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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영웅'이 된 '나치 부역자', '반공 민주'의 모순

 
[유라시아 견문] 자그레브 : 종교전쟁 2.0
2017.08.13 10:49:23
 

 

 

 

1. 두 개의 전쟁

독일은 동진하고, 소련은 남하했다. 나치의 동쪽에, 적군(赤軍)의 남부에 유고가 자리했다. 독소전 이면으로 유고내전도 격발된다. 1941년 4월 우타샤(Ustaša)가 주도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선포된다. Ustaša는 봉기(Uprising)을 뜻한다. 나치 독일에 호응한 파시스트 정부이다. 크로아티아는 1차 대전 이후 발칸에 들어선 유고슬라비아왕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국왕도 세르비아인이고 수도도 베오그라드였다. 세르비아 주도성이 현저했다.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은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없다. 동족이다.  

 

하지만 인문학적으로 갈라진다. 종교가 달랐다. 가톨릭을 신앙하는 자신들이야말로 남슬라브인의 맹주임을 자처했다. 유고왕국 내 연방제와 분권자치를 요구하며 최대한의 자율성을 도모했다. 호시탐탐 와중에 천금 같은 기회가 열린 것이다. 히틀러와 합작함으로써 기왕의 유고를 해체하고 대크로아티아를 구현할 수 있었다.  

 

괴뢰국가 크로아티아가 수립한 정책은 경악스러웠다. 자국 내 200만 정교회 세르비아인 가운데 1/3은 개종시키고, 1/3은 추방시키며, 1/3은 학살키로 한다. 유대인 학살을 솔선수범했던 독일마저 질겁했을 정도이다. 유고의 킬링필드가 펼쳐진다. 난징대학살을 능가하는 발칸대학살이었다. 

 

 

▲ 자그레브 대성당. ⓒ이병한


자그레브에는 발칸에서 가장 큰 천주교 성당이 자리한다. 1934년 대주교가 된 이가 스테피나츠(Stepinac)이다. 1941년 당시에는 추기경이었다. 그 또한 독일의 발칸 진출에, 크로아티아 독립국 탄생에 전율했다. 로마 가톨릭이 크로아티아에 들어선 지 1300주년에 일어난 기념비적 사건이라 했다. 실상은 좀 다르다. 9세기부터 이미 바티칸과 발칸 사이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유사 역사학 신봉자에게 문헌적 진실은 중요하지가 않다. 과거의 영광을 상기시키고 미래의 희망을 투사하는 것이 더 긴요한 과제이다. 

 

 

몸소 파시스트 정부의 수장을 찾아가 협력 의사를 밝힌다. 주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크로아티아를 만들자고 했다. 히틀러를 신뢰한 것도, 나치즘을 신봉한 것도 아니다. 도리어 이교도라고 여겼다. 자유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죄다 헛되고 삿된 미망들이라고 여겼다. 망상에서 벗어난 신의 나라, 신국(神國)을 건설코자 했다. 

 

그 중에서도 공산주의에 가장 적대적이었다. 종교를 배타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공산주의의 배후에 정교회가 있다고 여겼다. 러시아정교회와 세르비아정교회가 공산주의와 결합하여 가톨릭과 항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사실 여부는 부차적이다. 그렇게 인식했음이 관건적이다. 하여 우타샤가 세르비아 정교도를 절벽으로 밀어 떨어뜨리고 있을 때, 히틀러의 전차부대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로 진격하고 있을 때, 유럽 곳곳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강제수용소가 지어지고 있을 때, 스테피나츠는 모든 문명세계가 이교도들의 위협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목 놓아 설교했다. 십자군의 그림자가 여실하다. 
 

그가 발칸의 홀로코스트를 직시한 것은 1943년에 이르러서다. 2년간 전개된 사태의 본질을 뒤늦게 깨달았다. 우타샤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한다. 이로써 공산주의와도 적대하고, 파시스트들도 미워하는 인물이 되었다. 격화되는 독소전과 유고내전 속에서 서서히 고립되어간다. 그럼에도 바티칸으로 망명하지는 않았다. 궁여지책을 구했다. 우타샤와 최소한의 관계를 확보함으로써, 최대한의 인명을 구하는 길을 택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달할수록 그의 명성은 도리어 높아져갔다. 유대인도 세르비아인도 그를 신망했다. 발칸의 지옥에서 의탁할 수 있는 유이(二)한 보호자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무리들은 발칸의 체, 티토가 은거하고 있는 보스니아의 산골로 향했다.  

 

유고 내전의 진상을 찬찬히 살피노라면 '발칸의 홀로코스트'라는 비유를 곧이곧대로 쓰기가 꺼려진다. 독가스 살포를 비롯해 근대적 기술을 활용한 살육이 아니었다. 총도 아니고 칼과 도끼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요구한 것 또한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이념 전향이 아니다. 단연 개종이었다. 총검을 앞에 두고 강제 개종이 자행되었다. 거부하는 이들은 정교회 성당에 밀어 넣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성직자들이 깔끔하게 면도하는 가톨릭과 달리 정교회 신부들은 턱수염을 길게 기른다. 그 남다름조차 견딜 수가 없던 모양이다. 혐오스런 수염을 베어버리고 눈은 뽑아버리고 코와 귀는 잘라 버렸다. 가톨릭이 국시(國是)이고 개종이 곧 국책이었다. 하여 근대화가 곧 세속화라는 공식 또한 도그마에 그친다. 실사구시에 어긋난다. 발칸이 경험한 제2차 세계대전은 자유주의나 전체주의, 공산주의 간 전쟁이 아니었다. 명명백백 종교전쟁이었다. 동서교회간 지하드가 처절했다.  

 

매우 독특한 현상은 정교회 세르비아인의 박멸을 위하여 무슬림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기왕의 종교전쟁, 십자군과는 다른 양상이다. 크로아티아는 가톨릭과 이슬람에 속해 있다고 했다. 가톨릭과 이슬람의 위대한 역사가 크로아티아 독립국으로 합류한다는 것이다. 로마와 메카를 한 편으로 세우고, 콘스탄티노플(제2 로마)과 모스크바(제3 로마)를 배격한 것이다. 그래서 베오그라드의 정교회 성당을 파괴하는 반면으로 자그레브에는 새 모스크를 지어주었다. 정권이 준비한 300만의 탄알은 오로지 세르비아인과 유대인과 집시를 향했다. 무슬림보다 정교도에 더 적대적인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크로아티아인들과 한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한 뿌리이건만 혼이 비정상이었다. 비정상을 정상화하기 위하여 동족상잔도 마다치 않은 것이다.  
 

 

▲ 강제 개종 당하는 세르비아 정교도들.ⓒwikipedia

 

 

 

나아가 1054년 동서 교회 분열 이후 유럽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1000년만의 기회가 도래한 것이라고 여겼다. 비잔티움제국과 오스만제국으로 오염된 유럽을 말끔한 정토(淨土)로 회복시키고자 했다.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돕는다. 히틀러의 유럽 통일 전쟁 또한 새로운 천년왕국의 대사역이 출발하는 기회로 접수했다. 히틀러는 무장이다. 장수가 유럽을 통합하면, 그 새 유럽에 영혼을 불어넣는 작업은 본인들이 담당할 것이다. 

 

유럽사 특유의 종교전쟁이라는 맥락을 떼어놓고는 열전과 냉전으로 점철된 20세기 유럽사 또한 온전히 파악할 수가 없다. 근대화=세속화라는 교조적 프레임 또한 폐기처분할 때가 되었다. 종교사 없는 근대사, 문명사 없는 현대사는 가짜 역사학(Fake History)이다. 객관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다.  

 

▲스테피나츠 동상(자그레브).ⓒ이병한


2. 두 번째 전쟁 

학살이 학살을 낳는다. 세르비아인들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하고, 그들에 부역하는 무슬림들도 학살했다. 상호 학살이 심화될수록 역설적으로 유고의 구심력은 더욱 커져갔다. 극우파 괴뢰정권의 만행이 티토의 빨치산 투쟁에도 득이 되었다. 발칸의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속속 보스니아로 집결한 것이다. 사회주의의 우산 아래 종교전쟁을 그친 해방구였다. 우타샤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항쟁하는 티토에 대한 신망도 덩달아 높아져갔다. 민족과 종교로 사람을 나누지 않는 연방주의를 깃발로 세워 자그레브와 사라예보, 베오그라드를 해방시킨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대학살 정책이 그들이 가장 원하지 않던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왕정을 대신하여 공산주의 정부가 탄생했다. 유고공산당 아래 발칸은 재통합되었다. 티토는 집권 40여 년간 일관되게 형제애와 통합을 강조했다. 다원일체, 대일통을 고수했다.  
 

 

 

▲가톨릭과 정교회 대표와 유고 공산당이 함께 무대에 오르면서 '제국'을 연출한다.ⓒwikipedia

 

 

 

갈등이 완전히 봉합된 것은 아니다. 1972년 대숙청이 감행된다. 겉보기에는 공산당 내 보혁 갈등이었다. 서구 유화적이고 시장 친화적인 개혁파 대 사회주의를 고수하는 보수파의 길항으로 접근한다. 실상은 독립파의 재등장에 더 가깝다. 크로아티아 공화국 대표들이 통화주권과 군대보유를 요청했다. 총과 돈은 국가의 근간이고 혈액이다. 티토는 발끈했다. 1941년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이라며 역정을 내었다. 유고가 약화되면 재차 외세가 개입한다. 발칸을 자잘한 소국들로 나누어 분할지배 할 것이다. 우타샤가 일소된 것도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해외로 망명하여 '반공 전사'로 신분을 세탁했다. 천주교도가 민주교도가 된 것이다. 스페인과 아르헨티나 등 반공 군사독재 국가를 주 무대로 유고 해체 운동과 크로아티아 해방 운동을 벌였다. 그들을 지원했던 이로는 프랑스 국민전선의 태두 (아버지)르펜도 있었다. CIA의 자금에 힘입어 테러도 병행했다. 세계 곳곳의 유고 대사관을 겨냥하여 폭탄을 던졌다. 유고 국적기를 납치하는 초유의 사태도 벌어졌고, 내부까지 침투하여 극장과 철도역에도 테러를 가했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하면서 유고공산당의 구심력은 크게 약화된다. 설상가상으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반세기만에 독일과 소련 간 역전이 일어난다. 동독과 서독은 하나가 되었고, 소련은 조각조각 해체되었다. 크로아티아는 끝끝내 정의의 시간이 도래했다고 여겼다. 가장 먼저 독립을 선포하며 유고에서 이탈한다. 세르비아는 오리엔트이다. 유고는 제3세계이다. 우리는 본디 서방에, 제1세계에 속한다. 마침내 동양적 전제로부터 탈출하여 서유럽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해외에서 ‘반공전사’로 활동했던 우타샤 인사들도 속속 본토로 복귀했다. 타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그들이 정권을 접수한다. 크로아티아 독립국 수립 50년 만에 재차 분리 독립에 성공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번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 역시 통일독일이었다. 소련보다 독일의 재기가 유고의 장래에 더 위협이 될 것이라던 티토의 노파심이 들어맞은 셈이다. 소비에트연방과 유고연방에서 떨어져 나온 독립 국가들이 속속 유럽연합으로 편입되어갔다. 비동맹노선을 살처분한 나토는 더욱 확장되어갔다.  
 

두 번째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크로아티아에서는 과거사 청산이 부각되었다. 단연 논쟁의 중심은 스테피나츠 추기경이다. 유고 시절 그는 독일에 협력한 범죄자로 취급받았다. 1946년 전범재판에 회부된다. 나치에 부역한 성직자이자 괴뢰정부에 협력한 반역자라는 주홍글씨가 박혔다. 불명예를 떠안고 1960년 숨을 거둔다.  

 

 

▲나치 및 괴뢰 정권과 협력하는 스테피나츠.ⓒwikipedia

 

 

명예가 복권되었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열사로 대접받는다. 지금도 그의 묘지를 오가는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손으로 십자가를 그리며 기도를 올린다. 반공주의에 투철함으로써 친나치 이력은 소거된 것이다. 착잡한 마음이 일었다. 노트를 꺼내 몇몇 생각을 적어 내려가던 차, 기도를 마친 할머니가 내 옆자리에 앉는다. 기자냐고 묻길 래, 그렇다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내신다. 제대로 통하지는 않았다. 내가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헤로이'(херој)였다. 영어 히어로(Hero)와 러시아어 게로이(геро́й)의 중간쯤 되는 발음이다. 내가 알아듣지 못한 말의 취지는 그는 범죄자가 아니다, 였을지도 모르겠다. 찜찜하다. 석연치가 않다. 영웅이라 하기에는 너무 늦게, 너무 적게 기여했다. 크로아티아만큼 과거사 청산이 착종적인 곳도 드물다. 크로아티아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1989년 체제의 대서사, '반공 민주'의 모순이다.  

 

▲스테피나츠 묘소. ⓒ이병한


3. 신유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된다. 사회주의 모국이 사라졌다. 발칸에 세워진 유고사회주의연방공화국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이미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떨어져나갔다. 그럼에도 유고연방을 사수했다. 삭제한 것은 '사회주의'뿐이었다. 1992년의 유고연방을 '신유고'라고 한다. '제3의 유고'라고도 부른다. 유고슬라비아왕국과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공화국에 이은 세 번째 유고였다. 하지만 세르비아 중심성이 훨씬 심화되었다. 대크로아티아주의에 맞불을 놓는 대세르비아주의가 분출했다. 

 

 

크로아티아에서 스테피노츠를 추키고 있을 때, 세르비아에서는 두산(Стефан Урош IV Душан) 대왕을 고취시켰다. 14세기 세르비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차르이다. 북으로는 크로아티아를 정복하고, 서로는 아드리아 해에 닿았으며, 남으로는 에게 해에 이르고, 동으로는 콘스탄티노플 앞마당까지 진출한 영웅이다.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그리스는 물론 불가리아와 헝가리 일대까지 아우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세르비아인들은 그가 1355년 갑작스레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콘스탄티노플까지 정복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티토 시절에는 차마 그를 칭송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계몽주의 아래 봉건의 상징이나 반동적 민족주의 혹은 제국주의의 화신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 차르 스페판 두산의 동상(베오그라드).ⓒ이병한


우리는 서방이며 제1세계이고 세르비아는 동방이며 제3세계라는 크로아티아에 맞서 유럽사의 전개 또한 세르비아 중심으로 재인식했다. 신민족주의 서사에서 세르비아인은 유럽 문명을 구제한 수호신으로 등극한다. 비잔티움 제국을 잇는 후계자 자리를 두고 세르비아는 투르크와 경쟁했다. 왕년의 몽골처럼 투르크 또한 유라시아 초원길을 따라 파죽지세로 유럽까지 진출했다. 세르비아가 홀로 맞서 싸움으로써 오스만의 서진을 발칸에서 멈추어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가 아니었다면 유럽 전체가 오스만제국의 치하에 떨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즉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부터 프랑스의 계몽주의까지 서유럽의 근대 또한 세르비아인의 피와 뼈 위에서 세워졌다는 것이다. 피해망상과 자부심이 기묘하게 뒤섞인 서사이다. 그래서 세르비아에서 1989년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냉전이 끝난 해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389년으로부터 600주년이 되는 해였다. 1389년 6월 28일은 최후까지 투르크에 맞서 싸웠던 세르비아의 용장 라자르(Лазар Хребељановић)가 장렬하게 전사한 날이다. 
 

 

1989년 6월 28일. 차르 라자르가 패배한 장소를 찾은 이가 밀로셰비치이다. 바로 그곳에서 세르비아인들은 다시는 패배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했다. 대제국 오스만 시대와 소제국 유고 시대를 지나 정교회 대국을 만드는 것이 세르비아인의 사명이고 책무라고 선포했다. 다가올 다당제 시대를 예비하는 정치 선언이기도 했다. 지역감정을 자극하고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와 반공주의가 삼위일체로 공진화했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세르비아인의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세르비아 공화국 내 집과 학교, 상점에서 티토의 상징물을 떼어냈다. 티토가 주창한 '유고슬라비아인'은 다수 민족인 세르비아인을 억압하는 개념이다. 소수민족을 지나치게 대접했다.  

 

특히 크로아티아인과 알바니아인에게 과분하게 관대했다. 대크로아티아주의의 원흉 스테피나츠 추기경을 처형하지 않았다. 장례식도 허용해주고 자그레드에 무덤까지 만들어준 것이 티토였다. 무슬림에게는 코소보 자치주도 선사했다. 세르비아 공화국 안에 별도의 자치주까지 마련해준 것이다. 왜 이 신성한 세르비아인의 땅에 이주한지 300년 밖에 안 되는 무슬림 소수자들의 구역을 따로 허용한다는 말인가? 오스만제국의 무슬림보다 훨씬 이전에 이 땅은 본디 세르비아의 민족영웅 라자르가 돌아가신 곳이다. 신성한 고토를 회복해야 한다. 가톨릭과 정교회에 이어 정교회와 이슬람도 분열해간 것이다. 먼저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이 이웃에서 원수로 척을 졌다. 

 

▲차르 라자르 초상화. ⓒwikipedia

 

 

유고의 운명은 사회주의를 신봉했던 이데올로그들에게는 충격이었겠으나, 발칸사에 정통한 이들에게는 느닷없는 사태가 아니었다. 백년짜리 이념보다 천년 문명이 훨씬 뿌리가 깊다. 다문명세계를 아우르는 제국의 재건에 실패한다면 핵분열을 면하기 힘들다. 삼세번 유고로 이어진 '제국의 근대화' 실험이 최종적으로 파산한 장소가 코소보였다. 유고연방을 역사에서 삭제하고 지도에서 도려내는 NATO의 공습이 처음으로 단행된 곳 또한 코소보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리비아까지 체제 전환을 앞세우며 '인도주의적 개입주의'를 밀어붙이는 NATO의 원형이 드러난 곳 역시도 코소보였다. 고로 코소보는 20세기가 마감된 곳이자, 21세기가 시작된 곳이기도 했다. 세기말, 밀레니엄의 폭탄이 쏟아졌던 1999년의 코소보로 간다.

 

▶ 필자 소개
동아시아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논문보다는 잡문 쓰기를 좋아한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역할 모델로 삼는다. 뉴미디어에 동방 고전을 얹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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