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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폭력에 멍든 5살 연수의 ‘SOS’…어른들은 외면했다

등록 :2015-05-04 19:56수정 :2015-05-04 22:05

 

일러스트 이강훈 leebido@daum.net
일러스트 이강훈 leebido@daum.net
[탐사기획] 부끄러운 기록 ‘아동 학대’ 
② 방관

 

다섯 살, 연수(가명)가 죽었다. 연수는 유독 집에만 들어오면 똥오줌을 가리지 못했다. 눈물도 많아졌다. 자장면을 다 먹고 고봉밥을 한 그릇 더 비웠다. 그런 아이를 아빠는 때렸다. 다시 울었고, 바지에 오줌을 지렸고, 손톱을 뜯었다.

 

목격자는 어른들이었다. 신고해야 했고,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주저하고 외면하고 회피했다. “아는 사이” “이번만” 등이 이유였다. 어른들이 연수가 보낸 구조신호를 무시하는 사이, 아빠와 엄마는 약으로 연수의 멍을 지우고, 거짓말로 상처를 변명했다. 어른들이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다. 판결문과 공소장 등 자료와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연수의 마지막 6개월을 되짚었다.

 

뇌출혈로 죽은 연수 
학대 신고 의무자들은 
구조신호를 목격하고도 
응답하지 않았다

 

사망 2013년 9월21일 밤 11시. 연수를 건네받은 간호사는 “동공-반응 없음”이라고 써 내려갔다. 아빠의 품에 안겨 응급실에 도착한 아이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당직 의사는 아빠에게 응급처치를 위해 경위를 물었다.

 

“혼나다가….”

 

“씻고 나와 방으로 가다가….”

 

“미끄럼틀에서 넘어져….”

 

밤 11시, ‘들려온’ 딸의 상태를 아빠는 설명하지 못했다.

 

“잘 모르겠어요.”

 

아빠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함께 온 (연수가 고모라고 부른) 새엄마는 침착했다.

 

“경위는 잘 모르고 평상시에 잘 넘어져요.”

 

보호자들의 두서없는 진술은 응급진료기록부에 고스란히 남았다.

 

“같이 내원한 보호자 진술로는 혼나는 과정에서 경기하고 앞으로 꼬꾸라지면서 넘어졌다고 함. 오른쪽 눈 주변으로 피멍. 다친 경위에 대해 물었으나 정확하게 진술하지 않고 잘 모르겠다고 함.”

 

응급수술이 가능한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5시간 뒤 연수가 수술대에 올랐다. 뇌출혈은 급성과 만성이 혼재돼 있었다. 머리는 출혈로 가득했다. 연수는 겨우 하루를 더 힘겹게 살았다. 2013년 9월23일 밤 11시였다. 낮 기온이 32도까지 올라간, 가을치고는 무더운 날이었다.

 

연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이 찾아왔다. 관할 지역의 경관, 과학수사반 등 3명은 연수의 죽음에 대해 역할을 나눴다. 연수는 급성과 만성의 뇌출혈로, 몸의 멍으로 학대를 ‘증거했다’. 연수가 처음 실려간 병원의 응급기록지는 그날의 진실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살피는 일은 경찰에게는 가욋일이었다. 침묵하는 가족, 병원 사이에서 죽음은 사고사를 의미하는 ‘변사’로 처리됐다.

 

연수네 식구는 아빠와 연수, 연주 세 부녀와 엄마와 지연이, 지혜 세 모녀가 한 살림을 차린 지 6개월 만에 식구가 줄었다. 아빠는 새 가족을 꾸리기 몇달 전 이혼을 했고, 새엄마도 이혼 경험이 있었다. 연수와 연주는 새엄마를 “고모”라고 불렀다. 지연이와 지혜는 아빠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150일 전 아빠가 연수를 데리고 한 대학병원 정신과를 찾았다. 아빠는 연수의 욕설, 잦은 거짓말이 고민이라고 했다. 손톱을 뜯는 버릇도 고쳤으면 했다. 친엄마와 살다 아빠한테 온 지 한 달 만이었다. 정신과 의사는 연수의 얼굴에서 멍자국을 발견했다. 정신과 의사는 아빠에게 경고했다. “다시는 그런 폭력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그들 중 한 명만 눈뜨고 있었다면…

 

아빠의 발길질을 본 이웃 
멍을 확인한 어린이집 교사
머리를 꿰맨 의사와 간호사

 

그들은 모두
잊히길 바랄뿐…
그 사이 학대는 동생에게 갔다

 

 

연수의 이상행동은 원인이 분명했다. 의사가 “잦은 학대 경험(매, 언어폭력)”, “아버지에게 체벌” 등의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연수 치료를 위해 가장 급한 것은 아빠를 신고하는 것이었다. 의사는 신고의무자였다. 그럼에도 의사는 경고만 했다.

 

 

100일 전 2013년 6월, 베란다에서 벌을 받던 연수가 아빠의 발길질에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이웃이 있었다. 새엄마가 십수년 동안 동네 언니로 알고 지낸 김승미씨가 수박을 자르다 벌떡 일어섰다. 김씨 말고 이웃이 한 사람 더 있었다. 데리고 온 딸의 충격을 걱정할 만큼 연수 아빠의 발길질은 거셌다. 김씨가 아빠를 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네가 아는 사람이라 넘어가는데… 만약 내가 너를 몰랐다면 아동폭행으로 신고했을 거야. 만약 한 번만 더 그러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연수의 구조신호를 무시하기는 어린이집도 마찬가지였다. 2013년 6월 어느 날 한 어린이집. 똥을 눈 연수를 닦아주기 위해 교사가 들어섰다. 엉덩이 밑 허벅지 쪽에 여기저기 가늘고 길쭉한 멍자국이 보였다.

 

“연수야, 괜찮으니까 말해볼래?”

 

연수는 거듭된 질문에 “맞았다”고 답했다. 교사는 폭행 사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신고는 없었다. 어린이집 교사는 법상 신고의무자다.

 

한 달 뒤인 7월 어느 날이었다.

 

이 교사는 등원한 연수의 왼쪽 눈두덩에 지름 10㎝ 크기의 둥근 멍자국을 봤다.

 

“왜 멍이 들었어?”

 

“넘어져서 그래요.”

 

교사는 결국 ‘고모’한테 전화를 했다.

 

“거짓말을 해서 혼냈어요.”

 

돌아온 답은 오히려 담담했다. 교사는 이 또한 일일보고서에 기록했다. 어린이집 원장도 이날을 기억했다. 하지만 원장도 교사도 신고하지 않았다. 이날은 연수가 어린이집에 나온 마지막날이었다.

 

원장은 이날의 상처에 대해 “신발 모양이 나올 정도로 딱 봐도 맞은 멍이었다”고 기자에게 설명했다. 이렇듯 연수가 몸으로 보낸 구조신호는 번번이 응답받지 못했다.

 

결국, 연수는 죽었다. 죽음은 사고로 처리됐다. “넘어졌다”는 보호자들의 진술은 의학적 상식과 불일치했다. 경찰은 그 진술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침묵했다. 어른들은 공모자였다. 병원의 침묵에, 아동보호전문기관도 움직일 수 없었다. 경찰도 학대 정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연수가 죽음으로 알린 마지막 신호 또한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다.

 

 

동생 닿지 못한 구조신호가 반복되는 사이, 동생은 언니의 고통을 물려받았다. 동생 연주도 언니처럼 손톱을 물어뜯었다. 배꼽을 뜯다가 생채기를 냈다. 밥을 편식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많이 먹었다. 모든 게 맞을 이유였다. 새엄마 딸인 지연이는 경찰서에서 “삼촌(아빠)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고 진술했다.

 

멍은 일상다반사였다. 아빠는 학대를 멈추는 대신 성실하게 약을 발랐고, 먹였다. 동네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새엄마는 그 이유를 경찰에서 말했다.

 

“일단은 때린 게 드러날까봐 무서웠어요.”

 

동네 약국에서는 당시 이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타박상에 바르는 약은 흔하다. 학대는 약이 멍을 지우는 시간보다 잦았다. 이번에는 연주의 구조신호가 시작됐다. 10월 어느 날, 연주는 ‘두피의 열린 상처’를 한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연수의 죽음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은, 그 죽음이 사고로 결론이 난 것과 같은 시기다. 병원에서는 연주의 상처가 학대의 결과라는 것을 몰랐을까. 새엄마는 급정거하는 차 안에서 다친 상처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의학적 소견을 참조해 폭행이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병원은 침묵했다.

 

“연주가 사나흘 아니면 일주일 결석하고 오면 그때마다 상처가 있었고 멍이 들어 있었어요.”

 

연주가 다닌 어린이집의 담임교사는 연주의 멍을 기억했다. 12월에는 소변에서 피가 비쳤다. 닷새를 결석한 1월, 열흘을 결석한 2월 어김없이 몸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어린이집 담임교사가 기억하는 멍의 횟수만 10여 차례, 어린이집 원장도 대여섯 차례를 기억했다. 얼굴에 긁힌 상처와 볼과 이마 쪽의 멍, 팔, 다리, 엉덩이 부위에 몽고반점과 같은 멍자국…. 교사가 밝힌 멍의 기억은 표적지처럼 정확했다. 피와 멍을 본 교사들, 이들도 신고‘의무자’였다. 하지만 신고하지 않았다.

 

아빠의 발길질을 목격했던 김승미씨가 다시 그 집을 찾은 것은 연수가 죽고 나서다. 동생 연주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멍이 오른쪽 얼굴 반을 가릴 정도였다. 며칠 뒤 다시 찾아 연주 얼굴과 어깨의 멍을 확인했다. 김씨는 친엄마를 찾아 나섰다.

 

 

연수 친엄마는 큰딸의 죽음도 해를 넘기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의 보험 처리를 위해 서류를 떼던 과정에서였다. 죽음을 의심하기 힘들었다. 배운 사람이, 여유있는 사람이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맡긴 두 딸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연주가 얼굴에 멍을 달고 산다는 얘기를 듣고는 연주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곧바로 아동보호전문기관에 도움을 구했다. 2014년 5월, 연수와 연주를 아빠에게 보낸 지 1년2개월, 연수가 죽고 연주가 학대를 물려받은 지 8개월 만이었다. 아빠는 집에서 체포됐다. 경찰은 연주의 학대를 수사했다. 그러다가 8개월 전 연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수가 숨지기 이틀 전 실려간 병원의 응급기록지를 지나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결국 아빠는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 아빠는 연수의 죽음을 사고로 가장해 사망보험금까지 수령했다.

 

아빠는 5년형을 받고 복역중이다. 새엄마는 벌금형을 받고, 자신의 두 딸을 키우며 산다. 연주는 친엄마에게 돌아갔다. 더이상 식탐을 부리지 않는다. 대소변도 의젓하게 스스로 해결한다. 수사를 맡았던 경찰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다. 이웃은 기자에게 그들이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연주에게 언니 노릇을 곧잘 했다는 연수는 어떤 아이였을까. 일일보고서 몇 줄로 추측해볼 뿐이다. 그 안에서 연수는 다섯 살 꼬마 그대로다. “바람이 시원하다”고 이야기하고,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을 하며 즐거워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연수는 어린이집이 더 좋았을까. 오후에 선생님 차량이 가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일일보고서(김연수)

 

7월2일 “바람이 시원하다며 이야기함.”

 

7월4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함.”

 

7월5일 “오후 시간 선생님 차량 가면 눈물 보임.”

 

7월8일 “거짓말 횟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거 같음.”

 

7월11일 “웃는 얼굴, 우는 얼굴 해보면서 즐거워함.”

 

7월15일 “얼굴, 눈에 멍들어 옴.” “거짓말을 해서 혼났다고 함.”

 

7월16일 “세수 깨끗이 하겠다고 이야기함.”

 

7월18일 결석

 

 

 

연수는 죽었지만, 모두들, 별일 없이 산다.

 

연수의 멍을 목격한 어린이집 교사와 원장, 발길질을 본 이웃, 응급실 의사, 간호사, 수술을 한 의사, 사고사로 결론 낸 경찰, 다 무탈하다. 연주의 머리를 꿰맨 의사, 피와 멍을 본 어린이집 교사도 하나같이 사건이 잊히길 원했다. 이들 또한 별일 없이 잘 살고 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일러스트 박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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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 13년 “사법정의에 환상 버렸다”

 
[인터뷰] '연행전문'이 된 권영국 변호사 "민중이 권력 행사할 정치적 모색 시작해야"
 
입력 : 2015-05-03  18:31:00   노출 : 2015.05.04  11:44:59
이하늬 기자 | hanee@mediatoday.co.kr    
 

“연행 전문 변호사가 됐어요. 연행 당한 사람을 빼내주는 게 아니라, 연행을 당하는 변호사.” 권영국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최근 권 변호사는 세월호 1주기 집회에서 인권침해감시활동을 하다 연행됐다가 풀려났다. 지난 2013년 7월 대한문 집회에서의 연행에 이은 두 번째다. 당시 그는 경찰의 집회 방해에 항의하다 연행됐다. 두 번 모두 구속영장이 청구됐다가 기각됐다. 

권 변호사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즉각 규탄성명을 냈다. 그를 변호하기 위한 변호인에 이름을 올린 변호사는 50명이 넘었고 서울중앙지법 영장실질심사 법정에는 34명의 변호인이 출석했다. 이대순 변호사는 “권 변호사를 구속한다면 변호사업계 전체의 업무수행을 어렵게 만드는 잘못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권 변호사는 영장실질심사가 열린 다음날 오전 2시 10분께 풀려났다. “신경이 굉장히 곤두서있었어요. 경험상 결정이 늦게 나면 영장 발부에요. 그래서 사실은 자포자기 상태였어요. 구속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구속의 의미가 신경을 건드렸지요. 내가 검찰과 여러 건을 가지고 싸우고 있는데 판사가 검사의 손을 들어준다는 건, 내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인식될 수 있죠.”

검찰뿐 아니라 기업도 그를 싫어한다. ‘삼성전자서비스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티브로드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무효 소송’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이주노조 설립신고 반려 취소소송’ ‘전교조 법외노조’ 등이 적힌 서류가 사무실에 가득했다. 지난 달 30일 오후, 서울 서초동 해우법률사무소에서 권 변호사를 만났다. 

   
▲ 권영국 변호사. 사진=이하늬 기자
 

경찰과 검찰, 기업이 싫어하는 변호사

권 변호사는 2002년 권두섭, 강문대, 김영기 변호사 등과 함께 민주노총 법률원을 설립하고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민주노총 법률원은 노동운동도 법으로 대응하는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권 변호사의 나이 마흔이었다. 변호사가 되자마자 이를 택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애초 3년 정도는 집에 ‘돈을 벌어다 줄’ 생각이었다. 실제 사법연수원에 있을 당시 괜찮은 법률사무소에서 제의도 받았다. 

“조건이나 이런 건 다 이야기가 됐었고 서로 얼굴만 확인하면 되는거였어요. 법률사무소 면접을 가는 날 권두섭 변호사가 연락이 왔어요. 면접 직전에 서초동에서 잠시 만났지요. 민주노총 법률원 계획서를 들고 왔더라고요. 순간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거죠. 면접을 보류하고 집으로 갔어요. 한 3주 정도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어차피 할 바에야 지금 하자고 결정을 내렸어요.”

이 결정에는 노동운동 경험의 영향이 컸다. 그는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이후 방위산업체 ‘풍산’에 입사했다. 회사에서 노조를 만들려다가 인사조치됐고 1988년 회사 공장 폭발사고로 노동자가 숨지자 항의하는 대자보를 붙였다가 해고됐다. 몇 년 동안 복직을 위해 노력했지만 회사에 돌아가지는 못했다. 복직에 실패한 후 그는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노동자를 위한 변호인이 되겠다는 생각보다 당장의 생계 때문이었다. 

“다만 그런 생각은 했어요. 결국은 노동자에게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풍산에 있을 때 한 노동자가 그랬어요. ‘당신은 대학 나온 사람 아니냐. 상황이 불리해지면 당신은 얼마든지 떠날 수 았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따르겠느냐’ 그 말이 굉장히 가슴에 와서 꽂혔고 ‘여러분이 나를 밀어내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떠나지 않겠다’고 답했어요. 배신하지 않겠다는 거죠.”

그는 인터뷰 내내 ‘믿음’ ‘배신하지 않겠다’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 

   
▲ 올해 초 열린 '국민파업집회'에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권영국 변호사가 합법적인 행진을 막고 있다며 경찰에 항의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당신을 어떻게 믿고 따르겠냐”던 노동자

권 변호사는 노동자들의 법률대리인이기도 하지만 노동문제,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집회, 기자회견 현장에서도 늘 함께한다. “권영국이 여러 명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맡고 있는 법정 싸움만 챙겨도 시간이 부족할텐데 굳이 현장에 나오는 까닭을 물었다. 현장에 나가지 않으면 굳이 연행되고 구속영장이 청구될 이유도 없다. 

“사무실이나 법정은 뒤처리하는 곳이에요. 현재 진행형인 문제를 보지 못하게 되요. 젊은 변호사들에게 그래요. 현실을 정면으로 봐라. 그래야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바꾸어내야 하는지 문제의식도 갖고 되고 불의한 현실에 대한 분노도 갖게 된다. 사건으로 만나게 되면 늘 타인의 문제가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민주주의 후퇴나 경찰 인권침해, 노동현장의 권리침해가 타인의 문제일까요.”

그는 애초 이런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체제 순응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강원도 탄광 노동자의 아들로 살아왔고 학창 시절에는 열심히 공부한 기억이 전부다. 그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선배들이 교복자율화 투쟁을 벌였어요. 저는 공부하기 싫은 선배들이 자기 과시 하고 싶어서 하는 시위로 보고 동참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마주한 장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청재킷을 입은 남학생이 경찰에게 뒷덜미를 잡혀 끌려가는 걸 봤어요.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도 그 남학생은 '살인마 전두환 물러나라'고 외쳤어요. 데모는 공부하기 싫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배웠는데. 저렇게 피흘리면서 외치는 이야기가 뭐지? 그 자리에서 한 시간은 서 있었어요. 그때부터 문제의식을 가지기 위해 일부러 수업도 빠져보고 일탈을 했던 것 같네요.”

   
▲ 경찰에 항의한 권영국 변호사가 경찰이 뿌린 최루액을 맞고 괴로워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사법정의에 대한 환상을 버린다”

노동변호사·인권변호사로 살아온 지 13년째, 그는 일이 힘들다거나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다만 갈수록 친권력·자본적으로 구성되는 사법부, 그리고 그 운동장에서 싸워야 하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쌍용차 해고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대표적이다. 당시 대법원은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2심 판결을 뒤집었다. 대개의 경우 2심 법원의 판단이 대법원까지 이어진다. 2심 법원까지는 사실관계를 다투는 것이고 대법원은 법리적인 해석만 다투기 때문이다. 당시 권 변호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졌다. 쌍차 정리해고 사건 대법원에서. (중략) 대법원에 일말의 기대를 했다는 자체가 너무 부끄럽고 참담하다. (중략) 오늘로서 나는 천민자본과 이를 옹호하는 권력의 카르텔이 너무도 강고한 이 땅에서 노동자들이 법원의 판결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겠다는 망상을 버리도록 한다. 이 땅을 우리 후손들에게 그래도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민중이 진정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모색을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

그가 언급한 ‘새로운 정치적 모색’에 대해 물었다. 현실 정치 참여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서 정부를 비판하거나 노동기본권을 침탈하는 자본을 규탄하거나 또는 법정에서 권리침해를 구제하는거나, 제도정치를 하거나 모두 정치적 행위라고 봐요. 경우에 따라서 가능하다면 제대로 된 정당을 만들 수도 있는 거고 정말 필요하다면 국회의원 출마도 못할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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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간 갇혀 산 민이…13살 7.5kg 소녀는 미라 같았다

등록 :2015-05-03 19:39수정 :2015-05-04 10:33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leebido@daum.net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leebido@daum.net
[탐사기획] 부끄러운 기록 ‘아동 학대’

 

13살 민이와 또래 신체 표준 비교
13살 민이와 또래 신체 표준 비교
2013년 2월12일 낮, 한 소도시의 병원 응급실에 트럭 한 대가 들어왔다. 남녀 한 쌍이 내렸다. 남자의 손에 축 늘어진 아이가 들려 있었다. 13살 민이(가명)였다. 남자의 딸인 민이는 그해 설을 이틀 앞둔 2월8일 구토를 하며 음식물을 토하고 죽었다. 민이는 죽기까지 약 4600일을 살았다. 그동안 자란 키가 109㎝였고, 몸무게는 7.5㎏이었다. 또래 아이들(12~13살)의 평균 키·몸무게인 152㎝, 43㎏과는 차이가 크게 났다. 민이의 주검을 본 경찰은 “마치 미라와 같았다”고 말했다.

 

부부는 민이가 숨진 지 나흘 만에 병원을 찾았다. 나흘 동안 몸의 수분 등이 증발한 점을 고려하면 아이의 몸무게는 죽기 직전 8~9㎏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사는 아이의 맥박과 동공 등을 확인하고 사망을 확정했다. 다분히 형식적인 절차였다. 의사는 사체검안서를 쓰고 곧 경찰에 신고했다. 민이가 집 안에 갇혀 지낸 지 9년 만에 사회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민이가 미웠다. 25살, 결혼 4년 만에 얻은 첫아이였지만, 양육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준비하지 않은 채 맞은 아이는 엄마에게 기쁨이 아닌 스트레스였다. 남편은 물론 시집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둘째 현이(가명)가 태어난 뒤, 엄마의 관심은 민이로부터 더욱 멀어졌다. “아내가 민이에게 별로 정이 없었다.” 아빠의 증언이다. 민이는 점점 말을 듣지 않고 짜증이 많은 아이가 되었다.

 

가정불화에 경제적 곤란이 겹쳤다. 아빠가 사업에 실패하고 빚쟁이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가족이 한곳에 머물러 살 수 없게 됐다. 잦은 이사 탓에 2006년 주민등록이 말소됐다. 친인척들과 연락도 끊겼다. 아이는 물론 엄마도 집 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우울증과 불면증이 찾아왔다. 대인기피증도 생겼다. 아빠는 빚쟁이를 피해 멀리서 일했고,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만 집을 찾았다. 빈곤은 다시 불화를 키웠고, 민이네 가족은 사회적으로 완벽히 고립됐다.

 

 

2004년 2월 어느 날, 네 살 민이가 울었다. 울며 보채는 아이를 어쩌지 못하다, 엄마가 막대기로 아이를 때렸다. 아이의 넓적다리뼈가 부러졌다. 폭행이었다. 엄마는 10년 뒤 경찰 조사에서 “아이가 넘어져 다리뼈가 부러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네 살 아이가 넘어져서는 생기기 힘든 부상이었다. 경찰 조사가 계속되자 엄마는 자신이 민이를 때렸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민이는 방 한쪽에 누워 지냈다. 깁스를 푼 민이가 겁을 먹고 걷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걷기 연습도 시키지 않았다. 말도 걸지 않았다. 오랫동안 누워만 있던 민이는 어느 순간 그저 ‘누워 있는 아이’가 되었다. 남편은 오랜만에 집에 찾아와 말없이 민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민이가 다쳐서 움직이지 못했지만 부부는 민이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다. 돈도, 의지도 없었다. 아빠는 “나중에 살림이 나아지면 치료하려고 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이 좋아진 뒤에도 민이는 치료받지 못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거나 장애아동으로 신고해 치료를 받도록 할 수 있었지만 부부는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 민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꿨는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바랐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2013년 2월 경찰 조사가 시작됐다.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민이는 9년 동안 방에서 누워 지냈다. 적절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몸무게는 채 10㎏이 되지 않았다. 키도, 민이가 폭행당한 시절인 5살 수준(109㎝)에 머물렀다. 죽기 직전 민이는 걸을 수 없었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엄마는 죽지 않을 정도로만 민이를 돌봤다. 민이 사망 사건을 다룬 판결문에는 “1일 1회도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 날이 있는 등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지 않았고, 1년에 1회 정도 목욕과 양치질을 시키는 등 피해자를 방치했다”고 돼 있다. 민이의 공식 사망 원인은 영양결핍 또는 영양불균형 및 탈수였다. 사망 시간은 2013년 2월8일 오후 4시에서 10시 사이였다.

 

준비되지 않은 부모 만나
다리 골절뒤 누워서 생활

 

엄마는 우울증·대인기피증
아빠는 사업 실패로 쫓겨

 

‘1일 1식’도 못먹는 날 있어
치명적 방임이 부른 슬픔

 

신체 학대에 이은 치명적인 방임이 이뤄졌다. 민이의 주검을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점, 변사자가 식사를 잘 못하였음에도 이에 대한 건강관리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 점, 골절 치료 후 재활치료를 권유받았음에도 받지 않았고 누워 지내게 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참고하였을 때, 소아방치(child neglect; 소아에게 음식과 물, 주거지, 건강관리, 교육, 정서적 지지 등이 제공되지 못하는 경우)의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고 부검감정서를 썼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업무수행 지침을 보면 방임은 ‘보호자가 아동에게 반복적으로 아동 양육과 보호를 소홀히 함으로써 아동의 정상적인 발달을 저해하는 모든 행위’로 보고 있다.

 

 

경찰 조사가 진행되고 재판까지 받았지만 민이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가해자가 친부모이고, 이들이 사건의 공개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웃들은 민이의 죽음은 물론이고 민이의 존재조차 몰랐다. 민이가 살던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한 직원은 ‘2년여 전 이곳에 살던 아이가 영양실조로 죽은 사실을 아느냐’는 질문에 “전혀 몰랐다. 이 아파트는 단지가 작아 웬만한 사실은 금방 소문나는데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 아파트에 전세로 살았던 민이네 가족은 아파트 거주인 명단에조차 자신들을 올리지 않았다.

 

가족이 스스로를 감추고 고립시키는 상황에서 민이를 구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없었다. 다만 국가가 그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딱 한 차례 있었다. 2007년 민이가 만 7살이 되고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취학통지서를 받을 때였다. 그러나 민이는 전년도에 주민등록이 말소돼 취학통지서를 받을 수 없었다. 민이처럼 거주지가 분명하지 않아 취학통지서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한 해 평균 1000여명에 이른다. 국가는 병역통지서를 받지 못하는 청년은 경찰에 고발해 찾아내지만, 취학통지서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신고할 때까지 방치한다. 민이 동생 현이도 2013년까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현이 역시 방임으로 인한 학대를 당한 셈이다.

 

어렵게 살던 민이네 가족은 아빠가 괜찮은 직장을 구하면서 사정이 나아졌다. 그러나 살림이 핀 뒤에도 엄마·아빠는 민이를 치료하지 않았다. 부부를 변호한 변호사는 “그때는 이미 아이 상태가 어찌할 수 없는 단계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냥 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엄마는 2013년 10월 유기치사죄로 4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감옥에 있다. 아빠는 1년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3년간 집행을 유예받았다. 부부는 항소하려 했으나 포기했다. 민이의 죽음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둘째 현이는 뒤늦게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곧바로 초등학교 고학년에 편입해 들어갔지만 엄마가 집에서 열심히 공부를 가르친 덕분에 성적은 뒤처지지 않고 있다. 현이는 여느 학생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현이를 맡았던 담임 선생님은 “현이가 언니와 엄마 얘기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해서, 물어보지 않았다”며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공부도 썩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빠는 현이와 함께 아내가 석방되기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민이의 죽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아내와 둘째에게도 늘 잊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다만 아내가 아직 아파서 이겨내지 못하고 있어 걱정입니다.” 그와 기자의 만남은 지난달 2일 비 오는 밤, 그의 집 앞에서 우연하게 이뤄졌다. 짧은 대화 끝에 긴 인터뷰를 제안했고, 긍정적인 답을 얻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그는 “아내와 둘째딸이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빠와 현이는 한 달에 한 번씩 엄마를 면회하러 교도소에 간다. 돌아오는 길에는 납골당에 있는 민이에게 들른다.

 

최현준 임인택 기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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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도 피할 수 없다. 불법 대선자금 ‘증거’ 드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자금을 수사해야 하는 이유
 
임병도 | 2015-05-04 08:56:5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성완종 리스트로 이완구 총리가 물러났지만, 명단 속에 나온 인물들의 수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2015년 5월 3일 SBS는 단독으로 ‘새누리당 선대위 관계자에게 2억 전달’이라는 뉴스를 보도했습니다.1
 
SBS에 따르면 검찰은 성완종 전 새누리당 의원이자, 전 경남기업 회장의 비자금을 관리했던 한 모 전 부사장이 대선 직전 성 회장의 지시로 경남기업 회장실에서 새누리당 선대위 관계자 김 모 씨에 현금 2억 원을 전달했다는 진술을 확보했습니다.

대선 직전 성완종 전 회장이 현금 2억 원을 새누리당 선대위 관계자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은 대선자금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흘러들어 갔다고 볼 수 있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대선 직전 늘어난 경남기업의 비자금 인출’

성완종 전 회장은 홍문종 의원에게 현금 2억 원을 전달했다고 리스트와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2011년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와 대선 시기, 경남기업의 비자금 상황이 어떤지 살펴보겠습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현장 전도금’2 명목으로 대규모 자금을 현금으로 받아 개인용도 내지는 비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총 32억 8731만 원의 현금이 현장 전도금 명목으로 사용됐습니다.3

비자금 의혹을 받는 경남 기업의 현장 전도금 인출 액수를 보면 2011년과 2012년에 급증합니다. 7년 동안 인출된 현장 전도금 명목 중 가장 많은 금액이 이 시기에 집중됐습니다.

2011년 경남기업의 현장 전도금 7억 1200만 원이 2012년은 9억 5400만 원이 현금으로 인출됐습니다. 2011년과 2012년은 총선과 경선, 대선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경남기업의 비자금 인출 증가 시기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에게 돈을 줬다는 시기와도 일치합니다.

이제 검찰은 비자금이 박근혜 대통령의 불법 대선자금과 연관이 있는지 조사할 명분이 생겼습니다.


‘홍문종의 거짓말, 그를 소환 조사해야 한다’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은 성완종 리스트가 불거지자, 기자회견을 자처하면서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홍문종 의원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과의 만남조차 부인했습니다.

홍문종 의원은 4월 14일 JTBC 뉴스룸에 출연했을 당시 덕산스파캐슬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디트뉴스에 따르면 홍문종 의원은 새누리당 사무총장 시절 '충남정치대학원 제3기 수료식에서 특강을 했고 성완종 전 새누리당 의원은 인사말을 했습니다.4
 
새누리당 충남도당 위원장은 성완종 전 새누리당 의원이었습니다.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지역도당이 주최하는 행사에서 위원장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 누가 봐도 신빙성이 없습니다.
 
횡설수설했던 홍문종 의원의 변명은 오히려 의혹만 증폭시킬 뿐이었습니다.

▲성완종 전 회장이 죽기 전 경향신문과 가진 인터뷰 ⓒ오마이TV

경남기업의 한 모 전 부사장은 경남기업 회장실에서 새누리당 선대위 관계자에게 2억 원을 줬지만,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성완종 전 회장은 대선 때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에게 2억 원을 줬다고 했습니다.

돈을 받지 않았다고 홍문종 의원은 주장하지만, 현금 액수와 시기, 건넨 장소,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무슨 목적으로 돈을 준 정황이 나오고 있습니다.

홍문종 의원이 거짓말을 하는지, 성완종 전 회장이 치밀하게 홍문종 의원을 옭아매려고 2012년부터 작업을 했는지, 배달 사고가 났는지,5 검찰은 밝혀내야 합니다. 그러나 돈을 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 거짓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 홍문종 의원의 말은 이미 신뢰를 잃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자금을 수사해야 하는 이유’

성완종 리스트에 명시된 불법 정치자금이 대선자금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명단 속 인물들이 2012년 박근혜 캠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성완종 리스트에 있는 홍문종 의원은 2012년 대선 당시 조직총괄본부장으로 전국 719개 단체와 60만 명을 관리했던 인물입니다. 유정복 직능총괄본부장이 운영했던 직능본부만 해도 1000억이 필요했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6 당연히 많은 대선 자금이 필요했던 직책에 있었습니다.

대선자금이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일도 있지만, 산하 조직을 운영 관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성완종 전 회장이 홍문종 의원에게 줬다는 돈 현금 2억도 곧바로 선대위 관계자가 받아 비공식적으로 사용됐을 수도 있습니다.

불법 대선자금이 유입됐다면 누구를 위해서겠습니까? 바로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사용됐을 것입니다.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도 수사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성완종 리스트와 박근혜 대통령의 불법 대선자금은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법 대선자금의 핵심에 있는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관련 뉴스는 포털에서 사라졌습니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포털 뉴스에서 허태열, 홍문종 관련 기사는 4월 10일에서 12일까지는 591건과 352건이었지만 이후로 점점 사라지고 나오지도 않았습니다.7
 
불법 대선자금이 어떤 방식으로 유입됐고, 어떻게 사용됐는지 국민은 알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언론이 숨기려고 해도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성역없는 수사를 지시했습니다. 이제 성역없는 수사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 대선 캠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검찰에 출두하라고 지시를 내려야 합니다. 그녀가 떳떳하다면 그녀 또한 검찰 수사에 응해야 합니다.

이제 몸도 다 낫고 선거도 끝났으니 검찰 수사만 받으면 될 듯합니다.

1. “새누리 선대위 관계자에게 2억 전달” SBS 2015년 5월 3일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Id=N1002959077 
2. 사업장 운영을 위해 본사에서 사업장에 보내주는 경비
3. 홍준표·홍문종에 돈 줬다는 시기, 경남기업 ‘17억’ 인출 경향신문 2015년 4월 13일.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132326505 
4. 새누리당 “충남도지사부터 기초의원까지...” 디트뉴스 2013년 11월 27일.
http://www.dtnews24.com/news/article.html?no=356590 
5. 어쩌면 검찰은 배달사고 등으로 개인비리 수사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6. 박근혜 대선자금 의혹, 이렇게 가려지나. 오주르디 사람과 세상 사이. 2015년 4월 24일.http://blog.daum.net/espoir 
7. 박근혜의 돈 창구, 허태열 홍문종이 사라졌다. 뉴스타파 2015년 4월 23일.
http://newstapa.org/24976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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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역사인식과 샌프란시스코체제의 강화

아베의 역사인식과 샌프란시스코체제의 강화

2015. 05.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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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도입된 지 60년, 이제 중국 봉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르고 훨씬 복잡하며 모순에 가득 찬 체제로 진화하고 있다."

 - 존 다우어  MIT 명예교수

  아베 일본 총리는 1952년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었던 날인 4월 28일에  맞춰서 미국을 방문했다. 아베의 미국 방문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교 국방장관들은 뉴욕에서 미일 안전보장위원회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일본 자위대의 활동범위를 세계적으로 넓히는 방향으로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했다. 자위대는 이제 지구방위대가 되었다. 아베가 오바마 미국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상하의원 합동연설을 한 것은 모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일에 따라 이뤄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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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일은 일본 주권회복의 날?

 

 아베 총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유독 집착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61년이 되는 2013년 4월 28일을 ‘주권 회복 및 국제사회 복귀의 날 기념식’으로 하고 4월 28일을 ‘주권 회복의 날’로 규정했다. 기념식이 끝날 즈음에 참석자들은 ‘천황 폐하 만세’를 세 차례 외쳤다.
일본의 재무장을 추구하고 있는 아베 총리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인인 4월 28일에 집착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아베가 2차대전 종전 70주년이자 일본의 패전 70주년인 2015년 4월 28일에 맞춰서 이 같은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은 2차대전 전범국가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아베의 행보는 일본이 더 이상 전범국가가 아니라 보통국가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아베는 전범국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과거사를 사죄한 독일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취했던 역대 일본 내각의 입장을 모두 부정했다. 일본은 1982년에 미야자와 담화를 통해서 교과서 기술에 대해 주변국을 배려하는 입장을 밝혔다. 1993년에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고, 1995년에는 식민지지배와 침략을 사죄하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들은 대부분 한일 두나라 사이의 과거사에 대한 것이다. 아베는 지난 4월 22일 반둥회의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일본은 앞선 대전(大戰)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한다”고 했다. 일본이 중국, 미국과 전쟁을 한 2차대전(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해서는 사과는 없지만 반성은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서는 반성도 사과도 없었다. 
  아베 총리의 이같은 행보는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당시 상황을 연상시킨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미일안보조약과 함께 1952년 4월 28일 발효되었다. 이 조약 2조에서는 일본의 영토와 영해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주권행사의 범위를 지정한 것이다. 아베가 이날을 기념하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서 일본의 영토와 영해에 대해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생겨난 규칙, 절차, 제도 등을 포괄해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라고 부른다. 샌프란시시코 체제로 인해서 일본은 과거 전쟁과 침략의 범죄에 대한 사과 없이 국제사회에 무임승차한 것이다. 일본은 과거 범죄에 대한 징벌이 없이 샌프란시키코 체제를 통해서 오히려 역할이 중요해졌다. 이는 중국, 소련, 북한 등 공산주의 진영과 대결을 위한 미국의 전략 때문이었다.

 

치유되지 않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처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2차대전 이후 동북아에서 미소대결, 중국의 공산화 등의 상황을 반영한 미국의 전략에 따라서 형성된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동원하여 대소, 대중 봉쇄를 위한 동아시아 전진기지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지배와 군국주의를 완전히 청산하지 않은 채 일본이 재무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체제라기보다는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를 가로막는 불안전한 체제였다. 이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2015년 4월 28일 아베 총리의 미국 방문을 통해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일본역사에 대한 세계 최고의 권위자인 존 다우어 MIT대학 명예교수는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대해서 전쟁의 유산을 미청산하고 착취구조를 유지시킨 체제라고 비판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관대한 조치를 취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일본은 번영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착취로 인한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 계속 남아 있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형성된 냉전체제의 결과 한반도에서는 분단체제가 탄생했다. 한반도 분단체제는 세계적인 차원의 냉전체제의 하위체제가 되었다. 냉전은 한반도 분단의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종전 70주년과 분단 70년을 맞이해서도 변하지 않고 있다. 종전 70주년이 분단 70년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분단 70년은 구호 뿐이다. 하지만 종전 70주년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의 팽팽한 힘겨루기로 표출되고 있다. 70년 전에도 한반도가 국제정세에 의해서 지배받았듯이,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반도는 국제정세의 영향권에 놓여 있는 상황인 것이다. 
 종전 70주년의 가장 큰 특징은 중국의 ‘신형대국론’과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의 충돌이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중국과 미국은 과거 냉전시기에 미국과 소련이 대결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과 미국이 협력하고 공존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신형대국론에 대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신형대국론을 중국의 성장을 위한 시간벌기용 전략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소련의 부상을 위험스럽게 염려해서 대소련 봉쇄정책을 펼친 것처럼 중국이 아시아의 패권국가가 될 경우에 태평양 건너 미국의 위협이 된다는 발상이 자라잡고 있는 것이다.

 

성과 없는 미국의 아시아정책- 다급해진 오바마 정부

 

  탈냉전 이후에도 미국에게 있어서 일본의 존재는 미국이 세계전략 및 아시아?태평양 전략을 추진해가는 데 있어서 재정적 지원자였다. 지정학적으로도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거점이다. 뿐만 아니라 오래전부터 중국을 견제하거나 포용하는 데 있어 미국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적 파트너로 여겨졌다. 특히 최근 중국의 부상으로 이 같은 일본의 존재가 미국에게 더 긴요해졌다. 
  미국은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으면서 과거의 범죄에서 면죄부를 받아 군사대국화하려는 일본의 보통국가 전략을 용인해주고 있다. 미일동맹이 중국 봉쇄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일본의 군사력이 대외적으로 팽창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고,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같은 미국의 전략에 따라서 형성되는 미일관계는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당시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Pivot to Asia)은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을 중시하면서 일본의 재무장을 용인하고 한미일 삼각협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부활하여 재강화되는 것은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이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은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이했다. 게다가 2015년은 오바마행정부 2기 3년차이다. 올해에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오바마 정부의 정책은 실패로 끝나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바마 정부는 일본과 협력을 강화해 아시아 정책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한일 과거사 문제의 원만한 타협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런데 샌프란스시코 조약 체결 당시 한국을 제외시키면서 한일 간의 과거사 미청산의 씨앗을 뿌린 것이 한일관계가 악화된 원인이다.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이해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부활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샌프란스시코 조약 그 자체가 샌프란시스코 조약 부활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새롭게 재생산되는 한반도 분단체제

 

 결국 미국이 뽑아 든 카드는 한일 과거사에 대한 봉합이다. 미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커트켐벨 전 차관보는 오래전부터 일본의 과거사 문제 때문에 미국이 추구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진단해왔다. 그는 미국의 아시아정책의 기초를 입안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2015년 2월 웬디셔먼 미국무부 차관은 “위안부 문제와 같은 과거사를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애슈턴 카터 미국방장관은 지난 4월에 “한미일 협력의 잠재 이익이 과거의 긴장과 현재의 정치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이후 지속적으로 일본 중시 정책을 펼쳐 왔다. 하지만 그동안 미국정부는 아베 총리의 역사수정주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미국은 2013년에 아베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실망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아베의 집단적 자위권은 지지하면서도 아베의 역사수정주의에 대해서는 ‘미일동맹의 그림자’라고 생각하고 우려를 표명해왔던 것이다.  2015년 웬디 셔먼의 발언을 계기로 미국 정부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지지하면서 한일간의 역사갈등에서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도 처음에는 조약 체결국가 명단에 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종적으로 일본의 로비에 의해서 한국이 배제되었다. 당시 요시다 일본수상은 한국이 조약체결에 참가하면 일본이 한국에 막대한 전후배상금을 물게 된다는 이유로 한국의 참여를 배제했다. 미국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결국 한일 과거사 미청산의 씨앗이 된 것이다. 
 최근 미국이 한일관계에서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는 것을 보면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당시와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견제, 일본 중시, 한미일 삼각협력을 중심으로 하는 오바마의 아시아 회귀정책은 오바마 정부 2기 3년차를 맞이해서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다. 이 틈을 타서 아베는 재무장의 행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지금까지 동아시아에는 두 개의 큰 전선이 있었다. 하나는 G2로 성장한 중국과 아시아로 회귀하는 미국이 만들어내는 전선이다. 전통적인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부딪힘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전선이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보통국가화하려는 일본과 일본의 지배와 침략을 당한 나라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전선이다.  하지만 이 전선이 변화하고 있다. 역사전선을 유지해서 미국의 견제를 뚫으려는 중국과 역사전선을 약화시켜서 중국 견제를 강화하려는 미국의 대립 때문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는 70년 전과 마찬가지로 한반도 정세를 규정한다. 동아시아에서 강대국들이 만들어 내는 대립과 협력의 새로운 질서는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새롭게 재생산하고 있다.

 

 

** 이 글은 지난 4월 22일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이사장: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분단 70년, 남북관계는 어디로 가고 있나?”를 주제로 주최한 제15회 월례정책포럼에서 발표한 글을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이  다시 수정 보완한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5월호(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383 ) 에 공동으로 게재한다.

 

글·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전 국가안보회의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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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밖에 안 남은 유가족, 우리는 약하지 않았다

 

[현장] 5월 1일부터 2일까지, 이틀간의 기록

15.05.03 20:45l최종 업데이트 15.05.03 21:2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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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일 시청광장에서 열린 2015 세계노동절대회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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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부터 2일까지,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함께 견뎌 낸 뜨거운 시간들이 있었다. 주먹이 부르트고 이가 악물어질 만큼 참혹한 시간도 있었지만, 눈가가 뜨거워지고 가슴 속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시간도 있었다. 그 이틀간을 15개 장면으로 되짚어 보려 한다.

#1 노동자들을 향한 유가족의 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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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각역 사거리에서 마무리집회를 열고 있는 민주노총 조합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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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125주년 노동절을 맞아 서울 시청광장에서 세계노동절대회가 열렸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조합원 5만여 명은 박근혜 정부와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이라 뜻을 모았다. 

다양한 발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무대에 올랐다. 

"지난 1년간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눈물 흘리고, 고통을 나누며 행동해 주신 민주노총 모든 조합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마이크를 내려놓고 몸을 굽혀 큰절로 인사하는 유경근 집행위원장에게 노동자들은 시청광장을 가득 채우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응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는 416연대가 준비한 범국민 철야행동에 민주노총도 함께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2 소망으로 끝나 버린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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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국역 부근 아스팔트 바닥에 적힌 글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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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국역 부근 아스팔트 바닥에 적힌 글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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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막힌 노동자들은 다시 종각역 사거리로 돌아왔다. 오후 7시쯤이었다. 방송차 위로 올라간 김종인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안국역 쪽에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있는 1000여 명의 동지들이 있습니다. 오늘 세계노동절대회 행진은 여기서 마칩니다. 여기 계신 동지들 모두 안국역 유가족들의 곁으로 달려가 주십시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노조 깃발을 흔들며 커다란 함성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행진이 마무리되자 깃발들은 저마다 다른 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결국 이튿날 아침까지 유가족들의 곁을 지킨 노조 깃발은 채 서넛이 되지 않았다. 안국역 부근에서 만난 한 금속노조 조합원은 이렇게 말했다. 

"행진이 끝난 후 단위가 조직적으로 철야행동에 참여한다는 결정은 없었다. 각 단위 노조가 알아서 참여하는 식이었다." 

소망은 그렇게 소망으로 끝났다.

#3 낙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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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철학적인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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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역 부근으로 가니 이미 많은 깃발들이 모여 있었다. 청와대 방면에 세워진 차벽 앞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사람들은 도시락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필로 아스팔트 바닥에 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시꺼먼 아스팔트가 금세 거대한 칠판으로 변했다.

경찰버스로 둘러친 차벽은 어느새 예술가들의 공간이 돼 버린 듯 알록달록한 낙서들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차벽에 적힌 낙서들 가운데 가장 심오했던 것은, 원래 버스 옆쪽에 적혀 있는 '경찰'이라는 두 글자 뒤에 누군가 그려 넣은 '?'였다. 과연 이 시대의 경찰은 누구의 편이며 어떤 존재들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짧고도 강한 낙서였다.

#4 물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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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오 뒤쪽에서부터 날라져 오는 생수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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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사이신 용액을 얼굴에 맞은 사람들을 위해 시민들이 마련한 물병들.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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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시가 넘자 종로경찰서 경비과장이 차벽 뒤 어디선가에서 경고방송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차벽 왼쪽에 경찰들이 모여 있는 곳을 뚫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방패를 밀어붙이자 경찰은 사람 얼굴을 정확히 조준해 캡사이신 용액을 쏘았다.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이 뒤로 물러났다. 물을 찾는 다급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대오 뒤쪽에서부터 크고 작은 생수병들이 끝없이 날라져 왔다. 어떤 사람은 갖고 있던 보리차를 꺼냈다. 캡사이신을 맞아 괴로워하던 사람들은 물로 얼굴과 손을 씻은 뒤에야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러나 캡사이신은 다시 허공에 물보라처럼 튀었고 최루액을 끼얹은 듯 사방이 매캐해졌다. 똑같은 물을 쓰는 데도 서로 쓰는 방법이 너무나도 달랐다. 

#5 격리된 경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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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들 앞을 지키고 있는 장애인들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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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쪽 길목으로 가 보았다. 경찰들이 방패를 앞세운 채 나란히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찰들을 휠체어 탄 사람들이 막고 있었다.

원래는 거꾸로 돼야 하는 것이다. 어느새 경찰은 누군가를 보호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하는 존재가 돼 있었다.

#6 통곡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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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족과 시민들을 향해 퍼부어지고 있는 물대포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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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처럼 뽀얗게 될 만큼 최루액이 진하게 섞인 물을 경찰은 유가족과 시민들을 향해 쏘았다.
ⓒ 개미뉴스 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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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시 30분을 넘기자 종로서 경비과장은 '살수차를 써서 강제 해산에 들어가겠다'고 경고방송을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로 물대포가 날아들었다. 

물대포는 모두 셋이었다. 흰 물줄기가 밤하늘을 시원하게 가르는 모습은 장관이었지만 물줄기의 끝은 항상 사람을 겨냥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머리를 정통으로 맞으면 위험할텐데, 경찰은 유가족이든 시민이든 기자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겨냥해 물을 쏘았다. 

최루액을 얼마나 섞었는지 바닥을 흐르는 물줄기가 우유처럼 새하얬다. 사람들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기침과 재채기를 하며 뒤로 물러섰다. 숨을 쉬면 쉴수록 콧속과 허파를 철수세미로 긁어 대는 것 같았다. 경찰은 그렇게 최루액을 서너 차례나 더 발사했다. 

#7 유가족들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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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들 앞을 막아선 세월호 유가족들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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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최루 물대포 사격에도 굴하지 않고 맨 앞에 서서 물을 맞은 이들은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이었다. 이튿날 오후까지 경찰들과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 있었지만 언제나 맨 앞에는 유가족들이 있었다. 대체 어디서 힘이 나오기에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궁금했지만 답은 간단했다.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가 지쳐 주저앉은 한 유가족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아이들 마지막 순간만큼은 안 힘들어."

최루 물대포 사격이 끝나자 사람들은 다시 차벽 앞으로 모여들었고 유가족들도 길을 막고 있는 경찰들 앞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한 유가족은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경찰들을 향해 말을 쏟아 냈다.

"너희도 부끄럽지? 그러니까 눈 내리깔고 방탄모에 방탄복 입고 이렇게 엉거주춤 서 있는 거 아냐? 오늘 밤 같은 일은 경찰 기록에도 남을 거고 역사책에도 논문에도 낱낱이 기록될 거야. 너희들 나중에 자식 태어나서 너희들에게 엄마 아빠는 그때 어디서 뭐했느냐고 물으면 이야기할 수 있겠어? 못해. 너희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

1년 전,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서 경찰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자식 하나 못 살린 죄인'이라며 두 손을 싹싹 빌던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리고 유가족들이 그렇게 변한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다.

#8 삼성서비스노동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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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벽 앞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있다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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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자 차벽 앞에서는 자유발언이 시작되었다. 어느 대학생은 끝까지 이 자리에 함께 있어 주지 않은 민주노총이 많이 야속하다고 말했고, 어느 할아버지는 종로서 경비과장에게 이제 그만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자유발언에서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부산에서 올라온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의 이야기였다.

"저는 부산 지역 삼성 노동자입니다. 삼성서비스지회 조합원이기도 합니다. 아까 캡사이신 물대포 많이들 맞으셨죠? 저도 이렇게 독한 건 오랜만에 맞아 봅니다. 작년에 염호석 열사의 유골을 지키기 위해 경찰들과 맞서면서 캡사이신 정말 많이 맞았습니다. 맞으면서도 끝까지 버티니 나중엔 맛도 있었습니다. MSG 맛이 나니 아마 라면 좋아하시는 분들은 먹을 만할 겁니다. (웃음) 저희는 그렇게 싸워서 삼성의 76년 무노조 경영 원칙을 깨고 마침내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세월호 투쟁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저희 삼성노동자들도 세월호 유가족들과 피해자들 곁에서 끝까지 함께 싸우겠습니다." 

#9 어떤 기자, 눈 까뒤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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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고 들어오는 경찰을 온몸으로 막고 있는 유가족들과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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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만난 어느 영상 활동가가 들려준 이야기다.

"경찰들 앞에서 계속 영상을 찍고 있는데 기자처럼 생긴 어떤 여자 분이 사복 경찰과 계속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뭔지 궁금해 그쪽을 얼쩡거리면서 계속 찍었더니 그 여자 분도 제가 신경 쓰이는지 찍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기자 분이시냐고 물어보니 명함을 꺼내 보여주는데 아무개 매체 기자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웃으며 그랬어요. '어차피 아무개 매체면 경찰과 한통속이겠네요?' 그러니까 그분이 제 앞에서 충혈된 두 눈을 까뒤집으면서 '이거 왜 이러세요? 저도 아까 캡사이신 맞았거든요?' 이러고 가 버렸어요.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웃었죠."

#10 내게 산소 같은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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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단보도를 막아선 경찰들 앞에서 계속 신호 숫자를 세던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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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두 시부터는 유가족들과 함께하는 간담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경찰들이 갑자기 밀고 들어와 시민들을 인도로 몰아넣었고, 유가족들을 따로 고립시켜 버렸다. 사람들은 구호를 외치거나 경찰과 몸싸움을 벌일 뿐 벽을 뚫지는 못했다. 

오전 4시가 넘도록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고, 나는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누웠다. 잠들기 전에 내 앞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경찰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 횡단보도고 파란불인데 왜 못 건너가게 하죠? 이렇게 하라고 누가 지시했습니까? 지금 두 번째 파란불입니다. 두 번째가 되는 동안 경찰 여러분들은 불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잠시 후) 지금 세 번째 파란 불입니다. 세 번째가 되는 동안…."

눈을 뜨니 어느새 푸르게 동이 터 있었다. 얼마나 잤는지 손전화를 꺼내려는데 귓가에 아까 그 목소리가 흘러들어오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 횡단보도고 파란불인데 왜 못 건너게 하나요? 지금 마흔아홉 번째 파란불입니다. 마흔 아홉 번째가 되는 동안 경찰 여러분들은 계속 불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경찰은 어서 길을 열고…."

내가 잠든 사이에도 끊임없이 숫자를 세며 경찰과 맞섰을 그 아주머니는 오십 번째를 넘기자 그만 지쳤는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경찰들의 얼굴이 좀 풀리나 싶었던 것도 잠시, 절대로 지칠 리가 없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국동 사거리 동일빌딩 방향 횡단보도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국동 사거리 동일빌딩 방향 횡단보도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국동 사거리 동일빌딩 방향 횡단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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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들에게 막혀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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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을 보니 웬 아저씨가 시각장애인용 음향신호기의 단추를 꾹 누르고 있었다. 

경찰들에게 꽁꽁 포위당한 채로 맞이한 그날 아침이었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저항들이 나의 숨통을 조금 트이게 했다는 것을 그 아주머니와 아저씨도 알고 있을까? 

#11 경찰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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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밧줄을 목에 건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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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멀찍이 돌아 유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경찰들은 여전히 청와대 쪽 방면에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반은 인도에, 나머지 반은 차도에 앉아 있었다. 한 유가족이 경찰을 향해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인도로 가지 말라며! 그래서 차도로 가려는데 왜 못 가게 해? 그럼 우리 보고 어떻게 가라는 거야! 날아가? 어떻게 인도로 가지 말라는 소리를 할 수 있어?"

진부한 수작이었다. 경찰은 유가족들의 목적지가 어디든 청와대 방면으로 가는 듯하면 무조건 길을 막는다. 그런데 막을 명분이 없으니 왜 막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인도로는 갈 수 없다고만 되풀이한다. 그래서 차도로 가면 도로교통법과 집시법을 어겼다며 불법시위로 몰아붙인다. 날아다니는 새가 아닌 이상 꼼짝없이 걸려들 수밖에 없는 덫이다.

#12 악에 받친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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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들과의 몸싸움 끝에 탈진해 버린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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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가 넘자 완전히 날이 밝았다. 유가족들이 하나둘 경찰 앞으로 모이더니 밧줄을 꺼내 차례로 목에 감았다. 한 사람이 밧줄을 목에 한 바퀴 감고 옆에 넘기면 옆 사람이 그 줄을 받아 자기 목에 감고 다시 옆으로 넘기는 식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목을 이어 맨 유가족들은 그대로 경찰벽을 향해 돌진했다. 종로서 경비과장은 유가족들이 '위험한 시위행위'를 하고 있다며 방송차 안에서 떠들어 댔다.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 탈진한 유가족들이 하나둘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

밧줄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자 유가족들은 다시 방패 앞에 앉았고, 분노를 이기지 못한 한 유가족은 머리를 바닥에 짓찧으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 사람들이 달려와 그 유가족을 말리며 바닥에 눕혔지만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주변은 온통 눈물바다가 됐다. 

#13 방패 앞 뜨개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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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들 앞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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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햇살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꾸벅꾸벅 졸며 유가족들 옆에 앉아 있는데 경찰들의 방패 앞에서 노란 실로 뜨개질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가족은 아니었다. 무얼 하고 있는지 가서 물어보았다. 

"별을 뜨고 있어요. 평소에 아버님들이 발언하실 때마다 '우리 아이들은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었을 것'이라 말씀하세요. 그래서 아버님들의 그런 뜻을 저희가 좀 이어 보고자 이렇게 별을 만들게 됐어요. 광화문 농성장에 매주 수요일마다 모여 함께 별을 뜨고 유가족 분들에게 전달해 드리고 있어요."

노란 실로 짠 노란별이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14 경찰에게 유가족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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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길을 지나가려는 사람들은 인도 전부와 차도 일부를 막아 버린 경찰 때문에 차도 바깥으로 다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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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국민 철야행동은 원래 오전 11시에 광화문 광장에 모여 마무리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정오가 지나도록 경찰은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유가족들이 청와대가 아닌 광화문으로 간다고 해도 경찰은 묵묵부답이었다. 

차도 일부와 인도 전부를 막고 있는 경찰은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차도 바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유가족들이 '우린 막아도 좋으니 시민들에게는 인도를 열어 달라'고 요구했지만 경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경찰도 어쩔 수 없이 방패 사이로 사람들을 지나가게 했다. 흥분한 몇몇 사람들이 왜 유가족들만 못 지나가게 하느냐고 경찰에게 따지자 경찰은 간단히 대답했다.

"저분들은 일반 시민이 아닙니다."

유가족들이 일반 시민이 아니면 대체 뭐냐고 재차 물었지만 경찰은 다시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15 유가족들은 약하다, 그러나 우리는 강하다

오후 2시가 될 때까지 유가족들과 경찰들의 몸싸움은 계속되었다. 경찰들은 이제 대놓고 유가족들의 얼굴에 캡사이신을 겨냥해 쐈다. 다른 누군가를 겨냥하다 잘못 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경찰벽 앞에서 유가족들은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렸다. 

경찰은 2시가 넘어서야 유가족들이 조계사 쪽 길을 통해 광화문 광장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광장에 도착해 잠시 쉰 유가족들은 기자들과 시민들을 모아놓고 마무리집회 겸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서 있을 힘도 없었던 나는 그때 광장 구석에 있는 화단에 앉아 있었다. 내 앞에 앉은 한 유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어제부터 꼬박 현장을 취재했다고 하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 죽여 버리겠다고, 갈아 마셔 버리겠다고 써 주세요. 이제 우린 악밖에 남은 게 없어요."

나는 꼭 그렇게 써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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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마무리집회 겸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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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사진을 몇 장 찍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떠났다가 돌아오니 그 유가족은 다른 유가족 품에 안겨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도 이틀 만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유가족들은 강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약하다. 약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버티지 못한다. 약하기 때문에 자꾸만 잡아달라고 손을 내민다. 그 손 맞잡아 준 다른 손들과 함께 유가족들은 이틀을 보냈다. 이틀 동안 유가족들은 강했다. 그러나 그 힘은 유가족들을 비롯해 서로 손 맞잡은 모든 이들에게서 나온 힘이었다. 

그건 곧 나의 힘이기도 하다.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해서 머리도 아프고 걸음 옮길 힘도 없던 나는 유가족들에게서 받은 힘, 혹은 내가 유가족들에게 전해야 하는 힘 같은 것이 몸에 조금씩 차오르는 것 같아 가만히 몸을 일으켜 보았다.

그러고는 분향소 앞에서 시민들과 얼싸안고 울고 있는 유가족들을 뒤로 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여 광장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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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과 단심(丹心), 노자의 선택은?

 
이인우 2015.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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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명장면】노자, 그 잃어버린 이야기

 노담일사(老聃逸事)<상>

 

 

이 이야기는 고대 중국 주(周)나라 경왕(景王) 연간(B.C 545~520)에 왕실 사관(史官)을 지낸 노담(老聃)이라는 사람의 약전(略傳)이다. 나, 이생이 공자께서 ‘노자’(老子)를 만났다는 전래 설화의 진위를 추적하던 중에 듣게 된 전승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노담은 생애의 전모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 관한 전승들도 대부분 그 신빙성을 자신할 수 없다.① 그래서 약전의 제목을 노담의 ‘잃어버린’, 혹은 ‘잊혀진’ 이야기란 뜻의 <노담일사>(老聃逸事)라 하고 <공자, 노자를 만나다> 편의 부록으로 삼는다. 한 편의 ‘문화사’로 읽는다면 시간의 낭비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생(李生) 

 

 

1. 내력(來歷)

노담은 어릴 때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귀 모양이 특이했던 듯 하다. 그의 자(字)로 여겨지는 담(聃)은 ‘귓바퀴가 없을 정도로 귀가 늘어졌다’는 뜻의 글자이다. 그의 관직으로 추정할 때, 공자보다 한 세대 위, 즉 약 15~20살 정도 나이가 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담의 출신지는 중국 남방의 초(楚)나라 고(苦)현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 고현은 원래 진(陳)나라 상(相)땅이다. 진나라는 소국으로 초나라의 보호국이었다가 서기전 479년(공자가 돌아가신 해이기도 하다) 초나라에게 합병 당했다. 담은 상 땅이 진나라에 속한 시절에 태어난 사람이다. 이 상 땅이 나중에  초나라에 흡수되었기에 후대 사람들은 노담을 초나라 사람이라고 여겼다.

 

노담의 성씨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약소국 진나라 출신으로 주왕실의 태사(太史;고대 중국에서 천문역법(天文曆法)을 관장하는 벼슬)라는 고위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최소한 서민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나라 공실의 성은 규(女+爲)씨이다. 규는 고대의 성스러운 왕인 순(舜)의 성이다. 어쩌면 그의 집안은 낙양으로 진출한 진나라 공족의 후예였을지 모른다. 또는 중원의 공력 높은 무사(巫史) 가문이었을 수도 있다.

노담의 집안이 언제부터 주나라 수도 낙양에 살게 되었는 지도 알 수 없으나, 고조나 증조부 대부터 주왕실의 사(史)를 세습하였던 것 같다. 이 집안에는 비전(秘傳)하는 양생술(養生術)이 있어서 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함께 장수하였다. 그런 탓에 늙도록 왕실에 충성한 할아버지는 귀족들로부터 장로(長老)의 예우를 받았다. 담의 아버지는 태사의 지위에서 은퇴한 뒤에도 후배 사관들에게 ‘노사’(老師)라 불리었다. 이런 자랑스런 가계 때문에 담은 어렸을 때부터  ‘장로의 손자 담’,  ‘노사의 아들 담’이라고 불리었다. 나중에는 그 자신도 매우 장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담을 존칭하여 ‘노담 선생’이라 불렀다. 노자(老子)라는 존칭은 아마 여기서 처음 유래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노담의 직책은 왕실 사관(史官)이었다. 사(史)는 본래 고대 원시사회의 무축(巫祝)에서 비롯되었다. 무축은 모계(母系) 중심의 원시농경사회에서 신에게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고 사냥과 전쟁의 유불리를 점치는 사제자(司祭者)이자 주술자였다.

이 제사장 집단에서 무사(巫史)가 나왔고 유(儒)와 사(史)가 분화 되었다. 유가가 이 집단에서 제전(祭典)을 실행하는 층의 후예라면, 사는 축도문을 낭송하고 이를 기록(정확히는 기억)하는 층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들은 고도의 상징과 의식을 통해 자신들이 신과 닿아있음을 자부했다. 그들이 사용한 은유로 가득 찬 주술적인 언어들은 집단의 ‘공동기억’으로서 가문 안에서만 전승됐다. 이들은 무축의 시대가 가고 왕권의 시대가 오자 세력을 잃고 하층계급으로 전락해 갔다. 그러나 소수는 그 비전(秘傳)한 지식으로 권력을 가까이서 보좌했고, 정치력을 갖춘 자는 권력의 한 축이 되기도 했다. 왕실의 사(史)가 본래 모계(母系) 사회의 성직자였음을 암시하는 노담의 시가 지금도 전해진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신비한 암컷이라 한다.

 신비한 암컷의 문이여!

 이를 일컬어 만물의 근원이라 한다. 

 이어지고 이어져 영원한 듯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谷神不死(곡신불사)/是謂玄牝(시위현빈)/玄牝之門(현빈지문)/是謂天地根(시위천지근)/綿綿若存(면면약존)/用之不勤(용지

불근)②

 

제사자에서 왕의 정치적 자문관이 된 사는 일상적으로는 조정과 왕실의 제례와 의전에 관한 전거와 기록의 관리를 담당하며, 유사시에 천문(天文)과 복서(卜筮), 점사(占辭)를 행하고 해석함으로써 정치에 참여하였다. 사관으로서 노담이 맡았던 주요 직책 중에는 왕실도서관인 수장실(守藏室)의 장관직도 있었다. 당시 왕실 도서관이 소장한 하은주(夏殷周·고대 중국의 3대 왕조) 시대의 전적과 기물들은 오직 왕실과 왕명을 받은 자만이 열람·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수장실 장관의 권위는 매우 높았다. 노담은 또 ‘주하사’(柱下史)라는 직책을 겸하였다. 주하사는 말 그대로 ‘기둥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왕의 자문에 응하는 시어사(侍御史)의 직책’이었다. 왕을 정치적으로 보필하는 근신(近臣), 나아가 특별한 사랑을 받은 총신(寵臣)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요직이었다.  노담과 같이 높은 지위를 부여받은 사관은 그 광범위한 지식과 충성심을 바탕으로 현실 정치에 깊숙히 개입하기도 했다. 왕실 소속의 세습 사관 겸 정치자문관으로서 담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잠언이 있었다.

 

 도(道)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하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                                         

 만약 임금이 이를 잘 지킨다면                       

 만물은 저절로 교화되리라.                        

 교화를 억지로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이름없는 통나무가 되어 못하게 하리라.

 이름없는 통나무는

 대저 또한 욕심이 없을지니,                            

 욕심내지 않고 고요하여                                 

 천하는 저절로 안정하리라.                             

 道常無爲(도상무위)/而無不爲(이무불위)/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化而欲作(화이욕작)/吾將

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無名之樸(무명지박)/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不欲以靜(불욕이정)/天下將自定(천하장

자정)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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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출처 : 위키피디아

 

2. 영광의 시절

노담이 태사일 때 주나라 국왕은 경왕(景王)이었다. 그는 27년간 재위하며 군왕의 자질을 발휘했던 아버지 영왕(靈王)으로부터 군주의 도를 배웠다. 노담은 이런 경왕에게 두 가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첫째는 일종의 비밀업무로서 ‘제왕학’과 ‘군사학’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주나라는 외적을 피해 낙양으로 동천(東遷)하면서 사실상 천하의 주인으로서 권위와 힘을 상실했다. 왕국은 작은 영토로 축소되어 이웃한 강력한 제후국인 정(鄭)나라와 진(晉)나라에 의지하여 겨우 천자(天子)의 지위를 유지했다. 따라서 지각 있는 왕이라면 왕자(王者) 본래의 권좌와 위력을 되찾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미 영락한 작은 나라에 불과한 왕실이 몇배나 힘이 센 제후국들을 별다른 무력도 없이 통어(統御)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왕은 부왕인 영왕의 뜻을 이어받아 주왕실의 이런 서글픈 처지를 바꿔보고 싶었다. 노담 집안은 그런 왕실의 ‘비밀 두뇌’였다.

“왕실이 저 사나운 제후들을 말과 개처럼 부릴 지혜를 강구하시오! 왕도(王道)를 회복할 길을 반드시 찾아주시오!” 그런 지침을 받은 노담 집안이 찾아낸 치도(治道)는 무엇이었을까? 

 

 없는 힘으로 있는 힘을 다스린다

  

바로 성인(聖王)의 도(道), 즉 무위(無爲)의 치(治)였다. 무력(無力)으로 유력(有力)을 아우르고, 없음(無)으로 있음(有)를 덮고, 부드러움(柔)으로 굳셈(剛)을 감싸고, 약함(弱)으로 강함(强)을 이끄는 고도의 정치술이었다. 노담이 간절한 마음으로 왕에게 무위(無爲)의 덕의 중요성을 가르친 글 한편이 전해진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으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여 이기는데              

 물과 바꿀만 한 것이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                    

 천하에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나            

 능히 행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런 까닭에 성인이 말하기를                 

 나라의 오욕을 짊어지는 자                     

 그를 일컬어 사직의 주인이라 하며              

 나라의 불행을 떠매고 가는 자                      

 그를 일컬어 천하의 주인이라 한다.                

 天下莫柔弱於水(천하막유약어수)/而功堅强者莫之能勝(이공견강자막지능승)/以其無以易之(이기무이역지)/弱之勝强(약지승

강)/柔之勝剛(유지승강)/天下莫不知(천하막부지)/莫能行(막능행)/是以聖人云(시이성인운)/受國之垢(수국지구)/是謂社稷主(

시위사직주)/受國不祥(수국불상)/是謂天下王(시위천하왕)④

 

또한 노담은 강력한 제후의 군사력을 역용(逆用)하여 약한 왕실의 안녕을 지키고, 제후의 군사지휘권을 왕의 통제하에 두어 그것으로 제후를 복종시키는 용병술도 깊이 연구하였다.

“도(道)로써 덕(德)을 넓혀 지(智)와 무(武)를 복종시켜라!”

“제후가 병기를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 제후가 함부로 행군하지 못하게 하라! 제후가 병권을 성왕에게 바치게 하라!”

  

 무릇 아무리 좋은 병기(兵器)라도                                   

 상서롭지 못한 기물(器物)일 뿐이다.                               

 만물이 다 싫어하는 바이니,                                         

 도(道)를 지닌 자는 병사(兵事)에 몸을 두지 않는다.    

 병기는 도무지 상서롭지 않은 것이니                            

 군자의 기물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을 때 쓰는 것이니                                         

 사용함에 초연하고 담담해야 한다.                          

 이겨도 아름답지 않으니                                     

 승리를 찬양하는 자는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것이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가                                             

 어떻게 천하의 지지를 얻겠는가.                                 

 사람을 많이 죽였으면                                                   

 슬픔과 자비로 애도해야 하니                                        

 전승(戰勝)의 의식,                                                    

 상례(喪禮)를 따르는 것이 도리일진저.                       

 夫佳兵者(부가병자)/不祥之器(불상지기)/物或惡之(물혹오지)/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兵者 不祥之器(병자

불상지기)/非君子之器(비군자지기)/不得已而用之(부득이이용지)/恬淡爲上(염담위상)/勝而不美(승이불미)/而美之者(이미지

자)/是樂殺人(시락살인)/夫樂殺人者(부락살인자)/則不可得志於天下矣(즉불가득지어천하의)/殺人之衆(살인지중)/以哀悲泣之

(이애비읍지)/戰勝(전승)/以喪禮處之(이상례처지) ⑤

 

경왕은 주실 중흥(周室 重興)이란 자신의 염원이 태자 시대에서는 꼭 이뤄지기를 희망했다. 경왕은 태자를 담에게 맡겨 가르치도록 했다. 이때 경왕이 태자 수(壽)에게 노담을 교부(敎父)라 부르게 하니, 노담이 경왕 부자 앞에서 태자에게 바친 시가 전해진다.

 

 사람이 싫어하는 바가 셋이 있으니                         

 어려서 부모를 잃는 고(孤·고아)요,                      

 같아 살 배필이 없는 과(寡·과인)요,                            

 사람으로서 굶주리는 불곡(不穀·먹을 곡식이 없음)이니 

 그래서 왕공(王公)은 이를 자신의 칭호를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의 이치란                                           

 덜어내면 더해지고                                                   

 더하려면 오히려 줄어듭니다.                                     

 이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가르침이지만                        

 지금 다시 이를 가르치고자 합니다.                           

 교부(敎父)의 이름으로                                              

 오직 이 한 말씀을 그대에게 바칩니다.                        

 人之所惡(인지소악)/唯孤(유고)/寡(과)/不穀(불곡)/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故物(고물)/或損之而益(혹손지이익)/或

益之而損(혹익지이손)/人之所敎(인지소교)/我亦敎之(아역교지)/吾將(오장)/以爲敎父(이위교부) ⑥

 

태자는 총명하여 충실한 학업으로 왕의 기대에 부응했다. 왕실은 평안했고 미래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바야흐로 주왕실 중흥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 만 같았다. 노담의 가슴에도 뜨거운 자부와 웅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3. 비극의 시작

“담 선생!”

“노담 선생!”

수장실(守藏室)로 당직 사관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급히…”

“큰일났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급서하셨다고 합니다!”

노담의 손에 들려있던 도필(刀筆)이 쨍그러니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서기전 522년 주나라 경왕 18년, 태자 수(壽)가 왕후에 이어 갑자기 죽었다. 노담의 나이 40대 후반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태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 자체로 왕실의 큰 슬픔이면서 노담에게도 커다란 좌절이었다.

“그동안 제후들 몰래 연구한 제왕학(帝王學)을 꽃피워 줄 성군의 재목이었는데… 아, 주실(周室)의 천록(天祿)이 진정 여기까지인가…” 

태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 만개할 것이 분명했던 노담의 영화도 꽃을 피워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태자의 죽음이 장장 17년에 걸친 골육상쟁의 서막이 될 줄이야…

  

경왕은 태자와 왕후가 잇따라 죽는 슬픔 속에서도 군왕으로서 사고의 중심을 잃지 않았다. 우선 새로 정비를 맞아 적자를 생산하는 일을 서둘렀다. 경왕에게는 태자 말고 여러 명의 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맏아들 조(朝)는 장자로서 책임감이 강하고 기상도 늠름했지만, 경왕은 왕위만큼은 적자로 이어지길 원했다. 그래서 경왕은 곧 새 왕후를 맞아 새로 2명의 아들을 얻었다. 맹(猛)과 개(빌 개)였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경왕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경왕은 자신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음을 느끼자, 비로소 태자가 어린아이에 불과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맹은 이제 겨우 세살박이가 아닌가. 이리같은 제후들과, 호시탐탐 왕권을 노리는 노회한 공족들 틈바구니에서 저 아이가 제대로 임금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게다가 왕후 집안을 중심으로 새 외척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몇몇 탐욕스런 귀족들이 작당(作黨)을 부채질하고 주도했다. 왕은 불안감으로 잠 못이루는 날이 늘어만 갔다.

 

“노담, 어찌하면 좋겠소?”

“…”

노담은 죽은 태자의 스승으로서 다른 왕자들이 태자의 지위를 논하는 문제에는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서장자(庶長子) 조의 사부인 빈기(賓起)를 추천했다.

“그런 일은 저보다 빈기가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장자의 스승이니…”

태자가 죽은 후 맏아들 조에게 허전한 마음을 의지해온 경왕은 마침내 서자이나 이미 장성한 성인인 맏아들로 태자를 교체하기로 결심했다.

“조의 기상이 실로 할아버지 영왕(靈王)을 닮았다. 왕실의 중흥을 도모하려면 이 길뿐이다…” 

경왕은 조를 태자로 삼기 전에 중단한 결단을 하나 더 내렸다.

“태자의 외척들이 순순히 찬성할 리는 없을 터…”

태자 맹 형제를 에워싼 외척과 귀족들을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태자 교체는 말도 꺼내기 전에 수포로 돌아갈 것이 뻔했다.

그들은 강력한 제후국인 진(晉)나라를 배후세력으로 갖고 있었기에 왕으로서는 더욱 두려운 존재였다.

고민하는 경왕의 귀에  빈기가 속삭였다.

“폐태자를 하려면 우선 맹 왕자의 훈육을 맡고 있는 하문자(下門子)의 입부터 막아야 합니다. 다른 죄를 씌어 하문자를 먼저 내치십시오. 그런 다음 망산에서 여름 사냥대회를 열어 공경(公卿)들을 모두 초대하십시오. 왕의 부름에 선(單)공과 유(劉)공(외척의 후견 세력)도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냥하는 틈을 보아 둘을 처단한 뒤 즉시 태자의 교체를 명하신다면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그렇게 왕의 비밀작전이 착착 진행되어 마침내 사냥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경왕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궁을 나와 사냥터와 가까운 왕족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경왕이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켜 죽고 만 것이다.

왕자 조와 빈기의 입장에서 보면 이 ‘붕어’(崩御)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었지만, 암살의 증거 또한 없었다.

“살해자가 있음에 틀림없건만…”

 

사자굴에 들어갈 뻔 한 사실을 깨달은 태자당은 즉시 왕자 맹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선씨와 유씨가 섭정이 되었음을 공표했다. 그리고 바로 군사를 보내 빈기를 척살하고, 조정 안팎에 포진해 있던 선왕의 측근과 총신들은 물론 서왕자들과 가까운 백공(百工· 왕성 안에 살며 왕족과 귀족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제작·공급하는 세습적인 상공(商工)집단을 말한다.)들까지 축출하고 그 자리에 자기 세력을 배치했다.

전광석화처럼 새 왕 체제가 들어서고 2달 뒤 경왕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이 끝나고 새 왕의 정식 즉위식이 거행되기 전에 또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장자 조를 지지하는 왕족들과 숙청된 백관 및 백공 세력이 연합하여 왕궁을 기습 공격한 것이다. 선대 두 왕의 직계 왕자들도 모두 조의 편에 가담하니 전세가 단숨에 서장자 쪽으로 기울었다. 선씨와 유씨 등은 맹과 개 형제를 들쳐업고 이웃한 제후국인 진(晉)나라로 달아나 구원을 요청했다. 이 내전의 와중에 태자 맹이 놀라 죽자 척신들이 동생 개를 추대하니 이 사람이 경왕(敬王)이다. 호족들이 어린 이복동생 개를 즉위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조도 즉각 왕위에 오르니, 주나라 수도 낙양에 두 명의 왕이 동시에 들어서게 되었다. 낙양에는 두 개의 성이 있는데 서쪽에 본래의 왕성(王城)이 있고  동쪽에 새로 쌓은 성주(成周)성이 있었다. 사람들은 왕성에서 즉위한 조를 서왕(西王), 동쪽 성주에 들어간 개를 동왕(東王)이라 불렀다.

 

한쪽은 비록 서자이긴 하나 선왕이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는 명분이 있었고, 한쪽은 선왕의 유지가 없는 갓난아이지만 정비 소생의 적통이란 명분이 있었다. 약점과 명분이 뒤섞여 어느 쪽도 온전한 정통성을 주장하기 어려웠다.

낙양사람들은 두 왕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줄을 잘 못 섰다간 온 집안이 역적으로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느쪽이든 빨리 승부가 나기만을 바랐다. 노담의 상황은 더욱 안좋았다. 개인적인 친분으로는 서왕자들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태사로서 서자들에게 적통의 계승자를 제치고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선왕의 총애를 받은 사람으로서 어린 왕자를 허수아비삼아 권력을 농단하는 귀족들을 추종하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동왕 세력이 불러들인 진나라 군대가 낙양에 진군했다. 낙양은 진나라 군대를 사이에 두고 왕성의 서왕파와 성주의 동왕파로 갈려 사활을 건 대치에 들어갔다. 오늘 서왕파의 군대가 기세를 올리면 내일은 동왕파가 만세를 부르는 격이었다.

어느 쪽에도 가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진나라 군대의 노략질까지 당하게 된 백성들은 남부여대하여 피난을 떠났다. 노담의 가족도 전화(戰禍)를 피해 낙양을 떠났다가 전선(戰線)에 가로막히자 고향인 남쪽 진(陳)나라를 향해 피난길에 올랐다.

이 내란이 장기화되면서 궁중의 관리, 악사, 공장(工匠)들도 낙양을 떠나 중국 전토로 흩어져 갔다. 음악을 사랑한 공자도 사방으로 비산(飛散)한 악사들의 운명을 전해 듣고 안타깝게 여긴 마음이 <논어>에 전해질 정도였다.

 

‘태사지는 제나라로 가고, 아반간은 초나라로 가고, 삼반료는 채나라로 가고, 사반결은 진(秦)나라로 가고, 고방숙은 하(河)로 들어가고 파도무는 한(漢)으로 갔고, 소사양과 격경양은 발해 너머 갔느니… -<논어> ‘미자’편 9장

 

이복형제간의 맹렬한 왕위 다툼은 5년을 끌었다. 싸움은 진(晉)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장기전을 펼친 동왕의 승리로 끝났다. 서기전 516년 서왕은 주왕실의 내전을 종식시키기로 한 진나라의 대공세에 밀려 지지세력을 이끌고 마침내 초나라로 망명했다. 주왕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했던 서왕은 이 때 주나라 왕실 수장고에 있던 창업이래의 수많은 전적(典籍)을 가지고 초나라로 갔다.  주나라 왕실 전적의 남천(南遷)은 중국문화사의 일대 사건이었다.⑧ 당시까지 중원 문화권의 밖에 존재하는  ‘오랑캐’ 지역(초나라)이 갑자기 쏟아진 높은 수준의 외래문화와 문물을 흡수하여 급속하게 ‘중화’(中華)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서왕 조는 비록 왕위싸움에 져서 주나라 봉건질서 밖의 초나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으나, 자신이 그토록 자부한 `천자의 나라’가 그 문화적 영토를 양자강 이남의 남쪽 지방까지 확장시키는 예기치 못한 기여를 ‘중국’에 한 셈이 되었다.

서왕은 망명하면서 각 제후국에 이러 조칙을 내리고 떠나갔다.

“왕실이 혼란할 때 선씨와 유씨의 무리들이 천하를 착란시켜 한결같이 불순한 짓만을 자행하면서 ‘선왕의 후사에 어찌 정해진 규정이 있었던가? 오직 내 마음내키는대로 할 뿐이니 누가 감히 나를 토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하늘의 버림을 받은 무리들을 거느리고서 왕실에 혼란을 조성하고(…) 선왕의 명을 가탁해 거짓을 자행하는 데도 진나라는 부도(不道)하여 저들을 도와 그 끝없는 탐욕을 멋대로 부렸다. 지금 나는 난리를 피해 형만(荊蠻·초나라)으로 도망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으니, 나의 형제친족인 제후들은 하늘의 법을 따라 나의 성공을 돕고 교활한 자들을 돕지 말라. 선왕의 명을 따라 하늘의 벌을 부르지 말고서 부덕한 나를 용서하여 위난의 평정을 도모한다면 나의 소원이 이뤄질 것이다…”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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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목숨과 바꾼 단심(丹心)

내전이 끝나자 전장으로 변했던 낙양에 오랫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낙양을 떠났던 사람들도 하나둘 돌아와 본래의 생업을 되찾았다.  한편에선 피바람이 불었다. ‘줄을 잘못 선’ 많은 사람들이 반역죄와 부역죄로 처단되거나 투옥과 유형을 감수해야 했다. 비록 구체적인 혐의는 없다할지라도 서왕파와 조금이라도 가깝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은 목숨이 위태로왔다.

낙양으로 불려들어온 노담의 목숨은 풍전등화였다.

“적통을 폐하고 서자를 받들려고 했던 ‘역적 중의 역적’ 빈기란 놈과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너도 그와 한패가 틀림없으렸다!”

그런 의심 속에서 노담은 제발로 낙양에 온 것을 천번만번 후회했다.

‘차라리 서왕을 쫓아 초나라로 갈걸 그랬나…아, 동쪽 바닷가로 가서 이름을 바꾸고 숨어살았다면 이런 위태로움은 없을 것을…’

서기전 515년 노담이 나이 50대 중반에 맞이한 인생최대의 위기였다. 그런데 이 위기 속에 노담을 구한 건 다름아닌 그가 지닌 ‘지식’이었다.  서왕이 수많은 왕실 전적을 가지고 망명하는 바람에 새로운 지배세력은 권위와 정통성을 과시할 의전과 제례의식 거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른 시일 안에 왕실 전적을 보완해 제후국들에게 체통이 깎이는 일을 최대한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고전에 정통한 학자들이 다수 필요했는데, 노담은 그 대표적인 학자였다.

용케 화를 피한 동료들이 노담에게 권했다.

“노담선생.  서왕쪽과 맺었던 과거 친분은 모두 부인하세요. 낙양을 떠난 것도 진나라 군대의 약탈을 피해 떠났다가 서왕파의 군대에 막혀 돌아오지 못한 것이라고 사정하세요. 거짓말로라도 서왕을 따라가지 않은 것이 금상(今上)을 사모한 증거가 아니냐고 하세요. 사람은 일단 살고 볼 일이 아니요?”

“나는 선왕의 지극한 은총을 입은 몸. 그 아들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는데 내가  어느 편을 들어야 옳았단 말이요? 나는 그저 선왕을 기리며 여생을  살고 싶을 뿐이오.”

“선생의 마음을 우리가 왜 모르겠소. 그러나 금상은 여기 낙양에 있고 서왕은 천리밖 오랑캐 땅에 있소이다.”

제자들도 노담을 붙들고 간청하다시피 조언한다.

“선생님! 텅 빈 수장실을 전적으로 채우라는 성화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애꿎은 사관 하나가 매를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

“지금 섭정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제후들에게 뽐내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전고(典故)를 몰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후들에게 비장한 전적을 보내달라고 읍소를 해야할 지경인데, 우리 수장실에서 이 업무를 감당할 분은 선생님 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한번 허리를 굽혀 주신다면 미력한 저희들은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디 이 점을 살펴주십시오.”

죄인의 신분으로 낙양에 끌려오다시피했던 노담은 결국 서왕을 공개적으로 부인했고, 그 대가로 사면을 받아 수장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일실된 전적을 보충하고 새로 바쳐지거나 복사된 전적을 감수하는 일을 맡았다. 그것은 매우 깊고 넓은 지식을 요하는 작업이었지만, 노담에게는 더이상 `학문‘이 아니었다. 비루한 목숨값이었다. 그에게 독서와 연찬은 목숨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닌 한, ‘누군가의 찌꺼기를 핥는’  부끄럽고 비루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5. 늙은이의 노래

어느 화창한 봄날 성주성의 축성이 끝났다.  여러 나라에서 차출돼 온 역부들은 고향에 돌아갈 기쁨에 성을 돌며 ‘성주풀이’를 지어 불렀다. 왕과 신하들은 제단을 쌓고 신에게 축성을 고한 뒤 군신(君臣)이 더불어 영화를 누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서약식이 끝나자 대부 이상의 관리 출신 ‘사면자’들은 왕실이 베푸는 잔치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았다. 왕과 섭정들 앞에서 충성스런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시간이었다. 함께 나온 수장실의 동료가 노담에게 넌즈시 말했다.

“까짓 웃으라면 웃고, 춤을 추라면 춥시다. 기왕이면 왕이 직접 보고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또다른 친구가 말했다. 

“하늘에도 눈이 떠다니고 땅밑에도 귀가 있소. 괜한 소리말고 주는 술이나 받아마시고 조용히 있다가 갑시다.”

노담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 더이상 ‘학문’도 없고, 학문으로 봉사할 성왕도 없다. 내가 무엇때문에 형편없는 왕자들의 개같은 싸움에 내 소중한 목숨을 던져주랴. 만세를 부르라면 실컷 불러주자, 만세! 만세! 만만세…’

이 잔치날에 노담이 지어 불렀다는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뭇사람들은 즐거워하네                  

  큰 잔치상을 받아 들고                       

  봄날의 누대에 오른 듯 하네.              

  나는 홀로 조용하네                            

  아무런 느낌없이                             

  아직 웃는 것을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나는 홀로 우두커니 서 있네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뭇사람들은 다 잔치를 즐기는데           

  나는 홀로 떨어져 있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사람              

  세상사람들은 다 밝다 하는데              

  나는 홀로 깜깜하고                            

  세상사람들 다 총명하다 하는데          

  나만 홀로 어둡네.                              

  고요하기가 바다같고                         

  맑은 바람처럼 머무는 곳 없네.           

  뭇사람들은 다 높이 받들건만             

  나의 뜻은 홀로 낮은 곳에 처하는 것    

  나는 홀로 뭇사람들과 다르니             

  산다는 것의 본질을 귀히 여기노라.      

  衆人熙熙(중인희희)/如享太牢(여향태뢰)/如春登臺(여춘등대)/我獨泊兮(아독박혜)/其未兆(기미조)/如孀兒之未孩(여상아

지미해)/루루兮(루루혜)/若無所歸(약무소귀)/衆人皆有餘(중인개유여)/而我獨若遺(이아독약유)/我愚人之心也哉(아우인지심

야재)/沌沌兮(돈돈혜)/俗人昭昭(속인소소)/我獨昏昏(아독혼혼)/俗人察察(속인찰찰)/我獨悶悶(아독민민)/澹兮其若海(담혜기

약해)/요兮若無止(요혜약무지)/衆人皆有以(중인개유이)/而我獨頑似鄙(이아독완사비)/我獨異於人(아독이어인)/而貴食母(이

귀식모)

  

잔치에 참석은 하고 있지만, 마음은 진심으로 즐겁지 않다. 그래서 아직 웃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술을 마신다. 잔치가 무르익어 흥청거리자 노담은 조용히 따로 떨어져 나와 홀로 술잔을 기울인다. 우두커니 서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또 한 잔, 또 한 잔을 마신다. 바람이 따스하게 불어오니 꽃이 흐드러진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흰구름은 어디선가 일어나 어디론가 흘러간다.

  

      학문을 끊어 근심의 뿌리를 잘랐으니    

  이제 나에게 ‘네’와 ‘예’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                             

  선과 악의 차이는 또 얼마란 말이냐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바를 나도 두려워 한다.                            

  아, 생(生)의 도(道)                           

  아득하여 다 깨달을 수 없구나…

     絶學無憂(절학무우)/唯之與阿(유지여아)/相去幾何(상거기하)/善之與惡(선지여악)/相去若何(상거약하)/人之所畏(인

지소외)/不可不畏(불가불외)/  荒兮(황혜)/其未央哉(기미앙재)⑩

 

진심으로 충성하는 ‘예’와 마음을 감추고 대답하는 ‘예’의 차이가 굳이 얼마나 된다고 이러나? 저마다 선을 주장하는 데 과연 그 선이 말하는 악과는 또 얼마나 차이가 지나? 나는 또한 그 이치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나, 담은  ‘예’든 ‘네’든 개의치 않으련다. 이제 더는 선악을 묻지 않으련다. 나는 지금 승자를 따를 뿐이다. 나도 별 수 없는 인간, 뭇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 한다.

 

그렇다, 나도 남들처럼 죽음이 두려웠을 뿐이다. 인생이란 아직 다 건너지 못한 강, 다다르지 못한 평원을 가는 것과 같다. 나의 삶은 천명을 따르고 있는가? 거스르고 있는가? 옳다는 것은 무엇이고, 틀린 것은 또 무엇인가? 나는 아직 그 멀고 깊은 끝을 보지 못했다. 삶의 여정(道)이여, 이치(道)여, 참으로 멀고 아득하여 나는 알 수가 없구나….

 

<하편 계속>

 

 

 

<원문 보기>

 

① 노담의 신상에 관한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기록은 사마천의 기록이다.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다. 주나라 수장실의 관리였다. 공자가 주나라에 갔을 때,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 老子者, 楚苦懸여(갈 여)鄕曲仁里人也, 姓李氏, 名耳, 字聃, 周守藏室之史也. 孔子適周, 將問禮於老子.(하략) -사마천, <사기> ‘노자한비열전’

그러나 사마천 자신도 당시 전해져 온 노자에 관한 전승을 사실로 확신하지 못했다. 일례로 노담의 성이 이씨라는 것에 대해서는 ‘한나라 초기에 이씨 성을 가진 실세 가문이 노자의 가계를 차용한 ’것’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사마천은 또 공자 사후 1백여년 뒤의 인물인 주나라 태사 담이 노자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여 그에 관한 세상의 풍설을 함께 기록해 놓았다.

 “공자 사후 129년 후 기록에 따르면, 주나라 태사 담이 진헌공을 배알하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바로 이 태사 담이 노자라 하고, 혹자는 아니라고 하였다. 세상사람들도 그것이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自孔子師之後百二十九年, 而史記周太史담見秦獻公曰(…) 或曰담卽老子, 或曰非也, 世莫知其然否. -사마천, <사기> ‘노자한비열전’

 

   ② <노자> 6장 전문

 

 ③ <노자> 37장 전문

 

 ④ <노자> 78장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

 天下莫柔弱於水(천하막유약어수)/而功堅强者莫之能勝(이공견강자막지능승)/以其無以易之(이기무이역지)/弱之勝强(약지승강)/柔之勝剛(유지승강)/天下莫不知(천하막부지)/莫能行(막능행)/是以聖人云(시이성인운)/受國之垢(수국지구)/是謂社稷主(시위사직주)/受國不祥(수국불상)/是謂天下王(시위천하왕)/(正言若反(정언약반))

 

   ⑤ <노자> 31장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

 夫佳兵者(부가병자)/不祥之器(불상지기)/物或惡之(물혹오지)/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君子居則貴左(군자거즉귀좌)/用兵則貴右(용병칙귀우))/兵者 不祥之器(병자 불상지기)/非君子之器(비군자지기)/不得已而用之(부득이이용지)/恬淡爲上(염담위상)/勝而不美(승이불미)/而美之者(이미지자)/是樂殺人(시락살인)/夫樂殺人者(부락살인자)/則不可得志於天下矣(즉불가득지어천하의)/(吉事尙左(길사상좌)/凶事尙右(흉사상우)/偏將軍居左(편장군거좌)/上將軍居右 (상장군거우)/言以喪禮處之(언이상례처지))/殺人之衆(살인지중)/以哀悲泣之(이애비읍지)/戰勝(전승)/以喪禮處之(이상례처지)

 

 ⑥ <노자> 42장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

 (道生一(도생일)/一生二(일생이)/二生三(이생삼)/三生萬物(삼생만물)/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人之所惡(인지소악)/唯孤(유고)/寡(과)/不穀(불곡)/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故物(고물)/或損之而益(혹손지이익)/或益之而損(혹익지이손)/人之所敎(인지소교)/我亦敎之(아역교지)/(强梁者不得其死(강양자부득기사))/吾將(오장)/以爲敎父(이위교부)

 

   ⑦ <좌전> 노소공 22년조

  

 ⑧ 김학규, <공자의 생애와 사상>

 

 ⑨ <좌전> 노소공 26년조

 

 ⑩ <노자> 20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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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주년 메이데이 5만노동자 〈끝내자 박근혜!〉 ... 민주국제포럼 참가 국제민주인사들 선두행진

 
  • [사회] 125주년 메이데이 5만노동자 〈끝내자 박근혜!〉 ... 민주국제포럼 참가 국제민주인사들 선두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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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은 125주년 메이데이를 맞아 <최저임금1만원 쟁취! 노동시장구조개악 저지! 공적연금 강화! 세월호 진상규명!> 2015세계노동절대회를 1일 오후3시 서울시청광장에서 개최했다. 
     
    민주노총조합원 등 5만여명의 노동자가 모여 성사한 이날 대회에서 민주노총은 <4.24총파업으로 노동시장구조개악과 공무원연금 개악 등 노동자·서민의 삶을 후퇴시키는 정책에 대한 강력한 뜻을 밝혔음에도 <정부>는 정책강행을 포기하지 않았고 총파업에 대한 탄압(사법처리)수순을 밟고 있다.>며 <이에 맞서 전국에서 전개된 총파업의 기세를 서울로 결집해, 전국 2900여곳 사업장 5만명이상이 참가한다.>고 전했다.  
     
    이어 <노동절대회는 노동시장구조개악, 공무원연금개악, 공공기관가짜정상화, 대학구조조정, 비정규직착취, 의료·철도·물민영화 등 이 모든 공세에 대한 포괄적인 투쟁과 연대를 결의하는 장>이라며 <노동자와 서민의 삶을 파탄내는 원인의 정점에는 박근혜<정권>이 있다. 민주노총은 <끝내자 박근혜>라는 슬로건아래  △최저임금1만원 인상 △노동시장구조개악 폐기 △공무원연금개악 중단, 공적연금 강화 △<세월>호대통령령 폐기, 진상규명 4대요구를 천명하며 수용되지 않는다면 하반기 강력한 대정권투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노총 한상균위원장은 대회사를 통해 <4.24총파업의 기세를 오늘 다시 확인하고 5~6월투쟁으로 더욱 몰아쳐 가야 한다.>며 <하반기에는 기어이 민중총궐기투쟁으로 박<정권>을 끝장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2015년 노동자의 이름으로 박<정권>의 노동탄압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20년은 노동자로 살아가기 정말 힘들 것>이라며 <정권의 모든 공격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각오로 연대하고 투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박근혜와 그 뒤에 숨어있는 자본을 이길 수 없다. 노동자의 깡다구로 반드시 승리하자>고 힘주어 말했다. 
     
    전국농민회청연맹 김영호의장, 전국빈민연합 심호섭공동의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명애상임공동대표가 연대선언문을 통해 <국가폭력과 불법, 무법이 난무하는 나라에서 죽은 듯이 살수는 없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짓밟히고, 약한자를 향한 증오와 멸시가 판치는 사회에서 살수는 없다.>며 <거짓과 부정, 부패비리의 몸통, 박근혜는 퇴진하라.>고 외쳤다.
     
    한국노총 이병균사무총장은 연대사를 통해 <노동시장구조개악을 일방적으로 강행한다면 양대노총은 총파업투쟁으로 이를 저지할 것>이라며 <그로 인한 혼란과 파국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정부에 있다.>고 말했다.
     
    이날 <세월>호유가족들도 대회에 함께 했다. 
     
    유경근집행위원장은 <1년간 유가족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같이 눈물 흘리고, 같이 분노하며 함께 해준 민주노총조합원들에게 감사드린다.>며 <우리가족들은 시행령이 통과되든 말든, 정부가 진상규명을 방해하든 말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은 엄마아빠로 살기 위해, 안전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노총 산별연맹대표자들은 산별연맹깃발과 함께 무대에 올라 박<정권>에 맞서 앞장서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결의를 밝혔다. 
     
    대회를 마친 5만여노동자들은 서울시청광장을 출발해 서울시내곳곳을 누비며 <박근혜 퇴진!> <끝내자 박근혜!>, <더쉬운 해고 멈춰!, 더낮은 임금 멈춰!. 더많은 비정규직 멈춰!> 등의 구호를 외치며 청와대를 향해 행진했다. 
     
    경찰은 청와대주변을 비롯해 광화문, 종로 일대에 차벽을 설치하고 병력을 배치해 행진대오가 가는 곳마다 봉쇄하고 방패와 최루액, 물대포를 동원해 폭력적으로 해산시키려 했다.
     
    이 과정에서 10여명의 노동자들이 불법적으로 연행됐다. 
     
    지난 4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린 민주국제포럼에 참가한 인 베흐나흐 까센(Bernard Cassen)세계사회포럼창립자, 빅토르 우고 히혼((Víctor Hugo Jijón)에콰도르공공정책대학교수, 뎀바 무싸 뎀벨레(Demba Moussa Dembélé) 2011다카리세계사회포럼조직위원장, 잉에 회거(Inge Höger)독일연방의회하원의원, 클라우디아 하이트(Claudia Haydt)독일좌파당국제담당,  졍 살렘(Jean Salem)소르본대철학교수 등 외국인참가자들과 민주국제포럼명예대표 권오헌민가협양심수후원회명예회장, 공동대표 송무호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이사장, 이채언전남대교수 등이 대회에 참가하고 가두행진에도 동참했다.
     
    이들은 <우리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에 연대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들고 대열선두에서 행진했으며 <박<정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국제사회에 알리겠다.>고 강조했다. 
     
    이날 코리아연대(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는 <박근혜정권 퇴진!>촛불신문 97혁신호 3만여부를 노동자대회에 참가한 노동자들과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신문은 코리아연대의 <경찰벽 무너뜨리고 청와대를 향해 앞으로!>시국선언과, 4.16연대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통첩>, <<이명박근혜정권>의 <노동자죽이기> 10대죄악>, <박근혜<정권>이 퇴진해야 하는 10가지 이유> 등의 내용이 담겨있어 노동자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신문을 받아가는 등 많은 관심을 끌었다. 
     
    또 <부정선거 부패비리 박근혜정권 퇴진하라>는 구호가 적힌 전단이 서울시내곳곳에 뿌려졌고 <민생파탄 책임지고 박근혜정권 퇴진하라>, <부정부패 썩은 정권 박근혜새누리당정권 퇴진하라>·<세월호참사 성완종게이트 민생파탄 박근혜는 퇴진하라>가 적힌 포스터와 <박근혜도 수사하라>는 내용의 <그네공주와 일곱난장이>패러디포스터도 행진로 곳곳에 나붙어 참가자와 시민들이 <참신하다>며 환호하고 관심을 표했다.
     
    행진대오는 오후7시20분경 종각역사거리에서 정리집회를 하고 해산했으며 일부는 <<세월>호특별법시행령 폐기> 범국민철야행동에 계속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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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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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지 찾아오라고요? 그건 박 대통령의 거짓말"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5/03 10:45
  • 수정일
    2015/05/03 10:4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세월호 범국민 철야행동] 유족 및 시민, 경찰 과잉 대응 질타

15.05.01 16:43l최종 업데이트 15.05.02 19:34l

 

 

[최종신 : 2일 오후 4시 50분] 

"캡사이신·물대포에 우리는 두 번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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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족 입 속에 캡사이신 발사 세월호참사 범국민철야행동이 이틀째인 2일 오후 서울 안국동네거리에서 청와대방향 행진을 시도하는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에게 경찰이 캡사이신을 눈과 입을 향해 발사했다. 캡사이신을 입에 맞은 한 유가족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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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족 눈과 입에 캡사이신 난사 세월호참사 범국민철야행동이 이틀째인 2일 오후 서울 안국동네거리에서 청와대방향 행진을 시도하는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에게 경찰이 캡사이신을 눈과 입을 향해 발사했다. 눈과 입속에 캡사이신을 맞은 유가족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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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족과 시민들이 시행령 폐기 촉구를 요청하기 위해 청와대 행진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과잉 대응에 결국 두 손을 들어야 했다. '미신고 불법집회', '시민 교통 불편'이라는 전가의 보도와 물대포·캡사이신의 물리력은 유족과 시민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경찰의 공권력은 '언제든지 찾아오라'던 박근혜 대통령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해줬다. 

유족과 시민들 200여 명은 2일 오후 2시 40분경, 서울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다. 전날 오후 3시부터 서울 광장에 집결해 종로 일대를 거쳐 안국 사거리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꼬박 24시간 만에 세월호 농성장이 있는 광화문 광장으로 돌아왔다. 

이 자리에서 유족과 시민들은 경찰의 과잉 대응을 질타했다. 마이크를 잡은 '성호 아빠' 최경덕씨는 "1년 전이나 후나 대한민국의 변함 없음에 절망했다"면서 "유족들을 토끼 몰이로 가두고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쐈다"고 말했다. 이어 최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말씀을 지금도 잊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면서 "정말 저희들은 청와대에 가고 싶었다, 가서 쓰레기 시행령 폐기하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경주 엄마 유병화씨는 "이미 세월호 사고로 새끼 잃은 부모로서 한 번 죽었고, 어제 오늘 캡사이신과 물대포는 유족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며 "(세월호 참사 후) 1년이 지났지만, 경찰의 횡포는 나날이 발전했다"고 지적했다. 

유씨는 "국민 안전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경찰이 저희를 짓누르고 짓밟았다"면서 "저희가 총을 들었나, 칼을 들었나, 제대로 된 시행령 만들자는데 무슨 잘못이 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권 침해 감시 변호사단에서 활동한 송아람 변호사는 경찰에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송 변호사는 "정부가 유족과 시민들을 정권의 적으로 보지 않고서는 이렇게 상대할 수가 없다"면서 "경찰의 물리력은 상상 이상으로 유족과 시민을 겁박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미신고 집회라도 명백한 위험이 없다면 해산 명령을 내릴 수 없는 게 대법원 판례"라며 "저희는 인도를 통해 청와대에 가려고 했다, 시민 피해가 없는데도 마구잡이식으로 행진을 봉쇄했다"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는 향후 물대포에 함유된 캡사이신 양을 조사해 경찰 과잉 대응을 판단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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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유가족에 캡사이신 조준난사 세월호참사 범국민철야행동이 이틀째인 2일 오후 서울 안국동네거리에서 청와대방향 행진을 시도하는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에게 경찰이 캡사이신을 눈과 입을 향해 발사했다. 캡사이신을 맞은 삭발한 어머니가 물로 눈을 씻고난 뒤에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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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유가족에 캡사이신 조준난사 세월호참사 범국민철야행동이 이틀째인 2일 오후 서울 안국동네거리에서 청와대방향 행진을 시도하는 세월호참사 유가족과 시민들에게 경찰이 캡사이신을 눈과 입을 향해 발사했다. 캡사이신을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시민의 눈을 물로 씻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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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잡이 체포, 경찰 42명 연행 

전명선 4.16가족협의회 위원장은 1박 2일간 함께 해준 시민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전 위원장은 "지금까지 함께 해주시고 항상 저희 곁에 계시는 시민들 감사하다"면서 "캡사이신, 물대포 맞으신 시민들, 저에게 오시면 따뜻한 밥 한끼 사드리겠다, 너무나 수고했다"고 말했다. 

전 위원장은 "정부의 시행령안은 죽어서 자식 볼 면목을 없게 한다"면서 "시행령이 국무회의에 상정되더라도 시행령 받아들일 생각 없다, 저희 손으로 진상규명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유족과 시민들은 세월호 농성장 내 분향소에서 참배하며 1박 2일 철야 행동을 마무리했다. 

한편, 경찰은 1박 2일 철야 행동에서 유족 1명을 포함해 시민 42여 명을 연행했다. 서울 지역 경찰서로 이송한 경찰은 이들에게 공무집행방해, 도로교통방해, 집회 및 시위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조사 중이다. 

[13신 : 2일 오후 2시 10분 ] 

경찰, 유족 행진 시도에 다시 캡사이신 

세월호 유족들이 마지막 힘을 다해 행진을 시도했지만 경찰은 캡사이신으로 응수했다. 또 다시 경찰은 해산명령을 내리고 체포하겠다고 유족들을 겁박했다. 

서울 안국동사거리-경복궁역 도로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유족 50여 명은 2일 오후 1시 50분부터 경복궁 돌담 인도로 행진을 시도했다. 

유족들이 방패를 든 경찰과 몸싸움을 시도하자 경찰은 유족들에게 캡사이신을 쐈다. 얼굴에 맞은 유족은 고통을 호소했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물로 얼굴을 씻었다. 

유족들은 계속 길을 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은 경복궁 정문을 거쳐 광화문광장으로 행진을 원하고 있지만 경찰은 묵묵부답이다. 

경찰에 의해 행진이 막히자 유족들은 안국동 사거리를 지나 조계사를  거쳐 광화문으로 행진하고 있다. 

[12신 : 2일 낮 12시 30분] 

"밤새워 기다렸지만 돌아온 건 물대포·캡사이신" 

경찰과 유족 대치 속에서 먼저 광화문광장으로 이동한 시민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유족 행진 보장과 시행령 폐기를 촉구했다. 

서울 안국동사거리 인사동쪽에 갇혀 있던 '4월16일의 약속 국민연대'(아래 4.16연대) 소속 회원과 시민 200여 명은 2일 오전 11시경, 광화문광장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쓰레기 시행령 폐기를 위해 밤을 새워 대답을 기다렸다"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 경찰의 대답은 차벽과 캡사이신, 물대포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들은 "자식 잃은 부모가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 그렇게 두려웠나"면서 "어제 경찰은 차벽과 캡사이신, 물대포를 세월호 유족을 겨냥해 마구잡이로 쏘아댔다"고 비판했다. 또 "유족들은 농도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최루액 물대포에 맞아야 했고 고통스러워 했다, 눈물이 모자라 수포가 발생하기도 했다"며 "참으로 잔인하고 잔인한 정부가 아닐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또 "정부의 탄압은 진실을 향한 세월호 유족과 국민들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며 유족 행진 보장을 요구했다. 

한편, 유족 50여 명은 서울 안국동사거리 경복궁 방향 도로에서 경찰과 대치중이다. 유족들은 청와대행 대신 광화문광장으로 이동하려고 했지만 경찰의 비협조로 발이 묶여 있다. 경찰은 이동경로로 서울 조계사-광화문광장을 주장한 반면, 유족은 경복궁 정문으로 직진해 광장에 진입하기를 원하고 있다. 

[11신 : 2일 오전 8시 57분] 
"오늘이 내 새끼 화장한 날, 청와대 가자" 

경찰의 방패 벽에 세월호 유족들의 발은 한 시간 넘게 묶여 있다. 서울 안국동사거리-경복궁 방향 도로에서 유족들은 거리에 주저 앉았다. 목줄을 푼 유족들은 "으싸, 으쌰"하며 힘을 썼지만 방패는 꿈적도 않고 있다. 

유가족들의 한숨은 점점 깊어가고 있다. 답답한 마음에 창현아빠 이창석씨는 "택시 타고 가자, 택시 좀 불러 달라"며 "5분이면 된다"고 말했다. 한 아버지는 "작년 오늘이 내 새끼 화장한 날"이라며 "내가 오늘 청와대 가고 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욱엄마 홍영미씨는 경찰 대원들을 핸드폰으로 촬영했다. 홍씨는 "여러분들의 얼굴이 전세계에 채증되고 있다"면서 "유엔인권위원회에 보낼 거다, 여러분들의 잘못 똑똑히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을 채증하는 경찰을 향해 홍씨는 "채증맨 잘 보이시나, 필름 아깝다, 배터리도 세금"이라며 "저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 좀 보내주세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 스피커에서는 사법처리하겠다는 말만 흘러나왔다. 경찰은 "종로경찰서 경비과장 입니다, 유족 여러분들은 불법집회로 시민들의 교통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정밀 채증을 통해 사후에 사법처리하겠습니다"고 했다. 경찰은 이날 8시 50분 현재 4차 해산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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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박 2일 철야 행동. 계속되는 대치 상황에 지친 세월호 유가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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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신: 2일 오전 7시 43분] 
'청와대로' 한줄로 이어진 아빠들 

세월호 참사 유족들이 다시 청와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단원고 학생들 아버지 19명은 현재 목에 줄을 걸어 연결한 채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또 다시 경찰에 막혀 한 시간 정도 대치하고 있던 유족들은 오전 7시 20분경 자신들을 묶기 시작했다. 아버지들은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줄을 목에 걸었다. "줄이 너무 길어서 나까지 오겠다", "엄마들은 맨날 앞에 나섰으니까 아빠들만 해"라며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던 유족들은 연결을 마친 뒤 결연해졌다. 아버지들은 어깨동무를 한 채 박자를 맞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도 가지 못해 이들은 경찰의 방패에 막혔다. 유족들은 경찰이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며 계속 항의 중이다. 몇몇 어머니들은 목줄을 건 채 "나 갈거라고!"라며 울부짖는 아버지들을 보고 서럽게 통곡하고 있다.

한편 시민들은 여전히 유족들과 만나지 못한 채 인사동 쪽에서 경찰과 대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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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박 2일 철야 행동, 유가족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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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신: 2일 오전 6시 44분] 
또 다시 길바닥에서 잠 청한 유족들 

길바닥에서 밤을 보낸 유족들은 아침부터 다시 한 번 시끌벅적한 상황에 놓였다. 2일 오전 6시 20분 청와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유족들은 현재 경찰과 대치 중이다. 

한 운전자와 붙은 실랑이가 문제였다. 경찰은 오전 5시반경부터 차량 통행을 위해 차선 두 개를 확보했다. 안국동 사거리는 4차선인 탓에 평소보다 통행 속도가 느려지자 몇몇 운전자들이 유족들을 향해 불만을 터뜨렸다. 한 트럭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유족들에게 "이게 뭐하는 짓들이야"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이 말에 흥분한 유족들이 차량 운전자와 시비가 붙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자 유족들은 "차라리 (차벽으로 전면 통제했던 1일처럼) 다 막아버려라"고 소리치며 항의했다. 몇몇 유족은 경복궁역 방향으로 통행이 가능하니 청와대로 가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곧바로 움직였지만 다시 경찰에 막혀버렸다. 

한편 지난밤 인사동 쪽으로 밀려났던 시민 200여 명이 거리에서 밤을 지샜다. 이들은 여전히 경찰에 저지당해 유족들과 떨어져 있다. 시민들은 오전 6시 37분 현재 "폭력경찰 물러가라, 평화행진 보장하라"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8신: 2일 오전 5시 42분] 
유가족과 시민들, 인사동 입구에서 연좌농성 중 

2일 오전 5시 현재 경찰의 밀어내기에 집회 참가자들은 안국동 사거리에서 인사동으로 밀려난 상태다. 다만 40여 명의 세월호 유족은 인사동쪽 시민들과 나뉜 채 도로 위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일부 경찰이 유족 방향으로 일반차량을 통행시키려다가 시민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에 앞서 경찰이 집회 참가자들을 인도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캡사이신을 발포하기도 했다. 일부 시민이 저항했지만 참가자들은 인사동 차없는 거리 등으로 밀려났다. 또 이날 인권침해 여부를 감시하러 나온 국제앰네스티 한국 지부 관계자도 얼굴에 캡사이신을 맞았다. 

한편, 경찰은 아침이 다가오자 차량 통행을 위해 망가진 경찰버스 타이어 교체 작업을 하고 있으며 물대포와 살수차도 철수한 상태다.

[7신: 2일 오전 2시 53분] 
경찰 검거작전 시작... 유족들 맨 앞에서 몸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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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국역 네거리에서 열린 시행령 폐기를 위한 1박2일 범국민 철야행동에서 경찰이 검거작전을 시작하자, 유가족들이 맨 앞에 서서 이를 저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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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국역 네거리에서 경찰이 유가족을 방패로 때리며 "맞아도 싸다"라고 하자 분노한 유가족들이 경찰을 붙잡고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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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국역 네거리에서 열린 시행령 폐기를 위한 1박2일 범국민 철야행동에서 경찰이 검거작전을 펼치며 참가자를 강제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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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세 시간 동안 평화로웠던 안국동 사거리에 다시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2일 오전 2시 23분 "6차 해산명령에도 응하지 않았으니 검거작전을 하겠다"는 종로서 경비과장의 방송과 동시에 경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몸으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유족들이 미리 대열 맨 앞에 모였지만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유족들 건드리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이들은 유족들과 뒤엉켜 계속 밀려났다. 2시 53분 현재 경찰은 시민들과 유족들을 분리시켰다. 경찰벽에 둘러싸인 유족들은 또 다시 고립됐다. 이들은 시민들과 만나려고 이동했지만 다시 경찰에 막혀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유족 김 아무개씨가 경찰의 방패에 맞았다. 그러자 경찰은 "맞아도 싸다"는 말을 던져 유족을 자극했다. 유족들은 그를 붙잡고 거듭 사과를 요구했으나 해당 경찰은 끝내 입을 다문 채 동료 경찰들 쪽으로 피했다. 한 어머니는 "니들이 자식을 보낸 우리 심정을 아느냐"며 울부짖었고, 한 아버지는 분을 참기 어려운 듯 경찰버스를 향해 생수통을 던졌다.

[6신: 2일 0시 40분] 
캡사이신 물대포 난사 일시 중단... "이게 무슨 세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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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족에게 캡사이신 넣은 물대포 난사하는 경찰 민주노총 조합원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역 네거리에서 세월호 시행령 폐기를 위한 1박2일 범국민 철야행동을 벌이자, 경찰이 캡사이신을 넣은 물대포로 유가족을 향해 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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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 조합원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역 네거리에서 세월호 시행령 폐기를 위한 1박2일 범국민 철야행동을 벌이자, 경찰이 캡사이신을 넣은 물대포를 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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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캡사이신 물대포 난사는 잠시 멈췄지만 대치 상황은 여전하다. 2일 자정 현재 안국동 사거리는 여전히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를 외치는 시민들로 가득하다. 

경찰은 전날 10시 40분~11시 20분경 시민들을 향해 물대포를 집중 살포했다. 물대포가 지나간 자리에는 다량의 캡사이신 가루가 고여있었다. 물대포를 맞은 화단의 꽃들도 처참하게 쓰려져 버렸다. 

유족들은 자신들을 막아선 경찰에게 거듭 항의했다. 한 어머니는 "이게 무슨 세상이냐"라며 경찰 방패를 붙잡고 오열했다. 한 시민은 경찰들을 향해 "너희들이 무엇을 막고 있는지,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잘 봐두라"고 소리쳤고, 울고 있는 단원고 학생의 어머니들에게 "청와대 못 가서 죄송합니다 어머님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시민 대부분은 캡사이신 냄새에 콜록대고 추위와 씨우면서도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있다. 당초 416연대가 계획한 문화제 진행은 어려워진 상황이지만 시민들은 세월호 참사 추모노래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를 부르며 서로 격려하고 있다.

[5신 보강: 1일 오후 10시 58분] 
또 다시 등장한 물대포... 캡사이신 섞어 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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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 조합원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역 네거리에서 세월호 시행령 폐기를 위한 1박2일 범국민 철야행동을 벌이자, 경찰이 캡사이신을 넣은 물대포를 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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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 조합원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역 네거리에서 세월호 시행령 폐기를 위한 1박2일 범국민 철야행동을 벌이자, 경찰이 캡사이신을 넣은 물대포를 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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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대포가 또 다시 서울 도심 한복판에 등장했다. 

경찰은 10시 47분 현재 시민들을 향해 수차례 살수했다. 물대포에 캡사이신이 섞인 탓에 온몸이 젖은 시민들은 거듭 콜록거리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족들은 자신들이 대열 앞에서 물대포를 맞겠다며 나섰다. 

행진을 시도한 지 두 시간이 넘었지만 시민들은 아직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폴리스라인에 막힌 이들은 거듭 돌파를 시도하고 있지만 상황은 그대로다. 

반면 경찰의 대응 수위는 더욱 강경해졌다. 물대포 살수뿐 아니라 캡사이신 발포도 잦아졌다. 일부 시민은 우산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안국동 사거리 곳곳에서는 "물! 물!" "물 좀 전달해주세요!"라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고 있다. 몇몇 취재진도 시민들과 뒤엉킨 채 캡사이신을 맞기도 했다. 

[4신 : 1일 오후 10시 1분]
시민-유가족, 청와대 행진 시도... 경찰, 캡사이신 무차별 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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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노동절 대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역에서 경찰 바리게이트를 뚫고 행진을 시도하자, 경찰이 캡사이신을 뿌리며 저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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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노동절 대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역에서 경찰 바리게이트를 뚫고 행진을 시도하자, 경찰이 캡사이신을 뿌리며 저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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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청와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일 오후 9시 35분 현재 종로구 안국동 사거리에 모인 세월호 참사 유족과 시민 등 3000명(416연대 추산)은 경복궁 방향으로 나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경찰과 대치 중이다. 참가자들은 한 목소리로 "시행령을 폐기하라! 폭력경찰 물러나라! 평화행진 보장하라!"고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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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참사 유가족과 시민학생들이 1일 오후 서울 안국동네거리에서 청와대 행진을 시도하다 경찰 차벽에 가로 막히자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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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참사 유가족과 시민학생들이 1일 오후 서울 안국동네거리에서 청와대 행진을 시도하다 경찰 차벽에 가로 막히자 파도타기를하며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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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 시작 전,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우리는 가야할 길이 있다, 더 나아가야 한다"는 말로 참가자들을 독려했다. 그는 "아무리 차벽으로 둘러쳐도, 아무리 많은 경찰이 막아도 진실과 안전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들의 뜨거운 마음만 있으면 된다"며 "뜨겁게 함성을 지르며 나아가자"고 했다. 

시민들은 "와아"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곧바로 막혀버렸다. 이들은 차벽과 폴리스라인으로 에워싸인 통로를 뚫기 위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 또 다시 캡사이신을 맞으며 물러났다. 경찰은 현재 거듭 "지금 즉시 해산하라"며 살수차 사용을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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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참사 유가족이 1일 오후 서울 안국동네거리에서 청와대 행진을 시도하다 경찰 차벽에 가로 막힌 뒤, 경찰의 해산경고방송에 부부젤라를 불며 항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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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참사 유가족과 시민학생들이 1일 오후 서울 안국동네거리에서 청와대 행진을 시도하는 가운데, 경찰이 차벽과 물대포로 가로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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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 : 1일 오후 7시 30분]
차벽에 고립된 섬... "가만히 있는 게 가장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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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노동절 대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역에서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벌이다가 경찰 차벽에 막힌 채 세월호 시행령 폐기를 위한 1박2일 범국민 철야행동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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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유가족들이 차벽 앞에 주저 앉은 안국동 사거리에서는 시민들이 경찰버스 바퀴에 밧줄을 걸고 잡아당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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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족들이 차벽 앞에 주저 앉은 안국동 사거리에서는 시민들이 경찰버스 바퀴에 밧줄을 걸고 잡아당기고 있다. 또한 도로와 경찰버스에 정부파산 등의 문구를 적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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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이 가장 못 참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차벽에 에워싸인 안국역은 섬이 됐다. 오후 7시 30분 현재 이곳에는 세월호 참사 유족들이 모여 있다. 응급 차량마저 차벽에 막혀 돌아갈 정도로 경찰은 이곳을 철통방어하고 있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저희 유족들이 도저히 참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며 "기다리는 것,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싫다"며 경찰에 강하게 항의했다. 

같은 시각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도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마무리 집회를 이어가고 있었다. 김종인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세월호가 민주노총이고, 민주노총이 세월호이지 않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가 유족들을 책임져야 하지 않겠냐"며 "함께 싸우자"고 말했다. 조합원들도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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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노동절 대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벌이자, 경찰이 캡사이신을 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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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노동절 대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벌이던 중 경찰이 뿌린 캡사이신을 물로 씻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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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416연대는 이날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 등을 요구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1박 2일 농성을 벌이기로 했다. 그에 앞서 유족들은 청와대 쪽으로 행진을 시도하려 했지만 아직 안국역 인근에서 발이 묶인 상태다.

민주노총은 곧 보신각 집회 현장을 정리한 뒤 세월호 유족들이 경찰과 대치 중인 안국역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경찰은 조합원의 행진을 막을 예정이어서 또 다시 물리적 충돌도 예상된다.

[2신: 1일 오후 5시 50분]
차벽에 막힌 유가족... 도심서 물리적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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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노동절 대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인근에서 경찰 버스에 밧줄을 묶어 끌어내자, 경찰이 캡사이신과 소화기를 뿌리며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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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노동절 대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인근에서 경찰 버스에 밧줄을 묶어 끌어내자, 경찰이 캡사이신과 소화기를 뿌리며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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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노동절 대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벌이자, 경찰이 캡사이신을 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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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오후 5시 45분 현재 종로구 조계사 인근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 경찰과 대치 중이다. 이들은 '차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경찰버스에 밧줄을 연결, 잡아당기고 있지만 캡사이신에 계속 저지당하고 있다. 

앞서 민주노총은 오후 4시 반쯤 노동절 대회를 마치고 행진을 시작했다. 서울광장에서 출발, 을지로 2가를 거쳐 종로 2가에 도착한 대열 가운데 금속노조 조합원들은 안국동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경복궁 방향으로 진입하려고 했지만 경찰이 미리 쳐둔 폴리스라인에 막혀버렸다. 조합원들은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 경찰의 캡사이신 대량 발포에 막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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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유가족 100여 명이 경찰 차벽 앞에서 주저 앉아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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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벽에 가로막힌 유가족들이 도로에 앉아 아이들 사진을 보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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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노동절 대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을 지나 청와대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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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노동절 대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1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를 지나 청와대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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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25분쯤 관훈동 쪽으로 이동한 조합원들은 다시 한 번 경찰버스 2대에 막혔다. 이들은 수차례 버스를 넘어뜨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경찰이 캡사이신 등으로 대응하자 다시 인사동쪽으로 물러나고 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조계사 방향에서도 경찰과 대치 중이지만 대부분 막힌 상태다. 삼청동으로 가려했던 세월호 참사 유족들 역시 안국역 출구 근처에서 경찰에 막혔다. 

[1신 : 1일 오후 4시 43분] 
광장 메운 노동자들의 함성 "썩은 세상 우리가 갈아엎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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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5주년 세계노동절인 1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동절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악 저지, 공적연금 강화 및 공무원 연금 개악 중단 등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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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후 서울시청 앞 광장을 메운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제히 함성을 외쳤다.

"재벌경제, 썩은 세상 노동자가 갈아엎자, 투쟁!"

이날 전국민주노동총연맹(아래 민주노총)은 서울광장 앞에서 2015년 세계노동절대회를 열었다. 지난 4월 24일 총파업에 이어 다시 한 번 결집한 노동자들은 강경한 대정부 투쟁 의지를 드러냈다. 1일 대회 행사명도 '끝내자 박근혜'였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싸우지 않고 무엇을 쟁취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로 입을 뗐다. 그는 "2015년 올해, 민생은 파탄났고 서민들과 노동자들은 못 살겠다고 한다"며 "지금 싸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부패한 정권의 제물이 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민중의 총 결의로 박근혜 정권을 끝장내자"며 "침몰하는 한국사회를 구하기 위한 역할을 민주노총이 기꺼이 맡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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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5주년 세계노동절인 1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동절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악 저지, 공적연금 강화 및 공무원 연금 개악 중단 등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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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은 '최저임금 1만 원 인상'을 반드시 추진하겠다고도 강조했다. 이날 행사의 문을 연 것도 "이 돈으로 살아봐"라며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내용의 몸짓패 공연이었다. 한상균 위원장 역시 "최저임금 1만 원 인상에 시민들도 박수를 보낸다"며 "앞으로 20년은 노동자로 살아가기 참 힘들 텐데, 가뜩이나 힘든 우리 아들딸에게 못난 아버지가 되지 말자"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노동시장 구조 개악 저지는 민주노총뿐 아니라 한국노동총연맹(아래 한국노총·)도 주요 의제로 강조하고 있는 사안이다. 

이날 한국노총을 대표로 참석한 이병균 사무총장은 "정부가 노동시장 개악을 일방적으로 강행한다면 양대노총은 총파업 투쟁으로 저지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정부가 노동시장 개악을 포기하고 비정규직이 고용불안에 떨지 않고, 차별이 없어지고, 경제민주화로 재벌이 개혁되고 원·하청 노동자가 공생할 수 있을 때까지 (두 노총이) 함께 두 손 잡고 투쟁해야 한다"며 거듭 연대를 강조했다.

민주노총은 1일 노동절 대회에 약 5만 명이 참가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후 4시 14분 현재도 서울광장에는 노동절 대회에 참여하려는 노동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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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5주년 세계노동절, 서울광장 가득 메운 노동자들 제125주년 세계노동절인 1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동절대회에서 수많은 참가자들이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악 저지, 공적연금 강화 및 공무원 연금 개악 중단 등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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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홍현진 조혜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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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배 발 야권개편 태풍은 막을 수 없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선거에 패배한 이유와 퇴출 될 이유
 
임두만 | 2015-05-02 08:56:4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새정치연합은 왜 선거에 실패했을까? 다른 말들이 많지만 아주 간단하다. 문재인과 이너서클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내놓은 공천개혁이란 허구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공천이란 겉으로는 시민중심 개혁공천이지만 실상은 곧 자기들 집단 지키기 공천이다. 이는 다른 말로는 계파 패권주의 공천이다. 즉 실패한 공천이다.

▲보궐선거 당선 발표 후 승리를 환호하는 천정배 의원  © TV캡쳐 임두만

문재인 대표는 지난 전당대회 때 대회 한 달도 남기지 않고 경선의 여론조사 삽입방법을 달리하는 룰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 측이 반발했으나 당은 무리를 범했다. 물론 이렇게 룰을 개정하지 않았으면 당 대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개표 후 그것은 더욱 명백했다. 따라서 문재인 측으로선 그런 무리는 당권획득을 위해 꼭 필요한 편법이었다.

그래서 문 대표는 취임 일성으로 계파청산을 내걸었으며 탕평인사라는 말로 당직인선을 했다. 하지만 임명직 최고위원, 사무부총장 등 꼭 필요한 핵심 자리에는 자신의 계보를 심느라 당내 잡음을 일으켜 당직인선이 꼬여버렸다. 심지어 선임 최고위원이 사퇴를 말하고 당무를 거부하는데까지 나갈 정도로 격랑이 심했다.

시작부터 문대표의 계파청산 약속은 흔들린 것이다. 때문에 당 안팎에서 계파 패권주의, 친노 패권주의, 영남 패권주의라는 말은 없어지지 않았다. 즉 문 대표의 시작이 틀린 것이다.

결국 이런 과정을 지켜보던 천정배 정동영은 더 이상 당의 진로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탈당을 감행했다. 특히 천정배 의원은 지난 해 당이 문희상 비대위로 움직일 때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언론 루트를 통해 당에 경고했다. ‘당 운영을 그리하면 안 된다’고, ‘틀림없이 미래가 불투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비대위도 당권을 잡은 문 대표도 ‘이미 구 정치인이 된 변방의 호남출신의 불만’ 정도로 치부했다. 말로는 ‘만나서 설득하겠다. 협조를 요청하겠다’ 등이었으나 실제의 만남은 통과의례 정도였다. 이들을 핵심으로 불러들일 의사가 전혀 없었다. 결국 이들은 탈당했고 당은 지금 이 모양이다.

그리고 공천이라는 이름으로 패배가 보이는 진용을 짰다. 현지 여론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명분’에 집착한 고집을 부린 결과를 내놨다. 여기서 ‘명분’이란 당내 반대세력의 ‘트집잡기’를 사전에 막는 것을 말한다. 정당한 경선으로 후보를 뽑는다는데, 그렇게 뽑힌 후보가 필패의 후보라도 당내 비주류로선 비판할 명분이 없다. 문재인과 친노 당권파는 그것을 노린 것이다. 따라서 명분에 집착하다 선거에 지는 후보를 내놨다.

사실 관악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사실상 김희철 전 의원이 가장 적임자였다. 새누리당이 이미 지역선거로 치를 것을 천명하고 지역밀착형 후보를 선정한 것은 이 지역 보궐선거에서 승산을 점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대항마는 김희철 외에는 없었다. 직선 관악구청장을 역임하고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당선을 했던 김희철은 또 지난 2012년 총선 당시 야권연대라는 이름의 편법경선 피해자이기도 하다.

당시의 경선이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 측의 편법과 탈법이었다는 것은 더 이상 거론할 여지가 없다. 그 때문에 이정희 당시 대표는 후보직을 내놓고 대신 이상규 후보를 내보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당이 김희철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고 해도 된다. 그러므로 이번에야 말로 당이 김희철에게 빚을 갚아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되려 정태호 공천을 위해 여론조사 경선이란 룰을 당론으로 하는 우를 범했다.

권리당원 직접투표 50%에 여론조사 50%를 가미하는 경선이란 곧 친노 후보를 공천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김희철 당사자도 지적했지만 구청장을 지내고 직전 국회의원도 지내고 19대 경선의 피해자인 것을 지역이 모두 아는데 이해찬 보좌관에 잠시의 청와대 대변인만 했던 정태호가 인지도에서 앞선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두 개의 조사기관이 조사하여 평균치를 냈다는데 양쪽의 편차가 무려 15% 이상이었다면 이 여론조사는 둘 다 폐기해야 정당하다. 같은 날 같은 지역에서 조사기관 각각 패널을 선정, 같은 문항으로 조사했는데 특정기관은 김희철이, 특정기관은 정태호가 월등하게 앞서는 조사가 나왔다. 그래도 당은 이를 합산 평균하여 ‘정태호가 2.6%이겼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권리당원 직접투표에서 2%이긴 김희철이 여론조사에서 2.6%졌으므로 다시 합산하면 정태호가 김희철에게 0.6%이겼다’고 발표했다. 발품팔아 직접 투표한 권리당원의 투표권과 집에서 조작도 가능한 여론조사, 그 때문에 신뢰수준을 밝히고 오차범위를 밝히면서 발표하는 여론조사 지지율을 같은 표로 계산하는 어처구니없는 행태의 공천이었으니 패한 김희철 측히 승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2.6%승리란 모든 여론조사의 오차범위 안이다. 정태호가 그 수치로 이겼으나 실제는 반대로 김희철이 이길 수도 있는 수치다. 따라서 여론조사를 경선에 포함시키려면 오차범위 밖에 있는 수치만 계산한다는 룰도 필요하다. 그런데도 새정연은 기계적으로 같은 표로 계산했다. 패한 측이 도저히 승복할 수 없게 만든 결과다.

그래서 선거가 접전으로 진행될 때 당에서 김희철에게 우호적이었던 신림동 호남향우회 등에게 구원요청을 하자 “경상도 사람이 왜 호남향우회 도움을 요청하나?”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김희철 향수가 강하게 나타났다. 이런 지역적 특성도 도외시하고 문 대표의 측근을 편법 경선으로 공천한 것은 패배를 미리 자인한 것이다.

성남도 마찬가지다. 정환석 후보나 은수미 의원이 팽팽하게 공천경쟁을 했는데 두 후보 모두 이미 지역에서 지역밀착형으로 활동한 신상진 전 의원에게 상대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신상진 전 의원은 지역밀착형임에도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을 지내고 의사협회장도 지낸 데다 2선 국회의원 경력까지 가진 상당한 거물이다.

이런 후보에게 비례 초선, 또는 당선 경력이 없는 지역위원장을 붙인 것 자체가 관악의 정태호 공천에 대한 명분쌓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천정배 의원이 지적한 무조건 이길 수 있고 이겨야 하는 지역구 선거를 망친 공천실패에는 이런 내면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선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 모든 실착을 덮고 자기세력 굳히기에 들어갔다.

천정배와 정동영은 탈당했으나 따라가는 사람이 없으므로 당 장악은 쉬웠다. 전당대회 컨벤션효과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데다 당내 반대파도 당분간은 지켜보는 모드를 취했다. 언론은, 특히 문재인이 스파링 파트너로 가장 좋은 새누리당 우호적 언론들은 야권 유일 지도자로 문재인 띄우기를 가속했다.

당연히 여론조사 지지율이란 신기루가 보였다. 실제는 부산의 자기 지역구에서 다시 출마하더라도 당선을 자신할 수 없는 지지기반인데 전국적 스타로 만들어갔다. 여기에 취한 주변 딸랑이들이 더 문재인 대망론에 취했다. 그럴수록 국민들 여론, 특히 호남여론은 나빠가는데 문재인과 그 이너서클만 몰랐다. 그러니 광주에 물량공세를 퍼부으면 천정배 정도는 잡을 수 있다는 오만까지 나왔다. 새정연이 4.29 재보선에 참패한 이유다.

만약 시계를 되돌릴 수 있다면 이런 그림이 가능했다. 이를 되돌려 보자.

문 대표가 바깥에서 계속 신호를 보내는 천정배 의원에게 ‘당 개혁특위 위원장’ 정도의 자리를 만들어서 앉히면서 “4월 보궐선거는 당 대표나 사무총장의 주관이 아니라 계파청산의 본보기로 당 개혁특위가 할 것” 정도로 언급, 천 의원에게 일임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천정배는 성격으로 보나 지금까지의 정치적 행보로 보거나 탈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정배에게 당의 중책이 맡겼으면 정동영의 선도탈당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악과 성남에는 천정배가 그린 그림대로 필승카드로 나섰을 것이다.

당연히 관악은 정동영 출마라는 악재도 없었고 이상규가 완주했겠으나 새정연 후보 당선에 걸림돌은 없었을 것이다. 성남은 차라리 정동영이나 김상곤 같은 거물을 전략적으로 공천하므로 야권의 결집을 시도했을 것이다.

안철수 김한길이 수원에 손학규를 공천하던 그런 배짱으로 문재인이 나섰더라면 이 선거는 최소한 3승1패, 잘 하면 야당 바람이 불어 4전 전승도 가능했던 선거였다. 이런 선거를 패하게 만든 것은 누가 뭐래도 문재인 이너서클의 기득권 수호 욕심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실제로 야권의 여론을 움직인다는 언론부터 입진보로 치부되는 오피니언 리더들까지 ‘야권분열’ 때문에 선거에 졌으므로 문재인은 책임이 없다 식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다시 단합하여 위기를 돌파하자는 조리돌림만 있다. 이래서는 희망이 없다. 이는 지레 죽는 길이다. 결국 천정배의 ‘호남발 야권개편 작전’은 태풍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8&table=c_flower911&uid=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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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70주년에 생각해보는 통일

분단 70주년에 생각해보는 통일<기고> 이재봉 원광대 교수
이재봉  |  pbp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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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03  00: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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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


분단이 왜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올해 2015년, 나라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반도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위정자들이나 국민들이나 진보 쪽에서나 보수 쪽에서나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을 강조하고 있다. 당연히 통일에 대한 다짐도 여기저기서 많이 나온다. 그러나 분단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왜곡되어 있다. “김일성이나 북한이 분단의 원흉”이라는 억지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왜곡된 인식으로 바람직한 통일을 추구할 수 있을까.

분단의 원인이나 배경 또는 과정을 제대로 알아야 통일에 대한 올바른 대책이나 해법을 모색하고 제시할 수 있다.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이란 말은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남북으로의 분단이 1945년 8월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많은 사람들이 “분단은 외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이의 연장선에서 “강요된 분단”이란 말도 많이 한다. 분단은 1945년 8월 미국과 소련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 때는 남한도 없었고 북한도 없었다. 분단의 원흉은 김일성과 북한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란 말이다.

이른바 ‘6.25전쟁’은 김일성의 남침에 의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한반도 분단이 굳어졌다. 전쟁은 분단의 시작이 아니라 분단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1945년 8월 미국이 제안한 38선을 따라 국토가 분단되고 1948년 8-9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에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의 정부가 세워지자, 1950년 6월 김일성이 이를 통일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6.25남침 전쟁’이든 ‘적화통일 전쟁’이든 그 전에 이미 분단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 아닌가. 김일성과 북한을 ‘전쟁의 원흉’이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분단의 원흉’이라고 우길 수는 없다는 뜻이다. 김일성과 북한에 대해 원한이나 적개심을 가질 수는 있어도 왜곡된 인식을 갖는 것은 곤란하다.

왜 침략자 일본이 아니라 피해자 조선이 분단되었는가?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유럽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독일이 분단되었다. 1945년 이후엔 미국이 전쟁을 가장 좋아하고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그 이전엔 독일이 그랬다. 다른 나라들이 견제하기 어려울 만큼 군사력이 강하니까 호전적으로 된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힘을 약화하기 위해 분단시킨 것이니, 독일은 전쟁이란 범죄에 분단이란 처벌을 받은 셈이다. 그러면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를 침략하고 미국까지 폭격한 전범 국가 일본이 분단이란 처벌을 받았어야지, 힘이 약해 항상 침략만 받아온 피해자 조선이 오히려 분단까지 되었으니 얼마나 분통터질 일인가. 더구나 일본은 땅덩어리가 길어서 두 토막으로 자르기도 쉬운데 말이다.

어느 나라든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을 챙기기 마련이다. 실제로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이기자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 등을 전리품으로 차지했다. 쿠바는 1959년 카스트로와 게바라 등이 혁명에 성공해 지금은 북한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반미적인 국가가 되었고, 푸에르토리코는 머지않아 미국의 51번째 주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큰 자치령이 되었으며, 괌은 미국의 주와 마찬가지지만 아직 정식으로 편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사기지로 잘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통치를 받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침략과 점령을 당했지만 1946년 7월 독립했다.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 조선은 당연히 미국이 차지했어야 할 전리품이었다. 그런데 1945년 8월 소련이 자청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끈질긴 요구를 받고 한반도로 내려오던 참이었으니, 미국이 전리품 조선을 소련과 38선으로 나누어 점령하게 된 것이다. 바꿔 말하면 패전국 일본은 미국이 통째로 차지했다 물러가는 바람에 온전한 모양으로 남았고, 전리품 조선은 소련과 나눠 점령하는 바람에 분단의 상처를 입은 것이다.

조선이 분단된 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 동안이나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고, 힘이 부족했기에 우리 스스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단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국력이 부족해 외세에 의해 분단된 과거를 거울삼아 앞으로 어떻게 국력을 길러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뜻대로 평화 통일을 성취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

분단 70년이 흐르도록 통일의 문턱에도 이르지 못하는 배경은?

한반도가 분단된 지 70년이 흘렀는데도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엔 남북 사이에 갈등과 긴장이 커지면서 통일은 더욱 멀어지고 있다.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쳐왔지만 통일의 문턱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크게 네 가지 이유를 들고 싶다.

첫째, 외세의 영향력 또는 주변 정세가 남북 관계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 분단이 우리민족의 뜻이 아니라 외세에 의해 이루어졌듯, 통일 역시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러시아든 대외정책의 가장 큰 목표는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한반도 통일이 그들의 국익에 도움 되지 않는 한 반대할 것이다.

특히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자 남한의 유일한 군사동맹국으로 한반도 분단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북한을 ‘악마’로 남겨놓아야 남한에 미군을 유지하며 무기를 팔 수 있고 중국을 쉽게 견제하거나 봉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남한 정부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AIIB)에 회원국으로 참가하는 것을 미적거렸던 이유가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듯, 러시아가 구상해온 5월 9일 전승절 전후의 남북정상회담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도 미국의 압력 때문 아닌가.

둘째, 남북의 위정자들이 분단을 정권 유지 및 강화에 악용해 왔다. 상대방을 적으로 삼음으로써 권력을 유지 강화할 수 있는 이른바 ‘적대적 공존’을 이루어온 것이다. 특히 독재 정권들은 분단, 반공, 안보 등을 구실로 권력에 대한 비판을 억압할 수 있기 때문에 분단은 그들의 집권 및 통치에 이익이 된다. 예를 들어 통일이 이루어지면 국가정보원이나 군대 같은 기구의 조직, 인원, 예산 등이 줄어들 게 뻔한 데 그 지도자들이 통일을 원하겠는가.

셋째, 양쪽 위정자들이 통일을 원하더라도 자신의 체제를 지켜야 한다. 남쪽에서는 “체제 경쟁은 끝났다”며 자본주의만을 고집하고 북쪽에서는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라며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체제 통일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남한은 북한이 경제난으로 붕괴되기를 기대하고 북한은 남한이 사회혼란으로 무너지기를 원하겠지만 어느 쪽도 머지않아 붕괴될 것 같지 않다.

넷째,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남북 사이에 원한과 적대감이 커졌다. 주로 해방 이전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파, 북쪽의 토지개혁에 남쪽으로 쫓겨온 지주들, 북쪽의 종교탄압에 남쪽으로 내려온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반북 세력들은 북한을 증오하고 남북 사이의 화해와 협력을 거부하며 ‘북한 타도’를 주장한다. 특히 친일 세력이 해방 이후 척결되기는커녕 미군정의 도움으로 오히려 정권을 잡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미국 및 일본과 손잡고 반공과 반북을 악용해왔다.

통일을 왜 해야 하는가

통일을 이루어야 할 가장 큰 이유나 필요성은 한 마디로 분단에 따르는 폐해가 너무 크고 통일을 이루면 얻을 수 있는 편익이 몹시 크기 때문이다. 통일 경비가 천문학적으로 들 것이라는 얘기가 많은데 분단 경비는 이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더구나 통일 경비는 남북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더불어 살자는 건설적 투자비용이지만, 분단 경비는 서로 적대시하며 죽이자는 파괴적 소모비용이다. 통일 경비는 천금이라도 아깝지 않지만 분단 경비는 한 푼이라도 아깝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분단 때문에 빚어지는 피해와 고통 등 돈으로 계산하기조차 어려운 대표적 분단 폐해 몇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 분단 때문에 정치 발전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북한을 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가장 강조하는 게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것인데, 그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 현실이 참 역설적이다. 자유민주주의란 개인의 자유를 핵심 가치로 삼는 민주주의로, 개인의 자유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 자유는 사상과 양심, 언론과 출판, 결사와 집회 등의 자유다. 그런데 분단을 핑계로 유지되는 국가보안법은 이러한 기본적 자유조차 심각하게 제한하며 인권을 탄압하고 있지 않은가.

둘째, 분단 때문에 군사 외교적으로 자주권을 침해받고 있다. 군대의 작전통제권까지 미군에게 맡기는 등 미국에 너무 종속적이라 “남한은 미국의 51번째 주”라는 국제적 조롱을 받는 것은 분단 때문이다. 중국과의 교역규모가 미국과의 무역액수보다 두 배 이상 크지만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증진시키는 데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며 망언을 해도 미국의 영향력 아래 일본과 공조를 진전시켜야 하는 것도 분단 때문 아닌가.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되어야 진정한 자주 독립국이 될 수 있다.

셋째, 분단 때문에 엄청난 국방비를 쏟아 붓고 있다. 대략 정부 예산의 15-20%다. 국방비 말고도 남북이 체제 경쟁 때문에 모든 분야에서 쓸데없이 지출하는 비용이 얼마나 많은가.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되면 국방비를 비롯해 막대한 경쟁 비용을 줄일 수 있고, 그 만큼 사회복지비를 늘릴 수 있어, 요즘 사회적으로 떠들썩한 ‘무상 급식’ 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분단 때문에 빚어지는 이산가족들의 한과 고통이 몹시 크다. 남북 사이에 일가친척끼리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소식을 알아도 제대로 연락도 하지 못하며, 평생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죽어가는 이산가족들의 슬픔과 아픔을 달랠 수 있는 길은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다.

다섯째, 분단 때문에 여행의 자유도 제한 받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라는 말을 즐겨 쓰지만 남한은 ‘완도 (完島)’다. 육지와 연결된 ‘반쪽 섬’이 아니라 바다로만 나갈 수 있는 ‘완전한 섬’이란 말이다. 그러기에 해외여행을 하려면 편안한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지 못하고 돈이 많이 드는 비행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여섯째, 분단 때문에 주한미군이 유지되고 이를 통해 퇴폐문화가 확산되는 가운데 범죄까지 늘고 있다. 미군들이 온갖 폭행과 만행을 일삼아도 처벌은커녕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분단 때문이다.

일곱째, 분단 때문에 한반도가 동아시아 긴장과 갈등의 중심에 놓여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사이에도 남북한이 끼어 있다.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되어야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

여덟째, 분단 때문에 징병제가 고수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전한 남자들이라면 거의 모두 인생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20대에 공부하거나 일하다 말고 가장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집단인 군대에 불려가 2-3년 ‘썩어야’ 하는 현실이 왜 지속되는가. 군대에 가기 싫어 자신의 몸을 일부러 망가뜨리기도 하고, ‘빽’을 쓰기도 하며, 해외로 도피하기도 하는 등 온갖 병역 비리가 저질러지는 이유도 징병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해교전이나 천안함 침몰 또는 연평도 포격 등 남북 사이의 갈등이나 무력충돌 때문에 희생된 젊은이들보다 군대 안에서 자살과 사고로 죽어가는 젊은이들이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많다.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되면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꿔, 직업으로 군인을 선택하겠다는 젊은이, 군생활이 적성에 맞겠다는 젊은이, 군대 가야 사람 된다고 생각하는 어른 등 원하는 사람들을 모집해 단결심과 충성심이 강한 군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홉째, 분단 때문에 전쟁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만에 하나 서해교전 같은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이어진다면 남북 모두 막강한 병력과 최첨단 무기들을 가지고 있는 터에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멀쩡하게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 요즘 전쟁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또는 팔레스타인에서 보듯, 군인들만 죽는 게 아니라 민간인들이 더 많이 죽는다.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되면 끔찍한 전쟁의 가능성이 사라지거나 최소한 줄어들 것 아닌가.

통일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통일’을 말 그대로 ‘모든 것이 하나로 되는 상태’로 정의한다면 통일을 이루기 어렵다. 70년이나 떨어져 지내온 터에 이념과 체제를 금세 하나로 합친다는 것은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민주주의나 평화도 목표는 끝이 없기에 ‘민주화’나 ‘평화로 나아가는 과정’을 민주주의나 평화로 간주하듯,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 역시 통일의 일부로 생각한다면 ‘실질적 통일’ 또는 내가 말하는 ‘21세기형 통일’은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다. 남북이 적대 관계를 풀고 서로 협력하며 자유롭게 연락하고 오갈 수 있는 상태에만 도달하면 되는 것이다.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고 개성공단을 확대하며 이산가족 상봉을 정기적으로 실현하기만 해도 통일의 절반은 이루어지는 셈이다. 2000년 6월 1차 남북 정상회담과 2007년 10월 2차 정상회담의 합의사항, 이른바 ‘6·15합의’와 ‘10·4선언’만 제대로 이행해도 통일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 나아가 활발하게 교류하며 자유롭게 오가다 보면 통일이 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체제 통일엔 신경 쓸 필요 없다. 통일 한반도의 체제로 남한의 천박한 자본주의도 적합하지 않고 북한의 배고픈 사회주의도 어울리지 않는다. 남북연합이나 연방제를 지향하면서, 남한은 자본주의를 지키되 사회주의 장점인 평등을 조금씩 추구하고 북한은 사회주의를 고수하면서 자본주의 장점인 자유를 조금씩 늘려가면 된다. 남쪽에선 빨갱이 짓이라는 논란 일으킬 것 없이 복지정책을 조금씩 확대하면 충분하고, 북쪽에선 개혁개방을 조심스럽게 확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적어도 우리 다음 세대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유와 평등이 어우러지는 복지국가 체제의 완전 통일까지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 이 글은 2015년 5월 1일 <새날 희망연대> 초청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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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가 망해야 민주가 산다

 
 
제1편 - 민주당이 망가진 5가지 이유 | 민주당이 사는 법
 
신상철 | 2015-05-01 10:48:1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민주가 망해야 민주가 산다
제1편 - 민주당이 망가진 5가지 이유 | 민주당이 사는 법


4.29 재보선 결과를 두고 많은 분들이“새정연의 참패”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3:0’혹은 ‘4:0’이라며 한숨들을 내 쉽니다. 그런 결과가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고된 결과일까요 아니면 이길 수 있는 걸 놓친 걸까요? 4.29 재보선 참패의 결과가 야권에 ‘독(毒)’일까요, 아니면 ‘약(藥)’이 될까요?

갑자기 이런 얘기들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2001년부터 정치분석과 함께 정치칼럼을 써왔습니다. 그래서 네이버 인물검색 직업란에 ‘칼럼니스트’로 올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천안함 재판이 5년간 이어지고 그에 관한 글만 주로 다루다 보니 정치분석 관련 글을 쓰는 것이 스스로도 ‘생뚱맞은 일’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천안함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지만 그와 병행해서 정치분석글을 올리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언제부턴가 이러쿵 저러쿵 정치얘기 하는 것이 마치 ‘주제넘은 일’처럼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꼭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고, 지금이 그 때인 것 같아 몇 편의 글로 나누어 올릴까 합니다.

이번 재보선 그리고 앞으로의 정치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기에 앞서, 작년 초‘새정치민주연합’이 ‘민주당’당명을 벗어 던지기 이전 제가 올렸던 칼럼 두 편을 먼저 보시는 것이 앞으로 풀어갈 이야기 전개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우선 소개드리고 글을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 1 ] 2014. 1. 22 - 민주당이 망가진 다섯가지 이유

 

 

민주당이 망가진 다섯가지 이유
(신상철 / 2014-01-23)

오늘 날 민주당이 저 모양으로 망가진 데에는 적지 않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지난 18대 대선이후 잘못된 판단과 선택 그리고 민주당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를 포함, 상징적으로 다섯가지만 추려보았습니다.

 

1. 부정선거 대응실패 - 부정개표가 핵심이라는 사실 외면

지난 18대 대선이 총체적인 부정선거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국정원과 국방부의 조직적인 선거개입이 드러났고, 행안부와 보훈처 뿐만아니라 선거업무를 관장하는 주체인 중앙선관위까지 개표조작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당의 대응은 어땠나요? 당에서는 내몰라라 하고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후보는 이의제기할 수 있는 시한을 속수무책으로 넘겨버렸습니다. 그나마 한 달이라는 시한이전에 시민들이 소송을 제기하여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있지만, 현재 재판도 열리지 못하고 계류중에 있음에도 민주당은 관심조차 없습니다.

20만명의 시민이 부정선거를 외치며 서명을 했음에도 꿈쩍도 않던 민주당은 국정원 직원과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사건이라는 빼도박도 못하는 실체가 드러나자 겨우 무거운 엉뎅이를 움직이는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나마 청년비례대표인 김광진 의원 한 사람 고군분투하여 싸운 결과이지요.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에서 저질러진 부정선거의 모습들

 

부정선거의 핵심은 ‘부정개표’에 있습니다. 초기부터 대응에 실패했던 원죄를 안은 민주당은 ‘부정개표’문제에는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중앙선관위가 개표조작의 주범’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대응하고 처벌과 대책을 마련해야 앞으로의 부정선거를 원초적으로 방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개표부정의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는 가운데 중앙선관위가 부랴부랴 기존의 전자투표기를 모두 교체 폐기하려 하고 있는데도 민주당은 속수무책입니다. 범죄자가 범죄수단과 도구를 모두 없애고 있는데 말이지요. ‘중앙선관위의 개표부정’에 눈감고 있으니 그 문제 또한 방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한심한 민주당입니다.    


2. 패기없는 초선들 -  소총부대 어디갔나

민주당에는 모두 중진 이상만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초선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나요? 선거 역사상 최악의 부정선거가 저질러졌고, 민주 역사상 최악의 정권이 패악질을 거듭하고 있는데도 우리 야당의 초선의원들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 걸까요?

민주당 초선의원들의 존재감을 드러냈던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대선 직후 ‘대선 패배에 대해 국민들께 사죄하겠다’며 투어에 나섰다지요.

 

 

그 뉴스를 보며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참으로 착잡하더군요. 부정선거에 분노한 국민들 수십만명이 서명하고 있는 마당에 소총부대인 초선들이 앞장서 싸우기는 커녕 패배했다며 사과하러 다니겠다는 발상은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걸까요?

박근혜 정권의 삽질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소총들고 싸워야 할 신참들이 후방에서 미사일 쏘아주길 기대하고 있으니 난감합니다. 민주당의 초선의원들은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야성을 잃어버린 야당, 중진들의 총체적인 부실 속에 초선들 조차 제대로 키워내질 못하나 봅니다.

당시 국회앞에서 천배를 올리며 “지은 죄를 씻기 위해 당과 정치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고 변화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했지요. 그나마 김광진, 김현, 장하나 의원 조차 없었다면 민주당의 존재감 조차 기억하지 못했을 겁니다.


3. 종북 프레임에 갇힌 민주당 - 이석기 의원 구속 동의안 사건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사건이 터지자 민주당은 속전속결로 구속에 동의해 버렸습니다. 저는 그 순간 ‘아, 민주당 집권 포기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통합진보당의 세력이 막강해서 그 분들의 도움없이는 민주당이 집권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닙니다. 허긴 민주당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했겠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정치도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리’로 나타납니다. 민주당은 도리를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맏형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지요. 가장의 역할을 포기한 것입니다. ‘야권연대’가 무엇입니까. ‘한 이불 덮고 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게 ‘손만 잡고 잤어요’ 한다고 될 일입니까? 누가 그 말 믿어줍니까? 책임감도 없고 정의롭지 못한 처신입니다.

민주당은 이랬어야 합니다. “통합진보당 이리와봐라. 쟈들 주장이 사실이라면 골때리는 사안인데 우리 골싸매고 의논하자. 일단 자체조사를 해라. 시간 얼마나 필요한가. 한 달? 좋다. 한 달동안 철저히 자체 조사를 하고 다시 논의하자. 이 참이 진보정의당 당신들도 함께 고민하자. 이 문제는 야권 모두가 고민하고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 오케이?” 

국민께는 “국민여러분, 일단 자체조사와 야권의 논의를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고민하겠습니다. 여당의 체포동의안은 거부하겠습니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사법부의 판단을 지켜본 후 결정할 문제입니다.”라고 선을 긋고, 돌아서서 새누리에게는 “니들은 입 다물어라. 국정원 사건만 해도 니들은 정당해산해야 할 당이야!”라고 일갈했어야지요.

그게 야권의 맏형이 했어야 할 일입니다. 얼마나 든든한 형입니까?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후보시절 하셨던 말씀 “내 아내를 버려야 한다면 대통령 포기하겠다” 얼마나 든든한 남편입니까? 이석기 사건, 공소장 조차도 숱하게 조작이 되고 왜곡이 된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가슴졸이며 유죄받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지나 않은지 민주당은 가슴에 손 얹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4. 친노와 비노 프레임 - 끝없는 분쟁의 쳇바퀴

많은 식자들이 그럽디다. ‘친노와 비노 프레임’은 조중동이 만든 덫이라고.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그 분들 스스로 그 안에 빠져서 허우적대며 자신들의 경계선을 긋고 스스로들 유폐시키고 있으니 그 말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끝없이 망령처럼 휘감고 도는 것입니다.

안그런가요? 입에 바른 말로 “우리 그런 것 없다” 손사래 칠 것이 아니라, 스스로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요? 그래서 대선 때 당과 후보가 따로 놀고, 지금의 지도부 온갖 패착을 두고 있어도 팔짱끼고 뒤에서 쳐다만 보고 있는 건가요? 보는 사람들이 볼 때 경계가 확연하게 그어져 있는데, 아니라고 말한들 무슨 소용인가요?

 

 

친노와 비노의 경계선을 없애는 것은 레토릭의 향연이나 악수만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구성원들이 녹아들어 가야지요. 잘한 건 잘한다 격려하고, 못하는 것은 박터지게 싸우면서 대들기도 해야지요. 서로가 마치 ‘소 닭보듯’ 외면하고, 함께 힘을 합해야 할 일도 ‘처 외삼촌 벌초하듯’ 건성이고,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도 ‘강건너 불구경 하듯’ 하니, 우리 눈이 잘못된 건가요?

‘친노와 비노 프레임’- 이 지긋지긋하고 백해무익한 개념을 사라지게 할 장본인들 역시 당사자들입니다. 서로 섞여들고 비빔밥이 되어 초장을 치든, 지지고 볶든, 함께 깔깔대든, 뭔가 통일성이 있고 의기투합이 되어야 보기도 좋고 통트면 연장 챙겨 나가 싸울 전투력도 생기는 것인데 그런 모습이 보이질 않으니 사람들은 밖에서 구분지으며 손가락질 하고 있는 겁니다.

‘친노와 비노 프레임’ 그 끝없는 논쟁과 멈추지 않는 쳇바퀴, 그것을 종결지을 사람들은 바로 당사자들입니다. 스스로 친노인지 물어보고 스스로 비노인지 물어봐서 본인이 해당된다 싶으면 가슴을 후벼파 도려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레토릭도 설 곳을 잃게 되겠지요. 새해가 밝을 때마다 김대중 대통령님과 노무현 대통령님 앞에 어떤 얼굴로 서시렵니까?


5. 중진들의 삽질 - 어줍잖은 동서화합

저는 작금의 민주당이 존재가치를 잃어버릴 정도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며 김한길 대표는 깜이 아니니 최대한 빨리 물러나고 차라리 능구렁이 박지원씨가 대표가 되면 그나마 좀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밑에서 정치를 배우고 산전.수전.공중전.수중전까지 다 치러낸 베테랑이니 뭔가 다른 구석이 있지 않겠나 싶기도 했구요.

그런데 엊그제 새누리 사람들 떼거지로 데리고 신안의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방문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이지 뚜껑이 열리더군요. 그걸 ‘동서화합’이랍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새누리 족속들이 ‘화합’의 대상입니까? ‘응징’의 대상입니까? 그 원초적인 질문 앞에 어떤 대답을 내놓으시겠습니까?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될 만행을 백주대낮에 저지른 집단의 후예들인데 그들이 진정한 사과를 했습니까? 그들에 대해 합당한 처벌이 이루어졌습니까? 응징이 되었습니까?

그러니 친일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친일행위가 ‘민족의 발전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노라 왜곡질을 해대고 그것도 모자라 교과서에 못을 박겠다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응징해야 할 사람들이 주제도 모르고 응징해야 할 대상들에게 어줍잖은 화합의 굿판을 함께 벌이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겁니다.

따뜻한 봄이오면 박정희 생가로 여행을 함께 떠난다구요? 인혁당사건으로 피멍 든 가족들 함께 손잡고 갈 자신 있습니까? 고문치사로 분신으로 가장을 잃은 가족들에게 화합의 여행 함께 가자 할 자신 있습니까? 동서화합은 세월이 지나 민초들이 알아서 합니다. 때가 되면.. 아시겠습니까? 총 들고 싸워야 할 당신들, 총 놓고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신상철


덧글 : 민주당이 이땅의 민주본산으로서의 역할을 잘하게 되길 바랍니다. 하여 다음에는 '민주당이 사는 법'에 대한 글을 준비하겠습니다.

 


[ 2 ] 2014. 1. 30 - 민주당이 사는 법

 

민주당이 사는 법
(신상철 / 2014-01-31)

 

제목이 “민주당이 사는 법”인 것은, 현재 민주당이 죽은 정당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의석수 127석 씩이나 갖고 있는 정당이 저토록 존재감도 없이 따뜻한 아랫목 축 처진 할배 거시기처럼 맥아리 없는 것도 ‘정치학적으로 연구대상’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드문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요? 민주당 소속 의원들 대부분 누구한테 약점을 단단히 잡혀 찍소리도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도대체 새누리가 버린 파란색은 누가 줏어왔을까?… 퍼포먼스만 하면 언제 싸우려고…

 

저는 지난 번 글에서 <민주당이 망가진 5가지 이유> 를 나열한 바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려 현재의 민주당은 분석력도, 판단력도, 조직력도, 리더십도, 투쟁력도 없는, 한마디로 생명력을 상실한 정당이라는 얘깁니다. 그저 현실에 안주하며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 또는 정치생명 연장만이 유일한 관심거리인 집단인 거지요. 

“민주당이 망해야 민주가 산다”는 의미는, 민주가 승리하려면 민주당이 바로 서야 하고, 민주당이 바로 서려면 (지금 현재의 상황을 보아하니) 반드시 망하는 과정이 필요하겠다는 뜻이고, 현재의 민주당 내에는 알곡보다 쭉정이가 더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민주당은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민주당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시대와 역사를 뛰어넘어 민주당은 항상 존재했고, 존재해야 하고,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썩어 문드러지면 그 악취에 시달리고 청소하는 것 또한 민초들의 몫이기 때문에 설거지를 하든, 분류수거를 하든 성질 급한 사람들이라도 먼저 손 걷고 나서야 하지 않겠나 싶은 거지요. 그래서 분위기를 만드는 겁니다. 선동하고 폄프질해서라도 말이지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잊어버린 민주당

저는 원래 복잡하게 말하는 것 싫어합니다. 실은 머리에 든 것도 별로 없구요. 그래서 글도 최대한 쉽게 쓰려고 노력합니다. 중2 수준에서 이해가 될 수 있는 글, 그 수준이 저의 목표이며 한계입니다. 그러다보니 조금 길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차분히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복잡하게 나열할 것 없이, 한 문장으로 줄여 김대중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 “행동하는 양심”, 그 철학이 지금 민주당에는 있는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몇몇 의원들, 예를 들어 김광진 의원은 초선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잘 하고 있습니다. 장하나 의원 역시 초선이지만 용감하고 씩씩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싸울 수 있는 의원들이 현재의 민주당 내에 열 명만 있어도 지금의 한심한 모습은 아닐 것 같습니다. 야성을 잃어버린 야당, 싸움을 두려워하는 야당, 자리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야당, 그 모습은 직장인이지 야당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더구나 역사상 유례없이 부정하고, 부패하고, 교활하고, 패악한 독재정권에 맞선 야당의 모습은 더더욱 아닌 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와 정신을 잇지 못하는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철학은 “사즉생의 정치”입니다. 나를 버리고 희생하는 것, 나의 소리(小利)를 포기하고 대의(大義)를 따르는 것. 당장은 자신에게 손해인 것 같지만 긴 안목과 호흡으로 가시밭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 그러한 정신과 정치철학을 지근거리에서 보고 느꼈던 사람들조차도 마치 먼 옛날의 추억인양 깡그리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의 정책이 옳고 그르고, 어떤 정책은 성공이고 어떤 것은 실패였다.. 그런 것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민주당은 그 두 대통령의 정신과 가치 그리고 정치적 철학이 녹아들고 어우러져 공유된 상태에서만 존립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필연입니다. 그런데 그 두 분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부자연스러운 침묵 속에 반목과 대립 그리고 무관심과 방관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 심각성은 이제는 어떠한 해법으로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제갈공명이 온다해도 풀기 어려워 보입니다. 화합, 화목, 단합 그리고 전투력 결집.. 불가능합니다. 불신의 늪과 골만 더 깊에 패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모두가 마음을 비우고 중대한 결심들을 하셔야 할 시기에 이르렀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야 본인도 살고, 민주당도 살고, 민초들도 살 수 있는 것이지요. 개혁이지요. 개혁은 개혁인데, 어떤 개혁일까요?  


‘뼈를 깍는’개혁? 아닙니다.‘뼈를 갈아치우는’개혁!

무언가 큰 변화가 요구될 때, 흔히들 ‘뼈를 깍는 개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만, 현재의 민주당은 뼈를 깍는 수준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봤자 뼈대만 약해질 뿐이지요. 뼈를 갈아치워야 합니다. 대부분의 뼈대를 새 뼈로 교체해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도로 정립한 후 대못을 박아야 합니다. 그저 버스타고 세배다닌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의 민주당에 소속된 의원들가운데 최소한 절반 이상은 스스로 물러나야 합니다. 차기 불출마 선언하고, 남은 여생 후진양성에 매진하겠노라 선언을 하고, 민주가 회복될 수 있도록 한 알의 밀알 역할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럴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민주당 내에서 절반 이상은 나와줘야 비로서 ‘뼈를 갈아치우는 개혁’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야 국민들이 민주당을 쳐다보게 됩니다.

그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지키고,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와 정신을 잇는 길입니다. 이제는 고향에 내려가서 아니면 전국을 돌면서 그 철학과 가치와 정신을 전파하며 사람들을 일깨우는 일에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적어도 김대중, 노무현 두 분 밑에서 정치를 배운 사람들이라면 말이지요. 정치권 언저리에서 계속 권력을 바라는 탐욕을 버려야 할 때이고, 그것을 요구받는 때라는 얘깁니다. 

그게 “행동하는 양심”이고,“사즉생의 정치”아닌가요? 그것을 배운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금의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도 그 시기를 알지 못해 눈치만 보고 있는 모습, 스스로 거울에 비추어 보아도 추하지 않은가요? 탐욕과 권력에 눈먼 자신의 모습이 새누리 족속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요? 자신은 그렇지 않다며 거부할만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가요?

갈아치우는 것만이 능사인가. 예,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최소한 지금은 그렇습니다. 그것도 하지 못하면 민초들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드릴 겁니다. 반드시. 분노한 민초들은 별 역할도 없이 방만 크게 차지하고 있는 소위 원로급 이상의 의원들과 뒷 방 늙은이 같은 중진들, 초선이면서 이미 고물차가 되어 버린 의원들까지 분류하고 찍어내어 퇴출되도록 만들고야 말 겁니다.


민주진영 승리의 전제조건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밑도 끝도 없이 ‘야권이 연대하고 단일화하지 않으면 전멸한다’류의 주장을 펼치시는 분들이 계신데, 저는 이명박과 박근혜 시대를 관통하며 유형별로 다양한 경험들을 겪으셨던 분들이 아직도 그런 순진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연대하고 단일화만 되면 이기나요? 누구 맘대로? 새누리와 중앙선관위의 양보와 허락을 받으셨나요? 부정선거, 개표부정 저지르지 않겠다는 보증서 받았나요?

선거의 귀재, 조작과 왜곡의 달인, 부정과 부패의 지존, 그들이 “패배는 곧 죽음”이라는 각오로 목숨걸고 악랄하게 발악을 하며, 그들이 쓸 수 있는 모든 동력과 자원을 거지 깡통까지 뒤져가며 쓰고 있는데, 야권에서 신사협정만 맺으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면 수긍해 줄 수는 있지만, 그 조차도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승리를 견인할 수 있는 조건의 우선 순위를 다음과 같이 분석합니다.  

첫째, 부정선거와 개표부정에 대한 인식과 처벌, 그리고 확고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 이명박, 박근혜 시대에 시행된 선거관리 제도를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 그것이 야권승리가 가능한 무조건적 첫째 조건이다. 새누리는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둘째, 민주당이 뼈를 갈아치우는 개혁을 해야 한다. 그래야 민초들의 지지를 얻고, 흩어진 동력을 다시 모을 수 있다. 이것이 야권 승리가 가능한 무조건적 둘째 조건이다. 그 바탕이 있어야 다른 정당과의 연대든 단일화든 나설 수 있는 명분과 지위가 생긴다.

셋째, 위의 첫째와 둘째의 노력이 이루어진다면 승산이 높고 연대와 단일화까지 이룰 수 있다면 무조건 대승이다.

넷째, 만약 연대와 단일화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위 첫째와 둘째만 이루어 진다면 반 새누리당 진영은 무조건 이긴다. 국민들은 바보 아니다. 이미 새누리는 민심을 잃었고 부정과 부패와 조작없이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는 정당이다.  

다섯째, 위의 첫째와 둘째를 이루지 못하면 무조건 진다. 백약이 무효하다. 연대아니라 단일화 할아버지를 이룬다 해도 절대 승리하지 못한다. 선거애 이기고 개표에 지는 바보짓만 무한 반복될 뿐이다.

   
지방선거 - 총선.대선과는 다르다

앞에서 제가 말한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어야 할 당사자는 민주당입니다. 민주당이 뼈를 갈아치우는 개혁을 이루면, 새정치신당,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모두 민주당이 변화하는 만큼 함께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죽지 않으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지요. 민주당의 변화는 정치지형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면 승리도 그리 멀지 않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민주당이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요? 저는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주장을 하느냐구요? 민주당, 그들은 ‘뼈를 갈아치우는 개혁’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생각이 틀리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에 대한 민초들의 대응전략을 말씀드리기 위해 지금까지의 긴 설명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번 지방선거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민주당이나 새신당 입장에서야 중요할지도 모르죠.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지방선거가 중요하다 보십니까? 지방선거에서 한 석이라도 더 얻는 것이, 민주당이 스스로 변화하는 일, 개혁하는 일 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도지사 한 둘 더 얻는다고 세상 달라지던가요? 시장 한 둘 잃는다고 세상 무너지던가요? 2010년 이후로 오늘 현재까지, 서울시 25개구 가운데 민주당 구청장이 21곳이나 싹쓸이 해서 차지하고 있는데,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관통하며 세상 달라지고 있던가요? 만약 그거 다 잃는다고 민주당, 더 잃을 게 있을까요? 지방선거, 그리 중요한가요?

하지만 총선과 대선은 다릅니다. 국회의원 숫자와 대통령이 누가 되는가 여부는 정치적 환경과 우리 민초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극히 중대한 선택입니다.

그런데 지방선거는 다르다는 겁니다.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민초들 입장에서는 민주당이 징징거리며 도와달라고 소리에 개혁이고 뭐고 만사제쳐놓고 또 한 번 속아주는 것이 옳은 일이냐, 아니면 이번 참에 완전히 민주당을 두들겨 패서 초죽음을 만들어 놓는 것이 향후의 총선과 대선이라는 거사를 위해 바람직하냐, 그 고민을 심각하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개혁을 이루라, 그러면 반드시 손을 잡아 준다 !

결론은 간단합니다. 채찍과 당근입니다. “개혁해라 도와줄께. 개혁하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 그겁니다.

우리 입장에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선거, 민주당이 스스로 환골탈태하는 수단으로 삼고 압박과 협박을 하자는 겁니다. 그래야 총선과 대선을 이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번에 어리버리하면서 지금 저 꼴 저대로 가면 지방선거 망하는 건 당연한 것이고 총선과 대선 모두 말아 먹을 것이 불 보듯이 뻔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번에 민주당 스스로 낡은 옷을 확 벗고, 몸을 깨끗이 씻을 수 있도록 압박과 협박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설사 선거에서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음에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1. 부정선거와 개표부정에 대해 적극 개입하고 선거제도를 정비하라.
2. 전투력을 상실한 민주당 중진과 의원들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물러나라.

만약 민주당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 그것은 “죽어봐야 죽는지 알겠다”는 것이니 우리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사상 최악의 참패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 차라리 새 토양에 새 싹이 나올 수 있게 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누가 답답할까요. 답답한 것은 이번 선거 떨어지면 권력을 놓칠까 전전긍긍하는 '권력바라기'들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민주당의 ‘뼈를 갈아치우는 개혁’을 촉구합니다.

 

다음 글은 “제2편 - 4.29 재보선 새정연의 참패라구요?”로 이어가겠습니다.

신상철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1003&table=pcc_772&uid=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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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안보의 프레임을 답습하는 양태 보여

 
2015. 05. 01
조회수 91 추천수 0
 

  야당은 새누리당을 대체할 수 있는 수권 정당인가? 그러려면 국민에게 믿을 수 있는 안보의 확신을 주어야 한다. 재보선 참패에 빠진 야당의 환골탈태는 대북 안보정책에서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김종대 디펜스 21+ 편집장이 얼마전 온라인 매체 <프레시안>과의 직격 인터뷰에서 제기한 핵심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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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에 안보 ‘정책’이 있긴 한건가

 

  프레시안 :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가 천안함은 북한의 소행이라는 발언을 하면서 야당의 안보 정책과 지향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전반적으로 야당의 안보정책을 진단해 본다면?

  김종대 : 안보담론에 대한 야당의 대처 방식과 인식, 행동을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지난 2012년 총선 당시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논란에서 실패한 이후 안보 정책에 대한 트라우마가 차곡차곡 쌓여 왔는데, 그걸 벗어나려는 욕망이 안보에 대한 지향으로 표출된 것 같다. 현재 야당에서는 당 대표의 안보 행보, 안보 연구소 및 특위 조직 창설 등이 한꺼번에 진행되고 있다. 대규모로 예비역 장성들과 안보 전문가가 영입되고 있다. 안보 정당의 이미지를 보이면서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외부 공격을 차단하면서 경제 문제에 집중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물론 지금까지 야당 형편을 생각해 보면 이런 행동이 이해는 된다. 얼마나 지긋지긋했겠나. 제가 야당 지도부를 만날 때마다 들은 질문이 “천안함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야당 정치인 거의 대부분이 천안함 때문에 공격 받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제적으로 보수와 동일한 목소리를 낸 것인데, 문제는 이것이 보수 안보의 프레임을 그대로 수용하는 답습이 된 것이다. 
 이것이 천안함 이라는 한 가지 의제를 돌파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 않다. 다른 의제가 또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년 총선 이전에 한반도 사드 배치 문제가 구체화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총선 때 새누리당이 제주 해군기지로 야당을 밀어붙인 것처럼 사드를 통해 야당을 무책임한 세력으로 몰고 가려는 시도가 나오지 않겠는가. 얼마 전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 대표가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야당”이라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관심이 있는가”라고 거꾸로 야당에 질문을 했다. 이건 뭘 말하나? 사드가 제2의 강정마을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TV 조선>에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출현하였는데 진행자가 “사드 배치에 찬성하냐?”고 묻고 심 대표는 “반대한다”고 했다. 배치되지도 않을 사드 갖고 벌써 편 가르기가 나오고 야당은 말려들고 있지 않나? 그러면 그 때가서 야당은 또 종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드 배치에 찬성하고 나올 것인가? 참으로 답답한 것은 지금 야당의 준비 정도와 실력을 봤을 때 조선일보와 새누리당을 비롯한 보수가 짜놓은 프레임에 말려들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안보 문제가 불거지면 야권 내부에서 분열이 생긴다. 분명히 야당 강경파들은 다른 목소리를 낼 것이고, 이러다 보면 보수 세력은 강경파 의원들이 있는 소위 ‘종북 숙주 정당’의 이미지를 새정치연합에 뒤집어 씌울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언어로 한반도 안보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문재인 대표의 안보 행보는 보수층의 언어를 그대로 빌려서 이야기하는 흉내 내기로 간다는 것이고, 여기서 일부 야당 의원들은 이탈한다. 한번 가 보라. 또 다른 의제가 야권 전체의 목을 조를 것이다. 

 

  프레시안 : 문 대표의 천안함 발언이 나왔을 때 이런 행태가 여당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이라는 우려가 가장 많이 나왔다. 이후 상황은 어떤 식으로 전개될까?

  김종대 : 말려든다는 프레임이 가만히 생각해보면 바로 역할 변경에 있다. 안보가 무너지고 국민을 불안하게 해 실패한 안보에 대한 책임을 추궁 당해야 할 당사자는 사실 정부와 여당이다. 그런데 실패한 안보의 책임을 여당이 야당에게 추궁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원래 야당이 안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정부에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민주정치의 가장 정상적 현상인데 거꾸로 된 것이다. 천안함, 제주 해군기지, 사드 배치 등이 바로 그렇지 않나? 이것이 정부 여당이 선호하는 프레임이다. 
 마침 유승민 원내대표가 임시국회 대표연설에서 “사드에 반대하는 야당”이라는 표현을 쓰며 야당에 입장을 추궁했다. 그런데 새정치연합은 한번도 사드 배치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다. 정작 입장을 밝힌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사드 배치에 대한 요청도, 협의도 없었고 할 계획도 없다는 것이다. 또 전임 이명박 정부 때 천영우 당시 외교안보수석은 미국 MD에 우리가 왜 참여하느냐고 했었다. 그렇다면 사드를 반대하는 쪽에 가까운 것은 야당보다는 박근혜 대통령, 또는 전임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질문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잘못된 거다. 책임을 져야 할 세력이 질문을 받지 않으니까 안보에 무능력하고 무책임해 진다. 왜 이렇게 되었나? 야당이 자신의 언어로 정부여당에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당이 집요하게 묻고 추궁하면서 물고 늘어지지 못하니까 이제는 사드 배치에 대해서도 야당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게 바로 강정마을의 교훈이다. 사드 배치? 그것이 유승민 대표의 개인 의견인가, 정부의 입장인가, 왜 추궁하지 못할까? 게다가 정부여당이 그동안 안보에서 실패한 그 무수한 사례들을 제대로 정리하고 추궁했더라면 야당의 위신은 얼마든지 설 수 있었다. 보수정권의 전략적 실패와 방산비리와 같은 부패사건까지 안보를 무너뜨린 건 보수정권인데, 이걸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못한다. 그러니 야당 책임만 남은 것이다.   
  이건 안보 분야에서 추궁하는 검사가 여당, 답변하는 피의자가 야당으로 관계가 설정되는 셈이다. 이렇게 되다보니까 안보에 대해,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정부 여당은 면책되고 야당은 자기의 입장을 검증받아야 할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의 효과다. 여기서 야당은 일종의 정신적 장애가 있다고 해야 한다. 엄한 아버지 앞에서는 말을 못하는 청소년과 같이 자기 언어로 표현을 하지 못하는 정신적 장애다. 사도 세자가 영조 임금 앞에선 오금이 저리다가 말 한마디 못하고 결국 뒤주에서 죽었다. 그렇게 야당은 안보세력 앞에서, 군복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뒤주에 들어가는 사도 세자와 꼭 닮은 것이다. 이건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다.   

 

김장수가 다 망쳤다? 팩트 몰랐던 문재인 후보

 

  프레시안 :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야당에게는 외교안보정책이 중요한 자산인데 별로 공부도 안하고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지난 대선 당시 NLL 문제가 논쟁이 됐을 때 야당의 대응에 문제가 있다고 하셨는데 

  김종대 : 우선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는 3가지를 몰랐다. 남북정상회담 대화 내용, 대화록 작성 경위, 대화록의 소재 모두 알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 캠프 내 일각의 분위기는 2007년 정상회담 당시 북한이 서해평화협력지대와 NLL 등 우리의 요구를 다 들어줬다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중에 대화록이 공개되고 나니 이는 사실과 차이가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NLL이야기를 들고 나오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NLL을 평화와 경제 지도로 덮자는 전략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NLL에 대한 일종의 우회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마치 북한이 우리가 설정한 NLL을 인정한 것이라는 오인내지 기대, 착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NLL에 대해서는 노 대통령과 뜻을 같이 했으니 사실 관계도 밝혀지리라는 기대가 퍼졌다. 하지만 공개된 대화록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 때도 NLL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었고 정상회담 이후 11월에 열린 제2차 남북 국방장관회담 때도 21개 항에 합의문을 내 왔지만 서해 문제는 합의 사항에 포함되지 않았다. 북한이 NLL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서해 문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된 것이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인 2007년 8월 통일부-국방부-청와대가 모여서 NLL에 대한 최종적 입장을 정했다. 그런데 이날 하필이면 김장수 장관이 눈병이 났다. 그래서 김관진 합참의장이 대신 참석했다. 회의 이후 김 의장은 돌아와서 김장수 장관에게 NLL 수호에 대한 대통령 지침이 정해졌으며 군이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고했다. 중요한 것은 통일부가 여기에 반발하긴 했지만 NLL 문제와 관련해 주도권은 이미 국방부로 넘어간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는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남북이 합의했던 서해평화협력지대와 주요 갈등 사안인 NLL 문제는 이후 열린 국방장관 회담에 맡기자는 지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11월에 열린 국방장관 회담에서 이 문제로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됐다.
 11월 회담에서 수석대표는 김장수 국방부 장관, 그리고 실무 책임자는 정승조였으며, 합참의장은 김관진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박근혜 정부 들어 국방 분야의 주요 직위를 맡았다. 김장수는 국가안보실장, 김관진은 국방부 장관, 정승조는 합참의장이 되어 있었다. 남북 국방장관 회담의 핵심 멤버가 박근혜 정부에 모두 입각해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들은 노무현 정부가 NLL을 포기했다고 단 한 번도 밝힌 적 없다. 실제 포기하지도 않았고 만약 포기했다는 누명을 쓰면 본인들도 같이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NLL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2007년에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이 실현될 수 없었던 거다. 그런데 2년 전인가. 정승조 합참의장 시절에 합참의 간부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서해에 대한 인식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군의 입장이 정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런데 문 후보가 엉뚱한 발언을 했다. 대선이 있던 2012년, 10.4 남북공동성명 5주년 기념식에서 문정인 교수와 대담을 하는 과정에서 문 후보는 당시 국방부 장관인 김장수 장관이 경직된 태도를 보여서 남북이 합의한 사항을 다 깨뜨리고 내려왔다고 이야기했다.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김장수 장관은 앞서 밝혔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대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실제 노 대통령은 국방장관회담을 가기 전 찾아온 김장수 장관에게 “국방장관의 뜻대로 하라”고 했다. 이후 김장수 장관도 본인이 노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NLL을 지켰다고 밝힌 바 있다. 남북정상회담, 장관급 회담 당시 거론됐던 NLL 문제에 대해 문 후보가 팩트 자체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기화점으로 해서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10월 9일 노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고 주장했다. 4일 문 후보의 발언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한 새누리당은 “김장수 장관은 NLL을 지키려고 했다는데, 그랬던 김장수 장관이 일을 모두 망친 것이라면, 그렇다면 저 사람들은 NLL을 포기하려고 한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결국 NLL 포기론으로 문 후보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이게 새누리당이 NLL 문제를 제기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다. 
  그런데 이 때만 해도 박근혜 후보가 이 문제를 꺼내지 말자고 했다. 북풍이 불면 역풍이 분다는, 2010년 6.2 지방선거의 학습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새누리당의 소장파 의원들도 지금 시절이 어느 시절인데 북한 문제로 걸고넘어지느냐는 입장을 보였고. 그래서 NLL 문제가 다시 나온다고 해도 이게 대선 쟁점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의 선거 공약도 노 대통령의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과 같은 것이었다. 여야가 같은 선거 공약을 냈다. 
  그런데 제가 유심히 본 것은 그해 10월경에 육군 3군사령관 출신인 이홍기 예비역 대장이 새누리당에 출입한다는 소식이었다. 이건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이었다. NLL 문제가 남북 간 제일 첨예한 대립으로 불거졌던 때는 2007년 5, 6, 7차 남북 장성급회담이다. 이 때 회담 대표가 이홍기 소장(당시 국방부 정책기획관)이었고, 당시 이 회담들은 남북한의 NLL에 대한 이견 때문에 제대로 된 합의를 내지 못했다. 만일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한다면 그들에게 사활적인 이익이 걸린 NLL에 대해 합의가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그건 북한이 국가가 아니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아니나 다를까, 11월부터 새누리당은 NLL에 대한 총공세에 돌입했다. 박근혜 대표는 TV 토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직접 이 문제를 따져 물었고, 새누리당 안보세력이 총동원되었으며 극우 논객들이 이 문제를 일제히 들고 나왔다. NLL을 둘러싸고 상황이 이렇게 전개됐다는 것을 당시 정부 인사들이 뻔히 아는데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는 이러한 사실관계를 착각했다.

 

  프레시안 : 그럼 당시라도 이 상황을 아는 사람들이 나서서 수습을 해야 했던 것 아닌가?

  김종대 : 문 캠프의 사실관계 파악과 대응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문 후보 본인은 NLL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150번 정도 했다. 하지만 이미 NLL은 대선 과정에서 주요 쟁점이 되어있었고, NLL 포기냐 아니냐는 논쟁이 붙기 시작했다. 당시 캠프의 중요한 인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본인이 남북정상회담, 청와대 모두 있어봐서 아는데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NLL을 다 인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북한에 대한 감상적 낭만주의, 희망적 사고에 젖어있다 보니 팩트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가장 어이가 없는 건 10년 간 집권한 정당이 오히려 정보가 없고 당시 야당이었던 새누리당이 더 정확히 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문 캠프는 해명하기에 바빴고 우물쭈물 거렸다. 그러다보니 뭔가 숨기는 것 아니냐, 이상하다는 식의 여론이 형성됐다. 의제 관리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만약 DJ 였다면 후보 입을 통해 그런 식의 엄청난 발언들이 나오기 직전에 반드시 크로스 체킹을 했을 것이다. 정보를 취사선택하려면 관점과 생각이 다른 보고서를 여기저기서 많이 올려보라고 해서 리더가 공통되는 부분을 찾고 비교하고 선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 캠프에서는 한 명이 가서 소설을 써버리면 나머지 전체가 다 바보가 되는 형국이었다. 대선 끝나고 당시 민주당의 주요 인사들과 대북관계를 좀 알만한 의원, 국정원 간부 등에 물어보니 정확히 팩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런데 보고해봤자 중간에서 끊기거나 엉뚱한 사람이 소설을 써버리니까 팩트를 교정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스스로 버린 햇볕정책, 누가 대신 지켜주길 바라나

 

  프레시안 : 지금도 이 부분에 대한 사후 점검은 없는 것인가? 

  김종대 : 그렇다. 야당의 가장 큰 문제가 대선이 끝나고 나서도 자기들이 뭘 몰랐는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민주당에 안보 전문가가 없었을까? 새누리당에도 없는, 연평해전 당시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이 2명이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NLL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을 때 “NLL 내가 지켰다. 앞으로 문 후보와 지키겠다”라고 기자회견 한 번 하는 걸 보지 못했다. 또 NLL 문제로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극우 논객들을 단 한 명도 고소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나중에 TV토론 때 새누리당에서 질문이 나오더라. 당신들 극우논객이 허위사실을 유포한다고 하는데, 왜 고소하지 않느냐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부 탈북자 단체들이 대북 전단에 노무현은 전자개표기로 대통령을 도적질한 사람이고 김대중은 민족반역자라고 명기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이런 허위사실을 야당은 고발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당시 문 캠프는 거의 무장 해제 상태였다.  
 여태까지 뭘 실수했는지도 모르고, 사실 관계도 헷갈렸던 당시 캠프의 관성이 대선 이후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지난 2년 동안 전시작전권, 윤 일병 사망, 한미일 정보공유 약정 등 대형 안보 이슈가 많이 나왔다. 그런데 새정치연합은 이에 대해 단 한 번도 당론을 낸 적이 없다.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사드만 해도 그렇다. 입장이 없다. 그냥 퉁 치고 지나가자, 모르겠다, 떠들면 불리하다 등등의 기류만 있다. 당 내에 북한 전문가와 안보 전문가가 그렇게 많은데도 사건 터져도 회의 한번 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MB 회고록, 남북정상회담 비밀접촉 다 나와 있는데 완전 허위와 기만의 기록물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야당이 이런 문제에 대해 당 내 외교안보 전문가들끼리 단 한 번도 대책회의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이명박은 자신이 망친 안보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얼마나 행복한 대통령인가? 새정치연합은 외교 안보 관련 내부 소통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정당이다. 일할 만한 능력이 있는 정치인은 일을 못하게 다 묶어놓았다. 예를 들면 통일부 정책보좌관을 지냈던 홍익표 의원은 ‘귀태’ 발언으로 2년 째 대정부 질문을 못하고 있다. 또 야당에 예비역 장성과 해군 참모총장이 와있으면 이들을 써먹어야 하는데 다 남의 일이 돼버렸다. 
새정치연합이 고질적으로 당하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2002년 서해교전 때 햇볕정책 때문에 장병들이 죽었다는 주장이다. <조선일보>는 매년 6월만 되면 이런 식의 담론을 계속 꺼내고 있다. 오죽하면 2함대 소속 병사들까지도 야당이 집권하면 자기들은 다 죽은 목숨이라고 알고 있을 정도가 됐다. 
  그러면 야당에서는 이 문제를 설명할 전문성이 없었을까? 연평해전 당일인 2002년 6월 29일, 그날은 청와대 점심 회식을 하는 날이었다. 박지원 비서실장 이하 전 직원 점심 식사였다. 그날 오전 합참에 처음 올라온 보고 내용은 ‘적함이 불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측 피해는 보고가 안되니까 승전한 줄 알고 합참은 박수치고 다 밥 먹으러 가버렸다. 그런데 청와대에 있는 몇몇 장교들이 조사를 해보니 사건 발생 이후 2시간이나 더 지나서 아군의 피해가 있다는 것이 파악됐다. 이건 김대중 정부의 치명적인 위기관리 실패였다. 그런데 정부가 서해에 일부러 우리 병사들 죽으라고 내몰았겠나? 군에는 교전 수칙과 작전 계획이 있다. 또 우수한 함정과 자동화된 사격 장비도 있다. 이렇게 깨질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 사건이 벌어진 이유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때문이 아닌 해군의 기강 문란 때문이었다. 
   당시 아군 고속정 2척은 적이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면서 시속 6노트로 기동하고 있었다. 적과 대치하면 시속 30노트에 육박하는 돌격 기동을 해야 한다. 그러다가 불과 150미터 거리에서 함정이 적이 쏜 포에 명중되고 승조원 28명 중에 6명 사망자를 포함, 24명이 사상됐으며 배는 가라앉았다. 이 사실이 보고가 안 된 것이다. 이후 청와대 국정상황실을 통해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보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군의 작전 기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다 드러났다. 당시 합참의 작전본부장이 훗날 MB 정권에서 장관이 된 이상희,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남재준이었다. 이들은 이 사건에 대해 조사한 국정상황실 장교에게 “해군이 까불다가 다친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상황이 자세히 드러난 보고서는 이후 국정상황실장에게 전달됐다. 당시 국정상황실장은 새정치연합 전병헌 의원이었다. 그리고 그 보고서는 박지원 당시 비서실장에게 갔다. 보고서에는 해군의 실수가 기록돼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해군 출신들이 당시 정권이 자신들을 죽였다는 식으로 황당하게 사실을 바꿔치기 해버린 것이다. 당시 이 보고서를 받았던 박지원, 전병헌 의원은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이에 대한 방어나 해명을 한 적이 없다. 팩트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해명도, 방어도 하지 않은 채 싸움을 포기하고 투항해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안보 이슈를 어설프게 제기하다가 역풍을 맞은 것이다. 이길 수 있는 싸움도 피하다가 진다는 것이다. 역사의 진실에 등을 돌린 것은 민주당-새정치연합 자신들이다. 자기 스스로가 지키지 않는 가치를 남이 지켜주길 바라고, 이걸 국민보고 지지해달라고 하니 이게 말이 되나?

 

 프레시안 : 대선 당시 NLL 문제와 관련, 문 후보가 남북정상회담 대화 내용도 몰랐고 협상 과정도 몰랐던 것은 캠프 내에 전문가가 없었다기보다는 이 논쟁을 정확히 규명하기 위한 정치적 의지가 없었다는 것 아닌가?

  김종대 : 한 번도 TF 같은 것을 만들어서 새누리당의 의도와 방향을 분석해본 적이 없다. 경험자들의 팩트를 누군가가 정리해 준 적이 없다. 새누리당으로서는 선거에서 참으로 상대하기 딱 좋은 당이다. 사실 문 후보한테 이 책임을 다 물을 수도 없는 것이 그는 2007년 정상회담에 들어가질 않았다. 막상 정상회담에 들어간 것은 이재정 당시 통일부 장관, 대화록 작성은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 대화록이 어디 있는지 밝혀내야 하는 사람은 대통령 기록관장, 홍보수석 등 기록물 책임자들이다. 이런 책임자들과 더불어 팩트를 잘 알고 있는 서훈 국정원 3차장도 당시 대선 캠프에 있었다. 팩트를 아는 사람은 넘쳐났다. 단지 문 후보에게까지 팩트가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다. 

 

  프레시안 : 팩트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도 지키지 못하면서, 단순히 안보적인 측면에서 여당과 비슷해지려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김종대 : 그러면서 대선 캠프 당시에는 자리싸움은 아주 치열했다. 누가 외교 안보를 주도하느냐, 자문단은 누가 이끄느냐, 차기 정권에서 청와대 수석은 누구고, 장관은 누가 가느냐 등등 경쟁과 다툼이 심했고, 목소리 큰 특정한 사람들이 주도했다. 좋은 정보를 나 혼자 독점해서 후보한테 줘야 그걸로 좋은 점수를 딸 수 있다는 사심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햇볕정책이나 빌리 블란트의 긴장 완화 정책을 보면 지도자가 장기적인 일관성을 갖고 불굴의 신념과 용기를 발휘하는 주도세력이라는 것이 있을 때 그 정책도 역사 속에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새정치연합에는 그게 없다.

 

 변화된 남북관계 읽지 못하면 야당에 미래 없다

 

  프레시안 : 그런데 지금 야당에는 김대중-노무현이 추구했던 노선을 안고갈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김종대 : 그렇기도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때와 지금의 남북 상황이 달라진 측면도 있다. 일례로 서해 같은 경우는 완전히 상황이 바뀌었다. 노무현 정부 때만 해도 서해에 저렇게 많은 공격무기가 들어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지금은 서해 NLL을 중심으로 무기가 매우 많이 들어갔고 분쟁 잠재 요인들이 전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이제 분쟁이 구조로서 정착돼있다. 이런 와중에 서해가 남북간 정치적 급소가 됐는데, 과거 서해 평화협력지대라는 도그마를 지금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지는 신중히 따져봐야 한다. 사드와 노동 미사일이 오르내리는 것도 남북간 군비 경쟁의 단계가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다. 우선 현재 이 상황에서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면밀히 평가해야 한다. 그렇다면 서해 NLL과 관련된 입장을 그대로 고수할 것인지, 수정할 것인지 아니면 더 나은 대안을 가져갈 것인지 고려해봐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찰은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서해평화협력지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하면 진보 진영의 적이 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북한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백령도, 연평도에 공격 무기가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자신의 심장부 앞에 공격무기를 겨누고 있고 서해의 북한 항구는 사실상 NLL로 봉쇄되어 있는데 숨이 막혀 어떻게 사나?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의 G20 정상회의나 인천 아시안게임이 벌어질 때 서해가 얼마나 신경이 쓰였나? 이젠 서해의 안보로 인한 국가의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남북관계가 조금만 틀어져도 서해부터 신경이 쓰인다. 이래서야 어떻게 서해안 시대를 말할 수 있겠나? 지금 서해는 과거와 같은 꽃게잡이의 문제를 이미 초월했다. 완전히 새로 검토해야 한다. 지금 야당이 해야 될 일은 국가의 외교안보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진단하면서, 미래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최고의 전략가들을 결집하여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리지 말고 대국적(大局的) 관점에서 국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역량을 준비해야 한다.   

 

  프레시안 : 야당이 여당 따라가기만 하고 있는 상황이 문제지만, 여당이 안보 문제에 대처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예를 들어 최근 논란이 됐던 사드의 한반도 내 배치 문제에서 여당이 대처한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유승민 원내대표는 사드 도입을 당론으로 채택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인 바 있다. 

  김종대 : 무지의 소치다. 작전계획 5027에 의하면 한반도 유사 시 미국 증원군의 전투기가 3000대다. 물론 정말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일단 공식문서에 나와 있는 수치가 이렇다. 그리고 남한 전투기 400대, 일본 전투기 300대, 북한 전투기는 600대 정도가 전쟁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 좁은 한반도 상공에 작전하는 항공기가 5000대 정도가 된다는 의미다. 여기에 조기경보기, 폭격기, 각종 항공자산이 또 투입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드는 어떻게 발사해야 하나? 이 항공기들은 다 비켜줘야 하나? 작전 영역이 중첩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드를 발사하겠다고 초기 항공 작전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전쟁이 지구전,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이 발생한다. 단기에 전쟁을 종결하려면 항공 작전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런데 그 중요한 시기에 사드라는 무기체계 하나를 가동시키기 위해서 항공작전 골든타임을 상실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한반도 작전계획 전체를 다시 조정해야 하고, 공역관리, 지휘통제의 복잡성을 해결해야 한다.

 

  프레시안 : 말씀을 들어보니 지금 사드 도입 논의가 군사 작전 전체를 생각해서 짜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우리 군 내부에서는 사드에 대한 논의가 없었나?

  김종대 : 지난 5년 간 이 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협의체가 한미 확장 억제 위원회라는 조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단 한 번도 사드 문제가 의제에 오른 적이 없다. 확장 억제력은 미국이 제공하는 핵 우산과 미사일 하층방어인데 사드 배치는 고층 방어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미국 MD에 들어간다는 것은 고층 방어를 같이 한다는 것이고 이는 검토 대상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사드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드 문제가 불거지게 된 데에는 사실 주한미군사령관의 역할이 컸다. 커티스 스캐퍼로티 사령관은 지난해 10월부터 본인이 공개 강연에서 사드를 요청했다고 밝혔고 최근에 보도자료를 배포해 5개 지역의 부지 조사를 했다고 발표했다. 사드 배치에 대해 미국에 요청한 적도, 미국과 협의한 적도, 계획도 없다던 한국 정부의 입장과 배치되는 행태다. 주한미군사령관이 하나의 독자적인 정부처럼 움직인 것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은 한미연합사령관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뿐만 아니라 한국 대통령의 부하이기도 하다. 그런데 양국 정책에 반대되는 발언을 하고 다녔다. 한국의 국군 통수권이 처참하게 우롱당한 것이다.

 

  프레시안 : 주한미군사령관이 이렇게 내키는대로 발언하도록 내버려둬도 되는 것인가?

  김종대 : 그게 과거 정부와 지금 정부의 다른 점인데, 예전에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에서 돌출 발언을 하면 정부는 바로 미국에 항의했다. 어떤 때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리온 라포테 연합사령관이나 그 뒤에 부임한 비비 벨 사령관은 한국 정부의 항의를 받았다. 심지어 비비 벨 사령관에 대해서는 정부가 아주 강도가 센 항의 서한을 작성했다. 이를 워싱턴에 있는 우리 대사관에 전달해서 미국 국방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 강해서 주한 미 대사가 전달을 못하고 대신 말로 했다고 할 정도였다. 나중에 그 편지 내용이 비비 벨 사령관 귀에 들어갔는데, 그가 군 생활 30년 만에 이런 수모는 처음 당해본다고 이야기 할 정도였다. 비비 벨 사령관은 당시 한국 정부가 펜타곤에 ‘주한미군사령관을 교체해 달라’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이렇게 나서다 보니, 그 뒤에 주한미군사령관의 돌출 발언이 싹 사라졌다. 박근혜 정부는 그걸 못한다.


2015년 한국에 필요한 안보는?

 

  프레시안 : 여야를 막론하고 남북문제와 관련해서 현실적이면서도 힘있는 정책을 구사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없어지지 않았나

  김종대 : 심리학자인 셀리그먼이 한 실험 중에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이론이 있다. 개를 가지고 실험을 한 것인데 개를 묶어놓고 전기충격을 준 뒤 이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후 24시간 뒤에 똑같은 실험을 진행했다. 이번에는 담을 넘으면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하지만 이 개는 담을 넘지 않고 전기 충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무기력이 학습된 것이다. 새정치연합의 외교․안보의 무능력은 보수정권 7년 동안 학습된 결과다.  
  야당이 무기력하니까 안보를 망치는 새누리당을 비판하지 못한다. 새누리당 안보의 문제점은 우선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항상 안보 정책에 실패했지만 왜 실패했는지 질문을 받는 것은 새누리당이 아닌 야당이었다. 두번째 문제점은 안보는 자기들만 해야 한다는 ‘독점의식’이 강해졌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안보에 여야가 없다고 하지만, 독점화, 특권화, 성역화가 진행됐다. 그래서 세 번째 문제점으로는 혁신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전쟁에 지는 한이 있더라도 혁신해서는 안 돼. 지금 기득권을 건드리면 안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이 안보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런 안보는 준비되지 않은 전투원을 최전방으로 밀어내서 기어이 피를 흘리고 오는 안보 실패에 직면한다. 이것이 새누리당 식의 안보다. 그러면 새정치연합은 어떻게 안보 정책을 추진해나가야 할까? 우선 안보 행보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국민의 안전을 생각하고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딨나? 새정치연합이 해나가야 할 안보는 정상화 차원의 안보,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안보다. 안보의 주주이자 고객인 시민들, 안보 주권자인 시민에게로 안보를 되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안보의 원형과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게 바로 야당이 해야 할 안보고 그것이 합리적인 이미지와 논리와 대안으로 구축되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야당에서는 진보적 안보주의, 개혁적 안보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눈을 떠야 한다. 국가 불안에 대한 국민의 우려가 너무 커졌기 때문에 이것을 피해갈 수 없다는 객관적 현실을 야당이 인정할 때가 왔다. 더불어 갈등과 불안을 창조적이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적극적 평화주의, 이는 적정 군사력과 예방외교를 전략적으로 결합하는 능력이다. 이게 바로 야당의 핵심가치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중견국가로서 평화와 번영의 교량이 되느냐, 아니면 냉전식 대결구조에 함몰되어 강대국 정치의 희생물이 되느냐를 가늠하는 국가의 중차대한 전략적 상황이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 우리가 도모해야 할 국가이익이 무엇이냐를 분명하게 밝히고 작금의 논쟁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밝히는 힘찬 정치인을 우리는 필요로 한다. 여기에는 신념과 확신, 불굴의 의지, 합리적이고 전문성 있는 대안이 준비되어야 한다.

 

   디펜스21+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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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목에 줄 묶고 행진 보장 요구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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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5/05/02 10:34
  • 수정일
    2015/05/02 10:3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옥기원·김민혜·오민애·허수영 기자

최종업데이트 2015-05-02 08:54:35 이 기사는 현재 건 공유됐습니다.

세월호 범국민철야행동 참가자가 2일 새벽 서울 종로 북인사마당 앞에서 경찰에게 연행되고 있다.
세월호 범국민철야행동 참가자가 2일 새벽 서울 종로 북인사마당 앞에서 경찰에게 연행되고 있다.ⓒ양지웅 기자
2일 오전 8시30분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목에 줄 묶고 행진 보장 요구

밤새 청와대로 가겠다며 경찰과 대치했던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목에 줄을 묶고 행진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이날 새벽 4시경 경찰은 안국동로터리에서 문화제를 하던 시민들과 유가족 800여명을 북인사마당 인도로 밀어올렸다. 이 와중에 일부 유가족들은 길 건너편 풍문여고 입구 인근에 모여있었고 일부 유가족들은 북인사마당으로 함께 밀려들어갔다.

이후 경찰과 시민들의 대치가 몇 시간째 유지됐다. 통행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가족들은 풍문여고 입구에 모였고, 오전 6시30분께 청와대로 가겠다고 행진에 나섰다.

애초 가족들은 전날인 1일 낮 경찰에 연행된 유가족을 풀어주면 광화문농성장으로 이동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으나, 경찰의 강압적 태도에 항의하며 청와대로의 행진에 나선 것. 경찰과 대치한 가족들의 목에는 노끈이 묶여있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5월 2일 새벽, 광화문 광장으로 가게 해달라며 서로의 목에 줄을 걸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5월 2일 새벽, 광화문 광장으로 가게 해달라며 서로의 목에 줄을 걸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민중의소리

경찰이 가로막자 1시간여 앉아서 연좌농성을 벌였던 유가족들은 오전 8시30분 현재 행진 보장을 요구하며 다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한편, 전날 노동절 집회에서부터 세월호 범국민철야행동까지 연행된 인원은 40여명에 이르며, 세월호 유가족 1명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일 오전 4시

세월호 희생자 가족·시민들, 인사동에 고립돼...경찰, 캡사이신 쏘며 밀어붙여

세월호 범국민 철야 행동' 문화제를 진행하던 유가족과 시민 800여명이 수천명의 경찰에 또다시 고립됐다. 경찰이 참가자들을 도로 한쪽 구석으로 모는 과정에서 유가족과 경찰 간 강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전 2시30분께 경찰은 안국역로타리 차벽 앞에서 문화제를 진행하던 철야 행동 참가자들을 방패로 밀어붙였다. 유가족이 나서서 막았지만 경찰은 캡사이신을 뿌리며 참가자들을 인사동 방향 인도로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이어졌고 전명선 가족협의회 위원장 등 유가족들은 얼굴을 겨냥해 캡사이신을 뿌린 경찰에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폭력경찰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강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오전 3시 50분 현재 유가족들과 시민 800여명은 경찰에 둘러싸여 고립된 상태다.

2일 오전 2시 20분

세월호 희생자 가족·시민들, 밤샘 행사 진행중

새벽 2시가 넘는 시간에도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를 촉구하는 시민들의 철야 행동이 이어졌다.

서울 종로구 안국역로타리 경찰 차벽에 고립된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 800여명은 범국민 철야 행동을 하며 시행령 폐기를 거듭 촉구했다.

경찰과 시민들의 충돌은 2일 오전 12시를 넘어서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철야 행동 참가자들은 경찰 차벽 앞에 앉아 자유발언, 율동 등의 철야 문화제를 진행하고 있다.

앞서, 전날 오후 11시 50분께 경찰이 발사한 캡사이신을 섞은 물대포를 맞은 40대 초반 남성이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실신해 응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다.

오후 11시 00분

경찰, 세월호 가족들에 캡사이신 섞은 물대포 무차별 난사

경찰이 오후 11시께 안국로타리에서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시도하며 대치하던 세월호 가족들과 시민들에게 캡사이신을 섞은 물대포를 무차별 난사했다.

안국로타리에 모인 세월호 가족들과 민주노총 조합원, 시민 등 1천300여명은 오후 9시 25분께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시도하다가 경찰에 가로막혀 1시간 30여분 간 대치를 벌였다.

경찰이 지속적으로 캡사이신을 뿌리며 강경하게 대응해 피해가 속출하자 세월호 가족들이 행진 대오 앞으로 이동했다. 한 유가족은 “경찰이 시민들에게 캡사이신 뿌리는 모습을 우리 가족들이 지켜볼 수만은 없다”며 “우리가 이제 맨 앞에서 행동하자”고 말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캡사이신을 섞은 물대포를 가족들이 앞장선 대오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난사했다.

물대포를 맞은 가족들과 시민들은 얼굴을 움켜쥔 채 고통을 호소했다. 물대포를 뒤집어쓴 취재.촬영기자들도 속출했다. 물대포를 맞은 시민들도 연신 고개를 숙이고 기침을 하는 등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시민들은 "우리는 물러서지 않겠다. 우리는 잊지 않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은 물대포에 캡사이신을 섞은 사실을 시인했다. 경찰 관계자는 “현장 지휘관 판단으로 캡사이신을 물대포에 섞었다”고 말했다.

오후 10시 30분

세월호 가족-민주노총, ‘시행령 폐기’ 청와대 행진 시도

안국로타리에 모인 세월호 가족들과 민주노총 조합원, 시민 등 1천300여명이 오후 9시 25분께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시도하다가 경찰에 가로막혀 대치 중이다.

이들이 밀착하자 경찰은 차벽으로 길을 차단한 채 캡사이신을 난사하며 행진을 저지했다. 또 세월호 가족들과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난사하며 행진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들은 캡사이신을 맞고, 물대포를 맞아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있다.

행진 대오는 “시행령을 폐기하라”, “불법 차벽 제거하라”, “폭력 경찰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맞섰다.

경찰 관계자는 “불법 행위를 채증하고 있다. 경찰관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사법 처리하겠다”며 경고 방송을 수차례 내보냈다.

한 시민은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이 제대로된 진상조사를 하자고 말했는데, 정부는 독립성을 방해하는 특별법 시행령으로 유가족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며 “기필코 청와대를 가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시행령 폐기에 대한 답을 듣겠다”고 말했다.

행진에 앞서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길게 말씀드릴 것 없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부와 사회를 향해 외쳐야 할 소리가 있다”며 “아무리 경찰이 차벽으로 막아도 물리칠 수 있다. 함성을 지르고 나아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후 7시 50분

세월호 유가족·민주노총 조합원, 안국로타리 집결

서울 도심 곳곳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오후 7시 50분 현재 속속 세월호 가족들이 있는 안국로타리로 집결하고 있다.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하다가 낙원상가 인근, 현대건설 빌딩 앞에서 가로막혔던 조합원 4천500여명은 종각역 인근에 모여 6시 30분께 정리집회를 진행했다.

정리집회를 마친 이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며 7시 10분께부터 전철과 도보 등으로 안국로타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일부 조합원들은 도보로 이동하다가 경찰에 가로막히기도 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막힌 곳마다 격렬하게 항의했으며 우회를 하는 등의 방법으로 로타리로 향했다.

안국로타리에는 세월호 유가족 100여명과 민주노총 조합원, 시민사회단체 회원 등 1,000여명이 운집했으며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세월호 시행령 폐기' 등을 요구하며 범국민 철야 농성에 돌입할 예정이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정부가 유가족들의 요구에 귀를 닫는 것고 모자라 정부 시행령을 통해서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있다"며 "정부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능 유일한 것은 국민들의 힘이다. 오늘 철야행동을 통해 진상규명을 이루기 위한 뜻을 모으자"고 말했다.

전명선 4.16가족협의회 대표는 오후 7시 30분께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박근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1인시위에 돌입했다. 전 대표는 “시민들과 다 같이 여기까지 오지는 못했지만 오늘 밤 더 힘을 내서 박 대통령에게 우리의 요구와 물음에 답을 해달라고 요청하자”고 말했다.

한편, 이날 노동절 집회 후 거리행진 과정에서 12명이 연행됐다.

오후 5시 40분

세월호 가족-민주노총 조합원, 안국역 사거리 진출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세월호 참사 가족들이 오후 5시 40분께 안국역 사거리로 진출했다.

민주노총 조합원,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은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안국역으로 이동해 각 출구를 통해 거리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이 안국역 전 출구를 가로막고 있었으나, 4번 출구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한 조합원이 대치 끝에 경찰 병력을 뚫고 거리로 나왔다. 현재 각 출구에서 조합원들이 경찰과 대치를 하고 있고, 속속 안국역 사거리로 진입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안국역 사거리로 집결 중이다.

현대건설 빌딩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건설노조 조합원들은 종로3가역으로 위치를 옮겼다. 이들 중 일부 인원들은 지하철을 이용해 안국역으로 이동했다.

인사동 입구에서 잠시 경찰과 충돌했던 금속노조 조합원들은 반대 방향으로 이동해 공평동 인근에서 또다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오후 5시 10분

민주노총 조합원, 도심 곳곳에서 경찰과 대치...캡사이신 난사

서울광장에서 행진에 나선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오후 5시 10분께 종로구 인사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도심 곳곳에서 경찰과 대치 중이다.

선두에서 출발한 전국건설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종로3가와 창덕궁을 거쳐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하려다 안국역 인근 현대건설 빌딩 앞에서 경찰에 막혔다.

금속노조 조합원들도 종로2가를 거쳐 인사동길을 지나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시도했으나 종로경찰서 인근 인사동길 입구에서 저지당해 대치를 벌였다. 대치가 격해지자 경찰은 캡사이신을 난사했다.

한 조합원은 "최저임금 1만원을 요구하고 노동자 다 죽이는 구조개편을 반대하는 것이 무엇이 무섭길래 최루액을 뿌려대는냐"며 "우리는 박근혜 정권과의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낙원상가를 거쳐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미리 설치해놓은 차벽에 가로혔다.

오후 4시 25분

민주노총 5만여명, ‘세월호 시행령 폐기하라’ 가두행진 나서

1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진행된 ‘세계 노동절 대회’를 마친 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 5만여명이 오후 4시 25분께부터 가두행진에 나섰다.

 

 

 

이들은 전국건설노동조합을 선두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 폐기하라’, '최저임금 1만원으로 인상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을지로 방향 행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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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 해직 언론인들의 잃어버린 시간

 
[카드뉴스] 이명박근혜 정권의 부끄러운 유산… "자유 언론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
 
입력 : 2015-05-01  17:10:38   노출 : 2015.05.01  17:47:21
정철운 기자 | pierce@mediatoday.co.kr    

 

5월 1일은 노동자의 날입니다. 기자‧PD란 이름의 언론인들도 노동자입니다.

언론노동자의 근로조건에는 보도공정성이 포함됩니다. 어떤 외압도 거부하며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가 언론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근로조건입니다. 언론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위해 싸우다 부당해고를 당한 동료들이 있습니다. 언론현장에 함께 있어야 할 우리의 선‧후배입니다.

미디어오늘이 노동절을 맞아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다 해고당한 언론노동자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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