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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미국 VS 중국의 희생양 될 수 있다"

 

[중국 '왕서방'에 잠식된 제주도·④] 이해영 한신대 교수 인터뷰

허환주 기자 2015.02.05 06:25:46
 
2010년 2월부터 부동산 투자이민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제주도는 2014년 연말 기준으로 여의도의 2배가 넘는 땅이 중국인 소유라고 한다.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시스템을 통해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있도록 조절한다면 아무 문제점도 생기지 않지만 지금의 제주도는 그렇지 못한 게 사실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중국인 부동산 매입은 관광단지인 제주도 경관은 물론, 이곳에서 사는 지역주민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체 제주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지난 연말 프레시안에서는 2박3일간 제주도 현장 취재를 다녀왔다. 제주도의 상황이 어떤지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국경 없는 자본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다. 제주도에 들어오는 중국자본도 마찬가지다. 자칫 중국자본에 제주도가 잠식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최근 급속도로 늘어난 부동산 매입과 관광객의 증가로 제주도 내 공동체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자본이 제주도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옹호론도 나오고 있다. 그들이 제주도에 투자하는 돈으로 관광산업이 발전한다는 이야기다. 또한, 그들이 제주도 내 부동산을 매입하고 호텔, 리조트 등을 운영하면서 내는 세금으로 제주도의 재정이 튼실해진다고 주장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의 문제점을 선도적으로 지적해온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에게 제주도에 유입되는 중국자본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들었다.

  

 

▲ 이해영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이해영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중국인의 제주도 소유땅이 1%밖에? 사는 곳을 봐야 한다" 


프레시안 : 제주도 내에 중국자본 유입 속도가 빠르다. 그 규모는 얼마나 되나.

  

이해영 : 중국자본은 제주도라는 고립되고 제한된 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자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전체 중국자본 중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비율은 1%에 불과하다. 거기서 제주도에 들어가는 것은 10분의 1 정도나 될까. 그런데도 지금의 '임팩트'가 있다.  

  

프레시안 : 중국자본은 제주도에서 부동산을 상당히 매입하고 있다. 우근민 제주지사 시절 2010년 부동산투자이민제가 도입된 이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중국인의 토지소유가 늘어났다. 2014년 12월 기준으로 여의도 2배 정도 되는 크기의 제주도 땅을 중국인이 소유하고 있다. 부동산투자이민제도란 기준금액 이상을 투자한 외국인에게 국내 거주자격을 주고 5년이 지나면 영주권을 허용하는 정책이다. 당시 이민법을 도입할 때, 제주도는 기준금액을 5억 원으로 정했다.  

  

이해영 : 5억이면 조금 괜찮은 빌라형 주택을 살 수 있는 돈이다. 결국, 누구나 돈이 조금만 있으면 제주도에서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5억이라는 기준은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 거품에서 보자면 아주 낮은 기준이다. 부동산투자이민제도를 하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5억은 적다.  

  

프레시안 : 그나마 우근민 지사 이후 취임한 원희룡 지사가 지난해 10월 투자이민제도를 손질했다. 기준금액 5억에다 지역개발채권 5억을 더 매입하도록 하는 방안과 투자이민제도 적용을 기존 제주도 전 지역을 대상으로 했던 것에서 관광단지, 관광지, 유원지 등으로 한정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이해영 : 우근민 지사 시절, 제주도는 총면적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작다며 중국자본의 부동산 매입이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이었다. 실제 수치화해 보면 매우 작다. 현재 제주도 땅의 약 1% 정도를 중국인이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총면적에는 한라산 등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도 포함돼 있다. 중산간 지역은 여전히 인구 밀도가 낮다. 제주도민은 대부분 해안지역에 몰려 산다. 중국인들이 사들이는 곳은 매우 길목이 좋고 경관 좋은 곳이다. 아니면 서울 명동과 같이 사람이 많이 다니는 시가지다. 콕콕 찍어서 들어오고 있다. 그런데도 전체 면적에서 얼마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안이하기 짝이 없다.  

  

우근민 지사는 외국자본은 무조건 좋다는 논리로 우후죽순 중국자본을 받아들였다. 제주도는 관광산업이 중요하다. 서비스산업이 발전해야 관광산업도 발전하기에 서비스시설 투자비용을 외국자본에서 도움받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은 낡은 1970년대 개념이다. 그것을 맹신하면서 재탕한 셈이다. '깜깜이' 투자를 받은 거다. 그 결과, 우리가 외국자본을 투자받을 때 전제로 하는 ‘그린필드'형(국외 자본이 투자 대상국의 용지를 직접 매입해 공장이나 사업장을 새로 짓는 방식의 투자)과는 아무 관계 없는 외국자본이 들어오고 있다. 고용 창출, 조세 창출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묻지마 투자'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부동산 취득세 한 번만 내면 되는 식이다.

  

"중국자본으로 대기업, 토착부동산업자 등만 배불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하지만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중국자본이 유입되면 제주도 지역 경제가 살아난다고 주장한다.

 

이해영 : 반대다. 상당수 일반인이 피해를 보고 있다. 중국자본이 제주도에 들어오면서 제주 땅값이 올라버렸다. 자연히 제주도에 내려와 카페나 펜션 운영 등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던 이들이 직격타를 맞았다. 일찍 내려온 사람은 좀 낫고, 바람을 타고 내려온 사람들은 주식에서 ‘상투머리’ 잡는 식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

  

그다음으로 제주도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이다. 잘 장사하다가 밀려오는 중국인 때문에 쫓겨나는 식이다. 중국 관광객이 늘어나니 건물주가 이들을 내보낸다. 자기가 직접 상점을 운영하거나 대기 중인 중국자본에 판다. 중국 관광객이 늘어나서 제주도 관광산업과 서비스업이 호황을 누린다고 하지만 그것도 사실과 다르다. 중국여행사들은 중국관광객들이 호텔에 숙박할 때, 대부분 자기네들끼리 네트워킹된 곳으로 유도한다. 아니면 중국자본이 직접 짓거나 매입한 호텔 등에 이들을 데리고 간다. 자연히 제주도 국내 관광산업은 중국자본 특수효과에서 혜택받는 게 별로 없다. 결국, 중국자본으로 돈을 버는 이들은 건물을 보유하는 토착 부동산업자, 아니면 대형 호텔을 소유한 대기업 등 특수한 계층이다.

  

프레시안 : 최근 발표한 내용을 보면 제주도를 방문하는 중국관광객 10명 중 6명이 제주도 대형 면세점을 이용한다고 한다.  

  

이해영 : 신라, 롯데 등 대기업 면세점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지금 제주도에서는 면세점을 한창 증축 중이다. 중국자본이 늘고 중국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국내 대기업만 이윤을 버는 구조다. 초대형 유통자본만 배를 불리고 있다. '중국특수'라는 것은 일반 시민에게는 관계없는 일인 셈이다.  

  

프레시안 : 제주도에 중국자본이 일정 수준 이상 유입될 경우, 제주도는 중국 입김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해영 : 제주도는 G2(중국, 미국)의 헤게모니 각축 양상을 가장 표본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군사 안보적으로 제주도는 지정학적 요충지다. 1930년대 중일전쟁 당시, 난징대폭격을 위한 폭격비행기가 제주도를 거쳐서 갔다. 제주도에서 난징까지는 급유 없이 한 번에 갈 수 있는 거리다. 지금 제주 강정마을에 만들려는 해군기지는 사실 미국에서 요구하기 때문에 짓는 것이다. 목적은 이지스함을 정박할 해군기지다. 이 해군기지가 지어지면 미국은 중국의 목에 칼을 겨누는 형국이 된다.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의 90%는 그곳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곳에 이지스함 몇 대 가져다 놓으면 미국은 제대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점이 정치‧군사적 측면이라면 통상‧경제적 측면에서 제주도는 중국의 휴양지, 중국자본의 저가 휴양지 내지 종속된 관광지인 셈이다. 과거 재패니즈머니가 하와이를 잠식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만약 제주도가 중국자본에 종속되는 순간, 중국은 해군기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자기네들이 제주도에 투입된 자본을 다 빼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나. 한국 정부 정책이 제대로 실행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결국, 제주도가 정치적으로는 미국의 입김, 경제적으로는 중국의 입김을 받는 식이다.

  

제주도를 벗어나 한국 경제를 봐도 중국자본의 유입은 상당하다. 2012년 기준으로 중국은 국내 직접투자에 16억 불을 썼다. 반면, 주식시장에는 168억 불을 투자했다. 투기성 자금인 셈이다. 주식시장에서 제일 큰 손이다. 그 돈을 빼버리면 국내 중시는 매우 골치 아프게 된다. 더구나 중국자본은 중국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중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문제 해결? 한 방에 해결 어렵다. 유효한 정책을 단계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프레시안 : 지금 상황에서 한국 정부, 그리고 제주도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겠나. 무턱대고 중국자본 유입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해영 : 제주도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제주도민의 생각이 중요하다. 그다음 정부도 긴 안목으로 제주도를 어떤 섬으로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플랜이 있어야 한다. 사실 지금 상황이 워낙 안 좋기에 무엇인가 '빵' 때리면 상황이 변화하는 구조가 아니다. 유효적절한 정책을 단계적으로 적용하는 방법 말고는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중FTA도 체결되지 않았나. 이런 상황 속에서 단계별 정책이 한중FTA 하에 어떻게 약발이 먹힐지도 검토해야 한다. 예를 들어 중국자본에 대해서 토지소유를 제한하면 일종의 차별이다. FTA 위반이다. 더욱 복잡해지는 셈이다. FTA 시대이기에 새로운 규제는 바늘구멍이 됐다. 정확하게 딱 찔러야 한다.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는 이유다.  

  

프레시안 : 대다수 제주도민이 중국자본의 유입으로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 혜택은 제대로 받지도 못하면서 피해만 입고 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없겠나.  

  

이해영 : 최근 들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대부분 도시에서 '시티 택스'는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그리고 미국 뉴욕이나 텍사스에서도 호텔세(Hotel Occupancy Tax)란 이름으로 시티 택스를 받고 있다. 이 시티 택스를 제주도에도 도입해, 그 수입을 제주도민에게 나눠주는 방법을 고민하면 좋을 듯하다. 제주도는 제주지사가 세목을 정할 수 있기에 시티 택스가 가능하다. 유럽의 경우, 관광도시에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5유로를 받는다. 제주도도 이런 식으로 ‘인두세’를 받아 제주도민에게 환원하는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말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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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국방위 "미국 것들과 더는 마주앉을 필요 없어"


"선 변화 있어야 대화 있다는 헛소리 줴쳐대지 말아야"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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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04  11: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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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국방위원회가 4일 성명을 발표, 대미 입장을 밝혔다. [캡쳐-노동신문]

 

"날강도 미제가 우리의 사상을 말살하고 우리의 제도를 '붕괴'시키려고 발악하는 한 미국 것들과 더는 마주앉을 필요도, 상종할 용의도 없다는 것이 우리 군대와 인민이 내린 결단이다."

4일자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북한 국방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통해, 미국이 새해 들어 '소니해킹사건'을 빌미로 '대북제재 행정명령'을 발동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 붕괴'를 언급한 데 이어 3월초 '키리졸브/독수리군사연습' 강행 방침을 밝히는 등 대결 노선을 강화함에 따라 "위임에 따라 우리 군대와 인민의 원칙적인 입장을 내외에 천명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지난달 31일 노동신문에 소개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해.공군 '미 항공모함 타격훈련' 현지지도 발언을 되풀이한 것이다.

성명은 "앞날의 비운을 안고 있는 날강도 미제가 자기의 가련한 처지도 망각하고 우리를 '붕괴'시킨다고 떠들어대는 한 우리 군대와 인민은 미국을 상대로 더는 마주앉을 필요도 없고 상종할 용의도 없다는 것을 미합중국의 오바마 행정부에 정식으로 통고하지 않을수 없다"고 밝혔다.

아울러 "'선 변화'가 있어야 대화가 있다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세계 면전에서 더이상 줴쳐대지('이런저런 소리를 마구 하다'는 북한식 표현) 말아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6자회담 재개의 조건으로 한미일이 요구하는 비핵화 사전조치를 수용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북한은 조건없는 6자회담 재개를 요구하고 있다.

성명은 "우리에 대한 오바마 일당의 비방수위가 높아지는 것만큼, 악착한 제재와 압박의 도수가 강화되는 것만큼, 우리를 겨냥한 전쟁연습규모와 범위가 확대되는 것만큼 정의의 대응도수를 무한정 높여나가게 될 것"이고, "우리 군대와 인민의 정의의 대응은 미합중국에 가장 쓰디쓴 참변을 들씌우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라고 했다.

지난 31일자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사회주의제도를 그 무슨 '변화'의 방법으로 붕괴시킬 것이라고 공공연히 짖어대는 미친개들과는 더는 마주앉을 용의가 없다"고 밝혔다. "우리는 미제가 원하고 택하는 그 어떤 형태의 전쟁, 작전, 전투에도 대응해줄 수 있으며 상용무력에 의한 전쟁, 핵전쟁을 포함한 그 어떤 전쟁에도 대응할 만단의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도 했다. 

대조선적대시정책에 환장이 된 날강도 미제는 기필코 종국적멸망의 쓴맛을 보게 될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성명

악명높은 백악관과 펜타곤이 극도의 대조선대결광증에 들떠있다.

새해벽두부터 오바마가 직접 그 무슨 《대통령행정명령》으로 새로운 대조선《추가제재》를 선포한데 이어 1월 22일에는 우리 공화국을 《가장 고립되고 가장 단절되고 가장 잔혹한 독재국가》라고 악의에 차 헐뜯어댔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시간이 흐르면 그런 정권은 무너질것》이라고 줴쳐대며 싸이버전에 의한 정보류입으로 하루라도 더 빨리 우리를 《붕괴》시켜야 한다고 악설을 퍼부어댔다.

련이어 미국정계와 군부우두머리들이 줄줄이 나서서 《테로지원국》재지정과 《초강도추가제재》로 우리 공화국에 대한 고립의 포위망과 압살의 봉쇄망을 더 바싹 조여보려고 광기를 부려대고있다.

《련합체제유지》를 구실로 《키 리졸브》,《독수리》합동군사연습을 포함하여 남조선과 그 주변지역에서 벌리기로 계획된 전쟁연습들을 그대로 강행하기로 작정하고 미국본토 플로리다주의 특수작전군 사령부에서 우리의 핵과 미싸일을 제거하기 위한 비밀모의를 벌린데 이어 그것을 실천에 옮길 미국남조선련합사단까지 편성한것이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날강도 미제의 시대착오적인 대조선적대시정책이 더욱더 분별없는 히스테리적인 대결광기로 번져지고있는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는 위임에 따라 우리 군대와 인민의 원칙적인 립장을 내외에 천명한다.

1. 날강도 미제의 대조선적대시정책이 분별을 잃고 극도로 포악무도해지고있는 조건에서 그것을 짓부시기 위한 우리 군대와 인민의 정의의 대응 역시 더욱더 강도높게 벌어질것이다.

한때 미국의 정책작성자들은 뻔뻔스럽게도 제놈들에게는 대조선적대시정책이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오바마는 제입을 통하여 미국의 대조선정책이 가장 악랄한 적대시정책이며 그 기본목표가 우리를 《붕괴》시키는데 있다는것을 스스로 드러냈다.

고립과 봉쇄를 통하여 우리를 질식시키려는 음흉한 속내는 이미 확인된지 오래다.

군사적압박으로 신성한 우리 령토,우리 령해,우리 령공을 강점해보려는 무모한 흉계에 대해서도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오바마의 악담으로 우리가 살아숨쉬는것자체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미제의 강도적인 야망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더는 숨길수도 감출수도 없는것이 미제의 승냥이본성이다.

날강도 미제의 대조선적대시정책이 극단의 지경에서 더욱더 횡포무도해지고있는 한 우리 군대와 인민은 우리에 대한 오바마일당의 비방수위가 높아지는것만큼,악착한 제재와 압박의 도수가 강화되는것만큼,우리를 겨냥한 전쟁연습규모와 범위가 확대되는것만큼 정의의 대응도수를 무한정 높여나가게 될것이다.

미국은 날강도 미제가 불구대천의 원쑤라는 말이 우리 나라에서는 전인민적이며 전군적인 공용어로 된지 오래며 이 땅을 통채로 달구고있는 소탕하고 박멸하자,죽음을 주자는 무서운 반미보복열기가 이제는 죄악의 총본산인 미국땅 한복판을 향해 폭풍쳐 번져가고있다는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2. 날강도 미제의 대조선군사전략이 침략전쟁도발단계에로 치닫고있는 조건에서 우리 군대와 인민의 정의의 대응은 미합중국에 가장 쓰디쓴 참변을 들씌우는데 초점을 맞추게 될것이다.

원래 미제는 흑백을 전도하고 모략과 날조로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피는데 이골이 난 강도의 무리들이다.

바크보만사건을 조작하여 윁남침략전쟁을 계단식으로 확대한 장본인도 미국이며 《대량살상무기제거》라는 모략극을 날조하여 이라크를 타고앉은것도 미국이다. 지난 세기 50년대 《남침》을 구실로 북침전쟁을 도발한 방화범도 다름아닌 미국이다.

오늘은 오바마일당이 있지도 않는 우리 《인권문제》를 날조하고 근거도 없이 《쏘니 픽쳐스》에 대한 해킹공격의 《북소행》설을 내돌리며 싸이버전으로 우리를 《붕괴》시키려고 어리석게 놀아대고있다.

때를 같이하여 미국의 핵전략폭격비행대와 핵잠수함을 비롯한 핵타격수단들이 남조선에 뻔질나게 드나들고 우리의 핵 및 미싸일제거와 《북지역에서 특별민사 작전》을 벌리게 된 미국남조선련합사단이 새로 편성된데 이어 남조선과 그 주변지역에 형형색색의 침략무력이 은밀하게 집결되고있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미국이 꾸미는 이 모든 모략과 날조,그에 따른 군사적움직임은 새로운 침략전쟁도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우리 군대와 인민은 패배만을 기록한 미국의 수치스러운 력사를 마감하게 될 종국적멸망의 마지막페지를 다른 곳이 아닌 미국땅에서 우리의 백두산총대로 보기좋게 써주기로 결심하였다.

미국이 상용무력에 의한 침략전쟁을 강요한다면 우리 식의 상용전쟁으로,핵무력에 의한 침략전쟁을 도발한다면 우리 식의 핵타격전으로,싸이버전에 의한 《붕괴》를 시도한다면 우리 식의 령활한 싸이버전으로 미국의 최종멸망을 앞당겨오자는것이 우리의 단호한 선택이다.

소형화,정밀화,다종화된 핵타격수단을 포함한 우리의 지상,해상,수중,공중,싸이버전수단들은 날강도 미제가 가질수도 흉내낼수도 없는 우리 군대와 인민의 최강의 정신력과 불굴의 사상의지,인류전쟁사가 알지 못하는 주체적인 전략전술과 독특한 전법에 의하여 적용된다는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3. 날강도 미제가 우리의 사상을 말살하고 우리의 제도를 《붕괴》시키려고 발악하는 한 미국것들과 더는 마주앉을 필요도,상종할 용의도 없다는것이 우리 군대와 인민이 내린 결단이다.

오바마일당은 입버릇처럼 힘에 의한 《압박》과 《대화》라는 《두길전략》으로 우리의 변화를 유도하고 체제의 《붕괴》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제넘게 줴쳐대고있다.

우리가 선택한 사상을 거세하고 우리가 세운 제도를 허물자는것이 미합중국이 노리는 음흉한 정책적목표이다.

최근에 들어와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오바마일당의 광기가 극단의 지경에 이르렀다.

가련한것은 조미대결사의 년륜이 70돌기를 새겨오는 오늘까지도 그처럼 덩지큰 미국이 그따위 《압박》에 손을 들거나 기만적인 《대화》에 놀아날 우리 군대와 인민이 아니라는것을 전혀 모르고있다는것이다.

더욱 기막힌것은 망조가 비낀 자기 처지,무너진 로마제국과 같은 운명이 지척에서 기다리고있다는것도 의식하지 못한채 그 누구를 《붕괴》시킨다고 희떱게 놀아대고있는것이다.

대결의 상대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면 패배는 불가피한 법이다.

앞날의 비운을 안고있는 날강도 미제가 자기의 가련한 처지도 망각하고 우리를 《붕괴》시킨다고 떠들어대는 한 우리 군대와 인민은 미국을 상대로 더는 마주앉을 필요도 없고 상종할 용의도 없다는것을 미합중국의 오바마행정부에 정식으로 통고하지 않을수 없다.

《선 변화》가 있어야 대화가 있다는 잠꼬대같은 소리를 세계면전에서 더이상 줴쳐대지 말아야 한다.

지난 조미대결사에 기록된 우리의 영원한 승리의 전통과 날강도 미제가 당한 수치와 패망의 전통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래일도 변함없이 계승될것이다.

미증유의 초강경전에 떨쳐나 날강도 미제와 결판을 낼 우리 군대와 인민의 비상한 각오와 기세는 충천하다.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쑤 미제침략자들을 소멸하자!》는 원쑤격멸의 구호를 높이 추켜들고 우리 군대와 인민이 대를 이어 노도쳐온 반미대결항로에는 단 한치의 변침도 없을것이다.

세기를 이어오며 대조선적대시정책에 환장이 되여온 날강도 미제는 미국본토 제땅에서 가장 참혹한 종국적멸망의 쓴맛을 보게 될 악몽의 그 시각이 분분초초 다가온다는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주체104(2015)년 2월 4일
평양(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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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성공과 박근혜의 행복

[손석춘 칼럼]
 
입력 : 2015-02-03  11:01:18   노출 : 2015.02.04  09:51:10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2020gil@hanmail.net    

성공과 행복. 좋은 말이다. 둘 다에 초연할 사람도 있겠지만, 힘없고 돈 없는 국민 대다수에게 성공과 행복을 아예 마다하기란 쉽지 않다.

바로 그렇기에 두 말을 대통령 후보로서 공약해 ‘뜻’을 챙긴 정치인이 있다. ‘국민 성공시대’를 내건 대한민국 17대 대통령 이명박과 ‘국민행복시대’를 내건 18대 대통령 박근혜다. 박근혜의 대통령직은 진행 중이지만, 마침표를 찍은 이명박에 대한 평가는 이미 뭇 조사에서 나타났다. 그의 역대 대통령 순위는 흔들림 없다. 꼴찌다.

하지만 당사자 생각은 다르다. 그가 800쪽 가까운 회고록을 출간했다. 스스로 회고록 말미에 자화자찬을 경계했다고 썼음에도 내용은 자찬 일색이다. 일흔이 한참 넘은 사람에게 ‘성숙’이란 말을 꺼내들기란 민망한 일이지만, 주관적 환상에 매몰되어 객관적 현실을 모르는 인간을 우리는 ‘미숙하다’고 말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숙으로 접어든다. 선인들이 ‘철들었다’고 할 때가 바로 그 순간 아니던가.

이명박 회고록은 주관적 환상의 대표적 보기다. 그는 자신이 ‘국민 성공시대’를 약속하며 당선된 사실조차 잊은 듯하다. 케케묵은 낙수효과를 내세우며 747(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을 부르댄 사실에 회한이나 성찰이 있을 리 없다. 그러기에 ‘부자감세’를 여태 부르댄다. 감세는 ‘투자와 소비를 촉진시켜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살리기 위한 세계적인 추세’였다고 언죽번죽 주장한다.  

무지의 극치다. 과연 그의 주장처럼 감세로 투자와 소비를 촉진시켜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살렸는가? 2008년에서 2013년까지 ‘대통령의 시간’을 보낸 우리 국민에게 그 물음은 한낱 우문일 뿐이다. 

회고록이 살천스레 외면한 것은 그 뿐이 아니다. 서울 용산의 철거민 참사와 쌍용차 노동자들에 대한 살인적 탄압에 대해서도 성찰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자살로 몰아간 검찰 수사도 모르쇠다. 오히려 고 노무현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 전에 ‘미국산 쇠고기 전면개방’을 해결하지 않았다며, 비난하는 투의 ‘회고’를 늘어놓았다.

대통령직 평가 이전에 인간 이명박의 민낯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더 있다. 두루 알다시피 세월호 침몰은 해운자본의 요구를 덜컥 수용해 선박연령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서 비롯됐다. 바로 그 규제 완화를 이명박 정권이 단행했다. 수학여행 길에 부푼 청소년들의 생때같은 죽음, 부모들의 저 피눈물 앞에서 대체 인간 이명박은 아무런 책임도 못 느낀 걸까.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명박 임기는 끝났지만 ‘규제 완화’와 ‘기업 친화’ 따위는 고스란히 국정 지표이기 때문이다. 후임자는 외려 한 술 더 뜨는 언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 

명토박아 두거니와 나는 대통령 박근혜가 전임자의 후안무치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박근혜는 후보시절 ‘국민 행복시대’를 내걸었다. 국민 성공시대를 내건 이명박 치하 5년 동안 성공은커녕 불행한 사람이 양산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표를 얻으려면 그 언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터다. ‘국민 행복’은 ‘국민 성공’이 그렇듯이 먹혀들어갔다. 물론,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주요기관들의 선거개입도 대통령 당선에 큰 몫을 했을 터다. 

하지만 이명박과 선을 그은 차별성은 선거와 함께 시나브로 사라졌다. 규제완화를 부르대거나 대기업을 중심에 놓고 경제 살리기를 추진하는 언행도 어금버금하다. 심지어 747 논리와 같은 474까지 주장했다. 잠재성장률을 4%, 고용률 70%를 달성해,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제시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 그것이다. 

개탄할 일이다. 대통령이 대선에서 국민에 약속한 것은 747 아류 474가 아니었다. 그가 후보 시절 내내 외친 말은 ‘경제민주화’ 아니던가. 국민 행복시대와 경제 민주화를 내걸었던 박근혜 집권 2년 동안 과연 행복해진 국민은 얼마나 될까. 경제는 얼마나 민주화 되었을까. 

   
▲ 손석춘 언론인
 

이명박에게 성찰이 전혀 없듯 현직 대통령도 그렇다면 국민적 비극이다. 이명박이 자신은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착각하듯이, 현직 대통령도 자신은 행복한 대통령이라 생각하는 걸까. 딴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통령의 표정은 자못 행복해 보인다.

하여, 정색하고 경고한다. 이명박이 자신의 성공을 약속한 게 아니라 ‘국민 성공’을 공약했듯이, 박근혜 또한 자신의 행복을 약속한 게 아니다. ‘국민 행복’을 공약했다. 국민 성공시대를 내걸고 자신만 ‘성공’한 대통령에 이어, ‘국민 행복시대’를 내걸고 자신만 ‘행복’한 대통령을 보기란 국민의 한사람으로 참을 수 없는 고역이다. 아직도 3년이나 남은 임기, 국민 행복에 조금이라도 눈 돌리기를 촉구하는 까닭이다. 이명박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이 박근혜에게 주는 산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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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정주영 신화 밑바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5> 경제 개발, 열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룬 역사적 배경으로 평준화와 교육열, 그리고 농지 개혁과 여성의 사회 활동 참여 문제를 앞에서 짚었다. 
 
서중석 : 1970년대에 와서 국가 동원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한국이 지구상에서 특이한 역사를 가진 점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중앙 집권화 문제다.
 
중세 시대에는 대부분 분권 사회였다. 일본도 그랬고 서양도 대개 그랬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중국과는 또 다르게 적어도 고려 시대 초기부터 계속 중앙 집권화 방향으로 갔다. 조선 후기에 가면 면리도 이제는 중앙 정부가 상당히 장악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제는 한국을 더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 1914년 면리제를 실시한다. (이해 조선총독부는 지방 행정 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한반도 전역의 말단 행정 구역 수를 3분의 1 정도 축소·단순화할 정도로 큰 폭의 개편이었다. '편집자') 그리고 파출소를 면 단위까지 두고 한국인을 꼼짝 못하게 한다. 특히 일제 말에 가면 한국인을 대거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일제는 정신대, 근로보국대는 물론 방공협회와 그 지회라는 것을 방방곡곡, 구석구석까지 만들어서 방공 운동이라는 걸 했다. 또 애국반 같은 것을 조직했다. 방공 운동을 펴는 것도 애국반에서 많이 했지만 이런 것들은 공출, 징용, 징병 같은 것을 하는 데도 필요했다. 하여튼 이런 모든 것은 한국 사회가 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미군정 시절에 경찰까지 완전히 중앙 집권화가 이뤄지면서 그런 경향이 더욱더 강화된다. 미군은 서울에 경무부를 설치하고 경찰 조직을 중앙에서 장악해버렸다. 경찰 중앙 집권화는 노무현 정권 때 좀 지양할 것처럼 보이더니만 안 되더라. 사실 경찰을 중앙 집권화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경찰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각 지역 치안 업무를 맡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처럼 정치에 뛰어드는 경찰이 그리 많지 않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헌병 경찰제를 실시하며 무단 통치를 했다. 헌병 경찰제는 조선주차군 헌병대 사령관이 모든 경찰 업무를 지휘·총괄하는 체제였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헌병 경찰제는 폐지됐다. 그 후 조선총독부에 경무국(이후 경무부)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서는 도지사가 경찰권을 행사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미군정도 초기에는 이 틀을 유지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말 미군정은 도지사가 관할하던 각 도의 경찰부를 서울에 있던 경무국(얼마 후 경무부로 명칭 변경)이 직접 통제하는 체제로 바꿨다. 이처럼 중앙 집권화된 경찰 조직을 만든 것은 각지에서 분출하던 변혁 운동을 힘으로 누르기 위해서였다. '편집자')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동원적 경제 발전에서 효과 발휘한 강력한 국가 동원력 
 
프레시안 : 일제 강점기에 억눌려 있던 한국 사회는 해방을 계기로 역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분단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등을 거치며 민중은 움츠러들고, 반공주의를 앞세운 국가가 국민을 일상적으로 동원하게 된다. 
 
서중석 : 이승만 정권 때도 얼마나 동원을 많이 했나. 특히 북진 통일 운동 같은 게 그랬다. 1953년 이전에도 동원했지만, 1953년 휴전이 이뤄지기 한두 달 전부터 여러 형태의 북진 통일 운동이 1959년 연말까지 쉬지 않고 일어난다. 또 이 당시엔 도지사가 순시를 나가도 학생들이 나가서 손뼉 쳐야 했다. 이건 박정희 정권 때에도 그랬다. 나도 고등학생 때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 환영을 나갔고, 베트남에 파병할 때도 여의도에 환송 나가고 그랬다. 무슨 일만 있으면 학생을 동원했다. 이렇게 동원을 많이 했는데, 그건 그만큼 국가 동원력이 강했다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에는 주민등록증이 만들어지고 향토예비군이 생겨나고 1970년대 중반에 가면 민방위가 생기고 반상회가 생기고 학원이 완전히 병영화되고 그러면서 개인의 신상이 낱낱이 파악되지 않나. 이렇게 철저하게 국가가 민(民)을 장악하고 동원할 수 있는 사회였고, 그런 측면에서 한국은 옛날부터 지구상에서 가장 철저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돼 있었다. 
 
사실 일본 역시 역사적 전통 때문에도 개인 파악을 잘하는 나라였다. 내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일본에서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외국인 불법 노동자가 일본에서는 버텨내기 어렵다고들 했다. 그만큼 파악이 잘된다는 말이었다. 그런 일본조차 부가가치세, 금융 실명제를 오랫동안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는데, 한국은 척척 실행하지 않나. 이것도 국가가 민을 동원하고 장악하고 파악하는 능력이 세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센 나라다. 지구에서 제일 센 나라에 들어간다. 이게 동원적 경제 발전을 할 때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프레시안 : 학생을 마구잡이로 동원하는 일의 문제점을 지적했다가 언론이 봉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1955년 <대구매일신문> 테러 사건이다. 당시 이 신문은 고위층이 행차할 때 아침밥도 못 먹은 학생들을 불러내 뙤약볕 아래 몇 시간 동안 환영 인파로 세워두는 풍조를 질타하는 사설('학도를 정치도구화하지 말라')을 실었다가 수십 명의 관변 단체 회원들에게 테러를 당했다. 경찰이 "대낮(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궤변으로 폭도를 비호한 것으로도 유명한 사건이다. 나아가 이 사설이 북한 방송에 인용됐다며, 사설을 쓴 최석채 주필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진다. 다시 돌아오면, 국가의 동원력과 더불어 눈여겨볼 대목으로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사회 전반적인 능력, 이걸 국가 능력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회 전반적인 능력이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통계를 가지고 설명하면 이것에 대한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50년대에는 거의 모든 통계가 부정확했다. 사실 통계를 못 냈다고 이야기하는 게 좋다. 1950년대 국민총생산(GNP) 통계 같은 것을 낸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유엔에서 나온 건 있는데, 그건 그쪽 전문가들이 추정했다고 그런다. 유엔만 해도 고등 전문가들을 쓸 수 있었는데 한국은 그게 좀 약했다고 하더라. 심한 사례를 하나 들면, 대한노총에서 자기들 대한노총의 조직 노동자가 몇 명인지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 통계가 정확하지 않다. 나라가 전반적으로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경제 개발 계획을 제대로 세울 수 있었겠나.
 
1960∼1970년대를 보면 경제 성장률이나 물가 같은 중요한 통계조차 1980∼1990년대에 계속 수정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이야기할 경제 관련 여러 통계도 어떤 자료를 보느냐에 따라 다 다르게 나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은 그전에 비해서는 나았다. 왜냐하면 한국은행, 산업은행 조사부 같은 것을 통해 각종 통계가 비교적 정확하게 제시될 수 있을 만큼 한국 사회가 역량을 축적해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미국 등에서 통계 전문가를 계속 초빙한다. 그렇게 해서 통계를 배우는 것이다. 또 사실은 한국전쟁 시기에 미군이 통계와 관련해 여러 가지를 가르쳐줬다. 전쟁 시기에는 통계 낼 게 많지 않나. 이런저런 것을 통해 한국이 스스로 통계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면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에 가서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실효성 있게 되는 것 아닌가. 그것도 바로 이런 것과 관련 있다. 1950년대 초반이나 중반에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겠나. 통계 하나 제대로 못 잡던 시기였는데.
 

 

사회 전반적인 능력 문제를 헛짚은 뉴라이트 
 
프레시안 : 통계를 예로 들어 설명한 사회 전반적인 능력의 문제가 다른 영역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서중석 : 그 점은 테크노크라트, 기업인 그리고 회사의 중견 간부 문제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뉴라이트의 대부 격인 모 교수 그분이 쓴 논문을 보면, 1930년대 한국의 산업화, 경제 발전이 1960∼1970년대 경제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래서 정말 유심히 읽어봤다. 그런데 왜 가능하게 됐는지는, 그리고 인적 자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그 교수는 주장했는데 도대체 인적 자원이 어떻게 그랬다는 것인지 하는 부분은 제대로 알게끔 써놓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것은 주먹구구식이 아닌가. 우격다짐으로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 글을 보고 실망을 많이 했다. 어떻게 그런 분이 이렇게까지 쓸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테크노크라트만 하더라도 1950년대에 미국에 가서 연수도 받고 공부도 하고 하면서 이게 쌓였고, 1958년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가 탄생한다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거기서 최초로 제대로 된 경제 개발 3개년 계획도 세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면 정부에서 성취형 관료, 이들을 테크노크라트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겨나고, 1950년대부터 활약하던 그 사람들이 박정희 정부에서도 장관이나 실무 책임자로 여러 명이 기용된다. 그러면서 경제기획원을 중심으로 모이는 걸 볼 수 있다. 이처럼 테크노크라트 성장 과정을 보더라도 1950년대 말경부터 기술 인력이 관료 속에서 어느 정도 쌓이게 되는 것이다.
 
기업인의 경우를 봐도 1950년대에는 경제 발전을 이끌어갈 수 있는 기업인이나 중간 경영인, 회사원 같은 사람들이 상당히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에는 인적 자원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여러 자료에서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게 나오지 않나. 그런데 1950년대에 기업들이 망하고 새로 흥하는 부침을 거듭하면서 경영 수완을 쌓아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건 대기업도 그랬지만 그 시기에는 중소기업도 많았다.
 
그러면서 장면 정권, 박정희 정권에 가게 되면 부정 축재자 처리를 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예컨대 태창처럼 그 당시 큰 재벌이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권력 쪽에서 이른바 알래스카 계통이 당한다고 하듯이, 재계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부가 밀려나고 하면서 새롭게 살아나는 경영인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차관을 끌어다가 기업을 운영하며 국제적 경영 시야를 갖추는 사람까지 생겼다. (태창은 이승만 정권과 유착해 각종 특혜를 누리며 덩치를 키운 재벌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내리막길에 접어들면서 태창 전성시대도 막을 내린다. 알래스카 세력은 5.16쿠데타 정권의 중심 세력 중 하나이던 함경도 출신 군인들을 말한다. 경상도 출신 군인들과 경쟁하던 이들은 1963년 3월 이른바 '반혁명 사건'에 연루돼 대부분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다. 경상도계와 함경도계의 힘겨루기는 5.16쿠데타 후 부정 축재자 처리 과정에서도 벌어지는데, 함경도계가 밀려나면서 경상도 기업 중심으로 재계가 재편된다. '편집자')
 
이건 1960년대에 와서야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일제 때건 해방 이후건 그전까지는 그런 경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뉴라이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 2013년 2월 19일, 서강대 캠퍼스에 걸린 연극 '한강의 기적 - 박정희와 이병철, 정주영' 현수막 아래로 학생들이 지나가는 모습. ⓒ연합뉴스

▲ 2013년 2월 19일, 서강대 캠퍼스에 걸린 연극 '한강의 기적 - 박정희와 이병철, 정주영' 현수막 아래로 학생들이 지나가는 모습. ⓒ연합뉴스  

 
 
 
사회적 경험의 축적과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들의 형성 
 
프레시안 : 고도성장과 관련해 한국 사회에는 박정희 신화뿐만 아니라 이병철·정주영으로 대표되는 몇몇 재벌 회장들에 관한 신화도 있다. 요약하면, 탁월한 경영 능력으로 그룹을 만들고 한국을 일으켜 세웠다는 내용이다. 물론 경쟁하던 여러 자본가들 중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선택과 수완은 그것대로 평가할 대목이 있다. 그렇지만 신화로 표현되는 놀라운 성장을 가능케 한 밑바탕 즉 역사적 배경, 국제적 조건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탁월한 경영 능력'이라는 식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평준화, 교육열, 농지 개혁, 여성의 사회 활동 참여 문제, 그리고 국가 동원력과 사회 전반적인 능력 문제 등을 두루 살핀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재벌이 누린 수많은 특혜, 숱한 이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재벌의 거듭된 반칙, 평범한 국민들의 희생과 노력 등을 쏙 빼놓은 채 몇몇 재벌 회장의 탁월한 경영 능력을 치켜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쨌건 다시 돌아오면,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을 이끈 이들이 경영 수완을 쌓은 과정을 보면 뉴라이트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맨 파워'론과는 거리가 있다.
 
서중석 : 사실 나는 아까 이야기한 그 논문에서 뉴라이트의 대부 격인 그 교수가 삼성을 예로 들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적절한 예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내 기억으로는 그 사람을 예로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삼성 이병철 같은 경우도 일제 말에 몇 가지를 좀 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1950년대의 기업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더구나 1960년대 규모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었다. 이병철의 경우도 계속해서 노하우, 경영 능력이 쌓인 것이었다. 국제 정세를 1960년대부터는 아는 것 아닌가. 그때쯤에 일본을 자주 왕래하지 않나. 그리고 1970년대 들어 자동차를 제외한 거의 모든 중화학 공업에 뛰어들고 1977년에 대대적인 체제 개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게 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동차 업계가 참 재미나다. 왜 그렇게 자동차를 좋아했는지 모르겠는데, 자동차 업계에는 풍운아들이 많았다. 많은 경험을 축적해나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울산 현대의 정주영 같은 탁월한 기업인들이 생겨나게 되고, 중간 경영인들의 인적 자원도 점차 풍부해지는 것이다. 
 
그와 함께 1960년대부터 제대로 된, 능력 있는 회사원들이 많이 생긴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는 그런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면 바로바로 발탁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사람들이 회사에 헌신하면서 자신의 업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사업도 챙기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과로사도 많이 했다. 1970년대에는 뱀탕 먹고 술 마시며 접대하는 게 일이었던 '술상무'들 때문에 뱀이 다 사라졌다는 말까지 나오고 그랬다. 그게 다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이런 걸 거치면서 한국 사회가 산업화한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 한 사람이 시켜서 이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 내 말은 그것이다.
 
하여튼 1970년대 중후반에는 중동 건설 붐이 일면서 새로운 기업가들이 나타나고, 중화학 공업이 대거 생겨나지 않나. 정주영뿐만 아니라 다른 '신데렐라'들이 나타나 활약하면서 율산·제세·대봉 같은 데가 등장했는데, 이 기업들은 한때는 대단한 기업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오래지 않아 망한다. 그런 일도 생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여든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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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 비리 제보 후 2번째 파면... 마음 아파"

 

[인터뷰] 안종훈 동구마케팅고 교사 "학교 돌아가 비리 해결할 것"

15.02.03 20:50l최종 업데이트 15.02.03 20:5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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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익제보 뒤 파면당한 서울 성북구 동구마케팅고 안종훈 교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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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훈(43) 동구마케팅고 교사는 지난달 30일 또 다시 학교에서 쫓겨났다. 지난해 8월에 이어 두 번째 파면이다. 같은 해 12월 교원소청심사위원회의 파면 취소 결정으로 복직했지만, 이 학교 재단인 동구학원은 그를 한 달 만에 다시 학교에서 내쫓았다.

그는 2일 학교를 찾았지만, 학교로부터 뚜렷한 말을 듣지 못했다. 대신 학생들이 그를 찾아 "힘내세요"라고 말했다. 몇몇 졸업생들도 소식을 듣고 격려 전화를 했다. 한 졸업생은 "동구는 이사장이나 학교의 전유물이 아니다"고 했다. 안 교사는 3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인터뷰에서 "두 번이나 파면당해, 학생들한테 안 좋은 기억을 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안종훈 교사는 지난 2012년 이 학교 이아무개 행정실장이 학교 공금을 빼돌려 실형을 받았는데도 계속 돈을 받으며 재직하고 있다고 제보했다. 서울시교육청은 특별감사를 벌여 17건의 비위사실을 적발했다. 하지만 동구학원은 이아무개 행정실장을 퇴직시키지 않았다. 

서울시교육청은 조웅 이사장의 임원 승인을 취소했지만 동구학원은 버티기에 나섰다. 오히려 지난해 8월 안 교사를 파면했다. 교원소청심사위원회가 같은 해 12월 징계 사유를 인정할 수 없다며 파면을 취소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시설사업비를 내려 보내지 않겠다고 압박했다. 하지만 동구학원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근 안 교사를 재차 파면했다. 

안 교사는 "동구학원은 학생들의 교육이 아닌, 보복 징계를 통해 저 하나만을 쫓아내는 데 혈안이 돼있다"면서 "반드시 학교로 돌아가겠다, 학교의 비리를 모두 해결할 때까지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두 번째 파면, 마음 편할 줄 알았지만..."

지난달 30일 안 교사의 집에 그의 파면을 알리는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두 번째 파면이라 마음이 편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더 착잡했다"면서 "교원소청심사위원회의 파면 취소 이후 동구학원이 저를 다시 학교에서 쫓아내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그게 무너져서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파면의 가장 큰 이유는 안 교사가 지난해 5월 14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희생자 추모 서울교사결의대회'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교사가 정치적인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게 동구학원의 주장이다. 이는 1차 파면 때도 징계 사유로 언급됐다.

하지만 교원소청심사위원회는 동구학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원회는 "근무시간 중 무단이탈하여 결의대회에 참가하였다거나,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하였다는 사정이 보이지 않아 징계사유로 인정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파면의 두 번째 이유는 그가 해직기간 학교 앞에서 집회를 열어 '징계 거부 집단 시위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안 교사는 "징계가 부당하다고 항의하고 호소하는 것도 징계 사유가 된다니 황당하다, 징계 사유가 조작됐고 날조됐다"면서 "지난달 19일 징계위원회에 출석해 해명했지만, 전혀 반영이 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안 교사는 2일 학교를 찾았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징계를 한 이유를 밝혀달라고 했지만, 학교 쪽은 거부했다. 징계 과정에서도 동구학원은 대화를 거부했다. 그는 "파국을 막기 위해 대화하려고 했다"면서 "동료 교사나 인근의 한 학교 교장 출신 인사가 중재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대화는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동료 교사에 대한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억울한 심정을 동료교사들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교사들은 제가 다가올까 전전긍긍했다, 먼저 말을 걸어오는 동료도 거의 없었다"며 "제가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파면됐으니, 동료 교사들도 찍힐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반드시 학교로 돌아가, 비리 해결하겠다"

안종훈 교사는 "일반적으로 사학에서 비리가 발생하면, 꼬리자르기를 하고 터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동구학원은 비리를 감싸는 새로운 유형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개탄했다. 

현재 조웅 전 이사장의 부인 최길자 이사가 동구학원 이사장 직무대행이다. 학교 홈페이지는 여전히 조웅 전 이사장이 이사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달 12일 공익제보자인 안 교사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이 계속되고 있다면서 8억9675만 원의 시설사업비 집행을 유보했지만, 동구학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안 교사는 "시설사업비가 학생들을 위한 교육에 쓰는 돈이라고 생각한다면, 저를 쫓아내고 싶어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면서 "동구학원은 서울시교육청의 이러한 조치에도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학생들을 위한 교육이 안중에 없는 것 아닌가 싶어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동구학원은 비리를 덮고 감추기 위해 부당한 징계를 계속 하고 있다, 보복 징계를 통해 저 하나만 쫓아내는 데 혈안이 돼있다"면서 "이대로 넘어가면, 다른 사립학교도 동구학원처럼 버티면서 (제보자를) 보복 징계를 하려고 할 것이다, 진일보한 새로운 사학 비리의 유형이 나올까 걱정된다"고 밝혔다. 

안 교사는 "교원소청심사원회 소청심사 청구나 법적 대응을 통해 반드시 학교로 돌아가겠다"면서 "학교로 돌아가는 게 끝이 아니고, 학교의 비리를 모두 해결할 때까지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교육계와 시민사회에서는 동구학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서울지부는 2일 성명에서 "동구재단은 교육기관으로서 최소한의 양식을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센터는 3일 논평에서 "학교의 비리를 제보한 것에 대한 보복성 징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면서 "사학비리 제보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현 부패방지법과 공익신고자보호법을 신속히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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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갯고둥에 숨은 수만년 자연사 비밀

 
조홍섭 2015. 02. 03
조회수 2104 추천수 0
 

좁은 조간대 사는 이동성 적은 연체동물, 대륙이동 따라 전 세계 분포

한반도 댕가리는 빙하기 끝나자 일본서 제주, 남해 거쳐 서해로 확산

 

da.jpg» 갯고동의 일종인 댕가리의 모습. 서해와 남해 조간대에 널리 분포한다. 사진=원용진 외 <생태학과 진화> 

 
먹을 것 없던 시절 한겨울 아이들을 유혹하던 간식거리에 ‘쪽쪽이 고둥’이 있었다. 함지박에 수북이 담아놓은 이 고둥의 꽁지를 조금 잘라낸 뒤 입 쪽을 세게 빨면 짭짤하면서도 고소한 속살이 입에 들어온다.
 

요즘도 유원지에서 파는 이 다슬기 비슷하게 생긴 연체동물의 제 이름은 갯고둥과의 댕가리이다. 그런데 이 조그만 동물에 동아시아 환경의 수만년 변천사를 읽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댕가리의 유전자를 분석해 빙하기 같은 과거 지구 차원의 기후변화가 한반도 주변 해양생물에 어떤 진화적 변화를 일으켰는지를 처음으로 밝힌 연구결과가 나왔다. 
 

호 푸엉타오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박사과정생 등 이 대학 연구진은 과학저널 <생태학과 진화>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서·남해와 제주도 해안의 댕가리 디엔에이(DNA)에 나타난 변이가 과거 어떤 사건에서 기원했는지를 추적한 결과를 밝혔다.
 

댕가리-빙하기 해안선.jpg» 마지막 빙하기 때 한반도 주변의 해안선 위치(회색)와 해류 방향(화살표). 왼쪽 도표는 6가지 댕가리 집단별 개체수 변동, 막대는 빙하기 절정기, 맨위 곡선은 해수면 변동을 나타냄. 원용진 외 <생태학과 진화>

 

지구에는 지난 250만년 동안 빙하기와 간빙기가 교대로 찾아왔다. 수만년의 시간대 걸쳐 생물은 달라진 기후와 지형에 따라 이동과 격리, 번성과 사멸을 거듭했다. 한반도 주변의 동아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반도에 마지막 빙하기가 절정에 이른 때는 2만6000~1만9000년 전이다. 기온은 현재보다 8~13도 해수면 높이는 130m 낮았다. 황해는 당시 모두 육지였고 제주도 남쪽까지 이어졌다. 대한해협은 일본과 육지로 연결됐거나 아주 좁은 운하 형태였다.

 

빙하기가 절정을 지나 급속하게 기온이 오르자 바닷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길어진 해안선을 따라 갯고둥이 서식지를 늘려 갔다.

 

da2.jpg» 서해와 남해의 수심. 빙하기 때는 현재보다 100m 이상 해수면이 낮았기 때문에 온도가 낮아지면서 해안선은 차츰 제주도 남쪽으로 후퇴했고 댕가리의 서식지도 이에 따라 변화했다. 그림=원용진 외 <생태학과 진화>

 

댕가리(Batillaria attramentaria)는 갯벌이나 모래밭, 조간대의 바위웅덩이에 서식하며 서·남해는 물론 일본과 중국 동부에 널리 분포한다. 몸길이가 2~3㎝인 이 작은 갯가 생물은 멀리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 붙박여 산다.
 

많은 해양생물은 알에서 유생이 태어나면 해류를 타고 멀리 떠다니다가 정착해 성체가 되지만 댕가리는 유생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 따라서 태어난 곳에 주로 머물며 조간대의 좁은 지역에만 서식하기 때문에 해안선 변동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연구진은 지난 빙하기 이후 해안선의 변화에 따라 댕가리의 분포와 유전적 분화가 어떻게 이뤄졌으며 개체수가 얼마나 불어났는지 등을 유전분석을 통해 조사했다. 논문의 교신 저자인 원용진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는 연구결과를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본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해안가에 서식하는 해양 무척추동물인 갯고둥류의 댕가리 종은 마지막 빙하기의 절정기(2만6000~1만9000년 전) 이후 개체수가 역사적으로 급격히 증가해왔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서해를 비롯한 동아시아 주변 해역은 수심이 얕은 대륙붕 지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된 특징이 있는데, 이러한 해역은 빙하기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고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는 해침 시기에 극심한 해안선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빙하기 이후 해침에 따라 육지에 붙어 있던 제주도가 섬으로 떨어지고 해안선이 육지 쪽으로 이동하면서 서해와 남해와 해안선이 확장되어 들어오게 되는데, 이러한 고해양학적 변화와 시기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시간 순서가 이번 연구 결과 밝혀진 해양동물 댕가리 종의 해역별 분화와 개체수 증가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반도 주변의 댕가리는 빙하기 시기에 남방에 존재했을 조상집단이 북상하면서 제주도에 정착하게 된 후 그 중 일부 집단이 다시 서해와 남해로 갈라져 가며 서식지를 확장해 나갔는데, 이러한 서식지 확장과 동시에 개체수가 10배 이상 증가하는 변동을 겪은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이처럼 갯고둥과의 연체동물은 이동능력이 적어 해안선 변화의 지표 구실을 하지만 동아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와 호주, 그리고 중앙아메리카까지 널리 분포한다. 이동이 어려운 이들이 어떻게 전 세계에 걸쳐 분포하게 됐을까.
 

오자와 토모오 일본 사이버대 동물학자 등은 2009년 세계의 갯고둥 화석과 유전분석 결과를 토대로 이들이 호주, 남아메리카, 남극, 인도, 아프리카 등이 하나로 붙어있던 초대륙 곤드와나가 분열되면서 분포지가 나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오자와_댕가리.jpg» 갯고동과 생물의 세계 분포. 과거 초대륙 곤드와나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이 있다. 그림=오자와 외 (2009).

 

2500만년 전 호주와 동남아 지판이 충돌해 호주의 갯고둥이 아시아로 퍼졌고, 남아메리카의 갯고둥은 310만년 전 파나마 해협이 막혀 남·북아메리카가 이어지면서 아메리카에 널리 분포하게 됐다는 이론이다. 원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동아시아에는 이 갯고둥과에 속하는 Batillaria 속에 4종 알려져 있습니다. 화석 기록도 비교적 연구가 많이 되어 있습니다. 동아시아에는 마이오세 후기부터 이 그룹에 속하는 종들이 보고되고 있는데, 이들의 조상이 열대 기원의 남반구 호주 지역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점차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호주와 뉴질랜드 주변에는 동아시아 갯고둥과 종들과 공통조상을 공유하는 종들이 살고 있습니다. 갯고둥과의 조상들은 아주 먼 과거에 테티스 해(Tethys Seaway)를 따라 이동했다고 보고 있는데, 이에 따라 동쪽으로는 서태평양 연안까지 도달해서 현재의 갯고둥과 종들로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서쪽으로는 곤드와나 대륙이 갈라지면서 형성된 바다를 따라 오늘날 파나마 지역에까지 뻗어나간 것으로 확인됩니다. 흥미롭게도 중간에 해당하는 유럽에는 과거 조상의 화석은 발견되나 현재는 갯고둥과 계보들이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남아의 댕가리는 쿠로시오 난류를 따라 일본에 왔고 해류의 북쪽 가지인 쓰시마 난류를 타고 동해에 진출했으나 빙하기 때 동해가 내해가 되면서 고립돼 유전적으로 분화했다. 이번 연구는 쓰시마 난류를 타고 한반도 근해로 퍼진 댕가리가 제주와 남해, 서해로 차례로 확산한 과정을 규명한 것이다.
 

원 교수는 후속연구의 과제로  “이번 연구에선 핵 속의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를 분석 대상으로 삼아 약 6만년 전의 기간만을 들여다 보았지만 앞으로 핵유전자 좌위의 디엔에이로 분석대상을 넓히면 그 이전 빙하기 때의 사건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Phuong-Thao Ho, Ye-Seul Kwan, Boa Kim & Yong-Jin Won, Postglacial range shift and demographic expansion of the marine intertidal snail Batillaria attramentaria, Ecology and Evolution, doi: 10.1002/ece3.1374. http://onlinelibrary.wiley.com/doi/10.1002/ece3.1374/abstract
 

■ 이 논문과 관련해 원용진 교수가 기자의 질문에 답변한 이메일 전문
 
-연구 대상 생물인 Batillaria attramentaria를 댕가리라고 하셨는데요. 국내 수산 관련 자료에서는 학명이 B. cumingii로 좀 다르더군요.

  
=우리말로 댕가리 종은 Batillaria attramentaria 가 공식 학명입니다. Batillaria cumingi 는 이명(異名: synonym) 으로서 댕가리 종에 붙여진 다른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과거에 연구자들에 따라 한 종에 대해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서 사용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럴 경우 누가 제일 먼저 그 종에 대해 학술적으로 기록을 남겼냐는 기준(선취권) 따라 나중에 해당 분류군 전문가들이 다시 재정립을 진행합니다. 한동안 댕가리는 B. cumingi로 사용하던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정식 학명으로 B. attramentari가 채택되었습니다. 
 

댕가리는 연체동물문(Mollusca) 복족강(Gastropoda) 갯고둥과(Batillaridae) Batillaria 속에 속하는 종입니다. 연안의 조간대 해안을 따라 한국, 일본, 중국 등에 널리 분포하는 종입니다. 주로 갯벌이나 모래사장 그리고 조간대 바위 웅덩이 틈과 같이 얕은 물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모양은 민물 다슬기와 같은 원뿔모양이며, 백색과 흑색 띠가 교대로 원뿔 둘레를 감아 올라가는 무늬패턴을 나타냅니다. 몸길이는 작고 대략 2~3㎝ 길이, 폭 1㎝ 미만의 크기입니다. 동아시아에는 이 갯고둥과에 속하는 Batillaria  속에 4종 알려져 있습니다. 화석 기록도 비교적 연구가 많이 되어 있습니다. 동아시아에는 마이오세 후기부터 이 그룹에 속하는 종들이 보고되고 있는데, 이들의 조상이 열대 기원의 남반구 호주 지역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점차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호주와 뉴질랜드 주변에는 동아시아 갯고둥과 종들과 공통조상을 공유하는 종들이 살고 있습니다. 갯고둥과의 조상은 아주 먼 과거에 테티스 해(Tethys Seaway)를 따라 이동했다고 보고 있는데, 이에 따라 동쪽으로는 서태평양 연안까지 도달해서 현재의 갯고둥과 종들로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서쪽으로는 곤드와나 대륙이 갈라지면서 형성된 바다를 따라 오늘날 파나마 지역에까지 뻗어나간 것으로 확인됩니다. 흥미롭게도 중간에 해당하는 유럽에는 과거 조상의 화석은 발견되나 현재는 갯고둥과 계보들이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체발생상 댕가리의 발생은 직접발생 방식을 따릅니다. 해양생물들에서 이러한 발생방식은 수정란이 성체로 발달해 가는 과정에서 유생형 형질의 일부 혹은 전체가 생략되고 성체형 형질이 바로 발현되는 발생 양식입니다. 직접발생의 반대는 간접발생이라고 합니다. 유생시기가 상대적으로 길고, 성체와 모양이 뚜렷하게 다르며 변태에 의해 성체로 성장해갑니다. 해양생물들은 대체로 간접발생하는 종류들이 많은 편입니다. 유생은 배(胚)와 성체(成體)의 중간시기에 해당하는데, 배와는 달리 자유생활을 하고 성체와 달리 생식기관이 미발달된 상태입니다. 직접발생에서는 성체와 달리 몸이 작을 뿐인데, 이런 경우 수정된 장소 주변에서 성체가 될 때까지 몸이 자라는 과정을 거쳐 서식지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자유생활을 하는 유생시기가 길면, 해류를 따라 먼 장소로 이동하는 확률이 높아지지만, 반대로 직접발생을 하는 종류들을 이동성이 낮아지면서 서로 떨어진 집단들 간에 유전적인 분화도가 높아집니다. 이 경우 집단간 유전자 흐름이 적다고 말합니다. 문헌상 댕가리의 발생에 대해서 세밀한 연구 논문들은 매우 적은 편이라서, 구체적인 설명은 저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 이 연구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과거 빙하기와 같은 지구적 차원의 기후변화가 한반도 주변 해양생물들에 진화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는 데에 의미가 큽니다. 특히, 현재 살아있는 생물 집단들이 간직한 DNA 변이 정보를 분석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의 연대측정을 통해 과거에 있었던 진화적 변화의 양상과 발생 시기를 재구성했다는 점이 새롭습니다.  
 
댕가리 종을 대상으로 연구한 본 연구에서 의미하는 진화적 변화는 한 종이 서로 다른 두 종으로 나뉘는 종 분화(speciation) 수준의 큰 변화는 아니고, 종 분화 과정의 중간 단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해역의 구분에 따른 한 종 내 집단분화, 그리고 빙하기 기후변화와 연결된 해수면 변동과 지역 해류의 변동과 같은 고해양학적 변화의 영향을 받은 서식지 확장 및 해수온도 변화에 반응하는 개체수 증감 같은 사건들을 포함합니다. 
 
=본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해안가에 서식하는 해양무척추동물인 갯고둥류의 댕가리 종은 최후최대빙하기(Last Glacial Maximum: 2만6000~1만9000년 전) 이후 개체수가 역사적으로 급격히 증가해왔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서해를 비롯한 동아시아 주변 해역은 수심이 얕은 대륙붕 지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된 특징이 있는데, 이러한 해역은 빙하기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고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는 해침의 시기에 극심한 해안선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빙하기 이후 해침에 따라 육지에 붙어 있던 제주도가 섬으로 떨어지고 해안선이 육지 쪽으로 이동하면서 서해와 남해와 해안선이 확장되어 들어오게 되는데, 이러한 고해양학적 변화와 시기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시간 순서가 이번 연구 결과 밝혀진 해양동물 댕가리 종의 해역별 분화와 개체수 증가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반도 주변의 댕가리는 빙하기 시기에 남방에 존재했을 조상집단이 북상하면서 제주도에 정착하게 된 후 그 중 일부 집단이 다시 서해와 남해로 갈라져 가며 서식지를 확장해 나갔는데, 이러한 서식지 확장과 동시에 개체수가 10배 이상 증가하는 변동을 겪은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한국의 댕가리 개체수 증가 양상은 일본 주변의 광범위한 집단들에서도 매우 일치된 결과였는데, 이 시기 동아시아 전역에서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고 서식지가 확장되면서 댕가리가 생존하기에 좀 더 양호한 환경이 조성된 결과라고 해석됩니다. 동아시아 해양생물들을 통틀어서 본 연구 이전에는 마지막 빙하기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마도 본 연구결과가 이러한 과학적 질문에 대한 최초의 보고라고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가장 최근의 빙하기 영향을 댕가리 종이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이 생물이 갖고 있는 독특한 발생양식과 서식환경에 따른 것으로 해석됩니다. 댕가리 종은 직접발생으로 개체발생을 하기 때문에 태어난 곳 근처에서 성체가 되고 성체 또한 이동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떨어진 집단들 간에는 유전적 분화가 축적되어 갈 가능성이 큽니다. 또 해안가에 서식하고 있는 폭도 조간대 좁은 지역에 한정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해침에 따른 해안선 변동이 있을 경우 해안선 위치를 따라 이동해 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해안선 변동의 역사를 잘 반영하는 생물이었다고 추론됩니다. 지금의 서해는 과거 빙하기 시기엔 존재하지 않았고, 이후 기후가 온난화하면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이렇게 해서 새롭게 형성된 서해안은 댕가리 종에겐 매우 광활한 서식지 확장이 되었을 거고 개체수도 그에 따라 증가했을 것입니다. 
 
한편 빙하기는 동해가 주변 바다로부터 고립되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필리핀 남부에서 북상하는 쿠로시오 난류가 동중국해에서 갈라져 대한해협을 따라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길이 해수면 하강에 의해 형성된 육로에 의해 막히면서 쿠로시오 난류권에 놓인 남방 계열의 댕가리와 지리적으로 고립되는 시기를 갖게 됩니다. 동아시아 전체에서 댕가리는 크게 일본 북쪽의 북방계(쓰시마 계열)와 나머지 남쪽의 남방계(쿠로시오 계열)로 구분되어 있는데, 본 연구에서 이 두 계보가 갈라진 시기가 약 40만 년 전으로 처음으로 측정되었습니다. 거시적으로 살펴봤을 때 남방기원의 댕가리 종이 북상하면서 동해에 정착한 후 과거 여러 번의 빙하기 영향을 받아 나머지 해역과 고립되어 지리적 분화가 촉진되었음을 시사하는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동아시아와 한반도 주변 해양생물 전반의 과거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그동안 놓치고 있던 최근 과거 해양생물들에서 일어났을 법한 사건들의 개연성을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생물들의 특성이 다르므로 동일한 역사적 환경변화에 대한 개별 종들의 진화적 반응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댕가리와 같은 생물학적 특성이 있는 해양생물들은 그에 상응하는 진화적 변화의 사건들이 있었음을 시사했다고 봅니다. 현재 동아시아에 분포하는 해양생물들 가운데 일부지만 그들의 지리적 분포와 유전적 다양성의 기원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 연구라고 생각됩니다.  

 

-연구 방법론이 궁금합니다.
 
=본 연구에서는 댕가리 집단 샘플로부터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인 COI유전자 DNA 서열 정보를 얻은 후 이 자료를 분기집단유전학(divergence population genetics) 분석을 통해 과거 제주도, 남해, 서해 해역 사이에서 일어났던 종내 분기역사를 재구성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석방법을 통해 한국 댕가리 종의 과거 조상집단과 현재 집단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기연대와 개체수를 측정할 수 있었고 그 크기를 비교해서 증감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방법과 병행하여, 동아시아 지역별 그룹들을 6그룹(제주도 남부, 제주도 북부, 서해, 남해, 일본 북방, 일본 남방)으로 구분해서 각 지역에서 일어났던 개체수 증감의 역사를 베이시안 스카이라인 플롯(Bayesian Skyline Plot) 방법으로 분석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분석 방법은 개체수 증가의 양상과 그 시기가 상호 일치하는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두 방법은 모델 기반 집단유전학연구 방법으로 최근에 개발되었습니다. 복잡한 생물들의 과거 사건들을 비교적 단순한 모형(models)들의 틀로 해석하는 접근법인데, 샘플들의 DNA 자료에 담긴 집단변이 정보로부터 선택한 모형에 내재되어 있는 주요 파라미터 값(예를 들어 개체수의 크기, 분기연대, 집단 간 유전자 흐름 정도 등)들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사후확률적 분포(posterior probability distribution) 추론하는 방법들입니다. 2000년대 이전 과거에는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던 복잡한 진화적 사건들에 대한 정량적 추정이 집단유전학 이론정립, 모델개발, 컴퓨터 시뮬레이션 융합을 통해 가능해졌습니다.  
  
- 댕가리가 일본에서는 구로시오와 쓰시마 집단으로 나뉘고, 쓰시마 집단은 다시 한반도 근해에서 황해, 남해, 제주 북부, 제주 남부 등으로 형질이 분화했다고 이해했는데요. 일본에서 분화가 일어난 40만년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한반도 근해 집단의 지리적 형질 차이는 어느 정도나 됩니까? 한반도 해안이 다 연결돼 있는데, 경계지역에서 잡종화는 일어나지 않는지요.
 
=본 연구의 대상인 댕가리는 한국과 일본 모두 한 종입니다. 다만 지리적인 구역에 따라 서로 종내 차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령 쿠로시오와 쓰시마 집단은 일본의 북쪽과 남쪽에 지리적으로 구분되어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쿠로시오 해류의 영향에 따른 것으로 보여지며, 앞서 설명했듯이 빙하기 해수면이 하강했을 시기 쿠로시오 난류의 한 지류인 쓰시마해류가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대한해협에서 막히면서 동해쪽 그룹인 쓰시마 집단이 분리되어 나타난 유전적 차이로 해석됩니다. 물론 해류 한가지 영향만으로 두 그룹이 나뉘었다고 보는 것은 아니고요, 이 종의 이동 능력이 매우 낮기 때문에 거시적 지리 그룹 간에는 연결성이 약해지면서 차이가 축적되어 갔을 것이고, 특히 빙하기 시기는 지리적 고립을 더욱 촉진했을(reinforce)거라고 봅니다. 앞서도 설명드렸듯이 유생시기가 일부 생략된 직접 발생하는 댕가리의 경우 먼 거리 이동이 매우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역 집단들 간에도 유전적 분화가 높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해안선이 연결되어 있는 서해와 남해 간에도 서로 유전적 타입들의 빈도가 달라지는 분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집단 사이에 유전적 타입의 빈도가 달라지는 것은 서로 왕래가 적다는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쉽게 설명드리면, ABO혈액형 빈도가 집단들 간에 다를 수 있는데, 이 경우도 유전적 분화가 있다고 표현합니다. 즉 지리적 형질 차이는 사실 없지만, 집단유전학에서는 단순히 빈도가 달라도 분화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거시적으로 40만 년 전에 대표적인 두 계보 사이의 분리가 있는 것으로 계산이 되었는데요, 저는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남방기원의 댕가리가 동해 쪽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해간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유전적 다양성을 살펴보면 남쪽 쿠로시오 타입의 집단들에서 다양성이 훨씬 높게 관찰됩니다. 이는 과거에 북쪽이 아닌 남쪽에 조상집단들이 대거 서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실제로 화석자료들과 댕가리과 계통수(Ozawa et al 2009 Zoologica Scripta, 38, 5, pp 503-525) 연구에서 동아시아 갯고둥과 종들이 남방기원이라는 밝혀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잡종화(hybridization)는 서로 다른 두 종이 교배하여 자손을 낳을 때 이런 용어를 사용합니다. 하나의 종인 동아시아 댕가리 종은 그래서 이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유전적으로 독특한 집단 간에도 교배가 일어나며, 그에 따른 유전적 재조합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경우 백인과 흑인 사이처럼 말이죠.  제주도 남부는 특이하게 미토콘드리아 COI 유전자 타입에 쿠로시오 타입이 일부 관찰됩니다. 이는 제주도가 한반도 다른 지역에 비해 좀더 남쪽에 위치한 결과 과거 쿠로시오 타입의 개체들의 유입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빙하기 시기 제주도 남쪽에 퇴각해 있던 해안가로 규슈 지역에 서식했을 개체들이 유입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본 연구에서는 아쉽게도 모계유전을 하는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조사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유전적 그룹 간에 교배가 된 타입은 식별할 수 없었습니다 (A 아니면 B로 판별되지 AB 타입은 없습니다). 추후 핵유전자를 사용하여 조사를 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빙기와 간빙기는 250만년 전부터 시작돼 여러 차례 되풀이됐는데요. 이 연구에서와 같은 분화가 그때마다 일어난 건가요, 아니면 특정 시점에만 일어난 건가요.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먼저 간단히 말씀드리면,  현재의 자료로는 6 만 년 전 과거 이상에 대한 의미 있는 개체수 크기 정보는 추정할 수 없습니다. 과거를 들여다볼 창이 폭이 매우 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데이터의 해상력이 낮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먼 과거의 역사와 사건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다수의 핵유전자 좌위에서 DNA 서열정보가 추가되어야 합니다. 진화유전학자들은 과거를 들여다 보는 창을 늘리기 위해서 보다 많은 데이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러한 노력 가운데는 좀 더 많은 수의 유전자 DNA 서열정보를 추가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LGM(2만6천~1만9천년 전) 이후의 시기에 폭발적 개체수 증가가 측정되었는데요, 본 연구에 사용된 미토콘드리아 DNA 자료로는 6만 년 이전의 과거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추정해보면, 아마도 LGM 이전의 빙하기는 서식지의 감소와 추운 날씨로 인해 개체수가 상당히 줄어들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개체수가 줄게 되면 병목효과(bottleneck effect)가 일어나서 그 이전에 조상들로부터 유전된 유전적 변이의 상당량이 소실됩니다. 멸종위기종이 이런 특성이 있는데, 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낮은 이유가 바로 이런 병목현상과 같은 개체수 감소입니다. 그래서 다시 과거를 조심스럽게 재구성을 해보면, 과거 여러 번의 빙하기 시기를 거치면서 상당한 과거의 유전적 변이가 소실돼서 6만 년 이전의 과거를 알려줄 정보가 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에는 없다고 보입니다. 그와 대비되어, 병목 이후 간빙기 온난화에 따른 개체수가 10배 이상 증가하는 사건이 있게 되면(우리 연구에서 관찰한 LGM 이후 개체수 팽창) 상대적으로 개체수 팽창의 신호가 매우 분명하고 강하게 잡히는 것으로 저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달리 바라보면, 댕가리 종의 생물학적 특성이 고해양학적 환경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종이라고 가정한다면, 먼 과거의 사건들이 남긴 집단유전학적 변이 흔적은 그 이후 중간에 존재했을 빙하기 시기 개체수 감소와 같은 사건들의 영향으로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대적으로 먼 과거의 정보를 추출하려는 방편으로 앞으로 핵유전자 서열정보를 추가하여 분석하는 연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론유전학자의 도움을 받아 여러 번의 빙하기 조건을 시뮬레이션을 통해 구현하고 그 결과가 어떻게 DNA 변이에 영향을 끼칠지를 핵유전자 실험 관측치와 비교해보는 공동연구가 뒷받침되어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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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박지원이 새정연의 사망일을 앞당기고 있다.

‘경선룰’ 놓고 문재인과 박지원 신경전 격화
 
문재인, 박지원이 새정연의 사망일을 앞당기고 있다.
 
임두만 | 2015-02-03 15:24:4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2.8전당대회가 5일 앞으로 다가온 새정치민주연합에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 넉넉하게 이기고 당권을 잡을 것으로 판단했던 문재인 후보 측이 박지원 후보 측의 맹렬 추격 때문에 박빙의 게임이 된 때문이다.

1월 말을 지나면서 각종 여론조사와 당 내외의 예측은 대의원 당원에서 박지원 측이 이기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의원 당원에서 미세하게 이기더라도 반영률이 25%나 되는 여론조사에서 워낙 문재인 측이 앞서고 있으므로 대략의 예측은 ‘그래도 문재인’ 정도였다.

그런데 전대가 막판으로 다가가면서 문재인 측이 스스로 급해진 것 같다. 박빙일 것으로 봤던 대의원 표도 박 후보가 앞서고, 호남 쪽이 압도적으로 많은 권리당원 지지율에선 박 후보가 상당부분 앞선다는 예측이 나오면서다.

결국 여론조사에서 원사이드하게 박 후보를 제치지 못하면 최종 결과도 예측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 저들은 이미 지난 해 12월 29일 정해진 룰에서 위험부담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여론조사에서 ‘지지후보 없음’이란 답을 하는 응답층이 매우 중요한 값이 된 것이다.

즉 전체 응답자를 100으로 하고 이중 ‘지지후보 없음’ 응답자가 30%정도 나온다면 실제 여론조사 반영률은 전체 유권자의 25%가 아니라 15%로 줄어든다는 점에서 위험신호를 감지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느닷없이 이미 정해진 룰임에도 불합리하다며 이를 고쳐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룰을 고칠 자격도 없는 전준위가 ‘유권해석’이란 이름으로 문재인 측의 손을 들어줬다. 그들은 이 절차를 진행하면서 당내나 외의 비판과 후보 측의 반발을 의식, 투표라는 과정을 거쳤다. 전준위원 15명의 투표를 통해 11명의 찬성을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이는 편법이자 불법이다. 이미 전당대회 경선 룰은 지난 해 12월 29일 합의되어 경선 세칙까지 다 정해졌으며 이 세칙에 대한 내용까지 각 후보 캠프가 갖고 있다. 그럼에도 문재인 측은 이를 부인하면서 경선 세칙 중 유독 자신들이 유리한 여론조사 부분만 문제를 제기하고, 이미 권리당원 투표를 하루 정도 남긴 시점에 바꾸게 한 것이다.

박지원이 기자회견과 방송토론회에서 “작년 12월29일 모든 후보가 참여해 이 규칙(시행 세칙)을 만들었고 여기에 따라 오늘까지 선거운동을 했다. 100m 경주 가운데 98m를 왔는데 이제 와서 규정을 바꾼다면 이는 계파 독점의 결과”라고 한 말은 팩트다.

그럼에도 문재인은 방송 토론회에서 “재작년 전당대회대로 하자고 하는 것인데 이게 왜 룰 변경인가. 오히려 (박 후보 측이) 룰 변경을 시도하다가 제동이 걸린 것인데 거꾸로 호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국민들 앞에서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런 거짓말을 뻔뻔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누가 순수하다고 말하는가? 어제 방송토론회에서 나타난 문재인은 순수하지도 깨끗하지도 않아 보였다. 그의 모든 발언들을 종합하면 어떤 비난을 받아도 일단 당권을 잡아야겠다는 욕심만 노골적으로 내보였다.

이는 박지원도 마찬가지다. 룰 전쟁에서 뒤통수를 맞았다고 느꼈음인지 전국에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토론회에서 전당대회와 상관없는 문재인의 개인적 치부까지 들춰가며 인신공격성 발언을 했다. 때문에 두 사람의 노골적 탐욕이 그대로 나타난 토론회는 말 그대로 개판 토론회가 되었다.

그러니 이 상태로 전당대회가 치러지고 문재인이 당 대표가 되었더라도 ‘전대는 전대고 전대가 끝났으니 화합하자’고 하면 화합이 되는가?

천만에다. 정당한 룰에 의해 정당한 선거로 당선되어도 패자는 승자에게 흔쾌하게 승복하지 못하는 것이 선거다. 그런데 선거 룰을 선거운동기간 90%가 지난 다음에 바꿔서 승리한 측에게 패배한 후보가 승복할 수는 없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당은 불협화음이 오래 계속될 것이며 그 책임은 불법과 편법으로 당권을 잡은 측이 져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다. 지금이라도 문재인이 전대 승리 후 패자 측에게 화합을 말하고 하나됨을 말하려면 경선세칙을 원위치 시켜야 한다. 지난 해 12월 19일 합의하여 만들어진 룰대로 여론조사 값을 매겨야 한다. 그것이 그나마 자신이 지금까지 주장한 당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보이는 일이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보여야 하므로…

2.8전당대회가 끝나면 정국은 급속하게 4.29재보선의 격동으로 빠져든다. 보궐선거 3개의 지역구는 야당들이 피터지는 싸움판을 벌여야 할 곳이다. 국민모임, 통진당계무소속 후보는 무조건 출진한다고 하면 새정연 말고도 이미 야권 후보가 최소 2명씩은 나온다.

여기에 출마할 새정연의 후보라면 최소한 난립하는 야권후보들 중 특출하게 유권자를 견인할 후보여야 한다. 그런 후보를 공천해야 그나마 싸워볼 수 있다. 이번 당 대표는 그런 공천권을 행사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공천권도 행사하지 않겠다는 당 대표를 하려고 전대에서 불법과 편법을 한다? 그런 당 대표를 만들려고 전 계파가 다 불법과 편법을 옹호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스스로 불법과 편법을 자행한다?

거짓말이다. 개가 웃을 일이다. 불법과 편법은 다 동원하면서 당권을 쥔 문재인과 친노가 정말 문재인 말대로 모든 기득권을 다 내놓고 공천에서 아무 작용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면 그게 아마추어다.

결국 이 3곳의 공천은 틀림없이 친노 친문의 사천이 될 것이고 이로 인해 다시 당은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이후 자연스럽게 탈당, 분당, 신당 창당 등으로 야권은 시끄럽고, 야권후보는 난립하면서 새누리당은 선거에서 완승을 할 것이다. 이윽고 새정연이란 정당의 수명은 거기서 종료된다. 이 처절한 종막을 위해 저들은 마지막 진흙탕 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새정연을 두고 ‘통합’이니 ’화합‘이니 ’단일화‘니 하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반동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박근혜 정부와 대등한 전쟁이라도 할 수 있으려면 새정연이라는 세력이 야권의 주류여서는 안 된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8&table=c_flower911&uid=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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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면 실종 한 달, 국민TV에 무슨 일이 있었나

 
[미오방담] 대중영합주의, 협동조합 언론의 태생적 한계… 진영논리 극복하고 플랫폼 다변화해야
 
입력 : 2015-02-03  09:41:27   노출 : 2015.02.03  10:44:42
정철운·김도연·조윤호 기자 | pierce@mediatoday.co.kr  
 

미디어오늘이 미디어현장을 누비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작정하고 풀어놓기로 했다. 기사화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말한다. 첫 번째 주제는 ‘노종면과 국민TV’다. <편집자 주>

정철운=지난해 국민TV 방송평가 토론회 영상 보니 노종면이 왜 나갔는지 알 것 같더라. 공개적인 자리였는데도 경영진을 향해 “조합원들부터 40억 넘는 돈을 받았는데 독자적인 앱 하나 만들지 못한 허접한 조직”이라고 말하더라.(관련영상 보기) 그때 서영석‧조상운으로 대표되는 경영진과 노종면이 완전히 갈라선 것 같다. 뉴스K가 단독도 여러 번 하고 열심히 했는데 보도를 받는 곳도 없고 하니까…. 무기력한 국민TV 경영진에 환멸을 느낀 거 같다.

조윤호=노종면이 왜 나갔는지 조합원들도 잘 모르더라. 협동조합이 조합원 돈을 받아 운영되는데, 사실상 조합의 주인들이 조합의 사정을 모른다. 뉴스를 이끌던 핵심인력이 나갔는데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다. <관련기사=노종면 국민TV 떠나나…23일 사의 표명>

정철운=‘미디어토크’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한 번 털었는데, 결론이 이상했다. ‘언론인들이 엘리트 의식을 버리라’는 내용이었다. 

조윤호=사실상 노종면을 디스한 거다. 미디어토크 청취자들도 그런 댓글을 많이 달았더라. 

   
▲ 노종면 전 국민TV 방송제작국장. 언론인 노종면이 지난해 12월 국민TV를 떠난 뒤 잠적하며 언론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이치열 기자
 

정철운=뉴스K 콘텐츠가 안 팔리는 원인에 대해 유통의 문제와 포맷의 문제로 갈등한 것 같다. 국민TV 내부에선 ‘우리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얘기가 있었는데, 노종면이 일방적으로 무시했다는 주장도 있다. 모든 조직이 그렇지만, 더 있어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되니 나간 거다. 언론계에서 가장 능력 있다고 인정받던 선배다. 노종면이 다시 뉴스타파로 가기도 뭐하고, YTN으로 돌아갈 길도 없고, 본인의 앞날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 입장을 들을 수가 없으니…. 

조윤호=노종면이란 언론계의 귀한 자산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전화도 끊고, SNS 계정도 없앤 걸 보면 언론운동 판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도연=노종면은 언론 비평에 큰 관심이 있던 사람이다. 용가리통뼈뉴스는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렇게 비평 영역에 다시 복귀하지 않을까. 쉽게 이 판을 떠나진 않을 것 같다. 다만 복귀한다면 국민TV와의 갈등은 어느 정도 풀어야 할 것이다. 제작진과 소통 없이 나갔으니까. 당분간은 꽤 오랜 시간 칩거하겠지만 돌아오면 또 역할이 있을 거다. 

뉴스K의 패인, 손석희와 김어준 평전?

   
▲ 국민TV '김어준 평전'.
 

김도연=민동기 미디어오늘 국장이 국민TV 방송평가 토론회 자리에서 “미디어오늘 기자들도 뉴스K 안 본다”고 하니까 노종면이 “미디어오늘 기자들 혼내야 한다”고 했다.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이 드나 손석희 뉴스에 더 주목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정철운=뉴스K가 잘 안 된 건 손석희 JTBC뉴스 영향도 있다. 손석희 뉴스를 보는 게 더 편하고 공신력도 있으니까…. 뉴스K가 제3지대에서 대안매체로 클 수 있었는데 손석희 뉴스란 변수가 나타났고, 진보성향 시청자에게 외면 받은 것 같다. JTBC는 다음과 네이버에서 생중계됐는데 뉴스K는 볼 수 있는 통로가 팟빵과 유튜브 정도였다. 팟빵을 아는 일반 시청자는 별로 없다. 접근성에서 불편할 수밖에 없다.

조윤호=JTBC에 손석희가 있다면, 뉴스K에는 노종면이 있다는 식의 상징성이 있었는데, 노종면이 나갔다. 결국 국민TV가 진영논리를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정철운=뉴스K가 포맷을 바꾸게 되면 뉴스가 길어질 텐데, 평론이 들어갈 거고 종편 식으로 바뀔 확률이 높다. 라디오 편성도 ‘서영석 타임스’나 과거 ‘김어준 평전’ 같은 걸 보면 대안언론에 목말랐던 사람들이 바랐던 편성은 아닌 것 같다.

김도연=국민TV는 출발이 애매했다. 뉴스타파는 탐사라는 확고한 영역이 있었는데, 국민TV는 처음에 조합원 모집할 때 ‘TV가 필요하다’는 당위가 매체 설립의 목적을 압도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들이 어떠한 부문에 장단이 있는지 파악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조윤호=국민TV는 나쁘게 말하면 이류의 느낌이 난다. 대안언론이 일시적으로 관심을 끌 순 있지만 이류로는 계속 갈 수 없다. 국민TV는 주로 보수진영을 희화화하는 내용을 킬러콘텐츠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다보니 전통적인 의미의 ‘언론’이라는 느낌은 나지 않는다. 

김도연=국민TV에 바라는 게 있다면, 자신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대중 영합주의적인 측면을 완화해야 할 것이다. 김어준 평전은 조합원들끼리 만족할 수 있겠지만 진짜 언론의 모습은 아니지 않나. 지금이 다시 대안언론의 방향을 되돌아볼 시점이다. <관련기사=‘나꼼수 방송’ 시선부터 노종면 기자 영입까지>

조윤호=20대 입장에서 말하면 국민TV 특유의 유머코드가 재미없다. 딴지일보 류의 유머코드랄까. 30~40대 아저씨들한테는 잘 먹힐지 몰라도 젊은 사람한테는 별로 재미없는 것 같다. 나꼼수도 주진우는 팩트가 있어서 재미있게 들었는데 나꼼수의 유머코드는 재미가 없다는 의견도 많았다. 그런 게 도배를 해버리니…. 김어준 평전도 그렇고…. 

대안언론, 솔직히 뉴스타파 말고는 모르겠다 

정철운=대안언론 가운데 뉴스타파는 생존할 것 같다. 수익기반도 탄탄하고, 분야도 명확하다. 취재력도 있다. 나머지 대안언론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 뉴스K 화면 갈무리.
 

조윤호=뉴스타파의 경우 기사를 보면 기사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국민TV는 보고나면 내용보다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내용보다는 누가 이걸 했구나, 라는 게 더 강하게 남는다. 기사 그 자체의 질보다는 그곳의 사람들이 국민TV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게 큰 한계일 수 있다. 

정철운=팟빵 중심의 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게 노종면의 주장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팟빵을 잘 모른다. 반면 국민TV 대다수 성원은 팟빵에 익숙하다. 그래서 아마 따로 앱을 만들자는 얘기는 와 닿지 않았을 거다. 뉴스타파의 소비방식은 팟빵이 아니다. 페이스북이나 앱을 타고 보는 경우가 많다. SNS로 뉴스 소비 중심이 이동한 현재, 뉴스타파 방식이 유리하다. 국민TV 콘텐츠는 SNS를 통한 노출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보는 사람만 보는 것 같다. 

김도연=뉴스타파도 어려움이 있다. 주 콘텐츠가 영상이기 때문에 텍스트보다 쉽게 공유되기 어렵다. 모든 게 수용자 손바닥에서 이뤄지는 데, 스크롤 몇 번 내려서 기사를 읽는 게 영상을 한참 보고 있는 것보다는 쉽다. 쉬운 내용을 담은 영상물도 아니잖나. 뉴스K도 마찬가지 어려움을 겪은 것이겠고. 물론, 라디오 장점도 있는데, 단점도 명확하다. 고정 청취자, 충성도 높은 청취자에게만 어필하게 된다. 거기에 안주하겠다면 할 말은 없는데, 영향력을 지닌 언론이 되기는 어려울 거다.

정철운=조합원만을 대상으로 하는 뉴스였다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무료로 풀었다. 좋은 뉴스를 비조합원에게 많이 유통시키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열심히 했는데 반응이 없으니 노종면도 답답했을 거다. 

조윤호=일정 부분 포맷을 바꾸자는 의견도 맞는 것 같다. 차라리 포맷을 바꿔서 잘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는 의견이니까. 그런데 이게 딜레마다. 지금 이대로라면 사람들이 안 보는데, 형식을 바꾸면 진보진영의 종편으로 인식될 수도 있으니까. 근본적으로는 단독과 기획보도를 계속적으로 발굴할 능력이 안 되는 문제다.

김도연=뉴스K는 시작부터 헛발질을 크게 했다. 조선일보 오보를 주장했는데 뉴스K 오보였다. 그거 보는데 참 마음이 아팠다. 괜찮은 보도도 많이 한 것도 사실이다. 문창극 교회 영상을 KBS 단독으로 알고 있는데, 뉴스K도 당일 보도했다. 또 수원대 이인수 총장 해임을 촉구하는 교수가 교직원에게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단독 입수해 보도했는데, ‘왜 다른 방송에서는 못 봤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일반 언론이라면 내보내기 어려운 내용을 보도한 성과도 있다. 부각이 잘 안 됐다. <관련기사=노종면, “뉴스K 수준 기대 이상… 불공정 공영방송에 자극 주겠다>

조윤호=뉴스타파는 권은희 보도로 작년에 회원이 수백 명 나갔다. 비슷한 걸 국민TV가 했으면 조합원이 더 많이 나가지 않았을까. 국민TV내부 성원들이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자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조합원의 성향이란 게 있다. 어떤 조합원은 뉴스K 댓글에 새누리당 입장은 아예 받아줄 필요 없다고 하더라. 돈을 주는 조합원의 요구나 성향도 반영할 수밖에 없을 거다. 결국에 언젠가 한 번은 선택해야 한다. 뉴스타파도 권은희 보도를 통해 한 번 털어내고 간 거다. 공정해보이려고 권은희 깐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지만, 그걸로 어느 정도 (진영언론이란 비판을) 정리했다. 국민TV도 그런 보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관련기사=국민TV, “우리는 스마트 종편으로 간다”>
  
김도연=대안 언론을 소비하는 이들은 ‘빅텐트’를 이야기하곤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저 거대 세력에 맞서기 위해선 진보 성향의 매체들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얘기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전형적으로 언론을 ‘도구’로 보는 관점 아닌가. 특정 정파의 승리를 위해. 언론은 외부에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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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해수 수돗물’ MB사저부터 공급해야

 
 
4대강 사업으로 물부족 해결? 두 배 비싼 수돗물을 왜 마셔야 할까?
 
임병도 | 2015-02-03 08:55:1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요새 부산지역은 해수담수화 수돗물 공급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부산시 상수도사업본부는 부산 기장군 대변리의 바닷물을 여과시켜 수돗물로 공급하는 해수담수화 시설을 완공해 부산 기장군에 공급하려다 주민들 반대로 중지된 상황입니다.

부산시 기장군과 해운대 일부 주민들은 해수담수화 수돗물 공급 사업을 반대하는 서명과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일부 주민들은 아예 이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부산지하철노동조합의 도움으로1 부산까지 직접 가봤습니다.


‘고리원전에서 불과 12Km 떨어진 바닷물을 마신다고?’
 
부산시 기장군에는 총사업비 1,945억원을 투자해 바닷물을 수돗물로 공급하는 해수담수화플랜트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해수담수화 수돗물은 지난 12월 상수도를 통해 공급하려다 주민의 반대로 중지됐습니다.

주민들은 왜 해수담수화 수돗물을 반대할까요?

부산 시민들은 바닷물을 수돗물로 만들어 마시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부산시 기장군에 있는 해수담수화 시설의 수돗물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산시 기장군 대변리에 있는 해수담수화 시설은 고리원전으로부터 불과 12Km떨어진 바닷물을 여과시켜 수돗물로 공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고리원전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반경 10km내 주민들은 대피해야 합니다. 그만큼 10여 킬로 내외는 방사성 배출물에 대한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지역입니다.

 ⓒ 한국원자력연구원

주민들이 바닷물을 수돗물로 마시는 것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방사성배출물이 100%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방사성 배출물인 ‘삼중 수소’2는 암을 유발하거나, 기형아와 돌연변이 발생 위험성이 높습니다.

부산광역시 상수도사업본부는 수돗물에서 삼중 수소가 ‘불검출’됐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시험결과를 보면 분명히 검출됐습니다.

현재까지 삼중 수소를 100% 제거하는 기술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4대강 사업으로 물부족 해결? 두 배 비싼 수돗물을 왜 마셔야 할까?’

원전 근처 바닷물을 수돗물로 먹는 시민들은 불안합니다. 그런데 부산광역시 상수도사업본부는 물이 부족해 반드시 해수담수화를 통해 수돗물을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MB는 물 부족을 막기 위해 4대강 사업이 필요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4대강 사업을 했는데도 왜 물이 부족할까요? 실제로 부산시는 물 생산량의 53.3%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습니다.

1,954억이 든 부산 해수담수화 사업으로 공급되는 수돗물은 현재 수돗물 가격보다 두 배는 비싸게 판매될 수 있습니다.

정부가 5년 유예 기간을 줬지만, 나중에 부산시가 판매단가 기준 연간 59억 6천만 원, 생산단가 기준 연간 32억 5천만 원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그렇다면 왜 이런 비싼 수돗물을 부산시민들은 마셔야 할까요?

두산중공업은 부산 해수 담수화 사업에 706억원을 투자했습니다. 사우디아리바의 해수담수플랜트 수주를 위한 성공 사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MB는 원전을 수출하기 위해 물부족 중동국가에 해수담수화 수출 패키지를 진행했습니다. 원전을 수출하고, 원전에서 나오는 바닷물을 수돗물로 바꿔 공급하는 방식은 엄청난 MB의 치적으로 홍보됐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사업이 검증되지 않은 사업이었고, 그 검증을 위해 부산 시민들이 몰모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원전 해수 수돗물, 먹고, 마시고, 씻을 수 있도록 MB사저부터 공급해야’
 
주민들이 거세게 반대하자, 부산시는 부산 해수담수화 시설에서 나온 생수를 공무원에게 공급하겠다고 합니다. 4물 한 병 마시는 것, 엄마들도 그 정도는 다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엄마들이 두려운 이유는 수돗물은 단순히 일회성으로 마시는 생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이들이 수돗물로 몸을 씻고, 그 물을 마시고, 엄마들은 요리하고 아이들은 먹습니다.

단순히 물 한 병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방사성 물질이 우리 아이들에게 노출될 수 있기에, 0.1%든 0.001%든 부모들은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사례가 없다. 안전하다. 보험이 있으니 걱정 마라’는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아이들을 놓고 부모들이 도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헌법 제35조 1항은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되어 있습니다.

대법원은 ‘국민이 수돗물의 질을 의심하여 수돗물을 마시기를 꺼린다면 국가로서는 수돗물의 질을 개선하는 등의 필요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그와 같은 의심이 제거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고, 만일 수돗물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이나 의심이 단시일 내에 해소되기 어렵다면 국민으로 하여금 다른 음료수를 선택하여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이 국가의 당연한 책무이다.’라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5
 
단순한 물도 아니고, 우리가 씻고 먹고, 마시는 수돗물에 조금이나마 불안한 방사성 배출 물질이 있다면, 국가가 그 불안을 해소하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업적을 위해 국민의 세금을 빼돌리고, 국민을 몰모트로 만든 MB의 논현동 사저에 부산 원전 해수 수돗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가 장담했듯이 ‘하나의 하자도 없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원전 해수 수돗물을 마시고, 씻고, 요리해서 먹어 그 안전성을 MB 스스로 입증해주면 됩니다.

원전 해수 수돗물이 안전하다면 생수 한 병 달랑 마시지 말고, 논현동 MB사저부터 먼저 공급해서 손녀와 아들, 본인이 먼저 사용하여 솔선수범하는 전직 대통령이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1. 부산지하철노동조합은 1인 미디어를 대상으로 부산 지역 시사 이슈를 공동으로 취재할 수 있도록 시민단체와 협조하고 있다. 
2. http://ko.wikipedia.org/wiki/%EC%82%BC%EC%A4%91%EC%88%98%EC%86%8C#sthash.IRCzGMO3.dpuf
3. ‘예산 먹는 하마’ 뻔한데… ‘해수담수화 덫’에 걸린 부산시. 부산일보 2014년 12월 24일.http://goo.gl/Y6z1hD 
4. 해수담수화 수돗물 관공서 공급논란. KNN.2015sus 1dnjf 28일 http://blog.knn.co.kr/46873 
5. 대법원 1994.3.8, 선고, 92누1728, 판결 http://goo.gl/AEB43N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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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10시에 태어난 아이가 '종북'의 증거라고?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2/03 11:32
  • 수정일
    2015/02/03 11:3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재판기②] 아이의 출생과 이름에 대한 검찰의 황당한 소설

15.02.02 20:29l최종 업데이트 15.02.02 20:29l

 

'통일콘서트'를 열었다는 이유 등으로 구속된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가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겪은 일과 앞으로 진행될 재판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담은 글을 남편인 윤기진씨에게 편지로 보내왔다. <오마이뉴스>는 황선 대표가 윤기진씨에게 보내온 편지 내용을 몇 편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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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가 1월 10일 오후 인천국제공항공사에서 신은미씨가 떠난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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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피의자는 2005. 10. 10.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일을 기해 임신 중인 자식을 북한에서 출산할 목적으로 '아리랑 축전' 관람을 빙자, 방북하여 북한 평양산원에서 자녀를 출산 후 소위 통일둥이 '윤겨레'라 이름 짓고, 같은 해 10. 25. 판문점을 통해 귀환함으로써 종북인사들로부터 '통일전사'란 칭송을 받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사이트나 일부 극단적 개인들이 익명의 트윗이나 댓글에서 소위 '기획원정출산설'을 흘리며 모진 욕을 해대는 경우는 수차례 겪었으나 국가기관의 공식서류에서 우리 딸의 출산을 이런 식으로 기술한 것을 보게 되다니.

당시 남북이 함께 아이의 탄생을 축하했고, 아이는 이미 열 살이나 되어 이 나라에서 자라고 있다. 국가보안법 관련 공소장이나 체포영장, 판결문까지 얼마나 억지투성이인지는 때마다 느껴왔으나, 아무리 남북관계가 악화됐기로서니 아이 탄생을 두고 일개 시정잡배도 아닌 국가기관이 나서서 시비를 한다는 것은 차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들 내심에야 나의 출산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 있었다 치더라도 검사씩이나 한다는 사람들이 악플러 수준으로 자신의 명예를 내동댕이친다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에도 내키지 않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딸의 생일은 2005년 10월 10일이다. 왜냐고? "산이 거기에 있으니 올랐다"는 답 이상 어떤 답을 할 수 있겠는가. 애초 애물단지인 통일운동가(특히 한총련 관련 수배자들) 자식들을 둔 어르신들을 위한 반값 할인 평양 효도관광 일자는 2005년 10월 6~7일이었다. 나는 없는 돈에 시누이와 함께 관광비용을 마련하여 시부모님의 평양관광을 접수했다.

어린 아이도 있고 둘째를 임신하고, 돈도 없는 처지였던 나는 그 가을 4천 명이 평양관광을 다녀오는 분위기 속에서도 따라나설 염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수배 7년차 아들을 둔데다가 통일운동단체 대변인이란 걸 하면서 돈 한 푼 못 벌어오는 며느리 때문에 매일매일 속이 상하실 시부모님께 38선을 넘는 경험을 시켜드리고, 통일이 헛된 꿈이 아니라는, 그러니 우리의 불효를 이해해주십사 하는 마음을 전해드리는 게 그 효도관광의 목표였다.

헌데 10월 6일 새벽같이 길을 나선 부모님이 당일 오전 다시 짐 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실무 착오로 명단이 누락, 북측에서 부모님 명의의 초청장을 보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너무나 황당해 했는데, 그 후 얘기를 듣자 하니 그렇게 되돌아 선 부모님들이 총 13분이나 되셨다고 한다.

그 중엔 수배 중인 아들이 난생 처음 부모님 결혼기념 선물로 여행을 보내드린 경우도 있는데, 아들 성화에 밤을 새워 포항에서 인천공항까지 왔다가 허탕을 친 탓에 집안 분위기가 더 험악해졌다는 후문이다. 시부모님도 '자식이 수배 중인데 무슨 여행이냐'며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셨던 터라 그날의 허탕이 오히려 반가운지, '평양 다녀온 셈 치자'고 말씀하셨다.

나흘 전까지도 예상하지 못한 2005년의 평양 방문

그 소동 후, 당시 평양관광을 주관했던 '겨레하나' 쪽에선 하필 고생하신 부모님들 단체관광 보내드리는 데서 일이 난 게 속상하고 미안했던지, 다시 일정 맞춰서 청하겠다고 했다. 어렵게 낸 시간을 더 낼 수가 없어서 환불처리한 경우도 있었고 다시 관광길에 나선 경우도 있었는데, 우리 시부모님들은 그나마 '양심수 석방, 정치수배 해제' 집회장에서 일면식이라도 있는 분들과 가는 단체여행이라 가겠다고 승낙하셨던 것이지 이후 뿔뿔이 낯선 팀에 끼어 다니는 것은 질색이라 하셨다.

워낙 낯가림이 심하신 분들이고, 아들 때문에 근교나마 여행이라고 차리고 나선 일이 먼 옛 일이었다. 어려운 살림에 백만 원이 넘는 돈을 1박 2일 여행에 쓴다는 것도 영 걸려하셨다. 그러나 나는 꼭 보내드리고 싶었다. 스스럼없이 북의 동포들을 만나본 경험 한 번이 얼마나 민족문제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지. 부모님이 아들 수배바라지 하는 보람을 알 게 하고픈 순전히 내 욕심 때문이었다.

마침 '겨레하나' 쪽에서 연락이 왔다. 산부인과 치료를 마치고 막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는데, 10월 10일 관광팀에 여유가 있다며 부모님께서 낯선 이들과 가기 꺼려하신다니 가족 중에 동행할 한 분을 추가비용 없이 배려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가도 될까? 당시 나는 10월 17일 제왕절개 수술을 예약해놓은 상태였다. 그 전 해인 2004년 첫 아이를 난산 끝에 제왕절개로 출산하고도 연년생으로 또 둘째를 가진 터라 둘째는 자연분만을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예정일보다 일찍 수술일정을 잡아두었고 모든 징후들은 순조로웠기에, 의사선생님은 30분 안팎의 비행 정도는 괜찮다고 흔쾌하게 대답하셨다. 10월 10일 아침 인천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편으로 평양 방문길에 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여유 있는 날이 10월 10일이 아니었으면 이 마녀사냥이 좀 더 부드러웠을까 싶기도 하지만, 당시엔 이 모든 우연이 매우 자연스러웠을 뿐이다.

'겨레하나' 측에서 10월 10일 날 단체관광에 여유가 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도, 그리고 내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단 30분 만에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심지어는 5.1경기장에서 아리랑공연을 감상하는 그 순간에도 그날이 조선노동당 창당일이건 아니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건 내게 별 관심사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명박·박근혜 시절 들어 수 해 전 그날의 일이 이렇게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되어 국가기관까지 나서서 소설을 새로 쓰는 것이 신기하다. 내가 보기에 조선노동당 생일에 한국사회만큼 지극한 관심을 보이는 곳은 또 없는 듯하다.

당시 아이를 낳고 내가 그곳 평양산원에서 들었던 가장 그럴싸한 말은 "우리민족이 완벽한 숫자로 여기는 10이, 우리민족이 길하게 여기는 3번이나 겹친 10월 10일 10시에 태어났으니 복덩이임이 틀림없다"는 다소 무속적이면서도 민족적인 덕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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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10월 10일 평양산원에서 딸을 출산한 황선(32, 통일연대 대변인)씨가 딸과 함께 25일 오후 도라산 출입국관리소를 통해 귀환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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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체제선전사이트를 믿고 국민을 기소한 검찰

검사는 '조선노동당 창건일을 기해 임신 중인 자식을 북한에서 출산할 것을 목적으로' 방북했다고 하는데, 미국 원정출산처럼 이 나라에서 이런저런 혜택이 보장된 길도 아니고 오히려 때만 되면 빨갱이 사냥으로 광풍이 이는 곳에서 굳이 왜 그런 무리수를 두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북의 인사 중 누군가도 이런 이야길 했다. "보통 아줌마가 몸을 푼 거면 더 걱정 없이 축하하고 그러겠는데 하필 통일운동가 황선이가 여기서 애를 낳으니, 이후 괜한 생트집에 시달리지나 않을지 걱정"이라고. 그 말에 "설마 생명을 두고 그럴라구요" 하며 웃어넘겼지만, 아이 낳은 지 10년, 오늘 나는 이런 수준의 모함에 이러고 앉았는 것이다.

유신의 서슬이 퍼렇던 1977년, 청계피복노조가 9월 10일로 예정된 동화시장 옥상의 '노동교실' 강제폐쇄시한을 하루 앞두고 농성을 시작했다. 당시 경찰들은 농성자들을 연행, 구속하며 "북한정부수립일인 9월 9일에 맞춰 농성을 시작한 빨갱이들"이라 주장했다. 9.9절에 맞춰 농성을 감행한 빨갱이를 구속하기 위해 14살 미성년의 주민등록을 위조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정신병적 증상까지 보이는 공안기관의 빗나간 애국심은 예나 지금이나 놀라운 수준이다. 검찰은 구속영장 청구서류에 친절하게도 나의 평양출산에 대한 주석까지 달아놓았다.

"북한은 이를 소재로 단막극 <옥동녀>를 상영하는 등 체제선전용으로 활용. 북한의 체제선전 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 올려진 <김정일장군님과 민족대단결>이라는 문건은 '황선려성은 남에 있는 친정어머니도 돌려주지 못한 살뜰하고 다심한 사랑을 부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온정이 너무도 고마워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었다'며 '민족의 태양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민족대단결 사상을 받드는 한 성원이 되라는 의미에서 딸애의 이름을 <윤겨레>라고 지어주었다'고 발표."

한국에서는 차단돼 있고 검찰 스스로 북한의 체제선전사이트라 규정함에도 그곳에서 사실여부를 구하는 이 태도, 이것이야말로 북에 대한 모순적인 공안당국의 관점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지극한 정성을 보여준 평양산원의 의료진들과 돌봐준 여맹(여성동맹) 성원들, 영희 언니 그리고 스스럼없이 축복해준 남북 당국에게 감사를 표했다. 손수 나와 아이의 모습이 담긴 그림, 일일이 수놓은 쿠션이며 베개, 아이 돌복이며 이불, 아기 반지와 산모 보약 등, 서울에 두고 온 첫아이 선물까지 마련해준 그들이다. "이런 꿈같은 일은 모두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덕분"이라며 6.15의 수혜를 받아 감개무량하다는 소감도 거듭 밝혔다.

초등학생 아이에게 비정상적 학대... 이제 끝내라

문제는, 그들은 내가 누구에게 감사하든 그 모든 감사와 인사를 그 사회의 지도자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오해와 해석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있는 그대로의 북을 알고 납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연극 <옥동녀>를 본 일도 없고 '우리민족끼리'라는 사이트에 그런 글이 올라왔다는 것도 이번 재판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남북이 자유롭게 인터넷 서핑조차 할 수 없는 처지니, 피차 허위사실유포로 소송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검사가 검사 말마따나 그 사이트를 체제선전용으로 봐넘기면 그뿐이다. 국민에게는 불법사이트라 차단해두고 자신들은 그곳에서 취득한 정보를 맹신하며 일부 언론에 뿌리고 마녀사냥의 양념으로 쓰는 것은, 기울어져도 너무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뜀박질이 아닌가.

우리 '겨레'의 이름은 북에서 지어오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의 친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다. 평양산원에서 태어난 특별한 아이들에게 그곳 당국이 이름을 지어주곤 했으나, 역시 어떻게 튈지 모르는 남북관계며 조상 고유의 권리를 상의도 없이 박탈할 수 없다는 등의 고민으로 서울로 돌아와서야 수배 중인 아이 아버지와 시아버님의 상의 하에 지은 것이다.

최종 '동명'(최초 진통이 동명왕릉에서 오기도 했지만 시아버님이 그곳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셨다)이란 이름과 '겨레'라는 이름 중에 순 우리말인 '겨레'로 정하게 되었다. '한 조상의 피를 타고난 동포'를 뜻하는 겨레라는 말을 북에서는 저렇게("민족의 태양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민족대단결 사상을 받드는 한 성원이 되라") 해석하는 모양이지만, 우리 시아버님은 '민족의 태양'에도 '민족대단결 사상'에도 관심 없으시다.

다만 평양 아리랑 공연 중 일제시대를 형상화하며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노래가 나오니 대번에 눈물이 나셨다 했다. 우리 딸의 이름은 이런 감정을 담아 지은 것이다. 공안당국 멋대로 아이의 생일을 규정하고 이름까지 한계 지어서 이제 초등학생인 아이에게 비정상적인 학대를 가하는 짓, 끝냈으면 한다. 그래, 공안 경찰과 검찰에게 '겨레'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그들의 답이 궁금하다.

2015년 1월 25일 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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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5일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의 옥중편지 두 번째
ⓒ 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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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국립교예단, 세계를 날다


[친절한 통일씨] 1952년 창립, 세계대회 석권..'민족교예' 강조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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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01  23: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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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교예단의 '쌍그네 교예'. 지난 2008년 9월 4일부터 28일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세계무역전시관 부근 '유럽공간'(Europaviertel)에서 공연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달 20일 북한 국립교예단이 모나코에서 열린 제39차 몬테카를로 국제교예축전에서 체력교예에 해당하는 '쌍그네비행'과 '중심조형' 부문 금상을 수상했다는 <조선중앙통신>발 보도가 눈길을 끌었다.

당시 보도에서 축전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은 "조선의 공중교예는 어느 나라도 따를수 없다"며, "특히 김명진 배우의 기술동작은 세계적으로 그 누구도 수행하지 못한 것으로서 체육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운 것이나 같다"고 극찬을 했다.

사실 북측 교예단이 세계 무대에서 이같은 평가를 받은 것이 이번 만이 아니다.

국립교예단은 지난 1974년부터 시작해 올해 39회에 이르는 세계적인 서커스 축제인 '몬테카를로 국제교예축전'에만도 지금까지 10차례 대상과 금상을 수상하고 유럽순회공연도 여러차례 가졌으며, 최근에는 지난 2013년 11월 세계 3대 교예축전의 하나인 제14차 오교국제교예축전에서 체력교예작품으로 전년도에 이어 2년 연속 최고상을 거머쥔 바 있다.

공중교예와 대형마술 등 주특기

북 국립교예단이 최근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은 대표 작품으로는 공중교예 '정복자들', 체력교예 '비행가들'과 대형요술(마술)이 있다.

 

   
▲ 2008년 12월 평양교예단이 전용극장인 평양교예극장에서 그네비행 공연을 펼치고 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버스를 대절해 관람을 올 정도로 북한 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 2011년 중국 허베이성 스쟈장시에서 열린 제13차 우챠오국제교예축전에서 최고상인 금사자상을 수상한 '정복자들'은 1984년에 북한에서 처음으로 창작 공연된 공중교예 '3단 그네비행'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서, 당시 평양교예단 배우들이 출연한 '3단 그네비행'은 몬테카를로국제교예축전, 우챠오국제교예축전, 쿠바국제교예축전을 비롯한 국제교예축전들에서 최고상을 받고 인기를 끌었다.

 

재일 <조선신보>는 당시 보도에서 "9명의 남녀배우들(남자7, 여자2)은 '정복자들'에 출연하여 10분간 공중에서 4회전 돌아잡기와 3회전 돌아잡기를 비롯한 세계 최첨단 기교들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원만히 수행하였다"고 전했다.

지난 2011년 프랑스에서 열린 '제19차 마씨국제교예축전'에서 최고상인 프랑스대통령상을 수상한 '비행가들' 역시 몬테카를로국제교예축전(1997년), 중국오교국제교예축전(1999년), 중국무한국제교예축전(2002년), 이탈리아 라띠나국제교예축전(2010년), 프랑스그레노블국제교예축전(2010년)들에서 모두 축전 최고상을 받은 관록있는 작품이다.

   
▲ 지난 2011년 프랑스에서 열린 제19차 마씨국제교예축전에서 체력교예인 '비행가들'로 이 축전 최고상인 프랑스대통령상을 받은 두 남녀 배우인 한정심과 최철.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남자 9명에 여자 1명이 출연하는 이 작품은 유동그네를 이용해 서로 다른 비행을 하면서 배우들의 용감성과 대담성 그리고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예술적 형상을 보여주는데, "남자배우의 21m의 장식을 거리비행과 뒤로 3회전, 내리기를 몸 펴고 2회전, 옆으로 3회전 내리기, 여자배우의 3회전 잡아 3회전 땅에 내리기 등의 기교는 기술난이도가 매우 높은 최첨단 기교동작에 속한다"고 한다.

이밖에 북 국립교예단은 지난 2011년 4월 평양 5월1일경기장에서 펼친 '대형요술'공연에서 대형 여객버스와 헬리콥터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마술을 선보여 관중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을 방문 중이던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단장으로 하는 '디 엘더스' 대표단도 이 공연을 관람했다.

당시 공연을 본 중국무용단의 부단장은 "구성과 형식, 기교와 형상 등 모든 면에서 특색이 있는 공연은 요술 발전의 새 경지를 개척한 걸작"이라고 말했으며, 핀란드음악단 단장은 "이런 대형요술을 하는 나라는 몇 개 나라밖에 안 된다"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1952년 국립곡예단으로 창립

국립교예단은 전쟁중이던 지난 1952년 6월 10일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국립곡예단'으로 창립됐으며, 2012년까지 '평양교예단'으로 불리다 그해 '국립교예단'으로 명칭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2007년 6월 11일 <조선중앙통신>은 평양교예단 55돌을 맞아 그동안 교예단이 1천 50여 편에 달하는 교예 작품을 창작, 공연했다고 역사를 소개한 적이 있다.

통신은 "특히 1980년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수중교예와 빙상교예 창작을 시작해 30여 편의 수중 및 빙상교예 작품을 내놓았다"며 "교예단은 첫 공연의 막을 올린 1952년 8월부터 2천200만명을 대상으로 2만5천여 회의 국내 공연을 진행하고 160여개 나라에서 수천 회의 대외 공연을 했다"고 전했다.

통신에 따르면, 평양교예단은 1972년 4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제9차 국제현대마술 축전에서 1등에 올라 처음으로 금상을 탔으며 이후 세계서커스 선수권대회와 올림픽축전, 몬테카를로 국제서커스축전을 비롯해 다양한 국제대회에서 금상과 특별상 등을 휩쓸었다.

초기 50여명이었던 단원은 김 주석이 전국에서 선발한 200명의 단원을 보내주어 충원됐으며, 1975년 6월 15일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평양교예학교를 설립하면서 체계적으로 교예 전문인력을 양성할 수 있게 됐다. 초기에는 3년제로 시작해 4년제, 6년제로 심화됐으며, 1992년 9월 1일 '평양교예학원'으로 승격했다.

   
▲ 평양시 광복거리에 있는 평양교예극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행사를 위해 1989년 5월 1일 광복거리에 3천500석 규모의 전용극장인 평양교예극장을 건립해 일반교예, 수중교예, 빙상교예, 동물교예 등을 진행하고 교예배우들도 양성하고 있다. 이어 극장은 2010년 7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현대적으로 개건공사가 이뤄져 체력교예, 빙상교예, 동물교예, 수중교예 등을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물질기술적 토대가 마련됐다고 한다.

국립교예단과 함께 북에서 활동하는 전문 교예단으로는 1천640석 규모의 인민군 교예극장을 갖고 있는 인민군교예단이 있다.

민족교예 중심으로 교예예술 발전시켜

북측의 교예 공연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지난 2008년 10월 60여명의 국립교예단(당시 평양교예단)을 이끌고 유럽 순회공연을 하던 김대희 단장은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체력교예 발전에서는 이 교예를 통해서는 인간이 아름답고 슬기롭고 가장 힘있고 가장 귀중한 존재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고 북측 교예의 특징을 설명했다.

김 단장은 "다른 나라 교예를 보면, 인간을 기형화하는 그런 측면이 있다. 우린 절대 그런 것은 반대한다"며, "인간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슬기롭고 힘있게 보여야 한다. 인간으로서 삶의 보람과 가치를 느끼고 희열을 느끼고 이런 것을 하자고 하는 거다. 인간이 완벽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문학예술사전'에서도 "교예는 육체운동을 형상수단으로 하여 인간의 체험과 정서, 지향 등을 반영함으로써 사회교양적 기능을 수행한다 …육체의 성장과 그 기능을 다양하게 발전 시켜주며 용감성과 인내성, 굳은 의지, 명랑성과 낙천성을 배양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 금강산관광이 진행되던 때는 남측 관광객들도 북한 교예공연을 맛볼 수 있었다. 2006년 1월 '평양모란봉교예단' 출연진이 2천회 특별공연을 마치고 인사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 2012년 6월 <조선중앙TV>는 '주체교예발전 60년'을 되돌아보는 영상에서, 지난 1970년대 김정일 위원장이 민족교예작품인 '널뛰기'에 주목하면서 층층으로 인간 무등쌓기 동작을 심화시키는 기술을 최절정으로 장식하라는 지침이 있은 이후 민족교예를 중심으로 교예예술을 풍부하게 발전시켜 왔다고 강조했다.

 

또 그동안 마술이라면 손재주를 부리는 수준이었으나 1970년대부터 김 위원장이 '사람들이 탄복할 수 있도록해야 하며, 큼직큼직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 후부터는 헬리콥터 폭발장면 등을 연출하는 대형마술을 척척 만들어내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서 1972년 6월 김위원장이 새로 창작한 공중그네 예술을 선보였으며, 공중교예의 기본원리와 형상방도에 관한 문제, 공중교예의 높은 재주의 형상에 관한 문제 등 구체적인 지침을 주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지난 2012년 10월 초에는 국립교예단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깊은 관심속에 교예 역사상 처음으로 교예극 '춘향전'을 창작해 보다 높은 발전단계에 들어선 교예예술을 선보였다고 언급했다.

한편, 북한 교예에 대한 관심은 영화로도 발표될 정도였는데, 2012년 9월 평야국제영화축전에서 상영돼 호평을 받은 '김동무는 하늘을 난다(Comrade Kim Goes Flying)'는 당시 평양교예단의 현역배우인 한정심이 여주인공 '김영미'역을 맡아 북 교예배우의 전형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방의 탄광마을에 사는 처녀가 우여곡절끝에 평양에서 공중교예 배우로 변신해 성공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에서처럼 평양교예학원 입학시험에 떨어지기도 했던 한정심도 2003년과 2011년에 국제교예축전에 나가 금상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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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기습전법 연습하는 북의 추격기편대와 폭격기편대

 
한호석의 개벽예감 <147>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5/02/02 [12:14]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사진 1> 1.23비행전투훈련은 종전의 비행전투훈련과 확연히 다른 양상으로 실시되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훈련 직전에 항공군 사령관과 참모장을 당중앙위원회 청사로 불러 직접 비행항로와 자표들을 찍어주고 비행전투훈련의 진행순차와 방법 등 비행전투임무를 하달하였다. 이러한 훈련방식의 획기적인 전환은, 도식화된 훈련계획에 의존하면서 긴 시간 동안 준비절차를 거쳐야 했던 종전의 군사훈련방식이 퇴출되고, 최고사령관이 명령을 내리는 즉시 실전을 방불한 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 자주민보

 

 

근위항공사단 비행연대들의 탐색비행연습과 기습타격연습

 

지난 1월 24일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근위 제1항공 및 반항공사단 관하 추격기연대와 폭격기연대의 비행전투훈련을 지도한 소식을 일제히 실었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이 비행전투훈련소식을 보도한 날이 1월 24일이었으니, 훈련은 그보다 하루 전인 1월 23일에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이 방영한 1월 23일 ‘20시 보도’에 따르면, 당일 조선의 날씨는 전반적으로 맑았고, 기온도 평년보다 섭씨 5도 정도 높았으니, 겨울철 비행전투훈련에 알맞은 날씨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1.23비행전투훈련을 지도하기 며칠 전에 항공 및 반항공군 지휘부를 시찰하였다. 그 시찰소식은 1월 13일에 보도되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항공 및 반항공군 지휘부에서 근무하는 지휘관들에게 “실전과 무관한 훈련은 백날, 천날을 해도 필요가 없다. 한 가지 훈련을 하여도 내용과 형식, 방법이 현대전의 양상에 맞는 훈련, 실전환경과 접근된 훈련을 하도록 하자는 것이 당의 의도”라고 말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위와 같은 의도에 따라 1.23비행전투훈련은 현대전의 양상에 부합되는 실전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1.23비행전투훈련에 나선 근위 제1항공 및 반항공사단은 어떤 부대인가? 간혹 예외적인 경우가 있지만 대체로 조선의 언론보도에서는 조선인민군 군부대의 정식명칭을 표기하지 않고 제123군부대라는 식으로 표기하는데, 그런 명칭을 단대호라 한다. 그런데 이번에 1.23비행전투훈련을 보도할 때는 단대호로 표기하지 않고, 공식명칭으로 표기하였다. 


조선인민군 군부대들 가운데 ‘근위’라는 명칭을 수여받는 부대는 이미 6.25전쟁 때 전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정전 이후 오늘까지 60여 년 동안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각별한 관심과 지도를 받으며 자기의 전투력을 강화해온 최정예부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1.23비행전투훈련에 나선 근위항공사단은 조선인민군 항공군이 내세우는 최정예부대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근위제1항공사단 관하 비행연대들은 평안남도에 주둔한다. 제35비행련대는 평안남도 개천시 인근의 개천비행장에 주둔하고, 금성친위제55비행련대는 평안남도 순천군에 있는 순천비행장에 주둔하고, 제57비행련대는 평안남도 온천군에 있는 온천비행장에 주둔하고, 제60비행련대는 평안남도 북창군에 있는 북창비행장에 주둔한다.


조선인민군 항공군의 기본전투단위는 연대이며, 1개 항공사단은 6개 비행연대, 3개 반항공연대, 2개 탐지레이더연대로 편성되었다. 1개 비행연대에 4개 비행대대가 있다. 일반적으로 1개 비행연대가 1개 비행장을 사용하며, 1개 비행연대에는 전투비행사 70명이 배속되었다. 
조선인민군 최정예 항공사단 관하 비행연대들이 참가한 1.23비행전투훈련은 종전의 비행전투훈련과 확연히 다른 양상으로 실시되었다.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첫째,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1.23비행전투훈련 직전에 항공군 사령관과 참모장을 당중앙위원회 청사로 불러 “직접 비행항로와 좌표들을 찍어주시며 비행전투훈련 진행순차와 방법 등 오늘 진행할 비행전투임무를 하달하시였다”고 한다. <사진 1>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항공군 사령관과 참모장에게 직접 비행전투훈련임무를 하달한 것은, 항공군 참모부가 비행전투훈련계획을 작성하고, 항공군 사령관이 그 계획을 승인하고, 그 계획을 전달받은 항공군부대들이 비행전투훈련을 준비하는 절차를 밟아가는 준비시간을 크게 단축한 것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불시에 항공군 사령관과 참모장을 불러 비행전투훈련임무를 하달하였을 뿐 아니라, 오전 몇 시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도록 준비시간까지 정해주었다. 그렇게 되면 항공군 사령관과 참모장은 즉시 군부대로 달려가 최고사령관으로부터 하달받은 비행전투훈련임무를 전달하고 분초를 다투는 훈련준비에 돌입하는 것이며, 지정된 시간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최고사령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훈련을 시작하는 것이다.


요즈음 조선의 언론매체들이 보도하는 조선인민군 군사훈련에 관한 기사들을 종합해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비단 항공군만 그렇게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군을 그런 방식으로 훈련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훈련방식의 획기적인 전환은, 도식화된 훈련계획에 의존하면서 긴 시간 동안 준비절차를 거쳐야 하였던 종전의 군사훈련방식이 퇴출되고, 최고사령관이 불시에 명령을 내리는 즉시 실전을 방불한 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1.23비행전투훈련 중에 군지휘관들에게 “훈련에서 형식주의, 고정격식화를 배격하고 내용과 형식을 끊임없이 개선하며 훈련의 질을 높이는데서 전변을 가져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고 한다.

 

▲ <사진 2> 조선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이 초단기속결전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상한다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군사훈련에서 훈련진행속도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위의 사진은 2014년 4월 25일에 진행된 조선인민군 제681군부대 관하 포병부대가 실시한 포사격훈련장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자신의 손목시계로 훈련진행속도를 직접 측정하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그 포병부대는 자행포들을 최고사령관이 지정해준 사격지점으로 이동시키고 포사격을 개시하기까지 기동전개시간이 오래 걸렸고, 사격지점에서 진행한 연속포사격속도로 빠르지 못해 실격하였다.     © 자주민보


이전에 <자주민보>에 발표한 나의 글들에서 거듭 논한 것처럼, 조선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은 미상불 초단기속결전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견되는데, 그런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고속으로 전개하는 작전속도에 있다. 그런 까닭에 지금 김정은 제1위원장은 군사훈련에서 무엇보다 훈련진행속도를 중시한다. <사진 2>에서 보는 것처럼, 김정은 제1위원장은 군사훈련장에 나가서 자신의 손목시계로 훈련진행속도를 직접 측정한다.


그런데 훈련진행속도를 중시하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판정기준에 미달하여 실격된 군부대도 있다. 예컨대, 2014년 4월 25일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직접적인 지도 밑에 진행된 포사격훈련에서 조선인민군 제681군부대 관하 포병부대가 실격된 사례가 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 포병부대의 실격사유는 최고사령관이 지정해준 사격지점으로 자행포들을 이동시키고 포사격을 개시하기까지 기동전개시간이 오래 걸렸고, 사격지점에서 연속포사격을 진행한 사격속도도 빠르지 못한데 있었다.


당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구분대가 맡겨진 전투임무를 원만히 수행할 수 있게 산악극복능력을 강화하고 기동전개시간을 단축하며 전투사격속도를 높이기 위한 훈련을 잘하지 못하였다고 하시면서 구분대의 싸움준비가 잘되지 않았다고 엄하게” 질책하면서, “오늘 진행한 포사격훈련이 잘 되지 않은 것은 훈련에서의 형식주의가 낳은 결과”라고 지적하였고, “반미대결전을 눈앞에 둔 지금 싸움준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으며 인민군대의 싸움준비는 오늘 못하면 래일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 <사진 3> 이 사진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1.23비행전투훈련을 지도하면서 군지휘관들과 함께 비행장활주로를 이륙하는 미그-29 두 대를 바라보는 모습을 촬영한 것인데, 땅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에 시선이 쏠린다. 1월 23일 평양의 일출시각은 오전 7시 42분이었는데, 당일 그처럼 긴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1.23비행전투훈련이 오전 8시쯤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훈련임무를 하달한 시각으로부터 훈련이 시작된 시각까지 길어야 약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추산된다. 근위항공사단은 불시에 출격명령을 하달받는 경우 1시간 안에 사단 전체가 전투에 돌입할 격동적인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 자주민보


둘째,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1월 24일에 보도한 <사진 3>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보도사진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자신을 수행한 군지휘관들과 함께 비행장활주로를 이륙하는 미그-29 두 대를 바라보는 모습을 촬영한 것인데, 땅 위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에 시선이 쏠린다. 1월 23일 평양의 일출시각은 오전 7시 42분이었는데, 당일 그처럼 긴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1.23비행전투훈련이 오전 8시쯤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비행전투훈련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에 비행전투임무가 그 근위항공사단에 하달되었는지 보도하지 않았으나, 자기들의 최고사령관으로부터 비행전투훈련임무를 하달받은 항공군 사령관과 참모장이 “실전을 방불케 하는 급박한 한 초 한 초가 흐르는 속에” 그 임무를 근위항공사단에 “신속히” 하달하고 “훈련조직과 지휘를 짜고들었다”고 보도한 것을 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항공군 사령관과 참모장에게 훈련임무를 하달한 때로부터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곧바로 훈련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항공군 사령관과 참모장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부름을 받고 당중앙위원회 청사로 가서 비행전투훈련임무를 하달받는데 걸린 시간, 비행전투훈련임무를 하달받은 항공군 사령관과 참모장이 사단지휘부로 달려가 연대급 지휘관들에게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지정해준 비행항로와 타격좌표, 비행전투훈련 진행순차와 방법을 알려주고 비행편대들의 출격준비를 다그친 시간, 그리고 김정은 제1위원장이 자신을 수행한 군지휘관들과 함께 당중앙위원회 청사를 출발하여 군비행장으로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 등을 모두 계산하더라도, 김정은 제1위원장이 훈련임무를 하달한 시각으로부터 훈련이 시작된 시각까지 길어야 약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추산된다. 다시 말해서, 근위항공사단은 자기들의 최고사령관으로부터 불시에 출격명령을 하달받는 경우 1시간 안에 사단 전체가 전투에 돌입할 격동적인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 근위항공사단이 그처럼 격동적인 전투준비태세를 갖추지 못하였다면, 비행전투훈련준비를 약 1시간 만에 끝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조선인민군 전군은 그들의 최고사령관이 불시에 통일대전 총공격명령을 내리면 불과 1시간 만에 모든 전투준비를 끝내고 초단기속결전에 돌입할 준비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1.23비행전투훈련 준비과정에 대한 이러한 분석적 고찰은, 조선에서 말하는 통일대전이 한미연합군이 예기치 못한 시각에 사전징후를 노출하지 않은 채 시작될 것으로 보는 나의 예견을 뒷받침해준다.


셋째,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1.23비행전투훈련이 시작될 때, 김정은 제1위원장은 준비를 끝낸 근위항공사단의 “결심을 청취”하고 비행연대들에게 출격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훈련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서술하지 않고, 왜 그들의 결심을 청취하였다고 서술하였을까?


보고와 결심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보고는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끝냈음을 상부에 알리는 행동이고, 결심은 어렵고 힘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갖추는 사상정신적 준비를 뜻한다.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어렵고 힘든 임무를 수행하라는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받으면 그것을 완수할 사상정신적 준비부터 먼저 갖춘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결심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준비완료보고는 임무완수결심 뒤에 따라오는 실무절차다. 작전에 돌입하기 전에 보고보다 결심을 더 중시하고 앞세우는 것, 바로 이것이 자기들의 전통적 군풍이라고 조선에서는 말한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지정해준 비행항로와 타격좌표들은 그 근위항공사단 전투비행사들이 이제껏 연습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이었다. 평소에 자주 추격기와 폭격기를 몰고 날아가던 항로로 출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익숙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건만, 비행해보지 못한 장거리 항로로 출격하여, 육안으로 미지의 목표를 찾아내 기습타격하라는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받았으니 전투비행사들이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겠는가. 

 

▲ <사진 4> 1.23비행전투훈련에 나선 근위항공사단 추격기들이 주일미공군기지, 주일미해군항공기지, 주일미해병대항공기지, 주일미해군기지를 가상한 타격목표, 그리고 순양함, 구축함, 프리깃함, 상륙강습함으로 편성된 한미연합함대를 가상한 타격목표를 탐색하고 기습타격으로 파괴하였다. 위의 사진은 1.23비행전투훈련에 나선 추격기들이 타격목표를 향해 기습타격을 퍼붓는 장면이다.     © 자주민보

 

 

1.23비행전투훈련에 등장한 미그-29, 미그-23, 수호이-25


지난 1월 23일 먼동 트는 신새벽에 김정은 제1위원장은 항공군 사령관과 참모장을 당중앙위원회 청사로 불러 비행전투훈련의 순차와 방법까지 미리 정해주었다. 그처럼 세심한 지도는 비행전투훈련 전반에 관한 전문지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1.23비행전투훈련은 그들의 최고사령관이 정해준 순차와 방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1.23비행전투훈련의 첫 순서는 추격기편대와 폭격기편대의 탐색비행연습과 기습타격연습이었다. 전투비행사들은 미지의 타격목표를 찾아가는 탐색비행을 하였고, 타격목표를 발견한 순간 지체 없이 강력한 기습타격을 퍼부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미지의 타격목표를 찾아가는 탐색비행이다. 만일 그 전투비행사들이 계기판에 항로를 현시해주는 위성항법장치와 탐지레이더를 보면서 타격목표를 찾아갔다면, 그것은 탐색비행이 아니다. 조선에서 말하는 탐색비행이란 위성항법장치, 탐지레이더, 무선교신장치를 모두 꺼놓은 무전파공중기동 중에 전투비행사들이 육안으로 항로를 식별하면서 미지의 타격목표를 찾아가는 고난도비행이다. 선뜻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들은 비행훈련을 그렇게 한다.


그들이 1.23비행전투훈련에서 탐색비행연습과 기습타격연습을 실시한 것과 관련하여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우리 공화국에 대한 군사적 타격을 기도하는 적공중비적들의 해외발진기지와 적함선집단을 가상한 목표에 대한 탐색과 강력한 타격이 짧은 시간 안에 련속적으로 진행되였다”고 서술하였다. 이 인용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추격기편대와 폭격기편대가 ‘적공중비적들의 해외발진기지와 적함선집단을 가상한 목표’를 타격하였다고 서술된 대목이다. 조선에서 말하는 ‘적공중비적’이란 미공군부대, 미해군항공부대, 미해병대항공부대를 통칭하는 말이고, 해외발진기지란 주일미국군항공무력 및 해상무력이 집결된 군사기지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1.23비행전투훈련에 나선 근위항공사단 추격기들이 주일미공군기지, 주일미해군항공기지, 주일미해병대항공기지, 주일미해군기지를 가상한 타격목표를 탐색하고 기습타격으로 파괴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4>


조선에서 이륙한 추격기가 왕복비행을 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沖繩)를 제외하고, 혼슈(本州)와 규슈(九州)에는 다음과 같은 주일미국군기지들이 있다. 각 군종별 항공무력이 집결된 기지들은 미사와(三澤)공군기지, 아츠기(厚木)해군항공기지, 이와쿠니(岩國)해병대항공기지이고, 각 병종별 해상무력이 집결된 기지들은 요코스카(橫須賀)해군기지와 사세보(佐世保)해군기지다. 강원도 원산비행장을 발진기점으로 하여 항속거리가 가까운 순서로 위의 기지들을 열거하면, 이와쿠니해병대항공기지까지 왕복거리는 1,400km, 사세보해군기지까지 왕복거리는 1,600km, 아츠기해군항공기지까지 왕복거리는 2,280km, 미사와공군기지와 요코스카해군기지까지 왕복거리는 각각 2,400km다. 

 

▲ <사진 5> 이 사진은 1.23비행전투훈련에 나선 미그-29가 기습타격을 마치고 활주로에 착륙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최우수기종인 미그-29의 항속거리는 왕복 2,100km다. 미그-29는 동해 또는 서해에서 한미연합함대를 기습공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강원도 원산비행장에서 출격하는 장거리비행으로 이와쿠니해병대항공기지와 사세보해군기지도 기습공격할 수 있다. 한미연합군은 언급을 회피하지만, 현재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미그-29를 약 300대 보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미연합공군을 압도하는 것이다.     © 자주민보


조선인민군 항공군이 보유한 여러 기종들 가운데 위에 열거한 미국군기지들까지 왕복으로 비행할 수 있는 두 기종은 미그(MiG)-29와 미그(MiG)-23이다. 특히 야간전투능력이 뛰어나고 속력이 매우 빠르며 핵탄적재능력까지 갖춘 미그-29는 미공군 주력기종인 F-16보다 성능이 더 좋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최우수기종이다. <사진 5>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1989년에 소련에서 완제품으로 수입한 미그-29 30대를 보유하였는데, 1993년부터 평안북도 태천과 곽산에 있는 제7기계공업국에서 자체기술로 미그-29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군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연합뉴스> 1995년 7월 8일 보도에 따르면, 1994년을 기준으로 제7기계공업국의 미그-29 연간생산능력은 14대라고 한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2015년 1월 현재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자국산 미그-29 약 270대, 소련산 미그-29 30대를 보유한 것으로 추산된다. 세계적 수준의 최우수기종인 미그-29를 300여 대나 보유한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한미연합공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데, 한미연합군은 이 놀라운 정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 <사진 6> 이 사진은 1.23비행전투훈련에 나선 미그-23 비행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미그-23 항속거리는 왕복 2,820km다. 미그-23은 동해 또는 서해에서 한미연합함대를 기습공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강원도 원산비행장에서 출격하는 장거리비행으로 아츠기해군항공기지, 미사와공군기지, 요코스카해군기지도 기습공격할 수 있다.     © 자주민보


조선의 언론보도사진들에 나오는 미그-29들은 두 종류로 도색되었는데, 진록색으로 도색된 것은 소련산이고, 그보다 연한 색으로 도색된 것은 조선산이다. 1.23비행전투훈련에는 당연히 조선산 미그-29들이 참가하였다. 
미그-29 항속거리는 왕복 2,100km이고, 미그-23 항속거리는 왕복 2,820km다. <사진 6> 그에 비해 미그-21 항속거리는 좀 짧아서 왕복 1,400km다. 1.23비행전투훈련에 미그-29와 미그-23은 참가하였는데, 항속거리가 짧은 미그-21이 참가하지 않은 까닭이 거기에 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1.23비행전투훈련에서 미그-29와 미그-23를 조종한 추격기편대 비행사들은 “공화국에 대한 군사적 타격을 기도하는 적함선집단을 가상한 목표”를 탐색하고 기습타격으로 파괴하였다고 한다. 조선에서 말하는 ‘적함선집단’이란 순양함, 구축함, 프리깃함, 상륙강습함 등으로 편성된 한미연합함대를 가리키는 말인데, 추격기편대가 한미연합함대를 가상한 타격목표를 “짧은 시간 안에 련속적으로” 탐색, 파괴하였다는 것이다. 미그-29에는 무게가 1,000kg이나 되는 대형유도폭탄이 4발이나 탑재된다.

 

▲ <사진 7> 이 사진은 1.23비행전투훈련에 나선 수호이-25 비행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수호이-25 편대는 전차, 장갑차, 보병전투차량, 자주포, 다련장로켓포 등으로 구성된 한미연합군 기갑무력을 기습타격으로 파괴하는 연습을 진행하였다. 이 기종은 대형로켓포 32발로 중무장한다.     © 자주민보


1.23비행전투훈련에 참가한 기종들 가운데는 수호이(SU)-25 폭격기도 있다. <사진 7> 한국군에서 근접지원기(close-support aircraft)라 부르는 이 폭격기의 항속거리는 왕복 1,500km다. 이 폭격기는 길이 1.4m, 무게 5kg인 로켓포 32발로 중무장한다.  
1.23비행전투훈련에서 수호이-25 편대는 “<적>기계화부대 집결처에 대한 항공정찰”과 기습타격을 연습하였다. 조선에서 말하는 ‘적기계화부대’란 최전방에 배치된 한미연합군 기갑부대를 뜻한다. 수호이-25는 전차, 장갑차, 보병전투차량, 자주포, 다련장로켓포 등으로 구성된 기갑무력을 기습타격으로 파괴하는 우수기종이다.

 

▲ <사진 8> 이 사진은 주일미국군 해외발진기지와 한미연합함대를 가상한 타격목표로 설정된 동해의 어느 무인도가 조선인민군 추격기편대와 폭격기편대의 기습타격을 받은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섬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그 편대들이 "멸적의 비행운을 새기며 <적>목표를 무자비하게 죽탕쳐놓았다"고 묘사하였다. 기습타격연습은 성공적이었다.     © 자주민보


1.23비행전투훈련에 나선 추격기편대와 폭격기편대가 진행한 탐색비행연습과 기습타격연습은 성과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추격기편대와 폭격기편대가 “멸적의 비행운을 새기며 <적>목표를 무자비하게 죽탕쳐놓았다”는 것인데, 그것을 바라본 김정은 제1위원장은 “근위부대 전투비행사들이 지적해준 항로를 따라 정확한 시간에 생소한 목표를 탐색하고 습격을 맵시있게 해제꼈다고 못내 만족해하시였다”고 한다. <사진 8>

 

▲ <사진 9> 1.23비행전투훈련 중에 아군기와 가상적기가 격돌한 자유공중전투에서 공중경계와 공중매복비행임무를 수행하던 아군추격기들은 가상적기들을 먼거리에서 포착하고 재빠른 기동으로 속도, 고도, 방향을 부단히 바꾸며 꼬리를 사리는 가상적기들을 따라물고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다. 조선인민군 항공군의 공중매복전법은 이미 베트남전쟁에서 미해군 전투기를 완전히 제압하고 그 우월성을 입증한 매우 위력적인 전법이다.     © 자주민보

 

 

추격기편대가 연습하는 공중매복전법의 위력


1.23비행전투훈련의 두 번째 순서는 추격기들의 기종별 자유공중전투연습이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우리의 령공을 침입한 <적>공중비적들을 격추하기 위한 기종간 자유공중전투가 (1.23전투비행훈련 중에) 진행되였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자유공중전투라 하고, 한국에서는 근접공중전(dogfight)이라 한다.


여러 대의 추격기들이 서로 뒤엉켜 혼전을 벌이는 자유공중전투에서는 공대공미사일을 쏘고 싶어도 쏠 수 없다. 공대공미사일에는 최장사거리만 있는 게 아니라 최단사거리도 있는데, 자유공중전투는 최단사거리 안에서 혼전양상으로 전개되므로 공대공미사일이 무용지물로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공중전투에서는 추격기에 장착된 탐지레이더도 쓸 수 없다. 전투비행사가 육안으로 적기를 포착하고 재빠른 회전기동으로 적기의 꼬리를 물고 기관포를 쏘아 격추하는 것이 자유공중전투의 전개양상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인민군 항공군이 운용하는 추격기들에는 아군기와 적기를 구별하는 피아식별장치를 장착할 필요가 없다. 자유공중전투에 나서는 전투비행사에게는 고도의 비행술이 필수적인데, 강한 담력, 예민한 비행감각, 행동의 민첩성을 가져야 고도의 비행술을 발휘할 수 있다. 복잡한 전자장비를 장착한 미국군 전투기들은 그런 비행술을 훈련하기보다는 전자장비에나 의존하므로 실제 근접공중전에서 조선인민군 추격기들에게 패하기 십상이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1.23비행전투훈련 중에 아군기와 가상적기가 격돌한 자유공중전투에서 “공중경계와 공중매복비행임무를 수행하던 아군추격기들은 <적>의 전투폭격기들을 먼거리에서 포착하고 재빠른 기동으로 속도, 고도, 방향을 부단히 바꾸며 꼬리를 사리는 <적>기를 따라물고 치렬한 공중전투를 벌리였다”고 한다. <사진 9>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공중경계비행은 한국군에서 말하는 초계비행과 같은 뜻인데, 공중매복비행은 무엇일까? 매복이란 적의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숨었다가 적이 나타나면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전투행동을 뜻하므로, 원래 매복전을 수행하는 부대는 지상군부대들이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보병부대만 지상매복전연습을 하는 게 아니라, 항공부대도 공중매복전연습을 한다. 조선에서 말하는 공중매복이란 추격기의 위성항법장치, 탐지레이더, 무선교신장치 등을 모두 꺼놓은 무전파공중기동으로 저공비행을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적의 공중조기경보기가 사용하는 전파탐지기와 추적레이더에 포착되지 않아 공중매복이 가능하다. 적의 공중조기경보기를 따돌리고 공중매복에 들어간 추격기가 적기를 발견하면 급상승비행으로 비행고도를 높이면서 적기의 꼬리를 따라잡고 30mm 기관포를 쏘아 격추하는 것이다.


조선인민군 항공군의 공중매복전법은 이미 여러 차례 실전경험을 통해 그 우월성이 입증된 바 있다. 이를테면, 지난 베트남전쟁 시기 베트남에 파병된 조선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은 공중매복전법으로 미해군 전투기들과 근접공중전을 벌였다. 조선은 1967년 초에 2개 비행연대를 베트남전선에 보냈다. 조선인민군 비행연대는 1972년까지 6년 동안 6개월마다 다른 비행연대와 교체되는 방식으로 참전하였는데, 그로써 전투비행사 640명이 미국군을 상대로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들은 미그-19 추격기를 몰고 하노이 상공을 방어하면서 미해군 전투기들과 맞붙은 근접공중전을 벌였는데, 그때마다 적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이를테면 1969년 5월 28일 미그-17 8대를 몰고 출격한 조선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은 미해군 전투기 F-105 12대를 한꺼번에 격추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아음속기종인 미그-17이 자기보다 거의 2배나 빠르게 비행하는 초음속기종인 F-105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공중매복전법의 덕이었다. 그 날 대승을 거둔 조선인민군 비행대대는 ‘5.28공중전’ 승리를 기념하여 대대명칭을 제528대대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 시기였던 1996년 5월 23일 미그-19를 몰고 월남한 전투비행사의 말에 따르면, 베트남전쟁 중에 조선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은 미국군 전투기 약 100대를 격추하였다고 한다. 윌리엄 모마이어(William W. Momyer) 당시 미공군사령관은 1978년에 출판된 자기 회고록 ‘세(3) 전쟁에서의 공군력(Airpower in Three Wars)’에서 베트남전쟁 중에 격추된 미해군 전투기들은 거의 모두 조선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이 조종한 미그-17에게 당했노라고 서술한 바 있다. 


조선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은 베트남전선에서 공중매복전법으로 적기를 격추한 경험을 살려 동해 영공에서도 미정찰기를 격추하였다. 함경남도 함흥시 인근의 덕산비행장에 주둔하는 제2항공사단 관하 근위제56련대 전투비행사들은 1969년 4월 15일 미그-21을 몰고 나가 동해 영공을 침입하여 공중정찰을 감행하던 미정찰기 EC-121을 동해에서 격추하였는데, 그때도 그들은 공중매복전법을 썼다.   
또한 2003년 3월 2일 조선에서 출격한 미그-29와 미그-23 편대가 동해 영공을 침입하여 공중정찰을 감행하던 미전략전자정찰기 <RC-135S>에 기습적으로 접근하여 공대공미사일을 쏘겠다고 위협하며 공중에서 나포하려고 하였을 때도, 그들은 공중매복전법을 썼다.

 

▲ <사진 10> 이 사진은 1.23전투비행훈련 중에 실시된 특수기교비행연습에서 미그-29가 고난도기교동작을 펼쳐보이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그들은 배면비행, 90도측면비행, 횡전, 초저공비행, 급상승비행, 급강하비행 등을 연습하였다. 이런 고난도비행술은 전시에 한반도 상공에서 벌어질 근접공중전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 자주민보


1.23비행전투훈련의 세 번째 순서는 추격기들의 특수기교비행연습이었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특수기교비행연습에 나선 추격기들이 “배면비행, 90도측면비행, 횡전, 초저공비행 등 기교동작들을 펼쳐보였다”고 묘사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그들은 급상승비행과 급강하비행도 펼쳐보였을 것이다. <사진 10>


배면비행은 기체를 거꾸로 뒤집어놓은 상태에서 날아가는 비행술이고, 90도측면비행은 기체를 90도 각도로 세워놓은 상태에서 날아가는 비행술이고, 횡전은 날카로운 각도로 회전기동하는 비행술이고, 초저공비행은 기체를 지표면 또는 해수면에 바짝 붙인 상태에서 날아가는 비행술이다. 이러한 특수기교비행술은 묘기에 가까운 고난도비행술인데, 무전파공중기동으로 진행되는 탐색비행, 공중매복비행에서 요구된다. 추격기를 타는 조선의 전투비행사들이 위와 같은 고난도비행술을 연습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평소에 고난도비행술을 꾸준히 연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23비행전투훈련의 마지막 순서는 여성추격기비행사들의 단독비행훈련이었다. 조선에서 첫 여성비행연대가 창설된 때는 1993년 2월이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선인민군 여성비행사들이 조종하는 기종은 폭격기, 직승기(작전헬기), 저고도침투기 등 비행속도가 비교적 느린 항공기들이다.

 

▲ <사진 11> 이 사진은 1.23전투비행훈련에 참가한 두 여성비행사들이 조종하는 미그-17이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이 기종은 아음속추격기이지만, 지난날 베트남전쟁에서 미해군 전투기들을 완전히 제압한 전설적인 전승기종이다.     © 자주민보
▲ <사진 12> 1.23비행전투훈련의 마지막 순서는 여성추격기비행사들의 단독비행훈련이었다. 이 사진은 2014년 11월 27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미그-17을 조종하는 단독비행훈련을 마친 여성추격기비행사 조금향, 림설에게 최상의 평가를 안겨주고, 그들의 훈련성과를 축하하여 직접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어준 다음 그들과 함께 미그-17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앞으로 조선에서는 조금향, 림설의 뒤를 이어 추격기비행사들이 되겠다고 자원하여 입대할 여학생들을 보게 될 것이다.     © 자주민보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여성비행사들인 조금향, 림설 두 사람이 미그-17을 타기 시작하였다. 그 두 여성비행사들은 왜 미그-19를 타지 않고, 미그-17을 탔을까? 미그-19는 초음속추격기이고, 미그-17은 아음속추격기다. 비행훈련을 막 시작한 여성비행사들이 처음부터 초음속추격기를 조종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에 아음속추격기를 탔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들의 선배들이 베트남전쟁에서 벌어진 근접공중전에서 미해군 전투기를 완전히 제압한 전승기종 미그-17을 자기들의 첫 훈련기종으로 택한 것으로도 생각된다. <사진 11>

장장 70년에 이르는 조선항공군역사에 여성추격기비행사들이 배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 여성추격기비행사들이 조선의 언론에 처음 등장한 때는 2014년 11월 28일이다. 당시 김정은 제1위원장은 비행장활주로에 나가 여성추격기비행사들의 비행훈련을 직접 지도하면서,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조국의 딸, 인민의 장한 딸들이며 불굴의 녀성혁명가들”이라는 최상의 평가를 안겨주었다. <사진 12>


정신적, 신체적 부담이 매우 큰, 고된 훈련과정을 오랜 기간 동안 거쳐야 추격기비행사가 될 수 있는데, 그 두 여성도 그런 고된 훈련과정을 끝내고 조종간을 잡았을 것이다. 이제껏 남성들만 조종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추격기를 여성들이 조종하며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조선 전역에 퍼져나갔을 때, 전체 군인들은 전투훈련을 위해 더욱 분발하였을 것이고, 그에 따라 전군의 사기는 높아졌을 것이다. 앞으로 조선에서는 조금향, 림설의 뒤를 이어 추격기비행사가 되겠다고 자원하여 입대할 여학생들을 보게 될 것이며, 세계항공군사에서 처음으로 여성추격기연대가 창설될 날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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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 수사결과, 지난 30년간 단 한 건도 바뀌지 않아

군의 수사결과, 지난 30년간 단 한 건도 바뀌지 않아

2015. 0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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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2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내용 가운데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의 재연 사진

  2013년 8월 22일 낮 2시. 필자는 그날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서울고등법원 내 한 법정에 앉아 있었다. 무려 30년간 자·타살 공방을 벌이고 있는 한 군인의 민사 항소심 선고 결과를 보기 위해서였다.

  사건은 1984년 4월 2일 시작되었다. 이날 강원도 화천군 육군 7사단에서 군 복무 중이던 허원근 일병(당시 22세)이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7사단 헌병대는 허 일병이 스스로 총을 쏴 좌·우 가슴과 머리에 각각 한 발씩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군 복무 염증에 의한 전형적인 군인 자살 사건으로 처리될 줄 알았던 이 사건은, 하지만 이후 30년간 진짜 사망 원인이 무엇이냐를 넣고 치열한 논쟁을 하게 된다.

  군은 허원근 일병이 가혹한 중대장의 업무 지시와 폭언, 폭행 등으로 인해 비관하여 자살한 사건이라고 정리했다. 하지만 유족은 믿지 않았다. 특히 허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 씨는 아들이 사망한 후 30년 세월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계속 싸우고 있다. 이러한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허원근 일병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군 의문사’로 세인들에게 언급되고 있다. 현재도 방송과 신문이 군 의문사 사건을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례 중 하나가 바로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이다.

  허 일병 사망사건에서 가장 큰 의문은 바로 허 일병의 사체에서 발견된 세 발의 총상이다. 허 일병은 좌·우 가슴과 머리에 각각 한 발씩, 모두 세 발의 총상을 입고 숨졌다. 유족이 가장 이해할 수 없다며 반발하는 의혹도 이것이며, 허 일병 사인은 타살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가장 의심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허 일병이 자살하고자 스스로 좌·우 가슴에 한 발씩 총을 쐈는데, 그래도 죽지 않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마를 향해 세 번째 총을 쏘고 자살했다는 군 발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상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주력 총기로 사용하는 M16 소총은 당장 바꿔야 한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총알을 두 발이나 맞고도 죽지 않는 총으로 무슨 전쟁을 하냐는 조소였다.

더구나 M16 소총을 직접 다뤄본 군 전역자들은 군의 이러한 주장을 믿지 않는다. M16 소총의 위력을 안다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설령 총탄을 비껴 맞아 즉시 사망하지 않았다 해도 그 충격과 고통으로 기절할 수밖에 없는데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스스로 총을 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말한다. 하지만 군의 입장은 불변이다. 국방부는 지난 30년 동안 허원근 일병은 자살했다는 말 외에 나머지 남는 의문에 대해서는 성의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런데 세 발의 총상 외에도 허원근 일병 사건에서는 중요한 의문이 또 있었다. 바로 ‘피’였다. 허 일병이 총상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신고를 접한 7사단 헌병대가 바로 현장으로 출동했다. 헌병대는 허 일병의 사체와 사건 현장을 카메라로 촬영한다. 그런데 헌병대가 촬영한 사진 속에서 허 일병의 아버지는 이상한 점을 확인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허 일병은 무려 세 발이나 총상을 입었다. 당연히 허 일병의 몸에는 모두 6개의 관통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총알이 들어간 사입구와 빠져나간 사출구가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통상 사입구는 작으나 빠져나간 사출구는 그보다 훨씬 구멍이 크다. 그렇다면 이 총알 구멍들을 통해 허 일병의 몸에서 흘러내릴 피는 어느 정도의 양이 될까? 법의학자들은 적어도 몇 리터에 달하는 양의 흥건한 피가 현장과 사체에서 보여야 맞는다고 했다. 하지만 현장은 그렇지 않았다. 깨끗했다.

  너무도 상식 밖의 현장에 대한 의문에 대해 군 헌병대의 답변은 어처구니없었다. 흘러내린 피가 땅과, 입고 있던 허 일병 옷에 스며들어 사진 상으로는 보이지 않게 된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피가 땅에 스며든다 해도 빨대처럼 작은 구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상당한 넓은 면적으로 그런 흔적이 남아야 옳은 해명이 될 수 있다. 또한 옷에 스며든다면 거기서도 그런 넓은 핏자국이 보여야 인정될 수 있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런 흔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땅도 옷도 거의 핏자국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궁색한 군 헌병대의 변명조차도 끝내 피해갈 수 없는 또 하나의 결정적 의혹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2010년 허원근 일병 유족이 낸 민사소송 1심 판결에서 당시 재판부가 “허 일병의 사인은 자살이 아니며 사건 현장은 조작되었다”는 근거로 삼은 증거였다.

 

 사라진 허 일병의 신체 조직

 

  바로 ‘허원근 일병의 뇌 조직이 어디 갔느냐?’였다. 군은 사망한 허 일병이 좌·우 가슴과 머리에 각각 한 발씩 총을 쏴 자살했다고 했다. 그런데 법의학적 분석 결과 머리는 가장 마지막에 총격이 가해졌는데 이로 인해 허 일병의 머리 부위는 상당히 큰 손상을 입게 된다. 따라서 얼굴 피부 조직과 머리 뼈, 그리고 뇌 조직 등이 흩어지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사건 현장의 상태는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보면 당연히 현장에는 허 일병의 손상된 신체 부위가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없었다. 피도 없었고 두개골 조각이나 뇌 조각 등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 사건 민사소송 1심을 담당했던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36부 김OO 부장판사는 2010년 2월 3일 “허 일병의 시신에 대한 법의학적 소견,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증거 자료, 국방부 특별조사단의 수사 자료 등을 토대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한 결과 소속 부대 군인에 의해 타살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선고한다.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 발생 무려 만 26년 만에 내려진 새로운 법정 결론이었다.

  그러면서 당시 1심 재판부는 허 일병이 타살됐다는 유력 증거 중 하나로 두개골 조각이나 뇌 조각이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했다. 현장에 출혈 흔적이 없다는 의혹에 대해 “피가 땅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군의 황당한 해명과는 달리 재판부는 이 사건에 더 큰 의혹이 있다고 판단하여 타살로 결정지은 것이었다. 총상으로 손상된 허 일병의 머리 부위 신체 조직도 헌병대 촬영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한 단서가 됐다. 더욱이 재판부는 이 사건을 해외 법의학자에게 의뢰했다. 그들이 보내온 답은 간결했다“피는 설령 땅에 스며들 수 있어도 뇌 조직은 땅에 스며들 수 없다.” 즉, 허 일병이 발견된 장소는 허 일병이 사망한 장소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그러자 재판부는 누군가가 다른 곳에서 사망한 허원근 일병을 사체 발견 장소로 옮긴 것이며, 따라서 허원근 일병이 자살했다는 것은 사실로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아버지 허영춘 씨는 그날 감회가 새로웠다고 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고통 받았던 시간에 비하면 얻어낸 결론은 미약한 진실이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비록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고, 남은 의혹에 대해 명쾌하게 다 밝혀내지 못했지만 이번 판결로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기다린 보람 끝에 이겼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심 결과를 접한 국방부는 곧바로 반발했다. “사실 인정 및 법리상 오류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이라며 1심 판결에 불복, 바로 항소했다. 그래서 열리게 된 2013년 8월 22일 민사소송 2심 판결일. 나는 이 2심 선고를 보기 위해 그날 법원에 갔다.

 

 2심 재판부 허원근 ‘자살’ 판결, 30년 돌아 다시 제자리로

 

  잠시 후 서울고등법원 민사합의 9부 강OO 재판장이 법정에 들어섰다. 그리고 내려진 선고. 설마 했던 우려는 사실이 됐다. 타살로 인정되었던 1심 선고는 항소심에서 또 다시 자살로 뒤집혔다. 1984년 당시 7사단 헌병대가 자살이라고 발표한 후 이 사건은 정부기관 조사와 재판을 통해 모두 네 차례나 자·타살 결과가 번복되었다. 2002년 1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허 일병이 타살되었다고 발표하자 당시 국방부는 특별조사단을 임의로 구성하여 재조사한 후 다시 자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2004년 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국방부가 억지를 부린다며 다시 타살이라고 발표했고 이후 유족이 낸 민사소송에서 2010년 1심 재판부가 타살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런 허 일병 사인이 다시 그로부터 3년이 지나가던 2013년 8월 민사 2심 선고에서 다시 자살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만 29년을 돌고 돌아 결국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자살로 결론을 내린 민사2심 재판부의 판단은 1984년 7사단 헌병대의 수사 결과를 ‘사실상’ 그대로 반복했다. 더 밝혀진 것도 없었고 새로울 것도 없는 29년 전 그 ‘자살론’ 그대로였다. 먼저 세 발의 총상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 재판부는 “망인과 신체 조건이 비슷한 사람이 M16 소총의 발사 자세를 취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밝혔다. 자세가 가능하니 자살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를 시연한 모습을 슬라이드로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연자는 그 자세로 보여준 것일 뿐 실제로 좌·우 가슴에 총상을 입고도 마지막 세 번째 자세를 할 수 있는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 그런 자세가 가능한지만 보여준 것뿐이었다. 가슴뼈가 부러지고 몸에 4개의 큰 구멍이 이미 발생한 상태에서 다시 또 자신의 이마를 향해 세 번째 총격을 가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재판부의 결론은 참으로 ‘신비한’ 주장이었다.

  사실 나는 항소심 결과를 앞두고 우려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살로 처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로 언급한 것처럼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은 허 일병의 뇌 조직 때문이었다. 다른 것은 다 해결할 수 있어도 그 뇌 조직이 사건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방법도 변명도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적어도 합리적인 재판부라면 그것을 무엇으로 피해갈 수 있겠나 믿은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어처구니없었다. 놀랍게도 답은 간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사건 현장에 피가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땅에 스며들었다는 군 헌병대 답변은 옹색한 수준을 넘어서는 황당한 논리를 가져왔다. “M16 소총탄의 회전력으로 혈액이 비산(날아서 흩어짐)하여 날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뇌 조직 역시 “그렇게 어디론가 날아간 것으로 판단된다”였다. 재판부는 그렇게 모든 의혹을 한꺼번에 해결해 버린 후 자살이 맞다며 유족에게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나는 정말 그 판결을 들으며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의 위력이 보잘 것 없어 무려 세 번이나 총을 쏴야 사망할 정도였다고 하면서, 또 반대로는 소총의 회전력으로 그 모든 것이 비산되어 사라졌다는 이중적 논리는 너무도 뻔뻔하지 않은가.

  이런 판결에 대해 허 일병의 유족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 허영춘 씨는 “국방부가 그동안 해 온 아들의 자살 주장을 판사가 그대로 말하더라”며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는 한마디를 남긴 채 법정을 떠났다. 그러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며 상고했고 이제 이 사건의 최종 결론은 대법원으로 간 상태다.

  아버지 허영춘 씨 만큼은 아니겠지만 재판이 끝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던 나 역시 너무도 허탈했다.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싶었다. 그때였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국방부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한번 내린 수사 결과를 바꿔 본 적은 있을까? 자신들이 내린 수사 결론을 이후 피해 유족이 반발하여 이의를 제기할 경우 다시 재조사하여 그 결과가 바뀐 사례가 있다면 과연 그 횟수는 얼마나 되며 그러한 구체적 사례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이 들면서 나는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국회 자료제출 요청권’에 따라 국방부에 공문을 보냈다. 허원근 일병이 사망한 1984년보다 2년 전인 1982년 1월 1일부터 만 30년 후가 되는 2012년 12월 31일 사이 기간 중 군인 사망사건에 있어 유족이 기존 수사 결과에 반발하여 재조사를 요구한 후 그 결과가 변경된 사례가 있는지, 만약 있다면 그 대상자의 이름과 사건 개요, 그리고 사망 원인이 변경된 결과가 무엇인지 자료를 제출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0여일이 지나가던 어느 날, 마침내 내가 요청한 자료가 국방부 조사본부로부터 전달됐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그 문서를 열람해 보니 문서 분량은 고작 ‘한 장’이었다. 아니, 30년 동안 결과를 요청한 것인데 왜 이렇게 분량이 적나 의아했다. 그리고 읽어본 답변서의 분량은 딱 한 문장이었다. 그 답변을 그대로 인용한다.

  “요청하신 자료와 관련하여 군 헌병대의 1차 수사결과에 대해 유족이 이의를 제기하여 그 결과가 변경된 사례는 없습니다.”

  2015년 현재, 허원근 일병 의문사는 만 31년이 지나가고 있다. 또 다른 대표적 군 사망사고중 하나인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사건은 올해로 만 17년째다. 많은 이들은 묻는다. 도대체 왜 이런 군 의문사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냐고. 나 역시 이 공문을 보고 그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군 헌병대 수사는 신이 하는가? 완벽한 신이 하는 수사가 아니고서야 어찌 지난 30년간 군이 한 수사는 단 한 건도 그 결과가 바뀌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전화를 해서 물었다. 내가 물어본 것이 30년 사이 기간인데 혹시 1948년 군 창설 이래 지금까지 바뀐 사례는 있는지 물었다. 정말 놀라웠다. 답변은 "단 한 건도 없다"였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이제 답은 하나다. 군 헌병대가 군 사망사고 수사를 독점하는 지금의 상황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제3의 민간 외부 기구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군 사망사고 피해 유족의 주장을 더 이상 국가가 외면해서는 안 된다. 허원근 일병처럼, 김훈 중위처럼, 그 외에 이루 헤아릴 길이 없는 수많은 군인의 억울한 죽음을 이대로 군 수사에만 맡기는 것은 또 다른 죄임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나는 그동안 숨져간 모든 군인의 영혼을 위로한다. 이제 진실을 밝히자.

 고상만 인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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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7만8241명 건보료 분석해보니

등록 : 2015.02.01 22:02수정 : 2015.02.0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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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리포트]신입 7만8241명 건보료 분석해보니
취직 전보다 더 자주 병원에 가
진료비 지출 평균 10%가량 늘어

자주 속이 쓰리고 소화가 안된다. 전에 없던 일이다. 어깨와 목은 갈수록 뻣뻣해지고 뒷목을 잡는 날이 많다. 감기는 왜 이리 자주 걸리는지….

 

신입사원이 아프다.

 

최악의 취업난을 뚫었으니 ‘불행 끝 행복 시작?’ 아니었다. ‘지옥’을 빠져나왔다고 좋아했는데, 정작 기다리고 있던 건 새로운 ‘전쟁터’다. 낯선 전장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상흔을 남긴다. 악전고투다. 지금도 입사지원서를 고쳐 쓰는 후배나 동료들은 ‘행복한 아우성’이라 핀잔할지 모른다. 그러나 신입사원들이 꿈에 부푼 직장에서 확인하는 건 “여전히 미생”이라는 사실이다.

 

<한겨레>와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이 갓 직장에 들어간 신입사원의 입사 전후 1년간의 병원 이용 행태를 추적해 보니, 취직 전에 비해 입사 뒤에 더 자주 병원을 찾았고 그만큼 진료비 지출도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2012년 6월 건강보험 직장가입자 자격을 취득한 1977~1987년생(2012년 현재 25~35살) 7만8241명의 병원 이용 행태를 분석했다. 이들이 입사 뒤 1년(2012년 7월~2013년 6월) 동안 쓴 1인당 평균 진료비(건보공단 지급+개인 부담금)는 29만원이다. 입사 직전 1년(2011년 7월~2012년 6월) 동안 지출한 진료비 26만2000원보다 10%가량(2만8000원) 많았다. 입사 전엔 77%(6만429명)가 병원을 찾았지만 입사 뒤엔 그 비율이 82%(6만4626명)로 높아졌다. 취직 전에는 병원을 찾지 않은 신입사원 100명에 5명꼴로 입사 뒤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 치료를 받았다는 뜻이다.

 

입사 전후를 가리지 않고 진료 빈도 상위 1~3위를 차지한 질병은 급성기관지염, 편도염, 급성상기도감염이다. 모두 감기와 관련된 증상들로 볼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건 취직 뒤 이런 질병으로 병원을 찾는 이들이 3.4% 늘었다는 사실이다. 직장생활 뒤 스트레스가 쌓여 발병 빈도를 높이거나 새로 병을 유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흔히 복통·설사 증상으로 나타나는 위장염이 신입사원이 된 뒤 무려 31.6%나 증가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속쓰림 증상인 위염 및 십이지장염을 앓는 직장인도 11.5%가 증가했다.

 

추정은 건보공단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위장 등 소화 분야 장기는 스트레스에 민감하다. 신입 직원들이 새로운 일을 하느라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떨어지고 업무가 바빠 생활이 불규칙해지면 위염이나 소화장애 등이 나타날 수 있다. 잦은 회식과 과음·폭식·흡연도 위염 등의 원인이 된다”고 짚었다. 김형렬 가톨릭대 교수(직업환경의학)는 “신입사원들이 병원을 찾는 횟수가 늘어난 건 취직 뒤 경제적 여유가 생겨 이전엔 참고 넘기던 질병도 병원 치료를 받게 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신입사원들이 취직 전에 견줘 더 자주 병원을 찾고 진료비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겨레>는 몇몇 새내기 직장인들을 만나 병을 부르는 그들의 업무 환경, 생활 방식, 고충을 들어봤다. 야근과 과로, 업무상 음주, 인간관계와 조직 적응 과정에서 비롯된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몸에 투영된 결과로 요약된다.

 

 

부서 회식에 술접대까지
일주일에 사나흘은 만취

 

 

바쁠땐 며칠씩 제대로 못자
눈치 보여 아파도 휴가 못내

 

 

진상 민원인에도 고분고분
인사불이익 당할라 꾹 참아

 

 

아프다 말해도 대책 안세워
회사서 소모품 취급당해 절망

 

 

1년씩 계약 연장해야 돼 불안
‘월급이 아깝다’ 무시 당하기도

 

 

 

①대기업 사원(27·남)/과음/2014년 9월~

 

총무팀에서 근무한다. 인허가나 규제를 맡은 공무원에게 술자리 접대를 하는 일이 잦다. 일주일에 한번은 부서 회식에 참가해야 한다. 술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업무상 술자리는 고역이다. 마음이 편치 않고 술 마시는 양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없어서다. 무엇보다 긴장해야 한다. ‘갑’을 앞에 두고 먼저 흐트러져는 안 된다. 그렇게 일주일에 나흘 정도 술을 마신다. 그 가운데 사흘은 만취할 때까지 마신다.

 

지난해 말 건강검진을 받기 전 선배들의 조언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문진표 음주 습관 항목에 음주 횟수나 주량을 사실대로 적지 말라는 거였다. 나중에 몸에 이상이 생기면 일 때문이 아니라 원래 술을 좋아해 많이 마신 탓이라며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 조언에 격하게 공감한다. 하지만 자괴감이 스멀스멀 온몸을 벌레처럼 기어다닌다. 이렇게 살려고 취업하려 안달복달했나 싶다.

 

②구청 공무원(27·여)/감정노동/2013년 12월~

 

일반직 8급으로 서울의 한 구청에서 일한다. 첫 보직으로 10개월 동안 민원 처리 업무를 맡았다. 요구 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민원인 탓에 곤란할 때가 많다. 함께 화를 내지도 못한다. ‘불친절’ 공무원으로 찍혀 인사 불이익을 받을 수 있어서다. 행동 하나하나가 (구청 공무원의) 대표성을 띤다고 생각하니 행여 말실수라도 할까봐 긴장을 떨치지 못한다. 법과 절차를 따라야 하는데다 업무마저 익숙지 않아 대기 줄이 길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내가 낸 세금으로 이런 식으로 굼뜨고 불친절하게 민원을 처리하느냐”며 호통을 치는 사람이 꼭 있다. 어김없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긴 한데, 직접 당해보니 달랐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민원인이 욕을 하거나 언성을 높이면 긴장 탓에 소화가 안되고 오후 서너시면 편두통이 심해진다. 찬 공기를 쐬어도 효과가 없어 약을 먹을 때가 많다. 그런 날은 퇴근 뒤 집에 돌아와서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귀가 계속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고 얘기했다.

 

③티브이(TV) 드라마 프로듀서(28·남)/밤샘노동·과로/2013년 12월~

 

촬영에 들어가면 프로그램이 종영될 때까지 쉬는 날이 없다. 일과가 아침 6시께 시작해 일러도 다음날 새벽 1시는 돼야 끝난다. 잠은 두세시간밖에 못 잔다. 그마저도 입사 초기에는 중간에 서너번씩 잠에서 깼다. 현장에 늦게 도착하는 악몽에 시달려서다. 일이 새벽 서너시까지 이어지는 날도 흔하다. 그런 날은 잠은커녕 찜질방에 들러 몸만 씻고 출근해야 한다.

 

학생 땐 규칙적으로 지냈다. 그러다 취직 뒤 하루 두세시간밖에 잘 수 없는 현장에 내던져지니 적응이 어렵다. 입사한 지 서너달 됐을 땐 촬영 나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주저앉기도 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안정이 필요하단다. 선배들도 좀 쉬라고 권한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내 일을 대신 해줄 사람이 없다. 제때 하지 않으면 일이 자꾸 쌓이게 된다. 구멍이 나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눈치를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요즘에도 밤을 꼬박 새우는 일이 많다. 갈수록 머리가 몽롱하고 몸은 나른해진다. 추운 날씨에도 종일 서서 버텨야 하니 온몸이 욱신거린다.

 

④중소기업 사원(30·남)/인간관계 스트레스/2012년 8월~2013년 7월

 

대전의 한 의료기기 중소기업 기획실에서 1년가량 일하다 건강이 나빠져 결국 퇴사했다. 지금은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입사할 때 받은 건강진단에선 아무 이상이 없었다.

 

늘 아침 8시 전에 출근했고, 밤 9시 전엔 퇴근해 본 적이 없다. 하루 13시간씩 일했다. 퇴사 두달 전쯤 혈압이 160까지 올라갔다. 2층에서 5층까지도 걸어서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심한 호흡곤란 증상이 왔다. 의사는 스트레스를 피해야 한다며 무조건 쉬라고 했다. 일을 그만두라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고혈압 치료를 받느라 병원비와 약값으로 두달간 20만원을 썼다.

 

회사에 사정을 설명했는데도 대책을 세워주지 않았다. 사람을 늘리지도, 업무를 다른 사람한테 나눠주지도 않았다. 엔지니어 위주의 회사라 홍보 담당인 나는 업무 배정이나 연봉 협상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그만큼 반감도 컸다. 내 일에 대한 주변의 평가도 피상적이었고 종종 시기와 질투도 받았다. 몸도 몸이지만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를 소모품 정도로 여기는 회사와 상사들의 태도에 절망했다. 그래서 사직서를 냈다.

 

⑤국립대 기간제 비서(26·여)/모멸감과 고용 불안/2013년 10월~

 

국립대학 산하기관에서 비서로 일한다. 1년 계약을 했고 지난해 10월에 다시 1년 연장계약을 했어야 했는데 연봉 협상 문제로 아직 계약서를 새로 쓰지 못하고 있다. 행정실장은 바빠서 그렇다며 계약을 미룬다. 추가근무수당도 3개월째 받지 못하고 있다. 계약을 하지 않은 채로 계속 일하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고 하던데, 일이 어찌 될지 몰라 불안하다.

 

상사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러지 않는데 내 인사는 일부러 받지 않는 거 같다. “하는 일에 비해 돈을 많이 받는다”며 수치심과 모멸감을 주기도 한다. ‘알아서 그만두라’는 거 같기도 하고…. 같은 대학의 다른 기관 비서들은 월급을 180만원까지 받는다는데, 내겐 120만원도 아깝다는 거다.

 

입사하고 두달 만에 갑자기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몸이 붓더니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심야에 병원 응급실에 가야 했다. 면역력이 떨어지고 갑자기 스트레스가 집중되면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하더라. 한달 가까이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고 나서야 몸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됐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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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 모르는 ‘2·8전당대회’ 정권교체 가능할까?

 
 
새정치연합의 ‘2·8전당대회’ 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임병도 | 2015-02-02 08:56:3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당대표와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새정치민주연합의 ‘2·8전당대회’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보궐선거와 총선은 물론이고 대선까지 책임질 새정치연합의 지도부를 구성하는 ‘2·8전당대회’이지만, 여론 반응도 신통치 않고, 들려오는 소리도 그다지 좋은 얘기들은 없습니다.

오히려 새정치연합의 ‘2·8전당대회’는 가면 갈수록 지도부가 구성돼도 과연 정권교체가 가능할지라는 의문만 잔뜩 남기고 있습니다.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는 새정치연합의 ‘2·8전당대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아봤습니다.


‘당심과 민심, 왜 그리 차이가 날까?’

선거 관련 자료 중에 시도별 유권자수를 분석하는 도표는 빠짐없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경상도 유권자수가 다른 시도에 비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19대 총선 시도별 유권자수 분포 ⓒ박대용

경상도 유권자수는 전라도에 비해 세 배가 넘습니다.1 전라도와 충청,강원,제주,세종을 합쳐도 경상도 유권자를 넘지 못합니다.

광주와 전북,전남을 모두 합쳐도2 10.2%로 부산 (7.2%)과 경남 (6.4%)를 합친 13.6%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거에서 지역별 불균형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지역별 유권자수 불균형은 새정치연합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새정치연합의 ‘2·8전당대회’에서 당대표와 최고위원 선출 비중이 75%인 대의원과 권리당원의 숫자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서울과 경기지역 권리당원을 합쳐야3 전북이나 전남 지역 하나와 비슷합니다.
 
단순히 숫자만 비교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니, 전체 권리당원의 비중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새정치연합의 권리당원 중 전남, 전북,광주를 합치면 50%가 넘습니다. 서울과 경기를 합쳐도 전라도 지역의 권리당원 숫자보다 적습니다.

권리당원의 비중이 높아서, 새정치연합 당대표와 최고위원 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호남’에만 가면 자신이 ‘호남의 적자’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남지역이 야당의 텃밭이자 근간이 되는 지역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지역별 편차가 심하다 보니 당심과 정권교체에 가능한 민심이 비슷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새정치연합 당대표와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2·8전당대회’에서 당심과 민심이 다르다는 소리가 왜 나오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실 겁니다.
 

‘무조건 후보자를 선택해야 유효표?’

새정치연합의 당대표와 최고위원 선출방식은 대의원의 현장투표와 선거권을 가진 권리당원4의 ARS투표와 여론조사를 합산해서 결정됩니다.

대의원 투표는 전국대의원명부에 기재된 국내 거주 대의원은 현장투표를 하고, 재외국민대의원은 이메일로 투표합니다.

ARS투표는 선거권이 있는 권리당원에게 전화를 걸어 투표하는 방식입니다.5

여론조사는  당원 여론조사와 국민여론조사를 합니다. 여론조사는 25%를 반영하는데, 이때 국민여론조사는 득표율을 합산한 평균값 결과 5분의 3을, 당원 여론조사는 5분 2를 반영합니다.

문제는 여론조사에서 당대표 후보자 1명과 최고위원 후보자 2명을 모두 선택해야만 유효표 된다는 점입니다. 6
 
이 말을 바꿔말하면 서울시장과 구청장, 구의원을 뽑는 선거에서 서울시장과 구청장을 선택하고 구의원 투표에 ‘지지후보 없음’이라고 하거나 기표를 하지 않으면 무효표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새정치연합의 최고위원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권리당원이라고 해도 최고위원 후보가 누군지 모르는데, 일반 국민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새정치연합은 최고위원 2명을 무조건 선택해야 유효표로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냥 대놓고 여론조사를 무효로 만들겠다는 태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2월 3일부터 권리당원에 대한 ARS투표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새정치연합 홈페이지에 가보면 무슨 ‘강제적 권리당원 ARS투표’나 ‘자발적 권리당원 ARS투표’라는 어려운 말만 잔뜩 텍스트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권리당원이지만 새정치연합 당비만 자동이체로 나가지, 평소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유권자를 위해 자세하게 투표 안내를 해줘야 마땅하지만, 그저 경선규칙만 나와 있지, 쉽고 간편하게 이해될 안내문이 없습니다.

동영상으로 간단하게 투표 방식을 알려줄 의무가 있지만, 새정치연합은 홈페이지 어느 곳에도 그런 친절함은 없습니다. 공지나 자료실을 가봐도 현장중계 일정만 나옵니다.

투표 참여를 아예 처음부터 가로막는 참 불친절한 정당입니다.


‘정권교체 전에 자신부터 바꿔야 한다’

아이엠피터는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정치적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해왔습니다. 특히 민심을 새정치연합 내부로 끌어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문재인 후보는 여기서 나아가 제대로 된 ‘탕평책’을 펼쳐야 합니다. 자기와 우호적인 세력을 끌어 오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상대방 진영을 중요 보직에 임명하거나 정치신인을 등용해야 합니다.

선거 전에 이런 모습을 과감하게 보여줘야 ‘2·8전당대회’가 끝나도 새정치연합을 이끌 수 있는 수장이 될 수 있습니다.

지역위원장이나 대의원이 장악한 새정치연합 내부에서 그들과 연대하는 리더십을 보여주고, 시스템을 바꾸어 공정하게 새정치연합이 개혁될 수 있는 방법 또한 모색해야 합니다.

박지원 후보가 이번 전당대회에서 주장하는 핵심은 ‘당권과 대권 분리’입니다. 그런데 2010년 박지원 후보는 원내대표 경선에 나와서 “전당대회에서 대권을 꿈꾸는 우리 당 인재들이 지도부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당권과 대권을 분리하느냐는 중요한 점이 아니라고 봅니다. 당권과 대권을 분리해서 ‘정권교체’가 가능하느냐를 묻고 있을 뿐입니다.

새정치연합의 당권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도록 대선을 준비하고 승리한다면, 그의 말이 맞겠지만, 지금 새정치연합을 보노라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아이엠피터는 정치블로거이지만, 새정치연합보다는 항상 새누리당의 행보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을 비교하면, 새누리당이 오히려 더 젊어지고 진보적 성향의 모습을 가식적이나마 보여주고 있습니다.7

새정치연합의 ‘2·8전당대회’를 보면 참석자 대부분이 노령층입니다. 젊은이들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각 후보 진영 자원봉사자들이나 젊지, 참석자의 연령대는 대부분 높습니다.

‘2·8전당대회’조차 젊은이들이 참여하지 않는 정당을 보고 있노라면, 이래서 어떻게 ‘정권교체’를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새정치연합이 정권교체를 할 수 있게 하려면, 전당대회 투표에 선거권을 가진 권리당원이나 여론조사에 많이 참여해야 합니다.

새정치연합의 모습을 보면, 민심과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당원이 있어야 정당이 운영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선거에서 패배, 정당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민심과 당심을 하나로 합칠 수 있는 ‘2·8전당대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1. 박대용기자블로그 2012년 7월 29일. 19대 총선 시도별 유권자수 분포http://biguse.net/608
2. 광주 1,108,862명 2.8% 전북 1,476,325명 3.7% 전남 1,525,241명 3.8% 
3. 서울:37,503 경기:35,935
4. 2014년 6월 31일까지 입당한 당원 중 3회 이상 당비를 납부한 당원 
5. 새정치연합 당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을 위한 시행세칙. http://npad2015.kr/page/rule.php 
6. 새정치연합 경선방법,시행세칙 http://npad2015.kr/page/way.php
7. 새누리당의 홈페이지와 새정치연합의 홈페이지만 비교해봐도 누가 더 시민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쉽게 이해된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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