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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선언' 천정배, 문재인에 "너나 잘하세요"

 

"새정치연합 미래 없다, 의원들 결단 요청"... 1월 신당 창당 완료 계획

15.09.20 13:46l최종 업데이트 15.09.20 15:07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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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정배 신당 창당 선언 "국민과 함께 정치혁명 시작" 무소속 천정배 의원이 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정치를 전면 재구성할 '개혁적 국민정당'의 창당을 제안한다"며 독자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한 뒤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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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신당을 모색해 온 천정배 무소속 의원이 20일, 독자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했다. 

천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야의 틀을 넘어 개혁적 가치와 노선으로 무장한 새 정치세력이 등장해야 한다"라며 "진영과 지역의 독점적 지위에 기대 기득권을 나눠 가지고 있는 거짓 양당체제를 타파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천 의원은 이날 구체적인 창당 일정을 공개했다. 그는 "개혁적 국민정당의 가치와 비전, 그리고 취지에 공감하는 정치지도자, 개혁적 정치인, 풀뿌리 활동가, 청년 지도자와 각계 전문가를 규합해 10월 중 '풍요롭고 공정한 대한민국을 위한 개혁적 국민정당 추진위원회'를 발족할 것"이라며 "또 국민의 뜻을 널리 듣고 국민이 함께하는 다양한 토론과 활동을 거쳐 오는 12월까지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1월 중 창당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천 의원은 신당의 지향점에 대해 "무조건 싸움을 포기하고 어정쩡한 가운데에 서는 '중도'는 개혁적 국민정당의 길이 아니다"라며 "확고한 개혁노선 견지하고 좌우 양극단의 원리주의는 배격해야 한다, 온건한 진보와 합리적 보수를 아울러 다양한 입장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중용'의 길을 가야 한다"라고 밝혔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 총선 야당 참패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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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소속 천정배 의원이 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정치를 전면 재구성할 '개혁적 국민정당'의 창당을 제안한다"며 독자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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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의원은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아래 새정치연합) 등 거대 양당을 싸잡아 비판했다. 그는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은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의 옹호자일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수구 기득권 세력"이라며 "불통의 정치를 고집하고 잘못된 노동개혁으로 불안정한 노동조건을 더욱 악화시키는 등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새정치연합을 향해서도 "정권 교체보다 계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폐쇄적이고 패권적인 패거리 정치가 횡행하고 있다"라며 "무기력한 패배를 반복하면서도 분노한 국민이 진정으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파악하려는 의지조차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 총선에서 야당이 참패할 것이고, 이는 우리 사회 전반에 수구독점 기득권 세력의 절대 우위가 고착되는 국가적 참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새정치연합과의 연대 가능성을 강하게 부인했다. 특히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천정배 의원과 접점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정치연합과 천 의원이 같이 가는 게 바람직하다"며 야권 통합 의지를 밝힌 문재인 대표를 거칠게 비판했다.  

천 의원은 "미안하지만 새정치연합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라며 "국민의 고통과 절망을 극복하는 정치가 필요한데, 이럴 때는 뭐랄까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이 생각난다"라고 말했다. 

"희망 잃은 새정치연합 의원들에 결단 요청"... 박준영과도 협력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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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소속 천정배 의원이 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정치를 전면 재구성할 '개혁적 국민정당'의 창당을 제안한다"며 독자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한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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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의원은 관심을 끌고 있는 신당 참여 인사의 면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다만 "참신하고 유능하며 개혁적인 신진인사들에게 간청한다, 개혁적 국민정당의 주역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천 의원은 또 정치 신인뿐 아니라 기성 정치인들과도 함께 할 수 있다며 박준영 전 전남지사를 중심으로 한 가칭 '신민당', 김민석 전 의원 등이 참여하고 있는 원외정당인 '민주당'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밝혔다.

그는 "개혁적 가치를 공유한다면 여야를 막론하고 기성정당에 몸담았던 분들과도 함께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정치연합 내부에서 이탈자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내비쳤다. 그는 "새정치연합 의원들을 만나보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 동감하는 분들이 아주 많다"라며 "새정치연합 안에서 이미 미래의 희망을 잃은 의원들이 상당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의원들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 용감한 결단을 내려주기를 요청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천 의원은 끝으로 "개혁적 국민정당은 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며 "어떤 기득권도 고집하지 않고 한국 정치를 바꾸고 대한민국을 바꿀 정치혁명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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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소속 천정배 의원이 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정치를 전면 재구성할 '개혁적 국민정당'의 창당을 제안한다"며 독자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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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보기] 천정배 "개혁적 국민정당 창당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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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선언' 천정배, 문재인에 "너나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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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정배 신당 창당 선언 "국민과 함께 정치혁명 시작" 무소속 천정배 의원이 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정치를 전면 재구성할 '개혁적 국민정당'의 창당을 제안한다"며 독자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한 뒤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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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신당을 모색해 온 천정배 무소속 의원이 20일, 독자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했다. 

천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야의 틀을 넘어 개혁적 가치와 노선으로 무장한 새 정치세력이 등장해야 한다"라며 "진영과 지역의 독점적 지위에 기대 기득권을 나눠 가지고 있는 거짓 양당체제를 타파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천 의원은 이날 구체적인 창당 일정을 공개했다. 그는 "개혁적 국민정당의 가치와 비전, 그리고 취지에 공감하는 정치지도자, 개혁적 정치인, 풀뿌리 활동가, 청년 지도자와 각계 전문가를 규합해 10월 중 '풍요롭고 공정한 대한민국을 위한 개혁적 국민정당 추진위원회'를 발족할 것"이라며 "또 국민의 뜻을 널리 듣고 국민이 함께하는 다양한 토론과 활동을 거쳐 오는 12월까지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1월 중 창당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천 의원은 신당의 지향점에 대해 "무조건 싸움을 포기하고 어정쩡한 가운데에 서는 '중도'는 개혁적 국민정당의 길이 아니다"라며 "확고한 개혁노선 견지하고 좌우 양극단의 원리주의는 배격해야 한다, 온건한 진보와 합리적 보수를 아울러 다양한 입장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중용'의 길을 가야 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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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연합을 향해서도 "정권 교체보다 계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폐쇄적이고 패권적인 패거리 정치가 횡행하고 있다"라며 "무기력한 패배를 반복하면서도 분노한 국민이 진정으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파악하려는 의지조차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 총선에서 야당이 참패할 것이고, 이는 우리 사회 전반에 수구독점 기득권 세력의 절대 우위가 고착되는 국가적 참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새정치연합과의 연대 가능성을 강하게 부인했다. 특히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천정배 의원과 접점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정치연합과 천 의원이 같이 가는 게 바람직하다"며 야권 통합 의지를 밝힌 문재인 대표를 거칠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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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의원은 또 정치 신인뿐 아니라 기성 정치인들과도 함께 할 수 있다며 박준영 전 전남지사를 중심으로 한 가칭 '신민당', 김민석 전 의원 등이 참여하고 있는 원외정당인 '민주당'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밝혔다.

그는 "개혁적 가치를 공유한다면 여야를 막론하고 기성정당에 몸담았던 분들과도 함께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정치연합 내부에서 이탈자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내비쳤다. 그는 "새정치연합 의원들을 만나보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 동감하는 분들이 아주 많다"라며 "새정치연합 안에서 이미 미래의 희망을 잃은 의원들이 상당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의원들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 용감한 결단을 내려주기를 요청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천 의원은 끝으로 "개혁적 국민정당은 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며 "어떤 기득권도 고집하지 않고 한국 정치를 바꾸고 대한민국을 바꿀 정치혁명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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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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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 요원이 방 하나 차지…전화 와도 “잔다” “없다” 끊어버려

등록 :2015-09-20 13:47



 

길을 찾아서 /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5회 가택연금 

이희호 평전 다른 글 보기
1973년 8월13일 밤 김대중이 도쿄 실종 5일 만에 동교동 집에 나타난 소식은 ‘긴급 뉴스’로 알려져 세상을 또 한번 발칵 뒤집었다. 사진은 김대중·이희호의 평생 후원자였던 정일형·이태형 박사 부부가 가장 먼저 동교동으로 찾아와 생환의 기쁨을 나누는 모습이다.
1973년 8월13일 밤 김대중이 도쿄 실종 5일 만에 동교동 집에 나타난 소식은 ‘긴급 뉴스’로 알려져 세상을 또 한번 발칵 뒤집었다. 사진은 김대중·이희호의 평생 후원자였던 정일형·이태형 박사 부부가 가장 먼저 동교동으로 찾아와 생환의 기쁨을 나누는 모습이다.

 

 

 

“남편이 들어오고 10분이나 지났을까 내외신 기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어요.” 동교동 집 주위의 동네 사람들도 몰려들었다. <동아방송> 긴급 뉴스를 듣고 온 사람들이었다. 김대중이 풀려난 직후 언론사마다 전화벨이 울렸다. 애국청년구국대원이라고 주장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위협하듯 말했다. “김대중은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데리고 왔다. 김대중같이 외국에 가서 경거망동하는 놈은 앞으로도 가만두지 않겠다.” 이희호의 집은 순식간에 50명도 넘는 기자들로 가득 찼다.

 

“남편은 밤 11시쯤부터 새벽까지 기자회견을 했어요.” 김대중은 납치와 생환 과정을 이야기했다. 납치범들의 마취가 듣지 않아 김대중은 정신이 몽롱한 중에도 납치 행로를 상세하게 기억했다. 나중에 현장검증을 해보니 김대중의 기억은 거의 오차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예수님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하던 대목을 이야기하던 중에 남편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았어요.”

 

큰아들 홍일은 늦게 집에 돌아와 아버지를 보고 큰절을 했다. “내 손을 잡자마자 아버님께서는 흐느끼며 우셨다. 곁에 계시던 어머니도 함께 우셨다.” 장교로 복무하던 둘째아들 홍업은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근무지를 뛰쳐나왔다. 특별휴가를 신청해도 받아주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라디오 뉴스에서 아버지 육성이 나오자 무작정 부대를 이탈한 것이었다.

 

 

김대중 생환뒤 이상한 사태흐름
경찰서장이 집에 와 명령했다
가족·가사도우미·운전기사 빼곤
모두 집 밖으로 나가라고

 

가택연금이 시작됐고
남편 조사도 마치 죄인 다루듯
납치경위 아닌 국외활동 캐물어

 

‘박정희 지시 없이 납치했겠나’
진상조사 시민모임의 결론에도
여당은 자작극으로 몰아갔고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
신문들은 그 주장을 크게 다뤘다”

 

중정이 미국행 종용해 수용했지만
일본쪽의 사태확산 거부감에
결국 기나긴 연금이 시작됐고
1년뒤 내사중지, 이듬해 내사종결
특수본은 사건을 묻어버렸다

 

 

김대중이 생환한 다음날인 8월14일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이번 사건과 중앙정보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더니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15일 마포경찰서장이 와서 가족과 가사도우미와 운전기사만 남기고 모두 집에서 나가라고 명령했다. 동교동 집으로 통하는 골목마다 바리케이드를 세워 외부의 출입을 막았다. “형제들도 비서들도 들어올 수 없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인 홍걸이가 등하교할 때마다 경찰이 따라붙었어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날 오후부터 경찰과 중앙정보부 요원이 방 하나를 차지하고서 세 사람이 교대하며 집을 지켰다. “안방의 전화선도 끊어버리고 하나 남은 전화통을 경찰이 독점하고는 전화가 오면 ‘잔다’, ‘없다’ 하며 바꿔주지 않았어요.” 수사 방향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담당 검사, 경찰서장, 정보부원이 남편을 조사하는데 납치 경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국외 활동을 캐물었어요. 마치 죄인 다루듯이 심문했어요.” 8월24일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서울발로 ‘김대중 납치사건, 정보부 기관원 관련’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국가기관이 사건에 관여돼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 보도였다. 정부는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을 폐쇄하고 기자 3명을 추방했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몸부림이었다.

 

1973년 8월 김대중 생환 직후 박정희 정권은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현장검증과 대질심문 등으로 시늉만 내다 75년 내사 종결로 덮어버렸다. 사진은 그해 8월14일 마포경찰서에 차려진 ‘마포감금피의사건 수사본부’로, ‘김대중’이나 ‘납치’ 표현은 빠져 있다.(오른쪽)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한겨레> 자료사진
1973년 8월 김대중 생환 직후 박정희 정권은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현장검증과 대질심문 등으로 시늉만 내다 75년 내사 종결로 덮어버렸다. 사진은 그해 8월14일 마포경찰서에 차려진 ‘마포감금피의사건 수사본부’로, ‘김대중’이나 ‘납치’ 표현은 빠져 있다.(오른쪽)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이 사선을 넘어 살아 돌아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은 미국이었다. 주한미국대사 필립 하비브는 신속하고도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했다. 김대중 납치·실종 사실이 주한미국대사관에 보고된 것은 납치 후 두 시간이 채 안 된 8월8일 오후 3시였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가장 먼저 납치 사실을 알아내 대사관으로 연락했다. 도쿄의 납치공작 현장본부와 서울의 중앙정보부 본부 사이의 연락이 미국 정보망에 걸려들었음이 분명했다. 납치됐다는 정보를 접수한 하비브는 즉각 한국에 있는 모든 정보팀을 소집했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중앙정보국 한국 책임자 도널드 그레그도 달려왔다.

 

그레그는 뒷날 펴낸 회고록에서 이 순간을 묘사했다. “하비브는 격분했다. 그는 김대중이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됐으며,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됐는지 생사 여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하비브는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사태를 파악한 하비브는 박정희에게 긴급 메시지를 보내 ‘김대중 납치 사실을 알고 있으며 김대중이 죽는다면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끝장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하비브 대사가 그렇게 빨리 손을 쓰지 않았다면 남편은 돌아오지 못했을 거예요. 물론 나는 그때는 미국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요.”

 

미국 정부에 김대중 납치 사실을 알린 사람 중에는 한민통 미국본부 핵심 인물인 임창영도 있었다. 임창영은 장면 정부의 고위 관리를 지내다 5·16 쿠데타 뒤 망명한 사람이었다. 임창영은 한민통 미국본부 대표로 일본에 와 있다가 김대중 납치 사실을 안 직후 워싱턴의 한국문제 전문가 그레고리 헨더슨에게 연락했다. 헨더슨은 하버드대학 교수 제롬 코언에게 전화로 사실을 알렸고, 코언은 다시 대통령 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에게 전화했다. 키신저는 모든 조직을 가동해 진상을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 도널드 레너드는 납치 뒤 11시간 만에 미국이 김대중의 안전에 중대한 관심이 있다는 강경한 내용의 성명을 발표해 서울과 도쿄로 전달했다. “우리는 남편이 용금호에서 수장당하기 직전에 나타난 비행기가 미국이 보낸 것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뒷날 그레그씨가 미국 비행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고 정정해 주었지요. 미국이 압력을 가하자 한국 정부가 일본 쪽에 공작선의 위치를 알려주고, 일본 비행기가 출동했던 것 같아요.”

 

김대중과 함께 활동하던 재일한국인 민주화운동가들도 긴박하게 움직였다. 배동호·김재화·정재준·김종충·곽동의·조활준은 납치 발생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짓이 분명하다고 발표했다. 이 기자회견은 분초를 다투던 때에 김대중 구명 여론을 일으켰고 박정희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일본 경찰은 초기 수사에서 누가 납치를 실행했는지에 관한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다. 먼저 납치 현장인 그랜드 팰리스 호텔 2210호실 욕조에서 채취한 지문 중 하나가 주일한국대사관 일등서기관 김동운의 것임을 밝혀냈다. 이 지문은 한국 중앙정보부가 범행에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사건이 나기 이틀 전 오후 그랜드 팰리스 호텔 인근 등산용품 상점에서 김동운이 큰 배낭을 사갔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1998년 2월에 공개된 ‘케이티(KT) 공작요원 실태조사보고’라는 중앙정보부의 극비문서는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휘 아래 모두 46명이 9개조로 나뉘어 조직적으로 저지른 것이었음을 알려주었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1976년 6월22일 미국 하원 프레이저 위원회 청문회에서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했음을 자신이 수집한 정보로 확인하였다고 증언했다. 김형욱은 납치에 관여한 사람 목록을 프레이저 위원회에 제출했는데, 프레이저 위원회는 그 목록이 “미국 국무부의 정보와 일치하므로 믿을 수 있다”고 발표했다. 김형욱은 부장 이후락, 차장 김치열, 차장보 이철희를 명시하고 제1책임자로 주일한국대사관 공사 김기완(김재권)을 지목한 뒤 납치를 실행한 일곱 사람의 이름을 밝혔다.

 

사람들의 관심은 납치 살해를 지시한 최고책임자가 누구인지에 쏠렸다.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모임’은 1995년 펴낸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에서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이런 엄청난 일을 대통령 박정희가 모르는 사이에 중앙정보부가 단독으로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희호도 박정희가 직접 개입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후락 부장이 뒤에 최영근 의원한테 박정희 대통령이 납치 살해를 직접 지시했다고 얘기한 적이 있거든요. 대통령의 지시 없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 있겠어요.”

 

이후락은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동향 친구인 최영근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1973년 봄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불러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하였다. 나는 곤혹스러운 나머지 실행을 미루고 있었는데 박 대통령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김대중씨를 납치한 사람도 나지만 살려준 사람도 나다.” 그 후 이후락은 <신동아> 1987년 10월호 인터뷰에서 최영근에게 그렇게 말한 바 없다고 말을 바꾸었다. “이후락 부장이 최영근 의원한테 한 말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남편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그러니까 사건의 정확한 명칭은 김대중 납치사건이 아니라 김대중 살해미수 사건이지요.”

 

김형욱도 프레이저 위원회에 나와 “이만큼 중차대한 계획이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형욱은 이 청문회에서 박정희가 김대중을 살해하려 한 이유도 밝혔다. “박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1971년 그와 대결하였던 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씨와 미국의 대한정책을 좌우하는 미국 국회입니다. (…) 김대중씨에 대한 박정희씨의 감정은 단순한 정적 관계가 아니라 깊은 열등의식을 바탕으로 한 증오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자는 패자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민주정치상 최소한의 예절마저도 무시하고 (…) 백주에 남의 나라 수도에서 그를 납치하여 투옥시키는 비양심적, 반민주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납치사건에 중앙정보부가 직접 관여한 것이 분명한데도 여당에서는 납치사건을 ‘김대중의 자작극’으로 몰아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신문들은 그런 주장을 크게 보도했어요. 심지어는 유진산 총재가 이끄는 신민당 안에서조차 ‘자작극’이라는 여당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나선 사람이 신민당 의원 정일형이었다. “납치사건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탄압을 각오해야 하는 때였는데 정일형 박사가 이 문제를 국회에서 이야기했어요.”

 

1973년 8월 김대중 제거에 실패한 박정희 정권은 7년 전인 67년 대통령 선거와 71년 국회의원 선거 관련 선거법 위반 사건 수사를 재개해 내내 발목을 잡았다. 사진은 74년 6월1일부터 김대중과 함께 수사를 받은 신민당의 양일동·김형일 의원이 75년 3월25일 서울형사지법 법정에 출두한 때로, 방청석 맨 앞줄 오른쪽에 이희호의 모습도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3년 8월 김대중 제거에 실패한 박정희 정권은 7년 전인 67년 대통령 선거와 71년 국회의원 선거 관련 선거법 위반 사건 수사를 재개해 내내 발목을 잡았다. 사진은 74년 6월1일부터 김대중과 함께 수사를 받은 신민당의 양일동·김형일 의원이 75년 3월25일 서울형사지법 법정에 출두한 때로, 방청석 맨 앞줄 오른쪽에 이희호의 모습도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일형은 9월26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무총리 김종필에게 질의했다. 정일형의 질의가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해 핵심을 찌르는 대목에 이르자 여당 의원들이 책상을 치고 소리를 질러댔다. “무엇 때문에 한 정권이 개인을 상대로 하여 이토록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 있는지 알 수가 없소! 여보, 김 총리!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백주에 김대중씨를 납치해 서울 한복판에 데려다놓은 범인들이 바로 한국 사람이야! 외국에서는 물론이고 많은 국민들이 이번 사건을 중앙정보부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있어!” 정일형의 발언은 열네 번이나 중단되었고 끝내 원고를 다 읽지 못했다. “정일형 박사가 여당 의원들한테 떠밀려서 넘어지고 구둣발에 차였어요. 그때 장출혈이 생겼는데, 그 자리가 나중에 암으로 악화해서 결국 1982년 세상을 떠나셨어요.”

 

9월5일 일본은 납치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범행 현장에서 김동운의 지문이 발견되었다고 밝히고 당사자의 출두를 요구했다. 한국대사관이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자 한-일 관계가 얼어붙었다. 일본은 자기 나라에서 납치 범죄를 저지른 것은 주권침해이므로 공식 사과하고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 뒤 한국과 일본이 합의한 해결방식은 진상규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 정부는 김동운을 비롯해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귀국시켰다. 11월2일 국무총리 김종필이 박정희의 사과가 담긴 친서를 들고 일본으로 가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를 만났다. 이것으로 진상규명 작업은 흐지부지되었다. 그 뒤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 레너드는 한국 정부가 다나카에게 3억엔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김대중 생환 직후 설치한 특별수사본부는 1년 뒤인 1974년 8월14일 내사 중지 결정을 하고 그 이듬해 내사 종결을 한 뒤 사건을 묻어버렸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계속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어요. 10월 중순에는 이용택 중앙정보부 6국장이 찾아와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라고 했어요. 남편도 집에 갇혀 있느니 미국에서 활동하는 것이 낫겠다고 보고 미국으로 가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짐을 싸놓고 기다리는데 소식이 없었어요.” 11월에 하버드대학 교수 에드윈 라이샤워가 김대중을 하버드대학으로 초청하는 서류를 들고 서울에 왔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그날 하루 연금이 풀려 김포공항에 나가 라이샤워를 마중했다.

 

“라이샤워 교수와 외무부 차관이 만나 우리의 미국행을 협의하기로 했는데 약속한 시간에 차관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이후에도 연금은 풀리지 않았다. 이듬해 6월1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출두명령을 냈다. 1967년 윤보선 대통령 후보 지원유세를 하던 중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미국행을 막으려고 7년도 더 된 문제를 갑자기 꺼내든 것이었어요. 납치 문제가 커질까봐 일본 정부가 남편의 미국행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해요. 우리 정부도 그렇게 판단했던 거고요.” 박정희 정권은 결국 김대중을 집 안에 가두어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연재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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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보다는 미국이라고?


<기고> 강정구 전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강정구  |  unikoreauni@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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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19  19: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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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 전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7월 미국을 방문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한국전 참전 워크장군 묘지에서 “우리나라 운명을 지켜주”었기에 “한국식으로 큰절을 하겠다”며 많은 수행단과 함께 두 번 큰절을 올리고, ‘중국보다 미국’이라는 등 대미 자발적 노예주의와 같은 행보를 지속했다. 자기는 미국 땅에서 골수 종미주의자임을 공공연히 과시하면서도 다른 한 편 ‘종북좌익’척결을 외쳐댔다. 이런 자가 여당 대통령 후보 인기 1위라니 이대로 가다간 한반도의 미래가 정말 암울해 질 것 같다.

그렇지만 김무성이 아무리 갈구해도 미국의 세계 지배와 패권은 머지않아 끝장나고 중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가 구축될 것이다. 이런 세력교체는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단순한 세력교체가 아니라 스페인 이후 지구촌을 야만의 살육장으로 만든 서구제국주의의 수 백 년 세계지배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것만으로도 중미 세력교체는 역사의 진보이면서 인류사적 대전환이다.

일부에서는 중미 세력교체가 단순히 패권의 임자가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지는 것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문명 미국’과 ‘뭔가 그렇지 못한’중국을 대비하면서 우려하기도 한다. 과연 이런 폄하와 우려는 얼마나 설득력 있을까?

잉카문명 자체를 말살한 스페인의 살육과 정복주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서구의 지배는 일방적인 전쟁의 일상화, 노예사냥, 인종청소 등을 통한 무력중심의 지배주의 연속이었다. 이의 바탕에는 유일신을 기조로 한 기독교의 배타주의가 깔려 있다.

반면 중화주의는 천하의 중심인 중화는 주변 작은 나라를 보살피고, 주변은 중심인 중화가 정한 천하질서에 순응하고, 도전치 않고, 존중하며, 평화롭게 지낸다는 ‘자발적 동의’, 내정불개입, 평화지향 질서체계였다. 여기에는 콧대 높은 중심의 주변에 대한 우월주의와 시혜주의가 깔려 있지만 주변을 일방적으로 배척 및 지배하기보다는 이끌어야 한다는 상호적 지도주의가 기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는 이념적 지향이기에 현실에서는 이와 이탈되는 경향성을 띄기도 할 것이고 또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어 왔다. 그렇지만 평화중심의 중화주의 기조를 근원적으로 유지하는 게 한족중심의 중국의 포괄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인은 종종 정화(鄭和) 원정을 이에 대한 하나의 보편적 보기라고 주장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시작된 서구의 해양지배에 훨씬 앞서 중국은 1405년 전후 정화를 단장으로 한 남해원정을 단행했다. 무려 2만7870명과 62척 함대를 이끌고 홍해와 페르시아만까지 진출하여 중국 위신과 해양지배력을 과시하고 주변에 조공을 촉구한 것이다.

이를 두고 2011년 3월 10일 전인대(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다이빙궈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은 “중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국내 총생산이 세계의 30%에 달했지만, 확장이나 패권을 추구하지 않았다. 정화(鄭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선단을 이끌고 서방으로 일곱 번이나 출항하였는데, [서구 제국주의의 모습과는 달리—필자 삽입] 가져간 것은 피와 불, 약탈과 식민화가 아닌 도자기, 실크 그리고 찻잎이었다”고 평가했다("평화적 발전 노선을 견지하자" 보고에서).

이러한 역사와 전통에 더해 구조적으로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는 지배주의 또는 패권주의보다는 설복과 동의 유발 중심의 지도주의로 나아갈 경향성을 띄고 있다.

그 구조적 요인을 살펴보면, 중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는 1강(중국) 다극(러시아, 미국, 인도, EU)이라는 총체적 질서체계를 띌 것이기에 1강의 일방주의가 성립되기 힘든 구도이다.

또 군사력에서는 중·러·미의 3각 군사력 견제구조가 형성되기 때문에 일방적 폭력지배나 전쟁주의로 나아가기 힘들 것이다.

경제 구조적으로 중국은 전략상품과 기간산업이 국유경제 틀을 유지하고 있고 지금도 국가나 향촌 등 공유제 소유 분야의 GDP 점유비율이 50%를 상회하므로 군산복합체와 같은 사적 자본에 의한 무력친화주의를 통제할 수 있고 분배의 균등성을 높일 수 있다.

또한 서구의 개인지상주의와 달리 공공성 중시의 공동체주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고, 자본이 지배하는 시민사회의 절대화 구도를 띄는 서구와 달리 국가중심주의를 띄고 있어 국가에 의한 지도력이 발양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이번 9.3 항일전쟁승리 70주년 기념대회 열병식에서 시진핑 주석은 10여분의 짧은 연설에서 "평화" 단어를 18차례 사용했다. “평화와 발전은 오늘 이 시대의 주제가 됐지만 세계는 여전히 평화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평화를 수호하는 결심을 굳혀야 합니다”(今天,和平与发展已经成为时代主题,但世界仍很不太平,... 我们要以史为鉴,坚定维护和平的决心。)라면서 중국은 영원히 패권과 확장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中国都永远不称霸、永远不搞扩张).

걸핏하면 전쟁위기에 휩싸이고 있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이런 평화중심주의가 반갑고 반갑지만 다른 한 쪽 미국 땅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오싹 소름이 끼치게 만든다.

"미국은 지난해 5월 피아식별장치와 전술데이터링크 체계를 오는 2020년부터 바꾸겠다는 계획을 우리 군에 통보했다"면서 이 바꿔지는 군사체계에 맞추려면 대공포 등 방공무기 1천600여대, 전투기 등 공중전력 540여대, 함정 등 해상전력 270여대 등 총 3천200대에 달하며, 이는 우리 군 전체 전력 1만2천400여대의 25%에 해당한다고 한다(<연합뉴스> 2015.09.11.).

물론 이를 위해서는 50조가 될지 100조가 될지 모르는 우리 국민의 세금이 낭비될 것이다. 또 한반도는 더욱더 가혹한 전쟁위험에 노출되며, 우리 군은 전시작전통제권에 이어 모든 면에서 미국에 완전 종속되고 말 것이다. 또한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 북한을 핑계되지만 실제로는 중국겨냥의 한국군으로 탈바꿈시키려는 미국의 신냉전전략인 아·태 재균형전략에 철저히 순응하게 되어, 한국군은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 구축의 전초 전위대로, 한국 땅은 전초 기지가 되기 십상이다.

여기에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번 10월 미국 방문으로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미국 MD체계의 사드(THAAD-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도입이 예상되고 있다. 상대 미사일을 종말상층단계에서 요격하는 이 사드는 북한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중국을 겨냥한 것이어서 중국이 마지노선으로 설정하고 있다. 사드배치가 현실화되면 이 또한 중국포위의 전초기지화와 전초 전력구축을 의미하고 국민세금 10조원도 허비된다.
 
미·소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분단과 전쟁을 강요당한 우리로서는 이들 미국의 사드배치 강요와 25%의 군사력 증강 강요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70년 전에도 미·소 냉전 때문에 우리는 엄청난 비극과 희생을 강제 당했는데, 미·중 신냉전이 도래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도 한반도가 신냉전의 첨병이 되어 또다시 참극과 민족종말의 위험에 처해야 하는가?
 
이것이 과연 해방 70년을 맞아 우리가 걸어가야 할 역사의 길이란 말인가?
이래도 중국보다는 미국이란 말인가?
 
미국도 중국도 아닌,
또 ‘어디나’‘누구’도 아닌,
 
정말로 우리 땅의 우리,
우리다운 우리,
그 우리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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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넋이라도 고향 마당에 뿌려라”

日 강제징용 희생자, ‘죽음의 길’ 되짚어 조국 품에 안기다<70년만의 귀향> 징용자 아리랑…“내 넋이라도 고향 마당에 뿌려라”김미란 기자  |  balnews21@gmail.com
 

   
▲ ⓒ go발뉴스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 일대의 공사장 등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죽어간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해가 70년 만에 귀향했다.

70년 전 강제징용 희생자들은 바다를 한번씩 건너게 될 때마다 더 이상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절망을 겪었다. 그 죽음의 길을 되짚어 115명의 넋이 <70년만의 귀향>을 통해 조국의 품에 안겼다.

<70년만의 규향>은 해방 70주년을 맞아 홋카이도의 강제노동 현장에 방치되어 있던 희생자의 유골을 유족과 고향의 품으로 모셔 오는 한국과 일본 민간단체의 협력 작업이다.

지난 18일 부산항을 통해 귀향한 115명의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해는 다음날인 19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유족과 2천여 명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늦은 장례식을 치렀다.

아사지노 구 일본육군비행장 건설 희생자 유골 (39구), 코켄지 안치 슈마리나이 우류댐 건설 희생자 유골 (4구), 비바이 탄광 한국 출신자 유골 (6구), 혼간지 삿포로 별원 안치 한국 출신자 유골 (71구)은 합동장례식 후 20일 경기 파주 서울시립묘지 납골당에 안장된다.

   
▲ ⓒ go발뉴스

이날 축문은 한․일 시민단체로 구성된 ‘강제노동희생자 추모·유골 귀환 추진위원회’(이하 귀환추진위)의 한국 측 대표인 ㈔평화디딤돌 정병호 대표(한양대 교수)가 올렸다.

정 대표는 축문에서 “너무 늦어 죄송하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수천, 수만의 강제노동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다. 꼭 모셔오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어 “다시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인류, 인간에 대한 범죄가 정당화 되지 않도록,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장례식은 엄숙한 가운데 진행됐다. 유족들은 물론 시민들도 흰색 옷을 갖춰 입고 예를 갖췄다. 분향 후 유가족 대표로 단상에 오른 故 진병락 선생의 아들 진병윤 씨는 거듭 “감사하다”고 전할 뿐 긴 말을 잇지 못했다.

   
▲ ⓒ go발뉴스

장례 중간 중간 가수 정태춘, 재즈 보컬리스트 써니 킴,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 이애주(68·여) 서울대 명예교수 등 문화예술인들의 추도 퍼포먼스도 이어졌다. 정태춘 씨는 ‘징용자 아리랑’이란 제목의 노래로 70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115위의 넋을 위로했다.

 

징용자 아리랑

달아, 높이나 올라 이역의 산하 제국을 비추올 때
식민 징용의 청춘 굶주려 노동에 뼈 녹아 잠 못들고
아리 아리랑, 고향의 부모 나 돌아 오기만 기다려
달아 높이나 올라 오늘 죽어 나간 영혼들을 세라

달아 높이나 올라 삭풍에 떠는 내밤을 비추올 때
무덤도 없이 버려진 넋들 제국의 하늘 떠도는데
아리 아리랑, 두고 온 새 각시 병든 몸 통곡도 못듣고
달아, 높이나 올라 내 넋이라도 고향 마당에 뿌려라

아리 아리랑, 버려진 넋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달아, 훤히나 비춰 슬픈 영혼들 이름이나 찾자
고향엘 들러야 저승길 간단다
달아, 높이곰 올라라
달아, 놈이곰 올라라

 

이어진 추도사에서 공동장례위원장인 교토 니시혼간지의 승려 도노히라 요시히코(展平善彦)는 “강제노동의 책임은 식민지배와 전쟁침략 체제를 유지한 일본 정부와 강제노동 사역을 강요한 기업에 있지만 일본 국적을 가진 우리들도 함께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한다”면서 “하루라도 빨리 양국의 책임으로 유골 반환을 추진해달라”고 호소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115분의 유해가 70년이 지나서야 고통스런 길을 되짚어 고향에 돌아왔다. 이제 115분이 돌아왔을 뿐, 아직 일본 각지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유골의 수는 셀 수 없다”면서 “오늘 장례식은 작은 시작이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귀향을 기다린다”는 추도사를 전했다.

 

한편, ‘귀환추진위’는 “‘70년만의 귀향’은 이번이 끝이 아닌 시작”이라면서 “앞으로 더 많은 희생자들의 귀환을 위한 노력과 관련 활동이 이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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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이트와 피그미처럼, 인류의 진화는 계속될까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9/19 12:28
  • 수정일
    2015/09/19 12:2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이누이트와 피그미처럼, 인류의 진화는 계속될까

조홍섭 2015. 09. 18
조회수 673 추천수 0
 

최근의 잇단 화석 발견, "인류를 종착점으로 한 진화란 없다"

문화적 영향, 기술발전, 기후변화로 미래 인류진화 방향은 미궁에

 

호모 날레디 상상도.jpg»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두개골 화석을 토대로 복원한 호모 날레디의 상상도. 인류의 직접 조상인지 여부는 아직 논란거리이다.사진=요하네스버그/AP 연합뉴스 
 
인간은 외로운 동물이다. 사람은 포유동물강,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호모)에 속한 유일한 종(호모 사피엔스)이다. 
 
사람과에는 침팬지속, 오랑우탄속, 고릴라속, 사람(호모)속이 있는데, 사람속을 빼고는 모두 2종이 있다. 침팬지속만 해도 침팬지와 보노보가 있다. 사람의 친척은 모두 멸종했다. 
 
보통 1속 1종만 남은 동물은 미선나무처럼 멸종 위험이 커 보호를 받는데, 사람은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2008년 평가에서 “워낙 널리 분포하고 적응력이 뛰어나며 개체수가 증가하고 있어” 보전등급은 ‘최소 관심 종’이다.
  
고아처럼 남아서인지 인류의 조상 찾기 열정은 남다르다. 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연구자들이 발표해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고인류 ‘호모 날레디’ 화석도 그런 예다. 

F1_large.jpg» 호모 날레디의 뼈 화석. 1990년 이후 세계에서 발굴된 모든 고인류 화석을 합친 것보다 많을 만큼 풍부하다. 사진=<이라이프>

 
깊은 동굴 속에서 적어도 15구에 해당하는 1500여 점의 완벽한 뼈 화석이 나와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발견됐다”라는 보도가 잇따랐다. 그러나 흥분이 가라앉자, 연대 측정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화석의 주인공을 호모속으로 단정한 것이 성급했다거나 오히려 멸종한 고인류인 직립원인에 가깝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속 특징이 혼재한 것 등에 비춰 인류의 진화 경로가 알려진 것보다 복잡했을 것이란 추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분명한 건, 현생 인류가 필연의 단선적인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게 아니란 사실이다. 
 
세계적인 영장류학자 프란스 데 월은 15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강이 흐르다 보니 바다로 간 것이지 바다로 가기 위해 흐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류는 지적인 도약을 이룬 진화의 종착점이 아니고, 지금도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Rosino_-Homo_floresiensis_cave.jpg» 호빗의 두개골 화석이 발견된 인도네시아의 플로레스 섬 량바오 동굴. 사진=Rosino

 
1990년대 이후 어떤 고생물학자도 인류 진화의 경로를 깔끔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통념을 깨는 발견도 잇따른다. 2003년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에서 1만 8000년 전 살던 키 1m의 새로운 인류 ‘호빗’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단일종인 인류의 ‘순수함’도 흔들린다. 현생 인류가 지금은 멸종한 또 다른 인류인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등과 섹스를 하고 형질을 나눴다는 사실도 유전자 연구 결과 분명해졌다. 
 
2010년 이들의 게놈(유전체)을 분석한 결과 약 4만년 전에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 유럽인과 아시아인에게 유전물질의 2~4%를 물려준 것으로 밝혀졌다. 그 영향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우울증, 비만, 피부질환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Neandertaler_reconst.jpg» 인류와 같은 종 또는 아종으로 분류되는 네안데르탈인의 복원 상상도.현생인류와 같은 장소에서 한동안 살았다.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비슷한 시기에 시베리아에 살았던 데니소바인은 특이하게 태평양 멜라네시아인과 호주 원주민에게 5%의 유전자를 남겼다. 아시아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데니소바인의 흔적이 발견되는데, 티베트인은 물려받은 유전자 덕분에 4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도 적혈구 수가 늘어나 피가 끈적끈적해지는 고산병을 겪지 않는다.
  
인류는 홀로 남았지만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특별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증거가 잇따라 나온다. 
 
마테오 푸마갈리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생물학자 등 국제 연구진은 17일치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에서 그린란드에 사는 이누이트가 지방과 단백질로만 이뤄진 식단으로 생존하는 비결은 지방 대사를 조절하는 유전자 변이 덕분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주식은 물범과 고래인데, 지방산이 농축된 이런 음식을 먹고도 심혈관질환에 걸리지 않는 것은 불포화화 효소의 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 몇 개가 돌연변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런 돌연변이는 빙하기로 베링해가 육지로 이어졌던 2만년 전 북극에 살던 시베리아 원주민에게서 처음 발생했는데, 이누이트 모두와 유럽인 2%, 중국 한족 15%에도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Malik Milfeldt_s.jpg» 이누이트가 1000년 전부터 살아온 그린란드의 마을. 이곳에 이주해 오기 2만년 전 시베리아 북극쪽에서부터 과도한 지방섭취의 부작용을 막는 돌연변이가 일어났다. 사진=Malik Milfeldt


이 밖에도 인류의 최근 진화 사례는 많다. 유럽인의 젖당(락토스) 분해 능력은 널리 알려진 예이다. 성인이 돼도 우유 속 당분을 소화시키는 능력을 간직하는 이런 돌연변이는 7500년 전 유럽에서 나타나 퍼졌다.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도록 적혈구가 낫 모양으로 바뀐 아프리카와 인도의 겸상적혈구도 그런 예이다. 최근에는 아프리카와 동남아 열대우림에 사는 수렵채취인들이 모두 키가 작은 까닭이 열대우림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유전적 변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인류 전체는 앞으로 어떻게 진화해 나갈까. 지난 연말 영국의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비비시>에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는 너무 느려 인공지능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인공지능이 인류의 종말을 부를 것이라고 말해 논란을 불렀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로봇이 인간을 능가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자연 선택과 문화적 요인이 뒤섞여 진화의 효과를 가려내기도 쉽지 않다. 의학과 유전공학의 발달, 빈부 격차 등도 불확실성을 높인다. 
 
예를 들어, 수렵채취인보다 현대인은 확실히 두뇌를 덜 쓰기 때문에 뇌가 작아질 수 있다. 반대로  제왕절개 시술로 인류의 두뇌가 무한정 커지는 걸 가로막던 골반을 우회하는 길도 열렸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인류는 이제까지의 진화 경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을 것이란 점이다. 
 
인류는 지난 80만년 동안 겪지 못한 수준으로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높여 빙하기 도래를 늦추고 있고, 바다 산성화는 지난 3억년 동안 보지 못했던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지구의 생명질서는 대격변을 맞고 있다. 이제 인류는 처음으로 진화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는 동물이 될지도 모른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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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생부터 ‘사상교육’을 하겠다는 ‘국가보훈처’

 
 
어른들의 삐뚤어진 권력욕을 위해 사상교육을 하겠다는 국가보훈처의 모습
 
임병도 | 2015-09-19 09:58:2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새정치민주연합 강기정 의원에 따르면 국가보훈처는 지난 6월 4일 기획재정부에 요구한 예산안에서 나라사랑교육 관련 예산으로 무려 5,484억 4,800만 원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올해 관련 예산인 20억 3,500만 원의 269.5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국가보훈처가 ‘나라사랑교육’ 예산으로 하려고 하는 일들을 보면 유치원부터 초중고,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사상교육을 시키겠다는 의도가 명백합니다.

△전국 유치원의 10%를 나라사랑 꾸러기 유치원으로(106.34억) 
△전국 초중고의 3%를 나라사랑 연구학교로 (87.1억), 
△전국 초중고의 10%를 나라사랑 실천학교로 (137.3억), 
△전국 대학의 10%를 나라사랑 특성화 대학으로 (41.3억), 
△전국 초중고교에 호국안보 전담교사를 배치(3,422억 4,000만 원), 
△현재 120명인 나라사랑 전문강사단을 2,000명으로 (240억), 
△올해 600회(계획)의 나라사랑교육 횟수를 95,000회까지

 
‘한국보훈안보단체연합회 신년교례회(2013.1.9. 중앙보훈회관)’ 강연 동영상에서 박승춘 처장은 “국방부는 군사 대결 업무를 하지만, 이념 대결 업무는 어디서 합니까?” 라고 묻고, “지금 우리 정부 부서에 이념 대결에 대한 업무를 하는 부서가 불분명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제가 2년 동안 국가보훈처가 우리 국민의 안보 의식을 함양시켜서 이념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선제 보훈정책을 추진하는 업무를 했는데, 제가 알아보니까 국가보훈처가 이 업무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부서입니다.” 라고 하고, “본부가 있고, 지방청, 지청을 가지고 있어 가지고 전국적으로 이 업무를 할 수 있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강기정 의원 등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을 ‘국가공무원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지만, 아직도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 의원은 “2년 전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던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대선 개입 때 그대로 나라사랑교육을 계속하겠다는 것” 이라며 “총선을 앞두고 이런 생각으로 나라사랑교육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것은 총선개입을 더 하겠다는 것” 이라면서, “국가보훈처가 내년 나라사랑교육 예산을 올해 대비 100배 넘게 편성했는데 이를 예산 심사에서 전액 삭감할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른들의 삐뚤어진 권력욕을 위해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사상교육을 하겠다는 국가보훈처의 모습을 보면, 도대체 한국이 미래를 향해 가는 것인지, 반공시대로 후퇴하고 있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진실의길. 기고 글&기사제보 dolce42@naver.com]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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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철수 박근혜퇴진 1인시위 탄압을 규탄한다.

 
 
미국 대사관 앞에서 일인시위 한다는데 왜 막습니까?
 
이성원 기자 
기사입력: 2015/09/18 [15:1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에서 우리사회연구소 권오창 이사장이 발언에 앞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집회장 뒤로 미국 대사관 건물이 보인다.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9월 16일 광화문 미국대사관 건물이 바라보이는 KT 광화문지사 버스정류장 인근에서 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한 코리아연대(이하 코리아 연대)가 “미 대사관, 청와대, 종로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를 열었다.


 코리아연대 김대봉 회원의 사회로 진행된 이 날 집회에서 권오창 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이 발언에 앞서 “주한미군 몰아내고 조국통일 앞당기자!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을 통일하자!”라고 구호를 외쳤다.


이어진 발언에서 “우리 민족끼리 통일해서 남과 북 해외동포가 어울려서 살 맛 나는 세상 만들어서 살아보자. 젊은 학생들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이가 되기를 바란다.”고 발언을 하였다.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에서 민통선 평화교회 이 적 목사가 발언하고 있다. 집회장 뒤로 미국 대사관 건물이 보인다.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두 번째 발언자로 나선 민통선 평화교회 이 적 목사는 미국이 이 땅에 들어온 지 분단 70년이 되었고 미군 맥아더는 자기 스스로 이 땅에 점령군으로 왔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점령군의 모습이 70년이 지났어도 변하지 않고 있다고 발언하였다.


이 적 목사는 또, 얼마 전 보안수사대에서 조사에 받은 내용 중에 보안수사대는 반미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미국을 욕한 것에 대해 국가보안법으로 옭아매려 한다고 성토하며  “내가 미국을 욕하는데 내 나라를 욕하는 것도 아니고, 미국이 이 땅을 수탈하는 모습을 참기가 힘들어서 이 땅의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외치고 있는데 왜 그 말들을 못하게 합니까?
이 땅에 있는 미국 대사관 앞에서 일인시위를 한다는데 왜 미 대사관이 막습니까?
이 땅의 국민이 스스로 자주권이 있다면 경찰 여러분은 왜 일인시위 하는 것을 막습니까?
일인시위는 코리아연대 단체의 개인적인 이익이 아니라 이 땅의 해방과 이 땅의 통일을 위해서 외치고 있는 우리 백성들의 대표적 함성입니다.“라고 일갈하였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미국은 정체를) 숨기지 말고 미국은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더 이상 이 땅의 자주권을 침탈하지 말고 미국은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경찰 여러분은 미국의 꼭두각시놀음하지 말고 쇠침을 놓아서 일인시위 하는 자주 국가 국민을 탄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제의 꼭두각시놀음을 했던 순사가 있었듯이 종미의 꼭두각시놀음을 하는 경찰이 아니기를 바랍니다.”고 미군철수를 촉구하며 발언을 마쳤다.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에서 코리아연대 회원이 미국 대사관 앞 1인 시위 자리에 경찰이 쳐놓은 접근 방지선과 차량 돌진 방지용 쇠침판 사진을 들고 경찰의 방해를 규탄하고 있다.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이어진 발언자들은 1인 시위 방해 조치의 배후에는 <청와대의 상전 미국 대사관>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방해 증거사진을 제시하였다.

 

마지막 순서로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성명의 주된 내용 중에 평화적 반미시위를 탄압한다면 “평화적 반미 시위의 도수를 결정적으로 높여 나갈 것이며 그 실천적 조치의 범위 안에는 미국 대사관 진입이 포함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후 집회 참가자는 “만악의 근원 분단의 원흉 미군은 이 땅을 떠나라!”라고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 세월호 광장을 거쳐 정부 서울 청사 앞까지 거리행진을 하였다.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 후 거리행진 중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연대를 표하고 있는 집회 참가자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 후 정부 서울 청사까지 행진하고 마무리 집회를 하고 있다.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관련 성명 전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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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미대사관과 청와대, 종로서는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 코리아연대의 집회·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라 !

 

이 사회에 표현의 자유가 있는가. 말로는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실제 무슨 자유가 있고 민주주의가 있는가. 표현의 자유가 있기는 있다, 손톱만큼! 이 자유를 누리려면 이 손톱위에서 엄지발가락으로 서는 발레리나의 고난도 예술적 기교가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리아연대는 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한 표현에서 이 손톱만큼의 합법성도 소중히 여기고 그에 충실하였다. 결과는 어떠한가.

결국 코리아연대회원들은 지난 1년간 합법적으로 1인시위를 하던 인도에서 차도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는 무슨 봉을 보호하는 해괴한 폴리스라인이 쳐지더니 심지어 차량돌진방지용쇠침들까지 놓여졌다. 도대체 누가 이곳을 향해 차를 몰고 돌진하겠는가. 이렇게 해서 지난 1년간 허용되던 손톱만큼의 표현의 자유마저 철저히 유린되었다. 종로서경찰들이 확인해주는대로 이 모든 황당하고 악랄한 조치의 배후에는 미대사관이 있다는데 우리는 특별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우리가 늘 <청와대의 상전 미대사관>이라고 주장하던 사실이 또다시 입증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미대사관은 역사적으로 있어온 모든 군사쿠데타와 대선부정, 남북대결책동, 북침군사연습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이땅의 실질적인 지배자이다. 군사와 경제의 명맥을 장악한데 기초해 정치적으로 청와대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곳이다. 그래서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코리아연대의 조용한 1인시위조차 이처럼 가혹하게 탄압하는 것이고 평화적인 반미시위에도 저리 두려워 떠는 것이다.

코리아연대가 지난 7월 4일 4가지요구사항을 내걸고 4가지투쟁을 선포하였지만 모두 철두철미 평화적인 방식으로 일관하였다. 오직 이 사회의 <성역 중의 성역>인 미대사관을 향해 민심을 담아 할말을 하며 당당히 나아갔을 뿐이다. 이는 당연히 헌법이 보장한 집회·시위의 자유로 보호되어야 한다. 허나 미대사관의 조종을 받는 청와대, 그 청와대의 하수인인 종로서는 시종일관 가혹한 탄압으로만 나왔다.

심지어 지난 9월8일 9차때는 촬영하는 두 여기자와 그 차의 운전자까지 연행·구금하였다. 이는 지난 7월27일 6차때 남성·여성 두명의 촬영자를 연행한 데 이은 파쇼적 폭거이다. 도대체 이 지구상에 시위를 촬영한다고 잡아가는 나라가 어디 있으며 나아가 촬영기자를 구금하는 곳이 어디 있는가. 종로서는 이미 5월16일 청와대앞시위를 촬영하던 여기자를 연행·구금했던 곳이니 한마디로 상습적인 파쇼적 폭압기관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여성시위자들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집단적으로 성추행하는 만행도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매번 어김없이 벌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초보적 자유인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유린하고 집단성추행을 벌이는 종로서와 그 배후의 청와대, 미대사관을 향해 코리아연대는 정의로운 투쟁을 결코 멈출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코리아연대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힌다.

첫째, 만약 종로서가 이후에도 촬영자를 연행하고 여성시위자를 성추행한다면 코리아연대는 미대사관을 향한 평화적인 반미시위의 도수를 결정적으로 높여나갈 것이다. 그 실천적 조치의 범위안에는 미대사관진입이 포함될 것이다. 한마디로 선택사항이 필수사항이 되고 그 시기도 앞당겨질 것이다. 둘째, 종로서가 당장 1인시위자리에 매어놓은 폴리스라인을 해제하고 우스꽝스러운 훼방책동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1인시위의 도수 또한 비상히 높아지며 때로 철야도 불사할 것이다.

코리아연대는 빈말을 하지 않는다. 미대사관·청와대·종로서는 어리석은 공안탄압과 야수적인 폭력만행을 중단하고 민심이 원하는대로 박근혜는 당장 물러나고 미군은 이땅을 떠나야 할 것이다.

                                                    2015년 9월16일
                                        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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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 속에 평화의 꽃 피운 불굴의 정원사


<인터뷰> 평양 국제유소년축구대회 이끈 (사)남북체육교류협회 김경성 이사장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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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18  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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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측 선수단을 이끌고 평양에서 열린 제2차 국제유소년 축구대회에 참가했던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과 17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포화 속에 탄생한 평화의 꽃’.
지난달 16일부터 24일까지 평양 능라도의 5월1일경기장에서 열린 ‘제2차 국제유소년(U-15)축구대회’를 일컬어 나온 표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선수단의 입국을 이틀 앞둔 지난달 14일 남북은 열흘 전 파주시 군사분계선(DMZ)에서 발생한 지뢰폭발 사건을 두고 서해지구 군 통신선으로 ‘군사적 결판을 내보자’, ‘가차없이 응징할 것’이라며 일촉즉발의 충돌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6일 남측 선수단을 포함해 165명의 방북단을 이끌고 평양에 들어간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은 그 와중에도 남북고위당국자접촉이 시작되기 하루 전인 21일부터 극적 타결에 이른 24일까지 평양 5월1일경기장에서 8개 참가팀을 2개조로 나누어 조별예선을 거쳐 순위결정전과 준결승, 결승전까지 예정된 경기를 치러야했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몸은 경기장 주석단에 앉아 있지만 눈과 귀는 온통 군사분계선에 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비상연락망을 통해 한국 정부와 통화하면서 북측으로부터 신변안전 담보를 받고 여차하면 조기철수를 할 수도 있다는 전갈을 받고 북측과 긴박한 협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회를 계속하겠느냐는 의사를 북측과도 수시로 상의하고 확인하면서 대회는 진행됐다.

김경성 이사장은 평양 대회를 마친 후 지난 14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마련한 정례 정책포럼에 참석해 ‘체육교류로 열어가는 남북화해와 평화’를 주제로 긴박한 당시의 상황을 소개했다.

이 자리에서 김 이사장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연이어 대규모 방남과 방북을 성사시킨 불굴의 의지와 비결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17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사)남북체육교류협회에서 김 이사장을 만나 며칠 전 포럼에서 못 다한 뒷이야기를 더 들었다.

그는 오랜 고민 끝에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는 듯 ‘포화 속에 탄생한 평화의 꽃’이라는 시적인 표현으로 자신이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성사시킨 ‘국제유소년(U-15)축구대회’를 정의했다.

이번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사실 지난해 11월 경기도 연천에서 열렸던 제1차 국제유소년(U-15)축구대회 당시에도 북측 선수들이 입국하기 20일 전에 북에서 대북전단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이에 다시 남측이 대응사격을 하는 등 정전상태인 한반도의 긴장이 유감없이 펼쳐진 상황이었다.

   
▲ 김경성 이사장은 지난 14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정책포럼에서 '체육교류로 열어가는 남북화해와 평화'를 주제로 지난 10년간 자신의 경험을 담백하게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통일뉴스 : 대회 성사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다. 쉽지 않은 긴장 상황에서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비결이 있었다면?

■ 김경성 이사장 : 지난 8월 16일 남측 선수·임원만 84명 방북했는데, 이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대규모 방북사례가 된다. 2회 평양대회는 직전까지 남북이 비보도 보안을 지키면서 철저한 준비작업을 거쳐 8월 15일에야 첫 보도를 했다.

8월 14일 지뢰폭발 남북 군사상황이 시작됐는데, 남측 당국에서 16일 방북을 승인했다. 다른 사업 같았으면 못 가게 했을 것이다. 17일부터 한미 을지훈련기간이 되면서 군사적 긴장 수위가 높아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국민의 신변안전에 대한 우려를 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정부에서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년 1회 대회 때 유사한 군사긴장 상황을 겪고도 북에서 내려오면서 이미 대회의 체질이 강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1회 연천대회도 군사적 충돌 상황속에서 잘 치러졌다. 그런 군사상황에서도 북이 내려왔다는 것은 그동안 남북체육교류협회가 북과 지속적으로 해 왔던 평화적 사업의 성과가 이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때도 북측 4.25체육단이 우승했는데 4번의 만찬에 모두 참가했다. 우리 측 남경필 도지사를 비롯한 여야 국회의원, 지자체 단체장, 기업인 등 700여명이 북측 선수 및 임원들과 대화의 기회를 가졌다.

작년 연천 대회 이전에 남북 간에 대화가 거의 없었는데, 결국 축구대회를 하다보니까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보면 남북대화의 통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셈이다.

11월 국내에서 3회 국제유소년축구대회 개최

□ 평양대회 이후 연속적으로 구상,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 15세미만 국제유소년축구대회는 작년 1회 대회 때부터 북측과 남북체육교류협회가 장기사업으로 합의한 것이다. 기본 틀은 봄에는 평양, 가을에는 남측 도시, 겨울에는 중국이나 유럽, 남미 등 따뜻한 나라에서 개최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 2회 평양대회를 봄에 하지 못한 이유는 남북관계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런 것이고 3회 대회는 가을에 남쪽으로 내려올 차례이다.

김 이사장은 14일 포럼에서도 현실적 일정을 고려할 때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끝나는 11월쯤 경기·강원도에서 3회 대회를 준비하겠다고 설명했다. 다만 대회 장소는 여러 지역이 경합하는 만큼 특정하지는 말자고 덧붙였다.

□ 무리한 일정은 아니라고 본다는 건가.

■ 제가 추진을 안 하면 몰라도 추진을 하면 가능할 것이다. 다만 3회 대회가 2회 평양대회 일정과 간격이 너무 짧고 내년 1월 겨울대회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꼭 해야 하느냐는 고민을 하고 있다.

□ 지난 14~15일 북에서 국가우주개발국, 원자력위원회 등을 앞세워 위성발사와 핵실험 의지를 밝힌 상황인데 대회 진행에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나?

■ 남북 간에 실제로 포탄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과 견주어서 위성 발사 등 의사표시를 한 것이 더 큰 긴장상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북에서 인공위성을 쐈으니 유엔이 나서서 국제대회를 하지 말라고 제재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보지 않는다.

우리 정부가 ‘No’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이산가족 상봉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인데 과연 평화적인 경기까지 손을 댈 것인지는 생각할 여지가 있다.

북측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도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이미 가장 기분 나쁠 수 있는 대북 삐라를 뿌린 연천지역에도 와서 경기를 치르지 않았나.

   

▲ 8.24. 능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제2회국제유소년축구대회 우승팀인 북측 4.25축구단에 김경성 이사장이 우승 트로피를 수여하고 있다. [사진제공-남북체육교류협회]

□ 유소년축구대회 북측 파트너십이 다소 복잡해 보이는데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

■ 남북체육교류협회의 북측 파트너는 국방위원회에 소속된 위원회인 4.25체육단인데 군 소속이라는 특성상 남측 민간과 연계해주는 민족화해협력위원회(민화협)이라는 창구가 필요한 것이다. 북측 민화협은 국제대회와는 직접 상관없고 창구역할에 그치는 것이다.

또 4.25체육단이 국제축구대회를 주최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니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체육성, 조선축구협회 등을 거쳐 평양국제축구학교로 대회 주최가 조정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국제유소년(U-15) 축구대회는 남북체육교류협회(이사장 김경성)와 평양국제축구학교(교장 현철윤)가 공동 주최하는 행사로 남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경기도, 강원도, 연천군이 후원하고 있다.

□ 유소년축구대회의 참가범위를 더 넓히거나 확대해야 하지 않나.

■ 그렇다. 작년 1회 대회 때는 남북을 포함해서 중국, 우즈베키스탄 등 4개국이 참가했었다. 이번엔 거기에 남미의 브라질과 유럽의 크로아티아가 추가로 참가했다.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FIFA대회는 17세 대회부터 시작되고 그 미만 연령대의 대회는 없다. 또 15세 유소년대회에서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대회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이 대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

또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때 경기를 성사시켰던 과정을 돌이켜 보면 앞으로도 남북 당국이 이 대회를 관계 개선 등의 평화적 사업에 적극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 개보수 공사를 마치고 제2회 국제유소년축구대회가 진행된 평양 능라도 5월1일경기장 전경. [자료사진-통일뉴스]

□ 이번에 대회를 치룬 5월1일경기장은 북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인 ‘아리랑’공연으로 유명한 곳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지시로 지난해 10월 개보수 공사를 마치고 준공한 이후 이번 대회가 5월1일 경기장에서 처음으로 열린 국제대회였다고 들었다.

5.1경기장에서 '아리랑' 대신 월드컵 예선전을

■ 과거 5월1일경기장은 국제축구연맹(FIFA)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월드컵 지역 예선도 김일성경기장에서 치를 수밖에 없었다. 5월1일경기장은 15만 명의 관중이 들어가는 거의 세계 최대 규모의 경기장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새로 짓다시피 개건을 한 후 북은 특히 홈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진행되는 월드컵 예선 경기를 이곳에서 진행할 계획을 갖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도 봤지만 15만 명의 관객이 뿜어내는 엄청난 축구열기를 세계에 송출하려고 하는 것이다.

북한은 스포츠를 통해서 내부결속과 함께 북의 위상을 키우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체육강국의 메시지를 통해 내부결속도 시키지만 국제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아리랑은 더 이상 계획이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과거에는 북에서 내부결속 수단으로 봄부터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 ‘아리랑’을 준비하면서 여름, 가을까지 집단체조를 했는데, 지금은 스포츠를 주요 매개로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 축제가 가졌던 효과나 의의가 스포츠로 전환된 것이라고나 할까.

또 최근에는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오는 엘리트 체육 외에도 생활 스포츠를 강화하고 있지 않나. 이는 국민건강에 대한 홍보와 함께 개선되고 개방된 북한 사회의 모습을 외부에 보여주는 메시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월1일경기장은 다목적 체육경기장으로 새로 지어졌다. 북측 매체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준공한 5월1일경기장은 15만석의 관람석을 가진 축구장과 육상주로, 예비 운동실, 선수침실, 감독실, 심판원실, 검사등록실 등이 국제기준에 맞게 갖춰졌으며, 수영장, 탁구장, 미니골프장, 피로회복실을 비롯한 체육 및 문화 후생시설과 서비스 시설이 최상의 수준에서 완비되어 선수들의 훈련과 경기는 물론 관람객의 편의도 충분히 보장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경기장에서는 축구경기 외에 마라톤을 비롯한 육상종목들과 탁구, 수영 경기 등이 열리게 된다.

   

▲ 평양 능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진행된 제2회 국제유소년축구대회 모습. [사진제공-남북체육교류협회]

양궁·마라톤·격투기도 남북교류 유력 종목

□ 축구 외에 다른 경기 종목들에 대한 협조와 교류도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 2년 전부터 양궁장비를 꾸준히 지원해 왔다. 양궁장비는 1세트에 보통 1만 달러 정도 된다. 어지간한 초정밀 총포보다 비싼 고가 장비인데, 지금까지 정부 승인을 받고 20세트 이상 보내줬다.

지난해 5월 중국 강서성에서 남북 양궁대회를 열었는데, 장비 활용과 기술 교류뿐만 아니라 선수지도도 진행했다. 북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감독들을 인정한다. 또 실제로 성적이 좋아지니까 북측도 양궁교류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바라고 있다.

□ 남측 감독들이 평양에 가서 가르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않나.

■ 양궁은 특히 단기적으로 열흘 정도만 지도해도 효과가 크다. 장비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성적이 확 달라지기 때문에 기본 장비에 선수 체형별로 맞춤형으로 활용하는 방법, 야외경기에서 바람에 적응하는 방법 등을 ‘원포인트’ 지도방법만 가져도 상당히 효과가 있다.

또 북측 선수들이 집중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단기적인 기술전수만 이루어져도 성적이 많이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그밖에 어떤 경기종목이 남북 교류에 유력하다고 볼 수 있나.

■ 남북이 함께 교류하면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종목으로 축구와 양궁, 마라톤을 꼽고 싶다.

축구는 전 세계가 열광하는 종목이고 양궁은 우리 민족이 잘하는 종목이며, 마라톤은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족의 모습을 상징하는 종목이라고 생각한다.

또 북한이 전통적으로 격투기가 강하다. 복싱, 레슬링, 유도, 특히 태권도 등. 그런데 북은 격투기에 강하면서도 개정된 룰 등에 대한 숙지가 덜 되어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있다. 반면 남측은 약해지고 있다. 사회체육 저변이 확대되면 격투기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격투기 종목에서는 기술이나 시설, 인프라, 용품 등 북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선전하지 말고 성과내라'

□ 사업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사업수지는 어떻다고 할 수 있나.

■ 수익사업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지원사업으로 한 것이니까 대차대조표를 따지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개인재산은 많이 썼다.

살면서 진화된다고 할까. 돈을 벌기 위해서만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남북교류 사업을 하면서 이 분야로 진화되면서 행복도 찾아지는 것 같다. 물론 돈을 벌고 싶지만 남북이 같이 버는 사업을 만들면서 벌고 싶다.

□ 남북관계가 곡절이 많았는데 흔들리지 않고 대회를 지켜온 비결을 이야기해 달라.

■ 2006~2008년까지는 이 대회가 남북을 오가며 진행되던 정기교류전이었다. 남측 선수들을 매년 봄·가을에 6번 평양에 데리고 갔고 같은 기간에 북 선수들은 남측에 4번을 방문했다.

3년간 남북 선수들이 남북을 10회 왕래했던 거다.

이렇게 정착되던 남북유소년축구대회 정기교류전이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남북에서 할 수 없게 됐다. 다른 사람들이 다 중단했을 때 이 대회를 중국으로 가져가서 매년 겨울에 남북 선수들이 만나서 합동훈련도 경기도 했다. 2014년 겨울까지 중국에서 하다가 박근혜 정부 들어 남북 스포츠 교류는 허용을 했기 때문에 작년에 연천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지난 10년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작년에 포탄이 날아다니던 연천으로 북측 선수들이 내려 온 것이다. 이게 기본적인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평양공단을 개발하다가 5.24로 막혔을 때 그 기반을 단둥으로 옮겨서 축구화를 만드는 아리스포츠공장을 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보니 북측과 두터운 신뢰가 쌓인 것 같다.

김 이사장은 지난 14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정책 포럼에서도 “통일사업은 일관되고 지속적인 사업이어야 한다”며 조급하게 선전하려 하지 말고 성과를 내는 데 주력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지난 8월 뜨거웠던 평양에서 9박10일을 함께 한 관계자들과 함께 만찬장에서 ‘홀로아리랑’의 가사를 읊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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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명백한 타살... 이제라도 기록 공개해야"

 

[인터뷰]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펴낸 고상만

15.09.18 19:42l최종 업데이트 15.09.18 19:4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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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와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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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1918~1975)가 패기 있고 기상이 활달한 '행동가'였다면 함석헌(1901~1989)은 촌색시 같이 수줍음을 잘 타는 내성적인 '사상가'였다. 장준하는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총을 들고 항일운동을 벌였던 반면 함석헌은 그의 격렬한 말과 글로 낙심에 빠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고난을 극복할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었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장준하는 '야당정치인'으로 독재자 박정희와 정면대결을 벌였고 이 시기 함석헌은 '재야언론인'으로 박정희정권의 잘못을 누구보다 거침없이 비판했다.

장준하와 함석헌의 삶의 모습은 이렇게 겉으로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또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은 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이승만·박정희 정권기에는 민주화운동가였다. 이 땅의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장준하와 함석헌은 '바늘과 실'처럼 한 마음 한 뜻으로 행동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가장 소중한 가족들은 말 못할 고초를 겪었다.  

1975년 8월 17일 박정희 독재정권시절 장준하가 의문사 당한 후 함석헌은 장준하에 대한 인물평을 이렇게 했다. 

"그(장준하)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 나라의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고쳐보려고 온갖 노력과 투쟁을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 함석헌의 평가처럼 장준하는 그저 삶의 매 순간을 오직 공익을 위해, 민족의 의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을 감수하며 온갖 노력과 투쟁을 한 이다. 

나는 고상만을 지난 2004년 노무현정부 시절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직장동료'로 처음 만났다. 그때 그는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이었다. 1970년 대 말부터 '함석헌 환자'였던 나는 곧 정의감이 넘치는 '장준하 매니아' 고상만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고상만은 나의 후배이자 친구이면서 또 스승이 되었다.      

그런 고상만이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를 발간했다. 이 책은 박정희 독재정권시설 중앙정보부가 불법으로 민간인들을 사찰하고 야당 국회의원의 전화를 도청하는 등 박정희 독재정권이 저지른 추악한 국가범죄에 대한 기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고상만의 말처럼 "중정이 장준하 선생을 상대로 한 사찰, 미행, 도청 그리고 사설 정보원 활용을 통한 정보 수집은 그때나 지금이나 해서는 안 될 정치 개입"이었다. 이렇게 박정희정권은 "국가의 안보와 상관없는 독재자의 권력 연장용 도구로서 국가권력을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처벌받아야 할 불법 행위이지 보호할 가치가 있는 국가 기밀이 아니다"라고 고상만은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에서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장준하에 대한 '중요 상황 보고'를 통해 친일장교 출신 독재자 박정희가 광복군장교 출신의 야당 국회의원 장준하를 얼마나 비열하게 불법으로 감시하고 탄압했는지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 고상만의 증언처럼 이 책을 통해서 "독재 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어떻게 유린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똑똑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추악한 불법범죄행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커다란 불이익을 감수하고 당당하게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스승' 고상만의 용기에 깊이 감사드린다. 다음은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의 저자 고상만과 <함석헌평전>의 저자인 기자가 지난 몇 달간에 걸쳐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중앙정보부와 국가 권력기관 자료 토대로 책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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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책표지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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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출간을 축하드린다. 정말 어려운 시절에 큰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비밀 기록으로 새롭게 조명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을 쓰기로 마음먹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듣고 싶다.
"2015년 올해는 장준하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40주기를 맞이하는 해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는데 그 40주기에 선생님의 삶과 투쟁, 죽음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잘 알 수 있도록 책을 쓰고 싶었다. 원래는 8월 기일에 맞춰 책을 내려 했는데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더 좋은 책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 지난 2012년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을 출간한 바 있다. 기존의 저서 그리고 다른 분들이 또 그동안 쓴 '장준하평전'과 이 책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전에 나온 장준하 선생님의 평전과 이 책의 큰 차이점은 증언을 하는 이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전의 평전들은 장준하 선생님의 유족이나 지인, 또는 동지들의 증언을 주요 토대로 삼았는데 이번에 내가 쓴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평전은 생전 장준하 선생님을 지독하게 감시했던 중앙정보부 등 국가 권력기관이 기록한 자료를 토대로 책을 썼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이를 통해 장준하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담을 수 있었다. 나 역시 평전을 쓰며 매우 흥미로웠던 이유다."

- 20세기를 살다 간 장준하 선생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 특별히 젊은 세대들이 아는 일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2015년 올해는 대한민국의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에 국가 차원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가졌는데 나는 장준하 선생님 자체가 '대한민국 광복 70년 역사'라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으로, 또 해방후에는 <사상계> 언론인으로, 이어 독재 권력하에서는 민주 투사로, 이를 제도적으로 바꾸기 위해 국회의원을 지낸 장준하 선생님의 삶을 알게 된다면 나는 그것이 대한민국 광복 70년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지금의 젊은 세대가 장준하의 삶을 알아가는 것이 또 다른 역사 공부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을 가장 사랑한 사람, 바로 장준하였기 때문이다."   

- 지난 1974년 1월 15일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민간인 신분임에도 군사재판을 받는다. 당시 박정희가 장준하 선생을 감옥에서 죽이려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런 소문이 사실이었나?
"사실이었다. 박정희는 장준하를 죽이고 싶었다. 이를 위해 제일 처음 한 일이 바로 1974년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한 것이다. 박정희는 이러한 긴급 조치 발동을 통해 장준하를 감옥에 15년간 갇아 두려고 했다. 당시 장준하 선생님은 56세였는데 만약 15년을 다 살고 나온다면 일흔이 넘는 나이가 된다. 

이 당시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60세를 갓 넘었을 때였는데 협심증을 앓고 있어 건강이 좋지 않았던 장준하가 감옥에서 일흔을 넘겨 건강하게 나올 수 있다고 여긴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를 불과 10개월 만에 석방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장준하 선생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결국 중단하지 않는 장준하 선생의 저항이 비극적인 의문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 장준하가 의문사 당하기 20여 일 전인 1975년 7월 말 그는 김대중을 찾아 갔다. 당시 그는 김대중을 찾아가 "당신이 못 움직이니 내가 움직이겠다"며 "희생을 각오하고 싸울 터이니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함석헌은 이를 놓고 "장준하가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 불러왔어, 저놈들이 둘이 합치면 어찌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장준하가 의문사 당하기 전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그가 의문사 당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하나?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은 매우 정확한 인식이었다. 실제로 2003년 12월 당시 나는 돌아가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김대중도서관에서 만나 장준하 선생님의 사인에 대해 면담을 한 적이 있는데 이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도 하신 말씀이 있다. 

'장준하 선생님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하는 의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물음에 대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나도 1973년에 암살당할 뻔했는데 장준하 선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한 사실이 있다. 나 역시 박정희 권력하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 장준하 선생님이 화해하면서 거사를 논의하는 상황을 중정이 알게 되었고 결국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준하 선생이 변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장준하 선생에 대한 국가기록 공개해야"

- 지난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이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 당한 날 당시 중앙정보부는 어떤 기록을 남겼나?
"단 한 장의 문서만 남겼다. 이는 대단히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 시간대 별로 별스럽지 않은 일조차도 장준하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록으로 남겨놨던 중정이 정작 사건이 발생한 당일에는 사고가 발생하여 사망했다는 단 한 장의 문서만 남겨 놨다. 그리고 그 다음에 생산된 문서는 다음날인 18일 오전 7시 57분경, 장례 일정에 대한 협의를 담아 보고서를 작성했다. 무려 11시간동안 공백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사이 시간에 적어도 수차례의 추가 보고문이 있다고 확신한다. 의정부 지청 검사와 부검의 그리고 보안부대 고위 관계자가 사건 현장에 왔는데 이들이 무엇을 봤고 어떤 말을 했는지 기록하고 보고해야 하는데 이러한 내용이 일체 없다. 이는 중정 요원들조차 이상한 일이라고 조사과정에서 답한 바 있다. 지금이라도 이 기록은 반드시 공개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드시 진실을 밝힐 것이다."

- 장준하 사후 장준하 선생의 사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던 국내기자는 연행, 구속되고 또 외신기자는 아예 추방되기도 했다. 장준하가 정말 단순 사고인 추락사를 당했다면 박정희는 왜 그토록 진실을 은폐하고 철저하게 언론을 탄압했을까?
"중정은 장준하 선생의 사인 의혹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많은 이들이 의혹을 제기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아니면 다른 어느 기관이 했나 살펴볼 것 같기도 한데 전혀 그러한 흔적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의혹을 제기한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하는가 하면 의혹을 보도한 외신 기자를 추방하기도 한다. 장준하의 이름을 세상에서 지우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을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에 잘 실었다.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다." 

- 장준하는 박정희 독재정권하에서 모두 37번 연행되고 그중 3번 구속되었다. 그후 포천 약사봉에서 장준하 선생은 의문사 당했다. 그러나 당시 장안에서는 박정희가 죽은 장준하조차 두려워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는데?
"장준하의 사망 경위에 대한 보고는 대단히 엉성한데 반면 중정은 장준하 사후 장준하 선생의 유족과 동지들을 감시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예를 들어 함석헌 선생님이 장준하 선생 사후 두 달여 만에 명동에서 추모제를 하려고 하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1주기 기일 때는 더욱 그랬다.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장준하 선생을 박정희 권력이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죽은 사람조차 이렇게 두려워 할 지경이니 살아있는 장준하는 얼마나 무서웠겠나." 

-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 그리고 해방 후에는 언론인으로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권에 맞섰던 장준하 선생이 마침내 1967년부터 정치인으로서 본격적인 현실참여를 결심하게 되는 중대한 계기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박정희 권력은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를 탄압했다. 판매방해와 세무조사로 이중, 삼중의 고통과 어려움을 줬다. 결국 장준하 선생은 더 이상 비판만으로는 박정희 권력을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것이 바로 국회의원 선거출마였다. 이를 통해 국회에서 싸워 박정희 권력의 부도덕성과 야만적인 탄압에 맞서고자 했다. 만약 장준하 선생에게 조금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되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좋은 나라가 되었을 텐데... 많이 안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 장준하 선생은 부인과 3남 2녀의 가장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단 한 번 월급봉투를 집에 가져온 적이 없다고 한다. 또 그의 지인인 이행우 선생은 한 번 식사 시간에 우연히 장준하 선생 집을 방문하고 놀랐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국회의원인데 장 선생이 식사하는데 반찬이 깍두기 하나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왜 장준하 선생은 그토록 가난했을까?    
"높은 도덕성, 청렴성 그리고 가지지 못한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난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에서도 이러한 많은 일화가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장준하 선생은 국회의원 명함조차 만들지 않았다. 당시 국회의원 명함만 가지고 가도 마치 신분증처럼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시대였는데 장준하 선생은 그러한 부도덕한 일에 얽이지 않기 위해 아예 명함조차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이 책에 실린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와 국회의원 명함' 일화는 글을 쓰는 나조차도 먹먹한 감동을 느끼는 일이었다. 이처럼 정직하고 청렴한 정치인을 다시 만나고 싶다."

"장준하, 절대 추락사 하지 않았다... 명백하게 타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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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의 저자 고상만.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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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사건' 조사관을 지냈는데, 장준하 사건 조사관 입장에서 장준하 선생의 사인은 무엇이라고 추정하는가?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장준하 선생은 절대 추락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백히 타살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누가 죽였느냐'는 것으로 앞으로 국가차원의 조사 기구가 만들어져 그곳에서 책임있게 규명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여러 시나리오가 있는데 국가차원의 조사기구가 만들어진다면 내가 적극 지원하고 도와 남은 의혹을 명쾌하게 풀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자신 있다. 확실하게 진실을 규명할 것이다."

- 끝으로 장준하 선생이 한국역사와 사회에 남긴 소중한 유산은 무엇이라고 평가하는가?
"장준하 선생은 생전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말했다. 나는 그 말씀이 우리 사회에 남긴 소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역시 못난 후손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심, 이웃을 생각하는 연대감, 그리고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함께 가겠다는 인권의식이 나는 장준하 선생이 나에게 준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시대는 다시 어둡지만 나는 긍정적으로 낙관한다. 장준하 선생이 꿈꾼 정직한 나라, 용기 있는 정의를 위해 나는 제2의 장준하처럼 살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한 명, 한 명 늘어난다면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다. 장준하 선생이 남긴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앞으로도 끊임없이 말하고 나 역시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함께 가자!"

* 저자 고상만은 인권 운동가,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등 의문사한 이들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한다. 저서-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2012년), <다시, 사람이다>(책담, 2014년) 외 다수. 2012년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상' 등 수상.


○ 편집ㅣ박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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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아 고맙다, 쌀 빼고 생태계 서비스 연 13조원

논아 고맙다, 쌀 빼고 생태계 서비스 연 13조원

이은주 2015.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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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상식 톺아보기-벼농사의 가치

전국 논의 홍수조절량 춘천댐 24배, 지하수 함양 소양댐 8배

여름철 냉각효과와 오염물질 정화, 산소 생산, 습지 생태계 구실도 

04453621_R_0.JPG» 경기도 김포의 가을 들판에서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논은 단지 식량뿐 아니라 수많은 가치있는 환경적 기능을 한다. 사진=김명진 기자


이제 열흘 뒤면 추석이다. 추석에 우리는 햅쌀로 밥을 지어 조상께 올린다. 밥은 우리나라 사람의 주식이다. 밥은 쌀에 물을 부어서 조리해 먹기 좋게 만든 것이다. 
 
그 쌀을 생산하기 위해 벼를 재배하는 곳이 논이다. 그런데 벼농사는 단순하게 쌀을 생산하는 농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98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오창과학단지 구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볍씨가 관심을 끌었다. 이 볍씨가 나온 토탄층의 연대가 1만 3000여 년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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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볍씨가 묻혀있던 토탄층과 연대가 같다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 중 하나가 된다. 현재까지는 중국 허난성에서 출토된 약 1만 년 전 볍씨가 가장 오래되었다. 
 
토탄층에 묻힌 볍씨가 토탄층보다는 나중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벼농사가 한반도에서 매우 오래전에 시작됐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04061996_R_0.jpg» 경기도 파주의 교하신도시와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논. 벼는 열대작물이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온대 몬순에 맞게 개량한 작물이다.
 
동아시아 중심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6~7월이 되면 장마전선이 형성되어 일 년 강우량의 60%가 넘는 비가 집중적으로 내린다. 이러한 기후에 잘 맞는 농작물이 바로 벼이다. 
 
벼는 원래 아열대 및 열대지역이 원산지이므로 따뜻한 곳을 좋아한다. 우리 선조는 이런 벼를 온대기후에 잘 맞게 순화시키고 선발해서 우리의 주식 작물로 정착시킨 것이다. 
 
벼농사란 우기에 강우량이 집중되고, 고온다습해서 물가 잡초가 잘 자라는 몬순지대에서 진화해 발달한 농업이다. 이 때문에 유럽과 달리 아시아지역은 밀 대신 벼농사를 짓게 되었으며, 지금도 전 세계 쌀 생산량의 90%가 이곳에서 생산돼  대부분의 국가에서 주식으로 먹고 있다. 
 
그러면 미국이나 호주는 어떨까? 그런 나라들은 수출하기 위해 상업적으로 벼를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쌀 생산 방식 역시 생태적으로 차이가 있다. 
 
즉 우기 때 몬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겨울비나 눈 녹은 물을 인공적으로 저수해 이용하고 있다. 이런 벼농사 방식은 인위적인 물대기, 기계화 농법 및 화학물질 투입에 의존한다. 

00934967_R_0.JPG» 집중호우로 물에 잠긴 전남 나주평야의 논. 흔히 홍수피해의 전형적 사례이지만, 논이 홍수로 불어난 물을 가두어 주는 구실을 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사진=연합뉴스

 
볍씨를 뿌리고 수확하기까지 약 6개월이 걸리지만 이 기간 동안 벼는 기후에 적응하면서 우리의 주식을 제공해 주고 동시에 기상재해 방지, 환경 보전 등 공익적인 기능을 한다. 만약 벼농사를 짓지 않고 그 자리에 골프장이나 공장이 들어선다면 장마철에 쏟아지는 그 많은 빗물은 어디로 가며, 무엇으로 홍수를 조절할 것인가? 
 
장마 때 전국 논에 가둘 수 있는 물의 양은 춘천댐 저수량의 24배(36억 톤)이며, 논에서 지하수로 스며드는 물의 양은 전 국민이 사용하는 수돗물 양의 2.76배(소양댐 저수량 8.3배)가 된다고 한다.
  
벼농사는 수질정화 기능이 있다. 논에 가두어 놓은 빗물의 45%는 지하로 침투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수된 맑고 깨끗한 지하수 물이 된다. 논의 지하수 함양기능은 전 국민의 전체 물 사용량의 약 80%에 해당한다. 
 
수질정화 능력은 어떤가? 생활하수가 논에 들어오면 질소는 52~66%, 인산은 27~65%가 제거된다고 한다. 논만으로 전체 생활하수의 36%를 정화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논에는 여름철 더위를 식혀주는 기능도 있다. 논에 있는 물이 증발할 때마다 주위의 열을 빼앗는데 이러한 증발 잠열에 의해 우리나라 논에서 하루에 조절되는 열량은 원유 543만㎘에 해당한다. 
 
이렇게 열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여름에 논 주변을 시원하게 만든다. 호수에 둘러싸인 마을을 생각해 보라. 여름철 물에 잠긴 논이 호수 구실을 한다. 
 
또한 식물은 광합성 작용에 통해 대기로부터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우리가 호흡할 때 필요한 산소를 방출하는데 그 효과가 다른 작물에 비해 높다. 우리나라 벼농사에서 방출되는 산소의 양은 연간 1019만 톤에 이른다.

 

03036378_R_0.JPG» 강화도 길상면 초지마을 논에 분포하는 멸종위기 식물 매화마름. 논의 습지로서 생물다양성의 보고이기도 하다. 사진=연합뉴스 
 
이밖에 논은 습지로서 수많은 곤충, 갑각류, 물고기, 개구리 등의 서식지이고 이들을 먹이로 삼는 새들이 몰려드는 생물다양성의 터전이기도 하다. 
 
물론, 논의 물에 잠긴 토양에서 세균이 메탄가스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지구온난화에 상당히 기여하는 점은 부정적 요인이다. 세상에 모든 것이 좋은 일이란 없다. 
 
이처럼 벼농사를 지속함으로써 얻어지는 논의 홍수조절, 수질정화, 토양 유실방지, 공기와 수질의 정화, 유기물의 재순환, 여름철 냉각 효과, 습지생태계의 유지 효과 등 공익적인 기능을 모두 합치면 그 가치가 연간 13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05400261_R_0.jpg» 16일 오후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한 논에서 벼베기가 한창이다. 그러나 쌀은 논이 우리에게 주는 수많은 선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철원/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우리 선조가 오래전부터 지어 온 벼농사기 주는 이런 엄청난 혜택에도 그 고마움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논은 그저 쌀을 생산하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도 최근 들어 벼의 재배면적이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이런 농업생태계의 변화는 경제적인 논리와 맞닿아 있다.
 
벼농사가 환경에 기여하는 공익적인 효과는 대략 쌀 생산액 10조 원보다 훨씬 크다. 논이 공짜로 제공하는 생태계 서비스를 장기간 고려한다면 우리나라에서 벼농사를 지어 쌀을 소비하는 하는 것이 반드시 비싸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  건강을 해치는 주범 중 하나인 콜레스테롤 함량이 가장 낮은 곡물이 바로 쌀이라는 연구결과도 있지 않은가.
 
벼농사를 단순한 시장경제 원리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국토 환경과 건강까지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벼농사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이은주/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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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수백 명을 죽여서 버렸지. 시체 썩는 냄새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영암 ②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 2015.09.17 13:59:43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진행합니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호남(제주 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을 다룰 예정입니다.

 

의용군 박 씨의 사연…'화학산 빨치산'이 되다

냉천 마을에서 사달이 벌어지던 그 시각, 냉천 아랫동네인 다보와 연산 부락은 갑자기 들려온 총소리에 일제히 몸을 피해 큰 피해를 면했다. 연산 부락은 특히 경찰의 피해를 막기 위해 산 어귀에 보초를 세워 이들로부터 안전을 기하기도 했다.


연산 부락에서 만난 박상인(가명) 씨는 "흰 깃발과 붉은 깃발을 들고 산에서 보초를 섰다"며 "경찰이 올 경우 붉은 기를 들어 주민들이 산으로 도망가도록 했고, 이들이 다시 영암으로 빠져나가면 흰 기를 들어 마을에서 농사짓도록 했다"고 회고했다. 주민들이 받았을 경찰에 의한 피해를 짐작케 한다.

 

▲ 냉천 부락을 지나는 도로를 따라 곧장 내려오면 금정면 연보리 1구인 연산 부락과 만난다. 연산 부락 건너 편(사진 위쪽)에 다보 마을이 희미하게 들어온다. 사진 우측 하단에 있는 검은 지붕의 가옥에는 정복용 씨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박 씨는 또 자신이 빨치산 의용군으로 참여했다가 도망친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내 나이 18살이었다. 좌(左)니 우(右)니 그런 것은 당연히 모르고, 배고픈 사람 잘 먹게 해준다는 말에 의용군에 참여했다"고 털어놨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고, 남침 한 달여 만에 부산을 제외한 상당 지역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파죽지세로 몰아붙인 북한군은 거침이 없었다. 이들은 겹겹이 처진 방어선을 쉽사리 무너뜨리며 무섭게 남하했다.
 

북한군이 금정면에 들어온 것은 1950년 8월경이다. 군경은 이미 영암을 빠져나가 후퇴한 뒤였다. 냉천 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은 "8월경에 처음 인민군을 봤다"고 했다. 실제로 7~8월경 영암경찰서는 이 지역 보도연맹원 수백 명을 사살한 뒤 퇴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해 가을 금정면을 통제한 빨치산들은 의용군에 참여할 지원자를 차출해갔다. 이렇게 모아진 이 지역 의용군은 위치상 전남 서부권의 중심쯤에 해당하는 전남 함평으로 이동해 집결한 뒤 다시 화순으로 옮겨졌다.


화순 남단의 화학산(해발 614미터)은 영암, 장흥, 보성 등 전남 동남부 지역과 맞닿아 있고, 북단의 백아산(해발810미터)은 지리산과 무등산을 연결하는 주요 요충지다. 특히, 백아산은 한국 전쟁 당시 빨치산 전남총사령부가 주둔했을 만큼 반군의 본거지였다. 박 씨는 당시 화학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의용군을 모집한다기에 자원해서 참여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면 적어도 살 수는 있을 것 같아 그리했다."

 

박 씨의 거친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긴장된 듯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키더니 큰 소리로 내뱉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금정면소재지에서 연보리로 들어가는 초입. 사진 좌측 상석이 있는 묘지 부근과 도로 끝부분(검은 자동차 있는 부근) 우측에 인민 재판을 위한 총살장이 마련돼 있었다. ⓒ커버리지(정찬대)


북한군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감하며 살기 위한 수단으로 의용군이 됐지만, 화순으로 이동하는 내내 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곳곳에서 벌어진 게릴라전을 목격하며 죽음의 공포에 내몰렸고, 날선 칼날 위를 걷는 듯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었다. 황금빛 물줄기가 넘실대던 늦가을, 이들의 손은 적군의 핏줄기로 붉게 물들었고,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 박 씨는 죄악에 몸부림쳤다.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긴장한 표정은 이내 흥분으로 바뀌었다. 그는 "화순까지 넘어갔지만 먹을 것도 제대로 안주고, 사람 죽이는 것을 보면서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거듭 항변했다. 이어 "통일도 못할 것 같고, 고향 떠나 지내는 것도 겁이 났다"며 "그런 생각에 다보마을에서 함께 차출된 동무와 함께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고 말했다.


화순을 빠져나온 박 씨는 군경과 빨치산부대 모두를 피해 힘겹게 이동했다. 그리고 갔던 길을 되돌아 내산(금정면 청룡리)으로 왔고, 외갓집이 있던 나주로 곧장 향했다. 군경에 의한 보복 학살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 고향인 연산 부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취재진은 박 씨로부터 '화학산 빨치산' 생활에 대한 상세한 얘기를 듣고자 했지만, 그는 "그만하세, 그때 생각만하면 지금도 괴롭단 말이시"라며 더 이상의 언급을 피했다. 그만큼 당시 기억이 그에게 상처가 됐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마주한 충격적인 공포의 잔상은 60년 세월이 더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영암 부호 정 씨 집안의 특별한 인연감시 대상 1호, 몰살 위기에서 살아남다

연보리는 군경에 의한 피해가 컸지만, 빨치산에 의한 피해도 곳곳에서 발생했다. 특히, 군이나 경찰 집안, 부호(富戶), 지식인들은 모두 잡아 총살시켰다. 앞서 소개한 토벌대 척후병 조경석 씨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냉천에 살던 조 씨는 동생이 경찰이란 이유로 일가가 빨치산에 끌려가 학살당했다. 어렵사리 동네를 빠져나간 그는 이후 군경의 토벌 작전이 있을 것이란 소문을 듣고 길안내를 자처하다 변을 당했다. 현재 냉천 마을에는 조 씨의 며느리가 터를 이루며 살고 있다.

 

▲ 군경 토벌 작전이 있기 전 연보 부락에 들어온 경찰이 마을 청년들을 감금했던 장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나 주민들은 이곳을 '앵게 앞'이라고 불렸다. 현재 가옥은 모두 허물어져 밭이 됐고, 그 옆으로 비닐하우스 한 동이 놓여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이밖에도 냉천에 거주하던 김윤채 씨 가족 역시 작은 아버지가 형사라는 이유로 윤채 씨와 그의 여동생 종숙 씨를 제외한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연산 부락에 살던 정복용(당시 32세·현재 작고) 씨 사연은 좀 더 특별하다. 그의 집안은 빨치산에 의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특별한 인연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정 씨는 미군정기 미군 부대(목포 주둔 제16사단)에서 동시통역관을 지냈을 만큼 지역 내 엘리트였다. 전쟁 전, 정 씨의 아버지는 고향으로 그를 불러왔고, 빨치산이 마을을 습격한 뒤에는 자연스레 '감시 대상 1호'가 됐다. 지방 좌익들은 인민 재판을 한다며 그의 가족 모두를 포승줄에 묶어 총살장으로 끌고 갔다. 그런데 우연찮게 이를 본 한 유격대장이 정 씨 가족 모두를 빼주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사연은 이러했다. 영암 부호로 손꼽혔던 정 씨 집안의 머슴을 지낸 한 청년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가게 됐다. 물론 추수 후 받기로 되어있던 세경은 포기했다. 하지만 워낙 성실했던 그에게 정 씨 아버지는 세경을 넉넉히 챙겨줬고, 훗날 꼭 다시 오라고 했다.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해남 지역 빨치산 부대의 유격대장이 됐고, 빨치산의 후퇴로 영암을 지나 금정까지 오면서 총살장으로 향하던 정 씨 일가와 마주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통해 가족 모두를 빼주었다. 그야말로 천우신조였다.


정 씨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빨치산에 이어 경찰들에게서도 목숨을 잃을 뻔 했다. 해병대의 토벌 작전이 있기 전 연산 부락을 찾은 경찰은 동네 청년 열댓 명을 잡아다 감금시켰다. 물론, 명분은 '빨갱이 색출'이었다.

 

불안한 정 씨는 잠을 청할 수 없었고, 경계가 느슨해진 새벽녘,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다음날 아침, 집에 감금된 청년들은 영부재(냉천과 연산 부락 사이에 있던 고개)에 끌려가 모두 사살됐다. 정 씨만이 다보 마을 인근 논에 쌓아둔 볏단 속에 몸을 숨긴 채 살아남았다.


연산 부락에서 만난 한 주민은 "낮에 경찰이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다짜고짜 끌고 갔다"며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 잡혀간 사람 중 안적양반(정 씨의 별칭)만 살고 모두 죽었다"며 당시 기억을 끄집어냈다.
 

▲ 냉천 마을과 연보 마을 중간에 위치한 '6.25 희생자 위령탑'. 위령탑 아래 누군가 따라놓고 간 막걸리와 잔이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의 넋을 달래는 듯하다. ⓒ커버리지(정찬대)


영암 보도연맹 사건빈 트럭만 남긴 채 쓸쓸한 주검이 되다

한국 전쟁 발발 전인 1949년 10월, 이승만 정권은 좌익 세력에 대한 통제와 회유 목적으로 국민보도연맹(보도연맹)을 조직한다. 그해 말까지 이 조직에 가입된 수는 무려 30만 명에 달했다. 

 


초기 보도연맹 가입자는 순수하게 좌익에서 전향한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조직 확대 과정에서 정부는 의무 가입 대상을 광범위하게 규정하였고, 말단 행정기관에까지 가입 인원을 할당하면서 본인 의사와 무관한 이들이 강제 가입된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이름 석 자만 쓰면 밀가루와 고무신 등을 준다는 말에 그냥 서명한 이도 적지 않았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진태(장동건)의 약혼녀로 등장한 영신(故 이은주)이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장면은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그런데 이것이 훗날 '살생부 명단'이 되어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보도연맹 사건이다.
 

전쟁 뒤 정부의 태도는 돌변했다. 좌익 전향자들이 행여나 인민군에 참여할 것을 우려해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 및 즉결 처분을 단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암군도 예외일 수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영암경찰서는 이 지역 보도연맹원을 영암읍 마을회관에 감금시켰다. 이후 7월15일과 22일 두 차례에 걸쳐 집단 사살했다. 1차는 10여 대 트럭에 실려 금정면 덤재 골짜기에서, 2차는 냉천 마을 인근 야산에서 희생됐다. 그렇게 죽어간 이가 200~300여명으로 추산된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주민은 "경찰이 후퇴하면서 수백 명의 보도연맹원을 죽이고 갔다"고 했다. 아울러 "냉천 마을 앞 여운재 넘어 약수터 근처에서만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고 증언했다. 그는 "사람을 가득 태운 수십 대의 트럭이 여운재를 넘어왔다가 영암으로 빠져나갈 때는 빈 트럭으로 갔다"며 "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가 7~8월로 한 여름이었는데,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며 "총살한 사람을 그냥 버리고 간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른다"고 치를 떨었다.


('전남 구례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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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남북 보도 훼방말고 떠나라"

 
민가협 "6.1510.4 깃발들고 남북합의의 길로 진군하자"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09/18 [09:34]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민가협 조순덕 상임의장이 국가보안법철폐와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해 23년째 목요집회를 갖고 있으나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살아 양심수를 양산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시민사회단체가 남북고위급 긴급접촉에서 합의한 8.25합의에 자주통일의 길이 있다며 이를 훼방하는 세력과 미국을 규탄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상임의장 조순덕, 이하 민가협)은 지난 17일 서울 종로 삼일문 앞에서 목요집회를 열고 남측 당국과 미국은 8.25합의에 대해 시비하거나 혼란을 조성하지 말고 성실히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민가협 조순덕 상임의장은 "민가협 집회가 시작 된지 23년째가 되었으나 자주. 민주. 통일. 민생. 인권을 위해 투쟁하던 양심수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며 "박근혜 정권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정권이라면 양심수들을 석방하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순덕 상임의장은 "박근혜 정부는 무엇이 무서운지 통합진보당을 해산한 것도 모자라 당원들을 구속했다."면서 "공안당국은 국가보안법을 모르는 것 같다. 내란음모가 없었다고 사법부가 판결해 놓고도 궁여지책으로 내란 선동이라며 감옥에 가두어 놓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성탄절을 기해 양심수를 전원 사면해 석방시켜야한다. 우리모두 양심수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자."고 호소했다. 

▲ 통일광장 임방규 선생은 미군이 70년 동안 우리민족에게 ㄱ친 인적 물적 피해는 계산할 수 조차 없다며 온 겨레에게 고통만을 안기는 미군들이 철수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통일광장 임방규 선생은 자신은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고 소개하고 "당시 우리민족 대다수는 일본 놈들을 일본인이라 부르지 않고 왜놈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일본놈들로 해방 되어 이제 살만하다 생각했는데 미국X들이 이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 와 70년 동안 우리민족에게 고통을 안기고 있다."고 고발했다.


임방규 선생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민족의 이익을 위한 생각을 갖지 못하고 있다"며 "자기생각대로 살지 못하고 남의 생각과 사상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것은 미국이 미군정을 실시하면서 미국의 사상을 세뇌시켰기 때문" 이라고 지적했다.


임 선생은 "미국이 우리 땅에 군홧발을 내민 뒤 우리민족이 입은 인적 물적 피해는 계산할 수 조차 없다"며 "미국은 지금도 한반도 긴장을 고조 시키고 전쟁위기를 만들어 우리민족이 한시도 발편한 잠을 잘 수 없다."고 단죄했다.


또한 "미국. 미군은 외세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미국에 의해 남북이 분단 되었다."며 "외세가 갈라 놓은 분단을 끝장 내기 위해서는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그게 정석이다 앞으로 온 겨레는 외세의 지배없이 우리민족끼리 화해하고 단합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어 "박근혜 정부는 일본에 대해 과거를 묻지 말고 미래를 보자고한다."면서 "그런데 왜 동족인 북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가. 이제 우리 모두 나서서 민족적 비극을 끝장 내기 위해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는 8.25 남북합의에 자주통일이 있다며 8.25정신을 훼손하는 미국과 남측 당국자, 국회등을 규탄했다.     © 이성원 기자



두 번째 발언자로 나선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는 8.25합의 중요성을 설명한 뒤 "그러나 정부 당국은 합의정신에 어긋나는 발언들을 이어 가고 있다."며 "미국은 합의정신을 존중한다고 해 놓고 한미합동 군사연습을 진행 하고 있으며 북을 선제타격 하려는 작전계획 5015를 발표하는가하면 북의 핵 승인자를 제거하는 참수작전 계획도 내 놓았다.


참수 작전은 최고존엄을 생명 처럼 여기는 북을 심각하게 자극하는 말로 전쟁으로 몰아가는 대결적 계획으로 민족의 안전을 위해서 작전계획 5015와 참수작전은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자는 "박근혜 대통령 역시 남북이 합의한 정신을 이행 하기만 하면 우리민족끼리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정신에 의한 대단합과 통일의 전환적 국면이 열릴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민족문제를 가지고 여러나라에 통일을 구걸하는지 이해가 안간다."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당국자들은 남북공동합의 정신을 훼손하지 말고 이행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한 남한 국회에서 여야가 북 인권법 일부에 합의한 사실을 전하면서 "박근혜 정부와 여.야 국회는 북인권법 제정에 앞서  40여분마다 강간을 당하고 38분마다 자살하며, 58만여명의 노인들이 밥을 굶고 불타죽는 현실이 펼쳐지고, 자주와 민주, 통일, 민생, 인권을 말한다고 하여 감옥에 끌려가는 남한 인권문제 해결에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민족의 미래는 7.14 공동성명과 6.15 10.4 깃발을 높이들고 남북합의 정신의 길로 전진하는 것"이라며 "북녘 동포들은 백두산에서 평양을 거쳐 휴전선을 넘어 제주도 한라산으로, 남녘 동포들은 제주도 한라산을 출발하여 서을을 지나 분단 장벽을 넘어 백두산으로 달려가 민족의 염원인 조국통일 깃발을 꽂아야 한다. 우리모두 자주통일을 위한 길에 모두 떨쳐 나서자"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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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방학, 감귤방학… 제주만의 독특한 ‘이색방학’

 
 
제주의 벌초 문화에 숨겨져 있는 우리 현대사의 아픔
 
임병도 | 2015-09-18 08:25:5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추석이 가까워져 오면서 주말이면 전국적으로 벌초를하러 오가는 차량으로 고속도로 곳곳이 정체됩니다. 제주에서도 매년 음력 8월 초하루가 되면 오름 주변이나 산간 도로가 벌초 차량으로 뒤덮입니다. 제주에서는 보통 음력 8월 이전이나 8월 1일에 벌초를 합니다.

제주에서는 일가가 모여 조상 묘소를 벌초하는 것을 “소분(掃墳)한다”, “모듬벌초한다”, “모듬소분”한다고 합니다. 제주에서는 ‘제사는 지내지 않아도 남이 모르지만, 벌초는 안 하면 금방 남의 눈에 드러난다’, ‘추석 전에 벌초 안 하면 조상이 덤불 쓰고 명절 먹으러 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벌초하지 않는 일을 가장 큰 불효로 보기도 합니다.

벌초하는 날이면 회사에서는 휴가를 내줬고, 공무원들도 연가를 받았습니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도 명절에는 오지 않아도 이날만큼은 비행기를 타고 꼭 와야 했습니다. 만약 오지 않으면 양말이나 장갑, 내의 등을 돌리기도 했지만, 요새는 벌금처럼 돈으로 냅니다.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벌초에 애착을 가진 제주에서는 ‘벌초방학’이 별도로 있었습니다. 2003년 이전까지는 제주 도내 초중고등학교 100%가 음력 8월 1일에 ‘벌초방학’,‘성묘방학’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풀을 베는 어른들 틈에서 풀을 나르기도 했고, 점심이나 간식 먹는 재미에 푹 빠져 소풍처럼 느끼기도 했습니다.
 
제주에는 ‘벌초방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리 수확 철에는 ‘보리방학’을 감귤 수확 시기에는 ‘감귤방학’을 했습니다. 수확철이 되면 한꺼번에 인력이 필요했지만, 제주는 섬이라 금방 인력을 구하기 어려워 아이들도 일손을 거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3년이 지나면서 벌초방학이나 보리방학, 감귤방학을 하는 곳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벌초를 꼭 음력 8월 1일에 하기보다 주말에 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점점 보리농사나 감귤농사를 짓지 않는 곳이 많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 제주 4.3평화공원에 있는 민간인희생자 명단 ⓒ겨레하나

제주에서 유독 문중이나 일가의 벌초를 함께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제주 4.3사건으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기 때문입니다. 제주에서는 가족마다 4.3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희생자가 많았습니다. 제주 4.3사건 피해자 중에는 아이는 물론이고 온 가족이 모두 학살당해 후손이 일가친척밖에 남지 않은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문중 사람들이 돌봐주지 않으면 벌초조차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제주에서는 꼭 모듬벌초가 끝나야 직계가족의 개인벌초를 했습니다. 주변에 ‘골충’이라는 임자 없는 묘소가 있으면 같이 해주는 미덕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마을과 가족에게 대물림되고 있는 모습이 제주의 벌초 문화에 숨겨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초중고의 벌초방학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대학교에는 벌초방학이 남아 있습니다. 총학생회의 요청에 따라 하는 곳도 있고 안 하는 곳도 있지만, 대학생들이 벌초방학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 벌초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지로 간 사람도 있고, 나이가 많아 벌초를 하기 힘든 노인세대가 점점 늘어나면서 대학생까지는 벌초방학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제주에도 이제 젊은 청년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육지에서 게스트하우스나 카페, 식당 등을 하려고 오는 사람은 늘어났지만, 정작 제주의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거나 낮은 임금 때문에 오히려 육지로 떠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땅을 팔아 장사를 한다고 성공할 보장도 없거니와, 오랜 세월 농사짓는 부모님의 고생을 옆에서 본 자식들 입장에서는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입니다.

제주에 산 지 이제 6년째가 되어갑니다. 제주의 독특한 문화를 그냥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문화가 생겼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해가 될 뿐 아니라, 제주의 아픈 역사에 분노가 치솟을 때가 많습니다.

척박한 제주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를 듣노라면 어쩌면 아이엠피터는 부모님 덕분에 평탄한 인생을 살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부모님을 떠나 살다 보니, 얼마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았는지 깨닫습니다.

이번 추석에 육지 부모님을 뵈러 가느냐를 놓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8월에도 육지에 갔다왔고, 온가족이 차를 끌고 육지에 가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벌초방학’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으면서 참 못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자식들 손과 입에 뭐라도 챙겨주려고 하는 마음, 그런 부모님의 사랑을 잊고 살았기에 죄송스러웠습니다. 이번 추석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꼭 부모님께 가야겠습니다.


[진실의길. 기고 글&기사제보 dolce42@naver.com]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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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선친 “자식이 야스쿠니 신사에 모시어질 영광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9/18 10:22
  • 수정일
    2015/09/18 10:2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등록 :2015-09-17 16:09수정 :2015-09-17 17:59

 

1943년 9월8일 ‘아사이신문’ 4면에 징병제를 찬양하고 조선인의 참여를 선동하는 광고가 김용주의 이름으로 실렸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43년 9월8일 ‘아사이신문’ 4면에 징병제를 찬양하고 조선인의 참여를 선동하는 광고가 김용주의 이름으로 실렸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민족문제연구소, 김무성 대표 선친 김용주씨 친일 행적 사료 공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
진정한 정신적 내선 일체화를 꾀하여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

일본 신문에 ‘징병제 찬양·군용기 헌납 독려 광고’ 자신의 이름으로 실어
최대 친일단체 ‘임전보국단’ 발기인 참여 ‘황군장병에 감사의 전보’ 제안

 

민족문제연구소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선친 김용주씨의 친일 행적 논란과 관련해 추가 사료를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7일 서울 동대문구의 민족문제연구소 5층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친일파냐, 애국자냐는 논쟁이 있었던 김용주에 대해 기초 사료로 검증한 결과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기본적으로 연좌제에 반대하지만 김무성 대표 쪽에서 부친의 친일행적을 애국으로 미화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평전을 발간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고 있어 검증에 나섰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겨레>를 통해 김 대표 부친의 친일 행적 의혹이 제기된 뒤 일각에서는 ‘친일파가 아니라 오히려 민족교육에 헌신한 애국자였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이 계속됐고, 지난달 15일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이 출간되기도 했다. 이 책은 ‘극일을 이겨낸 망국의 한’이란 부제를 달고 김용주를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로 묘사했다.(▶ 바로가기 : ‘친일’ 김무성 아버지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날 공개한 자료들에는 김용주의 친일 행적이 여럿 나온다. 연구소가 정리한 김용주의 대표적인 친일 행적으로는 △식민통치기구인 도회의 의원으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 △친일단체 간부로서 침략전쟁에 협력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고 전쟁동원을 선동한 점 등이다. 특히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국방헌납운동의 하나인 애국기(국방헌금으로 생산한 군용 비행기) 헌납 운동을 전국에서 가장 활발히 했다고 민족문제연구는 밝혔다.(▶ 바로가기 : [전문] 김용주 ‘친일 발언’)

 

 

당시에는 영일군 소속이었던 포항 출신의 재력가 김용주는 1937년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경북 도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도회는 오늘날의 지방의회와 달리 지방자치기구로서의 기능과 권한은 없었으며,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조적인 인물들로 구성된 식민통치 기구였다”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당시 <매일신보> 기사 등을 보면 김용주는 도회 의원으로서 조선인에 대한 강제노역을 정당화한 국민개로운동을 독려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정황이 나온다.

 

1944년 7월9일 ‘아사이신문’ 4면에는 애국기 헌납운동을 독려하는 김용주 이름의 광고가 실렸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44년 7월9일 ‘아사이신문’ 4면에는 애국기 헌납운동을 독려하는 김용주 이름의 광고가 실렸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또 1941년에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대의 민간 친일단체인 임전보국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상임이사에 선정돼 결성식에서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긴급 제안하는 등 민·관을 가리지 않고 경북 지역에서 매우 영향력있는 친일인사로 전방위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또 김용주가 징병제 실시와 애국기 헌납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1943년 <아사히신문>(9월8일)에는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라는 징병제에 찬성하는 광고가 김용주의 이름으로 실렸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김용주는 1943년 10월 열린 전선공직자대회에서는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으러 모시어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김용주는 경북지역에서 애국기 헌납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밝혔다. 애국기란 기업이나 단체, 개인이 낸 국방헌금으로 생산한 군용 비행기다.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대대적으로 전개된 국방헌납운동의 하나다. 김용주는 <조일신문> 등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애국기 헌납운동을 독려하는 기명 광고를 싣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김용주가 활동한 영일군은 모두 14기의 애국기를 헌납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애국기를 헌납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에 대한 검증 결과, 기초적인 사실 관계도 틀린 부분이 많고, 객관적 자료로 확인이 불가능한 근거없는 이야기나 과장된 이야기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또 불리한 친일 행적은 감추고, 일부 친일 행적은 마치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처럼 미화 왜곡하고 있다”며 오류가 많아 사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평전이라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세열 사무총장은 “김용주에 대해 친일파냐, 애국자냐란 논란이 있었지만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친일인데 어떤 친일이냐가 문제인데 검증 결과 경북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친일인사로서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해야 한다”고 했다.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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