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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욕에 설 자리 잃은 '무시무시한' 광주 이야기

 

[주장] <넘어 넘어> <광주일지>를 두고 벌어진 민망한 일들

15.05.22 21:42l최종 업데이트 15.05.22 21:42l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인 현장 보고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영문판 재발간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민주화, 인권운동사에 남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중요 기록물이 절판된 지 10년이나 지났는데도 재발간 되지 못하고 있다. 영문판의 번역편집자인 설갑수씨가 영문판 재발간과 관련한 소회를 보내왔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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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일지'(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 설갑수 옮김, 1999)'.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자신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책을 한 번은 읽는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10일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아래 <넘어 넘어>, 1985)가 나에게는 그런 책이었다. 자신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책을 다른 나라말로 옮길 기회가 온다면, 개인에게는 큰 기쁨이리라. 나는 그 기쁨을 1999년에 누렸다. 

그해 5월, 나와 내 친구 닉 마매타스(Nick Mamatas)는 함께 <넘어 넘어>를 번역해 '광주일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아래 <광주일지>)라는 제목의 책을 세상에 내놨다. 이 책은 당시 미국 UCLA대학에서 아시아태평양 기록물 시리즈(UCLA Asian Pacific Monograph Series)로 출판되었다.

<넘어 넘어>는 한국에서 출간되자마자 금서가 됐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당시 저자 명의를 빌려준 소설가 황석영부터 책을 출간한 풀빛출판사 사장 나병식까지 모두 체포해 버릴 정도로 전두환 정권이 무서워했던 책. 그러면서, 전두환 자신도 읽어봤다는 책. 그 후 합법 비합법으로 1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책이 <넘어 넘어>다. 

올해로 <넘어 넘어> 출간 30주년을 맞았다. 돌이켜보면, <넘어 넘어>가 금서이던 1980년대, 그리고 베스트셀러였던 1990년대가 이 책의 황금기였다. 반면 최근 <넘어 넘어>와 <광주일지>를 두고 아쉽고 민망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민주주의 슬픈 자화상을 보는 듯했다. 나는 이제 더 늦기 전에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물의 실명을 쓸 것이고, 존칭은 생략하겠다(관련기사 : "밖에선 <죽음을 넘어~> 영문본 절판...").

커밍스, 촘스키, 샤록을 흔들어버린 '무시무시한 이야기'

<광주일지>를 번역하게 된 개인사부터 이야기하는 게 순서일 듯하다. 내가 <넘어 넘어>를 처음 접한 것은 책이 나온 1985년 5월,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같은 반 친구였던 최경송이 목사였던 부모님이 몰래 돌려보던 책을 자기도 읽었다며 무시무시한 책에 대해 얘기해줬다. 그 무시무시한 책이 <넘어 넘어>였다. 

5월 광주항쟁에 대해 풍문 정도를 들었던 내가 던진 첫 질문은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많이 죽였겠네"였다. 그런데 경송이의 대답은 당시 나에게 충격이었다. "아니, 대학생들은 다 도망가고, 노동자들만 죽었어." 몇 주 후, 우연히 책을 구해 볼 수 있었고, 앞에서 말했듯이 <넘어 넘어>는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물론, 그 '뒤흔들린 경험'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넘어 넘어>가 기록한, "군인들이 나라 지키라고 준 총으로 제 나라 백성 쏴 죽이고, 똑똑하고 정의롭게 보이던 대학생들은 도망가고 민중이 최후에 남았던" 광주항쟁의 진실은 한국의 한 세대를 뒤흔들어 버렸다. 내 친구 최경송은 지금도 경기도 과천에서 지역운동을 하고 있다.

이러저러해서 대학 졸업 후, 미국에 공부하러 왔다. 그리고 서점에 갈 때마다, 아쉬움이 생겼다. 1990년대 초, 중국의 천안문 항쟁 직후라서, 서점에는 천안문 학살에 대한 책이 넘쳐나고 있었다. 실록부터, 분석서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아시아에서는 적어도, 광주항쟁이 현대 민중항쟁의 원조 격인데, 천안문 항쟁처럼 국제 사회에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외면받는 것이 안타까웠다. 1995년 전두환과 노태우가 내란과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어 해외 언론에 한국 민주화와 광주항쟁이 재조명을 잠시 받을 때, 나는 <넘어 넘어>를 번역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또한, 1995년 5월 당시 진보월간지 <말>이 <넘어 넘어>를 실제 집필한 사람은 황석영이 아니라 이재의(당시 광남일보 논설위원)였다는 기사를 보도했다(이재의가 주도적 역할은 한 것은 사실이나, <넘어 넘어>를 그가 단독 집필한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아래에 다루겠다). 그해 12월, 당시 <말>의 미국 통신원이었던 김민웅 목사(현 경희대 휴마니타스 교수)를 통해 이재의와 연락이 닿았고, 풀빛출판사와 영어판 판권 계약을 했다.

<넘어 넘어>는 번역하기에 녹록한 텍스트가 결코 아니었다. 운동권 글투답게, 대부분 문장에서 주어는 생략되었고, 수동태가 태반에, 과장된 어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번역 과정에서 이러한 생생한 분위기를 영어권 독자들이 이해하는 한도 안에서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이 복잡한 과정에서 탁월한 편집자 마매타스의 역할은 매우 중대했다. 작업 초기에는 번역 문장 하나하나를 두고 서로 다퉜다. 고성과 욕설이 오가기를 몇 차례, 그러면서 몇 가지 원칙이 정해졌고, 작업은 신속히 진행됐다. 이 과정 탓인지, 마매타스는 그 후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편집자·소설가로 진로를 바꾸었고, 현재 버클리에 있는 출판사의 책임 편집자다.

번역 작업의 속도가 붙었으나, 일의 심적 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마도 <넘어 넘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낱말은 '구타'일 것이다. 같은 낱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은 영어 어법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군인이 민간인을 구타했다"라는 말을 수없이 다른 낱말로 옮겨 써야 했다. 통닭구이, 원산폭격 등 광주 시위대가 거리에서 당한 고문도 옮기기 힘든 부분이었다. 직역 대신 의역으로 고문을 묘사하려니, 희생자가 직접 겪은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몸으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가슴 벅찬 순간이 더 많았다. 나는 번역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당시 새로 나온 광주항쟁 관련 자료를 통해 사실 확인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광주일지>는 주석도 많고, 이재의의 동의로 본문을 다시 쓴 부분도 있다. 그런 탓에 <넘어 넘어>의 80%가 <광주일지>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주석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5시경 시민군이 전남대 병원 옥상에 설치한 2대의 LMG 기관총에 대한 것이다. 그날, 계엄군 발포 직후, 시민들은 무장하기 시작했다. 12층 병원 옥상에 설치한 2대의 기관총은 계엄군이 임시 사령부로 사용했던 4층 도청건물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였다. 항쟁 나흘 만에, 시민들이 처음으로 확보한 전술적 고지였던 셈이었다. <넘어 넘어>는 시민군이 도청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고, 그것이 계엄군의 후퇴를 재촉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통해 그것은 잘못된 기술이었음이 드러났다.

시민군은 기관총을 쏘지 않았다. 그것은 위협용이었다. 나는 기관총을 쏘지 않아서 광주가 더 위대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기관총을 쐈다면, 계엄군도 피해를 보았겠지만, 도청 주변의 시민들도 총탄을 피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터였다. 항쟁 첫 나흘 동안, 공격하는 계엄군과 방어하는 시민의 폭력성은 계속 격화되고 있었다. 쌍방은 모두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유리한 상황이 도래했음에도, 상황을 더는 악화시키지 않은 것은 시민들이었다. 

애초 폭력의 피해자였던 이들이 유리한 상황에서 스스로 사용할 수 있었던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이 무기를 든 이유는, 그러지 않고서는 다른 대안이 없는 정당방어였다는 사실을 발포하지 않은 기관총은 증언하고 있었다.

번역이 마무리된 1996년, 미국과 영국의 여러 출판사들에 원고를 보내 출판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첫 반응은 한결같았다. 도대체 이런 사건이 언제 있었으며, 이 학살이 사실이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인 시카고대학 교수 브루스 커밍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넘어 넘어>가 사실에 대한 기록임을 한국학의 대표적 교수로서 보증하는 편지를 써서 출판사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그때까지, 커밍스와 나의 관계는 그가 연사로 나온 콘퍼런스의 청중으로서 악수 한 번 한 게 전부였다. 커밍스가 나를 기억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커밍스는 출판사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줬고, 책의 편집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 조언 중에 하나가 광주항쟁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서문을 넣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왕이면 그 서문을 커밍스가 썼으면 좋겠다고 민망하게 매달렸다. 커밍스는 그 뻔뻔한 청을 흔쾌히 받아줬다.

그뿐만 아니었다. 커밍스는 MIT(매사추세츠 공과 대학)의 놈 촘스키(Noam Chomsky)를 소개해 줬다. 원고를 읽은 촘스키는 몇 차례 미국 출판사들에 <광주일지> 출판 필요성을 설명하는 편지를 써줬다. 또한 <광주일지>에 한국의 독재 정권을 계속 지원한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글을 넣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도 해줬다.

촘스키의 충고를 따르는 일은 뜻밖에 쉽게 풀렸다. 같은 해, 저널 오브 커머스(Journal of Commerce) 탐사기자인 팀 샤록(Tim Shorock)이 광주항쟁 당시 미국 국무부와 주한 대사관 사이에 오간 전문, 소위 체로키 파일(Cherokee files)을 정보공개법으로 입수, 폭로한 것이다. 샤록에게 <광주일지> 원고를 보낸 며칠 후, 그의 신문사로 전화했다. 그리고 체로키 파일에 기반을 둔 원고를 부탁했다. 샤록은 <광주일지> 원고를 읽어보고 결정하겠노라는 밋밋한 답을 줬다.

그가 원고를 다 읽을 즈음 다시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샤록의 목소리가 의외로 흥분되어있었다. 답변은 간단했다. "<광주일지> 원고 읽으며, 많이 울었다. 특히, 접대부들이 '부상자를 위한' 헌혈을 거부당하자 통곡하는 장면에서 많이 울었다. 체로키 파일에 대한 원고를 써주겠다." 솜씨 좋은 저널리스트답게, 샤록은 체로키 파일을 항쟁 10일 기간으로 재구성한 값진 원고를 써줬다.

그렇게 <광주일지>가 1999년에 세상에 나왔다.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넘어 넘어>가 한국의 많은 젊은이를 흔들어버린 것처럼, 마매타스, 커밍스, 촘스키, 그리고 샤록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이 제기한 인권, 민주,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에 이들이 감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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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진상을 처음으로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록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증보판이 내년 5월 간행된다. 지난 1985년 5월 초판 간행 당시 책의 표지와 수첩의 모습 (팜플릿 캡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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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집필자 못 정해 <넘어 넘어> 증보판 무산... 사적 공명심의 피해자는?

이제는 다소 어렵고, 다소 민망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지난해 7월, <넘어 넘어> 출간 당시, 전청연(광주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 회장이었던 정상용과 이재의의 주도로 <넘어 넘어> 증보판 간행위가 결성됐다. 책 발행 35주년인 올해에 증보판을 내기로 하는 게 목적이었다(관련기사 : "5·18 폄하 예상은 했지만 박근혜정부 들어 극심").

알려진 대로, 1985년 당시 <넘어 넘어>는 황석영 명의로 나왔다. 유명인사 이름으로 나와야 집필진과 <넘어 넘어> 프로젝트를 추진한 전청연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게 풀빛출판사 사장 나병식의 생각이었다. 이재의는 <광주일지> 서문에서 이 부분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출판사는 여러 유명인사에게 이름을 빌려줄 것을 간청했으나,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 사람은 황석영 혼자라고 했다. 황석영은 육필증거를 만들기 위해, 타자본 <넘어 넘어>를 원고지에 베껴 썼다.

이재의의 서문에 따르면, <넘어 넘어> 집필은 조양훈, 최동술과 같이한 공동작업이었다. 자료수집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돌이켜보면, 영어판 <광주 일지>에 적어도 그 두 사람을 공동저자로 넣는 게 옳았다. 저자를 황석영에서 이재의로 바꾼 이유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복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넘어 넘어>의 많은 부분은 소준섭(현 국회도서관 해외자료조사관)이 1981년 수배 중 광주에서 쓰고, 이듬해에 지하 출간한 <광주백서>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한다. 사실상 <넘어 넘어>의 뼈대가 <광주백서>인 것이다. 그러나 1985년 <넘어 넘어> 집필과 출판에 관여했던 사람 누구도 이런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소준섭은 <넘어 넘어> 증보판 간행위 참가를 고사했다. 

결국, 30주년 증보판은 나오지 못했다. 대표필자를 정하지 못해, 증보판 발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게 광주시 인권 옴부즈맨이자 간행위 실무자인 안종철의 전언이다. 전두환의 엄혹한 독재 속에서도 나왔던 책이, 30년 지난 공적 다툼에 30살 생일상도 못 차려 먹고 있다. 알려지는 게 두려워 유명인사 이름을 빌려 간신히 나온 책이 뒤늦게 이름 내고 싶은 사람들 다툼에 복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심정도 이해한다. 공이 있으면 상도 받고, 칭찬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책이 복간된 후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서로 공명심에 치우치다 보니, 소준섭 같은 이의 공헌을 인정할 여유도 이유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내 언사가 지나친가? 나도 이 처참한 상황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사적 공명심의 피해는 <광주일지>도 입었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이재의에게 다음을 수차례 간곡히 부탁했다. 책은 비영리 기관에서 나왔고, 그 누구도 경제적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다만 책의 영속성을 위해, 광주의 적당한 기관이 저작권 계약을 통해 <광주일지>를 발행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몇 년 후에 내가 들은 풍문은 광주에서 <광주일지> 해적판을 찍는다는 것이었다. 그 풍문이 사실임을 2005년 한국 방문 시, 광주시 관계자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필요해서 몇 부 찍어서 해외에도 보냈다"고 했다. 

큰 충격이었다. 그 광주시 관계자의 말은 결국 제 공명심에 책 좀 찍어 여기저기 뿌렸다는 말 이상은 아니었다. 사실, 비영리 기관과 정식계약을 맺고 책을 발행하는 것과 해적판 제작 사이의 생산비 차이가 얼마나 나겠는가? 자신의 명예와 광주의 전통을 갉아먹는 광주시 관계자의 단견에 두고두고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미국에서 주로 대학교재로 매년 200부 이상 팔리던 <광주일지>는 2006년 UCLA의 아시아태평양 기록물 시리즈가 중단됨에 따라 절판됐다. 그 후, 나는 미국에서 새로운 출판사를 구해보려고 몇 번 마음을 먹었으나, 그뿐이었다. 한마디로 흥도 안 나고, 환멸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광주항쟁에 감화를 받아서 번역과 기고에 참여한 3명의 미국인 앞에 면이 서지 않았다. 물론 우리 4명은 <광주일지> 발간 전후로 좋은 친구가 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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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 번역서인 <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By Lee Jai-eui/ Translated by Kap Su Seol and Nick Mamatas, 1999 UCLA Asian Pacific Monograph Series)의 저작권자인 설갑수(46)씨. 그는 현재 미국 뉴욕에 거주 중이며 MSCI(Morgan Stanley Capital International) ESG Research 애널리스트로 근무하고 있다.
ⓒ 설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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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도서관 소장 5·18 기록물 영문판도 해적판... 기가 찼다"

최근 박원석 정의당 국회의원이 <광주일지> 재발간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지난 5월 13일, 뉴욕에 잠시 들린, 박 의원의 비서관 조태근과 재발간 문제를 의논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조 비서관이 국회도서관에서 대출해 가져온 <광주일지>도 해적판이었다. 일단 떠돌기 시작하면 통제 불능이란 게 해적판이라지만, 다시 한 번 기가 찼다.

박원석 의원은 <광주일지> 재발간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이라도 할 기세다. 다시 한 번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책의 영속성을 고려한다면, 그 방법이 최선은 아닌 듯하다. <넘어 넘어>이건 <광주일지>건, 그 주인은 광주이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 민주주의이다. 그래서 나는 광주의 책임 있는 공적 기관이 이 두 기록물을 맡아, 영속성을 보장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관련기사 : 광주의 진실, 미국인들의 심장에 새길 수 있을까?)

자랑스러운 역사기록물을 개인들이 맡고 있으니, 잡음만 많고, 보존도 안 된다. 물론 책임 있는 기관이 나서준다면, 나를 포함한 <광주일지> 집필진 4명은 그 보전의 당사자이자, 시민의 한 사람으로 힘을 보탤 것이다.

흔히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훼손됐다고 말한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수구 정권이 민주주의를 훼손하기 전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방치하지는 않았을까? <넘어 넘어>와 <광주일지>의 역사를 보고 있노라면, 80년 광주라는 집단기억을 우리 스스로가 지우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박근혜 정권이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사실상 금지곡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의 가녀린 민주주의 전통 앞에 사랑은 저버리고, 명예와 이름만 찾는 우리네 마음속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미 오래 전에 금지곡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기만 한 광주항쟁 35주년 주간이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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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가 장악한 고대도시 팔미라에 대해 당신이 몰랐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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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MYRA

고대 사막 유적이 있는 도시 팔미라가 IS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라 사라즈 박사는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역사를 지우고 유물을 팔아 치우려는 강경한 전투원들이 세계 문화 유산을 파괴할까봐 운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팔미라의 높은 크림빛 기둥에서 아주 가까운, 악몽의 장소인 타드모르 군사 교도소를 향했다.

사라즈와 같은 많은 시리아 인들에게 있어 팔미라(아랍어로는 타드모르라고 한다)는 많은 사랑을 받는 역사적 유명 장소일 뿐 아니라 아사드 정권 하에서 수십 년간 지속된 압제의 가장 큰 상징이기도 하다. IS가 시리아 정권을 몰아내고 팔미라를 점령할 때 국제적 관심은 팔미라의 고대 역사에 쏠렸지만, 사라즈는 현대에 팔미라에서 자행된 잔인함이 간과되었다고 말한다.

“타드모르는 끊임없는 고문과 공포다. 그곳은 죽음의 수용소다.” 현재 시카고에서 살며 미생물학을 가르치는 사라즈는 스카이프를 통해 월드포스트에 이야기했다.

시리아의 전 대통령 하페즈 아사드 시절,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타드모르 군사 교도소는 즉결 처형과 대학살로 악명 높았다. 그의 아들 바샤르 아사드가 집권하고 난 뒤 2001년에 – 최소한 서류상으로는 – 이곳은 문을 닫았다. 정말로 닫았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2011년에 혁명이 일어나고 뒤이어 전쟁이 터진 뒤, 시리아 인들은 타드모르가 다시 열려 반체제 인사들을 수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 아사드 대통령 시절, 휴먼라이츠워치(HRW)가 1996년에 작성한 보고서에서는 1980년에 단 하루에 최소 500명 이상의 재소자가 학살 당한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며 이곳을 ‘죽음과 광기의 왕국’이라고 불렀다. 2001년의 암네스티 보고서에서는 재소자들이 ‘외부 세상과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고 하며, 이 교도소가 ‘재소자들에게 최대한의 고통, 모욕, 공포를 줄 수 있도록’ 설계된 것 같다고 했다.

고문 기술로는 걸어놓은 타이어에 죄수 매달기, 막대기와 케이블로 전신 구타하기, 억지로 척추를휘게 만드는 금속 장치인 ‘독일 의자’에 묶어 놓기 등이 있었다.

시리아의 여러 감옥에서 12년을 보내며 그 중 9년을 타드모르에서 지낸 사라즈는 타드모르를 ‘자유롭게 했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자신이 혐오하는 폭력적 극단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다.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포스트에 따르면 IS 전투원들이 타드모르 재소자들을 풀어 주었다는 말도 있지만, 월드포스트가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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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0일에 IS 웹사이트에 올라온 사진. IS와 시리아 정부군이 홈스와 팔미라를 잇는 길에서 전투를 벌이며 검은 연기가 치솟는 모습. ⓒAP

“이건 자유 세계의 폐단이다. 만약 다에쉬가 타드모르를 자유롭게 했다면, 자유 세계는 뭘 하고 있는 건가?” 다에쉬는 IS의 아랍어 별명이다.

국제인권감시기구 중동-북아프리카 부회장인 나딤 호우리 역시 시리아의 억압의 상징인 타드모르의 문을 연 것이 IS라는 아이러니를 느끼고 있다.

“잔혹한 지배를 벗어나 다른 잔혹한 지배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가 전화로 말했다.

U.N. 인권고등판무관 대변인인 라비나 샴다사니는 목요일에 제네바에서 시리아 정권은 IS가 몰려오는데도 정부 세력이 팔미라를 떠날 수 있게 될 때까지 민간인들이 팔미라를 떠나지 못하게 막았다고 말했다. IS가 팔미라에서 저지를 범죄에 대한 깊은 우려도 표명했다.

“IS가 팔미라에서 집집마다 뒤지며 정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주에 팔미라에서 최소 14명의 민간인이 처형 당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로이터에 한 말이다.

팔미라를 점령한 IS는 민간인 수만 명을 총부리 앞에 두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시리아 곳곳의활동가들을 통해 전쟁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영국의 반전 그룹 시리아 인권 감시 단체에 따르면, 목요일 기준으로 그들은 시리아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다. 5월 17일에 이라크의 요충지 라마디를 장악한 뒤 불과 사흘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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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0일 IS 웹사이트에 올라온 사진. IS 대원들이 홈스와 팔미라를 잇는 길에서 시리아 정부군과 전투 중에 몸을 숨기고 있다. ⓒAP

매체에서는 2,000년 된 유적 이야기를 호들갑스럽게 늘어놓지만, 사라즈는 그곳에 얽힌 자신의 어두운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지금도 고문 받던 친구들의 비명과 벽의 핏자국을 기억한다. 그는 감옥에 갇혀 낭비한 그의젊은 시절의 여러 해, 마음을 다 앗아가는 공포와 참담한 권태를 잊을 수가 없다.

21세의 대학생이던 사라즈는 1984년에 시리아 정보국에 끌려가 12년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그는 자신이 수감된 이유를 결코 알아내지 못했다. 하페즈 아사드가 정치적 목적으로 정치범 1,000명 이상을 석방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한 성인 남성이었다. 신분증도, 직업도, 인생도 없었다.

그의 가족들은 미국으로 옮긴 뒤였다. 그는 다행히 미국 비자를 얻을 수 있었다. 12년 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던 그들은 시카고의 오헤어 공항에서 다시 만났다. 사라즈의 가족 역시 사라즈처럼 훨씬 늙어 있었고, 그는 가족들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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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즈 박사가 시리아 정보국에 끌려가 악명 높은 타드모르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해의 사진

“눈물이 고인 걸 보고 내 가족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에겐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다.

사라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메꾸려고 하바드와 노스웨스턴 등에서 공부했지만, 타드모르는 지금도 그를 괴롭힌다. 그는 시리아 정권이 죄값을 치를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이제 50대가 되었지만 타드모르 교도소의 마당,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또 한 차례의 고문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던 기억이 지금도 문득 떠오른다. 그때 생긴 흉터가 지금도 그의 몸에 남아있다.

그는 아사드 정권이 민간인들에게 통폭탄(barrel bomb)을 투하하는데,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은 IS 거점만 공격한다며 바샤르 아사드를 공격하지 않는 서방세계를 비난했다.

“내 생각엔 그건 위선이다. 시리아 인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palmyra

2014년 3월 14일에 찍은 사진. 다마스커스에서 북동쪽으로 215km 떨어진 고대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 전경. 시리아의 전설적인 그레코-로만 오아시스 유적 팔미라에 마지막으로 여행자가 찾아온 것은 시위가 시작된 지 6개월 후인 2011년 9월이었다. 가장 최근에 찾아온 것은 폭력과 약탈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여러 시리아 인들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세계 문화 유산이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가?

“유적은 중요하다. 유적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IS가 장악했다고 해서 타드모르에 관심을 갖지만, 홈스나 다마스커스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건 정말 한심한 것이다.”

소셜 미디어의 글과 사진들이 전부 사실이면 어쩌나, 시리아 정권 세력이 퇴각한 뒤에도 아직 타드모르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 사라즈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남아 있는 재소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데일리 비스트’에서 팔미라의 반 아사드 조정 위원회 회원이라고 설명한 칼레드 옴란은 정권 측이 타드모르의 재소자들을 사용해 팔미라를 요새화해서 IS를 막으려 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는 ‘데일리 비스트’에 “재소자들을 태운 버스 10대 정도가 전선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목요일에는 트위터에 확인되지 않은 글이 돌았다. IS 대원들이 레바논 인 이십여 명을 포함한 타드모르의 재소자들을 석방했다는 내용이었다. 월드포스트가 직접 사실 확인을 할 수는 없었다. 트위터 사용자들은 타드모르에 정말 아직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재소자들이 있었다면 IS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 있을 것이라 우려했다.

베이루트에 있는 호우리는 타드모르 등의 군사 교도소에서 연락이 두절된 가족들의 정보를 수십 년 째 기다리는 레바논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때였다면 예전에 억류되었던 사람들의 가족들이 교도소로 달려갔겠지만, 지금은 어떤 일이 생길지 불확실하다. 사라진 사람들의 파일이 있었다는 증거물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집단 무덤과 재소자 파일 정보는?”

사라즈는 타드모르 밖의 세상과는 단절된 채 아직 남아 있는 재소자들이 있다면 IS에 합류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내가 석방되었을 때, 난 소련이 붕괴했다는 것도 몰랐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다른 세상에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풀어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환영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서방에 맞서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US 월드포스트(The World Post)의 중동 전문기자 소피아 존스가 쓴 'Palmyra, ISIS' Latest Conquest, Has Dark History Of State Torture And Abuse'(영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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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챙이 낳는 개구리, 구르는 사막 거미…10대 신종

 
조홍섭 2015. 05. 21
조회수 11409 추천수 0
 

국제생물종탐사연구소, 지난해 발견 1만8천종 중 특이한 10종 발표

추정 생물종 1200만종 중 200만종만 밝혀져, 신비와 가치 관심 촉구

 

지난해 학계에 새로 보고된 1만 8000종의 생물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10가지가 선정됐다.  미국 뉴욕주립대 환경 임학 대학(ESF)의 국제 생물종 탐사 연구소(IISE)는 21일 ‘2015 올해의 10대 신종’을 발표하면서 발견되기는 것보다 빠르게 사라지는 생물종의 신비와 가치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이 연구소 퀜틴 박사는 “전체 생물종으로 추정되는 1200만종 가운데 현재까지 200만종 정도만이 이름을 얻었을 뿐이다. 나머지 1000만종은 우리의 기원을 밝히고 자연을 보전하면서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할 귀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올해 선정된 10대 신종의 일부이다. 전체 목록은 이 연구소 누리집에서 볼 수 있다. 

 

■ 올챙이 낳는 개구리

 

1. Limnonectes larvaepartus. Male (left) and female (right).jpg» 체내수정으로 난관속에서 올챙이로 기르는 개구리(왼쪽이 수컷)와 난관 속의 올챙이. 사진=Jimmy A. McGuire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에 사는 이 개구리(Limnonectes larvaepartus)는 개구리 가운데는 드물게 체내수정을 한다. 암컷은 알을 100개쯤 낳는데, 난관 안에서 부화해 올챙이가 된다. 
 
이 올챙이는 알의 노른자를 먹으면서 다 자란 뒤 밖으로 나온다. 올챙이는 난관 속에서 어미의 배설물이나 죽은 형제들을 먹을 가능성도 있다.
 
연구자가 처음 이 개구리를 채집했을 때 손바닥 위에 올챙이를 낳는 바람에 이런 사실을 알았다. 세계의 개구리 6455종 가운데 체내수정을 하는 종은 10여종이 그친다.
 
★ 관련 논문:  Kusrini MD, Rowley JJL, Khairunnisa LR, Shea GM, Altig R (2015) The Reproductive Biology and Larvae of the First Tadpole-Bearing Frog, Limnonectes larvaepartusPLoS ONE 10(1): e116154. doi:10.1371/journal.pone.0116154
 
■ 공중제비로 굴러가는 사막 거미

 

1. Cebrennus rechenbergi.jpg» 위험에 닥치면 먼저 상대에게 위협적인 자세를 취한다. 사진=Prof.Dr.Ingo Rechenberg,Technical University Berlin

 

2. Cebrennus rechenbergi.jpg» 공중제비를 도는 식으로 굴러가는 사막 개미. 사진=Prof.Dr.Ingo Rechenberg,Technical University Berlin

 
모로코에서 발견된 이 거미(Cebrennus rechenbergi)는 위협을 느끼면 겁을 주는 동작을 취하다 안 되겠다고 판단하면 줄행랑을 놓는다. 처음엔 달리지만 곧 체조 선수가 공중제비를 넘는 방식으로 굴러 속도가 곱절로 늘어난다.
 
놀랍게도 도망치는 방향은 위협하는 상대 쪽이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여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사막에서 멀리 도망가야 숨은 곳도 없다. 굴러 이동하는 방식을 흉내 내려는 소형 로봇 개발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 6억년 전 화석동물?

 

2. Dendrogramma enigmatica.jpg» 6억년 전 멸종한 원시동물을 닮은 신종 해양생물. 새로운 '문'을 이룰 가능성도 있다. 사진=Jørgen Olesen 


1986년 과학자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남동해안의 1000m 해저에서 처음 보는 생물을 채집했다. 버섯 비슷하게 생긴 이 동물(Dendrogramma enigmatica)은 해파리나 산호와는 전혀 달라 생식기관도 신경계도 없었다. 
 
지난해 연구자들은 논문을 내 이 동물을 독자적인 과로 분류했다. 하지만 그보다 상위 분류 단위인 새로운 ‘문’이 될 가능성도 있다. 6억년 전에 멸종한 선사 동물 에디아카라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개미 마개’로 새끼 보호하는 말벌
 

Deuteragenia ossarium 4.jpg» 거미를 잡아먹는 이 말벌은 새끼를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개미의 주검을 활용한다. 사진=Michael Staab


중국 남동부에서 거미를 잡아먹고 사는 말벌 가운데 일부(Deuteragenia ossarium)는 독특한 행동을 한다. 나뭇가지의 빈속에 흙으로 공간을 구분해 방마다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른다. 그런데 새끼 방의 들머리는 비워두고 죽은 개미로 채운다.
 
독침을 쏘는 이 개미의 주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휘발성 물질이 다른 기생 동물의 침입을 막아준다. 이런 마개 덕분에 이 말벌은 둥지를 파는 다른 종보다 기생충 감염률이 현저히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Deuteragenia ossarium 1.jpg» 나뭇가지 빈틈을 흙으로 막아 방마다 새끼를 기르는 말벌의 둥지. 사진=Michael Staab

 

Deuteragenia ossarium 2.jpg» 둥지 들머리에 개미 주검으로 채운 방을 배치했다. 사진=Michael Staab 
 
★ 관련 논문: Staab M, Ohl M, Zhu C-D, Klein A-M (2014) A Unique Nest-Protection Strategy in a New Species of Spider Wasp. PLoS ONE 9(7): e101592. doi:10.1371/journal.pone.0101592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과거 10대 신종 기사:

콧속 거머리, 발광 버섯 등 지난해 신종 톱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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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5년 36회 공판에서 밝혀진 사실들

 
[공판 취재기] “국가가 국민 속일수 있음을 드러낸 재판”… CCTV 시간 하나도 안 맞아,
 
미디어오늘  | 등록:2015-05-21 15:10:04 | 최종:2015-05-21 16:12:1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천안함 5년 36회 공판에서 밝혀진 사실들 
[공판 취재기] “국가가 국민 속일수 있음을 드러낸 재판”… CCTV 시간 하나도 안 맞아, “함장이 어뢰로 보고하라 시켰다” 
(미디어오늘 / 조현호 기자 / 2015-05-21)


천안함 침몰사건 이후 해군 장교들이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를 고소한지 19일로 만 5년이 흘렀다. 2010년 8월 27일 검찰의 공소장이 접수된 이후 천안함 재판은 공판준비기일만 1년이 걸렸고, 공판이 진행된지 4년이 됐다. 공판 횟수만 해도 36회를 채웠을 뿐 아니라 증인은 47명에 달하고, 남은 증인까지 포함하면 70여 명에 이를 전망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지난 5년 동안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결론을 낸 뒤 덮고자 하고 있으나 그동안 제기된 여러 의문이 사실로 밝혀져왔다. 지난 5년의 천안함 재판을 정리했다.

생존자들 증언 “아무 이상 없었다…쾅 다른 선박과 부딪힌 줄 알았다”

무엇보다 사고를 전후로 핵심 위치에 있던 생존자들은 사고순간까지 특별한 징후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으며, 사고 순간에도 무언가에 부딪힌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지난 2013년 12월 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 신상철 대표 공판에 출석한 김기택 전 천안함 음탐사(해군하사)는 자신의 직전 근무자로부터도 특이사항을 전달받은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고순간까지도 음탐상 이상을 감지한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상 신호가 있었으면 모니터와 스피커에 나타나, 이상상황이 있으면 보고하는데,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며 “(당시 감지된 소리는) 일반적으로 나오는 여러가지 소음과 노이즈”였다고 전했다.

특히 폭발위치에 가장 근접한 곳에서 휴식중이던 생존장병은 다른 선박과 부딪힌 줄 알았다고 전했다. 사고순간 천안함 흘수선 아래 침실(CPO-수면하 침실)에 누워있던 천안함 전탐장 김수길 상사는 지난해 10월 27일 공판에 나와 “당직시간인 그날 16~20시 근무후 교대한 뒤 취침하러 ‘CPO실(수면하침실)’로 내려와 21시20분쯤 스탠드를 켜고 눈감고 있을 때 ‘쿵’소리가 들렸다”며 “다른 선임하사가 근무하고 있는데 다른 함정하고 부딪혔나 하고 있었는데, 몇십초 만에 다시 쾅 하는 소리가 나면서 배가 넘어졌다. 뭐에 부딪히는 소리인 줄 알았다. (천안함보다) 큰 함정이거나 동급함정에 부딪힌 줄 알았다”고 전했다.

평택 해군 2함대 안보공원에 전시된 천안함. 사진=조현호 기자

그는 첫 번째 ‘쿵소리’ 이후에 들었던 ‘쾅’ 소리에 대해 “처음 ‘쿵’ 소리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두번째 쾅 할 때도) 물체(함정)와 배(천안함)가 부딪힌 것으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사고순간 41포 RS실에서 당직근무중이던 천안함 병기병 안재근씨 역시 지난해 12월 22일 공판에서 “‘쾅’ 하는 충돌음 소리 뒤엔 길게 찢겨지는 소리가 났다”며 “뭐가 와서 때리는 소리였다”고 진술했다.

“함장이 어뢰로 보고하라고 시켰다”

합조단 보고서에 따르면 사고 직후 모든 보고라인엔 천안함이 파공후 침수 또는 좌초된 것으로 전달됐으나 20여 분 뒤부터 보고내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어뢰피격으로 변경된 것이다. 천안함 포술장 김광보 대위가 당일 21시28분 “좌초다”라고 보고한지 20여 분 만인 21시51분 천안함 통신장 허순행 상사는 “본국 어뢰, 어뢰로 사료됨”이라고 백령도 레이더기지에 보고한 것으로 보고서엔 나온다.

보고 내용이 바뀐 것과 관련, 허 상사는 최원일 천안함장의 지시에 의한 보고였다고 밝혔다. 그는 2012년 8월 27일 공판에 출석해 사고 직후 백령도 기지와 호출부호를 통해 침몰사유 통보 요구가 와 갑판에 나와있던 일부 장병들과 최 함장이 상의한 뒤 “어뢰피격으로 보고해”라는 지시를 받아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 판단 근거에 대해 “정확히 어떤 근거로 판단했는지는 모른다”고 답했다.

해경 부함장 “좌초 전문받아” 해작사 작전처장 “‘9시15분 좌초’로 합참에 보고”
백령도 초병 “중대상황실에서 9시31분, 좌초 전달받아”

천안함 재판 시작부터 증인들이 사고 초기 보고 상황은 좌초였다고 증언했다. 천안함 구조를 지휘한 유종철 해경501함 부함장(경위)은 2011년 8월 22일 첫 공판에 출석해 “구조하러 가는 중에 ‘좌초’라고 연락을 전문으로 받았다”고 증언했다. 심승섭 해군작전사령부 작전처장은 그해 9월 19일 공판에서 “해작사에서는 합참에 보고할 때 (최초상황이) 21시15분경으로 보고했다”고 밝혔다.

사고 직후 언론에도 ‘21시15분 좌초,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고 발표했던 해경의 이병일 전 경비과장은 2013년 12월 9일 공판에서 “(상부의) 지시사항에 의해서 발표했다”고 설명했다. 이 전 과장은 2010년 3월 28일 해경 보도자료에 ‘21시15분’으로 기재된 경위에 대해 “인천해양경찰서가 해군 쪽으로부터 사고 발생 이후 통보받은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백령도 해병대 247초소 위치에서 본 천안함 사고해역. 사진=조현호기자 

또한 천안함 사건 직후의 유일한 목격자인 백령도 초병 2명은 사고가 좌초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김승창씨(당시 일병)는 지난 2012년 11월 26일 공판에서 “당시 PCC가 좌초됐다는 중대본부로부터 보고를 받았다”고 했으며, 함께 근무중이던 선임자 박일석씨(당시 상병)는 그해 12월 17일 공판에서 “그날 밤 9시23분에 ‘쿵’ 소리와 함께 퍼져보이는 불빛(섬광)을 보자마자 즉시 상황실로 보고한 뒤 9시31분에 ‘PCC가 좌초됐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 같은 증언은 지난 3월 출간된 이종헌 전 청와대 행정관이 쓴 <스모킹 건>에도 기록돼 있다.

CCTV 시간 하나도 안맞아, 생존자가 마지막 CCTV 사진에 등장

천안함의 폭발증거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선체 내부 CCTV 11개가 모두 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도 재판과정에서 확인됐다. 복원된 11개 CCTV 가운데 사고시각(21시21분57초)에 가까이 촬영된 영상의 시각이 21시17분03초인 이유에 대해 합조단의 사이버영상팀장(해군 헌병단 중령)은 2012년 9월 24일 공판에서 “카메라(에) 내장(된) 시계상의 오차 때문이라고 판단했다”며 “그 외의 이유는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 전 팀장은 “카메라마다 시계가 있고, 11개 영상이 저장되는 본체 컴퓨터(통제컴퓨터)에도 시계가 있다”며 “하지만 본체에 있는 시계는 복원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증언에 당시 형사36부 주심판사는 “폭발시각은 미리 정해져있는데, 합조단이 폭발시각에 (끼워)맞춘 것 아니냐”고 추궁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합조단 보고서의 자료사진에 함미 후타실에서 희생자들이 운동하던 모습이 담긴 것과 관련해 이 가운데 생존자인 김용현 병장이 포함됐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어뢰 수거 대평호 선장 “해군이 준 좌표대로 작업”

천안함 침몰이 북한 어뢰의 공격이라는 결정적 증거라는 이른바 ‘1번 어뢰’ 인양 과정의 의문도 재판과정에서 나왔다. 김남식 대평호 선장이 1번 어뢰를 수거한 것은 2010년 5월 15일 아침이었다. 그러나 그 전날까지 3차원 입체 촬영기기를 보유한 고성능 탐색함이 한달 넘게 그 인근을 샅샅이 훑었으나 찾지 못했다.

김남식 선장은 지난해 7월 21일 법정에 나와 “(해군이 준) 포인트(좌표)를 정해놓고 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윤종성 합조단 군측 조사단장은 지난달 2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합조단 폭발위험분과에 소속된 ADD(국방과학연구원) 연구원들이 어뢰 폭발시 어느정도 되면 어뢰추진체가 후방 30~40m 지점에 떨어질지 시뮬레이션한 결과 어느 정도 위치에 떨어질 것이라는 자료 등을 어선에 전부 보내줬다”고 증언했다.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18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5년을 이어온 천안함 재판은 국가가 스스로 국민을 대상으로 국가안위와 관련된 중대사항에 대해 속일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낸 사건”이라며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뛰어넘는 일로 반드시 진실이 가려져야 할 재판”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2013년 상영된 <천안함프로젝트>에 출연한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 사진=아우라픽처스


출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3203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3746&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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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연대, 〈종로서장·202경비단장 파면! 박근혜 퇴진!> 노숙농성 ... 종로서 등 4곳서 매일 1인시위

  • [사회] 코리아연대, 〈종로서장·202경비단장 파면! 박근혜 퇴진!> 노숙농성 ... 종로서 등 4곳서 매일1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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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연대(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불법폭력성추행 인권유린 종로서장·202단장 파면! 불법정치자금 민주파괴 박근혜<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노숙농성에 돌입했다.

     

    코리아연대 진영하회원은 21일 오후3시30분경 광화문 세종대왕상앞에서 <세월호참사는 오늘의 광주학살 쓰레기시행령은 오늘의 계엄령>, <광화문은 오늘의 금남로 가자 청와대! 끝내자 박근혜!>, <불법폭력성추행 인권유린 종로서장. 202단장 파면하라!>, <불법정치자금 민주파괴 박근혜정권 퇴진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무기한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진보노동자회(단결과혁신을위한진보노동자회)사무국장이기도 한 진영하회원은 지난 4월5일부터 21일까지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노숙농성을 전개했고 4월7일부터 18일까지 대표자단식단으로도 참가했다. (관련기사 : [인터뷰] 진영하대표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은 곧 박근혜<정권> 퇴진>, 2015.4.13, 기사링크 http://www.minzokilbo.com/xe/107029 )

     
    <민주주의수호와 공안탄압저지를 위한 대표단단식농성>도 진행한 진영하회원은 특히 지난 4월11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광장에서 <기억하라 행동하라 행사 및 정부시행령 폐기 총력행동>범국민대회에서 행진대오 맨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연행돼 48시간동안 구금됐으나 인정심문과 지문날인도 거부한 묵비단식투쟁을 했다.

     

    진영하회원은 노숙농성에 돌입하기 앞서 오후1시 경찰청앞에서 열린 <박근혜불법부패정권퇴진과 불법폭력성추행경찰처벌 촉구 기자회견>에서 <관권부정선거로 권력을 찬탈한 박<정권>가 그 하수인 광견찰들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광견찰들을 민중의 지팡이로 바꾸기 위해 노숙농성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오후2시 탑골공원앞에서 열린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주최 <국가보안법철폐! 양심수석방!> 1026회 목요집회도 참가하고, 박<정권>의 부정부패·무능·민주주의파괴·민생파탄을 규탄하고, 광견찰의 야만성과 불법성, 폭력성을 폭로했다.  

     

    이날 바로 통일애국인사 안학섭선생이 농성장을 방문해 격려했고 지나가던 시민들이 노숙농성하는 진영하회원에게 <수고하십니다!>라고 응원하며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뿐 아니라, 이날 코리아연대는 광화문광장인근 미대사관앞·세월호농성장앞·세종문화회관앞과 종로서앞에서 <박근혜<정권>퇴진!> 촉구 1인시위를 각각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했다.

     

    코리아연대회원들은 미대사관앞에서 <세월호참사는 오늘의 광주학살 쓰레기시행령은 오늘의 계엄령, 박근혜는 오늘의 박정희·전두환 박근혜정권 퇴진하라!> 피켓을, 세월호농성앞에서는 <세월호참사 학살이다 학살정권 퇴진하라! 성완종 불법정치자금 박근혜정권 퇴진하라!> 피켓을, 세종문화회관앞에서는 <세월호차사 학살이다 학살정권 퇴진하라! 선거쿠데타 민주파괴 박근혜정권 퇴진하라!>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1시간가량 펼쳤다.

     

    종로경찰서앞에서는 오후3시부터 5시까지 2시간동안 <세월호참사 학살이다. 박근혜정권 퇴진하라! 성완종 불법정치자금 박근혜도 수사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진행했다.

     

    한 시민은 <코리아연대회원들 다 석방됐냐?>고 묻고, 박근혜 그냥 놔두면 망한다. 코리아연대대가 힘내야 이 나라가 산다.>고 격려했고, 지나가던 많은 시민들이 <더운 날씨에 수고많다>, <힘내라!>라며 지지·응원을 보냈다.

     

    코리아연대는 매일 낮12시부터 1시간동안 미대사관앞·세월호농성장앞·세종문화회관앞에서, 종로서앞에서는 낮12시부터 3시간동안 각각 1인시위를 동시다발로 진행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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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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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평양봄철국제상품전람회, 눈에 띄는 3가지 변화는?

올해 평양봄철국제상품전람회, 눈에 띄는 3가지 변화는?
 
 
 
nk투데이 김혜민기자 
기사입력: 2015/05/22 [06:18]  최종편집: ⓒ 자주시보
 
 

 

북한에서 제18차 평양봄철국제상품전람회가 5월 11일 평양 3대혁명전시관에서 개최되었다고 통일뉴스가 12일 보도했다.

 

 

 

 

평양봄철국제상품전람회는 1998년부터 매년 5월 즈음에 평양에서 열어왔던 행사이다. 

 

 이후 북한이 전람회 사업을 더욱 확대하여 2005년부터는 매년 9월이나 10월 가을철 국제상품전람회도 개최해 왔다.

 

매번 전람회에서는 단순한 상품 전시뿐만 아니라 해외 기업들이 북한 회사에 투자하는 방안도 논의되어 왔다고 한다.

 

올해 18차를 맞은 봄철국제상품전람회에는 북한을 비롯하여 뉴질랜드, 독일, 러시아, 말레이시아, 몽골, 스위스, 싱가포르, 중국, 캄보디아, 프랑스, 폴란드, 호주,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각 국가 소속 300여개 회사가 참가했다고 한다.

 

이는 12개 나라와 지역들에서 140여개 단위들이 참가했던 2013년, 14개 나라와 지역들에서 290여개 단위들이 참가했던 2014년에 비해 더 많은 회사들이 참가한 것이다. 

 

그리고 전자, 기계, 금속, 건재, 운수, 식료, 일용 등의 분야에서 ‘선진과학기술'을 도입해 생산한 제품들을 많이 출품되었다고 한다.

 

 

 

 

올해 전람회는 예년에 비해 새로운 변화 3가지가 있었다.

 

우선 예년보다 북한 무역회사 참가수가 많이 늘었다.

 

19일 노컷뉴스에 따르면 북한은 그 이유를 공장, 기업소의 생산활동이 활성화된 데다 북한식 경제관리방법을 받아들이고 자기 실정에 맞는 경영활동을 벌이는 과정에 이룩된 성과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두 번째 변화는 다양한 나라들 중에 특히 러시아, 중국의 참가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올해 러시아는 고기가공과 건설, 콩생산 등 다양한 분야의 12개 기업(<프리모르스카야 소야>, <달리폴리메탈> 등)에서 20여명의 기업인들이 참가했다. 

 

이번에 러시아 참가기업들이 늘어난 것은 러시아 정부가 이 사업을 추진하는 연해주상공회의소와 연해주수출발전센터를 직접 밀어주고 협조하면서 전람회에 참가할 기업들을 모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14일 온바오뉴스에 따르면 중국 기업들도 훨씬 많이 참가했다고 한다

 

량퉁쥔(梁彤軍) 조선중국상회 회장은 온바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전시회에 참여한 중국 기업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으며 전시 품목도 더 대중화돼 현지의 수요에 부합됐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변화는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를 포함해 각 도의 경제개발구에 대한 투자설명회를 개막 당일 함께 진행한 것이다.

 

북한은 5월 27일 금강산에서 2박3일 일정으로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 투자 설명회를 할 예정이지만 전람회에서 미리 간략한 투자설명회를 열어 외국인 투자자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홍보전을 펼친 셈이다.

 

17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번 투자설명회에서 경제개발구 안의 개발행위에 대한 법적 보장, 외국투자가의 기업 창설 및 경영규정, 현재 북한 내 경제개발구들의 실태와 전망 등에 대한 정보가 자세히 제공되었다고 한다. 

 

한편, 중국 뉴차이나뉴스와 일본 교토통신에서는 이번 평양봄철국제상품전람회를 직접 방문하여 보도하였다. 

 

특히 뉴차이나뉴스는 전람회에 참가한 독일 CVE 기업의 알렉산더 마이스뷘켈(Alexander Meiswinkel)의 인터뷰를 싣기도 했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시면 뉴차이나 뉴스를 직접 보실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시면 교토통신을 직접 보실 수 있습니다.) 

 

 

 

5월 14일까지 진행된 이번 봄철국제상품전람회는 성황리에 폐막되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이후 예정된 전람회는 가을철 국제상품전람회로 올해 9월 21일부터 24일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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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민과 함께하는 ‘금강산 다시가기 운동’


성동구 통일한마당 추진위, “남북교류확대 말이 필요없다”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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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21  15: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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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동구 통일한마당 추진위원회’는 21일 오전 성동구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성동 금강산 다시가기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제공-성동구 통일한마당 추진위원회]

지난 1994년부터 통일한마당 행사를 꾸준히 진행해 온 서울지역 주민단체가 광복 70돌과 6.15공동선언 발표 15돌을 맞아 금강산관광을 비롯한 남북 민간교류 재개를 위해 ‘금강산 다시가기 운동’을 시작한다.

성동구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 등이 참여하는 ‘성동구 통일한마당 추진위원회’는 21일 오전 성동구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하던 때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인 ‘성동 금강산 다시가기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부진환 성동구 통일한마당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남북 민간교류의 왜 필요한지, 5.24조치가 왜 해제되어야 하는지를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기획하게 됐다”고 행사 기획 취지를 설명했다.

성동구 통일한마당 추진위원회는 이를 위해 지역내 신협조직인 ‘논골신협’, 민주노총 동부지구협의회, 성동지역전국금속노동조합, 성동주민자치운동센터 등으로 ‘공동추진단’을 구성, 앞으로 5.24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는 시점에 첫 관광단으로 금강산을 방문할 계획이다.

또 금강산 관광 전이라도 백두산, 오키나와 등을 대상으로 평화기행을 기획,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에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금강산 다시가기 운동’은 온 민족의 만남과 교류를 상징하는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여 남북 간 화해와 단합의 시대를 다시 열어가자는 국민들의 요구와 의지를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금강산관광으로 대표되는 남북의 왕래와 민간교류가 활성화되어야 남과 북은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이수경 성동구 통일한마당 추진위원회 공동대표가 기자회견문을 낭독했다. [사진제공-성동구 통일한마당 추진위원회]

추진위원회는 이를 위해 온라인 사이트와 참가자 조별 사전모임 등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희망하는 성동구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고 지역차원에서부터 금강산 관광을 통한 소통과 교류 활성화를 꾀해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취지에 동의하는 지역 주민들은 각 단체나 온라인을 통해 ‘금강산 다시가기’ 신청서를 작성한 후 논골신협에서 ‘금강산 다시가기’ 관련 저축상품을 개설하면 된다.

최초 개설 기준금액은 2만원이며, 이후 자유저축 형태로 최대 월 10만원까지 납입할 수 있다고 한다.

계좌를 개설하면 신협 최;고금리인 2.6%에 우대금리 0.5%가 적용되며 추가로 적립되는 통일기금 0.5%의 금리는 성동지역 통일기금으로 신청자가 직접 추진위 기부계좌로 기부할 수 있도록 했다.

추진위원회는 이날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6월 15일까지 1차 대상자 모집을 시작하며, 8월 15일, 10월 4일을 계기로 2, 3차 모집할 계획이다.

“지역신협에 적금들어 금강산 관광 다시가자”
<미니인터뷰> 부진환 성동구 통일한마당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 부진환 성동구 통일한마당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통일뉴스 : 먼저 성동구 통일한마당 추진위원회에 대해 소개해 달라.

■부진환 집행위원장 : 1994년부터 매년 시작한 통일한마당 행사를 1998년 한해를 빼고 올해 22회째가 되니까 서울에서도 몇 군데 남지 않은 구 통일한마당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대체로 통일한마당은 매년 10.4선언 즈음해서 주말에 하는데 단순히 행사만 하는 게 아니라 추진위로 묶인 노동조합, 시민단체, 학생들이 함께 지역에서 할 수 있는 평화통일운동을 한다.

특히 5.24조치 이후에는 남북교류가 전혀 되지 않아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를 많이 고민했다. 더 중요하게는 단체들뿐만 아니라 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을 기획해 보자는 차원의 고민이 많았다.

□지역주민들과 함께 금강산관광을 다시 가자는 제안을 하고 일을 만들어나가는 발상이 특이하다. 계기가 있었나?

■금강산관광은 잘 알려진 대중적인 사업이고 무엇을 반대하는 운동이 아니라 그저 금강산을 가자는 긍정적인 구호의 운동이어서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까?

마침 논골신협에서 통일한마당행사를 꾸준히 후원해주었기 때문에 주민들과 노동자들이 직접 적금을 들어서 나중에 관광재개가 되면 제일 먼저 금강산에 가자는 취지로 제안하게 됐다.

그동안 활동의 기반도 있고 해서 주민들이 어렵지 않게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남북 민간교류가 왜 필요한지, 5.24조치가 왜 해제되어야 하는지를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기획하게 됐다.

□오늘부터 시작인데, 이후 진행은 어떻게 되나?

■기자회견 끝나고 논골신협에 참가단체 대표들이 먼저 가서 직접 신청서도 쓰고 가입도 해 보면서 절차를 상세히 안내할 수 있도록 체험하고 있다. 오늘부터 주민들은 홈페이지를 통해서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여기서 개인별로 신청할 수 도 있지만 단체별로 신청서를 작성하면 공장이나 장애인센터 같은 곳으로는 신협직원들이 방문해서 접수를 하기도 한다.

□0.5%통일기금은 어떤 방식으로 적립이 되나?

■개인이 계좌를 해지할 때 신협에서 지급할 이자 중의 일부를 통일기금으로 기부하는 게 아니라 신청할 때부터 개인이 체크해서 현금으로 내던지 일시불 계좌이체 방식으로 내는 방식이다. 신협은 사실상 1%의 우대금리를 제공하는 것이고 각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이중 일부를 통일기금으로 직접 기부하는 것이다.

□당장 백두산, 오키나와 평화기행 등 계획은 있나?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일단은 6.15까지는 모집사업을 집중적으로 해야 하고 모집된 분 들이 직업 참여할 수 있는 평화기행 등은 이후에 좀더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앞으로 활동계획은?

■성동지역에서는 평화통일운동을 하는 개인과 단체가 통일한마당추진위원회에 두루 망라되어 있기 때문에 6.15공동행사를 준비하는 ‘평화통일 서울시민 1,000인 원탁회의’ 등에서 계획하던 일도 다 관련이 있다. 8.15 행사때는 어린이부터 어르신들까지 연습해서 합창무대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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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도 공감도 안 가는, 대통령의 '새 총리' 카드

황교안 국무총리? 정홍원을 돌려달라

[게릴라칼럼] 납득도 공감도 안 가는, 대통령의 '새 총리' 카드

15.05.21 17:23l최종 업데이트 15.05.21 17:23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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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임 국무총리에 내정된 황교안 신임 국무총리에 내정된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21일 오후 정부과천청사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청사를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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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가 사람을 잡을 때가 있다. 아니 널리고 널렸다. 특히나 박근혜 정부의 인사 정책은 말이다. 아시다시피, 총리 난관은 말이다. 황교안 총리 후보자가 후보군에 올랐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자마자 육성으로 '설마...'를 내뿜었더랬다.   

하긴 '설상가상'과 같은 일이 이 정부에서 어디 한둘이었던가. 이런 생각은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그는 21일 오전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박근혜, 총리 후보로 황교안 지명. 과거 이 공간에서 황교안 총리 될 것 같다고 툭 던졌는데 진짜 실현되었다. 독실한 보수 기독교 신앙을 가진 초강경 공안검사로 박근혜의 통치철학을 체화하고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 국정운영의 방향이 가히 짐작된다."

그렇게, 21일 오전 황교안 법무부장관이 신임 총리 후보자로 전격 지명됐다. 이완구 전 총리 사퇴 이후 25일 만이다. 이 시각 무려 721일 동안 총리 관저를 지켰던 정홍원 전 총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죽했으면, 로이터통신 제임스 피어슨 기자가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과 사진을 게재했을까. 

"Park Geun-hye nominates Justice Minister Hwang Kyo-ahn as new Prime Minister - wonder if he will pass, otherwise:" (박근혜 대통령이 황교안 법무장관을 새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했다. 그가 (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을 지 궁금하다.)

'빽 투 더 정홍원'이 공감을 얻는 이유 

"총리 없어도 크게 상관없는 것 같은데 그냥 없는 대로 갑시다."

어느 SNS 사용자의 '웃픈' 일성이다. '책임총리제'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총리 잔혹사'를 몸소 실천했던 박근혜 정부의 현재를 단적으로 드러낸 일성이 아닐 수 없다. 기실, 이번 황교안 카드는 '회전문 인사', '돌려막기 인사'라는 표현마저도 부끄럽게 만든다. 반면, 청와대가 이러한 비판을 피해가기 위해 낙점한 인사가 결국 황교안 후보자라니 과연 상상한 것 이상을 보여주는 '콘트롤타워'답다고 해야 할까.

전문성? 탕평책? 그런 거 하나도 중요치 않다. 국정원장이 비서실장으로, 현직 의원들이 특보로 청와대에 입성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 장수 법무부장관이었던 황교안 후보자 역시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의 성균관대 사랑도 도드라진다. 정홍원 전 총리와 이완구 전 총리 모두 성대 출신이었다. 여기에 허태열 전 비서실장, 이남기 전 홍보수석을 비롯해 청와대 수석들만 5명이었다. 이 부분은 이명박, 노무현 정부 역시 편향성을 보여줬으니 형평성 측면에서 넘어갈 수 있다고 하자. 총리 후보자를 향한 대통령의 지독한 검경 편애는 무서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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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흔들어 인사 하는 정홍원 전 총리 이임식을 마친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16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입구앞에서 장관들과 인사를 마치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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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후보였으나 5일 만에 물러난 전 헌법재판소장 출신의 김용준 후보자를 시작으로 최장수 총리였던 정홍원 전 총리 역시 사시 14회의 검찰 특수통 출신이었다. '20억 전관예우'로 스스로 물러난 안대희 후보자 역시 대법관 출신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홍원 총리를 총리 공관에 더 오래 머무르게 한 문창극 후보자만이 유일하게 언론인 출신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렸던 황교안 후보자가 왔다. 

'공안검사', '미스터 보안법'이 '책임총리'라니 

황교안 후보자는 지명 기자회견에서 "나라의 기본 바로 잡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나라의 기본'이 어떤 방향인지는 그가 법무부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활약을 살펴보면 간단하다. 정의당 김종민 대변인의 논평을 빌려와 보자.   

"황 후보자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채동욱 전 검찰총장 내사, 정당해산 심판 등의 사건에서 진실과 정의가 아닌 박근혜 대통령과 이 정권에 충성을 다 해 온 인물이다(중략). 총리 내정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이게 전부가 아니다. '공안검사'로 활약했던 시절의 굵직한 사건만 꼽아 봐도, 박근혜 대통령과 그의 코드가 얼마나 '환상의 짝꿍'에 가까운지를 가늠할 수 있다. 잘 알려지다시피,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을 모두 무혐의 처리하며 부실수사 논란을 부채질한 것도 바로 당시 서울중앙지검에서 공안 수사를 지휘했던 그의 작품(?)이었다. 

같은 해 10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논란의 중심에 선 강정구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사건을 담당했던 것도 그였다. 결국 당시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불구속 수사와 관련 수사지휘권을 발동하면서 검찰총장이 사퇴하는 사태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2002년 당시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을 특수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던 것 역시 황 후보자의 지휘였다. 

'미스터 보안법'과 같은 별명으로 유명한 이 공안통 검사가 이명박 정부 들어 승승장구하더니, 이윽고 박근혜 정부 들어 법무부장관을 거쳐 총리 후보자의 자리로 올라선 것이다. 이런 이력의 소유자였으니, 민주정부 10년을 인고의 세월로 느꼈을 것은 당연지사.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을 두고 "이런 분이 대통령이 되고 나니까"란 발언을 서슴없이 한 것도 일견 이해를 해줘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 다음의 대통령이 누굽니까. 노무현 대통령인데,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에 의해 구속까지 됐던 분이에요. 앞의 김대중 대통령은 불구속기소, 구속되진 않고 재판에만 회부됐는데, 이 노무현 대통령은 공안부 검사들에 의해서 구속까지 됐던 분이에요. 대우중공업 사태와 관련해서 구속까지 됐던 분이에요. 이런 분이 대통령이 되니까 공안부에 오래 있던 사람들에 대해 또 여전히 곱지가 않겠지요." (부산 고검장 시절이던 2011년 5월 11일 부산 호산나교회 강연 중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도덕적으로 문제없는 인사"가 황교안? 

"저는 인사는 정말 능력 있고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그런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제가 힘든 어려운 국정을 그래도 해결해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누구보다도 능력 있고 도덕성에 있어서도 국민들한테 손가락질받지 않는 그런 인재를 찾는 데 있어서 저만큼 관심이 많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전제조건하에 또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한다,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1월 신년기자회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밝힌 인사 원칙 중 일부다. '유체이탈 화법', '멘붕 화법'에 이어 최근 '구글번역체 화법'으로 주목받고 있는 박 대통령의 의중을 해석하자면, "정말 능력 있고,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인사로 황교안 후보자가 본보기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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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교안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28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부처 관계자와 답변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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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연 그럴까. 법무부장관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한 황 후보자가 이번 청문회 역시 패스할 수 있을까. 단적으로,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요인으로 '20억' 전관예우 때문에 낙마했던 안대희 후보자와 비교해 (황 후보자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16억'의 수임료를 자랑하는 황 후보자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황 후보자는 2011년 9월부터 태평양 고문변호사로 재직하며 16개월여 동안 월평균 1억 원의 급료를 받았고, 재판 수임 건수는 단 1,2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병역면제, 장남의 불법증여와 증여세 탈루, 지방세·자동차세 등 과태료 상습 체납, 석사학위 논문 특혜, 용인 수지아파트 투기 등 법무부장관 인사청문회 당시 도마 위에  올랐던 의혹들은 더욱 깊숙이 파헤쳐질 전망이다. 이완구 전 후보자보다 결코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전력의 황 후보자를 박근혜 대통령은 그래도 "적재적소의 인재"라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야당과 여론의 몫일 것이다. 결국 총리 후보자감이 전혀 아니었던 이완구 전 총리를 낙마시킨 것은 '성완종 리스트'의 힘이었다. 명명백백 밝혀진 의혹 앞에서도 우리는 '그런 (이완구)총리'를 기어코 볼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더, '황교안 국무총리'까지 볼 수는 없다. 지난 세월호 1주기 추모제때 보여줬던 경찰의 폭압적인 진압이야말로 황교안 후보자의 주종목이다. 더욱이 "없어도 그만인" 지금의 총리가, 그 자리가 과연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나 비리를 근절할 수 있는지, 정치를 강력하게 개혁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통합'을 추구해야 할 총리가 '공안정국'을 부활시키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감시하면서 국민들의 피로감을 더할 필요가 있느냐 말이다. 차라리, (본인에게는 미안하지만) '빽 투 더 정홍원'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의 숫자가 궁금해지는 지금이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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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첨단 핵탄두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 공식 선언

북, 첨단 핵탄두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 공식 선언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05/21 [12:1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지난 5월 러시아 승전기념식에서 공개한 야르-24 대륙간탄도미사일, 토폴미사일을 개량한 것으로 러시아 최강의 미사일이다. 러시아도 이런 미사일 개발에 북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의 미사일 개발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보인다.     © 자주시보

 

▲ 북이 2012년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 기념 열병식과 2013년 7.27 전승기념절 열병시에서 선보인 화성13호 , 러시아 야르24 미사일과 바퀴 수가 같다. 비슷한 사거리의 미사일인 것이다.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20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북 국방위원회 정책국이 20일 조선중앙TV로 방송한 대변인 성명을 통해 "우리의 핵 타격 수단은 본격적인 소형화, 다종화 단계에 들어선지 오래"라면서 "중단거리 로켓은 물론 장거리 로켓의 정밀화, 지능화도 최상의 명중 확률을 담보할 수 있는 단계"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는 북이 소형핵탄두를 장착한 신형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하고 있다는 최초의 공식선언이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은 2013년 초 한반도 전쟁위기 당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지휘소 벽면에 부착된 대륙간탄도미사일 미 본토 공격계획 작전지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보유사실을 암시하는 등 미 본토 타격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시사해왔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 종류와 능력까지 국방위원회 정책국 명의로 공식 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단, ‘핵타격수단들이 본격적인 소형화, 다종화 단계에 들어선지 오래’라는 말은 소형핵무기와 다양한 종류의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말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핵폭탄도 종류가 여러 가지이다. 일반 핵폭탄에 중성자를 다량 발생시킬 수 있게 조작하여 구조물 안의 생명체만 모두 죽이는 중성자탄, 파괴력을 증가하기 위해 핵융합반응을 이용한 증폭핵분열탄, 핵분열과 핵융합을 여러 번 반복케하여 가장 무서운 파괴력을 갖게 한 수소폭탄 등이 있는데 북도 어느 한 핵폭탄만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핵폭탄을 오래 전부터 연구하여 이미 실전배치해온 것 같다.

이런 핵무기를 미사일과 같은 운반수단에 장착하려면 소형화를 시켜야 하는데 그에 대한 개발도 끝낸지 오래라는 것이다.

 

북은 이런 핵폭탄을 유도로켓 즉 미사일에 장착하여 투발하거나 핵배낭을 짊어진 특수부대원들이 직접 목표물로 접근하여 공격하는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는데 주된 방식은 미사일이다. 그 미사일도 정밀타격과 요격회피기동을 능란하게 하는 첨단기능을 갖추게 되었다고 이번 정책국 대변인 성명을 통해 선언한 것이다.

“그  중단거리 로켓은 물론 장거리 로켓의 정밀화, 지능화도 최상의 명중 확률을 담보할 수 있는 단계"라는 표현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통상 ‘정밀화’라는 말은 반경 5미터 원 안에 꽂아넣을 수 있는 정확도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관성유도장치만으로는 불가능하며 gps위성유도를 적용해가 가능한 정확도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10대의 나이에 북 포병체계에 gps 위성유도를 전면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논문을 발표하고 이후 북의 포병체계를 gps방식으로 전면적으로 혁신했던 것으로 중앙일보 등이 입수 보도한 자료를 통해 알려져있다. 
물론 북은 자체의 gps위성은 없지만 미국 등 상대국의 gps 시스템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지능화는 미사일에 인공지능 기능을 넣어 요격미사일이 접근할 경우 그것을 회피할 수 있는 기동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회피만 해서는 안 되고 회피한 후에는 다시 목표물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에 매우 뛰어난 인공지능컴퓨터를 미사일에 탑재해야 한다.


이는 결국 컴퓨터소프트웨어개발능력이 좌우한다. 북의 청년들이 컴퓨터게임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경우의 수가 많아 어렵고 복잡한 컴퓨터 바둑게임 경연대회에서 한중미일 연합팀을 간단하게 제압하고 싸우면 싸울 때마다 모조리 승리하는 괴력을 발휘한 바 있고 최근 인도에서 진행한 코드셰프대회에서도 최계 최강 구글팀을 청년들이 완전히 제압하고 1, 2, 3등을 모두 싹쓸이한 바 있다.
따라서 북의 미사일이 세계 최강의 정밀도와 요격회피 능력을 보유했다는 북 국방위원회 정책국의 공식 발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북 군사력 전문가들이 인터넷 상에 올린 글이나 북에서 암시한 여러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러시아에서 요격회피기동 능력을 처음으로 장착한 토폴미사일 개발에 북이 이런 측면에서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합뉴스 관련 보도에는 북 국방위원회 정책국이 "지난 5월8일 성과적으로 진행된 우리 전략잠수함의 탄도탄 수중시험발사는 조선의 군력 강화에서 최절정을 이룬 일대 장거"라며 "세계가 놀라움과 부러움 속에 환호하고 격찬하고 있다"고 선전했다는 내용도 나오는데 바로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탄도미사일이 그런 정밀화, 지능화된 미사일이며 그 안에 다양한 종류의 핵탄두를 장착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북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공개적으로 진행하지는 않아 좀더 두고 볼 필요는 있겠지만  북이 이렇게 국방위원회 정책국의 공식 입장으로 대륙간핵탄두미사일 보유사실을 선언하였고, 다양한 종류의 미사일을 공개한 바 있으며 방사능이 검출된 경우, 전혀 검출되지 않는 경우 등 여러 핵시험을 진행한 바가 있기에 이번 정책국 성명은 더욱 주목해서 봐야할 것이다.

정부 당국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 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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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신밀월시대 개막-글로벌 동맹으로 진화

미일 신밀월시대 개막-글로벌 동맹으로 진화

2015. 05. 20
조회수 65 추천수 0
 

  아베 일본 총리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었던 날인 4월 28일을 맞춰서 미국을 방문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의 대일점령의 기본목표를 수정한 것이다. 전후 미국의 대일정책의 기본 목표는 ‘비군사화’와 ‘민주화’라고 할 수 있다. ‘비군사화’와 ‘민주화’를 추구했던 미국의 정책은 1947년 4월 평화헌법 제정으로 현실화되었다. 전쟁을 포기하고, 무력을 가지지 않으며 교전권을 부인하는 9조는 평화헌법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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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해상자위대가 보유한 이즈모 헬기호위함. 명칭은 호위함이지만 실제론 경항공모함이다

 

글로벌 동맹으로 진화한 미일동맹

 

  하지만 국제정세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미소 갈등으로 냉전이 시작했고 중국에서는 공산혁명이 일어났으며 6.25 전쟁이 발발했다.  비군사화와 민주화를 목표로 했던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은 일본을 미국의 아시아 전진기지로 만들려는 목표로 바뀌었다.
  그 결과 1952년 4월 28일 미일안보조약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4월 28일에 맞춰서 아베는 미국을 방문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교 국방장관들은 뉴욕에서 미일 안전보장위원회를 개최(4.27)하여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개정했다.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은 미군과 자위대의 협력과 역할분담을 규정한 정부간 문서이다. 1978년에 만들어졌고(가이드라인 78) 1997년 한 차례 개정(가이드라인97)되었다. 이번에 18년 만에 재개정(가이드라인 15)된 것이다. 가이드라인은 정부간 문서이므로 그 차제로서는 법적 효력이 없다. 일본은 가이드라인에 따른 자위대의 역할을 법적으로 부장하기 위해서 자위대법이나 주변사태법과 같은 관련 법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표> 가이드라인 변화 과정과 변화 내용

 

 

가이드라인78(제정)

가이드라인 97(1차 개정)

가이드라인 15(2차 개정)

적용상황

일본 유사시

평시

평시

주변사태시

영향사태시

유사시

일본 유사시

3국 피습시

일본 재난시

 


  이번에 두 번째 개정된 방위협력지침으로 미일동맹은 글로벌 동맹으로 변화하였다. 자위대는 일본과 주변지역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으로 미군과 함께 진출하여 지구방위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차대전 직후 일본의 비군사화를 목표해서 평화헌법을 제정했지만 일본의 비군사화는 이미 철회된 지 오래다. 이미 그동안 지속적으로 무력화 조치가 취해진 평화헌법도 이번 미일방위협력 지침 개정으로 크게 퇴색하고 있다. 

미일 안보조약과 미일 가이드라인 제정

  1951년 체결되고 1952년 발효된 미일 안보조약은 일본에 대한 연합군의 통치 아래서 만들어졌다. 일본은 미군에 기지를 제공하고 미군은 일본에 대한 외부 공격시 방어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당시에는 자위대가 없었으므로 일본의 군사역할은 명시하지 않았다. 1960년 개정된 미일안보조약(신안보조약)에는 미군과 일본 자위대의 능력 발전과 일본 유사시 주일미군과 자위대의 공동방위를 명시하였다. 자위대의 군사 역할을 강화하는 기초가 되었다. 이후 1978년에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제정(가이드라인 78)하여 자위대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1960년에 개정된 미일신안보조약에는 5조에서 일본에 대한 제3국의 공격이 발생하는 ‘일본유사시’를 상정하고 미국의 군사적인 대응을 정리하고 있다.  6조에서는 ‘극동유사시’를 상정하고 이 경우 미일의 방위협력을 약속하고 있다.  
미국은 1970년에 들어와서 동아시아에서 미군철수까지 고려했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소련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이 증대했다. 그 결과 1978년에 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78) 제정으로 이어졌다.  미일안보조약 5조에 따른 일본 유사시와 6조에 따른 극동유사시를 상정하고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세부적인 역할을 규정했다. 미일 신안보조약의 이행을 위한 방침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하지만 ‘가이드라인 78’에서 일본 유사시에 대해서는 무력공격을 미군과 자위대가 연합하겨 격퇴한다는 내용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극동유사시에 대해서는 상호합의한다는 원칙에만 합의했다. 구체적으로 자위대의 역할이 명시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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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과 합동으로 상륙훈련을 준비하는 일본 육상자위대 서부방면대 보통과(보병)대원들

 

 

탈냉전기의 미국 세계전략과 일본의 역할

 

 1997에는 방위협력지침이 개정(가이드라인 97)된다. 일본은 방위협력지침 개정을 통해서 일본의 대외팽창주의적인 노선을 추구하게 되었다. 일본에게는 미일협력의 구도를 활용하면 일본이 독자적인 대외팽창이라는 주변국가들의 의혹과 불만을 해소하는 데 유리하다. 반면에 미국은 일본과 책임분담을 통해서 안보비용을 절감하고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이드라인 97’의 배경은 1996년에 발표된 ‘미일 신안보공동선언’이다. 이 선언에서는 미일 안전보장의 범위를 아시아 태평양지역으로 확대하고 이를 위한 두 나라의 협력방안을 제시했다. 탈냉전기에 미국의 세계전략 수립에 있어서 일본의 역할이 강화된 것이다. 미일 신안보선언의 기초는 조셉 나이가 1995년에 작성한 ‘나이 이니셔티브’ (Nye Initiave)이다. 조셉 나이는 미일동맹의 역할을 ‘대소봉쇄’에서 ‘세계의 평화와 안정 유지로 전환’할 것을 주문했다. 재정적자를 겪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탈냉전 이후 세계전략을 추구하는데 든든한 조연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셉 나이의 구상은 일본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져서 미일 신안보공동선언과 1997년 가이드라인 개정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2015년에는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꿈꾸는 아베의 적극적 평화주의와 접목하고 있다. 오바마와 아베가 미일정상회담에서 ‘동맹의 전환’을 강조한 것도 나이 구상의 부활이자 강화이다. 나이 구상으로 미일가이드라인이 개정(가이드라인 97)되었다면, 나이 구상의 부활은 가이드라인 2차 개정(가이드라인 15)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1997년 가이드라인 1차개정과 주변사태

 

  ‘가이드라인 78’에서는 미일 신안보조약 5조에 따른 일본 유사시에 대한 대응만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다. 6조에 따른 극동유사시에 대해서는 원칙적 합의만 있다. 가이드라인 97은 바로 6조에 따른 극동유사시 자위대의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가이드라인 97에서는 이것을 ‘주변사태’라고 하고 있다. 즉 가이드라인 97은 평시, 유사시, 주변사태시 라는 3개의 상황을 설정하고 각각의 상황별로 미일 군사협력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특히 가이드라인 97은 가이드라인 78에서 일본 유사시에 중점을 두고 있던 것을 주변사태를 강화하는 변화가 생겼다. 주변사태시 40개 항목으로 자위대의 역할을 규정하고 있다. 일본 자위대의 공해상에서 활동, 기뢰제거, 선박검사, 탄약수송 등으로 집단적 자위권행사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나이구상과 미일 신안보공동선언에 따른 것이다. 
논란이 되는 것은 주변사태의 범위이다. 가이드라인 97에서는 주변사태를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상황적 개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사태의 본질은 대만해협과 한반도라는 지리적 개념이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의 여론은 가이드라인 97이 자위대의 아시아 재침략을 보장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강력히 반발했다.
  일본 정부는 오래전부터 한반도 유사시를 전제해 일본인 구출 및 난민 수용문제 등을 검토해 왔다.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상륙에 대한 논의는 이미 1963년의 미쓰야연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1965년 6월 오카다 가쓰오 의원이 자위대통합막료회의의 ‘63년도 방위도상연구 실시계획(미쓰야 연구)’를 폭로했다. 당시 폭로된 내용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인데 자위대 출동과 일본 총동원 체제 수립을 내용으로 한다. 
1983년부터 일본에서 시작된 ‘극동사태연구’는 극동사태가 일본의 안전에 영향을 미칠 경우 일본이 작전 중인 미군에 협력하는 방안에 대한 연구이다. 그 대상지역이 필리핀, 일본, 한국, 대만이 포함되나 일반적으로 극동사태라고 할 경우 한반도 유사시를 의미한다.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가이드라인 97에서 주변사태를 명시한 것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는 일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명백하게 한반도를 대상으로 하는 작전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가이드라인 97에서 주변사태를 구체적으로 명기한 이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1999년에 주변사태법을 제정했다. 주변 사태 발생시 미군에 대해 후방지역 지원과 수색 및 구조 지원 등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주변사태법 역시 한반도 위기 상황에 대해 일본이 응급조치 차원에서 개입한다는 것이 근본 목적이다.

 

  ‘일본 영향’ 사태와 2015 미일 가이드라인 2차 개정

 

 2015년 4월에 2차 개정된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15)의 가장 큰 특징은 주변사태를 ‘일본에 영향을 미치는 위기 시’로 확대했다는 것이다. 유사시는 일본 유사시, 제3국 피습시, 일본 재난 발생시라는 3개 상황으로 세부화한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즉 ‘가이드라인 15’는  평시, 일본에 영향을 주는 위기시, 일본 유사시, 제3국 피습시, 재난시로 세분화했다. 그리고 각 시기별로 정보, 감시정찰, MD, 해상안보, 군사훈련, 재난구호  등 미일 공동 대비책을 마련했다.
  주변사태를 삭제하고 이를 일본에 영향을 주는 위기시로 대체한 것은 센카쿠열도(댜오위다이 섬)에서의 중국과의 분쟁을 상정함과 동시에서 궁극적으로 자위대의 역할을 세계로 확장하는 것이다. 미군 가는 곳에 자위대가 간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처럼 주변사태를 일본에 영향을 주는 사태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가이드라인 97때는 주변사태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고 숨겼으나 이번에 주변사태는 지리적 개념이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미일 방위협력 지침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가이드라인 97’ 이후에는 주변사태법을 제정하고 자위대법과 미일 물품 상호제공협적(ACSA)를 개정했다. ‘가이드라인 15’ 이후 도 마찬가지로 일본은 국내법적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법률 개정과 제정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5월 14일 각의에서 통과된 법안은 자위대법, 무력 공격사태 법, 주변사태 법, 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 등 10개 법안의 개정을 일괄한 ‘평화안전법 제정비 법안’과 국제 분쟁에 대처하는 타국군의 후방 지원을 수시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법안인 ‘국제평화지원법안’ 등 2개다. 이에 앞서 아베는 지난 4월 미국 상하원연설에서 8월까지 법적 정비를 마치겠다고 해서 일본 의회로부터 월권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본 정부가 새롭게 제정하는 법은 ‘국제평화지원법’이다. 이 법은 자위대가 외국 군대의 지원을 용이하게 해준다. 아울러 자위대의 해외파병에 대해서도 총리의 권한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에 영향을 주는 사태 발생시에 자위대가 손쉽게 세계로 나갈 수 있게 하는 법안인 것이다. 
  한반도 유사시에 자위대가 한국의 영역에 진입하는 것에 대해 중요 영향 사태법에서 ‘영역국가 동의’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유사시에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은 미군이 가지고 있고, 미군은 일본과 공동작전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역국가 동의’ 규정은 집단 자위권 관련법인 무력공격사태법 개정안에는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윤병세 외교장관은 “이번 지침은 무엇보다 북핵위협을 넘어 중국의 부상 등 근본적인 안보환경 변화에 맞춰 미일간 중장기적 협력 방향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아태 재균형 정책의 틀 속에서 미국의 동맹국에 대한 역할 증대 요청에 일본이 적극 부응한 것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정부가 가이드라인 제정과 미일 신밀월시대 개막이 가지는 엄중한 정세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는 불명확하다. 
  미일 가이드라인 개정은 주변사태를 일본에 영향을 주는 위기로 확장해서 한반도에 일본이 미군 지원 명목으로 개입할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한미일 3국 군사협력을 강화해서 글로벌 동맹으로 확대하여 한국이 제3국의 분쟁에 개입할 소지가 커졌다는 것이다. 즉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개입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과 한국이 동맹에 연루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결국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인 갈등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미일 가이드라인 개정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갈등시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의 충돌 가능성 △동중국해에서 중국과 미일의 충돌에 한국의 연루 가능성,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한미일 3국 군사력의 공동작전 가능성 △주일미군과 함께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 진출 가능성 등 4가지 문제가 대두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창수(코리아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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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한미일에 “임전태세 있다” 경고

 
 
국방위원회 정책국 “미사일 다종화 경량화 정밀화 지능화”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05/20 [20:3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이정섭 기자

 


조선은 핵타격 수단이 다종화 경량화 소향화, 지능화, 정밀화 되었다며 한미일은 임전태세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경고했다.
 
연합뉴스 등 국내 주요언론들은 20일 북 언론을 인용 조선국방위원회가 정책국 대변인 성명을 통해 자신들의 핵 타격 수단이 '소형화', '다종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정정당당한 자위력 강화 조치에 함부로 도전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조선국방위원회 정책국대변인 성명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미국의 독단과 전횡에 따라 움직이는 기구,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포기한 기구로 전락했다고 맹비난했다. 
 
국방위원회 정책국은 "우리의 핵 타격 수단은 본격적인 소형화, 다종화 단계에 들어선지 오래며 중단거리 로켓은 물론 장거리 로켓의 정밀화, 지능화도 최상의 명중 확률을 담보할 수 있는 단계"라고 주장했다. 
 
정책국 대변인은 "지난 5월8일 성과적으로 진행된 우리 전략잠수함의 탄도탄 수중시험발사는 조선의 군력 강화에서 최절정을 이룬 일대 장거"라며 "세계가 놀라움과 부러움 속에 환호하고 격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변인 성명은 그러나 미국과 일본, 남한의 경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이고 저들에 대한 가장 엄중한 도발이며 따라서 처절함을 감수하게 대응하고 국제적인 공조 분위기를 돋구어 제제와 압박의 도수를 높이려 한다."고 비난했다.
 
성명은 유엔 안보리를 "미국의 독단과 전횡에 따라 움직이는 기구, 공정성과 형평성을 줴버리고(내버리고) 주권 존중의 원칙,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스스로 포기한 기구"라고 몰아부쳤다. 
 
대변인 성명은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 시험발사에 대해 "그 누가 '도발'이라고 걸고 들고 '중지'하라고 고아댄다고(떠든다고) 하여 포기할 일이 아닌 우리의 정정당당한 자위력 강화 조치이며 합법적인 주권행사"라고 피력했다. 
 
성명은 계속해 "진짜 도발이라면 남의 땅에 침략무력을 끌고와 우리 '수뇌부 제거'와 '평양 점령'을 노리고 벌리는 미국의 화약내 풍기는 전쟁연습소동이며 진짜 위협이라면 핵타격 수단을 들이밀어 벌리는 공공연한 핵공갈 소동"이라고 미국을 지목했다.
 
이어 "미국과 온갖 불순 적대세력들의 위협과 공갈이 계속되고 침략과 제도전복의 날강도적인 책동이 노골화되는 오늘의 세계에서 나라의 국방과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국방력 강화 계획을 더욱 힘차게 추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미국과 일본, 남한을 '불구대천의 원쑤'로 규정하며 "제도전복을 꿈꾸는 침략자들의 준동을 짓 부시고 민족의 존엄과 주권을 지키기 위해 마련한 우리의 위력한 타격수단들이 정면과 익측뿐 아니라 등 뒤의 임의의 장소에서도 명중탄을 안길 임전 태세에 있다"고 경고를 이어 갔다.
 

 


한편 조선은 지난8일 잠수함 미사일을 발사를 한후 사출 시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으나 한국과 미국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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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는 정전체제의 민낯


 국제여성평화걷기와 유엔사의 ‘DMZ 관할권’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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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20  23:5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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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여성평화걷기 참석자들이 평양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당초 계획했던 대로 '판문점' 통과의사를 밝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아 의미 있는 첫 행사는 오는 24일 국제여성평화걷기(Women Cross DMZ, WCD) 참가단의 판문점 통과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유엔군사령부(유엔사)와 한국 정부는 판문점이 아니라 개성을 거쳐 경의선 육로를 차량으로 이동해 줄 것을 권유하고 있지만.

 

노벨평화상 수상자 메어리드 맥과이어를 포함한 30여 명의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은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는 판문점을 통해 DMZ를 넘기로 결정했다”고 분명히 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WCD 참가단이 평양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정전체제를 넘어 판문점을 오간 사람들

미국, 스웨덴, 일본 등 다양한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과 해외동포들로 구성된 WCD 참가단이 판문점을 통해 내려올 경우 진풍경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판문점은 인도적 신병인도나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방북한 통일운동가의 일방적 귀환 외에 이같은 평화행진이 이뤄진 적은 없기 때문이다.

보통 표류해온 남북 어민들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가는 경우가 가장 많고, 1993년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송환에 이어 6.15공동선언에 따라 2000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송환됐고, 2005년 10월 2일 비전향장기수 정순택 유해가 북측 유가족에게 인도되기도 했다.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방북했던 문익환 목사는 중국과 일본을 거쳐 귀국해 구속됐지만 전대협 대표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은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과해 내려와 곧바로 구속됐다. 이후에도 김일성 주석 1주기 조문을 다녀온 박용길 장로와 6.15 10주년 평양행사에 참가한 한상렬 목사,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 경축 열병식에 참가한 노수희 범민련남측본부 부의장 등이 판문점을 거쳐 돌아와 구속됐다.

이 외에도 1959년 <프라우다> 평양지국 이도운 기자가 귀순해왔고, 가장 유명한 귀순사건은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기습 귀순한 이수근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다. 2012년 10월 북한 병사가 전방부대 초소문을 두드릴 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이른바 ‘노크 귀순’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2013년 10월 25일에는 월북했던 남측 주민 6명을 북측이 판문점을 통해 인계해주기도 했다.

정전체제의 민낯, 유엔사의 DMZ와 JSA 관할권

 

   
▲ ‘Women Cross DMZ’는 국내외 여성 평화활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3월 11일 뉴욕에서 '국제여성평화걷기'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들은 처음부터 DMZ를 도보로 횡단하겠다고 밝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WCD 참가단은 19일 베이징 기자회견에서 “판문점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곳이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전쟁의 가장 상징적인 잔재”라면서 “대표단이 판문점으로 DMZ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유엔사 측에 거듭 요청했다.

 

WCD 측은 이 행사를 기획할 때부터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 여성의 날'인 5월 24일 판문점을 걸어서 통과하겠다는 구상을 세웠고, 지난 3월 11일 뉴욕 유엔본부 앞에서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할 것을 촉구하면서 이같은 구상을 밝힌 뒤 일관되게 고수해왔다.

이에 대해 통일부 관계자는 20일 “유엔사와 우리 정부가 협의해 판문점 보다는 경의선 육로를 통해 내려오면 좋겠다고 WCD 쪽에 권고했다”며 “판문점은 정전체제를 관리하는 곳이지 민간인들이 출입하는 곳은 아니다”고 말했다. 또한 “우발적 사건이라도 안전 문제가 될 수 있는 민감한 곳인데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겠느냐”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비무장지대(Korean Demilitarized Zone, DMZ)는 한국전쟁 이후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에 의해 성립된 지대로, 군사분계선(MDL)에서부터 남북으로 각각 2km의 범위로 설정되어 있다.

정전협정 제1조(군사분계선 및 비무장지대) ⑽항에는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남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총사령관이, 이북은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공동으로 책임진다”고 명기돼 있다. 즉, DMZ 남측 구역은 유엔사가 관할하고 있는 실정.

더구나 이들이 통과하길 희망하는 판문점은 공동경비구역(Joint Security Area, JSA)에 속한다. JSA는 한반도의 정전상태를 관리하는 군사정전위원회(유엔사측과 북한.중국측으로 구성) 운영을 위해 군사분계선상(MDL)에 설치한 동서 800m, 남북 400m 장방형의 지대다. 유엔사의 직접 관할하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유엔사측은 남북 철도연결 사업 당시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 지점에 대해 행정권인 관리권(adminstration)을 남측에 이양했지만 관할권(jurisdiction) 마저 넘긴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고, 지금도 개성공단으로 향하는 경의선 육로 통과자들의 명단이 유엔사에 통보되고 있는 실정이다.

유엔사 관계자는 19일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출입하는 문제이며, 유엔사는 관할구역인 DMZ를 건너는 상황에 대해서만 관여한다는 입장”이라며, “한국 정부의 승인이 났을 때 유엔사는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유엔사와 남측 정부가 WCD 참가단의 판문점 통과를 꺼리는 이유가 유엔사 모자를 쓴 주한미군에 의해 이곳의 관할권이 행사되고 있다는 ‘정전체제의 민낯’이 전 세계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대두되고 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정전협정에 의해 유엔사가 남측 관할권이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하고 “남북이 군사적 대치 상황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것을 부담스러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여성평화걷기, 평화체제 서막 여나

 

   
▲ ‘2015 Woman Cross DMZ 한국위원회’는 4월 23일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행사 계획을 발표했다. 이들은 “신변안전보장을 못 받더라도 여성들은 걷는다”고 선언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WCD 한국위원회 실행위원인 안김정애 평화여성회 상임대표는 “오늘 통일부측의 요청으로 면담을 가졌지만, 통일부는 여전히 경의선으로 오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했다”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한 역사적 공간으로서 판문점의 상징성이 중요하다”고 재강조했다.

 

안김정애 상임대표는 “WCD 국제공동대표단은 이미 어제 오후 북한에 들어가서 전혀 연락도 안 되고, 취할 방법도 없다”며 “그들은 원하는 대로 판문점으로 올 것 같다”고 전망했다.

따라서 WCD한국위원회는 이들이 내려오는 24일 버스 2대를 이용해 판문점으로 마중나가기 위해 유엔사측에 명단 제출을 추진 중이다.

안김정애 상임대표는 “여성이 평화체제의 주체가 돼 정전체제를 깨는데 의미가 있다”며 “유엔사와 정부는 우리가 원하는 바람대로 해주길 원한다”고 촉구했다.

2013년 8월 오토바이를 타고 경의선 육로를 통과한 뉴질랜드인 5명이나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8월 진행됐던 국제오토랠리(유라시아 자동차 대장정)는 모두 경의선 육로를 이용했다.

따라서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을 포함한 국제여성평화운동가 30여명이 처음으로 판문점 MDL(군사분계선)을 넘어서는 순간은 또 하나의 역사적 장면으로 기록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작 WCD 참가단에 해외동포들은 포함돼 있지만 남과 북의 여성들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더구나 남북 당국과 민간은 6.15공동행사와 8.15공동행사 개최 장소를 두고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이 한반도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나가는 것을 환영하며, 광복 70주년 을 계기로 남북의 민간과 당국도 남북을 오가며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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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오픈 기념 …함세웅 신부 - 김종철 이사장

 

˝제2민주화, 5월광주 - 6월항쟁 힘으로˝
[특집 대담 ①] 홈페이지 오픈 기념 …함세웅 신부 - 김종철 이사장
 
 
기사입력 : 2015.05.18 03:51  |  최종수정 : 2015.05.19 17:52  페이스북  트위터
 
자유언론실천재단 홈페이지가 광주민중항쟁 35주년을 맞이하는 2015년 5월 18일 문을 열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사의 횃불로 살아 있는 그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며 홈페이지의 첫 번째 기사로 함세웅 신부(민주주의국민행동 상임대표, 자유언론실천재단 고문)와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의 대담을 싣는다. 김 이사장이 묻고 함 상임대표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인터뷰를 정리했다. 2회에 걸쳐 연재된다. - 편집자.
 



‘암흑 속 횃불’ 광고로 유신독재 대대적 고발 

▷김종철(이하 김) : 올해로 5월 광주민중항쟁이 35주년을 맞았습니다. 그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해주실까요?

▶함세웅(이하 함) : 그날의 ‘광주’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것은 민중의 용감한 투쟁인 동시에 민족사의 비극이자 참사였습니다. 저는 1987년 6월항쟁 직전에 한 수녀님의 말씀을 듣고 새삼스럽게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서강대 3학년인 청년이 어느 날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전국을 여행하다가 광주 망월동묘역에 갔답니다. 그는 13살 된 중학생의 묘비 앞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저렇게 어린 학생이 총탄을 맞아 숨진 것을 알았을 때 부모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겠지. 나는 저 중학생보다 10년이나 더 살았구나.’ 그 청년은 묘지 앞에서 깊은 묵상을 하면서 그 중학생을 항쟁의 대열로 이끈 어떤 신비한 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울에 와서 성당을 찾아가 고백성사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모셨습니다. 수도자와 사제의 권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그 청년을 하느님께로 인도한 것은 바로어린 학생의 숭고한 죽음이었습니다. 저는 5월 광주의 정신은 십자가의 힘과 같다고 믿으면서 신자들과 함께 망월동묘역 참배를 계속했습니다. 신자들도 그 중학생의 묘비 앞에서는 숙연해지더군요. 

전두환 일파는 망월동묘역을 없애려고 갖은 공작을 벌였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 같은 그곳을 군사독재의 힘으로 지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갈릴리지방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들과 기쁨과 희망을 함께하셨습니다. 망월동은 한국의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곳입니다. 따라서 광주는 고난의 땅이지만 동시에 민족의 부활, 희망의 횃불이기도 합니다. 
 



▷김 : 광주민중항쟁의 정신과 이념을 오늘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구현하면 좋겠습니까? 

▶함 : 민주화를 향한 연대의식으로 박정희의 후계자들인 전두환과 노태우 일파에 맞서 떨쳐 일어난 것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이른바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들은 침묵을 지켰지만 광주의 전남대 학생들이 과감하게 쿠데타에 항거하고 나섰습니다. 항쟁 기간에 광주 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눠 먹으며 동지애를 다졌습니다. 거기서는 단 한 건의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것이 광주공동체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남한의 5천만 겨레는 바로 그 아름다움을 계승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광주를 방문할 때마다 안타깝고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광주 정신’을 물려받고 있다고 자처하는 여러 단체들이 그때의 초심을 잃어버리고 서로 대립하거나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현재 제일야당과 많은 국민들이 보이는 자세도 유감스럽습니다. 지난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 기간에 국정원과 보훈처, 국군사이버사령부 등이 저지른 선거부정이 명백히 드러났고, 투개표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행위에 대해 시민 28만여명이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는데도 새정치민주연합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의 국정원장 원세훈이 구속되었는데도 소수를 빼고 많은 국민이 침묵했습니다. 이것은 권력의 불의에 맞서 싸운 광주항쟁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물려받은 박근혜를 응징하고 제2의 민주화를 이루는 과업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40여년 동안 민주·민족·민중운동을 함께 해온 동지들, 그리고 젊은 세대의 일꾼들과 뜻을 한데 모아 지난 3월 24일 민주주의국민행동 발기인대회를 가졌습니다. 선조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3·1운동 때의 투지를 이어받고, 미군정과 야합한 이승만의 독재를 물려받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후예들인 현재의 집권세력을 타파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단을 구실로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는 수구보수세력을 척결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하고 재벌을 비롯한 기득권층을 더 부유하게 하는 신자유주의를 추방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경제체제를 이룩해야 합니다. 저는 제2의 민주화운동이 광주항쟁과 1987년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황새 부상 크게 보도… 학생데모는 안 실려” 

▷김 :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보겠습니다. 신부님이 언론에 관심을 갖게 되신 것은 언제인가요?

▶함 : 1973년에 로마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1974년 4월 박정희 정권이 민청학련사건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습니다. 그리고 5월에는 “북한을 추종하는 노농정권을 세우려고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인혁당사건을 발표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두 사건 모두 중앙정보부가 살인적인 고문으로 조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구속된 분들의 가족을 통해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야만적인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심한 일은 언론이 그런 사실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박 정권은 그해 7월에는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혐의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님을 구속했습니다. 지 주교님은 구속되기 직전에 유신독재를 강하게 비판하는 양심선언을 발표하셨는데 그 사실조차 신문과 방송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언론의 속성을 잘 모르던 저는 얼마 뒤에야 그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앙정보부 간부나 직원이 동아일보사를 비롯한 언론사에 상주하면서 편집이나 제작에 일일이 간섭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저항하는 언론인들은 ‘남산’이라고 불리던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고문이나 폭행을 당해야 했습니다. 

저는 당시 사제단 총무와 대변인을 맡고 있었는데 기자들은 이런 하소연을 했습니다. “천연기념물인 황새가 다치면 신문 사회면 머리에 나오는데 학생들이 데모를 하면 1단기사도 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명동성당에서 기자들을 만나면 특히 KBS 기자에게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치곤 했지요. 그리고 주변에서 감시를 하는 중앙정보부원이나 사복경찰도 나가라고 요구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참담한 현실에서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빼앗긴 언론자유를 되찾고 ‘기관원’이라고 불리던 정보기관원들의 언론사 출입을 거부한다는 내용이었지요. 저와 동료 사제들은 그 소식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튿날부터 동아일보에 민청학련이나 인혁당에 관한 기사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김 : 그런 현상을 깨뜨리려고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언론인들이 그해 11월 12일 일으킨 제작거부 운동을 기억하시는지요?

▶함 : 네, 며칠 전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바로 그 전날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각 교구 주교좌 성당들에서 일제히 인권회복기도회가 열렸습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가족들이 고문의 진상을 폭로하고 사제, 수도자, 교우와 많은 시민들이 그들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은 그 기도회가 아주 중요한 사건이니 11월 12일자 석간 1면에 사진을 곁들여 5단으로 보도하거나 사회면 머리에 올리고 동아방송 뉴스에도 맨 앞에 내보내라고 편집국장과 경영진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경영진이 거절하자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이 농성을 하면서 신문과 방송의 제작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날 하루가 지난 뒤에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는 인권회복기도회가 크게 보도되었지요. 
 



동아일보·방송 기자들 자유언론 투쟁 지원

▷김 :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박 정권이 저지른 만행이 보도되기 시작한 뒤 구속자 가족들의 호소, 천주교의 인권회복기도회와 개신교의 목요기도회 소식이 크게 보도되자 박정희는 최대의 위기라고 생각하고 1974년 12월 하순부터 중앙정보부를 통해 동아일보사에 대해 광고탄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백지로 변하게 된 동아일보 광고면에 격려광고가 실리면서 놀라운 민중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사제단은 그때 동아일보에 많은 격려광고를 실었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광고는 무엇이었습니까?

▶함 : 12월 31일자 동아일보 8면 전체를 차지한 ‘암흑 속의 횃불’이라는 광고입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비롯해서 지학순 주교님의 양심선언 등 박정희 유신독재의 실체를 대대적으로 알리는 내용이었지요. 당시 언론은 물론이고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충격적인 사실들이 실렸으니 박정희가 보고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그 광고를 싣기 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 문안을 보여드렸더니 이런 내용이 어떻게 신문에 나가겠느냐고 걱정하시더군요. 그러나 정작 ‘암흑 속의 횃불’이 나온 동아일보를 보시고는 매우 놀라시면서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특집대담②]에서 계속)
 


▲ 김종철 이사장(좌)과 함세웅 신부(우)가 대담을 마치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김종철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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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놈 병원에서 내보내라' 우익 민원 때문에"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5/21 07:05
  • 수정일
    2015/05/21 07:0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인터뷰] 세월호 유가족 '유민 아빠' 김영오씨... 46일 단식 그 뒤

15.05.20 20:28l최종 업데이트 15.05.20 20:2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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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민 아빠' 김영오씨
ⓒ 윤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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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고 1년. 특별법 시행령 시행과 인양에 대해 정부와 유가족 및 시민의 지난한 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진실규명을 외치는 시민들은 허탈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피해자 가족 당사자들의 심경은 어떨까. 지난해 7월 14일부터 46일간 단식을 하며 싸운, 세월호 사고 희생자 고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 뜨거운 여름날 사선을 넘나들며 진실을 외친 유민 아빠를 17일 안산시 부곡동 자택 앞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미운 게 많아질 것 같아요.
"미운 거 많죠. 사람이 미운 게 아니라 현실이 미워요.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건데. 돈을 이야기하다니요. 이렇게 궁지로 몰아가는 현실이 슬퍼요." 

-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해하는 시민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뜻은 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진실이니까요. 1년이 지난 지금 저렇게까지 버티면서 훼방을 놓는 것을 보면 분명하잖아요. '(정부가)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 틀림없다.'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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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민 아빠' 김영오씨
ⓒ 윤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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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식 이야기를 해볼게요. 회복은 많이 되셨나요?
"46일 단식했어요. 회복기간 즉 복식기간을 단식기간의 두 배 들여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90일 넘게 해야 하는데. 40일 정도 되었을 때 병원에서 나가달라고 하더라고요. 민원이 너무 많이 들어온다고요." 

- 민원이요?
"나쁜 놈이 병원에 있다고, 내보내야 한다고. 우익단체 어르신 같은 분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이 계속 병원에 전화를 했나봐요. 민원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병원에서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나가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왔죠. 뭐."

- 후유증이 심하시겠네요. 
"하루 한 끼 정도밖에 못 먹어요. 속이 안 좋아서요. 그리고 피곤을 많이 타요. 하루 외출하고 나면 그 다음 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자게 돼요. 얼마 전부터는 힘들어지면 그냥 자고 싶은 생각만 들기도 해요. 올해 1월부터인가, 유민이가 꿈에 가끔 나오거든요. 예전에는 꿈에 나온 적이 없었어요. 꿈에 안 나오면 좋은 데로 간 거라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척 그리웠거든요. 꿈에 유민이가 웃으면서 다가와서 폭 안겨요. 잠에서 깨면 울고 있어요. 그래도 좋아요. 너무 그리웠던 유민이를 만났으니까요."

"하루 한 끼밖에 못 먹어... 1월부터 유민이가 꿈에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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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원고 2학년 10반 고 김유민양의 책상. 5월 17일 밤에 촬영.
ⓒ 윤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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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민이 이야기를 해주세요. 어떤 아이였나요?
"큰딸 유민이는 혼자인 저에게 이 세상에서 유일했던 보호자였어요(기자 주 : 김영오씨는 유민 엄마와 이혼했다). 제가 해준 2만9천 원짜리 (휴대전화) 요금제도 비싸다고 1만9천 원짜리로 바꾼 아이. 수학여행 갈 때도 연락하지 않고 갔어요. 알면 아빠가 용돈 부쳐줄 거 뻔히 아니까. 용돈을 받으면 십 원 한 장 안 쓰고 저금을 할 정도로 알뜰했고, 수학을 잘해서 (제가) 은행원이 되라고 했죠.

마음이 고와서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아이. 유민이 동생한테 들었는데요, 한번은 집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왔는데 종이로 걷어내서 바깥에 날려주면서 '좋은 데로 가라' 그랬대요."

- 유민이랑 가까웠나요?
"같이 못 살아서 아빠가 밉기도 했을 텐데, 만나면 항상 꼭 붙어 있었어요. 가끔 명절 때나 시골(고향)에 가면 삼겹살 파티 같은 것을 했거든요. 제가 고기를 구우면 뒤에서 꼭 안고 있던 아이예요. 저희 6남매 중에 그런 자식을 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참 많이 부러워했어요. 유민이랑 동생이랑 제 왼쪽 오른쪽 팔에 끼고 잠들곤 했죠."

- 유민이가 바다에서 언제 올라왔죠?
"(지난해) 4월 25일 164번째요. 깨끗하게 올라왔어요. 그런데 많이 야위어있더라고요. 두 달 전 명절 때 봤을 때 분명이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우리 유민이가 살이 올라서 보기 좋다'고 했거든요. 혹시 배 안에서 며칠 더 살아 있었을까봐, 고통스러웠을까봐 마음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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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원고 2학년 10반 교실. 5월 17일 밤에 촬영.
ⓒ 윤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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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가장 궁금한 건 무엇인가요?
"많죠. 그 중에서도 저는 대통령이 참사 당시 7시간 동안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UDT가 왔을 때 해경청장이 상부에서 승인이 안 떨어져서 투입 못 시킨다고 했어요. 총리가 내려왔을 때도 그랬어요. 자기는 힘이 없다고. 그러면 승인을 내줘야 하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대통령이라는 거잖아요. 7시간 동안 무엇을 했기에 골든타임 다 놓치고, 구할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냐는 거예요."

- 개인적으로 어떤 점이 제일 속상하세요?
"저를 나쁜 아빠로 보는 거요. 왜 저를 배제하려고 하는지, 왜 저를 정치적으로 보려 하는지요. 대통령은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요, 정치인들은 신뢰를 잃었어요. 저는 아빠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예요. 저는 뭐가 먼저인지 아는 사람이에요. 처음으로 얻은 정규직 직장도 잃었어요. 노가다를 하면 어때요? 저는 다 해봤어요. 두렵지 않아요. 세월호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에요. 꼭 진실을 밝혀야 해요. 그리고요, 저는 다른 거 없어요. 이 모든 게 다 끝났을 때,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한마디면 돼요." 

세월호 사고 1주기에 전국에서 많은 시민들이 모여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다행이었다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 학생들이 찾아와 10년 후 자신들이 정치인이 돼 이런 아픔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하는 말에 희망을 봤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 시행령을 반대하며 광화문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다 다리에 문제가 생겨 절뚝이면서도 끝까지 "같이 가자. 함께해달라"고 당부했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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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부터 변질... 신군부 잔혹성·책임자 처벌 등 삭제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5/20 13:00
  • 수정일
    2015/05/20 13:00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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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집단발포' 빠진
보수정권의 5.18 경과보고

[분석] 2011년부터 변질... 신군부 잔혹성·책임자 처벌 등 삭제

15.05.20 10:37l최종 업데이트 15.05.20 11:2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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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5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국무총리 직무대행 자격으로 참석한 최경환 경제부총리,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최정길 5·18민주묘지관리소장이 나란히 입장하고 있다. 박 소장(앞줄 왼쪽)은 이날 기념식에서 5·18 3개 단체와 광주지방보훈청장을 대신해 경과보고를 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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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정부 주관의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식이 열린 국립5.18민주묘지. 최정길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장이 '5.18 경과보고'를 위해 마이크 앞에 섰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로 시작한 최 소장의 경과보고는 "희망의 새 시대를 만들어가겠다는 것을 5.18 희생영령께 결연히 다짐한다"는 말을 끝으로 3분 50초 만에 마무리됐다. 

최 소장의 경과보고는 즉각 논란을 낳았다. 그동안 5.18 경과보고는 2008년까지 '5월 3단체(5.18유족회, 5.18부상자회, 5.18구속부상자회)'의 대표가, 이후에는 광주지방보훈청장이 해왔다. 광주지방보훈청장은 고위공무원 나급(2~3급)의 일반직 공무원이,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장은 4급 서기관 또는 기술서기관이 맡는다.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로 5.18유가족·시민사회단체가 옛 전남도청 앞에서 따로 기념식을 열고, 국무총리 직무대행(최경환 경제부총리)이 기념사를 읽는 등 초유의 상황과 맞물려, "정부가 기념식의 격을 떨어뜨렸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문제는 보고자의 '급' 만이 아니었다. 최 소장이 낭독한 경과보고에는 '신군부', '계엄군의 집단발포',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작전' 등 당시 국가 폭력의 책임자와 그들의 잔혹성을 담은 내용이 빠졌다. 이날 기념식에 참석한 진성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최 소장의 경과보고는) '시위대와 진압군이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운운하며 전두환 신군부의 학살 만행을 슬쩍 은폐하려 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는 이번 정부 주관 기념식에서 최 소장이 읽은 경과보고와 5.18유가족·시민사회단체가 별도로 연 기념식의 경과보고, 또 2008년 이후 열린 5.18 기념식의 경과보고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이명박 정권 중반부터 축소되기 시작한 5.18 경과보고 내용은, 이후 국가 폭력의 주체(신군부)와 그들의 만행 및 처벌을 묘사한 문구가 조금씩 사라지며 지금에 이르렀음을 확인했다.

두 곳의 기념식, 두 개의 경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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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에 항의하며 5.18 유가족·시민사회단체가 18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서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식을 따로 연 가운데, 신대운 전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가 5.18 경과보고를 낭독하고 있다.
ⓒ 강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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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부 주관 기념식의 경과보고(편의상 경과보고A)의 문제점은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로 5.18유가족·시민사회단체가 옛 전남도청 앞에서 따로 연 기념식의 경과보고(편의상 경과보고B)와 비교해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기사 하단에 경과보고A·B 전문). 

신대운 전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가 약 8분 동안 읽은 경과보고B는 5.18의 배경과 과정, 잔혹성, 책임자 및 책임자 처벌, 의미 등을 상세히 담았다. 

반면 최 소장이 읽은 3분 50초짜리 경과보고A에는 국가 폭력의 주체이자 책임자인 신군부라는 단어가 아예 빠져 있다. 이외에도 ▲ 5월 21일 금남로에서 벌어졌던 계엄군의 집단발포 ▲ 도시 외곽 지역에서의 양민 학살 ▲ 5월 27일 탱크와 무차별 사격을 동원한 전남도청 진압 작전 등 신군부의 잔혹성이 담긴 내용도 생략돼 있다. 

"(5.18 이후) 군부정권은 5.18 묘지를 없애버리기 위해 유가족들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묘지 이장을 획책하는 등의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는 5.18 이후 정부의 은폐 시도 역시, 경과보고A엔 없다. 또 경과보고B에는 '책임자 처벌 과정'을 설명한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지만 경과보고A에는 정부의 명예회복 노력과 관련된 내용만 담겨 있다.

"1988년 여소야대 국회에서 5.18 진실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가 시작되어 계엄군의 만행이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부상을 입은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상이 시행되었습니다. 

1994년 5월, 5.18민중항쟁연합은 광주학살책임자 35명을 서울지검에 고소하면서 5․18진실규명과 학살책임자들의 단죄를 시도하였고, 1997년 결국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학살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워 단죄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 경과보고B 중

'집단발포'가 '공방전'으로... "5.18 폄훼 답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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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19일광주 금남로에 투입된 계엄군이 양손에 진압봉을 받쳐들고 시위군중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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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국가보훈처가 최종 작성하는 5.18 경과보고와 관련해, 지난해에도 비슷한 논란이 벌어진 바 있다(관련기사 : 보훈처, 5·18 강제진압 작전을 '해산 시도'로). 당시 전홍범 광주지방보훈청장이 읽은 경과보고는 1980년 5월 27일 탱크를 앞세워 무차별 총격을 가한 전남도청 진압 작전을 "해산 시도"라고 명명해 "역사왜곡을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우리가 봐도 의아스럽다"면서도 "지난해(당시 기준 2013년)와 같은 내용인데 왜 그땐 문제제기가 없다가 지금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5.18 경과보고는 언제부터 변질되기 시작한 걸까. 5.18의 진상을 충실히 담고 있는 경과보고B는 2008년까지 '5월 3단체' 대표들이 돌아가면서 발표한 내용과 상당 부분 흡사하다. 이후 2009년 당시 장갑수 광주지방보훈청장이 발표한 경과보고(바로보기), 2010년 영상으로 대체된 경과보고(바로보기)도 대체로 이전 내용을 여과 없이 담고 있다.

문제는 2011년에 한 경과보고에서부터 발견된다. 당시 안중현 광주지방보훈청장이 발표한 3분짜리 경과보고(바로보기)에는 처음 '신군부', '계엄군의 집단발포',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작전' 등의 내용이 빠졌다. 

신군부라는 단어는 아예 찾아볼 수 없고, 계엄군의 집단발포와 관련된 내용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사경을 헤맸다"로 바뀌었다. 

전남도청 진압 작전도 "1980년 5월 27일 열흘 동안의 5.18은 막을 내렸다"로 희석시켰다. 5.18 이후 정부의 은폐 시도, 책임자 처벌 과정도 2011년 경과보고부터 삭제됐고, 이것이 이번에 문제가 된 경과보고A의 기원이 되고 있다.

5월 단체의 한 주요 관계자는 19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참석을 거부한 상황에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경과보고 뿐만 아니라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 등 5.18을 폄훼하려는 것과 관련해 그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평을 하고 싶지도 않다"고 토로했다.

아래는 18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정부 주관 기념식의 경과보고A와 같은 날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5.18유가족·시민사회단체 주관 기념식의 경과보고B 전문이다.
 
두 개의 5.18 경과보고
□ 5.18 경과보고A(정부 주관 기념식, 최정길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장 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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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5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국무총리 직무대행 자격으로 참석한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헌화·분향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최정길 5·18민주묘지관리소장(오른쪽)은 이날 기념식에서 5·18 3개 단체와 광주지방보훈청장을 대신해 경과보고를 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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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의 경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로 광주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했습니다.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학생들의 항의시위로 계엄군과 충돌함으로써 518민주화운동은 시작됐습니다. 이날부터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시민들이 합류하여 광주 전역으로 확산됨에 따라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감행됐습니다. 

5월 19일 시위 규모가 확대되고 격렬해지면서 인명피해가 늘어나자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이 모여 시위진압을 완화하도록 건의했습니다. 5월 20일 오후 차량시위를 계기로 광주시민들은 광주에서 민주주의와 시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였습니다. 

다음날인 5월 21일 오후 1시경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계엄군과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야 했습니다. 5월 21일 오후부터 27일 새벽까지 광주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줄을 이었으며 수습대책을 강구하는 등 치안부재의 상황에서도 성숙한 시민자치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마침내 열흘 동안의 5.18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5.18의 진실을 규명하고 민주화 실현을 위해 투쟁한 국민들의 승리였으며, 5.18과 그 정신의 계승 과정에서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의 댓가이기도 했습니다. 

2001년 12월, '518.민주화운동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이 제정돼 5.18은 그 명예를 회복하게 됐습니다. 2011년 5월에는 기록물이 우리나라 현대사 자료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자료적, 역사적으로 그 가치를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35년 지난 지금도 많은 5.18 유공자와 유족들은 시위 과정에서 얻은 정신적, 신체적 상처로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5.18 35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온 국민이 감사한 마음을 담아 5.18 유공자와 유족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드리고, 이 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밑거름으로 해 국민통합을 이룩하고 하나의 대한민국, 희망의 새 시대를 만들어가겠다는 것을 5.18 희생영령께 결연히 다짐하면서 경과보고를 마치겠습니다.

□ 5.18 경과보고B(유가족·시민사회단체 주관, 신대운 전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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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 민주광장에서 별도의 5·18 35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5·18유가족회 등 5월 관련 3개단체, 광주전남지역 시민사회단체, 5·18민중항쟁 기념행사위원회가 개최한 기념식에는 5·18 유가족, 시민, 세월호 유가족, 정치인 등 1천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식 참가자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 강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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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를 비롯한 전라남도 일원에서 일어난 5.18의 경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5.18은 국가권력을 강점하려했던 신군부의 반민주적 책동에 맞서 1980년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대학생들의 시위를 계엄군이 유혈진압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은 시위 여부와 관계 없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진압봉으로 구타하고 심지어 총검까지 사용하는 유혈진압을 자행하여 순식간에 광주는 아비규환의 도시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계엄군의 잔학한 만행에 분노한 광주시민과 전라남북 도민은 5월 20일 차량시위를 계기로 계엄군과 적극적으로 맞서 민주주의와 시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였습니다.

5월 21일, 분노한 시민들의 저항에 밀린 계엄군은 오후 1시경 계엄군의 잔인한 만행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며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날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50명이 넘는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천 명의 부상자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야 했습니다. 오후 광주시내에서 퇴각한 계엄군은 광주를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시키는 작전으로 변경하였고, 광주 외곽에서 주둔하는 동안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이날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헌혈행렬이 줄을 이었고, 치안부재 상황에서도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완벽한 시민자치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시민학생민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어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으로부터 광주를 지키고 자체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투쟁을 지속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 27일 새벽, 신군부는 광주시민들의 평화적인 노력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의 난동에 의해 광주가 무정부상태가 되어 시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조작된 명분을 내세워 무력으로 진압을 강행하였습니다. 탱크를 앞세우고 진입하는 계엄군과 맞서 광주시민들은 마지막까지 전라남도 도청에 남아 저항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또다시 수많은 시민들이 총에 맞아 사망하거나 붙잡혀 끌려갔고, 열흘 동안의 5․18민주화운동은 참혹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5월 27일 도청에 남아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시민군들의 장렬한 희생은 이 나라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가슴에 정의와 양심으로 부활하기 시작했고, 광주학살을 통해 국가권력을 강점했던 신군부 세력에게는 씻을 수 없는 국민학살이라는 원죄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5.18은 1980년 5월 27일 막을 내렸지만 해마다 5월이 되면 5.18의 희생자들이 묻혀있던 5.18묘지는 이 나라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투쟁의 뜻과 힘을 모으는 결의의 장이 되어 왔습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갖게 된 군부정권은 5․18묘지를 없애버리기 위해 희생자 유가족들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묘지 이장을 획책하는 등의 만행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뿐만아니라 5.18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들의 처벌을 통해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투쟁하는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 땅의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분신과 투신 등으로 산화해 가기도 하였습니다. 

5.18을 계기로 시작된 국민적 민주대장정은 1987년 6월 항쟁을 정점으로 군부정권을 굴복시켰고, 1988년 여소야대 국회에서 5.18 진실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가 시작되어 계엄군의 만행이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5.18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부상을 입은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상이 시행되었습니다.

1994년 5월, 5.18민중항쟁연합은 광주학살책임자 35명을 서울지검에 고소하면서 5.18 진실규명과 학살책임자들의 단죄를 시도하였고, 1997년 결국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학살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워 단죄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상의 투쟁성과를 바탕으로 2001년 12월, 국회에서 '5.18민주화운동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이 제정되어 5.18은 참혹했던 상흔을 딛고 법적, 제도적으로 그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5.18은 반인륜적 학살책임자들의 단죄, 그리고 제도적 명예회복, 민주화를 향한 끊임없는 투쟁의 밑거름이 됨으로써 세계 각처의 민주, 인권, 정의를 위한 운동은 물론, 과거청산과 기념사업의 수범이자 선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1993년 정부에서는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희생자들의 묘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지금의 묘지가 조성되어 2001년 5.18민주유공자예우법 제정에 의해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산 교육장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2011년 5월에는 우리나라 현대사 자료로는 최초로 5.18 기록물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5.18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 민주화의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보편적 가치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다시는 국가폭력과 반인륜적 만행이 발붙일 수 없을 만큼 민주주의를 성장시켰고, 후손에 물려줄 자랑스러운 역사로 5.18이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5.18민주유공자들과 광주시민을 대신하여 그동안 5.18민주화운동의 명예회복과 정신계승 투쟁에 힘과 뜻을 함께 해주신 국민여러분께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하며, 1980년 5월 투쟁과정에서 희생되신 분들의 유가족을 비롯하여 부상과 고문 등의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는 5.18민주유공자들의 상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바,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부탁드리며 경과보고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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