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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정권교체는 시민권력이라야 가능…”

 
“2017 정권교체는 시민권력이라야 가능…”
 
4.29 재보선 광주 서구(을) 평가토론회 개최한 광주시민정치위원회 주장
 
임두만 | 2015-07-01 08:20:2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사단법인 광주연구소와 4.29보궐선거대책시민정치위원회는 30일 광주 YMCA에서 4·29 광주서구(을) 보궐선거 평가 토론회를 통해 향후 시민정치활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를 다졌다. 개회식을 포함해 총 3부로 이뤄진 이 토론회는 향후 호남 특히 광주의 정치지형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광주시민정치위원회 주최 4.29재보선 평가토론회 © 임두만

김대현 광주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실장의 사회로 열린 개회식이 끝난 뒤 나간채 광주연구소 이사장의 사회로 시작된 약정토론에는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의 <4·29 재보선에 나타난 정당정치의 현주소>란 제목의 발제가 있었으며, 이 발제에 대해 지병근 조선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와 천성권 광주대학교 교수의 평가토론이 있었다.

이 토론이 끝나자 최영태 전남대학교 교수의 <4·29보궐선거(광주서구을)와 지역정치>란 발제를 놓고 김상집 광주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나기백 전 참여자치21 대표, 황정아 전 여성단체연합 대표 등이 나서 열띤 토론을 전개했다.

이어진 종합토론은 나상기 민주평화 광주회의 총무의 사회로 참여자 전원이 토론자가 되어 향후 호남과 광주정치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을 밝혔다. 그리고 이 토론회의 종합결론은 현 새정치민주연합을 대체할 새로운 세력으로 시민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1차토론 발제에 나선 김만흠 한국 정치아카데미 원장은 “4·29 재보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지역 유권자 구도에 부합하는 후보 전략도 없었고 대안 없이 동교동계를 불러들였다”며 “이는 새정치연합과 호남의 비대칭 구조를 확인시켜 주면서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원장은 특히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문재인 대표체제의 상황인식이나 전략에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며 “2013년 댓글 정국에서 NLL대화록 공개 공방을 자초한다거나, 성완종 특사 논란에 법무부 책임이라는 황당 발언으로 여당의 물타기에 빌미를 제공하는 등 문 대표의 정세인식과 정치적 역량에 대한 논란은 많았다”고 지적한 것이다.

▲김만흠 정치아카데미 원장 등이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 임두만

또 “문재인 대표 체제의 새정치연합에 대한 불만과 조영택 후보의 경쟁력 부족이 천정배 후보의 압승 배경”이라며 “문 대표는 소외돼 있는 호남 정치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분석으로 호남출신 유권자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서울 관악을 사례를 든 그는 2012년 총선에서도 야권이 분열되어 김희철 무소속 후보가 높은 득표율로 3위를 했으나 이상규 후보가 당선되었다며 새정치연합 후보의 패배는 정동영 출마가 문제가 아니라 ‘친노 후보’가 결정적 이유라고 설명했다. 즉 새정치연합의 4.29대보선 완패는 친노 후보라는 후보 공천 잘못에서 대체적으로 기인했다는 평가였다.

이어서 그는 “친노패권주의 논란과 당의 비대칭 구조의 딜레마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며 “친노는 친노대로, 전통 민주당 지지자는 그들대로 새정치에 대한 충성도가 낮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당 권력과 지지 세력이 유대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김만흠 원장의 발제에 대해 토론에 나선 천성권 광주대 교수는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의 구체적인 자기 혁신과 경쟁적 정당 체제 형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 2년 동안 드러난 인사 난맥, 성완종 사태, 내부 권력 투쟁 등의 반대급부로서 정치적 이득도 누리지 못 하고 있다”며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닌, 정치를 위한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마음이 떠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천 교수는 특히 “호남민심은 지난해 7.30 재보선 당시 순천곡성 유권자들이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를 선택한 것으로 이미 옐로우카드를 내보였음에도 새정치연합이 변하지 않은 친노 지도부에 레드카드를 내밀었다”고 주장했다. 즉 “천정배 후보가 52.4%의 득표율로 새정치연합 조영택 후보(29.8%)에 20% 포인트 이상 압승한 것”을 두고 이런 평가를 한 것이다.

천 교수는 “애초 예측은 박빙의 승부일 것으로 봤으나 결과는 참사수준이었다”며 이를 “호남정치 복원 갈망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이어 “새정치연합이 텃밭에서 패배한 것은 그동안 정치개혁과 올바른 견제를 바라는 민심을 뒤로 한 채 무기력증과 계파갈등에만 몰두해온 것에 대해 지역 유권자들이 크게 실망하고 호남정치 복원을 갈망한 결과로 분석된다”고 평가했다.

이어 “지도부가 구체적으로 자기 혁신을 먼저 보여주고 비주류 역시 자기 개혁을 먼저 보여야 한다”며 “1당 체제인 호남의 경우 새정치연합과 경쟁할 수 있는 정치세력의 등장과 다당제에 부합할 수 있는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어진 토론회에서 최영태 전남대 교수는 새정치민주연합을 거부한 배경에 대해 문재인 대표에 대한 부정적 평가,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행태에 대한 거부감, 호남지역 국회의원에 대한 부정적 분위기(4무 현상), 후보의 상대적 열세 등 4가제를 제시하면서 이를 쇄신하지 않으면 호남에서의 새정연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특히 “지난 대선에서 호남 유권자들은 노무현이나 정동영에 비해 후보의 역량이 뛰어나지 않음에도 문재인 후보에게 광주 92% 전남 89%, 전북 86%라는 압도적 지지를 보낸 것은 오로지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고 한 뒤, 이 압도적 지지에도 문 후보가 패하면서 “호남 몰표에 대한 비난”은 물론 “보수 세력들의 호남 고립화 시도가 노골화되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열띤 토론은 김상집 광주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의 “정권교체는 시민권력이라야 가능하다”는 발제에 이르러 절정을 이뤘다.

이미 “새정련으로는 정권교체가 불가능하다고 진단하고 불임정당을 벗어나 2017 정권교체를 이루자”는 합의는 마음 속으로 상당부분 합의된 것으로서 “한마디로 2017 정권교체를 위해 제3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엘리트를 자처하는 국회의원과 동교동계 등이 모인다고 해서 정권교체가 가능할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소수 엘리트 중심의 정당정치의 악폐를 넘어설 정치세력화는 4․29재보선의 광주모델이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천정배 의원도 토론회에 참석 인사말을 했다. © 임두만

즉 “천정배 후보를 시민권력이 개혁후보로 선정 집중 지원을 함으로써 거대 야당의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게 한 것은 후보의 우위와 함께 시민권력의 성찰에 기인한 바 크다”면서 “이 광주모델을 전국 각 지역에 설명하여 지역마다 시민권력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러한 시민권력이 존재해야만 소수엘리트 중심의 낡은 정당정치의 패악을 극복하는 정치세력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결론을 맺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 참석, 인사말을 한 무소속 천정배 의원은 “신당을 포함한 다양한 방식의 야권재구성 방안을 구상 중에 있으나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면서 “만일 신당을 한다면 새로운 비전, 새로운 인물, 주도세력을 갖춘 전국적 개혁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광주지역의 이 같은 시민사회 움직임이 현재 천정배 의원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신당논의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는 하루였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8&table=c_flower911&uid=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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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가 복지 때문에 망했다? 대표적인 5가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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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은 무섭다. 잘 깨지지 않는다. 그 편견을 조장하는 건 잘못된 정보다. 잘못된 정보가 돌아다니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장 질이 낮은 것 중 하나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거짓 정보’다. 때로는 학자들도, 정치인들도, 또 언론도 거짓정보를 퍼뜨리는 주범이 된다.

그리스 위기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이 높아진 요즘, 아직도 ‘그리스가 복지 때문에 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 재정위기가 불거진 이래 벌써 몇 년째 되풀이된 거짓말이다.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그리스 사태’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5가지를 허핑턴포스트코리아가 정리했다. 어디서 이런 얘기를 했다가는 ‘무식하다’는 핀잔을 듣기 쉽다는 점을 기억해두자.

오해 1. 그리스는 복지 때문에 망했다

“그리스 사태는 국민들이 과잉 복지에 물들 경우 얼마나 되돌리기 어려운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동아일보 사설 6월30일)

한 문장 안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여럿 등장한다. 그리스는 결코 과잉복지 국가가 아니었으며, 복지혜택을 누리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문제는 과거 정부의 무능이었지, 복지가 아니었다.

우선 그리스의 1인당 국민소득(GNP) 대비 정부 복지지출 비중은 21.3%로 유로존 회원국 가운데서는 가장 낮은 수준이다. 덴마크는 26.1%, 핀란드는 24.9%, 스웨덴은 27.3%에 이른다. 단순히 복지지출이 많아서 망한다면 스웨덴부터 망해야 한다.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평균은 19.3%, 우리나라는 7.5%다. 복지지출이 많아서 위기에 직면했다는 비판은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복지지출을 늘리면 그리스 꼴이 될 거라는 비판 역시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미디어오늘 2012년 6월17일)

 
 

그리스의 상류층과 중산층은 제대로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 사회복지제도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지만, 사회복지제도의 혜택에서 소외되고 있다. 그리스 사회복지제도는 통일·집중되어 있지 못하고, 파편화(fragmentation) 되어 있다. 무엇보다 정부 주도성이 약화되고 '민간-공공 파트너십(PPP)'이라는 미명 하에 민간사업자가 대거 참여하여 이윤을 취하고 있다. 그리스의 사회복지제도는 복지 강국인 북유럽 국가들의 모델과는 크게 다르고, 오히려 한국이나 미국 같은 복지 후진국의 모델과 닮았다. 각종 통계 지표는 이를 뒷받침한다. (프레시안 2011년 11월10일)

 
 

 

오해 2. 그리스 국민들은 나태하다

“복지과잉으로 가면 국민이 나태해지고, 나태가 만연하면 부정부패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 연합뉴스 2월5일)

과잉복지와 꼭 붙어다니는 게 ‘나태하다’는 주장이다. 그리스 국민들이 일은 하지 않고 복지혜택만 누리려고 한다는 얘기다. 김무성 대표는 그리스를 그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했다. 틀렸다.

2013년 OECD 통계를 정리한 이 도표 하나만 기억하자. 그리스 국민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 일한다. 독일인들보다 무려 연간 649시간을 더 일한다. 다른 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에서 연간 2000시간 넘게 일하는 건 그리스인들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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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3. 빚을 갚지 않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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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리스 정부를 이끌고 있는 건 지난 1월 총선에서 승리한 시리자 정권이다. 언론들은 시리자를 “급진 좌파 정부”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련의 구제금융 재협상 과정에서 그리스 정부의 주장은 종종 위험할 정도로 ‘급진’적이고 시장경제 원칙을 무시한 ‘좌파적인’ 것들로 그려졌다.

그러나 ‘급진 좌파들이 문제야!’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시리자의 대표적인 공약은 ‘구제금융 재협상’이었다. 애초 불합리한 조건으로 협상이 이뤄졌으니 이걸 다시 논의하자는 얘기다. 시리자는 재협상을 통해 일부 부채 상환은 유예하고, 일부는 탕감 받겠다는 목표를 밝혀왔다.

‘돈을 빌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못 갚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리스는 돈을 빌리는 조건으로 채권자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재정지출을 대폭 줄였고, 빚도 꼬박꼬박 갚았다. 그 결과 채권자들은 돈을 회수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 정부와 국민들은 더욱 가혹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상황이 어려워지니 빚을 갚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다. 악순환이다.

그리스는 유럽 연합 집행 기관, 유럽 중앙은행, IMF로 형성된 '트로이카'가 요구하는 사항을 상당 수준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정부의 재적 적자를 흑자로 바꿨다. 그러나 그에 따른 정부 지출 감소는 예고했던 것처럼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실업률이 25%로 치솟았고, 2009년 이후 GDP가 22%나 감소했으며, GDP 대비 부채 비율도 35% 증가했다. 긴축 반대를 외친 시리자가 최근 선거에서 크게 승리한 건 '이제 겪을 만큼 겪었다'는 그리스 유권자들의 선언과도 같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허핑턴포스트 블로그, 2월5일)

 
 

나 몰라라 하는 듯하지만, 그리스도 할 말이 많다. 위기를 맞고 난 뒤로 겨우 5년 사이에 경제 규모가 4분의 1이나 쪼그라들었다. 실업자는 약 2.5배로 90만명가량 폭증했다. 대공황의 참상이 따로 없다. 이른바 트로이카(유럽연합·국제통화기금·유럽중앙은행)가 짜준 경제 프로그램을 가동했는데도 형편은 계속 더 나빠져갔다. 빚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국가부채를 갚으려면 전 국민이 1년9개월 동안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다 내주어야 할 지경이다. 지금으로선 상환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 재무장관이 말했듯이 국가경제는 이미 파산한 상태다. (한겨레 2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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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탕감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전례 없는 일도 아니며, 오히려 더 나은 해결책일 때도 있다. 그리스의 최대 채권국이라는 독일을 보면 알 수 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50억마르크의 부채를 탕감 받았다. 심지어 주변국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덕분에 독일은 빠르게 위기에서 벗어났다. 선순환이다.

1945년 2차대전에서 패한 독일이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라인강의 기적’은 1953년런던 합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략)
런던 합의는 서독이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할 때만 채권자들한테 빚을 갚을 수 있게 했다. 상환 규모도 무역 흑자의 3%를 넘지 않도록 배려했다. 채권자들로서는 서독한테서 빚을 받으려면 서독 제품을 사는 게 유리했다. 서독의 수출은 늘었다. (한겨레 1월26일)

 
 

프랑스의 유명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사진)가 "그리스 사태로 대변되는 유로존 위기는 회원국들의 거버넌스 실패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피케티 교수는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앤-실바 차사니 파리 지국장과의 인터뷰에서 "이미 많은 부채를 안고 있는 그리스에게 독일과 프랑스가 긴축 정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면서 "이 두 국가들이야 말로 2차 세계대전 후 30년간 채무 탕감을 통한 교육과 혁신, 인프라 투자로 성장을 일군 주인공들" 이라고 비판했다. (아시아경제 6월28일)

 
 

그리스에도 똑같은 방식이 적용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기업이 파산할 경우, 출자전환(debt-equity swap)은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안으로 이용된다. 이와 비슷한 방법을 그리스에 적용한다면, 기존의 채권을 GDP와 연결된 채권(GDP-linked bonds)으로 바꾸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 (경제)가 잘 되면 채권자들도 더 많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채권자들도 그만큼 손해를 입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양쪽 다 성장 회복 정책을 시행할 강력한 유인을 갖게 된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 허핑턴포스트 블로그, 2월5일)

 
 

 

오해 4. 사태가 여기까지 온 건 그리스 책임이 제일 크다

어쨌거나 그리스가 거액의 빚을 낸 건 그리스의 책임이 제일 크지 않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리스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모든 책임을 그리스가 져야 한다는 주장은 가혹하다. 이유가 있다.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얘기하는 게 있다. 바로 ‘유로화’다.

IMF(국제통화기금) 등에서 국가재정 및 개발원조 업무를 맡았던 엘리엇 모스 박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자국 통화를 쓰는 국가들은 무역수지가 악화되면 통화 가치를 낮춰 수출경쟁력을 높일 수 있지만 유로존 국가는 통화 가치를 독자적으로 낮출 수 없어 무역적자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무역적자의 증가는 정부부채 증가 및 경제성장의 둔화로 이어진다. 그리스의 현재 위기는 바로 이런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것이 모스 박사의 주장이다. (서울신문 6월16일)

 
 

유로존 회원국이 통화와 기준금리 정책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재정통합은 없는 상태다.

유로존 역내에서 재정의 이전이 자유롭게 이뤄지지 못하면서 구조적 개혁에 따른 불균형 해소가 불가능한 구조인 것이다.

화폐 통합만 이뤄진 상태에서 역내 회원국 간의 경상수지 격차는 확대됐고, 그리스를 중심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회원국들의 확장적 재정 정책이 악순환을 일으킴에 따라 남유럽발 재정위기는 시작됐다.

그럼에도 '몸에 맞지 않는' 유로화를 계속 쓰느라 그리스 등 재정 위기국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그리스가 유로존에 가입하지만 않았어도 위기가 이처럼 오래 가지는 않았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연합뉴스 6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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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유로화가 ‘경제적’인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인 산물이라는 점이다.

(중략)

그러나 경제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유로화 시스템은 ‘바보 같은 자해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유로존 국가들은 모두 자신들의 통화정책 주권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ECB에 넘겨야 한다. 유로존 국가들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ECB가 각 국가를 대신해 통일된 금리를 결정하고 화폐 유통량을 정한다. 문제는 19개의 유로존 국가들이 모두 너무나 이질적이고 처한 상황도 크게 다르다는 데서 발생한다.

(중략)

일부 전문가들은 유럽의 경제위기 때문에 유로화가 출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유로화 때문에 유럽의 경제위기가 더욱 심각해졌다고 지적한다. ECB로 금융통제권을 ‘아웃소싱’한 탓에 아일랜드, 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이 2008년 경제위기 당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주간경향 제1110호, 1월20일)

 
 

그리스 문제의 핵심 고리는 인플레이션이다. 과거 유럽에서는 이런 경우 평가절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왔다. 그러면 외화로 표시된, 노동비용을 포함한 그 나라의 모든 가격이 단번에, 무차별적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평가절하를 한 위기 국가는 신속하게 경쟁력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제는 단일 통화, 고정 환율을 사용하는 유로 시스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 2월15일)

 
 

금융위기가 닥치자 유로존이 구제금융을 대가로 PIGS 국가에 내린 처방은 임금·연금삭감 등 긴축정책이었다. 구제금융은 사실상 독일과 프랑스 은행 등 민간기관에서 빌린 돈을 공공부채로 전환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일 뿐, 각 국가 국민들을 위해 쓰이는 돈이 아니다. 결속기금 등 실질적인 지원 대책이 전무한 상황에서 유로존은 긴축이란 의무만을 강요했다.

문제는 각국의 ‘체력’을 따져보지 않고 획일적으로 부과한 긴축 처방이 그리스의 경우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경향신문 6월29일)

 
 

요약하면, 위기는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유로존에 묶인 그리스에겐 위기에 대처할 방법이 사실상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재정을 긴축하라는 채권단의 요구는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위기에 빠진 모든 국가가 그리스와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건 아니다.

유로화가 출범할 때부터, 이런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늘 제기됐다. 언제든 그리스 사태와 같은 일은 벌어질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스가 처음이 아닐 뿐더러, 마지막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그리스가 유독 눈에 띄지만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도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쯤 되면 이건 그리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로화 시스템의 문제라고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오해 5. 그리스 정부가 최소한의 의지와 책임감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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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정부가 ‘생떼’를 쓰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리스 정부는 협상 막판 연금삭감 등을 내용으로 하는 IMF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조심스레 타결 가능성이 언급되던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정부가 무책임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채권단의 요구는 또 얼마나 합리적이었는지도 함께 따져보는 게 맞다.

채무불이행(디폴트)과 그렉시트(유로존 탈퇴) 위기에 처한 그리스에 대해 국제 채권단은 처음부터 좌파 정권의 퇴진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지난주만 해도 그리스 지원재개에 대해 낙관적 분위기였으나 마지막 순간 국제통화기금(IMF)이 연금삭감 등 재정지출 감축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뒤틀어진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그리스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정권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안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시리자 지도부는 국제 채권단이 그리스 정권 전복을 기도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통상 급진좌파의 편집증적인 주장으로 치부하기 쉽겠지만 이번 경우엔 매우 확실한 근거가 있다. (연합뉴스 6월30일)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일찌감치 채권단의 ‘횡포’를 비판했다.

이어 크루그먼은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받아들이면 분명 트로이카 채권단은 치프라스총리 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실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지난 1월 당선된 치프라스 총리가 흔들리며 정치적인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것.

크루그먼은 이미 트로이카 채권단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한 바 있다. 그는 “트로이카 채권단이 부과한 프로그램은 전혀 말이 안됐고 제대로 돌아갈 가능성도 없었다”며 “경제학적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다. (이데일리 6월29일)

 
 

게다가 채권단이 요구하고 있는 건 이미 실패한 정책이라고 평가받는 바로 그 것, 긴축정책이다. 긴축으로 인한 고통에시달려왔던 그리스 국민들에게 똑같은 길을 또 가라는 얘기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지난 4월 이 같이 일갈한 바 있다.

그는 “그리스는 조기 퇴직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연금시스템을 개혁하고 국유자산 일부를 민영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부실채권 문제 해결과 세금문제를 관할하는 독립적인 위원회 창설, 기업활동 활성화 도모 등에도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엿다.

그러나 바루바키스 재무장관은 “앞서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진행할 당시 임금과 연금 삭감 등 긴축정책은 기대했던 수출 경쟁력 상승과 경제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따라서 현재 그리스 국민들은 국제 채권단이 요구하는 추가 임금 삭감과 연금 삭감에 반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해야할 일은 협상 파트너들에게 이미 실패로 드러난 정책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고 우리의 논리가 합당하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데일리 4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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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영예 자랑하듯 그 이름도 조선대학'


<감상기> 신은미 선생 일본 순회 통일콘서트를 보고 (3)
도쿄=배안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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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01  07: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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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북기로 유명한 재미동포 신은미 선생의 일본 순회 통일토크 콘서트는 조선대학 방문으로 마무리됐다. 신은미 선생 부부가 조선대학교를 방문, 꽃다발을 받고 장병대 학장과 포즈를 취했다. 맨 왼쪽이 필자. [사진 - 조선대학교 출판부 전현철]
신은미 선생의 일본 일정은 조선대학교 방문으로 마무리된다.

 

요코하마에서 강연회를 끝내고 신나게 뒷풀이도 치르고 또 언젠가 보자며 서로 껴안으며 악수하며 헤어졌건만 왠지 또 보고싶어져 나도 그녀가 방문한다고 하는 내 모교로 부랴부랴 가보기로 하였다.

떳떳한 모습으로 선 우리 모교는 늘 변함이 없고 그 언제나 포근하며 따뜻하다. 훈훈한 바람을 타고 신 선생이 대학을 찾아오니 교정에 또 아름다운 꽃이 한송이 핀 것 같다.

이번 순회공연이 도쿄, 가나가와, 오오사카, 고베 등 일본의 주요도시에서 열렸는데 그녀는 방문하는 곳마다에서 조선학교를 방문하기를 뜨겁게 원했다.

가나가와 강연회를 준비하였을 때 관계자가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가나가와는 세계에 이름난 항구도시 요코하마를 껴안은 곳인데 오신 김에 어디 방문하기를 원하시지는 않으냐” 물어봤더니 “조선학교를 찾아 가보고 싶습니다”란 한마디 답만 돌아왔다 한다.

 

   
▲ 민족의 기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광개토호태왕비 앞에서 한 컷.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민족적인 것을 바라며, 누구보다도 민족의 얼을 지키고 싶어하며, 또 민족의 정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것은 해외에 사는 동포들의 공통분모인 것 같다.

 

이런 민족적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민족교육은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지만 이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해외동포들의 공통의식인 것이다. 그녀 또한 그것을 잘 아는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우리의 말과 글도, 민족정신도 자연히 익혀지지도 키워지지도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아는 그녀이기에 조선대학교 방문은 그만큼 더 의의가 크다는 것을 얘기해 준다.

신은미 선생 일행을 조선대학교 학장, 부학장을 비롯한 교직원, 학생들이 환영한다. 서로 초면인 것 같지가 않을 정도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조선대학은 도쿄 교외인 고다이라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대학은 1956년 4월 10일에 창립되었고 내년에 환갑을 맞게 된다. 이는 재일동포 자녀를 위한 민족교육의 최고학당이며 이 대학의 설립은 재일동포 사회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통일조국의 미래를 지닌 우리 민족의 희망을 꽃피우는 대학인 것이다.

 

   
▲ 민족교육의 생생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는 신은미 선생 부부.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이 대학이 있으므로 하여 우리 재일동포들은 동포사회를 이어갈 새세대 교육을 담보할 수 있게 되었고 오늘도 능력있는 새세대 리더들을 육성할 수 있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대학의 면모를 갖추었다 하기에도 곤란한 초라한 교사에서 시작되었으나 대학에는 차츰 새조국 건설을 위하여, 동포사회를 위하여 살며 일할 거라는 일념을 안은 청년들이 전국에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민족교육의 화원 속에서 고등교육을 실시하고 싶어했던 우리 동포들, 특히 청년들의 요구는 1959년 6월 지금 현재 위치하는 도쿄도 고다이라시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일대 비약을 이루게 된다.

1957년부터 일본에서의 민족교육발전을 위하여 북에서 막대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이 보내져 오게 된 것이다. 그중의 제2차 교육원조비(1억 51만엔)와 3,4차 교육원조비에서 5천만엔씩 모두 2억 51만엔이 우리 대학의 새 학사 건설기금으로 쓰이게 되었고 우리는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해외동포들을 위한, 해외동포들에 의한, 해외동포들의 고등교육을 실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대학은 창립 당시로부터 오늘까지 13,000명의 졸업생들을 배출시켰고 그들은 일본뿐만 아니라 남과 북, 널리 해외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대학 교직자들과의 인사를 나누고 난 다음 일행은 기념관으로 향한다. 안마당을 거쳐 지나가면서 대학의 교육이념, 연혁 등에 대하여 설명을 듣는다.

 

   
▲ 학장실에서 장병태 학장과 면담을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강당 앞의 잔디가 깔려진 마당에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모여 앉는다. 소풍 나온 모양인지 다 같이 모여앉은 모습이 예쁘다.

 

안내하신 선생님 이야기로는 초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조선대학교를 찾아서”란 제목의 글이 실려져 있는데 도쿄 근교에 있는 우리학교 학생들은 이 과목을 배우는 시기가 되면 대학을 찾아오게 되어 있다. 나 역시 어렸을 때 그랬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일행은 기념관으로 들어선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손님들을 맞아주는 이는 갑옷 입고 말을 탄 고구려의 늠름한 병사이다. 우리를 지켜주는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든든해진다.

이 기념관은 대학 창립 25돌을 맞아 1982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여기에는 조선역사박물관과 조선자연박물관이 설치되어 있어 주로 북에서 보내 온 역사유물 500여종과 자연박물표본 2000여종이 전시, 관리 되어있다.

신 성생은 감탄을 금하지 못 한다. 북에서도 귀한 역사유물들을 이 대학에 보낸다는 북의 용단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것은 오로지 민족을 알고 사랑하고 민중을 위하여 살며 일하는 인재를 해외에서 육성하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북의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정대세가 이 대학 졸업생이라는 사실은 주지의 일이다. 동포사회에서 나서 자라 일본에서, 남과 북, 해외에서 활약하는 졸업생은 정 선수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 주로 동포사회 내에서 활약하던 졸업생들이 지금은 체육인이며 예술인이며 학자며 활동가며 기업가들이 되어 세계를 향하고 있으며 또 각자 활동을 통해서 우리 민족교육을 빛내이고 있다.

금수강산 내나라에 사회주의 꽃이피니
바다너머 이땅우에 우리대학 높이섰네
백두영봉 기상이냥 무사시노 굽어보며
조국영예 자랑하듯 그이름도 조선대학

젊은가슴 희망품고 교정안을 들어서니
조국사랑 넘쳐풍겨 따사로이 안아주네
무쇠팔뚝 두다리에 불을뿜뜻 용기솟고
우리심장 붉은심장 불덩이로 타오르네

참으로 우리 대학은 이 교가에서 불리워지는 것처럼 백두영봉의 기상을 이어받은 우리의 대학인 것이다.

신은미 선생을 뵙고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기대를 안고 전교생, 전교직원들이 오후 1시가 되기를 기다린다.

 

   
▲ 무대 위에서 강연하고 있는 신은미 선생. 3대헌장기념탑이 무대 배경을 장식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강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지나가는 학생들마다 신 선생에게 “안녕하세요”, “잘 오셨습니다”하며 인사를 한다.

 

“저 선생님께서 <오마이뉴스>에 올리신 글 다 봤답니다. 말씀 잘 들을게요.”
어떤 여학생이 신 선생에게 좀 수줍은 듯 전하고 강연장으로 뛰어 들어간다.
신 선생도 “오! 그랬어요? 고마워요”하며 답한다.

무대 위에 오른 그녀는 역시 강당에 모인 학생들을 축복한다.
순회강연 하면서 방문하게 된 각 지방에서 만난 동포들, 방문한 조선학교들, 거기서 배우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조국과 통일의 미래를 보게 되었다는 감상을 얘기한다.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세워 체계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해 온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대학까지 세우고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 온 역사는 아주 값있는 것이며 우리 민족의 재산이며 보물인 이 대학에서 배우는 학생들에게 감사하며 여기서 보고 느낀 것들 잊지 않을 거며 어디를 다녀도 많이 자랑할 것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민족교육을 시작하고 지켜온 수많은 동포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고 하니 장내에 박수가 크게 울려 퍼진다.

 

   
▲ 학생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 놓치지 않으려는지 강연장은 물뿌린 듯 조용하다.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학생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 놓치지 않으려는지 강연장은 물뿌린 듯 조용하다.
하지만 강연장 어디서나 그녀가 보여준 사진을 여기서도 소개시키기 시작하자 장내는 웃음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녀가 어디서 춤추는 사진이 소개된다. 그녀 얘기론 모란봉으로 산책하러 나가니 동네 아줌마들이 서클 활동을 하는지 춤판이 벌어졌는데 대뜸 합세하여 신나게 한판 춤추었다는 것이다.

“제가 어디 유럽 나라나 또 다른 나라를 방문하다 누가 춤춘다고 뛰어 들어가서 춤을 출 수가 있겠나요? 그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라서 그럴 수 있는 거죠”하고 얘기하자 청중들이 하나가 된 것처럼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그녀의 말 속에서 느껴오는 가장 귀중한 엣센스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기에, 같은 민족으로서의 정을 나눌 수 있고, 나라가 둘로 동강난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며, 가족과 친구들이 자유롭게 오고 갈수 없는 설움이 가슴에 맺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많은 아픔과 설움을 넘어서려면 통일에로 향해야 한다는 뜻이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 속에 배어 있다.

그녀는 “여기 오니까 우리말로 얘기하고 정을 나눌 수 있어 고향으로 온 것 같애요. 남쪽으로 가고 싶어지면 이제는 일본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만났으면 해요”라고 말했다.

여기서는 우리말이 조선어나 한국어, 코리안이 아니며 더군다나 한글어가 아니다. 우리말이 우리말이고 우리의 정은 민족의 정인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이렇게 다시금 마음에 새겨본다.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제 이름 하나 제대로 입밖으로 내놓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성도, 가족들이 지어준 이름까지 다 잃어버린 민족이었던 것이다. 우리말, 우리글은 파묻혀버리고 우리의 역사, 우리의 민족문화는 왜곡되어 날조되어 가면서 언젠가 그 찬연한 빛은 바래지고 동방에 이름난 영광의 민족으로서의 나날은 잊혀지고 잃어버려지고 말았던 것이다.

허나 그 암담했던 그 시절에 쭈그려 앉듯이 지내던 우리 동포들은 민족의 뿌리와 씨앗을 기어코 지켜내고 만 것이다. 광복이란 양춘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후대들에게 잃어버린 우리의 문화, 우리의 전통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번 무너졌다한들 억천만번 다시 일어서 우리의 것을 다시 찾으려는 민족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우리의 교육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우리대학 학생들이 민족의 희망이며 자랑이라 거듭 말한다.
분단의 설움을 넘어서 우리가 결탄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뜨거운 메시지를 학생들에게 전하는 모습은 그 날씬한 몸매와는 어긋나 그녀의 억세고 굳센 결심을 보여준 것 같기도 하다.

따뜻한 사랑의 정과 단호한 결심을 우리에게 전하고 그녀는 일본 일정을 끝내고 다음 행선지 평양을 향하여 일본을 떠났다.

 

   
▲ 조선대학교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신은미 선생.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재일동포사회는 지금 결코 순탄한 환경에 놓여있다 할 수 없다.
남북의 분단은 재일동포사회의 분단이 되었고 세대가 몇대로 바뀌어지면서 남에서나 북에서나 희망을 찾을 수 없게 된 많은 동포들이 동포사회를 떠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일본 순회강연회를 준비하면서 그런 동포들 역시 남북분단의 설움을 안고 통일에 대한 불씨를 안고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도 강연장에 찾아 온 것이다.

그리고 통일운동에 있어서의 세대교체는 기존세대들의 숙제가 된지 오래다.
더 이상 다음 세대들에게 넘겨져서는 안 되는 분단의 현실은 통일운동이 원만하게 다음 세대에 이어져야 한다는 모순을 끌어안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언젠가 될 거지”, “누군가 할 거지”하여 남들 일처럼 여겨 온 것도 사실이다. 통일이 희망이란 이름 밑에 밀어붙여져 사람들의 삶과 먼 곳에 위치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번 강연회는 그런 의식을 깨뜨려 버린 아주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강연장에는 이제까지 볼 수 없던 여러 세대의 동포들이 모여 들었고 그들의 마음속 깊이에서 잠들던 통일의식이란 눈을 다시 뜨게 하였다.

재미동포 아줌마 신은미 선생이 일본 순회강연하면서 남긴 것은 북에 대한 새로운 지식, 관점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너무 오래 기다린 나머지 느슨해진 재일동포들의 통일의식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또 고무해주기도 한 것이다.

이하 한 재일동포 여성이 보내 온 감상문을 소개한다.

밝은 미소와 장내를 울리는 맑은 목소리가 장내에 울리기 시작하지마자 마음이 몹시 끌렸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낭만에 넘친 힘있는 한마디 한마디는 내 마음을 삽시에 사로잡았다.
그녀가 하는 말들은 너무도 소박했다.
그 소박한 말들에는 진실감이 가득했다.
때로는 소리 내고 웃으며 어떨 때는 눈시울을 닦으면서 내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자주 귀에 들려온 말들이었다.
그런데 가슴 깊이 스며드는 거짓이 없는 성실한 이야기들.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봤다.
통일은 그 누가 이룩해 주는 게 아니다는 걸.
서로가 만나고 손에 손을 잡아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걸.
잠깐 동안은 미워했었어도 서로가 뜨겁게 사랑을 하고 해결하고 풀어야 한다는 걸.
작은 힘이나마 나도 그 한사람이어야 한다는 걸.
다시금 알게 해준 귀한 시간이었다.
2015.6.24
박 청 순

그렇다 통일은 누가 해주는 다른 누구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선 이 자리에서 통일을 바라며 통일을 생각하며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행동하여야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동포들을 만나고 싶다던 신은미 선생.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서로 잇게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통일에로의 지름길인 것이다.

초여름에서 여름으로 계절은 흘러가려 한다.
민족의 지맥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얼어붙은 장벽도 우리 민족의 소원이란 뜨거운 정열을 앞에 두고서는 녹아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곳도 차츰 더 더워지며 열기를 띠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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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의 벽에 써내려간 시 '흰옷'

<사이공의 흰옷> 실존 인물, 응우옌티쩌우를 만나다

[아맙이 만난 사람] 감방의 벽에 써내려간 시 '흰옷'

15.06.30 20:06l최종 업데이트 15.07.01 00:55l

 

 



한 다발의 삐라와 신문 감추어진 가방을 메고
행운의 빛을 전하는 새처럼 잠든 사이공을 날아다닌다
복습은 끝나지도 않고 평온한 밤도 오지 않았다
내일도 수업시간엔 잠이 오겠지 그러나 간다 내일도 내일도
- 노래 <사이공의 흰옷> 중에서

1960년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생사를 건 투쟁을 감행하는 청년들의 학생운동을 다룬 소설 <사이공의 흰옷>. 이 작품은 1980년대 중반 한국에 소개돼 당시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던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베트남의 시인 레안쑤언이 <사이공의 흰옷>의 주인공 '홍'의 실제 인물인 응우옌티쩌우에게 헌사한 시 '사이공의 흰옷'이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어지고 소설의 인기가 199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이어져 <전환시대의 논리>, <전태일 평전>, <철학에세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스테디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2006년에는 베트남과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고 <하얀 아오자이>란 제목으로 다시 번역해 출간됐다. <사이공의 흰옷>은 베트남과 한국이 역사와 문학을 통해 어떻게 만나고 소통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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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우옌티쩌우
ⓒ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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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의 흰옷>의 원작은 베트남 작가 응우옌반봉의 소설 <흰옷>으로 1972년에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응우옌티쩌우'라는 실존 인물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1960년대 베트남 남부에서 이름을 날린 청년 열사 응우옌반쪼이, 시인 레안쑤언과 함께 회자되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출판 상황이 아주 열악했던 전쟁 시기에 북베트남에서 출간된 탓에 정작 소설의 무대인 남베트남에서는 아주 극소수만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95년에 베트남 문학출판사에서 출간된 <응우옌반봉 선집 2>에 이 소설이 다시 수록되고, 응웬티쩌우의 이야기는 1950,60년대 남베트남의 학생운동사를 회자하는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왔다.

시내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치민시 10군에 살고 있는 응웬티쩌우 여사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사이공의 흰옷>의 주인공, 가난한 농촌 출신의 여학생 '홍'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장에 나가 신선한 용과를 사왔다며 주방을 오가는 그의 모습은 77세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정해보였다. 젊은 시절 극심한 고문과 고초를 겪어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가 이토록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이날 만남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남편 레홍뜨가 자리를 함께했다. 그 역시 베트남에서는 아내 못지않은 유명인사다. 두 명의 살아 있는 전설이 우리들의 맞은편에 앉아 용과를 자르고 차를 따르며 접대를 하느라 부산했다. 하얀 백발 아래 두 눈동자가 치열했던 한 시대를 방금 통과한 듯 강렬하게 반짝였다. 시간이 허락되었더라면 밤을 지새워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야기가 조곤조곤 이어졌다.   

밥 먹듯이 지각을 하던 우등생 소녀 람

응우옌티쩌우는 1938년 사이공의 북동쪽에 위치한 비엔호아 성의 솜짜이라는 작은 마을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쩌우는 다섯 형제자매 가운데 장녀였다. 11살이 되던 어느 날, 감옥에서 막 출옥한 아버지가 만신창이가 되어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쩌우는 10개월 된 막내둥이를 업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오래전부터 혁명 활동을 해오던 아버지가 경찰에 붙잡혀 보름간 온갖 고문을 당한 후 겨우 숨만 붙은 채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장사를 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쩌우가 곁에서 아버지를 간호하며 동생들을 돌봤다. 아버지는 절친한 고향 친구를 불러 가족을 돌봐달라고 당부하고는 2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쩌우의 어린 시절은 평탄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혁명 활동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어머니는 이른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 장사를 했다. 9살 때부터 쩌우는 아버지를 도와 서신전달이나 연락 업무를 도왔다. 다른 친구들이 학교에 갈 시간이면 쩌우는 동생들의 아침 식사를 챙겨야 했다. 10시를 훌쩍 넘겨 어머니가 시장에서 돌아오면 그제야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달려갔다. 그런 쩌우를 맞이하는 것은 선생님의 불호령과 따끔한 회초리였다. 선생님이 자꾸 늦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지만 쩌우는 입을 다물었다. 찰싹찰싹 매서운 회초리가 이어지며 선생님이 자꾸만 지각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어린 쩌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 일요일, 시장에서 어머니를 도와 장사를 하고 있는데 우연히 선생님과 마주쳤다. "세상에나 람(Lam)이 언니 동생이었어요?" 람은 쩌우의 아명이었다. 어머니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응, 내 아이야"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았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쩌우를 '성실한 럼'이라고 불렀다. 같은 반에 동명이인의 럼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 아이는 '게으른 럼'이라고 불렸다. 매일없이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학업서만큼은 우등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쩌우에 대한 선생님의 총애가 깊어지자 질투를 하는 친구들도 생겨났다. "시장 바닥에서 장사나 하는 주제에"라며 조롱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면 참지 않고 달려가 매운맛을 보여주곤 했다. 상대할 쪽수가 많을 때는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는 집의 아이들을 모아 함께 싸웠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1년간은 학교마저 다니지 못했다. 다시 학교에 돌아온 쩌우는 한이 맺힌 듯 공부에 열중했다. 그러고는 비엔호아 성 최고 수석으로 중학교를 졸업한다. 사람들은 우등생인 쩌우가 사이공에 있는 고등학교를 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학비는 간신히 해결했지만 숙식을 비롯한 기본적인 생활비를 감당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한 아저씨가 쩌우를 찾아와 500동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부로 아저씨는 담배를 끊었다. 매달 담배 살 돈으로 500동씩 부쳐줄 테니 학교에 가려무나" 그렇게 해서 쩌우는 고향 비엔호아를 떠나 말로만 듣던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발을 딛게 되었다. 

투쟁과 함께 찾아온 사랑, 그리고 이별

사이공에 정착한 쩌우는 반랑 기숙학교에 입학한다. 당시는 친미독재 정치로 악명이 높던 응오딘지엠 정부 치하였다. 교내에 일체의 정치성을 띤 동아리는 물론 학생들의 자치조직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쩌우는 빈민구제사업 등 여러가지 사회활동에 참여하면서 학생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를 벌고 조직의 활동자금을 마련했다. 그의 주된 임무는 사이공과 그 인근 지역에서 중고등학생, 대학생, 청년들을 조직화하여 남베트남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요구하는 투쟁을 이끄는 것이었다.

반랑 학교의 같은 반에는 레홍뜨라는 남학생이 있었다. 쩌우보다 3살 연상인 그는 당시 반랑 학교 노동청년단 서기장을 맡아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뜨는 처음부터 쩌우를 눈여겨봤다. 흑진주처럼 빛나는 까만 머리카락에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당찬 미소의 쩌우에게 남학생이라면 누구든 마음이 흔들렸다. 쩌우와 마찬가지로 뜨도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고단한 하루하루의 일상을 나누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무엇보다도 교내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던 두 사람은 목숨을 담보로 한 비밀 투쟁을  이어가면서 서로에 대한 깊은 감정이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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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운동 당시 레홍뜨(좌측)와 응우옌티쩌우.
ⓒ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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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뜨가 사랑을 고백했을 때 쩌우는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며 차갑게 거절한다. 지금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 동생들을 돌보며 공부에 열중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에도 뜨의 구애는 멈추지 않았고 쩌우는 매번 그를 거절했다.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투쟁의 나날 속에서 쩌우는 자신에게 사랑을 허락할 수 없었다. 학생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뜨가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쩌우는 2년간 고의로 졸업시험에 낙방하며 뜨의 빈자리를 대신해 반랑학교에서 학생운동을 이어갔다. 

감방의 벽에 써내려간 시 '흰옷'

1961년 2월 9일 늦은 오후, 집으로 돌아가던 쩌우의 앞길을 낯선 택시가 막아섰다. 쩌우가 끌려간 곳은 레반주옛 캠프로 당시 수도 사령부가 있는 곳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경찰의 취조를 받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 풀려난 것은 여러 번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사상개조실에 들어서는 순간 쩌우는 자신이 '붙잡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상개조실 뿐만 아니라 동물원의 암실, 군 교도소 등을 돌며 온갖 고문과 취조가 이어졌지만 쩌우는 굴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것을 시작으로 단식투쟁을 이어갔고 간수들이 몸을 땅에 파묻고 구타하며 취조를 하면 목청을 돋워 노래를 부르며 저항했다. 감옥에서 만난 동지들과 비밀리에 집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쩌우는 뜨의 소식을 접한다.

1961년 8월 7일, 사이공은 물론 미국의 워싱턴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사이공 주재 미 대사인 프레드릭 놀팅의 차량이 폭탄 테러를 당한 것이었다. 사이공-자딘 지역의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세력이 감행한 테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를 계기로 남베트남의 모든 도시에 반미·반독재 투쟁이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사건은 사이공에서 미국에 가해진 최초의 공격이었다. 사이공의 모든 경찰 병력은 물론 특공대, 헌병대, 기무사가 테러 주모자를 잡는데 총동원되었다. 이 작전의 주모자 가운데는 26살의 레홍뜨가 있었다. 결국 레홍뜨와 동료들은 붙잡히고 1962년 4월 25일, 뜨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법정에서 뜨는 "수류탄이 부족해 미 침략자들을 전멸시키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 뜨의 사형 선고 소식을 전해 들은 쩌우는 서럽게 울었다. 그가 사형집행을 당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감옥의 모든 연락책을 동원해 쩌우는 짧은 메시지를 전했다. "나는 레홍뜨와 결혼을 서약한 사람입니다. 동지들 중에 누구든 그를 만나게 되면 이 말을 꼭 전해주세요. 나 응우옌티쩌우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고". 쩌우의 전언이 뜨의 손에 가닿기까지는 2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또다시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감옥에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가던 어느 날, 쩌우에게 큰 시련이 닥친다. 음식을 주고받는 바구니에 숨긴 비밀 서신이 간수에게 발각된 것이다. 황급히 종이를 삼키려는 쩌우에게 간수들이 달려들었다. 쩌우는 암실에 감금되었고 모진 구타와 함께 밤새 물고문이 이어졌으며 열 손가락에 못을 박고 팔을 잡아당기고 비틀어 관절을 뽑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쩌우가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자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한 후 경범죄 수감자들의 방에 던져 넣었다. 그곳은 나병, 매독, 임질 등 전염병 환자들을 수감하던 감방이었다. 그가 병에 걸려 죽기를 바랐지만 수감자들은 감옥 안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쩌우를 극진히 간호한다. 이에 격노한 간수들을 쩌우를 다시 암실에 가두었다. 

사경을 헤매던 쩌우는 자신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직감한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뜨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전에 꼭 한번 만나고 싶었던 호치민 주석의 사진도 떠오르고 고향의 가족들 얼굴도 하나하나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쳐갔다. 이대로 죽고 마는 것인가. 그때  쩌우의 눈에 누군가 떨군 머리핀 하나가 보였다. 쩌우는 남은 기력을 모두 짜내 머리핀으로 감방의 벽에 '흰옷'이라는 자작시를 써내려간다. 

흰옷

나의 흰옷은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고 
먼 훗날의 일을 꿈꿔본 적도 없는데
이제 비참한 수렁에 빠졌으니 
이 흰 옷 언제까지나 하얗게 빛나길 바랄 뿐이네

1964년 말, 사이공 정부는 일부 학생들과 기자들에게 쩌우가 감금되었던 동물원의 암실을 견학시켰다. 감방문이 열리자 쩌우가 쓴 시 '흰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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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5월, 자신이 투옥되었던 감옥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응우옌티쩌우.
ⓒ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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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객들이 찍은 사진을 통해 이 시와 응웬티쩌우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에 대한 불법 구금과 고문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면서 사이공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쩌우를 포로 명단에 올려야 했고 이듬해인 1965년 5월 2일, 쩌우는 석방된다.

생사의 기로에서 쓴 네 줄짜리 시가 쩌우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쩌우의 시 '흰옷'은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감옥의 정치범들 사이에서 애송되었고, 쩌우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시인 레안쑤언 또한 '흰옷'이라는 시를 지어 쩌우에게 헌사한다. 그리고 훗날 레안쑤언의 이 시가 '사이공의 흰옷'이라는 노래로 만들어져 1980년대 한국의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구전되어 불리게 된다.  

감옥에서 나온 쩌우는 만신창이었다. 그는 구찌 땅굴에 은신해 몸을 회복하면서 투쟁을 이어갔다. 이전과는 달리 쩌우는 베트남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고, 그의 존재는 호찌민 주석에게까지 알려진다. 1969년 5월, 쩌우는 열사 응우옌반쫑이의 아내인 꾸옌과 함께 캄보디아로 건너가 비행기를 타고 하노이에 도착한다. 쩌우의 이야기를 들은 호찌민 주석이 자신의 생일에 초대한 것이다. 지팡이를 짚은 '호 아저씨'가 나타나자 쩌우는 곧장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았다. 준비한 꽃다발을 선물하는 것도 잊은 채 쩌우는 호 아저씨를 끌어안고 놓을 줄 몰랐다. 호치민은 레홍뜨의 안부를 물었다. 쩌우는 왈칵 눈물만 쏟으며 말을 잊지 못했다.

호찌민을 미소 짓게 한 '2kg'

생일상이 무색할 정도로 소박한 식탁에 마주앉았다. 호찌민은 직접 젓가락으로 쩌우와 꾸옌에게 고기를 한 점씩 집어주었다. "얘야, 너는 너무 말랐구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식당에 말을 하거라". 호찌민은 쩌우에게 밥을 많이 먹으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과 7월, 8월까지 쩌우는 호찌민을 네 번 만난다. 그때마다 호찌민은 "여전히 말랐구나. 밥을 잘 챙겨 먹으라니까"라며 정겨운 잔소리로 쩌우를 맞이했다. 그러나 정작 호찌민 자신은 눈에 띄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호찌민을 마지막으로 만난 8월 14일에는 그의 몸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다. 털옷에 모자까지 둘러쓰고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호찌민은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호찌민은 위독한 상태였지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쩌우와 젊은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온 것이다. 호찌민은 쩌우를 보자마자 살이 좀 쪘는지부터 물었다. 몸무게를 재어 보니 34.8kg이었다. 체중계를 가져온 비서가 "예전보다 2kg이 늘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호치민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호찌민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1969년 9월 2일, 쩌우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청년축제에 참가하고 있을 때 호찌민은 눈을 감고 만다.  

1969년 5월, 쩌우는 작가 응우옌반봉을 만났다. 그가 쩌우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제의했지만 처음엔 거절했다. 자기 자랑을 하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고, 자신이 세상에 노출되면 더 이상의 투쟁 활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베트남의 대표적인 혁명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또흐가 "남베트남의 학생운동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며 쩌우를 설득했다. 결국 쩌우는 응우옌반봉에게 자신이 살아온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것이 1972년에 장편소설 <흰옷>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후 쩌우는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제에도 참석하고 구소련, 중국, 헝가리, 북한 등 각 나라의 독립기념행사에 참석하며 베트남의 민족해방 투쟁을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그 후 하노이에 돌아와 응우옌아이꾸옥대학(오늘날의 호찌민국가정치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다시 사이공으로 돌아가 감옥에 갇힌 자신의 애인과 동지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구출 투쟁을 이어갔다. 

다시 만난 두 사람, 처음으로 손을 맞잡다

1975년 4월 30일, 드디어 기나긴 전쟁이 막을 내린다. 사이공을 비롯한 남부 베트남이 해방을 맞이하고 모든 정치범들이 석방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육지에 있는 모든 감옥 문이 열렸지만 쩌우가 애타게 기다리는 레홍뜨는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레홍뜨는 수 천 개의 감옥 가운데 가장 악명이 높았던 꼰다오 섬의 '타이거게이트'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를 비롯한 4300명의 사람들은 5월 4일이 되어서야 육지로 돌아와 사람들과 종전의 기쁨을 나눈다. 

무려 2만 명에 가까운 목숨을 앗아간 꼰다오 감옥에서 살아 돌아온 레홍뜨도 15년 만에 쩌우와 감격적인 재회를 하게 된다. 5월 5일 밤 10시, 호치민시 10군의 인민위원회 주석 응웬티쩌우가 차를 타고서 이제 막 사이공에 도착한 뜨의 앞에 나타났다. 오랜 세월 쇠고랑을 차고 있었던 뜨의 두 발은 형편없이 굽어져 있었다. 수년간 전장을 누비고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두 사람은 아직 젊은 나이에도 흰머리가 무성했다.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굳은 언약은 없었어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주잡은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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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홍뜨(왼쪽)와 응우옌티쩌우의 결혼식.
ⓒ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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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8월 19일, 두 사람은 오랜 기다림 끝에 부부의 연을 맺는다. 전쟁이 막 끝나고 너 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이라 결혼식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동료들이 추렴해 모은 돈으로 차린 음식은 고작 떡 몇 접시와 차가 전부였다.

그러나 가족, 친지들만 불러 조촐하게 치르려던 결혼식에는 '세기의 사랑'의 주인공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응웬티쩌우와 레홍뜨의 이야기는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이어졌다. 못다 들은 이야기는 다음날을 기약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응우옌티쩌우에게 어린 시절의 꿈을 물었다.

고향인 비엔호아에 살 때, 약을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고 간호사가 되고 싶었고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해 글자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워 선생님을 꿈꾸기도 했다고 한다. 공직에서 은퇴한 그는 호치민시 어린이보호위원회에서 오래 활동했다. 어린 시절의 꿈을 말년에 펼친 셈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당당했고 후회는 없어 보였다. 인터뷰 내내 여전히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과 자신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고 수차례 힘주어 말하곤 했다. 

우리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자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가 용과를 한 아름 안겨주는 쩌우의 모습은 인정 많고 푸근한 동네 할머니를 닮아 있었다. 골목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드는 노부부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면서 가로등 아래 백발만 하얗게 빛났다. 순간, 언제까지나 하얗게 빛나길 바라던 그 흰옷이 살포시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에 실린 글을 필자 허락을 구해 실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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警, 40만 국민서명 가로막아…“우리가 전염병 환자인가”


4.16연대, 세월호 시행령 개정 촉구 서명 靑에 전달하려다 3시간 째 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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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희 기자  |  balnews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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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30  17:43:09
수정 2015.06.30  19: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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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발뉴스(강주희)
세월호 유가족들의 국민서명서 전달이 결국 경찰에 의해 가로막혔다.

 

4.16 가족협의회(이하 가족협의회)와 4월 16일의약속국민연대(이하 416연대)는 30일 오후 2시 서울 청운효자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특별법 시행령 개정을 촉구하는 국민서명을 청와대에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6일부터 시작한 서명운동에는 39만 8727명의 국민들이 참여했다. 전명선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국민의 마음이 모인 이 서명용지야 말로 박근혜 대통령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일깨워주는 중요한 서명지”라고 말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유가족들은 서명서가 담긴 박스를 들고 청운효자주민센터 우측으로 이동했다. 청와대로 이어진 길이다. 박스는 전명선 위원장, 유경근 집행위원장 등 13명의 대표 손에 들렸다. 그러나 청와대로 향한 길은 곧바로 경찰에 막혔다.

#. 오후 2시 30분

이날 경찰은 청운효자주민센터 우측을 이중삼중으로 막았다. 진압용 버스 3대도 사거리 한켠에 들어섰다. 유가족들의 머리 위로 또 다시 채증 카메라가 등장했다. 경찰의 제지에 가족들은 “민원을 제기하러 가는건데, 왜 막느냐”며 소리쳤다. 그러나 경찰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 ©go발뉴스(강주희)
일부 유가족들이 강하게 항의하자 경찰은 몸으로 이들을 밀어냈다. 경찰관 폭행시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는 경고방송이 이어졌다. 이태호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은 “종로서 경비과장은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막는 이유를 설명하라”고 외쳤다.

 

#. 오후 3시

“민원을 제기하러 가는거잖아요.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까? 우리가 무슨 전염병 환자입니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박주민 변호사의 말이다. 박 변호사는 “기자회견에 앞서 경찰이 박스 안에 위험 물질이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며 일부 박스를 개봉하기도 했다. 내용물까지 다 확인했는데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막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답답해 했다.

애초 대표자 13명이 서명서를 전달하기로 한 것을 경찰이 일방적으로 3명으로 줄인 점도 비난했다. 박 변호사는 “경찰이 가족들에게 민원 제기 인원을 3명이라고 알렸다. 어떠한 설명도, 타당한 이유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 ©go발뉴스(강주희)
#. 오후 3시 15분

 

서명서 박스를 들고 있던 전명선 위원장과 유경근 집행위원장이 길 위에 주저 앉았다. 옆에 있던 이태호 공동위원장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지친 나머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김혜진 공동위원장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거친 숨을 골랐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지 1시간이 지났지만 청와대로 향한 길은 여전히 막혀 있었다. 노란색 경찰 통제선은 주민센터 우측으로 점점 늘어났다. 경찰은 이후 세 차례의 해산방송을 하며 가족들을 압박했다. 경고방송을 한 경비과장은 이날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세월호 유가족 홍영미씨(단원고 이재욱군의 어머니)는 “국민들의 세금으로 경찰이 있는 건데 부끄럽지도 않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 ©go발뉴스(강주희)
#. 오후 4시

 

유가족들과 경찰의 충돌이 주민센터 곳곳에서 일어났다. 유가족 최경덕 씨(단원고 최성호군의 아버지)는 화단을 넘어 가려던 중 경찰에 의해 제지 당했다. 최씨는 “민원을 제기하러 가는 것 뿐이다. 경찰이 막을 이유가 없다”며 거칠게 항의했다. 이원호 국민대책회의 운영위원은 “국민의 민원을 막으면서 뭐가 자랑스러워 채증까지 하고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경근 위원장은 “민원 하나 전달하는 일에도 경찰이 막고 있다. 서명은 가장 최소한의 권리지, 권리행세가 아니다”며 경찰의 일방적인 제지를 비난했다.

#오후 5시 20분

기자회견 후 끝난 지 2시간이 지났지만 상황은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한 시민이 “자기 자식 팔아먹은 사람들이 뭐하는 짓이냐”며 막말을 하자 유가족들은 거칠게 항의했다. 가족들이 막말을 한 사람을 데려오라고 요청했지만 경찰은 이를 제지했다. 황필규 변호사는 “정식으로 모욕죄로 고발조치 하겠다”고 항변하자 이 남성은 카메라로 유가족들을 찍으며 도망갔다.

   
▲ ©go발뉴스(강주희)
황 변호사는 “경찰이 질서를 유지하고 상황을 대처하는 것은 당연한 역할이지만 오늘 했던 역할은 정당하지 않은 행동”이라며 “가족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사람을 뒤로 빼돌리고 보호하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하루 반나절이 지난 오후 6시. 유가족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마이크를 잡은 홍영미씨는 “국가의 원수가 국민들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있다. 비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국민들이 원하는 진상규명을 반드시 하고 책임자를 처벌해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씨의 발언에 유가족들은  “진상규명 밝혀내자. 인양과정 공개하라”며 구호를 외쳤다.

   
▲ © go발뉴스(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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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몰라도 노회찬은 안다 '진보 장기집권'이 정치적 목표"

 

[정의당 당권주자 인터뷰④] 노회찬 후보

15.06.30 11:26l최종 업데이트 15.06.30 11:2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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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정의당 당대표 후보.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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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은 역시 노회찬이었다. 29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직전까지 그는 정의당 팟캐스트 방송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녹음했다. 그를 비롯해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후보들이 출연해 토론을 벌였다. 노 후보는 녹음을 마치고 선거사무소에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사전에 보낸 '인터뷰 질문 개요'를 훑어 읽고 곧바로 기자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인터뷰 중반에는 개요에 없는 질문이 더 많이 나왔지만 막힘이 없었다. 

노 후보가 '진보 정치의 스타'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그의 화려한 입담과 토론 기술은 정치인 중에서도 '톱클래스'라고 할 수 있다. 진보정당의 인사 중에 선거도 가장 많이 치렀다. 그래서 '인기'는 그의 가장 큰 무기다. 그 스스로도 다른 후보와 구별되는 강점으로 "대중성에 기반을 둔 확장성"을 꼽는다. "정의당을 잘 몰라도 노회찬을 아는 사람은 많다"는 것이다. 그가 이번 경선에서 제기하고 있는 '강한 정당'도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노 후보는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므로, 권력의 지지를 많이 받는 당이 강한 당"이라면서 "정의당은 좋은 당이지만 힘이 약하다, 국민들이 좋게 평가받지만 표는 안 준다"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건강하고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인기는 없다, 맛이 없거나 먹기 불편해서일 것"이라며 "당 대표가 된다면 맛도 있고 먹기도 편하게 만들겠다, 정의당의 '수석 요리사'가 돼 당의 지지율을 8%까지 끌어올리겠다"라고 말했다. 

한편, 노 후보는 최근 조성주 후보의 출마로 제기된 세대교체 요구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내보였다. 그는 "이제까지 정당 리더는 노선으로 교체되지 나이로 교체되지는 않았다"라며 "영국의 블레어 총리는 40대라서 당 대표가 된 게 아니라 그가 들고 나온 'New labor'라는 신 노선이 많은 당원에게 채택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 당도 노선으로 리더십이 교체돼야 국민의 마음을 얻고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노 후보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개인의 입신양명 위해 운동하고 정치해온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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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정의당 당대표 후보.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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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 노회찬·심상정 후보의 '빅 매치'가 예상된 가운데, 조성주 후보가 '다크호스'로 떠오르면서 선거구도가 변하는 모습이다. 현재 선거구도를 어떻게 보고 있나?
"바람직한 구도다. 자칫 '노-심' 구도로 갔으면 유권자들이 심심하거나, 따분하거나, 어쩌면 짜증이 날 수도 있었다. 조성주 후보가 활기차게 덤벼들고, 노항래 후보도 강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용감하고 패기 있게 도전한 두 후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 평소 대중적 인기가 높고 촌철살인으로 주목을 많이 받았는데 이번 선거에서는 노 후보가 잘 부각되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다.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내가 원래 그렇다. 같은 편끼리 경쟁하는 데 '촌철살인'할 필요는 없지 않나. 대신 적들하고 싸울 때는 힘도 나고 '번쩍번쩍'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갈등 등을 두고는 제대로 할 말을 한다. 그런 부분에서는 여태까지 활약한 게 있으므로 당원들이 좋게 평가해주시지 않을까 싶다."

- 조 후보가 출마선언문을 통해 노회찬 후보를 '진보정치 1세대'라고 평가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좋다' 혹은 '나쁘다'로 말할 수 없다. 사실이다. '어디까지가 1세대인가'를 두고 논쟁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 논쟁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당을 만든 창업세대다. 당연히 1세대일 수밖에 없다. 다만, 생물학적 세대교체가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지 여부는 문제다. 

이제까지 정당 리더는 노선으로 교체되지 나이로 교체되지 않았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는 40대라서 당 대표가 된 게 아니었다. 그가 들고 나온 'New labor'라는 새로운 노선이 많은 당원에게 채택됐기 때문이었다. 우리 당도 노선으로 리더십이 교체돼야 국민의 마음을 얻고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

- 최근 화제가 된 한 노동당 당원은 "노·심·조(노회찬·심상정·조승수)의 문제는 공은 사유화하고 과는 공유화한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관련기사 : "노심조는 공은 사유화하고 과는 공유화한다").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진보신당 시절인 2010년에 서울시장 후보로 나가서 많은 욕을 들었다. 다음 선거에서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지적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나갔나? 제 공을 위해 나갔나? 진보신당을 위해서 나갔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해서 진보신당으로 오는 과정도 그랬다.

국회의원 재선을 위해 좀 더 쉬운 길을 갔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애써 험한 길을 택했다.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운동하고 정치해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잘나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공을 사유화했다는 지적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 정의당이 창당한 지 3년이 됐다. 그러나 선거에서 성적은 좋지 않았고, 지지율 역시 답보 상태다. 이 부분에 노 후보의 책임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나는) 진보정당 전체가 어려워진 상황에 책임이 큰 사람 중 하나다. 시인한다. 여러 차례 유감도 표명했고, 성찰의 시간도 갖고 있다. 그러나 정의당만 놓고 보면, 꼭 지지율이 정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이 처음 출발할 때 옛 통합진보당과 싸우고 나왔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진보당을 탈당하는 과정에서 떨어져나간 분도 많다. 나오긴 했지만 국민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이후 진보당은 폭격을 맞아 분해됐고, 진보 전체가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다. 정의당 지지율은 1%까지 떨어졌다. 다행히도 지금은 5%까지 올랐다. 천호선 지도부를 비롯해 다들 애를 많이 썼다. 조직을 잘 유지·보존·생존시켰다. 그렇다고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내가) 이번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이유다."

"정의당은 건강한 음식이지만 맛이 없거나 먹기 불편"

- 당 대표가 되면 '강한 정의당'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강한 정당'은 다른 후보들도 똑같이 말하고 있다. 노 후보의 주장은 무엇이 다른가? 
"후보마다 '강한 당'의 의미가 다르다. 국민의 지지를 많이 받는 게 강한 당이라고 생각한다. 행동이 거칠거나, 주의·주장의 수준이 높거나, 과격하게 발언한다고 해서 강한 건 아니다. 제왕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당이 강해지진 않는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므로, 권력의 지지를 많이 받는 당이 강한 당이다.

지금 강한 정당은 새누리당이다. 불행하게도 가장 나쁜 당이 가장 강한 당이 됐다. 정의당은 좋은 당이지만 힘이 약하다. 국민들이 좋게 평가받지만 표는 안 준다. 건강하고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인기는 없다. 맛이 없거나 먹기 불편해서일 것이다. 당 대표가 된다면 맛도 있고 먹기도 편하게 만들겠다. 정의당의 '수석 요리사'가 돼 당 지지율을 8%까지 끌어올리겠다."

- 그럴 경우 '지지율 만능주의'에 빠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당이 지지율만 신경 쓴다면 강한 정당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지율에만 매몰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은 온당하다. 하지만 우리 당은 처지가 다르다. 우량주인데 저평가받고 있다. 우리의 정책이나 노력들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드려서 제대로 평가받겠다는 것이다. 

나쁜데도 불구하고 우리 실력 이상으로 지지율 받아내겠다는 주장이 아니다. 국민들은 합리적이고 건강한 진보정당에 표를 줄 용의가 있다. 그런데 그분들이 왜 우리를 선택하지 않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정책의 내용, 제시 방식, 시점 등 여러 가지를 갈고 닦는 노력이 필요하다."

- 정당 지지율을 올릴 구체적 방법이 있나?
"'열심히 하자, 언젠가 세상이 알아주겠지'라는 식으로 막연하게 일하지 않겠다. 정의당이 비정규직을 위한 정당이 되겠다는데, 왜 그들은 우리를 안 찍을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바로잡으면서 적극적으로 국민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겠다. 이렇게 했는데도 지지율이 오르지 않으면 대국민 시위라도 하겠다. 우리 당 지지율을 높여야 정치가 바뀐다고 설득하겠다. 청년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이 '시급 5000원 받아서 어떻게 먹고 사냐'고 호소하듯이, 좀 더 우리를 지지해달라고 하소연이라도 하겠다."

"지금은 전시 상황... 나는 전시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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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정의당 당대표 후보.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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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선출되는 당 대표는 내년 총선에서 내부를 단결시키고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 노 후보는 '총선 리더십'으로 적합한 인물인가?
"(나는) 가장 검증된 후보다. 실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지지율이 2%일 때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당시 헌법소원으로 1인 2표제(지역구-비례대표)도 얻어내고, 여러 전술을 써서 2002년 지방선거 때 정당득표율 8.13%를 기록했다.

2004년 총선 때는 정당명부 투표율 13.4%를 얻었다. 다들 비례대표 후보 8번인 노회찬이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선됐고, 김종필까지 정계은퇴 시켰다. 그렇게 10명의 의원이 당선됐다.(지역구 2명, 비례 8명) 물론 지금은 여건이 다르지만 과거의 쾌거를 이룬 경험을 토대로 열심히 뛰겠다." 

- 4명의 후보 중 노 후보만의 강점은 무엇인가?
"대중성에 기반을 둔 확장성이다. 정의당을 잘 몰라도 노회찬을 아는 사람은 많다. 깨끗한 정치인, 정의롭고 용기 있는 정치인, 정책 능력이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런 호감과 지지가 당으로 연결이 안 됐다. 내가 당의 얼굴이 되면 당의 대중성과 지지를 확장시킬 수 있다. 만약 평시라면 다른 사람이 당 대표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전시 상황 아닌가. 나는 전시용 대표다. 전쟁터에 필요한 장수로 역할을 다하겠다."

-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2.8 전당대회 때 한 말과 비슷하다.
"그럼 결과도 비슷하겠다(웃음)."

- 지난해 7.30 재·보궐 선거에서 새정치연합 후보의 사퇴에도 패배했다. 야권연대가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하나?
"서울 동작을 재보선 사례만으로 야권연대가 안 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때는 야권이 제대로 연대했으면 이기고도 남는 선거였다. 그러나 새정치연합 내부 공천 파동 등으로 야권 지지자들이 고개를 돌려버린 상황이었다. 그 공천파동과는 아무 상관없는 나에게도 시선이 싸늘했다. 그나마 후보 단일화가 되고, 내가 후보가 됐으니까 그만큼의 득표율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 내년 총선에서도 새정치연합 또는 천정배 의원 등과의 야권연대가 필요하다고 보는 건가?
"정의당의 기본 노선은 '야권과의 협력적 경쟁관계'여야 한다. 정책은 날카롭게 경쟁하고, 총선·대선 등의 큰 선거에서는 국민의 뜻을 받아서 연대해야 한다. 2016년 총선도 큰 선거이므로 연대가 필요하다. 다만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내용과 방식을 갖춘 연대여야 한다.

선거제도처럼 큰 개혁 과제를 놓고 구체적 합의가 이뤄지면 연대를 위해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 전략적으로 협력하되, 정책으로는 경쟁하는 '리딩(leading) 그룹'으로 역할을 하겠다. 정의당이 가장 큰 당은 아니지만, 독특한 원내 제3당 아닌가. 진보정당으로서 내년 선거판에서 상생할 수 있는 선거연대를 주도해나갈 수 있다."

- 내년 총선에서 서울 동작을과 노원병 중 어느 지역으로 출마할 것인가?
"출마 지역을 어떤 시기에 어떻게 정하느냐도 주요 선거행위다. 당과 상의한 뒤 때가 되면 결정하겠다."

- 제3의 지역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지난 재보선 때 동작을에 출마한 것도 당에서 정했다. 나는 어디든 나가야 하는 사람이다. 반드시 3선으로 국회에 복귀하겠다."

"진보 결집, 다원민주주의 실현해야 한다"

- 오는 9월까지 진보재편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총선을 위해 결집을 서두르면 또다시 분열 등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진보재편을 선거용으로 보지 않는다. 진보가 결집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따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에게 책임 있는 정치세력으로 인정받기 위한 첫걸음이다. 정의당은 출발할 때부터 '혼자 가지 않겠다, 흩어진 진보세력의 구심점이 되겠다'라고 약속했다.

마침 선거를 앞둬서 그렇지, 진보재편 논의는 계속 진행해왔다. 진보재편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계속 모아나갈 것이다. 여러 강물과 시냇물이 큰 강으로 합류하듯이, 가장 낮은 데 위치한 바다로 갈 동안 계속 지류를 모아내겠다.

우리는 두 가지 지적에 답하는 차원에서 질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하나는 '왜 큰 차이도 아닌 것 가지고 분열했는지', 또 하나는 '왜 국민 눈높이에 맞추지 못하는지'다. 이중 전자를 해결하려면, 진보 재결집으로 싸우지 않고 공존하는 다원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 노동당 내부 반대 등으로 통합이 요원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진보 재결집에 반대하는 분들까지도 포기하지 않겠다. 그분들은 나름의 문제의식으로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지, 궁극적으로는 진보가 하나 되는 데 동참할 것이다. 문제는 시간과 과정이다. 

한 번에 다 안 된다면, 긴 시간을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만나는 시간과 방식 등은 실사구시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겠다. 힘과 힘의 대결로 가지 않겠다. 손과 손을 마주 잡는 방법으로 가겠다. 언젠가 같이할 분들이라 생각하고 더 좋은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

- 진보신당 내부의 반대에도 2011년 통합진보당 창당 과정에 합류했다. 당시 그런 행보를 비판했던 사람들과 감정적 앙금이 남아있지 않나?
"제가 누구를 탓하겠나. 당시에는 진보정당의 가치를 지켜나가면서 더 큰 대중정당을 만드는 것이 국민의 요구라고 생각해 과감히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함께한 분들과 충분히 더 얘기하지 못하고 임박한 상황에 맞춰 결단 내렸다. 많은 분들에게 상처와 실망을 안겼다. 그분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언변 때문에 정책능력 부각 안 돼 억울하다"

- 온라인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오랫동안 진행해왔다. 어떤 성과가 있었다고 보는가?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듣고 정의당에 입당했다는 분들이 꽤 있다. 하지만 팟캐스트를 애청하는데도 정의당에 표를 안 주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있다. 그분들의 마음을 어떻게 가져올 것인가가 과제다."

- 노 후보는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진보 정치인이다. 일각에서는 너무 인기에 집중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기도 한다.
"억울하다(웃음). 사람들이 말을 정말 잘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장 말 잘하는 정치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되레 그런 칭찬 때문에 얼마만큼 일을 잘하느냐가 부각 되지 않는다.

그동안 정치인으로 많은 일을 했다. 헌법소원을 제일 많이 낸 정치인으로서 1인2표제 도입을 이끌어냈다. 영세 자영업자들을 위해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 인하도 이뤄냈다. 덕분에 미용사협회와 안경사협회 등에서 지금까지도 나를 도와준다. 내가 잘하는 건 말이 아니라 일이다. 언변 때문에 자꾸 정책적 능력이 가려지는 듯해 속상하다."

- 당 대표가 되면 가장 먼저 어떤 일을 해보고 싶나?
"박근혜 정부의 복지공약을 재검토하겠다. 앞으로 우리는 과거처럼 무상급식 등을 두고 원조 경쟁을 펼치면 안 된다. 진보정당으로서 더 많이 주는 복지 경쟁은 하지 말자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복지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재정에 우선순위를 두는 마스터플랜을 짜야 한다.

먼저, 박 대통령의 복지공약이 어느 정도 진척됐고, 문제는 없었는지 각 당이 모여 재검토해야 한다. 반성도 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치권은 1차 분배 구조가 악화되는 상황을 방치해두고 복지로만 해결하려고 했다. 1차 분배과정도 함께 수술해야 한다. 특히 정의당은 더 이상 반짝이는 아이디어, 조금 더 센 메시지로 승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책임지는 정당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 노 후보의 정치적 목표는 어디까지인가? 대선 출마도 생각하나?
"당근이다(당연하다). 정권교체에 힘을 보태겠다. 이왕이면 제대로, 좋게 이겨서 진보진영이 20년 집권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 그래야 세상이 달라진다. 우연히 이기면 또 빼앗긴다. 오래 집권하려면 처음부터 잘 이겨야 한다. '진보 장기집권'이 정치적 목표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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줬다 뺏는 박근혜, "뻔뻔해도 유분수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6/30 12:22
  • 수정일
    2015/06/30 12:2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줬다 뺏는 기초연금
 
 
7월이면 기초연금이 도입된 지 1년이다. 기초연금만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무엇보다 '줬다 뺏는 기초연금' 때문이다.

지난 1년째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은 매달 25일 기초연금 20만 원 입금을 통장에서 확인하고 다음 달 20일 기초생활 생계 급여에서 같은 금액을 공제당하고 있다. 그 수가 무려 40만 명에 달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노인 70%가 대부분 기초연금만큼 현금 소득이 늘었는데, 유독 가장 가난한 기초생활수급 노인들만 여기서 배제되고 있다.

노인들, 이제는 한숨만…

처음엔 이분들은 '어찌 그럴 수 있느냐'며 분통해 하셨는데, 이제는 오직 한숨만 쉬신다. 정부로부터 생계 급여를 받는 주제에 무슨 말을 또 하냐며 자신을 탓하신다.

하지만 정작 부끄러워할 사람들은 이분들이 아니다. 이러한 사태를 초래하고도 방치하는 우리 모두가 책임자이다.

작년 기초연금법이 국회에서 통과될 때까지 아무도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아니 모르거나 안중에 없었다. 정부는 이를 알리지 않았고, 국회와 복지 시민단체들은 오로지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연계 문제에만 정신이 쏠려 있었다.

정부, 법으로 기초연금 보장하고 시행령으로 박탈

우선 박근혜 정부의 뻔뻔함이 도를 넘는다. 기초연금법에선 20만 원을 보장해 놓고, 다른 법 시행령에서 이를 뒤엎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기초 연금은 국민 연금 가입 기간에 따라 금액이 삭감되는 구조를 지닌다. 그럼에도 결코 삭감되어선 안 되는 대상이 기초연금법에 명시돼 있다. 바로 장애인연금 수령자, 기초생활수급 노인 등이다. 보건복지부도 기초연금법 통과를 주문하면서 보도 자료를 통해 이를 홍보하기도 했다.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에도 기초노령연금을 신청하는 경우 지원 대상이 되며, 기초연금의 경우 20만 원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조치(기초연금법안 제5조 제6항)" (보건복지부 보도 설명 자료, 2013년 12월 27일)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기초연금법 제정 이후 관련 법률인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을 정비해야 했다. 현재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을 보면, 소득 인정액 범위에 기초연금이 들어가 있다.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이 기초연금을 받더라도 이 금액이 생계 급여에서 공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단어가 소득 인정액 범위에서 삭제돼야 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

제3조(소득의 범위) ① 법 제2조제9호에서 "실제 소득"이란 다음 각 호의 소득을 합산한 금액을 말한다.
1. 근로 소득... 2. 사업 소득.... 3. 재산 소득.... 4. 이전 소득
다. 「국민연금법」, 「기초연금법」, 「공무원연금법」, 「군인연금법」, 「별정우체국법」...

그런데 정부는 이를 그대로 놔두었다. 이는 시행령이 상위 법 조항을 무력화하는 불합리한 경우이며,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보건복지부의 설명과도 어긋난다.

작년 9월 추석을 앞두고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노인복지관을 방문해 '개선하겠다' 약속하고 올해 2월 당시 이완구 국무총리가 남윤인순 의원 질문에 "보완 대책을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단지 말뿐이다.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국회, 법안들 낮잠만 재워

둘째,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회의 의지, 능력이 너무 빈약하다.

복지 확대에 소극적인 새누리당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의 활동은 실망만을 안겨준다. 작년 기초연금법 제정 과정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오로지 다가오는 지방 선거에서 악재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정치 공학 문법에만 매달렸다.

서둘러 통과시키다 보니 기초연금법에 기초연금액 조정 원리가 소득 연동에서 물가 연동으로 대체되었음에도 별다른 대응이 없었다. 사실 황당한 법안 심의이다(당장 기존처럼 소득 연동이었으면 올해 4월부터 기초연금이 3.2% 올라 20만6400원이었어야 했건만, 물가와 연동되는 바람에 1.3%만 인상돼 20만2600원에 그쳤다. 이러한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질 것이다).

'줬다 뺏는 기초연금' 역시 그렇다. 기초연금법 심의과정에서 이 문제는 아예 제기조차 되지 않았다. 기초연금법 제정 이후 이 문제가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이를 시정하려는 활동도 미미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정치민주연합 이목희, 새정치민주연합 양승조, 정의당 박원석 의원이 법안을 제출했으나, 보건복지위원회는 이 법안들을 계속 낮잠만 재우고 있다.

복지·시민단체, 더 분발해야

셋째, 내가 활동하는 단체를 포함해 복지·시민단체들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작년 5월 기초연금법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한 언론사가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에 물었다. "혹시 기초연금이 도입돼도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은 못 받는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데, 맞는지요?" 아차 싶었다. 후속 조치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을 손보지 않으면 그러할 위험이 컸다.

서둘러 문의했건만 보건복지부는 시행령을 바꿀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존 기초노령연금에서도 이 문제가 존재했으므로 국회가 기초연금법 제정 과정에서 반드시 정부에게 '시행령 개정' 약속을 받았어야 했는데 이를 놓친 것이다. 

일부 복지학자들은 기초연금을 소득 인정액에서 빼면 기초생활보장제의 '보충성 원리'가 무너진다고 우려한다. 설령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줬다 뺏는 기초연금'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인 가구 유형 최저 생계비의 재설계를 포함해 전체 최저 생계비 체계를 바꿔야 하는데 이를 위한 활동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작업에 시간이 걸린다면 과도적이라도 기초연금을 소득 인정액에서 제외하는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복지 전문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요청된다.

시행령의 '기초연금' 4글자만 삭제하면 돼

작년 6월 노년유니온,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등 20개 단체들이 '빈곤 노인 기초연금 보장 연대'를 구성했다. 청와대 앞에서 '도끼 상소'를 올리고, '대통령직도 줬다 뺏을까요?', '줬다 뺏는 기초연금, 불효정당 새누리당' 퍼포먼스 등 다양한 활동을 폈으나 아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역시 40만 기초생활 수급 노인들에게 송구하다. 미리 챙기지 못하고 법안이 통과된 이후에야 움직였다. 그만큼 더 열심히 활동하겠다 다짐한다. 해법은 간단하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에서 '기초연금' 네 자를 삭제하라!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세요.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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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왜 유승민을 죽여야만 하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6/30 12:06
  • 수정일
    2015/06/30 12:0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합리적 보수를 주장하며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고 있는 유승민 의원
 
임병도 | 2015-06-30 09:58: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말하며 유승민 의원을 죽이려고 합니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친박계를 중심으로 유승민 의원이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새누리당 최고위원 8명 중 4명이 유승민 의원이 사퇴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국회법 개정안’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친박계의 유승민 사퇴 요구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왜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 의원을 그토록 몰아내려고 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알아봤습니다.


‘합리적 보수를 주장하는 유승민’

유승민 의원의 지역구는 ‘대구 동구 을’입니다. 유승민 의원의 지역구가 대구이니, 박근혜 대통령의 후광 때문에 당선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구가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기반인 것은 맞지만, 100% 박근혜 대통령 때문은 아닙니다.

유승민 의원은 17대 비례 대표로 국회에 들어왔다가 사퇴하고 10.26재보궐선거 대구 동구 을 지역에 출마, 다시 국회로 들어옵니다. 유승민 의원이 대구에서 출마한 이유는 대구가 아버지 유수호 전 의원의 지역구였기 때문입니다.

유승민 의원의 아버지 유수호 전 의원은 대구지방법원 판사 출신으로 ‘여당의 양심세력, 여당의 비판세력’을 내세웠던 대구 중구의 13대, 14대 국회의원이었습니다.1 유승민 의원은 경북고등학교 출신의 전형적인 대구 토박이였던 아버지 유수호 전 의원의 지역 기반을 토대로 대구에서 출마해 당선됐지, 결코 박근혜 때문만은 아닙니다.

판사출신이었던 유수호 전 의원은 14대 국회가 끝나면서 본업인 변호사로 돌아가겠다며 15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과욕이 되기 전 그만두는 게 온당하다고 판단했다’는 그의 말을 통해 전형적인 권력만 추구형 보수만은 아니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2 

유승민 의원은 무조건 보수를 고집하거나 편을 들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2013년 합창의장 인사청문회에서는 “진보정권, 좌파정권이라고 비난받던 노무현 정권은 자주국방을 위해 8.8%씩 국방예산을 늘렸는데, 국가안보를 생각하는 보수정권이라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연평균 5.3%, 4.1% 늘린 것은 국가안보를 생각하는 보수정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면서 보수정권이 내세우는 보 프레임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2014년 새누리당 사회경제적특위에서는 “특위가 출범하고 자문위원이 확정되니까 외부에서 새누리당이 너무 왼쪽으로 가는 게 아니냐며 약간 이념적 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은데 저는 위원장으로서 그런데 전혀 개의치 않는다. 보수냐 진보냐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센터, 마을기업 등과 관련해서 이 나라가 가야 할 옮은 방향이라면 이념적 색깔 씌우기에 전혀 구애받지 않겠다”며 진보에 가까운 정책을 강행하기도 했습니다.

유승민 의원을 가리켜 ‘합리적 보수’라고 합니다. 그의 행동과 발언, 정책이 보수세력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에서 약간씩 좌에 치우치거나 진보와 보수를 정확히 나누지 않는 특징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고 있는 유승민 의원’

유승민 의원이 여권 내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4위에 올랐습니다.3 박근혜 대통령과 대립하고 있는 모습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고 있었습니다.

▲대구, 경북 광역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차기 정치적 리더 조사 ⓒ 대구일보

대구일보가 2014년 말에 대구, 경북 시도의원을 대상으로 차기 정치 리더를 조사한 결과, 대구시의원들은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을 뽑았습니다.4 유승민 의원은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지역구와 상관없이 고른 지지를 받았습니다. 대구 정치인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이유가 ‘정치 신뢰도가 높고 소신 있는 정치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대구시의원들은 유승민 의원에 대해 “중앙 정치권에서 강력한 리더로 지역을 대표할 수 있으며, 원칙을 중요시하고 진보와 보수의 적절한 이미지를 갖춘 눈치 보지 않는 정치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역 기반인 대구에서조차 합리적 보수로 가야하는 차세대 지도자의 모습을 갖춘 인물이 유승민 의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2인자와 항명을 용납하지 않은 박정희와 박근혜’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는 2인자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부하들이 서로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경쟁을 부추기면서도 결코 권력을 나눠주지는 않았습니다. 

‘이후락’, ‘박종규’, ‘김재규’, ‘차지철’, ‘김형욱’ 등의 인물을 적당히 경쟁시키며 권력을 견제했던 박정희는 만약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있다면 가차 없이 내쳤습니다. 윤필용이나 김종필 등이 제거됐던 이유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됐기 때문입니다.
 
박정희는 군주라는 개념이 강했기 때문에 국회조차도 자신의 명령에 따르도록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만약 국회의원이라고 국회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철저히 응징했습니다.

1971년 공화당 의원 23명이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습니다. 처절한 고문을 당한 공화당 의원의 죄목은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에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입니다. 공화당의 실세였던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은 ‘10.2 항명’5이라 불리는 해임안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고, 강제로 정계를 떠났습니다.
 
지금 유승민 의원이 겪고 있는 사퇴 요구를 보면, 박정희 정권 때 벌어졌던 ‘10.2 항명’과 너무나 유사합니다. 단지 내무장관을 해임하게 했다는 이유와 국회법 개정안을 주도한 과정을 보면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가 됐다는 것은 ‘친박 우세론’보다 새누리당의 ‘위기론’이 작용했습니다. 유승민 의원은 원내대표에 출마하면서 “이대로 가면 내년 총선은 어렵다. 특히 박빙의 승부처인 수도권 선거는 더 힘들고 충청·강원·영남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누가 원내대표가 되는 것이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올바른 선택인가.”라며 ‘위기’를 내세워 원내대표에 당선됐습니다.6
 
박근혜 대통령은 절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사퇴 요구를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내부에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위협하는 세력의 중심에 ‘유승민 의원’이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 의원을 죽여야만 레임덕을 늦출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승민 의원은 사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퇴 파문은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 레임덕의 시작이 될 것이며, 친이계와 중도 보수가 힘을 합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리더는 새로운 사상을 가진 신진 세력을 품 안에 끌어들입니다. 독재자는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여 버립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유승민 사퇴 요구는 리더십이 완전히 망가지는 사건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1. 대구중구합동연설회. MBC뉴스. 1988년 4월 17일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8/1808719_13401.html 
2. 유승민 의원을 주목한다. 영남일보. 2013년 4월 22일.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30422.010310709170001
3. 유승민 원내대표 여권 ‘차기 대선주자’ 4위 올라. 경향신문 2015년 6월 29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291200541&code=940100 
4. 할말하는 원칙주의 ‘믿음 가는’ 유승민 중앙정치 영향력 갖춘 ‘친박핵심’ 최경환. 대구일보, 2014년 12월 31일.http://www.idaegu.com/?r=home&c=4&uid=308242 
5. 경향신문, 1971년 10월 4일 
6. 유승민 "박근혜 지지율 추락...내년 총선 어렵다" 오마이뉴스 2015년 1월 27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76315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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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태권도인, 남북종단. 북태권도단 미국 공연 추진

 
 
북 당국자 적극 호응, 남측 당국에 긍정적 기대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06/30 [08:2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지난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미국 태권도 협회 관계자는 4월 대회가 취소된 것에대해 아쉬움을 표명하면서 에볼라 바이러스 사태가 끝나면 재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바 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미국의 태권도인들이 조선 에볼라 바이러스 방역 조치로 취소됐던 남북한 종단 계획을 다시 추진키로 했다.

 

미국의소리방송은 30일 조선과 미국의 태권도인들이 상호 방문과 시범공연 등 구체적인 교류 계획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태권도 전문 잡지인 ‘태권도 타임스’ 의 정우진 대표는 29일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조선 태권도 고위 관계자들과 면담했다고 밝혔다.

 

태권도 타임스의 정우진 대표는“국제태권도연맹 ITF의 장웅 총재, 그리고 조선태권도위원회 김경호 위원장을 만나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태권도인들과 조선 태권도인들 간 왕래, 그리고 남북한 태권도 교류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고 전했다.

 

정대표는 "이번 논의에서 지난 4월 조선의 에볼라 방역 조치로 무산된 ‘남북한 태권도 종단’ 행사를 다시 추진하자는 데 합의했다."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태권도인들이 조만간 조선을 방문해 군사분계선을 통과한 뒤 통일을 상징하는 짧은 행사를 갖고 곧바로 한국 땅을 밟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또한“평양의 태권도 성지에서 조선 태권도인들과 서로 기술교환도 하고 세미나도 연 뒤에 남북한 중간지점으로 이동해 통일을 염원하는 격파 시범을 진행하려고 한다.”고설명했다.

 

미국 태권도인들은 이 계획이 성사 될 경우 한국으로 입국해 서울을 거쳐 무주 태권도원, 제주도의‘주먹탑 (태권도탑)’ 등을 돌아보는 일정도 기획 중이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일정은 남북한 육로를 통과하는 동선으로 남북한 당국의 승인을 거쳐야 하는 절차인데 양측으로부터 이미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는게 정 대표의 설명이다,

 

태권도 타임스 정우진 대표는“이번에 평양에서 조선 당국자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 받았고, 한국 측으로부터도 긍정적 반응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해 미국인들이 추진하는 태권도 행사의 성사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앞서 지난 4월 무산된 남북한 종단 행사에는 1백명 가까운 미국 태권도인들이 방북 의사를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대표는 올 가을 북한 태권도 시범단의 미국 공연 가능성도 타진 중이라고 밝혀 태권도를 통한 조-미, 남-북 관계개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미국 태권도인들은 앞서 지난 2007년과 2011년 조선 태권도 시범단의 미국 공연을 진행해 미 언론과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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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IB 협정문 서명식, 중국 주도 세계금융질서 본격화

 
최경환 부총리 "AIIB 통한 북한 지원 마다할 이유 없다"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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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29  17: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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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금융기구인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29일 협정문 서명식을 갖고 공식 출범했다. 바야흐로 '중국의 시대'로 한발짝 더 접어든 셈이다.

 

   
▲ 최경환 부총리가 29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AIIB 협정문 서명식에 참석했다. [사진출처 - 기획재정부]
기획재정부는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과 러시아, 인도, 독일 등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57개 회원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29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AIIB 협정문 서명식에서 한국 정부를 대표해 서명했다”고 밝혔다.

 

서명식에 참석한 57개 회원국 중 중국과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필리핀을 비롯한 7개국은 이날 서명하지 않고 연내에 서명할 예정이다. 우리나라는 AIIB의 창립회원국으로 협정문에 등재됐고, 향후 국회 비준동의를 완료하면 공식적으로 창립회원국이 된다.

당초 미국의 반대 속에 중국 주도로 추진된 AIIB는 아시아 지역의 부족한 인프라 투자를 지원함으로써 아시아의 경제.사회발전을 촉진하고 부를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다자개발은행이다. 이후 융자, 보증, 지분투자, 기술원조 등을 통해 인프라 투자를 지원하게 된다.

이날 서명된 협정문에 따르면 AIIB의 수권자본금은 1천억 달러이며 이중 납입자본금 비율은 20%, 역내국 지분 비중은 75% 이상이다. 그러나 일부 회원국이 배분된 일부 지분을 포기해 출범일 기준 실제 청약자본금은 982억 달러다.

이 중 중국은 지분률이 30.34%, 투표율 26.06%를 확보해 최대주주로 떠올랐고, 인도(8.52%), 러시아(6.66%), 독일(4.57%)에 이어 한국은 지분율 3.81%, 투표율 3.5%로, 37개 역내국 중 4위, 57개 전체 회원국 중 5위를 차지했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이 가입한 국제금융기구 중 가장 높은 순위이며, 한국에 배당된 자본금 37억 4천만 달러 가운데 실제 납입금액은 7억 5천만 달러이고 향후 5년간 분할 납입될 예정이다.

AIIB 지배구조는 총회, 이사회, 총재 및 1인 이상의 부총재와 임직원으로 구성되며, 이사회는 비(非)상주로 출범하되, 총회 의결에 의해 상주화가 가능하며 모든 투자결정에 대한 권한을 보유하게 된다.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에 따르면 아시아의 인프라 투자 수요는 매년 730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되나, 투자되는 자금은 연간 2360억 달러 수준에 불과하고, 이같은 실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10월 AIIB 설립을 제의해 이날 결실을 거두게 된 것.

중국은 육상으로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거쳐 유럽 대륙까지 철로를 연결해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형성하고 해상으로는 중국 연해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인도양을 거쳐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연결하는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 실현과 맞물려 AIIB 설립에 공을 들여 왔다.

2014년 10월 중국.인도.아세안 등 21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AIIB 설립 관련 양해각서(MOU) 서명식을 가졌고, 우리나라는 지난 3월 27일 공식적인 참여를 결정함으로써 막차를 타고 예정 창립회원국 지위를 획득한 바 있다.

기재부는 “AIIB 출범이 인프라 분야에서 경쟁력 있는 국내 기업들과 금융기관의 사업 참여 기회가 확대되는 등 관련 산업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

앞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경부 장관은 28일 오후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만나 "AIIB 설립 이후 운영 과정에서 북한 지원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환경과 여건이 조성된다면 AIIB를 통한 북한 지원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말해 주목된다. 현재 북한은 AIIB 회원국이 아니지만 AIIB 지분의 4분의 3 이상이 찬성하면 북한 지원도 가능하다.

안병민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은 신의주-개성 간 철도.도로 연결사업에 대해 “북-중 간 철도 연결은 양자간 협력사업이 아니라 다자간 협력사업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의 최적의 파일럿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관련기사 보기]

정부는 AIIB 출범과 가입에 따른 국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반기에 계속될 협상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TF) 구성.운영 △한국 인력의 AIIB 고위직 및 중간관리직 진출 지원 △지분율에 걸맞은 이사직 수임 등을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한편, 최 부총리는 협정문 서명식 후 시진핑 주석이 개최한 간담회에 참석했으며, AIIB 특별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해 AIIB의 출범까지 향후 준비계획과 총재 선임절차, 신규회원국 가입절차 등을 협의했다.

<AIIB 회원국별 지분율 및 투표권>
 

순위

국 가

지분율

투표권

순위

국 가

지분율

투표권

1

China

30.34%

26.06%

32

Brunei

0.05%

0.31%

2

India

8.52%

7.51%

33

Lao PDR

0.04%

0.30%

3

Russia

6.66%

5.93%

34

Mongolia

0.04%

0.30%

4

Korea

3.81%

3.50%

35

Tajikistan

0.03%

0.29%

5

Australia

3.76%

3.46%

36

Kyrgyz

0.03%

0.29%

6

Indonesia

3.42%

3.17%

37

Maldives

0.01%

0.27%

7

Turkey

2.66%

2.52%

역내국 합계

74.77%

73.29%

8

Saudi Arabia

2.59%

2.47%

9

Iran

1.61%

1.63%

 

 

 

10

Thailand

1.45%

1.50%

1

Germany

4.57%

4.15%

11

UAE

1.21%

1.29%

2

France

3.44%

3.19%

12

Pakistan

1.05%

1.16%

3

Brazil

3.24%

3.02%

13

Philippines

1.00%

1.11%

4

UK

3.11%

2.91%

14

Israel

0.76%

0.91%

5

Italy

2.62%

2.49%

15

Kazakhstan

0.74%

0.89%

6

Spain

1.79%

1.79%

16

Vietnam

0.68%

0.84%

7

Netherlands

1.05%

1.16%

17

Bangladesh

0.67%

0.83%

8

Poland

0.85%

0.98%

18

Qatar

0.62%

0.79%

9

Switzerland

0.72%

0.87%

19

Kuwait

0.55%

0.73%

10

Egypt

0.66%

0.83%

20

New Zealand

0.47%

0.66%

11

Sweden

0.64%

0.81%

21

Sri Lanka

0.27%

0.50%

12

South Africa

0.60%

0.77%

22

Myanmar

0.27%

0.49%

13

Norway

0.56%

0.74%

23

Oman

0.26%

0.49%

14

Austria

0.51%

0.70%

24

Azerbaijan

0.26%

0.48%

15

Denmark

0.38%

0.58%

25

Singapore

0.25%

0.48%

16

Finland

0.32%

0.53%

26

Uzbekistan

0.22%

0.45%

17

Luxembourg

0.07%

0.32%

27

Jordan

0.12%

0.37%

18

Portugal

0.07%

0.32%

28

Malaysia

0.11%

0.36%

19

Iceland

0.02%

0.28%

29

Nepal

0.08%

0.33%

20

Malta

0.01%

0.27%

30

Cambodia

0.06%

0.32%

역외국 합계

25.23%

26.71%

31

Georgia

0.05%

0.31%

 

<자료제공 - 기획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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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엑스 미국 폭발위성의 두 가지 의문점

스페이스엑스 미국 폭발위성의 두 가지 의문점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06/29 [15:4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유튜브에 공개된 스페이스 엑스 폭발 동영상]

 

▲ 미국 스페이스 엑스 노즐에서 발생한 불꽃 이상 현상, 아래 유튜브 시각에서 실제 발사 시각은 10초를 빼면 된다. 그러므로 발사 후 정확히 1분여만에 노즐에서 비정상적인 불꽃이 튀기 시작하였다.     © 자주시보

 

▲ 미국 위성 스페이스 엑스의 이상한 발광현상, 노즐에서 이상한 불꽃이 탁탁탁 튀기더니 엔진 소리가 둔탄해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0초 후 위의 사진처럼 위성 꼭대기부분에서 3번 단속적인 이상한 발광현상이 일어나더니 로켓모터가 점점 불꽃에 휩싸이며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 자주시보

 

▲ 스페이스 엑스 꼭대기의 이상한 발광 현상을 확대한 사진이다.   ©자주시보

 

▲ 곤두박질 치는 스페이스엑스, 요즘 미국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 자주시보

 

▲ 두 차례에 걸친 폭발을 일으키는 미국 위성 스페이스 엑스     © 자주시보

 

▲ 마지막 폭발 후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스페이스 엑스     ©자주시보
▲ 산산 조각 난 스페이스 엑스 잔해가 떨어진 미국 플로리다 대지엔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고요와 평온만 감돌았다.     © 자주시보

 

2002년 엘론 머스크가 창업한 스페이스 엑스 회사의 무인우주선이 미국 플로리다 발사센터에서  28일(현지시각) 발사 된 지 1분만에 문제가 발생하여 그 후 1분여 뒤에 결국 공중 폭발하고 말았다.

 

스페이스 엑스는 2008년 나사와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총 12회에 걸쳐 우주에 필요한 물자와 우주인을 실어다주는 내용의 계약을 16억달러에 체결한 바 있다. 이번엔 물자만 싣고 가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한 번 발사 하는데 것의 1000억원이 훨씬 넘게 드는 셈인데 그대로 날려버린 셈이다.

 

문제는 미국에서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지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찾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2013년 2월 제니트 통신위성 실패 등 미국 위성발사 실패가 줄을 잇고 있다. 현재 미국은 이유는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지만 우주인들의 경우 러시아의 위성을 이용하고 있다.

일본도 위성 발사에 3번 내리 실패하는 등 문제가 이어져 현재 위성발사 사업이 위축되어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도 몇 년 전에 연이어 2번 실패한 적이 있다.

그에 반해 쏘는 족족 성공하는 나라는 이란과 중국이다.

 

물론 위성은 워낙 고난도의 첨단 정밀 기술을 요하는 최첨단 장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스페이스 엑스의 실패는 좀 의아하다.

 

먼저 발사 1분 후 노즐에서 탁탁탁 하며 불꽃이 튀며 엔진음이 갑자기 둔탁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약 10초 후 위성 머리에서 이상한 빛이 세번 깜박이더니 급격하게 엔진에서 불꽃이 번지면서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후 1분여만에 공중 폭발하여 1000억이 넘는 첨단 우주비행선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노즐에서 불꽃 이상을 일으켰다면 엔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미국이 로켓 엔진을 이정도로 형편없이 만드는 나라가 아니지 않는가. 물론 이번 로켓은 불꽃이 붓끝처럼 모아지는 형태로 오랜 동안 미국이 사용해온 화염이 옆으로 많이 퍼지는 미국의 델타로켓 화염과는 좀 다르긴 했다.

아무리 신형로켓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런 붓꽃화염은 우리 나로호에서도 보여준 것이고 북의 은하로켓, 러시아의 대륙간탄도 미사일 등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미국이 그런 나라보다 형편없이 만드는 나라는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이상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위성로켓 머리에서 왜 빛이 발생하는가이다. 불꽃이 일어났다면 마지막 위성의 방향제어 로켓이 잘못 점화되어 그렇다고 볼 수 있겠는데 불꽃이 아니라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같은 빛이었다. 우주선에도 헤드라이트를 장착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어차피 우주선 윗 뚜껑은 우주공간으로 진입하면 튕겨내어 버리게 되어 있다. 거기에 헤드라이트를 설치 할 이유가 없다.

그 빛도 한번이 아니라 자동차 깜박이처럼 3번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태양빛이 구름에 얼룩거렸을 가능성도 없다. 이미 구름층을 뚫고 올라간지 오래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그 공간은 구름이 없는 아주 청명한 곳이었다.

 

나사 측에서는 이번 실패 원인을 로켓 상층 액체산소통에 작용한 과도한 압력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더 정확한 원인은 조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http://www.zdnet.co.kr/news/news_view.asp?artice_id=20150629091625&type=det&re=

 

어쨌든 미국은 이번 위성 실패로 심각한 손해를 입게 되었다. 막대한 비용들여 만든  우주선은 몰론 싣고 있던  2,400 kg에 해당하는 도킹 어댑터(도킹된 우주선의 연락 통로),우주복 고가의 화물들을 잃게 되었다. 우주인들이 사용할 물품은 4개월여분이 남아 있어 당장 급하지는 않지만 이 스페이스 엑스 사업이 실패하면 미국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 사업은 국가 사업이 아니라 민간자본이 투자된 사업이다. 요즘 구글에서도 투자를 하는 바람에 스페이스 엑스의 주가가 하늘 높이 폭등했고 연관 기업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하면 무너진다. 그 성장동력 중에 하나가 야심찬 우주산업이었다. 그래서 이번 스페이스 엑스의 실패는 미국에게 더욱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스페이스 엑스 사는 나사와 계약 이행을 위해 최근 9달간 공급 임무를 3번 시도하여 다 실패했다. 지난해 10월 버지니아의 오르비탈 사이언스 기업이 건설한 안타레스 로켓이 플랫폼에서 거대한 불덩어리로 폭발했다. 올 4월에 러시아의 프로그레스 화물선이 궤도에서 접촉이 두절되었다.그리고 대기권에 재돌입 하면서 로켓이 다타버렸다. 둘다 화물 비행이었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세번째로 미국 자체 발사마저 실패한 것이다.

 

스페이스 엑스 사의 다음 발사는 러시아가 맡아 7월 3일 바이코누르 우주 센터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 다음달 이후 많은 검증을 끝낸 러시아의 소유즈 우주선을 이용하여 미국 우주인 탑승 로켓 발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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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째 최저임금 동결 주장 경총의 ‘괴담’ 3가지

9년째 최저임금 동결 주장 경총의 ‘괴담’ 3가지

생계비로 충분하다? 매년 급격히 올랐다? 일자리 줄어든다?

정웅재 기자  최종업데이트 2015-06-28 15:34:56 이 기사는 현재 건 공유됐습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은 매년 최저임금이 결정된 직후 'oooo년 최저임금 결정에 대한 경영계 입장'이라는 보도자료를 낸다. 앞자리의 연도수만 다를 뿐, 해마다 내는 이 보도자료의 내용은 주요 내용이 똑같다.

매년 동결 주장하고, 인상되면 급격한 인상 비판
청년, 고령자 등 취약계층 일자리 줄어든다고 엄포

경제사정도 어려운데 고율의 최저임금 인상을 했다고 비판하며, 존폐 기로에 있는 영세사업장의 부담이 커지게 됐다고 우려한다. 그러면서 해마다 반복되는 최저임금 고율 인상은 경제의 성장잠재력과 일자리 창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구체적으로 청년, 고령자 등 취약계층의 일자리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마침표를 찍는다. 최저임금 인상이 최저임금을 받는 계층의 일자리를 빼앗는 역설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이다.

알바노조 회원들이 25일 오전 서울 마포구 대흥동 경총회관 앞에서 2016년도 최저임금 동결안을 제시한 경총을 규탄하며 연좌농성을 하다 경찰에 연행되며 피켓을 빼앗기고 있다.
알바노조 회원들이 25일 오전 서울 마포구 대흥동 경총회관 앞에서 2016년도 최저임금 동결안을 제시한 경총을 규탄하며 연좌농성을 하다 경찰에 연행되며 피켓을 빼앗기고 있다.ⓒ양지웅 기자

매년 최저임금 인상 후 똑같은 반응을 내놓는 경총이 똑같이 반복하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최저임금 동결 주장이다.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위한 올해 최저임금위원회 논의에서 사용자위원들이 최초 제시안으로 동결 주장을 내놓자, 언론에서는 9년째 동결주장을 했다고 썼는데, 정확하게는 8년은 동결을, 한 해는 삭감을 주장했다. 2007년과 2008년에는 동결안을 내놨고, 2009년에는 -5.8% 삭감안을 내놨다. 2010년부터는 매해 동결안을 내놓고 있다.

사용자위원들이 동결 주장을 하는 배경은 이렇다. 첫째, 경제 사정도 어려운데 매년 급격한 인상을 해왔다는 것, 둘째 최저임금 수준이 생계비로 충분할 정도로 올랐다는 것 등이다. 과연 그럴까? 박근혜 대통령마저 지난 대선 후보 시절, "최저임금 인상기준을 마련해 근로자 기본생활을 보장하겠다"고 공약한 점에 비춰보면, 사용자위원들의 주장은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인식과 동떨어져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때 "최저임금 제도는 근로자 기본생활을 보장하고, 소득분배구조 개선을 위해 중요한 제도인데, 최저임금이 근로자 기본생활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라며 "최저임금 결정시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을 기본적으로 반영하고, 여기에 노동시장 상황을 감안해 소득분배 조정분을 더하도록 최저임금 인상기준을 마련하겠다"고 공약했었다.

현행 최저임금법 4조 최저임금의 결정기준은 "최저임금은 근로자의 생계비, 유사 근로자의 임금, 노동샌산성 및 소득분배율 등을 고려해 정한다"고 돼 있다. 박 대통령의 공약은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은 기본적으로 반영해 매년 반복되는 노사간 논란의 소지를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괴담 1. 최저임금, 생계비로 충분하다?

지금 당장 시급 5580원(월급으로는 116만원) 언저리의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생계비로 충분하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제 정신이냐'는 반문이 돌아올 것이다.

한번, 통계로 살펴보자. 최저임금위원회는 최저임금 논의에 참고하기 위해 미혼 단신근로자의 생계비를 산출한다. 2015년 자료의 미혼 단신근로자 생계비는 150만6179원이었다. 2015년 최저임금이 월급으로 116만원이니, 미혼 단신근로자의 생계비보다 34만원 가량 부족하다.

그런데 사용자위원은 뭘 근거로 현행 최저임금이 생계비로 충분하다는 주장을 편 것일까? 바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상 1인 최저생계비 기준인데, 이 금액이 약 61만원이다. 이를 근거로 사용자위원은 최근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최저임금이 최저생계비의 두 배에 달해 미혼단신노동자의 생계비는 이미 최저임금으로 충족 가능하다"는 주장을 폈다. (*최혜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부장의 최저임금위원회 참관기에서 인용.)

터무니없이 낮다는 비판을 받아오고 있는 잣대를 기준 삼아 현행 최저임금 수준이 생계비로 충분하다는 주장을 펼치니 황당할 따름이다.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 최저임금보다 수준이 높은 '생활임금'을 도입해 시행하고 있는 것도 최저임금이 생활 불가능 임금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홈플러스 동수원점 의류매장에서 일하는 장경화(48) 씨는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다. 그는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두 자녀를 키웠다.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최저임금 노동자인 그는 딸이 꿈이 없다고 해서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가 최저임금을 받아 가정을 어떻게 꾸려왔는지는 보려면 기사 맨 하단의 관련기사를 보면 된다.
홈플러스 동수원점 의류매장에서 일하는 장경화(48) 씨는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다. 그는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두 자녀를 키웠다.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최저임금 노동자인 그는 딸이 꿈이 없다고 해서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가 최저임금을 받아 가정을 어떻게 꾸려왔는지는 보려면 기사 맨 하단의 관련기사를 보면 된다.ⓒ장경화 제공

괴담 2. 최저임금 매년 급격하게 올라 더 올릴 수 없다?

최저임금이 매년 고율로 인상됐다는 경총의 주장은 어떨가? 주장의 근거를 보자. 다음은 사용자위원이 최저임금 전원회의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연평균 최저임금이 평균 8.8%씩 오른데 반해 일반 노동자들의 임금은 평균 5.5%씩 올랐다. 물가는 2.9%씩 올랐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으로 중소영세기업의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이다. 노동생산성도 연평균 4.8%씩 밖에 오르지 않았다. 생산성에 비해서도 최저임금 인상률은 너무 높다. 유사노동자의 임금 수준과 비교해도 최저임금이 유사노동자 중위 임금의 50.9%로 절반을 넘었다. 이 통계는 1인 이상 사업장의 전체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통계다." (*최혜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부장의 최저임금위원회 참관기에서 인용.)

사용자위원의 주장은 제 논에 물대기식이다. 우선, 물가는 언급하면서 경제성장률은 언급하지 않았다. 또 최저임금과 유사 노동자의 임금을 비교할 때 기준을 1인 이상 사업장으로 할지, 5인 이상 사업장으로 할지, 10인 이상 사업장으로 할지에 따라 결과가 사뭇 달라진다. 노동자의 평균임금을비교 잣대로 삼느냐, 중위임금을 비교 잣대로 삼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저임금 노동자가 많고, 소득 격차가 크면 중위임금이 평균임금보다 낮다.(*중위임금은 노동자가 100명 있다고 치면, 임금순위에 따라 1등부터 100등까지 나열했을 때 50등 노동자의 임금이다./평균임금은 1등부터 100등까지 노동자의 임금을 모두 더해 평균을 낸 것이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슈페이퍼 '최저임금 적정수준과 고용효과'에서 연도별 최저임금 인상률을 분석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지난 25년 동안(1989~2014년) 연평균 최저임금 인상률은 시급 기준으로 9.8%(월환산액 기준 9.2%)였다. 같은 기간 10인 이상 사업체 상용직의 명목임금 인상률은 시간당 임금 기준으로 9.5%(월정액급여 기준 8.8%)고,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은 9.4%였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최저임금이 저임금 일소, 임금격차 해소, 분배구조 개선 등 본연의 역할을 다 하려면, 최저임금 인상률이 일반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률보다 높아야 한다. 하지만 지난 25년 동안 최저임금 인상률은 일반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률과 거의 같은 수준에서, 성장에 겨우 상응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졌다"라고 지적했다. 매년 고율로 지나치게 인상됐다는 경총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이 오른다." 전국여성노동조합, 민주노총여성위원회, 한국여성민우회 등 7개 노동·시민단체들은 25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최저임금 1만원의 바람아 불어라 기자회견을 열고 최저임금 1만원으로 인상을 촉구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이 오른다." 전국여성노동조합, 민주노총여성위원회, 한국여성민우회 등 7개 노동·시민단체들은 25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최저임금 1만원의 바람아 불어라 기자회견을 열고 최저임금 1만원으로 인상을 촉구했다.ⓒ김철수 기자

괴담 3. 최저임금 인상하면 취약계층 일자리 줄어든다?

최저임금을 자꾸 인상하면 청년, 고령자 등 취약계층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경총의 주장은 어떨까? 최저임금 인상에 따라 경영에 부담을 느낀 사용자들이 고용을 줄일 것이라는 것인데, 김유선 선임연구원은 "1980년대에는 '최저임금은 고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가 다수를 이뤘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최저임금이 고용에 미치는 부정적 고용효과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통계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2014년 현재 자영업자는 565만 명인데, 이 가운데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는 410만 명이고,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는 155만 명이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자영업자 155만 명의 부담이 느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골목상권 보호, 적정 하도급 단가 보장 등 경제민주화를 통해 해결해야 할 것이며, '사람에게 일을 시키면 생활하는데 필요한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훼손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짚었다.

이정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중소기업과 중소상인 어려움! 최저임금 인상이 문제인가? 원하청 불공정거래, 대기업 착취구조가 문제인가?' 토론회에서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중소기업의 도산을 걱정해야 하는 현재에 대한 진단과 원인 파악이 필요하다"면서 "출발점은 '최저임금제가 중소기업을 도산하게 하는가'가 아니라, '중소기업이 도산을 걱정하는 현재의 사회구조적 요인은 무엇인가'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힘의 열세 속에서 노동자들이 생존 수준 이하의 임금을 받을 가능성, 경험이 최저임금제를 등장시켰다"라며 "노동자와는 달리 중소기업이 직면하는 교섭은 다차원적이므로 중소기업 및 영세사업체의 어려움은 오로지 임금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 토론회에서 김철식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납품단가 인하 등 원하청불공정거래 문제가 중소기업의 가장 큰 애로사항이라고 짚었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전과 같은 고도성장이 불가능해지면서, 대기업 자본이 비용 절감을 통한 '단기수익 확보'에 치중한 결과 하청기업인 중소 영세사업장과 비정규직에 부담이 전가됐다고 분석했다.

김 연구원은 "(오히려) 최저임금 현실화는 원청 대기업이 낮은 인건비를 활용하고자 비정규직과 외주화로 비용을 떠넘기는 수익추구 전략을 상당 부분 제약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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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50년의 치욕, 언제까지 방치하는가?

 
한호석의 개벽예감 <165>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5/06/29 [08:04]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2중망언 계속 내뱉는 일본 극우정권
2. ‘이미 무효’ 네 글자가 불러온 재앙
3. 을사오적 매국범죄를 능가하는 매국범죄
4. 독도영유권 침해한 한일기본협정
5. 대일청구권마저 포기한 굴욕외교의 극치

 

▲ <사진 1> 2015년 6월 22일 서울과 도꾜에서 각각 진행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행사들에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교차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하지만 치욕으로 얼룩진 한일관계 50년 역사를 직시하면, 그것은 양국 국민을 속이는 교차기만극으로 보인다.     © 자주시보

 

 

1. 2중망언 계속 내뱉는 일본 극우정권

 

2015년 6월 26일 일본 중의원 평화안전법제 특별위원회에 출석한 아베신조(安培晉三) 일본 총리는 “전쟁 전 일한 사이의 여러 일들에 대해서는 1965년 일한기본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그가 일본 극우정권의 흉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교묘한 어법으로 식민지조선-일제 관계와 한국-일본 관계를 압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태평양전쟁 종전 이전에 일제와 식민지조선 사이에서 발생했던 여러 일들”이라는 식으로 모호하게 표현함으로써 일제의 극악한 범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과 관련하여 한국이 일본에 제기한 문제들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강변한 것이다. 


위에 인용한 아베의 발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식민지조선-일제 관계와 한국-일본 관계에 대한 일본 극우정권의 망언은 반복적이며 2중적이다. 이를테면, 그들의 1차 망언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강점하고 수탈한 범죄가 애초에 있지도 않았고, 일제는 일제와 조선이 합법적으로 체결한 조약들에 의거하여 조선에 정당하게 진출하여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것이며, 그들의 2차 망언은 자기들의 1차 망언이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망언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이 국제법적으로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망언이 법적 근거와 결부되는 경우 망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정치군사적 행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일본 극우정권이 반복적으로 내뱉어온, 식민지조선-일제 관계 및 한국-일본 관계에 관한 온갖 망언들을 용인해준 괴이한 행사가 2015년 6월 22일 서울과 도꾜에서 각각 진행되었다. 반세기 전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것을 기념하는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행사가 서울과 도쿄에서 각각 진행된 것이다.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그 날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 정부가 서울에서 주최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했고, 아베 일본 총리는 한국 정부가 도쿄에서 주최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부터 1945년 8.15 해방까지 40년 동안 이어진 식민지조선-일제 관계, 그리고 1948년 분단정부수립부터 오늘까지 67년 동안 전개된 한국-일본 관계를 올바로 아는 사람들은 그 두 정상이 기념식에 교차참석하여 축사를 한 것이 양국 국민을 속이는 교차기만극이라고 여길 터다. 무엇보다도 한일국교정상화라는 말부터 기만적이다. 50년 전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으로 한일관계가 정상화되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한국-일본 관계가 기형화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소급하여 식민지조선-일제의 관계까지 왜곡되고 말았다. 한일기본조약에 얽혀있는 치욕적인 사연들은 올해가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 아니라 한일관계기형화 50주년임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왜 한일관계정상화라는 말을 접고 한일관계기형화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 까닭은, 한국에서 정권을 잡은 친일세력이 일본에서 정권을 잡은 일제전범들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여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합법화, 정당화해준 것이 한일기본조약 체결의 내막이기 때문이다. 50년 전 한국과 일본이 대등하고, 정당하게 관계정상화를 실현하려고 하였다면, 한국에서는 친일세력이 아니라 항일세력이 나섰어야 했고, 일본에서는 일제전범들이 아니라 전범청산세력이 나섰어야 했다. 당시 한국의 친일세력과 일본의 일제전범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사법적 심판을 받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어야 하였는데, 그런 청산대상이 양국관계를 정상화하겠다고 나서서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였으니 그야말로 희대의 사기극을 공연한 것이다.

 

▲ <사진 2> 1963년 3월초부터 불붙기 시작한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은 마침내 6월 3일에 이르러 각계각층 대중이 총궐기한 범국민적 항쟁으로 폭발하였다. 4.19항쟁이 일어난 때로부터 불과 3년 뒤에 일어난 대중항쟁이었다. 위의 사진은 당시 시청앞 광장에 진출한 시위대의 투쟁모습이다. 박정희 친일정권은 6.3항쟁을 경찰력으로 막지 못하게 되자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내몰아 국민의 정치적 요구를 짓밟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 자주시보


<사진 2>에서 보는 것처럼, 1963년 3월 초부터 한국에서는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 대중이 궐기하여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배격하고 박정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격렬한 대중항쟁을 벌였는데, 박정희 친일정권은 대일굴욕외교를 중단하라는 국민의 요구를 위수령으로 짓누르고,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해범행에 대해 사죄해야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는 것처럼, 일본이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에 대해 사죄한다는 조항이 한일기본조약에 들어갔어야 한일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조약에는 사죄라는 말은커녕 반성이라는 말도 들어있지 않다. 한일기본조약을 인정해서는 안 되는 까닭, 그리고 한일관계가 정상화되었다고 볼 수 없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박정희 친일정권이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총칼로 짓누르고 일본으로부터 사죄는커녕 강압과 회유를 받으며 굴욕적으로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 50주년을 ‘기념’하고 ‘축하’한다는 정부행사를 서울과 도쿄에서 각각 진행하면서, 그 자리에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까지 교차참석하여 ‘축사’를 한 것은 역사와 국민에 대한 우롱이 아닌가.

 

2. ‘이미 무효’ 네 글자가 불러온 재앙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미 무효”라는 네 글자는 박정희 친일정권이 일본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그 조약에 들어간 것이다. “원천 무효”라는 말을 넣자던 박정희 친일정권의 요구는 일본의 강압에 짓눌렸고 일본의 회유로 말살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2015년 6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박정희 친일정권 하에서 한일회담에 참석했던 외교관 출신자들은 “일본이 워낙 강경하게 ‘이미(already)’를 주장해 이를 받지 않고는 협정체결이 불가능했다”고 회고하였다. <사진 3>

 

▲ <사진 3> 젊은 시절 다까끼 마사오로 일제의 만주괴뢰군에 복무하기 위해 일왕에게 바치는 혈서까지 쓰며 충성을 맹약했던 박정희가 1965년 12월 17일 청와대에서 한일기본조약문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이후락(비서실장), 정일권(국무총리), 이동원(외무장관), 김동조(주일대사) 등 친일관리들의 모습이 보인다.     © 자주시보


일본이 “이미 무효”라는 네 글자를 한일기본조약에 기어이 집어넣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미 무효”라는 말은 일제가 조선을 상대로 체결한 식민지강점조약들이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 1965년 6월 22일 이전의 어느 시점에 이미 무효화되었다는 것인데, 거기에 담긴 두 가지 뜻은 아래와 같다.


첫째,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들어있는 “이미 무효”라는 말은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이 국제법상 합법적으로 체결된 조약들인데, 과거 어느 시점에 이미 무효화되었다는 뜻이다. 그와 달리, “원천 무효”라는 말은,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이 국제법상 불법적으로 체결된 것들이므로, 애초에 조약으로 성립될 수 없었고 따라서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뜻이다. 이처럼 “이미 무효”라는 말과 “원천 무효”라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을 택하는가 하는 문제는 식민지강점조약의 불법성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적으로 중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박정희 친일정권은 일본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여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이미 무효”라는 말이 들어가도록 용인함으로써 식민지강점조약의 불법성을 부정하려는 일본의 흉계를 국제법적으로 인정해주고 말았다. 사죄조항이 들어가기는커녕 흉계조항이 한일기본조약에 들어가고 말았으니, 그것을 어찌 조약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둘째, “이미 무효”라는 말은,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이 1965년 6월 22일 이전의 어느 시점에 이미 무효화되었다는 뜻인데, 무효화된 시점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한일기본조약에는 무효화시점이 명시되지 않았는데, 그 조약의 제3조가 무효화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한일기본조약 제3조는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총회의 결의 제195(III)호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고 규정하였는데, 이 조항은 박정희 친일정권의 요구로 그 조약에 들어간 것이다.


한일기본조약에 왜 정권의 합법성에 관한 조항이 뚱딴지 같이 들어갔을까? 박정희 친일정권은 정권의 합법성이 대한민국 정부에게만 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게는 없다는 자기들의 반북대결정책을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정당화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친일정권이 정권의 합법성에 관한 조항을 한일기본조약 제3조에 집어넣음으로써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이 1948년 8월 15일에 무효화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법리적 근거가 생겨났다. 


그러므로 한일기본조약의 제1조와 제2조를 연결해서 읽으면,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 17일부터 이승만 정권이 등장한 1948년 8월 15일까지 43년 동안 유효하였는데, 1948년 8월 15일에 무효화되었고, 1965년 6월 22일에 이르러 무효가 국제법적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위에 서술한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면, 박정희 친일정권이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합법화,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범죄적 책동을 굴욕적으로 용인함으로써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범죄로 규정할 수 없게 만들어놓았음을 알 수 있다.

 

▲ <사진 4> 이 사진은 KBS 일요스페셜에 방영된 화면들 가운데 한 장면이다. 그 화면에 나타난, 미국 중앙정보국이 1966년 3월 18일에 작성한 내부보고서는 일본의 6개 대기업들이 박정희 친일정권에게 6,660만 달러에 이르는 비밀자금을 제공하였음을 말해준다. 그 불법자금을 직접 수령한 사람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었다. 그 금액은 당시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는데, 이것은 박정희 친일정권이 일본기업들이 제공하는 불법자금으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박정희 친일정권이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합법화,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범죄적 책동을 굴욕적으로 용인한 까닭은 무엇일까?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1966년 3월 18일에 작성한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제목의 내부보고서에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사진 4>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굴하였고, 2004년 8월 12일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공개된 그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 친일정권은 5.16병란을 일으킨 1961년부터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 1965년까지 일본의 6개 대기업들로부터 6,600만 달러에 이르는 비밀자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비밀자금을 직접 수령한 사람은 5.16병란의 주동자이며, 당시 한일회담의 막후실권자인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었다. 놀랍게도, 박정희 친일정권은 일본기업이 제공하는 불법자금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3. 을사오적 매국범죄를 능가하는 매국범죄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미국의 배후조종과 비밀지원을 받으며 재기하여 정권을 잡은 일본 극우세력은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에 대해 사죄하기는커녕 그 범죄를 정당화할 흉계를 품고 있었다. 예컨대, 6.25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6일에 진행된 제3차 한일회담에서 일본측 대표 구보다 간이찌로(久保田貫一朗)는 “일본이 (식민지강점) 36년 동안 한국인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었다. 일본이 (조선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하여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고, 당시 일본 외상 오까자끼 가쓰오(岡崎勝男)는 “구보다의 발언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한 것일 뿐”이라는 망언을 늘어놓았다.


이처럼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흉계를 국제법적으로 인정해준 한일기본조약이 발효됨으로써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이 발생하게 되었다. 재앙의 내막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을 합법화해준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지난날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에 반대하여 피흘려 싸운 우리 민족의 반일항쟁사가 통째로 부정당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반일항쟁사가 부정되면, 항일선렬들을 ‘폭도’ 또는 ‘불령선인’이라고 모독해온 일본 극우세력의 극악무도한 역사파괴만행이 국제법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사진 5>

 

▲ <사진 5> 조선을 강점한 일본군이 칼로 벤 사람의 머리를 손에 들고 웃으면서 찍은 살육만행사진이다. 무참히 살육당한 희생자들은 일제침략에 반대하여 싸운 항일투사들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악마 중의 악마였다. 그처럼 흉악한 일제에게 면죄부를 준 한일기본조약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 자주시보


박정희 친일정권이 저지른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이고, 반인권적인 범죄들이 숱하게 많지만, 식민지강점조약들을 합법화하려는 일본의 역사파괴만행에 굴복함으로써 천추만대 씻을 수 없는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해준 박정희 친일정권의 굴욕행위야말로 을사오적 매국범죄를 능가하는 극악한 매국범죄가 아닐 수 없다.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을 합법화한 한일기본조약을 존치시킨 상태에서 한국 민중이 일본에게 조선침략범죄와 식민지강점범죄를 사죄하라고 요구해도 그것은 저항적 의미만 지닐 뿐 정치적, 법리적 의미는 갖지 못한다. 

 

4. 독도영유권 침해한 한일기본조약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이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합법화됨으로써, 일제의 한반도점령이 합법화되었는데, 일제의 한반도점령에 대한 합법화는 특히 독도영유권을 침해하는 계기로 되었다. 우리 민족성원이라면 누구나 독도가 우리나라의 고유한 영토라는 사실을 예나 지금이나 전혀 의심하지 않지만, 한일기본조약은 독도영유권에 대한 그런 확신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 심각한 문제를 파악하려면 아래와 같은 구체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일본이 ‘한일관계정상화’에 나설 수 있었던 국제적 환경은 1951년 9월 8일 미국 쌘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대일강화조약에 의해 조성되었다. 패전국 일본을 점령했던 미국이 일본에게서 전범의 멍에를 벗겨준 것이 쌘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다. 쌘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결로 전범국 신세에서 벗어난 일본은 ‘한일관계정상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제1차 한일회담이 1952년 2월 15일에 열린 까닭이 거기에 있다. 


쌘프란시스코강화조약은 태평양전쟁 승전국인 미국이 군정을 실시하였던 점령지역의 영토주권을 원상대로 복구하는 문제를 국제법적으로 확정하였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조약이다. 미국이 군정을 실시하였던 점령지역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였다. 


미국은 쌘프란시스코조약을 체결하면서 이전에 자기들이 군정을 실시하였던 점령지역 가운데 한반도의 영유권이 한국에게 있음을 확인하였고, 일본 열도의 영유권이 일본에게 있음을 확인하였는데, 유독 두 섬의 영유권만은 예외로 처리하였다. 동해의 전략요충지인 독도의 영유권과 동중국해의 전략요충지인 오키나와의 영유권은 예외로 처리한 것이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일본에게 넘겨주지 않고 계속 점령지로 남겨두는 대신,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독도영유권이 일본에게 있음을 인정해준 것이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1945년 9월 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미국의 점령지역에 속했던 독도의 영유권이 일본에게 있다는 내용의 독도밀약을 체결하였고, 그 밀약은 쌘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점령지귀속조항에 반영되었다. <사진 6>

 

▲ <사진 6> 1951년 9월 8일 미국 쌘프란시스코에서 진행된 대일강화조약 조인식에서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가 조약문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이 조약에는 독도영유권이 일본에게 있음을 인정한 미국과 일본의 독도밀약이 반영되었다.     © 자주시보


미국과 일본의 공모로 쌘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점령지귀속조항에 독도밀약이 반영된 이후 일본은 한일회담과정 내내 독도강탈음모를 노골화, 행동화하였다. 2005년 8월 26일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한일회담에 관련된 36,000쪽 분량의 방대한 외교문서를 분석한 <신동아> 2005년 11월호 기사에 따르면, 1952년 2월 15일 제1차 한일회담이 진행된 때부터 1964년 12월 3일 마지막으로 제7차 한일회담이 진행된 때까지 회담 전기간에 걸쳐 일본은 독도를 강탈하려는 범죄적 의도를 지속적으로 드러냈다. 일본은 한일회담이 진행될 때마다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야 한다”느니, “독도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국교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느니 하면서 박정희 친일정권을 압박하였다. 예컨대, 1962년 9월 3일에 진행된 제6차 한일회담 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4차 회의 회의록은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전해준다.


이세끼 아시아국장 - “사실상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공원(도꾜에 있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원-옮긴이) 정도인데 폭파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최영택 참사관 - “회담 도중에 그 문제를 내놓겠다는 말인가?”
이세끼 아시아국장 - “그렇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기로 결정해야겠다.”

 

▲ <사진 7> 왼쪽은 1965년 당시 자민당 부총재 고노 이찌로의 밀사로 서울에 파견된 우노 소스께이고, 오른쪽은 당시 박정희 친일정권의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이다. 이 두 사람은 1965년 1월 11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범양상선 회장 박건석의 집에서 독도밀약을 합의하였다. 우노가 가져온 밀약서에는 한국이 독도영유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박정희는 정일권-우노 밀담 다음날 독도밀약에 서명하였다.     © 자주시보


일본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한 박정희 친일정권은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기 6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서울에서 정일권-우노 밀약을 체결하였다. <사진 7> 정일권은 당시 국무총리였고, 우노 소스께(宇野宗佑)는 당시 자민당 부총재 고노 이찌로(河野一朗)의 밀사였다. <월간중앙> 2007년 4월호 기사에 따르면, 4개항으로 된 정일권-우노 밀약은 “독도는 한국과 일본이 모두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며, 서로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장차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각각 자국영토로 하여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현재 한국이 (독도를) 점거한 현상을 유지하지만, 경비원 증강이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 증축은 하지 않는다.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나간다”는 것이었다. 정일권-우노 밀담 이튿날 박정희가 정일권-우노 밀약에 서명함으로써 독도는 한국의 영토도 아니고 일본의 영토도 아닌 무국적섬으로 되었고, 한국은 자기 영토가 아닌 무국적섬을 점거한 것으로 되었으며, 일본은 그 무국적섬을 탈취할 기회를 노리게 된 것이다.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에 체결되기 직전인 1965년 4월 ‘다케시마의 불법점거에 관하여 엄중 항의한다’는 외교서한을 박정희 친일정권에게 보내 또 다시 압박하였고,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조인식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당시 일본 총리 사또 에이사꾸(佐藤榮作)가 조인식에 참석하러 도꾜에 간 당시 외무장관 이동원을 자기 집무실로 부르더니 “다께시마는 일본 영토라는 것과 다께시마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기로 합의한다”는 내용으로 작성된 밀약서를 꺼내놓고 서명을 요구하였다. <사진 8>

▲ <사진 8> 1965년 6월 22일 일본 총리관저에서 진행된 한일기본조약 조인식 장면이다. 조인식이 시작되기 직전 당시 일본 총리 사또 에이사꾸는 외무장관 이동원을 자기 집무실로 불러 독도영유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밀약서를 꺼내놓고 서명을 요구하였다.   ©자주시보


이동원은 그 밀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지만,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체결된 부속협정인 한일어업협정에 정일권-우노 밀약이 반영되었다. 그 협정에 의해 독도 영해가 한일공동어로구역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독도 영해를 한일공동어로구역 안으로 집어넣고, 독도 근해를 한일공동어로구역으로 바꿔놓은 협정을 체결한 것은, 독도영유권을 포기한 정일권-우노 밀약을 국제법적으로 확정한 것이었다. 박정희 친일정권이 일본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여 독도영유권을 포기한 것이야말로 을사오적 매국범죄를 능가하는 극악한 매국범죄가 아닐 수 없다.

 

 

5. 대일청구권마저 포기한 굴욕외교의 극치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체결된 또 다른 부속협정은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다. 청구권이란 일제가 식민지조선에서 강탈, 침해한 재산, 권리, 이익에 대해 일본이 국가적으로 배상하며, 개인적으로도 보상하는 것을 일본에 청구하는 권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협정 명칭부터 이상하다.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협정’이라고 해야 정상인데,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라는 이상한 명칭을 달아놓았다.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규정한 협정에 왜 일본의 대한경제협력에 관한 조항까지 들어간 것일까? 
1961년 11월 11일 도꾜에서 진행된 박정희-이께다 밀담에서 그렇게 된 내막을 알 수 있다.

 

▲ <사진 9> 1961년 11월 11일 일본총리관저에서 박정희-이께다 밀담이 진행되었다. 박정희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고, 이께다 하야또는 당시 일본 총리였다. 사진은 박정희의 방일을 환영하는 만찬에서 박정희와 이께다가 통역 없이 일본말로 대화화며 웃는 장면이다. 당시 박정희는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하야또는     ©자주시보


 박정희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고, 이께다 하야또(池田勇人)는 당시 일본 총리였다. <연합뉴스> 2012년 11월 5일 보도에 따르면, 밀담에서 박정희는 청구권을 주장하였고, 이께다는 경제협력을 주장하였는데, 결국 청구권이라는 말과 경제협력이라는 말을 함께 쓰기로 타협하였다. 밀담 다음날 진행된 한일정상회담에서 박정희는 “우리는 자유당 정권(이승만 친미정권을 뜻함-옮긴이)처럼 많은 청구권 자금을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고 말했다. <사진 9> 일본의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서 꺼내놓으며 아부한 박정희를 그 이튿날 만나준 사람은 일본 정계의 거물 기시 노부스께(岸信介)였다. 그 날 박정희-기시 밀담에서 박정희는 “우리는 메이지유신 지사들의 마음과 같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한국을 건설하기 위한 좋은 의견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아부하였는데, 그 밀담을 계기로 기시는 박정희 친일정권에게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하는 든든한 후원자로 나서게 되었다.


이께다는 박정희와 밀담 중에 앞으로 청구권이라는 말과 경제협력이라는 말을 함께 쓰기로 타협하는 척하였지만, 그것은 속임수였다. 밀담 이후 일본은 표면적으로는 청구권이라는 말과 경제협력이라는 말을 함께 쓰면서도 실제 회담 중에는 한국이 대일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강변하면서 대일청구권 자체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1965년 5월 14일에 진행된 ‘청구권 및 경제협력위원회 제6차 회의록’에서 발췌한 일본측 발언이 2013년 11월 26일 <연합뉴스> 보도기사에 실렸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우리측의 제공은 어디까지나 배상과 같이 의무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협력이라는 기본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종래부터 한국의 경제개발을 위해 제공한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일본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경제협력이라는 입장에서 제공하려는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이것은 일본이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박정희 친일정권은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부정한 일본에게 굴욕적으로 애걸하였는데, 그 애걸발언은 이렇다. “이동원-시이나 외무장관 합의사항을 보면 청구권 및 경제협력으로 돼 있어 경제협력이라는 것도 있으나 청구권적인 성격이 엄연히 포함돼 있다. 문제는 청구권과 경제협력을 같이 협정문에 집어넣는 것인데 단순히 경제협력만을 한다는 것은 안 된다.” 


1965년 5월 당시 일본이 그처럼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부정한 까닭은,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오히라 2차 밀담에서 한국의 대일청구권에 관한 밀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이었고,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는 일본 외상이었다. <사진 10>

▲ <사진 10> 1962년 11월 12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도꾜에서 당시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나 2차 밀담을 진행하였다. 그 밀담 직전에 작성된 김종필-오히라 비망록은 청구권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일본으로부터 무상원조, 해외경제협력기금, 수출입은행차관을 받겠다는 내용으로 작성되었다. 이것은 박정희 친일정권이 일본에게 고작 3억 달러만 구걸하여 무상원조 명목으로 받아내면서 한국의 대일청구권마저 스스로 포기하였음을 말해준다. 굴욕외교의 극치였다.     © 자주시보


2차 밀담 직전에 작성된 김종필-오히라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3개항이 들어있었다. “(일본이 한국에 공여하는) 무상원조와 관련하여 한국은 3억5천만 달러, 일본은 2억5천만 달러를 각각 주장하였는데, 일본이 3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한국에 공여하기로 양측 수뇌에 건의한다. (일본이 한국에 빌려주는) 해외경제협력기금과 관련하여 한국은 2억5천만 달러, 일본은 1억 달러를 각각 주장하였는데, 일본이 2억 달러(이자율 3.5%, 7년 거치 20년 상환)를 10년에 걸쳐 제공하기로 양측 수뇌에 건의한다. (일본이 한국에 빌려주는) 수출입은행차관과 관련하여 한국은 별개로 취급하자고 주장했고, 일본은 1억 달러 이상을 프로젝트에 따라 늘릴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는데,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협력할 수 있도록 추진하기로 양측 수뇌에 건의한다.”


김종필-오히라 밀약과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김종필-오히라 밀약에는 청구권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았고, 무상원조, 해외경제협력기금, 수출입은행차관이라는 말만 들어갔다. 이것은 박정희 친일정권이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포기하였음을 의미한다. 박정희 친일정권이 대일청구권을 스스로 포기하기 훨씬 이전에 이승만 친미정권도 대일청구권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이동준 교수의 연구결과를 인용한 <연합뉴스> 2012년 9월 11일 보도에 따르면, 1952년 2월 20일에 진행된 제1차 재산 및 청구권 문제 분과위원회에서 이승만 친미정권은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에 대한 피해보상청구를 포기할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는데, 이런 태도는 이승만 친미정권이 수립 직후부터 추진한 대일정책이었다고 한다.  


둘째, <연합뉴스> 2012년 11월 5일 보도에 따르면, 1961년 11월 11일 박정희-이께다 밀담에서 이께다는 박정희에게 일본이 무상원조 5천만 달러를 한국에게 공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13년에 공개된 일본의 외교문서를 인용한 <도꾜신붕> 2013년 2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김종필-오히라 밀약이 체결된 1962년에 오히라는 외무성과 대장성(재무성의 전신)에 한국에게 공여할 무상원조금이 얼마인지 계산하라고 지시했는데, 외무성은 7,000만 달러로, 대장성은 1,600만 달러로 계산하였다고 한다.


<연합뉴스> 2012년 11월 5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이 한국에게 공여할 무상원조금을 그처럼 적게 계산한 까닭은 일제가 패망한 직후 식민지조선에 남겨두고 떠난 재산을 돌려받는 금액을 제외하고 한국에 공여할 무상원조금을 계산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김종필-오히라 밀담 중에 오히라는 김종필에게 “회담에서 합의해도 (합의사항을 언론에) 나타내면 안 되고, 정치회담(한일회담을 뜻함-옮긴이)에서 결정하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박정희 친일정권이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스스로 포기한 김종필-오히라 밀약을 언론에 공개해서는 안 되고, 나중에 열리게 될 한일회담에서 결정하는 것처럼 위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종필-오히라 밀약이 체결된 때로부터 약 2년 6개월 뒤에 체결된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2조 1항은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한국의 대일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김종필-오히라 밀약에서 합의한 대로 일본이 무상원조 3억 달러를 한국에 공여하는 것으로 이미 해결되었음을 공식화하였다.


일제식민지강점기 40년 동안 일제가 조선에서 수탈, 침해한 재산, 권리, 이익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일 것이다. 또한 2013년 11월 대일항쟁기조사지원위원회가 펴낸 자료에 근거하여 추산하면, 일제식민지강점기에 강제노역에 끌려간 조선인징용자는 모두 755만4,764명이었고, 일본의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끼(高見義明)의 추산에 따르면, 일제식민지강점기에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조선여성은 약 20만 명이었는데, 약 775만 명에 이르는 피해자들이 일본에게서 받아내야 할 보상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그것도 상상을 초월한 천문학적인 액수일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합법화한 한일기본조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에 대한 배상문제와 보상문제를 규정하는 청구권협정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었다. 그래서 박정희 친일정권은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는 것을 포기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게 마땅히 행사하여야 할 청구권마저 스스로 포기하면서 고작 3억 달러만 구걸하여 받고 말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을사오적 매국범죄를 능가하는 매국범죄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에게 형언할 수 없는 재난과 고통을 들씌운 일제의 침략범죄와 식민지강점범죄는 영원히 망각될 수 없으며, 그런 범죄를 부정하려는 일본 극우정권의 난동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그런 난동을 불러일으킨 한일기본조약을 폐기하지 못하고 50년이나 방치해온 것은 민족사와 항일선렬들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치욕이다.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을 되찾기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우리 항일선렬들이 후대에 위대한 유산으로 남긴 자주정신을 받들어 한일기본조약 폐기를 단행하는 것만이 지난 50년 동안 일본에게 당해온 수모와 치욕을 씻어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고 자주권을 수호할 최후의 방책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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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법 개정안 거부 대통령, 그녀가 진정한 배신자였다

 
‘배신의 정치’를 운운하며 거부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과거
 
임병도 | 2015-06-29 09:06:2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이 '국회가 사실상 정부의 시행령 등의 내용까지 관여할 수 있도록 하고 법원이 아닌 국회가 시행령 등의 법률 위반 여부를 심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위헌 소지가 크다'고 밝히면서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했습니다.1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하면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거세게 비난하는 등 오히려 국회의 입법권마저 통제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배신의 정치’를 운운하며 거부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얼마나 이중적인지 그녀의 과거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지금보다 더 강력한 국회법 개정안 발의에 찬성했던 박근혜’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하면서 ‘정치는 국민들의 민의를 대신하는 것이고, 국민들의 대변자이지, 자기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국회법 개정안이 국민들의 민의를 대신하지 못하고, 정치적 논리에 이용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이보다 더 강력한 국회법 개정안을 1998년도에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1998년 안상수 의원을 비롯한 한나라당 의원 33명은 ‘국회법중개정법률안’을 발의했습니다. 당시 박근혜 의원도 국회법 개정안에 찬성하는 의원 명단에 이름이 있었습니다.2
 
‘국회법중개정법률안’ 제안이유를 보면 ‘입법의 전문화, 다변화 추세에 따라 국회가 법률로 행정부에 위임한 대통령령, 총리령, 부령 등의 행정입법이 대폭 증가하고 있는데, 행정입법이 법률의 입법정신에 따라 적절히 규정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잘못이 있는 경우 이에 대한 이견을 제시함으로써 행정입법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관련 법을 개정하려는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1998년 박근혜 의원이 찬성했던 국회법 개정안은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는 2015년의 국회법 개정안보다 더 강력했습니다. 2015년 국회법 개정안은 ‘국회가 수정, 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 명시됐지만, 1998년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이에 따라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두 법안 발의안 모두 처벌 규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이에 따라야 한다’는 문장을 보면 2015년보다 강제성이 훨씬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강력했던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찬성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왜 지금은 거부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한다고 난리 쳤던 박근혜’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이 ‘위헌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회의 ‘입법권’을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05년 5월 14일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회에서 행정부가 만드는 시행령이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3

 

“어제 문광위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문제제기를 했습니다만, 신문법 시행령에 대해서 문광위에서 시행령을 만들면서 우리 한나라당이 신문법 개정안과 관련해서 독소조항이라고 반대해서 삭제됐던 조항을 버젓이 시행령에 넣어놨습니다. 이것은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하는 어이없는 일입니다. 편집위원회 구성을 자율에 맡기는 법정신을 무시한 것은 경영권 침해도 되는 것이고 편집위원회 구성을 해야만 광고 지면이 50% 이하인 곳에만 우선 기금을 주는 것은 명백히 언론자유 침해입니다. 한나라당에서는 독소조항이 들어간 시행령을 바로 잡기 위해서 강력히 대처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2005년 박근혜 의원

 

당시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을 두고 여야는 대치상태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제기한 문제를 그대로 참여정부가 시행령에 포함했다면서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하는 어이없는 일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국회가 정부가 만드는 시행령에 문제가 있다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국회가 행정부와 이 문제를 놓고 의견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시행령 수정 요구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2005년에는 당연한 일이라 말하고, 2015년에는 위헌 소지가 있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참여정부가 만든 시행령은 무조건 나쁘고, 박근혜 정부가 만든 시행령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차이일까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무조건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대통령제인 미국에서도 국회에서 의결된 법안을 대통령이 거부할 수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은 헌법 제1장제7조제2항에 따라 연방의회가 의결한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4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65번째이지만, 미국은 총 2,566건에 달합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을 ‘비토 법안’5이라고 하는데, 하원과 상원 등에서 재심의와 재의결 절차를 거칩니다.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비토법안의 숫자와 재의결 숫자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이 꼭 의결 절차를 거쳐 다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지만, 대통령의 정치적 수단으로는 이용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선거 때 자신과 반대 정당의 정책 간의 차별성을 강조하거나, 유권자에게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정책을 반대당이 집권하는 의회에서 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정책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거부권 행사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비토법안을 헌법의 테두리 내에서 의회의 결정에 맡기는 미국의 모습과 박근혜 대통령처럼 아예 국회의 입을 막으려는 한국의 모습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정치적으로 선거를 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이라며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대통령 당선 전에는 국회의 입법권을 보장하며, 잘못된 시행령을 바로잡겠다고 해놓고 대통령에 당선되니 말을 바꿔 국회를 비난하는 모습이야말로 ‘배신의 정치’입니다. 선거에서 국민들이 심판해야 할 대상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아닌 박근혜 대통령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국민을 팔아 마치 자신이 올바른 정치를 한다고 쇼를 하지만, 속내는 제왕적 대통령으로 군림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그 거짓말에 속는 바보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습니다.

1. 박근혜 대통령, 제26회 국무회의 주재. 청와대 2015년 6월 25일.
http://www1.president.go.kr/news/inside.php?srh%5Bview_mode%5D=detail&srh%5Bseq%5D=11233 
2. 국회의안정보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bill/jsp/BillDetail.jsp?bill_id=015133 
3. [취재파일] "독소조항 시행령 바로잡겠다"던 박 대통령의 변신 SBS 뉴스 2015년 6월 5일.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011086&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4.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 이후의 의회절차, 미국의 사례. 전진영. 국회입법조사처. 이슈와 논점 제1021호
5. veto message; 대통령이 왜 해당 법 안에 사인하지 않았는지를 상세히 기록한 사 유서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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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6월 중순 단비 불구, 장기적 가뭄 해소는 난망


[친절한 통일씨] 통일부, 북 가뭄 '식량난 겪지는 않을 것'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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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29  02:5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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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초 제철 모내기에 나선 북한 주민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달 중순 북한 황해도 지역을 포함해 한반도 중부권역에 적지 않은 비가 내린 후 북한지역 가움이 해갈됐는지, 식량작황에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인지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북한 관영 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3일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가뭄이 지속되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전했다.

당시 통신은 “1월부터 5월까지의 전국 평균 강수량은 135.4㎜로서 지난해 같은 기간의 강수량보다는 좀 많았지만 평년(182.6㎜)의 74.2%였으며, 특히 3월 강수량은 7.7㎜(평년 26.2㎜)로서 기상관측 이래 두 번째로 적어 전반적 지방에서 가물(가뭄)이 들었다”고 보도했다.

“주요 영농시기인 5월 강수량은 40.1㎜로서 매우 적었으며, 하순에는 이상 고온현상까지 겹쳐 가물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고 진행상황을 구체적으로 전했다.

가뭄이 가장 심한 지역은 량강도, 강원도, 황해남·북도(80~151mm, 평년 대비 53~67%)이며,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 평양시, 남포시(108~160㎜, 평년의 77~86%) 등 대부분의 지방에서도 심한 가뭄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 가물현상은 현재 덥고 건조한 기상조건으로 하여 전반적 지방으로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 날인 4일자에서 통신은 북측 전역에서 심한 가뭄 현상이 지속되는 속에서도 “전국적인 벼 모내기 실적이 현재 77% 계선에 들어섰다”고 밝혔다.

이 때까지만 해도 북측의 가뭄은 전년도에도 왔었던 봄 가뭄 정도로 인식됐으나, 이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분위기는 심각하게 돌변했다.

   
▲ 최근 북측 월별 강수량 비교 [자료 제공 - 통일부]

중순으로 접어든 지난 16일 통신은 “조선의 각지 농촌들에서 100년래의 왕가물로 심한 가물피해를 받고 있다”며, “8일 현재 전국적으로 44만 1,560 여 정보의 모내기 한 논에서 13만 6,200 여 정보의 볏모들이 말라가고 있다”는 급박한 소식을 전했다.

그중 피해가 큰 지역은 곡창지대인 황해남·북도와 평안남도 그리고 함경남도라고 하면서, “특히 황해남도에서 모내기 한 면적의 근 80%, 황해북도에서는 근 58%의 논이 마른상태에 놓여있다”고 가뭄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렸다. 

당시 통신은 “저수지들의 최대 수위가 낮아지고 강·하천들이 거의 마른상태여서 모내기한 볏모들뿐만 아니라 강냉이를 비롯한 다른 알곡작물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해당 지역들에서는 왕가물로 피해면적이 계속 늘어나는데 따라 볏모 대신 다른 작물들을 심는 등 가물을 극복하기 위한 필요한 대책들을 세워나가고 있다”고 상황의 심각함을 설명했다.

이와 관련, 지난 9일 통일부는 모내기철인 지난달 북한지역의 평균 강수량이 41.7㎜로 평년(76.4㎜)의 56.7% 수준으로 급감하고 기온도 평년에 비해 약 1℃ 높아 농지 수분함량이 급격히 감소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첫 모내기가 있었던 지난달 10일 이후에도 가뭄이 이어지면서 뿌리 활착에 장애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 주요 곡창지대인 황해남북도와 평안남북도의 4, 5월 강수량 비교 [자료 제공 - 통일부]

특히 주요 곡창지대인 황해남북도와 평안남북도의 경우 모내기철인 5월 강수량이 50mm에도 미치지 못해 모내기 지연과 향후 생육장애 발생도 우려했다.

통일부는 북측 농작물생물예보지휘부가 지난 10일을 기점으로 볏모가 말라죽는 지역에서는 포트에 심어둔 강냉이 및 알곡 작물로 교체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에 주목했다.

강수량 부족이 계속 이어질 경우, 감자와 쌀의 생산량이 예년에 비해 15~20% 급격히 줄어들고 지난달 10일 이전에 파종한 옥수수의 작황도 크게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지만, 지난 11일부터 20일 사이에 황해남·북도의 전반적 지역에서 비교적 많은 비가 내린 것이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2일자 통신에 따르면, 11일부터 20일 사이에 황해남·북도 곡창지대인 삼천군 99㎜, 신천군 97㎜, 해주시 95㎜, 안악군 72㎜, 신평군 90㎜, 은파군 80㎜, 곡산군 79㎜, 수안군 77㎜의 강수량을 기록했다.

북측 ‘기상수문국 중앙기상예보소’ 관계자는 “지난 열흘기간에 조선의 황해남·북도지역에서 비가 내렸지만 여전히 장기적인 가물(가뭄)이 완전히 해소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봄부터 지속되고 있는 엘니뇨현상으로 동아시아지역에 영향을 주는 북서태평양고기압이 강하게 발달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하여 올해에 장마가 늦어질 것이며, 특히 장마철 기간 강수량이 적을 것”이라고 예보한 바 있다.

7월 초 평안남·북도와 함경남·북도 지역에 비가 내리지만 상순까지는 평년에 비해 강수량이 낮다가 중순 이후에 회복될 것이라는 기상청 중기예보와 대체로 일치하는 예보이다.

   
▲ 7월 초 평안남·북도와 함경남·북도 지역에 비가 내리지만 상순까지는 평년에 비해 강수량이 낮다가 중순 이후에 회복될 것이라고 중기예보했다. [자료 출처 - 기상청]

통일부는 식량 생산량이 줄어들긴 하겠지만 북한이 식량난을 겪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해 봄 심각한 가뭄에도 불구하고 북측이 기존 저장용수를 활용해 상당 부분 피해를 극복한데다 이후 일조량도 좋았고 장마 피해도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료 및 농자재 공급도 비교적 원활했기 때문에 식량 작황은 큰 변화가 없었던 사례가 있다는 설명이다.

북측에서는 농업개선 조치의 일환으로 전 지역에 확대하고 있는 ‘분조관리제안에서의 포전담당책임제’를 통해 농장원들의 생산의욕이 높아진 것도 가뭄극복과 식량증산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확산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농업과학원 농업경영연구소 지명수 실장은 28일 주간 <통일신보>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분조관리제안에서의 포전담당책임제의 실효성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고 하면서 지난해 100년래의 왕가물이 들이닥친 불리한 기후조건에서도 알곡증산을 이룩하였다”고 말했다.

신문은 올해도 전국의 모든 협동농장에서 포전담당책임제를 더욱 심화시켜 나가고 있다며, 이와 함께 높은 수확고를 내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영농방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는 마른 논에서 벼포기 홈을 판 다음 모를 내는 ‘벼영양단지모에 의한 모내기방법’ 등이 ‘물절약형 농법’에 해당하며, 각종 물 원천을 확보하는 시설공사 등도 해당된다.

이와 관련, 22일자 통신이 현재 황해남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흐름식 물길공사’를 특별히 강조해 소개한 것이 눈에 띤다.

통신은 “올해 공사과정에만도 백 수십만 ㎥의 토량 및 암반을 처리, 이미 방대한 저수지 언제(둑)공사가 완공됐으며 지역에 관개수를 보내줄 수 있는 돌파구가 열리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북에서는 ‘자연흐름식 물길공사’를 가뭄과 큰물(홍수) 등 자연 재해를 예방하는 ‘대규모 자연개조사업’이라고 부르는데, 양수기와 전동기 등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강물의 자연스러운 흐름대로 농업용수를 쓸 수 있는 물길을 만든 후 중간에 ‘언제’를 만들어 중소형 발전기도 돌려 전기도 생산하는 방식으로 건설한다.

지난 2002년 10월 개천-태성호물길(150여㎞, 평양, 평안남도, 남포시 10만여정보), 2005년 10월 백마-철산물길(270여㎞, 평안북도 4만6천여 정보), 2009년 9월 미루벌물길(220㎞, 황해북도 미루벌, 420㎢)에 이어 2012년 1월부터 황해남도 물길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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