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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붙잡힌 날, 40년 만에 무죄 나왔다"

 

[인터뷰] 유신시절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 받은 재일동포 이철씨

15.02.15 20:33l최종 업데이트 15.02.15 20:3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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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75년 '재일동포 간첩단 학원침투사건'으로 연행돼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가 이후 감형·석방된 이철 씨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변호를 맡은 장경욱 변호사와 지지자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이철 씨는 "무죄 판결을 받아 기쁘기야 하지만 내 40년은 어떻게 되는 거냐. 뭔가 좀 허탈감도 느꼈다"고 소회를 밝혔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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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못한 선거법 유죄 판결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던 지난 9일 오후 2시 40분,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서관 현관 앞에 한 남성이 섰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와 꽃다발을 보냈다. 

그의 이름은 이철(67), 40년 전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까지 받은 재일동포다. 이날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5부(부장판사 위현석)는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간첩 등 이씨의 혐의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 마지막 공판 전 조금씩 흩날리던 눈발은 점점 굵어져가고 있었다.

"앞으로 5년, 10년 뒤에 '내가 언제 재심 무죄를 받았더라'하고 기억이 희미해질 수 있는데 '아 원세훈이 붙잡힌 날!'로 생각하면 잊지 않을 것 같다."

다음날 오후 종로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이철씨는 "나는 무죄를 받고, 나를 (간첩으로) 날조하고 괴롭힌 사람들은 유죄를 받고, 참 인상적인 날이었다"며 웃었다. 

고문에 못 이겨 '거물간첩' 된 예비신랑
 

1973년 대학원에 진학하며 한국으로 온 그는 1975년 12월 11일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 수사관들에게 끌려갔다. 수사관들은 구속영장도 없이 이씨를 감금했고 고문했다. 결혼식을 두 달 앞두고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예비신랑은 서둘러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씨는 "수사관들이 '너 빨리 이거 인정하고 나가야 할 거 아니냐' 하기에 맞으면서 '예예'했다"고 말했다. 

그냥 매 맞는 수준은 아니었다. 고문의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이씨는 머뭇거리면서 당시 상황을 조금씩 들려줬다. 설명하는 내내 입술이 마르는지 자꾸 침을 발랐다.

"어… 무조건 들어가면 빤스까지 다 벗긴다. 알몸 상태에서 구타를 당하는 거죠. 때리고, 차고, 잠도 못 자게 하고. 심지어는 야전침대에 나무기둥이 있었는데, 그걸 뽑아서 날 마구 때리니까 그 탄탄한 나무가 부러졌다. 그리고 벌거벗은 내 성기를……붙잡아서 담뱃불로 지지려고 하고…. 제일 힘들었던 것은…… '네가 (혐의를) 인정 안 하면 약혼녀랑 장모를 데려와서 네 눈앞에서 범하겠다, 그리고 한강에 버려도 우리한테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협박을 했다. 그래서 내가 '제발 그러지 마세요'라고 정말로 빌었거든요. 그걸 생각하면…제일 괴로웠는데…."

그렇게 그는 '거물간첩'이 됐다. 약혼녀마저 간첩방조죄로 끌려와 징역 3년 6개월에 처해졌다. 크게 놀란 이씨의 아버지는 두 사람이 서울구치소에 들어간 날 밤 세상을 떴다. 어머니마저 1979년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은 직후 돌아가셨다. "두 분 다 원래 건강하셨는데 충격을 받아서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이씨의 눈동자가 촉촉했다.

재일동포는 독재정권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이씨는 "우리는 (정부가) 다루기 쉬운 사람들이었다"며 "남북 대치 상황을 실감 못한데다 재일동포의 절반이 북한과 가까운 조총련계였고, 일본 학생운동은 좌익색채를 띠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비밀경찰이 우리를 잡아가서 때리면 먼지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였다. 그 역시 온갖 고초를 겪었고 1988년에서야 가석방으로 나왔다. 13년이나 늦어진 결혼식도 이때 올릴 수 있었다.  

그동안 이씨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고교 동문들은 사건이 터지자마자 구명운동단체를 만들었다. 한때는 일본 전역에 17개 지부까지 있었던 '이철 후원회'는 10만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열심히 움직였다. 여전히 활동 중인 후원회원들 가운데 몇몇은 이씨가 무죄 판결을 받는 순간에 함께했다. 10일에는 안산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에도 같이 다녀왔다.

사실 이씨는 재심을 청구할 뜻이 없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재일동포 양심수 동우회'를 만들어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렸던 재일동포들의 명예회복에 힘썼다. 이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면서 그 대상자를 '재일동포 양심수 전원'으로 했고, 특별법 제정도 추진했다. 개개인이 아닌 재일동포 전체의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을 바꾼 사람은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재일동포변호인단' 이석태 변호사였다. 장경욱 변호사와 함께 2011년 일본을 방문한 이석태 변호사는 이씨에게 "특별법은 언제 될지 모르는데, 일단 재일동포 사형수가 무죄를 받으면 다른 피해자들도 무죄 받는 것 아니냐"고 설득했다. 마음이 움직인 이씨는 그해 10월 31일 재심을 신청했고, 2015년 2월 9일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았다.

"40년 만의 무죄로 허탈한데... 한국도 조짐이 이상하다"

그런데 이씨는 무죄 선고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쁘기야 하지만 '내 40년은?'하고 허탈감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이씨는 그 세월 가운데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고맙다"고 했다. "감옥 안에서 청년들이나  장기수들과 생활하며 나도 분단의 무게를, 독재의 아픔을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는 이유였다. 물론 잃은 것도 많지만, 이씨는 감옥 생활은 수사관들이 망가뜨린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시간이었다고도 했다.

과거가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살아온 날의 절반 이상을 과거와 싸워온 그였다. 그런데 이씨의 눈에 지금 한국의 상황은 자신이 싸워온 지난 시절과 닮아가는 분위기다. 그는 걱정스러워했다.

"많은 이의 희생으로 사회가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생각했는데, 그 열매들이 어디로 갔는지… 참 희미해졌다. 다시 이상한 사회로 돌아가려는 듯한 조짐마저 보인다." 

이씨는 "정말로 옛날의 희생이 무엇이었는지 국민들이 깊이 생각해야 하고, 그 희생을 헛되게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1시간 40분 가량 인터뷰하는 내내 '과거'를 이야기하던 그가 처음으로 '현재'와 '미래'에 한 부탁이었다.

[일문일답 전문①] "매맞고 거물간첩으로... '약혼녀 협박' 제일 괴로웠다"
[일문일답 전문②] 야만의 시대 지났지만... "옛날의 희생이 희미해져가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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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북한동향] 2월 9일~2월 15일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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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5/02/16 09:43
  • 수정일
    2015/02/16 09:4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당 결정서 및 공동구호 발표..광명성절 본격 행사[주간북한동향] 2월 9일~2월 15일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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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16  00: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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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전용기에 탑승, 평양 미래과학자거리 건설장을 현지지도했다고 15일 매체들이 보도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김정은 동향>

□ 사회분야 : 원산 보육.중등학원 건설장(11일), 미래과학자거리 건설장(15일)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원산시 육아원, 애육원, 초등학원, 중등학원 건설장을 찾았다고 11일 매체들이 전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제1위원장은 육아원, 애육원은 4월 15일까지, 초등학원, 중등학원은 7월 27일까지 완공할 것을 지시했다.

이날 현지지도에는 최룡해 당 비서, 황병서 총정치국장,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한광상 당 재정경리부장, 조용원 당 부부장이 동행했으며, 김정권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맞이했다.

김 제1위원장은 처음으로 전용기에 탑승 평양 미래과학자거리 건설현장을 현지지도했다고 15일 매체들이 전했다.

그는 전용기 안에서 미래과학자거리 1단계 건설에 이어 2단계 건설을 지시했으며, 건설현장을 직접 찾아, 1단계 건설은 4월 15일까지, 2단계 건설은 10월 10일까지 끝내라고 강조했다.

이날 전용기에는 황병서 총정치국장, 한광상 당 부장이 동승했으며, 김정관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건설현장에서 맞이했다.

□ 경제분야 : 8건설국 건설자 기념사진(12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8건설국 건설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매체들이 12일 보도했다. 이날 기념촬영에는 한광상 당 부장, 김용수, 리문곤 당 부부장이 함께했다.

 

   
▲ 당 중앙위 정치국회의가 10일 진행, 7개 항의 내용을 담은 결정서가 채택됐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정치>

□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가 10일 평양에서 진행, '조선노동당 창건 일흔 돌과 조국해방 일흔돌을 위대한 당의 영도에 따라 강성번영하는 선군조선의 혁명적 대경사로 맞이할데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7개항을 담은 결정서를 채택, 13일 공개됐다.

□ 당 중앙위원회,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해방 및 당 창건 70돌을 맞아 공동구호를 11일 발표했다.

□ 육.해군, 항공 및 반항공군, 전략군 장병 결의대회가 13일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진행됐다.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연설자로 나섰다.

□ 광명성절을 맞아 백두산밀영결의대회가 12일 백두산밀영에서 열렸다. 김기남 당 비서,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곽범기 당 비서, 김용진, 리철만 내각 부총리가 참가했다.

□ 광명성절 73돌 중앙보고대회가 15일 평양 평양체육관에서 열렸다. 최룡해 당 비서, 황병서 총정치국장 등이 참가했다.

□ 김정은 제1위원장의 세포지구 관련 노작 관철 궐기모임이 9일 세포지구 축산기지건설현장에서 열렸다 곽범기 당 비서, 리경식 축산기지건설 중앙현장지휘부 부책임자, 인민보안부여단 초급청년동맹위원장, 김기철 자강도여단 단호시대대 대대장 등이 참가했다.

□ 광명성절을 맞아 농업근로자 경축모임이 13일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남새전문농장에서 열렸다. 리명길 농근맹 위원장이 보고자로 나섰다.

 

   
▲북한군 결의대회가 13일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열렸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남북관계>

□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11일 '남조선 당국이 대미추종으로 얻을 것은 가장 참혹한 종말 뿐이다'라는 제목의 특별성명을 발표, 남북관계에서의 대미추종 정책 철회를 촉구했다.

□ 남조선인권대책협회은 12일 대변인 담화를 발표,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했다.

□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10일 '절대로 합리화될 수 없는 세균전 범죄'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채널A>의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 관련 보도를 비난했다.

□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14일 '겉과 속이 다른 양명주의적 태도'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제48차 중앙통합방위회의 발언을 맹비난했다.

□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15일 '흑백전도의 궤변, 더러운 상전비호나발'이라는 제목의 논평으로 <채널A> 보도를 거듭 문제삼았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11일 특별성명을 발표, 남북관계에서의 대미추종정책 철회를 촉구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대외관계>

□ 광명성절을 맞아 8일 미국 뉴욕에서 '2월의 봄 음악회'가 열렸다고 13일 매체가 전했다. 리준무가 단장을 맡고 있는 우륵교향악단이 공연을 펼쳤다.

□ 광명성절을 맞아 캄보디아 국왕 내외가 11일 주 캄보디아 대사관에 꽃바구니를 보냈다.

□ 광명성절을 맞아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11일 김 제1위원장에게 축전을 보내왔다.

□ 광명성절과 설을 맞아 주북 몽골대사관 친선모임이 11일 평양 창덕학교에서 열렸다. 박경일 조선몽친선협회 부위원장이 참석했다.

□ 광명성절을 맞아 다맘 슐레이만 주북 시리아임시대사가 12일 연회를 열었다.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리수용 외무상, 리룡남 대외경제상 등이 초대됐다.

□ 광명성절을 맞아 굿럭 조너선 나이지리아 대통령이 12일 꽃바구니를 보내왔다.

□ 광명성절을 맞아 주가노프 러시아 공산당위원장이 12일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축전을 보냈다.

□ 광명성절을 맞아 12일 주러시아 북한대사관에서 연회가 열렸다. 연회에는 부슈민 연방평의회 부의장, 멜리니코프 국가회의 제1부의장 등이 초대됐다.

□ 광명성절을 맞아 주북 대사관 관계자들이 12일 평양문화전시관을 참관했다.

□ 광명성절을 맞아 주북 경제 및 무역참사단이 12일 평양 육아원애육원 등을 둘러봤다.

□ 광명성절을 맞아 주북 무관단이 12일 국제친선전람관을 참관했다.

□ 광명성절을 맞아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대통령이 13일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꽃바구니를 보내왔다.

□ 광명성절을 맞아 주북 세계식량계획, 유엔식량 및 농업기구 대표부 관계자들이 13일 만수대 언덕에 화환을 진정했다.

□ 광명성절을 맞아 테인 세인 미얀마 대통령이 5일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축전을 보내왔다고 14일 매체들이 보도했다.

□ 광명성절을 맞아 14일 중국항일혁명투쟁가 주보중의 딸 가족 등이 만수대동상에 꽃바구니를 보냈다.

□ 광명성절 73돌 재일본조선인중앙대회가 14일 일본 도쿄 조선문회관에서 열렸다. 허종만 총련 의장 등이 참가했다.

□ 광명성절을 맞아 주북 무관단이 15일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통해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꽃바구니를 보냈다.

□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10일 하산 로우하니 이란 대통령에게 이란혁명 36돌 축전을 보냈다.

□ 박봉부 내각 총리가 하비브 앗 사이드 신임 튀니지 총리에게 10일 축전을 보냈다.

□ 박봉부 내각총리가 15일 알렉산드르 부취치 세르비아 총리에게 15일 세르비아 국경절 축전을 보냈다.

□ 리수용 외무상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상에게 9일 조.러 신조약 체결 15돌 축전을 보냈다.

□ 리수용 외무상이 12일 밀란 훕체이 주북 체코공화국 신임 대사를 접견했다.

□ 러시아 외교관의 날을 맞아 10일 이고리 사기토프 주북 러시아 임시대사가 연회를 마련했다 .궁석웅 외무상 부상, 김진범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초대됐다.

□ 이란이슬람혁명 36돌을 맞아 만수르 차보쉬 주북 이란대사가 11일 대동강외교단회관에서 연회를 마련했다. 리수용 외무상, 정영수 노동상 등이 초대됐다.

□ 국방위원회 성명이 9일 유엔 안보리 공식문건으로 배포됐다.

□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9일 '또다시 세워진 반인권범죄기록'이라는 제목의 논평으로 미국 인권문제를 지적했다.

□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13일 '세계제패야망을 여지없이 드러내보인 모략문서'라는 제목으로 최근 발표된 미국 국가안보전략보고서를 비난했다.

 

   
▲ 광명성절을 맞아 중앙미술전시회가 10일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사회문화>

□ 광명성절을 맞아 얼음조각축전이 지난 5일부터 양강도 삼지연군에서 진행, 618건설돌격대 인민보안부사단이 1천여 점을 출품했다.

□ 광명성절 경축 중앙사진전람회가 9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개막했다.

□ 광명성절을 맞아 김득삼, 박경규 등에게 김정일훈장이 9일 수여됐다.

□ 광명성절을 맞아 북한 최고 과학기술상인 '2.16과학기술상' 수여식이 10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렸다.

□ 광명성절을 맞아 중앙미술전시회가 10일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서 개막했다. 김기남 당 비서,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박춘남 문화상이 참가했다.

□ 광명성절을 맞아 10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영화상영주간이 개막했다. 박춘남 문화상이 참가했으며, '위대한 영장을 모시여'가 개막작품으로 상영됐다.

□ 광명성절을 맞아 전국요리기술경연이 10일과 11일 평양면옥에서 열렸다.

□ 광명성절 맞이 노동계급과 조선직업총동맹 웅변모임이 12일 평양 중앙노동자회관에서 열렸다.

□ 광명성절을 맞아 제19차 김정일화축전이 13일 평양에서 개막했다. 개막식에는 김기남 당 비서,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용진 내각부총리, 김창도 김일성화김정일화위원회 위원장 등이 자리했다.

□ 광명성절을 맞아 성.중앙기관예술소조 종합공연이 13일 인민문화궁전과 동평양대극장에서 각각 진행됐다. 최룡해 당 비서, 김기남 당 비서,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등이 관람했다.

□ 광명성절을 맞아 조선민주여성동맹 경축공연이 13일 평양 여성회관에서 열렸다.

□ 광명성절을 맞아 김정일청년영예상, 김정일소년영예상 수여식이 13일 청년동맹회관에서 진행됐다.

□ 광명성절을 맞아 '우리교실문학상'이 13일 강반석고급중학교 문위성, 모란봉구역 인흥초급중학교 정원미, 덕천시 덕성초급중학교 고급 등 410명 학생에게 수여됐다. 수여식은 평양 청년동맹회관에서 열렸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는 아동용 책 '위대한 기정일대원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셔요'이 14일 출판됐다.

□ 광명성절을 맞아 우표 4종이 14일 발행됐다.

□ 광명성절을 맞아 빙상피겨축전이 15일 평양 빙상관에서 개막했다.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로두철 내가 부총리, 리일환 당 부장, 기광호 재정상, 김일국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서기장, 김영훈 체육상 등이 참석했다.

□ 광명성절을 맞아 수중체조무용모범출연 '그림움은 끝이 없네'가 15일 평양 창광원 수영관에서 열렸다.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용진 내각부총리가 참관했다.

□ 정규군 창설 67주년 조선인민군협주단 음악무용종합공연이 9일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열렸다.

□ 강원도 고성, 이천, 평강, 세포, 안변군에 군민발전소 착공식이 8일부터 11일까지 각각 열렸다.

□ 3대혁명전시관 중공업관에 마감건재전시장이 새로 꾸려졌다고 9일 매체들이 보도했다. 여기에는 천리마타일공장, 평양건재공장 등에서 100% 국내 원료와 기술된 생상제품들이 진열됐다.

□ 평양 만경대경흥식료공장이 10일 조업에 들어갔다. 이날 조업식에는 안정수 당 부장, 경흥지도국 관계자 등이 참가했다.

□ 함흥화학공업종합대학과 함흥의학대학에 도서관 준공식이 10일과 11일 각각 열렸다.

□ 평안북도 신의주시에 입체율동동영화관(3D영화관)이 10일 문을 열었다.

□ 함경남도 단천제련소 유리섬유 및 수지액생산공정이 12일 조업에 들어갔다.

□ 자강도소아병원이 12일 새로 지어졌다.

□ 올해 북한에서 다양한 요리경연대회가 열린다고 김영일 조선요리협회 중앙위원회 부장이 9일 밝혔다.

□ 조선요리협회가 12일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콩음식', '건강을 위한 식생활상식', '접대원상식' 등 책을 발간했다.

□ 조선요리협회 서재요리정보기술교류사가 최근 '조선요리'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 평양시 낙낭구역 정진동 36인민반에 거주하는 장영숙 할머니가 13일 100세 생일상을 김 제1위원장으로부터 받았다.

□ 김정은 제1위원장이 최근 사망한 유기항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부장에게 13일 조화를 보냈다.

□ 김정은 제1위원장이 조선4.26만화영화촬영소에 컴퓨터 등을 보냈다. 전달모임이 14일 김기남 당 비서가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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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망칠 총리후보자, 이완구

등록 : 2015.02.13 20:21수정 : 2015.02.1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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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총리 지명 뒤 무난하게 검증 절차를 통과하리라 여겨졌던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는 종합선물세트라 불릴 만큼 다양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11일 낮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한 의원의 질의를 들으며 이 후보자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토요판] 르포
이완구 총리 후보자 청문회

▶ 이완구 총리 후보자를 전담 마크(취재)하는 정치부 기자는 그의 ‘간단치 않다’는 말과 ‘십팔번’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공직에 오를 준비를 위해 병역과 관련한 50년 된 자신의 엑스레이 사진과 첫 월급명세서 등을 보관 중이라며 “나는 간단치 않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곤 했답니다. 실상은 달랐습니다. 부동산 투기 의혹 등 각종 의혹이 ‘간단치’ 않은 상황입니다. 정치부 김경욱 기자가 간단치 않았던 총리 인사청문회 검증 과정을 전합니다.

 

 

준비된 서류를 척척 꺼내들며 자신만만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수많은 여야 협상을 이끌며 여당의 뜻을 관철시켜온 노련미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날 선 기자들의 질문에 “청문회에서 얘기하겠다”는 말만 무표정한 얼굴로 반복했다. 지난 11일 오전 9시25분, 인사청문회를 위해 국회에 도착한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는 몰려드는 기자들을 피해 본관에 마련된 대기실로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그의 등 뒤로 길게 이어졌다.

 

하루 앞서 열린 청문회에서는 이 후보자와 관련한 부동산 투기 의혹, 병역 기피 의혹, 언론 통제 의혹 등이 중점적으로 제기됐다. 특히 이 후보자의 발언이 담긴 녹음파일이 일부 공개되면서 파문이 일었다. 지난달 27일 기자들과의 점심식사 자리에서 녹음된 내용이다. 이 후보자는 당시 이 자리에서 “언론인을 대학 총장과 교수로 만들어줬고, 언론사와 기자들이 곤욕을 치르도록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법 제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는 청문회장에서 이런 내용을 묻는 야당 의원들의 질문에 애초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가, 녹음파일이 공개되자 “착오가 있었다”고 말을 바꿨다. 사실상 위증을 한 것이다.

 

 

가장 걸림돌 없으리라던 초기의 낙관

 

야당 의원들에 의해 녹음파일이 공개되면서 그는 급격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청문회장에 들어서며 비틀댔고, 자리에 앉은 뒤 물잔에 물을 따르면서 손을 심하게 떨기도 했다. 야당 의원들의 녹음파일 공개에 대한 여당 의원들의 반발로 청문회가 중단됐을 때, 그는 눈 둘 곳이 없어서인지 한참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곤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시작은 늘 그렇듯, 순조로웠다. 이 후보자가 총리로 지명된 것은 지난달 23일이다. 이날 오전 10시 청와대는 정홍원 국무총리 후임의 새 총리에 이완구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내정했다고 발표했다. 낙마한 안대희 후보자(전 대법관), 문창극 후보자(전 <중앙일보> 주필)에 이어 이른바 ‘도로 정홍원’(정홍원 총리 유임) 결정은 언론에서 봤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나, 이 후보자 지명은 시기가 갑작스러웠지 지명 자체는 크게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 후보자는 언론에 수차례 총리 후보자로 거론됐고, 후보자 스스로도 기자들과 만난 자리 등에서 총리직에 대한 의지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내왔기 때문이다.

 

총리 지명 직후 국회에서 만난 이완구 후보자는 표정을 꾹꾹 눌러 감췄다. 굳은 얼굴로, 엄중한 시기에 무거운 직분을 맡았다는 부담감을 내비쳤다. 오랫동안 고대해온 총리직을 제안받은 데 대한 기쁨과 감동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날 밤 청와대로부터 전화를 받고, (수락 여부를) 고민하느라 밤잠을 설쳤다”며 눈도 충혈돼 있었다. “축하한다”는 기자들의 인사에 “축하를 받아야 할지, 위로를 받아야 할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볍게 행동하지 않은 것이다. 총리 지명 직후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웃으며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문창극 후보자와 확연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새해 기자회견 뒤 나타난 지지율 하락, 지난해 말~올해 초 불거진 청와대 공직기강 해이 문제, 연말정산 파동 등 최근 잇따라 터진 악재로 민심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국면 전환을 위한 승부수로 ‘이완구 총리 카드’를 꺼내든 것으로 보인다. 지지율 급락세를 반전시키려면 당·정·청은 물론 대야 관계까지 두루 원만하게 유지하는 게 절실하다는 판단에서다. 이 후보자는 지명 직후 그런 기대에 사뭇 잘 부응했다. 이 후보자는 내정 발표 직후 기자회견에서 “저의 마지막 공직이라는 각오로 신명을 바쳐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다”며 “야당을 이기려고도 않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헌신’은 그렇다 쳐도, 그동안 어떤 총리 후보자가 지명 첫 일성으로 ‘야당을 이기려고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총리 지명 첫 행보도 야당을 찾아가서 인사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총리 내정 사실도 언론에 공식 발표되기 전에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에 미리 알렸다. 야당을 배려한 것이다. 야당으로부터 덕담이 흘러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희상 당시 새정치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은 “모처럼 정치인 출신 총리가 나와 기분에는 (청문회) 합격”이라고 말했다. 이 후보자는 또 총리 후보자에게 지원되는 차량과 운전기사 등 의전 편의도 사양했다. 호의적인 언론 보도들이 마구 쏟아졌다. ‘충청권 맹주’ ‘차기 대선 주자로 급부상’ 등의 보도들도 이어졌다.

 

애초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 후보자가 인사청문 과정에서 큰 걸림돌은 없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평소 이 후보자 발언에 비춰 봤을 때, 그를 오랫동안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온 ‘준비된 공직자’로 생각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 후보자는 자신의 병역 회피 의혹을 해명할 엑스레이 사진들을 50년 동안 자택에 보관해왔고, 40년 전 공직생활을 시작할 때의 첫 월급명세서도 갖고 있었다. 충남도지사 시절 도청 이전 예정지인 홍성에 증조부가 일제 때인 1934년 아버지에게 물려준 땅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토지 보상금 2400만원을 국고로 귀속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도지사 시절, 장남 결혼식은 물론 장모상도 언론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치렀다. 그는 이런 이야기들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수시로 언급했다.

 

이완구 후보자를 사석에서 만나보면, “나는 ‘간단치’ 않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것을 알 수 있다. 철저히 자기 관리를 해왔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추진에 반발해 원안추진이라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도지사직을 내던질 정도로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말도 많이 한다. 기자간담회나 식사 자리에서 이 후보자를 만나거나, 취재를 위해 전화통화를 할 때면, 이 ‘간단치 않은 사람’ 발언에서 시작해 50년 된 엑스레이 사진, 첫 월급명세서, 증조부 토지 보상금 국고귀속, 장남 비공개 결혼, 도지사직을 던진 일화 등은 ‘노래방 18번’처럼, 그의 단골 레퍼토리로 자주 등장한다. 오죽하면, 정치부 국회출입 막내급 기자들인 언론사 ‘말진’들 중에는 “나는 간단치 않는 사람이다”로 시작해 이 후보자의 레퍼토리를 줄줄이 읊는 이들도 여럿 있을 정도다.

 

그를 만나거나 전화통화할 때면
‘간단치 않은 사람’에서 시작해
50년 된 엑스레이 등 에피소드가
‘노래방 18번’처럼 자동으로 나와
말진 기자들도 줄줄이 읊게 돼

 

‘반쪽 총리’의 문턱에서 그는
자신의 재산형성 과정 밝혀줄
자료와 사인간채무 상환 자료 등
수많은 관련 의혹들에 대한
소명자료를 여전히 제출 안 한다

 

 

공직생활 자료 모은 쌍둥이가방까지 준비?

 

그러나 실제 상황은 정반대였다. “간단치 않은 사람”의 의혹은 정말이지, ‘간단치’ 않았다. 부동산 투기 의혹, 본인 및 차남의 병역 기피 의혹, 교수 특혜채용 의혹, 논문 표절 의혹, 건강보험료 탈루 의혹, 재산신고 축소 의혹, 삼청교육대 관련 의혹, 언론 보도 통제 의혹 등 의혹이란 의혹은 죄다 터져나왔다. 그동안 낙마했거나 문제가 된 총리 후보자들의 의혹 ‘종합판’ 격이었다.

 

2013년 1월 말,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이긴 했으나 당선자 신분으로 새 정부 초대 총리로 지명한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은 전관예우 특혜 의혹과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총리 후보자 지명 닷새 만에 자진사퇴했다. 지난해 5월 물러난 안대희 전 대법관의 경우는 이 후보자와 같은 부동산투기·병역 관련 의혹은 없었다. 다만 2013년 변호사 개업 이후 열달 동안 최대 27억원에 이르는 거액의 수임료를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관예우’ 논란과 함께 자진사퇴했다. 이어 지명된 문창극 전 주필은 친일사관을 그대로 드러낸 교회 강연이 드러나면서 낙마했지만, 이 후보자와 같은 의혹들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김태호 총리 후보자가 2010년 인사청문회에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의 회동 사실을 속였다가 거짓말이 탄로나면서 청문회 도중 사퇴했다. 인사청문회법이 처음 도입된 김대중 정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이 부동산 투기 의혹과 위장전입 문제 등이 불거져 국회 인준 과정인 표결에서 최종 낙마했다. 뒤이어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장대환 <매일경제> 회장 역시, 부동산 투기 및 세금 탈루 의혹과 자녀 위장전입 등으로 국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완구 후보자는 총리 지명 이틀째인 지난달 24일 “차남 병역 의혹에 대해 공개 검증을 받겠다”고 선제적으로 밝혔다. 별다른 의혹 제기가 없는 상황에서 사전에 의혹을 털고 가겠다는 포석이었다. 이후 불거진 경기도 성남 분당구 대장동 땅투기 의혹에 대해서도 그는 지난달 27일 기자들에게 토지 매매 계약서와 13년 전 장인 병원 입원 기록 등을 꺼내들며 적극적으로 해명에 나섰다. 후보자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으로 출근하는 길에 기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 땅은 이 후보자의 장인과 장모가 2001년 매입한 토지로 이 후보자의 부인(62)을 거쳐 차남(34)에게 최종 증여되면서 투기 의혹이 일었다.

 

그는 당시 기자들에게 “질문할 게 더 없느냐, (질문이) 그게 다인가”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해명할 자료가 충분히 준비돼 있다는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내가 ‘별놈’의 자료를 다 갖고 와서…”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 후보자가 공직생활 초기부터 온 가족의 자료를 모아놓은 여행용 가방과 분실에 대비해 사본을 넣어둔 ‘쌍둥이 가방’까지 마련했다는 이야기를 미담처럼 다뤘다. ‘해명 자판기’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적극적인 해명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한 것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후보자와 관련한 의혹은 사그라들지 않고 되레 늘어갔다. 이튿날에는 이 후보자가 대장동 땅을 매입하는 과정을 직접 관할했고, 토지 매입을 권유받았다는 이 후보자 지인의 진술이 여러 언론에 보도됐다. 서울 강남 도곡동 타워팰리스 투기 의혹까지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자판기’ 해명을 듣기 위해 기자들이 통의동 사무실 앞으로 몰려들었지만, 이 후보자는 돌연 “오늘은 마음이 무겁다”고 입을 뗀 뒤, 이날 오후 2시30분에 차남의 병역 면제 의혹과 관련한 공개검증을 하겠다고 밝혔다. 더욱이 이 후보자는 “아직 장가도 안 간 자식의 신체 부위를 공개하면서 까지…. 내가 공직에 가기 위해서 비정한 아버지가 됐나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프다”며 눈물을 보였다. 의혹은 부동산 투기인데, 이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아들 병역 공개검증에 나서겠다고 하니, 기자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간단치 않은 사람’이다”라는 탄식이 기자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처럼 터져나왔다.

 

물 아래 가라앉아 있던 의혹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물 위로 떠올랐다. 1970~80년대 강남 아파트 투기 의혹(2월6일), 언론보도 통제 의혹(2월6일), 경기대 조교수 특혜채용 의혹(2월7일), 1차 징병검사 1급 현역 판정에 따른 본인 병역기피 의혹(2월10일), 충남도지사 시절 국외 출장에 부인 동반 의혹(2월11일), 부친 강남 아파트 우회투기 의혹(2월11일), 재산신고 누락 의혹(2월11일), 차남 건보료·소득세 탈루 의혹(2월11일) 등,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의혹들이 불거져 나왔다. 공직자로서의 기본이 완전히 무너지는 수준의 의혹들이었다. 이 후보자는 자택에 머물며 통의동 사무실로 출근을 하지 않거나, 오후에 출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완구 (의혹)백화점’, ‘이완구라’ 등의 조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국무총리실 인사청문 준비단 관계자는 관련 의혹들에 해명을 요구하는 말에 “일일이 다 해명할 수 없다. 후보자가 청문회에서 직접 밝힐 예정”이라고 답했다. 한 총리실 관계자는 “의혹에 일일이 대응하기가 너무 벅차다”고 털어놨다.

 

 

차기 대선주자 급부상에서 바닥까지

 

이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첫날인 지난 10일 각종 의혹에 대해 한껏 몸을 낮췄다. “통렬히 반성한다” “깊이 사죄한다” “용서를 부탁 올린다” “송구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죄드린다”며 허리를 굽히기도 했다. 다만 이튿날 오후에는 적응한 모습을 보이며 며느리 국적회복 증명서를 비롯해 자신에게 유리한 자료 등을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사인간 채무와 관련한 은행거래 자료와 차남의 재산 의혹을 완전히 해소할 국세청 자료 등은 끝내 제출하지 않고 ‘뭉개기 전략’을 구사해 야당 의원들의 질타를 받았다.

 

총리 지명 뒤 20일 가까이 이 후보자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총리로 지명되며 ‘차기 대선주자로 급부상’한 그는 이후 등락을 반복하다, 각종 의혹 탓에 지금은 바닥까지 추락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는 말도 과한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낙마까지는 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당이 오는 16일 단독으로 본회의에서 표결해 총리로 인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고지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물론 야당의 동의를 받지 못한 ‘반쪽 총리’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그는 지난해 8월10일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명량>을 보고 ‘콜백’(다시 전화 걸기)을 해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다. “<명량>을 보면서, (나도 이순신 장군처럼) 고통스럽고 고독하다고 느꼈다. 정치는 고독한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눈치, 저 눈치 안 본다. 훗날 정치를 떠난 뒤에 나는 후세들에게 ‘이완구, 그때 지혜로운 정치인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 과연, 후대인들은 그에 대해 어떤 말을 하게 될까. ‘반쪽 총리’의 문턱에서 이 후보는 자신의 재산 형성 과정을 밝혀줄 자료와 사인간 채무 상환 자료 등 수많은 관련 의혹들에 대한 소명 자료를 여전히 제출하지 않고 있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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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 무함마드 풍자화가 참석행사서 총기난사...1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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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격사건이 발생한 크루퇸덴 카페 주변에서 14일(현지시간) 감식요원들이 채증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슬람 극단세력에 의한 프랑스 파리 테러 한달여 만에 유사한 총격 사건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일어나 유럽이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14일 오후(현지시간) 코펜하겐 시내의 한 카페에서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 풍자 화가인 스웨덴 출신의 라르스 빌크스(68) 씨가 참석한 행사가 열리던 중 소나기 총격이 벌어져 참석 시민 한 명이 사망하고 경찰 세 명이 부상했다.

주요 외신과 덴마크 정보 당국은 빌크스가 애초 이슬람 극단세력의 테러 표적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공격이 그것과 관련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헬레 토르닝 슈미트 덴마크 총리도 성명을 내고 이번 사건을 정치적 암살 시도이자 테러 행위로 규정하고서 연루자들에 대한 단죄를 천명했다. 그녀는 이어 현장으로 달려가 용의자 검거에 만전을 기하라고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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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장 경찰관이 총격사건 현장 인근에서 경계를 서고 있다.

코펜하겐 경찰은 이날 오후 4시께 '예술, 신성모독,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주제로 토론 행사가 진행되던 중 밖에서 창문을 뚫고 최소한 40차례 총탄이 날아들었다고 초기 조사 결과를 전했다.

경찰은 애초 용의자를 두 명으로 보고 이들이 범행 후 검은색 폴크스바겐 자동차 폴로를 타고 달아났다고 밝혔으나, 이후 용의자를 한 명으로 수정했다. 경찰은 25∼30세 남성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흐릿하게 찍힌 사진을 내놓으며 목격자들의 제보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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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겐 스코브 경찰 대변인은 이 용의자가 파리 테러 때 공격당한 언론사 '샤를리 에브도' 사건 같은 시나리오를 계획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현지 TV 방송은 이 사건을 보도하며 창문에만 총탄에 뚫린 구멍 30개가 발견됐다고 전했다. 이 총기 공격으로 행사에 참석한 40세 남성 한 명이 숨졌으나, 타깃이 된 것으로 보이는 빌크스 씨는 무사했다고 이날 모임을 주도한 헬레 메레테 브릭스 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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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탄 자국이 선명한 카페 유리창.

브릭스 씨는 "얼굴을 가린 이들이 달아나는 것을 봤다"면서 "빌크스를 겨냥한 공격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프랑수아 치머래 덴마크 주재 프랑스 대사는 파리 테러와 같은 의도의 사건이라고 말하고 "내 느낌으로는 50발 정도는 총격이 이뤄진 것 같고, 여기 경찰은 200발이라고도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샤를리 에브도 관련 행사였기 때문에 참석한 것이었다.

빌크스는 지난 2007년 무함마드를 개로 묘사한 그의 만평이 스웨덴 신문들에 게재된 이후 수차례 살해 위협을 받아왔다.

앞서 2010년 두 명의 괴한이 빌크스의 자택을 방화하려다 실패했고, 작년에는 그를 살해하려 모의한 이슬람 과격세력에 가담한 미국 펜실베이니아 거주 여성이 붙잡혀 10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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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홉명

팽목항에 '3000명' 최대 인파
"얼마가 들어도 무조건 인양해야"

[현장] 19박 20일 500km 세월호 도보행진 마무리... 범국민대회 이어져

15.02.14 23:33l최종 업데이트 15.02.14 23:3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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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목항 가득 메운 인파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05일째인 도보순례로 14일 오후 진도 팽목항에 도착한 세월호 가족과 시민들 3천 여명이 '세월호 진상규명과 온전한 선체 인양, 실종자 수색'을 촉구하는 문화제를 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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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홉명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05일째인 14일 진도 팽목항에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 9명의 이름이 불밝힌 등대 아래 나부끼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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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3000여 명이 14일 오후 진도 팽목항을 꽉 채웠다. 세월호 참사 이후 '팽목항 최대 인파'를 기록했던 지난해 10월 '기다림의 버스' 행사(관련기사: 김제동, 팽목항 찾아 눈물... "대통령 사랑해달라") 때보다 3배 더 많은 숫자다.

이날 팽목항을 꽉 메운 이들은 19박 20일 동안 약 500km의 거리를 버틴 세월호 도보행진단과 이들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다. 지난달 26일 경기도 안산을 출발한 세월호 도보행진단(관련기사: "전두환 때도 이러진 않았다" 세월호 유족, 팽목항까지 20일 행진)이 이날 오후 4시 종착지인 팽목항에 도착했다. 이날 오전 8시 진도군청을 출발한 행진단은 8시간을 걸어 도보행진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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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화 엄마, 기운내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05일째인 14일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조은화양의 어머니 이금희씨가 도보순례로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다. 마중나와 있던 지인을 껴안고서 흐느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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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다윤 엄마'도 함께한 순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05일째인 14일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허다윤양의 어머니 박은미씨(앞)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세월호 가족들의 도보순례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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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단은 팽목항에 도착 직후, 곧바로 '진실규명을 위한 세월호 인양촉구 팽목항 범국민대회'에 참여했다. 범국민대회에는 지역, 성별, 나이를 불문한 유가족·실종자 가족·시민들이 참석해 "온전한 선체 인양을 통한 실종자 수습,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을 정부에 요구했다. 

범국민대회 사회를 맡은 유경근 4·16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세월호 인양 비용이 얼마인지 아나?"라고 물으며 "숫자를 말하는 분들은 다 틀렸다. 사람을 존중한다면 얼마가 들어가든 무조건 해야 하는 게 세월호 인양이다"고 말했다.

도보행진부터 범국민대회까지 함께 한 정봉주 전 의원은 "4월 16일 직후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한 국민들이 지금은 세월호를 잊은 채 '이제 그만하라'고 질타한다"며 "(진상 규명을 피하는 박근혜 정부) 그들이 질긴지 우리가 질긴지 알아 보기 위해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시길 호소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가족·실종자 가족 '눈물의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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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로 팽목항 도착한 세월호 가족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05일째인 도보순례로 14일 오후 진도 팽목항에 도착한 세월호 가족들이 '세월호 진상규명과 온전한 선체 인양, 실종자 수색'을 촉구하는 문화제에 참여해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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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지는 팽목항에 모인 가족과 시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05일째인 도보순례로 14일 오후 진도 팽목항에 도착한 세월호 가족과 시민들 3천 여명이 '세월호 진상규명과 온전한 선체 인양, 실종자 수색'을 촉구하는 문화제를 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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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범국민대회는 문규현 신부의 절규로 시작됐다. 문 신부는 "오늘 세월호 참사 실종자들이 아직 기다리고 있는 사고 현장에 다녀왔다"며 "우리가 다함께 실종자 9명을 크게 부르면 반드시 돌아올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실종자 9명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이영숙님, 권재근님, 어린 (권)혁규야, (박)영인아, (허)다윤아, (남)현철아, (조)은화야, 고창석 선생님, 양승진 선생님!"

지난달 26일부터 도보순례에 나서 이날 범국민대회까지 함께한 유가족들은 범국민대회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 근형이는 착하고 정말 말을 잘 들어서…. 그래서 우리 근형이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제가 잘못 가르쳤나 봅니다. 국민 여러분이 이 못난 아버지를 도와주십시오. 세월호 선체를 인양해 실종자들을 가족 품으로 돌려주고, 희생자들이 왜 죽었는지 철저한 진상규명을 할 수 있게, 그래서 못난 아버지가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단원고 고 이근형군의 아버지

"눈물을 흘리며 걸었습니다. 다리도, 허리도 아팠습니다. 근데 제 아이의 고통에 비하면 제 아픔은 아무 것도 아니겠죠. 한이 맺혀 죽고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제 아이가 엄마 이름을 부르며 왜 하늘의 별이 됐는지 모릅니다. 이 나라가, 이 정부가 제 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여러분, 진실이 인양될 때까지 함께 해주십시오." 
- 단원고 고 허재강군의 어머니

유가족들의 '눈물의 호소'에 무대 아래 있던 범국민대회 참석자들은 "울지 마세요" "힘내세요"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외쳤다. 일부 시민들은 유가족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고 박예슬양의 아버지는 "오늘 함께해준 여러분이 청와대 있는 분보다, 국회에 있는 의원들보다 훨씬 훌륭합니다"라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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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게 늘어진 진도군청 앞 '세월호 도보행진' 행렬 지난달 26일 안산을 출발한 세월호 도보행진단이 14일 오후 4시 종착지인 팽목항에 도착했다. 이날 오전 8시 진도군청을 출발한 행진단은 8시간을 걸어 도보행진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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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서 팽목항까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05일째인 도보순례로 14일 오후 진도 팽목항에 도착한 세월호 가족들이 '세월호 진상규명과 온전한 선체 인양, 실종자 수색'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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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찾은 문재인 "정치 제 역할 못해 송구... 세월호 반드시 인양"

참사 후 305일째, 아직 딸을 찾지 못한 이금희(단원고 실종자 조은화양의 어머니)씨의 발언에도 애절함이 묻어났다. "범국민대회 직전에 사고 현장에 다녀왔다"고 운을 뗀 이씨는 "가서 우는 것 외엔 아무 것도 못하고, 혼자 돌아왔다"며 눈물을 흘렸다(관련기사 : 저 멀리 노란 부표가... 엄마는 다시 배 위에 쓰러졌다).

"4월 16일 사고가 났을 때 '전원 구조했다'는 말만 믿고 내려왔습니다. 우리 딸 살아있는 줄 알고, 젖은 옷 갈아 입힐려고 내려왔어요. 근데 305일이 됐는데 아직 못 돌아왔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겪을 줄 알았겠습니까. (은화가) 신나게 엉덩이 흔들며 수학여행을 떠났는데 이런 일을 겪을 줄 알았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누구나 닥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실종자 수습, 세월호 인양, 진상 규명을 위해 도와주십시오. 그게 우리나라 안전의 기초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유가족 합창단은 참사 희생자 추모곡을 부르기도 했다. 노랫말에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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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목항 방문한 문재인 대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14일 오후 진도 팽목항을 방문해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분향소에서 헌화한 뒤 유가족들과 함께 분향소를 나서고 있다. 팽목항 방문에 오영식 최고위원, 김영록 수석대변인, 이낙연 전남도지사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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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목서 만난 아이와 잡은 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05일째인 14일 오후 진도 팽목항을 방문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하는 문화제로 발걸음을 옮기던 한 아이와 인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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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취임 후 첫 지방 일정에 팽목항을 포함시켜 이날 범국민대회 직전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을 만났다. 만남에 앞서 진도 팽목항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를 찾은 문 대표는 영정 앞에 국화꽃을 놓은 뒤 휴지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는 "정치가 해결해야 할 일을 (우리가) 제대로 못해 유가족 분들을 걷게 만들어 송구하다"며 "세월호는 반드시 인양해야 하고 새정치민주연합은 유가족·실종자 가족들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유가족들을 만나서도 "새 지도부가 들어섰으니 당내 세월호 관련 대책위원회를 복원해 특별조사위원회, 인양, 배·보상 대책을 세우겠다"고 강조했다.

앞서 문 대표는 진도군청에서 이동진 진도군수를 만나 "참사 수습 과정에서 진도군민의 고생이 많았다"며 "어민뿐만 아니라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도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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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와달라" 울부짖은 은화 엄마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05일째인 14일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조은화양의 어머니 이금희씨(왼쪽에서 세번째)가 진도 팽목항에서 시민들과 함께 한 문화제에서 "제발 도와달라"며 울부짖고 있다. 오른쪽은 문규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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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목항에 나부끼는 아홉 이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05일째인 14일 진도 팽목항에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 9명의 이름이 불밝힌 등대 아래 나부끼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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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에 바람을 느끼고 싶었던 독수리 ‘62번’

 
김봉균 2015. 02. 12
조회수 1846 추천수 0
 

굶주려 탈진한 독수리 2마리, '신검' 통과한 뒤 표지 달고 다시 자연에

가축 야외 폐기 금지돼 먹이 부족 시달려, 로드킬 고라니 줄 땐 납탄 조심
 

do3.jpg» 날갯짓 몇 번만에 하늘로 치솟은 독수리. 날개에 스치는 바람이 그리웠던가 보다.

  
1월16일 구조센터에서 1년여 동안 머물던 독수리 2마리가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둘 다 먹이를 먹지 못해 기아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발견한 때가 독수리가 북상하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회복이 끝났다 하더라도 방생을 하기엔 무리라고 판단해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1년 넘게 보호하게 되었습니다.
  
방생을 며칠 앞두고 신체검사를 했습니다. 신체검사를 통과한 독수리에는 날개 표지(윙택)를 부착했습니다. 윙택은 동물을 식별하는 도구인데, 방생 후 모니터링이나 동물의 이동 경로 등을 연구하는데 필수적입니다. 
 
미국 덴버동물원과 몽골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독수리에게 윙택을 달아 왔고, 위치추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수의 독수리에게 구조센터나 정부 연구자들이 윙택을 달고 있습니다.
 

do1.JPG» 멀리서도 개체를 식별할 수 있도록 각각 62, 63번이라는 표식이 그려진 파란 윙택을 단 독수리의 모습.
     
우리나라에서 독수리의 주요 위협 요인을 꼽는다면 중독사고(밀렵 과정에서 발생하는 2차 중독이나 너무 부패한 먹이를 먹고 발생하는 식중독), 굶주림, 총상, 전선 충돌 등으로 인한 골절사고와 질병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축산물의 야외 폐기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어 독수리들이 먹이 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간헐적으로 민간단체와 관공서에서 독수리의 먹이를 공급하고 있죠. 
 
하지만 먹이가 일반적으로 도축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이 포함돼 있거나, 가축농장에서 나온 폐사체 등도 활용되고 있어 잠재적 질병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정육을 제공하기에는 가격이 너무 비쌉니다.
 
최근에는 사고로 폐사한 야생동물, 특히 고라니를 먹이로 제공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폐사한 야생동물이 다른 야생동물의 에너지원이 된다는 것은 자연의 순환고리를 완성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로 제공되는 고라니의 주검에는 수렵 과정에서 사용된 납탄이 몸에 박혀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를 독수리가 먹게 된다면 심각한 납중독에 걸릴 우려가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고라니 등 야생동물을 먹이로 제공하기 전에 엑스선 촬영을 해 몸에 납탄이 있는지를 미리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또한 먹이를 주면 독수리를 한 장소로 모이게 하여 전염병이 돌아 떼죽음으로 이어질 위험도 커집니다. 이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과 당사자들 간의 지속적인 협의가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 독수리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면? 관련 기사독수리 수수께끼…콘도르보다 큰가, 수리와 독수리의 차이

 

do2.jpg» 독수리의 방생을 앞두고 있습니다. 야생동물을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과정은 구조센터에서 겪을 수 있는 일 중 가장 보람되는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마음이 사진 속 많은 분의 표정을 통해 느껴집니다. 
  
마침내 우리의 문이 열리자 독수리들은 기다렸다는 듯 힘차게 뛰어나갔습니다. 날갯짓 몇 번만으로 몸을 하늘에 띄우더니 저 멀리에 내려앉았습니다. 
 
다른 한 마리도 먼저 방생한 친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내려앉았습니다. 독수리들은 바닥에 내려앉아서도 날개를 쫙 펴고 바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런 독수리들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돌아왔습니다. 
 
do4.jpg» 얼마나 그리웠을까요. 저 바람이, 저 하늘이….  
 
이제 이 독수리들은 조금 더 우리나라에 머물다가 그들의 번식지인 몽골 등으로 북상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아무쪼록 잘 먹고, 잘 쉬다가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제 욕심이긴 하지만, 가능하다면 이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 물론 구조센터가 아닌 야생에서 말입니다. 
 
여러분도 독수리들의 안녕을 빌어주세요.
 
do5.jpg» 안녕~. 잘 가! 그동안 고생 많았어~. 
  
글·사진 김봉균/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재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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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美 ‘한국학 대가’ 故 양기백 박사의 삶과 업적

 
 
[부음기사로 쓴 인물평]故 양기백 박사는 지성인이요 진정한 애국자
 
정운현 | 2015-02-14 10:24:4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故 양기백 박사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45년간 근무하며 한국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양기백(梁基伯) 씨가 16일 미 워싱턴DC 근교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유족들이 28일 밝혔다. 향년 96세. 양씨는 1949년 국비장학생으로 도미(渡美), 1950년부터 95년까지 미 의회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한국과장과 동양학부장 등을 지냈다. 이 기간 중 한국 관련 자료를 270권에서 12만5,000권으로 늘리는 데 앞장섰다. 퇴임 이후에도 주미 한국대사관 한미외교사료실 고문으로 일하며, ‘미 의회 의사록 한국관계 기록 요약집’ 등을 펴냈다. 유족은 딸 양원경·아경·말경 씨가 있다. 장례식은 2월1일 오후 1시 메릴랜드 베데스다 펌프리 장례식장에서 열린다.”

위 내용은 지난 1월 29일자 국내 몇몇 신문에 실린 양기백 박사의 부음기사다. 원고지 2매 분량도 안 되는 이 정도로 미국 내 한국학의 최고 권위자로 불린 양 박사의 일생을 평가, 기록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명사(名士)의 경우 부음기사에 이어 지인이나 후학들의 고인에 대한 추억담, 회고담 같은 게 실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양 박사의 경우는 그런 것도 없었다. 국내인사가 아닌 재미교포인데다 이미 양 박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신문사에 거의 없는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생전에 양 박사와 다소의 교분도 있는데다 또 후학을 자처하는 필자라도 양 박사의 삶과 업적을 기록해둬야 할 것 같다.


1. 양 박사와의 만남, 미래의 한국 국기 구상

먼저 사적인 얘기부터 시작하자면, 1995년 4월 중앙일보 근무 당시 미국 워싱턴에 업무차 출장을 갔다가 양기백 박사를 만나 뵌 적이 있다. 당시 양 박사는 미국 의회도서관(LC, Library of Congress) 한국과 과장으로 근무하고 계셨다. 필자 같은 문헌정보학(옛 도서관학) 전공자들은 세계 도서관의 상징과도 같은 미국 의회도서관을 한번 방문하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다. 그런데 그곳에 한국인이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니 반가움이 더할 수밖에. 출장을 가기 전에 편지로 한번 뵙기를 청하였더니 일부러 내게 시간을 내주셨다.

집무실에서 인사를 나눈 후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양 박사는 내게 한국과 서고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서고로 안내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당시 한국과 서고는 지하에 있었는데 철제서가 양면에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당시 내 눈에 확 띈 것은 북한 책이 한국 책들과 나란히 꽂혀 있었던 게 인상적이었다. 서고를 들러본 후 내 관심사인 한국사 코너엘 들렀더니 뜻밖에도 그곳엔 내가 펴낸 <친일파·Ⅱ>(공저·91·학민사)와 <창씨개명>(편역·93·학민사) 두 권이 꽂혀 있는 게 아닌가. 미국 의회도서관에 졸저가 두 권이나 소장돼 있다는 사실에 당시 나는 적잖이 고무됐었던 기억이 난다.

▲ 한국과 사무실에서 양기백 박사와 함께 한 필자(1995.4.12)  
 
▲ 한국과 서고에서 졸저 <친일파·Ⅱ>를 들고 선 필자(1995.4.11) 

첫날은 양 박사께서 일정이 바빠 이튿날 다시 찾아뵈었다. 미국 가톨릭대학에서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받은 양 박사는 내가 같은 분야 전공자임을 알고는 더욱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그리고는 그간 모은 한국학 관련 자료 파일을 여럿 꺼내 보이며 이를 서지학적으로 정리중이라고 하셨다. (물론 이 자료들은 나중에 국내에서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헤어질 무렵 양 박사는 한 파일에서 미래 한국의 국기(國旗)를 구상한 것이라며 보여주셨다. 태극문양과 건곤이감 4괘 대신 깃발의 절반 아래는 흰색, 위는 푸른색이었다. 특별한 문양 같은 것은 없었다.

근 반세기를 미국서 살아오신 분이 어떤 연유로 한국의 국기를 새로 만들게 됐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그 연유를 양 박사께서 찬찬히 설명해주셨다. 언젠가 중국과(課)에서 들러달라고 해서 갔더니 한 미국인 젊은이가 태극기를 가지고 와서 기증하겠다며 맡기고 갔다는 거였다. 그 미국인은 2차 대전(태평양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손자인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던 중 태극기를 발견하고는 이를 중국 국기라고 여겨 중국과로 가지고 왔더라는 거였다. 그 미국인은 태극기의 ‘태극문양’을 중국 문양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 박사는 ‘태극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고 한다. 우선 그 미국인이 태극기를 중국 국기로 인식한 것은 ‘태극문양’ 때문인데 이는 분명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또 ‘태극기’가 그리기가 어려워 친근함을 주지 못하는 점도 국기로서 한번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양 박사는 ‘국기’를 나타내는 영어단어 가운데는 ‘colors’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국기가 그 나라를 상징하는 ‘색’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양 박사는 고금의 문서를 통해 ‘한국(인)의 색’을 찾아 나선 끝에 ‘백의(白衣)민족’과 ‘푸른 하늘’에서 흰색과 푸른색을 우리민족의 색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아래 사진 참조)

▲ 한국인의 상징인 ‘백의민족’과 ‘푸른하늘’에서 착상해 양기백 박사가 구상한 대한민국 국기(사진-백용 씨 제공)

2. 출신, 가족사항, 학력, 경력, 저서

양기백 박사는 미 의회도서관에서 ‘KP Yang’(Key Paik Yang)으로 통했다. 내가 양 박사의 집무실을 방문해 대화중에도 연신 전화가 걸려왔다. 그 때 마다 양 박사는 수화기를 들고는 “KP Yang”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는데 아직도 그 소리가 귀에 익다. 먼저 양 박사의 학력, 주요 이력 등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양 박사가 작성한 이력서에 따르면, 1920년 1월 20일(일부 자료에서는 1919년생으로 알려짐) 전남 나주 태생으로, 가족은 아내와 세 딸(원경, 안경, 말경)을 두었다. 어떤 연우에선지 몰라도 학교는 이북에서 다녔다. 평양3중, 숭실고 졸업(1939) 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대학 상학과(현 상대)를 졸업(1943)했다. (해방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 일리노이주 몬마우스대학 정치학과 졸업(1950) 후 아메리칸대학에서 행정학 석사학위(1958)를, 가톨릭대학에서 도서관학 석사학위(1960)를, 1975년 동국대에서 명예 정치학박사를 받았다.)

일본서 귀국 후 양 박사는 공직자로 변신했다. 첫 직장은 조선총독부 산하 경기도청에서 주사(6급)로 근무한 걸로 알려져 있는 데 이력서에는 해방 전 경력은 나와 있지 않다. 이력서에 따르면, 양 박사의 초기 경력은 해방 후 미 군정청 관재과장(1945~46)을 시작으로 경기도청 행정과장(1947~48)과 공보과장(1948~49)을 역임했다. (언젠가 양 박사가 일제 고등문관시험(고문) 합격자 출신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으나 공식문서로 확인하진 못했다. 다만 해방 직후 경력을 감안하면 양 박사가 고문 합격자라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또 해방 후 당시 토목국(현 국토교통부) 서무과장을 지냈다는 신문기사도 있다.)

1949년 한국정부의 미국 국비유학생 1호 선발돼 미국으로 건너간 양 박사는 이듬해(1950) 한국전쟁이 터지자 귀국하지 못한 채 현지에 눌러 앉았다. 그리고는 그해 미 의회도서관 한국문헌과(한국과) 직원 모집에서 공채 1호로 채용돼 이후 한국과장(1950~94), 아시아부장(1994~95) 등을 지내면서 46년 6개월간 한국 전문가로 근무했다. 1984년 미 의회도서관으로부터 공로상을 받았으며, 미국 내 유력인사들을 수록한 에 수년간 등재(1997~2009)되기도 했다. 1995년 은퇴 후에는 주미 한국대사관 고문 겸 문서담당(archivist)을 2000년까지 맡았다. 양 박사의 주요저서는 아래와 같다.

<비동맹운동> (Non-Alignment Movement, Seoul: Institute of Foreign Affaires and National Security, 1980) 
<한국전쟁서지목록> (Korean War Bibliography, Washington, D.C.: Library of Congress, 1990) 
<국가와 문화와 국학이란 뭘까요?> (서울: 선인, 2006) 
<미국 의사록 한국관계 기록 요약집 : 1887-1949> (Washington, D.C.: Embassy of Korea, 2001) 
<생각케 하는 말과 글: 한 아름> (서울: 송학, 2005) 
<우리 책 말풀이> (서울: 송학, 2005) 
<한국 문화와 예술과 문명의 생리와 걸림돌> (서울: 송학, 2005) 
<한·일·중 전통 사회의 모습> (서울: 송학, 2005) 
"An Outline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18, No. 1(1958) 
"The School of Yi Confucianism,"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18, No. 2(1959) 
"Present Conditions of Libraries in North Korea," Korean Affaires, Vol. 2, No. 2(1963) 
<한국공산주의운동사>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1968, 공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있는 미 의회도서관. 양기백 박사는 이곳에서 46년간 근무했다

3. 한국학 사료수집의 대가, 한국계 연구자에게 자료제공 등

정부수립 이듬해인 1949년 양 박사는 ‘국비 유학생 1호’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고인이 된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 초대 주미공사를 지낸 고광림 박사, 윤보선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인 신한수 박사(의사)와 함께였다. 당시만 해도 직항로는커녕 여객선도 없던 시절이었다. 6개월을 기다려 인천항에 짐을 내리고 돌아가는 화물선을 타고 40여일 항해 끝에 미국 땅에 도착했다. 일리노이주 몬마우스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한 양 박사는 이듬해(1950년) 워싱턴 D.C. 미 의회도서관에 한국과가 신설되면서 한국과 직원 1호로 채용됐다. 한국과는 이 해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 정부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

한국과로 발령을 받을 당시 미 의회도서관 내에 한국 관련 서적은 총 220권에 불과했다. 한국 관련 부서나 서고가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일본과에 그냥 포함돼 있었다. 당시 한국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양 박사는 우선 미국 내 유관기관이나 단체·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한국 관련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심지어는 북한이 펴낸 ‘이조실록’ 등 북한 관련 서적을 모으기 위해 추가예산을 요구하면서까지 한국 관련 자료 확충에 진력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책과 자료는 전부 손수 분류해 목록을 만들고 라벨을 붙였다. 그의 손때가 묻은 자료는 1995년 6월 그가 은퇴할 당시 12만권으로 늘었다. 또 초창기 그 혼자였던 한국과 직원도 5명으로 늘었다.

양 박사를 따라다니는 수식어 가운데는 ‘국비 유학생 1호’ ‘미 국회 도서관 한국과 직원 1호’ 말고도 ‘한국학 사료수집의 대가’ ‘이민 초창기 유학생들의 대부’ 등이 있다. 미 의회도서관에 근무하면서 한국학 관련 자료를 수집해 이를 체계화 하고 편찬하는 데 일생을 바쳐온 그는 미국 내 한국학 사료수집의 대가로 불려왔다. 95년 6월 정년퇴임 후에는 주미 한국대사관 고문 겸 문서담당(archivist)을 맡아 ‘사료실’을 만드는 일에도 깊이 관여했다. 미국 정부기관을 찾아다니며 한미관계의 중요한 사건이나 정책, 기록물을 일일이 복사해 『주미 한국대사관 50년사』(99년), 『미 의회 의사록-한국관계 요약집(1878~1949)』(2001년) 등 7권의 사료집을 펴내기도 했다. 『미 의회 의사록』 출간 후 ‘Radio Free Asia’와의 인터뷰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 이번에 어떻게 이 자료집을 펴내셨는지요? 
“내가 도서관에서 일 하면서 의회 회의록을 다루다 보니 우리나라에 관한 정보가 있어 모아 사전식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대사관에서 이를 보고 외교관들도 보고 읽어야 하니 출판하자고 해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 의회 의사록에 한국관련 부분은 언제부터 기록이 되어 있는지요? 
“우리나라에 관한 기록은 1846년부터 있다고 하는데 그때는 꼭 한번 일본과 조선이 무역을 한다는 조항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1882년 한미조약을 맺을 때 슈펠트가 조선과 미국의 조약에 대해 협의한 것 그것이 의사록에 실렸습니다. 그래서 민영식 공사가 처음 미국에 올 때 기록이 있고 그 후 우리 공관이 문을 닫았다가 1888년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교환공사를 임명해 거기에 대한 답례로 조선 공사를 처음으로 보냈죠.”

- 그런데 미 의회에서는 이런 자료들이 어떻게 모두 모아졌는지요? 
“의회에 이런 사연들이 모아진 것은 처음에 미국이 외국과의 외교 협정을 해군에서 했습니다. 당시 해군제독들이 자기 함대를 이끌고 가서 외교협정을 맺었는데 한국에는 슈펠트가 해군장성으로 한국과 교섭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 외교협정을 국무성에도 보고를 하고 의회에도 보고를 했기 때문에 의회에 자료가 있습니다.”

- 이번 자료집을 내시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1919년 3.1운동 관련 기록인데 3.1운동이 일어나니까 미국 선교사들이 기록들을 다 모아 가지고 자기 본부에다 보고를 하고 또 자기 지역 국회의원들에게 보고를 하면서 의사록이 싣도록 했습니다. 3.1운동이 아주 미묘합니다. 처음에 선교사들이 3.1운동에 가담을 하지 않다가 일본인들의 만행을 보고 동조하기 시작... 특히 제임스 게일 라는 선교사는 유명한 학자이기도 한데 처음에 이 사람은 친일파였습니다. 그러다 일본인들의 만행을 보고 반일파로 돌아섰습니다. 이 사람은 조선이 깨이려면 일본과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의 만행을 보니 친일 한 것이 잘못 되었다고 본인이 직접 말하기도 했는데 특히 수원의 제암리 교회에 교인들을 가두고 불을 질러 모두 죽인 사건으로 선교사들이 3.1운동에 동조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 요즘 한국과 일본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로 떠들썩한데 이런 자료가 실제적으로 좋을 증거가 아닙니까? 
“그렇죠. 우리 자료가 아닌 미 의사록의 자료이니까 우리가 말하기가 더 좋습니다. 이런 사건이 의사록 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가지고 잘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말로만 합니다. 반드시 서류로서 정정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의사록 몇 페이지에 다 실려 있다는 것을 서류로서 제시해야...”

- 이번 자료집에는 1949년까지 자료를 조사하셨는데 북미 관계 작업도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는 1949년 이후로 보아야 하는데 너무 방대합니다. 큰 작업입니다. 의사록이 굉장히 두껍고 크기 때문에 한번 뒤지기에도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런데 1950년부터는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거의 3분의2가 한국에 관한 부분입니다. 이 작업은 국가에서 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작업이 아닙니다.”

양 박사가 주미 한국대사관 고문 겸 문서담당을 맡게 된 것은 당시 주미대사였던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국비 유학생 1호’다 보니 양 박사는 이민 초창기 한인 유학생들의 ‘기댈 언덕’ 겸 한국학 기초자료 안내자 역할도 담당해야만 했다. 한인 유학생들은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미 의회도서관 출입이 잦았고, 그 과정에서 그의 도움을 적잖이 받았다. 고 이정식 박사를 비롯해 오세웅 전 국회부의장, 이홍구 전 총리 등이 그들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 내 대학에서도 한인 유학생들에 대한 지식이 없다보니 컬럼비아대학의 경우 그를 논문 심사위원으로 위촉해 20여 년간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수백 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그의 도움을 받아 석·박사 학위논문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 박사의 대표저서로 <국가와 문화와 국학이란 뭘까요>(선인, 2006)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양 박사가 미 의회도서관에서 찾아내 정리해 둔 19~20세기 한국 관련 도서에서 한국 관련 지식을 가나다순으로 풀어낸, 말하자면 ‘양기백식 개념어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95년 필자가 그의 집무실을 방문했을 때 한창 정리 중이었다. 원래 2005년 출간됐다 사장된 <량기백 산고(散稿)>(전 6권, 송학)의 제3권을 보완해서 별도의 책으로 다시 펴낸 것으로, 저자는 이를 서지백과학(bibliopedics) 또는 서지백과사전(bibliopedia)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책은 한국학은 물론 문헌정보학(도서관학) 측면에서도 귀중한 성과로 평가할 만하다.

 

 

양 박사가 이런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측면에서 여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선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태어나(1920년생) 자랐고,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생애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덕분에 그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에 모두 능통했다. 게다가 정치학, 행정학, 도서관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으며, 정보의 보고인 미 의회도서관에서 직접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폭넓은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근대’에 대한 개념의 뿌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또 이를 주체적으로 해석했다. 한 예로 ‘국가’ 항목에서 ‘내셔널리즘’을 국가주의가 아닌 민족주의로 수용한 한국적 특수성을 이야기하면서 “국가주의의 홍역을 거쳐야 성숙한 국민이 될 수 있다”는 보편적 시각을 견지했다.

이 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문장 서술방식이다. 그는 ‘국민(國民)’을 ‘궁민’으로, 즉 소리 나는 대로 읽고 또 표기했다. 또 주격 조사와 목적격 조사를 일부러 붙이지 않았다. 이밖에도 이 책에서 그는 지금은 사라진 옛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국문학적 가치도 큰 것으로 평가됐다. 그만의 독특한 표기방식은 평소 그의 소신으로, 이런 식으로 쓴 문장을 읽어보았더니 읽고 쓰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95년 미국 방문 때 그가 내게 보여준 몇몇 문건은 전부 이런 식으로 표기돼 있었다. 구체적인 표기 사례는 <4> 항목에서 그가 지인에게 보낸 이메일의 한 대목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이름 앞에 따라붙은 ‘한국학 사료수집의 대가’라는 수식어는 결코 허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묶어 책으로 펴내기도 하고 더러는 동학(同學)이나 후배들에게 자료를 제공해 활용되도록 했다. 90년대 초반 출판 분야 일을 하다가 대학 은사를 통해 양 박사와 인연을 맺은 백용(56·서울 거주) 씨에 따르면, 북한 김일성의 진위 여부로 한국 현대사학계가 시끄러울 때 미 의회도서관 차원에서 세미나를 개최했다. 당시 주제발표를 맡은 양 박사는 발표 자료를 준비 중이었는데, 절친한 미 의회 의원 한 사람이 발표를 만류해 결국 발표하지는 못했다. 이 때 준비한 자료는 김일성 연구 및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자들에게 값지게 활용된 바 있다고 한다.

4, 두 차례 서훈 추진과 불발, 노후생활

지금부터 16년 전인 지난 1999년 국내 몇몇 인사들이 양 박사에게 서훈을 추진한 바 있다. 이 일에 총대를 멘 사람은 건국대 신복룡 교수로, 신 교수 역시 양 박사에게 신세를 진 사람 가운데 하나다. 신 교수는 감영훈,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학준 당시 동아일보 회장(인천대 총장 역임) 등과 함께 양 박사와 방선주(당시 65세) 박사에 대한 한국정부의 서훈을 추진했다. 방 박사는 수십 년 동안 미 국립문서보관소를 중심으로 미국에 산재한 한국 근,현대사 관련 사료를 100만 건 이상을 발굴해 국내 학계 및 언론계에 제공하거나 자료집으로 엮어 냈다. 방 박사가 발굴한 미군정과 한국전쟁 관련 자료들은 이 분야 연구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참고로 방 박사는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신방선주 박사

[참조] 한국사료 발굴 방선주.양기백 씨 서훈 추진(연합뉴스, 1999.4.16.) 

(양기백 박사는) 미국 국적의 학자이기는 하지만 그가 그의 조국을 위해 이룩한 공로는 어느 한국인보다 지대합니다. 그러나 조국은 그에게 아무런 보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미국 의회도서관 일본과장 구로다(黑田) 씨가 천황으로부터 국가 최고문화훈장을 받은 사실과 비교한다면 한국의 경우는 너무 박정(薄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여생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의 생전에 조국은 그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이에 훈장 수여를 추천합니다.

2010.6

강영훈 전 국무총리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

강영훈, 이홍구, 김학준 등 3인은 서훈 추천서에서 양 박사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 박사에 대한 서훈 추진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유는 그 해 문화훈장 서훈 대상자가 이미 내정된 상태였다고 한다. 물론 양 박사보다 더 큰 공적이 있는 사람이 서훈을 받았다면 구구하게 따질 일은 아니다. 양 박사에 대한 서훈 추진은 1999년에 이어 10년 뒤인 2009년에 재시도 됐다. 그러나 이때도 성사되지 못했다. 정부가 하는 일이니 그 내막을 자세히 알 길은 없지만 아쉬움이 적지 않다. 추천서의 한 대목처럼 한국정부가 ‘너무 박정(薄情)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2009년 서훈 추진 건으로 백용 씨가 신 교수의 부탁을 받아 양 박사에게 연락을 취했을 때 양 박사는 다른 사람에게 그 공을 돌렸다.

“내게 한국에 공적 있다면 매 두째 화요일 모은 ‘화요회’ 주관한 거다. 연사 얻어오고, 엽서로 모임 알리고, 전화로 회의 참석 부탁 이 다 내가 했다. 역대 한국대사 비롯, 미국대사 Reischauer, 중국대사 Hammer, 우리나라 미국대사 Green, 이름난 역대 한국대사 비롯, 한국학 학자와 정부 높은 사람, 전 국무성 한국과장 Don MacDonald 박사에게 부탁 정중하게 초대했다.

첨 시작할 때 몇 사람 안 모였으나 한국에 관심 있는 미 정부와 재야인사 끊임없는 후원(Patron, Matron)으로 한 번도 빠짐없이 30년 넘어 성공리에 모였다. 이 공, 오로지 “Don MacDonald”에 돌린다. 그는 꾸준히 말없이 한국이라면 앞장서 도운 기특한 친한파(Koreaphile)다. 전남 광주에 파견된 (Foreign posting) 초창기 미국 외교관으로 한국에 대한 애정 남달랐다. 내 부탁으로 역대 주미 한국대사 이 모임 회원들 초대 대사관에서 연회 베풀어주었다.”

▲신복룡 교수 일행이 작성해 한국정부에 제출한 양기백 박사 공적서

당시 미국을 방문해 양 박사를 만난 백용 씨는 방 박사로부터 재미난 일화를 한 가지 들었다고 내게 전해줬다. 얘기인즉슨, 과거 박정희 시절(70년대 중후반) 정부에서 양 박사에게 훈장 수여를 추진했었다고 한다. 당시 문공부장관이었던 김성진 씨 통해 이같은 제안을 받았는데 그때 양 박사는 김성진 장관에게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거절 사유가 좀 특별하다. 양 박사는 평양3중, 숭실고 출신으로서(당시 동문 중에는 김형석 연대교수도 있었음) 장준하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 정권하에서 의문사를 당했는데 그걸 아는 본인으로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70년대 초반에 한국을 방문했던 양 박사는 장준하 선생을 만나 반가운 해후를 했으며, 장 선생이 같은 학도병 탈출자인 김준엽 고려대 총장을 소개해 그때부터 김 총장과도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1920년생인 양 박사는 만 95세로 타계했다. 세속적으로 보자면 천수를 다한 셈이다. 단란했던 가족과 평생 건강이 함께 했다. 게다가 평생을 바쳐 할 일이 있었고, 그 일로 인해 생계와 나름의 명예도 얻었기에 선생의 삶은 성공한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하나 아쉬움이라면 2010년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인생 말년 몇 년간을 외로이 보냈다. 비록 부인은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지만 세 딸들의 보살핌 속에서 그는 행복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2010년 양 박사가 백용 씨한테 보낸, 아내를 잃고 쓸쓸하게 보내는 심경을 담은 이메일의 한 대목을 양 박사의 말년 기록 겸 추억담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당시 나는 백용 씨를 통해 양 박사의 삶을 몇 차례 내 블로그에 연재할 계획을 밝힌 바 있어 양 박사 메일에 내 이름이 더러 등장한다.)

“Grace(셋째 딸 말경) Email로 보낸 편지 잘 받았오. 내 아내 무덤에 비석도 세웠고 나 또한 닥쳐 온 늙음맘과 몸으로 다짐하며 내 원고 색인 하는 Computer일 어서 끈내려 열심히 하고 있소. 정운현 씨 나와의 추억 기사화 무슨 말인가 잘 모르겠오. 좀 걱정되오. 기사화할 이력 없을뿐더러 겸손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움만 사게 되겠기에 한 말이오. 운현씨와 친분만으로도 난 반갑고 고맙소. 내 놀 (것) 엄는 나니 미안하지만 기사화 안 했으면한다 내 인사와 함께 꼭 전해주시오.

서로 터놓고 사귄 친구들 이젠 다 가고 없고 거기다 아내까지 죽으니 그 고독 이만자만 아니오. 딸들도 매날 와 도와주고 가나 내 맘 여전히 비여 있구려. 텅 빈집에 홀로 있어 오히려 짐 되기에 이집 팔고 이곳 떠나 어디로 갔으면도 하나 막상 갈 곳도 없오. 뒷방에 홀로 앉아 마당 큰 빨간 단풍나무 만 바라보고 이렇다 할 생각 없이 물그머니 처다 보오. 나만 두고 간 아내 원망스럽소. 앞음 없어 암 인는 줄 모르고 있었오. 진정제로 그는 아무 괴로움 없이 갔오. 내 손으로 그의 뜬눈 감겨 줬오. 죽기 앞서 엄마 병실에서 살다시피 한 셋 딸들 보고 “Take care of your father” 한담 갔오. 17살에 내 어머니 죽었을 때 그 슬픔 뒤풀이 하오. 아침 일찍 그의 산소에 가 여보 나 왔오 하고 한마디 한담 도라 오오. 내 푸념 털어놔 미안하오. 잘들 있으시오. 정운현씨에게 문안 부탁하오. 량기백.” (2010.11.28.)

▲워싱턴 근교의 자택 앞에 선 양기백 박사 부부와 백용 씨(2009.10, 백용 씨 제공)

5. 글을 맺으면서

양기백 박사는 일생을 미 의회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했다. 별로 빛도 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묵묵히 맡은 바 업무에 충실했으며, 그 과정에서 미국 내 한국 관련 자료 수집 및 보급에 큰 공을 세웠다. 46년간 미 의회도서관에 근무한 후 은퇴해서도 주미 한국대사관 고문으로 초빙돼 한미관계 사료정리와 편찬에 기여했다. 그 때 박사의 나이 80세였다. 내가 한번 만나 뵌 기억으로는 온화한 성품에 자애롭고 관대한 분이었다. 챙기기보다는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자리나 명예를 탐하지도 않는 분이었다. 양 박사 같은 분이야말로 지성인이요, 또 진정한 애국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분에게 한국정부가 훈장 하나 바치지 못한 것은 크나큰 결례가 아닐 수 없다. 이제라도 양 박사 영전에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훈장이나마 바쳐 은인에 대한 도리를 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삼가 고 양기백 박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 이 글은 생전에 양기백 박사와 교류를 가졌던 백용 씨의 증언과 자료협조로 작성되었음을 밝혀둡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1&table=wh_jung&uid=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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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폐 기로 ‘최규하 대통령 기념사업회’

등록 : 2015.02.13 20:25수정 : 2015.02.13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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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의 피해자가 아니라 방관자라는 정황도 있다. 미국 국무부의 1979년 5월9일 기밀해제 문서에 최광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주한 미국 대사에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치적 수술’을 예고한 발언이 기록돼 있음이 확인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가 2006년 10월23일 최 전 대통령 장례식장에서 조문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뉴스분석, 왜?
존폐 기로 ‘최규하 대통령 기념사업회’

▶ 이명박 전 대통령 회고록에 대한 호불호가 크게 갈립니다. 그러나 그는 기록은 남겼습니다.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전직 대통령이 있습니다. 최규하, 전두환 전 대통령입니다. 그들에게 증언은 어느정도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기록의 의무를 저버린 대통령, 최규하 기념사업회가 2012년부터 원주시청의 예산 지원으로 운영 중입니다. 대통령 기록의 의미와 무게를, 최규하 전 대통령을 통해 다시 짚었습니다.

 

 

1941년 만주는 엘도라도였다. “식민지 조선·대만 출신자들에게 입신출세나 일확천금의 기회를 부여잡을 수 있는 ‘동양의 엘도라도’”였다.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 청년도 24살께 엘도라도에 갔다. 만주에 가기 전에 이미 엘리트였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941년께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순의 근대국가, 만주에서 성장

 

만주국은 또한 실험장이었다. “국민국가 만들기의 실험적 사례”였다. 공식적으로는 만주인·몽골인·한족·일본인·조선인 5민족의 ‘오족협화’를 이념으로 내세웠다. 다민족국가인 미국을 모델로 삼았다. 법률상 입헌군주국이었고 입법부인 참의원을 규정했다. 그러나 정당 결사의 자유가 없었고 선거는 한번도 치러지지 않았다. 반관·반민단체인 ‘오족협화회’가 대의체 역할을 했다. 화폐는 있었지만 외교·국방권은 사실상 없었다. 국적법이 없어, ‘만주국민’이라는 국적도 없었다. 일본 관동군과 일본 국책회사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가 사실상 군사와 경제를 좌우했다. 그래서 학문적으로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괴뢰국가’라는 평이 대세다. 물론 아베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이자 만주국 고위관료를 지냈던 기시 노부스케는 ‘민족협화’, ‘왕도낙토’ 이상에 따라 건설된 국가라 주장한다.

 

그러나 생활과 삶의 영역에서는 다민족 공간이었다. ‘오족’은 물론 볼셰비키 공산주의혁명에 반대한 러시아인과 동유럽인도 뒤섞여 살았다. 이때 만주를 배경으로 ‘만주 웨스턴’이라 명명한 영화가 많이 나오는 건 우연이 아니다. 한편 철도, 우편, 항공, 경찰, 행정기구 등 근대국가의 기능은 작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요컨대 만주국은 모순이었다. 선거 없는 근대국가였고 자유경쟁 없는 자본주의 국가였지만, 한편 정상적으로 철도가 다니고 우체부가 편지를 배달하고 관료가 매일 출근해 문서에 도장을 찍었으며, 행정부가 만철 관료와 함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했던, 기계처럼 작동하는 근대국가였다. 경찰 및 행정관료를 충원하기 위해 국립대학인 ‘대동학원’, ‘건국대학’을 세웠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40년대 중반 만주군관학교를 다니며 지켜본 것도 아마 이런 ‘모순된 근대주의’였을 것이다.

 

24살의 조선 엘리트 청년은 만주국의 고급교육기관인 ‘대동학원’을 1943년께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쪽 역사서에는 1945년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기록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청년은 죽을 때까지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일어·영어에 능통하며 1940년대 중반에 행정관료로 ‘만주국의 근대주의’를 배운 이 청년은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는다. 만주국 황제 푸이는 1945년 8월18일 만주국 해체를 담은 조칙을 발표한다. 이 청년이 대체, 언제, 어떤 경로로, 무슨 꿈과 생각을 가지고 고향 조선으로 돌아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엘리트 청년은 다시 남한에서 관료가 됐다. 일제시대 통명(일상적으로 쓰는 이름)으로 알려진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대신 ‘최규하’라는 본명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알고 보면 남한의 모든 역사적 격변기에 다 있었다. 1948년 농림부 양정과장이 됐다.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이 됐다. 이승만 정부 때의 한일회담 실무에도 참여했다. 1952~57년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9~60년 외무부 차관을 지냈다. 5·16 쿠데타 이후 1963년 말레이시아 대사가 됐다. 1967~71년 외무부 장관이 됐다. 박정희 정부의 베트남전 참전과 관련해 한미회담 실무를 맡았다. 1971~75년 청와대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이 됐다. 1975년 12월부터 국무총리 서리로 일했고 1976년 3월13일 국회 동의를 거쳐 총리가 됐다.

 

1979년 10월26일에서 1980년 8월16일까지의 진실을 아직도 한국인은 온전히 알지 못한다. 1965년 10월부터 시작한 베트남 파병의 진실도, 일부만 안다. 그때 권한을 행사했던 최종결재권자거나 중요한 실무자였던 최 전 대통령이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짧은 시기에 격변이 있었다.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숨졌다. 12월12일 전두환·노태우의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최 전 대통령은 1979년 12월21일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계엄 확대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립을 결정한 국무회의 등의 최종 사인이 다 그의 손에서 나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것이 아니었다. 1980년 5·17 계엄이 확대돼 김대중·김종필이 체포됐고 김영삼은 가택연금됐다. 8월16일 최 전 대통령이 하야한다.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다.

 

지난 1월28일 찾은 원주역사박물관에 최규하대통령기념사업회 사무실이 들어서 있다.
역사학자들이 최 전 대통령이 밝혀주길 바랐던 역사적 장면들이 있다. 첫째, 1979년 12월12일 저녁 6시30분에서 12월13일 새벽 5시께까지 ‘10시간30분’의 진실이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법률상 상관인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김재규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명목으로 불법 체포했다. 전두환이 저녁 6시30분께 체포를 허가해달라는 재가서를 노란 봉투에 담아 삼청동 총리 공관을 찾았다. 당시 최 전 대통령은 대통령권한대행이었으므로 아직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었다. 서울 시내 여러 곳에서 신군부가 합법적 군지휘부를 점거하면서 총격전이 일부 벌어졌고, 결국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신군부에 쫓기다 그 노란 봉투를 제 손으로 다시 들고 총리공관으로 왔고 최 전 대통령이 새벽 5시께 결재한 사실은 대강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구체적 대화 내용은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전 전 대통령도 1995년 검찰 수사에서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최 전 대통령 측근들은 그래도 버텼다고 자평한다.

 

둘째, 1980년 8월16일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이유다. 전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에서 “7월에 최 전 대통령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전 전 대통령이 압박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뚜렷이 밝혀진 바 없다. 셋째, 박정희 정부와 미국 사이 베트남 전쟁 협상의 실체다. 최 전 대통령은 1988년 5공 청문회 때 출석 및 서면 증언을 모두 거부했다. 1995년 전두환·노태우 내란죄 수사 당시 검찰의 서면조사에도 답하지 않았다. 구인장을 받고 법정에 나가서도 말하지 않았다. 회고록도 남기지 않았다. 2006년 숨졌다.

 

12·12 등 역사의 격변기마다
사인한 건 전두환 아닌 최규하
말하지 않고 기록하지 않은 그는
침묵으로 현대사 빗장 건 대통령
2012년 기념사업회 출범했다

 

정치적 과오 냉정한 평가없이 
원주에서 ‘지역 인물’ 부각되고
‘강원 출신 대통령 기리자’ 조례
지방정부 지원에도 활동 지지부진
유족·관계자도 그처럼 침묵할 뿐

 

사업 실행 안돼 지원금 일부 돌려받을 예정

 

최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의 피해자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인지 조력자인지 분명치 않다. 최 전 대통령이 공식 통치시스템의 물밑에서 신군부가 움직이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던 정황이 또 확인된다. <한겨레>가 최근 확인한 미국 국무부 기밀해제 문서에서 이런 정황이 엿보인다. 1979년 5월9일 당시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이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는 당시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과 글라이스틴의 독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자신의 의견인지 밝히지 않은 채 최광수는 전두환이 계엄법 아래서 국민투표를 할지 고민중이며, 올여름에 펼쳐질 새로운 정치적 국면에 앞서 모종의 ‘정치적 수술’을 실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독대 며칠 뒤 5·17 계엄 확대가 실시되고 광주민중항쟁이 벌어진다. 이 모든 흐름을 대통령비서실장이 알고 있으며 미국 대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최광수 당시 비서실장은 체제유지파였다. 뼛속까지 보수였다. 글라이스틴이 보낸 같은 문서를 보면, 최 전 비서실장은 “김대중과 김영삼이 ‘약속한 정치적 개혁을 하지 않는 데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정부를 비판한다며 그들을 맹비난”했고 “노동계 상황에 불안해했고 사북탄광 노동자쟁의를 다룬 방식을 자랑스러워했으며, 인천·서울·부산 등 4개 주요 산업지역에서 벌어진 노동쟁의를 진압한 것을 뿌듯해했다.” 이런 인물이 보좌한 인물, 당시 모든 국정행위를 결재한 사람이 최 전 대통령이었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은 훗날 회고록에서 최 전 대통령과 노 전 국방장관을 12·12 내란의 가장 중요한 두 책임자로 지목했다.

 

이처럼 평가가 엇갈리지만 강원도에서 조용히 ‘지역 인물’인 점에 초점을 맞춘 기념사업회가 운영되고 있다. ‘최규하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2012년 12월 창립총회를 거쳐 설립돼 최근까지 운영 중이다. 최광수 전 비서실장이 이사장이다. 강원도의회는 2009년 ‘강원도 출신 전직 대통령의 위업을 선양하기 위한 기념사업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은 ‘강원도 전직 대통령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만들었다. 재단 누리집을 보면, 최 이사장은 “(최 전 대통령이) 실리외교를 추구”했고 “뛰어난 외교관과 행정가로서의 업적을 소개”하는 것을 설립 취지로 밝히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원주시청과 강원도로부터 설립총회 때부터 2014년까지 ‘창립총회’ ‘사업비 및 운영비’ 등 명목으로 모두 1억4000만원(도비 5000만원, 시비 9000만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지방재정법이 개정돼 지자체의 교부금 지급 기준이 엄격해진 탓에 올해는 2000만원만 지원받을 예정이다. 올해 기념사업회 운영 여부가 불투명하다. <강원일보>는 지난달 초 “다른 대통령들의 기념사업회와 달리 기본재산이나 기부금 등도 거의 없는 실정이어서 최규하 대통령 기념사업회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기록을 남기지 않은 한계’가 지역에서도 지적된 적이 있다. 원주시의회 회의록을 보면, 기념사업이 논의되던 2010년 12월 원주시의회에서 신재섭 의원이 사업 취지에 대해 “대통령께서 원주에 한 분밖에 안 계시는데 이분한테 꼭 듣고 싶었던 내용이 있는데 결국 돌아가시면서 그 부분을 말씀 안 하시고 가셔서요. 전임 대통령들 업적으로 보면 기간이 짧아서 얼마 안 될 텐데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을 때 이분을 선양해야 되는지 이런 것을 가려볼 텐데, 그 부분이 안타까운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시의회에서 기념사업 추진을 지지하는 분위기지만, ‘지역 인물’이라는 점이 주로 부각되고 있다.

 

박물관 1층에 전시된 최 전 대통령의 관용차.
사업은 잘 진행되지 않는 것 같다. 원주시청 설명을 종합하면, 기념사업회는 추도식, 나라사랑 글짓기 대회, 최 전 대통령에 대한 강좌 등을 하겠다며 지원금을 받았지만 나라사랑 글짓기 대회 등 일부 사업이 실행되지 않았다. 원주시청은 지원금 일부를 올해 되돌려받을 예정이다. 누리집에도 연혁, 실적 등이 하나도 없다. 기념사업회에 딱히 전시된 유품도 없다. 원주시 역사박물관 1층에 최 전 대통령이 타던 관용차 ‘푸조 604 1979년식’만 전시돼 있다.

 

역사학자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최 전 대통령이 아무것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실망이다”라며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 그렇게 했다(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건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았다는 것이다. 일본 전통은 그렇지 않다”고 11일 전자우편을 통해 평했다. <한겨레>가 ‘대통령 등 국정책임자가 역사적 증언이나 기록을 남길 의무가 있는지’ 묻자 “당연히 남겨야 한다. 그것이 이명박 전 대통령 회고록 수준이더라도. 그것 자체가 또 다른 역사의 기록이 된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우리 외교문서를 보면 최 전 대통령이 나오지 않는 대목이 없다. 외교 쪽에서 현대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11일 통화에서 “증언과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은 큰 문제”라며 “최 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의무를 다했다면 12·12 내란과 5·17 계엄 확대 등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답했다. 만주국 황제에서 공산화된 중국으로 돌아간 푸이는 <황제에서 시민으로>(이윤양 옮김·문학과비평사)를 남겼다.

 

 

정승화 체포 재가문서는 ‘미싱 상태’

 

최 전 대통령처럼 유족과 기념사업회도 상당히 과묵하다. <한겨레>가 지난달 28일 원주시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기념사업회 이사회 자리를 찾아 최 전 대통령의 장남인 최윤홍 전 한국지역난방공사 비상임이사를 만나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지금까지의 언론 보도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등의 이유로 고사했다. 기념사업회 쪽에 최 전 대통령이 남긴 기록이 존재하는지 물었으나 없다고 답했다.

 

참여정부 때 국가정보원 1차장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을 지낸 서대원 전 헝가리 대사가 최 전 대통령의 사위다. 1973년 외무고시 합격 뒤 외무관료로 오래 일했다. 1979년 12월15일자 미 국무부 기밀해제 문서를 보면, 1979년 12·12 내란 당시 주미대사와 최 전 대통령 사이의 ‘채널’로 ‘대통령의 사위’가 언급된다. ‘사위’가 최 전 대통령에게 두번 전화했다고 기록돼 있다. 서 전 대사와 통화한 뒤 전자우편으로 당시 최 전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 등에 대해 물었으나 이후 전화·문자·전자우편 등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명박 정부 한식세계화추진단 위원을 지냈다. <한국 대통령 통치구술사료집1: 최규하 대통령>에서 신두순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설명을 보면, ‘정승화 체포 재가문서’는 여전히 “미싱”(사라지고 없다)인 상태다. “지금도 그 서류가 미싱이에요. 없습니다. 우리가 그 서류를 갖고 있나요? 사인을 받은 곳에서 가져가는 것이지.” 있어야 할 기록이 없는 게 많다.

 

원주/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참고문헌: <만주국: 식민지적 상상이 잉태한 복합민족국가>(윤휘탁·혜안·2013), <한국 대통령 통치구술사료집1: 최규하 대통령>(연세대학교 국가관리연구원 편·선인·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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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여당의 ‘막장 이완구 구하기’, 낯 뜨거워!

 
 
케케묵은 지역주의 자극하며 이완구-김기춘 맞바꾸자는 식
 
육근성 | 2015-02-13 12:58:0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인사청문회 직전 조사에 따르면 이완구 총리후보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53.8%에 달한다. JTBC는 이 조사가 언론압박 녹취록 등이 공개되지 직전에 이뤄진 점을 들어 시간이 경과하면서 여론이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며 역대 총리 낙마 ‘평균선’인 ‘부정적 여론 62%’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청문회 거치며 등장한 두 가지 전략

이 후보자에 대한 각종 의혹들이 계속 불거질 때도 ‘낙마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던 새누리당이었다. 하지만 청문회를 거치며 달라졌다. 여론이 악화되자 크게 당혹해 하는 모습이다.

새누리당으로서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이완구 총리 임명동의안을 반드시 처리하라는 청와대의 ‘특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청문회 시작부터 청문보고서를 단독표결로 밀어붙인 12일까지 이삼일 동안 새누리당 지도부와 청와대는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숱한 고심을 했을 것이다. 오늘(13일)부터 고심한 결과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두 가지 전략이 눈에 띈다. 이완구 총리 자신사퇴를 요구하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칼날을 무디게 하고 야당의 힘을 빼기 위한 언론플레이와, 이 후보자에게 집중돼 있는 국민들의 시선을 흐리려는 ‘지역주의 꼼수’ 등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이완구 비판하면 충청에서 문재인표 추락한다 겁박

‘플랜1-언론플레이’는 정말 최악이다. 여론조사라는 형식을 갖췄다지만 그 내용이 황당하다. 13일 아침 MBN은 인사청문회가 진행 중이었던 지난 10일과 11일 이틀간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라며 그 결과를 보도했다. 새정치연합 정당지지율은 청문회 직후 31.8%로 1.4%포인트 낮아진 반면, 여당 지지율은 37.3%로 1.4% 높아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충청권 지지율만 꼭 집어 강조했다. “새정치연합에 대한 충청 지역 지지율은 11과 12일 하루만에 3.4%포인트 하락했다”고 말하면서 문재인 대표 지지율은 더 크게 떨어졌다는 점에 방점을 찍었다. 35.8%에서 28.7%로 7.1%포인트 하락했다며 이는 “충청권 총리에 대한 기대감이 충청 지역에서 야당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후보자의 의혹을 들춰내고 문제점을 지적하면 할수록 충청권 표심이 문 대표와 야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거라는 점을 강조한 보도다. 결과를 미리 설정해놓고 여론조사라는 형식을 덧입힌 것에 불과해 보인다. 설령 조사방법에 하자가 없다 해도 설문내용에 형평성이 결여돼 있다면 그렇게 나온 조사결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민감한 때에 지역주의를 자극하는 설문 아닌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케케묵은 지역주의… 충청도민은 ‘총알받이’?

케케묵은 지역주의에 기대려는 꼼수는 청문회장에서도 등장했다. 언론 압박 녹취록이 공개되고, 병역 의혹과 관련해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드러나자 이 후보자는 야당의원의 질문에 답변은커녕 이리저리 말을 바꾸고 둘러대느라 진땀을 뺐다. 그때 여당 간사인 정문헌 의원이 나섰다. 갑자기 무슨 메모지를 손에 쥐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 충남 당진에서 어떤 분이 전화했는데, 이런 무의미한 싸움 그만하고 민생 돌보라고 그러신다.”

왜 하필 충청도인가. 정말 낯 간지러운 장면이다. 이 후보자의 고향이 충남인 점을 내세워 지역주의 정서를 자극해서라도 충청민심을 건드려보겠다는 수작이다. 야당이 이 후보자를 계속 비판할 경우 충청민심이 돌아서 야당과 대립각을 형성할 수 있으니 충청 표를 잃지 않으려면 잠자코 있는 게 낫다는 식의 치졸한 겁박이다.

부적합한 인물이라 해도 동향 사람이면 무조건 ‘좋다’고 넘어가는 게 충청도 기질이라고 본 거다. 충청도 유권자들을 얕보고 조롱하는 처사다. 충청도민을 총알받이로 활용하겠다는 심보아닌가. 충청발 역풍이 불 것이다.

이완구와 김기춘을 맞바꾸자?

청와대도 ‘이완구 구하기 플랜2’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그 수법이 참 졸렬하다. 이 후보자가 낙마할 수도 있다는 분위기가 감지되자 청와대는 김기춘 비서실장을 등장시켰다. 대부분 언론은 11일부터 일제히 ‘총리 인준 직후 개각과 청와대 인사개편’이라는 내용의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소폭 개각과 함께 ‘김기춘 실장이 교체될 것’이라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한다.

‘총리 인준 즉시 김기춘 교체할 듯.’ 이런 기사가 부지기수다. 일종의 조건부다. 이완구 총리후보자 임명동의안을 처리해 준다면 김기춘 실장을 교체하겠다는 것처럼 들린다. 국민의 시선을 ‘이완구 후보자’에서 ‘김기춘 실장’으로 돌려보려는 꼼수다. 김기춘 사퇴와 개각을 총리 인준과 맞바꾸자는 건가.

‘당신들이 그토록 원하던 김기춘을 내보낼 테니 먼저 총리후보자 임명동의안을 처리해라’는 일종의 거래를 야당과 국민에게 제안한 셈이다. 이완구와 김기춘을 맞바꾸자? 철없는 아이에게도 먹히지 않을 제안이다. 이 두 사람 모두 ‘아니다’ 라는 게 국민 정서라는 걸 모르나.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2&table=c_aujourdhui&uid=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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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무장장비 개발, 정치행사 조직하라"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2/14 09:22
  • 수정일
    2015/02/14 09:2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첨단무장장비 개발, 정치행사 조직하라"北 당 중앙위 정치국회의, '당 창건, 해방 70돌' 결정서 채택 (전문)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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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13  15:3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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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가 지난 10일 당 창건 70돌과 해방 70돌을 맞아 결정서를 채택했다. [캡쳐-노동신문]

북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가 당 창건 70돌과 해방 70돌을 맞아 첨단무장장비 개발, 열병식 등 정치행사 등 7개항을 담은 결정서를 10일 채택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13일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가 2월 10일 평양에서 진행되었다"면서 '조선노동당 창건 일흔돌과 조국해방 일흔돌을 위대한 당의 영도에 따라 강성번영하는 선군조선의 혁명적 대경사로 맞이할 데 대하여' 결정서를 채택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당 중앙위 정치국회의는 결정서에서 먼저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를 우리 당과 인민의 영원한 수령으로 높이 받들어모시고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불멸의 혁명업적을 길이 빛내여나갈 것"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금수산태양궁전 성지조성 강화, △김일성-김정일 동상 및 색조각상 건설, △조선혁명박물관의 교양사업 강화 등을 담았다.

두 번째로 "당을 강화하고 당과 혁명대오의 일심단결을 반석같이 다져나갈 데 대해" 강조하며, 당 중심의 조직규율 재정립 강화를 밝혔다.

결정서는 세 번째로, "당의 선군혁명노선을 틀어쥐고 나라의 자위적 국방력을 철벽으로 튼튼히 다져나갈 것"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전민무장화, 전국요새화, △유일적 영군체계 수립, △오중흡7연대칭호쟁취운동 및 근위부대운동 강화 등을 담았다.

특히, "우주를 정복한 그 정신, 그 기백으로 현대전의 요구에 맞는 정밀화, 경량화, 무인화, 지능화된 우리 식의 위력한 첨단무장장비들을 더 많이 개발하자"고 해 주목된다.

이어 네 번째로, "사회주의 강성국가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새로운 비약의 불바람을 세차게 일으켜 선군조선의 일대 번영기를 열어나가자"면서 농산,축산,수산 3대축과 경공업발전 강화를 강조했다.

이 중 농업과 관련, "주타격방향으로 확고히 틀어쥐고 농업생산에 총동원, 총집중하며 세포지구 축산기지건설을 다그치고 축산업발전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켜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황금해의 새 역사를 펼치고 사회주의 바다향기가 온 나라에 차넘치게 하며 경공업발전에 계속 큰 힘을 넣어 인민소비품생산에서 전환을 가져올 것"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과학기술전당, △미래과학자거리, △위성과학자주택지구 2단계, △평양국제비행장 2항공역사, △김일성종합대학 3호교사, △평양건축종합대학, △1중학교 건설과 △중앙동물원, △만경대학생소년궁전 개건공사 등을 언급했다.

또한, 전력, 석탄, 철도, 금속, 화학, 기계 등 선행부문, 기초공업부문을 비롯한 인민경제 중요부문과 관련해, △백두산선군청년발전소, △청천강계단식발전소, △원산군민발전소 건설 및 현대화를 강조했다.

이어 "전사회적으로 사회주의애국림, 모범산림군칭호쟁취운동과 같은 대중운동을 힘있게 벌리고 군민협동작전으로 나라의 수림화, 원림화, 과수원화를 적극 다그치도록 할 것"이라고 결성서가 밝혔다.

다섯 번째로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실현하며 우리 혁명의 국제적 연대성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가자"며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밑에 굳게 단합하여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활짝 열어나갈데 대해서, △대외관계를 다각적으로, 주동적으로 확대발전시키며 우리 혁명의 국제적 연대성을 더욱 강화해나갈 것을 언급했다.

결정서는 여섯 번째로, 당 창건 70돌과 해방 70돌 경축행사를 조직적으로 진행할 것을 강조하며, 당 창건 70돌 경축 군 열병식, 평양시군중시위 등 정치행사를 밝혔다.

마지막으로 결정서는 각급 당 조직과 정치기관, 내각 등이 결정서에 제시된 과업을 관철하기 위해 행정실무대책을 세울 것을 강조했다.

결정서는 "지금 우리 군대와 인민은 위대한 당의 영도따라 혁명의 최후승리를 향하여 더욱 억세게 싸워나갈 불같은 결의에 충만되어 있다"면서 "당의 위업은 필승불패이며 사회주의 강성국가, 백두산대국건설의 최후승리는 확정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정치국회의에는 상무위원회 위원, 정치국 위원 및 후보위원 등이 참석했다고 통신이 전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서 결정서 《조선로동당창건 일흔돐과 조국해방 일흔돐을 위대한 당의 령도따라 강성번영하는 선군조선의 혁명적대경사로 맞이할데 대하여》를 채택 (전문)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가 주체104(2015)년 2월 10일 혁명의 수도 평양에서 진행되였다.

정치국회의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들과 정치국 위원,후보위원들이 참가하였다.

정치국회의에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서 《조선로동당창건 일흔돐과 조국해방 일흔돐을 위대한 당의 령도따라 강성번영하는 선군조선의 혁명적대경사로 맞이할데 대하여》를 채택하였다.

결정서는 우리 당과 군대와 인민이 멀지 않아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창건 70돐과 조국해방 70돐을 뜻깊게 맞이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조선로동당창건 70돐과 조국해방 70돐을 성대히 경축하는것은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시고 주체형의 혁명적당을 창건하시여 우리 혁명을 백승의 한길로 이끌어오신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불멸의 업적을 빛내이며 새로운 주체100년대를 자랑찬 승리와 강성번영으로 수놓아가는 우리 당의 높은 권위와 전투적위력을 힘있게 떨치는 중요한 계기로 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자주의 기치높이 20성상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치시며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시였으며 항일혁명의 불길속에서 마련하신 당창건의 조직사상적기초와 빛나는 혁명전통에 토대하여 주체형의 혁명적당,조선로동당을 창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혁명과 건설에서 당의 령도적역할을 높여 조국해방전쟁과 전후복구건설,두 단계의 사회혁명을 승리적으로 이끄시고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제도를 일떠세우시였으며 빈터우에서 사회주의공업화를 완성하시고 우리 조국을 자주,자립,자위의 사회주의강국으로 전변시키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혁명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정식화하시고 우리 당을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령도체계가 확고히 선 사상적순결체,조직적전일체로,인민대중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어머니당으로,높은 령도예술을 지닌 로숙하고 세련된 당으로,령도의 계승성을 확고히 보장한 전도양양한 당으로 강화발전시키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우리 인민과 혁명앞에 최악의 시련과 난관이 겹쌓였던 고난의 행군,강행군시기 우리 당을 선군혁명의 향도적력량으로 더욱 강화발전시키시여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굳건히 수호하시고 우리 조국을 일심단결된 정치사상강국,그 어떤 강적도 범접할수 없는 불패의 군사강국으로 일떠세우시였으며 새 세기 산업혁명의 불길을 지펴올려 경제강국건설에서 대비약,대혁신을 일으켜나갈수 있는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시였다.

주체의 당건설위업과 부강조국건설을 위한 투쟁을 승리의 한길로 이끄시여 우리 조국과 혁명의 승리적전진을 위한 억년기틀을 마련해놓으신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업적은 천추만대에 길이 빛날것이다.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 창건하시고 위대한 대원수님들께서 령도하여오신 우리 당과 우리 공화국을 영원히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사상과 존함으로 빛나는 당과 국가로 더욱 강화발전시키시려는것은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드팀없는 의지이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우리 당과 혁명의 영원한 지도사상으로 정식화하시여 우리 당을 위대한 김일성,김정일동지의 당으로 강화발전시킬수 있는 근본담보를 마련하시고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의 기치높이 반미대결전과 강성국가건설을 승리에로 현명하게 이끌고계신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탁월하고 세련된 령도밑에 오늘 우리 당의 존엄과 권위는 비상히 높아지고있으며 제국주의반동들의 끊임없는 고립압살책동속에서도 영웅조선의 백승의 력사와 전통이 대를 이어 굳건히 계승되고 강성국가건설위업이 활력에 넘쳐 힘차게 전진하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위대한 대원수님들을 우리 당과 인민의 영원한 수령으로, 주체의 태양으로 높이 받들어모시고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를 힘있게 다그쳐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뜻대로 이 땅우에 존엄높은 사회주의강성국가, 백두산대국을 일떠세워야 합니다.》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인민들은 《모두다 백두의 혁명정신으로 최후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총공격전에 떨쳐나서자!》라는 구호를 높이 들고 당의 두리에 천겹만겹으로 뭉쳐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에서 새로운 시대속도,조선속도를 창조하기 위한 투쟁을 더욱 과감히 벌려나감으로써 강성번영하는 선군조선의 존엄과 기상을 만방에 떨쳐야 한다.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은 백두의 혁명정신과 기상으로 조선로동당창건 70돐과 조국해방 70돐을 위대한 당의 령도따라 강성번영하는 선군조선의 혁명적대경사로 맞이하기 위한 대책적내용들을 결정하였다.

결정서는 첫째로,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를 우리 당과 인민의 영원한 수령으로 높이 받들어모시고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불멸의 혁명업적을 길이 빛내여나갈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위대한 대원수님들께서 영생의 모습으로 계시는 금수산태양궁전을 영원한 태양의 성지로 더욱 훌륭히 꾸리고 결사보위하며 대원수님들의 동상과 색조각상을 령도업적단위를 비롯한 중요단위들에 정중히 모실데 대해 밝혔다.

조선혁명박물관을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위대한 혁명력사와 불멸의 혁명업적이 집대성된 대국보관으로 새롭게 꾸리는 등 혁명전통교양거점들을 잘 꾸리고 그를 통한 교양사업을 강화할데 대해 지적하였다.

결정서는 둘째로,당을 강화하고 당과 혁명대오의 일심단결을 반석같이 다져나갈데 대해 강조하였다.

당을 강화하고 당과 혁명대오의 일심단결을 반석같이 다지는것은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령도따라 백두에서 개척된 주체혁명위업,선군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성해나가기 위한 결정적담보이다.

결정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유일적령도밑에 전당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는 강한 조직규률을 세우며 민심을 틀어쥐고 군중을 당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세워 우리 혁명의 정치사상진지를 더욱 공고히 다질데 대해 언급하였다.

결정서는 셋째로,당의 선군혁명로선을 틀어쥐고 나라의 자위적국방력을 철벽으로 튼튼히 다져나갈데 대해 강조하였다.

반미대결전에서 최후승리를 이룩하고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을 힘있게 다그치기 위하여서는 선군혁명의 기둥이며 주력군인 인민군대를 더욱 강화하고 국방공업을 발전시키며 전민무장화,전국요새화를 높은 수준에서 실현하여야 한다.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의 유일적령군체계를 더욱 철저히 세우고 오중흡7련대칭호쟁취운동과 근위부대운동을 힘있게 벌려 인민군대를 수령결사옹위정신,조국결사수호정신이 꽉 들어찬 사상과 신념의 최강군,백번 싸우면 백번 다 이기는 무적필승의 근위대오로 튼튼히 준비시키도록 할것이다.

결정서는 우주를 정복한 그 정신,그 기백으로 현대전의 요구에 맞는 정밀화,경량화,무인화,지능화된 우리 식의 위력한 첨단무장장비들을 더 많이 개발하며 국방공업을 최신과학기술의 토대우에 든든히 올려세울데 대해 밝혔다.

결정서는 넷째로,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새로운 비약의 불바람을 세차게 일으켜 선군조선의 일대 번영기를 열어나갈데 대해 강조하였다.

인민경제 모든 부문,모든 단위에서 경제강국건설을 위한 대고조진군을 힘있게 다그치는것은 정치사상강국,군사강국의 위력을 남김없이 과시하고 강성국가건설과 사회주의수호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기 위한 확고한 담보이다.

결정서는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첨단을 돌파하여 지식경제건설의 지름길을 열어나가며 농산과 축산,수산을 3대축으로 하여 인민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경공업발전에 힘을 넣어 인민생활향상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올데 대해 언급하였다.

특히 농업을 주타격방향으로 확고히 틀어쥐고 농업생산에 총동원,총집중하며 세포지구 축산기지건설을 다그치고 축산업발전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켜나가야 한다.

결정서는 수산부문을 결정적으로 추켜세워 황금해의 새 력사를 펼치고 사회주의바다향기가 온 나라에 차넘치게 하며 경공업발전에 계속 큰 힘을 넣어 인민소비품생산에서 전환을 가져올데 대해 강조하였다.

과학기술전당과 미래과학자거리,위성과학자주택지구 2단계,평양국제비행장 2항공역사,김일성종합대학 3호교사,평양건축종합대학,1중학교건설과 중앙동물원,만경대학생소년궁전개건공사를 비롯한 중요대상건설을 당에서 정해준 날자까지 무조건 끝내여 당의 주체적건축사상을 철저히 구현하며 건설에서 새로운 대번영기를 열어나갈데 대해 지적하였다.

결정서는 전력,석탄,철도,금속,화학,기계 등 선행부문,기초공업부문을 비롯한 인민경제 중요부문에서 비약의 불바람을 세차게 일으켜나갈데 대하여 밝혔다.

특히 국가적인 력량을 총집중하여 백두산선군청년발전소와 청천강계단식발전소,원산군민발전소건설을 다그쳐 끝내며 공장,기업소들의 현대화를 다그칠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결정서는 사회주의문명국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교육,보건,문학예술,출판보도,체육부문에서 새로운 전환을 가져오며 민족문화유산을 적극 보호하고 빛내여나갈데 대하여 지적하였다.

전당,전군,전민이 총동원되여 산림복구전투를 진행하며 국토관리사업을 개선하여 국토의 면모를 일신시켜나갈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전사회적으로 사회주의애국림,모범산림군칭호쟁취운동과 같은 대중운동을 힘있게 벌리고 군민협동작전으로 나라의 수림화,원림화,과수원화를 적극 다그치도록 할것이다.

결정서는 다섯째로,조국통일의 력사적위업을 실현하며 우리 혁명의 국제적련대성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갈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조국해방 일흔돐이 되는 올해에 온 민족이 힘을 합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자!》라는 구호를 높이 들고 미제와 괴뢰패당의 반공화국전쟁책동과 핵,인권모략소동을 단호히 짓부시고 북과 남,해외의 온 겨레가 애국의 기치,우리 민족끼리의 리념밑에 굳게 단합하여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활짝 열어나갈데 대해서와 대외관계를 다각적으로,주동적으로 확대발전시키며 우리 혁명의 국제적련대성을 더욱 강화해나갈데 대해 언급하였다.

결정서는 여섯째로,조선로동당창건 70돐과 조국해방 70돐을 대정치축전으로 빛내이기 위한 경축행사들을 성대히 조직진행할데 대해 강조하였다.

조선로동당창건 70돐경축 조선인민군 륙군,해군,항공 및 반항공군,전략군 장병들의 열병식과 평양시군중시위를 성대히 조직진행하여 경애하는 원수님의 두리에 굳게 뭉친 천만군민의 일심단결의 위력을 내외에 힘있게 과시하도록 할것이다.

조선로동당창건 70돐과 조국해방 70돐을 맞으며 여러가지 정치행사들을 의의있게 조직진행하도록 할것이다.

결정서는 끝으로 각급 당조직들과 정치기관들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서를 관철하기 위한 조직정치사업을 짜고들고 그 정형을 정상적으로 장악지도함으로써 결정서에 제시된 과업들을 철저히 집행하며 내각을 비롯한 해당 기관들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서에 제시된 과업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한 행정실무적대책을 세울데 대해 강조하였다.

지금 우리 군대와 인민은 당의 강화발전과 부강조국건설에 쌓아올리신 백두산절세위인들의 불멸의 혁명업적을 가슴뜨겁게 돌이켜보면서 위대한 당의 령도따라 혁명의 최후승리를 향하여 더욱 억세게 싸워나갈 불같은 결의에 충만되여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령도따라 자주의 기치,선군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아가는 위대한 김일성,김정일동지의 당,조선로동당의 위업은 필승불패이며 사회주의강성국가,백두산대국건설의 최후승리는 확정적이다. (끝)

[출처-조선중앙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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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사수 영화인 대책위 기자회견

"정부 차원의 영화계 압박...경찰청 전화도 받았다"

표현의 자유 사수 영화인 대책위 기자회견...김종덕 문체부 장관 면담 요구

15.02.13 20:45l최종 업데이트 15.02.13 20:45l

 

 

▲  영화인들이 13일 오전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표현의 자유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대책위원회 기자회견>을 열고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 사퇴 종용, 영진위의 영화제 영화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 제도 수정, 예술영화관 지원 축소 시도' 등은 영화계의 독립성과 자율성 훼손하고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행위라며 강력 대응 방침을 밝히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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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에 대한 부산시의 사퇴 압박,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영화제 상영작 등급분류면제 조항 개정을 통한 검열 논란, 독립예술영화관 지원 및 개봉 지원 축소를 통한 영화관 프로그램 통제 의혹 등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한국영화계가 공동대응에 나섰다.(관련 기사: 영진위가 허락한 영화만?...지원인가, 검열인가)

'표현의 자유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대책위원회'(이하 '영화인 범대위')는 13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려는 모든 시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영화인 범대위는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한국영화감독조합,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등이 참여하고 있는 기존 '부산국제영화제 독립성 지키기 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가 확대 개편한 것으로 70여개 영화단체들과 국내 영상위, 영화제들이 결집했다. 영화인들의 이 같은 움직임은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이후 10년 만으로, 그만큼 최근 상황을 영화계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관련 기사: 50개 영화제 공동 성명 "등급분류면제 개정 이유 없다")

영화인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러한 사태들이 영화계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것"이며 "나아가 영화예술발전의 근본인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련의 사태를 획책한 당사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한다"며 "기자회견 이후에도 표현의 자유와 독립성 그리고 자율성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훼손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잦아들지 않을 시 더 이상 좌시하지 않고 범문화계와 범시민 연대를 조직해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선언했다.

또한 서병수 부산시장에게는 공개 질의를 통해 "부산영화제의 독립성을 확실히 보장하겠다는 분명한 선언을 할 생각이 있는가?"라고 묻고,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는 면담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정부 차원의 억압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영화인들은 하나같이 표현의 자유 위축에 대한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다이빙벨>이 상영된 이후 노골적인 영화계 탄압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영화인들의 인식이었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이은 대표는 "확인된 사실이 없어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지금 사안이 정부 당국에서 억압하고 영화계를 건드리려는 것으로 본능적으로 느낀다. 누가 억제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려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후에도 우려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고 분명하게 경고했다. 
 
▲  영화인들이 13일 오전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표현의 자유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대책위원회 기자회견>을 열고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 사퇴 종용, 영진위의 영화제 영화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 제도 수정, 예술영화관 지원 축소 시도' 등은 영화계의 독립성과 자율성 훼손하고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행위라며 규탄구호를 외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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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 영진위 등에서는 "공교롭게 같은 시기에 논란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 뿐 부산영화제 압박 등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잇따라 진행되는 상황이 우연히 동시에 벌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영화인들의 인식이다. 이은 대표가 "확인된 사실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고 표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서병수 부산시장이 친박 핵심 인사라는 점도 영화계가 부산영화제에 대한 압박을 정권 차원의 시나리오로 의심하는 부분이다. 

서 시장은 지금껏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기존 시장들과는 전혀 다르게 <다이빙벨> 논란 과정에서 영화제 프로그램에 간섭하려고 해 영화계의 반발을 샀다. 논란이 커지면서 여론에 부담을 느낀 듯 봉합하는 모양새를 보였으나 이용관 위원장에 대한 사퇴 압박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영화계의 시선이다. 

배장수 영화제작가협회 상임이사는 "부산시가 '사퇴요구를 한 적 없다'면서도 공적인 자리에서 인적 쇄신을 요구하고 있고, 영화제 측의 소명을 받지 않고 감사 결과를 시의회에 보고하고 언론에 흘리는 등 상식적이지 않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다이빙벨> 같은 영화는 멀티플렉스에서 상영 안 하기에 독립영화전용관에서 상영하는데, 정부 지원 받는 영화관에서 트는 것을 문제 삼는 것 같다"며 "부산영화제 이용관 위원장 사퇴 압박이나 독립영화배급지원 문제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지정하는 영화를 상영하면 지원하고 그렇지 않으면 상영 기회를 박탈하려는 태도라는 것이다. 

보수영화인도 "표현의 자유는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

비영화인 출신의 영진위원장 임명도 이런 의심을 더욱 강화시키는 부분이다. 게다가 2010년 영화계 갈등의 한 복판에 있었던 문화미래포럼 참여 인사인 김종국 교수가 영진위원으로 선임된 것도 불신을 키우고 있다. 2010년 상처가 컸던 영화계에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인사라는 것이다. 

한국영화감독조합 부대표인 정윤철 감독은 "영화진흥위원회에 대해 '영화침체위원회'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강한섭, 조희문, 김세훈 위원장 등은 교수 출신들인데 현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영화계를 말아먹고 있다. 영진위 해체를 요구할 수도 있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또한 부산시장에 대해서도 "부산시가 무리한 행동을 하면 시장이 조직위원장을 할 필요가 없다"며 서병수 부산시장에 대한 사퇴요구도 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민병록 영화평론가협회장은 "대통령이 문화융성을 말하는데 정부는 비전문가를 앉혔다"고 비판했다. 이어 등급분류면제 논란에 대해서도 "20년 동안 한 번도 큰 문제가 없던 사안이다"라며 "자신 없으면 사퇴하라"고 김세훈 영진위원장을 겨냥했다. 

그는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 "김종국 영진위원은 2010년 영화계 혼란에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인데, 영진위원으로 있는 것은 문제"라며 "알아서 물러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들의 발언은 최근 임명된 영진위원들에 대한 영화계의 불신감을 대변한 것으로, "영진위 해체 요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이런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임창재 독립영화협회 이사장은 "관할 경찰서도 아닌 경찰청에서 직접 전화가 오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임 이사장은 "엊그제 경찰청이라고 밝힌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최근 영진위원장 교체로 인한 지원제도 변경과 독립영화인들에 대한 불편은 없는지 묻더라"며 "이런 일이 저뿐만 아닌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이송희일 감독은 "한국독립영화협회를 비롯한 영화단체, 지방의 독립예술전용관, 그리고 영화제들도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며 "문체부나 영진위 등의 관련 부처가 있는 데도 이 같은 전화가 동시에 오는 것은 공포 조성의 목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겁을 주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며 "'표현의 자유네, 검열이네' 하지 말라는 경고로 이해된다"고 덧붙였다. 
 
▲  임창재 한국독립영화협회 대표가 13일 오전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표현의 자유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서 "'경찰청'이라고 소개한 뒤 영진위의 정책변화에 대한 현장 영화인들의 반응을 청와대에 보고할 예정"이라고 밝히며 걸려온 전화내용을 공개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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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보수적인 영화계 인사들도 표현의 자유 침해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영화계에서 보수 원로로 꼽히는 정진우 감독(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은 "유신독재 시절도 아닌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표현의 자유는 영화계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이어 "부산시에도 부산영화제를 흔들지 말라는 입장을 전달했다"며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을 도운 한 보수 영화인은 "지지율도 떨어지고 정권에 부담되는 상황인데, 이에 아랑곳 않겠다는 것인지 친위대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큰 상태"라며 "온건파의 목소리가 힘을 얻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 2010년처럼 영화계가 혼란스러워지면 안 되는 데 걱정이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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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아시아중시정책과 한반도의 긴장

 
 
<분석과전망>미국의 아시아중시정책이 지속되는 한 남북관계개선 사업은 없다
 
한성 
기사입력: 2015/02/13 [15:50]  최종편집: ⓒ 자주민보
 
 

 

 

미국이 또 다시 아시아중시정책을 강조하고 나섰다. 한반도에 평화 대신 긴장이 자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워크 미 국방부 부장관이 10일 미 서부 샌디에이고의 미 해군연구소에서 미국의 아시아중시 정책은 계속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미국의 소리방송 11일자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위를 강조하는, 그런 차원의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워크 국방부 부장관을 통해 아시아중시정책 강조하는 미국

 

워크 부장관은 먼저, 아태 지역에 미 해군 전력의 60%를 유지하겠다는 기존 전략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언급했다. 해군 함정의 60%에 달하는 300 척 이상을 태평양에 계속 배치하게 될 것이며 또한 최대 4 척의 잠수함을 괌에 추가 배치하게 된다고 했다. 

 

미국이 취하고 있는 아시아중시정책의 강조는 미군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로 진행 중인 건설 프로젝트를 언급하는 것에서 더욱 명료해진다. 

 

총 네 곳이었다.   

 

첫 번째가 현재 진행 중인 평택의 캠프 험프리 미군기지 확장공사다. 그리고 나머지는 항공모함 탑재기와 미 해병대가 들어설 일본의 이와쿠니 기지, 오키나와의 후텐마 기지 대체 프로젝트, 그리고 괌의 해병대 증강 작업이다.

 

워크 부장관은 연설에서 미국의 주적을 세 종류로 분류해 규정할 수 있다고 했다. 

 

러시아와 중국 등 전진국가(advanced state)가 그 하나이다. 

워크 부장관은 이들 나라들에서 무기 현대화가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면서 그에 대한 대처로 기존의 폭격기와 핵미사일 성능을 개선하는 것을 기본으로 여기에 미사일 방어와 정보.감시,정찰 능력을 강화하는 것을 보태게 된다는 것을 밝혔다.

 

또 하나의 주적으로 설정한 것이 지역국가 (regional state)이다. 북한이 여기에 분류된다. 이란도 포함된다.

 

북한의 핵탄두와 이동식 장거리 미사일 (KN-08)이 언급된다. 당연하다. 미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와 연동되는 항목이어서다. 북한의 재래식 전력 또한 위협 항목에서 빠지지 않는다.  

 

워크 부장관은 국가가 아닌 급진 테러조직도 미국을 위협하는 또 한 종류의 주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지금의 정세에서 미국이 워크 부장관을 통해 아시아중시정책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워크 부장관은 특히 한국에는 잘 알려진 인사이다. 사드 하면 떠오른 대표적 인사이다. 사드 한국 배치 계획을 강조왔던 것이다. 

 

북한에 대응하기 위해 사드1개 포대가 괌에 배치돼 있다는 것을 공개하는가하면 지난해 8월 방한 때 "한국미사일방어체계(KAMD)가 미국의 사드와 완벽하게 상호 운용성을 갖추길 원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지로 한국을 선택할 정도였다. 

 

워크 부장관의 연설은 미국이 한미일3각군사동맹 구축 사업을 본격화할 것임을 예고해준다. 한미일 3각군사동맹이 미국의 아시아 중시 정책을 관철할 정치군사적 핵심 기제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중시정책이 한반도에 요구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긴장 

 

지금은, 아직까지 성과가 없기는 하지만 남북관계 개선 사업이 남북 간에 중요한 현안으로 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남북관계개선 사업은 한미일3각군사동맹과 정면에서 충돌한다. 

 

남북관계 개선 사업은 근본적으로 평화와 결부된다.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면서 그에 앞서 한반도의 평화가 없이는 진행될 수 없는 사업인 것이다. 

 

미국이 그동안 추진해온 한미일 3각군사동맹 구축사업은 그것이 한반도의 평화와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수도 없이 보여준다. 북중러를 대립축으로 설정해서 성립하는 것이 한미일3각군사동맹이어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미국의 한미일3각군사동맹 구축 사업은 한반도의 긴장에 기반해서만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한미일3각군사동맹 구축 사업에 필요한 한반도에서의 긴장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북한과 대립을 치는 것을 통해 발생하고 유지강화되는 긴장이다.   

 

이 긴장은 무엇보다도 한미동맹을 유지강화하는 데 쓰이는 기본 명분이 된다.

한반도의 긴장이 조금이라도 눅잦혀 지려는 징후가 보이기만 해도 미국은 이를 허용치 않는다. 한미동맹에 군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미국이 보였던 행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상징적인 일례로 부시가 김대중에게 '디스 맨'이라고 했던 것을 들 수가 있다. 하대치고는 심했다. 일국 수장한테 "이 냥반아!"라고 한 것이었다. 

 

그때 부시는“이 냥반아”라고 하면서 "당신 때문에 한미동맹이 흔들리고 있쟎아"라는 말을 면상에 대고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한반도의 긴장은 아울러 우리나라가 중국이나 러시아와 유대를 강화하는데 넘지 말아야할 한계선을 그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주목할 만한 일 하나가 한미 간에 벌어진다. 벤 로즈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이 나서서 러시아 정부로부터 초청 받은 '70주년 전승기념일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지 말 것을 종용한 것이 그것이다. 

 

한국이 러시아와 가까워지는 것이 한미일동맹 구축에 득이 될 것이 없다는 입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모스크바에서 남북정상이 조우라도 하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한반도의 긴장이 눅잦혀지게 되고 그것이 결국 한미일동맹을 약화시킬 것이 뻔하다는 것을 미국으로서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박대통령의 방러가 반미연대로서의 성격을 또렷이 하고 있는 북러관계발전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우려 역시 방러 불참 종용에서 읽히는 대목이다.

 

사실, 국민들이 경악할 만한 일이다. 일개 관리가 나서서 한나라의 독자적인 외교활동에 간섭하고 지시하려 드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외교상 하대문제 범주가 아니다. 한 나라의 자주권에 대한 심각한 문제이다. 

 

일각에서 ‘우리가 식민지국가냐!’라는 분노가 나왔던 이유다. 

  

지금이 21세기가 맞는가하는 말이 나올 법도 했고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을 하대한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언론들은 입이라도 맞추었다는 듯이 그 뉴스를 적극적으로 외면하거나 그 무슨 가십기사처럼 처리하고 말았다. 

 

그 언론들 위로 ‘우리나라가 식민지 국가가 아닌가하는 것을 지금처럼 살갗에 얼음 닿듯 실감하게 되는 것은 처음’이라는 한 논객의 실토가 그 무슨 욕처럼 쏟아졌다. 탄식이었다.

 

북한이 핵 시험 임시중단을 조건으로 임시 중단을 요구한 한미연합훈련을 강행하기로 한데에서 명확히 확인되었던 미국의 한반도 긴장유지책은 이처럼 아시아중시정책의 강조에 이르러 보다 탄탄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반도에 있어야 될 것은 평화지만 그 자리에 무성한 것은 이렇듯, 긴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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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유신공주로 자기 세계에 갇혀...
박 대통령 기본개념 전혀 없어"

[창간15주년 인터뷰]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15.02.13 11:16l최종 업데이트 15.02.13 11:1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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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6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지난 2년 박근혜 정부에 대해 "처음엔 이명박 대통령과 좀 다를 것 같았는 데, 금세 본색을 드러냈다"며 "경제는 더 나빠지고, 빈부격차도 심해지고, 그동안 뭐 한 것도 없지 않았나"고 평가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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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지금 지옥이예요, 지옥…. 뭐하나 제대로 가고 있는게 있나봐. 정치도, 경제도, 복지도 그렇고….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종북'이라고 딱지를 붙여버리고 말야. 이런 사회에서 무슨 건설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어요."

그는 마치 작심이라도 한 듯했다. 그의 입에선 '지옥', '엉터리', '나쁜 놈', '말도 안되는 소리' 등의 단어가 계속 터져 나왔다. 백발의 노(老) 교수는 거침이 없었다.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72)다. 예전에도 그와 수차례 인터뷰를 했던 기자는 살짝(?) 당혹스러웠다. 

인터뷰 말미에 기자에게 되물었다.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라며 "지금 이 사회가 정상적으로 가고 있는지 말이예요"라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어 그는 "지금 우리 사회는 마치 프랑스대혁명 시절에 있는 것 같다"면서 "그게 1789년 이야기인데, 그때나 볼 법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래서야 되겠어요?"라며 다시 되물었다. 

지난 6일 오후 고려대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국내 최대의 마르크스주의 포럼인 '맑시즘 2015' 첫날 강연을 마친 다음이었다. 문과대 202호 강의실은 학생과 직장인 등으로 가득차 있었다. 김 교수는 언제나 그랬듯이 하얀색 칠판 위에 그래프를 그려가며 자본론을 강의했다. 그는 당초 예정됐던 1시간 30분의 시간이 못내 아쉬웠던 것 같았다.

- 강의 후에 학생들 질문이 많았던 것 같던데요.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 대한 여러 고민들도 보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이 부족했지. 이런 강의는 항상 그래요. 어느 외국인도 질문을 하던데, 나중에라도 좀더 토론을 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 지난해 토마 피케티 교수의 '21세기 자본'이 국내에 소개되고, 장하성 교수도 '한국자본주의'를 펴내면서, 불평등과 경제민주화 등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는데요. 
"피케티 교수의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은 말그대로 부(富)를 말하는 거예요. 맑스의 '자본'과 다르지. 다만 피케티 주장의 핵심은 분배 문제인데, 그동안 자본주의 병폐가 불평등과 양극화 잖아요. 그것을 수백년의 자료로 입증해 보인 거예요. 주류경제학 입장에선 그의 주장에 '쇼크'를 먹은 거지."

김 교수의 말은 계속됐다. 이미 반복되는 경제위기 속에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 그는 "이미 지난 수십 년동안 미국 등에선 부자감세를 비롯해 사회보장제도가 해체되면서 빈부격차가 날로 커지고 있다"고 했다. 양극화에 따른 부의 불평등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필연적이라는 것도 강조했다. 그의 말을 옮겨본다.

"이미 맑스가 살던 시대부터 개혁과제를 내놨어요. 1848년 공산당 선언 등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위해 소득 누진세를 도입하고, 부의 대물림을 막기 위한 상속 제한 등 말이예요. 무상 교육도 있었고…. 나중에 서구국가들이 1950년대에 들어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고…."

"복지를 줄인다고? 여기는 지옥이야, 지옥...."

그는 이어 "당장 자본주의가 없어지거나 붕괴되지는 않겠지만, 끊임없이 개혁을 추진해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복지 논쟁도 마찬가지였다. 그와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박근혜 정부 2년 평가로 흘러갔다.

- 박근혜 정부가 만 2년이 지나고, 3년차로 접어들고 있는데요. 
"그래, 벌써 그렇게 됐어. 처음엔 이명박 대통령과 좀 다를 것 같았는데, 금세 본색을 드러냈어. 그냥 MB 것 거의 그대로 했는데…. 경제는 더 나뻐지고, 빈부격차도 심해지고, 그동안 뭐 한 것도 없지 않아요?"

- 애초 내걸었던 복지와 경제민주화 등 공약이 줄줄이 사라지고, 인사파동으로 시간만 보냈다는 지적도 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게 말이예요. 내가 보기엔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든, 경제든 기본적인 개념이 전혀 없는 것 같아. 머리가 없어요. 그냥 유신공주로서 자기 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사람 같아. 내가 전에도 이야기한 것 같은데, 세월호 사고를 보고 저 사람이 대통령인가 싶기도 하고…."

그는 '세월호 사고'를 꺼냈다. 작년 4월 기자가 김교수를 만났을 때 그는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대통령으로서 자격이 없다"고(관련기사: "박근혜 대통령 자격없다, 집권층 무너져도 혼란없어"). 김 교수는 "정말 자기 자식 죽은 부모의 심정을 그 사람(박근혜 대통령)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어 "대통령이라면 국민들이 얼마나 슬퍼하고,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고, 해결해줘야 하지 않은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올들어 연말정산 파동으로 증세와 복지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는데요.
"지금 청와대나 여당 모두 결국 복지 지출 줄이자는 거 아니예요. 오이시디(OECD)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가 복지 지출에서 거의 꼴지라고 하는데, 지금 무엇을 얼마나 쓰고 있길래 줄이자고 하는지…. 내 생각엔, 우리는 지금 제대로 된 복지를 안 하고 있는게 문제야."

- 여당에선 무상급식이나 보육 등에 들어가는 부담이 크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돈이 없다고 하면서 이미 증세로 서민들한테 돈을 거둬가고 있잖아. 담뱃세부터 말이야. 그런데 부자들은 모두 금고에 돈을 쌓아두고, 기업들도 마찬가지고…. 부자들부터 제대로 세금을 거둬야지."

"MB의 4대강 등 그 아까운 돈들을... 정말 나쁜 놈들"

- 박근혜 대통령은 기업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 해서 고용늘리면 세금도 늘어날 것이라고 하는데.
"(고개를 흔들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민간기업들은 이윤을 볼 수 있는 정도만 사람을 고용하잖아. 거기에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은 실업자야. 기업들은 실업률 같은 거 신경도 안 써요. 정말로 실업률 낮추고, 일자리 만들려면 정부가 나서야지."

김 교수의 비판은 계속됐다. 다시 그의 말이다.

"정부 1년 예산이 수백조 원이예요. 그것부터 제대로 잘 쓰면 돼. 정부가 나서서 일자리와 복지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들이 많아요. 그런데 쓸데없이 돈을 써버리잖아. 이명박 대통령이 무슨 4대강 사업한다고 22조 원인가 쓰고, 자원외교한다고 수조 원 날리고…. 그 피 같은 국민들 돈을 말이야…. 정말 나쁜 놈들이야."

-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4대강 사업으로 금융위기 극복했다고 썼는데요.
"(목소리를 높이며) 무슨 엉터리 같은 아야기를 하고 있어. 자기가 무슨 옛날 대공황시절 루즈벨트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는 모양이구만. 4대강사업 한다고 그 돈을 대기업들한테 다 나눠줬는데, 무슨 위기를 극복했다고…."

- 요즘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30%대까지 떨어지면서, 조기 레임덕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자업자득이지. 누가 좋아하겠어. 지금 사람들 사는 것이 지옥이예요, 지옥. 그래도 처음에 무슨 복지국가한다고 했으니 기대라도 했지만, 아니잖아. 청와대서 나오는 이야기 보면 무슨 지들끼리 권력싸움이나 하고 있질 않나, 그 사람들한테 국민들이 안중에도 없어요."

"참으로 더티한 나라, 과거로 후퇴한 민주화, 다시 싸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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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보수 여당은 선거를 앞두고 각종 복지공약으로 표를 모을 것"이라며 "야당이 보다 선명성 있는 정책을 내놓지 못하면 다음 선거도 힘들 수 있다"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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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정치민주연합 등 야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도 여전한데요.
"야당에 있는 친구들이 말이예요. 새누리당과 같은 수준의 복지 이야기를 하면 안돼. 좀더 진보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을 보여줘야지. 지금 실업, 비정규직 문제가 얼마나 심각해요. 정말 기업들이 맘대로 해고 못하도록 법으로 강제를 하든지, 노동조합의 권한이나 지위를 대폭 높여서 기업들과 대등하게 해주든지."

김 교수는 "아마 이런 식으로 가다간 내년 총선이나 다음 대선에도 정권교체가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보수여당은 선거를 앞두고 각종 복지공약으로 표를 모을 것"이라며 "야당이 선명성 있는 정책을 내놓지 못하면 다음 선거도 힘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 정부에서 민주화의 후퇴를 가장 우려하며 "후퇴가 정치·경제·사회 등 우리 전반에 걸쳐있다"고 아쉬워 했다. 그러면서 언론과 표현의 기본 자유가 침해받는 현실을 두고 "참으로 더티한(dirty, 더러운) 사회"라고 평가했다. 1시간을 훌쩍 넘는 인터뷰 내내 그의 직설은 계속됐다. 앞으로 어떻게 가야할지를 물었다.

"(웃으면서) 3년이나 남았나. 어떻게 하겠어, 계속 이야기를 해야지. 우리가 어떻게 얻은 민주화인데, 지금 이렇게 후퇴해버리면 되겠어요? 사상적으로 국민들을 이간질 하고 말이야. 참으로 더티한 사회야.  그래도, 이래선 안되니까, 계속해서 정치든, 경제든 다시 민주화를 이야기하고 싸워야지. 그래야 바뀌지 않겠어. 나부터, 당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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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회고록 역풍과 국방부의 ‘호들갑’

 
김종대 2015. 02. 13
조회수 568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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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국방부 정책실의 북한정책과 직원들이 집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바쁘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북한 전문가인 백승주 차관이 연일 북한정책과와 회의를 한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이와 유사한 분위기를 저는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 하반기에도 겪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국방부는 대통령의 한반도 대운하 구상에 맞춰 소위 ‘나들섬 구상’이란 걸 만들어 청와대에 보고하였습니다. 한반도 운하의 출발점인 임진강 하구의 나들섬을 남과 북이 공동으로 개발하면 수조 원에 달하는 골재 채취 이익이 생기게 됩니다. 그 이익을 남과 북이 나눠가지면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대운하의 시작도 순조롭게 되는 양수겸장의 효과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국방부가 이런 구상을 주도적으로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남북관계의 채널이 다 마비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북 군사회담 채널만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일하게 북한을 접촉하는 창구로서 국방부의 남북관계에서 지분이 확대되었고, 그 기세로 아예 남북관계까지 주도해보자는 수준에 이른 것입니다. 이 당시 국방부 관계자를 만나면 남북관계를 낙관하는 전망이 많아서 크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나들섬 구상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 분위기가 어쩐지 그 당시와 유사하다는 겁니다. 
  근거는 또 있습니다. 지난 1월 19일 국방부 통일부 외교부 보훈처 등 4개 부처 합동 대통령 업무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 국방부 업무보고는 뒷전으로 밀리고 통일부가 업무보고 전반을 지배하였습니다. 보고가 있기 직전에 국방부는 애초 계획된 업무 보고서를 대폭 손질하여 북한의 위협이 부각되지 않도록 수정하였습니다. 이것이 통일부 업무보고에 ‘코드’를 맞추기 위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에 모종의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대통령 회고록 소동

 

  그런데 2월 6일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최근 발매된 이명박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 대해 직설적인 어조로 비판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회고록에 남북 정상회담 관련 비사가 실린 데 대해 “안다고 다 말하나”며 현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에 부담을 주고 있다며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입니다. 전-현직 정권의 갈등이 조성될 수 있는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이와 같은 비판을 하고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게다가 회고록이 발매된 1월 말에 청와대가 남북관계의 비밀 내용이 회고록에 실려 있다며 “유감”을 표명하고 난 이후 잇달아 비판하고 나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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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이 과연 현 정부에 어떤 부담이 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일부 언론은 MB 회고록이 북한 내 대남 담당 관계자의 신변에 화를 미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매우 우려할 만한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MB 회고록은 남북 비밀접촉 전 과정에서 북한 쪽 인사를 하대하고 홀대하고 무시하는 장면을 수도 없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북한의 비밀 접촉의 당사자들은 남한과 접촉할 때의 행적에 대해 북한 당국의 조사를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 사례를 보면 장성택의 경우는 노무현 대통령 당시 남쪽에 내려와 “행실이 바르지 못했다”며 한 때 숙청되었다가 재기한 후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민족반역죄로 처형당한 것입니다. 류경 보위부 부부장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유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류경은 귀국 후 서울 방문 시 자신의 행적을 담은 보고서를 성실하게 쓰지 않았고, 이 때문에 남쪽 인사들과 내통하는 것 아니냐는 반역행위 혐의가 덧씌워졌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에 남북 접촉의 창구였던 최승철 통일전선부 부부장의 경우도 이명박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에 나설 것으로 인식했던 대화파이지만 정세 오판의 책임을 추궁당하여 처형된 것으로 남쪽 정보기관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모두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그나마 남쪽과 대화를 성사시켜보겠다고 온 이들은 남쪽에 말 한마디라도 실수하면 돌아가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북한의 대남 강경파에 의해 숙청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관계가 더 경색되고 우리는 다시 안보비용이 높아집니다. MB의 대북정책은 그들이 소위 말하는 종북세력 청산에 그치지 않고 북한의 종남세력 처형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회고록 발간 이후 일부 언론은 남쪽과 접촉한 대남통인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의 안위까지 거론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종남세력 몰락

 

  북한을 제대로 압박하고 망신을 주었다는 MB의 회고록 내용은 북한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는 속을 후련하게 했을지 모릅니다. 또한 북한 정권이 숙청한 것이 왜 우리 탓이냐고 반문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참으로 속 좁은 단견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남북관계의 문을 완전히 걸어 잠그고 비밀 회담이니 막후접촉이니 이런 것을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닙니까? 만나놓고 그 내막을 다 까발리는 식으로 모욕을 주는 회고록을 쓸 바에야 그 때 만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여럿이 죽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국가에 외교는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외교는 더 위험한 무기가 되어 돌아옵니다. 이것이 현 정부가 남북대화를 추진할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이렇게 까발리는데 북한과 대화가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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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 입장도 가만히 보면 복잡합니다. 올해는 경북 문경에서 세계 군인체육대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국방부는 여기에 북한 인민군을 초청하겠다는 입장이고, 이를 계기로 남북 국방장관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작년부터 조심스럽게 모색해 왔습니다. 언제는 “북한이 없어져야 할 나라”라고 했던 국방부지만 최근 행보를 보면 마치 북한과 평화협정이라도 체결할 것처럼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더 궁금해집니다. 북한과 대화를 하기 위한 준비된 철학과 비전, 전략이 무엇이냐는 거죠. 지난 정부에서 남북 비밀접촉을 추진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제 와서 저렇게 북한을 망신과 모멸감을 주는 대화록을 펴냈는데 과연 지금 정부는 다르냐는 겁니다.


 국방장관 회담 열리나?

 

  나들섬 구상도 좋고 세계 군인체육대회도 좋지만 그런 이벤트성 대화로는 사태가 나아지는 것이 없고, 장기적이고 일관된 전략과 행동이 나와야 성과가 기대됩니다. 그것이 바로 MB의 회고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잠깐 북한의 관심을 끌다가 이내 서로 틀어져서 욕을 하게 되면 차라리 남북 대화를 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이제껏 우리는 보아왔지 않습니까? 북한의 실체와 그들의 사고, 행동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 기준에만 맞춰 북한을 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지난 해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북한의 고위층이 내려왔을 때 대화의 모멘텀을 이어나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년 초에 북한에 유화적인 이런 국면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 이후에 더 큰 위기가 초래될 위험은 없는지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이 점에서 전-후임 정부가 대립하는 모양을 어쩐지 맘 편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 어떤 복선이 깔려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부가 더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야 합니다.

   김종대 <디펜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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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문재인은 대선부정 문제에 소극적인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2/13 11:53
  • 수정일
    2015/02/13 11:5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원세훈 유죄판결에 사과만 요구한 진짜 이유
 
조시형 | 2015-02-13 10:29:1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왜 문재인은 대선부정 문제에 소극적인가?
-원세훈 유죄판결에 사과만 요구한 이유


아래 게시한 자료는 2012년 12월 12일 대통령선거일을 전후로 해서 각 카페와 커뮤니티에 제가 게시한 글의 목록입니다. 보다시피 이미 12월 초부터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예견하고 그 대비책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과문하지만 제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제기했을 겁니다.)

 

심지어 민주당과 시민단체에도 제보하고 메일과 전화는 물론 직접 찾아가서 호소까지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대책 무방비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민주당 공조직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고 선거운동은 사실상 문재인 후보가 자발적 팬클럽의 도움으로 나홀로 고군분투 했었죠. 거 무슨 담쟁이 선본인가 시민단체가 합류하고 있었는데 그들도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 그 누구도 이런 문제에 열의는 커녕 관심도 없었습니다.

누구 탓 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적나라한 실상이었으니까요. 뼈저리게 절망하고 통탄스러웠습니다. 실제로 광범위한 선거부정은 그런 환경에서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자행되었고 그렇게 권력을 강탈당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현재까지 2년여 여러 사전 사후 선거부정의 사례가 드러나고 개표조작의 증거들까지 나오더니 드디어 원세훈이가 2심재판에서 유죄로 법정구속되는 상황까지 진전되었습니다. 의미있는 진전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벌써 2년째 문재인의원에게 이 문제에 대해 적극대처하지 않는다고 격한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죠. 특히 원세훈이 유죄판결이후 고작 사과요구 밖에 못했다고  비난하면서 박그네 사퇴주장하고 탄핵 추진하고 국민적 퇴진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렇게해야죠.

그런데요. 개표조작인 플랜B의 핵심적 증거는 이미 2012년 12월20일에 다 폐기되었습니다. 실제 투표용지가 다 폐기되고 새로 짜맞춘 투표지로 다 교체된 거죠. 그뿐아니라 전자개표기는 물론 그 컴퓨터 서버도 다 교체되었고 그 실무자들은 지금 국내에 없어요.

그럼 지금 드러난 댓글 공작만 가지고 싸워야 하는데 그걸로는 사과이상의 요구를 하기가 어려워요. 왜냐? 박그네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다, 나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다가 이미 2년 전 부터 공식입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의 성향이나 개표조작을 주장한 사람들을 구속시키는 행태로 보나 원세훈이도 최종심에서 어찌될지 몰라요.

ⓒ 민중의소리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가 이 문제로 문재인대표를 비난하지 못하겠는 진짜 이유는 현재의 민주당 아니 새정치민주연합의 다수 의원들과 당직자 그리고 그 당원들은 물론 강경파 시민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선패배를 이유로 국회의원직 사퇴와 정계은퇴를 매몰차고 집요하게 요구한 인사들이 아직도 즐비하게 포진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심지어 권은희 수사과장의 폭로로 벌어진 장외집회에 문재인의 참여를 대선 불복으로 비칠까 우려하여 저지한 게 새정치민주연합의 전 지도부였습니다.

아마도 원세훈의 국정원 댓글공작 문제로 막상 정권퇴진운동을 주장하고 나서면 각종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비협조하고 나 몰라라 할 사람들이 태반일 거라고 보여서 말이죠. 강경한 시민들 중 상당수도 정권의 강경한 탄압에 초장부터 돌아서거나 회피할 사람이 다수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는 개표조작까지 포함하는 결정적 증거나 증인이 나오기 전까지는 문재인대표가 사과와 국정원의 철저한개혁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지난 대선 때처럼 혼자 독박쓰고 실패해서 욕만 바가지로 먹고 끝날 무리한 전술이다 그리 판단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야당의 혁신과 통합이 현단계 너무너무 절실한 과제입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김대중 노무현같은 영웅의 시대가 아니라서 더 그렇습니다. 두 분은 천재적 능력으로 그런 조직적 난맥과 한계를 극복해냈지만 더 이상은 안 되는 시대라고 봅니다. 세력을 강화해서 세력이 집권하게 해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문재인 대표가 박정희 묘소 가서 참배했다고 비난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원세훈 2심유죄판결 (확정판결이 아닌)에 대해 대통령 사과만을 주장했다고 갑자기 쌍심지를 켜면서 비난하지 못하겠습니다.

정말 시급한 것이 재발방지 대책이라고 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6&table=c_jshpapa&uid=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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