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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판·김·세' 수상한 5일, 대선을 주물렀다

청문회 증언으로 본 '의혹의 재구성'…'축소·은폐'부터 '비상계획'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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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8-20 오전 2:56:08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부터 경찰의 조직적 수사 은폐까지. 18대 대선을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벌어진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국회 국정조사의 초점은 사건 핵심 연루자들의 수상한 '5일의 행적'이다.

사건의 발단인 지난해 12월11일 '오피스텔 댓글 사건'부터 16일 경찰의 수사 발표까지, 그 닷새 동안 국정원과 경찰 수뇌부, 박근혜 선거 캠프의 1, 2인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특히 19일 사건의 초기 수사를 담당했던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국회 청문회에서 경찰 수뇌부의 '사건 은폐 외압'을 폭로하면서 흩어져 있던 퍼즐의 조각들이 맞춰지는 분위기다. 국정조사 핵심 증인들의 발언을 토대로 사건 연루자들의 '5일의 행적'을 재구성해 봤다.

 

▲ 16일 국회 청문회에 참석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왼쪽)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프레시안(최형락)


■ 12.11, 대선 D-8
'오피스텔 습격' 혹은 '셀프 감금' 사건


18대 대선을 불과 8일 앞둔 지난해 12월11일, 서울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 경찰과 선거관리위원회 직원, 민주당 문재인 후보 캠프 관계자들이 602호 현관문 앞에 몰려 들었다. 한 국정원 직원이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를 지지하고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인터넷 게시글을 조직적으로 올리고 있다는 제보 때문이었다.

이날부터 문제의 국정원 직원 김하영 씨와 경찰 및 선관위 관계자들은 사흘간 지루한 대치를 계속한다. 김 씨는 "통로를 열어줄테니 나오라"는 경찰의 제안에도 "부모님과 상의해 재신고 하겠다"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흘간 이어진 대치 상황에 대한 해석은 지금까지도 엇갈린다. 국정원과 새누리당은 이를 민주당의 '국정원 여직원 인권 유린 사건'으로 규정하고 박근혜 후보까지 나서 "성폭행범들이나 사용할 수법으로 여직원을 감금하고 인권을 침해했다"며 민주당을 맹비난했다.

반면 민주당은 경찰의 신변보호 제안에도 김 씨가 끝내 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며 이를 국정원 직원의 '셀프(self) 감금' 사건으로 규정, 문제의 사흘 동안 김 씨가 자신이 작성한 인터넷 게시글과 댓글, 접속 기록을 삭제하는 등 증거 인멸을 했다고 맞서 왔다.

사건 당사자인 김하영 씨는 19일 국회 청문회에서 '감금'된 사흘 동안 인터넷 댓글 및 게시글을 삭제했느냐는 질문에 "답변하기 곤란하다"고 증언을 거부했다. 그러나 김 씨는 이후 경찰 조사에서 오피스텔 안에 머물렀던 사흘 동안 인터넷 접속 기록 등을 삭제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드러났다. 통합진보당 이상규 의원이 공개한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의 사건 조사 과정 녹취록을 보면, 김 씨가 경찰 진술 조서에서 개인용 자료와 문서 파일, 접속 기록 등을 삭제했다고 진술했다는 수사관의 발언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피스텔에 '감금'된 것이라는 김 씨의 주장과 달리, 증거 인멸을 위해 일부러 밖으로 나오지 않고 시간을 벌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

 

▲ 국정원 직원 김하영 씨(사진 가운데)가 지난해 12월13일 경찰과의 대치 끝에 역삼동 오피스텔을 빠져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 12.12, 대선 D-7
김용판 "압수수색 말라"…'외압'의 시작


이튿날인 12월12일, 민주당은 김 씨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다. 경찰 수뇌부는 이 때부터 발 빠르게 움직인다.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수사 은폐·축소 지시' 의혹이 싹튼 것도 이날부터다.

김 씨가 오피스텔에서 나오지 않고 버티자, 당시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수서경찰서는 해당 오피스텔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준비한다. 권은희 당시 수사과장은 19일 청문회에서 "12일 저희들이 오피스텔에서 철수한 이후 새벽부터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서류를) 준비해 서울중앙지검에 가지고 간 것이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날 권은희 전 과장에게 한 통의 전화 때문에 압수수색 계획이 뒤집어진다. 서울경찰청 최고위층인 김용판 전 청장의 전화였다. 권 전 과장은 "김용판 전 청장이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김 전 청장이 지난 16일 1차 청문회에서 "격려 전화를 한 것 뿐"이라고 증언한 것과 180도 다른 주장이다.

이를 두고 권 전 과장은 "김용판 전 청장이 청문회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냐"고 묻는 민주당 박영선 의원의 질문에 "네, 거짓말이다"라고 단언했다. 경찰 수뇌부의 조직적인 수사 은폐의 시작이 '압수수색 저지 외압'으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 12.13, 대선 D-6
경찰 수사 착수…새누리, '컨틴전시 플랜' 개시


사흘 간의 '셀프 감금' 끝에 결국 모습을 드러낸 김 씨는 서울 수서경찰서에 자신의 컴퓨터와 노트북 하드디스크를 임의 제출한다. 수서경찰서는 곧바로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 디지털 증거분석팀에 증거 분석을 의뢰한다.

본격적인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여권은 '권영세 녹취록'의 예고대로 이른바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비상계획)'을 개시한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으로 수세에 몰리자 'NLL(서해북방한계선) 작전'으로 맞불을 놓은 셈이다.

사흘 전인 12월 10일,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의 종합상황실장을 지낸 권영세 주중대사가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NLL 대화록 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역풍 가능성이 있다. 말 그대로 컨틴전시 플랜"이라며 "'도 아니면 모'고 할 때 아니면 못 깐다"고 한 발언은 얼마 전 공개된 녹취록에 담겨있다.

NLL 공세가 '컨틴전시 플랜'이라는 언급대로,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경찰 조사가 본격화되자 권 대사는 이날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NLL 대화록 공개 문제에 대해 논의한다.

원세훈 전 원장 역시 16일 청문회에 출석해 당시 권 대사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문제에 대해 "상의했다"고 시인한 바 있다. 원 전 원장은 당시 "13일 국회 정보위원회가 열렸는데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라는 얘기가 있어서 저도 답답하니까 친분 관계로 상의를 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대선을 불과 6일 앞두고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까지 번지던 와중에 국정원의 수장과 여당 대선 캠프의 핵심 인사가 현안에 대해 '상의'를 했다는 것 자체가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권 대사 외에도 새누리당 의원들은 발 빠르게 '컨틴전시 플랜'을 가동시킨다. 이날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의혹'을 꺼내들며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라고 국정원에 공식 요구한다. 야당이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한 '물타기'라고 비판하는 이른바 'NLL 전쟁'의 시작이었다.

■ 12.14, 대선 D-5
서울청 분석관, 국정원 댓글 확인 '환호성'
비오는 부산, 김무성의 '대화록 낭독'


대선을 불과 닷새 앞둔 14일 오후 8시. 마침내 국정원 직원 김 씨의 노트북에서 삭제됐던 '댓글 흔적'이 발견된다. 수서경찰서로부터 김 씨의 노트북과 컴퓨터를 넘겨받은 서울경찰청 디지털분석팀이 삭제된 파일 복구에 성공한 것. 당시 서울청 디지털증거분석실을 찍은 폐쇄회로(CCTV) 영상엔 국정원의 댓글 증거를 찾고 기뻐하는 분석관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울청 분석관들은 이틀간의 철야 작업 끝에 다음날 새벽 국정원 직원의 삭제된 40여 개의 ID와 닉네임을 발견한다. 한 분석관은 "닉네임이 나왔다. 고기 사 달라"고 박수를 쳤고, 다른 분석관은 "노다지를 찾았다"고 흥분했다. "이 자료를 뽑아 수사팀에 넘기자"는 말도 오갔다. 분석관들이 당시 찾아낸 김 씨의 댓글 관련 증거는 A4용지 100여 쪽에 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성과는 수사관들의 '자축' 하룻 만에 무위로 돌아간다.

다른 한 편으로 새누리당의 '비상 계획'도 착착 이행됐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이날 오후 부산, 박근혜 후보 캠프의 총괄선대본부장이었던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은 서면거리 유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낭독'한다. 국가 기밀인 2007년 정상회담 대화록을 불법 유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날은 언론에 문재인 민주당 후보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지지율을 앞질렀다는 보도가 처음으로 나온 날이기도 했다.
 

▲ 지난해 12월14일 박근혜 후보와 함께 부산 유세에 참석한 김무성 당시 총괄선대본부장(사진 오른쪽). 김 본부장은 당시 유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그대로 '낭독'해 대화록 사전 유출 의혹이 일었다. ⓒ연합뉴스


■ 12.15, 대선 D-4
김용판의 '수상한 점심 식사'…분위기 바뀐 경찰


15일 오전. 서울경찰청 디지털분석팀이 '밤샘 작업' 끝에 복구한 국정원 직원의 댓글 관련 자료가 김용판 전 청장에게 보고된다. 그러나 분석관들이 찾아낸 국정원의 대선 개입 흔적은 모두 묵살됐다. 김 전 청장의 5시간에 걸친 '수상한 점심 식사' 이후의 일이다.

야권은 이날의 점심 식사에 주목하고 있다. 이날 청와대 인근의 한 식당에서 가진 김 전 청장의 장시간에 걸친 점심 식사 이후 경찰의 기류가 180도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당시 서울청의 업무일지엔 김용판 전 청장이 정보부장 등 직원 12명과 식사를 했다고 나와 있지만, 직원들은 모두 이 사실을 부인했다. 민주당은 김 전 청장의 '수상한 행적'을 두고 국정원 등 여권과 사전 공모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지난 16일 청문회에서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를 보인 김용판 전 청장은 유독 '당시 누구와 식사를 했느냐'는 질문엔 당황한 듯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누구와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면서도 "정치권 인사는 아니"라고 하더니, 추궁이 계속되자 "기억을 하고 싶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김용판 전 청장의 '수상한 밥 자리'가 끝난 오후 5시, 김기용 당시 경찰청장은 서울청장의 수행도 없이 디지털 분석에 한창이던 서울청 증거분석실을 방문, 분석관들에게 "수고하라"며 돈 봉투를 건넨다. 이를 두고 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이날 오전 김용판 전 청장이 최현락 전 수사부장 등과 모의해 허위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로 하고 이어 김 전 청장이 '미스터리 점심'을 하고 난 시점에 김기용 전 청장이 돈 봉투를 전달한 것"이라며 '수사 종료 종용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 12.16, 대선 D-3
새누리, 경찰 수사 결과 암시…박원동-김용판 '의문의 통화'
경찰 "댓글 없었다"…심야 수사 결과 발표


16일은 대선 사흘 전이자, 박근혜-문재인 후보의 마지막 TV토론이 있던 날이었다. 선거의 판세를 바꿀 막판 3일을 앞두고 이른 아침부터 각 후보 캠프는 분주했다.

새누리당 대선캠프 인사들은 더욱 속이 탔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김무성 본부장 등은 '해서는 안 된 말'을 기자들에게 남긴다.

이날 정오 무렵, 김 본부장은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증거가 없다"고 잘라 말했고, 박선규 당시 박근혜 캠프 대변인 역시 이날 오후 수사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을 일부 기자들에게 흘렸다.

이날 밤 진행된 TV토론의 쟁점은 예상대로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이었다. 당시 박근혜 후보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실제로 여직원이 댓글을 달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나왔다"라며 경찰 수사 결과를 단정했다.

그리고 TV 토론이 끝난 직후인 오후 11시. 김무성 본부장과 박근혜 후보의 '예언'대로 국정원의 '댓글 흔적이 없다'는 경찰의 중간 수사 결과가 기습적으로 발표된다. 대선을 사흘 앞두고 진행된, 이례적인 '심야 발표'였다. 11분 후 국정원 역시 대선 개입은 '사실 무근'이라는 보도자료로 화답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올해 4월, 검찰은 경찰의 당시 중간 수사 결과 발표를 "실체를 은폐한 허위 발표"라고 결론 지었다. 그러나 사건 은폐를 주도한 김용판 전 청장은 불구속 기소에 그쳤다.

권은희 당시 수사과장은 19일 국회 청문회에서 경찰이 중간 수사 결과를 담은 보도자료를 이날 밤 11시에 발표하기 전까지 수사 결과가 발표되는 것조차 몰랐다고 증언했다.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일선 경찰조차 몰랐던 일을 박근혜 캠프의 핵심 관계자들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당이 김무성 의원 등의 국정조사 증인 채택을 요구하는 이유다.

미스터리한 전화 통화는 경찰의 수사 발표 전 한 차례 더 있었다. '외압'까지 행사하며 수사 발표를 진두지휘한 김용판 전 청장은 이날 오후 2시경, 박원동 전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박 전 국장은 19일 청문회에서 "당시 사건과 관련해 (김용판 전 청장이) 고생하고 있어 인사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전화했다"고 해명했지만, 가장 민감한 시기 수사대상 기관의 간부가 수사 총책임자에게 전화를 한 것 자체가 일종의 '수사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민주당이 청문회에서 공개한 CCTV를 보면, 당시 경찰 분석관들은 김 전 청장의 지시에 따라 수사 결과 보도자료를 준비하면서 "대선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경찰의 180도 달라진 수사 발표 다음날인 17일 보수언론들은 일제히 '국정원 댓글 흔적 없다'는 기사를 1면 톱으로 내걸었다. 대선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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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희가 지배한 청문회, 김하영이 조연하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8/20 06:21
  • 수정일
    2013/08/20 06:2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둘이 합쳐 증인 발언의 40%
권은희가 지배한 청문회, 김하영이 조연하다

[분석] 눈치 안 보고 소신 답변 vs 미리 준비한 모범 답변

13.08.19 22:47l최종 업데이트 13.08.19 23:06l
이병한(han) 남소연(newmoon) 이경태(sneercool)

 

 

16일 국회 청문회가 '선서 거부 청문회'였다면, 19일 청문회는 '가림막 청문회'였다. 얼굴 노출 방지를 위해 설치한 가림막의 적절성과 그 자리에 들어갈 증인 선정에 대한 여야 실랑이로 오전 시간을 전부 보내야 했다. 결국 가림막 하단 부분을 조금 도려내고,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을 제외한 나머지 국정원 직원 4명(박원동 전 국익정보국장, 민병주 전 심리전단 단장, 최영탁 전 심리전단 팀장, 김하영 심리전단 직원)이 그곳에서 증언하는 것으로 결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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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희 전 수사과장이 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증인심문에 응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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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날 청문회의 주인공은 가림막 밖에 있었다.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등 경찰 수뇌부의 축소·은폐 수사 의혹을 폭로한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다. 그는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크게 당황하거나 막힘 없이, 감정의 기복 없이, 또 빙빙 돌리지 않고 명쾌하게 답변했다. 그럴수록 점점 권 과장에게 질문이 집중됐다. 야당은 주장의 정당성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서, 또 여당은 어떻게든 권 과장의 주장을 탄핵하기 위해서.

또 한 명 조명을 받았던 증인은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다. 이번 청문회가 그로부터 파생됐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보면 예고된 상황이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일정한 틀 안에 있었다.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말 할 수 없다"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번 청문회의 '예고된 주인공'이었지만, 실제로는 비중있는 조연 정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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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현직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가 흰색 가림막 뒤에 몸을 숨긴 채 증인심문에 응하고 있다. 심문 내내 김씨는 미리 준비해 온 자료를 읽어내려가는 답변 태도를 보였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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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전직 국정원 직원 박원동 전 국장이 흰색 가림막 뒤에 몸을 숨긴 채 증인심문에 응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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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참석 증인 26명의 발언 횟수로 단적으로 확인된다. <오마이뉴스> 집계 결과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약 5시간 동안 여야 특위 위원들의 질문이 두 차례 돌았을 때, 권 과장의 발언 횟수는 이미 107회로 가장 많았고, 김씨는 59회로 2위를 기록했다. 두 사람의 발언만 26명 전체 발언 수(419회)의 약 40%에 달했다. 최현락 경찰청 수사국장의 발언 횟수가 4번, 한동섭 서울청 분석관과 강기정 민주당 의원의 발언 횟수가 불과 1회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극명히 대조된다. 3위는 박원동 적 국정원 국익전략실장(45회), 4위는 김수미 서울청 분석관(38회)였다.

권은희의 활약

내용적으로도 권 과장의 증언은 청문회를 지배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16일 경찰의 중간수사결과 발표에 대해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부정한 목적"이었다고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또 지난 16일 청문회 당시 증인선서를 거부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증언에 대해서도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16일 밤 11시 경찰의 중간수사결과 발표가 대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느냐"는 민주당 특위 위원 박범계 의원의 질문에 "대선에 영향을 미쳤느냐는 변론으로 하고, 발표 행위가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부정한 목적으로 하였음은 분명하다고 판단한다"고 답했다. 또 경찰의 심야 발표에 대한 생각을 묻는 신경민 위원(민주당)의 질문에도 "국민이 그 시각에 정확히 알아야 하는 사안이고 경찰이 정확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본다"면서도 "최종 수사결과에서도 봤듯 당시 나온 자료는 객관적이지 않았고 공직선거법 관련 자료는 은폐·축소하고 발표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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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권은희 전 수사과장이 증인심문에 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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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판 전 청장의 외압 행사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김 전 청장은 지난해 12월 12일 권 전 과장에게 '격려전화'를 한 것이 아니라,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의 오피스텔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신청을 막아섰다. 김 전 청장은 당시 전화가 단순한 격려전화였다고 청문회에서 증언한 바 있다.

새누리당의 '국정원 여직원 감금' 주장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아니라고 답했다. 그는 "감금은 법리적으로 유형적·무형적 자유 침해를 얘기하는데 (국정원 직원) 김씨는 저와 통화를 진행했고, 경찰이 현장에 출동한 것도 알았다, 도곡지구대 직원은 통로를 열어주겠다고 답변했다"면서 "감금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의 권은희 진술 탄핵하기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두 번째 질문 순서에서 새누리당 특위 위원들은 적극적으로 권 과장의 증언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심문을 끌어갔다. 새누리당 특위 간사인 권성동 의원은 "(권 과장은) 날고 긴다는 서울청 분석관들의 견해보다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보니 아집이 강하다"면서 권 전 과장을 깎아내렸다. 또 "증언 내용을 보니까 민주당을 애초부터 도울 생각으로 수사에 임했고, 적어도 (오늘) 민주당을 돕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청문회에) 온 것으로 보인다"고 공격했다. 이 발언에 대해 이후 권 의원은 야당의 문제제기를 받고 사과했다.

윤재옥 위원(새누리당)은 '왕따 만들기' 전략을 폈다. 그는 증거분석작업을 맡았던 경찰 측 증인 14명을 일일이 호명, 답변을 유도해 "(중간 수사결과 발표는)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부정한 목적이었다"는 권 과장의 진술을 반박했다. "동의할 수 없다", "(수사 결과 발표에) 일체의 정치적, 정무적 고려가 없었다고 확신한다" 등의 답변을 얻은 윤 의원은 "경찰 증인 15명 중에 14명이 (권 과장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장우 위원(새누리당)은 "수사과장이 편향된 시각으로 하니깐 (감금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며 "어떻게 부끄럽지 않게 '여직원을 감금하지 않았다'고 얘기하나"라고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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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 가린 국정원 직원 김하영 1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2차 청문회가 정회되자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청문회장을 나서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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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과장은 이 같은 공세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윤 위원의 '왕따 전략'에 맞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여부는 수사팀에서 하는 것이다, 공직선거법 수사는 제가 수년 간 해왔다"면서 "저는 수사팀이고 다른 분들은 증거분석 조사관"이라고 말했다.

감금 주장에 대해서도 김하영씨와 진술이 엇갈리자 "선서한 증인으로서 (김씨의) 증언이 (사실과) 다르다는 부분을 말하고 싶다"고 직접 반박했다.

김하영의 전술

반면 김하영씨에게는 모범 답안이 있었다. 김씨의 청문회 대응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부인. 그의 게시글과 추천/반대 등 사이버 활동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나 민병주 전 심리전단 단장 등 윗선의 지시에 의한 것인가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치·대선 개입 의도에 대해서도 "없었다"라고 부인했다. 그는 일관되게 검찰의 공소사실의 핵심에 대해 전면 부정했다.

두 번째는 회피.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답변을 피했다. 그는 "심리전단 활동은 댓글을 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답하기 곤란하다"고 말했고, 검찰 공소장에 기록된 특정 게시글을 올렸는지를 묻는 질문에도 마찬가지 답변을 했다. 통합진보당 특위 위원인 이상규 의원의 "그럼 여기 뭐하러 나왔느냐"는 항의성 질문에도 그는 "지금 재정신청이 진행중이기 때문에 답변에 제한이 있다는 것을 양해해달라"고 말했다.

세 번째는 적극 진술. 그는 민주당의 감금 등 인권유린 주장에 대해서는 적극 의견을 밝혔다. 김도읍 위원(새누리당)이 "(지난해 경찰 수사 당시) 왜 컴퓨터 노트북은 임의제출 했는가"라고 묻자, 그는 "당시 내가 감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오피스텔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억울한 측면이 있어서 제출했다"고 먼저 '감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답변했다. 그는 김민기 위원(민주당)의 질문에도 "나는 3일 동안 감금됐다, 가족을 만날 수 없었다, 음식물도 원할히 협조가 안 됐다"면서 "위급하고 무서웠고 공포스러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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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직원'의 모범답안 국가정보원 댓글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2차 청문회가 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렸다. 댓글사건 당사자인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가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이 적힌 자료를 보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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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모범 답안은 추측이 아니라 실체가 있었다. 사진 기자들의 카메라에 잡힌 김씨의 문서에는 예상 질문과 답변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사진으로 판독 가능한 답변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구체적으로 제가 쓴 글이 어느 글인지, 아이디어 어느 것인지 구분해서 말씀 드리기는 곤란합니다."
"쓴 뒤의 추적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재판) 중인 내용과 관련되어 있어 답변드리기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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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직원'의 모범답안 국가정보원 댓글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2차 청문회가 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렸다. 댓글사건 당사자인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가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이 적힌 자료를 보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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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 판문점사건의 진실과 허상

8.18 판문점사건의 진실과 허상
 
한호석의 개벽예감 <75>
 
한호석 통일학연소 소장
기사입력: 2013/08/19 [13:04] 최종편집: ⓒ 자주민보
 
 
▲ "판문점 사건"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도끼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

제5차 비동맹운동정상회의와 제31차 유엔총회, 그리고 판문점사건

1970년대에 북은 국제외교전에서 비약적인 상승세를 탔고, 미국은 추락을 거듭하였다. 그런 변화를 일으킨 국제관계의 원인은 아래와 같다.

첫째, 1960년대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반대하고 일어선 신생독립국들이 비동맹운동(북에서는 쁠럭불가담운동이라고 부름)에 결집하였는데, 비동맹운동 성원국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북은 전 세계 반제전선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가장 비타협적으로 투쟁하였으므로 그들이 북을 지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북의 국제적 위상은 비동맹운동의 지지에 힘입어 더욱 높아졌다.

둘째, 미국은 베트남전쟁의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패전하여 국제적 위상이 땅에 떨어졌고, 반제자주노선을 제시한 비동맹운동의 위세 앞에서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데 북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는 상승효과와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떨어지는 하락효과가 각각 극대화되는 두 가지 계기가 판문점사건과 각각 결부되었으니, 그에 얽힌 기묘한 사연은 이러하였다.

판문점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976년 8월 16일부터 나흘 동안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제5차 비동맹운동정상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그 회의에서 북은 비동맹운동 성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박성철 당시 정무원 총리와 허담 당시 정무원 외무상이 그 정상회의에 참석하여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와 미국 핵무기 철거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였다.

판문점사건 하루 전인 1976년 8월 17일 북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들은 미국이 남에서 모든 군사장비를 철수할 것과 대북침공위협을 중지할 것과 남에서 실시하는 군사연습 같은 도발행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는 대미결의안을 유엔총회에 상정하였다.

북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들은 1973년 12월 28일 제28차 유엔총회에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해체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1975년 11월 18일 제30차 유엔총회에서 주한유엔군사령부 해체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유엔의 이름으로 조작해놓았던 정치기구와 군사기구를 각각 해체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이다. 북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들은 그 여세를 몰아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미국이 남측에 배치한 핵무기를 철거시키는 결의안을 1976년 9월에 열리는 제31차 유엔총회에 상정해 놓았으니, 사상 최악의 외교적 패배로 궁지에 몰린 미국은 당황망조할 수밖에 없었다.

제31차 유엔총회를 며칠 앞둔 1976년 8월 30일 백악관에서 비상대책회의가 진행되었다.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당시 국무장관, 브렌트 스카우크로프트(Brent Scowcroft)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W. Scranton) 당시 유엔주재미국대사가 진행한 그 회의의 비망록이 2008년 12월 31일에 기밀해제되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대미결의안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은 31개국이었는데, 미국이 제출한 대북결의안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은 19개국밖에 되지 않아 곤경에 빠진 그들의 모습이 비망록에서 드러난다.

만일 판문점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1976년 8월과 9월에 각각 열린 비동맹운동정상회의와 유엔총회에서 주한미국군 철군과 남측 배치 미국 핵무기 철거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을 것이며, 그로서 미국은 국제외교전에서 만회하기 힘든 참패를 당하였을 것이다. 적대적 북미관계에서 미국이 사상 최악의 외교적 곤경에 빠졌을 때 판문점사건이 일어났고, 미국은 그 사건을 이용하여 외교적 곤경에서 빠져나오려고 총력을 집중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76년 판문점 미루나무 벌채사건 당시 북과 미군의 육박전, 쓰러진 미군이 인민군에게 짖밟히고 있는데도 옆의 두명의 미군은 돕기는 커녕 동료를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쁘다. 미군 측에서는 작업하기 위해 놓아둔 도끼를 인민군이 집어 들어 찍었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북은 미군이 먼저 도끼를 던지며 공격을 하기에 그 날아오는 도끼를 잡아 본격적으로 미군과 싸움을 벌렸다고 주장했다. 미군 측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서는 도끼나 무장없이 몸으로만 싸우고 있는데 표정만 봐도 인민군은 기세가 등등하다. 미군들은 쓰러진 동료를 버려두고 도망을 치거나, 의자 위에까지 몰려 더는 도망 못가게 되어 그런지 위자 꼭지에 털썩 주저 앉아 벌벌 떨고 있다. / 사진 자료 정설교 시인 제공 , 설명글은 자주민보 © 자주민보


새로운 사실을 밝혀주는 회고담

1976년 8월 18일 미루나무 가지치기작업을 지휘하던 미국군 경비병들을 인민군 경무원들이 도끼로 공격하여 그들 중 2명을 죽이고 다른 9명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 판문점사건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건현장 목격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래리 쇄딕스(Larry G. Shaddix)가 판문점사건에 관한 기존 서술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사건 당시 미국군 판문점경비대 병참장교였는데, 작업현장을 지휘하다가 피살된 아서 보니파스(Arthur Bonifas) 대위와 무전기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제5관측초소에서 사건현장을 사진기로 촬영하고 있었다. 쇄딕스는 2008년 7월 15일 인터넷에 실은 판문점사건 회고담에서 “지난 32년 동안 (판문점사건에 관한) 모든 책들과 기록들을 큰 관심을 갖고 읽어온 나는 (사건에 관한) 부정확한 정보가 출판된 것을 보고 놀랐다”고 지적한 바 있다.

쇄딕스를 비롯한 판문점사건 체험자들이 남긴 회고담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판문점사건의 진상을 보여주는데, 판문점사건과 관련하여 미국측에서 세 사람, 북측에서 한 사람이 언론에 회고담을 남겼다.

회고담을 남긴 미국인 세 사람은 위에서 언급한 래리 쇄딕스, 사건 당시 보니파스 대위의 운전병 겸 호위병이었던 마크 루트럴(Mark Luttrull), 사건 당시 미국군 판문점경비대 제3소대 기동타격대원으로 사건현장에 출동한 스티브 스프래그(Steve Sprague)다. 루트럴과 스프래그의 회고담은 2001년 8월 17일 <코리아 타임스>에 실렸다.

다른 한 편, 북에서 회고담을 남긴 사람은 사건 당시 인민군 경무원으로 사건현장에 출동한 박지선이다. 그의 회고담은 2012년 12월에 촬영된 북의 텔레비전 방송 소개편집물 ‘<도끼사건>의 주인공으로 영생하는 전사-전 조선인민군 군관 공화국영웅 홍성문’에 들어있다.


물리적 충돌 예측하고 사전준비 갖춘 미국군 판문점경비대

판문점공동경비구역 서쪽에 사천이라는 내가 흐른다. 사천의 물줄기를 따라 군사분계선(MDL)이 그어져 있고, 미국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 부르는 사천교가 북측 지역과 판문점공동경비구역을 연결한다. 1976년 8월 당시 사천교 부근에 키가 24m 정도로 크게 자란 수령 30년의 노르만디 미루나무(Normandy poplar tree) 한 그루가 서 있었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각, 미루나무 나뭇가지를 자를 작업반이 현장에 도착하였다. 작업반은 미국군 판문점경비대 병력 11명과 나뭇가지를 자르는 작업에 동원된 남측 민간인 5명으로 구성되었다. 민간인 5명은 미8군사령부가 고용한 한국노무단(Korean Service Corps)에 소속된 노동자들이었다.

판문점사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건 직전에 있었던 미국군 판문점경비대의 준비행동이다. 이에 관한 정보는 콘래드 디래터(Conrad DeLateur) 미국군 해병대 대령이 1987년 3월 미국 국무부의 대외업무단기강좌(Foreign Service Institute) 제29차 상급토론회에서 발표하였고 1989년 12월에 기밀해제된 연구보고서 ‘판문점에서의 살해: 위기해결에서 전역사령관의 역할(Murder at Panmunjom: The Role of the Theater Commander in Crisis Resolution)’에서 찾을 수 있다.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판문점경비대 지휘관 빅터 비에라(Victor S. Vierra) 중령은 보니파스 대위가 지휘하는 작업반을 현장에 보내기 직전 몇 가지 사전조치를 취하였다. 1개 소대병력으로 편성된 기동타격대를 작업현장에서 600m 떨어진 경비초소에 대기시킨 비에라 중령은 작업현장에서 인민군 경무원들과 충돌하면 기동타격대가 출동할 것이라고 보니파스 대위에게 일러두었고, 작업현장을 촬영하기 위해 미루나무 인근에 있는 다른 두 초소에 촬영담당인원을 각각 배치하였다. 이것은 미국군 경비병들이 인민군 경무원들과 물리적 충돌을 벌일 것에 대비한 사전준비였다.

비에라 중령은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것을 어떻게 그처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을까? 루트럴의 회고담에 따르면, 판문점사건이 일어나기 12일 전인 8월 6일 미국군 경비병 4명과 남측 노동자 6명이 미루나무 제거작업을 하려고 현장에 나갔으나 인민군 경무원들이 나타나 작업반을 위협하여 현장에서 쫓아냈다는 것이다. 12일 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므로, 비에라 중령은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사전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디래터의 보고서는 사건 당시 비에라 중령이 두 초소에 영화촬영기를 지참한 인원을 각각 배치하였다고 서술하였지만 그것은 사실과 조금 다르다.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자신은 “미국군 제5관측초소에서 사진기(camera)를 들고 사건현장을 촬영하였고, 자신이 찍은 현장사진들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판문점경비대 기술하사관으로 근무하던 티모시 그레이(Timothy Gray)의 회고담에 따르면, 자신은 사천교 인근에 있는 제3검문소에서 영화촬영기로 사건현장을 촬영하였다는 것이다.

그레이가 사건현장을 촬영한 흑백영화필름은 사건진상을 밝혀줄 결정적인 증거자료인데도, 미국은 그런 영화필름이 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또한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자신이 촬영한 현장사진들 중에 미국이 공개하지 않은 현장사진들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처럼 결정적인 증거자료들인 영화필름과 일부 현장사진을 공개하지 않은 까닭은, 그 미공개 자료들이 판문점사건에 대한 미국의 기존 서술내용을 뒤집는 장면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건현장에서 보니파스 대위의 지시에 따라 남측 노동자 5명이 미루나무에 올라가 가지치기작업을 막 시작하였을 때 촬영된 현장사진을 보면, 인민군 경무원 4명이 군용차(jeep)를 타고 현장에 도착한 장면이 나타난다. 처음부터 인민군 경무원 수 십 명이 군용트럭을 타고 사건현장에 몰려왔다고 서술한 것은 사실왜곡이다. 경무원 3명과 함께 현장에 도착한 인민군 군관은 박철 중위였다.


누가 곤봉을 사건현장에 가져갔을까?

박철 중위는 작업을 중지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미8군한국군지원단(KATUSA) 장교의 통역을 통해 작업중단요구를 전해들은 보니파스 대위는 그 요구를 거부하였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인민군 경비병들은 “이 나무를 찍자면 정전협정 합의조항에 따라서 사전에 우리와 합의를 하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는 것이다. 당시 군사정전위원회 미국군 특별고문이었던 이문항(제임스 리)의 회고담에 따르면, 판문점사건 다음날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서 인민군 대표는 “우리 경비병 4명이 그 곳에 가서 그 나무는 우리가 심고 기른 것으로 도로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라며 약 30분 동안 자르지 말라고 설득했었다. 그리고 반드시 잘라야 한다면 우리측과 상의해서 합의를 본 다음에 해야지 일방적으로 자르면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충돌에 대비한 사전준비까지 갖추고 현장에 나온 미국군 경비병들에게 인민군의 작업중단요구가 통하지 않았고, 양측의 발언과 행동이 차츰 격해지며 격앙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박철 중위는 만일 작업을 중지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경고하였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그 경고마저도 무시하고 가지치기작업을 계속 강행시켰다.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박철 중위는 경무원 한 명을 인민군 경비초소에 보내 증원병 출동을 연락하였고, 그에 따라 경무원들이 군용트럭을 타고 사천교를 건너 현장에 도착하였다. 증원병이 도착하자 박철 중위는 작업을 중지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미국군 경비병들을 위협하였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가지치기작업을 계속 강행시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물리적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고, 가지치기작업은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나뭇가지를 충분히 쳤냈을 때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물리적 충돌이 어느 쪽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 먼저 공격을 시작하였을까?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사건현장에 있던 미국군 경비병이 군용트럭을 몰고 인민군 경무원들에게 돌진하였다는 것이다. 미국군 경비병들의 작업강행에 화가 치민 인민군 경무원들은 자기들에게 차량을 돌진시킨 것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격분한 인민군 경무원들은 손목시계를 풀어 주머니에 넣으며 격투태세를 취하였다.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 긴박한 순간에 보니파스 대위는 인민군 경무원들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인민군 경무원들이 격투태세를 취하는지 알 수 없었고, 박철 중위가 “죽여”라고 소리치며 보니파스 대위의 사타구니를 걷어차는 것을 신호로 인민군 경무원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격자가 상대의 사타구니를 등 뒤에서 걷어차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위의 서술은 신빙성을 잃는다. 박철 중위가 보니파스 대위를 뒤에서 덮쳐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두들겨 팼다는 스프래그의 회고담이 사실에 더 가까운 상황묘사로 보인다.

디래터의 보고서와 스프래그의 회고담에 따르면, 격분한 인민군 경무원들은 도끼는 물론 칼, 곤봉, 쇠파이프, 곡괭이자루를 마구 휘두르며 공격하였다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쇄딕스가 촬영한 현장사진을 보면 칼과 쇠파이프를 손에 쥔 인민군 경무원은 보이지 않고, 도끼와 곤봉을 손에 쥔 인민군 경무원만 보인다. 멀리서 찍은 현장사진에서 곤봉과 곡괭이자루를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문제의 곤봉은 미국군 경비병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건 당일 판문점경비대 지휘관 비에라 중령은 12일 전 미루나무를 베어버리려다가 인민군 경무원들에게 제지당하고 쫓겨난 실패경험을 잊지 않고, 8월 18일의 물리적 충돌을 예상하여 그에 대비하여 몇 가지 사전준비를 갖추었는데, 작업현장에 나가는 미국군 경비병들에게 곤봉을 준 것도 그런 사전준비에 속한 행동이었다.

박철 중위가 보니파스 대위를 뒤에서 덮쳐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두들겨 패기 시작하자, 미국군 경비병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적들은 곤봉을 비롯한 흉기를 들고 집단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군 경비병들이 곤봉으로 인민군 경무원들을 제압하려고 한 것은 오산이었다. 판문점공동경비구역에서 근무하는 인민군 경무원들은 격술을 연마한 정예병들이다. 그들의 격술공격을 곤봉 따위로 제압해보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미국군 경비병들은 자기들이 휘두르던 곤봉을 인민군 경무원들에게 빼앗겼고, 결국 그 곤봉에 맞아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판문점공동경비구역 인근 북측 지역에 있는 정전협정조인장의 평화박물관에는 사건현장에서 인민군 경무원들이 격투 중에 빼앗은 미국군 경비병들의 곤봉이 도끼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영문자가 새겨진 미국산 도끼

판문점사건을 도끼사건이라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사건에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곤봉이 아니라 도끼였다. 미국측 자료들은, 남측 노동자들이 작업에 사용하다가 격투가 벌어지자 내던지고 달아난 도끼를 인민군 경무원들이 집어 들고 미국군 경비병들을 쳐죽였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아래의 정보를 살펴보면, 그러한 서술은 사실과 다르다.

문제의 도끼는 자루가 짧은 손도끼가 아니라, 자루가 긴 도끼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 도끼는 도끼날과 도끼자루를 합해 길이가 1m 25cm이고, 도끼날의 너비도 거의 20cm나 되는 것이다. 길이가 1m가 넘는 긴 도끼는 장작을 패거나 나무둥치를 찍는 벌목도구이지 나뭇가지를 치는 전지도구가 아니다. 작업현장에서 남측 노동자 5명은 미루나무 아래서 도끼로 나무둥치를 찍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나무에 걸친 사다리에 올라가 동력사슬톱(chain-saw)으로 나뭇가지를 잘라내고 있었다. 작업현장에 발동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박지선의 회고담에 들어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동력사슬톱을 사용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 날의 가지치기작업에 도끼는 필요하지 않았는데, 문제의 도끼는 어디서 온 것일까?

북이 정전협정조인장의 평화박물관에 전시해놓은 도끼를 촬영한 사진을 보면, 그 도끼날에 새겨진 ‘아메리카(America)’라는 영문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주한미국군에게 지급된 미국산 도끼인 것이다. 남측 노동자들이 미국산 도끼를 작업현장에 가져왔을 리 만무하다. 문제의 도끼는 미국군 경비병들이 타고 온 군용트럭에 실려 있었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 때 미제침략군 한 놈이 차에 달려있던 도끼를 조장 동무를 향해서 집어던졌”다는 것이다.

박지선의 회고담이 들어있는 소개편집물에는 판문점사건에서 격투를 벌인 경무원 홍성문이 자신의 전투기록장에 남긴 글이 소개되었는데, 그는 “나는 조장 동지를 향해 날아오는 도끼를 몸을 날려 잡아챘다. 순간 나의 눈에서는 복수의 불이 펄펄 일었고, 적들의 흰 철갑모와 이지러진 더러운 승냥이의 상통밖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고 썼다. 만일 미국군 경비병이 군용트럭에 있던 도끼를 집어 박철 중위에게 던지지 않았더라면 그 날의 충돌사건은 이전에 판문점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지곤 하였던 주먹싸움으로 끝났을 것이고, 판문점도끼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조장 동무 옆에서 적정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던 홍성문 동무는 잽싸게 도끼를 걷어쥐고 3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놈들을 네 놈이나 족쳐버렸”다고 한다. 홍성문이 미국국 경비병이 던진 도끼로 미국군 경비병들을 공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군 피살자 두 명이 그 도끼에 맞아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수 십 명이 서로 뒤엉켜 싸운 격투에서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을 구별해내는 것은 부검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미국이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미공개 현장사진들은 “북측 사람들이 곤봉으로 반장 보니파스를 때려죽이고, 반장 김씨(미8군한국군지원단 장교를 뜻함-옮긴이)가 그를 찾아내기까지 보니파스가 주차구역 한 복판에 홀로 남겨져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회고담은 미국이 말하지 않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첫째, 보니파스 대위가 도끼에 맞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목숨을 끊어놓은 치명타는 도끼가 아니라 곤봉이라는 점이다.

둘째, 격투 중 부상을 입은 미국군 경비병들이 집중공격을 받고 쓰러진 보니파스를 버려두고 모두 달아났다는 점이다.

보니파스는 현장에서 즉사하였지만, 또 다른 피살자인 마크 배럿(Mark T. Barrett) 중위는 현장에서 즉사하지 않았다.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중상을 입은 배럿을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4.5km 정도 떨어진 캠프 그리브스(Camp Greaves) 야전병원으로 자신이 데리고 갔고, 거기서 긴급의료수송에 쓰이는 군용헬기에 태웠을 때 그가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판문점사건 직후 북의 대응과 미국의 대응

판문점사건은 북미적대관계를 전쟁 직전 상황으로 끌어간 심각한 사건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세상에 알려진 것은, ‘도끼살해’에 대해 보복하려는 미국이 북에게 초강경하게 대응하였고, 궁지에 몰린 북이 미국에게 ‘사과’함으로써 전쟁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과설’이야말로 사건진상을 왜곡한 미국의 극본이었다. ‘사과설’과 관련하여 아래의 정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당시 판문점사건에 관해 보고를 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우리 경무원들의 행동은 응당한 자위적 행동이며 자랑할 만한 영웅적 행동”이며, “우리 인민과 영웅적 인민군대의 전투적 기상을 높이 보여주었다”고 치하하였고, 판문점사건에서 미국군 경비병들을 공격한 인민군 경무원들을 크게 표창하였다고 한다. 치하와 표창은 북이 궁지에 몰려 미국에게 사과하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미국은 판문점사건에 대응하여 문제의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폴 번연 작전(Operation Paul Bunyun)’을 실시하였는데, 그 작전이 끝난 직후 군사정전위원회 인민군 대표인 한주경 소장은 군사정전위원회 미국군 대표인 마크 프루든(Mark P. Frudden) 해군소장에게 “사적인 만남(private meeting)”을 요구하였다. 그 날 정오에 있었던 사적인 만남에서 한주경 소장은 프루든 소장에게 통지문을 읽어주었다. 이문항의 회고담에 수록된 통지문은 다음과 같다.

“판문점에서 오랫동안 큰 사건이 없었던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판문점공동경비구역에서 이번에 사건이 일어나서 유감입니다. 앞으로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측이 다같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당신측이 도발을 사전에 방지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측은 절대로 먼저 도발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발을 받을 때만 오로지 자위적인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측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한주경 소장은 위의 통지문을 프루든 소장에게 읽어줄 때,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위임에 따라” 통지한다고 밝혔으므로, 위의 통지문은 김일성 주석이 미국에 보낸 것이다.

미국은 김일성 주석이 자기들에게 통지문을 보낸 사실만 언급하였지만, 판문점사건 다음날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서 미국이 김일성 주석에게 공식적으로 구두메시지를 보냈으므로 김일성 주석의 통지문은 그에 대한 답장이었다.

김일성 주석이 미국에 보낸 답장통지문은 미국에게 사과의사를 표명한 게 아니라, 미국군 경비병들의 도발로 유감스러운 사건이 일어났으니 앞으로는 그런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미국에게 훈계한 것이다.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의 답장통지문을 전달받은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 리처드 스틸웰(Richard G. Stilwell)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부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도 미국은 북의 통지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1976년 8월 22일에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왜곡하고 ‘사과설’을 조작해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이다. 그는 북의 ‘유감표명’을 긍정적인 조치로 해석해야 한다는 긴급지시를 국무부에 내렸고, 그로써 미국 국무부는 불과 하루 만에 태도를 180도로 번복하여 미국이 북의 유감표명을 “긍정적인 조치”로 인정한다고 발표하였다. 키신저의 지시에 따라 국무부는 김일성 주석의 훈계를 유감표명으로 둔갑시키면서 자기들의 거부의사표명을 하루 만에 번복하여 수락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이 다급한 번복행위는 미국이 판문점사건으로 고조된 북미전쟁위험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음을 말해준다.

판문점사건 직후 미국은 북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당장 일으킬 것처럼 흥분했는데,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꿔 전쟁위험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일까? 미국의 그런 돌변행동에는 사연이 있다.

2010년 미국에서 출판된, 일본정책대학원 교수 미치시타 나루시게(道下德成)의 책 ‘북의 군사-외교활동(North Korea's Military-Diplomatic Campaigns), 1966-2008)에 따르면, 판문점사건 직후 북에서는 50살 미만의 제대군인들이 모두 복대하여 군복을 다시 입었고, 공장과 기업소들은 생산설비를 후방으로 이동시킬 준비를 갖추었으며, 1976년 8월 말부터 11월 중순까지 평양시민 약 20만 명과 황해남도 및 강원도의 약 8,000가구가 후방으로 이동하는 대규모 소개작전이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월간조선> 2013년 3월호에 실린 관련기사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 특전병들이 해상으로 침투하여 주한미국군기지들과 한국군기지들 주변에 매복하면서 기습타격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규모 소개작전과 선제기습타격준비는 평시군사훈련이 아니라 전면전에 돌입하는 마지막 단계의 전시군사행동이다. 미국을 상대로 ‘최후결전’을 벌이려는 북의 결심과 준비가 얼마나 단호하고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 판문점사건 직후 북을 위협하려는 무력시위를 며칠 동안 벌이다 슬그머니 물러간 미국과 달리, 북은 미국의 무력시위에 위축되기는커녕 선제기습타격으로 ‘최후결전’을 벌이는 전시군사행동단계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박지선은 회고담에서 “정말 그 때 우리는 전쟁이 막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고 말했다.

전면전 태세에 돌입한 북의 단호한 결심과 대규모 타격준비를 보고 덜컥 겁이 난 미국은, 느닷없이 훈계발언을 유감표명으로 둔갑시켜 그것을 받아들이는 돌변행동을 취함으로써 북미전쟁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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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G연습은 침략적.불법적 전쟁연습"

용산기지 등 전국 각지서 UFG 중단 촉구 기자회견 열려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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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8.19 17: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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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FG연습이 시작된 19일 서울 용산미군기지 앞에서 UFG연습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제공 - 평통사]
오늘(19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되는 ‘2013 한미연합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의 중단을 촉구하는 시민사회의 대응이 전국 각지에서 시작됐다.

 

서울에서는 19일 오전 11시 용산미군기지 2번 게이트 앞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이 한데 모여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UFG연습은 대북 (핵)선제공격을 포함한 침략적이고 불법적인 전쟁연습”이라고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전국농민회총연맹,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한국진보연대, 통합진보당 등은 공동 기자회견문을 통해 “UFG연습은 연례적인 방어연습이라는 한미연합사의 주장과는 달리 북한군 격멸과 북한정권 제거를 작전목적으로 하는 작전계획 5027과 한미연합 '국지도발대비계획', '북한 급변사태'에 대응하는 작전계획 5029에 따른 대북 공격연습”이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19일부터 22일까지 실시되는 정부연습인 을지연습은 ‘응전자유화계획’(충무 9000)에 따라 북에 대한 ‘안정화 작전’(점령통치)을 연습”하고 “UFG 연습에는 미군 3만명, 한국군 5만여명, 정부`민간인 40여만명 등 총 50여만명이 동원”된다며 “세계 최대 규모의 공격적 전쟁연습이 실전적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것”이라고 규탄했다.

 

   
▲ [사진제공 - 평통사]
 
   
▲ [사진제공 - 평통사]
특히 “작년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에서 선제타격전략을 최초로 공식 도입한 바 있는 한미군당국은 북한의 3차 핵실험 등 북한의 핵위협이 심각해졌다는 판단 하에 북한의 핵위기 상황 유형을 핵위협 단계.사용임박 단계.사용 단계 등으로 구분하여 각 단계별로 구체적인 타격 전략을 수립 중이며, 올해 UFG 연합연습에서 적용 및 검증하고 10월에 열리는 제45차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최종 승인할 예정”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우리는 한반도에 핵전쟁 위험성을 높여 평화를 위태롭게 하고 대미 군사적 종속을 심화하며 국민의 부담까지 강요하는 2013년 UFG연습을 즉각 중단할 것을 한미당국에 강력히 촉구한다”면서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폐기와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이를 위해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촉구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평통사 관계자는 “19일 저녁 7시 보신각에서는 전쟁연습 중단을 촉구하는 거리 캠패인이 진행되고 22일까지 미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가 계속된다”며 관심과 격려를 부탁했다.

이외에도 이날 인천시청과 수원역 중앙광장, 광주 군공항 입구, 전북도청, 부산 미국영사관 앞 등에서도 기자회견이 열렸으며, 파주시청, 광주시청, 무안군청, 목포시청 앞 등에서는 1인시위가 진행됐다.


   
▲ 한미연합군사령부는 UFG연습이 정전협정을 준수한 가운데 실시되며 통상적이고 연례적인 연습이라고 해명했다. [사진제공 - 평통사]
한편, 한미연합군사령부는 19일 보도자료를 통해 UFG 연습과 유사한 훈련 연습들은 한미상호방위 조약의 정신에 입각하여 정전협정을 준수한 가운데 실시된다고 전하고 이같은 통상적인 연습들은 연례적으로 한미 양국 간에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군사적 파트너 관계와 오랜 우의를 강조하고 한반도의 평화 및 안전보장을 확인하며 미국의 동북아에 대한 공약을 재확인시켜 준다고 밝혔다.

 

 

< 2013년 한미연합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전쟁연습 중단 촉구 공동 기자회견문(전문) >
한반도 핵전쟁 위험성 높이는 UFG 연습 중단하라!


한미연합사령부가 8월 19일부터 30일까지 2013년 한미연합 을지프리덤가디언(UFG)연습을 전개한다. 제임스 서먼 한미연합사령관은 “UFG 연습은 한미 양국군의 준비태세를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동맹간의 연습”이라며 “이 연습은 실전적인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범정부적 차원에서의 필수과업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UFG연습은 연례적인 방어연습이라는 한미연합사의 주장과는 달리 북한군 격멸과 북한정권 제거를 작전목적으로 하는 작전계획 5027과 한미연합 '국지도발대비계획', '북한 급변사태'에 대응하는 작전계획 5029에 따른 대북 공격연습이다. 이에 따라 평양 점령과 북한 최고지도자 생포 작전, ‘국지도발’의 경우 도발원점은 물론 지원세력과 지휘세력까지 타격, 북의 대량살상무기 유출시 한미연합군 투입하여 탈취작전 등을 연습한다.
이와 함께 19일부터 22일까지 실시되는 정부연습인 을지연습은 ‘응전자유화계획’(충무 9000)에 따라 북에 대한 '안정화 작전'(점령통치)을 연습한다.
UFG 연습에는 미군 3만명, 한국군 5만여명, 정부`민간인 40여만명 등 총 50여만명이 동원된다. 세계 최대 규모의 공격적 전쟁연습이 실전적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특히, 작년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에서 선제타격전략을 최초로 공식 도입한 바 있는 한미군당국은 북한의 3차 핵실험 등 북한의 핵위협이 심각해졌다는 판단 하에 북한의 핵위기 상황 유형을 핵위협 단계‧사용임박 단계‧사용 단계 등으로 구분하여 각 단계별로 구체적인 타격 전략을 수립 중이며, 올해 UFG 연합연습에서 적용 및 검증하고 10월에 열리는 제45차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최종 승인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국은 2010년 핵태세보고서(NPR)에서 부시정권의 대북 핵 선제사용(First Use) 전략을 그대로 유지했고, 이를 구체화하는 대북 핵선제 공격계획인 ‘OPLAN 8010'과 북의 대량살상무기(WMD) 확산저지 작전계획인 ’CONPLAN 8099'을 세우고 B-2, B-52 전략폭격기 등을 동원하여 한반도에서 핵전쟁연습과 대량살상무기 탈취훈련을 수시로 벌여왔다. 한국도 이에 보조를 맞춰 선제공격 전략인 ‘능동적 억제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미당국은 대북 선제타격을 핵심으로 하는 ‘킬 체인(Kill Chain)’을 2015년 이전에 구축하기로 하고 각종 무기체계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또 한국군 이지스 구축함이 수집한 정보를 미국에 제공해 온 데 이어, '한국형 MD'(AMD-Cell)와 주한미군 TMD(TMO-Cell)를 연동시키고, SM-3 요격미사일 도입을 추진하는 등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로 포장된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MD 구축을 가속화하고 있다.
한미당국이 대북 (핵)선제공격 전략과 작전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할 타격체계를 갖추어 수시로 이를 연습하면 당연히 한반도에서의 핵전쟁 위험성은 그만큼 높아져 한반도의 평화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밖에 없다.

한미연합사는 호주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 등 7개국의 유엔군사령부 파견국이 참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정전협정 이행 및 준수 여부를 확인`감독하는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스위스와 스웨덴 요원들도 이 훈련을 참관한다고 한다. 이는 2010년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가 "필요시 유엔사와 전력을 제공하는 국가들을 연합연습에 참여시킨다"는 내용의 한미 국방협력지침에 서명한 데 따라 2011년부터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형식적으로 정전협정 관리만 해오던 유엔군사령부(UNC)에 대해 2006년 전작권 전환 합의 이후 지속적으로 전시임무 복원을 추진하는 이유는 미군이 전작권 이양과 관계없이 유엔사를 존속시켜 한국군에 통제력을 행사하려는 데 있다. 나아가 유사시 유엔사 이름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북에 대한 점령통치를 함으로써 국제법적 논란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50여만명이 동원되어 북한군 격멸과 북한 최고 지도부 생포, 안정화작전을 수행하는 UFG연습은 그 자체로 유엔헌장이 금지하는 ‘무력의 위협(2조 4항)’에 해당한다. 평화통일의 사명을 명시한 헌법 전문, 평화적 통일정책 추진을 규정한 헌법 4조,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 헌법 5조에도 위배된다. 정전협정 상 ‘적대행위 금지’(2조 12항), ‘군사인원 및 작전비행기 등 무기 증원 금지’(2조 13항 ㄷ, ㄹ목) 규정 위반이기도 하다. 평화적 통일, 상호 체제 인정과 존중을 규정한 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선언 등 남북합의에도 위배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미군주둔비부담(방위비분담) 협상 과정에서 북핵 문제로 인해 전략 폭격기 등의 한반도 전개와 한미연합 군사훈련 등으로 연합방위력 증강에 소요되는 비용이 크게 늘어났다는 이유로 한국 부담의 대폭 증액을 요구했다고 한다. 미국은 북핵을 빌미로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스스로 증폭시켜놓고 이를 핑계로 한국에 비용 부담을 요구하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번 UFG연습은 대북 (핵)선제공격을 포함한 침략적이고 불법적인 전쟁연습이다. 미국은 이 같은 연습을 위해 비용 부담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한반도에 핵전쟁 위험성을 높여 평화를 위태롭게 하고 대미 군사적 종속을 심화하며 국민의 부담까지 강요하는 2013년 UFG연습을 즉각 중단할 것을 한미당국에 강력히 촉구한다. 나아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폐기와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이를 위해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촉구한다.

2013. 8. 19.

2013년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전쟁연습 중단촉구 공동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 노동인권회관, 노동자연대다함께,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민주노동자전국회의,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불교평화연대, 사회진보연대, 새물약사회,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빈민연합,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여성연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통일광장, 통합진보당,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화해통일위원회, 한국진보연대, 한국청년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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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를 촛불투쟁의 상징으로 만들어야

구심점 없이 가는 촛불, 무조건 실패한다
 
[김갑수 칼럼] 이정희를 촛불투쟁의 상징으로 만들어야
 
김갑수 | 2013-08-19 13:06:5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2008년 촛불은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시간을 오래 끌고 사람을 많이 모아 운동단체·시민단체의 존재감을 부각한 것이 성공이라면 성공일 수 있겠다. 결과 거기서 이름을 낸 사람도 적지 않고 더불어 국회의원도 나온 것으로 안다. 그러나 촛불시민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 이명박의 ‘아침이슬’ 사과뿐이었다. 그리고 불과 일주일 후 이명박은 ‘촛불이 정보전염병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2008년의 재현을 원하는가? 아마도 운동단체·시민단체 간부들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처럼 그렇게 시간이 남아도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노골적으로 묻는다. 왜 이정희를 N분의 1 정치인으로 묶어 두려 하는가…? 왜 통합진보당을 N분의 1 단체로 치부하는가? 당신들이 민주당의 눈치를 살피는 이유는 뭔가? 이정희와 통합진보당이야말로 지금의 국정원 촛불을 일궈낸 1등 공신 아닌가?

구심점이 없는 투쟁은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역사의 철칙이다. 2008년 촛불이 실패한 이유도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화제라고? 사과하라고? 대선불복은 아니라고? 개혁하라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들 그만 해라. 시민과 광장을 팔아 장사하지 마라. 안철수는 논외로 하더라도 문재인이나 김한길이 지도자가 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이미 그들은 투쟁의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았는가?

 

▲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6일 오전 청와대 앞 분수광장에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민중의소리

이정희가 문재인·김한길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는가? 그들보다 순수하고 그들보다 명민하며 그들보다 치열하고 그들보다 진실하며 그들보다 헌신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왜 이정희를 견제하는가? 알량한 지금 그 자리를 내놓기가 그토록 아까운가? 한 가지 이정희의 통합진보당이 민주당보다 소수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소수이니까 키워야 하는 것 아닌가? 세상의 어떤 큰 지도자도 모두 소수집단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은 없다.

거듭 말하지만 구심점 없는 투쟁은 십중팔구 실패한다. 그 구심점으로서 이정희는 충분한 자격이 입증되었다. 촛불투쟁이 성공하기를 원하는가? 범죄자들이 처벌 받기를 원하는가? 국정원이 해체되기를 원하는가? 대통령을 갈아치우기를 원하는가? 정말 원한다면 이정희를 구심점으로 삼아야 한다.

▲ 17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제8차 범국민촛불대회 '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찿습니다'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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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원래 이런 사람? 과거와 바뀐 정치인,누군가 보니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8/19 11:08
  • 수정일
    2013/08/19 11:0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인터넷에서 정치 사회 분야 글읽기를 좋아하는 분 중에 ‘아이엠피터’라는 블로거를 모르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일선 취재기자보다 더 밀도있는 취재와 깊이있는 분석력으로 이미 정계 언론계에까지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아이엠피터, 최근 시국을 어떻게 관망하고 있는지 만나보겠습니다. 본명은 임병도 씨인데요,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만나보겠습니다. 아이엠피터님!

1. 저도 ‘라디오비평’ 등 국민TV라디오 다른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엠피터 님의 블로그를 자주 인용합니다만, 어떻게 이런 방대하면서도 정확한 자료를 찾으시는지 놀랄 때가 많습니다. 노하우를 일러주신다면...

형사가 단서 하나를 가지고 범죄자를 찾는 수사기법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제를 선정하면 그 주제에 관한 모든 자료를 일단 찾습니다. 하나의 정치적 사건에는 수십,수백개의 자료가 존재하고, 그 수백,수천의 자료 중에는 분명 정치적 사건의 핵심을 알려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결국, 노하우는 24시간 그에 관한 자료를 찾아내는 끈질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자료를 검색하시면서 과거와 오늘의 입장이 확연히 달라진 표리부동 인사 베스트 1,2,3위를 꼽으신다면요.

먼저 3위는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입니다. 과거 그가 쓴 칼럼을 보면 대부분 문재인,안철수,진보세력을 비난하는 막말과 박근혜 대통령의 찬양이었습니다. 그는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말을 단순히 옮기는 입이 아니라, 대통령과 정권의 수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얼굴이자, 분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종편과 칼럼에서 막말할 때에는 대단한 정치평론가처럼 보였고, 진보진영 공격수로 환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윤창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새누리당과 보수는 내가 하는 말은 '칼럼,정치평론'이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막말'이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2위는 한광옥,김경재,한화갑 등 속칭 동교동 가신입니다.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살아 계실 때는 마치 진보세력처럼 보였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시자, 잽싸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로 달려갔습니다.

김경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대통합수석부위원장은 '48%도 중요하지만, 우선 51%를 대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진보를 공격하고 비난했습니다.

이들은 원래 진보의 탈을 쓴 보수에 불과했고, 대한민국의 보수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례를 남긴 정치인들로 볼 수 있습니다.

대망의 1위는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그녀의 변신은 대선 전과 대선 후로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국민소통을 입에 달고 살지만, 기자회견이나 국민과의 대화는 찾아볼 수 없었고, 공약은 이미 계속 폐기되고 있습니다.

국민대통합을 위한 탕평책을 펼치겠다면서 '유신의 잔재'인 김기춘 비서실장을 등용한 모습은 앞으로 철옹성을 쌓아 놓고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아마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집보다 더 잘 팔리는 것은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100가지 노하우'이런 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3. 지금부터 시국 현안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국정조사, 아직도 기대를 걸고 계신지요. 지난주 금요일 원판 청문회 보신 소감을 곁들여서 말씀해주신다면...

한 마디로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증거를 제시하고 글을 써도, '넌 노빠, 빨갱이,종북이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에게는 선악의 개념이 없습니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춘천지검 부장검사 출신입니다. 이런 그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증거를 보고 원세훈을 향해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최현락 전 서울경찰청 수사과장,이광석 전 수서경찰서장,권은희 전 수서경찰서수사과장, 댓글 분석관과 국정원 직원들이 출석합니다. 오늘 새누리당은 분명 특공무술에 천리행군 등 특수훈련을 받은 국정원 요원을 갸녀린 여성으로 둔갑시켜 '범죄 인멸'을 '감금'으로 왜곡할 것입니다.

앞으로 국정조사는 범죄자를 변호하려는 새누리당의 방해공작으로 그저 성과 없이 끝날 것이고, 23일 예정인 국정조사 결과보고서도 채택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 가닥 희망을 품었던 국정조사, 지난 금요일 이후로 포기했습니다.

4. 이번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새누리당에게 민주당이 크게 밀렸다는 평가가 적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속칭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터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민주당이 무조건 약체이기보다는 술에 취해 막무가내에 큰소리치는 주폭을 일반시민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일과 똑같다고 봐야 합니다.

민주당은 설마 새누리당이 노골적으로 범죄자들을 옹호할까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래 자신들의 이익과 범죄를 숨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점을 놓쳤다고 봅니다.

주폭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제압술이 필요한데, 민주당은 그런 제압술이 없었습니다.

 

 

 



5. 민주당의 대응수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장외투쟁을 접을 수도 없고, 더 강경하게 나가자니 카드는 마땅치 않고, 아이엠피터님이 만약 김한길 대표라면 모종의 카드를 꺼내야 할 이 시점에 무슨 대응책을 내놓으시겠습니까?

만약 제가 김한길 대표라면 시청앞 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를 전제로 단식투쟁을 할 것입니다. 언론이 엉망이라도 제1야당 대표가 땡볕에서 단식투쟁을 하면 보도할 것이고, 일반 국민들은 '저 정도면 진짜 부정선거였고, 문제가 있었다'고 인식할 것입니다.

지금이 독재시절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런데도 그때처럼 목숨걸고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라면 내 한목숨 걸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배수진을 쳐야 합니다.

6. 새누리당의 뻔뻔함에 혀를 내두른 국민이 적지 않았습니다. 원판 두 사람을 옹호해주는 태도가 그러한데요. 적어도 저런 강한 멘탈은 민주당이 본받아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니까요. 이들의 민심을 역행하는 행태, 그 배경은 어디에 있다고 봐야 할까요?

예전에 인기있던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에 고등계 형사 스즈끼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조선인을 체포,고문했던 민족의 배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해방 후 경찰로 그대로 근무하면서 오히려 독립투사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며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새누리당과 같은 대한민국 보수는 자신들이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저지르는 행위는 범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버젓이 할 수 있는 이유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가치관 때문입니다.

드골은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를 처단하면서 '이제,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프랑스를 배신하는 프랑스인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한국은 '대한민국은 배신할지언정, 박근혜를 배신하면 출세하지 못한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민심을 역행하는 배경이자 원인입니다.

7. 최근에 “촛불집회에 '문재인'이 나서야 한다”는 글을 올리셨습니다. 문재인 의원이 나서면 여권의 대선불복이라는 공세는 더욱 집요해질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당연히 그러겠죠. 그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프레임을 이제 무시해야 합니다. 3.15부정선거에 국민이 선거를 다시 하라고 했던 것이 '대선불복'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범죄를 처단하기 위한 민주주의 시민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지금 전국적으로 수십만의 사람들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법적인 제재와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국민의 심판밖에는 없습니다.

국민이 나설 때 지도자는 반드시 그들과 함께 싸우고 손을 잡아줘야 합니다. 문재인 의원이 새누리당의 '대선불복' 프레임이나 민주당 지도부의 눈치를 볼 시간은 지났습니다.

이제 국민만 바라보고, 그들과 함께해야 할 시간입니다.

8. 촛불의 파고, 제주에서 보실 때 어떻습니까?

처음 제주시청에서 촛불집회가 열렸을 때, 스무 명도 채 나오지 않았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그것을 바라보면서 너무 안타깝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점점 숫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촛불집회가 박근혜 대통령의 고향인 대구를 비롯한 전국에서 꾸준히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원세훈,김용판의 국정조사 증인 선서 거부를 보고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람이 많았듯이, 어떤 계기가 되면 더 많은 국민이 참여할 것입니다.

9. 지난 대선에서의 선거 부정 과정을 지적한 글도 적지 않게 올리셨는데요, 일각에서 주장하는 개표 부정과 관련해서는 캐보실 생각이 없으셨는지요.

지금 자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개표 부정과 같은 사안은 철저히 검증하고 제대로 터트려야 합니다. 지난 국정원 댓글 사건이 처음 나왔을 때, 초원복집 사건처럼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됐고요. '

[정치] - '국정원 12,12사태'와 직무유기 '선관위'

'유권소' (유권자 권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모임)와 각종 게시판,SNS에서 올라오는 제보를 나름대로 계속 검토하고 있으며, 관련 자료 중에서 몇 가지는 신빙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보공개 청구 등의 자료를 더 모아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10. 안철수 의원의 최근 행보,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안철수 의원이 그에게 닥친 위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는 안철수 의원이 갑자기 사안에 대해 빠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안철수 의원의 침묵은 다른 세력을 가진 사람과 다릅니다.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은 권력이 있으니 버티는 것이고, 문재인의 침묵은 기다림이지만, 안철수 의원의 침묵은 답답함입니다.

안철수 의원이 새로운 정치를 하려고 정치를 시작했지만, 보여주는 것이 없으면 국민은 지칩니다. 그가 새로운 정치인으로 나섰다면 반드시 새로운 정치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으며, 그 기다림이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11. 개인 일상사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가장 많이 들르는 사이트는 어디신지요?

가장 많이 가는 사이트는 새누리당 사이트입니다. 그쪽은 보도자료를 안 주니, 제가 직접 가서 찾아야죠. 조선,동아,중앙도 자주 갑니다. 아침마다 꼭 모니터링도 하고,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말과 전략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적을 아는 것이 승리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듯이, 도대체 집권세력의 문제가 무엇이고 그들이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늘 알기 위해 새누리당과 조중동 사이트를 자주 갑니다.

12. 가장 신뢰가 가는 언론매체는 무엇입니까? 반면 가장 불신하는 것은요?

신뢰가 가는 언론은 100%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안에 대해 조사하다보면 언론들 스스로 제각각의 수치와 자료를 내놓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불신하는 언론은 뉴데일리입니다. 보다보면 언론이 아니라 무슨 낙서 같아요.

마치 초등학생이 화장실 담벼락에 '누구와 누구는 사귄데요'라는 낙서처럼 그냥 제멋대로 마음껏 휘갈기는 기사들로 가득찼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런 언론사가 네이버에 뉴스로 나온다는 점입니다.

13. 가장 좋은 검색 습관, 즉 읽기 노하우를 일러주신다면요.

행간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A라는 사건의 자료를 모두 찾아 놓고 보면 수백 개의 자료 중에 숨겨진 코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박근혜 대통령이 고등학교때 선박 진수식을 위해 토요일에 갔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원래 진수식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고등학생이었던 박근혜양을 위해 진수식을 토요일로 옮긴 것이 과연 그녀의 학업을 위한 배려인지, 아니면 독재정권에서 벌어지는 일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누군가의 인터뷰와 기사 중에서 단어 하나를 범죄 수사의 단서로 생각하고 계속 수사한다는 생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 사건을 파헤치는 수법으로 글을 읽거나 자료를 찾으면 대단히 흥미롭고 남들이 알 수 없는 일들을 발견해낼 수 있습니다.

14. 전업블로거로서 그에 합당한 수익도 있으신지 궁금해집니다.

제주에서 가족들이 굶지 않고 살 정도는 됩니다. 원고료와 강의료보다는 후원금이 더 많으며, 대략 150~200만원이 채 안 됩니다. 취재를 위해 오가는 교통비가 많이 들어 실제 집에서 쓸 수 있는 돈은 더 적지만, 그래도 제주에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15. 성공한 1인 미디어 리더로서 앞으로의 포부, 계획이 있다면요.

블로그와 트위터,페이스북,게시판에 글을 쓰는 분들을 위한 시민기자 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 우리 주변의 이야기도 뉴스가 될 수 있는 세상인데, 글을 쓰는 방법이나 전파하는 노하우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킨을 시켰는데 다리 하나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치맥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뉴스입니다. 그런 얘기를 뉴스처럼 만들 수 있는 시스템과 시민기자를 키우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파워블로거 아이엠피터님을 이 아침에 초대해 시국 현안과 일상사를 나눠봤습니다. 아이엠피터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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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투자 "국민연금과 협의"? 국토부의 거짓말

[단독] KTX 투자 "국민연금과 협의"? 국토부의 거짓말

국민연금 고위 관계자 "투자 협의 없어…예의상 접대 미팅"

박세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8-19 오전 10:14:37

 

 

국민연금이 정부가 추진하는 '수서발 KTX 쪼개기'에 투자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힌 것으로 19일 알려졌다. 또한 국토부가 "국민연금과 협의했다"고 사전에 밝힌 것도 사실 "예의상 접대 미팅"에 불과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간 국토부는 국민연금과 사전에 "협의했다"고 주장하고 이와 달리 국민연금 측은 "협의한 적이 없다"고 해명해왔는데, 국민연금 측에서 수서발 KTX 법인 투자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프레시안> 취재 결과 지난 7월 26일 철도노조 관계자 등과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 관계자 등이 국민연금기금운영본부에서 만난 것으로 확인됐다. 수서발 KTX 운영사 선정과 관련해 국토교통부가 '연기금을 포함한 공적 자금이 70%의 지분 투자를 하기 때문에 민영화가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과 관련해 국민연금의 입장을 듣기 위해서였다.

앞서 국토부는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지난 4월 23일 국민연금 측과 협의"했다고 밝혔다. 마치 국토부와 국민연금이 사전에 교감을 나눴다는 것처럼 읽힌다. 그러나 당시 참석자 등에 따르면 국민연금 측 고위 관계자는 7월 26일 철도노조 관계자 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토교통부(세종시 소재) 담당자가 서울에 출장을 왔기 때문에 예의상 '접대 미팅'을 한 것이다. 당시 미팅을 한 사람은 기금운용본부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다. (국토부 측으로부터) 문서 등 자료가 제시되지도 않았고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 상부에) 보고할 만한 내용도 없어서 면담한 사실조차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당시 담당자가 국토교통부에 설명한 내용은 '기금 운용 절차상 정부 부처와 직접 협상은 불가하고 국민연금 단독으로 투자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기금으로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금 운용사를 포함한 시장에서 검토와 제안'이 있어야 한다."
 

▲ 수서발 KTX 운용사 설립 자체가 가능한지, 국토부가 제시한 방안대로 투자가 이뤄질 수 있을지 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연합뉴스


국토부 "국민연금과 협의"? 국민연금 "협의한 사실 없다"

국민연금의 입장은 사실 예측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국토부는 기금운용본부에서 "가장 젊은" 직원을 만나 상부에 보고될 가치조차 없는 미팅을 진행해놓고, 마치 국민연금과 공식 협의를 진행한 것처럼 발표했다.

국민연금 고위 관계자는 "(원래 국민연금이) 정부 부처와 직접 투자 상담을 하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 되면 연기금이 정부 쌈짓돈처럼 보이게 되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인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토부는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국토부가 주장하는 방식으로 연기금 투자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국토부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 이 같은 의미 없는 면담을 진행한 후 '협의했다'고 발표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수밖에 없다. 국토부가 '쇼'를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국토부는 앞서 수서발 KTX 법인을 세우겠다고 발표하며,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할 경우 그 지분을 매각하지 못하도록 묶어놓겠다고 발표했었다. 서승환 국토부 장관도 취임 100일을 맞아 지난 6월 19일에 연 기자 간담회에서 "수서발 KTX는 코레일 30%(를 출자하고), 연기금이 70%를 투자하는 형태로 설립할 계획이며 연기금이 투자한 부분은 절대 민간에 지분을 매각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국민연금 측은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연금 고위 관계자는 "(현재) 기금이 안정적이지 않다.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기금이 고갈될 것이라는 예상이 있다. 이런 경우에 자금이 한 곳에 묶여 있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했다. 한마디로 수서발 KTX 자회사 자체가 투자처로 매력이 없다는 말이다.

국민연금 고위 관계자는 또 "투자 여부를 결정할 때 이윤은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하여 7 ~8%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사업이 어느 정도 운영되어 자금 흐름이나 사업성 등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을 때 투자 여부를 검토한다"며 "특히 정부는 투자 대상으로서 매우 불안정하다. 정책 변화에 따라 상당한 손실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국토부가 '자신감'을 보인 배경도 의문이다. "기획재정부, 보건복지부, 국민연금 등을 통제할 수 있는 정부 최고위급으로부터 재가를 받은 것 아니냐", "청와대와 같은, 철도 민영화를 기획하는 최고위의 어떤 '선'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같은 대화가 오간 것과 관련해 국민연금 측은 "7월 26일 면담을 한 것은 맞다"며 "국토부와 협의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고, 국민연금의 원론적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프레시안>은 국토부의 입장을 듣고자 여러 차례 연락했으나, 담당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오건호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은 "국토부가 70%의 공적 자금을 끌어오겠다는데 정작 '협의'했다고 언급된 당사자는 투자 계획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며 "이를테면 아파트를 짓는데 투자자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투자가 이뤄질 것처럼 얘기한다면 사기 행위가 된다"고 말했다. "이는 정부가 나서서 시장을 교란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문제며, 사기 행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오 실장은 "수서발 KTX 법인에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투자되는 부분은 보건복지부 장관 소관의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를 반드시 거치도록 건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드러나는 국토부 꼼수들…수서발 KTX 투자, 가능하기는 한가?

국토부의 '수서발 KTX 법인' 설립 계획이 초반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국토부의 구상대로 '철도 발전 방안'을 추진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할 코레일의 사장 공모는 벌써 '낙하산', '외압' 논란으로 흔들리고 있다. '철도 민영화'에 부정적인 전임 정창영 전 사장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표를 낸 후 국토부의 '꼼수'가 하나둘 드러나는 모양새다.

국토부 계획대로라면 수서발 KTX 법인은 올해 안에 설립돼야 한다. 그러나 연기금은 투자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만약 연기금이 갑자기 투자에 참여하게 될 경우 그 정치적 배경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정부가 무리하게 '철도 민영화'를 밀어붙이고 있다는 역풍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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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대학살' 한 달 반, 미국은 무엇을 했나

'원조중단' 카드 만지작 거리기만... 실효성 없어

13.08.19 09:33l최종 업데이트 13.08.19 09:33l

 

 

7월 8일. 이집트 군부는 연좌농성을 하고 있는 무르시 지지자 60여명을 상대로 발포했다. 군부가 무함마드 무르시 전 대통령을 축출한 지 닷새 후였다. 친 무르시 세력의 저항이 거세지자 7월 24일 이집트 군부 수장인 압델 파타 엘 시시 국방장관은 국영 TV로 생중계된 연설에서 "(무르시 지지자들의) 폭력과 잠재적 테러리즘에 맞설 권한과 지위를 (정부에) 부여할 수 있도록 거리로 나와 달라"고 촉구했다. 26일 반무르시-친무르시 세력의 충돌이 발생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80명 이상이 숨졌다. 두 번째 대량 살상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여가 지난 8월 14일, 이집트에서는 '대학살'이 일어났다. 무르시 지지자들이 연좌농성을 하고 있는 두 곳의 농성장을 보안병력이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과도정부 공식 통계로만 600명이 넘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수는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뉴욕타임스> "미 정부의 외교노력, 모두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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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군부가 친무르시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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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가 무르시 전 대통령을 축출했을 때, 그리고 이후 대량살상이 발생할 때마다 국제사회의 시선은 미국에 쏠렸다. 이집트는 미국에서 연간 16억 달러의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받고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군부가 미국의 암묵적인 승인을 받고 '쿠데타'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17일 이집트 사태에 대한 미국 정부의 그간의 대응을 분석하면서 "미 정부가 했던 모든 노력은 이집트 역사상 최악의 정치적 유혈사태를 막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호스니 무바라크에 이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무르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이슬람주의에 편향된 정책으로 반대세력의 비판을 받아왔다. 지난 봄,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한 존 캐리 국무장관은 무르시 당시 대통령에게 반대파와 접촉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러한 '위협'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겠다는 무르시의 의지를 오히려 강화시켰다고 <뉴욕타임스>는 무르시 측근의 발언을 인용해 전했다.

무르시의 '독단'이 이집트 경기침체와 맞물리자 6월 말,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의 반정부 세력이 무르시 퇴진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군부개입 움직임이 나타나자 미 정부는 '원조중단' 가능성을 시사했다. 7월 3일, 군부는 이집트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무르시를 감금하고 대통령의 자리에서 끌어냈지만 오바마 정부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이집트 군부에 권력을 민간에 이양하라고 압박하면서도, 군부의 행위가 '쿠데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했다. 이러한 태도는 계속 이어졌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두 번째 대량학살이 일어난 뒤였다. 카타르, 아랍 에미리트 연합,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이스라엘은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정'은 이집트 사회 내 갈등 중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에미리트는 앞에서는 '화해'를 말하면서 뒤로는 이집트 보안병력에게 친무르시 세력 진압을 촉구했고, 압둘라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외무 장관은 미국을 방문해 이집트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또한 이집트 군부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스라엘 역시 미국의 이집트 원조 지속을 위해 로비를 펼쳤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지난 달 랜드 폴 상원의원이 이집트 군사원조 중단 법안을 상정하자,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인 로비단체인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는 7월 31일 의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는(원조 중단은) 이집트에서 불안을 높일 수 있고 미국의 이익을 저해하며 우리의 이스라엘 동맹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결국 이 법안은 86 대 13으로 부결되었다.

"미국이 원조를 끊는 폭력의 기준점은 어디인가"

지난 35년 간 이집트는 미국 중동외교의 핵심지역이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알카에다의 영향력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친미국가'인 이집트 군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인도주의적 접근보다는 국가의 이익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집트 군부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은 시시 이집트 국방장관과 최근 거의 매일 1시간~1시간 30분 동안, 총 17통의 통화를 했다. 통화에서 헤이글은 시시에게 민정이양을 압박했다. 이에 시시는 오바마 정부가 이슬람주의자들이 이집트와 군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불평했다고 미 관료는 전했다.

미 정부는 이집트 과도정부의 몇 안 되는 '온건파'를 포섭하고자 했다. 과도정부 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전직 외교관 모하메드 엘바라데이가 그 대상이었다. 7월 26일, 두 번째 대량 살상이 일어난 이후 엘바라데이는 부통령직 사임을 원했다. 하지만 존 캐리 미 국무장관이 이를 만류했다. 엘바라데이가 과도정부 내 강경파를 제어할 수 있는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엘바라데이는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지난 14일 대학살 이후 결국 사임했다.

지난 4일, 캐리는 국무 부장관인 윌리엄 번스를 이집트에 보냈다. 이후 번스와 유럽연합의 베르나디노 레온 이집트 특사는 중재안을 마련했다. 레온 특사는 무르시 전 대통령의 조언자인 아므르 달라크를 만나 수감돼있는 2명의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들을 풀어주겠다고 말했다. 대신 무슬림 형제단은 농성장소를 2개의 캠프로 한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풀려나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6일 존 매케인과 린제이 그레이엄 상원의원이 이집트를 방문했다. 의원들은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 석방과 조속한 민정이양을 촉구했지만 군부의 반응은 냉담했다. 다음날인 7일, 과도정부는 "국제사회의 중재노력은 끝났다"는 내용의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있을 폭력사태는 친무르시 세력의 책임이라고 천명했다. 달라크는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과 유럽사회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당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단지 쿠데타 정부가 '협상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주장하기 위해 불려왔다. 그리고 실제로 협상은 없었다."

9일 오후, 헤이글 장관은 시시에게 또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90분 동안 통화를 했고 헤이글은 폭력에 반대하고, 집회의 자유를 존중하며, 민정 이양이 필요하다는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4일 대학살 이후 오바마 대통령은 다음 달로 예정됐던 '브라이트 스타' 합동군사훈련을 취소했지만 원조 중단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미 의회에서는 이러한 오바마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한 군사 관계자는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미국이 원조를 끊는 폭력의 기준점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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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평통 대변인 담화, 실무접촉 장소 모두 ‘금강산’으로 제의

北, 이산가족 수용.. 금강산 관광 제안

조평통 대변인 담화, 실무접촉 장소 모두 ‘금강산’으로 제의

이계환 기자 | k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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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8.19 02: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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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이 18일 우리 정부가 제안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실무접촉 제안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회담도 제안했다.

<조선중앙통신> 18일발에 따르면, 북측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이날 대변인 담화를 통해 “오는 추석을 계기로 금강산에서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을 진행하며 10.4선언 발표일에 즈음하여 화상상봉을 진행하도록 한다”면서 “이를 위한 북남적십자 실무회담은 남측의 제안대로 23일에 개최하도록 하며 장소는 금강산으로 하여 실무회담기간 면회소도 돌아보고 현지에서 그 이용대책을 세우도록 한다”고 밝혔다.

실무접촉 장소는 우리 정부가 제안한 판문점 내 남측 지역인 ‘평화의 집’ 대신 ‘금강산’에서 하자고 수정 제의한 것이다.

특히, 조평통은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북남당국 실무회담을 개최하도록 한다”고 제의하면서 실무회담 날짜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실무접촉 하루 전인 22일에 역시 금강산에서 할 것을 제의했다.

아울러 조평통은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실무회담에서는 관광객 사건 재발방지 문제, 신변안전 문제, 재산 문제 등 남측의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협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외에도, 조평통은 “조선반도의 평화와 민족공동의 번영을 위한 사업을 활성화하도록 한다”면서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제반 사업들을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벌려 북남사이의 동포애적 유대를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남북 교류 의지를 피력했다.

조평통은 위 세 가지를 수용, 제안하면서 “이상의 우리측 제안이 실현되면 북남관계가 크게 전진하게 될 것이며 북남사이의 신뢰가 보다 증진되고 통일의 길이 앞당겨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한편, 조평통은 담화 모두에서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 채택이 “전반적인 북남관계 발전과 주변 정세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개성공업지구 문제가 해결의 길에 들어선 오늘 금강산 관광도 재개되어야 하며 그것은 북남관계 개선에도 매우 유익한 것”이라며 금강산 관광 재개에 강한 의지를 표시했다.

조평통은 “개성공업지구 정상화에 이어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온 겨레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게 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고는 “북과 남이 이번 개성공업지구 실무회담에서 보여준 호상이해와 신뢰의 정신에 입각하여 함께 진심으로 노력한다면 앞으로 북남사이에 풀지 못할 문제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평통 대변인, 금강산에서의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 진행, 금강산간광재개를 위한 당국자회담을 제안

보도된바와 같이 내외의 커다란 관심속에 수차례 진행되여온 개성공업지구정상화를 위한 북남당국실무회담이 8.15해방 68돐전야에 극적으로 타결되여 합의서가 채택됨으로써 온 겨레에게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우리 민족의 통일의지와 저력을 전세계에 과시하였다.

이번 합의서채택은 화해와 단합, 평화와 통일번영을 바라는 온 겨레의 한결같은 념원과 적극적인 지지성원의 자랑찬 결실이다.

합의서가 채택됨으로써 경각에 처하였던 개성공업지구가 정상화되고 새로운 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으며 그것은 전반적인 북남관계발전과 주변정세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있다.

하기에 지금 북과 남 온 겨레는 물론 전세계가 이번 합의서채택을 지지환영하고있으며 앞으로 북남관계에서 더 큰 전진을 이룩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있다.

우리는 이미 지난 6월 6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특별담화문과 7월 10일 남측에 보낸 통지문에서 개성공업지구실무회담과 동시에 금강산관광재개와 추석을 계기로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행사를 진행할데 대한 제의를 하였다.

이번에 남측은 《8.15경축사》를 통하여 추석을 계기로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을 진행할것을 제기하면서 판문점적십자련락통로를 통하여 그와 관련한 통지문을 보내왔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과 함께 금강산관광도 하루빨리 재개되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급격히 높아가고있으며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물론 집권여당인 《새누리당》도 금강산관광재개를 적극 주장하고있다.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은 다같이 화해와 단합, 통일과 번영의 상징으로서 더는 지체할수 없는 절박한 민족공동의 소중한 사업이다.

개성공업지구문제가 해결의 길에 들어선 오늘 금강산관광도 재개되여야 하며 그것은 북남관계개선에도 매우 유익한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북남관계개선과 조선반도의 평화, 공동의 번영을 위해 북과 남이 다같이 적극 노력해야 할 때이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개성공업지구가 정상화의 길에 들어선 격동적인 분위기와 남조선각계층을 비롯한 온 겨레의 요구와 내외여론의 기대에 맞게 북남관계를 전진시키며 평화와 통일, 번영의 새 국면을 열어나가려는 확고한 립장으로부터 위임에 따라 다음과 같은 제안을 천명한다.

1. 오는 추석을 계기로 금강산에서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을 진행하며 10.4선언발표일에 즈음하여 화상상봉을 진행하도록 한다.

이를 위한 북남적십자실무회담은 남측의 제안대로 23일에 개최하도록 하며 장소는 금강산으로 하여 실무회담기간 면회소도 돌아보고 현지에서 그 리용대책을 세우도록 한다.

2. 금강산관광재개를 위한 북남당국실무회담을 개최하도록 한다.

금강산관광재개를 위한 실무회담에서는 관광객사건재발방지문제, 신변안전문제, 재산문제 등 남측의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협의해결할수 있을것이다.

실무회담날자는 22일로 하며 회담장소는 금강산으로 할것을 제의한다.

개성공업지구정상화에 이어 금강산관광이 재개되면 온 겨레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게 될것이다.

3. 조선반도의 평화와 민족공동의 번영을 위한 사업을 활성화하도록 한다.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제반 사업들을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벌려 북남사이의 동포애적뉴대를 강화해나갈것이다.

이상의 우리측 제안이 실현되면 북남관계가 크게 전진하게 될것이며 북남사이의 신뢰가 보다 증진되고 통일의 길이 앞당겨지게 될것이다.

북남관계를 개선하여 평화와 통일, 공동의 번영을 이룩해나가려는 우리의 립장은 시종일관하다.

북과 남이 이번 개성공업지구실무회담에서 보여준 호상리해와 신뢰의 정신에 립각하여 함께 진심으로 노력한다면 앞으로 북남사이에 풀지 못할 문제란 없을것이다.

우리는 남측 당국이 온 겨레의 요구와 내외여론의 기대를 반영한 우리의 제의에 기꺼이 호응해나오리라고 믿는다.

(출처-조선중앙통신 2013.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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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파괴의 공범이기를 거부한다”

“민주주의 파괴의 공범이기를 거부한다”
 
[0호] 2013년 08월 17일 (토) 16:10:45 이기범 언론노보 기자 bumcom@daum.net
 
 
언론노동자 공정보도 실천 결의대회 개최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강성남)은 16일 오후 7시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조합원과 시민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공정보도 실천 결의 대회를 했다.
 
   
 

언론노조는 이날 결의문에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에 대한 분노의 촛불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지만, 정작 민주주의수호에 앞장서야 할 언론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며 “신중한 보도 운운하며 축소 보도로 일관하거나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으로 호도하는 등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신을 통해 접하는 수준에 이르는 암울한 과거의 회귀를 겪고 있다”고 밝혔다.
 
   
 

언론노조는 이어 “보도통제에 단호히 맞서고, 국정원 대선 개입의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언론을 다시 국민과 진실의 편으로 돌려 놓겠다”며 “민주주의 파괴의 공범이기를 단호히 거부한다’고 밝혔다.

참가자들은 △해직 언론인 복직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보도 제작 자율성 쟁취에 앞장서 선배 언론인들이 투쟁과 희생으로 지켰던 언론의 자유를 반드시 되찾겠다고 다짐했다.

 
   
 

강성남 언론노조 위원장은 대회사에서 “공정보도 실천에는 중앙과 본부, 지부가 따로 없고, 신문과 방송, 전문 직종이 따로 있을 수 없다”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소통과 연대 그리고 투쟁의 방법을 모두 동원해 공정보도 쟁취와 실천에 나서자”고 밝혔다.

김현석 언론노조 KBS본부장은 “내부 비판에 징계와 업무배제 그리고 지방 발령을 내리고 있다”며 “자괴감에서 빠져 나오고, 의지를 보여주자. 그리고 치열하게 단호하게 싸우자”고 강조했다.


 
   
 

이날 언론사 노조 대표들은 각 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도통제 현실과 언론인들의 공정보도 쟁취 투쟁을 전했다.

이성주 언론노조 MBC본부장은 “MBC 신뢰도가 0%로 가고, 대학생들이 MBC에 와서 편파보도 그만하라 규탄하고, 취재를 나가면 시민들에게 야단을 맞고, 뉴스데스크는 사망뉴스라는 말까지 듣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며 “매일 내부에서 전쟁을 치르지만 뉴스에 반영이 되지 않고,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은 달을 보라하면 손가락을 보며 우리에게 정치적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고 밝혔다.

이성주 본부장은 “단체협상을 앞두는 상황에서 회사는 공정방송 조항을 없애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고 밝힌 뒤 “더 이상 외면 받는 MBC 뉴스. 울고 싶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현장으로 나가기에는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아무리 절망스럽더라도 계속해서 싸워야할 현실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본부장은 “버텨야 한다”고 강조한 뒤 “진실을 위한 싸움을 결코 포기할 수 없으며, 최후의 승자는 진실이 될 것이며, 우리는 이 싸움 포기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권영희 YTN지부장은 “국정원 선거개입 단독 보도가 기사 어렵다는 이유로 방송이 내려지는 일이 발생하고, 이 잘못을 추궁하기 위해 보도국장 불신임 투표를 벌였던 기자협회장은 인사위원회에 불려가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며 “공정보도 틀을 다시 만들고, 해직된 6명을 복직하는 두 과제를 해 내지 못해 부끄럽다. 촛불시민들의 힘을 등에 업고, 언론노동자들과 함께 이 싸움을 해 내겠다”고 다짐했다.

남상석 SBS본부장은 “파업을 마친 동료들이 기자실로 돌아왔지만, 방송과 신문에 제대로 된 모습이 나오지 않고 있다”며 “요즘 SBS가 볼만하다는 말이 나오지만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정권을 누가 잡느냐, 사주의 마음에 따라 보도의 방향이 바뀌어서는 안 되기에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해 왔다”고 밝혔다.

남 본부장은 이어 “시스템을 갖춰야지 어느 정권을 잡던 언론이 제 할 말을 하고 시청자의 눈과 귀와 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김유경 전자신문 지부장은 “보도가 잘린다고 해서,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나설 분노가 쌓여있는가. 불행하게도 아닌 것 같다”며 “이는 집요하게 이어온 언론통제와 탄압, 그리고 언론을 길들여온 자본의 탓”이라고 진단했다.

김 지부장은 이어 “일상적인 조합 활동을 더욱 강화시키고, 공정보도 실천을 더 펼쳐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날 공정보도 실천대회에는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 박래부 새언론포럼회장, 고승우 80년 해직언론인, 송환웅 참교육학부모회 부회장, 전규찬 언론연대 대표, 박석운 민언련 공동 대표 등 언론계 인사들이 촛불시민들이 연대했다.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은 “1973년 대학가를 취재할 때 ‘개와 언론인 출입 금지’라는 문구를 보는 수모를 겪었고, 74년 언론인들이 일어섰다”며 “자유언론, 공정언론, 독립언론은 주장한다고만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언론인들이 직접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규찬 언론연대 대표는 “시민사회 운동 진영 역시 민주주의를 위해 단단히 묶이고 싸우도록 고민하겠다”며 “시민 여러분들도 성원과 응원을 언론노동자들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노종면 전 YTN지부장은 “오늘 김용판 원세훈의 오만방자를 목도했다.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국민을 우롱하는 것을 보았다. 누가 그들을 오만방자하게 했는가. 바로 우리들”이라고 말했다.

노 전 지부장은 이어 “방송이 권력을 감시하지 못하고 마사지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오늘 그들은 국정조사장에서 빈말과 거짓말을 하면서, 오늘 현장을 공방으로 보도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우리를 조롱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노 전 지부장은 언론에서 국정원 댓글 사건의 핵심인 서울경찰청 127시간 CCTV영상은 아직까지 보도하지 않는 반면, 날씨에 환장한 보도만을 내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 전 지부장은 “언론이 근혜 산성을 자저하며 대한민국 민주주의 파괴 주범이 되려 한다”며 “우리는 이제 언론 양심의 역사를 이어갈 언론의 바리케이트를, 민주주의의 보루 언론의 바리게이트를 치자”고 힘주어 말했다.

 
   
 

언론노조 조합원들은 이날 언론장악 분쇄와 공정보도 사수를 다짐하면서 대형 얼음을 깨는 상징의식을 하고 행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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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환각이 아니다

명상은 환각이 아니다

 

법인 스님 2013. 0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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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명상은 환각이 아니다

 

법인스님.jpg

법인 해남 일지암 암주

 

 

제자가 스승에게 여쭈었다. “더위를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스승은 이렇게 말한다. “더울 때는 더위와 한몸이 되고 추울 때는 추위와 한몸이 되는 거지.” 합일과 몰아의 경지로 몸이 덥다는 ‘사실’과 마음이 괴롭다는 ‘느낌’을 분리하라는 큰스님의 차원 높은 피서법이다.

그러나 찜통더위에 몸살을 앓고 있는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 이 피서법은 통하기 어려운 방법인 것 같다. 푸른 산 깊은 계곡에 앉은 산사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했는지 모른다. 사바란 참고 견디며 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계절 더위 속에 살아 가야 하는 인도인들은 극락세계를 청량세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템플스테이봉은사.jpg

*템플스테이하는 사람들. 출처: 봉은사 홈페이지

 

올여름도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계곡으로 해외로 피서를 떠난다. 그런데 이 더위에 특별한 피서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번뇌를 씻어내기 위해 산사의 참선수련, 천주교의 관상수도, 각종 마음수련에 참여하며 명상에 몰두한다. 종교를 넘어 영성과 힐링의 바람이 어디에나 불고 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땅끝마을 대흥사에서 세속의 벗들과 참선수련을 진행했다. 수련회 참가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뜻과 행위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경쟁과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의 늪에서도 올곧고 맑은 삶을 가꾸려는 그들의 의지는 견고했다. 처염상정(處染常淨)! 진탕 속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정결하고 청초한 자태를 뿜어내는 연꽃처럼 그들의 얼굴은 고결했다. 휴가를 맞아 일터를 벗어나 편히 쉬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고 산사를 선택한 그들의 선택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세속의 수행자는 순수한 집중과 응시를 통하여 자신을 힘들게 하는 감정과 습관의 허물을 소멸시키는 작업에 전념한다. “번뇌를 벗어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니/ 한바탕 고삐를 잡고 힘쓸지어다/ 뼛속까지 사무치는 추위를 견디지 않고서/ 어찌 코끝을 찌르는 매화향기 맡을 수 있으랴” 추위와 더위는 내가 이겨내야 할 또다른 내 안의 ‘나’라고 할 수 있다. 중국 황벽 선사의 선시와 같이 세속의 수행자는 심장까지 스미는 더위와 더불어 삶의 고통을 부르는 욕망과 집착을 온몸으로 안으며 한바탕 몸살을 앓는다. 또한 그들은 온전히 비움, 낮춤, 내려놓음, 살핌으로 내면의 평온과 희열을 맛본다. 채우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내려놓음으로써 길을 찾는다. 진정한 승자는 자신의 악습과 유혹을 이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땀에 흠뻑 젖어 명상하는 그들의 모습은 차라리 향기롭고 서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십년 넘게 참선수련회를 같이 하면서 수행의 함정을 발견한다. 수행 혹은 명상하는 뜻은 무엇인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보고 그 원인을 해체하는 것이 아닌가. 명상은 번거로운 세속 잡사를 벗어나 잠시의 안온과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정직하고 당당하게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지 않고 문제의 핵심을 외면하고 그저 고요함이 주는 평온에 매몰되는 것은 명상수행이 아니라 환각이다.

명상수행의 또다른 위험은 모든 고통과 불안의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는 일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의 의미를 그릇되게 파악하기 쉽다. 마음은 세상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그런 주관적 결정체가 아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 행위의 모든 것은 바로 세상과 관계하면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고통과 불안의 원인을 내 마음으로 환원하여 해결할 수 있는가.

 

비움과 냉철한 통찰이 함께하지 않으면 명상수행은 또다른 환각제가 된다.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소를 때려야 하는가,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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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 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8-18 오전 12:08:20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첫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프레시안 : 1950년대 하면 암울한 시절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서중석 : 고은 시인이 책 <1950년대>에서 묘사한 것처럼 1950년대는 답답한 시기였다. 연줄, '빽'이 없으면 어디 가서 뭐 하나 제대로 챙겨먹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주먹이 앞서는 불법·탈법·무법의 시대였다. 깡패들의 주먹의 시대, 권력 남용의 시대로 많이 이해된다.

그러나 그것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 시기에 엄청난 변화가 이뤄졌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미래를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이 쌓였다고 할까, 그런 걸로도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커다란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다른 의미에서 사회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농촌과 산골까지 변화하고 평준화 현상이 확산하며 교육 열풍이 분다. 이와 함께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국전쟁이 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나. 그런 변화가 한국에서도 전쟁을 통해 많이 일어났다. 전쟁이 잘됐다 혹은 그렇지 않다, 그런 걸 떠나서 (전쟁이 가져온)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한국전쟁이 낳은 커다란 변화

프레시안 :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

서중석 : 한국전쟁 때는 물론이고 1950년대엔 군대를 서로 안 가려고 했다. 그래서 손가락을 자르는 경우가 참 많았다. (일례로 1953년 경남 3개 군의 징집 면제자 중 불구자가 80명이었는데, 이 중 오른손 손가락을 작두로 자른 이가 50명에 달했다. <편집자>) 그렇게 자해 행위를 해서 안 가려고도 했고, 징집을 기피해 도망 다니는 젊은이도 많았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많이 했던 게 군인이 징집 기피자를 잡으러 다니는 거였다.

그렇게 군에 안 가려고 했던 건 군이 무서워서였다. 먹을 것도 제대로 안 주고, 이른바 '빠따' 치고 막 기합을 주지 않았나. 거기다 대통령이 '북진 통일을 한다'고 하는데 그러다 또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쌓여 있었던 거다.

이랬던 건데, 당시 촌사람들이 군에 많이 갔다. 이 사람들은 '빽'도 없으니, '군대에 와라' 하면 (자해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서울 지역 대학생의 입대 비율은 1950년대 중반 10퍼센트 수준이었다고 한다. <편집자>) 그런데 소위 무지렁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산꼭대기로 조그만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산골에 있던 사람들이 (그걸 계기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 거다. 물론 (한국전쟁 이전부터) 빨치산이 활동하면서, 산골 주민들 중에는 빨치산과 군경의 싸움 때문에도 변화를 접한 경우도 많다.

하여튼 (시골) 청년들이 군대 갔다 온 것을 계기로 인생이나 세상을 많이 안 것처럼 됐다. 그러면서 이제 시골에선 더 살기 싫다며 도시로 막 빠져나갔다. 또 젊은 여성 중에서 (집안에서) 밥 한 끼라도 줄이려는 생각으로 도시로 나가는 이들이 늘었다. (그 결과) 그야말로 산업화 없는 도시화가 이뤄졌다. 도시는 점점 인구 과잉이 됐다. 그러면서 판자촌이니 달동네가 엄청나게 많이 생겼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대단한 활력소였다. 이 문제는 평준화 현상의 확산과도 관련돼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나.

서중석 : 일제 때 한국인들은 권력을 일본인들에게 다 뺏겼다. 제국주의자들이 현지 주민들의 전통적인 여러 면을 놓아두면서 주로 간접 통치를 한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지역과는 다른 점이다. 일본은 면 단위까지 (직접) 장악해 통치하고, 권력과 주요 재산을 빼앗았다. (다수의) 한국인들은 그만큼 하등으로 몰리면서 하향 평준화가 됐다.

일제를 거치면서 지주들은 어느 정도 남아 있었지만 양반은 거의 다 망했다. 거기다 해방 후 혁명적 분위기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던 지주들도 많이 몰락했다. 한때는 (많은) 지방 유지도 힘을 잃었다. 유지 중에 노골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사람이 적지 않았고, 그 때문에 해방 후 동네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 혁명적 분위기가 더 강해진 거다. 그러고는 농지 개혁이 시작되고 곧이어 전쟁이 이어지면서 농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어떤 면에서는 공산주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굉장히 평등화가 됐다.

한국처럼 양반, 상놈, 노비 따지는 나라를 찾기 어려웠는데, 일제를 겪고 해방 직후(의 혁명적 분위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게 싹 없어지다시피 했다. '노력만 하면 된다. 배우면 된다. 다 출세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가득하게 된 거다. 잘 배우면 된다는 건 이른바 일류 학교에 들어가는 걸 의미했다. 한국은 '빽' 사회, 연줄 사회니 일류 학교에 가면 연줄도 많이 생기고 그런 면에서도 잘될 거라고 본 것이다.

프레시안 : 1950년대 교육열,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그전에도 교육열이 높았던 사회이긴 했지만, 전쟁 후 평준화 현상과 겹치면서 엄청난 교육 팽창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대학만 일류, 이류, 삼류가 있는 게 아니라 고등학교, 중학교, 나아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마저 그렇게 나뉘었다.

1950~1960년대엔 한 학급에 100명이 넘는 곳이 많았다. 130명인 곳도 있었다. 그러면서 이부제, 삼부제 수업을 받는 데가 무척 많았다. 1일 3교대로 가르치는 게 삼부제다. 그런 데가 많았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거냐 하면, 한국 사회에 대량으로 한글세대가 탄생했다는 거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취직할 데는 별로 없었다. 산업예비군으로 축적됐다. 쌓이고 쌓인 이 산업예비군은 어디서 무슨 일만 준다면 열심히, 그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할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1960~1980년대 30년간 산업화의 그야말로 역군이 된 것이다.
 

▲ 2월 1일, 서울지방병무청에서 진행된 올해 첫 징병 검사에서 현역 판정을 받은 검사 대상자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런 모습과 달리, 195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징집은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 부담 때문에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일도 적지 않았다. ⓒ연합뉴스


한국전쟁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 경제 발전의 밑거름 마련

프레시안 :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의도한 건 전혀 아니지만, 전쟁을 통해 평준화가 더 확산되고 그게 교육 열풍 등과 맞물리면서 1960년대 이후 경제 발전의 밑거름 역할을 하게 됐다는 말로 들린다.

서중석 : 그렇다. 경제 발전을 위한 여러 요소가 1950년대 말경부터 쌓여갔다. 특히 한글을 읽을 수 있고 어느 공장에서건 한글로 쓰인 기본적인 수칙을 다 지킬 수 있는 근면한 한글세대가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규모로 쌓였다(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사회에) 역동적인 활기를 불어넣었고 경제 발전을 이루는 데 큰 힘으로 작용했다. 그러면서 1960년대 중후반부터는 한일협정 자금, 베트남 특수, 각종 차관 등의 형태로 외국 자본도 많이 들어오게 된다.

이런 것들을 어떤 식으로 결합해 나가느냐 하는 게 매우 중요한 상황이었다. (이 대목에서) 뭐든 열심히 해보려 했던 (우수한) 산업예비군(의 존재) 못지않게 국가 권력의 특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국가 권력은 어떤 면에서는 일제가 행사한 권력보다 더 강화된 측면이 있다. 부정부패하고 친일파도 많았던 이승만 정부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나쁜 정부로 보이는 면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전쟁 후 이승만 정부는 굉장히 힘이 셌다.

프레시안 :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주 계급은 힘을 잃었고, 지가증권(농지 개혁 과정에서 정부가 지주에게 농지 대금으로 준 증권. <편집자>)은 똥값이 됐다. 대지주는 은행 융자를 받거나 귀속 재산을 불하받는 데 지가증권을 쓰면서 그나마 많이 살아났지만, 중소지주는 사실상 쫄딱 망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한국에서 큰 재산, (그러니까) 큰 기업을 일구는 데 쓸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제의 귀속 재산이었다. 큰 기업이나 공장은 대부분 일제가 남긴 것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불하받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그건 정치 권력과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니 정치 권력이 아주 힘이 셀 수밖에 없었다.

그거 못지않게 경제를 좌지우지했던 게 미국의 원조 물자를 어떻게 배정받느냐 하는 것이었다. 원조 물자를 잘 배정받으면 경제력을 크게 키울 수 있었다. 원조는 재벌을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재벌이라든가 경제인은 한편으로는 자유당 간부 못지않게 굉장히 큰 부자이고 특권층임은 분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 앞에서 힘을 못 쓰는 존재였다. 경제가 국가 권력에 예속된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전쟁 이후에 이런 현상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면에선 국가 권력이 일제 때보다도 더 셌고, 그런 면을 (훗날) 박정희 정부가 더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문화계에서도 국가 권력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였다. 진보적인 문화 활동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굉장히 위축당했다. 저항적 문인들이 (일부) 활약하긴 했지만, 대개는 관과 결탁한 문인들이 힘을 발휘했다. 문화계라든가 교육계를 좌지우지한 건 친일파거나 관 결탁 세력이었다.

이렇게 막강한 국가 권력이 구축됐다. 그런 속에서 주로 미국으로 유학이나 연수를 가서 상당한 실력을 쌓았다는 사람들이 1950년대 중후반 이후 계속 들어왔다. 새로운 테크노크라트가 국가 권력을 조정하고 이끌어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는 거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학살로 세운 극우 반공 체제

프레시안 : 전쟁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부의 힘이 강해졌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이는 극우 반공 체제 강화 문제로 바로 이어진다.

서중석 : 한국전쟁으로 한국 사회가 많은 어려움을 안게 됐다. 특히 사회를 극도로 단순화한 극우 반공 체제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내면화됐다.

물론 전쟁이 나기 전에도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역설했다. 빨갱이를 엄벌에 처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결과 감옥소가 그야말로 '좌익수'로 넘쳐났다. 감옥에 갇힌 죄수의 80퍼센트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잡힌 좌익수라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이 사람들을 조그만 감방에 잔뜩 집어넣어가지고 말할 수 없는 고생을 시켰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탄생했다. 그 이듬해인 194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투옥된 사람이 무려 11만8621명에 달했다. 이 때문에 교도소가 꽉 차, 1949년 10월 형무소 두 곳을 새로 만든다는 결정이 내려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 '좌익수'의 상당수는 이른바 빨갱이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편집자>) 또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을 거치며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반공주의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쟁 전까지는 반공주의가 그렇게 먹혀들지 못했다. 이 점은 1950년 5.30 선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승만 세력은 참패하고 이승만에게 비판적인)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당선됐다. (전체 210석 중) 무소속 국회의원이 126명이나 탄생했는데, 이 중엔 합리적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2대 국회는 민권을 위한 국회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이 그렇게 강권으로 주입하려도 해도 잘되지 않던 극우 반공주의가 전쟁을 거치면서 위세를 떨치게 됐다. 왜 그렇게 됐나? 제일 큰 이유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집단 학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공포란 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학살은) 어느 지역에서나 일어났다.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정부 비판, 이승만 반대 같은 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게 돼버렸다. 선거 때도 조심해야 했다.

부역자로 몰린 사람도 굉장히 많았다. 그렇게 부역자로 몰려 죽은 사람도 그렇고 감옥소에서 고생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된 거다. 연좌제도 심하지 않았나. (이런 상황에선) 이승만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현실 순응주의가 공포감과 결합하면서 강력한 극우 반공 체제가 만들어진 거다.

프레시안 : 학살 등을 통해 강력하게 기틀을 마련한 극우 반공 체제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서중석 : 그렇다. 독재 정권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함께 분단을 최대한 활용해 독재를 강화하고, 그것을 수호하는 활동을 해왔다. 그런 것들도 따지고 보면 다 한국전쟁으로 귀착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전쟁 시기에 수많은 살상과 집단 학살, 동족상잔 같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는 걸 잊지 말고,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한다.

한국의 전 역사를 돌아봐도 (한국전쟁 때 같은) 그만한 규모의 학살과 동족상잔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돼 새로운 사회로 발전시키자고 하는 길목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을 극우 반공주의로 가게끔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이런 전쟁은 (다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 이승만 전 대통령. ⓒ연합뉴스


한국 문제는 전쟁을 통해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프레시안 : 한국전쟁은 내전의 성격만이 아니라 국제전의 성격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한국만이 아니라 주변국들에도 한국전쟁은 대사건이었다.

서중석 : 한국전쟁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러시아, 북한에도 똑같이 큰 교훈을 줬다. 그리고 귀일하는 지점이 있다. 뭐냐 하면, 한국 문제는 전쟁을 통해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같은 전쟁이 한반도에서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뼈저리게 느꼈고, 중국은 중국대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나. 승리했다고 주장은 하지만 굉장히 큰 희생을 치렀다. 러시아(한국전쟁 당시 소련)도 자기들이 일단 뒤에 물러서 있긴 했다고 하더라도 이 전쟁(의 내막)을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이 관계돼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난 주변국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길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고 본다. (한국전쟁 경험을 통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강대국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고, 전쟁이 일어나 북한이 파멸할 경우 보트 피플을 비롯한 엄청난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한의 경우,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제공권과 제해권을 미국에 완전히 뺏겼다. 1950년 7월 초순에 이미 넘어갔다. 7월 중순이 되면 북쪽의 해군력과 공군력이 힘을 못 쓴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북한 상공을 장악하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휴전 회담이 진행되던 2년 동안 북한에 엄청난 폭탄이 쏟아졌다.

얼마 전 출간된 책 <폭격 : 미 공군의 공중 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에 이 내용이 잘 정리돼 있다. 당시 출격했던 미국 공군의 기록을 분석한 이 책에는 미국 공군이 북한의 여러 도시를 폭격하기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폭격 후 그 도시들은 완전히 잿더미가 됐다. (이런 걸 보면) 북한이 (미군의 폭격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됐는지, 그 때문에 북한이 얼마나 전쟁을 무서워하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반도를) 사회주의로 통일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하고는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물론 (한국전쟁 이후) 북한이 국지전을 생각해본 적은 있다. 예컨대 1960년대 후반에 그러지 않았나. 그러나 전면전 문제는 다르다. 난 한국전쟁의 공포가, 북한이 전면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계속 막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피해가 컸다.
 

▲ 한국전쟁 당시 폭탄을 투하하는 유엔군 폭격기들. ⓒ연합뉴스


한국전쟁을 깊이 이해할수록 한국 사회가 잘 보인다

프레시안 :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0년이 지났다. 그렇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긴장 상태다.

서중석 : 한국전쟁의 큰 교훈은, 한편으로는 학살이라든가 부역자 문제 등을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새겨보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다시는 그런 전쟁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 한반도 평화처럼 소중한 건 없다. 그게 한국전쟁의 최대 교훈이다.

그런데도 '확 싸지르자', 말하자면 '까불면 응징해야 한다'는 식으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전쟁도 좋다'는 극단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지금 남한과 북한에 있다. 그건 굉장히 위험하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무서운 파괴 수단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전쟁광적인 사람들에 의해 순간적으로 잘못 처리되면 어떻게 되겠나.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평화의 기틀을 탄탄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지금까지도 많이 했지만, 앞으로도 굉장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프레시안 : 올해 들어서도 남북 관계는 격랑에 부닥쳤다.

서중석 : 지난봄에도 큰일 날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한때 있지 않았나. 남쪽이나 북쪽이나 무섭게 나왔다. 그러면서 정말 최악의 상태까지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많은 사람에게 줬다. 그런 걸 생각하더라도,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며 구조적으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 지혜를 다각도로 짜내고 활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사회적인 큰 변화를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소중하다. 경제 발전을 어느 한 사람과 연결해 생각하는 건 굉장히 단순한 사고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누구나 얘기하면서 우리 경우에 대해선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다.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한국전쟁이 문화, 경제, 사고, 습관, 생활 등 여러 면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폭넓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대한 자신이라고 할까 깊은 믿음을 갖게 하고, 평화를 구축하고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와 인권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한국전쟁을 깊이 이해할수록 현재 한국 사회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김덕련 기자,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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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 국정원 규탄 8차 국민촛불대회] "이번 기회에 뿌리 뽑아야"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8/18 08:40
  • 수정일
    2013/08/18 08:4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청문회에 성난 4만 촛불 "원-판 불변의 법칙"

[현장 : 국정원 규탄 8차 국민촛불대회] "이번 기회에 뿌리 뽑아야"

13.08.17 21:22l최종 업데이트 13.08.17 22:01l
권우성(kws21)이주영(imju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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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8차 범국민촛불대회 17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정치공작·대선개입 규탄 제8차 범국민촛불대회'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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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국민촛불대회 "박근혜 대통령 책임져라" '국정원 정치공작·대선개입 규탄 제8차 범국민촛불대회' 마지막 퍼포먼스로 참가자들 머리 위로 "박근혜 대통령 책임져라"는 구호가 적힌 대형 현수막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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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원-판 불변의 법칙'을 확인하고 얼마나 열 받았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세금으로 월급 주고 공권력을 맡겼다는 게 얼마나 분하고 섬뜩합니까."

17일 오후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을 규탄하는 촛불집회에 참석한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가 이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촛불을 든 4만 명(주최 쪽 추산, 경찰 추산 8500명)의 시민들이 "맞다"며 환호했다.

참여연대와 한국진보연대 등 280여 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시국회의'가 이날 주최한 '8차 국민촛불대회'는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오후 7시 10분부터 시작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석자가 늘어 서울광장 잔디밭 밖 인도까지 촛불을 든 시민들로 북적였다. 해가 진 뒤에도 무더운 날씨가 계속됐지만 시민들은 물과 부채 등으로 더위를 식히며 집회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시민들과 더불어 야당 인사들도 촛불집회에 함께했다. 김한길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와 소속의원들도 당 행사에 이어 합류했다.

증인선서 거부·혐의 부인한 원세훈-김용판 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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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정치공작·대선개입 규탄 제8차 범국민촛불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국정원 댓글을 발견한 뒤 은폐하는 경찰의 CCTV 영상을 담은 <뉴스타파> 기사를 긴장된 표정으로 시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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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정치공작·대선개입 규탄 제8차 범국민촛불대회' 무대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서 국정원 댓글을 발견한 뒤 은폐 촉수시키는 경찰의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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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촛불집회에서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향한 질타가 이어졌다. 두 사람은 전날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해 증인 선서를 거부하고 대선개입 수사축소 등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양승조 민주당 최고위원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한 증인선서를 원 전 원장과 김 전 청장은 거부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오만 불순한 태도"라며 "증인선서 거부야말로 뭔가 단단히 구린 구석이 있다는 것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정치개입과 수사은폐 등의 혐의를 부인한 것과 관련해서도 "그동안 밝혀진 국정원 댓글과 경찰 수사관들의 대화가 담긴 CCTV 영상을 보면 제기된 혐의가 사실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며 "그들의 주장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질타했다.

원세훈-김용판 청문회에서 새누리당이 펼친 질의를 두고도 '두 사람의 변호인'이라는 비난이 이어졌다. 양 최고의원은 "새누리당이 청문회에서 '원-판 일병 구하기'에 앞장섰다"고 비꼬았다.

국회 국정조사에서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국정원을 상대로 특검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장주영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은 "이번 기회에 사건 관련자를 처벌하지 않으면 국정원은 또다시 국민들을 우습게보고 또다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동에 나설 것"이라며 "내곡동 특검처럼 중립적 특검수사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 사태를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 역시 어김없이 나왔다. 특히 야당 대표로 참석한 국회의원들은 박 대통령이 '촛불 민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재연 통합진보당 의원은 "정부는 지난 8.15 때 국정원 사태 해결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시민들을 연행했다"며 "청와대가 끓어오른 민심을 계속 무시한다면 성난 시민들의 시위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시민들 분노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KBS 노조위원장 "방송이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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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8차 범국민촛불대회 17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정치공작·대선개입 규탄 제8차 범국민촛불대회'가 열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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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회의는 앞으로 예정된 21일 청문회에 권영세 주중대사와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 증인으로 출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대현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새누리당은 권 대사와 김 의원이 증인 출석에 반대하고 있다"며 "대선 기간에 2007 정상회담 회의록을 입수한 혐의가 있는 두 사람을 증인으로 채택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들 없는 국정조사는 의미 없다"고 말했다.

김현석 전국언론노조 KBS 본부 위원장은 국정원 사태에 침묵하던 KBS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은 "촛불시민들이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KBS 보도가 미약하나마 변하고 있다"며 "지난주 토요일(10일) 9시 뉴스는 촛불집회를 제대로 보도했고, 국정원에서 댓글 달았다는 기사도 내보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변화들은 촛불시민들의 덕이다, 촛불의 힘이 언론인들을 각성시키고 있다"며 앞으로 국정원 사태와 관련해 공정보도를 실현하겠다고 다짐했다.

시민들은 연이은 참가자들의 발언과 노래, 국정원 사태 관련 영상을 보며 자리를 지켰다. 오후 9시 현재까지도 시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즐기고 있다. 서울광장 건너편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집회를 연 보수단체들이 촛불집회에 맞서 "촛불좀비 규탄"이라 고함을 외치고 있지만, 다들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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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곽동기의 '북한의 군사무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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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8.17 1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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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7일, “전승 60돐 기념 조선인민군 열병식”에는 북한의 항공기도 출현하였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끈 것은 열병식장 상공에 나타난 초대형 헬기였다.

   
▲ 7월 27일 전승절 열병식장에 나타난 북한 수송헬기. TV조선이 보도하였다. [캡쳐사진-곽동기]

이 헬기는 러시아 수송헬기 MI-26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 러시아 수송헬기 MI-26은 양산형 헬리콥터 중 가장 거대한 헬기이며 최대 수송중량이 20톤이 달해 장갑차를 비롯한 기계화 전력을 수송할 수 있으며 보병의 경우 최대 90명까지 탑승이 가능하며 완전무장한 공수특전단의 경우 40-50명이 탑승 가능하다고 한다. MI-26이 보유한 20톤의 수송능력은 미군의 대형수송기 C-130과 맞먹으며 미국 보잉사가 제작한 수송헬기 CH-47 치누크의 2배에 달하는 양으로 헬기를 이용한 수송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할 수 있다.

   
▲ 미군이 보유한 대형수송기 C-130. MI-26의 수송능력은 20톤으로 C-130과 같다. [자료사진-곽동기]

헬기란 무엇인가?

헬기는 회전하는 프로펠러를 통해 기체부양에 필요한 양력을 얻는 항공기를 말한다. 비행기는 고속으로 진행할 때 비행기 날개 윗부분의 압력이 아랫부분에 비해 낮아지면서 공중으로 이륙하게 되는데 헬기는 동체가 고속으로 전진하는 대신 프로펠러를 고속으로 회전시켜 비행기 이륙과 비슷한 양력을 발생시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헬기는 날개가 고정된 비행기와 달리 이륙 시 활주로가 필요 없으며 공중에서 정지할 수 있어 군용헬기의 경우 대지상전 작전에 널리 활용될 수 있다. 미군의 C-130과 북한의 MI-26이 수송능력에서는 20톤으로 같다고 하더라도 C-130은 활주로의 제약을 받아 장갑차 등의 최전방 기동에는 어려움이 따르며 군용물자를 투하할 경우에도 낙하산을 이용한 투하에 의존해야 하는 점이 있다.

다만 헬기가 메인로터만 장착한 채 이륙할 경우 메인로터의 회전력에 의해 동체가 빙글빙글 회전할 수밖에 없어서 자세제어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헬기 동체를 제어하기 위해 헬기의 꼬리부분에 프로펠러를 달아서 동체의 반작용을 상쇄하는데 이를 테일로터라 한다. 상대적으로 돌출된 테일로터만 파괴되면 헬기는 자세제어불능에 빠져 추락이 불가피하므로 지상병력이 헬기를 공격할 때 테일로터가 주된 목표가 되기도 한다.

   
▲ 헬기의 작동원리. 메인로터가 붉은색 화살표 방향으로 회전하면 동체는 초록색 화살표 방향의 반작용을 받게 된다. 이를 테일로터를 회전시켜 노란색 토크로 상쇄해 헬기동체의 자세를 제어한다. [자료사진-곽동기]

다만 미국의 수송기 CH-47 치누크의 경우는 두 개의 메인로터를 각각 다른 방향으로 회전시키기 때문에 테일로터가 필요없다. 이런 방식의 로터를 텐덤로터라 한다.

   
▲ 두 개의 메인로터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회전시켜 동체의 회전을 상쇄시킨 CH-47 치누크 수송헬기. 이러한 방식을 텐덤로터라 한다. 그러나 MI-26은 하나의 메인로터로 이륙하면서도 수송능력이 치누크의 2배에 달한다. [자료사진-곽동기]

MI-26은 어떤 수송헬기인가

MI-26은 수송기와 달리 헬기의 경우 활주로가 필요없기 때문에 수송작전에 동원될 수 있는 범위가 매우 확대되며 한반도의 산악지역을 비롯한 각 지역에 군용물자를 정확히 투하할 수 있다.

초대형 수송헬기 MI-26은 동체길이 40m에 회전하는 프로펠러인 메인로터의 길이만 32m에 달하며 동체의 높이가 무려 8m이다. 양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메인로터에는 8개의 프로펠러, 테일로터에는 5개의 프로펠러가 부착되어 있다. 헬기 꼬리에 붙은 테일로터의 길이만 7m에 달해 보통 헬기의 메인로터와 같은 크기라 할 수 있다. MI-26의 자체 무게는 28톤이며 최대 20톤의 화물을 수송할 수 있다. 최대 시속 295km로 비행하며 항속거리가 1920km에 달해 한반도 전역을 비행할 수 있다. 최대 4600m까지 상승할 수 있어 군수송 작전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 장갑차까지 수송할 수 있는 MI-26. [자료사진-곽동기]
   
▲ MI-26의 메인로터 헤드부분. 보통 헬기와 비교되지 않으며 거대한 추진력을 실감케 한다. [자료사진-곽동기]
   
▲ MI-26의 테일로터 헤드부분. 웬만한 헬기의 메인로터와 같다. [자료사진-곽동기]

일례로 미국 공격헬기 아파치 AH-64의 최대속도가 시속 293km이며 항속거리가 1900km이므로 공중기동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MI-26의 경우 수송기에 비해 비행속도가 현저히 떨어지므로 최전방에서 작전 시 요격당할 확률이 높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북한군 후방에서 전략물자를 수송하는 역할을 띨 가능성이 높다. 이는 한반도 유사시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지역을 비롯한 북한 전역에 배치된 북한군의 장갑차, 탄약을 비롯한 전략물자들을 휴전선 지역으로 신속히 수송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인민군 특수부대는 MI-26에 탑승해 최전방지역에 도착한 다음, AN-2기나 호버크래프트, 또는 기타 다양한 방식으로 대한민국의 후방으로 침투할 가능성이 높다.

초대형 헬기의 유지비용

다만 MI-26은 헬기를 이용한 수송을 채택하다보니 연료소모가 높은 편이다. 헬기는 엔진추력의 대부분을 프로펠러가 동체를 부양시키는데 사용하므로 앞으로 전진하는 추진력은 약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헬기의 속도가 비행기에 비해 느린 이유이다. 특히나 MI-26의 경우 90명의 인명을 탑승시키므로 웬만한 여객기 규모라 할 수 있다.

MI-26은 시간당 3500리터의 연료를 소모하며 운용비용이 시간당 1500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북한이 MI-26을 10대 보유하였다면 운용비용은 시간당 1억 5000만원으로 상승할 것이다.

항간에 북한이 유류난이 심각해 북한군 항공기가 이륙도 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많지만 이를 정면에서 반박하는 자료가 된다. MI-26 1대면 군용수송트럭 100여대를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이 같은 대형헬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유류사용에 대한 제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례로 2011년 4월 7일, 당시 한나라당 윤상현 의원은 북한이 전시에 대비해 군 보관시설에만 유류 150만톤을 비축하고 있으며 군량미 100만톤, 탄약 170만톤을 비축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150만톤의 전시용 연료를 비축하고 있다면 북한군은 4000대 이상의 전차 2000대 이상의 장갑차, 1000대 가량의 항공기를 동시에 기동시키는데 무리가 없다.

북한이 초대형 수송헬기 MI-26을 실전 배치시켜놓고 있는 현실도 윤상현 의원의 주장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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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폭탄 발언 "권영세와 NLL 대화록 상의했다"

"김용판 의문의 점심 식사 뒤 사건 축소가 시작됐다"

서어리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8-17 오전 12:20:09

 

 

국가정보원, 경찰, 새누리당이 지난해 대선 승리를 위해 사전 공모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황이 16일 속속 드러났다.

자정 가까이 진행된 이날 국회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관련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삼각 연결고리를 부인하면서도 관계를 의심케 할만한 빌미를 제공, 의혹을 증폭시켰다.
 
▲ 16일 국회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관련 국정조사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왼쪽),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프레시안(최형락)

특히 김 전 청장은 경찰 중간수사 결과 발표 전날인 지난해 12월 15일 의문의 점심식사 행적에 대해 시종 '모르쇠'로 일관, 의구심을 키웠다. 또한 원 전 원장은 대선 전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 핵심인물인 권영세 현 주중 대사와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문제로 전화 통화를 주고받은 사실을 밝혀 논란을 낳았다.

야당 특위위원들은 두 증인의 발언 등을 토대로 대선 사전 모의 '퍼즐 맞추기'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국정원의 조직적 댓글 공작이나 경찰의 수사 은폐 등 제기된 의혹의 실체를 완전히 규명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용판, 12월 15일 '미스터리 점심' 이후 사건 축소·은폐 시작"

야당 특위위원들은 오후에 이어 김 전 청장의 12월 15일 낮 행적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이들은 중간수사 결과 발표 직전 가진 점심 식사 자리에서, 김 전 청장이 국정원 사건과 관련된 유력 인사들과 대책 회의를 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견지했다.

김 전 청장은 이날 점심 청와대 인근 식당에서 정보부장, 정보과장 등 12명과 오찬을 가졌다고 청문회에 앞서 제출한 자료를 통해 보고한 바 있다. 그러나 청문회 과정에서 이는 거짓으로 드러났고, 김 전 청장은 "누구와 식사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야당 간사인 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당일 해당 식당의 예약 접수증을 복사해왔다"면서 "15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있었고 7명이서 28만원을 계산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총 7명이 식당을 했고 3만5천원짜리 밥을 먹었다"며 "여기에 소주 2병, 맥주 5병으로 '소폭'을 만들어 먹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식사를 한 뒤 7시에 구로서에 도착을 한다"며 "한 시간 동안 시간이 비는데 한 시간 동안 무엇인가 벌어졌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정 의원은 이어 같은 날 저녁 디지털증거분석관실의 CCTV 영상을 제시하며, "김 전 청장이 국정원 직원을 만났는지 청와대 직원을 만났는지, 박근혜 캠프 직원을 만났는지 1시부터 7시까지 무슨일이 있었는지 지시 상황이 급변한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이날 오후 8시 8분에 댓글이 발견되고 24시간 이후 언론 브리핑을 시작하며 사건의 축소와 허위가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김 전 청장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분명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대선 기간 중에 어떤 정치인도 만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지켰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아까 정치인하고 점심 먹었냐는 질문에 (김 전 청장이) 펄쩍 뛰었는데 그럼 국정원 직원들이랑 먹은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3만 5000원짜리 식사를 했고 오후 5시에 사우나를 갔다. 그곳에서 손가락을 문에 끼어 다쳤다고 병원 임상기록에 나와 있는데 술을 먹고 사우나 간 것 아니냐"면서 "그 중요한 시기에 사우나를 들락거릴 정도의 여유는 있었느냐"고 따졌다.

원세훈 "권영세와 선후배 관계… 대화록 논의 차 개인적으로 통화"

원 전 원장은 대선 직전 권 대사와 전화통화를 갖고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과 관련한 논의를 했다고 실토하면서 다시금 대화록 사전 유출 논란에 또 다시 불을 지폈다.

원 전 원장은 권 대사와 통화를 한 적이 있지 않느냐고 추궁한 민주당 박범계 의원의 질의에 "대화록과 관련한 상의를 했다"면서도 "국정원 사건에 대해선 상의하지 않았다"며 연결 의혹을 부인했다.

원 전 원장은 통화 경위에 대해 "학교 선후배고 개인적으로 가깝다"며 "지난해 12월 13일 국회 정보위원회가 계속해서 (대화록을) 공개를 하라는 입장이어서 (권 대사와) 상의를 했다"고 밝혔다.

민주당 등 야당은 원 전 원장의 이 같은 발언이 '권영세 NLL 녹취록'의 신빙성을 높여준다며 대화록 사전 유출 의혹을 제기했다.

박 의원은 "적절치 못한 통화"라며 "현직 국정원장이 어마어마한 비밀대화록을 당시 민간인인, 그리고 유력 대선후보의 선거캠프 2인자와 생각이 어떻냐며 통화했다. 엄청난 것 아니냐"고 말했다.

"권영세, 대선 공작의 중심 드러나 청문회 증인 채택해야"

원 전 원장과 권 대사의 대선 직전 통화 사실이 드러나자, 야당 특위위원들은 "권 대사가 대선 공작의 중심에 있었다"며 증인 채택을 요구했다.

정 의원은 청문회 말미에 "오늘 분명한 사실이 추가로 밝혀진 게 있다면 권영세 대사와 원 전 원장과의 13일 전화통화"라며 "김무성 의원은 물론이고 권영세 대사 부분은 증인채택을 꼭 해야만 하는 팩트(사실)가 추가로 확인됐기 때문에 새누리당은 국민적 요구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새누리당 권성동 간사와) 증인 채택을 발표할 때 비합의된 증인은 김무성, 권영세를 의미한다"며 "증인 채택은 간사 간 위임된 사항으로 권성동 간사가 하자고 하면 증인이 되는 것"이라며 권 의원을 압박했다.

이에 대해 권 의원은 "답변을 거부한다"며 "오늘 김무성·권영세에 대해 증인 채택을 하자는 것에 대해 정 간사에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일축했다.

권 의원의 증인 채택 거부 의사 표명으로, 김무성-권영세 증인 채택 건은 사실상 무산된 상태다. 두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려면 법에 따라 일주일 전 통보가 돼야한다. 국정조사 마감일이 23일임을 감안할 때 16일인 이날 출석 여부에 대한 여야 합의가 끝났어야 했다.

결국 두 인사의 증인 채택이 사실상 무산됨에 따라 야당 측의 향후 입장이 주목된다. 야당 특위위원들은 두 증인 없이는 19일 청문회가 의미가 없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19일 청문회 불참까지 검토하고 있어 막바지에 다다른 국정조사가 또 다시 파행 사태를 맞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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