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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을 옮겨 당장 되살려야할 화순적벽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11/18 16:41
  • 수정일
    2013/11/18 16:4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댐을 옮겨 당장 되살려야할 화순적벽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3/11/18 [06:19]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절경의 화순 적벽, 화순에는 이런 아름다운 절벽이 여러 곳이 있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던 두 곳이 전두환정권이 건설한 댐에 의해 수장되고 말았다. ©자주민보, 이창기 기자



지난 10월 중순 화순 양현당 한민족생활관을 취재하러 갔을 때 양현당 대표이자 화순 동복댐 건설에 따른 실향민 대표를 맡고 있는 장두석 대표의 안내로 그 유명한 화순 적벽을 직접 가서 볼 수 있었다.


적벽

노산 이은상

산태극 수태극 밀고 당기며
유리궁 수정궁 눈이 부신데
오색이 떠오르는 적벽 강물에
옷 빠는 저 새아씨 선녀 아닌가.



이렇듯 수많은 시인 묵객이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화순 적벽의 경치를 접하는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세상에 이런 절경도 있단 말인가”
옛 선조(1519년 기묘사화 때 화순에 유배된 신재 최산두)들이 중국의 절경이라는 양쯔강 적벽 못지 않다고 해서 ‘적벽’이라 이름 붙였다고 하던데 양쯔강의 적벽인들 이보다 더 아름다울까 싶었다.

전국을 방랑하던 김삿갓(김병연) 시인도 이 적벽을 와서 보고서는 방랑생활을 접고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았던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높은 산중에 가득 들어찬 동북댐 호수에 비낀 50여 미터의 아찔한 절벽과 그 위로 당장이라도 “감히 누가 이 땅을 노려” 하고 쩌렁쩌렁 소리를 지를 것 같은 옹성산의 당당한 위용이 어우러져 화순의 노루목 적벽은 절경 중에 절경, 비경 중에 비경이었다.

우리나라 산천 곳곳을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절벽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특히 웅장한 옹성산, 그 아래로 흘러갔을 유장한 강과 어루어진 아찔한 100여미터 높이 수 키로미터에 이르는 만점짜리 3박자 절경은 정말 보기 드물다.

강릉 경포대도 가보고,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금강산 삼일포도 가보았지만 호수와 주변 경치만 따져 이 적벽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감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절벽의 절반이 호수에 잠겼음에도 이 정도인데 만약 절벽의 전체 위용이 다 드러난다면 얼마나 장관이겠는가.

아마 세계에서도 찾기 힘든 절경일 것이다.

옹성산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를 노리는 왜적을 막기 위해 쌓은 장성산성 등 여러 산성 중에 최후의 보루로 쌓은 옹선산성 유적지가 남아있는 곳이다. 한눈에 봐도 천혜의 요새였다.
왜적이 이 근처까지 왔다면 단 한 놈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 자명하다. 물론 그 전 방어선에서 이미 패퇴시켰기 때문에 이 옹선산성 근처에도 얼씬하지 못했었다.
그 옹성산과 적벽 절벽의 오묘한 조화는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하였다.

장두석 실향민 대표는 비감에 젖어 입을 열었다.

“지금 이 경치도 절경이지만 저 절벽 중에 49미터나 물속에 잠겨버렸어, 전두환이가 기어이 댐을 만들어 그 아름답던 적벽 절벽을 호수 속에 수장시켜버린 것이지.”



“역사적 유적이고 세계적인 명승지를 그래, 수장시키는 것을 화순 주민들과 광주시민들이 그저 보고만 있었단 말입니까?”

“데모하고 난리 났제, 근디 광주항쟁이 터져 부러서 다 감옥으로 잡혀가 불고, 군인들이 불도저 밀고 와서 공사가 진행되는데도 기어이 마을을 떠나지 않던 주민마을에 불을 쳐질러 버리고, 거기다가 공사를 위해 막아 놓은 가물막이 댐에 비가 와서 물이 차 마을이 마구 물에 잠기기 시작하는 거야, 반쯤 잠겨서야 어쩔 수 없이 가재도구도 다 두고 몸만 빠져나온 주민들이 많았어”


“광주시민 식수용으로 댐을 막더라도 이 아름다운 절벽은 살리고 그 위에 만들면 안 됩니까.”

“왜 안 돼, 여기서 500미터만 올라가서 댐을 만들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제, 주민들도 아예 댐공사를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저 위에다 하라는 것이었제”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왜 그랬을까요”

“그 놀보 심보를 누가 알것어, 내가 그 때 감옥에 끌려가서 신문을 보니 광주항쟁 이후 무등산을 쪼개버리는 도로를 내겠다는 계획도 발표하던데 그건 광주시민들이 다 들고 일어나 못했지, 전라도를 파괴해서 지역감정을 악화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


“맞네요, 그 외에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네요. 나라가 발전하면 할수록 자연자원의 가치가 높아지고 명승 절경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그 지역 경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삶의 질을 평가하는 척도가 휴식과 여행 아닙니까.
특히 관광산업은 부가가치가 높고 고용유발효과가 매우 큰 첨단미래 산업에 속한단 말입니다. 전라도에서 이 화순은 동굴, 운주사, 고인돌 유적지 등 많은 명승 유적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백미가 이 적벽으로 보입니다.
적벽을 물에 수장시키고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출입금지 시켜놓으면 전라도 관광의 핵심을 제거해버리는 셈이겠지요.
전라도가 못살아야 지역 갈등이 심해질 것이니 그것을 노렸을 법도 하네요.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이런 데까지 신경 쓸 경황은 없었을 것이니 그 머리 위에서 조정한 미국의 음모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상수원 보호구역이라고 이런 절경을 왜 국민들이 보지 못하게 출입금지 시키는 것이지요. 광주보다 훨씬 큰 서울 시민의 상수원인 팔당댐은 양 옆으로 고속 도로가 쭉쭉 뚤려 씽씽 달리고 능내, 두물머리 유원지 등 쌍쌍 다정한 연인들과 서울 시민들이 얼마든지 접근해서 돌을 던져 물수제비도 뜨고 노는데...
팔당댐 인근에서 낚시질을 금지시킨 것도 좀 전의 일이 거든요. 15년 전에 대학시절 두물머리 느티나무 마을로 야유회를 가서 낚시질해서 매운탕 끓여먹고 그랬는데 화순적벽의 상수원만 유독 통제가 심하네요.”

“그래서 광주시청에 그렇게 주민들에게 개방하라고 요구해도 통 들어주질 않아. 실향민과 국민들이 와서 잠긴 마을도 보고 이 절경을 구경할 수 있게 우리 실향민들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요청, 지원금을 받아 여기 노루목 적벽 앞에 망향정을 세우고 휴식 공간과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광주시에서는 주변 사유지까지 출입통제 시키고 허가 없이는 들여보내질 않고 있어.”


 
▲ 차로 노루목 절벽 앞까지 갈 수 있는 산길이 만들어져 있지만 상수원 보호구역이라며 이렇게 통제하고 있어 현재는 광주시청에 허락을 구하지 않 ©자주민보 , 그리나래 블로그 펌



이 아름다운 화순 적벽은 화순군민, 광주시민만의 재산이 아니라 온 국민 온 겨레, 온 세계의 재부이다. 더는 저 원한의 철망으로 가로막아서는 안 될 것이다.
상수원 보호대책은 철저히 세우면서도 국민들과 세계인들이 마음껏 보고 느낄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검색을 해 봐도 물에 잠기기 전의 화순 적벽의 경치를 담은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
두 가지를 다 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물에 절벽이 반쯤 잠긴 지금의 경치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크고 넓은 호수와 어우러진 풍광도 멋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바에 세계적인 새로운 명승지 하나 만들어보면 좋겠다.

상수원 용 댐은 이 절벽 위로 옮기고 지금의 댐은 오직 경관용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꽃피는 계절, 녹음과 단풍이 짙어가는 계절, 비와 눈이 오는 계절을 고려하여 지금의 댐 수위를 조절하여 다채로운 풍광을 인위적으로 조성해보는 것도 매력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꽃피는 봄이나 비가 많이 오는 여름에는 댐의 수위를 높이고 단풍철이나 눈 쌓이는 겨울엔 댐의 물을 바닥까지 빼서 절경의 절벽을 마음껏 볼 수 있게 한다면 그것도 멋이겠다 싶다.

그러면 철 따라 다른 경치를 보기 위해 더 많은 관광객이 해내외에서 몰려오지 않겠는가.

근초고왕 등 드라마를 여기 노루목절벽 망향정에서 찍었다고 하던데 겨울연가와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라도 이 배경에서 나온다면 화순과 광주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관광 산업에도 크게 기여하지 않겠는가.

화순의 여러 신문과 시민운동가들의 블로그를 보니 이미 화순 적벽 개방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통합진보당 지역 의원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전 전라도 주민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이 운동에 동참해 나서서 수장된 민족의 보물을 반드시 건져 올려야 할 때이다.

왜 이렇게 절절히 호소하는지 알고 싶거든 한 번 가보시라. 사전에 허가를 구하면 지금도 누구나 가볼 수 있다고 한다.
사전 탐방 신청은 광주시 상수도사업본부 용연사업소 062-609-6122, 화순군청 062-374-0001에 하면 된다.





관련 자료

1. 최근 한 여행가가 찍은 만추의 화순 적벽
http://blog.daum.net/wuo/11537

2. 화순 적벽에 대한 설명이 잘 된 자료
http://ask.nate.com/knote/view.html?num=1248435

3. 적벽 사진
http://blog.naver.com/jajuwayo?Redirect=Log&logNo=50179387638

4. 적벽 사진
http://cafe.naver.com/gotothekorea/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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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가 아폴로적 인간이라면 노무현은…"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43> '호이트한국' 이래경 대표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11-17 오후 2:01:20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신이시여, 어디로 가나이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물음 앞에서 답할 준비를 하고 있을까. 2013년에 만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이래경 공동대표('호이트한국(주)' 대표)는 마치 이것에 대해서라면 늘 준비된 것처럼 당당하게 답했다.


"시대와 상황이 요구했을 때 마음속으로부터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피하려고 했을 때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중략) 우리의 삶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 이에 제한받고 규정된다고 할 때 오늘 이 시점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시대정신 속에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보람된 것이다."

오늘의 시대정신 속에 현재를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종교를 가지지 않고는 살아가기 어려웠던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 기독교의 영향으로 예수를 알리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학교 안을 돌아다녔던 열혈소년 이래경. 유신이 뭔지, 독재가 뭔지 알지 못했던 그는 대학에 들어와서야 독재정권과 인권탄압, 민주주의 억압이라는 현실에 눈을 떴다. 그리고 '민주주의 수호'라는 시대정신 앞에서 당시 4.19 혁명 때도 움직이지 않았던 서울공대 시위의 선봉에 섰다.

두 번의 제적으로 학교에 돌아가지 못했던 청년 이래경은 한국의 산업발전 궤적과 함께 오퍼상(영어 'offer'에서 파생한 일명 '보따리 장수'. 작은 규모의 무역상을 뜻한다) 사업을 시작으로 오늘의 호이트한국(주)을 일궈냈다. 깐깐한 독일 사람들도 인정한 CEO 이래경은 전 세계에 200여 개의 법인을 가진 연 매출 10조 원 규모의 독일 기업 호이트그룹에서 창업주 가족을 뺀 나머지 4만 명의 종업원 중 지분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민주투사 고(故) 김근태를 도와 오랫동안 한국의 정치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했을까. 어떻게 철저하게 수입의 1/3은 국가에, 또 1/3은 사회에 환원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진보적 자유주의가 이야기하는 복지국가를 외칠 수 있을까.


"나와 타자의 관계는 '불일(不一)이요 불이(不二)', 즉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이다. 결국 '나와 타자는 서로 맞물려서 함께 간다'는 뜻이다. 타자를 자기 삶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진보'적인 것이고, 나아가 타자를 나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 '진보적 자유주의'라고 생각한다. '인간 개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는 인식 위에 동일한 존재로서 타자와 만날 때 비로소 연대가 있고 진보가 있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진보적 자유주의를 외치는 가슴 따뜻한 부자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 이래경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호이트한국(주)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 1984년 독일의 호이트그룹이 국내 영업을 시작했고, 1988년에 합자형태의 법인 '호이트한국(주)'이 설립되었다. 유체동력학적 기술과 첨단 전자제어 지식을 결합한 산업기계를 제작하고 공급하는 회사라고 들었는데, 어떤 인연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인가?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이 적은 수입으로 6남매를 키우느라 생활이 매우 빠듯했다. 집안에 가진 것도 없고 대학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나 졸업장도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 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내 사업을 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졌다. 그래서 1984년에 내 사업으로 오퍼상 일을 시작했고 그때 만난 기업 중 하나가 '호이트(VOITH)'라는 독일 기업이었다. 호이트에서 들여온 철도 차량부품이 초기부터 대단한 성과를 거두면서 한국철도차량 사상 최초로 독자 설계한 '전후구동식 새마을동차'를 만들게 되었다. 이 분위기가 국제하계올림픽이 열리는 계기로 이어져 1988년 독일 본사에서 내게 한국에 현지 법인을 차리자는 제안이 왔다. 그 요구를 받아들여 '호이트한국'이라는 법인을 만들었다. 그렇게 주주 겸 대표이사를 맡아 여기까지 왔다.

- 외국 회사와 협력해 한국에서 자리를 잡는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나?

70~80년대의 오퍼상은 밑천 없는 사람들에게 성공을 만들어가는 신기루 같은 통로였다. 나는 운 좋게 매우 좋은 파트너를 만났다. 독일 사람들은 한 번 상대방을 신뢰하면, 그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하는 편이다. 물론 내 자신이 그들의 기대 이상으로 열심히 일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철도차량 분야와 독일 호이트그룹 내에서도 나는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호이트그룹은 전 세계에 200여 개의 법인과 전체 직원 4만 명을 거느린 연 매출 10조 원 규모의 기업인데, 이 4만 명 종업원 중에 창업주 가족을 빼고 지분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그만큼 독일 친구들이 나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다.

- 73학번으로 서울 공대 금속학과 출신이다. 당시 '금속학'은 다소 생소한 분야였을 텐데, 어떻게 가게 됐나?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기독교였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읽은 헨리크 센케비치의 <쿠오바디스>라는 소설에서 기독교인들이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물려 죽으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가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Youth For Christ (YFC)'라는 보수적인 종교반에서 활동을 열심히 했다.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이라는 목사가 주도한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의신론(依信論)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고교생 써클이었다. 지금은 의신론이 우리 사회를 질곡(桎梏)시키는 잘못된 신앙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이것을 믿었고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도 일주일에 세네 번씩 새벽기도를 나갔다. 학교에서는 매일 점심시간이면, 전도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렇게 열렬히 신앙생활을 하던 소년이었다.

신학대학을 가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당시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 여성들이 그렇듯 우리 어머니의 삶도 한 편으로는 시대상황에, 다른 한 편으로는 6남매를 키워야 하는 어려운 가정상황에 종교 없이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의 가장 큰 장점은 원칙적이고 타협하지 않다는 것인데,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나와 어머니는 매일같이 교리논쟁을 했다. 어머니의 꿈은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 돼서 '형제감독' 즉, 여호와 천국의 왕국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고, 나는 신학을 해서 개신교의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릎 쓰고 신학대학에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신학대 진학을 포기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평소 존경하던 고1 담임선생님이 우리나라에선 소재산업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당시 포항제철이 완공돼 쇳물을 쏟아내던 시기였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금속·철강 소재가 산업 입국에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 사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상장을 독차지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던 모범생이었다(웃음).

- 대학에 막 입학했을 당시는 유신이 시작된 바로 이듬해(1973년)였다. 스산했던 시절, 대학생 이래경은 어떤 청년이었나?

그때까지 나는 '유신(維新)'이 뭔지도 몰랐다.(박정희 독재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선포된 '10월 유신체제'에 따라 12월 17일 국민투표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약칭 '유신헌법')을 확정했다. (한국 헌정사상 7차로 개정된 제4공화국의 '유신헌법'은 정권 유지를 위한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유신헌법'의 '유신'은 일본 명치유신에서 가져왔다. 편집자) 당연히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소위 '문제 서클'과는 가까이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유로 몇 가지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공대에 진학했지만, 인문학적 갈증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인문학 강의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첫 번째 선택한 강의에서 읽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두 권의 책이 내 기본적인 종교관을 '확' 흔들었다. 다니던 교회 목사에게 '내가 왜 교회를 떠나는가?'에 대해 장장 7장의 편지를 남기고 교회를 떠났다(하지만 지금도 내 신앙은 기독교다). 그 뒤 독서토론회에 열심히 나갔는데, 사회문제의식이 있는 서클이라기보다는 당시 나오는 소설들을 편하게 따라 읽는 모임이었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황석영의 <객지> 등에서부터 세계명작 작품도 읽고 가벼운 소설들도 많이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읽었던 책들이 내가 편협한 사고에 빠지지 않고 삶의 균형을 잡는 데 매우 도움이 된 것 같다.
 

ⓒ프레시안(최형락)


또 다른 충격은 당시 정치현실에 대한 것이었다. 대학시절 초기 나는 학내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많은 학생들이 잡혀 들어간 사실에 관심조차 없었고, 그저 내 생활에만 바빴다. 그러면서도 점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1학년부터 2학년까지 총 4학기를 다니는 동안 한 학기에 2개월 이상 강의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개강하면 곧바로 휴교를 했는데, 이것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런 나의 생각들이 독서토론회에서 읽고 있던 책 내용과 연결되면서 내게도 조금씩 사회의식이 생겼다. '뭔가 잘못됐다'라는 생각이 커지기 시작했다.

- 당시 대학가에서는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대학생들이 시위 도중 죽기도 하고, 붙잡혀 강제 징집을 당하거나 제적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조용한 독서토론회 일원이었던 이래경이 75년 '김상진 할복자살 사건' 이후 서울공대 시위를 주도했다.

1975년 4월에 독서토론회의 멤버 중 하나였던 문리대 미생물학과 박우섭 씨(현 인천남구청장)가 4·3시위로 정학을 당했고, 4월 11일에는 농대 축산학과 김상진 씨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쓰고 할복자살을 했다. 이것은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당장 야밤에 그때 다니던 교회 건물에 가 새벽까지 '인간해방 선언문'이라는 제목의 유인물 3000장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새벽 5시에 등교해 준비한 유인물을 공대 강의실과 화장실 곳곳에 뿌렸다. 유인물에 "아무리 서울공대생이 산업의 주역이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침묵을 지켜선 안 된다.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한다"라고 썼지만, 그날 이후에도 공대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거의 모든 대학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했는데, 서울대 공대만 정상적으로 수업하고 있었다. 4.19 혁명 시절에도 공부를 계속했던 일종의 '서울공대 전통'이었다.

그러다 4월 17일경, 농대 학생들이 공대 건물을 기습해 시위를 부추기는 선동을 하고,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 농대생들의 선동으로 학교 잔디밭에 수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는데, 그것을 집회 세력으로 이끌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의를 듣던 중에 뛰쳐나와 집회를 주동하게 된 것이다. 평소 답답했던 속이 후련해지고 상큼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시위가 끝난 후 청량리에서 막걸리를 진탕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형사들이 집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잠깐 조사받고 오겠다'고 하고 붙잡혀 갔다. 당시 친 이모부가 안기부 내 대학 및 종교담당 수석과장이었는데, 그 덕분에 3일 만에 그냥 풀려났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가 보니, 나를 포함해 당시 학교에서 불온시했던 서클 리더 7명 모두가 데모한 이튿날 제적됐다. 지금도 그 친구들에게는 마냥 미안하다.

- 어떻게 조용하던 청년이 앞에 나가 시위를 마이크를 잡고 시위를 주도할 생각을 했나?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욱'하는 경향이 있다. 그땐 나도 순간 '욱'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나는 기독교 신앙에 의해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예수신앙'의 핵심이라 할 '나라와 정 의'를 위해 자기를 던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 상황에서 침묵하고 출세를 위해 공부만 한다는 것은 나로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당시 순간에는 어떤 판단을 깊이 할 수 있는 겨를이 없었다. 평소 나를 굉장히 좋아했던 교수가 강의실을 나가지 말라고 막았지만, 뿌리치고 나섰다. 집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내가 앞서 나가 김상진 열사를 위해 묵념하고 짧은 웅변과 만세삼창을 하고 노래했다. 그 후 잔디밭 자리에 앉으니, 연이여 학생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와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냈다. 비록 그것 때문에 경찰에 붙잡혀가고 제명을 당했지만, 지금도 전혀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했었을 것이다.

- 학교에서 제적당한 후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던가?

학교에서 쫓겨난 지 한 달 만에 인생이 360도 바뀌었다. 보름 만에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영장이 나왔고, 바로 입대했다. 당연히 군대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최전방으로 떨어질지는 몰랐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강원도 인제를 넘어, 원통사단에 혼자 배치됐다. 당시 훈련소에서 교육받은 수천 명 중 나처럼 집회를 주동하다가 갑작스레 군대로 온 십여 명만 골라서 전방 여러 부대로 산개해 보낸 것이다. 운동권 출신들이 겪은 감옥살이는 당시 내가 겪은 군대 생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무 힘들었다.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에서 묘사한 그대로였다.

한편으로는 고생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책과 세상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고 제대했다. 같은 부대에서 김삼수라는 친구(현 산업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만났는데, 그 친구에게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조용범의 <후진국 경제론>,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등의 책을 추천받았다. 그렇게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기 시작한 것이 독서토론회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의식을 갖게 된 계기였다.

제대 후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취업을 해야 했는데, 당시는 인력 부족이 심각했던 터라 '아남산업'이라는 곳에 쉽게 취업할 수 있었다. 거기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대 공대 산업경영연구회와 산업사회연구회 써클 출신 친구들이 함께 공부하자며 찾아왔다. 그들과 같이 E.H.카의 <소비에트 혁명>, 스위즈의 <자본주의 비판이론>,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 발달사> 등 여러 책을 전부 원서로 읽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는 망한다. 사회주의는 필연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단순하고 순박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당시 상황과 환경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 노동운동을 잠깐 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노동운동을 깊이 하지는 않았다. 당시 내가 일하던 아남산업은 세계 최초로 전자오락기를 만든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사로에 기능품을 반제품으로 하청 수출하는 기업이었다. 이 전자오락기가 세계시장에서 엄청나게 팔렸다. 나는 생산 관리를 맡고 있었는데, 급증한 수요에 맞춰 물량을 대려니 8000여 명에 달하는 여공들에게 하루 12~16시간씩 무리하게 생산을 강요했다. 군 장교 출신인 미국인 총감독을 보조하면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내내 여성 노동자들을 들볶았다. 그러다 보니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아가씨들이 잠깐 쉬는 시간에도 복도에서 고목 넘어지듯 푹푹 쓰러져 그대로 잠들었다. 이를 보고 참다못해 감독하고 있던 미국인과 크게 싸우고, 사표를 던지고 나와 버렸다.

그렇게 회사에서 나와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야전잠바를 입고 부평 근처 공장을 전전했다. 그런데 아무리 취업을 하려해도 나를 받아주는 공장이 없었다. 다들 내 손을 보고는 '당신은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안 받아 주더라. 지금도 나는 당시 노동자로 취업했던 사람들은 정말 어떻게 현장에 들어갔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결국 인천소재 대우중공업 직업훈련소에 들어갔는데, 며칠 만에 위에서 훈련생의 머리를 깎으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차마 그것을 견딜 순 없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들었던 생각은 '나라는 존재는 노동자들과 마음을 같이 할 수는 있어도, 내가 억지로 그 사람들 속에 함께 노동하면서 살 수는 없구나'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솔직한 한계와 고백이었다. 그 길로 노동운동을 하려고 노력했던 몇 개월간의 방황을 접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소개로 한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회사에 취직을 하고도 계속 서울대 제적생들과 만나 토론회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 1980년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5년 만에 복학하니, 어떤 기분이 들었나?
 

ⓒ프레시안(최형락)

1979년에 10.26 사건이 발생해 그 덕에 내가 졸지에 서울대 공대 제적생 대표로 복학하게 됐다. 새로운 인생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는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법대 대표로는 이범영, 사회대는 이해찬, 인문대는 이철, 의대는 서광태, 사대는 고은수 등이 있었다. 당시 서울대의 움직임은 복학생협의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군바리 전두환'이 전면에 등장한다고 잔뜩 긴장하고 복학생협의회를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정작 나 자신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복학생대표로 학교와 교수들에게 따질 것은 따지고 요구할 것은 요구했지만, 시위를 위해 대학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대신 그동안 직장생활에서 모은 돈으로 대방동에 입시학원을 차려 박인배(현 세종문화회관 대표), 박우섭 등과 함께 저녁에는 중학생을 가르치면서 낮에는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군부 세력의 긴박한 움직임에 학생들의 시위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을 계속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내가 운영한 입시학원에는 시간당 3000~5000매가 나오는 당시 최고급 윤전기가 있었다. 그러니 재학생 후배들이 시위가 있을 때면 밤마다 와서 윤전기를 쓰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예 5월 초에는 그것을 총학생회에 기증해버렸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기 하루 전날, 전국 대학교 학생회장단이 이화여대 앞에 총집결했는데 그 때 나는 집에 있었다. 학과 후배가 전화로 "선배님, 빨리 피하십시오. 경찰이 학생회장단을 다 연행해 갔습니다"라고 하길래, 곧바로 집을 나와 대방동 학원에서 며칠을 기거했다. 며칠 후, 후배들이 찾아와 "광주에서 큰일이 났습니다. 서울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라고 하길래, "같이 죽을 일 있느냐, 제발 좀 참아라"라고 말렸다. 하지만 결국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이 입시학원에서 제작됐고, 서울에서는 5월 23일 처음으로 구로공단에 뿌려졌다. 유인물을 나눠주던 후배들은 현장에서 다 잡혔고, 경찰은 나를 이해찬 선배와 이들과의 연결고리로 상황을 만들어 수배자 신세가 되었다. 6월 13일 계엄령 선포되면서 나를 포함한 100여 명에게 공개 수배령이 내려졌다. 친구 집에서 숨어서 TV를 보고 있는데, 수배자 명단에 내 이름이 '이래경'이 아니라 '이태경'으로 나온 것을 봤다.

또다시 내 인생이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집에서는 어머니가 혈우암으로 위독하니, 그만 자수하라고 했다. 고민 끝에 친형님을 만나러 나오다 그 자리에서 형사에게 잡혀 자수한 셈이 되었다. 이번에도 이모부 덕분에 그럭저럭 29일간 조사만 받고, 기소중지로 나왔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학교에서는 두 번째 제명을 당했기 때문에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다시 취업을 해야 했다.

무역회사에 다닐 때 문교부라는 이름으로 몇 차례 전화를 받았다. 어느 날 문교부(사실은 안기부) 직원들이 나를 시내 호텔 방으로 불러 '오사카, 동경, 베를린 중 네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해라. 돈은 우리가 다 제공하겠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대학교 교수 자리도 보장해 주겠다. 대신 해외에서 공부하는 동안 교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간 보고 해 달라'고 제안했다. 말 그대로 나를 그들의 끄나풀(앞잡이)을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기가 막혀서 웃었다. "내가 아무리 공부가 고프다고 한들, 그런 식으로 공부하겠나.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거다"라고 단호하게 거부했더니, 자기들이 제안한 것을 평생 입 닫고 비밀을 무덤에 갈 때까지 지키라고 협박했다. 이게 다 기무사, 보안사, 중앙정보부라고 하는 당시 첩보기관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을 끄나풀로,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만드는 일이다. 당시 대학교수 중 첩보기관 끄나풀로 공부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그들에게 들었다.

- 그렇게 사업을 가꾸고 키우는데 집중했다. 그렇다면, 고(故) 김근태 의장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1983년 내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또는 민청련) 결성과정에 개입하면서 거기서 '김근태'라는 인물을 만났다. 초기 의장이 김근태였고, 부의장이 장영달과 이해찬, 상임위 의장이 최민화였다. 처음 나는 서울대 공대와 성균관대와 연락을 책임지는 간사 겸 상임위원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민청련 중심 인물 중 하나가 된 셈이었다. 그러다 1년쯤 지나서 집안이 기울고 내 생활도 어려워져 민청련 상임위원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민청련에서 나온 이후인 1985년, 남영동에서 '김근태 고문사건'이 터졌다. 그 소식을 듣고 정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고 또 미안했다. 당시 나는 1선도 아니고 2선도 아닌 3선에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민청련 부설 민족민주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정세연구>라는 격월간지 발간 비용을 한 달에 50만 원씩 지원하는 일이었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아무리 내 상황이 어려워도 한 번도 지원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10년 동안 지원한 금액만 5000만 원 쯤 될 것이다. 당시로써는 꽤 큰돈이었다. 김근태 선배가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오피스텔을 빌려 여러 사람과 만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러던 그가 1993년 가을 무렵 내게 '정치에 입문하려 하니 도와 달라'고 했다.

그때 우리가 만난 곳은 성북구 우이동 산골 속에 있던 '명상의 집'이라는 천주교 피정장소였다. 본인 성격에는 교수나 신부가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나마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에 입문하겠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가 이 이야기를 일부러 '명상의 집' 예수님 상 밑에서 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에게 하는 자신의 약속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그를 돕게 되었다. 1994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에도 계속 도와달라고 하니,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지켜본 사람으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후원회 책임을 맡게 되었다. 당시 후원회 실무자가 지금 민주당 유은혜 의원이었고, 내가 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으면서 '한반도 재단'을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 '김근태 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옆에서 정치권을 보며 가장 힘들었던 점이나 안타까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김근태가 제일 어려웠던 시기가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역설적으로 DJ와 노무현 집권 10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근태 선배는 세상을 보는 시각과 방향은 DJ와 전적으로 공유하고 있었으나, 현실 접근에서는 매우 달랐다. 이 점에서 나는 DJ를 매우 정략적인 마키아벨리 형 인간이었다고 본다. 그는 동교동계라는 충성적 계파운동을 통해 필요하다면 구태의연한 타협적 정치를 했다. 어쩌면 그것은 불가피한 현실 정치였을 것이다. 반면, 김근태는 초짜라고 놀림을 당할 만큼 원리원칙을 대단히 중시한 철저한 민주주의자였다. 계파를 떠나 토론과 숙의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라고 여겼다. 평민당 대선 후보 선출방식 과정에서 이 둘의 의견이 충돌한 이후, DJ와 동교동계는 김근태를 견제하기 시작한 것 같다. 실제로 DJ는 평민당 초기, 부총재로 김근태를 발탁한 것 외에는 그를 중용해서 함께한 적이 없다.

김근태와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애증관계였다. 김근태는 철저한 현실 파악 속에 지성과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반면, 노무현은 다분히 즉흥적이고 감정적이었다. 그 두 분의 차이는 니체가 쓴 <비극의 탄생>에서 나오는 아폴로적인 요소와 디오니소스적 요소 같았다. 김근태가 아폴로적 인간이었다면, 노무현은 디오니소스적 인간이었다. 그 둘이 협력을 잘했다면 시너지 효과가 매우 컸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노무현은 본인이 대통령이 됐긴 했지만, 운동권의 대부로 실질적인 정통성을 갖고 있는 김근태에 대한 자격지심이 너무 컸던 것 같았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이 두 사람은 끊임없이 갈등했다. 어느 날은 내가 김근태 선배에게 "그냥 노무현을 밟아라"라고 직언했더니, "어떻게 만들어진 참여정부인데 그럴 수 있나. 내가 노무현 대통령과 싸우면 참여정부가 무너진다"고 하더라. 그렇게 나라 걱정 앞에는 한없이 심약한 양반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민주개혁진영의 내부가 차마 공개적으로 내놓고 말하지 못한, 속병을 앓는 자기모순과 같은 것이었다.

- '일촌공동체'라는 새로운 사회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노무현 정부가 출범할 때 매우 중요한 사건 하나가 터졌다. 2003년 7월 인천 부평구 청천동에서 30대 엄마가 아이 셋을 데리고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철저한 고발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이 사건을 심각하게 들여다봤어야 했다. 그런데 그 상황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대신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분양 원가를 공개하는 게 말이 되느냐, 장사꾼 논리대로 해야 한다'라는 참으로 한심한 발언을 했다. 김근태가 복건복지부 장관을 하던 시절인 2004년 12월, 대구에서 다섯 살 남자 아이가 벽장 속에서 굶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내가 김근태 장관을 대신해 부인인 인재근(현 민주당 의원) 씨와 함께 대구로 내려갔다. 당시 현장 담당 사회 국장이 사건 브리핑을 하는데, 요지가 '이번 일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인력·행정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이었다'라고 말했다. 브리핑 도중에 내가 "때려치워라.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변명만 하고 있느냐?"라고 소리를 질렀다.
 

ⓒ프레시안(최형락)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제는 우리가 정부만을 믿어서는 안 되고 시민사회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몰입된 지금 우리 사회는 잘못 가고 있다'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는 '성장과 출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상생하는 사회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 스스로 상생하는 문화, 인간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자는 결심으로 '일촌공동체'를 기획하고 2007년 3월에 법인으로 설립했다.

- 일촌공동체를 설립하고 난 후에도 복지국가소사이어티와 같은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계속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이래경의 삶을 움직인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시대와 상황이 요구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서부터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피하려고 하면,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각 시대의 흐름에는 그때마다의 시대정신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는 '독립'은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이었다. 그다음에는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경제발전'이 시대정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일등공신은 '박정희'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역할을 한 부분도 있지만, 최고 공신은 차라리 '조봉암'이었다. 만약 조봉암이 농지개혁을 계획하고 실현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경제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장면 정부 때 만들어 놓은 경제발전 초안에 기초해 자신이 쿠데타로 집권 한 뒤 이를 실천한 것이었다. 여기서 박정희를 평가하는 것은 자립경제의 기치로 중공업과 산업재 중심의 경제발전을 추진하고 이루어 냈다는 점이다. 제 3 세계에서는 감히 꿈꿀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을 높이 사고 싶다. 이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민주화'였다. 유엔의 제1 아젠다가 바로 '인권(Human Right)'이고, 제2 아젠다가 '참정권'이다. 참정권은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민주국가라는 것은 국민들 스스로가 국가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고 결정할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지난 대선에서의 국가정보원(과거 안기부, 기무사) 등 권력기관의 개입은 민주적 기초와 원칙을 뒤흔드는 매우 중차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참정권 이후, 시대정신은 바로 '사회경제적 권리'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제반 조건, 즉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가 바로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다. '복지국가'는 우리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자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내가 좋아하는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은 복지국가가 지향해야 할 철학을 단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안전보장(Human Security)'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단지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최소한의 재화와 서비스의 제공을 넘어서, 한 인간으로서 자신에 내재한 잠재력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적극적 개념으로 더욱 발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와 같은 논쟁을 보고 있으면, 그래서 참 한심하다. 복지는 기본적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연의 위대한 산물 또는 하나님의 섭리적 창조물이고,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개개인으로서 가치와 존엄은 예외 없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적 조건 안에서 어떻게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으로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 70년대 20대였던 이래경은 '정부 민주화'를 요구했다면, 2013년 60대 이래경은 국가를 상대로 '복지국가'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나?

청년일 때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대자적 의식과 자신의 생각이 분명하지 않았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막연한 분노감으로 운동을 했다. 어떤 정립된 체계나 사상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게 바로 청년 정신이다. 이순(耳順)의 나이에 이른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리와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가야한다고 하는 방향성을 마음속으로 깊이 느끼며 살고 있다.

-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장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도 상당 부분 시간과 돈을 할애하고 있다. 어떻게 나의 몫을 다른 이들의 몫으로 나눌 수 있는가?

'인간은 과연 도덕적인 존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본다. 이것은 매우 철학적이고 자유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다. '도덕'에 관한 여러 입장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로 '도덕은 쓸데없는 것으로 인간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즐기며 살면 된다'고 하는 입장이 있다. 다른 하나는 '도덕은 인류가 살아오면서 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한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은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는데 검증된 적합하고 실제적이며 정당한 게임의 법칙이다'라는 입장이 있다. 세 번째는 도덕이란 '인간으로써 마땅히 가지고 있는 내면의 핵심 의지다'라는 입장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세 번째 입장이다.

하나의 열린계가 스스로의 한계에 이르면, 이 장애를 뛰어넘기 위해 새로운 계로 이동하는데 이것을 '창발현상'이라고 한다. 인간은 이 창발현상에 의해 자연계에서 생물계로, 그리고 인간계로 이동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대자적 의식을 한다. 마치 파스칼의 '나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혹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처럼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면서 창발현상으로써 인간이 완성된 것이다. 이 창발의 핵심에 바로 도덕적 의지가 있다. 도덕은 우리 내면에 빛나는 도덕률로 자리하면서 인간이기 때문에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재창조의 작업으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능력을 갖춘다. 새로운 것들을 창조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름 내면의 도덕을 실현하고 있다.

- 개인의 몫과 공동체의 몫의 가치가 충돌하지는 않는가?

지금도 내 수입의 1/3은 세금, 1/3은 내 개인과 가족, 그리고 나머지는 다른 이들을 위해 쓴다. 1년에 1억 원이 넘는 금액을 지원한 지 벌써 7년 정도 됐다. 처음 결정할 때는 매우 주저했던 기억이 있지만, 이후에는 무심하리만큼 사무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더라.

다행히 내 처는 허영과 사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나를 믿어주고 일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개입도 언급도 하지 않는다. 대단히 고맙게 생각한다. 내 기본 봉급은 생활비로 가져가지만, 그 외에 수입인 경영수당과 배당이익은 대부분 사회활동을 하는 지인이나 단체를 후원하는 데 쓴다. 정직하게 말하면 가끔은 '내 자신과 가족을 위해 허영도 부리고 호사도 하고 싶다'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잠시 생각일 뿐 곧바로 떨쳐 버린다.

- 이래경에게 자유란?

인간이란 필연과 우연의 접점에서 자기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간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 아니 자유 그 자체'라고 선언했다. 또 '인간은 인간의 미래'라고 외쳤다. 참으로 멋진 선언이고 이것이 자유주의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이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는 '나는 무엇이고 타자는 무엇인가? 개인이 먼저인가. 공동체가 먼저인가?'라는 중요한 화두가 반드시 발생한다.

나와 타자의 관계를 불가의 용어 '불일(不一)이요 불이(不二)', 즉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싶다. 결국 나와 타자는 분리가 무의미하게 서로 맞물려서 함께 간다는 뜻이다. 타자를 자기 삶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진보'적인 것이고, 나아가 타자를 나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 '진보적 자유주의'라고 생각한다. 자기 삶에 대한 자각을 통해 자연스레 '인간 개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는 인식의 기초 위에 동일한 존재로서 타자와 만날 때 비로소 연대가 있고 진보가 있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에게 자유란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과 타인을 향한 대한 대화이자 채찍질'이다.

-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중용(中庸)>을 읽을 때마다 참 좋다. 보통 '중용'을 적당히 균형 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다. 성철 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용은 '쌍차쌍조(雙差雙照)'다. '쌍차'란 양 끝을 모두 버린다는 뜻이고, '쌍조'란 모든 것을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좌와 우의 양 극단을 버려 그야말로 공(空)의 상태가 될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린 쌍차(雙差)의 빈 마음, 청정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살펴본 후에야 '올바름'을 판단하는 게 바로 중용인 것이다. 도올 선생은 이것을 '호문(好問), 호찰好察), 집기양단(執基兩端)'이라고 설명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끝까지 살펴본 후, 양 끝을 모두 포용하여 판단한다'는 뜻이다.

젊은이들에게 치열하게 우리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부딪쳐 보고 무엇이든 실천해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도올의 중용 이야기를 빌어 세 가지 관점으로 이야기 한다면, 첫째는 '시중(時中)'으로 '모든 존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조차도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 이에 제한받고 규정된다고 할 때 오늘 이 시점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시대정신 속에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보람된 것이다. 두 번째는 '능구(能久)'다. 공자가 '안회'라는 제자를 가리켜 '나는 어떤 결심하지만 달이 바뀌면 마음도 변하는데, 안회는 한 번 무언가를 결심하면 끝까지 지켜 간다'면서 늘 칭찬했다. 한 번 마음을 정하면 의지를 가지고 지켜나가는 실천의지가 소중하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곳에 젊음을 던져라! 마지막은 '지미(知味)', 즉 '삶을 음미하라'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두세 번씩 식사를 하는데, 그 중에 음식의 참다운 맛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인생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자각하고 자신의 삶을 음미하고 살피라는 것이다.

일촌공동체를 설립할 때 그 기본정신을 해월(海月) 최시형 선생에게서 가지고 왔다. 첫 번째는 '경인경물(敬人敬物)', 인간과 자연에 대해 경외심을 갖자는 뜻이다. 두 번째는 '심인심고(心人心告)', 생활 속에서 만나는 타인을 사랑하고 걱정하며 그들을 위해 마음속 하느님(侍天主)에게 간절히 기도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은 '여인여락(與人與樂)'으로 사람들 속에 함께 머물면서 그 사람들과 삶의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락'은 기쁨과 더불어 슬픔, 아픔, 애달픔, 고통 등을 모두 포괄한다. 이 '삼인사상(三人思想)'을 일촌공동체를 통해 실현했으면 하는 소망이다. 동시에 삼인정신은 자유와 함께 내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고이자 내 삶의 잣대이다.
 

▲ 심인심고(心人心告), 여인여락(與人與樂) ⓒ프레시안(최형락)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연구원이 진행하고, 정리는 정인선 인턴이 맡았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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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직원, 민주당 의원 뒷덜미 잡아채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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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3/11/18 15:46
  • 수정일
    2013/11/18 15:4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현장] 의원들, 항의하며 거센 몸싸움... "양팔 뒤로 꺾은채 '의원이면 다냐'고 해"

13.11.18 10:36l최종 업데이트 13.11.18 14:52l
이경태(sneerc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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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민 민주당 의원(오른쪽 위)이 강기정 의원의 뒷덜미를 잡은 청와대 경호실 직원(아래 피흘리는 사람)에게 "당신의 신분을 밝히라"며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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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 : 18일 오후 1시]
뒷덜미 잡힌 강기정 "양팔 뒤로 꺾은 채 '의원이면 다냐'고 했다"

"버스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먼저 앞 목을 잡더니 바로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또 다른 손으로는 내 허리춤을 움켜쥐었다. 동료 경호원까지 나오자, 양팔을 뒤로 꺾었다. 그렇게 3~4분 가량 뒷덜미를 잡혀 젖혀진 상황이 이어졌다."

청와대 경호실 직원에게 폭행을 당한 강기정 민주당 의원의 설명이다. 그는 18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 시정연설 후에도 국회 본관 돌계단 위에 계속 주차돼 있던 '차벽'에 대해 항의하다가 청와대 경호실 직원으로부터 폭행당했다.

그에 따르면, 강 의원 등 민주당 의원들은 박 대통령 시정연설 후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규탄집회를 열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그러나 국회 본관 앞 돌계단 위에는 청와대 경호용 버스 3대가 계속 주차돼 있었다. 정부의 정당해산심판 청구에 항의하며 본관 정문 앞에서 농성 중인 통합진보당 의원들을 겨냥한 '차벽' 용도였다.

강 의원 등은 본래 국회의장 및 국회 교섭단체 대표 등의 차량을 주차하는 곳에 여전히 서 있는 '차벽'을 빨리 철수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세 대의 버스 중 가운데 있던 버스의 열려 있던 문을 발로 차며 "빨리 차 빼라"고 요구했다.

폭행상황은 그 직후 벌어졌다. 버스 안에 있던 경호원은 그 즉시 뛰쳐나와 '행동'에 나섰다. 강 의원은 "주변의 동료의원들이 내 뒷덜미를 잡은 경호원에게 '의원이니 손을 놔라'고 요구했지만 (경호원들은) '국회의원이면 다냐'며 약 3분 가량 이상을 저의 양손과 뒷덜미, 허리춤을 잡았다, 노영민 의원을 밀치기도 했다"고 밝혔다.

청와대 경호실이 '과잉경호'에 나섰다고도 꼬집었다.

그는 "버스 차량이 세워진 곳은 국회의장과 교섭단체 대표, 의원들의 차량을 세우는 곳이었다"면서 "역대 어느 정권의 시정연설에서 그곳에 경호차량을 차벽처럼 설치하고 의원들의 출입을 막아서는 경우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국회의원이라고 제지했음에도 경호원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인) 차지철처럼 무소불위로 폭행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경호실 측과 민주당 관계자들의 실랑이 과정에서 문제의 경호실 직원의 입술이 터져 피가 난 것에 대해서는 "나는 (그 사람이) 버스에서 뛰어나오는 순간만 기억날 뿐이고 제지에서 풀려난 뒤에는 (계단 아래) 규탄대회 장소로 이동했다"면서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뒤통수로 경호원을 가격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뒤로 제껴져 있던 상황이었는데 어찌 가격했는지 누가 내게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말했다.

강 의원은 강창희 국회의장에게 이 같은 상황을 설명하고 청와대 측의 해명을 요구한 상황이다. 강 의원은 "강 의장이 '청와대 비서실장은 몰라도, 정무수석을 불러서 (이런 상황을) 어필하도록 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한편, 청와대 경호실 측은 오히려 폭행당한 것은 자신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버스를 바로 뺄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버스를 발로 차는 행위를 했고 이를 제지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문제의 경호실 직원은 상황 직후 병원으로 이동했다. 민주당 관계자들이 해당 직원의 신분 공개를 요구하며 버스를 가로막는 등 대치상황이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자 경호실 측은 다른 경호원에게 외투를 씌워 버스에 태우는 식으로 민주당 관계자들의 눈을 속이기도 했다.
 

대통령 경호실 "강 의원이 폭행... 법적 조치 검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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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대통령 경호실은 18일 박근혜 대통령 시정연설 직후 강 의원과 경호실 직원들과 벌어진 충돌에 대해 '강기정 민주당 의원의 경호요원 폭행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의 원인 제공은 물론, 경호실 직원의 입술이 터진 것도 강 의원의 소행이라며 법적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도 밝혔다.
ⓒ 이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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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대통령 경호실은 박근혜 대통령 시정연설 직후 벌어진 충돌을 '강기정 민주당 의원의 경호요원 폭행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의 원인 제공은 물론, 경호실 직원의 입술이 터진 것도 강 의원의 소행이라며 법적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도 밝혔다.

대통령 경호실은 이날 오후 보도자료를 내고 "금일 행사 종료 후 행사에 참여한 22경찰경호대 운전담당 현아무개 순경이 대형버스를 이동시키려고 차내에서 대기 중이었다"며 "민주당 의원 일행이 버스 인근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강 의원이 '야 이 새끼들, 너희들이 뭔데 여기다 차를 대놓는 거야, 차 안빼'라며 정차된 차량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차내에 있던 현 순경이 내려와 강 의원에게 다가가면서 상의 뒷편을 잡으며 '누구시길래 차량을 발로 차고 가십니까'라고 항의했다"며 "현 순경은 강 의원이 의원 배지를 달고 있지 않아 국회의원 신분임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부연했다.

또 "주변에 있던 민주당 의원들이 '누가 함부로 국회의원을 잡고 그래, 안 놔" 등의 발언을 하는 상황에서 강 의원이 머리 뒤편으로 현 순경의 안면을 가격하여 입에 상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경호실은 민주당 의원들의 항의를 '소란행위'라고도 했다. 이들은 조치 사항으로 "현 순경의 입술 내외부가 크게 찢어져 급히 화장실로 이동하여 피를 닦아내는 상황에서 민주당 김현 의원이 '너희들 경호실이지'라며 고성을 지르는 등 소란행위를 유발했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 현 순경은 강북삼성병원으로 응급 후송돼 봉합 치료를 받고 있으며 강 의원의 폭력 행사에 대한 법적 조치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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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이 끝난뒤, 국회 본청 정문 앞에서 민주당 의원들과 청와대 경호실 직원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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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 : 18일 오전 11시]
청와대 경호실 직원과 민주당 의원들 몸싸움

18일 오전 10시 40분경, 국회 본청 앞에서 청와대 경호실 직원과 민주당 국회의원간의 거센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경호실 직원은 입이 터져 피를 흘리기도 했다. 이날 몸싸움은 경호실이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앞두고 대형버스 차량 3대를 국회 본청 입구를 막고 주차한 데에서 비롯됐다.

강기정 민주당 의원은 "대통령 연설이 끝났으면 차량을 빼야지 왜 그대로 주차해 두었냐"라고 항의했다. 이에 경호실 직원은 "왜 차를 발로 차냐"며 강 의원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 장면을 본 노영민 의원 등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여기가 어딘데 이 자리에서 국회의원의 뒷덜미를 잡냐"며 거세게 항의했다.

현재 청와대 경호실 대형버스 1대는 자리를 떠났고 나머지 버스 2대 주변을 민주당 당직자들이 에워싸고 있다. 청와대 경호실 직원은 이 몸싸움 과정에서 입이 터져 피를 흘리기도 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청와대 경호실 직원에게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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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진보당 침묵시위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후 첫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마스크를 쓴 채 정당해산 청구 철회를 주장하는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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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 : 18일 오전 10시 36분]
'반쪽 환영' 받은 박 대통령, 한쪽에는 '마스크'도...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전 10시 취임 후 첫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했다. 박 대통령의 등장에 통로 옆쪽 새누리당 의원 전원은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러나 환영은 '반쪽'뿐이었다.

양승조·정세균·조정식 등 민주당 의원 10여 명은 일어서지 않았다. 김기식·은수미 의원 등 15명가량의 민주당 의원들은 아예 시정연설에 불참했다. 앞서 민주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대통령 입장시 예우를 하는 것을 '권고'했다. 다만, 시정연설 후 연설 내용에 따라 예우 여부를 '자율적'으로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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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립한 새누리당, 앉아있는 민주당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4년도 예산안에 대한 정부 시정연설을 마치자 새누리당 의원들이 기립해 박수를 친 반면 민주당 의원들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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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박수 터질 때마다 '정당해산철회' 피켓 들어

오병윤·김선동·이상규·김미희·김재연 등 통합진보당 의원 전원은 '마스크'를 썼다. 헌정 사상 첫 정당해산심판 청구를 한 것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김선동 의원은 연설 중 박수가 터질 때마다 '정당해산철회'라고 적힌 피켓을 들어올렸다.

앞서 이들은 국회 본관 앞 정문 앞에 단식농성장에서도 박 대통령에게 항의 의사를 드러냈다. 박 대통령이 이날 오전 9시 40분께 국회에 도착하자,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당해산철회'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어올렸다. 박 대통령보다 먼저 국회에 도착한 정홍원 국무총리·황교안 법무부장관에게도 "정당해산 철회하세요"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시선은 여기에 닿지 못했다. 청와대와 국회사무처는 철저하게 이들을 가렸다. 청와대 경호원 등을 실은 대형버스 세 대를 국회 본관 로비 앞에 주차해 농성장을 가렸다. 청와대 경호원들과 국회 방호원들을 농성장 옆과 뒤에 배치해 시선을 가렸다. 김미희 의원이 '인의 장막'을 넘어서기 위해 피켓을 든 손을 번쩍 들었지만 소용 없었다.

국회 사무처는 이날 오전 기자들에게 "본회의장 퇴장시 통합진보당의 항의 및 돌발사고 발생 위험 등으로 인한 경내 보안 강화 지침으로 행사장 근처인 2층 정현관, 3층 로텐더홀 근처 출입 및 취재가 제한된다"고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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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 첫 시정연설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9차 본회의에서 취임 후 첫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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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독도영유권 주장 근거문서 원본 소실

日 독도영유권 주장 근거문서 원본 소실
 
시네마현 고시 제40호는 누구도 본 적이 없다
 
독도련 | 등록:2013-11-18 09:14:05 | 최종:2013-11-18 09:56:1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시네마현 고시 제40호는 누구도 본 적이 없다

배삼준 (독도일본에알리기연대 회장)

일본이 1905.2.22 독도를 시마네현지사를 통해 고시 제40호를 제정하고 불법적으로 일본에 무단 편입하였다는 것은 우리 얘기지 국제법적으로 보면 그리 만만찮은 일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따진다면 명백히 우리 땅인 건 분명하지만 국제사법제판소에서의 재판은 가장최근의 조약이나 협약, 협정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는 것이 국제법학자들의 해석입니다.

일본이 자신을 갖는 것은 센프란시스코평화조약(SF) 입니다. 이 조약은 독도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습니다. 독도가 한국 땅이다 또는 일본 땅이다 하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울릉도, 거제도, 거문도를 반환한다고만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썼다고 해서 한국에 섬이 수천 개가 있는데 여기에 기재하지 아니한 섬은 모두 일본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독도도 반환되는 섬이다 라고 해석할 수 있고 또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이니까 역시 반환되어야 할 섬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전자는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후자는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는 데 동의 하지도 않고 1905년에 국제법적으로 적법하게 편입하여 선점했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12차 회담 중 독도를 한국에 반환해야한다는 논의가 많이 있다가 최종 이 논의를 무시하고 독도반환 조항을 삭제한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가 독도를 일본 땅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 점이 우리로서는 피곤한 점입니다.

그런데 다 아시다시피 SF조약 6차회담 직전인 1949년11월 일본 측은 미국인이면서 일본 측 정치고문이었던 윌리엄 씨볼트를 통해 1905년에 시마네현 고시제40호를 제정하여 선점한 것이라는 논리로 미 국무성에 로비한 것이 먹혀 그렇게 결정이 난 것이지만 만일 독도문제가 ICJ에 간다면 우린 시마네현고시는 당시 독도의 주인이 한국이라는 것을 일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군사적 우위를 이용해 불법적으로 편입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고시라는 것이 실체도 없는 것인데 일본이 미 국무성을 속이고 허위 주장을 한 것이므로 SF조약에서 독도 반환조항이 삭제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독도는 한국이 이미 61년째 실효지배하고 있으니 현상유지의 원칙에 따라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해 달라고 청구해야겠지요.

우리는 이제 그 고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집요하게 일본이 미 국무성만이 아니라 세계를 속이고 기만했다고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ICJ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일본은 속인 적이 없다며 그 고시 원본 또는 사본이라도 내놓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은근히 걱정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첫째, 1945.8.24 마쓰에소요사건으로 목조건물이던 시마네현 청사가 전소된 사실은 그 기록이 증명하고 있는 점,

둘째, 제가 방문했을 때 시마네현 공문서보관소 독도자료실 담당공무원들 3인이 함께 고시40호를 비롯한 명치38년(1905년) 문서들이 모두 소실되었다고 말한 사실이 저를 비롯한 한국인 3인이 들었을 뿐 아니라 저의 휴대폰 녹음기에도 녹음 되어 있는 점,

셋째, 그 자료실에는 실제로 명치38년도 공문서(고시, 훈령, 현령 등)들이 없어서 아이카 무라에서 소장 중이던 것을 회수한 것들로 대체하고 있는 점(시마네현은 1905년 당시 고시를 제정하면 예하의 각 무라-우리의 읍, 면에 해당-에 지사의 직인을 날인하지 아니안 고시를 한부씩 참고하도록 나누어 주었는데 200여개 무라 중 아이카를 포함한 4개 무라만이 전달 받은 문서들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함),

넷째, 담당공무원들이 이런 말을 거짓으로 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어려운 점,

다섯째, 아이카 무라에서 회수본으로 제출한다면 활자 인쇄본으로 된 그 고시에 시마네현지사의 직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직인이 없는 또 다른 붓글씨본 고시40호가 나타나는 등 여러 가지가 나타나 유효한 문서로 볼 수도 없고 나아가 고시를 제정한 사실 자체를 의심 받을 수 있는 점,

여섯째, 동 고시를 제정한 것이 사실로 간주하더라도 소실된 1945년까지 한국은 식민지상황이어서 독도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고, 제3국은 독도에 관심이 없었고, 일본이 1945년에 패전해 항복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견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그 고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기회가 한 번도 없었으므로 이 세상 누구도 그 사본이라도 소유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으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시제40호 원본이 없어서 다른 근거를 제시한다면 몇 가지가 예상됩니다.

독도 일본편입을 결정한 일본각의 결정문과 내무대신이 시마네현지사에게 독도편입을 고시하라는 훈령 등의 원본이 있어서 제출하는 경우 우리는 일본정부내부문서에 불과하다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1905.2.24자 산음신문을 제시할 것도 예상되지만 이 신문은 “다케시마를 오키도사 소속으로 한다는 지사의 고시가 있었다.”는 짧은 기사가 있었으나 공고나 공시란이 아닌 '잡보'란에 게재되었고 고시를 언제 제정했다는 말이 없고 고시 제40호라는 말도 없어 정황적 증거에 불과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시마네현은 1905년 당시에는 공시하는 기관지가 없었고 고시 자체가 공시라는 주장을 펼 것으로 보이지만 인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시마네현은 명치19년(1887년)부터 명치21년 까지는 공보를 썼고 현보는 대정5년(1916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1905년 당시엔 법령제정을 공포하는 수단이 없었습니다. 설령 공포한 문서가 있었다 하더라도 명치38년 공문서는 모두 소실되었다고 하므로 뭔가를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시마네현 고시제40호 등 1905년 당시의 공문서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이 포함된 것만큼이나 우리민족에겐 행운이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http://www.dokdoteam.com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3077&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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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국회 시정연설, 박수칠 때가 떠날 때

박근혜 국회 시정연설, 박수칠 때가 떠날 때

 

 

 


오늘 11월 18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서 첫 시정연설을 합니다. 대통령 시정연설은 내년도 새해 예산안과 관련해 대통령이 국회에서 하는 연설을 말합니다. 대통령 시정연설은 단순한 예산안 관련 연설이 아니라, 국정 운영 전반에 걸친 대통령의 철학과 정국 현안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자리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을 놓고 시끄럽습니다. 민주당 의원들의 박근혜 대통령 시정연설 '보이콧' 움직임부터 민주주의 사망을 의미하는 검은색 정장이나 스카프를 착용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민주당에서는 박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에 참여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일부 민주당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정국 현안에 대한 무언의 항의표시를 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습니다.

' 노무현의 국회 시정연설때 왜 한나라당 의원은 박수치지[각주:1] 않았을까?'

민주당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에 항의하자는 움직임이 나오는 이유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 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보여준 태도 때문입니다.
 

 

 

 


2003년 10월 13일에 국회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은 아직도 논란이 되는 국회 시정연설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할 때 한나라당 의원들 70%만 기립했습니다. 38분 연설 내내 박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퇴장할 때도 새천년민주당 의원은 절반만, 한나라당 의원은 40명만 기립했습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런 태도를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최도술 청와대 비서관 비리 사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새천년민주당 의원들은 9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한 이후로,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데 함께 했었습니다.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과 새천년민주당 의원들이 보여준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은 그와 비슷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많은 편입니다.

' 박근혜의 시정연설을 사수하라'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첫 국회 시정연설을 하는 오늘, 국회 사정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NLL 대화록 등으로 계속 충돌하고 있으며, 통합진보당의 정당 해산안 사태도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단식 농성 중인 통합진보당에 국회 사무총장 명의 공문이 한 장 전달됐습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의원님들의 건강이 무척 염려되니, 농성을 종결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과연 국회 사무총장이 통합진보당 의원님들의 건강을 생각해서였을까요? 혹시나 11월 18일에 있을 박근혜 대통령 국회 시정연설이 통합진보당과 충돌할까 봐 사전에 국회를 청소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새누리당은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 시정연설을 '여야가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새누리당 심재철 최고위원도 민주당이 대통령 시정연설까지도 흠집내기와 흥정대상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국회 시정 연설 당시 한나라당이 했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말들을 2013년 새누리당이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하고 있습니다.
 

 

 


MBC는 8시 뉴스데스크에서 ' 무례한 국회,, 대통령 연설 블랙투쟁?'이라는 보도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에서 국회의원들이 일어나지 않거나 박수를 치지 않는 무례(?)를 우려한 뉴스를 내보냈습니다.

조선일보는 11월 18일 1면에 <대선 연장전 333일, 마침표를 찍자>는 기사를 조간신문에 실었습니다. <정치권 자멸의 길로 가>라는 연관 기사를 보면 여야 대립을 다룬 듯 보입니다. 그러나 속내는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첫 시정연설에 예의를 지키자는 뜻입니다.

국회, 새누리당, 언론이 모두 나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을 사수하려는 움직임을 보면, 마치 대통령이 엄청난 일을 벌이는 듯한 착각마저도 듭니다.

' 박수칠 때 떠나라'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문에 대해 청와대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있으며, 철통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엠피터는 박근혜 대통령이 오늘 국회 시정연설에서 무슨 말을 할지 대략 예상하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가장 먼저 민생을 운운하며 여야가 그만 싸우고 민생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또한, 수정된 대선 공약에 대해서는 불가피했으며, 자신은 대선 공약을 앞으로 계속 실천할 것이라고 밝힐 것입니다.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 등의 대선 개입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겠지만, 특위나 특검 등의 부분은 국회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말하리라 예상됩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 등에 관한 '재신임'을 묻겠다고 제안한다면, 아이엠피터는 당연히 박수를 치겠습니다.

흔히 국회에서 대통령을 향한 예의를 안 지킬 때 하는 논리 중에는 미국 의회를 예로 듭니다. 미국은 대통령이 의회에서 연설할 때 기립박수는 물론이고 제대로 환영과 우대를 해줍니다. 문제는 그것이 대한민국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느냐는 부분입니다.

[정치] - '미국 인사청문회 VS 한국 인사청문회'절차와 특징

의회는 법률안 제정,통과와 정부 견제의 기능을 가진 곳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의회의 역할이 항상 무너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이 정국 현안에 대해 소통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예의만 지키자고 외치는 것도 참 웃깁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4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이해찬 총리가 대독하는 노무현 대통령 시정 연설에 대해 "야당 무시발언? 그 지지국민 무시. 야당도 국민 대표해 국회 들어왔는데 그 앞에서 무슨 시정연설 - 모순." 이라는 메모를 했습니다.

지금 국민들은 추운 날씨에 민주주의를 지켜내자고 외치며,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부정 사건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강압적으로 국회,언론,새누리당,청와대가 나서서 대통령에 대한 예의를 지키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순'입니다.

대통령이 박수를 받건 안 받건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박수를 안 친 것이 엄청난 사건을 향한 국민의 뜻을 대표해서인지, 박수를 강요하는 정치공작이 과연 정당한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대통령이 박수를 억지로 강요해서 받을 때야말로,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일이며, 그때가 대통령이 떠나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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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민주주의 뿌리가 북이라고?

진보적 민주주의 뿌리가 북이라고?
 
 
 
권종술 기자
기사입력: 2013/11/18 [03:44] 최종편집: ⓒ 자주민보
 
 
박근혜 정권은 통합진보당이 위헌이라며 당의 노선인 ‘진보적 민주주의’도 문제삼았다. 북의 김일성 주석이 주장한 사상이란 것이다. 하지만 진보당은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널리 사용한 용어라고 반박했다.
진보당은 지난 2012년 개정된 당 강령을 통해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 실현’을 제시했다. 지난 6월 정책당대회에서 개정된 당헌엔 ‘통합진보당은 국민이 주인 되는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강령과 정책을 가진 정책 정당’이라고 명시돼있다.
 

 
정권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명칭에 대해 북의 김일성 주석이 강연한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와 명칭이 같고, 그 본질은 공산주의 혁명전술인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에서 말하는 인민민주주의라며 헌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진보당은 “강령이 주장하고 있는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나 민주노동당 강령이 주장하고 있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이 ‘인민민주주의’와는 다르다”고 밝혔다.
 
진보당은 그 근거로 “해방 전후 시기 사회주의 계열에서 사용한 진보적 민주주의란 용어는 2차 대전 당시 미-소를 두 축으로 하는 동서간 데탕트를 배경으로 사회주의 소련이나 자본주의 미국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를 의미했다”며 “미군정청이나 소련이 동의할 수 있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과도적으로 자본주의 정치체제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방을 전후해 많은 진보적 독립운동 인사들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창한 바 있다. 조선건국준비위가 1945년 8월 발표한 선언엔 ‘국내의 진보적 민주주의적 여러 세력’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여운형 선생의 인민당도 조선인민당을 ‘진보적 민주주의의 대중정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언급한 건 이보다 몇 개월 뒤인 1945년 10월이었다.
 
외국의 진보적 정당 및 단체들은 이보다 훨씬 앞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해 왔다. 1914년 미국의 정치학자인 허버트 크롤리는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나중에 미국의 신국민주의의 이념적 기반이 됐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을 지낸 루스벨트에게도 영향을 미쳐 대기업 규제, 노동자 보호, 자원보존 등의 정책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리고 미국의 뉴딜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 베트남민족해방전선 등도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 바 있다.
 
또 ‘진보적 민주주의 당(Progressive Democratic Party)’이란 정당이 아일랜드, 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브롤터, 튜니지아, 방글라데시, 미국의 사우스캐롤리나 등에서 활동했거나 지금도 존재한다. 미국 민주당 내에도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Progressive Democrats of America’라는 단체가 존재한다. 진보당은 “진보적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현실적인 집권을 지향하는 공개적인 정치노선”이라고 설명했다.
 
진보당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진 여러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널리 사용한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용한 사례만을 가져와서 같은 의미라고 주장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밝혔다.
 
권종술 기자 news@goupp.org
<진보정치 6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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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14년, 한국정치에 큰 기여

 
 
‘무상의료 무상교육’ 보편적 복지 시대를 열다
 
황경의 기자
기사입력: 2013/11/16 [22:31] 최종편집: ⓒ 자주민보
 
 
박근혜 대통령도 베낀 경제민주화 ‘원조정당’
 
“우리가 위헌이면 새누리당, 민주당도 위헌”
 
박근혜 정부가 사상 유래 없는 통합진보당 해산 폭거를 일으키며 신유신독재를 선포했다. 그 해산의 근거가 “통합진보당의 활동과 목적이 헌법의 민주적 질서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다. 진보당은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민주적 질서를 강화하고 공공의 이익 실현에 앞장서 왔다.
 
당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을 거쳐 지금까지 14년 동안 한국정치 발전에 큰 기여를 해 왔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원조정당으로서 보편적 복지시대를 열었다. 부유세 신설, 해외투기자본 감시 등 경제민주화를 선도했다. 특히 비정규직, 장애인 등 사회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도 적극 했다.
 
이정희 대표는 지난 9일 민주찾기 토요행진에서 “진보당은 거대 정당과 달랐다. 민주노동당으로 시작해 14년, 진보당의 공직자들은 검은 돈 안 받았고 지역 토호 비리에 눈감지 않았다. 노동자 농민 서민 속에서 우리 힘은 그 어떤 거대정당보다 컸다. 그래서 해낼 수 있었다”며 친환경무상급식, 상가임대차보호법, 비정규직센터 설치, 밭직불금 등 진보당이 일군 성과를 하나하나 되새겼다. 그러면서 이 대표는 “진보당이 유신부활 박근혜 독재에 앞장서 반대했더니 적반하장으로 진보당이 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한다고 한다”고 정부의 정당 해산 의도를 비판했다.
 
당이 시대를 앞서 제기한 진보정책은 보수일변도의 한국 정치 지형을 바꿨다. 지난 2010년 지방선거에선 무상급식이 쟁점으로 부각, 보편적 복지가 대세를 이뤘다. 민주당은 지난 2011년 무상의료와 무상보육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지난 대선에선 박근혜 대통령조차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 공약을 내놨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복지가 대세
 
우리 당의 대표 정책을 꼽는다면 무상의료, 무상교육이다. 당은 2002년 교육과 의료 기회 균등을 위해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당론으로 채택, 16대 대선에서 이를 적극 내세워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좋은 정책이라는 담론 형성에 그쳤다. 실현 가능성을 낮다고 봤다. 이에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담론이 아니라 법, 제도로 구체화할 방안을 마련했다.
당은 2005년 무상의료실현운동본부를 꾸리고 ‘암부터 무상의료’를 기조로 전당적 사업을 벌였다. 같은 해 6월 정부가 암 등 중증질환에 대한 본인 부담 인하와 보험 적용을 확대해 첫 성과를 거뒀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당 지지율 13.1%로 10명의 국회의원 배출, 원내 교두보를 확보했기에 가능했던 성과다. 이후 당은 2006년 전염병예방법을 통과시켜 0~6세 어린이 필수예방접종 무료화를 이뤘다. 이를 홍연아 안산시의원이 전국 최초로 영아부터 무상예방접종을 실시할 예산을 확보하고 조례로 제도화했다. 이런 모범은 전국으로 확산됐으며 지금은 민주당이 집권한 서울 각 구청에서도 영유아 무상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있다.
 
또 당은 2007년 노인 장기요양법을 통과시키고 2008년 건강보험지키기 운동본부를 결성, 의료민영화와 의료법 개악을 막아내는데 힘썼다. 이어 2010년에는 진주의료원에서 ‘보호자 없는 병원’이 처음 시행됐다. 이와 함께 ‘모든 병원비를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을 시작, 본인 부담금 100만 원 상한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당은 대학 등록금 상한제와 후불제 등 무상교육 실현에도 힘썼다. 2002년 대선부터 등록금 상한제를 제기, ‘반값 등록금’ 운동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2010년에는 등록금 부담을 낮출 수 있는 고등교육법이 개정되기도 했다. 이는 2007년 대선에 이어 2012년 대선에서도 뜨거운 이슈였으며 새누리당도 ‘반값등록금’을 무늬만이라도 흉내내게 만들었다. 물론 새누리당의 빈 공약임이 드러나긴 했지만 말이다.
 
이처럼 국가의 책임과 공공성을 강조한 무상정책시리즈는 2010년 복지논쟁을 촉발시켰다. 그 선두에 무상급식이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먹는 밥은 교육의 일환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보편적 복지가 대두된 것이다. 이는 이후 복지재정 확보를 위한 증세 주장으로까지 확대됐다. 이렇게 당이 처음 제기한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사회 주류정책으로 인정받는 데는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부유세 도입 등 경제민주화 선도
 
보편적 복지 확대를 위해선 복지재정 확대가 필수다. 이명박 정부의 부자감세 등으로 세수가 줄어든 뒤 증세 논쟁이 불붙었으며 지난해 대선에서도 지속됐다. 이에 첫 단추를 꿴 것이 당이다. 2002년 대선에서 무상의료, 무상교육과 함께 부유세 도입을 제기했다. 그리고 2003년 부유세 도입 서명운동을 벌였다.
 
부유세는 일정액 이상의 부동산과 금융자산을 보유한 사람에게 매기는 세금으로 프랑스, 스위스, 노르웨이 등에서 실시되고 있다. 부유세 도입이 야권의 목소리로 거듭난 것은 정동영 민주당 의원을 통해서다. 정 의원은 2010년부터 복지국가를 위해 부유세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8월에는 한국조세재정연구원도 부유세가 소득 양극화에 따른 사회 불평등을 완화하고 국가재정을 확충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라고 평가했다.
 
민주노동당은 경제민주화 의제도 적극 제기했다. 론스타 등 투기자본의 문제를 집중 부각시켰다. IMF 이후 국내에 유입된 외국계 투기자본은 국내기업을 헐값에 매입한 뒤 고배당 유상감자에 이어 정리해고와 자산매각 등을 거쳐 조 단위의 차익을 챙겨왔다. 당은 외국자본유치의 문제와 이로 인해 고통 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해 왔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선 외국자본의 국내은행 지분 소유를 제한, 금융기관 매각 중단, 국유은행 확대 등 금융주권과 공공성 강화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와 함께 경제주권을 지키기 위해 한미 FTA 폐기를 가장 앞서 주장했다.
 
또한 재벌기업의 횡포에 맞서 중소상공인의 삶을 지키는 데 힘썼다. 이를 위해 대형마트와 기업형수퍼마켓(SSM) 개설 허가제 도입을 위한 법 개정 논의를 촉발시켰다. 2010년엔 이정희 대표가 발의한 유통산업발전법이 통과됐다. 앞서 당은 2000년대 초반부터 상가임대차보호운동, 전월세 상한제 도입과 이자제한법 발의, 신용회복상담 등을 통해 서민경제 보호에 힘써 왔다. 이는 2011년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도 이자제한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최저임금 현실화, 공공서비스 일자리 창출 등 노동기본권 보장을 경제민주화의 영역으로 확대하기도 했다.
 

 
1인 2표제, 여성할당제 등 정치제도 발전에 힘
 
당은 정치제도 발전에도 기여했다. 당은 진성당원제를 운영원리로 한다. 당비를 내는 당원들이 당직․공직 후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한다. 이는 기성정당의 금권정치, 계파정치를 배격하고 깨끗한 정치를 안착화하는데 보탬이 됐다. 또 당은 가장 먼저 여성할당제를 도입, 여성정치세력화에 앞장섰다. 이에 지난 2008년 총선에는 지역구에 여성후보가 45명 출마, 전체 당 출마자의 44.12%를 차지했으며 비례대표 10명 가운데 5명이 여성후보로 ‘여성공천 1등 정당’으로 인정받았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김용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실장은 정치권의 투표 참여 논란과 관련해 “투표율 저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 인터넷·모바일 투표 도입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냈다. 이미 당은 인터넷 투표 시스템을 벌써 10년 전부터 실시해 오고 있을 정도로 한발 앞서가고 있다.
 
2002년 지방선거부터 1인2표 정당명부제가 도입되는 데도 당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이 헌법재판소에 국회의원선거 소선거구비례대표제가 평등선거, 직접 선거에 반한다는 헌법소원을 낸 것이 받아들여져 지방선거에도 적용된 것이다. 이후에도 당은 독일식비례대표제 필요성을 줄곧 제기하면서 사회 약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는데 힘써왔다.
 
친환경무상급식 등 진보자치 모범 확산
 
당은 풀뿌리 진보자치의 씨앗을 뿌리고 키워왔다. 이영순 전 의원이 대표발의, 통과된 주민소환법은 지방선출직 공직자들의 비리척결의 토대가 됐다.
 
무엇보다 당의 지방자치는 학교급식과 함께한 역사다. 지난 2003년 4월 전남도의회에서 전국 최초의 주민발의로 학교급식조례가 제정됐다. 전종덕 전남도의원을 중심으로 노동자, 농민, 시민사회가 함께 운동본부를 꾸려 서명을 받아 조례를 발의, 제정한 모범은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그리고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16개 광역시도와 200여 개 시군구에 학교급식조례제정운동본부가 꾸려져 주민발의운동이 불붙었다. 이어 2006년 학교급식법이 개정되고 지역급식, 안전한 우리농산물, 무상급식을 목표로 한 급식운동이 전면화됐다. 당 지방의원들은 조례 제정에 이어 예산확보를 위해 힘썼다. 2009년 이은주 전 울산시의원은 관련 예산이 고작 4억 원에 불과해 전국 최하위 수준인 것을 꼬집었으며 송영주 경기도의원은 한나라당 도의원들의 무상급식 예산 50% 삭감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윤종오 울산 북구청장은 친환경학교급식센터를 설립, 공공급식 체계를 구축했다. 이런 당의 활동이 2010년을 무상급식 원년으로 만드는 데 바탕이 됐다. 배옥병 친환경무상급식전국풀뿌리연대 대표는 “당이 주민과 함께 움직여 제도를 입안하고 실현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2007년 서울시의회에서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에 관한 조례가 통과됐다. 이수정 전 서울시의원이 전국장애인이동권연대 등 교통약자들과 함께 서명을 받고 여론을 형성해 만들어낸 결과다. 이는 교통약자들이 안전하고 편리한 이동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았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울산 동구에서 처음 시행된 주민참여예산제는 2010년 지방선거에 당선된 민주당 구청장들이 앞다퉈 시행하고 있다. 2008년 경남도당이 처음 시작한 학자금이자지원조례제정운동은 전국으로 확산,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운동의 밑천이 됐다.
 

 
노동자, 농어민에 대한 진심이 진보정책으로
 
당의 정책에는 노동자, 농어민, 서민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담겼다. 오은미 전북도의원이 대표발의, 2008년 전국 최초로 제정된 전북농업인 소득보전조례는 기존의 쌀직불금을 밭작물까지 확대 지급하는 근거가 됐다. 이는 소규모 농사, 고령농 등에도 농가소득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는 데서 의미가 깊다.
 
또 경기도 건설산업활성화촉진조례, 전남비정규직지원조례, 울산 학교비정규직직고용 조례 등을 제정해 건설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에도 힘썼다. 울산 북구에서 처음 시행된 관급공사체불임금방지조례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울산 동구가 구청 안에 설치한 비정규직지원센터는 노동자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 있다.
 
당이 집권하고 있는 울산 동구와 북구는 진보행정의 새로운 모범을 만들고 있다. 김종훈 동구청장은 “동구청에 비정규직지원센터를 설치하고 전국 최초로 인권도시 선언을 했다. 진보행정은 사람으로 외화된다. 행정이 내 삶의 아픔과 어려움을 함께 한다는 얘기가 주민 속에 회자되고 있다”며 주민을 행정의 주인으로 세우려 했던 지난 2년 동안의 성과를 짚었다. 윤종오 북구청장은 중소상인들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해 코스트코 입점 허가를 반려했다가 소송에 휘말려 구청장직 상실 위기를 겪기도 했다. 윤 구청장은 “모든 사업의 기획 단계부터 주민의 의견을 듣고 또 듣는다”며 “주민 참여와 소통 행정의 성과는 ‘동원’에서 ‘자발적 참여’로 바뀌고 있는 것”이라고 지난 3년 동안 행정의 변화를 짚었다.
 
민주노동당부터 14년 동안 제시한 진보 정책과 담론은 한국사회 표준정책으로 인정받게 됐다. 처음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제기할 때 ‘빨갱이’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노동자, 농어민, 서민을 위한 진정성으로 국민의 마음을 얻어서 가능했다.
 
하지만 당은 진보정책의 원조정당으로서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우리 당의 더 많은 정책을 베껴가도 좋으니 국민의 삶의 질이 나아지길 바랐다. 이런 진심의 정치를 해왔던 당을 해산하려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당원들은 “무상의료, 무상교육 주장하면서 국민들 마음 얻었더니 새누리당, 민주당 다 베껴가 놓고 우리 보고 위헌이라고 한다. 그러면 새누리당, 민주당도 모두 위헌 아니냐”고 거세게 저항하는 것이다.
 
정부가 주장하듯 당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 실현과 경제민주화, 정치․정당제도 발전 등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우리 당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것이 오히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란 얘기다.
 

 
황경의 기자 kehwang@goupp.org
<진보정치 6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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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고릴라도 도구 쓴다, 대나무를 사다리로

야생고릴라도 도구 쓴다, 대나무를 사다리로

 
조홍섭 2013.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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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화산국립공원서 어미가 새끼에게 대나무를 사다리처럼 내려줘

막대기로 수심 재며 건넌 사례 이어 야생 고릴라 도구 사용 드문 사례

 

go1.jpg » 산악고릴라 어미가 대나무숲 위로 올라오지 못해 애태우는 새끼에게 대나무 막대를 기울여 타고 올라오게 하는 모습. 사진=시릴 그루에터 외, <행동 프로세스>

 

자신의 몸의 기능을 확장하기 위해 주변의 물체를 이용하는 것을 ‘도구를 쓴다’라고 정의한다면,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은 많다. 특히 머리가 좋기로 유명한 영장류, 돌고래, 까마귀에 그런 사례가 많다.
 

먹이를 획득하는데 도구를 쓰는 예가 가장 흔하다. 침팬지가 나뭇가지를 이용해 개미집의 흰개미를 낚는 행동은 널리 알려졌다. 영장류 가운데 마카크 원숭이는 돌을 이용해 굴 껍질을 까며, 침팬지와 꼬리감기원숭이는 견과류의 단단한 껍질을 돌을 망치와 모루처럼 이용해 깬다.
 

영장류 가운데 고릴라는 도구 사용 사례가 드문 편이다. 사육 상태에서 도구를 쓴 사례는 보고돼 있다. 눈길을 걸을 때 손과 발을 짚으로 만든 ‘신’으로 씌우거나, 양동이로 물을 긷고 나무에 막대기를 던져 씨앗이나 잎이 떨어지도록 하는 행동이 관찰됐다.
 

야생에서 고릴라가 도구를 사용하는 희귀한 장면이 아프리카 르완다 화산국립공원에서 목격됐다. 이곳에서 다이앤 포시 고릴라재단 연구자들이 산악고릴라를 추적 관찰하던 중에 우연히 얻은 성과이다.

640px-Gorilla_mother_and_baby_at_Volcans_National_Park.jpg » 르완다 화산국립공원에서 새끼와 먹이활동을 하고 있는 산악고릴라 어미.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2010년 11월30일 연구진은 파블로 무리를 뒤쫓고 있었다. 무리는 마침 죽순을 먹기 위해 해발 2800m에 있는 울창한 대나무숲에 있었다. 영양가 많은 죽순은 고릴라의 일상 음식은 아니지만 1년 두 번 맛보는 별식이었다.
 

아침 9시께 암컷 타무는 높이 2m가량인 대나무 숲 위에 올라앉아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 살 난 수컷 새끼 임부토는 대나무 숲으로부터 4m쯤 떨어져 있었는데, 엄마가 있는 곳을 보고는 자기도 올라가겠다고 찡찡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타무는 먹는 것을 멈추고 새끼를 내려다 봤다. 아들은 대나무숲 가장자리에서 덤불을 쥐고 기어오르려 했지만 번번이 대나무에서 미끄러졌다.
 

타무는 새끼가 오기 전에 먹으려고 대나무를 잘라내 쥐고 있었다. 9시11분, 타무는 대나무 막대 끄트머리를 쥐더니 아래로 45도 각도로 늘어뜨렸다.
 

새끼가 대나무를 마치 사다리처럼 잡고 기어오르자 어미는 죽순을 단단히 쥐고 새끼가 기어오르는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새끼가 다 오르자 함께 휴식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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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4.jpg » 야생 고릴라가 도구를 이용하는 최초의 목격 사례. 콩고 습지에서 처음 웅덩이를 건너다 물에 빠진 고릴라 암컷이 막대기로 수심을 재어 가며 웅덩이를 건너고 있다. 사진=토마스 브로이어 외, <플로스 바이올로지>

 

연구진은 이 사례가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구를 이용한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보았다. 죽순은 먹으려고 딴 것이지 새끼를 구하려고 딴 것은 아니었던 만큼 유연한 사고를 보여준다. 새끼가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물체의 다른 용도를 떠올린 것이다.
 

물론 타무의 행동은 우연히 죽순을 내려뜨렸고 이를 타고 올라오는 새끼를 지켜본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또는 중심을 잡기 위해 죽순을 지팡이처럼 의지하고 있는데, 새끼를 이것을 타고 올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새끼가 죽순을 타고 기어올랐을 때 어미가 분명히 준순을 단단히 쥐는 행동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이번 관찰은 일회성이어서 이를 일반화시키기는 곤란하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연구진은 고릴라의 도구 사용이 매우 드물게 관찰되는 이유로 식성이 나뭇잎이나 줄기 같은 식물을 먹는 채식성인데다 워낙 힘이 세 정교한 도구를 쓰기보다 힘으로 해결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침팬지가 개미 낚시를 한다면 고릴라는 그저 개미집을 부숴버리면 그만이다. 이 관찰결과는 국제학술지 <행동 프로세스> 최근호에 실렸다.
 

야생 고릴라의 도구 사용이 처음 보고된 것은 2005년이었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동물학자 등은 콩고 북부의 습지에서 암컷 고릴라가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뭇가지로 물의 깊이를 재면서 웅덩이를 건너는 모습을 관찰한 적이 있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Cyril C. Grueter et. al.,Possible tool use in a mountain gorilla, Behavioural Processes 100 (2013) 160~162
 
Breuer T, Ndoundou-Hockemba M, Fishlock V (2005) First Observation of Tool Use in Wild Gorillas. PLoS Biol 3(11): e380. doi:10.1371/journal.pbio.0030380

조홍섭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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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용산참사 유가족 유영숙 씨

“김석기 사장 퇴진, 다른 이들 위해 우리가 할 일”

 

[인터뷰] 용산참사 유가족 유영숙 씨

정현진 기자 | regina@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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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1.15 17: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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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과 분노의 40일이었다.

김석기 한국공항공사 신임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용산참사 유가족들의 농성이 40일째 서울 강서구 공항공사 앞에서 이어지고 있다. 취임 전부터 시작된 농성이 한 달 넘게 진행되고 있지만, 유가족들은 그동안 단 한 번도 김석기 사장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취임식 날이던 10월 16일에도 김석기 사장은 새벽 6시에 공사 안으로 들어가 ‘도둑 취임식’을 치렀다.

그리고 지난 5일, 김석기 사장은 기자회견에서 “적절한 기회에 유가족을 만나서 애도의 마음과 위로를 표할 생각이 있다”면서도 “(용산참사 당시) 경찰이 법 집행을 잘못했다는 것은 사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김 사장은 유가족들이 계속 시위를 이어가자 지난 1일, 유가족과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대표 등 8명을 상대로 출입금지 및 업무, 통행방해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법원이 이 신청을 받아들이면, 용산참사진상규명위는 위반 행위 1건당 300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

그리고 가처분 신청 재판이 열렸던 13일, 유가족들은 결국 경찰에 연행됐다. 이날 연행에 앞서 유가족인 유영숙 씨는 공항공사 직원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목과 팔에 깁스를 하고 은평경찰서로 달려온 유영숙 씨는 또 다시 경찰에 의해 유가족마저 연행되는 상황에 분노했다.

 

   
▲ 13일, 유가족들이 연행되었던 은평경찰서 앞에서 발언하는 유영숙 씨(오른쪽). 그는 “나의 부상은 내 남편의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끝까지 김석기 사장의 퇴진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김석기 사장 퇴진은 용산만의 일이 아니다

“김석기 사장을 퇴진시키지 못하면, 공권력은 앞으로 더 큰일을 저지르게 될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막기 위해 싸우는 거예요. 김석기 퇴진은 용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14일,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 유영숙 씨를 다시 만났다. 그는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힘들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정부가 자꾸 만들고 있다고 호소했다.

내년 1월 20일이면 용산참사 5주기를 맞는다. 유영숙 씨는 “벌써 5년이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아직도 5일 전의 일처럼 모든 것이 선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2009년 1월 20일을 여전히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지난 5년간의 싸움도 그렇게 가슴에 묻은 남편과 함께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경황없는 중에도 그의 눈에 들어왔던 온갖 거짓의 증거들, 말도 안 되는 남편 시신의 상태와 유품, 그 후에 밝혀진 증거들이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면서 “여전히 그날을 생각하면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가족들이 김석기 사장을 대상으로 싸운 것은 처음이 아니다.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이었던 김 사장은 용산참사에 대한 책임으로 7개월 만에 물러났지만, 그는 낙마 4개월 만에 한국자유총연맹 부총재 자리에 오르더니, 오사카 총영사를 거쳐, 지난해 총선에서는 새누리당 후보로 경주에서 출마했다. 총선에 출마했을 당시 김석기 사장은 “용사참사 때문에 출마하지 못한다면 억울한 일”이라고 말했다. 유족들은 그런 김석기 사장의 유세지마다 쫓아다니면서 “살인자”라고 외쳐야 했다.

유영숙 씨는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 그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무전기를 꺼놓았다’는 말 한마디로 면죄 받은 사람이 멀쩡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그를 저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지금 쌍용차, 밀양, 강정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이 생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더 힘든 이들 생길 것
27일 용산 생명평화 미사 다시 시작

“공권력은 사람을 죽여도 괜찮다는 거잖아요. 살인을 지시한 사람이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어요. 공권력이 앞으로 어떤 일을 더 저지를지 생각하면 끔찍해요. 몰염치할수록 성공한다는 공식이 생기지 않도록 김석기 사장을 저 자리에서 꼭 끌어내릴 겁니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요.”

유영숙 씨는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김석기 사장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유 씨는 김 사장이 국정감사에서도, 총선 유세장에서도, 공항공사 직원들에게도 “유가족들에게 사과하고 천도재도 지냈다”고 말하는데, 누구에게 사과하고 누구를 위한 천도재를 지낸 것인지 궁금하다고 되물었다.

유영숙 씨는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더 힘든 이들이 생길 것이니까,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용산참사 진상규명에 온힘을 기울여야 하는데 늘 이렇게 싸우고만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대한문 미사를 위해 길을 서두르면서 유영숙 씨는 “대한문 미사가 끝나면 용산 생명평화 미사를 다시 시작한다”고 소식을 전했다.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는 꼬박꼬박 용산 생명평화 미사를 봉헌해왔는데, 대한문 미사가 생기면서 함께 미사를 드리게 됐다. 다시 시작되는 용산 생명평화 미사는 27일 오후 7시 30분 명동 가톨릭회관 2층 강당에서 봉헌된다.

“인혁당 어머니들처럼 몇 십 년이 갈 일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해야죠.”

앞으로 그들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이들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은 그들만이 아닐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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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회개하라

박정희 독재 저항 상징 함세웅 신부 다시 나서
 
정상추 | 2013-11-16 05:47: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박정희 독재 저항 상징 함세웅 신부 다시 나서
-아시아 뉴스 연석회의 보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유신독재 시대로 역행하자 박정희 독재에 맞서 싸웠던 老신부가 다시 나섰다. 아시아 뉴스가 암울한 폭압의 시대였던 박정희 유신 시대에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불리며 정의사제구현사제단을 이끌었던 함세웅 신부가 최근 한국에서 결성된 연석회의에 참석한 사실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아시아 뉴스는 13일 ‘‘민주주의 상징’ 신부가 박근혜에게 사과하고 회개하기를 촉구하다-‘icon of democracy’ priest asks Park to apologize and repent’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1970년대 독재자 박정희에 대항한 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국내에 널리 알려진 가톨릭 함세웅 신부가 연석회의에 참여했다’며 “지금 벌어지는 일은 지난 세기에나 일어났던 일들이다. 정부는 회개하고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함세웅 신부의 발언을 소개했다. 함신부의 발언을 위주로 보도된 이 기사는 “일 년 전 대선에서 발생한 불법행위들은 심각한 범죄이나, 현 정부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은폐, 수사 방해, 그리고 외압이 더 큰 범죄이다”는 함신부의 발언을 이어 소개하며 함세웅 신부가 ‘국정원이 저지른 심각한 위법행위가 최근 몇 달에 걸쳐 밝혀진 후, 정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운동인 연석회의의 출범식에 참여’ 하여 이와 같이 말했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아시아 뉴스는 가톨릭 교회가 정당들과 민주단체들이 주최하는 시위에 참여해 오고 있다고 소개한 뒤 청와대에 진실을 밝히고 국가기관의 불법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해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이 기사는 함세웅 신부가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군부독재자 박정희에 맞서왔다고 소개하며 “교회와 사회는 우리 헌법을 수호하고, 그 가치를 [1919년 일본에 대항한] 삼일 독립운동과 [1960년] 4월 혁명의 정신으로 구현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했다. 우리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과 1987년 민주 운동의 정신을 되새기며, 불의한 정권에 맞섰던 모든 의인들과 셀수 없는 촛불들을 마음에 품고, 이 정권이 회개하기를 희망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호소하며 여기에 서 있다”는 함신부의 비장어린 발언을 소개했다.

‘아시아 뉴스’는 교황청 전교회(PIME, Pontificio Istituto Missioni Estere)에 의해 설립되었다. 현재는 월 방문자수가 500만 명에 달하는 온라인 매체로 전세계 가톨릭계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정상추가 번역한 아시아 뉴스의 기사 전문이다.
번역 감수: 임옥

기사 바로가기 ☞ http://bit.ly/19jD2Fk

11/13/2013 12:13SOUTH KOREA

Seoul, "icon of democracy" priest asks Park to apologize and repent
서울, “민주주의 상징” 신부가 박근혜에게 사과하고 회개하기를 촉구하다

by Joseph Yun Li-sun

Fr. Ham Se- woong, a Catholic priest known throughout South Korea for his leading role in the 1970’s protests against the dictator Park Chung-hee, has joined the Alliance for Cooperation: "what 's happening, happened in the last century. The government must repent and retract. And we must be vigilant to save democracy".

1970년대 독재자 박정희에 대항한 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국내에 널리 알려진 가톨릭 함세웅 신부가 연석회의에 참여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지난 세기에나 일어났던 일들이다. 정부는 회개하고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Seoul (AsiaNews) - "The illegalities that occurred in the presidential election a year ago were a serious crime, but the bigger crimes are the cover-up, the investigation hampering, and the pressure tactics that we've seen under the current administration". These were the words of Fr. Ham Se- woong, a Catholic priest known throughout South Korea for his leading role in the protests of the seventies against the dictator Park Chung -hee, the father of Korean President Park Geun - hye .

서울 - “일년 전 대선에서 발생한 불법행위들은 심각한 범죄이나, 현 정부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은폐, 수사 방해, 그리고 외압이 더 큰 범죄이다.” 이것은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독재자 박정희에 맞서 1970년대 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한 가톨릭 함세웅 신부의 말이다.

The priest was attending the launch of the Alliance for Cooperation, a movement that aims to achieve justice after the serious violations committed by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which emerged in recent months. The Catholic Church has joined the protests of the political parties and democratic organizations, asking the "Blue House " to shed light on the electoral fraud and , more generally, to put a stop to the illegal activities carried out by the state apparatus in the name of "stability".

함세웅 신부는 국정원이 저지른 심각한 위법행위가 최근 몇 달에 걸쳐 밝혀진 후, 정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운동인 연석회의의 출범식에 참여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정당들과 민주 단체들이 주최하는 시위에 참여해 오고 있으며 “청와대”에 선거 부정의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보다 광범위하게, “안정”이라는 명목하에 국가기관에 의해 행해진 불법 행위들을 중단할 것을 요구해 왔다.

Fr. Ham, who worked with Cardinal Kim for a decade to support democratic activities against the military dictatorship of Park (father ) stated that "the Church and society have come together to guard our Constitution and embody its values in the spirit of the March 1 Independence Revolution [against Japan in 1919] and the April Revolution [of 1960].We stand here recalling the spirit of the 1980 Gwangju democracy movement and the 1987 democracy movement, holding in our hearts all the righteous people who stood up against iniquitous governments and all the countless candles - hoping, praying, and appealing for this government to repent".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수십년 동안 군부 독재자 박정희에 맞서 민주주의 활동을 지원했던 함세웅 신부는 “교회와 사회는 우리 헌법을 수호하고, 그 가치를 [1919년 일본에 대항한] 삼일 독립운동과 [1960년] 4월 혁명의 정신으로 구현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했다. 우리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과 1987년 민주 운동의 정신을 되새기며, 불의한 정권에 맞섰던 모든 의인들과 셀수 없는 촛불들을 마음에 품고, 이 정권이 회개하기를 희망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호소하며 여기에 서 있다.”

He concluded, "in forming this Alliance we decided to unite around our great common denominators in spite of the basic differences. There are minor and major violations, they are all serious things that threaten our conception of democracy. Those who govern us must return to the spirit of the task it performs, find their humility and apologize for what happened before the entire population. "

그는 “연석회의를 결성하는 데 있어, 우리는 기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큰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연합하기로 결정했다. 작고 큰 위법 행위들이 있고, 그것들은 우리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심각한 것들이다. 정권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하며, 겸허해야 하고, 그리고 전 국민앞에 발생한 일들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라며 연설을 마쳤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9&table=c_sangchu&uid=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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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가던 헬기는 왜 아파트 북면에 부딪쳤나?

 

엘지전자 사고 헬기, 아파트 북쪽 면에 충돌... 안개 외 다른 원인은?

13.11.16 17:14l최종 업데이트 13.11.16 21:56l
김종철(jcstar21) 최지용(endof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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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지전자 소속의 헬기 충돌 사고가 발생한 16일 오전 영동북단에서 바라본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 아파트(왼쪽 건물). 짙은 안개로 뿌옇게 보인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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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민간헬기가 고층아파트와 충돌하는 초유의 사고가 발생한 가운데,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짙은 안개가 원인이라는 추정에 힘이 실리고 있지만, 다른 원인의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 중이던 헬기가 건물의 북쪽 면에 충돌하면서 항로이탈 가능성이 높아졌다.

"건물 꼭대기 안 보일 정도 안개 심했다"

이날 오전 8시 55분경 엘지전자의 사고 헬기는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30층 아파트) 23층부터 27층 사이에 충돌했다. 김포에서 출발해 사고현장에서 약 2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잠실 헬기장으로 가던 길이다. 잠실에 도착 후 엘지전자 임원을 태우고 전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헬기는 1차 목적지인 잠실 헬기장에 거의 다 와서 사고가 난 것이다. 잠실 헬기장은 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사고 당시 서울에는 짙은 안개가 끼었으며 가시거리는 1.1킬로미터 정도로 매우 짧았다. 가시거리가 1킬로미터 이하가 되면 항공기 운항이 제한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짙은 안개가 이날 사고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아파트 관리인 역시 "쿵 소리가 나서 나와 보니 헬기가 떨어져 있었고, 건물 꼭대기가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짙게 끼었다"라며 "건물 절반 정도가 보이지 않았을 정도"라고 말했다.

현장에 출동했던 소방관들 역시 "현장에 도착했을 때 헬기에서 연기가 발생해 더 잘 안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안개가 확실히 심하다 싶을 정도였다"며 "조종사가 안개 때문에 건물을 보지 못하고 충돌한 것 같다"고 말했다.

소방 관계자는 또 "헬기의 몸통이 건물에 부딪친 것 같지는 않다"며 "피해 건물의 형태를 봤을 때 조종사가 건물을 피하려고 방향을 틀었고, 주 프로펠러와 꼬리 쪽이 건물에 부딪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사고원인을 분석 중인 국토교통부 사고대책반 역시 짙은 안개를 원인으로 예상했지만 "정확한 원인은 블랙박스와 사고 잔해를 수집해 정밀 조사를 해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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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기 사고 조사하는 국과수 엘지전자 소속의 헬기가 충돌한 16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 아파트 사고현장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소방대원들이 추락한 헬기 잔해를 조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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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조종사 둘, 그들은 왜 남쪽으로 향했나

그러나 아무리 안개가 짙게 꼈다고 하더라도 조종사가 둘이나 탄 헬기가 건물과 부딪친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특히 사고 아파트는 건물 자체가 높을 뿐 아니라 경기고등학교 건너 편 언덕 위에 있어 주변에 다른 건물보다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다. 총 3개 동으로 이뤄진 건물이 30~40미터 간격으로 밀집해 세워진 것도 특징이다. 안개로 인해 시야가 제한된다 해도 아예 안 보일 정도는 아니라 게 지역 주민들의 의견이다.

무엇보다 헬기의 충돌 지점이 북서쪽이라는 점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충돌지점은 102동 23층에서 27층 사이로 거의 정 북에 가까운 북서 방향이다. 헬기가 이 지점에 충돌하려면 북에서 남쪽 방향으로 이동해야 가능하다. 헬기가 정상적으로 잠실 헬기장을 향했다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했을 것이고, 설령 건물과 충돌한다고 해도 건물의 서쪽 면에 충돌했어야 한다. 단순히 안개 때문에 보지 못해 충돌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안개로 인해 방향을 잃었을 가능성도 제기 되지만 헬기의 진행 방향이 목적지와 정반대 방향이라는 점에서 희박하다. 보통 민간헬기 도심지역보다는 한강변을 따라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사고 헬기 역시 김포를 출발해 한강을 따라 잠실 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충돌지점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려면 동에서 서로 이동하던 헬기가 목적지를 불고 1~2킬로미터 앞둔 지점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꺾었다는 얘기가 된다. 항로를 완전히 이탈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재영 서울지방항공청장은 "한강 위 경로대로 운행을 하다가 잠실 선착장 주변에서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경로를 이탈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반적으로 도심상공이나 인구밀집지역의 (항공기) 운항은 가급적 하지 않도록 돼 있다"면서 "시계비행에서 특별한 고도제한은 없지만 인구밀집지역에서 최소한 장애물 높이에서 300미터 떨어져 운행하도록 돼 있다"고 말했다.

사고 헬기 조종사들이 상당한 베테랑이었다는 점도 사고의 의문점을 배가 시킨다. 이날 <연합뉴스>에 따르면 사고로 사망한 기장 박인규씨의 아들은 "아버지와 부기장 모두 군에서 대통령 전용기를 조종한 베테랑이었다"고 말했다. 베테랑 조종사가 둘이나 탄 헬기가 목적지 부근에서 아파트와 충돌했다는 것은 단순 안개만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무슨 이유로 이들이 남쪽을 향하게 됐는지를 밝히는 게 이번 사고 원인 규명의 핵심이 될 전망이다.

오후 3시 현재 국토교통부는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 소속 6명의 조사관이 현장에 출동해 헬기 블랙박스와 헬기 잔해를 수거하고 있다. 국토부가 블랙박스를 분석하고 공식적인 사고 원인을 공식발표하기 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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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빗장을 열어제끼다

북중경협10년 시리즈 2회-국경의 빗장을 열어제끼다

 
2013.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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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동북진흥계획 10년...질적 변화 접어든 북중경협 2회

 
차례 

1회. 공동관리 공동운영의 새로운 협력모델

2회. 국경의 빗장을 열어제끼다

3회. 기업 중심의 협력 확대 및 심화

4회. 전력망 연계와 인민폐 결제통화 도입

5회. 러시아 몽골과의 경쟁적 다자 협력

6회. 훈춘 북방의 선전(심천)이 될 것인가

 

 
두만강 7곳 통로 확대 교량 5곳 보수 및 추가건설
 
015.jpg » 훈춘의 취안허 세관의 모습 북쪽의 원정리로 넘어가려는 트럭의 모습이 보인다.
 
중국 북한 접경지역은 1334km에 걸쳐 있으며, 압록강유역이 795km이고 두만강유역이 525km다. 육지로 접한 지역도 45km에 달한다. 접경지역 전체로 보면 15개의 통상구가 있는데 랴오닝성에 2개 통상구가 있고 나머지13개 통상구는 지린성 지역 내의 압록강과 두만강유역에 분포되여 있다. 15개 통상구 가운데 3개는 철도 통상구며 나머지는 도로 통상구 혹은 부두 통상구로 돼 있다.
 
중국은 그동안 북-중 경협의 일환으로 두만강 유역에서 7곳의 북-중 통로 개발 정비 사업을 벌였다. 이번 답사에서 둘러본 취안허 맞은편의 원정리, 싼허(삼합) 건너편의 회령 등은 이미 현대식 건물의 세관이 들어서 있었다.
 

016.jpg » 중국 훈춘 취안허 세관에서 방천 가는 길에서 건너다 본 새두만강교와 북한 원정리 세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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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jpg » 개보수 전후의 취안허~원정리를 잇는 두만강 철교. 위가 옛모습.
 
019.jpg » 싼허의 망경각에서 내려다 본 북쪽 회령 세관의 모습.
 
또 2012년 6월 취안허 통상구와 북한 원정리를 잇는 두만강교를 보수했고, 2012년말에는 원정리와 나진항간 2차선 도로 포장공사가 끝났다. 이밖에 투먼(도문)과 남양-청진을 잇는 구간과 싼허(삼합)와 회령-청진 구간, 그 북쪽의 카이산툰(개산둔)과 삼봉 구간, 사퉈쯔(사태자)와 경원군 구간, 허룽시 난핑~칠성리와 그 아래쪽의 구청리(고성리)와 삼장리 구간 등 기존 도로와 교량이 너무 낡았던 4곳에서도 새로 철도를 건설하거나 낡은 다리와 도로를 보수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이 가운데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허룽시 구청리와 양강도 대홍단군의 삼장리를 있는 다리는 백두산 아래 첫 통상구라 하여 두만강 제1교로 불린다. 2일 세미나에서 연변대 안국산 마케팅학과 교수는 구청리~삼장리는 2010년 개보수가 완료된 1급 육로통상구로 7개 두만강지역 통상구 가운데 가장 시설이 양호하다고 말했다.
 
이들 통상구 가운데 동해로의 출구와 관련된 통로는 크게 △훈춘의 권하~원정리-나진항 △도문~남양 -나진항 △투먼~회령- 청진 등 세곳이다. 권하~원정리는 2급 포장도로이고 나머지 두곳은 철도로 각각 158.8㎞, 171.1㎞에 이른다. 안국산 교수는 “이 두 철도는 시설노화, 운송능력 부족 등으로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며, 현재 투먼시 정부가 도문-회령-청진 간 철도보수계약을 체결해 장기차관의 형태로 북쪽에 철도보수 자금 1000만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두만강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기존 북•중을 연결해 왔던 교량은 11개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북중이 추가로 개보수를 진행하거나 완료한 교량은 2곳이며, 건설중이거나 계획 중인 교량은 2~3개에 이르고 있다.
 
020.jpg » 신의주 단둥의 신압록강 대교 
 
가장 규모가 큰 ‘신압록강대교’는 이미 다리 상판이 연결됐으며 내년 7월 완공될 예정이다. 중국 단동의 랑토우(량두 浪頭)진 궈먼(국문 國門)만과 북한의 신의주 남쪽에 위치한 삼교천의 장서를 잇게 되는 이 신압록강대교는 전장 12.7km의 길이에 폭 33m의 왕복 4차선 현수교로 건설되고 있다.
 
북 주도의 지안(집안) 만포 압록강 다리 개보수
 
북한의 자강도 만포와 중국 지린성 지안 간 국경다리는 북한 주도로 개보수가 진행돼 지난 10월초 완료된 것으로 연변대 김성남 교수가 직접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교량에 관한 양국간 협정이 공개된 건 2012년 5월10일이었다. 당시 북한 <중앙통신>은 자세한 설명없이 평양에서 박길연 외무성 부상과 류훙차이 북한 주재 중국대사가 협정문에 서명한 소식만 짤막하게 전했다.
 
그 뒤 5월 26일 <RFA(자유아시아방송)>이 입수한 중국어 협정문에 따르면 다리의 주 교량과 북쪽진입교의 설계와 건설을 북한이 책임지기로 한 것으로 밝혔다. 신압록강대교 건설과 지린성 훈춘과 나진 간 도로 보강 공사 등 북중 경협을 위한 기반시설 공사는 이제껏 중국측이 주도해왔던 점에 비춰보면 이례적이다.
 
이와 관련해 북이 주도하게 된 배경으로는 신의주와 나진에 이어 개발이 상대적으로 더딘 북한 내륙지역을 북중 경협을 통해 개발하려는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특히 그에 앞서 일본의 <요미우리신문>( 2011년 10월 26일)은 중국측 지역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북쪽이 압록강에 있는 북쪽 섬인 벌등도를 관광지로 공동 개발하자는 제안을 해 협의를 하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벌등도는 강 하류 쪽으로 10㎞ 정도 내려간 곳에 있으며, 지안 시가지와 가깝다.
 
이 섬에 북한 식당이나 토산물 판매점을 짓고, 북한 예술단체의 공연을 하게 한 뒤 지안과 벌등도를 유람선으로 잇자는 것인데 2011년 5월말 만포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등의 대표단이 지안을 방문해 벌등도 공동 개발 문제를 논의했다는 것이다. 앞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생전인 2010년 8월 만포~지안 압록강 철교를 이용해 중국을 방문한 바 있다. 당시에도 김 위원장이 늘 이용하던 신의주~단둥 경로 대신 만포를 지나 지안으로 건너간 배경을 두고 북중 간 새로운 내륙 교역로를 개척하려는 의도가 내포돼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창바이(장백) 혜산간 압록강 친선다리 개보수
 
022.jpg » 중국쪽 창바이에서 혜산으로 이어지는 압록강 친선의 다리를 넘어가는 차량들. 개보수 전의 모습.
 
023.jpg » 위성에서 내려다 본 창바이(장백, 위쪽)와 혜산 시의 모습.
 
북한의 혜산 및 인근 북한 최대의 청년동광산을 마주하는 지린성 창바이(장백) 사이의 교량은 ‘압록강 친선다리’로서 지난10월 확장 재개통됐다. 5층짜리 세관을 새로 짓는 공사도 마무리됐다. 기존에 있던 세관과 이곳에서 북한과 연결되는 다리는 신축 세관에서 3~4㎞쯤 떨어져 있다. 중국은 이 “신축 세관 앞에 새 교량을 건설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혜산에는 북한 최대 구리 광산인 청년동광이 있다.북한과 중국이 출자해 협력 개발키로 한 혜산청년광산의 준공식이 열린 건 2011년 9월이다,
 
실제 운영은 2010년 가을부터 부분적으로 시작됐다. 올 초에는 중국의 완샹그룹이 5년간 5억6천만 위안(9천만 달러)을 이 구리광산에 쏟아붓고도 이익금을 내지 못한다는 내용이 중국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혜산동광은 맞은편 중국의 창바이로부터 약 3.5km 정도 떨어져 있는 동 품위가 1.4~1.5% 정도 되는 데다 세계적인 수준의 매장량을 보이는 광산이다. 북한자원연구소의 최경수 소장에 따르면 북한은 동 외에도 200여개의 광물자원 중 마그네사이트, 텅스텐, 화강암, 금, 몰리브덴 등 10개 광물에서 세계적인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취안허 새두만강 대교 건설 착공 방침
 
지린성 정부는 지난 7월12일 공개한 ‘새 취안허대교 추진 현황’에 따르면 중국은 취안허~원정리 사이의 기존 철교 말고 새 두만강대교 건설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타당성 조사를 끝내고 평가결과를 바탕으로 올해 착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이용중인 두만강대교에서 30m 떨어진 곳에 나란히 건설될 새 교량은 폭이 23 m (왕복 4차선), 길이가 637m에 이르며 진입 도로를 포함해 총 921.78m가 새로 건설될 예정이다. 건설비용만 총 1억5천만 위안(2천500만 달러)가 투입된다.
 
주로 대형 컨테이너 화물차량용으로 이용될 예정이며 기존 두만강교는 관광과 여객 운송에 주로 이용한다는 방침이다. 현 두만강교는 1937년에 세워진 것으로 하루 평균 화물 통행량이 600t (연 20만t)정도인데 반해 새 교량은 연간 화물 60만t, 인원 60만 명으로 설계돼 3배 가까이 늘어난 규모다.
옌지 훈춘 투먼/강태호 기자 kankan1@hani.co.kr
 
 
북한 중국관광객 20만명 시대
 

024.jpg » 연길 뻐스 터미널

 
중국과 북한은 북한 관광객을 겨냥해 버스, 항공기 운행을 정례화하고 있다. 훈춘시는 올해 중국에서 직접 자가용을 몰고 국경을 넘어 북한을 둘러보고 오는 북중 자동차 관광을 확대키로 했다.
 
옌지(연길)와 나선은 정기 버스가 오간다. 4시간이면 된다. 2012년 8월 정식 개통됐다. 연변동북아려객운수그룹유한회사와 지린우벨 운수그룹유한회사가 조선 라선시륙해운수총회사, 라선시관광총회사와 합작한 것으로 매일 양쪽에서 성수기에는 12대, 평소에는 1대씩을 운영하기로 했다. 총 길이는 200km로 중국쪽이 150km 북한쪽이 50km다. 요금은 100위안(1만7500원), 단체요금은 80위안이다. 훈춘에서 가면 각각 70위안, 50위안이다.
 
또 그에 앞서 7월 초부터는 운항에 금강산 관광을 위한 옌지~평양 전세 항공 노선이 시작됐다. 관광객들은 직접 연길에서 비행기를 타고 평양에 간 후 다시 여객 운수 차량을 타고 각지 관광을 다닐 수 있게 됐다.
 
중국, 북한, 러시아 3국 주요관광지를 잇는 옌지-평양-블라디보스톡을 잇는 전세기관광상품도 곧 출시된다.블라디보스톡에서 돌아올때는 차량을 이용해 훈춘 러시아국경 세관인 창링즈(장령자, 훈춘세관으로 명칭이 바뀜)를 거친다.
 
연변천우국제려행사( http://www.ybtianyu.com ) 지금녀총경리에 따르면 관련 관광코스는 5박 6일(1인당 5280위안,92만4천원)로서 9월과 10월에 시운행을 했으며 2014년에 정식운행을 할 계획이다. 이 여행사의 누리집에 가보면 연길-평양-묘향산, 연길-평양 -금강산을 비롯해 연길-나선-금강산의 크루즈 여행 등 관광 프로그램의 일정 가격 등이 소개돼 있다.
 
지난 2일 민화협 정책위원회와 연변대 동북아연구원의 세미나에서 김성남 경제관리학원 교수는 중국쪽 통계로 북한을 유람한 중국관광객은 2010년 13만1100명에서 2011년에는19만3900명으로 47.9% 증가했으며 2012년에는 20만명을 훌쩍 넘은 것으로 추정(출처 http://www.cceebb.com/article/860179/view )했다.
옌지/강태호 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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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사건 이후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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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3/11/16 11:36
  • 수정일
    2013/11/16 11:3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권력의 노골적인 충성요구…무너진 신상필벌, 결론은 특검으로
 
정주식 | 2013-11-15 15:59: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인간은 누구나 상을 좋아하고 벌을 두려워한다. 성악설을 신봉했던 한비자는 인간의 이기심을 통제하는데 상(賞)과 벌(罰)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군주(국가)가 이를 불편부당하게 집행한다면 공동체의 질서가 바로 잡히고 국가의 신뢰가 높아진다는 것이 한비자가 제시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현대국가에서도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여진다. 국가 기관, 특히 엄정한 법집행으로 국가의 신뢰를 담보해야 할 수사기관의 신상필벌이라면 그 중요성을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중징계냐 경징계냐, 국정원사건 수사팀을 이끌었던 윤석열 팀장의 징계 수위에 대해 논란이 뜨겁다. 어제 대검찰청이 윤 팀장에 대한 중징계를 청구한 가운데 그 과정에서 대검찰청이 감찰위원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감찰위원들의 폭로가 나왔다. 찍어내기 사전각본설이 제기되는 것이 당연하다. 윤석열 팀장의 징계수위에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는 이것이 수사방해 의혹을 받고 있는 조영곤 서울 중앙지검장에 대한 무혐의 처분과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대검찰청이 두 검사를 대하는 온도의 차이는 그동안 수사팀이 받았을 외압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처벌기준은 검찰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국정원사건 수사가 시작된 이후 비슷한 일들을 이미 여러차례 겪어 왔다. 윤석열 팀장의 징계는 보다 큰 그림의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건의 당사자 국정원과 이를 수사했던 경찰과 검찰, 그들 세 조직에서 일어난 신상필벌의 흐름을 살펴보자.

<국정원사건 관련 검·경·국정원 신상필벌 표 by @LOVELYTAENG>

작년 대선 직전 국정원 심리전담반의 조직적인 선거개입을 고발했던 국정원 직원 3인은 올해 초 원세훈 전 원장의 강도 높은 ‘색출작업’ 끝에 모두 파면당했다. 그들의 제보는 분명 공익에 부합하는 것이었으나 야당도, 유명무실한 '공익신고자 보호법'도 그들을 지켜내지 못했다. 반면 검찰은 지난 6월 사건의 주모자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수사 은폐 사건을 지휘했던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불구속기소하면서 국정원 이종명 전 3차장,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10월 18일 추가 기소), 김 모 심리전단 직원 등 3명, 외부 조력자 이 모씨 등에 대해 전원 기소유예처분을 내렸다. 기소유예란 혐의사실은 인정되나 정상을 참작해 ‘봐주겠다’는 뜻이다. 검찰이 밝힌 기소유예의 변은 그들이 “상급자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검찰은 국정원의 ‘복종범죄자’들을 모두 풀어주면서 공무원의 ‘위법한 명령에 따를 의무’를 인정했다.

지난 2월초 국정원사건의 수사책임자였던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과장은 뚜렷한 이유없이 송파경찰서로 전보됐다. 수사에 의욕적이었다는 이유로 ‘찍어내기’를 당했다는 설이 무성했고, 권 과장은 지난 8월 국정조사에서 실제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외압이 있었음을 폭로 했다. 권 과장은 한 달 뒤 외압사실을 언론에 밝혔다는 이유로 서울경찰청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반면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과 함께 사건의 축소·은폐수사를 모의한 것으로 알려진 ‘3인방’은 모두 사건 이후 승진·영전한 것으로 밝혀졌다. 최현락 당시 수사부장은 경찰청 수사국장으로, 이병하 당시 수사과장은 여주 경찰서장으로 각각 승진했고, 김병찬 당시 수사 2계장은 그자리를 유지하고 인사상 영전했다.

또 작년 12월 16일 문제의 경찰 중간수사발표 기자회견에서 “(댓글이) 삭제된 흔적은 있으나 혐의사실과 관계가 없다”고 말해 빈축을 샀던 김수미 분석관 역시 수사관으로 승진했다. 김수미 분석관은 국정조사에서 권은희 과장과 상반되는 진술로 김용판 전 청장을 옹호하기도 했다. 국정원 직원 김하영과 소개팅으로 만나 400여통의 문자를 주고 받았던 신동재 개포경찰서 경위도 이 과정에서 서울경찰청 회계파트로 승진했다. 국정원사건 은폐·축소수사 의혹과 관련된 모든 경찰관들이 승진했다. 이것들의 개연성이 의심받는 것은 당연하다.

<출처:황정인 서울 강남경찰서 수사과장 페이스북>

검찰의 상황은 좀 더 드라마틱하다. 권은희 과장의 전보 이후 경찰의 수사가 지리멸렬 그 자체였다면, 6월 경찰로부터 수사를 이관받은 검찰 수사팀은 뭔가 달랐다. 채동욱 총장과 윤석열 수사팀장은 경찰이 내놓은 수사결과를 완전히 뒤집으며 축소·은폐를 지시한 혐의로 김용판을 기소했고, 원세훈의 선거법위반-구속여부를 놓고 황교안 법무부장관과 각을 세우기도 했다.

예상치 못했던 검찰의 태도에 당황한 황교안 장관은 원세훈에 대한 불구속수사를 고집하며 검찰을 압박했다. 수사지휘권파동을 연상케하는 줄다리기 끝에 양측은 결국 <선거법위반 혐의 인정-불구속기소>라는 타협안에 사인했다. 황교안 장관과 갈등을 빚었던 채동욱 총장은 지난 9월 엉뚱하게도 사건과 무관한 사생활 논란으로 사임한다.

채 총장이 물러난 뒤에도 수사팀은 의욕은 꺾이지 않았다. 수사팀은 10월 17일 아침 국정원직원 3인을 전격 체포한 뒤 20일에는 트위터 대선개입건 등을 포함하는 공소장 변경을 신청했다. 그러나 윤석열 수사팀장은 이 ‘작전’을 사전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찰지시와 함께 수사팀에서 배제되었고, 며칠 뒤에는 박형철 수사부팀장마저 공보업무에서 배제된 것으로 확인됐다. 국정감사장에서 황교안 법무부장관의 수사외압을 폭로했던 윤석열 팀장과, 지난달 직접 공소장 변경을 신청했던 박형철 부팀장이 모두 물러난 수사팀은 이제 완전히 다른 팀이 되었다.

권력의 노골적인 충성요구

국가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너졌을 때 이를 회복할 수 있는 첫번째 방법이 신상필벌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과 검찰, 경찰은 국정원사건 수사과정에서 나쁜 신상필벌의 전형을 보여줬다. 원칙은 뒤집혔고 방법은 천박했다. 이들이 보여준 신상필벌에서는 동일한 일관성이 나타난다. 세 기관은 한결같이 권력에 충성하는 관료에게 상을 내렸고, 권력의 비리를 추적하는 관료에게 벌을 내렸다. 공을 세운 관료에게 벌을 내리고 일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탐관오리에게 상을 내린 것이다.

국정원의 공익제보자들이 파면당하는 과정이나, 권은희 과장이 아무런 설명 없이 전보당하는 과정, 검찰총장이 사생활문제로 법무부장관에게 감찰을 받는 과정, 용의자를 체포했다는 이유로 수사팀장이 교체되는 과정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보면 일련의 사건들이 매우 인위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권력에 맞서는 자는 언제든 쳐낼 수 있다는 경고이자, 권력의 편에 서는 자에게는 마땅한 상을 내리겠다는 유인이다. 이쯤되면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자”거나 “국정원의 자체개혁” 같은걸 들먹이는 작자들이 딴세상 사람처럼 느껴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검찰수사팀이 대단히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채동욱→윤석열→박형철로 이어진 ‘찍어내기 3단콤보’는 더 이상 정상적인 검찰수사로 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없음을 말해준다. 경찰수사→검찰수사→국정조사로 이어진 근 1년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사는 여전히 사건의 중심부에 접근하지 못했다. 국정원에 이어 국방부와 보훈처 등 정부 다수 부처의 전방위적인 선거개입이 확인됐음에도 수사의 창끝은 전임 권력자의 근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사건의 주모자인 원세훈 전 원장조차 공직선거법위반도 아닌 개인비리로 겨우 구속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스럽게 결론은 특별검사제로 모아진다. 외압으로부터, 무너진 신상필벌체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이제 특검이 유일하다. 지난주 특검실시를 요구한 야권의 연석회의를 환영한다. 오래 전에 했어야 할 일을 드디어 하게 된 거다. 모처럼 의기투합한 범야권이 특검관철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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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배제하는 야권연대, 꼭 그래야 하나?

 

[게릴라칼럼] '박근혜 독재'에 대처하는 야권의 자세

13.11.15 20:19l최종 업데이트 13.11.15 20:19l
안호덕(minju815)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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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한길 민주당 대표 "특검 도입하라" 민주당 김한길 대표를 비롯한 의원, 당원들이 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을 위한 9차 국민결의대회'에서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사건을 규탄하며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건과 함께 특별검사법안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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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청구 중단하라" 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총체적 대선개입 민주주의 파괴 박근혜 정부 규탄 19차 범국민 촛불집회'에 참석한 통합진보당 당원과 정부의 정당 해산청구를 규탄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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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민주주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을 위한 9차 국민결의대회를 마치겠습니다. 이후 촛불집회가 이어질 예정이오니, 많은 참석 바랍니다."

늦가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9일 저녁 서울 시청광장. 오후 7시를 조금 넘겨 민주당 주최 집회가 끝났다. 사회자가 이후 촛불집회를 안내했지만 광장에 모였던 민주당 각지구당 깃발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곧이어 시국회의에서 촛불집회를 알리는 방송을 내보냈다. 뒤이어 민주당 깃발이 빠져 나간 자리에 통합진보당 깃발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불과 20여 분 사이에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은 섞이지 않는 기름과 물처럼 갈라섰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바꿨다.

'아니, 왜 함께 하지 못하는데?' 이도 저도 아닌 촛불시민인 아내와 나는 3시간 내내 비를 맞으면서도 이 물음에 답을 얻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운 건 젖은 옷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왜 함께 하지 못하는데?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은 박근혜 정부 출범 9개월이 다 돼 가지만 의혹이 더 확산되는 양상이다. 국방부와 국가보훈처마저 대선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지만 대통령은 "국정원 사건과 자신은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으며, 새누리당은 "수사중인 사건이니 만큼 결과를 기다려보자"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검찰총장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물러났고,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조사하던 수사팀장인 윤석열 검사는 수사에서 배제된 것은 물론 중징계까지 당했다. (물론 이 징계 과정도 검찰 지휘부가 짜놓은 각본대로 이루어졌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윤석열 검사의 징계가 당연한 조치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기에 호응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이명박 정부에서 저질러진 대선개입보다 박근혜 정부에서 자행되고 있는 사건 은폐가 더 큰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대선 부정을 덮기 위한 박근혜 정부의 광폭 행보 속에는 국민의 선택을 받은 합법적인 정부라는 오만만이 가득 묻어날 뿐이다. 민주주의 운영원리는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으며, "이게 나라냐"라는 비아냥거림이 유행어가 된 지 오래다.

민주당 김태년 의원은 이러한 상황을 "파시즘 체제의 전조"라고 진단했다. 지난 10일 개인 성명을 통해 "사적 이익과 욕망을 채우려고 한 이명박 정부보다 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위임된 권력으로 국민을 겁박하며 반대세력을 고사시키고 역사를 퇴행시키고 있다"고 성토하면서 "역사 퇴행과 민주 말살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입장에서야 '박근혜씨'라고 불리는 것만큼 펄쩍 뛸 용어지만 작금의 정치 현실과 비추어 보면 이만큼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표현도 없을 듯하다.

파시즘은 반합리성에 기초한다. 이성을 앞세우기보다는 감정에 호소하고 광신적이며 독단적이다.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심판 청구, 2007년 남북정상회담대화록 유출 사건 등은 이성적 판단에 의한 행위라기보다는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해 보수 세력을 규합하고 반대세력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반합리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정권이 이성보다는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고, 광신적 집단이 활개치고, 왜곡된 이념이 사회를 유린하는 현상은 파시즘 체제의 전조를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파시즘의 또 다른 양태는 엘리트에 의한 정치, 국민의 정치 참여 배제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평등보다는 불평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나 정치인은 국민의 심부름꾼이 아니라 국민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고, 국민의 목소리보다 정치권력과 엘리트계급의 목소리가 커질 때 그 사회는 위험하다. 대통령을 '박근혜씨'라고 불렀다고 해서 석고대죄를 요구하는 여당와 대통령 순방 중에 촛불시위를 했다고 교포를 상대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협박을 일삼는 국회의원, 날치기와 폭력 국회를 막겠다고 발의한 국회선진화법을 스스로 위헌 소지가 있다며 폐지나 헌법 소원을 계획하고 있는 여당. 이런 행태는 정치권력의 횡포이고 민주주의 주인인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다. 국민들이 정치의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정치는 권력의 전유물이 되는 사회. 파쇼 타도를 외치던 70-80년대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파시즘은 전체주의를 강조한다. 정권의 뜻에 따르지 않거나 전체주의를 거부하는 세력에게는 철저한 응징이 가해진다. 굳이 통보진보당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그 예는 무수히 많다.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던 해고자 조합원 가입 문제를 빌미로 전교조에 법외노조를 통보한 것 또한 그 일부분에 불과하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대선개입을 했다며 진행한 공무원노조 서버 압수수색, 시민단체 강제해산 추진 등 국민에게 특정 이념을 주입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는 끝도 없이 게속되고 있다. 국가의 공인된 폭력이 대화와 타협보다 앞서는 사회. 파시즘 체제의 무서운 얼굴이다.

연석회의 출범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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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기관 선거개입 진상규명 각계 연석회의 출범 12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국정원과 군 등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진상규명과 민주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각계 연석회의'에서 김한길 민주당 대표, 천호선 정의당 대표, 안철수 의원 등 야당인사와 종교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손을 맞잡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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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이 지난 10일, 101일 만에 천막당사를 접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2일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사건 진상규명과 민주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각계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를 출범시켰다.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제안한 특검을 우선적으로 관철하기 위한 연대라고 하지만, 그간의 투쟁이 민주당과 시국회의 등에서 파편적으로 진행되어 온 점을 감안한다면 우선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야당 의원조차 파시즘 체제의 전조라고 진단하는 비상시국에 출범하는 연석회의에서, 거기에 걸맞은 각오와 결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광범위한 대선개입 사건. 특검이 국회에서 야권이 쟁취해야 할 목표가 돼야 한다는 사실에 이견은 없지만, 단지 특검을 쟁취하기 위한 연석회의에 머무른다면 한계는 분명하다. 파시즘 체제를 획책하고, 이를 통해 권력을 영구화하려는 보수 세력의 음모에 파열구를 내지 못한다면 이 사회는 1987년 6월 항쟁 이전의 정치 질서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탄압, 역사교과서 왜곡,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폄훼,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청구 등 무수한 문제들은 탄압 당사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연석회의, 더 나아가 진보세력과 양심적인 보수세력이 손잡고 싸워서 해결해야할 민주주의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이번 연석회의에서 통합진보당이 배제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처사다. 언제까지 통합진보당 탄압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민주당과 통합진보당 모두 보수 세력에 의해 '종북'이라는 굴레가 끝도 없이 덧씌워졌다. 종북이 아니라는 '자기결백'이 연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지 궁금하다. 파시즘 체제를 구가하고 있는 박근혜 정권 하에서 통합진보당과 연석회의가 손잡지 않는다면 과연 이 낙관을 극복할 수 있을까?

51.6% 득표로 당선된 박근혜 정부는 합법적인 정부임을 내세우며 파시즘 체제 구축을 위한 광폭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51.6%에 표를 준 유권자나 그에게 표를 주지 않은 나머지 유권자 누구도 부정에 눈감고 국민들 위에 군림하라고 자신의 권한을 정권에게 위임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잘못 사용하는 정권을 바로잡아야 할 책임도 국민들에게 있다.

합법적인 선거로 뽑힌 지도자가 세기 최악의 독재자가 되었다. 야당은 법률 제정권을 행정부에 위임함으로써 독재자를 견제하는 대신 폭주를 합리화시켜 주었다. 그 결과 학살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세계전쟁에 불을 붙였다. 결과는 참혹했다. 독재자뿐만 아니라 국민들 모두가 전세계의 범죄자가 되었다. 1933년 독재자 히틀러를 탄생시킨 독일의 이야기이다.

각성된 국민들의 실천과 폭넓은 연대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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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는 정치검찰의 수상한 대화록 수사 발표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폐기,삭제 의혹을 수사한 검찰이 11월 15일 금요일 오후,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검찰은 대화록 삭제, 미이관이 모두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검찰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대통령 지시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삭제,파쇄되어 대통령 기록관으로 이관되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또한, 역사적 기록물로서 보존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로 유출된 사실도 확인됐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 발표를 보면 뭔가 석연치 않은 점들이 너무 많습니다. 도대체 검찰 수사 결과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리해봤습니다.

 

 

 

 


검찰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지원 시스템에 있는 회의록 파일은 없애도록 하라, 회의록을 청와대에 남겨두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검찰의 발표와 다르게 검찰 수사 결과 18페이지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녹취록을 한 자, 한 자 다듬고 정확성, 완성도가 높은 대화록으로 정리하여 이지원에 올려 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검찰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화록을 삭제 지시했다고 하는 근거로 조명균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의 진술이라고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조명균 전 비서관은 1월 검찰 조사는 부정확한 진술이었고, 이번 조사 때 정확하게 그런 지시가 없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결국, 검찰은 부정확한 진술만을 가지고 노무현 대통령이 삭제를 지시했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검찰은 대통령 기록물이 삭제되고 이관되지 않은 사안을 중대한 범죄라고 발표했습니다. 새누리당은 '사초 폐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초본의 삭제와 최종본 미이관입니다. 검찰은 자신들의 수사 결과 14페이지에서 '초본,최종본,국정원본 모두가 회담의 본질적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라고 해놓았습니다.

회의록 초본은 거의 속기록 수준이라 이런 식의 기록은 완성본이 만들어질 경우 삭제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검찰은 무조건 초본이 사라졌으니 의도적인 삭제라고 발표했습니다. 최종본 미이관은 시스템상의 오류 (퇴임 직전 이지원 셧다운, 초기화 등) 이지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었습니다.

대통령 기록관에 넘기지 않으면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회의록을 볼 수가 없습니다. 대신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국정원본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보지 못하고 후임자는 보게 한다는 그 자체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검찰이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검찰은 대선 전부터 시작된 대화록 수사를 금요일 오후에 발표했습니다. 사람들이 불금이라고 들떠 있는 금요일 오후의 뉴스 전파력은 약합니다. 그래서 보통 이런 중요한 수사 결과는 월요일~목요일 주중에 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은 대부분 금요일 오후에 발표됐습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6월 14일 금요일,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자식 의혹 사건 9월 13일 금요일, 9월 27일 금요일, 윤석열 국정원 사건 특별수사팀 감찰 11월 8일 금요일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치명적인 약점을 주는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부정 사건도 금요일.
국정원 사건을 조사하는 검찰총장과 수사팀의 감찰 결과 발표도 금요일.
대선 기간 내내 논란이 됐던 NLL 대화록 수사 결과 발표도 금요일.


박근혜 정부의 정치검찰이 왜 금요일에만 이런 발표를 했을까요? 당연히 자신들의 범죄 행위와 부실한 수사 결과를 국민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11월 15일 KBS,SBS,MBC 톱뉴스는 '노무현 대통령 삭제'라는 문구였습니다. 11월 16일 조선일보 1면은 '노 지시로 원본 삭제' 동아일보 1면에도 '노지시로 회의록 폐기'였습니다.

이제 국민 대다수는 검찰의 부실한 수사와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NLL 대화록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잊어버렸습니다. '김무성 의원이 찌라시를 보고 대화록을 읽었다'는 말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한눈에 보는 정치 검찰의 수상한 대화록 수사



사건의 본질과 진실은 누군가에 의해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정치 권력자가 검찰,언론을 장악하면 어떻게 되느냐를 잘 보여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검찰개혁, 언론개혁을 주장했다가 그들에게 잡혀먹힌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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