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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검사와 길 위의 목사, 그리고 유신의 그녀

도가니 검사와 길 위의 목사, 그리고 유신의 그녀
(블로그 ‘사람과세상사이’ / 오주르디 / 2012-09-14)


 

▲<임은정 검사와 박형규 목사>

 

5.16과 유신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귀에 거슬려도도 참으려 했다. 역사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여당의 대선후보에 실망하면서도, ‘자식이 어찌 대놓고 부모를 비난할 수 있겠느냐’며 그나마 분을 온정으로 삭이려 했다. 많은 국민들이 이랬다.


진실 앞에 고개 돌리는 여당 대권 후보

맞아 보니 별것 아니다 싶었나. 정신 줄 놓은 듯 한참 더 나가고 말았다.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 있다고 주장했다. 무죄를 선고한 재심판결을 부정하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는 말이다. 유신반대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날조한 것으로 결론이 난 사건을 마치 실체가 있는 간첩사건인 것처럼 말해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1974년 4월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이 ‘인혁당 재건위’의 배후조종을 받아, 반정부 운동을 전개해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며 긴급조치 4호와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1024명을 체포한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이들 중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불과 18시간 후인 4월 9일 새벽 사형이 집행된다. 억울한 시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울부짓는 유족들/1975년 4월 9일>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탄압위해 날조된 사건으로 밝혀졌다. 2007년 이후 올해까지 재심을 통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던 피해자들 모두 무죄를 선고 받았다. 2007년 8월 서울지방법원은 인혁당 사건 희생자 유족들에게 국가가 총 637억여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2004년 8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인혁당 사건 유족과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사형판결 등은) 법적으로 결론이 난 사항들”이라며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사건이 날조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검사가 선고공판에서 “무죄 내려달라”, 사법사상 초유의 일

지난 6일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 받았던 박형규 목사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검사가 피고인에게 무죄를 구형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임은정 검사는 검사의 직분을 망각한 양 재판장에게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청했다.

임 검사가 무죄를 구형하며 한 말이다. 매우 감동적이다. ‘권력의 검’이 아닌 ‘정의의 검’을 쥔 검사를 볼 수 있다는 게 참으로 기뻤다.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해 권력의 채찍을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간 사람들이 있었다. 몸을 불살라 칠흑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 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됐다.

그러니 무죄를 내려달라.”

 

재판부도 임 검사와 뜻을 같이 했다. 재판부는 “장구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울였을 노력 등이 이 판결을 가능하게 하였음을 고백한다. 이 판결이 부디 피고인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우리 사법에 대한 안도로 이어지길 소망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임은정 검사, 그는 ‘도가니 검사’였다

임은정 검사. 그 이름이 낯설지 않다. 2011년 9월 광주 인화학교 청각장애아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가 전국을 후끈 달구던 때, 검찰 내부통신망에 올라온 글 하나가 화제가 된 바 있다. 사건의 1심 공판검사가 그 영화를 본 뒤 수사 당시(2007년)에 썼던 일기를 공개한 것이다.

 

 

▲<PD수첩 화면 갈무리>

 

“어제 도가니를 보고 그때 기억이 떠올라 밤잠을 설쳤습니다”는 말로 착잡한 심경을 밝히며 공개한 임 검사의 일기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2007년 3월12일

....법정을 가득채운 농아자들은 수화로 이 세상을 향해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
....어렸을 때부터 지속된 짓밟힘에 익숙해져 버린 아이들도 있고, 끓어오르는 분노에
치를 떠는 아이들도 있고.... 눈물을 말리며 그 손짓을, 그 몸짓을 그 아우성을 본다.
변호사들은 그 증인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는데, 내가 막을 수가 없다.
....피해자들 대신 세상을 향해 울부짖어 주는 것, 이들 대신 싸워주는 것.
그리하여 이들에게 이 세상은 살아볼만 한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것....

............

2009년 9월20일

도가니가....베스트셀러라는 말을 익히 들었지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잘 아는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잘 알기에...서점에 들렀다가 결국 구입하고 빨려들듯 읽어버렸다.
가명이라 해서 어찌 모를까? 아 ! 그 아이구나. 그 아이구나....
신음하며 책장을 넘긴다....1심에서 실형이 선고되었지만,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는 뉴스를 들었다.
...정신이 번쩍든다. 내가 대신 싸워줘야 할 사회적 약자들의 절박한 아우성이 밀려든다.
그날 법정에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말려가며 한 다짐을 다시 내 가슴에 새긴다.
...정의를 바로 잡는 것. 저들을 대신해서 세상에 소리쳐 주는 것.

난 대한민국 검사다.

 

임 검사는 2011년 10월 국회 국감장에 증인으로 출석해 당시 공판 분위기와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는 아동 성폭력 수사에 대한 지침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증인 심문과정에서 피해자 아동이 ‘거짓말쟁이’로 몰려 억울해 하는 것을 제대로 살펴주지 못해 아쉬웠다고 술회했다.


검사로부터 ‘무죄’ 구형받은 박형규 목사, 그는 누구?

그런 그가 사법사상 초유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구형했다. 피고인 박형규 목사는 어떤 사람일까. 그를 ‘길위의 목사’로 부르기도 한다. 현대사의 아픈 현장에서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평생을 헌신한 사람이다.

4.19혁명 즈음 결혼식 주례를 보고 오던 길에 피 흘리는 학생을 보고 “엉터리 목사로 살아온 것을 뉘우치고 진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박 목사. 그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에서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에게서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었다.”

 

 

유신 반대 투쟁에 앞장서 19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을 주도했다. 4월 22일 새벽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 6만 여명의 신도가 운집했다. 이 자리에서 “민주주의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등의 민주회복과 언론자유를 호소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이는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박 목사는 내란예비음모죄로 기소됐고, 이후에도 반독재 투쟁을 벌여 6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평생 인권과 민주운동, 깡패 동원 예배 방해해 6년간 노상예배 드리기도

유신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박 목사는 정권으로부터 감시당하던 학생들에게 마음껏 ‘거사’를 도모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했다. 그와 학생들이 모였던 곳은 서울 변방의 한 신학교. 고 김근태 고문 등이 그곳을 자주 들락거렸다. 박 정권은 시위하다 붙들린 젊은이들을 고문하는 현장에 그를 불러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했다. 이렇게 말하며 말이다. “당신 때문에 저렇게 당하는 거야!”

 

 

▲<끌려가는 박형규 목사>

 

아흔을 바라보는 노목사와 그 신학교와의 인연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성공회대학교는 지난 4월 박 목사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장로교 교단 소속 목사가 성공회대 최초의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박 목사가 아예 목회를 하지 못하도록 탄압을 했다. 매번 깡패를 동원했다. 그가 목회하고 있던 서울제일교회에 침입해 난동을 부리고 마구 폭력을 휘둘렀다. 교회에서 예배할 수 없게 되자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서 교인들과 일반인까지 참여하는 노상 예배를 서울 6년 동안 드렸다. 이 사실이 외신에 의해 보도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MB는 기독교 욕되게 했다” “박근혜 지지는 독재정권 다시 보자는 것”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도 따금하게 일갈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였을 때 박 목사를 만나 “나도 민주화 운동을 했고, 나도 크리스천이다”라고 자랑했단다. 하지만 박 목사는 이 대통령을 이렇게 평가한다 “크리스천이라는 간판만 달고 기독교를 욕되게 했다.”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는 “그를 지지하는 건 독재정권의 그림자를 다시 보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긴급조치 구속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1975년 2월>

 

달라도 참 다르다. 한쪽에서는 과거의 암울한 역사를 치유하고, 그를 교훈삼아 더 나은 민주사회를 만들려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 어떻게 하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려고 안달이다. 한쪽은 시대정신에 철저하고, 다른 쪽은 시대정신에 역행한다.


저들의 눈에 임 검사와 박 목사는 어떻게 보일까?

‘도가니 검사’와 ‘길 위의 목사’는 인권과 정의라는 시각으로 과거를 보는데, 박근혜 후보와 그를 추종하는 이들은 ‘박정희 프레임’에 갇혀 뒤집힌 시각으로 과거를 본다.

진실은 하나다. 대법원 판결이 하나인 것처럼 진실도 두 개가 될 수 없다. 극과 극을 형성하는 두 시각, 한쪽이 진실이면 한쪽이 거짓일 수밖에 없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게 옳은 일인가? 어느 쪽이 거짓인지 또렷해도 너무 또렷하다.

5.16쿠데타, 유신독재,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장준하 선생의 죽음 등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보는 저들의 눈에 임은정 검사와 박형규 목사가 어떻게 보일까?

 

오주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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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잘리고 피 흘리는 추한 진보 vs. '안철수 우파'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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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몰입, 2012] <지금 여기의 진보>·<우파의 불만>

홍명교 영화 노동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09-14 오후 6:42:32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신해욱,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중


그 놈의 장례 행렬 참 길기도 하다. 한참 전에 죽은 것을 믿지 못하고 안고 업어 달려오다 보니 죽어 있어서, "이 놈은 죽었습니다!" 선언했지만, 누구는 그것을 죽어도 믿지 않고 또 누군가는 죽어도 내 자식 아니겠느냐고 끌어안아서, 장례 행렬은 아직 끊이지 않고 있다. 나 역시 그를 만나고 온몸에 이고 달려온 무수한 사람들 중 하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작 1년 만에 나는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2003년 11월 노동자대회 즈음에 말이다.

배달호, 이현중, 이해남, 이용석, 김주익, 곽재규 열사. 그 해에만 여섯 명의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부와 자본에 맞선 저항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전국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불 붙었지만 어떤 노동 운동 관료들의 선택은 투쟁을 전면화하는 것보다 '이듬해 총선'에 있었다. 총선에서 노동자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열사들의 한을 풀자는 것이었다. 투쟁은 급격히 소강기로 접어들었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듬해인 2004년 4월. 민주노동당은 열 명의 국회의원을 원내로 진출시켰다. 그것은 '정치'의 시작인가? 정치라는 것을 '사회 운동'과 철저하게 분리시켜 사고하는 '정치학 박사' 박상훈은 바로 그 점에 역점을 두어 '진보 정치'에 대한 악평을 늘어놓는다. 그는 정치를 '정당 정치' 혹은 '의회 정치'라는 협의 안에 가둠으로써 현실이란 얼마나 고단한 것이며 여러 가지 차악을 선택하는 지난하고 복잡한 과정인지 훈계한다.

좌파는 '운동'은 참 열심히 하고 잘 하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너무 아마추어적인데다 몽매하고 정파 정치의 패권으로 인해서 오늘날 '진보'가 이 모양 이 꼴이 난 것이라는 얘기다. 진보 정당의 정치인들이 아마추어적이라는 지적은 일면적 차원에서는 일리 있는 말일 것이다. 또한 특정 정파의 패권주의가 최근의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큰 해악으로 작용됐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통합진보당 사태의 근본적 원인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레시안(손문상)

며칠 전 통합진보당 탈당을 선언하고 '혁신 모임' 구성을 통해 "새로운 대중적 진보 정당을 건설할 것"임을 밝힌 심상정-유시민-조준호 등의 진보적 자유주의 혹은 노동 운동 우파 계열의 스펙트럼에 위치한 정치 그룹은 지금까지의 모든 사태에 대한 반성적 제스처 없이 또 다시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다.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상정은 지난날 민주 노조 운동의 성과를 끊임없이 의회 내로 수렴시키고자 했던 전형적인 의회주의 정치인이다. 의회 내 그녀의 생산적 역할 중 의미 있는 일도 없지 않았겠으나 패권주의적 정치 기획으로 진보 진영의 정치적 위신을 전국적으로 추락시킨 '경기 동부 세력'과 지난 정권 신자유주의의 첨병 노릇을 했던 국민참여당 계열과 합종연횡에 동조하고 2011년 9월 진보신당 당 대회 결정을 어기고 탈당한 장본인이다.

또 조준호는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 현장에서 일었던 비정규직 노동자 조합원들과 현장 활동가들의 울분 섞인 요구들을 무시로 일관했던 대표적인 중앙 관료 중 하나다. 비정규직-여성 노동자 중심의 노동자 운동의 변화를 도모해야할 오늘날에 있어서 그는 혁신의 주체이기는커녕 혁신되어야 할 상징적 대상 중 하나인 것이다. 박상훈이 이런 주요한 원인에 대해 침묵하는 이상 그가 말하는 진보 정당 운동 위기의 원인 진단은 엇나갈 수밖에 없다.

물론 소위 "'운동권'들이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식의 비판이 합당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만약 부르주아 정치 질서에서의 온갖 장황한 술책들을 늘어놓는 것으로서의 '전문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 진단은 설득력을 갖추기 어렵다. 오히려 '운동'에 있어서 원칙을 끈기 있게 지켜왔다면 오늘날 노동자 운동이 이런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진보 정치의 실패는 1987년 이후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민주노총으로 이어온 민주 노조 운동의 기반 자체를 모조리 의회 정치의 성과로 수렴시키고자 했던 것에 더 가까이 있다. 이른바 진보 정치의 스타 정치인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볼멘소릴 하는 것처럼 노동자 운동에 휘둘리기보다 끊임없이 노동자 운동의 체제 내로의 수렴과 '타협'을 선도했다.

이쯤이면 모두 눈치 챘겠지만 우리가 아직도 끌어안은 채 놓지 못하는 그 죽은 아이는 바로 '진보'다. 언젠가 배우 고수가 영화 <고지전>에서 전우인 신하균에게 비틀거리며 이미 일어난 것인지도 모르는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했듯, 나는 진보가 아주 오래 전에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새로운 것을 도래시키지 못하고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도 그것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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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여기의 진보>(박상훈·심보선·장석준·홍기빈·이택광·하종강·서동진·엄기호·박경신·홍세화 지음, 이음 펴냄) ⓒ이음
<지금 여기의 진보>(이음 펴냄)는 정치학 박사 박상훈을 비롯해 심보선, 장석준, 홍기빈, 이택광, 하종강, 서동진, 엄기호, 박경신, 홍세화 등 예술, 경제, 정치, 노동, 교육, 법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진보 진영의 명사 혹은 이론가들이 저마다의 입장에서 진보의 현재에 대해 늘어놓은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전문적인 분석과 입장들이지만 이중 어떤 글들에 대한 인상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다른 영역이지만 저마다 전제로 하는 이념과 역사적 평가가 조금씩 다르고 종종 상충되는 견해들도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이 제각각 경제, 예술, 생태, 정치 등 다른 영역의 코드를 논제로 삼고 있기에 논쟁의 핀트를 맞추기 쉽지 않다.

기획에 있어서 실패가 아닌가 모르겠다. 아무리 다양하게 끌어안는다고 하더라도 아귀는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독자들은 '지금 여기의 진보'의 의제들이 다종다기하게 늘어진 채 어떤 정치적 헤게모니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를테면 홍세화는 "자칭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다름 아닌 그 자유주의자들이 오늘날 소위 '배제된 노동'을 더욱더 배제하면서 동시에 노동 운동 상층부의 관료들과는 밀착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지적한다. 이와는 다르게 박상훈은 정당 정치 중에서도 전문가적인 전술 구가의 필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역설하는 방식으로 자유주의 정치를 옹호한다. 위기의 원인을 서로 다르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 변호사 박경신은 진보 진영이 '표현의 자유'에 대해 갖고 있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태도에 대해 지적하면서 그것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그러기 위해 그가 요청하는 것은 우리를 억압하는 신자유주의가 아닌 근원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자유주의다.

이처럼 각자가 소환하는 '자유주의'가 상이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고 진보의 위기로 짚는 원인들도 다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이것의 맥락적 차이들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은데 그것이 개별 영역의 논의로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논쟁을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논의의 폭이 너무나 엷기에 대체 어디서부터 맞춰 이야기해야 할지 맥이 잡히지 않는다.

아마 이 책에 실릴 글들이 강연문으로 나왔던 일련의 강연들을 청취했던 사람들에겐 그것이 아주 혼란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결국 '지금 여기의 진보'의 잔해들이 이토록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는 걸 확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홍세화가 끊임없이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노동 운동 상층 관료들을 향해 일갈하는 것은 자못 '홍세화다운' 태도다. 그는 몇 주 전 국회 앞 기자 회견을 통해 발표한 진보신당의 대선 사회 연대 후보에 대한 회견문에서도 지난 시절의 '노동 운동'을 비판하며 그것을 '조직노동'이라고 뭉뚱그려 비판한 바 있다. 나는 당원 게시판, SNS 등 온라인상에서 그런 식의 수사로 가하는 비판이 별로 맞지 않다고 비판한 적 있다.

그리고 홍세화가 계몽주의적 태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운동의 경향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조적인 분석과 아래로부터의 실천을 통해 가능한 것일 텐데, 그는 각기 다른 운동들에 대한 시차적 관점을 가지려 노력하기보다 '선생님'의 자리에 머무르려 한다. 실제 진보 정당 정치인들이나 우경화된 노동 운동의 상층 관료들이 홍세화가 지적한 관료주의적이고 우경화된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조직 노동'이라고 애매하게 설정했을 때에는 아예 엉뚱한 층위에서 불필요한 오해와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선 오늘날 우경화된 노동 운동의 흐름은 충분히 조직적이지 못해 항상 문제였지 '조직 노동'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 한 바 없었다. 만약 민주노총이 한진중공업이나 현대자동차 하청 노동자 파업,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 해고에서부터 자본에 의해 자행된 일련의 금속 사업장 파괴 공작에 조직적으로 맞섰다면 우리는 노동자 운동의 추락에 대해 이토록 한탄할 일 없었을 것이다.

지난 시기 진보 정당이 노동 운동의 성과로서 모조리 수렴되면서 아래로부터 끊임없이 현장의 강화를 통해 조직적으로 유지되고 쇄신되어야 할 노동조합 운동이 그 힘을 상실해왔기 때문이다. 만약 홍세화가 '배제된 노동'이라고 칭하고 있는 '불안정 노동자' 조직화의 전략을 강조하고 싶다면 더더욱 적극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피력했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모든 공력을 가하고 있는 현장 활동가들은, 대선 정국에서 '선거 연합'을 도모해야 하는, '조직 노동'의 전망에서 활동하는 일련의 좌파 정치 조직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하종강이 끊임없이 피력하는 노동조합 운동의 중대성은 누차 강조해도 모자란 이야기다. 어떤 면에선 그의 우직한 일관성과 어렵지 않은 해설이 가장 현명해 보이기까지 하다.

한편, 장석준이 던지는 '녹색 사회주의'의 의제는 흥미로울뿐만 아니라 논쟁적이다. 오늘날 전 지구적 생태 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좌파가 선택해야 할 전략은 녹색 사회주의임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유럽에서 얼마나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 그리고 전술적으로 무엇이 강조되어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글들과 접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따로 또 존재하는 듯한 인상이 든다.

충돌 지점이 있다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홍기빈의 몽매하고도 정념적인 비판들일 것이다. 홍기빈은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성에 빠진 진보 세력이 다시금 경제 문제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이른바 '살림살이 경제학'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그가 가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의 항목들은 대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내용 안에 갇혀 있다.

생산력주의와 역사적 진화주의의 한계에 갇힌 현실 사회주의 운동이 역사적 곤경에 쳐했던 것을 거론하며 반복적으로 그것의 비실용성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다. 일정한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나는 그가 피력하는 '교조성'에 대한 우려를 아예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무오류의 신화라는 환상은 지난날 사회주의 운동이 빠진 곤경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화의 문제의식을 견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홍기빈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완전한 기각을 주장하며 구체적인 비판은 생략하고 그것이 변증법적 무오류의 논리성 안에 갇혀 결국 교조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고만 주장한다. 그가 삶에서 만난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말 그렇게 우격다짐으로만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진화주의적 역사 발전 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힌 사회민주의자들이 설득력 있는 논거를 지닌 역사유물론자보다 훨씬 많듯이 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항상 실천에 있어서 세상을 일거에 혁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몽매하게 반복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지독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오늘날 좌파들은 도시 공동체에서, 노동조합에서, 학교와 미디어에서 다양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도모해왔다고 말하는 게 훨씬 정확하다.

반면 홍기빈이 예로 드는 스웨덴이나 영국의 비마르크스주의 제도주의 좌파들이 오늘날의 체제의 기로 앞에 선 세계 좌파들에게 별다른 귀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페이비어니즘이 득세했던 영국에서는 왜 노동당 스스로 변질되어 신자유주의 개혁을 주도했었는지, 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게 복지 국가 시대의 명성을 구가했던 스웨덴은 왜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오늘날 추락하고 있는가?

조만간 방한하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주창하는 세계 체계론의 시각에서 이런 '기적'은 스웨덴의 배후에 경제 식민지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가능케 하는데, 홍기빈은 이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하다. 이 지면에서 구체적으로 비판하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

물론 나는 오늘날 좌파들이 새롭게 도전해야할 과제들이 산더미처럼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자본의 음모로 돌리며 전위 정당 중심의 국가 전복의 필요성을 반복해서 피력하는 것은 전통적 '전략'이 될 순 있을지언정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와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적 공백을 뒤엎을 만큼 구체적 실천의 지표를 던져주진 못한다.

그러나 유럽의 지나간 역사와 비교해 이런 특수한 정세에서 시도되었던 이론을 현실의 간극에 대한 고려 없이 들이대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못하다.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대중 운동과 정치 그 자체가 파괴되고 진보적 이념이 대중화되지 못한 채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홍기빈이 제시하는 살림살이 경제학의 실천의 가능성을 십분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협동조합 같은 제3섹터의 조직 역시도 신자유주의적 '협치(governance)'의 블랙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홍기빈이 말하는 '살림살이 경제학'이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고 독립적이며 변혁적인 전망 속에서 어떤 활력을 제공할 수 있으려면 세계 체계의 변동과 국민 국가 내의 복합적인 이데올로기를 아우르는 사회 운동 정치 전략 역시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때 현재에 걸 맞는 얼굴을 찾은 마르크스주의는 '몫 없는 자들' 노동자 계급에게 여전히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미래에 어떻게 '새로운 길'을 물을 것인가? 심보선은 지난 희망 버스 운동에서 '신신좌파'의 탄생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가 회고하기에 그것은 '지도자 없는 리더십', '조직 없는 조직화'의 과정이었다. 희망 버스의 주체들은 자율성의 장소를 분쟁적인 공공 영역의 형태로 발견하고 또 발명했다.

그러나 희망 버스 운동을 무언가 자생적이면서도 새롭게 등장한 무엇으로 평가했을 때 놓치게 되는 역사적 기인도 있다. 한진중공업 정리 해고 철폐 투쟁의 기원이 지난 시기 민주 노조 운동의 역사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 말이다. 김진숙이라는 투사를 낳은 것도 85호 크레인이라는 상징과 열사들의 목소리를 남긴 것도 모두 민주 노조 운동이라고 명명된 노동자 운동의 바람직한 지향 속에서 가능했던 것임을 쉽게 넘겨선 안 된다.

더불어 희망 버스 운동에 대한 요청이 그간의 사회 운동 활동가들 사이에서 일었던 것 역시 민주노총이라는 기제가 더 이상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 가운데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면서 이루어졌음을 기록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들이 거세된 채 어떤 새로운 현상을 평가할 경우 '기적'에 대해 단순한 자생성과 어떤 아나키하고 포스트모던한 흐름에 기인한 것으로 오판하기가 쉽다. 이데올로기와 정세에 대한 면밀하고 정확한 역사적 평가가 요구되는 이유다.

*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글인 서동진의 '전진하는 미학 : 사회와 정치 그리고 예술의 동요'는 위와 같은 낭만주의적 인식을 겨냥하면서 비판적 미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글은 신자유주의 금융화 시대의 예술이 빠진 곤경과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 미학의 오류를 비판하며 예술에서 우리가 아직 새로운 정치를 발굴할 수 없다면 "잠시 예술을 잊어도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예술은 자신의 정치적 상상력과 해후할 때 다시 재림하고 또 부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배적인 질서에 파묻히고 싶지 않다면, 더디더라도 지난한 관계 속에서 '정치'를 굴착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예술이 그 자체로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없듯, 또한 정치가 어떤 새로운 상상력과 모험 없이는 결코 구제될 수 없듯, 오늘날 예술과 정치의 분리 속에서 어떤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좌절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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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파의 불만>(김민하·김진호·최태섭·박연·박권일·이택광 지음,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이 글이 현실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맞선 비판에 충실하듯이 이택광과 박권일을 비롯해 여섯 명의 필자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우파의 불만>(글항아리 펴냄)은 한국 사회에 새롭게 출현한 우파들과 그 주위의 불안한 징후들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택광은 그간 꾸준하게 지적해왔던 것처럼 영화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을 통해 중산층이 아닌 '중간 계급'이라는 새로운 우파의 등장과 그들의 불만을 차근차근 분석한다. 두 영화에 대한 예상치 못한 환호를 통해 중간 계급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사회를 인식한다. 즉 "아무도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히스테리적 인식을 통해 사회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 것이다.

또한 이택광은 오늘날 진보의 문제가 더 이상 정당 정치 안에서 작동되지 않고 축출당했다고 말하며 이러한 상황에서의 진보의 재구성이란 당연하게도 정당 정치 바깥의 정치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치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 여기의 진보>에 실린 서동진의 견해와도 어느 정도 상통한다.

그밖에 다른 다섯 명의 필자들은 이런 문제의식과 공명하는 가운데 경제 개혁에 있어서의 신자유주의적 흐름, 기독교 우파, 인문 우파, 멘토로 명명되는 우파 이데올로그, 반이주민 정서의 확산 속에서 드러나는 '네오-라이트(neo-right)' 노동 담론을 다루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역사적 배경이나 인문학에 대한 기이한 환호 현상, 멘토로 대변되는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반이주민 정서를 둘러싼 노동 담론에 대해 분석한 박권일의 글이 가장 흥미로웠다.

얼마 전 광화문역 인근을 지나가다가 다문화 정책 반대 시민 단체의 소규모 시위 현장을 보았던 충격적인 경험 때문이었다. 박권일이 말하는 것처럼 반이주민 정서는 애국주의자로서의 자기규정을 기본으로 해 민족주의 담론, 경제 담론과 결합되어 복잡한 사회적 적대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네오-라이트'들의 불만이 끊임없이 사회적 적대로 재생산되고 일자리 부족과 계급 내 경쟁에 대한 피로감으로 노동자 계급 내의 단결을 저해할 경우 우리는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몇 년 전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정주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뺏고 있는데 이에 대한 민주노총 차원의 대처가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 모 상층 활동가가 했다는 악명 높은 망언이 있다.

"그렇습니다. 정말 심각하죠. 이주노동자들의 유입이 굉장히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이런 곤경을 극복하고 인종주의적인 반이주민 정서를 돌파하려면 노동자 운동의 확장과 인종주의에 대한 국제주의적 대응과 더불어 그것이 이주 노동자 운동과 조우해야만 한다. 최근 이주 노동자들의 사업장 이동에 대한 제한이 주어져 이주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구할 때 고용주들에게만 명단이 돌아가고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고용주들의 명단이 주어지지 않는, 말 그대로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사업장 선택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브로커 개입 방지를 위한 사업장 변경 제도 운영 개선 내용'이 발표되었는데 이런 사안에 대한 국제주의적 시야에 입각한 국내 노동자 운동과 사회 운동의 연대가 절실하다.

얼마 전 용역깡패들에 의해 침탈되어 폭력을 당했던 SJM 안산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녀들이 공장 밖으로 쫓겨나오게 되었을 때 SJM 남아프리카공화국 현지 공장의 노동자들이 파견되어 대체 인력으로 투입하게 된 사태를 맞이하였다. 이때 남아공의 금속노조가 보인 연대가 바로 국제주의적 연대의 모범이 아닐까 생각한다. SJM 자본이 한국으로 보낸 남아공 노동자들을 돌려보내지 않을 경우 남아공 금속 노동자 총파업을 벌이고 거래처인 현대자동차를 압박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런 연대의 경험 속에서 노동자 계급이 갖고 있는 인종주의, 반이주민 정서를 극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의 양상, 우파의 불만을 통해 재현되는 불안의 징후들은 사회의 주체적 구성원들인 노동자들이 모종의 대안 이념과 사회를 재구성해나갈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 이택광은 사회 체제의 모순은 존재하는데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새로운 우파의 불만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간극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위기에 처한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제하는 것에 그 가능성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 노동자 계급의 민주주의를 통해 간극 자체를 다시 응시하고 질서 재편을 도모하고자 하는 좌파적 도전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런 도전이 성공하려면 좌파에게나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에게나 각자도생의 길이 열려야 한다. 불만의 주체로 등장한 '새로운 우파'에겐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장이 열려야 하고, 노동자 계급에겐 불안정한 노동과 실업을 해결할 수 있는 계급적 단결과 정치적 대안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이런 노정 속에 대선이 놓여 있다. 이 두 권의 책을 덮은 후 우리는 무엇을 도모할 것인가? 그때 저마다 진보라는 기표가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서 말이다. 차라리 그때 우리는 '진보' 대신 다른 이름을 필요로 할는지도 모른다. 장석준은 그것이 '녹색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용에 있어서 좌파가 '생태주의'와 결합을 이뤄내는 것은 필연적인 과제일 게다. 그러나 당면한 정세에서 이름을 짓는 것에 앞서 중요한 것은 흩어져 있는 제 좌파가 우경화된 노선에 빠져 있던 대중 조직과 함께 힘을 모으고 2013년 이후 계급 투쟁의 비전이 있는 길로 '진보 진영'을 견인하는 것이다.

노동자 민중 대선 후보 전술에 대한 좌파 단위들의 논의가 뜨거워지고 있다고 한다. 아무쪼록 '공동선'을 찾는 것에 주력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노조 조직률 10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의 노동조합도 없는,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민주통합당의 두 자유주의적 경향의 대선 후보 가 "저녁이 있는 삶"(손학규)이나 "사람이 먼저다"(문재인)라는 다소 모순적이며 인간주의적인 제스처를 내밀었던 것의 모순성을 있는 그대로 폭로할 수 있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위기와 생존 불안의 위기에서 좌파적인 대안이란 어떤 것인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드러내는 슬로건을 말이다.

바로 그 '공동선'을 찾아나가는 과정 속에서 '지금 여기'의 진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얼굴은 끔찍한 형상이었다. 2013년 이후 세계의 경제 상황과 급변하는 정세는 '진보'의 새로운 얼굴과 아래로부터의 꾸준한 실천을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 최근에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노동자 운동의 혁신'에 대한 과제와 '민중의집', '태일이네', '노동자회관' 등의 이름을 한 사회 운동들이 그 양 날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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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기술, 그 실체와 대책

도청기술, 그 실체와 대책

 
김수빈 2012. 09. 14
조회수 437추천수 0
 

 

위급 상황에서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는 기술을 호신술이라 한다. 온라인에서의 활동이 ‘또 하나의 현실’이 된 요즈음, 해커나 사이버범죄자들은 물론이고 기업, 국가권력까지도 당신을 노리고 있다. 온라인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기술은 점점 필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호에서는 전화 통화는 물론이고 실내 대화의 도청까지 막는 방법들을 소개한다. 본 기사는 총 5회로 기획되어 <디펜스21플러스>에 연재 중인 '사이버 호신술' 시리즈의 두번째이다.

당신이 갖고 있는 도청에 관한 지식은 얼마나 정확할까? 먼저 아래의 OX 퀴즈를 풀어보자:

□ 드라마에서처럼 싱크대의 물을 튼다고 해서 도청을 방해할 수는 없다

□ 통화 중에 하울링(울림)이나 음질 열화가 발생하면 도청일 수 있다

□ 휴대폰 통화는 누구나 엿들을 수 있을 만큼 도청이 쉽다

□ 교환기를 거치는 전화보다는 직통전화가 더 안전하다

□ 스마트폰으로는 안전한 통화가 불가능하다

 

답은 모두 X이다. 이번 회에서는 실제로 도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이를 (주로 개인 차원에서) 어떻게 방어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룰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청은 실내에서의 대화를 감청하는 행위부터 일반 전화, 휴대폰/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음성통신에 대한 감청 모두를 포괄한다.

 

실내 도청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도청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실내 도청이다. 송신기를 실내에 몰래 설치하여 목표물이 어떠한 대화를 주고 받는지를 감시하는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기술의 발달로 소형화와 무선화가 일반화되면서 실내 도청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실행 가능하다. 사무실에서 자주 사용하는 마우스나 멀티탭, 전자계산기, 심지어 USB케이블 형태의 도청장치도 존재한다. 이러한 실내 도청장치는 크게 무선송신 방식과 자체저장 방식의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자체저장 방식은 설치를 한 다음에 다시 수거를 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어 무선송신 방식이 보다 자주 쓰이는 편이다. 또한 이러한 장치들의 크기는 동전 크기 수준이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숨길 수 있다. 무선송신 방식의 경우 보통 전파송신 범위가 300미터에서 1킬로미터 수준이다. 여기에 더하여 고층에 설치할 경우 전파가 두 배 정도까지 더 멀리 송신이 가능하다. 이 송신 범위 내에 위장 사무실 등을 마련한 후 장비를 설치하여 도청 내용을 수신하여 저장한다. 또한 유리창에 레이저를 쏴서 실내의 울림을 측정하여 도청하는 영화 속의 장비 같은 도청장비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회피하기만 한다면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것은 여전히 가장 안전한 음성통신 수단이다. 실외 또는 (미리 설치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사전에 그 위치를 알리지 않고 직접 만나 대화를 하면, 이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지 않으며 대화 내용은 (어느 한쪽이 몰래 녹음을 하지 않는 이상) 대화 당사자들만의 기억 속에 남는다. 다만 물리적으로 매우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끼리의 경우 직접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일부 휴대폰들은 전원을 끈 상태에서도 마이크가 작동한다는 보고가 있다. 이를 확인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자기장 보호가 안 되어 있는 저가형 스피커 근처에 휴대폰을 놓아 보는 것이다. 휴대폰은 전원이 켜져 있을 경우 주기적으로 전파를 발신하는데 이때 스피커에서 잡음이 나게 된다. 의심스럽다면 배터리까지 뽑아 놓고 대화를 할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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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능 전파탐지기 OSC-5000. 기무사와 국정원에서도 사용하는 장비라 한다. (장비제공: (주)한국스파이존)

 

상식과 엇갈리는 일반전화의 도청

휴대폰보다는 일반전화의 도청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보안 관련 매뉴얼에서도 일반전화끼리의 통화가 보다 안전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기자가 만난 보안전문가는 의외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일반적으로 사무실 등에서 사용하는 아날로그 전화기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도청할 수 있으며 디지털 전화기가 좀 더 안전한 편이기는 하지만 역시 전문가 앞에서는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보안상 가장 취약한 것은 가정에서 흔히 사용하는 무선 전화기이다. 주파수 대역 자체가 공개 대역(900Mhz)이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는 광대역 수신기를 사용하여 스캔하면 누구든지 도청이 가능하다. 일부 기업 임원들은 교환기를 거쳐해 들어오는 전화보다는 직통 전화가 더 안전할 것이라 믿고 직통 전화를 애용하나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일반전화의 도청은 크게 전화기 자체 또는 연결 부위 근처에 설치하는 방식과 통신실(MDF실)에 침입하여 설치하는 방식으로 나뉘는데 직통전화를 사용하는 경우 (직통이기 때문에) 매번 동일한 번호를 사용하기 때문에 MDF실에서 그 위치를 찾기가 매우 쉽다. 최근의 장비들은 물리적으로 브릿지(bridge, '뿌락치'라는 변형된 일본식 발음으로 통용된다)를 할 필요가 없이 회선이 지나가는 곳 근처에 장치를 장착하기만 해도 회선에서 발산되는 신호를 가로챌 수 있다.

 

반면에 키폰을 사용하는 DID/DOD 방식의 경우, 같은 내선 번호의 전화기라도 매번 다른 번호가 부여되기 때문에 통신실에서 회선 하나만을 분리하여 도청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보다 기술적인 내용에 대해 부연을 하자면, 방식은 사무실 내에 전화가 100대가 있다고 해서 회선을 100개를 신청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동시에 100대가 통화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선은 50개 정도로 신청을 하고 전화를 사용할 때마다 이 50개 회선 중에서 남는 것을 연결해 준다. 이는 인터넷 유동식 IP 배분 방식과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동일한 회선을 쓰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유선전화기를 순식간에 도청장치로 만드는 기술도

일반전화를 사용하여 실내 도청을 하는 '인피니티'라는 독특한 장치도 있다. 전화를 건 다음에 도청대상이 전화를 받으면 통상적인 대화(혹은 잘못 걸었다는 사과)를 한 후 전화를 끊게 유도한다. 대상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면 그 다음부터 그 전화기가 일종의 도청기가 되어 실내의 대화내용을 여전히 수화기를 들고 있는 도청자에게 전달한다. 그 원리는 이렇다.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 전화가 끊기는 이유는 전화기에 붙어있는 후크 스위치가 눌리기 때문이다. 이 후크 스위치를 눌러도 전화가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도청대상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통화가 끝났다고 생각할지라도 여전히 통화는 계속되고 있는 상태가 된다. 자연스럽게 나의 전화기가 누구의 손도 닿지 않았는데 도청장치가 되는 셈이다. 인피니티 장비는 특수한 방법으로 후크 스위치가 작동되지 않게 신호를 교란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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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도청탐지장비들 (장비제공: (주)한국스파이존)

 

휴대폰 도청,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왠지 휴대폰 도청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무선으로 전파를 송수신하니 근처에 수신장비를 놓으면 충분히 전파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보안전문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CDMA 방식은 하나의 주파수 대역에서 여러 회선의 통화가 가능한 코드분할 방식을 사용한다. 그리고 각각의 통화는 (0과 1의 숫자가 반복된) 디지털 암호화가 된다. 주파수 대역을 맞춘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암호화된 통화 내용 중 도청목표의 통화만을 골라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를 도청할 수 있는 기계는 4~5억 정도로 일반인들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이 기계는 도청목표의 전화번호를 입력하면 목표에 어디에 있든지 간에 도청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스마트폰의 경우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바로 앱이나 메일 등을 통하여 사용자의 스마트폰에 몰래 침입하는 말웨어(malware)다. 소유자가 가는 곳 어디에나 따라다니는 스마트폰은 최적의 감시장치가 될 수 있다.

 

실내 도청, 어떻게 막나

실내 도청의 경우,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도청방지기나 휴대용 감지기를 시중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사용하는 것도 좋다. 도청방지기는 가청주파수 대역 바깥에 있는 주파수를 발산하여 도청기가 제대로 소리를 포착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욕조의 물을 틀어놓는 행위도 비슷한 효과를 준다. 최근에 방영된 한 드라마에서는 도청기가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주인공이 싱크대의 물을 트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감지기는 도청기가 발산하는 주파수를 포착하여 이를 신호 등으로 알려준다. 그러나 실내에서 전파는 형광등을 비롯한 모든 가전제품에서 발산되며 경험이 많지 않은 일반인으로서는 도청기에서 발산하는 전파를 이러한 잡다한 전파들 속에서 분간해 내기가 쉽지 않다.

 

실내의 도청장치 설치 여부를 탐색해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업체들도 있다. 실내의 모든 주파수 대역을 스캔하여 합법적인 장비의 주파수인지 불법 장비의 주파수인지를 판단하여 준다. 유선 전화기 등의 유선 장비의 경우에는 측정기를 사용하여 단선이나 단락이 있는지를 점검하며, 레이저를 유리창에 쏴서 도청을 하는 경우 특수필름이나 무작위의 진동을 유리에 전달하여 도청을 방해하는 장비를 설치해 주기도 한다. 기자가 만난 보안전문가는 유리창 도청의 경우 창에 블라인드나 커튼을 설치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방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조언했다.

 

자체 전원을 사용하는 도청의 경우, 내부 전원의 한계로 두 달 이상을 넘기기가 어렵다. 그러나 멀티탭이나 USB케이블로 위장한 도청장치나 전원 스위치에 설치한 도청장치의 경우에는 무제한적으로 전원이 공급되기 때문에 특히 전원 근처에 대해서는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유선전화 도청, 이렇게 막는다

군 복무를 해본 독자들에게는 비화기가 매우 익숙할 것이다. 비화기는 유선전화의 신호를 암호화하여 전송하는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도청을 하더라도 디지털 노이즈만 들리게 된다. 다만 비화기는 그 가격이 150~200만원 정도 하며 전화를 받는 상대방도 동일한 비화기를 사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쉬운 선택이 아니다. 그외에도 도청방지기가 있다. 이 장비는 전화기 자체에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는지를 탐지하는데 그 원리는 이렇다. 전화기 내부에 도청장치가 설치되면 전화기 내의 전압이 낮아지거나 편차가 커지는 등 이상 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이 감지되면 알람을 울리는 방식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도청장치의 성능이 매우 좋아져서 감지기로 포착이 어려운 것들도 있어 주의를 요한다. 전문장비들은 전화기 자체 뿐만 아니라 회선 내에 (도청을 위해) 단선 단락이 된 부분이 있는지 여부를 파악할 수 있고, 만일 있다면 그 위치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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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카메라의 신호를 탐지하는 장비. (장비제공: (주)한국스파이존)

 

휴대폰 음성통화 보안을 강화하자

휴대폰에도 비화기가 존재한다. 2G용 비화기는 휴대폰의 후면에 부착하는 형태인데 휴대폰의 두께가 두꺼워져 휴대가 불편하다는 것 때문에 많이 선호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3G용은 앱을 사용한다. 일반 휴대폰 회선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인터넷망을 사용하는 일종의 VoIP 방식이며 디지털로 암호화가 되기 때문에 보다 안전하다는 것이 보안전문가의 설명이다. 전문적인 회사에서 판매하는 앱은 가격이 100~150만원 정도이며 1년마다 보안 업그레이드를 받는다. 다만 3G망이나 와이파이 연결의 상태에 따라 통화에 제약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인터뷰] (주)한국스파이존 이원업 부장

 

기자는 지난 5일 보안전문회사인 (주)한국스파이존(http://www.spy-zone.co.kr)을 찾아 이원업 부장을 만나 국내의 도청 및 도청방지 기술의 현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주)한국스파이존은 국내 언론은 물론 일본 언론에서도 소개된 바 있으며 영화나 드라마 제작에 기술자문 및 장비협찬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SBS의 드라마 <유령>에서 도청 관련 기술자문을 하였다 한다. 다음은 이원업 부장과의 일문일답.


 

▶ 도청장치를 탐지하는 업체가 있다는 게 일반에게는 다소 낯설 것 같다.

기업이 보유한 기술이나 노하우가 중요한 자산으로 평가받는 시대이지 않은가. 또한 이러한 자산을 훔치려는 시도도 늘고 있다. 그래서 산업보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업의 보안수준이 기업의 가치평가에 반영될 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현재 인허가를 받은 업소가 31개까지 늘어난 상태이다.

 

▶ 인허가를 받는 데에 특별한 요건이 있나?

방송통신위원회 산하기관인 중앙전파관리소에 등록허가를 받아야 하고, 불법감청설비탐지업법에 의거한 법인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전기, 전자, 정보통신 등과 관련된 기능사 자격증을 소지한 1인 이상이 회사에 상주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프로그램, 선로 분석기를 2식 이상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 기업체들이 보안에 열을 올리는 것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반 가정이나 개인 차원에서의 수요는 어떤가?

사생활 보호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스토킹 등으로 인한 개인피해를 호소하는 사례들이 늘어나면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몇가지 사례를 들자면, 아파트 단지 등에서 주부들의 통화를 도청하여 얻은 정보로 협박을 가하는 경우로 수사 의뢰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외도의 의심 등으로 갈등하고 있는 부부로부터 각기 따로 의뢰를 받은 적도 있었다. 의뢰를 받아 탐색을 위해 방문했더니 얼마 전에 방문했던 집이었다.

 

▶ 기업체들의 보안 의식은 어떠한가?

보안에 대한 경각심은 높은 편이지만 여전히 직원들 개인의 보안의식은 희박한 편이다. 주요 임원실의 출입장치가 허술하게 관리되거나 임원이나 부장들이 자신의 컴퓨터를 끄지 않고 (패스워드 설정도 없이) 퇴근하는 일도 다반사이고 카드키나 ID카드 등의 관리도 부실하다. 보안점검의 일환으로 이른 새벽에 사무실 내로 잠입을 하기도 하는데 청소를 하고 있는 인원들이 모두 외부 용역 업체 소속이라 우리가 들어와도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한번은 모 기업에 보안점검을 나갔는데, 보안담당자가 값비싼 ID카드 시스템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해당 기업을 드나드는 구두닦이가 그 시스템의 마스터키를 복제하여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니 적잖이 당황하더라.

 

▶ 보안 문제로 고민하는 기업체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보안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보안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인식의 부재가 심각한 수준이다. 한 예로 퇴근길 엘리베이터, 동료와 커피 한 잔하면서, 심지어 회식자리에서도 우리는 회사 업무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들을 스스럼 없이 이야기하곤 한다. 내 옆자리에 경쟁사 직원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또한 연락을 받아 기업을 방문해 보면 이미 보안사고가 발생한 이후일 때가 많아 안타깝다. 보안점검은 사후약방문식이 아닌 사전 점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피해 사례의 60%가 내부자의 결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두었으면 한다. 즉, 보안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나를 위해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이란 것을 인식하고 습관화해야 한다. 기업에서는 물리적인 보안에만 치우치지 말고 인원보안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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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도청기술, 김수빈, 디펜스21+, 디펜스21
 
김수빈
디펜스21+ 기자
우리나라 공군 최초의 패트리어트 작전장교(TCO) 중 하나. 번역서로 <우정의 가치(까만양)>, <실비오 게젤의 경제학의 정신(인카운터)>이 올해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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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피해자 ‘헌쇠’ 박중기 선생

 

인혁당 핵심 피해자도 “강령 모른다”
인혁당 피해자 ‘헌쇠’ 박중기 선생
 
 
2012년 09월 14일 (금) 19:02:36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 인혁당 사건 핵심 피해자인 '헌쇠' 박중기 선생과 12일 여의도 한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극심한 고문으로 양쪽 고막이 다 터져버린 사람도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박중기 선생.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인혁당 관련 발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12일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인혁당 관계자들과 유가족들이 규탄 기자회견을 가졌다. 영정을 든 부인들의 뒷줄에 조용히 서 있던 한 노신사의 표정도 한없이 어두웠다.

‘헌쇠’ 박중기(78) 선생.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7명의 수형자 중 한 명이었고, 2차 인혁당 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 당시 혈육 같았던 동지들을 떠나보내고 천행으로 목숨을 건진 뒤 유족들과 함께 긴 침묵의 세월을 견뎌온 4.9통일평화재단 이사이다. 헌쇠는 고 이돈명 변호사가 고철 사업을 하던 시절 붙여준 선생이 아끼는 호다.

지난해 ‘4.9통일열사 36주기 추모제’ 이후 <통일뉴스>와 첫 인터뷰를 가졌던 선생은 박근혜 후보의 인혁당 관련 발언에 우려를 표하며 이날 새누리당 당사 앞 기자회견에 앞서 여의도에서 두 번째 인터뷰에 응했다. [첫 번째 인터뷰 보기]

무엇보다 박근혜 후보가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다”고 말한 대목에 대해 그는 “그것은 아마 4.19세대 후기에 들어온 박범진일 것”이라며 “강령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며 당시 정황을 설명했다.

그는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이 41명이고 참고인 조사도 여러 명이 받았지만 강령이나 선서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 때는 무자비한 때이니까 별별 짓을 다해서 무슨 건덕지라도 찾으려고 했을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견디다 못해 자결한 사람도 있고 완전히 늑골이 나가고 양쪽 고막이 다 터져버린 사람도 있고, 자결하려고 자해행위한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이 많다.

그럼 거기서 무슨 정강.정책이든 비슷한 말이라도 하나 나왔어야 되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만 유일하게 선서를 했다, 뭐 정강정책이 있었다 하는데 나는 모를 일이다.

그 사람이 무엇인가 착각을 했든지 자기네들 서클 안에 있던 무슨 일들을 다르게 해석한 건지 아니면 들은 이야기를 침소봉대했든지 그런 거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지 않느냐.

또 하나, 검찰 취조를 할 때 20일간을 꼬박 밤샘을 하다시피 했는데도 검사가 하나도 그런 비슷한 근거를 못 찾아내니까 기소를 못 하겠다 했고 사표까지 내던졌다. 2중, 3중 걸렀는데도 그렇게 나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과장됐다는 거다.”


그는 “41명 중 최종적으로 형을 산 것은 도예종 선생을 비롯해 7명이었다”며 “강령을 모른다. 판사도 이 사람이 무게가 있다 싶어 41명 중에서 실형을 줄 만큼 그때 중심핵에 속했던 나도 모르는데 알 사람이 별로 없다”고 확인했다.

1차 인혁당 사건 핵심 관계자의 입을 통해 당시 인혁당에 강령이나 조직가입 선서가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 4.9통일평화재단 등이 12일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개최한 규탄 기자회견 모습. 박중기 선생도 참가했다. 뒷줄 왼쪽 노란 중절모.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그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중정)에 의해 어떻게 엮여졌는지, 특히 2차 인혁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계자들이 왜 사형에까지 처해지게 됐는지를 당시의 시대 상황과 혁신계 진영의 흐름을 통해 상세히 설명했다.

4.19혁명으로 분출한 민주화의 열망을 짓밟고 들어선 5.16쿠데타 세력은 당시 꿈틀거리던 혁신계를 짓밟았고, 중정은 그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이들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엮어 기소했지만 검찰이 사표를 내며 무죄를 주장할 정도로 유죄를 입증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중정의 고문사실이 폭로돼 국회 진상조사단이 감옥으로 그를 찾아오는 등 사회 문제화 됐고, 톡톡히 낭패를 본 중정은 벼르고 있다 2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이들을 사형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2차 때도 조직을 만들거나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구체적으로 조직이 없다. 2차도 1차와 같다”며 “무모하게 누가 그래 조직 만들어 이름 붙이고 강령 만들어 알리겠느냐. 그건 합법적일 때 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보복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혁당이라는 조직이나 강령은 없었지만 4.19 공간에서 확인됐던 핵심 활동가들이 5.16 군사쿠데타로 구속되고 피신했지만 6.3사태 등을 계기로 연계망이 형성돼 활동했다는 증언도 덧붙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까 선거 때 좀 자유스럽게 왕래하면서 A는 B를 알게 되고 B는 C있는 곳을 알게 되고 C는 A하고 다시 연결되고, 그렇게 하다 보니 4.19 공간에 알았던 사람들이 다 거점을 알아서 서로 소통이 됐다. 모이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뭣이고 이렇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면, ‘지금 정당규제가 풀리고 나면 우리는 정당을 했을 때 어떤 노선을 해야 하냐’ 이런 이야기를 한 거다. 앞으로 나아갈 길, 민족이 살아가야 될 노선 이야기를 한 것이다.”


언론과의 인터뷰도 피한 채 동지들의 남겨진 가족들을 챙기며 침묵의 바다를 건너온 그는 2002년에야 비로소 열사들의 ‘제사장’이 되어 ‘민족민주열시.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의장으로 첫 공식활동을 시작했고, 2008년 무죄 판결과 국가 배상을 받은 유가족들의 출연금으로 설립된 4.9통일평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그는 “죽 한 그릇 있으면 그것도 같이 나눠먹는 것이 도움이지, 내가 돈 벌어서 같이 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며 “그걸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서... 애들이 헐벗고 그러는데 옳게 도와주지도 못했다”고 눈시울을 붉히고 “옳게 도와주기나 했으면 모르지만 그 양반들이 작은 걸 가지고 자꾸 고마워라 하면서 그걸 이야기하고 다닌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못했다”고 오히려 미안해했다.

3차례 체포돼 고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실신했다는 그는 당시 중앙정보부가 보복성 매타작으로 “사람을 못 쓰게 만들었다”면서도 “나도 거기에 끼어들어 갈런지 모르겠다. 나는 내 이야기 못하겠고”라고 시종 자신을 낮췄다.

그러면서도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사건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류의 발언을 한데 대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공주같이 자라 가지고 세상일은 모르고 아버지 하는 것은 모조리 옳은 것으로 알고만 살았는데 그래도 따르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이라고 격분했다.

그는 “이번에 답한 것은 박근혜라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 것이다. 얼마나 무식한지를. 이런 사람을 대통령 된다고 해서 뒤에서 미는 사람들 모두 같은 사람 아니겠나, 나는 그렇게 본다. 참 불쌍한 사람들이고, 우리 백성들 잘못하며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우려를 표했다.

지난해에 이어 헌쇠 박중기 선생과의 두 번째 인터뷰는 12일 낮 여의도 한 사무실에서 진행됐으며, 인터뷰 내용 중 당시 시대상황 설명 일부를 제외하고 가급적 모든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중심핵에 속했던 나도 모르는데 알 사람이 별로 없다”

   
▲ 지난해 4월 첫 인터뷰에 이어 두 번째로 <통일뉴스>와 인터뷰에 응한 박중기 선생.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 인혁당 사건이 정치권에서 쟁점으로 떠올랐다. 어제 박근혜 후보가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언론에서는 대체로 박범진 전 의원의 증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그것은 아마 4.19세대 후기에 들어온 박범진일 것이다. 서울대 문리대 안에 4.19전부터 학생들끼리 청조회라든지 여러 서클 비슷한 게 존재했는데, 그 인맥을 타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오병철, 서정복, 황건 이런 선배들과 접한 게 있었던 걸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나도 안다. 깊은 속내는 모르고 그저 성실한 사람이고 또 나중에 조선일보에 있고 민정당으로 가서 국회의원을 한 것으로 안다. 서울신문에 가서 논설위원을 맡았다가 민자당에 가서 지역구 출마해서 당선되고 그러면서 차츰 사람이 변한 것 같다.

□ 박범진 전 의원이 1차 인혁당에 강령과 규약이 있고 자신은 입당선서도 했다고 주장했다.

■ 자기네들끼리 작위적으로 한 지는 모르겠는데 강령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게 처음에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이 41명이다. 그런데 41명 뿐 아니고 거기에 관계되는 여러 사람들을 참고인으로 불렀다.

그 때는 무자비한 때이니까 별별 짓을 다해서 무슨 건덕지라도 찾으려고 했을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견디다 못해 자결한 사람도 있고 완전히 늑골이 나가고 양쪽 고막이 다 터져버린 사람도 있고, 자결하려고 자해행위한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이 많다.

그럼 거기서 무슨 정강.정책이든 비슷한 말이라도 하나 나왔어야 되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만 유일하게 선서를 했다, 뭐 정강정책이 있었다 하는데 나는 모를 일이다.

그 사람이 무엇인가 착각을 했든지 자기네들 서클 안에 있던 무슨 일들을 다르게 해석한 건지 아니면 들은 이야기를 침소봉대했든지 그런 거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지 않느냐.

또 하나, 검찰 취조를 할 때 20일간을 꼬박 밤샘을 하다시피 했는데도 검사가 하나도 그런 비슷한 근거를 못 찾아내니까 기소를 못 하겠다 했고 사표까지 내던졌다. 2중, 3중 걸렀는데도 그렇게 나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과장됐다는 거다.

□ 64년 1차 인혁당 사건 때 연루 됐나? 41명 중 한 명이었나?

■ 그렇다. 나는 들어가서 형을 1년 살았다. 다 나가고 최종 기소된 사람이 13명인데 11명이 무죄를 선고받고 나왔고 그때 나도 나왔다. 그리고 고법에 항소한 게 뒤집어져서 유죄가 돼 법정구속이 돼서 7명이 형을 살고 나머지 6명은 집행유예로 나왔다. 41명 중 최종적으로 형을 산 것은 도예종 선생을 비롯해 7명이었다.

□ 그러면 7명 중의 한 명이었던 선생은 강령을 보거나 입당선서를 한 적이 없었나?

■ 강령을 모른다. 판사도 이 사람이 무게가 있다 싶어 41명 중에서 실형을 줄 만큼 그때 중심핵에 속했던 나도 모르는데 알 사람이 별로 없다.

□ 선생님도 고문을 많이 당했나?

■ 그때는 6.3 때니까 계엄령 상황이어서 살벌할 때다. 그리고 군사정권이 옷만 바꿔입고 들어섰으니 수사기관의 무자비함은 말할 수가 없다. 중앙정보부에 갔다면 죽은지 산지 잘 모를 때고 무법천지일 때다. 그 시절에 우리가 잡혀들어 갔으니. 대형사건이다. 도예종 선생이 내가 자취하던 방에 와서 한 일주일 묵기도 했다.

그때는 (생명이) 갔다왔다 했다. 졸도도 하고, 뭐. 나는 세 차례 갔는데 두 번은 졸도를 몇 차례씩 했다. 그걸 당한 사람들은 대개 옳지(온전치) 않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 2차 인혁당 사건은 8명이 사형까지 당했는데 과연 2차 인혁당 사건의 실체가 있느냐? 사실 이번 두 번째 인터뷰도 이 문제에 대해 듣고 싶어서이다.

■ 그전에 1차 대담할 때도 약간 비쳤는데, 우리가 기준을 두는 것은, 가치를 두는 것은 4.19였다. 이미 분단사회가 돼서 60년대니까 15년 후 아닌가. 군정 3년을 제하고 난 뒤에 대한민국 분단정권을 세운 게 이승만이다.

그간에 6.25 치르고 하면서 10여년 집권했는데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게 지상에서 가장 질 나쁜 나라, 하등한 나라로 사람이 사는지 야만이 사는지 모를 정도였다.

4.19가 나서 민족 자존심을 찾은 거다. 그런데 그 중심이 학생이지 그걸 이끌 정당은 9개월 전에 조봉암이 죽고 진보당은 깨져버렸으니 혁신계의 구심점이 없었다. 그래서 중심이 되는 게 혈기왕성한 청년단체다.

어른들을 모시고 밤낮없이 뛰었다. 4.19가 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남쪽을 재건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고 정신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혼신을 다했다.

그런데 5.16 쿠데타가 나자 모두 에누리 없이 단속을 해버렸다. 우리만 외톨이 되고 고립됐다. 하나 없이 다 잡혀 들어갔다. 나 같은 사람은 도망갔다. 당시 우리가 합법적으로 했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 그래도 그걸 모두 10년, 15년, 20년, 사형 뭐 이래서 다 가뒀다.

“형, 오늘 우리 사형 받았어”

   
▲ 그는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었지만 동지들의 죽음 뒤 침묵을 지켜왔다.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 2차 인혁당 사건 때도 핵심으로 찍혔나?

■ 내가 그때 주변에 장훈고등학교에선가 선생하고 있던 이재오니 이런 젊은이들이 좋다고 찾아오고 나도 간혹 그들 집에 갈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감시를 받고 있는 차인데 너무 분다하게 나한테 오는 게 좋지 않아서 수원에 있는 김정태라고 서울대 농대를 다니다가 4.19때 들어가서 감옥 살고 나온 사람인데, 이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른 짓을 하다가 들통이 난거다. 경찰을 치고 도망가다가 김정태가 권총에 발목을 맞았다. 발포를 할 정도니까 사건이 커진 거다. 잡혔는데 캐물으니까 나도 관계가 있고, 나는 이미 전과가 있는 사람이 돼 놓으니 내가 무슨 지휘자로 되어 있었다. 저쪽에서 그렇게 오해한 거다.

여러 날 감시하다가 날 끌어간 것 같다. 남산 치안본부 대공분실, 지금은 치안본부지만 그때는 치안국이다. 대공분실에 끌고 갔는데 느닷없이 사람을 하체를 못 쓰게 만들어 버리는 거다.

내가 못 서니까 자기네들이 업고 다니면서 화장실도 다니고 나중에는 옷을 가지고 와 바지가 벗어지지 않으니 가위로 잘라내서 벗기고 집에서 가져온 풍덩한 바지를 입고. 내가 뭐 일하러 다니던 것도 중도파직 돼 버렸고.

9월 하순인지 10월 초순인지 끌려갔는데 경찰에서 20일 가까이 있다가 검찰로 넘어갔는데 그 때 이한동이가 공안부장을 했다. 나중에 민정당 원내총무도 했던. 그래 가지고 6개월 꼭 채우고 집행유예로 나온 거다. 그때는 걸려 들어가면 조사 끝났다고 내주지 않고 어쨌든 1심 6개월을 채우고 나서 내주니까.

6개월 만에 나온 게 4월 19일 저녁이었다. 아침에 김용원 선생, 이수병 선생 들어가고 나는 저녁에 나오고 그랬던 거다. 그 사람들을 2차 인혁당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발표를 그렇게 안했고 민청학련이라고 했다.

당시는 수감자가 원체 많으니까 내방에도 독방인데 임시로 도둑놈, 잡범을 집어넣었다. 학생들은 따로 넣고. 그래서 바깥 소식이 자꾸 들어오는 거다. 학생들이 오늘은 몇 명이 나가고 뭐 어쩌고, 백기완 들어오고 장준하도 들어왔다고. 나중에 들으니까 지학순 주교도 들어온다 하고.

내가 나와 가지고 아흐레인가 열흘이 채 못 되는 시간에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다시 잡혀들어 갔다.

잡혀 들어가서 1차 조사를 받는데 너무 심하게 해가지고 내가 거기서 졸도를 해서 앰블란스가 오고 난리를 쳤다. 그런 사고까지 안에서 있었는데, 나중에 감이 오는 게 처음에 조서를 받은 것은 완전히 무시되고 새로 하는 거다.

불려 다니다 보니 이상하더라. 전혀 조서 꾸미는 것도 조서도 아니고, 수사관들끼리 하는 얘기가 “이놈들 내줘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완전히 그걸 해야 한다”, “이번에는 느그 나갈 생각 하지 말라” 이런 식이다.

뭐, 죄가 없는데 저희가 해봐야 뭘 하겠나 싶어서 그랬는데. 나중에는 부르지도 않고 놔두다가 두 달 조금 넘어서인가 어느 날 저녁에 저녁 먹고 짐 챙겨 나오라고. 나오니까 남산으로 데려갔다.

다른 사람 조서 꾸민 걸 보여주면서 “왜 너는 안했다고 하느냐?”, 난 “말이 안 되지 않나. 나는 여기 들어앉아 있었는데 어떻게 12월에 지도부 회의를 하느냐”하고. 6개월 감옥에 있어서 공백이 있으니 이제 안 맞는 거다. 그래서 나중에 어긋나겠다 싶으니까 빠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어떻든, 하루는 기다리고 있는데 구형받고 들어오더라고. 김종대 선생이 “형, 오늘 우리 사형 받았어”, 장난삼아 하는 거다. 복도를 지나가면서. 아무리 계엄령이고 협박이지만 사형이라는 게 말이 끔찍하잖나.

복도에서 서로 아는 체 하고 통방을 못하게 돼 있으니까. 건성으로 “야, 걱정하지 마라”, 그랬거든. “그래 못한다. 어떻게 사람들을 마음대로 그래 하냐”. 그리고 모두 방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리고 구형을 받고 며칠 후에 우리는 나왔다.

“학교 다닐 때 담임까지 수사를 다 했으니까”

   
▲ 숱한 고문과 동지들의 죽음을 겪어온 박중기 선생.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 2차 인혁 관계자들을 잘 아실텐데, 그 분들이 조직사건으로 엮일만한 게 있었나?

■ 63년에 박정희가 정권을 쥐고 들어와서 군인들이 옷 벗고 들어오니 나라살림에는 등한할 거 아니겠나, 잘 모르니까. 힘을 가지고 관료들만 두드려 조지는 거다. 중앙정보부라는 절대권력이 나는 새도 부를 정도로 힘이 쎘으니까.

한일회담 문제가 나오자 그해 가을 방학 전에 기동을 하다가 3월달 개학되자 문제의 시작이 김종필이가 오히라 메모를 써가지고 구체화됐다. 64년에 학교는 개학하면서 계속 농성만 하니까 문이 닫혔다.

그때 김중태, 김도현, 현승일이라는 학생 3인방이 있었다. 3개 신문 톱에 맨날 이 세 사람이 오늘 서울광장에서 무슨 연설했다 그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까 선거 때 좀 자유스럽게 왕래하면서 A는 B를 알게 되고 B는 C있는 곳을 알게 되고 C는 A하고 다시 연결되고, 그렇게 하다 보니 4.19 공간에 알았던 사람들이 다 거점을 알아서 서로 소통이 됐다. 모이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뭣이고 이렇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면, ‘지금 정당규제가 풀리고 나면 우리는 정당을 했을 때 어떤 노선을 해야 하냐’ 이런 이야기를 한 거다. 앞으로 나아갈 길, 민족이 살아가야 될 노선 이야기를 한 것이다.

거기에 가령 내가 남정현이란 사람을 안다면 남정현은 고향 후배가 있을 것이고 서울대학교 친구도 있을 거고, 또 문인이니까 문인세계에 가서 자기 평소에 친한 사람한테는 이야기를 하니까 자꾸 퍼져가지고 동의를 받는 거다.

그러던 중 도예종 선생이 5.16때 지명수배가 내리는데 집에서 잡히지 않고 서울에 와서 기피를 하고 있었는데, 학생 민통련 속에 조금은 티나게 한다고 하는 김정강의 불꽃회에 김정남이 있다.

김정남이 몇몇과 핵심이 되서 학습도 하고 이랬던가 본데, 처음에 잡으러 갔을 때 도망을 갔는데 하숙집에 가 뒤져보니까 일기책이 압수된 걸 읽어보니까 도예종 이름이 나온 거다.

‘존경하는 선생님은 이럴 때 어떻게 판단하실까?’, 이런 게 나왔다. 그래서 도예종이 지시했다고 5백만원인가를 걸고 지명수배했다. 김정강이 하고 둘을.

그런데 근처에 있을 것 같은데 수사관들이 감이 있지 않나. ‘아, 이게 옛날 서류 압수한 민민청(민족민주청년동맹), 통민청(통일민주청년동맹) 이놈들이 박혀있는 것 보니 이 계통 수사해야 한다’. 그래서 뒤진 거다. 뒤지다가 인맥을 찾아서 모조리 찾아 걸린 게 중심인물 41명이다.

나머지는 얼만지 모른다. 친척 뭐 해가지고 다 뒤져내는 거다. 학교 다닐 때 담임까지 수사를 다 했으니까. 부지기수다. 그렇게 잡히고 한 게 1차 인혁당이다.

구성을 해보니 긴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가면 개성이 다르니까 약한 사람은 뺨도 한 대 안 때려도 미리 겁을 내 다 불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친구 잘못 불다가는 망신시키니까 그런 피해 안 입히려고 고문을 더 받아야 되고. 안다고 해서 공무원 하는 친구들은 옷 벗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또 똑같이 고문을 받는데도 인간적으로 미운 사람이 있지 않겠나? 그 사람은 반쯤 죽이는 수도 있고. 병신 되기도 하고. 그랬던 게 1차 인혁당 모습이다.

자기네들 하자는 대로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아니다” 그러면 두드려 맞으니까, “그렇다 하소”. 어떤 사람은 아무리 두드려 패도 고집을 피우고 안하니까 저희들 맘대로 하고 도장 찍으라고 하니, “내가 왜 거기 도장 찍어” 하면서 조서 몇 시간 꾸민 걸 확 쥐어 뜯어내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런 별별 사람이 있었는데, 그래서 1차 인혁당도 사형은 안 시켰지만 희생도 많았고 평생을 지병을 가지고 병신된 사람도 있다.

□ 대표적으로 사망하거나 큰 지병을 얻은 사람은 누가 있나?

■ 송상진 선생도 옳지 않았고, 서도원 선생은 그 후에도 세 차롄가 들락날락했으니 저 사람은 분명 자기네들한테 거슬리는 사람인데 구체적으로 증거가 없으니까 “온 김에 혼이나 나라” 일종의 보복 매타작을 해서 보내는 거다.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는 거다. 나도 거기에 끼어들어 갈런지 모르겠다. 나는 내 이야기 못하겠고.

돌아가신 강무갑 선생은 양쪽 고막이 다 터져버리고 늑골이 나가 가지고 병원에 입원도 안 시켜주고 그 안에서 자연치유 돼 가지고 나와서 그 뒤로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인혁당은 ‘저거 죽여야 된다’ 생각했겠지”

   
▲ 새누리당 규탄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수병 선생의 부인 이정숙 여사를 위로하고 있는 박중기 선생.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1차 인혁이 그렇다면, 2차 인혁은 조직적 실체가 있었나?

■ 그건 자기네들 보니까 통민청 민민청이 혁신계 주류라고 알았는데 사회에 알려져 있는 명사들이 진짜가 아니고 그 사람들은 이름만 있고 실제 움직인 사람은 이렇다는 걸 5.16 나고 나서 알았다. 수사 속에서 알았는데 잡힌 사람이 몇 사람 안 된다 말이다.

그런데 (1차 인혁당 관계자) 잡아보니 그 사람들인 거다. 자기네들은 노다지 캤다고 생각한 거다. 신원확보만 한 것도 큰 성과다.

그 과정을 설명하면 조금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중앙정보부에서 조서를 꾸며서 의견서를 만들어서 자기들의 조사부(서)를 검찰에 넘기는데, 검찰에서 20일간을 아침 9시에 문을 열면 밤 1시, 2시 어떨 때는 4시에 들어가고 그랬다. 대기실에서 졸고 밤 야식을 빵을 사다 넣어주고 이랬는데, 그리 조사를 해도 안 됐잖느냐.

그때는 검찰이고 뭣이고 모든 게 중앙정보부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검찰로서는 이 똥대가리 같은 놈들이, 아무 법도 모르는 놈들이 완전히 깡패짓을 하고 있거든. 검찰 공안부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그냥 그 권위도 인정 안하고 달려드니까, 아마 자기네들도 알력도 있었을 것이다.

모조리 서울대 교수니 각 대학교 경제학 교수니, 합동통신사 외신부장이니 다 있으니까 중앙정보부에서 조서를 꾸며보니 도대체 수준이 무엇을 물어도 대답을 하는 걸 알아들을 수 없는 거다. 도둑놈 잡아다 두드려 패고 옛날 빨갱이라고 수틀리면 죽여버리고 하던 그런 놈들이 수사를 하고 앉아 있으니.

검찰이 와서 하나하나 해보니 “이 사람들은 대단히 수준 높은 사람들이다. 정치를 해도 날라리 정치가 아닌 옳은 정치를 할 사람들이다”라고 존중도 받았다.

그때 신직수가 검찰총장인데 부장이 가서 “기소를 할 수 없습니다”, “도장이나 찍어. 책임은 내가 질테니”, 검찰총장도 (중정에) 꼼짝을 못하니까. 그렇게 다투다가 3명이 사표냈다는 것 아니냐. 12시가 넘으면 영장 시효가 넘어 모두 내줘야 하니까 숙직검사가 공소자가 되서 기소를 한 거다. 쇼도 보통쇼가 아니다. 나라 운영에 그런 게 어디 있느냐? 똥칠할 수 있는 건 다한 거다.

그게 신문에 막 터졌다. 그때는 조.중.동이 지금처럼 안 그랬다. 그래서 국회에서도 발칵 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숨죽이고 있는데 야당에서 살판이 났다. 명분이 생겼으니까.

국회조사단을 꾸며가지고 조사단이 와서 “우리 고문 조사하러 왔는데, 어떻게 고문했느냐?”, 맞은데 보자고 바지를 한번 벗어보겠냐고. 벗어보니 시커멓게 이게 보였다. 그래서 “고문 흔적이 맞다”. 요즘처럼 칼라사진이 있으면 딱 좋았을 텐데, 그렇게는 못하고 눈으로 여러 사람이 본 걸 확인해서 국회에 보고서를 낸 거다.

그래서 정식으로 중앙정보부 해체해야 한다고 했다. 소위 혁명정부 구조가 무너지는 꼴이 되니까 이 사람들한테는 인혁당은 “저거 죽여야 된다” 생각했겠지. 그런 사람들이 2차에도 남에게 존경받는 사람들로 구성이 돼 있으니까 죽인 거다. 보복이라고 본다.

□ 2차 때도 조직을 만들거나 하지 않았나?

■ 구체적으로 조직이 없다. 2차도 1차와 같다. 그 무모하게 누가 그래 조직 만들어 이름 붙이고 강령 만들어 알리겠느냐. 그건 합법적일 때 하는 이야기다.

□ 도예종 선생과 이수병 선생이 특별했던 관계인 것으로 아는데, 소개해달라.

■ 특별한 관계는 이런 것이다. 이수병은 5.16 나고 학생 민통련으로 조선일보에 있던 류근일하고 똑같이 취급받아 (감옥)살았다. 그 사람들은 그래 가지고 68년에 나오는데 도예종 선생은 재판에서 3년형을 받아서 안양교도소로 내려가 나머지 잔여 2년 형을 살았다.

도예종 선생이 가보니까 이수병이라는 사람이 거기 있었다. 나이가 차이가 많으니까 서로 이야기를 한번 해보니 참 대단한 사람을 만난 거다. 그래서 거기에 혁신계 사람들이 같이 살면서 도예종 선생이 가 가지고 여때까지 했던 분위기와 전혀 다르게 분위기가 혁신이 돼 버렸다.

거기는 아마 형을 살면서도 방에 꼭꼭 가둬놓는 것이 아니고 적당한 운동시간에 잔여시간 한두 시간 화단에 가서 화초도 기르고 야채도 기르고 한다. 거기서 두 사람이 내내 붙어 있더라는 거다.

두 양반이 거기서 만나서 특별한 우정을 쌓고 자기 속에 있던 회포, 나라의 앞일,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 이런 걸 한 2년동안 논의하고 친해졌다고 하니까.

도 선생이 나머지 2년만 살고 이수병 보다 먼저 나왔다. 그래서 도 선생이 나를 한번 찾아왔다. 오셔서 점심을 자기가 사면서, “왜 자네는 그리 가까운 사람을 학대해?”, “왜요?”, “다른 사람이 책을 넣어주고 그러는데 책이라도 부지런히 넣어줘야지. 읽을거리가 없어서 책을 굶주리는데 그러느냐”, “녜, 알겠습니다”.

그전에 한 달에 한 번씩 꼭 가서 영치금 넣고 면회를 했는데, 그때는 김금수 선생 나, 김달수 선생 셋이서 형 살고 나와서 제재소를 했다. 그때는 형무소 아침에 가면 하루 걸린다. 안양 내려가는 교통도 안 좋고, 형무소 가면 대기해야 했다. 면회를 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고 그랬는데,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다.

□ 선생과 이수병 선생도 함께 산 걸로 아는데.

■ 고등학교 때부터 암장이라는 서클을 같이 했으니까.

□ 감옥에서 도예종 선생이 선생 이야기를 많이 들었겠다.

■ 그래도 내가 미더우신지 대구에서 찾아오셔서 나를 좀 보자 해서 이야기 하고.

□ 그 이후에도 도예종 선생과 자주 만났나?

■ 대구에 내려가신 후에는 자주 만나지 못하고 그 전에는 서울에서는 만나고 최종적으로는 나한테 한 열흘 숨어 있다가 나갔다. 내가 나가서 약속시간에 집에 안 들어오니까 문을 안에서 따고 나갔다. 나중에 잡혀 들어가서 (도 선생 구속 사실을) 알았지.

□ 사형 당한 여덟 분과 다 친했나?

■ 다 친하지. 여정남이만 모른다. 여정남이는 나하고 차이가 많아서.

“박근혜라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 것”

   
▲ 그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에 대해 "어린애"라고 단언했다.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고 역사의 판결에 맡겨야 한다고 하는데.

■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어린애라고 생각한다.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공주같이 자라 가지고 세상일은 모르고 아버지 하는 것은 모조리 옳은 것으로 알고만 살았는데 그래도 따르는 무리들이 있다는 거다.

새누리당에 지금 붙어서 좋다고 하는 사람은 출세하기 위해서 줄 선 사람이지 나라 일을 위해서 아니면 박근혜가 경륜이 있어서 “이 사람은 분명히 나라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고 믿고 그 사람을 따른 사람이 아니라고 본다.

그 사람한테 붙으면 국회의원도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고 출세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거기에 따르는 거지, 그 사람 스스로를 헤아리면 인격이나 뭣을 알고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이번에 답한 것은 박근혜라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 것이다. 얼마나 무식한지를.

이런 사람을 대통령 된다고 해서 뒤에서 미는 사람들 모두 같은 사람 아니겠나, 나는 그렇게 본다. 참 불쌍한 사람들이고, 우리 백성들 잘못하며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든다.

□ 2차 인혁당 사건 이후 선생의 삶은 유족들 뒷바라지 하고 살았나?

■ 뒷바라지라고 할 게 있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죽 한 그릇 있으면 그것도 같이 나눠먹는 것이 도움이지 내가 돈 벌어서 같이 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려울 때 같이 나눠먹는 걸로 생각하고 그저 벌면 같이 먹는 걸로 생각했다.

그걸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서... 애들이 헐벗고 그러는데 옳게 도와주지도 못했다. 내가 돈을 번 게 몇 푼 되나? 거기다가 돈을 벌면 쓸 때는 그처럼 많더라고. 옳게 도와주기나 했으면 모르지만 그 양반들이 작은 걸 가지고 자꾸 고마워라 하면서 그걸 이야기하고 다닌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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