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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축적된 방위비분담금으로 3천억 넘게 이자소득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11/20 14:51
  • 수정일
    2013/11/20 14:5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미국, 축적된 방위비분담금으로 3천억 넘게 이자소득

<칼럼> 유영재 평통사 미군문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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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1.20 12: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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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재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미군문제팀장)


미국이 우리 국민 혈세인 방위비분담금(미군주둔비부담금)을 축적하고 이 자금으로 돈놀이를 하여 2006~2007년 2년간 566억원의 이자소득을 얻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이 국가를 상대로 한 8차 미군주둔비부담협정에 대한 손해배상청구 소송과정에서 법원을 통해 확보한 주한미군 영내 은행인 ‘커뮤니티 뱅크’와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 서울지점 간의 양도성 예금증서(NCD) 거래 내역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2006년에 204억원, 2007년에 362억원의 이자소득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2006년 24억원, 2007년 43억원의 이자소득세(12%)도 납부하지 않았다.

이를 미국이 미군주둔비부담금을 축적해온 전 기간(2002년~2013년)으로 확대해 보면, 미국이 얻은 이자소득은 3천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확인된 2년치의 이자소득을 평균값으로 하여 전 기간을 곱하면 3,396억원이 나오는 것이다.

2006~2007년의 확인된 이자소득 566억원과 정부가 공식 확인한 3개년의 축적금을 해당연도 평균 양도성 예금증서에 투자했을 경우의 이자소득 5년간 합산을 전 축적기간(12년)에 적용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즉, 미군주둔비부담금 축적금으로 정부가 공식 확인한 2008년 10월의 1조 1193억원, 2012년 9월의 7611억원, 2013년 3월의 7380억원을 해당 연도의 평균 양도성 예금증서 이율로 곱해서 나온 이자소득 추정액은 각각 614억원, 251억원, 196억원이다. 여기에 2006~2007년간의 이자소득 566억원을 합산하면 5년 치의 이자소득은 1,627억원이다.

나머지 7년(2002~2005년, 2009~2011년)의 이자소득도 최소한 위의 수치와 비슷할 것이다.(2002~2005년은 축적금 규모가 가장 적은 시기이지만, 2011년부터 축적금을 미군기지건설공사에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2009~2011년은 축적금 규모가 가장 큰 시기이므로) 따라서 이 계산법에 의거하더라도 2002~2013년간의 이자소득은 최소한 3천억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국이 전체 축적 기간(12년) 동안 떼먹은 이자소득세(12%)도 최소 360억원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도 정부는 지금까지 미측으로부터 이자수익이 없음을 공식적으로 4번 확인했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그러나 뱅크 오브 아메리카 자료는 “당 지점은 커뮤니티 뱅크를 통하여 미국정부가 가득한 이자소득에 대하여 이자소득세를 원천징수하지 아니하였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뱅크 오브 아메리카 서울지점과 커뮤니티 뱅크 사이에 금융 거래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이자소득이 발생했으며, 그 이자소득을 미국정부가 얻었고, 이자소득세를 납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에 앞서 서울지방 국세청도 평통사의 주한미군 탈세 신고에 대한 결과 통보에서 커뮤니티 뱅크에 대해 ‘비과세’ 처리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이자소득이 발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미국 정부가 가득한 이자소득’이 미군주둔비부담금에서 나온 것이라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 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커뮤니티 뱅크는 ‘BoA 군사금융부문’이 미 국방부와의 계약에 따라 주한미군 금융업무를 대행하는 주한미군 영내은행이다. 미국 정부나 한국 정부가 아닌 민간인이 거액의 자금을 예금할 수 있는 일반 상업은행이 아닌 것이다.

둘째, 한미양국 정부가 미군기지이전비용 전용을 목적으로 주한미군사령부가 미군주둔비부담금을 2002년부터 축적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 자금은 당연히 주한미군 영내은행인 커뮤니티 뱅크가 관리한다. 이와 관련하여 국방부는 2008년 10월 현재 1조 1193억원, 2012년 9월말 현재 7611억원, 2013년 3월말 현재 7380억원이 축적되어 있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셋째, 커뮤니티뱅크와 BoA 서울지점 사이에 수천억원의 금액이 3~4개월 단위로 연쇄적으로 거래되고(이전 거래 만기일과 다음 거래 개시일이 같은 날이고, 금액도 동일한 경우가 다수 발견됨) 이 과정에서 이자소득이 발생했고 이를 미 국방부에 송금한 사실이 BoA 서울지점 자료로 확인되었다.

넷째, 커뮤니티 뱅크가 취급할 수 있는 미 국방부 자금은 주한미군 인건비나 운영비가 될 텐데, 인건비는 장병들에게 지급되고 운영비는 부대 운영을 위해 소모되는 경비이므로 이 자금을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로 반복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 한국 정부가 제공하는 미군주둔비부담금 중 현금으로 지급되는 인건비도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지급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축적될 수 없다. 따라서 커뮤니티 뱅크가 거액을 반복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은 미군주둔비부담금 중 현금 지급되는 군사건설비 밖에 없다.

다섯째, BoA 서울지점 자료의 내용이 커뮤니티뱅크가 방위비분담금을 BoA 서울지점에 맡겨 이자소득을 얻어 미 국방부에 송금했다는 <신동아> 황일도 기자의 계속된 보도 내용과 대부분 일치한다. <신동아> 기사는 미군주둔비분담금 이자소득과 탈세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하여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이처럼 이자소득은 미군주둔비부담금에서 나온 것이 확실하고, 우리 정부가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2007년부터 관련기사가 나오기 시작했고, 평통사의 탈세 신고로 서울지방 국세청이 조사를 했고, 법정 소송을 통해서 관련 사실이 밝혀졌다. 비정부 시민단체인 평통사도 이자소득을 확인할 수 있는데 정부가 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는 정부 관계자들의 명백한 직무유기이자 미측을 방패삼아 우리 국민과 국회를 고의적으로 속인 것이다.

우리 국민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사태는 정말 기가 막힌 일이다. 매년 편성된 예산은 그 해에 쓰도록 되어 있고(국가재정법 상 회계연도 독립의 원칙), 부득이하게 다음 해에 넘겨서 써야 할 때는 국회(명시이월)나 관련 정부기관(사고이월)의 승인을 받는 것이 기본적인 법 상식이다. 미군주둔비부담협정도 매년 정해진 예산이 있고, 해당연도에 그 예산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미국은 우리 국민 혈세를 받아서 미2사단이전비용에 쓸 목적으로 10년 넘게 축적해왔다. 국가의 면모를 갖춘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 같은 예산 집행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런 사실을 감춰오다가 더 이상 이를 숨길 수 없게 되자 오래 전부터 양해해왔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그 양해라는 것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미군주둔비부담금 축적 자체가 미2사단이전비용은 미국이 부담하기로 한 2004년의 한미 간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LPP)개정협정을 위반한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미군기지이전비용의 90% 이상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국과 미국이 비용을 절반씩 부담한다는 정부의 설명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이를 믿고 협정을 비준동의해 준 국회의원들은 바보가 되었고 국민은 16조원이나 되는 비용을 덤터기 쓴 것이다.

이것도 모자라 미국은 우리 국민 혈세로 부동산 펀드 등에 투자하여 3천억원이 넘는 이자수익을 올리고, 그 과정에서 이자소득세까지 떼먹었다. 이자소득은 주한미군이 관리하여 한국에서 쓰는 것도 아니고 미국 정부가 받아 한국과 아무런 관련 없는 사업에 써도 우리 정부는 제대로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사령부는 미군주둔비부담금을 흥청망청 쓰고 있다. 미 의회조차 ‘공돈(FREE MONEY)’처럼 쓴다고 지적할 정도로. 그러고도 현재 미군 축적금 잔액 7380억원과 한국 정부가 관할하는 쓰지 않은 미군주둔비부담금을 합쳐 2013년말로 추산하면 1조 4천억원이 넘을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2014년부터 적용될 9차 미군주둔비부담 특별협정 협상 과정에서 내년에만 1조원 이상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런 행태야말로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횡포가 아니고 무엇인가. 세계 어디에 이런 불법과 부당한 행위를 당하고도 정부가 찍소리도 못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한미동맹이라면 그 어떤 불평등도, 그 어떤 굴욕도 감수해야 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미국이 협상하다가 수틀리면 주한미군 철수한다고 협박하면 나라가 무너질 것처럼 경기를 일으키는 것이 세계 10위권 이내의 군사강국, 세계 15위의 경제강국 대한민국의 실상이다.

이런 참담한 상황은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한미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청산하고 평등한 한미관계를 수립해야만 이런 굴욕적인 상황은 근본적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군주둔비부담 문제의 불법성과 부당성을 시정하는 것은 평등한 한미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이 불법 축적한 미군주둔비부담금과 이자소득을 모두 국고로 환수하고, 미집행 부담금을 9차 미군주둔비부담 협정 체결 협상과정에 반영하여 내년도 부담금을 대폭 삭감해야 한다. 특히 불법 축적과 각종 부당 집행의 원천이 되고 있는 군사건설비 항목을 폐지하고 관련 예산을 모두 삭감해야 한다. 그리고 협정 기간은 1년으로 하여 국회의 예산심의확정권과 국민의 감시권을 보장해야 한다. 나아가 미군 경비는 모두 미국이 부담하도록 되어 있는 한미SOFA를 위배하여 23년이나 특별협정으로 지속되고 있는 미군주둔비부담 협정 자체를 박근혜 정부 임기 안에 폐지해야 한다.


유영재(평통사 미군문제팀장)
 
   
 
전 애국크리스챤청년연합 부의장

전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사무처장

전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사무처장

전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범국민대책위원회 정책위원장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미군문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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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계로 갔을까?

그는 천계로 갔을까

 
성해영 2013. 11. 19
조회수 502추천수 0
 

[나를 울린 이 사람]

 

스베덴보리의 천계- (1).jpg » 스베덴보리가 다녀왔다는 천계

 

‘김충’ 사무관을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이다. 지금은 종교학자가 되었지만, 나는 사회생활을 문화체육부 공무원으로 시작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선한 미소, 곱슬머리의 그는 내 전임자였다. 모든 게 서툴러 자주 귀찮게 굴던 나를 군말 없이 많이도 도와주었다.

더욱 친해진 건 나와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걸 알고서였다. 만화와 무협소설을 비롯해 책이라면 뭐든 좋아했고, 무엇보다 종교와 수행에 관심이 많았다.

 

가상 유에프오-1-.jpg » 가상의 UFO(유에프오)

 

윤회, 최면, 초능력, 유에프오(UFO), 미스터리와 같은 어른이라면 더 이상 하지 않는 얘기를 하며 소년들처럼 함께 킥킥댔다. 그래서일까. 정말 재미있는 책은 다 읽는 게 싫어 일부러 천천히 읽는 것처럼 우리는 만남을 아꼈다.

두고두고 대화의 즐거움을 만끽하려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라며 두권의 책을 갑자기 내게 빌려주었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와 <스베덴보리 평전>을.

그런데 한달도 안 돼 그는 전신이 마비되는 치명적인 사고를 당했다. 말을 전혀 못 했고 그저 눈만 움직일 수 있었다. 겁이 나 차마 못 가던 면회를 갔다. 한참의 입원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는 손끝도 까딱할 수 없었지만, 나를 보고 오랫동안 눈으로 웃어주었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는 며칠 뒤 빌려준 책 제목처럼 침묵의 세계에 있다가, 스베덴보리가 보고 왔다는 천계(天界)로 떠났다.

 

스베덴 보리-1-.jpg » 갈릴레이 못지않은 저명한 천체물리학자로, 천계 체험을 책으로 쓴 스베덴보리

 

사고가 나기 직전에 왜 하필 그 책들을 내게 빌려주었는지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 책은 돌려주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은 공무원을 그만두고 내가 종교학을 하게 만든 큰 이유 중 하나다.

누구 못지않게 자유롭고 유쾌했던 그는 내가 닮고 싶었던 영혼이었다. 젊은 나이에 훌쩍 저세상으로 간 그가 요즘도 가끔 생각난다. 그럴 때마다 그립다. 마지막 만남에서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의 웃음은 여전히 나를 울린다. 다시 만나게 되면 아끼느라 미처 못 했던 이야기들을 깔깔대며 나누고 싶다.

성해영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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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영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문화관광부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고교 때 체험한 신비체험을 규명하기 위해 공무원 생활을 접고 서울대에서 종교학을, 미국 라이스대학에서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를 공부한 뒤’로 서울대 HK(인문한국) 교수로 있다. 종교체험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 지 탐구중이다. 저서로 오강남 교수와 함께 나눈 얘기 모음인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가 있다.
이메일 : lohel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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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 일본 신문 함부로 베끼지 마라!

[서남 동아시아 통신] <아사히>와 <요미우리>의 갈림길

현무암 훗카이도대학원 준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11-20 오전 9:26:57

 

 

한국과 일본의 민주주의 위기

한국과 일본의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 양국 공히 '정보'를 둘러싼 권력의 장악과 통제가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위기가 국가정보원이 지난 대선에서 벌인 정치 개입과 'NLL 대화록' 유출이라는 권력 남용과 헌법 무시 행위를 통해서라면, 일본의 위기는 '국익'을 위해 시민의 알 권리와 언론 보도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 '특정비밀보호법안'이 발단이다.

'보통 국가'를 지향하는 아베 신조 정권이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대승하여 중참 양원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되자 헌법 개정을 향해 박차를 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연정 파트너 공명당이 반발하고, '침략'에 대한 정의와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국제적인 갈등이 고조되는 등 대내외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자 헌법 개정 자체보다도 미국이 재촉하는 집단적 자위권의 해석 변경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그런데 집단적 자위권을 통해 미국과의 공동 작전을 수행하려면 미국의 정보 제공을 불가결로 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일본판 NSC)를 설치해야 하는데, 미국 정부는 2007 년 이를 추진하는 아베 1차 정권 때 이미 자국의 정보 보호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었다. 따라서 '비밀을 지키는 법률이 매우 약한' 일본이 이러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부터 받은 비밀 정보를 엄수하기 위한 법률 제정이 급선무가 된다. 이것이 특정비밀보호법안이다.

한국 언론이 <요미우리신문> 기사(11월 8일자)를 인용해 집단적 자위권의 해석 변경을 공명당과 내각 법제국과의 조정을 위해 내년으로 늦추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11월 7일에 중의원을 통과한 국가안전보장회의 설치 법안과 더불어 특정비밀보호법안도 국회에서 심의 중에 있다. 이들 법안은 집단적 자위권 해석 변경을 위한 일련의 과정이며, 헌법 개정을 향한 수순으로 나아가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특정비밀보호법안이 올 9월에 들어 갑작스레 부상하게 된 것은 이미 이전 민주당 정권이 추진했었기에 가능했다. 2010년 센가쿠열도(댜오위다오) 근해에서 중국 어선과 해안보안청 순시선의 충돌 영상 유출 사건은 민주당 정권이 비밀 보전 법제를 제안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간 나오토 총리의 지시로 구성된 유식자 회의는 "비밀 보전을 위한 법제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하여"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2011년 8월 8일에 공표했다.

이 보고서에 의거하여 추진된 법제화 시도는 2012년 12월 총선거에서 민주당 정권의 몰락으로 무산됐지만, 그 이전에도 자민당-공민당 연립 정권(후쿠다 정권)에서 비밀 보전 법제의 검토가 진행되고 있었다. 또 자민당 정권은 당시 1985년 중반에 시민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된 국가 기밀 법안을 제출한 바 있고, 2001년에는 방위 부문에 한정됐지만 자위대법 개정에 따라 방위비밀법제를 성립시키기도 했다. 특정비밀보호법안은 통치 권력의 숙원인 것이다.

<아사히신문>의 고군분투

특정비밀보호법안은 9월에 일본 정부가 법안 제정을 위한 국민 의견 공모(퍼블릭 코멘트)를 시작하자 최대의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장관 등 행정 기관장이 방위, 외교, 스파이 활동 방지, 테러 활동 방지의 4분야에 있어서 일본의 안전 보장에 대해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정보를 '특정 비밀'로 지정하고, 이를 취급하는 공무원, 경찰 직원, 계약업자가 '특정 비밀'을 누설할 경우 최대 10년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 법안의 요지이다.

문제는 법안이 성립되면 관료의 재량으로 방대한 정보가 '특정 비밀'로 지정되어 반영구적으로 시민 사회로 부터 격리되는 데 있다. '특정 비밀'은 보도 기관이나 감시 기관 등 제3자가 검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시민의 알 권리와 언론 보도의 자유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시민 사회 각 부문에서 법안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공명당도 우려를 표명하자, 아베 정권은 수정안에 "국민의 알 권리 보장에 이바지하는 보도 혹은 취재의 자유는 충분히 배려하고, 출판·보도의 취재 행위는 법령 위반이나 현저하게 부당한 방법이 아닌 한 정당한 것으로 본다"는 규정을 추가했다.

하지만 수정안으로 알 권리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이 법안은 '특정 비밀'에 접하는 자의 감시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의 생활을 위한 조사 활동도 위법화할 소지를 안고 있다. 특히 '공모죄' 규정은 핵발전소의 안전성이나 주일 미군의 범죄 및 사고 조사 등 안전과 인권에 대한 시민의 일상적 활동을 위축시키게 된다.

이처럼 시민의 알 권리와 보도의 자유를 침해하는 특정비밀보호법안에 대하여 앞장서서 반대 입장을 개진하는 것이 <아사히신문>이다. 지난 2개월간 법안에 찬성하는 <요리우리신문>보다 3배에 달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관련 사설만 해도 동 법안을 직접 다룬 것이 6개, 간접적으로 다룬 것이 2개로 총 8개에 이르는 이례적인 대응이다. 그 중 2개는 사설란 전부를 활용한 두 배 분량이다. 신문의 간판 칼럼인 '천성인어(天声人語)'에서도 다섯 차례나 이 법안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뿐이 아니다. 9월 19일부터는 9회에 걸쳐 '비밀 보호 법안 분석한다'라는 시리즈를 마련했고, 이어서 각 전문가가 바라보는 '비밀보호법 나는 이렇게 본다'라는 시리즈를 10회에 걸쳐 내보냈다. 현재 '비밀보호법 체험에서부터 묻는다'가 진행 중이다. 독자 투고란에도 매일처럼 법안을 비판하는 의견이 올라온다. 법안이 국회 심의에 들어간 다음날(11월 8일) 조간 1면에는 논설주간 명의로 '사회에 불안, 폐안하라'라는 제목의 강렬한 비판 논평을 게재했다.

<아사히신문>은 지금 특정비밀보호법안 저지를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일본 저널리즘이 놓인 심대한 위기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

'국익'으로 전향한 <요미우리신문>

반면 법안에 찬성하는 <요미우리신문>은 느긋하다. 그간 2개 사설을 게재했는데, 하나는 법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고 하나는 국민의 알 권리가 보장되도록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0월 25일에 법안이 국회 제출되자 다음날 <아사히신문>은 법안 전문을 게재하고 많은 지면을 할애해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요미우리신문>의 반응은 담담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두 신문의 '국익'과 저널리즘에 대한 입장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전후 일본 저널리즘이 제국주의 시대에 국가 권력과 결탁한 것에 대한 반성에 기반을 둔 만큼, 냉전 시기에는 '국익'과 저널리즘에 있어서의 두 신문의 입장 차이는 크지 않았다. 일본이 경제 대국화에 따른 방위 책임을 내외로부터 요구받기 시작하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요미우리신문>은 '헌법의 제약'으로 인해 경제 원조에 의한 국제 공헌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것이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직후 <요미우리신문>은 이러한 입장의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사설을 게재한다(1990년 8월 29일). 일본이 헌법을 개정하여 군사적 전개를 요구받게 되는 1990년대, 평화헌법을 기반으로 한 '전후 패러다임'의 전환과 함께 일본 저널리즘에 있어서 '국익'은 새롭게 위치 지워져야 했던 것이다. 특히 주변사태법(1999년) 및 2000년대 들어서 정비된 유사법제로 인해 알권리는 '국익'의 하위에 놓이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자위대를 전장에 파견하게 되는 이라크 전쟁에서는, <요미우리신문>이 미일 동맹을 기축으로 해서 일본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최고의 국익'이라는 사설(2003년 6월 7일)을 게재함으로서 저널리즘에 있어서 '국익'의 봉인은 완전히 해제된다. '국익'과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해온 <아사히신문>이 2008년에 "이해가 대립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당연히 일본의 국익을 주장해야 한다"라는 NHK 경영위원장의 발언을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하자(3월 26일), <산케이신문>은 '국익 주장은 당연'이라는 사설로 맞서 <아사히신문>에 설명을 요구했다.

이것이 '국익'을 둘러싼 일본 언론의 결정적인 갈림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요미우리신문> 등 보수지는 '국익'을 언론 자유 및 알 권리 등 제 가치의 상위에 놓고, <아사히신문>은 '국익'을 상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번 특정비밀보호법안에 대한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의 온도차는 이들의 '국익'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 일본의 헌법 개정을 향한 움직임이 가속되고 시민 사회의 저항도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때 일본의 신문 보도에 의존하는 한국 언론의 보도 자세 또한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더불어 우리 자신의 '국익'에 대한 보도 자세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은 동아시아를 깊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유명한 서남재단의 <서남포럼 뉴스레터>에 실린 칼럼 등을 매주 두 차례 동시 게재합니다. 현무암 훗카이도대학원 준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 연구원)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200호에 실린 글입니다.

 

 
 
 

 

/현무암 훗카이도대학원 준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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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밖 조직' 선언한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

"구글·애플이 노조탄압에 돈 쓰나?
전교조 찍어내는 게 독재정권의 증거"

[인터뷰] '법 밖 조직' 선언한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

13.11.19 20:18l최종 업데이트 13.11.19 20:18l
권우성(kws21) 황방열(hby) 최지용(endof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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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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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은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는 일이 계속된다. 그리고 그 투쟁은 정부와 보수언론에 의해 불법의 딱지가 붙는다. 파업이라도 한번 할라치면 어려운 경제에 깽판을 놓는 몹쓸 집단으로 낙인 찍는다. 엄연히 법이 보장한 파업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여태까지 민주노총 스스로가 '법 밖'으로 나가겠다고 한 적은 극히 드물다. 14년 전 천신만고 끝에 '합법'노총을 인정받은 설립신고서까지 찢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은 취임 4개월 만에 그 신고서를 찢어버렸다. 지난 1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그는 조합원 3만여 명 앞에 서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건설하기 위해서 수많은 피와 땀을 흘렸지만 지금 이 시기에, 법 속의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에 '노조 아님'을 통보한 정부와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14일 서울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신승철 위원장을 만났다. 43년 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전태일 열사 추모 주간이었다. 지난 7월 당선된 신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전임 김영훈 위원장의 사퇴 이후 계속된 지도부 공백상태를 깨고 위원장에 당선됐다. 취임 당시에도 현대차 사내하청 문제, 쌍용차 해고자 복직문제, 공무원노조 합법화 문제 등 굵직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러나 무엇 하나 해결되는 것 없이 전교조 법외 노조화 문제, 삼성그룹의 노조파괴 문서 공개 사태와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의 죽음까지 닥쳐왔다. 또한 박근혜 정부의 공약 후퇴와 KTX민영화 문제 등 민주노총이 나서야 할 사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다가 민주노총 내부도 단속해야 하고 새로운 진보정치 구상도 멈출 수 없다. 비록 이 일들을 신 위원장 혼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위원장으로서 모든 사안에 책임을 떠안고 있다.

신 위원장은 이날 <오마이뉴스>와 만난 자리에서 "박근혜 정부의 전교조 탄압은 이데올로기 공세"라며 "아이들에게 보수적 시각을 심어주려는 과정에서 전교조 탄압이 이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법 속의 민주노총은 의미가 없다"는 발언과 관련해 "노동자의 기본권이 법으로 보호받고 있는가. 법의 보호를 받을 수가 없는데 그 안에서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신 위원장은 이날 약 2시간에 걸쳐 <오마이뉴스>와 현안 전반과 관련해 대화를 나눴다. 다음은 신 위원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전교조 가처분 당연, 본안도 같은 결과 나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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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신고증' 찢는 민주노총 위원장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이 대회사를 하던 중 "지금 이 시기에, 법 속의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민주노총 설립신고증을 찢어버리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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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원이 정부의 전교조 '노조 아님' 통보에 집행정지 가처분을 승인했다. 정부의 행위가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계속됐고 그것이 일부 확인됐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기쁜 소식이긴 하지만 그런 표현은 예상 외 결과가 나올 때 쓰는 것 같다. 당연한 결과이고 정상적인 판단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결과를 기쁜 소식이라고 하려니, 그동안 정부가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일들을 해왔는지 생각하게 된다. 많은 변호사와 법학자들이 전교조의 설립신고 취소는 정상적이지 않다고 얘기했는데, 정부가 우긴 것 아닌가. 앞으로 있을 본안도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 말씀대로 앞으로 본안 판결도 남아 있다. 법원이 가처분까지 받아들인 상황에서 이제는 더 이상 전교조가 법외 노조냐 아니냐가 핵심이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가 이 사안을 밀어붙이는 것은 다른 의도로 보인다.
"이데올로기 측면이 강하다. 교학사의 역사교과서 논란을 일으키는 것도 전교조 탄압과 무관하지 않다. 보수정권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빼앗긴, 또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한다. 그것도 같은 이데올로기적 공세라고 할 수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보수적 시각을 심으려는 다각적인 수단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 중 핵심이 전교조 탄압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지난 10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지금 이 시기에 법 속의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주노총의 설립신고서를 찢기도 했다. 투쟁 사안이 많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법 밖'을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법 밖에 민주노총'으로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근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사고를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계속됐다. 그들의 외침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인정을 받고 싶은 거다. 여전히 노동자들은 배가 고프고,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이 박탈당하는 구조라면 민주노총의 합법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 투쟁과 파업으로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가해진 손해배상가압류 금액만 1700억 원에 이른다. 노동자들의 해고와 구속 모두 법 안에서 이뤄진다. 노동자가 법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가? 법이 정해준 합법성을 유지하는 게 우리의 기본권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보호받지 못하는 법 안에서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 같은 자리에서 박근혜 정부를 독재정권이라고 규정했다. 과거 군사독재와는 다른 의미로 읽힌다. 민주적 절차를 걸친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봐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민주노총이 조직적으로 현 정부를 독재정권이라고 규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벌어지는 일들은 심정적으로 독재정권에 가깝게 표출되고 있다. 국민이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박탈하고 있지 않는가. 제도적 민주주의, 국민의 피와 땀으로 뿌리 내린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독재라고 할 수 있다."

- 공무원노조에 이어 전교조도 조직적으로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압수수색도 진행됐다. '노조 아님' 통보와 같은 맥락으로 전교조에 대한 탄압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위원장의 의견은 어떤가?
"본질적으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물타기'를 하는 것이지만 뜻대로 안 될 것이다. 직급이 낮은 공무원들의 정치적 행위는 보장 돼야 한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마치 그것이 국가기관의 조직적인 대선개입과 똑같은 책임인양 몰아간다. 그렇다면 조직적 개입이 확인 됐으니까 이번 선거는 무효라고 해야 하지 않나?

교원노조가 합법화 돼 있는 다른 국가에서는 그 교원노조가 포함된 노총 단위에서 정당과 정책연대를 하고 선거에 주체로 참여한다. 미국노조가 오바마와 연대했고 일본의 노총인 '랭고'도 선거에 조직적으로 참여한다. 노동조합은 당연히 정치행위를 해야 하는 조직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이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희생양으로 삼을 일이 아니다."

- 전교조 탄압은 정권 내내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마치 예전부터 벼르고 타깃으로 삼은 듯하다.
"'나와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거기에 국가권력을 이용하고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우러져서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자기 의견을 내는 것이 보장되는 게 민주주의의 큰 특징이다. 경제체제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를 떠나서 민주주의 안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 내가 진보주의라고 해서 보수적인 생각이 잘못 됐다고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전교조를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보고 찍어내는 게 독재정권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세계에서 삼성이 노조탄압하는 사례들 모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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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죽음을 선택하면서 사회가 죽음에 둔감해졌다. 경기도 마석에 모란공원에 가면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노동열사들이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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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31일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노동자 최종범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태일님처럼은 못해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위원장으로서 어떤 심정이었나?
"최종범 열사는 또 다른 전태일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900만 명이다. 그 형태도 다양하다. 파트타임, 특수고용, 사내하도급, 촉탁직 등 변종 일자리들이 쏟아진다.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고 그들은 정규직의 평균임금에 50%도 받지 못한다. 최종범 열사의 죽음은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비정규직의 간절함을 사회에 외친 것이다.

그는 삼성전자서비스의 노조를 지키려다 일감을 빼앗기고 감사를 받았다. 그들이 노동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를 조직하는 일이다. 분노가 표출되지 않으면 쉽게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그걸 막아야 한다."

- 최종범씨의 죽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고공농성,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계속돼도 사람들은 큰 문제라고 느끼지 않는 분위기다.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죽음을 선택하면서 사회가 죽음에 둔감해졌다. 경기도 마석에 모란공원에 가면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노동열사들이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의 죽음은 자신과 관련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자본 기업들이 우아한 이미지 광고를 많이 하는 이유도 그렇다.

사회공헌이니, 감성경영이니, 윤리경영이니 하는 것들도 모두 노동자의 죽음과 그 자본의 책임을 분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경제 수준 상위 1%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짓된 희망에 목숨을 걸게 만든다.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미친듯이 살아간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노동자의 절반은 비정규직이다. 대학을 나와도 비정규직이다. '나는 아닐 수 있다, 나는 안 죽을 수 있다'는 이제 공허한 소리다."

- 삼성의 노조파괴 문건 공개를 계기로 민주노총이 대삼성투쟁을 전면화하겠다고 선언했다. 단지 수사적 표현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구체적인 방식이나 계획이 나와야 할 것이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와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민주노총은 삼성이 벌이는 반노동정책, 탄압의 사례를 모을 것이다. 이는 국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삼성이 진출한 인도네시아나 브라질, 터키에서도 노동탄압 사례가 제기됐다.

민주노총이 비록 국내에서 영향력이 작아 보일지 모르지만 국제노동계에서는 결코 작지 않다. 국제연대를 통해 삼성이 세계 곳곳에서 벌이는 노동탄압의 사례를 모아내고, 이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결코 타격은 미비하지 않을 것이다."

- 삼성전자 쪽에서는 이 문제가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의 문제이지 자신들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고용노동부도 위장도급과 불법파견 의혹에는 불법이 아니라는 결론을 발표했다. 삼성그룹도 노조파괴 문건은 단순 회의자료라며 구글이나 애플에도 노조가 없다고 해명했다.
"정부는 삼성에게 면죄부를 줬고, 삼성은 자신의 잘못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무소불위, 정치권력보다 위에 있는 자본권력이 삼성이다. 거기에 굴복하지 않는 게 민주노총이고, 삼성의 조직된 노동자들이다. 지금의 삼성의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삼성이 정말 세계적인 기업이 되고 싶다면 언젠가는 노동조합을 인정해야 한다. 세계는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더욱 요구하고 있다.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구글이나 애플이 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위해 돈을 쓰나? 삼성은 노동조합을 유지하는 비용보다 더 많은 돈을 탄압하는 데 쓰고 있다. 삼성이 정말 혁신적인 기술로 수십조에 달하는 이익을 내는 것인가? 아니다. 하도급으로 점철되는 착취에서 이뤄진다. 가장 기형적이고 비도덕적인 기업이다.

나도 삼성의 서비스 기사들이 삼성의 직원이 아닐 줄은 몰랐다. 그들은 20년 동안 삼성의 제품을 고쳐도 삼성 직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그 노동자들이 900만 명이라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침을 대신하고 있다. 삼성에게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같은 폭발적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다."

"지금은 노사정 대화 못 들어가... 투쟁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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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위에서 합법화에 합의한 전교조가 지금 저렇게 공격받고 있는데, 거기서 합의하는 게 실효성이 있다고 할 수 있나?"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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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정부는 고용율 70%를 정권의 최대 목표로 제시했다. 최근에 공공부문 시간제 일자리 1만7000여 개를 늘리겠다는 발표도 있었다. 민주노총은 현재 노사정 대화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 시간제 일자리에도 비판적이다. 노사정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와 정부의 고용정책에 한마디 해달라.
"시간제 일자리의 가장 큰 핵심은 '선택의 권한'이 있는가 여부다. 가사나 육아로 어려운 조건 때문에 시간제를 선택했다면, 그 문제가 해소됐을 때 정규직으로 선택권이 주어지는가, 또 임금과 복지에서 정규직과 동일한가. 박근혜 정부의 시간제 일자리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정부가 말하는 시간제 일자리는 지금도 많다. 비정규직 일자리의 대다수가 시간제 일자리다. 청년, 여성의 일자리가 지금도 다 시간제 일자리인데, 또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있는 일자리의 처우도 개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똑같은 일자리만 늘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결국 비정규직이 확산되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 현재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이 현안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대화에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한다.
"대화가 된다면 들어가겠다. 현재로써는 못 들어간다. 정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 고용율 70% 목표 달성에 민주노총도 참여하라는 것인데 민주노총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 자리에 뭣 하러 들어가나?

전교조 문제는 과거에 노사정위원회에서 합의해 합법화됐다. 노사정위에서 합법화에 합의한 전교조가 지금 저렇게 공격받고 있는데, 거기서 합의하는 게 실효성이 있다고 할 수 있나? 현대차 사내하청 문제, 쌍용차 해고자 복직 문제 등 민주노총의 장기투쟁 사업장만 70개가 넘는다. 정부가 이런 사업장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교섭을 제안하나? 그렇게만 한다면 민주노총 위원장이 어딜 못 가겠나. 지금은 투쟁을 통해 여론을 만들어가는 방법 말고는 없다."

- 취임 후 4개월 동안 정부 쪽과는 전혀 접촉이 없었나?
"민주노총 사무실을 찾아온 건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과 노사정위 상임위원 한 명이 개인적 볼일로 왔다가 인사차 찾아온 것 말고는 없다. 전화도 받은 적 없다. 연락 오면 만날 생각이 있다. 노동자들 문제 해결을 위해 누굴 만나지 못하겠나."

"민주노총, 이제는 인물정치 안 한다"

- 국정원의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사건에 이어 정부는 정당해산 청구까지 내놓았다. 진보진영 전체의 위기라는 인식과 함께 이석기 의원 그룹을 향한 비판도 없지 않다. 위원장은 이번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간단하게 말해줄 수 있나?
"공안탄압규탄대책위에 공동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사건을 해명하는 일은 이석기 의원을 비롯해 당사자들이 하는 게 맞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정치적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통합진보당도 반성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계파나 그룹의 결속력이 강하면 배타성이 강해진다. 결속력이 강하면서 다른 조직과 융화하기는 쉽지 않다. 이석기 의원과 그와 함께 하는 의견그룹은 결속력이 강하다. 대중정치, 정당정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문제로 진보진영 내에서도 비판 의견이 있는 것이다. 결속력만 강조될 때 집단의 광기가 폭력적으로 표출될 수 있다. 폭력을 긍정적으로 볼 사람은 없다."

- 위원장 선거 당시 "민주노총 내 정치위원회를 복원해 진보정당운동을 평가하고 반성한 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복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정치위원회 위원장 선임했고 연맹과 지역본부에 32개 정치위원장을 임원급으로 두고 있다. 부산을 시작으로 지역정치위원회를 구성해 토론을 시작했다. 각 연맹과 지역본부에서 이전 정치활동을 평가하고 향후 전망을 고민할 것이다. 공약에도 냈지만 정당정치 중심으로 선거정치 중심이 아니라 지역, 생활정치 중심으로 정치위원회가 자리매김해야 한다. 특히 진보진영이 분열된 상태에서 특정정당을 선택할 수 없다. 인물정치의 한계성을 실감했다.

표를 조직하고 선거자금을 걷고, 특정 인물을 지원하는 정치는 더 이상 안 된다. 그런 인물이 민주노총을 대변하는 게 아니다. 대리정치의 한계다. 민주노총은 노동중심 의제로 뭉치고 지역 중심으로 실천 구조를 가졌을 때 정치력을 발생시킬 수 있다. 당을 선택하고 그 당에 맞춰 활동을 하는 것은 진보정당 운동을 다시 시작해도 똑같은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그동안은 급했다. 의원을 국회에 들여보내야 했고 표를 모으는 것에 급급했다. 단기적 목표를 가지고 해왔다. 이제는 노동자들이 지역에서 어떻게 정치활동을 하고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낼 것이냐에 집중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렇게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앞으로의 정치활동이 돼야 한다."

- 당선되면서 회의체계에 따른 공조직 강화를 강조했다. 그동안 민주노총을 주도해온 정파적 논리에서 탈피하겠다는 의도였는데 현재까지 어떻게 평가하나?
"정파들이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정파의 생각을 중심으로 대중사업을 결정하는 것은 맞지 않다. 또 조직의 결정이 정파의 의견에 따라 수행이 안 되는 것도 문제다. 공조직 회의 구조에 권위가 부여되어야 한다. 단결의 핵심이다. 그런 취지로 공조직 중심으로 운영하려고 노력 중이다."

- 여전히 민주노총은 강성노조라는 이미지가 강하고 대중들과는 거리가 있다. 앞으로 대중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민주노총은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나?
"정규직 중심의 운동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100만 비정규직화 조직을 위해 200억 기금 운동에 나섰다. 돈만 모으는 게 아니라 사람을 모으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조직 문화를 혁신해야 한다. 내년도 미래전략위원회를 발족하고 내부 변화와 대중적 변화의 문제를 고민할 것이다. 대중과 접촉공간을 늘리는 건 방식의 고민이다. 투쟁의 근본적 변화는 아니다.

당장 사람이 죽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가 웃으면서 싸울 수 있는 일인가. 같이 일하는 동료가 죽었는데, 그건 가능하지 않다. 이 노동자들의 절박한 분노는, 그들이 표현하는 방식은 그대로를 인정할 것이다. 앞으로 민주노총이 정규직 대공장 노동조합 요구를 중심으로 파업을 선택하거나 투쟁할 일은 없다. 지금도 민주노총의 대부분의 투쟁은 노조설립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다. 최저임금문제이나 연금과 같은 사회적 의제는 대중하고 접촉면을 확장시키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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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구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제1.2권 출간

안재구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제1.2권 출간'

통일운동가.수학자 안재구의 어떤 현대사' 21일 출판기념회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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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1.19 18: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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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구(安在求) 교수의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1.2권이 출간됐다. 부제는 「통일운동가.수학자 안재구의 '어떤 현대사'」

2011년 6월 22일부터 2013년 6월 15일까지 통일뉴스에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씩 총 124회에 걸쳐 연재된 원고지 4천매 분량의 내용을 정리해서 펴낸 책이다.

   
▲ 안재구 저 『끝나지 않은 길』(내일을 여는 책) 표지. [사진제공 - 내일을 여는 책]

『끝나지 않은 길』은 저자가 1996년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이란 제목으로 출판된 유년시절 밀양 산천의 이야기에 이은 다음 편에 해당하며, 1.2권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제1권 '가짜해방' 첫 머리는 1945년 해방을 맞은 저자의 고향 밀양에서 친일 행적을 면피하기 위해 저자의 할아버지인 안병희 선생에게 집을 헌납했던 친일파가 미군청정의 등장과 함께 그들을 등에 엎고 애국자들을 탄압하는 재판의 풍경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제2권 '찢어진 산하'는 "1952년 9월 1일,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나는 이 분단된 나라의 남쪽 사회에서 출세의 끄나풀을 일단은 잡게 되었고, 그러면서 분단을 반대하는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 투쟁의 깃발을 내려버리고 만 것이다"라고 마무리되어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세계적인 수학자답게 뛰어난 기억력으로 해방 직후 현대사를 정밀하게 복원해놓은 현대사의 교과서"라고 추천한대로, 해방 직후 7년여 동안의 현대사의 굴곡을 원고지 4천매가 넘는 엄청난 분량으로 정리한 대단한 역작이다.

분량만큼이나 대단한 것은 바로 저자의 뛰어난 기억력이다.

저자는 투쟁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은 물론 그들과 나눈 대화와 밀양의 저자거리 풍경을 혼신의 힘을 담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대하소설에 뒤지지 않을 만큼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인물 관계가 사실감이 넘치며, 엮어가는 사건은 한편의 장편영화를 보는 듯 하다.

그런가하면 저자가 직접 겪은 해방 직후의 시대상황과 사건, 정세를 그 어떤 역사학자의 기록보다 살아 숨쉬는 것으로 해설하고 '살아 낸' 자만이 가능한 내공으로 사건의 본질을 육중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하게 유지되는 해방 직후 이 나라 소년의 치열한 고민과 문제의식, 그리고 이 시기를 전사(前史)로 살아낸 저자의 이후 인생역정은 더 큰 울림으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저자는 2011년 6월 통일뉴스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내가 우리 시대를 살면서 그 속에서 언제나 따라다니는 공포와 가난 속에서 빼앗긴 해방을 다시 찾으려 발버둥을 쳤고, 더구나 갈라지기까지 한 조국을 아우르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목숨과 혈육마저 담보하며 살아온 나의 역사, 우리가족의 역사를, 현대사 속에서 아무나 가지는 역사가 아닌 어떤 한 사람의 역사를 「어떤 현대사」라는 이름으로 쓰려고 합니다."라고 적은 바 있다.

"그래서 팔순이 다 되도록 살면서 헛살았다고까지 생각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는 말의 대답을 그 실마리라도 얻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라고 저자는 말했다.

『끝나지 않은 길』은 이번에 출간된 1.2권에 이어 앞으로 제3권(수학자의 삶), 제4권(전사의 맹세)을 근간으로 준비하고 있다.

"대학으로 들어갈 때는 순수이론과학인 수학을 연구하는 학자로 살기를 작정했다. 그것은 분단된 조국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갈가리 찢긴 겨레가 너무나 가슴에 아리어서 그 상황으로부터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상아탑에 침잠하여 그 바깥의 아우성, 그리고 인민들의 노성, 생활하는 민중들의 몸부림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아니 일부러 모르는 채 하고 살았던 것이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의하여 도발된 청년학생들의 의거였다. 그것은 나에게는 호된 채찍을 들이댄 것이다. 정말 정신이 뻔쩍 들도록 하는 채찍이었다."

올 6월 통일뉴스 연재를 마치면서 저자가 남긴 글은 이후 두번의 사형 구형과 한번의 사형선고, 두번의 무기징역으로 이어지는 저자의 '끝나지 않은 길'을 예고하고 있다.

올해 산수(傘壽)를 맞은 저자의 『끝나지 않은 길』 출판기념회가 21일(목) 오후 6시30분 서강대학교 동문회관 2층 스티브 김 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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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사령부 '블랙북' 매일 청와대 보고


 

 

 

 


사이버사령부의 국내 정치 및 대선 개입 여론조작 공작 활동이 청와대에도 매일 보고됐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민주당 김광진 의원은 전직 사이버사령부 고위 간부와의 면담을 통해 <사이버사에서 매일 오전 7시 A4용지 2~3장 분량의 상황보고를 국방부 장관을 경유해 청와대에 했다.>는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지난달 김관진 국방장관과 국방부가 밝힌 "사이버사 요원들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고 별도의 지시는 받지 않았다'는 해명이 거짓이 된 셈입니다.

속속 밝혀지고 있는 사이버사령부의 국내 정치 및 선거 개입 의혹 중, 사이버사의 조직및 청와대 보고 내용 등을 정리했습니다.

' 사이버사령부 댓글 작업, 매일 청와대에 보고'

사이버사에 근무했던 A씨는 자신이 근무하던 당시에 매일 상황보고는 물론이고, 정치 댓글 작성과 밀접한 심리전 관련 내용도 A4 용지 1장으로 정리 별도로 보고했다고 밝혔습니다.

 

 

 


A씨에 따르면 사이버사에서는 매일 오전 보고서를 작성해서 <530단장 → 사이버사령관 → 김관진 국방장관 → 청와대> 일일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특히 청와대에서는 3개월에 한 번씩 회의했으며 사이버사령관도 수시로 청와대에 불려 갔다고 합니다.

사이버사령부의 530단 보고서는 일명 '블랙북'이라는 비밀번호 잠금장치 부착 가죽가방에 담겨 장관에게 보고됐습니다.

'일일종합정보보고서'에 별도의 심리전 (국내 정치 댓글 작업 및 4대강과 같은 홍보 내용) 내용이 담겨있었다는 사실은 청와대에서도 이미 사이버사의 국내 정치 개입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개인적인 정치 활동이었고 자신들은 몰랐다는 국방부와 국방부 장관의 말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것입니다.

' 사이버사, 갑자기 대선 앞두고 조직과 인원 확대'

사이버 사령부는 국방부 장관 직할 부대로 연구개발 31단, 사이버전 510단, 대북심리전 530단, 교육 훈련 590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댓글 작업과 국내정치,대선 개입을 했던 조직은 사이버사 530단입니다. 원래 대북심리전을 담당하는 530단은 사이버사령부 요원 전체 450여 명 가운데 200여 명이 속해있을 정도로 사이버사에서 제일 큰 조직입니다.

사이버사는 단순히 사이버전을 담당했다고 보기에는 굉장히 수상스러운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국정원처럼 사복을 착용하거나 국정원식으로 회사 명칭으로 '사장님','과장님','부장님' 등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사이버사 이모 중사가 트위터에서 자연스럽게 사장님,부장님을 호칭했던 이유도 이런 특수한 정보조직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사이버사 530단은 기획,정보,작전,미디어,해외홍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이버사령부는 2010년 7명, 2011년 17명이 뽑았는데, 2012년 대선이 있던 해에 특채 4번을 통해 무려 82명을 새로 채용합니다. 그중 47명을 530단에 배치했습니다.

530단의 특이한 점은 어학병사가 많았다는 부분입니다. 사이버사가 국정원과 달리 해외 유학생이나 한인 사이트 등에 접속해서 글을 게시한 내용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이는 부분입니다. 또한, 미디어 전문가를 특채해 국정원의 홍보전 동영상이나 포스터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4~5명이 1개팀으로 10개팀이 운영됐던 530단은 언론동향을 분석하기도 하는 국내 정보 수집 업무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댓글 작업에 대해 우호도, 비우호도 등을 00% 감소, 증가 등으로 수치화하며 공작 활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해외동포 투표권을 노린 해외 한인 사이트 작업과 대선을 앞두고 확대된 530단 조직은 국정원 사건만큼이나 까도 까도 나오는 양파처럼 의혹이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 박근혜는 진짜 몰랐을까?'

530단 보고서가 사이버사령관을 통해 김관진 국방장관과 청와대에 보고됐다는 사실은 MB정권이 이미 지난 대선에 확실히 개입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문제는 박근혜 정권이 과연 몰랐느냐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이 바로 연제욱 사령관입니다.

 

 

 


MB는 사이버사령부 창설과 지원에 대해 "사단 하나 없애도 사이버사령부를 지원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후 사이버사는 국방부 장관 직할부대로 승격합니다. 합참 소속이면 그나마 독립성을 갖출 수 있었지만, 국방부 장관 직할 부대였기에 청와대의 지시를 받고 보고한 것입니다.

대선을 앞두고 확대 개편된 사이버사는 사령관이 소장으로 격상됩니다. 당시 연제욱 사령관은 참여정부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장성 진급에서 계속 탈락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사이버사에서 임기제 진급을 했고, 결국 박근혜 대통령인수위를 거쳐 청와대 국방비서관으로 영전했습니다.

연제욱 사이버사령관이 청와대 국방비서관으로 영전한 사실을 놓고 본다면 박근혜 정부가 사이버사의 국내 정치 및 대선 개입 사건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 국정원 사이버사령부 댓글 작업 비교 출처:페이스북

 


사이버사령부 530단이 저지른 범죄는 국정원 사건보다 훨씬 규모가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방부 조사본부는 한 달이 지나도 수사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당연히 직속상관인 국방부 장관을 수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이버사 → 국방부 장관 →청와대에 이르는 일일보고 시스템의 비밀을 푼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대선에서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확실히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국회 첫 시정연설 장면. 출처: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지금 대선을 치른 지 1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라고 국정원 사건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대선이 1년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국정원 사건보다 더 큰 규모의 사이버사 범죄가 이제야 드러났다는 부분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을 1년이 넘도록 은폐했고 처벌하지 못했다는 부분에 대해 대통령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대립과 갈등' 은 감정적인 부분입니다. 그러나 범죄를 지시,인지했던 사이버사령관,국방부 장관, 청와대에 관한 처벌은 법치국가에서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기본적인 행동입니다.

범죄를 외면하고 대립과 갈등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리는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서, 청와대라는 단어 뒤에 그녀가 숨어 있다는 의혹밖에는 떠올릴 수가 없습니다. 정치 검찰과 사법부의 판단뿐만 아니라 국민의 판단과 의혹에 대해서도 그녀는 책임질 각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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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픽스, 韓정부 대선 개입도 모자라 미국 내 규탄 시위도 개입

 
토픽스, 韓정부 대선 개입도 모자라 미국 내 규탄 시위도 개입
 
정상추 올린 CNN iReport 토픽스에 정식기사로 채택해
 
정상추 | 2013-11-19 15:33:4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정상추 올린 CNN iReport 토픽스에 정식기사로 채택해
-미국서 합법적 시위 방해, 미국 헌법위반
-한국 국정원, 재향군인회 개입 의혹 제기

김진태의 폭언을 다룬 코리아헤럴드의 영문 기사를 올려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미국 최대의 웹모바일 미디어 토픽스(Topix)가 18일(미국 동부시간) ‘한국정부 대선개입에 이제는 시위개입도!-S. Korean Government Interferes with Presidential Election and Now the Surrounding Protests’라는 제목의 기사를 토픽스에 정식 기사로 채택하여 올렸다.

이 기사는 지난 16일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제 6차 한국국가기관 부정선거개입 규탄대회’가 재향군인회 및 가스통 할베 등 시위 방해세력들의 폭력적 방해로 위협을 받은 것과 관련하여 18일 CNN iReport에 올라 온 기사다. 이는 CNN iReport에 기사가 올라온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올라온 것으로 토픽스 편집진이 기사가치를 인정하고 바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한국의 부정선거에 대한 국제적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추세다.

‘정의와 상식을 추구하는 시민 네트워크(이하 정상추)’의 임옥씨가 쓴 이 기사는 뉴욕의 규탄시위에 직접 참여하여 겪은 상황을 자세하게 전하며 시위를 방해하는 세력들의 준동도 적나라하게 전달했다. 특히 이 기사에서는 제목에서 밝힌 대로 미국 내의 동포들의 시위를 방해하는 세력들의 배후로 국정원과 이들과 연계된 재미 한국군 재향군인회를 지목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기사는 ‘이 노인들은 국정원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한국 재향군인회에 의해서 시민들의 시위를 방해하기 위해 동원된다고 전해진다’고 폭로하고 있다.

실제로 동포사회에는 시위를 방해하는 군복을 입은 이들의 배후에 영사관과 국정원 파견 직원들이 연관이 있다는 설이 파다하며 참가한 할아버지 중에서는 일당 1백 달러를 받고 참가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이번 시위에서는 폭언과 집회 방해에 그치지 않고 폭력 행사까지 벌어져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기사는 뉴욕 시위 상황과 시위 방해자들의 모습을 전하며 ‘미국에서 집회 결사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며 ‘만약 한국 정부가 평화적인 집회나 시위를 금지하려 하거나 방해하려 시도한다면, 이는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시위자들의 채증사진을 다 찍었고, 이들이 시위를 벌인 데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라고 한 김진태의 파리 교민들에 대한 협박을 전한 이 기사는 ‘김진태의 행동은 민주주의 정신과 표현의 자유에 위배되는 것이다’라며 ‘이것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정말로 죽어가고 있다는 확실한 표시일지도 모른다’고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토픽스는 미국 최대의 웹커뮤니티 사이트로 미국 내 뉴스는 물론, 국제적인 초점이 되는 토픽을 웹과 모바일에 올려 네티즌의 의견을 나누고 있다. 24시간 7만 4000개 이상의 뉴스 속보를 전하며 매일 수십만 개의 댓글이 올라오고 있다. 지난 2월 한 달간은 2억 개의 기록적인 리플이 달리기도 했다.

CNN의 iReport는 시민들이 기사를 올리는 곳으로 기사가치가 충분하거나 독자들의 관심이 많을 경우 정식 기사로 채택되기도 한다. 이 기사를 올린 임옥씨가 소속된 정상추는 그 동안 한국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한국 대선에 관한 외신들을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하여 네티즌 및 한국 인터넷 언론들에 큰 환영을 받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온라인 그룹으로 지난 주말 한국 언론과 소셜 네트워크를 뜨겁게 달군 뉴시스의 ‘박근혜 아웃 대 박근혜 만세’ 기사를 제보하기도 했다.

다음은 정상추가 번역한 CNN iReport의 영문 기사 전문 번역이다.
번역 감수: 임옥

Topix 기사 바로가기 ☞ http://bit.ly/1bKAVzi

CNN iReport 기사 바로가기 ☞ http://ireport.cnn.com/docs/DOC-1062283

S. Korean Government Interferes with Presidential Election and Now the Surrounding Protests
한국정부 대선개입에 이제는 시위개입도!

By oglim (임옥)

In the evening of Friday, November 15, 2013 South Koreans and Korean-Americans started gathering in front of the U.S. Army Recruiting Station in Times Square in New York City. We were coming together in protest against the South Korean state agencies' intervention in last December's presidential election in South Korea. Many of us traveled from other cities to be there. Some came from New Haven, Philadelphia, Washington D.C., Chicago, and Los Angeles. I took a bus from Boston, Massachusetts to join the rally.

2013년 11월 15일 저녁무렵, 한인동포들이 타임스 스퀘어 광장에 위치한 미국 모병소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난 12월 한국에서 있었던 대선에 한국 국가기관이 개입한 것에 대한 규탄시위를 위해 이곳에 모이고 있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다른 도시에서 여행하여 이곳에 왔다. 뉴헤이븐, 필라델피아, 워싱톤 D.C., 시카고 그리고 LA 등의 도시에서 동포들이 왔다. 나는 메사추세츠의 보스턴에서 버스를 타고 와서 시위에 참여했다.

Our group held signs such as "Stop the Spread of McCarthyism!", "Democracy Dying in S. Korea!" and "S. Korean Democracy is Under Attack. OUST Park Geun-Hye!", just to name a few. The group marched from Times Square to Korean Town. We chanted all the way, "Oust Park Geun-Hye", "dissolve the NIS", "out, out, Park Geun-Hye", and "down, down, NIS”. Many onlookers cheered us on and some even chanted with us. There were some Americans who marched with us, chanting to show us their support as well. As we reached Korean Town more people joined us and a couple hundred of us held a candle-light vigil.

우리 그룹은 “매카시즘 흑색선전을 중단하라!”, “한국의 민주주의는 죽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공격을 당하고 있다. 박근혜를 몰아내라!” 등을 비롯한 여러 사인을 들었다. 시위대는 타임스 스퀘어에서 코리아 타운까지 행진했다. 행진하는 동안 내내 우리는 “박근혜는 사퇴하라!”, “국정원을 해체하라!”, “박근혜, 아웃!”, “국정원, 다운!” 등의 구호를 함께 외쳤다. 거리의 구경꾼들이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고 우리의 구호를 함께 외쳐주기도 했다. 심지어는 우리와 함께 끝까지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고 우리를 지지해준 미국인들도 눈에 띄었다. 코리아 타운에 다다를 무렵엔 사람들이 불어나 2백명에 가까운 무리가 되어 촛불시위를 벌였다.

There has been enough evidence proving that last year's presidential election in South Korea was totally fraudulent. State agencies such as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NIS) and the Army Cyber Warfare Command meddled in the election by having their agents post possibly many hundreds of thousands of messages online in favor of the ruling party's candidate and current president, Park Geun-Hye, and slandering the opposition candidates. Park's administration has bluntly been denying all allegations even with evidence proving otherwise. The illegal acts that they committed in the presidential election are serious crimes, but the worst of it is the cover-up, the investigation tampering, and the pressure to the investigation team by the current administration to obstruct its progress.

지난 한국 대선이 철저한 부정선거였음을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들이 이미 드러나 있다. 국정원과 군사이버 사령부 등의 국가기관이 요원들을 시켜 당시 집권당 후보이며 현 대통령인 박근혜를 찬양하고 야당후보들을 비방하는, 아마 수십만 개로 추정되는 인터넷 댓글과 메시지를 올리게 하며 대선에 개입했다. 박근혜 정부는 이미 증거가 나와 있는데도 자기들은 관련이 없다고 절대적으로 부인해왔다. 대선 당시 저지른 불법행위는 심각한 범죄이나 그걸 숨기려고 하는 것, 수사를 방해하는 것, 그리고 수사의 진전을 막기 위해 현 정부가 수사팀에 외압을 넣는 것은 가장 나쁜 범죄이다.

A fraudulent election is not a legitimate election and an elected president through an illegitimate election is not a legitimate president. This election was indeed a serious crime that had been carefully planned ahead and committed by the government, ruling party, and state agencies together. So far nobody has been held accountable or has come forward to take responsibility. The former head of the NIS and the former head of the Seoul Metropolitan Police have been indicted. However, the prosecutors working to uncover the truth have been fired and replaced with people from Park's inner circle. Citizens, political parties, and religious leaders home and abroad who are frustrated and angry have been holding numerous protests and candle-light vigils over the past few months. They are demanding a thorough investigation by introducing an independent counsel and any party that is proven guilty be punished.

부정선거는 합법적인 선거가 아니고 합법적이지 않은 선거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은 합법적인 대통령이 아니다. 이 부정선거는 실제로 정부, 집권당, 그리고 국가기관이 함께 철저히 사전 계획하고 저지른 심각한 범죄 행위다. 아직까지 아무도 그 일로 처벌을 받지도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지도 않았다. 전 국정원장과 전 서울 경찰청장이 기소를 당한 상태이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일하는 검사들이 쫒겨나고 박근혜의 측근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좌절하고 분노한 시민, 정당,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이 수 없이 많은 규탄집회와 촛불시위를 지난 수개월 동안 벌여왔다. 그들은 특검을 도입해 철저히 수사할 것과 범법자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Unfortunately during this Friday's protest some uninvited guests showed up. A group of extreme right-wing conservatives made their presence known by attempting to intimidate us out of protesting. The group consisted of approximately 20 people, mostly old men and a few women in their 60s and 70s, and many of them were in military uniforms. They came to interfere with our peaceful protest as they had done during many previous protests. They brought a number of huge banners and stood in front of our group holding those to block us from being seen by passersby. They shouted at us, "These communists! Go to North Korea!” They used violent language and even tried to exercise physical violence towards a few female protesters. One old woman actually cursed at me and tried to hit me when I tried to take photographs of the scene. A man from a similar group during a previous protest had been videotaped, stating that each person had been paid $100 per protest. These people are allegedly organized by the Korean Veterans Association with funding from the NIS in an attempt to obstruct protests by citizens.

불행하게도 금요일 시위가 열리는 동안 불청객들이 나타났다. 극우 보수주의자 단체가 시위를 못하도록 우리에게 겁을 주려 그곳에 나타났다. 이 단체는 약 20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부분은 6, 70대의 노인 남자분들과 몇몇 여자분들이며 상당수는 군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전의 시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평화적인 시위를 방해하기 위해 왔다. 큰 현수막을 많이 가지고 와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볼 수 없도록 우리 그룹 앞에서 현수막을 치켜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공산주의자들! 북한으로 가라!” 라고 소리쳤다. 그들은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했고 심지어 몇몇 여성 시위자들을 향해 폭력행사를 시도했다. 실제로 한 노인 여성은 내가 그 광경을 사진으로 찍으려 했을 때 나에게 욕설을 퍼부우며 때리려 했다. 이렇게 시위를 방해했던 그룹의 한 사람이 지난 시위 중, 시위 참여시 $100를 댓가로 받는다고 말한 것이 비디오로 찍혔던 사실이 있었다. 이 노인들은 국정원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한국 재향군인회에 의해서 시민들의 시위를 방해하기 위해 동원된다고 전해진다.

Freedom of assembly and association is guaranteed in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It is a violation of the Constitution if the South Korean government attempts to ban or interfere with any peaceful rally or protest. There was a time in the 60's through the 80's in South Korea when the government could do that. In the darkest era in the South Korean history when the country was ruled by military dictators, such as the father of the current president, the government arrested, tortured, and even executed any political dissent, mostly even without any proper legal procedure.

집회 결사의 자유는 미국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만약 한국 정부가 평화적인 집회나 시위를 금지하려 하거나 방해하려 시도한다면, 이는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국 정부가 그렇게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이 현 대통령의 아버지와 같은 군사독재자들에 의해 통치되었던 최악의 암흑기에, 정부는 대부분 적법한 절차없이 정치적 반대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심지어 사형시켰다.

Last week a lawmaker from the ruling party, Kim Jin-Tae, who accompanied Park Geun-Hye on her European tour wrote on his facebook about the protest held by South Korean residing in Paris against Park. He said "Photographs of the protesters have been taken and I will make the protesters pay the high price for their actions!" He had worked as a public prosecutor before he entered the Parliament. Kim Jin-Tae seems to think he is above the law and he can treat people unconstitutionally. His actions speak against the spirit of Democracy and the freedom of expression. This may be a clear sign that democracy is truly dying in South Korea.

지난 주 박근혜의 유럽 순방에 동행했던 여당 국회의원 김진태는 그의 페이스북에 프랑스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박근혜 규탄을 위해 가진 시위에 대하여 글을 남겼다. “시위자들의 채증사진을 다 찍었고, 이들이 시위를 벌인 데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 검사로 일했었다. 김진태는 자신이 법 위에 있고 위헌적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의 행동은 민주주의 정신과 표현의 자유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정말로 죽어가고 있다는 확실한 표시일지도 모른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9&table=c_sangchu&uid=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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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사자, 표범, 재규어의 고향은 히말라야

호랑이, 사자, 표범, 재규어의 고향은 히말라야

 
조홍섭 2013. 11. 19
조회수 13추천수 0
 

티베트서 가장 오랜 화석 발견, 대형 고양이과 동물 '아시아 기원설' 확인

넓은 이마는 추운 기후 적응, 히말라야 산맥 솟으면서 세계로 확산

 

새로 발견된 고양이과 맹수 조상_s_Mauricio-Anton.jpg » 새로 발견된 고양이과 맹수 조상의 화석을 바탕으로 복원한 모습. 현생 눈표범과 비슷하다. 그림=모리시오 안톤, <왕립학회보 비>

 

호랑이, 사자, 표범 등 대형 고양이과 동물은 서식지 최상위 포식자로서 생태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또 이들의 상당수는 아주 심각한 멸종위기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이들이 언제 출현해 어떻게 분화했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미국과 중국 연구자들은 이제까지 알려진 것보다 약 200만년 더 오랜 대형 고양이과 동물의 두개골 화석을 발견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발견으로 이들 대형 맹수는 아시아에서 처음 출현했으며 히말라야 산맥이 솟아오르면서 세계 곳곳으로 확산해 분화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USAID Afghanistan_640px-Big_cat_in_Afghanistan.jpg » 아프가니스탄에서 촬영된 눈표범의 모습. 추위에 적응해 눈 사이가 넓고 꼬리가 뭉툭하다. 사진=아프가니스탄 USAID, 위키미디어 코먼스

 

고양이과 동물 가운데 덩치가 큰 표범아과에는 호랑이, 사자, 재규어, 표범, 눈표범, 구름표범 등이 속해 있다. 여태껏 이들의 기원과 분화를 설명하는 길은 현생 맹수들의 유전자를 분석해 추론하는 것뿐이었다.

 

2006년 미국 과학자들은 분자생물학 연구를 통해 대형 고양이과 동물이 1000만~1100만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해 퍼져나갔다고 밝혔지만, 기존의 화석연구와 어긋나는 부분이 많아 논란이 거듭됐다.
 

이제껏 알려진 가장 오래된 대형 맹수의 화석은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것으로 380만년 전 두개골 조각 등이 전부였다. 그런데 2010년 미국 남 캘리포니아 대학 돈사이프 캠퍼스의 박사과정생이던 잭 쳉은 중국과 파키스탄 국경인 티베트의 오지를 조사하다 강변에서 동물 화석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cranium.jpg » 이번에 발견된 대형 고양과 동물의 두개골 화석(오른쪽)과 3차원 복원 모습. 사진=모리시오 안톤, <왕립학회보 비>

 

절벽에 묻혀있다 침식돼 떨어져 나온 120개의 화석은 지금은 멸종한 영양, 말, 코뿔소의 것이었는데, 그 속에 대형 고양이과 동물 3마리의 거의 온전한 두개골 하나를 포함해 이빨과 턱뼈 등이 들어있었다.
 

이 맹수는 체중이 20㎏ 정도로 호랑이와 사자는 물론이고 눈표범보다도 약간 작았던 것으로 추정됐는데, 추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찬 공기를 데우는 구실을 하는 부비동이 커 이마가 넓었다.

 

Panthera-blytheae-Mauricio-Anton.jpg » 이번에 발견된 대형 고양이과 동물 화석 두개골과 이를 복원한 모습. 그림=모리시오 안톤, <왕립학회보 비>
 

이번 연구로 대형 고양이과 동물의 기원은 400만~590만년 전으로 끌어 올려졌고,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기존 연구가 확인됐다. 새롭게 그린 고양이과 맹수의 진화 과정은 이렇다. 약 1640만년 전 티베트에 이들의 첫 조상이 출현했고, 600만년 전에는 이번 화석의 주인공을 비롯해 눈표범의 조상, 호랑이의 조상 등 3종이 아시아 고원지대를 누볐다. 사자와 재규어는 훨씬 나중에 가지 쳐 진화한다.

big cat map_s.jpg » 대형 고양이과 동물의 확산 과정. 그림=모리시오 안톤, <왕립학회보 비>

 

티베트 고원의 남서부에는 다양한 말, 영양, 여우 등의 화석이 출토된다. 당시의 기후는 건조했고 너른 평원과 히말라야의 가파른 절벽이 있는 경관이 펼쳐졌다. 히말라야 산맥이 차츰 솟아오르면서 동물들의 서식지는 나뉘었고 맹수들도 그들을 따라 흩어져 다양한 환경에 적응했다.
 

그런 점에서 티베트 고원지대는 대형 고양이과 포식동물이 기원해 분화한 곳일 뿐 아니라 그들의 먹이였던 다양한 초식동물이 다가올 빙하기에 적응할 ‘훈련장’이자 빙하기 때 피난처 구실도 했을 것이다. 이 연구는 국제학술지 <왕립학회보 비> 최근호에 실렸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Z. Jack Tseng et. al., Himalayan fossils of the oldest known pantherine establish ancient origin of big cats, Proc. R. Soc. B 2014 281, 20132686, published 13 November 2013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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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경호실, 유신 시절 복기하나

‘차벽’과 경호실 직원 폭력, 유신정권 연상돼
 
육근성 | 2013-11-19 10:56:0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대통령 시정연설이 있었던 18일 국회 본청 앞 돌계단 위. 청와대 경호실은 대형버스 세 대로 ‘차벽’을 세우고 본청 앞을 막았다. 경찰도 국회경비대도 아닌 청와대 경호실이 버스를 동원해 본청 앞을 가로막은 것은 민주화 이후 초유의 일일 것이다.

본청 앞 대형버스로 막은 것 다분히 의도적

연설을 마친 박 대통령이 국회를 떠난 뒤에도 경호실이 본청 앞에 ‘근혜산성’을 세운 것은 시정연설 직후 예고돼 있던 야당의 규탄집회와 정당해산심판 청구에 항의하는 통합진보당의 농성을 방해하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던 것으로 풀이된다.

결국 충돌이 발생했다. 청와대 경호실 파견근무를 하던 22경찰경호대 소속 순경과 민주당 강기정 의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강 의원은 뒷덜미를 잡히고 팔이 뒤로 비틀린 채 몇 분간 끌려 다녔고, 경호대 소속 순경은 강 의원의 뒷머리에 받혀 입술이 터졌다.

이를 두고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강 의원이 가해자라며 법적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민주당과 강 의원은 가해자는 경호실 직원이고 폭행을 당한 쪽은 강 의원이라고 주장했다.

“가해자는 민주당 강기정 의원” 우기는 청와대와 새누리당

청와대 경호실은 강 의원이 먼저 버스를 빼라며 폭언을 퍼부었으며 상대가 국회의원 신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경호실 직원이 강 의원의 뒷덜미를 잡자 강 의원이 자신의 뒤통수로 경호실 직원을 가격해 입술이 터지는 상처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주장은 다르다. 대통령이 국회를 빠져 나간 뒤에도 여전히 ‘차벽’이 치워지지 않자 규탄대회를 준비하던 강 의원이 차를 빼라고 버스에 발길질한 것뿐인데 경호실 직원이 뛰어나와 강 의원의 뒷덜미와 허리춤을 잡았으며, 노영민 의원 등 주변 의원들과 민주당 당직자들이 강 의원이 국회의원 신분임을 수차례 밝히며 제지하고자 했지만 계속 뒷덜미를 놓지 않으려고 강 의원의 목을 더 세게 흔들던 와중에 강 의원 뒤통수가 자기 입술에 부딪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 의원은 ‘차벽’을 치우라고 요구하다가 경호실 직원들로부터 심각한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이다.

“(경호실 직원이) 버스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먼저 앞 목을 잡더니 바로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또 다른 손으로는 내 허리춤을 움켜쥐었다. 동료 경호원까지 나오자 양팔을 뒤로 꺾었다. 그렇게 3~4분 가량 뒷덜미를 잡혀 젖혀진 상황이 이어졌다...양팔을 뒤로 꺾은 채 ‘의원이면 다냐’고 했다. 말리는 노영민 의원을 밀치기도 했다.”

강기정 “폭력을 휘두른 건 경호실 직원들”

강 의원은 강창희 국회의장에게 청와대 측의 해명을 요구해 놓은 상태다. “청와대 비서실장은 몰라도 정무수석을 불러 이런 상황을 어필하겠다”는 국회의장의 대답을 받아 놓았다지만 과연 그렇게 될지 미지수다. 강 국회의장은 ‘박근혜 7인회’ 멤버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하지 않던가.

<육사 출신을 청와대에 대거 포진시킨 박근혜 정부 패러디물>

이번 사건의 발단은 청와대 경호실이 국회 본청 앞에 차벽을 설치한 데에 있다. 본청 앞 돌계단 위에 버스 세 대를 나란히 주차시킬 경우 본청과 의원 주차장이 격리될 수밖에 없다. 본청 앞 공간과 돌계단을 이용한 집회는 개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본청 앞에서 이뤄질 민주당의 규탄대회와 통합진보당의 농성을 방해하겠다는 의도가 깔린 ‘차벽’이라면 청와대 경호실이 민감한 정치적 상황에 개입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차벽’과 경호실 직원 폭력, 유신정권 연상돼

경호실이 국회 본청 앞에 차벽을 세우는 등 과감한 행동을 보인 것은 최고 권력자가 청와대 경호실에 상당한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과거 유신 때처럼 말이다.

<막강한 권력 유신정권 경호실. 앞줄 좌로부터 노태우, 전두환 경호차장보, 차지철 경호실장>

박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차관급이었던 경호실장을 장관급으로 격상시키고 육군참모총장 출신을 그 자리에 앉혔다. 1974년 문세광의 저격으로 육영수가 사망하자 박종규 대신 경호실장이 됐던 육군 중령 출신 차지철도 그랬다.

차지철은 약관의 나이에 박정희의 총애로 경호실장에 오른다. 청와대에 입성하자마자 차관급이었던 경호실장 직급을 장관급으로 격상시키고 경호실을 군 출신으로 채웠다. 경호차장에는 현역 중장 또는 소장을, 차장보에는 현역 준장을 임명했다. 군 장성들에게 청와대 경호실은 출세의 관문이었다. 전두환·노태우 역시 경호실 차장보 출신이다.

<복장까지 히틀러 SS 흉내냈던 '차지철 경호실'>

히틀러 SS 배끼려 했던 ‘유신정권 경호실’

권력자를 호위한다는 명분으로 경호실이 정치에 개입해 막강한 힘을 과시했던 사례가 있다. 바로 박 대통령의 아버지가 만든 유신정권 경호실이 그랬다.

차지철은 히틀러의 SS를 흉내낸 제복을 경호실 요원들에게 입히고 완벽하게 ‘박정희 친위대’로 만들려 했다. 당시 경호실 권력은 대단했다. 심지어 경호실이 주최하는 국기하강식에 장차관과 군 고위장성들이 빠짐없이 참석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국무총리와 중앙정보부장까지 차지철의 눈치를 봐야 했다. 박정희는 장차관과 정치인들을 제 입맛에 맞게 길들이는데 이런 차지철을 이용했다.

가슴에 총 맞고 무너진 ‘경호실 권력’

유신정권 당시 경호실의 오만은 극에 달했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이 발발하자 차지철이 박정희에게 “야당이든 학생이든 탱크로 밀어서 캄보디아처럼 2~3백만 죽이면 조용해집니다”라고 간언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박정희의 총애로 만들어진 ‘경호실 권력’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막을 내린다. 박정희와 육사 동기인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를 제거하면서 군 대선배인 자신을 아랫사람 취급해온 차지철의 가슴에 총알을 박은 것이다. 김재규가 거사를 감행하기로 작심한 데에는 차지철의 오만이 크게 작용했다.

박 대통령도 ‘경호실 권력’의 폐단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 박정희의 신변을 지켜야할 경호실이 아버지에게 총부리 겨누도록 김재규를 부추긴 결과가 됐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이제 경호실까지 유신 복기하나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박정희와 유신 시대’가 부활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국회 본청 앞 사건을 보면서 심지어 경호실까지 유신 시대를 복기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금하기 어렵다.

청와대 경호실은 대통령의 신변을 보호하는 게 제 역할이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 본청까지 나와 차벽을 세우고 야당 의원의 뒷덜미를 잡는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야당 의원을 항거불능한 상태로 제압하고 이리저리 끌고 다닌 건 명백한 폭력이다. 차벽을 세우도록 허락한 국회사무처에게도 책임이 있다. 청와대 비서실장과 국회의장이 국민과 야당에게 사과 해야 한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2&table=c_aujourdhui&uid=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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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일간 '길거리 미사'가 그들을 살렸다

[현장] 쌍용차 사태 해결을 위한 대한문 앞 마지막 미사... 분향소 평택으로 옮겨

13.11.18 22:00l최종 업데이트 13.11.19 09:16l
유성애(find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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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매일 미사'가 마지막으로 열렸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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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온도 -3.6°C, 급기야 하늘에서는 하얀 눈송이가 흩날렸다. 코가 빨갛게 변한 수녀들과 하얀 사제복 위 겨울옷을 껴입은 신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18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매일 미사'의 모습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주최로 열린 이날 미사에는 50여 명의 신부를 포함해 평소보다 많은 300여 명이 참석했다. 간이의자 외에 바닥에 깐 돗자리도 가득차 결국 60여 명은 서서 미사를 드려야 했다. 4월 8일부터 225일간 이어져 온 대한문 앞 매일 미사가 이날을 마지막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쌍용차범국민대책위는 지난 16일, 2009년 사측으로부터 해고당한 후 사망한 쌍용차노동자·가족 24명을 기리는 위령제를 지내면서 대한문 앞 분향소를 1년 7개월만에 경기도 평택 쌍용차 공장 앞으로 옮기겠다고 밝혔다. 이제는 해고자 문제에 대해 사측이 답할 차례라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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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열린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매일 미사에는 수녀님들을 비롯해 평소보다 많은 300여명이 참석했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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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에 참가한 유재선 쌍용차 해고노동자는 "그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저녁을 함께 해준 분들께 감사하다"며 "10년 넘게 아버지하고만 살면서 많이 외로웠는데 미사가 시작되면서 매일 여섯 시 반 저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앞으로도 가족들 눈에 눈물 나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싸우겠다"고 말했다.

'희망의 빛' 마주한 225일... "비정규직 없는 세상 위해 계속 투쟁하겠다"

"지난 225일 간 미사에 함께하면서 진정으로 사람만이 희망임을 확인했습니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준 나승구 대표 신부님을 비롯해 함께해 준 분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반드시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는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쌍용차 문제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해 더 당차게 웃으며 투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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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마지막으로 열린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미사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득중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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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중 쌍용차 지부장은 발언을 통해 "매일 미사는 저희에게 든든한 희망이자 버팀목이었다"며 "반드시 공장으로 돌아가서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225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미사에 참석한 신도도 있었다. 세례명이 '엘리사벳'인 박종금(73)씨는 "뉴스에서 미사를 한다기에 여기 처음 왔었는데, 팔도강산에서 모이는 사람들과 멋진 신부님들을 보며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진짜 반해버렸다"고 말해 사람들의 웃음과 박수를 자아냈다.

마이크를 잡은 김안드레아 수녀는 미사에 참석하며 처음 마주한 것이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희망 없는 눈빛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사에 오면서 동료와 가족을 보내고 살아남은 자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닌 이들과 함께 울 수 있었다"며 "시대에 광풍이 불어도 계속 함께 걸어가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이날 성명서를 통해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후 불법연행 등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면서 정부를 비판했다. 이들은 "오늘 끝나는 대한문 미사는 또 다른 기도의 시작"이라며 "박근혜 정권에 탄압당한 노동자뿐 아니라 진실과 공정에 헌신하는 모든 이의 연대로 다시 거듭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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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열린 대한문 미사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수녀님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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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평택공장 앞 송전탑에 올라 문제해결을 촉구하며 고공 시위를 벌였던 한상균 전 지부장은 <오마이뉴스>와 만나 "쌍용차 해고노동자 등 국가 폭력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매일 미사'는 큰 힘이 됐다"며 "쌍용차 노동자들도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치유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인국 신부는 "지난 225일 동안 서글프고 처량한 날도 많았지만 그래도 희망의 빛을 보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쌍용자동차의 대주주인 인도 마힌드라그룹 아난드 회장은 지난 11일 은수미 민주당 의원 등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의원 3명을 만나 쌍용차 정리해고자의 복직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평택으로 넘어 간 쌍용차 노동자들의 '희망'이 사측의 결단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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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열린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마지막 미사에서는 신부 50여명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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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위해 마지막 미사가 열린 뒤 참석자들이 서로 인사하며 껴안고 있는 모습.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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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언제 다시 가볼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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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광 시작 15주년..중단 5년 현주소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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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1.18 17:3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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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금강산을 방문한 대북 인도적 지원단체 '푸른나무'가 촬영한 금강산 모습. [통일뉴스 자료사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지 18일로 15주년을 맞았다.

금강산 관광은 1998년 11월 18일 관광선 '금강호'가 이산가족 등 826명을 태우고 동해항을 출발, 북한 장전항에 입항하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2003년 9월 금강산 육로관광이 시작됐고, 2007년 5월 내금강이 문을 열었으며, 2008년 3월부터는 승용차를 이용한 관광도 가능해졌다.

1998년 첫해에는 1만 554명, 1999년 14만 명, 2004년 26만 명, 2007년 34만 명 등 총 193만 4천662명이 금강산을 다녀왔다. 여기에는 단순 관광뿐 아니라 수많은 남북공동행사도 포함됐다.

 

   
▲2001년 금강산으로 향하던 관광선 '설봉호'에서 열린 조계종의 천도제. [통일뉴스 자료사진]

 

물론 금강산 관광이 부침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1999년 6월 관광객 민영미 씨가 북한 환경감시원에게 귀순을 공작했다고 억류되면서 잠정 중단되었고, 2003년 4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으로, 같은 해 8월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자살 등으로 잠정중단됐다.

하지만 2008년 7월 북한군의 총격으로 관광객 박왕자 씨가 숨진 사건으로 관광은 5년째 중단된 이후 지금까지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피격사망사건으로 정부는 북측에 △진상규명, △재발방지, △신변안전을 위한 제도적 보장 등 '3대 선결 조건'을 요구해왔다.

 

   
▲ 2008년 7월 당시 황부기 정부합동조사단 단장이 박왕자씨 피격사건을 중간발표하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북측도 2009년 8월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만나 △금강산 관광 재개, △남측 인원의 군사분계선 육로통행과 북측 지역 체류 재개, △개성관광 재개, △백두산 관광 개시 △남북 이산가족상봉 및 친척 추석 상봉실시 등의 공동보도문에 합의했다.

하지만 정부는 현 회장과 김 위원장의 공동보도문을 두고 정부 당국 간 합의가 아니라며 묵살해왔다.

그리고 2010년 천안함 사건으로 대북제재인 '5.24조치'를 발표하고, 연평도 포격전으로 남북관계가 냉각기에 접어들면서 이명박 정부 당시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됐다.

 

   
▲ 2009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공동보도문을 발표하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조건에 조건이 붙는 금강산 관광 재개 논의

그렇지만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한 희망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정부와 차별성을 갖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라는 대북정책을 마련한 박근혜 정부는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해 '신변안전보장 제도적 합의 마련'이라는 조건만 해결된다면 가능하다는 다소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다.

남북은 '격' 문제로 무산됐지만, 지난 6월 서울에서 고위급 회담을 열고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 등 남북 간 현안을 포괄적으로 논의하려고 했다.

또한, 개성공단 가동중단 이후 북측이 금강산 관광 재개와 이산가족상봉 행사를 묶어 문제 해결에 나섰지만, 정부는 이산가족상봉 행사 우선 원칙을 내세웠고,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남북 당국 간 실무회담을 10월에 열 것을 역제의했다.

그러나 북한이 합의까지 이룬 이산가족상봉행사 무기한 연기를 통보하면서 금강산 관광 재개 논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 금강산 관광 중단 이후 2009년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이산가족상봉행사. [통일뉴스 자료사진]

 

일련의 흐름 속에서 정부는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당국 간 실무회담을 제기할 계획은 없다.

최근 확정된 '제2차 남북관계발전기본계획' 정부 안에는 금강산 관광을 두고, "확고한 신변안전 보장 등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조치를 토대로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통일부 당국자는 "금강산도 금강산이지만 현재 진행되는 개성공단 문제가 잘 협의.합의되고 성과를 거두고 일방적으로 연기한 이산가족상봉행사가 재개돼야 한다"라며 "구체적으로 회담을 먼저 제안하거나 추진할 계획은 없다. 지금 되고 있는 게 하나씩 되면서 신뢰를 쌓는 게 좋다"라고 말했다.

즉, 개성공단 통행.통신.통관 등 3통 문제가 해결되고, 개성공단의 국제화 발판이 마련된다면, 그리고 북측이 일방적으로 연기한 이산가족상봉행사가 재개될 경우, 상황에 따라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당국 간 실무회담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신변안전의 제도적 보장이라는 조건에 개성공단의 발전적 정상화와 이산가족상봉행사 성사라는 조건이 더 붙어, 금강산 관광 재개 논의는 더 어려운 상황이 놓였다.

금강산 관광 중단 피해액 1조원 넘어.. 정부는 모르쇠

정부가 남북 간 현안을 선택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가운데, 금강산에 투자한 기업들은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현대아산의 경우, 지난 3월 현재 금강산 관광 매출 손실액이 5천1백억 원에 달한다. 49개 협력업체로 구성된 '금강산기업인협의회'는 6월 현재 5천1백억 원의 피해를 보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남북경협기업인비상대책위원회'와 '현대경제연구원'이 분석한 자료로는, 5.24조치 이후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인한 직접적인 경제적 피해는 남한이 1조 2천561억여 원을, 북한은 2천564억1천여만 원의 손해를 보고 있다.

이 밖에 생산유발 차질, 부가가치 유발 차질 등 간접적 피해액은 3조 원을 훨씬 넘고, 고용 차질도 3만5천여 명에 달한다.

그뿐만 아니라 금강산 관광 길목이던 강원도 고성군의 경제는 붕괴수준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통일부는 구체적 피해액을 제대로 집계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금강산 대북투자 내역을 중심으로 약 3천5백억 원으로 파악하고 있다.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인해 텅빈 아산 휴게소 식당. [통일뉴스 자료사진]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피해지원 명목으로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남북협력기금에서 총 32개사 114억 원을 특별대출하고, 2012년 긴급운영경비 무상지원으로 40개사 4억2천만 원이 지원된 것이 전부이다. 여기에 특별대출은 되갚아야 할 금액으로 현재 상환유예상태이다.

이에 반해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에 대해서는 범정부적 차원에서 580억 원이 넘게 지원됐다.

그렇기에 금강산 투자 기업들이 형평성을 제기하고,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봐달라고 호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정부는 이들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지난 10월 5년 만에 통일부 장관과 금기협 관계자들의 면담이 이뤄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금기협 관계자들이 요구한 통일부-금기협-현대아산의 협의체 마련에 대해 통일부 당국자는 "필요하면 소통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 수시로 전화하고 만나고 간담회를 할 예정"이라며 협의체 구축에 난색을 보였다.

또한, 기업들의 추가대출 요구에도 다른 기업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 금강산으로 향하는 동해선 남북출입사무소에 불이 꺼져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남측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듯 금강산 지구를 관광상품으로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북한은 2010년 남측 자산 동결.몰수에 이어, 2011년 현대아산의 독점권을 취소했고, 같은 해 5월 '금강산국제관광특구법'을 채택했다. 그리고 금강산과 인접한 원산을 관광특구로 개발하면서 원산-금강산을 잇는 관광사업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민족경제'와 남북화해의 상징으로 시작된 15년 전 금강산 관광이 남북 간 힘겨루기로 5년째 중단되면서 관련 기업들을 비롯해 일반 국민들이 상당한 손해를 입고 있다. 그리고 우리 정부가 조건을 내세운 금강산 관광 재개 논의 원칙 속에서 북한은 나름대로 관광산업을 개발하고 있다.

씁쓸한 금강산 관광 시작 15주년을 맞아 금기협은 18일 입장을 발표했다.

이들은 입장문에서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던 그날의 시작이 또 다른 아픔으로 남이나 북이나 생채기 내기에 급급한 상황이 되어버렸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우리의 조국은 '대한민국'"이라며 "이제 중요하고 시급한 만 5년간 방치된 금강산 관광 재개 및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 2008년 5월 금강산 구룡연은 등반객으로 붐볐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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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탄압의 배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진보당 탄압의 배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한호석의 개벽예감 <88>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3/11/19 [00:36] 최종편집: ⓒ 자주민보
 
 

 


2001년 9월 22일에서 2012년 3월 8일까지 “10년 안에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과 연방통일조국 건설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실현할 민중의 강력한 무기로서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과 민족민주정당 건설! 우리는 이것을 향후 2∼3년 안에 해내자고 결의한다.”

 

 


당찬 인상을 안겨주는 이 문장은 누구의 글인가? 2001년 9월 22일 1박2일 일정으로 충청북도 괴산군 보람원에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 진행한 ‘2001년 민족민주전선일꾼전진대회’에서 채택한 문서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 -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를 맞는 전국연합의 정치.조직방침에 대한 해설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전국연합’ 대의원 513명이 참석한 그 대회에서는 민족민주정당 건설→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연방통일조국 건설이라는 방침을 채택하였다. 2001년까지만 해도 ‘전국연합’은 진보정당이나 진보정치라는 개념을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2001년 9월 23일 ‘전국연합’이 앞으로 2∼3년 안에 민족민주정당을 창당하겠다고 결의하였을 때는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때로부터 1년 8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따라서 ‘전국연합’이 민족민주정당을 창당하는 경우 진보정당이 두 개가 될 판이었다.

 

 


이런 사정을 고려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국연합’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04년에 민주노동당에 대거 입당하여 그 당의 주도세력으로 되었고, 그 주도세력은 ‘2001년 민족민주전선일꾼전진대회’에서 채택한 방침을 보완하여 진보정당 건설→진보적 정권교체→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자주적 평화통일 실현으로 이어지는 발전경로를 제시하였다.

 

 


 


2001년 9월 23일 ‘전국연합’이 채택한 방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진보적 정권교체를 의미하는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이었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해야 진보적 민주주의도 실현할 수 있고, 자주적 평화통일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1년 9월 23일 ‘전국연합’ 대의원 513명이 모여 앞으로 10년 뒤에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겠다고 결의하였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들의 결의를 ‘극소수 운동권 핵심세력의 희망사항’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결의를 실천하기 위해 10년 동안 헌신분투한 결과 놀라운 현실이 펼쳐지게 되었다. 2001년 9월 23일 513명이 진보적 정권교체를 10년 뒤에 실현하겠다고 결의한 때로부터 11년이 지난 2012년 3월 8일 이정희 당시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와 한명숙 당시 민주당 대표가 두 당이 합의한 ‘범야권 공동정책합의문’을 발표한 것이다.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이 공동정책합의문을 발표한 것은 6.25전쟁 이후 정치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정당들 사이의 정책연합을 실현한 주목할 만한 사변이었다. 그 두 원내정당의 정책연합은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째, 통합진보당이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제기하였던 진보적인 정책의제들이 그 두 당의 공동정책의제에 포함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일보> 2012년 3월 12일부 분석기사는 “과거 총선과 대선 때마다 현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이 주장했던 정책들이 (범야권 공동정책합의문에) 다수 포함됐다”고 지적하였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미FTA 반대, 제주해군기지 건설 즉각 중단, 국립대학 법인화 폐지, 대기업의 순환출자 금지 같은 진보적인 정책들이다.

 

 

 

둘째,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이 공동정책의제를 실현하기 위한 상설기구를 결성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공동정책의제를 실현하기 위한 상설기구를 결성하려는 것은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공동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뜻이다.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이 이처럼 ‘정책연합’을 실현한 것은 그 두 당이 2012년 대선에 범야권단일후보를 출마시켜 승리함으로써 공동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강력한 공동집권의지를 표출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일보>는 2012년 3월 12일부 분석기사에서 “민주노동당은 당시만 해도 집권과는 관계없는 노동자정당, 이념정당이었다. 그러나 소수자정당이 내세웠던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대상황변화와 ‘선거연대’라는 정치공학과정을 거치면서 집권을 내다보는 정당의 정책이 되어가고 있다”고 크게 ‘우려’하였다.

 

 


원래 공동정부구성을 처음으로 제안한 쪽은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민주당이었다. <노컷뉴스> 2010년 1월 8일 보도에 따르면, 2010년 1월 7일 정세균 당시 민주당 대표는 신년기자회견에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국민참여당에게 6.2지방선거에서 연대하고 공동지방정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1년 1월 수많은 유권자들은 2012년 대선에 범야권단일후보가 출마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예컨대, 여론조사기관의 설문조사결과를 인용한 <경향신문> 2011년 1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2012년 대선에서 범여권단일후보와 범야권단일후보의 양자대결구도가 형성되는 경우 범여권단일후보 지지도는 38.5%밖에 되지 않았는데 범야권단일후보 지지도는 45.5%나 되었다.

 

 


당시 일반국민들은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공동정부수립이라는 고도의 정치변화를 명시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범야권단일후보에 대한 기대감은 매우 높았다. 그런 기대를 안고 대권주자로 떠오른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이사장은 2011년 9월 1일 공식석상에서 “야권대통합의 목적은 총선, 대선승리가 아니라 정권교체를 통해 진보개혁진영의 공동연합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9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범야권단일후보가 승리하여 사상 최초의 공동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이 열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국정원은 왜 2010년 5월부터 내사를 시작하였을까?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2012년 대선에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범야권단일후보가 출마하는 경우, 여권후보를 꺾고 당선될 가능성은 매우 높았고, 그에 따라 그 두 당이 구성한 공동정부가 등장할 가능성도 높았다.

 

만일 공동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노력이 아무런 반대와 방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2012년 대선에 범야권단일후보가 출마하여 승리하고 공동정부가 수립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혐의’를 조작하고 그 당을 강제로 해산시키려는 박근혜정권의 탄압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2012년 대선에 범야권단일후보가 출마하여 승리하고 공동정부가 수립될 것으로 내다보았던 기대와 희망과 요구는 전혀 실현되지 못하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기대와 희망과 요구와 어긋나는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범야권단일후보의 대선승리와 공동정부수립을 향한 기대와 희망과 요구가 사라지고 새누리당이 정권연장에 성공한 사태로 귀결된 원인은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 원인은 범야권단일후보의 대선승리와 공동정부수립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변화를 극력 거부한 반대세력의 대응이 있었다. 그런 대응행동이 당시 이명박정권에 의해 취해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명백하다.

 

 

 

이명박정권이 범야권단일후보의 대선승리와 공동정부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대응행동은 통합진보당을 ‘종북정당’으로 모략함으로써 그 당과 민주당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었다. ‘여론재판’을 벌여놓고 통합진보당을 ‘종북정당’으로 모략하면, 민주당은 그 당과 자연히 거리를 두게 될 것으로 타산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타산에 따라 이명박정권에게는 ‘종북정당’ 모략을 위한 ‘증거’들이 필요하였는데, 이명박정권 시기의 국정원이 ‘증거수집’에 나섰다. <동아일보> 2013년 8월 28일 보도기사에서 차경환 수원지검 2차장 검사는 국정원이 이석기 의원을 비롯하여 현재 구속 중인 통합진보당 인사들에 대한 내사를 2010년 5월부터 시작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국정원은 통합진보당(당시는 민주노동당) 인사들에 대한 내사를 왜 2010년 5월부터 시작했을까? 그 까닭은 2010년 6월 2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당시 민주노동당이 뜻밖의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 뜻밖의 성과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2010년 2월 10일 ‘2010 지방선거 공동승리를 위한 야5당 협상회의’가 결성되었고, 2월 16일에는 ‘야5당 정책연합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아쉽게도, 야5당은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하는 바람에 그 합의를 이행하지는 못했지만, 2010년 4월 현재 지지율 13.3%를 기록하며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민주노동당은 2010년 6월 2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를 실현하여 142명을 당선시켰고, 민주당과 손잡고 두 곳에서 공동지방정부를 구성하였고, 26곳에서 공동지방정부구성에 대한 협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이 6.2지방선거에서 지역별 야권연대를 통해 공동지방정부를 구성한 사상 최초의 경험은 당시 2년 앞으로 다가온 2012년 12월 대선에서 범야권단일후보를 출마시켜 공동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을 성큼 앞당긴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다.

 

 


둘째,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에게 있어서 공동정부수립은 그 당의 최종목표가 아니었다. 그 당의 최종목표는 진보적 정권교체였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은 2012년 대선에서 야권연대로 승리하여 공동정부를 수립하는 중단단계를 거쳐 2017년 대선에서 마침내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려는 단계적 실현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공동정부수립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쳐 진보적 정권교체를 추구하려는 민주노동당의 집권전략을 간파한 국정원이 수수방관할 리 없었다. 국정원은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의 야권연대를 통한 공동정부수립을 저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2010년 5월부터 민주노동당에 대한 내사를 감행하면서 무슨 ‘대북혐의점’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썼어도 결국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국정원의 집중내사는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내사에서 실패한 국정원이 ‘북의 지령을 받은 반국가단체’를 적발하였다고 하면서 2011년 7월 8일에 터뜨린 것이 이른바 ‘왕재산사건’이다.

 

 


 


국가안보실이 말하는 ‘비정형적 도발’과 국정원이 말하는 ‘내란예비음모’

 

 


2013년 5월 28일 <연합뉴스>는 흥미로운 보도기사를 실었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박근혜정권이 출범하기 하루 전날인 2013년 2월 24일 청와대에 들어가 위기관리상황통제권을 넘겨받은 뒤로 3개월 동안 단 하루도 자택으로 퇴근하지 못하고 청와대 지하층의 위기관리상황실에서 비상특근을 계속해오다가 5월 24일에야 자택으로 퇴근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3개월 동안 청와대 인근 군부대의 장교숙소(BOQ)에서 숙식을 해결하였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택에 잠깐씩 들렀다고 한다. 안보부문 최고책임자인 국가안보실장이 3개월 동안 그처럼 긴박한 비상특근태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전쟁재발위험이 어느 정도로 격화되었는지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자기들은 그처럼 초긴장상태에 있었으면서도, 3개월 동안이나 지속된 전쟁재발위험이 사실대로 알려지면 남측에서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이 일어날까봐 그들은 전쟁재발위험에 대해 쉬쉬하며 관련정보를 통제하기에 급급하였다.

 

 


중요한 것은, 김장수 국가정보실장이 3개월 동안 집에 가지도 못하고 군부대 장교숙소에서 숙식하며 청와대 지하층의 위기관리상황실에서 비상특근을 계속한 2013년 2월 24일부터 5월 24일까지 3개월 동안의 상황이 ‘위기관리단계’에 근접한 비상사태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기관리단계’란 박근혜정권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른 전쟁재발위험에 대처해야 하는 비상사태를 뜻한다.

 

 


박근혜정권은 출범과 함께 그런 비상사태를 맞았지만, 전쟁재발위험에 대처할 준비를 아직 갖추지 못한 채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위기관리단계’에 진입하는 경우, 정권 차원의 긴급대응행동을 취하게 되어 있는데, 당시 박근혜정권에게는 그런 긴급대응행동을 취할 준비가 거의 없었다. 박근혜정권이 ‘위기관리단계’에 대처하여 긴급대응행동을 취하려면, 우선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부터 있어야 하는데, 2013년 4월 말 현재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그 두 지침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머니투데이> 2013년 4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2013년 4월 18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하여 “국가위기요인을 사전에 발견해 선제대응하겠다. 국가전쟁지침, 국가위기관리지침도 작성 중이고 8월까지 안보관련 최고지침인 국가안보전략지침을 확정해 정부 내에 배포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주목하는 것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사전에 발견해 선제대응하겠다고 말한 ‘국가위기요인’들 가운데 “테러로 분류할 수 있는 비정형적 도발”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일보> 2013년 3월 9일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보도에 따르면, 새로 출범한 박근혜정권의 고위관리들이 2013년 3월 8일 위기관리상황실에서 진행된 긴급회의에서 ‘북의 도발’에 대한 대응책을 검토하였는데, 그들이 예상한 네 가지 유형의 도발 가운데 “테러로 분류할 수 있는 비정형적 도발”이 들어있었다. 또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2013년 4월 18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철도역과 같은 대중이용시설을 중심으로 테러위험 등을 점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면,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적대세력의 비정형적 도발을 사전에 발견하여 선제대응한다는 내용을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에 포함시킨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국정원과 검찰이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통합진보당 인사들을 구속, 기소할 때, 그들이 “RO라고 부르는 혁명조직을 결성하고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내란예비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조작, 적용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조작된 혐의는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에 포함된,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적대세력의 비정형적 도발음모”에 대한 혐의와 일맥상통한다.

 

 


 


‘특별관리’라고 부르는 선제대응

 

 


<연합뉴스> 2013년 11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이 날 열린 첫 공판에서 통합진보당 구속자 공동변호인단은 국정원이 2013년 7월까지만 해도 이른바 ‘RO총책’을 이석기 의원이 아니라 이전 민주노동당 시절에 당직자였던 다른 사람으로 ‘추정’하였고, 이석기 의원은 “RO중앙팀 일원”으로 ‘추정’하고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2013년 8월에 갑자기 이석기 의원을 ‘RO총책’으로 지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동변호인단은 그처럼 갑작스러운 변경행위야말로 국정원과 검찰이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음모사건’을 조작하였음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국정원은 이석기 의원이 아닌 다른 사람을 ‘RO총책’으로 지목하고 그를 2010년 5월부터 3년 동안 계속 감시해오다가 2013년 8월에 갑자기 ‘RO총책’을 이석기 의원으로 교체하면서 통합진보당 인사들에 대한 압수수색과 검거를 자행하였고, 박근혜정권은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내란예비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통합진보당 인사들에게 씌워 통합진보당 해산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하였던 것이다.

 

 


2013년 4월 18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적대세력의 비정형적 도발을 사전에 발견하여 선제대응한다는 취지로 말한 발언내용에 통합진보당에 대한 탄압을 비춰보면, 박근혜정권은 통합진보당 인사들이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비정형적 도발(내란)’을 예비한 음모를 사전에 발견하여 선제대응하였다는 탄압사유를 조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정원을 비롯한 정부기관들의 대선개입 범죄행위가 드러나 그들을 처벌하고 국정원을 해체하라는 각계각층의 요구가 강하게 제기되자, 대선개입을 자행한 자기들에게 쏟아지는 규탄과 비난을 피해보려는 의도에서 국정원이 통합진보당을 탄압하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물론 그런 요인도 작용하였겠지만, 원내정당을 강제로 해산하려는 전대미문의 탄압은 국정원과 검찰이 자행하는 공안기관 수준의 탄압을 넘어서,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에 따라 자행되는 정권 차원의 특대형 탄압으로 보아야 한다.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기밀이어서 무슨 내용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 두 지침에는 1999년 2월 국정원이 작성한 ‘전시대비 비밀문서’에 나오는 이른바 ‘특별관리’라고 부르는 선제대응도 포함된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 비밀문서에 나오는 ‘특별관리’라고 부르는 선제대응은 “위기관리단계에서 남파간첩출신, 사회주의지하혁명조직 구성원, 친북좌익이념단체의 인물, 재야-노동운동단체의 핵심인물, 북한공작조직과 연계혐의가 있는, 내사와 수사.공작 대상자 등을 (국정원이) 경찰, 검찰, 기무사와 함께 특별관리한다”는 것이다. ‘위기관리단계’에서 국정원, 경찰, 검찰, 기무사 등이 자행하는 ‘특별관리’는, 전시에 진보세력이 내란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한 극우독재정권이 진보세력을 말살하려는 선제대응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박근혜정권이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혐의’를 조작하여 그 혐의를 그 당에 확대, 적용하는 최악의 경우에는 공안기관만 탄압에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군부까지 동원할 수 있다.

 

박근혜정권이 통합진보당 탄압에 군부까지 동원할 수 있다는 말이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적 판단이라는 점을 밝혀준 것은 <연합뉴스> 2012년 10월 10일 보도였다. 그 보도에 따르면, 국방부는 이 날 한국군 전체 부대에 배포한 이른바 ‘종북실체 표준교안’에서 “종북세력”으로 지목한 진보세력을 “국군의 적”으로 규정하였다. 군부가 진보세력을 적으로 규정한 것은, 전시상황이 조성될 경우 군부가 나서서 진보세력을 말살하겠다는 극도의 적대감을 드러낸 것이다.

 

 


6.25전쟁이 종전되지 못하고 매우 불안정한 정전상태에서 전쟁재발위험이 전례 없이 격화된 현재의 위기상황에서 군부가 진보세력을 적으로 규정하였고,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그런 내용을 담은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을 작성하였고, 그에 따라 통합진보당을 말살하려는 전대미문의 대탄압이 벌어지고 있는 경악할 사태를 보면서 60여 년 전 이승만정권이 전시에 자행한 끔찍스러운 대학살을 상기하게 되는 것은 결코 무리한 연상작용이 아니다. 그런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역사적 사실은 아래와 같다.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진보세력을 무차별적으로 탄압, 처형한 이승만정권은 식민지시기에 항일세력을 짓누른 일제의 탄압도구였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모방하여 1949년 6월 5일 이른바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30여 만 명에 이르는 진보세력을 그 단체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이승만은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에 공표한 ‘비상조치령 제1호’에서 “국가적 위기에 당하여 반국가죄는 될 수 있는 대로 조속히 또는 엄격하게 처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 명령에 따라, 군부는 1950년 6월 29일부터 서울을 탈환한 9월 28일까지 3개월 동안 남측 전역에 산재한 168개소의 집단학살지에서 ‘보도연맹원’ 30여 만 명 대부분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4.19민주항쟁 직후인 1960년 10월 전국피학살자유족회 회장이 정부기관에 제출한 자료를 인용한 <매일신문> 2000년 1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정권은 6.25전쟁 발발 전후 진보세력과 그 가족 113만 명을 집단학살하였다고 한다.

 

 


 


통합진보당 탄압의 배후에 누가 있는가?

 

 


2013년 10월 23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였다. 그는 워싱턴 방문 중에 수전 라이스(Susan E. Rice)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척 헤이글(Chuck Hagel) 국방장관, 존 케리(John F. Kerry) 국무장관, 제임스 클래퍼(James R. Clapper, Jr.) 국가정보실장을 차례로 만났다. 이제껏 워싱턴을 방문한 남측 역대 정부의 고위관리들 가운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국방장관, 국무장관, 국가정보실장을 두루 만난 사람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밖에 없다.

 

 


언론매체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5월 6일부터 9일까지 워싱턴 방문 중에 미국의 환대를 받았다고 대서특필했지만, 그런 떠들썩한 환대는 과시용이었고, 미국의 실세들이 진짜 환영한 사람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었다.

 

 


미국의 실세들은 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을 그처럼 환영하였을까? 그의 경력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2004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이 되었고, 2006년 노무현정권 말기에 국방장관이 되었고, 200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및 최고위원이 된 경력이다. 그런데 미국은 2006년 국방장관이었던 그에게 공로훈장을 수여하였고, 200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및 최고위원이었던 그에게 또 다시 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출신자들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을 포함하여 모두 24명인데, 그들 가운데 미국의 공로훈장을 3년 동안 두 차례나 연거푸 받은 사람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밖에 없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미국의 공로훈장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다. 미국을 위해 특출한 공을 세운 사람이 미국의 공로훈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공로훈장을 두 차례나 받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의 이색적인 경력은 그가 미국을 위해 어떤 특출한 공을 세웠음을 말해준다.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이전에 미국을 위해 무슨 공을 세웠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특이한 수상경력은 그가 친미군부인맥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에 충분하다.

 

 


그처럼 친미군부인맥을 대표하는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국군사령관이 행사하는 현실조건에서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을 작성할 때, 미국과의 협의과정을 거쳐 그 두 지침을 작성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실은 박근혜정권의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을 협의할 때, ‘위기관리단계’에서 취하게 될 선제대응에 대해서도 당연히 협의하였을 것이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박근혜정권만 통합진보당을 적대시하는 게 아니라 미국도 통합진보당을 적대시한다. 미국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한반도에서 반미자주화의 기치를 든 통합진보당이 추구하는 진보적 정권교체는 미국의 국익을 결정적으로 해치는 것이므로, 미국은 통합진보당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막후에서 은밀히 적대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통합진보당을 적대시하는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실이 ‘위기관리단계’의 선제대응에 관해 협의할 때 통합진보당 강제해산문제를 협의하지 않았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혐의’를 조작하고 그 당을 강제로 해산하려는 특대형 탄압의 배후에 미국의 은밀한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한 추정이 아니다.

 

 

 

2012년 8월 25일 <민중의 소리>에 실린 나의 글 ‘미국의 한국 진보정당 압살은 반복되는가?’에서 논한 것처럼, 진보적 정권교체를 추구하던 진보당의 지도자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씌운 이승만정권은 1958년 2월 25일 진보당을 강제로 해산하였고, 대선 8개월 전인 1959년 7월 31일에는 조봉암의 사형집행까지 감행하였는데, 그런 악랄한 정치탄압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

 

 


54년 전에 있었던 진보당 강제해산에 대한 기억은, 오늘 박근혜정권이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혐의’를 조작하고 그 당을 강제로 해산하려는 특대형 탄압의 배후에 미국의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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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을 옮겨 당장 되살려야할 화순적벽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11/18 16:41
  • 수정일
    2013/11/18 16:4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댐을 옮겨 당장 되살려야할 화순적벽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3/11/18 [06:19]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절경의 화순 적벽, 화순에는 이런 아름다운 절벽이 여러 곳이 있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던 두 곳이 전두환정권이 건설한 댐에 의해 수장되고 말았다. ©자주민보, 이창기 기자



지난 10월 중순 화순 양현당 한민족생활관을 취재하러 갔을 때 양현당 대표이자 화순 동복댐 건설에 따른 실향민 대표를 맡고 있는 장두석 대표의 안내로 그 유명한 화순 적벽을 직접 가서 볼 수 있었다.


적벽

노산 이은상

산태극 수태극 밀고 당기며
유리궁 수정궁 눈이 부신데
오색이 떠오르는 적벽 강물에
옷 빠는 저 새아씨 선녀 아닌가.



이렇듯 수많은 시인 묵객이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화순 적벽의 경치를 접하는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세상에 이런 절경도 있단 말인가”
옛 선조(1519년 기묘사화 때 화순에 유배된 신재 최산두)들이 중국의 절경이라는 양쯔강 적벽 못지 않다고 해서 ‘적벽’이라 이름 붙였다고 하던데 양쯔강의 적벽인들 이보다 더 아름다울까 싶었다.

전국을 방랑하던 김삿갓(김병연) 시인도 이 적벽을 와서 보고서는 방랑생활을 접고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았던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높은 산중에 가득 들어찬 동북댐 호수에 비낀 50여 미터의 아찔한 절벽과 그 위로 당장이라도 “감히 누가 이 땅을 노려” 하고 쩌렁쩌렁 소리를 지를 것 같은 옹성산의 당당한 위용이 어우러져 화순의 노루목 적벽은 절경 중에 절경, 비경 중에 비경이었다.

우리나라 산천 곳곳을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절벽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특히 웅장한 옹성산, 그 아래로 흘러갔을 유장한 강과 어루어진 아찔한 100여미터 높이 수 키로미터에 이르는 만점짜리 3박자 절경은 정말 보기 드물다.

강릉 경포대도 가보고,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금강산 삼일포도 가보았지만 호수와 주변 경치만 따져 이 적벽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감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절벽의 절반이 호수에 잠겼음에도 이 정도인데 만약 절벽의 전체 위용이 다 드러난다면 얼마나 장관이겠는가.

아마 세계에서도 찾기 힘든 절경일 것이다.

옹성산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를 노리는 왜적을 막기 위해 쌓은 장성산성 등 여러 산성 중에 최후의 보루로 쌓은 옹선산성 유적지가 남아있는 곳이다. 한눈에 봐도 천혜의 요새였다.
왜적이 이 근처까지 왔다면 단 한 놈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 자명하다. 물론 그 전 방어선에서 이미 패퇴시켰기 때문에 이 옹선산성 근처에도 얼씬하지 못했었다.
그 옹성산과 적벽 절벽의 오묘한 조화는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하였다.

장두석 실향민 대표는 비감에 젖어 입을 열었다.

“지금 이 경치도 절경이지만 저 절벽 중에 49미터나 물속에 잠겨버렸어, 전두환이가 기어이 댐을 만들어 그 아름답던 적벽 절벽을 호수 속에 수장시켜버린 것이지.”



“역사적 유적이고 세계적인 명승지를 그래, 수장시키는 것을 화순 주민들과 광주시민들이 그저 보고만 있었단 말입니까?”

“데모하고 난리 났제, 근디 광주항쟁이 터져 부러서 다 감옥으로 잡혀가 불고, 군인들이 불도저 밀고 와서 공사가 진행되는데도 기어이 마을을 떠나지 않던 주민마을에 불을 쳐질러 버리고, 거기다가 공사를 위해 막아 놓은 가물막이 댐에 비가 와서 물이 차 마을이 마구 물에 잠기기 시작하는 거야, 반쯤 잠겨서야 어쩔 수 없이 가재도구도 다 두고 몸만 빠져나온 주민들이 많았어”


“광주시민 식수용으로 댐을 막더라도 이 아름다운 절벽은 살리고 그 위에 만들면 안 됩니까.”

“왜 안 돼, 여기서 500미터만 올라가서 댐을 만들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제, 주민들도 아예 댐공사를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저 위에다 하라는 것이었제”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왜 그랬을까요”

“그 놀보 심보를 누가 알것어, 내가 그 때 감옥에 끌려가서 신문을 보니 광주항쟁 이후 무등산을 쪼개버리는 도로를 내겠다는 계획도 발표하던데 그건 광주시민들이 다 들고 일어나 못했지, 전라도를 파괴해서 지역감정을 악화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


“맞네요, 그 외에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네요. 나라가 발전하면 할수록 자연자원의 가치가 높아지고 명승 절경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그 지역 경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삶의 질을 평가하는 척도가 휴식과 여행 아닙니까.
특히 관광산업은 부가가치가 높고 고용유발효과가 매우 큰 첨단미래 산업에 속한단 말입니다. 전라도에서 이 화순은 동굴, 운주사, 고인돌 유적지 등 많은 명승 유적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백미가 이 적벽으로 보입니다.
적벽을 물에 수장시키고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출입금지 시켜놓으면 전라도 관광의 핵심을 제거해버리는 셈이겠지요.
전라도가 못살아야 지역 갈등이 심해질 것이니 그것을 노렸을 법도 하네요.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이런 데까지 신경 쓸 경황은 없었을 것이니 그 머리 위에서 조정한 미국의 음모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상수원 보호구역이라고 이런 절경을 왜 국민들이 보지 못하게 출입금지 시키는 것이지요. 광주보다 훨씬 큰 서울 시민의 상수원인 팔당댐은 양 옆으로 고속 도로가 쭉쭉 뚤려 씽씽 달리고 능내, 두물머리 유원지 등 쌍쌍 다정한 연인들과 서울 시민들이 얼마든지 접근해서 돌을 던져 물수제비도 뜨고 노는데...
팔당댐 인근에서 낚시질을 금지시킨 것도 좀 전의 일이 거든요. 15년 전에 대학시절 두물머리 느티나무 마을로 야유회를 가서 낚시질해서 매운탕 끓여먹고 그랬는데 화순적벽의 상수원만 유독 통제가 심하네요.”

“그래서 광주시청에 그렇게 주민들에게 개방하라고 요구해도 통 들어주질 않아. 실향민과 국민들이 와서 잠긴 마을도 보고 이 절경을 구경할 수 있게 우리 실향민들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요청, 지원금을 받아 여기 노루목 적벽 앞에 망향정을 세우고 휴식 공간과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광주시에서는 주변 사유지까지 출입통제 시키고 허가 없이는 들여보내질 않고 있어.”


 
▲ 차로 노루목 절벽 앞까지 갈 수 있는 산길이 만들어져 있지만 상수원 보호구역이라며 이렇게 통제하고 있어 현재는 광주시청에 허락을 구하지 않 ©자주민보 , 그리나래 블로그 펌



이 아름다운 화순 적벽은 화순군민, 광주시민만의 재산이 아니라 온 국민 온 겨레, 온 세계의 재부이다. 더는 저 원한의 철망으로 가로막아서는 안 될 것이다.
상수원 보호대책은 철저히 세우면서도 국민들과 세계인들이 마음껏 보고 느낄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검색을 해 봐도 물에 잠기기 전의 화순 적벽의 경치를 담은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
두 가지를 다 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물에 절벽이 반쯤 잠긴 지금의 경치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크고 넓은 호수와 어우러진 풍광도 멋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바에 세계적인 새로운 명승지 하나 만들어보면 좋겠다.

상수원 용 댐은 이 절벽 위로 옮기고 지금의 댐은 오직 경관용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꽃피는 계절, 녹음과 단풍이 짙어가는 계절, 비와 눈이 오는 계절을 고려하여 지금의 댐 수위를 조절하여 다채로운 풍광을 인위적으로 조성해보는 것도 매력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꽃피는 봄이나 비가 많이 오는 여름에는 댐의 수위를 높이고 단풍철이나 눈 쌓이는 겨울엔 댐의 물을 바닥까지 빼서 절경의 절벽을 마음껏 볼 수 있게 한다면 그것도 멋이겠다 싶다.

그러면 철 따라 다른 경치를 보기 위해 더 많은 관광객이 해내외에서 몰려오지 않겠는가.

근초고왕 등 드라마를 여기 노루목절벽 망향정에서 찍었다고 하던데 겨울연가와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라도 이 배경에서 나온다면 화순과 광주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관광 산업에도 크게 기여하지 않겠는가.

화순의 여러 신문과 시민운동가들의 블로그를 보니 이미 화순 적벽 개방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통합진보당 지역 의원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전 전라도 주민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이 운동에 동참해 나서서 수장된 민족의 보물을 반드시 건져 올려야 할 때이다.

왜 이렇게 절절히 호소하는지 알고 싶거든 한 번 가보시라. 사전에 허가를 구하면 지금도 누구나 가볼 수 있다고 한다.
사전 탐방 신청은 광주시 상수도사업본부 용연사업소 062-609-6122, 화순군청 062-374-0001에 하면 된다.





관련 자료

1. 최근 한 여행가가 찍은 만추의 화순 적벽
http://blog.daum.net/wuo/11537

2. 화순 적벽에 대한 설명이 잘 된 자료
http://ask.nate.com/knote/view.html?num=1248435

3. 적벽 사진
http://blog.naver.com/jajuwayo?Redirect=Log&logNo=50179387638

4. 적벽 사진
http://cafe.naver.com/gotothekorea/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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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가 아폴로적 인간이라면 노무현은…"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43> '호이트한국' 이래경 대표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11-17 오후 2:01:20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신이시여, 어디로 가나이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물음 앞에서 답할 준비를 하고 있을까. 2013년에 만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이래경 공동대표('호이트한국(주)' 대표)는 마치 이것에 대해서라면 늘 준비된 것처럼 당당하게 답했다.


"시대와 상황이 요구했을 때 마음속으로부터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피하려고 했을 때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중략) 우리의 삶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 이에 제한받고 규정된다고 할 때 오늘 이 시점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시대정신 속에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보람된 것이다."

오늘의 시대정신 속에 현재를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종교를 가지지 않고는 살아가기 어려웠던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 기독교의 영향으로 예수를 알리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학교 안을 돌아다녔던 열혈소년 이래경. 유신이 뭔지, 독재가 뭔지 알지 못했던 그는 대학에 들어와서야 독재정권과 인권탄압, 민주주의 억압이라는 현실에 눈을 떴다. 그리고 '민주주의 수호'라는 시대정신 앞에서 당시 4.19 혁명 때도 움직이지 않았던 서울공대 시위의 선봉에 섰다.

두 번의 제적으로 학교에 돌아가지 못했던 청년 이래경은 한국의 산업발전 궤적과 함께 오퍼상(영어 'offer'에서 파생한 일명 '보따리 장수'. 작은 규모의 무역상을 뜻한다) 사업을 시작으로 오늘의 호이트한국(주)을 일궈냈다. 깐깐한 독일 사람들도 인정한 CEO 이래경은 전 세계에 200여 개의 법인을 가진 연 매출 10조 원 규모의 독일 기업 호이트그룹에서 창업주 가족을 뺀 나머지 4만 명의 종업원 중 지분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민주투사 고(故) 김근태를 도와 오랫동안 한국의 정치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했을까. 어떻게 철저하게 수입의 1/3은 국가에, 또 1/3은 사회에 환원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진보적 자유주의가 이야기하는 복지국가를 외칠 수 있을까.


"나와 타자의 관계는 '불일(不一)이요 불이(不二)', 즉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이다. 결국 '나와 타자는 서로 맞물려서 함께 간다'는 뜻이다. 타자를 자기 삶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진보'적인 것이고, 나아가 타자를 나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 '진보적 자유주의'라고 생각한다. '인간 개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는 인식 위에 동일한 존재로서 타자와 만날 때 비로소 연대가 있고 진보가 있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진보적 자유주의를 외치는 가슴 따뜻한 부자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 이래경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호이트한국(주)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 1984년 독일의 호이트그룹이 국내 영업을 시작했고, 1988년에 합자형태의 법인 '호이트한국(주)'이 설립되었다. 유체동력학적 기술과 첨단 전자제어 지식을 결합한 산업기계를 제작하고 공급하는 회사라고 들었는데, 어떤 인연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인가?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이 적은 수입으로 6남매를 키우느라 생활이 매우 빠듯했다. 집안에 가진 것도 없고 대학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나 졸업장도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 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내 사업을 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졌다. 그래서 1984년에 내 사업으로 오퍼상 일을 시작했고 그때 만난 기업 중 하나가 '호이트(VOITH)'라는 독일 기업이었다. 호이트에서 들여온 철도 차량부품이 초기부터 대단한 성과를 거두면서 한국철도차량 사상 최초로 독자 설계한 '전후구동식 새마을동차'를 만들게 되었다. 이 분위기가 국제하계올림픽이 열리는 계기로 이어져 1988년 독일 본사에서 내게 한국에 현지 법인을 차리자는 제안이 왔다. 그 요구를 받아들여 '호이트한국'이라는 법인을 만들었다. 그렇게 주주 겸 대표이사를 맡아 여기까지 왔다.

- 외국 회사와 협력해 한국에서 자리를 잡는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나?

70~80년대의 오퍼상은 밑천 없는 사람들에게 성공을 만들어가는 신기루 같은 통로였다. 나는 운 좋게 매우 좋은 파트너를 만났다. 독일 사람들은 한 번 상대방을 신뢰하면, 그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하는 편이다. 물론 내 자신이 그들의 기대 이상으로 열심히 일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철도차량 분야와 독일 호이트그룹 내에서도 나는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호이트그룹은 전 세계에 200여 개의 법인과 전체 직원 4만 명을 거느린 연 매출 10조 원 규모의 기업인데, 이 4만 명 종업원 중에 창업주 가족을 빼고 지분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그만큼 독일 친구들이 나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다.

- 73학번으로 서울 공대 금속학과 출신이다. 당시 '금속학'은 다소 생소한 분야였을 텐데, 어떻게 가게 됐나?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기독교였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읽은 헨리크 센케비치의 <쿠오바디스>라는 소설에서 기독교인들이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물려 죽으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가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Youth For Christ (YFC)'라는 보수적인 종교반에서 활동을 열심히 했다.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이라는 목사가 주도한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의신론(依信論)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고교생 써클이었다. 지금은 의신론이 우리 사회를 질곡(桎梏)시키는 잘못된 신앙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이것을 믿었고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도 일주일에 세네 번씩 새벽기도를 나갔다. 학교에서는 매일 점심시간이면, 전도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렇게 열렬히 신앙생활을 하던 소년이었다.

신학대학을 가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당시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 여성들이 그렇듯 우리 어머니의 삶도 한 편으로는 시대상황에, 다른 한 편으로는 6남매를 키워야 하는 어려운 가정상황에 종교 없이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의 가장 큰 장점은 원칙적이고 타협하지 않다는 것인데,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나와 어머니는 매일같이 교리논쟁을 했다. 어머니의 꿈은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 돼서 '형제감독' 즉, 여호와 천국의 왕국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고, 나는 신학을 해서 개신교의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릎 쓰고 신학대학에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신학대 진학을 포기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평소 존경하던 고1 담임선생님이 우리나라에선 소재산업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당시 포항제철이 완공돼 쇳물을 쏟아내던 시기였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금속·철강 소재가 산업 입국에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 사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상장을 독차지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던 모범생이었다(웃음).

- 대학에 막 입학했을 당시는 유신이 시작된 바로 이듬해(1973년)였다. 스산했던 시절, 대학생 이래경은 어떤 청년이었나?

그때까지 나는 '유신(維新)'이 뭔지도 몰랐다.(박정희 독재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선포된 '10월 유신체제'에 따라 12월 17일 국민투표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약칭 '유신헌법')을 확정했다. (한국 헌정사상 7차로 개정된 제4공화국의 '유신헌법'은 정권 유지를 위한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유신헌법'의 '유신'은 일본 명치유신에서 가져왔다. 편집자) 당연히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소위 '문제 서클'과는 가까이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유로 몇 가지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공대에 진학했지만, 인문학적 갈증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인문학 강의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첫 번째 선택한 강의에서 읽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두 권의 책이 내 기본적인 종교관을 '확' 흔들었다. 다니던 교회 목사에게 '내가 왜 교회를 떠나는가?'에 대해 장장 7장의 편지를 남기고 교회를 떠났다(하지만 지금도 내 신앙은 기독교다). 그 뒤 독서토론회에 열심히 나갔는데, 사회문제의식이 있는 서클이라기보다는 당시 나오는 소설들을 편하게 따라 읽는 모임이었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황석영의 <객지> 등에서부터 세계명작 작품도 읽고 가벼운 소설들도 많이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읽었던 책들이 내가 편협한 사고에 빠지지 않고 삶의 균형을 잡는 데 매우 도움이 된 것 같다.
 

ⓒ프레시안(최형락)


또 다른 충격은 당시 정치현실에 대한 것이었다. 대학시절 초기 나는 학내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많은 학생들이 잡혀 들어간 사실에 관심조차 없었고, 그저 내 생활에만 바빴다. 그러면서도 점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1학년부터 2학년까지 총 4학기를 다니는 동안 한 학기에 2개월 이상 강의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개강하면 곧바로 휴교를 했는데, 이것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런 나의 생각들이 독서토론회에서 읽고 있던 책 내용과 연결되면서 내게도 조금씩 사회의식이 생겼다. '뭔가 잘못됐다'라는 생각이 커지기 시작했다.

- 당시 대학가에서는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대학생들이 시위 도중 죽기도 하고, 붙잡혀 강제 징집을 당하거나 제적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조용한 독서토론회 일원이었던 이래경이 75년 '김상진 할복자살 사건' 이후 서울공대 시위를 주도했다.

1975년 4월에 독서토론회의 멤버 중 하나였던 문리대 미생물학과 박우섭 씨(현 인천남구청장)가 4·3시위로 정학을 당했고, 4월 11일에는 농대 축산학과 김상진 씨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쓰고 할복자살을 했다. 이것은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당장 야밤에 그때 다니던 교회 건물에 가 새벽까지 '인간해방 선언문'이라는 제목의 유인물 3000장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새벽 5시에 등교해 준비한 유인물을 공대 강의실과 화장실 곳곳에 뿌렸다. 유인물에 "아무리 서울공대생이 산업의 주역이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침묵을 지켜선 안 된다.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한다"라고 썼지만, 그날 이후에도 공대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거의 모든 대학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했는데, 서울대 공대만 정상적으로 수업하고 있었다. 4.19 혁명 시절에도 공부를 계속했던 일종의 '서울공대 전통'이었다.

그러다 4월 17일경, 농대 학생들이 공대 건물을 기습해 시위를 부추기는 선동을 하고,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 농대생들의 선동으로 학교 잔디밭에 수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는데, 그것을 집회 세력으로 이끌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의를 듣던 중에 뛰쳐나와 집회를 주동하게 된 것이다. 평소 답답했던 속이 후련해지고 상큼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시위가 끝난 후 청량리에서 막걸리를 진탕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형사들이 집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잠깐 조사받고 오겠다'고 하고 붙잡혀 갔다. 당시 친 이모부가 안기부 내 대학 및 종교담당 수석과장이었는데, 그 덕분에 3일 만에 그냥 풀려났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가 보니, 나를 포함해 당시 학교에서 불온시했던 서클 리더 7명 모두가 데모한 이튿날 제적됐다. 지금도 그 친구들에게는 마냥 미안하다.

- 어떻게 조용하던 청년이 앞에 나가 시위를 마이크를 잡고 시위를 주도할 생각을 했나?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욱'하는 경향이 있다. 그땐 나도 순간 '욱'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나는 기독교 신앙에 의해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예수신앙'의 핵심이라 할 '나라와 정 의'를 위해 자기를 던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 상황에서 침묵하고 출세를 위해 공부만 한다는 것은 나로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당시 순간에는 어떤 판단을 깊이 할 수 있는 겨를이 없었다. 평소 나를 굉장히 좋아했던 교수가 강의실을 나가지 말라고 막았지만, 뿌리치고 나섰다. 집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내가 앞서 나가 김상진 열사를 위해 묵념하고 짧은 웅변과 만세삼창을 하고 노래했다. 그 후 잔디밭 자리에 앉으니, 연이여 학생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와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냈다. 비록 그것 때문에 경찰에 붙잡혀가고 제명을 당했지만, 지금도 전혀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했었을 것이다.

- 학교에서 제적당한 후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던가?

학교에서 쫓겨난 지 한 달 만에 인생이 360도 바뀌었다. 보름 만에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영장이 나왔고, 바로 입대했다. 당연히 군대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최전방으로 떨어질지는 몰랐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강원도 인제를 넘어, 원통사단에 혼자 배치됐다. 당시 훈련소에서 교육받은 수천 명 중 나처럼 집회를 주동하다가 갑작스레 군대로 온 십여 명만 골라서 전방 여러 부대로 산개해 보낸 것이다. 운동권 출신들이 겪은 감옥살이는 당시 내가 겪은 군대 생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무 힘들었다.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에서 묘사한 그대로였다.

한편으로는 고생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책과 세상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고 제대했다. 같은 부대에서 김삼수라는 친구(현 산업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만났는데, 그 친구에게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조용범의 <후진국 경제론>,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등의 책을 추천받았다. 그렇게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기 시작한 것이 독서토론회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의식을 갖게 된 계기였다.

제대 후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취업을 해야 했는데, 당시는 인력 부족이 심각했던 터라 '아남산업'이라는 곳에 쉽게 취업할 수 있었다. 거기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대 공대 산업경영연구회와 산업사회연구회 써클 출신 친구들이 함께 공부하자며 찾아왔다. 그들과 같이 E.H.카의 <소비에트 혁명>, 스위즈의 <자본주의 비판이론>,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 발달사> 등 여러 책을 전부 원서로 읽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는 망한다. 사회주의는 필연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단순하고 순박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당시 상황과 환경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 노동운동을 잠깐 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노동운동을 깊이 하지는 않았다. 당시 내가 일하던 아남산업은 세계 최초로 전자오락기를 만든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사로에 기능품을 반제품으로 하청 수출하는 기업이었다. 이 전자오락기가 세계시장에서 엄청나게 팔렸다. 나는 생산 관리를 맡고 있었는데, 급증한 수요에 맞춰 물량을 대려니 8000여 명에 달하는 여공들에게 하루 12~16시간씩 무리하게 생산을 강요했다. 군 장교 출신인 미국인 총감독을 보조하면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내내 여성 노동자들을 들볶았다. 그러다 보니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아가씨들이 잠깐 쉬는 시간에도 복도에서 고목 넘어지듯 푹푹 쓰러져 그대로 잠들었다. 이를 보고 참다못해 감독하고 있던 미국인과 크게 싸우고, 사표를 던지고 나와 버렸다.

그렇게 회사에서 나와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야전잠바를 입고 부평 근처 공장을 전전했다. 그런데 아무리 취업을 하려해도 나를 받아주는 공장이 없었다. 다들 내 손을 보고는 '당신은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안 받아 주더라. 지금도 나는 당시 노동자로 취업했던 사람들은 정말 어떻게 현장에 들어갔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결국 인천소재 대우중공업 직업훈련소에 들어갔는데, 며칠 만에 위에서 훈련생의 머리를 깎으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차마 그것을 견딜 순 없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들었던 생각은 '나라는 존재는 노동자들과 마음을 같이 할 수는 있어도, 내가 억지로 그 사람들 속에 함께 노동하면서 살 수는 없구나'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솔직한 한계와 고백이었다. 그 길로 노동운동을 하려고 노력했던 몇 개월간의 방황을 접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소개로 한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회사에 취직을 하고도 계속 서울대 제적생들과 만나 토론회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 1980년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5년 만에 복학하니, 어떤 기분이 들었나?
 

ⓒ프레시안(최형락)

1979년에 10.26 사건이 발생해 그 덕에 내가 졸지에 서울대 공대 제적생 대표로 복학하게 됐다. 새로운 인생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는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법대 대표로는 이범영, 사회대는 이해찬, 인문대는 이철, 의대는 서광태, 사대는 고은수 등이 있었다. 당시 서울대의 움직임은 복학생협의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군바리 전두환'이 전면에 등장한다고 잔뜩 긴장하고 복학생협의회를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정작 나 자신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복학생대표로 학교와 교수들에게 따질 것은 따지고 요구할 것은 요구했지만, 시위를 위해 대학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대신 그동안 직장생활에서 모은 돈으로 대방동에 입시학원을 차려 박인배(현 세종문화회관 대표), 박우섭 등과 함께 저녁에는 중학생을 가르치면서 낮에는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군부 세력의 긴박한 움직임에 학생들의 시위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을 계속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내가 운영한 입시학원에는 시간당 3000~5000매가 나오는 당시 최고급 윤전기가 있었다. 그러니 재학생 후배들이 시위가 있을 때면 밤마다 와서 윤전기를 쓰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예 5월 초에는 그것을 총학생회에 기증해버렸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기 하루 전날, 전국 대학교 학생회장단이 이화여대 앞에 총집결했는데 그 때 나는 집에 있었다. 학과 후배가 전화로 "선배님, 빨리 피하십시오. 경찰이 학생회장단을 다 연행해 갔습니다"라고 하길래, 곧바로 집을 나와 대방동 학원에서 며칠을 기거했다. 며칠 후, 후배들이 찾아와 "광주에서 큰일이 났습니다. 서울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라고 하길래, "같이 죽을 일 있느냐, 제발 좀 참아라"라고 말렸다. 하지만 결국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이 입시학원에서 제작됐고, 서울에서는 5월 23일 처음으로 구로공단에 뿌려졌다. 유인물을 나눠주던 후배들은 현장에서 다 잡혔고, 경찰은 나를 이해찬 선배와 이들과의 연결고리로 상황을 만들어 수배자 신세가 되었다. 6월 13일 계엄령 선포되면서 나를 포함한 100여 명에게 공개 수배령이 내려졌다. 친구 집에서 숨어서 TV를 보고 있는데, 수배자 명단에 내 이름이 '이래경'이 아니라 '이태경'으로 나온 것을 봤다.

또다시 내 인생이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집에서는 어머니가 혈우암으로 위독하니, 그만 자수하라고 했다. 고민 끝에 친형님을 만나러 나오다 그 자리에서 형사에게 잡혀 자수한 셈이 되었다. 이번에도 이모부 덕분에 그럭저럭 29일간 조사만 받고, 기소중지로 나왔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학교에서는 두 번째 제명을 당했기 때문에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다시 취업을 해야 했다.

무역회사에 다닐 때 문교부라는 이름으로 몇 차례 전화를 받았다. 어느 날 문교부(사실은 안기부) 직원들이 나를 시내 호텔 방으로 불러 '오사카, 동경, 베를린 중 네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해라. 돈은 우리가 다 제공하겠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대학교 교수 자리도 보장해 주겠다. 대신 해외에서 공부하는 동안 교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간 보고 해 달라'고 제안했다. 말 그대로 나를 그들의 끄나풀(앞잡이)을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기가 막혀서 웃었다. "내가 아무리 공부가 고프다고 한들, 그런 식으로 공부하겠나.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거다"라고 단호하게 거부했더니, 자기들이 제안한 것을 평생 입 닫고 비밀을 무덤에 갈 때까지 지키라고 협박했다. 이게 다 기무사, 보안사, 중앙정보부라고 하는 당시 첩보기관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을 끄나풀로,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만드는 일이다. 당시 대학교수 중 첩보기관 끄나풀로 공부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그들에게 들었다.

- 그렇게 사업을 가꾸고 키우는데 집중했다. 그렇다면, 고(故) 김근태 의장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1983년 내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또는 민청련) 결성과정에 개입하면서 거기서 '김근태'라는 인물을 만났다. 초기 의장이 김근태였고, 부의장이 장영달과 이해찬, 상임위 의장이 최민화였다. 처음 나는 서울대 공대와 성균관대와 연락을 책임지는 간사 겸 상임위원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민청련 중심 인물 중 하나가 된 셈이었다. 그러다 1년쯤 지나서 집안이 기울고 내 생활도 어려워져 민청련 상임위원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민청련에서 나온 이후인 1985년, 남영동에서 '김근태 고문사건'이 터졌다. 그 소식을 듣고 정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고 또 미안했다. 당시 나는 1선도 아니고 2선도 아닌 3선에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민청련 부설 민족민주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정세연구>라는 격월간지 발간 비용을 한 달에 50만 원씩 지원하는 일이었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아무리 내 상황이 어려워도 한 번도 지원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10년 동안 지원한 금액만 5000만 원 쯤 될 것이다. 당시로써는 꽤 큰돈이었다. 김근태 선배가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오피스텔을 빌려 여러 사람과 만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러던 그가 1993년 가을 무렵 내게 '정치에 입문하려 하니 도와 달라'고 했다.

그때 우리가 만난 곳은 성북구 우이동 산골 속에 있던 '명상의 집'이라는 천주교 피정장소였다. 본인 성격에는 교수나 신부가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나마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에 입문하겠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가 이 이야기를 일부러 '명상의 집' 예수님 상 밑에서 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에게 하는 자신의 약속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그를 돕게 되었다. 1994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에도 계속 도와달라고 하니,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지켜본 사람으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후원회 책임을 맡게 되었다. 당시 후원회 실무자가 지금 민주당 유은혜 의원이었고, 내가 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으면서 '한반도 재단'을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 '김근태 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옆에서 정치권을 보며 가장 힘들었던 점이나 안타까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김근태가 제일 어려웠던 시기가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역설적으로 DJ와 노무현 집권 10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근태 선배는 세상을 보는 시각과 방향은 DJ와 전적으로 공유하고 있었으나, 현실 접근에서는 매우 달랐다. 이 점에서 나는 DJ를 매우 정략적인 마키아벨리 형 인간이었다고 본다. 그는 동교동계라는 충성적 계파운동을 통해 필요하다면 구태의연한 타협적 정치를 했다. 어쩌면 그것은 불가피한 현실 정치였을 것이다. 반면, 김근태는 초짜라고 놀림을 당할 만큼 원리원칙을 대단히 중시한 철저한 민주주의자였다. 계파를 떠나 토론과 숙의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라고 여겼다. 평민당 대선 후보 선출방식 과정에서 이 둘의 의견이 충돌한 이후, DJ와 동교동계는 김근태를 견제하기 시작한 것 같다. 실제로 DJ는 평민당 초기, 부총재로 김근태를 발탁한 것 외에는 그를 중용해서 함께한 적이 없다.

김근태와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애증관계였다. 김근태는 철저한 현실 파악 속에 지성과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반면, 노무현은 다분히 즉흥적이고 감정적이었다. 그 두 분의 차이는 니체가 쓴 <비극의 탄생>에서 나오는 아폴로적인 요소와 디오니소스적 요소 같았다. 김근태가 아폴로적 인간이었다면, 노무현은 디오니소스적 인간이었다. 그 둘이 협력을 잘했다면 시너지 효과가 매우 컸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노무현은 본인이 대통령이 됐긴 했지만, 운동권의 대부로 실질적인 정통성을 갖고 있는 김근태에 대한 자격지심이 너무 컸던 것 같았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이 두 사람은 끊임없이 갈등했다. 어느 날은 내가 김근태 선배에게 "그냥 노무현을 밟아라"라고 직언했더니, "어떻게 만들어진 참여정부인데 그럴 수 있나. 내가 노무현 대통령과 싸우면 참여정부가 무너진다"고 하더라. 그렇게 나라 걱정 앞에는 한없이 심약한 양반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민주개혁진영의 내부가 차마 공개적으로 내놓고 말하지 못한, 속병을 앓는 자기모순과 같은 것이었다.

- '일촌공동체'라는 새로운 사회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노무현 정부가 출범할 때 매우 중요한 사건 하나가 터졌다. 2003년 7월 인천 부평구 청천동에서 30대 엄마가 아이 셋을 데리고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철저한 고발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이 사건을 심각하게 들여다봤어야 했다. 그런데 그 상황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대신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분양 원가를 공개하는 게 말이 되느냐, 장사꾼 논리대로 해야 한다'라는 참으로 한심한 발언을 했다. 김근태가 복건복지부 장관을 하던 시절인 2004년 12월, 대구에서 다섯 살 남자 아이가 벽장 속에서 굶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내가 김근태 장관을 대신해 부인인 인재근(현 민주당 의원) 씨와 함께 대구로 내려갔다. 당시 현장 담당 사회 국장이 사건 브리핑을 하는데, 요지가 '이번 일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인력·행정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이었다'라고 말했다. 브리핑 도중에 내가 "때려치워라.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변명만 하고 있느냐?"라고 소리를 질렀다.
 

ⓒ프레시안(최형락)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제는 우리가 정부만을 믿어서는 안 되고 시민사회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몰입된 지금 우리 사회는 잘못 가고 있다'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는 '성장과 출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상생하는 사회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 스스로 상생하는 문화, 인간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자는 결심으로 '일촌공동체'를 기획하고 2007년 3월에 법인으로 설립했다.

- 일촌공동체를 설립하고 난 후에도 복지국가소사이어티와 같은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계속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이래경의 삶을 움직인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시대와 상황이 요구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서부터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피하려고 하면,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각 시대의 흐름에는 그때마다의 시대정신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는 '독립'은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이었다. 그다음에는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경제발전'이 시대정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일등공신은 '박정희'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역할을 한 부분도 있지만, 최고 공신은 차라리 '조봉암'이었다. 만약 조봉암이 농지개혁을 계획하고 실현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경제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장면 정부 때 만들어 놓은 경제발전 초안에 기초해 자신이 쿠데타로 집권 한 뒤 이를 실천한 것이었다. 여기서 박정희를 평가하는 것은 자립경제의 기치로 중공업과 산업재 중심의 경제발전을 추진하고 이루어 냈다는 점이다. 제 3 세계에서는 감히 꿈꿀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을 높이 사고 싶다. 이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민주화'였다. 유엔의 제1 아젠다가 바로 '인권(Human Right)'이고, 제2 아젠다가 '참정권'이다. 참정권은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민주국가라는 것은 국민들 스스로가 국가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고 결정할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지난 대선에서의 국가정보원(과거 안기부, 기무사) 등 권력기관의 개입은 민주적 기초와 원칙을 뒤흔드는 매우 중차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참정권 이후, 시대정신은 바로 '사회경제적 권리'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제반 조건, 즉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가 바로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다. '복지국가'는 우리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자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내가 좋아하는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은 복지국가가 지향해야 할 철학을 단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안전보장(Human Security)'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단지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최소한의 재화와 서비스의 제공을 넘어서, 한 인간으로서 자신에 내재한 잠재력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적극적 개념으로 더욱 발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와 같은 논쟁을 보고 있으면, 그래서 참 한심하다. 복지는 기본적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연의 위대한 산물 또는 하나님의 섭리적 창조물이고,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개개인으로서 가치와 존엄은 예외 없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적 조건 안에서 어떻게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으로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 70년대 20대였던 이래경은 '정부 민주화'를 요구했다면, 2013년 60대 이래경은 국가를 상대로 '복지국가'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나?

청년일 때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대자적 의식과 자신의 생각이 분명하지 않았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막연한 분노감으로 운동을 했다. 어떤 정립된 체계나 사상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게 바로 청년 정신이다. 이순(耳順)의 나이에 이른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리와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가야한다고 하는 방향성을 마음속으로 깊이 느끼며 살고 있다.

-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장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도 상당 부분 시간과 돈을 할애하고 있다. 어떻게 나의 몫을 다른 이들의 몫으로 나눌 수 있는가?

'인간은 과연 도덕적인 존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본다. 이것은 매우 철학적이고 자유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다. '도덕'에 관한 여러 입장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로 '도덕은 쓸데없는 것으로 인간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즐기며 살면 된다'고 하는 입장이 있다. 다른 하나는 '도덕은 인류가 살아오면서 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한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은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는데 검증된 적합하고 실제적이며 정당한 게임의 법칙이다'라는 입장이 있다. 세 번째는 도덕이란 '인간으로써 마땅히 가지고 있는 내면의 핵심 의지다'라는 입장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세 번째 입장이다.

하나의 열린계가 스스로의 한계에 이르면, 이 장애를 뛰어넘기 위해 새로운 계로 이동하는데 이것을 '창발현상'이라고 한다. 인간은 이 창발현상에 의해 자연계에서 생물계로, 그리고 인간계로 이동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대자적 의식을 한다. 마치 파스칼의 '나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혹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처럼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면서 창발현상으로써 인간이 완성된 것이다. 이 창발의 핵심에 바로 도덕적 의지가 있다. 도덕은 우리 내면에 빛나는 도덕률로 자리하면서 인간이기 때문에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재창조의 작업으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능력을 갖춘다. 새로운 것들을 창조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름 내면의 도덕을 실현하고 있다.

- 개인의 몫과 공동체의 몫의 가치가 충돌하지는 않는가?

지금도 내 수입의 1/3은 세금, 1/3은 내 개인과 가족, 그리고 나머지는 다른 이들을 위해 쓴다. 1년에 1억 원이 넘는 금액을 지원한 지 벌써 7년 정도 됐다. 처음 결정할 때는 매우 주저했던 기억이 있지만, 이후에는 무심하리만큼 사무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더라.

다행히 내 처는 허영과 사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나를 믿어주고 일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개입도 언급도 하지 않는다. 대단히 고맙게 생각한다. 내 기본 봉급은 생활비로 가져가지만, 그 외에 수입인 경영수당과 배당이익은 대부분 사회활동을 하는 지인이나 단체를 후원하는 데 쓴다. 정직하게 말하면 가끔은 '내 자신과 가족을 위해 허영도 부리고 호사도 하고 싶다'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잠시 생각일 뿐 곧바로 떨쳐 버린다.

- 이래경에게 자유란?

인간이란 필연과 우연의 접점에서 자기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간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 아니 자유 그 자체'라고 선언했다. 또 '인간은 인간의 미래'라고 외쳤다. 참으로 멋진 선언이고 이것이 자유주의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이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는 '나는 무엇이고 타자는 무엇인가? 개인이 먼저인가. 공동체가 먼저인가?'라는 중요한 화두가 반드시 발생한다.

나와 타자의 관계를 불가의 용어 '불일(不一)이요 불이(不二)', 즉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싶다. 결국 나와 타자는 분리가 무의미하게 서로 맞물려서 함께 간다는 뜻이다. 타자를 자기 삶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진보'적인 것이고, 나아가 타자를 나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 '진보적 자유주의'라고 생각한다. 자기 삶에 대한 자각을 통해 자연스레 '인간 개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는 인식의 기초 위에 동일한 존재로서 타자와 만날 때 비로소 연대가 있고 진보가 있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에게 자유란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과 타인을 향한 대한 대화이자 채찍질'이다.

-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중용(中庸)>을 읽을 때마다 참 좋다. 보통 '중용'을 적당히 균형 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다. 성철 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용은 '쌍차쌍조(雙差雙照)'다. '쌍차'란 양 끝을 모두 버린다는 뜻이고, '쌍조'란 모든 것을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좌와 우의 양 극단을 버려 그야말로 공(空)의 상태가 될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린 쌍차(雙差)의 빈 마음, 청정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살펴본 후에야 '올바름'을 판단하는 게 바로 중용인 것이다. 도올 선생은 이것을 '호문(好問), 호찰好察), 집기양단(執基兩端)'이라고 설명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끝까지 살펴본 후, 양 끝을 모두 포용하여 판단한다'는 뜻이다.

젊은이들에게 치열하게 우리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부딪쳐 보고 무엇이든 실천해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도올의 중용 이야기를 빌어 세 가지 관점으로 이야기 한다면, 첫째는 '시중(時中)'으로 '모든 존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조차도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 이에 제한받고 규정된다고 할 때 오늘 이 시점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시대정신 속에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보람된 것이다. 두 번째는 '능구(能久)'다. 공자가 '안회'라는 제자를 가리켜 '나는 어떤 결심하지만 달이 바뀌면 마음도 변하는데, 안회는 한 번 무언가를 결심하면 끝까지 지켜 간다'면서 늘 칭찬했다. 한 번 마음을 정하면 의지를 가지고 지켜나가는 실천의지가 소중하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곳에 젊음을 던져라! 마지막은 '지미(知味)', 즉 '삶을 음미하라'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두세 번씩 식사를 하는데, 그 중에 음식의 참다운 맛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인생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자각하고 자신의 삶을 음미하고 살피라는 것이다.

일촌공동체를 설립할 때 그 기본정신을 해월(海月) 최시형 선생에게서 가지고 왔다. 첫 번째는 '경인경물(敬人敬物)', 인간과 자연에 대해 경외심을 갖자는 뜻이다. 두 번째는 '심인심고(心人心告)', 생활 속에서 만나는 타인을 사랑하고 걱정하며 그들을 위해 마음속 하느님(侍天主)에게 간절히 기도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은 '여인여락(與人與樂)'으로 사람들 속에 함께 머물면서 그 사람들과 삶의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락'은 기쁨과 더불어 슬픔, 아픔, 애달픔, 고통 등을 모두 포괄한다. 이 '삼인사상(三人思想)'을 일촌공동체를 통해 실현했으면 하는 소망이다. 동시에 삼인정신은 자유와 함께 내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고이자 내 삶의 잣대이다.
 

▲ 심인심고(心人心告), 여인여락(與人與樂) ⓒ프레시안(최형락)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연구원이 진행하고, 정리는 정인선 인턴이 맡았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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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직원, 민주당 의원 뒷덜미 잡아채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11/18 15:46
  • 수정일
    2013/11/18 15:4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현장] 의원들, 항의하며 거센 몸싸움... "양팔 뒤로 꺾은채 '의원이면 다냐'고 해"

13.11.18 10:36l최종 업데이트 13.11.18 14:52l
이경태(sneerc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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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민 민주당 의원(오른쪽 위)이 강기정 의원의 뒷덜미를 잡은 청와대 경호실 직원(아래 피흘리는 사람)에게 "당신의 신분을 밝히라"며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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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 : 18일 오후 1시]
뒷덜미 잡힌 강기정 "양팔 뒤로 꺾은 채 '의원이면 다냐'고 했다"

"버스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먼저 앞 목을 잡더니 바로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또 다른 손으로는 내 허리춤을 움켜쥐었다. 동료 경호원까지 나오자, 양팔을 뒤로 꺾었다. 그렇게 3~4분 가량 뒷덜미를 잡혀 젖혀진 상황이 이어졌다."

청와대 경호실 직원에게 폭행을 당한 강기정 민주당 의원의 설명이다. 그는 18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 시정연설 후에도 국회 본관 돌계단 위에 계속 주차돼 있던 '차벽'에 대해 항의하다가 청와대 경호실 직원으로부터 폭행당했다.

그에 따르면, 강 의원 등 민주당 의원들은 박 대통령 시정연설 후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규탄집회를 열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그러나 국회 본관 앞 돌계단 위에는 청와대 경호용 버스 3대가 계속 주차돼 있었다. 정부의 정당해산심판 청구에 항의하며 본관 정문 앞에서 농성 중인 통합진보당 의원들을 겨냥한 '차벽' 용도였다.

강 의원 등은 본래 국회의장 및 국회 교섭단체 대표 등의 차량을 주차하는 곳에 여전히 서 있는 '차벽'을 빨리 철수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세 대의 버스 중 가운데 있던 버스의 열려 있던 문을 발로 차며 "빨리 차 빼라"고 요구했다.

폭행상황은 그 직후 벌어졌다. 버스 안에 있던 경호원은 그 즉시 뛰쳐나와 '행동'에 나섰다. 강 의원은 "주변의 동료의원들이 내 뒷덜미를 잡은 경호원에게 '의원이니 손을 놔라'고 요구했지만 (경호원들은) '국회의원이면 다냐'며 약 3분 가량 이상을 저의 양손과 뒷덜미, 허리춤을 잡았다, 노영민 의원을 밀치기도 했다"고 밝혔다.

청와대 경호실이 '과잉경호'에 나섰다고도 꼬집었다.

그는 "버스 차량이 세워진 곳은 국회의장과 교섭단체 대표, 의원들의 차량을 세우는 곳이었다"면서 "역대 어느 정권의 시정연설에서 그곳에 경호차량을 차벽처럼 설치하고 의원들의 출입을 막아서는 경우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국회의원이라고 제지했음에도 경호원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인) 차지철처럼 무소불위로 폭행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경호실 측과 민주당 관계자들의 실랑이 과정에서 문제의 경호실 직원의 입술이 터져 피가 난 것에 대해서는 "나는 (그 사람이) 버스에서 뛰어나오는 순간만 기억날 뿐이고 제지에서 풀려난 뒤에는 (계단 아래) 규탄대회 장소로 이동했다"면서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뒤통수로 경호원을 가격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뒤로 제껴져 있던 상황이었는데 어찌 가격했는지 누가 내게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말했다.

강 의원은 강창희 국회의장에게 이 같은 상황을 설명하고 청와대 측의 해명을 요구한 상황이다. 강 의원은 "강 의장이 '청와대 비서실장은 몰라도, 정무수석을 불러서 (이런 상황을) 어필하도록 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한편, 청와대 경호실 측은 오히려 폭행당한 것은 자신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버스를 바로 뺄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버스를 발로 차는 행위를 했고 이를 제지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문제의 경호실 직원은 상황 직후 병원으로 이동했다. 민주당 관계자들이 해당 직원의 신분 공개를 요구하며 버스를 가로막는 등 대치상황이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자 경호실 측은 다른 경호원에게 외투를 씌워 버스에 태우는 식으로 민주당 관계자들의 눈을 속이기도 했다.
 

대통령 경호실 "강 의원이 폭행... 법적 조치 검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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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대통령 경호실은 18일 박근혜 대통령 시정연설 직후 강 의원과 경호실 직원들과 벌어진 충돌에 대해 '강기정 민주당 의원의 경호요원 폭행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의 원인 제공은 물론, 경호실 직원의 입술이 터진 것도 강 의원의 소행이라며 법적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도 밝혔다.
ⓒ 이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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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대통령 경호실은 박근혜 대통령 시정연설 직후 벌어진 충돌을 '강기정 민주당 의원의 경호요원 폭행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의 원인 제공은 물론, 경호실 직원의 입술이 터진 것도 강 의원의 소행이라며 법적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도 밝혔다.

대통령 경호실은 이날 오후 보도자료를 내고 "금일 행사 종료 후 행사에 참여한 22경찰경호대 운전담당 현아무개 순경이 대형버스를 이동시키려고 차내에서 대기 중이었다"며 "민주당 의원 일행이 버스 인근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강 의원이 '야 이 새끼들, 너희들이 뭔데 여기다 차를 대놓는 거야, 차 안빼'라며 정차된 차량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차내에 있던 현 순경이 내려와 강 의원에게 다가가면서 상의 뒷편을 잡으며 '누구시길래 차량을 발로 차고 가십니까'라고 항의했다"며 "현 순경은 강 의원이 의원 배지를 달고 있지 않아 국회의원 신분임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부연했다.

또 "주변에 있던 민주당 의원들이 '누가 함부로 국회의원을 잡고 그래, 안 놔" 등의 발언을 하는 상황에서 강 의원이 머리 뒤편으로 현 순경의 안면을 가격하여 입에 상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경호실은 민주당 의원들의 항의를 '소란행위'라고도 했다. 이들은 조치 사항으로 "현 순경의 입술 내외부가 크게 찢어져 급히 화장실로 이동하여 피를 닦아내는 상황에서 민주당 김현 의원이 '너희들 경호실이지'라며 고성을 지르는 등 소란행위를 유발했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 현 순경은 강북삼성병원으로 응급 후송돼 봉합 치료를 받고 있으며 강 의원의 폭력 행사에 대한 법적 조치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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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이 끝난뒤, 국회 본청 정문 앞에서 민주당 의원들과 청와대 경호실 직원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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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 : 18일 오전 11시]
청와대 경호실 직원과 민주당 의원들 몸싸움

18일 오전 10시 40분경, 국회 본청 앞에서 청와대 경호실 직원과 민주당 국회의원간의 거센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경호실 직원은 입이 터져 피를 흘리기도 했다. 이날 몸싸움은 경호실이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앞두고 대형버스 차량 3대를 국회 본청 입구를 막고 주차한 데에서 비롯됐다.

강기정 민주당 의원은 "대통령 연설이 끝났으면 차량을 빼야지 왜 그대로 주차해 두었냐"라고 항의했다. 이에 경호실 직원은 "왜 차를 발로 차냐"며 강 의원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 장면을 본 노영민 의원 등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여기가 어딘데 이 자리에서 국회의원의 뒷덜미를 잡냐"며 거세게 항의했다.

현재 청와대 경호실 대형버스 1대는 자리를 떠났고 나머지 버스 2대 주변을 민주당 당직자들이 에워싸고 있다. 청와대 경호실 직원은 이 몸싸움 과정에서 입이 터져 피를 흘리기도 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청와대 경호실 직원에게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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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진보당 침묵시위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후 첫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마스크를 쓴 채 정당해산 청구 철회를 주장하는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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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 : 18일 오전 10시 36분]
'반쪽 환영' 받은 박 대통령, 한쪽에는 '마스크'도...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전 10시 취임 후 첫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했다. 박 대통령의 등장에 통로 옆쪽 새누리당 의원 전원은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러나 환영은 '반쪽'뿐이었다.

양승조·정세균·조정식 등 민주당 의원 10여 명은 일어서지 않았다. 김기식·은수미 의원 등 15명가량의 민주당 의원들은 아예 시정연설에 불참했다. 앞서 민주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대통령 입장시 예우를 하는 것을 '권고'했다. 다만, 시정연설 후 연설 내용에 따라 예우 여부를 '자율적'으로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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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립한 새누리당, 앉아있는 민주당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4년도 예산안에 대한 정부 시정연설을 마치자 새누리당 의원들이 기립해 박수를 친 반면 민주당 의원들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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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박수 터질 때마다 '정당해산철회' 피켓 들어

오병윤·김선동·이상규·김미희·김재연 등 통합진보당 의원 전원은 '마스크'를 썼다. 헌정 사상 첫 정당해산심판 청구를 한 것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김선동 의원은 연설 중 박수가 터질 때마다 '정당해산철회'라고 적힌 피켓을 들어올렸다.

앞서 이들은 국회 본관 앞 정문 앞에 단식농성장에서도 박 대통령에게 항의 의사를 드러냈다. 박 대통령이 이날 오전 9시 40분께 국회에 도착하자,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당해산철회'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어올렸다. 박 대통령보다 먼저 국회에 도착한 정홍원 국무총리·황교안 법무부장관에게도 "정당해산 철회하세요"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시선은 여기에 닿지 못했다. 청와대와 국회사무처는 철저하게 이들을 가렸다. 청와대 경호원 등을 실은 대형버스 세 대를 국회 본관 로비 앞에 주차해 농성장을 가렸다. 청와대 경호원들과 국회 방호원들을 농성장 옆과 뒤에 배치해 시선을 가렸다. 김미희 의원이 '인의 장막'을 넘어서기 위해 피켓을 든 손을 번쩍 들었지만 소용 없었다.

국회 사무처는 이날 오전 기자들에게 "본회의장 퇴장시 통합진보당의 항의 및 돌발사고 발생 위험 등으로 인한 경내 보안 강화 지침으로 행사장 근처인 2층 정현관, 3층 로텐더홀 근처 출입 및 취재가 제한된다"고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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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 첫 시정연설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9차 본회의에서 취임 후 첫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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