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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의 율도국, 심청전의 인당수…수많은 전설 어린 섬 위도

바다목장으로 거듭나는 '고슴도치 섬' 위도

 
황선도 2012. 10. 02
조회수 97추천수 0
 

홍길동의 율도국, 심청전의 인당수…수많은 전설 어린 섬 위도

수산자원 보전과 생태관광으로 새로운 파시 열리려나

 

물고기를 따라다녀야 할 팔자인 수산 전문가에게 현장 조사하러 들렀던 해안 포구와 섬, 그 와중에 만난 사람들은 단순 여행자의 그것과는 다른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불규칙하긴 하지만 여러 해를 사귄 주민들은 느닷없는 연락에도 어제 본 친구인 양 반갑게 맞이해 주고, 서로 뜻밖의 도움을 주고받기도 한다.

 

이렇게 만난 사람들과 장소에 관한 사연이 묵어 이제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간다. 그래서 물고기 이야기에 다 담아낼 수 없었던 포구와 섬 이야기를 한차례 풀어놓으려 한다.

 

자연과학에서는 그곳 자연을 알지 못하고는 조사를 할 수 없기에 지형과 역사를 파악하는 것조차 통합연구의 연장이라는 변명을 가져다 붙인다. 이글의 일부는 홍민표 님의 도움을 받았다.


설레임의 섬, 위도(蝟島)

섬 여행은 육지의 어디를 갈 때와는 다른 설렘을 느끼게 한다. 생활에 지친 이들에게 여행이 일상의 일시적 단절을 의미한다면 섬으로 떠나는 여행자는 아스팔트로 이어진 길에서 물길로 물리적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 연안 섬들 중에 이런 완벽한 단절의 경험을 주는 곳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편리성과 관광객 유치를 위해 다리가 놓여진 곳이 적지않고, 특히 서해 연안에는 새만금 개발과 맞물려 몇 해 안에 ‘연륙교’란 말 그대로 육지가 될 운명인 섬들도 줄지어 있다. 단절감을 주는 설렘이 사라진 섬은 자동차를 타고 스쳐 지나는 풍경으로 남고, 여행자는 여전히 배를 타러 나선다.

 

wi1.jpg » 바다와 섬 여행은 일상과의 단절이 주는 설레임이다.

 

위도 파장금 항은 부안 격포 항에서 뱃길로 50분 거리다. 뱃전 오른쪽으로는 고군산군도의 섬들을 꼬치 꿰듯 잇는 새만금 방조제가 서서히 물러나고 이내 위도(蝟島)에 딸린 식도(食島)가 나타난다. 위도는 30개의 섬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중 유인도는 6개뿐이다.

 

wi2.jpg » 위도 지도

40∼50년 전 칠산 앞바다에 몰려온 조기 파시로 유명했던 이 섬은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로 명성에 치명상을 입었다. 2003년 방사능폐기장 유치에 나서야 할 만큼 섬 사람들의 상처는 깊었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뒤 유치 실패가 다행이었다고 여기는 주민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우여곡절을 겪는 위도는 이제 청정 해역을 거느린 애초의 모습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wi2-1.jpg » 과거 핵 폐기장이 들어설 예정이던 곳. 지금은 주민들이 유치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는 분위기이다.


고슴도치를 닮은 위도

파장금 항은 위도에 들어가는 들머리로 걸맞은 곳이다. 위도(蝟島)의 위(蝟)는 고슴도치를 뜻한다. 지도를 펴면 섬은 고슴도치가 편안히 누운 모양새다. 파장금(波長金 물결이 길면 어선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으로 파도가 길게 치면 어선들이 대피하여 금, 즉 돈이 몰려온다는 뜻일 게다)은 고슴도치 주둥이에 해당하여 위도를 찾는 여행자들은 배에서 내려 곧장 고슴도치 입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셈이다.

 

항구에서 시작하는 일주도로는 떡시루를 닮은 시루금(시름)을 지나 면 소재지인 진말(진마을, 진리)를 만난다. 앞다리인 정금(鼎金→井金)과 소금벌이 있었다는 벌금을 돌아서면 배 부위에 해당하는 도장금에 다다르는데 그곳에 위도 해수욕장과 식수원인 저수지가 있다.

 

갑자기 나타난 가파른 산길을 굽이굽이 올라가면 ‘이곳이 서해 바다가 맞아?’라고 생각할 만큼 절벽 해안이 나타나는데 바로 그 아래에 고슴도치 배 부위인 깊은금(지푼금, 심구미)과 이어 달그림자가 아름답다는 미영금이다.

 

엉덩이와 꼬리에 해당하는 논금(논구미, 답구미)은 위도에서 유일하게 벼를 경작하는 곳이었고, 조석에 따라 살을 쳐서 고기를 잡았다는 널은 갯벌을 가진 살막금(전막리箭幕里)에 다다른다. 논금에서 살막금으로 넘어 오는 중간에 차바퀴를 닮았다는 거륜도가 있고 주변에 토끼섬과 외조도, 중조도, 내조도가 둘러싸 있는 안락한 바다낚시터가 있다.

 

살막금을 지나 위도 띠뱃놀이전수관이 있는 대리(대돌목, 대저목, 큰돼지의 목 형상이라 해서 대저항, 대장마을, 大里)와 소리(작은돼지목)를 지나 한참을 가면 치도(꿩雉 모양 마을)를 거쳐 다시 파장금으로 돌아오는 길은 고슴도치의 등에 해당한다.

 

치도 앞에 따로 떨어져 있는 형제 섬이 있는데, 큰딴치도와 작은딴치도가 그것이다. 이곳은 얼마전까지 공군의 폭격 목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바로 마을 코 앞인데. 위도에 딸린 섬으로는 멀리 상왕등도와 하왕등도가 있고, 파장금 앞에 식도가 있다.

 

위도와 식도…. 식도(食島)와 이어지는 위도(胃島)가 아니고 고슴도치 위도(蝟島)란다. 항간에는 조기 파시로 휘청망청했던 파장금 항이 주변 돌산을 개발하면서 쇄락했고, 고슴도치가 주둥이를 못쓰게 되니 음식에 해당하는 식도가 먹히지 않아 흥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섬 사람들의 자연 섬기는 마음일 게다.

고슴도치가 방어에 능한 동물인 것처럼 위도는 조선시대에는 위로는 고군산(군산)과 아래로 법성포(영광)까지 관할하는 수군 진영을 둔 군사적 요충지였고, 지금도 진리에 위도 관아가 남아 있다.

 

wi2-2.jpg » 대리 앞바다의 너른 갯벌

 

마을 이름 ‘금’ 자의 비밀
위도는 지명에 순수한 우리말의 흔적을 잘 간직하고 있기로 유명하다. 파장금, 정금, 벌금, 도장금 깊은금, 미영금, 논금, 살막금처럼 ‘금’으로 끝나는 지명은 모두 깊숙이 들어온 내만(內灣)이며 배가 피항할 수 있는 천연의 항구다.

 

‘금’은 ‘구미’의 축약이나 ‘끝’의 변형으로 ‘파장구미’ ‘깊은구미’로 불리기도 한다. 비숫한 지형을 가진 다른 섬이나 포구에서도 ‘구미’ 또는 ‘끝’으로 끝나는 지명을 찾아볼 수 있지만 위도의 ‘금’은 다른 곳과는 달리 한자(金)를 쓴 것이 눈길을 끈다.

 

위도에는 현재 14개 금이 남아 있는데, 이 금들은 섬이 과거에 군사적 요충지였던 내력과 관련이 깊다. 이곳은 지금도 주민들에게 유용한 항구지만, 외적들이 배를 대고 침입하기에도 좋은 곳이어서 수군은 이들 금에 자급할 수 있는 경작지가 딸린 초소를 두었고, 지금도 그중 상당수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위도 사람들은 이 ‘금’들을 우리말 그대로 두지 않고 ‘金’ 자로 표기하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대로라면 지명에 ‘金’이 붙은 이유는 사금이 났다거나 육지와 바다에서 난 산물이 풍족해 금처럼 소중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설이 제기되었다.

 

조선 숙종 때 위도에 최초로 진 설치 임무를 띠고 이곳 위도에 부임했던 광산 김씨 김복남 장군의 9대손인 김영석 선장의 증언을 들으면, 김복남 장군과 그 아들 김한윤은 2대에 걸쳐 위도진을 관할하는 절충장군(첨사, 종3품)을 지냈다. 김복남 장군 부자는 위도 관아 건립과 더불어 14개의 초소를 설치했고 직접 이름을 지었는데, 이때 절충장군이었던 부자의 성을 따 ‘금(金)’ 자를 붙였다는 이야기다. 뒷받침할 사료를 찾는 것이 과제로 남지만, 오랫동안 한 집안에서 내려온 사연이니 위도만의 특별한 지명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하나의 열쇠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wi4.jpg » 광산 김씨 김복남 장군의 9대손인 김영석 선장(왼쪽).

 

섬 속의 도솔천, 내원암
고슴도치의 자궁 자리인 깊은금 산속에는 아담한 절, 내원암이 있다. 절의 이름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의 내원과 외원에서 따 왔다고 한다. 도솔천은 외원궁과 내원궁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외원궁은 천인들이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곳이고, 내원궁은 미륵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올 때를 기다리며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곳이다.

 

페리호 사고 등 크고 작은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던 섬 사람들은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위도 사람들은 내원암을 찾아 불공을 드리고 마음을 모아 용왕각을 지어 치성을 드린다.

내원암은 여느 산중 사찰의 위용과는 거리가 멀다. 대웅전은 1873년에 중수된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작은 규모이다. 대웅전 옆에 심겨진 배롱나무 고목이 건물보다 더 커 보일 정도다. 건물보다 더 큰 나무라니….

 

이런 풍경은 내원암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지만, 곧 대웅전 신축공사가 시작된다니 아쉽게도 사라질 풍경이다. 유인갑 면장이 군 유지 일부를 대웅전을 증축하는데 이용할 수 있도록 행정지원함으로써 배롱나무를 옮기거나 제거하지 않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내원암이 소장하고 있는 탱화도 눈 여겨 봐야 한다. 후불탱화인 관음후불탱은 바다에 나가 생명을 담보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바다를 관장하는 해수관음의 영험함이 그려져 있다.

 

wi5.jpg » 내원암과 집보다 큰 배롱나무.


격포 항과 위도 파장금 항을 운행하는 카페리 선실에는 위도를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정말 이곳 위도가 어려운 현실 속에서 미륵이 오길 기다리며 도솔천의 내원을 속세에 재현한 율도국은 아니었을까? 흥미롭기만 하다.

 

심청전 인당수와 문인석

홍길동전의 이상향인 율도국과 대리 마을의 대룡샘, 형제섬에 얽힌 전설 등, 위도는 전설의 섬이다. 그중 가장 특별한 이야기는 심청전과 얽혀 있다.


진리 어촌계장을 맡고 있는 서봉신씨는 1984년경 위도 앞 임수도 근처에서 특이한 돌을 건져 올려 지금도 집 대문가에 세워 놓았다. 보통 묘 앞에 세우는 문인석이었는데, 이 돌이 우리나라에 흔한 재질이 아니고 땅속에 묻히는 기반이 없어 관심을 끌만하다.

 

소설은 소설일 뿐 사실이 아니기에 거기서 근거를 찾는 것 자체가 논리적이지 않지만, 최근 각 지자체들은 홍보를 위해서 자기 지역이 여러 설화의 근거지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그간은 백령도 근처 물살이 세고 중국과의 교역 루트로 이용됐던 해역이 인당수일 것이라고 지목되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심청전의 배경인 인당수가 어디냐는 논란에 불을 지피는 게 아니가 싶다.

 

심청이 공양미 삼백 석에 제물로 팔린 것처럼, 옛날 뱃사람들은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용왕께 인신공양을 하며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산 사람을 수장하는 것이 악습으로 지목되자 뱃사람들은 대신 사람의 모습을 닮은 문인석을 제물로 바쳤지만, 어쨌거나 잔혹한 인신공양의 증거는 거센 물살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확고하게 남았다. 현재 서 씨의 대문 앞에 보관되어 있는 것 외에도 이후 몇 개의 문인석이 더 건져 올려져 치도 노인회관 담장 아래에 2기가 보존되어 있다.

 

wi6.jpg » 위도 앞바다 임수도에서 건져올린 문인석. 인신 공양의 흔적일까.


사라진 조기떼를 부르는 띠뱃놀이

1970년대까지도 위도는 칠산 앞바다의 풍요로운 어장에서 잡아 올린 조기 파시로 명성을 날렸다. 사실 조기로 유명한 곳은 영광군 법성포구이다. 바로 앞 칠산바다에서 조기를 잡아와 굴비로 가공을 하기 때문이다.

 

영광군은 전남, 위도는 전북에 위치하지만,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두 곳의 거리는 지척이다. 과거 언젠가는 위도가 영광군에 속했던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정리해 보건데, 영광 앞바다에서 위도 주변 해역을 통틀어 칠산바다라 했을 것이다. 날씨가 사납거나 법성포로 갈 수 없을 만큼 조업이 한창일 때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위도에다가 잡은 조기를 부렸을 것이다. 이곳이 조기 파시가 열렸다는 파장금이고…. 파장금은 이제 위도에 들어가는 항구 구실만 하고 있지만, 파시가 한창이던 시절에는 30여 곳의 주막과 이동 술집, 어부, 장사꾼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wi7.jpg » 영광 법성 포구와 굴비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 대리 마을에서 띠뱃놀이라는 풍어제가 벌어진다. 원래 명칭은 대리 원당제이나 1985년 위도 띠뱃놀이라는 명칭으로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띠뱃놀이를 보존하기 위해 전수관과 전시관이 지어졌고 전시관 한켠에는 띠배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애초에 풍어제는 용왕굿과 당굿이 중심이었고,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할 때 이 띠배를 띄워 보내기 때문에 띠뱃놀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집인 원당에서 굿을 하기 때문에 원당제라고도 한다.

띠배는 띠풀과 짚, 싸리나무 등을 함께 엮어 길이 3m, 폭 2m 정도의 크기로 만드는데 안에는 각종 제물과 함께 7개의 허수아비, 돗대, 닻을 만들어 달아 배 형태를 갖춘다. 놀이는 수호신을 모신 원당에 올라가 제물을 차리고 굿을 한 후 마을로 내려와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함으로써, 굿의 공간이 산과 마을, 바다로 이어진다. 띠뱃놀이는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으니 언젠가 칠산 앞바다에 조기떼가 다시 몰려올 날이 있을 게다.

위도는 서해안의 여느 섬 같지 않은 절경을 자랑한다. 예부터 위도 8경이 시로 읊어져 왔는데, 위도의 절경이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외에도 부안 채석강은 저리가라 할 만큼 아름다운 용멀(용머리)이라 부르는 해안 절벽을 비롯해 곳곳에 기암절벽이 펼쳐진다. 방사능폐기장 예정지와 가까운 깊은금 해안에 깔린 납작한 콩돌은 파도가 쓸고 지나갈 때마다 시원한 소리를 낸다.

 

wi12.jpg » 용멀 해안의 대규모 퇴적층. 격포해안 퇴적층의 연장으로서 공룡시대 호수 바닥에 쌓은 퇴적물이 돌로 굳은 흔적이다.

 

wi13.jpg

필자가 위도의 풍광과 사연이 새삼스런 이유는 최근 위도 앞바다에 수산자원을 조성하는 사업과 맞물려 자주 방문하며 섬을 돌아볼 기회가 많았던 탓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바다는 수산자원이 고갈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수산물 소비가 늘고 바다를 휴식과 레저의 공간으로 찾는 이들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들의 요구는 자원 보존적 관리에서 적극적 자원조성으로 개념의 이동이 일어났다. 2012년부터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서해지사(지사장 조강현)와 부안군(담당 김호중, 이호성)이 함께 하는 위도 연안 바다목장 조성사업은 그 첫걸음이다.

 

wi8.jpg » 위도 연안 바다목장 해역

 

대리 강대식 선장과 함께 수산생물 모니터링을 한 결과, 쥐노래미, 조피볼락, 붕장어, 양태, 보구치, 꽃게, 홍어, 참돔, 박대, 농어 등 유영생물과, 홍합, 피뿔고둥, 해삼 등의 저서생물들이 다양하게 서식하는 곳으로 나타났다.


wi9.jpg » 대리 강대식 선장의 자망 그물질

 

위도는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이 세워졌던 곳, 1993년 10월 10일 서해페리호 침몰사건이 난 곳, 2003년 위도 방폐장 반대 시위 등 과거와 현대사에 시련이 많았던 곳이다. 이제 이곳에 수산자원을 조성하고 생태관광을 발굴하여 다시금 파시가 형성되고 율도국과 같은 이상향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wi10.jpg » 바다목장 해역 자망(왼쪽 위)과 통발(오른쪽 위) 조업에 의한 자망 어획물(왼쪽 아래)과 통발 어획물(오른쪽 아래)


wi11.jpg » 바다목장 해역 잠수 조사(위)와 저서생물(아래)

 

글·사진 황선도/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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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도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연구위원·어류학 박사
고등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어류생태학자.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에서 자원조성 업무를 맡고 있다. 뱀장어, 강하구 보전,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수산자원 회복 등에 관심이 많다.
이메일 : sanisdhw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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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보호사 무명씨들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0-02 오전 7:48:40

 

올해는 사회서비스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지 5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간병노동자, 요양보호사, 보육교사, 장애인 활동보조인 등 돌봄노동자들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돌봄노동자들은 "노동자의 노동권과 건강권을 보장해야 양질의 사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며 오는 10월 20일 보신각에서 '제3회 돌봄노동자대회'를 열 예정이다. 이에 공공운수노조는 사회서비스 영역의 현재를 진단하고 제도개선안을 제안하는 기고를 <프레시안>에 7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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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 요양보호사들에게 김장이나 된장, 고추장을 담아 자식들에게 택배를 부치라고 하거나, 마늘 까기 같은 그 집의 부업꺼리, 심지어 밭일까지 시키기도 해요. 시설은요. 10년 넘게 일해 웬만한 간호사 신출내기보다도 우리가 더 전문성이 있어도 "아줌마, 이거 해, 저거 해"라고 부려먹으려고만 하죠. 그러니 우리를 "요양보호사"라고 제대로 부를 리가 없습니다.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방문 요양보호사는 가사도우미나 파출부로 소개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이런 부당노동 요구에 대해 센터장에게 불만을 이야기 해봤자 더 화만 나요. 대상자(등급 받은 노인)를 놓칠까봐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반응입니다. 이런 일을 거부하려면 당일 해고를 각오해야 합니다.

노인 수면제 먹기기부터 근무일지 조작까지…사설요양시설의 꼼수

사설 요양시설에서는 꼼수가 난무합니다. "본인부담금(전체 서비스 비용의 15~20%를 본인이나 가족이 부담)을 면제해주며 대상 노인이나 가족을 유인하는 불법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센터장은 한 달에 90시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어르신을 70시간만 돌보고, 실제로는 90시간 근무일지를 쓰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받은 20시간의 부정 수가로 본인부담금을 면제해 주는 것이죠. 국민이 내는 사회보험금을 떼어먹는 짓이자, 내 노동시간을 줄여 내 임금을 깎아 먹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환자에게 더 잘하고 싶은데 사설 요양기관에서는 돈을 아끼기 위해 기저귀도 하루에 세 번만 갈라 쓰라고 하질 않나, 반으로 잘라 쓰라고 하지 않나…. 그러면서 퇴직금을 주기 싫어 가족이랑 센터장이랑 짜고 11개월 만에 문자로 해고 통보하는 건 다수예요. 내가 지금까지 환자를 열심히 돌본 건 도대체 무엇인가 싶어요.

▲ 요양보호사(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연합뉴스

안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센터장은 요양보호 대상자로 등급 받은 노인들 어디 없나 찾아보라고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등급 노인 한 명당 요양보호사에게 10만 원, 가족에게 10만 원을 주는 곳도 있어요. 요양등급을 받기 위해 공단 심사원이 집에 오는 날에는 노인에게 수면제 등 약을 먹이는 가족들도 있고, 일부러 치매나 인지능력 장애로 보이게 하려는 온갖 속임수를 센터장이 가족이나 노인에게 미리 교육을 시키기도 합니다. 시설도 마찬가지에요. 시설장은 시설을 넘기면서 노인 한 명당 2500만원에 팔아넘기기도 해요. 요양 서비스의 질이나 노인들의 돌봄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우리는 우리대로 하루종일 일하다 보니 그 분들을 돌보는 요양서비스의 질이 현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도 그럴 것이 하루에 혼자 30~40명 노인들을 다 상대하다보면 진이 빠지거든요. "노인 2.5명당 요양보호사 1인"이라는 규정은 서류상의 지침일 뿐입니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다 보면, "아 나는 늙기 전에 빨리 죽어야지." 이런 생각까지 들어요. 정말 현대판 고려장이 따로 없을 정도로 노인들이 딱하고 안타깝죠.

정부에서 관리한다하지만 미리 알려주고 오는 그런 정기 평가는 하나 마나예요. 게다가 방문 요양보호사 분들은 정부에서 관리한답시고 RFID라는 전자 시스템으로 출퇴근 감시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게 아무 효과가 없어요. 멀쩡한 어르신들에게 수면제 먹여가며 요양 서비스 등급을 받으려 하거나, 70일 근무했는데 90일 근무했다고 근무일지를 조작해서 돈 떼먹는 센터장을 제대로 잡아내느냔 말이죠. 게다가 RFID 시설의 교체비용도 우리가 다 내야 합니다. 우리 감시하자고 만든 제도의 기기를 우리가 내면서 효과는 없는 셈이죠.

길게 일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도 우리 요양보호사들은 하루 12시간 혹은 하루종일 일해야만 12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답니다. 시설에 일하는 요양보호사들에게는 월 2회 정도 외출만 허용하고, 재가 요양보호사 분들에게는 24시간 입주 근무를 시킵니다. 그래야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다른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은 모두 단절됩니다. 이게 사람이 할 일인지 한숨만 나옵니다.

추석 명절에는 온 가족이 다모여 쉬는데, 그럴 수가 없어요. 무조건 일해야 하죠. 수당도 꿈도 못 꾸죠. 쓸쓸하게 자식들도 없이 요양원에서 홀로 있는 노인들 옆에서 지켜드리자는 마음으로 일하는 거죠. 이제 명절에 못 쉬는 건 괜찮아요. 제발 딸 결혼식이나 가까운 친척이 상을 당했을 때 대체인력이 없으니 동료 요양보호사들 눈치 봐야 하는 것만이라도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너무 미안하니까 제 돈으로 대체인력 넣고 나서 쉬었어요.

8시간 노동이요? 길게 일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하지만 12시간, 24시간 맞교대를 해야 겨우 120만 원을 버는데, 8시간 노동을 하면 월급이 얼마나 줄어들까요? 8시간 노동이 아니라 8시간으로 생활임금을 보장해야 합니다.

▲ 지난 9월 24일 국회 앞에서 "요양보호사 노동인권 개선과 노인장기요양서비스 공공성 강화를 위한 법 개정"을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여는 전국요양보호사협회 회원들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전면 개정 공동대책위원회

열심히 일하는데 사람대접 받아봤으면 좋겠어요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12시간, 24시간씩 돌보는 일을 하다 보니 우리는 1년 정도 일을 하고나면 모두 골병이 들어요. 그런데 전혀 산재 인정이 안 됩니다. 규정대로 한다면 둘이서 같이 노인 한명을 씻겨야 하는데 그런 걸 지키겠어요?

그렇게 혼자서 열심히 돌보는데도 치매도 아닌 멀쩡한 노인들이나 가족들이 대놓고 무시하고 도둑 취급하면 정말 속이 상해요. 노골적으로 성희롱할 때는 정말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죠. 그래서 이야기하면 "싫으면 관두라"는 식이에요.

우리가 노인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만큼 우리도 그들을 돌보는 노동자로서 인격적으로 대우받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우리는 환자를 돌보는 돌봄 노동자이자, 요양보호사에요. 우리와 마주치는 센터장, 시설장, 환자, 환자 가족들 그리고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봐주길 바랍니다.

 

 
 
 

 

/요양보호사 무명씨들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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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의 수상한 안철수 논문 표절 보도

 


추석 연휴 기간 민심을 잡기 위해 고심하는 대선 후보들에게 추석 연휴 기간에 보도되는 뉴스는 민심과 여론을 움직일 수 있기에 민감합니다. 어제(10월1일) MBC 뉴스데스크는 '단독 보도'라는 타이틀로 안철수 후보의 박사 논문 표절 의혹을 보도했습니다.

MBC 뉴스는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의학박사 학위 논문이 다른 교수의 논문을 상당 부분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면서, 안철수 후보의 1990년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과 서울대 서 모 교수의 박사 논문을 비교하는 자료 화면까지 내보냈습니다.

이 뉴스 보도를 보면 안철수 후보의 논문 표절 의혹이 사실인 양 비쳤는데, 어제 MBC 뉴스에는 수상한 모습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논문의 표절 진위를(물론 철저히 검증이 요구되지만) 떠나 MBC의 안철수 후보 관련 보도를 어떻게 했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해봤습니다.

' 언론의 원칙이 무시된 보도'

'언론은 철저하게 중립적인 원칙을 지키면서 보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중립적인 원칙을 지키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객관적인 증거, 사실에 대한 반론권 등이 있습니다. 객관적인 증거라 함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학술적이거나 검증된 증거 자료를 의미합니다.

반론권은 방송과 언론에 의해 공표된 사실에 의해 피해를 볼 수 있는 사람의 주장을 포함하여 언론 보도가 양쪽 당사자의 주장을 모두 담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원칙에 따르면 어제 MBC 보도는 정확한 보도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객관적인 증거의 부족

논문 표절 의혹의 검증은 사실 정확한 학술관련 단체에서 판명되기 전까지는 오해 내지는 시시비비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래서 논문 표절 판정이 나오기 전에 보통 언론에서는 학술단체나 관련 분야 교수의 의견을 포함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어제 MBC 보도에서는 기자가 논문 표절 의혹을 서술했을 뿐, 전문가 내지는 교수들의 인터뷰 내용이 빠져 있었습니다.

 

 

▲안철수 후보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논문의혹 관련 해명 게시글.

 


MBC 보도의 안철수 후보 논문 표절 의혹 보도 이전에 안철수 후보 공식 페이스북은 서울대 의대 생리학 교실 이호석 주임 교수와 호원경 교수의 의견을 게재했습니다.

 

"MBC측에서 문제삼는 볼츠만곡선은 19세기 통계물리학자인 Ludwig Boltzmann이 정립한 물리학적 원칙으로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비견되는 물리학적 법칙임. 자연현상의 해석에 뉴튼의 원리를 적용할때마다 그의 저서인 Principia를 인용하지 않듯이 볼츠만의 원리를 적용할때 인용문을 달지 않는것이 관례임. 두 논문은 심장세포에 존재하는 세포막을 통한 전혀 다른 종류의 이온흐름에 같은 통계물리학적 원리를 적용한 것임. 서로 다른 생물학적 현상에 같은 물리학적 원리를 적용한 것을 표절이라고 볼 수 없음."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 주임교수 이석호


이 의견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충분히 관련 보도 내용과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이런 다른 전문가의 주장을 충분히 들어 볼 필요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MBC는 기자의 말 이외에는 어떤 전문가의 주장이나 의견이 없었습니다.

 

 

▲SBS뉴스의 새누리당 신경림 비례대표 논문표절 의혹 단독 보도 관련 전문가 인터뷰 장면

 


SBS 뉴스는 4월초 새누리당 비례대표 신경림씨의 논문표절 의혹을 단독 보도했습니다. SBS는 이 논문 표절 의혹 보도를 하면서 한상권 한국 학술단체 협의회 교수의 주장과 인터뷰 내용을 삽입해서 보도했습니다. 기자가 논문표절 의혹을 보도하면서 자신만의 주장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언론 보도 방식에서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SBS처럼 '논문 표절 의혹'이 있다면 과연 이 논문이 표절인지 전문가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함께 보여줘야 합니다.

오로지 MBC 뉴스데스크에서만은 이런 객관적인 증거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라진 반론권

앞서 언론은 어떤 사건의 당사자 양쪽의 말과 주장을 모두 실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엠피터'가 글을 쓰는 방식에서 민주당이 제기한 의혹을 무조건 쓰지는 않습니다. 민주당의 제기한 의혹을 새누리당은 어떻게 해명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글을 씁니다.

보통 기자라면 민주당과 새누리당에 가서 취재하겠지만, 일개 블로거인 저에게 취재를 응할 새누리당이 아니기에 새누리당의 보도자료를 많이 인용하거나 사용합니다. 이처럼 양쪽의 주장을 모두 담는 것이 원칙이지만, MBC는 안철수 후보의 해명과 반박 자료를 보도에 넣지 않았습니다.

 

 

▲안철수 후보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글

 


안철수 후보 캠프의 정연순 대변인은 "MBC의 새누리당 출입 기자가 오늘 오후 8시께 다른 기자를 통해 유민영 대변인에게 보도 내용을 취재했고, 유 대변인은 8시 45분께 서울대 의과대학 생리학교실 주임교수 이석호 교수의 의견을 전달한 후 '보도 내용은 사실이 아니며 만약 보도할 경우 MBC는 이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했습니다.

만약 정연순 대변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MBC 기자는 안철수 후보의 논문 표절 의혹을 보도하면서 방송 1시간 전에야 취재 전화를 하고 그에 대한 답변은 모두 잘라 버리고, 단순히 '안 후보와 논의 후 답변하겠다'는 언급되지 않은 거짓말을 공식 답변처럼 왜곡 보도한 것입니다.

 

 

▲SBS뉴스의 새누리당 신경림 비례대표 논문표절 의혹 단독 보도 관련 신경림측 주장 보도 내용

 


SBS는 새누리당 신경림 비례대표의 논문 표절 의혹을 보도하면서, 앞서 한상권 학술단체 협의회 교수가 주장한 내용에 대해서 '연구 대상자와 연구 기간을 늘린 것으로 일종의 반복 확대 연구'라는 해명은 물론이고, '2005년 논문과 2009년 논문은 연구 대상과 방법이 완전히 다른 별개의 논문들'이라는 신경림측 주장을 논문 표절 의혹 주장과 비슷한 분량으로 보도했습니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은 검증 학술 단체에 의해 판결이 나오기 전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시청자가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언론은 양쪽 당사자의 주장과 반반,해명의 기회를 줘야 합니다. 그러나 MBC 뉴스는 안철수 후보 논문 표절 의혹을 보도하면서 기자로서 최소한 갖춰야 할 취재의 원칙이나 방법 모두 지키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정확한 취재를 하지 못한 언론이 나중에 잘못된 보도를 정정하는 일에는 얼마나 소극적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오로지 자신의 주장만 강조한 MBC 뉴스데스크의 보도는 논문 표절 의혹 자체를 떠나 데스크에서 어떻게 승인이 났는지 이상할 정도로 앞뒤가 맞지 않는 단독 보도였습니다.

' 새누리당 출입 기자의 안철수 단독 보도'

안철수 후보 캠프 대변인의 말을 보자면, 이번 MBC 뉴스를 보도한 기자는 새누리당 출입 기자입니다. 출입처 기자가 왜 중요하냐면, 만약 민주당 출입기자가 새누리당 뉴스를 쓸 동안 새누리당 출입기자가 그 소스를 모르고 있었다면 데스크에서 자격 미달,능력 부족으로 찍히기 때문입니다.

 

 

▲현원섭 기자의 새누리당 보도 기사 리스트

 


이번 안철수 논문 표절 의혹을 단독 보도한 현원섭 기자는 새누리당 출입 기자입니다.(지금은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만약 안철수 후보 담당 MBC 기자였다면 안 캠프에 다른 기자를 통해 취재할 리가 없었다고 봅니다.) 왜 이런 출입처가 중요하냐면 과연 안철수 논문 표절 의혹 소스가 새누리당에서 흘러나왔을 수 있다는 의혹도 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새누리당은 이미 안철후 후보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 이전부터 안철수 관련 팀을 운영했다고 소문이 떠돌았고, 그런 사실을 증명하듯 하나씩 쏟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안철수 후보 '다운계약서'가 새누리당에서 나왔던 점으로 미루어, 이번 사건도 새누리당과 MBC의 합작품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안철수에 관한 편파적인 MBC'

MBC 뉴스를 보면 거의 안철수 후보를 왜곡하려고 작정한 듯 보이는 편파적인 보도를 일삼고 있습니다. 대선 후보로 나오기 전부터 MBC는 안철수 후보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를 계속 쏟아냈었습니다.

 

 

▲안철수 원장이 힐링캠프에 출연할 당시의 MBC 뉴스데스크 화면

 


보통 시청자들은 뉴스 꼭지의 첫 화면에 나오는 문장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거나, 그 문장 그대로 이미지를 굳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런 뉴스 방식을 본다면 MBC의 안철수 원장 힐링캠프 출연은 '정치 아마추어'로 인식하기에 충분한 효과를 보였습니다.

MBC는 유독 안철수 원장의 부정적인 이야기는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정작 중요한 그의 정책이나 행보의 의미를 생략하는 행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민언련의 방송모니터 결과

 


안철수 후보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9월19일부터 23일까지의 MBC 뉴스를 보면 안철수 후보가 민주당 대선 후보와 갈등을 빚을 것이며,민주당이 안 후보를 견제했다는 식의 논리를 앞세운 내용을 타 방송보다 현저히 많게 보도했습니다.

'안은 호객꾼,,다급해 허둥'
'단일화 논의 부적절 독자행보'
'시민 캠프로 안 'SNS'캠프에 맞불'

MBC 보도를 보면 안철수 후보가 나와서 정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혀 없고, 오로지 구태의연한 정치인을 등장처럼 만들어, 치열하게 싸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안철수 후보의 논문 표절 의혹은 반드시 검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표절 의혹에 관한 국민의 궁금증과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언론이 할 수도 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언론의 모습은 국민의 알권리를 대신하는 언론의 기능이 아니라, 특정 후보와 영합한 '정치 주체'가 되어 앞으로 자신들의 이익과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정치 공작으로 비칠 뿐입니다.

 

“우리의 언론은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다가 그로부터 해방된 다음에는 이 권력, 저 권력과 제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조중동입니다. (중략) 그들이 정치주체가 된 것입니다. 물론 모든 언론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점점 확산되고 있습니다. 모든 언론이 성격을 달리해서 게임을 관리하고 심판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선수가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 2007년 11월 11일, KTV 특집인터뷰 다큐멘터리 ‘대통령 참여정부를 말하다’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의 수준을 높이는 가장 강력한 힘은 깨어있는 시민의 참여라고 했습니다. 대안언론으로 나오는 미디어를 살릴 수 있는 원동력도 시민이고, 잘못된 언론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의무와 권리가 있는 존재도 시민뿐입니다. 여러분의 수준이 높아졌다면, 이제 저질 왜곡 언론은 퇴출시켜야 할 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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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저축은행 피해자들, 저축은행 점거의 세월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2/10/02 07:35
  • 수정일
    2012/10/02 07:3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은행에 돈 맡긴 죄로 거리에서 1년 6개월

[이들의 추석②]부산저축은행 피해자들, 저축은행 점거의 세월

12.10.01 16:30l최종 업데이트 12.10.01 22:17l
정민규(hello21)

 

 

부산저축은행 피해자들이 500일 넘게 점거하고있는 동구 초량동 부산저축은행 본점 건물. 27일 찾은 은행에는 영업정지 당시 붙었던 공고문이 아직도 입구에 붙어있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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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숙(가명·66)씨의 시간은 2011년 2월 17일에 멈춰있다. 600여 일 전 부산저축은행은 영업정지를 당했다. 처음 은행이 영업정지를 당했다고 했을 때 민씨는 영업정지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지금도 그는 왜 은행이 자신의 돈을 주지 않는지 모른다.

은행이 문 닫기 두어달 전 은행직원은 그에게 후순위 채권이란 걸 권유했다. 스스로를 '까막눈'이라고 말하는 그는 은행 직원의 말이 고마웠다. 자신같이 못 배운 노인에게 이렇게 좋은 상품을 권해주는 은행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별 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이자를 많이 주는 좋은 상품"에 가입했다.

그렇게 그와 그의 남편이 평생 동안 안 쓰고 안 먹고 모은 돈 1억 원을 은행에 맡겼다. 이 돈을 모으기 위해 남편은 타이어 공장에서 젊은 시절을 쏟아 부었다. 몸이 아프면 죽을 먹어가며 일했다. 중풍에 걸린 시아버지와 19살 때 사고로 몸을 다쳐 돈벌이를 못하는 아들을 위해서 두 부부는 죽어라 일을 했다. 그래도 가난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직도 부부는 산동네 무허가 주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은행이 문 닫은 이후로도 그는 간판만 남은 동구 초량동의 부산저축은행을 매일같이 찾는다. 그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껍데기뿐인 은행 건물 앞에 선 지도 500일이 넘었다. 추석을 사흘 앞둔 27일에도 저축은행 피해자들은 은행 건물을 지켰다.

주야 돌아가면서 텅 빈 은행건물 지킨지 1년 6개월

부산저축은행 피해자 남 아무개(65)씨가 27일 부산저축은행 본점에 앉아 뉴스를 보고있다. 매일 70여명의 저축은행 피해자들이 혹시나하는 기대에 이곳을 찾는다고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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휑하게 빈 은행 건물로 매일같이 7~80여 명의 저축은행 피해자들이 텅 빈 마음을 채우러 찾아온다. 남들은 명절 준비에 바쁘다는데 이들에게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피해자들은 야간에도 돌아가며 은행에서 밤을 지새운다. 사무실 바닥의 냉기를 막기 위에 깐 스티로폼과 그 위에 덮은 전기장판이 이들의 잠자리다. 지금은 견딜만 하지만 다시 다가올 겨울을 어떻게 버텨야할지 걱정이다.

그래도 추위는 참아낼 만하다. 추위보다 무서운 건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다. 한창 자신들을 찾던 정치인과 언론은 이제 더 이상 이들의 일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국회에서도, 검찰에서도, 법원에서도 이들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다. 만나고 싶은 '높은 사람' 대신에 경비와 경찰이 이들을 상대한다. 그는 양팔에 시퍼렇게 멍든 팔을 기자에게 내보였다. 며칠전 국회에서 국회의원을 만나겠다고 했다가 경찰에 끌려나오며 생긴 멍자국이다.

선거철만 되면 찾아와 두 손 꼬옥 잡아주던 국회의원들은 이젠 두 팔에 멍이 들어도 만나기 힘든 사람들이 됐다. 서러워서 길바닥에 앉아 펑펑 울었다.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서 손자뻘인 경찰들과 드잡이를 하고 길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져야 하는지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은행에 돈을 맡긴 죄 밖에 없는데...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금융당국의 수수방관이 키운 저축은행 부실

부산저축은행 피해자들은 주간조와 야간조를 나눠 은행 건물을 지킨다. 스트로폼을 깔고 전기장판을 덮은 잠자리에서 잠을 자는 피해자들은 다가올 겨울이 벌써부터 걱정이라고 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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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벌면 2~3만 원을 번다는 구포시장 채소 노점상 아주머니도, 평생 부두에서 하역일을 하며 번 돈을 맡긴 남씨 할아버지의 사정도 비슷하다. 민씨 할머니 부부가 평생 모은 1억 원, 노점상 아주머니가 하루하루 벌어 모은 3500만 원을 부산저축은행 경영진은 제 집 곳간 쌀 퍼 쓰듯 썼다.

부산저축은행 박연호 회장은 9조 원에 이르는 금융비리로 항소심에서 징역 12년 형을 선고받았다.

회장뿐만 아니다. 스스로에게 362억 원을 대출해준 은행 대표, 차명으로 관리하던 비자금을 다시 빼돌린 영업이사도 있었다. 곳곳에서 천문학적인 돈이 줄줄 세고 있는데도 감시를 해야 할 정부와 금융당국은 손을 놓고 있었다.

2008년 검찰이 부산저축은행의 불법대출을 적발하고 이를 금융감독원에 통보했을 때도 금감원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고객들이 은행에 맡긴 돈 200여억 원이 임직원 명의로 설립된 특수목적법인(SPC)에 부당하게 지급됐지만 감시와 감독은 허술하기만 했다.

지난해 10월 27일에야 대법원은 박연호 회장 등이 불법대출로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가 인정된다며 유죄 취지의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미리 정부가 손을 썼다면 은행의 부실은 막을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2009년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의견서를 살펴보면 당시 검찰은 "(경영진이) 자신들의 돈이라면 이런 주먹구구식으로 투자사업을 하였겠느냐"며 부산저축은행의 방만한 경영을 질책하고 있다.

오히려 당시 금융당국은 법까지 뜯어고쳐가며 부산저축은행의 부실을 키워갔다. 지난해 저축은행 국정조사특위에서는 2008년 금융위원회가 상호저축은행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부산저축은행이 대전저축은행을 인수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5년간 금융관계법상 위반으로 벌금형 이상의 처벌을 받은 사실이 없어야 한다'는 개정전 법 시행령에 따르면 부산저축은행은 다른 금융기관을 인수 할 수 없었다. 당시 부산저축은행은 2004년 증권거래법과 외감법을 위반으로 처벌받은 적이 있어 다른 저축은행을 인수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후 부산저축은행그룹의 대전저축은행 출자현황을 살펴보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2455억 원이 흘러들어간 것으로 나타나 있다. 결국 이것이 부산저축은행의 몰락에 결정적 영향을 제공했다.

"정부의 관리부실을 피해를 서민에게 전가"

지난 총선에서 저축은행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던 정치인들은 어느 순간부터 이들의 목소리에 둔감해졌다. 한 정당 행사에 참석한 이들은 경찰과 경호원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한 국회의원의 자동차 앞에 저축은행 피해자가 들어눕자 경찰이 이들을 끌어냈고 차에 앉아있던 관계자들은 이들을 빤히 보고도 지나쳤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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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은행 피해자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피해자들은 정부와 금융당국이 자인한 저축은행의 부실을 예금자들이 떠 안아야한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 저축은행 피해자들을 구제한다는 목적으로 추진되던 저축은행 특별법도 원금의 55%만을 구제해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사위에 계류 중인 이 법안마저도 정치권의 관심 부족으로 사실상 폐기된 상태다.

참다못한 저축은행 피해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490억 원의 국가배상신청을 제기했지만 이 역시도 난항이 예상된다. 서울고검에서 진행하고 있는 국가배상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법무부 배상심의위원회에서 다시 심의를 받아야 한다.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국가를 상대로 정식 소송을 걸어야 한다. 노령의 피해자들이 수 년의 시간이 필요한 정식 소송을 버텨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옥주 전국저축은행비상대책위원장은 "정부의 명백한 관리 부실이 드러났음에도 피해를 서민들에게 전가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고 강한 목소리로 비판했다.

김 위원장은 "설사 국가 배상 판결이 받아들여진다 해도 70~80대가 많은 피해자들에게 소송은 너무 긴 시간이 된다"며 "대승적 차원에서 정치권이 서민들을 위한 구제에 노력해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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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과 통화하던 그날, "이런, 젠장 할…"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화차> 변영주 감독 "꼰대들과 싸우는 것이 임무"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0-01 오전 10:54:38

 

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 서고 싶은 때가 있다. 방향을 잃은 것 같아 한없이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다. 함정에 갇힌 것처럼 마음이 갇혀 헤맬 때, 날 구원해주진 않지만 그 함정에서 빠져나올 길을 살짝 알려주는 이를 만나게 되면 행운이다. 행복이다.

"영화를 안 만든다고 내가 죽지는 않는다. 나는 영화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 나는 영화보다 내가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만약 어느 날 영화감독을 더 이상 못하게 되면 불행해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만약 꿈꾸는 어떤 삶이 있고 내가 세상을 손을 잡고 걸어가려는 어떤 길이 있다면 책 대여점을 하면서 꼬맹이들한테 "야 판타지 재밌는데 이 책 죽여~"라며 책을 권하는 걸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밀애>나 <발레교습소>를 생각해보면 매번 중간에 멈췄던 것이 흥행에 실패했던 것 같다. 바꿔 말하면 <화차>가 그나마 좀 잘된 것은 내가 상업적인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에 멈춰 서지 않고 끝까지 가 보고 싶은 방향을 향해 걸어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출사표라는 표현을 썼다. '이제 나는 이렇게 영화를 만들 것이고, 더 단단해질 것이고, 더 뜨거워지고, 더 정교해지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화차>를 막 찍기 시작했는데 '희망버스'가 시작되었다. 촬영현장에서 감독은 굉장히 쾌적한 숙소에 독방까지 주는데 침대에서 못 자겠는 거다. 사람들은 끌려간다고 그러지 김진숙 씨는 크레인 위에서 저러고 있지. 심지어는 침대에서 누워서 잔다는 것이 토가 나올 정도여서 맨날 바닥에서 잤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지 않아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화차> 시나리오를 20고까지 썼다는 영화감독 변영주. 한진중공업 문제 때문에 사람들은 저리 뛰어다니는데 혼자 편히 자는 것이 미안해 영화 제작 내내 바닥에서 잤다는 인간 변영주. "나는 영화보다 내가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자신의 말을 그는 그렇게라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살아내고 싶었던 것일까. 갑자기 <화차>가 다시 보고 싶다. 스크린 저 뒤쪽에 변영주 감독이 맨바닥에 웅크려 자는 모습이 혹시 보이지 않을까 해서.

"일단 기본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책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정말 개 쓰레기라는 생각을 한다. 지들이 애들을 저렇게 힘들게 만들어 놓고서 심지어 처방전이라고 써서 그것을 돈을 받아먹나? 애들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무가지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걸 팔아먹나? 아픈 애들이라며? 아니면 보건소 가격으로 해 주던가."

"고흐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거대한 벽을 허무는 일'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영화를 만들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벽을 한꺼번에 뽀개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끌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긁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말을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차올라 허둥지둥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야 했다. 왜 그랬을까. 제아무리 제약과 한계가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하며 자신만의 벽 긁기를 포기하지 않고 싶은, 지금 이 순간은 멈춰 있더라도 언젠가 다시 끌을 잡을 거라며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 친구들과 변영주 감독의 인터뷰를 함께 읽고 싶다.

다큐멘터리 <송환> 촬영감독을 했었다.

동원이 형이 그냥 내 이름에 넣은 거지, 영화 전체를 따지면 1분도 채 안 찍었다.(웃음) 그래서 <송환>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한 줄도 없다.(웃음)

<낮은 목소리>의 위안부 할머니나 촬영감독으로 활동한 <송환>의 장기수 할아버지는 우리 사회에 매우 특별한, 하지만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들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있었다면?

<낮은 목소리> 전에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비디오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제주도 기생관광에 관한 내용이었다. 원래 김동원 감독 친구분이 김동원 감독한테 부탁했는데, 자기가 어렵고 힘들 것 같으니까 나한테 떠넘긴 거다.(웃음) 김동원 감독이 되게 훌륭한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 굉장히 약삭빠른 사람이다.(웃음) 제주도에서 요정에서 일하고 있는 언니 둘을 만나서 같이 인터뷰를 하는 것인데, 작품이 되게 후지다. 필모그라피(작품목록)에 넣기 싫을 정도로 후졌는데(웃음) 그것이 아무래도 성매매 문제이고 하니까, 교회에 있는 여성인권운동 하시는 분들이 주관을 해주셔서 시사회까지 했다. 시사회가 끝나고 우리 친구들하고 뒤풀이를 하면서 정말 펑펑 울었다.
 

▲ 변영주 감독 ⓒ최형락

그러면서 내가 딱 한마디 했던 것이 기억난다. "정말 감독이 되고 싶다"고. 그때 처음으로 진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어떤 영화를 만들까 하다가, 요정에 있던 언니 한 명이 처음 성매매를 하게 된 이유가 그 언니 어머니가 위암자궁암까지 걸려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다 처음으로 몸을 팔게 되었던, 무슨 이현세 만화와도 같은 현실을 찾기 위해 무작정 당시 합정동에 있던 나눔의 집을 찾아가서 할머니들이랑 놀기 시작했다. 한 일 년 반을 노니, 할머니들이 '젊은 애가 너무 논다' 이러면서 같이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것은 나에게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런 역사적 사실들이 아니라, 오십 년 동안 세상 사람들 앞에 자기를 철저하게 숨겼던 사람들이 갑자기 세상에 커밍아웃을 했을 때 이후에 할머니들의 삶이 과연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낮은 목소리>가 만들어졌던 것이고 처음부터 연작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8년 동안 세 편을 찍을 줄 알았으면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한 편 만들고 났더니 할머니들이 또 만들자고 해서 만들게 되고, 그걸 만들고 났더니 이번에는 이런 게 좀 필요할 것 같다고 그러면서 만들게 됐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이십 대 중반에서 삼십 대 중반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젊었던 시절을 이 할머니들과 보냈던 것은 굉장히 좋았던 것 같다.

어떤 면에서 특히 좋았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보게 되는 관점을 거기서 배운 것 같다. 어떤 일이 터지면 어떤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안에 누가 있는지, 그 사람은 누구인지에 훨씬 더 궁금해지게 되었다. 전에는 안 그랬다.

'사건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나는 이제 세상의 모든 일이 이슈로 느껴지지 않는다. 쌍용차 문제를 예로 들면 그것은 그냥 대한문 앞에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친구가 죽었고 그들의 가족이 흩어져 있고 아이들이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같은 상표의 라면을 먹고 있으니까 말이다. 주장하러 가거나 손을 잡고 깃발을 흔들러 가는 것이 아니라 들으러 가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인 것 같다. 듣는 것이 나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고, 결국 나로부터 그 대답을 들으려고 애써보는 일이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쌍한 할머니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과 맞서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용감해져야 하는 거지'라는 나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언제나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20대 혈기가 가득한 시간, <낮은 목소리>가 1편에서 2편, 2편에서 3편으로 갈 때의 두려움은 없었나?

<낮은 목소리> 2편을 찍을 때 두려움이 가장 심했다. <낮은 목소리> 2편은 다른 사람들이 둘이 연애 하느냐고 놀릴 만큼 가장 친했던 할머니 한 분이 폐암 말기 판명을 받으시고 죽을 때까지 자기를 찍어달라고 해서 시작한 거였다. 그런데 3개월 판명을 받았던 할머니가 일 년 반을 사셨고, 그 일 년 반이 우리에게는 정말 지옥과 같았다. 우리는 돈이 없었다. <낮은 목소리>가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킨 것 같지만, 극장에서 5000명도 보지 않았다. 우린 그때 이미 7500만 원정도의 빚이 있었고, 일본 개봉을 앞두고 그렇게 쉬운 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두 번째 작품을 만들고 있었으니까 한 6개월이 지나니 돈이 다 떨어졌다. 할머니는 그대로 살아계시지, 대부분의 폐암 말기 환자들이 그렇듯 두 달에 한 번씩 응급실에 실려 가시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한 일 년이 지나니 할머니가 병원에 실려 가셨다고 했을 때 '어떡하지, 할머니?'가 아니라 '이번에는 돌아가시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어느 날 할머니가 또 실려 가셨는데 조감독이 간호사를 보자마자 "이번에는 돌아가시나요?"라고 했던 자기 말에 스스로 놀라 죄의식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우리 모두가 그 시기 동안 죄의식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가 응급실에 실려 가시면 그것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정말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게 정말로 힘들었다. 당시 병원이 중앙병원이었는데, 난 아직도 중앙병원에 안 간다. 그리고 정말 언젠가 할머니한테 내가 그랬다. 할머니 되게 못됐다고. 치사하고 더럽고 엿 같다고. 할머니가 그렇게 한 것 때문에 지금 나는 너무 힘들다고…. 그러던 중 내가 할머니를 모티브로 한 극영화 시나리오가 로테르담 영화제 시나리오 공모에 붙어서 잠깐 그 영화제에 가게 되었는데, 내가 로테르담에 가자마자 그 다음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연락을 듣자마자 나는 속으로 할머니가 정말 치사한 년이라고 생각했다. 돌아오면서도 '어 갔어? 진짜 갔어?' 이런 느낌이었다.

ⓒ최형락
<낮은 목소리> 2편이 관객들 반응이 가장 좋았던 것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실제로 있고 그 할머니 곁에 세상을 여전히 살아가는 또 다른 할머니들이 있다는 것이 약간의 블랙 코미디 같은 느낌으로 작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2편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그래서 <숨결>(<낮은 목소리> 3편)을 한 편 더 했던 것 같다. 이 할머니로 인해 받은 상처를 할머니로 위안받고 싶었고, 그래서 더 철저하게 촬영감독이 되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이 만나서 동료들의 증언을 듣는 작품이 <숨결>이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굉장한 위로의 영화였다. 촬영이 있었던 어떤 날, 인터뷰를 하는데 한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한테 "언니 나는 대만으로 끌려갔었는데, 언니는 어디로 끌려갔었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되게 행복해졌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이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는 어떤 일을 겪으셨어요?'가 아니라 '나는 이곳에 끌려갔는데, 너는 어디로 끌려갔니? 나는 이 꼴을 당했는데, 너는 어떤 꼴을 당했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지금껏 듣고 싶었던 거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피해자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에서 굉장한 위로를 얻었다.

편하게 덤덤하게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 순간은 못 잊을 일인 것 같다.

못 잊는다. 그런데 워낙 오래전 일이라.(웃음)

<낮은 목소리> 3부작을 마쳤을 때 "영화는 못 봤지만, 정말 수고하셨고 훌륭하십니다"라는 이야기를 제일 많이 들어 극영화로 옮겨올 때 "보지 않고서는 칭찬도 할 수 없고 욕도 하기 힘든 영화를 만들고 싶다. 정치적이지 않은, 정치적으로 지지받지 않을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그런가? 그런데 '정치적이지 않은, 정치적으로 지지받지 않을 영화'라는 게 무엇인가?

<숨결>까지 만들고 났을 때 영화로서가 아니라, 내 이름이 유명해진다는 것이 웃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정말 훌륭한 일을 하시네요"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 저런 말을 영화를 만드는 감독한테 태연하게 할 수 있지? 어디 뭐, 구의원이라도 출마를 해야 하는 거야?' 이런 농담을 했을 정도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낮은 목소리>와 같이 '보지도 않고 칭찬할 수 있는 영화, 영화를 안 보고도 지면에다가 이 영화는 꼭 봐야 한다'라고 쓸 수 있는 그런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보기 전에는 어떤 평가도 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칭찬받고 싶어서 영화를 한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극영화를 하려고 했던 것이 <낮은 목소리>를 끝내지 못해서 지연돼 있었던 것이라, 이것이 끝난 이후에는 극영화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제 충무로로 가서 극영화를 하겠다고 했을 때 대뜸 제안들이 들어온 게 뭐냐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극영화들이었다. 가장 엿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완전히 공간을 이전해서 나의 욕망을 쫓아갔더니, 거기에서 또다시 위안부 문제와 같은 극영화를 다룬다면 마치 '전 변하지 않았어요~'라고 하면서 코스프레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사회적인 이슈나 정치적인 이야기가 정면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일상적이고 허접한 소재로부터 출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을 먹더라도 사람들이 보고 난 뒤에 욕을 할 거니 말이다. 그때 내 프로듀서가 권해줬던 책이 전경린 작가의 <내 생애 하루뿐인 특별한 날>이었고, 무엇보다도 작가의 페미닌한(여성스러운) 문체가 너무 좋았다. '이러한 문체를 과연 영상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너무 좋아서 <밀애>를 만들게 되었다. 내용 자체는 '남편 때문에 맞바람을 피고 난 뒤 제 인생은 망했지만, 지금 열심히 살고 있어요. 편집자님'처럼 마치 <선데이서울>에 나오는 독자 후기 같은 건데 말이다.(웃음)

나도 <밀애>를 되게 좋아해 두 번이나 봤다.(웃음) 하지만 '정치적이지 않은, 정치적으로 지지받지 않을 영화'라고 했지만, <화차>나 다른 영화들도 보면 정치적인 것이 녹아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이 글을 쓰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면, 결국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건, 어떤 영화를 만들건 간에 그것을 만들고 있는 나의 시점과 신념과 뇌는 언제나 '나는 지금 2012년을 어떻게 살고 있고, 나는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안에 있는 거다. 정치적인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코미디영화를 만들더라도 새누리당 지지자와 진보신당 지지자의 영화는 다르다.(웃음) 그것은 그 사람의 정치적인 성향이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와 캐릭터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이 되는지, 하고 싶은 것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인 것이다. 채식주의자인 감독이라면 영화에 불고깃집이 나오기는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그것을 그냥 만드는 게 아니라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거다.

비근한 예가 <화차>의 원작자인 미야베 미유키의 일화이다. 그는 전 세계로 책이 출간되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걸어 다니는 대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지금껏 부모님과 함께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그 집에서 살면서 전철을 타고 출퇴근을 한다. 어느 날 출판사에서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납치위험도 있고 하니까 자동차를 타고 다니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운전을 배울 수 없을 테니 기사를 불러서 차를 갖고 다니라고 했더니, 일주일을 고민한 뒤에 그가 하는 말이 "미안합니다. 나는 아침에 집에 나와서 골목길을 걸어서 시장통을 지나 전철을 타고 이곳에 오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전철에서 내가 바라보고 있던 그 사람을 상상하고 만든 캐릭터이고 시장 길을 걸으면서 봤던 어떤 풍경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다니면서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 내가 글을 쓸 수 없잖아요. 납치당하지 않도록 조심할게요"라는 것이다. '그거'라고 생각한다. 생산을 한다는 것은 우아를 떨며 살롱 같은 곳에서 깊은 시름에 잠겨 있다가 어느 순간 시상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이고, 어떻게 살기로 결심했고, 그 세상을 향해 이렇게 전진할 거야'라고 결심하며 사는 어느 순간, 내 시선에 의해서 잡힌 어떤 세상이 영화가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배우들과의 관계나 같이 연기하고 싶은 사람들을 선택할 때 기준은 무엇인가?

배우들도 다 알고 있지만 내가 이제까지 함께했던 배우들은 언제나 내 첫 번째 초이스(선택)들은 아니었다. <밀애>를 시작으로, <발레교습소>도 그랬고, <화차>도 언제나 거절을 당했다. 계속 거절을 당하는 과정에서 '그렇다면 이 친구는 어떨까' 하면서 결정된 것이다. <밀애> 때도 매번 배우들한테 시나리오를 주면 노출수위가 어떠냐가 그들의 첫 질문이었는데, 윤진이는 그것을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래서 '아, 얜가 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발레교습소> 때도 열아홉 살 소년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은데 류승범, 원빈한테 다 거절을 당하고 계상이를 선택한 거다. 설마 내가 꿈속에서 윤계상을 보고 캐스팅 했겠나.(웃음) 계속 거절을 당하니 '그렇다면 막 나가 보자' 하면서 캐스팅의 범위를 확 넓혀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예능 프로에 나오는 윤계상의 얼굴을 봤는데 사내아이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실세계 안에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 친구로 하게 된 거다. <화차<의 경우도 여러 후보들 중에 선균이가 제일 먼저 캐스팅이 됐고, 그가 일 년 반을 기다려 주었다. 그 친구 말에 따르면 자기는 이미 <화차,에 탄 것만 같았다고, 사채 빚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한다.(웃음) 민희도 첫 번째 초이스는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이 친구는 어때?'라고 생각하고 그를 만났을 때 느낌이 왔었다.

ⓒ최형락

그래서 나는 시나리오를 쓸 때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배우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망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가 결정되면, 그때부터 배우들과 많은 의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서 촬영이 들어가기 전에 만나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배우뿐만 아니라 촬영감독이라든가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준비기간에 모든 것의 90퍼센트 이상이 결정 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잘 모르겠는 부분은 촬영이 들어간다고 해서 알게 되지 않는다. 촬영 전에 사람들과 만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관계가 깊어지게 되고 또 다른 좋은 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떤 감독들은 '그냥 따라와'라고 하는 스타일도 있을 것 같은데, 감독은 같이 얘기하고 뽑아내는 스타일인가?

촬영 전까지는 배우들과 산책하러 나가고 수다를 떤다고 생각한다. 선균이 같은 경우는 아이를 키우니 아이를 재우고 나오면 밤 한 시 반인데, 그때 꼭 전화가 온다. 그때부터 한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그 한 시 반을 대비해 미리 다양한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웃음) 영화가 만들어질 때는 감독의 것이지만, 관객에게 제공된 이후는 배우들의 것이다. 나만 하더라도 내가 좋았던 영화들을 떠올려보면, 그 배우가 어떤 대사를 하거나 그 배우가 어떤 표정을 짓던 그 장면이 좋아서이지 그 감독이 그렇게 연출했던 그 장면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결국 영화가 관객에게 다가가는 순간서부터는 배우의 감정을 관객들이 받아먹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영화를 찍을 때마다 매번 이런 미션을 내 스스로에게 준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친구들이 나보다 더 좋은 감독한테 팔려갔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이를테면 '이창동 감독이 <화차>를 본 후에 전도연이 아니라, 김민희를 캐스팅했으면 좋겠다', '이선균이 강우석 감독하고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런 미션 같은 것이 내게 있다. 항상 성공하지는 않지만.(웃음)

아직까지 한국에서 여성 감독은 흔치 않은 존재다. 여성 감독으로서 현장을 지휘할 때 어려움은 없나? 반면 여성이기에 가지는 장점이 있다면?

임순례 감독이 언젠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 "이 세상에서 참, 너나 내가 대답하기 힘든 게 여성 감독으로서 현장에서 일하는 게 어떠냐의 문제인 것 같다. 너나 나나 등빨에서 밀리지 않지 않냐."(일동 웃음) 그런 질문은 이를테면 이경미 감독과 같은 얄상한 애들이 현장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가로 궁금해야 될 문제인 것 같다.(웃음) 여성 감독은 의외로 많고 늘어나는 추세다. 현장에서 감독의 역할은 세 개가 있는 것 같다. 열심히 듣는 것, 정확하게 대답해 주는 것, 그리고 겁먹지 말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 세 가지만 잘한다면 영화 현장에서 성별이 문제되지 않는다.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있어서 영화 현장이라는 것은 힘든 편이 아니고, 실제로 한국 영화 현장은 굉장히 권위적이지 않은 편이다. 내가 있었던 현장은 아무튼 그랬다. 다른 데는 잘 모르겠고(웃음). 기본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일이 아이를 키우거나 가사 노동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독의 역할 중에 '겁먹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어떨 때 겁이 나나?

어떻게 찍어야 할지 다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현장 컨디션이 바뀌었을 때 과연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는 때가 있다. 원래 여기까지 이 장면을 찍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지연 되는 바람에 해가 떨어지려고 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20분이고, 20분 안에 어떤 것을 찍고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이 될 때가 있다. '배우들은 이미 감정이 다 올라와 있고, 이것을 중간에 끊고 내일 찍자고 하면 아마 전체를 다시 찍어야 되고, 그러면 제작비도 문제가 될 것이고' 하는 수만 가지 생각이 든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가장 원하던 그림을 뽑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결심을 해야 하는데, 그 순간이 두렵다. 그때 주저하거나 비겁해지면서 겁을 먹고 물러서면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기치 않게 발생한 상황 속에 겁을 먹지 않기 위해서는 팀워크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그런 팀워크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나.

열심히 듣는다. 아무리 조급해도 상대방이 뭔가 할 말이 있을 때는 듣는다. 그리고 그 말이 정말 쓸데없으면 꼭 얘기해준다. 쓸데없다고.(웃음)

<화차> 제작 시 예산이 부족해 현장 일반 스태프들을 제외한 감독을 포함한 헤드 스태프들의 보수를 깎아서 시작했다고 들었다. 보통은 현장 일반 스태프들의 보수를 깎기 쉬울 텐데, 이렇게 한 것에는 감독의 평소 생각들이 반영된 것인가?

그것은 당연하다. 제작비가 부족하게 된 것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산업 안에서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고 그렇다면 내 연출을 깎는 일이 맞다. 대신 '잘 만들어서 인센티브를 왕창 벌어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 된다. 프로듀서한테 부탁해서 깎고, 배우들한테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잘 됐을 때 제일 이익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먼저 깎아야 되는 게 맞다. 현장 스텝은 이 영화가 잘되고 이익 볼 게 없지 않나.

다른 감독들은 어떤가? 변영주 감독처럼 같이 생각하고 현장에 적용하는 감독들이 있나?

다른 감독들이 어떻게 하는지는 모른다.

관련해서 문화예술계 현장 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배우들은 억대 출연료를 받는 상황에서도 최고은 작가는 배고픔에 굶어 죽어야 했던 현실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에는 영화산업노조, 세종문화회관 노조, 개별 예술인 등이 함께 힘을 합쳐 '예술인 소셜 유니온' 출범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여기에 함께 참여하고 있나?

충무로 스텝들은 처우가 나쁘지 않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도 20억 원 미만의 영화의 경우에는 스텝 보수를 보장해준다. 정말 그지 같고 개떡 같고 도둑놈 같은 현장이 아닌 이상, 오버차지(시간 외 수당)도 받고 촬영하는 동안에는 4대 보험도 다 된다. 문제는 찍고 있지 않을 때이다. 영화가 촬영되지 않고 놀고 있을 때 이 친구들의 생활보장은 어떻게 하는가가 고민인 것이다. 유니온의 경우는 오히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디들의 문제를 위해 결성된 것이다. 독립영화 현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이라든가 인디밴드로 활동하는 친구들은 정말로 돈을 받을 방법이 없다. 비정규직 문제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이 친구들이 어떻게 정부로부터 보장받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감독도 사실 벌이가 일정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문화예술을 한다는 것이 때로 고통스럽지는 않나?

이제 영화도 좀 잘됐는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웃음) 기본적으로 나는 삶이 불안정한 것이 무섭거나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해야만 하는 일을 선택한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 부모님을 부양하기 위해 직장을 선택하고 돈을 버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사람과 삶의 안정성이 같으면 정말 거지같은 나라 아닌가? 나는 내가 삶의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다.

ⓒ최형락

잘 먹기도 하면서 하고 싶은 일도 한다는 것은 솔직히 웃기는 일이 아닌가. 그건 무슨 시건방인가. 그럼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겠나. 먹고 살 수 있는 안정된 길이 있다면 이런 인터뷰 하겠나. 골방에 앉아서 나올 때까지 자기 글 쓰고 있지 말이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다 먹고 살기 위해 버티며 사는 거지 않나.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걸 하고 있다면 삶이 조금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지금 마흔일곱 살인데 내 집 꿈도 못 꾸고 있고 내년이면 전세금도 올려야 한다. 보험 든 거? 없다. 은행잔고? 요즘 영화가 잘돼서 몇백 단위가 좀 있다.(웃음) 기본적으로 몇십 단위다. 그런데 그래서 불행해지는 거라면 왜 이 일을 하겠나? 나는 모든 것에는 게임값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내 모든 짐이 트렁크 두 개 안에 들어가길 바란다. 요즘은 잘돼서 세 개.(웃음)

'잘 먹기도 하면서 싶은 일도 한다는 것은 솔직히 웃기는 일이 아닌가'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이 없다. 오히려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생활의 안정을 누릴 수 있어야 성공했다라고 생각하는 사회다.

요즘 친구들한테 미안하다. 나도 먹고살려고 시간 강사 같은 것도 한다. 시간강사로 먹고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화차>가 잘 되면 한 학기 또 뛰겠다고, 쓸데없는 약속을 했던 것 때문에 강의를 또 하게 되었다. 사실 애들 가르치는 것 진짜 싫다. 내가 20년에 걸쳐서 깨달은 걸, 요돈 받고 애들한테 풀어 준다는 게 막 억울하고 분하다.(웃음) 그래서 애들이 이해 못 하는 표정 지을 때 되게 좋다.(일동 웃음) 농담이고. 어찌 되었건 학교에 가서 수업을 하면 애들한테 정말 미안하다. 우리 때문에 애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 우리 세대가 고생하고 세상의 모든 폭력은 다 받고 온갖 피해는 다 받은 것처럼 굴지만, 사실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적어도 우리 때보다 애들이 안 행복하지 않나. 우리는 철저하게 실패한 기성세대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십대들이 세상을 장악해서 우리의 목을 어서 빨리 쳐버렸으면 좋겠다. 우리를 다 끌어내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제일 먼저 "네. 죄송했습니다" 그러면서 짐 싸들고 내려 갈 거다.

하지만, 이 미안한 것과 상관없이 요즘 청년들이 '88만 원 세대'라서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현실적 상황이 자기연민의 도구가 되면 망한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생활이 안정적인 것은 우리 세대들도 못해본 일이고 전 세계도 못하는 일이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복지가 잘 된 국가도 잘 못하는 일일 것이다. 얘가 가진 것을 나도 가지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할 수는 없다. 이때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한 걸음의 전진이다. 그리고 사회가 해줘야 하는 것은 이 친구가 한 걸음의 전진을 하다가 벼랑 끝으로 떨어져 버렸을 때 죽지 않도록 밑에 안전한 그물망을 놔주는 것이다. 적어도 얘가 먹고는 살 수 있고, 자기 몸을 누일 수는 있고, 일주일에 한 번은 영화는 볼 수 있는 제도를 보장해 주는 게 사회와 세상이 해야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회가 벼랑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게 해주는 건 보장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나무가 아무리 높이 자라도 부러지지 않는 이유가 마디와 마디가 지주대 역할을 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감독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동일한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어 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 나는 계속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구나'라며 스스로 매듭을 지었던 순간들이 있었나. '영화를 안 만들면 죽겠구나'라고 생각하던 그런 순간들은 없었나?

영화를 안 만든다고 내가 죽지는 않는다. 나는 영화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 가끔 후배들이 "감독님, 저는 영화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하면 "영화가 무슨 죄가 있어서?"라고 한다.(웃음) 나는 영화보다 내가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들고 싶다고 느껴지는 그 영화를 만들면서 그것을 관객들이 사랑할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포기해야 할까?'라는 생각도 안 한다. 내가 만약 어느 날 영화감독을 더 이상 못하게 되면 불행해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다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거다. 내가 만약 꿈꾸는 어떤 삶이 있고 내가 세상을 손을 잡고 걸어가려는 어떤 길이 있다면 책 대여점을 하면서 꼬맹이들한테 "야 판타지 재밌는데, 이 책 죽여~"라며 책을 권하는 걸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용산참사, 언론노조, 쌍용자동차, 재능교육, 제주도 해군기지 등과 같은 사회의 날 선 이슈에 늘 함께 있다. 가끔 대중 집회에서 사회를 보기도 한다. 변영주 감독에게 사회참여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나는 영화 덕에 덕 보는 애다. 사실 영화만 사랑을 받으면 되는데, 고맙게도 사람들이 나도 사랑해주면서 얻게 되는 부가적인 것들이 있다. 하다못해 식당에 갔는데 내 영화를 보고 좋아한 식당주인이 뭘 더 줬다고 하면, 그것 역시 부가 소득이며 그렇다면 그것은 사회에 빨리 돌려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영화 때문에 사랑받게 된 어떤 부가적인 것들을 돌려 드릴 수 있는 방법이 뭘까를 고민해 왔고, 그것은 분기마다 달라지는 것 같다. 이번 분기에는 '어떻게 하면 젊은 친구들이 조금 더 용감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해 봤더니 '어떤 해고자도 존재하지 않는 것, 어떤 비정규직도 자기가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쫓겨나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고, 그래서 쌍용자동차나 용산에 함께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곳에 갔더니 거기서 고동민(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도 보게 되고 송경동(시인)도 만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꿈에 고동민이 나오는데, 내가 얘를 사랑하나 이런 생각도 잠시 하기도 했는데 그럴 리는 없다.(웃음)

ⓒ최형락

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 때 처음 송경동을 만났다. 얼굴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애가 전화를 해서 '구로에서 기륭 분들이 농성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문화제를 한다고 와달라'는 것이었다. 갔더니 공동체 놀이 비슷한 것을 하는데, 이상하게 내가 제일 못하는 것이 이런 공동체 놀이 같은 것이다. 손을 잡고 서로 인사하고 이런 것이 정말 미칠 정도로 너무 싫다. 공황장애가 온다.(웃음) NL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에 내가 NL이 될 수 없었던 유일한 이유는 처음 보는 사람과 친숙하게 지내야 하는 일종의 집단주의적 공동체 놀이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웃음) 이념과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다. 그런데 거기서 그런 것을 하는데 막 미치겠는 거다. 그런데 그런 나를 송경동이 바깥쪽으로 끌더니 "밖에서 지켜 보세요" 그러는 거다. 나를 알아차리는 그를 보고 '이 녀석 뭐지?' 하면서 그때부터 이 친구가 너무 좋았다. 이 친구의 시를 좋아했고, 이 친구의 "누나 내일 나와요"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뻔뻔함이 좋았다.

그런데 이후 <화차>를 막 찍기 시작했는데 '희망버스'가 시작되었다. 이 녀석은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전화해서 오라고 하지, 나는 촬영을 해야 하지,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다. 촬영 현장에서 감독은 굉장히 쾌적한 숙소에 독방까지 주는데 침대에서 못 자겠는 거다. 사람들은 끌려간다고 그러지 김진숙 씨는 크레인 위에서 저러고 있지. 심지어는 침대에서 누워서 잔다는 것이 토가 나올 정도여서 맨날 바닥에서 잤다. 그 때 꿈은 '빨리 끝내고 희망버스 탄다'였는데 아마도 송경동은 나에게 어떤 죄의식을 촉구하여 나를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웃음)

그 해 촬영이 끝나고 부산 영화제 때 드디어 '희망버스'를 탔다. 도착해서 김진숙 씨하고 통화를 하는데, 정말 울컥하더라. 크레인 위에서 손전등을 켜 좌우로 움직이는 순간 '이런, 젠장 할…' 하면서 눈물이 나질 않겠나. 나에게 수화기를 주는데 김진숙 씨가 "안녕하세요" 하니까, 그때까지는 울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김진숙 씨가 "저 2회 여성영화제였던가? 감독님한테 싸인 받은 적이 있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펑펑 눈물이 났다. 저기서 저 꼴을 하고 있는 여자가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너무 터무니가 없었다. '내년 3월쯤 <화차>가 개봉을 하니까 꼭 와주셨으면 좋겠다'고 하며 엉엉 울면서 돌아왔다. 나중에 잡혀갔던 경동이는 풀려나서 VIP시사회에 다리를 절며 절뚝절뚝 와서 내 영화를 봤고 김진숙 씨도 크레인에서 내려와 부산 시사회 때 초대하여 영화를 보았다. 영화 엔딩이 추락하는 것이라 마음이 상하면 어쩌나 별생각을 다 했는데, 다행히 김진숙 씨가 좋아했다. 배우들이 직접 인사하러 오고 사인까지 해주어, 자기가 사람들한테 가오(체면)가 섰다고 좋아하는 것을 보니 너무 기뻤다. 김진숙 씨가 부산에서 내 영화 시사회를 온 날이 제일 기뻤던 것 같다.

지난 4.11총선에서 박찬욱, 봉준호 감독들과 함께 문화예술인 269인의 진보신당 지지 선언을 이끌어 냈다. 특별히, 문화예술인들이 진보신당을 이렇게 지지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현장에서 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김대중 정부 이후에 민주당에 대한 지지도가 높다. 왜냐하면 김대중 대통령 되면서 검열 없앴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영화진흥정책을 정말 잘 폈지, 독립영화 사전제작 지원도 많이 해줬지 영화인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진 것이다. 마지막에 스크린 쿼터와 한미FTA가 문제가 되면서 엎어진 것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민주당 정부의 영화 정책이 좋다는 정서가 있다. 또 전체적으로 영화 쪽이 왼쪽에 있는 경향도 있는데 이것은 당연한 거다. 대중문화를 하는 사람들이 오른쪽에 있으면 좀 이상하지 않나.(웃음) 할리우드도 그렇고 전 세계의 경향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영화인들 특별히 박찬욱, 봉준호가 대표적으로 진보신당을 지지하고 있고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다.

'진보신당이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문화예술인들이지지 선언을 하니까 진보신당만이 갖는 특별함이 있나 생각했다.

이번 총선 때 좀 힘들었다. 왜냐하면 나를 포함한 진보신당 지지자들 중의 상당수는 노회찬 빠나 심상정 빠였기 때문이다. 나도 지금도 그분들을 너무 좋아하고 그분들이 빨리 민주당으로 가서 큰 정치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충무로에서 영화를 만드셨으면 좋겠다. 그런다고 변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은 계속 작고 후지더라도 이 사회에 의미 있는 발언들을 계속하면서 존재하면 안 되나? 우리가 집권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 않나. 진보신당이 집권하면 난 이민 갈 거다. 무서워서 어떻게 사나.(웃음) 그런 수권능력이 없는 애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웃음) 진보신당을 여전히 지지한다는 것은 이 당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지지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그 당의 기동성에 대한 지지일 것이고 그 당의 과감함에 대한 지지이다.

학부를 이화여대 법대를 나왔다. 그런데 '엄마 시력보다 낮은 평점이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켰고, 그래서 20대의 자신은 인제 어쩌지 정도가 아니라 이제 망했나에 가까웠다'고 했다. 20대에 학점을 내팽개칠 만큼 몰입하게 했던 것이 있었나? 아니면 법학이 잘 맞지 않았나?

1985년에 대학을 들어갔는데 그때에는 대학에 두 종류 학생이 있었다. 학생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학생운동을 하는 것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이대를 다녔는데 운동화를 신고 데모하는 애들하고, 하이힐을 신고 데모하는 애들을 도와주는 애들이 있었다. 이 말은 학생운동이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자기가 옛날에 80년대 어디에서 뭘 했다고 하는데, 그 대단한 일 모두가 다 했던 거다. 2002년에 월드컵 응원 간 거랑 똑같다.(웃음) 잘난 척하면서 내가 그때 잡혀가고 그랬다고 하는데, 정말로 누구나 다 했던 일이다. 데모하러 모인거랑 시청 앞에 백만 명 이상이 모인거랑 뭐가 다른가. 다 똑같다. 월드컵 응원 한 거다. 물론 고문당하고 죽은 사람도 있고 대단한 일을 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학생운동이 뭐 대단했던 일이라고는 생각 안 한다.

데모할 때 선두에 섰나?

언제나 선배들이 날 뒤로 숨겼다. 내가 애들보다 기본적으로 머리 하나가 크지 않나.(웃음) 첫날 데모하러 나갔는데, 그날 노량진 경찰서에서 날 불렀다. 데모하는 사진에 찍혔는데 거의 내 독사진처럼 나와서 한눈에 난 줄 알아봤던 것이다.(웃음) 그래서 선배들이 나는 좀 보호해줘야 한다고 해서 항상 뒤에 섰다. 특별히 돌이나 화염병도 못 던지게 했다. 증명사진이 나온다고.(웃음) 그래서 가끔 연세대학교에 가서 시위했었다. 연세대에서 시위를 할 때면 너무 자유로웠다.(웃음)

20대에 느꼈던 벽이 오히려 지금의 변영주 감독을 있게 한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하나. 그런 면에서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류의 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일단 기본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책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정말 좆같다고 생각한다. 개 쓰레기라는 생각을 한다. 지들이 애들을 저렇게 힘들게 만들어 놓고서 심지어 처방전이라고 써서 그것을 돈을 받아먹나? 내용과 상관없이 애들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무가지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걸 팔아먹나? 아픈 애들이라며? 아니면 보건소 가격으로 해 주던가. 20대들에게 처방전이라고 하면서 무엇인가 주는 그 어떤 책도 팔 생각은 없다. 이 세상에서 제일 못된 선생은 애들한테 함정의 위치를 알려주는 선생이다. 걷다 보면 누구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인데, 그것을 알려준다는 것은 되게 치사한 자기 위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그 친구들이 함정에 빠졌을 때 충분히 그 함정을 즐기고 다시 나올 수 있도록 위에서 손을 내밀고 사다리를 내려주는 일이지, "거기 함정이다"라고 하거나 "야, 그건 빠진 것도 아니야. 내가 옛날에 빠졌던 것은 더 깊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영화가 하고 싶어서 막 어쩔 줄 몰라 하는 것과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 중에 더 훌륭한 선택은 없다. 누구나 자기의 선택이 있는 거다. 다만 행복할 자신은 있으시냐고 묻고 싶을 뿐이다.

'영화라는 것은 늘 실패와 흥행의 굴곡을 거듭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베갯잇을 눈물로 지새운 밤이 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런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나?

크랭크인(crank in) 아침에는 떨려서 다 토하고 간다. 항상 그 전날에 똑같은 꿈을 꾸는데 극장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영화를 보러 와서 나를 비웃고 있는 꿈이다. 그런데 '뭐 어쩔 거야'라는 생각을 한다. 압박은 견디라고 있는 것이고 스트레스는 받으라고 있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살려면 열심히 덕을 쌓아서 다음 생애에 친환경 농장에서 병아리나 소나 돼지로 태어나서 안전하게 스트레스 하나도 안 받고 무항생제로 살다가 맛있는 음식이 되면 된다.(웃음) 압박이나 스트레스는 받고 먹으라고 있는 것인 것 같다. 그런데 무항생제로 스트레스 없이 살면 좋기는 하겠다.(웃음)

<화차>만 해도 시나리오를 20고까지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원래 그렇게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끝까지 가보는 편인가.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시간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말이 쉽지 정말 내공이 필요한 일일 것 같다.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밀애>나 <발레교습소>를 생각해보면 매번 중간에 멈췄던 것이 흥행에 실패했던 것 같다. 바꿔 말하면 <화차>가 그나마 좀 잘된 것은 내가 상업적인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에 멈춰 서지 않고 끝까지 가 보고 싶은 방향을 향해 걸어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상업적인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렇게 끝까지 가본 것이 결국 사람들의 마음까지 건드린 것 같나?

그렇다고 생각한다. <화차>를 찍으면서 촬영 현장에서 한 번도 봉합해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화차>가 감독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 그래서 내가 출사표라는 표현을 썼다. '이제 나는 이렇게 영화를 만들 것이고, 더 단단해질 것이고, 더 뜨거워지고, 더 정교해지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조급함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자신을 다스려내나.

커피의 힘이다. 조급해지고 초조할 때는 초코파이다.(웃음)

변영주 감독을 사로잡고 있는 화두가 있다면?

고흐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거대한 벽을 허무는 일'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영화를 만들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벽을 한꺼번에 뽀개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끌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긁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형락

"그림이란 뭐냐? 어떻게 해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 그건 우리가 느끼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서 있는,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는 것과 같다. 아무리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는 그 벽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인내심을 갖고 삽질을 해서 그 벽 밑을 파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럴 때 규칙이 없다면,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흔들림 없이 계속해 나갈 수 있겠니? 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일은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을 때 이룰 수 있다. 결코 우연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 빈센트 반 고흐

변영주에게 자유란?

나에게 자유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디테일하게 행동하는 거다. 꿈이라는 말보다 욕망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데, 누구에게나 욕망이 있다. 장래희망보다 '누구랑 첫 섹스를 하고 싶은가'가 그 사람의 인생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나 욕망이라고 큰 틀에서 얘기를 한다. 욕망은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는 한 그 근원에 있는 진짜 욕망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근원에 있는 욕망을 알아내려고 할 때 내 머릿속에 누군가가 그건 아니지, 그건 잘못된 거지라고 해서 제어하지 않는 것이 자유인 것 같다. 가장 더러운 상상에서부터 가장 고귀한 상상까지 마음껏 할 수 있고 그것을 아주 디테일하게 행동하면서 내 삶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은 이렇게 할 거고, 이건 이렇게 할 거야. 그게 싫다면 당당하게 나한테 아니라고 얘기해. 뒤에서 뒤통수치지 말고"까지를 토해내는 게 자유인 것 같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자기를 너무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슈퍼스타K> 같은 것을 보면 10대 아이들이 나와서 "저는 너무 독특해요. 저는 너무 이상한 애고요, 저는 5차원이고 6차원이에요"라고 할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프다. 걔랑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옷을 입은 애를 나는 5분 안에 서른 명을 구해다 줄 수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너와 내가 어디가 비슷한 것인가'이다. '너와 내가 어디가 다른가'가 아니라 '너와 내가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를 찾는 것이 더 먼저라는 것이다. 그래야 '너의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그것이 연동되어져서 나의 문제도 조금씩 나아지게 되는 것을 찾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손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다들 자기가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서워서 그러는 거다. 스스로 무리 안에 있으면서 그 무리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으니까 자기는 독특하다고 하는 거다. 핵심은 승리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 주는 거지, 애들을 가짜로 독특하다고 인정해 주는 게 아니다. 그러니 제발, 옆 사람이 나와 얼마나 비슷한가를 찾는 일, 아주 전통적인 언어로 '친구 찾기'를 했으면 좋겠다.

자기 연민이야말로 독약이다. 스스로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걔보다 불행한 사람 서른 명을 5분 안에 데려다 줄 수 있다. 자기가 얼마만큼 불행한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얘하고 나하고는 어떤 불행함 안에 놓여 있는가'를 상상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88만 원 세대'라는 것이 구조가 변해야 한다는 개념으로써는 중요한 말이지만, 이것이 당신의 핑계거리와 자기연민의 도구로써 존재한다면 당신은 우리 세대에게 끝까지 이용당하다 죽을 것이다. 자기 연민을 벗어던지고 세상을 친구들과 손을 잡고 만들어라.

그래서 트위터에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를 썼다. "당신들이 세상을 건져서 빨리 우리들의 목을 따 달라"라고.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의 20대들이 건설하는 20년 뒤의 이곳이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 못마땅할지라도 상관없다. 어떤 세상이 올지라도 박수를 칠 거고 대단하고 멋지다고 할 거고 지지할 것이다. 다만 어떤 사안들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그런데 이 부분은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하면서 유서처럼 남기고 갈 것이다. 후배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을 하든 지지해 주고 안전망을 마련해주고 손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구경하고 있거나 '너희들을 구원해주겠다'거나 '너희들,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치사하다.

그래서 정말 <아프니까 청춘이다>만큼 엿 같은 게 '20대 개새끼론'인 것 같다. 부끄럽지도 않나. 어쩌면 마흔 살 넘었는데도 저렇게 자기 성찰이 안 되지? 얼마나 게으르면? 얼마나 꼰대길래? 또 한 가지 우리의 임무가 있다면 우리 세대들의 꼰대들과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빨리 젊은 친구들에게 길을 터주고 그 친구들이 신나게 걸을 수 있도록, 적어도 한 걸음 더 걸을 수 있도록 용감해질수 있는 그 어떤 것을 만들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일을 실제로 지금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진숙 씨나 송경동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고 홍세화 선생님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젊은 친구들이 '피시(PC, Politically Correct 정치적으로 올바르려고 하는)'하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홍세화 선생님이 어느 날 트위터에 "아들과 함께 대학로를 걸으며 담배를 물었습니다"라고 썼는데, "선생님 길빵하지 마세요"라고 멘션을 보내는 얘들이 있다. 도대체 이게 뭔가. 홍세화 선생님이 길에서 담배 피는 게 좋지 않다는 걸 모르시겠나. 그럼에도 그 말을 건네고자 한 이야기의 맥락이 있지 않나. 그래서 내가 "정말, 지랄 맞다"라고 썼더니, 거기다 대고 또 "지랄이라는 것은 간질환자들에게 있는…"이라는 멘션을…. 그게 중요하냐? 왜 그러는가. 왜 그렇게 우아들을 떠는가. 인생 좆같이 살면서, 맨날 다 뺏기면서, 이용당하면서 왜 이렇게 우아한 척을 해. "그래요? 지랄이 그런 뜻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랄이라는 말은 그렇게 분석하면서, 그 말에 섞여 있었던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왜 이야기 안 하는가. 그 말부터 해주었으면 좋겠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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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9-30 오후 1:45:45

 

I. 21세기 탈근대의 문화적 현상

1998년의 IMF 위기와 2002년 월드컵의 열기 이후, 우리는 대한민국 사회에 등장한 아주 기이하고 특이한 문화현상들을 목도하게 된다. 그것은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K-팝으로 이어지는 '한류' 대중문화가 대한민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지역적인 열풍뿐만 아니라 이슬람 지역과 중남미와 유럽의 지구촌 세계모두 포함하는 세계적인 열풍이다. 이러한 지역적이고 세계적인 '한류'의 문화적 열풍은 한 마디로 서구와 비(非)서구, 남과 북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 경제적 지배와 종속으로 이어지는 근대에 대한 환멸과 탈근대적 지구촌 문화의 향연에 대한 지역적이고 세계적인 문화적 표현을 '한류'가 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내내 한반도를 지배했던 근대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세계관에 대한 환멸은 지난 500년 동안의 지구적인 근대 제국주의적 세계체제와 지난 100년 동안의 한반도를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남북분단으로 이끌었던 지역적인 근대 식민지 분단체제의 붕괴를 알리는 지구적이고 지역적인 대변동과 함께 일어났다. 그것은 중국과 동유럽 국가들의 자본주의적 세계체제 진입, 구소련의 몰락, 동서독의 통일, 중남미 아메리카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들의 탈미국화, 15%의 백인이 70%의 흑인과 15%의 유색인을 지배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와 흑백통합의 만델라 정부의 등장, 그리고 유럽연합의 등장과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을 필두로 한 중남미 국가들의 원주민 권력의 등장 등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구적인 탈근대적 현상과 대한민국의 지역적인 탈근대의 문화적 현상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와 파쇼체제 속에서 오랜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두환 세력의 노태우 전 대통령과 박정희 세력의 김종필 씨와 연합하는 보수대합당, 근대 대한민국 체제의 상극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보수당의 연대, 그리고 2002년 대통령 선거의 마지막 날에 파행을 겪었지만 민주세력의 상징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경제적 보수세력의 상징인 정몽준 씨와의 연대.

이러한 정치적 현상들은 결국 세계적인 지구적 변화와 대한민국의 지역적 변화를 수용하여 새로운 탈근대의 대한민국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 그리고 경제적 지배와 종속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는 이명박 정부를 통하여 21세기의 대한민국을 1970년대 근대 산업화 시대에 횡행했던 독재와 파쇼의 대한민국 정치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전쟁, 그리고 남북분단으로 이루어진 근대 식민지 국가체제의 정당제도와 기형적인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 폭력은 마침내 탈근대의 문화적인 시민과 국민이 문화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현장에 직접 나서도록 만들었다.
 

▲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프레시안(손문상)

2002년 월드컵의 '붉은 악마'와 '효순이-미순이 사건', 그리고 2004년 노무현 탄핵반대와 더불어 '미친 소-미친 교육 반대 촛불문화제'로 이어지는 탈근대의 문화적 시민과 국민의 등장은 이명박 정부하에서 근대의 기형적인 수구(한나라당)/보수(민주당)의 양당체제 속에서 보수적인 민주당과 진보적인 민주노동당이 아무런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을 때에 그 꽃을 피웠다. 정당이나 개인이 아닌 시민후보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2008년 7월의 서울교육감 보궐선거와 2009년 4월의 경기도 교육감 보궐선거였다. 비록 서울 시민후보로 출사표를 던진 주경복 서울시교육감 후보가 실패하였지만, 그 경험은 경기도의 도민후보로 출사표를 던진 김상곤 교육감 후보를 당선시켰고, 2011년 6월 지방선거에서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은 상당한 표차로 재선을 달성함과 더불어 서울의 곽노현 교육감과 함께 강원도, 전북과 전남, 그리고 광주인천에서 단일 정당과 관련이 없는 다수의 시민후보와 도민후보를 당선시키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지난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시민후보의 당선은 2012년 12월 대선에서 안철수 국민후보의 등장을 알리는 탈근대적 서곡이었다. 이러한 근대 식민지 정치체제의 기형적인 수구-보수 양당체제에 대한 변혁은 이명박 정부로 하여금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과 곽노현 서울 교육감에 대한 가혹한 탄압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곽노현 서울 교육감은 '사후매수죄'라는 말도 안 되는 법으로 교육감 직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

II. 탈근대의 국가와 국민

탈근대의 국가와 국민은 근대적 의미의 국가나 국민과 다르다. 문화적인 삶을 누리고자 하는 탈근대의 시민과 국민의 입장에서 의회(혹은 국회)의 입법권과 법원의 사법권 그리고 정부의 행정권이라는 삼권분립을 모델로 하는 근대적 의미의 국가나 국민은 전근대적 왕정체제나 종교체제의 국가나 국민처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외부적 힘의 강요나 폭력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러한 외부적 힘의 강요나 폭력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보와 보수, 혹은 좌파와 우파라는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민족과 계급의 폭력적 이분법에 의한 강요나 폭력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서구 유럽 국가들이나 중국, 혹은 러시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분법은 해체되었으며, 진보와 보수, 혹은 좌파와 우파라는 계급적이고 민족적인 이분법 또한 근대 국민국가 내부의 권력관계가 만드는 일시적 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이후의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정부에서 우리는 근대 국민국가 내부의 권력관계가 만드는 일시적 현상의 진보와 보수, 혹은 좌파와 우파의 전혀 원칙이 없는 구별을 경험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탈근대의 국가와 국민은 근대적 의미의 국가나 국민처럼 외부적 힘의 강요나 폭력에 의해서 이분법적으로 국가와 국민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이고 세계적인 문화의 구성 속에서 자신이 속하고 있는 국가와 국민을 구성하는 관계적이고 일시적인 주체이다.

근대적 의미의 국가나 국민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외부적 힘의 강요나 폭력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구성되는 것은 근대적 세계가 서구와 비서구의 이분법을 토대로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서구유럽 국가들은 문명이고, 선진국이고, 제1세계(혹은 그것에 저항하는 제2세계)라는 중심의 세계이고, 대한민국을 포함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야만이고, 후진국이고, 제3세계라는 주변의 세계, 즉 중심과 주변이라는 근대적 서열관계의 식민지적 세계인식 속에서 스스로 국가와 국민을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정치적 폭력과 경제적 이익추구로 드러나는 이러한 문화적 열등감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서구 문화의 수입과 해방 이후 미국 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식민지성, 즉 식민지적 지식과 권력에 의한 근대 대한민국의 국가와 국민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1990년대 이후의 세계는 결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서구유럽의 중심과 비서구 지역의 주변이라는 근대적 서열관관계의 세계인식으로 지구촌 세계가 구성되지 않고 있다. 1990년대 이후에 형성되기 시작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와 유럽 등등의 다양한 지역 문화권과 문화권, 그리고 중심과 주변에서 벗어난 각 나라들의 상호 일대일의 쌍방향적 관계 등등은 지구촌 세계를 정치적인 지배와 피지배, 혹은 경제적인 손익계산서에 의한 근대적 서열관계에서 벗어나 다지역과 다중심의 삶의 문화로 지역과 세계를 인식하고 그러한 다자관계로 세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탈근대의 문화적 현상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류' 대중문화의 지구적 출현이다.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K-팝으로 구성된 '한류' 대중문화의 출현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국가와 국민은 오직 서구적 지식과 권력으로 이루어진 근대적 열등감의 식민지성으로 형성된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탈근대의 자부심과 문화적 생산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국가와 국민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대한민국이라는 지역적 주체성과 지구촌 세계를 구성하는 지구적 세계성이 결합한 '한류' 대중문화의 지역적이고 세계적인 출현은 대한민국의 시민과 도민으로 하여금 자발적인 지역적 주체성과 지구적 세계성의 결합으로 인한 탈근대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러한 지역적 주체성과 지구적 세계성의 국민적 표현이 2002년 월드컵의 '붉은 악마'들과 '미순이-효순이' 사건, 노무현 탄핵반대와 '미친 소-미친 교육 반대 촛불문화제'의 청소년들과 시민 그리고 도민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탈근대적 정치적 표현이 지난 교육감선거와 서울시장 선거에서 보여준 시민후보와 도민후보의 추대들이다. 그들의 탈근대적 정치적 표현의 정점에 근대적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며,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며, 자본주의자도 아니고 사회주의자도 아닌 동시에 근대적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탈근대의 국민이 추천하는 안철수 후보가 있다. 그의 삶과 그의 세계인식이 탈근대인의 전형으로 보인 것이다.

III. 탈근대적 지도자의 출현

탈근대의 국민추천 안철수 후보라고 명명하지만,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탈근대의 문화적 측면에서도 안철수 후보가 탈근대적 지도자로 검증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복지, 정의, 평화'라는 화두를 가지고 이 시대의 문제들을 점검하는 <안철수의 생각>에서 표현된 '새로운 세계'나 '새로운 국가'는 문화적으로 탈근대의 지구촌 세계와 탈근대의 대한민국 국가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복지'는 빈부의 차이나 도시와 농어촌 지역의 차이, 그리고 남녀노소의 차이를 넘어서는 보편적 교육과 인간적 삶의 권리에 대한 문화적 보편성의 복지임에 틀림이 없고, 그가 제시하고 있는 '정의'는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 손익계산의 관점에서 벗어나 삶의 질이나 기회의 균등성을 보장하는 문화적 보편성의 정의임에 틀림이 없으며, 그가 제시하는 평화는 한반도의 남북관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과 지구촌 세계에서 근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경제적 손익계산서의 관점을 넘어서서 남과 북을 포함한 지역과 지구에서 형성된 지역적 문화를 보장하는 탈근대적 평화임에 틀림이 없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지난 5년 과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너울을 쓰고 대한민국의 근대적 식민지성과 폐쇄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새누리당은 차치하고라도 1990년대 이전의 지난 근대화 과정에서 대한민국 근대의 보수 세력을 대표하고 있는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 그리고 통합진보당을 포함한 근대의 진보세력과 연대하고 결합하여 어떻게 탈근대적 대한민국의 국가와 국민이 지니고 있는 지역적 주체성과 지구적 세계성을 실현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류' 대중문화가 대표하고 탈근대의 국민이 지향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역적 주체성과 지구적 세계성은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이라는 삼권분립의 근대국가를 넘어서서 교육문화권(the right of education and culture)과 시민권(the right of citizen)을 보장하는 오권분립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다. 입법권과 사법권 그리고 행정권은 근대 국민국가가 가지고 있는 지배적 권력의 권리이다. 그러나 교육문화권과 시민권은 국가의 국민과 시민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근대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나 경제적인 개발논리는 대한민국의 국민과 시민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을 권리와 현실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아 오늘날도 여전히 교육과 문화적인 이유 때문에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들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과 시민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고 현실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는 기형적인 시민지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 대한민국의 초중등교육과 대학교육을 '한류' 대중문화처럼 생산적이고 지속적인 교육과 학문구조의 요람으로 만드는 토대이다. 또한 선거관리위원회나 인권위원회 그리고 언론위원회 등등의 국민과 시민이 지니고 있는 권리는 행정권의 수장인 대통령과 정부의 수족 노릇에서 벗어나 국민이나 시민과 소통하는 자율적인 자가생산적 구조를 지녀야만 한다. <안철수의 생각>은 교육문화권과 시민권의 보장 속에서 탈근대적 대한민국의 토대가 될 것이다.

* 이 글은 지난 9월 26일 프레스 센터에서 열린 '한국비전2050포럼'의 제1차 정책토론회의 "한국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발표한 글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임.(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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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인들의 "그려~"에 속으면 안 된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2/10/01 09:04
  • 수정일
    2012/10/01 09:0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대선현장③ - 대전] 대선 캐스팅보트 충청, 지지후보는 '비밀'

12.09.30 13:57l최종 업데이트 12.09.30 13:57l
박현주(nabi8)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심대평 전 자유선진당 대표. 두 사람은 한시절 충청권 '맹주'로 불렸다. (자료사진)
ⓒ 자유선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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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던 시절이 있었다. 깃발 색깔만 보고 찍어주던 유권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95년 3월 김종필 총재가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은 오랜 세월 동안 선거 때마다 녹색깃발로 출마한 후보를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으로 그대로 '꽂아주는' 괴력을 발휘했다.

경상도는 신한국당 또는 한나라당의 파란색으로 모두 덮였고, 전라도는 국민회의 또는 민주당의 노란색 물결이었으므로, 충청도 역시 한 가지 색으로 '앗쌀하게' 통일해줘야 '핫바지' 소리는 안 들을 거라 여겼을까?

공교롭게도 자민련은 파란색과 노란색의 혼합색인 초록색으로 당 깃발을 택했고, 충청도에서 초록색 깃발을 꽂고 입후보하면 즉시 고귀한 자리에 꽂히는 행운을 얻었다. 당으로서는 쾌거였고, 후보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정계진출의 기회였다.
처음엔 창당 개업발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개업 때 찾아온 손님들이 '꽂아주고 꽂히는' 맛을 잊지 않고 그 뒤로도 꾸역꾸역 몰려와 마침내 자민련은 충청도에서는 대박 정당이 되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표 몰아주던 시절

지난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지방자치 선거에서 광역단체장 4명, 기초단체장 23명, 광역의회의원 86명을 당선시켰고, 1996년 4·11총선(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50석을 얻음으로써 제2야당의 지위와 함께 국회 운영의 캐스팅보트까지 거머쥐었다. 1998년 6월 4일에 치러진 지방자치제 선거에서는 광역단체장 4명, 기초단체장 29명, 광역의회의원 82명을 당선시켰다.

자민련에 대한 충청민들의 지지는 그야말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전폭적인 지지였다. 후보 자질보다, 공약보다 우선한 것이 충청도 정당 소속이라는 것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선거는 2000년에 와서야 비로소 묻고 따지게 됐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가 낙천낙선후보를 발표하였을 때, 그 명단에는 자민련의 많은 후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유는 거개가 부정부패 또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 때문이었다.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 여파로 자민련은 2000년 총선에서 지역구 12석, 비례대표 5석으로 총 17석을 얻는 데 그치고 말았다. 4년 후인 2004년 총선에는 지역구에서 4석만을 확보하여 급격한 쇠락을 길을 걸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 충청도 출신의 정치인이 자유선진당, 국민중심당 등을 창당했지만, 예전 자민련의 영화를 재현할 수 없었고 지방선거에서 승리하여 자치단체장이나 지역의회 의석 정도를 가져갈 뿐이었다. 충청도의 표심을 대변하던 초록색은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나뉘었다. 이같은 색분화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직후 치러진 총선부터 시작되었다.

▲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 2000년을 기점으로 충청도에서는 특정정당이 몰표를 가져가던 현상이 사그라들었고, 2004년 총선이후로는 완전히 사라졌다.
ⓒ 대전충남총선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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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충청도의 선거 지형에 지진과 같은 변화가 생겼다.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은 충청인이 그해 4월 총선에서 자민련 대신 민주당을 선택케 했다. 이후 자민련의 부활은 이뤄지지 않았고 '꽂으면, 꽂히는' 기현상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이후 보수 성향의 유권자는 파란색 깃발(새누리당 창당 이후엔 빨간색)을 진보성향의 유권자는 노란색 깃발을, 더 진보를 자처하는 유권자는 보라색 깃발을 각각 선택하면서 충청도는 그 누구도 당락을 예견할 수 없는, 감히 그 누구도 맹주 노릇을 할 수 없는 지역이 되었다. 좋게 말하면 캐스팅보트를 쥐었고, 정치권 시쳇말로 무주공산이 되었다.
충청도에서 웃는 자, 대통령에 오를까

캐스팅보트의 위력은 대선에서 가장 도드라진다. 대선 주자들은 충청도에서 만큼은 치열한 진검승부를 겨뤄야 한다. 그러나 충청도 사람들은 속을 내보이지 않기로 유명하다. 느릿느릿하게 하는 "그려~" 한 마디는 수긍의 의미도 되고, 반대의 의미도 되고, 망설임의 의미도 되고 결정의 의미도 된다. 오직 진실은 말을 한 사람만이 알뿐이므로 듣는 사람이 함부로 판단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현재까지 대선 흐름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민주당 문재인 후보, 오랜 고민 끝에 출마를 선언한 무소속 안철수 후보, 이렇게 치열한 3파전 양상이다. 그렇다면 충청인, 특히 대전시민은 이번 대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마운틴 고장', 즉 서산·논산·금산·예산·아산 등의 충남 출신 시민에게 그 답변을 듣기란 쉽지 않았다. 거개가 "글쎄 뭐..."로 일관하며 말을 아낀다. "이 사람은 이게 아쉽고, 저 사람은 저게 아쉽고" 하며 자기 의견을 똑 부러지게 밝히는 사람들은 거의 수도권이나 전라권에서 온 사람들이다. 대전은 토박이보다 인접한 충남, 충북, 전북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다. 수도권 출신들도 꽤 있고, 거리가 먼 경상권에서 온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렇다면, 대전 토박이들은 어떻게 뭐라 답했을까? 어느 토박이는 "후보들의 본 모습을 잘 몰라 판단하기 어렵다"라고 대답한다. "글쎄 뭐"보다는 구체적지만 "이 사람은 이게 아쉽고" 보다는 훨씬 신중한 답변이다. 어느 토박이는 이번 대통령 선거가 매우 기대되고 재밌다고 야단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다른 대선보다 대통령 후보 세 명 모두 괜찮은 사람들이라서" 그렇단다. 딱 찍어놓은 후보는 없지만 박빙의 승부를 볼 것 같아 가슴 떨린단다.

지난 2월 10일, 자유선진당 이회창-심대평 두 전현직 대표가 당 분열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회창-심대평은 김종필 이후 충청권의 맹주 노릇을 했다.
ⓒ 자유선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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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부모형제와 일가친척을 모두 TK지역에 두고 혈혈단신으로 대전에 와서 산 지 30년이 넘은 어느 어르신은 이번처럼 찍을 사람이 없는 대통령 선거는 처음이라고 혀를 찼다. 어르신은 '정통 보수' 후보가 나온다면 그가 군소정당 소속이라도 찍어주겠노라고 했다.

다양성이 유권자를 자유롭게 한다

수도권 출신으로 결혼과 동시에 대전에 내려와 살고 있는 어느 주부는 아직 지지하는 후보를 결정하지 않았지만, 자기 의견을 한참 동안이나 조목조목 피력했다. 그런데 말미에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덧붙인다.

"예전에는 충청도 사람들이 너무 이상했어요. OO당 이름만 들고 나오면 그냥 무턱대고 찍어주는 게 이해 안 가더라고요. 요즘은 좀 덜 그런 거 같던데..."

외지인들이 보기에도 초록색 깃발로의 통일은 이상했나? 이런 의아함에 충청인들은 으레 이렇게 반박한다.

"그럼 경상도와 전라도는 어떤겨? 똑같지 않은겨? 거기는 아직도 그렇잖여!"

사실 충청도가 지역색깔 놀음에서 가장 빨리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지역정당이 전국정당으로 크지 못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지역감정과 지역색깔이 토호세력의 비리만 불렀을 뿐 지역사회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음을 충청도의 유권자들은 지난 세월동안 명백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전과 충청도가 한 가지 정당색의 압박에서 벗어난 것은 축하받아야 할 일이다.
정치적 다양성은 후보와 유권자 모두를 자유롭게 한다. 이제 충청인들은 대통령선거라는 축제를 맘껏 즐기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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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PD가 하는 일이 요리, 이런 방송도 있답니다

기자와 PD가 하는 일이 요리, 이런 방송도 있답니다
(블로그 '사람과세상사이' / 오주르디 / 2012-10-01)

 

MBC 사태 8개월. 별의별 일이 많았다. 사측은 노조의 파업에 맞서 해고, 정직, 부당 전보, 교육발령 등으로 맞섰다. 인기 시사프로그램이 줄줄이 중단됐고, 뉴스 제작도 원활하지 못해 방송 시간을 대폭 줄이기도 했다. 드라마 제작에 차질을 빚어 결방 되는 등 MBC는 연일 진기록을 세워왔다.


베테랑 PD와 기자의 일과가 ‘요리’가 된 사연

 

갈수록 더 가관이다. 베테랑 기자와 PD가 출근해서 하는 일이 닭가슴살을 굽고, 햄버거 만드는 것이란다. 주말 뉴스데스크를 진행했던 앵커 출신의 경력 12년 왕종명 기자도 마이크와 기자수첩을 내려놓았다. 노릇노릇 고기가 구워지는 후라이팬을 바라보는 게 일과다.

 

‘출발 비디오 여행’ ‘푸른세상 만들기’를 진행했던 박경추 아나운서도, ‘시사매거진 2580’의 김연국 기자도, 앞치마를 두르고 햄버거를 만드는 게 출근해서 하는 일의 태반이 돼 버렸다.

 

 

20년, 30년 이상 경력을 가진 고참 PD, 유능한 아나운서와 기자 등 87명이 방송 현장 밖으로 밀려나 ‘교육’이라는 미명아래 요리 강습을 받고 ‘브런치’를 만들고 있다. ‘공정방송’을 주장하며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들에 대한 MBC 김재철 사장이 내놓은 일종의 ‘보복’이다.

파업에 동참한 기자, PD, 아나운서들을 방송현장으로부터 격리시키려는 의도다. 이에 대해 이용마 MBC 노조 홍보국장은 “어떻게 해서든 대선 때까지 격리해 복귀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지금 진행되는 편파방송 체제를 확실히 유지하고 가겠다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조는 사측이 ‘야만적인 보복행위’를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9월 25일 서울 상수동 ‘롤링홀’에서 가장 많은 핍박을 받아 방송이 중단된 <PD수첩>의 정상화를 위한 행사가 열렸다. 최승호 PD등 해고된 전 <PD수첩> 제작진과 노조원, 방송작가, 그리고 <PD수첩>의 원상회복을 촉구하는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였다.


‘응답하라 PD수첩’, 김재철의 응답은 ‘교육발령’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직접 참석했고, 문재인 후보는 도종환 시인을 대신 보내 격려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는 초청을 받고도 참석여부조차 밝히지 않은 채 침묵했다. 안 후보는 “언론은 진실만을 얘기해야 하는 숭고한 사명을 갖고 있다”며 “여야 합의로 MBC사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후보는 “현정권의 처사는 엄혹했던 유신시절 긴급조치 9호가 되살아 난 듯하다”며 이명박 정권을 비판했다.

 

‘응답하라 PD수첩’ 행사에 김재철 사장이 응답했다. 황당한 방법으로 말이다. 행사가 열렸던 그 다음날 김재철 사장의 인사명령이 있었다. 28명에게 새롭게 교육발령을 내려 ‘MBC아카데미’에서 요리수업을 듣도록 했다. 앞치마를 두르게 된 28명 중에는 20년 이상 베테랑 기자와 PD뿐 아니라 30년 이상 간부사원도 포함됐다. 김 사장의 응답은 또 ‘보복’이었다.

MBC노조는 김 사장이 이렇게 응답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곧 있을 법원 판결에 앞서 선수를 친 게 분명하다고 말한다. 지난 8월 초 자신의 업무와 무관한 부서로 발령 난 47명의 노조원이 ‘부당전보 취소 가처분소송’을 서울 남부지방법원에 제출했고, 이에 대한 판결이 오는 10월 중순경 있을 예정이다.

 

법원 판결로 원직에 복귀된 사례가 있다. 지난해 <PD수첩> 아이템 선정과 관련해 사측의 입장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용인 ‘드라미아’와 경인지사로 전출된 이우환 PD와 한학수 PD의 경우가 그것이다.


작가들에게는 ‘대체작가 모집공고’로 응답

 

‘응답하라 PD수첩’ 행사에는 방송작가들도 대거 참석해 MBC를 규탄했다. 한 작가는 현재의 MBC사태와 김재철 사장의 거듭되는 만행에 대해 시민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며 이렇게 말했다.

 

“5년, 10년 전이었어도 경천동지할 일이 지금 MBC에서 몇 십 개가 일어났는데도 시민사회에서 용인되고 이해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김재철 사장은 작가들의 비난에도 ‘응답’했다. MBC는 26일 홈페이지를 통해 <PD수첩> 작가 모집 공고를 냈다.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920명이 보이콧을 하자, 대체작가를 선발해 사측의 입맛에 맞는 <PD수첩>을 만들겠다는 의도다.

이에 대해 작가협회는 “MBC가 방송작가들에 대한 모욕과 능멸이 도를 넘어섰다”며 “‘응답하라 PD수첩’ 행사가 끝나자마자 이루어진 작가 공개모집 공고는 <PD수첩> 정상화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호응과 염원을 짓밟는 폭거”라고 비난했다. 또 “백 번, 천 번, 만 번을 공모하더라도 <PD수첩> 해고 작가들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꼽 잡게 만든 동영상 하나

 

아주 특별하게 응답하는 김 사장. 기자와 PD들에게는 교육발령으로 앞치마를 두르게 하고, 작가들에게는 대체작가 모집공고로 맞선다. ‘응답하라 PD수첩’ 행사에서 방영된 동영상 하나가 참석자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당시 <PD수첩>의 책임프로듀서(CP)였던 최승호 PD와 윤길용 시사교양국장이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다. <PD수첩>에서 최 PD를 빼내려는 회사의 조치가 부당하다는 항의에 대한 윤 국장의 대답이 걸작이다. 이렇게 답했다.

 

“최승호씨한테도 이번에는 약간 자유로움을 주고자 한다. 저 사람 저렇게 되면 얼마나 피곤하겠나.”

권력이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도록 담합해 주는 게 언론의 존재이유인가? 급여 등 근무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도 아니다. ‘공정방송’을 위한 외침이다. 후진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 지금 MBC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주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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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들의 잔치, 민족학교 운동회

 

재일동포들의 잔치, 민족학교 운동회
<포토뉴스> 재일 ‘미나미오사카조선초급학교’의 가을운동회
 
 
2012년 09월 30일 (일) 22:09:12 오사카=김양희 기자 tongil@tongilnews.com
 

 

지난 10월 22일 토요일에는 오사카에 위치한 ‘미나미오사카조선초급학교’에서 제3회 대운동회가 열렸다. 오사카지역은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의 60%가 거주한다고 할 정도로 많은 수의 재일동포들이 있다.

따라서 민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많은 편이지만 현재 ‘미나미오사카조선초급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유치부 학생들과 초급학교 1~6학년생을 모두 포함해서 50여 명 뿐이다. 현재 아이들의 부모세대가 다닐 때만해도 수백여 명이 곳곳에 뛰어놀던 학교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원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학생수는 50여명이었지만 지역에 사는 재일동포들이 모두 모여 아이들과 함께 경기를 하고 응원을 보내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진행된 운동회를 알차게 꾸몄다.

한편 이날 행사에서 내걸은 구호는 ‘새시대 요구성과 현 상황에 맞게 우리 학교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자!’, ‘찾아가자! 봉사하자! 넓히자! 동포민족권’이었다. 이는 일본 정부의 탄압에 위축되고 있는 민족학교를 살리기 위한 재일동포들의 간절한 외침이다.

 

 

   
▲ 가을운동회가 열린 미나미오사카초급학교 정문.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민족학교의 운동회는 지역 재일동포들의 잔치이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전교생이 참가하는 집단체조 '우리학교가 좋구나'에서 유치반 학생들이 아빠와 함께 입장하는 모습.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전교생이 참가하는 집단체조 '우리학교가 좋구나'에서 아빠와 함께 공연하는 모습. 공연도중 아빠 팔에 매달려 있던 아이 하나가 떨어져 울었다. 아이는 그 이후 공연은 하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유치부 아이들의 이런 예상을 깨는 실수가 있어 관객들은 더욱 즐거웠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전교생이 참가하는 집단체조 '우리학교가 좋구나'에서 저학년생들의 깃발 공연.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임원석, 이곳에서 안내방송을 하던 여 선생님은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아이들을 응원하고 동포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왼쪽에 '청군, 백군'이 아니라 '청군, 홍군'으로 팀을 나눈 것이 돋보인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전교생이 참가하는 집단체조 '우리학교가 좋구나'에서 고학년생들의 공연모습. 손바닥의 나무판으로 손뼉을 쳐 나는 소리와 고학년생들의 절도있는 동작들이 어우러져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전교생이 참가하는 집단체조 '우리학교가 좋구나'에서 만든 학생들의 체조동작.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6학년 가족들로 참가한 아이들이 결승점의 6학년 언니 오빠들이 나눠주는 과자를 받기 위해 뛰는 모습.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달리기는 꼴찌해도 선물은 풍성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전교생이 참여하는 '일륜차로 씽씽', 미나미오사카조선초급학교에서는 외발자전거 타기 교육을 적극적으로 실시해 전교생이 외발자전거를 탈 수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부모님과 함께하는 2인3각 게임.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취재열풍, 흡사 2012 런던올림픽 못지않은 취재열풍이 연출됐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부모님과 함께하는 게임의 마지막은 학생이 부모님을 업고 들어오는 것이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그러나 작은 체구의 아이들은 아직 부모님을 업기 힘들다, 그러자 부모님이 아이를 번쩍 안아 들어온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오래오래 장수하세요' 게임, 콩주머니를 그물 바구니 안에 모두 넣는 팀이 승리한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만세, 우리가 이겼다', '오래오래 장수하세요' 게임에서 이긴 청군의 기뻐하는 모습.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온 가족이 참여해 함께 달리는 '가족과 함께 달려요' 게임장면.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아주 어린 동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온가족이 함께 손잡고 달리는 경기로 승부는 이미 뒷전이고 참가 자체가 가족 모두의 축제였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반바퀴 이상 떨어졌어도 곧바로 따라잡곤 하는 운동회의 백미인 이어달리기. 마지막 주자의 바톤 터치 모습. 체구가 작지만 이를 악물고 뛰는 모습에 관람객들은 열광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경기를 마치고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이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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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쇠러 왔어요"

"추석 쇠러 왔어요", 겨울철새 큰기러기 벌써 한강에

 
윤순영 2012. 09. 28
조회수 886추천수 1
 

올해도 어김없이 9월15일 한강 하구 도착, 가을의 전령

떨어진 낱알 먹으러 먼 길 왔지만 농경지는 매립돼 갈수록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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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기러기가 지난 9월15일 한강 하구에 어김없이 찾아왔다.


지난해와 비슷한 시기이다. 그렇지만 벼 이삭에 푸른 기운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계절은 이른 감이 있다. 기러기는 외롭고 쓸쓸한 가을을 알리는 철새로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지만, 풍요를 채워 주는 가을맞이 전령사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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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_크기변환_DSC_6515.jpg » 벼 베기가 끝나지 않아 이리저리 먹이터를 찾아 헤매는 큰기러기들.

 

크기변환_DSC_3776.jpg » 농경지로 날아드는 큰기러기.

 

크기변환_DSC_6527.jpg » 큰기러기 뒤로 일산대교가 보인다.

 

크기변환_DSC_4782.jpg » 큰기러기는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 왔지만 한강 하구 주변의 농경지는 매립되고 있다.

 

크기변환_DSC_4781.jpg » 오랜 세월 큰기러기의 터전이던 곳이 날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글·사진 윤순영/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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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 ‘장준하 타살의혹’ 국감 증인채택 거부

 

새누리 ‘장준하 타살의혹’ 국감 증인채택 거부
 
[뉴스단평] 특별법 제정도 미온적... 야당 “과거사 사과 잊었나”
 
정운현 기자 | 등록:2012-09-29 13:37:49 | 최종:2012-09-29 13:42:2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머리 부분에 타살 의혹이 완연한 장준하 선생의 유골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과 관련한 증인 채택을 놓고 여야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가운데 새누리당이 증인 채택을 거부해 박근혜 후보의 과거사 사과 진정성이 또 다시 도마에 올랐다.

 

새누리당은 28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증인 채택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국회 행안위 새누리당 간사인 고희선 의원은 “국정감사 기간에 행정자치부 등 살펴봐야 할 곳이 너무 많아 바쁘다”며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관련한 증인을 채택할 가능성은 없다”고 밝혔다.

고 의원은 이날 “국감에서 증인을 몇명 불러 물어본다고 의혹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며 “이번에 증인을 채택하지 않는다고 의혹을 해소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좀 더 큰 틀에서 의혹을 풀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행안위는 전날 전체회의를 열어 장 선생 의문사 진상 규명과 관련한 증인 채택 문제를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민주당은 장 선생의 아들 장호권 씨와 2003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고상만 전 조사관, 목격자 김용환 씨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김용환 씨의 경우 장 선생 실족사 당시 유일한 목격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따라서 김 씨의 증인 채택은 장 선생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그의 진술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국감의 취지가 왜곡된다며 김 씨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것을 반대했다.

김현 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내 “새누리당이 장 선생 타살 의혹과 관련한 증인 채택을 거부해 그의 죽음을 미완의 과제로 남겨두는 것은 과거사 정리를 위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며 “국민들은 일주일 전 박근혜 후보의 사과를 아직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지난 24일 박정희 시대의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과 가족에게 사과하고 그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장 선생 사건 진상규명과 관련, 증인 채택을 거부함에 따라 박 후보의 과거사 사과가 과연 진정성이 있는 것이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편, 장 선생의 유족과 기념사업회는 최근 범국민대책위를 구성해 100만명 서명운동에 나섰다. 또 야당에서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 진상규명 작업에 나설 방침이다. 그러나 이 역시 새누리당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여 특별법 제정은 현재로선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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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안철수, 양자대결서 박근혜 제쳐

문재인·안철수, 양자대결서 박근혜 제쳐
(오마이뉴스 / 2012-09-28)

안철수 vs 박근혜 17.3%p 차로 격차 확대
[오마이뉴스 여론조사①] 3자 구도에서는 박근혜-안철수 오차범위 내 1위 다툼 치열

<오마이뉴스>가 '리서치뷰'(대표 안일원)에 의뢰해 실시한 이번 정례조사는 지난 26일~27일 2일간 전국에 거주하는 만19세 이상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2012년 8월말 현재 국가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라 성·연령·지역별 유권자비례 무작위추출을 통해 ARS/RDD(Random Digit Dialing) 휴대전화로 실시했다. 표본수는 2000명, 표본오차는 95%신뢰수준에 ±2.2%p다.

총선이나 지방선거와 달리 상대적으로 투표율이 높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지난 5월부터 5319만 6862명에 달하는 휴대전화가입자(2012년 8월말 현재)를 대상으로 정례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대체로 국내 여론조사기관들이 유선전화와 휴대전화를 병행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조사기법으로, 상대적으로 투표율이 높은 대통령선거에 보다 더 적합한 여론조사방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마이뉴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의 양자대결 결과.
ⓒ 리서치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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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가 모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의 양자 대결에서 오차범위 밖에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마이뉴스>가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서치뷰에 의뢰해 26~27일 실시한 9월 정례 여론조사 결과, 안철수 후보는 박근혜 후보를 17.2%포인트 차이로 따돌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재인 후보도 박근혜 후보를 6.5%포인트 차이로 눌렀다.

하지만 3자 대결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1위를 달렸다. 박근혜 후보(37.2%)는 오차범위 내이긴 하지만 안철수 후보(34.5%)를 2.7%포인트 차이로 제쳤다. 3위 문재인 후보의 지지율은 25%였다. 야권 단일 후보 지지도에서는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17.3%포인트 차이로 앞섰다.

이번 정례 여론조사에서는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상승세와 박근혜 후보의 하향세가 두드려졌다. 이는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공식적으로 대선 레이스에 등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른바 '컨벤션 효과'다. 문재인 후보는 16일 민주통합당 후보로 선출됐고, 안 후보는 19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박근혜 후보의 하향세도 눈에 띈다. 박 후보는 지난 11일 '두 개의 인혁당 판결' 발언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24일 사과도 지지율 반등에 큰 효과가 없었다. 또한 홍사덕 전 캠프 선대위원장의 금품수수 의혹, 송영선 전 의원의 금품 요구 파문, 김재원 전 대변인의 만취 폭언도 박 후보 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여론조사는 27일 안철수 후보와 26일 안 후보 부인인 김미경 서울대 의대 교수의 다운계약서 작성 의혹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전에 이뤄졌다. 관련 논란은 이번 여론조사에서는 제한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양자대결①] 문재인, 처음으로 박근혜 제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의 양자대결 결과.
ⓒ 리서치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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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후보는 박근혜 후보와의 양자대결에서 6.5%포인트 차로 앞섰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대결할 경우, 내일이 선거일이라면 누구에게 투표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47.0%가 문 후보를 선택했다. 박 후보라고 답한 응답자는 40.5%였다.

지난 8월 27~28일 정례조사와 비교하면, 박 후보의 지지율은 45.9%에서 40.5%로 5.4%포인트 하락했다. 반면, 문 후보는 43.2%에서 47.0%로 3.8%포인트 상승했다. 4월 총선 이후 정례조사에서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앞서는 결과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후보의 지지층은 세대별로 극명하게 갈렸다. 20~40대는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가 높았다. 특히 19세와 20대의 62.4%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박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22.0%였다. 이번 대선의 캐스팅보트 세대인 40대에서도 문 후보(54.0%)가 박 후보(36.2%)를 17.8%포인트 차로 따돌렸다. 하지만 50대 이상에서는 박 후보가 앞섰다. 50대에서 박 후보(56.6%)는 문 후보(33.3%)를 23.3%포인트 차로 제쳤다.

지역별로 보면, 문 후보가 수도권(문 49.3%, 박 38.7%), 호남(문 69.5%, 박 9.9%), 강원·제주(문 50.0%, 박 37.8%)에서, 박 후보가 부산·울산·경남(박 49.8%, 문 41.3%), 대구·경북(박 61.4%, 문 26.6%), 충청(박 44.6%, 문 41.2%)에서 앞섰다.

[양자대결②] 안철수, 박근혜와 격차 벌려... 17.2%포인트 차이

안철수 후보도 박근혜 후보와의 양자대결에서 앞섰다. 안 후보(56.1%)와 박 후보(38.9%)의 격차는 17.2%포인트에 달했다. 지난 8월 조사(4.0%포인트 차이)와 비교해 격차가 더 확대됐다. 박 후보의 지지율은 8월 44.5%에서 9월 38.9%로 5.6%포인트 하락했고, 안 후보는 같은 기간 48.5%에서 56.1%로 7.6%포인트로 상승했다.

안 후보는 문 후보와 마찬가지로, 20~40대에서 박 후보를 앞섰다. 안 후보는 19세와 20대 지지율에서 77.7%를 얻어 17.9%를 얻은 박 후보를 59.8%포인트 차로 앞섰다. 40대에서도 안 후보(61.5%)가 박 후보(35.1%)를 26.4%포인트 차이로 따돌렸다. 박 후보는 60대 이상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64.6%의 지지율로 안 후보(28.4%)를 36.2%포인트 차이로 제쳤다.

지역별로는 안 후보가 수도권(안 60.2%, 박 35.3%)·충청(안 51.5%, 박 43.1%)·호남(84.2%, 박 10.3%)에서 박 후보를 크게 앞섰고, 박 후보는 대구·경북(박 57.5%, 안 36.7%), 부산·울산·경남(박 51.4%, 안 43.8%), 강원·제주(박 47.6%, 안 45.1%)에서 앞섰다.

[3자 대결] 1위 박근혜, 오차범위 내에서 안철수 앞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의 3자 대결 구도.
ⓒ 리서치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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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자 대결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1위를 기록했다. '대선에서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가 대결할 경우, 내일이 선거일이라면 누구에게 투표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37.2%가 박 후보를 선택했다. 이는 안 후보(34.5%)보다 오차범위 내이긴 하지만 2.7%포인트 앞서는 것이다. 문 후보는 25.0%의 지지를 얻었다.

지난 8월과 비교하면, 박 후보는 42.3%에서 37.2%로 5.1%포인트 하락했다. 반면, 안철수 후보는 30.4%에서 34.5%로 4.1%포인트 상승했고, 문 후보도 22.7%에서 25.0%로 2.3%포인트 상승했다.

연령대별로는 20, 30, 40대에서 안 후보가 1위를 달렸고, 50, 60대에는 박 후보가 앞섰다. 문 후보는 20, 30대에는 2위를 기록했고, 나머지 연령대에서는 모두 3위였다. 지역별로는 박 후보가 충청, 대구·경북, 부산·울산·경남에서 선두를 달렸고, 안 후보는 수도권과 호남에서 선두를 달렸다.

[야권단일후보 지지도] 안철수, 문재인에 17.3%포인트 앞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의 야권단일후보 지지도 결과.
ⓒ 리서치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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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단일후보 지지도에서는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17.3%포인트 차로 앞섰다. '야권단일후보 경선을 실시할 경우, 누구를 지지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안 후보는 54.4%의 지지를 얻어, 문 후보(37.1%)를 제쳤다. 이 문항은 새누리당 지지자들의 역선택을 막기 위해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무당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지난 7월 정례조사 이후 안 후보의 지지율은 상승세를 탄 반면, 문 후보의 지지율은 8월 40%대의 지지율이 깨진 이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안 후보는 48.2%(7월) → 51.3%(8월) → 54.4%(9월)의 지지율 추이를 보였다. 반면 문 후보의 지지율은 41.1%(7월) → 36.2%(8월) → 37.1%(9월)였다.

안 후보는 전 연령대에서 문 후보를 앞섰다. 안 후보는 50대를 제외하고 모두 과반 지지율을 얻었다. 특히, 19세와 20대에서 두 후보 간의 격차는 23.0%포인트(안 54.4%, 문 37.1%)로 가장 컸다. 반면, 문 후보는 50대와 40대에서 각각 40.6%, 40.2%를 얻어 선전했다.

정권교체 지지층(문 45.2%, 안 50.6%)과 민주당 지지층(문 51.0%, 45.4%)에서는 두 후보가 오차범위 내에서 접전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지지층(문 27.7%, 안 59.6%), 무당층(문 20.9%, 안 64.9%)에서는 안 후보가 크게 앞섰다.

안 후보가 대선에 임하는 방식을 묻는 질문에는 41.9%가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를 선호했다. 이어 무소속 출마(29.0%), 박근혜 후보와의 단일화(13.8%), 신당 창당(7.4%) 순이었다. 집권 정당 선호도에서는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46.2%로, 새누리당의 재집권을 원하는 사람(35.0%)보다 11.2%포인트 많았다. 지난 7월(3.3%포인트)과 8월(5.4%포인트)보다 그 격차가 확대됐다.

정당 지지도에서는 새누리당(35.8%)이 민주통합당(33.8%)을 오차범위 내인 2.0%포인트 차이로 앞섰다. 8월 조사와 비교해, 새누리당은 3.0%포인트 하락했고, 민주통합당은 4.2%포인트 상승했다. 통합진보당은 2.3%, 선진통일당은 0.3%의 지지를 얻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직무 평가에서 '잘함'이라고 평가한 응답자는 30.4%였다. 반면 65.8%가 '잘못함'이라고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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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투표시간 연장 헌법소원에 참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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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2/09/30 07:22
  • 수정일
    2012/09/30 07:22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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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직, 게임방, 변호사, 약사, 의사...
"왜 투표시간 연장 헌법소원에 참여하는가"

[추석연휴, 가족과 이 이야기를 ①] 투표시간 연장, 어떻게 생각하세요?

12.09.29 21:19l최종 업데이트 12.09.29 21:20l
이병한(han)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날인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공덕동 주민센터에 마련된 제4투표소에서 유권자가 기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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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소는 선거일 오전 6시에 열고 오후 6시(보궐선거 등은 오후 8시)에 닫는다."

공직선거법 제155조 제1항입니다. 요즘 이 조항이 뜨거운 감자입니다.

안녕하세요, 독자여러분. 즐거운 추석 보내고 계시나요. <오마이뉴스> 사회팀은 이번 연휴 동안 가족, 친지들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획을 고민하다가 투표시간 연장 문제를 다뤄보기로 했습니다. 때가 때이니만큼 정치문제가 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이 사안은 그중에서도 정파적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유권자의 권리와 민주주의 근본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8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투표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통과 직전까지 갔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무산되자 여론이 뜨겁습니다. 그중에서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서 추진하고 있는 선거법 155조 1항에 대한 헌법소원입니다.

이 소송이 주목되는 이유는 바로 아래 조항인 155조 2항(부재자투표의 투표시간 규정)에 대해 지난 2월 23일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민변의 소송은 2항에 이어 더 규모가 큰 1항의 위헌성을 다투는 '투표시간 헌법소원 제2라운드'인 셈입니다.

민변은 지난 25일 오후부터 소송에 참여한 청구인단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모집했는데요. 약 사흘만인 28일 오전 현재 84명이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84명이 뭐 대단한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청구인단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꽤 까다롭습니다.

우선 선거권이 있어야 하고, 시간의 제한 때문에 지난 4월 총선에서 투표할 수 없었거나, 오는 12월 대선에 투표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어야 합니다. 신청서에는 투표시간 규정에 의해 기본권을 침해받을 수 있음을 합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현재 직업과 참여 동기를 명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발적입니다. 아무리 공익소송이라고 하지만 소송에 휘말리는 것이 반가운 일은 아니지요. 지난 2월 헌법불합치 판결이 났던 소송은 청구인이 단 한명이었습니다.

155조 2항은 이미 승소... 이제 1항을 다툰다

신청서를 제출한 84명을 살펴보면, 남성(65명)이 여성(19명)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연령별로는 40대가 40명으로 거의 절반이고, 30대(24명), 50대(15명) 순입니다. 개략적인 직업을 보면 상당히 다양합니다.

자영업 13명, 회사원 11명으로 제일 많구요, 비정규직·계약직과 개국 약사가 각각 5명씩으로 뒤를 잇고 있습니다. 대기업 정규직도 4명, 대표이사를 포함한 중소기업 정규직도 3명, 대학원생을 비롯한 학생도 3명입니다. 택시기사, 벤처기업 정규직, 변호사, 의사, 치과기공사, 학원강사, 예술인, 건설업, 직업상담사, 프리랜서, 국회의원 보좌관까지 정말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신청했습니다.

신청서를 제출한 몇몇 분들에게 전화를 해봤습니다. 서울 노원구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약사 안아무개(42)씨는 "약국은 약사 이외의 사람은 조제나 투약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대개 자리를 비우기 힘들다"면서 "저녁 8시 이후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는 소규모 자영 약국 입장에서는 투표하기가 정말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제19대 국회의원선거일인 11일 서울 용산구에 마련된 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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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에서 게임방을 운영하는 김아무개(36)씨는 "게임방이라는 특성상 24시간 운영하는데, 경기라도 좋으면 사람을 많이 써 내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요즘은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느냐"면서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고, 사실 요즘 24시간 아닌 곳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투표일은 법정공휴일 아니냐는 질문에 웃으면서 "그건 공무원들 이야기다, 자영업에는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 용산구에 살면서 비정규 계약직으로 행사출연 일을 하는 안아무개(29)씨는 좀더 직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지난 총선 때는 겨우 투표 했어요. 막바지에 겨우. 하지만 이번 대선 때는 힘들 것 같아요. 보통 연말에 행사가 많거든요. 투표일에 행사가 잡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며칠 전 리허설부터 참여해야 해요. 몇시에 끝난다 말은 하지만 절대 그렇게 안 끝납니다. 먹고사는 일이 달려있으니 빠질 수 없습니다. 해야 합니다. 저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투표가 너무 힘들어요. 투표시간은 길어야 좋은 것 아닌가요?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갑니다. 투표시간 연장하면 100억 원이 드네 어쩌네 하는데, 100억 원이 아니라 1000억 원이 들어도 해야되는 거 아닌가요?"

전북 전주에서 비정규직으로 건설업에 종사하는 한다는 강아무개(51)씨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직업의 특성상 현장에 오전 7시에 가서 오후 6시가 넘어야 끝납니다.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투표는 꿈도 못 꿉니다.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몇 명씩 팀을 이뤄서 현장에 들어갑니다. 이동도 팀별로 차로 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빠진다고요? 못 빠집니다. 다음부터 짤리는 거죠. 상황이 이런데 투표가 뭐가 중요하냐고요. 법정공휴일이요? 직업의 특성상 공휴일이 따로 없습니다. 일이 있으면 해야 해요."

단지 비정규직이나 자영업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송아무개(33)씨는 준종합병원급에서 근무하는 내과전문의입니다. 그는 지난 총선 때 투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근무시간이 오전 9시부터 6시까지인데, 사실 8시까지는 와야 합니다. 그러면 이동시간 고려하면 7시에 나와야 하는데, 2살짜리 애 챙기려면 새벽 투표는 힘듭니다. 총선·대선이 공휴일이라고는 하지만 제가 알아본 바로는 아주 큰 대학병원 정도만 쉬지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 일을 합니다. 병원장의 뜻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병원에서는 하루 일 하고 안 하고에 따라 매출 차이가 엄청나니까요. 새누리당이 투표하는데 불과 10분 정도만 내면 된다고 하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이외에도 국회의원이 선거일에 더 바쁘기 때문에 투표하기 불가능하다는 의원 보좌관도 있었고요, 언론사는 투표일에 쉬지 않기 때문에 홍보팀도 그에 따라 일하는 경우가 많다는 대기업 홍보팀 근무자도 있었습니다. 위성도시에서 서울로 출퇴근 하는 상황에서 오전 일찍 투표를 하려고 하면 대기인이 많아 출근시간을 맞추기 어렵다는 정규직 근로자도 있었습니다.

"투표일 법정공휴일은 공무원들 이야기"

민변 사무차장이자 이번 헌법소원을 담당하고 있는 박주민 변호사는 이번 소송의 승소를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세 가지 이유로 투표시간으로 인해 투표권이 제약되고 있는 정황이 너무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첫째, OECD 가입국가 중에서 우리나라의 근로시간이 제일 높다는 점(연평균 2193시간). 둘째, 근무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비정규직 근로자가 800만이 넘는다는 점. 셋째, 우리나라의 투표율이 세계에서 제일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시민들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나서서 소송을 제기하고 있는데, 정치권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질타합니다.

자,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추석 연휴에 가족, 친지들과 한 번 이야기해 볼만한 주제 아닐까요? 우리 자식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산 교육 차원에서라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박 변호사의 말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그는 전화통화에서 이 말을 꼭 적어달라고 하더군요.

"아시다시피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의 보좌관이 연루된 것으로 밝혀진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소위 '터널 디도스' 논란이 있습니다. 이제 새누리당은 투표시간 연장까지 명백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서 봤을 때,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새누리당은 좀 위험하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단지 나쁘다, 싫다는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정도면 위험한 겁니다."

내일은 반대 논리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왜 투표시간 연장에 신중한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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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맞은 우체국 비정규직 "15년차 임금 알바생 수준"

정부·정치권, 공공부문 비정규직 처우 개선안 내놨지만…

김윤나영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09-29 오전 10:52:49

 

추석을 닷새 앞둔 25일 아침 서울 광진구 동서울우편집중국에서 만난 송찬수(가명) 씨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밤샘노동을 하는 송 씨는 명절 때 가장 바쁘다. 과일상자와 추석선물세트 등이 쌓여있는 작업장을 두고 그는 "그나마 어제 밤새 일해서 물량이 많이 빠진 상태"라고 설명했다. 작업장 뒤편에는 아직 분류되지 않은 택배가 가득했다.

송 씨는 지식경제부 산하기관인 우정사업본부(우체국) 소속 비정규직이다. 400~500㎏에 달하는 소포를 얹은 화물수레를 끌어 나르는 일을 한다. 한 번에 두 개씩 1톤 무게의 수레를 하루 100여 차례 나르다보니 몸 성할 날이 없다. 명절 때는 12~14시간까지 일하지만 그는 정규직이 받는 명절 상여금도 받지 못한다.

공공기관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근무조건이 사기업보다 나은 편은 아니다. 이들은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거나 그보다 더 힘든 업무를 떠맡고도 정규직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는다. 우편집중국에서 일하는 노동자 대부분이 40~50대로 생애주기에서 가장 돈이 많이 필요한 연령층이지만, 비정규직이 받는 월급은 주간조의 경우 80~90여만 원, 야간조는 1.5배인 120~130여만 원으로 최저임금 수준이다. (☞관련 기사 : "500kg 우편물 하루 150번 실어나른 대가가 130만 원")
 

▲ 추석을 앞둔 동서울우편집중국. 우편집중국에서는 택배와 우편물을 분류한 뒤 전국 각지로 배송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전날 밤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밤샘노동을 한 송찬수 씨는 "그나마 어제 밤새 일해서 물량이 많이 빠진 상태"라고 설명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프레시안

"공공부문이 노비 양산했다"

'질 낮은 일자리'를 만드는 데는 공공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IMF 사태 이후 우정사업본부는 정년퇴직과 정리해고 등으로 감소하거나 새로 필요한 일자리 수요를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직 등으로 채웠다. 그 결과 동서울우편집중국에서 관리직(행정공무원)을 제외한 노동자 570여 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420여 명으로 74%에 달한다. 이들은 임금, 휴게시간, 복리후생 등에서 정규직보다 차별받는다.

동서울우편집중국에서 13년째 최저임금 남짓한 금액을 받고 비정규직으로 일한 김진숙 씨는 "예전에는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정규직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IMF 이후로 한 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이라고 체념했다.

"우리끼리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해요. 여기에는 세 계급이 있다. 양반(행정공무원), 중인(정규직), 노비(비정규직)."

"우체국 무기계약직, 20년차여도 알바와 임금 비슷"

김 씨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음부터 체념만 했던 것은 아니다. 2007년부터 2년 이상 일한 계약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한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다. 2007년부터 우정사업본부가 법을 이행하며 2년 이상 일한 비정규직 6177명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을 때 이들은 처우 향상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다. 현재 동서울우편집중국에는 전체 비정규직 가운데 무기계약직이 65%에 달한다.

지난 1월에는 고용노동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고 이들의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은 안양우편집중국을 방문한 뒤 "공공부문이 먼저 나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겠다"며 "공공부문에서 분위기를 조성하면 민간기업 비정규직의 처우도 개선될 것"이라고 밝혔다.

기간제법 그러나 무기계약직 전환 5년, 노동부 발표 후 7개월이 지난 현재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무기계약직 6년차인 김 씨는 "무기계약직은 무늬만 정규직이지 2년차이든 15년차이든 여전히 아르바이트생 수준의 기본급을 받고 있다"며 "차이라고는 6개월, 1년마다 계약 갱신을 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무기계약직은 '무기한 비정규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그래서인지 우편집중국에는 '단기 아르바이트생'은 있어도 젊은 직원은 드물다. 김 씨는 "여기서 일하는 절반 이상이 50대로 물러날 데가 없는 사람들"이라며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오면 젊었을 때 다른 좋은 직장에 취직하라고 권한다"고 씁쓸해했다.

그는 "여긴 2년차나 20년차나 근속수당이 없어서 희망이 없다"며 "우리가 왜 최저임금만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프레시안(김윤나영)

"처우 낮출 땐 '공무원 규정' 적용, 처우 개선은 '비정규직이라 안 돼'"

정치권에서도 '공공부문 비정규직 철폐' 공약을 앞다퉈 내놓았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냉소적이다. 앞서 새누리당은 2015년까지 공공부문의 상시업무에서 비정규직을 전부 정규직(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안을 19대 총선공약으로 내걸었다. 민주통합당은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뿐만 아니라 '기간제법 사용사유 제한'을 통해 2017년까지 비정규직 비율을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줄이겠다는 공약을 내놓은 바 있다.

이미 65%가 현행법에 따라 무기계약직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은 어떨까. 2년차 비정규직인 이기범(가명) 씨는 "우리는 공무원이 아닌데도 우정사업본부는 임금을 깎는 등 처우를 낮출 때는 '공무원 규정에 의거'한다면서 처우 개선은 비정규직이라서 안 된다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예전에는 연장근로를 10분이라도 하면 1시간 시급을 줬는데, 최근에는 30분 시급인 2500여 원만 준다"며 "우편집중국에 이유를 물었더니 '공무원 보수 규정에 의거해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지난 2월 고용노동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의 일환으로 우정사업본부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30만 원짜리 복지포인트를 지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정사업본부는 비정규직을 '우체국 실손형보험'에 강제로 가입시키고 민간 실손보험에 가입한 비정규직은 13만5000원짜리, 가입하지 않은 비정규직은 6만5000원의 보험료를 차감한 금액을 복지포인트로 지급했다. 비정규직은 "우체국 영업실적을 올리기 위해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고 반발했지만, 당시 우정사업본부는 "정규직인 공무원의 기준에 준해서"라고 해명했다.

지난해 8월 비정규직노조인 '공공운수노조 전국우편지부'를 만든 이들은 "정규직과 달리 비정규직 가운데는 식사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경우도, 물 한 모금 마실 시간이 없는 경우도 있다"며 비정규직의 인권문제를 알리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어릴 때 학교에서 편지를 배달하면 '우체부 아저씨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고 배우잖아요. 전국의 우편 비정규직 노동자 1만 명이 얼마나 참담한 노동과정을 거치는지 알리고 싶습니다."

 

 
 
 

 

/김윤나영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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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피 터지고, 아이들은 뒷전... 조마조마한 한가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2/09/29 08:45
  • 수정일
    2012/09/29 08:45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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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서울 망원시장 상인들, 홈플러스 입점 반대 천막농성

12.09.28 18:09l최종 업데이트 12.09.28 18:16l
강민수(cominsoo)

 

 

서정래씨가 이날 반품할 옷들을 창고에서 꺼내 용달차로 옮기고 있다.
ⓒ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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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래씨가 가게 돌보랴, 당번 서느라 챙기지 못한 점심을 천막 농성장에서 해결하고 있다.
ⓒ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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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회에서 알립니다. 오늘 농성장 당번인 빨간오뎅, 우먼로드, 올리비아 하슬러는 늦지 않게 제 시간에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민족의 대명절 추석을 3일 앞둔 27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망원시장. 농성장 당번을 알리는 상인회의 공지가 울려 퍼졌다.

여성 의류 전문점, '올리비아 하슬러'의 서정래(51)씨는 오후 1시 당번이다. 서씨는 근무시간을 맞추기 위해 점심도 걸렀다. 혼자 재고 박스 30개를 용달차에 실었다. "장사가 잘됐으면 박스 수가 적었을 텐데…" 재고 물품을 넘기는 서씨의 마음은 무겁다. 얼른 박스를 싣고 시간에 맞춰 농성장으로 달려간다.

농성장은 시장에서 800m 떨어진 '메세나폴리스' 앞의 임시 천막이다. 이 초고층 주상복합 빌딩에 대형마트인 홈플러스가 입점하기로 예정돼 있다. 입점은 상인들의 생존과 직결되기에 농성장을 세워 입점을 저지하고 있다.

서정래씨가 재고 물품을 물류창고로 보내기 위해 박스를 용달차에 고정시키고 있다.
ⓒ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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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째 망원시장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는 서씨는 홈플러스 반대 운동을 하면서 정작 자신의 장사는 뒷전이 됐다. 농성장 근무 외에도 기자회견, 대책위 회의 준비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서씨는 "대표라는 사람이 신경을 안 쓰고 가게를 등한시하다 보니까 매출에 지장이 없을 수가 없다"면서 "신경 쓰지 못한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큰 충격이 올지 모른다"고 말했다.

뒷전이 된 것은 가족도 마찬가지다. 딸 셋을 둔 가장으로서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딸들과 저녁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눌 시간 없다. 이른 아침부터 가게와 농성장을 오가며 하루를 보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도 서씨는 홈플러스가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몰두해 있다. 그는 "(저지 운동을) 망원시장만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더 큰 줄기인 경제민주화 이슈로 확장해야 한다"며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지 말고 큰 길로 나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인 생계'에서 '공동 운명체'로... 입점 저지의 구심점, 천막 농성장

천막 농성은 합정동 홈플러스 입점 저지 마포구 주민 대책위원회가 주도하고 있다. 대책위에는 망원시장 상인회, 망원월드컵시장 조합, 지역의 시민단체, 진보신당 등이 참여하고 있다.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망원시장과 망원월드컵시장이 나뉜다. 망원시장은 88개, 망원월드컵시장은 42개, 둘을 합치면 140개 점포가 있다.

대책위와 시민단체, 정치권이 '경제민주화'를 화두로 내세우면서 이 지역의 문제가 공론화되자 홈플러스 측은 눈치를 보는 듯하다. 지난 8월 말 문을 열 예정이었지만 9월 말인 현재까지 입점이 연기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농성장을 세울 때만 해도 '장사하기도 바쁜데, 시간을 낼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목소리가 많았다. 대부분 1인 사장인 상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지금, 농성장은 상인들이 뭉치는 구심점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끈끈한 연대의 현장을 보여주면서 입점 저지 운동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특히 '개인'의 생계 문제를 상인들의 운명 공동체인 '우리'의 생존 문제로 확대해낸 것이 주효했다.

몸이 부서져도 끝까지 간다는 각오...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

새내기 상인도 이날 농성장에 나왔다. 서씨와 교대한 '빨간오뎅' 사장 신봉진(32)씨는 지난 2일 망원시장에 가게를 열었다. 한 달도 안 된 신참이라 그동안 당번에 끼지 못했지만 추석 대목을 맞아 바쁜 상인들을 대신해 전격 투입됐다.

신씨는 홈플러스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망원시장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가게 문을 열고 상인들의 활동을 보면서 '이렇게 하는데 홈플러스가 어떻게 들어올 수 있겠냐'고 안심하고 있다.

신씨는 "망원시장이 지역 주민들한테 인기가 좋기 때문에 오히려 홈플러스가 들어와서 망할 수도 있다"면서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오후 5시 당번인 이성진(45)씨는 망원월드컵시장에 들어온 지 2년이 넘었다. 고추장, 된장 등 식자재 도소매점을 운영한다. 그는 평소 오전 4시에 일어나 오후 11시까지 일을 하지만 농성장이 들어선 뒤에는 다음 날 오전 2시까지도 눈을 붙이지 못한다. 대책위 회의와 근무를 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결국 몸에 무리가 왔나보다. 이날 코피가 났다. 가게를 열기 전에는 체육관을 운영하며 몸을 다졌던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다. 이씨는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 몸이 부서져도 끝까지 간다는 각오"라며 "장사만 아는 상인들이 이렇게 같이 '으쌰 으쌰'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며 웃었다.

이성진씨가 농성장 근무를 마치고 가게로 돌아와 진열대를 정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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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늦은 오후. 대책위 상인들이 천막 농성장에 모여 회의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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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추석은 시장 상인들에게 조마조마한 시간

"박원순 시장이 오면 어떻게든 입점 저지를 지지한다는 발언을 끌어내야 돼."

26일 오후 10시가 넘은 시간, 대책위 상인 5명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한다. 28일 박원순 시장의 농성장 방문을 준비하는 전략회의다. 상인들은 서울시가 대형마트 일부 품목을 제한하고 일요일 의무 휴업을 추진하면서 홈플러스 입점 저지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박 시장의 방문은 홈플러스를 압박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셈이다.

박 시장의 입점 저지 지지 발언을 또렷히 듣기 위해 마이크도 준비하기로 한다. 추석 연휴 전날이지만 더 많은 상인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의자도 늘린다. 대책위의 능력을 총동원해 간담회를 준비한다는 계획이다.

농성장은 추석 연휴 3일간 휴식한다. 추석 이후가 걱정이다. 다음달 4, 5일 메세나폴리스 내 상인들이 홈플러스 입점을 추진하라는 취지의 집회를 계획한 것이다. 이 상인들은 홈플러스가 빨리 입점해 상권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칫하면 입점을 저지하는 상인들과 충돌할 수도 있다.

추석이 되면 사람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덕담을 나눈다. 그러나 2012년 추석은 망원시장, 망원월드컵시장 상인에게 조마조마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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