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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학교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2/10/13 06:57
  • 수정일
    2012/10/13 06:5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엄마의 학교

 
김인숙 수녀 2012. 10. 12
조회수 530추천수 0
 

 

촛불행사[1].jpg

촛불행사

 

 

예슬이는 몇 시간 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인터넷으로 자신이 가고 싶은 고등학교를 찾고 있는 중이다. 중3인 예슬이의 학교 성적은 현재 최상위급이다. 그래서 부모는 물론 학교에서도 잔뜩 기대를 하고 있다. 예슬이가 컴퓨터를 멈추더니 의자를 뒤로 돌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나… 고등학교는 엄마 학교 갈래.”

그 말에 엄마는 하던 뜨개질을 멈춘다. 자신도 그쪽으로 마음이 없진 않았으나 딸이 먼저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지 못했다. 예슬 엄마는 속으로는 좋으면서도 딸에게 물었다.

 

“왜?”

예슬이는 멈칫멈칫만 하고 선뜻 대답을 안 했다. 엄마는 다시 물었다.

“거기는 공부도 많이 안 시키고 좀 그러는데 왜 엄마 학교를 선택해?”

그제야 예슬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 학교는 뭔가 여유가 있고 특별해. 엄마 학교는 5월이면 그 뭐 행사하잖아? 합창대회도 하고 촛불행렬도 있고…… 나는 그런 것들이 맘에 들고 좋아…….”

 

예슬 엄마는 속으로 참 다행이다 싶고 뿌듯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공부 잘 하는 것은 한 순간이나 학창시절 그 행사, 그 추억들은 30년이 지나도 엄마는 생각난다.

 

합창대회 방청객들.jpg

학교 합창대회 방청객들과 학생들

 

 

정 아녜스 수녀도 해마다 5월이 돌아오면 라일락꽃 향기 속에 날리는 그 시절 그 노래 소리를 듣는다. 새로운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적응하기도 힘들 판인데 담임선생님은 4월 어느 날 조회시간에 힘주어 말했다.

 

“지금부터 딱 한 달 후에는 우리 학교의 역사적 전통이며 가장 중대한 행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반은 똘똘 뭉쳐서…….”

‘선생님~~ 보시다시피 우리는 아직 학교 적응도 힘들고 서로도 도통 모르는데 어떻게 행사를 해요?’

 

나를 포함한 반 친구들은 다 이런 말을 속으로 하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5월 행사를 앞 둔 4월을 우리는 멋모르고 날고 뛰어다녔다. 아마 1학년 전체가 다 그렇게 토끼처럼 뛰면서 보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아욱실리움 합창대회>를 알리는 벽보가 붙었다. 지정곡과 자유곡 채점방법, 심사부분에 대해서 알렸다. 자유곡 선정, 지휘자, 반주자, 의상, 율동 등등 모든 것을 그 반 학생들이 알아서 준비하는 것이 절대 원칙이었다.

 

도통 뭔지 모르지만 시간이 없다는 촉박함이 밀려왔다. 당장 그날 오후, 우리는 모두 모여 치열한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자유곡 선택을 해야 한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도레미송’을 하느냐, ‘마덜 오브 마인 (mother of mind) 을 하느냐 아니면 또 다른 무엇으로 하느냐를 놓고 우리는 손 높이 들고를 얼마나 반복했는지……. 한 표 차이로 자유곡이 선정되었다. 다음은 반주자를 뽑자며 여러 중학교에서 모인 우리는 피아노 재능을 가진 친구들을 수색했다. 찾고 보니 꽤 여러 명이 나타났는데 그중 교회에서 성가반주를 하고 있는 정연이를 뽑았다. 지휘자는 반장인 나영이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참참 의상, 의상은? 의상은 반장과 학교에서 집이 가까운 친구들이 함께 다니면서 나중에 결정하고 우선 합창 연습이 더 중요하니 내일부터 시작하자 결정하고 회의를 마쳤다. 이렇게 긴 시간동안 서로 자기 의견을 표시하고 의사 결정을 하는 사이 아이들의 마음은 점점 하나로 똘똘 뭉쳤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수업 시작 전마다 애교를 떨었다.

 

“선생님~~ 수업 5분만 땡겨서 끝내주세요. 네?”

자비하신 선생님은 3분 전에 끝내 주었다. 우리는 그것도 감개무량 하며 피아노가 있는 일곱 교실 중 한 곳을 찾아 모두 도망가듯 달렸다. 다른 반 보다 먼저 가서 한 번이라도 더 연습을 하기 위한 결사적 투쟁이었다. 그러나 모든 학급 아이들의 심정도 다 같았다. 그래서 아무리 날며 뛰며 넘어지면서 달려갔으나 벌써 다른 반 아이들이 피아노 둘레에 모여 연습 중일 때가 허다했다. 점심시간은 언제나 합창 연습 후 밥이었다. 오전 수업 종료 벨이 울리자마자 반장인 나영이는 애가 탔다.

 

“빨리빨리 모여.”

“나, 화장실 좀…… 금방 올게…….”

 

특별한 저음의 보유자 화진이가 오늘도 음을 올리라는 친구들 권고에 삐쳤다.

“이 음이 진짜거든?”

반면 목소리가 큰 순영이한테는

“넌 노래는 잘 하는데 소리를 약간 줄여봐. 응?”

 

 

합창대회[1].jpg

합창대회

 

순영이도 역시 삐쳤다. 반주자도 중간에 삐치고, 노래를 부르다 서로서로 삐치고 삐치면서 우리는 변해 갔다. 불협화음 목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단합된 한 목소리로 되어 갔다. 노래를 정말 못 부르는 송희는 일명 ‘넘순이(페이지터너) 역할을 맡았다. 반주자 옆에서 긴장을 풀지 않고 있는 송희에게 우리는 노래를 부르며 전한다. ‘송희 너, 정말 중요한 역할인 걸 알아, 몰라.’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애쓰는 우리의 호프 반장이 갈수록 안쓰럽다. 나영이는 요즘 꿈속에서도 지휘봉을 칼춤 추듯 휘둘리고 있단다. 팔과 허리가 아파 잠도 못자고 생전 터지지 않던 코피까지 쏟았다. 정보쟁이 희수는 틈만 나면 정보 폭을 넓혔다. 쉬는 시간마다 이반 저반 돌아다니며 이 친구 저 친구에게 정보를 캤다.

 

“야, 니네반 지정곡 뭐야.”

지정곡이 같으면 불리하기 때문이다. 의상 정보도 필요하다. 우리반은 하얀 블라우스에 교복 치마를 입기로 결정했다. 희수의 정보 중 피아노가 있는 교실이 비어 있다는 정보가 떨어지면 우리는 우르르 학급 반 대이동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학교는 합창연습으로 노래가 요들송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한 가지 우리 반이 유리한 조건이 있었다면 이런 것이었다. 합창 대회는 학교 대강당에서 열리는데 이 강당 무대에 서서 연습하는 것은 각 반마다 두 번씩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우리 반은 바로 대강당 바로 옆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정해진 두 번 에 기를 쓰고 플러스 두 번의 기회를 더 만들었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학교에 모여 연습을 했다.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2-3일은 더더욱 한 번 더, 더 연습하자는 쪽으로 마음이 일치하였다. 학원도 빠지자 등 의견이 분분하다. 야식은 빼놓을 수 없는 우리의 생명. 우리의 기쁨. 숫자가 많아 떡볶이는 못 사 먹고, 아이스케키와 빵을 선택한다.

 

합창대회는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출연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이것은 절대조건이었다. 만약 한 명이라도 빠지면 감점을 먹고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연습 때 보이지 않는 친구들을 우리는 목숨 걸고 찾아 나섰다. 하기 싫다는 친구는 살살 달래고, 아파서 결석한 친구가 있으면 조를 짜서 병문안을 갔다.

 

그 해 4월 한 달을 우리는 노래를 합창하면서 서먹했던 반 아이들과 갑자기 친해지고 우정이 깊어져 갔다. 한 명이 빠지면 감점이라는 점수 때문에 소중하지 않는 친구가 없음이 우리 마음속에 각인 되었다.

 

본 대회 날이다.

평소에 체육 수업을 하러 올 때에는 그렇게 썰렁하고 넓어보였던 대강당이 의자로 꽉 채워지고 심사위원석, 내빈석 등으로 온갖 화분과 팻말로 꾸며 놓은 그날의 강당은 정말 큰 행사를 치른다는 걸 보여 주었다.

 

한 달 동안 이것이 뭐시여 하면서 쫓아다녔던 우리들. 서로 격려하며 끝까지 함께 달려온 우리들. 지금 이 순간 내색은 안했지만 각자는 “나 지금 떨고 있니?” 하고 묻고 있다. 수능 수험생 심정 못지않았다. 우리는 서로 잡은 손목에 힘을 주며 전했다. ‘야, 함께 하잖아. 떨지 말고 해.’ ‘알았어.’

 

강당 밑과 좌우 스탠드에는 전교생을 비롯한 내․외빈들로 꽉 차 있다. 무대 위에 돌덩이처럼 굳은 우리는 그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지휘자 나영이가 씨익 웃으면서 신호를 주니 언제 떨었는가 싶게 우리는 초원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상을 받지 못해도 좋다. 부디 떨지만 말아다오.’ 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우리가 일등 할 거야.’라며 어느새 욕심쟁이가 앉아 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고 무대에 내려와 지정석에 앉아 발표를 기다린다. 화음과 음질, 악상표현, 표정과 율동, 입․퇴장 질서, 관람태도 등이 점수에 포함된다.

 

1학년 노래는 단조롭지만 1년 경력이 있는 2학년 선배 무대는 난이도가 높은 노래들로 탄성을 자아낸다. 민첩한 진행과 깔끔함이 정말 합창대회의 느낌이 났다. 율동으로 우산을 들고 코믹한 장면을 연출하는 여유도 보였다.

 

모든 합창이 끝나고 드디어 점수가 발표되는 순간이다. 최우수상, 우수상, 장려상, 인기상, 지휘자와 반주자에게 주는 개인상이 있다. 우리반은 장려상을 받았다. 뛸 뜻이 기뻤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 낯선 상태에서 그러나 가슴 가득 설렘으로 이 날을 준비했기에 최우수상이 부럽지 않았다. 최선을 다 했다는 그것으로 천여 명의 전교생들이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치고 기뻐했던 그 시절 그 추억… 5월의 꽃향기여, 5월의 노래여…….

 

제2부촛불행사[1].jpg

촛불행사

 

 

2012년 5월 11일. 예슬 엄마와 정순자 아녜스 수녀의 모교에서는 ‘제41회 아욱실리움 합창발표대회’가 열렸다. 초대된 심사위원 중 이름을 날리는 음악교수는 그날 대강당에 모인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의 맑고 고운 합창소리를 들으며 참으로 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많은 학생들이 합창대회 중 이렇게 한 마음 한 뜻으로 경청하면서 잘 들어주는 행사는 제가 어디 심사평을 가서도 드문 일입니다. 제 딸도 이 학교 졸업생입니다. 50년 역사가 빛나는 모교에 대한 자부심으로 교복을 아직도 간직하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꺼내보고 잊지 못하는 걸, 이제야 아, 정말 그래서 그랬구나를 오늘 여기 와서 알았습니다.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는 두 번째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모교,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아직도 이런 50년 전통을 이어가는 그 자체가 자랑스럽고 모두에게 상을 주고 싶습니다.”

 

제1부 합창대회가 막이 내리면 전교생 모두는 제2부 촛불행사를 위해 운동장에 모인다. 한 손에 하얀 촛불 하나, 마음에는 소원 가득 품고서…….

 

어쩌면 우리 학교는 이 시대 이 사회 분위기와는 역행하고 있는지 모른다. 빡세게 공부도 시키지 않는다. 일류학교 합격률도 많지 않는 인문계 학교다. 그럼에도 졸업생들은 대세의 흐름에 흘러가지 않고 인생의 추억을 심어주는 우리 학교를 졸업했다는 자부심이 누구보다 대단하다.

 

 

 

돈보스코의 예방교육 영성

 

“음악이 없는 학교나 집은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다.”

예방교육자 돈보스코의 말씀입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청소년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소리지르기, 달리기, 뛰기에 대한 자유를 넉넉히 줍시다. 체육이나 음악, 낭독, 연극, 소풍은 청소년의 넘치는 활력을 배출시키는 데 필요한 도구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자발적인 ‘축제’는 아이들을 순종하게 하며, 도덕성과 건강에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축제의 분위기는 오랫동안 저항할 수 없는 생명의 폭발이며 산소를 공급하여 되살려 내는 그런 호흡과도 같습니다. 음악, 연극, 소풍, 놀이의 축제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며 그렇게 참여한 후에는 새로운 신뢰와 열성으로 일상의 삶과 임무에로 돌아옵니다.

 

합창대회가 어떤 교육적 가치가 있는가? 인간교육 차원에서 접근합니다. 입학하여 모든 것이 낯선 새 학교, 새 학년, 새 친구들이 모여 4월 한 달 동안 학생회 중심으로 준비하는 축제는 서로서로의 소중함으로 자연스럽게 뭉쳐집니다.

 

하루 24시간 중 잠자고, 먹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는 청소년들에게 학교 공간이 추억이 없는 시험 장소로만 남아 있다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어른들은 학교의 주인공인 학생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노래, 연극, 춤, 놀이의 공간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학교가 학생들의 감성을 발산하는 축제를 되살려 줄 때 학교 내 친구들 사이의 왕따, 폭력, 자살 등이 사라질 것입니다.

 

예방교육의 축제 분위기가 살아 있는 이 학교는 2011년 교육과학 기술부가 지정한 「학교문화선도우수학교」, 2012년에는「인성교육실천우수학교」로 선정되었습니다. 올해 합창대회가 더욱 뜻 깊은 것은 이 학교를 졸업한 동창생들이 모여 ‘엄마 합창대회’를 창립하였다는 소식과 내년부터는 <아욱실리움 합창발표대회>에 특별출연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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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수녀
서울 영등포구 신길5동 천주교살레시오수도회 마자렐로센터에서 봉사 중. 순간의 잘못으로 ‘6호 처분’을 받아 6개월간 소년원을 거쳐가는 소녀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치유자다. 사회에서 ‘문제아’라고 내모는 아이들에게서 더 큰 희망을 발견하는 수도자이기도 하다. 저서로 <너는 젊다는 이유 하나로 사랑받기에 충분하다>가 있다.
이메일 : clara2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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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채널A '대선 여론조사 조작' 그 실체는?

 


대선이 가까워져 올수록 방송, 특히 종편에서는 온종일 정치 관련 뉴스만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치 뉴스가 많으면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여론조사입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민주당 문재인 후보, 무소속 안철수 후보 간의 지지율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는 많은 국민의 관심사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털 검색어에도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박근혜 지지율, 문재인 지지율, 안철수 지지율이라는 검색어입니다. 이렇게 많은 유권자가 관심이 있는 여론조사 지지율이 그동안 왜곡됐거나 조작됐다는 의혹을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일보 종편채널 채널A의 '이언경의 세상만사'라는 뉴스 프로그램에서 대놓고 여론조사를 조작해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여론조사를 조작했는지, 방송과 언론에 등장하는 여론조사 진짜 믿을 수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 채널A의 뻔뻔한 여론조사 조작'

'이언경의 세상만사'라는 뉴스 프로그램에서는 지난 11일 '박근혜,새누리 내홍 수습..전화위복 될까' 라는 제목하에 정연정 배재대 공공행정학과 교수와 함께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지지율에 관한 분석을 했습니다.

 

 

▲채널 A의 보도 내용과 실제 리얼미터 여론조사 지지율. 출처:중앙일보,채널A

 


채널A가 도표로 제시한 자료를 보면 10월 5일 박근혜 후보가 46.8%로 46.5%인 문재인 후보를 앞섰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10월 10일 문재인 후보는 44.6%, 박근혜 후보는 46.6%로 근소하게 하락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채널A는 이 여론조사를 리얼미터와 jTBC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리얼미터 조사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실제 리얼미터 조사결과에서는 오히려 문재인 후보가 46.6%로 박근혜 후보를 앞섰고, 박 후보는 44.6%로 2,2% 하락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아예 조사결과를 반대로 조작한 것입니다. 이들이 어떤 의도로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선을 불과 68일 남은 상황에서 이런 여론조사의 조작은 심각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채널A는 이런 여론조사의 조작에 대해 중앙일보 11일자 3면 기사에 게재된 도표를 흑백프린터로 출력해 CG팀에서 그래프를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진 단순한 실수라고 해명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중앙일보 여론조사 결과를 흑백으로 바꾼 화면, 출처:중앙일보

 

채널A의 해명처럼 중앙일보 신문을 흑백으로 변환시켜 뽑아봤습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박근혜 VS 안철수 결과와 비교하면 박근혜 VS 문재인 후보의 양자대결 조사 결과는 뚜렷하게 보입니다. 만약 안철수,박근혜 후보 양자 대결만을 실수했다면 이해를 하겠지만, 흑백으로 인쇄해도 뚜렷하게 보이는 결과까지도 조작한 모습은 단순한 실수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아예 두 사람의 결과를 처음부터 정반대로 했다면 이해를 하겠지만, 10월 5일 46.5%였던 그래프가 46.6%로 올라갔는데도 아예 그래프를 44.6% 지지율로 둔갑시켰던 점입니다.

 


 

▲ 여론조사 조작 동영상을 삭제한 상태. 출처:채널A 홈페이지

 

이처럼 단순한 실수로 보기에는 어려운 조작을 해놓고 채널A는 10월 11일 새벽까지도 홈페이지에 사과문은커녕 아예 동영상을 삭제하고 자신들의 조작을 숨기고 있습니다.

이언경이라는 앵커와 배재정 교수는 과연 방송 준비를 제대로 하고 뉴스 보도를 했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로 방송 내내 "박 후보가 중도 외연확대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지만, 반면 굴곡있는 인생을 살아 위기 대응에, 강하다.","평온할 때보다 위기에 잘 대응한다"는 말로 박근혜 후보 편들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지난주부터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양자간 대결은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안철수 후보에게 뒤지고 있는데도 앵무새처럼 박근혜 후보를 찬양하며 그가 부동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는 그녀들의 말을 보면, 뉴스인지 박근혜 홍보팀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 여론조사가 선거에 미치는 영향'

여론조사는 선거판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선거의 양상이 전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터진 후에 일어나는 여론 조사는 유권자의 표를 이동시키는 캐스팅보트 역할도 가질 수 있습니다.

 


 

▲1997년 11월17일 동아일보 기사.

 

1997년 11워17일 모든 신문은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회창 후보의 2위 진입을 보도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중앙일보는 "이회창 2위권 진입"이라는 제목을 뽑아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양자 간 대결로 여론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누가 김대중 후보와 2파전을 이룰 것인가는 선거 한 달이 남지 않은 기간에 중요한 요소인데, 아예 여론 조사를 통해 이회창 후보로 굳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중앙일보는 1면에 "TV토론 직후 지지율이 빠지는 경향을 보인 이회창 후보가 이번에는 가장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진행된 신문협회와 방송협회 주최 TV토론 이후 '이미지가 좋아진 후보'에는 이회창 후보 29.8%, 김대중 후보 23.1%, 이인제 후보 22.4% 순이었고, '이미지가 나빠진 후보'에는 김후보 18.4%, 이인제 후보 17.7%, 이회창 후보 16.6% 순이었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습니다.

이 여론조사 덕분에 이회창 후보는 단숨에 이인제 후보를 제치고 김대중 후보와 양자 간 대결 구도를 펼치게 됩니다.


 

 


 

▲2010년 서울시장 후보 여론조사와 실제 결과.

 

 

2010년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오세훈 후보는 한명숙 후보를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었습니다. 모든 언론사는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한명숙 후보가 아예 오세훈 후보와 게임이 안 되는 것처럼 보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오세훈 51.9% - 한명숙 32.8%…격차 다시 벌어져
[조선일보·한국갤럽 여론조사] 서울시장 가상 대결 오세훈 23.3%·한명숙 9.5%
오세훈·한명숙 서울시장 가상 여론조사… 韓 지지율 '들쭉날쭉' 왜?

그러나 실제 투표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세훈 47.4%, 한명숙 46.8%로 겨우 0.6% 차이로 오세훈 후보가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만약 여론조사가 실제 투표처럼 박빙의 승부로 예상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강남지역 여론조사와 다른 지역의 여론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아마 선거의 양상은 바뀔 수도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론조사는 갑자기 순위가 바뀌기도 하고, 선거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무기이자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 여론조사,과연 얼마큼 믿어야 할까?'

선거의 양상을 바꾸기도 하고, 선거 결과를 움직일 수 있는 여론조사. 그만큼 객관적이고 공정한가를 묻는다면, 대부분의 통계학자조차 현행 조사 방법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 2006년 서울시장 후보 여론조사 결과. 출처:선거여론조상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조성겸)

 

2006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피습 직후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에 대한 지지도는 회사별로 최대 8.9%의 격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똑같은 후보를 향해 여론조사를 했는데, 이렇게 격차가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차이는 여론조사를 수행하는 조사기관이 어떤 방식에 따라 여론조사를 하느냐에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지역과 대상을 조사한 결과도 조사기관에 따라 차이가 날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조사기관별로 차이가 나는 가장 큰 이유는 응답자(피조사자)선정방식에도 있을 수 있는데, 무작위 표집방법 방식이나 인구비례할당을 적용한 비확률 할당 표집 등에 따라서도 많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여성의 경우 평일에는 사무직 응답자의 비율이 13.%라고 하면 휴일에는 21%, 20대 전업주부의 경우 평일 조사가 22% 나왔다면, 휴일에는 3%의 응답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대,요일별로 재택률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실제로 유선전화 방식 등의 여론조사는 진짜 여론조사라고 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조사응답률입니다. 조사응답률이 낮으면 실제 여론조사의 신뢰성이 떨어지는데, 미국의 경우 응답률 30% 이하의 선거 여론조사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지만 한국은 20% 내외이거나 30-40%까지인데도 응답률을 잘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여론조사와 실제 투표율의 차이도 여론조사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투표하겠다고 물으면 대부분 투표를 하겠다고 밝히지만 실제로 투표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수치를 어떻게 배제하고 계산하느냐에 따라 여론조사의 투표율과 실제 투표율의 차이가 날 수 있으며, 이는 선거 예측에 많은 변수가 되기도 합니다.



 

▲중앙일보의 여론조사 설문지. 출처:위키프레스

 

여론조사가 수행하는 기관이나 의뢰자에 많은 차이가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조사 질문지의 내용과 순서가 어떻게 구성되었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추측성 질문이나 예측성 질문이 포함된 경우, 어떻게 단어를 배치하고, 표현하느냐에 따라 응답도 달라집니다.

중앙일보가 했던 추석 이후 여론조사를 보면, 문항 9번에 예시 2번을 보면 '다소 불안하더라도'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불안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는데, 이렇게 '불안'이라는 단어를 넣는 순간 응답자는 2번보다는 1번 '안정적'이라는 문항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대선 일주일 전까지는 수많은 여론조사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여론조사만을 무턱대고 믿다가는 여론조사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자들의 전략에 빠져들 수가 있습니다.

"여론조사가 여론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자기들 편의대로 해석하고 조작하는 여론조사를 믿는 대신에 어떤 여론조사를 가지고 어떤 여론을 만들려고 하는지를 우리 모두 눈여겨봐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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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벨상은 '펜' 든 인민해방군 모옌을 주목했나?

[2012 노벨 문학상] 가오미의 이야기꾼, 모옌

심규호 제주국제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0-12 오후 6:51:54

 

 

무라카미 하루키와 필립 로스는 헛기침을 했을지도 모른다. 2012년 노벨 문학상 발표 직전까지, 그 어느 해보다도 유명 소설가의 이름이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10월 11일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 문학상 발표장에서 울려 퍼진 이름은 중국의 소설가 모옌(莫言)이었다.

모옌은 1955년 중국 산둥 성 가오미 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학교 5학년 때 문화 대혁명을 맞아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해 농장과 공장 등지에서 일했다. 1976년 인민해방군에 입대 후 처음 글쓰기를 시작한 모옌은 1981년 단편 '봄밤에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로 데뷔했다. 이후 10여 편의 장편 소설과 수많은 희곡, TV 드라마 극본 등을 통해, 뛰어난 상상력과 능청스러운 유머로 중국 현대사와 민중의 삶을 묘파하며 자국민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모옌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는 1988년 장이머우 감독이 그의 중편 소설 '붉은 수수'를 원작으로 한 영화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그는 지금까지 중국 마우둔 문학상, 이탈리아 노니노 문학상,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등을 받았고 "중국의 윌리엄 포크너, 프란츠 카프카"로 불리면서 중국어권 작가 중 가장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어 왔다. 그리고 2012년, 모옌은 마침내 노벨 문학상 109번째 수상자이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첫 번째 중국 국적 작가가 되었다.

11일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에 대해 "판타지와 리얼리티, 역사와 사회를 폭넓게 조화시키면서, 윌리엄 포크너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복잡다단한 문학과 닮은 세계를 창조하는 동시에 중국 고전 문학과 구전 문학의 전통으로부터 또 다른 차별화 지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한림원 측은 또한 중국의 집에서 수상 소식을 전해들은 모옌이 "혼비백산할 정도로 무척 기뻐했다"고 전했다.

이번 '프레시안 books' 111호에서는 모옌의 <개구리>(심규호·유소영 옮김, 민음사 펴냄) 번역자이자 모옌의 벗이기도 한 심규호 제주국제대학교 교수(중어중문학과) 기고문을 소개한다. 심규호 교수의 글을 통해 모옌의 문학 세계에 대해 심도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개구리> 외에도 국내에서 현재 찾아볼 수 있는 모옌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풀 먹는 가족>(박명애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사십일포>(박명애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박명애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인생은 고달파>(이욱연 옮김, 창비 펴냄), <달빛을 베다>(임홍빈 옮김, 문학동네 펴냄),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임홍빈 옮김, 문학동네 펴냄), <홍까오량 가족>(박명애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술의 나라>(박명애 옮김, 책세상 펴냄), <만사형통>(박재우 옮김, 민음사 펴냄).

말하지 않는 이야기꾼

▲ 201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중국 작가 모옌. ⓒ민음사
모옌이 201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인도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913년), 일본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 오에 겐자부로(1994년), 중국 태생의 가오싱졘(2000년)에 이어 아시아에서 네 번째 노벨 문학상을 타게 되었다.

본명은 관모예(管謨業), 모옌은 필명이다. '막언(莫言)'은 말이 없다는 뜻도 되지만 말하지 않는다, 또는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된다. 어찌 천하의 이야기꾼이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가? 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가? 추측컨대, 말이 아닌 글, 언어가 아닌 문자로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일 터이다.

그런데 말이 곧 글 아니던가? 아니다. 말은 말이고, 글은 글이다. 주어 담을 수 없는 말의 책임보다 한 번 써서 세상에 나오면 고칠 수 없는 글의 그것이 막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공식석상에서 되도록 말을 아껴 침묵으로 대신하는 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책임의 막중함과 견제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현대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석에서 만난 모옌은 조곤조곤 말을 재미있고 흥미롭게 잘 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의 토양은 산동성 가오미(高密) 현 허야(河崖) 진, 다란(大欄) 향(鄕)이다. 가오미 현 동베이(東北) 향이 마치 그의 고향인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단편 소설 '백구와 그네(白狗秋千架)'에서 처음 나오기 시작하여 그의 최신작 <개구리(蛙)>(심규호·유소영 옮김, 민음사 펴냄)의 무대가 되기도 한 그곳은 실제 고향을 모델로 한 그의 문학적 고향이자, 심리적 지리 세계일 따름이다.

그는 그곳에서 태어난 후 잠시 소학교를 다니기 위해 떠났다가 문화 대혁명으로 인해 5학년 때 귀향하였는데, 일반적인 학교 교육에 물들기 전에 시골의 삶에 익숙해진 것은 오히려 그의 문학에 보탬이 된 듯하다. 가을이면 붉은 수수로 온 마을이 붉게 물들던 그곳은, 허나 낭만적이고 시심(詩心) 가득한 동심의 세계가 아니었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기아와 고독은 나의 고향과 언제나 연관되어 있다. 어린 시절 배불리 먹지 못하고 따뜻하게 입지도 못하며 소나 양을 치면서, 나는 사방 어느 곳에서도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땅에서 외롭게 생존하였다. 이런 기아와 고독이 내 창작의 원천이다."

외로움은 글의 세계로 인도하는 첩경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기아는 참을 수 없는 욕구에 대한 절망이다. 끊임없이 말하고자 하는 "야성과 광기의 이야기꾼"의 글에 대한 욕망은 바로 이러한 가오미의 고독과 기아에서 배태되었다.

창인가 아니면 펜인가?

그는 인민해방군 출신의 작가이다. 1976년 군대에 들어간 그는 1981년 단편 소설 '봄밤에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春夜雨霏霏)'로 데뷔하였으며, 1984년 7월 해방군예술학원에 문학과가 개설되자 그곳에서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받았다. 물론 이후 북경사범대학, 노신문학원에서 수학하면서 석사 학위를 받았지만, 그에게 문학 습작과 학습의 공간을 허여한 것은 군대였다.

군대는 창이다. 그러나 그는 펜을 택했다. 군대는 인명 살상을 능사로 여긴다. 그러나 그는 생명의 부활을 꿈꾼다. 그가 꿈꾸는 생명은 때로 비장하게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하거나(<붉은 수수 가족(紅高粱家族)>의 남자 주인공 위잔아오余占鰲처럼), 속죄와 참회 속에서 심지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지만(<개구리(蛙)>의 여자 주인공 고모), 작가는 오히려 <풍만한 가슴과 퉁퉁한 궁둥이(豊乳肥臀)>에 나오는 '모친(母親)'처럼 굴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버티며 견고한 생명의 질긴 끈을 버리지 않는다. 민간, 백성들이 모여 살고 있는 그 사이에서 그들의 삶을 온전히 보여줌으로써 생명과 그 생명이 추구하는 질긴 욕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삶이란 인간의 본성의 드러남이다. 그렇다면 본성이란 무엇인가? 식(食)과 색(色), 그 처절한 욕망 아니던가?

모옌 스스로 누차 이야기했듯이 그의 관심은 사람이고, 그가 쓰는 것은 사람의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획생육(計劃生育 : 산아 제한. 중국 정부가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독생자녀(獨生子女 : 아이 하나 갖기)' 정책)이라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를 접근하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아주 분명하게 내 자신에게 일렀다. 나는 중국의 계획생육의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것이며, 소설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을 쓰는 것이라고. 나는 '사람을 똑바로 보고 쓰기'로 했다. 고모를 원형으로 하고 허구와 상상을 덧붙여 세계 문학에서 일찍이 출현한 적이 없는 인물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인물을 제대로 묘사한다면 소설은 성공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실패한 것이다. 이렇게 쓴다면 계획생육은 역사적 배경이 될 것이고, 인물을 형상화하는데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는 끝내 루쉰(魯迅)처럼 소설을 버리고 잡감문(雜感文)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마오둔(茅盾 : 본명 심덕홍(沈德鴻), 자는 안빙(雁冰))처럼 끝까지 소설의 붓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개구리>로 중국의 저명한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마오둔 문학상(제8회)을 받은 것도 일리가 있다. 이렇듯 모옌에게 소설은 루쉰처럼 날카로운 비수와 창이 아니라 그냥 소설이다.

비틀어 쓰기 : 현실과 환상

▲ <개구리>(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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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小說)은 원래 가항(街巷)에 떠도는 잡다한 이야기를 말한다. 그런 이야기를 마치 채시(采詩)하는 것처럼 채집하는 이들을 일러 소설가라고 한다. 소설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속하지만 '가(家)'가 아니라 그저 '유(流)'라고 조금 폄하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옛날 제자백가의 학문은 이미 절맥되고, 오히려 하찮게 여겨졌던 소설가의 부류가 문학의 대종을 이룬 지 이미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소설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흥취를 주는 것은 무엇보다 흥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모옌의 소설은 특이하다. 무엇보다 현대를 살면서 여전히 전근대적인 의식과 관습이 존재하는 곳의 이야기를 쓰기 때문에 그러하고, 때로 상상력이 지나쳐 독자를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맴돌게 하기 때문에 그러하며, 소설 속에 드러나는 삶의 모습이 절절하여 독자들에게 색다른 감동을 주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그의 쓰기 방식(이른바 서사 방식)에 있다.

모옌은 스스로 한 군데 국한되기를 거부했지만 굳이 현대 중국의 문학사조로 따져본다면, 1985년부터 다시 불기 시작한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선봉문학(先鋒文學 : 전위파, 아방가르드) 계열의 작가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물론이고 신시기 초기의 상흔(傷痕)과 반사(反思) 문학에서 벗어나 '삶의 문제'를 주제로 한 문학 본연의 사명으로 돌아가는 한편 '붉은 수수'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서술 방식보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나 마환주의(魔幻主義 : 판타지) 기법을 활용하고, 심지어 <인생은 고달파>(이욱연 옮김, 창비 펴냄)에서 볼 수 있는, 중국의 전통적인 소설 형식인 장회체(章回體)를 사용하는 등 새롭고 다양한 실험적인 형식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그의 초기작 '붉은 수수'나 <풍만한 가슴과 퉁퉁한 궁둥이>, <사십일포>(박명애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의 경우처럼 주로 한 시대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 문학가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특히 '붉은 수수'는 문혁(文革) 이전의 혁명 역사 소설이 주로 직접 전투에 참가한 이들에 의해 창작되어 르포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 것과 달리 보다 새로운 시각과 필법으로 역사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신역사주의 작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중국 산동의 가오미 현을 중요 무대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향토 소설 또는 심근(尋根) 소설가로 볼 수도 있다. 그의 소설은 향토색이 짙으며, 걸쭉한 사투리며 지방 민속이 적지 않게 노출되어 있다. 이는 독자, 특히 외국 독자들에게 생경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불편을 주지만 반면 중국적 특색을 농밀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모옌 문학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한 작가 또는 작품에 이처럼 다양한 사조를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아마도 이는 그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생산해낼 수 있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일뿐더러 폭넓은 문학 세계에 침잠하여 다양한 문체나 서술방식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문학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 사조 면에서 어디에 속하든지 앞서 말했듯이 그가 소설을 통해 인성(人性)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 예컨대 역사 소설의 경우, 역사는 주인공의 영혼과 감정, 운명의 변화를 표현하는 일종의 환경이자 배경일 따름이라는 뜻이다. 모옌 스스로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소설은 인성을 묘사할 뿐이며 감정을 묘사해야만 더욱 풍부해지고 영향 또한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이렇듯 복잡하고 미묘한 '인성' 묘사를 소설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인성'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붓 또한 현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가상을 종횡으로 들고나며, 고금이 동시에 존재하며, 심지어 뜬금없는 환상의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의 다양성은 그가 가진 탁월한 상상력의 소산으로 내용의 풍부성과 맞물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야기를 끝내며

▲ <인생은 고달파>(전2권, 이욱연 옮김, 창비 펴냄).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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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옌은 1981년 단편 소설 '봄밤에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로 문학계에 데뷔한 이후로 '붉은 수수(紅高粱)'(1986년)를 비롯한 중·단편 소설, <십삼보(十三步)>(1988년), <붉은 수수 가족(紅高粱家族)>(1987년), <티엔탕 마을 마늘종의 노래(天堂蒜薹之歌)>(1988년), <풍만한 가슴과 퉁퉁한 궁둥이(豊乳肥臀)>(1995년), <사십일포(四十一炮)>(2003년), <인생은 고달파(生死疲勞)>(2006년) 등 10여 권의 장편 소설을 발표하였으며, 그 중에 적지 않은 작품이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었다.

특히 그의 중편 소설 '붉은 수수(紅高粱)'를 영화화한 장이모 감독의 데뷔작 <붉은 수수밭(紅高粱)>이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 상을 수상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이후 세계 문단에 널리 알려져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이탈리아 노니로 문학상,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대상 등 다양한 나라에서 그의 문학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근자에 만해(萬海)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모옌을 중국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실력 있는 후보자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의 말대로 올해 노벨 문학상은 모옌에게 돌아갔다.

지난 해 어느 날 베이징에서 모옌을 비롯한 산둥의 작가 몇몇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모두 인민해방군 출신이었으며, 그 가운데 한 명은 현역으로 마오둔 문학상을 받은 이였다. 함께 자리했던 또 다른 작가 웨난은 모옌의 수상을 축하한다는 내 메일에 이렇게 답했다.

"아시아 문학의 굴기는 당연한 일이다. 다만 세월의 단련이 필요할 뿐이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 문학상 수상식에서 '나는 중국의 모옌과 한국의 김지하의 미래를 주시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번에 모옌이 상을 탔으니 이제는 김지하를 봐야할 것이다."

김지하를 좋아하는 인민해방군 출신의 작가, 그의 말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누구든 좋다.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그 일 때문에 흥분하고 싶다.

 

 
 
 

 

/심규호 제주국제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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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학회, MBC·부산일보 지분 비밀매각 추진"

<한겨레> 보도... "최필립-이진숙 만나 언론사 주식 매각 방식·발표 방안 논의"

12.10.12 21:19l최종 업데이트 12.10.12 21:19l
이주영(imjuice)

 

 

MBC 김재철 사장과 이진숙 기획홍보본부장(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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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학회가 비밀리에 언론사 주식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한겨레>는 "정수장학회가 문화방송(MBC) 지분 30%와 부산일보 지분 100% 등, 갖고 있는 언론사 주식 매각을 비밀리에 추진해온 것으로 밝혀졌다"며 "또 정수장학회는 수천억 원에 이르는 매각 대금을 활용해 부산·경남 지역 대학생 및 노인층, 난치병 환자 등을 위한 대규모 복지사업을 계획 중인 사실도 드러났다"고 12일 보도했다.

<한겨레>에 따르면,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지난 8일 서울 중구 정동 정수장학회 이사장실로 찾아온 이진숙 MBC 기획홍보본부장·이상옥 전략기획부장 등을 만났다. 이진숙 본부장과 이상옥 부장은 최필립 이사장에게 정수장학회의 언론사 주식 처분 및 활용 계획을 밝힌 것으로 확인됐다.

MBC 측은 이 자리에서 ▲ 내년 상반기 문화방송 상장계획 ▲ 정수장학회의 문화방송 지분 30% 처분 방식 ▲ 정수장학회의 언론사 지분매각 입장 발표 방안 등을 설명했다.

이상옥 부장은 "MBC를 주식시장에 상장하면서 장학회 지분 30%를 상장 물량으로 처분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며 "주식시장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주식을 풀면, (장학회를)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보이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최 이사장 "19일에 발표"... 이진숙 "젊은층 많은 곳에서 발표"

이에 최 이사장은 "(MBC 쪽 제안대로) 추진하되, 이를 10월 19일에 발표하게 해달라"며 "발표에는 (정수장학회가 MBC 지분 매각 대금을 활용해) 부산·경남 지역 대학생을 대상으로 직접 '반값등록금'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진숙 본부장은 "대학생 등 젊은층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형 광장이나 대학을 (19일) 발표 장소로 정했다"며 "정치적 임팩트가 크기 때문에 대중에게 가장 효과가 큰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날 회동에서는 정수장학회의 부산일보 매각 방침도 언급됐다. 최 이사장은 이 본부장에게 "부산·경남지역 기업 총수들과 맺은 부산일보 매각 관련 양해각서(MOU) 체결 사실도 19일에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부산일보 매각 배경과 관련해 "지금 노조 때문에 (부산일보가) 민주당인지 진보당인지 기관지로 돼 있으니 이 사람(부산경남 지역 기업 총수)들이 안 되겠다는 것"이라며 "이 사람들이 '부산일보를 사서 기업의 빽으로도 쓰고 부산도 (야당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말했다.

최 이사장은 또 "부산일보 매각 대금을 부산·경남 지역 노인정이나 난치병 환자 치료시설에 전액 기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최 이사장은 '전혀 모르는 상황'이라며 "언론사 매각 계획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그는 12일 <경향신문>과 한 전화통화에서 "<한겨레> 기사는 내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MBC를 내가 어떻게 파는가, 그것은 정부에서 팔고 말고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MBC 인사들을 만난 사실에 대해서는 "자주 본다"고 답했다.

민주당 "정수장학회 언론사 지분 매각, 박근혜 위한 이벤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12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OL-Park축구장에서 열린 월남참전 48주년 기념식 및 국가안보결의대회에 참석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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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문방위) 소속 민주통합당 의원들은 정수장학회의 언론사 주식 매각과 부산·경남 지역 대규모 복지사업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두고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위한 이벤트"라며 비판했다.

문방위 소속 민주통합당 의원들은 12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진숙 본부장이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 줄서기 일환으로 이런 대선 이벤트를 준비했다"며 "날짜까지 구체화하며 박 후보를 돕기 위해 지분 매각을 기획한 이진숙 본부장과 최필립 이사장은 즉시 사퇴하고 국민 앞에 사죄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정수장학회의 언론사 지분 매각은) 최소한 김재철 MBC 사장과 박 후보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박 후보는 국민 앞에 공개 사과하고 김재철 사장은 즉시 사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재정 민주통합당 의원은 이날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최 이사장은) 박 후보와 정수장학회가 관계없다고 했으면서 매각한 대금을 부산·경남 지역에 선심성으로 쓰겠다고 밝혔다"며 "이는 최근 민심이 흔들리고 있는 이 지역을 관리하면서 정수장학회 관련 논란도 해결하겠다는 전략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정수장학회의 MBC 지분 30% 매각을 두고 'MBC 민영화 과정'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용마 MBC 노동조합 홍보국장은 "어제(11일) 회사 쪽에서 일부 간부를 상대로 MBC 민영화 방안을 설명한다고 들었고, 회사 측이 방문진 주식도 추가로 매각할 계획인 것으로 안다"며" 정수장학회 주식 매각 자체가 MBC 민영화 방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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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중 철책은 왜 자꾸 뚫리는 것일까?

 

 

 

3중 철책은 왜 자꾸 뚫리는 것일까?
 
[한호석의 개벽예감](33) 철책 뚫릴 때마다 변명일삼는 군 지휘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2/10/13 [02:27] 최종편집: ⓒ 자주민보
 
 

15명 대 150만명이 벌인 51일 간의 전투

전에는 잘 알지 못한 북측 사정이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경우가 차츰 많아지고 있다. 북측 사정은 북의 언론기관들이 운영하는 몇몇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도 세상에 알려지지만, 북의 언론기관이 <유튜브(You Tube)>에 올려놓은 동영상을 통해서 알려지는 북에 관한 정보는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준다. <유튜브>에는 갖가지 대북정보를 담은 동영상들이 많이 게시되어 있는데, 북의 인터넷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가 2012년 2월 22일에 게시한 다부작 기록영화도 그런 동영상들 가운데 하나다. 특히 조선기록과학영화촬영소가 2010년에 제작한 기록영화 ‘누리에 빛나는 선군태양 제4부 - 인민군대를 백두산 혁명강군으로’라는 제목의 상영시간 50분 짜리 기록영화는 이제껏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민군의 전투력에 관한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그 기록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후반부에 나오는, 이름을 명시하지 않은 인민군 장병 전사자 25명의 얼굴사진인데, 지휘관 한 사람의 사진을 맨 앞에 두고, 그 다음으로 병사 8명의 사진을 세 줄로 배열하였다. 전사자 사진들은 1996년 9월 18일에 일어났던 인민군 잠수함 사건에서 전사한 인민군 장병들의 영정으로 보인다.

인민군 잠수함 사건이 있었던 때로부터 16년 세월이 흐른 지금,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진 그 사건을 다시 거론하는 까닭은 인민군 전투력에 관한 기록영화에 그 사건이 다시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북이 인민군 잠수함 사건을 인민군 전투력이 얼마나 강한지 말해주는 여러 사례들 가운데 한 사례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6년 9월 18일 동부전선 군사분계선(MDL)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강원도 강릉시 안인진리 앞바다에서 인민군 소형 잠수함 한 척이 해안에 좌초되었다. 그 잠수함에는 승조원 23명과 정찰병 4명이 타고 있었다. 해안에 좌초한 잠수함을 더 이상 운항할 수 없게 되자, 그들 27명 가운데 소총으로 무장한 16명은 뿔뿔이 흩어져 오대산에서 설악산에 이르는 험준한 산줄기를 타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산줄기를 타고 북상하며 한국군과 교전하였던 인민군 16명 가운데 정찰병은 3명 뿐이었고, 나머지 13명은 잠수함 승조원이었다. 정찰병 3병은 육상정찰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군의 포위공격 속에서도 교전할 수 있는 육상전투능력이 있었지만, 바다에서 잠수함을 타던 승조원 13명에게는 육상전투능력이 사실상 없었다. 그래서 투항자 1명이 잠수함 승조원 가운데서 나왔다.

해안에 좌초된 잠수함에 정찰병 3명이 타고 있었다는 보도를 보면, 그 소형 잠수함이 대남정찰을 위해 남하하였다가 해안에 좌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사건에서 기억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으로부터 16년 전만 해도 북은 정찰병을 적진에 침투시키는 정찰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주한미국군과 한국군도 대북정찰활동을 벌였다. 한반도가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한 정전상태에 있으므로, 교전쌍방이 서로 그러한 정찰활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전역을 미국 상업위성이 정밀하게 촬영한 위성사진자료가 2001년 6월 11일부터 인터넷에 공개되기 시작하자, 북은 정찰병을 남측에 침투시키는 대남정찰활동을 더 이상 지속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를테면, 2012년 10월 5일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민주통합당 소속 국회의원은 미국 상업위성이 촬영한 인터넷 위성사진자료에 한국군 각 부대들의 위치와 건물배치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지상배치 무기와 군사장비들까지 모조리 노출되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 또한 2012년 6월 4일 인민군 총참모부가 당시 평양에서 진행된 소년단 창립 66주년 경축행사를 비방한 남측 신문사들의 좌표를 열거하면서 조준사격 위협을 가한 것은, 인민군이 위성사진자료를 통해 정밀한 타격좌표를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인민군은 2000년대에 들어와 대남정찰활동을 중지하였지만, 미국군과 한국군은 지금도 이전처럼 대북정찰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왜냐하면 미국 정찰위성이 찍어오는 위성사진에는 북의 갱도화된 군사지하시설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1996년 9월 18일 인민군 잠수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기라고는 소총 한 자루와 실탄 몇 발씩밖에 갖지 못한 정찰병 3명과 육상전투능력이 없는 잠수함 승조원 12명의 북상을 차단하기 위해 한국군은 연인원 150만 명을 투입하여 여러 겹으로 포위망을 쳤다. 15명 대 150만명이 벌인 51일 간의 전투, 그것은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격전이었다. 51일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인민군 14명이 교전 중 전사하였고, 한국군은 11명, 예비군 1명, 경찰 1명이 전사하고 15명이 부상당했다. 한국군 전사자 11명 가운데 3명은 오인사격에 의한 사망자다. 소총 한 자루와 실탄 몇 발씩밖에 갖지 못한 인민군 15명의 북상을 차단하기 위해 병력수송헬기까지 동원한 한국군이 51일 동안 150만명 대병력을 작전에 투입하고서도 13명이 전사하고 15명이 부상당한 것은 그 작전이 사실상 실패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인민군 잠수함 승조원들과 정찰병들이 한국군 포위망을 뚫고 오대산을 거쳐 설악산까지 북상하는 동안, 북에서는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특수군 병력을 실은 AN-2 기습항공기들을 군사분계선 부근까지 남하시켜 비행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만일 인민군 특수군 병력이 방공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 AN-2기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한국군과 곳곳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더라면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까? 한국군이 인민군 잠수함 승조원 11명과 정찰병 3명을 상대로 벌인 51일 동안의 교전에서도 그처럼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면, 북에서 자타가 최정예로 공인하는 특수군 병력을 상대로 벌이는 교전에서는 한국군이 상상하기 힘들 만큼 엄청난 인명손실과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군의 작전패인은 무엇인가?

한국군이 10만 배나 되는 대병력을 작전에 투입하고서도 결국 실패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한국군이 작전실패의 원인을 어디서 찾았는지는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작전과 관련해서 남과 북에서 각각 나온 기록들을 살펴보면 한국군의 작전실패 원인을 분석할 수 있다.

우선 남측에서 나온 관련기록부터 살펴보면, 인민군 잠수함 사건 당시 동부전선 매복작전에 동원된 익명의 한국군 병사가 남긴 생생한 체험담이 인터넷에 게시되어 있다. 체험담의 주요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수류탄을 지급받은 한국군 병사가 작전에 투입되기도 전에 수류탄 한 발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대대병력 500명이 잃어버린 수류탄을 찾기 위해 주둔지역을 사흘 동안이나 샅샅이 뒤졌다는 얘기, 수류탄은 안전핀과 클립을 모두 빼고 던져야 하는데 어떤 병사가 안전핀만 빼고 던지는 바람에 불발 수류탄을 잘못 건드리면 터지게 되므로 매복 중인 장병들이 날이 밝을 때까지 제자리에서 꼼짝없이 발이 묶여 있었다는 얘기, 매복작전 중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앞뒤를 보지도 않고 미친 듯이 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매복구역에 나타난 아군을 오인사살하거나 마을에서 기르는 황소를 오인사살하거나 송이버섯 캐러 산에 오른 주민을 오인사살하였다는 얘기, 교전 중에 전사한 전우의 시체를 보면서 느낀 감정 등이 체험담에 들어 있다.

그 체험담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군의 전투능력이 생각보다 부실할 뿐 아니라, 특히 정신적으로 매우 허약하다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했으므로 한국군 지휘부는 인민군 15명의 북상을 차단하는 포위작전에 150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군 지휘부가 그런 불편한 진실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아서, 일반대중은 한국군의 전투력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다른 한 편, 인민군 잠수함 사건에 관해 언급한, 위에서 인용한 북의 기록영화에는 “전투근무 수행 중 폭풍에 떠밀려 남쪽으로 흘러가 적의 포위에 들었을 때 누구도 명령한 사람은 없었건만 전사들이 억세게 틀어쥔 자폭의 수류탄”이라는 해설이 나오는 동영상 화면에 수류탄 세 발이 땅에 놓여져 있는 장면과 소총 탄피들이 땅에 떨어져 있는 장면과 함께 “우리들은 혁명적 절개와 지조를 지켜 적들에게 절대로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이며 장군님의 병사답게 영예로운 최후를 마칠 것이다...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글귀가 화면에 나타난다. 그 글귀와 함께 군용무전기가 화면에 나온 것으로 봐서, 그 글귀는 좌초된 잠수함에 탔던 인민군 장병들이 잠수함 운항을 포기하고 거기서 나와 강릉 해안에 상륙하기 직전 잠수함에서 마지막으로 북에 송신한 맹세문인 것으로 보인다.

강릉 해안에 상륙한 27명 가운데 소총마저 없었던 승조원 11명은 좌초지역에서 서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있는 청학산 중턱에 가서 수류탄 세 발을 가운데 놓고 서로 어깨를 겯고 자폭하였다. 절대로 포로가 되지 않고 영예롭게 최후를 마치겠다고 맹세한 그대로 그들은 자폭의 길을 택하였다. 이런 사실을 보면, 북에서 말하는 ‘자폭정신’은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강인한 전투정신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총을 가진 다른 승조원 및 정찰병 14명은 한국군과 교전하면서 북상하던 중 전사하였는데, 한국군이 겹겹으로 포위망을 둘러치고 좁혀오는 상황이었으므로 120km에 이르는 전선을 돌파하여 군사분계선 철책을 넘어갈 가망은 사실상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총에 마지막 실탄이 남을 때까지 싸웠다. 살아날 가망이 없는 포위망 속에서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것 역시 북에서 말하는 ‘자폭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2012년 10월 2일 강원도 고성에 주둔하는 한국군 제22사단의 최전방 철책이 어이없게 뚫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날 밤 10시 30분쯤 한국군이 감시하는 최전방 철책에 걸어서 도착한 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높이 4m의 3중 철책을 맨손으로 타고 넘었다. 철책을 넘어 남하한 그는 불빛이 비치는 동해선 경비대로 가서 출입문을 두드렸으나 반응이 없자 다시 한국군 병사들이 잠을 자고 있던 생활관(이전에는 내무반)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한국군 병사 3명이 잠자리에서 부시시 일어나 출입문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문 밖에 서 있었다.

한국군이 최전방에 가설한 철책은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3중으로 설치되었는데, 철책 아래쪽은 절단하기 힘든 촘촘한 판망이고 윗쪽은 타고 넘기 힘든 커다란 원통형 철망이다. 또한 철책 곳곳에는 돌과 깡통을 매달아놓아 철책이 흔들리는 경우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군사분계선과 3중 철책 사이 2km 구간에는 한국군 최전방 경계초소(GP)들이 있고, 철책 남쪽에는 최전방 소초(GOP)들이 있다. 최전방 소초에 주둔하는 한국군 소대병력 40여 명은 동서로 1.5km에 이르는 3중 철책구간을 24시간 감시하고 있다. 밤에도 동서구간 철책 400~500m마다 경계병력이 배치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군 최전방 경계초소는 인민군 병사가 3중 철책을 하나씩 타고 넘어 남하하는 것을 알지 못했고, 철책을 감시하던 한국군 경계병들도 철책에 매단 돌과 깡통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소대병력이 잠든 생활관 앞에는 보초병도 서 있지 않았고, 폐쇄화면 TV마저 작동하지 않았다. 그 날 오전, 강원도 강릉 앞바다에서 남측 어선을 북측 잠수함으로 오인한 사건이 일어나, 동부전선을 지키는 한국군 제22사단은 경계태세를 강화하였다고 하는 데도, 그런 사태가 일어났으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번 사태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전해들은 남측 국회의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어떻게 3중 철책을 아무런 도구 없이 약 12분만에 맨손으로 타고 넘을 수 있겠는가고 의문을 표시하면서 혹시 다른 인민군 병사의 도움을 받았을지 모른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누리에 빛나는 선군태양 제4부 - 인민군대를 백두산 혁명강군으로’라는 제목의 기록영화를 보면, 남측 국회의원들이 불가사의하게 여긴 3중 철책 타고넘기가 결코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은, 개인화기로 무장한 인민군 병사들이 불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실전 분위기 속에서 높은 철조망을 타고 넘는 훈련장면이다. 그런 훈련을 평소에 받은 인민군이 군사분계선 철책을 타고 넘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이번에 인민군 병사가 군사분계선 철책을 타고 넘은 시간이 4분이라고 하였는데, 철책 한 개를 타고 넘는 데 4분씩이나 걸린 것을 보면, 그는 평소에 철책 타고넘기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낙제생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했으니 탈영하여 남하하였을 것이다.

한국군이 경비하는 최전방 철책은 이번에 처음으로 뚫린 것이 아니다. 1996년 9월 18일 인민군 잠수함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겹겹으로 둘러치고 조여오는 한국군 포위망을 벗어나 북상하여 철책을 뚫고 북으로 돌아간 정찰병 1명도 한국군 제22사단이 경비하는 바로 그 지역에서 월북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2004년과 2009년에 남측 민간인들이 3중 철책을 뚫고 월북했을 때도 한국군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로켓포탄 두 발씩 가슴에 안은 그들은 누구인가?

‘철통 같은 경비태세’라고 항상 큰 소리를 치던 한국군이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SBS> 2012년 10월 11일 보도에서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2008년 4월 인민군 1명이 군사분계선 철책을 넘어 한국군 최전방 경계초소에 접근하였는데, 경계초소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급한 생각에 권총을 꺼내 공포탄을 쏘며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경계초소에 있던 한국군 장병들은 “(권총 공포탄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응사하기는커녕 어떻게 할 줄 몰라했다. 들키면 총을 맞을까봐 참호에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적과 대치하는 최전방 초소에서 경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군인들이 갑작스럽게 울린 총소리 두 발을 듣고 놀라 참호에 숨어버린 웃지 못할 사건은 언론에 보도하기도 힘든 ‘창피사건’이다.

원래 공포란 정신력이 허약한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심리현상이다. 사람이 느끼는 갖가지 공포감 중에서 가장 무섭게 느끼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공포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 필사의 각오로 싸움에 나선 전사가 적을 압도하는 용맹을 떨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최전방에 배치된 한국군이 작전 중에 또는 경계근무 중에 공포에 사로잡혀 전의를 상실하고 몸을 숨긴다면 그런 그들의 전투는 해보나 마나 뻔하다. 더구나 상대는 ‘자폭정신’으로 무장한 강력한 인민군이 아닌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누리에 빛나는 선군태양 제4부 - 인민군대를 백두산 혁명강군으로’라는 제목의 기록영화에는 인민군 특수군이 야간습격훈련과 기습폭파훈련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공중강하훈련에 나선 것으로 보이는 인민군 특수군이 출동을 앞두고 대오를 정렬한 장면을 보면, 그들이 커다란 로켓포탄을 두 발씩 앞가슴에 안고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류탄보다 더 강력한 로켓포탄을 두 발이나 터뜨려 적진을 깨부술 ‘자폭정신’으로 무장한 필사의 각오와 전의가 보이는 모습이다. 일부 탈북자들이 늘어놓는 허튼 소리만 듣고 인민군 전투력을 판단하는 것은 100% 오판이다.

150만 대병력의 포위망 속에서 어깨를 겯고 수류탄을 터뜨려 집단자폭의 길을 택하고, 소총 한 자루와 실탄 몇 발만 갖고 끝까지 싸우다가 최후를 맞는 ‘자폭정신’으로 무장한 인민군 전방부대들이 지상과 지하, 해상과 해저에서 그리고 공중에서 5차원 진격을 개시하면, 권총 공포탄 소리에도 겁을 먹고 참호에 숨는 한국군은 그들의 진격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한국군 방어선은 너무도 싱겁게 뚫릴 것이다. 인민군 전방부대들이 한국군 방어선을 순식간에 뚫는 사이, 미리 후방지역에 침투하여 사전대기 중이던 인민군 특수군 병력은 서울을 비롯한 남측 각지에 있는 전략시설들을 거의 교전도 하지 않은 채 신속히 무혈점거할 것이다. 그러면 북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은 그것으로 끝나게 된다. 경기도와 강원도 북부에 사는 남측 주민들은 그래도 포성이나 듣겠지만, 그 아래 남부지역에 사는 남측 주민들은 포성도 듣지 못한 채 어느 새 속결전이 끝났음을 알리는 긴급보도를 듣게 될지 모른다.

이번에 동부전선이 또 다시 뚫린 사태가 일어난 뒤 2012년 10월 11일에 국방장관은 전군 작전지휘관 화상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병력, 감시장비 운용을 포함한 접적지역 경계작전 시스템의 근원적인 보강대책을 조기에 마련해 추진”하라고 지시하고, “국민들께 심려를 끼친 것에 대해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전방 철책이 뚫릴 때마다 송구스럽다는 변명조 발언을 되풀이해온 한국군 지휘부의 말을 더 이상 곧이 듣기 어렵다.

지금 한국군은 북측 전역을 타격할 탄도미사일을 3년 안에 개발하겠다는 자극적인 무력증강책을 발표하여 북의 ‘조국통일대전’ 의지를 시험해보려고 할 게 아니라, 군사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체제를 세우는 올바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할 것이다. “남과 북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하였다”고 명시한 10.4 선언을 이행하는 진지한 노력만이 한국군에게 참패를 면할 수 있는 방도가 될 것이다.(2012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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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단일화, 장도빈 선생의 민중일보가 전하는 시국 메세지

장도빈 선생이 전하는 시국 메세지
꿀단지고서방의 보물 장도빈의 민중일보 원본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2-10-12)


 

▲ 창동예술촌 '꿀단지고서방'의 지킴이 김영철 씨가 <민중일보> 원본을 들어 보이고 있다.

2012년 대선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진정한 쟁점은 무엇일까.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말이 있다. 볕이 안 드는 깜깜한 쥐구멍에 볕들 날 있다는 말 뜻은 '고생 끝에 낙이 있다'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이유 등으로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던 사실이 역사적 조명을 새롭게 받으며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얼마 전 마산의 창동예술촌을 다녀오면서 그곳에 있는 '꿀단지고서방'에서 오래된 신문을 친견하는 행운 조차 그랬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책방을 다녀갔지만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서재필의 '독립신문'이라든지 장도빈 선생의 '민중일보'와 구한말 1898년 9월 5일에 창간된 '황성신문' 등 주옥같은 보물들은 그냥 지나쳐버린 듯 했다. 100년도 더 된 그 신문들은 누렇게 퇴색되고 너덜너덜 하게 변해 꿀단지고서방 지킴이 김영철 씨가 비닐봉투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다. 손만 대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이 오래되고 낡은 신문이었다.


장도빈 선생이 창간한 '민중일보' 원본 만나다

그나마 그 신문들은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 오래된 골목길과 함께 쇠퇴해 가는 도심의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을 만도 했다. 또 오늘날 최첨단 기술이 깃든 스마트폰 등 새 것을 좋아하는 세대가 골동품에 열광할 리가 없었으므로, 독립신문이나 민중일보 등 중요한 사료들은 헌책방 내지 고서적방 한 구석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글쓴이 포함 일행들이 꿀단지고서방에 들러 이것 저것 오래된 물건들에 관심을 보이자, 깊은 잠에 빠졌던 오래된 신문들이 기지개를 펴며 카메라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김 씨가 글쓴이 앞에 끄집어 내 보인 신문들 중에는, 정체불명의 친일파 서재필의 독립신문에 이어 독립운동가 장도빈 선생이 창간한 <민중일보>가 눈길을 끈 것이다. 김 씨는 귀찮을 법도 했지만 깊은 관심을 보이자 신이난 듯 카메라 앞에 귀한 사료들을 펼쳐보였다. 그런데 이 귀한 사료들이 2012년 대선을 앞 둔 우리들에게 요긴한 자료로 쓰이게 될 줄 누가알았던가. 먼저 장도빈 선생의 자취를 살펴보면 대략 이러하다.


장도빈 선생은 어떤 인물인가

"장도빈 선생은 1888년 10월 22일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신읍리에서 장봉구(張鳳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산운(汕耘)이다. 선생의 가계는 사대부 집안이었으나, 조부 장제국(張濟國) 때에 이르러서는 출사하지 않고 재야 유림으로 향리에 묻혀 살았다. 그것은 조선 말기의 파행적 정치형태인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매관매직이 자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중앙 관직에 진출하기 보다는 차라리 재야에서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 사대부로서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선생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우리나라의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이듬해 2월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까지 간섭하면서 식민지화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갔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그 해 7월 19일 광무황제를 강박하여,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는 양위 조칙을 반포케 하였다. 그런 다음날 일제는 경운궁 중화전에서 신·구 황제가 참석하지도 않은 채 양위식을 거행케 하여 당시 반일 구국운동의 정신적 지주이며 식민지화 정책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하였던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이어 일제는 '이완용(李完用) 매국 내각'으로 하여금 같은 해 7월 24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인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제1조, 조선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조선정부의 법령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받을 것. 제3조, 조선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제4조, 조선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은 다음에 시행할 것. 제5조, 조선정부는 통감이 천거하는 일본인을 조선관리로 임명할 것. 제6조, 조선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는 외국인을 조선관리로 초빙하지 아니할 것. 제7조, 광무8년 8월 22일 조인된 조일협약 제1항은 폐지할 것.-> 을 체결케 한 뒤, 대한제국 정부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이들로 하여금 국정을 운영하는 이른바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자행하였다.

나아가 7월 31일에는 일제가 작성한 군대해산 조칙을 새 황제 순종(純宗)으로부터 재가 받는 형식을 취한 뒤,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결국 일제는 이 같은 일련의 침략 책동으로 한국 정부의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국가 보위의 국방력을 말살함으로써 대한제국을 형해화(形骸化, 내용은 없이 뼈대만 있게 된다는 뜻)하여 갔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선생은 1908년 봄 위대한 정치가가 되어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세우겠다는 결심으로 상경했다. 우선 선생은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정치가가 되기 위해 학업을 닦는 한편, 황성신문사 주필인 박은식(朴殷植)의 소개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논설을 담당했다. 특히 이 때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인 신채호(申采浩)가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선생이 주로 논설을 작성하였고, 1909년부터는 신채호와 일주일씩 교대로 논설을 썼다고 한다.

1904년 광무황제의 후원으로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치외법권을 갖고 있던 영국인 베델이 발행인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정책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었다. 따라서 선생은 각종의 애국적 논설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일제 침략의 실상을 고발함으로써 당시 각계각층에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구국계몽운동을 확대 지원하여 갔다. 아울러 선생은 이 시기 이미 역사학자로 명망 있던 신채호와 동고동락하면서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필요성을 체득하여 향후 국사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

1930년대에 들어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침략, 1937년 7월 중일전쟁,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이른바 총후(銃後)의 안정과 전시 인력 및 물자 동원을 목적으로 본격적인 ‘황민화’정책을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순차적으로 일본어 상용(1937. 3), 신사참배(1937. 7), 황국신민 서사(1937. 10), 창씨 개명(1939. 11) 등을 강요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는 민족지도자들을 갖은 방법으로 변절시켜 침략전쟁에 협력케 하는 한편, 이들을 황민화정책의 앞잡이로 삼아 한국 청장년들을 전쟁터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 때에도 선생은 끝까지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산간벽지로 피해 다니며 국사를 연구하면서 조국 광복의 날을 기다렸다.

8·15해방이 되자 선생은 조국을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한 끝에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선생이 해방 공간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가 국민계몽을 통한 민주국가 건설에 있음을 인식한 결과였고, 또 한 말이래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해 줄기차게 실천해온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활동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민중일보(民衆日報)>를 창간하여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활동으로 민족의 진로를 밝히며 민주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는 선생은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그것은 선생이 시종일관 주장해온 민족교육을 통해 민주국가의 동량을 육성하고, 나아가 그들의 애국심을 함양함으로써 민족·민주 국가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고 <국가보훈처> 자료 등에서 말하고 있다.

장도빈 선생의 자취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전후 사정을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이때 선생이 하신 일은 주로 국사를 바로 세우는 일과 함께 일제에 강점당해 빼앗긴 우리 민족의 정체성 회복 등이었다. 대략 100년 전후에 전개된 역사를 살펴보고 있노라니, 2012년 현재 친일·숭미 극우주의자들이 들끓는 대한민국의 대선 시즌과 너무도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이완용 매국 내각으로 하여금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인 '정미7조약' 등 친일행위자들의 면모를 떠올리자 고아처럼 방황하는 정체불명의 친일·숭미세력들이 눈 앞에서 어른거리며,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상황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오늘날 국사편찬위원회가 친일 유신독재자를 옹호하게 된 희한한 상황과 닮은 꼴이랄까.


민중일보와 오늘날의 언론

이들이 나라를 어지럽힌 주된 요인 중 하나는 조선 말기의 파행적 정치형태인 '세도정치(왕의 신임을 얻은 신하나 외척이 강력한 정치적 권세를 잡고 나라를 다스리던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로 매관매직이 횡행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오늘날 친일.숭미주의자들이 당명을 바꿔가며 변신을 시도하고 있었던 이유가 부정부패의 대명사인 '차떼기당'으로 드러난 것 처럼, 매관매직 등 부정부패가 극도에 달하여 나라와 민족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만의 이익을 도모한 결과 을사늑약이라는 치욕적인 역사를 맞이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소한 100여 년 전의 상황이 2012년 현재 상황과 맞물린 게 장도빈 선생의 민중일보 창간 경위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 장 선생이 민중일보를 창간한 이유는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초래는 온통 친일색이었던 언론이 국민들을 우민으로 격하 시킨 때문이었을까. 이명박 정권이 불과 4년 반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대한민국은 이완용 매국 내각과 흡사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완용이 처럼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내 준 건 아니지만 친인척.측근비리 등 이른바 공구리정권이 '4대강 죽이기' 토건사업으로 인해 국토는 황폐화 되었다. 장사꾼에게 나라를 맞긴 결과 때문이었다. 4대강에 투입된 돈은 자그마치 23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었다. 지금 그 돈은 다 어디로 갔으며 4대강은 어떻게 변했나. 이 같은 문제 등이 방치될 수 있었던 건 여론이었으며 여론을 무마시킨 언론 때문이었다. 소수의 진보적 매체를 제외한 다수의 언론들이 본질을 회피하고 엉뚱한 사실만 다루는 동안 나라 전체가 썩은 냄새로 진동하게 된 것이다.

그게 오늘날 친일·숭미세력들이 정치판에서 생산한 산물이자 코를 찌르는 악취인 것이다. 정치가 장사판으로 변한 것이며, 정치가 조직을 위한 제도로 변한 것이며, 정치가 나라와 민족과 별개의 제도로 변신을 거듭해 온 결과였던 것이다. 이들을 견제해야 할 언론들이 한 패거리가 되어 망국에 이르게 한 결과 2012년 대선은 다시금 장 선생이 도모하고자 했던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된 것이다. 선생은 이런 상황을 최소한 100여 년 전에 간파하고 1908년 7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 논설에 이렇게 쓰셨다.

"국가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국민을 모아 이룬 것이오. 국정이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국민이 그 일 <국정>을 자치(自治)하는 것이오. 애국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국민이 그 몸<국가>을 스스로 사랑하는 것이라. 고로 민권이 흥(興)하면 국권이 세워지고 민권이 멸(滅)하면 국권이 쓰러지니 윗사람이 압민(壓民)하는 권리를 힘쓰면 그 나라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오, 국민된 자가 그 권리의 신장에 힘쓰지 아니하면 그 몸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2012 대선을 앞 둔 요즘 야권의 두 주자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약진이 눈에 띈다. 여론조사 결과 등에 따르며 여권의 박근혜 후보는 일찌감치 대선레이스 밖으로 사라진 느낌이다. 이유가 있었다. 박 후보는 물론 그녀가 소속된 새누리당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은 게 그 이유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이명박 정권을 계승한 사람들이었으며 친일.유신독재자 박정희의 통치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한 정당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5.16군사쿠데타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인혁당사건 등 과거사에 발목이 붙들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일련의 과거사는 민족 내지 동족이었다면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과 조차 불분명하게 한 결과 시민들의 눈 밖에 벗어나고 만 것이라 판단되는 것이다. 그 모든 행위를 장 선생이 남기신 논설 한 쪽에 비추어 보면 '국가와 국정'이 모두 실종된 '장사꾼스타일'의 정치가 4년 반 정도 이어지며 나라와 민족을 풍전등화에 이르게 한 것이라 사료되는 것이다.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에게 바라는 정치

선생께서는 이런 일 등에 대해 "… 민권이 흥(興)하면 국권이 세워지고 민권이 멸(滅)하면 국권이 쓰러지니 윗사람이 압민(壓民)하는 권리를 힘쓰면 그 나라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오, 국민된 자가 그 권리의 신장에 힘쓰지 아니하면 그 몸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의 지난 4년 반 동안의 정치는 국가의 공권력을 강화하여 '압민의 권리'에 몰두하며 '민권이 흥하는 국권'의 의무를 방치하거나 탄압한 결과 국권이 쓰러질 위기에 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언론들이 입을 다물거나 딴청을 피운 결과 '국민된 자가 도리를 다 못하며' 국난의 위기를 자초하게 되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

오늘날 국민들이 정치에 또는 정치판에 환멸을 느끼며 안철수 신드롬에 집착하는 게 주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 사료되는 바, 최근 야권의 두 후보간 단일화 기싸움이 만만치 않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당정치를 주장하는 문재인 후보측과 무소속을 고집하는 안철수 후보측의 거리감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글쓴이는 두 후보의 주장이 다 옳다고 여겨진다. 다만, 두 후보가 가진 단점만 보완된다면 야권후보 단일화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은 전망도 된다. 반드시 정당의 족수(의석수)가 많다고 해서 선정을 펼칠 수 있다는 논리는 새누리당을 통해 확인된 바 불가능한 상태이며, 그간 민주당의 정치적 행보를 통해서도 국민들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정당정치를 하는 민주국가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대통령이 국정을 펼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언론이 권력으로 변해있는 이상한 제도권에서 국민들의 지지만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판단된다. 마치 촛불시위가 단말마에 그치며 역사속으로 묻힌 것과 같다고나 할까. 국민적 열망을 담아내 다 쓰러져 가는 나라와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대통령 한 사람만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 두 후보는 너무도 잘 알것이다.

어느 날 쥐구멍에 볕든 하루 때문에 우리는 5년의 황금 같은 세월을 빼앗긴 뼈저린 경험을 했다. 그리고 다시금 이 땅에 민주정권을 세울 수 있는 정권교체의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다시 쥐구멍에 볕들 기회를 주지 않으려면 두 후보는 야권에 반드시 필요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축하기 바란다. 그건 일방적인 양보가 아니라 쌍방의 소통에 의한 새로운 권력의 창출이다. 두 후보가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이 같다면 버릴 건 과감히 버리는 게 국민을 위한 일 아니겠나.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 지 서로 나누며 충분히 절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바란다. 그 일을 위해 야권의 두 후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격려와 성원은 필수적 조건이자, 괴물같은 정권을 키워낸 편파적 언론을 막아내는 힘이다. 마산 창동의 한 골목길 헌책방에서 만나게 된 장도빈 선생의 민중일보가 일깨운 작은 메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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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도의 운명, 외국 자본 손아귀에 들어간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2/10/12 09:22
  • 수정일
    2012/10/12 09:2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기고] 대륙철도의 꿈을 파탄 낸 MB정권의 과오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철도정책 연구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0-12 오전 8:04:44

 

막연한 꿈이 아니다. 70년 전만 해도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만주를 넘어 베이징으로, 베를린으로 가는 열차 승객들이 출발시간을 기다리면서 김 서린 찻잔을 기울이던 서울역이다. 1936년 식민지 민중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던 청년 손기정이 서울역에서 베를린 행 열차를 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잊었다.

부산을 출발한 특급열차 '히까리'를 탄 후 신징까지 가서, 독립투사 안중근이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하얼빈까지 703열차를 타고 도착하면 유럽행 국제열차인 701열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베를린까지 가는 3등석 열차 요금은 당시 돈 350엔으로 뱃삯의 1/3에 불과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 정책의 일환으로 건설한국 철도는 선로 마디마디, 침목 하나하나에 조선 백성들의 피와 땀이 스며 있는 한의 쇳길이었다. 열차 이름도 일본어였고 운영자도 물론 일본이었다. 이 회한의 철길로 나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3등실 객차에 몸을 구부린 채 일본 헌병의 눈을 피해 망국의 한을 삼키며 달렸다.

독립은 이뤘으되 진정한 해방은 오지 않았다. 남과 북이 분단되고 참혹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일본이 물러간 후 비로소 철도는 우리 손으로 움직이게 됐지만 이번에는 갈라진 부모형제들의 찢어지는 가슴들을 안고 달려야 했다. 파란만장한 한국 근대사의 깊은 골짜기에는 이 땅의 백성들과 울고 웃으며 고락을 함께한 역사의 동반자로 철도가 있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눈부신 경제발전은 철도가 자동차 경적소리에 밀려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찬란한 경제발전의 빛에 가렸던 그늘이 드러나자 철도는 이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국토 파괴, 교통 혼잡비용, 환경오염을 최소화할 수 있는 철도가 국가의 중심 교통수단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발전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평화와 공존의 길을 여는 대륙철도 연결

한국 철도는 더디지만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갔다. 고속철도개통되어 철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고, 무엇보다 남북의 대결을 끝낼 수 있는 현실적 수단으로 기적을 높이 울렸다. 남북 철도 연결이 확정되고 제일 먼저 철도 연결 부지의 지뢰 제거 작업이 진행됐다. 수천 개의 눈 없는 살인무기 지뢰가 제거되고 군부대도 이전했다. 살벌하게 서로 노리던 철조망은 평화와 소통의 새 길로 열렸다. 두 줄 선로가 남과 북을 단단하게 이었다. 철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과 북이 소통하자 주변 나라들도 움직였다. 러시아는 남북과 함께 북한 철도 개량 사업으로 시베리아 철도 연결 사업에 나서겠다고 하고, 한국에 차관으로 갚아야 할 돈으로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했다. 중국은 중국횡단철도에 남북의 철도를 연결시키겠다고 했다. 당사국 철도관계자들이 만나 회담을 하고 협력을 다짐했다. 남과 북의 평화공존은 주변국을 대립에서 상호협력으로 견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부산역이나 서울역에서 파리 행 기차표를 들고 열차에 오르는 일도 불가능한 꿈은 아니게 되었다.

남북 철도 연결, 그리고 중국-러시아의 대륙철도와 연결하는 것은 수십 년간 고립되었던 한국이 새로운 기지개를 펴는 역사적 전환점이 될 것이 분명했다. 특히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보장하는 튼튼한 쇠줄로 작용하는 소중한 자산이다. 철도는 그 특성상 인접국 간 호환이 되지 않으면 운행을 제대로 할 수 없다. 특히 낙후한 북한 철도 개량 사업을 진행하고, 만주를 넘어 중국으로 향하는 노선 및 시베리아 철도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러시아, 남과 북의 상호 긴밀한 소통과 협력이 필요하고 이것은 당사국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북한 철도 개량에 한국 철도와 관련 기업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신호 체계 개선, 선로 개량, 기관차 및 객차 보급 등 협소한 남쪽의 철도망에서 가졌던 한계를 극복하고 철도산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출발점으로서도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철도가 그동안 지속된 반목과 오해를 불식시키는 기관차가 됨은 물론이고, 식민지 철도로 시작된 한국 철도의 한이 비로소 풀리는 새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다. 대운하를 꿈꾸던 정권은 이 땅의 혈관인 강을 파기 시작했다. 무려 22조 원에 이르는 건설비에, 앞으로 들어갈 유지비용이 얼마가 될지 상상할 수도 없다. 4대강 사업비의 1/3만 들여도 한국 철도가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는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하지만 토건재벌의 배를 불리는 사업의 중요성에 비하면 철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강바닥을 파내고 언저리를 콘크리트로 바르고 보를 쌓아 흐르는 강물을 썩게 만드는 사업에 모든 노력을 기울인 대가는 생각보다 더 참혹했다.
 

▲ 한국전쟁 때 폭파돼 움직이지 않는 비무장지대 안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보존 처리 작업을 거쳐 2009년 임진각(경기도 파주시) 안 전시장으로 옮겨졌다. 사진은 옮겨지기 전 모습. ⓒ연합뉴스

역사의 후퇴, 두꺼운 녹으로 다시 뒤덮인 경의선 남북 연결 철도

뼛속까지 친미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미국 일변도의 외교 정책과 대북 강경책, 중국 무시 정책을 펼쳐온 결과 외교에서 균형과 조화라는 기본을 무너뜨렸다. 중국-러시아의 대륙철도와 연결하기 위한 협력도 도루묵이 되었다. 북한의 주요 개발 사업은 남한을 배제한 채 중국 기업이 독점하는 상황이다.

지정학적으로 세계를 호령했던 강대국들을 인접국으로 두고 있는 한국이 지혜로우면서도 당당하게 외교정책을 펼치지 못할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서민들의 몫이다.

남과 북은 과거로 돌아가 원수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고 매일 문산과 개성을 오가던 경의선 철도는 운행이 중단됐다. 남북 철도 연결 구간인 경의선 승무를 담당하고 있던 철도공사 서울기관차 승무사업소의 기관사들로 이루어진 개성행 열차 담당 승조는 해체됐다. 군사분계선에 어렵게 열렸던 육중한 철문이 닫히고 선로는 두꺼운 녹으로 덮여갔다. 북의 해안포가 연평도 땅에 떨어지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고 당장이라도 전쟁이 벌어질 듯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향후 평화와 소통의 견인차 역할을 할 한국 철도를 재벌들의 수익 창구로 전락시키는 일이 경쟁체제란 이름으로 추진됐다. 민간자본의 선진 경영 기법이란 게 고작 높은 이자놀이요, 정부나 지자체의 보조금 빼먹기요, 시민들에게 요금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서울 지하철9호선을 비롯한 수많은 민자사업에서 드러났는데도 말이다. 국토부는 여전히 KTX 민영화를 정권을 이어 추진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WTO GPA(정부조달) 협상을 통해 한국 철도의 모든 분야를 외국자본에 개방하는 길을 열었다. 협상 과정은 사회적 공론화를 거치지 않고 조용히 진행됐다. 내용마저 뒤늦게야 밝혀졌다. 협정 내용을 보면 철도 시설의 건설, 설계, 엔지니어링, 감독, 운영 등 철도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렇게 개방이 완료되면 한국 철도의 운명은 우리 손이 아니라 수익만이 최고의 가치인 외국의 거대자본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공공성 파괴에 앞장서는 정부를 어찌할 것인가?

이런 일련의 작업에서 선봉에 선 것은 국토해양부다. 국토해양부가 KTX 민영화 추진과 더불어 줄기차게 밀어붙인 철도공사로부터 철도 관제권 환수나 역사 및 시설 환수라는 게 철도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다. 향후 한국 철도에 들어올 거대자본들에게 철도의 각 분야를 자유롭게 운영할 권한을 주기 위한 방편이다.

WTO GPA 협상 막판 행안부의 초기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교부의 강요에 추가로 도시철도 부분이 개방되었다. 서울, 부산, 대전, 인천, 대구, 광주 등의 모든 지하철공사에도 적용되어 이미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사회기반시설 민자사업뿐만 아니라 공기업이 담당하고 있는 사업에도 자유로운 외국자본의 투자가 가능해져 온 나라를 민영화된 시스템으로 뒤덮는 사태가 예견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WTO 협정은 FTA 협정 같은 양자 협상이 아니라 다자 간 협상으로, 이 협정이 발효되면 WTO 회원국 누구든 제한 받지 않고 한국 철도 산업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이다. 또 한미 FTA 협정에 근거해 다른 국제 무역 협상의 조약이 체결될 경우 이 기준에 따른 개방을 보장해야 한다. 선진 기술과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철도 선진국들에 비하면 한국의 철도산업은 대형마트 앞의 골목길 구멍가게 꼴이나 다름없다.

그동안의 WTO 협정과정을 지켜보면 철도 선진국들의 한국 철도 전면 개방 요구를 번번이 거부하고 한국 철도 산업을 보호해왔는데, 이 정권 들어 완전하고 완벽하게 개방의 물꼬를 텄다. 국토부의 정책 담당자는 5월 23일 열린 토론회에서 지역노선과 화물열차도 경쟁 입찰을 통해 민간에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철도를 갈기갈기 찢어서 수많은 철도 사업자하나로 전락시키겠다는 심산이다. 국가기간철도망 운영주체로서 지위를 무력화한 결과는 국내외 거대자본의 손쉬운 진출이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국토부가 증오의 눈길로 부실과 적자의 원흉이라고 몰아붙이는 한국 철도 대신에 남북철도와 대륙철도를 달리는 열차는 미국과 일본, 유럽의 자본이 운행하는 열차가 될 것이다. 20세기 초 제국주의 일본의 국제열차를 타고 달렸다면 21세기엔 한국 철도의 이권 쟁탈전에서 승리하는 국가의 열차를 타고 달리게 될 수도 있다.

서울역에서 파리 행 열차를 타고 싶다

정부가 조금이라도 앞을 내다본다면 미래를 책임질 교통수단이 무엇이고 또 대륙을 달릴 수단으로서 철도가 갖는 위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철도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이를 바탕으로 한 국가와 사회 주도의 든든한 공공철도가 가져올 성과는 민영화를 통한 일부 자본의 이익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사회적 자산이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하고 그 구성원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으로 사용될 때 우리는 한 걸음 더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탐욕의 손길이 경쟁과 효율을 명분으로 시나브로 펼쳐가는 민영화의 사슬을 어떻게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거대자본에 팔아넘겨져 민영화된 철도의 요금과 안전을 걱정할 것인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파리 행 기차표를 살 것인지?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철도정책 연구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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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제게 물으신다면?

[연재를 마치며] 북녘 동포는 보듬어 안을 우리 형제

12.10.11 19:58l최종 업데이트 12.10.11 19:58l
신은미(eunmishin)

 

 

2011년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에 이끌려 내키지 않는 북한에 첫발을 디딘 이후, 지난 5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40일 동안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다소 교만하고 냉소적인 마음가짐으로 떠난 첫 북한 여행은 저의 거짓 신앙과 삶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저는 경상북도 대구 태생으로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개신교 목사였던 외할아버지께서는 포항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제헌국회를 시작으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국회의원을 직함을 달고 지냈던 보수 정치인이셨습니다. 아버지 또한 한국전쟁 당시 대대장으로 참전해 조국의 최북단까지 올라갔던 군인이셨습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저 역시 지극히 보수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나마 제가 남편을 따라 북한에 여행을 간 것도, '그들은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라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 차례에 걸친 북한 여행을 통해 '어쩌면 우리와 그렇게 똑같을까'라는 동질성을 깨닫게 됐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나, 유적지를 참관할 때나, 인생의 희로애락을 이야기할 때나... 그 어떤 것도 제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또 동질성을 느끼면 느낄수록, 조국이 분단돼 있다는 생각에 슬픔은 배가됐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체험하고,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이와 동시에 민족 통일에 대한 염원을 품게 됐습니다.

북한동포. 이들이야말로 분명 우리가 사랑하고 보듬어 안아야 할 우리 민족이요, 제 형제자매, 그리고 이웃이었습니다. 보잘것없고 편협하기 그지 없었던 내 마음의 빗장을 깨부수고 활짝 열어젖히니, 어두웠던 곳곳을 환히 비춰주는 따사로운 빗줄기가 마음속에 들어옴을 느끼게 됐습니다. 진작에 열어젖히지 못한, 미련하고 어리석었던 내 마음에는 아쉬움만이 가득했습니다.

북한 동포들과의 추억, 아직도 가슴이 뭉클해

원산 시민들. 얼굴 표정에 굳은 삶의 의지가 보인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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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동기는 북한 여행을 통해 생각 없이 살아온 지난날의 제 모습을 스스로 고백하고 반성하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후 저와 함께 마음을 나눴던 분들께서 <오마이뉴스>에 여행기를 연재하길 권했습니다.

사실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과연 사람들이 이러한 여행기에 관심이나 가져줄까'라는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매회 기사 조회 수가 수십만에 이르는 것을 보며, '아직도 우리 국민들이 민족이나 통일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남과 북이 사랑으로 하나된 '통일조국'을 상상해보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매회 원고를 쓸 때마다 지나간 기억을 되살리며 미소를 짓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여행 중 만난 따듯한 북한 동포들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제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스치고 지나가는 사이에 비친 그들의 가난은 지금도 제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북한에 다녀온 후 사람들이 제게 '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난한 나라'라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을 통해 뜨게 된 마음의 눈으로 내내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슬픔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됐을 때, 마음에서 진정한 사랑이 배어 나오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사랑으로 사람과 사물을 들여다보니, 그 어떤 것도 굴절되지 않고 어그러짐 없이 있는 그대로 보였습니다.

2013년, 다시 북한에 가려 합니다

을밀대를 넘어 개선문 광장으로 가는 길에 설경이와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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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이 잘 전해지지 않아 독자들로부터 심한 비난의 댓글을 받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오히려 '글을 연재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쓰기를 그만두려고도 했습니다. 또한 실향민들과 이산가족분들로 부터 '죽기 전에 고향 땅 한 번만 밟아보면 소원이 없겠다'는 쪽지를 받았을 때는 그런 곳에 한가하게 여행이나 하고 돌아온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분들께 미안한 감정을 넘어 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신 <오마이뉴스> 독자들을 생각했습니다. 독자들이 있었기에 다시금 힘을 얻어 계속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오마이뉴스> 독자들이 이 연재 여행기의 출판을 권했습니다. 또 일본의 한 출판사를 비롯해 국내의 몇몇 출판사로부터 단행본 출간을 요청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네잎클로버 출판사로부터 장문의 출판 제의 메일을 받고 출판을 결심했습니다. 이 여행기를 읽고 단 한 사람이라도 민족의 앞날과 통일에 대해 관심을 더할 수 있기만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2013년 또다시 북한 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지면을 허락한다면, 독자 여러분들께 북한 동포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여행기가 연재되는 동안 수많은 분들께서 아름답고 애절한 댓글을 달아주셨고, 쪽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물론, 반대 성격의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도 많이 계셨지요. 그분들의 심정 역시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곱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해주셨으면 더 좋지 않았겠나'라는 생각입니다.

그동안 이 여행기의 연재를 다듬어준 <오마이뉴스> 편집부 기자들, 수십만 회씩 기사를 클릭해주신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들, 조국의 정보에 어두운 저에게 <오마이뉴스>를 알려주신 UCLA 교환학자 이병한 선생님,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의 저자이시며 제 '민족통일학'의 스승님이신 재미동포 의학자 오인동 박사님, 그리고 연재가 나가는 동안 많은 격려를 보내주신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끝으로 제게 북한 여행을 제안하고 마음의 눈을 함께 뜬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우리가 여행을 떠난 동안 집에서 혼자 지내야 했던 막내딸 수민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2012년 10월, 캘리포니아에서,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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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사람’ 문재인-안철수의 지난 발자취를 찾아서

 

알콩달콩 재미, ‘문-안투어’를 아십니까?
 
[‘부산공감’의 현장답사기] ‘부산사람’ 문재인-안철수의 지난 발자취를 찾아서
 
김욱 | 2012-10-12 08:34:2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문재인과 안철수 두 사람은 '부산 사람'이다. 두 사람은 대학 입학 전까지 부산에서 자랐다. 문재인은 남포동을 중심으로 한 구도심이, 안철수는 서면의 신도심이 생활권이었다. 문재인의 남포동에서 안철수의 서면까지는 지하철로 20분 거리다. 두 사람의 가장 근접한 생활권은 고등학교인데 문재인의 경남고와 안철수의 부산고는 직선 거리로 1.4km, 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인접해 있다.

부산에서 살면서 문재인과 안철수는 서로 모르는 사이에 몇 번 마주쳤을지도 모르겠다. 중학생 안철수가 남포동 부품상가에 라디오 부품을 사러갔다 방학 때 집에 온 대학생 문재인을 스쳤을 수 있고, 책을 좋아하는 두 사람이 지금은 없어진 서면의 '동보서적'에서 같은 책에 손 때를 묻혔을 수도 있다.

문재인-안철수 두 사람의 단일화는 기정사실이다. 3자대결로는 여권 후보가 모조리 이기고 단일후보와의 대결은 대부분 야권 단일후보가 이기는 걸로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단일화는 양쪽 모두에게 절실한 과정이다. 아마 두 사람의 단일화는 이번 선거 최대의 이벤트가 될 것이다. 이런 두 사람이 같은 지역에서 자랐다는 사실은 올해 대선 또 하나의 흥미 요소다.

 

'부산공감' 회원들은 번호 순서대로 빨간 선을 따라 움직였다

지난 10월 6일 부산의 소셜미디어 유저 모임인 '부산공감'(필자도 이 모임의 회원이다) 회원들과 함께 문재인-안철수 두 사람의 부산에서의 자취를 찾아보는 '문안투어'를 다녀왔다. 이날 '부산공감'의 회원들은 문재인의 남항초등학교에서 시작해 안철수 부친이 얼마전까지도 운영했던 범천의원까지 두 사람의 초·중·고등학교와 살던 집을 찾아 봤다.

익숙한 부산의 공간 속에서 둘의 자취를 찾아보니 두 사람이 부산 사람이라는 게 새삼스레 다가왔다. 대통령 후보로 멀게만 생각되었던 두 후보가 영도 문재인, 범천동 안철수로 더 가깝게 느껴졌다. 정서적인 거리감이 좁혀진 건 필자와 후보 사이만은 아니었다. 둘의 생활권을 몇 십분만에 넘나들다 보니 두 사람이 드라마 속의 드디어 기다렸던 대결을 펼치는 숙명적 라이벌 같은 느낌도 들었다.

같은 지역 출신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 두 명이 대결하는 선거는 우리나라 선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렇게 두 후보의 자취를 몇 시간만에 돌아볼 수 있는 또 다른 대통령 선거는 확률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백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 흥미롭고 희귀한 투어를 최초로 시도하고 소개한다.

 

 

 



 

'흥남철수' 때 남쪽으로 내려온 문재인의 부모님은 피난지 거제도에서 문재인을 낳은 후 문재인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부산 영도로 이사왔다. 남항초등학교는 원래 작은 학교인데 피난민들 몰려들어 문재인이 입학할 당시 한 학년에 1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재인은 3학년 때까지 가교사에서 공부해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 문재인의 기억은 가난 때문에 그리 즐겁지 않다. 배급 강냉이죽을 받아 먹기 위해 친구의 도시락 뚜껑을 빌렸다거나 월사금을 내지 못해 교실에서 쫓겨난 걸 문재인은 초등학교 기억으로 떠올린다. 하지만 문재인은 이런 가난이 자신의 독립심을 기를 수 있었던 선물이 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신선성당과 남항초등학교에서 신선성당으로 올라가는 경사길

 

남항초등학교 바로 위에는 1955년 문을 연 신선성당이 있다. 당시 성당은 구호식량을 배급해 주었는데 문재인은 배급날이면 학교 뒤편 경사길을 올라 성당 앞에 줄을 섰다. 그때가 초등학교 1~2학년 때였다. 수녀님들은 배급을 기다리는 꼬마 문재인의 손에 사탕이나 과일을 쥐어주었는데 문재인에겐 그런 수녀님들이 천사처럼 보였다. 문재인은 3학년 때 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문재인의 어머니는 사목회 여성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성당을 둘러보다 만난 관계자 한 분에게 문재인 후보 어머니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문 후보의 어머니는 아직도 이 성당에 다니신다고 한다. 그런데 문재인의 어머니인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문재인의 어머니가 그런 말을 안하고 성품도 너무 조용하기 때문이다.

 

부산 경남중학교

문재인은 자신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을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알았다. 당시엔 중학교도 시험을 쳐서 들어갔기 때문에 학교에서 아이들을 늦게까지 공부시켰는데 그때 문재인의 성적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문재인은 당시 부산에서 최고의 일류 학교로 꼽혔던 부산중학교에 합격했다.

초등학교가 가난을 알게했다면 중학교는 문재인에게 불공평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경남중학교 인근 대신동이 당시 부산의 부촌이었다. 경남중학교 학생들도 대체로 부유했다. 문재인은 정원과 일하는 사람도 있는 집에 사는 친구를 보고 주눅이 들었다. 자신과는 씀씀이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어려웠던 문재인은 그때부터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부산 경남고등학교

 

문재인은 야구광이다. 시위로 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 지금의 아내가 문재인을 기쁘게 할려고 모교의 우승 소식이 적힌 신문기사를 들고 왔을 정도이다. 문재인은 야구를 좋아할 뿐 아니라 잘하기도 한다. 대학시절에는 학년 대항 야구시합에서 주장을 맡아 팀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문재인 후보에게 야구를 알게 해준 것은 야구 명문인 그의 모교 경남고등학교다. 전설적인 투수 최동원과 현재 일본에서 활약 중인 이대호 선수가 바로 이 학교 출신이다.

 

경남고등학교 도서관과 뒷산

 

경남고등학교는 오래된 원형건물이 독특하다. 지금은 도서관으로 쓰이는 이 건물이 과거엔 교실이었다고 한다. 토요일 오후 문재인 후보의 후배 두 명이 이 도서관의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학교 뒷산은 문재인에게 '문제아'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지금의 모범생같은 모습과 달리 문재인은 한때 문제아로 찍히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뒷산에서 술마시고 고성방가를 하다가 유기정학을 받았다.

 

부산고 교가 기념석

문재인을 지나 이제 안철수로 가보자. 안철수도 문재인처럼 야구광이다. 롯데가 부진할 때면 마음이 아파 경기를 못본다고 할 정도의 야구광인데 안철수도 문재인처럼 야구를 고등학교에서 알게 되었다. 안철수의 부산고는 문재인의 경남고처럼 야구 명문인데 안철수가 재학할 당시엔 전국대회에서 3년 간 5번이나 우승했다. 혈기 왕성하던 고등학생 안철수에게 모교의 야구 우승의 기억은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한 지역의 야구 명문인 두 학교가 라이벌이 아니라면 이상할 것이다. 문재인의 경남고와 안철수의 부산고는 세상에 둘도 없는 고교 야구 라이벌이다. 대충 하는 소리가 아니다. 얼마나 라이벌이냐면 두 학교의 올해 친선 경기에 김연아가 시구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만큼 두 학교의 경기가 빅매치라는 것인데 이런 두 학교의 라이벌 관계가 문재인과 안철수의 대선경쟁을 숙명적 대결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부산고는 특이하게도 교가를 새겨넣은 돌을 학교에 세워두고 있는데 가만 보면 그 이유를 알만하다. 부산고의 교가는 청마 유치환 시인이 작사를 했고, 세계적 작곡가인 윤이상 선생이 작곡을 했다. 윤이상 선생은 부산고에서 교편을 잡은 인연으로 부산고 교가를 만들었다.

 

 

 

예전의 부산 중앙중학교. 현재 부산교육청 운영 '궁리마루'로 바뀌었다

 

안철수가 다닌 중앙중학교는 지금은 사라지고 건물만 남아있다. 폐교된 건 아니고 2013년 정관 신도시에서 다시 문을 연다고 한다. 중앙중학교 건물은 현재 부산교육청의 '궁리마루'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다. 중앙중학교의 흔적을 찾으려고 건물 주위를 돌아봤지만 잘 찾아지지 않았다. 오래된 기념석 옆에 붙은 명패석에서 학교 이름을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부산 동성초등학교

 

안철수가 다닌 동성초등학교다. 자신이 직접 쓴 <행복 바이러스 안철수>라는 책에서 안철수는 초등학교에 버스가 있었지만 자신은 걸어다녔다고 썼다. 안철수의 초등학교에 버스가 있었던 것은 사립초등학교이기 때문이다.
 

범천의원 건물과 병원 외부에 붙어있는 안영모 원장 문패

'문안투어' 마지막 일정으로 찾은 곳은 안철수 후보의 부친 안영모 원장이 올해까지 운영했던 범천의원이다. 안철수의 가족은 이 병원 3층에서 살기도 했다. 현재는 '범천의원'이라는 간판은 뜯기고 셔터는 내려진 채 병원은 버려진 건물처럼 서 있다. 지난 5월 과도한 취재에 부담을 느낀 안영모 원장은 49년 간 운영하던 병원 문을 닫았다.

안영모 원장은 49년 전 이 나라가 가난했던 시대에 이 나라에서도 가난했던 이 동네에 병원을 차렸다. 가난한 이 동네는 계속 가난했고 지금은 그나마 있던 사람들도 빠져나가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더 가난해졌다. 범천의원 주변엔 문을 연 가게를 찾기 힘들었다. 49년 동안 지켰던 범천의원마저 문을 닫아버리면서 이 거리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다.

병원 폐원 안내문

병원 셔터 안 유리문에 붙어있는 폐원 안내문의 간결한 글에 가슴이 찡해졌다. 안영모 원장의 성실한 의사로서의 삶이 이 한 문장 안에 다 들어가 있는듯 했다. 안영모 원장은 병원을 내년까지 하고싶어 했다고 한다.(일요신문 인터뷰 내용) 내년에 그만 뒀다면 저 폐원 안내문엔 49년이 아니라 50년이 적힐수 있었을 것이다.

안영모 원장이 50주년을 못 채운 건 극성스런 언론 때문일까? 대통령에 출마한 안철수 때문일까? 언론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아들 안철수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언론이든 안철수든 상관없다. 내가 안영모 선생의 폐원 안내문에서 분명하게 느낀 건 정치에 대한 안철수의 확고한 의지다. 그러고보니 안영모 선생의 글씨체와 안철수의 글씨체는 참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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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인 '안철수 죽이기' 보도, 문-안 떼놓기 위함"

 

"노골적인 '안철수 죽이기' 보도, 문-안 떼놓기 위함"

 

"언론단체 적극적 행동과 저항에 나서야"
김도연 수습기자 | riverskim@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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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10.11 21:22:15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권력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를 안철수 후보에 대한 '비난'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언론개혁시민연대가 주최한 '대선보도, 이대로는 안 된다' 토론회가 11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렸다.

 

   
▲ 11일 오후 3시, 서울 정동에서 '대선보도, 이대로는 안 된다' 토론회가 열렸다. ⓒ김도연

 

발제를 맡은 전규찬 언론연대 대표는 "보수언론에게 있어 제도정치, 정치체제의 외부자인 안철수 후보는 인식공격의 대상이며 보수언론의 '안철수 죽이기'는 선거기간 내내 지속될 미래형 게임"이라며 "안 후보가 매력적인 중산층의 지지표를 빼내가면서 보수진영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높은 당선 가능성으로서 신자유주의, 보수 정권의 재창출 가능성을 위협할 때, 그에 대한 조·중·동의 반감과 신경질은 극도의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전 대표는 "노골적인 '안철수 죽이기' 프레임은 '안철수와 문재인, 끝까지 따로 떼어 놓기'의 프레임과도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면서 "과연 단일화가 될 것인지, 그 방법은 어떤 게 될 것인지를 묻는 이들의 연설에는, 단일화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속내가 담겨있다. 신문들은 지배 여당의 의사와 입장을 그대로 옮기고 있으며, 거의 당 대변인 역할에 가까운 기능적이고 도구적인 언어수행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날 토론회에 참여한 패널들은 MBC, KBS 두 공영방송사 선거보도의 편파성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정영하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장은 "MBC <뉴스데스크>가 단독 보도한 '안철수 후보 논문 표절 의혹은 한두 달 전에 언론사 기자들에게 넘어간 내용이었다. MBC가 보도한 내용을 보면 전문가 멘트가 하나 없었고 교수들의 의중이 충분히 취재되지도 못했다"며 "사측은 '전문가의 검증이 있었고 우리는 정당한 검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는데, 결코 보도 책임자가 할 말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정영하 본부장은 또 "김재철 사장과 편향된 가치를 가지고 있는 현재 보도라인이 있는 한 (편파보도는 앞으로) 훨씬 더 심각해질 것"이라며 "MBC가 정상화되기까지는 정말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며 정상화를 위해서는 국민들의 강한 문제제기와 비판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창선 시사평론가는 "방송사의 편향된 시사패널 선택으로 평론가로서의 양심을 지키면서 냉정한 분석을 하기 어려운, 심리적 압박을 느낀다"고 입장을 표했다. 방송환경이 보수 패널에게 유리하게 조성돼 진보 평론가로서 소신있고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어렵게 됐다는 얘기다.

유창선 평론가는 "이런 편향된 환경에서 공정한 보도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며 "야권의 대선 후보 캠프부터 공적으로 편파적 보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또 언론단체들도 보다 적극적인 행동과 저항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거보도의 편향성을 개선하기 위해 시민사회가 지금보다 더 행동지향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공유됐다.

송경재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학술연구교수는 "무브온의 경우 불공정한 보도에 대한 정확한 지침이 있다. 그것은 '불공정보도가 있다면 문제제기를 통해 항의한다'는 것이었다"며 "'안티조선운동' '수신료 거부 운동' '언론연대의 감시' 등 외부적 자극을 통해 언론사에 대해 강한 압박과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송 교수는 "SNS 자체가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사회운동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규찬 대표 역시 마무리 발언에서 "시민사회의 모니터링 강화, 비상기구 행동단체 조직화, 그리고 학계와의 공모를 통한 계획 설계 등으로 공정한 선거보도를 위한 투쟁을 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플로어에 있던 한 시민은 "시민단체활동이 정치 입문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상도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시민단체와 시민사회가 스스로 성찰과 함께 공정한 방송을 위한 목소리를 결집하는 것만이 편향된 방송을 정상화시킬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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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 수장들의 한바탕 웃음

종단 수장들의 한바탕 웃음

 
조현 2012. 10. 10
조회수 378추천수 0
 

 

 

국자감 대성문앞 공자상-.jpg

베이징 국자감 입구의 공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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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공자의 사당에서 펼쳐지는 대성예악을 관람하는 종교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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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공자의 사당에서 펼쳐지는 대성예악에서 여성무희들의 춤을 관람하는 종교지도자들

 

 

 

 

대성예악 남자무희들 관람-.jpg

베이징 공자의 사당에서 펼쳐지는 대성예악에서 남성무희들의 춤을 관람하는 종교지도자들

 

 

 

공자사당에 예를표함-.jpg

공자사당에 예를 표하는 종교지도자들

 

 

 

 

국자감 주위 연못-.jpg

국자감내 벽옹을 둘러싼 연못

 

 

 

 

황제가 직접 강학하는 장면 그림-.jpg

황제가 직접 가르치는 장면을 그린 벽옹내 그림

 

 

 

 

우리나라 7대 종교지도자들이 ‘이웃종교체험’을 위해 유교의 교조 ‘공자’를 찾아 떠났다. 지난 4~7일 3박4일 일정이다. 종교지도자협의회 대표의장인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을 비롯해 민족종교지도자협의회 한양원 회장, 천도교 임운길 교령, 성균관 최근덕 관장, 가톨릭 주교회의 종교간대회위원회위원장 김희중 대주교,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배인관 사무총장, 원불교 문화사회부장 김대선 교무를 비롯 20여명이 함께 했다.

 

 우리나라는 유교문화권이다. 특히 조선 500년은 명실공히 유교(학)의 시대였다. 그래서 종교와 학문의 지형이 크게 바뀐 지금도 유학은 의식 깊숙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평등과 민주화가 보편화된 현재까지도 위계질서가 엄격한 종교계는 불교건 기독교건 실상 ‘의식·문화·관습은 유교적’이라는 평이 많다. 다양한 종교들이 ‘유교(학)’에선 통하는 것이다. 더구나 현재 유교는 ‘종교’보다는 ‘학문’으로 받아져 타종교인도 거부감 없이 좀 더 쉽게 다가가는 특성도 있다.

 

순례단의 첫 방문지는 베이징 국자감. 원·명·청대에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중국 천하의 인재들이 모여 공부했던 곳이다. 부속건물 벽옹 주위는 지름 60m 못이 360도 둘러싸고 있다. ‘학생들이 수업중에 새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 아니겠느냐’는 말에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건 어느 나라나 어느 종교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며 한웃음을 터트린다.

 

 이어 국자감과 붙어있는 공묘. 원나라 때 창건돼 황제들이 공자에게 제사를 올리던 사당이다. 공묘에선 젊은 남녀가 화려한 옷을 입고 사당 앞에서 음악에 맞춘 춤을 춘다. 엄숙하기 그지없을 것만 같은 공자의 사당에서 춤이라니.‘대성예악’이다. 음악을 도(道)로 보았던 공자의 덕을 맹자는 ‘집대성’(集大成)으로 표현했다. 다른 성인들의 덕은 하나의 악기가 최고의 연주를 이뤄낸 ‘성’(成)라면 공자의 덕은 각각의 연주를 모은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를 이뤄낸 ‘대성’(大成)이라는 것이다.

 

 

 

공림 앞의 종교지도자들-.jpg

공자와 후손들이 묻힌 공동묘지인 공림 입구에 선 종교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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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림 내 공자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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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잘 하게 해주세요" 공자 묘 앞에서 기도하는 중국의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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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간 공자의 묘를 지킨 제자 자공을 기리는 비석. 문화혁명 때 두동강난 흔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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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연구원내 공자 당시를 재현한 조각상을 관람하는 종교지도자들

 

 

 

제자 가르치는 공자 그림-.jpg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 그림. 공자연구원내

 

 

 

 순례단은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로 향했다. 공자연구원은 중국정부가 공자를 중국의 상징으로 부활시키면서 1996년 설립한 곳이다. 양차오밍 원장 등이 일행을 지극히 맞는다. 그도그럴 것이 우리나라의 ‘성균관’이 지난달 27일 이곳에서 열린 ‘제5차 세계유학대회’에서 ‘2012 공자문화상’단체상을 받았다.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 등 중국인들이 잃어버린 유교의 예식과 정신을 전해주는 멘토인 최근덕(79) 성균관장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각별하다. 공자의 후손인 양샹린 부원장은 온종일 순례단과 동행했다.

 

 한 때 문화혁명 때 파괴했다가 이제 정부 차원에서 띄우는 ‘공자’의 유적지는 어디나 인산인해다.‘세계 최고의 사당’이라는 공묘와 공자씨족의 공동묘지인 공림도 마찬가지다. 공자의 후손들이 거주한 ‘공부’(孔府)도 발 디딜틈이 없다. 순례단 가운데 최고령인 민족종교협의회 한양원(89)회장은 “불리하다고 내치고 유리하다고 상품화하는건 아직도 공자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이라며 “공자는 중국 하나를 본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수신제가를 통해 천하를 태평케 해 하나가 되는 대동세계를 이루려 했다”고 설명했다. 

 

 ‘공부’에서 여성들만의 거처로 남자종도 출입할 수 없었다는 안채로 들어가자마자 총천연색으로 그려진 대형벽화가 마주한다. 용처럼 생긴 탐욕스런 ‘탐’(貪)이란 동물이 발에 온갖 보물을 다 쥐고서도 하늘의 태양까지 따려고 덤벼드는 그림이다. 남성들보다 글공부에서 소외된 여성들을 위한 그림이다. 이 문을 통해 바같으로 나가기 전 ‘탐욕에 물들지 말 것’일 경계한 것이다. 이를 본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배인관(54)사무총장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란 성경 야고보서를 인용하며, “탐욕과 욕망의 길을 가르치는 종교가 있겠느냐”면서 “우리 사회의 모든 병폐가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공부

 

공부 내실 벽에 걸린 탐-.jpg

공자의 가문에서 바깥 세상에 나갈 때 탐욕에 물들 것을 경계하기 위해 상상 속의 동물 '탐'을 그린 벽화

 

 

 

공부에서 쉬는 종교지도자들-.jpg

공자의 집 `공부'에서 쉬고 있는 종교지도자들

 

 

 

공부에서 죄인된 김희중 대주교-.jpg

공자의 집 공부에서 벌을 주기 위해 만들어놓은 빨래판같은 대리석 위에서 무릎을 꿇어보고 있는 김희중 대주교

 

 

 

공자집 공부에서 종교지도자들-.jpg

공자가문의 집 공부 앞에 선 종교지도자들

 

 

 

 공자가 거처했던 집 앞엔 마치 빨래판같은 대리석이 놓여있었다.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무릎을 꿇고 걷게 했다는 판이다. 천주교 김희중(65) 대주교와 원불교 문화사회부장인 김대선(59) 교무가 ‘죄인’을 자청해 시연했다. 주위에서 “아프냐"고 묻자 그들은 “그걸 말씀이라고 하느냐”고 물어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공부엔 진시황이 책들을 없애게한 분서갱유 당시 공자의 후손이 책을 넣고 외벽을 봉해버렸다. 그래서 유실을 막은 노벽이 있다. 이 때 보존된 논어는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말해주는 지침서다. 천도교 임운길(84) 교령은 “공자께서 종교적인 의식보다는 생활 속에서 뜻을 펴며 실천하도록 하는데 주력했다는 것을 알겠다”고 말했다.

 

 일행은 노벽 한켠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이 때 최근덕 관장이 ‘농반 진반’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과거 이곳에 왔을 때, 중국인들에게 ‘죽어 좋은 곳에 가려면 헌금을 많이내야한다’는 내용이 적인 <논어>를 한권 줄테니, 이걸 노벽에서 새로 찾았다고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교가 내세에 대해선 일체 언급 없이 현세만 이야기하니, 사람들이 헌금 바칠 생각도 안해 성균관이 배 고파서 못살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한양원 회장이 “지금 공자님에게 하소연을 하는거냐 원망을 하는거냐”라고 물어 웃음이 터졌다.

 

 

 

태산에 오르는 사람들-.jpg

태산에 오르는 순례객들

 

 

 

옥황봉에 오르는 사람들-.jpg

태산의 정상 옥황봉에 오르는 순례객들

 

 

 

태산 벽의 글씨들-.jpg

태산에 오르는 길 절벽에 새겨진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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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보인다'는 말을 기념하는 `공자소천하처' 비석

 

 

 

 

도교사원의 열쇠-.jpg

태산 정상 도교사원 안에 헤어지지 말 것을 언약하는 자물쇠들이 잠겨있다.

 

 

 

옥황봉의 자승 스님-.jpg

태산 정상 공복석 아래 자승 스님

 

 

 

태산 정상의 조망-.jpg

태상 정상에서 바라본 조망

 

 

 

 웃음 속에선 다름도 갈등도 없는 ‘대동’(大同)이었다. 김대선 교무는 “궁극적으로 성자들이 일깨워준 것은 정성과 공경과 믿음”이라며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면 이렇게 평화롭지 않느냐”고 말했다. 김희중 대주교는 “이웃종교의 교리를 수용할 수는 없어도 이해하고 준중할 수는 있다”면서 “모든 게 경제논리로만 좌우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각 종교들이 정신문화의 가치와 참된 지혜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해 시대의 요구에 응답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순례단의 여정의 종착지는 타이안의 태산. 중국의 오악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여긴 성산이다. 공자가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보이는구나’고 했다는 것을 기념하는 ‘공자소천하처’(孔子小天下處)에 오른 종교지도자협의회 의장인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백천입해 동일함미(百川入海 同一鹹味·일백개 천의 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짠맛으로 하나가 됨)’라는 말로 공자가 꿈이 그리던‘대동’을 표현하며 이렇게 말했다.

 

 “50개 종교, 500개 종파가 있는 우리나라에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성현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길 아니겠는가”

 

베이징·취푸·타이안(중국)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웃종교 순례는

 

공자연구원의 순례단들-.jpg

취푸 공자연구원 앞에 선 이웃종교체험성지순례단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순례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다. 더구나 종교 갈등이 세계 곳곳의 불화에 기름을 끼얹는 지금 상황에선 더욱 더. 이런 순례는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다종교 국가인 우리나라 종교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번 순례는 종교간 화해를 위해 문화관광부가 지난 2010년부터 마련한 것이다. 기독교유적지인 이슬라엘·로마 교황청과 지난해 캄보디아 불교유적지에 이은 세번째다.

 

 과연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다니면서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신앙을 지키면서도 조화를 이룰 것인가.

 

 

마차위의 대주교와 스님-.jpg

마차에 동석한 김희중 대주교와 자승 스님

 

 

 ‘군자는 남과 조화를 이루나 남과 같아지지는 않으며, 소인은 남과 같은 척 하지만 실제로는 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공자의 말을 모은 <논어> 자로편에 나오는 말이다. 7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번 순례에서 조화와 화해의 여정으로 군자의 도를 보여주었다.

 

 순례는 7대 종단 수장단 중 기독교 홍재철한기총 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원불교 교정원장은 종단 사정으로 각각 불참해 다른 간부들이 대신했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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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왜 아들을 북한 땅에 묻었을까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3>

황재옥 (사)평화협력원 인권·평화센터 소장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0-11 오전 7:57:52

 

지난 8월 초순 한국의 북한전문가들이 8박9일 동안 압록강 서쪽 끝 단동(丹東)에서 두만강 동쪽 끝 방천(防川)까지 북·중 국경 1376.5㎞, 3000리가 넘는 거리를 답사하면서 강 건너 북한 땅의 사정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북한 전문가들이 그 동안 문헌자료와 현장경험을 통해서 축적해온 지식과 눈앞의 현실을 대조하고 검증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답사단의 분석과
평가정보와 자료로서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프레시안>은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황재옥 박사가 이번 현장답사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정리한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둘째날-오전]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과 수풍발전소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과 소련 공군의 한국전쟁 참전 사실(史實)


둘째 날 아침 우리는 단둥(丹東)을 떠나 허커우(河口)에서 압록강의 두 번째 단교와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을 보고 수풍댐까지 갔다. 이 지역은 옌볜에 비해 기후조건이 좋아 사과와 복숭아 등의 과일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단둥을 떠나 수풍댐 가는 길옆에는 과수원들이 펼쳐져 있었고, 재배한 과일들을 내다 파는 좌판들이 도로변 여러 군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국 쪽 기후조건이 이렇다면, 강 건너 반대편인 북한의 평안북도 의주와 창성, 그리고 자강도 쪽도 살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기후조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전쟁 때 끊어진 압록강 위의 두 번째 단교가 허커우(河口)라는 곳에 있다. 허커우 단교도 단둥의 단교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졌다. 1950년 10월 이후 중국인민지원군 부대들이 북한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단둥, 허커우, 지안(集安)이었다고 한다. 허커우 다리가 끊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허커우 단교 위에는 한국전쟁 참전 지원군 지휘관들의 흉상이 도열해 있었다. 허커우 단교를 둘러보고 나서 우리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 ⓒ황재옥
마오안잉의 동상은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있는 펑더화이(彭德懷) 동상만큼 잘 조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오안잉 동상도 북중관계와 관련해 의미 있는 동상임에 틀림없었다. 이 동상은 2010년 참전 60주년을 기념해 세워졌다고 한다. 중국의 향후 동북아 전략과 관련해 중국이 북한을 어떻게 활용하려는 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정치적 상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상의 하단 뒷면에는 마오안잉(1922~1950)의 스토리가 적혀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공산당 중앙과 마오쩌둥 주석이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 차원에서 북한에 중국인민지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이 맨 먼저 중국인민지원군에 등록을 했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인민지원군 제1호가 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는 설명도 함께 있었다. 마오안잉은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 지원군 사령부에서 러시아 통역을 맡으면서 사령관(펑더화이)의 비서로 일하다가, 참전한 지 약 한 달 만인 1950년 11월 25일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전사했다. 마오안잉은 아버지인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북한 땅에 묻혔다.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묘에 마오안잉은 다른 전사자들과 함께 묻혀 있다.

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차원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마오안잉은 전사했다. 일행 중 한 분이, 마오쩌둥은 며느리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마오안잉을 북한 땅에 묻으라고 명령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나는 마오쩌둥이 왜 그랬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결국 마오쩌둥의 심모원려(深謀遠慮)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즉 마오쩌둥이 깊이 궁리를 하고 멀리까지 내다 보았다는 것이다. 중국 최고지도자의 장남이 위기에 처한 북한을 도우러 왔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북한 땅에 묻혀있다. 북한은 중국에 크게 빚을 진 거다. 중국 사람들은 그 일로 북한에 생색을 낼 수도 있고, 목숨 받쳐 희생적으로 북한을 도왔으니, 북중관계는 특별하다고. 중국의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하다.

미국 대통령 아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한국 땅에 묻혀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이 미국을 대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우방끼리도 도리는 있는 법이다. 중국이 조중우의를 강조하는 배경에 이런 드라마 같은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마오안잉 동상을 직접 보고 더욱 실감하였다.

▲ 마오안잉의 동상에 쓰인 약력. ⓒ황재옥

한국전쟁은 북한이 소련의 후원을 보장받고 시작한 전쟁이라는 것은 소련의 당시 외교문서를 통해서 이미 오래 전에 확인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2010년 중국 당국이 세운 마오안잉의 동상에서 소련 공군의 한국전쟁 참전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행 중 한 분이 한국전쟁 초기 소련의 공군력 지원문제를 둘러싼 중국과 소련사이의 막후 외교협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개시 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돌파하여(이날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날 바로 중국은 내부적으로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했다. 한국군과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미군이 동북3성까지 위협할 것을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일, 밤을 새워가며 격론 끝에 10월 2일 '중국인민지원군'의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은 참전 결정 사실을 스탈린에게 통보했다. 그리고 10월 8일 마오쩌둥은 '중국인민지원군 편성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스탈린에게 공군 지원을 간청하기 위해 그루지아의 휴양지 아브하지아로 떠났다.

그런데 10월 19일까지 중국은 행동을 개시하지 못했다. 참전에 필요한 인원 차출이나 병참 준비관계로 행동개시가 늦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미군의 막강한 공군력을 견제해줄 만한 화력이 중국에는 없는 반면, 소련이 지원 약속을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센터가 공개한 저우언라이문고(周恩來文稿)에 따르면, 저우언라이가 10월 14일에도 스탈린에게 소련 폭격기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때까지 소련은 중국의 속을 태우면서 답을 안 주었다. 그러다가 어렵사리 스탈린으로부터 공군 지원 승낙이 떨어지자 10월 19일 비로소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펑더화이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널 때까지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 한국전쟁 참전 소련 공군 묘역이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중국 당국이 마오안잉 동상에다 마오안잉이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폭사했다고 새겨 놓았으니 이것보다 더 확실한 소련 공군의 한국전쟁 직접 참전 증거가 어디 있을까?

경위야 어찌 되었건, 단둥의 펑더화이 동상과 허커우의 마오안잉 동상이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1~2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중국이 G3, G2 국가로 급부상하는 가운데 북중간 경제협력이 재개되는 때에 만들어졌다. 이것은 항미원조-조중혈맹을 강조하면서 중국이 북중관계를 주도적으로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풍댐 주변 풍광과 강 남북의 사는 모습의 차이

허커우 단교와 마오안잉 동상을 보고난 뒤 우리는 선착장으로 가서 수풍댐 근처까지 운행하는 배를 탔다. 그런데 오늘도 날씨가 흐리고 압록강 물위로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 북한 쪽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을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선착장 매표소 근처 안내판에 뱃길 주변 중국과 북한 지역의 약도가 있었다. 허커우 단교와 마오안잉 동상이 서있는 곳은 칭수이(淸水)라는 곳이고, 건너편 북한 지명은 청성군(淸城郡)이다. 중국 쪽도 북한 쪽도 모두 맑을 청(淸)자를 넣어 지명을 지었다. 이걸 보면 옛날부터 이곳의 풍광이 좋았던 모양이다. 약도에는 선착장 건너편으로 김일성 고거(金日成 故居) 표시가 있었다. 아마도 그 곳에 한 때 김일성 별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만큼 풍광이 수려한 관광지여서 그런지 중국인 관광객들이 상당히 많았다. 수풍발전소 근처까지 가는 관광유람선도 여러 대 있었다. 우리는 유람선으로 이동하면서, 버스는 수풍댐 바로 밑 동네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배를 타고 수풍댐을 향해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얼마나 물이 많았으면 옛날부터 수풍(水豊)이라고 했을까? 물이 많은 곳이어서 그런지 물안개 속에서도 강물의 색은 초록빛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압록강(鴨綠江)의 이름은 청둥오리(鴨)의 초록(綠) 깃털처럼 물색이 아름답다 해서 당나라 때부터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강 중류라서 강폭은 제법 넓었다. 압록강에서 조정 연습을 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안개 속으로 아련하게 들어 왔다.

물안개 속을 뚫고 한참을 가니 드디어 북한 마을이 나타났다. 텃밭과 집, 공장 등 일상적인 주민들의 생활환경이었다. 공장으로 보이는 건물지붕은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 노후하였고, 건물 벽이 얼마나 낡았던지 비가 오면 물이 샐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우리를 보고 오른 손을 머리위로 높이 들어 올리는 북한식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산비탈에 방목한 염소감독하면서 양산을 쓴 여성도 보였다. 협동농장의 염소들이라고 한다. '피부 보호를 위해 빛을 가리는' 양산을 쓴 여성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약간 놀랐다. 북한의 사는 형편에 비해서 예상 밖의 여유와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점은 1998년 8월, 내 눈에 비쳤던 북한주민들에 비해 이번에 본 북한 주민들은 먼발치에서나마 활기차다는 것이었다. 체격도 극히 마른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냥 강가에 쭈그리고 앉아 멍하니 강가를 바라보는 북한주민들이 많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놀이하거나 고기를 잡는 사람들은 있어도, 그냥 멍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위 '고난의 행군' 끝자락이었던 1998년 8월에 국경지역에서 봤던 같은 북한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가슴 찡하기도 했었는데, 이번 답사 기간에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 압록강에서 본 북한 주민. ⓒ황재옥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중국과 북한의 산하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접경지역 북한의 산에는 나무가 없는 대신 뙈기밭이 많았다. 뙈기밭은 일부 경작되거나 아예 방치된 곳도 있었다. 식량사정이 좋아진 것인지 아니면 접경지역에서만이라도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뙈기밭이 많이 경작되고 있던 이전의 방문 때와는 좀 달랐다. 그리고 수풍댐 주변에 설치된 북한과 중국의 송전탑도 모습에서 차이가 났다. 중국 쪽 송전탑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에펠탑같이 늘씬한 철탑인데 반해, 북한 쪽 송전탑은 T자 모양으로 키가 작고 아담한 모습이었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특별한 '신풍경'은 자전거를 탄 북한주민이 많이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3~4대가 지나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탄 여성의 모습도 보였다. 자전거도 그리 낡아 보이지 않았다. 북한주민의 생활 형편상 자전거 구입 가격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였지만, 일행 중에 그것까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철로 공사를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도 보였다.

수풍댐이 가까워지면서 북한 쪽 산야에 세워진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 만세"라는 구호가 눈에 들어 왔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은 동지 만세"라는 구호도 눈에 띄었다. 나는 '은'이라는 글자를 망원경으로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혹시 김정일의 '일'자를 지우고 그 위에 '은'자를 새로 쓴 것은 아닌지 궁금하였다. 북한의 김일성 일가에는 이름 가운데 '정'자가 많이 들어간다. 김정숙, 김정일, 김정은. 이들 이름 가운데 '정'자가 잘 쓰이는 것은 혹시 북한 주민들이 익숙하게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항렬처럼 쓴 것은 아닐까하고 추측을 해 보았다.

▲ 북한 쪽 산야에 세워진 문구들. ⓒ황재옥

유람선을 타고 40분 정도 올라가니 드디어 수풍댐이 나타났다. 압록강에 가장 먼저 세워진 수풍발전소는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배후기지로서 조선을 공업화하면서 1937~41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수풍댐 근처는 일제 때 일본의 병참 지역이었다고 한다. 압록강 수계의 발전소 중 최대 규모이고 시설 용량 70만kw로 당시에는 동양 최대였다. 댐 색깔 때문인지 노후해 보이기는 했으나 당당함은 그 옛날 동양 최대임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날씨가 흐려서 더 당당한 수풍댐의 위용을 사진에 담아 올 수는 없었으나, 초등학교 때 사회생활 시간에 말로만 들었던 수풍댐을 지척에서 바라보니 감개무량했다.

▲ 수풍댐. ⓒ황재옥

 

 
 
 

 

/황재옥 (사)평화협력원 인권·평화센터 소장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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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물질안전보건자료 확인은 필수... '전문가 풀' 꾸리는 것도 시급해

12.10.11 09:38l최종 업데이트 12.10.11 09:38l
김학용(taelim)

 

 

실제 유해화학물을 취급하고 제조하는 회사에 근무하면서 겪었던 사례를 중심으로 화학사고 초동 대처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기자 말

[사례①] "비누 원료라던데 운전자 얼굴에 화상이..."

유독물을 운반하는 한 탱크로리 차량의 외부에 기재된 적재량 표시.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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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가을쯤이었다. 내 휴대전화에 '0XX-XXX-0119'라는 발신번호가 떴다. 받고 보니 관내 소방서 관제직원의 다급한 전화였다. 그는 고속도로 상에서 탱크로리가 전복돼 비누원료로 추정되는 약품이 누출됐다며 어떻게 방제해야 하는지 급하게 물었다. 단 몇 마디만 나눴을 뿐인데 나는 그 액체가 유독물임을 직감했다.

"운전자 말로는 비누원료라고만 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네요. 운전자 얼굴에 화상을 입은 것 같기도 하고... 도로 옆 냇가에는 작은 고기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니, 급하니까 이리로 빨리 좀 와주세요!"
"비누 원료요? 그렇다면 혹시 '수산화나트륨'이나 '가성소다'라 불리는 유독물은 아닌지 살펴봐 주세요. 아마 차량 탱크에 약품명이 표시돼 있거나 유독물 운반카드가 있을 겁니다. 혹시라도 맞다면 그건 유독물입니다"

"그래요? 그럼 선생님께서 취급하시는 방제약품이나 적절한 중화조치는 없을까요?"
"유출약품이 알칼리성이니 중화조치는 염산 등 약산성 약품이 해당되겠지만, 잘못 사용하면 2차 오염이나 환경피해가 발생할 수 있으니 섣불리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일단 누출량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하니 건조된 흙이나 모래 등으로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절대 작업자들의 피부에 직접 닿지 않도록 당부해주세요!"

사고 내용은 이랬다. 예상대로 실제 탱크로리에 실렸던 약품은 '가성소다'(수산화나트륨·NaOH·비중 약1.52·pH14)라 불리는 강알칼리성 유독물 원액이었다. 이날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탱크로리차는 급커브를 지나다 운전 미숙으로 전복되고 말았다.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 않은 운전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탱크로리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약품을 막기 위해 홀로 수습하려 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출동한 소방관의 질문에 운전자는 문책이 두려워 '비누원료'라고 얼버무린 것이었다.

전복된 유독물 탱크로리 운전자, 문책 두려워 "비누원료"

유독물의 위험성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경찰과 소방관들이었지만, 운전자의 피부에 거무스름할 정도의 화상 흔적이 보이기 시작하자 뭔가 심상치 않은 약품임을 직감했다. 급기야 고속도로 바로 옆 하천에는 극히 일부만 유입됐는데도 치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방제팀은 부랴부랴 해당 지자체에 환경 관련 업체를 수소문한 후 나를 찾은 것이었다.

당시 운전자는 자신이 운반하는 유독물의 특성이나 응급방제 요령도 제대로 모르는 채 탱크로리를 몰고 있었고 최소한의 방제장비도 갖추지 않았다. 또 운전자는 사고 시 현장에 출동한 방제팀에게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는 유독물 운반카드(운반 중인 유독물의 특성과 방제요령을 적은 카드)조차 비치하지 않았다. 방제팀은 운전자의 진술에만 의존했던 것.

이미 하천에 유입된 곳을 차단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다행히 흘러들어간 양이 미미해 더 이상의 오염사고로는 확산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당시 흘러들어 간 약품의 양이 많았거나 약품이 불산(불화수소산) 같은 강산성이었더라면 피해규모는 엄청났을 것이다. 이번 불산 누출로 인한 피해가 급속도로 퍼진 가장 큰 원인도 누출 약품의 특성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 아니었던가.

[사례②] 염산 누출사고 발생... "탱크로리 보내주세요"

일정 수준 이상의 사고대비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은 화학사고 발생 시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인 ‘자체방제계획’이라는 제도로 관리되고 있다. 사진은 자체방제계획서 내용중 일부.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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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월, 염산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OO화학공단 내 한 공장에서 '탱크로리 차량을 급히 수소문할 수 없겠냐'는 연락이 왔다. 공장 내 염산 저장탱크(50m³) 하부의 드레인밸브(Drain Valve·이토변)에 균열이 발생하면서 염산이 누출되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염산의 부식성으로 인한 단순한 균열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압력이 걸리면서 점점 균열이 커지고 말았단다. 결국 누출이 심해져 저장탱크 내 모든 약품을 빼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다행히 약품을 수거할 차량은 바로 준비됐다. 염산 저장탱크 방호벽(약품누출 차단시설) 내에 누출된 양은 아직 미미했지만 탱크로리에 옮기는 시간만 2시간 정도 걸리는 게 걸림돌이었다. 특히 염산의 농도는 35%의 고농도. 강산성인 염산은 피부 특히 눈에 직접 닿을시 심한 손상을 일으켜 심하면 실명할 수도 있으며 흡입 시 기관지폐렴이나 폐부종으로 사망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독극물이다.

MSDS 통한 침착한 대처... 노출가스 최소화로 피해 막아

이번에 문제가 된 불산의 화학적 물성과 위험성, 노출 상한 기준선을 비롯, 운송 시 누출사고나 화재발생시 대처 방법이 기록된 MSDS의 첫 페이지.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구할 수 있다.
ⓒ 산업안전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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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나는 현장담당자에게 방제요령을 유선상으로 침착하게 설명했다. '절대 현장관리자의 자의적인 판단과 처치는 금물'이며 '조치 처음부터 끝까지 물질안전보건자료(Material Safety Data Sheet·MSDS)를 통한 정확한 방제'를 주문했다.

또 '스크러버(유해가스 정화 및 대기 배출설비)를 최대한 활용하고 작업자에게는 내산성 보호구와 보호복을 착용하라'고 당부했다. '염산이 신체에 닿았을 경우 특정한 해독제가 없으니 작업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흐르는 물로 계속 살수해 가스 발생을 감소시키라'고도 주문했다.

이날 사고 현장에서는 일사불란한 대처가 이뤄졌고, 천만다행으로 누출 직후 정확한 방제조치가 취해졌다. 누출 가스를 최소화해 인명피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보호마스크를 착용했다고는 하지만 워낙 강한 유독성 가스라 현장 작업자들이 약간의 현기증 증세를 보인 것 말고는 큰 문제는 없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내 안경 렌즈의 코팅이 녹아버려 쓸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단시간의 유독물 가스 누출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경북 구미 국가산업단지 내 화학물질 제조업체에서 탱크로리의 불산이 일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5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 명이 크게 다쳤다. 이후 불산 가스가 주변으로 퍼지면서 2차 피해가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병원 치료를 받은 주민이 3000여 명을 넘어섰고, 농작물 피해 규모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불산 가스 누출사고에 대한 부실 대응으로 질타를 받고 있는 정부는 화학물질 관리를 강화한다며 조급하게 이것저것 추진하고 있다. 전수조사에 의해 취급 품목과 업체의 사고 발생을 구분해 매뉴얼을 작성, 상황별로 대처한다고 밝혔다. 또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이른바 '화평법' 시행 안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화학약품 누출사고가 한두 해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지만 사건이 발행할 때마다 커다란 사회적 파장이 이는 것도 유사하다.

누출 사고 대처할 때는 해당 약품 MSDS 확인부터

불산 MSDS에 기록된 누출 시 대처방법과 위험성. MSDS만 잠깐 살펴봤더라도 이 같은 사태까지 벌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 산업안전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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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응방법의 변화 없이는 '도로아미타불'이다. 매번 그러했듯, 또다시 방재시스템을 재정비한다는 명목 아래 장비구입으로 거액의 예산만 투입하고 누출사고 관련자 몇 사람을 시범케이스로 사법처리하는 척하다가 흐지부지될지 모를 일이다.

전국의 모든 유독물 사용업체를 폐쇄하고, 모든 소방대원에게 다른 업무 제쳐놓고 수천 종의 유해물질 방제법을 달달 외우게 하고, 모든 탱크로리차는 고속도로 진·출입 시 톨게이트에서 허가를 받고 운행해야 한다면 모를까.

제2, 제3의 불산 사태가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또다시 '소방인력과 예산 부족' '미온대처가 화 불렀다' '알고 보니, 절차 무시' 등 이런저런 '소설' 써가며 갑론을박할 것인가.

만약 이번처럼 바로 내 눈앞에서 유독 약품과 가스가 누출됐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앞에서 눈도 못 뜨고 숨 막히는 유독가스가 퍼져 나온다면? 그야말로 정신을 놔 버리고 말 것이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수습절차 무시나 미온 대처의 문제라기보다 무엇이 유출됐는지, 어떤 성질을 가진 화학물질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단 물부터 뿌린 대처였다고 생각한다.

출동한 소방당국은 부식성이 강한 불산을 제독시키기 위해 알칼리약품인 소석회를 뿌리고 물을 뿌려 중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했지만, 불산이 보다 빠르게 증발돼 이로 인한 2차 피해를 더 키우고 말았다. 독성가스 유출사고에 따른 취급상 주의사항이나 응급방제요령 등에 관한 MSDS만 살펴봤더라도 이 같은 사태까지 발생하지 않았을 수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각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화학제품에 대해 ▲ 성분과 위해성 여부 ▲ 취급 및 저장방법 ▲ 사고 시 대처 요령 ▲ 누출 및 화재 시 대응법 등을 적은 MSDS를 사업장 내 비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도 거의 대부분의 화학제품 제조업체에서는 판매와 유통과정에서 해당 약품의 시험성적서와 MSDS를 함께 제공하고 있다.

유독물 운반카드가 없다면? 차량외부 부착표시 활용하라

특히 3~4장으로 돼 있는 이 문서는 해당 약품의 화학적 물성과 위험성, 그에 누출되는 상한 기준선까지 모두 정해놨고, 운송 시 누출사고나 화재 발생 시 대처 방법도 모두 기록돼 있다. 결국 MSDS를 통해 얻은 단 1분의 방제요령만 습득해도 사고 발생 시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는 확률은 수십 배로 높아진다. 혹시라도 현장에 MSDS가 비치돼 있지 않다면? 인터넷을 사용해 산업안전공단이나 관련 업체 누리집에서도 쉽게 내려받을 수 있다(이 기사 하단에서 불산 MSDS를 내려받을 수 있다).

또, 현재 일정 수준 이상의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은 화학 사고가 발생했을 때 즉각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인 '자체방제계획'이라는 제도로 관리되고 있다. 예를 들어 염산의 경우, 보관 및 저장 수량이 20톤 이상일 경우에는 자체방제계획 수립대상이다.

여기에는 ▲ 취급유독물의 유해성 자료 ▲ 사고 시 응급조치방안 ▲ 사고 시 주민의 대피요령 등이 반드시 기재돼 있어야 한다. 하지만 기준량 이하의 소규모 사업장은 사고 자체방제계획서 적용에서 제외돼 있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해화학약품을 5,000kg이상 운반 시는 운반계획을 숙지하고 운반사고에 대비해 유독물 운반카드를 소지하도록 하고 있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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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화학물질관리법은 화물자동차운송업자가 유해화학물질(환경부 장관이 고시함)을 5000kg 이상 운반 시 운반계획을 숙지하고 운반사고에 대비해 유독물 운반카드와 일정한 방제장비를 갖추도록 하고 있다.

이 운반카드에는 적재 물질의 이름·성분·유독성과 누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취해야 할 초동조치 요령과 신고 관서 전화번호 등이 기재돼 있다.

혹여 유독물 운반카드를 소지하고 있지 않다면? 차량 외부에 부착된 적재물 표시에 기재된 약품명을 검색해 MSDS를 찾아보고 이를 통해 적절한 방제조치를 취해야 한다.

사고 발생 때 가장 먼저 소방관들이 출동하지만 이들의 주 임무는 화재진압이나 인명구조다. 하지만 화학물질이나 독성가스 누출사고에 대비한 장비는 물론이고 상세한 매뉴얼도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 사고처럼 현장에서 중화제 대신 물을 뿌려 가스 확산을 초래하는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이는 화학 사고 발생 시 현장에 직접 투입이 가능한 '전문가 풀(Pool)'을 만들어 바로 연계한다면 충분히 대처 가능하다.

전문가 풀 도입... 화학사고 대응 시스템화 절실

지난달 27일 구미 국가산단 4단지의 휴브글로벌 공장에서 작업중 불산가스 유출 되고 있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 경북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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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사고 대처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방제조치 등을 실제적으로 지원하게 될 전문가 풀을 학계·화학회사·연구소·보건환경단체·환경화학기술 전문인력 등으로 구성해야 한다.

각 소방서와 지자체 환경정책부서는 1서 1담당자를 의무적으로 지정해 긴급상황 발생 시 전문가에 의한 정확한 정보파악을 통해 정확한 방제요령을 지령하는 화학물질 사고대응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방당국은 언제까지 화학분석차량과 물질별 매뉴얼 등 특성에 맞는 장비와 정보가 부족하다고 한탄만 할 것인가.

불산 가스 누출사고 이후 생긴 두려움의 체감 위력은 이미 방사선 공포 이상이다. 10일 구미 피해지역의 대기·수질·토양 및 지하수 등에서 불산이 '불검출' 또는 '기준치 이내'로 검출돼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정부 발표는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불산이 아닌 또 다른 유독물질 누출 사고가 일어난다면 이제는 완벽히 위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말이다.
첨부파일
불산MSDS.pdf

덧붙이는 글 | 김학용 시민기자는 환경공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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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김정일 비밀녹취록? 대선 앞둔 '북풍'

 


10월9일 문화일보는 1면에 <10,4 합의 최대 퍼주기 '비공개 대화록'>이라는 타이틀로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이 단독 회담을 가졌고, 여기서 노무현 대통령이 적게는 11조 원에서 최대 100조 원을 퍼주기로 약속했으며, 김정일 위원장이 내년에는 정권이 바뀌는데 이렇게 해도 되겠는가 라고 묻자 "그러니까 대못질 해야"한다고 주장했던 내용을 그대로 올렸습니다.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주장을 조중동과 보수 언론은 그대로 대서특필했고, 보수 우익은 퍼주기 대북정책의 실체가 드러났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 문화일보 10월10일자 기사

 


언론이 '노무현-김정일 비밀 녹취록'이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쏟아내자 새누리당은 '대북 퍼주기 논란'에 관한 국정조사를 하자고 나섰고, 문화일보는 한술 더 떠서 '대북게이트'라고 규정하며 아예 굳히기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실체가 없습니다. 정문헌 의원의 단독 주장일뿐 어떤 근거 서류도 없거니와 정황근거조차 거짓입니다. 과연 그의 말이 사실인지 객관적으로 당시 정상회담에 참석한 증인들의 주장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10월 3일 오후 3시에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정일과 노무현 대통령이 단독회담을 진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던 이재정 통일부 장관,김만복 국정원장,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 등은 그 시간에 배석자가 있는 정상회담 중 오후 회담이 진행됐을 뿐이라고 밝혔습니다.

사실 정문헌 의원이 말하는 단독회담이 있었다면 그 사실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기자단이 따라가고,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호 문제도 있기에 두 사람이 몰래 기자단을 따돌리고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또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시에 나란히 걸어간 적은 있었지만, 따로 만나거나 한 적은 없었고, 걸어간 경우에도 동행자가 있었다고 김만복 국정원장은 밝혔습니다.

 

 

▲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을 하는 모습. 당시 이재정 통일부 장관, 김만복 국정원장,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 등이 배석했다.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김정일과 노무현 대통령의 비밀회담을 녹취한 녹취록이 있으며, 이는 북한으로부터 넘겨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우선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녹취록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대화록만 존재합니다.

여기에 대화록도 1급 비밀로 분류되어 있는데, 취급 인가를 받은 관계자만 볼 수 있는 1급 비밀 문서를 정문헌 의원이 봤다면 그 자체로 정문헌 의원은 범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있지도 않은 녹취록을 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그의 주장이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임을 뒷받침하기도 합니다.

NLL이나 대북 퍼주기 100조 원 같은 이슈는 노무현 대통령이 즉흥적으로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서울과 평양에 정상회담 상황실이 설치되며, 이 상황실에서는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과 방북단의 회의나 행위가 모두 핫라인으로 정보를 공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의 사실에 대비한 대책이나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김정일과 노무현 대통령이 단독회담을 했다면 이는 '비상상황'을 말하는 것이고,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난리가 났었을 텐데,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고 당시 홍익표 남측 상황실 실무책임자는 밝혔습니다.

시간, 정황증거,회담 배석자의 증언과 전혀 맞지 않은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주장은 마치 정준길 변호사가 택시 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가 바로 발각되자 잠수탔던 행위와 비슷할 정도로 증거는 없고 허위사실만 스스로 주장하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이런 그의 주장을 언론들은 그대로 받아쓰기하면서 '대북게이트' 라는 단어로 호칭하며 거짓을 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명박 정부, 남북합의서 0%'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세, 통일 항아리 운운하며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남과 북의 통일은 평화적 통일이어야 하고, 그 통일을 위해서는 남과 북의 인적,물류, 교류가 이루어져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동서독의 통일 원인이 외부적인 요인보다 서로 간의 왕래를 통한 내부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던 점을 비쳐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적대적인 두 국가의 통일은 내부적인 교류가 먼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MB정권에서 대북정책은 참혹할 정도입니다.

 

 

 


남과 북이 만나서 회담을 하고 대화를 했던 횟수를 살펴보면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 한해만 55회였습니다. 그러나 MB정부는 5년간 남북회담은 달랑 15회에 불과했습니다. 회담이 이렇게 적으니 남북간 회담으로 합의서를 끌어낸 비율을 보면 YS정부 시절 21% 국민의정부 시절 60% 참여정부 시절 67%에 비해 MB정부는 0%입니다.

이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고 한반도의 운명에 달린 남과북의 대화채널을 몽땅 미국과 일본,중국에 의존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북한과 전쟁까지 하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참혹했던 MB정부의 대북정책을 보면, 북한이 말하는 적화통일을 대한민국 보수세력도 똑같은 전략으로 채택하고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두려움만 생겼던 잃어버린 5년이었습니다.

' 그들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김정일-노무현 비밀 녹취록 주장과 국정조사 요구는 간단하게 말해서 2012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북풍'을 다시 연출하겠다는 의도입니다.

 

 

▲ 조선일보 대선특집 기사

 

조선일보는 대선특집 기사에서 <올 대선 안보 핵심 이슈 NLL..노무현과 군의 갈등사>라는 제목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군이 NLL을 상대로 갈등을 벌였고 이는 안보의 공백을 초래했다는 식으로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김장수 전 국방장관이 북한이 NLL의 불법성에 대해 얘기했다고 주장한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군이 잘못한 것입니다.
 

김장수 전 국방장관이 북한이 NLL의 불법성에 대해 얘기했다고 했는데?
- 그런 내용을 당시 청와대에 보고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김 장관의 주장대로 북한이 그런 발언을 했다면) 북한의 전술일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김 장관이 회담 본부에 북한의 요청이나 주장에 대응할 훈령을 요청해야 하는데 그런 적도 없었다.
(김만복 국정원장과 기자와의 일문일답)


북한이 NLL의 불법성을 주장했다는 말만 하고, 그에 대한 대책은 전혀 세우지 않았던 국방장관과 군 장성들의 무책임함은 전혀 나오지도 않고, 오로지 노무현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천안함,연평도 포격 사격이 있었던 시기의 이명박 대통령은 하야해야 마땅합니다.

 


 

 


새누리당과 조중동이 '북풍'을 건드리는 이유는 대선에 '북풍'처럼 효과적인 무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보수세력조차 새누리당을 외면하고 있는 이때에 '노무현 대북 퍼주기'라는 사실과 'NLL 발언'은 일거에 모든 악재를 털어낼 수 있는 묘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는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주장처럼 2007년 단독회담이나 비밀 녹취록은 없었다고 끄트머리에 밝혔습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거짓으로 말한 새누리당 의원의 말을 믿고 국정조사를 하자고 주장하는 새누리당이나, 자신들의 보도가 거짓임이 밝혀지자 이제는 여권관계자라는 가상의 사람을 내세워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진실이었다고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조중동과 보수세력이 '북풍'이라는 카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대 대통령 선거 당일 아침 조선일보 1면 기사, 이날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출처:조선일보

 


2012년에는 저런 기사가 나오지 않으리라, 이제 북풍'카드는 통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2012년 10월11일자 조선일보 1면 헤드라인 기사, 출처:조선일보

 


있지도 않은 녹취록이 나오자 보수우익 신문은 '추가적으로 녹취록 내용이 문화일보를 통해 공개돼'라는 기사를 또다시 쏟아 냈습니다. 거짓말로 밝혀지는 것은 상관 없습니다. 그저 호객꾼처럼 일단 내뱉고 사람을 끌어들이면 그들의 임무는 끝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진실이 되는 세상.
진실이 거짓으로 둔갑하는 세상.
여러분이 사는 세상의 거짓은 진실을 외면하려는 당신의 무책임 속에 더욱 날개를 달고 여러분의 미래를 망가뜨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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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남북정상회담 공식수행원들, 국회서 반박 기자회견

 

"단독회담도 없는데 무슨 비밀녹취?"
2007년 남북정상회담 공식수행원들, 국회서 반박 기자회견
 
 
2012년 10월 10일 (수) 16:40:38 조정훈 기자 whoony@tongilnews.com
 

 

   
▲10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공식수행원이었던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 김만복 전 국정원장,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 등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정문헌 의원의 주장을 반박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정문헌 새누리당 국회의원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비밀녹취록' 존재여부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당시 공식 수행원들은 이를 전면 부인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공식수행원이었던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 김만복 전 국정원장,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 등은 10일 오후 2시 국회 정론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사이에는 별도의 어떤 '단독회담'도 없었고 '비밀합의'도 없었다"며 "이와 관련한 '비밀녹취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들은 "정 의원이 주장하는 10월 3일 오후 3시는 정상회담의 오후 회담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간이었고, 이 회의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미 제안된 남북공동사업계획들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이 회의의 진행은 모두 남북 간의 공식적인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정문헌 의원이 주장하는 10월 3일 오후 3시에 단독회담은 없었고 공식 수행원들이 배석한 공식 정상회담이 열렸다는 것이다.

당시 정상회담에는 북측에서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남측에서는 이재정 통일부장관, 김만복 국정원장, 권오규 경제부총리,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이 함께 배석했으며, 정 의원이 주장하는 비밀회담은 있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기자회견 직후,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예를 들어 같이 걸어가는 경우가 있지 따로 만나는 형식은 전혀 없다. 게다가 두 사람만 같이 걷는게 아니고 배석자, 수행원, 경호원이 같이 가기 때문에 두 사람이 비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당시 이재정 통일부장관 정책보좌관으로 서울상황실을 담당했던 홍익표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은 "대통령 일거수일투족, 당국간 대표단의 모든 회의는 평양상황실과 공유한다"며 "대통령이 단독회담을 했다면 긴급 비상상황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전파되고 비상상황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없었다"고 설명했다.

즉, 정 의원의 주장대로 '비밀녹취록'이 있어야 할 '단독회담'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홍 의원은 "당시 통일부 상황일지를 내놓으라고 해봐라. 거기에는 (단독회담 내용이) 없다"며 "상황실은 저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공무원이 있다. 기자도 수시로 확인했었다. 단독회담 상황이 전파된 것은 아무도 몰랐다"고 단독회담 자체를 부인했다.

 

   
▲ 기자회견 직후, 2007년 남북정상회담 수행원과 실무자가 설명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정상회담, NLL 언급할 자리 아니다."

이들은 정문헌 의원이 공개한 "'서해북방한계선(NLL)'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이재정 전 장관은 "NLL은 당시 회담에서 나올 수도 없는 이야기다. 나올 필요가 없다. 다만 서해평화특별지대를 제안하고 논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화수역만 이야기를 했다. (평화수역의) 기준은 실무적으로 다룰 이야기다. 정상회담에서 다룰 이야기가 아니다"라며 "이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정상회담 이전에 안보조정회의에서 평화수역 내지는 공동어로구역을 어찌하느냐의 논의를 했고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다"고 해 남북정상회담에서 'NLL'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정 의원이 주장한) 허위 사실 관련 발언은 없었다. 정상회담은 그렇게 진행되지도 않는다"며 "상당히 긴장된 가운데 정말 국가 앞날을 위해 논의하는 자리이다. 신중하고 정리된 발언을 하고 그렇게 진행된다. 정 의원이 말한 것같은 발언은 있을 수도 없고 노 대통령은 그런 생각도 안했다"고 못박았다.

"대화록은 1급 비밀..정 의원이 봤다면 범죄행위"

또한 정 의원이 주장하는 '비밀녹취록'에 대해서도 "대화록이 있을 뿐, 비밀녹취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만복 전 원장에 따르면, 당시 정상간 대화는 특수경우를 감안, '녹취록' 아닌 '대화록'으로 남겼으며, 1급 비밀로 분류돼 국가기록원과 국정원에 보관되어 있다.

즉, 정문헌 의원이 주장하는 '비밀녹취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게다가 정 의원은 현 정부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설령 대화록을 '비밀녹취록'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해도, 1급 비밀취급인가자가 아니기에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재정 전 장관은 "정 의원이 1급 비밀취급 면허가 있으면 볼 수 있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비서관은 1급 비밀 취급인가자가 아니다"라며 "대화록을 볼 수 없다. 볼 수 없기에 (주장한) 내용이 다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당시 대화전체를 배석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정확하게 들은 당사자로서, 정 의원이 주장하는 내용은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 사이에 전혀 없었다"면서 "대화록의 경우, 1급 비밀취급자만 특별한 경우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볼 수있고, 보는 경우에도 직무상 얻은 내용을 공개적으로 말할 경우에는 범죄행위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상회담과 관련된 내용은 누구나 이야기할 수도 있고 의혹을 제기할 수도 있다"며 "그러나 사실 자체를 왜곡하거나 마치 사실인 것처럼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며 "정문헌 의원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대화록에는 정 의원의 주장 같이 발언한 내용이 없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들은 "없다"고 일축했다.

김만복 전 원장은 "보안법상 이것은 공개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향후 남북정상회담을 또해야 한다. 그런 연속선상에서 공개하면 상대방에게서 역공을 받는다"며 대화록 공개는 거부했다.

 

   
▲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이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앞서 이들은 기자회견문에서 "우리는 이제 대선을 두 달여 남겨놓은 시점에서 왜 이런 황당한 발언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인지, 무슨 정치적 의도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어떤 이유에서든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전직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하고 정상회담의 권위와 가치를 무너뜨린 데 대하여 엄중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앞으로의 남북관계 그리고 동북아 평화를 위하여 일부 언론처럼 정문헌 의원의 일방적이며 왜곡된 주장을 사실인 양 몰아가는 보도를 즉각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한다"며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 공식수행원으로 참여했던 우리들의 기자회견으로 이러한 소모적인 논란이 종식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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