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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 법정에 설 준비가 돼있나

[아시아생각] ‘여덟 살 응우옌티탄’이 기억하는 학살

 

 

응우옌티탄은 머리가 아팠다. 2015년, 2018년, 2019년, 모두 세 차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두통과 멀미에 시달렸다. 태어나 마을 밖으로 멀리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어 그런 건지,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정이 가져온 스트레스인지 알지 못했다. 응우옌티탄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국회로, 전국으로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바쁜 일정 사이에 한국 친구들이 챙겨준 두통약도 소용이 없었다. 베트남어가 잘 통하지 않을 땐 이마 가운데를 손으로 툭툭 치며 아픈 표정을 지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지 못해 한 쪽에 자리를 깔고 누워있기도 했다. 언제나 한국 방문은 그에게 힘들고 어려운 숙제였다. 두통에 시달리며 매번 그는 한국에 온다.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Nguyễn Thị Thanh). 같은 날 학살로 희생된 탄의 다섯 가족은 마을 당산나무 옆 위령비에 이름으로 남았다. 위령비에 새긴 29번 엄마 판티찌, 34번 이모 판티응으, 42번 언니 응우옌티쫑, 62번 남동생 응우옌득쯔엉, 64번 사촌동생 도안테민이 그들이다. 탄의 가족을 포함해 모두 74명이 희생된 이 사건은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 전투부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 중 유일하게 현장 사진 등의 증거가 남아있는 사건이다. 당시 희생자 대부분은 10세 미만의 어린이와 노인, 여성이었다. 탄은 살아남은 19명 중 한 명이었다. 탄은 지금도 여덟 살 그 해, 그 날만 떠올리면 울음이 터진다. 

 

화약연기 뿌연 속을 허우적거리며 배를 움켜쥐고 오빠와 엄마를 찾아 헤맨 기억이 서럽다. 엄마의 죽음을 만난 건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후였다. 한국의 기자가 가지고 온 흑백 사진 속 참혹한 시신들 사이에 엄마가 있었다. 사진을 보러 모여든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탄은 카메라를 응시한 채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윗옷을 추켜들어 자신의 상처를 보였다. 옆구리에 난 상처가 깊었다.

 

그로부터 14년의 세월이 지나 탄은 한국에 왔다. 사진에서 본 젊은 탄은 중년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탄은 죽은 이들을 대신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라고 했다. 2000년대 초까지 전개되었던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 이후로 20여년의 세월을 건너,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활동이 재점화 되었다. 그리고 그 활동의 중심에 퐁니퐁넛 마을 사건과 응우옌티탄이 있었다. 

 

2018년, 탄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평화법정’)의 원고가 되어 피고 대한민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 한국에 다시 왔다. 옆 마을 하미학살 피해자인 같은 이름의 응우옌티탄이 또 다른 원고로 동행했다. 

 

이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법정을 준비한 것은 50여개가 넘는 단체와 1천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었다.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태 변호사, 양현아 서울대 교수로 재판부를 구성하고, 실제와 다름없이 법정을 준비했다. 퐁니·퐁넛 사건과 하미사건에 대한 소장과 증거, 변론준비기일 통지서 등을 법률상 대표자인 법무부장관 앞으로 송달하고 피고 대한민국의 참여를 기다렸다. 

 

탄은 시민평화법정에서 지난 삶의 고통을 눈물로 진술했다. “저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제 삶의 힘든 시기에 항상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죽지 않았다면, 온 가족이 화목하게 지냈을 것입니다. 한국군인들이 그 때, 학살이 일어난 날에 차라리 나를 죽였으면, 이렇게 힘들게 지내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도 합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전달하고 싶은 것은 법정이 저를 도와줘서 한국 정부하고 한국 참전군인들이 이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2018년 4월 21일, 베트

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원고 퐁니·퐁넛마을 응우옌티탄 진술)

 

 

그 무엇보다 사과를 원했다. 가족을 잃고 자신의 삶도 무너진 피해자 응우옌티탄은 한국의 참전군인과 정부가 학살을 인정하고 사과하길 바랐다. 그것은 탄과 같은 다른 피해자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2019년 4월, 베트남 꽝남성과 꽝응아이성 한국군 피해마을 유가족 103명이 한국 정부에 제출한 청원서에도 한국 정부의 진상조사와 공식사과, 피해회복조치 요구가 담겨있다. 이것은 베트남의 피해자들이 한국 정부에 직접 목소리를 내 피해를 호소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들은 청원서에 자신과 가족이 겪은 피해사실을 적고, 한국 정부가 학살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그들은 학살 이후 가족을 잃고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후유증으로 삶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도 했다. 피해에 대한 배상과 사과 외에도 한방파스가 필요하다고도, 생계를 도와달라고도 했다. 죽은 가족의 제사를 지내고, 무덤을 고치게 해 달라고도 했다. 피해자들은 한국 정부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의 시작부터, 시민평화법정, 피해자 청원까지 이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에 요구하는 바는 명백하다. 진상조사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가해의 역사를 반성하고 사죄하며, 피해자에 대해서는 인도적 차원의 조치를 하라는 것이다. 진상규명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시작된 지도 20년 세월이 흘렀다. ‘의혹’으로 시작된 이 문제는 사실상 많은 기록들에 의해 상당부분 ‘확인’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만이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피해자 청원에 대해 다섯 달 만에 나온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답변은 이 문제에 대한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자세를 반영한다. 한국군 전투사료에서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어불성설이나, 한베공동조사 여건조성이 안 되어 조사를 못하겠다는 식의 답변이 그러하다. 민변에서 퐁니퐁넛 사건에 대한 국정원 조사기록 목록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있는 현실도 덧붙일 항목이다.


 

정부가 진상규명 활동에 뒷짐 지고 있는 사이 전쟁의 기억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깊어지고, 수많은 베트남전 참전군인은 전쟁범죄의 가해자가 되어버렸다. 국가폭력에 동원된 또 다른 피해자인 참전군인을 위해서도 정부는 진상조사에 나서야 한다. 국가가 나서 베트남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참전군인의 삶까지 돌아봐야 한다. 국제적으로도 한국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해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의 세인트 제임스 스퀘어에 한 시민단체가 한국군 성폭력 피해여성과 그로 인해 태어난 라이따이한을 위로하는 모자상을 세웠다. 이 단체는 영국 의회에서 한국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행사를 가졌다. UN인권위원회의 전면 조사는 물론 한국 정부에 진상조사와 사실인정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베트남전쟁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진상규명 요구가 국내외적으로 거세다. 언제까지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


 

베트남전쟁을 돌아보는 것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 문제에 관심 가져야 하는 이유다. 굳이 가해의 역사에 대한 성찰이란 거룩한 표현이 아니어도 좋다. 관점은 눈이 아니라 발에 달려있다. 베트남 전쟁 문제에 있어 피해자중심주의란 바로 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103명 청원인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사과의 대상은 베트남 정부가 아니라 피해자여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과 베트남 나라간의 정치적, 외교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논하는 것은 맞지 않다.


 

탄은 이제 ‘진짜’ 법정에 대한민국을 세우려 한다. 2020년 4월 21일 민변 변호사들이 대리인이 되어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배상을 요구하는 소장을 제출했다. 코로나19가 길을 막았지만 화상통화를 연결해 소감을 전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먼 길을 오지 않은 응우옌티탄은 이 기자회견을 앞두고도 두통에 시달렸을까?

 

최근 진상규명 활동을 본격화하기 위해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가 꾸려졌다. 이를 중심으로 청원 1년 기자회견과 ‘베트남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 발의를 알리는 보도자료가 배포됐다. 좀 더 강제성을 가지고 법과 제도의 틀에서 문제해결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다. 이후로도 한국 정부와 우리 사회가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의 자리에서, 유가족의 자리에서, 베트남전쟁 참전군인과 그 가족의 자리에서, 가해자의 자리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도록, 진상규명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여덟 살 탄의 눈으로 전쟁을 본다.


 

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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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통련, 5.18민중항쟁 40주년에 즈음해 성명 발표

기자명 조혜정 기자

 

 승인 2020.05.18 15:51

‘미국의 광주학살 개입 진상은 모두 밝혀져야 한다’

▲ 2018년 8월9일, 민플러스-조선신보-Web통일평론이 공동으로 주최한 ‘4.27판문점선언시대와 우리의 역할’ 토론회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손형근 한통련 의장
▲ 2018년 8월9일, 민플러스-조선신보-Web통일평론이 공동으로 주최한 ‘4.27판문점선언시대와 우리의 역할’ 토론회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손형근 한통련 의장

5.18광주 민중항쟁 4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에서 자주 민주 통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한통련(의장 손형근)은 5월18일 성명을 발표하여 미국의 광주학살 개입 진상은 하루빨리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통련은 문재인 대통령이 헌법 전문에 5.18광주 민주화운동 정

신이 반드시 담겨야 한다고 강조한 데 대해 이 제안을 적극 지지하면서 이와 관련한 21대 국회의 역할에 기대감을 나타냈다. 

성명은 오월항쟁 당시 군부의 폭압으로 국내 언론이 마비되고 있는 가운데 해외동포들은 “외신이 전해 온 생생한 영상 등을 통해 민주화를 요구하며 총궐기한 용감한 투쟁 모습과 총검으로 시민을 습격하는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을 목격하였다”고 주장, “뜨거운 애국심과 분노로 5.18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신속하고 널리 국제사회에 알렸다”고 해외운동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고 “5.18민주화운동을 국내 민중과 함께 투쟁한 주체의 하나”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최근 비밀 해제된 미국 국무성이 작성한 5.18관련 문서와 관련하여 “미국이 신군부의 12.12숙군 쿠데타를 묵인한 사실과 5.18당시 전두환 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광주시민의 애절한 호소를 거부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고 지적하고 “전두환의 만행을 시인한 미국의 행위에 강한 분노를 느낀다”다면서 5.18관련 문서가 전부 공개되어 진상이 모두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미국이 광주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한국군 이동을 승인한데 대하여 “5.18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다”면서 “반미자주화운동의 고양은 5.18민주화운동의 피의 교훈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미국은 남북공동선언 이행 등 아직도 우리민족의 자주권을 노골적으로 침해하고 있다”면서 40년이 지나도록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간섭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미국의 개입에 대한 진상이 하루빨리 규명”되어 “한국이 자주적인 나라로 발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영령들이 꿈꾼 이상적인 사회, 한반도에 평화가 넘치는 조국의 자주 통일 실현을 위해 한통련은 자주 민주 통일운동을 더한층 전진시켜나갈 것”을 다짐했다. 

성명 전문은 다음과 같다.

광주민중항쟁 40주년을 맞이하여 
미국의 광주학살 개입 진상은 모두 밝혀져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 길이 빛날 광주민중항쟁(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이하였다. 1980년 5월 우리들 해외동포는 항쟁이 시작된 직후부터 외신이 전해 온 생생한 영상 등을 통해 민주화를 요구하며 총궐기한 광주시민의 용감한 투쟁 모습과 총검으로 시민을 습격하는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을 목격하였다. 당시 국내가 군부의 폭압으로 언론이 마비되고 있는 가운데 해외동포는 뜨거운 애국심과 분노로 5.18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신속하고 널리 국제사회에 알렸다. 동시에 전두환 신군부의 잔인한 진압과 시민학살을 규탄했다. 해외동포는 5.18민주화운동을 국내 민중과 함께 투쟁한 주체의 하나임을 자부한다. 

최근 비밀 해제된 미국 국무성이 작성한 5.18관련 문서 일부가 공개되었다. 문서는 미국이 신군부의 12.12숙군 쿠데타를 묵인한 사실과 5.18당시 전두환 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광주시민의 애절한 호소를 거부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다시금 전두환의 만행을 시인한 미국의 행위에 강한 분노를 느낀다. 아직도 미공개로 남아있는 미국의 5.18관련 문서가 하루빨리 전부 공개되어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광주 오월항쟁 이전까지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혈맹의 나라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은 군부세력의 폭압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촉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통수권을 가진 미군은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한국군 이동을 승인하였다. 광주시민의 기대는 무참하게 짓밟힌 것이다. 5.18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 미국이 진정한 친구가 아님을 인식하였다. 1980년 이후의 반미자주화운동의 고양은 5.18민주화운동의 피의 교훈을 기초로 하고 있다. 

현재 남북공동선언 이행을 방해하는 등 미국은 아직도 우리민족의 자주권을 노골적으로 침해하고 있다. 그 모습은 광주학살에 개입한 미국의 모습과 겹쳐진다. 40년이 지나도록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간섭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광주항쟁 40주년에 즈음하여 헌법 전문에 5.18광주 민주화운동 정신이 반드시 담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국내동포와 함께 민주화운동을 전개해온 한통련은 문 대통령의 제안을 적극 지지한다. 우리는 헌법 전문에 광주항쟁 정신 계승이 실리기를 바라면서 21대 국회의 역할을 기대한다. 또한 군부의 광주항쟁 진압과 관련한 미국의 개입에 대한 진상이 하루빨리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검증 작업을 통해 한국이 자주적인 나라로 발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광주민중항쟁 40주년을 맞이하여 영령들이 꿈꾼 이상적인 사회, 한반도에 평화가 넘치는 조국의 자주 통일 실현을 위해 한통련은 자주 민주 통일운동을 더한층 전진시켜나갈 것을 다짐한다. 

2020년 5월 18일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키워드#재일한통련 #손형근 #광주항쟁40주년 #광주항쟁미국개입

출처 : 현장언론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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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망언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들

유야무야 끝난 ‘5·18 망언 3인방’ 에 대한 처벌
 
임병도 | 2020-05-19 10:21:2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이 열리는 날 현충원에서는 “5·18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고 폭동이다”라는 망언이 나왔습니다.

극우인사 지만원씨는 국립현충원에서 태극기를 든 사람들과 함께 ‘5.18 군경전사자 추모식’을 가졌습니다.

지씨는 이 자리에서 “5.18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고 폭동이다. 누가 일으켰느냐? 김대중 졸개하고 북한 간첩하고 함께 해서 일으켰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특수군 소행이라 주장해왔던 지씨는 2월에 명예훼손으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 김태호 판사는 ‘광주 북한특수군(광수)’가 북한 고위직과 얼굴이 동일하다는 지만원씨가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제출하지 못했다”라며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폄하하는 것으로 비방의 목적이 인정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인물인 김사복(오른쪽 빨간 동그라미 안 오른쪽)와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가 1975년 장준하 선생 사망 현장 취재를 함께 갔을 때 찍은 사진. ⓒ목포MBC 화면 캡처 [출처: 중앙일보] ‘택시운전사’ 김사복, 1975년 장준하 사망 현장 취재도 지원

김태호 판사는 지씨가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 인물이었던 고 김사복씨를 ‘빨갱이’라고 지칭한 부분도 사자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지만원씨는 국회에서 열린 “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말했지만, 법정에서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해당 게시글은 단순 의견 표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판사는 “근거가 미약하고 표현 방법도 악의적인 점, 피해자들의 사진집 발간과 관련한 사회적 명성과 명예가 실추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어 지씨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글을 게시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다만, 지만원씨가 고령의 나이라는 점을 들어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지만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만원씨가 5월 18일에 또다시 망언을 쏟아내자 일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법정구속을 하지 않은 탓에 망언을 했다”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습니다.

지만원씨의 5·18 관련 명예훼손 사건은 2015년부터 여러 사건이 병합되거나 추가 기소가 이루어지면서 재판이 늦어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 지씨는 계속해서 망언과 가짜뉴스를 유튜브와 홈페이지, 강연 등을 통해 확산시켰습니다.

유야무야 끝난 ‘5·18 망언 3인방’ 에 대한 처벌

2019년 2월 8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는 당시 자유한국당 김진태, 이종명 의원이 주최하고 지만원씨가 발표하는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지씨는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했고,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도 망언을 쏟아냈습니다. 당시 이들을 가리켜 ‘5·18 망언 3인방’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5·18 망언 3인방’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은 높았지만, 자유한국당은 이종명 의원만 제명 처분을 하고 김순례 의원에게는 ‘당원권 정지 3개월’을 김진태 의원에게는 ‘경고 처분’을 결정했습니다.

21대 총선에서 5.18 단체들이 김진태 의원의 공천 취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김 의원은 강원 춘천철원화천양구갑에 통합당 후보로 출마를 했습니다. 그러나 김진태 의원은 허영 민주당 후보에게 패배하며 국회 재입성에는 실패했습니다.

비례대표였던 김순례 의원은 경기분당을에 공천을 신청했다 컷오프 되자 제명을 요구했습니다. 김 의원은 비례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에서 비례대표 의원직을 유지했습니다.

이종명 의원도 제명 이후 미래한국당으로 당을 옮겼고, 20대 국회가 끝날 때까지 비례대표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5·18 망언 3인방’은 아무런 처벌도 없이 20대 국회의원직을 무사히 마치고 국회를 떠나게 됐습니다.

주호영 원내대표가 사과했지만, ‘당이 다르다’는 궤변도

▲2019년 2월 8일 자유한국당 김진태, 이종명 의원이 주최하고 지만원씨가 발표한 공청회에서 5.18 관련 단체 활동가는 ‘광주를 모욕하지 말라’라는 현수막을 펼치며 광주 북한군 개입설이 거짓이라고 반박했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유족들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주 원내대표는 5.18민주묘역 참배 도중 유가족과 만나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성격, 권위에 대한 평가는 이미 법적으로 정리된 것 아니겠냐”라며 “마음에 상처를 드린 점에 대해서는 거듭 죄송하고 잘못했다는 점을 말씀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주 원내대표는 ‘5.18 망언 3인방’에 대한 징계가 약했다는 지적을 의식한 듯 5.18 단체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징계 수준이 국민 요구에 못 미쳤지만, 현재는 당이 다르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미래한국당과 통합당의 합당이 예정된 상황에서 ‘당이 다르다’는 주장은 변명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통합당이 진정한 사과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5.18망언’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처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518왜곡 처벌법’, 21대 국회에서는 통과될 수 있을까?

▲2019년 2월 13일 더불어민주당이 주최한 ‘5.18 망언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토론회 모습

현행법으로는 518을 왜곡하거나 망언을 해도 처벌할 수가 없습니다. 518단체들은 ‘명예훼손’ 소송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피해대상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을 경우 처벌이 어렵습니다.

17일 광주·전남 민주당 당선인 18인은 보도자료를 내고 “21대 국회 개원 즉시 5.18 관련법 개정을 공동으로 추진, 20대에서 이루지 못한 과제를 반드시 완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당선인들이 공동발의할 5‧18 관련법은 일명 ‘5‧18 역사 바로세우기 8법’으로 △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역할과 권한 확대, △5.18 역사 왜곡 처벌 강화, 헌정질서 파괴사범 행위자에 대한 국립묘지 안장 금지, △민주화운동 유공자 명예회복 및 실질적 보상 등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20대 국회에서도 ‘518 왜곡 처벌법’이 발의됐다가 통과되지 못한 사례가 있습니다. 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이 공동으로 발의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은 출판물, 전시물, 인터넷, 공연 등에서 5.18을 비방·왜곡·날조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한 자에게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518왜곡 처벌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망언을 하고 가짜뉴스를 유포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 모습도 국민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미국은 ‘증오표현’ 등의 관련 법안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를 처벌합니다.

21대 국회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면서 5.18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를 막을 수 있는 법안을 만들고 통과시킬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통합당이 과거를 반성하고 진정으로 사과한다면, 민주당과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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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20주년 특별기획] 맹목적 미국 중심에서 평화통일 한반도로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⑩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
발행 2020-05-18 18:37:04
수정 2020-05-18 18:3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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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2000년 5월 15일 첫걸음을 뗀 민중의소리가 창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자와 후원인들의 성원과 격려로 민중의소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자주평화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진보언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창간 20주년 특별기획으로 각계 원로, 전문가, 신진인사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릴레이 기고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코로나 이후 한반도의 미래? 기본과제로 떠오르는 것이 분단극복, 평화실현이다. 그렇다. 미래는 단순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의지적 관점에서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한반도를 살아가는 공동체 성원들에게 최대의 구조적 문제인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와 번영, 통일의 새시대를 열어야 한다. 이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공동체 성원들의 행복을 위한 근본조건이기에 그만큼 절박하다.

우연은 없다. 사회물리적 현상은 필연의 질서다. 코로나 위기도 우연히 온 것이 아니다. 올 것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일시적 현상이 아닌 구조로 보고 항구적 대비가 필요하다.

모두들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예측하고 전망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미래는 누군가에겐 시간의 흐름으로 그냥 오는 것이지만, 그 미래를 꿈꾸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겐 미래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예측할 수도 예측되지도 않는다. 다만 시대변화의 큰 경향성과 트렌드(초고령화사회-인구감소, 기후변화와 환경위기, 질병과 전염병, 초연결사회, AI시대와 무인화, 첨단정보화사회, 초국경의 시대 등)를 탐구하고, 현재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미래사회를 꿈꾸고 준비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미래를 만들어가는 미래의 주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의 흐름으로 왔다가 또 지나가는 미래의 객체가 될 것인가? 답은 자명하다. 지금 발 딛고 선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가 꿈꾸는 미래를 만들어가자.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 입국장에서 코로나19 외국 유입 차단을 위해 옥외공간에 설치된 개방형 선별진료소(오픈 워킹스루형·Open Walking Thru)에서 의료진과 육군 현장지원팀이 대기하고 있다.  2020.03.27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 입국장에서 코로나19 외국 유입 차단을 위해 옥외공간에 설치된 개방형 선별진료소(오픈 워킹스루형·Open Walking Thru)에서 의료진과 육군 현장지원팀이 대기하고 있다. 2020.03.27ⓒ김철수 기자

코로나 사태가 만든 패러다임의 변화:패권의 몰락
위기를 기회로:코로나 위기를 분단극복의 기회로

조작된 분단체제가 허구적으로 만든 미국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고정관념들의 붕괴, 그리고 촛불시민혁명에 이은 위대한 대한민국의 재발견! 코로나 팬데믹이 만든 패러다임의 변화를 한국적 상황에서 상징적으로 평가, 규정해 본 정의다. 그래서 코로나의 세계적 위기를 진정 우리에게는 철저한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만든 세계사적 변화는 가히 패러다임의 변화다.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존 세계질서의 주류적 정서와 가치, 패권들을 해체시키고 있다. 미국 중심적 패권적 질서는 이미 국제적 리더십을 잃었고 신자유주의적 가치 또한 반사회/반공동체적 허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특히나 분단체제 70여년의 역사 동안 우리에게 최고 선진국의 모델이었던 미국이 코로나 상황에 직면한 실체적 모습은 참으로 어처구니없을 뿐만 아니라 위상과 상징에서 대추락에 가깝다. 특히 미국 중심적 가치관에 절대적으로 지배되어 온 우리 사회에서는 그 충격파가 더 크다. 우리 사회의 맹목적 미국 추종의식과 관성, 미국적 제도와 가치의 일반화에 상당한 타격을 주고 미국 중심의 패권적 질서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위기는 진짜 기회다. 코로나의 위기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조선 500년의 역사를 지배했던 사대주의와 일제 35년의 식민지배, 이후 다시 미국적 패권질서에 철저히 고개 숙였던 지난 70여년의 분단체제를 돌아보면 우리에게 늘 우리(주체)는 없었고 사대와 제국의 패권, 그 패권에 빌붙은 기회주의만이 득세했다. 코로나는 이제 패권과 사대, 기회주의를 넘어 우리 자신, 우리 스스로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돌아볼 엄청난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한류와 K팝, 촛불로 상징되는 열린사회와 세계 최고의 성숙한 시민 민주주의, 봉준호의 아카데미상 수상 그리고 다시 코로나가 전 세계에 증명한 K방역까지, 이 모두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만들어진 결과물들이 결코 아니다. 전 세계 어느 국민들보다 우수한 우리 국민, 우리 사회의 수십 년 축적된 민주적 시민 역량이 만들어낸 필연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미 세계 최고의 성숙한 시민과 공정과 투명, 정의를 지향하는 정부에 힘입어 더욱 열린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특히 이 모든 성과들이 전 세계 어느 나라도 겪지 않는 분단체제(외세, 국제 패권질서의 상시적 침해)의 악조건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기에 그 가치는 더욱 크다.

한반도의 분단은 그 수립과 유지 자체가 미/소 냉전으로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미/중/일/러의 패권적 국익이 충돌하고 호시탐탐 한반도를 자국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장으로 변질시키는 엄혹한 체제다. 타(他)를 넘어 아(我), 객(客)을 넘어 주(主), 타율이 아닌 자율, 예속이 아닌 독립을 세우는 기본조건이 바로 우리 스스로의 분단극복, 평화실현, 통일의 길이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분단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매일 매일이 국민불행의 나날, 정책실패의 나날임을 직시해야 한다.

코로나가 바꿀 세상에 대한 여러 전망들이 쏟아진다. 초고도의 정보화사회, 빅데이터, 초연결사회, AI 등으로 상징되는 4차 산업혁명이 더욱 가속화될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러한 사회물리적 변화 이전에 국민행복의 근본조건이자 기본요건으로써 반드시 선결해야할 공동체의 과제가 있다. 바로 분단과 전쟁상태를 극복하고 평화와 번영, 통일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분단체제 극복, 평화체제 실현이다.

코로나의 위기를 우리 공동체의 천재일우의 기회로 만들어가기 위해 가장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 바로 분단극복의 과제이다. 미-소 냉전체제 수립의 결과물이었던 한반도 분단은 정작 미-소 냉전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냉전의 마지막 유산으로, 분단체제 75년을 유지하고 있다. 준엄하게 진정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구를 위한 분단이며 누구에 의한 분단이었는가? 이제 그 분단의 기원과 본질을 똑똑히 들여다보고 지체 없이 국민행복의 평화체제로 나아가야 한다.

분단은 국민불행의 근원이다. 분단적폐는 우리 사회 모든 적폐 중의 근본적폐다. 한국전쟁 70년이 되었는데도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여전히 전쟁상황(휴전협정)을 유지하고 있다. 정작 남과 북이 평화협정을 합의했음에도 미국의 반대, 미국의 국익 때문에 8천만 공동체 성원들의 생존권이 전쟁상태(휴전협정)에 놓여 있다. 준엄하게 물어야 한다. 왜 미국은 종전선언, 평화협정을 반대하는가? 휴전협정은 누구를 위한 협정인가? 결국 미국은 남과 북 8천만의 생존권을 담보로 미국의 국익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종전선언, 평화협정은 국민행복의 기본조건이다. 국민행복은 눈치 보는 것이 아니다. 양보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존재이유다.

코로나 이후의 한반도:평화실현이 근본과제
근본 물음? 누구를 위한 분단인가?
미-중 갈등 선택, 미국이냐 중국이냐? 정답은 북!

국민들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누구를 위한 분단인가? 누구에 의한 분단인가?
누구를 위한 전쟁상태 유지인가? 누구에 의한 전쟁상태 유지인가?

분단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허구적 체제이기에 이 허구적 체제를 떠받들기 위해 결과적으로 또 수없이 많은 거짓과 왜곡, 폭력과 공포, 독재와 인권유린이 분단체제 유지의 명목으로 작동되었다. 분단체제의 악순환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 시간) 미 애리조나주의 한 마스크 공장을  방문해 마스크는 쓰지 않은 재 고글만 쓰고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자료 사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 시간) 미 애리조나주의 한 마스크 공장을 방문해 마스크는 쓰지 않은 재 고글만 쓰고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자료 사진)ⓒ뉴시스/AP

코로나 팬데믹은 인류 공동의 문제에 직면하여, 책임 있게 국제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력을 갖춘 국가가 없음을 증거했다. G-2 국가니 G-7 국가니 하는 것들은 결국 대부분 자국의 패권적 질서를 위한 허구적 실체였음이 드러났다. 코로나로 가장 많은 사망자는 미국에서 나왔으며 서구 유럽의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도 속수무책이었다. 바야흐로 ‘G-0(지 제로)’ 시대다. 국제사회 지도국이 없는 ‘G-0’ 시대 개막, 미국과 중국은 자국의 패권만 있었지 국제적 리더십은 애초부터 없었다. 이러한 미국과 중국, 일본과 같은 허구적 패권들에 한반도의 분단이 농락당해야 하는가? 8천만 공동체 성원들의 생존권이 좌우되어야 하는가?

코로나 위기 상황은 미-중관계를 무역전쟁의 차원을 넘어 더 큰 갈등관계로 몰아가고 있다. 미-중 관계는 1972년 닉슨 방중 이후 최악의 상황이다. 향후 미-중 갈등이 더욱 증폭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중간의 엄혹한 갈등국면, 전쟁적 상황의 긴장이 고조되는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의 해법은 뭘까? 미국일까, 중국일까?

둘 다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근본해법은 미국도 중국도 아닌 남과 북의 하나됨, 바로 북에 있음을 증거한다. 남과 북이 적대를 넘어 평화로 하나 되면 미국도 중국도 더 이상 눈치 볼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러시아도 하나 되는 남과 북을 눈치 보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질서가 바꿀 동북아 질서다.

코로나발 경제 위기?
남북 평화경제로 대반전의 역사 만들 기회

코로나 팬데믹의 위기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연쇄반응하면서 우리 경제와 산업에 심각한 위기를 몰고 올 것이다. 전 세계적 소비 침체는 공황을, 실업율 증가는 더 큰 국가위기로 내 몰 것이다. 미국 중심의 신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의 심화, 국가간 장벽, 노동이동의 제한 등이 대두될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 경제위기 전망 속에서 우리에게는 다른 나라들이 갖고 있지 못한 확실한 기회의 영역이 하나 있다. 바로 75년 분단체제에 가로막혀 철저히 고립되고 단절된 영역, 북측이다.

코로나 이후의 범세계적 경제위기들(경제/산업, 고실업, 공황 등)을 북이라는 기회의 창을 통해 위기를 최소화하고 오히려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남북 간의 경제/산업적 협력, 평화경제를 통해 엄청난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다. 남과 북은 이미 평화경제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을 14년간 해 본 경험이 있다. 우리 국민들이 몰라도 너무 몰랐던 개성공단의 가치는 평화, 경제, 미래 통일문화 축적 등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한반도 평화경제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은 매일매일 작은 평화와 통일의 사례들이 발현, 축적되어지는 기적의 공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한국경제의 구조적 저성장, 제조업의 위기, 양극화, 일자리 문제 등을 구조적으로 풀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이었다. 다만 개성공단의 가치가 왜곡되어 국민들이 너무 모른다는 문제가 있었다. 여하한 간에 남북경협, 평화경제는 우리 경제뿐만 아니라 분단극복 평화실현, 번영과 통일의 가장 확실한 대안이었다.

개성공단이 북한 일방적인 통행 제한 조치로 가동 중단된지 160여 일 만에 재가동된 2013년 9월 17일 오전 북한 개성시 봉동리 개성공단 SK어패럴에서 노동자들이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개성공단이 북한 일방적인 통행 제한 조치로 가동 중단된지 160여 일 만에 재가동된 2013년 9월 17일 오전 북한 개성시 봉동리 개성공단 SK어패럴에서 노동자들이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구체적으로 코로나 이후의 경제위기와 관련하여 우리는 남북협력, 경제협력을 통해 위기를 최소화하고 오히려 기회로 만들 수 있다. 남측의 소비부진 공급과잉은 북측의 소비진작 공급으로 풀 수 있다. 남측의 농산물 공급이 과잉되면 북측과 물물교환(구상무역) 하면 된다. 북측 경제 전반의 수요와 공급은 우리에게 고스란히 공급과 수요의 선순환을 만들 수 있는 기회요인이다. 5천만이 아닌 8천만의 규모의 경제를 구현할 수 있다. 북에 없는 것은 남에 있고, 남에 없는 것은 북에 있다. 유무상통만으로도 전 세계적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넘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건설/토목 등 인위적 경기부양이 필요하다면 남측만이 아닌 전 한반도를 대상으로 통일시대를 상정한 국토균형발전의 관점에서 경기부양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구상무역(북측이 지하자원)으로 대가를 받으면 된다. 그 결과는 엄청난 윈윈효과로 시너지는 더욱 커질 것이다. 철강과 주요 지하자원 대부분을 전량 수입하는 우리가 호주나 칠레가 아닌 북측의 철강원석을 활용하면 그 경쟁력은 압도적일 것이다. 철강재를 사용하는 조선, 자동차 등 연관 산업의 경쟁력도 확실히 비교우위를 갖게 될 것이다. 이렇듯 남북경협의 평화경제는 우리 경제의 확실한 도약과 질적/구조적 개선을 가능케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개성공단의 경험을 갖고 있다. 체험적 확신이다.

코로나가 위기와 함께 가져온 기회의 선물이라 생각해보자. 분단체제 속에서 휴전선 이남에 갇힌 사고가 아니라 대륙으로 뻗어가는 열린 세계관, 남과 북이 대립하고 반목하는 배타적 경제가 아닌 상호 ‘윈윈’ 하고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는 열린 경제, 한반도 평화경제를 모색해보자.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미 우리는 14년간 개성공단의 경험을 통해 평화경제가 가지는 엄청난 폭발성과 효과를 직접 체험해봤다.

코로나 선거 민의? 중단 없는 개혁, 과감한 평화정책 추진
4.27/9.19 합의실천, 평화협정 체결, 평화경제 시동부터

4.15 총선은 코로나 선거였다. 코로나 위기 속에서 4.15 총선은 전 세계 시민 민주주의의 모범이었고 선거 결과적 측면에서 국민들의 민의는 중단 없는 개혁으로 정리되었다. 총선결과는 평화지향 진보개혁세력의 압도적 약진과 분단적폐 수구세력의 몰락으로 요약되었다. 총선민심은 개혁을 중단 없이 추진하라는 꺼지지 않은 촛불 민심의 재확인이었다. 촛불 민심의 상징은 적폐 청산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적폐 중의 근본적폐가 분단적폐다.

분단적폐가 양산한 특권과 기득권, 허구적 분단체제를 지탱하는 과정에서 양산된 몰가치, 비합리의 제도적 적폐들은 구조적 반민주와 반평화, 불공정,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국민불행의 독소적 기제들이었다. 이제 진보개혁세력의 압도적 민의를 바탕으로 적폐중의 근본적폐인 분단적폐 청산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더불어 시민사회는 정부가 좌고우면하지 않도록 국민의 명령으로 분단적폐 청산에 적극 나서도록 해야 한다.

평양남북정상회담 사흘째인 218년 9월 2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손을 맞잡아 들어올리고 있다.
평양남북정상회담 사흘째인 218년 9월 2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손을 맞잡아 들어올리고 있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그 첫 출발은 남북 양 정상의 4.27 판문점선언/9.19 평양선언 합의들을 실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합의의 핵심내용은 평화협정 체결과 전면적인 남북관계 개선, 평화경제의 상징인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재개다. 이것부터 우선 추진하는 실천적 의지를 보일 때 남과 북은 교착국면을 돌파하고 다시 화해협력의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남북관계가 최고 정점을 찍었던 9.19 평양선언 이후 하노이 회담 결렬과 북미관계 교착, 그보다 더 심각한 남북관계 교착이 왜 왔는지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남/북/미관계의 교착, 특히 남북관계의 교착에 우리에겐 문제가 없었는지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한반도 평화문제에 진정 우리가 주체적 역할을 했는지? 비핵화의 프레임에 빠져 평화의 본질을 등한시하지는 않았는지?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미국 문제를 풀어야 할 상황에서 오로지 한미동맹에만 매몰되어 제재의 프레임으로 북을 대하지는 않았는지? 4.27과 9.19에서 전 세계를 향해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천명해놓고 4.27과 9.19의 합의 실천에 소극적으로 미국 눈치 보기에 급급하지는 않았는지... 진정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상황에 대한 인식의 오류/한계, 인식의 실패가 분석 실패, 정책 실패로 나아간다. 코로나가 가져온 위기에는 기회의 선물도 있다. K방역이 세계를 선도한다. 마찬가지로 한반도 평화의 해법은 우리가 가장 잘 만들 수 있다.

이 땅의 주인은 우리고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는 남과 북이며, 분단 극복 평화 실현의 주체도 우리임을 직시한다면 미국을 한반도 평화문제의 상수에서 변수로 만들 수 있다. 이곳은 수천 년 동안 우리가 살아 온, 지금도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우리 땅이다. 우리가 주인이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우리가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

[창간20주년 특별기획]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모아보기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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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5.18 진상 규명 최선 다할 것”


옛 전남도청 앞에서 40주년 기념식..유공자 등 400여명 참석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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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18  1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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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0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광주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40년전 5월 계엄군에 희생된 남편 임은택씨의 이야기를 편지 형식으로 전하는 유족 최정희 씨. [사진제공-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정부도 5·18의 진상 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이날 오전 10시 광주광역시 동구 ‘5.18민주광장’(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제40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이같이 밝혔다. 1997년 정부 기념일 제정 이후 5.18민주묘지가 아닌 ‘5.18항쟁지’에서 열린 첫 기념식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5월12일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남겨진 진실을 낱낱이 밝힐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진실이 하나씩 세상에 드러날수록 마음속 응어리가 하나씩 풀리고, 우리는 그만큼 더 용서와 화해의 길로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2019년에 이어 이날 3번째로 5.18기념식에 참석했다. [사진제공-청와대]

“왜곡과 폄훼는 더이상 설 길이 없어질 것”이고 “발포 명령자 규명과 계엄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헬기 사격의 진실과 은폐·조작 의혹과 같은 국가폭력의 진상은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들”이라고 지목했다.

문 대통령은 “진상규명의 가장 큰 동력은 광주의 아픔에 공감하는 국민들”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국민들은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서 4·19혁명과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과 촛불혁명까지 민주주의의 거대한 물줄기를 헤쳐왔다”며, “5·18의 완전한 진실을 향한 국민의 발걸음도 결코 되돌리거나 멈춰 세울 수 없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헌법 전문에 ‘5·18민주화운동’을 새기는 것은 5·18을 누구도 훼손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로 자리매김하는 일”이라고 강조했으며, “전남도청의 충실한 복원을 통해 광주의 아픔과 정의로운 항쟁의 가치를 역사에 길이 남길 수 있도록 정부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광주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더 많이 모으고, 더 많이 나누고, 더 깊이 소통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을 경험했다”며 “우리에게 각인된 그 경험은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언제나 가장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이제 우리는 정치·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넘어 가정, 직장, 경제에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하고, 나누고 협력하는 세계질서를 위해 다시 오월의 전남도청 앞 광장을 기억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것이 그날, 도청을 사수하며 죽은 자들의 부름에 산 자들이 진정으로 응답하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 문 대통령은 기념식 직후 5.18민주묘지를 찾아 오월영령들을 추모했다. [사진제공-청와대]

5·18유공자 및 유족, 민주・시민단체 주요 인사 등 400여 명이 참석한 40주년 기념식은 방송인 김제동 씨의 사회로 참석자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 노래의 가사 한 구절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가 이날 행사의 주제가 됐다.

문흥식 5·18구속부상자회장이 묵념사 ‘바람이 일었던 곳’을 낭독했으며, 5.18유가족인 남녀 대학생 차경태(조선대 1학년), 김륜이(조선대 2학년) 씨가 경과보고를 낭독했다. 최정희(73) 씨가 40년 전 5월 21일 사망한 남편 고 임은택 씨의 이야기를 편지 형식으로 전했다. 

(추가, 16:54)

<문 대통령, 제40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사(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광주·전남 시·도민 여러분,

 

오월 광주로부터 40년이 되었습니다.

시민들과 함께하는 5·18,

생활 속에서 되살아나는 5·18을 바라며,

정부는 처음으로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망월동 묘역이 아닌,

이곳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거행합니다.

 

5·18 항쟁 기간 동안 광장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사랑방이었고,

용기를 나누는 항쟁의 지도부였습니다.

 

우리는 광장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대동세상을 보았습니다.

직접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시민들과 어린 학생들도

주먹밥을 나누고, 부상자들을 돌보며,

피가 부족하면 기꺼이 헌혈에 나섰습니다.

우리는 독재 권력과 다른 우리의 이웃들을 만났고,

목숨마저 바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참모습을 보았습니다.

 

도청 앞 광장에 흩뿌려진 우리의 민주주의는

지난 40년, 전국의 광장으로 퍼져나가

서로의 손을 맞잡게 했습니다.

드디어 5월 광주는 전국으로 확장되었고,

열사들이 꿈꾸었던 내일이 우리의 오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잘살 수 있는 세상은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더 많은 광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늘 5·18 광장에서

여전히 식지 않은 오월 영령들의 뜨거운 가슴과 만납니다.

언제나 나눔과 연대, 공동체 정신으로 되살아나는

오월 영령들을 기리며,

그들의 정신을 민주주의의 약속으로 지켜온

유공자, 유가족들께 깊은 위로와 존경의 마음을 바칩니다.

 

‘오월 정신’을 키우고 나눠 오신 광주시민과 전남도민들,

광주를 기억하고, 민주주의를 지켜주신 국민들께도

각별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오월 정신’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희망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며 만들어진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걱정하는 마음이 모여

정의로운 정신이 되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의 서로를 격려하는 마음과 나눔이,

계엄군의 압도적 무력에 맞설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광주는 철저히 고립되었지만,

단 한 건의 약탈이나 절도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인 없는 가게에 돈을 놓고 물건을 가져갔습니다.

 

그 정신은 지금도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깃들어 있습니다.

‘코로나’ 극복에서 세계의 모범이 되는 저력이 되었습니다.

병상이 부족해 애태우던 대구를 위해

광주가 가장 먼저 병상을 마련했고,

대구 확진자들은 건강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월 어머니’들은 대구 의료진의 헌신에

정성으로 마련한 주먹밥 도시락으로 어려움을 나눴습니다.

 

‘오월 정신’은 역사의 부름에 응답하며

지금도 살아있는 숭고한 희생정신이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칼에 이곳 전남도청에서 쓰러져간 시민들은

남은 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열어갈 것이라 믿었습니다.

오늘의 패배가 내일의 승리가 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름에 응답하며,

민주주의를 실천했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것이 민주화 운동이 되었고,

5·18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역사가 되었습니다.

 

“나라면 그날 도청에 남을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이 무엇이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우리는 그날의 희생자들에게 응답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끼리 서로 공감하며

아픔을 나누고 희망을 만들어내듯,

우리는 진실한 역사와 공감하며,

더 강한 용기를 얻고, 더 큰 희망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우리 국민입니다.

 

‘오월 정신’은 더 널리 공감되어야 하고

세대와 세대를 이어 거듭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한 청년이 말했습니다.

“5·18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아직 5·18정신이 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18을 겪지 않은 세대가 태어나고 자라

한 가정의 부모가 되고, 우리 사회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그날 광주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함께 광주를 겪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월 정신’은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오월 정신’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미래를 열어가는 청년들에게

용기의 원천으로 끊임없이 재발견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월 정신’이 우리 마음에 살아 있을 때

5·18의 진실도 끊임없이 발굴될 것입니다.

‘오월 정신’을 나누는 행사들이

5·18민주화운동 40년을 맞아 전국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 의미 있는 행사를 진행하고 계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와 정부도

‘오월 정신’이 우리 모두의 자부심이 되고,

미래세대의 마음과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언제나 함께할 것입니다.

 

서로 돕고 나눌 수 있을 때, 위기는 기회가 됩니다.

위기는 언제나 약한 사람들에게 더욱 가혹합니다.

우리의 연대가

우리 사회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고,

그들이 일어날 수 있을 때,

위기를 극복하는 우리의 힘도 더 강해질 것입니다.

 

오늘 ‘경과보고’와 ‘다짐’을 낭독해준

차경태, 김륜이 님과 같은 미래세대가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에서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연대의 힘을 더 키워 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광주시민들은 아픔을 넘어서는 긍지로

5·18의 명예를 소중히 지켜왔습니다.

광주 밖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광주의 고통에 눈감지 않고 광주의 진실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정부도 5·18의 진상 규명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난 5월 12일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남겨진 진실을 낱낱이 밝힐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진실이 하나씩 세상에 드러날수록 마음속 응어리가 하나씩 풀리고,

우리는 그만큼 더 용서와 화해의 길로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곡과 폄훼는 더 이상 설 길이 없어질 것입니다.

발포 명령자 규명과 계엄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헬기 사격의 진실과 은폐·조작 의혹과 같은

국가폭력의 진상은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처벌이 목적이 아닙니다.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는 일입니다.

이제라도 용기를 내어 진실을 고백한다면

오히려 용서와 화해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5·18 행방불명자 소재를 파악하고,

추가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배·보상에 있어서도

단 한 명도 억울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지난해 이준규 총경에 대한 파면 취소에 이어,

어제 5·18민주화운동으로 징계 받았던

퇴직 경찰관 21명에 대한 징계처분 직권취소가 이뤄졌습니다.

경찰관뿐만 아니라 군인, 해직 기자 같은

다양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도 노력하겠습니다.

 

진상규명의 가장 큰 동력은

광주의 아픔에 공감하는 국민들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서

4·19혁명과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과 촛불혁명까지

민주주의의 거대한 물줄기를 헤쳐 왔습니다.

5·18의 완전한 진실을 향한 국민의 발걸음도

결코 되돌리거나 멈춰 세울 수 없습니다.

 

국민이 함께 밝혀내고 함께 기억하는 진실은

우리 사회를 더욱 정의롭게 만드는 힘이 되고,

국민 화합과 통합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헌법 전문에 ‘5·18민주화운동’을 새기는 것은

5·18을 누구도 훼손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로 자리매김하는 일입니다.

2018년, 저는 ‘5·18민주이념의 계승’을 담은

개헌안을 발의한 바 있습니다.

언젠가 개헌이 이루어진다면 그 뜻을 살려가기를 희망합니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지방 공휴일로 지정한

광주시의 결정이 매우 뜻깊습니다.

 

‘오월 정신’은 도청과 광장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전남도청의 충실한 복원을 통해

광주의 아픔과 정의로운 항쟁의 가치를

역사에 길이 남길 수 있도록 정부도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광주·전남 시·도민 여러분,

 

40년 전 광주는 숭고한 용기와 헌신으로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광주를 떠올리며 스스로 정의로운지를 되물었고

그 물음으로 서로의 손을 잡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언제나 국민에게 있습니다.

광주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더 많이 모으고, 더 많이 나누고,

더 깊이 소통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에게 각인된 그 경험은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언제나 가장 큰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치·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넘어

가정, 직장, 경제에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하고,

나누고 협력하는 세계질서를 위해

다시 오월의 전남도청 앞 광장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날,

도청을 사수하며 죽은 자들의 부름에

산 자들이 진정으로 응답하는 길입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5월 18일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자료제공-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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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뭐라건, 노무현의 길

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 시간의 극장등록 :2020-05-18 06:00수정 :2020-05-18 10:23
제1화 바보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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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 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매주 월요일 게재.
한겨레 사진 아카이브에는 강재훈 기자가 1988년에 찍은 초선의원 노무현의 사진이 있다. 노무현을 투사의 이미지로만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이 사진은 다정하고 품격 있는 신사의 모습이다. “저들이 그토록 매도하던 운동권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11월11일치 인터뷰에서 노무현은 말했다. 청문회 스타가 된 노무현 의원이 1988년 최일남 선생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겨레 사진 아카이브에는 강재훈 기자가 1988년에 찍은 초선의원 노무현의 사진이 있다. 노무현을 투사의 이미지로만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이 사진은 다정하고 품격 있는 신사의 모습이다. “저들이 그토록 매도하던 운동권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11월11일치 인터뷰에서 노무현은 말했다. 청문회 스타가 된 노무현 의원이 1988년 최일남 선생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노무현은 앞선 사람이었다. 남과 달랐다. 사람들이 싸우기 주저할 때 투쟁에 앞장섰고, 싸움에 몰두할 때는 통합을 주장했다. 그런데 “튀어나온 못이 망치를 맞는다”는 말이 있다. “웃자란 가지가 먼저 베인다”고도 한다. 그에게 일어난 일이 그랬다. 노무현에게 마음의 빚을 진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정치인 노무현과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1988년부터 2009년까지 20년 남짓이다. 한겨레 30년치 기사와 사진을 모은 아카이브를 찾아보았다. 노무현과 만난 사람, 노무현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지역이 눈에 띈다. 해설 김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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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청문회’와 초선의원 노무현
젊은 초선의원 노무현이 온 나라 사람의 눈에 든 사건은 1988년의 ‘5공청문회’였다. 전두환 일당은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뻔뻔하였다. 텔레비전 중계로 청문회를 보던 시민이 화가 나 심장마비로 숨질 정도였다(한겨레 1988년 11월9일치). 이때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전두환과 부하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든 사람이 노무현이다. 빈틈없는 논리가 그의 무기였다.1988년 11월11일치 한겨레에 노무현의 인터뷰가 실렸다. 노무현은 어떻게 ‘청문회 스타’가 되었나. 증인으로 나온 5공인사들이 “불합리하고 모순된 진술을 하도록 끌고 가는” 것이 비결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논리적인 모습 때문에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다. 끈질기게 그를 따라붙던 ‘선동적’이라느니 ‘감정적’이라느니 하는 비난과는 다르다.
1988년 11월11일치 한겨레에 노무현의 인터뷰가 실렸다.
1988년 11월11일치 한겨레에 노무현의 인터뷰가 실렸다.
· 29년 전 오늘, 노무현을 세상에 알린 헌정사 첫 청문회가 열렸다 / 201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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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졸’로 보는 세력과 같이 할 수 없다”
세상이 김영삼을 따르던 1990년대 초에 노무현은 그에게 맞섰고 세상이 김영삼에게 등을 돌린 2002년에 노무현은 그를 챙겼다. 남들이 뭐라건 노무현은 소신대로 움직였다.노무현을 정치권에 영입한 사람이 김영삼이었다. 그런데 1990년에 김영삼은 충격적인 결정을 한다. 노태우와 김종필과 당을 합친 것이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서 민주진영에 유리하던 국회의 의석수는 하루아침에 역전되었다. 악명 높은 ‘3당합당’이다. 많은 정치인이 김영삼을 따라 거대 여당에 들어갔다. 노무현은 이들과 갈라섰다. 어려운 길을 택했다.
2002년에 김영삼을 찾은 노무현. 김영삼과 그 측근 박종웅 사이에 서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별세한 김종수 기자가 찍었다.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다. 한겨레신문사 서가에 필름 상태로 보관돼오던 것을 팩트스토리가 발굴했다.
2002년에 김영삼을 찾은 노무현. 김영삼과 그 측근 박종웅 사이에 서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별세한 김종수 기자가 찍었다.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다. 한겨레신문사 서가에 필름 상태로 보관돼오던 것을 팩트스토리가 발굴했다.
3당합당의 나쁜 결과 하나는 지역 갈등이다. 한때 영남과 호남은 민주주의를 위해 힘을 모았다. 그런데 3당합당 이후 부산과 경남은 김영삼을, 호남은 김대중을 편들며 다퉜다. 노무현은 두 세력의 통합을 바랐다. 2002년에 대통령 후보가 되자마자 김영삼을 찾은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당시는 김영삼이 비난받던 시절이었다. 노무현의 지지율이 떨어졌다. 후보를 사퇴하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한겨레21] 3김…계산기를 두드려라 / 20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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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의 낙선…‘바보 노무현’
노무현은 김영삼과 헤어진 뒤 김대중이 이끌던 야당에 합류했다. 약은 사람이라면 지역구를 부산 말고 다른 곳으로 옮겼을 터. 그러나 노무현은 우직하게 지역주의와 싸웠다. 1992년 국회의원 선거도 1995년 시장 선거도 부산에서 출마하고 낙선했다. 중간에 한번, 서울 종로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2000년 총선 때 다시 부산에 갔다. 그리고 낙선했다.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가는 그를, 사람들은 “바보 노무현”이라 불렀다.
‘바보 노무현’의 탄생. 2000년 총선 때 노무현은 다시 부산에 출마하고 낙선한다. 유세장에서 신이 난 어린이들의 모습을 이용호 기자가 찍었다.
‘바보 노무현’의 탄생. 2000년 총선 때 노무현은 다시 부산에 출마하고 낙선한다. 유세장에서 신이 난 어린이들의 모습을 이용호 기자가 찍었다.
1995년 지방선거. “자정 무렵. 개표 방송을 보며 펜을 들었다.” 노무현이 직접 쓴 글이다. 여론조사에서 앞서가던 노무현은 지역주의의 바람을 맞고 휘청였다.“이러한 상황에서 지역바람을 차단하고 승리를 보장할 비책으로 ‘탈당’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원칙을 지켰다. 나의 자존심도 탈당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지지한 많은 분들에게 실망을 드릴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당락에 연연하여 비겁하게 지역대결구도와의 정면승부를 회피할 수는 없었다.”
1992년 총선. “만약에 유권자들이 오도된 지역감정에 묻혀버린다면 선거의 의미는 실종되고 만다. 선거는 정권과 정당과 국회의원 또는 후보자 개인에 대한 심판이다.” 교과서 문장 같다. 틀린 말 하나 없이 답답할 정도로 정론이다. 1992년 3월13일치 한겨레에 실렸다. “부산 시민들은 민자당의 정치행태를 따끔하게 심판하여야 할 것이다.” 누가 썼을까? 부산의 활동가였던 문재인의 글이다.
1992년 총선. “만약에 유권자들이 오도된 지역감정에 묻혀버린다면 선거의 의미는 실종되고 만다. 선거는 정권과 정당과 국회의원 또는 후보자 개인에 대한 심판이다.” 교과서 문장 같다. 틀린 말 하나 없이 답답할 정도로 정론이다. 1992년 3월13일치 한겨레에 실렸다. “부산 시민들은 민자당의 정치행태를 따끔하게 심판하여야 할 것이다.” 누가 썼을까? 부산의 활동가였던 문재인의 글이다.
1995년 7월6일치 한겨레21에 실린 노무현의 글. 글에 열정이 있다. 노무현과 문재인, 두 대통령의 문체를 비교해본다.
1995년 7월6일치 한겨레21에 실린 노무현의 글. 글에 열정이 있다. 노무현과 문재인, 두 대통령의 문체를 비교해본다.
· [한겨레21] ‘바보 노무현’의 외길 / 2002.4.24
· ‘바보 노무현’의 도전, 지역주의 허문 씨앗이 되다 / 2019.5.20
· 보듬어준 종로서 꿈꾼 선거개혁…20년 지나 되살아나 / 2019.5.21_______
노무현을 두려워한 사람들
노무현을 마음에 담아둔 사람은 일찍부터 많았다. “문화방송 텔리비전의 ‘퀴즈 아카데미’ 시청자퀴즈 공모에서 올해의 ‘한국의 인물’로 노무현 의원이 선정됐다.” 1988년 12월25일치 한겨레에 실린 기사다.(그때는 ‘텔리비전'으로 썼나 보다) 한겨레21은 1999년과 2000년에 호감 가는 정치인이 누구인지 시민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다. 두번 다 1위는 노무현.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이회창과 이인제가 ‘차기 대권'이라 불리던 시절인데 그랬다.
노무현이 표지 인물로 처음 등장한 &lt;한겨레21&gt; 1999년 7월1일치(왼쪽). 노무현은 2002년 3월28일치에 다시 표지에 등장했다. 제목은 무려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무현이 표지 인물로 처음 등장한 <한겨레21> 1999년 7월1일치(왼쪽). 노무현은 2002년 3월28일치에 다시 표지에 등장했다. 제목은 무려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무현을 두려워한 이들도 일찍부터 있었다. 노동자 집회에서 한 말이 앞뒤 맥락 잘리고 악의적으로 보도된 사건이 일어나 노무현이 항의했다는 기사가 1988년 12월29일치 한겨레에 실렸다. “<주간조선>이 허위사실을 보도해 노무현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기사는 1992년 12월5일치. 재계에서 노무현을 “친노동계 정치인”으로 분류해 견제한다는 2000년 4월8일치 기사도 있다.· [한겨레21] 떴다, 노무현! / 2002.3.20
· [한겨레21] 한겨레21, 노풍을 처음 예보하다 / 2002.12.27_______
종로, 이명박…‘악연’의 시작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제3세력은 가능한가? 노무현도 한때 이 문제를 고민했던 것 같다. 1996년 국회의원 선거 때 노무현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거대 양당’에 거리를 둔 채 독자세력으로 서울 종로에 출마한다. 결과는 낙선. 이때 그를 꺾고 당선된 사람이 이명박이다.
1996년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 종로에 출마한 노무현과 이명박. 후보 등록 하러 온 두 사람이 악수하는 장면을 이종근 기자가 찍었다.
1996년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 종로에 출마한 노무현과 이명박. 후보 등록 하러 온 두 사람이 악수하는 장면을 이종근 기자가 찍었다.
그런데 얼마 뒤 이명박은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다. 수를 쓴다. 의원직을 잃기 전에 사퇴를 선언한 것이다. 1998년에 보궐선거가 열리고 노무현이 당선된다.(이때는 김대중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에 몸담고 있었다) “종로는 정치1번지”라는 말을 소개할 때 거론되는 일화다. 노무현과 이명박, 두 사람의 악연이 종로에서 시작했다는 사람도 있다.
별세한 김종수 기자가 남긴 이 사진은 2009년의 잔인한 5월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이 사진을 볼 때면 마음이 일렁인다.
별세한 김종수 기자가 남긴 이 사진은 2009년의 잔인한 5월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이 사진을 볼 때면 마음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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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선택…‘노무현 대통령’을 믿기 시작하다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에서 장관을 지내고 2002년에 대선후보 국민경선에 뛰어든다.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대통령이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적었다. 후보 경선은 이인제가, 대선 본선은 이회창이 이길 것이라고들 생각했다.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광주경선이 있던 3월16일부터였다. 지역주의에 맞서 싸운 그에게 새 미래를 기대했을까? ‘학살 주범’ 전두환 일당을 몰아세우던 청문회 스타를 잊지 않았던 걸까? 광주시민의 선택은 영남사람 노무현이었다. 의미는 컸다. “노무현은 좋지만 설마 대통령이 될까” 의심하던 사람들이 “정말 대통령이 된다”고 믿기 시작했다.
광주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이종근 기자가 찍었다. 나는 그날 노무현이 활짝 웃었다고만 기억했는데 사진을 다시 보니 여러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다. 활짝 웃기만 하던 쪽은 “세상이 바뀐다”며 설레던 그날의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광주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이종근 기자가 찍었다. 나는 그날 노무현이 활짝 웃었다고만 기억했는데 사진을 다시 보니 여러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다. 활짝 웃기만 하던 쪽은 “세상이 바뀐다”며 설레던 그날의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2002년 후보 경선 기간에 노무현은 말했다. “아무도 ‘노풍’을 예견하지 못했는데 딱 한군데 노무현을 알아주고 노풍을 예언한 곳이 있다. 바로 <한겨레21>이다.”노무현이 표지 인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99년 7월1일치 한겨레21이다. ‘여론조사를 해보니 1등이더라’는 기사였다. 2002년 3월28일치에 다시 표지에 오른다. 제목은 무려 “노무현 대통령?”이다. 후보 경선 초반인데 말이다.“처음 염두에 두던 표지 제목은 ‘솟는 노무현 대안론’ 정도였다. 광주경선 현장에서 떠오른 제목은 ‘노무현 돌풍’이었다. 머리를 맞댄 끝에 나온 최종 표제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한 후배는 ‘?보다 !가 나았을 것’이라고 농담처럼 건넸다. 민주당 일부에선 너무 나가지 않았느냐는 반응도 나왔다.” 2002년 4월11일치 한겨레21에 임석규 기자가 털어놓은 뒷이야기다.· [한겨레21] 노무현, 호남 지역주의에 돌진! / 2003.10.7_______
“노무현과 난 전생에 형제였나 보다”
노무현과 김대중은 어떤 사이였을까. 둘 사이가 서먹하다는 추측이 한때 유행했다. 김대중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지도자였다. 노무현이 대선후보가 되었을 때도 좋다 싫다 내색이 없었다. 둘 사이가 나쁘다는 주장도 있었다. 김대중이 아끼던 박지원이 2003년에 이른바 ‘대북송금 특검'으로 구속되고,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2004년에 갈라서는 상황을 보면서였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는 과연 불편했을까?
청와대를 떠나는 김대중을 노무현이 환송하는 모습. 2003년 2월 취임식 직후 김봉규 기자가 찍었다.
청와대를 떠나는 김대중을 노무현이 환송하는 모습. 2003년 2월 취임식 직후 김봉규 기자가 찍었다.
이제는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2008년에 김대중은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과 나는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다. 전생에 형제 사이였나 보다.” 2009년 노무현이 세상을 떠나자 김대중은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내린 것 같다”며 괴로워했다. 노무현의 영결식 때 김대중의 슬피 우는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이 따라 울었다. 최근 귀가 솔깃한 증언이 나왔다. “2002년 광주경선에서 노무현이 1위를 할 수 있도록 김대중이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올해 4월17일 <에스비에스>(SBS)에 출연한 박지원의 주장이다. “민주당의 가치관과 정통성은 노무현에게 있다”고 김대중은 생각했다는 것이다.
서울역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2009년 5월에 김대중은 말했다. “노무현의 유지를 받들어 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고. ‘유지’라니. 먼저 떠난 후배의 ‘유지’를 입에 올리는 손윗사람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해가 다 가기 전 김대중 역시 세상을 떠났다. 촬영은 이종찬 기자.
서울역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2009년 5월에 김대중은 말했다. “노무현의 유지를 받들어 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고. ‘유지’라니. 먼저 떠난 후배의 ‘유지’를 입에 올리는 손윗사람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해가 다 가기 전 김대중 역시 세상을 떠났다. 촬영은 이종찬 기자.
이 증언은 어디까지 사실일까? 2002년 3월25일치 한겨레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노무현에게 밀리던 경쟁 후보 이인제가 “노무현 돌풍의 배후에 김대중이 있으며 둘의 연결고리는 박지원”이라는 주장을 편 것이다. 이때는 지어낸 말이라고들 생각했는데, 웬걸, 박지원의 증언이 나온 뒤 다시 보니 흥미롭다.· [한겨레21] 의리로 얻어낸 신뢰의 상표 / 2004.1.29
· [한겨레21] DJ와 노무현, 전생에 형제간이려나 / 2009.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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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제주
제주4·3평화기념관에 갈 때마다 나는 노무현의 영상을 본다. 4·3사건 때 국가가 저지른 폭력을 국가원수로서 사과하는 영상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기도 하다.
2006년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분향하고 묵념하는 노무현.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이었다. 촬영은 장철규 기자.
2006년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분향하고 묵념하는 노무현.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이었다. 촬영은 장철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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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 다시 봉하를 찾는 날
문재인은 부산의 인권변호사였다. 한겨레 지면에 1988년부터 자주 등장한다. 오랜 친구 노무현의 선거도 도왔다. 그런데 의외다. 노무현의 선거 사진은 많은데 문재인이 찍힌 사진이 거의 없다. 여느 정치권 인사들이 노무현과 함께 사진을 박으려고 어떻게든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 때 문재인은 묵묵히 자기 일을 했던 것이다.그런 문재인에게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2004년부터다. 이른바 ‘노무현 탄핵 정국’ 때 노무현 쪽 대리인단 간사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5월14일에 탄핵을 기각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지켜냈다.
헌법재판소는 5월14일 대통령의 노무현의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지켜냈다. 선고가 나던 날 법정을 나서는 문재인의 표정을 김태형 기자가 사진에 남겼다. 좀처럼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도, 이날만큼은 뭉클한 기쁨을 참지 못했던 것 같다.
헌법재판소는 5월14일 대통령의 노무현의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지켜냈다. 선고가 나던 날 법정을 나서는 문재인의 표정을 김태형 기자가 사진에 남겼다. 좀처럼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도, 이날만큼은 뭉클한 기쁨을 참지 못했던 것 같다.
문재인은 대통령이 되자 봉하의 노무현 묘소를 찾았다. 임기 중에 더 오지 않겠다고,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 퇴임 뒤 다시 오겠다고 밝히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문재인이 다시 봉하를 찾는 날,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며 어쩌면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노무현 상주’ 문재인, 10년 전 오늘 조문객들에게 부탁한 말 / 2019.5.24
[화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 1회 해설자인 김태권 작가는 만화가입니다. 글도 쓰고 일러스트도 그립니다. 요즘은 주로 관악산 자락에서 두 아이를 떠메고 다니며 시간을 보냅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 <히틀러의 성공시대> 등의 만화책을 그렸고, <불편한 미술관>과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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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되는 대만해협위기, 현금인출기로 전락한 한미동맹

[개벽예감 395] 고조되는 대만해협위기, 현금인출기로 전락한 한미동맹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0/05/1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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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트럼프의 전향적인 국가전략수정

2. 대만해협에서 출발하는 대양간 해상비단길

3. 사상 처음 날짜변경선 넘은 중국 함대

4. 10년 동안 컴퓨터모의전쟁연습에서 매번 패한 미국군

5. 현금인출기로 전락한 한미동맹

 

 

1. 트럼프의 전향적인 국가전략수정

 

2018년 10월 3일 국제통화기금(IMF)이 ‘세계금융위기 이후 10년, 우리는 안전한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펴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60개국의 경제가 세계금융위기가 일어난 2008년 이전보다 더 쇠락했는데,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직접적으로 겪었던 24개국의 경제가 특히 더 쇠락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10년 동안 세계경제가 점차적으로 쇠락해온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 60개국 정부들은 2008년에 일어난 세계금융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정지출을 늘렸고, 60개국 중앙은행들은 저금리를 유지하고 금융자산을 대규모 매입했는데, 그런 조치들이 엄청난 부채를 안겨주었다. 이를테면,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전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36%이었던 60개국의 부채비률은 10년 만에 52%로 늘어났다. 금융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빚더미만 엄청나게 키워놓은 것이다. 

 

2) 2008년에 일어난 세계금융위기로 60개국의 실업률이 증가했는데, 실업증가는 지난 10년 동안 빈부격차를 더욱 심하게 벌려놓으면서 결혼률과 출산률을 동반적으로, 지속적으로 떨어뜨려 사회적 생산력을 감소시켰다. 세계금융위기에서 발생한 불행과 고통을 노동계급에게 떠넘겨 실업이 늘어나고 빈부격차가 확대된 것이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세계적 범위에서 발생한 부채증가와 채무불이행, 실업증가와 빈부격차확대를 위험한 현상들이라고 지적한 국제통화기금 보고서가 나온 때로부터 1년이 지난 2019년 11월 말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다. 신형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라는 괴질재앙이 전 세계를 덮친 것이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10년 동안 점차적으로 쇠락해온 세계경제는 전 세계를 덮친 괴질재앙으로 치명적 위험에 빠졌다. 기저질환을 앓는 사람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곧바로 사망하는 것처럼, 10년 동안 점차적으로 쇠락해온 세계경제에 괴질재앙이 덮쳤으니 치명적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세계경제가 점차적으로 쇠락해온 지난 10년 동안 미국과 중국은 어떻게 대처해왔을까? 

 

미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기존 세계화전략을 대폭 수정하여 자국우선주의전략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6년 1월 20일 자국우선주의의 화신이 미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미국 대통령 트럼프다. 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구호를 외치며 등장하더니, 자기는 세계의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이라고 하면서 자국우선주의전략을 강하게 밀고 나갔다. <사진 1> 

 

▲ <사진 1> 2016년 1월 20일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미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변화는 기존 세계화전략을 대폭 수정하고 자국우선주의전략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이 제국주의국가로 남아있는 한 세계지배전략을 버릴 수 없으므로,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지배전략을 종전대로 유지하면서 기존 세계화전략을 대폭 수정한 자국우선주의전략을들고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우선주의전략에 따르면,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이후 10년 동안 점차적으로 쇠락해온 미국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방도는그 동안 미국의 세계화전략에 편승하여 부를 축적한 중국과 친미동맹국들에게서 보상금을받아내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보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중국에게 관세전쟁을 도발했고, 동맹국들에게는 미국군주둔지원금을 대폭 증액하는 현금갈취조치를 강요하고 있다. 트럼프의 현금갈취조치에 가장 먼저 걸려든 대상이 한국이다.  

 

미국이 제국주의국가로 남아있는 한 세계지배전략을 버릴 수 없으므로,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지배전략을 종전대로 유지하면서 기존 세계화전략을 대폭 수정한 자국우선주의전략을 들고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우선주의전략에 따르면,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이후 10년 동안 점차적으로 쇠락해온 미국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방도는 그 동안 미국의 세계화전략에 편승하여 부를 축적한 중국과 친미동맹국들에게서 보상금을 받아내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보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중국에게 관세전쟁을 도발했고, 동맹국들에게는 미국군주둔지원금을 대폭 증액하는 현금갈취조치를 강요하고 있다. 트럼프의 현금갈취조치에 가장 먼저 걸려든 대상이 한국이다.         

 

그러면 중국은 어떻게 대처해왔을까? 2012년 11월 15일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시진핑은 중국식 세계화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2013년 3월 14일 중국 국가주석으로 선출된 그는 2013년 9월 7일 카자흐스탄을 방문하는 중에 아스타나에 있는 나자르바예브 대학교에서 연설하면서 대륙간 육상비단길을 창설하는 중국식 세계화전략을 밝혔다. 또한 시진핑 주석은 2013년 10월 2일 인도네시아를 방문하는 중에 국회에서 연설하면서 대양간 해상비단길을 창설하는 중국식 세계화전략을 밝혔다. 중국식 세계화는 중국이 국운을 걸고 추진하는 21세기 국가전략사업이다.  

 

미국식 세계화전략은 약소국들을 지배, 수탈하고, 적국들을 위협, 침공하는 제국주의전략의 일환이지만, 중국식 세계화전략은 지배와 수탈, 위협과 침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이 제국주의전략을 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대만해협에서 출발하는 대양간 해상비단길

 

중국식 세계화전략을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라고 부른다. 대양간 해상비단길은 한 갈래고, 대륙간 육상비단길은 세 갈래다. 대륙간 육상비단길은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에서 출발하여 몽골-로씨야-유럽으로 이어지는 제1통상로, 시안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우크라이나-유럽으로 이어지는 제2통상로, 시안에서 출발하여 동남아시아-서남아시아-중동-뛰르끼예-유럽으로 이어지는 제3통상로로 갈라진다. 또한 대양간 해상비단길은 중국 푸젠성 푸저우(福州)에서 출발하여 동중국해-남중국해-인디아양-아라비아해-홍해-지중해로 이어지는 거대한 통상로다. 대륙간 육상비단길과 대양간 해상비단길은 이딸리아 항구도시 베니스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아시아와 유럽을 순환하면서 세계 인구 65%의 경제활동을 포괄하는 거대한 세계통상로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중국이 대양간 해상비단길의 출발점을 세계적인 통상-금융거점인 상하이로 정하지 않고 별로 알려지지 않은 푸저우로 정했다는 사실이다. 푸저우는 상하이보다 훨씬 남쪽에 있다. 왜 푸저우를 대양간 해상비단길의 출발점을 정했을까? 지도를 보면, 푸저우는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만의 중심도시 타이베이와 마주하고 있다. 대양간 해상비단길은 사실상 대만해협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 중국이 대양간 해상비단길을 안정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대만해협 지배권을 장악해야 하고, 대만을 수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양간 해상비단길은 대만해협에서 출발하는데, 미국은 대만해협 지배권을 여전히 붙들고 있고, 대만을 자기 영향권 안에 묶어두려고 한다. 중국이 중국식 세계화전략을 추진하려면 대만해협 지배권을 배타적으로 행사해야 하고, 대만을 수복해야 한다. 미국은 대양간 해상비단길을 차단하기 위해 대만해협과 동중국해에서 해군력과 공군력을 시위할 뿐 아니라, 대만의 분리주의세력을 적극 지원하여 대만을 중국에서 떼어내려고 획책하고 있다. <사진 2>

 

▲ <사진 2> 중국식 세계화전략을 일대일로라고 부르는데, 대양간 해상비단길은 한 갈래지만, 대륙간 육상비단길은 세 갈래다. 대륙간 육상비단길과 대양간 해상비단길은 이딸리아 항구도시 베니스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아시아와 유럽을 순환하면서 세계 인구 65%의 경제활동을 포괄하는 거대한 세계통상로가 완성되는 것이다. 대양간 해상비단길은 대만해협에서 출발하는데, 미국은 대만해협 지배권을 여전히 붙들고 있고, 대만을 자기 영향권안에 묶어두려고 한다. 중국이 중국식 세계화전략을 추진하려면, 대만해협 지배권을 배타적으로 행사해야 하고, 대만을 수복해야 한다.  

 

만일 미국이 해군력과 공군력을 동원하여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를 가로막고, 대만을 중국에서 분리시켜 독립국가로 만들면, 중국은 대양간 해상비단길을 운영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중국식 세계화전략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지도 못한 채 반신불수로 될 것이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중국식 세계화전략을 추진하는 것은 미국과 타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 따라서 중국은 미국과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자명해진다.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한 중국은 우선 남중국해 지배권부터 장악했다. 중국은 남중국해 시사군도에 속한 130여 개 섬, 암초, 산호초, 모래톱을 모두 자국 영토로 확정했고, 남중국해 난사군도에 속한 174개 암초, 산호초, 모래톱 중에서 10개를 자국 영토로 확정했다. 중국은 시사군도와 난사군도에 각각 인공섬들을 만들고, 거기에 공군기지와 미사일기지를 건설했다. 그로써 중국은 남중국해 지배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어물어물하다가 남중국해 지배권을 중국에게 빼앗긴 미국은 ‘항행의 자유 작전’이니 뭐니 하면서 남중국해에 이지스미사일구축함을 계속 출동시키고 있지만, 남중국해 지배권이 중국에게 넘어간 이상 미국의 그런 행동은 시비를 거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중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만해협 지배권을 장악하는 것인데, 이 문제는 대만을 수복하는 통일전쟁과 직결된다.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은 두 가지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미국의 영향권 안에 있고, 분리주의세력의 통치 아래에 있는 대만을 수복하여 국토를 완정하는 것이며, 둘째는 중국의 21세기 국운이 걸려있는 중국식 세계화전략의 한 축인 대양간 해상비단길을 안정적으로 운용하게 되는 것이다.   

 

 

3. 사상 처음 날짜변경선 넘은 중국 함대

 

중국은 오래 전부터 대만통일전쟁을 체계적으로, 지속적으로 준비해왔는데,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준비를 완료하는 해가 올해 2020년이다. 대만 언론매체 <중앙통신사> 2018년 9월 1일 보도에 따르면, 대만 국방부는 2018년 8월 31일 입법원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이 2020년까지 대만통일전쟁준비를 완료할 것으로 예견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중국은 올해 2020년 초부터 대만을 수복하기 위한 사전행동에 나섰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재앙도 중국의 무력통일의지를 가로막지 못했다. 

 

대만을 수복하려는 중국의 무력통일의지는 2020년 2월 초 어느 날 태평양 한 복판에서 극적으로 발현되었다. 그날의 사변을 보도한 중국인민해방군 기관지 <지에팡쥔바오>와 일본 <요미우리신붕> 2020년 3월 29일부에 실린 기사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2020년 2월 초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소속 7,500t급 이지스미사일구축함 3척과 45,000t급 지원함 1척으로 편성된 함대가 “흥분과 긴장 속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날짜변경선을 넘었다. 지도를 보면, 중국 상하이에서 태평양 한 복판에 그어진 날짜변경선까지 직선거리는 약 5,800km다. 이제껏 근해방어훈련에 힘을 집중해온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이 그날은 태평양 한 복판으로 항진하여 상하이에서 5,800km 떨어진 날짜변경선을 사상 처음으로 넘은 것이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날짜변경선을 넘어가는 극적인 원양기동훈련에 참가한 그들이 어찌 흥분과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2) 날짜변경선을 넘은 중국 함대는 미국 하와이주 오하후섬 서쪽 300km 해상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면, 날짜변경선에서 오하후섬까지 직선거리는 약 1,430km이므로, 중국 함대는 날짜변경선을 넘어 동쪽으로 약 1,100km를 더 항진하여 오하우섬 서쪽 300km 해상에 도착한 것이다. 중국 함대가 접근한 오하우섬에는 무엇이 있을까? 방대한 무력으로 미국의 인디아양-태평양지배체제를 안받침해주는 인도-태평양사령부 본부가 자리 잡은 캠프 스미스(Camp H. M. Smith)가 있다.  

 

3) 미국 인도-태평양사령부 본부로부터 약 300km 떨어진 해상에 도착한 중국 함대는 두 편으로 나뉘어 “실전을 상정한 훈련”을 했다. 함대를 두 편으로 나눠 실전연습을 했다면, 두 개의 타격대상을 동시에 공격하는 실전연습을 한 것이다. 그날 중국 함대가 모의공격을 연습한 두 군데 타격대상 중에서 한 군데는 인도-태평양사령부 본부인 것이 분명한데, 나머지 한 군데는 어디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중국 함대에 탑재된 공격무기체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날 오하우섬 앞바다에서 실전연습을 벌인 중국 구축함들은 052D형 이지스미사일구축함들이다. 이 구축함들에는 순항미사일 수직발사관 64문이 설치되었는데, 사거리가 540km인 초음속 순항미사일 잉지(YJ)-18이 그 속에 들어있다. 이 초음속 순항미사일은 마하 0.8의 아음속으로 해수면을 스치듯이 날아가다가 타격대상으로부터 40km 떨어진 상공에 이르러 마하 2.5~3.0의 초음속으로 도약비행을 하므로, 미국군의 미사일방어망을 뚫을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그 초음속 순항미사일이 함대지순항미사일과 함대함순항미사일 두 종류로 나뉘어 수직발사관에 각각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함대지순항미사일은 인도-태평양사령부 본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고, 함대함순항미사일은 오하우섬 진주항에 있는 해군기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중국 함대는 두 종류의 초음속 순항미사일 잉지-18을 각각 발사하여 인도-태평양사령부 본부와 진주항 해군기지를 동시에 공격하는 실전연습을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4) 하와이주 오하우섬 앞바다에서 실전연습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국 함대는 미국의 서태평양 군사전략거점인 괌(Guam)에서 서쪽으로 611km 떨어진 필리핀해를 지날 때, 자기들을 감시하며 따라오던 미국 해군 P-8A 해상초계기를 향해 레이저광선을 쏘았다. 레이저광선을 맞은 P-8A 해상초계기는 황급히 기수를 돌려 일본 오끼나와 가데나에 있는 발진기지로 돌아갔다. <사진 3> 

 

▲ <사진 3> 위의 사진은 중국인민해방군이 운용하고 있는 052D형 이지스미사일구축함을 촬영한 것이다. 7,500t급인 이 구축함에는 순항미사일 수직발사관 64문이 설치되었는데, 사거리가 540km인 초음속 순항미사일 잉지-18이 그 속에 들어있다. 이 초음속 순항미사일은함대지순항미사일과 함대함순항미사일 두 종류로 나뉘어 수직발사관에 각각 들어있다.2020년 2월 초 이지스미사일구축함 3척과 지원함 1척으로 편성된 중국 함대가 사상 처음날짜변경선을 넘어 하와이주 오하후섬 서쪽 300km 해상에 도착했다. 오하우섬에는 미국인도-태평양사령부 본부와 진주항 해군기지가 있다. 그날 중국 함대는 두 종류의 초음속 순항미사일을 각각 발사하여 인도-태평양사령부 본부와 진주항 해군기지를 동시에 공격하는실전연습을 진행했다.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태평양작전구역에 배치된 미국의 해군력과 공군력을 제압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하와이 오하우섬에 있는 인도-태평양사령부와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해야 한다. 중국 함대가 날짜변경선을 넘어 오하우섬 앞바다에서 대담한 실전연습을 벌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그날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담한 군사행동은 오하우섬 앞바다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다. 중국 함대가 오하우섬 앞바다에서 실전연습을 하고 있었던 2020년 2월 9일과 10일 이틀에 걸쳐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소속 훙-6K 전략폭격기, 젠-11 전투기, 쿵징-500 조기경보기로 편성된 공군무력이 장거리항공작전을 연습하고 있었다. 장거리항공작전은 대만해협의 중간선 상공을 넘어 대만 남부해역 상공으로 접근하였다가, 대만과 필리핀 북부 사이의 바시해협을 통과하여 서태평양 상공으로 나갔다가 북상하여, 일본 오끼나와섬과 미야꼬섬 사이에 있는 미야꼬해협 상공에서 대만 북동부해역 상공을 거쳐 중국 본토로 돌아가는 긴 경로를 따라 전개되었다.  

 

대만해협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한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담한 군사행동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연합뉴스> 2020년 3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소속 훙-6K 전략폭격기, 젠-11 전투기, 쿵징-500 조기경보기로 편성된 항공무력이 2020년 3월 16일 대만 서남부해역 상공에서 야간비행훈련을 하다가 대만방공식별구역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연합뉴스> 2020년 4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소속 60,000t급 항공모함 랴오닝함, 7,500t급 이지스미사일구축함 2척, 4,000t급 미사일호위함 2척, 48,000t급 보급함 1척으로 편성된 항모전단은 2020년 4월 초 중국 산둥성 칭다오항을 출항하여 4월 11일 미야꼬해협을 통과했고, 12일 대만 동부해역을 지나면서 항공모함에 탑재된 대잠헬기를 이륙시켜 대잠수함훈련을 진행했다고 한다. 

 

또한 중국인민해방군은 2020년 5월 14일부터 보하이만에서 항모전단이 참가한 가운데 실사격훈련을 시작했는데, 이 훈련은 앞으로 두 달 반 동안 계속된다. 

 

대만해협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한 군사행동은 민족주의와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중국 언론매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2020년 5월 11일 보도에 따르면, 최근 중국의 퇴역장성들은 태평양에 배치된 미국 항공모함 4척이 모두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마비된 지금이야말로 대만을 무력으로 수복할 기회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의 정치평론가들도 대만을 평화적으로 통일할 가능성이 사라졌으므로 2005년에 제정된 반분렬국가법에 의거하여 대만을 수복하는 통일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런 주장에 중국 인민들이 호응하고 있다고 한다.  

 

 

4. 10년 동안 컴퓨터모의전쟁연습에서 매번 패한 미국군

 

중국이 대만해협 지배권을 장악하고, 대만을 무력으로 수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은 극도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인도-태평양사령부는 태평양작전구역에 배치한 해군력과 공군력을 대만해협으로 계속 들이밀었다. 2020년 초부터 미국이 대만해협에서 전개한 군사행동을 날짜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감행하는 미국의 군사행동에 대한 서술은 생략한다.)

  

1월 16일 미국 해군 소속 이지스미사일순양함 샤일로함이 대만해협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통과했다.

1월 12일 미국 공군 소속 B-52H 장거리전략폭격기가 대만섬 동부해역 상공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통과했고, 미국 공군 소속 MC-130J 특수작전기가 대만해협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통과했다. 

2월 13일 미국 해군 소속 P-3C 해상초계기가 대만 최남단 인근 해역 상공을 비행했다.

2월 15일 미국 해군 소속 이지스미사일순양함 챈슬러빌함이 대만해협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통과했다. 

3월 25일 미국 해군 소속 이지스미사일구축함 맥켐벨함이 대만해협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통과했다.

4월 10일 밤부터 11일 새벽 사이에 미국 해군 소속 이지스미사일구축함 배리함이 대만해협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통과하면서 중간선에서 중국쪽에 있는 마쭈렬도 인근 해상에 접근했다.

4월 13일 미국 RC-135W 통신감청정찰기와 P-3C 해상초계기가 대만 남부해상 상공에 나타났다. 

5월 13일 미국 해군 소속 이지스미사일구축함 맥캠벨함이 대만해협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통과했다. 

5월 14일 미국 공군 소속 B-1B 장거리전략폭격기 2대가 대만 동부해역 상공에서 KC-135 공중급유기 2대로부터 각각 급유를 받고 서북쪽으로 비행했다. 그보다 앞서 지난 5월 1일 미국 텍사스주 다이스공군기지에서 이륙한 장거리전략폭격기 B-1B 4대가 2대씩 편대를 이뤄 일본 오끼나와 상공과 동중국해 상공으로 비행하였다가 괌에 있는 앤더슨공군기지에 착륙했는데, 이것은 일시적 착륙이 아니라 약 200명의 장병들과 함께 그 공군기지에 전진배치된 것이다. 미국은 지난 16년 동안 앤더슨공군기지에 배치했던 B-52H 장거리전략폭격기 5대를 2020년 4월 17일 미국 본토로 철수하는 대신 그 공군기지에 B-1B 장거리전략폭격기 4대를 배치했다.  

 

그런데 2019년 7월 30일 마익 라운드 미국 연방상원의원이 상원군사위원회 인준청문회에서 지적한 바에 따르면, 미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B-1B 장거리전략폭격기 61대 중에서 39대는 기술점검을 받고 있고, 15대는 창정비를 받고 있는 중이므로 즉시 작전에 동원될 수 있는 것은 6대 뿐이라고 한다. 

 

지금 중국과 미국이 대만해협에서 벌이는 군사행동이 격화되면 국지전이 일어날 것인지 아니면 전면전이 일어날 것인지 예단하기 힘들지만, 중국과 미국의 전쟁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중미전쟁이 일어나면 어느 쪽이 이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세인의 관심사로 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2020년 4월 21일 미국에서 출판된 ‘죽임의 사슬: 미래의 첨단기술전쟁에서 미국을 수호하여“라는 제목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 연방상원 군사위원회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크리스천 브로즈가 집필한 그 책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미국 국방부는 미국과 중국이 싸우는 컴퓨터모의전쟁연습을 진행해왔는데, 컴퓨터모의전쟁연습의 결과는 미국군이 ”매번 거의 완벽하게“ 패하는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미국 공군이 운용하는 B-1B 장거리전략폭격기를 촬영한 것이다. 미국은 지난 16년 동안 괌의 앤더슨공군기지에 배치했던 B-52H 장거리전략폭격기 5대를 2020년 4월 17일 미국 본토로 철수하는 대신 그 공군기지에 B-1B 장거리전략폭격기 4대를 배치했다. 이것은 장거리전략폭격능력을 한층 더 강화한 조치로 된다. 왜냐하면 군사강국인 중국을 상대로 미국이 전쟁을 하려면, B-52H 장거리전략폭격기보다 B-1B 장거리전략폭격기를 사용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B-1B 장거리전략폭격기 61대 중에서 39대는 기술점검을 받고 있고, 15대는 창정비를 받고 있어서 즉시작전에 동원될 수 있는 것은 6대 뿐이다. 미국군은 첨단무기를 자랑하지만, 그들의 작전준비태세는 대체로 그런 수준에 있다.  

 

지난 10년 동안 컴퓨터모의전쟁연습에서 미국군이 매번 중국인민해방군에게 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무기체계와 군사훈련은 미국을 공격하는 특수한 전투환경에 맞춰 개발된 반면에, 미국의 무기체계와 군사훈련은 중국을 공격하는 특수한 전투환경에 맞춰 개발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전투환경에 맞춰 개발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예상씨나리오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1) 중국이 둥닝-2 위성요격미사일을 발사하면, 미국의 정찰위성들은 모조리 파괴되고, 미국의 눈은 멀어버린다.

2) 중국이 정밀타격미사일을 집중발사하면, 괌의 미국군기지와 일본의 미국군기지들은 모조리 파괴된다. 중국이 발사하는 정밀타격미사일은 미사일방어망을 뚫는 미사일들이다.  

3) 중국이 핵추진잠수함들을 서태평양에 출동시키면, 미국 항모전투단은 중국 본토로 접근하지 못한다.

4) 중국이 지대공미사일과 함대공미사일을 발사하면, 미국 공군 F-35 스텔스전투기들에 항공유를 공급하는 공중급유기들이 모조리 격추된다. 그렇게 되면 작전반경이 짧은 F-35 스텔스전투기들은 중국 본토 상공에 접근하지 못한다. 

5) 중국 연안에 접근한 미국의 핵추진함수함들이 잠대지미사일로 중국 본토의 군사기지들을 공격하면, 중국은 장거리탄도미사일로 하와이의 인도-태평양사령부와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한다. 

 

대만통일전쟁에서 중국이 우려하는 것은 미국의 핵공격이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전략핵탄두를 전술핵탄두로 개조한 것은 미국이 핵무기를 억제력으로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실전무기로 사용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한 것이다. 최근 미국이 전술핵탄두를 개발하기 시작한 것에 자극을 받은 중국은 두 가지 대비책을 서둘렀다. 

 

1) 중국은 미국의 전술핵공격을 받았을 때를 가정한 보복핵공격을 연습했다. 중국 언론매체 <글로벌타임스> 2020년 1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2020년 1월 15일 중국인민해방군 로켓군 산하 1개 여단이 지하갱도기지에서 미국의 핵공격을 받은 상황을 가정하여 지하갱도기지를 밀폐시키고 보호장비를 착용한 다음, 산소부족, 피로, 배고픔을 극복하는 생존훈련을 진행했으며, 핵타격미사일을 발사하여 미국에게 보복핵공격을 가하는 훈련을 진행했다고 한다. 

 

2) 중국은 미국을 상대로 가장 확실한 핵억제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2020년 1월 5일 보도에 따르면, 2019년 12월 22일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은 새로 개발한 쥐랑(JL)-3 잠대지탄도미사일을 보하이만에 출동한 11,000t급 094형 핵추진잠수함에서 시험발사했다고 한다. 이날 수중에서 시험발사된 쥐랑-3 잠대지탄도미사일에 장착된 모의탄두는 중국 신장자치구에 있는 고비사막에 떨어졌는데, 사거리가 12,000~14,000km인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094형 핵추진잠수함에는 쥐랑-3 잠대지미사일을 발사하는 수직발사관 24문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중국 핵추진잠수함은 자국 영해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미국 본토 전역을 핵타격미사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사거리가 12,000~14,000km인 잠대지탄도미사일 24발을 핵추진잠수함에 탑재하면, 중국은 미국의 핵공격을 억제하는 가장 확실한 핵억제력을 보유하게 된다.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을 단행해도 미국은 중국에게 핵공격을 감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5. 현금인출기로 전락한 한미동맹

 

“미국은 동맹국들을 위해 돈을 지불하는 데 지쳤다”고 푸념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세계화전략을 대폭 수정하고 자국우선주의전략을 추진하는 중이고, 21세기 “중국의 꿈”을 실현하려는 시진핑 주석은 중국식 세계화전략을 추진하는 중이다. 그런데 한국은 트럼프식 자국우선주의전략에서 우선순위 밖으로 밀려났고, 한반도는 중국식 세계화전략의 범위 밖에 있다.  

 

주목되는 것은, 중국식 세계화전략과 미국의 태평양지배전략이 상호대립하는 경계선이 한반도 군사분계선에 그어지는 게 아니라 일본렬도에서 대만해협으로 이어지는 동중국해 해상에 그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미국은 태평양지배전략을 종전대로 계속 추진하기 위해 미일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있으며, 대만해협에서 도발적인 군사행동을 계속 감행하는 중이다. 

 

미국의 태평양지배전략에서 보면, 미일동맹체제는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수호하는 전략거점이고, 한미동맹체제는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외곽에서 방어하는 전초거점이다. 한미동맹은 이처럼 미국의 태평양지배전략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갖지 못하고, 미일동맹에 부속된 보조적 지위밖에 갖지 못했는데도, 미국이 이제껏 한미동맹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던 까닭은 미일동맹을 외곽에서 방어해주는 전초거점이 자기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진 5>

 

▲ <사진 5> 위의 사진은 한미연합군 창설기념식 장면이다. 병사들이 깃발을 다섯 개나 들고있다. 한미연합군이라면서 유엔기를 들고 나온 꼴이 우스꽝스럽다. 한미연합군은 유엔안전보장리사회의 지시를 받지 않고, 유엔안전보장리사회에 보고도 하지 않는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 미국의 태평양지배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그들은 임의로 유엔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미국의 태평양지배전략에서 보면, 미일동맹체제는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수호하는전략거점이고, 한미동맹체제는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외곽에서 방어하는 전초거점이다. 그러나 중국인민해방군과 미국군이 대만해협에서 군사대결을 벌일수록, 한미연합군의전략적 가치는 감소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미국과 중국이 무력충돌을 벌여도 한미연합군은 대만해협으로 출동할 수 없고, 주한미국군도 대만해협으로 출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선으로 군대를 출동시키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 한미동맹을 바라보는 트럼프대통령의 시선은 싸늘하다. 그의 눈에는 한미동맹이 보상금을 받아내는 현금인출기로 보일뿐이다.  

 

그러나 중국인민해방군과 미국군이 대만해협에서 군사대결을 벌일수록, 한미연합군의 전략적 가치는 감소된다. 왜냐하면 미국과 중국이 무력충돌을 벌여도 한미연합군은 대만해협으로 출동할 수 없고, 주한미국군도 대만해협으로 출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미국은 한국군을 윁남전선으로 출동시켰지만, 그것은 윁남전선의 비정규전에 한국군 지상군부대를 동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사정은 완전히 다르다. 대만해협에서 미국과 중국이 무력충돌을 벌이면, 쌍방에서 해군력과 공군력을 동원하게 되는데, 한국 공군 전투기들은 작전반경이 짧아 대만해협까지 날아가지도 못하고, 한국 해군 군함들은 대만해협으로 떠나기 전 중국인민해방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서해와 남해에서 격침될 것이다. 더욱이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에 돌입하면, 조선도 즉각 조국통일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사정이 그렇게 얽혔으니, 미국은 한미연합군을 한반도 밖으로 출동시킬 엄두도 내지 못한다.  

 

전선으로 출동하지 못하는 군대를 어디에 쓰겠는가!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 한미동맹을 바라보는 트럼프 대통령의 시선은 싸늘하다. 그의 눈에 한미동맹은 보상금을 받아내는 현금인출기로 보일 뿐이다. <동아일보> 2020년 5월 15일 보도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는 미국군주둔지원금을 2020년에 13% 인상하고, 2024년까지 5년 동안 매년 7~8%씩 인상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 방안을 거부하면서 2020년에 전년대비 49%를 인상하여 13억 달러를 받아내고, 2021년에 협상을 다시 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부터 해마다 13억 달러 이상 추가로 받아내어 앞으로 5년 뒤에는 연간 100억 달러씩 뜯어가려는 것이다. 2019년 8월 15일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유세 중에 “미국은 동맹국들을 위해 돈을 지불해주는데 지쳤다”고 푸념한 것은 한국에게서 연간 100억 달러씩 보상금을 뜯어내기 위해 앞자락을 깔아놓은 것이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인 필립 럭커와 캐롤 러닝이 공동집필한 책 ‘매우 안정적인 천재(A very Stable Genius)'가 2020년 1월 21일 미국에서 출판되었는데, 그 책에 들어있는 내용에 따르면, 2017년 7월 20일 미국 국방부 청사에서 진행된 전략회의 중에 트럼프 대통령은 만일 한국이 100억 달러를 내놓지 않으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전략환경이 이처럼 근본적으로 바뀌었는데도, 현금인출기로 전락한 한미동맹을 여전히 숭상하면서 주한미국군에게 의존하는 것은 자멸을 부르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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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대통령 "헌법 전문에 5.18 정신 넣어야"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05/18 10:08
  • 수정일
    2020/05/18 10:0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5.18 인터뷰..."이명박-박근혜 정권의 5.18 폄하, 분노스러웠다"

 

문재인 대통령이 5.18 광주민중항쟁 40주기를 앞두고 헌법 전문에 5.18 정신을 넣어야 한다며 개헌을 언급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하면서 여권 내부에서 개헌 논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문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개헌을 언급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문 대통령은 17일 오전 광주MBC가 방영한 5.18 40주년 특별기획 <문재인 대통령의 오일팔>에 출연해 "앞으로 언젠가 또 개헌이 논의가 된다면 헌법 전문에서 그(5.18) 취지가 반드시 되살아나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문 대통령은 실제로 지난 2018년 5월 개헌안을 직접 발의하기도 했다. 해당 개헌안은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지만 야당 의원 대부분이 불참함에 따라 투표가 좌절됐다.

 

문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개헌안 발의를 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비록 국회를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제가 발의한 개헌안 그 전문에 5.18 민주화운동의 이념의 계승, 이것이 담겨있다"고도 했다.

 

 

그는 "현재 우리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에 의해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4.19민주운동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으로 그렇게만 헌법 전문에 표현되어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발전시켜온 민주주의가 실제로 문안화돼서 집약돼 있는 것이 우리의 헌법"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4.19의 혁명만으로 민주 이념의 계승을 말하기에는 4.19혁명 이후에 아주 장기간에 어찌 보면 더 본격적인 군사 독재가 있었기 때문에 4.19운동만 가지고는 민주화운동의 어떤 이념의 계승을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촛불혁명은 시기상으로 아주 가깝기 때문에 정치적 논란의 소지가 있어서 아직 헌법 전문에 담는 것이 이르다"면서 "적어도 5.18민주운동과 6월항쟁의 이념만큼은 우리가 지향하고 계승해야 될 하나의 민주 이념으로서 우리 헌법에 담아야 우리 민주화운

동의 역사가 제대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아울러 5.18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전히 발포의 명령자가 누구였는지, 발포에 대한 법적인 최종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이런 부분들은 밝혀지지 않았다"며 "마침 오늘(12일)부터 5.18진상조사위원회가 본격적인 조사 활동이 시작됐는데, 이번에야말로 아직 남은 진실들이 전부 다 밝혀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는 "결국 과거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어야 한다. 치유되어야 화해가 있고, 또 국민 통합이 이루지는 것"이라면서 "그 출발은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는 것, 그 진실의 토대 위에서만 화해가 있고 통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용서도 진실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도 행방을 찾지 못하고, 또 시신도 찾지 못해서 어딘가에는 아마 암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 그런 집단 학살자들, 그분들을 찾아내는 일들, 또 헬기 사격까지 하게 된 그 어떤 경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그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 그런 어떤 그 공작의 실상들까지 다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5.18에 대해선 "폄하된다할까 하는 것이 참으로 분노스러웠다"고 표현했다. 

 

그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대통령들이 참석도 않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도 못 하게 해서 유족들이 따로 기념행사를 가졌다"며 "5.18민주화운동 정신에 대한 존중, 진심, 이런 부분이 거의 담겨 있지 않았다. 또, 유족들이 따로 기념식을 치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민망하고 부끄러운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때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광주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대한민국 전체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로 승화시키고, 제대로 기념식을 치러야겠다는 그런 식의 각오를 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5.18하면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80년대 이후의 부산 지역의 민주화운동은 광주를 알리는 것이었다"며 "광주를 알게 될수록 시민들은 그 당시 광주가 외롭게 고립돼 희생당했는데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두었던 그 사실에 대해 큰 부채의식을 가지게 됐고, 그것이 이제 민주화운동의 하나의 또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당시 노무현 변호사와 제가 주동이 돼 부산 카톨릭 센터에서 5.18 광주 비디오, 말하자면 관람회를 가졌다"며 "그때 비로소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그런 분들도 많았다"고 부연했다. 

 

문 대통령은 또 과거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됐던 당시 경찰로부터 광주 상황을 전해들은 순간을 떠올리며 "저는 광주 바깥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먼저 광주의 진실을 접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며 5.18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2017년 취임 직후 참석한 5.18 기념식 때 유족 김소형 씨를 안아줬을 때의 소회도 밝혔다.

 

그는 "그분이 5.18 당일 날 태어난 것과 아버지가 전남 완도에서 일하시던 분인데,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왔다가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서 사망하게 된 거였다"며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었다면 엄마 아빠가 지금도 행복하게 잘살고 있지 않을까 이런 사연을 추도사에 담았는데, 그 추도사를 들으면서 누구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51709170861977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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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공덕비’ 시민들은 폭파하자는데 옮겨놓자는 포천시, 도대체 왜?

시민단체 “철거 아닌 이설 결정하는 바람에 해결 안 돼”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20-05-17 16:13:08
수정 2020-05-17 16: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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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논개 생가지를 지나 오른편에 위치한 연못의 정자인 '단아정'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 1999년 10월 쓴 것으로 알려진 정자 현판이 20년만에 철거됐다. 2019.12.3.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논개 생가지를 지나 오른편에 위치한 연못의 정자인 '단아정'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 1999년 10월 쓴 것으로 알려진 정자 현판이 20년만에 철거됐다. 2019.12.3.ⓒ뉴스1 
 
충청북도 청주시 청남대에 있던 전두환·노태우 동상이 철거된다. 도는 이들의 이름을 딴 대통령 길도 폐지하고 유품사진 등의 기록도 전시하지 않기로 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걸려 있던 ‘전두환 친필 현판’도 5월 중으로 ‘안중근체’로 교체된다. 지난해 말엔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가 30년 가까이 보관·전시하고 있던 전두환 부부의 물품을 철거했다. 비슷한 시기에 전두환이 직접 쓴 장수군 장계면 주논개 생가지 정자 현판도 철거됐다.

이처럼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전두환 흔적 지우기가 이뤄지고 있다. 전두환이 아무리 ‘전직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5.18 광주학살의 주범이면서 대법원에서 혐의가 확정된 내란·반란 수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기도 포천시 축석고개 삼거리 부근엔 여전히 ‘전두환 공덕비’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철거하라” 민원으로 포천시가 2018년경에 한차례 철거 또는 이설을 검토한 바 있으나, 무산된 뒤 아무런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당시 시는 시정조정위원회를 거쳐 이설(移設)을 결정하고 950만원 상당의 예산을 편성했으나, 시의회에서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서 무산됐다. 이후 이에 대한 논의는 전개되지 않고 답보상태에 놓였다.

17일 오전 포천시 전두환 공덕비 철거를 촉구하는 상징의식의 모습.
17일 오전 포천시 전두환 공덕비 철거를 촉구하는 상징의식의 모습.ⓒ이명원 제공

‘철거’ 요구했는데, ‘이설’ 결정

‘전두환 공덕비’는 지난 1987년 12월 세워졌다. 시민단체가 철거를 요구하며 뜯어내 지금은 사라진 비석 동판엔 “개국 이래 수많은 외침으로부터 굳건히 나라를 지켜온 선열들의 거룩한 얼이 깃든 이 길은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분부로 건설부와 국방부가 시행한 공사로서 ‘호국로’라 명명하시고 글씨를 써 주셨으므로 이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한다”는 찬양 문구가 적혔다. 불리는 명칭 그대로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덕비인 셈이다.

또 이 비석엔 전두환의 친필 글씨체로 커다랗게 ‘호국로’(護國路)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 옆엔 ‘대통령 전두환’(大統領 全斗煥)이 적혔다.

포천진보시민네트워크 등 시민사회는 해마다 5월 18일이 다가오면 이를 철거하라고 요구해 왔다. 역사적으로나 법원 판결로나 범죄자로 규명됐음에도, 여전히 반성이 없는 이의 행적을 기려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2018년 5월 17일엔 시민사회가 해당 비석을 흰 천으로 가리고 그 위에 ‘학살자 전두환 죄악 증거비’라고 적힌 현수막을 거는 상징의식을 벌였다. 또 이듬해엔 민중당 포천시위원회가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 씨의 발언인 ‘민주주의 아버지’가 적힌 현수막을 걸고, 붉은 페인트가 묻은 공을 던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올해도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시에 해당 비석 철거를 촉구하면서 퍼포먼스를 벌일 예정이다.

하지만 시는 여전히 해당 비석을 철거할 계획이 없다. 지난 13일 경기도 포천시 관련 부서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2018년도에 (공덕비 이설이) 추진했다가 무산된 뒤로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2018년 9월 포천시는 부시장과 30여 명의 국장급 공무원들로 구성된 시정조정위원회를 개최해 해당 비석을 어떻게 할지 논의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시는 ‘철거’가 아닌 ‘이설’을 결정했다.

그해 9월 7일 열렸던 포천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정례회에 참석한 시 관계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에 관련된 학살자라고 해도, 대통령이 지시해서 건설된 비를 일방적인 민원만 갖고 철거하면 되느냐는 민원도 많이 받았다”라며 “대통령 공적을 기리는 동판은 제거됐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진보단체 요구사항도 들어 준 것이고, 또 비석을 왜 없애느냐는 반대급부적인 민원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에 옮기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시의회에 ‘전두환 공덕비’ 이설 비용으로 950만원을 승인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설 비용은 승인되지 않았다. 이설로는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세화 예산결산특별위원장(더불어민주당 소속)은 그해 9월 12일 열린 포천시의회 본회의에서 “이설은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하여 끊임없는 민원이 제기될 우려가 있다”며 “시민 여러분께서 주신 소중한 예산을 헛되이 쓰지 않도록 이설 공사를 보류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손세화 포천시 시의원은 지난 2018년 9월 17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전두환 공덕비 철거 또는 이설 여부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이같은 댓글들이 달렸다.
손세화 포천시 시의원은 지난 2018년 9월 17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전두환 공덕비 철거 또는 이설 여부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이같은 댓글들이 달렸다.ⓒ손세화 시의원 게시물 갈무리

“포천에 전두환 공덕비, 치욕”
“철거 말고 발파해야”
“흑역사도 역사...이전해 기록해야”
“이전하는 비용도 아까워”

처음부터 이설이 아닌 철거를 주장했던 손세화 시의원은 이후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그해 9월 17일 손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전두환 공덕비 관련 의견수렴을 수렴한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그러자,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전두환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죄인으로, 그런 자의 공덕비가 포천에 있다는 건 치욕이다. 철거가 아닌 폭파, 해체해야 한다”는 분노 서린 글이 달리는가 하면, “잘못된 역사도 역사다. 논쟁이 있었다는 걸 기록해서 이전해야 한다”는 글도 달렸다.

“철거는 당연히 해야 하고, (전두환이 지은) 도로명도 개명해야 한다”, “돌이라도 던지게 철거하는 과정에 포천시민들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 “발파해야 한다”, “그냥 엎어뜨려 시민들 평상으로 사용하고, 철거비용은 복지 사각지대 있는 분들을 위해 쓰는 게 좋겠다” 등의 글도 달렸다.

또 한 시민은 “5.18 학살의 주범 공덕비가 의견을 청취할 문제인가, 바로 없애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항의하는 글을 달았다.

댓글만으론 철거 쪽이 우세해 보였으나, 15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손 의원은 “그냥 돌덩이에 불과한데 거기에 너무 의미부여하는 것 아니냐, 그런 데에다가 왜 예산을 쓰느냐 등의 항의전화도 많이 온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당 내에서도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라며, 2018년 이후 철거 방향으로 관련 논의를 이끌지 못한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포천시 소흘읍 축석검문소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 '전두환 공덕비'.
포천시 소흘읍 축석검문소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 '전두환 공덕비'.ⓒ민중의소리

“공무원이 대법원판결 따라야지 뭘 따르나?”

전두환 공덕비 철거 및 이전 논의가 전개되지 않는 이유는 포천시가 ‘기계적 중립’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탓으로 보인다.

2018년 9월 7일 개최한 제135회 포천시의회 1차 정례회 기록을 보면, 손세화 시의원이 “950만 원을 들여서 이설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런 흑역사는 아예 제거하는 게 낫지 않나”라고 묻자, 시 건설과장은 “시민단체에서 (철거하라고) 민원을 내지만 (또 한편에선) 나이 드신 분들이 민원실에 계속 전화해서 존치해야 한다, 시민단체들 퍼포먼스하는 걸 왜 가만두느냐며 항의한다”며 “(양쪽에서) 이런 민원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이설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해 부탁드린다”라고 답했다.

또 손 시의원의 지적과 시 건설국장 대답에 미래통합당 소속 송상국 시의원은 “공무원이 공무원 업무 수행하는데, 정치적인 이념을 가지고 해야 되는 건가. 흑역사고 무슨 역사고 정치적인 개념으로 공무원이 일을 한다고 하면 공무원이 할 일이 뭐가 있나. 그 발언 굉장히 부적절하다”라며 거칠게 항의했다. ‘전두환은 맹백한 죄인이고 흑역사’라는 전제가 정치적인 해석이라며, 이를 공무원에게 요구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명백한 죄인이다. 전두환은 1997년 4월 17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군사반란죄, 국헌문란죄, 폭동죄, 간접정범죄, 내란죄, 내란목적살인죄, 반란죄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과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그가 풀려날 수 있었던 이유는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해 12월 김영삼 대통령이 퇴임 2개월을 앞두고 ‘국민 화합’이란 이유를 붙여 그를 특별사면했기 때문이다.

이명원 포천진보시민네트워크 대표는 “대법원에서 학살자로 인정 됐는데, 공무원이 대법원의 입장에서 해야지 어떤 입장에서 하란 건가”라고 말했다. 이어 “철거 예산을 올렸어야 했다. 시 집행부에서 이설 예산을 올리는 바람에 해결이 안 되는 상태로 2년이 흐른 것”이라며 “대법원판결이나 역사적 규명으로 이미 결론이 난 것을 기초로 충청북도에서도 청남대에 있는 동상을 철거하기로 한 것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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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5·18 필름 들고 스웨덴행, 전두환이 쫓던 '그들' 찾았다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 ⑥-1] 외무부 비밀문서에 담긴 평화봉사단 두 사람

20.05.18 07:16l최종 업데이트 20.05.18 07:16l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2020년, <오마이뉴스>는 '평화봉사단'에 주목했다. 항쟁의 복판에 있었던 '증인'들의 이야기를 연속 보도한다.[편집자말]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사진은 1980년 7월 22일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김용식 주미대사에게 보낸 'Peace Corps(평화봉사단) 단원의 광주사태 관련 발언' 대외비 문서다.
▲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사진은 1980년 7월 22일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김용식 주미대사에게 보낸 "Peace Corps(평화봉사단) 단원의 광주사태 관련 발언" 대외비 문서다.
ⓒ 외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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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은 1980년 7월 15일자 스톡홀름발 AFP통신 기사였다. 이후 7월 20일에도 "코리안 페이퍼스(Korean Papers)"라는 제목의 스톡홀름발 AP통신 기사 3건이 나왔다. 모두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잔혹함을 묘사하고 있다.

이 기사들에는 두 명의 인물이 제보자로 등장한다. 스티븐 클라크(Steven Clark)와 캐롤린 페리(Carolyn Perry)가 그 주인공이다.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두 사람을 <오마이뉴스>가 찾아냈다.

이들은 한국 외교 당국에서도 쫓던 인물이다. 당시 생산된 외무부(현 외교부) 비밀문서에 두 사람의 이름이 선명히 박혀 있다. 그들의 활동은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으로 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보고된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국보위 보고사항'이라고 적힌 문건에 '스티븐 클라크(Steven Clark)'와 '캐롤린 페리(Carolyn Perry)'의 이름이 담겨 있다. 이 이름은 1980년 7월 스톡홀름 발 AFP, AP 5.18 기사의 제보자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국보위 보고사항"이라고 적힌 문건에 "스티븐 클라크(Steven Clark)"와 "캐롤린 페리(Carolyn Perry)"의 이름이 담겨 있다.
ⓒ 외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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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두 달 후
 5·18 이후 두 달 지난 시점에서 나온 스톡홀름발 이 기사들에는 광주시민의 관점이 비교적 강하게 담겼다. 사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5·18 직후 외신 보도는 가치와 한계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미국 5대 언론매체(<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 AP > <뉴스위크> <타임>)에서 1980년 5월 18일~6월 18일 생산한 기사 190건을 분석한 5·18기념재단 보고서에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미국 주류언론에 투영된 광주항쟁: 비판적 검토>).


2017년 이 보고서를 쓴 최용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 조사1과장은 "국가폭력에 대항해 민주주의·인권신장의 '보편적' 가치를 쟁취하려는 시민저항으로서의 본질은 외면되고, 지역 차별에 분노한 주변부 시민의 국지적 폭동이란 측면이 (미국 매체에서) 더 강조됐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최 과장은 "미국 매체들은 공수부대의 유혈진압이 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간과하지는 않았다"라며 "미국 매체들은 최소한 사실을 왜곡하거나 사건의 인과관계를 의도적으로 뒤틀지는 않았다, (왜곡·날조를 반박할 수 있는) 실증적 가치가 크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의 매체들은 원칙적으로 미국의 관점,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국 정부의 관점에서 광주항쟁을 해석하고 뉴스원을 고르고 기사를 생산했다"라며 "한국 신군부와 유착을 강화하려고 했던 카터 행정부의 외교적 전략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한, 당시 미국 언론의 경로의존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비해 스톡홀름발 기사는 시위의 성격을 "민주적 권리와 계엄령 종료를 위한 비교적 평화로운 시위"라고 설명했다. 시위가 시작된 시점을 "김대중이 검거된 날"로 표현해 지역성을 내비치긴 했지만, 제보자 2인의 취재원을 "학생들이 작성한 성명서와 미국 평화봉사단 및 한국인 천주교 성직자들의 증언"이라고 소개하며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강조한 광주의 관점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또 "미국과 한국 정부 관계자들에 의해 진실이 억압되었다"라는 제보자의 주장도 기사에 실렸다.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1980년 7월 20일자 스톡홀롬 발 AP 기사는 5.18민주화운동의 성격을 "자유민권(democratic right)과 계엄령의 종료를 주장하는,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시위였다"라고 설명했다.
▲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1980년 7월 20일자 스톡홀롬발 AP 기사는 5.18민주화운동을 "민주적 권리와 계엄령 종료를 위한 비교적 평화로운 시위"라고 설명했다.
ⓒ 외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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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기사들을 보면 사실과 다른 내용도 있다. 하지만 사망자 수나 일부 과장된 표현을 제외하면, 사실에 가까운 내용이 상당하다. 계엄군의 잔혹함과 관련해 "(사망자가) 3세에서 80세에 이른다", "버스 한 대를 채운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기관총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많은 여학생들이 죽임을 당했고 일부는 강간당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묶이고 구타당했다" 등의 증언이 기사에 담겼다.

실제로 1980년 6월 7일 오전 11시 광주지방검찰청의 검시조서를 보면 5월 27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효덕동 뒷산에서 '좌우경부 맹관총상'을 입은 상태로 발견됐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의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는 74세 여성의 '복부관통상 사망' 기록도 남아 있다.

5월 23일엔 주남마을 인근 버스 집중사격으로 탑승자 18명 중 15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나머지 3명 중 2명은 야산으로 끌려가 사살·암매장됐다. 최근에는 5·18 당시 계엄군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피해자가 직접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1980년 6월 7일 조선대병원에서 작성된 이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검시조서(광주지검)의 주인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본적 : 불상, 주소 : 불상, 성명 : 불상, 연령 : 4세 가량. '91번'이라고 적힌 이 검시조서는 '알 수 없는(불상)' 내용으로 가득하다.
▲  1980년 6월 7일 조선대병원에서 작성된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검시조서(광주지검). 본적 : 불상, 주소 : 불상, 성명 : 불상, 연령 : 4세 가량. "91번"이라고 적힌 이 검시조서는 "알 수 없는(불상)" 내용으로 가득하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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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고 조비오 신부 사자명예훼손' 재판의 쟁점인 '헬기 사격' 관련 증언도 나온다. 기사에는 "무장 헬기가 민간인 군중을 향해 덤덤탄(보통탄보다 상처가 크게 나도록 만들어진 특수 소총탄으로 현재는 참혹성 때문에 사용이 금지되었다 - 편집자 주)을 무분별하게 발사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는 내용이 있다. 특수 살상 무기인 '덤덤탄'이 사용됐을 가능성은 없지만, 5·18 두 달 후 나온 기사에 헬기 사격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사망자가 2000명에 이른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은 수치다. 물론 당시 정부가 "철저한 조사 끝에 밝혀냈다"는 174명 역시 신뢰할 수 없는 수치다.

현재까지 5·18의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 수 없다. ▲ <5·18 관련 사망자 검시내용>(광주지검) ▲ <광주민중항쟁비망록>(5·18광주민중항쟁 유족회 편) ▲ <피해자신고서> 사망자·부상자 편(평민당) ▲ <광주사태, 사망자 명단>(계엄사) ▲ <5·18 관련자 치료비 지원금 내역>(1988년 국정감사 제출) ▲ <1980년대 민주화운동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편)를 종합해보면 총 235명의 사망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기록에 남지 않은 사망자, 무명열사, 행방불명자 등을 고려하면 숫자는 더 늘어날 수 있다. 현재 집단 암매장과 관련된 조사도 이뤄지고 있다.

5·18 해외 기록물을 발굴·분석해온 최용주 과장은 "당시 정부의 통계를 믿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나, (일부 과장된) 이야기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있었다"라며 "그만큼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당시 상황의 끔찍함을 전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로 보면 된다"라고 추정했다.

항의

당시 외무부는 곧장 반응했다. <오마이뉴스>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에는 위 AFP, AP 기사가 나온 이후 외무부의 대응이 상세히 담겨 있다. 총 108쪽 분량 중엔 당시 비밀문서로 분류된 문건도 포함돼 있다.

우선 AFP 기사가 나온 직후인 7월 16일, 외무부는 "광주사태 관련 미 평화봉사단원의 발언"이란 주요 내용이 담긴 '한국 관련 주요 외신보도' 문건을 작성했다. 해당 문건엔 수기로 두 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스티븐 클라크와 캐롤린 페리였다.

앞서 소개했듯 두 사람의 이름은 AFP 기사의 제보자로 등장한다. 이 문건이 작성된 이후에 나온 AP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기사에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으로 소개돼 있다. 평화봉사단은 1961년 미국 정부가 만든 청년 봉사단체로 주로 개발도상국에 파견돼 교육, 의료, 농수산기술 분야에서 활동했다. 한국엔 1966~1981년 평화봉사단이 들어와 있었다.

1980년 7월 18일 오후 3시 한·미 당국자가 외무부 미주국장실에서 만나 두 사람을 거론한다. 외무부 이계철 미주국장, 소병용 북미담당관과 주한미대사관 블랙모어(Blackmore) 정무참사관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
 
 5.18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제일은행(현재 무등빌딩) 앞에서 최루탄이 터진 상황에서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무등빌딩 인근의 모습.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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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국장 : 기사에서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이라고 자칭한 스티븐 클라크 및 캐롤린 페리 등 미국인 2명이 밝힌 내용은 전혀 근거 없는 날조이며 이는 북괴의 광주사태 관련 선전을 의도적으로 부추기려는 것으로 판단되는 바, 상기 2명이 정말 미 평화봉사단 요원인지 및 당시 광주에 있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여 외신에 공개해명을 해주기 바라는 바임.

블랙모어 참사관 : 현재 알기로는 이들은 평화봉사단 명단에는 없으나, 다시 확인하여 결과를 알려주겠음. 이들이 거짓 이름을 사용했을 경우도 상상할 수 있겠는 바, 이러한 경우 미(국) 측 입장이 매우 어려워질 것으로 봄.

블랙모어 참사관은 잠시 후인 동일 16:15에 미주국장에게 전화로 다음과 같이 통보해 옴.

블랙모어 참사관 : 조사 확인 결과 이들이 평화봉사단원이 아님이 판명되었음.

미주국장 : 그렇다면 공개적으로 동 사실을 해명해주기 바람.

블랙모어 참사관 : 해명을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힘든 바, 만일 기자가 질문을 해오면 이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해명하는 것이 좋겠음.

미주국장 : 그런 정도로는 이번 사건으로 이미 초래된 피해를 복구하기에 미흡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음. 공개 해명을 해주기 바람.

블랙모어 참사관은 동일 19:00 또다시 미주국장에게 전화로 다음과 같이 통보하여 왔음.

블랙모어 참사관 : 재차 확인 결과, 상기 2인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이 미 평화봉사단원 명단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들 유사 성명의 소유자들은 1980년 6월 25일 한국에서 출국한 것으로 되어 있음.

미주국장 : 귀하 말대로 문제의 미국인들이 평화봉사단원이라면 이는 중대한 문제라고 보며 미국 측에서 이에 대한 시정조치가 있어야 될 것으로 생각함. (중략)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시정조치가 취해질 때까지 계속 추궁할 것임.


실명
 
 미국 평화봉사단 앨범에 실린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Steven Clark Hunziker)와 캐롤린 트루비필(Carolyn Turbyfill)의 모습.
▲  미국 평화봉사단 앨범에 실린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Steven Clark Hunziker)와 캐롤린 트루비필(Carolyn Turbyfill)의 모습.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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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모어 정무참사관이 스티븐 클라크와 캐롤린 페리에 대해 혼선을 빚은 이유는 기사에 익명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두 사람은 당시 대구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했던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Steven Clark Hunziker)와 캐롤린 트루비필(Carolyn Turbyfill)이었다. 두 사람이 썼던 익명과 실제 이름을 비교해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수소문 끝에 두 사람 중 트루비필과 연락이 닿았다. 안타깝게도 헌지커는 2014년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머물던 당시 트루비필은 '부경희', 헌지커는 '문성배'란 이름을 사용했다. 트루비필은 <오마이뉴스>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언론과 인터뷰하며) 순간적으로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지만 거의 익명이 아니었다"라며 "(AFP보다 먼저 스웨덴의 일간지에 기사가 실렸는데) 우리의 사진도 함께 게재됐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는 한국인과 미국인 모두에게 존경받는 한국인으로부터 (5·18)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반체제 인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라며 "(5·18의) 은폐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우리는 한국의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억압과 잔인함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평화봉사단 소속 팀 원버그(Tim Warnberg)의 모습을 담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진.
▲  평화봉사단 소속 팀 원버그(Tim Warnberg)의 모습을 담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진.
ⓒ 나경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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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지커와 트루비필에게 광주의 소식을 전한 이는 또 있었다. 광주와 영암에서 평화봉사단으로 있다가 5.18을 직접 목격한 팀 원버그(Tim Warnberg)와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였다(관련기사 : 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그가 광주를 위해 남긴 선물). 원버그와 돌린저의 이름은 7월 20일 보도된 스톡홀름발 AP 기사에도 실려 있다.

원버그와 돌린저는 5월 18~27일 동안 광주에서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또한 광주시민을 보호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그들은 계엄군의 구타를 말리고, 환자를 후송했으며, 외신기자의 통역(대표적으로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위르겐 힌츠페터)을 맡았다. 1987년 하와이대학 한국학 잡지 < Korean Studies >에 논문 < 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 >를 게재한 원버그는 안타깝게도 1993년 세상을 떠났다. 돌린저는 현재 영국에 거주 중이다.

돌린저는 <오마이뉴스>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헌지커와 트루비필은 팀과 내가 광주에서 목격한 것에 큰 관심을 가졌다"라며 "1980년 6월 초 그들과 광주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은 2년 동안의 프로그램을 마치고 6월 후반에 한국을 떠났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돌린저는 자신이 광주에서 찍었던 사진의 필름과 광주시민들이 만들었던 성명서 등을 두 사람에게 넘겼다. 이 필름의 사진들은 1980년 12월 미국의 잡지 <커버트 액션(Covert Action)>에 실렸다.
 
 표지. 5.18민주화운동 소식으로 채워져 있다.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한국에 있었던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와 캐롤린 트루비필은 광주의 참상을 목격한 팀 원버그와 데이비드 돌린저로부터 자료를 받아 이 잡지에 사진과 글을 실었다. " class="photo_boder"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display: block;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402px;">
▲  1980년 12월 미국 잡지 <커버트 액션> 표지. 5.18민주화운동 소식으로 채워져 있다.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한국에 있었던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와 캐롤린 트루비필은 광주의 참상을 목격한 팀 원버그와 데이비드 돌린저로부터 자료를 받아 이 잡지에 사진과 글을 실었다.
ⓒ 최용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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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비필은 "돌린저가 한국군 병사들의 말할 수 없는 만행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화가 나고 소름 끼쳤다"라며 "우리는 그로부터 필름을 받을 수 있어 기뻤다, 이 필름을 빼앗길까봐 한국에선 감히 사진을 뿌릴 수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이어 "(5·18을 기록한) 서류와 필름을 받았을 때 우리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미국이나 한국의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라며 "그 결과 한국을 떠날 때 수색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헌지커는 당시 <커버트 액션>에 사진과 함께 실은 기고를 통해 "전두환은 군대와 경찰로 나라를 뒤엎었고 수천 명의 한국인을 감옥에 가뒀다"라며 "5월 18일 광주의 일부 용감한 시민과 학생은 탄압에 맞서 시위를 벌였다. 전두환은 공수부대를 광주로 보내 시민들을 죽였고, 더 많은 시민이 거리로 모여 군대에 맞서 저항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상하게도 카터 행정부는 (사회적 안정을 도모했다는) 전두환의 진술을 공개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 미국의 전략적 관심사는 일본을 (공산권의) 완충지대로 삼는 것이었고, 때문에 (한국의 안정화를 통해) 일본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라며 미국의 책임도 거론했다.

트루비필은 같은 잡지에 중앙정보부를 분석하는 글을 썼는데, 이를 통해 "중앙정보부뿐만 아니라 경찰과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는 고문, 테러, 혼란과 불신 조장의 전술을 사용했다"라며 "칠레의 디나(DINA, 정보기관 겸 비밀경찰),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Gestapo, 비밀경찰)와 마찬가지로 교활하고 잔인한 조직"이라고 말했다. 이 잡지는 미국의 중앙정보국(CIA) 같은 주로 정보기관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아왔다.

그들은 왜 스웨덴으로?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스톡홀름 언론을 통해 알린 캐롤린 트루비필. 팀 원버그와 데이비드 돌린저로부터 5.18 소식을 접한 그는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와 함께 스웨덴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모두 평화봉사단 단원이다.
▲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스톡홀름 언론을 통해 알린 캐롤린 트루비필. 팀 원버그와 데이비드 돌린저로부터 5.18 소식을 접한 그는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와 함께 스웨덴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모두 평화봉사단 단원이다.
ⓒ 캐롤린 트루비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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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왜 한참 떨어진 스웨덴의 스톡홀름까지 가게 됐을까? 사실 두 사람이 가장 먼저 간 곳은 일본이었다. 트루비필은 "우리는 편향되지 않은 신문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일본에서도 그런 신문은 찾을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라며 "우리는 또한 한·미 정부의 보복과 일본에서 우리를 억압하려는 시도를 두려워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강영규 주스웨덴대사가 박동진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대외비 문건에는 그들이 스웨덴에 도착해 여러 언론사를 다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AFP > 기사 대응조치'란 제목의 이 문건에는 "두 사람은 7월 15일 < UPI >, 7월 16일 <로이터>를 방문했으나 기사화하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다.

"우리는 스톡홀름으로 갔다. 스웨덴은 인권을 중시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그곳이 안전할 거라고 느꼈다. 우리가 접촉한 스웨덴의 첫 인권운동가로부터 일간지 <다겐스 니히터(Dagens Nyeter)>를 소개받았다. 우리는 인터뷰보다 (언론사의) 취재를 원했지만 결국 인터뷰하기로 동의했고 7월 15일 보도됐다. 이후 <다겐스 니히터>를 손에 들고 우리는 스웨덴의 AP 지사로 갔다. 그들은 7월 20일에야 이 내용을 보도했는데, 그 이유는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전날 (지사로 와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기 때문이다."

특히 트루비필은 보도를 전후로 한·미 정부 관계자로부터 압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우리는 한국 정부의 억압적인 활동 때문에 (광주의) 이야기를 보도하도록 도왔다"라며 "(한국 정부는) 스웨덴 신문기자들을 한국에서 추방했고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전역으로 우리를 쫓아다녔다"라고 주장했다.
 
 5.18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가 전일빌딩 앞에서 선회하는 모습. 현재 전일빌딩은 당시 헬기사격에서 발생한 탄흔으로 추정되는 자국들이 남아 기록물 형태로 보존하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의 헬기가 전일빌딩 앞에서 선회하는 모습. 현재 전일빌딩에는 당시 헬기 사격의 탄흔으로 조사(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된 자국들이 남아 있다.
ⓒ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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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덴마크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외무부 대외비 문건에도 기록돼 있다. 다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현재로선 알기 어렵다. 7월 24일 임명진 주덴마크대사가 박동진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평화봉사단 회견'이란 제목의 문건에는 "단원 2명이 당지(덴마크)에 입국함으로써 (반한 교포 김○○에 의해) 회견이 주선된 것으로 판단. 김○○가 계속하여 독일, 프랑스 등 남부 유럽으로 안내해 동종의 회견을 주선할 것으로 예측되는 바 해당공관에 통보, 대처할 것을 건의함"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문건에서 거론한 회견은 헌지커와 트루비필이 진행한 것으로 이 내용이 7월 23일 덴마크 조간지 <악튜엘트(Aktuelt)>에 실렸다.

같은 날 역시 임 대사가 박 장관에게 보낸 '반한교포, 아국대표단 유인 시도'라는 제목의 3급비밀 문건에는 "반한 교포 김○○으로 추측되는 자가 7월 23일 12:00경 당시 유엔 여성회의 본회의장에 나타나 아국 대표를 유인 시도한 것으로 판단되는 사건이 발생함"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면서 임 대사는 "당관(주덴마크대사관)에서는 현재 김○○의 행방을 추적 중이며 파악되는대로 추보 위계(추가로 보고할 예정)임"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트루비필의 기억은 이와 다르다. 그는 "<다겐스 니히터> 편집장은 우리에게 한국의 인권운동가 김○○을 소개했고 그는 우리를 도왔다"라며 "그와 함께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의 다른 곳을 다니며 언론과 대화하고 인권운동가를 만났다. 동시에 우리를 쫓는 사람들을 피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김○○는 우리를 덴마크 코펜하겐 국제여성회의에 데리고 가서 더 많은 인권운동가와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라며 "우리가 회의를 떠나려는데 우리 차에 한국 여자가 와서 김○○와 이야기를 나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린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스웨덴에 왔을 때 한 우익 신문이 '김○○가 회의장에서 그 여자를 납치하려고 했다'는 기사를 실었다"라며 "우리는 코펜하겐에서 내내 김○○와 함께 있었고 김○○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이후 김○○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라고 떠올렸다.

또 "우리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가족에게도 우리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알리지 않았다"라며 "그런데 미연방수사국(FBI)이라고 주장하는 두 사람이 미국에 있는 부모님 집에 찾아와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부모님은 아무것도 몰랐고 매우 무서워했다"라고 덧붙였다.

국보위 보고사항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1980년 7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외무부 관계자의 수기 메모. '국보위 보고사항'이란 문구가 담겨 있다.
▲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1980년 7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외무부 관계자의 수기 메모에 "국보위 보고사항"이란 문구가 담겨 있다.
ⓒ 외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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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활동은 당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에게도 보고된 것으로 보인다. AFP 보도(7월 15일)와 AP 보도(7월 20일) 사이, 외무부 고위 관계자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수기 메모에는 '국보위 보고사항'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제목은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광주사태 허위사실 유포'였다. 국보위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줄임말로, 전두환 등 신군부 강경파로 구성돼 이후 5공화국 독재의 발판이 됐다. 7월 25일에도 3급기밀 문서를 통해 최규하 대통령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에게도 보고가 올라갔다.

외무부는 7월 22일 해외공보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발표하며 스톡홀름발 기사를 강하게 비난했다. 당시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김용식 주미대사에게 보낸 '평화봉사단원의 광주사태 관련 발언'이란 제목의 대외비 문건에는 해당 성명이 영어로 첨부돼 있다.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폭동과 모든 사상자들에 대한 사실 판단을 위해 즉각적인 조치가 내려졌다. 철저한 조사 끝에 사망자 수는 174명으로 밝혀졌다"라며 "사태를 목격했다는 이들이 거짓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서울발 AP를 통해 기사화되기도 했다. 또 주미, 주일, 주캐나다, 주호주, 주뉴질랜드 대사관에 "(헌지커, 트루비필의 발언은) 광주사태 진상을 왜곡·과장한 것으로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임을 표명토록" 지시하기도 했다.

같은 날 외무부는 '미 평화봉사단 관계관 회의'를 열었다. 이때부터 평화봉사단 입국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취지의 논의가 진행됐다. 참석자 명단엔 외무부 미주국장·북미담당관·조약1과장, 청와대 이수영 과장, 문교부 사회국제교육국 국제교육과장, 보사부 의정국 의정 1과장, 과기처 기술협력국 총괄과장, 문교부 외신과장이 적혀 있다.

이 자리에서 미주국장은 "평화봉사단의 현 운영실태를 점검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고 밝혔다. 이에 문교부 참석자가 "긍정적인 면이 컸던 것은 사실이나 필수적이며 크게 유익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고 본다"고 말하자, 보사부 참석자도 "정확한 평가는 어려우나 문교부 측 코멘트에 동감한다"라고 호응했다.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사진은 강박광 과학기술처 기술협력국장과 메이어(Mayer) 평화봉사단장이 1980년 7월 24일 면담한 것을 기록한 3급비밀 문서다.
▲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강박광 과학기술처 기술협력국장과 메이어(Mayer) 평화봉사단장이 1980년 7월 24일 면담한 것을 기록한 3급비밀 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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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외무부 북미담당관이 과기처 기술협력국장에게 보낸 '전언통신문'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가 나와 있다. 북미담당관은 "그동안 평화봉사단이 한국에서의 봉사를 통해 성과를 거둔 것으로 사료하는 바, 이제 추가로 파견될 계획으로 있는 53명의 파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로서는 필요 없다고 생각함"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강박광 과학기술처 기술협력국장은 메이어(Mayer) 평화봉사단장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면담했다. 이 내용이 담긴 3급기밀 문건에서 강 국장은 "우리의 의견은 최종 파견 분 (53명에) 대해 초청을 취소하는 편이 타당하다는 것인데 당신의 입장은 어떠한가"라고 말했다.

7월 25일 외무부장관실에선 박동진 외무부장관과 몬조(Monjo) 주한미대사관 대사대리가 만났다. 이 자리에서 박 장관은 "그들의 소행이 끼친 피해는 매우 크다고 생각되며 북괴의 허위선전에 휘발유를 뿌리는 격이 되고 있다"라고 불만을 강하게 표현했다. 이처럼 외무부는 7월 22~25일 차츰 직급을 높여가며 미국 측에 불만을 표시했다.

미국의 태도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사진은 대외비로 분류된 박동진 외무부장관과 몬조(Monjo) 주한미대관 대사대리의 면담요록 중 일부다. 박 장관이 "북괴의 허위선전에 휘발유를 뿌리는 격"이라고 5.18의 진상을 외신에 제보한 평화봉사단 단원들을 비난하자, 몬조 대사대리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동조하고 있다.
▲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사진은 대외비로 분류된 박동진 외무부장관과 몬조(Monjo) 주한미대관 대사대리의 면담요록 중 일부다. 박 장관이 "북괴의 허위선전에 휘발유를 뿌리는 격"이라고 5.18의 진상을 외신에 제보한 평화봉사단 단원들을 비난하자, 몬조 대사대리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동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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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몬조 대사대리 역시 박 장관과 비슷한 관점을 내보인다. 그는 "본인도 평화봉사단원 행동이 매우 무책임한 것으로 생각하며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라며 "(이는) 미국에 대해서도 크게 독을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관님의 도움으로 53명 평화봉사단원이 예정대로 한국에 도착한다면 메이어 단장이 재차 강경한 경고를 할 것임을 거듭 약속드린다"라며 "봉사대상국을 비방한 행위에 대해 매우 통탄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5·18 직후 미국 대사관을 찾아간 다른 평화봉사단의 증언을 들어보면, 몬조 대사대리의 이러한 태도는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돌린저는 "원버그와 함께 5월 30일 대사관을 찾아갔는데 (대사와의 만남을) 거절당했다"라며 "대사관 관계자는 '광주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알고 있고 당신들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라고 말했다. 대사관 측은 두 사람이 광주에서 목격한 것을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도 받지 않았다.

역시 광주에서 5·18을 목격한 평화봉사단원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도 대사관을 찾았다가 문전박대당한 경험이 있다. 그의 회고록 <푸른 눈의 증인>의 마지막 부분이다.

"우리는 건물 안으로 안내를 받아 대사대리 사무실로 향했다. (함께 간) 짐이 이미 약속을 해놓은 터였다.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확신했다. (중략) 우리는 대사대리의 사무실 밖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리를 일어나 나왔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사관은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추가 평화봉사단원 53명의 입국은 취소되지 않았다. 다만 평화봉사단 협정 종료가 1982년에서 1981년으로 앞당겨졌다. 또한 한국은 1982년부터 여러 차례 있었던 미국의 재협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외무부의 또 다른 문건에 담겨 있다. 'Peace Corps(미국 평화봉사단)의 활동재개 문제, 1981~1987'이라는 제목의 이 문건엔 비밀문서도 포함돼 있다. 문건에선 전두환 정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국가안전기획부(중앙정보부의 후신)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 문건의 내용은 다음 기사에 이어진다.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
①-1 이 미국 청년을 아십니까 http://omn.kr/1nj3g
①-2 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http://omn.kr/1nj2u
② 광주 할머니와 약속 지킨 청년 http://omn.kr/1nk4l
③ "전두환 부끄러워해야" http://omn.kr/1njqo
④ 미국인이 찍은 80년 5월 http://omn.kr/1nkf9
⑤ 택시운전사 류준열, 사실... http://omn.kr/1njxh

■ 이메일 인터뷰 번역
: 송재걸 (카디프대학 석사학위 논문 <The Gwangju Democratisation Movement and the Role of International News Flows> 저자)

덧붙이는 글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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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20주년 특별기획] 코로나 역시 현대문명의 ‘선물’일 뿐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발행 2020-05-16 17:10:24
수정 2020-05-16 1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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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2000년 5월 15일 첫걸음을 뗀 민중의소리가 창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자와 후원인들의 성원과 격려로 민중의소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자주평화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진보언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창간 20주년 특별기획으로 각계 원로, 전문가, 신진인사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릴레이 기고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

서구문명이 신세계에 안겨준 최대 선물은 전염병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발을 디딘 지 불과 40년 만에 탐험가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대부분을 밟고 다닌다. 유럽인의 강제노동제도, 그리고 유럽에서 이입된 새로운 질병과 접촉하면서 원주민은 멸절된다. 흑사병으로 알려진 새로운 역병이 14세기에 아시아로부터 수입되어 이미 기근으로 쇠잔해진 유럽인을 공격했을 때, 전사한 인구수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신대륙에서 죽어갔다.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이와 똑같은 일이 태평양에서도 벌어졌다. 하와이 같은 청결한 대양에는 병원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서구인이 옮겨온 온갖 병균에 아메리카의 원주민이 당했던 것처럼 섬의 주민들을 치명적인 재앙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처럼 역병은 인류문명사에서 전쟁, 기근 못지않은 집단 죽음을 몰고왔다. 역병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문명사적 병’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코로나가 그러하다. 코로나 역시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문명사적 병이다.

2
코로나로 인하여 페루 연안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야행성 프랑크톤이 불을 켜고 도심 주변을 밝히고 있다. 오래 전에 곳곳에 널렸던 반디불이 사라졌다가 맑은 산촌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의 해변 접근이 단절되자 프랑크톤조차도 이를 알고 해변으로 출몰한 것. 사라졌던 물개와 거북이도 돌아오고 있다. 거북이는 아무데서나 산란하지 않는다. 거북이 역시 회귀본능이 있어서 특정 바닷가 모래밭에 어두운 야음을 틈타서 알을 낳고 부화시킨다. 부화된 새끼들은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용을 쓰면서 바닷가로 달려간다. 그 자체 장엄한 생명의 드라마다.

2020 년 3 월 24 일 페루의 리마에 있는 해변가에 수천 마리의 새들이 모여든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이 사라진 빈 해안은 새들의 차지가 됐다.
2020 년 3 월 24 일 페루의 리마에 있는 해변가에 수천 마리의 새들이 모여든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이 사라진 빈 해안은 새들의 차지가 됐다.ⓒ뉴시스/AP

세계 해안이 통제되면서 바닷가 모래밭 거북이 산란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물개들도 올라와 간만의 휴식을 취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바닷가 모랫사장을 ‘해수욕장’이라 표현한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 표현이다. 여름 한철 쓰자고 만들어진 모랫사장이 아니다. 조개가 살아가고 염색식물이 군락을 이루며 철새가 날아오고 거북이가 산란하는 생명의 공간을 인간들이 잠시 빌리거나 탈취하여 이용할 뿐이다.

인간의 영역과 권한인줄만 알았던 바다가 사실은 생물체가 함께 숨쉬는 공유의 공간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코로나 이후, 바닷가 거북이의 귀환은 우리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거대한 재앙으로 다가와 있지만 인간과 자연의 제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고 포스트 코로나의 문명사적 성찰을 하게하는 적극적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되어야한다.

코로나 이후 인간의 발길이 끊기며 자연이 회복된 바다
바다가 생물체가 함께 숨쉬는 공유의 공간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문명의 전환은 코로나가 인류에게 던져준 가장 중요한 화두

3
인간의 끊임없는 식탐은 기다려서 잡는 것이 아니라 악착같이 쫓아가서 잡는 싹쓸이 어법으로 바다를 고갈시켰다. 사람에게만 집이 있을까. 물고기도 정든 집을 그리워하고 아늑하여 천적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좋아한다. 어느 물고기에나 집이 있으며 선호하는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고기떼는 숲그늘로 몰려드는 근성이 있다. 물고기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숲을 그리워한다. 동물만이 숲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도 해변이나 섬의 숲그늘로 몸을 숨기고 ‘그늘의 미학’을 즐긴다. 선사시대 인간들이 바위그늘에서 주거처를 마련하였듯이 물고기들도 바위그늘이나 숲그늘을 선호한다. 오늘날의 현대어법이라는 것은 그 집들을 쫓아가면서 싹쓸이하는 어법을 뜻한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이런 글을 소개하고 있다. ‘수륙에서 나는 이익은 공사가 다같이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때없이 잡으면 번성하지 못한다. 지금 백성들이 소년어를 잡기 좋아하는데. 아무리 많이 잡아도 쓸모가 없다’고 했다.

이덕무가 소개한 ‘소년어’란 세글자가 아주 강렬하게 다가온다. ‘소년어’란 단어만큼 인간의 잔인하고도 부도덕한 어린 물고기 남획을 잘 설명한 단어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에 넣어서는 안 된다는 문명사적 교훈이다. 거대한 상업적 고기잡이가 아니더라도 빈틈없이 고도로 발달된 그물은 소년어는 물론이고 유아기 단계의 가녀린 물고기까지 싹쓸이로 해치운다.

지난 1세기, 불과 100여년이 채 안 되는 시기에 전 지구적 차원에서 고기들이 급격히 사라졌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소멸 및 급격한 감소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물고기가 가장 많이 모여살 뿐더러 종다원성도 풍부한 연근해부터 소멸· 감소하기 시작하여 비교적 머나먼 외해는 물론이고 망망대해에 이르기까지 파장이 미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텅빈 이탈리아 베네치아스의 운하
코로나19 사태로 텅빈 이탈리아 베네치아스의 운하ⓒ뉴시스/AP

4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면 강원도 최북단 고성 거진항이 부른다. 2월 말이면 늘 명태축제가 열린다. 그런데 축제랍시고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것이 그 많던 명태들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많던 명태는 어디로 갔을까. 2000년부터 급격히 어획량이 줄어 ‘동해명태’를 구경하기 어렵다. 온난화 때문에 사라졌다. 수온 1℃가 높아지면 그에 따라 적어도 수백키로미터의 한계선 이동이 이루어진다. 동해에 난류성 물고기가 대거 출현 중이다.

남극이 녹고 북극이 녹는 중이다. 한반도 남부의 아열대화가 촉진된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표현대로, 지구온난화와 수온상승은 범 인류적인 지구의 재앙이다. 베네치아의 해수면이 높아져 성 마르코 성당이 수시로 물에 잠긴다. 석호 위에 세운 도시이므로 사실상 인간이 바다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재난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서남해안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간척지, 그리고 매립하여 그 위에 세운 도시들이 어떤 운명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린란드가 그야말로 식물이 자라는 녹색의 땅이 되었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툰드라의 빙토 아래 잠들어있던 어떤 바이러스가 표층 위로 출현하여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 예측 불가이다. 온난화는 단순하게 수온상승과 수면상승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각변동과 새로운 병균의 출현을 가능케 할 것이다. 매우 불길한 시나리오들인데 이 모든 것이 인류의 현재 속도와 물량의 자본주의와 연결되어있다.

프란치스코 교종(교황)이 지난 4월 코로나19로 인해 십자가 아래서 홀로 기도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교황)이 지난 4월 코로나19로 인해 십자가 아래서 홀로 기도하고 있다.ⓒ뉴시스/AP

코로나 이후의 인류문명사가 우리가 지금껏 해온 문명의 혜택이라는 것들에 관하여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든다. 미세 프라스틱을 없애려면 비닐봉투도 쓰지 말고 스티로폴을 쓰면 더욱 안된다. 이른바 알갱이화장품을 쓰지 말아야한다. 시장에서 생선을 사면서 비닐봉투가 없다면, 얼마나 불편하고 당황스러울까. 그 불편과 당황을 뛰어넘는 새로운 문명의 전환, 코로나가 인류에게 던져준 가장 중요한 화두가 아닐까.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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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중항쟁 40주년] "전두환 처벌!“ 전두환 집까지 드라이브 스루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0/05/16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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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민중항쟁 40주년을 맞이해 ‘5.18 광주항쟁 40주년 기념사업 시민추진위원회’가 서울 여의도에서 출발해 전두환이 있는 연희동까지 “모이자 연희동으로! 전두환은 사죄하라! 5.18 드라이브 스루” 행진을 진행했다. 차량에 선전물을 붙이는 참가자.  © 김영란 기자

  

▲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꿇은 전두환 대형상징물.   © 김영란 기자

  

▲ 드라이브 스루에 참가한 차량들이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 김영란 기자

  

▲ 5.18 민중항쟁 40주년을 맞이해 ‘5.18 광주항쟁 40주년 기념사업 시민추진위원회’가 서울 여의도에서 출발해 전두환이 있는 연희동까지 “모이자 연희동으로! 전두환은 사죄하라! 5.18 드라이브 스루” 행진을 진행했다. 출발하는 차량들     ©김영란 기자

  

▲ 신촌로터리에서 연희동 삼거리로 오는 차량 행진  © 김영란 기자

  

▲ 연희동에 도착한 차량 행진 참가자들이 기자회견을 통해 전두환의 사죄와 처벌을 요구했다.  © 김영란 기자

 

▲ 전두환 집 앞에서 경적을 울리는 참가자     © 김영란 기자

 

“5.18 민중항쟁은 오늘의 역사입니다아직 끝나지 않은 살아있는 역사입니다촛불과 함께 끝끝내 승리하고야 말 역사입니다오월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촛불혁명을 완성하는 일입니다자주적인 내 나라민주적인 내 나라통일된 내 나라오월 해방광주에서 외쳤던 그 구호를 받아 우리가 촛불로 이어가야 합니다.”

 

“2020년 5.18은 40주년이 아니라, 40번째의 5.18 투쟁입니다.”

 

5.18 민중항쟁 40주년을 즈음한 2020년 5월 16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이다.

 

5.18 민중항쟁 40주년을 맞이해 ‘5.18 광주항쟁 40주년 기념사업 시민추진위원회(이하 시민추진위)’가 서울 여의도에서 출발해 전두환이 있는 연희동까지 모이자 연희동으로전두환은 사죄하라! 5.18 드라이브 스루” 행진을 진행했다.

 

코로나19로 대규모 옥외집회가 어려운 속에서 1980년 광주의 시민들이 차량으로 계엄군을 향해 나아갔던 것처럼 70대의 차량이 여의도에서 출발해 전두환이 있는 연희동까지 차량 행진을 했다.

 

차량행진 선두에는 전두환이 무릎 꿇은 대형 상징물이 있었다상징물에는 '학살원흉 전두환', '반드시 응징한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차량행진을 지켜보던 서울 시내 시민들은 대형 상징물을 보면서 촬영을 하고 손을 함께 흔들기도 했다.

 

차량행진에 참가한 시민들은 전두환이 처벌받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와 5.18 민중항쟁의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5.18 민중항쟁 40주년인데코로나로 대규모적인 행사가 취소되어 너무나 안타깝다그런데 전두환이 뻔뻔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다니고 있잖아요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나왔다책임자들이 처벌되고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왔다. (김성일 강북구 시민)”

 

“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다그 당시에도 광주의 진실을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다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5.18이다솔직히 전두환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은 역사의 치욕이라고 생각한다반드시 전두환을 학살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래서 오늘 차량 시위에 나오게 되었다. (오명윤 성균관대 민주동문회 회원)”

 

“40년 전 광주 시민들이 한 것처럼 전두환을 법정에 반드시 세워 학살의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오게 되었다. (서울 구로구 시민)”

 

“5.18은 민주주의 열망했던 광주 시민들의 행동이었는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왜곡된 말들과 거짓 뉴스가 나오고 있다대학생들은 이런 가짜 뉴스에 분노하고 있다학살자 주범 전두환은 그대로 놔둘 수는 없다는 마음에서 참가하게 되었다. (최수진 대학생)” 

 

  © 김영란 기자

  

  © 김영란 기자

 

▲ 전두환 처단 구호 외치는 참가자들  © 김영란 기자

 

▲ 마포대교를 건너가는 차량 행진  © 김영란 기자

 

▲ 차량 행진이 연희동에 도착하고 있다  © 김영란 기자

 

서울 여의대로 금융감독원에서 출발해 마포대교강변북로서강대교 북단신촌로터리동교동삼거리연희삼거리를 거쳐 차량행진은 연희동에 도착했다.

 

시민추진위 차량행진 행렬은 임을 위한 행진곡’, ‘광주 출정가’ 등의 노래와 전두환을 구속하라!’, ‘오월 정신 계승하자!’, ‘5.18 배후 미국을 규탄한다’, ‘5.18 망언 중단하라!’, ‘5.18 정신 계승하여 민주주의 실현하자’ 등의 구호에 맞춰 차량 경적을 울렸다.

 

연희동에 도착한 시민추진위 차량 행진 대열은 ‘5.18광주항쟁 40주년 차량행진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시민추진위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전두환이 이토록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5.18을 부정하는 적폐 세력들이 여전히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계속해 시민추진위는 전두환이 끝내 사죄하지 않는다면대한민국 민주화의 반역자민중의 학살자로 역사에 기록되어 영원히 지탄받게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시민추진위는 “5.18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에서 우리는 미국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라며 명확한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더 이상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당시의 진실을 정확하게 공개하고그 결과에 대해 우리 국민에 사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민추진위는 “"5.18 진상규명과 전두환 사죄 촉구를 시작으로 5.18 광주민중항쟁을 대한민국의 역사에 굳건히 세우고촛불혁명을 완성하기 위한 투쟁으로 힘차게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 차량 행진을 보며 손을 드는 시민들  © 김영란 기자

 

▲ 차량 행진 참가자들이 연희동 전두환 집 앞에서 내려 선전물을 들고 있다.   © 김영란 기자

 

  © 김영란 기자

  

아래는 시민추진위 기자회견문 전문이다.

 

---------------------아래-----------------------------------

 

5.18 학살 주범 전두환은 국민들 앞에 사죄하라!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대사건이었던 5.18 광주항쟁이 40주기를 맞았다그러나 아직도 5.18 광주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5.18 광주항쟁의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책임자 심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두환광주를 군홧발로 짓밟고금남로를 민중의 피로 물들인 학살자살인마 전두환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았다오히려 회고록을 출간하여 광주항쟁을 ‘5.18 사태로 폄훼하고알츠하이머 핑계를 대며 재판을 고의적으로 연기하면서도 골프를 치러 다니고법정에서 조는 등 불성실한 태도로 속죄를 거부했다그뿐 아니라 여전히 쿠데타 주역들과 만찬을 즐기고항의하는 시민을 향해 추징금을 대신 내달라는 등 파렴치한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다전두환의 이러한 뻔뻔한 작태는 자신의 죄에 대한 인정과 참회는커녕그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5.18광주항쟁과 군부독재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이 이토록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그것은 5.18광주항쟁을 부정하는 적폐세력들이 여전히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적폐세력들은 5.18광주항쟁의 의미를 깎아내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미래통합당 소속 정치인들과 적폐언론인들이 쏟아내는 5.18광주항쟁에 대한 망언허무맹랑한 북한군 개입설’ 그리고 최근 보수단체들의 대규모 광주 집회 예고 등이 그 증거다.

40년 전광주시민들은 군부독재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하나로 힘을 모아 떨쳐나섰다이후 우리 민중들의 항거 정신은 87년 6월 민주항쟁박근혜를 탄핵시킨 촛불혁명을 만들어내며 더욱 거세졌다전두환이 끝내 사죄하지 않는다면대한민국 민주화의 반역자민중의 학살자로 역사에 기록되어 영원히 지탄받게 될 것이다전두환은 국민들의 엄중한 경고를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편 5.18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에서 우리는 미국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미국은 당시 한국군의 군사작전권을 갖고 있었다미국은 전두환 일당의 학살을 승인하였는가아니면 전두환 일당의 일방적인 행동이었는가만약 그렇다면 왜 그것을 묵인하고 이후에 전두환 정권을 인정하였는가이와 관련된 명확한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더 이상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당시의 진실을 정확하게 공개하고그 결과에 대해 우리 국민에 사죄해야 할 것이다.

5.18 광주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은 촛불혁명이 국민들의 힘으로 전진하고 있는 지금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시대적 책무를 다 해야 한다.

5.18 진상규명과 전두환 사죄촉구를 시작으로 5.18 광주민중항쟁을 대한민국의 역사에 굳건히 세우고촛불혁명을 완성하기 위한 투쟁으로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

 

-전두환은 국민 앞에 사죄하라!

-오월정신 계승하여 촛불혁명 완성하자!

 

2020년 5월 16

5.18 광주항쟁 40주년 기념사업 시민추진위원회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5.18민주화운동서울기념사업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서울시지부민청학련동지회긴급조치사람들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전대협동우회주권자전국회의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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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진, 아방궁... 5.18 숨은 주역 '황금동 여성들'을 찾습니다

[5.18 40주년 특집]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이제 '전설'에서 '역사'로 끌어올리자20.05.15 18:27l최종 업데이트 20.05.15 20:30l박정훈(twentyrock)

 

  518 당시 광주 한 병원의 모습.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518 당시 광주 한 병원의 모습.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5.18기념재단 영상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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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2일, 불로동 광주적십자병원은 헌혈을 하기 위한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전날 도청 앞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 부상자들이 몰려서, '병원에 피가 모자르다'는 소식이 들리자 주변 시민들이 너도나도 헌혈을 하러 병원에 모인 것이다.

당시 송원여고 교감이었던 송희성(83) 전 오월민주여성회 회장은 헌혈하러 온 시민들을 줄 세우는 등 병원에서 '질서 유지'를 돕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과 과장이었던 의사 김아무개씨와 여성 무리의 가벼운 실랑이를 목격하게 된다.

"느그들 피는 필요 없어야."
"그러면 우리 피를 검사라도 해서 써주세요." 

검사를 받으면서까지 헌혈을 하려 했던 이들은 소위 '황금동 콜박스'라는, 유흥업소가 몰려 있는 거리에서 일하는 여성들이었다. 송 전 회장은 의사에게 절박하게 호소하는 여성들의 차림새를 보고난 뒤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재 수년간 방치 상태로 있는 옛 적십자병원 앞에서 그는 감회에 젖은 듯 말했다.
 

"내가 얼마나 눈물을 흘렸다고... 오미 이렇게 우리가 대동(大同)세상으로 가는구나, 저분들도 저렇게 돕는구나, 얼마나 눈물이 나오는지...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내고 다녔어." 


'피를 나눈' 황금동 여성들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황금동 여성들의 전설
 

 구 광주적십자병원 사적비 앞에 선 송희성 전 오월민주여성회 회장
▲  구 광주적십자병원 사적비 앞에 선 송희성 전 오월민주여성회 회장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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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헌혈까지 거부당했음에도, 그들은 굴하지 않고 5.18 민주화운동 내내 강력한 여성군단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들이 했던 일은 헌혈뿐만이 아니었다. 집회에 참여하거나 대치 상황에서 짱돌과 맥주병을 무기로 삼아 싸웠다. 물과 주먹밥을 시민군들에게 제공해주는 '보급병' 역할도 했으며, 공수부대에 쫓기는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숨겨주기도 했다. 

황금동은 금남로와 도청 등 공수부대의 사격과 무자비한 폭행이 이뤄진 곳과 매우 인접해 있다. 안전을 위해서는 몸을 사려야만 했다. 그런데 황금동 여성들은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서 민주화운동에서 가장 적극적인 주체로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술집 여자'라고 비하 당하고 차별받던 그들은, 민주화운동 과정을 통해서 한 명의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이는 5.18 당시 광주가 해방구이자 평등한 자치 공동체를 구성했음을 입증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상에 대해 정리된 자료는 전무하다. 한국현대사회연구소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499명의 구술을 담아 1990년에 발간한 <광주5월민중항쟁 사료전집>에서 6명의 증언자들이 황금동 여성들에 대해 짧게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황금동 여성들이 실제 항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기가 어렵다.

기록이 없다

광주 시민들 사이에서 구전되어온 황금동 여성들의 존재가 언론을 통해 처음 알려진 것은 2018년 <오마이뉴스> 정미경 시민기자의 '5.18 때 피를 나눈 '황금동 여성들'은 왜 잊혔나'(http://omn.kr/r9k2)를 통해서다. 이 기사는 공식 기록 하나 없이 잊힌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상을 당시 광주 시민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정리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기사를 바탕으로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추가 증언을 듣고, <광주5월민중항쟁 사료전집>을 참고해 정리한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상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황금동 쪽으로 도망치는 시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도움을 주고 ▲ 금남로 등으로 주먹밥 등 생필품을 보급했으며 ▲ 시신들을 수습해서 염을 했고 ▲ 직접 집회나 대치 현장에서 싸웠다.

먼저 이들은 공수부대에게 쫓기는 시민군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돌봐주는 역할을 도맡아 했다. 송희성 전 회장은 "황금동 콜박스 네거리에서 학생들이 도망다닐 때, 다 감춰주고 그랬어. (밖에서 안 보이게) 셔터를 내려버렸어"라며 당시 황금동 여성들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시민군을 숨겨주는 것은 결코 우연한 계기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목숨을 거는 위험하고도 능동적인 행위다. 이들이 겁내지 않고 시민군을 숨겨줬던 이유는 전두환 군부세력과 계엄군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쓴 이재의씨는 당시 황금동의 분위기를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황금동 콜박스 쪽으로 도망을 갔다. 황금동 일대 술집 여자들도 이를 뿌드득 갈며 식칼을 들고 다니면서 공수들의 행위에 치를 떨었다. 그들은 콜록이는 학생들에게 치약을 갖다 주기도 하고 돌도 날라다주었으며 마스크까지 가게에서 사다주었다." - <광주5월민주항쟁 사료전집> 중 -


한광진(69) 5.18광주민주화운동 부상자회 사무총장은 자신이 직접 황금동 여성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2018년 인터뷰 당시 밝힌 바 있다. 황금동 여성들이 부상 당하고 나온 자신에게 옷과 신발을 챙겨줬고 "어떤 길로 가면 계엄군을 피할 수 있는지 알려줬다"고 한다. 이들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황금동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이용해서 시민군들의 도피와 은신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한복 치마 안에 사람을 감싼 채 탁자 밑에 숨겨 놓고 앉아 능청스럽게 계엄군을 상대했다는 일화'는 그저 '영화 같은 이야기'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도와주고 살린 시민군의 숫자를 추정해 본다면 민주화운동 속 그들의 역할은 역사적으로 재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자신들이 가진 모든 자원 동원해 싸우다
  

 위의 사진처럼 5.18민주화운동 기간동안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의 상인들이 주먹밥을 나눠준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먹밥과 물을 함께 날랐던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상은 기록되지 않았다.
▲  위의 사진처럼 5.18민주화운동 기간동안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의 상인들이 주먹밥을 나눠준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먹밥과 물을 함께 날랐던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상은 기록되지 않았다.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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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동 쪽으로 갔더니 술집 여자들이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가지고 길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물을 나눠주는 그 여자들을 보니 온 광주시내 사람들이 한마음이 된 것 같았다. 평소에는 술집 여자들이 낯설고 불결하게 생각되었는데 그렇게 작으나마 성의를 다해 마음을 나누는 그 사람들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따뜻한 이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광주5월민주항쟁 사료전집> 고등학생 김○○씨의 증언 중 -


황금동 여성들은 밥과 물을 비롯한 음식과 생필품의 보급을 담당했다. 이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물과 함께 금남로로 운반하고, 이를 시민군들에게 나눠줬다. 당시 주변 주민들은 "시내 황금동 여자들이 제일 열심히 한다" (정경숙씨, 2018년 오마이뉴스 인터뷰)라고 말하는 등 이들의 활약을 높게 샀다. 그러나 대인시장·양동시장 상인들이 주먹밥을 지어 나른 사실은 널리 알려져 '광주공동체 정신'의 상징이 된 반면, 이들의 헌신은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 있었다.

상무대에서 사망자의 시신을 지키고 염을 한 이들도 있었다. 작고한 고정희 시인이 <월간중앙> 5월호에 기고한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이라는 글에는 이들의 헌신이 기록돼 있다.
 

"도청 앞 맞은편 상무관에는 신원이 확인된 시체들이 질서정연하게 태극기와 무명천에 덮여 진열되었고 입구에 분향대가 마련되었는데, 주로 황금동 술집 접대부로 알려진 여성들이 자진해서 이들 참혹하게 죽은 시체들을 씻기고 양말을 신기고 염하는 일을 도왔으며 민주영령을 위로하는 분향대를 지켰다(이들중 2명이 나중에 구속되어 정현애(오월어머니집 전 관장)와 감방생활을 함께 했다)."


당시 시민군 보급부장이었던 구성주(64)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 회장도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상무대에서 시신을 수습하던 중 황금동 여성들을 봤고, 외양상 독특했기에 이들이 황금동에서 일한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정현애(67) 전 관장과 5.18민주유공자 이영자(78)씨의 증언은 좀 더 구체적이다. 5.18 직후 체포되어 광산경찰서(유치장)에 있던 이들은 '진'과 '인자'(예명)를 만났는데, 이들은 '아방궁'이라는 유흥업소에서 일했고, 자신들이 5.18 당시에 시신 수습을 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아방궁에서만 7~8명이 시신을 염습해서 상무대로 옮기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아방궁에 대해서 정현애 전 관장은 황금동 콜박스 거리의 유흥업소, 이영자씨는 도청 뒤 나이트클럽, 송희성 전 회장은 도청 뒤 '요정'이라고 기억한다).

"그들도 광주 시민"

황금동 여성들의 활동이 시민군을 돕는 일에만 그쳤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집회에 참여하고, 대치 상황에서 계엄군에게 대항하기도 했다. 짱돌을 던지고, 황금동에서 바리케이드가 쳐지자 빈 맥주병을 나르기도 했다. 총이 없을 뿐,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해 싸웠다.
 

"집회에서 외쳤던 구호는 '전두환을 때려잡자'. '양키들은 물러가라' 등이었고 정의가,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불렀다. 군중 속에는 황금동 술집 여자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그들을 보고 신기해하며 야! 하는 감탄을 하기도 하고, 그들도 광주 시민인데 당연하다는 말을 했다. 다른 사람들도 대개 그런 말을 들었다. - <광주5월민주항쟁 사료전집> 공장노동자 김○○씨의 증언 중 -


23일 도청집회의 상황을 묘사한 위의 문장에서 황금동 여성들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의미심장하다. 처음에는 그들이 집회에 함께하자 일시적으로는 '신기하다'는 감정이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자연스럽게 '광주 시민'이라는 평등한 위치로 인식됐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조용하게 시민군을 도왔던 존재가 아니라, 직접 항쟁에 나서서 자신들이 '광주 시민'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던 것이다.

목포 출신 '인자'와 서울 출신 '진'... 구체적이고 중요한 증언들
 

 현재의 황금동 모습. 과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현재의 황금동 모습. 과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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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앞서 언급한 증언 자료는 황금동 여성들의 활동을 설명하는 데는 불완전하다. 먼저 이들은 일반적인 시민 대학생 조직에 속해 있지 않았다. 이들이 항쟁에 참여한 계기가 무엇인지, 어떻게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는지 등은 외부인이 규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활약상 역시 목격자들의 증언만으로는 구체적, 입체적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황금동 여성들의 직접 증언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80년 이후 황금동 여성들을 만났거나 연락했다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또한 황금동 거리를 둘러봐도 80년대 '황금동 콜박스'라는 유흥의 거리는 아예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지금 황금동은 옷 가게와 음식점이 모여 있는 흔한 도시의 중심부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올해 초,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여성 운동가들로부터 황금동 여성들의 신원을 짐작하게 해주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계엄군에 의해 체포된 여성들만 모여 있던 광산경찰서에서 진과 인자(예명)이라는 황금동 여성들을 만났다는 정현애 전 관장의 증언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100여 명 정도가 유치장에 있었어요. 황금동 여성들은 15~20명 정도... 외모상으로 눈에 띄었어요. 방(유치장)을 고정적으로 쓰는 게 아니라 멤버가 바뀌었거든요. 그러다가 아방궁이라는 술집에서 일하는 진과 인자랑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인자는 집이 목포였고,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술집을 전전했다고 합니다. 남자친구가 대학생이었고, 하루는 그 남자친구 부모인지 친구인가가 면회를 왔어요. 남자친구는 해남 출신인데 5.18 항쟁에 뛰어들었다고 해요.

진은 집이 서울인데 집을 나왔던 것으로 기억해요. 희생당한 시신들이 도청으로 집결하고 이를 상무관으로 옮겨놓았는데, 진이 이 시신들을 돌봐주고 지키는 일을 했다고 해요. 인자는 서포트 역할을 했고요. 아방궁에서만 7~8명이 시위에 참여하고 물자를 공급하거나 수혈을 하면서 시민군들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상무관에 있다가 26일에 아방궁으로 다들 돌아갔는데, 누군가가 신고를 해서 잡혀 왔다고 해요. 둘은 1차 훈방(7월 3일)에 풀려난 것으로 기억해요."


그는 '황금동 여성들'에 대한 에피소드도 하나 말해줬다. 황금동 여성들이 자신들이 왜 잡혀온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죄목을 경찰서에 물어봤다고 한다. 그러자 "저렇게 죽으면 어여쁜 아가씨가 돌봐준다는 것을 보여줬다"라고 답하면서 '폭도 고무'라는 황당한 죄명을 댔다는 것. 이에 유치장에 있던 사람들이 황당해서 전부 웃었다고 한다.

5.18 당시 계엄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가두방송'을 했다가 체포된 차명숙(59) 대구경북 5·18동지회장은 광산경찰서에 오기 전에 505보안 상무대에서 고문을 당했다. 당시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황금동 여성들'의 존재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제 기억으론 여덟, 아홉 명쯤 됐던 것 같아요.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컸어요. '당당한 일을 해서 상을 받아야 하는데 잡혀왔다'고 했거든요. 특이하다고 느꼈어요. 제 밥이나 속옷 등을 챙겨놨던 것 같고... 헌혈도 하고 시신을 닦았다고 들었거든요. 거기 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헌혈을 어떻게 해? 라는 반응이 있었어요."


5.18 유공자인 이영자씨의 증언도 비슷하다. 
 

"25~27살 정도 됐던 것 같아요. 걔네가 그래요. '언니 나는 실은 상 받아야 할 일을 했는데 죄인이 돼서 왔어요.' 들어보니까 시신 수습을 하고, 광목으로 옷을 만들고 염을 해서 도청 앞 상무대로 옮겼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언젠가는 너희가 상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줄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그런데 (5.18) 유공자가 된 것 같지는 않아요. 모임에서 본 적도 없고, 이름이나 신상을 모르니까 찾기도 어렵고요."


계엄군의 서류... "직업 : 접대부(향락)"

계엄군에 붙잡힌 황금동 여성들에 대한 기록이 서류로 남아 있진 않을까?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 남아 있는 '훈방' 관련 자료(5.18 광주 민주화운동자료총서)를 살펴봤다. 7월 3일 훈방 명단에 '인자'라는 이름은 있었으나, 정 전 관장이 말하는 이와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직업란을 살펴봐도 황금동 여성들로 특정될 수 있는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훈방자에게 받는 '각서' 자료가 일부 남아 있었는데, 한 여성의 직업이 접대부(향락)으로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소 역시 한 여관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황금동 여성들'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 
   

 5.18전자자료총서 캡처. 한 여성이 훈방조치를 받고 나갈 때 썼던 각서다. 직업란에 부분에 접대부(향락)이라고 적혀 있다.
▲  5.18전자자료총서 캡처. 한 여성이 훈방조치를 받고 나갈 때 썼던 각서다. 직업란에 부분에 접대부(향락)이라고 적혀 있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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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추적은 딱 여기까지였다. 위 각서에 쓰인 이름과 광산경찰서에서 감옥생활을 했던 두 명의 예명을 바탕으로, 5.18 단체들과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등에 질의했으나 마땅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실제로 취재 과정에서 만나거나 연락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났다" "만나기 어려울 거다"라며 부정적인 전망을 드러냈다.

<오마이뉴스>가 황금동 여성들을 찾습니다

그러나 한 지역을 기반으로 조직적으로 항쟁을 했던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을 이대로 야사(野史)로 남겨둘 수만은 없다. 유치장에 있던 황금동 여성들의 말처럼, 그들은 당당하고 옳은 일을 했고, 현재의 한국 사회는 이를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황금동 여성들의 증언이 세상에 알려지면, 80년 5월 광주에서는 계층과 지위를 초월한 항쟁이 벌어졌고, 여성들 또한 항쟁의 주체였다는 사실이 재조명될 수 있다. 이는 5.18의 의미를 더욱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황금동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전설'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 <오마이뉴스>는 한 명 한 명 '광주 시민'으로서 항쟁에 참여했지만, 기록되지 못한 그들을 계속 찾을 것이다.

※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오마이뉴스>는 5.18 민주화운동의 숨은 주역 중 하나인 '황금동 여성들'을 재조명하고, 기록하고자 합니다. 만약 자신이 '황금동 여성들'로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거나, 혹은 황금동 여성들을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꼭 오마이뉴스에 제보해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2-733-5505, E-Mail: stargazer@ohmynews.com, edit@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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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촛불혁명 완성의 길

박해전  | 등록:2020-05-15 16:03:27 | 최종:2020-05-15 16:10:3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문재인 대통령과 촛불혁명 완성의 길
[통일정치시론] 촛불혁명을 완성하는 길은 남북공동선언을 완수하는 데 있다
(사람일보 / 박해전 / 2020-05-15)

 

박해전 자주통일평화번영운동연대 상임대표가 15일 ‘문재인 대통령과 촛불혁명 완성의 길’ 제하의 통일정치시론을 발표했다. 전문을 싣는다. <사람일보 편집자>

[통일정치시론] 문재인 대통령과 촛불혁명 완성의 길

국민주권자들은 촛불혁명으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유린한 박근혜 사대매국정권을 탄핵하고 2017년 5.9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선출한 데 이어 2020년 4.15총선에서 촛불혁명 정권을 뒤엎으려는 박근혜 잔당을 물리치고 제21대 촛불혁명 국회를 세우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주년 특별연설에서 촛불의 염원을 항상 가슴에 담고 국정을 운영했다며 임기 마지막까지 위대한 국민과 함께 담대하게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과 제21대 국회는 국민주권자들이 쟁취한 촛불혁명 권력으로서 촛불혁명의 대의에 따라 식민과 분단의 적폐를 청산하고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강령인 판문점선언을 완수함으로써 국민주권을 오롯이 실현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과 막중한 책무를 안고 있다.

제폭구민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동학혁명, 일제침략에 맞선 항일투쟁, 외세에 의한 조국 분단에 항거하며 자주 민주 통일을 이루기 위해 투쟁한 제주 4.3항쟁, 4.19혁명, 5월항쟁, 6월항쟁, 범민련 민족대단결운동, 6.15공동선언, 10.4선언 정신이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

국민주권자들은 촛불혁명 권력인 문재인 대통령과 제21대 국회가 역사와 민족의 부름 앞에 자기 사명과 역할을 다하여 촛불혁명을 완성할 것을 엄숙하게 요구하고 있다. 제정당사회단체들도 이러한 민의를 받들어 국민주권을 침해하는 식민과 분단의 적폐를 청산하고 우리 민족의 염원인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을 앞당기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제21대 국회는 개원과 함께 우리 민족의 식민과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을 총결산하는 역사적인 판문점선언의 국회비준동의를 만장일치 가결하는 것으로 자기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판문점선언 이행을 바탕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추진하는 코로나19 국난 극복을 위한 ‘한국판 뉴딜’ 성공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국회는 또 분단 제도적폐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판문점선언에 기초한 자주통일 평화번영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국민주권을 완전하게 보장해야 한다. 헌법 전문에는 반외세 동학혁명으로부터 촛불혁명권력 창출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위대한 투쟁의 현대사와 그 정신이 오롯이 담겨야 한다.

국회는 특히 군사주권을 외국에 넘기고 일제식민지배에 면죄부를 준 사대매국악법들인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일기본조약을 폐기하고 한미상호자주평등공동번영조약과 한일불법강점침략배상정의조약을 체결하도록 결의함으로써 국민주권이 올바로 실현되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

제정당사회단체들은 국민주권자들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살길인 판문점선언 완수와 사대매국범죄 추방 범국민운동을 적극 벌여나감으로써 사대매국노들이 다시는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식민과 분단 적폐청산으로 사대매국언론을 퇴출시키고 국민주권자들에게 참답게 복무하도록 권력기관을 혁신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식민과 분단의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정의와 역사정의를 바로세워 촛불혁명을 완결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6.15공동선언, 노무현 대통령의 10.4선언을 계승하여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판문점선언을 공동채택한 문재인 대통령이 촛불혁명을 완성하는 길은 남북공동선언을 완수하여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을 이루는 데 있다.

▲박해전 대표  ©사람일보

국민주권자들은 촛불혁명권력 문재인 대통령이 민족자주와 민족자결의 원칙에서 촛불혁명권력 제21대 국회와 연대 협력하여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조국통일회담을 열어 판문점선언에 의거한 조국통일을 선포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촛불혁명이 완성되는 그날 촛불은 더욱 영롱한 빛을 뿌릴 것이다.

국민주권자들은 문재인 촛불혁명 대통령과 제21대 촛불혁명 국회와 함께 촛불혁명의 완성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할 것이다.

2020년 5월 15일
자주통일평화번영운동연대 상임대표 박해전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uid=4964&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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