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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고향방문, 통일의 꿈 이루도록”

 더불어시민당 비례후보 7번 윤미향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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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4.05  2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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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불어시민당 비례후보 7번 윤미향 후보와 3일 오후 서울 광화문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3시간 동안 고민을 했고 결정했다.”
일본군‘위안부’(성노예) 문제 해결에 30년간 힘을 쏟아온 더불어시민당 비례후보 7번 윤미향(55) 후보는 “현장이 국회로 넓어졌다”고 정치권 진출 결단을 간략하게 요약했다.

그간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로 더 잘 알려진 윤미향 정의연(일본군성노예제해결정의기억연대) 전 이사장은 공식 선거운동 이틀째인 3일 오후 서울 광화문 한 커피숍에서 <통일뉴스>와 가진 인터뷰에 파란색 ‘5번’ 복장으로 임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경력 탓일까. ‘일본 정부가 비례후보 7번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더니 <조선일보>는 ‘반미 구호 외친 시민당 비례, 자녀는 미국 유학’ 류의 기사로 윤 후보에게 포화를 집중했다.

그는 “왜 <조선일보>가 그 많은 후보들 중에 비례 1번도 아니고, 비례 2번도 아니고, 3번도 아니고, 7번인 윤미향일까?” 자문하고 “역시 일본이 불편해 하고 일본이 예의주시 하고 있는 것을 <조선일보>가 저렇게 대행해주고 있는 것이구나. 그렇게 연관지울 수밖에 없다”고 자답했다.

“30년 동안 거리에서 운동을 하면서 한계에 부딪쳤던 것은 일본의 힘이었다”는 그는 당선될 경우 희망하는 상임위원회를 묻자 “당연히 외교통일위에 들어가야 한다”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러면서도 “일본과 싸우러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풀지 못하는 것을 다자외교를 통해서 갈등을 풀어나가고 싶다”며 구체적으로 한일여성평화의원모임과 국제여성평화의원모임 등의 구상을 밝혔다.

특히 “일본 정부는 ‘위안부’ 강제연행의 증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일본 정부에게 “인정하라! 인정하라!”고만 해서는 해결이 안 된다”며 “우리 내부에서 법체계를 만들어서 진실규명을 해나가고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고 체계화해서 그것을 토대로 일본 정부에 진실규명도 촉구해 나가고”, “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자외교를 벌였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 윤미향 후보는 1992년부터 정대협 간사를 시작으로 한 길을 걸어왔다. [사진제공 - 윤미향]

윤미향 후보는 1991년 8월 14일에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임을 밝히고 나선 후 1992년 단체 간사로 활동을 시작해 정대협 상임대표를 역임했고, 수요시위(현재 1433차)를 이끌며 유엔은 물론 유럽연합과 미국, 독일, 베트남, 일본 등 세계 곳곳을 활동무대로 누볐다.

그는 “13살 15살에 고향을 떠나서 아직도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것도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하나”라며 “결국 일제식민지를 완전히 청산하는 것, 저는 통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분단을 극복하고 분단을 해소하는 이것, 통일이 일제식민지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청산하는 것이고 해방되는 참해방”이라고 강조했다.

30년 동안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현장을 뛰어다니고 세계를 누빈 결론은 일제식민지 완전 청산, 참해방을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임을 절감한 것.

그는 “외교통일위를 통해서는 “나, 일본정부에게 진실된 사죄 한 마디를 듣고 싶어요” 하는 소원, 남북연대를 통해서는 “엄마, 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하는 할머니의 고향방문을, 통일을 바라는 꿈을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작년 초의 단계로 돌아가서 금강산, 개성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된다”며 “정부는 정부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노력하고 민간은 민간대로 북과 만날 수 있는 노력들 우리가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과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차별, 재일동포사회에 대한 탄압이 같은 맥락”이라며 “근본적으로는 일제 식민지 책임의 청산 문제로 볼 수 있다”고 짚고 “통일과정에서 반드시 우리가 언급하고 함께 해야 될 문제가 재일동포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가 평등하게 대우 받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3일 오후 3시 서울 광화문 한 커피숍에서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비례후보와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한계에 부딪쳤던 것은 일본의 힘이었다”

   
▲ 윤미향 후보는 더불어시민당 '5번' 기호가 눈에 띄는 선거 복장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더불어시민당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다. 지금 5번이 씌어진 복장도 입고 있는데, 그동안 윤미향 대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국회 진출이 약간 갑작스럽고 낯설기도 한 것 같다. 언제 어떻게 결심했나?

■ 사실은 두 주도 안됐다. 지난 19일, 더불어시민당이 우리 사무실에 ‘시민사회에서 후보를 추천해 달라’고 공문을 보내왔다고 우리 활동가들이 얘기를 하더라.

그런데 더불어시민당에 참여하고 있는 정당들을 봤는데, 가자평화인권당이 있었다. 가자평화인권당은 우리가 수요시위를 할 때마다 옆에서 정대협을 공격하는 데모를 했던 팀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문희상 안(案)’을 찬성하는, 그러니까 결국은 돈이다. 일본 정부 보다는 한국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청와대로 가자!”하면서 청와대로 행진하는 퍼포먼스도 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안 된다고 문제제기를 했다.

우리 단체에게도 적임자를 추천해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고, 그래서 사무실에 누구를 추천할 수 있을지 좀 알아보라고 했다. 그날만 해도 저는 상상도 안 했다.

그 다음날 20일, 저 혼자 휴가 내고 집안일 하고 있었는데, 지은희 선생을 비롯하여 정대협 선배들이 저를 추천했다고 사무총장이 연락이 와서 3시간 만에 결정하라는 거다. 그래서 3시간 동안 고민을 했고 결정했다.

□ 짧은 시간 안에 나서기로 결정한 이유는?

■ 그 결정의 이유는 딱 하나다. ‘열여덟 분이 생존해 계신데, 이 같은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그동안 30년 동안 거리에서 운동을 하면서 한계에 부딪쳤던 것은 일본의 힘이었다. 일본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역사를 부정하고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학자들을 키우고 하는 일에 1년에 수억원의 예산을 수립해 활동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시민단체, 정대협이 부딪치는 거였다.

그러니까 어느 나라에 가면 우리가 실컷 기림비를 세워놨는데 기림비를 무너뜨리고, 어느 곳에 가면 심포지엄을 하고 있는데 일본의 지원을 받는 연구자가 일본 정부 입장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고. 김복동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데 거기에 나타나서는 “저 할머니들 돈받지 않았느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한 5,6년 전만 해도 그런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아베 정권이 장기집권하면서 너무나 급속도로 세계 각지에 늘어나기 시작한 거다. 그때마다 제가 느꼈던 것은 ‘아, 우리가 이런 식으로 대응해서는 안 되겠구나’였다.

조금 더 제도적으로 정책적으로 뒷받침을 해주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연구자도 많이 확보돼 있어야 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그것을 우리말로, 영어로, 일본어로 해석해 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세계가 이 문서 기록들을 함께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제 18명만 남은, 240명의 피해자 분들의 목소리를 담아서 계승해 나가는 길이라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실종된 십수만의 여성들의 삶을 지금이라도 우리가 기억하고 그분들의 이름을 불러드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NGO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넘어서기 때문에 정책으로 수립돼 입법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계기는 국회에 들어가서 그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

또 다른 이유도 하나 있다. 사실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저한테 제안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정의연을 떠날 수 없는 상황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스템도 다 정비되었고, 후배들이 다 각자의 몫을 다하고 있다. 또 재단이 만들어져서 지원활동을 하고 있고, 심지어는 일본운동까지 지원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 경험을 가지고 국회에 들어간다면, 시민사회가 그동안 30년 동안 함께 해왔던 것을 비로소 정치권이 받아 안아서 이것을 제대로 정책화해 내는 일에 사용될 수 있겠구나 그런 판단을 했다.

그래서 가야겠다고 정말 3시간 만에 결정을 해서 후다다닥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좀 마음이 부자유로웠다. ‘내가 과연 나한테 맞지 않은 정치가의 옷을 입을 수 있을까?’ 또, 미래한국당이 만들어지고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서 더불어민주당이 소수정당과 함께 비례연합정당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정개련과의 협의가 깨어지는 모습을 너무 안타깝게 보고 있었다.

더불어시민당이 만들어졌고 추천서가 왔고, ‘이게 기회구나’ 판단했다. 문재인 정부가 일본 정부에게 무역보호 조치를 당한 상황에서 윤미향이 정치권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일본 정부에게 가지는 강한 메시지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국회에 들어가는 결정을 한 것이다.

“답을 듣고 싶다. 왜 <조선일보>가 나를 공격하는지

 

   
▲ 윤미향 후보는 <조선일보>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일본이나 보수진영에서 윤 대표의 국회 진출을 상당히 눈여겨보거나 눈에 가시로 보는 것 같다. 실제로 <조선일보>가 윤 후보의 딸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 시작은 ‘일본 정부가 비례후보 7번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기사가 먼저 떴다. 그게 뜨고 나서 일본의 지인이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일본이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라는 암시를 저한테 줬다. 그래도 뭐 별로 신경을 안 썼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제 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정대협과 정의연이 대표가 똑같이 윤미향인데 두 단체 다 서울시 프로젝트를 신청했고 서울시가 실사를 통해서 정대협만 프로젝트를 주고 정의연은 탈락시켰다면서 그 제목을 “들통났다”고 했다.

법인이 다르니까 당연히 법인 이름으로 프로젝트를 신청하는 것이고, 서울시가 봤을 때 적절치 않으면 탈락하는 건데, 그게 마치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들통났다” 이렇게 기사를 쓰는 것을 보고 ‘이게 시작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제 딸한테 올 줄은 몰랐다. 제가 주한미군의 방위비, 그것도 사드 배치 비용을 미국이 우리에게 다 부담하라고 한 것에 대해서 반대 목소리를 낸 것으로 ‘반미 프레임’을 씌웠고, ‘반미하면서 딸은 미국으로 유학보냈다’ 라는 기사를 쓴 거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그 기사를 썼을 때는 저는 그냥 <조선일보>니까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다른 경제신문들이 똑같은 기사를 썼다. 그리고 계속 정대협을 종북주의라고 공격해온 우익 인터넷매체가 또 썼다.

아! 충격이었다. 일본이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했는데, 경제신문이 나선다면 ‘혹시 이게 일본의 자금이 움직이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좀 했다. 그런데 이건 제가 조심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저를 공격하는 게 아니니까. 제 딸을 공격하는 것일 줄은 상상을 못했으니까.

제 딸은 충격을 먹어서 거의 감옥상태에 있다. 혹시 집밖에서 이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 아닌가 싶어서. 다른 식구들을 옆에 붙여놓을 정도다.

제가 좀 이해를 할 수 없는 게 왜 <조선일보>가 그 많은 후보들 중에 비례 1번도 아니고, 비례 2번도 아니고, 3번도 아니고, 7번인 윤미향일까? 왜 ‘위안부’ 문제를 했던 윤미향이 국회 들어가는 것이 <조선일보>가 보기에 그렇게 불편하고 저렇게 공격할 정도로 위험한 것인가? 이런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되는 거다.

그것은 역시 일본이 불편해 하고 일본이 예의주시 하고 있는 것을 <조선일보>가 저렇게 대행해주고 있는 것이구나. 그렇게 연관지울 수밖에 없다. 사실 저는 좀 답을 듣고 싶다. 왜 <조선일보>가 나를 향해 공격하는 것인지.

□ 어제부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다. 비례후보들의 경우 지역구가 없기 때문에 선거운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 주로 SNS 활동을 하고 있고, 언론 인터뷰도 하고 있다. 그나마 이걸 입고 다니면서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다. 공공장소에서 할 수도 없고, 무슨 집회 같은데 가서도 “저를 지지해주세요”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선거운동 하는데 가서 뭐라도 하면 선거법에 걸린다고, 그것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SNS나 언론인터뷰나, 제 지인들을 통해서, 또 관계맺고 있는 네트워크를 통해서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제가 남해 출신이기 때문에 남해에서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도록 하는 호소활동을 아는 사람, 친구들, 가족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기존 정당도 아니기 때문에 당원이라는 게 없지 않나. 그래서 더 열악하다. 돈도 없는 것 같다.

□ 오늘 가자평화인권당이 윤 대표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했다는데 소식을 들었나?

■ 결과는 못 들었고, 할 것이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가자평화인권당이 처음에는 공동대표 한분을 비례로 냈는데, 비례에서 탈락했다. 비례 떨어지고 나서 계속 기자회견 하고 중앙당에서도 항의하고 그랬다더라.

아마 제가 자기들의 비례를 뺏어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저를 공격으로 삼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제가 아니었더라도 평화인권당은 비례로 선정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제 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오늘 기자회견 내용 중 이용수 할머니가 윤미향 후보에게 흔쾌하게 “잘 해봐라”라고 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더라. 그 대목에 대한 입장은?

■ 공식적으로 선관위에 후보 등록하는 날 이용수 할머니께 조심스럽게 전화했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지난번 선거 때 비례로 나서서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혹시 할머니가 여전히 비례로 추대되길 원하실까 이런 생각을 조금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할머니 연세가 93세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제가 갑작스럽게 추천됐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할머니와 의논할 수는 없었고, 후보를 등록하는 날 할머니한테 그 과정을 설명드렸다. 설명하자 마자 “아, 잘 됐다. 잘됐다” 그러셨다.

그래서 제가 “할머니, 제가 그러면 할머니하고 함께 국회한다라고 생각할께요. 할머니가 저한테 전달하실 말씀 있으시면 제게 하시고, 또 빨리 남북의 물꼬도 터서 할머니랑 함께 평양도 가고 그럴 수 있게끔 제가 할께요” 그랬더니 “그래, 그래, 그러자. 열심히 하자” 흔쾌히 그러셨다.

그런데 딱 이틀이 지났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이미 목소리가 굉장히 화가 난 목소리였다. 누가 할머니에게 왜곡된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고, 그날은 대화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제 또 전화가 왔는데, 어제는 확실히 누가 옆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가 며칠 전에 출연한 방송 유튜브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아, 누군가가 할머니에게 유튜브를 열어서 보여주면서 할머니를 이용했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피해자들은 누구를 이용했다고 할 때 참 힘들어 한다.

할머니께서 ‘위안부’ 문제를 다 해결하고 들어가라고 하셔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가 들어가는 겁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전화 끝나자마자 정의연 사무총장에게 전달을 해서 찾아가 뵈라고 이야기했고, 그래서 만나서 상대측에 기자회견하라고 한적 없다고, 내 이름을 거론하지 말라고 직접 전화통화를 했다고 들었다.

□ 오늘 가자평화인권당 측이 기자회견에서 정대협이 할머니들에게 1억원 뒷돈을 몰래주고 수요시위에 오게 하고 반일 운동을 하게 했다고 발표했다.

■ 그러면 할머니들 역시 류석춘이 이야기한 것처럼 자유의지가 하나도 없는데 정대협이 시켜서 한 거란 말인가. 그거 기사로 쓸 기자들이 있을까? 1억 지급한 것 다 알고 있지 않나. 그때 당시 우리가 모금을 어떻게 했고, 피해자들에게 인권상을 드리면서 전달한 것이다. 가슴이 아프다.

“외통위, 일본과 싸우러 들어가려는 것 아니다”

   
▲ 2013년 일본 순회집회 중 할머니들과 함게 신칸센으로 이동하며 일하는 모습. 윤미향 후보는 일본이 가장 주목하는 후보다. [사진제공 - 윤미향]

□ 국회의원에 당선될 경우 염두에 둔 상임위가 있나?

■ 외교통일위원회에 가야 한다. 그리고 일단 여성가족위원회는 꼭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위안부’ 관련한 진상규명이라든가 기념사업, 그걸 여가부가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외교통일위에 들어가야 한다. ‘위안부’ 문제나 과거사 해결도 한일 간의 외교로만 이루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한일 관계에서는 대립하는 이익 관계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인권이나 평화의 가치들을 외교는 숨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다자외교가 필요하고, (외교부) 일본과, 아태국에서만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하면 안 된다. 인권사회과에서 국제기구를 향한 외교가 필요하다. 그리고 특히 국회의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국제의원연맹이라든가 유엔의 여성기구들에 국회의원들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들어서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시민사회가 주 타깃이 돼서 일본 정부의 공격을 받고 이랬던 것도 정치영역으로 책임을 분담할 수 있는 것도 되지 않겠는가.

외교통일위에서 아마 저를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제가 일본과 싸우러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풀지 못하는 것을 다자외교를 통해서 갈등을 풀어나가고 싶다. 다양한 나라 의원들과 함께 힘을 모아서 일본 정부와 유엔을 향해서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세계에서 계속되고 있는 무력분쟁 지역의 성폭력 재발방지를 위한 목소리를 내게 만드는 역할, 그걸 하려면 외교통일위에 들어가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그렇지만 결국 일제식민지를 완전히 청산하는 것, 저는 통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분단을 극복하고 분단을 해소하는 이것, 통일이 일제식민지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청산하는 것이고 해방되는 참해방이다.

13살 15살에 고향을 떠나서 아직도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것도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하나다. 피해자들이 집으로 가고 싶을 때 가게 만드는 것, 원상회복 조치다.

13살에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았더라면 이분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았을까? 저렇게 이산가족이 돼서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그것도 해방의 과정 중의 하나다.

그래서 저는 외교통일위야 말로 진정한 식민지 책임을 청산해내는 숙제가 놓여져 있는 위원회이고, 30년 동안 거리에서 부드러운 혁명이 진짜 무엇인지 몸소 배웠던 사람으로서 또 일본의 정치권을, 일본의 시민사회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현실에 맞는 외교전략, 외교정책을 수립하는 일에도 저를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꼭 윤미향 외교통일위 가야 된다. 한국 정부가 풀 수 없는 일, 윤미향이 풀 수 있다.

   
▲ 2004년 5월 일본과거청산을 요구하는 제 2회 국제연대협의회 서울대회에서 만난 남측 길원옥(왼쪽) 할머니와 북측 리상옥(오른쪽) 할머니가 손을 맞잡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노무현 정부 시절에 북측 ‘위안부’ 피해자 분들이 남쪽에 오기도 했다. 남북간 연대, 교류에 대해 어떤 구상이 있나?

■ 사실은 제 눈에는 아직도 그 영상이 그대로 있다. 북에서 리상옥 할머니가 오셨는데, 우리 길원옥 할머니가 손을 잡고 마치 형제지간을 만나는 것처럼 그 눈동자가 초롱초롱했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처럼 남아있다.

그걸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걸 잊지 않아야 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남북연대의 물꼬를 트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려고 한다. 그건 우선은 북에 대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제재가 해제되어야 되고, 그리고 남북이 지금 교류와 협력을 통해서 대치를 풀어야 된다.

무엇보다도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 김영삼 정부 시절에 남북의 정치권이 아무리 긴장국면에 있을 때에도 ‘위안부’ 문제는, 여성들의 연대는 정부들이 풀어줬다. 그래서 인도주의 입장에서 북의 ‘위안부’ 단체와 만나는 것을 승인을 해줬고, 승인을 해주면 통일부가 경비를 지원했다.

그런데 그걸 ‘원 트랙’으로 만들어 버렸던 게 바로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였다. 이명박 정권 때만 해도 사실은 2008년에 길원옥 할머니가 평양에 갔다. 할머니 고향인 (평양) 서성구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약간 맛만 보게 하고 딱 끊어져버린 거다. 다시 고향을 가야 하는데.

저는 93세 노인이 고향을 가고 싶다고 하는데 그것을 못 이뤄주는 정부는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부도 나서고 국회도 나서고, 할머니의 간절함이 알려지면 무슨 일이 있어도 북 정부도 할머니의 그 소망을 들어줄 수 있도록 응하지 않겠는가. 그런 신뢰와 믿음이 있다.

왜냐하면 길원옥 할머니가 그동안 재일 조선학교 아이들에 보여온 사랑이랄까 평화의 메시지랄까 북에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외교통일위를 통해서는 “나, 일본정부에게 진실된 사죄 한 마디를 듣고 싶어요” 하는 소원, 남북연대를 통해서는 “엄마, 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하는 할머니의 고향방문을, 통일을 바라는 꿈을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 “엄마, 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2007년 5월 서울에서 열린 '제8차 일본군'위안부'문제 아시아연대회의'에 앞서 진행된 '남북연대모임'. [사진제공 - 윤미향]

□ 당장 남북관계가 막혀 있다. 만약 의원이 돼서 외통위에 간다면 남북관계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된다고 생각하나?

■ 사실은 작년 초만 해도 다 이뤄진 것 같다고 생각했지 않나. 북에서 금강산, 개성관광 재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을 때 우리가 그것을 자주적으로 결정해서 이것은 제재와 상관없는 인도주의 정책으로 시행했다면 남북관계가 지금 어떻게 됐을까 상상을 할 수 있지 않나.

다시 저는 작년 초의 단계로 돌아가서 금강산, 개성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국의 압력이 있고 미국 대사관에서도 미국과 협의해서 남북이 교류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도 조금 강한 메시지를 낼 수 있는 그런 정부, 그런 국회의 목소리가 나와야 된다고 보고, 그런 게 이루어지면 북에서도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북에서 무조건적으로 저렇게 문을 닫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코로나19 정국이 달라져야 되고, 코로나19 정국이 해결되면 저는 민간에서도 적극적으로 교류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본다. 정부는 정부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노력하고 민간은 민간대로 북과 만날 수 있는 노력들 우리가 해야 한다.

□ 또 난제 중의 난제는 한일관계다. 오랫동안 해왔고 이미 많이 알려진 이슈들인데, 어찌됐든 현재는 막혀있고 아베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는 상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나?

■ 어려운 숙제인데, 일본 사회 내에서 우선 변화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본 사회 내 시민사회의 목소리, 그게 좀 더 강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지원하고 연대하는 것도 다른 한쪽에서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 내부에서도 지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과거사 문제 해결과 관련해서 기준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바로 ‘피해자 중심주의’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과거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정책을 수립해야 되고, 그 정책을 수립하는데 있어서는 민간자원, 입법부를 충분히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강제연행의 증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일본 정부에게 “인정하라! 인정하라!”고만 해서는 해결이 안 된다.

우리 내부에서 법체계를 만들어서 진실규명을 해나가고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고 체계화해서 그것을 토대로 일본 정부에 진실규명도 촉구해 나가고, 그 진실 위에 일본 정부에 책임을 촉구해 나가는 그런 노력이 한쪽에서는 계속 이루어져야 된다고 본다.

   
▲ 윤미향 후보는 국제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19년 11월 우간다를 방문해 우간다내전 성폭력 생존자지원센터 건립부지를 둘러보는 모습. [사진제공 - 윤미향]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런 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자외교를 벌였으면 좋겠다. 유럽연합, 미국 등등의 나라들에게 뭔가 협력을 이끌어내는 활동이 필요하다.

예전에 일본이 ‘납북자 문제’를 이야기할 때, 일본 정부는 모든 나라 만나면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서 “너희 나라 정부가 발언해 달라.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유엔에 가도 그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했던 이야기는 “수많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왜 일본정부가 침묵하면서 계속 그 문제만 제기하고 있느냐”라는 비판을 계속 해왔다.

혹자들은 “계속 그렇게 하다보면 한일 간에 뭔가 외교관계로 발목이 잡혀서 국익이 위협을 받는다. 안보가 위협을 받는다”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계속 ‘투 트랙’ 외교를 하겠다고 천명했다. 경제와 안보 문제는 그대로 해나가고 과거사 문제는 원칙을 가지고 해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투 트랙 외교를 한다고 해서 경제와 안보에 집중하고 이것(과거사)은 무시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만큼 인권외교를 적극적으로 계속 병행한다면, 피해자들이 한국 정부를 향해서도 입법기구를 향해서도 “노력을 멈춘 건 아니구나. 계속 노력하라. 노력하라”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잘 안보이기 때문에 “정부가 뭐하고 있느냐? 국회는 지난 시간 동안 뭐를 했느냐?”라는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제 피해자들이 정부를 향해서도 “우리가 이제 정부를 믿고 우리는 시민사회의 목소리 내겠다”라고 할 수 있을 그런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토대를 형성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참 어렵다. 어떻게 일본이 변할 수 있을까. 너무나 오래도록 체제화 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일본의 민주화다. 일본의 시민사회 목소리가 커져서 아베 정권의 부당한 정책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이건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린다.

재일동포 문제, “남북통일 과정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

 

   
▲ 역사의 고통을 겪은 할머니들이 재일동포들의 고통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19년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한 김복동장학금 전달식 모습. [사진제공 - 윤미향]

다른 하나는 국제적인 공조를 통해서 국제적인 압력, 정치적으로 변화할 수 있게끔 어떤 연대를 만들어내는 이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나야 한다.

예전에 한국의 민주화 때 한쪽에서 민주화투쟁 계속했던 민주화운동, 독일이나 서구에서 민주화운동을 알려 나가고 계속 지원, 지지하는 그런 운동들이 함께 있었다.

일본의 ‘지한파(知韓派)’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위해서 지원했지 않나.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이 일본의 민주화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가? 일본의 민주화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일본의 양심있는 세력들이 목소리를 내고 이제는 한국에서도, 다른 세계에서도 일본이 진정한 민주화를 이루를 수 있도록, 과거의 잘못했던 역사를 올바르게 청산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압력을 가하는 그런 노력들이 함께 어우러져 간다면 저는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가 국회에 들어가면 무엇보다도 한일여성평화의원모임을 만들고 싶고, 그 다음에 그걸 넘어서서 국제여성평화의원모임을 만들고 싶다.

한일여성평화의원모임은 ‘위안부’라는 용어를 쓰지 않아도 “평화를 위해서도 과거사를 청산하자, 민주화를 위해서도 과거사를 청산하자” 이런 메시지를 내고 싶다. 우리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일본 여성의원들 스스로 일본의 시민사회와 함께 협력해서 할 수 있도록.

우리는 거꾸로 국제여성평화의원회를 만들어서 같이 연대하고 그 속에 일본여성들도 들어오는 거다. 그렇게 해서 연대하고 지원하고, 그 기구는 곧 한반도 평화에도 기여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으로 하고 싶다.

최근에 북에 대해서 제재가 계속되고 그것이 남북의 긴장을 더 만들고, 북미 간의 긴장을 더 고조시키고 이런 것들 다 보고 있지 않나. 이때 중간에 나서서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어느 누구도 그걸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다.

한국 내에서만 풀 수 없다. 이럴 경우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국제적인 정치가들, 국제평화운동가들, 그런 분들이 목소리를 내는 게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다. 지난 30년 동안 제가 현장에서 배우고 만들어 왔던 축적된 경험을 가지고 그것을 좀 하고 싶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 최근 일본에서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제외조치와 유아원.보육 무상화 제외조치가 논란이 되고 있다. 상당히 치졸하지만 근본적인 문제인 것 같다. 일본 내부의 한국에 대한, 조선적 재일동포에 대한 정서와 기류가 부정적인 것 같다.

■ 치졸하다. 저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과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차별, 재일동포사회에 대한 탄압이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본다. 따로 떨어져있지 않고, 결국은 근본적으로는 일제 식민지 책임의 청산 문제로 볼 수 있다.

왜냐면 재일동포들의 현재 상황은 일제식민지 역사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니까. 그런데 해방이 된 이후에 그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일본에서 살게 됐고, 그것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인권을 탄압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인종을 차별하는 정책이 학교교육으로까지 이어져서 오늘날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차별, 심지어 유치원에 마스크를 배부하는 것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과거 역사, 식민지 책임의 청산은 남북의 분단상황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식민지는, 남북이 분단되기 이전의 상황이다. 분단되기 이전의 상황으로 돌려놓는 것이 식민지 책임의 청산이라고 저는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일본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일동포들에 대한 문제도 우리가 해결해야 될 책임이 있다. 그것은 북의 문제도 아니고 재일동포 만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우리 남북이 함께 해결해 나가야 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통일과정에서 반드시 우리가 언급하고 함께 해야 될 문제가 재일동포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가 평등하게 대우 받는 것이다. 인권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과거사 청산 운동에서도 또 통일운동에서도 꼭 같이 그 과제를 함께 해결해나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김복동 할머니가 늘 이야기했던 ‘김복동 희망’을 재일동포 사회에 전하는 것, 지원하고 연대하고 희망을 계속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 체제를 바꿔나가는 운동도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재일동포를 바라보는 시각을 분단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그것을 하나로 보는 그런 교육들을 우리가 해나가야 되지 않겠는가. 지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그리고 청년세대에게는 재일동포는 이미 전혀 다른 세계의 구성원처럼 되어버렸다.

지금이라도 빨리 재일동포들도 결국은 우리가 함께 남북통일의 과정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라는 인식을 같이 가져야 한다.

일본의 정치적인 탄압을 바꾸어 나가는 것, 우리 사회에서 재일동포의 차별문제를 바꿔나갈 수 있도록 교육하고, 법제화해내는 일들을 동시에 이뤄야 한다.

저는 정치 신인이지만 국회의원이 되면 21대 국회에서 그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하고 법제화를 해나가려고 한다. 그래서 더불어시민당의 시민사회에서 추천된 10명의 후보들이 굉장히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분들과 네트워크를 계속 형성해 나가고 기존의 통일운동과 시민사회운동에서 배출된 국회의원들과 연대를 만들어서 누구 한사람의 영웅적인 운동으로 결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함께 해나가는 모습을 처음부터 만들어 나가고 싶다.

지금 ‘역사바로세우기 윤미향만이 할 수 있다’ 이런 슬로건이 사실 좀 부담스러운데, 저는 계속 지금 과거사 관련 단체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해요. 함께 해요”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통일분야도 과거사 청산분야도 또 여성인권 분야도 그동안 시민사회의 역할을 토대로 해서 그 축적된 성과를 국회에서 계승하고 그리고 시민사회가 더 활성화될 수 있도록 국회는 법으로 지원하는, 이런 상호작용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한다.

“수많은 할머니들의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국회로...”

   
▲ 윤미향 후보는 4년간 국회 활동을 마치면 다시 NGO로 활동가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이제 30년을 뒤로하고 새로운 장으로 뛰어들었다. 개인적인 소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수요시위는 계속 나갈 건가?

■ 네, 계속 나갈 거다. 온라인 시위가 사람을 만나는 시위로 바뀌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온라인 시위가 좋은 측면도 있더라. 참여하기 어려운 분들도 온라인에서는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 때문에.

그런데 저는 그것보다도 사람을 만나고 눈동자 속에, 손을 잡는 속에 전해지는 그 사람의 현실, 그 사람의 삶의 처지, 그런 것을 직접 만나서 느낄 수 있는데 그걸 지금 하지 못해서 사실 좀 안타깝다.

저는 ‘현장이 국회로 넓어졌다’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거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동안 30년 동안 살아왔던 이 거리 위에서 활동이 플러스 국회로까지, 그리고 비례이기 때문에 전국 각지로 확산돼서 오히려 더 바빠졌고 일이 더 많아졌다라고 생각한다.

국제무대야 늘 정의연 30년 운동하면서 안 다닌 나라가 없기 때문에 그건 그대로 계속할 것이지만, 그리고 ‘김복동 센터’를 세우는 일도, 제가 “김복동 할머니의 메시지를 실현하기 위해서 국회로 왔다. 그리고 수많은 할머니들의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국회로 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계속 노력하고 싶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들 뿐만 아니라 저와 함께했던 분들이 ‘윤미향과 함께 한다’라고 생각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제가 그러지 않으리라고 자신 있지만, 혹시나 제가 그냥 흔히 말하는 정치가가 된다면 엄격하게 꾸짖고 비판해 주고 감시해 주시기를 바란다라고 부탁도 드리고 싶다.

그 역할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더불어시민당을 많이 뽑아주셔서 제가 국회에 가서 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부탁도 드리고 싶다.

그리고 저를 반미프레임까지 낙인찍는 언론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국회 들어가서 진정한 해방, 참해방을 피해자들이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 식민지 책임을 청산할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줬으면 좋겠다.

제 가족을 공격하는 일은 멈춰줬으면 좋겠다. 공격할 일 있으면 저에게 해 달라. 그것은 저를 단련시켜주는 일이기 때문에 저에게 공격해 달라고 얘기하고 싶다.

□ 비교적 바쁘게 살아왔는데, 국회의원이 되면 더 바빠지는 것 아닌가?

■ 그래서 좀 걱정이다. 올해 들어와서는 제가 조금 마음을 내려놨었다. ‘밤이 있는 풍경’을 추구하고 주말에는 산에도 가고 그랬는데 벌써 뺐겼다. 주말이 없어졌다.

안타깝기는 한데, 4년 한 번 해보겠다. 4년은 더 바빠지고 책임감도 더 무거워지고 그런 삶을 살게 되겠지만 30년 보다는 짧은 시간이니까 최선을 다해 달려보고 그 뒤에 다시 윤미향의 개인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하고 싶다.

□ 재선에 도전할 수 있지 않나?

■ 그건 물론 제가 지금 장담은 할 수 없다. 이런 것도 해보고 싶다. 재야활동을 하다가 국회로 갔다가 다시 재야로 와서 열심히 NGO 활동가가 되어 활동하는 모습, 그것도 또 하나의 어떤 사례를 만드는 길이 되지 않을까. 물론 다시 받아준다면.(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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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한핵전쟁도발, 누가 억제할 것인가

[개벽예감 389] 미국의 제한핵전쟁도발, 누가 억제할 것인가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0/04/0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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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조선과 미국의 핵대치상황에 충격을 준 사건

2. 미국은 왜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파기했는가?

3. 핵태세검토보고서에 늘어놓은 거짓말

4. 팬텍스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신형 전술핵무기들

5. 아시아에 우선적으로 배치될 미국의 신형 전술핵무기

6. 미국은 1~2년 안에 전술핵공격준비 완료한다

7. 조선이 만드는 신형 전략무기는 극초음속활공체

 

 

1. 조선과 미국의 핵대치상황에 충격을 준 사건

 

2019년 8월 2일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이 중거리핵무력조약(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사건이다. 중거리핵무력조약은 1987년 12월 8일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쵸브가 체결한 미국과 소련의 쌍무조약이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로씨야가 이 조약의 의무를 이행하게 되었다. 이 조약의 영어명칭을 직역하면 중거리핵무력조약이지만,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Intermediate-Range Nuclear Arms Control Treaty)으로 의역해야 정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이라고 부른다. 

 

이 조약이 어떻게 체결되었는지 살펴보자. 미국과 소련은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1980년 10월부터 1987년 9월까지 협상을 진행했다. 8년 동안 협상한 끝에 1987년 12월 8일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약에 따라 두 나라는 1988년부터 1991년까지 3년 동안 사거리가 최단 500km에서 최장 5,500km에 이르는 지상발사미사일을 모두 폐기했다. 핵탄두를 장착하는 미사일과 재래식 탄두를 장착하는 미사일이 폐기되었고, 지상발사탄도미사일과 지상발사순항미사일이 폐기되었으며, 이런 종류의 미사일이 탑재되는 발사대차들도 폐기되었다. 3년 동안 미사일 2,692발이 폐기되었다. 미국과 로씨야는 1991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동안 폐기현장을 교차방문하면서 검증했다. 

 

그러나 8년 협상과 10년 상호검증을 거쳐 실현하였던 중거리핵군비통제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조약을 파기하는 바람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미국의 일방적인 조약파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국제사회에서 울려나왔지만, 어떤 나라도 미국의 파기행위를 막지 못했다. 미국이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파기한 것은, 그 조약이 체결된 이후 32년 동안 핵무력 증강을 부분적으로나마 억제해온 장치를 풀고 핵무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미국이 핵무력을 증강하는 것은 방대한 양의 기존 핵무기를 현대화하고, 새로운 종류의 핵무기를 생산한다는 뜻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그것은 미국이 도발적인 핵전략을 틀어쥐고 자기의 적대국들을 이전보다 더 심하게 협박하면서 전 세계적인 핵전쟁위험을 고조시킨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그래서 핵무력을 증강한다는 표현이 아니라, 핵무력 증강에 광분한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이런 사정을 파악하면, 미국이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파기한 행위가 미국과 로씨야의 핵무력 균형에만 충격을 주는 게 아니라, 전 세계 핵안보정세에도 충격을 주는 요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미국의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 파기가 조선과 미국의 핵대치상황에 충격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정세분석가들은 미국의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 파기가 조선과 미국의 핵대치상황에 충격을 주고 있는 현실을 주목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미국이 로씨야의 중거리미사일 실전배치에 대응하기 위해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 트럼프 행정부의 왜곡선전이 정설처럼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사진 1>  

 

▲ <사진 1> 위의 사진은 1989년 1월 14일 미국에 파견된 소련검증단이 미국의 퍼싱-2 중거리탄도미사일 해체를 현장에서 검증하는 장면이다. 1987년 12월 8일 미국과 소련은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체결했고, 1988년부터 1991년까지 그 조약에 따라 지상발사 중거리미사일 2,692발을 폐기했다. 그리고 1991년부터 2000년까지 폐기현장을 교차방문하면서 상호검증했다. 그러나 8년 협상과 10년 상호검증을 거쳐 실현된 중거리핵군비통제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조약을 파기하는 바람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미국은 그 조약을 파기하고 나서 핵무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파기한 행위는 미국과 로씨야의 핵무력 균형에만 충격을 주는 게 아니라, 조선과 미국의 핵대치상황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2. 미국은 왜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파기했는가?

 

1981년에 미국은 소련이 SS-20 중거리탄도미사일을 폐기하면, 그에 상응하여 자기들도 퍼싱-2 중거리탄도미사일과 지상발사순항미사일을 폐기할 수 있다는 용의를 밝혔는데, 그것을 계기로 협상의 물꼬가 트였다. 그렇지만 당시 미국이 그런 용의를 표명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1979년에 미국은 퍼싱-2 중거리탄도미사일을 1983년부터 유럽 동맹국들에 전진배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었는데, 1981년에 이르러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니 미국이 중거리미사일을 상호폐기할 수 있다는 용의를 밝혔기 때문이다.  

 

미국의 태도는 왜 돌변한 것일까? 미국이 중거리미사일을 상호폐기할 수 있다는 용의를 밝힌 것은 핵군비를 통제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세계를 핵무력으로 지배하면서, 핵무력 증강에 광분하는 아메리카핵제국이 핵군비를 통제하려고 생각했을 리 만무하다. 미국이 소련에게 중거리미사일을 상호폐기하려는 용의를 표명한 진짜 이유는 중거리미사일경쟁에서 소련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은 핵군비경쟁에서 소련에게 패하게 되자, 중거리핵무력을 상호폐기하는 핵군비통제로 자기의 열세를 만회해보려고 교활하게 책동했던 것이다. 미국이 핵군비경쟁에서 패한 내막은 다음과 같다.   

 

소련은 SS-20 중거리탄도미사일을 1976년부터 실전배치했는데, 미국은 퍼싱-2 중거리탄도미사일을 1983년부터 실전배치했다. 소련은 미국보다 7년 앞서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했던 것이다. 당시 소련은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한 시기에서만 미국에 앞섰던 것이 아니라,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만드는 기술도 앞섰다. 이를테면, 소련의 SS-20이나 미국의 퍼싱-2는 모두 고체추진제를 사용하는 2단형 탄도미사일로 개발되었는데, SS-20의 사거리는 5,000km인데, 퍼싱-2의 사거리는 1,770km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SS-20은 6축12륜 발사대차에 탑재되어 기동력과 신속발사능력이 크게 강화되었는데, 퍼싱-2는 트랙터형 견인차량에 싣고 다니는 한심한 형편에 있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이 각각 실전배치한 중거리탄도미사일에 어떤 핵탄두가 장착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우열을 가리는 결정적인 판별기준으로 되었다. SS-20에는 1메가톤급 핵탄두 1발이 장착되거나 150킬로톤급 핵탄두 3발이 장착되었다. SS-20에 장착된 150킬로톤급 핵탄두 3발은 미사일이 발사되어 최고고도에 이르렀을 때 서로 다른 타격목표들을 향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사출되는 각개발사식 열핵탄두들이었다. 그에 비해, 퍼싱-2에는 폭발위력을 5킬로톤급에서부터 80킬톤급 사이에서 조절할 수 있는 W85 전술핵탄두가 1발밖에 장착되지 않았다. 이처럼 중거리탄도미사일경쟁에서 소련에게 패한 미국은 중거리미사일을 상호폐기하는 것으로 자기의 열세를 만회해보려고 교활하게 책동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은 지상발사미사일만 폐기시켰을 뿐이고, 공중발사미사일과 잠수함발사미사일은 폐기시키지 못한 불완전한 조약이다. 그 조약이 그처럼 불완전하게 체결된 까닭은, 1980년대 당시 공중발사미사일과 잠수함발사미사일을 개발하는 기술수준이 소련보다 앞선 미국이 자기들이 우세한 공중발사미사일과 잠수함발사미사일을 폐기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국이 1982년부터 실전배치한 AGM86 공중발사순항미사일에는 150킬로톤급 열핵탄두 1발이 장착되었고, 사거리는 2,400km였는데, 소련이 1980년부터 실전배치한 Kh-15 공중발사미사일에는 300킬로톤급 열핵탄두 1발이 장착되었고, 사거리는 300km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이 1979년부터 실전배치한 트라이던트-1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은 100킬로톤급 각개발사식 열핵탄두 8발이 장착되었고, 사거리는 7,400km였는데, 소련이 1978년부터 실전배치한 R-29R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은 200킬로톤급 핵탄두 3발이 장착되었고, 사거리는 6,500km였다.

 

 

3. 핵태세검토보고서에 늘어놓은 거짓말

 

미국이 중거리핵군비조약을 파기하려는 조짐은 2017년 4월부터 나타났다. 2017년 4월 17일 미국 국방부 대변인 다나 화이트는 성명에서 미국 국방부가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새로운 핵전쟁준비태세를 검토할 것이고, 2017년 말에 보고서를 발표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2017년 말에 발표할 예고했던 보고서는 2018년 2월 2일에 발표되었다. 그날 미국 국방부는 2018년 핵태세검토보고서’라는 제목의 문서를 발표했다. 미국 국방부는 그 문서에서 당시 미국이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파기하려는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는데, 그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이렇다. 2018년 핵태세검토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냉전 이후 자국의 핵무기비축량을 85% 이상 감축했고,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신형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잠재적 적국으로부터 점점 더 노골적인 핵위협을 받고 있으며 ... 그 어느 때보다 더 다양하고 진화된 핵위협환경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파기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 국방부가 2018년 핵태세검토보고서’에서 늘어놓은 거짓말은 다음과 같다. 

 

1) 미국이 냉전 이후 핵무기비축량을 85% 이상 감축했다는 미국 국방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만일 미국이 핵무기비축량을 85% 이상 대폭 감축했다면, 지금 미국은 지난 시기에 비해 25%밖에 되지 않는 핵무기를 비축하고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2016년 3월 2일 미국 <핵과학자협회보>에 실린,  2016년 미국의 핵무기’라는 제목의 논문은 2016년을 기준으로 미국이 비축한 핵무기가 6,970발에 이른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핵무기를 6,970발이나 비축해놓고서도, 핵무기를 85% 이상 감축했다니, 그보다 더한 거짓말이 없다.    

 

2) 미국이 냉전 이후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신형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았다는 미국 국방부의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위에 인용한  2016년 미국의 핵무기’라는 제목의 논문에 따르면, 1994년 미국은 전략핵폭격기에 탑재되는 핵폭탄 100발을 신형 핵폭탄으로 교체했고, 2006년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장착되는 핵탄두 240발을 신형 핵탄두로 교체했고, 2008년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에 장착되는 핵탄두 700발을 신형 핵탄두로 교체했다고 한다. 냉전 이후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신형 핵폭탄과 신형 핵탄두를 1,040발이나 배치하고서도, 신형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았다니, 거짓말도 그런 거짓말이 없다. 

 

3) 미국이 잠재적 적국으로부터 노골적인 핵위협을 받고 있다느니, 위험한 핵위협환경에 직면하였다느니 하는 미국 국방부의 주장도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놓은 상투적인 왜곡선전이다. 세계 최강의 핵무력을 가졌다고 으스대는 미국이 동맹국들을 끌어들인 세계 최대 규모의 핵공격연습을 주기적으로 감행하면서 위협하기 때문에, 조선, 중국, 로씨야가 핵공격연습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노골적인 핵위협을 받으며, 위험한 핵위협환경에 직면한 쪽은 미국이 아니라, 조선, 중국, 로씨야다. <사진 2>    

 

▲ <사진 2> 위의 사진은 미국 텍사스주에 있는 팬텍스공장에서 기술자들이 신형 W76-2 전술핵탄두를 만드는 장면이다. 1987년에 실전배치된 W76 핵탄두는 폭발위력이 100킬로톤인 전략핵탄두인데, 팬텍스공장에서는 그것을 5~7킬로톤급 신형 전술핵탄두로 개조하고 있다. 그 공장에서는 B61 핵폭탄도 5~7킬로톤급 신형 전술핵폭탄으로 개조하고 있다. 미국은 W76 전략핵탄두 3,400발과 B61 핵폭탄 3,155발을 각각 비축해놓았는데, 그 중에서 약 1,000발을 신형 전술핵탄두 또는 신형 전술핵폭탄으로 개조하고 있다. 이 전술핵무기들은 B-52 전략폭격기들에 탑재된 중거리순항미사일들에 장착되거나, B-2 스텔스전략폭격기들과 F-15E 전투기들과 F-16 전투기들에 탑재되거나, 트라이던프-2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에 장착된다. 이런 정황은 미국이 전술핵무기를 사용하는 제한핵전쟁을 도발하기 위한 준비를 다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팬텍스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신형 전술핵무기들 

 

미국의 온라인 군사전문매체 <디펜스 뉴스> 2017년 10월 31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핵무기를 현대화하고 관리하기 위한 핵무력증강사업에 앞으로 30년 동안 1조2천억 달러의 예산을 지출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미국이 앞으로 30년 동안 핵무력을 대폭 증강하기 위해 중거리핵군비통조약을 파기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신형 중거리미사일을 짧은 기간에 후닥닥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에 미국은 신형 중거리미사일을 완성하기 전에 우선 기존 핵무기를 개조하여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존 전략핵탄두의 폭발위력을 낮춘 신형 전술핵탄두를 생산하여 순항미사일에 장착하고, 기존 전략핵폭탄을 전술핵폭탄으로 개조하는 방식이다. 지금 미국은 그런 방식으로 W76 전략핵탄두와 B61 핵폭탄을 개조하고 있다. 

 

W76 핵탄두는 1978년에 실전배치되었는데, 폭발위력이 100킬로톤인 전략핵탄두다. 미국은 W76 전략핵탄두 3,400발을 비축해놓았는데, 그것을 5~7킬로톤급 전술핵탄두로 개조하는 중이다. 다른 한편, B61 핵폭탄은 1968년에 실전배치되었는데, 원래 폭발위력이 0.3킬로톤급에서 400톤급까지 여러 급으로 생산된 핵폭탄이다. 미국은 B61 핵폭탄 3,155발을 비축해놓았는데, 그것을 5~7킬로톤급 전술핵폭탄으로 개조하는 중이다. 미국의 온라인 정치전문지 <폴리티코> 2017년 9월 9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기존 열핵무기보다 폭발위력이 적은 신형 전술핵무기를 개발하는 중인데, B61 핵폭탄을 저위력 전술핵폭탄으로 개조하는 사업도 거기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일본 <교도통신> 2019년 12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가핵안보국은 연방의회에 제출한 2020회계년도 핵탄두 비축 및 관리계획 보고서에서 2020회계년도 중에 임계전 핵시험을 두 차례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임계전 핵시험에서 얻어낸 기폭상태에 관한 각종 지표들은 신형 전술핵무기를 생산하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신형 전술핵무기는 미국 텍사스주에 있는 핵무기공장인 팬텍스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다. 미국의 핵안보전문가들인 윌리엄 아킨과 핸스 크리스텐슨이 2020년 1월 29일 미국과학자련맹 웹싸이트에 발표한, ‘미국이 신형 저위력잠수함탄두를 실전배치하다’라는 제목의 글에 따르면, 2019년 2월 팬텍스공장은 폭발위력이 약 5킬로톤인 신형 W76-2 전술핵탄두 50발을 생산했다고 한다. 또한 팬텍스공장은 각종 전술핵무기 약 1,000발을 생산하게 되는데, 이 전술핵무기들은 B-52 전략폭격기들에 탑재된 중거리순항미사일들에 장착되는 신형 W76-2 전술핵탄두들, 그리고 B-2 스텔스전략폭격기들과 F-15E 전투기들과 F-16 전투기들에 탑재되는 신형 B61 전술핵폭탄들이라고 한다. 

 

미국은 팬텍스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신형 전술핵무기들을 실전배치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2019년 8월 2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앞으로 18개월 안에 신형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할 것으로 예견된다고 한다. 미국 국방부 정책담당차관 존 루드는 2020년 2월 4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미국이 신형 W76-2 전술핵탄두를 트라이던트-2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에 장착하여 실전배치하였다고 밝혔다. 미국의 핵안보전문가인 핸스 크리스텐슨은 2020년 1월 29일에 발표한 글에서 미국 해군 오하이오급 핵전략잠수함 테네시함이 신형 W76-2 전술핵탄두가 장착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탑재하고 2019년 12월 하순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킹스베이 잠수함기지를 출항하여 대서양 작전수역으로 떠났다고 밝혔다. 

 

도이췰란드 텔레비전방송 <도이취벨레> 2020년 3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이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기간에 도이췰란드 라인란트팔츠주 뷔헬공군기지에 15~20발 배치한 B61 전술핵폭탄은 노후화되었기 때문에 폐기하고, 신형 전술핵폭탄을 미국에서 가져와 조립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도이췰란드에 배치된 기존 전술핵폭탄을 개조해 신형 전술핵폭탄을 만들어낼 것이고, 도이췰란드공군의 주력 전투기인 토네이도에 신형 전술핵폭탄을 탑재하는 실험을 2020년 안에 시행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미국이 새로 개발하고 있는 전술핵폭탄은 꼬리부분에 디지털 레이더와 위성위치정보체계를 내장해 타격정밀도를 높였는데, 이르면 2022년에, 늦으면 2024년에 도이췰란드에 배치될 것으로 예견된다고 하였다. 

 

 

5. 아시아에 우선적으로 배치될 미국의 신형 전술핵무기

 

영국 통신사 <로이터즈> 2019년 8월 3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미국 국방장관 마크 에스퍼는 미국이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파기한 이튿날인 2019년 8월 3일 미국 국방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미국이 지상발사 중거리탄도미사일이 개발하면 그것을 아시아에 배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미국이 새로 개발한 지상발사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아시아에 배치하고 싶다는 미국 국방장관의 발언은 이전에 미국이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파기하기 위해 내걸었던 구실과 서로 어긋난다. 지난 시기 미국은 로씨야가 2017년에 실전배치한 9M729 순항미사일의 사거리가 2,000~5,000km에 이른다고 하면서, 그런 중거리순항미사일을 실전배치한 것은 사거리 500km 이상의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하지 않겠다고 합의한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런 주장에 맞선 로씨야는 9M729 순항미사일의 사거리가 480km이므로, 자기들은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해명하였다. 로씨야의 해명은 합리적이다. 9M729 순항미사일은 2006년에 실전배치된 이스칸데르-M 저고도비행활공도약미사일을 순항미사일로 개조한 것이므로, 9M729 순항미사일의 사거리는 이스칸데르-M 저고도비행활공도약미사일의 사거리와 같은 480km다.  

 

지난 시기 미국은 로씨야가 9M729 순항미사일을 실전배치하여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위반했기 때문에 그 조약을 파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미국은 그 조약을 파기한 뒤에 자기들이 개발하는 신형 중거리미사일을 로씨야의 9M729 순항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에 배치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 국방장관은 신형 중거리미사일을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 배치하겠다고 말했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진 3>

 

▲ <사진 3> 2017년 8월 14일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조선을 '화염과 분노'로 파괴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폭언을 응징하기 위해 조선인민군 전략군사령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전략군사령관으로부터 괌포위사격계획을 보고받았다. 위의 사진은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김락겸 전략군사령관으로부터 괌포위사격계획을 보고받는 장면이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괌포위사격계획은 화성-12형 중거리탄도미사일 4발을 동시다발로 발사하여 괌의 동서남북 인근 수역에 탄착시키는 위협사격계획이라고 한다. 그날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조선인민군 전략군사령부 작전지휘소 미사일발사통제실도 시찰하였는데, 지하에 건설된 미사일발사통제실 벽에는 "전략로케트군이 워싱톤을 타격할 데 대한 명령을 받으면 언제든지 타격한다"는 전투구호가 나붙어 있었다.   

 

미국의 그런 언행을 뒤집어보면, 미국이 우려하는 대상은 로씨야가 실전배치한 9M729 순항미사일이 아니라 조선, 중국, 이란이 각각 실전배치한 중거리탄도미사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은 2017년 2월 12일 사거리가 5,500km인 북극성-2형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했고, 2017년 5월 14일에는 사거리가 6,000km인 화성-12형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 중국은 2016년 사거리가 4,000km인 둥펑-26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했으며, 이란은 2017년 1월 29일 사거리가 2,000km인 코람샤르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 조선의 북극성-2형과 화성-12형, 그리고 중국의 둥펑-26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군사전략요충지인 괌을 타격할 수 있는 중거리탄도미사일들이다. 2017년 8월 14일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조선을 ‘화염과 분노’로 파괴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폭언을 응징하기 위해 조선인민군 전략군사령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전략군사령관으로부터 괌포위사격계획을 보고받았다.    

 

 

6. 미국은 1~2년 안에 전술핵공격준비 완료한다

 

위에 서술한 사실을 보면, 중거리핵군비통제조약을 파기하고 신형 전술핵무기를 개발, 배치하는 미국의 의도가 조선, 중국, 이란을 상대로 제한핵전쟁을 도발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이 개발, 배치하는 신형 전술핵무기는 신형 중거리탄도미사일과 신형 중거리순항미사일, 그리고 신형 전술핵탄두와 신형 전술핵폭탄인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의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두 갈래로 추론하였다.

 

첫째, 미국이 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전술핵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추론이다. 미국의 핵안보전문가 핸스 크리스텐슨은 2013년 4월 30일에 발표한 논문 ‘핵억제경비활동의 감소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지난 냉전시기에는 미국의 핵억제경비활동(실제로는 핵공격준비태세)이 대서양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진행되었는데, 이제는 핵억제경비활동의 60%가 태평양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하면서, 이런 변화는 미국이 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핵공격계획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둘째, 미국이 조선과 이란을 상대로 전술핵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추론이다. 윌리엄 아킨과 핸스 크리스텐슨은 위에 인용한 글에서 미국은 신형 전술핵무기가 로씨야와의 핵대결에서 사용될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신형 전술핵무기로 조선과 이란을 공격할 의도가 엿보인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그 글에 따르면, 미국은 신형 W76-2 전술핵탄두를 탑재한 B-2 스텔스전략폭격기를 중동전쟁을 수행하는 중부사령부에 배속시킬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움직임은 미국이 이란에게 전술핵공격을 감행하려는 전쟁계획을 수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위에 서술한 두 가지 추론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미국의 적국은 조선이다. 이것은 미국이 조선, 중국, 이란 중에서 조선을 우선적인 핵공격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만일 조선과 미국이 무력충돌을 벌이면 중국은 대만해방작전에 돌입할 것이고, 중국과 미국이 무력충돌을 벌이면,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에 돌입할 것이다. 조선과 중국은 대미전쟁에서 공동행동을 취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미국은 신형 전술핵탄두를 장착한 중거리탄도미사일과 중거리순항미사일, 신형 전술핵폭탄을 조선과 중국을 공격하기 쉬운 곳에 배치할 것이다. <뉴욕타임스> 2018년 10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미국의 핵무기 배치에 대한 반대가 그리 심하지 않고, 미국의 대규모 군사기지들이 있는 일본 또는 괌에 신형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할 것으로 보인다고 예견한 바 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하면, 미국이 개발하고 있는 신형 중거리탄도미사일은 일본 오끼나와에 있는 가데나공군기지에 배치될 것으로 보이고, 미국이 개발하고 있는 신형 중거리순항미사일과 신형 전술핵폭탄은 괌에 있는 앤더슨공군기지에 배치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배치하면, 조선과 중국에게 전술핵공격을 감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위에 인용한 <도이취벨레> 2020년 3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이 신형 전술핵폭탄을 도이췰란드 공군기지에 배치하는 시점은 이르면 2022년, 늦으면 2024년이라고 하였는데, 신형 전술핵무기들은 유럽보다 먼저 아시아에 배치될 것이므로, 조선과 중국에 대한 전술핵공격준비를 완료하기까지 1~2년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 

 

▲ <사진 4> 위의 사진은 미국에서 개발하고 있는 극초음속활공체가 최고고도에서 덮개를 열고 모습을 드러낸 장면를 컴퓨터화상처리기법으로 그려낸 상상도이다. 극초음속활공체는 지구 어느 곳이든 1시간 안에 타격할 수 있는 무기이며, 미사일공학기술의 최고결정체이다. 로씨야와 중국은 극초음속활공체를 실전배치했고, 미국은 2020년 3월 19일 마하 5의 속도로 비행하는 극초음속활공체 시험발사를 처음 진행했다. 조선도 극초음속활공체를 개발하는 중이다. 조선이 미국보다 한 발 앞서 극초음속활공체를 개발할 것인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7. 조선이 만드는 신형 전략무기는 극초음속활공체 

 

미국이 중거리핵무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은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이 미국의 제한핵전쟁 도발을 억제할 대응책은 보다 위력적인 핵공격수단을 실전배치하는 것밖에 없다.  

 

2020년 3월 21일 조선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신형 전술유도무기 시범사격을 진행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우리가 최근에 개발한 신형 무기체계들과 개발 중에 있는 전술 및 전략무기체계들은 나라의 방위전략을 획기적으로 바꾸려는 우리 당의 전략적 기도실현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하게 될 것”이라고 언명했다. 이런 언명은 조선이 신형 전술무기들과 신형 전략무기들을 계속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준 것이다. 조선이 개발하고 있는 신형 전략무기는 무엇인가? 

 

지금 조선은 극초음속활공체(hypersonic glide vehicle)를 개발하고 있는 중인 것으로 보인다. 극초음속활공체는 지구 위의 어느 곳이든 1시간 안에 타격할 수 있는 무기이므로, 미사일공학기술의 최고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로씨야는 마하 9의 속도로 비행하는 극초음속활공체, 마하 10의 속도로 비행하는 극초음속활공체, 마하 20의 속도로 비행하는 극초음속활공체를 실전배치했다. 중국은 마하 6의 속도로 비행하는 극초음속활공체, 마하 10의 속도로 비행하는 극초음속활공체를 실전배치했다. 미국은 2020년 3월 19일 마하 5의 속도로 비행하는 극초음속활공체 시험발사를 처음 진행했다. 

 

조선은 마하 7~8의 극초음속으로 비행하는 번개-5 지대공요격미사일을 2017년 하반기에 실전배치했는데, 조광무역회사를 통해 그 미사일을 해외수출시장에 내놓았다. 극초음속으로 비행하는 미사일을 만든 조선이 극초음속활공체를 개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조선로동당 위원장은 2019년 12월 3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어떤 세력이든 우리를 상대로는 감히 무력을 사용할 엄두도 못내게 만드는 것이 우리 당 국방건설의 중핵적인 구상이고 확고부동한 의지”라고 하면서, “이제 세상은 곧 멀지 않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보유하게 될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확언하시였다”고 한다. 김정은 조선로동당 위원장이 언급한, 조선이 곧 보유하게 될 새로운 전략무기는 극초음속활공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조선이 미국보다 한 발 앞서 극초음속활공체를 개발할 것인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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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행금지는 최후 수단” 코로나 위기 속 독일 민주주의 논쟁

등록 :2020-04-05 09:03수정 :2020-04-05 09:10

 

유럽에 연대의 손길 내민 독일

확진자 늘자 이동금지령 만지작
2인 초과 접촉 금지령만 실시
코로나로 민주주의 후퇴 논란

베를린 승객 75%·운송수입 90%↓
‘사회적 거리’ 성공엔 안전망 필수
임대료 지원·임금보전 등 조처

이탈리아·프랑스 환자 수용한 독일
“1·2차 세계대전 부채감 되갚는 것”
윤리적 열등감 극복할 수 있을까
지난달 31일 이동제한령이 실시되고 있는 독일 베를린 중앙역 모습. 사람의 발길이 끊겨 텅 빈 상태다.
지난달 31일 이동제한령이 실시되고 있는 독일 베를린 중앙역 모습. 사람의 발길이 끊겨 텅 빈 상태다.

 

 

 

 
 
 

MAKE THE CALL

 
 
▶ 독일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실시 중인 접촉제한 조치를 이달 5일에서 19일까지 연장했다. 현재 독일은 공공시설은 물론 음식점 등 일반 가게들의 운영을 제한하고 집 밖에서 두 명을 초과해 만날 수 없는 접촉금지령이 내린 상태다. 유럽 대부분에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이동금지령이 내려진 것에 대해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게 아니냐는 논쟁도 치열했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남은주 전 <한겨레> 기자가 현지 상황을 전해왔다.

 

 

 

 

 

지난달 30일 아침 9시.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있는 포츠담 광장(포츠다머 플라츠)은 고요했다. 글로벌 기업의 사무실들과 복합상영관이 들어서 있어 언제나 붐비던 소니센터는 건물 전체에 불이 꺼져 있었고 광장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장으로 이어지는 8차선 넓은 도로에도 손님 없이 달리는 버스들만 있을 뿐이었다. 지나가는 차량도 거의 없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독일 전역에 접촉금지령을 내린 지 8일째 되는 날, 베를린 도심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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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거리에서 사라진 사람들

 

 

포츠담 광장은 베를린 영화제가 열리는 곳이다. 영화제가 열리던 3월1일까지만 해도 1600석이 넘는 대형극장에 사람이 가득 차고 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마스크를 쓴 사람도,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베를린에서 마스크 쓰는 사람은 레드카펫에서 마스크 퍼포먼스를 했던 필리핀 가수 카븐 데 라 크루스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지난달 2일 베를린에서도 첫 확진자가 나왔지만, 7일 브레멘과 베를린의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에는 5만5천 관중이 모였다. 클럽은 여전히 붐볐다. 코로나19 확산 첫 2주 동안 감염자 263명 중 42명이 클럽에서 감염된 것으로 확인된다.

 

지난달 16일 독일 학교들이 휴교에 들어가면서 분위기가 급하게 바뀌었다. 18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대국민연설을 앞두고 에스엔에스(SNS)에서는 “오늘 독일도 프랑스, 이탈리아처럼 이동금지령을 실시한다고 발표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전날부터 프랑스에서 외출이 제한되면서 생필품을 확보하려는 시민들이 한꺼번에 몰려 슈퍼마켓이 아수라장이 되는 장면이 독일에도 중계됐다. 이날 아침부터 독일에서도 사재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18일 메르켈 총리는 결국 통행금지를 발표하지 않았다. 독일 연방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의무화하는 접촉금지령으로 가닥을 잡았다. 4월1일 기준 독일에선 확진자가 가장 많은 바이에른주를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만 프랑스와 비슷한 수준의 이동금지령을 시행하고 있다. 이동금지령은 꼭 필요하지 않은 곳이면 가지 않도록 외출 자체를 제한하는 조치고, 접촉금지령은 외출은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가족이나 동거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과 1.5m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 것이다.

 

독일 베를린 시내 중심부에 있는 포츠담 광장 앞 텅 빈 거리.
독일 베를린 시내 중심부에 있는 포츠담 광장 앞 텅 빈 거리.

 

독일 베를린 도심에서는 공연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공연 포스터가 떼어지고 그 자리에 ‘집에 머무세요, 그리고 딜도를 사용하세요’라는 포스터가 붙었다.
독일 베를린 도심에서는 공연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공연 포스터가 떼어지고 그 자리에 ‘집에 머무세요, 그리고 딜도를 사용하세요’라는 포스터가 붙었다.

 

클럽과 술집 등이 모두 무기한 휴업에 들어간 독일 베를린의 클럽 베른하인 앞의 텅 빈 모습. 평소 대기줄로 꽉 차 있던 모습과 대조된다.
클럽과 술집 등이 모두 무기한 휴업에 들어간 독일 베를린의 클럽 베른하인 앞의 텅 빈 모습. 평소 대기줄로 꽉 차 있던 모습과 대조된다.

 

무더기 확진자가 나온 베를린의 한 클럽에 붙은 휴업안내문. 접촉금지령이 내려진 4월19일까지 문을 닫는다는 내용.
무더기 확진자가 나온 베를린의 한 클럽에 붙은 휴업안내문. 접촉금지령이 내려진 4월19일까지 문을 닫는다는 내용.

 

베를린에선 외출을 제한하되 외출 목적은 폭넓게 인정하는 이동제한령이 실시되고 있다. 베를린교통공사(BVG) 집계를 보면 3월 한달 승객 수는 전달보다 75%가량 줄어들었으며 운송수입은 90% 가까이 줄었다. 코로나 위기가 시작되면서 많은 베를린 시민들이 주로 집에 머문다는 뜻이다. 4월부턴 이동제한령을 어기면 꽤 많은 벌금을 내도록 규칙이 정비됐다. 새 규칙에 따르면 다른 사람과 최소 1.5m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50~500유로(6만5천~65만원), 노인시설에 있는 할머니를 1시간 이상 방문하면 100~1천유로(13만~130만원), 다른 사람 집에서 머물면 500유로(65만원)까지도 벌금을 내게 됐다.

 

본격적인 단속이 시작되면서 도심은 텅 비었고 동네에선 어린이들이 사라졌다. 놀이터가 폐쇄되고 공원엔 혼자 걷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슈퍼마켓 앞에는 사람들이 1.5m 간격으로 긴 줄을 섰다. 동네에서 경찰들이 사람들을 지켜보는 모습도 보였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경찰이 개인의 행동을 단속하는 상황은 독일에선 영 낯설다. 코로나19를 막겠다며 기본권을 제한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높다. 많은 독일 언론들은 지난달 16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이동금지령을 발표할 때 했던 연설을 비판적으로 소개했다. 주간지 <슈피겔>은 “그는 20분 동안 ‘이것은 전쟁이다’라는 말을 여섯번 했다”며 “프랑스 국민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믿을 만한 대통령을 보았다는 느낌을 주기 위한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통행금지를 실시하자 ‘강한 정부’에 대한 기대로 지지율이 오르는 현상에도 우려가 높다. 독일 신문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헝가리 총리가 국가비상사태를 무기한 연장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킨데다 폴란드에선 코로나 위기를 틈타 여당이 대선운동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었고 영국에선 경찰이 코로나19 확진자들을 체포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하는 등 코로나19 방역을 핑계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4월2일 기준 8만4415명으로 세계에서 네번째로 확진자가 많은 독일이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처럼 통행금지를 하지 않았던 것은 우선 이런 비판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독일은 프랑스나 이스라엘처럼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통행금지를 실시할 법적 근거가 없으며 이탈리아처럼 군인들이 민간인을 통제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독일의 접촉금지령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특정 장소를 차단할 수 있다”고 정한 연방감염보호법 제28조에 근거한 것인데, 바이에른주의 통행금지는 이 법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했다고 변호사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중앙정부가 독일 전역에 통행금지 조치를 하는 것은 자치 정신에 어긋난다는 지방자치단체들의 반발도 컸다. 독일도시·지방자치단체협회 사무총장 게르트 란츠베르크는 “통행금지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가장 심각한 침해 중 하나이며 아직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다”라며 거부 의사를 밝히고 나섰다. 자치와 기본권 침해 논쟁 끝에 독일 정부는 접촉제한을 실시하고, 지역감염이 우려되는 지역에서만 벌금이나 이동제한으로 추가 규제하는 방안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접촉금지령 2주가 된 지금 논란은 줄어들었다. 베를린자유대의 하네스 모슬러 교수는 “지금 독일의 조치들은 개인의 기본권을 제한했지만 침해하지는 않는다. 위기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이 조치는 한시적이며 사회적 합의에 따라 변경될 수 있어서 악용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을 들어 접촉금지령이 민주주의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독일의 접촉금지령은 2주 동안 시행할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다시 2주를 더 연장할 수 있는 한시적 정책이다.

 

평상시 관광객들로 가득 찼던 이스트사이드 갤러리가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대여 자전거만 놓여 있다.
평상시 관광객들로 가득 찼던 이스트사이드 갤러리가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대여 자전거만 놓여 있다.

 

지난달 31일 코로나19로 접촉금지령이 내려진 독일 베를린 이스트사이드갤러리의 모습.
지난달 31일 코로나19로 접촉금지령이 내려진 독일 베를린 이스트사이드갤러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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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안전망이 최고의 방역”

 

 

유럽의 이동금지령의 목표는 건강보건 시스템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환자를 유지하는 것이다. 길게 보아 전체적인 환자 수는 같다고 하더라도 환자가 빠르게 늘어나면 위중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시설과 인력이 부족해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처럼 사망률이 높아지게 된다. <슈피겔>에 따르면, 애초 영국과 네덜란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대신 바이러스를 견뎌낼 수 있는 건강한 사람 50%가 감염되도록 해서 전체 집단이 면역을 얻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에 이어 스페인까지 건강보건 시스템이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이들 국가도 무조건 초기 환자를 줄이는 것으로 방역 목표를 바꾸고 국경폐쇄와 이동제한 등에 나선 것이다.

 

싱가포르, 대만처럼 선제적 방역에 성공해서 이를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아니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감염속도를 줄이고 집단면역의 길로 가게 될지는 독일에서 논쟁 중이다. 감염학자인 베를린종합병원의 크리스티안 드로스텐 박사는 최근 <엔디아르>(NDR) 방송과 함께 하는 팟캐스트에서 “증상이 나타나면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격리해야 한다. 독일식 접촉금지가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 말고도 셧다운 조치로 인한 경제적 타격도 정부엔 큰 압박이다. 휴업 조치로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 임원들이 급여를 반납하기로 하고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바피아노가 파산 신청을 했다. 대형 백화점 카르슈타트는 임대료 국가보호를 신청했다.

 

베를린자유대 김상국 연구교수는 “자영업자를 위한 긴급자금지원, 단축근무를 위한 정부 지원금, 실업급여 및 생계수당 등 독일은 위기 상황에 있는 시민들을 위한 방어기제로 활용할 제도가 많다. 전염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수 있으려면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이 이렇듯 중요하다. 독일이 셧다운에 나설 수 있었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베를린 시내 놀이터가 폐쇄된 모습.
베를린 시내 놀이터가 폐쇄된 모습.

 

베를린 시내 한 마트 앞의 풍경
베를린 시내 한 마트 앞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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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와 폐쇄, 유럽 각국 다른 해법들

 

 

최근 독일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병상이 부족해 다 수용하지 못한 중환자들을 잇따라 받아들이고 있다. 73개 병원에서 이탈리아 환자들을 받아들이고, 프랑스 환자 50명도 독일 남부 지역으로 이송할 계획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역별로 고르게 발달한 보건시스템 덕분이다. 독일 전역에는 1942개 병원이 있는데 의료시설이 전국에 고르게 분포해 위기 때 긍정적 역할을 한다. 지방정부들은 아직까지는 병상에 여유가 있다고 보고 외국에서 온 코로나 중환자들을 수용한다. 독일연방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독일에는 주민 10만명당 33.9개의 집중치료실이 있다. 환자들을 모두 수용하지 못해 의료시스템 붕괴 현상을 보이고 있는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각각 9.7개, 8.6개의 집중치료실이 있다. 병상이 얼마나 남는지에는 확진자 자가격리 비율이 영향을 끼친다. 베를린의 경우 4월2일 기준 2993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는데 입원은 476명, 중환자실 104명으로 코로나19 확진을 받아도 입원보다 자가격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렇게 마련한 병상을 이웃 나라 중환자들에게 내주는 것이다.

 

거기에 독일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한몫했다. 문화인류학자인 정진헌 베를린자유대 겸임교수는 “1·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은 유럽 주변국에 도덕적 부채가 쌓여 있었다. 2015년 메르켈이 난민을 적극 받아들이는 정책을 펼치면서 윤리적 열등감을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위기 때 주변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유럽연합 공동체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정책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민주주의의 또 다른 축은 연대이다. 코로나19를 이유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국경을 폐쇄한 상황에서 포르투갈은 자국에 있는 난민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별도의 체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도 7월까지는 모두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있고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베를린/글·사진 남은주 자유기고가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935637.html?_fr=mt1#csidx5eef6b06eed3954ae784506788d38f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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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탑 1평 하늘감옥 300일 김용희의 '삼성 무노조' 뽀개기

응원 시민 모여 삼성 사과 요구하기도

"이재용을 구속하라", "재벌적폐청산" 구호가 적힌 스티커를 붙인 150여 대의 차량이 경적을 울리며 삼성전자 서초사옥 주변 차도를 빙빙 돌았다. 차를 가져오지 않은 시민도 사옥 주변 인도에 피켓을 들고 섰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강남역 철탑 위 김용희 삼성 해고 노동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김 씨는 "꼭 승리해서 삼성에 노조 깃발이 휘날릴 수 있게 만들겠다"며 "이재용을 구속하라. 무노조경영 폐기하고 해고자 문제 해결하라"고 외쳤다.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다 해고된 김 씨의 강남역 앞 25m CCTV 철탑 농성이 4일로 300일이 됐다. 코로나19로 집회를 열 수 없는 상황에서 민주노총과 삼성피해자공동투쟁은 이날 삼성전자 서초사옥 주변에서 재벌적폐청산 차량행진을 열었다.

 
임미리 "김용희 내려오면 민주당도 승리" 
 

차량행진이 끝날 무렵 김 씨가 올라간 철탑 아래에서 약식집회가 열렸다. 사람들이 모이자 김 씨는 철탑 아래 달린 작은 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이날 사다리차를 타고 올라가 김 씨를 만나고 내려온 임미리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최기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인권위원장, 삼성피해자공동투쟁 대표단 등이 김 씨 싸움의 의미를 짚었다.

 

"지난 여름부터 고공농성장을 찾아 김용희 씨와 가끔 전화하던 사이"라는 임 교수는 "김용희 씨가 '먼저 간 동지도 있는데 저는 아직 살아서 복'이라고 이야기하길래 '이게 무슨 복이냐. 희생하는 노동운동 말고 잘 먹고 잘 사는 노동운동하자'고 했다"고 김 씨와의 대화 내용을 전했다. 

 

임 교수는 "제가 '민주당만 빼고'라는 칼럼을 쓴 가장 큰 이유는 김용희 씨 제발 살아서 땅으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며 "민주당이 김용희 씨를 땅으로 내려오게 하면 선거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그 칼럼 썼다. 민주당 제발 정신 차려달라"고 말했다. 

 

▲ 4일 고공농성 300일을 맞은 삼성 해고 노동자 김용희 씨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시민이 철탑 아래에서 약식 집회를 열었다. ⓒ프레시안(최용락)

 

최 위원장은 "제가 수없이 많은 고공농성 진료를 다녀봤지만 김용희 씨가 올라간 철탑이 가장 좁고 가장 열악하다"며 "저 위에서 300일을 버티는 건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자기를 갈아 넣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김 씨가 올라간 철탑의 너비는 1평이 되지 않는다. 

 

최 위원장은 "김용희 씨를 땅으로 내려오게 해서 건강을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며 "삼성과 문재인 정부가 당장 김용희 씨에게 사죄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루빨리 땅을 밟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성애 김용희고공농성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오늘 많은 분이 함께 해주셔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며 "김용희 씨에게도 반드시 땅으로 건강하게 내려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힘내서 싸우겠다고 약속드리고 내려왔다"고 전했다. 

 

▲ 4일 오후 고공농성 300일을 맞은 김용희 씨가 농성 중인 철탑. ⓒ프레시안(최용락)

300일 고공농성에도 아무 말 없는 삼성 

 

김 씨는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려다 1991년과 1995년에 두 번에 걸쳐 해고됐다. 이후 20년이 넘게 '삼성의 진정성 있는 사과, 복직, 해고기간에 대한 임금지급'을 요구하며 삼성과 싸워왔다. 

 

회사에 다녔다면 정년퇴직 날짜였을 60살 생일을 한 달 앞둔 작년 6월 10일, 김 씨는 '마지막으로 한 번 제대로 싸워보겠다'며 강남역 앞 CCTV 철탑에 올랐다. 김 씨는 이후 55일 간 단식을 하다 주변의 만류로 중단했다. 지난 달 27일 김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작년 12월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전 의장, 강경훈 삼성전자 전 부사장 등이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전자서비스에서의 '노조 파괴'에 대해 1심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은 "과거 노조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식이 국민의 눈높이와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김 씨의 고공농성에 대해서는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40417271520425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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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심사를 친일파가? 연세대 학생들은 알까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04/05 09:35
  • 수정일
    2020/04/05 09:35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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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준 편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 [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낙준 묘지 민족을 붙들고 살리기 위해 '친일' 을 택했다는 사람, 백낙준 친일파 백낙준의 묘는 국가유공자1묘역에 자리해 있다. 유공자1묘역은 이승만 대통령 묘소 바로 뒤쪽으로 친일파 김백일과 신응균이 잠든 장군1묘역으로 가는 길목이다. ⓒ 김종훈

 
국립현충원에 잠든 11명의 '국가공인 친일파' 중 군인이 아닌 인물이 하나 있다. 연희전문학교 초대 총장이자 문교부 장관, 초대 참의원 의장을 지낸 백낙준이다.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자리한 그의 묘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는 전쟁을 앞뒤에 두고 나고 자라고 일하는 동안 민족을 붙들고 살리는 방도가 교육에 있음을 알고 일생 사업으로 교육에 종사하여 왔다."
   
 

▲ 국가공인 친일파 백낙준 ⓒ 한국학중앙연구소

 
일제강점기 백낙준의 삶은 묘비에 새겨진 말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백낙준은 일제강점기부터 교육자이자 언론인, 종교인으로 활동하며 설교, 사설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특히 <기독교신문>의 편집위원과 이사로 활동하며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했다. 1942년 5월 20일 백낙준이 직접 작성해 <기독교신문>에 실은 설교문 '내 아버지의 집' 중 일부다.
 

"우리 제국의 궐기는 대동아 공존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한 정의의 옹호다. 이러한 성전에 몸과 정성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황국에 생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 신민된 자에게 무한한 영광이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자기 나라가 이 세상 나라였다면 그 신하가 싸울 것이라 했다."


백낙준이 직접 편집과 설교, 사설을 써가며 자신의 친일 행각을 알린 <기독교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조선기독교협회에 의해 창간됐다. 4월 29일은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로, <기독교신문> 창간 10년 전인 1932년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한 날이기도 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백낙준은 1942년 '종교보국'을 사명으로 창간된 기독교 신교 각파의 합동기관지 <기독교신문> 이사와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면서 황민화 정책과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지면을 편집하고 직접 설교와 사설을 썼다. '미영타도' 좌담회에 참석하고 전쟁협력을 역설하는 기고문을 반복적으로 발표하는 등 사회단체를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적극 협력했다."

 

▲ 1943년 1월 당시 매일신보에 실린 일본 항공기 관련 기사 ⓒ 공훈전자사료관

 

▲ 1941년 12월 2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애국기헌납운동' 관련 기사. 백낙준은 지대한 활동을 보였다. ⓒ 공훈전자사료관

    
백낙준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헌신적으로 부역하기 위해 '조선예수교 장로교도 애국기헌납기성회'라는 단체의 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42년 9월 23일 <기독교신문>에는 이 단체에서 구입해 일제에 헌납한 해군전투기 '조선장로호' 명명식 장면이 기사로 실렸다. 이 자리에는 목사 백낙준도 참석했다. 
 

"남으로 북으로 종횡무진의 활약을 하고 있는 우리 육해공군의 분투와 노고에 보답해, 총후 37만 장로교도 일동은 우리 무적해군에 해군기 1대와 병기 2정을 헌납한 사실을 누차 보도했다. 이 보국호(조선장로호)의 명명식은 '대공의 제전'에 전개된 항공일의 의도 깊은 9월 12일 오후 1시부터 경성 함태영 목사, 백낙준 목수 외 80여 명 장로회 대표들이 열석하고, 군관민 내빈 5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경성운동장에서 엄숙히 거행됐다."


독립운동가 서훈 심사위원이 된 친일파 
 

▲ 1951. 부산, 한 초등학교 어린이 대표가 교과서 용지를 원조해준 미국의 원조기관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하고 있다(오른쪽 끝은 당시 백낙준 문교부장관) ⓒ NARA

 
해방 후 한 달 뒤인 1945년 9월 백낙준은 큰 어려움 없이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김성수, 김활란 등과 함께 활동한다. 이어 10월부터는 경성대학(서울대학 전신) 법문학부 부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부터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1946년 8월 연희전문학교가 연희대학교로 승격되자 초대 총장이 됐다.  

1950년 5월부터 문교부 장관을 맡아 1952년 10월까지 재임했다. 이후 국민사상지도원 원장과 연희대학교 이사장을 맡았다. 1953년에 다시 연희대학교 총장으로 복귀, 1957년 1월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대가 통합해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자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1985년 1월 8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연세대학교 명예총장을 지냈다. 

1968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가 열리자 박정희 정권은 백낙준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기준으로 조선사편수회 출신 신석호, 이병도,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회부장 출신 홍종인 등도 백낙준과 함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박정희 정권 때 활동했다. 

24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친일행적
 

▲ 1943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백낙준 관련 기사 ⓒ 매일신보 캡처본 재촬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담긴 백낙준의 친일행적은 A4용지 24장에 이른다.

1940년대 교육과 문화, 언론, 종교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부역한 백낙준의 친일 족적이 그만큼 방대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백낙준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라고 평가했다.
 

"백낙준은 평남 신성학교와 중국 천진신학서원을 거쳐 미국 파크대학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신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예일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연희전문교수로 재직하며 문과과장을 지냈다. 194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예수교 장로회 포교자로 허가를 받은 뒤 각종 사회단체를 통해 일제에 협력하는 활동을 했다."


백낙준은 '국가사회 유공자'라는 이유로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혔다. 2009년 정부가 '친일파'로 결정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누워있다. 현행 상훈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명시됐다.
 

▲ 백낙준 (1896~1985) -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이 된 친일파, 연세대 총장 "제국의 궐기는 대동아 공존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한 정의의 옹호다. 이러한 성전에 몸과 정성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황국에 생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 신민된 자에게 무한한 영광이다." 연희전문학교 초대 총장이자 문교부 장관, 초대 참의원 의장을 지낸 백낙준이 직접 창간한 <기독교신문>에 실은 글이다. <기독교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창간했다. 10년 전,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성공시킨 날이기도 하다. 해방 후엔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김성수, 김활란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57년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자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1968년엔 친일파 홍종인 등과 함께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국립현충원 11명의 국가공인 친일파 중 유일하게 군인이 아닌 인물이다. 그의 친일행적 기록은 A4용지 24쪽에 달한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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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준 교수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법

  •  정희상 기자
  •  호수 654
  •  승인 2020.04.03 12:17
 
중앙정보부의 고문으로 숨진 최종길 교수의 아들 최광준 교수는 ‘81+’를 제안한다. 권위주의 시절 희생자 80여 명을 기억하자는 의미다. 그 아픔을 기억하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긴다.
ⓒ시사IN 윤무영최광준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위)는 최종길 교수가 사망할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1973년 10월25일 중앙정보부(중정) 김치열 차장이 ‘유럽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정 남산 청사에서 조사받던 중 간첩 혐의를 시인한 뒤 투신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중정은 최 교수가 투신했다는 현장을 공개하지 않았다. 고문에 의한 타살 의혹이 일었다. 두 달 전인 그해 8월,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일으킨 중정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중정이 간첩단 사건을 조작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최 교수는 그 무렵 미국 하버드 대학 옌칭 연구소에서 1년, 독일 훔볼트 재단에서 6개월 동안 교환교수를 끝내고 서울대 법대 교수로 돌아왔다. 중정은 ‘유럽 간첩단 사건’에 최 교수를 포함해 유럽 유학이나 출장을 다녀온 학자와 공무원들을 엮었다. 중정은 이들이 북한 공작원과 접촉해 간첩 활동을 벌였다고 발표했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최종길 교수는 서울대 법대, 스위스 취리히 대학, 독일 쾰른 대학에서 공부한 뒤 1962년 서울대 법대 강의를 시작했다. 사망 당시 42세이던 최 교수는 부인과 아들, 딸을 두고 있었다. 아들 최광준 교수(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아버지께 5·16 쿠데타 뒤 박정희 측에서 ‘혁명정부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군사정부에 협력하기를 극구 거부하셨다. 그때부터 미움을 샀다는 말도 나돌았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유신체제 반대 투사는 아니었다. 제자를 사랑하는 학자였을 뿐이다.”

 

최종길 교수는 1967년부터 서울대 도서관장과 학생과장 등의 보직을 맡으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어머니랑 도시락을 들고 서울대 법대 교정으로 찾아가야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바쁘셨다. 아버지가 가족과 함께 미국·독일에 초빙교수로 가서 연구 활동을 하던 1970년대 초반이 가장 행복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사진을 취미로 하셔서 여동생과 나를 위한 앨범을 따로 만들어주었다. 마치 돌아가실 걸 아셨던 것처럼 사진을 섬세하게 잘 정리해두셨다.”

최 교수가 중정에서 조사를 받기 직전인 10월4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학내에서 경찰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며 끌려가는 일이 발생했다. 최 교수는 이날 교수회의에서 “학생들의 수난을 모른 체해서는 안 되니 부당한 공권력의 최고 수장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최 교수를 상대로 중정은 간첩 조작 사건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중정에는 최종길 교수의 동생 최종선씨가 근무하고 있었다. 최종선은 동료한테서 “유럽 간첩단 사건 수사를 벌이고 있는데 수사팀이 북한 공작원 이재원과 중학교 동창생인 최 교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최종선은 형에게 중정에서 수사 협조 요청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10월16일 중정은 동생 최종선을 통해 최종길 교수를 남산 조사실로 불러들였다. 사흘 뒤인 10월19일 새벽 1시30분께 최 교수는 중정 조사실 건물 밖에서 양복 차림으로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중정은 동생 최종선에게도 비보를 알리지 않았다.

장례 치르자 약속 어긴 중앙정보부

중정은 유족을 회유 협박했다. 최종길 교수가 간첩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을 테니 잠자코 있어달라고 했다. 보상금도 제시했다. 유족은 중정의 보상금 제의를 거절하고, 대신 최종길 교수를 억울하게 간첩으로 만들지 말 것, 자녀들의 교육에 지장이 없도록 할 것, 동생 최종선을 계속 근무하도록 할 것 등 3가지를 요구했다. 중정은 이 3가지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유족이 장례를 치르자 중정은 약속을 어겼다.

중정의 유럽 간첩단 사건 발표 뒤 동생 최종선은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정신병동에 위장 입원했다. 그는 중정 감시를 피해 형의 죽음과 관련한 수기를 썼다. 이 기록을 그는 함세웅 신부에게 넘기고 훗날 때가 오면 공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최종길 교수의 집은 중정 직원이 상주하며 감시했다. 국내 언론은 침묵했지만 외신기자들이 찾아왔다. “〈워싱턴포스트〉 돈 오버도퍼 기자가 아버지의 사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직접 우리 집까지 찾아왔지만 중정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는 그걸 평생 한으로 생각하셨다.”

ⓒ시사IN 포토2003년 10월17일 서울대 최종길교수기념홀에서 3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함세웅 신부, 최광준 교수, 백경자씨(왼쪽부터).

최 교수가 사망한 지 1년이 되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도로 명동성당에서 추모 미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중정은 유족을 찾아와 참석하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는 중정의 눈을 피하기 위해 우리 남매 손을 붙잡고 명동 근처 미도파·신세계 등 백화점을 종일 배회하셨다. 쇼핑하는 척하다가 간신히 미행을 따돌리고 명동성당으로 달려갔다. 그날 추모 미사가 아버지 사건에 대해 우리 가족이 공식적으로 진상규명에 나선 시작점이었다.”

부인 백경자씨는 아들 최광준을 해외로 내보내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최종길 교수와 함께 수학한 독일과 미국의 법학자들이 보인 관심과 위로가 계기였다. 최 교수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던 독일 게르하르트 케겔 교수와 동료 법학자들은 가족에게 독일로 건너와서 진상규명에 나서라고 제안했다. 중정 감시 체제 아래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독일 친구 분들이 아들만이라도 보내면 돌봐주면서 진상규명을 돕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나를 조기유학 형식으로 독일로 내보내려 했지만 그것도 가로막혔다.”

또 최종길 교수가 옌칭 연구소 교환교수 시절 그를 지도했던 미국 하버드 대학 제롬 코언 교수와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훗날 주일 미국 대사 역임)도 최 교수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했다. “코언 교수와 라이샤워 교수는 아버지의 연구 능력과 성실성을 높이 샀다. 그들이 우리 가족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돕겠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중정이 방해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체제가 무너지자, 최종길 교수의 지인들한테 억울함을 풀 기회가 왔다는 전화가 쇄도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서울대생들은 우리 집으로 찾아와 진상규명에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대부분의 서울대생들이 아버지 사건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해서 놀랐다.”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로 이런 바람도 물거품이 되었다. 이때 유족은 해외 망명도 생각했다. 백경자씨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최광준과 함께 주한 독일 대사를 만났다. “독일 대사는 망명을 하면 전두환 당국의 주목과 견제를 받게 돼 가족이 더욱 힘든 생활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며 만류했다. 대신 내 유학을 권유했다.”

고문으로 숨지자 투신자살로 위장

우여곡절 끝에 1984년 최광준은 20년 전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뒤따라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최광준은 독일에서 아버지의 은사와 동료 학자들 도움으로 법학박사 학위 과정을 밟았다. 1987년 6월 항쟁 뒤 최종길 교수 사건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함세웅 신부는 1988년 최종길 교수 사건의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최종선의 수기를 공개했다. 함 신부 등은 “최종길 교수의 죽음은 고문 수사 과정에서 빚어진 폭압적 권력에 의한 살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라며 검찰에 고발장을 냈다. 노태우 정부의 검찰은 무성의하게 수사를 진행했다. 당시 검찰은 “최종길 교수가 간첩이라는 증거도, 투신자살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최광준은 독일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1994년 경희대학교 법대 교수로 부임했다. 최 교수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쫓으면서 인권법 전문가가 되었다. 우선 아버지 사건을 포함해 권위주의 시대 의문사를 조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2002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가 최종길 교수 사건 조사에 착수했다. 의문사위 조사 결과 중정 수사관들은 최 교수에게 잠 안 재우기, 구타, 각목을 무릎에 끼워 발로 밟기 등 고문을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 교수를 직접 조사했던 당시 중정 수사관은 차철권씨였다. 의문사위는 중정 수사관들을 조사해 고문 수법과 간첩 조작 사실을 밝혀냈다. 의문사위는 고문 과정에서 최 교수가 숨졌고, 이후 투신자살로 위장했다고 발표했다. 의문사위 조사로 유럽 간첩단 사건 자체도 조작임이 드러났다. 당시 중정의 최종길 교수 수사 책임자는 의문사위 조사에서 “최 교수를 간첩으로 만들면 그 시절에는 아무도 의심하거나 항의할 수 없었기에 고문치사를 은폐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를 선택했다”라고 실토했다.

의문사위 조사 과정을 도운 최광준 교수는 사건 당시 서울에 파견돼 있었던 도널드 그레그 CIA 국장과 안흥용 중정 공작과장의 진술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내가 도널드 그레그 CIA 국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당시 미국은 간첩 사건과 무관한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고문 과정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중정에 강력히 경고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서 막을 수 없었다는 요지로 서면 답변서를 보내주었다. 안흥용 중정 공작과장은 의문사위 조사에서 부하들이 고문하다 아버지를 죽인 뒤 창밖으로 던져버렸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의문사위 조사로 최종길 교수의 죽음은 타살이라고 국가기관에서 공식 인정했다. 아버지를 따라 법학자의 길을 걷는 최광준 교수는 새로운 사명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법학 분야가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선진 학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사명으로 사셨던 아버지가 40대 초반에 반인륜적 국가폭력으로 잔인하게 비명횡사하셨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유산은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 그 아픔을 기억하고 치유하라는 게 아버지가 내게 남겨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최 교수는 독일이 나치 만행을 반성하고 기억하는 ‘기억의 문화’라는 키워드에서 착안해 ‘81+’를 제안했다. 81+는 국가폭력에 희생되고도 진상을 밝혀내지 못한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을 상징하는 기호다. “의문사위 조사 과정에서 1970~80년대 권위주의 정권 시절 아버지와 같은 희생자가 80여 명이었다. 여기에 1을 붙여 그보다 플러스가 되는, 그것이 우리나라 국가폭력 비극의 역사라는 의미다. 이런 비극으로 사망한 분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다.” 그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기억해야 한다는 게 최 교수의 생각이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와중에도 최 교수는 최근 독일 통일의 주역 헬무트 콜 전 수상의 아들 발트 콜을 만났다. 발트 콜은 최광준 교수의 뜻을 숭고하게 여겨 그가 베를린에서 운영하는 전시관 이름을 ‘RAUM 81+’로 명명해주었다. 이 전시관에서는 지난 2월 한 달 동안 ‘1980 광주 5·18’ 사진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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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계엄령 선포한 미국, 그 이면에 4.3이 있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제주 출신 많던 오사카, '한신교육투쟁' 더 번질까 우려한 미국

20.04.03 18:00l최종 업데이트 20.04.03 18:00l

 

 제주4.3을 그린 독립영화 <지슬>
▲  제주4.3을 그린 독립영화 <지슬>의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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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제주 4.3항쟁은 1947년 3.1절 기념식 때 발생한 어린이 부상 사고에 대한 항의 투쟁에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미국의 분단정책에 대한 민족주의 투쟁으로 발전했다. 3.1절 기념식장에서 기마경찰의 말이 아이를 걷어찼는데도 경찰이 후속 조치를 하기는커녕 항의하는 시민들한테 도리어 무차별 사격을 가한 데서 발단한 이 사건은 초기에는 항의 시위와 민·관 총파업의 양상을 보였다.

그러다가 미군정청의 토벌대 파견과 유엔 소총회의 '남한 단독선거 결의'를 계기로 이 사건은 분단 반대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됐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해 제주도민 350명이 경찰서 및 토벌대 숙소를 공격하면서, 이 사건은 어떻게 보면 한민족 대 미국의 대결이 되는 방향으로 번져갔다.

미국 및 이승만 정권과의 대결에서 제주도는 패했다. 희생자 규모도 상당했다. 정부에서 공식 인정한 숫자는 1만 4000명 정도이지만, 실제는 3만 정도라는 게 정설이다. 희생자 중 상당수를 차지한 여성들이 일반적인 살상에 더해 치욕적인 수모까지 당했기 때문에, 불명예나 보복이 두려워 피해 사실을 숨기는 집안들이 많았다. 살아남기 위해 토벌대원을 사위로 맞이한 집안에서는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제 희생자가 3만 정도라고 한다면, 1948년에 제주 인구가 25만이었으므로 도민의 10% 이상이 세계제국 미국에 의해 희생됐다는 의미가 된다.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해 한 지역 주민의 10% 이상이 희생됐다는 것은, 분단의 땅을 딛고 있는 한민족의 발끝을 찌릿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을 긴장시킨 한신교육투쟁

 

미국은 제주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그것은 마음 편한 승리가 아니었다. 이 섬의 반(反)미국·반제국주의 투쟁은 미국 당국자들을 크게 긴장시킬 만했다. 이 점은 그들이 이북 출신인 서북청년단까지 파견해 잔혹한 살상을 부추긴 사실은 물론이고 이 시기에 일본에서 벌인 또 다른 사건에서도 명확히 표출된다. 

해방 직후, 일본에 사는 재일한국인들은 조선인학교라는 민족학교를 통해 한국인 어린이들에게 한국어 및 한국사를 가르쳤다. 이런 학교가 1946년에 500여 곳, 학생 숫자도 6만 명이나 됐다. 1945년 10월 15일 출범한 재일본조선인연맹이 이 사업을 주도했다.

그런데 제동을 걸고 나선 곳이 있다. 1945년 10월 2일부터 1952년 4월 28일(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일)까지 일본에서 군정 통치를 실시한 연합국최고사령부(GHQ 또는 SCAP)가 바로 그곳이다. 2008년에 <한일민족문제연구> 제15권에 실린 김인덕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 '1948년 한신 교육투쟁과 재일조선인 역사교육'은 GHQ의 조치를 이렇게 설명한다.

"GHQ는 1947년 10월 재일조선인 학교도 일본 문부성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즉 GHQ는 '조선인 모든 학교는 정규 교과(의) 추가 과목으로 조선어를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는 예외를 인정하는 것 외에는 일본의 모든 지시를 따르도록 일본 정부에 지령한다'고 했다. 민족교육에 대한 본질적인 탄압의 시작이라고 보여지는 GHQ의 이러한 지시는 조선어를 정규 과목으로 하지 않고 추가 과목으로 즉 과외로 가르친다면 조선인 학교를 예외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GHQ의 지령은 문부성이 조선인학교를 탄압하는 명분이 됐다. 일본 정부의 후속 조치는 이랬다.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 자녀의 경우 법적 기준에 합당한 학교에 취학할 것을 고지했다. 아울러, 교사는 일본 정부가 정한 기준에 합당한 사람만이 강의하도록 했다. 그리고 일본인 학교 건물을 빌려쓴 조선인학교의 철수와, 교과 내용은 학교교육법에 따라 모두 일본어로 교육하고, 조선어는 과외로 학습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GHQ와 문부성의 조치에 따라 조선인학교들이 운명의 기로에 놓이자, 재일한국인들은 1948년 3월부터 대규모 항의투쟁을 전개했다. 민족학교 폐쇄를 막기 위한 이 투쟁은 오사카(大阪) 및 고베(神戶) 등지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일어났다. 그래서 '한신(阪神) 교육투쟁'이라 불린다.

연인원 103만이 참가한 이 시위에는 3만 명 이상이 참여한 경우도 있고, 참가자 1만을 진압하려고 경찰 병력이 8000명이나 동원된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소년 김태일 같은 희생자도 나오고 150명의 부상자도 나왔다. 체포된 한국인은 3076명, 그중에서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212명이다. 해방 3년 뒤에 한국인들이 일본에서 이처럼 대규모 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일본인들뿐 아니라 미군정 당국에도 충격을 줬다. 이 점은 1948년 4월 24일 밤에 미군이 취한 조치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이날, 고베시와 고베시가 속한 효고현은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학교폐쇄 명령을 철회했다. 그런데 그날 밤 계엄령이 발포되고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미군이 일본 지방관청의 조치를 뒤엎은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군과 일본 경찰이 효고현과 고베시의 조치를 뒤집고 한국인들에 대한 무차별 검거에 나서게 됐다. 

비상사태 선포를 통해 군부대가 상황 진압에 나섰다는 것은 미군정이 사태를 직접 챙겼음을 의미한다. 1945년 패망으로 일본군이 해체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것은 미군이 직접 나섰음을 뜻한다. 한신 교육투쟁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위 논문은 "GHQ에 의해 고베 일대에는 일본 최초의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며 "이 비상사태는 미군의 일본 점령기간 동안 유일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1945년에 세계 최강으로 등극하고 최전성기를 누리던 당시의 미국을 긴장시킬 만한 요소가 한신 교육투쟁에 내재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작은 제주'로 불렸던 오사카

1948년 시점에서 미국이 오사카 및 고베 지역 한국인들의 동태에 이처럼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다. 그것은 오사카 지역에 제주도 사람들이 특히 많이 살고 있었던 점과 무관치 않다. 1922년에 제주도-오사카 정기 항로가 열린 이래로 제주도 사람들의 오사카 이민이 활발해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제주도와 오사카. 구글 지도에 약간의 편집을 가한 그림이다.
▲  제주도와 오사카. 구글 지도에 약간의 편집을 가한 그림이다.
ⓒ 구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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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연구소가 2001년 발행한 <4.3과 역사> 창간호에 실린 문경수 리츠메이칸대 교수의 논문 '4.3사건과 재일한국인'은 "재일 한국인의 출신지는 전국적으로 경상남도가 가장 많은데, 오사카에서는 제주도 출신자의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한 뒤 "재일 제주인은 1만여 명에서 5만여 명으로 불어나 33년에는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이 일본에 있게 되는 사태에 이른다"고 말한다.

제주도 인구의 상당 부분이 오사카로 이민을 갔고 그중 상당수가 오사카 이쿠노구(區)의 코리아타운에 거주했기 때문에 이쿠노구는 '작은 제주'로 불리기까지 했다. 제주도인들의 오사카 이민은 4.3항쟁을 계기로 한층 격증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밀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사카 코리아타운을 집중 취재한 이시바시 히데아키 <아사히신문> 기자는 2018년에 <4.3과 역사> 제18호에 기고한 '어느 일본인 기자와 제주 4.3사건 - 20년 전의 취재 경험을 중심으로'에서 "제주도에서 4.3의 혼란을 피해 고향 사람이나 친족에 의지해서 밀입국으로 오사카에 들어온 사람이 수천 명 이상 있었다고 한다"면서 "오사카에 사는 제주 사람에게 4.3은 바로 자신들이 연관된 사건이며, 털어놓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고 말한다.

논문에 적힌 이시바시 기자의 취재 경험을 듣다 보면, 오사카에 가서 4.3을 언급하는 일은 신중해야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논문에 인용된 이시바시의 1998년 8월 13일자 기사에 따르면, 4.3사건 당시 19세 나이로 1년여를 숨어 지내다가 밀항선을 타고 오사카에 잠입한 시인 김시종은 "탈출 직전 마지막으로 만난 아버지는 어머니가 볶은 콩을 굳혀 채운 도시락통을 주며 '너는 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며 그때를 회고했다고 한다.

냉전 체제 굳히려던 미국의 '걸림돌'

위 문경수 논문에서는 제주도인들의 오사카 이민을 설명하다가 "33년에는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이 일본에 있게 되는 사태에 이른다"는 표현을 썼다. 한국어에 덜 익숙한 재일한국인이라서 '상황'이 아닌 '사태'라는 단어를 골라겠지만, 1948년 당시의 GHQ 입장에서는 한신교육투쟁이 벌어지는 한신 지역에 제주인이 많은 것은 '사태'라고 불릴 만했다. 이 사건이 같은 시기에 제주도에서 전개되는 4.3항쟁과 연계되지 않을까 하고 미국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1948년에 미국이 동아시아에 대해 가장 크게 신경 쓴 것 중 하나는 한반도 분단을 '연착륙'시키고 이를 발판으로 냉전구도를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이 그해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를 무사히 치르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제주인들의 거점인 제주도와 한신 지역에서 민족주의 투쟁이 벌어졌으니 미국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지역의 사건이 연계될 가능성을 미국이 우려했다는 점에 관해 위 문경수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예컨대 (1948년) 4월 10일의 GHQ의 어떤 문서(GHQ, FEC, Staff Study Operation, 'STRETCHABLE, Edition 1,' 10 April 1948, MacArther Memorial)는 단독선거 이전에 남한에서 대규모 반대운동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재일한국인 가운데서도 특히 오사카 지구에 거주하는 이단분자는 남한에서의 대규모 폭동과 연대해서 재일 점령군을 곤란에 빠트리게 하는 목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이고 폭동을 일으키고 다른 지역의 민중운동을 지원할지도 모른다'고 하고 있다."

문서가 작성된 1948년 4월 10일 시점의 '남한에서의 대규모 폭동'은 제주 4.3항쟁을 가리킨다. "GHQ와 국무성이 단독선거를 의식해서 '남한에서의 대규모 폭동'이라고 할 때, 제주도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제주 4.3항쟁과 한신교육투쟁이 연계돼서 '재일 점령군'인 주일미군이 곤경에 빠질 수도 있다는 미국의 우려가 위의 계엄령과 비상사태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4.3항쟁에 대해 얼마나 예민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948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조선은 희랍사태 재연, 좌우 항쟁도 근사(近似)'로 번역돼 게재된 미국 UP통신(훗날의 UPI통신) 서울특파원 제임스 로퍼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유럽의 동쪽 끝자락인 그리스와 아시아의 동쪽 끝자락인 한반도는 공산권에 대한 미국의 투쟁에서 동일한 전략적 의의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4.3과 역사> 제14호에 실린 역사학자 허호준의 논문 '냉전체제 형성기 미국의 제3세계 개입과 역할 -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의 비교를 중심으로'에 설명된 것처럼, 미국은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에 똑같이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이 두 곳이 적대세력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했다. 두 지역에 대한 개입을 계기로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냉전 체제를 굳힐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제주 4.3항쟁은 미국의 세계지배를 정착시키는 데 걸림돌이 됐다. 바로 그 4.3을 주도한 제주인들의 동향 사람들이 같은 시기에 오사카 및 주변 지역에서 한신 교육투쟁을 벌였기에 미국이 비상사태까지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제주 4.3항쟁은 '솥뚜껑'만 봐도 놀랄 정도의 두려움을 미국에 심어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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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노조경영 불가능... 삼성은 변화 선언해야"

[인터뷰] 노중기 한신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삼성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다 해고된 김용희 씨의 강남역 25m 높이 CCTV 철탑 고공농성이 4일이면 300일이다. 김 씨는 공식 사과, 복직, 해고기간의 임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한 평도 안 되는 철탑 위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삼성은 답이 없다.

 

돌아보면 삼성에는 수많은 김용희가 있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30여 년간 삼성이 무노조 경영을 유지했음을 떠올리면 당연한 일이다.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다 실패한 수많은 사람 중 지금 철탑에 올라가며 싸우고 있는 사람이 김 씨일 뿐이다.

 

그간 어떤 이유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이 가능했을까. 다른 한편 변화가 생기는 원인은 무엇일까.

 

지난 달 31일 사당역 근방 커피숍에서 노중기 한신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만나 삼성 노조탄압의 역사에 대해 물으며 이에 대해 들어봤다. 노 교수는 '노동정치체제'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사회를 분석해왔다. 노동정치체제는 '노동과 자본, 국가의 전략적 상호 작용이 구조화된 틀'을 뜻한다.


 

 

87년 민주화 이후 정부 정책 기조가 크게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여러 사업장에서 노조가 생겼다. 삼성은 유독 노조 무풍 지대였다. 노 교수는 "합법적으로는 이런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삼성이 로비 등을 통해 국가 기구 전반을 '관리'했다"며 "경총, 보수언론 등도 함께 움직였다"고 말했다.


 

 

그래도 2011년 삼성에버랜드노조 설립 이후 삼성에서는 제대로 된 노조가 설립되고 유지되기 시작했다. 작년 12월에는 삼성에버랜드노조와 삼성전자서비스에 대한 삼성의 노조 파괴 행위에 대한 유죄 판결도 나왔다.

 

노 교수는 "2000년대 이후 비정규직 확산으로 노동자의 삶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것, 민주화 이후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가 확대된 것 등이 원인으로 작용해 삼성 무노조 경영 전략이 더는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며 "이런 변화는 구조적이기 때문에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 교수는 "삼성이 무노조 경영 전략을 포기한다는 것은 노동을 배제하고 억압해 이윤을 만들어온 한국 자본주의 축적 체제의 본진이 무너짐을 뜻한다"며 "노동자는 물론 한국 자본주의의 합리화와 개혁을 위해서도 삼성이 빨리 그런 선택을 해야 한다"고 전했다. 

 

▲ 노중기 한신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삼성 무노조 경영 전략 폐기, 그래도 낙관한다" 

 

프레시안 : 김용희 삼성 해고 노동자 고공농성이 4월 4일이면 300일이다. 어떤 생각을 했나?

 

노중기 : 우선 불편하고 힘들다. 강남사거리에 자주 가는 편은 아니지만 김용희 씨가 올라간 철탑이 있는 8번 출구 쪽을 쳐다보면 괴롭다. 당하는 사람이야 훨씬 안타깝고 안 됐다. 
 
노동자의 극한 저항을 40년 가까이 봐왔다. 그런데 사회가 변하면서 '이것 좀 안 봤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한 10년 전부터 진지하게 들었다. 아직도 고공농성이 노동자들의 유력한 투쟁 방안이 되는 현실이 불편하고 힘들다.

 

이명박 정부 때 민주노총이 한진중공업 김진숙 씨를 보러 가는 희망버스를 조직했다. 그때 두 번 정도 참가했다.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고공농성 같은 극한저항을 노동운동의 관행이나 전술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안다. 고공농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터져 나오면 지원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중심 사업으로 고공농성을 배치하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노동운동 내부에도 이런 문제의식은 있다. 

 

프레시안 : 노동자의 저항이 개인의 극한투쟁에 기대는 방식이 아니라, 노동운동 진영 전체의 조직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간 주로 저술해온 노동통제 혹은 노동정치체제의 관점에서는 어떤 생각을 했나.

 

노중기 : 지금의 고공농성은 문제가 풀리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큰 틀에서는 한국의 노동 억압 체제가 해체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옛날의 낡은 모습이 계속 되는 지점이 있다.  
 
노동 체제의 변동과 관련해서 보면 근본적으로 낙관한다. 소망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삼성은 노동 억압적인 한국 자본주의 축적체제의 본진" 

 

프레시안 : 삼성이 한국의 노동 통제 혹은 노동정치체제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나. 

 

노중기 : 노동 통제 혹은 노동정치체제는 한국 자본주의의 핵심고리 중 핵심고리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는 지질하고 더럽고 추접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이윤을 내서 성장해왔다. 

 

삼성은 한국 자본주의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기업이다. 경쟁력, 조직관리, 사회적 영향력, 이미지 등 모든 면에서 한국자본주의를 대표하는 탑클래스 기업이다. 그리고 탑클래스 재벌이다. 대한민국 재벌 체제를 대표한다. 이런 삼성을 뒷받침하던 지배 시스템 전체와 관련된 문제가 노동이다. 

 

기업 입장에서도 노동통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다. 불법파견 판결, 노조파괴 판결을 받은 삼성전자서비스는 삼성그룹이나 삼성전자라는 큰 틀에서 보면, 삼성전자서비스는 작은 작은 사양 산업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도 무노조 경영을 못 놓는다. 

 

지난 80년 간 노동을 배제하고 억압해서 이윤을 냈던 한국 자본주의에 여러 겹의 기지가 있다고 생각하면 제일 본진이 삼성이다. 본진인 삼성이 무너지면 한국의 노동 통제는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전투로 비유하면 삼성은 군단 본부 사령부다. 앞에 GM사단, 현대사단이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전쟁에서는 지고 있다. 그 여파가 이제는 삼성까지 오고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삼성의 무노조 전략이 다른 기업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말인가. 

 

노중기 : 삼성 무노조 전략이 있어서 쌍용차 노동자 탄압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열악한 대우가 가능했다. 삼성 무노조 전략이 있어서 2010년대 초반에 기업이 용역 폭력배를 동원해 노동자를 두들겨 팬 사건이 가능했다.

 

그런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데 맨 밑바닥에서 정당성과 가능성을 제공한 게 삼성이다. '삼성은 노조 없이도 운영하는데 왜 우리는 노조 때문에 부담을 져야 돼?' 노조파괴 노무법인인 창조컨설팅 심종두가 사회적으로 던진 질문이다. 기업이 볼 때 심종두는 돈만 주면 삼성의 무노조 전략을 관철해주는 사람이다. 삼성이 100개가 넘는 기업을 거느리고 있지만 노조가 없다. 그러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GM대우 같은 외국 기업도 한국에 들어오면 전부 노조 때려 부수려고 한다. 유럽에서는 불가능하니 안 하는 것뿐이고, 한국에서는 가능하니 한다. 그게 가능함을 보여주는 게 삼성의 노동탄압이다. 

 

▲ 강남역 CCTV 철탑 위에서 생활 중인 김용희 씨. ⓒ프레시안(최형락)

 

"삼성의 무노조 경영 전략 뒤에는 국가가 있었다" 

 

프레시안 : 삼성의 노조탄압 역사 이야기를 하면서 풀어가 보자. 유독 이병철 삼성그룹 전 회장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노조는 안 된다"는 말은 유명하다. 이런 경영방식은 어디에서 비롯했나. 

 

노중기 : 이병철의 기업 운영이나 인사관리, 노무관리 모델은 일본 제조업 재벌이다. 2차 대전 때 일본 제조업 재벌은 노조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노조가 없는 게 당연했고 있어도 어용노조였다. 전후 15년 정도에 걸쳐서 일본 노동운동이 폭발했다. 그때 삼성이 모델로 삼았던 제조업 중심 기업 미쓰비시 등에서 엄청난 쟁의가 있었다. 일본 자본이 50~60년대 넘어오면서 노조를 때려잡았다. 어용노조도 활용했다. 일본의 기업 모델 중 노조가 작동하지 않는 모델이 이병철의 기업 모델이었다. 

 

이병철이 기업을 경영하던 기간이 박정희, 전두환 경제 성장기와 겹친다는 점도 중요하다. 말하자면 장시간 저임금 노동 체제가 민주노조를 완전히 억압하는 체제와 결합되어 있었다.


 

 

'노조 억압을 어떻게 실현하느냐'는 문제에서 삼성은 노조를 무력화하는 노하우를 만들고 이데올로기도 만들고 기업 관행도 만들었다. 삼성의 이런 기업 전략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의 노조 배제 정책, 억압 정책과 맞물리면서 장기적으로 성공해왔다. 

 

이게 삼성전자가 후발 전자 회사로 일본 유수의 전자 기업을 추월하고 세계 최고 전자 기업이 될 수 있었던 주요 동력 중 하나라고 본다. 삼성의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병철의 무노조 전략은 자본 입장에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프레시안 : 87년 민주화 이후 삼성을 제외한 다른 기업에서 수많은 노동조합이 생겼다. 

 

노중기 : 87년 이후부터 97년 외환위기 사이의 시간을 나는 87년 노동체제라고 부른다. 독특한 노동정치 환경과 구조가 만들어진 시기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정치사회는 민주화됐지만 노동사회는 여전히 전두환 체제다. 그 사이에 모순이 생겼다. 노동자에게 싸울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거다. '왜 대통령은 내 손으로 뽑고 사회에 나가면 시민인데, 공장 안에만 들어오면 노비처럼 살아야 하냐. 못 참겠다. 작업장도 민주화 해라.'


 

 

작업장을 민주화하는 건 당시 제조업 기업 관점에서는 심각한 비용 부담이었다. 우리가 가진 기술력이나 생산력에 비하면 아주 낮은 인건비로 일본의 조선 공장을 전부 아웃시키지 않았나.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질은 좀 떨어지지만 값이 워낙 쌌다. 제품 가격의 원천은 인건비다. 

 

그래서 국가와 기업이 전력을 기울여서 민주노조 설립을 막았다. 노조 만드는 것까지는 되는데 한국노총까지만 돼. '민주노조는 안 돼.' 빨갱이 노조라서 안 된다고 하지만 이건 욕하거나 선동할 때 하는 말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민주노조로 제대로 싸우면 한국 자본주의가 망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위협감이 있었다. 그래서 끝까지 버텼다.

 

노조 문제가 1차로 터지는 데는 제조업이다. 그래서 과거 제조업 그룹 노사가 심각하게 붙었다. 가장 대표적인 데가 현대다. 현대 중공업. 현대 자동차. 매년 엄청난 쟁의가 벌어졌다. 공공부문에서는 지하철, 철도에서 매년 큰 쟁의가 벌어졌다. 이렇게 싸운 시간이 10년이다.


 

 

10년 동안 개별 사업장에서는 국가와 자본이 백퍼센트 이겼다. 그런데 97년 날치기 노동법 규탄 겨울 총파업 때 국가와 기업은 '10년 동안 민주노총을 때려잡으려 했는데 결국 민주노총은 만들어졌고, 노동조합의 힘은 커졌다. 우리가 전투에서는 수도 없이 승리했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했다'고 느꼈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자본 일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이해했다. 이를 감지한 국가는 정리해고를 도입하는 한편으로 민주노총을 합법화하고, 전교조도 합법화했다. 현장에서도 민주노조라고 하는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노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제도적 변화가 일어났다.


 

 

프레시안 : 삼성에서는 민주화 이후 10년 동안 기록에 남아있는 제대로 된 노조가 없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노중기 : 삼성은 노조 확산 흐름으로부터 상당한 정도로 무풍지대였다. 

 

현대와 삼성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현대는 중공업 중심이다. 삼성은 상대적으로 경공업 중심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삼성 주력 산업 중에 중공업은 삼성중공업밖에 없다. 나머지는 전자, 서비스, 섬유, 금융이다. 현대는 중공업 사업장을 많이 갖고 있다 보니까 노조와 먼저 부딪쳤다. 삼성은 삼성중공업을 잘 장악했다. 

 

그러다가 1995년에 삼성이 대규모 제조업 사업장을 만들었다. 90년대 초반에 삼성이 자동차 산업에 진출한다고 할 때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노태우 정부 경제관료, YS 다 반대했다. 강력한 로비로 2년 만에 다 뒤집었다. 결국 지금 르노에 인수된 자동차 사업을 세운지 2년도 안 돼서 망했다.


 

 

왕창 망하는 바람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직접고용 노동자가 최소 2, 3만명 잘렸다. 1차, 2차 하청업체 노동자를 합치면 약 10만 명이 해고당했다. 엄청난 문제였다. 이건희 회장이 자동차 공장에 사운을 걸겠다며 삼성전자에서 데려간 젊고 뛰어난 인력들도 다 잘렸다. 

 

노동쟁의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외환위기 한복판이었다. 회사가 생긴 지도 얼마 안 되니까 노조도 제대로 없고 노동자들이 저항할 힘도 없었다.


 

 

여기에 뛰어난 관리 통제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조직의 삼성이라고 한다. 조직의 삼성이 다른 말이 아니다. 삼성 무노조 전략 뒤에는 삼성만 있는 게 아니다. 권력기관이 다 결합돼 있다. 사법, 언론, 정부와 기업 유착 등과 관련해 말끔하게 정리하지 못한 문제가 집중되어 있는 데가 삼성이다. 다른 데서는 많이 무너졌다. 삼성은 2000년대까지 넘어왔다. 그걸 보여주는 사건이 2005년 X파일 사건이다. 

 

프레시안 : X파일 사건의 어떤 점이 그런 면을 보여주나.


 

 

노중기 : X파일 사건은 삼성 그룹이 불법 대선 자금, 고위 검사 뇌물 등을 이야기한 도청 파일이 폭로된 사건이다. 삼성이 검사들에게 수백억 원을 추석 떡값으로 돌렸다. 명절 때 수백억 원이니까 급한 사안을 두고 직접 로비할 때는 어땠겠나. 자기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다 돈을 주는 거다. 일상적 관리가 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직접 그 일을 하는 부서에서 일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삼성은 정부·청와대 정책과 인사에 개입하고, 대통령과도 직접 이야기할 수 있고, 문제가 터지면 법원, 검찰, 행정부서를 관리한다. 삼성 직원이 네트워크를 유지하다, 문제가 터지면 체계적으로 대응했다.


 

 

이병철이 있을 때는 비서실, 그 뒤에는 기업구조조정본부, 요새는 미래전략실이 그 일을 40~50년간 해왔다. 삼성 공화국이라는 말이 그냥 상징이 아니다. 

 

87년 이후에도 삼성에서 제대로 된 노조를 만들려는 시도를 찾기 어려운 이유다. 중공업이 약한 삼성 특성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억압, 은폐, 통제 문제가 크다. 

 

프레시안 : 외환위기 이후에는 삼성SDI, 삼성일반노조 등 기록에 남은 수많은 노조 설립 시도가 있었다.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나. 

 

노중기 : 민주화나 노동기본권 보장이 삼성에서는 불가능했다. 나아가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 게 X파일 사건이다. 저는 이렇게 이해를 한다.


 

 

"비정규직 확산과 민주화 여파가 구조적 변화 만들고 있다" 

 

프레시안 : 그래도 그 뒤에는 기록에 남는 노조 설립 시도가 있다. 어떤 변화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하나.

 

노중기 : 삼성의 무노조 전략과 관련해서 외환위기 이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크게 세 가지다.

 

97년 이후에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해졌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 기업 절반이 망했다. 안 망한 기업은 마른 수건도 또 짜는 식으로 기업을 운영했다. 경쟁력, 효율성, 인건비 절감, 비용 절감을 위해 무한경쟁 시스템을 도입했다.

 

정규직 필요 없는 데는 다 비정규직으로 바꿨다. 아웃소싱, 소사장제, 하청 시스템, 자동차 모듈화를 동원해서 정규직을 줄였다. 정규직은 자기들끼리 경쟁시키고 못 견디면 잘랐다. 나머지는 저임금으로 착취했다. 이게 신자유주의의 슬림화, 유연화다. 이걸 삼성도 대규모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삼성에서도 비정규직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외환위기 전에도 삼성전자서비스 업무를 내부에서 관리했지만 (노동자의 어려움이) 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햇수가 갈수록 점점 심각해진다. 여기에 첨단장비를 이용한 감시가 들어오니까 사람이 죽을 지경이 된다.

 

외환위기 이후 제조업뿐 아니라 비제조업 비정규직의 싸움도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프레시안 : 외환위기 이후 노동자의 삶이 나빠지면서 노조 설립 시도가 생겼다는 이야기 같다. 또 어떤 변화가 있었나.

 

노중기 : 자본주의가 변하면서 옛날에는 문제되지 않던 게 점점 문제가 된다. 대표적인 게 산업재해다. 1980년대 같았으면 황유미가 그렇게 문제가 안 됐을 거다. 그런데 이제 시민 사회가 이런 사태를 용인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황유미 문제는 터지자마자 시민 사회가 결합했다. 삼성도 방어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무리수가 터졌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전자서비스 불법파견 이슈를 만든 힘의 절반은 황유미 사건에서 나왔다고 본다. 둘은 별개의 사건이지만 (황유미 사건으로) 삼성전자가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한쪽에서는 산업재해가 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자유주의가 강화되면서 비정규직의 분노가 축적됐다. 그 힘이 삼성으로 향했다.

 

90년대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민주노총도 외환위기 이후 합법노조가 돼서 삼성에서 일어나는 일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1노조가 됐다.


 

 

프레시안 : 민주화 이후 사람의 생명이나 노동권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다는 이야기 같다. 마지막으로는 어떤 변화를 꼽나. 

 

노중기 : 법치주의가 강화됐다. 이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노동에서 신자유주의 논리를 유지하는 두 힘이 시장만능주의와 법치주의라고 본다. 신자유주의를 파시즘 비슷한 거 아닌가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신자유주의가 절차적·정치적 민주주의 위에 있다고 본다. 그 핵심 내용 중 하나가 법치주의다. 시장만능주의를 하면 피해 보는 사람이 생긴다. 패배하는 사람이 저항하기 마련이다. 그걸 법치로 규율한다.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제도화됐는데, 이에 맞물리는 법치주의가 상당히 잘못됐다. 노동자는 법을 지키라면서 반대편은 마음껏 법을 어긴다. 

 

그나마 시간이 흐르면서 법치주의가 절차적 민주주의 원리와 맞물려 달리 해석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삼성의 법원 관리가 완벽히 작동하지 않게 됐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불법파견 판결을 받았는데 90년대 같으면 법원이 어떻게든 (삼성에 유리한 쪽으로 판결을) 만들었을 거다.


 

 

프레시안 : 인터뷰 초반에 삼성 무노조 경영 전략에 대해 그래도 낙관적이라고 이야기했던 게 이런 변화들 때문인가.

 

노중기 : 삼성이 무노조 전략으로 갈 수 없다고 보는 건 앞서 열거한 이 같은 변화가 구조적이기 때문이다. 삼성 무노조 전략은 법을 다 지키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법을 어기고, 끊임없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야만 유지할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의 변화한 조건-노사 관계, 절차적 민주주의, 변화하는 사법기관, 시민 사회의 성장-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프레시안 : 삼성에서 지금껏 유지되는 노조가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2011년 삼성에버랜드노조 이후다. 왜 2011년인가?

 

노중기 : 중요한 제도적 변화가 있었다. 2011년 7월 기업 단위 복수노조가 합법화됐다. 삼성이 무노조 전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복수노조 금지 조항이 있기 때문이었다. 

 

87년에 삼성에 노조 만들려는 흐름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때 창원이나 마산에서 노조 만드는 흐름이 강력했다. 거제도에 있는 대우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그 옆 삼성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밖에 나가서 술 마시면 전부 고등학교 친구고 형님, 아우 하는데 당연히 노조 만들자고 했을 거 아닌가.


 

 

당시에 삼성이 북한의 오호담당제(5가구마다 한 명씩 선전원을 배치해 주민의 삶을 간섭, 감시하는 제도) 비슷한 제도를 시행했다. 직원들이 서로 감시하게 하고 찌르면 승진시켰다. 노조 만들려는 사람이 포착되면 납치해서 데려다가 술 마시면서 '이번 일만 넘어가면 내년에 아파트 하나 사줄게'하는 식으로 회유했다는 말도 들었다. 김용희 씨는 협박도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밤에 두 세 명이 숨어서, 보안 철저히 해서 노동청에 노동조합 설립 신고를 하면 그거 받는 공무원이 맨 먼저 삼성 노무과에 전화한다. '노조 설립 신고 들어왔는데 너네들도 빨리 가져와라.' 그러면 삼성 노무과에서 가져온 신고증을 먼저 받는다. 어용노조를 먼저 만들어버리는 거다. 그때도 노조가 만들어졌다면 굉장히 많이 만들어졌다. 지금 삼성전자서비스노조도 삼성전자서비스에서 4번째로 만들어진 노조다. 

 

복수노조 금지 무너질 때 제일 급한 회사가 삼성이었다. 그래서 삼성 그룹 차원에서 준비한 게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폭로한 삼성 노조파괴 문건인 'S그룹 노사전략 문건'이다. 

 

▲ 김용희 씨가 고공농성 중인 철탑 근처에 있는 조형물. 김 씨가 주장하는 그의 사연이 적혀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삼성그룹 차원에서 무노조 경영 전략 폐기 선언해야" 

 

프레시안 : 작년 12월 삼성전자서비스, 삼성에버랜드 노조 파괴 유죄 판결이 나온 뒤 삼성의 노조 전략이 변하고 있다고 보나. 

 

노중기 : 이런 문제에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들이 제일 예민하다. 삼성 노동 문제와 관련해 계속 이야기 듣고 자료도 모으니까. 그 사람들 글을 보니, 삼성이 에버랜드나 삼성전자서비스나 문제된 사업장에서는 대국민사과 하고 인정한다는 취지의 사과문을 제시했지만, 한번도 그룹이나 경영자 차원에서 답한 사례는 없다.

 

문제는 같은 기간에 다른 사업장에서는 옛날 방식으로 여전히 (노무관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거다. 그룹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무노조 관련 입장을 바꾼다고 한 적은 없다고 봐야할 것 같다. 

 

지금도 경영진 한편에서는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바뀌듯 정권 바뀌면 돌아간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황교안 같은 사람으로 바뀌면 모르겠지만, 합리적 보수라고 이야기되는 사람 정도로만 바뀌어도 삼성이 옛날처럼 하기는 어렵다.

 

장기적으로는 무노조 원칙을 포기하도록 온 사회가 채찍질하는 게 삼성그룹이 돈을 더 많이 버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황유미 때나 X파일 사건 때 삼성이 경영 전략을 바꿨다면 이재용이 감옥 갈 일은 없었을 거다.

 

그런 점에서 제대로 현실을 읽는 경영능력이 필요하다. 이재용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룹 경영진에 그런 능력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불행한 일이다.


 

 

프레시안 : 삼성의 무노조 경영 전략이 다른 기업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다른 기업들에서는 변화가 있나.

 

노중기 : 2018년 말에 삼성 무노조 경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과 관련해서 경제인총연합회에 관한 토론회를 한 적이 있다. 경총이 삼성 무노조 전략에 직접 개입했고 한 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다음에 개혁 세력이라고 송 모를 불러왔더니 반대파가 벌떼 같이 달려들어서 날아갔다. 과연 한국 재벌이 노동에 대한 태도를 바꿀 거냐. 당시 경총 사태에서 보면 바꿀 생각 없다는 게 드러난 토론회였다. 

 

일본과는 좀 다르게 경총은 한국 자본의 대(代)노동 전략에서 보면 행동대다. 뒤에 자본이 있고, 그 자본의 핵심은 재벌이 만든 전경련이다. 경총의 노무관리 기본 전략 목표는 무노조다. '노조는 깨는 게 맞다. 한국노총까지는 봐준다. 민주노총은 깬다.' 이게 전략이다. 심종두가 경총에서 7~8년 근무했다. 그걸로 네트워크 만들어서 독립해서 돈 벌었다.

 

한국 자본이 계속 노동 배제 전략을 쓰면 한국 자본주의의 합리화와 개혁은 더 미뤄질 거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 자본주의는 노동과 관련해서 더 큰 비용을 써야 할 거다. 노동자의 고공농성 같은 일이 더 나오고, 기업 입장에서는 경쟁력의 발목을 잡을 거다. 안타까운 일이다.


 

 

프레시안 : 삼성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노중기 : 삼성그룹 차원에서 무노조 전략 폐기를 선언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의미도 있다고 본다.

 

시민 사회나 민주노총은 계속 변화를 요구할 거다. 앞으로도 계속 노조가 만들어지고 다툼이 생길 거다. 그때마다 무노조 문제가 계속 부각되고 압박 받을 거다. 그런 선언이 나오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이건 잘 모르겠다.

 

삼성 문제는 단순히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 노동 배제 전략의 마지막 보루인 삼성의 노동 전략이 어디로 가느냐는 한국 사회 노동 문제를 보는 시금석이다. 삼성이 확실히 바꾸면 아마 용역깡패를 동원해서 노동자를 두드려패고 노조를 파괴한다는 전략, 창조컨설팅 전략은 역사의 유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충분히 안 됐기 때문에 김용희가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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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40315103315536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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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는 조선학교 차별을 당장 멈춰라"

우리학교 지키는 시민모임 등, '조선학교 차별 중단' 국제캠페인 선언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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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4.03  14: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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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3일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차별 중단을 촉구하는 국제캠페인을 선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 의해 지속적으로 자행되는 조선학교와 동포들에 대한 차별 중단을 요구하는 국제 캠페인이 추진된다.

최근 사이타마시가 코로나 바이러스 예방을 위해 18만장의 마스크를 배포하면서 조선학교 유치원을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철회하는 사건이 이번 캠페인의 계기가 되었지만 2012년 고교무상화 정책에 이어 2019년 유아교육·보육 무상화에서도 조선학교를 배제하는 등 일본정부의 지속적 차별에 대해 국제적인 공동행동이 필요하다는데 생각을 같이하는 단체들이 뜻을 모았다.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 이창복)와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YWCA연합회, 코리아국제평화포럼(KIPF) 등 캠페인 제안단체들은 3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일본대사관 뒤 평화의소녀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정부는 조선학교 차별을 멈춰라' 국제캠페인을 선포했다.

손미희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공동대표는 "조선학교 차별중단을 요구하는 국내외 동포들, 국제적 인사들의 메시지를 일본정부와 국제사회에 전달하고, 관련 사안으로 투쟁하는 동포들을 지지하고 연대하여, 아베정부가 조선학교 유치원에도 유아교육·보육 무상화를 적용시키도록 하겠다"고 이번 캠페인의 취지를 설명했다.

제안단체와 참여단체들의 국제네트워크를 모두 활용하여 다양한 방식의 국제선언 연서명과 인증샷, 동영상 등을 취합하고 #조선학교차별중단, #유아교육보육무상화적용 등 해시태그 이벤트로 확산을 시도할 예정이다.

1차 6.15 즈음 조선학교 방문시 일본 문부과학성을 찾아 연서명과 인증샷 등 항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8월말까지 모은 각종 선언은 2차 9월 유엔총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이창복 6.16남측위 상임대표의장은 "모든 어린이들은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일본정부가 조선학교 어린 학생들에 대해 벌이고 있는 부당한 차별정책은 옳지 못하다. 즉각 폐기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장지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기지부장은 "일본정부는 앞으로 일본이 북과 수교를 할 때 두 나라를 모두 잘아는 조선학교 학생들이 매우 유용한 인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당장 성공적인 도쿄올림픽을 위해서라도 조선학교 차별은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조선학교 차별을 중단하라.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김경민 한국YMCA 전국연맹 사무총장과 시민모임 공동대표인 정태효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목사가 낭독한 '일본정부는 조선학교 차별을 당장 멈춰라!' 국제선언을 통해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차별은 자신들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재일조선인들의 역사와 현재를 부정하려는데서 비롯한 치졸한 행위이며, 민족교육을 말살화려는 노골적인 탄압이다. 또한 국가가 앞장서서 재일조선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행위는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명백한 국가폭력이다"라고 하면서 차별 중단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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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본부, 반통일·반평화 후보 21인 “황교안·태구민·하태경·김진태...”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0/04/04 09:47
  • 수정일
    2020/04/04 09:4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0/04/03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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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태구민, 하태경, 김진태, 홍준표...”

 

이들은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청년학생본부(이하 청학본부)가 발표한 ‘평화번영통일의 21세기에 NO 쓸모, 21대 국회 반통일·반평화 후보 21인’에 포함된 후보들이다,

 

3일 청학본부는 보도자료를 이번 총선을 맞아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들의 지난 발언들을 보도한 언론 기사들을 조사해 ‘평화번영통일의 21세기에 NO 쓸모, 21대 국회 반통일·반평화 후보 21인‘ 명단을 발표했다.

 

청학본부는 2018년 판문점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는 평화와 번영, 통일의 새로운 시대에 진입한 만큼 앞으로 구성될 21대 국회는 지난 시대의 폭력과 당리당략에 얼룩진 동물국회, 식물국회가 아닌 평화통일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나갈 통일국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학본부는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소중히 여기는 후보들이 당선되어야 하며 평화와 통일, 민족보다 당리당략과 개인의 영달을 우선하는 후보들은 퇴출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아래는 청학본부가 배포한 웹 선전물이다. 

 

▲ 청학본부가 4일 보도자료를 통해 발표한 ‘평화번영통일의 21세기에 NO 쓸모, 21대 국회 반통일·반평화 후보 21인‘ [사진제공-청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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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대응이 기후위기 운명을 결정한다

[초록發光] 지금이 기후위기 대응의 길을 찾을 때

 

기후재앙을 야기할, 전 지구 기온상승을 1.5도 이내로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과학자들이 계산한 ‘탄소예산’을 8년 안에 모두 소진해버릴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2018년에 이어 2019년의 전 지구적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늘지 않고 정체되었다는 소식이다. 여기에 더해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불행한 사태로 세계 각국의 사회경제적 활동이 멈춰 섬으로써 온실가스 배출량이 크게 줄어들게 될 전망이다. 이미 세계 1위 온실가스 배출국가인 중국의 배출량 감소가 보고되고 있다. 비유하자면 중환자실 입원으로 인한 강제 다이어트다. 퇴원 후 불어날 몸무게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한 것처럼, 코로나19 재난을 야기한 근본적인 원인은 기후 재난과 분리할 수 없다. 에볼라, 사스, 메르스, 그리고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 같은 인수공통감염증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는 벌목, 채굴, 댐 등의 각종 개발 사업으로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그들과 우리 사이에 유지되던 거리가 급격히 줄어들거나 사라진 탓이다. 그 개발 사업이 기후위기를 야기하는 채굴주의와 성장주의, 자본주의 체계의 요체라는 점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미 발생한 인수공통감염증이 더 확산하지 않도록 어떻게 봉쇄할지,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백신을 얼마나 빨리 개발할지에만 초점을 맞추면, 코로나19 재난과 기후 재난의 연결점을 놓칠지 모른다.

 

코로나19 재난에의 대응, 그리고 여파가 기후 재난을 다스릴 길을 열 수도 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전 세계의 온실가스 감축이 비극적인 코로나19 재난을 통해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공장은 멈춰서고 쇼핑몰은 한산하며, 배는 항구에 정박했고 비행기는 뜨지 않음에 따라 가능해졌다. 생산과 소비, 그리고 국제 무역이 감소하면서 화석연료 소비도 같이 줄어들고, 그 결과 온실가스 감축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재난 속 유토피아’가 모순적으로 느껴지지만 어쩌면 희망일지 모르는 것처럼, 재난 속에서 발견하는 탈 성장의 전조일 수 있다.

 

 

많은 것들이 되돌아오고 있다. 사람들이 각자의 집에 웅크리고 있는 사이에, 칠레 산티아고의 퓨마를 비롯해서 세계 여러 도시 거리와 해변에 야생동물이 나타나 그 땅이 본래 누구의 것이었는지 인식하게 해주었다. 금세 잊어버릴 동화 같은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조업의 부품과 시민의 필수품 공급이 어려워지자,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값싼 노동력을 찾아 세계 곳곳에 흩어놓은 생산 라인을 다시 국내로 불러들이려는 재지역화 움직임도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시장에만 맡겨놓고 물러나 있던 국가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봉쇄령을 내려 사회를 멈춰 세우고, 재난기본소득을 포함하여 엄청난 규모의 재정 투자를 시작했으며, 병원 등 여러 기관들에 대한 국유화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 각국이 능력이 없어서 기후 재난에 대응 못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시장이 다 알아서 해줄 것이며, 심지어 재난이 닥쳐오고 있을 때에도 시장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물론 강한 국가가 권위주의로 타락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기후 재난을 이유로 ‘에코 파시즘’이 대두하면 어쩌느냐는 걱정은 정당하다. 많은 재난은 기존 권력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전시장인 한편, 재난을 핑계로 국가 권력을 집중하고 절대화할 기회이기도 하다(이미 필리핀, 헝가리, 이스라엘에서 그런 시도가 성공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재난의 시기를 이윤을 창출하는 기회로 삼는 ‘재난 자본주의’의 길을 열어놓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막아설 수 없다. 지금은 오히려 지금껏 부족했던 국가의 역할을 촉구해야 할 때이고, 그 국가를 더욱 민주화해야 할 때다.

 

 

가장 큰 질문은 따로 있다. 사람들이 코로나19 재난을 경과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용기를 얻을 것인가. 코로나 봉쇄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 판로를 찾지 못한 농민, 문을 닫은 영세자영업자들은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또한 코로나가 멈춘 돌봄 서비스 부재로 또 다른 재난을 경험하는 이들도 많다. 이 재난 속에서 국가와 사회가 나서 자신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경험을 갖게 된다면, 또한 재난을 거쳐 마주하게 되는 세계가 여전히 불평등으로 가득 차 있다면, 예고된 재난을 대비하기 위한 절제, 협력과 연대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사회적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 공포로 급작스럽게 이뤄낸 사회경제적 활동의 축소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영속화되며, 그 안에서 형평성을 이뤄낼 수는 없을까. 시민에게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는 시장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에서 공급될 수는 없을까. 코로나 뉴딜에서 시작하여 그린 뉴딜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정의로운 전환을 강조하는 이들의 고민이다.

 

 

빠른 재난을 해결하는 동시에 거대하지만 느린 재난인 기후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을 결집시켜야 한다. 결국 이는 정치의 몫이다. 재난을 대비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제할 민주적 정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책과 공약은 사라지고 위장정당의 깃발만 나부끼는 이번 총선에서, 기후위기를 넘어설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할 수 없다. 각 정당이 기후위기 해법을 두고 토론하고 경쟁하며, 코로나 뉴딜을 그린 뉴딜로 연결하는 정치적 창조성을 발휘해낼 것이라 낙관적인 기대를 할 수 있을까. 위장정당 열린민주당은 선관위에 10대 정책공약도 제출하지 않았고, 더불어시민당은 날림 공약을 제시했다가 금방 거둬들이는 촌극을 빚었으니 말해 뭐하겠나. 나아가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나 언론들이 그런 토론과 경쟁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비례대표 방송토론 주제에 기후위기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기후위기에 대한 각 정당 정책을 비교하려는 언론들의 시도도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기후위기비상행동은 정당과 지역구 후보자들에게 기후정책을 묻는 질의를 진행 중이고 투표일 전에 공개할 예정이다. “기후국회와 배출제로를 위해서 투표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후보와 정당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 코로나19 위기는 결국 기후위기에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위기대응의 해법 모색도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지난 1일 벚꽃을 구경하기 위해 호수공원으로 나온 경기 고양 일산 시민의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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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40309542980278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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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만 남는 선거를 언제까지 할 건가

[제안] 쓰레기 정책의 사각지대, '선거'를 바꾸자

20.04.03 08:17l최종 업데이트 20.04.03 08:17l

 

 2010년 6.2 지방선거 투표를 이틀 앞둔 5월 31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아파트 재활용품 수거함 안에서 선거공보 봉투가 개봉되지 않은 상태로 나뒹굴고 있다.
▲  2010년 6.2 지방선거 투표를 이틀 앞둔 5월 31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아파트 재활용품 수거함 안에서 선거공보 봉투가 개봉되지 않은 상태로 나뒹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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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후보 유세가 시작되었다. 동네 곳곳 펼쳐진 현수막과 받자마자 버려져 거리에 나뒹구는 명함과 공보물을 보며 이번 선거도 쓰레기만 남는 선거가 될까 우려스럽다.

공약은 실종되고, 선거법 개정 취지와 달리 비례위성정당들이 난무하여 21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가 높지 않다. 환경정책을 제시한 후보자들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선거 과정에서도 환경을 배려한 부분도 찾기 어렵다. 선거철은 선거 쓰레기가 여전히 폐기물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뒤돌아서면 버려지는 후보자들의 명함, 보지 않아 봉투째 버려진 후보자의 공보물, 거리에 난립하는 후보자의 현수막, 선거철에만 입고 버려지는 옷과 어깨띠, 분리되지 않고 버려지는 온갖 쓰레기들이 가득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선거벽보 104만 장, 선거공보 6억 4000만 부, 현수막으로 13만 8192개가 발생되었다. 20대 총선에서는 선거벽보 32만 장, 선거공보물은 8000만 부, 현수막 1만 4000개가 발생되었다. 

21대 총선에서는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발생될까. 한 언론은 2020년 총선의 투표용지·홍보 인쇄물 등 제지 수요가 8500톤 가량 발생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20대 총선과 종이 인쇄물의 양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후보자가 게시할 수 있는 현수막은 2배로 늘어났다. 선거운동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서라며 2018년 3월 국회가 공직선거법을 개정했기 때문이다. 현수막 매수를 선거구안 읍면동 수마다 1개에서 2배 이내로 개정했는데 이는 현수막 도배를 법적으로 보장해주도록 개악된 것이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수막 게시매수는 해당 선거구 안의 읍·면·동 수의 2배 이내로 적용되어 253개 지역구에서 발생되는 현수막은 총 3만 5100여 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월 28일 선관위에서 발표한 선거후보자는 1118명, 지역구별 후보자 수는 약 5명으로 계산된 결과이다. 

선거 이후, 당선자, 낙선자들이 내건 현수막까지 포함하면 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공직선거법 제118조 5항에 따라 선거일의 다음 날부터 13일 동안 해당 선거구 안의 읍·면·동마다 1매의 현수막을 게시하는 행위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현수막만 재활용하면 해결되나
 
 2018년 환경부는 현수막 재활용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  2018년 환경부는 현수막 재활용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 환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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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간 선거철마다 문제로 지적된 현수막을 일부 기초 지자체에서는 자체적으로 수거해 앞치마, 화분, 선풍기 덮개, 줄넘기 등을 만들어 학교나 복지시설에 기증하거나 판매하기도 했다. 또한 2018년 환경부는 '선거현수막 재활용 시범사업'으로 서울 노원구, 금천구와 함께 폐현수막으로 장바구니 20만 개를 제작했다. 재활용을 위한 지자체와의 협력 시도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확인해 보니 노원구는 재활용한 장바구니를 배부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노원구 자체 재활용 행사 시 홍보물과 함께 배포했다고 한다. 서울시는 19~20대 총선에서 재활용 업체 2곳을 선정해 각 구에 폐현수막 제공에 협조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지만 강제력이 없어 현수막 대부분은 폐기되었다고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사회적기업 터치포굿은 대통령선거, 교육감선거에서 사용된 현수막으로 장바구니를 제작한 적이 있다. 공약을 기억하는 취지와 함께 재활용의 의미를 잘 살린 사례이다. 그러나 모든 현수막을 장바구니로 만들 수는 없다. 현수막 재활용 제품은 판매처가 확보된 양만큼만 제작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형태의 쓰레기일 뿐이다. 세척과 제작에 드는 비용을 고려한다면 수요 없이 제품을 제작할 수는 없다. 현수막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현수막은 보통 폴리에스터의 재질에 인쇄하여 제작시 잉크가 묻어나올 수 있어 재활용이 어렵고, 재활용하더라도 질 좋은 상품을 만들기 어렵다. 따라서 일부 재활용되는 현수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각처리 된다. 현수막을 소각하는 과정에서 다이옥신 같은 유해물질이 배출된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환경을 생각해서 만든 에코백이 넘쳐나 이제는 에코백이 에코백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텀블러, 에코백은 집집마다 서너 개 이상은 가지고 있다. 현수막을 재활용한 장바구니는 수년 전까지는 재활용 취지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아름답고 잘 만든, 내 취향에 맞는 장바구니가 넘쳐나는 시대다. 

넘쳐나는 종이 인쇄물

선거에서 사용하는 종이 인쇄물로는 후보자의 선거벽보, 후보자별 선거공보물, 공보물 봉투, 투표용지 등이 있다. 각 후보자들은 공직선거법, 공직선거관리규칙에 따라 인쇄물을 이용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 선거벽보는 규격과 재질이 규정되어 있지만 선거공보물은 규격만 규정되어 있다. 종이 종류와 무게에 대한 규정이 없다. 

투표용지는 전자개표를 도입하면서 납품규격이 의무화되어 2개 제지사만이 납품하고 있다.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전자개표 시에도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한솔제지는 재생원료 비율을 30~50%로 하여 제작한 종이를, 무림제지는 저탄소 인증을 받은 종이를 납품하고 있다. 투표용지 제작은 시군구선관위가 인쇄소를 선정하고, 제지사는 인쇄소에 종이를 납품하는 시스템으로 나누어져 있다(사전투표시 사용하는 롤용지는 별도 제작한다).

투표용지를 제외한 기타 선거벽보, 선거공보물에 대해서는 별도의 종이질에 대한 규정이 없어 후보자가 특별히 재생종이를 찾지 않는 한 인쇄소에서 선택한 종이를 사용한다. 재생종이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선택받기 어렵다. 공급보다 수요가 적어 일반 제지시장에서는 가격이 저렴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종이 선택에 있어 단지 가격만이 아니라 환경도 고려할 수 있도록 제도 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환경부에서는 1톤의 폐지를 재활용할 경우 CO₂ 1070kg, 대기오염물질 약 95% 저감, 물과 전력의 28~70%를 절약할 수 있다고 2010년에 발표한 바 있다.

또한, 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폐지 1톤을 재활용하는 경우 30년생 나무 약 20그루를 벌채하지 않아도 되는데 "30년생 나무 한 그루가 연간 축적하는 1톤의 CO₂ 흡수량과 펄프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되는 에너지 및 기타 부대비용을 생각하면 폐지의 재활용은 단순히 원료를 저감하는 그 이상의 효과를 얻는다"고 밝히고 있다. 

투표용지를 제외하더라도 선거공보물 8000여 톤을 재생종이로 사용한다면 30년생 나무 16만 그루의 나무를 살릴 수 있다. 또한 재생종이로 다시 만드는 물과 에너지를 감안하더라도 폐지 재활용에 따른 CO2 감축, 물과 전력 에너지의 절약효과는 매우 높다.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다
 
 춘천시의 위탁을 받아 폐현수막으로 쓰레기 분리수거용 마대자루를 만드는 춘천시니어클럽 작업장 마당에 폐현수막이 산처럼 쌓여 있다.
▲  춘천시의 위탁을 받아 폐현수막으로 쓰레기 분리수거용 마대자루를 만드는 춘천시니어클럽 작업장 마당에 폐현수막이 산처럼 쌓여 있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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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시 발생되는 홍보물(선거벽보, 후보공보물, 어깨띠, 현수막 등)이 대량의 쓰레기로 발생되는 모습은 새롭지 않다. 십수년간 문제제기 되었음에도 해결되지 못했다. 심지어 20여 년 전에도 환경친화적 선거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다. 2002년 환경부는 '환경친화적 선거 문화 조성을 위한 실천방안'이라는 연구를 진행했고 놀랍게도 이 연구 책임자는 조명래 현 환경부 장관이다. 

연구보고서는 녹색선거를 판가름하는 조건을 ① 유권자가 녹색후보를 골라내는 것 ② 선거 진행 과정에서 후보자들의 유세 활동이 얼마나 친환경적으로 치러졌는지 평가하는 것으로 꼽았다. 선거공약 상 환경에 대한 입장은 차치하더라도 광고지의 환경성 배려 여부, 교통수단의 환경성 배려 정도, 유세장소의 환경오염 발생 정도(소음, 쓰레기)를 기준으로 제시하며 친환경 선거문화 조성을 위해 법이나 규정을 개정해야 해야 한다고 밝혔다.
 
"선거 유세과정을 환경친화적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정부 쪽의 역할도 중요하다. 가령 후보자들의 정책공약 양식을 동일화해 정보를 제공하도록 규정을 만들고, 유세 활동과 관련 환경수칙을 제정하는 것 (예, 유세장 폐기물의 분리수거), 친환경적인 유세가 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을 하는 것(예, 저렴한 재생용지의 대량 공급 등) 등은 모두 정부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렇듯 환경부는 20여 년 전에도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대안을 제시했었다.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등을 치르며 선거 후 발생되는 쓰레기 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사회단체들이 정당과 선관위에 제안한 바 있다. 온라인 기반의 홍보를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한다거나 녹색선거 가이드라인을 준수하여 친환경 재질을 사용하고 재활용하도록 유도하도록 말이다. 그러나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다.

'쓰레기 없는 선거'를 위해

시대가 변했다. 사전투표도 하고 있고, 백화점 전단도 온라인으로 보는 시대다. 권고나 유도가 아닌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공직선거관리규칙을 개정하여 선관위와 각 후보자들이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첫째, 종이 사용을 최소화하고 온라인 공보물로 전환하자. 현재 선관위 홈페이지에서는 후보자 명단 확인 가능하다. 후보자 공약까지 볼 수 있도록 하자. 모바일용 총선 앱을 만들어 후보자 명단과 공약 볼 수 있도록 하자. 

민주시민으로서 후보 공보물에 담긴 후보의 정책과 이력을 참고해야 하는 것은 투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보다 효과적으로 볼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편하고, 불필요한 우편물을 줄여 자원을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선관위는 후보자들에게 선거공보물을 재생종이로 만들라고 권장하지 말고 강제하라. '녹색제품 구매촉진에 관한 법률'의 적용범위를 확장하여 선거에도 녹색제품 사용을 촉진시켜야 한다.

선관위가 제작하는 종이 인쇄물(투표용지, 봉투용지 등)뿐 아니라 후보자들의 공보물(선거벽보, 후보공보)도 포함해야 한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인 제품, 재활용제품의 품질인증 상품 등의 녹색제품이나 재생종이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현수막 재활용 비율을 의무화하여 재활용을 촉진해야 한다.

셋째, 규격과 수량이 제한 없는 사각지대의 제도를 개선하라. 예비 후보자의 선거 운동 방식 또한 개선되어야 한다.

건물의 절반 이상을 뒤덮은 예비 후보자들의 현수막을 본 적 있을 것이다. 현 공직선거법상 예비 후보자는 간판·현수막 등을 게시할 수 있고, 그 수량은 제한이 없기 때문에 건물을 덮을 정도의 큰 현수막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정당별로 당사 게시 선전물은 선거운동기간 내 게재 가능하고 수량과 규격의 제한이 없다. 규격과 수량을 제한함으로써 무분별하게 자원을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뿐일까. 그렇지 않다. 더 나은 방법들을 시민들이 제안할 것이다.

쓰레기 없는 선거를 위해 투표를 해주세요.  녹색연합은 '쓰레기 없는 선거'를 위해 우선 해결해야 할 부분들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선관위와 환경부에 전달하여 제도개선을 촉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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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유족들은 왜 ‘미래한국당 정경희 후보 사퇴’를 요구했나

정 후보의 편향된 역사인식,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제주 4.3의 아픔
 
임병도 | 2020-04-03 09:12:0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제주 4.3 유족과 관련 시민단체들이 미래한국당 정경희 비례대표 후보의 사퇴를 촉구했습니다.

정경희 후보는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후보 7번을 받았고, 미래한국당은 미래통합당의 비례대표 위성정당입니다.

미래한국당 정경희 후보는 박근혜 정부 당시 국사편찬위원을 지냈고 2015년 <한국사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출판했습니다.

정 후보는 책에서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이 주도한 좌익세력의 활동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었다”며 “도민들이 궐기한 게 아니라 제주도의 공산주의 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에 저항해 일으킨 무장반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사)제주4․3연구소, (사)제주민예총, (사)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사)제주4.3범국민위원회는 2일 공동성명서를 통해 “정 후보는 자신의 저서 등을 통해 4.3을 ‘좌익폭동’, ‘공산주의세력의 무장반란’이라 주장하며 제주4.3을 심각하게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왜곡했다”고 밝혔습니다.

4.3단체들은 “검정교과서의 내용을 두고 ‘제주4.3사건을 폭동이 아니라 봉기 또는 사건으로 규정해 이 사건의 폭력성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한다’고 비난하며, 청소년의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로막는 언행을 자행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왜곡된 역사인식으로 4.3을 폄훼하는 인사를 비례후보로 내세운 미래한국당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역사의 상처를 딛고 평화로운 공동체로 나아가자는 국민적 열망을 짓밟고, 다시 갈등과 반목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반역사적 행위”라며 미래한국당의 공천을 비판했습니다.

4.3단체들은 “(정 후보 공천)이는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갈등과 반목의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대다수 국민과 4.3유족의 열망을 무참히 짓밟는 행위”라며 “이런 유족과 국민적 열망에 동의한다면 정 후보는 자진사퇴해야 한다. 미래한국당 또한 이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고, 제주도민과 4.3유족들에게 사과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습니다.

정 후보의 편향된 역사인식

정경희 후보는 <1948: 대한민국 건국이야기>에서도 “제주도 3개 선거구 가운데 2개에서 좌익의 폭동으로 인해 투표가 실시되지 못했을 뿐, 전국적으로 압도적 다수의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했다”라며 제주 4.3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했습니다.

오마이뉴스 윤근혁 교육 전문 기자의 기사를 보면 정 후보는 2014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비로 쓴 <제3공화국의 정체 확립과 근대화전략: ‘조국 근대화’를 위한 ‘정치의 경제화’>라는 논문에서는 박정희 정권을 미화하는 편향된 역사인식을 보여줬습니다.

논문을 살펴보면 정 후보는 유신을 가리켜 “가능한 한 최단 시간에 최대의 효과를 내는 군사적, 경제적 개발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도입한 것이 바로 유신체제였다”라며 독재정권의 상징인 유신을 ‘정치개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정 후보는 “박정희가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의 대한민국은 ‘조국 근대화’를 국가 프로젝트로 추진하는 발전국가라고 이름 붙여도 무방할 것”이라며 5.16 군사쿠데타를 옹호했습니다.

국민교육현장에 대해서는 “국민교육헌장에 담겨있는 혁신, 융통성 등의 핵심 가치가 오늘날과 같은 ‘역동적’인 한국을 가능하게 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국민교육헌장은 1890년 일본이 발표한 ‘교육칙어’와 매우 흡사합니다. 일제는 조선인에게 신민사상을 강요하기 위해 교육칙어와 천황의 초상화를 전국 학교에 내걸었고, 아침조회나 행사 때마다 낭독하게 했습니다.

1948년 폐지된 일본 천황이 발표한 ‘교육칙어’라는 일제의 잔재가 20년 뒤인 1968년에 박정희 정권에서 부활한 셈입니다.

국민교육헌장은 일제의 잔재라는 지적에 따라 1994년 선포 기념행사가 폐지되면서 사라졌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제주 4.3의 아픔

https://www.youtube.com/watch?v=9y8YsrhlwIE&feature=youtu.be

미래한국당 정경희 후보는 비례대표 7번으로 당선된다면 교육위원회로 배정받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정 후보가 교육위원회 소속이 된다면 편향된 역사 인식이 그대로 정치에 적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아직 이름조차 명명되지 않은 제주 4.3사건이 분열과 갈등의 양상으로 다시 재연된다면 제주도민들은 또다시 아픔을 겪어야만 합니다.

오늘은 제72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리는 날입니다. 코로나 19 사태로 행사는 대폭 축소됐습니다. 일 년에 하루 제주 4.3사건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나오는 날이지만 그마저도 어렵게 됐습니다.

국민들의 아픔을 해결하는 정치가 아니라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모습이 보여 4월 3일 아침이 씁쓸합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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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북 바로 알기'

<화제의 책> 김이경 『미래세대를 위한 북 바로알기-우리는 통일세대』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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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4.02  23: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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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남북관계를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하다'는 비유로 설명하기도 한다.

벌써 3년전인 2017년 11월 29일 화성-15형 발사에 성공한 북한이 정부성명으로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언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던 한반도 전쟁위기는 한달여 지난 2018년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창올림픽에 대표단을 파견하고 대화에 나서겠다는 용의를 표명하면서 극적인 평화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난 2~3년이 지나는 동안 말 그대로 격변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요동치는 관계변화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남의 일처럼 아득하다가도 어느새 가슴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하지만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은 북쪽 사회에 대한 인식이다. 분단과 전쟁의 70년 역사는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해 덧칠되면서 그만큼 더 완고한 벽이 되었다.

   
▲ 김이경, 『미래세대를 위한 북 바로알기-우리는 통일세대』, 초록비책공방, 282쪽, 2020.3.20. [사진제공-초록비책공방]

지난해  2월 '새로운 북미관계'에 대한 기대로 충만하기까지 했던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바로알기를 표방한 책을 출판한 바 있는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가 이번에 다시 한번 '북녘 바로알기' 심화편이랄 수 있는  『미래세대를 위한 북 바로알기-우리는 통일세대』를 펴냈다.

지난해 나온 『좌충우돌 아줌마의 북맹탈출 평양이야기』가 2001년부터 시작된 민간교류 경험과 느낌을 바탕으로 '사람의 정이 넘치는 사회주의 북'을 다루었다면, 이번엔 좀 더 본격적으로 북을 깊이 있게 다루려고 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이번 책에는 북녘의 그들이 경제난을 극복한 과정과 교육·종교·의료 등과 같은 현재의 생활상, 북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가 적극적으로 다루어졌다. 또 외세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나라를 건설해 온 과정, 그런 역사속에서 어떤 정서와 사고방식을 형성해 왔는지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작심 발언이 적지 않다.

"인민의 삶의 향상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할 방안을 더 열심히 찾지 않고 사회적 안정을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영화속 주인공의 대사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배움'이란 취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사의 발전, 노동자 자신의 발전, 또 국가를 위한 것이다"라는 대목은 일찍이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된 발언이었지만 책속에서 지극히 자연스럽다.

우리의 회사에 해당하는 북의 기업소에서 노동자들이 받는 생활비는 임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과는 달리 기업소의 주인으로서 노동과 생산의 가치를 분배받는 것이다. 

"기업소는 국가 혹은 인민위원회와 함께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주택과 식량을 비롯한 최소한의 기본 생활용품 배급 등을 해결하고 이 배급으로 해결할 수 없는 소비를 위하여 생활비를 분배한다"는 설명은 낯설지만 이해할만한다.

몇년전부터 주문배달 서비스와 식료품 이동판매 서비스는 물론 드라이크리닝과 기차표 예약서비스를 대행한다는 국영 체인점 '황금벌' 상점의 서비스는 '가난한 사회주의' 북한의 상상을 넘어서는 변화를 보여준다.

큰 제목으로만 보아도 <북녘 청소년의 성장기>, <북녘 인민들 삶의 이모저모>, <북 현대사를 알아야 지금의 북이 보인다>, <현대사와 함께 성장한 북녘의 문화예술> 등 다루는 내용이 포괄적이다. 

그래서 더욱 더 저자는 "통일을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북을 바로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검열에서 깨어나려는 결단과 용기를 요구하지만 예전처럼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진지함, 인문학적 상상력, 솔직한 질문과 토론의 문화, 그리고 열려있는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진실과 마주할 수 있다"고 다시 강조한다.

북녘 연인들의 성의식과 결혼관, 북의 무상주택 정책과 그쪽 사람들의 집에 대한 단상, 거주이전과 여행의 자유에 관련한 실상, 의료정책과 종교활동 등 평소 궁금해 하던 북녘 일상에 대해 사례만 나열하지 않고 개념적으로 정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이 책이 제공하는 큰 장점이다.

또 <김일성 주석은 정말 항일 무장 투쟁을 했을까>, <한국전쟁 이후 북의 경제 건설>, <유일사상 체계의 확립과 계승문제> 등 오래된 질문에 대해서도 냉전논리에 편승한 뻔한 답변 대신 북의 설명과 역사에 근거해 해설하는 접근은 분명 새롭고 유의미한 것이다.

나아가 <1970년대 유일사상 체계의 확립과 계승문제>, <1980년대 북 전역에 퍼진 주체사상화>, <1990년대 무너지는 사회주의 앞에 홀로 선 북의 운명>, <2000년대 자주적으로 닦은 경제 활성화의 기반>, <2010년대 경제강국으로 나아가는 김정은 시대> 등은 새로운 남북관계를 위해 필요한 적극적인 인식의 지평을 여는 주제들이다.

때로 남과 북의 현실을 극단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아닌지, 불편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객관적 해설임을 알 수 있도록 각주가 충실히 제공되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새로운 한반도의 꿈을 꾸자고 하는 이 책에 대한 기대는 크다.

너무나 극적으로 다가온 평화분위기는 그래서 처음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우리에게는 70년 분단체제를 넘어 한반도 항구적 평화체제에 대한 꿈이 멀지만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분명 싹트고 있다.

남과 북의 정상이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서로를 껴안고, 남에서 북으로 다시 북에서 남으로 군사분계선을 넘는 모습은 온 민족과 세계를 향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의지를 밝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해 9월 평양 5.1경기장에서 15만 평양시민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남쪽 대통령이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그림을 내딛자'고 연설할 때, 백두산 천지앞에서 남북 정상이 두손 맞잡고 다짐할 때, 그 모습을 지켜본 많은 이의 가슴속엔 분명 평화와 통일이 이뤄진 우리의 미래가 뜨겁게 그려졌다.

그후 결렬과 그밖의 어떤 일이 있었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고 우리는 가장 중요한 준비를 변함없이 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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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코로나19 재앙... 한국에서도 일어날 뻔했다!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0/04/02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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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현재 미국의 코로나19 확진자는 21만5천여 명을 넘었고, 사망자는 5천 백여 명을 넘었다.

 

미국이 코로나19의 새로운 진앙지가 된 것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적인 의료 시스템이 부재하고 의료에서도 이익만을 내세운 시스템이이 주원인이다.

 

미국에서는 비싼 의료비 때문에 코로나19 진단을 하기 어려운 사람도 많다. 실례로 미국의 첫 10대 사망자는 의료보험이 없어 병원으로부터 진료와 치료를 거부당했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국민건강보험 제도를 비롯한 공적인 의료보장 제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집권 시절 공적인 의료 제도가 돈이 안 된다며 의료 부문을 미국처럼 민영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의료 민영화는 국가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공적 영역인 의료 분야를 사적 영역인 민간에 내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명박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의료 산업화’였다. 

 

이명박 정부는 의료서비스산업을 지속가능한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규제 완화를 추진했다. 이명박 정부는 영리의료법인(영리병원)·의료채권제 도입, 프리랜서 의사 허용 등을 추진했고 이로 인해 5년 내내 의료 민영화 논란에 휩싸였다.

 

이명박 정부의 대표적인 의료민영화 정책은 ‘영리병원’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경제자유구역(송도) 내 외국 영리병원 설립을 허용했다면 이명박 정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내국인 영리병원 설립 허용을 추진했다. 이명박 정부는 의료민영화 비판을 받는 영리병원이란 이름 대신 ‘투자개방형병원’이란 명칭을 사용하면서 제주도 내 내국인 영리병원 설립을 추진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영리병원은 국민적 반대에 부딪혀 세워지지 못했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를 명분으로 국민적 요구였던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확충'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고 오히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축소해 버렸다. 그래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꾸준히 높아져 오던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비율을 낮췄다.

 

이명박 정부는 2011년 기획재정부 안으로 교육·의료 부문을 서비스 산업에 포함한다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을 추진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이 법안을 추진했으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박근혜 정부 역시 의료 민영화를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이명박 정부 때 실패한 영리병원을 재추진하려 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영리 자회사 설립 가이드라인’을 추진했다. 우리나라의 법인병원은 투자자에게 수익을 배분하게 할 수는 없게 한다는 뜻에서 '비영리'로 규제되어왔다. 그런데 ‘영리 자회사 설립 가이드라인’은 비영리병원이 영리 자회사를 만들어 외부 투자자의 투자를 받고 이윤 배분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엄마' 병원은 비영리, '아들' 병원회사는 영리 주식회사가 되는 형식이다. 결국 이것은 병원이 수익 추구, 즉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치료만 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박근혜 정부는 병원의 부대 사업 대폭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했다. 병원을 종합쇼핑몰 수준으로 바꾸려고 한 것이다. 병원의 부대 사업 범위에는 부동산 임대업도 포함되었고, 헬스클럽, 수영장 등도 포함될 수 있었다. 

 

이것이 현실화되었으면 돈이 되는 헬스클럽이나 쇼핑이 중심이 되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의 기능은 축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원격 의료를 추진하려 했었다. 박근혜 정부의 원격 의료는 의사-환자 간의 대면 진료를 의사-환자 간의 화상 진료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해 1차 의료를 IT와 전자 등 총자본의 영리 추구에 활용하려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경남도지사 시절인 2013년 5월 공공의료기관인 진주의료원을 폐쇄했다. 진주의료원은 사회적 약자를 치료하는 공공의료기관이었다. 

 

공공의료기관이란 국가·지방자치단체 등이 정하는 보건의료기관으로, 진주의료원 같은 공공병원을 비롯해 적십자병원, 지방의료원 등 전국에 200여 개가 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 등을 민간병원보다 저렴한 가격에 받을 수 있고 민간병원이 꺼리는 장애인 전문 시설이나 호스피스 병동 등도 갖춰 의료소외계층에게 톡톡한 의료 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다.

 

진주의료원이 폐쇄된 후 경남지역의 표준화 사망률(성별ㆍ연령차에 따른 영향을 배제해 인구 10만 명당 표준화한 사망률) 지역별 순위가 높아졌다는 통계가 나온 바 있다. 즉 지역에서 안전망 역할을 하던 병원이 폐쇄된 뒤에 나온 결과라 지역 민심이 크게 요동쳤었다.

 

지난 3월 2일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이런 말을 했다.

“전국에서 공공병상 수가 가장 부족한 지역이 경남이다. 경남의 공공병상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원인은 옛 진주의료원 폐쇄 이후 서부권의 공공의료가 공백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라며 “옛 진주의료원 폐업이 더욱 아쉽고 안타까운 이유”라고 말했다.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이 확산될 때 한 지역의 병원 1개가 폐쇄된 것도 이런 아쉬움이 남는데, 만약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추진했던 의료 민영화가 현실화되었다면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코로나19 사태에서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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