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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한국 내 양심적 학자들'로 포장되지 않길

[반일 종족주의 ⑧] '산미증식계획과 쌀 수탈'의 진실

19.09.16 07:29l최종 업데이트 19.09.16 07:29l

 

<반일 종족주의>가 논란입니다. 몇 회에 걸쳐 이 책의 문제점을 짚어봅니다.[편집자말]

 

 유튜브 채널 이승만TV에 출연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  유튜브 채널 이승만TV에 출연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 이승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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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총리 대신을 비롯한 일본 우익은 식민지배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 식민지배가 한국에 득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았다고 강변한다.

한국전쟁(6·25전쟁) 휴전 3개월 뒤인 1953년 10월 15일 제3차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나온 구보다 간이치로도 그랬다. 식민지배 배상 문제가 거론되자, 그는 "일본은 조선의 철도나 항만을 만들고 농지를 조성하고, 대장성(일본의 과거 중앙행정기관-편집자 주)에서는 많은 해엔 2천만 엔도 내놓았다"며 이런 것과 식민지배 배상을 상쇄시키는 게 어떻겠느냐는 황당한 발상을 입에 담았다.

대장성이 조선총독부에 제공한 그 2천만 엔으로 경찰서나 형무소를 짓지 않았느냐는 한국 측 반박이 있었지만, 쇠 귀에 경 읽기였다. 그는 식민지배가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됐다며 한국 측 심기를 살짝 살짝 건드렸다.

 

식민지배가 득이 됐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일본 우익이 서슴없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잘못 믿고 있거나 그렇게 믿고 싶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믿음을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바로,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내부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로 대표되는 이들은 일본 우익과 똑같은 주장을 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논리에 학술적 색채까지 입히고 있다. 일본 우익이 이들을 '한국 내 양심적 학자들'로 포장해서 선전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식민지배가 한국에 해가 되지 않았음을 입증하고자, 낙성대경제연구소가 내세우는 것 중 하나는 '일제에 의한 식량 수탈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영훈과 김낙년·김용삼·주익종·정안기·이우연이 함께 쓴 <반일 종족주의> 제3장 '식량을 수탈했다고?' 편에 이런 주장이 담겨 있다.

쌀을 강제로 빼앗겼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조선총독부 자료 

식량 수탈 혹은 쌀 수탈로 한민족이 고난을 겪었다는 점은 한국사 교과서에 잘 소개돼 있다. 쌀 증산을 목표로 일제가 시행한 산미증식계획이 한국이 아닌 일본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국사편찬위원회가 2007년 발행한 고등학교 <국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표로 설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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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농림국이 작성한 <조선 미곡 요람>에 근거한 이 표에 따르면, 조선의 쌀 생산량은 일제강점 2년 뒤인 1912년에 1156만 8천 석이었다. 산미증식의 결과로 이 양은 1928년에 1729만 8천 석이 됐다. 1912년에 비해 49.5% 증가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으로 판매된 양이 1912년에는 291만 석, 1928년에는 740만 5천 석이다. 154.5% 증가한 것이다. 쌀 생산량은 49.5% 증가한 데 반해, 대일 판매량은 3배 이상이나 증가한 것이다.

그럼, 증가된 생산분만큼만 일본으로 넘어간 것일까? 1912년과 1928년을 비교하면, 증산분만큼만 넘어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1912년에는 1156만 8천 석이 생산되고 1928년에는 1729만 8천 석이 생산됐다. 461만 6천 석이 증산된 것이다. 한편, 일본으로 넘어간 쌀은 1912년 291만 석, 1928년 740만 5천 석이다. 449만 5천 석이 더 넘어간 것이다. 이것만 보면, 대일 판매량의 증가분이 증산량과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다른 연도들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증산량보다 많은 양이 넘어간 해들이 발견된다. 1912년과 비교할 때, 1929년에는 194만 3천 석이 증산됐지만 대일 판매량은 269만 9천 석이 증가했다. 1930년에도 증산량보다 많은 양이 넘어갔다.

식량을 수탈당했다는 점은 한국인의 쌀 섭취량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표에 따르면, 1912년에 1인당 연간 0.772석이었던 1인당 섭취량이 1929년에는 0.446석으로 떨어졌다. 쌀이 증산됐는데도 섭취량은 줄어든 것이다.

쌀을 강제로 빼앗겼다는 점은 한·일 양쪽의 섭취량을 비교해보면 더 잘 드러난다. 쌀 생산량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섭취량은 매년 1석이 안 되지만, 일본인의 소비량은 1석을 넘겼다. 다른 것도 아니고 조선총독부 농림국이 작성한 <조선 미곡 요람>만으로도 이런 참담한 실상이 드러난다.

위 표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한국인의 참담한 실상은 한반도 거주 한국인과 일본 거주 한국인의 식생활 차이에서도 표출된다. 농림성 같은 일본 정부 자료를 분석한 이송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조선인 식생활의 지역성과 식민지성'(고려사학회가 2019년 발행한 <한국사학보> 제75호)에 이런 대목들이 있다.
 
"주식은 전체적으로 쌀만을 섭취하는 경우는 13%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보리 및 다양한 잡곡을 혼용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중 약 30%는 1년 내내 육류·생선·계란 등의 어떠한 동물성 단백질도 먹지 못하는 처지였다."
 
한국에서 쌀이 생산되는 데도 한국인 87%는 쌀을 제대로 먹지 못한 데 반해, 일본에 가서 노동 일이나 날품팔이를 하는 한국인들의 생활은 달랐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재일 조선인은 주식으로 백미를 섭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 내에서 거의 최하층이었지만, 쌀을 구입해서 쌀밥을 지어먹었다."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살기 힘든 이들이었다. 조선에서 이들은 쌀을 먹는 13%에 끼지 못했다. 이들이 속한 쪽은 1년 내내 동물성 단백질을 먹기 힘든 계층이었다. 그런데 이들도 일본에 가기만 하면, 돈을 아무리 적게 번다 해도 일년 내내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한국인들이 생산한 쌀이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넘쳐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동아일보> '조선 쌀을 막지 말라' 기사의 실체

하지만 이영훈 교수는 그것을 수탈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반일 종족주의> 제3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과서의 서술이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만약 누군가가 피땀 흘려 생산한 쌀을 강제로 빼앗아 갔다고 한다면, 바보가 아니고서야 가만히 참고 있을 농민도 없겠거니와, 그것이 곧 신문에 보도될 뉴스거리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쌀 수탈을 묵인하고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바보라는 것인가? 그런 느낌이 들게 하는 글이다.

그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면 신문에 떠들썩하게 보도되지 않았겠느냐고도 말한다. 일제강점기의 언론이 지금의 언론처럼 보도의 자유를 누렸으리라는 가정 하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쌀 증산량에 비해 한국인 섭취량이 줄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 때문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말한다.
 
"생산량에서 수출량을 빼고 수입량을 더해서 구한 국내 소비량은 정체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 인구가 늘었기 때문에 1인당 쌀 소비량은 감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쌀 섭취량이 감소한 것은 수탈의 결과가 아니라 인구증가의 결과라는 것이다. 식민지 한국 내부에서 책임 소재를 규명해야 한다는 인식인 것이다.

이영훈 교수의 말은 언뜻 보면 총독부에 유리한 것 같지만, 실상은 불리하다. 식민지 한국을 지배하겠다고 들어온 총독부가 한국인 인구증가도 고려하지 않고 쌀 정책을 결정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구가 증가하는 것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쌀의 대일 유출을 조장했다는 것은 그들이 너무도 무책임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을 수탈할 의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쌀 섭취량이 감소한 원인을 인구증가로 돌린 뒤, 이영훈 교수는 1931년 6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 '조선미 이입제한엔 절대 반대'를 거론하면서 화제를 전환한다. 조선 쌀의 유입으로 피해를 본 일본 농민들이 조선미 유입을 반대하는 현상을 거론하면서, 이 기사는 '조선 쌀을 막지 말라'는 항의의 의견을 내보냈다. 이 기사의 결론 부분은 이렇다.

 
 본문에 인용된 <동아일보> 기사.
▲  본문에 인용된 <동아일보> 기사.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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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입장으로 앉아서는 그 방법의 여하를 물론하고 어떠한 종류의 이입 제한이든지 그것이 차호(此毫)라도 조선미의 일본 유출을 방해하는 성질의 것이면 차(此)를 절대로 반대할 수밖에 없다."
 
이 조금이라도(此毫) 조선 쌀의 일본 판매를 방해하는 게 있으면 절대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이 기사를 근거로, 이영훈 교수는 "<동아일보>는 조선 농민의 입장에서 단호히 반대"했다면서 이렇게 해석한다.
 
"이를 거꾸로 보면, 일본이라는 쌀의 대규모 수출 시장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쌀 생산이 크게 늘어났음에도 쌀값은 불리해지지 않았고, 그것이 조선 농민의 소득 증가에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미증식으로 쌀 유통량이 늘어났는데도 한국 쌀값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일본인들이 한국 쌀을 구매해줬기 때문이고 이 덕분에 한국 농민들의 소득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쌀 유입을 반대하는 일본 농민들에 맞서 <동아일보>가 '한국 쌀을 막지 말라'는 경고성 기사를 실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싫어했다면 <동아일보>가 이런 기사를 내보냈겠냐는 게 이영훈 교수의 생각이다.

그런 뒤 그는 1인당 쌀 섭취량이 감소한 문제를 재차 거론한다. "쌀을 수출한 것이 생활수준의 하락을 가져온 원인은 아닙니다"라고 강조한 뒤 송이버섯 비유를 꺼낸다.
 
"요즘 송이버섯은 귀하고 하도 비싸서 보통 사람들은 좀처럼 먹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일본으로 대량 수출되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송이버섯 사랑은 유별나서 일본에서도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한국의 송이버섯 채취 농가가 생산량을 늘렸다고 해도, 더 많이 수출하고 나면 송이버섯의 한국 내 소비가 줄어들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생활수준이 떨어졌다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인들이 송이버섯을 수출하기 위해 자체 소비를 줄인다고 해서 생활수준이 떨어졌다고 말할 수 없듯이, 일제하 한국인들이 일본에 쌀을 수출하느라 쌀을 못 먹었다 하여 생활수준이 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쌀은 핵심 식량이고 송이버섯은 그렇지 않다는 이치를 도외시한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농민'과 '지주'... 착각을 유도하는 고약한 장치

이 대목에서 해결해야 할 의문이 있다. 위 <동아일보>에 따르면, 1931년 당시의 한국인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지지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이영훈 교수는 일제의 쌀 정책이 식민지에 도움이 됐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 말을 듣다 보면, 일제 식민지배가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 수도 있다.

그런 느낌이 생길 여지가 있는 것은 이영훈 교수가 글 속에 '장치'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농민'이란 표현을 강조해서 사용했다. 한국인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희망했으며 그런 판매가 한국에 이익이 됐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만약 그가 '조선 농민' 대신 '조선 지주'란 표현을 썼다면, <동아일보>가 쌀의 대일 판매를 지원한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일제의 쌀 정책으로 대다수 한국인이 수탈을 당하는 가운데 소수의 지주계급만큼은 총독부와의 협력 하에 이익을 봤다는 사실이 금세 드러났을 것이다. 이영훈 교수가 '지주'를 '농민'으로 바꾸는 바람에 그런 사실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유통회사 대리점을 경영하는 사람은 상인으로 불릴 수 있어도, 유통회사 본사의 사장은 상인으로 불리지 않는다. 유통회사를 경영하므로 상인인 것은 맞지만, 그 표현으로는 그가 하는 일과 그가 차지한 사회적 지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지주도 농민이기는 하지만, 농민이란 표현으로는 지주의 기능과 지위를 정확히 표시하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농민'이란 표현은 지주보다는 소작농을 먼저 연상시키기 마련이다. 이영훈 교수가 '조선 지주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찬성했다'고 하지 않고, '조선 농민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찬성했다'고 하는 바람에 독자들이 착오를 일으킬 소지가 높아지게 된 것이다.

쌀의 대일 판매로 이익을 본 것이 소수의 지주계급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영훈 교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제3장 본문의 후반부에서 그 점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는 이렇게 서술했다.
 
"전체 농가 중에서 지주의 비중은 3.6%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작료 수입을 통해 전체 쌀 생산량의 37%를 취득하고 있었습니다. 자가 소비를 제하고 상품화되는 쌀을 기준으로 하면 지주의 몫은 50% 이상으로 늘어납니다. 앞에서 쌀이 수출 상품이 되어 조선의 농민들이 유리해졌음을 언급했지만, 그 혜택은 쌀 판매량이 많은 지주나 자작농에게 집중되었고, 소작농에게 돌아간 것은 미미한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쌀의 대일 판매로 득을 본 것은 3.6%에 불과한 지주계급이나 그들에 필적하는 소수의 부유 자작농뿐이었다는 점을 이영훈 교수도 인정했다. 일반 농민인 소작농한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음을 그도 인정한 것이다. 소작농들은 쌀 섭취량 감소로 생활고만 입었을 뿐이었다. 이처럼 쌀의 대일 판매가 총독부 지지 계층인 지주계급한테만 유리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조선 농민들이 대일 판매를 찬성했다'며 착오를 유도했던 것이다.

그가 쌀의 대일 판매로 소수 지주들만 이익을 봤다는, 자기 주장에 해가 되는 말을 한 이유가 있다. 한국 소작농들이 가난을 면치 못한 것은 일본 때문이 아니라 지주계급 때문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말을 하다 보니 쌀의 대일 판매로 이익을 본 게 지주계급뿐이었음을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이처럼 낙성대경제연구소에 포진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은 고약하다. 한국인들의 착각을 은근히 유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논리는 허술하다. 일제의 쌀 수탈을 부정하는 그들의 논리는 다름아닌 그들 자신의 논리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논리도 일본 우익한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양심적인 한국 지식인들'이 일제 식민통치에 고마워하고 있다는 선전을 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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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수필> 정 이월 다 가고 … - 그리운 강남 아리랑 -

음률에 남과 북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아리랑 노랫 말을 뇌이다 보니 목이 메였다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9/16 [06:33]
 

 


 

“정 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
 

‘그리운 강남’, 이 얼마 만에 듣는 노래인가.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벌어진 남북통일 축구경기 TV중계화면에 한복을 입은 한 중년 사내가 달랑 북 하나의 장단에 맞춰 노래하고 있었다.


옛날에 귀에 익었던 이 노래, 그러나 아주 다른 소리 빛깔과 낯 설은 가락으로 부르고 있다.

가슴 속 깊이 묻혀있던 한을 끄집어 내어 우리 고유의 창 같은 음률로 토해내듯 불러대는 이

소리에 나는 그만, 깊숙이 빠져들고 말았다. 그는 모국의 소리꾼 장사익 이었다.
 

어렸을 때 동네 여자애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며 부르던 이 노래를 왜 이제서야 다시 듣게 되었는가? 그 내력을 찾아보니 일제강점기 언론인 김형원의 시 '그리운 강남'에 작곡가 안기영이 1928년에 곡을 붙였다. 그렇다, 이 노래는 그냥 철 없는 아이들만의 노래는 아니다.


매몰찬 일제의 억압에서 독립의 봄을 그리워하던 우리 겨레의 한과 소망이 담긴 노래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 당국에 의해 금지 되었던 또 하나의 울 밑에 선 '봉선화' 같은 노래다. 해방

뒤 남과 북의 음악교과서에도 실려 마을마다 골목마다 메아리 쳤던 노래였다.


안기영이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의 길을 모색하고 있던 때 일어난 1919년 3.1독립항쟁에 참가한 이유로 그는 퇴학당했다. 그가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다니던 중 여운형 선생을 만나 그의 권유로 남경 금릉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1924년 귀국해서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조교를 하던 그는 또 1925년, 미국 오레곤 주 엘리슨 화이트 음악대학 유학 길에 올랐다. 3년뒤 귀국하고 이화여전 음악교수로 재직 중 지금의 교가도 작곡했다. 작곡가며 성악가였던 그는 조선의 설화 '콩쥐팥쥐'와 '견우직녀'같은 향토가극을 1940년대 초에 작곡하고 공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극(오페라)들이다.
 

그는 해방뒤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1947년 암살 당한 여운형 선생의 추모곡을 작곡하고 장례식에서 연주지휘도 했다. 좌우이념의 대립이 한창이던 그 때 좌익으로 몰려 그는 이승만정부에서 음악활동마저 중지당했다. 그리고 남북전쟁 중 1950년 그는 북으로 갔고 그의 노래들은 남녘에서 금지되었다. 거의 40년이 되어 남녘에 민주화 바람이 불어온1980년대 말에야 그의 창작품들이 풀려났다. 그동안 땅 속에 묻혔던 안기영 음악의 뿌리가 뒤늦게나마 소리꾼 장사익에 의해 되살아나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얼마전, 로스앤젤레스 챈들러음악당에서 열린 장사익 소리판 공연에서 열광하는 3,000명 청중 속에 나도 있었다. “사람이 그리워서”라는1부 공연에서는 ‘희망 한 단’, ‘찔레꽃’ 등 국악에 바탕을 둔 풋풋한 황토 빛 노래들을 그는 절규하듯 불러댔다. 북과 장고, 기타와 피아노가 받쳐주는 반주의 화음이 감동을 더 해 주었다. 2부에서는 친근한 가요, ‘님은 먼 곳에’, ’동백아가씨’등을 탁하지만 가슴 시린 서정을 담아 온 몸으로 노래했다. 구슬픈 듯 아득한 해금의 음색도 가슴을 파고 들었다. 전통 악기와 서양악기가 어우러진 반주로 우리 겨레만이 느낄 수 있는 사람 냄새와 정이 끈끈한 노래들을 그만의 독특한 소리판으로 이어 갔다.

 

한 판, 한 판 더해 가며 무대와 청중은 하나가 되었다. 마지막 노래를 마친 그가 ”용의 눈에

점을 찍은 이 소리판에 와주신 여러분….”하며 미국 순회 마지막 공연에 성황을 이뤄준 데 대한

감사의 말을 했다. 감동에 벅찬 관중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며 일어섰다. 기어이 “한 번 더!

한 곡 더!”의 열화 같은 재청에 이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이 안기영의 곡을 엮은 ‘강남 아리랑

(그리운 강남)’을 선창하자 객석의 모두가 일어나 함께 불렀다.
 

“ …… 또 다~ 시 보오~옴이 오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이 노래를 부르며 문득 일화 하나가 생각났다. 남녘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1년, 북미주와 유럽의 선우학원, 이영빈, 김동수 등 학자와 종교인 30여명이 처음으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북의 려연구(여운형 따님), 안경호 박사 등 15명과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의 대화] 모임을 가졌다.

분단 36년만에 처음인 두렵고 떨리는, 그러나 결의에 찬 
만남이었다. 회의뒤 저녁 식사자리에서 북과 해외동포들은 축하의 술잔을 마주치고 난 뒤에도 서로 어색하고 서먹서먹한게 긴장이 안 풀려 말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한 여인이 조용히 ‘정 이월 다 가고…’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입이 열려 따라 부르다 손에 손잡고 부르고 또 부르다 끝내 모두는 눈물을 머금고 껴안았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음률에 남과 북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아리랑 노랫 말을 뇌이다 보니 목이 메였다고 한다. 그밤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이 노래의 감동으로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일제강점 시절 창가수준의 창작계를 한 차원 높여 우리나라 가곡의 효시가 되었다는 안기영의 기여가 뒤 늦게 남녘에서도 조명되었다고 한다.

북에서 그는 김원균 평양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1980년 
세상을 떠났다. 이 소박하고 더 없이 고운 시 '그리운 강남'을 지은 김형원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였다. 그는 신경향파문학의 선구자로 활동하며 저항적 참여 시도 많이 썼다. 허나 일제강점 말기에 일본의 조선총독부 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뒷날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일제강점과 해방,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청춘을 산 우리 선대들의 삶이 파란만장하지

않았던 분이 얼마나 될까? 아직도 반목과 대결을 계속하고 있는 분단조국의 동포들이 똑 같이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 ‘아리랑’ 가락은 어찌 그리 아픈 굴곡의 역사를 겪어야 했나.

우리 겨레의 영혼에 들어와 어린아이들마저 즐겨 부르던 이 노래를 왜 이렇게 끊었다 이었다가,
 

버렸다 주었다 해야만 했는지! 겨레의 애틋한 소망을 담은 이 한 노래의 역사가 이렇게 우리

가슴을 에이니, 떠나간 자와 남은 자, 남았으면서도 갈라져 사는 가족의 아픈 수난들을 그 어찌 말로 표현하랴. 4계절이 분명치 않은 이곳 미국의 남캘리포니아이지만 매해 3월이면 공기 맑은 해안도시 산후안 카피스트라노에서 제비축제가 열린다. 우리 겨레에게도 평화와 통일의

감람나무 잎새를 물고 올 제비가 기다려진다. 그 언제 남과 북의 동포들이 한 자리에 만나 손에 손 맞잡고 “정 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를 함께 부를 날이 올까!

오 인 동/재미동포의사, 본사상임고문  
 

 

 미주 중앙일보 2007년 6월28일

 한국의 문예월간 '한국산문' 2008년 6월호

 한국의사수필가협회 동인지 '너 의사 맞아?' 2009년

 

장사익 그리운 강남, 아리랑: https://www.youtube.com/watch?v=9HRQ6FYBQ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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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회문제를 검찰에 맡기면 검찰개혁도 민주주의도 어렵다”

[만사법통에 기댄 사회](2)금태섭 “모든 사회문제를 검찰에 맡기면 검찰개혁도 민주주의도 어렵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seirots@kyunghyang.com

입력 : 2019.09.16 06:00 수정 : 2019.09.16 08:18

 

민간분쟁을 파헤치는 검찰 - 금태섭 국회의원

금태섭 의원이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금 의원은 1995년 검사로 임관해 2007년 검찰을 떠났다. 당시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라는 글을 일간지에 실어 내부에서 문제가 됐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금태섭 의원이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금 의원은 1995년 검사로 임관해 2007년 검찰을 떠났다. 당시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라는 글을 일간지에 실어 내부에서 문제가 됐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소속 금태섭 의원은 인사청문회에서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인사청문회에서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언행이 불일치한다고 말했지만, 검사 출신 의원이 드는 부적격 사유로는 어색했다. 진짜 이유는 조 후보자의 검찰개혁 방안에 동의하지 않아서라고 법조계는 추측한다. 서울대 박사과정 사제지간인 두 사람은 민사분쟁에 수사기관이 개입하는 문제에 똑같이 비판적이다. 조 장관은 도덕에 형법이 개입하면 안된다는 <절제의 형법학>을 2015년 냈다. 금 의원도 오랫동안 이 문제를 지적해왔다. 유례가 없는 우리나라 검찰의 권한을 손봐야 한다는 생각도 같다. 어디에서 두 사람이 갈리는 걸까. 금 의원을 국회 의원회관에서 지난 9일 오전 만났다. 인터뷰하는 동안 조국 법무장관 임명이 발표됐다.

 사인(私人) 사이의 분쟁에 수사기관이 개입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채무불이행이다.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상대를 사기로 고소한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 채무자를 불러 겁도 주고 기소해서 돈을 받아준다. 부동산을 팔기로 하고 중도금까지 받으면 더 좋은 조건이 나타나도 포기해야 한다. 위약금을 물고 새로 계약을 하려 해도 불가능하다. 검사가 배임죄로 기소하고 법원에서 유죄가 나오기 때문이다. 부동산 이중매매 처벌이라는 대법원 판례 때문인데 지나치다는 비판이 많았다. 하지만 지난해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처벌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자질구레한 빚까지 대신 받아주는 일을 검사들이 기꺼워할까. “반반이라고 본다. 채무불이행 같은 민사사건에 수사기관이 개입하는 역사적인 맥락이 있다. 과거에는 민사재판에서 이겨도 돈을 받아내기가 어려웠다. 채무자가 재산 숨기는 것을 막는 장치가 부실했다. 가족 이름으로만 돌려놔도 강제집행이 안됐다. 선진국처럼 신용에 불이익을 줘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형사절차를 통해 채권을 해소했다. 아주 예전에는 선진국도 비슷했다. 채무자 감옥도 있었다. 이런 해결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쓰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채무자 감옥은 1800년대 중반에 사라졌다.

 신용제도가 부실한 사회에서는 수사기관이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닌지 다시 물었다. “2002년 신용카드 대란 때 카드대금 갚지 못한 사람들을 검찰이 기소했다. 그런데 신용카드 회사는 전문 금융기관이고 자신들이 가입자의 신용도를 평가해서 카드를 내준 것이다. 이런 부실까지 검찰이 해결해주면 카드사로서는 땅 짚고 헤엄치는 사업이 된다. 내가 몇몇 사건에서 불기소 결정문을 써서 사안을 다르게 보자고 했다. 그랬더니 ‘검찰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신용거래가 정착되지 못한다’고 하더라. 오히려 그 반대다. 검찰이 다 해결해주니 금융기관이 체력을 기르지 못했고, 그래서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투자은행이 없지 않나.”

 검찰이 경영판단과 노조활동에도 관여하고 있다고 금 의원은 지적한다. “금융기관이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하면 배임으로 처벌한다. 담보를 확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그러니 사업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아도 담보가 없으면 대출을 못 받는다. 성공한 벤처기업이 드문 이유다. 경영판단도 수사 대상이다. 일부 악덕기업도 있지만 실패한 경영판단도 기소한다. 무죄율이 다른 범죄의 2배다. 기업들이 안전한 사업에만 투자하다가 영세 자영업자들 분야까지 진출한다. 노동자 파업을 업무방해로 기소하면서 사용자와 노동자를 합의시킨다. 이렇게 검찰이 처벌을 하고 다니니 경제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다.”

 수사기관의 민간영역 개입은 과거의 일이 아니다. 검찰은 자기 영역을 끊임없이 확대하고 있다. 지난달 법원은 동대문 흥인시장 상가 분양 사기범이라고 검찰이 기소한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 피고인은 상대방에게 민사소송을 당했다가 대법원에서 승소한 사람이다. 보통 민사에서 잘못이 인정되어도 형사처벌까지 받는 경우는 드물다. 어느 나라에서든 형사처벌은 마지막 수단이다. 이 사건에서는 민사에서 잘못이 없다고 대법원이 확정한 사람을 검찰이 기소해 형사법정에 세우고 징역 14년을 구형했다. 검찰이 수사력을 동원해 민사법원을 가르치겠다고 나선 셈이다.

 “외국에서는 민사 문제에 수사기관이 개입하지 않는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이것은 민사 문제여서 경찰이 다루지 않으니 돌아가라’는 내용이 만화에도 나온다(민사불개입 원칙으로 불리며 불편부당을 규정한 일본 경찰법 2조 2항에서 유추된다). 최근 검찰에서 공정거래사건은 공정거래위원회 고발이 없어도 검찰 수사가 가능하도록 바꾸자고 한다. 공정위 고발이 있어야 수사가 시작되는 현행 제도는 수사권 발동을 공정위가 결정해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이 스스로 수사 개시를 결정하면 너무나 많은 사적 분쟁에 개입할 우려가 있다.”

 혼인빙자간음죄나 간통죄는 민사 문제를 형사범죄로 만든다고 오랫동안 비판받았지만 폐지는 국회가 아닌 헌법재판소가 했다. 처벌 대상을 늘리고 법정형을 높여야 여론이 지지하니 국회가 나서지 못한 것이다. 선거를 의식하는 정치권이 처벌조항을 줄이지는 못해도 이용하는 일은 자제해야 한다고 금 의원은 말했다. “2016년에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와 모욕죄를 폐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는데 통과되지 못했다. 참 어렵다. 게다가 법도 법이지만 사회의 분위기, 문화의 문제도 있다. 일본에도 명예훼손죄가 있지만 거의 쓰이지 않는다. 우리는 고위공직자가 나서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이 대목의 고위공직자가 조 법무장관이다. 금 의원은 청문회에서 이렇게 질의했다. “민정수석 당시 악의적인 뉴스이긴 하지만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법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자리 중 하나인 민정수석이 본인에 대한 이의제기에 고소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 뉴스는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고 해명하는 방향을 보여줬으면 어떨까. 공무원들이 자기에 대한 허위 뉴스를 고소·고발하기 시작하면 인터넷에서 댓글 다는 사람들, 카톡을 주고받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이 처벌된다. 아무리 현행법상 처벌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과연 바람직한 모습인가 싶다.”

 금 의원과 조 법무장관의 검찰개혁에 대한 입장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금 의원은 윤석열 검찰이 조 후보자를 수사해 정치에 개입한 배경에 특수부를 그대로 살려둔 조 민정수석의 잘못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청문회에서 물었다. “윤석열 검찰총장 휘하의 거의 모든 요직을 특수통 검사로 채운 것은 후보자가 민정수석으로 있을 때다. 후보자가 주도적으로 만든 수사권 조정 정부안을 보면 검찰의 특수수사 기능은 거의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 검란이라고까지 부르는 이번 사태를 통해서 후보자가 검찰개혁에 대해 지금까지 견지해 온 입장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에 조 후보자는 “이론적으로나 원론적으로 금 위원 말에 크게 동의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조국 민정수석과 박상기 법무장관이 재임하는 동안 특수부는 커지기만 했다. 현재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규모가 대검 중앙수사부 시절의 3배를 넘는다. 이는 전임 정권의 국정농단을 처벌하려는 청와대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법조계 사람들 추측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도 조 법무장관은 찬성하고, 금 의원은 반대한다. 찬성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수사 경쟁을 통해 사건 덮기를 막겠다는 것이고, 반대하는 이들의 논거는 안 그래도 비대한 수사기관이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조 장관은 취임 이틀 뒤인 지난 11일 특수부 축소를 지시했다).

 지금과 같은 검찰을 개혁하려면 기소권과 수사권을 나눠야 한다고, 즉 특수부를 없애거나 줄여야 한다고 금 의원은 설명한다. 그렇지 않으면 검찰이 정치에 계속 관여한다고 본다. “인구가 한국의 2.5배인 일본에도 특수부가 전국에 3곳밖에 없고 그나마 뇌물과 전통적인 범죄만 수사한다. 공무원 직권남용이나 경영상 배임 같은 애매한 영역은 손대지 않는다. 우리는 특수부가 이렇게 크니 고등학생 자기소개서까지 검증한다. 최종적으로 혐의가 밝혀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수사권을 가지고 뛰어드는 것 자체로 정치에 영향을 준다. 수사로 논쟁이 끝나지도 않는다. 반대편은 엉터리 수사라면서 특별검사든 뭐든 다시 하라고 한다.” 금 의원은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청문회에서도 특수부를 당장 3개로 줄이라고 했다.

 특수부가 수색하고 압수하면 범죄가 나오기는 나오는데 어찌 막느냐고 물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검찰은 위에서 원하면 착착 해낸다. 재벌 범죄도 공직자 잘못도 전광석화로 도려낸다. 그러한 조직은 선출도 되지 않았으면서 반드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다른 나라는 왜 이렇게 안 하겠냐. 미국에서 하버드 로스쿨 나온 사람들 다 모아서 파헤치지도 않고, 독일에서 전국의 우수한 인재를 모아 털어대지도 않는다. 우리나라만 초대형 특수부가 필요한 유난히 썩은 사회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검찰에게 모든 것을 맡기니 다른 해결 메커니즘이 생기지 않는다.”

 “국회에서 증인으로 불러도 사람들이 안 나온다. 하지만 국회조차 별달리 비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누군가 검찰의 출석요구를 거부하면 정당에서 목소리를 높여 비판한다. 국회 스스로가 국회의 권능보다 검찰의 수사에 의미를 둔다. 이렇게 정치권이 검찰을 지나치게 이용하고 있다. 우리에게 탄핵이 있었고 촛불혁명이 있었다. 그렇게 들어선 새 정부는 과거를 청산하면서 정답뿐 아니라 과정도 새롭게 했어야 했다. 토론과 합의를 통해 정리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검찰에 너무 많이 의존했다. 적폐청산을 검찰에 맡긴 것은 잘못이다.”

 지금과 같은 검찰의 전방위 수사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금 의원은 말했다. “조직에는 조직의 논리가 있다. 검찰이 보수의 편만 들거나 진보의 편만 들지는 않는다. 조직의 생존과 영향력 확장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검찰개혁이란 말을 외국에서 이해하지 못한다. 범죄를 처벌하는 기관이 무슨 문제냐고 한다. 우리나라 검찰이 손대는 영역이 얼마나 넓은지 몰라서다. 토론과 합의라는 민주주의가 힘을 쓰지 못한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 절차에는 독립성을 상당히 부여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검찰을 부르고 검찰이 수사해서 해결한다.” 그래서 지금 패스트트랙 문제가 수사로 번진 일에도 부정적이다.

 “검찰 힘이 세진 배경은 해방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에 협력한 경찰을 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엘리트를 전국에 내려보내 시민들의 마음을 달랬다. 젊은 영감(令監)에게 친일 경찰들이 쩔쩔맸다. 6공화국을 거치면서 권력 중심부로 들어갔고 권력의 위로 올라가 이렇게 세졌다. 진보 정부가 검찰을 다루면서 잘못 판단한 것이 강한 검찰을 그대로 두고 좋은 검찰로 바꾸려고 한 것이다. 정의롭고 착한 검찰을 꿈꾸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한다. 민주주의는 신뢰가 아니라 제도에 바탕한다. 지금 특수부나 아니면 공수처가 정의로운 권력기관이 되지 못한다. 힘을 쫙 빼는 것이 방법이다. 사회 문제들을 검찰을 이용해서 해결하려 하면 검찰개혁도 민주주의도 어려워진다.”

■ 글 싣는 순서

1 현대예술을 재단하는 법정 - 남형두 연세대 로스쿨 교수

2 민간분쟁을 파헤치는 검찰 - 금태섭 국회의원

3 정치외교를 좌우하는 사법 -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9160600015&code=940301#csidx2d87d04ad8ba2f78b44b7c96a943f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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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천사와 악마의 싸움이 아니다

[특별기고] '조국사태'에 대한 두가지 교육적 성찰
2019.09.16 09:00:54
 

 

 

조국 사태가 일단락이 되었다.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우리 사회는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여진은 아마 상당히 오래갈 것이다. 그동안의 과정에 대해서 ‘안타깝고 아픈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사태가 일단락된 지금, 이번 사태의 교육적 의미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된다. 미래 세대인 학생들에게 이번 사태의 교훈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번 사태를 통해 ‘정치란 천사와 악마의 싸움’이 아니라는 점을 재인식하는 것이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쟁투(爭鬪)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여야 간, 보수 대 진보 간, 좌파와 우파 간에 쟁투, 정치경제적 자원의 배분이거나 혹은 국가적 의사결정을 둘러싼 쟁투의 과정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이 치열해지면, 대체로 우리 편은 천사가 되고 상대방은 악마가 된다. 자기 편은 ‘과잉’ 천사화하고, 반대편은 ‘과잉’ 악마화하는 관성이 작동한다. 더 넓혀서 이야기하면, 20세기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십자군 전쟁도 그랬다. 종교 등 다양한 요인이 결합되면서 정치는 천사와 악마의 싸움으로 신념화된다. 정치를 바라보는 이런 과잉인식을 우리가 극복해야 한다(여기서 나는 정치라고 할 때 ‘여의도정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여성주의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 삶 속에 정치가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광의의 생활정치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단순히 정치적·사회적 갈등이라고 치환해도 좋겠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 편이라고 해도 천사가 아닐 수 있다”, “우리 편도 70%만 옳다”, “나도 70%이상 옳을 수 없다”, “적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30%는 동지에게 적용하자”는 인식을 가지고 우리가 정치를 바라보면 좋겠다(조국 사태에 대해서 나는 상대방에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비판들의 30%는 경청하게 된다. 현 정부 집권 이후 낙마한 다른 사례들과 비교해서도 그렇고, 현재의 여당이 야당이었던 시절의 비판 기준을 적용할 때도 그러하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쟁투로서의 정치는 ‘70%의 천사 대 70%의 악마’의 싸움으로 바라봐야 한다. 아니 ‘악마적 천사 대 천사적 악마’의 싸움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나도 70% 이상 옳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치열한 쟁투의 과정에서 그래야 상대방을 100% 미워하지 않고 70%정도로 미워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 나머지 30%로 상대방과 공존할 수 있는 심리적 기반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점을 아래에서 조금 자세하게 서술해보자. 먼저 나는 사회학적 측면에서 정치를 광의로 해석하는 입장이라는 점을 말해두어야 할 것이다. 여성주의에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할 때, 협의의 정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 혹은 우리들의 사회적 삶의 전 과정에 정치가 내재되어 있다. ‘교육정치학회’라는 학회도 존재한다. 교육의 과정이 -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 정치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판단 위에서 이런 명칭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거정치, 의회정치와 같은 협의의 정치만이 아니라, 생활정치, 삶의 정치, 사회적 정치 등 광의의 정치 개념이 존재하고 나는 그런 개념을 선호한다. 
 
얼마 전 서대문구의 청소년의회에서는 교육감을 불러서 ‘교육감사’하듯이 질문을 하고 교육감이 응답하는 행사가 있었다. 감사 전에 잠깐 서울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서, 민주시민교육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거기서 나는 학생인권은 ‘안중에도 없던’ 시대를 지나, 학생을 배움과 학교생활, 개인 삶의 독립적 주체로 대우하고 교육하는 학생인권시대, 그리고 민주시민교육 시대로 이행했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그 민주시민으로서의 학생, 나의 표현을 빌린다면 ‘교복입은 시민’이 세계(민주)시민으로 되어야 한다는 점, 나아가 ‘다원성의 사회’에서 다양한 차이를 차별로 접근하지 않고 존중하는 ‘다원적 민주주의’ 시대의 배려와 존중, 공존의 시민미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우리 사회는 87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권위주의시대에서 선거민주주의시대로 이행한 이후 30여년 간, 과거의 권위주의 유산을 극복하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질적 민주주의로, 국가 수준의 민주주의를 지자체 수준 및 생활세계 수준의 민주주의로 심화시키기 위한 쟁투의 과정을 거쳐 왔다. 이 과정에서 모든 국민들은 자신의 권리와 이해가 부당하게 침해받으면 안 된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한 부당한 침해상황에서는 바로 머리띠를 두르고 투쟁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이런 ‘행동하는 시민’과  ‘깨어있는 시민’의 적극성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휘되어야 하고, 또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투쟁이 아니라, 우리가 일궈놓은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어떻게 다원성이 인정되는 공존형 정치의 기반을 확대할 것인가하는 과제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 조국 법무부장관이 후보자 시절 기자회견을 열고 각종 논란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민주주의는 ‘투쟁의 정치’와 ‘공존의 정치’로 구성된다 
 
민주주의에는 2개의 정치가 내포되어 있다. 투쟁의 정치와 공존의 정치다.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쟁의 정치가 필요하다. 87년 이후 지난 30년 동안 한국민주주의는 투쟁의 정치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역동적인 민주화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30% 공존의 정치를 확대해가야 한다. 물론 정치는 쟁투의 과정이기 때문에 투쟁의 정치가 부재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투쟁의 정치와 공존의 정치를 어떻게 배합할 것인지가 문제다. 나는 투쟁의 정치 대 공존의 정치가 ‘7대 3’정도로 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에게도 이런 과제가 주어졌으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공존의 정치를 실현해내는 것 자체도 정치적 역량이다). 적폐청산의 강렬한 국민적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섣부르게 공존의 정치를 시도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또한 보수가 과거의 프레임을 충분히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고, 때로는 촛불시민혁명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도 표출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어차피 승자를 정하는 쟁투는 전개된다 
 
종종 이런 예를 든다. 어차피 정치라는 것이 다수의 지지를 받는 승자를 결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쟁투는 불가피하다. 쟁투가 무찌르기 식이나 사생결단식이 아니더라도 승자는 결정된다. 예컨대 87년 대선을 돌이켜 보자.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각각 여의도 광장에 100만명 이상을 동원하기 위한 쟁투를 펼쳤다. 사실 100만명 이상을 동원하는 정치는 얼마나 많은 정치자금이 들었겠는가. 그런데 그 이후 TV토론 등이 활성화되면서, 그리고 정치적 쟁투의 형식의 변화하면서, 지금은 여의도 광장에 100만명을 동원하는 경쟁을 하지 않아도 승자를 결정하는 과정이 진행된다(그러면 지금의 정치는 87년 보다 덜 치열한가?).
 
이런 견지에서 천사 대 악마의 싸움으로 정치를 규정하지 않아도 선거민주주의의 특성 상 쟁투가 있고 쟁투의 결과 승자를 결정하는 치열한 싸움이 진행된다. 단지 그 방식을 현대화해야 하고 더욱 합리화해가야 한다. 투쟁의 정치와 공존의 정치를 배합해 가야 한다. 
 
쟁투의 상대방을 존재론적으로 긍정하는 사고 
 
이를 위해서는 쟁투의 상대방을 존재론적으로 수긍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조국 사태'에서 내가 주목하는 점이 이것이다. 쟁투의 과정에서 우리는 100% 옳은 존재로, 그리고 우리 동지는 천사로, 우리의 대표적인 인사는 100% 도덕적 존재로 상정하고 쟁투한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국은 사법개혁의 상징적인 존재이고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앙가주망’이 아니라 사회개혁을 위해 희생적으로 헌신해온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참여연대의 사법개혁센터의 초기 주역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헌신성을 가까이 지켜볼 기회도 있었다. 당시 초기 시민운동의 과정에서 이른바 일류대학의 교수들이 자기 시간과 돈을 내서 참여하는 것이 흔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헌신적으로 초기 사법개혁운동의 중심인물로서 활동했다. 
 
조국이 진보적 사법개혁의 아이콘이지만, 그를 100% 도덕적 존재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번 사태에서도 그것이 잘 드러났다. 그렇지만 100% 완전한 존재로 법무부 장관직을 수행할 필요는 없다. 사실 9월 6일 치열했던 조국 청문회에서 ‘목소리를 높힌’ 의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장제원 의원의 아들이 음주운전, 운전자 바꿔치기, 돈으로 합의 시도 등을 동반하는 사건에 휘말린 걸 청문회 다음 날 목도하였다. 조국 장관 딸의 논문에서 '제1저자'로 등재한 것에 분노하여 촛불을 든 서울대 학생이 역시 제1 저자로 등재된 것이 드러났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우리는 조금은 정치적·사회적 쟁투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에 여유가 생기면 좋겠다.  
 
박정희는 ‘공3과7’ 혹은 ‘공7과3’? 
 
민주화 세대가 ‘악마화’한 박정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 박정희시대에 대해 ‘공7 과3’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공(功)을 7로, 과(過)를 3으로 평가하자는 말이다. 나는 이에 반대한다. 굳이 한다면, 박정희 시대의 정책에 대해 공(功)을 3으로, 과(過)를 7로 평가하고 싶다. 7:3이라는 언어 자체가 한 시대를 평가하는데 7:3이라는 비율적 표현 자체가 부적절하겠지만, 그런 공존의 기반을 갖자는 취지이다. 나는 자사고 폐지를 주도하면서, 이것이 ‘제2의 고교평준화’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박정희 시대였던 70년대 고교평준화를 시도했다면, 지금 하는 자사고 폐지 정책은 그런 정신을 현대적으로 구현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그가 취했던 정책 중에서 그린벨트 정책, 의료보험 제도 도입,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시기에 취했던) 한글 사용 확대 정책에 대해 계승하는 입장을 갖는다. 
 
끝없는 악순환을 넘어 일반적 규칙을 만들면 
 
우리 편에 대한 과잉천사화와 상대편에 대한 과잉악마화는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그런 점에서, 공존의 정치라는 견지에서, 일반적 규칙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국회선진화법’ 같은 것도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현재의 야당이 여당이었을 때 현 여당이 된 당시의 야당도 동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 역사가 되어버렸는데, 박근혜정부는 직권 남용, 공적 권력의 사적 이해를 위한 활용, 사인에 의한 공적 권력의 무력화, 정경유착 등으로 탄핵되었다. 탄핵의 사유들의 향후 운용에 대해서도, 일반적 규칙을 만드는 작업의 필요성을 느낀다. 즉 박근혜 정부의 그러한 극단화된 적폐적 행태를 단죄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과 동시에, 그 극단성에 내포된 행위 중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 탄핵 이후의 높아진 국민들의 눈높이를 감안해서 - 새로운 규칙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야당은 ‘그것 보아라’하면서 박근혜의 탄핵 이전의 행태 모두를 정당화하는 식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여당은 이를 도외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실 ‘직권남용’이라는 것을 광의로 적용하기로 하면, 정권 교체 이후 선거에 나타난 민심을 반영하는 방향에서의 정부의 인적 구성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 미국처럼 정권 교체 이후의 고위직의 교체 범위를 정의하는 식의 여야간의 합의된 규칙을 만들 수도 있다. 정권 교체 이후 자신의 정치적 지향에 맞는 인적 구성을 만들려는 시도는 언제든지 상대방에 의해서 직권남용이 되고, 그것이 정권의 주체가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악순환을 방지해야 한다.  
 
또한, 조국이 페이스북 상에서 던진 강렬한 메시지는 이번 사태에서는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한일무역갈등 국면에서의 페이스북 글에서도 큰 기조는 동의하지만 미묘한 국가 간 갈등의 복잡성을 과도하게 단순화 한 점에 대해서는 일부 우려를 가지고 있다. 또한 조국을 둘러싼 폴리페서 논란도 그러하다. 나는 천사와 악마의 대립이 아니라는 전제 위에서, 교수의 현실 참여에 대한 여야, 보수와 진보가 합의하는 ‘일반적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수의 어떤 참여가 폴리페서이고 어떤 참여는 앙가주망이 되는가. 사실 폴리페서와 앙가주망을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서울 법대 정종섭(자유한국당 의원)의 박근혜 정부 시절 장관직 수락과 조국의 장관직 참여는 동일한 것이다. 단지 맥락과 참여의 정치적 성격이 다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 
나에 대한 ‘내로남불’ 비판을 생각하면서
 
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자사고-외고 폐지를 주장하면서 자녀들이 외고에 다녔다며 '내로남불'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 나는 한편에서는 여러 가지 마음 속으로 항변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주장을 상대방이 할 수 있다고 본다. 인정한다. 바로 그러한 도덕적 결함을 갖는 존재로서의 조희연 교육감이 자사고 폐지의 선봉에 서 있다고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2014년 선거 과정에서 내 아들이 쓴 편지와 고승덕 후보 딸이 쓴 편지가 대비되어 선거의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나는 사실 이 점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원래 내 아들이 나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쓴 편지를 선거본부 실무자들이 가지고 왔을 때, 나는 ‘낯 뜨거워서’ 안 냈으면 내지 말라고 했다. 내가 반대해서, 2-3일간 발표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거본부의 강력한 주장을 존중해서 발표를 허용했고 그것이 어떤 점에서는 고승덕 후보 딸의 편지와 대비되는 반응이 나왔던 것 같다. 선거 이후에 나는 여러 차례 이런 이야기를 공식적·비공식적으로 했다. 고승덕 후보에게도 했다. “사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는가. 선거국면이 치열한 쟁투의 현장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저는 ‘도덕적 아버지’로 과잉 표상되고, 고 후보는 부덕한 아버지로 과잉표상되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대비해서 생각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 
현대 철학에서의 다수자와 소수자 
 
내가 철학에 대해 과문하지만, 이런 인식과 사고가 근대 ‘이후’ 철학의 핵심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철학과 정치경제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양분법적 사고 양식이 존재했다. 예컨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자본가와 노동자, 억압 민족과 피억압 민족의 양분법적 구분 말이다. 이 때 후자는 인간과 사회 해방의 천사로서 인식되고, 상대방은 악마로 인식된다. 20세기의 1차, 2차 전쟁을 포함하여, 에릭 홈스봄이 말한 ‘극단의 시대’가 20세기에 펼쳐진 것도 이런 사고 위에서였다. 그러나 이 양분법적 인식의 강을 횡단하는 것이 근대 이후 철학의 한 특징이다. 영화 <색계(色戒)>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민족해방을 위해 성을 도구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내재되어 있다. 사실 자본가와 노동자는 하나의 순수일체적 존재로 단일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 단일범주로의 인식은 역으로 피억압민족 내의 모순과 균열을 숨기는 것이 된다. 다수자와 소수자가 있다고 할 때, 소수자 역시 자신 속에 다수자적 속성이 있다. 남성과 여성, 여성과 레즈비언의 관계가 다를 수 있다. 현실에서 악마와 천사는 없다. 악마적 천사와 천사적 악마가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시각을 제기하는 이유가 ‘민나 도로보데스(모두가 도둑놈. みんな  どろぼうです)’ 식의 냉소주의를 부추기거나, 근대 이후 철학이 갖는 상대주의로 가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주의를 취하려 해도 정치의 영역에서는 ‘적과 동지’의 구분은 너무도 확연하게 된다(그래서 칼 쉬미트는 정치를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기술’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단지 적과 동지의 싸움이 ‘무찌르기’ 식의 극단적 절멸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최소한의 공존의 바탕 위에서 싸움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조국 사태에서 ‘계급’의 문제를 본다? 
 
둘째로, 이렇게 다원적 시선을 갖는다고 할 때, 그냥 공존하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조국 사태'의 고민 지점은 여기서 새롭게 시작된다. 조국은 분명히 87년 이후 '민주개혁 대 반개혁'의 입장에서 보면, 민주개혁의 선도적이고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조국 사태'를 통해, 부모의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동원할 수 있는 교육 자원의 격차, 교육의 영역을 통해서 드러나는 불평등의 문제가 투명하게 드러났다(서민들의 자녀와 조국의 자녀들이 어떻게 다른 ’생애의 기회‘를 갖는지도 드러났다). 명문대생들은 명문대생대로 불공정을 성토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피땀으로 이룬 성취를 조국과 같은 기득권의 자녀들이 부모의 인적·물적 네트워크라는 지름길을 이용해 손상했다고 주장한다. 한편에서는 이런 비판마저 배부른 소리라고 지적한다. ‘구의역 김군’과 함께 일했던 동료의 발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와 엘리트 인생 사이에 어찌 출발선이 같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여기서, 향후 쟁투의 내용을 새롭게 재정식화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일부에서는 이를 ‘계급적 문제’로 보고자 했다. 사실, 조국은 대표적인 ‘강남좌파’라고 불리웠는데, 이때의 강남성(性) 혹은 강남적 성격은 현존하는 질서 내에서도 일정한 ‘혜택받은 집단’이나 ‘기득권적 지위’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어떤 의미에서 조국의 강남성(性)은 그가 서울대 교수라는 점과 '사학 오너'의 자녀라는 점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강북이나 지방의 좌파와 달리 기존의 질서 내에서 동원할 수 있는 네트워크 역량이 현저하게 다르고 다양한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 상의 일’들에 연루될 가능성이나, 현재의 달라진 공직자의 기준에서 쟁점이 될 수 있는 과거의 관행적 일들에 연루될 가능성도 클 것이라고 판단된다. 강남 좌파는 그런 점에서 그러한 계급적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만큼 그가 참여한 개혁적 운동의 저변이 넓어지게 했다는 점에서, 도덕적으로 많은 국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었다. 그러나 '조국 사태'를 통해서 드러난 불평등 접근권의 문제를 단지 ‘조국 특수'적 문제로가 아니라 일반적인 문제로 포착하고 다음 단계의 쟁투의 의제로 삼아야 한다. 개혁주의자로 살아온 ‘강남좌파’ 위에, 더욱 심대한 불평등 접근권의 격차가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새로운 사회와 정치(새로운 정치적·사회적 쟁투라 해도 좋다)를 생각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조국 너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만들어낸 ‘민주사회’에서 민주화를 주도했던 386세대는 -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 우리 사회의 주류, 특별히 정치적 주류로 진입하였다. 이 점은 유럽의 68혁명세대도 마찬가지이며, 미국의 60-70년대 저항세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87년 이후 체제, 97년 체제에 의해 이른바 신자유주의적으로 구조화된 새로운 체제 내에서 주류가 된 셈이다. 
 
조국을 통해서 우리가 본 것은 강남좌파의 두 측면이다. ‘강남이면서도 좌파’인 그의 인간적 헌신과 87년 체제 하에서의 개혁성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87년 체제 하에서 강남적 존재가 갖는 불평등한 접근권의 모습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인식하면서 우리는 조국을 넘어가야 한다. 조국에서 느끼는 실망으로 87년 6월 민주항쟁과 촛불시민혁명 이전으로 돌아가려 해서는 안 된다. 강남좌파의 강남성에서 발생하는 특권적 모습을 도덕적 비판하면서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시도와는 달리 우리는 미래의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새로운 미래를 바라봄에 있어 ‘세대갈등’으로 치환할 필요는 없다
 
또한 나는 이런 미래를 개척함에 있어 ‘세대갈등’으로 가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이번 조국 사태에서 중도층이나 젊은 세대가 좌절과 분노에 공감한다. 나는 젊은 세대가 이야기하는 ‘기회의 공정성’을 넘어서서, ‘결과의 평등성’까지 실현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386세대나 586세대 전체와 젊은 세대의 갈등으로 치환하는 것은 올바른 시선이 아니다. 민주개혁의 선도에 섰던 386세대, 아니 586세대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함께 가야 한다. 386세대나 586세대를 정치 영역에서의 국회의원이나 주류화된 중상층만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현재에도 다양한 사회영역에서 젊은 세대가 분노하는 불평등과 격차,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해서 싸우고 있는 사람 중에는 386세대 혹은 586세대가 다수 존재한다. 이런 연대 위에서, 386이나 586의 세대적 한계까지도 당연히 쟁점화되어야 한다. 
 
또한 그들 중의 강남좌파가 된 존재들의 강남성에 의해서 주어지는 구조적 접근권의 격차까지도 개혁하는 새로운 쟁투로 가야 한다. 예컨대 이번 - 지금은 일정하게 개혁되고 한 단계 높은 개선을 목적에 둔 - 과거의 ‘학생부 종합전형’ 제도에서의 계급계층적 접근권의 차이에 분노하는 것을 넘어서서, 문재인 대통령도 지적했지만 서열화된 고교 체제와 대학 입시 개혁으로도 가야 한다. 당연히 사회경제적 개혁의 더 높은 단계를 상상해야 한다. 청년, 일자리, 여성, 다문화, 비정규직 등 386이냐 586이냐를 넘어서 험악해진 우리 사회의 균열을 치유하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주지하다시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화와 소득 및 자산의 양극화는 무한 입시경쟁의 불평등의 토대가 된다. 그래서 당연히 사회경제적 개혁은 지속되어야 한다. 대입과 고입을 준비하는 교육 현장은 사회경제적 격차를 교육 격차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약육강식 무한경쟁의 장(場)이다. 따라서 당연히 제도 내에서의 도덕성에 분노함과 동시에, 서열화된 고교체제과 대학체제, 그 관문으로서의 입시제도를 한 단계 높은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변화시켜 가야 한다. 그것이 - '조국 사태'를 보면서 '조국 너머'의 -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새로운 쟁투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당연히 386세대 그리고 586세대는 바로 이러한 변화된 구조적 현실을 성찰적으로 대면해야 한다. 이미 주류화된 존재로 그 구조 내에서 비루하게 자신의 자식의 문제로 고군분투하지만 ‘태어난 집은 달라도 배우는 교육은 같은 교육제도’를 만들기 위해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직시해야 한다. 강남좌파는 그 강남성의 구조를 넘어서기 위하여 젊은 세대의 분노와 만나야 한다. 교육에서는 강남성이 특권으로 작용하지 않는 제도개혁, 더 나아가 더 큰 틀에서의 학벌-학력 차별을 타파하기 위한 구조개혁에 나서야 한다. 젊은세대를 노동시장에의 진입 조차 못하게 하는 현재의 ‘의도하지 않은’ 배제의 구조를 극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에서의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더욱 대의될 수 있는 구조를 만나야 한다(현재 계류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과 그것이 미래세대에게 대의 공간을 열어주는 식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을 포함하여). 386세대와 586세대는 자신이 투쟁했던 체제에 스스로가 주류로 진입하는 동안 그 구조는 여전한 불평등구조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직시하고 새로운 개혁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예컨대 대학등록금을 신입생에게 적용하던 과거의 대학등록금 인상에 대한 대학당국의 정책을 생각해보자. 최초의 민주노조를 가능하게 한 386세대는 그들이 비지니스 영역에서 성공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지만, 그들이 97년 체제의 도전 속에서 민주노조의 조직력으로 자신들의 이해를 힘겹게 방어하는 사이, 기업주들은 신규진입자에게 새로운 불이익 조건을 강제하는 식으로 대처하였다. 그 결과 이중노동시장이 아니라 아예 정규직과 비정규직, 내부노동시장과 외부노동시장의 격차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글을 마치면서, '조국 사태'는 이제 법무장관 임명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이행하고 있다. 이후 상황은 나는 지켜보는 입장이다. 이 글은 단지 임명 이전까지의 사태 전개를 보면서 이 '조국 사태'를 교육적으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우리 학생들이 토론할 때 내가 참여자라면 어떻게 토론할 것인가를 고민해온 작은 생각들이다. 한달 동안 '조국 사태'에 매달려온 많은 분들의 사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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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턴 내쫓고 새로운 계산법 검토하는 트럼프

[개벽예감 364] 볼턴 내쫓고 새로운 계산법 검토하는 트럼프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9/16 [07:06]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미국의 협상청원 수락한 조선의 특별담화

2. 새로운 대안 가져오라는 조선의 요구

3. 조미실무협상에 포괄적 의제 오른다

4. 초대형 방사포 시험사격에 담긴 뜻

5. 트럼프, 조미협상 가로막은 큰 걸림돌 치웠다 

 

 

1. 미국의 협상청원 수락한 조선의 특별담화

 

“나는 미국에서 대조선협상을 주도하는 고위관계자들이 최근 조미실무협상개최에 준비되여 있다고 거듭 공언한 데 대하여 류의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 동지께서는 지난 4월 력사적인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지금의 계산법을 접고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필요하며 올해 말까지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볼 것이라는 립장을 천명하시였다. 나는 그 사이 미국이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계산법을 찾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졌으리라고 본다. 우리는 9월 하순경 합의되는 시간과 장소에서 미국측과 마주앉아 지금까지 우리가 론의해온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토의할 용의가 있다. 나는 미국측이 조미 쌍방의 리해관계에 다같이 부응하며 우리에게 접수가능한 계산법에 기초한 대안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고 믿고 싶다. 만일 미국측이 어렵게 열리게 되는 조미실무협상에서 새로운 계산법과 인연이 없는 낡은 각본을 또다시 만지작거린다면 조미 사이의 거래는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될 수도 있다.”

 

위의 인용문은 2019년 9월 9일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발표한 담화의 전문이다. 여섯 문장으로 이루어진 짤막한 담화이지만, 거기에 담긴 정치적 의미는 그 담화를 특별담화라고 불러야 할 만큼 매우 중대하다. 조미실무협상 담당자인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조선에서 건국 71주년을 맞이한 날에 조미협상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은 중대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특별담화에서 “나는 미국에서 대조선협상을 주도하는 고위관계자들이 최근 조미실무협상개최에 준비되여 있다고 거듭 공언한 데 대하여 류의하였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 고위당국자들이 조미실무협상을 개최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공언한 것은 무슨 뜻인가? 

 

그 동안 미국 국무부는 조미실무협상이 속히 개최되기를 바라는 청원을 여러 차례 조선 외무성에 보냈다. 청원련락을 비공개로 했기 때문에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고, 따라서 몇 차례나 청원련락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보낸 것이 분명하다. 전형적인 청원외교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9년 2월 28일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리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현지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그 때로부터 약 반년이 지나 조선에서 건국 71주년을 맞이한 2019년 9월 9일 최선희 제1부상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특별담화에서 그는 2019년 9월 하순경 합의되는 시간과 장소에서 조미실무협상을 개최하여 포괄적인 의제를 토의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이것은 미국 국무부가 조선 외무성으로부터 무시와 질책을 받으면서도 거듭 청원해온 조미실무협상을 개최할 수 있다는 조선의 청원수락이다. 특별담화에서 언급한 포괄적인 의제는 미국이 조선에게 제시할 새로운 비핵화방안, 그리고 조선이 미국에게 제시할 새로운 평화실현방안을 모두 포괄하는 의제라는 뜻이다.     

 

굳이 청원외교라는 말을 쓰는 까닭이 있다. 만일 미국이 대등한 조건에서 조선에게 협상을 개최하자고 요구했다면, 협상제의라는 말을 써야 하지만, 부등한 조건에서 협상을 개최하자고 요청했으니 협상제의가 아니라 협상청원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무릇 청원이란 낮은 지위에 있는 행위자가 높은 지위에 있는 상대자에게 자기 소원을 아뢰는 행동이다. 오늘날 조미관계에서 조선은 미국으로부터 거듭되는 청원을 받을 만큼 우세한 지위에 있고, 그와는 반대로 미국은 조선에게 청원을 거듭해야 할 만큼 열세한 지위에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 외무성이 미국 국무부의 거듭되는 청원을 받고서도 아무런 응답을 주지 않고 무시해버렸다는 사실이다. 거만하고 도도하기로 소문난 미국이건만, 조선으로부터 그처럼 거듭 무시를 당하면서도 반발하지 못하고 주눅이 들어 있다. 비공개 청원을 거듭하였으나 조선 외무성의 응답을 받지 못해 고심하던 미국 국무부는 공개 청원으로 돌아섰다. 최근 미국 국무부가 조선 외무성에게 신속한 협상재개를 공개적으로 청원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2019년 8월 27일 마익 팜페오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 텔레비전방송과 대담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이 그의 팀을 현장에 보내 나의 팀과 함께 일하는 것으로 미국인들을 위해 훌륭하고 확실한 결과를 이끌어내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팜페오 국무장관이 조선에게 신속한 협상재개를 공개적으로 청원하기 나흘 전인 2019년 8월 23일 이례적인 일이 생겼다. 리용호 외무상이 담화를 통해 팜페오 국무장관을 심하게 질책한 것이다. 리용호 외무상이 그를 질책한 까닭은, 2019년 8월 21일 팜페오 국무장관이 미국 언론매체와 대담하는 중에 “만일 북조선이 비핵화를 하지 않으면 미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재를 유지하면서 비핵화가 옳은 길임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들겠다”고 시건방진 말투로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그런 발언을 들은 리용호 외무상은 8월 23일 담화를 발표하여 팜페오 국무장관을 심하게 질책했던 것이다. 질책담화에서 리용호 외무상은 “족제비도 낯짝이 있다는데 어떻게 그가 이런 망발을 함부로 뇌까리는지 정말 뻔뻔스럽기 짝이 없고, 이런 사람과 마주앉아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지 실망감만 더해줄 뿐”이라고 하면서, 그는 “미국 외교의 독초”이고, “조미협상의 앞길에 어두운 그늘만 던지는 훼방군”이라고 책망했다. 

 

그런데 팜페오 국무장관은 그런 질책을 받고 기분이 상했으면서도 내색을 하지 못하고, 나흘 뒤에 조미협상이 하루빨리 재개되기 바란다는 청원의사를 언론대담을 통해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조선에게 조속한 협상재개를 공개적으로 또는 비공개적으로 청원해온 미국 국무부의 다급한 사정은 2019년 9월 6일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조선특별대표의 연설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는 미시건대학에서 연설하면서 “현재 조미 쌍방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치는 협상탁에 마주 앉아 타협점을 찾고 협상의 운률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즉각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 북조선도 협상의 장애물을 찾는 행동을 그만두고 대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에게 조속한 협상재개를 청원하다가 질책까지 받고서도 내색하지 못하는 미국의 쪼그라든 몰골, 그리고 그들의 거듭되는 청원을 무시할 뿐 아니라 질책까지 주저하지 않는 조선의 위풍당당한 태도, 바로 이것이 오늘 조미관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2. 새로운 대안 가져오라는 조선의 요구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특별담화에서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 동지께서는 지난 4월 력사적인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지금의 계산법을 접고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필요하며 올해 말까지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볼 것이라는 립장을 천명하시였다”고 말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4월 13일에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2019년 2월 27일과 28일에 진행된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중단된 조미협상을 재개할 수 있는 선결조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조미 사이에 뿌리 깊은 적대감이 존재하고 있는 조건에서 6.12조미공동성명을 리행해 나가자면 쌍방이 서로의 일방적인 요구조건들을 내려놓고 각자의 리해관계에 부합되는 건설적인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선 미국이 지금의 계산법을 접고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중략) 어쨌든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볼 것이지만 지난번처럼 좋은 기회를 다시 얻기는 분명 힘들 것입니다. 앞으로 조미 쌍방의 리해관계에 다같이 부응하고 서로에게 접수가능한 공정한 내용이 지면에 씌여져야 나는 주저 없이 그 합의문에 수표할 것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미국이 어떤 자세에서 어떤 계산법을 가지고 나오는가에 달려있습니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하였으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면적으로 거부한 미국의 계산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조선에게 일방적인 핵포기를 요구하는 이른바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이며, 조선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의 강도적인 요구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 직전에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작성하여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출한 사람이 바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다. 

 

나는 2019년 4월 1일 <자주시보>에 실린 ‘핵협상 결렬시킨 트럼프, 텔리미트리 점검하는 전략군’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2019년 3월 29일 영국 통신사 <로이터즈> 소속 백악관 특파원이 직접 읽어보았다는 백악관 외교문서, 다시 말해서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전한 외교문서에 관한 보도내용을 검토하면서, 그 외교문서에 담긴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8년 6월 7일 마익 팜페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백악관 장미원에서 기자회견을 시작하기 직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의견충돌로 사이가 벌어졌다. 볼턴은 적대국들과 협상하는 외교는 시간랑비일 뿐이며, 제재압박과 정권교체와 무력사용으로 적대국들을 굴복시키는 폭압이 효과적이라고 믿는 극우전쟁광이다. 뭐가 뭔지 모르고 분별없이 날뛰는 그런 극우전쟁광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안에서 다른 각료들로부터 소외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우익세력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려는 생각에서 볼턴을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했지만, 그의 극우광기가 너무 심하여 그의 발언과 행동을 제지해야 하였고, 그러는 과정에 그와 수없이 의견충돌을 벌였으며, 종당에는 그를 백악관에서 쫓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결렬시키고, 조미협상을 지난 7개월 동안 정체시킨 결정적인 요인으로 되었던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은 볼턴이 입안하여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출한 것이다.     

 

(1) 핵동결 - 조선은 현존하는 모든 핵활동을 중단하고, 새로운 핵시설 건설도 중단한다.

(2) 핵신고 - 조선은 자기의 핵프로그램에 관한 포괄적 선언을 한다.  

(3) 핵반출 - 조선은 핵무기와 핵물질을 미국으로 반출한다.

(4) 핵폐기 - 조선은 핵기반시설, 탄도미사일, 미사일발사차량, 관련시설들, 생화학무기프로그램을 해체한다.

(5) 핵사찰 - 조선은 미국인 전문가들과 국제전문가들로 구성된 사찰단에게 핵폐기현장에 대한 완전한 접근을 허용한다.

(6) 핵기술집단해체 - 조선은 모든 핵과학자들과 핵기술자들을 비군사직종으로 전직시킨다.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특별담화에서 “나는 그 사이 미국이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계산법을 찾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졌으리라고 본다”고 하면서, “미국측이 조미쌍방의 리해관계에 다같이 부응하며 우리에게 접수가능한 계산법에 기초한 대안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고 믿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제시했던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철회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받아줄 수 있는 계산법에 기초한 대안을 가지고 조미실무협상에 나오라는 뜻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언급한 미국의 새로운 계산법, 그리고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특별담화에서 언급한 미국의 새로운 계산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3. 조미실무협상에 포괄적 의제 오른다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특별담화에서 “우리는 9월 하순경 합의되는 시간과 장소에서 미국측과 마주앉아 지금까지 우리가 론의해온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미국 국무부가 조선 외무성으로부터 무시와 질책을 받으면서도 거듭 청원해온 조미실무협상을 오는 9월 하순에 개최할 수 있다는 조선의 청원수락이다. 조선의 청원수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있다. 

 

위에 인용된 문장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조선은 조미실무협상이 열리면 포괄적인 의제를 토의하려는 것이다. 포괄적인 의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이 조선에게 제시할 비핵화방안만 토의하는 게 아니라, 조선이 미국에게 제시할 평화실현방안도 토의한다는 뜻이다. 조선이 미국에게 제시할 평화실현방안은 항구적이고 공고한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방안이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평화협정, 불가침선언, 보장협약의 3중구조 위에 수립하려는 조선의 평화실현방안에 대한 설명은 지면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룬다. 

 

조선이 미국에게 조미실무협상 개최시점으로 제시한 2019년 9월 하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에게 제시한 시한(2019년 12월 말)까지 석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다. 이것은 조선이 2019년이 가기 전에, 다시 말해서 앞으로 석 달 안에 조미협상을 타결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정해놓은 대미협상시간표에 따라 앞으로 3개월 동안 조미관계와 한반도 정세에서 변화의 급류가 일어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2019년 9월 12일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은 올해 언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려는가?”고 물은 백악관 출입기자의 질문을 받고 “올해 어느 때 그렇게 된다. 틀림없이 그들은 만나기를 원한다. 그들은 만나고 싶어 한다. 나는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지켜보자. 나는 무엇인가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다시 만나기를 바라면서도, 백악관 출입기자들 앞에서는 “그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엉뚱하게 답변하였다. 이 엉뚱한 답변은 그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즉석에서 임기응변으로 꾸며낸 것이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9년 9월 12일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정원에서 백악관 출입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장면이다. 그 자리에서 어느 기자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당신은 올해 언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려는가?"고 물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면서 올해 안에 조미정상회담이 개최될 수 있다는 기대를 표명하였다. 2019년 4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과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가지고 조미정상회담을 하자고 제의하면 올해 안에 한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고 밝혔으므로, 트럼프 대통령은 그 조건에 맞춰 올해 안에 반드시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임기응변으로 꾸며낸 생뚱맞은 답변이지만, 거기에는 올해 안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다시 만나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려는 그의 생각이 녹아있다. 지난 4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과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가지고 조미정상회담을 하자고 제의하면, 올해 안에 한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고 밝힌 바 있으므로, 트럼프 대통령은 그 조건에 맞춰 올해 안에 반드시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해야 하는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4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은 조건에서 제3차 조미수뇌회담을 하자고 한다면 우리로서도 한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습니다”고 말했다. “한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는 말은 올해 안에 열리는 조미정상회담이 비핵화문제를 해결할 마지막 기회로 될 것이라는 뜻이다. 

 

조선과 미국은 오는 9월 하순에 열릴 조미실무협상에 각자 외교력량을 집중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2019년 9월 4일 유엔주재조선대표부는 오는 9월 하순 뉴욕에서 진행되는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려던 리용호 외무상이 “다른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발표하였다. 2019년 7월 10일 유엔사무국이 발표한 유엔총회 연설자 명단에는 조선의 상급(장관급) 인사가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기로 되었었는데, 지난 8월 30일에 수정된 연설자 명단에는 상급이 대사급으로 바뀌었다. 리용호 외무상은 오는 9월 하순에 열릴 조미실무협상에 관심과 노력을 집중해야 하므로,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려던 계획을 그만둔 것이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오는 9월 하순에 열릴 조미실무협상에 외교력량을 집중해야 한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전격 해임하고, 새로운 인물을 물색하는 것은 그런 상황에 대비하는 조치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을 전격 해임한 조치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4. 초대형 방사포 시험사격에 담긴 뜻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특별담화에서 “만일 미국측이 어렵게 열리게 되는 조미실무협상에서 새로운 계산법과 인연이 없는 낡은 각본을 또다시 만지작거린다면 조미 사이의 거래는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앞으로 열리게 될 조미실무협상에서 미국이 조선이 받아줄 수 있는 계산법에 기초한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분별없이 리비아식 비핵화 요구를 또 다시 꺼내놓으면, 조미협상은 그것으로 완전히 파탄날 것이라고 미리 경고한 것이다. 

 

2019년 9월 9일 최선희 제1부상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음을 알려주는 속보가 <연합뉴스> 웹싸이트에 실린 시각은 오후 11시 39분이었다. 속보가 실린 시점을 보면, 최선희 제1부상은 오후 11시 30분경에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평양시간으로 오후 11시 30분을 워싱턴 시간으로 환산하면, 같은 날 오전 10시 30분이다. 정오가 가까운 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안보보좌관들이 영어로 번역한 최선희 제1부상의 특별담화를 받아보았을 것이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NBC>의 2019년 9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9월 9일 오후 백악관 집무실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고 한다. 미국 통신사 <블룸벅 뉴스>는 2019년 9월 11일 보도기사에서 지난 9월 9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소집된 긴급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대이란제재를 완화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가 제재완화를 반대하는 볼턴 국가안보보좌관과 격론을 벌였다고 하였지만, 긴급회의에서는 대이란제재를 완화하는 문제와 함께 최선희 제1부상이 특별담화에서 언급한 조미실무협상개최문제도 논의되었다. 

 

긴급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조미실무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철회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기하였고,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강하게 반대하였다. 대이란제재완화문제와 조미실무협상개최문제를 놓고 두 사람은 격론을 벌였다. 

 

미국 언론매체들에 실린 동영상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오후 3시 10분경 백악관 집무실을 나선 모습이 나타난다. 오후 7시에 노스캐롤라이나주 페이엇빌에서 열리는 공화당 대통령선거유세에 참석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으므로, 그는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공군기지에서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노스캐롤라이나로 가기 위해 긴급회의를 마치고 백악관 정원으로 나갔던 것이다. 

 

백악관 정원에서 대통령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백악관 출입기자들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들 가운데는 최선희 제1부상의 담화발표에 관한 질문도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북조선에서 방금 나온 성명(최선희 제1부상의 담화를 뜻함-옮긴이)을 보았다. 그것(최선희 제1부상의 담화를 뜻함-옮긴이)은 흥미로운 것이다. 나는 김 위원장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겠지만, 언제나 나는 만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하곤 한다. 나쁜 것이 아니다.”

 

위에 인용된 트럼프 대통령의 즉석답변을 읽어보면, 최선희 제1부상의 특별담화를 읽고 조미협상개최문제에 기대를 건 그가 백악관 집무실에서 소집한 긴급회의에서 조미실무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철회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미실무협상이 개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그리고 자기의 의견을 반대한 볼턴에게서 느낀 불편한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페이엇빌을 향해 이륙하는 대통령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페이엇빌 선거유세장으로 가던 트럼프 대통령에게 뜻밖의 긴급보고가 전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유세장에 도착하기 약 1시간 전인 오후 5시 53분(평양시간으로는 9월 10일 오전 6시 53분) 조선이 초대형 방사포 시험사격을 또 다시 진행하였다는 긴급보고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리둥절하였다. 그의 천박한 정치적 식견으로는 조선이 왜 조미실무협상을 개최하자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자마자 위협적인 시험사격을 단행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9월 10일 이른 아침 평안남도 개천비행장 활주로에 임시로 설치된 지휘소에서 제2차 초대형 방사포 시험사격을 지도하는 장면이다.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지휘소 밖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초대형 방사포 시험사격은 미국의 협상청원을 수락한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의 특별담화가 발표된 때로부터 약 7시간 30분 뒤에 진행되었다. 조선이 미국의 협상청원을 수락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으므로, 시험사격을 자제하거나 연기할 수 있었지만, 조선은 그런 통념을 깨고 미국의 협상청원을 수락한 특별담화를 발표한 때로부터 7시간 30분만에 시험사격을 단행하였다. 특별담화발표와 시험사격단행은 미국이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철회하지 않고 끝내 고집하여 조미협상이 파탄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양면조치였다. 만일 미국이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철회하지 않고 끝내 고집하여 조미협상이 파탄되면, 조미관계가 급속히 악화되고 무력충돌위기가 조성될 수 있으므로, 조선은 그런 상황에 대처할 압도적인 위력을 시위할 필요가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유세장에 들어선 시각은 오후 7시 9분이었다. 수많은 지지자들이 그의 등장에 환호하였지만, 조선이 왜 조미실무협상을 개최하자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자마자 위협적인 시험사격을 단행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선거유세 중에 조미관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동맹국들이 미국을 이용하고 있다. 나는 세계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이라고 하면서, 동맹관계를 깎아내리는 발언을 늘어놓았을 뿐이다. 

 

최선희 제1부상이 특별담화를 발표한 때로부터 약 7시간 30분이 지난 9월 10일 오전 6시 53분 평안남도 개천비행장 활주로 공터에서 거대한 불줄기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 밑에 제2차 초대형 방사포 시험사격이 진행된 것이다. 

 

조선이 미국의 협상청원을 수락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으므로, 시험사격을 자제하거나 연기할 수 있었지만, 조선은 그런 통념을 깨고 미국의 협상청원을 수락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때로부터 7시간 30분 만에 주한미국군에게 죽음의 공포를 안겨주는 초대형 방사포 시험사격을 단행하였다. 

 

7시간 30분 시차를 두고 최선희 제1부상의 특별담화가 발표되고, 초대형 방사포 시험사격이 진행된 것은, 미국이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철회하지 않고 끝내 고집하여 조미협상이 파탄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양면조치였다. 만일 미국이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철회하지 않고 끝내 고집하여 조미협상이 파탄되면, 조미관계가 급속히 악화되고 무력충돌위기가 조성될 수 있으므로, 조선은 그런 상황에 대처할 압도적인 무력을 시위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과 한국의 언론매체들이 실상을 정확히 보도하지 않아서 독자들이 모르고 있지만, 이번에 조선이 시험사격한 초대형 방사포는 압도적인 위력을 지닌 타격수단이다. 주한미국군에게 죽음의 공포를 안겨줄 만큼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한 초대형 방사포의 시험사격은 백악관에 보내는 조선의 강력한 경고메시지였다.  

 

 

5. 트럼프, 조미협상 가로막은 큰 걸림돌 치웠다 

 

페이엇빌에서 선거유세를 마친 트럼프 대통령은 곧바로 백악관으로 돌아갔다. 그가 움직인 동선을 시간대별로 추적해보면, 그가 백악관으로 돌아간 시각은 오후 10시쯤이다. 창가의 불빛들이 하나 둘 꺼지고, 초가을을 재촉하는 풀벌레 소리가 밤의 정적 속에 내려앉고 있었던 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 전화통화는 볼턴에게 국가안보보좌관직을 오늘 밤에 그만두라는 해임통보였다.  

 

그날 밤 트럼프 대통령이 전화 한 통으로 볼턴을 전격 해임할 줄은 각료들과 백악관 고위보좌관들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튿날 오전 8시 58분에 트위터로 발표한 볼턴 해임소식을 듣고서야 간밤에 볼턴이 해임되었음을 알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 해임을 단행한 까닭은 무엇인가? 

 

미국 언론매체들은 9월 9일 오후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소집된 긴급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대이란제재를 완화하는 문제를 놓고 볼턴과 격론을 벌인 것이 볼턴을 해임한 이유라고 지적했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국가안보문제를 놓고 의견충돌을 벌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을 전격 해임한 까닭은, 오는 9월 하순에 조미실무협상이 실패하면, 조미협상이 파탄될 것이라는 최선희 제1부상의 서릿발 같은 경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2019년 9월 11일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출입기자들에게 볼턴 해임과 관련하여 언급한 발언에서 드러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존(존 볼턴을 지칭-옮긴이)은 나와 아주 잘 어울린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매우 큰 실수를 저질렀다. 리비아 모델은 꺼내서는 안 될 발언이었다. 그것은 우리를 뒤로 밀어냈다. 솔직히 그는 나보다 더 강경하지 않지만, 강경하게 행동하려고 했다. 알다시피, 그는 강경한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우리를 이라크(전쟁터)로 끌어갈 만큼 강경했다. 그는 나와는 매우 좋은 관계를 맺었지만, 행정부의 다른 사람들과는 잘 지내지 못했다. 이것은 내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다. 그가 리비아 모델에 대해 언급하자 재앙이 일어났다. 가다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보라. 나는 그 이후(미국이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꺼내놓아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결렬되고 조선이 대미협상을 중지한 이후라는 뜻-옮긴이), 김정은(위원장)의 발언을 탓하고 싶지 않다. 그는 존 볼턴과 상종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볼턴의 리비아식 비핵화 발언을 뜻함-옮긴이)은 강경함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해 말을 삼갈 줄 아는 명석함의 문제다. 존은 우리와 같은 길에 있지 않았다. 때로 그는 우리가 너무 강경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9년 9월 11일 미국 국방부 청사 앞 광장에서 진행된 9.11사태 18주년 추모식에서 연설하는 장면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백악관을 출발하기에 앞서 백악관 출입기자들에게 볼턴 해임과 관련한 자신의 견해를 말해주었다. 그는 볼턴이 제안해서는 안 되는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조선에게 제안하여 "재앙"을 불러일으킨 "매우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비판하였다. 이런 발언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제안하여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결렬시킨 재앙의 책임을 볼턴에게 떠넘겼고,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조미협상이 7개월 동안 지체된 재앙의 책임까지 그에게 뒤집어씌워 그를 백악관에서 내쫒은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선희 제1부상의 특별담화를 읽고 볼턴을 전격 해임한 것은,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철회함으로써 조미실무협상이 개최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긍정적인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위의 발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제기하여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재앙’의 책임을 볼턴에게 떠넘겼고,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조미협상이 7개월 동안 지체된 ‘재앙’의 책임까지 볼턴에게 뒤집어씌워 그를 백악관에서 내쫓아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선희 제1부상의 특별담화를 읽고 볼턴을 전격 해임한 것은,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철회함으로써 조미실무협상이 개최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긍정적인 조치라고 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그런 조치에 의해 조미협상을 가로막았던 큰 걸림돌이 치워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철회하는 것은 핵동결, 핵신고, 핵반출, 핵폐기, 핵사찰, 핵기술집단해체를 요구한 리비아식 비핵화방안 중에서 핵반출, 핵폐기, 핵기술집단해체를 들어내고, 핵동결, 핵신고, 핵사찰만 남겨두는 것이다.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에서 핵심내용은 핵반출, 핵폐기, 핵기술집단해체인데, 그런 핵심내용을 들어내고 핵동결, 핵신고, 핵사찰만 남겨두면, 그것은 더 이상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이 아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이 주장한 리비아식 비핵화방안을 철회하고, 핵동결, 핵신고, 핵사찰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비핵화방안을 검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이 검토하고 있는, 핵동결, 핵신고, 핵사찰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비핵화방안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언급한 새로운 계산법에 기초한 비핵화방안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고, 최선희 제1부상이 지난 9월 9일 특별담화에서 언급한 “조미 쌍방의 리해관계에 다같이 부응하며 우리에게 접수가능한 계산법에 기초한 대안”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녕변핵시설을 영구적으로 폐기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 바 있고, 2007년 2월 13일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5차 6자회담 제3단계 회담에서 채택된 ‘9.19공동성명이행을 위한 2.13합의’에 따라 조선은 녕변핵시설에 대한 핵신고를 실행하고 핵사찰을 허용한 적이 있으므로, 앞으로 조미정상회담이 다시 개최되면 녕변핵시설에 대한 핵동결, 핵신고, 핵사찰(녕변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을 합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녕변핵시설 이외의 다른 핵시설도 영구적으로 폐기하는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일단 조선이 녕변핵시설을 영구적으로 폐기하고, 그와 동시에 미국이 등가적 상응조치를 실행하면, 녕변핵시설 이외의 다른 핵시설을 영구적으로 폐기하는 문제도 합의될 수 있다. 2018년 9월 19일에 채택, 발표된 평양공동선언에는 “북측은 미국이 6.12조미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녕변핵시설의 영구적 페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고 명시되었다. 바로 이것이 조선이 미국에게 제시한 동시행동원칙에 따른 단계적 비핵화방안이다. 

 

오는 9월 하순 조미실무협상이 개최되면, 미국은 조선이 제시하는 동시행동원칙에 따른 단계적 비핵화방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석 달 안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다시 만나 정상회담을 개최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소원이 풀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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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바꾼 풍경] 자유롭고 처우 좋은 IT 대기업에 웬 노조? 편견은 그만

네 번째 이야기 : 화학섬유식품노조 네이버지회

이소희 기자 lsh04@vop.co.kr
발행 2019-09-15 09:27:50
수정 2019-09-15 09:2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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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은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결사체지만 이기적이고 불온한 듯 비칠 때가 많다. 전태일 열사는 1970년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청계시장에서 몸에 불을 붙였지만 오랫동안 우리나라 전역은 노조의 동토지대였다.

노조가 널리(?) 확산된 것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직후부터다. 이전부터 일부 열성 활동가들과 조합원들이 있긴 했지만, 군사독재를 정치적으로 패퇴시킨 6월항쟁의 에너지가 ‘이제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열망으로 분출됐다. 그해 여름 구로공단부터 울산과 거제까지 노조 깃발이 휘날렸다. 헌법에서 잠들어있던 노동3권이 부활했다.  

그로부터 32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노조 조직률 즉, 전체 노동자 중 노조에 가입한 이들의 비율은 10% 남짓이다.(2017년 말 현재 10.7%) 이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모두 합친 숫자다. 최근 늘어나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자가 맞는지, 사용자가 누군지 등이 사회적으로 정립되지 않아 법의 사각지대에 몰려있다.  

파업한다고 비난받고 밥그릇 지키기라고 욕을 먹어도 노조는 꾸준히 성장했다. 비정규직이 대거 노조를 결성했고 정규직과 함께 노조를 구성해 힘을 키우거나 아예 정규직화를 이뤄내기도 했다. 지켜지지 않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도록 해, 살인적 장시간 노동과 위험한 노동조건을 줄였다. 라이더라 불리는 배달노동자들도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조건 개선에 나서 작지만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의사나 IT업종 같은 그간 불모지였던 고임금 또는 신산업 업종에도 새로운 유형의 노조가 들어서기도 했다. 여성, 비정규직 등 이전에 상대적으로 노동의 주변부였던 이들도 빠르게 단결을 확장하며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전면에 등장했다.  

노조의 확산은 노동자의 권리의식을 높이고 직장문화도 바꿨다. 최근 직장 내 ‘갑질’이 단지 ‘꼰대’라 불리는 상사나 선배의 일탈이 아니라 노동자 권리 침해, 나아가 위법행위라는 인식이 분명해진 것도 변화의 증거다. 노조는 현장의 노동환경을 바꾸고 산업계의 체질도 변화시켰다. 이에 따라 법규도 바뀌고, 사회전반의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노조가 바꾼 풍경’에서 이를 짚어본다.  

*이 기획기사는 뉴스통신진흥회가 개최한 2019 제1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에서 가작을 수상했습니다.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네이버지회 홈페이지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네이버지회 홈페이지ⓒ사진 = 네이버지회 홈페이지 갈무리
 

2018년 4월 2일, 국내 1위 인터넷업체 네이버에 창립 19년 만에 최초로 노동조합이 생겼다.

사람들은 의아하고 신기해했다. 평균연봉이 7천만 원이 넘는다는데, 출퇴근 시간도 없고 맡은 일만 하면 퇴근해도 한다던데, ‘부장님’, ‘차장님’ 직급 없이 직원들끼리 서로 ‘님’이라고 편하게 부른다던데, 복장도 자유롭다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노동조합을 만든 거지? 하는 궁금증들이 꼬리를 이었다.

더구나 이 노동조합이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이하, 화섬식품노조)’ 소속 ‘네이버지회’로 만들어진다고 하자 의구심은 더 커졌다. 40~50대 생산직 노동자가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투쟁”을 외치는 모습이 떠오르는 ‘강성’ 이미지 민주노총과 최첨단 판교 테크노밸리를 오가는 20~30대 IT개발자들의 모습이 쉬이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IT 회사 노조가 왜 화학섬유식품노조 밑에?’ 하는 궁금증도 있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네이버지회를 ‘귀족노조’로 매도하며 “배부른 투쟁”을 한다고 힐난했다. 또 민주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만들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정규직 노동자들의 격차를 심화시키려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무언가를 시도하기도 전에 신생노조에 적잖은 눈총이 쏟아졌다.

이런 온갖 의구심에도 네이버지회는 15개월 남짓 자신들의 길을 걸어왔다. 차근차근 조합 활동을 하며 몸집도 키웠다. 네이버 본사의 노동자들은 물론 자회사와 계열사 내 다양한 직군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했다. 지회 측에 따르면, 2019년 7월 현재 조합원수가 2000여 명을 훌쩍 넘었고, 이는 8000여 명 정도 되는 네이버와 관련사 전체 직원 수의 25~30%에 달하는 숫자라고 한다.

오세윤 전국민조노동조합총연맹 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네이버지회 지회장이 23일 성남 분당구 네이버 사옥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23
오세윤 전국민조노동조합총연맹 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네이버지회 지회장이 23일 성남 분당구 네이버 사옥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23ⓒ김철수 기자

‘네이버지회’는 왜,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을까?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노조활동을 해나가고 있는 것일까?  

‘인터넷 업계 대표기업 네이버라면 처우도 좋을 거 같은데 노조를 왜 만들었냐’는 삐딱한 질문에 오세윤 네이버지회 지회장은 이렇게 반문했다. “노동조합을 만드는 건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상관없지 않나요? 노동자라면 당연히 노동조합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서 “노동자가 있는 곳엔 다 노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회사에 자본과 노동이 동등하게 있게 된다”라면서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이 직장이니까, 그 안에서 좀 더 사람답게 지낼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가 받아들여지는 직장이 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되기 위해 노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또 오 지회장은 회사와 노동자 간의 ‘투명한 소통’에 대한 요구 때문에 노조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네이버가 직원들끼리는 수평적이다. 호칭도 ‘님’을 붙여 부르고 자유롭게 대하고 복장도 그렇다. 그렇지만 회사 내 의사결정 구조는 수직적인 게 있었다. 회사가 경영상에 큰 변화가 있거나 하면 직원들과 같이 상의해야 한다고 본다. 적어도 설명이라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들이 많이 부족해 노조를 만들게 됐다”  

11일 오전 경기도 성남 네이버 본사 앞에서 열린 네이버지회 단체행동 선포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네이버지회(네이버 노조) 조합원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2019.02.11
11일 오전 경기도 성남 네이버 본사 앞에서 열린 네이버지회 단체행동 선포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네이버지회(네이버 노조) 조합원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2019.02.11ⓒ민중의소리

‘노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네이버 노동자들이 모인 익명게시판 애플리케이션 ‘블라인드’에 예전부터 심심찮게 올라왔다고 한다. 그러다 실제로 노조를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이들이 오픈채팅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고, 2018년 1월 오프라인서 첫 모임을 했다. 처음 모인 사람은 4명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 사람씩 구성원이 늘어, 노조 출범 시점쯤엔 10명이 넘는 인원들이 활동을 함께 했다고 한다. 

모인 이들 모두 ‘노조’, ‘노동운동’엔 문외한이었다고 한다. 노조를 만들겠다고 모였지만 기존 ‘노조’에 대해 가진 인식이 좋지만은 않았다는 점도 비슷했다.  

오 지회장은 만화 ‘송곳’을 보면서 노조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노조를 만들기로 하면서 예전에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파리바게뜨 청년 노동자들이 정의당 ‘비상구’(비정규직 노동 상담 창구)를 찾아가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를 소개 받고 노조를 만든 이야기였다.  

오 지회장의 기억이 씨앗이 되어 네이버 노동자들 역시 ‘비상구’를 찾았고 화섬식품노조를 소개받았다. 이후 화섬식품노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노조 출범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해, 3개월여 만인 2018년 4월 2일 드디어 노조를 만들었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의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오 지회장은 “앞서 파리바게트 노조와 일하면서 잘해온 것 같았다. 또 만나서 저희 현장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의견은 존중해줬다. 적극적으로 노력해 줘서 함께 하게 됐다”고 밝혔다.  

네이버지회가 별칭 ‘공동성명’을 인쇄해 조합원들과 함께 나눠 입은 티셔츠
네이버지회가 별칭 ‘공동성명’을 인쇄해 조합원들과 함께 나눠 입은 티셔츠ⓒ사진 제공 = 화섬식품노조 네이버지회

네이버지회의 등장이 물꼬 튼 ‘노조 문화’의 변화  

네이버지회 구성원들은 새로 만든 노조가 ‘노조에 대한 오래된 편견’에 갇히지 않길 바라며, 활동과 투쟁에 새로운 방식을 고민했다.  

오 지회장은 “노조가 워낙 이미지가 안 좋다. 언론에서 자꾸 안 좋은 모습만 보여주니까 그런 것 같다. 우리가 보통 노조에 대해 교육받는 적도 없지 않냐”면서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 노조를 만들다 보니, 노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기 위해 ‘리-브랜딩(re-branding)’이란 이름으로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네이버지회 사람들은 제일 먼저 노조에 ‘별칭’을 붙여 친근한 느낌을 주려고 했다. 이들의 별칭 ‘공동성명’(共動成明)은 “함께 행동해서 네이버를 깨끗하게 성장시킨다”는 뜻으로 박상희 사무장이 직접 지은 것이다. 지회에서는 별칭을 티셔츠, 후드점퍼, 목걸이 줄에 인쇄해 굿즈(GOODS)로 만들고 쟁의행위 때 조합원들과 함께 착용하며 공동체성을 높였다.

노조 간부들은 누구나 다가오기 편하도록 ‘쟁의국장’, ‘교육선전국장’ 이란 호칭 대신 ‘staff(스태프)’로 일괄해 부르기로 했다. 현수막, 피켓, 노동조합 유인물 등 홍보물 제작엔 순화된 용어를 쓰고 딱딱하지 않게 디자인과 색깔에도 신경을 썼다. 지난 2월 20일 첫 점심시간 쟁의행위 때는 네이버 본사 그린팩토리 로비에 녹색의 현수막이 등장했다.  

(왼쪽)네이버지회가 지난 4월 24일 부분파업 당시, 영화 단체 관람을 하기위해 오리 CGV 영화관 내에 붙인 안내문
(왼쪽)네이버지회가 지난 4월 24일 부분파업 당시, 영화 단체 관람을 하기위해 오리 CGV 영화관 내에 붙인 안내문ⓒ사진 제공 = 화섬식품노조 네이버지회

또 보통의 집회 현장처럼 크게 민중가요를 트는 대신, 익숙한 동요 ‘둥글게 둥글게’를 틀었다. 조합원들은 손에 풍선을 들고 동요에 맞춰 8박자 구호를 외쳤다. 꿀벌캐릭터 ‘네이-비(NA-BEE)가 등장해 깜찍한 모습으로 현장을 오고 가며 분위기를 친근하게 만들었다.

지난 4월 24일 첫 부분 파업 때는 기나긴 집회를 하지 않고, 영화관을 대관해 조합원들이 좋아하는 최신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을 단체로 보기도 했다.  

오 지회장은 “계속 고민하고 있다. 노조 활동의 큰 의미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디테일을 가다듬고 있다. 우리 조합원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기 위해 디테일을 보완해 나간다고 보시면 된다. 기존의 노조들이 좋은 것들을 많이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것들을 보완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상급 단체 화섬식품노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IT분야엔 워낙 노조가 없다 보니, 네이버지회의 현장 경험과 설명을 화섬식품노조가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귀담아듣고 있다고 한다. 오 지회장은 “저희가 홍보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피력한 부분들을 화섬식품노조에서 많이 수용해주셨다. 그런 부분은 서로 시너지가 나는 것 같다” 고 말했다. 

네이버지회는 달라진 스타일로 활동을 이어가며 여러 가지를 이뤄냈다. 작년엔 노사협의회에 노동자대표로 참여해 IT업계 고질적 병폐인 포괄임금제를 폐지했고, 올해는 단체 협상을 맺으며 노사 간 ‘소통의 투명성’도 상당 부분 확보했다. 앞으로 회사는 경영상 주요 부분에 대해 직원들에게 설명해야 하고, 그동안 직원들에게 제각기 지급되던 인센티브에 대해서도 객관적 근거를 들어 설명하게 됐다. 그 외에도 업무 시간 외 SNS로 업무 지시 금지, 유급휴가와 육아휴직 기간 확대, 노조 활동 보장과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설치 등도 이뤄진다.  

네이버지회가 경기도 성남시 네이버 본사 그린팩토리 1층 로비에서 점심시간 동안 쟁의행위를 벌이고 있다. 조합원들이 손에 풍선을 든 채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네이버지회가 경기도 성남시 네이버 본사 그린팩토리 1층 로비에서 점심시간 동안 쟁의행위를 벌이고 있다. 조합원들이 손에 풍선을 든 채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사진 제공 사진 제공 = 네이버지회

변화는 이제 시작, 앞으로 남겨진 것들  

네이버지회는 오랫동안 노조의 불모지였던 IT업계에 새로 깃발을 꽂고 영역을 개척해, 더 많은 IT노동자들의 노동권이 보장될 수 있게 물꼬를 텄다. 네이버 지회를 본 인터넷·게임 업체 노동자들도 스스로 노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네이버 지회가 출범한 지 5개월만인 지난해 9월, 게임 회사 넥슨과 스마일게이트에 노조가 생겼고, 그해 10월엔 카카오에도 노조가 만들어졌다. 2019년 7월 현재, 4개 노조는 각각 본사와의 단체협상 체결을 완료한 상태다.  

오 지회장은 “저희는 업계에서 괜찮은 편이고, 그런데도 노조를 만들었다. 저희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계신 분들이 저희를 보고 용기를 내서 노조를 좀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저희도 연대해서 그분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힘을 보태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야 판교 인근 IT회사에 지회가 4개 생긴 것이다. 더 많은 노조가 생겨야 한다. 노조를 통해 노동권이 보장 되고 노동자들이 더 존중받게 되어야, 한국 IT산업도 성장하지 않겠나. 이게 네이버지회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1일 오전 경기도 성남 네이버 본사 앞에서 열린 네이버지회 단체행동 선포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네이버지회(네이버 노조) 조합원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2019.02.11
11일 오전 경기도 성남 네이버 본사 앞에서 열린 네이버지회 단체행동 선포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네이버지회(네이버 노조) 조합원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2019.02.11ⓒ민중의소리

네이버지회는 또 다른 측면으로도 연대의 기운을 높이고 있다.

네이버지회는 ‘계열사 노조’다. 네이버 본사 뿐 아니라 그에 딸린 자회사, 손자회사 등 40여 개 기업에 속한 노동자를 포괄하는 것이다. 실제로 20개 자회사, 손자회사의 노동자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했고, 지회는 이 중 16개 회사와의 교섭권을 확보한 상태다.  

지회 측에 따르면, 본사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제일 나은 상태이고, 자회사나 계열사로 갈수록 열악해진다고 한다. 또 각 회사들이 본사에 재무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종속된 상태라, 인사·처우 문제 등에 있어 본사의 입김이 강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지회는 계열사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각 사측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다양한 처우의 노동자들끼리도 ‘노조’라는 한울타리 내에서 연대가 가능함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네이버가 지분 100%를 보유한 손자회사 ‘컴파트너스’의 노동자들도 네이버지회 조합원으로 활동중이다. 이 회사는 네이버 검색광고 상담, 네이버 및 자회사 직원 업무 지원 등의 일을 한다. 소속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감정노동자’에 해당하므로, 관련한 노동자 보호 조치와 휴식권 보장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사측에 요구하고 있다.  

네이버지회는 지난해 8월부터 컴파트너스 사측과 15회 넘는 교섭을 진행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태다. 지회는 노조활동 보장, 리프레시 휴가 3년 근속에 3일 보장 등으로 요구사항을 축소했지만 지난 7월 교섭은 결렬됐다. 이 때문에 컴파트너스 소속 네이버지회 조합원들은 쟁의행위에 돌입했고, 8월 19~21일 간 부분 파업을 진행했다. 향후에도 투쟁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네이버지회 컴파트너스 스태프 한용우 씨는 “저는 손자회사 직원이지만 네이버지회 안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다. 지회 안에서 각 자회사, 손자회사 법인 별로 이슈를 함께 고민하고 대처해 나간다. 파업 때도 그랬고, 현재 진행 중인 컴파트너스 노동자 17인의 초과수당 미지급에 따른 체불임금 소송도 지회를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 지회장은 “계열사 노조이니, 자회사·손자회사 조합원들과 함께 투쟁하는 건 당연하다. 앞으로도 ‘우리 노조는 하나’라는 연대감, 끈끈함을 다 같이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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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 최강자 미국, '빨갱이 공포'를 내면화하다

[전쟁국가 미국·3강-⑨] 현존위험위원회(CPD)와 반공군사주의
2019.09.14 10:36:31
 

 

 

 

공화당의 반격과 CPD의 대응

1951년 1월 5일 아이젠하워는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현지 실태 조사를 위해 유럽으로 떠난다. 같은 날 공화당 출신의 전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미군의 유럽 추가 파병은 "또 다른 한국전쟁을 초래"할 것이라며 나토 결성을 강력 반대한다.

후버는 공군과 해군력만으로 미국을 지킬 수 있다면서 유럽이 스스로를 지킬 의지가 있음을 확인한 이후에 군사원조와 미군 파병을 단행해도 된다고 강조했다. "유럽을 잃는다 해서 우리 안보나 미래에 대한 확신을 잃고 히스테리에 빠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공화당의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도 이날 2시간 30분에 걸친 의회 연설을 통해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의회 승인 없이 미군의 해외파병이 가능한가? 둘째, "러시아가 유럽을 공격할 의도가 있다"는 증거가 있는가? 셋째, 유럽에 미군을 파병하면 오히려 러시아를 자극하는 것 아닌가? 등이다.  

사실 해외 파병은 의회 승인 사항이다. 그런데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의 남침을 막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경찰 행동(police action)이라는 이유로 의회 승인 없이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그런 전례가 반복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얘기다. 또한 미군의 유럽 파병은 오히려 소련을 자극해 전쟁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지적이다. 

그는 "평화에 대한 최대의 현존하는 위험은 트루먼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정부의 행동, 특히 미국인 장군 아이젠하워가 지휘하는 통합 유럽군대의 창설"이라면서 대규모 미군의 유럽 파병은 "엄청난 재정적자와 인플레, 미국의 병영국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생존해 있는 유일한 전 대통령과 공화당의 양심으로 불리는 태프트 의원의 경고는 대중들의 여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다음 날인 1월 6일 부어리스는 워싱턴에서 CPD 회의를 소집해 "유럽에 대한 미 군사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후버 전 대통령의 제안이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의 제안을 지지하는 편지가 의회에 쇄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월 7일 CPD는 유럽은 "소련이 노리는 다음 먹잇감"이라고 맞받아쳤다. 소련이 유럽을 먹는다면 이는 "2억 명, 그것도 대부분 고도로 산업화된 주민들이 미국에 대항하는 공산 제국에 흡수되는 꼴"이라는 것이다. CPD는 "미국의 성공적 방어는 유럽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 이를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뒤늦게 깨달았다"면서 트루먼의 유럽 파병을 적극 옹호했다.

1월 8일 트루먼 대통령이 연두교서를 발표했다. 그는 "남한 침략은 세계를 단계적으로 접수하려는 소련 공산 독재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서유럽이 소련 침공에 무너지면 소련의 석탄 생산량은 2배, 철강 생산량은 3배로 늘어날 것"이며 "미국이 유럽을 외면하면 소련은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소련이 유럽과 아시아의 자유국가들을 집어삼키면 미국으로서는 감당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우리를 압박해 올 것"이며 "그런 상황이 되면 소련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를 세계에 강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서는 제한전을 수행하는 한편 지구적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한국전쟁의 승리보다는 핵심 산업지역인 서유럽과 일본의 재무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트루먼은 "우리는 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계속할 필요가 있다. 그 원조는 이제 그들의 국방 건설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2월 7일 코난트는 전국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미국이 위험에 처해 있다. 분명히 군사적 위협이다. 우리는 즉각 국가적 위험에 대응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모든 국민들은 의회와 행정부에 대해 현 위기 상황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적절한 대응 조치를 취할 것을 청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결국 상원 외교위와 군사위는 유럽 파병에 관한 합동 청문회를 개최한다. 2월 20일 청문회에서 마셜 국방장관은 미군의 유럽 파병은 이미 1950년 9월 트루먼 대통령이 군부의 조언을 받아 결정한 사항이라면서 4개 사단 증파 방침을 기정사실화 했다. 이에 대해 후버 전 대통령은 2월 27일 증언에서 "미군의 유럽 파병은 러시아와의 승산 없는 지상전, 그리고 미국 청년들의 학살"로 이어질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의회에서 찬반 양론이 팽팽한 가운데 CPD는 3월 4일부터 매주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국민 직접 설득에 나선다. 국민들의 의식을 바꿔 의회 반대파들을 압도한다는 전략이다. 3개월간 지속된 방송 캠페인의 첫 번째 연사는 과학계의 거물인 바네바 부시였다.

부시는 이제 소련과의 대결에서는 "모든 군사력에서의 우위"가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소련의 핵개발 이전까지는 미국의 핵 독점으로 소련의 군사행동을 억지할 수 있었으나 핵 독점이 무너진 이후에는 핵무기 및 재래식 군사력의 우위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NSC-68의 핵심 요지로 이후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독트린이 된다. 즉 군사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대외정책을 이끌어가겠다는 것이다. 1996년 클린턴 행정부가 천명한 '전방위 지배(Full Spectrum Dominance)'는 바로 이러한 정책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어 3월 11일에는 로버트 패터슨 전 전쟁부 장관이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응책은 전면적이고 신속한 대외 군사 원조"라면서 아이젠하워가 주도하는 나토 결성을 전폭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월 18일에는 윌리엄 도노번 전 OSS 국장이 심리전 등 비밀공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CPD는 라디오 연설 내용을 소책자로 발간하는 한편 '쫄면 죽는다(The Danger of Hiding Our Head)'라는 제목의 만화 10만부를 배포하고 '현대 무기와 자유인(Modern Arms and Free Men)'이라는 선전영화를 제작했다. 기업계는 이러한 선전 책자를 확대 보급했다.

CPD의 대국민 선전 작업은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의 우호적인 보도 덕택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부어리스 부의장은 자체 평가를 통해 전국 라디오 연설은 "CPD의 활동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국민들에게 우리가 처한 위험을 일깨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고 밝혔다. 

결국 1951년 4월 5일 의회는 10만 미국 병사의 유럽 파병을 승인하는 한편 대통령에게 대외 및 군사정책에 대한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한다. CPD의 대국민 선전이 이뤄낸 개입주의의 승리였다. 

맥아더 해임 

그런데 바로 이날 또 하나의 폭탄이 의회에서 터진다. 하원 공화당 원내대표 조셉 마틴 의원이 중국 본토 공격을 주장하는 맥아더의 편지를 공개한 것이다. 중국 국민당 병사 80만을 동원해 중국 대륙에 대한 제2전선을 열자는 것이었다. 즉 한국전쟁을 중국대륙으로 확대해 중국 공산정권까지 무너뜨리자는 것이다.  

그는 유럽의 운명은 아시아의 반공전쟁에서 결정된다면서 "공산주의 음모가들은 아시아를 세계 정복의 주전장으로 택했다. 우리 군인들은 이곳에서 유럽을 대신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곳의 외교관들은 여전히 말싸움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극동에서의 전쟁에서 패한다면 유럽의 상실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맥아더는 1월 중순경 중국군을 저지하고 반격하기 위해 만주에 원폭 공격을 가하는 한편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를 동원해 중국 본토를 공격해야 한다고 정부에 제안했다. 그러나 이미 제한전 방침을 굳힌 트루먼 행정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유엔 결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 단독으로 확전을 결정할 수도 없었다. 유엔 결의에 참여한 유럽 국가들이 3차 세계 대전을 의미하는 확전에 동의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승리를 포기한 정부 방침에 분노한 맥아더는 자신의 복안을 야당에 알리면서 사실상 항명 행위를 한 셈이다. 4월 11일 트루먼은 맥아더 해임을 발표한다. 이로써 미국의 대외정책 논쟁은 개입주의 대 불개입주의에서 유럽우선주의 대 아시아우선주의로 바뀐다.  

전쟁 도중 지휘관을 교체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인데 유럽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고 군사원조를 한다? 대중들은 분노했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없었다. 애치슨 국무장관과 마셜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지금은 전면전을 치를 수 없다. 준비가 안 돼 있다'며 제한전 방침을 고수했다. 미국과 서유럽의 군사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951년 당시 미군 지휘관들은 소련과의 전면전에서 승리를 낙관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맥아더 서한이 공개되면서 공화당은 총공세에 나섰다. 태프트 상원의원은 한반도에서 유화정책을 버리고 승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선택은 "애치슨인가 맥아더인가...애치슨을 해임하고 국무부 내의 공산주의 동조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나라의 단합은 없다"고 역설했다. 

윌리엄 제너 상원의원은 "오늘날 우리나라는 소련의 지령을 받는 비밀요원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우리는 즉각 우리 정부 내의 암적 음모 집단을 통째로 들어내야 한다. 트루먼 대통령을 탄핵하고 우리나라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보이지 않는 정부를 색출해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닉슨은 트루먼 대통령을 견책해야 한다면서 '맥아더 해임은 세계 공산주의에 대한 유화책'이라고 주장했다. 매카시는 트루먼에 대해 '개새끼(son of bitch)'라고 막말을 퍼부으면서 이제 온 나라가 붉게 물들 것이라고 개탄했다. 4월 12일 공화당 하원 정책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뮌헨을 능가하는 거대한 유화책이 트루먼-애치슨-마셜에 의해 준비되고 있는가?"라고 공격했다. 

5월 3일, 이른바 맥아더 청문회가 시작된다.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이 정당한가를 따지는 청문회였다. CPD는 교묘한 여론전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부어리스는 맥아더 해임 논쟁으로 공산주의의 위험이 새롭게 부각된 것은 오히려 좋은 징조라면서 여론전을 지휘했다.

우선 4월말 <뉴욕타임스>를 통해 무엇보다 국민적 단합이 중요하다면서 유럽 우선이냐, 아시아 우선이냐는 부차적 문제라고 물타기를 시도했다. 특히 미국이 한국전쟁을 우선시 할 경우 유엔과 나토의 단합이 무너져 자칫 미국 혼자 반공 성전에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5월 14일부터 세 차례에 걸친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맥아더의 주장을 무력화시킨다. 첫 번째 방송에서 부어리스는 맥아더 휘하 극동사령부의 2인자인 클라크 아이첼버거 장군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전쟁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대응은 적절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유럽 방위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그리고 5월 20일의 두 번째 방송에서 결정적 한 방을 이끌어낸다. 이날 출연자는 맥아더의 절대적 지지자인 두 명의 반공 신부였고 그중 한 명은 매카시에게 빨갱이 사냥에 나서도록 권유한 에드먼드 월시 신부였다. 그는 맥아더와 장시간 대화를 나눴으며 맥아더가 "자신의 극동 전략이 아이젠하워의 유럽 동맹 결성을 소홀히 하라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다른 이의 증언을 통해 맥아더의 본심을 뒤바꿔버린 것이다.

이것으로 사실상 논쟁은 끝이 났다. 맥아더는 내심 유럽보다는 아시아를 우선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나토 결성보다 한국전쟁에서의 승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공을 위해 단합해야 하며 아시아 우선이냐, 유럽 우선이냐는 부차적 문제라는 CPD의 원론적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했다. 결국 의회는 "맥아더 해임은 대통령의 헌법적 권리에 속한다"며 트루먼의 해임 조치를 추인했다. 

이로써 1951년 1월 시작된 미 대외정책의 대논쟁은 유럽에서의 반공을 우선하는 개입주의의 승리로 사실상 끝이 났다. 또한 1951년 10월 10일 유럽에 대한 경제 원조를 군사 원조로 대체하는 내용의 상호안보법이 통과되면서 CPD는 자신의 모든 임무를 완수한다. 이 법은 사실상 CPD가 주도해서 만들었다. 군사 원조 위주의 상호안보법이 제정됨에 따라 1952년 미국의 대외원조는 73억 달러로 늘어난다. 1948-51년 마셜 플랜에 따른 연간 원조액 40억 달러의 두 배 가까운 수치다. 즉 서유럽에 대한 원조 확대로 이들 국가들을 미국 진영에 묶어둘 수 있게 된 것이다.  

1951년 말 CPD는 모든 임무를 완수했으나 실제 해산은 1953년에 이루어진다. 첫째 이유는 너무 일찍 해산할 경우 소련 공산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국민들의 경각심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CPD가 주창한 반공군사주의를 실천할 지도자로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당선을 돕기 위해서였다. 결국 1차 CPD는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당선 이후 해체된다.

그리고 CPD 의장 제임스 코난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독일 고등판무관으로, 부의장 트레이시 부어리스는 나토 국방보좌관 겸 해외조달(Offshore Procurement) 책임자로 발탁된다. 즉 NSC-68의 반공군사주의를 홍보했던 사람들이 이의 집행에도 참여한 것이다.

고등판무관은 미국의 독일 점령에서 민간 부문 최고 책임자로 재무장과 경제 통합에 관한 정책들을 담당한다. 해외조달 책임자란 나토 병력을 위해 유럽에서 생산된 군수물자를 미국 돈으로 구매하는 역할을 한다. 즉 유럽 기업에 일감과 함께 달러 수입을 제공함으로써 대서양동맹을 강화하자는 취지다. 또한 미 의회와 국민들의 퍼주기 논란을 피하기 위한 꼼수다. 1954년 유럽에서의 해외 조달 액수는 23억 달러에 이른다.

반공군사주의의 확립 

1947년 냉전이 본격화된 이후 미국에서는 두 가지 빨갱이 공포가 성행했다. 하나는 공화당 우파가 유포한 것으로 '공산주의 일반'의 위협을 앞세워 국내의 반대파 척결에 나섰다. 아시아, 유럽 등 해외 공산주의에 대한 대응은 그 다음이었다. 다른 하나는 집권 민주당에 의한 것으로 '소련 공산주의'의 서유럽에 대한 위협을 강조했다. 민주당은 매카시 등의 빨갱이 사냥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으나 NSC-68을 관철해냄으로써 반공군사주의 체제를 확립한다. 요컨대 미국의 두 정치세력 모두가 '빨갱이 공포'를 정책 수행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역사가 멜빈 레플러는 2차 대전 이후 민주당과 공화당은 반공을 매개로 냉전 합의를 이룬다고 말한다. 즉 트루먼은 공화당이 자신의 대외정책을 지지해준다면 공화당 요구대로 국내의 이른바 '체제 전복 세력'과 맞서 싸울 용의가 있었다. 반면 공화당은 (국내에서의) 반공을 위해 마셜 플랜과 나토 창립, 독일 및 일본의 재건과 미군 해외 주둔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렇게 해서 반공군사주의는 미 대외정책의 초당적 합의로 굳어지고 이 합의는 1960년대 말 베트남전쟁 때까지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빨갱이 공포가 내면화됐다는 점이다. 1950년대는 미국의 국력이 역사상 최강, 세계에서 절대적 우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내면에서는 공포가 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은 군사력과 경제력 측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와 직장에서는 소련의 핵공격에 대비하는 민방위훈련이 실시됐고 1957년에는 폭격기 갭, 1960년에는 미사일 갭 등 미국의 군사력이 소련에 뒤진다는 불안감이 끊임없이 환기됐다. 바로 이러한 불안과 공포가 미국의 군사주의를 유지, 확대하는 자양분이 됐다.  

미국은 나토 창설 당시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그 이유로 들었다. 또한 독일이 통일될 당시 소련에게 나토가 단 1인치라도 동쪽으로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동유럽 거의 모든 나라를 나토에 가입시켜 러시아를 포위하고 있으며 1990년대에는 유고슬라비아 해체에 나토를 동원했다. 미국의 군사주의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미국의 세계 지배를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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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1인 시위에 '재 뿌린' 박근혜 지지자들

[현장] 황 대표, 추석연휴 두 번째 1인시위 진행... 류 전 최고위원 "박근혜 석방" 촉구

19.09.14 21:04l최종 업데이트 19.09.14 21:07l

 

 14일 저녁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역에서 추석 연휴 기간 두 번째 1인 시위를 진행했다.
▲  14일 저녁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역에서 추석 연휴 기간 두 번째 1인 시위를 진행했다. 류여해 전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이 황 대표 앞에 무릎을 꿇고 "박 전 대통령 석방"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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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18시 50분, 이때까지만 해도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추석 연휴 두 번째 서울역 1인시위는 매우 성공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붉은색 바탕에 태극기 무늬 치마와 하얀색 저고리를 입은 류여해 전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이 황 대표 앞에 나타나 "박근혜 대통령을 즉각 석방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호소하자 현장은 한마디로 난장판이 됐다.

당직자들은 류 전 최고위원을 끌어냈고 그는 특유의 목소리로 "왜 나를 밀치냐"면서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곤 이내 다시 돌아와 황 대표 앞에 무릎 꿇고 다시 한 번 강한 목소리로 "박근혜 대통령을 즉각 석방하라. 힘을 합쳐 달라"고 호소했다.

굳은 표정의 황 대표는 잠시 지켜보더니 류 전 최고위원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무언가 이야기를 건넸다. 그제야 류 전 최고위원은 현장에서 물러났다.
 

 14일 저녁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역에서 추석 연휴 기간 두 번째 1인 시위를 진행했다.
▲  14일 저녁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역에서 추석 연휴 기간 두 번째 1인 시위를 진행했다. 류여해 전 최고위원이 1인 시위 중인 황 대표에게 다가와 "박 전 대통령의 석방"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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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저녁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역에서 추석 연휴 기간 두 번째 1인 시위를 진행했다.
▲  14일 저녁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역에서 추석 연휴 기간 두 번째 1인 시위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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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뒤, 황 대표는 기자들을 향해 "(추석 연휴 기간) 국민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줬다"면서 "그렇지만 '조국 임명은 안 된다'라는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이렇게 하면 안 된다'라는 공감이 컸다"라고 서울역 두 번째 1인시위의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황 대표는 "조국 장관을 사퇴시켜야 하고 문재인 정부는 사과해야 한다"라고 촉구하며 "우리 당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국민과 함께 이겨내겠다"라고 말했다.

황 대표는 이어 검찰이 조국 장관의 5촌 조카를 체포한 것과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법에 따라서 엄정하게 처벌될 것이라 생각한다"면서 "그렇게 돼야 한다"라고 담담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황 대표가 1인 시위를 마친 뒤 현장을 벗어나자 지지자들이 '황교안'을 연호했고, 황 대표는 멈춰 서서 "연휴 기간에 나와줘 대단히 감사하다. 여러분 응원에 힘입어 반드시 문재인 정권을 이겨내겠다"라고 말하며 떠났다.

황 대표는 이날 추석 연휴를 맞아 서울역 2번 출구 앞에서 지난 12일에 이어 두 번째로 '조국 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1인시위를 벌였다. 

1인 시위 내내 지지자들과 인사하고 악수한 황 대표    
 
 14일 저녁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역에서 추석 연휴 기간 두 번째 1인 시위를 진행했다.
▲  14일 저녁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역에서 추석 연휴 기간 두 번째 1인 시위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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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두 번째 서울역 1인시위를 예고한 황 대표는 14일 오후 5시 57분 지지자들의 열띤 환호 속에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역 2번 출구 앞에 황 대표가 자리를 잡자, 시민들은 '황교안이다'라고 외치며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었다. 입구가 막히자 당직자들은 지난 12일 황 대표의 1차 1인 시위 당시의 혼잡함을 고려한 듯 선제적으로 "길을 열어달라"라고 외치며 통로를 만들었다. 자리를 잡은 황 대표 역시 지지자들이 몰려 시민들의 통행을 방해하자 손짓을 하며 "우리가 길을 막고 있다"라는 말을 하며 주변 정리를 지시했다.
  
그러나 황 대표의 말은 여기까지였다. 1인 시위 시작과 동시에 기자들이 다가와 "다시 1인 시위에 나선 이유가 무엇인가", "조국 장관 5조 조카가 구속됐다. 어떻게 보나" 등의 질문을 건넸지만 황 대표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피켓만 들고 있었다. 

지지자들에게는 달랐다. '황교안'을 연호하며 지지자들이 다가오자 황 대표는 고개를 숙여가며 "고맙다"라는 말과 함께 한 명 한 명 악수를 나눴다. 일부 지지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황 대표에게 다가가 물과 음료수 등을 건네며 "힘내시라"는 말을 외쳤다.

일부 시민 "박근혜 즉각 석방하라"  
  
 14일 저녁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역에서 추석 연휴 기간 두 번째 1인 시위를 진행했다.
▲  14일 저녁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역에서 추석 연휴 기간 두 번째 1인 시위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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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황 대표의 1인 시위 현장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도 모였다. 이들은 황 대표를 향해 '박근혜 대통령 즉각 석방'을 요구하며 "그러면 황 대표를 지지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 중에는 황 대표가 들고 있던 피켓을 가리키며 "조국 임명 철회하라가 도대체 무엇이냐. '구속하라'를 외쳐라. 확실한 투쟁을 보여 달라"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황 대표가 앞장 서서 단식을 하라"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를 의식한 듯 1인 시위 후 기자들을 만난 황 대표는 '보수통합'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그런 얘기는 이런 자리에서 간단하게 할 얘기가 아니다"라면서 "우리는 기본적인 대통합을 해서 문재인 정권을 이겨내야 한다"라고만 답변했다.
  
 14일 저녁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역에서 추석 연휴 기간 두 번째 1인 시위를 진행했다.
▲  14일 저녁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역에서 추석 연휴 기간 두 번째 1인 시위를 진행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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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대표의 1인 시위 현장에는 지지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류 전 최고위원의 소동 직후 한 20대 청년은 황 대표 앞에 다가가 "지금 이런 행동이 되게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이에 일부 흥분한 황 대표 지지자들이 청년에게 욕설하기도 했다.

황 대표가 1인 시위를 하는 동안 30m 떨어진 지점에선 자신을 '사법농단 피해자 가족이자 당사자'라고 밝힌 한 시민이 맞불 시위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진실규명 사법정의 실현, 조국 법무부장관 합격"이라는 피켓을 들고 "공안검사 출신 황교안은 물러나라"라고 외쳤다. 이번에도 흥분한 일부 황 대표의 지지자들이 욕설을 하며 격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한편 황 대표는 연휴 마지막 날인 15일 오후 3시 국회에서 소속 의원들과 함께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규탄하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내용의 '국민보고대회'를 열 예정이다. 이후에는 소속 의원들과 함께 광화문 광장으로 이동해 조국 임명 규탄 집회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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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연 주권방송 편집국장

[신혜원의 그려주는 인터뷰 ]4. 서지연 주권방송 편집국장
 
 
 
신혜원 
기사입력: 2019/09/15 [11:1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주권방송 편집국장 서지연     © 신혜원

 

원 : 자기소개해 주세요.

연 : 저는 주권방송 편집국장 서지연입니다.

 

원 : 주권방송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연 : 2010년 10월 1일에 창립됐어요. 준비사업은 2009년부터 했고 2008년에는 ‘615TV’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습니다.

 

원 : ‘615TV’ 때부터 같이 하신 건가요?

연 : 네.

 

원 : 어떻게 방송 일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연 : 2007년에 아이를 낳고 쉬고 있다가 방송국을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고 복귀하면서 같이 준비하게 됐어요. 

 

원 : 그 전에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있나요?

연 : ‘깨우는 동화’라는 애니메이션 동화를 만든 적이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꽤 큰 프로젝트였는데요. 

 

원 : ‘깨우는 동화’에 대해 어떻게 기획해서 하게 됐는지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연 : 벌써 십몇 년 전 일이네요. 60년 동안 깨지 않는 악몽이라는 주제로 분단과 미국, 제국주의의 한반도 전략에 의한 피해와 아픔, 상처들에 관한 내용을 야기 형식으로 편하게 풀어보자는 목적으로 만들게 됐어요. 생활 곳곳에 있는 이야기들을 하려다 보니 범죄 얘기를 많이 다루게 되었죠. 기지촌으로 가게 된 지 며칠 만에 살해당한 여성, 주한미군 기지로 확정되며 땅을 빼앗긴 평택 대추리 이야기, 폭격 훈련장으로 이용되던 매향리 투쟁, 이태원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조중필 학생 등 변하지 않는 미군 범죄에 대해 다루며,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미군이 있는 한 우리는 피해를 받는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TV동화 행복한 세상’같은 형식으로 ‘깨우는 동화’로 만들었고요, 그림 그리고 극하는 동지들과 같이 진행했었어요. 

 

원 : 영상을 만들었던 경험만으로 방송국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결심이었을 것 같은데요, 당시 방송국을 만들었던 목표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연 : 당시는 동영상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기던 때였어요. 그 이전에는 다음 아고라가 대중들이 모이는 장소였다면 미디어몽구를 비롯해 동영상 콘텐츠 제작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대중적으로 영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였죠. 유튜브 이전에 아프리카TV나 판도라TV 등이 사용될 때였어요. 진보진영에서도 이런 경향에 맞는 플랫폼을 만들어야겠다는 고민에서 시작되었죠.

 

원 : 동영상 콘텐츠 제작뿐 아니라 방송국이라는 형태를 시작할 때는 다른 고민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연 ; 2007년부터 국민주권시대라는 고민을 하며 국민의 목소리는 높아지는데 기성 언론이 이 목소리를 다 대변하지 못한다는 생각했어요. 그런데서 개인으로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보다 공신력을 가진 언론으로 국민의 대변자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원 : 그렇군요. 그렇게 시작한 주권방송이 10년이 되었네요.

연 : 내년에 10주년이 돼요.

 

원 : 10년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연 : 많은 일이 있었지요. 이름인 ‘주권’처럼 주인다운 힘을 느꼈던 10년이었어요. 이명박근혜 시기가 이 안에 다 있어요. 주권방송의 시작이 광우병 촛불 때부터였거든요. 천안함이나 세월호, 부정선거 등 큰 사건들과 큰 집회의 현장도 많았고, 통일정세 상에서도 극한점까지 갔다가 다시 정상회담까지 오는 과정도 보게 됐지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우는 우리 민족, 국민의 힘을 느꼈던 10년이었어요. 우리가 막 일구어왔다기보다 계속 노력하시는 분들, 어떻게 돌파해나갈 것인가 고민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다 보니 10년이 간 것 같아요.

 

원 : 참 다사다난했던 10년이었네요. 그 안에서 편집국장님의 역할이나 마음가짐의 변화도 있었을 것 같아요.

연 : 많이 배우고 알게 됐죠. 예전에는 기획방송에 대한 고민보다는 정규방송과 현장방송을 중심으로 고민했는데 지금 이 시기에 가장 필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전해야 할 목소리는 무엇인지 좀 더 고민하게 되는 과정이었어요. 저도 주인으로 서는 과정이었던 거죠. 몸도 마음도 훨씬 더 건강해졌어요.

 

원 : 몸은 어떻게 건강해진 거예요?

연 : 이전에는 스트레스를 엄청 많이 받았어요. 안 아프고 일주일을 다 출근하기 힘든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일도 많고 챙겨야 할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나를 몰아세우면서 했던 걸 그렇지 않게 됐어요. 예전 같으면 상황이 나를 몰아가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랄까요. 마음이 건강해졌어요. 아이들이 커서인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옛날부터 저를 알던 사람들이 지금 제가 더 편해 보인다고 이야기해요.

 

원 : 편집국장은 어떤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연 : 다 같이 하는 것이긴 한데, 방향을 잡고 기획을 하고요. 어떤 내용의 방송과 기사를 어떤 형식으로 낼지를 정해요. 혼자 정하는 것은 아니고 조금 더 먼저 고민하는 사람 정도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장 큰 것은 기사 검토예요. 처음의 목적대로 제작되었는지 확인하고 기자들과 토론을 많이 하면서 방향을 잡아나가기도 하고요.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인 거죠. 콘텐츠에 대한 책임을 더 많이 지는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원 : 공신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검토를 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그 외에도 실력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는지요?

연 : 10년 동안 느낀 것은 개개인이 실력을 쌓는 건 한계가 있다는 거예요. 전체적으로 고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놓고 싶어요. 그리고 기술 실무능력을 키우는 것에 빠지기 쉬운데 정세분석이나 우리의 몫에 대한 고민 등 정치적 판단능력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저희는 회의 시간 외에 정세분석 관련해서 토론을 많이 하려고 노력해요. 세계, 국내, 한반도 정세 등 분야별로 나누어서 토론하는데요, 이런 내용이 ‘박둥지의 세계의 눈’ 같은 콘텐츠로 제작돼요.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토론을 일상적으로 많이 해요. 기술 실무적인 능력은 계속 배우는 중이에요. 같이 배우기도 하고 개별로 인터넷 강의를 듣기도 하고요. 책을 정해서 같이 읽기도 하는데요, 따로 보면 다 읽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매일 독서이어달리기라는 것을 해요. 가장 감명 깊은 구절과 단상을 남기는 것인데요, 매일 당번이 있어서 안 읽으면 안 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요. 이런 방식을 통해서 개인이 아니라 같이 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요. 주권방송 구성원들은 매일 저녁 9:30에 출근, 업무, 독서 등에 대해 하루 보고를 해요. 무엇을 보고할지, 몇 시에 보고할지 그런 내용도 다 토론해서 결정한 거예요.

 

원 : 하루 보고라.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요.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요?

연 : 처음 시작은 평창 동계올림픽 즈음이었어요. 제가 독감에 걸려서 출근을 못 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였거든요. 그런데 민족의 화해와 단합의 기운이 높아지는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마음을 모으며 집중 기간을 정했어요. 개인별로도 목표를 정하고, 전체적으로 100 콘텐츠를 만들고 10만 조회 수를 달성하자는 목표를 세웠어요. 그러면서 집중 기간답게 매일 보고를 하자고 하여 시작된 것인데, 당시의 성과를 계속 이어나가자고 하며 꼽은 것들 중의 하나예요. 하루를 돌아보게 되어 좋았다는 평이 많았어요. 

 

원 : 정말 좋은 방도인 것 같네요. 주권방송 10년의 역사 동안 중요하고 기억에 남은 콘텐츠는 무엇이 있나요?

연 : 최근 것이긴 하지만 정상회담 보도 영상이 떠오르네요. 하루에 12개 정도씩 만들어서 올렸어요. 다들 똑같은 마음으로 영상들을 쏟아냈죠. 이 귀한 순간들을 잘 전달하자는 마음으로 녹취를 다 해서 자막을 정확하게 올리자고 했어요. 잘 알아듣기 힘든 발음을 몇 번씩 들어가면서 녹취를 했죠. 실수 없이 정확하게 전문을 다 따자고 결심하고 카메라 플래시가 수없이 터지는 중에도 말 한마디 한마디를 잘 들으려고 노력했어요. 노력보다는 그렇게 하고자 했던 마음들이, 그 순간 그런 걸 제작하는 것 자체가 신나고 벅찼죠. 또 하나는 탄핵촛불 때요. 박근혜가 탄핵되던 순간, 천안함이나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것들도 있고요. 천안함은 10년 동안 놓치지 않고 있고, 세월호도 구원파 사무실까지 찾아가며 진실을 찾으려 했지요. 노래 영상들도 많이 만들려고 했어요. ‘이름을 불러주세요’같은 영상은 조회 수가 180만이 넘었어요. 그 외에도 통일콘서트, 채널 615등 통일과 한반도 정세전망 전문 방송을 1주일에 1개는 꼭 하면서 이어왔죠.

 

원 : 참 많은 일을 해 왔네요. 지금 주권방송이 하는 방송들 소개를 해주세요.

연 : 정규방송으로는 매일 나가는 ‘황당한 뉴스’가 있고요, 주 2회 나가는 시사이슈 ‘단상’과 세계정세를 보는 ‘박둥지의 세계의 눈’이 있어요. 정세를 해설해주는 ‘시사돋보기’, 심리학자 김태형의 미국심리학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미심쩍다’, 장경욱 변호사의 ‘조작’이 있고요. 월 1회 일본어로 읽어주는 ‘칼럼 읽는 남자’가 있어요. 그리고 현장 보도영상과 카드뉴스, 진보강좌(진보적 의제나 한미관계에 대한 것을 강연 형식으로 만든 것)들이 있고 때때로 기획영상과 노래 영상들도 만들어요. 지금은 끝났지만 ‘천안함의 진실 2019’라는 방송도 했네요.

 

원 : 와,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하죠?

연 : 저희는 개편을 수시로 해요. 인터넷 방송의 장점이죠. 긴 흐름을 갖고 가는 것도 있긴 한데 쉽게 쉽게 하려고요. 우리가 1주에 한 번씩 하는 정세토론의 내용을 방송으로 만들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만들다가 2주에 한 번으로 바꾸기도 하고 그래요. 사안을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기본 틀을 잡고 꾸준히 하면서 그 안에서 이러저러한 궁리를 하죠. 예를 들면 강연 영상을 찍을 때 강연만 올리면 집중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 하면서 ppt도 화면에 같이 보여주자는 방도가 나오고요. 지금 필요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맞는 방식으로 정확하고 빠르게 내는 것을 연습 중이에요. 그래서 갖가지 방법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원 : 그렇다면 주권방송의 목표? 방향은 어떻게 되나요?

연 : 몇만, 몇십만이 보는 콘텐츠들 속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콘텐츠, 젊은 사람들도 볼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자는 게 목표예요. 뭔가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면 EBS를 보는 것처럼 정세를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되면 주권방송을 보도록 하는 것이 첫째 목표, 둘째 목표는 더 많은 사람이 보도록 하는 거예요. 작년보다 조회 수가 2배로 늘었지만 만대의 시청률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요. 마지막으로는 아직 젊은 층이 보기 힘들어하는데 더 젊은 세대들에 맞춰서 만드는 게 목표예요.

 

원 : 주권방송과 함께 한 10년 세월 속에 서지연이라는 사람에게 있어 보람과 어려웠던 점들에 관해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연 : 보람이라. 좋았던 거라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많이 배웠던 과정이었어요. 세월호 가족들, 신상철 대표, 평생 통일운동 해 오신 분들,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순간들에 많이 배웠어요. 콘텐츠 제작은 혼자가 아니라 같이 하는 거라 서로 빛내어주는 과정이 행복했어요. ‘이름을 불러주세요’ 만들 때 아이들 책상을 꼭 찍고 싶었는데, 두 동지가 가서 1반부터 10반까지 모든 반을 돌며 모든 책상을 하나씩 찍어왔어요. 무얼 해야겠다고 하면 다 같이 힘을 모으는 모습을 보며 든든한 곳에서 일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같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아이 둘을 낳고 키우는 과정 동안 주권방송에 계속 있었는데 동지들 덕에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랑과 믿음을 많이 느끼는 과정이었죠. 어려웠던 건 부족함을 느낄 때예요.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떠나가는 경우들도 있는데 그럴 때 내가 부족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말하는 내용을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잘 안 될 때도 부족함을 느끼죠. 안 보는 콘텐츠는 안 보는 이유가 있거든요. 조회 수만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조회 수가 바로 보이니까요. 결국 우리의 실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느낄 때 어렵죠.

 

원 : 그렇다면 올해까지 서지연 편집국장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연 : 제가 일을 제때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해야 할 일들이 갑자기 많아져서 헉헉대면서 하는 상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중요한 일을 제시간에 많이 하지 못하고 짧은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것들만 쳐내다가 해야 할 일을 폐기하게 되고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일들이 생겨요. 지금 꼭 해야 되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야 하는데. 이창기 선배처럼 다른 사람들이 신심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신심 높게, 해야 할 일이라면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것을 배워야겠어요.

 

원 : 높은 책임감으로 많은 일을 하고 계시는 편집장님, 앞으로도 좋은 방송 부탁드립니다.

 

‘깨우는 동화’ 참고자료

https://youtu.be/klUNCqsUi6w

https://youtu.be/QtmEZST5I_0

 

*    *        *    *    *        *    *     *        *    *

 

▲ 신혜원 작가가 서진연 편집국장과 대담하면서 느낀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 신혜원

 

 

무척 바쁜 주권방송 편집국장님을 8.15가 끝난 주 일요일에 겨우 만났어요.

그날도 집수리를 하는 도중에 겨우 빠져나와 급하게 인터뷰만 하고 가셨는데요.

어떤 질문을 해도 개인의 이야기보다 주권방송, 우리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을 보며 집단과 동지들을 귀히 여기는 그런 마음이 주권방송을 튼튼하게 만드는 하나의 큰 힘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어요.

계속 전진할 서지연 편집국장과 주권방송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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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게이트 노동자 도로공사 본사 점거농성 일주일, 더 커지는 연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9/15 11:50
  • 수정일
    2019/09/15 11:5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노동과 세계 보도, 14일, ‘비정규직 이제그만’ 주최 결의대회 500여명 참석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9/15 [01:30]
 

 
 

14일 오후2시 도로공사 앞 결의대회 (사진 :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 백승호)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의 한국도로공사 본사 점거농성이 일주일을 맞았다.

민주일반연맹 공공연대노조 백양사지회 서영희, 조관옥 조합원은 “청와대와 비교하면 별 5개 호텔이다. 공기도 좋고 밤에 별도 초롱초롱 빛난다”고 말했다.

생활하기는 조금 나아졌지만 마음은 무거워졌다. 한평 부스에 에어컨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곳에서 일했는데, 정규직 직원들은 이렇게 크고 좋은 건물에서 일하는 걸 보니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어서다.

언제 경찰이 침탈할지 몰라 두려운 마음도 있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불안할 것”이라며 매일 경찰차가 몇대 와있는지, 상황이 어떤지 알려준다고 한다.

“안에 있는 조합원들이 연대하러 온 사람들 얼마나 있냐고 매일 물어봐요. 누군가 더 온다는 게 희망이에요. 딱 한번만 100만 민주노총의 힘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비정규직 이제그만' 주최 결의대회에 500여 명 참석...
톨게이트 노동자, "우리는 우리 회사에서 사장과 만나려는 것뿐"

 

결의대회 참석자 전체사진 (사진 :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 백승호)


조합원들의 바람대로 톨게이트 투쟁에 전국 노동자, 시민의 힘이 모이고 있다.

14일 오후2시 ‘비정규직 이제그만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 주최로 ‘자회사 폐기! 직접고용 쟁취! 불법파견 종식! 톨게이트 투쟁 사수를 위한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날 결의대회에는 서울, 부산, 인천, 제주, 강원 등 전국에서 500여 명의 노동자, 학생, 시민이 참석했다. 불법파견 시정명령을 요구하며 10일째 집단단식 중인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결의대회에 함께했다.

9일부터 본관 내 농성에 함께한 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 차헌호 지회장은 “한쪽 벽면 전기가 다 끊겨서 휴대폰 사용도 어려워졌다. 2층부터 전기를 다 차단해서 휴대폰 라이트를 켜고 씻는다”고 내부 상황을 전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편지도 이어졌다. 47일 간 곡기를 끊은 금속노조 기아차 비정규직지회 김수억 지회장, 한국지엠 부평공장에서 고공농성을 중인 한국지엠비정규직지회 이영수 사무국장, 76일째 영남대의료원 70m 고공에 올라있는 박문진, 송영숙 조합원이 직접 쓴 편지를 전했다. 창원지역에서 온 아르바이트 노동자, 불교계, 데모당 등 연대발언도 이어졌다.

결의대회 마지막 발언에 나선 민주연합노조 박순향 부지부장은 “걱정 많이 하시는데, 안에서 잘 버티고 있다”고 인사했다. 이어 “잠시 여기 내려와있지만 한명씩 끌려나오면 다시 청와대로 갈거다. 그간 참고 살아온 세월이 10년, 20년이다. 불법점거니 퇴거니 쉽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이강래 사장은 여기 와서 교섭하라. 문재인 대통령은 이강래 사장 불러다 바로 이곳 교섭자리에 앉히라”며, “우리는 여기서 한발짝도 나갈 수 없음을 알린다”고 말했다.
 

 사진 :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 백승호
 기아차비정규직지회 김수억 지회장 편지를 낭독하는 현대차 전주지회 이병훈 지회장 (사진 :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 백승호)

 


투쟁기금, 릴레이 손글씨 등 연대는 계속돼...
민주노총, 15일 문화제 이어 18일, 21일 결의대회 개최

톨게이트 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연대는 더 크게 확산되고 있다. 이날 결의대회에서 데모당은 페이스북 모금을 통해 하루만에 모금된 600여 만원을 전달했고,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현대기아차비정규직지회, 케피코지회 등에서도 투쟁기금을 전했다. 지난 추석기간 동안 농성장 간식 후원계좌에는 3일만에 2천만원 넘는 후원금이 모였다.

온라인에서는 톨게이트 노동자를 지지하는 손글씨 릴레이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편 민주노총은 15일 오후8시 문화제를 열고, 18일 영남권 결의대회, 21일 민주노총 집중 결의대회를 이어갈 계획이다.
 

 사진 :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 백승호
 사진 :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 백승호
 발언하는 민주연합노조 박순향 부지부장 (사진 :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 백승호)


출처: 노동과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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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은 일본정부의 범죄에 공범자가 되선 안된다

[기고] 후쿠시마 사고와 도쿄올림픽

 

 

 

고이데 히로아키(小出裕章) ― 1949년생. 전 교토대학 원자로실험소 조교. 원자력 전공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개념의 근본적 허구성과 위험성을 밝히는 데 평생을 바쳤다(그의 지위가 마지막까지 최하위직 교원 신분인 '조교'였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녹색평론사에서 출간된 책 <은폐된 원자력, 핵의 진실>(2011), <원자력의 거짓말>(2012)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글은 후쿠시마 사고로 인한 세기적 재해가 여전히 진행 중인데도 불구하고, 이른바 '부흥 올림픽'을 내걸고 파국적 상황을 은폐하려는 아베 정부의 부도덕성에 눈을 감고 2020년 하계 올림픽을 도쿄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한 국제올림픽위원회와 230여 개 각국 올림픽위원회 앞으로 2018년 8월에 보낸 문서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문서는 후쿠시마 사고의 통제불능 상황을 설명하고, 현재 도쿄는 방사능오염 지역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각국의 올림픽위원회가 더이상 일본 정부의 반인륜적 범죄에 동참하는 공범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 글은 <녹색평론> 168호에도 실렸다.(바로가기)
 
2011년 3월 11일,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도교전력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 전체 정전은 원전에 파국적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전문가들은 일치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예측대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는 용해되어 대량의 방사성물질이 주변의 환경에 방출되었다. 일본정부가 국제원자력기구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고로 인해 1.5×1016Bq, 즉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 168개분의 세슘―137이 대기 중으로 방출되었다. 히로시마 원폭 1개분의 방사능도 아주 무서운데, 그 168배의 방사능이 대기 중으로 방출되었다고 일본정부는 말한 것이다.
 
사고로 노심이 용해된 원자로는 1호기, 2호기, 3호기로, 총 7×1017Bq, 히로시마 원폭으로 환산하면 약 8,000개분의 세슘―137이 노심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중 대기 중으로 방출된 것이 168개분으로, 바다로 방출된 것까지 합산하면 현재까지 환경으로 방출된 것은 히로시마 원폭의 약 1,000개분 정도일 것이다. 즉, 노심에 있던 많은 방사성물질이 여전히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의 파괴된 원자로 격납건물 등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노심이 더 녹게 되면 다시금 방사성물질이 환경으로 방출되게 된다. 이를 막으려고 사고 이후 7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녹아내린 노심을 향해 끊임없이 물을 주입해왔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매일 수백 톤의 방사능 오염수가 축적되었다. 도쿄전력은 부지 내에 1,000개가 넘는 물탱크를 만들어 오염수를 저장해왔는데, 그 총량은 이미 100만t을 넘었다. 부지는 한계가 있고, 물탱크의 증설에도 한도가 있다. 가까운 장래에 도쿄전력은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로 흘려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종결'될 수 없는 원전사고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용해된 노심을 조금이라도 안전한 상태로 만들어나가는 것이지만, 7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녹아내린 노심이 어디에, 어떤 상태로 있는지조차 모른다. 현장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고가 난 발전소가 화력발전소라면 문제가 없다. 사고 초기에는 며칠 동안 화재가 이어질지 모르지만, 불이 꺼지면 현장에 직접 갈 수 있다. 사고를 조사하고 복구해서 재가동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났을 경우, 사고 현장에 사람이 접근하면 죽어버린다. 정부와 도쿄전력은 사람 대신에 로봇을 투입하려고 했지만 로봇은 방사능에 취약하다. 명령을 인식하는 IC칩이 방사선에 노출되면 명령 자체를 잘못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투입된 로봇은 거의 전부가 귀환하지 못했다.
 
2017년 1월 말에 도쿄전력은 원자로 압력용기가 놓여 있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받침대 내부에 위내시경용 카메라와 같은 원격조작 카메라를 삽입했다. 그 결과 압력용기 바로 아래에 있는 강철제 작업용 발판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서 녹은 노심이 압력용기 아랫부분을 뚫고 내려와 그보다 더 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사를 통해 보다 중요한 사실이 판명되었다. 사람은 8Sv의 피폭을 당하면 반드시 죽는다. 그런데 압력용기 바로 아래의 방사선량은 시간당 20Sv였는데, 여기까지 도달하기 전에 이미 530Sv 혹은 650Sv의 방사선이 계측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선량 방사선이 측정된 장소는 원통형 받침대 내부가 아니라, 받침대의 벽과 격납용기의 벽 사이였다. 도쿄전력과 정부는 용해된 노심은 받침대 내부에 쌓여 있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30~40년 후에는 용해된 노심을 회수해서 용기에 봉입하고, 이로써 사고 수습을 종결짓기로 예정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녹은 핵연료가 받침대 밖으로 흘러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정부와 도쿄전력은 로드맵을 바꾸어, 격납용기의 측면에 구멍을 내어 그곳을 통해서 직접 끄집어내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작업을 하게 되면 작업에 투입된 노동자가 막대한 피폭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는 당초부터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경우처럼 후쿠시마 원전도 석관으로 막아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해왔다. 체르노빌 원전의 석관은 30년이 지나면서 노후화되어 2016년 11월에 더 큰 규모의 제2석관으로 다시 감쌌다. 이 제2석관의 수명은 100년이라고 한다. 그다음에는 어떤 수단이 가능할지는 모른다. 지금 살아 있는 그 누구도 체르노빌 사고의 종결을 보지는 못한다. 하물며 후쿠시마 사고의 종결은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죽은 다음에도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설혹 용해된 노심을 용기에 봉입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방사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후 수십 년에서 100만 년 동안 그 용기를 안전하게 계속 보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계속되는 인간적, 환경적 비극 
 
발전소 주변에서도 여전히 극심한 비극이 진행 중이다. 사고 당일 '원자력긴급사태'가 발령되어 처음에는 3km, 다음에는 10km 그리고 20km로 강제피난 지시가 확대되었고, 사람들은 손에 잡히는 짐만 가지고 집을 떠났다. 가축이나 애완동물들은 버려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40~50km 떨어져 있어서 사고 직후에는 아무런 경고나 지시도 받지 않았던 지역인 이다테무라(飯館村)에는, 사고 후 1개월 이상이 지나고 나서 극도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피난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마을 전체가 피난했다. 
 
사람의 행복이란 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에게는 가족, 친구, 이웃, 연인과의 평온한 날이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평범하게 이어지는 것이 바로 행복일 것이다.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중단된 것이다. 피난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체육관 등의 피난소, 다음에는 2인당 4조 반(약 7.3m2) 정도 넓이의 가설주택, 그리고 재해부흥주택이나 지자체 등에서 제공하는 주택으로 옮겨 갔다. 그러는 동안에 가족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생활이 파괴되고, 절망의 나락에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극도의 오염으로 인한 강제피난 명령이 내려진 지역보다 더 바깥쪽에도, 본래대로라면 '방사선관리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으면 안될 오염지대가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방사선관리구역'이란 방사선을 취급함으로써 급여를 받는 성인, 즉 방사선 업무 종사자들만이 들어가는 게 허용되는 구역이다. 그리고 방사선 업무 종사자라고 해도, '방사선관리구역'에 들어가면 물을 마시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된다. 물론 자는 것도 금지되고, '방사선관리구역'에는 화장실도 없고 배설행위도 할 수 없다. 정부는 긴급사태라는 구실로 종래의 법령을 무시하고, 그런 오염지대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방치했다. 
 
그렇게 버려진 사람들(갓난아기를 포함해서)은 그곳에서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당연하게도 피폭으로 인한 위험을 지고 있는 것이다. 버려진 사람들은 모두 불안할 것이다. 피폭을 피하기 위해서 일을 버리고 가족 전원이 피난한 사람도 있다. 아이들만은 피폭으로부터 지키고 싶다고, 아버지만 오염지역에 남아서 일을 하고, 아이들과 어머니만 피난한 가족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자면 생활이 붕괴되거나 가정이 붕괴된다. 오염지역에 남으면 몸이 망가지고, 피난하면 마음이 상한다. 버려진 사람들은 사고로부터 7년 이상, 매일같이 고뇌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2017년 3월이 되어 일본정부는 피난 지시에 따르거나 혹은 스스로 피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1년간 20mSv를 넘지 않는 오염지역으로 귀환할 것을 지시하고, 그때까지 충분치도 않게 지원하던 주택보상을 끊었다. 그렇게 되면 오염지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이 생긴다. 지금 후쿠시마에서는 '부흥'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곳에서 살아야만 하는 상태에 처해지면, 물론 누구라도 부흥을 바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매일같이 공포를 안고서는 살아가지 못한다.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어지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방사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정부나 지자체는 적극적으로 잊도록 유도한다. 오염이나 불안을 입에 올리면, 부흥에 방해가 된다고 비난을 받는다.
 
연간 20mSv라는 피폭량은, 과거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이었지만 방사선 업무 종사자에 대해서나 비로소 허용되는 피폭 한도이다. 그런 피폭량을 피폭으로 인한 그 어떤 이익도 없는 사람들에게 허용한다는 것은 용서하기 어려운 짓이다. 게다가 아기나 아이들은 피폭에 민감하다. 그들에게는 일본 원자력의 폭주, 후쿠시마 사고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없다. 그런 아이들에게마저 방사선 업무 종사자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러나 일본은 지금 '원자력긴급사태선언'하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긴급사태가 하루, 일주일, 한 달,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1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면, 혹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고 후 7년 반이 지나도 '원자력긴급사태선언'은 해제되지 않고 있다. 정부가 법령으로 매스컴의 입을 적극적으로 틀어막음으로써 국민들이 후쿠시마 사고를 잊어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이 '긴급사태'를 해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방사성물질의 주범은 세슘―137이며, 반감기는 30년이다. 100년이 지나도 겨우 10분의 1로 줄어들 뿐이다. 일본은 앞으로 100년이 지나서도 '원자력긴급사태선언' 상태로 있을 것인가. 
 
공범자가 될 것인가 
 
올림픽은 어느 시대건 국위 선양에 이용되었다. 최근에 와서는, 거대한 건축물을 짓고 다시 무너뜨리는 방대한 낭비사회의 구축과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토건세력이 중심이 된 기업들의 먹이가 되어왔다. 지금 중요한 것은 '원자력긴급사태선언'을 한시라도 빨리 해제할 수 있도록, 온 나라가 총력을 기울여 움직이는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야말로 최우선의 과제이며,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을 피폭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이 나라는 올림픽이 중요하다고 한다. 내부의 위기가 심하면 심할수록, 권력자는 위기로부터 국민들의 눈을 돌리려고 한다. 그리고 후쿠시마를 잊게 하기 위해서 매스컴도 앞으로 더욱더 올림픽에 열광하고, 올림픽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국민'이라고 부르는 날이 올 것이다. 지난 전쟁 당시에도 그러했다. 매스컴은 대본영의 발표만을 그대로 반복했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전쟁에 협력했다. 자신을 우수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일수록 전쟁에 반대하는 이웃을 비국민이라고 단죄하고 말살했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들을 버린 채 올림픽이 중요하다고 하는 나라라면, 나는 기쁘게 비국민이 되겠다.
 
후쿠시마 사고는 거대한 비극을 안은 채 100년 단위로 이어질 것이다. 방대한 피해자들을 곁눈으로 보면서도, 이 사고의 가해자인 도쿄전력, 정부 관계자, 학자, 매스컴 관계자 등 누구 한 사람도 책임을 지지 않고, 처벌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지금은 멈춰 있는 원자력발전소를 다시 가동하고, 해외로 수출하겠다고 하고 있다. '원자력긴급사태선언'하의 나라에서 개최되는 도쿄올림픽. 여기에 참가하는 나라와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물론 피폭의 위험에 노출되는 피해자가 될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범죄에 가담하는 공범자가 될 것이다.(김형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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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못 다 이룬 꿈, 검찰개혁

문재인의 못 다 이룬 꿈, 검찰개혁

김윤나영 기자 nayoung@kyunghyang.com
입력 : 2019.09.13 15:08
 
조국 신임 법무부 장관이 9일 오후 경기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조국 신임 법무부 장관이 9일 오후 경기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국정 과제의 최우선순위로 ‘검찰 개혁’을 꼽았다.

특히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문 대통령의 검찰 개혁에 대한 생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 대통령은 저서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에서 “개혁을 둘러싼 참여정부와 검찰의 대립 결과가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이라고 통탄했다.

문 대통령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검찰이 ‘정치 보복’의 칼로 쓰이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제도적 통제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검찰에 자율성만 보장하면 검찰이 스스로 개혁하리라던 낙관적인 전망을 반성했다. 다른 저서 <운명>에서는 특히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를 사법 개혁과 함께 추진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의 검찰 개혁 구상의 요체는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법제화다. 그 핵심이 현재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올라온 검경수사권 조정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도입법이다. 문 대통령은 법무부가 검찰을 견제해야 하고, 법무부 장관의 임기는 적어도 2년 이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 못 다 이룬 검찰 개혁의 과제를 완수할 인물로 조국 법무부 장관을 꼽은 것으로 보인다.

■검찰과의 대화와 대선자금 수사

노무현 정부가 처음으로 검찰과 맞부딪혔을 때는 2003년 3월9일 ‘검찰과의 대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 전 대통령은 평검사들과 검찰 개혁 방향을 토론하고 싶어했지만, 논의는 겉돌기만 했다. 당시 생중계된 대통령의 대화에서 평검사들은 ‘검찰 독립을 위해서 인사권에 간섭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는 유명한 말이 이때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의 의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노무현 정부의 검찰 개혁 방안은 법무부의 견제와 인사권을 통해 검찰을 통제하되, 수사에서 검찰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방향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정치 검사’들에 대한 일종의 좌천성 인사를 추진했다. 대신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청와대가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검찰과 핫라인(직통 전화)을 끊은 것도 문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이어진 대선자금 수사는 노무현 정부의 검찰 개혁을 더욱 어렵게 했다. 2003년 12월 대검 중수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한나라당 이회창 전 후보 등 여야 전반의 대선자금을 대대적으로 수사했다. 그 결과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썼고, 노 대통령의 측근들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청와대가 검찰 수사 대상이라는 상황은 청와대와 법무부의 검찰 개혁에 대한 운신 폭을 좁혔다.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 내내 중수부 폐지를 정부가 추진하면 마치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정권 차원의 보복 또는 검찰 손보기라는 식의 오해를 받을 소지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추진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회고했다.

당시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부정부패를 처단하는 청렴한 검찰 이미지를 얻었고, 검경수사권 조정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 줄어들었다. 자연히 검찰 개혁의 동력은 상실돼 갔다.

■개혁 대상은 주체가 될 수 없다

노무현 정부는 검찰에게 자율성을 줬을지언정, 제도 개혁까지는 나가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 전 대통령은 저서 <운명이다>에서 “나는 검찰의 중립을 보장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대통령이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면 검찰도 부정한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지 않겠느냐는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검경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퇴임한 이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서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운명이다>)

문 대통령도 노무현 정부의 검찰 개혁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정권이 검찰을 정권의 목적에 맞춰 장악하려는 시도만 버린다면 검찰의 민주화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저절로 따라온다고 봤다”며 “너무 나이브한 생각(<검찰을 생각한다>)”이었다고 평가했다.

그 이후로 문 대통령에게는 개혁의 대상이자 ‘기득권’인 검찰이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확고한 생각이 자리잡힌다. 그 결과 문 대통령이 구상하던 검찰 개혁의 요체가 현재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올라간 검경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법이다.

■조국, 문재인 민정수석의 페르소나?

조국 법무부 장관은 박상기 장관에 이어 문재인 정부 들어 두 번째 비검찰 출신 법무부 장관이다. 비검찰 출신 인사 기용은 문 대통령의 평소 고민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위의 책에서 비검찰 출신은 “검찰을 장악하는 데 부족하다”고 평가하면서도, 검찰 출신은 “너무 검찰 마인드에 빠져서 검찰 개혁이 어렵다”고 했다. 법무부 장관의 역할에 대해선 “법무부가 검찰 견제 기구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면서 “법무부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인권 옹호”라고 당부했다. 또 “법무부 장관은 적어도 2년, 가능하다면 대통령과 함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래야 일관성 있게 정책도 행할 것”이라고 했다.

조국 수석은 취임 다음날인 지난 10일 검찰개혁추진단 구성을 지시한 데 이어 11일에는 법무검찰개혁위 발족을 지시했다. 조 장관은 검찰의 직접 수사를 줄이고 검사 비리 감찰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역진 불가능한 검찰 개혁은 결국 법개정이라는 측면에서 검찰 개혁의 열쇠는 조 장관보다는 국회가 쥐고 있다. 패스트트랙에 올라간 검경수사권 조정법과 공수처 도입법은 오는 10월 말부터 12월 말 사이 본회의 표결에서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조 장관 임명이 사법개혁안 국회 통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검찰 수사가 조 장관을 겨누고 있고,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이 조 장관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는 점은 전망을 어렵게 한다. 조 장관으로서도 법안 통과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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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국회 앞 농성장을 지키는 이들의 간절한 추석 소원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9/14 09:35
  • 수정일
    2019/09/14 09:3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인터뷰] 국회 앞에서 수백일 째 농성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자와 5.18 단체들

남소연 기자 nsy@vop.co.kr
발행 2019-09-13 20:12:53
수정 2019-09-13 20: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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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에 명절의 넉넉함을 즐길 수 없는 이들이 있다. 국회 앞에서 수 백일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과 5.18단체들도 비슷한 처지다.

각기 다른 이유로 국회 앞에 모였지만, 이들이 바라는 건 비슷하다. 명절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정기국회에서 수 년째 표류 중인 법안들이 통과되는 것이다.

특히 이번 국회는 20대 마지막 정기국회이기 때문에 이들의 간절함은 어느 때보다도 컸다. 만일 이번 정기국회에서도 관련 법안들이 처리되지 못한다면, 해를 넘기는 것은 물론이고 21대 국회에서 법안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를 이틀 앞둔 10일, 국회 앞에서 차려진 농성장 두 곳을 찾아 이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어봤다.

2012년부터 국회 농성 이어온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최승우 씨
 

국회 앞에서 농성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최승우 씨
국회 앞에서 농성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최승우 씨ⓒ민중의소리

"추석에도 이곳에 있어야죠."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인 최승우 씨에게 '추석에는 무엇을 할 계획이냐'고 묻자 허탈한 웃음과 함께 돌아온 답변이다.  

중학교 1학년 때 형제복지원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었던 최 씨는 지난 2012년부터 국회 앞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법 제정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이제 그의 농성장 주변에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피해자 등 과거사 관련 단체들이 모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과거사법)' 개정안 통과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함께 내고 있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과거사법은 지난 2010년 활동이 종료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를 다시 구성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위원회를 통해 그동안 규명되지 못했던 국가폭력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 회복 조치를 취해달라는 게 피해자들의 요구다. 하지만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제동으로 관련 논의는 별다른 진전 없이 답보 상태다.  

최 씨는 "지금 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위원회에서는 통과됐는데, 자유한국당이 안건조정위 구성을 신청하는 바람에 90일 동안 묶여있다"며 "벌써 몇 년 째 논의를 해 온 건데, 무엇을 더 논의해야 한다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국회법에 따르면, 안건조정위로 넘어간 법안은 최대 90일까지 묶여있게 된다. 과거사법 개정안은 추석 연휴가 지난 후 오는 23일까지 안건조정위에서 논의하게 되는데, 이때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전체회의로 법안이 넘어가도 또다시 계류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어 법안 처리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최 씨는 "국회는 법을 만드는 곳이 아니냐"며 "그런데도 지금 국회의원들은 자기들 당리당략만 생각하지, 국회 앞에서 농성하는 피해자들은 안중에도 없다"고 울분을 토해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을 직접 찾아가 호소도 해봤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건 '외면'이었다.

최 씨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일어났던) 부산이 지역구인 한 의원을 찾아갔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만 하더라"라며 "어떤 의원실은 '왜 자꾸 찾아오느냐'고 해서 부딪힌 적도 많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 씨는 걱정만 늘어간다. 이번 국회에서도 과거사법이 처리되지 못하면 또다시 기나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안건조정위에서 과거사법 개정안이 합의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게 저의 제일 큰 걱정"이라며 "지금 전혀 논의가 안 되면 21대 국회로 넘어가고, 그러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참 걱정이 많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농성장 건너편에는 '함께 웃는 한가위', '행복한 추석 되세요'라고 적힌 각 정당의 추석 인사 현수막을 걸려 있었다. 그 현수막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 씨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저는 과거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으면 현재에도 그 일이 반복될 테고, 미래로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이번에는 여야가 합의를 해서 과거사법 개정안이 본회의까지 무사히 잘 갔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소망을 전했다.  

"지금까지 하나도 이뤄진 게 없어, 하지만 포기 않는다" 
다시 신발 끈 조여 맨 5.18 단체들 
 

국회 앞에서 농성 중인 5.18 농성단
국회 앞에서 농성 중인 5.18 농성단ⓒ민중의소리

최 씨의 농성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5.18 단체들의 농성장이 있다. 지난 2월 국회에서 열린 '지만원 공청회'를 계기로 5.18 유공자들과 관련 시민단체들은 이곳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시작했던 농성은 어느덧 무더운 여름을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곳에서 만난 김용만 농성단 홍보팀장은 "얻어낸 게 하나도 없으니 농성을 끝낼 수가 없는 괴로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 팀장은 "자유한국당 '망언 3적(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 제명, 5.18 역사왜곡처벌법 제정,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가동하라고 요구하면서 농성을 하고 있다"며 "하지만 농성을 한 지도 200여 일이 지났지만 그중에서 아무것도 이뤄진 게 없다"고 씁쓸해했다.

실제로 '극우논객' 지만원 씨가 국회에서 공청회를 열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고, 해당 공청회에서 5.18 모욕 발언을 했던 의원들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쳤다. 진상조사위도 여전히 관련 법안들이 통과되지 못하면서 출범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적 관심이 높았던 사안들이었지만, 5월이 지나자마자 다른 현안들에 밀려 흐지부지되는 상황이다.  

김 팀장도 이 부분을 가장 아쉬워했다. 그는 "우리가 이렇게 농성을 해도 어차피 '망언 3적' 제명이나 법안 통과는 다 국회에서 해야 할 일"이라며 "그런데 지난 5월에만 하더라도 반드시 관철시킬 것처럼 얘기하던 정치인들이 5월이 지나자마자 그런 사안들이 있기냐 했었냐는 것처럼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라고 지적했다.  

최악의 경우, 내년 5월까지도 이렇다 할 진전 없이 시간만 흐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5.18 단체들은 좌절하지 않는 듯 보였다. 오히려 '장기전'을 대비해 다시 한번 신발 끈을 조여 매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김 팀장은 "농성단 입장에서는 전열을 재정비해서 투쟁 역량을 높여야 할 때인 것 같다"며 "이번이 20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다. 내년에 설사 임시국회가 열린다고 하더라도 총선을 앞두고 있어 국회의원들 마음은 다 콩밭에 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국회의원들은 큰 그림을 보지 않고, 그때그때 당리당략만으로 움직이는 근시안적 정치를 하고 있다"며 "그래도 우리는 국회를 향해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한다. 농성단이 없으면 그 일을 할 사람이 없다"고 강조했다.  

김 팀장은 반드시 5.18 관련 사안들 중 하나라도 해결해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물론, 그때까지 농성을 계속 이어나가겠다는 계획도 함께 밝혔다. 

김 팀장은 "우리가 요구했던 것들을 하나도 얻지 못한 채 농성을 멈춘다는 건 저들의 시간 끌기 작전에 항복하는 것밖에 안 된다"며 "지금으로서는 농성을 계속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고 힘줘 말했다.  

남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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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소통? 개점휴업?... 남북연락사무소, 두 가지 시선

9월 14일로 개소 1년... 남북 접촉은 이어지지만, 지자체-NGO 역할 강화도 필요

19.09.13 19:24l최종 업데이트 19.09.13 19:24l

 

 14일 오전 개성공단에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식이 열린 가운데 사무소 외벽에 대형 한반도 기가 걸려 있다.
▲  2018년 9월 14일 오전 개성공단에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식이 열린 가운데 사무소 외벽에 대형 한반도 기가 걸려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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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층, 지상 4층, 높이 23.45m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은 남북 소통의 상징으로 주목받았다. 남북 최초의 '상시협의 채널'인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오는 14일 개소 1주년을 맞는다. 개소 당시 '365일, 24시간 남북한 상시소통 채널'임을 강조했지만, 현재는 남북 연락사무소장 소장회의도 열리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난 2월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고 난 뒤부터 지금까지 소장회의는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연락사무소 소장을 맡은 서호 통일부 차관은 지난 5월 취임 후 아직 북측 소장을 만나지 못했다. 남북은 2층엔 남측사무실을, 4층엔 북측사무실을 마련해두고 3층을 남북 공용의 공간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하노이 회담 이후 3층 회담장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다.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공동연락사무소를 서울-평양 상주대표부로 확대·발전하려던 한때 목표는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북미 비핵화 협상과 북미 관계 진전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남북관계의 소통이 '일시적'으로 중단됐을 뿐이니 북한에 '대화에 나서라, 소장 회의에 참석하라' 등의 요구를 하지 않겠다는 것. 현실적으로 북미 관계의 부침에 따라 남북 관계도 영향을 받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황해북도 개성시에 마련된 남북 최초의 상시협의 채널인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의미] 하루에 두 번, 여전히 만난다
 

서호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소장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소장인 서호 통일부 차관(왼쪽)이 지난 10일 연락사무소를 방문해 박진원 연락사무소 부소장(오른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서호 소장은 이날 북측 관계자를 만나지 못했다.
▲ 서호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소장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소장인 서호 통일부 차관(왼쪽)이 지난 10일 연락사무소를 방문해 박진원 연락사무소 부소장(오른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서호 소장은 이날 북측 관계자를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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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회의는 열리지 않지만, 공동연락사무소에서 꾸준히 지켜지는 일정도 있다. 하루에 두 번, 오전 9시 30분과 오후 3시 30분에 남북 연락관이 만난다. 요즘처럼 남북 사이에 오고 가는 이야기가 없을 때는 논의할 주제가 마땅치 않다지만, 연락관 협의가 중단되지는 않았다.

 

공동연락사무소 3층에 마련된 회담장은 6개월이 넘게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공동연락사무소 개소 당시 남북이 합의한 매일의 일정은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남북이 하루에 두 번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창구가 닫히지 않았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될 수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남북이 매일매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폄훼해서는 안 된다, 남북의 연락관이 여전히 '상시소통'을 이어가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사실 남한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역할을 관두라'는 날 선 비난을 하는 북한이지만, 짐을 싸서 남북의 '소통창구'인 공동연락사무소를 떠나지는 않았다.

한 건물에 남과 북이 있다는 건 비공식의 만남도 언제든 가능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갈 때, 각자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건물을 나설 때 자연스레 만날 수 있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상대'가 떠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언제고 다시 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현재도 공동연락사무소에는 남북 각 15~20명이 머무르고 있다.

[한계] 정부, 남북관계 창구 단일화 욕심?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리선권 조평통 위원장등 참석자들이 14일 오전 개성공단에서 열린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해 제막식을 하고 있다.
▲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리선권 조평통 위원장등 참석자들이 2018년 9월 14일 오전 개성공단에서 열린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해 제막식을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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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북미 관계에만 의존한다면 공동연락사무소의 한계는 명확하다. 사실 '공동연락사무소'의 한계라기보다는 현재 남북관계의 한계일 수 있다.

하지만 북미가 풀어야 할 비핵화 협상의 속도만 쫓다 보면, 남북은 언제 '우리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는 지적도 상당하다. 남북의 지난한 역사에서 경색국면이야 언제든 있었는데, 연락사무소까지 마련된 상황에서는 좀 달라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공동연락사무소가 개소한 이후 정부가 모든 남북관계의 창구를 '단일화'하려는 욕심을 부렸다는 쓴소리도 있다. 공동연락사무소는 ▲교섭·연락업무 ▲당국 간 회담·협의 업무 ▲민간교류 지원 ▲왕래 인원 편의 보장 등을 담당하고 있다.

정부는 공동연락사무소를 개소하며, 민간협력을 지원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남북 교류협력단체 관계자들은 정부가 민간단체까지 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서만 남북이 소통하도록 '통제'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중국이나 러시아 등 제3국에서 만나온 남북의 민간교류를 공동연락사무소 개소 후, 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서만 북측과 접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30여 년 남북의 민간교류 분야에서 일한 관계자는 "남북의 소통이 잘 될 때는 정부가 주도해 민간단체의 남북교류를 통제하려 한다, 공동연락사무소도 마찬가지"라며 "지난해 민간교류단체들은 연락사무소를 거치지 않고는 북한과 접촉할 수 없었다, 그동안 지자체나 민간단체 나름의 방식으로 북한과 교류해온 것들을 정부가 통제하려 한다"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정부는 남북의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는 할 수 있으면 알아서 해보라는 식이다, 남북교류를 대할 때, 정부와 민간단체에서 늘 있었던 문제가 공동연락사무소에서도 재발했다"라고 짚었다.

[대안] 지자체-NGO를 주목해야

공동연락사무소가 처음의 취지대로 24시간, 365일 소통의 창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현재 정부가 주도하며 운영하는 연락사무소에 지자체나 NGO, 기업, 국제기구 등 비정부 주체가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변수에서 자유로운 비정부 주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안보전략연구실장은 "공동연락사무소의 다원적인 운영방식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정부가 큰 맥을 가지고 사업의 방향을 이끌어간다면 남북교류의 오랜 경험을 쌓은 지자체나 NGO 단체들은 그 외의 남북교류를 담당할 수 있다"라고 내다봤다.

전국 17개 광역지자체가 각기 남북교류 추진 조례를 갖추고, 일부 전담 조직을 마련한 상황에서 정부 외의 소통창구도 열어둬야 한다는 지적이다.

민간교류 단체 관계자 역시 "남북 교류협력이 안정적으로 지속하려면, 정부 주도의 연락사무소처럼 지자체·민간 주도의 연락사무소를 별개로 만드는 게 필요하다, 민간의 자율성을 보장하며 민간교류가 정부 주도의 교류에서 하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대북 제재가 있는 현실에서 비정부 주체가 정부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남북교류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역할을 나눠야 한다는 뜻이다. 이 관계자는 "정치·군사 분야에서 생긴 문제가 남북 교류의 전체를 막아서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라며 "공동 연락사무소에 비정부단체들이 제 목소리를 내면 최소한 남북교류의 단절은 막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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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의 껍질을 벗기니 ‘뼈속까지 친미’

이흥노/미국 발티모아 메릴랜드, 입만 벌리면 우리는 동맹이요 혈맹을 외치지만 실은 일방적이고 짝사랑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9/14 [00:41]
 
 

 

 

▲  미국방장관 마크 에스퍼가 지난달 급거 한국으로 날아와 "한미동맹은 철통같다"며 속국 관리들로부터 다짐을 받고있다.


 


<한미동맹>의 껍질을 벗기니 ‘뼈속까지 친미’  
 
                                                                                           

최근 자유한국당과 보수매체들을 비롯한 반북 반통일 보수우익 세력의 ‘한미동맹’ 소동이 부쩍 더 요란해지고 있다. 하긴 꽃노래도 아닌 그놈의 소리를 70년 넘게 들으니 이젠 정말 지겹고 진절머리가 난다.

또, 걸핏하면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기, 심지어 일장기 까지 둘러메고 ‘안보타령’과 ‘종북소동’을 벌린다.

일본이 벌인 무역전쟁에 투항하자면서 노골적으로 일본편에 선다. ‘지소미아’ (한일정보보호협정)가 정지되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발작수준의  ‘안보소동’을 벌인다.

‘아시아 중시정책’ (Pivot to Asia)의 일환으로 오바마가 한미일 ‘3각군사동맹’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이를 대체한 게 ‘지소미아’다. 아첨과 아부의 달인 이명박의 각료들이 몰래 골방에 숨어 ‘지소미아’를 타결하려는 순간 그만 탄로가 났다. 온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막아냈다. 그런데도 박근혜는 이걸 끝내 타결하고 말았다.
 

이 협정의 핵심 내용은 모든 북측 군사정보를 한일이 공유하자는 것이다. 애초에 탄생되지 말았어야 할 ‘지소미아’가 늦게나마 종료된 건 다행이고 타당한 일이다. 무엇보다 남북관계 발전에 결정적 장애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지소미아’ 종료에 얽힌 사연 사건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협정 반대세력일수록 자주 자립 통일 지향적이고, 지지세력일 수록 외세의존 예속근성 경향이 아주 짙다.

또한, ‘지소미아’ 지지세력은 신통하게도 한결같이 ‘한미동맹’에 목을메고 그걸 ‘금과옥조’로 모신다. 휴전 결사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던 리승만을 달래기위해 미국이 급조한 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이 조약은 일방적이고 불평등하다. 70년이 흘러도 ‘국방주권’이 없다. 독립국이라 할 수 있을까?
 

한국은 조선보다 45배 더 많은 군비를 쓴다. 그러고도 미군철수 소리만 들려도 사시나무 떨 듯 하며 까무라친다. 이런 비겁한 인간일수록 정부의 ‘지소미아’ 정지를 성토하고 ‘한미동맹’까지 거덜났다고 오두방정을 떤다. 그리고는 슬쩍 일본편에 달라붙는 모습을 보인다.


최근 숱한 전문가들의 ‘안보소동’이 주요 언론매체를 도배질하고 있다. 선량한 백성들을 오도한다. 전문가들중 한 외교관과 한 대학교수의 주장을 대표적 예로 한 번 살펴보자.

김홍균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문 정부가 남북관계에 매몰돼 동맹∙우방들과 협력을 거부해 왕따됐다. 그래서 “한미동맹에 빨간 불이 켜졌다”고 주장한다. 미국에 순종하는 게 ‘한미동맹’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그가 쓸개를 빼놓고 평화를 교섭하러 다녔다는 걸 생각하니 입맛이 쓰다.

 

홍광희 성대 정치학 교수는 '북한'을 적이 아닌 친구 (동족)이라 보는 문재인 정권의 대북 인식이 화근을 불렀다고 결론짓는다. “적과 공조하려는 발상”이 틀렸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지소미아’ 중단으로 한미일 3국 안보협력이 붕괴돼서 미국의 반발을 초래했다고 펄쩍뛴다.
 

하나가 되야 할 제동족을 적이라며 공조가 아니라 무찔러야 한다는 정신상태를 가진자가 교육자라니. 제나라 제민족의 이익을 먼저 걱정해야 정상이지, 미국의 이익을 더 지키지 못해 안달하니 정신나간 교수다. 미국사람 이상의 미국사람이다.

홍 교수는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아무리 동맹관계여도 국익 보다 우선할 수 없다”라고 한 발언을 어떻게 평가할까? 아마 미국을 배신하는 발언을 했으니 종북으로 몰아 철창에 쳐넣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서울의 주요 매체들에 연일 오르내리는 쓸개빠진 전문가들의 주장 속에는 민족의 자주, 존엄, 긍지, 통일이라는 글자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오로지 대국에 메달리는 게 사는 길이고, 그게 애국 애족이라고 포장한다. 그러니 이들은 ‘균형외교’라는 소리만 나와도 펄쩍뛴다.

외국군도 없고 비동맹인 조선과 관계발전을 도모키 위해서 뿐 아니라 북중러를 불필요하게 자극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한미군사동맹’을 너무 강조할 필요는 없다. 입만 벌리면 우리는 동맹이요 혈맹을 외치지만, 실은 일방적이고 짝사랑이라는 것이 여지없이 들어나고 있다. 동맹타령, 안보타령은 결국 스스로 ‘봉’이니 맘껏 농락해도 된다는 신호로 미국을 읽는다고 믿어진다. 그러니 미국이 더 큰 고지서를 뻔질나게 내밀지 않나 말이다.
 

남북 북미 관계 발전과 비핵 평화를 위해서 ‘한미작계-5015’는 오래전에 마땅히 폐기됐어야 옳다. 그것은 한미의 북침→점령→참수작전 계획이다. 지난번 한미합동군사훈은 명칭과 규모만 바꿔 또 다시 그걸 재연했다.

미제무기 수입국 1위에 올라가면서 최첨단 무기들을 대량 도입하기로 돼있다. 무기 반입과 한미훈련은 ‘4.27선언’과 ‘남북군사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했다며 북측은 남북대화를 중단하기까지 했다. 실제 한미합동훈련은 ‘6.30 판문점 회동’에서 취소가 합의됐다. 그러나 조선의 거센 항의에도 강행됐다. 미군부를 달래야 하는 트럼프의 한계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단거리 미사일 발사와 한미훈련은 조미가 상호 인정 수용하게 된 것이다. 조미가 ‘짜고치는 고스톱’이 되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한미동맹’을 ‘신주단지’로 모신다. 이걸 시비하면 영낙없이 찍힌다. 심지어 미국과 의견만 달라도 당장 외교참사요 안보참사 소리가 요동친다. 무조건 미국에 순종하는 게 ‘한미동맹’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고 있다.
 

이런 예속적 주종관계에 익숙해져서 미국이 하는 짓은 틀린 게 없고 우리는 그저 따라가는 게 동맹이라고 한다. ‘한미동맹’의 껍질을 벗기면 허망한 “뼈속까지 친미친일”이라는 알맹이가 튀어나온다. 원래 이 말은 이상득 당시 국회의장이 자신의 동생 “이명박은 뼈속까지 친미친일”이니 미국이 믿어달라고 아첨하면서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흥노/미국 발티모아,메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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