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대통령이 31일 오후 광주시청 시민홀에서 열린 광주시·현대차 완성차 공장(광주형 일자리) 투자 협약식에 참석했다. ⓒ청와대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재판장 김정중)는 지난 14일 선고공판에서 결격사유 있는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이 건설승인 과정에 참여했고, 방사선 환경영향평가 중대사고 고시를 누락해 신고리 5·6호기 건설허가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공사 중지는 할 수 없다며 행정소송법 규정에 따라 ‘사정판결’을 선고했다. 위법이지만 취소하는 게 공공복리에 적합하지 않다면 말 그대로 사정상 처분은 취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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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고리 5.6호기 건설현장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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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판부는 건설을 중단할 경우 예상손실이 6조원인 반면 위법사유는 보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앞서 울산시 울주군에 건설 중인 신고리 5·6호기는 2017년 공사가 중단됐으나 공론화위원회 결정으로 건설이 재개되며 2024년 준공을 앞두고 있다.
피고측이었던 원안위는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줄곧 핵발전소 가동을 주장해온 매일경제신문은 15일자 지면에서 “신고리 5·6호기 위기모면”이란 제목의 기사로 “(재판부가)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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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반핵 활동가들이 법원의 1심 판결에 항의하는 모습. ⓒ그린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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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 탈핵특별위원회는 15일 논평에서 “술은 마셨지만 직업을 잃을 우려 때문에 음주운전으로 처벌하지는 않겠다라는 식의 우리 사회 고질적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낸 결정”이라고 비판하며 “국민의 생명에 대한 안전보다 건설업체의 돈벌이를 우선으로 한 사법부의 판단을 규탄한다”고 밝혔다. 김영희 변호사는 “독일의 경우 100% 건설한 원전도 가동을 안 한 경우도 있다. (건설 중단) 손실이 6조원이라고 했지만 안전이 지켜지지 않아 사고가 나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린피스 장마리 캠페이너는 “사법부 판단이 법으로 규정된 최소한의 책무마저 관례적으로 등한시해 온 원안위에 경종을 울리는 대신 오히려 힘을 실어준 격”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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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5 20:5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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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 보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비건을 주목하라 | ||||
| 기사입력: 2019/02/15 [10:4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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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역사적 명장면이 나올까. 온 세계가 마음을 졸이며 2월 27일-28일로 다가온 2차 북미정상회담을 주시하고 있다. 미국은 대다수 언론이 보도하는 ‘북한의 비핵화’가 아닌, 북한과의 새로운 관계 수립과 평화체제 구축에 힘을 쏟고 있는 모습이다. 미 국무부의 대북정책협상특별대표 스티븐 비건의 움직임이 북미회담의 결과를 예측하게 해주는 중요한 실마리다.
우선 왜 비건을 주목해야 하는지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굴러들어온 국무부의 신참, 비건
지난 2018년 8월 23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스티븐 비건을 대북정책협상특별대표로 임명했다며 불쑥 소개했다.
국무부는 “비건은 특별대표로 국무장관을 대신하여 미국의 모든 대북 정책을 지시하고 협상을 이끌며 미국의 동맹국과 파트너와 외교적 노력을 주도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비건은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중량감도 떨어지는 인물이다. 비록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예산배정,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이어진 북미 간 제네바협정 등에 관여한 바 있고, 상·하원 외교위원회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머무른 바 있다지만 고위급은 아니었다.
비건의 경력을 보면 차라리 외교보다는 경제에 어울린다. 그는 특별대표를 맡기 직전까지 포드 자동차에서 14년 동안 국제부문 부회장을 맡은 잔뼈가 굵은 기업인이다. 게다가 주요업무는 러시아 담당이었다. 이쯤 되면 대북정책과는 별 관련 없고 정계에서도 은퇴한 ‘순도 100% 기업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미국에서도 “(비건의) 대북 경험이 적다”는 의아함이 터져 나왔다. 이에 대해 헤더 나워트 국무부 대변인은 “비건은 포드차에서 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며 “전 세계에 걸쳐 협상을 해왔고 이번 (대북협상) 업무에도 기술과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밝혔다.
폼페이오도 “거친 협상 환경에도 폭넓은 경력을 갖고 있다”고 소개하며 ‘부적합 논란’에 단단히 쐐기를 박았다.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비건은 6개월 동안이나 빈자리였던 조셉 윤 전 대북정책특별대표의 뒤를 이었다. 트럼프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수행할 적임자를 찾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음(또는 신중을 기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폼페이오가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후속회담을 위한 평양행을 목전에 두고 비건을 공개적으로 데뷔시킨 것이다.
일반적인 외교의 방식을 생각해보면 비건의 임무는 대북정책에 꾸준히 관여해온 국무부 내부 인사가 맡아야 타당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밝힌 만큼 그를 뒷받침하는 ‘검증된’ 인사를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앞서 비건은 국가안보보좌관 후보군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결국 대북강경파로 분류되며 6자회담의 ‘판’을 깬 전력이 있는 존 볼턴이 앉았다.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을 중시하는 트럼프와 달리 볼턴은 “군사적 옵션 검토” 등 연신 북한에 대한 발톱을 드러냈다. 트럼프로서는 대북강경파들이 득시글대는 국무부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물이 절실했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비건이 대통령과 국무장관을 대신해, 북미협상의 전권을 행사하는 중요한 자리에 ‘꼭 앉아야 했던 공개할 수 없는 뒷이야기’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볼턴 등 정부 내 반발을 억제하고 북미 간 과감한 협상을 추진할 수 있는 바깥사람으로서 비건에게 적격 판정이 떨어진 것은 아닐까.
‘트럼프 직통’ 폼페이오–비건 국무부 라인의 의미
비건의 직함인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영어로 ‘UNITED STATES SPECIAL REPRESENTATIVE FOR NORTH KOREA’라고 쓴다. 여기서 대표(REPRESENTATIVE)는 조직의 장(長)이 아니라 ‘선발된 대리인’이란 뜻이다. 풀이하자면 비건은 특별(SPECIAL)하게 선발된 미 국무부의 대리인이다.
국무부는 미국에서 가장 ‘급’이 높은 실세부서다. 수장인 국무장관은 대통령 바로 다음가는 내각의 실질적 2인자로 주(州)와 연방정부와의 관계, 대외외교, 대통령 부재 시 정부를 관할하는 막중한 직책이다.
지난 시절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 이후 민주당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힐러리에게 일정 지분을 나눠줬다는 평가가 나왔고, 실제로 힐러리는 오바마 행정부의 2인자로서 큰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지난해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전임자인 렉스 틸러슨을 (트위터로) 별안간 해고했고 앞서 CIA국장으로 임명했던 폼페이오를 국무장관으로 전격 발탁했다. 국무장관이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하는 관습을 깬 것이다. 아울러 CIA국장이 국무장관으로 바로 이동한 것도 전례 없는 일이었다.
폼페이오는 북한 정보당국과 ‘끈’이 닿아있던 인물로 북미관계에 최우선으로 집중하기 위해 국무장관을 제 입에 맞는 인사로 갈아치우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드러낸 것과 다름없다. 트럼프가 보인 ‘파격’을 국무부를 활용해 미국 내 거센 반발에도 자신의 의도대로 대북정책을 펼치기 위한 발판으로 분석해야 하는 이유다.
대통령이 국무부를 온전히 통솔할 수 있다면 대북강경파가 많은 정부-공화당-민주당의 방해를 돌파할 수 있다. 트럼프의 폼페이오-비건 임명에 담긴 의미를 이와 같이 추론할 수 있다. 보도되지 않는 1월31일 스탠퍼드 연설의 뒷장
앞서 소개한 ‘추론’은 지난 1월 31일 평양행을 앞두고 비건이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벌인 강연을 통해 사실임이 확인됐다. 여기서 북미정상회담을 마주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구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강연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을 끝낼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는 북한 정권을 전복하려하지 않는”다는 발언이 큰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그보다 훨씬 중요한 얘기는 묻혔다. 미 국무부가 홈페이지에 공개한 강연 전문을 통해 일관되게 드러난 것은 정상 간 접근, 동시이행, 대화, 외교, 평화관계수립으로 북미관계를 풀겠다는 미국의 태도다.
물론 전문에서 ‘검증 가능하며 완전한 비핵화’라는 단골메뉴는 등장하지만 ‘북한과의 관계수립’이 앞장서면서 확연히 뒤로 밀린 모양새다.
비건은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 시도 할 수 있는 전통적인 기대치에 제약이 있으며 실패한 결과는 기대할 수 없다”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성공할 경우 근본적으로 양국 관계를 변화시킬 다양한 행동으로 하향식 접근(TOP-DOWN) 접근 방식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내 팀과 국무장관의 기동을 위한 공간을 제시했다.” “미국은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약속을 현실화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70 년 동안 전쟁과 적대감을 겪었던 한반도의 미래를 바라 볼 때 개인적인 관점에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전국, 민주당, 공화당 모두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발언도 주목해야 한다.
위의 발언들은 현재의 북미대화가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대리인’을 활용한 직접담판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미 북한에서 ‘미국 내부의 반발이 심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믿는다’는 취지의 논평이 여러 차례 나온 바 있다.
‘전쟁’ 없어진 자리 메운 외교·도전·소통·체제 인정
“가까운 장래에 싱가포르 합동 성명서의 모든 요소를 발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할 것이다.” -1월 31일 비건의 강연 중에서
이 같은 입장은 이른바 ‘북한의 비핵화’에 무게중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으로 단계적·동시적 이행을 강조하는 북한의 입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풀이된다. 다른 발언에서도 비건은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새로운 관계로의 전환,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 구축, 완전한 비핵화와 병립하는 것”이라고 이를 뒷받침했다.
“북한과 우리(미국)는 지도자 간 고위급 간 (대화의) 진행을 다져왔다. 우리는 양국정부가 외교관계를 전진하기 위해 노력한 사실을 목격했다. 우리는 보다 계속적인 패턴으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물론 때때로 도전에도 직면하겠지만 긴 세월 가운데 양국이 가장 집중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여기서 ‘도전’이란 북한과의 적대적 관계청산-평화적 관계 수립을 꺼리는 미 내부의 굳어진 관성(반발)을 뜻한다. 다음의 발언을 살펴보면 명확해진다.
“미국과 북한이 외교적인 이니셔티브(계획)를 개시하려는 데 많은 도전이 있었고 복잡했다. 양국 체제가 무척 다르다는 것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양국관계는 60년 이상 정전 또는 휴전상태에 놓여 있었다. 양국은 지리적으로도 다른 장소에 위치하고 역사도 무척 다르다. 양국은 개인의 권리와 인권에 대해 극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되는 현실이 세계관, 지역관, 서로에 대한 인식에 큰 차이를 형성했다. 또한 우리는 무역관계, 외교관계도 없이 사실상 직접소통 할 능력도 없다.”
“양국 체제가 무척 다르며” “사실상 직접소통 할 능력도 없다”는 ‘현재진행형’의 시인을 봐도 그동안 지난 2017년 말까지 미국이 북한에 시위를 겨눴던 전쟁위협과는 완전히 결이 다름을 잘 알 수 있다.
또 무역·외교관계에 대한 언급은 ‘족쇄’가 되는 대북제재를 완화 또는 해제해 양국이 정상관계를 맺자는 전향적인 신호로 읽힌다. 다음 달로 예정된 “북한에 전 재산을 투자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사업가 짐 로저스의 방북도 이와 결부된 미국의 조치일 가능성이 높다.
종합하면 이는 그동안 미국이 북한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고 맹목적인 공격과 압박에만 힘써왔던 지난날의 대북정책이 잘못됐다는 고백과도 같다.
앞서 지난 1월 18일부터 22일까지 스웨덴에서 이뤄진 북미 간 합숙 실무협상에서도 대화를 중시하겠다는 언급이 긍정적으로 언급된 바 있다.
비건은 “김혁철 대사(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와 처음으로 실무적인 면담을 가졌다”면서 “우리는 결과에 만족했으며 가까운 장래에 싱가포르 성명서의 모든 요소를 발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스탠퍼드를 떠나 2월 6일부터 8일까지 2박 3일 간 평양을 찾은 비건은 한국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 대북정책의 전권을 쥔 담당자가 평양에 이렇게 오래 머무르는 건 전례가 없는 일. 그만큼 2차 북미정상회담과 관련한 북미 간 담판-문구 조율이 치밀하게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어떤 협상이 오갔는지 구체적인 얘기는 함구되고 있지만, 비건은 2월 13일 2차 북미회담의 의제가 12개 이상으로 정리됐다고 밝혔다. 사전에 있었던 비건의 발언을 쭉 돌이켜보면, 6.12북미공동성명의 단계적·동시적 이행과 미국의 상응조치를 바탕으로 한 북한과의 ‘새로운 관계 수립’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세밀한 논의가 오갔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북미 하노이 공동성명, 그 이후의 청사진
조만간 북미 간 이견조율, 하노이 공동성명(정상회담 합의문) 작성을 위한 실무협상이 제3국에서 열린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개최될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세계는 북미가 풀어놓는, 평화가 가득한 ‘깜짝 선물보따리’를 받아 안게 될 것이다.
섣부른 예측일 수 있지만 최소한 양국 간 ‘연락사무소 개설’ 이상의 조치는 확인된 셈이다. 2월 13일 JTBC도 남·북·미 당국이 “종전선언을 뛰어넘어”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평화협정위원회’ 창설방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노이 공동성명에는 ‘북한의 승리·미국 패권의 쇠퇴’로 여길만한 세계사적 조치들이 여럿 담길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태세전환 역시 북한의 핵무력·외교력에 의해 ‘강제된 의지’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트럼프는 지난 2017년까지만 해도 “북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 한반도에서 수 천 명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막말을 마구 일삼았다. 이런 태도가 ‘북한과의 대화’로 돌변한 시기는 절묘하게도 2017년 11월 김정은 위원장의 “국가핵무력 완성 선포” 뒤였다. 이후 북미 간 협상이 진행되며 ‘전쟁위기론’은 온데 간데 사라졌고 어느새 평화협정의 문턱까지 다다랐다.
실제로 매년 “북한 점령”을 내걸며 이 땅에서 위험천만한 전쟁훈련을 벌인 미군의 군홧발이 마침내 멈춰 섰다. 남북 정상은 지난해 9월 19일 평양에서 “땅·바다·하늘에서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어떤 경우에도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군사분야 합의를 이뤘고 세계가 환희했다. 성큼 가까워진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은 미국의 반발을 뚫어내고 전진하는 우리민족이 주도하고 있음을 각인해야 한다.
1776년 이래 정복과 군사침공, 경제공세 등 끊임없이 주변국을 힘으로 누르고 팽창만을 추구하던 ‘깡패국가·전쟁국가·패권국가’ 미국. 그 대외정책-세계전략의 근간이 70여 년 간 미국의 적대국이었던 북한에 의해 뒤집어지고 있는 풍경은 엄연한 눈앞의 현실이다.
아직까지는 ‘북한이 한반도·동북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평화를 견인하고 있다’는 표현이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북한의 도발이 전쟁위기를 초래한 거잖아.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분석이 다 있어?”라며 황당해하는 시선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한반도에 전략무기를 들이며 군사패권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미국의 횡포가 멈추고, 시간이 흐를수록 기존의 평가는 뒤바뀌게 될 것이다.
트럼프의 말마따나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 북한이 주도하는 ‘세기의 드라마’가 점차 막바지에 이르고 있으니 그리 머지않은 날 확정된 결과가 나올 것이다. 훗날 지구촌의 교과서는 기록할 것이다. 우리민족이 나아가는 몇 발자국이 ‘세계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 위대한 걸음’이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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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이 31일 오후 광주시청 시민홀에서 열린 광주시·현대차 완성차 공장(광주형 일자리) 투자 협약식에 참석했다.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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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4 16:3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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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기의 빈민스토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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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점상 '노'는 이슬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게 노점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서서히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변하듯 도시도 항상 변한다. 성장과 쇠퇴를 반복하는 것이 도시다. 그 변화의 속도에 맞춰 거리의 노점상들도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고 또 사라지기 때문이다. “노점상의 어원을 찾아보니 ‘길가의 한데에 물건을 벌여 놓고 하는 장사. 또는 그런 장수’라 한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노점상의 첫 번째 글자 길 ‘노(路)’로 알고 있는데, 이슬 ‘노(露)’자다 그러니까 노점상(露店商)이란 이슬을 맞으며 고달프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 철거민과 노점상 단체에서 빈민운동을 하다가 유명을 달리한 김흥겸 선배의 이야기다. 그는 그때 위암에 시달리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술은 먹지 않고, 풀어냈던 이야기다. 거리에서 이슬을 맞고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이슬 노(露)자를 써서 노숙인(露宿人)이라 부른다. 종합해보자면 ‘이슬’은 가난한 사람들의 공통된 상징이 된다. 2007년 11월 11일 경기도 고양시에서 벌어진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남편은 매일 매일 건설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제가 파는 붕어빵 마차에 들렸습니다. 어제는 덩치 큰 여러 명의 용역반이 저를 둘러싸고 마차를 부수자 길가에 반죽이며 팔다 남은 붕어빵이 흩어졌어요. 이 모습을 남편이 목격했습니다. 저와 남편이 바닥에 뒹굴며 단속에 저항했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구경만 하더군요. 그리고 남편은 평소와는 다르게 밤늦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보 미안해 당신에게 정말 미안하다.’, ‘ 세상 살기 힘들다.’ ‘장사를 못하니 나라도 나가 막노동이라도 해야지…….’라며 유서를 써놓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아내의 붕어빵 마차가 단속당하는 것을 지켜본 고양시의 노점상 이근재 씨는 공원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우리 곁에 돌아왔던 것이다. 단속이라는 위협적인 상황에 놓인 노점상들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일 것이다. 이미 이전에도 그동안 수차례 노점단속으로 시달려 온 상태였다. 당시 고양시는 노점단속 비용으로 31억이라는 혈세를 쏟아붓고 있었다. 한 사람의 나약한 노점상의 비관적인 자살이라고만 바라볼 문제인가? 누가 한 노점상의 가정을 이 지경으로 몰고 갔을까?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 우리의 문제설정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시각에서 노점상을 이해하고 이들의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들이 서로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을 봐야 한다. 개별적 시선을 넘어 붕어빵 노점상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가난을 더욱 부채질하는 무차별한 노점단속 때문은 아닌지, 왜 노점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지, 이를 먼저 보려 노력해야 한다. 어느 사업장이나 노동자들이 있듯이 한국사회속에서 노점상이란 과연 어떤 존재였는지 역사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2. 노점상의 형성과 역사 노점상의 형성 시기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불가능하다. 아마도 오랜 예전부터 마을 장터를 중심으로 천민들이라 불리는 가난한 이들의 경제활동의 근거지가 되지 않았을까? 지방 나름의 특정 상품이 재배되고, 그 지방의 물품들이 자유롭게 거리로 나와 마을 장터가 형성되었다. 나아가 같은 품목이라 할지라도 지방마다 재배 되고 만들어지는 한정된 물품은 가격이나 가치가 천차만별이었을 것이기에 더 큰 장터가 형성되고 점차 상업 활동도 활발해졌을 것이다.
조선 초기 각 지방의 특산물, 농어물, 공산품들을 국가에 상납했지만, 중기 이후 세금을 쌀로 내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때문에 지방의 특산물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가 직접 혹은 지방관청을 이용해 물건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마을 장터에서 지방 특산물이나 농작물, 공산품들이 유통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몇몇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장터가 발전된다. 이제는 생존을 위한 유통 형태에서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변화된 시장은 자신의 신체 노동으로 전국을 활보하며 유통을 담당했던 보부상과 난전 상인 즉 지금의 노점상, 그리고 본격적으로 상업을 본분으로 삼고 특정 장터에서 장을 펼치던 상인으로 발전한다. 현재의 ‘떴다방’을 연상시키는 보부상의 역사적 문헌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물교환 형태의 소규모상인으로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고려 후반 조선 초부터 보부상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보부상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총칭하는 말이다. ‘난전’이란 허가받지 않은 상태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현재의 ‘노점상’을 뜻한다. 이들을 비하하는 말로 뒤섞여 떠들어 댄다는 말의 ‘난장판’이라는 말은 난전에서 유래한다. 불법적인 거래로 상업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난전이 형성되는 장터는 상권이 만들어 지면서 공식적인 상인들과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론이 모이고 흩어지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지금의 노점상처럼 난전에 대한 단속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후기 ‘금난전권(禁亂廛權)’은 말 그대로 난전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난전’을 적발할 경우 폐쇄하고 판매하던 물건도 압수했다. 일부 공식적인 시전상인은 난전 단속을 위해 ‘자경단’과 같은 자체 조직을 거느리기도 했다. 정부 역시 직접 단속에 나서기도 했는데 적발한 물품은 벌금 명목으로 몰수했고, 물품이 벌금보다 적을 경우 난전 상인을 곤장형으로 다스리기도 했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황평우에 따르면
“1700년대(숙종 연간) 전쟁을 겪고 기후변화까지 겹쳐 피폐한 농민들이 한성으로 몰리자 남대문 근처에 가난한 사람들의 숙소가 형성되었다. 이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자신들의 물건을 사고파는 장이 형성되었다. 도시 상업인구가 늘어난 것이다. 이때 본격적으로 가가(假家) 즉 임시로 지은 집인 ‘난전’이 생겨나며 상거래 행위가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결국 민중들이 스스로 만든 남대문 칠패 시장, 동대문 바깥에 이현시장 등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한다.”고 전한다. 특히 노점상과 보부상인은 소작농이나, 저소득 상인, 가난한 천민들의 생존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 스스로 거리로 나와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소작농과 겸업 하면서 물건의 유통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농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삼고 중시한 농본주의 사회였기에 상업을 억제했다. 백성들이 이문만 쫓고 농업은 등한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가장 천시받는 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상업에 대한 국가 통제가 커서 수도인 한성에서는 허가받은 상인만이 물건을 팔 수 있었다. 지정한 곳 외에 장을 개설하고 상거래 하는 것을 금지했다. 조선 후기 정부로부터 특권이 부여된 6개의 큰 시전이 종로 1가와 2가에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취급하는 물건 종류를 다른 상인이 거래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는 권한, 금난전권을 부여했다. 즉 육의전은 특권적 어용 상인의 단체들이었다.2) 주2) 네이버 [지식백과] 육의전 [六矣廛] (경제학사전, 2011. 3. 9. 박은태) 그렇다면 조선은 왜 이토록 막강한 상업적 특권을 시전상인에게 부여했던 것일까. 이렇게 본격적으로 유통을 담당하는 상인들이 생겨나고 국가는 그들에게 일부 품목에 대해 ‘독점권’을 인정하면서 지방에 국한되어 있던 상품들이 교통의 발달로 폭넓게 타지방으로 활발히 유통되거나 사재기를 통해 더 큰 이익을 보게 된다. 금속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상업 발전을 더더욱 촉진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 후기 접어들어 양반과 상민의 계급제도 붕괴를 가속하고 자본의 성장에 원인이 된다.
필자 최인기는 ‘민주노점상전국연합과 전국철거민연합’으로 결성된 ‘빈민해방실천연대에서 수석부위원장’ 을 겸임하고 있다. 현장을 지키며 카메라를 드는 이유는 ‘더불어 사는 사회,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다. 사진 책《청계천 사람들 : 리슨투더시티》외 도시빈민 관련된《가난의 시대 : 동녘 》와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 동녘 》 《그곳에 사람이 있다 : 나름북스 》공저로《누리하제 : 노나메기》등의 책을 썼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webmaster@minplus.or.kr |
[로힝야 학살 보고서②]ㆍ여성에게 더 잔혹했다
뚤라똘리 마을 출신 맘타리(가명)가 성폭행 피해 등 자신이 겪은 미얀마 군대의 학살을 증언하며 울부짖고있다. 미얀마 군인이 민가에 방화하는 과정에서 맘타리는 얼굴 오른편에 화상을 입었다.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 제공
뚤라똘리 마을 사망자 절반이 여성
그중 절반, 성폭행 직후 살해당해
2017년 8월30일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 북쪽의 로힝야족 거주지 뚤라똘리 마을. 여성들이 강변의 민가로 끌려갔다. 4~5명씩 무리 지은 미얀마 군인과 경찰들은 한데 모아둔 여성들을 다시 5~7명씩 뽑아 민가로 데려갔다. 로힝야 남성들을 죽인 뒤였다. 살아남은 여성들을 민가에서 성폭행했다.
이 마을 출신 바시다(25·가명)도 이날 얻어맞고 장신구와 돈을 빼앗긴 뒤 강간당했다. 이때 그의 품엔 생후 28일 된 젖먹이가 안겨 있었다. 미얀마 군인들은 아이를 빼앗아 여러 번 집어던져 죽였다.
같은 마을의 맘타리(30·가명)는 남성 3명에게 오전 10시쯤 성폭행당했다. 다른 피해 여성들과 마찬가지 방식이었다. 미얀마 군경은 먼저 남자들을 죽였고, 여자들을 민가로 데려가 돈과 장신구를 빼앗고 성폭행했다. 성폭행을 한 후엔 민가 문을 걸어잠근 뒤 불을 질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여성들만 빠져나와 도망쳤다. 맘타리의 얼굴 오른편엔 선명한 화상 자국이 남았다.
2017년 8월 말 로힝야 마을 곳곳에서 벌어진 학살은 여성에게 더 잔인했다. 살아남은 여성들은 지금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가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서 인터뷰한 로힝야 난민들은 무차별적인 학살과 함께 여성들에 대한 집단적인 성폭력을 증언했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아디의 로힝야 5개 마을(뚤라똘리, 인딘, 돈팩, 쿠텐콱, 춧핀) 학살 보고서에 따르면, 성폭력은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단독]군인·경찰, 손쉬운 표적 ‘아기·엄마’ 군사작전하듯 죽이고 성폭행](http://img.khan.co.kr/news/2019/02/14/l_2019021401001057100086382.jpg)
■ 사망자 절반 이상은 여성
가장 많은 집단학살 희생자(최소 451명)가 나온 뚤라똘리 마을에선 여성 사망자가 248명으로 절반이 넘는다. 10~20대는 113명에 이른다. 사망한 여성 중 절반 가까운 123명이 성폭행 직후 살해당했다. 군인들은 여성들의 장신구를 빼앗은 뒤 성폭행하거나 살해했는데, 귀걸이 등을 가져가려고 귀를 자르기도 했다. 인터뷰에 응한 춧핀 마을 출신 40명 중 10명이 성폭행 피해자였다. ‘테러리스트 토벌’이 군사작전의 명분이었지만, ‘테러’와는 거리가 먼 여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당했다.
춧핀 마을 출신 아누라(24·가명)는 학살이 일어나던 2017년 8월27일 라카인주에 사는 또 다른 소수민족인 라카인족 남성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라카인족은 당시 미얀마 군경과 함께 로힝야 학살에 가담했다. 당시 아누라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남성이 아이를 빼앗으려 하자 아누라의 아이들이 울었다. 아누라가 저항하자 남성들은 망고나무에 묶어놓은 뒤 그의 큰아들을 염소우리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아누라를 성폭행했다.
돈·장신구 빼앗은 뒤 성폭행
문 걸어 잠그고 불 지르는 등
‘테러리스트 토벌’ 명분으로 악행
우는 아이들은 총 쏘거나 불태워
아누라는 의식을 잃었다. 아누라는 “남성 2명이 현장에 있었지만 몇명이나 성폭행을 저질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3시간가량 지나서야 한 이웃이 아누라를 구해주었다.
아누라처럼 많은 여성들은 어머니였다. 미얀마 군인과 경찰, 학살에 가담한 민간인들은 젖먹이 아이를 서슴없이 죽였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을 강간하려고 아이를 어머니 품에서 빼앗아 죽인 것이다. 춧핀 마을에선 인터뷰에 응한 40명 중 23명이 아동 살해를 목격했다고 했다. 총을 쏘거나 불에 태워 아이들을 죽였다. 흉기를 휘둘러 죽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성폭행을 막으려던 이들도 죽임을 당했다. 인딘 마을 출신 나후마(50·가명)는 2017년 8월25일 군경이 마을을 습격하던 날 사망한 이웃주민 후세인의 모습을 기억했다.
후세인은 나후마의 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나후마가 군경을 피해 숲속으로 도망가는데 미얀마 군인이 나후마의 딸을 붙잡았다. 붙잡힌 딸을 구하기 위해 후세인이 군인들 앞으로 달려갔다. 군인들은 흉기를 휘둘러 그를 죽였다.
뚤라똘리 마을 출신 바시다(가명)는 생후 28일된 갓난아이를 안고 있던 상태에서 미얀마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목에 난 상처는 미얀마 군인들이 흉기를 휘둘러 난 것이다.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 제공
■ 난민캠프에서 이뤄지는 ‘자조모임’
아누라는 국제사회에 ‘정의’를 요구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성폭행을 겪어야 했던 그에게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회복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하지만 당장 가해자 처벌은 요원하고, 난민캠프의 생활도 열악하다. 여성들은 간신히 살아남은 자녀들을 돌보며 자신의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끔찍한 기억을 안고 있는 로힝야 여성들은 난민캠프에 머물며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린다. 하지만 주변에 고민을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여성들의 피해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아디의 여성 조사관들이 나섰지만, 옆 텐트의 음성이 생생히 들리는 난민캠프의 특성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피해를 말하길 주저했다. ‘성폭행 피해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했다. 성폭행 피해 여성들은 또 다른 편견의 벽에 부딪혔다.
‘성폭행 피해자’ 낙인찍힐라 쉬쉬
살아남은 여성들은 ‘정신적 고통’
난민캠프서 심리지원 자조모임
아디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힝야 여성 심리지원단’을 양성해 훈련하고 있다. 이 심리지원 활동은 집단학살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이 서로 도울 수 있는 ‘자조(自助)모임’을 만드는 게 핵심이다. 성폭력 등 각종 피해를 입은 난민 여성이나,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난민캠프 안에서 훈련된 로힝야 여성 등 난민 여성들의 모임을 조직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아디 관계자는 “종교성이 강하고 전통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자란 탓에 로힝야 여성들이 겪은 참혹한 피해는 오히려 사회적 낙인이 될 우려가 있다”며 “여성들끼리 서로 보듬고 도와 자존감을 키워갈 수 있는 자생적인 모임을 만들어가는 것이 지금 단계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엔 조사위서 책임 묻자 미얀마 군통수권자 “끝나지 않은 비즈니스”
이양희 유엔 인권특별보고관 “한국, 인권유린 국가와 교류 중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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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제일 세포 축산기지를 가다<2> | ||||||||||||||||||||||||||||||
| 기사입력: 2019/02/14 [10:32]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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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만플러스와 김수복 6.15뉴욕지역위 공동위원장의 동의를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세계 제일 세포 축산기지를 가다<2>
세포지구 생성내력은 화산이다. 지금으로부터 150만 년 전 현재의 세포군 성산리에 있던 화산이 폭발하면서 흘러내린 재가 일대를 뒤덮으며 평평한 대지가 생겨났다. 화산재는 산성이어서 농사가 안 된다. 수만 년 억세 풀만 무성하던 버려진 땅이었다.
우리가 세포군에 도착하자 과학자돌격대원인 한윤철 박사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농업과학원 사리원 축산학연구소 부소장으로 있다가 세포지구 건설에 지원해 온 한윤철 박사가 우리의 세포등판 안내원인 것이다.
▲ 세포군 성산리 축산기지종합지령실 앞에서 돌격대원 한윤철 박사와 함께
목장인지 무엇인지 분간이 안 되는 사방팔방이 확 트인 광활한 풀밭에 우리가 서 있다. “젊어지라 복받은 대지여” 라고 엄청나게 큰 글씨를 보고서야 우리가 드디어 목장에 온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 글자는 꽤 먼 거리인데도 내 사진기로서는 한 장에 잡을 수가 없어서 두 장으로 찍어야만 했다.
이렇게 수만 년 묵었던 세포지구에 대한 종합적인 개발이 김정은 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12년 9월 22일에 세포등판 건설명령이 내려졌다.
성산리에 맨 먼저 종합지령실을 건설하고 5만 정보 전역을 작은 필지로 나누어 관리한다. 각 지역별 온도, 전염병, 풀 건강상태 등을 살핀다. 세포는 염소 방목이 주가 될 것인데 공사가 완성되면 50만 마리를 방목하게 된다.
▲ “젊어지라 복 받은 대지여” 커다란 돌덩이가 모여서 글이 되었다.
▲ “젊어지라 복 받은 대지여”
자주 등장하는 돌격대란 말이 군사작전 용어이지만 북에서는 수력발전소건설, 물길공사, 간척지공사와 같은 험난한 대자연개조공사나 려명거리건설과 같은 대규모 건설공사장에서는 언제나 가장 위험한 작업을 군인 건설자들이 맡아서 하고 그 뒤에 돌격대가 따라간다.
세포등판 건설명령이 하달된 날인 9월 22일을 따서 만든 922돌격대가 전국의 각 도시군 직장별로 편성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국가 과학원 김책공업전문대학 김일성종합대학 등에서 나온 전문가 조직인 2월17일 과학자기술자돌격대는 종전부터 따로 있던 전문분야 조직이다. 세포등판 축산기지의 과학기술적 문제를 담당할 2월17일 과학자기술자돌격대원 50명이 상주할 고급건물이 성산리에 한창 건축 중이다.
인공풀밭 조성작업은 다 끝났는데 아직은 맨흙이 보이는 곳도 있고 이제 막 풀싹이 올라오고 있는 곳도 있다. 여기저기 건물 공사가 한창이었다. 성산리 일대는 짐승들도 많이 보이지 않았고 염소는 이미 방목공이 풀이 무성한 곳으로 몰고 가 이동한 뒤였다. 빈 우리와 길바닥에 깔린 윤기 있는 염소똥 더미만 보고 다음 일정을 계속했다. 염소와 상면은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만 했다.
세포등판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작업은 5만 정보 구석구석의 필지별 토양분석 자료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 자료에 근거하여 제일 먼저 소석회와 탄재 흙보산 비료 같은 유기질비료를 준비했다. 그리고 평강에 큰 소석회 생산공장을 세우고 후민산 비료생산기지도 세워서 토양의 영양물질함량을 결정적으로 늘리기 위한 작업을 우선 했다. 그 뒤에 방목공 살림집들과 학교, 집짐승우리, 인공수정시설, 수의방역시설, 축산학연구소, 축산물 및 먹이가공기지 등 수천 동의 건설을 시작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고 노래했던 유명한 가수 남진이 있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 둘만의 보금자리를 노래했는데 여기 세포에서는 수만 명의 군인들과 돌격대가 하나같이 손잡고 대자연개조를 통한 미래를 그리며 우렁차게 노래하고 있다. 세포축산기지에서는 필요한 물과 전기도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자립자강의 당정책은 각 지방의 말단 단위들에서도 원칙으로 밀어나가고 있다.
▲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풍력양수기
▲ 풍력양수기로 퍼올인 물을 담는 저류지들. 2층집은 염소우리이고 단층집은 방목공 살림집
필요한 물은 옆에 흐르는 개울물을 이용하고 개울물이 안 닿는 곳은 풍력양수기로 지하수를 뽑아 저류지에 저장한다. 전력은 중형 수력발전소가 완공되면 국가전력을 쓰지 않고 자체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 트랙터만 빼고 자체제작한 풀밭 조성용 기구들이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다.
농기구들도 자체적으로 제작해서 쓰고 있다. 70년 계속되고 있는 제재 극복 수단으로서만 자력자강이 아니고, 항일빨치산 시기부터 자기 힘만을 믿고 나아갈 때에 반드시 승리한다는 귀중한 경험이 있기에 북의 자력자강 정책은 제재가 해제된 이후에도 당정책으로서 변하지 않고 집행될 것이라고 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바탕을 두고 무한 경쟁 속에서 승리한 독점적 기업만이 생존하는 체제가 아니고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실험하고 있는 나라가 조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세포등판 대자연개조의 1단계는 2017년 10월 27일에 완성되었다. 수수 천년 잠자던 갈대밭이 기름진 풀밭이 되고 동양 최대의 종합축산기지로 다시 태어났다. 후천개벽이 일어났다.
동영상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한다. “150만 년 전에 솟구쳐 올라온 자연 화산은 이 땅을 불모의 땅으로 바꿨지만 김정은시대에 터져 오른 애국의 활화산은 어떻게 대지를 천지개벽시켰는지를 머지않아 세계는 볼 것이다.”
집짐승우리들마다에서 닭, 오리, 돼지의 배설물이 흘러나온다. 닭, 오리 배설물은 쓰레기가 아니고 발효시키면 훌륭한 돼지사료가 된다.
애국풀, 단백먹이풀은 물론 콩짚, 강냉이 짚과 같은 짐승이 먹을 수 없는 거친 재료도 토착미생물과 함께 발효하면 맛있는 집짐승 먹이가 된다. 알곡먹이를 대폭 절약하게 된다. 돼지 배설물은 유기농비료의 원천이 되고 유기농비료는 또 다른 진거름 퇴비, 흙보산비료와 함께 땅을 기름지게 만들고 있다. 유기농복합비료는 화학비료의 흡수능력을 높여서 적은 양의 화학비료만으로도 큰 효과를 보기에 화학비료 사용량을 대폭 줄일 수 있게 된다.
5만 정보 풀밭에 염소 50만 마리와 닭, 오리와 돼지, 소로 넘실거릴 것이다. 평강군에 자동화된 대형 고기가공공장과 짐승사료가공공장이 이미 작업중에 있다. 질이 높은 햄 통조림, 소세지, 요구르트, 산유, 우유, 치즈, 빠다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풀을 고기로 바꾸려는 당 정책을 실현하는 현장이다. 고리형순환생산체계에 의한 농축산방법을 전국으로 파급하는 본보기 공장이 되고 있다.
▲ 우리당 염소 250마리 수용. 낮에는 방목장으로 나가서 비어있다. 창이 없는 윗 층은 건초창고
▲ 젖산발효 풀저림칸. 두터운 시멘트벽 흙을 높이 쌓아서 보온한다. 이제 건설 중이다.
▲ 짐승 우리에서 배설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게 설계한 메탄가스탱크
▲ 3층 건물은 2.17돌격대 과학자기술자50명이 상주할 살림집
https://youtu.be/mhBBHrPCVBU 이 것을 딸각 눌러 보세요.
위 동영상은 세포지구의 천지개벽을 노래한다. 소요시간이 20분이다. 세포읍에 거주하는 81세인 양 옥희 할머니의 구수한 역사해설부터 돌격대 형성 과정과 건설현장에서 돌격대원들의 삶과 생각과 결의를 보여주는 좋은 동영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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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윤 대표. ⓒ프레시안
▲ 고 김용균 씨 유품. ⓒ공공운수노조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노동자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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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3 17: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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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공개 ‘로힝야 학살 보고서’
수백명 난민들 심층 인터뷰 통해 세계 첫 마을 단위 종합·분석 작업
미얀마 정부의 조직적 범죄 증거로
로힝야 여성이 지난해 6월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서 집단학살을 증언하다 괴로워하고 있다. 이 여성이 살던 미얀마 라카인주 북부의 쿠텐콱 마을에선 최소 148명의 로힝야 주민이 미얀마 군인들에게 숨졌다. 10세 미만 희생자도 33명으로 추산됐다. ⓒ조진섭
2017년 8월25일 오전 3시쯤 빗소리에 섞인 총성을 처음 들었다. 미얀마 서쪽 라카인주 북부의 로힝야족 거주지 쿠텐콱 마을 주민 안다르(60·가명)는 딸에게 말했다.
“군인들이 여자에겐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남자들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모두 마을을 떠나면 저들(군인)이 집을 불태울 테니, 일단 남자들은 도망가고, 여자들은 집을 지키는 게 나을지도 몰라.”
안다르는 딸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아들과 함께 마을 동쪽 숲으로 도망쳤다. 몸을 피한 뒤 멀찍이서 마을을 바라봤다. 마을 남쪽에서부터 군인들이 몰려왔다. 군인 400~500명은 초록색 군복을 입었다. 카키색 복장의 경찰도 보였다. 군인들은 총알을 퍼부었다. 총성이 멈추지 않았다. 그때 안다르의 딸, 손자, 아내가 죽었다.
쿠텐콱 마을뿐이 아니었다. 2017년 8월 말, 미얀마 소수민족인 로힝야가 모여 사는 라카인주 북부 마을 곳곳에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총성이 울린 마을에선 주민들이 자취를 감췄다.
살아남은 사람 중 돌아온 이들은 없다. 삶을 일구던 마을을 떠난 로힝야는 지금까지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 머물고 있다. 모두 미얀마 정부와 군대, 이슬람교도인 로힝야를 탄압하는 불교도들을 피해 마을을 떠났다.
유엔 자료를 보면, 로힝야 난민은 8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지금도 매달 수천명이 미얀마 정부의 핍박을 피해 국경을 넘고 있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의 ‘로힝야 학살 보고서’는 온통 핏빛으로 얼룩져 있다. 학살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로힝야 난민들은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학살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어머니는 안고 있던 젖먹이를 빼앗겨도 막지 못했다며 울먹였고, 숲속에 피신한 주민들은 이웃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학살 보고서는 로힝야에 대한 체계적인 심층 인터뷰를 담았다. 로힝야 학살을 마을 단위로 종합·분석한 작업은 세계적으로도 처음이다.
■ “우리는 정의를 원한다”
로힝야 학살 보고서 - 마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2017년 9월13일, 나프강을 건너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로힝야 난민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많은 로힝야 주민들이 미얀마 군인의 학살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작정 인근 방글라데시로 넘어왔다. EPA연합뉴스
지옥에서 탈출한 사람들
2017년 8월 미얀마 정부군 습격
로힝야 마을 400여곳서 학살 자행
목숨 걸고 방글라데시로 피란
학살 명분은 ‘테러리스트 토벌’이다. 2017년 8월25일, 로힝야 반군인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이 미얀마 경찰 초소와 군영 등 30여곳을 습격했다고 알려진 뒤 미얀마 정부의 군사작전이 시작됐다. 대테러 작전이라던 군사행동은 민간인들이 살던 로힝야 마을 약 400곳에서 집단학살과 방화·강간·약탈로 이어졌다.
아디는 2017년부터 난민캠프에 거주 중인 로힝야들을 출신 마을별로 분류한 뒤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경향신문은 아디가 지난해 12월 우선 제작한 인딘·돈팩·춧핀·쿠텐콱·뚤라똘리 등 5개 마을의 학살 보고서를 입수해 분석했다. 아디와의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5개 마을 출신 203명이다. 아디는 심층 인터뷰에다 광범위한 설문조사를 진행해 학살 피해 상황을 통계화했다. 그 결과 마을별로 80% 이상의 주민들이 직계가족의 사망을 경험했고, 학살 피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디는 올해 15개 마을의 학살 보고서를 순차적으로 제작해 발표한다. 이 프로젝트는 내년까지 이어진다. 인터뷰를 완료한 로힝야 난민은 780여명이다. 이들의 인터뷰가 담긴 보고서는 학살 증거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출된다.
■ 동시다발적 군사작전, 조직적 집단학살
쿠텐콱 마을에 총성이 울린 2017년 8월25일 미얀마 라카인주 서북부 해안마을 인딘에도 포탄이 잇따라 떨어졌다. 아이를 안고 있던 한 남성은 폭격을 피해 달렸다. 나무로 만든 가옥에 포탄이 떨어지면 불이 붙었다. 한가로이 돌아다니던 닭들도 도망가기 시작했다. 길옆으로 포탄이 떨어졌다. 아이들이 타오르는 불길 사이를 소리치며 뛰었다. 뛰지 않으면 죽었다.
인딘마을 주민인 50대 여성 하디마(가명)는 이날 남편을 잃었다. 하디마는 소에 풀을 먹이던 남편을 집에서 바라봤다. 군인이 갑자기 마을에 몰려오자 남편은 숲속으로 피했다. 결국 붙잡힌 남편은 군인들 앞에 섰다. 군인들이 남편을 발로 차 쓰러트리고는 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렸다. 그리고 머리에 총을 쐈다. 군인들에게 섞여 있던 라카인주 민간인이 총에 맞은 남편에게 칼을 휘둘렀다. 다리를 잡아 뒤집어 보더니 죽은 것을 확인했다. 군인들은 남편 시신을 강에 던졌다. 하디마는 “남편을 구할 수 없었다”고 자책했다.
이날 인딘마을에서 죽은 이들은 모두 147명으로 추산된다. 사망자 중 33명은 18세 이하였고, 90세가 넘는 노인도 1명 포함됐다.
보고서에는 미얀마 군대와 경찰, 소수민족 탄압에 가담한 수많은 라카인주 출신 민간인들이 저지른 잔혹한 학살도 담겨 있다. 로힝야 마을 400여곳에서 며칠 사이 이뤄진 학살은 패턴으로 나타났다. 이른 오전 군경이 로힝야 마을을 사방에서 포위한다. 마을로 들이닥쳐 민가를 수색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인다. 학살이 끝나면 민가를 태우고 약탈한다. 학살자들은 시신은 땅을 파서 묻기도 했지만 대부분 내다 버렸다. 마을은 폐허가 됐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학살을 피해 수일에 걸쳐 맨발로 국경을 넘었다.
아디가 제작한 ‘로힝야 보고서 - 춧핀’ 표지.
■ 최악의 군사작전 벌어진 뚤라똘리 마을
2017년 8월30일 오전 8시, 라카인주 북부의 마웅도 지역 뚤라똘리 마을 상공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마을 북쪽에서부터 이어진 강이 뚤라똘리 마을을 감싸듯 동쪽과 남쪽으로 흐른다. 마을 북동쪽 강변 백사장을 두고 사람들은 ‘데저트’라고 불렀다. 이날 데저트에는 1500~2000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마을행정관이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도망가지 말고 데저트로 가면 안전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 군인 공격을 피해 뚤라똘리 마을로 피신해 온 이웃마을 와이꽁과 디오똘리의 주민도 데저트로 갔다. 하지만 데저트에는 곧 총알이 쏟아졌다. 눈치 빠른 이들이 먼저 강에 뛰어들어 도망갔다. 수영할 줄 모르거나 아이를 돌봐야 했던 주민들은 꼼짝할 수 없었다.
무사히 강을 건넌 주민들은 많지 않았다. 물가에 아이들 시신이 떠다녔다. 젊은 남자들이 머리가 터져 죽은 갓난아이 시신을 물가로 건져냈다. 물가에 시신이 늘어섰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어리둥절했다. 강을 건넌 주민들은 서둘러 물가를 빠져나왔다. 살아남은 이들은 강 건너 마을에서 벌어진 살육을 목격했다.
뚤라똘리 마을주민 마리즈(30·가명)는 이날 목숨을 건졌지만, 생후 2년6개월 된 아이를 잃었다. “어떤 아기들은 총에 맞아 죽었고, 칼에 찔리거나 강에 빠져 죽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군인이 제 아기를 빼앗아가 (시신을 태우기 위해 파둔) 불구덩이에 던져버렸습니다.” 아이를 죽인 뒤 군인들은 5~6명씩 여성들을 민가로 끌고가 성폭행했다.
지옥을 증언하는 사람들
인딘·돈팩 등 5개 마을 출신 203명
진술로 확인된 사망자만 1265명
80% 이상 “직계가족의 죽음 경험”
로힝야에 대한 학살이 가장 대규모로 벌어진 곳은 뚤라똘리 마을이었다. 아디는 뚤라똘리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을 “미얀마 군부가 주도한 군사작전 중 최악의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 마을 주민 증언을 종합해 아디가 내놓은 사망자 숫자는 451명이다. 여성이 248명, 18세 이하 청소년과 아동은 251명이다. 이 중 10세 이하 아동이 169명으로 전체 사망자 중 37%를 차지했다. 이마저도 최소치의 추산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을을 떠난 로힝야 사람들은 며칠씩 걸어 국경을 넘었다. 음식과 물이 없어 피란 중에도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돈팩 마을에 살던 에나울라(20·가명)는 총탄에 맞아 부상당한 뒤 방글라데시로 피신을 가기로 했다. 숲속을 나흘 동안 걸었다. 가족들이 에나울라를 부축했다. 그는 “강가를 지날 때 물 위에 시신들이 떠다녔다”고 했다.
같은 마을 주민 나빌라(44·가명)도 고향을 떠나기 싫었지만, 이웃마을에서 학살이 벌어지자 피란을 결정했다. 도망가는 동안 먹을 게 없었다. 나빌라는 “아직도 피란 가며 느꼈던 슬픔과 어려움이 생각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숲속을 걸을 때 피 흘리는 로힝야들과 시신이 보였다. 국경을 완전히 넘기 위해선 배를 얻어 타야 했지만, 그와 가족들은 빈털터리였다. 나빌라는 “돈이 없어 몸에 있는 모든 장신구를 뱃사공에게 줬다”고 했다.
그들은 왜 우리를 죽였나
보복 두렵지만 증언 결심한 건
국제사회의 ‘정의’를 원하기 때문
내년까지 보고서 완성해 ICC 제출
아디 인터뷰에 응한 로힝야 피해자들은 난민캠프에 거주하면서도 자신의 신원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했다. 혹시 모를 불이익을 겪게 될까, 자신의 신원이 드러나 고향에 돌아가서도 보복을 당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아디와의 인터뷰에 응한 건 자신들의 증언이 로힝야에게 벌어진 학살을 고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층 인터뷰에 응한 로힝야 피해자들은 “국제사회에 말하고 싶은 것”을 묻는 질문에 하나같이 “정의를 원한다”고 했다. 뚤라똘리 마을의 한 30대 여성은 “내가 살던 집과 정의를 되찾길 원한다. 왜 이런 폭행을 당해야만 했고, 그들은 우리를 왜 죽였을까. 국제사회의 정의를 원한다”고 말했다. 다른 남성은 “내 부모를 죽이고 아내와 여동생을 성폭행하고,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빼앗아간 데 대한 정의를 원한다”고 했다.
학살이 벌어진 지 이미 500일이 지났다. 정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방글라데시 난민촌 로힝야족이 직접 인터뷰…
6~10명 조사관, 현지서 보고서 작성법 교육받고 법적 효력 갖는 증언·증거 수집 ‘총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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