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초등, 중등 {우리교육} 2006년 11월호

 

못다 이룬 꿈의 귀환

 

양돌규

 

선생님, 늦은 시각입니다. 한낮의 삶의 열기도 모두 잠들어 사위가 적요합니다. 글줄 따위로 선생님께 안부를 여쭙는 제자를 용서해주십시오. 여전히 강건하신지 궁금하기도 하고 뵙고도 싶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때는 중학교 때였던 1987년이었지요. 벌써 19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선생님은 저희 학교에서 유일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사협의회 소속 선생님이셨습니다. 물론 저는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아이들이 말하기를, “운동권 학생이 우리 학교에 선생으로 왔댄다”고 했지요. 그래서 저는 무슨 대단히 강퍅한 투사형으로 상상했더랬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뵙고 나니 예상했던 모습과는 딴판인 모습이셨습니다. 틈만 나면 아이들을 두들겨 패던 늙수그레한 선생들 틈에서 갓 부임한 선생님의 이윽한 자태는 작약 같은 아취를 물큰 풍기셨답니다. 그래서였나봅니다. 중3이 되고 나서 선생님께서 처음 담임을 맡은 1학년 교실에 틈만 나면 찾아가게 되었지요. 친구 준희와 함께 말입니다. 이것저것 처음이라 서투신 담임 업무를 저희가 도왔었지요. 다부지게 일을 돕던 선생님 학급 반장이던 웅숭깊은 대병이도 기억납니다. 다른 아이들도 1학년답게 잘 익은 밤톨처럼 개구졌지만 선생님은 웃으며 환경미화를 하셨고 집으로 돌아가는 언덕 아래 길가에서 떡볶이를 사주시곤 하셨지요.


이듬해 고등학생이 된 1989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출범했습니다. 그리고 곧 노태우 정권은 선생님들을 거리로 내쫓았지요. 1,500여 명의 해직교사 명단을 짚으며 선생님도 끼어 있는지 확인해 보았지요. 물론 선생님은 명단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누나와 동생이 졸업한 중학교,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도 우리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평판 좋던 선생님들도 죄다 선생님처럼 해직교사가 되셨지요. 저희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신 선생님들. 그리고 우리의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았던 노태우 정권.


여름방학 때, 혹여나 선생님을 뵐 수 있을까 해서 명동성당에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명동성당에서는 전교조를 지키기 위해서 선생님들이 단식농성을 하고 계셨지요. 탄압 같은 불볕더위 가운데서도 헐쑥해진 선생님들은 찾아오는 제자들을 반갑게 맞이하셨지요.


그 여름은 20여 년이 지났지만 제 기억 속에서 찬연하게 그리고 삼엄하게 남아 있답니다. 어쩌면 선생님들은 그렇게 우듬지처럼 높고도 높았던지. 아마도 전교조 선생님들의 그 모습 때문에 그리도 많은 학생들이 나섰겠지요. 전교조를 지키고 참교육을 지지하며, 그리고 학생자치활동 보장과 학생탄압 분쇄를 주장하며 50만 명의 학생들이 싸움에 나섰지요. 그리고 그 싸움 한 가운데서 마주한 선생님들은 차라리 친구셨고 동지셨으며 먼 길을 함께 걷는 도반(道伴)이셨습니다. 그 싸움은 저희들의 싸움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건 정말 저희들의 싸움이기도 했지요. 이미 1987년부터 중고등학생들 사이에는 광범하게 소모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보다 힘이 있는 학교에서는 학교를 바꿔내기 위한 작은 싸움들을 벌여나가기 시작했지요. 보충수업, 자율학습 폐지, 자살학생 추모, 두발제한 폐지, 동아리 합법화, 학생회 등 학생자치활동 보장. 파주여종고, 정화여상 등의 학교들에서는 짧게는 몇 십일, 길게는 삼백일이 넘도록 사립학교 비리척결을 내걸고 선생님들과 함께 싸우기도 했었지요. 중고등학생운동의 그 흐름은 1989년 전교조에 이르러 선생님들의 교육민주화운동과 실천적으로 함께 했었던 것이죠. 선생님들의 해직에 맞서 학생들은 운동장 시위, 농성, 거리진출, 혈서, 동조단식, 징계위 저지, 삭발등교, 투신, 연대집회 등을 감행했지요. 5월부터 10월까지, 한국의 학교는 온통 뒤흔들렸습니다. 이에 놀란 문교부, 시도교육위원회, 심지어 치안본부까지 나서 고등학생들의 지역별 조직 실태, 대표 및 핵심인물의 인적사항, 각 조직의 가입학교 및 활동상황을 파악하는 데 나섰고, 언론을 통해서 전교조가 학생들을 좌경의식화 했다고 매도했지요. 그래도 학생들은 꿋꿋했고 광주에서는 2만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가두집회를 가지기도 하고 광주, 부산, 마산․창원에서 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가 만들어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그 많던 전교조 선생님들은 다 어디로 가셨나요? 1,500여 명의 해직 교사들과 1만여 명이 넘던 조합원들은 모두 어디로 가셨나요? 우리가 ‘민주교사’라고 부르던 선생님들은 이제 정말 찾아볼 수 없는 건가요? 조합원 9만 명에 달하는 전교조가 있는데, 서너 분 중에 한 분은 전교조 선생님인데, 전교조가 예전처럼 불법단체가 아니라 교육부와 단체교섭도 하는 합법화된 노조인데, 왜 학교는 달라진 것이 없나요?


올해 서울 동성고등학교 오병헌 씨가 ‘빼앗긴 인권을 돌려주십시오’라고 쓰여진 피켓을 들고 1인 시위에 나선 일이 있었지요. 두발규정 폐지, 비상식적인 징계 금지, 강제 0교시와 보충․자율학습 폐지 등과 같은 요구를 아직도 해야 한다는 현실이 우습더군요. 그런데 20여 년이 더 지난 요구를 했다는 이유로 학교 측은 오병헌 씨에게 복장용의규정 불이행, 징계 거부, 교사의 정당한 지도 불응, 허위사실과 허락받지 않은 사실 유포, 학생 선동과 질서 문란 등의 사유를 들어 학교징계위원회에서 특별교육이수 결정을 내렸지요. 저는 여기까지도 깜짝 놀라지 않았습니다. 제가 깜짝 놀란 건 전교조 동성고 분회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였습니다.


1,500여 명의 해직에 50만 명이 함께 연대했던 1989년으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 1명의 징계에 전교조 9만 조합원이 침묵하는 상황은 제게 너무나도 큰 좌절감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전교조가 동성고 오병헌 대책위원회에도 결합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선생님들이 오병헌 씨의 투쟁에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것 역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올해 정기국회에서 학생인권법 통과를 위해 전교조 주도로 ‘아이들 살리기 운동본부’가 만들어져 활동중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정작 문제는 만약 선생님들이 계신 학교에서 동성고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전교조 분회 조합원들이 함께 행동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9만 조합원은 허수(虛數)가 아닌가요? 학생인권법이 통과되더라도 오병헌 씨가 여전히 징계를 받는다면 그 법은 제정과 동시에 사문화되는 것 아닌가요?


평교사협의회, 그리고 전교조 출범 초기 시절, 각 학교에서 중고등학생들이 소모임, 동아리, 학생회 활동을 할 때 선생님들이 든든한 지원을 하셨던 걸 저희는 기억합니다. 전교조 지회 사무실은 학교가 인정하지 않았던 학교와 지역 소모임들의 장소를 제공했고 늘상 따뜻한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셨지요. 또 학교에서 탄압이라도 할라치면 전교조 본조, 지부, 지회에 있던 학생사업국 담당 선생님들이 해당 학교에 항의하고 각 학교 교무회의에서도 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셨지요. 그때처럼 지금도 학생들에게는 당장 학교에서의 구체적인 연대,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학교 현장을 실제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도이니까요. 학교를 바꿔내기 위해 전교조가 노동조합으로 출범했던 것이 아니었나요. 지회가 그리고 분회가 움직여야 합니다.


근래 전교조의 전망과 관련하여 교육운동과 노동조합운동 사이의 긴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각각의 노선이 오랜 역사적 연원이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대립은 허구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비단 저뿐만이 아닐 듯싶습니다. 교육노동, 그것이 전교조의 뿌리인 한, 그리고 그 교육노동이 청소년들과의 직접적인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한, 청소년들의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유리된 그 어떤 교육노동운동도 허구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블랭킷 에어리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방송에서 난시청 지역을 뜻하는 말인데 2개의 방송국에서 보내는 전파가 겹쳐 어느 쪽의 방송도 시청할 수 없는 지역을 뜻한다 합니다. 청소년들이 놓여져 있는 지역이 혹 난시청지역이 아닐까요? 과거 민주화운동 시절의 그 젊고 패기 넘치던 교육운동적 신념에 가득찬 교사들이 보내는 타전도, 신자유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조합 전교조의 타전도 청소년들에게는 와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 전파를 안 쏜 것 아닐까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또 설령 도착하더라도 그 타전이 가슴 하나 울리지 못하는 타전이라면, 우리 운동은 연대의 공명을 울릴 수 없게 되겠지요.


올해 들어 힘차게 터져 나오는 청소년인권운동의 함성은 지난 8~90년대 못다 이룬 꿈의 귀환입니다. 마치 1987년 789노동자대투쟁 때 울산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내걸었던 것과 같은 구호, “두발 제한 철폐”의 구호를 들고, 청소년들은 해맑게 싸워나갑니다. 그건 지난 80년대, 그리고 90년대 고등학생운동이 그리고 9만 조합원의 전교조 17년 역사가 해내지 못한 과제입니다. 그건 단지 머리카락 길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고자 하는 인간들의 자유로운 운동 그 자체입니다. 그 운동의, 싸움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전교조 선생님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1989년 학생들이 보여준 연대의 함성에 대한 실천적 화답인 동시에 교육노동에 근거한 연대의 정신이 살아 있는 노동조합운동이겠지요.


가을이 깊어갑니다. 선생님의 건강, 그리고 활력있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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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6 13:59 2006/11/16 13:59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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