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선 없는 실무와 실무 없는 노선

 

{노동해방문학}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김진주는 한승호라는 필명으로 '노선 없는 실무'가 주도하는 전국회의의 경향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십수 년이 지난 후, 다시 월간 {노동해방문학}을 펼쳐보면서 나는 그네들의 '실무력'에 새삼 감탄한다.

 

{노동해방문학}이 창간했던 시점은 1989년이다. 민주노조운동의 거대한 파고가 가장 정점에 섰던 시점이 1989년이었다. 1989년은 그야말로 어떤 공세기와 퇴조기를 가르는 분기점으로서 노동조합 조직률도 최고였고, 파업 건수, 노동조합수 등 모든 면에서 그 이후와 대별되는, 1987년 789노동자대투쟁의 직접적인 영향 속에 있었던 해였다. 이 파고를 잠재우기 위해 1989년부터 노태우 정권은 가혹한 탄압을 진행하였는데, 이는 사회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몇 가지 사건들만 떠올려도 참 엄청난 시련의 시기였다. 전교조 출범과 1500명의 해직, 지하철노동조합의 파업, 현대중공업 128일 투쟁, 문익환-임수경의 방북, 학생들의 평양축전 참가투쟁. 그해, 1989년은 아와 피아, 이쪽과 저쪽, 왼쪽과 오른쪽... 아무튼지간에 무지하게 싸움이 진행되었던 해였던 것이다. 그리고 1990년 1월 22일, 전노협이 출범하고 3당야합이 선언되면서 일정하게 그 힘의 무게는 한쪽으로 쏠리게 된 듯하다.

 

{노동해방문학}을 보면서 느끼는 '실무력'에 대한 감탄은 다른 것이 아니다. 어쩜 이렇게 책을 잘 만들어냈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는 PC나 매킨토시로 작업하던 때가 아니라, 모눈종이에 대지작업을 해서 잡지를 만들어내던 때였다. 그런데 마치 맥에서 퀔으로 레이아웃 잡은 것처럼 좌우 리드선이 딱딱 들어맞는 것이 놀랍다. 내지 디자인도 디자인이거니와 표지 디자인도 감탄사 터지게 한다. 스탠드 켜놓고 얼마나 오리고 붙이고를 반복했으면 그런 정도의 숙련이 생겼을지. 문장의 교정, 교열도 그렇다. 없지는 않지만 많지도 않다. 월간지임을 감안하면 그 점은 더욱 놀랍다. 아무리 최신식으로 집필했다 하더라도 대우전자 르모2, 혹은 IBM AT의 보석글 따위로 작성했을 글줄이 정연하다. 나는 그것이 '실무력'이 아닐까 한다.



뭐, {노동해방문학}이 당시 최고의 편집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 말할 수는 없을 거다. 이미 1988년 5월 15일에 창간한 한겨레신문이 CTS 형태의 조판을 했으니, 쟤네 쪽 매체들이 보유하고 있는 장비나 시스템은 훨씬 선진적이었을 거다.

 

그러나 문제는, 그 '최신식'의 기술적 발전을 적어도 아-이쪽-왼쪽은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정도로 보유하고자 했고, 기술적인 능력을 습득하고 숙련하려고 하였으며 또 그에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성과를 냈다.

 

그건 {노동해방문학}만 그랬던 게 아니었다. 사료들을 정리하다가 보면, 등사기를 밀어 유인물을 찍어내던 때로부터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대량 복사를 하다가, 마스터로 찍고, 아예 인쇄소를 차리기도 하는, 그런 식의 진보가 1980년대의 사료에 그대로 나타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실 1980년에는 등사기도 최신식이었을 거고, 1980년대 중반에는 마스터도 최신 기술이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이후 매킨토시를 사용한 것도 꽤나 빠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다. 러시아에서 소위 정치신문이 조직화의 매개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가장 선진적인 조판 기술을 갖고 있던 인쇄 노동자들과 가장 선진적인 교통수단을 담당하고 있던 철도 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에릭 리의 {인터넷과 노동운동}(한울)이라는 책이 이야기하고 있는 논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노동해방문학}도 아니고 1989년도 아니고 매킨토시도 아니다. {노동해방문학}이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하더라도 요즘 사보나 패션잡지에 비할 바는 아니다. 시대적 한계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라는 얘기다.

 

'노선 없는 실무'를 비판하던 쪽의 진심과 상관 없이 그래도 그때는 '실무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되든 안 되든 실무력을 높이기 위해 실무자들이 부단히 노력했던 시절이었다. 노동조합을 어떻게 만드는 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서류와 절차 등의 '실무'에 대해 설명해주던 해고자 활동가들이 있었기에 1987년 789도 있었다.

 

근데 요즘 환장하겠는 것은, J 계간지, R 월간지들 등을 볼 때, 혹은 한국의 한 내셔널센터 앞에 몇 주째 버젓이 내걸려 있는 플래카드에서 발견하는 오탈자이다.

 

J계간지의 편집위원인 C씨는 서울대 박사라는 양반인데, 글 써놓은 걸 보면 고등학교의 유능한 교지 편집자 만도 못한 수준의 문장을 쓴다. 비문, 오탈자 때문에 읽지도 못할 정도의 문장을 거의 뱉어놨다. 이게 한국의 monthly review 혹은 newleft review를 꿈꾸던 한 잡지의 현 상태이다. R 월간지도 그 모양 그 꼴이다. 최소한 단 1번의 교정조차 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건 차라리 낫다. 자기 건물 앞에 내걸어놓은 플래카드가 '자주와 평등을 실현하겠읍니다'로 표기되어 있으면 누군가는 얘기해서 고쳐 달아야 하는 거 아닌가? 80년대 맞춤법 개정 이전 시대의 '자주와 평등' 상태로 실현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자기 건물 마빡에 그런 플래카드를 몇 주째 걸어놓다니.

 

 

오탈자, 그건 사실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출판사 편집자들의 직업병인 편집증세가 아니라면, 그건 눈에 잘 띄지도 않으니까. 문제는 그건 '실무 없는 노선'의 한 증세라는 것 때문이다.

 

난 J계간지의 C씨를 두고 "서울대씩이나 나온 인간이 맞춤법, 띄어쓰기도 제대로 못해서야 되겠냐? 국어공부부터 다시 해라"라는 식의 말을 내뱉는 그 어떤 국어학자들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 모두가 맞춤법, 띄어쓰기를 다 잘해야 된다!고 주장할 의사는 추호도 없다. 그딴 건 틀려도 된다. 그런 거 신경쓸 여유가 있으면 더 신경써야 할 게 어디 한두 가지인가. 문제는, C씨가 맞춤법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책임편집자가 그걸 다 잡으면 되는 거다. 근데 그게 안 되는 시스템이다. 그게 문제다. J계간지가 어디 초교, 재교 안 본다는 것만 문제였나. 편집도 참... 신경 안 쓴다. 원고 메일로 받아서 아래한글에 쫙 깔아놓고 페이지만 나눠서 찍는 것 같다. R 월간지도 그렇다. 편집을 그 따위로 할 거면, 왜 매킨토시 갖고 편집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잘 하려고 퀔 갖고 편집하는 거 아니었나? 근데 아래한글로 한 것 만큼의 수준도 못 만든다. 차라리 교회 학생회 따위의 주보가 더 예쁘고 앙증맞다.

 

물론 그게 안 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모 내셔널센터는 문제가 다르지만) 내가 알기로 J계간지에서 편집을 맡아서 하는 사람은 1명이다. 1명이 회의 일정 잡고, 필자 청탁하고, 전화 독촉하고, 원고 받아서 편집하고, 표지는 기획사한테 얘기해서 시안 만들어지면 검토하고, ok사인 내리고... 그래야 계간지 1권이 나온다. 그러니 그 1인 시스템의 고단함 앞에 마주하면, 나던 화도 가라앉는다.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유인물 한 장이 나오기 위해서도 누군가는 밤을 지새웠어야 할 터이다. 이런 계간지 하나, 월간지 하나에도 그렇겠지. 때론 '볼 게 없다'며 욕도 하고 그러지만, 그래도 수고는 수고다. 하지만 수고로움만 갖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노선 없는 실무'가 주도한다고 욕하던 시절이 '실무 없는 노선'의 시대가 되었다. 이 '노선'도 그 시절의 그 '노선'과 범주가 같은 것이 아닐 터이다. 참, 뭐 그리 없는 게 많은지.

 

그놈의 실무력이 없어서, 몇백, 몇천만 원씩 까먹지를 않나, 부동산 계약 하나 제대로 못하질 않나, 신고 하나 하면 아낄 수 있는 돈을 까먹질 않나. 헛참. 그 돈으로 매킨토시 100대쯤 사서 1단체 1개씩 나눠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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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9 19:52 2006/11/19 19:52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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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1/19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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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할 이야긴 아니지만,,, L 주간지의 오탈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쩝...
  2. 2006/11/21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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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왠지 술을 마시면서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고 싶군.
  3. 2006/11/26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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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윽 C 인터넷 매체도 다르지 않아오. 나두 겁나넹
  4. 2006/11/28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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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서 반가웠다는 얘기를, 이 게시물의 덧글로 하고 싶었어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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