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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 지금내리실역은 용산참사역...

30년이 훨 지난 지금, 여전히 우린 난쏘공의 세계에 살고 있다. 아니, 그 보다 더 끔찍한 세상에 말이다.

 

나에게 재개발과 관련된 기억들은 별로 없다. 농촌에 살았지만 그다지 넉넉한 형편도 아니요, 어린 나이에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일매일 농사지으며 고생하는 것은 쭉 봐와서 그런지. 약간의 의미는 알 것 같다. 피폐해지고 삶이 주눅들고 무관심과 냉대..등등

 

농사짓는 땅들이 국립복덕방(주공, 토공 등)에 수용되고 이주비를 받은 것..내가 받은 것은 아니고 부모님께서 받은 것이지만, 그것이 나의 간접적 경험이다. 첨부터 땅, 토지, 집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저 농사짓는 땅은 계속 농사를 짓도록 하지, 뭘 한다고 아파트를 짓나 싶을 정도였다. 부족한 것도 아닌데..

 

처음, 촌으로 와서 국립복덕방에 수용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동네사람들이  은근히들 반대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막상, 일들이 진행되자 반대하는 사람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수용해야지 별 도리 없다가 우세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이 나서서 값을 더 받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긴 마찬가지지만 그것은 수용을 전제한 부분적 반대였다. 촌사람들의 순박함인지, 아니면 정권이 하는데로 그냥 따라가는 것이 몸에 베어서 그런지, 잘 모르지만....하여튼 싱겁게 끝났다.

 

그리고, 목격한 것은 뿔뿔이 흩어지는 마을공동체, 친지, 이웃들.... 내 경험은 세입자의 입장에서 철거민과 같은 처지는 아니었다. 재개발이지만 원주민이였던 관계로 별다른 마찰이나 갈등이 표면화되진 않았다. 물론 약간의 보상때문에 소소한 분노는 있었고 그로 인해 정든 삶터를 등진다는 것, 공동체가 해체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향수....용산이나 난쏘공처럼 격한 분노와 갈등은 아니었다.

 

요즘 사람들끼리, 모이면

촌으로 들어가서 살자며 땅, 살곳 등을 이야기한다. 주로 돈이고 땅값이고 목적에 맞는 땅을 고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장벽은 돈이다. 어쩌면 빚을 얻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 될 수도. 그러나 이러한 욕망들이 커지면, 미치고 환장하면 혹 재개발에 찬성하거나 쫒겨나는 사람들에 대해 무정해질까 두렵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땅(토지)을 소유한다는 것, 그것도 대규모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택을 소유한다는 것, 그것도 많이 가지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매달 임대료 내기도 빠듯하고, 월세내는 것도 버거운 내 삶.

돌이켜보면 내가 난쏘공이고 내가 지금 용산참사역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난, 그 중심에 있으면서 무관심했다.

1년간 내 일만 하고, 건성건성으로 용산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했는지도.

 

내일모레가 딱 1년째다.

 

2009년 1월 20일에서 2010년 1월 20일까지 용산의 역사는 그 기간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기 위해 나는 뭘 해야 할까. 용산이라는 공간, 1년이라는 시간속에 가두어선 안된다.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아울러 용산과 난쏘공은 분노와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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