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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9/01
    보르헤스(5)
    레니
  2. 2004/08/14
    만화잡지(8)
    레니
  3. 2004/07/31
    화씨 911, 마이클 무어
    레니
  4. 2004/07/31
    미야자키 하야오, 잃어가는 것들
    레니
  5. 2004/07/15
    허클베리핀, 남상아(2)
    레니
  6. 2004/07/13
    마그리뜨(4)
    레니

보르헤스

 

얼마전에야 이름도 거창한 보르헤스 "전집" 중 한권을 가까스로 다 읽었다. 내가 소설을 많이 읽는다고 절대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사람 소설은 읽어왔던 소설에 비해 좀 특이하다. 허구와 사실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놓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건 뭐 그렇다고 치자. 소설이란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고대 로마, 아랍, 중세 유럽, 당연하지만 남미를 오가며 역사적 사실에 구체적인 장소까지 들먹이며 주석이 페이지의 반을 차지하는 소설을 읽고 있자면, 하, 뻥 한 번 제대로 칠려고 이렇게까지 지적인 열정을 쏟아부어야 하나. 하는 약간은 허무한 생각이 든다. 뭐 그래도 재미있긴 재미있다.

 

보르헤스 "전집"(백과사전이냐)은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특이하다 생각한 것은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의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다. "불사"를 추구하는 사람("죽지 않는 사람들")이나 "절대적"인 동전("자이르"), 재규어의 무늬로 나타난 "신의 암호"("신의 글"), "알렙"("알렙") 등. 신비주의적인 소재로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일이 많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결국 이렇게 절대적인 가치들을 찾거나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결말은 항상 허무하다. 종종 비참해지기도 하고. 어쩌라구요...

 

그래서 그런지 아침마다 지하철에서 눈빠지게 보르헤스를 읽고 난 느낌은 그다지 깔끔하지가 못하다. 누구나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래도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절대적인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는데(그게 뭔지 설명하긴 아주아주 힘들지만), 보르헤스를 읽고 나니 뭔가 허무해 진다고나 할까나. 뭐 혼자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소설이 삶에 활력을 주는 경우는 아주아주 드무니까. 일단 재미있었다는 점에서는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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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잡지

jineeya (님을 붙이려니 너무 어색해요)의 "[허브] 잘되기를 부탁해!"에 대한 트랙백입니다.

 

여동생의 영향인지 순정만화를 많이 봅니다.

대부분 단행본으로 구해서 보긴 하는데

그 중 "윙크"라는 만화잡지만은 한 달에 두 번 꼬박꼬박 보고 있죠.

 

 

 

 

(흐흐, "궁"은 안 보는 만화이긴 합니다만...)



윙크에서 "사각사각"을 연재하던(지금은 끝났습니다만) 김나경이란 작가가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타이틀 페이지에 "만화를 당당하게 사서 볼 권리"라는

주제의 캠페인 배너(?)를 요.(하핫 무의미한 링크;;;)

이 캠페인의 주 타격 방향은 만화대여업소와 그 고객들(?) 입니다.

단행본이나 잡지를 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만화방에 가거나 / 대여점에서 빌려보거나 / 사서 보는 것인데,

만화를 사서 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경험적으로도 잘 알 수 있죠.

따라서 만화가에게 직접적인 수익(인세)이 돌아가는 구조를 방해하는 요인인

만화대여업소에 대해 직접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운동들이 넷상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대표적인 것이 반(Anti)청보법 운동과 함께 반(Anti)대여체제 운동을 하고 있는

"자유의 검은 리본"입니다.


 

 

이 논쟁은 mp3 및 소리바다에 대한 논쟁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지금와서 음반업계는 음반시장의 불황을 얘기하면서

대부분의 책임을 mp3 공유에 돌리고 있습니다.

이 얘기가 너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음악적 가치보다 상품적 가치를 더욱 중요하게 고려하고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여 음반을 팔아온 음반업계와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은

스스로 음악의 유통 구조를 허약하게 만들었고

지금 그 결과가 돌아온 것 뿐이죠.

 

그렇다면 만화시장에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을까요?

음... 저 자신도 대여업소를 통해 만화잡지를 빌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행본으로 산 만화의 대부분은 일본만화입니다.

한국 만화가들의 수익에 전혀 기여를 하고 있지 않은 것이죠.

하지만 만화대여점이 없어진다해도 저는 윙크를 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신 한국 작가들의 단행본을 구입하게 되겠죠.

그러나 박희정을 제외한 한국 작가의 매력은

제가 좋아하는 몇몇 일본 작가의 매력에 비해 떨어지므로

그 우선순위가 한참 밀릴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결과적으로 못 보는 만화가 많아질 뿐이란 얘기가 되는군요.

 

일본에서는 만화가 종합적인 문화 컨텐츠로 인식되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만화가 그러한 힘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음반 시장에서 항상 미국이나 일본의 예를 드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무조건 구입해야만 문화 컨텐츠가 소비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음악보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만화의 매체 특성상

독자층을 현저하게 줄일 것임이 분명합니다.

 

차라리 만화방이나 대여업소와의 빅딜을 통해

적절한 수입분배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어떨까요. (쉽지는 않겠지만)

단행본 값은 나름대로 부담되는 값인데

여유가 있는 사람이 문화 컨텐츠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다면

이 또한 부당한 일이고,

수입의 많고 적음이 만화사랑의 척도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무조건 사서 봐라. 빌려보는 놈은 도둑놈.

뭐 이렇게 얘기한다면 에잇, 안보면 그만이지. 이렇게 대답할 것 같아서

약간은 자기 변명적으로 포스트를 쓰게 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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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911, 마이클 무어

 

주중에 "화씨 911"을 보고 또 한 번 느껴버렸다.

 

"화씨 911"은 마이클 무어의 전작인 "볼링 포 컬럼바인"보다 "웃기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 하나 바보 만들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마이클 무어가

이번에는 그 대상을 (잘 알려진 대로) 원수 지간인 부시로 잡았으니

세계적 트렌드로 자리잡은 反부시 정서에 근거하여 보면 매우 "웃기다".

 

"볼링 포 컬럼바인"에서도 그랬지만 마이클 무어의 다큐는 좀 산만하다.

주제가 이리저리 바뀌면서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는데,

"화씨 911"도 역시나 가뜩이나 자막이 많아 정신이 없는데다

주제가 계속해서 필사적인 도약을 해 대니

영화관을 나올 때에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이번엔 좀 나은 게

이미 반전이라는 주제를 알고 영화를 봤었고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나레이션까지 나와줘서

마이클 무어가 무엇을 얘기하려 했는지 좀 알 것 같다.

("볼링 포 컬럼바인"의 경우에는 마이클 무어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서로 말이 달라 토론이 벌어졌던 기억이 있다.)

 



뭐 "화씨 911"의 주제야 잘 아는 내용이라 그다지 생각을 더 해 볼만한 것은 없지만

또 다시 머리 속에 든 생각은 자본주의와 저항 간의 관계이다.

 

"화씨 911"은 상업 영화다.

물론 할리우드 거대 자본이 개입하진 않았지만

제작과 배급을 거치려면 상업적인 영화 제작 시스템을 거쳐야만 한다.

지지리도 못사는 플린트 시 출신인 마이클 무어라고 해도

자본주의적 착취에는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저항의 관계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근데 (지금은 해체되었지만) RATM을 생각하면 좀 얘기가 다르다.

이들 노래는 자본들의 입장에서 신경쓰일 만하지 않나?

그럼 좀 경계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너무나 당연하게 소니-컬럼비아와 RATM은 이들 노래를 상품화하고 잘 팔아먹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저항을 상품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저항이 자본주의를 이용하는 것인지.

난 전자에 100만표를 던질 용의가 있다.

(그리고 사실 후자는 좀 말이 안된다.)

 

제니스 조플린의 "Mercedes Benz".

자본주의 물신성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벤츠는 이 노래는 자사의 CM으로 사용했다.

아무리 저항한들 자본은 이를 너무나 당연하게 상품화한다.

역시 자본에 독립된 구조를 만드는 것이 대안인가? 난 잘 모르겠다.

 

"화씨 911"을 보고 난 후 가장 안 좋았던 것은

잘 만든 저항 상품을 구입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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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잃어가는 것들

neoscrum님의 파시스트가 되느니 차라리 돼지가 되겠다에 트랙백한 글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통해 '아니메'를 알게 된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그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군요.
어릴 적 보던 만화들이
(특히 마징가나 그랜다이저 같은 거대 로봇 만화들,
그리고 코난이나 은하철도 999같은 SF도 그랬죠)
당시에는 일본 만화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바,
최초로 일본 만화라는 인식을 가지고 본 애니메이션은
세운상가에서 복사를 뜬 "천공의 성 라퓨타"였습니다.
이미 여러 번의 복사를 거친 후라 조악한 화질+음질을 자랑하는 데다
요즘 DIVX 같이 자막이 같이 붙어 나오는 게 아니라서
당시 활발했던 PC 통신에서 구한 대본(!!!)을 구해 같이 읽어가며
간신히 내용을 이해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라퓨타"를 통해 작품마다 독특한 철학들을 지닌
아니메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을 모조리 구해가며 보기 시작했는데
오시이 마모루를 만나기 전까지
저에게 있어 미야자키 하야오는 최고의 애니 감독이었죠.

 



제가 느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는
권력과 과학기술 문명에 저항한다는 측면에서 진보적(아 이 단어는 너무 애매하군요)이지만
가족관과 젠더적인 측면에서 보수적(이 단어는 명확해서 좋습니다ㅡㅡ;)이라는 것입니다.
"나우시카"나 "라퓨타", "원령공주" 등에서 등장하는 가족들의 구성원은
전통적인 가족 내에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그들은 그 자체로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라퓨타"와 "원령공주"에서는 여성이 리더를 맡고 있는 집단이 등장합니다.
"라퓨타"에는 해적(공적인가???) 집단의 삐삐머리 할머니,
"원령공주"에는 제철마을의 군주인 에보시가 리더인데,
이들은 남성화된 여성 캐릭터로서 중성적이죠.
만약 에보시가 남성이었어도 그의 행동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이 작품들의 주인공 여성들은 전통적인 여성성을 탈피한 모습입니다.
일부 캐릭터에서도 역시 이러한 모습은 드러나죠.
하지만 이 작품의 남성들은 하나같이 강인함을 요구받고 여성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주인공급 남성 캐릭터들은 그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죠.
그래서 저는 그의 작품 자체는 매우 재미있게 봤지만
그가 만든 캐릭터를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아, "원령공주"의 코다마를 제외하곤 말이죠. :)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분명 훌륭한 감독이고 작품도 매우 재미있습니다.
"붉은 돼지", "마녀배달부 키키" 등 역시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무척 훌륭한 작품들입니다.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볼 때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붉은 돼지"만큼의 사회성을 지닌 작품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의 애니에서 사회성이 제거되고 남는 것은
불편한 캐릭터들과 판타지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나 아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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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핀, 남상아

아... 이 포스트를 만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허클베리핀을 첨 본 건 연대에서 무슨 문화제를 했을 때입니다.

당시 연주했던 곡이 바로 '사막'이었던 것 같은데,

바이얼린 연주를 무대에서 하는 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죠.

이후에 mp3를 구해 허클베리핀 노래를 듣기 시작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남상아가 보컬을 맡았던 1집이 2집보다 나아보였습니다.

하지만 1집은 도무지 구할래야 구할 수가 없더군요.

서울 시내 온 음반가게를 뒤져도 결국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네 멋대로 해라'를 보고 3호선버터플라이를 구해 들었는데,

전반적으로 곡 완성도는 높아졌으나 허클베리핀 시절 남상아의

거칠고 불안정한 보컬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이 포스트를 보고 허클베리핀을 검색하니 1집이 재발매 되었더군요.

정세에 맞게(?) 좋은 포스트 써 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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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뜨

중학교에 다닐 시절이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성실하고 학구적이었는데,

어느날 평소 놀던 대로 동아대백과사전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삘이 오는 그림 한 장을 발견.

바로 마그리뜨의 유명한 '피레네 산맥의 성채'다.

이후 달리의 몽환적인 그럼을 더 좋아하게 되어서

마그리뜨의 그림을 볼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이 사람의 작품은 볼 때마다 섬뜩할 정도로 기발하다.

익숙해질 수 없는 상상력.

 

... '집합적 발명'이란 작품에 나온 머리가 물고기이고 하체가 사람인

   인어 아닌 인어는 한 번 꿈 속에서 만난 적이 있다...

 

You 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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