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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30
    심상정은 내 돈 물어내라!(2)
    구르는돌
  2. 2010/05/28
    이런 제기랄!!!
    구르는돌
  3. 201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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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경기도지사 후보 토론회 후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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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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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0/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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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5/14
    진보신당의 답답한 짓거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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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5/08
    대학 구조조정 고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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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0/05/01
    원희룡에게 배워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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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0/04/30
    서울 교육감 선거는 어찌되고 있는 건지...(2)
    구르는돌

도가니 단상 - 2011.10.1

페이스북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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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히려 이 끔찍한 장면들보다 영화의 말미에서 공유가 죽은 민수의 영정 사진을 들고 경찰의 물대포를 맞으며 하는 마지막 대사, "이 아이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민수라고 합니다."가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결핍의 상태인 이 아이를 위해 대신 싸워주기를 호소하는 이 정의의 외침은 그러나, 민수를 여전히 정의의 '수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른들이 물대포 맞아가며 싸우는 동안, 연두와 유리는 그저 울며 물대포 세례를 힘없이 지켜만 보고 있다.

끔찍한 장면의 자극을 통해 만들어지는 분노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함께 공유하고 해결해 나갈 노력을 만들어갈 길은 없는 것일까? 장애인의 신체적 '결핍'을 대신해 싸워주겠다는 '가상의 정의감'을 공유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이 몸으로 내는 목소리에 귀기울여가며 그들의 싸움에 '동참'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지영의 말처럼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심지어 게으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통해 느낀 폭발하는 감정들이 이 진실의 '게으름'을 앞서 나가려다 보면 분명 진실에 상처를 주고 말 것이다. 진실만큼 느리게 가자. 진실보다 뒤쳐져선 안되겠지만, 단 두시간 동안 느낀 감정으로 진실을 인도하려 하지 말자. 우리는 아직 모르는게 너무 많다.

 

 

나는 오히려 이 끔찍한 장면들보다 영화의 말미에서 공유가 죽은 민수의 영정 사진을 들고 경찰의 물대포를 맞으며 하는 마지막 대사, "이 아이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민수라고 합니다."가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결핍의 상태인 이 아이를 위해 대신 싸워주기를 호소하는 이 정의의 외침은 그러나, 민수를 여전히 정의의 '수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른들이 물대포 맞아가며 싸우는 동안, 연두와 유리는 그저 울며 물대포 세례를 힘없이 지켜만 보고 있다.

끔찍한 장면의 자극을 통해 만들어지는 분노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함께 공유하고 해결해 나갈 노력을 만들어갈 길은 없는 것일까? 장애인의 신체적 '결핍'을 대신해 싸워주겠다는 '가상의 정의감'을 공유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이 몸으로 내는 목소리에 귀기울여가며 그들의 싸움에 '동참'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지영의 말처럼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심지어 게으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통해 느낀 폭발하는 감정들이 이 진실의 '게으름'을 앞서 나가려다 보면 분명 진실에 상처를 주고 말 것이다. 진실만큼 느리게 가자. 진실보다 뒤쳐져선 안되겠지만, 단 두시간 동안 느낀 감정으로 진실을 인도하려 하지 말자. 우리는 아직 모르는게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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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교육과 학생들 집회 후기 - 2011.11.6

페이스북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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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특수교육과 학생들 집회에 갔다와서 느낀 점들.

인원수가 이틀 전 있었던 한미FTA집회의 2배는 넘어보였다. 근데 좀 속터지는게, 종횡으로 줄을 딱 맞춰 앉아서 연단에서 시키는대로만 하는 집회라는 거. 심지어 사회자는 질서유지를 위해 화장실에 갈 때는 '질서유지인'의 인도하에 5명씩 짝을 맞춰 가라고 했다.ㅠ.ㅠ 난 정말 집회 대오가 사회자의 말을 이렇게 잘 듣는 집회는 처음 봤다.

그리고 꼭 민중가요에 맞춰서 문선 같은거 해야 하나?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아마 그 집회에 나온 학생들 99%는 운동권이 아닐테고, '파도앞에서' 같은 노래는 거기서 처음 들어봤을 텐데... 자기 문화가 아닌 걸 그저 집회라는 형식에 맞추기 위해서 꼭 반복해야 하나... 그 공연 보면서 즐거워하는 건 솔직히 무대 옆에 모여 앉아있던 장애인단체 활동가들 뿐이었다. ㅠ.ㅠ

요즘엔 나조차도 그런 문화가 어색하고 조금은(아니, 솔직히 많이) 불편하다. 내가 이러면 변절한거야? 그런건 아니죠?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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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와 대한민국 헌법 - 2011.12.4

페이스북에 썼던 글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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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늘 판사가 추천한 동영상 "을사늑약이 쪽팔려서"에 보면 한홍구 교수가 다음과 같이 한미fta를 정리한다. 바로 이것이 체결되었을 때 바뀔 법 체계이다. 상위법부터 나열하면,

1. 미국 헌법
2. 미국 한미fta 이행 법안
3. 한미fta 조약 전문 (영문본)
4. 한미fta 조약 전문 (한글본)
5. 한국 헌법
6. 한국 법률

전두환 노태우 때에는 민주화 진영이 '호헌철폐'를 외쳤다는데, 우리는 마치 보수주의자들처럼 '헌법수호'를 외쳐야 할 판이다. 우리 집 문짝에다 "사랑해요, 대한민국 헌법"이라고 써 놔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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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와 장애인 - 2011.12.8

페이스 북에서 옮겨 온 글. 이건 고려대 학생이 과제로 하는 영상물 촬영에 인터뷰 하면서 대답한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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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미FTA와 관련해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투자자국가제소권이잖아요. 이것은 투자자가 기대하는 미래이익이 국가의 개입으로 침해되었다고 판단될 때 국가를 국제중재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이죠. 이 문제를 굳이 장애인과 관련해서 비교하자면, UN에서 제정하는 국제장애인권리협약이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협약은 강제력이 없어요. 그래서 이 협약에 강제력을 부여하기 위해서 선택의정서라는 것을 두는데, 이것을 통해 비로소 국내에서 장애인권리침...해가 일어났을 때, UN의 직권조사를 요구할 수 있죠. 그런데 선택의정서의 작동도 국내법의 절차를 다 거쳤음에도 해결이 안났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죠. 물론 한국은 이런 선택의정서도 비준하지 않았지만요.
반면 ISD는 투자자가 직접적인 손해도 아니고, 미래에 예상하는 기대수익이 침해되었을 때에도 언제든지 국가나 지자체를 국제심판에 제소할 수 있습니다. 투자의 권리가 무슨 역사적으로 인정된 천부인권이라도 됩니까?
사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권리 침해와 차별에 대해서 제대로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그나마 최근에 장애인차별금지법 등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정부가 의지가 없으니 이런 법들을 무력화시키기 일쑤죠. 지금도 정부가 복지예산 줄인다고 거동이 힘든 장애인들의 등급을 임의로 낮춰서 하루아침에 활동보조서비스를 못 받게 만드는, 사실상 정부에 의한 인권 유린이 자행되고 있는 마당인데, 국가 내에서는 이를 구제해주는 체계가 전무해요. 그런데 엄청난 재력을 가진 투자자들은 수 틀리면 바로 국제심판에 국가를 제소할 수 있다는 것, 이것보다 더 심한 차별이 어디있습니까?
사실 ‘투자자’라는 것은 비인격적 실체입니다. 한미FTA는 이것에게 인간의 권리를 넘어선 특권, 인간의 권리가 파괴되어야만 보장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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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재 장애인, 그 중에서도 중증장애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복지제도는 아무래도 활동보조서비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혼자서는 일상생활이 힘든 장애인들의 가사, 신변처리, 이동지원 등을 돕는 가장 필수적인 제도인데, 이게 기본적으로 국가책임이에요. 파견되는 활동보조인의 급여도 국가에서 주고요. 그런데 이 서비스를 중계해주는 기관은 다양한 민간기관들이 난립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정부는 이런 민간화, 시장화를 더욱 부추기고 있구요. 그러면 분명 장애인의 생존권적 요구와는 별개로 오로지 수익만을 노리고 이 서비스에 진출하려는 이들이 생기게 됩니다. 현재에도 중계 수수료만을 노리고... 이 서비스를 하려는 이들이 많은데, 한미FTA가 체결되면 외국 투자자들까지 개입하겠죠.
사실 이건 그냥하는 소리가 아니라, 한미FTA의 목적과도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 한미FTA를 추진하면서 그 이유로 든 것이 바로 ‘서비스 산업의 활성화’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제조업으로는 앞서간 일본과 추격하는 중국에게 쫓겨 안되겠으니까 서비스 산업으로 돌파구를 찾자는 것이었죠. 문제는 서비스 산업의 활성화라는 것이 다른 말로 ‘서비스 산업의 시장화’라는 것입니다. 의료 서비스, 교육 서비스가 대표적인 것이고, 활동보조, 주간보호 서비스 등도 이 시장화의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영역에 진출한 해외 투자자들은 이 서비스가 공적으로 제공되는 것이 투자 수익을 올리는 것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문제삼을 것이고, 그것이 국제제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장애인의 생존의 문제가 국제중재심판소의 3명의 심판관의 손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공적 서비스 체계가 무너지면, 유료화된 서비스를 부담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장애인만 살아남는, 장애인 복지에 있어서는 가장 야만적인 체제가 도입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이상하게도 정치권에서 복지국가 얘기가 부쩍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이 논의 속에 한미FTA가 별로 쟁점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정치권의 복지논쟁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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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세미나 후기 - 2011. 12. 12

페이스북에서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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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랜만에 간 교육학 세미나에서 본 글 중에 이런게 있었다. 우리나라 교육은 일명 '손님 만나 달리기'라는 것이다. 어느 시골 초등학교에서 운동회때 '손님 만나 달리기'라는 것을 하는데, 달리기 전에 제비뽑기로 종이를 뽑아 나오는 나오는 사람과 손을 잡고 같이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재수없게 백발의 할아버지가 걸린 학생은 아무리 육상 기대주라도 꼴찌를 하는거고, 운이 좋아 젊은 군인 아저씨가 걸린 학생은 군인 아저씨가 업고 달려서라도 1등을 한다는 것이다. 즉 이 사람은 부모 잘만나면 장땡인게 한국 교육이다, 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난 이 손님 만나 달리기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 인생이 다 손님 만나 달리기 아닌가?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인생을 완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손님'들을 레이스에서 없애버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인생에서 손님은 필연적인 존재임을 인식하고, 교육을 통해 함께 달리는 법을 배우고, 또 할아버지와 달리는 것이 군인 아저씨와 달리는 것에 비해 뒤쳐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아니, 굳이 알게 하지 않아도 되게끔 최종 결승점을 둔 100미터 레이스 코스를 원형으로 만들어 앞서간 사람이 뒤쳐진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이 그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순간이 아니라 다시 시작되는 출발점에서의 동행의 순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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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바람] 장애인야학에게 '참교육'은 무엇인가?

 

 

장애인야학에게 ‘참교육’은 무엇인가?

-<장애인야학 참교육실천대회>를 치르고 나서-

 

 

 

이야기 시작부터 샛길로 - ‘참교육이라는 한 단어에 대한 기억

 

‘참교육’. 대뜸 내가 이 단어를 언제부터 알게 되었는지 생각해본다. 생각났다. 대학시절 동아리방에서 할 일 없이 노닥대고 있을 땐 항상 민중가요 여러 곡을 반복재생해서 듣곤 했다. 그러다 우연히 너무 웃긴 노래를 듣게 되었다. 가사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서 검색해보니, 제목은 <못생긴 얼굴>, 작곡가는 그 유명한 ‘개똥벌레’를 작곡했던 한돌씨.

 

열사람 중에서 아홉 사람이 / 내 모습을 보더니 손가락질 해

그놈의 손가락질 받기 싫지만 / 위선은 싫다 거짓은 싫어

못생긴 내 얼굴 맨처음부터 / 못생긴걸 어떡해

 

너네는 큰집에서 네명이 살지 / 우리는 작은집에 일곱이 산다

그것도 모자라서 집을 또 사니 / 너네는 집 많아서 좋겠다

하얀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 우리집도 하얗지

 

모처럼에 동창회서 여잘만났네 / 말 한번 잘못했다 뺨을 맞았네

뺨 맞은건 괜찮지만 기분 나쁘다 / 말 안하면 그만이지 왜 때려

예쁜 눈 예쁜 코 아름다운 입 / 귀부인이 되었구나

 

몇 일후면 우리집이 헐리어진다 / 쌓아놓은 행복들도 무너지겠지

오늘도 그 사람이 겁주고 갔다 / 가엾은 우리엄마 한 숨만 쉬네

개xx 개xx 나쁜 사람들 / 엄마 울지 마세요

 

아버지를 따라서 일터 나갔네 / 처음잡은 삽자루에 손이 아파서

땀 흘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니까 / 나도 몰래 내눈에서 눈물이 난다

하늘에 태양아 잘난척 마라 / 자랑스런 우리 아버지

 

가사만 적어놓으니 조금 밋밋한데, 노래로 들어보면 정말 웃긴다. 얼마나 못 생겼길래 열 사람중에 아홉사람이나... 게다가 ‘난 못 생긴게 아니야!’라고 부인하지도 않고 ‘맨 처음부터 못생긴걸 어떡해’라니! 그러다 ‘혹시 이 노래 내 얘기하는건가?’라는 생각에 웃음이 싹 가셔버리는, 요새 인터넷 용어로 말하자면 ‘웃픈’(웃기고 슬픈)노래.

 

하지만 4절, 5절까지 듣다보면 미묘한 반전이 느껴진다. 가엾은 엄마와 땀흘리는 아버지를 보며 가슴 속에 슬픔과 절규를 쌓아가고 있는 자식의 눈물이 느껴지는 노래. 사실 이 노래에서 말하는 <못생긴 얼굴>은 얼굴에 대한 묘사라기보다는 가난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도시빈민의 자기애환적인 독백의 단어이다. 그러나 이 절망은 절망의 심연에서 무릎사이로 고개를 파묻고 있지 않고, ‘엄마 울지 마세요’, ‘자랑스런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면서 홀로 눈물을 닦는 의연함을 드러낸다. 이 의연함은 간주 부분에 두 아이의 대화를 담은 나레이션으로 더욱 생명력있게 나타난다.

 

다른 꽃은 예쁜데 콩나무는 못생겼어

못생겼지만 쑥쑥자라는 게 보기 좋지 않아?

꽃삽으로 잡초를 뽑아주자 잡초를 뽑아주자

콩나무가 쑥쑥 자라네

 

콩나무가 싹이 트고 잎이나서 참교육!

콩나무가 싹이 트고 잎이나서 참교육!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참교육’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그게 초창기 전교조의 슬로건인지, 그리고 이후 전교조 다수파를 상징하는 이름인지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말이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 어쩌다 <장애인야학 참교육실천대회>를 하게 되었지?

 

올해 초,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나는 이 단체의 유일한 상근 활동가다! ^^;)와 함께 사무실을 쓰는 전국장애인교육권연대 활동가들과 장애인야학들이 모여서 무슨 사업을 해 볼 수 있을까 이야기를 하다가 “전교조처럼 참교육실천대회를 해보는게 어떨까”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덜컥 “좋은 생각이네요”해 버렸고, 그 한마디 때문에 생전 처음 100명 가까운 인원이 모이는 행사를 기획해보는 엄청난(-_-;;)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전교조처럼 참교육실천대회 해보자’라고 말은 했지만, 학령기-청소년기를 교육하는 전교조 선생님들이 모여서 하는 행사랑, 이미 성인이다 못해 노인들도 다니는 장애인야학의 교사들이 모여 하는 행사가 같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교사이고 전교조 조합원인 친구의 아이디를 빌려서 전교조 참실(보통 ‘참교육실천’을 줄여서 ‘참실’이라고 한다) 게시판의 이런저런 자료도 찾아봤지만, 솔직히 도움 될 만한 자료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 같지 않아, 내 마음은 ‘너무 많은 고민을 하지 말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장애인야학들이 그 동안 장애성인 교육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위한 투쟁들은 많이 했지만, 자체적으로 축적했던 교육역량들을 공유하는 자리는 없었던 만큼 그런 첫 자리를 만드는 것에 의의를 두자는 쪽으로 말이다. 그래서 활동이 활발한 서울의 노들야학, 대구의 질라라비야학, 인천의 민들레야학에 각각 야심차게 진행해 왔던 교육사례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어쩌다보니 야학의 교사와 학생을 대상으로 장애인야학의 발전방향에 대한 의견을 묻는 설문조사까지 하게 되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단체 지원사업으로 선정되기도 해서, 어쨌든 일단 열심히 준비했다.

 

그렇게 별 대책도, 뚜렷한 고민도 없이 준비하던 중에 ‘불편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행사를 한 달 정도 앞두고, 막 홍보에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이 소식을 나누는 카카오톡 채팅방에 홍보 웹자보를 올리자, 경기지역의 한 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는 동지가 질문을 던져왔다.

 

“참교육이라면 전교조에서 내걸어 왔던 것인데, 그러면 야학협의회에서 생각하는 참교육은 어떤 것인가요?”

 

예상치 못했던 당황스러운 질문이었고, 그래서 답할 길이 없었다. 고민 끝에 성실한 답변을 포기하고 다분히 ‘정치적인 대응’에 들어갔다.

 

“글쎄요. 논의해 본적은 없지만 이번 행사를 통해서 그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해 봐야겠죠.”

 

이런 나의 대답에 상대방도 ‘정치적인 대응’으로 마무리 해 주길 바랬지만, 그 분은 나를 상대로 끝내 공격 포인트 올리고 떠나셨다.

 

“참교육에 대한 개념정리도 없이 이런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좀 당황스럽네요. 어쨌든 의미있는 행사 되시길 바랍니다.”

 

이 분, 두 번째 문장으로 나름 기분 좋게 마무리하려고 했던 것 같긴 하지만, 첫 번째 문장의 지적이 너무 따가웠다. 한편으론 야학교사 경험도 일천하고 야학협의회 상근 활동 한지 이제 1년 조금 넘은 나에게 너무한 질문 아닌가 싶어 억울하기도 했다. 그렇게 억울함과 함께 불편한 고민은 시작되었다.

 

 

불편한 고민 장애인야학에서 참교육은 어떤 의미일까?

 

참교육. 이 용어가 한국사회에 자리 잡게 된 것은 90년대 내내 불법단체였던 전교조가 합법화 투쟁을 하면서 부터이다. 그래서 이 단어가 풍기는 순수성과 무관하게, ‘참교육’은 한국 교육운동의 타협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나는 그런 역사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가 주최하는 첫 번째 전국단위 행사의 이름으로 <참교육실천대회>라는 이름을 선택하는 데에는 별로 주저함이 없었다.

 

그 이유는, 내가 ‘참교육’이라는 단어를, 전교조의 이러저러한 역사를 고려하면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못생긴 얼굴>의 간주 나레이션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곱씹어 생각해보건대, ‘교육’의 진정한 의미를 이 나레이션만큼 잘 표현한 것도 없는 것 같다. “콩나무가 싹이 트고 잎이 나서 참교육!”이 한 문장에서 나는 자라나는 한 생명에 대한 찬미를 느낀다. 다른 꽃들보다 못생긴 그 콩나무를 자라게 하기 위해 잡초를 뽑는 손길,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참된 교육의 손길이 아닐까?

 

우리는 생이 끝날 때까지, 자라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신체적 발육이 멈춘 성인기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자라야 한다.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능력에 있어서 끝없이 자라나야 한다. 이 ‘자람’이 멈추면, 사회적 생명으로서의 ‘나’는 죽는다. 우리가 배우는 과정에서 익히는 수많은 지식도 바로 이 ‘자람’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한국교육의 문제점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바로 ‘자람 없는 지식의 쌓음’에 있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가 자란다는 것은 언제나 ‘함께’자람이다. 논에 모든 벼들이 태풍을 맞아 쓰러졌는데, 나 홀로 웃자라 버티는 벼는 없다. 태풍맞아 쓰러질 때 같이 쓰러지고, 일어서며 힘낼 때도 같이 힘 낸다. 내가 얻은 ‘앎’을, ‘지식’을 그런 공감과 함께 힘을 내는 도구로 쓸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 나는 그것이 교육이라고, 믿는다.

 

나는 노들에서 1년 반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맴돌면서, 그런 교육의 의미에 대해 어렴풋하게 느끼게 되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노들의 교사들은 항상 두려워한다. 오늘 수업에서 내가 학생들의 말을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을까, 혹시 잘 알아듣지 못해 학생 분들이 상처받으면 어쩌나 하고... 그래서인지 자신이 가진 지식들로 철옹성을 쌓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왠지 교사로서의 자신감이 없어 보인달까, 그런 느낌도 가끔 받는다. 학생분들 또한 그 흔한 ‘학생다움’이 없다. 수업시간에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아무 때나 하고, 집에 가고 싶을 때 간다. 그런데 학생 분들이 그러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래서 가끔 화를 내도,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는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 모두 함께 ‘자라고’있다고 느낀다. 두려움에 맞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갖은 차별과, 시설이라는 사회적 감옥 속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느끼는 두려움이 있다. 교사들은 십 수년을 오로지 말 잘 듣는 학생으로만 살다가,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던 장애성인 학생을 만났을 때 어쩔 줄 몰라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우리는 ‘삶’을 창조한다. 그래서 노들은 항상 시끄럽고 북적거린다. 그것이 노들야학만이 갖는 생명력이란 생각이 든다.

 

노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지난 6월에 한 인권교육에서 대구 질라라비야학 교장이신 박명애 대표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박명애 대표님은 야학 학생으로 들어와서 교장까지 하신 특출난 이력을 가지신 분이다. 박명애 대표님은 야학 학생으로 다니면서 가장 설레였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처음으로 전동휠체어를 타게 되었을 때, 어떻게 운전해야 할지도 몰라 두려웠다. 그러나 전동휠체어를 나보다 먼저 이용하던 ‘선배님’들을 따라 다니면서 그 두려움을 벗어나게 되었다. 질라라비야학은 나에게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 준 존재다.”

 

나는 대표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파울로 프레이리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우리는 하나의 모험적인 학교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체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고 참여하고 창조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추측하고 열정적으로 끌어안고 삶을 긍정하는 것이 이 학교입니다.”(파울로 프레이리, 『프레이리의 교사론』中) 생각해보면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받는 학교교육은 학생들에게 오히려 두려움을 끊임없이 각인시켜 줄 뿐이었다. 너의 부모님이, 선생님이, 미래의 상사와 사장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래서 그 두려운 존재들로부터 질책당하지 않고,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규칙을 따를 것을 강요했고, 그들이 정한 조작된 지식을 습득할 것을 강요했다.

 

야학 경험 일천한 내가 ‘참교육’이란 이름 아래, 전국의 야학 교사들을 모아놓고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야학 교사들이 느꼈을 수많은 두려움을, 망설임을, 그리고 용기들을. 듣고 싶었다. 그것이 우리를 자라게하는 유일한 토양이니.

 

 

소감

 

하지만 실제 일이 이런 ‘이상적인’ 목표에 적합하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각 야학별 사례발표에 대한 원고 글을 받았을 때는, 두근거렸다. 인천 민들레야학과 작은자야학이 함께 준비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발표, 대구 질라라비야학에서 진행한 발달장애인 자립지원 사업에 대한 발표, 노들야학의 인문학 교육과 성평등 교육에 대한 발표. 특히 노들의 김유미 선생님이 준비한 인문학 교육에 대한 발표 글에는 유미 쌤이 매 학기 수업이 끝나고 쓴 수업평가서가 실려 있었다. 아, 이런 보물이!! 한 문장 한 문장 속에 내가 생각했던 교사의 두려움, 망설임, 그리고 용기들, 그 모두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8월 24~25일, 이틀 간 행사를 진행하면서, 참 뿌듯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좋은 내용들을 많이 공유하게 되었다고 격려도 해 주셨다.

 

하지만 행사를 끝내고 몇몇 야학들로부터 평가를 들으니, 적잖은 분들이 많이 힘드셨던 것 같다. 어떤 분은 ‘상근교사들에게는 적합한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자원봉사로 오는 교사들에게는 지루하기만 했다.’고 했다하고, 또 다른 분은 ‘소수 몇몇 야학에 치중된 내용이어서 모두를 포괄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도 말씀하셨다. 무엇보다도 쉼 없이 이어지는 사례발표, 토론, 강의에 지칠 지경이었다는 말들이 가장 많았다.

 

너무 욕심을 많이 부렸나? 그랬다. 처음 하는 행사이고, 그래서 어떤 기획이 적합한 것일지 판단도 제대로 서지 못했는데, 그래도 다른 데 가서 자랑할 만한 행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욕심이 크면 탈도 큰 법이겠지.

 

하지만 이번 <참교육실천대회>와는 또 다른 방식일 수는 있겠지만, 이런 시도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야학은 움직이는 거니까. 여전히 두려워하고 망설이지만, 그럼에도 용기내어 말하고,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끌어안고 삶을 긍정하니까. 그런 과정들을 쉼없이 나누고 이야기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 전국에 있는 장애인야학들을 괴롭히는 것이, 내 일이다. 으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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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로와

언제부턴가 나는 투쟁가가 나올때 팔뚝질도 안하고 구호외칠때 소리도 안내는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게 뭐 잘했다는 건 아니고, 언제부턴가 그럴 기운이 안생겨 버렸다. 나의 그런 태도가 약간 분위기 깨는 것 같을 때도 있어서 사실 나 자신도 그런 마음이 불편하긴 하다.

 

얼마 전 레디앙에 한 대학생 독자가 '옳음을 추구한다면 플라톤을 읽어라'라는 글을 기고했던데, 제목부터가 별로 공감이 안되었다. (그래서 안 읽었다.) 무슨 옳음을 추구하길래 플라톤을 읽어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사실 플라톤이 추구한 옳음이라는 것은 '탁월함'과 비슷한 의미의 것이 아닌가? 플라톤 뿐만이 아니라 그로 대표되는 서양 고전철학이 사실 '탁월함'의 세계를 추구했던 것이고...

 

모든 민중가요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불려지는 노래들 중에 우리들의 '강함'을 이야기하고 '단단한' 연대를 노래하는 것들에서 나는 항상 공허함을 느꼈던 것 같다.

 

사실 우리는 강하기 때문에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약하기 때문에 연대한다. 한없이 연약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그래서 요즘 '달로와'의 노래가 좋은가보다. 달로와는 노래패 우리나라 출신이다. 달로와는 우리나라에서의 노래와는 다르게 속삭이고 읊조린다. 그러나 달로와의 노래가 속삭이고 읊조리기 때문에 좋은 것은 아니다. 인간의 불안함과 연약함 그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내면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려는 태도에 끌리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강함과 투쟁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보다, 외면하기 쉬운 슬픔과 연약함을 직시하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섣부른 해석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뿌리> 달로와


이 푸른 잎을 제 진심이라 생각지 마소서
이 늘어진 가지를 제 기쁨이라 생각지 마소서
그대 눈에 마냥 푸른 빛 비추려고
그대 마음에 마냥 우거진 행복만을 비추려고
이렇게 흙빛으로 천갈래 만갈래 속이 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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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절 명상 백대서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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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삼호의 『한국 장애운동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

윤삼호의 『한국 장애운동의 어제와 오늘』

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

 

 

윤삼호의 이 글은 매우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스타일의 글이다. 스스로가 장애-당사자주의를 표방하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고 이 글 속에서도 사실상 장애-당사자주의를 두둔하고 있으면서, 글의 전체적인 뉘앙스는 ‘양비론’적이다. 저자의 태도는 글의 말미에서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에서 보이듯이, 이 두 진영의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적인 장애운동을 건설할 것을 ‘거국적으로’(?) 제안하는 듯 한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국 장애운동의 역사를 개괄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윤삼호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는 서구와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장애-민중주의가 먼저 나타났고 장애-당사자주의가 그에 후속했는데, 이러한 뒤바뀜이 한국의 장애운동을 왜곡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나는 이해했다).

 

※ 마이크 올리버가 설명하는 장애단체의 역사 (M. Oliver, 『장애화의 정치』, 158~161쪽)

 

 

파트너십 / 보호

(장애인을 위한 단체들, 자선단체들)

장애인을 위한 단체

경제 / 의회

(의회 로비 및 연구, 법정 단체들)

소비자주의 / 자조

(장애인 당사자 단체들)

장애인 ‘당사자’ 단체

(신사회운동으로서 장애운동을 주도)

민중주의 / 활동가

(장애인 당사자 단체 및 정치 활동가 단체들, 정치적, 집단적 활동과 의식 함양 목적)

우산 / 통합

(소비자주의 민중주의 조직들을 포함 단체 연합)

 

올리버가 위와 같이 역사를 정리하는데에는 두 가지 배경 사건이 자리잡고 있는데, 하나는 UN의 ‘1981 세계장애인의 해’ 선포계획이다. 장애인 당사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이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고, 이 때를 기점으로 영국장애인단체협의회(British Council of Organization of Disabled People, BCODP)를 결성한다. 두 번째 사건은 ‘장애인을 위한 단체’ 중 하나인 국제재활협회(RI, Rehabilitation International)가 자신의 조직의 ‘장애 헌장’에 “지역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장애인의 동등한 참여에 대해 가능한 가장 완전한 통합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고 명시했으나, 장애인 당사자가 이사회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는 요구에는 거절의사를 표하자, 이에 맞서 장애인 당사자들이 DPI(Disabled Peoples’ International)를 결성한 것이다.

즉, 서구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단체’에 맞서 ‘장애인 당사자 단체’들이 스스로 조직되는 역사를 통해 장애운동이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등장과 함께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의 장애운동은 울림터, 장애인청년운동연합회 등 민중주의 성향의 단체1)들이 먼저 결성되었고, 당사자주의 및 우산/통합을 지향하는 DPI 등의 단체는 90년대 후반에야 등장했다.

이에 대해 윤삼호는 “서구 장애운동은 흑인운동, 게이운동, 여성운동 등 소수자운동의 맥락에서 출발한 까닭에 인권과 복지이슈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반대로 ‘장애-민중주의’가 압도한 한국의 장애운동은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여타 민중 세력이 종적으로 연대하는 구사회운동적 기획이 인종, 여성, 소수자 등 다양한 운동세력이 횡적으로 연대하는 신사회운동적 기획을 압도하는 양상이다. 이것이 장애인들이 스스로 결정한 선택인지, 아니면 비장애인 운동가들의 ‘과도한’ 개입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장애-민중주의 부정적인 영향을 부각시키고 있다.

반면 그는 장애-당사자주의에 대해서는 이 그룹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사자주의의 악용을 문제삼을 뿐, 그것을 장애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견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글에 나와 있는 내용만으로는 저자가 주장하는 당사자주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좀 뒤져봤다. 윤삼호는 「장애인 당사자주의 소고」라는 글에서 당사자주의의 구체적인 맥락을 이야기하고 있다. 당사자주의에는 크게 영국의 당사자주의와 미국의 당사자주의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영국의 ‘분리에 저항하는 신체장애인 연맹’(UPIAS)은 손상(impairment)과 장애(disability)를 명확히 구분하고 장애의 원인을 손상이라는 의학적 원인이 아닌 사회적 배제나 불이익과 같은 사회적 문제로 보고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사회적 결정과 권력으로부터의 배제 극복을 추구하는 ‘정치 참여형’ 장애인운동이 등장한다. 한편 미국의 당사자주의는 <Nothing About Us Without Us>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즉 장애인이 겪는 독특한 장애 경험과 문화에 기반해 자기 몸과 삶에 대한 자기 통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리주의에 반대하는 의미로 당사자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의 이해로는 이러한 당사자주의의 두 경향이 교집합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드는데, 일단 그것은 아무렴 어떻겠냐 싶으니 일단 넘어가자. 그런데 이러한 두 경향은 일반적으로 ‘신사회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운동의 특징들을 일정하게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사회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우선 편한대로 (구)사회운동이라 일컬어지는 노동운동과 같은 주류 운동 담론에서 배제되었던 주체 및 의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 전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거시적인 사회변혁에 치중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삶에 기반한 변화들을 추구하는 경향을 띤다(라고 이해해 보자).

그런데 이 신사회운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두 가지가 거론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원동원’과 ‘정체성지향’이다.2)쉽게 말하면 ‘자원동원’은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운동조직의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여 목표에 도달하는 정치적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이고, ‘정체성지향’은 억압에 저항하는 이들의 정체성을 계급이라는 단일한 표상에 두지 않고 성, 인종, 지역, 장애 등 억압받는 이의 삶과 문화를 구성하는 다양한 정체성에 기반하고자 하는 것이다.

윤삼호의 장애-민중주의 비판도 어떤 면에서 보면 바로 이 ‘자원동원’과 ‘정체성지향’에서 장애-민중주의가 오류를 낳았다고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초로 장애-민중주의를 표방한 울림터는 장애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적 모순의 결과라는 급진적 주장을 내놓는데, 이를 두고 “따지고 보면 이 주장은 독창적인 장애이론이 아니라 당시 민중운동의 논리를 장애운동에 ‘기계적으로’ 대입한 것”이라고 평가하거나, 이동권 투쟁 당시 비장애인-운동권 활동가들을 두고 “투쟁 지원에 그치지 않고 투쟁을 기획하고 주도하거나 ‘프락션’을 하기도 했다.”는 등의 평가를 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장애운동이 장애인 정체성에 기반한 이념과 방식을 따르지 않고, 비장애인 운동권들에 의해 자원과 이념을 외부수혈 하다보니 왜곡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더해 장애-민중주의 진영이 노조와 연대해 정립회관 투쟁으로 마찰을 일으킴으로써 “청소년 시절 정립동산을 뛰놀던 숱한 장애인들의 ‘마음 속 고향’도 사라졌다”고 말하면서 장애인의 독자적인 장애경험과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Q1) 누가 ‘장애인’인가? - ‘정체성지향’으로서의 당사자주의에 대한 의문.

 

장애-당사자주의도 장애가 사회적 차별에 의해 생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결과라면 피해의 당사자가 문제 해결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은, 장애운동에서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노동운동 등 여타의 운동에서도 기본적인 ‘원칙’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사회적’이라는 전제를 중심에 놓고 보면, 사실 ‘장애인 당사자’라는 것도 선험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편하게 복지카드 소지자를 장애인 당사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손가락 절단으로 장애등급을 갖게 된 우리 아버지는 솔직히 ‘장애’ 때문에 차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학벌이 낮고 가진 게 없어서 차별을 받았으면 받았지, 아버지의 복지카드가 장애인으로서 차별 받았음을 증명해 주지는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차별이라는 구체적인 작용이 어떤 사회적 장벽과 억압기제에 의해 벌어졌는가를 묻는다면, 신체적(또는 법적)으로 장애인 당사자로 규정되고 아니고는 운동에 있어서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선험적인 장애인 당사자를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상당히 모순적이다.

예를 들면 법적으로 장애 등급을 받을 수 없지만, 활자 중심의 사회에서 엄청난 제약과 차별을 겪을 수밖에 없는 난독증을 가진 사람들을 보자. 사실 이들은 복지부 기준으로는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지만, 특수교육 대상자로 선정되서 각종 교육 서비스를 받기도 한다(고 들었다. 아닌가?). 선험적인 장애인 당사자를 규정하여 이들의 정치적 결정권 확대를 요구하는 방식의 운동은 이런 ‘비장애인’의 장애를 해결할 어떤 이념과 원칙을 갖고 있는가?

또 하나. (내가 몇 번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이기도 한데) 예전에 검찰이 용산 철거민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에 대해 DNA를 채취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한 것, 그리고 강제철거에 반대한 행위를 일종의 ‘범죄’라고 보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유전적 질병’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체적 ‘손상’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강제적으로 의학적 형태의 권력에 의해 집행되는 현상은 어찌보면 장애인에게 가해지던 의학적 시선이 확대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명권력의 횡포가 확대되면 장애인 수용시설처럼 해고자 수용시설, 철거민 수용시설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의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나아가 누가 ‘장애인’인가? 윤삼호는 장애-민중주의를 향해 던지는 첫 번째 질문에서 “장애인들이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문제를 국가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면 개인이 손상 그 자체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비통함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이 질문으로서 성립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손상 그 자체는 언제나 고통과 비통함을 수반하는가? 이 질문 자체가 장애를 사회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개인의 손상이 고통과 비통함으로 옮아가게 되는 것은 ‘손상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조건들 때문이다. 이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바로 사회모형에 기반한 장애인운동이 해야 할 역할 아닌가? 혹여나 ‘손상 그 자체’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비통함(예를 들면 교통사고나 천재지변에 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장애인운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의학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버릴 필요는 없지만, 선험적인 장애인 정체성 개념은 버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 정체성은 끊임없이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Q2) ‘구매력 행사’가 당사자의 권력을 강화하는가? - ‘자원동원’으로서의 당사자주의에 대한 의문

 

앞에서 신사회운동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당사자주의는 두 가지의 특징, 즉 ‘자원동원’과 ‘정체성지향’이라는 특징을 갖는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정체성지향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했으니 자원동원과 관련해서 이야기해보자.

신사회운동의 특징으로서 ‘자원동원’이 앞서 이야기했듯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운동조직의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여 목표에 도달하는 정치적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장애인운동에서는 이것이 주로 공급자 중심의 서비스체계를 비판하고 장애인 당사자의 ‘서비스 통제권 확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의 주요한 실현을 장애인 당사자 조직이 복지전달체계를 독점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증장애인, 지적/발달장애인이 주로 이용하는 복지서비스 전달체계를 경증장애인이 차지하는 것이 당사자주의라면 이것은 코미디이다.3)

 

그런데 사실 내 고민의 핵심은 당사자주의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서비스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비자주의’, 즉 장애인 당사자의 구매력 행사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윤삼호도 이 글에서 소비자주권이라는 개념이 자립생활운동의 주요한 이념이라고 언급하는데, 이것은 당사자주의를 주장하는 진영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개념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소비자주의’니 ‘소비자주권’ 같은 개념이 매우 불편하다.

소비자주의가 주장되는 배경에는 “장애인복지서비스에 관하여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전달과정에서 장애인 자신들의 경험 및 다양한 욕구가 반영하지 못하고 전문가 및 정책담당자들에 의하여 공급자 위주로 전달되었다는 것”4)이라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그래서 서비스 제공과정에 장애인 당사자가 자기결정의 주체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구매력을 갖춰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내에서도 활동보조서비스에 서비스 그 자체가 아니라 현금을 지급하는 직접지불제(Direct Payment) 도입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일단 장애인 의제를 떠나서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는 얼마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설령 그가 고소득자로서 상당한 구매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생산을 통제할 수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돈이 수십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생산과정을 통제해 생산품의 질을 높이는가 하는 문제는 완전 별개의 사안이다. 그는 그 수십억의 돈으로 더 값 비싼 상품, 더 많은 상품을 구매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일정 정도 이상의 구매력은 질 낮은 상품이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해 퇴출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할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공급자간의 경쟁구조 속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 예산절감 노력(노동자 착취 등)만 행해질 뿐이다.

이것을 장애인 복지영역에 적용하게 되면 어떨까? 장애인이 활동보조서비스를 통해 이용하는 것들, 예를 들면, 용변 처리, 식사 보조, 이동 보조, 옷 갈아입기 등... 이런 것들을 비장애인은 돈을 내고 이용하나? 화장실 한 번 갈 때 100원, 외출 전에 옷 갈아입을 때는 200원, 길을 걸어갈 때 300원... 뭐 이렇게 돈을 내나? 아니면 밥 먹을 때 밥 값 이외에 추가로 내는 비용이 있나? 이런 것들은 비장애인에게는 굳이 ‘권리’라고 인식할 필요도 없는 공기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 돈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장애인은 돈을 내야 하나? 설령 그 돈을 국가에서 지급해 준다 하더라도, 이런 기본적인 일상생활의 영위와 관련된 것들을 상품화, 화폐화 시킨다면 활동보조서비스의 권리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탈각될 것이다. 그 결과는 당사자의 결정권 강화가 아니라 장애인의 경제력에 따라 권리 향유가 계급화되는 것으로 될 것이다.

이러한 소비자주의는 고립된 개인으로서의 당사자를 전제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활동보조’를 서비스로서 ‘구매’하여 ‘소비’해 버리는 것으로 이해되는, 소비자주의에 기반한 자립생활운동은 얼마나 우리 사회를 장애인이 살기에 적합한 사회로 바꾸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활동보조와 자립생활을 화폐적 관계를 넘어선 어떤 삶의 재구성의 한 형태로 바라보는 아래와 같은 관점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세상 누구도 사회에 등장할 때 혼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말이죠. 사회란 말 자체가 그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제가 사회 속에서 등장할 때, 옆에 이미 다른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지요. 저는 활동보조인이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서로를 이미 활동보조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박경석과 고병권의 대담, 『부커진R – 소수성의 정치학』 (그린비) 中

 

 

앞으로 우리는 이렇게 ‘고립’된 ‘자립’ 개념을 깨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런 고민 속에서 얼마 전 비마이너에 실린 일본 푸른잔디회 회원 중 한 명의 발언은 왠지 눈길이 갔다.

 

토오루 씨는 “하지만 푸른잔디회의 중심사상 중의 하나는 지역 안에서 생활하면서 근처에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 내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나는 공적 보조인 개호서비스(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다”라면서 “이번에 한국에 함께 온 이들도 제가 사는 지역 사람들과 제가 강사로 일하고 있는 국학원대학(國學阮大學)에서 만난 인연으로 동행한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일본 푸른잔디회, 노들야학을 만나다” (비마이너 6/26)

 

 

‘자립생활’이라는 것이 단지 한 개인이 홀로 살아갈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활동보조서비스 등 장애인복지의 전달체계의 문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대충 글을 마치며

 

갑자기 나보고 발제를 하라길래, 처음엔 그냥 요약이나 대충 해가면 되겠지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길어졌다. ‘당사자주의’라는 주제를 접하게 되니 별별 생각들이 다 들었고 결국엔, ‘나는 왜 하고많은 운동들 중에 굳이 장애인운동을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에 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내가 ‘장애’라는 것을 삶 속에서 확인하고 느낄 수 있었던 첫 번째 계기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절단된 아버지를 보면서 항상 ‘불쌍한 우리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박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온 아버지 동료를 보니 그 분은 아예 손목이 잘려나갔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 “내 주변엔 다 불쌍한 사람들 밖에 없구나. 불쌍한 사람들 속에서 사는 나도 너무 불쌍해.” (따지고 보면 이런 생각은 우리 엄마가 항상 주입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20대 중반까지 마음속으로 끝도 없이 불쌍하다고 자기 무덤을 파대는, 진짜 ‘불쌍한’ 짓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어떤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장애인운동을 하게 된 것은 이 ‘불쌍함’의 낡은 순환에서 스스로 빠져나오고 싶어서였던 것이 아닐까?

 

“장애를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장애인을 결핍된 인간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자나 장애인을 동정하는 자나 차이가 없다. 차별하는 자와 동정하는 자는 그 이유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은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다. 장애인들은 의학적․공학적․정치적 기술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것은 어떤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그 자리에서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다.”

- 박경석과 고병권의 대담, 『부커진R – 소수성의 정치학』 (그린비) 中

 

 

생각해보면 저 굵은 글씨의 문장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게 아닐까 싶다. 노동‘해방’이든 장애‘해방’이든, 그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구렁텅이, (또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번뇌의 사바세계를 벗어나 극락왕생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겠다는 선언 아니겠나!? 그런 삶이 나 혼자 정신수양 한다고 될게 아니고, 속도와 효율 중심의 이 사회를 함께 바꿔나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이미 장애‘해방’운동의 당사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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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운동 등 소위 ‘주류’ 사회운동 진영과 밀접한 인적, 이념적, 조직적 관계를 맺고 있는 단체들(이라고 윤삼호는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2) 이인영, 「신사회운동으로서의 장애인운동에 관한 고찰」,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년.

 

3) 유동철, 「당사자주의는 대안인가?」, 『소비자주의? 당사자주의? : 비판과 대안』, 2006년 한국장애인복지학회 춘계학술대회.

 

4) 이성규, 「소비자주의는 있는가?」, 같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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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쌤 강연 후기

노들바람에 글을 쓰라는 요구에 응해 쓴 글인데,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고민을 정리한 것 같아 올려봅니다. 나도 "내일 당장 그린비 인문플랫폼이 사라진다해도 한 줄의 씨앗문장을 올리는" 마음가짐으로.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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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 자본의 일정표를 멈추고 사건을 시작하는 선언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하금철

 

 

고병권 쌤의 강연 후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미 한 달도 더 지난 강연의 후기를 쓴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 밀린 방학 숙제를 몰아서 하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부랴부랴 비마이너에 실린 강연 원고도 찾아서 다시 읽어보고, 그것도 부족해 위클리 수유너머에 실린 고병권 쌤의 연재 글도 훑어봤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무슨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내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1,2학년 때 쯤이었을 법한 아버지의 파업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 했었다. 누구보다 순종적인 도덕관을 가지신 아버지가 사장의 명령을 어기고 파업의 대열에 동참하실 때에는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그런 이야기로 한페이지 넘게 써내려가 봤지만, 결국 다 엎어버렸다. 고병권 쌤이 강연을 통해 절실하게 요청했던 ‘총파업’은 아버지의 파업을 포함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이러저러한 파업의 반복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가 파업에 동참한 그 동기야 물론 인간적인 분노와 설움 때문이었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자본이 짜 놓은 욕망의 회로에 갇혀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고병권 쌤은 “모든 곳을 점거하라,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라!”라고 했지만, 우리 아버지는 분명 야근에 특근을 해서라도 임금을 더 받기를 원했던 분이셨다.

그래서 대체 뭘 어째야 된단 말인가? 하루 종일 고민해서 썼던 글을 엎어버리고 나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고병권 쌤은 지금 당장 “체제의 중단”을 요구해야 한다고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 말이 그저 ‘이론적 표어’ 같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지난 5월1일 있었던 한국은행 앞에서의 ‘총파업’ 행진도 체제의 중단을 선언하고 실천하는 자리라기보다는 한 판의 축제 같다는 느낌이 더 강했던 것이다. 축제가 끝나고 난 뒤엔 여전히 내 안에도 자리잡고 있는 자본의 혈관은 잘만 돌고 있었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의 수많은 1인 시위 행렬에 끼어, “자본주의 물러가라”라고 주술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만 같은 무력감을 느꼈다고 하면 너무 심한 비유인가? (물론 아직까지 그런 들썩거리는 집회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의 이질감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나니 한편으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런 불편한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병권 쌤이나 ‘총파업’ 행진을 기획했던 분들에게, 장판 활동가들이 가끔 시청 장애인복지과 등에 프로포절 내듯이 <총파업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2012년 사업계획서>를 써오라고 요구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사업계획서를 백가지 천가지를 써온다고 한들 수많은 우연과 사건의 충돌로 형성되는 역사의 순간들 앞에서 어차피 무용지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시작되는 순간, ‘총파업’

 

생각해보면 ‘총파업’은 그와 같은 용어로 지칭되는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도망가기를 언제나 주저하지 않았다. 역시나 올 해에도 민주노총은 메이데이 집회에서 총파업 투쟁을 감행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총파업’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시청 광장을 가득 메웠던 깃발들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월차내고 재능 갑시다”라고 배짱 좋게 이야기하던 어떤 활동가의 위트 있는 한 마디와 더 잘 어울렸다.

고병권 쌤은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대와의 만남을 계기로 이러한 글을 쓰고,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 만남을 하나의 ‘사건’이라고 지칭했다. 지친 몸을 쉬러 떠난 타국의 현장에서 만난 시위대와의 만남이 하나의 ‘사건’이듯이,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모두 사건들이 쌓이고 쌓여 생긴 퇴적암이었다가 그 사건들 외부에서 가해오는 또 다른 사건의 열기에 의해 다져진 편마암이 아닌가. 나는 이렇게 무수한 사건의 과정 속에 있는 총파업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고병권 쌤은 강연 서두에서 발달장애 아이를 둔, 투사가 된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어머니는 “부양의무제 폐지, 활동지원 시간 확대, 평생교육, 가족지원 등… 그 어떤 의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을 살리는 말들”을 자신과 처지가 같은 사람들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투사가 되는 길이, 아들을 살리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점거’와 ‘총파업’에 대한 강연에서, 왜 굳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발달장애 아이를 둔 어머니의 이야기로 시작했을까? 내가 받아들이기로는 이 ‘사람을 살리는 말들’을 듣는 순간이, 월가를 점거한 사람들이 ‘뭔가를 일으키는’ 사건의 순간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경찰이 점거 집회 예정장소를 원천봉쇄하자 점거자들이 주코티 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 누군가 ‘우리 모두 여기서 이야기를 하자’고 선언하면서 상황은 놀랍게 변했다. 처음에는 쭈뼛쭈뼛하던 사람들이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주변 사람들과 곳곳에 작은 원들을 만들었다. 그러자마자 이런저런 말들이 마구 쏟아져나왔다. 집을 잃은 이야기, 건강보험 없이 아이들을 키우는 이야기, 직장을 잃은 이야기, 대학등록금이 너무 높아 학업을 접게 된 이야기…”

 

이렇게 내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각인되고 있는 이 ‘사건’이란 대체 무엇인가? 적어도 이 ‘사건’은 자본의 방식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 자본은 오로지 ‘집행’할 뿐이다. 수익률의 하락을 타개하기 위해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는 업무를 ‘집행’하고, 대양해군을 육성하기 위해 수천 수만년 숨쉬어 온 구럼비 바위를 파괴하는 업무를 ‘집행’한다. 여기에서 존재와 존재가 만나 벌어지는 ‘사건’같은 것은 출현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 존재가 완전히 대상화되어 가치의 쓰레기통에 분리수거 되거나 운 좋게 살아남아 자본이 정해놓은 틀 속에서 근근이 숨 쉴 뿐이다. 요즘엔 심지어 ‘사랑’조차 집행될 뿐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최근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알랭 바디우의 『사랑예찬』이란 책에서 저자는, 프랑스의 결혼 중매 사이트쯤 되는 ‘미틱’(Meetic)이란 사이트의 광고 문구에 의문을 표한다. “위험없는 사랑을 당신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사랑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설렘, 갈등과 시련… 이 따위의 위험들을 모두 제거하고도 사랑할 수 있다는 이들의 ‘사랑’에는 우연적인 사건, 즉 ‘만남’이 배제되어 있다. 오로지 특정한 조건과 조건을 일치시키는 프로그램을 ‘집행’할 뿐이다. 이러한 사랑의 과정, 사건의 과정에서 기계적으로 소외된 인간들은, 미틱의 집행에 의해 선택되거나 버려지거나 둘 중 하나만이 가능할 뿐이다.

점거는 그리고 총파업은, 이렇게 자본의 계획표에 따라 진행된 집행에 의해 버려지고 배제된 존재들이 드디어 입을 열고 이야기를 벌릴 자리를 제공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으로서는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발달장애 아이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 달라고 말하기 위해, 어머니는 교육청을, 보건복지부를,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는 ‘사건’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고립된 삶을 살아왔던 발달장애 가족들은 서로를 인간적인 관계망으로 끌어당기게 되고, 발달장애인을 배제한 채 작동되는 체제의 ‘중단’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실천한다.

 

 

자본의 일정표에서 일탈하기

 

총파업(General Strike). 그것은 이 어머니처럼 체제의 중단을 요청하는 ‘온갖 요구’들이 모이는 순간의 사건을 지칭한다. 그것은 모이는 사람들의 수로 ‘계산’되지 않고, 특정한 기관의 계획과 일정표에 의해 ‘집행’되지 않는다. 총파업이 작동되는 원리는 오로지 사람들이 광장에서 만나는 사건의 순간, 각자가 터뜨리는 웃음의 크기, 흘리는 눈물의 염도에 좌우될 뿐이다.

 

 

 

어제 오랜만에 집회에 나갔다.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23번째 죽음을 막기 위한 ‘희망행진’. 오랜만에 집회 단상에 오른 김진숙 지도위원의 발언은 또 한번 요약 불가능한 감동을 전해줬다. 그녀의 발언에는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2012년 총파업 사업계획서>같은 것은 없었지만, 자본에 맞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실천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었다. “울다가 웃자. 그리고 사랑에 빠지자.”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 월스트리트 점거운동 르포르타주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 월스트리트 점거운동 르포르타주
고병권
그린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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