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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교수 강의에 대한 몇 개의 메모


* '빌리 엘리어트'와 노동자계급 문화의 남성적 전통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보면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의식을 가진 남성 노동자들이 남성성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자존과 긍지를 지켜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학교와 계급재생산'에 대한 글에서 고민했던 것도 이런 지점인데, 남성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남성성의 강조, 성차별주의/가부장제와의 결합이 문제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갈 것인가이다. 노동자 계급의 상징을 남성적인 것에서 전위시킬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남성성은 노동자계급을 민족국가가 동원하며 여성노동력을 평가절하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반동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 이것은 언제든지 다시 민족국가에 동원될 수 있다. (또 파시즘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특성이 반여성주의라는 점을 기억하자) 따라서 당장 남성 노동자대중을 동원하는 데 있어서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흡인력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상징을 활용해서는 안 된다. (전술적 필요에 의해서 전략적 원칙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원칙일 텐데, 잠시 후에 언급할 다른 쟁점과도 연관된다.)

노동자 투쟁에서 여성노동자 투쟁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계승하고 현재적으로 활성화하는 것, 노동자계급의 단결의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여성노동자 투쟁의 폄하/분리는 계급본질주의적 시각과 연결된다. 계급본질주의는 내적으로 남성중심적으로 노동자계급을 사고하고 있다. '밥꽃양'은 억압-분리되고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미약한 前史로 취급된다.)

문제는 그것이 단지 운동문화일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일상문화에 침투해야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를 성공적으로 해낸 사례는 다른 나라의 대중운동에서도 별로 없는 것같다. 여튼, 이를 위해서는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조직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여기서 활동가들의 위상이다.
 
* 활동가들의 위상, 이론의 위상, 이데올로기
 
대중운동의 활동가들은 대중과 끊임없는 전이-역전이의 관계에 있다. 활동가들이 가지는 의식은 이론으로부터 형성된 것으로부터 대중으로터 전이된 것까지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혼동하게 되고 상호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변용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운동문화(결국 이데올로기의 영역이다)를 변화시켜내는 활동에 있어서도 현존의 대중 이데올로기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활동가들에게 있어서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활동가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이론에 있어서도 정도는 다르더라도 사실일 수 있다. 특히 계급투쟁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하는, 계급투쟁 속의 이론에 있어서는 그러한 역전이는 이론에 있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맑스주의가 여성억압의 문제에 대해서 무지했다면 이것은 이론의 영역에 대해서 대중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후대의 맑스주의자들은 물론 맑스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시 활동가들로 되돌아오자. 활동가들에게 있어서 대중과의 전이-역전이는 필연적인 것이지만, 이 속에서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대중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 복수의 정체성과 '국면'
 
임지현 교수는 본질주의와 환원주의를 비판한다. 복수의 정체성, 복수의 모순을 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 복수의 정체성을 사고하고 주체 내의 모순에 대해서 사고해야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복수의 정체성들이 드러나는 어떤 '국면'인가의 문제일 텐데, 그것을 무시하게 되면 단일한 기원과 본질의 환원주의로 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주체의 내적인 복합성은 어떤 국면-정세에서 외부와 만나고 각각 다른 식으로 작동한다는 것. 따라서 대중은 정치적 쟁점들에 대해서 일관되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인정해야만 노동자계급의 단일성 혹은 이를 반영하는 당의 무오류성을 부당전제하지 않을 수 있다.
 
* 오리엔탈리즘과 페미니즘

페미니즘이 서구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왜일까? 서구는 식민지를 야만으로 인식하면서 제국의 남성이 식민지의 여성을 봉건적인 질곡에서 구출한다는 플롯을 창조했다. 식민주의자들의 텍스트 속에는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형상화한다. 이것은 비극적인데, 페미니즘이 서구적인 것으로 인식되면서 민족주의자들에게도 이질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그밖에도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를 여성으로 표상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아직도 그러한 영향은 깊게 남아 있는데 임권택 감독이 상을 받는 영화들은 서구의 시선 속에서 한국의 전통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라는 사례
 
* 파시즘의 주요한 특징으로서 반여성주의

남성적인 노동자계급 문화가 남성중심성, 여성폄하와 함께 파시즘에 동원될 우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민족국가의 남성 시민은 민족국가가 징병제를 통해서 자신들의 전쟁에 남성들을 동원하면서 형성되는데 내적 기원에 있어서 민족국가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미국에서 네오콘의 경우도 반여성주의의 특징을 보여준다. 남한에서도 새롭게 형성되는 우파들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
 
* 모성보호법안

임지현 교수는 모성보호법안이 '국가경쟁력을 위한 것'으로 제기되는 것에서 국가주의의 혐의를 읽어낸다. 우에노 치즈코의 <내셔널리즘과 젠더>를 언급하는데, 국가에 대한 의무를 통해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받으려는 일부 여성진영의 시도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태평양전쟁에 대한 전시 동원에 여성운동의지도자들이 여성이 국민으로 인정받는 계기라고 판단하고 적극 협력하였다. '국가를 위한' 출산장려정책의 일환으로서 모성보호법안은 위험할 수 있다. (이것도 전술적 필요에서 전략을 희생하는 사례일 것)

최근에는 한겨레21이 여성도 군대를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런 식의 편의적인 입장이 여성운동 내에 존재하는 것은 문제다. 특히 모성보호를 '국가경쟁력을 위한' 출산정책과 연결할 경우, 여성의 자기 육체에 대한 권리를 증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운동이 오히려 국가를 위해 여성의 육체를 동원한다는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모성보호도 보호지만, 더욱 강력하게 국가의 출산강요를 비판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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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공공서비스노조 투쟁승리 공공연맹 결의대회

※ 광주전남공공서비스노조 동지들이 쓴 지난 24일 투쟁 기사입니다. 정말 이날 비 엄청오더군요. (집회가 끝나니까 비도 그침 -.-;) 이 투쟁도 얼마전에 올린 경북 칠곡 환경미화원(대구경북공공서비스노조 http://blog.jinbo.net/rudnf/?cid=4&pid=13)들의 투쟁과 같이 공공서비스의 민간위탁, 외주용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에는 전국학생연대회의 동지들과 간담회도 진행했는데 유익하고 뜻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올리죠.

 

2005년 8월 24일 수요일, 광주전남공공서비스노조는 하루 전일파업투쟁을 실시하였다. 아침 일찍 시청 앞에 모여 광주지역일반노조 `희망원` 동지들과 함께하며 아침출근투쟁을 시작으로, 도청과 서구청으로 이어지는 집회와 도보행진을 실시하였다.
 
어제에 이어 우리는 시청 앞 거리에서 피켓과 프랑을 펼쳐들고 시청 앞을 지나는 광주시민들을 향해 우리들의 요구와 주장을 알렸고, 선전물을 통한 거리 선전전을 했다. 시청 앞 아침출근투쟁을 마치고, 조합원들 모두 연맹 사무실로 들어가 함께 프랑과 피켓을 만들면서 이후에 있을 집회와 선전전을 준비하였다.
 
오후 2시, 노동조합 투쟁승리를 위한 공공연맹 결의대회를 위해 상무관 앞엔 공공연맹 소속의 사회보험노조, 광주시립예술단지부, 광주지역일반노조 전남케이블방송tv, 민주노총, 광주전남현장연대 등 많은 동지들이 함께하였다.
 
상무관 앞에 모인 조합원들과 연대단위 동지들은 비가 오는 가운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옷을 입고 박준영도지사와 도청의 말도 안돼는 행정을 규탄하는 항의집회를 가졌다.
 
도청 앞 항의집회를 마치고 도청에서부터 서구청까지 가두 행진을 하면서 길거리 선전전을 펼쳤다. 도청을 지나 금남로를 거쳐 양동시장에서 우리는 멀리서 연대하러 온 전국학생연대회의 학생동지들과 합류하여 서구청까지 함께 행진하면서 길거리 선전전을 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빗속에서도 동지들의 투쟁의지는 수그러들 줄 몰랐으며, 서구청 앞에 도착한 후에도 수진환경 문제 해결 촉구를 위한 서구청 항의집회가 이어졌다.
 
서구청 마무리 집회에선 전국학생연대회의 학생동지들의 연대사와 공연이 이어졌고, <민간위탁/ 환경오염/ 용역전환/ 시설비리/ 산업재해/ 노동탄압/ 공공성 파괴/ 비정규직/ 여성차별> 등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와 같은 글귀가 적힌 붉은프랑을 모두 함께 찢으면서 전일파업투쟁을 마무리 하였다.
 
끝으로,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공공연맹 결의대회에 참가한 동지들은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할 것을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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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신민노회 수련회에서 몇가지 메모

지난 주말에 있었던 체신민주노동자회 수련회.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서 몇가지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들이 있다.
 
 
* 김진숙 지도위원 강의 중, 다 듣지는 못하고 군데군데만 들었지만 몇가지 메모
 
o 문화적 행동과 물질적 조건
남성 노동자들이 집에서 말이 없는 이유는 그들의 노동의 성격이 단순노동으로서 어떤 의미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의 공장에서 하루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노동자들의 문화적 행동들과 그들의 작업장, 노동의 물질적 성격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o 비정규노동자운동의 목표는 무엇인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목표가 노동해방이 아니라 오직 정규직화. 비정규직은 정규직화에 몰입하는데, 그 자체가 부당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전망을 정치적으로 것으로까지 밝혀가지 못하고 정규직화에 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렇게 되면 사측의 선별적인 정규직화 시도에 곧장 조직이 무너지는 등 단결이 약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노동해방 이념의 중요성은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에도 마찬가지로 강조되어야한다는 점. 그렇다면 정규직화 요구에 몰입하고 정작 정규직화 된 이후에는 운동적 전망을 상실하는 경우들을 볼 때, 또 일부가 정규직화된다고 해서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기 난망하다는 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에 있어서도 정규직화 요구를 넘어서는 요구를 정리해야한다.
 
o 한일 FTA와 노무현정권의 노사관계 로드맵의 관련성.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한일 FTA에서 일본의 요구사항과 노사관계로드맵의 내용이 같다는 지적이다. 몇몇 자료를 찾아보니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그 내용적 유사성에 대한 내용들이 있다. 노사관계로드맵이 추진되는 정세적 이유중에 중요한 요인이 세계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들 투쟁을 연결해야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노동기본권 쟁취투쟁과 세계화 반대투쟁을 단락시키고 대중운동을 급진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 그밖의 발제, 대화들에서.
 
o 어용세력의 전문가주의
어용세력은 교섭의 전문가주의를 내세우면서 조합원을 대상화시키고 권력을 유지한다. 이 전문가주의는 관료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관료적 권력을 유지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지식독점을 전제하는 데 지식이 권력이 된다. 이러한 지식독점을 통한 권력 독점은 부르조아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해서 행사하는 것인데 노조 조직 안에서 노조관료들이 이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주의는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라는 점에서 민주노조 운동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경계해야한다. 지식의 보편적 확산, 민주화가 중요한 과제이다. 지적노동, 육체노동의 분할을 철폐하는 것은 노동자 조직 안에서부터 진행되어야한다.
 
o 허구적인 자격증제도
집배원 채용에 워드자격증 등 정보통신 관련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집배원 업무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수 없는 이들 자격증 강요는 자격제도라는 것이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이 점은 '학교와 계급재생산 '의 저자가 지적한 바 있다. 노동자계급 자녀들은 이를 '간파'하기 때문에 자격증을 무용한 것으로 취급한다는 언급과 함께 말이다. http://blog.jinbo.net/rudnf/?cid=2&pid=10)
 
o 현장조직의 임무
현장 조직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집권인가 현장의 민주화인가? 그것이 대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어떤 시기에는 선택의 문제로 드러날 때가 많다. 많은 대공장노조에서 집권을 통한 민주화라는 프로젝트는 현장조직을 선거조직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아직 어용세력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 있는 체신노조와 같은 곳에서는 집권 프로젝트을 떠난 현장민주화의 전망을 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선거에 몰입해서는 안되며, 선거조직으로 전락한 다른 현장조직들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어떤 구체적인 실천들이 여기에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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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홈페이지?

 
'러시아에 관한 명상'이라는 곡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 노래 가사를 하나 검색하다가 발견한 사이트.
 
새벽의 홈페이지 혹은 팬페이지.
 
93년 공연의 전체 실황도 있고 가사도 전부 있는데, 음질은 너무 좋지 않아서 듣기 힘들다.

저 평등의 땅에
 
 
저 하늘 아래. 미움을 받은 별처럼.
저 바다 깊이. 비늘 잃은 물고기처럼.
큰 상처입어. 더욱 하얀 살로.
갓 피어나는. 내일을 위해.
그 낡고 낡은. 허물을 벗고.
잠 깨어나는. 그 꿈을 위해.
.....
 
우리. 노동자의. 긍지와 눈물을 모아.
저 넓디 넓은. 평등의 땅 위에 뿌리리.
우리의 긍지. 우리의 눈물.
평등의 땅에. 맘껏 뿌리리.
......
 
평둥의 땅에. 맘껏 뿌리리.
 
홈페이지의 코멘트 : http://dawn.logosia.com/204-dawn.html
 
 
참 좋아하는 노래였는데 부른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다는 점이 부끄럽다. dimitri형 소개 덕분에 '윤선애씨 어디 계세요"라는 타이틀의 비라이센스(?) 음반' mp3p에 넣어서 열심히 듣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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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이해관] 강성은 언제나 변혁적인가

매일노동뉴스에 실린 컬럼. 생각해볼만한 글이라 옮김.
 
전투적 경제주의가 처하게 되는 딜레마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좌파의 정체성을 거기서 찾으면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전투적 경제주의의 문제설정에 빠져있을 경우에는 협조주의 노선과 거울대당하게 되는 데, 사회적 합의주의를 둘러싼 논쟁에 좌파들이 올 상반기 내내 몰입한 것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장칼럼>
강성은 언제나 변혁적인가 
 
“협조주의 노선은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 아닌 결과”
 
증시에 공시된 바에 따르면, 지난해 KT의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5,130만원이다. 이 금액에는 각종 복지혜택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반면, 동일업무를 하는 KT의 하도급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체로 월 180만원 정도의 임금을 받고 있다. 이 금액은 통신수리공에게 필수적인 통신요금, 차량유지비 등의 비용이 포함된 액수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서 계산하면, 대체로 KT의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3배가 된다. 순수노동시장의 논리로 얘기하자면, KT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울타리가 제거된 채 노동시장에 내동댕이쳐질 때 임금이 1/3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는 현 KT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에 노동력 시장가격의 2배 정도의 초과이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 이해관
· 1963년생  · KT 해고자
· 전 KT노조 부위원장
·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 기획위원(현)
 

물론 이 초과이윤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사실상 유선통신시장에서 독점적 성격을 띠고 있는 KT의 독점이윤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소비자로부터 얻은 초과이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하도급 업체와의 불공정 계약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에도 못 미치는 초과착취 임금에 기초한 것이다.
 
민영화 이후 KT는 공기업 시절과는 달리 독점적 지위를 적극적인 수익 창출의 기회로 활용하면서 엄청난 돈벌이를 하고 있다. 매출은 10조원을 훌쩍 넘어섰고 당기순이익은 꾸준히 1조원대를 유지하며 2조원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민영화 이후 KT 정규직의 임금인상은 KT의 막대한 이익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2~3%에 머물고 있다. 민영화를 위한 해외매각이 시작된 1998년 1억5천만원에 불과했던 1인당 매출이 2003년 3억원을 넘어섰음을 감안하면 KT의 초과이윤 배분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은 매우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고용안정이 먼저냐, 임금인상이 먼저냐
 
이러한 낮은 임금인상에 대해 KT 정규직 노동자들은 불만이 적지 않다. 소위 ‘민주파’ 활동가들은 ‘이러한 낮은 임금인상률은 사측의 협조세력에 불과한 무기력한 노동조합 때문’이라며 ‘강력한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활동가들의 주장에 KT 정규직 노동자들은 일정 정도 동의를 표한다. 실제로 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의 발전에 비하면 임금인상이 형편없다고 느낀다. 특히 안정적인 고용보장이 전혀 작동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로서는 당장의 임금인상이 절실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이다. KT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임금에 노동시장에서의 시장가격보다 2배 이상의 초과이윤이 포함되어 있음을 모르지 않다. 그래서 회사 발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인상에 대해 불만을 갖지만, 동시에 KT라는 기업이 제공하는 울타리가 아니면 현재의 임금수준이 유지될 수 없음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케이블TV, 초고속인터넷 등 새로운 유선통신 분야의 등장으로 통신수리공이 부족했던 2000년대 초반까지와는 달리 지금은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통신수리공들의 임금은 계속 하락하는 추세다. 이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격차를 더욱 확대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격차의 확대는 고스란히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구조조정 압박으로 작용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은 줄어든다. 초과이윤의 대부분을 자본이 챙기는 셈이다. 이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만은 높다. 그러나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의 시장가격과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간의 격차가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불만이 투쟁으로 폭발하지 않는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노동자들은 두 가지 노선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나는 강력한 노동조합을 통해 회사의 성장에 걸맞는 임금인상을 쟁취하는 노선, 이른바 ‘강성’ 노선이다. 이는 독점으로 KT가 확보한 초과이윤 배분과정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을 늘리자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력의 시장가격과의 차이 속에서 정규직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임금인상 등을 자제하며 회사 경영에 협조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KT의 초과이윤 창출에 적극 협조하자는 노선인 셈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협조주의’ 노선이 우세해진다.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이 하락하면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이 거의 동결 수준이어도 격차는 확대되며, 격차가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KT의 초과이윤 가운데 정규직 노동자의 몫을 투쟁으로 확보하자는 강성노선의 설득력은 떨어진다. 그 결과 노조는 점점 협조주의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왔다.
 
'강성' 노선과 '협조주의' 노선은 동전의 양면
 
그런데 많은 활동가들은 거꾸로 현장에서 협조주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이라고 얘기한다. 그래서 ‘강성’ 투쟁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협조주의 세력의 강화는 위기의 결과이지 결코 원인이 아니다.
 
대기업 노조에서 외형상 매우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노선의 차이는 실제로는 초과이윤을 배분받는 방식 및 배분의 양과 관련된 전술적 차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두 노선의 외관상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두 노선은 현재 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딜레마의 즉자적 반영에 불과하다.
 
협조주의 노선이든 강성 노선이든 두 입장 어느 것도 독점 대기업의 초과이윤의 원천인 독점이윤,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하청 노동자간의 차별구조 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 한 지금의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명백하지 않은가!
 
이미 KT의 구조조정 압박은 기업 내적인 데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KT는 여전히 돈을 잘 벌고 있고 부도날 위험도 전혀 없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하락은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임금격차를 계속 확대시키고 있고, 이는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구조조정의 강력한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응하는 노동운동은 기업 내 초과이윤 분배 차원을 조금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노동시장에 대한 그 어떤 운동적 개입도 하지 못하고 있다.
 
구조조정이 사회적 영역으로부터 압박해 들어오는데, 그에 저항하는 노동운동이 기업 내적인 초과이윤 분배에 머문다면 승부는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노조원들은 강성 노선이든 협조주의 노선이든 노조가 지금 노동자의 삶의 딜레마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이 차이가 굉장한 차이인 것처럼 주장한다. ‘강성=변혁적’이라는 생각이 굳어져 있다. 그래서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을 협조주의 세력 탓으로 돌리고 정작 자신의 운동노선이 초과이윤 내에 갇혀 있음을 성찰하려 하지 않는다. 초과이윤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 분배 방식에서 강성이냐 아니면 협조주의냐의 차이를 절대적인 차이로 규정하면서 스스로 ‘강성=변혁세력’임을 자위한다.
 
초과이윤에 안주하는 노동운동과 초과이윤을 문제삼는 시민운동
 
최근 민영화 이후 KT의 경영이 공공성을 외면하는 데 대해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KT의 초과이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비자의 관점에서 KT가 막대한 이윤에도 불구하고 요금인하를 하지 않는 데 대해 문제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종량제 도입 반대, 사회 공공성을 위한 적절한 공공투자 확대 요구, 주주가치 중심의 고배당 비판 등 여러 각도에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문제제기의 핵심은 공적 기업인 KT의 초과이윤을 주주들의 사적 소유 대상으로 할 게 아니라 사회화 하라는 요구이다.
 
여기서 필자는 과연 어떤 운동이 더 진보적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초과이윤에 안주하는 노동운동과 초과이윤을 문제제기하는 시민사회 중 과연 누가 진보적인가! 노동자가 하는 운동이라고 다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노동운동의 진보성이 인정되는 것은 노동자가 자본주의에서 가장 착취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노동자들이야말로 가장 착취당하는 존재이기에 자본주의 사회를 가장 철저하게 변혁시켜야 하는 역사적 사명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동자들이 하는 운동이어서 진보적인 게 아니라 노동운동이 보편적 인간해방이라는 역사적으로 부여된 사명을 수행할 때 진보적인 것이다.
 
노동운동의 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협조주의 세력의 발호 때문도 아니다. 노동운동이 근본적인 자기성찰을 게을리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초과이윤 확보 방식을 둘러싸고 전술적 차이만을 절대화 했을 뿐, 사회 보편적인 관점에서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분할지배전략에 맞서 노동운동의 대응을 모색하지 못한 우리 스스로의 책임이다.
 
스스로를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독점 대기업의 필터를 통해 바라보는데 익숙해진 우리 활동가들의 한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충실히 실천하는 데서 변혁성을 찾기보다는 협조주의 세력과 대립에서 변혁성을 자위한 우리의 소심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우리 노동운동 활동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업의 울타리 내에서 ‘강성=변혁적’이라고 자족하는 게 아니라, 사회변혁을 추구하기 위해 사회운동적 관점에서 노동운동을 재구성하려는 진지한 자기성찰이다.
 
 
이해관 전 KT노조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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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나쁜 과학 - 근본적으로 위험한 유전자조작 생명공학


나쁜 과학 - 근본적으로 위험한 유전자조작 생명공학
매완 호 지음, 이혜경 옮김 / 당대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 중에서 나중에 엉터리라는 것을 알고 분노한 일이 많이 있다. 그런 와중에도 굳건하게 믿음을 유지한 내용들도 있는데 물리, 화학, 생물 등 주로 자연과학과 관련된 학과목 내용이다. 자연과학이라는 것도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알튀세르와 쿤으로부터 배웠지만, 적어도 중고등학교 자연과학 과목에서 가르칠 정도의 기초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수십년 믿어온 '공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엉터리라는 것을 또 한번 발견할 게 될 때 황당함이란!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에 대해서, 그리고 이를 지탱하고 있는 생물학의 편견들에 대해서 말하는 이 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물학과 생명공학에 대한 '상식'을 깬다. 이 '상식'들을 깨는 과정에서 유전자조작 생명공학이 약속한다고 하는 '멋진 신세계'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 우선 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을 다시 살펴보자.
 

다음 세대에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생물의 생식세포는 체세포 기관을 통해서 복사되는 만큼 체세포의 유전자 변화는 당연하게도 생식세포에 영향을 주고 다음 세대에 유전된다. 생명체는 외부 환경에 의해서 끊임없이 유전자 자체의 변화를 겪기 때문에, 이 말은 곧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말이다. 어찌보면 대단히 상식적인 내용인데도 '획득형질은 유전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 진리라고 반복되는 것은 도그마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생명체 형태의 기본적인 내용은 모두 유전자 안에 있기 때문에 유전자만 적절하게 분석한다면 생명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유전자는 다양한 외부환경에 반응하면서 전혀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에 동일한 유전자가 동일한 결과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혹은 다른 유전자와 상호작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유전자의 영향으로 인해 특성은 발현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유전자는 무엇인가?
 
생물학에 대한 편견들은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임은 물론 역으로 그것에 의해 강화된다.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에 대해서 이렇게 흥미로운 예도 없을 것이다. '우리 유전자 안에 있다'는 주장은 과학이자 이데올로기로서 나타나고,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전제가 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유전자 결정론', '사회 생물학'과 같은 사이비 과학들이 최첨단 유전자 공학 생명공학의 지지를 받으면서 대중에게 수용된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유전자 조작과 인간복제를 상업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지원할 수 있게 한다. 이데올로기와 과학과 자본의 고려가 동시에 작동하고 서로를 강화한다. 저명한 분자유전학자들은 이미 생명공학기업의 투자를 받거나 이사로 활동하는 등 긴밀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데, 이들은 또한 앞장서서 유전자 결정론을 선전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이데올로기는 기괴한 것이다. 농업생산을 늘리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유전자 조작농산물은 유전자 전이를 통해서 잡초의 제초제 내성을 길러주고 결국 농약으로 인해서 생산을 파괴한다. 사소한 기후 변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농사를 망치게 된다. 세균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항생제는 박테리아에 대한 유전자 조작 과정에서 박테리아의 항생제 내성을 확산하여 '슈퍼 박테리아'를 만들게 된다. 유전자 조작 식품에 포함된 조직된 DNA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인체에 흡수될 수 있다. 이런 DNA에는 불임유전자와 같은 것도 있다. 유전자 전이를 쉽게 하기 위한 프로모터는 수평적 유전자 전이를 가능하는 한편, 이종 간 질병 확산이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최근의 조류독감 파동은 이런 직접적인 결과일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파괴적인데, 이들이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는 우생학을 합리화한다. 유전자 안에 있다면, 열등한 유전자를 찾아내어 박멸해야할 것이다.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비만 유전자'나 '범죄 유전자'를 찾아서 유전자 치료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을 박멸(!)하기 위한 우생학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유전자는 '환경 속에서' 발현하기 때문에 동일한 유전자가 동일한 결과를 산출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방식은 정치적으로도 해악적일 뿐 아니라 실제로 유전병을 방지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박탈한다. 모든 것이 이미 유전자 안에 있다면 여성은 단지 유전자에 기입된 것을 발현하기 위한 인큐베이터에 불과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편견은 이미 제국주의 시대에 확립된 유전학이 가지는 관념, 모든 것을 지도, 통솔하는 유전자와 이에 따르는 재생산 세포라는 식의 구분, 자본-노동자의 구도를 본 딴 유전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이해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 산업은 제3세계에 대한 유전자 착취도 발명해냈다. 전통사회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작물들은 그것을 '발견'한 초국적 기업의 특허품이 된다. 그리고 제3세계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시험장이 되면서 전통농업의 재생산 기반은 파괴되고 초국적 기업에 완전히 종속된다. 유전자 다양성의 파괴, 농약의존으로 인해 곧 농민들의 몰락을 부추길 뿐이다.
 
최근의 쟁점이 되는 인간복제 문제에 대해서도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할 지점들을 찾을 수 있다. 인간복제 시도는 성공할 수 없는데, 이미 고유한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복제(동물복제)는 체세포의 핵을 난자에 이식하여 이를 착상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미 체세포의 핵에 있는 유전자는 성체의 성장과정에서 배아상태의 것과 같지 않고 변형되어 있다. 따라서 전혀 '같은' 유전자를 확보할 수 없다. 또한 체세포 유전자는 발생초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공가능성이 극히 낮다. 수백개의 난자를 확보하여 진행한다고 해도, 출산에 성공하는 확률도 낮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낮다. 복제양 '둘리'의 경우 300여개의 수정란을 조직함을 통해서 성공했다. 더 성장하더라도 이미 '늙어서 태어난' 것처럼 일찍 노화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복제의 문제는 인간 정신의 동일성이 복제된다는 오해와 같은 것 때문에 위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문제의 모든 결과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젝의 언급이 사고실험으로서 모순을 사고하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사실에 대한 무지와 정치적 쟁점에 대한 무시로 인해 해악적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나쁜 클론을 두려워 하는가?Who's afraid of the Big Bad Clone? http://blog.jinbo.net/taiji0920/?pid=623)
 
저자는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의 이런 수많은 쟁점들이 상호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상세하게 밝혀주고 있다. 무엇보다 장점은, 따로 따로 사고하기 쉬운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의 여러 쟁점, 문제들이 자본의 이해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밝혀준다는 점이다. 인간복제로부터 제3세계 유전자 착취, 우생학, 초국적 제약회사의 횡포, 곡물 메이저들의 착취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최근 뜸하던 황우석 교수는 개 한 마리를 복제한 이벤트로 다시 언론을 탓다. 이 책을 통해서 사실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다면 이제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 복제 시도가 가지는 위험과 성공 불가능성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개 복제가 결국 오로지 여론조작을 위한 부질없는 시도이며, 거대한 실망을 낳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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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최원]비극의 의의 혹은 취중결론

사회진보연대 게시판에서 최원씨의 인상적인 메모를 퍼오면서 몇가지.
 
글을 옮기기 전에 내 이야기를 먼저 하자. 내 아이디 '겨울철쭉'은 PC통신이 막 활성화되던 시설에 만든 아이디이다. 당시에는 참세상도 텍스트기반의 '이야기'나 '새롬데이타맨'으로 접속하던 시절이었고 나우누리 '찬우물'은 운동권들의 플라자, 공론장이였다. 이 두 서비스는 한글 아이디를 제공했는데 그 때 만든 아이디다.
 
아이디는 '조국과청춘'이 불렀던 '녹슬은 해방구'의 가사 첫부분에서 따왔다. '조국과청춘' 1집이니까 92년이다. 92년. 지금이나 그때나 정파적 대립에 따라서 즐겨부르는 노래도 달랐지만, 이 노래는 좌파 중에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녹슬은 해방구
- 글,가락 김석준

그 해 철쭉은 겨울에 피었지
동지들 흘린 피로
앞서간 죽음 저편에
해방의 산마루로 피었지

그 해 우리 춥지는 않았어
동지들 체온으로
산천이 추위에 떨면
투쟁의 함성 더욱 뜨겁게

산 너머 가지위로 초승달 뜨면
머얼리 고향생각 밤을 지새고
수많은 동지들 죽어가던 밤
분노를 삼키며 울기도 했던

나의 청춘을 동지들이여
그대의 투쟁으로 다시 피워라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조국 해방의 약속을
 
 
이 노래를 들으면 빨치산 투쟁이 마지막으로 치닫던 1953~4년의 겨울을 생각하게 된다.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서는 알수없는 감정에 빠지고는 했는데, 빨치산 투쟁의 그 비극성 때문이었다. 비극성. 그것을 사고해야한다고 생각했었지만 비극의 의미에 대해서 달리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예정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가 없는 딜레마와 그리고 알 수 없는 어떤 것 그 이상은 말이다.
 

비극의 의의는 어떤 혁명적 시도들의 실패의 장렬함을 보여줌으로써 이후 세대들이 유사한 길을 걷도록 촉구하는 데 있지 않다. 또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전 실패의 원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공에의 보증을 이후 시도들 속에서 조금이라도 증가시킬 것을 촉구하는 데 있지도 않다.
 
내가 이해하기에, 비극의 의의는 혁명을 원하는 그 모든 동일자의 법칙(혹은 확신)은 예기치 못한 타자의 법칙(혹은 확신)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며, 따라서 그 모든 혁명적 시도들은 항상-아직 '유한한 것'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만드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비극의 의의는 혁명적 시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이 빠져들 그 모든 '확신'에도 불구하고, 왜 동일자가, 혁명의 주체가, 여전히 타자를 향해, 심지어 자신의 적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내는 운동을 행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비극을 실패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결국은 마찬가지 이야기겠지만) 끝내 도래하여 그 모든 실패들을 '보상(redeem)'해줄 성공에의 촉구로 이해하는 것은 모두 종말론적이고 결단론적인 비극 이해일 뿐이다. 하이데거와 벤야민이 공유했던 이 위험한 코드를 반복하지 말 것.
 
혁명은 '목표'가 아니라 '정세'일 뿐이라는 점, 우리는 혁명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정세로서의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수행할 수 없는 다수의 곤란한 목표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볼 것. 그리고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할 수 없는 다수의 목표들이 문제인만큼, 혁명은 여전히 어떤 '정치'가 가능해야할 공간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것. 만일 혁명이라는 정세가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정세로 둔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이 아니며 가장 끔찍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할 것. 혁명 속에서 무엇이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가, 혁명 속에서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정치는 어떤 것인가를 사고할 것.
 
"우리에겐 반역해야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인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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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칠곡군 해고 환경미화원 12명의 투쟁

대구경북공공서비스노조의 칠곡환경지회의 해고자 복직투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제가 지원하는 사업장이기도 하죠.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확대가 민간위탁, 외주용역으로 전면화되고 있는 것이 최근의 상황인데, 아래 칠곡환경지회의 투쟁은 지방자치단체가 간접고용 비정규직을 확대시키고 공공성을 훼손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매우 중요한 투쟁입니다.
 
***
 
경북 칠곡군의 환경미화원 노동자들의 복직투쟁이 얼마 있으면 100일에 이르게 됩니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동네로 알려져있는 대구경북지역에서 수십년간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온 환경미화원 노동자들이 투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칠곡군은 대구 바로 위에 있는 곳으로, '왜관읍'이 있는 곳입니다)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사업장이 폐쇄되고 해고되었기 때문입니다.
 
 

조합원들은 1년 365일, 말 그대로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했습니다. 주5일 근무로 주말에 할 일 없어서 심심한 사람들이 사회문제가 되는 요즈음, 일요일이나 공휴일 뿐 아니라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에도 하루도 쉬어 본적이 없습니다. 일이 끝나도 군청 행사가 끝나면 달려가서 뒤 치닥거리를 했습니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곧바로 쓰레기를 치워야했고, 부모님 상을 당하고도 발인이 끝난 후 현장에 달려와야했습니다. 딸자식 결혼하는 날도 쓰레기를 치우고 헐레벌떡 냄새나는 옷을 갈아입고 식장으로 달려가야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무리 시골동네이지만 이런 식의 착취가 어디에 있습니까? 조합원들은 해고가 되고 나서야 처음 주말을 가족들과 쉬어봤습니다.
 
그러고도 임금은 군청에 직접고용된 환경미화원의 반토막에 불과했습니다. 우선, 군청이 업체에게 민간위탁하는 과정에서 군청이 애초에 정해진 예산의 일부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다른 용도로 전용합니다. 아마도 '꼬리표없는 예산'으로 변신한 이 돈은 군수의 선심성 예산으로 쓰였을 겁니다. 그런 다음 업체가 또 지급된 금액을 떼어 먹습니다. 사장이나 사장 마누라, 친구를 가짜 환경미화원으로 장부에 올려서 임금을 전용하고 각종 법정수당을 전혀 지급하지 않아 체불임금이 수천만원에 이릅니다. 이렇게 해서 부패한 관료와 자본가들이 다단계로 전용한 금액이 수십억입니다. 아마 이 금액은 불법적인 정치자금으로도 많이 흘러들어갔겠죠. (부패한 정치인-관료와 민간위탁 업자로 선정된 자본가들이 공생입니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요구한 것도 소박한 수준입니다. 남들처럼 일요일이나 명절은 좀 쉬어보자, 월급, 다른 지역이나 직영 환경미화원 만큼은 안 되도 일이십만원 올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업자는 지노위 쟁의조정 마지막날에 폐업신고를 하고 도망을 가벼렸습니다. 아마도 노조를 깨기 위해서 군청과 협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노조의 투쟁이 깨지면 아마 새로운 업자를 통해서 착취구조를 온존시킬 것입니다. 군청은 다른 두 개의 위탁업체를 통해서 대체근로를 시키고 있습니다.
 
칠곡군청이 민간위탁 업체를 통해 간접고용했으니 고용을 책임지라는 것이 조합원들의 요구입니다. 간단하게 군청이 직접 재고용해서 업무를 시키면 되고 그것도 안된다면 노동자들이 자주관리 기업에 맡기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군청은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지역주민이니 취업을 알선(?)하겠다는 황당한 말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탄압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장 황당한 것은 관변단체와 면장, 이장 등을 동원한 선전전입니다. 노조의 선전전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사용자가, 그것도 지방자치단체가 노조를 비방하는 선전전을 진행하는 한심한 상황인 것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이런 플랭카드가 새마을 어쩌구, 참전전우회 어쩌구 하는 관변단체 이름으로 읍내에 깔렸습니다. 관변단체 회원을 동원해서 저녁마다 유인물을 살포하기도 합니다. 노조를 비방하고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지요.
 
 
노동자들이 천막 농성을 시작하자 물과 전기를 끊어버립니다. 공무원들을 동원해서 노동자들을 미행하더니, 급기야 한나라당 타격을 위해 상경투쟁하는 대오에까지 따라붙고, 심지어는 민주노동당 의원을 만나러온 국회 안에까지 따라붙습니다. 이런 식이니, 어느 자본가가 군수를 믿고 탄압에 앞장서지 않겠습니까?
 
이렇다보니 투쟁은 장기화될 조짐도 보이고 있습니다. 버티기로 일관하는 것이 군청의 태도인데, 떨어져나가면 된다는 식입니다. 사태해결을 위한 군수면담을 요구해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분위기는 아주 좋습니다. 군대에서 특수임무를 하는 모 부대 출신인 지회장님의 헌신성에 기인하는 바도 크겠지만 12명의 조합원이 똘똘뭉쳐 있는 것이 투쟁을 지원하는 입장에서도 부러울 정도입니다. 각자 개성도 강한 사람들이 이렇게 잘 지내는 것을 보면 신기할 지경이죠. 지역 여론도 '군수가 너무하네'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에, 군청이 끈질긴만큼 우리도 끈질기게 투쟁한다는 결의가 높습니다.
 
이렇게 지역 공공부문 투쟁을 하다보면 단일 정당이 장악한 지역의 고유한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경상도에서 한나라당, 전라도에서 민주당 혹은 열우당이 장악한 상황에서 각 지역에서는 공천이 곧 당선입니다. 그렇다보니 이들 지역의 토호 정치인들은 주민들의 여론은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신경쓴다면 다만 공천에 영향을 주는 한에서입니다.(여기서 모든 정치의 블랙홀이며 대주우동원 이데올로기인 지역감정의 폐해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앞서도 보았듯이 환경미화원 업무의 민간위탁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패의 고리에 물려있는 정치인들에게는 환경미화원 12명은 안중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따라서 투쟁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투쟁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원리가 적용되는 사업장인 만큼 결의갖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공공기관의 특성상 어디로 도망가거나 폐업할 수도 없으며, 내년에는 자치단체장 선거도 있는 등 군수가 버티는 만큼 노동자들이 더 끈질기게 투쟁하면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사진 멋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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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에어컨이라는 아이디어

티코님의 [강물 에어컨] 에 관련된 글.
 
덧글을 따라가다가 재미있는 글을 발견했다.

강물에어컨, 강물을 이용해서 도시를 식히자는 아이디어라는데,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외국의 대도시에서 이미 실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름철 냉방용으로만 쓰기 위해 25조원 이상을 들여 12개의 원전을 만들어 가동시키고 있는 셈이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거 원, 원전을 완전히 없앨 수 있는 방법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들은 다양하게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원전을 또 짓자고 방폐장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이 놈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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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학교와 계급재생산


학교와 계급재생산 - 반학교문화, 일상, 저항
폴 윌리스 지음, 김찬호 외 옮김 / 이매진
 

영국 고등학교에서 장래에 육체노동자가 될 '싸나이'들에 대한 문화기술지이자 분석인 이 책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관찰이다. 다소 오래되기도 했고 영국의 상황이라는 점에서 시공간적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이데올로기가 주체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고 작동하는지, 이 과정에서 어떠한 모순이 작동하는 지 보여준다.
 
'싸나이'들은 학교의 반항아들, '비순응적인' 아이들이다. 우리나라의 학교에는 이런 식의 '싸나이'들 보다는 '날라리' '양아치'같은 반항아들이 있는데, '싸나이'들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반항적인 아이들이 다른 성격을 가진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육체)노동자에 대한 관념, 계급 재생산의 방식이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싸나이'들의 반항성은 단지 청소년들의 일반적인 반항적 기질과 연관시킬 수만은 없다. 그건 어느 시대 청소년들에게나 있겠지만, 왜 '싸나이'들과 같은 특수한 양식으로 발현되는가가 문제이다. 이들이 가지는 반항성의 근원을 저자는 (보다 광범위한 계급 대중 속에 위치하는) 비공식집단이 가지는 계급적 지배구조에 대한 간파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자격증을 강제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노동자의 통제와 분할지배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나, 학교에서의 성적이라는 것도 육체노동자가 되는 속에서는 의미가 없다거나, 학교가 가하는 통제가 가지는 본질과 같은 것을 (비록 의식적인 형태는 아니라고 해도) '간파'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간파는 자신들(노동자계급)에 대한 고유한 자존을 확립하는 과정과 동행하는데, 그것은 주로 육체노동자의 남성성을 긍정하고 숭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고유한 힘과 반항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간파는 항상 '제약'을 동반한다. 자신들을 긍정하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로서 남성성은 남성 노동자들의 가부장성과 마초주의, 인종차별주의 등 퇴행적인 이데올로기로 쉽게 전화된다. (이미 그것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육체노동에 대한 긍정은 역설적으로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단순육체노동에 불만없이 종사할 수 있는 대중을 생산한다.
 
책의 뒷부분에 이러한 결론도 흥미롭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앞 부분의 문화기술지 부분이다. 저자는 '싸나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검출하고 있는다. 예를 들어 노동현장에서 테일러주의적인 통제가 발전하면서 자본은 숙련 노동자에 고유한 기술을 포섭해가는 데, 노동자들은 비공식적 집단을 중심으로 작업 태만, 거짓말, 관리자 따돌리기 등으로 다양하게 대응한다. 이러한 방식은 학교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데 테일러주의적 통제의 전단계로서 시간표를 통해 학생들의 육체를 규율하려는 시도를 '싸나이'들의 비공식 집단은 끊임없이 교란시킨다.
 
저자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해 보여준다. 지배이데올로기는 순수하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오히려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이 책에서 보여주는 '싸나이'들, 그리고 그들이 이후 속하게될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저자가 질문하는 것처럼, 피지배계급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지배를 가능하게 해주는 역설이 존재한다.
 
그러나 저자는 급진적인 유래(간파)에서 보수적인 결과(제약)이 왔다고 해고 적어도 저항의 역량은 존재한다는 점, 급진화에 대한 논리적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데 주목한다.
 
사회적 행위자들은 이데올로기의 수동적인 담지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능동적으로 전유하여 투쟁, 주장, 그리고 기존의 구조에 대한 부분적인 간파를 통해서 그 구조를 재생산한다. (349쪽)
 
그리고 노동자들이 그 속에서 발전시키는 문화는 도전적이고 반체제적인 성격을 유지하고 자본주의에 잠재적인 위협으로 존재한다.
 

1.
한편, 저자는 이러한 간파, 제약 등이 일어나는 공간, '싸나이'들 주체가 형성되는 공간이 '문화적 형태'의 독특한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게 이것은 물질적 구조는 물론이려니와 이데올로기와도 구별되는 것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문화적인 것의 독특한 차원이 존재하는가는 논쟁적인 주제일 것이다. 오히려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공간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인데, 그 속에서 '싸나이'들이 주체화되는 양식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별도의 '문화적 형태'라는 차원을 상정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마치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의식'으로 바라보는 편향에 근거한 것이 아닌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2.
육체노동자들 사이에 형성되는 남성우월주의는 이 책에서 분석하는 영국의 사례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가혹한 육체노동의 조건에서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형성되며, 이는 이들 노동자들이 자본에 맞서 단결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상징의 정치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생산적이고 남성적인 자신들과, 그 반대의 상징을 가진 지본가의 상징을 대비시킨다.)  ※ 비공식 하위집단의 문화(노동현장문화)가 노동자들의 단결에 미치는 영향은 신병현 교수를 중심으로 '시월'등의 몇 개의 연구에서 분석된 바가 있다. [노동자문화론 신병현 지음 / 현장에서미래를]

그렇다면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동반되는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성 등도 필연적인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물론 현장의 남성적 상징도 마찬가지이다. 80년대 말 이후 대공장 남성 육체노동자를 주력대오로 해서 형성된 남한의 '민주노조운동'에서 이 것은 매우 심각한 쟁점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 활용될 수 있는가? 혹은 정치적으로 부당하기 때문에 활용되어서는 안 되는 이데올로기의 요소인가?
아마도 단결의 초기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끊임없이 상징을 전화시키고, 남성 노동자들의 고유한 자존심이 타자들에 대한 경멸 혹은 지배의식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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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진술 몇 가지.
 
이 책은 89년에 처음 번역되어 많이 읽혔다. 당시에 이미 문예패나 몇몇 학회의 세미나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학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의 경우에는 이 책을 이 이전에는 읽어본적이 없는데, 아마 내가 속한 학회의 관심사항과 달랐기 때문에 커리큘럼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아마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주제(교육)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교육문제에 대한 측면도 중요하기는 하겠지만,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 지, 주체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보여주는 데 있어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서 '탈학교론'의 전제를 발견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재생산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그러한 결론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마도 이 책의 구도에 따르면, 다소 어정쩡하겠지만) '범생이'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싸나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 묘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싸나이'들은 육체노동이나 손노동에 무능하고 수동적이며 순응적인 '범생이'들을 비난하는데, 이는 자신들이 반대로 육체적인 기능에 있어서 유능하고 독립적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이것은 육체노동자가 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준비이기도 하고 학교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이기도 하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측면에서 나를 포함한 범생이들은 참 비겁했다고 할 수 있고, 실제로 무능했다고 볼 수 있다.(이들이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지배계급의 일환이 된다는 것은 영국과 비슷한 구도이지만 참으로 짜증나는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지는 육체노동자에 대해서 가지는 콤플렉스의 기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그것은 내가 다른 운동공간이 아니라 굳이 노동조합운동을 택한 이유와도 관련되어 있다.) 물질적 세계에서 마치 만능인 것처럼 보이는 독립적이고 강인한 육체노동자 상에 대한 존경과 경외 혹은 두려움같은 것들. 그것이 운동에 있어서 노동현장에 대한 보다 의식적인 강조와 연결되기도 할 것인데, 한편으로 그러한 '현장성'의 이중성과 모순에 대해서 사고한다는 것은 나에게 필수적인 과제일뿐더러 매우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현장성의 이중성과 모순이란, 이 책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노동자 대중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의 모순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대중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와 어떤 식으로든 결합하고 상호전화하지 않고서는 노동자 대중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에서 제기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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