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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비마이너] 언젠가는

언젠가는
내가 하고 싶은 것 아닌 할 수 있는 것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와
스스로 계획하고 부딪혀 보는 것이 참된 자립생활의 길
2011.01.04 21:01 입력 | 2011.01.05 23:54 수정

이글은 지난 2일 폐렴 증세로 숨진 고 우동민 활동가가 지난해 6월 고인이 활동하던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식지 '네 바퀴로 보는 세상'에 직접 쓴 글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40대 미혼 남성이다. 매일 오전 7시 반에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고 갈 길 바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동료들과 “좋은 아침~”하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 후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일하다 틈틈이 커피 한잔에 사색도 하고, 보고서가 잘못되면 팀장에게 질책을 듣기도 하며, 일과 후 치킨에 맥주 한잔 하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 난 여느 직장인들처럼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과 내가 다른 것은 조금은 느리게, 적잖이 불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사무실 동료들은 날 이렇게 부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하는 동민 씨’. 장애를 가지고 여기까지 오게 된 나의 인생 여정,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싶어, 장애를 핑계로 집안에만 있는 것이 싫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하는 나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보고자 한다.

 

 

 

 

1968 년 10월 24일, 난 서울 면목동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 부모님께선 비록 없는 살림이지만 건강한 남자아이가 태어나서 무척이나 기뻐하셨으리라…. 하지만 태어난 지 3일째 되던 날 갑작스레 고열이 났고, 가진 것 없는 부모님은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갈 엄두를 내지 못하시고 아이의 열이 내리기만을 곁에서 지키셨다.

 

그 순간이 내가 지금까지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살아가게 된 순간이다. 그렇게 여섯 살 때까지는 일어설 힘도 기어다닐 힘도 없어서 집에서 누워서 지냈고, 바깥세상 구경은 할 수가 없었다. 여섯 살 이후부터 나에게도 차츰 근력이란 게 생겼던 걸로 기억한다.

 

그 렇게 문밖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나날이 커지던 어느 날, 부모님이 집을 비우셨고 그 틈을 타서 난 생애 처음으로 집 밖으로의 첫걸음, 아니 첫 포복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탈출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에게 발각되었고 모진 매질을 당한 후에 난 밖에 나가기를 포기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저 고분고분 말 잘 듣고 부모님께 폐 안 끼치는 아들로서….

 

 

이 후 남들 다 겪는 질풍노도의 시기도 없이 스물다섯 살까지 착한 아들로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옆집 아주머니의 제안으로 안산의 한 시설에 입소하게 된다. 지금 근무하는 센터에서 나의 또 다른 별명은 ‘한 달 용돈 만 원’인데, 시설에서의 한 달 용돈이 3만 원이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만큼 시설에서는 돈 쓸 일, 특히나 내 마음대로 무엇을 할 일이 극히 적어서 어떤 일을 해보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나 또한 다른 시설 입소자들과 마찬가지로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후 5년, 서른 살의 나는 - 비록 친한 친구에게 떠나보내야 했지만 - 시설에 갓 입소한 스무 살의 여성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애틋한 감정도 키워 보았다. 또 시설 관리자의 권유로 ‘보치아’라는 뇌성마비장애인들을 위한 스포츠를 접한 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었지만, 선수로도 활동하게 되면서 세상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지금 센터에서 보치아 담당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아닐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할 수 있는 것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5 년간의 시설생활과 그 후 5년간의 그룹홈 생활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사회에 나와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채 겪었던 정립회관 비리척결 투쟁, 활동보조서비스 쟁취 투쟁. 그것도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 모른다.

 

내 나이 이제 불혹을 넘었지만 생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될까 자문해본다. 그저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들을 해나가면서 마지못해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쇼 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는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사람들에게 복수하고자 감옥 안에서 치밀한 준비를 해나갔고, 결국엔 탈옥에 성공해서 쏟아지는 비에 몸을 맡긴 채 두 팔을 벌려 자유를 만끽한다. 어쩌면 그 순간 그는 복수할 수 있다는 기쁨보다는 자유로움 그 자체에 집중했을 것이다. 난 주인공처럼 감옥과 같은 울타리 안에 갇혀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삶은 내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감옥을 만들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 지만 앤디가 감옥을 나가고 싶어했듯이 나도 마음속 감옥에서 나가고 싶은 꿈, 늦기 전에 혼자 힘으로 외국에 나가 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이것도 막연한 꿈일지 모르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자리를 지키면서 틈틈이 노력해 보련다. 언젠가는 나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비록 그것이 진정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지라도, 시도에 의의를 두련다. 스스로 계획하고 부딪혀 보는 것이 참된 자립생활의 길이기에….

 

 

 

 

ⓒ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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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5

한 장애인 활동가가 돌아가셨다
농성,집회중에 걸린 감기증세가 급성폐렴으로 악화되 그리되었다한다.

고인을 개인적으로 알지못한다.
사진을 보니 한번쯤 뵌것같이 낯이 익기도하다.
그가 자신의 별명인 '비가오나 눈이오나...'처럼 집회,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고 하니
아주 가끔 들르는 나도 얼굴을 볼일이 있었나보다

그가 활동했던 근거지가 성북자립생활센터라고한다.
재작년 여름 탈시설농성진료를 하다 계속 진료할곳을 찾던중 처음 제안했던 곳이다.
인연이 되었다면 많이 만날수도 있었을것이다.

25년을 집안 골방에서 살다, 다음 5년은 시설, 그다음 5년은 그룹홈

그리고 생의 마지막 기간은 지역사회에서 장애인 활동가로 살았다한다...

 

조문하러 갈까하다 안갔다.

그냥 마음이 미안하고,,, 가서 인사 한번하는것이 면피용인것 같아 가기가 그랬다..

 

내가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일인지 다시 묻게된다.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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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왕삼매론중에서...

오랫만에 읽어보았슴...

 

<<보왕삼매론중 일부>>

 

몸에 병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격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하라" 하셨느니라.

 


남이 내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 지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공덕을 배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마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덕 베푼것을 헌신처럼 버려라"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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