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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레쉬·모닥불 집회는?... "하소연은 술 먹고"

미친놈들 스토리 1

 

 

후레쉬·모닥불 집회는?... "하소연은 술 먹고"
[取중眞담] 대권 3수 한나라당의 '트라우마'
텍스트만보기   최경준(235jun) 기자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 장윤석 한나라당 정치관계법 제개정특위 소위원장은 18일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시설은 정당과 정당 후보자 간 또는 정당과 무소속 후보자 간의 후보자 단일화를 위한 토론 등을 방송할 수 없도록 한다"는 등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2007년 대선을 앞둔 한나라당의 '오버'가 예사롭지 않다. 대선 예비주자 '빅2'의 지지율 합계가 70%를 육박하는 당 치고는 가볍다. 1997년, 2002년 잇따른 대선 패배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한 탓이다.

다음은 지난 19일 SBS <김어준의 뉴스앤조이>에 출연한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과 김어준씨의 대화다.

김어준 "한나라당이 내놓은 정치관계법 개정안, 내용이 너무 웃기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웃기시면 저는 어떻게 먹고 삽니까?
홍준표 웃기는 게 아니구요. 지난 대선 때 김대업씨가 온갖 허위사실을 유포해서 후보를 음해했거든요.

김어준 한나라당의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장애)는 알겠는데요. 구체적으로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촛불집회를 금지했는데, 말이 안되는 발상 아닙니까? 후레쉬를 들던 촛불을 들던 사람들의 자유 아닌가요?
홍준표 "지난 대선 때 촛불시위를 이용한 특정 세력의 책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촛불시위 금지…, 그것 좀 이상하네요. 하하

김어준 이상하죠? 그럼, 모닥불 집회는 해도 됩니까?
홍준표 그것 좀 내가 들어봐도 이상하네요. 아마 한나라당 정치관계법특위 위원 일부가…, (한나라당은) 피해의식이 강합니다."

김어준 또 있습니다. 다른 당 후보들이 단일화하는 방송 중계를 (국민들이 궁금해 하는데) 한나라당이 어떻게 막습니까?"
홍준표 그것도 그렇네요. 하하

김어준 개인적으로 가장 웃긴 것은 이겁니다. '포털에서 선거관련 단어를 인기 검색어에 포함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홍준표 누가 그런 법안을 제출했습니까? 그냥 발표만 했겠죠. 그게 웃긴 게 아니고, 지난번에 너무 피해를 많이 봤기 때문에 방어적인 측면으로 나온 것이겠지요. 법안으로 나갈 수 있겠어요?

김어준 그럼, 법안으로 만들지 말아야지요. 하소연을 법으로 만들면 어떻게 합니까. 술 먹고 하소연해야지. 듣고보니까 재미있지 않습니까?
홍준표 듣고 보니까 재미있네요. 그것(선거 관련 단어 인기 검색어 금지)은 좀 심하네요. 하하"


거센 저항에 부딪힌 정치관계법 제·개정안

 
▲ 한나라당은 19일 오후 정책의총을 열고 대북정책 변화에 대해 토론했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의총에서 양손을 들고 김형오 원내대표와 전재희 정책위의장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한나라당이 대선을 앞두고 추진중인 정치관계법 제·개정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선거에 영향 줄 수 있는 촛불집회 등 금지 ▲국가 보조금·지원금을 받는 시민단체 및 대표자의 선거운동 금지 ▲전자개표는 보조, 수개표 의무화 ▲허위사실이 선거 결과에 영향 미쳤다고 인정될 경우 당선 무효, 재선거 실시 ▲보도 금지 등의 요청에 법원이나 선관위는 72시간 내 최종 판단 내리고, 그 전까지 보도 금지 ▲선거 관련 단어 포털 인기 검색어 금지 ▲정당 후보자간 단일화 위한 토론 방송 금지

한나라당 정치관계법 제·개정특위는 이같은 내용을 지난 16일부터 매일 한차례씩 국회 기자실에서 기자회견 형식으로 발표했다. 기자들은 "당론이냐"고 물었고, 특위는 "당론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장윤석 의원은 '선거 관련 인기 검색어 금지'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하기 위해 당내 의원들에게 서명까지 받아놨다.

그러나 정치관계법 제·개정안은 타당의 거센 반발을 샀다. 최재성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18일 "한나라당은 제정신이 아니다"며 "대권 편집증환자 한나라당의 광기가 국민의 정치의식과 민주주의와 언론을 향해 계엄령을 선포했고, 군사정권의 후예가 아니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이영순 민주노동당 공보부대표는 "사실상 한나라당판 긴급조치 10호에 해당한다"며 "집권하지도 않은 정당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집권을 하고 나면 얼마나 더 가혹할 지 벌써부터 몸서리 쳐진다"고 성토했다. 타당도 "주권자는 한나라당 당원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임을 명심해야 할 것"(통합신당모임), "군부독재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형질을 드러냈다"(민주당) 등 목소리를 높였다.

한나라당도 처음에는 "도둑이 제 발 저린 격", "선거법 개정투쟁은 정의를 바로 세우자는 빛의 세력과 불의를 방치하자는 어둠의 세력간의 대결"(박영규 부대변인)이라고 저항했다. 그러나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19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정치관계법 개정안은 어디까지나 특위 차원의 검토되고 있는 안에 불과하다"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의원총회에서도 "의총을 거쳐서 확실한 당론이 되기 전에 특위에서 오버를 하고 있다"며 "당 지도부와 협의 없이 언론에 발표해 마치 당론인양 언론에 보도됐다"고 질책했다.

"문제는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당내 일각에서도 문제제기가 잇따랐다. 원희룡 의원은 20일 "위헌적 선거법 개정시도는 한나라당의 자살골"이라며 "국민의 기본권 제한을 통해 집권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발상은 원내 제 1당으로서 지난 대선의 패배를 남 탓으로 돌리는 옹졸한 처사로 국민들이 기억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 의원은 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잊을만하면 오만하고 과거로 돌아가려는 정당으로 낙인 찍히는 것은 대선을 앞둔 우리당에게 더 심각한 문제"라며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장윤석 의원이 발의하려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서명했던 의원들이 철회를 요청하고 나섰다. 결국 장 의원측은 당론이 확정된 뒤 발의하려고 했던 법안의 의원 서명인부를 이날 소각하기로 했다.

향후 특위안이 최고위원회의와 의총 등 당론화 과정을 거쳐 위헌성이 있는 조항이 삭제되고 어느 정도 정제될 지 두고 볼 일이다.

"술 한잔 먹고 하소연 할 일"을 법안으로 만들려고 했으니 쉽지 않은 작업이겠지만, '결자해지' 자세가 필요하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한나라당이 대선 패배의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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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중도정치'를 아느냐?

 

 

 

너희가 '중도정치'를 아느냐?
"그들의 '중도'... 사이비 개혁세력의 '우익투항'일 뿐"
텍스트만보기   심상정(713sim) 기자   
 
 
▲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요즘 '중도'라는 말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실 요즘이랄 것도 없이 선거철만 되면 우리 정치권은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 듯 '중도'의 스펙트럼으로 자신을 치장하기에 바쁘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도 중도를 자임했고, 정운찬 전 총장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중도로 규정했다. 손학규 전 지사 역시 마찬가지다. 아울러 실패한 정치세력인 범여권은 '중도개혁세력 대통합'을 명분으로 패자부활전을 모색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을 빼고는 우리나라 정치인 가운데 자신을 중도로 포장하지 않는 이를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중도정치의 역사적 기원

중도정치란 역사적으로 좌파정치세력의 노선변화를 가리키는 게 대부분이었다. 근래의 대표적 사례로는 영국노동당의 '신노동당' 선언의 이념적 근간이었던 '제3의 길'(the third way), 독일사민당의 '새로운 중도'(Neue Mitte)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중도노선은 좌우세력의 비판 속에서도 최소한 당대의 논쟁을 담고 있었다. 서구 복지국가의 한계, 사민주의냐-신자유주의냐,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혁신, 근대와 탈근대 즉 노동 대 자본의 근대적 정치구도에서 탈피해 성찰적 탈근대 정치로 이동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정치에서 '중도'는 철학도, 실체도 없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한국정치에서 중도는 좌파가 아닌 우파가 제기하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사실 이는 '중산층과 서민을 지지기반으로 한다'고 떠벌이는 보수야당의 선거전략에 불가하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집권 냉전세력의 '좌익용공' 공세를 피하기 위해, 최근엔 실정의 면피용으로 중도가 이용되고 있다.

평화개혁, 중도실용, 중도개혁 등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쓰는 '중도'는 그 자체로 완결적일 수 없는 불구의 개념이다. '무엇에 대한 중도인지'가 분명해야 하는데 그와 관련한 차별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사이비 개혁세력이 그냥 좋은 개념, 절충적 개념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 실패자, 정치적으로 방황하는 미아들의 정치노선, 그것이 한국정치에서 중도의 실체다.

"무엇을 하겠다는 중도인지" 답하라

책임정치, 정치철학, 정치노선 차원에서 중도를 들먹이려면 적어도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논리적 전제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무엇을 하겠다는 중도냐'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의 핵심의제인 'IMF 경제위기 10년의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대안'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중도를 부르짖는 정치세력은 바로 그 이름으로 '양극화 강화정책'과 '신자유주의'에 순응하거나 밀어붙여왔다. 그것이 바로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실패한 근본원인이다.

눈여겨 볼 것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실패한 정책에서 둘 사이에 어떠한 긴장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정책에서는 같은 방향을 지향하면서도 정작 서로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유지된 것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관계다. 이런 상황에서 제기되는 중도론은 이러한 허구적 긴장관계마저 해소해 보자는 것이다.

범여권에서 나오는 중도론은 한마디로 말해 '우익편승론'일 뿐이다. 장사 되는 곳에 좌판을 벌이겠다는 발상, 나는 이것을 '떠돌이 약장사 정치'로 규정한 바 있다. 국민이 개혁을 요구할 때는 개혁장터에 좌판을 벌이고, 국민이 잇따른 실정에 절망하고 한나라당 쪽으로 옮겨가자 이제는 재빨리 중도란 이름으로 좌판을 벌이고 우익편승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한미FTA와 원포인트 개헌 등의 의제는 "나도 괜찮은 보수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한나라당, 보수언론 등 우파 헤게모니에 편승하기 위한 적극적 구애행위인 것이다.

실체없는 말의 성찬이자 정략적 알리바이

한국의 중도주의는 전통적인 좌표를 수정한 게 결코 아니다. 무엇에 대한 중도란 말인가. 평화개혁, 중도개혁, 중도실용은 말의 성찬일 뿐 개념도 아니고,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지난 반세기의 한국정치에서 끊임없이 중도론이 제기되었지만 현실정치에서 그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 실체가 없으니 당연히 좌표에도 없다.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점을 찾아가다 보면 길 잃은 부랑아가 될 수밖에 없다. 한미FTA 추진, 비정규직 개악법안 강행통과, 부동산정책 실패 등 정치와 정책에서 실패한 세력이 선거승리라는 정략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알리바이가 곧 중도론이다.

중도정치가 성립하려면 좌우의 균형이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한국정치는 보수독점 구조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 '극우-중도-극좌'로 재편될 가능성은 없다. 이 점에서 '보수-중도-진보'는 추상적 이념 속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구도다. 오로지 선거공학적 레토릭으로서 기능할 뿐이다.

참여정부의 실정을 경험한 국민은 이제 레토릭을 넘어 정치의 실질적 내용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말뿐인 중도주의는 더 이상 한국에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사이비 개혁세력의 우익투항, 정치개혁 실패를 고백하는 과정일 뿐이다.

"한미FTA 찬성이냐 반대냐" 대선 핵심쟁점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무현-한나라당-보수언론의 3각동맹 체제는 우익편승론을 본질로 하는 중도의 귀결점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한미FTA는 올해 대선의 핵심쟁점이 될 것이고, 따라서 나는 FTA를 둘러싼 정치구도 재편에 주목한다. 개혁세력이니 평화개혁이니 하는 지난날의 어정쩡한 정치 슬로건은 한미FTA 전선에서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고, 오직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분명한 태도를 요구받게 될 것이다.

나는 한미FTA를 일관되게 반대해왔고, 무효화해야 함을 역설해왔다. 그것은 졸속으로 시작해 미국 퍼주기로 끝난 협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동차 세제개편이라든가 투자자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보장하는 독소조항에서 볼 수 있듯 서민의 삶을 희생양으로 대기업과 소수 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한미FTA는 결코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는 3각동맹체 내부의 자리바꿈일 뿐인 정권교체를 뛰어 넘어야 한다. 부자들의 시대에서 서민의 시대로, 냉전의 시대에서 평화와 통일의 시대로, 신자유주의 약육강식 시대에서 호혜협력의 시대로, 보수정치시대에서 진보정치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좌표이자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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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가 대선구도 흔들 다크호스?

 

 

 

'개인주의'가 대선구도 흔들 다크호스?
[여의도통신] '블런델-고스초크 모델' 한국적용 가능할까
텍스트만보기   여의도통신(ytong)   
 
 
 
ⓒ 여의도통신
 

진보-보수-중도 등 이념적 척도를 가지고 유권자의 성향을 분석하는 방법론은 서구에서 이미 그 한계가 드러났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레드 콤플렉스 등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볼 때 이념적 성향에 따른 유권자 분석 방법론은 서구보다 도리어 한국에서 유권자 분석틀로 한계가 많다고 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분단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이념지형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는데도 이념 지표를 사용하는 것은 그 출발부터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진보 vs 보수 이념 지표의 한계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는 '좌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탄압해 왔다. 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진영에서 발생한 자생적 좌파세력 역시 사회주의 국가 붕괴 이후 소멸되다시피 하면서 이념지형 자체가 거의 형성되지 못했다.

용어적으로도 '좌파'라는 말이 금기시되면서 '진보'나 '개혁' 등을 혼용함으로써, 이념지형 형성에 있어 많은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 등은 '좌파'로 분류할 수 있으나 이들 역시 '진보' 라는 용어를 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인은 이념적 태도에 의한 정당선택 경험도 없다. 1970~1990년대 한국의 사회운동은 민주주의 세력, 자유주의 세력, 사회주의 세력 등이 당면과제인 '민주화'를 성취하기 위해 보수정당(민주당 등)과 연대하는 양상이었다. 사회주의 세력의 독자정당 창당 시도는 현실법의 한계에 부딪혀 좌초했다.

이에 따라 일반 국민들은 좌파정당 vs 우파정당의 대립을 경험해 본적이 없으며, 정당 지지 역시 우파들의 보수정당 중에서 선택해 왔던 것이다. 다만,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은 이념적 선택을 하는 측면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이념지형이 거의 형성되지 못한 한국사회에 진보 vs 보수라는 이념적 분석틀을 적용하는 것은 매우 한계가 많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보수주의자라 할 수 있는 이명박 전 시장이 유권자들에게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의 이념분석틀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서구에선 새로운 이념지표 사용

서구 사회는 뚜렷한 이념 대립 구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유럽은 경제에 대한 태도로서 좌파 vs 우파의 기본 대립 구도를 형성해 왔다. 유럽의 정당들은 이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유권자도 이념에 따라 정치적 태도를 갖거나 지지 정당을 결정해 왔다. (그림1 참조)

 
ⓒ 여의도통신
 

이러한 대립 구도는 맑스의 '공산주의' 제창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공산주의 운동 경험이 척박한 미국의 경우는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보수정당의 대립구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유럽은 계급구성 변화 및 '개인주의' 신장에 따른 정치지형 변화에 조응하고자 전통적 좌우 구분을 뛰어넘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 왔다.

1997년, 영국의 존 블런델(John Blundell)과 브라이언 고스초크(Brian Gosschalk)는 전통적 좌우대립 축(경제적 태도)에 개인주의 축을 추가한 모델을 적용했으며, 이후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 블레어의 노동당 현대화 프로젝트, 기든스의 제3의 길, 독일 사민당의 신중도 노선, 전통적 가치관 붕괴에 주목한 잉글하트 모델 등은 기존의 좌우 구분을 뛰어넘고 '개인주의'를 적극적으로 수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서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블런델과 고스초크는 영국에서 사회적․정치적 태도에 따라 보수주의적, 자유지상주의적, 사민주의적, 권위주의적이라고 일컫는 네 집단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림2 참조)

 
ⓒ 여의도통신
 

경제적 자유, 즉 자유시장에 대한 신념이 한 축에서, 그리고 개인적 자유가 다른 한 축에서 측정되는데 기존의 좌파 우파 구분에서는 드러나지 않던 유권자 태도 변화나 현실 설명이 가능하게 됐다. 위 모델에 따른 각 유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보수주의적(conservative)] 신자유주의적인 것으로 시장의 자유에 찬성하지만 가족, 마약, 낙태와 같은 쟁점에서는 강력한 국가 통제를 원한다.

[자유지상주의적(libertarians)] 모든 방면에서 개인주의와 낮은 수준의 국가 관여를 원한다.

[사민주의적(socialists)] 보수주의자들과 반대로 경제생활에서 더 많은 국가 관여를 바라고 시장을 불신하고 있으나 도덕적 쟁점에 관한 한 정부관여에 회의적이다.

[권위주의적(authoritarian)]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양자를 포함하여 모든 영역에서 정부가 강력한 통제를 유지하기를 희망한다.

핵심은 '개인주의'의 급속한 신장

블런델-고스초크의 조사 및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정의에 따라 영국 인구의 약 3분의 1이 보수주의자이며, 20%에 약간 못 미치는 사람들이 자유주의자이며, 18%가 진보주의자, 13%가 권위주의자, 그리고 기타가 15%인 것으로 나타났다.

1997년 선거 직전에 토니 블레어에 의해 재건된 노동당은 보수주의적 집단을 제외한 다른 집단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보수당에 투표하겠다는 사람들 가운데 84%가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집단에 속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새로운 방법론 도입의 핵심에는 '개인주의'의 급속한 신장이 자리 잡고 있다. 개인주의란 집단적인 삶의 방식 우위라는 전통적 관념 대신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 신장을 추구하는 흐름을 말한다. 2차 대전 이후 베이비 붐업 세대가 주도하고 있는데 그 분포를 보면 젊고, 교육수준이 높으며, 소득도 높은 층에 집중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 이러한 개인주의 세력은 42% 수준이며(2006년 갤럽 조사결과), 영국은 38% 수준(1997년 IEA 조사결과)을 보이고 있다. 인용한 영국의 수치 38%는 1997년 자료이기에 현재는 미국의 경우처럼 40% 수준으로 확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개인주의의 신장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사회분석틀을 주창한 사람으로 미국의 데이비드 놀란(David Nolan)이 있다. 놀란은 1971년, 기존의 단선적인 좌우 이념축에 개인주의 축을 추가한 '놀란 차트'를 만들었다. 놀란 차트는 이후 많은 변형과 개념이 추가되기도 했으나 개인주의 축을 유지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고 있으며, 위의 블런델-고스초크 모델 역시 놀란 차트의 변형이다.

한국 사회 역시 '개인주의'가 매우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개인주의적 성향의 국민이 상당수에 놓여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에 대한 사회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어 구체적인 수치는 확인된 바가 없지만 말이다.

한국 사회 적용할 경우 주목할 것들

그렇다면 이러한 '블런델-고스초크 모델'이 한국 사회 적용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현재의 이념대립 구도는 한나라당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경제에 대한 태도로서 진보 vs 보수의 이념 구분에 따라 한국의 유권자 및 정당의 지형을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림3 참조)

 
ⓒ 여의도통신
 

자본주의 발달 및 세계화에 따라 시장자유적 측면이 강조되면서(이는 전 세계적 흐름이기도 하다) 국가관여의 표현인 '규제' '분배' '복지국가' 등은 소수의 위치로 몰리고 있다. 유럽 등 복지국가들조차 이러한 흐름을 받아들여 복지규모를 줄이는 추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참여정부가 복지를 늘리겠다고 하는 것은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복지수준이 서구의 복지국가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기에 이를 확충해야 한다는 논리는 '맞는 말'이지만 현재의 이념구도 속에서는 '좌파적' 혹은 '사회주의적'이라는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명박 전 시장과 한나라당 후보들의 시장자유 주장이 마치 '개인적 자유'를 포함하는 듯한 착시효과를 일으키면서 '개인주의적' 유권자 다수를 포섭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2007 대선 역시 이념대립 구도로 치러질 경우 한나라당 승리 가능성이 높다. 현재 대선구도는 이념적 프레임에 의해 각종 담론이 생산, 유지, 강화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과 이명박 전 시장 등 한나라당 후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을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사례1] 시장자유를 주장하는 한나라당 및 한나라당 후보들에 비해 국가관여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그리고 범여권 대선주자들은 마치 반시장주의자로 인식되고 있다.

[사례2] 시장자유에 대한 주장은 개인자유까지 옹호하는 듯한 착시효과를 일으키면서 시장자유에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참여정부 및 열린우리당 그리고 대선주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세력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례3]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라는 구분법 역시 이념적 대립축의 변형으로 경제발전을 주도한 산업화세력에게 다시 한국경제 재건을 맡겨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전 시장이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 범여권이 '반한나라당 연대'를 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소수자'를 자임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며, 결국 이러한 구도가 유지되는 한 한나라당의 승리가 예상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적용되면 대선구도 아성 흔들릴 수도

그러나 새로운 분석틀을 적용할 경우 선거구도에 변화가 예상된다. 실제로 블런델-고스초크 모델에 따른 한국의 유권자 및 정당의 지형을 예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4 참조)

 
ⓒ 여의도통신
 
이념적 대립구도 축에 '개인자유' 축을 추가해서 펼쳐보면 각 정치세력의 입장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우선 한나라당은 보수주의자로 시장의 자유에 찬성하지만 개인적 자유 옹호보다 국가규제를 선호하는 지형에 위치하게 된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역시 개인자유 측면에서는 뚜렷한 입장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국민을 계도하려는 권위주의적 요소가 다분한 지형에 위치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개인주의적 성향의 유권자 다수가 위치하고 있는 상단 지형에 적합한 정당 또는 대선후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지금까지는 탈정치화 되어 있는 이명박 전 시장이 이들을 흡수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마땅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범여권의 입장에서 이러한 블런델-고스초크 모델을 차용할 경우 실천적으로 적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블런델-고스초크 연구보고서는?  
 
 
영어로 쓰여진 이 연구보고서의 원제는 이다. 기존의 이념적 방법론 대신 개인주의 축을 추가한 새로운 프레임을 적용, 영국 국민의 의식을 새롭게 규정한 여론조사 결과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기든스의 유명한 저작, <제3의 길>에 인용되었는데, 그 조사결과 및 분석내용이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P&C리포트(pncreport.com) 홈페지에서 영어 원본을 다운받아 볼 수 있는데, 주요 목차는 다음과 같다.

-Foreword by Robert M. Worcester
-The authors
-Introduction
-Beyond Left and Right
-Voting Intentions by Ideology
-Party Vote by Ideologies
-Ideologies by Social Characteristics
-Questions by Social Characteristics
-Where do you fit?
-Appendix I: Summary Data 21 Questions
-Appendix II: Grouping by Voting Intention
-Appendix III: Group Classification
-Technical Note
-Endnotes / 여의도통신
 
 
 
 
정리=여의도통신 정지환 기자 ssal@ytongsin.com

- 이 기사는 국내의 가장 권위 있는 정치분석기구 중 하나인 P&C글로벌네트웍스가 제공한 < P&C리포트 >를 여의도통신이 가공한 것이며 입법전문 정치주간지 <여의도통신> 6호(4월 9일자)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07-04-1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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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생산성 세계 최고 수준

 

 

 

한국 노동생산성 세계 최고 수준
미국 노동통계국, 생산성 대비 실질임금 증가율 일본 절반
 
 
 

경총은 지난 2월 14일 '임금수준 및 생산성 국제비교 보고서'란 것을 내놓은 적이 있다.

보고서는 "우리나라의 임금상승률이 선진국 및 경쟁국에 비해 과도하게 높을 뿐만 아니라 생산성 증가분을 크게 초과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대졸초임은 2,255만 원으로 2,384만 원인 일본의 94.6%에 달한다"며 "특히 1000인 이상 대기업의 경우 대졸초임이 일본보다 10.4% 높아 상대임금수준은 110.4%에 달했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는 경총이 같은 달 25일 회원사에 권고한 '2007년 경영계 임금조정 기본방향'의 논리적 근거가 됐다. '임금조정 기본방향'에서 경총은 "전체적인 임금인상률은 2.4% 수준에 맞추고 대졸초임과 고임금을 받는 대기업의 임금은 지난해 수준에서 동결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경총 보고서의 주장대로 국내 임금상승률은 생산성 증가율에 비해 과도하게 높은가.

민주노총은 지난 3월 '제조업 노동생산성과 임금인상률 국제비교(2005년)'라는 정책보고서를 냈다. 이는 미국 노동통계국(BLS)이 지난 2월 발표한 '16개국 제조업 노동생산성과 임금비용 국제비교(1952-2005년)'라는 보고서를 요약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 노동통계국의 보고서는 경총 보고서와는 정반대의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지난 2005년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세계 1위 수준이며, 생산성 대비 임금증가율은 비교 대상 16개국 가운데 10위권 전후로 낮은 편에 속한다는 게 보고서의 결론이다. 보고서를 좀 더 세부적으로 뜯어보자.

   
 
 
먼저 2005년 국내 시간당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8.5%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1인당 생산성 증가율도 7.9%로 가장 높았고, 제조업 생산성 증가율도 7.0%로 수위를 나타냈다. 반대편에선 시간당 임금(6.2%), 시간당 실질임금(3.4%), 실질연평균임금(2.8%), 총임금(4.7%) 증가율 등도 가장 높았다.

이처럼 노동생산성이 늘고 임금도 늘었지만, 임금의 증가율보다 노동생산성의 증가율이 더 컸다. 이를 보여주는 게 단위노동비용 증가율이다. 단위노동비용은 산출물 1단위를 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 비용을 뜻한다.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임금의 증가율보다 크면 단위노동비용 증가율은 줄어든다. 지난 2005년 국내 단위노동비용 증가율(자국 통화기준)은 - 2.2%로 전체 13위를 차지했다.

이에 따라 생산성 대비 시간당 임금증가율은 72.9%로 전체 11위에 그쳤고, 생산성 대비 시간당 실질임금 증가율도 40%로 9위에 불과했다. 우리와 자주 비교되는 일본의 경우 생산성 대비 실질임금 증가율은 79.2%로 우리의 두 배 수준을 보였다.

1996-2005년 10년간의 생산성 증가율에서도 한국은 16개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중간에 외환위기가 있었는데도 그렇다.

먼저 우리나라의 평균 시간당 생산성 증가율은 9.0%로 1위였다. 2위인 스웨덴(6.9%)과의 격차도 상당했다. 평균 1인당 생산성 증가율도 8.5%로 월등히 높은 수위를 차지했다. 평균 제조업 생산성 증가율도 7.6%로 1위를 나타냈다.

물론 같은 기간 시간당 실질임금 증가율(4.2%), 시간당 실질연평균임금 증가율(3.7%), 시간당 총임금 증가율(6.5%)도 가장 높았다. 노동생산성과 임금이 공히 상승한 셈인데, 역시 다른 나라에 비해 임금 증가율보다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비교적 컸다.

이 기간 중 우리나라의 단위노동비용 증감율은 -0.9%로 전체 10위에 해당했다. 그나마 이는 국내 화폐인 원화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미국 달러로 환산할 경우 평균 -2.7%로 떨어져, 일본과 대만을 제외하곤 증가율이 가장 낮았다.

민주노총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성 증가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인건비 증가율만 높다고 하는 재계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면서 "경총의 주장은 임금억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2007년 04월 03일 (화) 14: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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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조희연의 최장집 비판을 읽고] 차라리 '반개혁국민후보'가 답?

 

 

 

두려움의 동원정치’를 넘어서자
[조희연의 최장집 비판을 읽고] 차라리 '반개혁국민후보'가 답?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사회, 아니 진보진영은 ‘죽은 이론가의 사회’라고 할 만하다. 언제부터인가 이론적 논쟁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점에서 최근 최장집 교수의 논쟁적 문제제기, 이에 대한 조희연 교수의 비판적 논평은 손뼉을 쳐 반가워해야 할 경사이다. 조교수는 최교수의 논지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다.

최교수의 인식의 근저에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정치의 활성화와 정상화라고 하는 문제의식이 존재한다. 민주주의의 공고화의 핵심적 과제라고 할 수 있는 ‘대표체계의 민주화’를 포함하는 ‘제도정치의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그리고 참여정부는 이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 최교수 인식의 근저에 놓여있다.

최교수는 ‘사회의 광범위한 갈등이나 이해관계가 정당에 의해 대표되고 의회가 민의의 대표기구로 구실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인데, 참여정부는 “정당정치를 통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수렴하지 못하고 대통령이 당과 국회를 우회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려면 사회적 갈등들이 제도정치 내로 수렴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거리의 정치가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운동의 동력에 의한 민주화’가 진전되어 왔지만, 이제 시대가 전환되었음에도 사회운동 나아가 제도정치에 진입한 운동 출신 민주진보세력(그 일부로서의 386 정치인들)이 관성적으로 운동에 기대는 방식으로 행위하고 있기 때문에, 정작 민주주의의 공고화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교수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위기’, 즉 제도정치의 정상화를 위협하는 운동정치의 과잉을 우려하고 있다

이런 인식 위에서 사회적 갈등을 흡수하는 제도정치의 안착이 중요하고 그 제도정치적 룰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참여정부의 실패를 인정하고 정권교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운동정치 과잉 탓으로 보는 건 잘못

우선 위기의 원인으로 운동정치의 과잉과 제도적 정당정치의 무시로 보고 있는 최교수의 입장을 비판한 조교수에 동의한다. 운동정치와 제도정치를 배타적으로 보는 것도 문제지만 현재의 위기를 운동정치의 과잉의 탓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문제는 운동정치의 부족이다. 최근 반핵반김모임, 뉴라이트 등이 보여주듯이 냉전적 보수세력의 운동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자유주의진영의 운동정치, 진보진영의 운동정치를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운동정치의 위기, 운동정치의 힘의 관계의 역전이 위기의 원인일 것이다.

물론 화염병으로 상징되는 기동전의 시대는 끝났는지 모른다(물론 기동전과 진지전을 배타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러나 거리의 정치, 운동정치가 기동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기동전이냐 진지전이냐가 아니라 시민사회(운동정치)냐, 정치사회(제도정치)이냐이다.

다시 말해, 최교수는 시민사회는 문제가 없는데 그 같은 시민사회의 힘이 정당정치가 제대로 제도화되지 않아 그리고 정당과 국회를 우회하는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스트적 정치행태에 의해 민주주의의 위기가 온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 손호철 교수
 
운동정치 힘 관계 역전이 문제의 핵심

그러나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현대정치에서 정당이 중요하고 정치사회가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의 참호인 시민사회이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은 시민사회에서의 힘의 관계, 운동정치의 힘의 관계인데 그것이 역전된 것이다. 이 점에서 답은 조교수의 지적대로 사회의 급진화(를 통한 시민사회의 힘의 관계의 재역전)에 있다.

그러나 최장집 교수의 문제제기 중 경청해야 할 부분이 있다. 최교수는 정당과 정치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는데 그같은 문제의식의 핵심은 오히려 제도정치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에 있다.

구체적으로, 최교수는 정당과 제도정치를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의 균열을 반영해 이를 조절하고 풀어나가야 하는데 우리의 경우 진보정당의 부재와 보수정당의 독점으로 정치사회가 시민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제멋대로 움직여 온 것을 비판하기 위해 정치사회에 주목해 왔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의 경우 당정분리, 열린우리당의 창당, 임기 초기의 이라크 파병으로부터 시작된 보수적 정책 등을 통해 정권과 열린우리당이라는 집권당을 시민사회의 지지세력(개혁세력과 호남)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개혁도 실패하고 지지층도 잃어버렸다는 것이 최교수의 비판 중 경청해야 할 합리적 핵심이다.

다시 말해, 최교수의 논지의 합리적 핵심은 조교수가 주목한 제도정치 중심적 시각에 기초한 제도정치의 후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정치(노무현정부와 열린 우리당)의 시민사회(개혁지지세력)로부터의 분리에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세력 대안 없으면 한나라당에 정권 내줘야

두 번째 핵심적인 쟁점은 노무현 정부라는 개혁세력이 실패했으니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 같은 정권교체가 반복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최교수의 주장이다. 이 문제 역시 개인적으로 최교수와 조교수의 중간 입장이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공감하는 것은 최교수의 주장 중 정권교체가 반복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부분, 즉 집권당의 책임을 묻는 정권교체의 제도화가 민주주의의 공고화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함의가 아니다. 오히려 “권력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면 열린우리당이든, 새로 만드는 정당이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최교수의 주장이다.

다시 말해, 나 역시 최교수와 마찬가지로, 아니 최교수보다 한 발 더 나가, 열린우리당이건 통합신당이건 자유주의세력(소위 개혁세력)이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에 따라 자신들이 군사독재시절보다 더 악화시켜 놓은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차라리 집권을 하지 말고 정권을 한나라당에게 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김대중, 노무현 정부처럼 사회적 양극화를 가속화시키고 민중들을 생존의 위기에 몰고 갈 바에는, 차라리 국정책임을 한나라당에 떠넘기고 자신들은 책임이 적은 야당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 집권의 역설적 긍정성

이와 관련, 우리의 민중들이 한나라당과 그 전신인 냉전적 보수세력 하에서 경험한 것은 개발독재일 뿐 신자유주의는 아니라는 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국민들은 신자유주의, 그 폐해인 사회적 양극화하면 한나라당과 냉전적 보수세력이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정부와 자유주의 개혁세력을 연상하고 있다.

또 오히려 박정희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고 박정희를 그리워하고 있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집권해 한나라당식의 신자유주의정책에 의해 사회적 양극화와 민중생존의 파탄을 경험하고 문제의 핵심이 김대중, 노무현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있다는 것을 민중들이 직접 체험해야 한다.(그럴 리가 없지만 ‘일자리 창출이 최고의 복지이고 분배’라는 한나라당식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나의 예상과 달리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고 민중들을 파탄하게 구할 수 있다면 한나라당 집권은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될 때, 한국정치는 단기적으로는 후퇴할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발전할 수 있다.

이를 두 가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것은 지난 해 지방선거 그리고 잇따른 재보궐선거의 결과이다. 기록적인 열린우리당의 참패의 핵심에는 노무현정부의 신자유주의정책에 의한 민중생활을 피폐화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민중들은 그 대안으로 반신자유주의 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또 다른 신자유주의 정당인 한나라당을 선택했다. 이같은 정치의식의 한계를 깨기 위해서는 민중들이 한나라당의 신자유주의와 한나라당의 사회적 양극화를 직접 경험해 봐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 연정을 제의하면서 한 발언이다. 즉 일반적 통념과 달리 한나라당과 열린 우리당이 그리 차이가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사실 맞는 이야기로 그 말이 맞다면 열린 우리당과 별 차이가 없는(둘다 신자유주의 세력이라는 점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한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는가?

한나라당 집권 호들갑 떨 필요 있나

물론 노대통령이 주목하지 않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냉전문제이다. 그 때문에 자유주의적인 보수세력인 열린 우리당과 달리 한나라당은 냉전적 보수세력이다. 그러나 현 정세에서 신자유주의가 주전선이고 냉전문제는 부차적인 전선이다.

그리고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대통령이 잘 지적했듯이 한나라당이 집권한다고 한반도에 전쟁이 나고 큰 틀의 햇볕정책의 기조를 포기하고 북한을 고립시켜 붕괴시키는 전략으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특히 사회적 양극화 등 실정에 대한 자기반성과 이에 대한 대안적 처방을 제시하지 않은 채 기간당원제냐, 기초당원제냐 하는, 국민들이 관심도 없는 말단지엽적인 문제 등을 가지고 탈당 등 소동을 벌리며 신당창당으로 상황을 반전시키거나 허구헌 날 가만히 있다가 선거를 1년도 채 남겨 놓지 않고 갑자기 개헌을 제기해 이를 중심으로 반한나라당전선을 만들어 볼까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최교수의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내에서까지 한나라당에 권력이 넘어가도 좋으냐는 식으로 윽박질러(최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려움의 동원”으로) 문제를 풀려는 것은 한마디로 코미디이다. 이제 유치한 ‘두려움의 동원정치’는 끝내야 한다.

차라리 반개혁국민후보가 답이다?

이와 관련, 최근 시민운동 내에서 한나라당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반(反)수구 국민후보 운동이 일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아직도 한국에서 초계급적인 국민후보가 가능한지 모르지만 설사 가능하더라도 현 정세에서 필요한 것은 반(反)신자유주의 국민후보, 반(反)사회적 양극화 국민후보, 반(反)부동산 폭등 국민후보이지 반수구 국민후보가 아니다. 아니 신자유주의가 (경제) 개혁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되어 온 점을 고려하면, 필요한 것은 반수구국민후보가 아니라 ‘반(反)개혁국민후보’인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조교수가 지적한 대안문제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고자 한다. 물론 대안은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정당이 아닌 진보진영(진보적 학계, 진보적 운동단체들)의 주된 임무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최근 유행하고 있는 지나친 대안에 대한 강조는 마치 진보진영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서 위기인 것과 같이 문제를 단순하고 왜곡할 우려가 있다. 사실 많은 경우 문제는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대안도 관철시킬 수 있는 사회적 힘이 없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그러하고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체근무제가 그러하다. 경제문제도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이 제안한 부유세는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많은 대안을 생각할 수 있다. 97년 경제위기 당시에도 일방적인 정리해고 대신 민주노총과 진보진영은 일자리 나누기를, 한전 등 공기업의 민영화(사유화) 대신에 국민대표들로 구성된 공기업개혁위원회를 통한 공기업 개혁을, 재벌개혁에 대해서도 소액주주운동 대신에 노동자 경영참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새로운 대안을 생각하기에 앞서 민중운동과 진보진영이 이미 제시한 대안들만이라도 관철시킬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백배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소수 지식인들에 의한 지적 기획에 대한 대중의 힘의 우위, 지적 기획에 대한 사회적 힘의 관계의 우위를 믿는다.

대안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대안이 아니라 기존의 대안이라도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의 급진화에 의한 사회적 힘의 관계의 전복이다.

 
     관련기사
· '지적'의 올바름과 '진단'의 오류 · 제도정치 중심주의 vs 사회 중심주의
 
2007년 01월 31일 (수) 15:01:24 손호철 교수 / 서강대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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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위기 진단’ 진보학자들 논쟁 불붙었다

 

 

 

정치위기 진단’ 진보학자들 논쟁 불붙었다
 
[한겨레 2007-02-09 08:18]    
 

[한겨레] 한국 정치 위기 진단을 놓고 진보학계의 지도급 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사이에 논쟁이 불붙었다. 논쟁에 불을 댕긴 쪽은 조희연 교수다. 조 교수는 <한겨레> 인터뷰(1월22일치 4면) 등 여러 매체에서 최장집 교수가 한 발언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장문의 글을 인터넷 진보매체 <레디앙>에 기고했고, 이에 대해 손호철 교수가 조 교수의 주장을 일면 동조하고 일면 비판하는 글을 같은 매체에 기고하자 조 교수가 다시 손 교수를 반비판하면서 논쟁의 판이 커졌다.

애초 쟁점을 제공한 최 교수의 논지를 요약하면 노무현 정부는 무능력과 비개혁 때문에 실패했으며, 실패한 이상 특단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한나라당으로 정권을 넘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 원인으로, 사회적 갈등을 제도정치 안에서 해결하지 못한 채 운동정치(포퓰리즘=민중주의)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정치를 무력화한 데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한나라당 집권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의 이런 주장에서 출발한 세 학자의 논쟁을 진행 순서대로 정리해본다.

 

조희연의 최장집 비판=조 교수는 최 교수가 한국 정치의 위기에 대한 ‘지적’은 올바르게 했지만 ‘진단’에서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했다고 포문을 열었다. 노무현 정부가 실패했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만, 원인은 잘못 짚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가 정당과 국회를 배제한 데 실패 원인이 있다는 최 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조 교수는 사회적 힘을 이끌어내는 ‘진보적 민중주의’ 전략을 구사하지 못한 데 참여정부 실패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도정치로 갈등을 수렴하는 노력을 안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 저항을 돌파하는 제도정치 바깥의 사회적 힘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확언했다. 민중주의란 정당이나 국회 등 제도권 정치를 뛰어넘어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고 대중과 결합하는 전략을 가리킨다. 진보적 민중주의는 ‘사회경제적 개혁’을 급진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데, 그러려면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르는 대중의 분노를 급진적 방향으로 키워야 한다고 조 교수는 주장했다. 그는 제도정치가 정상화하고 그 제도적 틀로 사회적 갈등을 흡수하기 위해서라도 ‘민중주의적 사회운동’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조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 문제를 진보세력과는 아무 상관 없는 ‘타자의 문제’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과 열린우리당 등 중도자유주의세력을 포함한 진보·개혁 세력 전체가 지닌 본질적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문제의 하나로 그는 노무현 정부가 ‘헤게모니 정치’를 실행하지 못한 것을 들었다. 참여정부는 지나치게 정체성에 집착해 집권 기반을 협소화했을 뿐, 보수적 대중의 동의를 얻어내 함께 가는 기반확대 전략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손호철의 반론=손호철 교수는 조 교수의 최장집 비판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자유주의 세력이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한나라당에 정권을 내줘야 한다”는 최 교수의 주장에 더 무게를 실었다. 손 교수는 한나라당의 집권이 역설적으로 긍정적 요소가 있다며, 정권이 넘어가면 오히려 한국정치가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나라당이 집권해 한나라당식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사회적 양극화와 민중 생존의 파탄을 경험”하면 “문제의 핵심이 신자유주의에 있다는 걸 직접 체험”하게 될 것이고 그럴 때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에게서 대안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최 교수가 말한 ‘두려움의 동원 정치’를 다시 거론한 손 교수는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안에서까지 ‘한나라당에 권력이 넘어가도 좋으냐’는 식으로 윽박질러 문제를 풀려는 것은 코미디”라며 “이제 유치한 ‘두려움의 동원 정치’는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조 교수이 논리에 ‘두려움의 동원 논리’가 여전히 있다는 인식이 깔린 반론인 셈이다.

조희연의 재반박=이에 조 교수는 “우리 현실의 복합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손 교수의 한나라당 집권 긍정 논리는 최 교수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며, “한나라당 집권 촉진 운동을 해야 한다는 오해도 나올”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손 교수의 논리는 “한국 자본주의가 더 파국적인 상황을 맞아야 대중이 더욱 급진화하고 변혁운동 기반이 강화된다는 1980년대식 인식을 떠올리게 한다”며 매우 위험한 논리라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한나라당의 집권은 한국에서 ‘신보수주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1930년대 독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붕괴한 뒤 긴 파시즘 시대가 열린 것처럼 진보세력에게 불리한 상황만 안겨줄 것이라고 진단했다. 조 교수는 2004년 탄핵반대 투쟁에서 확인됐듯이 올바른 일반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진보세력의 공간도 확장시킨다며, “탄핵반대 투쟁이 열린우리당에게만 혜택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대약진에도 결정적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2007년 대선도 마찬가지”라며 “현재와 같은 구도로 지속되는 것이 좋은가, 한나라당의 패권적 구도가 흔들리는 것이 진보정당의 약진에 좋은 것인가 한번 생각해보라”고 주문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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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berto Bobbio 가 생각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Norberto Bobbio 가 생각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                                                                                                                                        맑은샘.

1.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정의)

모든 형태의 독재체제와 구별되는 정치형태로써의 민주주의에 관한 의미 있는 논의는 오로지 민주주의를 다음과 같이 파악하는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민주주의를 누가(who) 종합적인 정책결정권을 행사하는가의 문제와 그것은 어떤 절차(procedures)에 의거해서 이루어지는가의 문제를 규정하고 있는(주요한 혹은 기본적인)일련의 규칙들로서의 특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어떠한 사회집단이든 대내외적인 존립을 보장받기 위하여 모든 구성원을 구속시킬수 있는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
모든 결정은 설사 그것이 집단적 결정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상 개인들에 의해 내려지게 마련이다. 즉, 집단 그 자체는 어떠한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들에 의해 그것이 한사람이든, 몇몇 사람이든 아니면 모든 사람이든 간에 내려진 한 결정이 집단적 결정(collective decision)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 결정이 누가 결정권자이며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를 명시한(성문으로든 관습으로든)규칙에 근거를 둔 것이어야 한다.
전체적 결정권을 내리는 주체(persons)를 기준으로 하자면 민주주의란 대다수 성원들에게
이러한 결정권-(결정할수 있는힘(power)은 기본적인 헌법의 보장에 의해 결정권(right)이 된다)--이 부여되어 있는 정치형태를 말한다.
사실 여기서의 '대다수(a large number)'란 개념은 모호한 개념이긴 하다.
정치적 결정들은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접어두더라도 선뜻 "모두"란 말을 쓰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완전한 민주체제를 가진 나라라 하더라도 일정한 연령에 도달해야만 투표할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인의 지배(omnicracy)는 최상의 이상일 뿐이다. 민주주의라고 불려질 만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투표권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어떤 추상적인 원칙에 의해 미리 결정될수 없다. 역사적인 상황들과 어떤 판단을 하기 위한 기준의 필요성 따위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다.
기껏 말할수 있는것은 성인남자들만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유산자들만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사회보다 더 민주적이지만, 여성들에게 까지 투표권이 주어진 사회보다는 덜 민주적이라는 정도이다. 지난 19세기에 몇몇 국가에서 지속적인 민주화의 진전이 있었다는 진술은 투표권을 누릴수 있는 사람들 수가 꾸준히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결정이 이루어지는 양식(mode)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민주주의란 그 기본규칙을 다수의 지배에 둔 양식이라고 할수 있다. 다시 말한다면, 결정권을 가지는 사람들 대다수에 의해 승인될때 그 결정은 전체의 결정으로 간주될수 있고, 그럼으로써 모든 성원을 구속할수 있는 결정이 될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다수의 결정이 유용한 것이라면 만장일치는 훨씬더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만장일치는 구성원의 수가 제한되어 있거나 또는 동질적인 집단 내에서만 가능한 것으로써 극단적인 두가지 상충되는 경우에만 그 요건이 충족될수 있다.
모든 구성원이 거부권을 가지고 참여해야할 만큼 매우 심각한 결정사안이 생겼을 경우나 아니면 결정사안이 별로 중요치 않아 명백히 반대의사를 표하지 않는한 이를 찬성으로 간주해도 무방한 경우, 이른바 묵시적 동의의 경우이다. 당연히 만장일치는 결정권자가 오직 두사람일 경우에만 필요한 방식이다.
이점이 완전한 합의에 토대를 둔 결정과 법(통상 다수의 승인을 요구하는)에 따라 이루어지는 결정과의 명백한 차이이다.
내가 여기서 내리고 잇는 민주주의의 기본정의는 이상에서 말한 두가지 요건, 즉 상당수 시민들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전체의 결정에 참여할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야 한다는것, 그리고 다수결의 원리(극단적인 경우에는 만장일치제)같은 절차적 규칙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것 이상의 또다른 요건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기본조건에 들어갈 세번째 요건으로는 결정권자나 혹은 결정권자를 선출하는 사람들앞에 실질적인 선택대안들이 주어져야 하며, 이 대안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수 있는 여건이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러한 요건이 의미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여론형성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등 이른바 기본권(basic right)이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권리들은 자유주의국가 초기부터 그 토대가 되었던 권리들로써 법치국가(Rechtsstaat)의 기본 교의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치국가는, 본래적 의미를 따를때, 법에 의거하여(sub lege)권력을 구성하는
국가를 의미할뿐만 아니라 이른바 인간의 불가침의(inviolable)권리들에 대한 헌법적 승인으로부터 적법하게 내려진 제한 속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이러한 권리의 철학적 바탕이 무엇이든간에 이것들은, 민주주의체제의 특징을 이루는 주요한 주요 절차적 기제가 적절히 작동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이러한 기본 권리들을 부여하는 입헌적 규범들은 그 자체로써 게임의 규칙이 아니라 그 게임을 가능하게 해주는 전제들로써의 규칙들인 것이다.
이렇게 볼때, 자유주의 국가(Liberal state)는 민주주의 국가(democratic state)의 역사적인 전제일뿐 아니라 법적인 전제이기도 하다.
자유주의국가와 민주주의국가는 완전히 상호의존적이다.
자유주의가 민주적인 권력의 적절한 행사에 필수적인 자유를 마련해 주는것이라면 ,민주주의는 이러한 기본적인 자유의 존재와 지속을 보장해준다. 바꿔 말하면, 비자유주의국가에서는 민주주의가 적절히 작동될수 있을것 같지 않으며, 역으로 비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기본적 자유들이 효과적으로 보장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자유와 민주의 이러한 상호의존은 자유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가 흥망성쇠의 궤적을 같이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될수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민주화의 과정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것을 우리가 직접 보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먼저 완전히 새로운 의사결정능력에 참여하고자 하는 요구에 의해 성취된 성공을 지적하는것이 필요하다. 너무 단순화시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권력은 오직 두방향으로만 흐른다.
그것은 하향적, 즉 위에서 아래로 흐르거나 상향적, 즉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것이다. 현대국가에서 전자의 전형적인 예는 관료적 권력이고, 후자의 전형적인 예는 정치적 권력인데, 이때 정치적 권력이란 시민으로서의 개인보다는 시민전체를 위하여 시민의 이름으로 국가, 지역, 지방의 모든 차원에서 실행되는 권력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근래의 민주화과정, 즉 상향적 권력의 확장은 개개인들이 그들의 역활 내에서 시민으로서 고려되고 있는 정치적 관계의 영역에서부터, 개인들이 특정한 상황에서 각기 다르게 가질수 있는 다양한 기능과 다양한 역활이라는 면에서 고려되는 사회적 관계의 영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부모, 어린이, 배우자, 감독, 노동자,교사, 학생의 관계들과 의사와 환자간의, 장교와 사병간의, 공무원과 탄원자간의,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공공시설과 관리자와 고객간의 관계들이 이에 포함될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수 있을것 같다.
즉, 만약 현재의 민주화과정에 대해 이야기할수 있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종종 잘못이해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직접민주주의로 옮아가는 데 관한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사회적 민주주의로 옮아가는데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거의 대부분 국가적 차원의 정치영역에(작고 하찮고 정치적으로는 무관한 자발적 결사에) 한정되었던 상향적인 권력은 학교에서 공장에 이르는 시민사회의 다양한 영역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여기서 학교와 공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곳이 현대사회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의도적으로 교회를 무시했는데, 왜냐하면 종교적 사회는 설사 민주화에 대한 절박한 논란으로 인해 혼란에 휩쓸린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정치적이지도 시민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현대사회가 발전하는 노정을 새로운 민주주의 유형이 이제껏 계급제도나 관료조직에 의해 장악되었던 공간들에 침투해가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단순한 공식, 즉 국가 민주화에서 사회민주화로의 발전으로 요약할수 있는 민주적 제도의 발전에서 진정한 전환점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정당하다.
만일 전체로서의 공동체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정치"로 본다면, 역사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사회적 민주주의보다 앞서 도래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수 있다.
사람들은 대개 의회제도의 확립을 통해 실현될수있는 국가의 민주화와 사회의 민주화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가족에서의 학교, 기업에서의 공공사업의 경영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제도들이 그 역활을 민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도 당연히 민주국가는 존재할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는 정치적으로 이미 민주적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의 민주발전의 현 단계를 뚜렷이 특징짓는 물음을 제기한다. 즉 민주국가가 비민주적사회에서 생존할수 있는가?
이를 또한 다른 방법으로 묻는다면, 정치적 민주주의는 국가가 독재정권의 희생물이 되는것을 방지하는데 필요했고 계속해서 필요할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인가?
오늘날 민주발전의 지표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투표권을 가지는 사람의 수에 의해서는 충족될수 없고 정치의 범위를 넘어서서 투표권이 행사될수 있는 영역의 수에 의해야만 한다.
이를 설명하는 간결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은 기존 국가의 민주화의 상태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더 이상 “누가(who)" 투표하는가가 되어서는 안되고 ”어디에(where)"투표 할수 있는가가 돠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투표한다는 것이 가장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참여방식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참여를 투표권 행사에 국한하려는 의도는 없다는 것이 여기서 지적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지난몇년간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이 던져졌을때 우리는 유권자가 얼마나 더 많아졌느지를 살펴서는 안되고 시민들이 투표권을 행사할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살펴야만 한다.
보통선거권이 획득된 마당에서 민주화과정의 확대문제가 거론된다면 그것은 흔히 주장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로부터 직접민주주의에로의 이행보다는 정치적 민주주의로부터 사회적 민주주의에로의 이행이 될 것이다.
“누가 투표하는가?” 하는 것보다 “어디에 투표하는가?” 하는 것이 보다 문제이다.
환언하자면, 어느 나라에서보다 큰 민주화에로의 진전이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우선 관련있는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권한이 있는 참여권자의 수가 얼마나 증대되었느냐 하는 것 보다는 이러한 권리를 행사할수 있는 상황이나 영역의 폭이 얼마나 증대되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선진사회에 존재하는 상층부의 두개의 커다란 권력블럭 즉 대기업과 관료기구에 대한 민주화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가능한 것이라 하더라도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점은 일단 젖혀두고 민주화과정은 종결되었다고 말해질수 없다.


(현대민주주의의 패러독스)
내가 일부러 직접민주주의의 한 형태인 국민투표를 예로 든 것은 대의제 민주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민주주의를 “체제”의 결함에 대한 즉효요법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직접민주주의의 장점을 극구 칭찬하기(물론 이는 정당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때문이다.
그러나 누차 지적했듯이 민주주의가 어렵다면 직접민주주의는 더욱 어렵다.  
나아가 나는 그것이 이전보다도 점점 더어려워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이주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모든 정치체제가 당면하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의 진정한 패러독스(Paradox)“라 불러야 할 몇가지 문제를 들고 싶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통치를 의미하고 인민의 이름을 붙인 통치가 아니라고 한다면 완전한 민주주의, 이상적 사회주의가 직접민주주의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이 루소가 영국인민은 투표함에 표를 넣는 순간에만 자유롭다고 말한 이유이다. 하지만 루소의 언급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그리고 수천번이나 제기되었던)반론은, 다른 나라의 인민들은 투표하는 순간조차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소는 직접 민주주의, 즉 아우라(Aura)의 민주주의에 대치되는 아고라(Agora)의 민주주의가 소국가, 곧 모든 시민이 광장에 집합할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국가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몽퇴스키외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러한 소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국가는 거대화 되고 있으며 이제 광장은 참가하는 시민이 아니라 동원된 군중조차 수용할 수 없다. 몽퇴스키외도 민주주의의 원리는 국가애(國家愛)로 이해되는 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작은 국가만이 자발적인 사랑을 받을수 있다.
그러므로 로베스피에르는 거대한 프랑스국가에서 바로 국가를 구하기 위해 덕(德)과 테러를 결합시켜야만 했다.
고대인의 민주주의에 대비되는 현대인의 민주주의의 첫 번째 패러독스는(유명한 구별을 모방한다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발생한다.
즉, 우리는 객관적 조건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속에서 끊임없이 점점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어제오늘 시작된 일은 아니지만 커다란 조직 내에서 민주주의의 게임의 규칙을 존중하도록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국가조직을 비롯한 여러조직은 점점 커진다. 이러한 불길한 흐름-(그것은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이라 불린다.) 에 맞닥뜨린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대의제 민주주의에 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직접민주주의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1960년대와 70년대 학생운동이 부활시킨 직접민주주의 혹은 “아테네식” 민주주의에 의해 서술한 규칙의 정확한 작동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언제나 기만적이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동의로써 표현되는 집행부의 결정을 비준할(자주 박수에 의해)뿐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카리스마적인 (기술적인 의미에서, 곧“민주주의적”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카리스마적” 이라는 뜻이다) 권력기초를 지닌 집행부가 있고, 그 권력은 대의단체의 어떤 집행부보다 훨씬 경고하며 항거할수 없는(위임권의 소환 따위는 아무데도 없다) 최악의 의회보다도 더욱 나쁜 집회로 구성되었다. 이것을 말하는 목적은 민주주의가 미봉책과 안이한 일반화 및 간교한 혁신을 거부하는 극히 복잡한 “실천”이고, 조그만 충격에도 무너질수 있는 대단히 섬세한 기구(mechanism)임을 다시 한번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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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Aura):회의장소, 강당을 의미하는 언어.
*아고라(Agora):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중심지에 있는 광장.
*아우라의 민주주의: 강당과 같은 곳에서 대표자들이 모여서 논의하는 대의제(간접)민주주의
*아고라의 민주주의:열린광장에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
*과두제의 철칙: 과두제란 1인이나 다수 또는 전체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가 지배하는 정치체제. 독일의 사회학자 R.미헬스가 그의 저서(정당사회학)1921에서 독일과 이탈리아

의 사회민주당을 분석하고 국가뿐만 아니라 정당, 회사, 노조, 대학, 종교단체등의 사회집단에서도 소수의 지배가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 “과두제의 철칙”이라는 표현을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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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제와 테크노크라시)
더욱 성가신 두 번째 패러독스는 현대국가가 규모만이 아니라 기능의 범위에서도 증대하며, 어떤 국가기능의 증대도 관료적 장치, 즉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위계적 구조를 가진, 아래로부터 위로가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권력장치의 증대로 귀결된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하고 있다. 카부르 시대의 장관은 7,8명 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네배가 되었다.
각 장관이 자기 자신의 관료군을 필요로 한다.--준 국가기관(para state)은 계산에 넣지 않지만, 이것도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현대국가가 관료주의적이며 그 법률이 본질적으로 반민주주의적인 권력조직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얼마나 강하고 또 자연스러운가를 알 수 있다. 같은 시대에 이들 국가 내에서 대체로 이것과 동시에 민주주의화 과정도 진행되고 있는것도 사실이지만, 민주주의화 과정과 관료주의화 과정이 같은 보조로 진행되고 있을뿐만 아니라 후자가 전자의 직접적 귀결임도 역시 사실이다.
선거권의 확대에 따라 점점 더많은 새로운 대중이 자기의 요구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제기하는데, 이러한 요구는 거의 언제나 국가에게 새로운 과제와 부담을 떠안도록 하기 때문에 국가는 그 활동영역과 장치를 부득이하게 증대시키지 않을수 없다.
관료주의국가와 민주주의국가가 동시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현대국가의 성장을 목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어떤 사람은 만족스럽게도 또 어떤사람은 걱정하면서)의 오랜 생각이며, 지금은 습관적으로 쓰는 문구가 될정도이다. 곧 민주주의(사회주의는 더욱 더하다)가 확대될수록 관료주의도 확대된다.
적어도 이제까지는 그러했다. 그것을 알아야만 우리는 민주주의 논쟁의 배경을 이루는 거대한 난점을 과소평가하지 않을수 있으며 또한 그 마술적인 해결에 속지 않을수 있다.
세 번째의 패러독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 장기적 과정의 산물이다. 자본주의경제에 근거하든 혹은 사회주의경제에 근거하든 상관없는, 공업사회에 특유한 기술적 발전의 결과이다. 즉, 이사회 내에서는 유자격자가 아니면 맡길수 없는 기술적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이 점점 증대하고 있다는 사실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전문가에 의해서 통치하려는 유혹, 혹은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를 창출하려는 유혹이 계속 생겨난다.
테크노크라시와 민주주의가 충돌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큰 통찰력이 필요치 않다.
테크노크라시는 유자격자, 즉 어떤 사물에 관해서 잘알든지, 또는 알도록 되어 있는 사람들의 지배이다. 민주주의는 모든사람, 즉 그 전문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험에 기초하여 결정해야 하는 사람들의 지배이다.
공업사회의 주역은 과학자, 전문가, 숙련자이다. 민주주의사회의 주역은 평범한 시민, 보통사람, 모든 민중이다. 고대사회의 사람이 당면해야 했던 문제의 어려움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 사이의 비교는 불가능하다.
일례를 든다면, 거대국가의 경제문제에 정통하고, 일정한 목적이 세워진 경우에 정확한 해결을 제시할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더욱 나쁜 경우에는, 주어진 수단아래에서 도달 가능한 목적을 지적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결정할수 있다는, 명백히 한계를 갖는 이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민주주의적 이상에 따르면 정치문제에서 유일한 권능자는 시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민은 주권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이 점점 기술적으로 되고 점점 비정치적으로 됨에 따라 시민적 권능의 영역, 따라서 그 주권은 좁혀지지 않을까? 점점 기술화되어가는 사회속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나는 테크노크라시 사회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더욱 정교한 기술적 해결을 요구하는 문제가 확실히 증대하더라도 전통적 정치문제의 전 공간을 점할 만큼 증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술적 진보는 끊임없이 정치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을 확인해두고 싶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는 것은 현대사회의 객관적 발전조건에 의해 점점 권능을 잃고 있는 사람들의 권능에 속하는 결정의 확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자본주의경제는 물론 사회주의경제에서도 이제까지 사실상 어떤 형태의 인민통제도 제거되었던 영역이자 민주주의적인 도전이 승리했거나 패배했던 영역인 생산의 영역에서 그러하다.
편견이나 과도한 환상없이 사실을 확인하는것이야말로 즉흥적이지 않고 실행가능한 방책을 생각해낼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문화산업과 정치산업)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의 과정과 대중사회의 대립으로부터 발생하는 패러독스를 생각해보자.
민주주의는 인간능력의 자유롭고 충분한 발전을 전제로 한다.
모든 거대사회가 겪고있는 대중문화의 결과는 순응주의의 일반화이다.
대중사회의 특징인 피교화성(indoctrination)은 민주주의사회를 떠받치는 토대가 되는 개인의 책임감을 억누르고 압박하는 과정을 가지고 있다.
잘 조직된 선전은 개인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 여지를 점점 줄이고, 순간적인 감성적 반응이나 타인의 행동에 대한 수동적인 모방에 기초하지 않는 확신의 여지를 점점 줄여가는 경향이 있다.
대중의 최소한의 동의 없이는 통치할 수 없는 그것은 곧 이들 나라에서 민주화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나라에는 많은 비판을 불러 일으키는 문화산업과 함께 정치산업이 존재한다.
더많은 개인이 문화의 산물을 이용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쉽게 소유함에 따라 문화산업이 발생하는것처럼 정치산업은 권력기반의 확대와 함께 등장하며 인민주권의 추상적 원리를 신화로부터 현실로 옮기는 제도들(보통선거권으로부터 조직정당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이 실현됨에 따라 번영하고 성장한다.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도 여러 가지 형태의 정치산업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이해하고 있다. 모든 성년시민이 정치적 결정의 형성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원리를 가진, 그리고 그들이 권력의 소유자들에 의해 많든 적든 고려대상이 되는 사회가 존재할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적어도 현재의 사회적, 지적 발전단계에서는 비현실적이고 터무니 없다.
모든 사회는 동의를 조직하기 위한 기술들--(그 강도와 강제성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을 사용하는 것을 요구받는다.
누차 지적했듯이 이러한 기술의 사용은 불가피한 것이다.


교도민주주의(directed democracy)와 구별하기 위해 참여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로 정의되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어떤 귀결을 수반하는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명히 참여민주주의의 특징중 하나는 광장의 집회나 행진등과 같이 이른바 대중의 의지표시운동이며, 이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또는 커다란 여론의 방향을 불러일으키길만한 사건에 즈음하여 행해진다. 이러한 운동에 참가--(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어떤 상황에서는 시민적 의무로 간주한다)---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이것이 집단의 단결과 연대를 촉진하고 유지하기위한 자극으로 기능하는 가치를 가진다고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또한 그것들의 효과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의지표시운동이 산회(散會)하면 그것이 불러일으킨 흥분은 급격히 가라앉고 행동의지도 소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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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민주주의(directed or guided democracy) :
인도네시아의 정치가 A.수카르노가 제창한 민주주의.
인도네시아의 정당난립과 민족분열상을 극복하고자 1957년 서구정치제도의 모방이 아닌
인도네시아에 적합한 민주주의로 일반대중에 대한 엘리트의 교도적 역할을 강조한
민주주의. 지도자의 교도에 의한 질서있는 토론과 만장일치를 원칙으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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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것들에의 마지막 호소)
이제 결론으로, 환상과 절망에 쉽게 빠져드는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 의해 자주 제기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민주주의가 주로 일련의 절차적 규칙들이라면 민주주의가 어떻게 “적극적인 시민들”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할수 있겠는가?
적극적 시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마 어쩌면 굳이 필요한 이상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상이라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다고 어떻게 위에 들어온 일련의 규칙들을 획득하기 위해 바쳐온 투쟁들,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그 위대한 투쟁들을 무시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것들을 낱낱이 상기해보려 한다.
우선 첫째가 관용의 이상인데 이 이상은 수세기에 걸친 참혹한 종교전쟁들을 치른이후에야 획득되었다.
만일 오늘날 세계평화에 대한 위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또다른 광신주의, 다시 말하면 자기네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그리고 이를 타인에게 강요하는데 필요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맹목적 믿음 탓이다.
굳이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이는 여러분의 눈앞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둘째는 비폭력의 이상이다.
민주주의체제와 독재체제의 본질적 구분은 오직 민주주의 체제에서만이 시민들이 피를 흘리지 않고 정부를 갈아치울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했던 칼 포퍼의 언명을 나는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아주 빈번히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던 민주주의의 형식적 규칙들은 사회적 갈등을

폭력에 호소하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공존의 테크닉을 역사위로 최초로 선보여 주었다. 이러한 규칙들이 존중되는 곳에서만 적대자가 전멸되어야 하는 원수로서가 아니라 내일 우리를 대신 해줄지도 모르는 반대자로서 존재할수 있게 된다.
셋째는 사고의 자유로운 토의를 통한, 그리고 삶의 태도와 양식의 수정을 통한 사회의 점진적 개선의 이상이다. 오로지 민주주의만이 아마도 우리시대의 최고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성의혁명과 같은 조용한 혁명들이 발화하고 확산될수 있도록 허용한다.
마지막으로 형제애(프랑스혁명에서의 박애)의 이상이다.
인간의 역사는 골육상쟁의 역사로 메워져 있다.(역사철학)에서 헤겔은 역사를“거대한 살육의 집”이라고 정의했다. 부정할수 있겠는가?
세상 어느 나라에서고 민주주의적 방법이 하나의 습관이 되었을때 비로소 그것은 영속해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류를 하나의 공동 운명체로 연대하는 형제적 띠에 대한 인정없이
민주적 방법이 하나의 습관으로 정착할수 있을 것인가?
이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이 나날이 실감을 더해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형제적 띠에 대한 승인이 더욱 절실하다.
우리는 아직 어렴풋이나마 우리의 길을 비추고 있는 이성의 희미한 등불을 따라서 의미 있는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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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베르토 보비오 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시민이 참여하는 대의민주주의가 답이다) 에서 ..............

2. 노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 1909--) :
교조적 맑스주의에 반대하여 자유와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한 정치학자.
1909년 이탈리아의 공업도시 투린에서 태어난 노베르토 보비오는 이탈리아가 배출한 유럽최고의 정치사상가, 이론가중의 한사람이다.
튜린대학에서 법철학을 전공한 그는 변호사이며 대학교수로서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당(psi)소속의 종신상원의원으로서 이론적 실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유로코뮤니즘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좌파적인  이론적, 실천적 조류와의 논쟁속에서 자신의 정치이론을 형성했다.
이렇게해서 정초된 그의 실천적 당 이론은 psi로 하여금 독특한 방법으로 현실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도록 주도하였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의 하나인 이권정치, 즉 혼탁한 부패사슬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의연한 본보기이기도하다.
어찌보면 한국의 정치현실도 보비오가 실천속에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 이탈리아와 유사한 점이 많다 . 한보사태, IMF외환위기, 기아, 선경, 대우사태와 정경유착의 부패는 오늘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보여주는가?
이러한 점에서도 그의 지적 성과물들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지난한 민주화과정을 거쳐 이제 그 공고화단계에 들어선 한국의 정치현실 역시 이탈리아와 비슷하게 지역주의와 고위공직자들의 부정부패문제에 얽매여 진퇴양난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저작들은 단순한 정치이론이 아니라 실천현장에서의 논쟁의 산물이기 때문에 더더욱 가치가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민주주의의 미래)(자유주의와 민주주의)(민주주의와 독재)그리고(어떤 사회주의인가? Which Socialism?)등은 모두 한결같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이상적인 사회를 추구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전제로서 강조고 있다. 즉, 그의 저술들은 진보적인 사회체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민주주의의해 보장되는“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지를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이론적 통찰은, 이탈리아라는 특정사회의 정치노선 문제를 넘어 21세기를
살고있는 인류가 현대적 조건에서 정치제도로써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발전하는지, 즉 민주주의의 미래를 전망하는데 있어서도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주요저서: 정치와 문화, 민주주의의 미래, 어떤사회주의인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제3의길은 가능한가?(좌파냐 우파냐)등이 있다.

3. 작품소개:
생산수단의 공적소유를 통해 물질적 분배의 평등을 추구하고 나아가 노동해방을 기치로 내걸었던 거대한 세계사적 실험, 사회주의는 20세기가 그막을 내림과 동시에 실패로 끝났다.
여전히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국가들도 공산당 주도의 집산주의(collectivist)계획경제체제에 수정을 가하고 자본주의적 자유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수용의 폭을 확대하고 잇는 것이 20세기 후반부터의 세계사적 흐름이다.
그러나 인류가 자신의 공동체를 정치, 경제적으로 어떻게 조직할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인간해방이라는 것을 목표로 사회체제의 변화를 모색하던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사상 및 그와 관련된 무수한 논의들을 부단히 되돌아보면서 현재의 사회체제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맑스주의자들로 하여금 “시민사회”라는 개념에 주목하게함으로써 유로코뮤니즘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20세기초반의 맑스주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보비오의 논의 역시 현대민주국가의 시민사회를 이해하는데 잇어 건너뛸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도 민주주의는 인류에게 여전히 중요한 화두의 하나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체제가가 몰락하면서 그것과 대비되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퇴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회변혁적 이상이나 시도도 환영받을수 없는 민주주의시대에 민주주의에 대하여 다시금 관심을 가지고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노베르토보비오 역시 바로 그정점에 서있는 정치 사상가이다. 그렇다면 그람시처럼 이탈리아에 뿌리를 둔 정치사상가 보비오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하여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가?
맑스주의를 옹호하는 수많은 서유럽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이 맑스는 옳앗지만 맑스주의가 틀렸다고, 맑스주의는 옳았지만 맑스주의자들이 틀렸다고, 그리고 맑스주의자들은 옳았지만 맑스주의적 실천이 틀렸다고 하면서 맑스와 맑스주의에 면죄부를 부여하려할 때, 보비오는 “도데체 어떻게 오류로써 자유로울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수있단 말이냐”면서 “맑스의 비판은 옳았지만 그의 이상은 잘못되었다”고 과감한 비판을 제기한다.
맑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정신은 유효하지만 그의 공산주의사회에 대한 설계이상은 무효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자유민주주의적 “자유”만을 강조하면서 마냥 자본주의체제를 옹호했던 이론가는 아님은 물론이다.
그는 인류가 어우러져 살만한 이상적인 정치체계를 이룩하기 위한 여정은 “민주주의”를 탄탄히 구축하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자유사회주의(Liberal socialism)또는 “다원사회주의” 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체제가 역사적인 시행착오를 거쳐 보존해온 개인주의적 신조와 노선을 바탕으로 사회주의적인 가치와 물질적 재화의 평등한 분배와 균등한 기회등 분배적 정의를 수용하는 법의지배, 활발한 대의주의 그리고 경쟁적 복수정당정치의 실질적 제도화가 그내용이다. 요컨대 그는 “자유”와“평등”을 역관계가 아닌 정관계로 구현하는 이른바“사회주의적 자유(Socialist liberty)를 강조한다.
이와같은 기본적인 발상위에서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들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죠아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반면에, 진정한 민주주의는 생산수단의 공유를 통한 경제적 권력의 광범위한 차이를 좁혔을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보비오는 이러한 생각을 민주주의를 단순한 의사결정수단으로만 보는 것이라 비판한다.
이렇게 단순한 사고는 맑스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권리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뿐이다.
자유주의적 수단과 양립할수 있는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정치적 해방은 근대민주주의를 낳았던 모든 제도를 발전, 확대, 강화”를 요구하며, 단한순간이라도 그러한 제도가 정지한다면, 다시 말해서 시민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문제를 과소평가한다면 전혀 이로울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의 결론격으로 보비오는 “생산자의 자치정부”를 자유사회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황주홍 옮김, Norberto Bobbio, 문학과지성사 1992년, 7,000원

Bobbio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소신이 있지만, 경박하지 않다. 묵직한 사려를 품은 학자이자 정치사상가로 보인다. 일전에 <좌파냐 우파냐>라는 책을 단순요약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래야 할 듯 싶다. 천천히 두루살피고 싶은 마음 없지 않지만, 중간고사생에게는 발등의 불이 있는지라 '효용'을 무시할 수가 없다. -_-;

한국에 살면서 정치체의 이름 중,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이다. 워낙에 익숙하기에 자유는 으레히 민주주의 앞에 붙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유를 핵심으로 삼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반드시 친화적인 것만은 아니다. 외려 상충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Bobbio는 그 양자간의 관계맺음을 살펴보기 위해 타임머신을 탄다. 일반적인 정의를 언급하고 시작한다. "자유주의(liberalism)는 국가에 대한 어떤 독특한 태도를 일컫는 개념으로서, 국가의 권력과 기능은 제한적이라고 보는 신조이다.(≠절대국가,사회국가) 민주주의(democracy)는 통치형식의 하나로서, 통치의 힘, 즉 통치권이 한 개인이나 몇몇 소수의 수중에 장악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 신조이다.(≠군주주의,과두주의)"(p.11) 때문에 자유주의 국가가 반드시 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아니며, 민주주의 정부가 자유주의 국가내에서만 성장하는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자유의 고전적 개념과 현대적 개념의 차이를 최초로 언급한 사람이 Benjamin Constant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대립적으로 설정한 시도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그대로 재인용한다. "고대인들은 한 국가내의 모든 시민들에게 권력이 분배되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며 이것을 그들은 자유라고 생각했다. 현대인들의 목표는 각자의 사적인 소유에 대한 보장이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자유는 제도에 의해서 획득된 이 소유의 보장을 일컫는다."(p.12) 그리고 Constant은 이들은 양립불가능하며,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

자유주의의 '철학적' 전제는 자연권(이론)에서 비롯된다. '철학적'이라는 수식은, 그것이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가설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자연법 사상의 매력이라면 매력인 것은, 그 논리전개가 실제의 진행방향을 뒤집어놓는 다는 것에서 찾을 수도 있다. 절대군주의 억압하에 있던 개인이, 이 사상체계에서는 자유로운 자연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가정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와 관련해 언급되는 것들은 거진 다 교과서를 통해 한 번쯤은 들어보았다는 점에서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을 절감케하는 부분이다. 어쨌거나. 모든 개인은 천부인권을 갖는다. 국가나 지배자는 이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타인에 의한 권리의 침해로부터 개인을 보호해야 한다. 이것이 자유주의의 기본 논리이자, 자유주의 국가가 제한국가(the limited state)이게 하는 근거다. John Locke가 대표적인 자연법 이론가인데, 미국의 <독립선언서>, 프랑스 혁명기의 <인권 선언문>은 이를 반영한다.(p.17)

사회계약이론의 핵심단어는 '계약'에 있다. 그리고 계약을 위해서는 독립된 개인이 전제되어야 한다. 결정권이 개인에게 존재해야만 논리전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권사상을 통해 뒷받침된다. 개인이 등장하므로. 인간의 권리, 그리고 사회계약이론은 개인주의(individuality)를 매개로 연결된다.(p.19) 개인주의 없이 자유주의는 불가능하다는 명제가 도출된다.

자유주의 이론에서 국가는 권력과 기능의 측면에서 한계를 갖는다. 전자는 권리존중주의 국가(right-based state), 후자는 최소국가(minimal state)로 이어진다. 권리중심주의 국가는 공권력이 기본법이나 헌법 등과 같은 일반적 규범들에 의해서 규제되고 있는 국가로 이해된다.(p.22) 이는 소극적인 의미로 '사람이 아니라 법에 의해서 통치되는' 비독재(non-despotic) 국가정도로 정의될 수 있지만, 외연이 매우 광범위하기에 개념으로서의 의의가 퇴색된다. 자유주의 이론에서는 권리중심주의 국가를 적극적으로 살핀다. 자의적이고 정통성이 결여된 권력행사를 방지하고 예방하는, 그리고 권력의 남용과 탈법적인 권력행사를 제동걸고 분쇄하는 모든 '헌법적인 장치'를 포용하면서 정의된다. 이는 ⓐ입법권우위(-행정권) ⓑ사법부에 의한 입법부 감시 ⓒ지방정부의 자율성(-중앙정부) ⓓ행정관료의 자율성이 핵심적 장치가 된다.(p.24)

상기한 장치는 최종적으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때의 자유는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이다. 자유주의에서 '자유'와 '권력'은 대립항이다.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른 사람의 자유가 확대된다는 말은 한 사람의 권력이 그만큼 축소된다는 것을 말한다."(p.25) 그래서 국가는 권리존중주의적일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연장선상에서 국가역할이 제한될 필요가 있음이 정당화된다. 개인의 입장에서 국가는 필요악이다. "가부장적 국가(imperium paternale)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독재체제"라고 한 Kant와, "외부의 적이나 타인으로부터의 손상으로부터 개인을 지켜주고, 사적영역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공공사업의 필요성"으로 국가역할을 한정한 Smith는 이에 부합한다. Humboldt는 개인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성(variety)의 가치를 중시한다.(갈등을 긍정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국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안전(security)'일 뿐이라는 것이다. 헤겔이 상상한 국가는 더이상 자유주의에서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근대적인 것이다. 반면 정부형태로서의 민주주의는 고대적이다.(p.36) 어원상 민주주의는 다수인민(the people)에 의한 통치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불신한다. 그리스에서 볼 수 있었던 직접민주주의 형태를 말한다. 이는 인민에 대한 불신과 동일하다. Madison의 말을 인용한다. "인민들에 의한 통치는 이러한 위험스러운 악성의 경향성을 띠게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서도 이 통치 형태의 지지자들은 결코 그 통치의 성격과 운명에 대한 경각심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미국헌법에도 드러나듯이, 자유주의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민주주의가 결국 다수에 의한 지배가 전제정(tyranny)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에 있었다. 이들은 논리상 대표가 통치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고, 사회의 규모는 이를 뒷받침했다.(Bobbio는 이들의 생각에 반감을 표명한다.)

하지만 루소가 "진정한 민주주의는 결코 존재해보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그 이유는 ⓐ작은규모의 사회 ⓑ간단한 사안 ⓒ부의 평등 ⓓ검소한 생활이라는 전제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듯이 이미 직접민주주의는 비실현태이고, 현실적으로 대의제민주주의만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양자는 모두 인민주권의 어떤 원리에 입각하고 있음 또한 사실이라고 Bobbio는 지적한다.(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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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부동산 치부 이명박이 1위? 국민 반성해야”

 

 

 

김진명 “부동산 치부 이명박이 1위? 국민 반성해야”
 
실명 대선소설 <나비야...> 작가, 여의도통신과 인터뷰서 주장
 
입력 :2007-02-05 18:07:00   안성모 (momo@dailyseop.com)기자
 
 
유력 대선주자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실명이 등장하는 소설 <나비야 청산 가자>의 작가 김진명 씨는 “한국 사회의 여러 성향을 분석했을 때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다는 차원에서 가상의 대선전략 보고서를 통해 하나의 시각을 보였을 뿐이다”며 선거법 위반 논란을 일축했다.

김 씨는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유명한 밀리언셀러 작가. 이번 소설에는 한나라당 대선주자인 손학규 전 지사가 범여권 경선에 참여해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는 것이 여권의 필승전략이라는 가상의 ‘대선 전략 보고서’를 담아 화제가 됐다.

소설 내용을 놓고 보면, 한나라당 내 대선주자인 이른바 ‘빅3’ 중 손학규 전 지사에 호의적인 반면,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보인 셈이다. 이에 이명박·박근혜 캠프 측에서는 정치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느냐며 시큰둥한 입장을 보인 바 있다.

“손학규 여권후보 현실화 가능…이명박·박근혜 내게 고맙다 해야”

   
 
  ▲ 김진명의 소설 <나비야 청산가자>의 책 표지   
 
김진명 씨는 5일 발행된 <여의도 통신>과 인터뷰에서 “손학규 전 지사가 한나라당에서 뛰쳐나올 가능성은 매우 높다”며 “충분히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소설에서 ‘한나라당에 쓴 소리를 할 수 없는 박근혜, 이명박과 달리 손학규는 소속당인 한나라당의 잘못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소설에 대한 이명박 캠프의 ‘시큰둥한 반응’에 대해 “도리어 이명박 전 시장은 나에게 고맙다고 해야 된다”고 밝혔다. “이명박 같은 사람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선거의 공정성을 감안해서 많이 순화시켰다”는 것이다.

“책에서도 부드럽게 언급했는데 원래는 더 세게 언급할 수도 있었다”는 김 씨는 “많은 국민이 ‘이명박이 희망이다’라고 하고 있는데 다른 측면을 봐야 할 것 같다”며 “이명박 전 시장이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얘기다”고 주장했다. “그냥 일반 국민이 부동산 투기한 것하고 이명박 전 시장의 행위는 다르다”고도 했다.

박근혜 전 대표의 반응에 대해서도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만 도리어 좋아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로서는 현재의 구도가 바뀌어야 하는데, 이명박 전 시장이 워낙 강세이기 때문에 무기력할 뿐 방법이 없다”고 평가한 그는 “이른바 이명박 표는 여권이 지리멸렬하면서 붙은 것이 많다”며 “현재 여권 후보들이 빈약하지만 손학규 전 지사하고 같이 하게 돼서 힘이 커지면 이명박 표는 자연스럽게 빠진다”고 내다봤다.

손학규 전 지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인지도’라고 했다. 김 씨는 “사람들이 손 전 지사에 대해서 제대로 알면 심각한 양심의 갈등에 빠질 것이라고 본다”며 “객관적으로 딱 올려놓고 보면 많은 국민들은 ‘이명박, 박근혜에 비해서 우리가 이제까지 못 가져본 후보’라고 생각할 것이다”고 내다봤다.

“부동산 플레이로 돈 번 이명박이 대통령후보 1위…국민들 반성해야”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한 비판은 그를 지지율 1위의 대선후보로 자리잡게 한 국민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김 씨는 “여권이 지리멸렬하면 그 표는 당장 이명박 전 시장에게 붙는다”며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개인적인 약점이 보일 것이다”고 예상한 후 “그럼 국민들은 ‘과연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질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가 그 동안 추구했던 많은 정의, 정말 피로써 만들어왔던 그것을 버리고, 이 사람이 밥 먹여줄 것 같은 이유 하나만으로 더티하게 부동산 플레이를 한 이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는지에 대해 국민들은 고민할 것이다”며 “그래서 소설에서 우리 국민들을 비판한 것이다”고 밝혔다. “솔직히 이명박 전 시장보다 국민들이 더 원망스럽다”고도 했다.

김 씨는 또 “우리에게는 악몽 같은 기억이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나서 한반도에서 전 국민적 데모가 있었다”며 “‘조선의 은인을 살해한 안중근 불한당을 죽여라’고 외치며 데모를 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악법 중의 악법인 유신헌법에 대해 당시 국민의 90%가 지지한 것도 그것과 비슷한 이야기이다”고 지적한 그는 “부동산 망국이 어쩌고저쩌고 욕하면서도 더티한 부동산 플레이로 돈 번 사람을 대통령 후보 1위로 뽑고 있는 현실, 이런 것을 반성하자는 차원에서 소설을 썼다”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다”고 밝혔다.

젊은 세대에 쓴 소리도 나왔다. 소설에서 주요 인물을 모두 젊은 세대들로 내세우기도 한 김 씨는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같은 책이나 보고 있고, 달콤한 개인의 행복에만 빠져 있다”며 “그런 그들에게 간단치 않은 조국의 현재와 미래를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지금은 찬란하지만 모두 신기루에 불과”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선 전략 보고서’가 제시한 여권 후보 승리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우선 “손학규 전 지사가 여권으로 가야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김 씨는 “(현재) 여권은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다”며 “여권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른 인물을 데리고 오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적합한 인물로서는 “대통령이 되려는 욕구가 강한 사람”을 들었다. 김 씨는 “고건 전 총리에게는 그것이 없었다”며 “대통령 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투쟁 경력이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여권의 잠재적 대선후보로 주목받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에 대해 “일단 밥상이 다 차려지면 숟가락 들고 먹을 수는 있지만 밥상 차리기가 어렵다”며 “그런 사람은 안 된다”고 평가했다.

김 씨는 또 여권의 경우 “인물이 안 되면 바람으로 이겨야 한다”며 “경선을 얼마나 극적으로 만들어 내느냐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나라당 경우 “너무 확실한 후보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 질 것이다”며 “지금이야 찬란해 보이지만 모두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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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품단가 후려치기'가 사람을 죽였다

 

 

 

'납품단가 후려치기'가 사람을 죽였다
영세부품업체 사장 자살 … <중앙>-네이트, "노조 때문" 왜곡
 
 
 

"지속적인 경영악화와 눈덩이처럼 커지는 부채의 현실 앞에,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중압감에 어찌할 수 없는 길을 선택합니다.(중략) 저희 제조업 단가 현실과는 너무나 힘이 듭니다. 바보같은 인간이지만 저혼자 호의호식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제조원가 너무나도 현실성이 안되네요."

납품단가 인하로 인한 경영악화에 시달리던 영세업체 사장이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1일 오전 8시께 경남 창원시 대산면에 있는 한 자동차 부품업체 사무실에서 이 회사 대표 송모(48·창원시 동정동)씨가 목을 매 숨져 있는 것을 출근한 회사 직원 김모(28·여·김해시 진영읍)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조사결과 숨진 송씨는 지난 2000년부터 창원시 대산면에 직원 10여 명을 두고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소규모 하청업체를 경영해왔다. 최근 경영악화로 인한 자금압박에 시달리던 중 1일 두 장의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을 매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숨진 송씨의 바지 주머니에서 발견된 유서는 최근 중소영세업체 사장들이 환율인하와 납품단가로 인해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가 적혀 있었다. 유서에서 송씨는 "제조원가가 현실과 터무니없이 맞지 않아 경영악화가 지속됐다"고 적었다.

경찰에 따르면 송씨는 지난해까지 비교적 잘 판매되던 부품을 생산하다가 그 수요가 줄어 외국업체로부터 하청을 받기 시작했는데, 최근 환율이 급격히 내리고 원자재비도 갈수록 높아져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오히려 납품 단가는 낮아져 적자폭이 계속 늘어났다.

송씨는 어려운 회사 상황에서도 직원들의 임금체불을 막기위해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송씨는 "누구든 저와 같은 전력은 밟지 마세요. ○○야 정말 할 말이 없다"며 숨을 끊는 순간까지도 직원들부터 걱정했으며 "외국인 꼭 챙겨주세요. ○과장 부탁해요"라고 적어 평소 송씨가 가진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따뜻한 마음도 읽을 수 있었다.

끝도없는 대기업 납품단가 후려치기

송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다. 지난 2005년 1월 현대자동차는 '비상경영'을 선포하면서 제주도에 하청업체 임원들을 불러놓고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해 현대자동차노조와 부품업체인 금속노조가 강력하게 항의했었다.

지난 1월 29일 ㈜만도는 2007년 사업계획 설명회에서 "지난 현대자동차에 납품단가 인하를 800억 맞은 게 맞느냐?"는 노조 간부의 질문에 "CR을 맞은 건 맞지만 액수를 알려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하청업체에게 얼마나 때렸냐?"고 묻자 "현대차에 맞은 50%의 단가인하를 요청했다"는 대답을 들었다.

즉, 현대자동차가 환율인하를 이유로 1차 하청업체에게 단가인하를 때리면 1차 업체는 1차 업체에게, 2차 업체는 3차 업체에게, 3차는 4차 업체에게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하고, 결국 영세업체 노동자는 최저임금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금속노조 만도지부는 회사에게 "하청업체에 납품단가 인하를 하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회사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이를 거부해왔다. 죽음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해 4월 19일 현대·기아차 그룹 계열사 노조와 자동차 부품사 노조, 금속노조 등 1200여명의 노동자가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앞에 모여 '납품단가 후려치기 중단'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현대·기아차 그룹은 수년 째 계속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노조 매도에 고결한 죽음마저 이용하는 중앙일보

송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환율하락과 제조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납품단가 인하다. 해마다 계속되고 있는 대기업의 납품단가 인하와 불공정거래로 인한 경영악화를 견디지 못해 그는 결국 목숨을 끊었다. 2장 짜리 그의 유서에도 명백하게 씌여있다.

그런데 <중앙일보>는 2일자 '현대차 협력업체 사장 목매-주변선 `귀족노조 파업 등으로 자금난'이라는 제목을 달아 그의 죽음이 노동조합 파업 때문이라고 왜곡했다. 유서 어디에도 노동조합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그러자 <중앙일보>는 친구의 말을 인용해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고, 노조를 매도하는 데 고인의 죽음까지 이용한 것이다.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악의적인 보도를 한 곳은 네이트다. 네이트는 이 뉴스를 눈에 '화제기사' 머리에 올려놓고 제목도 굵은 글씨로 뽑았으며, <중앙일보>의 제목 '현대차 협력업체...' 앞에 '파업'을 붙여 마치 현대차 파업 사태가 협력업체 사장의 자살과 관련이 있는 듯한 편집 태도를 보였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에 대해 '불공정거래'로 강력하게 처벌해야 할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지난 해 12월 28일 정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대표자를 청와대로 불러 상생회의를 한다고 했지만 대기업의 범죄행위를 눈감아주고 있다.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막기 위해 결국 노동자가 나서야 한다. 원청노동자와 하청노동자가 하나의 산별노조로 뭉친 금속노조는 올해 중앙교섭을 통해 '원하청 불공정 거래 중단' 등을 요구할 계획이다.

   
 
 

"산별교섭에서 불공정거래 중단 요구할 계획"

금속노조 김창한 위원장은 "중소기업 육성은 전체 산업을 건강하게 하는 힘인데 하청업체의 납품단가 후려치기로 노동자들의 고통뿐만 아니라 회사의 기술개발이 이뤄지지 못해 큰 문제였는데 이제는 사람까지 죽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원청회사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면 하청회사는 더 옥죄려고 할 것"이라며 "자본의 몫을 줄이면 원하청 불공정거래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재벌의 배를 불리고 불법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계속되고 있는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노동자의 힘으로 근절해야 하는 것이다. 

 
2007년 02월 02일 (금) 16:33:26 박점규 현장기자 bada99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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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리얼해서 무서운 메디컬 드라마

 

 

 

너무 리얼해서 무서운 메디컬 드라마
<하얀거탑>은 어떤 드라마?
텍스트만보기   조은미(cool) 기자   
 
 
ⓒ iMBC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숨죽이고 지켜봤다."
"소름 끼치게 재미있다."
"친구한테 보라고 권하게 재방 좀 편성해 달라."


MBC주말드라마 <하얀거탑> 시청자게시판엔 벌써부터 기대가 넘쳤다.

지난 6일 시작한 MBC주말드라마 <하얀거탑>(안판석 연출, 이기원 극본)은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굴러간다. 2회 만에 주요 인물들은 이미 링 위에 올라갔다. <하얀거탑>은 본격 메디컬 드라마다. 병원 이야기라고 해서 의사와 간호사들의 좌충우돌 로맨스를 기대하면 오산이다. 우리나라 최고 대학병원 외과 과장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권력 싸움이다.

여기에 병원 생활이 실제처럼 펼쳐진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지금껏 보지 못한 병원 드라마인 건 틀림없다. 이 드라마를 본 한 대학병원 의사는 말했다.

"이 드라마는 의사들에겐 공포물이다. 너무 리얼해서."

의사들에겐 너무 리얼한 공포물?

드라마 배경은 우리나라 최고 대학병원인 명인대 의대 병원이다. 병원 외과 과장(이정길)이 곧 퇴임한다. 하지만 후임인 장준혁(김명민)에게 그 자리를 물려줄 생각은 없다. 장준혁은 천재적인 외과 의사다. 소문도 자자하다. 과장은 자기보다 잘난 그가 싫다. 또 다른 의사 노민국(차인표)을 거기 앉히면 퇴임 뒤, 다른 자리가 보장된다.

장준혁은 실력만 최고인 게 아니라 최고가 되고 싶다. 그게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명인의대 병원 외과 과장이다. 변수는 이 병원 실세인 부원장(김창완)이다. 그는 권모술수에 닳고 닳은 달인이다.

하지만 일이 꼬인다. 그가 오진한 환자를 장준혁이 몰래 수술한다. 인간적인 내과의사인 최도영(이선균)이 부탁해서다. 그런 장준혁을 부원장이 그냥 둘 리 없다. 장준혁은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할까? 외과 과장 자리까지 오를 수 있을까? 천재 외과 의사의 야망의 끝은?

<하얀거탑>은 본래 소설이다. 야마자키 도요코가 쓴 일본 소설이다. 1969년에 발간됐다. 철저한 취재 뒤 사실성 높은 소설을 쓰기로 유명한 신문 기자 출신 소설가가 썼다. 소설은 단순히 의사들 이야기를 넘어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소설이 <하얀거탑>의 원작이다. 일본에서도 드라마로 만들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1978년과 2003년이다. 일본에서 2003년 만든 드라마는 명작으로 손꼽힌다.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 안판석 PD도 "처음 봤던 그 드라마가 잊혀지지 않는다. 워낙 명작이다"고 말했다.

원작의 힘일까? <하얀거탑>엔 벌써부터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을 드러내는 대화들이 넘쳐난다. 과장님 사모님조차 행여 부원장 사모님보다 튈라. 애써 수수한 옷을 고르며 말한다. "대장보다 튀어봤자, 남는 건 불똥 밖에 없는 거야."

 
▲ 9일 오후 경기도 이천 세트장에서 외과 과장(이정길)과 부원장(김창완)이 장준혁(김명민)을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이 촬영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15억 들인 세트장까지 사실성에 공들여

한국판 <하얀거탑>은 일단 사실성 있는 드라마인 건 틀림없어 보인다. 드라마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서 의사들로 꾸려진 자문단도 있다. 안판석 PD는 "의료적인 요소를 2006년 상황에 맞게 번안했다.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

실제 지난 주말 방송에선 사실적인 수술 장면이 방송됐다. 외과의사 장준혁은 환자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환자 가슴을 열어 심장을 마사지 했다. 이때 실제 사람과 흡사한 환자 모습의 '더미'가 사용됐다. 2500만원 가량 하는 고가 소품이다.

이 드라마가 실감나는 데는 세트장도 한몫한다. 명인대학병원 모습은 6개월 동안 15억원을 들여 경기도 이천에 만든 1200평짜리 세트장에서 모두 촬영한다. 수술실, 병실, 중환자실, 연구실까지 세밀하게 만들었다. 정교한 병원 그대로다. 맹장 수술 정도야 당장 해도 될 정도다.

김창완씨는 말했다. "딴 생각 없이 연기만 할 수 있는 세트장이다. 자전거 타고 여행하다 보면 산에 미치고 강에 빠지고 하는 그런 느낌이 드는데, 이 세트장에선 정말 '하얀거탑' 속에 푹 빠지는 느낌이다."

배우들도 탄탄하다. 김명민, 이선균, 송선미 같은 젊은 배우들뿐만 아니라 김창완, 이정길, 변희봉, 정한용, 양희경 같은 중견 배우들이 뒤를 받친다. 벌써부터 배우들 연기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높다. 김창완은 지금껏 우리 드라마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악역 캐릭터를 선보였다.

불륜도 불치병도 없는 드라마, 될까?

 
▲ 6개월간 15억원을 들여 경기도 이천에 만든 1200여평의 명인대학병원 세트장의 수술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특히 야망을 쫓는 장준혁을 연기한 김명민은 발군이다. 안판석 PD는 "김명민은 분석력이 상당히 뛰어난 배우"라며 "그에겐 인간의 복합성에 대한 깊이 있는 명상 같은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복잡한 인물인 장준혁을 표현하는데 적역이라는 것이다. 김창완도 김명민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KBS <대조영>, SBS <게임의 여왕>과 맞붙는 <하얀거탑>은 지난 주말 평균시청률 11.4%, (TNS미디어 집계)을 기록했다.

안판석 PD는 "이 드라마는 좋은 드라마"라며 "좋은 이야기라는 덴 자신 있다"고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불륜, 출생의 비밀, 불치병, 재벌2세 없는 드라마를 찾기 힘든 현실에서 <하얀거탑>은 성공할 수 있을까? 볼만한 드라마가 없다는 볼멘소리가 심판대에 오르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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