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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나를 마귀로 보는 기독교인...이번에 다를 것"

 

 

 

김용옥 "나를 마귀로 보는 기독교인...이번에 다를 것"
기자회견서 "정통 신앙인" 고백…"기독교의 심오함 알려주겠다"
텍스트만보기   주재일(bomgil) 기자   
 
 
 
▲ 요한복음 강해를 앞두고 1월 31일 기자들과 만난 김용옥 교수는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쉽게 풀어주었다.
ⓒ 신철민
 
요한복음 강해를 앞두고 1월 31일 기자들과 만난 김용옥 교수(세명대 석좌)는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쉽게 풀어주었다. 19세기 이후 기독교를 주체적이면서 전폭적으로 수용한 우리나라의 처지에서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를 바로 보지 못하는 일이라며, 죽어서 천당 가려고 믿는 천박한 기독교가 아닌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기독교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강해 작업은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들도 기독교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자부했다.

특히 김 교수는 기독교를 거침없이 비판했던 것을 이번 강연에서는 자제하고 차분하게 설득하며 기독교인들과 함께 나아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예수를 믿고, 보수 기독교인이 신앙하는 인격유일신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소통을 위해 위장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정통에 가까운 신앙인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가 말하는 '예수와 유일인격신에 대한 믿음'은 보수 기독교인의 이해와는 분명 차이를 보인다. 기자설명회의 짧은 시간에 이러한 차이를 모두 설명하지 못했다. 그의 강연과 책을 읽으며 차근차근 확인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오늘의 브리핑
 
"독점 폐해 무시하는,
정부가 더 큰 문제"
'비MS' 운동 김기창 교수
 
 
"손학규, 여권 대선후보될 자격 있다"
피켓 들고 거리 나선 여성 아나운서
'왕따' 루아얄, 이대로 주저앉나
노회찬 "민주노총 할당제 없애야"
집나간 '시대정신' 김영환, 돌아오라
"임대주택으로 2마리 토끼 못 잡는다"
'판사 명단 공개' 논쟁은 무지의 소치
'인혁당 질문' 가로막는 박근혜 캠프
'IMF 괴물', 자살 3번 결심케한 요물
 
다음은 김용옥 교수가 기자들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건가.
"최근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논술과 철학을 강의한 적 있다. 이번에는 대학생들이 많이 들어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주로 기독교 교회에 출석하는 지성인이 내 강의를 들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관심이 많다."

-고전을 강의하면서 우리 시대의 이슈에 대한 발언을 쏟아내 화제를 모았다. 이번 강의에서도 우리 시대의 문제를 다룰 생각인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반추해보자. 이렇게 종교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민족이 세계 어디에 있는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불교를, 조선시대는 유교를, 19세기 말부터는 기독교를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우리 민족의 특수성으로 봐야 한다.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하다. 기독교는 외국 선교사가 던져준 종교가 아니다.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이제 남북통일의 문제와 함께 종교 화합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논의할 시점에 왔다. 인구까지 줄어드는 마당에 기독교가 팽창할 시기는 지났다. 기독교 입장에서도 새로운 틀을 정립할 때가 되었다. 내 강의가 한국 기독교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는 이미 대선 정국에 들어섰기에 교수님의 발언에 더욱 민감할 것 같다.
"좋은 대통령이 뽑히면 좋겠다. 노무현 대통령에 관해서는 최근 4개월 간 정보를 모은 게 없어서 잘 모른다. 노 대통령이 인기가 없다고 해서 우리 시대를 잘못 이끈 대통령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단지 인기가 없을 뿐이지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니다. 우리는 5년 동안 긍정적인 성과를 잘 살펴 이어가야 한다. 대통령의 권위가 많이 떨어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노무현 정권 5년을 너무 각박하게 평가하지 말자. 우리 사회는 진보했고 민주 세상을 향해 가는 길이다. 크게 불행한 시기는 아니었다. 우리 시대를 폄하하지 말자."

 
▲ 김용옥 교수는 "기독교가 생명력을 가지려면 정치적 입장과 거리를 두고, 신앙 공동체의 본래적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 신철민
 
-기독교의 사회책임이나 한기총 등 기독교인들의 정치 활동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를 수용한 배경에는 억압 받았던 우리 민족의 고통과 이스라엘이 겪은 고통의 역사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감동을 주었다. 처절한 우리 민족에게 기독교는 굉장한 힘을 주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KSCF,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같은 기독교 단체가 한국의 민주화를 주도했다. 지금 이런 물줄기가 다 사그라지고 보수화되는 시대로 갔다. 보수화되는 게 상당히 염려스럽다.

종교는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좋은 점들이 많다. 기독교는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어느 한편에 서면 곤란하다. 정치와 종교가 결부되면 급속히 망하는 첩경이다. 로마와 결탁한 교회 권력도 망했는데, 지금 우리나라라고…. 종교와 정치의 결탁은 교회 자멸하는 길이다. 기독교가 생명력을 가지려면 정치적 입장과 거리를 두고, 신앙 공동체의 본래적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종교는 문명통합적이어야 한다. 어떤 종교든지 민족을 분열해서는 안 된다."

-강의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요한복음은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 1장이 가장 난해하다. 1장을 지나면 그다음부터는 쉽다. 1장에서 만들어진 인식론적 틀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10강을 녹화했는데 1장에서도 10절까지 나갔다. 요한복음 전체를 하려면 최소한 100강 규모는 되어야 한다.

강의 초반에는 철학적인 설명이 많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20강 이후에는 영어 강독 형식으로 진행된다. 철학적인 설명을 충분히 해야 하는 이유는, 헬라 철학을 특히 로고스 사상이라는 배경을 설명하지 않으면 요한복음 해설이 안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희랍 세계, 특히 희랍의 지식인들을 향해 쓴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신학계는 요한복음을 구약과의 관계에서만 해설하려는 경향이 짙지만, 요한복음은 희랍과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게 좋다.

강의 형식은 고전 강독이다. 구닥다리 영어가 아니라 현대적 영어를 구사할 것이다. 한 단어에 담긴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해설도 내 평생 배운 것을 녹여서 충분히 할 생각이다."

-인터넷에 댓글이 올라오면 반응할 생각인가.
"지식의 전수는 쌍방향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일이 대응할 생각 없다. 내 일 하기도 바쁜데, 창조적인 일을 해야지. 그런 것은 취사선택하는 게 민주 사회의 정도다. 사람들이 민주를 자기들의 요구만 들어달라는 식으로 오해한다. 지식의 세계는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내 지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강요가 아니다. 나는 독자들하고 채팅하는 그런 지저분한 짓을 절대 안 한다. 평생 그렇게 생각해 왔다. 집에 컴퓨터도 없고, 자판을 두드려본 적도 없다. 난 컴맹이다. 너무 불편해서 배워볼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정말 인터넷 문명이 대단하다. 내가 30년 동안 모아야 할 책을 며칠 만에 샀다. 아마존은 남의 서재에 꽂힌 책도 가져다주더라."

-과거 논어 강의를 끝마치면서 다시 대중 강의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런 일은 하사관이 해야지 장교가 할 일은 아니라고 표현했는데.
"그렇게 말했다. 텔레비전에서 대중 강좌를 하다보면 불필요하게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시도다. 공짜로 강의가 뜨는 게 아니라 돈을 내고 홈페이지에 들아와야 내 강의를 볼 수 있다. 그 정도 열심을 내 들을 정도면 소위 이상은 된다고 생각한다. 내 신념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또 관객 없이 카메라 앞에서 강의하니 청중에게 쏟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었다. 그 에너지를 강의에 집중하니 한 번에 다섯 강좌를 연속으로 녹화해도 끄떡없고 재미있더라. 과거 텔레비전 강의는 지나가면 끝이었지만, 이제는 내 작품으로 남으니까 나도 보람을 느낀다.

나는 인류의 3대 지혜서로 노자의 도덕경, 인도 문명의 금강경, 중동의 요한복음을 꼽으면서 이 문헌들을 강의하고 싶다고 밝힌 적 있다. 당시는 막연했지만 그 계획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우수한 신학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한복음을 강해하는 것은 떨리는 일이다. 그래서 안 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렇지만 불트만이나 다드의 주석 못지않은 작품을 내놓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내 강의와 책이 결코 경박한 작품은 아니다."

 
▲ 김용옥 교수는 "우수한 신학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요한복음을 강해하는 것은 떨리는 일이다. 그렇지만 불트만이나 다드의 주석 못지않은 작품을 내놓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내 강의와 책이 결코 경박한 작품은 아니다."
ⓒ 신철민
-과거 교수님은 불트만 신학을 토대로 성서를 해석했다. 현대 신학은 불트만 이후 엄청나게 발전했는데,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한국 기독교는 불트만을 이해한 적 없다. 불트만의 책을 제대로 번역하지도 못했다. 허혁 선생이 불트만을 깊게 연구했는데 기독교 내부에서 배척받다가 외롭게 돌아가셨다. 불트만은 한국에 비신화화 신학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지독한 정통신학자다. 신앙 형태도 지극히 보수적이다. 불트만은 성서의 신화적 표현 때문에 기독교가 진리를 잃어버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서에 나오는 신화는 신화로 해석해야 전통적 신앙을 이해하고 보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불트만을 넘어선다. 불트만 이후에 나온 각종 고대 문헌들을 섭렵했고, 불트만 이후의 현대 신학에 대해서도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불트만이 요한복음을 영지주의적 문서로 이해하지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내 접근은 정통신학에 가깝다. 철저하게 성서가 말하려는 본래 의도, 예수의 말씀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강해한다. 정통신학에 가까울수록 더 자유로워야 한다."

-교수님은 기독교의 내세적인 특성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렇지만 초월은 종교의 중요한 특징이다.
"묵시록과 종말론은 다르다. 묵시록은 미래의 한 시점에 어떤 특별한 계시가 있다는 기대다. 종말론은 시간의 끝이라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종말론적 긴박성은 오늘 여기 나의 문제다. 지금 여기라는 실존적 상황을 벗어나서 말하는 종말론은 없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종말론이 강렬하게 드러난다. 예수는 너희는 나를 믿지 않기에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한다. 최후의 심판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요한복음은 초월적 측면과 묵시론적 측면을 깊이 있게 종합하려고 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나 복음서 기자들이 하나님이 누구라는 걸 말한 적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규정할 수 없는 세계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초월한 분이고, 인간은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경건은 인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절대 규정할 수 없는 분, 그렇지만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시는 존재가 하나님이다. 기독교 사상도 깊이 들어가면 동양 사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인격신이라는 입장을 벗어나지 않는다. 유일인격신이라는 정체를 깔아뭉개면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찍힌다. 나는 유일신 사상에 기독교의 강력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유일신에 대한 해석을 잘해야 한다."

-기독교인을 배려하는 측면이 많다.
"내가 그토록 비판했는데 안 되니까. 이젠 북돋아서 함께 가자는 입장이다. 나도 늙었다. 죽기 전에 반론이 아니라 정론을 내놓고 싶다. 내 인생의 모드가 그렇게 바뀌고 있다. EBS에서 나에게 좋은 기회를 주었다. 감사한다."

-이번 강연이 기독교계에 파문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파문이 일면 좋겠다.(웃음) 그렇지만 나는 성서 입장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나를 마귀로 보는 기독교인들이 있었지만, 이번 강의를 두고 그렇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같은 집단이 무조건 까지 말고 협조해서 기독교를 잘 알려야 할텐데…."

-한때 기독교인이었고 신학도 전공했는데.
"나는 장로교 집안에서 자랐다. 예장 목회자들 가운데 훌륭한 분치고 우리 집 안 거쳐간 분들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 부모님은 목사님들을 대접했다. 우리 집 가까이에 씨알농장이 있어 함석헌 선생의 설교도 많이 들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고 한 때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1년 후 신학대학을 떠나 철학을 공부했다."

-그럼 신앙을 버린 것인가.
"신앙을 버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지금은 기독교인이 아니지 않는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럼 누가 기독교인가. 교회를 다닌다고 다 기독교인인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다. (예수를 믿는가)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면, 나는 예수를 믿는다. 내 안에 예수에 대한 심상이 있다."

 
▲ 김용옥 교수는 "다락방 같은 교회에서 성령 충만한 신앙 공동체가 나온다. 그런데 한국에는 살아 있는 신앙 공동체를 보기 어렵다.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 신철민
 
-예수의 심상이 어떤 건가.
"짧게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예를 들면, 성경에 오병이어 사건이 나온다. 예수 주변으로 5000명이 모인 것이다. 그것도 배고픈 사람들이다. 예수는 진지하게 사태를 파악한다. 우리에게 뭐가 있는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도시락으로 싸온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것을 들고 축수(두 손을 모아 빎)한 다음 나누어 먹었다. 뭐 음식이 계속 불어났다는 둥,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둥 하는 말이 없다. 그저 나눠 먹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는 그렇다."

-신학대를 떠난 뒤 신앙의 진보가 있었나.
"지금도 방황하고 있다. 도마복음서에 보면, 방황하는 자가 되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다. 성경에는 내가 평화를 주러온 것이 아니라 분란을 주러 왔다고도 말한다. 세속적인 인간관계를 떠나야 한다는 말이다. 방황하라는 것은 세속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세도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부름을 받았다. 그가 민족을 이끌 수 있었던 힘은 방황에서 왔다. 예수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았고, 사도 바울도 아라비아 사막에서 방황하는 시절을 거쳤다. 부자가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은 자기 부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나는 40년의 세월 동안 신앙적으로 크게 자랐다고 자부한다. 나의 체험이 한국 기독교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국교회가 퇴보했다고 아쉬워했다.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대한성서공회가 발행한 성서에 명백한 오자가 엄청나게 많다. 내가 다 써놓았다. 성경의 축자무오류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타임즈에서 1년에 몇 번 없는 오자가 나도 엄청난 일로 처리하는데, 수천만 명이 보고 엄청나게 많이 판매한 성경에 그렇게 많은 오자가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한문학자로서 보기에 관주성경에 나오는 한문이 틀린 게 많다. 말하면 지적해줄 수 있다. 여기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다.

한국교회는 해외 선교할 사람 말고 기독교 명전들을 번역할 인물을 키워야 한다. 그런 작업은 출판 논리로는 불가능하다. 교회들이 재정을 지원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의 책을 번역 안 하고 건물만 지으려 한다. 건물은 절대적으로 비게 되어 있다. 그렇게 크게 지어서 100년을 버틸 수 있겠나. 유럽 교회를 봐라. 21세기 기독교는 내실을 기해야 한다. 지금 규모로도 충분하다. 배타만 하지 말고 여유롭게 포섭하면서 어른 노릇해라. 기독교가 가장 강력한 종교 아닌가. 다락방 같은 교회에서 성령 충만한 신앙 공동체가 나온다. 그런데 한국에는 살아 있는 신앙 공동체를 보기 어렵다. 반성해야 한다."

-그럼 한국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보는가.
"한국교회는 억압받던 일제강점기에 감동의 여파로 만들어진 조직력에 의존해 여태 기생하고 있다. 이런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 조직력에 의존해 교회를 유지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러려면 설교가 감동적이어야 한다. 목사가 공부해야 한다. 자신이 배운 것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지 않고는 절대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많은 목사들이 성경 몇몇 구절을 암기해서 일상에 버무려 구라를 친다. 학문적으로 깊게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위대한 기독교가 솟아날 것이다. 요한복음 주제는 생명, 빛, 진리, 자유, 영생이다. 한국교회에 끊임없는 성령의 감화와 은혜가 솟아나야 한다."

 
▲ 김용옥 교수는 "한국교회는 해외선교할 사람 말고 기독교 명전들을 번역할 인물을 키워야 한다. 그런데 건물만 지으려고 한다"며 질책했다.
ⓒ 신철민
 
-한국 기독교의 뿌리 가운데 명동촌에서 형성된 전통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강원룡 목사님을 생전에 만나지 못한 게 아쉽다. 그를 만나 명동에 관한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내가 너무 늦게 명동에 대한 이야기를 알았다.(문익환 목사의 사모인 박용길 장로님이 살아계신다) 그런가. 꼭 한번 만나러 가고 싶다."

-여전히 기독교계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교수님을 평가한다.
"나의 강의는 신도들에게 엄청 감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독교를 깽판 놓으려는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가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나에게 집회를 맡기는데, 왜 기독교만 마귀 취급하는가. 기독교를 통해서 위대한 물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기독교가 제대로 끌고 가야 한다."

-현대 신학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자유주의신학의 오류는 아기 목욕물을 버리라고 했는데 아이까지 버린 일이다. 나는 그들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다. 기독교를 강력하게 비판하지만, 기독교의 장점을 평범하게 만들어선 안된다는 생각한다. 기독교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다른 종교와 깊게 대화할 수 있는 우리 나름의 신학을 만들어야 한다. 정치적 상황에 천착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보수 종단의 반감을 샀고, 오히려 보수 쪽을 도와주는 꼴이었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소중한 노력이지만, 이론적 기초가 없었다. 한국 신학의 과제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어떻게 한국에서 새로운 신학을 세우느냐 하는 것이다."

-후속 작업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강연이 끝나면 대형 교회를 돌아가며 방문해보고 싶다. 한국교회가 어느 수준인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

-다양한 층의 기독교인을 만나는 건 어떤가.
"좋다. 청년들과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불러 달라."

-교수님의 강의와 관련된 후속 논의가 진행되면 참여할 의사가 있는가.
"언제든지 좋다. 격조만 지켜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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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기독교 대안 언론 <뉴스앤조이>(www.newsnjoy.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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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숙 새 책 나오자마자 '십자포화'

 

 

 

조기숙 새 책 나오자마자 '십자포화'
<조선>-심재철 맹비난... 조 교수 "책이나 읽고 비난하라"
텍스트만보기   손병관(patrick21) 기자   
 
 
▲ 심재철 한나라당 홍보위원장은 2일 오전 당직자회의에서 최근 책을 출판한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에 대해 "여당이 싫다는 여론은 무시하는 게 최고라는데, 참으로 오만하기 그지없다. 이거야말로 건방죄를 물어야 한다"고 비난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참여정부의 청와대 홍보수석를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저서 <마법에 걸린 나라>(cafe.naver.com/chomagic)가 출간되자마자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의 공격을 받았다.

<조선>은 2일자 4면에 '여당 싫다는 여론은 무시하는 게 최고'라는 제목으로 조 교수의 책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보수성향의 인터넷신문 <데일리안>도 <조선> 기사와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책 내용을 보도했다.

한나라당 홍보기획위원장을 맡고있는 심재철 의원은 이날 오전 주요당직자 회의에서 이에 대해 "여당이 싫다는 여론은 무시하는 게 최고라는데, 참으로 오만하기 그지없다. 이거야말로 건방죄를 물어야 한다"고 비난했다.

또한 심 의원은 <조선> 보도를 근거로 이렇게 말했다.

"(조 교수의 책) 내용이 오늘 보도됐는데, 전형적인 노빠(노무현 대통령의 열성적인 지지자를 비하하는 말 - 기자 주) 류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노 대통령이 저지른 것이라고는 '국민정서법 위반죄'라고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국민정서 오판죄'다. 또 '노 대통령이 여론에 편승하지 않았다'며 이것을 '여론편승 거부죄'라고 한다. 이거야말로 민심순응 거부죄라고 얘기했다. '노빠' 류의 지독한 아집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심 의원은 "조 교수가 또 '학자가 정부에 협력하는 것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라며 희한한 어용론을 펼쳐서 어안이 벙벙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심 의원의 말이 끝나자 장윤석 인권위원장은 "법률가도 모르는 죄들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고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조선> 보도와 심 의원의 주장처럼 조 교수의 책은 '노빠'의 아집만을 보여준 것일까? 조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조선>을 필두로 한 수구언론과의 담론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진보진영이 민심을 얻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짚어냈다.

조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조선>의 왜곡된 기사와 곧바로 이어진 심 의원의 발언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조동문 프레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반론을 폈다.

실제로 <조선> 기사와 조 교수의 책을 대조해보면 어감에서 차이가 나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조선> 기사는 "그는 '열린우리당이 오만하고 편가르기를 해서 싫다는 여론조사는 무시하는 것이 최고'라며 더욱 오만해질 것을 주문했다"고 했고, 이는 "여당 싫다는 여론은 무시하는게 최고"라는 제목으로 채택됐다.

책의 원문은 이렇게 되어있다.

 
 
"한 언론사의 여론조사에서 열린우리당이 왜 싫냐고 했더니 오만하고 편가르기 하기 때문이란다. 이런 여론조사는 무시하는 것이 최고다. 리프만의 명언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가 사람들의 행동과 말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매일 이런 조사 결과를 진실처럼 읊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참 괴로운 일이다."

조 교수는 "특정 언론사 여론조사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인데, 의도성 있는 여론조사를 여론으로 비틀어 소개한 것은 심각한 왜곡"이라고 지적했다.

<조선>에 "학자가 정부에 협력하는 것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인용된 대목도 원문은 이렇게 되어있다.

"과거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학자들에게 어용의 낙인이 찍히듯, 앞으로는 수준 낮은 언론에 협력한 부끄러운 학자로 기록되는 것은 아닐까. 국민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정부에 협력하는 것은 오히려 국민에 대한 봉사이며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정책은 정권이 바뀌어도 다음 정권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정치언론을 위해 봉사하는 교수들은 특정 정파를 위해, 혹은 특정 자본가를 위해 일했다고 기록될 수도 있다."

국민들의 선택으로 집권한 정부에 학자들이 협력하는 것은 독재시대 어용 학자들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게 조 교수의 설명이다. 학자가 정부에 협력하는 것을 무조건 어용으로 몰아붙인다면 한나라당이 향후 집권을 하더라도 한나라당 정권에 참여하는 모든 학자들이 어용 시비에 휘말릴 것이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조 교수는 "대통령의 가장 큰 잘못은 헌법보다 무섭다는 국민정서법 위반죄, 여론편승거부에 따른 괘씸죄라고 할 수 있다"고 한 대목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국민들의 정서적인 부분을 무시하고 이성과 논리와 합리로만 정치를 한 것이 꼭 올바르지 않다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답했다.

조 교수는 "심재철 의원이야말로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조선> 기사만 보고 신문사의 지시대로 로봇처럼 움직인 것 아니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조 교수는 8일 영풍문고(저녁 7시)에서 '저자와의 대화' 시간을 갖는다. 조 교수는 "<조선> 기사만 읽고 책에 거부감을 느낀 분들과 이 자리에서 토론을 하고싶다. 책을 집필하는 데 도움을 주신 '개혁 네티즌들'에게는 책을 무료로 드리겠다"고 덧붙였다.
 
 
2007-02-02 11:4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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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사회주의자 25] '미래소년 코난'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문화] 닉슨과 FBI가 입국을 막은 '불온한 좌파' [새창] 장석원 객원기자 2006-12-09
·[국제] 선(禪)-맑스주의자를 꿈꾼 20세기의 아이콘 [새창] 윤재설 기자 2006-07-03

 | 세계의 사회주의자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애니메이터
[세계의 사회주의자 25] '미래소년 코난'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만화 영화는 재미로 본다. 이런 재미도 있고 저런 재미도 있지만, 미국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 주는 재미는 경쾌함과 발랄함, 그리고 무엇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누릴 수 있는 재미이다. 물론,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도 나름의 ‘교훈’이 있지만 미국의 상업 영화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속 보이는 감동’이기 쉽다.

디즈니의 만화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 본다면 놀랄 만한 애니메이션이 있다. 바로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다. 그 장르가 다양해서 재미도 여러 가지인데, 사회와 삶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면서도 극적 긴장감 또한 뒤지지 않는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여럿이다.

그 중에서도 기술 문명의 위태로움, 인간 사회의 갈등, 인간과 자연의 긴장을 역동적이고도 재미있게 연출하기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그 철학적 깊이에 놀랄 만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재미로만 볼 수는 없게 한다.

   
  ▲ 에니메이션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
 
SF와 마르크스 주의의 결합

미야자키는 1941년에 도쿄 부근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비행기 공장을 운영했다. 이 비행기 공장은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등장하는 날아다니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행은 미야자키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수직 상승과 하강이라는 미야자키만의 역동적 애니메이션은 기계와 등장인물의 비행으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그 비행기 공장에서 산업 사회의 계급적 차별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작품에 고도로 산업화된 문명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미야자키는 어린 시절 만화가가 되길 원했다. 그래도 그림을 배우기 위해 미대에 진학하지는 않고 정치경제학부에서 일본산업론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에 일본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사전(白蛇傳)(1958)>에 감동을 받고 애니메이터가 되고자 했다. 대학 시절 아동문학 연구회라는 서클에서 활동하면서 동서양의 많은 문학을 접한 것이 이후의 작품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과정이 없었음에도 미야자키는 ‘그림을 그리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었다. 스스로는 그림에 재능이 없다고 했지만 작화, 원화를 그릴 뿐 아니라 때로는 동화도 직접 수정한다. 애니메이터로 시작했으나 다양한 인문적 지식과 철학적 성찰이 연출 능력을 키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청년 시절 사회주의에 큰 관심을 가졌던 미야자키는 대학에 다닐 무렵 일본공산당의 기관지인 '아카하타(赤旗)'의 청소년판인 <소년소녀신문>에 <사막의 백성>이란 제목의 만화를 연재했는데, 그가 밝혔듯이 이 작품은 SF와 마르크시즘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노동조합의 의뢰를 받아 만들어진 이 만화는 ‘단결하면 큰 힘이 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중앙아시아를 배경으로 잔인한 강대국에 맞서는 소수민족의 항쟁을 그리고 있다. 그 그림을 변형해 만들어낸 것이〈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라고 한다. 무엇보다 ‘힘을 합친다’는 연대의식은 많은 작품에서 공동체 사회(마을)로 등장한다.

학교 졸업 후 한때 노동조합 서기로 지내기도

미야자키는 대학 졸업 후 애니메이터로 일하게 된 도에이동화의 노동조합 서기로도 활동하였다. 노조활동은 그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은데 이는 작업 공간에 대한 태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미야자키는 도에이동화에서 만난 다카하타 이사오와 사상적 교감을 나누며 노동조합 활동도 함께했다. 1985년 그들은 스튜디오 지브리를 만들었고, 1990년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과는 달리 스태프를 월급제로 고용하였다.

스태프를 작품마다 계약하는 방식이 아닌, 상시적으로 고용하여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고용을 안정시킴으로써 작품의 질을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이는 스태프들을 한 자리에서 일하게 하여 관리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또한 이는 적지 않은 스태프들을 월급제로 고용할 자금을 투자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브랜드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었다.

이런 ‘파격적’ 고용 방식을 두고 <공각기동대(1995)>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는 지브리를 소비에트의 크렘린에 비유했다. 그는 지브리의 조직화된 구조가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한 양질의 작품을 만들어 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창조성을 저해한다며, “그들이 영화를 만드는 것을 아직도 노조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고 했다.

오시이의 발언은, 지브리의 고용 방식이 작업 효율보다는 그 설립자들의 활동 궤적에 기인한다고 여기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시선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지브리라는 제작사를 통해 미야자키는 다카하타 이사오와 하나로 이해되기도 한다. 도에이동화에서 만난 다카하타는 사회주의 사상에 밝았는데 미야자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작품 성격은 다르다.

다카하타는 <반딧불의 무덤(1988)>, <추억은 방울방울(1991)> 등 상당히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다. 미야자키가 기획한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은 우화적이기 하지만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강해서 다카하타다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다카하타의 작품이 미야자키의 작품보다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평가도 있다.

다카하다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1974)>, <엄마 찾아 삼만리(1976)>, <빨강머리 앤(1979)> 등 TV애니메이션들도 연출했다.

맹목적인 기술 추종의 위험성

   
  ▲ <미래소년 코난>
 
미야자키는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미래소년 코난(1978)>,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이웃집 토토로(1988)>, <붉은 돼지(1992)>, <모노노케 히메(1997)> 등을 연출했다. 이 작품들은 고도로 산업화된 문명의 위협과 어리석음, 파괴적인 전쟁과 독재 권력,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 인간과 자연의 갈등과 공존을,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경쾌하게 그리고 있다.

이와 달리 최고 정점에 오른 작품성을 보여주면서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0)>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은, 한편으로는 미야자키의 면모를 이어가고 있지만, 사회, 정치적 문제 등과 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에서는 벗어났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미래소년 코난>은 초강력 전자력 병기가 세계의 절반을 일순간에 소멸시킨 200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만든 ‘거신병’이라는 무기로 세계가 불타버린 먼 미래가 배경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로 이어진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도 기술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때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전쟁과 파괴 기술 때문에 인간 사회가 위기에 처했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그 파괴 기술을 독점하여 남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이들 작품들은 인간적 가치가 발전할 수 있도록 기술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착취 사회와 공동체 사회의 대비

미야자키의 작품은 억압과 착취의 사회와 조화로운 공동체 사회를 대조하기도 한다. <미래소년의 코난>의 인더스트리아와 하이하바,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원작인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도르메키아, 도르크와 바람계곡이 그러하다.

인더스트리아, 도르메티아, 도르크와 같은 도시와 국가는 <붉은 돼지>의 주인공이 스스로 사람이길 포기하고 차라리 돼지가 되어버린 이유를 제공한 전쟁과 파시즘 국가와 관련이 있다. 그것들은 악독한 계급 사회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나 국가를 폭력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이기도 하다.

이런 대군사 제국에 저항하는 사회는 다분히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하이하바와 바람계곡과 같이, 개인이 상품가치를 지니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그리고 있다. 미야자키는 “일정한 공동체 속에서 일정한 일을 하고 있으면 능력차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회가 된다. 어지간한 게으름뱅이가 아닌 한에는, 마을이 굶주릴 때에는 함께 굶주리고 마을이 풍요로울 때에는 자신도 풍요로워지는” 사회상을 그리고자 했다.

미야자키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또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마스크를 뒤집어쓴 채 곰팡이로 뒤덮인 음침한 폐허를 지나는 한 여행자의 독백, “마을이 또 하나 죽었군.” 이 대사로 시작하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1950년대 발생한 미나마타병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미야자키는, 대표적인 ‘공해병’을 낳은 이 사건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오염 물질의 끔찍함을 목격함과 동시에, 강력한 복원력으로 그 오염 물질을 빨아들여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자연을 보았다.

미야자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개봉 10주년 기념으로 하게 된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당대를 반영하지 않은 예술작품이란 없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70년대에 등장한 환경론적 세계관이 반영된 작품이다”라고 했다.

당대를 반영하지 않은 예술작품은 없다

이처럼 미야자키는 인간과 자연의 긴장감을 많이 다루었다. 그렇다고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평면적으로 그리지는 않았다. <모노노케 히메>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걸 뚜렷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숲을 파괴하고 무기를 만들지만 그것도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그러한 행위에 저항한다. 인간이 자원을 이용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산업 기술 문명을 이룩했다는 것 자체가 자연과의 대립을 영원히 피할 수 없게 한다. 대립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웃집 토토로>는 전후에 사라져가는 일본의 숲을 소재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방식을 동화적이고도 신비롭게 그리고 있다.

   
  ▲ <이웃집 토토로>
 
미야자키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의 국경 분쟁은 과연 그 국가들의 사회주의가 진실한가를 의심하게 했다. 그래도 그는 1990년대 이전까지는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결국 동구권의 몰락은 그에게도 고통이었다.

왜냐하면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붉은 돼지>를 제작한 후에는 “정치를 좌우로 가르지 않는다. 다만 물질문명에 비판적이라는 진보적 경향은 남아 있다”고 했다.

미야자키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자연을 착취하지 않는 인간 사회의 이상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작품을 통해 이상주의적인 사회주의를 그렸을 뿐 그다지 실천적 활동을 보여 준 사회주의자는 아닐 지도 모른다.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게다가 그의 어느 작품에서도 ‘흑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인종주의’의 혐의를 받고 있다. 미야자키는 단지 ‘색감의 문제’라고 하지만 오히려 이 말이 ‘검은 피부색’은 아름답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그와 교감으로 평생 동료로 지내고 있는 다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의 무덤>이 전쟁의 가해자인 일본을 마치 피해자인 양 그렸다며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배급을 위해 미국의 거대 미디어 재벌 디즈니사와 제휴를 맺은 점, 무엇보다 지브리의 설립자들은 상업적 성공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 이 때문에 그들의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의식과는 별개로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는 이들인가 의심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에는 이러한 주제의식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고 평가 받기는 하지만- 미야자키의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의식, 이상적 사회상이나 인간관계는 사회주의 철학에 가깝다.

미야자키는 자신이 꿈꾸고 있는 바를 작품에 담았다. 오히려 미야자키는 현실 사회주의나 사회주의 정당과의 관계를 중시하지 않아 자신의 꿈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지라도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미야자키에게 배워야 할 덕목은 그의 작품 속 주제의식보다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일지 모른다.

 
2007년 02월 01일 (목) 14:55:27 문성준 / 객원기자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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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조동문 프레임' 깨지 못해 지지율 낮아&quot;

 

 

 

참여정부, '조동문 프레임' 깨지 못해 지지율 낮아"
'한국판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펴낸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
텍스트만보기   손병관(patrick21) 기자   
 
 
 
ⓒ 지식공작소
"열린우리당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선거마다 패배를 거듭하는가? 별로 잘한 것같지 않은 한나라당은 왜 그리 선전하는가? 참여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왜 일관성 없이 널뛰기를 하더니 바닥으로 주저앉아 움직일 줄을 모르는가?"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신간 <마법에 걸린 나라>(지식공작소, 사진)를 펴냈다. 그의 책은 독자들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조 교수가 올해 12월 대선에서 진보진영의 대응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의 원제는 <진보는 죽었다>였다. 그의 시각에서 참여정부가 출범한 뒤 '나 몰라라' 뒷짐을 진 진보진영을 질타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데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그러나 책은 출간을 앞두고 보다 상징적인 제목(<마법에 걸린 나라>)으로 바뀌게 됐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성추행 사건을 일으켜도, 공천헌금 비리가 발각되어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마술에 걸린 것 같다"고 푸념한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말에서 영감을 얻은 제목이다.

조 교수는 이 책에서 참여정부가 보수진영과의 담론 경쟁에서 패배한 과정을 상술했다. 지난해 정가에 화제를 모은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를 쓴 조지 레이코프 교수의 '프레임 이론'을 한국의 현실에 대입한 것이다.

그는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수구성향의 조간신문에서 만들어낸 프레임을 석간신문 <문화일보>가 확대재생산하는 이른바 '조동문 프레임'을 깨지 못한 것을 참여정부의 가장 큰 실패 원인으로 꼽았다.

조 교수는 이러한 보수언론에 맞서 대항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한 진보언론과 시민단체에도 책임을 물었다. "노 대통령은 여론을 거역했으므로 선거에 의해 뽑힌 독재"라고 비판한 최장집 교수도, "참여정부와 언론의 싸움은 어른과 애의 싸움"이라고 주장한 강준만 교수도 그의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진보언론과 시민단체가 어용시비를 피하기 위해 보수언론보다 더 가혹하게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고, 열린우리당도 여기에 가세하는 등 결과적으로 진보진영의 분열이 참여정부의 위기를 자초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주고, 탄핵으로부터 구해주고, 열린우리당에 국회 과반수 의석을 몰아준 국민들이 참여정부를 질책하며 등을 돌리는 것에도 그는 "당신은 대통령만 달랑 뽑아놓고 뭘 했냐?"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다. 참여정부가 탄생한 것은 국민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인정한 것이지, 새로운 패러다임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는 항변이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노 대통령을 비교하며 두 사람의 성패가 엇갈리는 환경을 비교한 대목도 흥미를 끈다. 두 사람 모두 ▲언론과의 불편한 관계 ▲기득권 세력과의 대립 ▲여소야대 국회라는 악재를 안고 출발했지만, 클린턴의 경우 노 대통령만큼 언론환경이 불리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조기숙 교수가 지적한 노 대통령의 3가지 잘못

그렇다고 해서 조 교수가 노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참여정부가 낮은 평가를 받는 데 노 대통령이 가장 큰 책임이 있다"며 대통령의 세 가지 잘못을 꼽았다.

"첫째는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의 성공신화에 매몰된 것이 대통령으로서 성공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지역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필생의 신념이 오히려 지역주의를 한국정치의 상수가 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셋째는 초유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적 당청관계에 있어서 한국적 정서를 무시함으로써 바람직한 관계설정에 실패한 것이다."

대통령이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상'을 거부하고 '노무현스러운' 대통령이 되길 원했기 때문에 참여정부의 청와대에서 참모들이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이나 바람직한 대통령상에 대해 조언하는 것을 꺼렸다는 뒷얘기도 소개했다.

그의 여당에 대한 평가는 한층 혹독하다. 대통령의 문제가 스타일에 있다면 여당의 가장 큰 문제는 '콘텐츠의 부재'에 있다는 점에서 열린우리당의 죄질이 더 나쁘다는 지적이다.

그는 "여당은 5·31 지방선거에서도 핵심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복지 정책이 존재하지 않았고 '부패는 용서해도 무능은 용서할 수 없다'는 보수언론의 프레임을 스스로 받아들여 '오만과 독선을 반성하니 싹쓸이만 막아 달라'고 읍소하는 등 제 발등을 찍는 선거운동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했다.

"열린우리당의 현재 위기는 탄핵 여파로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잡탕정당의 문제라고나 할까. 탈지역정당의 한계라고나 할까. 당내 성공적인 의사소통이 없는 것도 문제다. 초선의원이 108명이나 되니 위계질서가 없고 팝콘처럼 튀어서 의견조율이 여간 어렵지 않다. 한 발씩 양보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오기와 감정싸움으로 끌고 오다보니 결국엔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당내 지역갈등까지 겹쳐서 열린우리당의 문제는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정당의 이념적 정체성이 불명확하다는 데에 있다. 개념 없는 정당에게 누가 표를 주겠는가."

최근의 통합신당 논의에 대해서도 그는 "콘텐츠에는 큰 관심이 없고 스타일만 바꿔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했다.

조 교수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앞서가는 가장 큰 이유는 여권이 우왕좌왕하기 때문"이라며 "2002 대선이 무너뜨리는 선거였다면 2007 대선은 쌓아 올리는 선거가 될 것이다. 혼란과 갈등에 종지부를 찍고 업적의 축적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는 쪽이 이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2007-02-01 09:2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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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의 '백지광고 사태' 호도 파렴치하다

 

 

 

동아>의 '백지광고 사태' 호도 파렴치하다
[민언련 논평]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관련 <동아> 사설에 대해
텍스트만보기   민주언론시민연합(ccdm1984)   
 
<동아일보>가 언론민주화의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진실화해위원회 흔들기'에 나섰다.

31일 <동아일보>는 사설 '반(反)화해 과거사위 본색 드러내기'를 싣고 과거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 대한 판결문 분석 보고서'를 공개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본보는 유신정권에 저항하다 언론사에 유례가 없는 백지광고 사태를 겪었다. 그럼에도 이번 판사 명단 공개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은 진정한 화해에 역행한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파렴치한 주장을 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 대해 '재판관 실명 공개'만 의제로 삼아 반(反)화해, 정략적 의도, 편가르기 등 억지 주장을 편 것도 문제지만,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백지광고 사태의 진실'까지 멋대로 끌어다 붙이는 행태는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오늘의 브리핑
 
"보수언론은 왜
사법부 반성 가로막나"
[판사 실명 공개]
 
 
참여정부, '조동문 프레임' 못깨 실패
'IMF 괴물', 자살 3번 결심케한 요물
중국의 모든 길은 올림픽으로 통한다
"핀란드 들어오려면 한국어시험 봐라"
"한국 드라마 모르면 북한서 '왕따'"
박태환 선수 훈련파트너 소개합니다
인기검색어 전파 속도 빛보다 빠르다?
"석궁 습격은 판·검사 오만의 반증"
 
<동아일보>가 "유신정권에 저항"하다 겪었다는 이른바 '백지광고 사태'는 <동아일보>가 쫓아낸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 운동에서 비롯된 것임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중앙정보부 요원의 언론사 상주와 편집권 간섭 등을 거부하는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나섰다. 그러자 정권은 광고주들에게 동아일보사에 광고를 주지 못하게 했고 이 때문에 '백지광고 사태'가 벌어졌다.

시민들은 지지 광고를 통해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 투쟁을 성원했지만 동아일보사는 유신정권과 한 편이 되어 75년 3월 17일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나선 113명의 언론인을 쫓아냈다.

어디 그 뿐인가? 당시 <동아일보>는 지면을 통해 자유언론 수호투쟁에 나선 언론인들에 대해 "일부 과격한 사원들의 제작 방해" 운운하며 사태의 진상을 호도하려 들었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 자신들이 쫓아낸 언론인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도대체 누가 유신정권에 저항했고, 누가 탄압을 받은 것인가?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는 언론인들을 쫓아냈던 <동아일보>가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백지광고 사태'를 자신들의 '민주화운동 전과'로 내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과거청산 작업을 공격하는 데 악용한단 말인가?

당시 <동아일보>가 쫓아낸 언론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가 바로 민언련의 전신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이다. 우리는 백지광고 사태의 진실을 왜곡하는 <동아일보>의 행태를 접하며 우리의 낯이 뜨거워질 정도의 모욕감을 느낀다. 아울러 철저한 과거청산이 왜 필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동아일보>의 오늘 사설은 사과해야 할 사람들이 '피해자'인 양 나서는 적반하장과 역사 왜곡을 더 이상 방관해서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현재 진실화해위원회는 박정희 정권시절 <동아일보> 광고탄압과 대량 기자해직 사태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우리는 진실화해위원회가 '동아일보의 진실'을 낱낱이 밝혀 국민 앞에 투명하게 공개해주기를 당부한다.

덧붙여 재판관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조차 "반(反)화해"라며 과거청산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동아일보>에게 거듭 촉구한다.

잘못된 판결을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면 국민들은 누구와 '화해'를 해야 한단 말인가? 또 반성할 사람들이 최소한의 반성을 하지 않는데 국민들은 무조건 '용서'부터 해야 하는가?

국민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공개하는 것을 두고 '반(反)화해', '정략적 의도' 운운하며 과거청산 작업을 흔드는 일을 즉각 멈추기 바란다. 지금 <동아일보>가 벌이고 있는 '언론민주화의 역사 왜곡', '진실화해위원회 흔들기'가 모두 후대에 청산해야 할 과거로 남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2007-01-31 21:1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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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정부 성장·소비·투자 모두 ‘꼴찌’

 

 

 

盧정부 성장·소비·투자 모두 ‘꼴찌’
 
[문화일보 2007-01-2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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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共이후 5개정부 ‘경제성적표’ 비교::) 유신정권 이후 5개 정부의 ‘경제성적표’를 분석한 결과 경제성 장률과 민간소비증가율, 설비투자증가율 모두 노무현정부 실적이 가장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출은 역대 2위의 증가율로 비교적 호조세를 보였지만 건설투자 와 일자리 창출에서도 노무현정부는 5개 정부중 4위에 그친 것으 로 분석됐다.

이처럼 노무현정부 기간중 실물경제지표가 악화된 것은 외환위기 와 카드사태 등 전임정권에서 비롯된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현 정부 들어 규제가 지속되는 가운데 상호충돌하거나 미숙한 경제 정책이 쏟아지면서 경제심리를 크게 위축시켰기 때문으로 전문가 들은 분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경제의 저성장세가 굳어지고 성장잠재력은 추세적 으로 약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9일 한국은행의 ‘연간 실질 국내총생산(GDP)’ 시계열 통계와 통계청 자료를 문화일보가 자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실 질 GDP성장률이 5.0%를 기록함에 따라 노무현정부 4년(2003~2006 년)간 평균 경제성장률은 4.2%였다. 한은이 올해 성장률 전망치 를 4.4%로 제시한 것을 감안하면 노무현정부 5년(2003~2007년)동 안 평균 경제성장률은 4.24% 안팎으로 예상된다.

이는 외환위기 직후의 김대중정부 평균 경제성장률(4.4%)에도 미 치지 못하는 것이며, 연평균 성장률이 가장 높았던 전두환정부(8 .7%)때와 비교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노무현정부 집권4년 기간에 민간소비증가율과 설비투자증가율은 각각 1.5%, 3.8%에 머물러 유신정권 이후 5개 정부중 최저치를 기록했다.

한은이 지난해 12월 제시한 올해 경제성장 전망치를 적용해 ‘집 권5년 성적’을 낼 경우 각각 2.0%, 4.2%로 소폭 개선되지만 여 전히 ‘꼴찌’에선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됐다.

노무현정부 4년간 연평균 신규 일자리 창출은 24만6000개에 불과 했으며 2007년 한은 전망치(28만개)를 적용하더라도 25만2000개 에 그쳤다. 건설투자증가율 역시 집권4년 평균 2.3%(집권5년 2.2 %)에 머무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외환위기 이후 경제전반에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친 김대중정부 실적(19만1000개, -1.1%)에 만 다소 앞설 뿐 다른 정부 성적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노무현정부는 다만 수출에서는 4년간 연평균 15.5%의 증가율을 기록해 김영삼정부(평균 16.3%)에 이어 2위로 평가됐다.

김병직기자 bjkim@munhwa.com



문화일보 기사목록 | 기사제공 :
[문화일보] 노무현 정부 '경제성적표'
 
소비증가율 DJ때의 반토막… 수출로 버텨 “盧정부 포퓰리즘 의존 심해”
 
盧정부 성장·소비·투자 모두 ‘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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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밑에 달린 nicejisung님의 예술적 댓글 기사입니다.

한나라당 정권이면 이 기사는 이렇게 바뀐다[229]

nicejisung다른글 보기 IP 59.6.xxx.130신고

盧정부 주가, 무역수지, 물가 모두 1등

(::5共이후 5개정부 경제성적표 비교::) 유신정권 이후 5개 정부의 경제성적표를 분석한 결과 주가와 무역수지, 물가 상승률 모두 노무현정부의 성적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성장률 역시 지난 4년간 GDP성장률 4.2%를 기록해 OECD 국가 중 5위권을 기록했다. 특히 2006년의 성장률 5%는 OECD 30개국 중 3위에 해당하는 높은 성적으로, 한국과 비슷한 경제규모(GDP규모, 인구수, 1인당 국민소득)를 가진 국가와 비교했을 때는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흔히 경제의 선행지표라고 말하는 주가지수의 경우 노대통령 취임 첫해 600포인트에서 출발했으나 현재 1400선을 오르내리며 올 연말까진 1600선 돌파도 가능하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잇따르고 있다.

수출의 경우 2004년 2천억 달러를 돌파한지 불과 2년만에 3천억 달러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2천억 달러를 달성한후 미국이 8년, 일본이 5년만에 달성한 것과 비교해 볼때 놀라운 실적이다.

4년내내 막대한 무역수지를 기록하며 외환보유고가 2천3백억 달러를 넘어서는 바람에 이젠 오히려 많은 외환보유고가 환율하락의 한 요인으로 작용할 정도이다.

작년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기자간담회에서 외환보유고의 다각화를 시사하는 발언을 했을때, 즉시 전 세계 외환시장이 요동친 사건(?)은 역설적으로 한국경제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전체 교역량 역시 빠른 속도로 증가해 2006년엔 전 세계 국가들 중 교역규모가 11위를 차지했는데, 중개무역 중심인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론 세계 9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실적과 아울러 2005년도엔 WEF, 즉 세계경제포럼이 매년 발표하는 국가경쟁력순위에서 그 전해보다 무려 12계단 수직상승하며 17위를 기록해 역대 정부사상 최고 순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참여정부가 정경유착의 오랜 관행을 끊고 우리 기업들의 투명성과 경쟁력을 높인 결과라는 지적이다.

비록 부동산 급등과 외환위기, 신용카드 대란의 후유증으로 여전히 내수가 부진하지만, 한국경제의 펀더멘틀이 튼튼하고 여러 거시경제지표의 호조로 인해 향후 한국경제 전망은 매우 밝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정책으로 인해 집값 역시 잡힐 기미가 보이면서, 양극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서민경제도 차츰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양극화 해소를 위해 내놓은 2030비전은 예산이 제대로 뒷받침만 된다면, 대기업들만 혜택을 보던 일방적인 성장기조 경제정책의 사각지대였던 서민들과 저소득층에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년간 평균 2%대의 안정적인 상승률을 기록한 물가 역시 서민들의 생활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참여정부 내내 일관되게 추진한 정경유착 근절, 기업의 투명성과 경쟁력 제고, 공정한 시장질서의 확립 등을 통해 노무현 정부 5년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틀을 확고하게 자리잡게 만든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는게 경제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3) 흰구름님이 퍼온 friend73님의 댓글과 그 아래 달린 쪽글 및 서프 댓글들..

friend73다른글 보기 IP 58.227.xxx.2신고
성장률은 선직국일수록 당연히 낮다.이미 성장해서 더이상 성장할께 없거든..어떻게 전두환시대와 성장률을 비교하나..ㅉㅉ. 조중동별책부록 문화일보.....참고로 우리나라 10대 경제대국이다.

경제가 안좋다는데 가구당 자동차보유대수가 90%가 넘었고,개인당 핸드폰보유도 90%가 넘었다.컴퓨터는 말할것도없이,초고속인터넷..해외여행객은 발디들틈이 없이 많아지고,..모두들비싼 아파트에만 살려고한다.애들학원은 두군에 이상보낸다.젊은사람들은 개나소나 비싼등록금주고 이름없는 대학으로..딴에 대학나왔다고 보수좀낮은직장은 들어갈생각도없으면서 실업율이
낮다고 하는꼴들이며...

국민들이 경기가 안좋다는건 다들 눈높이가 엄청높아져서 이다. 
눈높이를 낮추면 배고푸지않고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수있다.그러면
우리나라도 잘살고있는것처럼 느껴진다. 
하루3끼만 먹여주던 박정희,전두환,노태우시대 그때는 독재자체가 기득권이였기 때문에 잘사는것처럼 국민들이 세뇌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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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의견 18개
 
 
friend73 경제도 안좋은데 3억짜리 아파트나 사야겠다.
01/29 17:38:55(58.227.xxx.2) 신고
 
ibc1107 ㅎㅎㅎㅎㅎ 씨이~~ 또 10자 적으란다...
01/29 17:39:28(59.5.xxx.114) 신고
 
friend73 경제도 안좋은데 애들과외는 3군데만 시켜야겠다.
01/29 17:39:32(58.227.xxx.2) 신고
 
seraqwe 옳소 기자 뭘좀 알고 노무현정부 씹어라
01/29 17:39:36(58.234.xxx.58) 신고
 
dayhat 경제도 안좋은데 새차와 새핸드폰,새PC로 교체해야 겠습니다.
01/29 17:40:25(122.128.xxx.18) 신고
 
friend73 경제도 안좋은데 신혼여행은 태국이나 가야겠다.
01/29 17:40:42(58.227.xxx.2) 신고
 
friend73 경제도 안좋은데 중형차는 말고 소나타급으로 하나 사야겠다.
01/29 17:41:33(58.227.xxx.2) 신고
 
dayhat 경제도 안좋은데 주말에 스키장 놀러갔다왔습니다.
01/29 17:42:12(122.128.xxx.18) 신고
 
ibc1107 경제가 안좋은데 오늘 나이트나 가야 겠습니다 ^^
01/29 17:44:46(59.5.xxx.114) 신고
 
asj1012 경제도 안좋은데 스테이크말고 딴거 먹어야겠다..스테이크 지겹다..특히 소고기!!
01/29 17:44:47(210.94.xxx.89) 신고
 
friend73 경제도 안좋은데 하루3끼 외에 치킨이나 먹어야겠다.
01/29 17:44:48(58.227.xxx.2) 신고
 
ilksw 경제도 안좋은데 애들 유학이나 보내야겠다
01/29 17:45:52(58.143.xxx.92) 신고
 
friend73 경제도 안좋은데 성형수술이나 해야겠다.
01/29 17:47:44(58.227.xxx.2) 신고
 
ilksw 경제도 안좋은데 마트에 왜이리사람이 많은겨~ 에이 백화점이나 가야겠다
01/29 17:48:10(58.143.xxx.92) 신고
 
friend73 경제도 안좋은데 가급적 일주일에 극장은 한번만 가자.
01/29 17:48:39(58.227.xxx.2) 신고
 
friend73 경제도 안좋은데 코는 30만원짜리 병원에서 세우고 쌍거플수술은 15만원짜리 병원에서..
01/29 17:49:57(58.227.xxx.2) 신고
 
ilksw 경제도 안좋은데 주식이 왜이리 오른기여~ 해외펀드에 가입해야겠다
01/29 17:50:33(58.143.xxx.92) 신고
 
noboblige 경제도 안좋은데 해외에 골프나 치러 가야겠다...아니다 국내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제주도로 가야겠다!
01/29 17:58:15(211.238.xxx.18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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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으로 부활한 일본 원작 드라마 <하얀거탑>에 관한 모든 것

대한의사회...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최강의 권력집단 중 하나라고 믿는다...(의약분업 때 몇을 죽였는지...)

요번 대선 때 잘 보겠다.

 

 

한국판으로 부활한 일본 원작 드라마 <하얀거탑>에 관한 모든 것
2007.01.26
 

하얀 맨들의 정치 이야기, 드라마 <하얀거탑>이 지난 1월6일 MBC에서 첫 방송됐다. 일본 소설가 야마자키 도요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영화 <국경의 남쪽>으로 스크린 신고식을 치른 안판석 감독(<장미와 콩나물> <아줌마>)의 브라운관 복귀작이다. 4화까지 방영된 15일 현재 평균 시청률은 10% 초반을 맴돌고 있지만, 드라마 홈페이지를 비롯한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는 ‘이야기에 긴장감이 넘친다’, ‘인물들의 갈등관계가 생동감있게 그려진다’며 좋은 반응들이 올라오고 있다. 특히 네티즌 사이에서는 2003년 ‘후지테레비 개국 45주년 기념’으로 제작돼 방송됐던 <후지TV>의 <하얀거탑>과 비교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동명 소설 원작, 일본에서 영화와 네 차례 드라마로 제작

권력과 명예를 향한 인간의 욕망, 의료계를 둘러싼 야욕의 전쟁터. 취재를 바탕으로 쓰여진 야마자키 도요코의 소설 <하얀거탑>은 병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의사들의 정치 이야기다. <마이니치신문> 기자 출신인 야마자키는 오사카대학 의학부를 모델로 의료 실수, 의료계의 봉건적인 시스템, 의사들의 권력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그려간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이젠 고로(한국판 장준혁 역)와 모든 일에는 정도가 있다고 굳게 믿는 사토미 슈지(한국판 최도영 역)를 중심으로 병원 내에서의 자리싸움이 극적으로 전개된다. 특히 소설 후반부에는 자이젠의 의료 실수로 인한 법정 싸움까지 등장한다. <하얀거탑>은 주인공들을 끊임없는 선택의 갈림길로 몰아세우고,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한다. 주인공들은 그 선택의 골에서 갈등과 마주하지만 주저하지 않는다. 권력과 명예를 택하는 자의 목소리는 가치와 소신을 지키는 이의 주장과 동일하게 울린다. 그래서 이야기는 결코 풀리지 않는 실의 매듭처럼 병원의 복도를 맴돈다. 의료계를 둘러싼 권력싸움에서 선과 악은 서로에 대한 메아리일 뿐이다. 병원은 하얀 의복을 입은 위엄의 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두운 이면을 감춘 음산한 구덩이다.

갈등과 대립, 계속되는 긴장 국면. 소설 <하얀거탑>의 드라마틱한 이야기 전개는 사실 영화 혹은 방송 드라마가 가장 탐내는 요소 중 하나다. 1969년 총 2권의 단행본으로 발행된 이 소설은 아직 연재 중이던 시기인 1966년 영화화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4차례 TV드라마(<아사히TV> 2회(1967년, 1990년), <후지TV> 2회(1978년, 2003년))와 1차례 라디오 드라마(일본 <문화방송>, 1965년)로 제작됐다. 특히 2003년에 제작된 <후지TV>의 <하얀거탑>은 보통 10회로 제작되는 일본 드라마와 달리 두 시즌에 걸쳐 22화로 완성됐다. 평균 시청률 25%를 기록했으며, 드라마의 무대가 된 관동지방에서는 45%에 가까운 시청률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에는 2004년 대만을 시작으로, 2006년 중국과 한국(케이블채널 스토리온)에서 방영됐으며, 1월21부터는 국내 케이블방송 에서 다시 한번 방송된다. 대학병원이란 프레임으로 포착된 ‘인간의 양상’이 시대와 장소를 바꿔가며 현실을 풍자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여섯 번째가 한국의 2007년이다.

메디컬드라마가 아니다, 인간들의 이야기다

1978년 <후지TV>에서 제작한 <하얀거탑>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만들어진 <하얀거탑>의 영상물들은 모두 원작을 토대로 세부적인 상황들을 각 시대와 장소에 맞게 변형했다. 특히 급격하게 변화해온 의료기술 부분은 사실성 측면에서 각색이 불가피한 부분. 그래서 2003년 버전의 <하얀거탑>은 주인공 자이젠 고로(가라사와 도시아키)의 타이틀을 ‘복부외과의’에서 ‘식도외과의’로 바꾸었으며, 2007년의 <하얀거탑>은 이를 다시 ‘간이식수술의’로 변경한다. 즉 1969년엔 불치병에 가까웠던 위암이 2003년엔 식도암에 그 자리를 내주었고, 2007년 한국에선 간이식수술로 치환되는 셈이다. 더불어 한국의 <하얀거탑>은 주인공들의 직함도 한국 의료계 상황에 맞게 각색했다. 외과교수는 외과과장으로, 조교수는 교수로 호칭을 갈아입는다. 일본에선 한과가 한명의 교수와 여러 명의 조교수, 전임강사 등으로 이뤄지지만, 한국에선 한명의 과장과 여러 명의 교수, 조교수 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수가 되려고 야욕을 불태우는 자이젠 부교수는 한국에서 외과과장이 되려고 애쓰는 장준혁 교수(김명민)로 변한다. 이 밖에도 안판석 감독은 인물의 등장 시기와 에피소드 순서, 이야기의 흐름을 20회 미니시리즈에 맞게 재구성한다. 다소 천천히 전개되는 소설의 도입부는 장준혁의 세 차례 수술 에피소드로 빠르게 제시되며, 교수회에서 심문을 받을 위기에 처한 자이젠의 에피소드는 브랜치병원으로 내려갈 위기에 처한 장준혁의 일화로 대체된다.

김종학 프로덕션이 제작하고 안판석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 <하얀거탑>은 엄격한 의미에서 메디컬드라마가 아니다. <하얀거탑>은 대학병원을 무대로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야기의 초점을 인간에 맞춘다. 안판석 감독도 기자회견 및 인터뷰를 통해 몇번이고 이 드라마를 “메디컬드라마가 아닌 병원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이야기”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이는 곧 소설의 방향이기도 하다. 외과과장이 되려는 장준혁과 이를 저지하려는 이주환 과장(이정길), 이주환 과장이 자신의 후임으로 점찍어둔 노민국(차인표)과 원장이 되기 위해 장준혁의 뒤를 봐주는 우용길 부원장(김창완), 또 이들과는 별개로 병원 내의 모든 일은 원칙과 정도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 장준혁의 동기 내과 의사 최도영(이선균)과 기초과학과장 오경환 교수(변희봉). 드라마는 병원 내의 인물들을 크게 두개의 축으로 늘어놓고 그 사이 사이를 복잡다단한 관계선으로 이어나간다. 그리고 이는 원작에 충실했던 이전의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레이 아나토미> 등 의학을 소재로 한 외화 시리즈들이 의료 사건을 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과 달리 <하얀거탑>은 의학 사건을 매개로 인물들의 관계를 조망한다. 수술과 환자들의 이야기는 병원 내의 갈등구조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병원이란 공간과 시스템은 인간들의 권력 싸움을 위한 장으로 철저하게 소비된다.

<후지TV>의 2003년판 vs 한국판

특히 수술장면은 병원 내의 갈등관계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표본이다. <하얀거탑>의 수술실에는 2층에 참관실이 있다. 이는 국내 드라마에선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공간이다. 실제로 한국의 수술실에는 참관실이 없다. 하지만 안판석 감독은 참관실이 붙어 있는 수술실을 재현했다. <하얀거탑>에서 참관실은 이야기를 진행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실제로 원작 소설은 물론 이전에 제작됐던 모든 영상물에는 참관실이 등장한다). 그래서 <하얀거탑>의 모든 수술장면은 세트에서 촬영됐다. 이천에 지어진 1200평 규모의 세트장이 그곳. 참관실을 갖춘 수술실, 의사들의 연구실과 집무실, 중환자실과 린넨실 등을 섬세하게 구현해낸 세트장은 드라마 <궁>에서 황실을 만들었던 비주얼스토리공장 솜씨다. 더불어 <하얀거탑>의 수술실 세트는 비주얼적인 과시 이상의 역할을 한다. 수술실의 내부와 외부를 이어주는 참관실은 수술에 얽힌 여러 인물들의 이해득실을 긴장감있게 엮어내고, 참관실에 있는 인물들은 유리 너머의 수술실 상황을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독해한다.

<후지TV>의 2003년 <하얀거탑>과 안판석 감독의 <하얀거탑>. 인터넷 게시판에 비교 대상으로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 두 작품의 수술장면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원작에 충실하다. 수술장면을 통해 인간관계의 조형도를 그려내는 점은 동일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선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우선 <후지TV>의 2003년 작품. 여기서 카메라는 좀처럼 환자의 환부를 담지 않는다. 갈라진 배를 비추지 않고 배를 가르는 메스를 주시한다. 혹은 메스를 움직이는 집도의의 손을, 집도의를 도와주는 어시스턴트의 떨리는 팔목을 잡는다. 수술은 곧 집도의와 어시스턴트의 관계선을 대신한다. 그래서 자이젠은 일본 드라마의 주인공답게 어떤 면에선 장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면 안판석 감독의 <하얀거탑>에는 환자의 환부가 자주 등장한다. 피도 흐르며, 장기가 보일 때도 있다. 대신 안판석 감독은 인물들의 얼굴을 빠르고 거칠게 보여준다. 수술의 커뮤니케이션이 집도의와 어시스턴트를 잡아내는 숏 사이에서 생겨나는 셈이다. 그래서 안판석 감독의 수술장면은 좀더 극적이다. 장준혁은 어떤 면에서 기술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여줌’에 대한 미세한 차이지만 이는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대립각의 인물구조는 서로에 대한 메아리

<하얀거탑>은 장준혁의 이야기다. ‘장준혁과 최도영의 대결’이란 카피가 소설과 드라마를 가장 먼저 수식하고 있지만, 사실 최도영은 장준혁을 설명하기 위한 기능적 인물에 가깝다. 안판석 감독은 이를 리트머스라는 표현을 빌려 설명한다. 최도영은 장준혁의 이면을 보여주기 위한 리트머스며, 오경환 교수는 이주환 과장과 우용길 부원장의 이면을 보여주기 위한 리트머스라는 것이다. 실제로 장준혁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최도영을 찾는다. 외과과장이 되기 위해 의사협회회장 이희도(유필상)의 술시중을 들던 장준혁은 지친 몸을 이끌고 최도영의 연구실로 발길을 옮긴다. 위로의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밑바닥을 주저하지 않고 드러내 보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장준혁의 야심과 권력에 대한 욕심은 최도영 앞에서 매우 순진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조롱도 냉소도 어울리지 않는 인간 욕망의 원초적인 모습. 최도영은 장준혁에 대한 일종의 시험지이자 연민의 보호막이다. 그래서 장준혁은 최도영과 함께 있을 때 절대적인 악역을 면한다.

와인바를 운영하고 있는 강희재(김보경)도 최도영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명인대학교 병원 근처에 자리잡고 있어서 명인대학교의 대다수 의사들이 찾는 곳. 강희재는 일면 병원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역으로 가장 깊게 연루된 인물이기도 하다. 안판석 감독의 전작 <아줌마> <장미와 콩나물>에서 부엌이 그랬던 것처럼, <하얀거탑>에서 와인바는 인물들의 넋두리를 받아내는 공간이다. 상사에 대한 험담과 자신의 앞날을 위한 꿍꿍이, 강희재는 오른쪽 테이블에서 들은 이야기를 왼쪽 테이블에 흘리고, 왼쪽과 오른쪽에서 취합한 이야기를 장준혁에게 전한다. 장준혁과 강희재는 바람을 피우고 있지만 이들의 관계는 불륜보다 협력에 가까워 보인다. 소설 원작과 일본 드라마에서 강희재에 해당하는 역할인 하나모리 게이코는 병원 생리를 견디다 못해 의대를 중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하나모리는 자이젠을 가장 잘 이해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더 냉소한다. 하지만 안판석 감독은 강희재란 인물에게서 학력에 대한 과거를 삭제했다. 의대를 중퇴한 여대생이 와인바를 운영한다는 설정은 한국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강희재는 하나모리와 달리 독자적인 캐릭터가 약하다. 강희재에겐 병원의 주위를 맴돌며 하얗게 가장된 야심의 줄거리를 전달하는 메신저의 동기가 부족하다. 이야기에 현실성을 양보하는 대신 인물의 완성도가 떨어진 셈이다. 하지만 이는 <하얀거탑>이 인물들을 설정하는 방식이다. 우선 장준혁이 있고 그의 갈등을 전개할 인물들이 배치된다. 이야기는 인물들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그 갈등은 장준혁이란 인물의 반작용으로 제시된다. 드라마는 매회 특정한 충돌을 통해 인간의 삶에 질문을 제기한다.

실제 병원의 기능 재현한 세트, 극의 ‘리얼리티’ 살려

병원보다는 인간에, 의학보다는 갈등에 초점이 맞춰진 드라마지만 <하얀거탑>에서도 병원과 의학이 주는 스펙터클을 놓치긴 힘들다. 한회 분량의 대사 중 3분의 1 이상이 의학용어가 들어간 문장이고, 드라마가 주력하는 인간의 갈등도 결국 고학력과 명예욕으로 점철된 의학세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판석 감독은 드라마의 미술과 수술장면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고 말했다. 2005년부터 준비단계에 들어간 드라마는 미술작업의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촬영이 지연됐고, 수술장면 촬영은 경우에 따라 최대 20시간 계속되기도 했다. 안판석 감독과 주연배우들이 실제로 참관한 뒤 촬영한 수술장면도 생동감이 넘친다. 더미(실리콘으로 만들어진 가짜 시체)와 돼지 껍데기를 이용한 복부 절개 장면은 한국 드라마로서는 전례없이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드라마 홈페이지에는 의료직 종사자들의 “현실감있다”는 감상평이 올라오고 있다. <하얀거탑>에서 미술은 다소 비현실적일 만큼 극적인 갈등 국면을 안정적으로 지탱해주는 시각적 효과를 가진다. 안판석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애브노멀한 상황을 노멀한 이야기”로 가공해주는 장치. 그래서 인물들은 매우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갈등에도 설득력을 잃지 않는다.

거대한 하얀 건물, 복도를 꽉 메우는 의사들의 회진 행렬. ‘하얀거탑’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위엄과 권력이 느껴지는 불편한 공간이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위계질서가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입구를 지나 내부로 들어서면 병원은 어두운 갈등의 굴레를 드러낸다. 의학의 세계 뒤편에 정치의 세계가 펼쳐지고, 생명과 윤리를 가장한 수술이 돈을 매개로 거래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그래서 <하얀거탑>은 인물들을 갈등에 빠뜨린다. 자신을 억누를 것 같은 권력의 무게와 자신을 이겨낼 수 있는 가치의 믿음이 동일한 선택지 안에서 질문받는다. 안판석 감독은 이를 “삼각관계, 불륜이 등장하는 일련의 드라마”와 차별화되는 <하얀거탑>의 작은 가치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질문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하얀거탑’은 어쩌면 선택이 충돌하는 모든 공간의 상징물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장준혁과 최도영, 문은 열렸다. 이젠 당신이 선택할 차례다.

한국판 vs 일본판(2003) 캐릭터 소개

장준혁 교수(김명민)/자이젠 고로 부교수(가라사와 도시아키)
대학병원 외과의 최고 실력자. 권력을 향한 야욕을 숨기지 않는다. 치밀한 암투 끝에 원하는 자리에 올라서지만, 의료 실수로 법정까지 가게 되는 캐릭터. 원작 소설과 <후지TV> 2003년 드라마에선 폐암으로 죽는다.

최도영 교수(이선균)/사토미 슈지 부교수(에구치 요스케)
장준혁, 자이젠과 대립되는 인물. 모든 일은 정도와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내과의 최고 실력자며, 모든 병은 신중하게 진단해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다. 드라마 후반 법정 싸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주완 외과과장(이정길)/아즈마 테이조 교수(이시자카 고지)
대학병원 외과의 최고 권력자. 퇴임이 얼마 남지 않아 후임자 문제로 고심한다. 유력한 후임자로 거론되는 장준혁, 자이젠에 반감을 갖고, 키쿠카와, 노민국이란 히든카드를 제시한다.

노민국 교수(차인표)/키쿠카와 노보루(사와무라 잇키)
이주완, 아즈마가 자신의 후임, 사위로 생각하고 추천하는 인물. 장준혁, 자이젠과 외과과장(교수) 자리를 두고 맞붙는다. 원작에서의 비중은 그리 크지않다.

우용길(김창완)/우가이 료이치(이부 마사토)
대학병원 내 최고 권력자. 의사들의 인사는 물론 연구비, 수술날짜 등 병원 내 모든 일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인물. 외과과장(교수) 후임 선정과 관련해 장준혁, 자이젠과 한배를 탄다.

이윤진(송선미)/아즈마 사에코(야다 아키코)
이주완, 아즈마의 딸. 대대로 의사 집안의 자식 같지 않게 권력과 명예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틀에 박힌 의사 남편에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전형적인 의사와는 사뭇 다른 최도영, 사토미에게 호감을 갖는다.

강희재(김보경)/하나모리 케이코(구로키 히토미)
장준혁, 자이젠과 불륜관계의 인물. 병원 근처에서 술집을 운영하고 있다. 소설 원작과 <후지TV> 버전에서는 의대 중퇴의 과거가 그려진다. 병원 내부의 비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캐릭터다.

오경환(변희봉)/오오코우치 세이사쿠(시니가와 도오루)
장준혁, 자이젠보다는 최도영, 사토미에 가까운 인물. 기초과학과 임상병리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연구에 몰두한다. 기초의학 분야의 우두머리 격으로 외과과장(교수) 선출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판으로 부활한 일본 원작 드라마 <하얀거탑>에 관한 모든 것 1/2
<하얀거탑>의 안판석 감독 인터뷰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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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형제의 성공 최장집들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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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형제의 성공 최장집들의 실패
 
번호 55   글쓴이 김동렬    조회 5576   점수 0   등록일 2007-1-27 20:17 대문 0   톡톡 0  
 
 
 

수영은 자전거 타기와 비슷해서 한번 배워두면 절대로 잊어먹지 않는다. 나는 한동안 수영을 하지 않았다가 10여 년만에 다시 수영을 해 본 일이 있는데, 아무런 부자연스러움이 없었다.

친구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수영을 제법 잘하는데도 여전히 물을 두려워하는 친구가 여럿 있다.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는 한 50미터쯤은 헤엄칠 수 있어.’ 이건 잘못된 거다.

자전거로 ‘100미터쯤 갈 수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물 위에 뜰 수만 있으면 배가 고프고 힘이 빠져서 더 이상 헤엄을 못 치게 될 때까지 몇 시간이고 계속 헤엄칠 수 있는 것이 수영이다.

이유를 알아보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도시의 수영장에서 전문 강사에게 수영강습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사들이 수영을 가르치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50미터쯤 헤엄칠 수 있다는 말은 물속에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평영이니 접영이니 하며 자세부터 배우기 때문에 자세에 신경 쓰느라 물 그 자체와 친해지지 못해서 그렇다.

꼬맹이시절 나는 마을 앞 개울에서 헤엄을 배웠다. 아무도 내게 헤엄치는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물장구를 치며 놀다 보면 그냥 헤엄을 칠 수 있게 된다. 먼저 물 그 자체와 친해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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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을 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물에 뜨는 것이다. 둘째는 물을 헤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헤엄을 치려면 먼저 물에 뜰 수 있어야 한다. 천만에! 그렇지 않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헤엄을 쳐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저절로 뜨는 것이다. 물에 뜨려고 하는 즉 뜨지 못한다. 수영강사들은 이 점을 놓치고 있다. 헤엄이 먼저인가 뜨기가 먼저인가? 뜨기가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헤엄이 먼저다.

꼬맹이 시절 나는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숨을 참으며 그냥 헤엄을 쳤다. 물 위로 뜨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헤엄치다 보니 어느 순간 물 밖으로 머리를 내놓고 수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라.

자전거 타기도 마찬가지다. ‘자전거가 왼쪽으로 기울면 핸들은 어느 쪽으로 꺾어야 하지?’ 이걸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판단해서는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조건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저절로 균형을 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린이용 자전거는 좌우에 보조바퀴가 있어서 이것이 가능하다.

균형이 먼저인가 진행이 먼저인가?
먼저 균형을 잡고 그다음 진행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진행해야 균형이 잡힌다.

무엇인가? 일의 진행에는 반드시 단계가 있다. 우선순위를 판단해야 한다. 1단계를 완성한 다음에 2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착각이다. 2단계를 시작하지 않으면 1단계는 절대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 원리는 보편적인 법칙이다. ‘일머리’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어떤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1사이클의 전체과정을 경험해봐야 알 수 있다. 현장경험 없는 책상물림 이론가들은 절대로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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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자와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미소니언 협회 회장 랭글러 박사의 글라이더가 이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랭글러 박사의 비행체는 곧장 호수로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한동안 뜨거웠던 비행기 열풍은 급속하게 식어버렸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는 성공했지만 그 자리에는 단 한 사람의 기자도 찾아오지 않았다. 신문사에 전보를 쳤지만 대부분의 신문은 그 역사적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랭글러 박사의 실패에 실망한 기자들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라이트 형제의 성공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9월에야 라이트 형제는 몇몇 기자들 앞에서 비행시범을 성공시킨다.

비행기를 뜨게 하는 양력의 원리는 진작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왜 이 원리를 잘 아는 과학자들이 비행기를 발명하지 못하고 자전거포나 운영하던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었을까?

비행을 위해서는 2단계가 필요하다. 1) 공중에 뜨기 2) 제어하기. 모든 과학자들이 1단계에 집착하고 있을 때 라이트 형제는 2단계를 실험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2단계에 성공하지 않으면 1단계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상식이 항상 상식적인 것은 아니다. 달에 갈 수 없다는 것이 지난 수천 년 동안 고려 사람과 조선 사람의 상식이었지만 그 상식은 틀렸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우리 조상의 상식도 틀렸다. 상식을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선순위 판단을 거꾸로 한다. 기둥을 정확히 세운 다음에 대들보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들보가 먼저 올려져서 그 무게로 위에서 눌러줘야 기둥이 제 위치를 잡아가는 것이다.

인천공항의 활주로는 지금도 조금씩 지반이 가라앉고 있다. 원래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자동차라도 그렇다. 부품들이 자리를 잡은 다음에 엔진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엔진이 작동해야 부품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간다.

이론과 현실 사이에는 명백히 갭이 있다. 현장에서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자리를 잡은 다음에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진행을 해야 각자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최장집이나 강준만이나 손호철들이 늘 하는 이야기는 비행기가 공중에 떠야 조종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매우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랭글러 박사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

오마이뉴스와 한겨레는 창간 때부터 랭글러 박사의 오류에 빠져 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헤엄치지 않으면 물에 뜰 수 없고 제어하지 않으면 이륙할 수 없고 페달을 밟지 않으면 균형을 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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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하는 열쇠는 ‘구조’에 있다. 구조를 아는 것이 그 어떤 것을 아는 것이다. 구조의 원리는 밸런스에 있다. 밸런스는 대칭과 평형이다. 대칭은 맞물림이다. 서로는 맞물려 있다.

자전거가 균형을 잡는 것, 수영선수가 물에 뜨는 것, 비행기가 나는 것은 공중에서 밸런스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정(靜)이 아니라 동(動)이다.

밸런스는 천칭 저울의 두 접시가 이루고 있는 평형이다. 언뜻 보기에는 정(靜)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로 그것은 동(動)이다. 돌아가는 팽이는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밸런스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 지식인들의 오류는 그 맞물림을 해체해 버리는데 있다. 그들은 천칭저울의 두 날개를 떼서 각각 따로 놓아둔다. 왜? 그들은 밸런스를 정(靜)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팽이의 고요함을 멈추어 있는 팽이로 착각하는 것이다.

큰 파도를 만난 선장은 배를 전속으로 항진시킨다. 파도가 가진 에너지가 100이면 그 배가 파도의 방향과 직각으로 전진하여 맞서는 에너지가 100에 도달할 때 배는 밸런스를 얻는다. 평온하게 파도를 타고 넘는다.

밸런스는 정(靜)처럼 보이지만 동(動)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결코 밸런스를 얻을 수 없다. 공중에서 제어하지 않으면, 물속에서 헤엄치지 않으면, 페달을 밟아 나아가지 않으면 결코 밸런스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의 진보는 반드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피드백과정을 거친다. 변혁은 A 단계의 완성 다음에 B 단계로 가는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가 맞물려서 동시에 나아가야 비로소 그 전단계인 A가 완성되는 것이다.

역사상의 위대한 변혁은 모두 미완성인 상태로 출발하였다. A 단계가 51프로 진행되었을 때 이미 B 단계에 착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완벽한 이론은 없다.

어떻게 완성하는가? 일단 B 단계를 진행시키면서 거기서 얻은 데이터를 토대로 A 단계의 결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샘플이 필요하고 모범이 필요하고 본보기가 필요하고 성공모델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해도 전면시행이 아니라 ‘부분시행≫데이터 확보≫시행착오 발견≫오류시정≫전면 확대’의 피드백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러한 가역과정이 없는 모든 개혁은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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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이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무엇이 되느냐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된 다음에 개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하다 보니 대통령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정치권의 신당논의도 마찬가지다. ‘1) 당을 만든다. 2) 개혁을 한다’로 순서를 정해놓으면 당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51프로 진척의 미완성 상태에서 2단계를 시도해야 피드백에 의해 1단계가 완성된다.

당을 만들어서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하다 보면 당이 만들어진다.

아기가 말을 배울 때는 옹알이부터 시작한다. 옹알이는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다. 그 문장은 엉터리다. 단어를 조합하여 문장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엉터리 문장을 마구 지껄이다 보면 그 과정에서 단어가 완성되는 것이다.

외국어학습도 마찬가지다. ‘알파벳≫단어≫문장’의 순서는 틀렸다. 수영은 ‘자세≫진행’이 아니라 일단 진행하다 보면 나중에 자세가 잡힌다. 마찬가지로 엉터리라도 문장을 말하다 보면 단어가 자리를 잡아간다.

영어사전은 by라는 단어 하나를 19가지 의미로 설명한다. 틀렸다. 단어의 의미를 알고 문장을 구성하려 하는 즉 진짜 의미를 알지 못한다. 단어는 포지션을 나타낼 뿐이고 문장에 의해 역으로 단어에 의미가 부여된다.

피아니스트는 먼저 음 하나하나를 치는 방법을 배우고 그다음에 전곡의 연주에 도전한다. 이 방법으로는 성공하지 못한다. 되든 안 되든 일단 전곡을 연주해야 밸런스를 터득하고 밸런스를 터득해야 음 하나하나의 소릿값을 알게 된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 주변의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발견될 수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통합을 외치고 있지만 통합은 자세잡기에 불과하다. 자세를 잡으려 하는 즉 절대로 자세가 잡히지 않는다.

100명의 군중을 나란히 한 줄로 세우려면? 줄을 세우려 하는 즉 줄이 세워지지 않는다. 100미터 앞에 있는 전봇대 기준으로 선착순을 시켜야 줄이 세워진다. 줄 서기는 자리 찾기다. 자리에서 이탈해야 자리가 찾아진다.

우리당이 망가진 이유는 개혁적 리더십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개혁을 해야 리더십이 만들어지고 리더십이 얻어져야 통합이 된다. 개혁을 해야 전방과 후방이 가려지고 전투부대와 보급부대가 제 위치를 잡아간다.

선 통합 후 개혁은 자전거 위에서 균형 잡는 방법을 배우고 난 다음에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발상이다. 이 방법으로는 영원히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신당을 만든다는데 좋다. 그런데 그 당을 만들어서 무엇을 하지? 먼저 당을 만들고 그다음에 무언가를 하려 하는 즉 당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지금 시작해야 그 과정에서 당이 만들어진다.

신당의 목적은 정권 재창출에 있다. 그런데 정권 재창출해서 무엇을 하려는 거지? 그 하려는 무엇을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정권 재창출 못한다. 집권한 다음에 개혁하겠다는 식으로는 절대로 집권 못하다.



ⓒ 김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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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돈 만평] 이명박의 굴욕?

촌철살인임. 시츄에이숑을 잘 정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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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만보기   김상돈(don1079221) 기자   
 
 
ⓒ 김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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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 이야기>에 쏟아지는 비난

 

 

 

요코 이야기>에 쏟아지는 비난
한국은 과연 전쟁강간에서 자유롭나
[주장] 이 책을 둘러싼 민족주의 논쟁이 빠뜨린 진실
텍스트만보기   김홍주선(pheebss) 기자   
 
 
 
▲ <요코 이야기>
 
<요코 이야기>를 둘러싼 언론 보도로 네티즌들이 '들끓고' 있다. <연합뉴스>에서 지난 17일 <'얼빠진 한국' 일본마저 거부한 요코 이야기>라는 선정적인 제목으로 보도한 기사를 살펴보자.

전범 가족의 딸 요코 가와시마 왓킨슨이 성인이 되어 저술한 과거사 이야기에는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 여성들을 강간했음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중학교 교재로 채택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 <대나무 숲 저 멀리(So far from the bamboo grove)>가 파문의 근원이다. 한인 사회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따른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상흔이 남은 가운데 이같은 교재를 문제의식 없이 채택한 것에 분노하여 항의하고 있다.

이에 이 책이 한국 출판사 문학동네를 통해 출간된 것이 또한번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후의 보도는 민족감정을 터뜨리며 실제 책의 내용에 대한 확인은 제쳐두고 일단 문학동네와 한국 외교통상부를 향한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전쟁이 있는 곳엔 언제나 강간이... 한국이라고 결백할 수 있나

오랫동안 단일 민족을 형성하여 살아왔으며, 굴곡 많은 근·현대사를 거친 한국인들에게 '민족'의 문제는 언제나 뜨겁다. 그렇기에 <요코 이야기>에 등장한 여성에 대한 위협과 강간의 가해자를 한국인으로 설정했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을 뜨겁게 자극하여 분노케 하고 있다.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자행된 역사의 만행 앞에서 한국인을 가해자로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셈이다. 피해자의 국적이 '일본'이라는 것 또한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기에 앞서 민족의 이름으로 분노를 터뜨리게 하고 있다.

전쟁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강간과 성폭력이 자행되어 왔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일본에 의해서 한국과 중국, 심지어 네덜란드에서까지도, 그리고 미군이 주둔하는 한국의 기지촌에서도 미군에 의해 수없이 저질러진 일이다. 또 한국이 베트남에서 수없이 저지른 일이기도 하다.

   오늘의 브리핑
 
노무현과 이명박의
공간정책은 달랐나
 
 
정체성·정당이 없는 후보 필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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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는 판사에게 왜 석궁을 쏘았나?
 
한편으로 전시에 여성들을 강간하는 관행은 일부 남성들의 우발적인 행동만도 아니었다. 이는 인종청소를 위한 계획의 하나였고 강간은 여자들을 짓밟음으로써 상대국(상대 민족)의 미래를 짓밟으려는 계획적이고 집단적인 전쟁 작전의 하나였다. 그래서 강간은 어느 전쟁에서나 있어왔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패전국 일본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한국 남성에 의한 일본 여성의 강간이 '있을 수 없는 일', '과거사 왜곡'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가족 안 과 애인 사이에도 부지기수로 발생하는 '성폭력'이 민족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상대국 여성에게 가해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과연 누가 할 수 있는가? '순결한' 한국의 남성들이 할 수 있는가?

진보를 표방하는 언론매체인 <한겨레>에서도 <요코 이야기>가 정확한 사료에 근거하지 않은 떠도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이 책이 담고 있는 강간 피해를 일축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실증이 없다고? 일본군 성노예도 한때는 '떠도는 이야기'였다

 
▲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황금주 할머니가 지난 2004년 5월 12일 오전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열린 '미군의 이라크인에 대한 반인권적 전쟁범죄 규탄 및 한국군 파병 철회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해 규탄사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러나 우리는 '사료 중심'의 증거 채택에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 우리들이 현재 그렇게 분노하고 공감하며 지지하는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발굴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이 일이 우리 나라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국제사법재판소(ICJ)에까지 가게 된 지는 불과 10~20여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이때는 한국에서 '성폭력' 자체가 공론화하던 때와 얼추 맞물린다. 여성운동의 성과에 힘입어 성폭력특별법이 제정(1993년)되고 성폭력 비난의 중심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로 힘겹게 돌아서던 때이다.

전쟁 당시의 피해가 있었던 때로부터 50여년이 더 지나, 최초의 할머니가 증언을 시작했다. "부끄러운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다"라는 신념으로 입을 연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사회는 '강간' 자체가 피해자 여성의 수치스러움으로 인식됐다. 그랬던 때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화와 강간'은 '떠도는 이야기'였을 뿐, 누구 하나 나서서 증언하려 들지도, 공론화하려 들지도 않았던 숨겨진 이야기였다.

당시 할머니들의 '거짓말 같은 끔찍한 증언'에 일본의 자유주의 실증사학자들은 "구술된 이야기라서 정식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며 사실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남성 중심의 역사 기술에서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는 애초부터 기록된 자료가 부족했다.

공문서와 역사 자료를 기초로 '실증'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정신대 할머니들의 성노예 피해구술 기록(할머니들에게는 무슨 서사구조로 이야기해야할지 참고할 이야기틀도 없었고, 아파서 기억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은 한낱 '어중이 떠중이 헛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후 같은 피해를 당한 할머니들이 하나둘 입을 열어 증언을 시작하고 '성노예'와 다름없는 참상이 알려졌다. '정신대 문제'는 한국의 뜨거운 민족 감정에 힘입어 '사실'로 기록되어 알려졌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던 당시, 국내외의 여성들을 전쟁에 동원했다. 이 와중에 일본(내지) 여성들은 1차 위안부로 간호사 등의 2차 병력으로 활약하고 한국 여성들은 2차 위안부인 '성노예'로 다루어졌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2차 위안부인 '성노예'로 차출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정신대 문제가 민족 대 민족의 이름으로 공론화할 수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 내에서조차 제대로 발설하기 힘든 문제가 되어 잊혀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성노예' 문제 자체를 없었던 일로 치부하면서 아직까지도 공식적인 해명이나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전쟁강간, 중요한 건 국적이 아니다

네티즌들이 감정적으로 비난을 퍼붓고 있는 문학동네에서 당시 <요코 이야기>를 출판할 때, 한국 번역가와 일본의 저자가 만났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저자는 일본 정부의 잘못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자기 잘못에 대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입니다. 진실을 말하고 사과하지 못한다는 것은 창피한 거지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그렇고요."

현재 이 기사를 쓰고 있는 피시방에서도 사방에서는 전쟁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의 재일동포 기사를 썼던 친구 하나는 민족 운동의 진영 내에서 '민족의 순결성'을 강요하며 여성들에게 치마저고리와 모성을 강요하고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끈끈한 '가족애'를 본다.

강간은 일본군이 한국 민간인에게 저질렀던 것인가. 단지 그것뿐인가. 강간의 국적을 따지기 시작한다면 강간 피해자에게는 가해자의 국적이 중요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피해자도 '한 민족에게 당한 강간이기에 덜 상처받는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국의 근·현대사에 휘말려 일본의 재일교포 3세로 태어나 힘든 삶을 살아왔던 신숙옥씨는 <자이니치, 당신은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대하여>라는 책을 펴냈다. 일본과 한국과 북한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치여가며 만신창이가 된 생생한 개인사의 증언이었다.

신씨는 일본인 남자 의사에게 강간당했던 '조센징 여자아이'의 삶에서부터 시작해 국적 불명으로 학교와 사회에서 당했던 차별과 취직거부로 인한 가난을 겪었다. 지금 그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삶을 살고있지만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자이니치'(재일교포를 뜻하는 일본말)의 존재를 이용할 뿐 제대로 포용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 환멸을 느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경을 넘어, 민족을 넘어, 손을 마주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지금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 피차별자가 아니면 체험하지 못할, 인간의 '양심'과 만날 수 있는 인생은 최상의 인생이기도 하다. 지금 나는 어느 나라 국가도 부르지 않는다. 어느 나라 국기도 게양하지 않는다. 내게 애국심은 없다. 국가를 사랑하기보다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사람을 계속 사랑하고 싶다."

'민족주의' 이름으로 공론화조차 틀어막아선 안돼

 
▲ 지난 해 8월 9일 낮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앞에서 정대협 회원과 한·일 시민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연대집회'가 제721차 수요집회를 겸해서 열렸다. 세계연대집회는 국제앰네스티(AI)의 제안에 따라 우리나라와 일본, 미국, 홍콩, 독일, 덴마크 등 세계 27개 도시에서 열린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가 이야기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란 국가와 민족으로 가려지지 않은 가해와 피해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전쟁'을 일으킨 정부는 민족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며 수많은 남성을 전쟁터로, 수많은 여성을 강간의 피해자로 내몰았다. 일본에서 우익 정권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거행하고 수업시간에 '히노마루(일장기) 그리기'를 강요할 때 이에 대항하는 '올바른 역사 인식'은 어디에서 와야할까.

한·일 여성 공동역사교재 편찬위원회는 2005년 <여성의 눈으로 본 한일 근·현대사>를 펴냈다. 편찬위는 일본 우익의 역사 교과서가 아시아 태평양 전쟁 동안 일왕이 침략전 수행의 아들들을 위한 하사품으로 선물한 '위안부' 즉 일본군 성노예 등 가해의 역사를 삭제하고 가부장제를 강화해 군국주의의 기초로 삼는 데 문제의식을 가졌다.

물론 일본의 페미니즘에는 전시에 여성을 동원하여 전쟁에 '찬동'시키고 극렬히 선전했던 여성 이치카와 후사에(市井房枝·1893~1981, 1937년 부선획득동맹과 그밖에 8개 단체를 거느린 일본부인단체연맹을 결성해 '후방을 굳게 지키자'며 협력 체제를 만들어 이끄는 등 '국가 총동원' 체제에 적극 부응했다) 같은 '과거사'가 존재한다. 이들 역시 전범임은 분명하다. 그 누구도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으며 주어서도 안 된다.

<요코 이야기>를 둘러싼 논쟁도 '가해자 일본-피해자 한국'의 단순구도를 떠나서 복합적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 한국인 남성에 의해 일본인 여성에게 가해진(가해졌을 수 있는) 성폭력에 대한 공론화를 '민족'을 이유로 틀어막아선 안된다. 이런 시도는 일본 우익이 자국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위안부의 역사를 삭제하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요코 이야기>를 비난하고 막는 것은 답이 아니다. 전시 강간과 전쟁 폭력을 이야기하는 증언은 다양한 형태로 터져 나와야 한다. 그것은 어느 한 편에 속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국의 이익과 어느 한 인종이나 민족의 영달을 위해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가부장적 내셔널리즘은 배격돼야 한다.

불과 몇 주 전 술자리 성매매 방지를 위한 여성가족부 캠페인에 일부 남성들과 네티즌이 "여성가족부를 폐지해야 한다"고 '자체 캠페인'을 벌이던 한국은 무죄인가. 아직도 '성매매 방지 캠페인'이 필요한 우리 사회,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이 당당히 거리에 걸릴 수 있는 우리 현실부터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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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2007-01-18 10:00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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