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국사회] ‘세 번의 자유’에 대한 조소 / 정정훈
야!한국사회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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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문제의 권위자인 한 교수는, 최근 어느 칼럼에서 ‘고용허가제’는 ‘국내 노동시장 보호’를 위한 제도이며, 국제사회에서 우수성이 인정된 ‘보편적 제도’를 도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은 한국사회 이주정책에 대한 지배적 관점을 드러내며,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소통이 절실함을 반사적으로 시사한다.

고용허가제의 핵심적 쟁점은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규정에 있다. 자본주의의 시장노동이 노예제나 봉건제의 노동과 다른 점은 노동관계에서 신분적 구속을 폐지하고 형식적으로나마 ‘시장에서 만날 자유’를 보장하였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시장에서의 형식적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사업장 변경을 규율하는 고용허가제 법은 특정 사업자에 대한 신분적 구속을 부과한다. 그 명분을 ‘내국인 고용기회 보호’라고 한다.

그래서 핵심적 질문은 정말로, ‘내국인 고용기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원칙적으로 제한하여야 하는가’에 있다. 그러나 현행 고용허가제는 이 근본적 질문을 간단히 비켜나갔다. 도입 과정에서부터 시행 3년에 이르기까지, 사업장 변경을 허용함으로써 제도 전반에서 ‘고용 충돌’이 발생할 것이라는 어떠한 합리적 예측과 분석도 제시된 바 없다. 단지 지극히 피상적인 우려와 이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독단이 존재했을 뿐이다. 내국인 기피 업종(3D)에서 인력 공백을 보충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현재의 제도 아래 이주노동자들이 ‘국민’의 일자리를 침해한다는 일방적인 전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그러한 단정적 전제는 신자유주의 시대 불안전 고용의 사회적 갈등을 ‘내부의 적’을 만들어 우회하려는 인종주의적 동원에 가깝다.

사업장 변경의 원칙적 금지는 ‘내국인 고용 보호’라는 표면적 명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적 효과를 겨냥한다. 이주노동자의 저임금을 강제하여 사업주의 초과 잉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고용허가제를 ‘또 하나의 현대판 노예제도’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사업장 변경 제한은 이주자를 ‘노동자’로 규정함으로써 새롭게 부여한 권리들을 법전 속에 가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연수생’과 다름없는 ‘무권리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고용허가제는 사실 ‘시장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함으로써 ‘시장에서 사업주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시장의 폭력을 제도의 폭력이 뒷받침하는 것, 그것이 고용허가제의 본질이다. 그것이 형식적으로 평등하고 중립적인 법률과 계약의 이면에 놓여 있는 칼날이다.

정책의 무게 중심이 ‘저임금 외국인 활용’에 놓여 있는 한, ‘내국인 고용 보호’라는 법의 표면적인 명분과는 끊임없이 충돌할 것이다. ‘내국인 고용 보호’에 필수적인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제도 근본에서부터 부정하기 때문이다.

일정한 경우에 ‘3회’만 사업장 변경을 허용하는 고용허가제 규정은 다음과 같은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세 가지 열쇠를 쥐고 이주노동자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리바이어던’(국가)이 말한다. ‘당신들은 이제 연수생이 아니라 노동자’라고, 그러나 ‘자유는 예외로 세 번뿐’이라고.

“노예제다” “아니다” 공방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보는 단견이다. ‘노예’라는 규정은 ‘세 번의 자유’로서 ‘노동자’를 선언하는 제도적 허위에 보내는 사회적 양심의 조소다. 동시에 “노예일 수 없다”는 이주자들의 존재의 외침이다. 절규하는 타자의 자리에서 진실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진실일 수 없다.



정정훈/변호사·공익변호사그룹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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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6 12:43 2007/07/16 1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