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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 구조조정의 방향(1999)(1)

 대우그룹 김우중회장이 귀국했다. 재계에서는 김우중회장의 공과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가 경제성장에 기여한 공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우중회장은 재벌 가운데서도 특별했다. 분식회계, 정경유착 등이 심했고, 그 결과 한국경제와 노동자, 일반 국민들에게 큰 부담을 지우는 등 과오가 컸다. 그에 상응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대우그룹 부도 사태 직전 1999년에 작성한 논문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진보 블로거들께서도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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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경제] 제10집, 경상대학교 산업경제연구소, 1999 12


         대우그룹 구조조정의 방향


                                     장 상 환(경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1. 머리말


대우그룹의 부도가 현실로 닥쳐왔다. 1999년 7월 19일 대우재벌에 대한 긴급구제금융 조치가 발표된 후 주가가 폭락하는 등 경제가 휘청거렸는데, 이것은 대우재벌 문제의 올바른 처리에 실패할 경우 국가경제가 다시 한 번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대우 부도사태는 부실기업정리 문제와 재벌체제 청산의 문제를 함께 안고 있는 문제이다. 대우그룹이 부실기업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재벌체제 청산이 앞당겨진다고 할 수 있다. 재벌체제의 약한 고리가 깨져나가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대우그룹 부도의 원인을 살펴보고, 정부의 대우사태 대책을 평가한 후 대우그룹사태 해결책으로서 부실채권처리, 금융시장안정대책, 기업매각 또는 독자회생, 기업소유체제 전환, 고용문제 등을 검토한다.   

대우사태는 금융위기 재연 등 국민경제의 위기, 재벌체제 개혁의 문제, 기업구조조정(기업회생)의 문제, 노동자 생존권의 문제 등 다양한 수준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고서 대우그룹 구조조정을 시행할 경우 경제위기 요인을 증폭시키고 한국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심화시킬 수 있다.   



2. 대우그룹 부도위기의 원인


대우그룹이 부도위기에 빠진 것은 총수의 경영전횡에 의한 정경유착과 과도한 차입에 의한 문어발 확장경영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대우그룹의 이러한 축적행태는 60-70년대의 고도성장기에는 모순을 표면으로 드러내지 않고 누적시켜왔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서 시장경제의 확립에 따른 정부 특혜의 곤란 등으로 대우그룹은 국내에서는 더 이상 과거방식으로는 급속한 자본축적을 하지 못하게 되어서, 세계경영으로 돌파구를 열려고 했으나 IMF사태 앞에서 결국 좌초하고 만 것이다. 다른 재벌들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었으나 대우그룹은 그 정도가 심했다고 할 수 있다.      

  

1) 정경유착과 과다차입에 의한 무리한 확장경영


김우중회장은 1967년 500만원의 자본으로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창립했다. 그후 대우그룹은 정경유착을 통해 부실기업을 특혜대출로 인수하는 방법으로 5대 그룹으로 성장해왔다. 대우그룹은 박정권과 전두환정권, 노태우정권 등 독재정권에 정치자금 뇌물을 헌납하는 등 부정비리가 가장 심했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김우중을 총애하여 대우그룹 성장에 큰 힘을 밀어줬다.

대우그룹은 60년대와 70년대초에는 섬유류수출 쿼타제와 수출금융을 활용해 성장했다. 미국의 섬유수출규제를 예상하고 수익성을 무시한 밀어내기 수출을 밀어부쳐 대미수출물량이 무려 5배나 증가하였고, 아시아 섬유류 수출기업 가운데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톡세일이라는 밀어내기 방식의 수출을 강행해 사채금리 30%의 5분의 1에 불과한 연리 6%의 저리 수출금융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대우그룹은 경공업수출정책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정부특혜를 기반으로 토대를 닦았다.  

대우는 1972년부터 문어발식 기업인수를 시작하여 1년만에 9개의 기업을 인수했다. 72년 고려피혁 인수, 1973년 1월 쌍미실업 인수, 5월 삼주빌딩 인수, 6월 대우기계 인수, 7월 동양투자금융 설립, 신성통상 인수, 8월 영진토건(->대우) 인수, 9월 동양증권 인수 등이다. 대우는 70년대 후반부터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섬유중심의 경공업에서 탈피하여 기계, 조선분야와 해외건설분야로 확장한다. 1976년 한국기계(현 대우중공업) 인수, 1978년 새한자동차(현 대우자동차)의 경영참여는 정권과의 유착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1978년 옥포조선소를 인수할 때 김우중은 ‘옥포조선소 건설비 전액의 국가지원’, ‘조선불황에 대비 미국 7함대 수리조선 유치’, ‘옥포를 대단위 종합기계단지로 지정’ 등을 요구하여 관철시켰고, 이를 계기로 대우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표 1>  대우그룹 팽창사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대우실업

설립(67)

동남섬유인수(70), 부산양정공장인수(70)

고려피혁인수(72), 한국투자신탁인수(73)

동양투자금융설립(73), 동양증권인수(73)

동국정밀 인수(73), 오성염직 인수(73)

쌍미실업 인수(73), 삼주빌딩 인수(73)

대우기계 인수(73), 신성통상 인수(73)

영진개발 인수(73)-->((주)대우)

대우전자(74), 대우빌딩인수(74)

대원섬유인수(74), 대한교육보험출자(75)

피어리스출자(75), 

한국기계인수(76) --> (대우중공업)

대우엔지니어링 설립(76)

동우개발설립(76) --> (힐튼호텔)

대성공업인수(77), 제철화학인수(77)

대양선박인수(77), 

새한자동차 경영참여(78)

옥포조선소인수(78) --> (대우조선)

원림산업인수(78) --> (대우어페럴)

신아조선인수(78), 동흥전기인수(78)

풍국정유인수(78), 대우ITT 설립(79)

설악개발 인수(80)

대우정밀 설립(81)

새한자동차 경영권인수(82) --> (대우자동차)

삼보증권 합병(83)

 --> (대우증권)

대한전선 가전부문 인수,

 대우전자와 합병(83)

대우전자부품(83)

대우자동차부품(84)

대우HMS공업 설립(83)

코람프라스틱 설립(83)

오리온전기 인수(83)

대우통신 인수(83)

대우경제연구소설립(84)

경남기업 인수(84)

대우캐리어 설립(85)

 

대우자동차 판매(96)

한국전기초자 인수(97)

쌍용자동차 인수 (97)


이렇게 하여 70년대말 당시 대우그룹의 계열사는 모두 24개로 늘어났다. 그중 창립회사는 모기업인 대우실업과 동양투자금융, 대우선박, 대우개발 등 4개사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김우중회장이 정경유착, 과다차입으로 인수합병한 것이다. 인수합병 기업 중 상당수는 누적된 적자로 부도위기에 몰린 기업이었다. 김우중은 이들 부실기업 인수후 연리 4% 이하의 특혜금융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사업확장의 계기로 활용했다. 문제는 부실기업을 인수한 뒤 경영을 제대로 안정시키지 않은 채 다시 또다른 부실기업을 인수하거나 사업규모를 키워온 것이다.

80년대 이후 대우그룹은 자주 위기를 맞이했지만 김우중회장은 정면돌파 수법으로 이를 극복해왔다. 80년 등장한 신군부세력의 전두환대통령은 재벌 길들이기를 위해 기업 강제분할과 금융압박을 시도했는데 이때 김우중회장은 2백억원 사재출연이라는 교묘한 방법으로 이를 극복했다. 1980년 10월 김우중회장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주식 175억원, 부동산 23억운, 현금 2억원 등 총 200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사회환원이라는 명목으로 대우재단에 출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환원이 아니라 대우재단을 통한 계열사 지배를 가능하게 해준 수법에 불과하였다.  

1989년 조선경기 불황으로 대우조선이 엄청난 적자에 허덕였을 때에도 김우중회장은 계열사 2개를 팔고 거제도 조선소로 직행하여 2년동안 경영개선에 매달려 조선수주 1위의 기업으로 만들었다. 대우조선은 당시 연간 2천억원 이상의 적자를 기록하며 거대한 부실기업으로 전락했다. 대우는 90년 3월까지 대우투자금융, 풍국정유, 호텔뉴설악, 제철화학 매각, 90년 6월까지 대우빌딩 매각, 92년말까지 대우중공업과 재우조선 합병, 및 수영만 부지 매각 등을 골자로 하는 ‘대우조선 합리화방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이러한 자구노력을 전제로 산업은행의 기존 대출금 2500억원을 상환유예해 주고 또 거치기간중 이자를 감면해주고 대우쪽이 4천억원의 자구노력을 하면 즉시 1500억원을 추가대출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합리화 방안의 이행은 순탄치 않았다. 풍국정유, 호텔뉴설악, 제철화학 등의 매각은 순조로웠으나 다른 사안들은 대우와 정부간에 이행을 놓고 지루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대우는 투자금융의 매각에 대해 마감시한인 90년 3월께 주식가격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매각연기를 요청했고, 그 해 9월에는 정부에 대우빌딩의 매각 취소를 요청했다. 자구노력을 이미 달성했고 매각해도 100억원 미만의 자구노력 효과밖에 없다는 이유였는데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부산 수영만 부지의 매각도 땅이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기요청을 했고, 아직까지도 팔지 않고 있다. 1992년 대우자동차와 GM간의 제휴 결별 후에도 김우중회장은 부평공장에 상주하여 5년만인 97년 국내외 2백만대 생산체제 구축을 이루어냈는데 이러한 위기 극복 경험이 김우중회장으로 하여금 점점 모험선호적인 경영을 강행하게 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결국 대우그룹의 경영위기를 초래한 원인은 기아의 경우와 같이 과다차입에 의한 여러 업종에 대한 무리한 투자였다. 기아의 경우 주력업종인 자동차 이외의 기아특수강, 기산 등 계열사의 수익성 악화로 모기업인 기아자동차까지 자금압박을 초래했다. 대우도 마찬가지로 과다한 외부차입에 의한 기업확장 전략이 문제를 야기했다. 1993년부터 시작된 동일한 방식에 의한 대우의 세계경영이 성과를 거두기 전에 외환위기를 맞았고 이것은 다른 그룹보다도 대우에 치명타를 입혔다.


2) 무리한 세계경영


김우중회장은 국내에서 상위 그룹에 밀리는 상황을 세계경영으로 극복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결국 덫이 되고 말았다. 김우중회장은 1993년부터 대우를 2000년에 매출액 2천억달러, 종업원 25만명의 세계 최대 기업군으로 만들겠다며 동유럽과 개발도상국에 무모하게 진출하기 시작했다. 대우그룹이 세계경영으로 나간 이유는 지역(블럭)화로  역내 국가로 뛰어들지 않으면 판매가 어렵다고 보았고, 국내시장도 좁은데다 무역자유화로 선진국기업과 경쟁이 더욱 격렬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본집약적 산업의 경우 선진국에 공장을 설립하면 일단 자본비용이 많이 들고 이미 가동중인 현지기업들 보다 감가상각 면에서 불리하므로 신흥시장(emerging market)을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우중 회장으로서는 한국의 60-70년대와 유사한 환경에 있었던 동유럽국가들이 투자적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1993년에 150개에 불과했던 해외 사업장이 1996년말에는 468개(종업원11만9,200명), 1998년말에는 해외법인 396개, 지사 134개, 연구소 15개, 건설현장 44개 등 589개, 종업원 21만명에 달했다. 국내의 대우그룹 임직원이 10만5천명인 것에 비하면 6년만에 비약적인 양적 팽창을 한 것이다. 해외법인은 자동차 13개국, 전자 39개국, 호텔 8개국, 금융 10개국 등에 설립되었다. 세계경영의 결과 1998년 9월말 발표된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발행 ‘97 세계투자보고서’에서 (주)대우가 해외자산기준으로 개도국 기업 가운데 초국적기업 1위에 랭크되었다. 1998년 세계투자보고서에서는 대우그룹의 해외투자가 119억달러, 20만명으로 개발도상국에서 제1위를 차지했다.

대우는 1998년부터 세계 20개국에 지주회사 형식의 해외본사 설립을 착수할 계획이었다. 대우의 위성그룹 재벌체제를 해외 20개국에 구축하여 연결시키겠다는 것이다. 대상 지역은 중국 미국․러시아․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폴란드․루마니아․모로코․알제리․수단․베트남․미얀마․인도․일본․프랑스․멕시코․이란 등이며, 위성그룹 전진기지를 확보하는 주력업종은 자동차와 전자로 설정되어 있었다. 

대우그룹은 해외로 진출할 때 선단식으로 나갔다. 단일품목만으로 해외시장을 공략하는 일반적인 다국적 기업과는 다른 특징으로서, 무역을 필두로 자동차와 전자 중공업 은행 통신 등 다양한 업종이 한꺼번에 진출했다. 국내에 기반을 두지 않은 업종에도 진출했다. 은행 외에 시멘트 제조, 통신서비스, 리스, 제철, 목재가공, 면방직, 타이어 제조, 고속버스사업, 자원개발사업 등이 22개국에서 대우이름으로 전개되었다. (주)대우가 무역, 금융, 마케팅 등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대우의 해외경영은 기존기업체의 인수합병을 주된 방법으로 하였다. 대우가 해외에 거느리고 있는 310개의 해외법인(1997년 6월말 현재) 가운데 20%인 60개가 인수합병(M&A)을 통해 얻은 회사들이다. 동구권에서는 체제변화로 민영화되는 국영기업들을 놓치지 않고 인수했다.

대우의 해외경영은 차입경영이었다. 대우의 해외투자규모는 80억달러에 이르는데 해외법인 차입금규모가 68억4천만달러로 세계경영의 83%를 빚으로 쌓아올린 셈이다. 김우중 회장은 1995년경 전경련회장단 모임에서 "우리는 해외에서 60%의 자금을 쓰고 있다"고 했다. 대우의 한 해 해외프로젝트는 10억달러선(97년․자본금 기준)이었고, 1997년 당시 추진중이거나 계획하고 있었던 해외프로젝트 규모는 총 180억달러(약18조원)에 이르렀다. 이같은 천문학적인 거액을 대우는 어떻게 감당했던가.

폴란드 FSO자동차 인수의 경우 투자금액은 2002년까지 총 11억달러로 계획되어 있다. 대우는 부채비율 200%의 원칙으로 자금조달을 했다. 11억달러 가운데 3분의 2를 현지법인의 이름으로 금융을 일으키면 부채비율 200%가 된다. 이 부문은 대부분 설비등 시설재에 해당되며 대우그룹계열사들은 공장기자재를 직접 수출하는 기회를 독점한다. 자기자본으로 채워야 할 나머지 3분의 1도 대우가 단독 부담하지 않았다. 대우는 현지정부(또는 사업자)와 철저히 50대 50의 합작원칙으로 진출, 위험을 분산했다. 폴란드 FSO의 경우 폴란드 정부가 50%의 지분으로 참여했다. 따라서 당초 FSO투자액 11억달러에서 현지금융조달분과 합작파트너의 몫을 제외하면 11억달러×1/6 = 1억9,000만달러가 된다. 대우는 이 자금을 5년에 걸쳐 자금을 투자한다. 연간 투자금액은 3,700만달러로 줄여든다. 대우는 이 3,700만달러 가운데 1/5정도만 자체조달하고 나머지 4/5는 각종 금융기법을 동원해 해결했다. 결국 대우의 연간 투자금액은 11억달러×1/6×1/5×1/5(=740만달러)로 줄어든다. 금융조달 방법으로는 주로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주식예탁증서(DR), 교환사채(EB)등 주식연계채권이 활용되었다. 1993년 6월 대우자동차 우즈벡공장이 설립되었는데 여기에는 6억3천5백만달러가 투자되었다. 기존 부채가 4억3천5백만달러였고, 자본금 1억달러는 우즈벡측이 현물출자하고 대우가 1억달러를 투자했다. 대우는 이중 8천만달러를 수출입은행에서 차입하여 투자했다. 결국 자기돈 2천만달러로 6억짜리 공장을 인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우의 세계경영수법은 국내에서 했던 대로 해외의 부실기업을 특혜대출로 인수한 것이었다. 국외사업은 성격상 자본의 회임기간이 길고 그만큼 위험부담이 크다. 대우 김우중회장은 신속하게 의사를 결정하는 기동성을 과시했다. 그러나 장기적인 투자자금을 감당할 수익이 있어야 하는데 1-3년의 단기자금으로 장기간 투자는 위험한 것이다. 이 때 부채비율이 100%를 넘어서면 투자자금 회수기간 중간에 닥쳐오는 불황에 견디지 못한다. 대우는 확장위주 전략은 경제가 계속 성장하고 기업환경이 좋을 때는 효과가 있었지만 환경이 나빠지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김우중회장의 외상경영론 때문에 지급보증으로 얽혀있는 해외법인 중 몇 군데라도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연쇄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김우중회장의 세계경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폴란드 대우FSO공장의 경우 대우는 생산의 3-4배 증가를 통한 2만명 전원의 고용유지와 이를 위한 11억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과다부채가 뇌관으로 2000년까지 4억5천만달러를 추가 투자해야 하는데 대우로서는 그런 여력이 없었다. 우크라이나 자동차공장의 경우 “공장이 가동되지 않는다 해도 노동자의 임금은 지급한다”라는 계약에 따라 공장이 1998년 10월 생산을 중단했는데도 임금이 지급되는 등 적자와 부채가 누적되고 있었다. 대우의 체코 자동차 공장은 체코의 마이너스성장으로 곤란을 겪은 데다가 대우의 자금난으로 설비투자를 하지 못해 연산 2만5천대의 설비인데도 99년 상반기에 겨우 1200대 생산에 그쳤다. 인도의 씨에로 자동차 조립공장은 초기에 수천대를 팔았으나 경기침체로 판매가 극히 부진했다.   

뉴욕타임스는 대우그룹 김우중회장을 그리스신화의 이카루스에 비유했다. 차입경영과 사업확장의 세계경영이라는 밀랍날개를 맹신한 결과 유동성 위기라는 바다에 추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우중회장은 수십개의 계열사를 가진 대우그룹을 경영하면서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경기고 인맥들이 중심이 되어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해왔다. 진정한 경영자는 김우중회장 혼자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금융기법 전문가로서 자금조달방법을 개발하는 일만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우부도사태는 악화된 환경속에서 이러한 독단경영이 빚은 필연적 귀결이다. 


3)부진한 구조조정


대우그룹은 1997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를 단순한 외환유동성 부족에서 비롯된 일시적 외환위기로 생각하고 구조조정을 지연시키고 차입을 늘려 국면을 넘기려 했고, 심지어는 사업확장까지도 감행했다. 대우는 1997년 12월 쌍용자동차 주식 53.5%를 인수하고 쌍용자동차의 총부채 3조4,000억원중 2조원을 떠안아 10년 거치후 일시 상환하기로 했다. 종금사 보험 등 제2금융권 부채에 대해서는 조흥은행 프라임레이트에 1.0%포인트를 더한 금리만 부담하고 금융권에서 운영자금 명목으로 1,500억원을 지원받았다. 대우로서는 과거의 부실기업 인수에 따른 특혜금융을 기대한 것이었지만 과다차입상태에 있었던 대우의 당시 상태에서는 무리한 인수였다.

대우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수출을 중시하여 이를 무리하게 늘리면서 자금부담이 커졌다. (주)대우의 경우 98년 매출액 증가분 13조원의 75%인 9조원 정도가 해외지사에 대한 외상매출을 통해 달성하였다.

IMF하에서 대우는 이러한 자금부족을 자산매각 등 자구노력에 의해 조달하기보다는 회사채 CP 등 차입확대로 대응하였다. 대우그룹은 1999년에 (주)대우 등 4개사의 부채증가와 자산재평가 등으로 자산총액이 크게 증가하여 전년도 2위였던 삼성을 제치고, 자산총액 제 2위의 재벌이 되었다. 1997년말 자산총액은 대우와 LG가 다같이 53조원으로 비슷했는데 1998년말에는 LG는 자산총액이 50조원으로 감소된 반면에 대우는 78조원으로 무려 25조원이나 늘어났다. 경영위기에 처한 대우그룹이 얼마나 회사채와 기업어음 발행으로 버터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표 2> 대우그룹의 순위 변화

                                                   (단위 : 개, 10억원)

순위

집단명

계열사수

자산총액

순위

집단명

계열사수

자산총액

1(1)

2(3)

3(2)

4(4)

5(5)

6(6)

7(7)

8(8)

9(9)

10(11)

11(10)

12(15)

13(14)

14(13)

15(19)

16(20)

현    대

대    우

삼    성

L    G

S    K

한    진

쌍    용

한    화

금    호

롯    데

동    아

한    솔

두    산

대    림

동국제강

동    부

62(62)

34(37)

49(61)

48(52)

41(45)

21(25)

23(22)

21(31)

29(32)

28(28)

15(22)

19(19)

14(23)

17(21)

16(17)

32(34)

88,806(73,520)

78,168(52,994)

61,606(64,536)

49,524(52,773)

32,766(29,267)

18,548(19,457)

14,167(15,645)

13,084(12,469)

10,696(10,361)

10,446(8,862)

8,719(9,054)

8,060(6,268)

6,704(6,586)

5,825(7,001)

5,764(4,865)

5,549(4,626)

17(12)

18(17)

19(16)

20(18)

21(23)

22(22)

23(21)

24(24)

25(30)

26(29)

27(26)

28(-)

29(25)

30(-)

 

한    라

고    합

효    성

코 오 롱

동    양

진    로

아    남

해    태

새    한

강원산업

대    상

제일제당*

신    호

삼   양*

 

17(18)

8(13)

17(21)

19(25)

21(23)

17(15)

15(15)

15(15)

15(16)

13(27)

14(20)

15(-)

21(28)

10(-)

 

5,535(8,562)

5,232(5,193)

5,178(5,249)

4,941(4,894)

4,228(3,885)

4,098(4,258)

4,097(4,339)

3,977(3,747)

3,513(2,659)

2,957(2,665)

2,798(2,847)

2,728( - )

2,701(3,060)

2,342( - )

 

합   계

686(804)

472,757(435,318)

주 : * 표시는 신규지정된 기업집단.       

     (  )내는 ‘98년도 지정시의 순위, 계열회사수, 자산총액.

     합계란의 ( )는 뉴코아, 거평의 계열회사수 및 자산총액을 포함한 수치.

자료: 공정거래위원회, 1999년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자료.


금융감독위원회가 98년 10월 18일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1998년에 들어와 지난 9월말까지의 회사채 발행 총액 34조1500원 가운데 5대 그룹이 발행한 회사채는 전체의 78.9%인 26조9500억원에 이르렀는데 이 가운데 대우그룹이 전체의 26.9%인 9조1825억원어치의 회사채를 발행해 1위를 기록했고 삼성 5조6700억원(16.6%), 현대 5조6200억원(16.5%), LG 3조9360억원(11.5%), SK 2조4920억원(7.3%)등의 순위였다. 이와 함께 투자신탁회사와 투신운용사가 보유하고 있는 5대 그룹의 기업어음 보유 비율도 70%를 초과해 5대 그룹이 단기자금시장도 독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8년 8월말 현재 정리절차 진행중인 한남 등 7개 투신사를 제외한 투신사가 보유한 기업어음 총액 31조3696억원 가운데 5대 그룹의 기업어음이 71%인 22조2746억원에 달했고, 기업별 어음 현황을 보면 대우 11조200억원(35.1%)로 1위이고 현대 5조 7829억원(18.4%) LG 2조176억원(6.4%) 삼성 2조55억원(6.4%), SK 1조4666억원(4.7%) 등의 순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초기 신용경색과 고금리 상황에서 대규모 차입은 높은 금융비용이라는 대가를 강요하였고, 이에 따른 수익성 악화는 다시 신용하락과 고금리 감수를 강용하는 악순환을 초래하였다. 특히 98년 하반기 들어 대우 CP는 타그룹에 비해 3-5% 포인트 높은 10-11%의 높은 금리조건이 부과되었다. 98년 금융비용은 6조원으로 97년 3조원에 비해 두 배로 증가하였고 당기순이익은 1997년 1350억원에서 1998년 5540억원이라는 대폭적자로 반전되었다. 98년 하반기에 들어와 정부는 재벌들의 무리한 차입경영의 부작용을 경계하여 98년 7월과 10월에 걸쳐 CP와 회사채 보유한도규제(CP의 경우 동일계열 보유한도 5%, 회사채의 경우 은행과 보험은 10%, 투신사는 15%)를 통해 제동을 걸었다. 

CSFB 증권은 1998년 6월 「한국10대재벌 개혁보고서」에서 대우재벌은 운용현금흐름이 단기자금 상환 등 자금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로서 독자적 능력으로 구조조정을 할 능력이 없다고 평가하였다(표 3). 실제로 대우그룹의 1997년 현금흐름은 마이너스로 단기차입금을 상환하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부채늘리기로 버텨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표 3> 5대그룹의 건전성 점수

 

   현대

   삼성

    LG

  대우

   SK

전반적 건전성 점수

    1.7

   4.3   

    3.0

   1.7   

   4.3

영업이익/총이자비용

             1993

             1994

             1995

             1996

             1997

             평점

2.2

2.6

2.8

1.9

2.3

C

4.4

6.0

7.0

3.7

4.2

A

2.9

3.3

3.8

2.7

3.4

A

1.4

1.5

1.6

1.6

1.7

D

2.2

2.3

2.5

2.7

4.2

A

단기차입금/운용현금흐름

             1993

             1994

             1995

             1996

             1997

             평점

 3.8

 4.3

 4.0

18.0

82.9

 F

1.6

1.3

1.4

4.0

4.2

A

 2.7

 2.6

 2.7

 4.5

46.7

 E

 8.7

25.7

45.9

 5.8

-17.5

4.0

4.2

2.7

2.8

4.2

A

순부채/자기자본

             1993

             1994

             1995

             1996

             1997

             평점

171.9

197.4

202.4

257.5

376.1

 D

161.7

124.2

109.4

183.6

240.2

 B

159.5

151.3

166.3

198.5

317.3

C

221.4

206.0

257.9

269.0

357.1

C

190.2

212.2

180.1

214.2

279.4

C

주 : 대우의 경우 대우자동차의 쌍룡자동차 합병을 반영한 수치임.

    전반적 건전성 지수란 위의 여러 평점의 가중평균치임.

자료 : CSFB, Korea's Top-Ten Chaebols: Part 1, How to play chaebol                  reform, 1998. 6


일본의 노무라 증권은 1998년 10월 29일 발행한 보고서에서 대우그룹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하였다. 이 보고서는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제목으로, 금융회사의 회사채 보유가 제한되면서 회사채 발행으로 대부분의 자금을 조달해 왔던 대우그룹이 심각한 유동성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고 내다봤다. 보고서는 대우그룹 계열사 가운데 2개사를 빼고는 주가가 액면가 미만이어서 증자를 통한 자금조달이 어렵고, 유일한 대안인 자산매각도 투자자들이 매력을 느낄만한 회사나 자산이 있는지 회의적이라고 썼다. 보고서는 최악의 경우 대우그룹이 워크아웃 가능성이 있다며 대우전자와 중공업 등 핵심계열사 주식을 매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10월27일 현재 금융회사들이 대우그룹 회사채를 한도보다 3조4600억원이나 초과 보유하고 있어 더 이상의 회사채 매수는 불가능하다며, 취약한 재무구조를 갖고 있는 대우그룹으로서는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또 대우는 앞으로 해외차입이 불가피하며 국내은행에 긴급자금 대출을 요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우는 1998년말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하면서 41개 계열사를 10개사로 줄이겠다고 발표하였고, 4월 19일 발표직전까지 7개사를 정리해 34개사가 남아 있었다. (주)대우의 교보생명 주식 매각, 유통부문 매각 및 국내외 유상증자 등 총 15조원의 자구노력으로 ’99년말 부채비율을 199.5%로 감축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998년말 부채는 97년보다 17조원 증가하고 자기자본 확충도 미흡하여 부채비율은 474%에서 527%로 오히려 상승했다. 또 1998년말부터 99년 1/4분기까지의 자구노력은 총 1조2천억원으로 목표치인 6조5천억원에 크게 미달하였다.


     <표 4> 대우그룹의 구조조정 이행실적(99.1/4분기 현재)

                                                     (조원, %)

 

97말 

실적(A)

계     획

98말

실적(D)

 

98말(B)

99말(C)

감축(증액)목표(C-A)

감축(증액)실적(D-A)

 부  채  액

42.8

60.2

30.4

-12.4

59.9

 17.1

 자기자본액

9.0

19.6

15.2

6.2

11.4

2.4

 부채비율

(자산재평가포함)

473.6

 

-

(308)

199.5

(140.1)

-270.8

 

527

(354)

53.4

 

산업자원부, 금융감독위원회, 한빛은행, 외환은행, 제일은행, 「5대그룹 구조조정 추진        상황 점검」, 1999. 4. 27.

삼성그룹과의 빅딜이 무산된 후 대우그룹은 1999년 4월 19일 자산의 해외매각(이미 추진중이었던 대우통신 TDX부문, 힐튼호텔, 하나로통신 지분 매각 외에, 대우전자, 대우중공업의 조선부문 매각 등 추가)을 중심으로 한 「추가구조조정계획을」 발표했으나 계획의 비현실성으로 시장의 신뢰만 더욱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대우그룹에 대해 자체 구조조정계획을 승인하여 문제해결을 지연시켰다.   

이러한 가운데 대우의 부실상황을 알고 있었던 외국 초국적 대형은행들은 대우 현지법인의 만기연장을 이미 중지하고 있었고, 1998년 4/4분기 이후 대우그룹은 만기가 돌아오는 기업어음을 상환하기 힘들 정도로 자금난이 심화되었다. 그래서 국내 금융기관의 협조로 간신히 기업어음 만기연장조치를 받아왔다. 그런데 1998년 8월부터 정부가 재벌의 자금독식을 막기 위해 금융기관의 회사채와 기업어음 발행한도를 총자산의 10%이내로 제한하자 기업어음과 회사채 발행을 통해 늘어나는 부채를 감당해오던 대우는 심각한 자금난에 빠졌다. 대우그룹 전체 금융권 부채 가운데 60% 이상이 기업어음과 회사채이며, 이 가운데서도 1998년 상반기 발행분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더욱이 회사채의 대체로 만기가 3년인데 비해 대우가 98년에 발행한 회사채는 1년짜리여서 99년에 만기상환요구가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특별히 대우그룹이 이익을 내거나 자산을 팔아 이를 상환하지 못하면 다시 차환용 회사채를 발행해야 하는데 금융회사들은 보유한도제 때문에 인수가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자금순환상의 애로 떄문에 일부 채권단인 이미 오래전부터 만기연장을 거부해왔다. 더구나 대우의 경영상태는 악화되어 1998년의 대우그룹 전체 매출액은 61조7천억원인데 부채가 59조8천억원에 달했고, 영업이익 3조 1900억원은 금융비용 5조9천억원에 훨씬 못 미쳤다.  

대우는 1998년말부터 금융기관의 채권회수가 본격화되면서 사실상 부도상태였다. 99년 5월께부터는 당일 자금을 막지 못하고 1차 부도를 낸 뒤 정부의 도움으로 최종부도만 면하는 일이 계속되어 왔다.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부채를 감당하기 위해 대우는 최근에 1-3일 짜리 콜자금(초단기 대출자금)에 의존해왔으며, 7월에만 갚아야 할 부채가 7조7천억원에 달했다. 결국 대우의 지지부진한 구조조정이 대우의 부도위기를 부추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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