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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님의 [자전거와 속도 그리고 폭력에 대하여 ] 에 관련된 글.
자동차도 시속 30키로로 간다면?
속도가 분명 사람을 불안하게 하기도 하지만
자동차가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폭력적으로 만드는 건가?
돕이 말한 자립성에 공감하고, 그 효율성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바다.
자전거를 타고 도로주행을 해본 후,(물론 텐덤 타고 그랬지만)
자전거가 속도가 좀더 늦을 뿐,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일단 자전거 잘 타는 분들은 그만한 속도를 낼 수도 있기도 하고
차가 밀려서도 그럴 수 있겠지만, 좁은 틈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 장점인 것 같다.
글고 자가용이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더욱
목적지까지 걸어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들기 때문에
자전거가 전체 시간 상 쳐지지 않을 수 있겠다.
그러나 자가용은 차가 밀리지 않는다면 자전거보다는 빠르게 먼 거리를 갈 수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알 것 같다.
그런데
자동차를 타는 순간, 폭력적으로 된다- 왜냐, 세상과 차단되고
자기 신체의 속도보다 10배 이상 빠르게 달리다보면, 자칫 죽을 수도 있다는 심정에 긴장하게 되어서.
그럴 것도 같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40키로로 달리는 건, 더 위험천만한 일로 느껴지지 않는가?
차는 부딛쳐도 차가 먼저 찌그러지지만, 자전거는 그런 속도로 차들 사이를 달리는 한
맨몸으로 더 위험이 느껴지지 않을까?(실제 위험도는 제쳐두고 심리적 차원에서)
그럼 더 긴장하겠지... 그럼
차와 같은 속도로 달리는, 아니 좀더 낮은 속도로 달리는 자전거를 탄 사람은
더 폭력적으로 될 수도 있는건가?
(사실, 아직 자전거를 잘 못타는 사람들, 도로주행을 꺼리는 사람들은 실로
그 긴장이 두려운 거 아닌가. 물론 그건 스스로 극복하는 게 좋다고 판단한다.
어쨌든 자전거를 못타거나 안타고 어딜 간다면, 걷지 않는 이상 차를 타고 갈 거니까.)
실로 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차에 대해서 욕 하는 것을 보면
이상한 거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조곤조곤 잘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겠지만
거칠게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거칠게 싸워야지만 운전자도 자전거를 조심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전거든 사람이든 달리고 걸을 권리가 좀이나마 확보된다고 하면서 말을 하지만
그렇구나- 하면서도 그때 사람들이 확 열받아 내뱉는 말에서 느껴지는 분노는
가급적 피하고 싶은 종류의 그런 기운이다. 한마디로 평화롭지 못하며,
때로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반작용에 대해,
정말 방법이 그것뿐인가 묻는다면, 내가 너무 순진한 건가?
'차가 더 폭력적이잖아!'라고 말하면 되는 건가?
아니면, 에헤라 잘 했네! 하고 화낸 일을 기쁘게 넘어가는 게 지혜로운 건가...
걷기<자전거<자동차.
이것들의 속도 비교를 통해서,
세상과의 단절이나 긴장감, 폭력성을 정의한다면,
사실 자전거는 걷기보다는 좀더 폭력적인 수단이 되는 거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자전거를 타는 일에 대해 정치적 올바름을 부여할 수 있는건지.
내 주변에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 많고, 나 역시 자전거를 타고저 노력하는 1人으로서,
자동차를 탄 사람들이 빵빵대거나 쓸데없이 욕을 하거나 끼어들면
불끈 올라오는 화를 참는 일은, 혹은 터뜨리는 일은 공감하지만,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면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는
그 누구도 '폭력적인 사람'의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더욱이, 우리가 걷는 속도에서 볼 수 있는 지렁이의 꿈틀댐이 자연을 느끼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런 방식으로 자연을 느낀다면,
지렁이의 속도로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이상,
지렁이에게 우리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속도로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지렁이를 통해 자연을 느끼지만, 지렁이는 우리의 속도에 벌벌 떨고 있는 건 아닌가.
만물이 어울려 사는 생태계를 보지 못하게 하는 50km의 속도.
걸으면 생태계를 볼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속도에 우리가 모두 맞춰야만, 모든 사물이 동일한 속도로 살아야 폭력이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각자 기계 등을 버리고 자신의 생체 속도에 따라 살면 폭력이 사라지는 걸까?
그럼 자전거는 어찌 되는 건가.
'자전거를 타는 것은 닫힌 나의 자신을 여는 것이고, 끊어진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지구가 건강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나 역시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매순간 인식하는 것이다. 폭력이란 별 게 아니다. 나 이외의 다른 존재가 가진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나와 동등하며, 나름의 가치를 지닌 존재들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폭력은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을까. 자전거를 타는 것은 평화로운 세상으로 천천히 가는 훌륭한 방법이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을 열고, 끊어진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런 과정은 정말 기쁜 것이다.
그렇지만, 자전거와 속도와 폭력의 상관관계를 밝힌 이 글은
계속 어딘가 불편하게 남아있다.
멀리, 빨리 어딘가로 가고 싶은 욕망에 대해
난 그렇게 부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자전거를 무척 좋아하지만,
그건 몸을 건강하게 하고 돈도 절약되고
막상 자전거 타고 어딜 가보니 시간이 좀 걸려도 지루하지 않고
전쟁의 원인이자 환경오염의 주범인 석유를 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웬만하면 자전거가 차보다 낮은 속도로 가더라도 차보다 '느리지 않게' 어딘가로 날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어젯밤, 긴 글을 쓰고
내만 보기 버튼을 누를까 하다가, 그럼 이 글이 묻힐 수도 있겠다 싶어 일단 올렸는데
집에 들어가자마자 글 고치고 싶어졌다.
그리고, 막 나와보니, 역쉬나, 댓글이 붙어 본문 수정하긴 좀 그렇고.
몇 가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떠오르는 사연들.
1. 내 짝꿍 M과 있었던 이야기.
이 친구도 자전거 광팬이다.
스스로 자전거 부품을 어디서든 가져와 자전거를 조립해서 한 대 척 만들기도 하고
머, 아시는 분덜은 알겠지만, 자전거 참 잘 탄다. ㅎ
근데, 이분, 나와 길을 걷다가 갑자기 차에게 확, $&#%!* 하고 욕을 하는 경우 종종 있다.
어으씨. 뭐야!
난 깜짝 놀라고 심장이 쪼그라든다.
나 :(시무룩) 왜 그렇게 화를 내야 해?
M : (신경질) 저 차가 사람이 가는데 빵빵대잖아!
나 : ...
M : 저게 차가 이렇게 돌아서 가면 되는데 안그러고. 사람만 있으면 빵빵거려요. 슥 밀고 들어오고.
나 : (복잡한 심경)흠. 난 괜찮은데.
이런 일은, J와 텐덤을 탔을 때도 일어났다.
J가 화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니와 말도 느리고 씨-익 웃는 것이 트레이드 마크인 그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다 뒤에서 차가 갑자기 튀어나오니 자전거를 세운다.
뒤를 돌아보고 확! 화를 낸다.
"자전거 안보여요? 운전 앞좀 보고 하세요!"
신경질이다. 충격.
워우워- 이럴 수가.
그 친구, 내가 당황한 걸 눈치채고는 예의 그 상냥한 말투로
"예전에 자전거 같이 타던 친구들이랑,,,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해가지고..."
얼마전, 차가 길가던 나와 M 뒤에서 빵- 했다.
그때부터 그분, 어떤 법전보다 더 정확하고 간결한 문구들을 줄줄줄 쏟아내시며
보행자가, 운전자가 어쩌고 저쩌고.
보행약자를 보호해야한다고 운전면허 딸 때 시험 안 봤냐 하고 따져야 한다고 한다.
차를 세우고, 나오시라고 해서
보행자 입장에선 운전자의 경적소리는 욕하는 소리로 들리는 거다.
내가 이렇게 돌아서 나가야해서 앞으로 나가는데 왜 빵빵대냐...
이렇게 말해야한다고 한다.
어흠. 그런 거였군.
몇 차례 옥신각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 친구의 퍼즐같은 말이 맞춰진다.
네 말이.. .맞다.
2. 따지고 들면 분명 생각할 여지가 생길 것 같다.
당황하는 것보다는 화를 내는 게 낫겠다 싶고
화를 내는 것 보다는 저렇게 따져주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확실히 자전거를 안 타는 사람보다
속도에, 차의 속도와 운전자의 태도에 민감해지는 것 같다.
나는 차가 슥 밀고 들어오는 건지도 모르고 그냥 비껴가며
빵 대면 헉 놀라 옆으로 비킨다. 가끔 불쾌감이 들긴 하지만, 차가 슝 하고 갈 것이므로
그냥 화도 곧 사라진다.
그리고 내가 차에 타고 있으면, 확실히 조급증이 든다.
앞에 장애물, 늦게 가는 차, 이런 것들에 대해 별 고민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 거다.
자전거를 타면서 속도가 폭력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본 사람들은
자기 속도에 대해서도 바라보는 능력이 생기는 것 같다.
운전자들도 자기 속도에 대해서 바라보는 능력이 생기겠지? 생길까?
승용차 운전자들이 옆에 큰 덤프트럭 붙거나 앞에 트럭 끼어들면,
저것들은 잡아먹을듯이 운전한다면서 씨$*@&!^ 욕을 하는 거 보기도 한다.
그렇게 속도와 덩치가 폭력이 될 수 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본 운전자들은
운전을 하면서 자기 속도에 대해 바라보게 될까?
아- 이런 당하는 경험만이 그런 능력을 키우는 걸까?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을거다. 자기가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누구나 조금은 움츠러들거라고, 생각해볼 거라고...
믿고 싶다.
3. 짝꿍 M은 자동차 운전도 한다. 어쩌다 옆자리에 얹혀 타면
가끔 답답할 때가 있다. 막 빨리 가다가 갑자기 천천히 간다.
M은 기다린다.
앞에 사람이나 자전거나 개나 뭔가가 지나갈 때까지.
나는 그 옆으로 쓱 지나가면 될 것 같은데, 기다린다.
그가 왜 기다리는지 알기까지 1-2초 더 걸린다.
역시- 난 운전대 잡으려면 수양이 더 필요하다 싶다.
자전거를 타면서 속도 수양을 해야 할 것 같다.
아항- 피곤한 하루.
노들, 아니 이룸센터에 다녀와서 소파에 잠시 누웠다.
하루 하루가 다이나믹하다-
지선생처럼, 나도 휴가가 필요한데...
여튼, 오늘 노들 강의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이룸센터에서 진행되었다.
천막 농성 중이신 곳.
변선생님과 여의도에서 만나 농성장을 찾아갔다.
나도 처음 가는 길. 두리번 두리번. 지난주에 다녀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설명을 듣고도 불안불안.
12월 3일,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장애인활동보조예산, 장애인 노동권, 장애인연금쟁취를 위한 공동행동 중이시다.
이노무 정부는 장애인복지예산을 삭감하기 위해 여러 모로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 모양이다.
구체적으로 투쟁 소식을 듣고 싶었지만,
천막 안은 사람이 가득하고,
교장샘은 간담회 준비 중이시고,
어쨌거나, 오늘은 변샘의 영화 강의이다.
단편영화 두 편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기대 기대.
이룸센터 안으로 들어가 수업준비를 했다.
로비가 강의실.
전동 휠체어를 탄 분들이 들어오시고... 열기는 뜨거웠는데
수업을 위해 가져온 빔프로젝터가 말썽인데다가 롤스크린 설치도 만만찮고
가져온 노트북에는 dvd 콤보가 없어 노트북 다시 빌리고, 멀티탭 가져오고,
연결했는데 또 빔 안되고,
그래서 2층 대회의실을 하나 빌렸다.
회의실은 정말 대회의실.
국회의원들이 둘러앉을법한, 혹은 회사 CEO들이 앉을 법한,
푹신한 의자와 개인 마이크..
전동휠체어들이 들어가도록 의자들을 한쪽으로 쭉 빼고
다시 노트북과 빔 연결...
그런데 또 빔이 안되었다. 관리실 아저씨는 어딘가 전화를 해서 왜 안되냐 물었지만, 대책 없는 상태.
다시 이동.
이번엔... 제발.
강의실2.
노트북과 연결이 필요없이 설비가 다 되어있어, 결국 영화 강의가 시작되었다.
1시간이 훌쩍 지연되는 통에
몇몇 분들은 가셨지만, 그래도
변샘이 누구시냐. 아- 저 여유.
땀을 식히며, 봉준호 감독의 졸업발표작 '지리멸렬'을 보았다.
영화, 너무 웃기고 재밌고- 그 특유의 블랙코미디.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탁월한 초이스!
학생들과 나는 낄낄 헉헉대며 영화를 봤다.
내용은 절대 안가르쳐 줄거다. ㅎㅎ
교수님의 포르노잡지와 바퀴벌레,
골목에서 쫒고 쫒기는 논설위원과 신문배달부,
검사의 똥과 밥통.
그리고 TV를 끄고, 못보고, 혹은 보는 우리들 이야기.
그러고 나서 영화 한 편을 더 보았다.
"여러분, 혹시 가리베가스가 어디에 있는 지 아세요?"
가리베가스란다. 가리베가스.
알고보니 가리봉+라스베가스.
독립영화에 가장 많이 쓰이는 소재가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이라는데
변샘은 이 영화를 가장 따뜻하고 소박하면서 내용을 잘 짚은 영화로 꼽아주셨다.
20분이 채 안되는 영화.
가리봉에서 살던 26-7세의 여공이 공장 이전에 따라 수원으로 이사가는 날.
용달차 아저씨, 벌집, 냉장고와 장농, 그리고 테니스공... 숟가락.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 생생하다.
이사- 떠도는 인생들의 처연한 뒷모습. 그러나 따뜻한 메세지.
새로 이사오는 사람들은 이주노동자들. 그녀의 편지를 읽을 수 없는,
소외된 자들끼리도 소통되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많은 말들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젖은 길바닥처럼 되었다.
끝나고는, 밍구샘이 넣어준 김밥을 모두 나눠먹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간 매번 봐왔던 한 여성분과 대화를 나누며
김밥을 입에 넣어드리고
단무지도 넣어드리고
그렇게 배부르게 참치냄새가 많이 나는, 그러나 참치는 없고 대신
참깨가 많이 붙어있던 그 김밥을
맛나게 먹고 돌아왔다.
빈집 이, 혹은 빈집 투, 혹은...
결국 윗집으로 정해졌다. 빈집1이 아랫집이니까.
오늘, 잔금을 치르고 빈집2 이삿짐을 날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협력하여 짐을 옮기고 방바닥을 문대 닦고 가구를 배치하고
뻥카도 치고 짜장면 탕수육을 먹고 고량주도 한 잔 먹고.
빈집2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
,,,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피곤해서 오늘은 안 쓴다.--- ㅎㅎ
어쨌거나 빈집2, 즉
윗집에 아마도 입주하게 될 것 같다.
이사온지 2달만에 또 새 집이라니.
지금 있는 집도 좋지만- 앞으로 다가올 집은 가슴이 설렌다.
웨웨웨웰--
어제는 노들에 안 갔다.
하는 일 없이 바쁜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 해얄까.
암튼 웨웨웰 달려오다보니 잠깐 멈춤을 해줘야 했다.
하루에 회의 4개, 연구실-피자매-빈집-노들-워크샵 이렇게 달리니
하루 쉬고 싶었달까.
열시에 자고
네시 반에 깼다가
여섯시 반에 일어나 효소와 호빵을 먹고
다시 잤다.
열한시에 일어나 이불을 둘둘말고 앉았다 누웠다 스트레칭했다 다시 누웠다.
열한시 반에 방바닥으로 굴러 내려와 옷가지를 갰다.
열두시, 300년만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우헬헬-
연구실 나와보니, 어제 노들 강의갔다온 만*가
소파에 뻗어 누웠다.
"어제 강의 잘 햇어?"
"어- 어버버 어버버했어.'
"왜, 어땠는데?"
"에이씨- 내가 준비해간 예가 하나도 안 먹혀서 어버버했더."
"?"
"돈을 얼마나 벌고 싶으세요? 하면 보통은 십억이요.
그러면 내가 그걸로 뭐하시게요? 하면 건물을 산다든지 뭐..
그렇게 말해야 내가 다음 이야기를 하는데, 이분들은, 얼마나 벌고 싶으세요?하면
천만원이요. 그러면 천만언으로 뭐 하시게요? 하니
전동(휠체어) 사게요. 한단 말야.
아쓰-- 보통 사람들은 축적욕망이 있어서 내가 할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내가 할 말을 이분들이 다 하시니..."
꺌꺌꺌-- 푸하하하
"그래서 어떻게 했어?"
"그냥, 기왕 왔으니까 준비한 건 다 하고 갈게요. 하고 마저 하고 왔어."
녹초가 된 그의 얼굴을 보며 폭소를 날린 것이 좀 미안하기도 하지만
웃긴 걸 어쩌나.
그렇게 웃고 있다보니 갑자기 어깨가 뻐근해져온다.
아쓰-
나도 곧 강의 나가야하는데. ㅡ,.ㅡ;;
'소통의 문제'라는 말은 너무 지겹다.
한 주 더 다녀오고 나서 드는 생각.
요구를 전달하는데, 나는 아직도 무척 서투르며
그건 노들에서 장애인들과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노들에서 그게 더 극대화되어 나를 자극하는 것은 분명하다.
장애를 이해하러 간다고 가는데, 정작 깨닫는 것은 나의 부족한 소통의 기술이다.
나의 요구를 잘 전달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를 잘 전달받는 것.
공통된 리듬을 즉각적으로 형성하는 여유와 센스. 그런 것들.
다른 일상들에서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거나 느껴도 그냥 지나치는데
이곳에서는 일단 불편을 ‘느끼고’ 그것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다.
어쩌면 '현장'이라는 말은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정해진 공간이 있다기 보다는 서로에게 느낌을 주고 그 느낌에 매달리게 하는 힘이 창출되는 곳.
========
이번 강좌는 이진경샘의 '맑스'였다.
열혈청년 맑스가 유럽을 돌아다니며 혁명과 접속할 수밖에 없었던 절실함.
그리고 돈과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에 대한 고찰.
반-휴머니즘으로서의 꼬뮤니즘.
그런 것들이 주 테마였다.
하이데거의 '사물들'이 떠올랐고,
선물세미나를 하며 읽었던 '증여론'이라 '선물의 역사' 같은 책들이 떠올랐다.
이웃한 것들에 따라 본질이 달라진다는, 스피노자-들뢰즈/가따리의 이론도 붙여졌다.
한 사람의 사유를 따라가더라도 거기에 무던히 많은 사유들이 덧붙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만 문제가 더 적극적으로 넘겨지지는 않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반-휴머니즘으로서의 사물들과의 접속에서
사물들에 감사하며 그 앞에서 백팔배를 한다고 하는 예는
이론적으로 유물론과 멀어보이기도 한다.
이런 질문들을 던질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시간 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질문이 던져질 수 있는 강의가 그냥 닫힌 것같은 느낌도 없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역시, 뒷풀이가 남아있었다.
아주 이번엔 무슨 토론회라도 된 듯했다.
앉자마자 시작된 박경석 교장샘의 질문.
조직화를 어떻게 해야 좋은 관계를 만드는 건지,
장애인 연금법과 장애인 노동권,
관련해서 비정규직 정규직화냐 보장소득 요구냐,
노인 1인당 복지예산에 비해 장애인 1인에 대한 복지예산이 훨씬 높은 것을 들어
관료들이 장애인 복지 예산을 더 이상 확충하려들지 않는 것을 어떻게 타개해나갈 것이냐,
논리로서도 그렇지만 현실 투쟁의 방법적 차원에서 고민해야 하는 지점들까지
교장샘과 이진경샘과 고추장과 노들교사분들의 열띤 공모.
====================
그 옆의 그룹, 또 저쪽 그룹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중에 저쪽 그룹에 껴서 한 이야기는,
장애인 당사자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농성장에 가끔 비장애인들만 모여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땐 장애인이 한 명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하고 솔직하게 생각이 든다는 것에서
장애인 운동을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것이 의미가 있지만, 좀처럼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술도 많이 먹었고, 머리도 아프고- 암튼 기력이 딸려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피자매 이야기를 하면서 남자도 피자매 할 수 있고, 하고 있다,
차이를 강조하려고 운동하는 게 아니라 차이를 넘나드는 더 좋은 신체로 거듭나기 위해
운동하는 거 아니겠냐. 이런 식으로.
병역거부운동에 여성들이 하는 경우, 이들은 남의 문제에 신경쓰는 자들인가, 아닌가?
'군대도 안 간 여성이 무슨 병역에 대해 할 말이 있냐?' '니들이 군대를 알어?' 식의 표현이
얼마나 폭력적인가.
장애인 운동도, 당사자들이 젤 먼저 나서야 한다는 명제보다,
당사자들이 젤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그 나눔을 나누기 위해 운동하는 거다.
그 효과적 전략은 함께 구성해야한다--는 어쩌면 뻔한 결론을 다시 내리고 말았다.
역시, 돌아와서 계속 그 문제가 내 머릿 속에 남아 있다.
더 나아갈 순 없을까.
스피노자가 이야기했던 공통관념의 형성,
그것은 개인과 사회가 이분화된 국가가 아니라
질적 다양체들의 총체로서의 세계를 그렸다.
그것은 차이들을 내재적으로 포괄해 자유자재로 자신을 변신시키는 역량, 즉 변용능력과
자신이 갖는 힘을 통해 다른 것들을 변신시키는 역량, 변용시키는 능력
을 강조한다.
어떤 생명체도 그들의 코나투스, 즉 삶을 욕망=노력=의지한다. 그리고
개체는 그 자체로 복합물로서 부분들로 이루어져있으면서 동시에 하나의 특이성을(singular thing) 유지하는 존재다.
다만, 외부 세계와의 무수한 우연한 만남들(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기에 우연하게 느껴질 뿐, 실은 필연적인 = 마치 불교의 인드라망 같은) 속에서 그 자체로 완전한 다른 개체들과 부딪치게 된다.
생명은 자신의 있음을 보존하려 하고 더 확장하려 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변용시키며 자기 스스로 변용한다.
1차적으로 다가오는 신체적 변용에 대한 관념, 즉 정서에서
원인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는 정신력으로의 이행.
이 때의 변용능력을 용기와 관용이라 표현했던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다시금 정리하게 된다.
용기는 이성의 명령에서 자기의 유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을 말하며,
관용은이성의 명령에서 다른 사람을 돕고 그들을 우애로 결합시키려는 욕망이다.
그리고 다시,
들뢰즈가 <에티카>의 문제의식을 세 가지로 정리한 것.
3중의 실천적 문제가 여기에 걸린다.
1. (자연 속에서의 우리의 처지로 인해 우리는 나쁜 만남들과 슬픔들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어떻게 즐거운 정서의 극한에 도달해서, 그로부터 자유롭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이행할 것인가?
2.(우리의 자연적 조건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신체, 우리의 정신, 그리고 다른 사물들에 대해 부적합한 관념들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능동적인 감정들을 가능케 하는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하는 데까지 어떻게 이를 것인가?
3.(우리의 의식은 환상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어떻게 자기 자신, 신, 그리고 사물들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따라 의식할 것인가?
-<스피노자의 철학> p.46-47, 질 들뢰즈,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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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어려운 문제네. 언젠가 본 짧은 영상물 (제목이 시속 0킬로였던가)에선, 인간의 '가속'욕망이 얼마나 파멸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는지에 주목하며 (전쟁이야말로 가속의 욕망을 부채질했다는 설명)막판에 시속 어마어마 킬로의 원자폭탄이 지상을 파멸시킨 자리에서 다시 생명을 시작한 건 바로, 시속 0킬로의, 아무 것도 해치지 않고, 많은 것들에게 삶의 자리를 만들어주며,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나무였음을 보여주었지. 상당히 찡한 감동으로 근대의 속도에 대한 모티브를 제공하는 영상물였던듯.
자전거 유저들의 울컥은 -_- 그거랑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ㅋㅋ (속도광들도 많고.) 속도가 주는 짜릿한 엑스터시와 속도에의 강박은 또 다른 접근이 필요한 문제겠지? 아아 모르겠도다. 아무튼 자동차는 그 자체로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느껴져. 중국에 살고 있는 요즘, 점점 더. (길 한번 건널 때마다 생명의 위협과 아찔한 스릴을 느낀다니까 -_- 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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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속' 욕망과 속도 조절 능력의 대결구도?좀 지나고 나니 또 속도 조절의 능력을 기르는 문제는 별개로 하고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는...
어젯밤 빈집에서 긴긴 이야기들을 나누었지.
자동차=폭력, 자전거=평화. 이런 구도에 대해서.
그리고 자전거와 자동차와 보행자의 공존의 방법에 대한 다양한 상들에 대해.
자동차 속도제한, 자전거도로 이야기들.
에코 파시즘, 지구온난화,
그렇게 시작하다가 베네수엘라 좌파와 차베스 이야기까지.
시속0킬로 영화도 보고싶다.
근대의 속도에 대해 나도 공부를 좀더 해봐야지...
근데, 전쟁이 가속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재밌다.
인과의 선후가 바뀌면
가속의 욕망이 전쟁을 부채질했다... 가 될텐데, 이건 왠지 아닐수도 있지 않나 싶은 느낌.
자동차, 나도 싫어. 타고 있을 땐 아주 죻지만.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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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로 천천히 가면 된다. 사람많으면 내려서 걸어가고.사람들은 자전거를 타도 좋은 자전거와 속력을 소유하려고하더라.
자전거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도 '구별짓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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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 간만이네. 자전거를 타도 '좋은' 자전거와 속력을 소유하려 한다는 거 공감. 무언가를 그저 하려는 것과 그것을 소유하고 독점하려는 것은 너무나 다른 차원인 것 같지만 경계가 모호한 것이기도 한 듯.불교에서 말하는 '분별심' 그게 정말 중요한 문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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