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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하이닉스 사내하청동지들이여

미안해요. 하이닉스 사내하청동지들이여

 

육아휴직을 끝내고 일터로 복귀할 무렵, 굳게 마음먹은 것이 하나 있다. ‘하청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하면 짐싸들고 말려야지. 단 원청의 정규직노동자들, 즉 원청노조가 함께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렇게 굳게 마음먹었다. 하이닉스, 매그나칩 사내하청 비정규노동자들과 보낸 3년, 그 시간은 나를 이렇게 패배자로 돌려 놓았다.
  
10년동안 변치 않았던 임금 몇푼 올려보겠다고 그렇세 소박한 기대속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던 하이닉스, 매그나칩의 비정규노동자들. 그 소박한 기대는 뒤로하고  어느새 투사가 되어야만 했던 그들. 서류뭉치 든 출근가방이 아니라, 한달치 노숙할 생필품을 구겨 넣을 배낭이 출근가방이 되어야 만 했던 그들.

우리는 그들에게 진정으로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얄팍한 돈 몇푼을 위로금으로 받고 그동안의 투쟁을 접는다 했을 때, 미안해서 눈도 마주치지 못했고 차라리 집에서 있으니까 얼굴이라도 마주지지 않는 것에 위로를 삼기도 했다.

 

너무나 야속했다.

같은 월급쟁이 신세인데, 같은 노동자인데도 길거리에 나와 있는 비정규노동자들에게 손한번 내밀어주지 않았던 정규직 노동자. 한국노총소속의 수천명의 정규직 노동조합이 너무나 야속했다. 너무나 야속하고 너무나 미웠으면서도 그들에게 속시원하게 소리한번 질러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단, 한번! 우리가 힘들 때 결정적으로 단 한번!’하는 그 미련한 믿음 하나를 버리지 못해 그랬었구나.

 

사내하청노동자, 도급회사의 노동자. 그들에게 ‘노동기본권’, 그 흔한 그 말한디가 통할 여지가 있으랴! 원청회사의 계약해지 공문 하나면, 모든게 끝장나버리는 그들. 수십년간 일해왔던 그 회사의 건물도, 그 기계도 그대로인데 하루아침에 회사만 증발해버리는 그 불가사의한 현실. 이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투사가 되어야만 했던 그들의 비극을 눈앞에 두고서, 다시는 하청노동자들이 ‘인간이기를 선언’하는 그 행위에 같이한다는 것 조차 두려워졌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하나 더 늘었다. 노무현! 이상수! 이용득! 이 사람들이 비정규노동자를 보호한다고 해서 만들어 놓은 ‘비정규보호법’. 이 보호법이 시행되자 마자, ‘이랜드그룹’에서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 알량한 ‘0'개월 짜리 근로계약서, 하루짜리 초 단기 계약서가 등장하더니 그 마저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없어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리에, 정규직노동자들이 등장했다. 다름 아닌, 용역회사의 정규직 노동자들로. 

 

아침에 한통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내리는 비 만큼이나, 행복한 하루 되세요’라고. 오늘도, 일거리를 찾아 헤메고 있을 하이닉스, 매그나칩의 비정규노동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내리는 비 만큼이나, 미안해요. 그리고, 내리는 빗방울이 모두 모여서, 우리를 절망케 했던 것들을 다 쓸어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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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다. 비정규보호법

찬란하다!  '비정규보호법'


'이딴 놈의 법이 왜이래!', '누가 이런법 만들어 달랬나요'. 그 이름도 찬란한 '비정규노동자 보호법'이 엇그제 1일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시작되자 마자 난리다. 온통 사방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잔치다.

 

이랜드 그룹이 운영하는 홈에버. 지난 6월까지 400명의 비정규노동자들이 계약해지됐다. 다 아시겠지만 비정규노동자는 '해고'란 언감생심이다. '해고'란 정규직 노동자들만이 누릴수 있는 특권일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정규보호법 시행에 따라, 홈에버는 아예 비정규노동자를 다 내보내고 용역으로 전환하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이상수 장관은 '비정규보호법' 시행에 따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 시정될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웬걸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누가 그딴 법 만들어 달라 했나요. 시정은커녕 그전에 다 짤려버리는데요'라고 말한다.

 

'꿈의 열차'인 KTX 여승무원 비정규직 노동자 50여명이 오늘 또다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간다. 그녀들은 말한다.  '비정규보호법이요. 집토끼도 못지키면서 산토끼를 잡는다고요. 차라리 고목나무에 꽃이 피길바라죠'.

 

오륙십대의 32명 청소용역노동자들의 밥줄을 끊었던 청주대는 어제부터는 아예 그녀들의 농성장에 물과 전기까지 끊었다. 그녀들은 말한다. '노동부요. 뭐할라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학교에 와서 학교관계자 눈치나보고 하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라고. 

 

십년가까이 행정사무보조로 학교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했던 정수운씨는 '비정규보호법'의 시행을 일주일 앞두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녀에게 비정규보호법은 '정규직으로 가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 아니라 '해고로 가는 썩은 동아줄, 아니 목매달'이 였던 것이다.
 
노동자의 눈물 콧물 다 닦아주겠다던, 아니 비정규직 노동자의 눈물만큼은 닦아주겠다던 노무현대통령.

그럴 요량으로, 야심차게 참여정부가 제정한 '비정규보호법.

 

그 햇살이 너무 찬란해서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감격의 눈물이 바다를 이룬건가!

 

세상은 잔인하다. 노무현정부들어서 더더욱 잔인해졌다. 신탄진에 있는 한 회사에 실습나온 실업계 고교생, 그는 실습도중 손가락이 잘린 대가로 수십명의 실습생중 유일하게 정규직으로 채용되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수군댔다. '저놈아! 정규직될라고 손가락 자른 무서운 놈이라고'.

 

세상은 잔인한데, 햇살은 더더욱 눈부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눈도 뜨지 못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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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교를 마친 충북민언련회원분들께

<금속노조의 파업이 끝이났다. 그리고 신문을 보라! 지난한주 무슨일이 벌여졌는가를!>

 


언론학교가 잘 끝났다 하니 다행이군요. 그런데 불행은 한번도 회원으로서 한번도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이구요. 그리고 만행은 칼럼란에 한달이상 글을 채우지 못한 저의 게으름이구요.

 

이수희 사무국장님과 다른 회원님들께 진심을 사과 드립니다.(철판을 깔고 애길 하자면 세달 육아휴직을 보내고 6월 1일 부터 복귀를 했는데 정말로 장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장난이 아닐 정도로 바빴다는 거죠. 하필이면 비정규사업을 맡아서 복귀했는데 터지는게 온통 비정규노동자들의 아우성이였어요)

 

그래도 사과는 진심으로 해야겠지요. 죄송합니다.

 

지난 한주, 금속노동조합의 반fta 파업에 대한 언론의 보도, 아니 이것은 보도가 아니죠.

언론을 보는 것이 무섭고, 인터넷을 보는 것 자체가 공포가 될 정도의 야수의 찌라시였죠.

2006년도 3월 달에 철도노동자들이 ktx 여성 비정규노동자들의 정규직화 문제로 파업할때 였죠. 그때 아래의 글을 썻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들 언론이라고 불리워지는 자본의 찌라시들은 항상 그래왔습니다. 2003년의 파업에도, 04년의 파업에도 05년의 파업에도 작년의 파업에도 올해 금속의 파업에도 그래왔지요.

 

이를 두고 진중권씨는 찌라시들의 행태를 다음과 같이 애기합니다. (아래의 글은 레디앙, 이창우의 그림만평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 다음 -

진중권의 [미학오딧세이 3권 '가상과 현실' 매트릭스 중에 있는 귀절을 재인용해 보겠습니다.

 

"파업이 일어났다. 우리의 신문은 이를 제시하는 선험적 틀을 갖고 있다.

 

1면 톱뉴스 <노조, 파업돌입. 수출차질 우려>
사설 <불법 파업, 단호히 대처해야>
칼럼 <가뭄으로 멍든 농심 파업으로 또 멍드나>
사회면 <기업탐방, 무노조의 신화>
경제면 <노조천국, 기업이 떠나고 있다>
긴급 인터뷰 <파업왕국, 투자 매력 상실>
해외면 <중국이 쫓아온다>
특파원 기고 <영국, 노조병 어떻게 치유했나>
석학에게 듣는다 <평등의 허상>
휴지통 <화염병의 역사>
만평 <귀족이 따로있나>

세계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민언련 회원 여러분. 그리고 이수희 사무국장님.

 

하종강 선생님의 강의가 감명깊었다 하니, 위의 진중권님의 지적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우리 민언련이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겠지요.

 

작년에 썻던 글을 아래에 첨부하면서, 인사와 사과를 마칩니다.

 

첨언입니다. 아래나오는 내용중 '철도노조'를 '금속노조'로, '복귀율'을 '파업참가율'로 바꾸서 읽어보세요. 그리고 조중동 메이저 지난주 신물을 펴보세요.

 

<철도파업과 언론에 대한 나의 감탄> 2006. 3. 17

철도파업이 끝났다. 그것도 그냥 끝난 것이 아니다. 조합원들은 찜질방에서 옷도 못입은채 현행범으로 연행된채, 일부는 경찰을 피해 깊은 산속에서 추위에 떠는 그 와중에 파업은 끝났다. 이뿐이랴! 대한민국 언론으로부터 온갖 비난(사실, 비난이라기보단 욕에 가까웠다.)을 덤으로 안은채 무기력하게 끝났다.

 

이번 철도 파업에도 우리나라의 위대한 언론이 보여주는 “파업보도 공식”이 여지없이 등장했다. 일명 “ 1단계 : 고립, 2단계 : 분열, 3단계 : 섬멸”이라는 3단계 보도가 여의없이 등장했다. 철도 파업과 관련해서 단계별로 보자!

 

우선 1단계인 “고립” 단계이다.

 

언론은 철도노조가 왜 파업에 들어가는지 설명 없이, 곧바로 철도파업으로 인한 국민고통만을 부각시킨다. 파업 며칠전부터 철도 파업으로 인한 운행률 예상 및 국민불편 가중보도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파업에 돌입하자마자, 지하철 이용객들이 짐짝처런 실린 모습과 불만 섞인 인터뷰가 쏟아져 나온다. TV, 신문등 매체 구분 필요없고, 한겨레/조선일보등 수구/진보 매체 구분도 없이 완전 일색이다. 이로서 국민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철도노조 파업을 바라본다. 하다못해 당장 철도를 이용할 일도 없는 청주의 초등학생도 철도노조를 욕하게 만들 정도다.

 

두 번째 단계인 “분열” 단계이다.

 

비난여론을 통일한 위대한 언론은 복귀율을 언급한다. 복귀율이 몇%가 넘었느니 집중보도하며 철도조합원들의 내부분열을 이용한다. 복귀를 종용하는 과정에서의 비인권적인 행위는 안중에도 없다. 복귀율의 진실성도 관심없이 오직 철도공사가 불러주는 복귀율을 부각시키며 조합원들의 내부분열을 유도한다.

마직막 단계인 “섬멸”단계다. 이제는 간단하다. “파업을 통해 무엇을 얻었나?”라는 질문을 통해 이미 고개숙인 철도노조에 다시한번 “확인사살”의 축배를 든다.

 

노동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일관되게 적대적인 논조를 일관해온 보수언론, 아니 이땅의 모든 언론은 이 전가의 3단계 보도 전술을 철도파업에 구사했고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정말로 대단한 언론이다.

 

여기서 다소 생뚱맞은 첨언 하나! 그런데 이번 철도파업엔 “귀족노조” 전략은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철도노조가 파업을 하면서 내건 요구는 “비정규직 철폐”와 “철도 공공성 사수”였고, 세부내용은 “장애인,노약자등 철도 할인제 유지”,“KTX 여승무원 정규직화”등이었다. 예전 같으면 비정규직 문제 외면하는 귀족노조라고 공격할 법 했는데, 그래도 위대한 언론은 잘 참아주었다.

 

위대한 언론의 인내심에 경탄하면서, 노조에 대한 역사적 적개심의 산물인 “고립, 분열, 섬멸”의 일관된 원칙을 지켜준 위대한 언론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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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기업 하이텍알씨디코리아의 이상한 그녀들을 생각하며

모범기업 하이텍알씨디코리아의 이상한 그녀들

 

‘처음엔 제가 미쳤는 줄 알았어요. 항상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고, 불안해서 진정도 안되고.... 아이한테 너무 미안했어요. 아이한테 신경질적인 행동이 나도 모르게 나오고... 그리고 가슴이 진정되면 내가 무슨 짓을 했나. 내가 미쳤나 하는 생각만 들고요’

 

병명도 낯설다. ‘우울증을 수반한 만성적응장애’ 판정을 받은 여성노동자가 울먹이면서 했던 말이다.

 

그녀는 말을 더 들어보자. ‘내가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고, 그래서 처음엔 말도 못했어요. 그런데 나만 그런게 아니더라고요. 우리 노동조합 사람들 다 그랬어요’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그녀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던 건 2002년. 그리고 공장안에는 새롭게 CCTV가 추가 설치되고 노동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맟춰 카메라는 움직였다. 구사대가 동원되고 식당출입이 봉쇄되고 직장 폐쇄조치가 이어졌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서야 다시 노동조합 조합원에게 공장문이 열렸다. 그런데 공장문이 열렸다는 기쁨도 잠시, 이들을 반긴건 조합원들에 대한 집중적인 따돌림, 이른바 ‘왕따라인’이였다.

 

그뿐만이었나! 비조합원에게만 임금을 인상해주고 조합간부들을 거리로 내몰았다.(이들 해고노동자들은 노동위원회와 법원으로부터 모두 부당해고, 즉 원직복직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 회사는 법원의 판결까지 거

부하고 있다.현재까지)

 

 2004년, 회사측의 각별한 노조탄압에도 꿋꿋하게 버텨낸  13명의 조합원 전원이 “사측의 감시, 차별, 부당해

고 노조 탄압으로, '우울증을 수반한 만성 적응장애'”을 받기에 이른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이유는 대체로 소박하기 그지없다. 임금인상 요구나 과한 최소한 인간적 대우를 받고 싶다는 정도의 이유다. 그 임금인상 요구란 것도 살펴보면 근로기준법만 제대로 지켜져도 해소될 정도의 그런 요구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기대는 꿈속에나 존재할뿐, 이 회사의 노동조합을 유지했던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가 집단적으로 ‘정신병’만 얻고 말았다.

 

서울에 있던 그녀들이 지금 청주, 아니 오창에 와있다. ‘하이텍 알씨디 코리아’라는 회사의 정문앞에 그녀들이 와있다. 오늘로서 꼭 일주일째다. 그런데 그녀들 낯선 타지라고, 외지인 손님대접이 확실하다. 그 여성노동자들 밤이슬 피할 천막한동 칠라하면 민중의 지팡이께선 여지없이 뜯어버린다. 장마미, 뜨거운 햇살 피할 그늘막도 3일이 지나고서야 허락되었다. 회사 정문앞으로 갈라치면, 민중의 지팡이께선 한치의 여력도 허락하지 않는다. 완벽한 무관용이다.

 

그녀들이 틈만나면 청주대아주머니들 있는 곳으로 와서 힘내라고 하신다.

 

그녀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갑자기 본사가 충북으로 이전해와 지역경제를 활성화시켜준다고, 뜬금없이 엄청난 액수의 장학금을 지역에 기부하는 훌룡한 기업으로만 알았던 그 기업에서 정신병까지 얻어가며 탄압받았던 노동자들의 존재자체도 몰랐던 우리가 너무 미안하다.

지역의 노동형제들! 오늘밤은 소주한병 사들고 오창으로 가 보는 건 어떨까! 큰 도움 못되더라도 그녀들의 말벗만 되어준다해도, 그녀들의 시름하나 덜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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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만 하는 청주대 청소 아주머니들!

울기만 하는 청주대 청소 아주머니들!

 

 

이제 내 나이도 불혹(不惑)이 저만치 앞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때가 되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내가 아는게 요만큼이라도 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지난 한주도 그랬다. 장마비가 올때쯤이란 건, 일기예보를 굳이 보지 않아도 알수는 있었다 싶었는데, 난생처음 지독한 장마비를 맞고 나니 그깟 세월을 통해 얻은 직관이 있으랴 싶다.

 

정말로 지독한 장마비였다. ‘제발 짜르지만 마세요. 네! 총장님. 우리 지금까지 일 잘 해왔잖아요. 그렇게 지내면 안되나요.’ 청주대 아주머니들은 청주대 총장을 보았을 때 울었다. 노동부 관계자를 만나도 울고, 청주대학교 사무처장을 봐도 울었다. 그런데 그 눈물이 너무 굵다. 그 어떤 장마비보다 굵었다.

손에서 피가 쏟아지고서야, 아니 잔인한 세상의 기억과 잠시 이별한 후에야 울음소리를 그쳤던 분회장 아주머니. 119 구급차에 실려가고 나서야, 장마비가 그쳤음을 느끼게 해준 분회장 아주머니.

청주대학교 본관이라는 자그마한 또 하나의 우주, 또 하나의 지구속에서 난 가장 지독한 장마비를 맞으며 지난 한주를 보냈다.

 

비정규법이 뭔지도 모르고, ‘사용자성’, ‘불법파견’ 이런 딱딱한 용어는 관심도 없는 아주머니들을 앞에두고, 세상은 근엄하게 대법전을 들고 나온다. “울고 있는 아주머니의 눈물을 닦아줄라치면, ‘근로기준법상의 사용자성’이 인정돼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라고  근엄하게 말씀하시는 청주대학교의 높으신 관계자.

 

“아주머니들, 불법파업으로 손실을 입었으니까 손해배상 청구할꺼에요.”라고 말하는, 일년동안 아무것도 한게 없이, 아주머니들의 노동의 대가에 기대어 소개비조로 기천만원을 가져갔을 법한 용역업체 사장님.

울고있는 아주머니들 사이에 갖혀 잠시동안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된 대학교 높으신 양반을 두고 “저러다가 저양반 쓰러지면 어떻게 하냐”고 아주머니들의 불법행위를 눈감을수 없다는 경찰 아저씨.

 

총장실 앞에서 울고 있는 아주머니를 끌어내려고 와서는, “여기는 우리 직장이에요. 당신들(아주머니들) 나가세요”라고 힘주어 외치는 민주노총조합원 자격의 청주대 아저씨들.

 

이쯤되면 그 어떤 수해방지대책도 무용지물이겠지.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그 어떤 수리공법이 등장한다 해도 아주머니들의 눈물로 쏟아진 장마비앞에선 허접쓰레기겠지.

 

청주대 본관을 나오니, 장마비가 늘 그렇듯이 오다 마다, ‘쏟아졌다’, ‘그쳤다’를 반복한다.

그러나, 지금도 청주대 본관 안에는 그치지 않고, 장마비가 쏟아진다. 오늘도 아주머니들은 뭐가 그리 서러운지 사람만 보면 운다. 노동부 아저씨를 봐도 울고, 청주대 높은신 아저씨를 봐도 울고, 연대온 작업복 입은 노동자를 봐도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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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대 청소아주머니와 민주화운동20년

청주대 청소아주머니와 민주화운동20년

 

50대 두 아주머니가 울고 있다. 이제 갓 돌을 지난 딸아이보다도 더 크게 입을 벌리고 울고 있다. 해고(이들에게 해고란 사실없다. 비정규직이란 신인류에겐 '계약만료'만 있다.) 통보를 받고나서 그저, 어떻게든 일하게 해달라는게 전부인데, 그래서 폼나게 국회의원과 기자회견 하기로 했던날 그녀들은 결코 폼나지 못했다.

 

 

청주대학교는 정문은 언덕길이다. 20년전 아니 십수년전만해도 그 언덕길위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 한손에는 돌멩이를 들고, 독재타도 깃발을 들고서 언덕아래 교문을 막아선 전경들을 향해 학생들이 언덕아래로 쏟아져 나왔겠지.

 

그런 청주대학교 풍경이 가물가물해지만큼 시간이 흘렀다. 청주대학교 청소 아주머니들이 교문을 지나 그 언덕길을 올라서는데, 학생들이 내려온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을 막아선다.

'너네들 왜 나왔니.'하고 물어도 대답을 안한다. '왜 막니!' 그래도 대답을 안한다. '이럼 안된다. 우린 너희들 어머니일지도 몰라'하니 학생들이 움찔거린다. 그 옆에서 어떤 교수(나중에 교수로 알았다. 처음엔 용역경비 직원일준 알았지만...)가 뭐라하고, 다시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아주머니들을 막았다. 결국 사고가 났다. 왜 나온지도, 자기가 하는 것들이 뭔지도 모르는 한 학생이 아주머니를 밀쳤고 50대 후반의 한 아주머니가 뒤로 넘어졌다.

 

87년 6월, 그 폭풍같은 그 유월이 지난 뒤 7월,8월,9월 노동자들은 축제였다. 새마을 운동식 군대같은 규율이  지배하던 공장들의 기계가 멈춰섰다. ‘임금100%인상, 악질관리자 퇴직’ 같은 수십년간 봉쇄됐던 그런 함성들만이 공장에서 나올수 있는 유일한 사람소리였다. 그렇게 87년의 민주화항쟁의 그 불꽃은 노동자들의 가슴을 태웠고, 노동자들의 살림살이에 난로처럼 다가왔다.   

 

청주대 청소아주머니들은 바보다. 20년 전에도 그 암흑과도 같았던 그 시기에도 임금인상 100%, 아니 200% 인상을 외쳤는데 임금인상 목소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그저 오로지, “용역이라도 좋으니 일만하게 해주세요” 이다. 20년 전의 그때 학생들이 밀고나왔던 청주대학교 그 언덕길에서 거꾸로, 학생들에게 길이 막혀버리고, 그 자리에서 울기만 하는게 유일하게 할수 있는 것의 전부인 그녀들은 바보다.

 

 

진짜 바보는 우리다. 87년의 주역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됐는데도, 그때보다 더 서럽게 울고있는 아주머니들이 있는데, 그 금배지들과 87년을 기념하는게 전부인 우리들이 진짜 바보다.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민주주의가 진척되었다고 그들과 함께 기념만 하는 우리가 진짜 바보다. 비정규직의 ‘87년대투쟁’을 못 만드는 우리가 진짜 바보다. 청주대, 그 아버지의 비리를 끝내지 못하고, 그 아들로의 왕위세습을 막지도 못하고, 그녀들을 울게만드는 우리가 진짜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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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다카지마 노동자들의 투쟁

시공간을 초월한 다카지마 노동자들의 투쟁

 

 

작년 오뉴월,  철강도시 포항을 뜨겁게 달군 건 뜨거운 초여름 햇살이 아니라 나이 예순, 칠순의 토목노동자들이었다. 세계 제일의 제철소 포스코, 그리고 그 포스코의 설비를 새로 짓거나 개보수를 담당하는 하도급업체의 노동자. 젊은 혈기도 엄두를 내기 힘든 포스코 본사 점거투쟁을 진행했던 예순에서 칠순사이의 이들 늙은 노동자.

 

무엇이 그들을 투사로 만들었나! 이 질문에 그들은 간단히 답했다. 바로 다단계 하도급, 즉 중간착취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답했다. 이 중간착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포스코의 도급단가 계산에서 노동자 일당이 '품셈(인건비'으로 11만 7천원이면 십장(하도급) 체제에서 반장 한사람이 밑에 도급으로 붙으면 11만원이 되고, 그 밑에 또 팀장이 붙으면 10만원이 되고, 결국 A급 일꾼은 9만 5천원, B급은 9만원, C급은 8만5천원이 된다.

 

같은해, 현대자동차의 한 사내하청업체의 중간착취 실태가 폭로되었다. 단지, 사무실 운영하고 노무관리 하는 것이 전부인 이 업체의 사장은 일용공들의 노동에 기생해 월간 약 2천여만의 순이익을 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일용노동자와 현대자동차 중간에 기생하는 이 중간착취기업(용역,파견)만 없에고 그 둘이 직접 계약한다면 이 일용노동자들의 일당은 하루 3만4천원에서 4만4천원으로 올릴수 있다 한다.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100여년전의 일본으로 가보자! 일제하 우리 선조들의 강제징용지로 악명을 떨쳤던 100여년전의 다카지마(高島) 탄광.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살아있는 노동자들과 환자들, 그리고 죽은 자들의 주검을 함께 섞어 해변에서 불태워 버렸던 다카지마 탄광, 바로 거기서 1872, 1878,1880, 1883년에 노동자들의 폭동이 연이어 터진다. 진압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사살당하고 고립당했다. 그러나, 이 폭동의 최후의 승자는 다카지마 탄광노동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싸운 대상은 무었이었으며, 이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이들은 바로, 현대의 중간착취 용역·파견격인 '나야가시라'(納屋頭)라는 인력청부업자들을 대상으로 싸웠고, '나야가시라'라는 제도의 철폐였다.

 

그 시기에 '나야가시라'는 일본만의 존재였을까! 아니다, 가장 먼저 자본주의화된 영국은 그 일찍이 이런 노동청부업자들이 존재했었다. 옆나라 중국에서는 '바오궁터우(包工頭)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제도는 어떻게 없어졌는가! 바로 다카지마 탄광노동자들의 경우처럼, 벼랑끝 반란에 의해서, 그리고 노동자들의 기본권이란 이름으로 없어져 갔다.

 

다시 100년후인 현재로 귀환해보자. 그들 선배노동자들의 투쟁덕분에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에는 '중간착취의 배제'라는 문구를 통하여 '다른 노동자의 임금을 중간에서 착취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노동자들의 기본권으로 명문화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야만적인 중간착취라는 유령는 '아웃소싱', '파견노동', '비정규보호법'등의 명목으로 더욱더 되살아 나있다. 이를 두고 무어라 해야될까!  '야만'의 귀환인까! '제다이의 귀환'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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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착취·노예노동을 권장하는 사회

중간착취·노예노동을 권장하는 사회

 

 

모처럼 사무실에 나갔는데, 중년의 여성노동자 예닐곱명이 모여있다. 이들이 나누는 애기를 귀동냥해서 들어보니 유통업체의 비정규노동자들이다. 이들의 직업이 감이 잡히는 순간 더 이상의 귀동냥할 필요가 없어져버렸다. 왜냐면 이들이 할 애기가 뻔하기 때문에....

 

이미 이들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소속이 유통회사가 아니라 유령처럼 만들어진 다른회사의 직원들로 소속이 바뀌어 있었고, 자동적으로 갱신되던 근로계약도 어느새 몇 개월마다 재개약이 반복되는 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 유통회사는 사람들을 자른단다. 

지금, 그녀들이 할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소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과 함께 태운 근로기준법도 소용없다. 그녀들이 잘리는 건, 근로기준법상의 해고가 아니라, 고상하게도 '계약만료' 이기 때문이다.

 

그녀들과 같은 이런 노동자들을 파견노동자라 부른다.

 

대한민국정부와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한국노총은 이 불쌍한 파견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을 만들었다. 얼마나 보호할려고 하는 의지가 강했던지 법률 명칭도 '비정규노동자 보호법'이라 했다.

그런데, 이 보호법 때문에 파견노동자들의 밥줄이 줄줄이 짤려나간다. 이제 이도 모자라, 대한민국은 파견업종을 대폭 확대하는 시행령을 입법예고했다.

비정규보호법에 의해,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2년 미만의 기간제 파견 노동자로 전락하다 고상하게 재계약을 거부당해 잘려 나간다. 그 보호법의 시행령으로 인해 또 다른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파견노동자로 전락하다 자신의 자리에 먼저 있던 선배들가 같은 운명이 된다.

 

여기서 파견노동의 본질을 보라! 고상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서로 물고 뜯기는 정글의 눈으로 파견노동의 본질을 보라! 바로 '중간착취'이자 '노예노동' 이다.

 

소개비라는 명목으로 용역회사는 앉아서 돈을 긁어 모은다.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고 타인의 노동에 기생해 소개비를 챙긴다. 그래서 중간착취인 것이다. 파견노동자는 자신의 근로조건에 대해서 어떤 결정권도 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해야만 하고, 주면 주는대로 받아야만 한다. 이 암묵의 규율을 어길라치면 그대로 끝장이다.

 

우리 민주노총 홈페이지에 어느 파견노동자가 글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저는 건설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 입니다.그런데 용역사무실 횡포가 심해서 도움을 청합니다. 그 내용을 열거를 해보며는 하나 하루를 일을 하며는 일당을 받는데, 하루에 10.000원씩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법에는 10%이상은 못띠는데,업자들이 담합해서 일괄적으로 띠고 있습니다. 하나 일당은 그러다 치고 교통비도 자기네가 먹고 있습니다. 차를 끌고 가며는 기름값으로 2000원을 주는데, 5명도 10.000원, 6명도 10.000원, 7명도 10.000원, 입니다. 이러한 법이 대한민국에 어디에 있습니까!"

 

비정규보호라는 명분을 대고, 중간착취와 노예노동을 권장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살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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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관점이, 우리 사회에 유익한가!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어떤 관점이, 우리 사회에 유익한가!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얼마전, 딴 곳에 실린 저의 글에 대해서 댓글이 달렸다. 댓글의 요지는 저의 시각이 일방적으로 한 곳만 바라보는 편협함의 극치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비이성의 광기'란 나의 글을 뒤집어 '광기어린 비이성'라고 나를 놀려댔다.

 

요즘, 상생(相生)이란 말이 유행하는데 노동조합운동의 일선에 있는 사람으로서 내게 이말처럼 난해하게 느껴지는 그 이상의 단어는 없다. 과연 노동자와 자본가, 노-자관계에 상생이란 존재하는가! 상생이란 말의 반대편에는 '서로 물어 뜯다가 같이 죽는' 그런 개념이 있을텐데 난 아직 그런 개념을 현실로 목격한 적이 없다. 쉽게 말하면 노동자들의 자주적 단결체인 노동조합 때문에 자본, 즉 회사가 망한 것을 보지 못했다는 애기다. 여때까지 눈뜨고 내가 본 것은 월등한 힘을 가진 것은 항상 자본이었고, 그 힘의 관계에서 결과는 불보듯 항상 그런 식이었다. 칼자루를 쥔 사람과 벼랑끝에서 칼날을 맨손으로 막아선 사람에게 상생의 전제조건인 상호 양보란 것이 실은 얼마나 불평등한가!


연간 순이익만 수조원을 올리는 대기업 하이닉스가 노동조합 만들었다고 연봉2천만원 10년차 비정규노동자를 한순간에 잘라버렸다.  그렇게 쫓겨난 이 일회용 비정규노동자들이 상생을 위해 양보할 것이 존재하기나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 싸움, 대기업과 비정규노동자 사이의 이 싸움 끝은 너무나 뻔하게 예견되어 있었고 그렇게 끝났다. 너무나 눈이 부시게 처절할 정도로...

 

하이닉스 비정규노동자들의 문제에 있어서 이들 사이엔 상생의 여지가 없었다. 오로지, 밥줄(한 가족의목숨줄이다) 끊긴 노동자들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지 하이닉스란 대기업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난 매우 편협하다. 노동문제만 나오면 난 노동자의 이해관계에서 잔머리를 굴려보고, 그 속에서 행동반경도 가지려 한다. 난 이것이 우리 사회의 보다 많은 사람들, 다수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까지 확신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성운동이 올바를수 있었고 많은 놀라운 결과들(제도와 인식의 변화)을 만들어 낼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보편적 기본권과 평등권을 옹호하는 운동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처럼, 노동자 운동 또한 그 기본적이 성격이 같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의 차별철페 운동, 그리 오랜 시간의 뒤안이 아니라 얼마전까지만 해도 장애인들의 기본권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했지만 이제는 국영방송의 광고조차도 '장애인들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라고 이야기 할 정도 까진 왔다. 우리사회는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보편권, 기본권이 일시적 기복을 딛긴 확지만, 역사적으론 확장되는 형태로 발전해가고 있다. 왜냐면 그것이 옳았기 때문에...

 

나는 편협함이란 것, 대립적이고 때론 적대적이기 까지 한 양대집단속에서 어느 일방의 이익을 주장한다는 것이 결코 편협함이라 보지 않는다. 진짜문제는 그 편협함이 누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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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를 벌레만도 못하게 보는 시선

노동자를 벌레만도 못하게 보는 시선

학교급식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의 가슴시리게 사무친 애기를 들은적이 있다. 이 아주머니가 가장 하고 싶은 것중의 하나가 초등학교 딸아이와 함께 다정하게 손잡고 학교 정문을 지나가는 것이란다. 아니, 그것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해보고 싶은 일중의 하나가 될까.

그러나, 그녀의 어린딸아이의 눈에 비친 어머니는 못나고, 공부도 못해서 결국 남들 하지 않는 힘들고 천한 일을 하는 부끄러운 대상이였다. 그리하여 그 어린 딸아이는 학교 정문을 들어가는 순간부터 자기 어머니와 남남으로, 누가 알아볼까 눈길한번 주지 않는다.

누가 이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기억이 떠오른다. '이놈의 시키, 니덜 공부안하고 맨날 그려혀라! 나중에 니네덜 뭐하는지. 남들 양복입고 에어컨 나오는 사무실에서 일할 때 니덜 청소나 하고, 아니면 공돌이 공순이 된다. 잘 생각해라'라고 힘주어 말하는 옛날 중학교 담임선생님 모습.

아 그랬었구나. 노동자란 말대신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웠던 우리들의 선배노동자. 언제나 공부안하고 못나고 그래서 실패한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로, 그래서 사람들 머릿속에 인이 박혀버린 노동자란 개념. 그렇게 우리는 배워왔구나!

양반, 상놈 구별되는 시대는 조선시대로 끝났다 하지만, 양반상놈 구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하긴 회장님의 아들로 태어나면 대대로 회장님이 되는데, 누군 그 회장 아드님 하룻밤술값보다 못한 일년 연봉받자고 일하는 인간군상들이 수두룩 한데 그 무슨 얼어죽을 평등사회.

말하는 모양새로는 그 밉기가 노무현 대통령에 뒤지지 않는 한나라당 이명박씨가 또 미운 말들을 쏟아냈다.

"(지난달 인도의 한 업체를 방문해 보니) 소위 대학 출신 종업원들이 '우리는 노동자가 아니다'라며 평시에 오버타임을 해도 수당을 안 받는다고 하더라."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조도 만들지 않는다던데, 만들 수 없어서 못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 수 있는데도 스스로 프라이드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노동자 알기를 조선시대 상놈으로 취급하는 말인데, 풀어보자면 양반(대학출신 종업원)이 프라이드가 있어야 양반인데 어찌 요즘 우리나라에선, 어찌 양반의 프라이드도 내팽개쳐 버리고 스스로 상놈(노동자)이 돼서 노조를 만드냐 하는 말이다.

이명박씨가 노동자 알기를 이렇게 알고 있는데, 교수들의 노동기본권에 대해서 그의 생각은 뻔히 보인다. "대학교수들의 노조를 만들기 위한 법안이 국회 상임위의 소위원회를 통과했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대학교수란 사람들이 노조를 만들겠다니, 교육이 제대로 되겠냐." 이명박씨는 교수노조에 진짜로 충격을 받았나 보다.

아, 이쯤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 비싼 과외비를 대줄 능력도 없고, 오늘 하루도 잔업특근에 몸둥이를 학대하는 노동자들이여, 그래서 자식들에게 다시 노동자가 될 수 밖에 없는 DNA를 물려준 노동자들이여! 우린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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