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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영화 속 로봇의 진화, 그리고 로봇들의 반란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11


영화 속 로봇의 진화, 그리고 로봇들의 반란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몇 년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일본의 '아시모'(ASIMO)에 맞먹는 인간형 로봇 '휴보'(HUBO)를 개발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를 보면, 인간의 동작, 사고와 판단 능력을 기계 속에 심으려는 인류의 노력이 끊임없이 경주되고 있는 듯싶다. 제 삶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SF영화 속에서도 그 줄거리를 이끄는데 로봇은 줄곧 중요한 역할을 점해왔다.

이번 호는 70년대까지 영화 속에 등장했던 로봇의 모습에 대한 얘기다. 영화에서는 저급의 단순 동작을 반복하고 반응하는 기계에서부터 인간의 외양에 감정까지 갖춘 사이보그 형식까지 다양한 로봇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기계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에 얼마나 근접하는가의 정도에 따라 로봇, 안드로이드, 인공지능 로봇, 사이보그, 휴마노이드 등으로 구분되거나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들 로봇의 이미지 또한 그 때 그 때마다 인간의 충복으로써, 혹은 권력의 수행자로써, 혹은 암울한 미래의 상징으로써 변해왔다.

 



권력의 이미지거나 인간의 충복이거나

아마도 영화속 로봇의 최초 모습은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1927)> '퓨쳐라'(futura)일 것이다. 미친 과학자 로트왕(Rotwang)에 의해 만들어진 이 로봇은 기계의 외양을 하고 있으나 마리아의 정념을 불어넣어 인간과 기계 조합을 시도한 초기 사이보그 형태다. 애초 메트로폴리스의 지배자 조 프레데르센(Joh Fredersen)의 죽은 부인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퓨쳐라는 지하 노동자들을 선동해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악녀로 등장한다. 권력의 하수인과 같은 로봇의 모습은 <THX1138 (1971)>의 사이보그형 안드로이드 경찰들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절대 권력의 폭력 수행자로, 은색의 금속 얼굴에 경찰복을 입고 손에 긴 진압용 전자 곤봉을 든 이들은 마치 권력의 냉혈한 하수인처럼 행동한다. 비록 외계인이 만들어낸 로봇이긴 하나, <지구를 조준하라 Target Earth (1954)>에 등장하는 깡통 로봇 또한 레이저 빔을 내뿜으며 닥치는대로 인류를 말살하는 이름모를 외계 종족의 하수인으로 등장한다.

        그 정반대의 경우로, <금단의 행성 Forbidden Planet (1956)>에 등장하는 로봇 로비(Robby the Robot)는 당시 미국 아동들의 장난감 문화를 바꿀만큼 인간에게 애완견과 같은 존재로 로봇의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지구가 멈춰선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1951)>에서 외계 행성의 평화사절단으로 온 클라투(Klaatu)의 충복 로봇 '고르트'(Gort)그 충성심에 있어서 가히 따를 로봇이 없다. 비록 고르트의 주인이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긴 하나,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른 주인을 살리거나 주인의 말에 복종하는 로봇 이미지를 또 한번 강하게 남겼다.

        인간을 따르고 인간 사회에 우호적인 로봇의 모습은 <침묵의 질주 Silent Running (1971)>에서 두드러진다. 영화의 무대는 미래 어느 우주 화물선이다. 생태계 파괴로 지구는 거의 모든 환경이 괴멸한 상태다. 주인공 프리맨 로웰(Freeman Lowell)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친환경주의자다. 우주선에 자연의 온실을 만들어 식물을 재배한다. 하지만, 우주선 본부는 화물 수송의 본업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추장스런 온실들 모두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극도로 분노한 로웰은 본부 명령을 수행하는 한 동료 승무원과 몸싸움 끝에 사고로 그를 죽이게 되고, 내친 김에 나머지 온실 폭파 작업을 수행하던 승무원 둘까지 폭발물로 날려보낸다. 화물선에 홀로 남은 그는 드론(Drone)이라 불리는 화물수리용 로봇들을 리프로그래밍해 충직한 하인처럼 부리거나 혹은 친한 친구처럼 지낸다. 프리맨은 로봇 드론 원을 '듀이'(Dewey), 드론 투를 '휴이'(Huey)라는 이름을 붙힌다. 그는 로봇들과 카드 게임도 같이 하고, 땅을 파 나무를 심으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본부 우주선이 자신의 화물선에 접근하면서 동료 승무원을 죽였다는 자괴감과 온실을 살려야겠다는 심정에 프리맨은 극단의 선택을 한다. 듀이에게 그 온실칸을 맡긴 채 우주 저 멀리로 쏘아보내고, 그는 사고로 다친 휴이와 함께 화물선에 남아 스스로 자폭한다. 배경 음악에 70년대 히피운동에 앞장섰던 조엔 바에즈(Joan Baez)의 환경친화적 음악이 은은히 깔린다.

        다른 어떤 영화보 <침묵의 질주>는 로봇에 대한 인상에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프리맨이 운전 실수로 다치게 한 휴이에 느끼는 인간적 슬픔이나 단지 기계에 불과한 듀이에게 생태계의 상징인 온실을 맡기는 장면 등은 인간의 충복으로서 로봇의 이미지를 넘어서 자연과 공생하는 기계의 미래까지도 점친다.    

 


위기의 징후로서 로봇들의 반란

반대로 인간에게 통제 불가능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로봇들의 미래 모습이 크게 눈에 띈다. 영화 <웨스트월드 Westworld (1973)>에선 로봇 오류에 의해 생길 수 있는 위기 상황을 다룬다. 인간들의 유흥을 위해 서부 시대, 고대 로마, 중세의 세가지 주제로 델로스(Delos)라는 가상의 테마공원이 만들어지고, 실제 인간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들이 각각의 테마의 현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동원된다. 하루 체험을 위해 막대한 돈을 지불한 관람객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현실감을 느끼지만, 로봇들은 점점 오류를 보이며 인간들을 해치기 시작한다. 중세 로봇 기사가 관람객을 살해하고, 로봇 뱀이 사람을 물어 죽이고, 서부의 악당 로봇(율 브린너역)이 체험 관객에 대고 총질을 해댄다. 유희 체험을 위해 만들어진 델로스엔 살인극이 벌어지고 통제 불가능의 아노미 상태에 이른다

       

B급 로봇 영화의 결정판, <휴마노이드의 탄생 The Creation of the Humanoids (1962)>은 핵 폭발 이후 92%의 인간이 멸종되고 도시 건설과 생산력 증대를 위해 로봇들이 인간보다 문명의 핵심에 서는 미래 사회에 대한 얘기다. '클릭커'(the Clicker)라 불리는 안드로이드 로봇들이 대거 활동하고, 이들이 직접 새로운 종류의 로봇 생산까지 책임진다. 로봇의 진화가 계속되면서, 당시 로봇의 핵심 모델이었던 R-34는 방사능 시대에 살아남을 후대의 생명체로 나약한 인간들이 부적합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이들 로봇은 인간과 똑같이 감정을 지니고, 인간의 기억을 갖고, 살인에 대한 충동까지 느끼는 불법 개조 모델, 휴마노이드 R-96을 만들어 모반을 꾀한다. 인간들이 로봇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신체질서국'(The Order of Flesh and Blood)의 몇몇 관리마저 비밀리에 R-96로 개조된다. R-96의 특징은 죽기 4시간 전의 인간 신체와 기억을 필요로 한다. 마치 외계인의 증식 방법처럼, 뇌 기억을 고스란히 로봇에 옮기고 죽은 인간의 거죽을 씌워 원래 인간을 대체한다. 휴마노이드들은 자신들에게 단지 한가지 빠진 약점인 재생산(출산)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또 다른 진화된 모델 R-100을 만들자는데 일치를 보고 영화의 막을 내린다.

        <악마의 씨 Demon Seed (1977)>에 이르면, 로봇 반란의 위기는 공포로 돌변한다. 또한 휴마노이드 모델 R-100의 실제 모습도 이 영화에선 볼 수 있다. 해리스(Alex Harris) 박사는 사업가들의 수주를 받아 '프로테우스 포' (Proteus 4)라는 마치 유기체처럼 살아있는 뇌덩어리의 인공지능 컴퓨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프로테우스는 인간이 만들어냈지만, 통제 불능의 무서운 괴물로 돌변한다. 프로테우스는 자신이 갇혀있는 터미널 박스를 나와 걸어다니는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의 숙주는 해리스 박사의 아내 수잔이 된다. 연구소와 연결된 수잔의 집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로봇, 컴퓨터 터미널, 자동 장치들은 프로테우스의 통제아래 들어간다. 수잔은 외부로 나가는 모든 통로가 봉쇄되고, 심지어 그에 저항하려다 로봇에 이끌려 포박까지 당한다. 결국 프로테우스가 강제로 그녀의 자궁으로부터 채취한 세포와 자신의 인공 유전자를 재배열하여 스스로 완벽한 사이보그 아기를 낳으려 한다. 한편 연구소에선 프로젝트를 지원했던 사업가들이 프로테우스가 지닌 위험성과 그 상업적 가치를 못미더워 이를 폐쇄하는 결정에 이른다. 전원을 잃기 전, 프로테우스는 수잔의 자궁에 '악마의 씨'를 밀어넣고, 한 달여만에 그녀의 배 안에서 로봇 아이를 속성 성장시킨다. 그 악마의 생명은 프로테우스가 만든 정육면체의 금속 인큐베이터에서 5일간의 숙성을 거쳐 태어난다. 수잔은 그 인큐베이터의 괴물을 죽이려 시도하나 괴물의 금속 비늘을 벗겨내자 병으로 죽었던 자신의 딸과 똑같은 아이의 얼굴과 피부를 본다. 영화는 음산하게  그 딸아이가 프로테우스의 목소리로 "나는 다시 살아났어"라 외치며 끝난다.

        

    세 영화의 로봇관은 비관론이라기보다는 거의 심각한 공포 사회의 모습에 가깝다. 로봇이 인간을 물고,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을 숙주로 삼는 미래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인류 역사이래 기술의 진보에 열광하는 자들에게 그의 오류와 위협을 감안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러시아 체르노빌 원전의 끔찍했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얼마전 지진으로 일본에서 가장 큰 핵발전소의 핵폐기물이 그 근해에 대량 유출된 적이 있다. 강도 높은 지진에 대한 예측 오류로 인한 인재라 한다. 앞으로 그 핵폐기물이 물속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과학기술이 안전하다는 믿음은 언제나 예상치 못했던 인간의 지적 한계 능력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미래 사회 로봇의 반란이 그리 상상만은 아니라 여겨지는 까닭은 아마도 알면 알수록 끊임없이 통제 불가능의 오류들로 인간을 괴롭히는 과학기술에 대한 지적 불안감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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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감시사회의 섬찟한 미래가 우리의 진짜배기 현실로 되돌아온다면...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10

 

감시사회의 섬찟한 미래가 우리의 진짜배기 현실로 되돌아온다면...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챨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1936)>를 보면, 한 굴뚝 공장에서 경영주가 노동자를 제어하기 위해 쓰이는 갖가지 기법들을 동원한다. 컨베이어벨트, 자동 식사장치, 노동 분업 등은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 출입 펀치 카드 리더기와 폐쇄회로 TV는 소위 '농땡이'치는 자들을 파악하는데 이용된다. 영화에서 채플린이 쉬야하러 화장실에 가서 몰래 담배를 꼬실르다 거기에 설치된 공장주의 폐쇄회로를 통해 뒷덜미를 잡히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감시는 이렇듯 보이지않는 은밀한 곳에서 저도 모르게 일어난다. 감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로부터 생성된다. <모던 타임즈>에서 감시는 공장 안이란 공간을 통해 노동 생산성을 뽑아내려는 자의 권력과 전제적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감시는 요즘엔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소비 행태를 분석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 영역을 확장한다. 우리가 아는 감시는 무엇보다 권위주의 국가에 의해 크게 저질러졌다. 사회의 불순분자 혹은 반체제 인사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에 대한 블랙리스트 작성, 도청, 감청, 위치추적, 미행 등이 그것이었다. 소위 유비쿼터스 사회로 오면, 감시의 행태는 좀 더 숨고 식별 불가능하다. 현대 사회에서 감시자는 언제나 감시 행위를 시민들의 효율적 관리라는 명분으로 감싼다. 그래서 효율성의 논리 밑에 가려진 감시의 그늘을 찾아내기가 더욱 어렵다. 게다 첨단 기술의 발전은 그 은밀함을 더욱더 강화한다. 작아지고 이동 가능한,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유무선 감시가 활개친다.  

 

테크노-관료사회의 미래

어느 누구보다 감시사회의 미래를 잘 표현했던 작가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을 꼽을수 있다. 그는 SF소설의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되는데, 이는 상상에 의존한 기존의 장르 표현과 달리 있음직한 현실에 기반해 서사를 풀어나가고, 정치적으로 경직된 관료 사회의 모습을 빗대어 형상화하고, 그 결말 또한 비관적이기 그지없다는 점에서 기존의 장르 특성에 보다 많은 다양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오웰의 대표작 <1984>를 영화화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1956영국에서 이뤄졌다. 가상의 핵폭탄이 터져 세계는 불과 몇 개의 대륙만이 남고 그 중 '오세아니아'라 불리는 대륙은 '빅브라더'의 지배하에 놓인다. 이 영토 안에서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이 빅브라더의 통치권자 아래 감시된다. 눈깔처럼 깜빡거리는 '텔레바이저들'(televisors)이 그의 수족이 되어 모든 곳을 지켜본다. 한편 주인공 윈스턴(Winston) '진실부'(The Ministry of Truth)라는 곳에서 과거 사실과 역사를 현재에 맞게 왜곡하고 필요에 따라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는 일을 맡고 있다. '사상관리 경찰국'(the Thought Police)에서 일하는 쥴리아(Julia)는 언제부터인가 윈스턴을 사랑하고 그에게 마음을 전하려 한다. 이들 둘은 깊은 관계를 지니지만, '빅브라더' 통치 아래서는 적에 대한 증오 이외에 남녀간 사랑의 감정은 금지돼 있다. 밀정에 의해 그들의 감정이 발각된 윈스톤과 쥴리아는 결국 취조실에 잡혀가 '빅브라더' 사회에 금지된 불순의 감정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세뇌를 받고 빅브라더의 힘에 굴복한다. 영화는 비관적으로 끝을 맺는다. 윈스턴은 한 때 그의 사랑하던 연인이었던 쥴리아를 외면한 채, "만수무강 하십시오, 빅브라더!"를 미친 듯 소리치며 거리를 뛰쳐나간다.     

 

사랑과 자의식은 권력의 적

프랑스 뉴시네마의 기수 쟝 뤽 고다르(Jean Luc Godard)가 만든 영화, <알파빌 Alphaville (1965)>은 또 다른 감시사회의 비전을 펼친다. 이 영화는 빅브라더 컴퓨터와 이를 만든 과학자에 지배당한 한 사회를 음울하게 보여준다. 영화 촬영 거의 대부분이 밤에 이뤄진 이 영화는 침침한 르와르 장르에 전통의 SF영화를 뒤섞고 있다. 주인공 이반 존슨(Ivan Johnson) --- 그의 본명은 레미 꾸숑(Lemmy Caution)으로 후에 밝혀진다 --- 외계(the Outlands)에서 알파빌이란 도시로 보내진 비밀 첩보원이다. 그의 임무는 알파빌에 건너가 연락이 끊긴 자신의 동료들을 찾고, 그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있다. 동료의 행방을 찾다 그는 알파빌 시민들이 폰브론(Vonbraun) 교수와 그의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60'에 의해 감시받고 세뇌당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러는 동안 이반은 폰브론의 딸 나따샤(Natasha)에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알파빌이 사랑이나 인간의 자의식 등 비논리적 감상을 퍼뜨리는 자들은 공개적으로 처형되고, '프로그래밍과 기억국'이라는 곳에선 매일같이 단어의 의미를 컴퓨터 논리에 맞춰 새로 만들고 수정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모든 단어들을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삭제하는 사회임을 깨닫는다. 예컨대, 알파빌 사람들은 컴퓨터 논리에 따라 '왜냐하면'을 표현하지만, '?'란 단어와 그 물음을 기억에서 지우고 산다. 권력에 대한 의문 혹은 감정에 충실한 언어들은 철저히 그 사회로부터 배제된다. 그럼에도 나따샤는 이반을 통해 그 잃어버린 사랑과 의식이란 단어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알파60으로부터 외계 첩보원임을 발각당한 이반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결국 그는 폰브론 교수를 총으로 살해하고 나따샤와 함께 그 마을로부터 탈출한다. 자동차로 떠나면서, 나따샤는 그녀가 힘겹게 떠올린 단어 "사랑해"를 이반에게 속삭인다.    

           

이름대신 일련번호로 호출되는 사회

조지 루카스(Geroge Lucas) 감독의 초기작 (1971)>은 감시사회의 어두운 미래를 그리는데 그 절정에 서 있다. 그가 그린 감시사회의 인간 모두는 머리를 밀고 하얀 환자복같은 옷들을 입고 다니며 이름 대신 일련번호로 호명되어 살아가는 몰개성의 생명체다. 거대 정신병동을 연상시키는 이 지하도시에서 모든 이들은 권력자에 의해 투여되는 약물로 통제된다. 이 약물은 개성을 말살하고 사랑과 섹스 등 인간 감정을 누그러뜨리는데 쓰인다. 또한 이 사회에선 인간들을 감시하고 실제 폭력을 써서 통제하는데 사이보그 형태의 '안드로이드' 경찰들이 동원된다. 어느날 여주인공 LUH3417은 그 약물의 중독성을 깨닫고 은밀히 자신의 약을 줄이고, 함께 룸메이트로 기거하는 남자주인공 THX1138의 약 또한 바꿔치기 한다. 약물 중독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이 둘은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급기야 사회로부터 금지된 섹스 행위를 하게 된다. 이들의 사랑은 권력자의 레이더망에 잡혀, 결국 이들은 출구가 보이지않는 시뮬레이션의 백색 방에 각각 감금된다. 후에 THX1138은 자신이 사랑하는 LUH3417이 이미 권력에 의해 소생 불가능할 정도로 다른 인간으로 바뀌었음을 알고 체념한 채, 결국 바깥 세계로의 탈출을 결심한다. 안드로이드 경찰들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하 긴 터널을 지나 이제껏 보지못했던 태양으로 이글거리고 새들이 날아오르는 자유의 땅에 당도한다.          

        

미래 감시사회의 모습

예서 짧게 소개된 세 편의 영화들은 각기 다른 나라들에서 다른 시기에 제작되었지만 다같이 감시사회의 공통적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게다가 어느 정도 과장은 있어도 우리의 현실과 많이 닮아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우선 사람들은 이름 대신 사회가 부여한 일련번호로 호명된다. 일련번호는 인간의 언어라기보다는 컴퓨터의 언어고, 통제와 분류 목적으로 이용된다. 한국 사회의 문제많은 주민번호도 그에 상당부분 상응한다. 휴대폰 개통, 교통카드, 인터넷 실명제 등등에서, 우리가 나면서 지니는 주민번호는 스스로를 호명하는 족쇄로 쓰인다.

        다음으로 인간 감정의 통제다. 특히 영화들에서 사랑은 금지된 덕목이다. 세 영화 모두에서 주인공들의 사랑이 권력과 반목을 이룬다. <1984>에서는 사랑대신 증오를 키우고, <알파빌>에선 아예 사랑이란 말을 사전에서 없애버렸고, 에선 권력이 사랑의 감정을 거세하기 위해 약물을 투여한다. 섹스 행위도 권력이 허하는 선에서만 이뤄진다. 오직 차가운 과학의 논리가 사회를 떠받치는 중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다시 우리 현실을 보자. 우리는 경제, 사회, 과학기술 등 정책 수립시에 효율성의 논리를 외친다. 게서 소외되고 침묵하는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하는 것은 시민의 개개인 감성을 죽이는 기계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간 감성의 억압 행위는 오늘날 관료사회가 보여주는 비인간적 통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언제 어디서든 노출된 개인의 사생활이다. 에서 LUH THX, 그리고 <1984>에서 윈스톤과 줄리아의 은밀한 사랑은 권력자들의 시선에 완벽히 노출돼 있다. <1984>에선 이웃에 의한 감시마저 가세한다. <알파빌>에선 '거주자 통제국' (Residents Control)이란 곳에 설치된 알파60이 전 도시의 시민들을 세뇌하고 지켜본다. 홀로된 곳에서 움치고 뛸 수 있는 자유가 완벽히 차단된 최악의 사회들이다. 이제 우리는 유비쿼터스 사회에 열광한다. 언제 어디서든 연결된 사회의 위험성은 모든 곳의 감시 가능성으로 돌변할 수 있다. 공적 공간에 은밀히 설치된 폐쇄회로 TV, 몰래카메라, 휴대폰 카메라, 인터넷 쿠키, 모바일 친구찾기 서비스, 지리정보위치 시스템(GPS) 등 편의와 효율성에 받아들인 기술이 우리 스스로의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결국 이들 영화는 기술의 진보에 열광하기 이전에,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되돌아볼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렇지않으면 영화 속 섬찟한 상상이 우리의 진짜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경종도 덧붙인다.         

 

(20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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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파괴의 과학에 스러진 인류, 삶의 과학으로 곳추 세우기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9

 

파괴의 과학에 스러진 인류, 삶의 과학으로 곳추 세우기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지난 호에 우리는 초기 흑백 영화들이 과학기술로 인도된 멋진 신세계의 과장된 미래 모습을 그리는데 열중했음을 보았다. 이 밑바닥에는 과학기술이 이뤄낸 생산력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크게 자리잡고 있음도 확인했다. 예컨대, 톨스토이의 원작 소설이자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1927)>에 큰 영감을 주었던,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초 SF영화 <앨리타: 화성의 여왕 Aelita: Queen of Mars (1924)>에서도 한 때 인류 구원의 세계로 제시됐던 사회주의 체제 혁명에 대한 열광과 당시 인간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동경이 잘 녹아있다. 이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라 하면, 레닌의 '신경제계획'(NEP)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로 박차를 가하고, 사회 진보와 생산력 아래 예술의 가치를 뒀던 소비에트 '구성주의' (constructivism)가 한참 유행하던 때이기도 하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한없이 밝았고, 혁명의 이상향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고,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위대함은 이를 위한 동력으로 간주되었다. 영화 <앨리타>에 등장하는 화성인들의 건축과 그들의 의상 등에는 당시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을 칭송하고 이를 상징화하여 표현한 무대 효과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물론 <앨리타>에선 이상향의 비전 제시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노동자를 등쳐먹는 당 간부, 어리숙한 소비에트 형사들, 화성 노동자들의 반란을 자신의 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엘리타 여왕의 배반 등을 통해 과거 전제군주 시대의 나쁜 습속들이 새 시대에도 근절되지 못함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허나 이들에게 인간평등의 신세계의 미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고, 기술 진보를 통한 신세계 건설의 믿음은 그 어느 시대보다 확고했다.

 

인류 재앙과 절멸의 불길한 상상들

피비린내 나는 정적 숙청과 관료주의로 소비에트의 비전이 차차 빛바래고 미소간 군비 경쟁의 팽팽한 냉전이 찾아들면서 인류 절멸에 대한 불안감은 점점 깊어진다. 핵실험이 늘어나면서 이에 개탄하고 인류 절멸을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차차 지지를 받기 시작한다. 지면을 통해 오래 전에 살펴보았던 SF 영화 속 거대 괴수들과 돌연변이들의 출현은 방사능 오염의 공포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던 사례들이었다. 무엇보다 구소련과 미국의 군비경쟁과 핵실험에 의한 지구 절멸의 순간은 발 게스트(Val Guest)의 영국 영화 <지구가 불타는 날 The Day that the Earth Caught Fire (1961)>에서 그 의미가 생생히 전달된다.   

        가상의 어느 60년대초, 미국의 남극 핵실험과 구소련의 시베리아 핵실험은 지국 축을 뒤흔들어 그 궤도를 태양 쪽으로 내밀리게 만든다. 이로부터 지구가 재로 될 날이 4개월 남짓 남게 된다. 이후 전세계는 이상 기후의 매서운 징후를 맛본다. 때 이른 개기 일식이 이일어나고 홍수로 범람하고 사방에 가뭄으로 땅이 메마르고 폭염으로 수많은 가축들이 쓰러지고 해일과 폭풍우는 대도시들을 쓸어가 버린다. 런던의 템즈강은 메마르고 더위를 못이긴 사람들은 반벌거숭이로 물을 찾아 헤맨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선 반핵 시위와 핵 옹호자들의 충돌이 발생한다. 몇 개월 후에 지구가 불타버릴 것이라는 파국의 메시지는 인류를 거의 무질서의 혼돈 상태로 내몬다. 살인이 자행되고 거리는 광란으로 수습이 불가능하다. 태양에 불타 녹아버리기 30초전, 주인공 일행은 술집 바에서 스카치로 건배하며 인류의 종말을 쓸쓸히 받아들인다. 영화에선 세계가 구원받을지 아니면 끝내 사라져버릴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피한다.    

        강대국간 핵경쟁에 의한 인류 절멸의 위기와 그 비극이 하나의 예라면, 의도치않은 천재지변에 의한 인류 절멸의 순간도 존재한다. 다른 행성에서 날아온 혹성들과의 충돌로 지구가 사라진다는 내용의 조지 팔(George Pal)의 영화 <세계 충돌의 날 When Worlds Collide (1952)>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영화에서 인류 종말의 예언자들은 천문학자들로 분한다. 이들은, 스콜피오 행성의 자이라(Zyra)와 벨러스(Bellus)라는 혹성이 궤도를 벗어나 지구로 돌진 중이며, 먼저 오는 자이라는 지구를 빗겨가지만 큰 천재지변을 불러올 것이고 뒤이은 벨러스의 충돌은 지구를 종말로 이끌 것이라 관측한다.    

        이들 천문학자들은 인류의 절멸을 막기 위해선 '노아의 방주'와 같은 우주선을 구축해야 하며, 내부에는 가축, 동식물, 젊은 남녀 40여명을 선발하여 자이라 행성으로 이주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유엔의 각국 대표들은 이들의 예언에 콧방귀를 뀌나,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일부 돈푼깨나 있는 사업가들은 우주선을 만드는데 밑천을 대는 대가로 이 신식 '노아의 방주'에 탑승 티켓을 보장받으려 한다. 첫 번째 재앙인 자이라가 빗겨가면서 뉴욕은 해일로 물바다가 되고 세계는 화산폭발과 지진으로 인해 폐허로 돌변한다. 반면 우주선 발사 준비가 완료되고 탑승자 40여명의 선발 명단이 발표되자 이에 배제된 후보자들의 무리는 총을 들어 우주선을 장악하려 한다. 최후의 재앙인 벨러스 행성이 지구에 충돌 직전까지 오고, 우주선에 탑승한 이들은 선택되지 못한 폭도들을 뒤로하고 가까스로 지구를 벗어난다. <지구가 불타는 날>과 달리 이 영화는 곳곳에 인류애적 감상이 묻어난다. 어디에도 인간 무리들의 아노미 상태나 혼란은 없다. 질서정연하고, 때론 자신을 희생해 우주선에 합류하길 포기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탑승에서 배제된 무리나 돈으로 우주선 티켓을 사려던 일부 인간들도 존재하나, 모두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고 도덕적이다. 절멸 이후의 모습도 꽤 희망적이다. 지구의 종말로부터 생존한 이들은 자이라에 무사히 도착해, 지구보다도 훨씬 나은 이상향의 무릉도원을 맞이한다. 영화는 "신세계의 첫 번째 날"이라는 성경 창세기에 빗댄 해피엔딩의 메시지로 끝을 맺는다.    

           

먼저 찾아가본 우리의 미래

조지 팔(George Pal)이 제작하고, 웰스(H. G. Wells)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타임머신 The Time Machines (1960)>은 이같은 지구 절멸의 순간을 미리 보고, 그로부터 살아남은 인간 문명까지 미리 상상해볼 수 있는 재미를 준다. 주인공 조지는 새로운 세기를 앞둔 1899 12월 마지막 날, 자신이 개발한 타임머신을 타고 4차원 시간이동 여행을 떠난다. 그가 1917년에 타임머신 기계를 멈추자 유럽은 독일과 전쟁 중이고, 그 전쟁은 1940년까지도 계속된다. 다시 그가 1966년의 어느 날로 접어들자 인간들이 개발한 핵 위성으로 지구는 쑥대밭이 되고 다급히 이를 피해 더 먼 미래로 키를 잡는다. 인류의 암흑기가 계속되다 서기 802,701년에 접어들어서야 조지는 순수 자연의 지상 낙원을 발견한다. 하지만, 조지의 기쁨도 잠시 뿐, 그 곳엔 후대 인간들끼리의 암울한 먹이사슬이 존재함을 금방 깨닫는다.

        살아남은 인간 종족의 일부는 개미굴을 파 지하로 들어가 생활하면서 '몰락'(the Morlocks)이라는 종족이 되고, 일부는 지상에 남아 '일로이'(the Eloi)란 종족으로 번식해 살아간다. 몰락은 지하에 살면서 번쩍이는 눈을 가진 괴물로 변한 채, 일로이 종족을 가축처럼 풀어놓고 먹이와 옷을 주며 번식시켜 이들이 성숙해지면 잡아먹는 식인종이 된다. 일로이 종족은 찜질방에서나 입는 옷을 입고 금발의 무표정한 청춘 남녀들이 떼로 무리지어 다닌다. 일로이 종족은 몰락의 배를 불리는 인간 가축들에 진배없다. 몰락은 이전 인류의 전쟁 시기에 사용하던 공습 사이렌을 이용해 일로이 무리를 개미굴로 유인해 그 때 그 때 잡아먹는다. 조지는, 몰락이 불에 약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개미굴에 들어가 이들을 불태워 죽이고 자신이 사랑하는 일로이 족의 여인을 구출하고, 그 종족에게 문명을 일으키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그 먼 미래에 홀연히 남는다. 예서도 비극적 미래를 넘어서 인류 희망의 비전을 잃지 않으려는 시각이 묻어난다.               

        

인간 희망의 끈, 과학기술

핵기술에 의한 인류 절멸의 순간에서도 실낱같은 삶의 희망을 움켜지려는 인간의 모습은 당시 영화들의 공통된 정서였던 듯싶다. <세계 충돌의 날>에서 '노아의 방주'격인 지구 탈출 우주선의 아이디어가 지금에 와서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해도, 당시에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과학적 해결책이자 상상물로 봐야한다. <지구가 불타는 날>에서 인간들은 지구 축을 원상복귀하려고 절멸의 순간에 또 다른 핵 투하를 계획한다. 그도 터무니없는 시도이긴 하나, 역시나 당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었다. <애리타>에서도 소비에트 혁명의 파고를 화성까지 밀고가는데, 주인공 로스(Los)의 우주선과 화성인들의 상상 속의 첨단기술 없이는 불가능했다. <타임머신>에선, 조지의 최첨단 타임머신과 그가 가져갔던 성냥불 없이는 몰락 종족과 일로이 종족의 먹고 먹히는 비극적 삶을 끊기 힘들었을 것이다.        

        핵기술에 참담히 무너지고 또 다시 과학에 의탁해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모습은 어찌보면 허망하고 무기력해 보인다. 그래도 인류 절멸의 순간에 그 희망의 끈을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데 또 다시 과학기술의 공이 있다 생각하니 과학과 인간의 관계는 한 몸임을 느낀다. 베고 할퀼수록 인간들에게 상처로 돌아오나 보듬을수록 희망을 볼 수 있는 그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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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첨단 과학기술로 가능한, 이유있는 미래 풍경들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8

 

첨단 과학기술로 가능한, 이유있는 미래 풍경들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인간에게 언제나 과학기술은 구질구질한 현실을 극복하는 희망이자 마취제와 같았다. 18세기 중엽 영국의 산업혁명, 그 굴뚝 공장에서 쉴틈없이 나오는 상품더미,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했던 과학기술에 인류는 경이의 시선을 보냈다. 한편으론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상품이 넘쳐날수록, 인류의 진보와 고른 분배가 위로부터 슬슬 아래 밑바닥까지 퍼져나갈 줄 믿었다. 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학기술에 탄력을 받아 이룬 생산력의 진보가 현실의 불균형 문제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그 골을 더 악화시키고 있었다. 20세기 전반 밀어닥친 혁명의 물결은 점점 깊어만가는 계층간 모순의 골 때문에 들끓었다. 하지만 당시의 혁명들조차 탐욕의 인간을 미워할지언정 기술에 대한 신뢰는 거두질 못했다. 마르크스 할아버지까지도 과학기술로부터 얻은 생산력이 찬란한 사회주의를 위한 토대라 하지 않았던가.

시간이 흘러, 이제 우리는 기술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인터넷 시대를 넘어서 바야흐로 유비쿼터스 시대로 가고 있다. 현실의 불균형과 모순은 그대로 떠안은 채, 어디든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실기간으로 접속되는 미래 모습에 우린 또 한번 열광한다. 한때 과학기술이 마련한 생산력의 마술에 흥분했다면, 이젠 언제 어디서든 빛의 속도로 연결되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매 시대마다 열광은 달랐지만, 과학기술에 대한 동경은 항상 그 자리를 지켰다. 과학기술은 그저 좋은 것이요, 쓰임새에 따라 좋기도 하고 심하게 나빠지기도 한다고 보았다. 그 믿음은 기술의 산업화가 급진전된 이래 아직까지 굳건하다. 하지만 현실이 삭제된 과학기술의 동경은 근거없는 법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번 호는 그 과학기술의 경이에 마취된 시대에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영화들을 몇 편 소개할까 한다.

 

물밑 잠수함을 통해 본 미래

과학 모험소설의 대가 중 하나를 고르라 하면 역시 쥘 베른 (Jules Verne)이다. 그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1916)>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이후에도 몇 차례 베른의 <해저2만리>가 영화화되었지만, 내가 유독 이 때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베른조차 소설 속에서 묘사하지 않았던 선장 네모의 출생사가 담겨있고, 과학에 대한 당시의 시대정신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우선 네모 선장의 출생 배경은 이렇다. 지금은 세상을 등지고 바다에 떠돌며 불의와 싸우는 독특한 인물로 등장하지만, 네모 선장은 원래 다카르(Daakar)라는 이름의 인도 왕자였다. 찰스 덴버(Charles Denver)라는 영국 무역상의 음해로, 영국 식민군에 반해 이들을 추출하려는 모반을 꾸민다하여 급기야 그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한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식민 군인들과 인도인들의 충돌 도중 덴버에 의해 살해되고, 그의 딸까지 잃고 왕국은 폐허로 변한다. 결국 네모는 세계 각지를 떠돌며 그 분노를 삭이며 식민주의자들과 싸우는 인물로 설정된다. 세월이 흘러 '신비의 섬'에 홀로 사는 자연인이 바로 네모의 딸로 판명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 불쌍한 부녀가 극적으로 상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네모는 그 충격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대부분이 <해저 2만리>를 연상할 때 떠올리는 장면은 '괴물문어'와 인간과의 싸움 장면이다. 허나 이 영화는 사건의 중심에 '괴물문어'의 습격을 막기 위한 탐사선의 모험담을 늘어놓기보단, 선장 네모를 통해 당시 식민주의의 거친 시대 상황을 표현하려 애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에 대한 동경과 장밋빛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데에 이르러서는 많이 과장되어 있다.

선장 네모는 미국 정부의 탐사선, '아브라함 링컨호'에 탑승한 과학자 일행을 자신의 잠수함 노틸러스 (nautilus)'에 감금한 채, 일행에게 과학기술의 숭고함을 성토한. 현실 세계의 인간들은 선장 네모의 시선으로 미래 과학기술의 가능성을 체험한다. 그 당시 물밑을 가는 배가 존재할 수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노틸러스 그 자체는 기술의 경이였고, 해저 밑바닥에서 산호초 등 그 전경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드는 고강도 '신비의 유리 창문' (선장 네모는 그리 불렀다) 또한 그저 상상의 기술에 가까웠다. 우주복과 같은 해저 잠수복을 입고 바다 밑을 거니는 것도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아이디어였다. 실제 방수 카메라 장치가 없던 시절에 찍었던 이 영화에서 바닷속 촬영은, 윌리암슨 형제가 수중유리 박스에 카메라를 대고 비춰진 전경을 찍는데 만족해야 했다. 어쨌거나, 새로운 해저 세계의 경험은 기술에 의해 인도된 신세계임에 틀림없었다. 선장 네모는 "신조차 우리에게 보여주길 꺼렸던 것들을 (인간의 기술을 통해) 보여준다"며 인간 과학의 성과에 대해 침을 튀기며 극찬한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당시 식민주의 현실의 권력 관계와 인간의 탐욕 등을 잘 묘사하고 있지만, 기술에 인도된  물밑 신세계를 통해 인간이 바라는 과학기술의 이상향을 찬탄하는데 크게 주저하지 않았다.

 

미래주의자들의 시선을 통해 본 미래

미래 공상과학 소설의 대가하면 우린 누구보다 웰스 (H. G. Wells)를 떠올린다. 그가 소설을 쓰고, 영화의 각본을 맡은 영국 영화, <다가올 세상 Things to Come (1936)>은 과학기술 예찬론의 극단에 서있다. 1940년 크리스마스날 한 가상의 도시, '에브리타운 (Everytown)'이란 곳에 전쟁이 터지고, 그 전쟁은 30여년간 지속되며 인간의 문명을 잿더미로 만든다. 게다가 전쟁 중 창궐한 돌림병 (the wandering sickness)은 수많은 사람들을 앗아간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지역 자치구를 만들고, 그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주위 자치구를 정벌한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과학자들은 이라크의 바스라를 거점으로 지금의 UN 비슷하게 전세계의 무정부 상태를 원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세계연맹 (Wings over the World)'이란 조직을 구축한다. 이들은 미래 기술로 중무장하고 자신의 이름 아래 세계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자치구들을 진압한다. 주로 진압의 기술은 '평화의 가스 (the Gas of Peace)'라는 것으로, 미래형 전투기들을 통해 자치구에 가스탄을 살포해 도시의 시민들을 잠들게 한 후 이들 지역을 포획하는 방식이다.

시대가 흘러 2036년이 되면서 인류는 지하에 거대한 미래 도시 문명을 건설한다. 아테네 아고라 광장을 연상시키는 건축과 그 시대의 복장들을 하고 나타난 미래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만끽한다. 그 와중에 인간의 끊임없는 기술발전의 욕망에 넌더리를 내는 한 선동가에 의해 기술파괴의 러다이트 (Luddite) 봉기가 일어난다. 하지만 과학의 무궁한 기대치를 갖고 있는 지도자는 '스페이스 건' (space gun)이라는 대포 장치에 그의 딸을 우주선에 실어 달나라에 쏘아보낸다. 영화는 성난 군중들이 난입해 들어옴과 동시에 그 지도자가 또 다른 신세계에 대한 개척과 진보에 대한 믿음을 설파하면서 장렬히 끝을 맺는다.

영화 <다가올 세상> 2차 대전의 전운을 감지한 덕에 그 빛을 발했다. 실제 1939년을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시점으로 본다면 1940년의 전쟁 상황 설정은 상당히 적중했다. 전쟁으로 인한 인간 문명의 말살이라는 메시지가 유효했지만, 영화에서 시종일관 흐르는 과학 예찬의 경구는 지겨울 정도다. 전쟁 이후 생존한 과학자들에 의해 꾸려지는 미래 세계라는 설정은, 사회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평화의 역할자로 과학자 엘리트 집단을 다룬다는 점에서 상당히 위험한 시각이다. 게다가 과학의 미래를 불신하는 대중선동가와 이를 따르는 대중을 철저히 과학에 무지하고 걸리적거리는 부류로 치부한다.

        

가공의 기업 도시를 통해 본 미래

어쨌든 <다가올 세상>에서 큰 사회적 화두가 전쟁의 참혹상이었다면, 시아 혁명의 파고가 휩쓸고 간 시대에 토픽은 단연 사회에 뿌리깊은 계급 불평등의 문제일 것이다.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1927)>는 공상의 미래 기업 도시국가에서 계급 불신의 골을 다룬다. 랑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계급간 화해와 공존이다. 영화 시작을 알리는 경구용 자막에도 "머리와 손의 중개자는 가슴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서 머리란 지식노동자 혹은 경영자요, 손은 공장 노동자를 지칭한다. 가슴은 노사간 '신뢰'(trust)에 해당한다. 결국 영화는 계급 혁명으로 한쪽을 멸하는 방식이 아닌, 노사 화합의 믿을만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당의성에 집착한다.

어설프게 계급 화해를 부르짖는 내용에 눈살이 찌푸려지긴 해도, 랑이 그리는 메트로폴리스의 미래 도시 묘사는 상당히 섬세하고 풍부하다. 공중을 나는 비행선들, 고층빌딩 숲을 지나는 고가도로들, 미래의 고층 도시들, 증기를 뿜어내며 돌아가는 기계 장치들, 이 모두가 미래의 미장센(배경소품)들로 선택된다. 미래에도 노동자들의 땀을 쥐어짜는 시스템은 더욱 강화한다. 모든 시계는 노동자의 하루 노동시간인 10시간으로 고정되어있고, 노동자 군상들은 기계처럼 좀비처럼 혹은 군인처럼 어두운 작업복을 입고 작업 교대를 위해 묵묵히 발맞춰 공장으로 걸어간다.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곳은 빛이 들지 않는 깊은 지하에 위치하며, 일이 파하면 다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거처로 내려간다. 가진 자들은 지상에 산다. 메트로폴리스의 지배자 조 프레데르센(Joh Fredersen)과 그의 아들 프레더(Freder) '하이 타워'에 살면서 도시를 지배한다.

프레더는 우연히 노동자 마리아를 첫눈에 보고 사랑하게 되나, 미친 과학자 로트왕(Rotwang)의 농간으로 붙잡혀 그녀는 '퓨쳐라'(futura)라 불리는 사이보그에 정념을 심어넣는데 이용된다. 이후 마리아를 통해 프레더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눈을 뜨게 된다. 여기서 강조할 바는 랑의 미래 기술 묘사다. 비록 결론에서 자본가인 프레데르센와 노동자들의 리더인 그로트 (Grot)가 계급 화해를 하는 예고된 식상함을 보여줬지만, 이 영화는 기술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데 있어서만큼은 꽤 사실적이었다. 첨단 기술아래 허덕거리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나 인조인간 퓨처라의 부정적 묘사는, 기술이 중립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각본에 의해 생성됨을 새삼 깨닫게 한다. 계급간 모순을 감상으로 봉합하려는 각본이 여러모로 눈에 거슬리긴 하나 미래 과학기술에 대한 깊은 회의를 담은 점은 남다르다. 랑의 메시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기술관에 큰 시사점을 준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언제나 현실의 모순을 그대로 품어 안고 간다는 사실 말이다. 뒤집으면, 모순의 해결없이 진보는 허망한 신기루일 뿐이라는 진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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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멋진 신천지 달나라 여행이란 더 이상 없다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7

 

멋진 신천지 달나라 여행이란 더 이상 없다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이젠 아무도 밤하늘을 비추는 달을 보면서 토끼들이 방아찧는 모습을 떠올리진 않는다. 구소련이 최초 스푸투니크Спутник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때가 지금으로부터 딱 50여년전 일이고, 미국에서 이에 황급히 그 다음 해에 항공우주국NASA을 설치해 다시금 공을 들여 인류 최초 유인 우주선을 달나라에 보낸 것이 1969년의 일이다. 그러고보니 인간이 달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한 지 불과 3, 40년만이 흘렀다. 그 전에만 해도 지구 이외의 삶의 공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던 인류에게, 달 착륙은 충격 그 자체였다. '스카이콩콩'을 뛰듯 슬로우 모션으로 달 표면을 무중력 상태로 널뛰듯 다니는 닐 암스트롱의 모습에 우리 모두가 경이롭게 바라본 적이 있었다. 달은 새롭게 인간 문명을 뿌리내릴 수 있는 새로운 신천지로 멋지게 등장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달나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돈을 벌 수 있는 식민지의 효용성이 사라지고 냉전이 수그러지면서 그만큼 달나라의 매력도 잦아들었다. 이번 호는 근대 초기 SF영화 속에서 인간들이 지구 밖의 공간으로써 달나라에 지닌 동경과 상상,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고, 오늘의 새로운 디지털 공간 속에서 어떻게 이를 재음미할 수 있는지를 살펴볼까 한다.      

 

달나라 금나라

달나라 얘기를 꺼내려면, 먼저 두 편의 오래된 고전을 넘고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조르주 멜리에스George Méliès가 만든 <달나라여행 Le Voyage dans la Lune (1902)>,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독일 감독 프리츠 랑Fritz Lang이 제작한 <달의 여인Frau im Mond (1929)>이다.

        멜리에스의 <달나라여행>은 그가 남긴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달나라여행> 11분짜리 단편 무성영화로 제작되었으나, 이 작은 필름에는 1900년대초 인간이 달에 대해 가진 여러 상상력들이 세세하게 묘사돼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달 표면에 인간의 우주선이 내리꽂히는 장면은 지금 보더라도 특수효과 측면에서 손색이 없다. 멜리에스의 달나라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놀고, 마치 무릉도원이나 낯선 이국의 정글과 같은 곳들이 나오고, 그 속에 야만의 달나라 원주민들이 달에 착륙한 과학자들을 뒤쫓기도 한다. 알려지지 않은 세계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이 달에 사는 상상과 현실의 생물들로 잘 재현되고 있다. 멜리에스의 상상력 속의 달나라 풍경은, 지구와 비슷하나 인간 문명의 접촉이 없는 야만 상태의 이국적 상태였다.

        프리츠 랑의 <달의 여인>에 오면 달나라는 좀 더 과학의 눈에 비춰진 모습으로 성장한다. 1930년대로 접어들면 서구열강들의 식민지화 바람이 거세게 불던 차에, 달나라에 대한 상상 또한 그에 맞춰 변화한다. 이 영화에서 종종 언급되는 '달나라 노다지론Moon Gold Theory'은 당시 식민지 정복 바람과 맞물려있다. 마치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마냥 달나라는 서유럽 제국들의 새로운 노다지의 원천으로 등장한다. 영화에선 대다수의 자본가들이 달나라 노다지론에 코웃음쳤지만, 일부 재빠른 거대 자본가들의 연합은 이것이 새로운 이윤원을 보장해 줄 것으로 간파했다. 마침 달나라 로켓을 개발하고 있던 볼프 헬리우스Wolf Helius가 이들의 눈에 띄어, 산업 자본가들은 그를 위협해 달나라 탐사를 시도한다. 6명의 다양한 구성원들로 채워진 로켓우주선 '자유Friede'호는 달에 도착해 정말로 노다지를 발견한다. 금맥을 발견하고 탐욕에 몇 명은 죽고 서로의 총질에 산소통을 잃은 승무원들은, 주인공 헬리우스와 그가 사랑했던 여인 프리더를 남긴 채 지구로 귀환한다.         

        시대의 한계인듯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기술적으로 서툴다. 우주복 복장도 없이 다들 제각각의 옷을 걸치고 등장한다. 무중력 상태를 표현하기 힘들어서인지, 승무원들이 옮겨다니도록 만든 우주선 내부 천장과 바닥의 손잡이와 발목끈이 우습다. 달에선 공기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한 승무원이 성냥불을 여러번 그어대는 장면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성냥불이 살아나자 달표면에선 승무원들이 우주복없이 걸어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의 여인>은 설득력있게 지구에서 달까지의 로켓발사의 논리를 꽤 그럴듯하게 관객에게 설득시킨다. 물론 감독인 랑이 이렇게 잘 짜여진 영화를 만든 데에는 당시 물리학자였던 헤르만 오베르트Hermann Oberth의 공이 크다. 오베르트는 현대 로켓공학과 우주비행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가 랑의 기술 자문을 맡음으로써 영화의 현실감이 크게 향상되었던 것이다.1)   

        

냉전 시대의 달나라

랑의 영화 이래로 달을 소재로 했던 SF영화는 거의 20여년간 침묵을 지켰었다. 1950년이 되어서야 그 달나라에 대한 궁금증이 다시 미 대중문화의 장을 통해 발산한다. 앞서 얘기한대로 구소련의 위성 발사에 충격을 받은 미국이 과학 진흥에 대한 일종의 강박 상태로 모리면서, 달을 비롯한 우주비행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관심이 커진다. 이런 가운데 헐리웃 스튜디오들은 그 대표작으로 조지 팔 제작의 <달을 향하여>를 내놓는다.

        <달을 향하여>는 엄청난 자본 투자를 통해서 만든 초유의 대작이다. 게다가 달나라 탐사를 보다 현실에 기반해서 그리고 기존의 항공우주 과학에 기초해 다룸으로써, 후에 미국내 관료들에게 미 항공우주 프로그램을 추진하게끔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실지로 영화의 달 탐사 장면은 꽤 현실력있게 재현된다. 무중력 상태로 우주선 안에서 이동하기 위해 자석붙힌 장화를 착용하고 다니는 모습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주선 밖에서 생명줄을 놓쳐 떠다니는 동료를 구출하는 장면과 달에서 무중력 상태로 점프하면서 이동하는 모습 등은 지금에 와서 보더라도 손색없이 처리됐다. 로켓 발사 장면에선 핵에너지를 이용한 제트엔진 기술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그래서인지, 영화 전반부에선 2차대전 이래로 공포의 대상이었던 핵 방사능에 대한 시민들의 두려움과 로켓 발사로 인한 오염 문제가 맞물리기도 한다.

        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은 로켓 과학자 찰스, 쎄이어 장군과 사업가 짐 셋이다. 미 연방 정부의 로켓개발 예산 삭감으로 곤경에 처한 쎄이어 장군은 후견인 짐을 설득해 자본가들로부터 추가 자금을 따오는데 성공한다. 쎄이어 장군은 달의 군사적 이익을 얻기 위해 구소련을 따돌려 미국이 먼저 그 곳에 근거지를 마련해야 한다고 자본가들을 설득한다. 이 세 명의 주인공은 군(軍)/(産)/(學) 복합체의 대표자들을 연상케 하는데, 이들 셋은 우주 프로그램을 통해 큰 이득을 보는 선도적 세력으로 묘사된다. 또 다른 재미는, 이들 3명이 또한 로켓 승무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들 모두는 로켓 연료 계산 잘못으로 달에서 곤경에 처하기도 하지만, 그들간의 돈독한 유대감을 기반으로 모두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난다. 하나, 영화에서 빠져있는 주체는 연방 정부다. 오히려 정부는 달에 우주선을 쏘아올리는데 마뜩해하고 우주 프로그램 예산마저 동결하는 부정적 대상으로 등장한다. 결과적으로 영화 <달을 향하여>에서 정부를 소외시킨 효과는 오히려 우주 프로그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상당히 긍정적인 반향을 주었다. 정부가 달 탐사를 과학기술의 우선 순위로 두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키는데 한몫한 것이다.

      

신천지 달이 아닌 화성으로 간 까닭

같은 해에 만들어진 영화 <우주선 X-M Rocketship X-M> <달을 향하여>의 대규모 투자에다 해피엔딩의 스토리에 비교해보면 저예산 영화에다 영화 전개 또한 상당히 비극적이다. 이 영화는 <달을 향하여>와의 시나리오 저작권 문제로 애초 달 착륙을 의도했다 화성으로 가는 것으로 서사 구조를 고쳐써야했던 시련도 겪었다. 영화에서 승무원들이 의도치않게 이끌려간 곳은 달이 아니라 화성이다. 승무원들은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하고 그들이 누리던 고도의 문명이 핵재앙으로 모두 소멸되고 야만의 종족으로 연명해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화성에서 승무원들은 그 원시인들에게 2명이 살해당하고 1명의 승무원이 부상당하며 쫓겨나오고, 다시 지구로 귀환 중에 나머지 3명 또한 착륙 미숙으로 모두 몰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전혀 해피 엔딩이 아니다. <우주선 X-M>에선 비유적으로 군사 경쟁에 의한 핵 재앙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그들이 달에 떨어지지않고 화성에 간 것은 저작권 분쟁이 그 현실적 이유였으나, 지구인들에게 핵재앙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암시로 작동한다.

         달의 모습은 그렇게 한참 낯설게 변화했다. 초기의 신과 야만이 공존하는 신천지에서 기업의 야욕이 끼어들고, 냉전의 현실이 개입하고, 핵재앙의 미래까지 점쳐지는 어둠의 공간으로 변했다. 그 당시 달에 대한 인간 상상력의 부정적 변천사를 오늘에 와서 비교해보면, 디지털 신천지의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 닮은꼴은, 신천지 달나라와 같은 자유의 디지털 공간에서 돈벌이와 국가 안보를 빌미로 해 권력의 감시가 늘어나고 장사치가 점거하는 공간이 되가는 현실에서 발견된다. 과거 인류가 달나라 탐사에서 핵 재앙을 감지하듯, 권력의 감시와 상업화가 판치는 사이버공간에서 우리의 미래를 하루빨리 감지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2007. 7.)

1) 듣자하니 이후 오베르트는 미국에 건너가 SF영화의 대중화 붐을 조성한 작품인 <달을 향하여 Destination Moon (1950)>에도 관여했다 한다.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면, 랑의 <달의 여인>은 히틀러가 감복하여 자주 보았던 영화였다 한다, 여기에 선보였던 로켓 우주선은 이후 2차대전 중 유럽 도시들을 초토화시키며 악명을 떨쳤던 유도로켓 브이원V-1과 브이투V-2 기술의 원조격이었다 한다. 오베르트는 히틀러밑에서 바로 그 V-2 로켓을 개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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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를 다녀와서

오늘 여행에서 돌아와 빨래를 잔뜩했다.

이박 삼일로 모처럼만에 다녀온 뉴올리언스는 카트리나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붐볐다. 차를 몰고 외광을 들어서자 버려진 폐가들이 수도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나마 복구가 이뤄진 지역은 프렌치 쿼터 일부였다. 민가들은 버려지고 흉흉했다.

가족이랑  검보샵에 들렀다. 승준이가 닭 검보를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카페 듀몽드에 들러 베이네 와 카페 오레를 맛나게 먹었다. 이번 여행에선 주차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주말이라 호텔앞 길거리에 그저 빈 곳에 차를 대고 지냈다. 호텔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드 써끄라는 아트 디스트릭에 있는 호텔이었는데 에어컨 배기구에서 물이 흘러내려 밤잠을 설치며 물을 받아내야 했다. 체크아웃하는 날에 직원 몇 불안되는 돈을 할인해 주었다.

올라오는 길에 휴스턴에 들러 맛없는 분식을 먹고 순대와 족발 만원어치를 사들고 차를 신나게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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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저녁

수염이 너무 이리저리 나 면도기를 사러 루트라는 곳에 갔다. 오는 길에 경래에게 전화를 했다. 숙소 앞에 있는 셜록홈즈 바에 가서 기니스 한잔을 시켰다. 밖에 걸터앉아 250cc 한잔을 죽 들이켰다. 이제까지 먹어본 기니스 중에서 최고였다. 너무 부드러웠다. 한잔에 2.75p를 낸 것 같다. 가는 마당에 그리고 이곳 런던 주말에 뭔가 여유로운 기분을 혼자라도 느끼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좀 일찍 자야 시간 맞춰서 일어날 것 같다. 갈 길이 멀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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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떠나기 전날

오늘은 느긋하게 늦게 일어났다. 별로 가고싶어 땡기는 곳도 없고해서, 코벤트 가든을 갔다. 휘둘러보고, 승준이가 좋아할 것 같은 곳이다 싶어 자연박물관을 갔다. 복도에서 사진한방 찍고 또 휘둘러왔다. 참 사으스 케싱턴 역에서 한국인이 지하철역 통로에서 기타를 메고 가요을 열창하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워 1파운드를 던져주었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가 뒷전을 때린다. 어느 한국인을 봐도 이곳 런던에서 반가웠던 느낌이 없었는데, 그는 내게 노래로 가슴 뭉클함을 전해주었다.

어디를 갈까하다가 가기 전 정리로 빅밴을 택했다. 빅밴에서 사진을 휘 둘러 찍고, 담배 한대 불사르고 게서 떠났다. 버스를 잡아타고 트라팔가 광장으로 돌아와 숙소에서 잠깐 쉬다, 공연이라도 볼까하고 레스터역 근처 공원에 향했으나 가격과 일정 때문에 그냥 채플린 동상이 서있던 공원을 배회하고 차이나 타운 가는 길에 한국상점에서 쌀을 사들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자그마한 스시쌀을 사다가 물을 부어 밥을 지었다. 밥이 잘 되었지만, 라면 한 그릇에 참치캔 1통 남은 것을 비웠더니 배가 불러 밥을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어쩄거나 오늘도 곡기를 거르지 않고 보낸다. 남은 김치와 마늘쫑은 다먹어 치웠다. 일정 동안 김치를 잘 먹었던 것이 뿌듯해졌다. 이제 컵라면 하나 남았는데, 이건 공항에 가져가서 휴스턴 가서나 먹을란다.

런던에 오면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너무 물가가 비싸다는 것. 달러 가치의 2.4배 정도되니 뭐 하나 먹고 사려해도 도통 엄두가 안난다. 달러가 정말 런던에선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온다. 그러고보니 참 미국에서 같은 제품이라도 참 싸게 사고 입고 놀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 아침 모닝콜을 로비에 부탁했는데, 여전히 불안하다. 자명종 시계도 없고, 이를 어찌해야할지... 새벽 4시에는 일어나 움직여야 하는데... 오늘 일찌감치 잘 생각이다. 잘 될런지는 모르지만,...

떠나기 전에 식구들이랑 어머니꼐 안부 인사라도 할겸 전화나 하러 잠깐 나갈 생각이다. 하루가 저문다. 내가 온 처음으로 런던의 날씨가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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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같은 날 밤

저녁에 가져온 짜장에 마지막 남은 밥을 비벼먹고, 게다 컵라면까지 들이켰다. 부른 배를 해가지고선 체링 크로스 길을 따라 서점들을 훑고 지났다. 일전에 봐둔 쾨니히 디자인 서점에서 리차드 바브룩 책을 집어들고 나왔다. 오늘 길엔 숙소 근처의 대형 체인 서점인 왓슨스에 들러 승준이 해리포터 책과 뱅씨 책 두권을 샀다. 워낙 물가가 비싸 엄두가 안났었지만, 뭔가 런던에서 집어갈 거리를 만들고 싶었다. 하기사 오늘 산 책들 모두 미국에서 아마존으로 사면 훨씬 싼 가격에 살 수 있지만...

오후에 LSE를 들렀던 기억이 난다. 화장실을 찾다. 커뮤니케이션 학과를 마주쳤고, 나도 모르게 로빈 만셀 교수 방문 앞에 서 있게 됐다. 학과실 조교인 지 교수인지 보이는 여자가 만셀이 프랑스에 가서 한두주 있다 오거라고 내게 말한다. 뭔가 그냥 가기 섭섭해서, 명함 뒷면에 왔다간다는 메모를 남겼다.지난 해도 그렇지만 이상하게 올해도 날이 겹쳐 그녀를 볼 수 가 없었다, 나중에 기회를 보자며 건물을 빠져나왔었다.

내일 계획은 없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발길 닿는대로 다닐 예정이다. 딱히 가보고 싶은 곳도 없다. 저녁 바람이나 쐬러 작년에 백선배랑 같이 나갔던 빅밴근처에나 나가볼까 한다. 토요일은 아침 일찍 가야하니까 일찌감치 저녁에 들어와 짐을 싸야 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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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의 하루

오늘 하릴없이 이리저리 다녔다. 비가 얼마나 쏟아지던지... 작년하곤 딴판이다. 추운데다 비에다... 긴팔옷이 한벌이라 줄창 그것만 입고 다닌다. 오전에 Neal Street란 곳에서 존을 만났다. 그는 뱅씨의 벽판화를 복제해 팔고 있는 길거리 장삿치였다. 그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기념으로 그의 뱅씨 복제물과 그를 배경으로 사진을 한방 박아주었다. 어색한 그의 몸짓이 기억난다. 오후엔 브리티쉬 뮤지엄에 갔다, 뮤지엄 길이란 곳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비를 피하고 서있다. 프렌치 가나 출신의 스페픈이란 친구를 만났다. 이친구는 서쪽 끝에서 베이커리 주방에서 일한다고 했다. 빵을 만드는 친구였다. 프렌치 가나에서 온지 1달 되었다고 한다. 왠지 시골스런 그의 모습이 정감이 왔다. 비를 피하는라고 한 20여분을 거기서 그와 얘기를 나누었던 듯 싶다. 그리고 자리를 뜨기 전에 기념 사진을 둘이서 한방 찍었다. 그리고, 왠지 허그를 해야할 것 같아 하고, 그의 험난한 런던 생활에 행복을 빌어줬다. 그도 외로운지 내가 가는 것이 못내 서운해 했다. 그렇게 난 자리를 옮겨 다시 빗속 거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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