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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디스 월드 / 마이클 윈터바텀


그는 이 세상에 없어요..



어떻게든 미래가 있는 삶을 살아보려 난민촌을 떠나는 사람들.

그러나 떠나는 순간, 그들의 발끝엔 죽음이 매달린다.  

머무르지 그랬냐고 하기엔, 이 삶이나 저 삶이나 매일반이어서,

그저 이 세상에 있었을 때 나는 존재했다, 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숨막히는 순간들. 야간 산행 때 총기로 위협당하는 씬이라든가, 밀폐된 컨테이너로 수십시간 밀항하는 씬은, 일부 익숙한 시각적 코드와 결합되고 다큐적 현실감을 경유하여 감각적인 대리체험으로까지 관객을 몰고 간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공포다. 국제란 한구석 1단 기사로 수도없이 지나갔을 건조한 비극이, 그 순간 숨쉬는 생명체로 살아난다.

 

여기, 타인의 삶이 있다.

이 삶은 고통으로 가득하다.

이 삶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어떤 위치에서 바라볼 것인가.

내가 목격한 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그것으로 결국 무엇을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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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이 부탁으로 인권하루소식에 기고하기로. ㅡ.ㅡ

왜 이렇게 글이 안 써질까.

 

살기 위해 떠나는 난민들의 죽음 같은 여정 

이 세상에는 1500만 명의 난민이 있고, 그 중 500만은 아시아에 살며, 100만은 파키스탄 난민촌에 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다. 영화는 누런 모래바람 날리는 난민촌에서도 천진함을 간직한 아이들의 웃음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인 열두 살 소년 자말도 그런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어린 아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 봤자 하루 1달러도 벌지 못 하는 데다 미래 따윈 사치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난민촌에서, 웃음을 잃어버린 많은 이들은 탈출을 꿈꾼다. 오직 하나, 미래가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그리하여 자말은 사촌형 에나야트의 통역을 자처하며 런던까지 6400km에 이르는 머나먼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살기 위한 여정은 첫발부터 난관을 예고한다. 브로커는 돈 떼먹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검문소의 군인들은 뇌물을 요구한다. 국적을 속이려 어색한 옷을 걸쳐 보기도 하지만, 왔던 길로 되돌려지는 건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은 수많은 난민들이 택했던 도피의 여정을 극적으로 쉽게 재구성하는 것에서 벗어나, 함께 경험하기를 선택한다. (알려진 바대로, 자말과 에나야트는 실제 난민이다.) 카메라는 자주, 자말의 뒷모습 가까이에 붙어 따라다닌다. 관객도 따라나서길 종용하듯이.

또한 국경수비대의 총소리에 위협당하면서도 국경을 넘는 야간 산행 장면이나, 밀폐된 컨테이너로 수십 시간씩 밀항하는 장면은, 일부 익숙한 시각적 코드와 결합되고 다큐적 현실감을 경유하여 감각의 대리체험으로까지 관객을 몰고 간다. 신문 국제란 한구석에서 1단 기사로 수도 없이 읽고 넘겼던 건조한 비극이, 그 순간 생명력을 얻고 살아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밀입국을 시도하다 컨테이너 안에서 질식사 한 58명의 중국난민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치 나의 경험인 듯.



<인 디스 월드>는, 눈물이 흐르지는 않되 가슴 먹먹해지게 만드는 영화다. 영화 전편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경험한 관객들에게, 눈물을 통한 면죄부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타인의 삶까지도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고민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 바로 이 영화가 가진 미덕이다.

덧붙임.
우리나라는 1992년 유엔 난민협약과 난민의정서에 가입했지만, 2001년에야 에티오피아인 한 명을 첫 난민으로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난민 인정을 신청한 외국인은 494명이며, 그 가운데 129명만이 난민 여부를 심사받았고, 최종 인정을 받은 사람은 37명에 불과하다.


(사진 출처는 nkin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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