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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 박완서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자꾸만 그 남자네 집은 남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였다.
- p16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창백하게 일렁이던 카바이트 불빛, 불손한 것도 같고 우울한 것도 같은 섬세한 표정, 두툼한 파카를 통해서도 충분히 느껴지던 단단한 몸매, 나는 내 몸에 위험한 바람이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불쌍한 어머니를 맨날맨날 구박한다고 해도 그게 하나도 못돼 보이지 않았다.
- p36

그는 나를 구슬 같다고 했다. 애인한테보다는 막내 여동생한테나 어울릴 찬사였다. 성에 차지 않았지만 나도 곧 그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구슬 같은 눈동자, 구슬 같은 눈물, 구슬 같은 이슬, 구슬 같은 물결... 어디다 그걸 붙여도 그 말은 빛났다.
- p38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가 아니었을까.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
- p44

"결혼해서 내 아이를 갖게 되면 갓난아기 때부터 쭈욱 자라나는 모습을 찍어두려고 해요. 그걸 앨범으로 만들어서 그애가 시집장가갈 때 선물하면 좀 좋아하겠어요. 아마 앨범만 싸놓아도 제 키만 해질걸요."
"거창한 선물이 되겠네요. 꼭 사진에 원수진 사람 같네요."
- p84

그 남자가 말했다는 첫사랑 소리가 내 가슴에 꽃히고 나서 나는 누님의 다음 말을 거의 귀담아듣지 않았다. 내 이성을 마비시키기엔 그 말 한마디면 족했다.
...
그 남자가 나에게 해준 최초의 찬사는 구슬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구슬 같은 처녀이고 싶었다.
- p169

해진 데는 없었지만 우리 엄마 너무 말랐더라. 그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울고 있었다. 점점 더 심하게 흐느끼면서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도 애끓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그 남자를 안았다. 그 남자도 무너지듯이 안겨왔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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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삶..
그리고 그 남자의 삶을..
함께 그리고 그 삶속에 있던..
그녀/그의 역사를 살펴, 걸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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