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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옹호되어야 한다.(2004.04.)

그래도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옹호되어야 한다.

 

단호한 대답?

 

지난 두 달간 성황리에 치루어 졌던 [현대 자본주의의 이해]강좌(한노정연 주최)의 마지막 ‘종합토론’시간 때였다.

강사가 그간의 강좌 내용을 종합하여 ‘현대 자본주의의 전망과 과제’라는 주제로 기조 발제를 한 후, 참석한 수강생들 사이에서는 열 띤 질의․응답과 토론이 진행되었다.

강좌의 결론은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불안정을 극대화하면서 새로운 위기를 재생산할 것”이고, “이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해 나갈 주체형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자본 그 자체의 위기’라는 점에 대해 강사진은 의심의 여지없는 단호함으로 결론을 맺어 주었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의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해 나갈 주체는 바로 ‘노동자계급’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현장성, 계급성, 전문성’의 기치를 내건 한노정연의 연구위원답게 분명하게 대답해 주었고, 참석한 수강생 대부분도 이에 공감하는 듯했다.

 

그런데, 열 띤 토론의 막바지에 한 수강생으로부터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당연히(?) 나왔다.

순간 강사진은 멈칫하는 것 같았고, 그 사이 토론에만 귀를 기울이던 나는 재빨리 나섰다.

“‘사회주의’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뜻밖의 단호한’ 대답에, 사회를 보던 강사는 “대안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며 서둘러 토론을 마무리지었고, 마침 시간도 많이 지난 터라 곧바로 뒷풀이로 들어갔다.

사회를 보던 강사가 서둘러 토론을 종결시킨 이유가 시간 부족만이 아니었다는 점을 나중에 강사진이 제출한 [강좌 소개서 : 전쟁과 공황, 위기로 점철된 역사 -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본 현대 자본주의]라는 글을 읽고 알았다.

 

“이 강좌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나아가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완결적이고 직접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 현 좌파이론의 전반적인 한계 때문 ---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가 가져 온 충격은 현실의 운동뿐만 아니라 이론진영 전체에 엄청난 공백을 초래 --- 과거에 진리라고 믿고 따르던 이런 저런 ‘교의’들이 사실상 결함 많은 하나의 이론체계에 불과하다는 자각 ---길고 지난한 과정일지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씩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가 다다른 결론이다”

 

아니, 나는 사실 그날 종합토론과정에서 이들 강사진의 고민과 고통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 또한 이런 고민과 고통으로부터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역사적인 현실이 지난 십 수년간 우리들을 짓눌러 왔던 그 중압감을 누가 홀가분하게 벗어 던질 수 있었겠는가?

적어도 여전히 스스로 사회주의자이고자 했고, 또 그 이념을 고통스럽게 부여안고 왔다면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현 좌파이론의 전반적 한계”라는 현실을 외면한 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씩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애써 무시한 채, “‘사회주의’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그만 단호하게 답해 버리고 말았다.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대안사회의 이념과 전략으로서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옹호되어야 한다”는 소박한 판단 때문이었다.

 

우려와 조롱

 

그런데 이 말을 내뱉자마자, 단호했던 대답과는 달리 내 마음과 머리 속에서는 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에 십 수년간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운동’에 대해 퍼부어졌던 수많은 우려와 조롱이 걷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뇌리를 휘젓고 지나갔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민주화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라는 우려는 차치해 두자.

그보다는 오히려 구체적인 내용도 없고 대중적 정서도 고려하지 않은 채 행해졌던, “그래 나는 사회주의자요”식의 ‘선언적 운동방식’, 그리고 이러한 운동방식이 가져왔던 여러 폐해와 실패의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우려가 귓전을 세차게 흔드는 듯 했다.

“선언만 해서 뭐하냐, 내용을 채워야지”, “대중적 정서가 아직 이르니, 풀어서 이야기하면 된다” 등 등.

그런데 이런 우려는 그나마 견딜만한 것이었다.

어쨋든 운동하는 방식의 차이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아직도 그 낡은 이념을 벗어 던지지 못했나”라는 조롱이었다.

‘사회주의’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소련과 동구를 봐라, 중국과 북한을 봐라. 이미 실패하고 낡은 이념과 체제가 어떻게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조롱하는데, 이것이 조롱으로 느껴지는 것은 ‘사회주의’가 미래의 전망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기껏 과거의 잔재나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는 실제 현실의 사회주의운동이 미래의 전망은커녕, 과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자리매김조차도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한 데에 대한 자책 때문이었다.

 

사실 10여 년 전, 이런 우려와 조롱을 벗어나 스스로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기 위해 ‘현장에서 미래를’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연구소운동은 출발했었다.

연구소는 신경영전략과 신노사관계,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서, 현장의 활동가들과 함께 노동운동의 민주적 계급적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다.

노동운동의 정치적 전망을 왜곡하는 자유주의적 개혁주의나 사민주의적 개량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에 맞서서도 힘겨운 이데올로기투쟁을 전개해 왔다.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의 노동통제 노동강도의 강화와 노동자계급의 분할, 그리고 노동조합운동의 개량주의화와 관료화가 어떻게 국가의 노동정책,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맞물려 있는지, 노동자들의 투쟁이 자신의 삶과 노동의 조건은 물론 우리 사회 전체를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 연구소는 이론과 정책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한편으로는 이런 노력과 투쟁의 성과로,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의 계투 자체의 진전으로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는 이제 ‘새로운 이론적 실천적 과제’에 직면하게 됐다.

“그러면 대안은 뭐냐?”는 것이다.

‘자본 자체가 위기’인 현실에서, 그 위기의 표현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선 전세계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이 그 어느 때보다 고양되고 있는 현실에서, “‘노동자투쟁의 진정한 정치적 대안’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래도 철회하지 않는 이유

 

그런데 그간의 우리의 노력과 투쟁이 우려를 씻어내고 조롱을 넘어설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을 정리하지도 못했는데, 나는 그만 덜컥 ‘사회주의만이 대안’이라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이 답변이 그간의 노력, “하나하나 내용을 채워나가는 과정”에 찬물을 끼얹게 되지는 않을지, 또 하나의 ‘교의(도그마)’를 현실에 강요하는 꼴이 되지는 않을 지, 그래서 우려와 조롱만을 더욱 골 깊게 만들지는 않을지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사회주의만이 대안’이라는 답변을 다시 주어 담지 않기로 결심했다.

 

먼저, ‘사회주의’란 개념은 지난 노동자민중투쟁의 역사적 성과라는 점 때문이다.

그것이 현실사회주의의 역사적인 실패에 의해 상처를 받았어도, 그 상처조차도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보듬고 안아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미래의 대안사회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로부터 나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평가와 그 극복으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실패’의 원인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현실 사회주의가 이루어놓은 ‘성과’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000주의’라는 비판과 딱지 붙이기 이전에, 오히려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들이 이루어지고, 그에 기초한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 져야 할 때이다.

그 때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가 진전시켜 놓은 성과를 계승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 혹은 오류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내용을 하나씩 구체화해 나가면서 그 내용에 걸 맞는 용어나 개념을 세워나가야 하지, 그렇지 않을 때, 얼마나 공허한 선언인가”라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발전에서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라는 용어를 사용해 나갈 때, 그 용어 자체를 사용하는 것이 하나의 절박한 이데올로기투쟁이었다.

‘사회주의’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이루는 내용으로 다 분해해서 하나 하나의 내용이 다 정리되면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다.

‘어떠한 사회주의인가’를 둘러싸서 다양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서 그 구체적인 내용에 따라 ‘사회주의’라는 말 앞에 ‘민주적’, ‘과학적’, ‘혁명적’, ‘인간적’ 등등의 수식어를 붙일 수는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망으로서의 ‘사회주의’라는 용어와 개념은 그 자체로서 수호되고 주장되어야 한다.

 

출발의 지점

 

그날 종합토론이 끝난 후 뒷풀이 자리에서, 나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옆에 있는 동료에게 이런 문제제기와 바램을 쏟아 부었다.

 

“‘자본주의의 위기’ 자체만을 이야기하면서, 그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이 ‘새로운 사회=사회주의’의 물적 조건을 어떻게 준비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왜 이야기하지 않는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공세로 인한 노동자계급의 분열과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해서는 그토록 과도하게 강조하면서, 투쟁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야박하게 평가하는가?”

 

“이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공세에 맞선 전세계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은 ‘반자본투쟁’으로 진전되어 가고 있는데, ‘반자본’ 이후의 정치적 전망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가?”

 

마침 5월 23일부터 25일 사흘간에 걸쳐 ‘2003년 제1회 맑스 꼬뮤날레’가 개최된다.

적어도 아직 스스로 맑스주의자라고 생각하는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모여, ‘지구화 시대의 맑스주의의 현재성’을 주제로 열띤 토론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십 수년 간 우려와 조롱 속에서도 ‘사회주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고 현장에서, 지역에서, 그리고 여러 부문에서 치열하게 투쟁해 온 실천 활동가들도, 최근 사회주의 정치조직운동의 혁신과 연대를 내걸며 실천운동의 진전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토론과 실천적 모색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공세에 맞선 노동자민중들의 현실의 투쟁과 동시에 그 투쟁의 미래와 굳건하게 결합해 나가고, 그리하여 한국에서의 사회주의운동이 새로운 가능성을 얻고, 한국의 노동자민중운동이 이 결합 속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간다면, ‘사회주의만이 대안’일 수 있다는 나의 답변은 최소한 우려와 조롱은 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옹호되어야 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비록 신문기자이자 소설가인 손석춘이 소설 [유령의 사랑]에서 맑스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을지라도 말이다.

 

“왜 당신들은 나를 밟고 가지 않으려는가?

왜 당신들은 내가 걸음을 멈춘 그곳에서 단 한걸음도 더 전진하려고 하지 않는가?

왜 앞으로 걸어가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가?”

 

[현장에서미래를]

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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