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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굶어 죽거나 함께 세상을 뒤집어 바꾸거나
- 고 최고은 작가를 애도하며-
2011.2.10.
며칠간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아마 모두들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애도하는 모두는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로 봅니다.
영화산업구조에 대한 비판과 자성도, 영화산업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폭로도 이어집니다.
한국사회 전체가 그렇듯이 “살아남는 자가 사는 거다”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아니 소비하면서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영화를 만드는 영화 제작 노동자들의 현실은 어떤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영화 ‘소비자’였을 뿐입니다.
고기를 먹으면서 축산노동자의 현실을 생각하지 않았고,
자동차를 타면서 자동차노동자의 현실을 나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듯이---
누군가 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대해 “창작자의 재능과 노력을 착취하고, 단지 이윤창출의 도구로만 쓰려하는 잔인한 대중문화산업의 논리”가 빚어낸 비극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비단 최고은 작가 한사람만이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영화에 대한 열정을 착취하는 이상한 구조”를 극복할 ‘사회안전망’, ‘제도적 보호장치’를 마련하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최고은 작가와 같은 죽음이 더 이상 되풀이 돼서는 안됩니다.
며칠간의 ‘애도’ 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잊혀져서도 안됩니다.
문앞에 부친 ‘쪽지’(“며칠새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은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집 문좀 두들겨주세요”)를 통해서만 세상을 향해 자신의 굶주림과 고통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더 이상 되풀이 돼서는 안됩니다.
병들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쪽지’를 통한, 온정에의 호소가 아닙니다.
최 작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남은 밥이나 김치’가 아닙니다.
진정 최 작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재능’만이 아닙니다.
더 이상 병들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이런 세상과 싸워 바꾸려는 의지’였습니다.
혼자서만 힘들기에 함께 싸워나갈 수 있는 ‘동료’가 필요했습니다.
한순간의 싸움이 아니라 끈질기고 지속적으로 싸워나가기 위해 ‘조직’이 필요했습니다.
‘잔인한 대중문화산업의 논리’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착취하는 이상한 구조’도 최작가‘들’이 이런 현실을 뒤집겠다고 나설 때에야 극복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안전망’도 ‘제도적 보호장치’도 그 싸움의 결과로서만 주어집니다.
‘쪽지’가 아니라 ‘머리띠’를 둘러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를 향해 ‘호소’하고 ‘설득’해야 합니다.
더 이상 영화를 ‘소비’하는데만 머물지 말고, 영화를 ‘생산하는 노동자’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그래서 그 힘을 모아 영화자본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영화를 만드는 진정한 주체는 ‘자본’이 아니라 ‘영화산업 노동자’들이라고.
2011년 한국사회는 최작가‘들’에게 잔인하게도 이렇게 요구합니다.
“혼자 굶어죽거나 함께 세상을 뒤집어 바꾸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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