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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라디오 광고

배용준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당신을 좋은 집에서 살게 해주는 것"이라고 목소리 깔며 얘기하는 라디오 광고를 들을 때마다 웃어야하는 건지 비웃어야하는 건지 (결국 웃긴 웃는 것이군) 헛갈리던 것이 몇달째였는데, 또 헛갈리는 것이 하나 더 나왔다.

 

"장바구니 챙겨야지" "비닐포장을 줄이기 위해 장바구니를 준비하는 당신, 고맙습니다."

"건전지는 따로 버려야지" "환경을 생각해서 건전지는 따로 버리는 당신, 고맙습니다."

 

엇, 건전지, 따로 버리는 거던가?

이거 무수은, 무(또 뭐더라...)로 제작되어 이제부터는 따로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게 90년대 말이었는데, 그 사이 다시 수은건전지가 나오는 건가, 아니면 따로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해놓고 알아보니 그러면 안되는 거여서 번복했었나..

사실, 건전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마다 1초간 망설이긴 했었다, 그냥, 왠지.

만약 따로 버려야하는 것이라면 따로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할때처럼 왜 신문에 알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또 왜 건전지 수거함은 하늘에 별따기 마냥 보기 힘든 것인가.

나는, 모든 항목에서 점수를 받고, 다시한번, 자타가 공인하는 '지구지킴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딱 한 항목에서 날려버리고 이 탓을 누구한테 해야하는지, 어디부터 잘 못 된건지 찝찝한 기분으로 한참을 짚어보았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정신차리고 보니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97년말, 연세대학교 공대 도서관 건물 안의 한 장면.  도서관 내부 벽에 붙어있던 작은 의견란 앞 청바지와 누런 색 쎄무 자켓을 입고 긴 생머리를 하고 서있던 한 여자. 그 의견란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끄적끄적 그녀가 적고 있었던 것은, "공대 내 건전지 수거함을 만들어주세요."란 문장 아래, "건전지는 이제 무수은, 무(....기억 안난..)로 제작되어 분리수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녀가 펜을 내려놓자 마자 마침 화장실에서 돌아온 그녀의 애인, 그것을 보고, 입끝을 귀에 걸며, "당신은 아네뜨 베닝같아"한다.(그 당시 무슨 영화에서 마이클 더글라스는 미국대통령으로 나오고 아네트 베닝은 환경운동가로 나와 환경에 대해 썰을 풀자 마이클 더글라스가 그 모습에 반하였다) 

 

아, 그 여자, 그 당시, 정말 아름다웠구나, 미친년 널 뛰듯 머리를 산발하고 있어도, 가끔은 쥐잡아먹은 듯 시뻘건 립스틱만 얼굴에 동동 띄웠어도, 다 헤진 청바지와 다 헤진 30년된 쎄무 자켓이 그럴싸하게 어울리며 너무도 아름다웠었구나, 이 생각을 한참 하고 자빠져있었다. 건전지 분리수거가 잘 안 알려진 문제의 책임은 저 멀리 집어던져놓고.

 

이제는 알겠다, 그 때 그녀가 정말 아름다웠었다는 걸. 아, 젊음이란, 지나고 나니 이렇게 가슴 끓듯 절절히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이제는 미친년 널 뛰는 머리를 하면, 그야말로 미친년 널을 뛰고있고, 쥐잡아먹은 시뻘건 립스틱을 발라볼라치면, 살짝 바르자마자 누가 그새 혹 봤을까 깜짝 놀라 허둥지둥 지우기 바쁘고, 헤진 청바지와 누렁 쎄무자켓은 버티기 자세같다. "그거 그렇게 버리면 오염원이야."라고 한 소리하면, '아네뜨 베닝'은 커녕, '저 아줌마 저 잔소리'표정이 돌아오고....

 

20대, 나에겐 다 지나가주었다는 것이 좋았어, 라고 시건방을 떨었더니, 이제와서 이렇게 그리울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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