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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1/06
    <까페 뤼미에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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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12/23
    얼씨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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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12/22
    피아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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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12/16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라 뮤지카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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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12/05
    인터넷 관두기 전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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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12/03
    이제 인터넷 그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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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11/15
    스포츠 중계를 보지 못하는 이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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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11/14
    또 영화, <라빠르망>과 <나의 그리스식 웨딩>(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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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11/04
    또 영화, <세입자<the tenant, Le locatair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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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10/30
    두 영화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 <연애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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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 뤼미에르>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휀이었던 염승주답게 염승주의 2005년 베스트 무비는 <까페 뤼미에르>라고 했다. 

 

 

얼굴 본지도 몇 년에다가, 그렇다고 앞으로 몇 년 후에 얼굴 볼 것인가 하면 그럴 것 같지도 않은 사람을 두고 나는 참으로 이러쿵저러쿵 별 생각을 다 한다.

그런 사람이 있긴 하지.

직접 보며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그 사람을 가끔 떠올리고,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영향을 조금 가끔 받고 있는.

난 왜 그런 사람이 하필이면 멸치대가리 염승주일까.

(염승주말고 다른 사람도 물론 있겠지, 예를 들면 존 레논이 그렇고...)

하여간에 나도 <까페 뤼미에르>가 무척 보고싶었다. <킹콩>보다 <까페 뤼미에르>가 더 보고싶다.

 

<까페 뤼미에르>의 광고를 보고 아, 이 영화 보고싶군,이란 생각을 하자마자 시사회신청을 열라 했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대여섯군데를 들러, 똑같은 답변을 써놓고, 회원가입을 하는 지랄을 하느라 두어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시사회 시간이 밤12시이니 규민이 재워놓고 나가면 딱 맞겠다, 티켓 두 장 오면 하나는 누굴 줄까, 일본인이랑 같이 보고싶은데 아는 일본인이라고는 하야타형밖에 없고, 이 양반은 밤 열두시에 만나 영화티켓을 건네며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나와 영화가 좋으면 팔짱을 끼고 밤거리를 걸을 지도 모르는 낭만의 상대로는 왠지 끌리지 않는군, 그렇다면 어떡하나, 학교에 일본어 선생을 꼬셔볼까...하는데 시사회에 당첨 안 됐다. 그 후에 들은 소리는 <까페 뤼미에르>가 염승주의 2005 베스트 무비라고.

 

2006년엔(이 까마득한 숫자라니.) 영화를 좀 많이 봐야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영화 보는 습관을 들이기가 힘들다. 영화를 보자면 약 두시간 쯤(집에서 비디오로 볼때나 그렇지 영화관에 가자치면 반나절이나) 꼼짝없이 시간을 묶어두어야한다는 것인데, 애 낳고 키우다보면 금 한 다라이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게 두 시간이라, 이 금쪽보다 귀한 것을 어디 한 군데에 묶어쓰겠다는 과감성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이다. 사실 그러고서는 하는 짓이 인터넷이다.

인터넷 딱 삼십분만 하고, 책 한 시간, 나머지 삼십분은 차마시며 신문을 봐도 좋고, 손톱 맛사지를 할까, 인생을 음미하며 철학을 생각할까,하고 컴퓨터를 켜고는 두시간 홀랑 인터넷인 것이다. 이놈의 인터넷 정지해도 싸다.(아직 정지하지 못했음)

 

따라서 점점 영화와 나는 멀어지고(언제 가까운 적 있었던가만은) 그냥 이렇게 멀어지는 것이 수순인가보다,하고 생각하였다. 나에겐 내가 감당 못 할, 그러나 너무 가까와져버려 거부할 수는 이미 없는 것이 생겨버렸으니 영화 쯤 멀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영화는, 보면 재미있으니, 보면 또 보고싶고..

요즘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있어서 특히 그런가보다.

요즘 본 것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어찌나 재미있는지 여러번 보면서도 보면 볼수록 재미있다.

새삼, 감상의 기쁨이랄까.

(규민이가 아직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를 보지 못해(귀신때문에 무서워서 중간에 자꾸 빨리 돌려야함) 비디오로 복사를 못하고 있어 이 디비디를 빌려준 누군가에게 너무나 미안함)

오히려 처음 봤을땐, 캐릭터마다 이미지가 과다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이게 내가 에스에프나 환타지를 싫어하는 이유인 듯.

그러나 보면 볼수록 드러나는 것은 감정과 일상을 표현하는 섬세함, 세밀함, 풍성함.

섬세하고 세밀하고 풍성한 감정과 일상의 표현이란 창작의 원론 같은 것이다. 결국 아무 데도 더 가지 않았다. 아무리 길고 뛰는 디지털 시대 어쩌고 하지만, 세상은 늘 제자리인 것을. 줄기세포, 인간은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전기용접 따위로 신을 흉내내었다고 하려하다니.

황우석 얘기는 아무 데서도 하지 않는다고 결심했건만, 하필이면 엄마 아빠 앞에서 몇 마디 했다가 대판 싸우기만 했음. 으으으... (아니다, 황우석은 엄마랑 싸우고, 아빠하고는 이명박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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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

전북도민은 새만금 막아서 농사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다는 기사를 본지 만 몇 시간 만에 전북도청 팡파레 울리고 경사났네 잔치 벌렸다는 기사.

 

그치, 원래 나랏일 하시는 분들이 백성들을 살핀 적 있던가.

전북도청 팡파레 울렸다는 기사가 실린 신문엔 그 어디에도 일반인의 평/인터뷰 한 꼬다리도 없고. 그냥 전북도청이 팡파레면 그 아래 백성들도 따라서 팡파레라는 식?

 

그런데, 그 신문에서 더 가관인 건, 고등법원의 판결 기사 중

"식량자주권을 염려하는 정부의 손 들어"줬다는.

 

이런 개똥 같이 웃긴 얘긴 또...

 

쌀시장 개방하며 팔아먹은 식량자주권을, 엉덩이에 모자 씌웠다고 얼굴이라고 들이밀면 어쩌시나.

 

어렸을 때 이렇게 앞뒤 안 맞는 어른들의 큰소리를 들으면 나의 생각; 그래도 무언가 내가 이해못하는 큰 뜻이 있나보지. 그래서 어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결정한 것이겠지. 나도 어른이 되면 그걸 이해할 수 있겠지. 그걸 이해하면 나도 세상을 알 수 있겠지.

(지금 보니, 아주 정직하고 올바르고 튼튼한 아이였네. 그런 아이가 이렇게 음침하고 불온하게 되다니.)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든 거야.)

 

그러나 역시 '직관'이 옳다.

처음에 딱 아니라는 느낌이 들면, 그게 맞는 것이다.

나는 아직 덜 성숙한데다, 여자라는 소수자 시각을 벗어날 수 없는데다, 온통 컴플렉스라서 내 직관을 믿지 않으려 한 세월이 길었지만, 결국 직관이 옳았다.

(얼마전 세계문학포럼에서 최장집 교수의 말을 듣고, 이 컴플렉스를 벗기로 용기를 냄)

아니면 아닌 것이다. 구리면 구린 것이다.

새만금 갯벌막아 농사는 왜 짓느냔 말이지.

농사 지을 땅이 없어서 못 지었냐.

식량자주권 때문이라니.

입 벌려 뱉으면 다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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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대학교 때 뜬금없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적이 있었다.

피아노치기를 그만두고 만 십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나는, 내가 음악과 미술에는 젬병,이라고 낙인 찍고 살아왔었다.

미술은 정말 쪽팔릴 정도로 못했고, 음악은, 사실 음악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못 한 것도 아닌데, 시험 공부 하기싫어 그냥 시험봤더니 필기시험이 40점대(두개 중 하나도 못 맞힘, 이렇게 음악상식이 없다는 것 자체가 꽝이라는 증건가...)이고 나니, 실기시험을 아무리 잘 봐도 이미 바닥 점수로 결판이 난 것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노래를 내가 그렇게 못 하나? 내가 듣기에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암튼 나는 '듣는' 음악과 '보는' 미술에 나의 인생을 한정하고 살아왔었다. (사실 이것도 그렇게 풍부하고 심오하게 즐기는 편도 아니다. 오히려 얄팍하고 경박하고 단순하고 무식한 편이지.) 그래도 뭐 살기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때때로, 대학교 때 뜬금없이 동네 피아노 학원에 오만원 들고가 등록해야만 했던 때와 같은 그런 순간이 오곤 했다는 것이다.

 

이럴 때 나의 인생은 참으로 가난했다.

나는 악기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르고, 무언가 떠올랐다고 오선지에 끄적거려볼 줄 모르고(무언가 떠올라서 흥얼거린 적은 있었지.), 붓을 들고 색을 골라 펼쳐 보일 줄 몰랐다.

 

그러나 오만원 들고 등록한 동네피아노 학원에서는 내가 생전 듣도보도 못한 것을 요구했다(물구나무서고 피아노치기 같은 걸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즐기기 전에 질려버리고 학원에 가지 않았더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또 그로부터 거짓말처럼 만 십년이 훨씬 더 지났다.

 

올해는, 기타치기를 한해소망목록으로 올린 해였다.

때때로 터지던 갈망이, 이제 별로 시간이 남지 않았다(그게 젊음이던, 인생이던)는 조바심 때문인지 시시각각 터졌다. 아니, 그것은 시간이 별로 남지않았다는 조바심 떄문이 아니라, 나의 인생이, 혹은 누구나의 인생이든 인생이란 것 자체가 사실은 원래부터 유희가 원천근거이기 떄문이라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말하기 쪽팔리게 나는 한 번도 기타 배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이것도 내가 스스로에게, 직접하는 음악/미술의 문외한으로 낙인찍은 불행한 결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직접 연주하며 부르려고,하고 이유를 댔더니, 전수찬이 그거 치려면 꼬박꼬박 매일매일 연습해서 3년은 쳐야된다고 말했다. 이미 넌 글렀다는 뉘앙스였다. 어쩌면 난 평생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이렇게 생각하니 순간 서글프네).

 

하여간에 본격적으로 '하는'음악의 원년으로 삼은 올해, 단지 의식적인 한해소망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을 다시 잡아보려는,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보려는 인생 전환점에서의 오묘한 무의식의 힘처럼 나는 피아노를 다시 치게 됐다.

 

국민학교 담임은 원래 노래반주를 풍금으로 하지않은가. 풍금도 없는 가난한 학교에는 강당에 조율되지 않은 오래된 영창피아노와 누가 퇴직금으로 기증한 디지털피아노가 한 대 씩 두대 있는데, 강제적인 음악연수를 시작하게 되면서 이 두 대의 피아노를 만져보게 된 것이다.

 

이미 밝혔듯 이것은 강제적인 것이었다. 나는 늦은 퇴근을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음악연수 선생님은 일주일에 딱 한 번 오셔서 선생님 전부에게 레슨을 해주시기 떄문에 나같은 신임은 당연히 끄트머리 순서를 받아 퇴근이 무지하게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더더군다나 끄트머리에 레슨을 받으면 피곤해질대로 피곤해진 음악선생님은 딸랑 5분짜리 레슨만 해주었고 이걸 받으려고 한달에 5만원을 내야한다는 것도 억울했고 하여간에 나의 자발적인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을 대고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손가락은 내 머리가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피아노 건반과 감동적인 해후를 하였다.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라고 욕을 먹다가 결혼식에서 최종민과 유영이의 애무를 끝으로 내 곁에서 사라진 나의 낡은 영창피아노, 이거 2학년떄 올백 맞은 기념으로 사주신 거였는데, 그 피아노가 어찌나 그리운지 내가 발등을 찍는다. 도로 찾아올 수 없을까.

디지털 피아노는 정말 사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싸니까 디지털 피아노를 살 수 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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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라 뮤지카2

마르그리트 뒤라스, 이 여자 나랑 이란성 쌍생아 아닐까?

문장 하나하나가 마치 내 머리 속에서 나온 것 같다.

(하긴, 이렇게 느낄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그래서 세계적 작가이겠지.)

사실 문학의 감동, 예술의 정화(카타르시스, 지금 이 말이 생각 안나며 별별 단어가 머리에 떠오름, 클라이막스는 그렇다쳐도 코르크, 클리토리스,..) 이런 거 없다.

좀 달착지근하려고 한다,하다가도 확 건조하고 권태롭게 나가떨어지는 그 맛. 그거 때문에..

 

이런 게 그렇게 좋다니, 문득 나는, 관계에 관한 한(?), 너무 건조하고 무기력한 인간 아닌가, 란 생각이 들어 기운이 빠졌다. 이미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의 이런 말을 들으면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자기 소설을 잘못 읽고 있다고 쯧쯔 혀를 찰 지도 모르겠다. '나는 관계에 관한 열정을 그린 것이지. 그게 너무 강렬해서 현실은 항상 무기력하고 마는 것이라....' 그러나 나는 관계에 관한 열정은 하나도 모르겠다. 단지 작품해설이랍시고 나온 글에 하나같이 관계, 열정 운운하고 있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있을 뿐, 애초부터 주인공들은 건조하고 권태롭고 무기력하다. 관계에. 일상보다 관계에.

 

내 머리 속에서 나온 것 같은 문장의 이 소설들이, 그래서 난 대단한 세계적 소설로 도통 느껴지지가 않는다. 어쩔 땐 부끄럽기마저 하다. 아이고, 이런 걸 남한테 어떻게 보여줘.

마르그리트 뒤라스 때문에 나는 소설가 되긴 글렀다. 내가 소설 쓰면 이거 다 뒤라스 소설 흉내낸 거 아니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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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관두기 전에 또.

내년도 수첩을 샀다.

내 뜻과 상관없이 아주 멀쩡한 걸로 샀다.

회사 로고가 찍힌 것은 아니되 최대한 헐값인 걸로 장만하려하였으나, 나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아주 삐까하고 고급스러운 수첩이다. 이 수첩에서 칼라프린트 빼고, 양장 겉표지빼고, 빠닥빠닥한 종이 질 빼고하면 내가 원하는 수첩이 되겠는데, 수첩 만든 사람 말로는 만드는 단가는 얼마 안 들었고 후원금이 더 많이 포함된 거라고 한다. 후원금 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첩 안에 다달이 적힌 비장한 문구들을 보면서.

 

해마다 새 수첩을 사면서 어떡하면 회사 로고 찍힌 것은 아니되 최대한 싸구려를 살 것인가 궁리한다. 수첩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내 취향이 싸구려 취향이기 때문이다. 마분지 겉표지에 갱지 속종이면 딱이겠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공산품은 없고(2,000원 쯤 하는), 예술인이 만들어 벼룩시장에 내놓고 만오천원을 받는다. 꽥.

 

이런 궁리를 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영화 <청춘스케치(리얼리티 바이츠)>, 위노나 라이더가 두꺼운 수첩(분명히 내용도 이리저리 정신없이 빽빽하게 차여있을 거라 상상이 되는)과 펜을 들고 골몰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벤 스틸러가 뒤에서 허리에 팔을 두르며 껴안는다. 그러면서 2년 전 수첩을 쓰고있냐고 놀라고(그 영화에서 벤스틸러는 잘나가는 여피였지) 위노나 라이더는 흐흐흐흐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데, 당시 영화를 본 모든 x세대 여자들이 위노나 라이더와 자기를 등치시켰던 것처럼, 순간 나도 당장 2년 전 수첩을 찾아써야겠다는 충동이 일었었다.

매번 수첩을 살 때마다 새로 사지 말고 올 해 것 그대로 써볼까,하는 갈등을 25초 쯤은 한다.

 

꼭 위노나 라이더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이대로 올해 수첩은 무용지물이 되는 연말이면 곳곳에 텅빈 수첩이 무척 아깝다. 내년에도 쓴다고 해도 넉넉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새 수첩을 사서 새로 적기 시작하는 기분도 삼삼하지. 핸드폰이 있기 전엔 해마다 주소록에 이름들을 새로 적어가며 그 명단들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곤 했는데, 이젠 핸드폰이 줄줄이 번호를 기억하고 있으니 주소록 명단들의 의미가 시들시들하다. 핸드폰이야말로 깔끔이 관둬버리고 싶은 흉물이다. 나만 없애는 게 아니라, 전 지구상에서 싹 사라져버렸으면 싶은.

얼마전에 <라빠르망>을 다시 보며, 불과 얼마전의 영화인데도 단지 핸드폰이 없다는 차이점 하나로 공중전화를 찾아 뛰어다니고 무지 찾아헤매지만 늘 엇갈리는 걸 보고, 핸드폰 하나만 있으면 쟤네들 금방 다시 만나 사랑의 재회를 했을텐데 싶은 것 보다, 핸드폰 하나만 없어도 저렇게 풍성한 우연과 비밀과 이야기와 로맨스가 나오는데 핸드폰이 다 잡아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갓댐 핸드폰.

 

한 해가 가고 새 수첩을 사는 이 즈음이면, 곧 서랍에 쳐박히거나 쓰레기통에 쳐박힐 올 해 수첩을 1월부터 넘기며 '올해 베스트 영화'나 '베스트 액터/액트리스'를 꼽는 행사를 가져줘야하는데, 벌써 몇 년 째 못 하고 있다. 덩달아 이거 하면서 술먹는 재미도 잃고.

내년엔 할 수 있을라나.

 

전수찬 말이, 얼마전 염승주를 만났는데, 그는 여전히 올해 베스트 무비가 어쩌고 베스트 액터가 어쩌고 떠들며 술을 마신다고. 뭐라더라, 귀여운 로맨스물을 하나 꼽으며 올해 베스트 영화라고 했다는 것 같은데, 영화 제목 기억이 안난다. 그가 <도니 다코>를 두고 올해 최고 영화라고 떠들었던 몇 년 전이 기억난다. 그 말에 나도 그 영화를 보았고, 무지하게 재밌어서 나도 올해 베스트 탑 5안에 꼽았었다. 나의 2005 베스트 무비는 본 것이 없어서 꼽기도 어렵지만, 아녜스 자우이의 <룩 앳 미>가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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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인터넷 그만

한달에 들어가는 공과금이 너무 많다.

공과금 벌기 위해 사는 것 같다.

정작 내가 먹고 입는 데는 배추 꼬다리만큼이면 다 되는데, 그놈의 공과금이 다 잡아먹는다.

(근데 갑자기 공과금이란 무슨 단어일까, 란 생각이 듦. 공적으로 부과된 금액이란 소린가. 그렇다면 내가 지금 불평하고 있는 돈들에게는 공과금이란 이름이 어울리진 않는데. 사과금인데...  생각해보니, 내가 불평하고 있는 돈들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 이것들도 어차피 내가 먹고 입고 사는 데 필요해서 소비되는 돈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쓰면서 내 생활 어디가 보수되고 유지되고 있다는 것인가. 그냥 물 새듯 새고 있는 돈이다. 이런 돈이 너무 많다. 이런 돈들을 위해 허걱허걱 일을 해야하는 처지가 불쌍하다. 도시의 생활에 왈칵 혐오감을 느낀 것도,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살고 있다는 명제가 바로 내 꼬락서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신문을 끊었다. 돈의 액수로 보자면 순위가 낮은 편인데, 가장 먼저 체크당했다.

신문 볼 시간도 없고.. 가 이유다. 

전화를 걸었다. 신문 끊기위해 배달원이랑 실갱이를 벌이는 짓 따위는 없이 우리회사는 깔끔하고 쿨하다는 듯이 전화상담원은 상냥하고 친절하기도 하였지만, 실제로 신문은 계속 왔다.

아침마다 집 앞에 놓여있는 신문 잡아드는 재미를 마지막으로 느껴보지, 뭐. 알아서 끊어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는데, 알아서 끊어주는 게 아니라 알아서 계속 보내고 있다.

 

뭘 끊나, 그러면.

건강보험료가 눈엣가시인데, 이거 어떻게 처치하는 방법 없을까.(이것은 진정 '공과금' 아닌가.)

그러나 그 다음 순위는 인터넷이란 걸 나는 내심 알고 있었다.

 

인터넷을 끊을 수는 없었다.

아, 내 친구 인더넷.

1996년부터 우린 찰떡사이였지. 집에서도 널 만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몰라.

밤새 넌 날 냉철한 시사의 세계, 몽롱한 예술의 세계, 그리고 축축한 지하의 세계까지 멋진 여행을 시켜주었었지.

니가 없이 난 어떻게 살겠니. 벌써부터 열손가락이 근지러워지는걸.

 

그러나

인터넷을 끊기로 했다.

일전에도 인터넷 가격이 문제되었을때, 더 싼 것으로 바꿀 방법을 찾았었지, 아예 없애버리는 것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어째 아주 명료하게 곧장 해지로 결정했다.

결정하고 나니, 그 후는 아주 고요한 바다였다.

 

해일이 몰려오고 폭풍이 범람하고 하늘과 바다가 엉켜 울부짖을 줄 알았는데, 고요한 바다였다.

인터넷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이다.

인터넷으로 신문 보면 되지, 뭐, 하고 생각했었는데, 신문을 끊으려 했다니, 갑자기 신문에게 미안해졌다.

그러나 아마도 난 인터넷이 있는 곳에 가게 되면 언제나 그 앞에 달려가 앉아서 어느새 입은 헤 벌리고 있겠지. 하여간에 지금의 정답은 인터넷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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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중계를 보지 못하는 이유

얼마전에 한국의 프로야구 코리안시리즈 우승팀과 일본의 프로야구팀과의 친선경기가 몇 경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십대 초반 나도 야구장에 가봤다. 야구장에 가서 피자와 캔맥주를 먹자는 말에 넘어가 피크닉 가는 정도로 생각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엉덩이 들썩하는데 부화뇌동하기도 쉽고, 부화뇌동 하는 가운데 먹는 피자와 캔맥주가 꽤 맛있었다. 하지만 나는 피자와 캔맥주가 끝나면 또 아이스크림을 먹고 아이스크림이 끝나면 또 무언가를 먹고 내차 먹다가 먹을 게 없어지면 몸을 꼬았다.

 

하지만 나에게도 일생일대 잊지 못할 정도로 역사적인 스포츠 경기가 있다.

국민학교 6학년때였는데, 한국 대 일본의 야구경기였다.

일본팀이 2점(인가? 이것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젠 가물가물하네) 선점하고 있었고, 한국팀은 도통 방망히 한 번 휘두르지 못했었다. 당시 같이 살고 있던 이모는 즉석 떡볶기를 좋아했었다. 그녀 나이 스물일곱, 집에서는 한창 노처녀 취급을 받고있었다. 지금 생각하기에 그녀는 즉석떡볶기 중독이었었던 것 같다. 우리는 광화문 내자호텔 근처 살고 있었는데, 점수변동이 없는 야구가 지겨워진 이모는 나를 꼬셔 정동 지역 최고 유명했던 미리내 분식점에 함께 가서 즉석떡볶기를 사오자고 했다. 나는 이모와 손잡고 그 길을 걸어가, 떡볶기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집에 왔다. 집에 와서 끓여먹을 찰나, 막판에 한국팀 점수가 났다. 한대화가 막판 만루홈런으로 역전을 시킨 것이었다. 이모는 고 사이에 떡볶기 사오기를 잘하지 않았느냐며, 막판 만루홈런을 알고 그 사이의 시간을 잘 사용했다는 식으로 의기양양하게 뻐겼고, 나는 야구는 구회말 투아웃부터라는 의미를 가슴에 새겼다.

그 이후 프로야구가 생겨서 원년에 오비베어즈 어쩌구하며 다녔던 것도 좀 기억난다.

 

가끔 운동선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여자애들을 보면, 그게 멋져보여 나도 흉내내려 했던 적이 있었다. 진정으로 나의 총애를 받았던 선수도 몇 있다. 최천식, 전희철...

 

하지만 나는 스포츠 경기 앞에서 항상 딴 생각이 빠진다.

야구는 투수가 폼을 잡고 공을 던지기까지 그 사이에만 잠깐 딴 생각한다는 것이 정신 차리고 보면 벌써 공치고 타자 뛰고 있고, 농구는 반칙 나온 사이에만 잠깐 딴 생각한다는 것이 정신 차리고 보면 점수를 따라잡기 어렵고, 축구는 워낙 경기장이 넓어 시종일관 계속 딴생각이다. 고스트 바둑왕을 보며 잠깐 '승부욕'이란 것을 나도 가져봐야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그러다가 남편이 그러고 있는 날 한심하게 쳐다봐서 당장 관뒀다.), 사실 나의 적성과도 맞지 않는다.

 

얼마전에 있었던 한국 프로야구팀 대 일본 프로야구 팀 경기중계에서는 이승엽에 대한 딴생각에 빠졌다. 이승엽은 일본 프로야구팀 소속이었다. 이승엽은 얼마전에 결혼해서 새 신부와 일본에 갔다. 일본으로 가는 공항에서 이승엽과 새 신부는 나란히 사진포즈를 취했는데, 그녀는 짧은 청미니스커트에 곰사냥나가는 털부츠를 신고 있었다. 한 눈에 대단한 신세대 미녀였다. 이승엽처럼 잘 나가는 프로야구선수는 그런 미녀를 차지할 만하지. 이승엽이 경기하고 들어오면 그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나긋나긋 풀어줄 그녀가 곁에 있으니 총각 때와는 달리 이젠 안정이 되겠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싶었나보다. 그녀는 곁에서 이승엽의 피곤과 스트레스를 나긋나긋 풀어준다. 저런 미녀라면 이승엽은 눈녹듯 피곤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이승엽이 한국에 돌아오면 그녀도 함께 돌아오고, 다른 곳으로 가면 또 거기도 가고. 이승엽의 피곤을 풀어주기 위해 함께 항상 갈 것이다. 365일 고용된 개인용 창녀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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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영화, <라빠르망>과 <나의 그리스식 웨딩>


 

옛날 옛적 이 영화를 보았는데,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실 그런 영화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뭔가 기억해야만 할 것이 있는데 까먹고 있다는 느낌에 끌려서 다시 봄.

<라빠르망>은 처음부터 <미나 타넨바움>하고 헛갈렸었는데, 시기가 비슷하고 프랑스영화고 여자 둘의 이야기고, 그냥 그래서 그랬나 보다. (로만느 보랭제가 나왔고. 보는 영화마다 이 여자가 나왔던 시절이 있었는데.)

 

서로 엇갈리는 사랑. 그 상대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상대가 또 다른 상대를 만들어 넷이 되고 다섯이 되고.

억지설정이 계속 나오긴 해도 엇갈리는 사랑이 안타까움.

이쁜 여자 둘이 나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기도 하고.

모니카 벨루치는 처음에 보자마자 확 당기는 미모이지만, 로만느 보랭제가 보면 볼수록 신비하게 끌리는 쪽이다. 감독도 그런지, 영화의 주인공은 모니카 벨루치에게 빠져있지만, 나중엔 너무 어이없을만치 심심하게 그녀를 포기하고 로만느 보랭제에게 달려간다. 그랬다가 제일 심심하게 생긴 현재 약혼녀에게 묵묵하게 걸어가는 건 뭐냐. 뭐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다만.

그런데, 뱅쌍 카셀이 모니카 벨루치 남편이라지. 그렇다면 결국 이 남자는 모니카 벨루치 쪽이군. 이 영화를 보고 처음 꺠달은 것, 벵쌍 카셀이 섹시하다는 것. 이 사실이 바로, 기억해야만 할 것인데 까먹고 있어 날 영화로 이끌었던 그것!인가보다.

 

멍청해보이는데, 그게 섹시해보이기도 하고...

 

또 하나의 섹시한 남자를 찾았음.

존 코베트, <나의 그리스식 웨딩>의 남자주인공.

영화에서 여자주인공은 존 코베트가 식당으로 걸어들어오는 순간부터 첫 눈에 반하는데, 나 같아도 저런 남자가 들어오면 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첫눈에 반한 그 남자와 여자가 일사천리로 데이트-사랑-결혼-행복하게 된다.

존 코베트 같은 남자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여자를 바라보며, 키스하고, 프로포즈하는데, 나도 설렁설렁 그냥 다 넘어가겠음. 저런 남자가 여자 등짝 후리는 사기치는 건 식은 죽 먹기겠음.

 


(어때?)  (마치 새 남자친구를 보이듯 어때라니.) (이 사진은 너무 평범해 보이는 것 같은데.)

 

 


(이건 종민이 같나?)

 

그 영화를 보고있자니, 결혼하면서 상대에게 나의 '가족'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지 알겠다. 그래도 결국 거기에 동화된다는 것은, 그냥 익숙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인해전술에는 넘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인가.

 

그리스여자들이 그렇게 화끈하고 사람이 좋다던데(그리스인 친구를 둔 유영의 말에 의하면. 그 친구 엄마가 그리스에서 가끔 오는데, 그렇게 화끈시원하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니 정말 그렇다.

한국여자들이랑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한국여자들한테는 없는 게 있다.

결혼식을 앞둔 딸에게 엄마가 첫날밤에 대한 코멘트를 한다.

한국엄마들이 "남편이 하는 대로 따라야"한다는 코멘트를 했다는 소문에 비하면, 그리스엄마는 "그리스 여자는 부엌에선 양이지만, 밤에는 호랑이"라는 코멘트를 하였으니...

 

나도 그리스인을 만난 적이 있다. 여자는 아니고 남자.

런던에서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가던 버스에서 였다.

버스의 승객은 나와 그, 둘뿐이었는데, 나도 어리둥하고 있는 판국에 날보고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가려면 어디에서 내려야하냐고 물었다. 그 남자는 버스기사에게 물었고, 우리는 같이 내려 걸었다. 그 남자는, 하루키 소설에 나왔던 그 그리스 섬 출신이었다. 키가 나보다 약간 작았지만, 잘 생겼었다!

남자는 그리스에서 미술을 가르친다는데, 방학이 되면 자기가 공부했던 런던으로 와서 미술관에 다니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여성단체에서 일을 했는데 그만두고 여행중이라고 말했다. 그 남자는 왜 여성주의자가 되었냐고 묻더니, 내가 이러쿵저러쿵 이야길 하면 말끝마다 빙그레 웃었다. (이 영화를 봤더니 그 남자가 왜 웃었는지 알것도 같다)

미술관에 도착해서, 이제 안녕, 했더니 우리 같이 점심 먹을까?한다.

음....난 (사먹을 돈도 없고) 샌드위치 싸왔는데, 했더니, 자기도 샌드위치를 싸왔다고 하여 그럼 같이 먹지, 뭐.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나에겐 미술관 사랑의 첫정 같은 곳이다.

미술을 내가 뭘 아나, 관광삼아 가서 처음엔 어슬렁어슬렁 천천히 되는대로 걷고 구경하다가 점점점 쓰여진 설명들을 코 쳐박고 읽어가며 그림들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바라보다가 다음 그림으로 일초라도 빨리 가려고 허둥허둥 꽁무니를 빼고 걷고 뛰기 시작했던 첫 미술관이었다. 지금도 미술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나는 샌드위치 먹는 시간도 아까워졌다. 그냥 이렇게 하염없이 돌아다니며 그림들을 보고 싶어졌지만, 그래도 잘생긴 그리스 남자를 또 언제 보겠는가, 약속장소로 갔더니, 그 남자도 그림을 보던 흥분으로 달궈진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둘은 잔디밭에 앉았다. 샌드위치는 금방 다 먹었다. 그 다음 일정이 서로 달랐다. 그래, 그럼 이만 안녕, 하자, 순식간에 "Bye my beautiful Korean feminist friend"하더니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헉. 난 얼마나 놀랐나 몰라.

근데, 뭐, 영화를 보니, 그리스사람들 저렇게 뽀뽀하는 건 일상이겠다.

나만 괜히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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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영화, <세입자<the tenant, Le locataire>


 

남편이 로만 폴란스키의 옛날 영화를 얻어와서(누가 씨디로 구워주었다고 했다. 그 편리함에 놀랄 정도였지만, 난 사실 영화를 못 봐도 괜찮으니 이런 식의 편리함은 세상에 없었더라면 더 좋을텐데 하는 느낌..) 볼래?했다. 그래서, 처음엔 볼 생각이 없었다. 나는 또 바뻤다.

그러나 컴퓨터에서 영화가 돌아가고 있으니 그냥 또 봤다.

 

로만 폴란스키 영화는 로즈마리 베이비가 엄청나다는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 본 것은 특별히 로만 폴란스키라고 할 만할 것들도 아니었다. 피아니스트(2002)나, (내가 좋아하는) 죽음과 하녀(1994)(한국어 제목이 뭐더라.).. 그런데 이 1976년도 영화를 보고있자니, 로즈마리 베이비가 얼마나 엄청날 건지 알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배우들이 조종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 꼭두각시 인형처럼.

갑자기 휙 나타나서 소심한 대사를 늘어놓거나, 호통을 치는 인물들.

안절부절하며 공포에 떠는 주인공은 그러나 상황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망상의 세계로 데리고 간다.

별 것도 없는 줄거리임에도  그런 분위기로 인해 신경이 거슬린다.

줄거리는, 1976년엔 쇼킹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보기엔 단조롭다.

아파트의 새 세입자는 전 세입자가 창문 넘어로 투신자살하였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무슨 이유인지 이 남자는 아직 죽지않았다는 전 세입자의 병실을 방문하고, 그 병실에서 그녀의 친구를 만나 이소룡영화를 같이 보며 키스를 한다. 아파트 안의 신경질적인 이웃들과 부딪히는 등의 며칠이 지나가고, 남자는 이웃들이 자신을 전 세입자로 만들어 투신자살하게 하려한다는 환각에 시달린다. 남자는 전 세입자가 남기고 간 원피스를 입고 화장을 하고 긴머리 가발을 쓰고 투신한다. 한 번 떨어졌는데 안 죽으니 몸을 질질 끌고 올라가 다시 떨어진다.

 

단순한 조명(공포스러울땐 어두컴컴)과 문학적인 대사, 그리고 놀랄 땐 앞으로 가고 관찰할 땐 한 발 물러 따라가는 우직한 카메라, 진지한 표현이란 표현의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시나 의도자의 진심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고전을 만난 기쁨을 음미하나, 이는 영화를 씨디 안에 복사할 수 있다는 테크놀로지 덕분이겠지만, 진심을 오바하는 방법의 세상, 테크놀로지의 세상이 바로 모든 종류의 의도자들이 경계해야할 것 아니겠는가. 영화를 못 봐도 좋으니, 세상의 모든 씨디와 디비디와 컴퓨터와 *지털은 종말하였으면.  엘피와 필름과 타자기가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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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 <연애의 목적>

* 이 글은 원래 10월29일 토요일 올렸던 것인데, <연애의 목적>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대충 쓰고 말아버린 감이 있어 10월30일 일요일 다시 씀. 정성이다.

 

 

'이처럼 어린 여자가 이처럼 의연하게 사랑의 오고 감을 응시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던가. 사랑의 환상과 현실의 냉정함 사이에서 그 아픔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내던 소녀. 사랑이 떠난 후, 휠체어를 타고 그녀는 홀로 길을 나선다. 그 슬픈 뒷모습에서 세상을 향해 또 한 걸음 내딛은 여인을 본다. 그 순간, 사랑보다도 빛나던 순간.'

 

한겨레신문에 어느 평론가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자기가 본 최고의 쿨한 멜로영화로 꼽으며 쓴 평.


 

이 평이 실렸던 기사는, <너는 내 운명>하고 <사랑니>같은 멜로영화가 다시 유행이라고 하면서, 멜로 영화를 '쿨한 멜로'와 '징한 멜로'로 나누자면, <너는 내 운명>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류의 '징한 멜로'이고, <사랑니>는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류의 '쿨한 멜로'라는 얘길 썼다. 그러면서 어느 평론가와 어느 소설가의 각각 '쿨한 멜로'옹호론과 '징한 멜로'옹호론을 덧붙여 놓았었다.

나는, 이것이 나의 개인적 취향의 문제인지, 개별 영화의 내용이나 재미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징한 멜로'보다는 '쿨한 멜로'에 한 표다. '징한 멜로'영화는 나를 잘 설득하지 못한다.

가슴에 악마가 얼음심지를 박아놓았는지, 사랑하는 사이로 설정된 두 사람이 등장할 때 마다, '쟤네 이제 끝나나보다'라는 생각부터 하고 본다. 절절이 사랑한다는 설정이 계속이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히 그 근거를 찾으며, 잘 이해하지 못 한다.

(그런데 <굳세어라 금순이>의 구재희의 사랑은 그토록 가슴절절하게 봤으니, 이것은 나의 영화관람자세와 드라마관람자세의 차이인가????)  저 신문 기사에서도 소설가의 '징한 멜로'옹호론은 나에게 설득력 빵이었다.

 

쓰고보니 이것은 실제로 나의 '애정관'과 연관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애정관이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식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사랑이란 그 과정에 있다는 생각이다. 감정에의 응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성찰. 무엇인지 끝까지 알지 못해도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끝없는 질문.

 

한겨레에 평을 올린 평론가만큼 나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재미있었다. 내가 본 최고의 멜로영화 탑 화이브 안에 꼽겠다. 사랑영화는, 내 애정관에 맞는 사랑영화는 결국 자기얘기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 생선을 굽는 조제의 의연한 얼굴. 식탁에 놓을 생선접시를 향해 뻗어올린 조제의 의연한 팔. '그 순간, 사랑보다도 빛나던 순간.'

 

일본어 영화를 볼때마다 그 익숙하지 않은 인토네이션에, 배우들이 지금 연기를 잘 하고 있는 건지, 좀 느끼하거나 오바인건지 아리송하며 불편하곤 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특히 남자주인공이 너무 이쁘게 생겨서 싫었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애가 애인이라면 금새 토라져, 흥, 나 장애인애인 안할거야,하고 삐칠까봐 영화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이쁘장한 남자애는 잘 삐친다는 선입견?)

 

반면 <연애의 목적>.

그냥 호감가고 좋으면 같이 자는 거지, 쿨하게. 사랑이란 감정은 어차피 3개월짜리인데 사랑은 왜 따져. 라며 추근대는 남자. 여기에서 이 영화는, '사랑은 할인쿠폰이라는' 쿨한멜로처럼 보였다.

 

때로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보다 '너 졸라 맛있다'라는 말이 더 정확한 사랑의 고백일 수 있다. 나도 니가 졸라 맛있어,하고 맞붙는 사랑에 무슨 걸림돌이 있겠는가.

 

둘은 그래서 불같은, 뜨거운, 멋진 사랑이 될 수 있었다. 이제부터 결국 감독이 원했던 건 징한멜로였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랑이 할인쿠폰같은 세상에서 이런 징한 사랑이 있단다,라고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거다. 애타게 부르짖는 남자 목소리의 '우리의 불같은 사랑' 어쩌구란 노래는 노골적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결말에, 최홍이 학원강사 유림을 다시 만나는 순간부터 확 깼다.

앗, 저것은....

저것은 무엇인가.

 

최홍은, 유림에게 있어 이제 그녀 자신이 '손발을 잘라버리고 그의 아내도 죽여버리고 죄없는 애새끼까지 죽여버리고 싶'던 그 가해자가 되었으면서, 유림 앞에 다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한껏 감정이입했던 주인공의 새 사랑이기에?

더구나 한 번 당했던 피해자였으니 동종 범죄에 있어서는 면책특권을 주자는?

(강간당한 여자들은 강간하면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새로운 논리?)

(나 이제 잘자,하는 최홍의 대사는, 순간 이 영화가 호러영화였나 싶게, 소름이 좍 끼쳤다.)

여관 앞에 쌓인 첫 눈을 처음 밟았다며, 우리 관계는 이렇게 깨끗하게 새 시작이야,라는 넉살좋은 표정을 짓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모든 걸 덮어버린다는 그 투는, 오히려 이 영화의 최고의 순정이었던 최홍을 더럽히는 결과이다.

 

영화는 공들여 최홍을 사랑의 유일한, 따라서 빛나는 실천자로 만들어왔다(<클로저>의 나탈리 포트만같은, 조제같은, 내가 좋아하는 <멘>의 숀 영같은). 사랑이 무엇인지 묻기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려하는, 그럼으로써 막 움트는 사랑의 감정과 그것에 기대고 싶은 자기가 있었으나,  그것이 설혹 후에 진짜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서슴없이 포기되는 사랑은 단호히 부정하는, 정직하게 실천하는 용기있고 아름다운 그녀.

이렇게 고귀한 캐릭터를 애써 만들어놓고는 팔짱을 끼며 배시시 싸구려 웃음을 흘리게 만드는 건 무언가.

사랑의 고갱이에 애써 다다라 놓고는 똥을 한 바가지 퍼 싸지르고 이게 사랑이야,하는 꼴이다.

 

사실, 똥 한 바가지 퍼 싸지르는 게 필남필부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고갱이 같은 사랑을 실천하는 빛나는 실천자는 천사 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궁색맞고 저열하지만 모두가 끄덕이는 우리의 냄새나는 사랑, 그것을 영화는 이야기하려 했던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기에는, 감독은 홍상수도 아니고,

더구나 최홍을 음해하는 인터넷때문에 꼭지가 돌아 애들을 패대는 이유림과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이유림이 좋아하는 닭강정 도시락을 싸서 둘만의 아지트에서 행복하게 님을 기다리는 최홍의 교차편집이 사건의 절정에서 숨막히게 펼쳐지며, 이 천상의 연인들에의 연민을 최대한으로 호소했던 감독이, 막판에 인간의 너절한 사랑을 난데없이 메인주제로 떠올렸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영화는 거기서 끝나야했다. 이유림이 경찰차에 태워지고(왠 경찰차? 여자의 '저 남자가 성추행한거에요.'란 말 한 마디에 경찰차 오는 나라였던가, 여기가?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학교홈페이지가 야동익명게시판 같은 모양새나, 경찰차 출동이나 좀 오바다, 감독이.), 최홍은 설겆이를 하다가 설겆이통에서 불어터진 닭강정을 보며 오열하고, 약혼자와의 대화,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잤어? 그럼.하고 끝. 딱 거기가 좋았는데. 마지막 강혜정의 표정도.

 

 

<연애의 목적>이란 제목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게 더 어울렸었을...

하여간에 박해일은 여전 멋졌음.

특히, 그 부분, 최홍이 무단결근하자 집으로 다짜고짜 찾아가 창문을 간신히 여는 장면.

창문이 신통찮게 열리자, 차에서 거울을 떼어와 창문에 대고 이리저리 비추며 "아, 저기 있네. 거기 그러고 있으면 못 찾을 줄 알았지?"하는 그 장면. 으하하.


 

 

 

술은 왜 그렇게 많이 마시는거야? 저렇게 술을 막 퍼먹어본 것이 정말 오래전 일 같다.

그렇게 마구 퍼마시고 필름도 확 끊기고 그래보고 싶었다. (저 사진봐라, 정말 맛있겠지.)

(그러나 숙취는 여전히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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