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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6/10
    칫솔(1)
    이유
  2. 2005/06/03
    어느 라디오 광고(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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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6/01
    비가 온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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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6/0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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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05/31
    국제문학포럼 관람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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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05/30
    한다한다 마음먹었으니 더 잊어먹기전에 국제문학포람 관람기 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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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05/30
    들어가기 전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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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05/24
    뭐야, 어쩌라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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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5/20
    오늘 별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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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5/19
    일기장에 들르듯이(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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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솔

하얗다 상이 몇 번 우리집에서 자고갔다.

한 번은 그 다음날 일본으로 출장 예정이어서 (고향에 가며 '출장간다'라고 말하는 건 좋을까, 나쁠까. 고향은 닳고 닳은 단어라지만, 그말에 동의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향이란 단어에 연상되는 이미지는 가슴 뻐근하게한다.) 가방에 세면도구들을 챙겨왔었는지, 아침엔 당당하게 자기 칫솔을 꺼내어 썼다.

그러고는 그 칫솔을 놓고갔다.

 

음, 이걸 어쩌나.

1초 생각하고, 그냥 그대로 두었다.

그냥 그대로 둔 것이 하얗다 상이 다음에 올 것을 대비하는 착한 마음이었다면 이런 곤란한 벌을 하늘이 주지 않았을까.

하룻밤을 다른 곳에서 자게 되었을때, 세면도구 챙길 것을 전수찬에게 부탁했더니, 이냥반이 자기칫솔, 규민칫솔은 다 잘 챙기고서는 내것이랍시고 하얗다 상의 칫솔을 가져왔다.

그걸로는 왠지 도저히 이를 닦을 수 없었다. 그김에 이 안 닦고 먹고 자고 했다.

(그랬더니, 이게 늙어가는 징조인가, 지금 한쪽 잇몸이 마구 시리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 세면도구를 제자리에 정리하던 중, 하얗다 상 칫솔을 들고 또다시 음, 이걸 어쩌나 1초간 생각하였다. 모조리 칫솔꽂이에 꽂아두었으면 한 번에 일이 끝날 것을, 칫솔꽂이까지 걸어가서 몇몇 칫솔은 꽂아두고 다시 돌아서서 쓰레기통까지 걸어가 하얗다 상 칫솔만 따로 버리는 수고를 했다. 어차피 이 집 안에선 필요없는 물건인 걸, 남의 칫솔로 수채구멍 청소하기도 그렇고 버리자.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갈잎을 먹으면 죽는다고, 애초에 게으름뱅이 짓을 했으면 게으름뱅이 다운 마감을 할 것이지, 괜한 이중의 노동을 해가지고 하늘은 일을 한 번 더 꼬아 벌을 주셨다.

 

어젯밤 하얗다 상이 또 우리집에서 자고 갔다.

오늘 아침 일어나 그는 아껴두었던 나의 새 칫솔을 썼다.

아까와 뜯지도 못하고 있던 걸.. 무심하게 뜯어제껴져 한 쪽에 나뒹굴고 있는 포장, 공포 속에 떨며 마모되었을 여리딘 여린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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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라디오 광고

배용준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당신을 좋은 집에서 살게 해주는 것"이라고 목소리 깔며 얘기하는 라디오 광고를 들을 때마다 웃어야하는 건지 비웃어야하는 건지 (결국 웃긴 웃는 것이군) 헛갈리던 것이 몇달째였는데, 또 헛갈리는 것이 하나 더 나왔다.

 

"장바구니 챙겨야지" "비닐포장을 줄이기 위해 장바구니를 준비하는 당신, 고맙습니다."

"건전지는 따로 버려야지" "환경을 생각해서 건전지는 따로 버리는 당신, 고맙습니다."

 

엇, 건전지, 따로 버리는 거던가?

이거 무수은, 무(또 뭐더라...)로 제작되어 이제부터는 따로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게 90년대 말이었는데, 그 사이 다시 수은건전지가 나오는 건가, 아니면 따로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해놓고 알아보니 그러면 안되는 거여서 번복했었나..

사실, 건전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마다 1초간 망설이긴 했었다, 그냥, 왠지.

만약 따로 버려야하는 것이라면 따로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할때처럼 왜 신문에 알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또 왜 건전지 수거함은 하늘에 별따기 마냥 보기 힘든 것인가.

나는, 모든 항목에서 점수를 받고, 다시한번, 자타가 공인하는 '지구지킴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딱 한 항목에서 날려버리고 이 탓을 누구한테 해야하는지, 어디부터 잘 못 된건지 찝찝한 기분으로 한참을 짚어보았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정신차리고 보니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97년말, 연세대학교 공대 도서관 건물 안의 한 장면.  도서관 내부 벽에 붙어있던 작은 의견란 앞 청바지와 누런 색 쎄무 자켓을 입고 긴 생머리를 하고 서있던 한 여자. 그 의견란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끄적끄적 그녀가 적고 있었던 것은, "공대 내 건전지 수거함을 만들어주세요."란 문장 아래, "건전지는 이제 무수은, 무(....기억 안난..)로 제작되어 분리수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녀가 펜을 내려놓자 마자 마침 화장실에서 돌아온 그녀의 애인, 그것을 보고, 입끝을 귀에 걸며, "당신은 아네뜨 베닝같아"한다.(그 당시 무슨 영화에서 마이클 더글라스는 미국대통령으로 나오고 아네트 베닝은 환경운동가로 나와 환경에 대해 썰을 풀자 마이클 더글라스가 그 모습에 반하였다) 

 

아, 그 여자, 그 당시, 정말 아름다웠구나, 미친년 널 뛰듯 머리를 산발하고 있어도, 가끔은 쥐잡아먹은 듯 시뻘건 립스틱만 얼굴에 동동 띄웠어도, 다 헤진 청바지와 다 헤진 30년된 쎄무 자켓이 그럴싸하게 어울리며 너무도 아름다웠었구나, 이 생각을 한참 하고 자빠져있었다. 건전지 분리수거가 잘 안 알려진 문제의 책임은 저 멀리 집어던져놓고.

 

이제는 알겠다, 그 때 그녀가 정말 아름다웠었다는 걸. 아, 젊음이란, 지나고 나니 이렇게 가슴 끓듯 절절히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이제는 미친년 널 뛰는 머리를 하면, 그야말로 미친년 널을 뛰고있고, 쥐잡아먹은 시뻘건 립스틱을 발라볼라치면, 살짝 바르자마자 누가 그새 혹 봤을까 깜짝 놀라 허둥지둥 지우기 바쁘고, 헤진 청바지와 누렁 쎄무자켓은 버티기 자세같다. "그거 그렇게 버리면 오염원이야."라고 한 소리하면, '아네뜨 베닝'은 커녕, '저 아줌마 저 잔소리'표정이 돌아오고....

 

20대, 나에겐 다 지나가주었다는 것이 좋았어, 라고 시건방을 떨었더니, 이제와서 이렇게 그리울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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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무슨 비가 게릴라처럼 온다.

꿈에서 봤던 몽롱한 안개비를 기다렸는데.

그러면 우산도 없이 밖으로 나가, 꿈에서처럼 그냥 맞으며 걸어가려고 했는데.

옥상에는 내가 어제 널어놓은 이불 세개가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을 것이다.

바람에 마구 흔들리며.

옥상에 이불 널어놓고 저집 여편네는 어디 갔냐고, 옆 건물 사람들이 한 마디할 이 여편네는 그냥 밖의 비만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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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이를 봤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그녀와 나는 어디론가를 자꾸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기때문에 그녀의 옆 얼굴만을 볼 수 있었다.

굉장한 이야기가 나와서 기억해두었다가 꼭 꿈을 깨고나면 적어두어야지, 했는데, 손톱만큼도 기억이 안 난다.

 

유영이를 만난 후 (꿈이 설정해둔) 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공원 같은 곳에 앉아있었는데, 주위의 빌딩 옥상에서 사람들이 5분 10분 간격으로 떨어졌다. 어머, 저기, 누가 떨어져. 했는데, 주위 사람들은 무반응이었다. 요즘은 원래 저렇게 사람들이 떨어져 자살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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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문학포럼 관람기 2

둘째날은 운이 좋았다.

규민이 어린이집 일정상 아침 9시까지 어린이집에 등원해야해서 곧 세종문화회관으로 뛰어갈 수 있었다. 아침 10시 시작하는 토론회가 두 개, 무얼 고를까, 갈등.

하나는 내 청춘의 히로인, 오정희가 발제자로 나오신다. 그러나, 주제가 또 그만그만한 것, <힘의 질서와 인간 가치:독재, 전쟁 그리고 평화>.

같은 시각 다른 것은 <영구평화의 이상>.

독재, 전쟁, 힘의 시대를 거쳤으니, 이젠 평화도 영구평화를 얘기해야 시원하지, 하고 <영구평화의 이상>을 보기로 했다. 주제 발표는 로버트 하스(시인이라함)와 최장집교수.

그런데 늦었다. 로버트 하스의 발표 앞대가리를 빼먹는 바람에 집중하고 앉아있지 못하고 화장실도 왔다갔다 (그러느라 회의장 밖에 나갔더니, 누가 다가와, 저기 혹시 xxx씨 아니세요? 했다. 순간 나한테 떠오른 생각은 주책맞게, 엇! 난 소설가도 아닌데 어떻게 알지?였다. 내가 전혀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결과는 시시껍절하게 그냥 대학 1년 후배였다. 한편으로는 약간의 안도감, 그래, 졸업하고 그렇게 팍 변한 건 아닌가보다..) 해서 로버트 하스의 발표는 뭐가 뭔소린지 잘 모르겠다. 내가 깜짝 놀라며 감동을 받은 것은 최장집 교수때문이었다.

 

최장집 교수는 '한반도 평화조건'이란 글을 준비했는데, 그 글 안 몇가지 표현, 예를 들면, 북한을 언급할때 북한/북핵이라고 표시한다든지, 민주주의나 자유, 인권이란 가치 개입없이 평화공존 자체를 목표로한 남북한 관계라든지, 하는 표현들이 주위 토론자와 거기에 있던 몇 원로들(박이문 교수를 포함)의 의심을 샀다. 질문이 이어졌다. '북한 슬래쉬 북핵'이란 표현은 북핵을 인정하는 것이냐, (북한과의 관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놔둘 수 있느냐 등.

 

최장집 교수의 답변은 너무도, 너무나도 평범, 평이한 것들이었는데도, 그토록 평범하고 평이해서 단박에 이해되는 말을 붙들고 똑같은 질문이 반복해서 던져졌다. 말하자면, 북핵은 북한의 존립문제와 링크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 등을 상대하는 대외적 의미에서) 북한과 북핵을 연결하여 표현한 것이다...(최장집 교수의 대답, 이러면 다시 질문) 그렇다면 당신은 북핵을 인정하고 있는가. 북핵이 있다/없다 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북핵은, 북한의 존립을 인정하면 피할 수 있는 문제다. (라고 최장집 교수 다시 대답. 그럼 또 빙딱같은 질문) 북핵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인가. (이런 찐따 질문에도 다시 최장집 답변) 물론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너무도 간단하게 피할 방법(북한의 존립 인정)이 있다. 그런데 이 간단한 방법을 미국은 시도하지 않는다. 나는 북한 측보다는 미국이 오히려 북핵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코메디 쇼같은 일련의 이런 우문현답 씨리즈를 보면서, 나는 그 뒤 이어질, 북의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 그대로 놔둘 것이냐,란 그의 대답이 궁금했다. 북의 인권 문제라면, 나도 '빨리 바뀌어야하는데'편 중 하나였다. 그의 대답은, 역시, 너무도, 너무나도 평범, 평이한 것, 그것은 초음속으로 날아가 나의 의식의 허영, 거기 있던 모든 이들의 의식의 허영을 꿰부수고 진리에 꽂혔다; 정치는 매우 다이나믹한 것이다. 인권문제가 있다는 판단(우월의식) 하에 어떠한 개입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그 체재 안에서는 어쨌든 인위적이며, 어떠하든 위험하다.

 

하하하,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 했다.

다시 한 번 세상의 진리는 아른아른 머리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쪼그리고 잘 보면 알 수 있는 땅바닥에 있음을...

북한이 인권문제 심각하다고 말하는 집단 치고 인권문제 없는 집단 있는가. 뭐 묻은 것들이 뭐 묻은 거 나무란다고. 하물며 북한의 인권문제는 복합적이다. 바로 손가락질하는 그 놈들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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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한다 마음먹었으니 더 잊어먹기전에 국제문학포람 관람기 씀

오에 겐자부로씨가 대단한 소설가라는 건 따로 말을 안 들어도 알만하겠는데, 유종호 평론가왈, 오에 겐자부로씨가 20대때 싸르트르와 대담을 했다고. 역시 될 사람은 떡잎부터 다른건지, 세상에 그런 20대가 있어도 되는건가. 나는 서른중반이 되어도 조느라고 '구토'를 다 읽어낼 수 없는데. 그런데 그런 20대와 노벨문학상의 그 사람은 순진하고도 겸손하고도 착한 아이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문학'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에 겐자부로씨의 책이라면, 제목때문에 읽었던 '性的인간'이 전부인 나는 정말 그이 앞에서 다 시들어빠진 시금치쪼가리처럼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오에 겐자부로씨의 발표가 있던 <인간가치와 정치변화>를 현장에서 직접 들었던 것은 아니다. 10시반 시작인데, 규민이 데려다주고 집에 온 시각이 10시15분인것을 세종문화회관까지 15분만에 무슨 수로 가나. 2시 <문학과 보편적 인간가치>를 들으러 갔더니, 박이문교수, 오에 겐자부로씨가 앞줄에 앉아있었었다. 발제문책자를 사서 뒤늦게 오에 겐자부로씨의 발표를 읽었다. 오에 겐자부로씨와 함께 발표를 했던 사람은 김우창이란 평론가였는데, 이 사람 무지 쪽팔렸었겠다. 오에 겐자부로씨의 글은, 짧고도, 읽기 쉽고도, 노작가의 평화에의 절절한 호소가 가슴 찌릿찌릿 하였다. 반해, 김우창씨 글은 뭔 소린지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주술이 하여간에 무지하게 길었다.

 

오에 겐자부로씨는 자신이 쓰고 있는 지금의 소설에서부터 글을 시작하였다. 아마 이것이 자기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일 것이라면서. 자기 생애 마지막 소설일 것이라 생각하며 글을 쓰는 작가의 느낌은 어떠한 걸까. 김윤식씨였나, 다른 사람이었나 아무튼 누가 그러길, 오에 겐자부로씨가 이 짧은 일정에서도 호텔에서 원고지를 놓고 글을 수정하고 있더라고.

 

박이문교수와 오에 겐자부로선생이 앞줄에 앉고 그 뒷줄에 내가 앉아 들은 토론회는 <문학과 보편적 인간가치>였다. 르 클레지오, 유종호, 루이스 세풀베다, 황석영씨가 주제 발표를, 김인환(평론가라함), 이인성(소설가라함)이 토론자로 나왔다. 사회자는 김화영 교수. 김화영교수는 여전히 한국어를 불어처럼 발음한다. '뒤에' 같은 단어는 특히 그렇다. 입술을 너무 앞으로 내밀어서 그런 거 같다. 생글생글 웃으며 간간히 농담을 하는 모습이 지금 이 토론회가 무척이나 즐거운 듯. 김화영교수는 그럴 양반이다. 소설가들 사이에서 문학을 얘기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평생 소년처럼 행복해하며 문학을 읽고 공부하고 글을 쓰고 했을 그 양반이 순간 가슴 뻐근하게 부러웠다.

 

보편적 인간가치,라니 뭘 갖다 대도 다 그럴듯할 포괄적인 주제라, 발표문들이 다 예수님 부처님말씀처럼 지루하게 옳은 소리들 뿐이었다. <인간가치와 정치변화>도 포괄적 주제이긴 마찬가지인데, 오에 겐자부로씨는 그토록 감동적인 발표문을 쓰셨건만.

이인성씨는 생긴 것도 꼭 멸치같아 염승주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말투도 염승주랑 비슷하였다. 툭툭 시비조로 던지는 말투, 약간 옆으로 꼬나보면서. 이런 식의 형식위주의, 딱딱한 토론회는 정말 재미없다고. 재미있는 얘기를 하자고. (유종호 평론가 빼고) 죄다 유명한 소설가이시니 각자 글 쓰는 얘기 좀 해달라고. 옳거니.

김화영교수는 이인성씨의 이런 지적에도 싱글벙글이다. 자기가 준비모임에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딱딱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단다.

그 이후로 나온 얘기들이 실제로 재미있었다. 르 클레지오씨는 마르고 키가 크고 눈매가 깊은데다가 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라 여자들로부터 인기만방일 타입이었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미래소년 코난 친구, 판초처럼 생겼다.

오늘은 여기까지, 규민을 데릴러 가야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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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우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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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어쩌라고

서울국제문학포럼, 인터넷 생중계를 틀었더니, 오에 겐자부로 선생께서 말씀 중이신데, 통역을 안해준다.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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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별미

쪽파를 총총 썰어 넣고 다진 마늘을 넣고 참기름을 떨어뜨려 잘 섞은 간장에 담배를 살짝 떨어뜨렸다가 말린 후 피웠더니 입 안에 짭조롬한 맛이 돈다. 두부 한 입 먹고 간장담배 한 입 피우면 간이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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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에 들르듯이

이 글은 내일아침이면 비웃음을 당할지도 모르나, 일기장에 들르듯이...

 

지금은 와인을 삼분의 이 병 마시고 난 후다.(Thanx, koo)

얼음을 잔뜩 쳐넣고 마셨건만, 11.5%의 알콜이 날 알딸딸하게 만들었다.

비웃음을 당할 지 모르는데도 떠들어댈 수 있게.

 

상대는 35도가 되는 진도 홍주를 마셨다.(이것도 Thank you, koo)

고로 나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니, 생활고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나는 생활고에 덜 시달린다. ?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편견이다.

나는 매일 8시 반쯤 되면 극도로 피곤한 생활인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술을 마시면 다시 에너지를 회복한다.)

 

내가 먼저 가라타니 고진 이야기를 꺼냈다.

윤리를 이야기하는 상대에게.

가라타니 고진은 요즘 우리 집 안에 히어로이다.

뭐, 히어로까지야..

내가 가라타니 고진을 처음 읽은 건 녹색평론에서다.

녹색평론에 짧게 실린 그의 글은 선거와 제비뽑기에 관한 것이었다.

요는, 선거는 결국 비민주적이고, 제비뽑기가 대안이다,였다.

나는 제비뽑기니 각종 추첨이니 하는 것들에 죽어라고 운이 없는 편에 속하기 때문에 처음엔 생뚱맞다는 기분으로 그 글을 읽었다가 그의 글에 완전히 넘어가서, 맞어, 선거 다 없애고 이젠 제비뽑기 해야돼,하고 결론을 내렸었다.(430 보선을 보라)

그 글이 나에게 무척 즐거웠기에 당시, 오늘밤 진도 홍주를 마셨던 상대에게 제비뽑기 얘기를 꺼냈다가 본론 얘기도 채 꺼내보기 전에 오히려, 가라타니 고진의 글 얘기만 상대로부터 진탕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가 문학동네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말'을 재미있게 읽은 후 였다.

 

얼마 전 나는 그 '근대문학의 종말'을 너무도 흥미있게 읽었다.

요는, 문학이란 살아있(어야한)다,는 거다(내가 너무 감상적인가).

문학은 내적지향을 잃고 타인지향을 사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시대에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다. 그러나 결국 문학이란 형식을 잃었다. 인도의 떠오르는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는 소설 그만두고 댐건설반대운동가가 되었다. 가라나티 고진은 그런 그녀를 두고 '진짜' 문학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글을 이렇게 정리하면 누가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그글을 읽어보아야겠다.)

하여간에 나는 제비뽑기에 이어, 근대문학의 종말도 너무나 재미있게 읽어,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랬더니, <윤리21>이란 책이 딱 보였다.

(그 전에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란 책도 보였지만.)

 

그래서 나는 그에게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21>을 읽어보지 그래?하고 말을 건넸다, 오늘밤.

왜?하고 그가 되물었다.

음, 당신이 이야기하는 윤리와 그가 이야기하는 윤리가 어쩐지 맞닿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내 가방이 어디 있더라...하고 갑자기 그는 가방을 찾았다.

그는 가방을 찾으러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다른 방까지 갔다.

왜, 지금 가방을?

가방을 가지고 돌아온 그가 가방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꺼낸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 21>이었다.

이 순간은, 누군가가 키스 자렛의 바하 연주를 좋아한다는 말을 끝내자마자 상대가 자켓 안주머니에서 자렛이 바하를 연주한 씨디를 꺼냈다는 순간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었다.

클로즈업, 슬로우모션.

 

이 감격적 순간 이후로 나는 감정이 과장되어버렸다.

나로서도 의심스러운 이야기를 여과없이 마구 떠들어대었다.

스스로도 조심스러운 이야기란, 자본주의를 씹으면서도 막상 대안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나의 대안은 누가 놀고있네,하고 뱉어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를 유치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름, 일상에 촘촘히 뿌리내려진 거미줄과 같은 촉수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가라타니 고진처럼 '칸트'와 '들뢰즈'를 쉴새없이 인용할 수는 없는 것이라도 자본주의를 경계하는 마음은 일맥상통한다. (그렇지않은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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