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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4/22
    선녀와 나뭇꾼과 백설공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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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4/18
    규민이 이런 말도 해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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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4/03
    규민의 이런 사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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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3/12
    우리 딸, 청소도 다해요.(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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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2/22
    딸내미 자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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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1/31
    아이의 비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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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1/27
    아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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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11/24
    <선녀와 나뭇꾼> 놀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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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9/25
    모기에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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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8/17
    우리의 사랑(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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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와 나뭇꾼과 백설공주

<선녀와 나뭇꾼> 동화책을 사주었다.

그 책엔 나뭇꾼이 선녀옷을 감추고 숨어있다가 혼자 남은 선녀에게 솔직하게, 내가 색시를 얻고 싶어 사슴에게 말했더니 이 방법을 알려주더라, 내 색시가 되어주실 수 없냐,라고 부탁하여 허락을 받아 같이 살게 되었다고 나온다.

 

얼마전 토요일아침 이비에스에 채널 고정하고 티뷔를 틀어놓고 있었다.

딩동댕유치원 공개방송에서 <선녀와 나뭇꾼> 연극을 하고 있었다.

나뭇꾼이 선녀옷을 감추고 숨어있다가 혼자 남은 선녀에게 그냥, 울지말고 우리집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고 집으로 데려간다. 장면 바뀜. 선녀는 아이 둘을 낳고 잘 살고 있다.

 

딩동댕유치원이 끝나고 뭉뭉 인형극장, <백설공주>를 하고 있다.

못된 왕비가 머리빗에 독을 발라 백설공주 머리에 꽂는 바람에 백설공주는 쓰러졌다. 일 나갔던 일곱난장이가 돌아와서는 빗을 빼내 백설공주는 다시 살았다. 난장이들과 공주는 기쁨의 노래도 하고 다시는 모르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면 안된다는 대화를 나누는데, 난장이들이 계속 번갈아 공주와 춤을 춘다. 말을 할 때도 살가움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계속 공주에게 스킨쉽을 한다.

 

 

연속으로 저 두 편의 방송을 보고있자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왜 내 기분이 모래씹은 것처럼 찝찝한가, 뚱딴지처럼. 생각해봤더니,

저 설정 때문이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와 이래저래 살을 맞닿는, 계속되는 저 설정.

그러나 여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남자 쪽에서 무턱대고 다가와 여자에게 살을 맞댄다.

 

특히 인형극에서 백설공주 인형은, 짐작하시겠지만, 가슴은 c컵 사이즈이면서 얼굴은 열서너살, 목소리도 약간 코맹맹이에 어린 기가 다분, 그 여자 하나를 중심으로 수염난 난장이부터 철부지 어린 난장이까지 번갈아 다가와 손을 잡고 춤을 추고 팔을 비벼대는데, 거의 성추행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도 백설공주는 화 낼 줄 모른다.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난장이들에게 감사해한다.

 

<선녀와 나뭇꾼>은 좀 미묘하다.

딩동댕유치원의 연극은 납치에 다름 아니지만, 내가 샀던 동화책에는 솔직한 나뭇꾼의 태도에 선녀도 마음을 열고 색시가 되는 것으로 나와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선녀와 나뭇꾼>은 나뭇꾼이 선녀옷을 감추어 선녀를 색시로 삼는다는 하나의 스토리가 대표할 뿐이지, 상황과 심리 묘사 따위가 세심하게 읽혀야하는 것이 아니라서, 결국 때에 따라 논의 외의 납치가 되기도 하고 인지상정의 여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무슨 어마어마한 간극이란 말인가. 말도 안되는 인권유린의 납치와 그럴 수도 있는 인지상정이 뚜껑을 열면 나란히 들어있는 한 세뜨라니. 이게 가능한 것이 상대가 여자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사실 아이들을 상대로한 동화에서든, 어떤 이야기에서든 취하고자 하면 취해지는 것이 여자다. 남자들이 싸우기도 하지만 아무튼 누군가 취한다.

 

되게 불쾌하다. 난장이들이 계속 다가오면서 춤 추자고 하고 팔을 비벼댄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난장이라서가 아니라 수염달린 남자부터 코맹맹이 철딱서니까지 번갈아 다가온다고 생각해봐) 아, 정말 싫다. 하긴 그런 뽀르노도 봤다. 어디서 난장이 배우들은 줄줄이 잘도 구해가지고 일곱 난장이들이 번갈아 백설공주와 섹스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고전 버전일 것이다.) 백설공주는 순진무구탱이라서 난장이들이 내미는 성기를 귀여운(?) 장난감이라고 생각하고 오잇오잇 소리를 내며 함께 논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일곱난장이와 백설공주는 그런 식의 환타지인 것이다. 그것을 아무리 어린이버전으로 옮겨봤자 그대로 드러난다. 공주는 열댓살이라도 가슴은 c컵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들이 어떤 외모를 가졌건 공주 쪽에서의 선택의 자유는 없다. 남자는 (중?)늙은이부터 어린애까지 골고루, 번갈아.

아, 정말 여자에게 너무도 잔인하다.

 

그림형제의 백설공주는 어쩌자는 식이었을까. 사실 그림형제를 이제 다시 읽어보면 죄다 음흉하고 의뭉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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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민이 이런 말도 해요

만44개월

 

ㅇㅇ하기는 한데 .....하다.

ㅇㅇ하다면서 .... 하냐?

 

 

 

* 무서운 얘기 해달라고 졸라졸라서 다 듣고 난 후,

"재미있기는 한데, 무서웠어."

 

*  엄마랑 둘이 이부자리에 누워 뒹굴뒹굴, 이럴 때 나는 꼭,

"규민아, 최고 사랑해."

"엄마는 날 최고 사랑한다면서, 떼 부렸다고 혼내냐?"

 

 

뿐만 아니라 감정의 세밀한 고개고개를 타는 말도 구사한다.

 

어젯밤 된통 골이 나있던 나는 이부자리에서 가만 있는 남편에게 무어무어라 쪼았다.

내 딴에야 지난 밤의 일이 도저히 풀리지 않아 이대로는 숨통 막혀 잠을 못 잘 것 같아 한 짓이지만, 어젯밤 이부자리에서만 보았을 때는 한 사람이 가만히 있는 한 사람을 냅다 건드린 꼴이었다. 그걸 지적한 사람은 규민이었다.

"엄마, 빨리 아빠한테 미안해 해라."

...

"안 하면 아빠하고만 놀거다."

(내심 아이의 그 말에 슬펐음) "넌 엄마 속상한데 왜 속상한 것도 모르고 그러냐?"

(급격하게 자세 바꾸어서)"엄마, 내가 미안해."

이건 감정의 세밀한 고개가 아니라 감정의 평평한 평야인가..

하여간에 여전히 엄마 아빠가 세상의 전부인 사랑스러운 울 애기..... 규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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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민의 이런 사과

다섯살이 되니 이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논다. 엄마된 사람들은 수다도 떨 수 있어 좋다.

네살 무렵까지만 해도 친구를 옆에 앉혀놓으면, 장난감 실갱이에, 밀고 때리기 실갱이에, 어떤 엄마들은 그래도 무시하고 수다에 몰입하던데, 나는 그러지 못했었다.

이제 실갱이가 벌어지긴 하지만 서로 미안해, 괜찮아, 사과하고 화해하고 다시 놀고 다시 싸우고 다시 사과하고 다시 화해하며 그럭저럭 자기들끼리 논다. 기특해라.

 

규민이 친구집에 놀러갔다.

아이들 네 명이 모였고, 엄마들 네 명도 모였다.

그 집엔 플라스틱 미끄럼틀이 제법 큰 거 하나 있었고, 트럼폴린이라고 하던가, 고탄력판 아래 거대한 용수철이 있어 점프하며 노는 것까지 있었다. 아이들이 거기로 몰리는 건 당연하지. 네명이 한꺼번에 몰려 놀기엔 싸이즈가 작아서 계속 실갱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애들 실갱이가 일어나면 수다에 몰입하지 못 하던 습관으로, 그 모습을 한 켠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여자 친구 하나가 미끄럼틀 계단을 올라가더니 내려가지 않고 버티고 앉아있다.

그 뒤 올라가던 사람은 규민, 그리고 규민 뒤에 바로 이어서 남자 친구 하나가 계단을 붙잡고 올라갈 태세.

윗 친구는 내려가지 않고있지, 밑 친구는 빨리 비키라고 하지, 규민이 진퇴양난, 사면초가, 당황난색, 결국 세명 동시에 실갱이 벌어짐.

윗 친구, 사태의 가장 큰 책임자, 이 사람이 그냥 내려오면 일 되는 상황인데, 계속 버티기 고집. 왜 안 내려가냐는 규민의 질문에 자기는 그냥 올라오고 싶어서 올라왔는데 내려가기는 싫단다. 이 뭔 뻔뻔스러운 대답인가. 한 켠에 가만 입닫고 있는 나까지 짜증날라 한다.

타고싶은 미끄럼틀을 못 타고 있는 이 한탄스러운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밑친구는 규민이 비키지 않는다고 신경질을 바락바락낸다. (사실 평소 윗친구보다 이 밑친구가 한 성깔로 유명하신 양반, 자기는 계단의 첫 칸도 밟지 않은 주제임을 파악하고 위 두사람에게 실갱이를 할 권리와 선택할 권리를 줄 것이지, 무작정 비켜비켜 비명을 내지르며 한 켠에 가만 입닫고 있을라는 나를 자꾸 발딱발딱 일어서게 할라 한다.)

왠만하면, 주변 어른들이 누구누구의 엄마가 아니고-그래서 때로는 누구편 누구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아이들 무의식 저변에 깔려있는- 공정하신(과연?) 선생님이 계신 어린이집이라면, 주변에 친구 언니 오빠들의 눈이 있고 자기가 떼쟁이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는 어린이집이라면, 사태는 긴장이 터지기 전에 수습되었을 것이다. 다섯살이면 그만한 이성은 있는 나이인 것이다.

그러나 주변 어른들이 죄다 누구누구의 엄마들이고, 떼쟁이로 낙인찍을 주변인들도 없는 그 곳에서 결국 셋 죄다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어른들의 중재로 사태는 종결되었다.

 

내가 주목한 순간은 이 다음이다.

세 아이 대충 울음을 그치고 다시 미끄럼틀을 타기 시작하려 할때였다.

규민이 다른 두 아이 얼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더니, "미안해, 미안해"하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한, 죄다 깡그리 잊었다는 의도의 표정을 짓고 미끄럼틀에 매달리려는데, 규민은 두 아이 모두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지자면, 규민은 아무 잘못없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해 통감하는 기분, 그것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그래서 안타깝구나'..

그러나 영어에서 sorry와 i'm sorry는 그렇게 차이난다지만, 우리말 '미안해'는 모호하다. 그 말을 한 이가 결국 밑지고(?) 들어가는 결판이 휙 나버리는, 미묘한 뉘앙스를 살리지 못해 미묘한 감정을 살려주지 못하고 결국 미묘한 상황과 관계를 단순하게 결판지어버리는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다.

나는 이 생각을, 당시 규민의 얼굴 표정과 슬로우모션처럼 플레이되는 '미안해'를 들으며 1분 간은 하고 서있었나보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생각들은, 그러고보니 나도 그런 식의 미안해를 참 많이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했던 순간들, 나는 진심이었다. 내가 아무리 객관적이려 노력하며 두번세번 반복하여 생각해봐도 내 잘못은 별로 없는 것 같은 경우이지만 일어난 사태가 불행스러웠을 때, 나는 미안해, 미안해, 나도 더욱 주의하지 못 했던 것 같아, 어쩌구하며 사과, 사과 또 사과했었다. 그렇게해서 사태가 불행을 극복한다면, 사태의 당사자들이 깨끗한 기분을 맞을 수 있다면 무언들 못하리, 사과 쯤이야. 백만번도 할 수 있어.

 

그때는 저 바닥의 나의 진심을 실컷 퍼올려 마구 퍼주던 사과가 갑자기 몹쓸 단어처럼 느껴졌다. 공정치 못하고, 사태에 무책임하고, 특히나 사후 관계까지 무책임한.

어쩌면 내가 겪는 내 주변 관계의 억지스러움은 내가 진심이라고 남발했던 무책임한 사과의 탓도 있을지 모른다.

 

딸내미의 사회적'미안해'를 들으며 규민이도 이제 지난한 여자의 길로 들어섰구나,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면 비약인가. 미안해 잘 안하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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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 청소도 다해요.

원래, 하지말라는 것이 더 재미있고, 어른들 하는 짓은 다 재미있어 보이는 것이다.

 

우리 딸래미는 빨래가 너무 재미있다.

조그만 손으로 조물락조물락, 입고 있는 바지 다 적셔가며, 비누곽을 물로 채워놓으며, 화장실 바닥을 비누끼로 온통 미끌미끌 만들어가며 빨래를 즐긴다.

오늘, 빨래를 하다가 흥이 난 규민은, 엄마, 솔 꺼내줘,하더니 쓱쓱 빨래비누 몇 번 긁고서 바닥을 싹싹, 변기 속도 싹싹(변기 안으로 거의 들어갈 자세), 목욕 의자도 싹싹, 삶는 통도 싹싹, 뭐든지 싹싹 닦는다.

 

노래를 해가면서('봄은 언제 오나요?'), 작은 엉덩이를 바삐 돌리며, 샤워기를 잡고 물을 틀었다가 껐다 하면서 솔을 놀리는 폼은 제법이지만, 사실 청소는 커녕 뒷정리 할것만 산더미로 만들어놓는 것이다.

 

"우리 딸, 힘들지 않아? 왜 이렇게 열심히 빨래하고, 청소해?"

대답도 능청스럽게 잘 한다.

"으응, 엄마 사랑하니까. 엄마 도와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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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내미 자랑

다음의 사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답 : '이'

 

전수찬이 얼마전 규민에게 '이'字를 가르쳐주었다. (선행학습 시키는 것 아님. 영리한 딸내미를 보고 부모가 선행학습 시키는 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단지 딸내미가 영리해서 그런 것임) 엄마나 아빠가 글씨쓰는 것을 보고 흉내내기를 하는 규민에게 재미있으라고 가장 쉬운 글자(엄마이름에도 있으니까 친근하기도 하고)를 가르쳐준 것이었다.

 

위 사진은 규민이 만든 작품이다.

'방울에다 볼펜을 끼웠네'라고 평가했던 어른들에게 규민의 작품 설명 ; "'이'자 만든거야."

오호라, 신퉁방퉁 딸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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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비명

그 완벽한 아이가 밤에 비명을 지른다.

자다가 갑자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가슴 속에 응어리가 있는 것이다.

응어리, 가슴에 맺힌 그 응어리는 나로 인한 것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최고 애착대상인 부모, 즉 나와의 충만한 시간.

엄마가 일하러 가야하기 때문에, 아빠가 일하러 가야하기 때문에, 바쁘기 때문에, 아이는 계속 참아왔다.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응 알았어,대답하고는 어린이집에 갔었다.

그러나 어린이집 훌륭하시다는 선생 열, 또래친구 수억 다 필요없다.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 냄새를 맡고, 엄마와 눈을 맞추고, 엄마 입에서 나오는 엄마 말을 듣고, 엄마가 밥을 먹여주고, 엄마가 옷을 입혀주고, 엄마가 친구가 되어주는 것, 오로지 이것을 원한다.

아아, 이 안쓰럽게 사랑스러운 것.

그런데 나는, 사실, 며칠 전 읽기 시작한 소설이 더 재미있다.

이제 얼마있으면 새 일이 시작될 직장 준비에 더 마음이 급하다.

엄마는 너를 최고 사랑해,하고 으스러뜨릴 듯 껴안고 눈을 맞추어 바라보고는 돌아서서 직장 준비를 바삐 하고 잠깐 짬이 날 땐 궁금한 소설책을 집어 들고 싶은 것이다.

아이의 이 집착은 생존본능일 것이다.

약한 것의 생존본능.

그러나 그는 나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본다(더할 수 없는 사랑의 눈빛).

나를 보면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안도와 평화가 보인다. 내가 없으면 그에게 안도와 평화가 있을까, 불안하다.

나는 외면하기도 잘 하면서, 실은 가슴으로 전전긍긍한다.

이렇게 완벽한 아이는 흔한 사랑 조차 충만히 받지 못하고, 인간과 인생과 세계의 괴리를 일찌기 체험하며 못난 인간의 허울많은 인생을 시작하나보다. 그래서 세계는 부조리 투성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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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여 아이와 대화가 가능해진 후, 그러니까 아이의 실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내가 조금씩 발견할 수 있었던 그 실체라는 것을 한 문장으로 하자면, 아이는 참말로 완벽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루 말 할 수 없이 상투적이라 이미 너덜너덜하게 닳아빠져 그 의미조차 너절해진 느낌의,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다'란 명제도, '아이는 천사와 같이 순수하다'란 명제도, 그래서 참인 것이었다.

 

이것은 섬뜩한 발견이었다.

 

나는, 아이를 싫어한다는 편으로 남고자 끈질기게 애쓰며 살아왔었는데(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된 주제에도. 딱히 어떤 아이가 싫어서라기 보다는 꾸역꾸역 태어나는 인간들이 싫은 것이었음) 두 손 들어 완패를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앞에 육화하신 부처, 예수, 성인을 두고 감히 내가 뭐라고 그 존재를 '싫다, 좋다' 한단 말인가.

 

 

이 발견의 근거가 되는 상황 상황들을 하나하나 여기에 옮기기는 어려우니 요약정리하자면, 아이는 내가 풀어놓는 인간관, 인생관, 세상관 등에 대해서 내가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과 내가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았다. (그 판단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천상으로부터 내려진 솔로몬의 왕관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테고, 사실 그것은 다름아닌 아이의 '백지와 거울'이란 특성 때문이다. 외부를 고스란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고스란히 내비추고 있는 특성.) 그리고 그 괴리를 자기 몸으로 고민한다. 해답을 찾으며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오오.

 

이러니 아이 앞에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초라해지겠는가.

나의 일거수일투족, 일사일언이 진실인 것인가,하는 검증은, 이 나이에 새삼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섬뜩한 발견이었다.

 

 

언젠가부터, 아이가 짜증을 부리고 떼를 피우면,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구나, 엄마가 몰랐구나,라는 말이 나왔다. 백만번 사과를 해도 미안해. 그러다가도 나는 역시 범인이라, 어른이랍시고, 떽 혼을 낸다. 홍수나는데 저수지에 또랑내어 논에 물대고 있는 꼴이라지. 누가 누구를 혼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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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와 나뭇꾼> 놀이

네 살이 되니, 여자/남자를 알기 시작했다.

"엄마는 여자야, 남자야?" "나는?"이란 원초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편리하게 대답만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근본 원리를 설명해주는 것이 교육이란 걸 일찌기 깨달았던 나는 엄마는 여자, 아빠는 남자, 규민이도 여자,라고 대답을 해주었다가 이 답을 찾아가는 근본원리는 무엇일까, 잠깐 생각했다. 여자는 치마를 입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도, 남자는 서서 쉬를 하는 사람이란 것도, 순간 머리 속에 떠오른 모든 것들은 다 사회 습관일 뿐, '근본원리'는 아닌 것 같았다. 남자도 치마를 입을 수 있고, 남자도 앉아서 쉬를 할 수도 있지. 그래서 나름대로 근본원리라고 생각하는 사실만 전달하기로 했다.

"잠지가 있는 사람은 여자고, 고추가 있는 사람은 남자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몇 해전 한겨레 만화 비빔툰에서 보았던 장면이 불현듯 스쳤다.

비빔툰의 꼬마, 정다운이 역시 남자와 여자를 알아가는 무렵, 할아버지 할머니와 저녁식사 도중, 할아버지 고추 운운하는 짱구짓을 해서 엄마얼굴이 벌개졌다는 내용.

엇, 나도 실수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잠지/고추 나누기 질문이 시작되었다.

 

"엄마, 별똥별(규민이 선생님)도 잠지있지이~?"(이미 여자라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묻는 확인질문)

짱구같은 짓도 역시 벌어졌다.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저녁상에서 "할머니도 잠지있지이~? 할아버지는 고추있지이~?" 막상 일이 벌어지고 나니, 그게 그렇게 낯뜨거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게 뭐 그리 이상한 질문이겠는가, 싶었다. 

 

여자와 남자를 알기 시작하더니, 진도가 빠르다.

 

우리집에 규민이와 같은 반 친구 둘이 놀러왔었다.

가영이는 여자아이, 태우는 남자아이.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고, 친구들과의 벅적한 시간의 여운이 남은 규민, 엄마에게 <선녀와 나뭇꾼> 연극을 제의했다.

엄마는 나뭇꾼역 -그런데 엄마가 이 역을 맡는 게 아니라, 태우가 이 역을 맡는거란다. 그러니까 엄마는 태우로서 나뭇꾼이 되는 것이다.

규민은 선녀역 - 규민이도 규민이가 아니라 가영이가 되어 선녀 역을 맡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태우와 가영이가 되어 <선녀와 나뭇꾼>연극을 하는 것이다.

 

태우는 산 꼭대기에 올라, 연못에서 목욕하는 선녀 옷을 하나 몰래 훔친다. 그랬는데, 선녀 가영은 애기 둘을 안고 하늘로 올라가버린다. 태우 나뭇꾼은 다시 산에 올라 하늘에서 내려온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선녀와 아이들을 만난다. (이 장면이 클라이막스) 그러나 나뭇꾼의 엄마를 만나러 땅으로 내려왔다가 엄마가 주는 호박죽이 너무 뜨거워 하늘을 나는 말이 먼저 날아가버려 영영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울다 죽는다.

 

규민은, 태우와 가영이가 상봉하는 클라이막스에서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자기도 모르게 입이 스윽 열리다 탄성을 지를 듯 크게 벌어지고 급기야 흥분으로 꺄악 외친다. 이 장면을 위해 연극을 몇번이나 반복한다. 반복할 수록 클라이막스 부분 할당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점점 연출자(규민)의 의도가 짙어진다.

 

연출자의 의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처음에 태우와 가영은 여보~라고 외치며 그저 손을 맞잡고 벙벙 뛰었다. 

다음엔 벙벙 뛰는 것을 줄이고 껴안는 시간을 늘였다.

그 다음엔 나는 앉고 규민은 서서 껴안았다(규민과 나의 키차이를 생각해보면, 서서 껴안는 것과 앉아서 껴안는 것의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 내가 앉으면 눈높이가 같아진다).

그 다음엔 앉아서 껴안고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기서 웃지 말라고 규민이가 지시.

그 다음엔 앉아서 껴안고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뽀뽀한다. 내가 볼에 뽀뽀하려고 했더니 고개를 설레설레하고는 입술을 살짝 내민다. 역시 웃으면 안됨.

그 다음엔 앉아서 껴안고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술로 뽀뽀하는데 뽀뽀의 시간이 무척 길어졌다.

이것은 그러니까, 태우와 가영의 키스씬이었다. 영화에서의 키스씬 저리가라 할만한.

 

나는 규민이가 언제 이런 키스씬을 보았길래 이런 장면을 연출할 수 있는걸까, 놀랐다.

테레비에서 슬쩍 보았겠지. 아, 미키비디오에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가 키스하는 장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슬쩍 본 키스씬을 이렇게 연출할 정도이니 규민의 잠재된 성애욕구를 감히 짐작할 수 있겠는가. 하긴 잘 생각해보면 나도 여섯살 무렵 즈음 성애의 호기심이 스멀대었던 것 같다. 기억할 수 있는 나이가 여섯살 정도라서 그렇지, 그 이전부터 였을 것이다.

새삼 성욕의 이 막강한 에너지에 전율을 느낀다.

성애의 신을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

이 날의 연극은 물론 즐거웠지만, 다시 한 번, 규민에게 '시간낭비하지 않는 성욕 혹은 성생활' 강의를 어떡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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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에게

날아다니는 모기를 탁 잡았다.

아싸.

 

모기는 제대로 맞지 못해 단숨에 죽지 못하고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가늘은 다리를 드문드문 떨며.

모기를 위한 송사.

 

모기야 미안해, 니가 미워서 죽인 것은 아니었어.

니가 꼬리로 콱 물면 가렵고 아퍼서 그게 싫어서 그런 거였어.

그러니까, 다음엔 모기로 태어나지마.

다음엔 나비로 태어나거나, 힘센 호랑이가 돼라.

 

옆에서 들여다보고 있던 규민의 말,

그래, 모기야, 다음엔 나비가 되나, 호랑이가 되나, 올챙이가 되나, 개구리가 되나, 음음, 또오, 악어가 되나 잘 생각해보고, 그렇게 해라. 나비가 되어서 훨훨 날아다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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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랑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다.

상대의 눈 안에 내가 비치는 것을 발견한다.

 

"어, 엄마 눈 속에 내가 있는데!"

"응, 규민이 눈 속에도 엄마가 있어."

(아, 연애할때 조차도 이런 대사는 구사해본 적 없었다.)

 

이런 사랑이 정말 있다.

보면 볼수록 샘솟는 사랑.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5분도 5초 같고, 50분도 5시간도 닷새도 다섯달도 하염없이, 하염없이, 손으로 턱을 괴고 그 얼굴만 바라볼 수 있는 사랑.

연애의 유효기간은 2년이라는데, 유효기간 1년을 넘기면서 오히려 새로운 절정기를 새삼 맞고있는 사랑.

절정기의 고개를 넘어 구름을 타고, 또 구름을 타고 높아높아만 가는 사랑.

 

아침에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발견한 그녀, 생긋 웃는다.

숨이 막힐 듯이 아름다워, 너.

그녀도 나에게 건네는 말, "엄마, 엄마는 왜 그렇게 이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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