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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허가제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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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고용허가제가 시행된지 5년이 되었단다. 고용허가제라고 할 때 이주노동자를 떠올리는 이가 얼마나 될까. 레디앙과 참세상의 관련기사에는 아무런 댓글도 달리지 않았다. 세상이 그 만큼 드라마틱한 것도 있겠지만, 과거보다 고용허가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 줄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예전에 당에 있을 때에는 교육을 하는 입장이었던, 당위였던 간에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해 나름의 관심을 가졌던 것 같은데, 무소속이 된 이후부터는 이에 대한 관심도가 많이 떨어진 것 같다. 소수의 시민사회단체를 제외하고는 이주노동자에 대해 관심을 가질까. 노동조합운동의 경우에도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의식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는한 사회생활 속에서 가졌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울 것임에 틀림 없다. 그렇지 않은 일반대중의 경우에는 말할 필요도 없다.
 
최근에 다문화사회 운운하면서 외국인을 고위공무원으로 임용하는 등 한국사회가 굉장히 개방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고용허가제 5년을 바라보는 이주공동행동의 기자회견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관련하여 과거 네이버블로그에 올려놓았던 이주노동, 고용허가제 관련 글을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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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적 고용? 이주노동자 옥죄는 족쇄 (레디앙, 2009년 08월 11일 (화) 17:10:57 이은영 기자)
[고용허가제 5년] 사업주 중심 고용허가제 전면 개정 필요
 
고용허가제가 오는 17일 실행 5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의 “합법적 고용”을 보장한다는 고용허가제는 직장 이동, 구직 기간의 제한으로 “고용의 자유는커녕 족쇄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주공동행동이 ‘고용허가제 실행 5주년’을 맞아 11일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주노동자의 고용 실태 및 고용허가제의 부당함을 고발했다. 이들은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를 더 옥죄는 역할만 해왔다”며 “사업주들의 권한만 보호하는 위선적인 제도임을 지난 5년간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고용허가제는 “현대판 노예제도”라는 불명예를 안았던 산업연수생제도가 폐지되고, 이주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실시됐지만 “권익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현행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 변경을 원칙적으로 3회 초과할 수 없다. 또 사업장 이동시 사업주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에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주들의 부당한 대우와 권리 제한에 앞에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주공동행동은 이에 “(사업장 이동의 제약으로) 사업장 이탈 등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며 “일부 악랄한 사업주들은 직장 변경 승인 요구를 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행사를 훼방하기 위해 허위로 이탈 신고를 해 이주노동자들을 미등록 신분으로 내모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사례 1> 직장 변경 3회 제한으로 인해 상습 임금체불 직장을 떠날 수 없는 상황
필리핀 출신 이주노동자 제OO 씨는 2007년 5월 한국에 입국해 2번의 직장이동 후 OO정밀에서 일하다 상습 임금체불로 다시 직장이동을 선택했다. 이후 2개월의 구직기간이 만료되어 감에 따라 결국 OO정밀에서 다시 일하기 시작했으나 또 다시 2개월의 임금체불이 발생했다. 고용지원센터는 같은 업체로 복직했어도 직장이동 횟수에 포함이 되어 업체를 나올 경우 출국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을 과도하게 제한함으로써 이주노동자의 처우개선 및 인권보호를 위한 기능보다는 사용주에 대한 종속을 강화하고 있다. 고용허가제의 도입을 통한 이주노동자의 처우개선과 인권보호라는 정부의 주장이 실효성 없는 선언으로 그치고 있는 것. 여기에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고용허가제의 구직기간 2개월 규정에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부는 “구인 수요가 구직자보다 많기 때문”이라며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지난 2008년 1월부터 올해 1월까지 구직기간 제한으로 인해 체류 자격을 상실한 이주노동자는 2,448명으로, 이에 “정부의 입장은 결국 이들 개인이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이 없어 취업에 실패한 것이니 한국에 체류할 자격이 없다는 자본의 비인간적 논리”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사례 2> 최저임금 및 수당 미지급, 숙식비 공제
충남에 있는 장난감회사 OO토이즈는 2008년 12월부터 일하는 고용허가제 노동자들의 임금을 3개월 동안 최저임금의 80%만 지급했다. 이는 수습기간을 적용한다고 치더라도 명백히 최저임금 위반이다. 심지어 2009년 2월부터는 기숙사비 명목으로 10만 원을 공제하기 시작했다. 이주노동자들은 잔업과 특근을 수십 시간씩 해도 한 달에 받는 돈이 100만 원이 안 된다.
 
지난 3월 중소기업중앙회는 ‘외국인근로자 숙식비 부담기준’을 발표하며 기업들에게 이주노동자 임금 삭감 시행을 촉구했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사업주가 기숙사·일반주택 및 이에 준하는 시설과 2끼의 식사를 제공할 경우 최저임금의 20%(180,800원)을 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침에 따르면 최저임금 수준 또는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이주노동자의 임금이 대폭 삭감된다. 이에 중소기업중앙회는 “최저임금법 및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균등대우 원칙, 임금 전액불 지급 원칙, 일방적 근로조건의 불이익 변경 금지 원칙 등을 위반한 행위”라며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한편, 이주노동자들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강화된 ‘법질서’ 확립으로 “인간사냥”에 가까운 단속에 노출돼 있다. 지난해 11월 정부는 마석 가구 공단에 260여 명의 단속반과 경찰을 투입해 100여 명의 이주노동자를 무더기 단속했다. 2008년부터 올해 5월까지 강제 추방된 인원만도 4만2천여 명이다. 지난 2008년 국가인권위가 발행한 「미등록이주자 단속과 외국인보호소 방문 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를 당해 경찰서를 찾거나 권리구제를 위해 노동부를 찾은 이주노동자들이 그 자리에서 출입국관리소로 인계돼 자신의 권리를 찾지도 못한 채 강제추방되는 사건들이 보고되고 있다.
 
이에 이주공동행동은 “정부가 미등록 이주노동라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그들의 권리를 우선으로 보장했던 ‘선(先)구제 후(後)통보 지침’을 폐기하고 출입국관리법의 ‘통보지침’을 강화함으로써 인권후진국, 노동후진국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주공동행동의 이정원 활동가는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들의 등골을 빼먹는 야만적 제도”라며 “이주노동자들의 ‘코리안 드림’을 절망과 한숨으로 바꾸는 고용허가제와 정부의 정책의 과감한 전환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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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허가제 시행 5년, 이주노동자 절망은 더 커져 (참세상, 김용욱 기자, 2009년08월12일 12시08분)
일부 악랄 사업주 허위신고, 미등록자로 전락
 
고용허가제 시행이 오는 17일로 5년을 맞지만 여전히 이주노동자들의 절망과 한숨소리는 줄지 않고 있다. ‘이주노동자 차별 철폐와 인권 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은 11일 오전 세종로 정부청사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주노동자에게 직장 이동의 자유와 동등한 노동권 보장 △이주노동자를 일회용 부품 취급하는 고용허가제 전면 전환 △이주노동자 임금 삭감하는 숙식비 공제 중단 △이주노동자 인간사냥 단속 중단 △ 미등록 이주노동자 통보의무 조항 폐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등을 요구했다.
  
이들은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던 고용허가제는 지난 5년 동안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를 더욱더 옭죄는 역할을 해왔다”면서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대폭 제한해 사업주들의 권한만 보호하는 위선적인 제도임을 지난 5년간 보여주었다”고 지적했다.
 
고용허가제는 사업장 이동이 3회로 제한되고 이동시 사업주 승인을 요구해 사업주들이 악용하기 쉽다. 이런 제도의 문제점 때문에 공동행동은 “사업주들은 이주노동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 할 수 있는 무한 권한을 가짐으로써 이주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릴 수 있었다”면서 “일부 악랄한 사업주들은 직장 변경 승인 요구를 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행사를 훼방하기 위해 허위로 이탈 신고를 해 이주노동자들을 미등록 신분으로 내모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밝혔다.
 
또 구직기간을 2개월로 제한해 체류자격을 상실,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전락하는 것도 문제다. 공동행동은 “노동부가 ‘구인 수요가 구직자보다 많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지난 2008년 1월부터 2009년 1월까지 구직기간 제한 때문에 체류 자격을 상실한 이주노동자가 2,448명이 이른다”며 “정부의 입장은 이들 개인이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이 없어 취업에 실패한 것이니 한국에 체류할 자격이 없다는 자본의 비인간적 논리”라고 비난했다.
 
공동행동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고용허가제로 고통받는 이주노동자들의 실태를 공개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B(35, 남)씨는 3번째 직장 변경한 업체에서 해고돼 강제출국 당할 입장에 놓였다. B씨는 2007년 5월에 입국해 2009년 4월께 3번째로 직장이동을 한 0정밀에서 계약체결 후 일하다 일이 서툴고 임금체불 문제 등으로 회사와 다퉜다. 이 일이 있은 후 업체는 B씨에게 일방적인 해고 통지를 했다. B씨는 임금체불 문제로 노동부 진정한 상태지만 문제해결 때까지 출입국에 G-1비자로 변경했고 임금 수령 후 비자만료로 출국을 생각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온 C씨(여, 33세)는 매달 급여에서 고용보험료를 납부 했지만 해고후에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었다. C씨는 2008년 6월부터 2009년 3월까지 일하다 최저임금 문제로 다투다 해고당했다. 해고를 당하자 C씨는 지역고용지원센터에 실업급여를 신청했지만 미가입자로 분류된 사실을 알았다. 매달 고용보험료를 공제했다고 문제제기를 하자 '이주노동자는 임의가입자로 최초 고용보험 가입 시 별도로 신청서를 작성했어야 한다'는 말만 들었다. 고용지원센터는 소급적용도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업주의 무단이탈 신고로 체류 자격을 박탈당하는 사례도 있었다. 인천시 서구 가좌동에 위치한 휴대폰 부품 제조업체에 근무하던 필리핀 여성노동자 D씨와 E씨는 회사에서 부품 검사 작업을 2년간 했다. 경기가 안 좋아지자 회사에서는 인원을 감축하고 D씨와 E씨에게 그동안 했던 ‘검사’작업에서 여성이 하기 힘든 ‘탈수’작업으로 업무배치를 조정했다. 그러나 ‘탈수’작업으로 인해 일이 힘들었던 D씨와 E씨는 2009년 6월 중순께 회사에 사업장변경을 요청했다. 사업주가 6월말에 사업장을 변경해준다고 하자 두 여성노동자는 사업주의 이야기를 믿고 6월 30일에 ‘고용변동확인서’를 사측에 요구했다. 그러나 여러 업체를 보유하고 있는 사업주가 회사에 자주 출근하지 않아 사업주를 만나기 어려웠고, 회사직원들은 사업주에게 그런 말을 들은 바가 없다며 계속 일을 하라고 종용했다. B씨와 E씨는 사업주의 말을 신뢰하여 7월 1일부터 일을 나가지 않고 사업장을 변경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사측에서는 무단결근을 했다는 이유로 고용지원센터에 일방적으로 이탈신고를 했다. 결국 두 여성노동자는 미등록자로 전락하게 됐다.
 
공동행동은 “이주노동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인종, 피부색, 지위와 상관없이 대한민국 국민과 같은 보편적인 평등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정부 정책의 과감한 전환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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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허가제 5년, 이주노동자 인권시계는 여전히 ‘제자리’ (한겨레, 부산/신동명 기자, 2009-08-16 오후 08:50:10)
경남 300개 업체 조사…부당 대우 다반사
저임금·사내폭행 등…여권압류 25.8% 달해

 
17일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지 5년이 됐지만 노동 여건과 생활 실태는 여전히 열악한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정부가 2004년 8월17일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을 바탕으로 고용허가제를 시행하면서, 기존 산업연수생 제도의 송출 비리가 줄고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가 향상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가 경남지역 300개 업체에 취업중인 이주노동자 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실상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주노동자 가운데 입국 과정에서 브로커에게 돈을 주었다고 응답한 사람은 17.5%나 됐다. 고용허가제 시행 이듬해인 2005년과 2007년 조사 때도 입국 때 돈을 지급했다는 노동자는 각각 19.4%와 15.6%여서 이 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들이 정부에 내는 입국 비용은 평균 266만원가량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이 한국에 들어와 취업한 뒤 사용자에게 여권을 빼앗겼다는 응답도 25.8%나 됐다. 2005년의 47.9%보다는 줄었으나 2007년 27.1%와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산업연수생 제도 시행 때 노동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악용된 관행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외국인등록증을 압류당했다는 응답도 2005년의 16.4%보다는 나아졌지만 2007년 16.4%와 거의 비슷했다. 또 사내 폭행도 여전해 이주노동자의 11.5%가 직장에서 폭행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폭행을 가한 사람은 한국인 노동자(54.2%)가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관리자(25%), 사장(10.4%) 차례였다. 폭행당한 이유는 ‘외국인이라서’가 37.5%로 가장 많았고, ‘한국말을 이해 못해서’ 20.8%, ‘작업 중 실수’ 16.7% 순서였다.
 
이주노동자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2005년 11.1시간, 2007년 11.4시간에서 올해 10.6시간으로 약간 줄었다. 월평균 임금은 2005년 111만원, 2007년 126만원에서 올해 132만원으로 조금씩 늘어났다. 해마다 최저임금 인상분이 임금 인상 요인이 된 것으로 분석했다. 이들이 매달 본국으로 보내는 돈은 2005년 72만4800원, 2007년 88만200원에서 올해 85만5800원으로, 수입의 60% 남짓이었다. 이주노동자의 56.6%는 한달 생활비로 30만원 이하를 쓴다고 응답했다. 
 
“배제정책으론 문제해결 어려워” (한겨레, 신동명 기자, 2009-08-16 오후 08:48:31)
이철승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 대표
현 제도 미등록체류자 양산…외국인 ‘기능인력’ 인정해야
 
그는 “이주노동자의 40% 이상이 전문대졸 이상의 고급 인력에다 대부분 2년 정도 지나면 숙련도가 높아져 회사에선 사실상 단순노동보다 기능인력으로 쓰고 있다”며 “취업기간을 3년으로 제한한 것도 잘 적응해 쓸 만하면 내보내야 하는 탓에, 이주노동자도 그렇지만 기업주들한테서도 아우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 때문에 정부가 미등록 체류자 문제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고용허가제가 오히려 미등록 체류자를 양산시키는 부작용을 빚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의 취업기간을 5년으로 늘리는 법안을 입안 중인 것과 관련해 ”기간을 늘리는 것 외에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시스템의 전환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며 “기본적으로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이 정주화를 막는 데 있다면 단순히 취업기간을 늘리는 것만으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독일이 일반노동허가 외국인 가운데 언어와 작업의 숙련도 등을 고려해 정주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는 특별노동허가로 전환시켜 줬던 예가 있다”며 “정부는 80만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에 대해선 배제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욕먹고 맞아도 일터 못 옮겨 (한겨레, 신동명 기자, 2009-08-16 오후 08:45:10)
고용허가제 독소조항 ‘사업장변경 3회한정’
 
현행 고용허가제는 외국인 취업자가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과 사업장 변경 사유 및 횟수, 근로계약 기간 등에 대해 까다롭게 제약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합법적 취업기간을 한국어를 익히기에도 벅찬 3년으로 제한한데다 사업장 이동 횟수도 원칙적으로 3회로 묶어놓았다. 사업장 변경은 이주노동자 임의로 할 수 없다. 1년의 근로계약 기간 중 중도에 해지할 권리는 오직 사용자에게만 있고, 사용자의 노동관계법 위반이나 회사 도산 등 몇 가지 예외에 한해 정부가 사용자에게 고용허가를 취소할 수 있을 뿐이다. 설령 사업장 변경이 가능하다 해도 두 달 안에 근무처를 찾지 못하면 꼼짝없이 출국해야 한다.
 

 

2004/11/22 01:13
아래 기사는 경향신문의 KHAN이 보는 세상에 실린 것이다. 이제 명동성당의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30명도 안된단다. 고용주가 동의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사업장을 이동할 자유조차 없고, 동의없이 이동할 경우 불법체류자가 된다. 철야농성을 한지도 1년이 넘었는데, 지금까지 말만 하면서도 명동성당에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어느새 겨울이 된 것이다.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어떤 의미일까?
 
무슨 사안이든지 휴머니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을 그리 탐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대해서도 비슷한 비판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데, 장애인, 이주노동자, 동성애자 등 이 땅의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는 이러한 휴머니스트의 눈으로라도 보는 게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주노동자의 ‘못다 부른 悲歌’ (미디어칸 고영득기자, 2004-11-19)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한계상황에 몰렸을 때 찾는 마지막 피난처, 명동성당. 올 한해도 한달 남짓 남겨둔 명동성당은 1년째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초췌한 모습과 이 곳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경찰의 모습에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임금체불에다 이유없는 인권차별을 겪는 외국인 노동자들 150여명이 강제출국을 피해 철야농성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11월 15일. 현재 허름한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30명도 채 안된다. 대부분 단속에 걸려 추방당하거나 전망이 불투명한 농성투쟁에 지쳐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 10개국 이상에서 산업연수생제도와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온 이주 노동자는 줄잡아 40여만명. 지금 그들은 단순한 인종차별의 차원을 떠나 노동자로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다음주면 1년간의 농성을 마치고 해산식을 갖는다. 하지만 그들의 농성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동안 여러 사회단체들이 우리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명동성당 농성을 마친다고 해서 우리들의 목소리를 접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아노와르씨(34. 방글라데시). 한국에서의 생활을 8년째 맞고있는 그는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언급하며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하는 농성이다.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앞으로 전국에 흩어진 이주노동자들의 결의를 다져나갈 것이다”며 향후의 계획을 밝혔다.
 
이주노동자들의 권익보호와 관련, 윤혁(민주노총 서울경인지역 평등노동조합) 정책위원은 “고용주가 동의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사업장을 이동할 자유조차 없다는 것. 이것이 지금 이주 노동자들이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그로 인해 이주노동자들이 고용주의 어떤 부당한 요구에도 따를 수 밖에 없으며 그 곳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불법체류자의 신세가 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 11일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조정회의에서 합동단속반을 구성한 뒤 연말까지 집중단속을 통해 불법 체류자를 전체 외국인노동자의 10% 수준인 4만-5만명으로 줄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윤위원은 노동자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노동권 보장을 호소했다. 10년동안 숨어다니며 한국의 제조업을 먹여 살린 그들에게 강제추방은 잔혹한 처사라는 주장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장기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에 대하여 시민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가 오래 전부터 제기되고 있다. 부시 미 대통령은 재선 성공 후 미국 내 불법 이민자들의 지위를 한시적으로 합법화하는 이민법 개혁을 재추진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부시 대통령은 “외국인노동자들이 미국인이 채우지 못하는 일자리에서 일하기 위해 입국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며 “미국이민법을 더 합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불법체류자의 문제가 현안이 되고 있다. 각종 외국인 범죄의 급증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그들이 가지는 경제적 효용은 무시할 수 없는 처지다. 불법체류자 중에는 이른바 ‘재팬 드림’을 꿈꾸고 건너간 한국인들이 많다. 출입국관리국의 단속에 적발되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된다. 불법체류자들이 외국인 범죄의 주범으로 매도되면서 단속도 강화되는 현실이지만 그들의 처지는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과는 상반된다.
 
명동성당에서 외치는 이주노동자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왔던지 일을 했으며 노동에 대한 대가를 달라는 것이다. 산업연수생 제도나 고용허가제등 정부가 내놓은 정책들이 오히려 무거운 족쇄로 변형돼 악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들은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 악덕 고용주의 횡포에 의한 노동자의 설움이 비단 이주노동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현실에 명동성당으로 향한 계단은 더욱 가파르게 보인다.

 

이주노동자-내가 당에 가입한 이유 2005/04/12 03:25
방글라데시에서 온 마슘이라는 평등노조 이주지부 조합원이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이유를 민주노동당 다른 당원동지들에게 해주었습니다. 이를 김인숙이라는 분이 옮겨주셨구요.
 
최근에 최고위원회을 비롯한 당의 행태에 실망하여 탈당하는 당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입당하는 당원들이 훨씬 더 많긴 하지만,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또한 당이 다가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민주노동당만이 희망이라고 보고 여기에서 많은 것을 얻으려는 이들이 많이 있기에, 그들 앞에서 무기력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선 안되겠다 마음 먹습니다.
 
마슘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시아에 한국의 민주노동당만한 정당이 없으며, 아시아 다른 나라들의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또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현실이라는 것을 민주노동당이 제대로 보여주었으면 한다고... 
 
하나라도 배우려는 그에게서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이유를 들으면서 내가 처음에 민주노동당에 입당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떠올려봅니다.
  
저는 이주노동자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가 똑같다고 생각하고 같이 싸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같은 입장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민주노동당에 가입했어요. 
 
저 또한 그렇습니다. 끝이 멀수록 처음처럼... 

 

이주노동자-내가 당에 가입한 이유 (글쓴이 : 김인숙, 등록일 : 2005-04-07   23:17:02)
     
[얼마전 당에 가입한 이주노동자 A.B.M. MONIRUZZAMAN MASUM(마숨)이 자신이 당에 가입한 이유를 다른 당원 동지들에게 말합니다. 그는 한글을 쓸 수가 없어, 제가 대신 마숨의 말을 받아서 적었습니다.]
 
저는 평등노조 이주지부 조합원 방글라데시에서 온 마숨입니다. 저는 지난 3월 6일 민주노동당에 당우로 가입했어요. 당원으로 가입하고 싶었지만,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당우로 가입하게 됐어요.
 
제가 민주노동당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왜 민주노동당에 가입했는지 얘기하고 싶어요. 저는 이주지부 조합원인데요. 평등노조 이주지부는 민주노총 산하잖아요. 민주노총에 대해서는 2001년에 알게 됐어요. 그때 저는 수술받고 일도 못하는 상태였고요. 한국말도 잘 못하고 읽지도 못했어요. 영어로 된 신문들을 보면 노동조합에 대한 기사는 많이 없어요. 그런데 우연히 타임신문에서 어떤 큰 노동조합이 이주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인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것보고 어디인지 2달 동안 찾아봤어요. 그때는 KCTU가 민주노총인지도 몰랐어요. 그때 저는 어디에 찾아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 지도 몰랐어요. 한국의 길도 잘 몰랐어요.
어느 날 이주노동자 모임에서 평등노조 이주지부에 대해 알게 됐죠. 그때 조합에 가입했고, 그때부터 민주노동당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어요. 어떻게 민주노동당 만들어졌는지도 알게 됐어요. 그 다음에 단병호 의원님이 감옥에 있을 때 유덕상 민주노총 직무대행을 만나서 이주노동자 투쟁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도 더 알게됐죠. 그 후 단병호 의원님이 우리 이주노동자 집회에 참가했는데 그때 그분하고 만나서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그리고는 명동성당 농성장에 민주노동당 배너가 있었는데, 우리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내용이었어요. 그 당시엔 부대표이셨는데요.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께서 매 주마다 오셔서 우리 어떻게 지내나 묻고 어떻게 투쟁해야 하나에 대해서도 얘기했어요. 너무 좋았어요.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민주노동당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김혜경 대표께서는 "노동자는 다 하나다. 이주노동자나 한국노동자나 다 똑같다."고 얘기하셨어요.
 
아직 민주노동당에는 이주노동자 당원이 없어요. 이주노동자 중 '불법체류자'가 많아서죠. 또 고용허가제로 합법화되는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선전이 많이 없고, 아직 민주노동당에 관심이 많이 없고 정부가 어떻게 하나 그것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정부가 합법화시켜 준다는 말을 다 믿은 노동자들이 많았어요. 합법화되면 그 사람들 조금 더 안전하게 돈 벌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 이주노동자들도 민주노동당 정책 본 후에 민주노동당원으로서 활동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힘차게 투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처음이니까 날 보고 다른 동지들도 민주노동당에 대해 더 많이 알고 가입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당에 가입한 이유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현재 한국정부와 법무부가 이주노동자들을 엄청 탄압하고 있어요. 우리가 언제 본국으로 추방될지 모르는 상태죠. 저는 추방당해도 노동운동을 계속하려는 마음 갖고 있어요. 우리나라 노동자들도 많이 착취받고 있어요. 저는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활동과 노동운동을 하며 여러 가지 경험을 얻게 됐어요. 여기서 더 많이 배워서 우리나라에 가게 되면 제대로 된 노동조합과 노동당을 만들고 싶어요. 저는 충분히 배워서 우리나라에서도 노동자들의 해방을 위해서 일하고 싶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거예요
 
제가 지난해 농성하며 민주노동당의 여러 분들을 만나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시아에 한국의 민주노동당만한 정당이 없어요. 민주노동당이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심한 아시아 다른 나라들의 모델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 얘기하려고 제가 당우로 가입했고요. 앞으로도 당의 여러 가지 일정에 결합하면서 이런 말을 전해주고 싶어요. 지금 10명이나 국회의원이 됐는데, 당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는지 민주노동당의 활동을 배우고 싶어요. 한국도 어려웠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더 어려울 거예요. 그 점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노력하려는 마음 갖고 있어요.
 
민주노동당에 바라는 점이 있어요.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현실이라는 것을 민주노동당이 제대로 보여줬으면 해요. 이주노동자들도 똑같은 노동자예요. 똑같은 일하고 똑같이 돈벌죠. 이주노동자들도 한 집의 가장이거나 식구들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에 한국노동자들과 마음이나 입장이 다 똑같아요. 민주노동당이 이주노동자 문제를 가지고 4월에 노동허가제 법안 내려고 했죠. 한국사회에 이주노동자 문제가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민주노동당이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한국노동자 관련해서 여러 일정을 갖고 있어요. 특히 한국사회가 비정규직 문제로 너무 혼란스러워요. 자본가들과 정부가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그것을 정규직 노동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앞으로 정규직 노동자들이 나이 먹으면 일 자리에서 나와야 하잖아요. 퇴직한 이후에 그 사람들의 식구, 아들이나 딸이 다 비정규직 돼버리면 불안하잖아요. 어떤 집안이나 불안해요. 불안한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해봤으면 해요.
저는 자본가들 이주노동자들을 이용해서 한국노동자들 착취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대해 더 신경 쓰고 선전도 더 잘했으면 좋겠어요. 선전이나 토론회, 100분 토론과 같은 TV 토론회들에서 비정규직 법안과 함께 이주노동자 문제를 가지고 더 많은 의견을 내놓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주노동자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가 똑같다고 생각하고 같이 싸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같은 입장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민주노동당에 가입했어요.
 
저는 언제든지 추방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당이 어떻게 활동하나 사회적인 문제가지고 포럼이나 토론회를 어떻게 준비하나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리나 배워서 나라에 가서 같은 활동을 하고 싶어요. 우리를 외계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요.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를 형제처럼 받아들이고 여러 투쟁과 일정에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고용허가제 1년 - 이주노동자의 삶과 투쟁 2005/09/08 17:29
오늘은 민주노동당 관악구위원회에서 [고용허가제 1년 - 이주노동자의 삶과 투쟁]이라는 주제로 당원교육토론이 있습니다. 너무 늦게 공지가 되어서 많은 당원들이 올지 의문입니다만, 의미있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네요. 
 
이와 관련하여 나온 자료들을 정리하였습니다.
하나는 구태옥 당원이 올려준 고용허가제 및 이주노동자와 관련된 글모음 중에서 함께봤으면 하는 부분을 발췌,정리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7가지의 자료가 있습니다.
 
그리고 2004년 12월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홍원표 정책연구원이 발표한 것으로, [이주노동권 쟁취를 위한 법 제도 개선 투쟁에 대해] 설명한 글입니다. 본문에는 그 글의 일부, 아니 거의 대부분을 옮겨놓았는데, 쟁점이 되는 사항을 현행 고용허가제, 참여연대 등의 고용허가제 개정안, 그리고 노동허가제로 나누어 알기 쉽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고용허가제 시행 1년을 맞이하여 2005년 8월 25일 노동기본권실현 국회의원 연구모임 대표 단병호 의원이 주관하여 가진, 이주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조건 실태조사 발표회에서 발표된 자료집 중 홍원표 정책연구원의 「이주노동 정책의 개선 방향」이라는 글의 일부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이상의 글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소위 조선족 또는 중국인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빼놓아선 안될 것입니다. 작년 4월 사장이 월급을 주지 않아 집에 갈 수 없다며, 노동청에 가서 사정도 했으나, 오히려 사장편만 들더라는 유서를 남겨 놓은 채 지하철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은 중국인 여성이주노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12살 아들을 둔 서른 네살의 엄마인 정유홍 씨였습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We are not Slave, but Human.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다)
 
그들은 사람일 뿐더러 노동자이기도 합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인 마슘 님이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면서 입당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아시아에 한국의 민주노동당만한 정당이 없으며, 아시아 다른 나라들의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현실이라는 것을 민주노동당이 제대로 보여주었으면 한다. 
저는 이주노동자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가 똑같다고 생각하고 같이 싸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같은 입장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민주노동당에 가입했어요.
 
그렇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넘어, 이주노동자까지 포함하여 노동자는 하나라고 한다면, 제발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 "태양민족, 우리는 하나" 이런 따위의 말들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여 발제자 중의 한분인 이주노조 사무국장 KAJIMAN 님의 발제문 [단속추방과 이주노동자 운동]을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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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노동당] <논평> 고용허가제 시행 1년의 성적표
→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에서 2005년 8월 17일 나온 글로서, 고용허가제 시행 1년을 맞아 나온 글들 중에서 가장 쉽고 간략하게 고용허가제 시행 1년을 평가하고 있는 글입니다.
'외국인력 단기순환' 정책의 실효성과 도덕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하며, 2011년이면 노동력 부족 국가가 되는 상황을 고려하여 이주노동자의 정주화, 나아가 영주권 부여와 이민 등에 대해서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 저야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그렇다면 구체적인 작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부입니다. 

 
오늘은 '외국인근로자고용등의관한법률'(이하 '고용허가제')이 시행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80년말에 이주노동자가 이 땅에 유입된 이후 15년이 넘도록, 그 규모가 25만 명에 달하도록, 한국 땅에는 이주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는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이주노동자는 노동하되 노동자가 아닌 무엇이었으며, 존재하되 드러날 수 없는 존재로 살아 왔던 것이다.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착취와 반인권 행위였다.
 
'사장님, 때리지 마세요', '사장님, 배 고파요'로 시작된 이주노동자 운동이 시민단체의 왕성한 지원활동과 이주노동자의 자주적 활동으로 발전하면서 한국 정부가 뒤늦게 마련한 법안이 바로 '고용허가제'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최초로 인정한 제도라는 점에서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러나 시행 1년을 맞는 고용허가제는 시행 초기부터 시민단체와 이주노동자들의 반대에 부딪혀왔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현대판 노예제도'라는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었던 산업연수생 제도를 존속시킴으로써 여전히 인권과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이주노동자가 방치될 수밖에 없다. 둘째, 형식적인 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사업장 이동 제한과 1년 단위 재계약 등의 독소조항으로 인해 사실상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은 무용지물이다. 셋째,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선별적 합법화와 그에 따른 강제 단속·추방 정책은 결국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유린한다. 넷째, 고용허가제의 근본적 전제인 '외국인력 단기순환정책'은 이주노동자들의 정주를 막기 위해 체류 기간을 3년으로 제한함으로써, 결국 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
 
시민사회단체와 이주노동자들의 이러한 우려는 고용허가제 시행 1년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난 1월에는 태국 여성노동자 8명이 집단적으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다발성 신경장애라는 어처구니없는 산업재해를 당했다. 2005년 4월에는 출입국 관리 직원이 베트남 이주노동자에게 프락치 활동을 강요해 동료 18명을 신고하게 만들었다. 2005년 5월에는 새벽 1시에 출입국 직원이 이주노조 위원장을 표적 연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노동부는 이주노동자들의 자주적 결사체인 이주노조의 설립신고를 반려했다. 가장 최근에는 출국을 앞두고 체불 임금을 받지 못한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벌어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주노동자는 지난 1년 동안 10여 명을 헤아린다.
 
몇몇 불행한 사건들만이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2002년 이후 지난 3년 동안 이주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99만5천원에서 98만 7천원으로 소폭 감소했으나, 물가인상 등을 고려한 실질임금은 대폭 하락했다. 내국인 노동자 평균임금에 비하면 2002년 48.9%에서 2005년 41.5%로 내국인 노동자와의 임금 격차가 더욱 심각해 졌음을 알 수 있다. 노동시간은 2002년 273시간에서 2005년 253.6시간으로 7% 가량의 감소를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다. 또한 여전히 절반가량(47.5%)의 이주노동자들이 임금 체불을 경험하고, 근무 중 상해를 경험하는 이주노동자들은 32.2%에서 38.3%로 오히려 증가했다. 감금이나 여권 압류 등의 말도 안 되는 인권유린도 10명 1명 이상 꼴(12.9%)로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규모는 고용허가제 이후 꾸준히 증가해 합법화 당시 13만 8천명에서 2005년 6월 현재 19만 6천명에 달하고 있다. 이는 전체 이주노동자의 56.3%에 달한다. 거기에 8월 말이 되면 합법화 조처에 의해 발급된 체류 비자가 만료되는 이주노동자가 또한 수만에 달한다. 이들의 절반 ! 이상은 역시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신분으로 체류하게 될 것이다. 결국 고용허가제는 절반의 제도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고용허가제의 낙제 점수는 시행 당시부터 예견된 것이다. 정부는 지난 1년 고용허가제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의 평가를 겸허하게 수용하고, 그에 대한 대안 모색에 전향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외국인력 단기순환' 정책의 실효성과 도덕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2011년이면 노동력 부족 국가가 되는 상황을 고려하여 이주노동자의 정주화, 나아가 영주권 부여와 이민 등에 대해서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 나아가 아무런 법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아 미등록 신분으로 밖에 체류할 수 없었던 이주노동자들을 제도의 시행과 함께 제도에서 소외시켰던 부분 합법화 방침도 재검토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실질적인 노동3권을 제약하고 노사자율주의 원칙을 위배하는 사업장 이동 제한은 완전히 철폐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이주노동자의 노동권과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시민사회단체들과 언제나 함께 할 것이며, 고용허가제를 넘어 노동허가제를 쟁취하기 위한 제도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할 것이다.
 
2005년 8월 17일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2. “이주노동자의 목소리,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것”
   - 청주보호소에서 77일 째 ‘보호’ 중인 이주노조 아노아르 위원장 인터뷰
  
→ 2005년 7월 28일 이주노동자방송국 홈페이지에 실린 전민성 님의 글입니다.
지난 2003년 11월, 명동성당에서 82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정부의 고용허가제 실시에 의한 자진출국을 거부하며 380일간 농성투쟁을 시작했고, 2004년 2월, 샤말타파 투쟁단장이 연행된 후 농성을 해산한 2004년 11월까지, 9 개월 동안 ‘이주노동자 농성투쟁단’의 대표 직무대행을 맡았던 현(現)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초대 위원장 아노아르 후세인 님은 2005년 5월 17일,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뚝섬역에서 출입국 직원들에 연행되어 청주 외국인 보호소에서 갇혀 있습니다. 아직 나오지 못했으니 이제 100일이 넘었습니다. 그 사이에 아노아르 위원장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그에 따른 첫 재판이 2005년 8월 26일에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연행된 후 호송된 차량 안에는 아노아르 위원장의 연행 관련 서류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지난 5월 3일 민주노총 기자회견실에서 진행된 이주노조 창립 기자회견 당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기자회견장에 들어와 사진을 찍는 등의 불법사찰을 자행하다 적발된 것과도 관련되는데,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아노아르 위원장을 연행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쉽게 풀어주지도 않을 듯 합니다.   
 
3. “마지막까지 ‘평화와 노동자의 권리’ 위해 투쟁할 것” 
   - 청주 외국인 보호소에서 아노아르 위원장이 보낸 편지
  
→ 2005년 5월 15일,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뚝섬역에서 기다리던 출입국직원 30여 명에게 폭행당하고 곧바로 청주 외국인 보호소로 보내진, 이주노조 아노아르 위원장이 갇힌지 78일을 맞은 지난 7월 29일 오후 작성한 편지입니다. 한국정부는 저를 하루라도 빨리 방글라데시로 강제추방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글라데시 정부에 아노아르 님이 테러리스트 활동을 했다는 거짓 문서를 꾸며 보내기도 하였구요. 참, 대단한 정부입니다. 
 
4. 고용허가제는 실패했다!
   - 청주 외국인보호소에서 보내온 아노아르 위원장의 편지
 
→ 아노아르 위원장이 청주 외국인보호소에서 8월 8일에 보내온 편지내용으로, 이주노동자방송국 홈페이지에 실려 있습니다. 이 글을 실은 박경주 님에 따르면, 당초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숫자를 줄이고 고용을 합법화하여 산업연수생 제도 때문에 생겨온 여러 가지 문제를 없애겠다던 정부의 의지와는 다르게, 고용허가제는 시행한지 1년이 되지 못했는데도 시민사회로부터 비판적인 지적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고용허가제의 실시와 동시에 산업연수생 제도를 당장 폐지하겠다던 정부가 지난 7월 27일 열린 ‘외국인력정책심의위원회’에서 2005년 하반기에 산업연수생 7천명 추가 도입, 2006년 신규연수생 도입 중지여부에 대한 재검토 등을 결정하는 등, 산업연수생제도 폐지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의심하게 하고 있구요.
 
아노와르 위원장은 서신에서 고용허가제를 통해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줄이겠다던 정부의 계획과는 달리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이주노동자들이 다시 미등록 상태가 되는 등,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면서 정부가 고용허가제의 실패를 인정하고 노동허가제를 도입할 것과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전면 합법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5. “닭장 같은 휴게실과 돼지를 위한 음식"
   - 외국인보호소 내, 이주노동자들의 항의 잇달아
 
이주노동자방송국 2005년 8월 10일
 
6. [이주노조 일본 사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방패",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 (1)(2) 

(1) "모래 위의 노조"에서 "반석 위의 노조"로
(2) 무라야마 사토시 위원장이 한국에 전하는 메시지 
→ 일본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힘이 되고 있는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을 방문하여 어떻게 결성되었고 활동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기사입니다. 그리고 무라야마 사토시 위원장의 인터뷰 기사로 읽을 만 합니다. 무라야마 위원장이 말하는 것처럼 민주노총이 이주노동자의 조직화를 위해 나름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글도 이주노동자방송국 홈페이지에 박경주님이 2005년 7월 6일에 쓴 글입니다.
 
이렇게 일본에서도 불법체류자의 문제가 현안이 되고 있으며, 특히 이들 중에는 ‘재팬 드림’을 꿈꾸고 건너간 한국인들이 많습니다. 거기에서도 불법체류자들은 외국인 범죄의 주범으로 매도되면서 단속도 강화되는 현실이지만 그들의 처지가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사업장 이동이 자유로우며 노동의 대가는 충분히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본의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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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권 쟁취를 위한 법 제도 개선 투쟁에 대해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홍원표 2004. 12)
 
2004년 8월, 고용허가제가 실시됨으로써 이주 노동에 대한 한국 최초의 법적 근거가 생겼으나 현행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의 인권 및 노동권을 매우 심각하게 제한할 소지를 갖고 있다. 이에 대해 이주노동자 운동을 전개하는 많은 단체들은 한결같이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주노동에 대한 법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고용허가제를 넘어 노동허가제로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제도 개선의 현실성에 대한 상반된 평가로 인해 고용허가제 개선과 고용허가제 폐지/노동허가제 도입의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눠지고 있다.
 
1. 고용허가제/개정안/노동허가제 비교
현재 이주노동 문제를 둘러싸고 쟁점이 되는 사안은 크게 미등록이주노동자 합법화 문제, 사업장 이동의 자유 제한의 문제 그리고 체류기간에 대한 문제이다. 각각의 사안에 대해 현행 고용허가제, 고용허가제 개정안(2004. 8. 참여연대안), 노동허가제(2002년 민주노총안)의 내용을 간략히 비교 소개하고자 한다.
 
□ 미등록이주노동자 문제
- 현행 고용허가제: 부칙 제2조(불법체류 외국인근로자에 대한 특례)에 따르면 총 체류 기간이 5년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2003년 3월 31일 기준으로 국내 체류 기간 3년 미만인 자에 한해 최장 2년까지만 허용.
- 고용허가제 개정안: 제한 없이 신고에 따라 합법화
- 노동허가제: 제한 없이 신고에 따라 우선적으로 노동허가 부여
 
□ 사업장 이동권의 문제
- 현행 고용허가제: 3회까지 허용, 노동자의 자유의사에 따른 사업장 이동 불허. 대통령령에 따라 1회 추가 허용 가능
- 고용허가제 개정안: 정당한 사유에 한해 이주노동자에게 계약 해지 권한 부여. 4회까지 사업장 이동을 허용하나 이주노동자에게 귀책사유가 없을 경우 회수 산정에 포함하지 않음. 사업장 변경 기간이 있으나 마찬가지로 이주노동자에게 귀책사유가 없을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음.
- 노동허가제: 사업장 이동 자유 보장.
  
□ 체류 기간의 문제
- 현행 고용허가제: 3년(1+1+1). 귀국 후 1년 경과 후 재입국 허용. 다만 총 5년 경과 못 함.
- 고용허가제 개정안: 현 고용허가제와 동일
- 노동허가제: 일반노동허가와 특별노동허가의 이원적 체제. 일반노동허가의 경우 5년(2+1+1+1)까지 가능. 일반노동허가가 만료된 이주노동자가 원할 경우 특별노동허가(5년) 신청 가능.
 
2. 2004년도 제도 개선 투쟁 보고
 
3. 이주 운동이 나아갈 방향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해 볼 때, 고용허가제 개정안이든 노동허가제든 지금과 같은 상황이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진다면 입법 발의는 그저 하나의 해프닝으로 지나칠 가능성이 매우 크다. 
 
□ 이주 노동자 조직의 강화
이주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당분간 이주노동자 문제가 주된 사회적 쟁점이 될 가능성은 매우 적은 상황에서 현행 고용허가제와 연수생 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이주노동자에 가해지는 각종 억압에 대해 우선적으로 이주노동자 스스로 조직화를 통해 대처해 나아야 할 것이다. 이주노동자 조직 강화는 또한 노동허가제 쟁취를 위해서도 가장 핵심적 사안이다.
 
□ 이주 운동 진영의 연대 활동 강화
이주노동자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주노동자가 처한 상황은 이주노동자 스스로 조직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방어할 수 있는 세력으로 형성하기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단체들이 일상적인 이주노동자 지원 업무와 더불어 보다 적극적으로 이주노동자 조직화 사업을 도와야 할 것이다. 또한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여내고 대안적 제도 수립을 위해 각각의 이주노동자 지원 단체들의 고유 역할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연대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 법 제도 개선 투쟁
고용허가제가 제정된 시점과 비교할 때 2004년이나 2005년의 상황이 더욱 불리하다. 고용허가제가 제정되던 시점은 정부 역시도 이주노동자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법 제정이 필요한 시기였다. 반면, 당분간은 정부의 입장에서 이주 관련 제도를 수정해야할 긴박한 필요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행된 지 채 몇 개월도 되지 않은 고용허가제 체제에 수정을 가한다는 것 자체가 정부로서는 스스로의 오류를 시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매우 부정적으로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현 고용허가제에 대한 대안 법률을 빠른 시일 안에 제출해야 할 것이다. 법안 제출 자체만으로도 이주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사회적 환기 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안이 통과되고 제도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법안 제출 이전에 앞서 말한 이주노동자들의 조직을 강화하고 이를 토대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각종 활동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최우선적 과제로, 현 고용허가제가 안고 있는 문제를 알릴 수 있도록 고용허가제 이후의 이주노동자 현실, 특히 E-9 비자 소지자(고용허가제 시행 이후 입국한 이주노동자와 합법화 조치를 통해 노동비자를 획득한 이주노동자)를 중심으로 고용허가제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주노동자 제도임을 증명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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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 정책의 개선 방향 (홍원표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Ⅰ. 들어가며

 
2005년 8월은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지 1년이 지나는 시점이다. 고용허가제 시행 1년을 두고 정부와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제도의 성과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제출하였다. 제도 시행의 주체인 노동부는 입국인원의 증가, 이주노동자의 인권향상 및 사업장 무단이탈 감소 등 제도 시행 1년이 되면서 고용허가제가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정부와는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주노동자인권연대는 고용허가제의 시행 취지와는 달리 여전히 송출비리 문제를 개선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지급과 임금체불, 폭행 등의 인권침해 사례가 적지 않았고, 무엇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업장 이동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어 고용허가제 시행 1년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또한, 서울경기인천지역이주노동자노동조합은 사업장 이동 제한, 강제 단속ㆍ추방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산업연수생 제도와 병존하고 있는 고용허가제가 사실상 이주노동자의 기본적 인권과 노동권을 보장하지 못했으며, 나아가 숙련된 노동자를 강제 추방함으로써 인력 수급에서도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고용허가제의 파탄 선언 결의대회를 진행하였다. 국회 노동기본권연구모임에서 진행한 연구조사에서도 고용허가제가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키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Ⅱ. 고용허가제 시행 1년, 무엇이 문제인가?
 
1. 고용허가제 시행 1년 -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증가
한국에 체류하는 이주노동자는 2000년 28만 여명에서 꾸준히 증가하여, 2004년 42만 명까지 증가하 였다가 2005년 들어 35만 명으로 다소 감소하였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고용허가제 시행을 앞둔 부분 합법화 조치에 의해 2003년 13만 명까지 감소하였으나, 정작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해 2005년 6월 현재 20만 명에 육박하고 있어, 전체 체류자의 절반 이상이 미등록 신분으로 체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불어, 부분 합법화 조치에 의해 합법적 체류 지위를 부여 받은 이주노동자들의 비자가 2005년 8월에 모두 만료될 예정이어서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숫자는 당분간 더욱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 해결을 강제 단속ㆍ추방 정책에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하고 있다. 2005년 3월 8일 노동부ㆍ법무부 장관 합동 성명서를 통해 밝힌 것처럼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강화하고 전국 26개 상시적인 합동 단속반을 구성하는 등 강제 단속ㆍ추방을 강화해 왔다. 강제 단속ㆍ추방 정책은 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 해결에 일시적인 방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지속적인 정책으로 추진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입국 절차를 간소화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재입국보다는 미등록 체류를 선호하고 있는 상황에서 3년 순환을 골간으로 하는 현재의 고용허가제가 존속하는 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앞으로도 꾸준히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강제 단속ㆍ추방 정책은 그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다.
 
결국, 지난 1년간 고용허가제는 제도의 대상이 되는 이주노동자의 절반도 포함하지 못 하는 반쪽짜리 제도로 운영되어 왔으며, 이는 고용허가제가 목적으로 하는 ‘외국인근로자에 대한 체계적 관리’가 체계적으로 무너져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용허가제 실시 이후 강화된 강제?단속 추방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과 이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사업주 사이에 형성된 노동시장을 더욱 음성화하는 효과를 가져와 노동조건 하락과 인권 침해의 가능성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2005년 1월 태국 노동자들의 노말헥산 집단 중독 사건은 강제 단속의 의한 노동시장 음성화가 산업재해 예방 시스템의 사각 지대를 어떻게 확대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 고용허가제 시행 1년 - 노동조건 개선 효과 미비
고용허가제 실시 이전 이주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995,816원이었으며, 고용허가제 실시 이후 이주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974,966원(국회 노동기본권연구모임, 2005)/1,003,000원(한국노동연구원, 2005)으로 명목 임금은 거의 변동이 없다. 물가 인상을 고려할 경우(2002년-2004년 매해 물가 인상률은 3.6%) 실질임금은 하락하였으며, 내국인 노동자 평균임금 대비 이주노동자 평균임금 수준은 2002년 48.9%에서 2005년 41-2%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이주노동자인권연대의 실태조사 보고(2005)에 따르면 고용허가제 실시 이후 신규 입국한 이주노동자들 중 계약 체결 당시 노동조건과 실제 사업장에서의 노동조건이 일치 않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중 임금이 달라진 경우가 45.1%, 노동시간이 달라진 경우가 53.5% 업무내용이 달라진 경우가 19.7%에 달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계약 내용에 비해 실제 조건은 하락하였다. 임금과 노동시간 등 주된 고용조건 이외 작업장에서 발생하는 고충은 다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다. ...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업주 혹은 관리자의 태도가 다소 개선되었으나, 업무 및 노동조건에 관한 사항에 있어서는 여전히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특히, 감금 혹은 신분증 압류와 같은 명백한 불법 행위가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고용허가제 1년의 평가
제도가 도입된 사회ㆍ역사적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법안(고용허가제가 부르는 ‘외국인근로자고용등에관한법률)이 밝히고 있는 ‘체계적 도입ㆍ관리’와 ‘원활한 인력수급’의 관점에서만 제도를 평가하게 될 경우, 이는 대단히 형식적 평가에 그칠 우려가 있다. 따라서, 고용허가제 시행 이전 산업연수생 제도에서 문제로 지적되었던 부분들이 고용허가제 실시 이후 얼마나 개선되었는가에 대한 평가 역시 동시에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미등록 이주노동자 현황과 이주노동자 노동조건의 변화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고용허가제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에 있어 매우 취약하며, 이는 곧 고용허가제의 치명적 약점이 될 것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증가는 고용허가제의 사각지대가 확장됨을 의미하고, 이는 곧 이주노동자 노동시장의 음성화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물론 2004년 하반기와 2005년 상반기에 나타났던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증가는 고용허가제 실시에 따른 일부 합법화에 따른 비자 만료에 의해 일시적으로 급증한 현상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정책이 강제 단속ㆍ추방에 의존하고 있으며, 고용허가제가 3년 단기 순환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이상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발생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거나 단기간에 해결될 것이라 전망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둘째, 고용허가제 시행에 따른 노동조건 개선 효과는 거의 전무하다. 제도의 시행이 제도 대상자들의 삶을 개선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문제는 고용허가제가 삶의 조건을 개선시키지 못 한다면, 행위자들이 고용허가제 내부에 머물러야 할 유인을 얻지 못 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감소시키는 데 고용허가제가 무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Ⅲ. 한국의 노동시장과 이주노동자
 
고령화 사회로의 급속한 전환 및 출산 기피 현상으로 인해 향후 노동력의 공급 부족이 심각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여기에 3D 기피 현상까지 겹쳐 중소 제조업의 경우 인력난이 더욱 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중소 제조업을 중심으로 이주노동에 대한 수요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반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주노동자에 의한 내국인 일자리 대체 현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이주노동자가 유입되는 노동시장이 내국인 노동자의 노동시장과 일정 정도 분리된 노동시장 분절화 현상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이주노동자의 유입이 전체 경제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는 고용창출 효과로까지 연결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용주의 수요가 지속되고 있어 이주노동자가 유입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 전망되는 반면, 아직까지 이주노동자 유입에 따른 부작용은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주노동자 정책은 현재 체류 중인 전체 이주노동자 35만 명뿐만 아니라 향후 이주노동자 규모의 증가를 대비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Ⅳ. 결론: 외국인력 제도의 개선 방향
 
현행 고용허가제의 근본을 이루는 원칙은 첫째, 국내 노동시장 보완성의 원칙, 둘째, 송출비리 방지 및 외국인력 선정ㆍ도입 절차의 투명성 원칙, 셋째, 외국인의 정주(定住)화 방지 원칙, 넷째, 내외국인간 균등대우의 원칙, 다섯째, 산업구조조정 저해 방지의 원칙이다.
 
① 노동시장 보완성의 원칙: 노동시장 보완성의 원칙은 이주노동자가 내국인 노동시장을 침해ㆍ교란하여 실업 혹은 임금 및 노동조건의 하향평준화 등의 현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력을 수입하고 있는 대다수의 국가들에 적용되고 있다. ... 노동시장에서 노동자와 사용주의 권력 자체가 불균형할 수밖에 없으며, 자유로운 노동자의 국가 간 이동은 이러한 불균형을 오히려 더욱 증대시킬 가능성이 더욱 크다. 따라서 노동시장 상황에 따른 국가의 적절한 조절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조절’의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내 노동시장의 지역별, 산업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의사결정의 토대가 되어야 하며, 노동시장의 여건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당사자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행 고용허가제에서 이러한 기능을 담당하는 외국인력정책위원회는 노동시장의 여건변화에 따라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의 의견이 반영되기 어려운 구조이다. 따라서 현행 외국인력정책위원회의 인적 구성을 노사정 대표가 참여하는 구조로 전환하고, 산업별/업종별/지역별 노동시장 정보가 보다 정확하게 수집될 수 있도록 노동시장 인프라가 확장되어야 한다.
 
② 선정ㆍ도입 절차의 투명성 원칙: 현행 고용허가제는 산업연수생 제도에서 문제가 되었던 송출 비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MOU를 체결한 국가에서만 인력을 공급받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 실시 이후에도 산업연수생 제도에서의 송출비리와는 그 유형이 다를 수 있지만, 여전히 과대 송출 비용과 관련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현재 100여 개 국으로부터 이주노동자가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몇 개의 MOU 체결국으로만 합법적 인력 유입을 허용하는 것은 곧 MOU 체결국 외의 국가에서는 적법한 과정으로 이주노동자가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별 협약에 의한 입국 경로 외에 개별적 입국이 가능한 절차를 고민해야 한다.
 
③ 정주화 방지 원칙: 고용허가제의 핵심적 원칙으로 이주노동자의 정주화를 막기 위해 고용허가제 자체가 3년 단기 순환 제도로 설계되었으며, 고용허가제 시행에 앞서 조치되었던 일부 합법화 역시 정주화 방지 원칙에 의거, 4년 미만 체류자로 한정되었다. 정주화 원칙, 다시 말해 외국인력 단기순환 정책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양산하는 핵심적인 문제이다. ... 그러한 조치가 지금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를 더욱 악화시켜 오히려 제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또한 최근 노동의 국제 이동은 단기적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으로서의 노동 이동이 아니며, 이주 노동자들 스스로도 4-6년 정도의 체류를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3년의 단기 순환 정책은 합법적 체류 기간 만료 이후 미등록 체류로의 전환을 필연적으로 수반할 것이며, 이는 이주노동시장의 음성화를 가속시켜 사회적 문제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④ 내외국인간 균등대우 원칙: 고용허가제 22조는 외국인 차별 금지를 명시하고 있고, 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어 균등대우 원칙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25조에 규정하고 있는 사업장 이동 규정은 사실상 이주노동자의 자율적 사업장 변경을 원천 봉쇄하고 있고, 이는 곧 합법적 체류 자격과 연동되어 있어 사실상 노동3권의 행사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임금 등 고용조건의 하락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외국인간 균등대우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허가 또는 신고된 사업장 사이에서는 자유로운 사업장 이동을 보장해야 하며, 나아가 내외국인간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로 발전시켜야 한다. 
 
⑤ 산업구조조정 저해 방지 원칙: 산업구조조정 저해 방지 원칙이란, 이주노동자의 저임금 노동이 경쟁력이 약화된 한계산업의 시장 퇴출을 지연시켜 산업구조조정을 저해하고 결국은 경제 전반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어, 이러한 산업에 이주노동자의 인력 수급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고용허가제에서는 산업구조조정 저해 방지 원칙에 대한 관련 조항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주노동자에 의해 형성된 저임금 노동시장은 개별 기업으로는 합리적 선택의 폭을 넓히고 이윤 확대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경제 전반에 걸쳐서는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이주노동자에 의한 저임금 노동시장을 막는 것이 정책의 주된 방향이 되어야 하는 이를 위해서는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최저임금의 인상,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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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추방과 이주노동자 운동 (발제자 - 이주노조 사무국장 KAJIMAN)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88년부터였다. 그 후 1991년을 지나면서 많은 이주노동자가 일자리를 찾기 위해 한국에 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불법체류자(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2년에 정부가 마련한 대책은 6개월짜리 비자를 일시적으로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 저임금, 임금체불, 산업재해, 감금노동, 성폭행 등의 착취로부터 오랜 시간 고통 받아 오면서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투쟁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98년까지는 종교단체나 시민단체와 함께 투쟁해 왔지만 그 이후로 이주노동자는 자기 스스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2001년에 평등노조 이주지부가 건설되었다. 우리는 ‘단속추방 반대, 전면 합법화, 연수생제도 폐지, 노동3권 보장, 노동비자 쟁취’의 요구를 걸고 투쟁하였다.
 
2002년 한국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1년 안에 출국을 하는 조건으로 부분적인 합법비자(E-9)를 주었다. 그러나 이주지부는 등록거부 운동을 펼치며 노동비자를 요구했고 이주지부장, 꼬빌, 버즈라, 자나르단 동지들이 77일간 농성 투쟁을 하였다. 그리고 2003년 7월 31일 고용허가제가 통과된 후 이주지부에서는 고용허가제 반대 투쟁을 전면화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고용허가제 시행에 앞서 5년 이상 한국에 체류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2003년 11월 15일 안에 출국하여야하고 무조건 단속으로 추방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단속추방에 맞서기 위해 이주노동자들은 명동성당에서 2003년 11월 15일부터 380일간 농성투쟁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농성 해산 이후, 이주노동자 스스로 단결하여 요구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2005년 4월 24일에 이주노조를 건설하였다. 그러자 법무부는 아노아르 위원장을 표적 연행함으로써 이주노동자 운동을 탄압하였고, 위원장을 연행한 뒤에도 오랜 시간 보호소에 가두어둔 채로 시간을 끌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나 한국 정부는 이주노조나 이주노동자를 두고 장난만 치고 있다.
 
출입국관리소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마약, 절도, 테러리스트 같은 범죄자로 몰아가면서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이주노동자를 연행하고 단속하고 있다. 단속반은 단속 과정에서 신분을 밝히지도 않고 이주노동자를 연행 하고 함부로 욕과 폭행을 하거나 이유 없이 수갑을 채운다. 그리고 그물총이나 전기총 등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정부는 한국을 인권국가라고 알리고 있다. 그리고 경제 발전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전면 합법화 시켜야 한다. 합법과 불법의 차이 없이 35만 이주노동자 모두의 권리를 보장해야한다. 다시 한국에 들어오는 사람도 같은 법으로 보장해야 한다. 이주노조에서는 ‘단속추방 반대, 전면 합법화, 연수생제도 폐지, 노동3권 보장, 노동비자 쟁취’ 요구를 이루기 위해 계속 투쟁하고 조직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한국 노동자운동과 여성, 장애인 운동 등에도 연대해나갈 것이다.
 

 

2006/11/19 00:21
최근엔 무슨 활동을 하지 않다 보니 주로 하는 짓이 관련된 기사를 퍼오는 것 뿐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하루이틀이 아닌데, 그냥 무감하게 되는 건 왜일까. 이주노동자와 관련된 글을 읽게 되면 이주노조의 서선영씨와 마님이 생각난다. 요새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을까. 참세상의 글을 담아왔다. 
 
"아노아르 위원장 체류 불허 방침을 철회하라" (참세상 최인희 기자,
민주노총, 이주노조 결성권 침해로 한국정부 ILO에 제소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노동자성을 부정하는 정부의 입장과 법원의 이주노조 설립신고 반려는 UN협약과 ILO규약 등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주노동자 노조 결성권 침해와 고용허가제 등은 ILO협약 143조 항목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이주노동자에 대한 동등한 권리 보장'을 어기고 있으며, 이주노동자들의 결사의 자유, 노동조합 결성권, 단체교섭의 권리 등이 보장돼 있는 87조와 98조에도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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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는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을 즉각 인정하라! 2007/02/06 17:11 
지난 목요일 오전 민변에서 상근활동하는 정양에게서 메신저로 이주노조 설립을 인정한다는 판결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그 때는 없었고, 오후가 되니 여기저기서 논평이 나왔다.
이주노조가 당분간 인정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직은 법에 의한 판단도 기대할 여지가 있는 걸까. 서울고등법원의 이주노조 설립신고반려처분 취소 판결을 환영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기사와 논평, 판결문을 옮겨온다. 

 

한국 정부는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을 즉각 인정하라!
-서울고등법원의 이주노조 설립신고반려처분 취소 판결을 환영하며
(2007년 2월 1일, 민주노총 서울본부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2월 1일 서울고등법원 제11특별부 재판부(재판장 김수형 판사)는 이주노조의 노조설립신고서반려처분취소청구를 기각한 1심 판결을 취소하고, 이주노조 설립신고서반려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우리는 지난 2005년 5월 3일 노조설립신고서를 노동청에 제출했으나 노동청은 사업장별 명칭과 조합원 수 및 대표자의 성명, 조합원 명부를 보완하라는 부당한 요구와 미등록이주 노동자는 노동자도 아니라는 이유로 6월 3일 설립신고서를 반려했다. 그래서 우리는 7월 20일 행정법원에 부당한 노동청의 노조설립 신고 반려에 불복해 ‘노동조합설립신고서반려처분취소’를 청구했다. 그러나 2006년 2월 7일 행정법원은 미등록이주노동자의 고용에 따른 노동자성 불인정, 출입국법상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한 바 있다.
    
우리는 행정법원의 명백한 부당한 판결에 불복해 항소심을 청구했고, 무려 1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끝에 우리 주장의 정당성이 입증됐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을 환영한다!
우리는 이 판결이 그 동안 이주노동자들이 인권과 노동권을 요구하며 지난하고 처절한 투쟁을 벌여온 것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의 투쟁을 지지하고 엄호해 준 한국 동지들의 연대의 성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판결이 지금도 기승을 부리고 있는 단속추방 때문에 숨죽이고 있는 40만 이주노동자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될 수 있기 바란다.
   
우리는 이 판결을 계기로 이주노동자 권리 쟁취와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나아갈 길이 멀다. 단속에 걸린 이주노동자들이 단속 당시의 충격과 감옥보다 못한 외국인 수용소 처우에 고통을 겪으며 마땅히 받아야 할 퇴직금, 체불 임금도 받지 못하고, 병이 있는 사람들이 아픈 몸을 치료하지도 못하고 강체 출국당하고 있다.
우리는 당면의 이 탄압을 저지하기 위해, 또 우리 이주노동자들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더욱 적극 투쟁할 것이다.
  
이제 노동청은 즉각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여 이주노조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노동청이 이 판결을 수용하지 않고 대법원 상고를 진행한다면, 노동부의 반 노동자적 행태를 규탄하며 계속 투쟁해 나갈 것이다.
 
"이주노동자도 노조 만들 수 있다" (프레시안, 여정민 기자, 2007-02-01 오후 6:38:12)
고법 "노동부의 설립신고서 반려, 근거 없다"  
 
고등법원, 이주노조 설립신고반려 위법 판결 (참세상, 변정필 기자, 2007년02월01일 19시16분)
“이주노동자 인권과 노동권을 요구했던 처절한 투쟁의 성과”    
 
[논평] 이주노동자 노조설립 인정 첫 판결을 환영하며 (2007년 2월 1일 민주노동당 부대변인 정호진)
 
[논평] 법원의 이주노동자노동조합설립 인정 판결을 환영한다 (2007년 2월 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논 평] “이주노동자노동조합설립신고서반려처분을 취소하라”는 항소심 판결을 환영하며 (2007. 2. 1.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1. 2007. 2. 1. 서울고등법원 제11특별부(재판장 김수형 판사)는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위원장 아노아르, 방글라데시)이 서울지방노동청장을 상대로 제기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설립신고서반려처분취소청구 항소심 재판에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의 노조설립신고서반려처분취소청구를 기각한 1심판결을 취소하고, 이주노동자노동조합설립신고서반려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하였다.
   
2. 그동안 노동부는 불법체류 외국인근로자의 경우 출입국관리법상 취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는 이유로 노동3권의 주체로 볼 수 없으며, 노조가입자격이 없는 불법취업 외국인을 주된 구성원으로 조직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을 노동조합법상 노동조합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노조설립신고서를 반려하였고 불법체류 외국인근로자의 노동조합 활동을 불법시하여 왔다. 1심 재판부인 서울행정법원 제13부(재판장 이태종 판사) 또한 노동부와 같은 이유로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하였으나 항소심 재판부에서 노동부와 1심 재판부의 견해를 뒤집은 것이다.
   
3. 우리 모임은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출입국관리법을 위반한 상태에서 근로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더라도, 출입국관리법위반은 그 법이 정한 행정 목적에 따른 판단일 뿐이고, 그렇다고 하여 그 근로관계의 실질이 부정되거나 노동관계법의 보호 대상이 되는 근로관계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며,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라고 하더라도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 해당하고, 그 근로조건의 유지 개선이나 사회적 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하여 노조를 설립할 권리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주노동자의 노조 설립을 인정하라는 취지의 항소심 판결은 매우 정당한 것이다.
   
4. 우리 모임은, 이 판결이 우리 사회에서 불법체류라는 신분으로 인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보장과 권익신장을 위한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주노조 지역지부 확대가 가장 큰 과제” (참세상, 변정필 기자, 2007년02월05일 13시12분)
 3차 정기총회, 조합원 범위변경 규약개정 및 새 지도부 선출

 

이주노동자에 대한 제도적 살인을 중단하라. 2007/02/12 18:02 
지난 2일 이주노조 설립을 인정한다는 판결이 나와서 기뻐했는데, 일요일 새벽에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죽은 이들에게 한국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코리언 드림은 고사하고 목숨마저 앗아가는 대한민국.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난 이주노동자들을 추모한다. 


연영석 3집 - 코리안 드림
 
가난이 싫어 고향을 등지고 나홀로 돈 벌러 나왔어
돈 많이 벌어서 가족을 돌보고 내 꿈도 돌보고 싶었지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내 돈을 돌려주세요
내 몸이 아파 마음이 아파 여기서 도망치고파
 
차가운 시선 난 그냥 일하지 난 그냥 일하고 싶을 뿐
백인도 아냐 흑인도 아냐 난 그냥 일하는 사람
 
나온 지 십년 내 몸이 아파 병들어 버린 몸둥이
그래도 또 다시 더럽고 힘든 일 내 이름 불법체류자
 
코리아 코리안 드림 코리아 코리안 드림

 

<속보> 여수 출입국관리소 화재 사건 대책회의 열려 
유가족들, “여수출입국에 분향소 설치해 달라” 
이주노동자방송국, 현장취재: 전민성 & 조나잉, 정리: 매바마, 2007년02월12일 13:38:37  
 
2월 11일 여수 외국인 수용소 화재 현장 1일차 현지 방문을 정리하며....... (MTU이주노조, 2007-02-12 04:54:30) 
 
무엇보다 이 사건의 핵심은 방화냐 아니냐가 결코 아니다. 유가족이 오열하듯이, 화재가 발생한 상황에서 도주 우려 때문에 이들을 신속히 대피시키지 않은 것이 이 참사의 직접적 원인이다. 뿐만 아니라 수용 시설 내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마련돼 있지 않은 점-순천지청장은 이 건물은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가 없다며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수용소 내 시설물들이 유독가스가 많이 발생하는 재질의 시설물로 채워진 점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문제 투성이다. 이번 사건은 외국인 수용시설이 얼마나 열악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제도적 살인을 중단하라.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2007-02-12 09:14:28)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사건에 대해 법무부를 규탄한다. 
 
이번 사건은 단지 방화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고, 보상에만 국한되는 문제도 아니다. 그 이전에 구타나 반인권적 처우 관련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며, 그리고 기본적인 관리직원과 보호시설의 잘못으로 인해 화재사건이 벌어진것이란 원인은 무시한 채 모든 원인을 이주노동자에 의한 방화로 몰고가는 지금의 출입국관리국의 태도는 출입국측의 잘못을 물타기하려는 처사에 다름아니다.
 
이번 사건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지금 현재의 그릇된 출입국 행정에 있다. 고용허가제 시행과 동시에 강화된 단속추방은 전국에서 도저히 관리 불가능할 정도의 인원을 매일 단속하고 있고, 콩나물시루처럼 좁은 공간에 무조건적으로 집어넣고, 하루라도 빨리 나라로 돌려보내기 위해 협박 및 회유에만 치중하는 지금의 전반적인 출입국행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는 범죄자가 아니다.” 미국에서 센센브레네 법이 상정돼 한국의 단속추방과 같은 제도가 시행되려 했을 때 주미한인들이 외쳤던 구호이다. 출입국 규약을 어긴것은 범죄가 아닌 범법이고, 이주노동자들은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만 함에도 한국에선 모든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을 범죄자에 대한 처우보다 못한 처우를 받으며 살고있다. 항상 시도 때도 없이 닥치는 단속에 공포에 떨며 지내야 하고, 단속된 후 열악한 보호시설과 반인권적 관리태도에 고통받고 있다.
 
이번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사건에 대해 이주노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이번 사건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단시 직원들과 제대로 된 시설조차 갖추지 못한 여수출입국관리소 측에 대한 사회, 노동단체들이 결합하여 공정한 진상조사를 진행해야 하고, 이 결과에 따라 관리소장 및 책임자들과 당시 직원들이 법적인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또한 사망자 뿐만이 아니라 중상자들의 가족들도 신속히 입국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며, 이에 대한 배상문제를 철저하게 처리해야 한다.
  
둘째, 그리고 이 문제가 단지 여수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보호소 및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상기하고 계속해서 문제제기되고 있는 출입국관리사무소 및 보호소의 시설 미흡 및 직원들의 반인권적 태도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개선해야 한다.
  
셋째, 이주노동자에 대한 구금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지금 현재 진행되는 대규모 반인권적 구금을 중단하고 보호소를 폐쇄해야 하고, 이 사건이 명백한 제도적 살인임을 인정하고 지금 진행되고 있는 강제추방정책을 중단하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전면합법화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의 야만적 단속·추방 정책이 이주노동자 9명을 죽였다 (2007년 2월 11일, 민주노동당 의견그룹 다함께)
 
[성명서] 고통으로 세상을 떠난 피해자를 추모하고, 법무부의 보호소 운영 실태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2007. 2. 11.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이주노동자의 귀환 후 문제 / 이주아동들의 교육받을 권리 (일다) 2007/06/20 15:48
일다의 아래 기사를 보면 여성주의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소수자운동의 틀에서 연대하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주노동운동과 관련하여 놓치고 있었던 부분을 본 듯하여 반가운 기사였다. 이주노동자의 귀환 후의 문제와 이주아동들의 교육받을 권리, 모두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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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귀환 후에는? (일다ⓒ www.ildaro.com, 윤정은 기자, 2007-06-08 02:13:13)
이주노동NGO들의 새로운 시도
 
이주노동단체들은 만약 이주노동자들이 이주노동을 떠나기 전에 본국(송출국)에서 주위 사람들과 함께 미래를 설계하고, 한국에서 와서 몇 년간 일한 돈을 저축하고, 체류하는 동안 필요한 직업교육, 기능교육과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데 착안하게 됐다. 현재는 이주노동자가 자국에 돌아가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자리가 없어 실업 상태로 있거나, 또다시 타국가로 이주노동을 떠나게 되어 본국의 사람들과 이별을 겪게 되는 등 문제가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귀환프로그램이 실효성을 거두려면, 현재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50% 존재하는 한국의 현실에서 무엇보다 ‘강제적인 물리력을 동원해 강제 출국시키는 식’의 정부의 역할과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최정의팔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소장은 강제 단속과 추방으로 일관하는 한국 정부의 정책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귀환프로그램을 (정부에) 제안하는 것 자체가, 본국으로 귀환할 형편이 되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권익을 오히려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최 소장은 “한국에서 귀환프로그램은 (자국의 재통합만이 아닌) 한국 사회 통합문제와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이주노동자들이 본국에 돌아갈 수 없을 경우에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부여하는 운동과 함께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귀환프로그램과 시민권을 주는 운동이 동시에 전개되어 상호보완적으로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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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서 쫓겨난 이주아동들 (일다ⓒ www.ildaro.com, 부깽 기자, 2007-05-29 01:23:00)
동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보장해야
 
사단법인 국경없는마을 다문화사회교육원 이선옥 연구원은 “그 중에는 아직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 조건인데도 (학교가) 내보낸 것을 보면, 연령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말썽이나 관리상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고 지적한다. “학교 측에서 이주 자녀를 ‘잠재적 문제아’로 보고 내 쫓았다”는 주장이다.
  
이선옥 연구원은 “학교에서 내몰린 아이들은 다른 학교에서도 받아 주지 않았고,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중학교 진학을 할 수도 없었다”고 말하며, 이후의 상황이 더 큰 문제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현재 “대부분 공장에서 일을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노력해야 할 학교가 오히려 이주아동의 교육권을 제한하고, 결국 아동노동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자녀라 하더라도 그들 부모의 배경과 관계없이, 한국인 아이들과 같은 조건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모든 아이들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 권리가 제한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주아동의 학교 입학 여부도 학교장의 재량에만 맞길 게 아니라, 입학 및 졸업과 관련한 법적인 기반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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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연대 (한겨레21  2007년10월12일 제680호,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이주노동자와 함께…산별노조 문 ‘활짝’ (한겨레, 황예랑 기자, 2007-10-18 오후 09:09:16)
민주노총 금속노조 대대적 조직화 나서 
  
하나로 뭉치니 마음은 하나, 힘은 두배 (한겨레, 대구/ 김소연 기자, 2007-10-19 오전 12:53:07)
이주노동자와 첫 통합노조 만든 삼우정밀
  
노동자 전반적 처우개선 효과 기대 (한겨레, 황보연 황예랑 기자, 2007-10-18 오후 11:27:07)
이주노동자 ‘노동조건 개선 요구’ 봇물 예고
노조가입 땐 임금 등 국내 노동자와 동일 적용될 듯
‘유니언숍’ 합의·정규직 조합원들 거부감 풀어야
 
 
[사설] 금속노조의 이주노동자 껴안기 (한겨레, 2007-10-18 오후 06:17:51)
 
이주노동자들을 소속 노동조합원으로 가입시키겠다는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의 계획이 눈길을 끈다. 금속노조는 어제 중앙위원회를 열어 소속 사업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전면적인 실태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임금 등 근로조건을 조사하고, 노조 가입에 걸림돌이 되는 요인을 알아보려는 것이다. 금속노조는 이미 조직 규약을 고쳐 이주노동자를 가입 대상에 포함시켰고, 간부의 일정 비율을 이들에게 할당하게 해두었다.
 
이주노동자들의 노조 가입은 이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전기가 될 뿐 아니라, 노동조합의 교섭력을 키우는 데도 큰 구실을 할 수 있다. 금속노조 삼우정밀 지회의 사례는 이주노동자 껴안기가 국내 노동자와 이주노동자에게 두루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회사의 한국인 조합원은 41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사원 모두 입사하면서 바로 노조원이 되는 ‘유니언숍’을 지난 7월 도입해 이주노동자 22명을 조합원으로 가입시켰다. 그 뒤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크게 개선됐고 고용도 안정됐다. 전사원이 조합원이 되면서, 조합의 교섭력은 매우 커졌다.
 
국내 이주노동자들은 아직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5년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 100여명이 지역노조 설립 신고서를 냈으나 노동부가 반려했다. 행정소송에서 고등법원이 이들의 손을 들어줬지만 노동부가 상고해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지역노조는 합법화되더라도 사업장 중심으로 활동하기는 어렵다. 산별노조가 이주노동자를 직접 껴안겠다는 시도는 그래서 의미가 크다.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48만여명으로 전체 임금 노동자의 3.2%에 이른다. 어느새 우리 경제의 한 축을 떠받칠 정도로 늘어났다. 이들을 국제적으로 보편화된 노동규범에 따라 대우하는 것은 ‘인권 보장’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노동자들 가운데는 이주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뺏는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이도 일부 있다. 그러나 일감이 달라 실제 일자리 경쟁은 심하지 않다. 반면, 이들에 대한 낮은 처우가 국내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까지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업주들도 이주노동자 처우 개선을 생산성 증대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할 때가 되었다. 

 

 

2007/11/30 11:58 
27일 오전 이주노조 지도부 연행 소식이 전진 게시판에 올라왔다. 아니 그 전에 진보블로그에서 누군가가 이주노조 지도부가 연행되었다는 글을 쓴 것을 먼저 본 것 같다.  
 
서울고등법원이 이주노조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 탄압은 무엇일까. 이것은 이주노조를 와해시키려는 표적단속이라고 할 만하다. (법무부와 보조를 맞추는 노동부는 여전히 이주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항고를 해놓은 상태이다) 출입국공무원들에게 준사법권이 부여되면서 이를 어떻게 사용해볼까 고민고민해왔던 것의 결과인 걸까. 까지만 위원장 연행시 최정규 선배가 옆에 있었는데도 15명 정도 되는 단속반원들을 당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무력감을 느끼셨을까.    
 
이주노동자들이 한국노동자들의 밥그릇을 뺏는 것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면을 부각시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민족성 견지하지 못해 이주노동자 문제가 심각하다고 파악하는 범민련의 주장이 보여주듯이 민족주의자들도 비슷한 견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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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조 지도부 연행 경과 및 현황 (이주노조, 2007-11-28 04:19:01)
 
1. 연행 경과
11월 27일 오전 9시 ―9시 30분 경, 까지만 위원장, 라쥬 부위원장, 마숨 사무국장이 각각 집과 사업장에서 연행됐다. 
 
2. 연행 이후 경과
이주노조 위원장 이하 임원들이 연행된 과정은 명백한 표적 탄압임을 보여준다. 오전 9시 30분 경, 지도부 체포 사실을 확인하고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로 향하는 도중 이미 세 동지 모두 청주외국인보호소로 이송 조치해 서울추입국사무소를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울출입국관리소 앞 항의 집회를 마치고 민주노총 주봉희 부위원장, 민변 권영국 변호사, 김진억 민주노총 서울본부 정책국장, 이주노조 등이 항의 면담을 진행했다. 이 자리에는 문화춘 조사과장을 비롯한 심사과장, 관리과장과의 면담이 진행됐다.
문화춘 조사과장은 표적 단속과 이주노조에 대한 탄압에 대한 항의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출입국 앞 시위에 대해 경고했었다. 불법체류자 단속하는 사무소 앞에서 시위하는 것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 우리 직원들이 못 견뎌했다. 그래서 시위자들을 단속하겠다는 의견을 이미 두 달 전에 여러 차례 밝혔고 나 역시 불법체류자니 단속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11월 2째주부터 단속이 강화됐다. 나는 이주노조 간부들인줄 몰랐다. 단속해서 이곳에 온 다음에나 알았다."
서울출입국의 이런 발뺌에도 불구하고 연행 과정은 명백히 이미 계획된 표적 단속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법무부는 단속된 이주노조 임원들을 신속히 추방할 채비를 이미 마친 상태다. 이에 대해 항의방문단은 민주노총이 필요한 적법 절차 등을 거치기 전에 강제 추방을 집행하지 말 것을 강력히 촉구한 상태다. 서울 출입국 심사과장은 권영국 변호사를 통해 집행 절차를 밟겠다고 분명히 약속을 했다.

오후 3시 경, 청주보호소에서 민주노총 법률원 송영섭 변호사와 이주노조 최정규 동지가 청주 보호소를 방문해 면회를 진행했다. 현재 국가인권위에 표적 단속과 노조 탄압에 대한 진정을 제출한 상태이며, 내일 오전 강제퇴거 명령에 대한 이의 신청, 보호에 대한 이의 신청을 진행할 계획이다.
 
3. 사건의 성격
이 사건은 명백히 이주노조와 이주노조 활동에 대한 탄압이다. 이미 지난 8월부터 시작된 합동 단속 과정에서 이주노조 조합원 20여 명이 단속됐다. 또 얼마전 동대문 분회장인 검 구릉 동지 역시 표적 단속임이 드러났다.
법무부는 현재 이주노조가 고등법원의 이주노조 설립 신고 반려 취소 처분 판결 이후 노동부의 상고로 대법원에서 이주노조 설립 문제를 다투고 있는 상황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노조 간부들을 대거 연행한 것은 명백히 노조 자체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최근 법무부가 이주노동자 단속을 대폭 강화하면서, 그 동안 단속에 항의하는 운동의 선두에서 싸워 온 이주노조에 대한 보복이다. 이미 서울출입국 조사과장은 이주노조 위원장을 단속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바 있다. 게다가 법무부는 출입국 관리법 개악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에 항의하는 운동에 대한 정지 작업의 성격도 있다. 이 모든 상황을 보건대 이번 사건은 이주노조,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탄압의 의지 표명이다. 이런 만큼 전체 운동 진영의 시급한 연대와 투쟁이 매우 필요한 시점이다.

4. 향후 계획
 
5. 요구
- 까지만 위원장, 라쥬 부위원장, 마숨 사무국장을 즉각 석방하라!
- 이주노조 탄압과 파괴 공작 즉각 중단하라!
- 이주노동자 단속 즉각 중단하라!
- 출입국관리법 개악 시도 중단하라!
 
출입국공무원에 준사법권 부여 (매일노동뉴스 2007년 11월 9일, 김봉석 기자)
이주노동자 인권단체 "과도한 인권침해 우려" 반발 
 
출입국, 이주노조에 또 “표적 단속”했나 (참세상, 변정필 기자, 2007년11월27일 17시04분)
까지만 위원장 비롯해 지도부 3명 동시에 잡혀가
 
여수, 엑스포 그리고 이주노동자 (레디앙, 2007년 11월 28일 (수) 15:10:10 박점규 현장기자)
우리가 엑스포 유치 성공을 축하해줄 수 없는 이유들 
 
'이주노동자노조' 위원장만 되면 연행·추방 (프레시안, 김하영/기자, 2007-11-28 오후 4:50:09)
민주노총 "표적 단속, 노조파괴 공작"…법무부 "불법체류 단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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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정부에 요구한다. (2007년 12월 5일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준))
 
이주노조 지도부에 대한 표적 탄압에 항의하는 농성투쟁이 오늘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2월 여수 출입국사무소 화재 참사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야만적 인권유린이 폭로된 바 있다. 그럼에도 정부의 반인권적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폭행과 불법감금 등의 인권침해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더 나가 법무부는 영장 없이 강제단속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출입국관리법 개악까지 추진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사법적 절차에 의해서만 인신에 대한 조치를 할 수 있음에도, 이주노동자는 혐의만으로 강제수색과 감금을 당하는 것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하고 불범감금을 합법화하자는 반인권적이고 초헌법적 발상인 것이다.
 
이번에 자행된 이주노조 지도부 감금은 이 같은 이주노동자 전면 탄압국면의 연장이며, 이주노동자운동 와해를 위한 공격인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세계적 이동을 촉진하면서 노동의 이동은 제약한다. 이민 통제를 폐지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해야한다. 인간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은, 태어난 곳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가 노동하고 생활하며 사회적 관계를 맺는 장소에 따라 결정되어야한다.
우리는 이주노조 탄압을 강력히 규탄하고 이에 항의하는 농성투쟁을 적극 지지하며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이주노조 지도부를 즉시 석방하고 이주노동자운동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
출입국관리법 개악 시도를 폐기하고 야만적 감금과 강체추방을 중단하라.
사실상 감옥으로 기능하고 있는 보호시설을 철거하라.
이민 통제를 폐지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이동과 동일한 사회경제적 권리를 보장하라.
 

"노무현 정권, 이주노동자 탄압도 따를 자가 없다" (프레시안, 여정민/기자, 2007-12-05 오후 2:42:26)
'표적 단속'된 이주노조 간부 석방 요구, 농성 시작  
  
"표적탄압은 법무부 ‘기획’ 서울출입국 ‘연출’" (참세상, 변정필 기자, 2007년12월05일 15시57분)
이주노동자들,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기습 농성돌입 
 
법무부, 이주노조 지도부 "날치기" 강제출국 (참세상, 변정필 기자, 2007년12월13일 16시06분)
보호소 뒷문으로 이주노조 지도부 빼돌려
 
"이것이 노 대통령의 마지막 성탄절 선물입니까?" (프레시안, 여정민/기자, 2007-12-13 오후 4:18:14)
단속된 이주노조 간부 3명, 끝내 비밀리에 강제 출국  
 
“한국행 네팔인에 노동교육 할겁니다” (한겨레, 황예랑 기자, 2007-12-17 오후 07:39:11)
[한겨레가 만난 사람] 강제출국 당한 까지만 까풍 이주노조 위원장 
 
‘코리안 드림’, 정말 있기는 한건가요? (참세상, 변정필 기자, 2007년12월18일 15시46분)
세계이주민의 날, 잡혀가고, 쫓겨나는 이주노동자들

 

 

2008/01/21 05:51
나 또한 이주 노동자들을 노동자가 아닌 단지 외국인, 사회적 소수자로서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지난 금요일 빈곤사회연대 후원의 밤 행사에 갔다가 이주 노동자 동지들을 본 적이 있다. 45일째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하고 있단다. 저번 11일에 있었던 평당원 토론대회가 기독교회관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농성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농성장을 찾지는 못했다. 물론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진보정당이 여성, 생태, 인권,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과 함께 하는 당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런 것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배정학 동지가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재정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걸 보고서도 미안함을 느꼈는데, 이주노동자 운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최정규 선배가 거기에서 활동하고 있기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이다.

 

이주 노동자, 민주노총의 갈 길을 묻다 (참세상, 변정필 기자, 2008년01월09일 16시08분)
"이주노동자들만의 노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작년 8월 법무부는 산업연수생을 포함한 이주노동자는 전체 장기체류외국인 중 56%인 40만 4천 51명이며,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22만 5천 273명이라고 발표했다. 등록된 이주노동자들 가운데 단순기능인력은 93.3퍼센트. 대다수의 이주노동자들이 소위 3D(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는 신분상의 제약으로 인해 임금체불, 산재, 폭력 등이 발생하더라도 제대로 구제되기 어려운 조건에 있다. 노동자들에게서도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피부색이 같아도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노동자이지만, 노동자로 대우받지 못하는 것이 이들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최정규 이주노조 연대사업 차장은 “정부가 30억을 투자해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결합하는 것을 막고 있다”며 최근 강화되고 있는 정부의 지원사업으로 오히려 이주노동자들이 자기권리를 찾기 위해 노동조합으로 모이기 보다는 지원단체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상황을 지적했다.
 
이주인권연대 최현모 농성단 공동대표도 이런 절박한 호소에 함께 했다. 최현모 공동대표는 “이주노동자들이 민주노총에 대해서는 아쉬움과 애정이 섞인 것을 많이 봤다”며 “한국 사회내 이주운동의 기형성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이주노동운동의 “성장의 발판이 없다”는 것이다. “시민운동으로 이주민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이주민운동이 확대되고 있지만, 또 이들 대다수가 노동자라는 점에서 이주노동운동이 성장해야 하는데, 아직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에서는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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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도 무시한 출입국관리법” (참세상, 변정필 기자, 2008년01월21일 15시25분)
농성 47일, 수그러들지 않는 이주노동자 투쟁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렇게 인권침해라는 지적을 받아왔던 '영장과 적법절차 없이' 진행되고 있는 단속을 오히려 법무부가 법제화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지난 11월 8일 법무부는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을 통해 '의심'만으로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을 가능하도록 하는 안을 입법예고 했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원회는 지난 12월, 법무부의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을 검토한 결과 "죽음을 부르는 외국인 강제단속 및 보호절차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오히려 법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인권을 지키기 위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그러나 노조를 만든다는 상식적인 일조차도 이주노동자들에게는 힘겨운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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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 이주노조 지도부 강제추방 법무부에 '유감' (참세상, 최인희 기자, 2008년05월16일 13시56분)
표적단속·인권침해 진정 조사중 '긴급구제 권고' 무시
 
연행된 이후 청주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되어 있던 토르나 이주노조 위원장과 소부르 부위원장은 어제(15일) 저녁 급작스럽게 본국인 네팔과 방글라데시로 각각 추방됐다. 연행된 이후 이주노조가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낸 '강제퇴거명령 및 보호명령 이의신청'이 기각된 것.
   
법무부의 이번 강제 추방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긴급구제 조치 권고'를 무시한 채 이뤄진 것이라 논란이 되고 있다. 국가인권위는 지난 8일 이주노조로부터 '이주노동자 표적단속 및 단속과정에서의 폭행 등에 대한 진정'을 접수받고 이를 조사 중이었다. 이에 국가인권위는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장에게 "진정인과 피진정인 진술, 관련 증거 확보 등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이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강제퇴거 명령서의 집행을 유예해 달라"는 긴급구제 조치를 권고했었다.
 
국가인권위는 법무부와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가 긴급구제 결정문을 송달받은 당일인 15일 저녁에 이들 피해자들을 강제 출국 조치하자 16일 오전 성명서를 발표해 "강력히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국가인권위는 현재 이주노조 설립신고 문제를 대법원에서 다투고 있는 상황인 만큼, 이주노조 간부들을 같은 날 동일 시간대에 다른 장소에서 단속한 것이 표적단속인지 여부와, 체포과정에서 폭행 등 인권침해 정황이 있는지 등에 관해 조사중이었다. 법무부는 지난해 11월 단속한 까지만 이주노조 2대 위원장 등 3인의 지도부에 대해서도 국가인권위가 진정사건 조사를 하던 도중 일정 통보 없이 강제 출국 조치한 바 있어, 이번 국가인권위의 '법무부 유감 표명'은 처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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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검거 할당제’ 과잉단속 불보듯 (한겨레, 노현웅 기자, 2008-05-20 오후 09:27:45)
5월 한달 실적목표치만도 3000여명 이를 듯
사고·인권침해 가능성…“신공안정국” 반발

  
이달부터 재개된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법무부의 집중단속이 지역별 ‘실적 목표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어 또다시 과잉단속에 따른 사고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20일 법무부와 이주노동자 인권센터 등의 말을 종합하면, 법무부는 이번 단속에서 △서울·인천출입국관리소 600명 △부산출입국관리소 250명 등 지역별로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실적 목표치를 세웠다. 전국 출입국관리소의 5월 한달 단속 목표치는 3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주노동자 인권센터 관계자들은 “이주노동자 집단 거주지역과 상담센터, 대형마트 등에 대한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의 목 단속이 부쩍 강화됐다”고 말했다. 우삼렬 전국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외노협) 사무처장은 “단속이 강화되면서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상담소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표적 단속’ 기류도 감지된다. 
 
이주노동자 관련 단체들은 “새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이 ‘신 공안정국’으로 흐르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철승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장은 “지난해 11월 사고 직후부터 노동부·법무부와 함께 불법체류자 양성화 방안에 대한 논의를 해왔는데, 새정부 들어 이런 논의 자체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3년 집중단속 때 15명의 이주노동자가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은 적이 있다”며 “또다시 무리한 표적·과잉단속이 이뤄질 경우 인명사고와 인권침해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3월 노동부와 법무부의 업무보고 자리에서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활개치고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된다. 이들의 집단행동은 용납되어선 안 된다”며 대책 마련을 주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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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미등록 이주노동자 대상 검거할당제, 표적단속 즉각 철회돼야 (참여연대, 2008년 5월 21일)
미등록 이주노동자 양산하는 제도 개선 선행이 우선
 
오늘(21일) 언론보도에 의하면 법무부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집중단속 및 표적단속를 진행하는 것에 더해 지역별로 '검거할당제'를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인천출입국관리소 600명, 부산출입국관리소 250명 등 전국적으로 5월 한 달간 3천여 명의 단속 목표량을 정해놓고 집중단속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증가하고 있는 배경에 대한 깊이 있는 정책적 고민은 결여한 채, 검거할당제를 통해 미등록 이주노동자 숫자만을 감소시키려 하는 이 같은 법무부의 행태는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검거할당제는 할당량 채우기에만 급급하게 만들어 검거과정에서 인권이나 적법절차를 무시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정부는 검거할당제 같은 반인권적 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미 국제사회가 한국정부에게 이주노동자의 인권보호를 거듭 촉구하고 있다. 최근 유엔의 국가별인권상황정기검토(UPR) 회의에서도 이주노동자의 인권문제에 대한 각국의 질의와 권고가 쏟아졌다. 등록, 미등록의 여부와 관계없이 이주노동자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고, 그들의 인권은 보호되어야 한다. 다문화사회, 문화다양성 존중 등 겉치레뿐인 수사들은 결코 이주노동자의 차별해소와 권리보호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정부의 진정성 있는 대책마련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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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2 23:18 2009/08/12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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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빠진 영국과 좌파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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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동지가 번역한 팻 데바인과 데이빗 퍼디의 글을 흥미롭게 읽었다. 내친 김에 원문과 그에 대한 알렉스 넌스와 시오반 맥궉의 토론문을 읽었더니 토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대충 감이 잡힌다. 토론자들은 데바인과 퍼디 글의 부족한 점을 나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으나, 거기까지다. 물론 토론자들이 말하고 있는 비판의 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데바인과 퍼디보다 그 대안 제시에서 빈약함을 보인다.
 
장석준 동지는 대안 좌파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광범한 선거 연합의 결성에서부터 영국 좌파 혁신을 시작하자는 것을 핵심으로 보고 있으나, 토론자들은 선거 연합보다는 당 자체를 문제삼는다. 물론 나는 데바인과 퍼디의 입장이 타당하다고 본다. 당 없이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맥궉은 인터넷을 통한 직접민주주의,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민주주의 등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방안들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데바인과 퍼디가 편집했다는 책에 의미 있는 제안이 있지 않을까 싶다.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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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팻 데바인(Pat Devine)과 데이빗 퍼디(David Purdy)가 영국의 좌파 월간지 에 지난 6월 발표한 글의 후반부를 번역한 것이다. 데바인은 ‘참여 계획 경제’를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 좌파 경제학자이고, 퍼디는 오랫동안 DEMOS, Compass 등의 씽크탱크에서 활동하면서 영국 좌파의 혁신을 주창해온 논객이다. 본래 이 글은 올해 초에 이 두 사람이 편집해 낸 책 <절망에 빠진 영국: 어떻게 보다 낫게 만들 것인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 책은 신노동당이 만들어놓은 영국 사회 현실을 비판하면서, 대안 좌파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광범한 선거 연합의 결성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비록 먼 나라 영국의 현실을 전제한 내용들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좌파 정당의 지향과 과제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고 판단해 부분 번역, 소개한다. - 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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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무엇을 할 것인가? (<주간 진보신당>/레디앙, 2009년 08월 11일 (화) 10:24:54 번역 / 장석준)
선거조직과 레닌주의적 전위를 넘어…녹색뉴딜 중심 선거연합부터 
    
오늘날 영국 좌파는 과거 자신의 모습의 그림자다. 과거 영국 좌파의 모습이란 분열되고 무정형적인 이견들의 집합체였다. 그래서 주류 정치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지도 못하고 여론의 쟁점에 별다른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좌파가 고려해야 할 네 가지 시간지평
어떻게 해야 이러한 영국 좌파가 유의미한 정치 세력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자면, 어떠한 시간 지평을 다루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정책과 프로젝트를 면밀히 구분해야 한다. 사회 경제 체제의 문제가 다름 아닌 우리 행성의 미래와 충돌하는 우리 현실에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시간 지평을 구분하는 게 적절하다.
첫째, 단기. 간단히 말하면, 12달 앞까지의 일들.
둘째, 중기. 4년 앞까지의 일들. ‘정상적’ 의회 임기 동안.
셋째, 장기. 몇 차례의 의회 임기, 말하자면 한 세대 혹은 25~30년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먼 미래. 오늘날 서구에서 태어난 아동의 기대 수명에 따른 생애주기를 단위로 하는 시간 지평. 더 나아가서는, 생물권에 대한 인간 활동의 영향이나 생태계에 대해 사고하기에 적합한 수 세기나 천 년 단위를 단위로 하는 시간 지평.
 
좌파 재건 프로젝트는 이 모든 시간 지평에 걸쳐 있다. 틀에 박힌 정치는 단기와 중기만을 다룬다. 정치인 집단과 언론을 지배하는 것은 이러한 단기와 중기의 시간지평이며, 이들의 관심은 차기 선거에만 쏠려 있다. 만약 이게 당신의 시간지평이라면, 당신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지속 발전과 정당 정치의 급박한 현안과 관련된 쟁점들을 다루는 데만 관심을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현존 사회 질서를 관리하는 것이 우선적인 관심사인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당연한 시간 지평이다. 물론 현 체제를 관리하는 것만도 충분히 어려운 일이며, 그것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좌파는 사회를 바꾸길 열망해왔고, 이것은 훨씬 더 어려운 과제다. 그리고 사회주의자(한때 좌파의 중핵을 이뤘지만 지금 서방에서는 거의 정치적인 멸종 위기종인)에게 이것은 탈자본주의 문명을 지향하는 것을 뜻했다. 
 
우리 중 일부는 이것이 여전히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것은 조만간 성취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탈자본주의 이상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단기․중기 지평을 넘어 전망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삶을 사고해야 하는 이유는,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기존 질서의 폭풍과 파도에 휩쓸려 침몰해버리기만 할 것이라는 데 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한 목표를 향해 항해하지 못하고 말이다. 달리 말하면, 좌파에게는 중․단기 지평을 위한 정책들뿐만 아니라 장기와 먼 미래를 향한 프로젝트 또한 필요하다.
 
물론 정책들과 프로젝트는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문제들에 대한 해법으로 장기 목표만 떠들어대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현 상황에 개입할 여지가 없을 것이고, 따라서 다른 정치 세력들이 상황을 주도하면서 현실에서 벌어질 일들을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장기 과제를 무시하고 오늘날의 문제들에 대해 순전히 실용적인 방향에서만 대응(요즘 유행어로 말하면, ‘되는 일 하기’)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현존 사회 제도, 문화 패턴 그리고 권력 관계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기와 먼 미래 사이의 구별은 자본주의의 변형과 그 지양을 구별하게 해준다. 미국의 전 지구적 지배권이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신자유주의의 제단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비록 파괴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때에 자본주의의 변형이란,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를 새로운 조절된 ‘사회적 시장’ 정책 체제로 대체하려는 공동의 노력을 뜻한다. 반면 자본주의의 지양은, 문자 그대로, 탈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를 종식시킨다는 과제를 준비하는 것보다는 정책 체제의 변화를 지지하는 쪽에 현재 더 광범한 세력들을 동원할 수 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전체 좌파는 단지 중․단기를 넘어서는 전망을 갖추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진지한 반대 세력은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의 동맹군들에게, 만약 괴물을 죽이지 않고 가둬놓기만 한다면 괴물의 힘이 점점 더 세져서 결국에는 쇠창살을 부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위기, 조절 그리고 탈조절의 순환이 반복되기만 할 뿐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선거 기계도, 레닌주의적 전위도 아닌 당, ‘현대의 군주’
남는 것은 흔히 주체의 문제로 알려져 있는 것을 고려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실제로 세 개의 물음이 존재한다. 신자유주의를 폐위시키거나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데 이해관계를 지닌 사회 세력들은 누구인가? 이러한 세력들을 안정적인 역사적 블록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조직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람시의 표현에 따르면 ‘현대의 군주’라고 할 이런 조직들이 출현할 출발점들은 무엇인가? 진보적인 역사적 블록의 잠재적 구성 요소들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노동조합, 빈민과 철거민, 환경 그룹과 운동가들, 세속적인 입장에서든 종교적인 입장에서든 소비주의를 비판하면서 보다 의미 있는 사회 관계와 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람들, 성별이나 인종 혹은 성적 정체성에 따른 사회적 차별에 도전하여 인권을 지키려는 운동들 그리고 보다 공정하면서 덜 분열된 전 지구적 질서를 추구하는 운동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 세력들은 항상 저항의 기반을 제공하면서 다른 세상을 추구해왔다. 1649년 영국 청교도 혁명 당시의 제러드 윈스턴리와 디거스(Diggers)로부터 1970년대의 루카스 항공기사(社) 현장위원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현존 경제 ․ 사회 조직 형태에 대한 급진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대안들을 제공하곤 했다. 비록 일시적이고 지역적인 토대에 국한되었을지라도 말이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들 서로 다른 집단들이 자신들의 특수한 분파적 입장을 넘어 성장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가 이다. 어떻게 해야 이들을, 우선은 신자유주의를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탈자본주의 문명을 건설하는 것을 지향하는 공동의 전국적 (그리고 국제적) 투쟁으로 결집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지적 도덕적 지도력이 필요하다. 이 지도력은, 민중 운동에 직접 뿌리를 두면서 선거 경합과 승리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다지는 데, 광범한 동맹의 중핵 역할을 할 프로그램(강령)을 발전시키는 데 우선적인 목표를 두는 사람들의 헌신적 조직에서 배출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선거 기계나 레닌주의적 전위가 아닌 그런 정당 말이다. 이런 정당은 지적 문화적 과제에 진지하게 임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당 내 절차가 철저히 민주적이어야 하며 다른 조직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분명히 비종파적이어야 할 것이다. 높은 수준의 성실성과 일관성을 견지하면서,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반대 세력으로 존재하면서도 반대를 위한 반대로 전락하지 않는 길을 찾아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론의 신뢰를 얻으면서 공동의 입장과 정책들에 대한 합의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정당들 중에는 이러한 요건에 들어맞는 당을 찾아볼 수 없다. 최선책은 궁극적으로 ‘현대의 군주’를 출현시킬 일련의 과정에 착수하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한 가지 길은 노동당 좌파의 남은 세력, 과거 공산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 녹색당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민족주의자, 자유민주당 내 불만 세력 그리고 무당파 활동가들로 이뤄진 느슨한 선거 연합을 만드는 것이다. 이 연합의 중심 축은 신자유주의적 주류 정치에 대한 반대이고, 그 중심 실천 과제는 선거 개혁과 녹색 뉴딜의 캠페인을 벌이는 일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선거 연합이 총선에서 상당한 성과를 내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녹색당이 거둔 일정한 성과에서도 드러나듯이, 지방선거는 좀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에는 진보 연합의 여지가 존재하며, 이것은 잉글랜드 정치의 재편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연방 전체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든 말이다. 게다가 총선에 뛰어들어 경합을 벌이는 것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곳에서도 선거 연합을 구성하기 전에 우선 그 잠재 구성원들 사이에서 토론을 시작할 수 있다. 단지 목표와 전략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좌파가 기후 변화 대책을 경제 회복 프로그램의 중심에 놓는 강령을 기반으로 선거에 개입할 수 있을지가 토론 주제가 될 것이다.
 
불황기에는 민간 지출 감소를 대신해서 공공 지출과 차입[적자 재정]을 늘려야 한다. 기후 변화와 여타 생태적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이러한 공공 지출 증가분은 생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프로그램에 집중 투입돼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현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사회, 사회적으로 정의롭고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토대 또한 구축해야 한다.
 
우리는 GDP 성장의 회복을 추구하거나 현재 대부분의 논평가들이 예견하는 것처럼 과거의 관행을 그대로 반복할 게 아니라 보다 완만한 실질 성장률을 지향해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정태적 경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삶의 질에, 우리 동료 시민들의 웰빙에, 또한 세계의 나머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는, 보다 평등한 사회일수록 보다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라는 증거가 풍부히 존재한다.
 
최근 폴리 토인비가 지적한 것처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보건, 교육 그리고 사회 서비스 수준은 이 나라들의 공공 지출 및 과세 수준에 의존한다. 그리고 공공 채무 수준이 실제로 문제적 상황에 이른 경우에라도 이것은 지출 삭감이 아니라(물론 트라이던트 핵 미사일, 항공모함 그리고 최근의 대형 교도소 신축 계획 같은 위험하고 쓸데없는 항목들은 삭감 대상이지만) 적절한 누진 과세 제도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사상과 비전이 모자란 것이 아니다. 일단 이들 사상과 비전이 추진되기만 한다면 잘 작동할 것이라는 증거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차라리 정치적인 것이다. 유일한 이유는 현재 녹색 뉴딜의 주창자들이 소수여서 주류 정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중적 논쟁의 용어들을 바꾸고 정치적 세력 균형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한다. 분명 어려운 과업이지만,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길이 있겠는가? 구좌파에게는 새로운 전국적 헤게모니 프로젝트가 없고, 신노동당의 프로젝트는 전혀 좌파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동당 바깥의 좌파는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 지금은 우리의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미래를 탈환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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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bad Britain and the future of the left (Red Pepper 9 June 2009, Pat Devine & David Purdy)
This article is based on Feelbad Britain: How to Make it Better, edited by Pat Devine, Andrew Pearmain and David Purdy (Lawrence and Wishart, 2009)
 
If the left in all its diversity is to develop the coherence to meet the new challenges posed by the implosion of the capitalist financial markets, then it needs to overcome the weaknesses that allowed neoliberalism to triumph in the 1980s. Here Pat Devine and David Purdy suggest strategic thoughts for the future, drawing from their analysis of what they see as the left’s lack in the past of a positive project for social change
 
As we ponder the shape of post-crash politics, we should not lose sight of the wider aspects of the crisis besetting neoliberal capitalism, nowhere more evident than in Britain. It is not just that our long consumer boom depended on inflated house prices, reckless mortgage lending, debt-fuelled spending, record balance of payments deficits, misbegotten financial ‘innovation’ and inept regulation. The whole consumer confidence trick rested on a body of ideas about freedom and the market that have guided the policies of successive Conservative and Labour governments over the past 30 years, but which experience shows to be deeply inimical to personal well being, social cohesion and environmental sustainability.
 
Neoliberalism was forged in opposition to Keynesian social democracy, the fusion of social democratic politics and Keynesian economics that governed public policy during the ‘golden age’ of post-war capitalism from 1945 to 1975. But neoliberalism was always more than a recipe for quelling inflation, corralling the public sector, replenishing corporate profits and restoring the primacy of market forces in economic life. Behind its harsh remedies for the economic failings of the old regime lay the idea that the good society is one in which individuals enjoy maximum (and, in principle, equal) freedom to seek their own salvation in their own way so long as they do no harm to others. According to neoliberals, the form of society that best enshrines this ideal is one based on private ownership of productive assets, free contracts, competitive markets, commercial money and generalised commodity production. The only legitimate role for government is to establish (or re-establish) the institutions and norms that underpin these conditions.
 
The bursting of the house price bubble, the near collapse of the financial system, the onset of global recession and the emergency measures improvised by governments around the world to bail out banks and shore up spending – at heavy cost to the public purse – offer a stark reminder, if one were needed, that capitalism is plagued by boom and bust. But what makes the economic crisis so intractable in Britain is the human and social damage caused over the past 30 years by the neoliberal model and its continued hold over policymakers. Unhampered by this crippling legacy, government could set about rallying public support for a green new deal aimed at promoting economic recovery by combating climate change. As it is, our society lacks the cohesion and confidence needed to escape from recession, begin the transition to a low-carbon economy and restore faith in government.
 
The state we’re in
Even before the crash, there was abundant evidence that rising per capita income had failed to improve people’s sense of well-being. On average, people felt no better off than 30 years before, and growing material prosperity had been accompanied by a range of personal and social disorders: family breakdown, mental illness, personal insecurity, social inequality, declining trust, addiction, obesity and crime.
 
Perhaps the most telling evidence that Britain has become a stressed and dysfunctional society comes from international comparisons of child welfare. In a survey of 21 rich countries based on 40 indicators, ranging from babies’ birth weights to how often children talk to their parents, Unicef placed Britain in bottom place, just below the United States (Child Poverty in Perspective: An overview of child well-being in rich countries, Unicef 2007). Young Britons fared badly in each of the six broad categories into which the data were grouped – material prosperity, family and peer relationships, health and safety, behaviour and risks, education and subjective well-being – and fared worst of all in the sections on their social lives. Only 43 per cent were willing to describe their peers as ‘kind and helpful’. Britain’s teenage pregnancy rate is five times that of the Netherlands, whose children fared best overall.
 
The poor shape of British society is matched by the decadence of our politics. Spin, sleaze and smears are merely sordid surface symptoms of a deep-seated disease. The triumph of neoliberalism has pulled the entire political spectrum to the right, leaving a desert on the political left while the mainstream parties cluster around a narrow range of variations on a common commitment to global competitiveness, job-centred consumerism and perpetual economic growth. Historically, the division between left and right centred on the causes and consequences of social inequality and the scope for overcoming it. These ethical and philosophical issues have lost none of their bite, but they are no longer reflected in our politics. There is a gaping hole where the democratic green left ought to be.
 
Our political institutions too have been hollowed out. As the battleground of politics contracts, the techniques that parties use to poll or target voters grow ever more sophisticated, while the messages they communicate grow ever more manipulative. In the digital age, the career politicians and professional functionaries who control our parties no longer need activists to fight elections or argue a case. No wonder party membership has dwindled, party funding is a disgrace and the political class is discredited.
 
First-past-the-post voting makes things worse. Critics of this system have long argued that it exaggerates the winning margin, handicaps minor parties and forces millions of voters to choose between voting for no-hope candidates, voting tactically or not voting at all. Now a fresh charge can be added: that the system leads to tactical electioneering in which the parties effectively ignore most of the electorate and target swing voters in key marginals. The combined result of all these factors – elite consensus, deracinated parties, media-led politics and disproportional representation – is a rumbling crisis of legitimacy. When the two main parties each receive roughly 35 per cent of the vote on a turnout of 60 per cent, it is perfectly possible for one of them to win a working parliamentary majority with the support of little more than 20 per cent of the electorate.
 
The one source of hope in an otherwise bleak political landscape is that with nationalist parties in office for the first time in Scotland and Wales, the UK is ceasing to be a centralised, Union state, and even in England the old system of two-party politics has started to dissolve. With the Conservatives back in power at Westminster, as seems increasingly likely, whether alone or in tandem with the Liberal Democrats, and with the SNP returned for a second term in Scotland, a further loosening of the Union is a strong possibility and the strange death of Labour England cannot be ruled out. In these circumstances, space would open up for a new political formation of the left. Before examining this prospect, however, we need to consider how Britain arrived at its present sorry plight and what needs to be done to revitalise the left.
 
The fall of the post-war settlement

The post-war settlement rested on three pillars: the maintenance of full employment by means of counter-cyclical demand management; a mixed economy with a major role for public ownership, national planning and market regulation; and a welfare state that provided a range of tax-financed social services and cash transfers, the former available to users mostly free of charge, the latter subject to various qualifying conditions or means tests. At the same time, the ongoing management of the national economy became the joint responsibility of government and the corporate organisations of employers and workers. This tripartite system of ‘industrial politics’ was largely informal and operated behind closed doors, in contrast to the open forms of ‘social partnership’ that flourished elsewhere in western Europe but in keeping with the paternalistic and technocratic character of the British state.
 
Prior to 1945 capitalism had relied on periodic mass unemployment to contain wage pressure and maintain work discipline. With wages determined by collective bargaining, the consequence of removing this built-in stabiliser was that the growth of money wages persistently outstripped the growth of output per worker, pushing up labour costs per unit of output. Typically, employers sought to claw back the wage increases they had conceded by raising their selling prices in order to protect their profit margins. In the 1960s, though, as the pressure of international competition intensified, profit margins were squeezed, curtailing investment and hampering firms’ ability to compete with rivals overseas. Higher prices simply provoked fresh demands for higher money wages. Thus, as long as fiscal and monetary policy was dedicated to preserving full employment, wages and prices went on chasing each other upwards in an endless spiral.
 
There were two, but only two, solutions to this problem. One was to abandon the wages ‘free-for-all’ and introduce some form of pay policy, not as a temporary expedient, but on a permanent basis. The other was to abandon the commitment to full employment and institute an old-fashioned deflationary purge. The former offered the labour movement the chance to exchange concessions on pay for advances in economic democracy, at economy-wide, enterprise and workplace levels. Tragically, the chance was spurned. The idea of tackling the country’s pressing economic problems by extending democracy into the citadels of economic power held little appeal for most of the left and the labour movement. Thus, initiative and responsibility for resolving the crisis passed to the right, which seized them with alacrity.
 
Capitalism unleashed
The first wave of the neoliberal revolution, presided over by Margaret Thatcher, was largely concerned with dismantling the old regime. Incomes policy and demand management gave way to monetary discipline and fiscal retrenchment; nationalised industries were privatised; financial markets were unshackled. The voluntary system of industrial relations dating back to the days of Lloyd George was replaced by a legal framework, emasculating the unions, deregulating the labour market, expelling the TUC from the corridors of power and undermining the position of the labour movement as an ‘estate of the realm’.
 
The aim of the second wave, initiated under John Major, but pursued with missionary zeal by New Labour, was to build a market state. On the macroeconomic front, Tony Blair and Gordon Brown consolidated the work of their predecessors by handing over responsibility for setting the base rate of interest to the Bank of England and introducing fiscal rules designed to keep public borrowing within ‘prudent’ limits. It was in the field of social policy, however, that New Labour broke new ground, seeking to embed the ideal of homo economicus more deeply into everyday life.
 
To reduce welfare dependency and avoid inflationary labour shortages, the government launched a series of welfare-to-work programmes targeting groups who were or risked becoming disconnected from employment. To promote self-reliance, it sought to shift provision for retirement pensions away from the state and towards the private sector; it also introduced student loans and top-up fees. Above all, New Labour set out to reform public services by separating finance from provision, creating quasi-markets, expanding consumer choice and encouraging managers to adopt commercial norms and practices.
 
The overall result of this sustained exercise in social engineering was to unleash capitalism, just as its architects intended. What they did not reckon with were the human, social and environmental consequences. If I am persuaded to dedicate myself to owning, earning and spending, no one should be surprised if I end up caring only for me, more, now. If the scope of the market is extended into areas of economic and social life from which it should be excluded, from public utilities and social services to unpaid care-giving and mutual self-help, we increasingly experience and think of ourselves as atomised market participants – employees, customers or consumers, as the case may be, rather than as citizens, neighbours, colleagues and associates. And if we buy into the fantasy of boundless economic growth, we put both human civilisation and life on earth at risk.
 
The story of Britain over the past 30 years echoes Karl Polanyi’s account of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during the period from 1815 to 1845, when a similar drive to establish a ‘self-regulating market’ gave rise to similarly destructive consequences. (The Great Transformation, 1944, Beacon Press edition, 2001). Modern economists, Polanyi noted, study market systems in abstraction from culture, society and politics. But all economies, including those based on the supply-demand-price mechanism, are embedded in specific forms of social life. The vision of a free-floating, self-regulating market system is an impossible object, like one of Escher’s images. Attempts to bring it into being are both futile and destabilising, for they provoke protest and resistance, though the forms these take and the ends they serve are diverse. After the Wall Street crash of 1929, for example, when laissez-faire was discredited by the Great Depression, three rival political projects battled for supremacy: fascism, an authoritarian collectivism of the right; communism, an authoritarian collectivism of the left; and a liberal collectivism of the centre-left, exemplified by Roosevelt’s New Deal and Sweden’s ‘historic compromise’ between capitalism and socialism.
 
The lesson of the 1930s, as of the 1970s, is that in periods of organic crisis a progressive outcome is by no means guaranteed. To be sure, fascism was eventually defeated and, in the west, Keynesian social democracy gave capitalism a new lease of life, but only after ten years of worldwide economic carnage and six years of total war. And both the 1930s and the 1970s highlight the importance of moral and intellectual leadership in framing new policy paradigms and mobilising support for radical reform. In the end, the reason the British left failed to counter the rise of neoliberalism is that it had no alternative hegemonic project of its own.
 
What is to be done?
The British left today is a shadow of its former self, a diffuse and amorphous body of opinion with no organised presence in mainstream politics and little impact on public affairs. How can it become a serious political force? In thinking about this question, we need to be clear about timescales and distinguish carefully between policies and projects. In a world where questions of economic and social organisation impinge on the very future of our planet, four timescales are relevant:
the short run – roughly speaking, anything up to 12 months ahead;
the medium run – up to about four years ahead, the length of a ‘normal’ parliament;
the long run – extending over several parliaments up to, say, a generation or 25-30 years; and
the very long run – subdivided into the human lifespan, as measured by the expected lifetime of a child born in the west today; and eco-time, the timescale appropriate for thinking about eco-systems and the impact of human activity on the biosphere, measured in centuries and millennia.
  
The project of rebuilding the left spans all these timescales. Conventional politics deals only with the short and medium run. This is what preoccupies the political class and the media, their eyes fixed firmly on the next election. Inevitably, if this is your time horizon, you will be mainly concerned with trying to cope with the issues that are thrown up by the ongoing development of capitalism and the exigencies of party political conflict. It is the timescale natural to anyone who is primarily concerned with managing the existing social order. Of course, managing the system is difficult enough and may be done well or badly. But ever since the French Revolution, the left has aspired to transform society, an even harder task. And for socialists – once the core of the left, but now in the west almost an endangered political species – this has meant working towards a post-capitalist civilisation.
 
Some of us believe that this should still be our aim. It will not, of course, be achieved any time soon, but this does not mean that the idea of post-capitalism has no relevance to the problems we face today. The reason we need to look beyond the short and medium run and think about life after capitalism is that if we do not, we shall simply be buffeted about and carried along by the prevailing winds and tides, rather than steering towards a goal of our own choosing. In other words, the left needs not only policies for the short and medium run but also a project oriented towards the long run and the very long run.
 
Naturally, policies and project must connect. It’s no use proclaiming long-term goals as the solution to today’s problems, because that gives you no purchase on the current situation and simply means that other political forces will take charge and decide what actually happens. But neither can we afford to ignore the long run and respond to today’s problems on a purely pragmatic basis – ‘doing what works’ in the current vogue phrase – because that does nothing to change prevailing social institutions, cultural patterns and power relations.
 
The distinction between the long run and the very long run turns on the difference between transforming capitalism and transcending it. At a time when US global supremacy is coming to an end and the neoliberal temple is badly damaged (though certainly not destroyed), transforming capitalism involves, above all, a concerted effort to replace neoliberalism with a new regulated ‘social market’ policy regime. Transcending capitalism means, quite literally, building a post-capitalist society.
 
Undeniably, a wider range of forces can currently be mobilised in support of a change in policy regime than are prepared to work for the end of capitalism. But just as the left in general needs to look beyond the short and medium run, so serious opponents of capitalism need to convince their allies in the struggle against neoliberalism that if the beast is merely caged and not killed, pressure will eventually grow for the bars to be removed and the cycle of crisis, regulation and deregulation will repeat itself.
 
Hegemony, agency and alliances
It remains to consider what is usually known as the problem of agency. There are really three questions here. What social forces have an interest in dethroning neoliberalism or transcending capitalism? What kind of organisation is required to promote the development of these forces into a stable historic bloc? And what are the sources from which such an organisation, a ‘Modern Prince’ as Gramsci called it, might emerge? It is not difficult to identify the potential components of a progressive historic bloc: trade unions; the poor and the dispossessed; environmental groups and campaigners; secular and religious critics of consumerism who are looking for a more meaningful social relationships and a better quality of life; movements seeking to uphold human rights and challenge social divisions, whether of gender, race or sexual orientation; and movements seeking to create a fairer, less divided global order.
 
Social forces such as these have always offered resistance and looked forward to another world. And from Gerard Winstanley and the Diggers in 1649 to the Lucas Aerospace shop stewards in the 1970s, they have sometimes offered radical democratic and egalitarian alternatives to prevailing forms of economic and social organisation, albeit on a temporary and local basis. The problem is how to persuade these disparate groups to rise above their particular sectional standpoint. How can they be brought together in a common national (and international) struggle aimed, in the first instance, at replacing neoliberalism and, in the long run, at building a new, post-capitalist civilisation?
 
This problem will not solve itself. It calls for moral and intellectual leadership from a committed body of people who are themselves rooted in popular movements and whose primary aim is not to contest and win elections but to articulate a hegemonic project covering society as a whole and to develop a programme around which a broad alliance can coalesce: in short, a political party that is neither an election machine nor a Leninist vanguard. Such a party would need to take cultural and intellectual work seriously. It would also need to be scrupulously democratic in its internal procedures and resolutely non-sectarian in its dealings with other organisations, striving to uphold the highest standards of honesty and integrity, to win public respect and to reach agreement on common positions and policies, while finding non-antagonistic ways of living with disagreement.
 
No existing party comes anywhere near meeting these requirements. The best we can do is set in motion a process from which a ‘Modern Prince’ might eventually emerge. One way forward is to work towards the formation of a loose-knit electoral alliance drawn from the remnants of the Labour left, former communists and Trotskyists, greens, Scottish and Welsh nationalists, disaffected Liberal Democrats and unaffiliated activists, united in opposition to the neoliberal mainstream and dedicated to campaigning for electoral reform and a green new deal.
 
The alliance could not hope to make much headway at Westminster until some form of proportional representation is achieved. However, local elections offer more fertile ground, as demonstrated by the modest success of the Green Party. There is also scope for progressive alliances in Scotland and Wales, which would help the cause of political realignment in England, whatever happens to the Union. And even where there is no point in contesting parliamentary elections, prospective alliance partners can still engage in talks, not just about goals and strategy, but about how the left might intervene in elections around a platform that puts measures to combat climate change at the heart of a programme for economic recovery.
 
In times of recession, public spending and borrowing must increase, to compensate for the downturn in private spending. Faced as we are with climate change and other pressing ecological challenges, the increased public spending must be focused on programmes to address these. But in the course of responding to the present crisis we need to lay the foundations for moving to a very different society, one that is socially just and ecologically sustainable.
 
Far from aiming to restore GDP growth and resuming business as usual, as current forecasts assume, we need to move towards a slower material growth rate and in the longer term a steady state economy. We need to concentrate on the quality of life, on the well being of our citizens and also those of the rest of the world. There is now overwhelming evidence that happier, healthier societies are more equal societies.
 
As Polly Toynbee has recently pointed out, Scandinavian levels of health, education and social services depend on Scandinavian levels of public expenditure and taxation. And to the extent that the level of public debt really is a problem, this should be dealt with not by cutting expenditure (apart from dangerous or useless items such as Trident, aircraft carriers and now mini-Titan prisons), but by a proper system of progressive taxation.
 
There is no shortage of ideas and vision, or of evidence that these ideas would work, if only they could be implemented. Rather, our problem is political. For the moment green new dealers are a minority with little influence on mainstream politics
 
We must, therefore, do what we can to change the terms of public debate and shift the balance of political forces. It will be hard work, but what is the alternative? The old left has no new hegemonic national project, New Labour’s project is not of the left and the non-Labour left is lost in the wilderness. The time has come to learn the lessons of our history and reclaim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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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response: A new vehicle (Red Pepper 9 June 2009 )
 
The old, failed internal combustion engine of politics is not the way forward, argues Alex Nunns
 
There is an unseemly break in Pat Devine and David Purdy’s argument between their masterful sweeping narrative of Britain’s post-war political economy and their recommendations for the future of the left.
 
At the heart of their analysis is the contention that the neoliberal right was able to seize control of Britain at the end of the 1970s largely because the left had no alternative hegemonic project, no compelling vision of how society should be ordered to offer a way out of Britain’s crisis. Thirty years later, as neoliberal hegemony collapses, they argue the left must develop a new hegemonic project if it hopes to influence the future. Yet the mechanism they advocate for achieving this, a new party of the left, doesn’t follow.
 
If the left lacks a hegemonic project, it is not short on parties. Indeed, until recently it made up a large chunk of the Labour Party. Yet according to Devine and Purdy its lack of vision allowed the right to triumph. So if the absence of a hegemonic project is the root of the problem, why do we need another party? Is a new party, with its meetings and conferences, really the missing element that will crystallise our vision? A hegemonic project, as Gramsci explained and Devine and Purdy know, has a much wider scope than a single party. It is something that must be developed, extended and expanded by a broad range of intellectuals and activists, ultimately seeping into every crevice of society.
 
The British branch of the neoliberal hegemonic project (for it was a global phenomenon) did not depend on a party. It gathered pace from the works of disparate economists and thinkers who were on the right but not necessarily Conservative (Milton Friedman, who unfortunately died in 2006 just two years before being proved wrong, was American), and was implemented politically by a small group around Margaret Thatcher and Keith Joseph. Most Tory MPs and many members of Thatcher’s first cabinet were not neoliberals, or “one of us” as Thatcher expressed it. In fact the ideological flavour of neoliberalism was distasteful to genuine Conservatives.
 
Devine and Purdy might counter that even if a new party isn’t a prerequisite to establishing a new hegemonic project, it is still necessary for responding to events in the short term and positioning for the longer term. But this raises practical issues. Who will put in the enormous time and energy to build a new party? Why will it work now when it hasn’t worked before?
 
Aside from sectarian wrangling, the common explanations for the British left not getting it together are the first-past-the-post electoral system and (as a consequence) the dominance of Labour. The problem of first past the post raises the question of whether a new party is the best use of resources when it would only have a chance in local and European elections (except in Scotland and Wales).
 
As for Labour’s dominance, this excuse shouldn’t hold weight anymore. New Labour has long since ceased to have anything to do with the left. While some may still have the residual notion of the Labour Party as a limb of the wider labour movement or as a rainbow coalition, for younger people the party is just not seen like that. As the annual Labour conference shows, there is neither room for the left nor democratic avenues open to it.
 
Despite this, attempts at electoral coordination in the form of the Socialist Alliance and Respect have not broken through nationally (excepting George Galloway’s individual success). First past the post and the dominance of Labour cannot fully explain this. Perhaps there is a deeper factor, rather painful to admit. Many European socialist parties were initially formed as loose electoral alliances and their success was phenomenally quick. Even in Britain, with its specific electoral rules, Labour was able to form a government just a quarter-century after its foundation.
 
This was because socialist parties had a ready-made constituency – the industrial working class. In 2009, the working class has less awareness of itself as an entity. This makes the job of forging a new political base ten times harder than it was for early socialists and demands fresh methods.
 
Given these bleak conditions, to present a new party of the left as the only option is somewhat demoralising. It may be true that climate change will focus minds and bridge the gaps between greens and socialists and between the generations. But part of Devine and Purdy’s purpose is to break with what they see as the failed tactics of the 1970s. It seems strange, then, to advocate the organisational form of that time – the political party – for the future of the left, especially when faith in political parties is at rock bottom (see David Beetham, Red Pepper June/July issue).
 
Of course the left must know its history and never forsake the painstaking work of previous generations. But just as the internal combustion engine must give way to hydrogen fuel cells or electric cars, so it must be worth trying to innovate a more appropriate vehicle for political represen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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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response: Many paths (Red Pepper, 9 June 2009)
 
A revitalised left needs to consider what exactly it wants before it can determine how to achieve it, says Siobhan McGuirk
 
Pat Devine and David Purdy offer a reasonable assessment of our current social and political landscape, benefiting from their historical analysis. Their call for a revitalised left is welcome, as is the debate they are stimulating. But their conclusions are shaped by too narrow and pessimistic a view of our diversely politicised landscape.
 
By concentrating on party-based organisations, they fail to recognise the breadth of activity on the left, ignoring non-party political approaches precisely at the moment when new ideas are needed. As a result, they discern only one path towards a post-capitalist world where there are many. For them, government and hegemony are unquestioned terms. Yet their roles in this new society require debate. We must consider what we are uniting and striving for – not just how to achieve it.
 
Disillusionment with the existing party political choices should not imply that a new party is needed. The political system itself is under scrutiny and has been found wanting. There is a strong desire within sections of the left to break comprehensively from business-as-usual style politics, and certainly to go beyond our current party-political system.
 
The insightful historical view that Devine and Purdy present is not matched by sufficient recognition that today’s context is dramatically different from that of the past. A shifting political climate calls for new ideas. Already, movements they have overlooked have found new ways of working. Their ideas demand attention, as steadily growing numbers are embracing non-dogmatic and genuinely open, bottom-up approaches.
 
Cooperation at local levels is being fostered through community agricultural projects, skill sharing, non-monetary trade systems and creative initiatives. This includes the production of newsletters and independent magazines, both in print and online. The internet has genuinely altered the way that political groups coordinate and communicate. ‘User-generated content’ has opened up spaces to publicise stories and events shunned by mainstream media channels. Freeware initiatives provide computer users with programs at no cost while the copyleft movement promotes creativity and information sharing without concern for monetary gain.
 
Hierarchies and leaderships are increasingly uncomfortable for many. Where the notion of top-down democracy is regarded as oxymoronic, a diversity of ideas finds space to emerge. Online networking and forum sites are allowing important debates to take place progressively and openly. Email lists facilitate horizontal organising, reflecting the non-hierarchical approach increasingly important to the left.
 
Where decision-making processes are by consensus, rather than majority-vote led, a return to party politics is a retrogressive step. We must consider what post-capitalist solutions imply for electoral politics: is there a place for majority rule in a just and equal society? For many left movements the system is inherently problematic and in need of abolition, not reform. This raises an important question: why play the system if we have post-capitalist solutions now?
 
Strong international networks have been built through increased interconnectivity without compromising autonomy. Yet the need for an internationalist anti-capitalist movement receives only a nod from Devine and Purdy, who fail to look far beyond the components of the ‘Union’. Further afield, genuine post-capitalist solutions are visible in both experimental and functional forms. The experience of the Argentinian communities functioning self-sufficiently post-economic crash in 2002 is an instructive case.
 
Devine and Purdy avoid questioning the role of nation states in what would presumably be a comprehensively different world. We must consider the type of government, if any, an alliance of the left should form. What would the transformation, and ultimately transcendence, of capitalism imply for apparatuses of the state, such as the military? What type of rules and regulations could be set in a free society? Would we seek self-sufficiency on a local or global scale? What would be the limits of the state? Fundamentally, can governance as we know it have a role in a post-capitalist future?
 
Despite these unacknowledged questions, Devine and Purdy insist that a cohesive and electable party-political force is the only route for the left. They presume that we have lacked the hegemonic project necessary to transcend capitalism, but leave the constitution of that project obscure. Perhaps the bigger issue we face just now is finding ways of working together on the basis of shared values and acknowledging rifts that will not be easily surmounted. Our differences do not have to be divisive, and may well be overcome through a plurality of approaches, working in conjunction. As a first step we should recognise that calls to ‘rise above sectional standpoints’ must entail genuine openness to ideas. They cannot only demand the collective rallying around a particular and predetermined solution.
 
The idea that party politics is the central practical issue for the left will do little to revitalise it. And if party politics is as important as Devine and Purdy believe, they may do well to reassess the Green Party as a viable alternative. It certainly shares their aims of electoral reform and a green new deal.
 
The revitalisation of the left will not be top-down. It can only occur through meaningful dedication to openness and the desire to work collectively, beyond existing and embedded systems – both political and capitalist. The abandonment of rhetoric and comfort and a willingness to work with non-definitive answers may in fact be the new alternative. We must build our projects together before we unite behind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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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1 21:49 2009/08/11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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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에 대한 이해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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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길님의 [한국, 소통하면 되는 걸까?] 에 관련된 글.
경향신문에 [한국, 소통합시다] 기획기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강준만 교수가 진보언론으로서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높게 평가하는 기고를 하였다. 하지만 절반의 성공이라고 하면서 최장집 교수의 기고글을 언급하였다. 거의 한달여 전의 글이기에 그에 대한 요약글도 함께 실었고...
 
이러한 강준만 교수의 기고글은 소통만으로 포괄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는 점을 경향신문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최장집 교수의 '소통에 대한 이해와 오해'라는 기고문에 대한 몇 가지 반응이 있었는데, 노사모를 비롯한 친노진영의 반응은 예상대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단지 MB정부는 민주정부'라고 한 언급을 물고 늘어지면서 최장집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마저 왜곡했기 때문이다. 하긴 민주-반민주 구도가 유의미하다고 보는그들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여기에 강준만 교수의 글은 경향신문의 소통 논의에 최장집 교수의 문제의식을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전향적이다. 하지만 정작 최장집 교수가 논의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빼먹었다. 바로 소통문제로 넘어갈 때 프레임 자체가 바뀐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그렇고, 현재의 MB정부하에서도 그렇고,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불통의 문제를 풀기 위해 소통하자고 하는 노력은 노동 없는 민주주의, 사회경제적 의제의 무시를 지적하는 이들을 무의사결정의 영역으로 밀어놓고 자신들이 틀지어놓은 소통의 문제를 강제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예 경향신문의 설문 자체에 응답하지 않았던 이들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고...
 
이를 응용해보더라도 내가 관여하고 있는 조직내의 문제나 조직간 문제가 소통의 문제는 아닌 듯 싶다. 그럼 뭐냐라고 하면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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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통합시다]최장집교수 특별기고 ‘소통에 대한 이해와 오해’ 요약 (경향, 2009-08-10 18:13:31)
 
소통이 사회적 논의의 주제가 된 데는, ‘불통정부’라는 말이 지칭하듯, 소통을 거부하는 현 정부를 비판적으로 겨냥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정치적 조건에서 소통의 의미는 몇 가지 상황을 가정한다.
첫째는 사회적 의견이 적대적 양상을 보이는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되었다. 둘째,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은 소통 부재를 가져온다. 셋째,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소통은 위기 수준에 이르렀다. 현재 소통문제는 세 가지 요소가 합쳐진 것이라 하겠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말만큼 정치갈등이 두 개의 진영 사이에서 전개된다는 인식을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 복고적 성격이 강한 이런 이해방식은 민주주의 틀 안에서의 정치경쟁을 선악개념으로 치환하고 집단적 열정을 동원하려고 시도한다. 일방의 진영이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대 정치연합을 강조하고 미덕으로 삼는 분위기에서, 내부 비판이 자유롭게 표출돼 여러 의사형성이 가능하고 이를 토대로 다원적인 세력형성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세계화로 빈부격차·노동문제, 사회적 상향이동이 더욱 불가능해지는 사회구조 등 풀어야 할 여러 새로운 이슈가 등장했다. ‘소통 대 불통’이든 ‘민주 대 반민주’든 양극화의 논리·담론은 현실변화의 문제를 대면하고 다루는 데 부응할 수 없다.
 
소통문제가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된 정치의 맥락에서 논의될 때, 정치발전에 어떤 긍정적 기여를 가져올지 의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서민·노동자를 소외시키며, 경찰·사법·정보기구들이 권위주의적 양태를 보인다고 비판할 수 있다. 보수정부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반민주적이라고 평하게 되면, ‘민주정부’라고 생각하는 앞선 정부들은 그만큼 긍정적으로 미화될 것이다. 이런 이해방식은 소통불능을 오히려 강화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과거 정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문제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이른바 진보적인 정부들 역시, 신자유주의 성장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양극화 비전에 입각한 신문 논조는, 민주화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객관적으로 보고,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배우는 일을 어렵게 한다. 야당(들)은 성장과 노동, 분배를 결합해 보수정당보다 우월한 대안적 성장정책을 가질 때 집권할 수 있다. 민주정치에서 소통은 투표에서 다수의 평결을 통해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소통하도록 강제되는 조건의 함수로 이해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잘하는 것이 소통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지, 소통에 대한 강조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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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통합시다]최장집 교수 특별기고-소통에 대한 이해와 오해 (경향,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 2009-07-13 17:43:45)
ㆍ민주주의를 잘 하는 것이 소통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지,소통에 대한 강조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소통이 사회적 논의의 주제가 된 데는, 이명박 정부의 권력 운영방식과 리더십 스타일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소통이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든, “불통정부”라는 말이 지칭하듯, 그것은 소통을 거부하는 현 정부를 비판적으로 겨냥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정부가 시민들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고, 반응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면, 소통이라는 말보다 정부가 시민들의 의견 및 여론에 귀기울이는 것을 뜻하는 “책임(성)”이라든가, “반응성”이라든가 하는 정치학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말을 쓰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 소통이라는 말이 현재 정치적 갈등이 양분화되고 격화되는 상황에서 사용될 때 원래의 문제의식과는 달리, 어떤 공정하고도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증진하고, 이를 통해 정치발전에 기여하기보다 의도하지 않았던 역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생긴다.
 
소통문제를 생각할 때, ‘누구와 누가 무슨 내용을 가지고 어떤 맥락에서 소통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의 여론 형성은 주류언론들이 압도적인 영향력과 더불어 이슈를 설정하고, 지식인들이 이 논의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진보언론은 자주 보수언론에 대한 거울이미지로 반대 논리를 제시해왔다. 그러면서 사회의 집단적 의사형성은 냉전반공주의나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적 관점에 의해 좁게 제한된 이데올로기적 틀을 통해 만들어져 왔다. 공론장에서 논의되는 이슈들은 이렇게 정형화된 이념범주로 분류되어, 언론매체들을 통해 사회화되고 정치화되었다. 사회의 의사형성이 언론과 지식인 엘리트들에 의해 선점되고 좁게 제한된 이데올로기 범위로 한정되는 조건에서, 공공여론이 사회현실을 반영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이슈화하기는 쉽지 않다. 소통의 문제가 이런 맥락에서 제시될 때, 엘리트주의라는 특징과 아울러 그러한 의사형성과 여론이 사회현실로부터 크게 괴리되었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민주주의가 잘 발달된 나라 같으면, 여러 사회집단들, 특히 사회적 약자, 소외세력들의 의사를 정당하게 반영하고 조직함으로써 사회적 의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인 엘리트와 소수 언론매체들을 통해 형성되는 것을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치 밖의 소수언론과 엘리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어떠해야 하고, 공익은 무엇이고, 시민이 도덕적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정치의 밖으로부터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성급하게 시민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보여줄 때가 많다. 이러한 공론장의 구조에서, 소통이 강조된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정치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현재 정치적 조건에서 소통의 의미는 몇 가지 상황을 가정한다. 첫째는 사회적 의견이 적대적 양상을 보이는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되었다. 둘째,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은 타기(唾棄)할 만한 것이고, 소통의 부재를 가져온다. 셋째,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소통은 더욱 악화되어 위기의 수준에 이르렀다. 현재 논의되는 소통문제는,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합쳐진 것이라 하겠다.
 
이런 관점은 정치갈등과 경쟁이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되었다는 이해의 방법에 기초한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말만큼 정치갈등이 두 개의 진영 사이에서 전개된다는 인식을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 이 말은 민주화운동과 그 과정에서의 격렬한 대립과 투쟁을 상징하고 당시의 정조를 불러들이는 것으로, 분명 과거 지향적이고 복고적인 성격이 강하다. 정치에 대한 이러한 이해방식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정치갈등과 민주주의 틀 안에서의 정치경쟁을 좋은 것과 나쁜 것, 도덕적인 것과 반도덕적인 것 간의 투쟁, 곧 선악개념으로 치환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집단적 열정을 동원하려고 시도한다. 일방의 진영이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대 정치연합을 강조하고 이를 미덕으로 삼는 분위기에서, 내부비판이나 생각의 차이들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여러 의사형성이 가능하고 이를 토대로 다원적인 세력형성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선호가 강한 사람들만이 지배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적인 의사형성이란 차이를 인정하고 이들 차이 간의 합리적 경쟁을 통해 일정한 합의를 넓혀가는 과정이라 할 때, 사전에 정해진 어떤 의사, 가치를 위로부터 부과하는 것은, 무엇보다 민주주의원리와 부합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소통이라는 말을 쓰면서 발생하는 역설적인 현상은, 그것이 개인의사든, 집단의사이든 의견, 의사의 소통을 더 자유롭게 하고 그 범위를 넓히기보다 이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이데올로기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협애하게 제한된 좌우 스펙트럼의 틀에서 비춰지는 양극단은 나쁜 것이고, 중간이 좋다는 가치판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결과는 중산층적 온정주의를 강화하는 것과 더불어, 그렇지 않은 여러 의사를 제약하면서 차이를 인정하는 것보다 없애는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다.
 
정치를 이렇게 양극화된 대립구조로 볼 때, 그것은 현실의 변화를 보기 어렵다. 그동안 세계화는 한국 사회를 전면적으로 변화시켰고, 빈부격차, 노동문제, 사회적 상향이동이 더욱 불가능해지는 사회구조 등 우리 사회가 풀어가야 할 여러 중요한 새로운 이슈가 등장했다. 투표자들의 선호 역시 크게 변했고 한나라당, 민주당 등 정당들의 사회적 기반과 정당 자체의 구조도 변했다. ‘소통 대 불통’이든 ‘민주 대 반민주’든 양극화의 논리와 담론은 이런 현실변화의 문제들을 대면하고 다루는 데 제대로 부응할 수 없다.
 
이처럼 소통문제가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된 정치의 맥락에서 논의될 때, 그것이 정치발전에 어떤 긍정적 기여를 가져올지 의문이다.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가 사회의 최상층 이익만을 보장하고 서민과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며, 법의 지배와 인권보장, 권력 운영방식에서 경찰, 사법, 정보기구들이 권위주의적 양태를 보인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오늘의 정부를 보수정부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정부를 반민주적이라고 평하게 되면, 역으로 “민주정부”라고 생각하는 앞선 정부들은 그만큼 긍정적으로 미화될 것이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이해방식은, 소통불능을 오히려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이른바 진보세력의 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과거 정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문제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과거 이른바 진보적인 정부들 역시, 경제와 사회정책에서 신자유주의 성장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로 서민과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나빠졌고, 국가의 사법, 경찰기구들은 충분히 민주화되지 못했다. 또 소통이 잘 안 되었던 것은 그때도 비슷했다.
 
양극화 비전에 입각한 신문의 논조는, 민주화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부족했던가를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객관적으로 보고,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배우는 일을 어렵게 한다. 야당(들)은 여당의 실패를 통해 집권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노동, 분배를 결합해 보수정당보다 우월한 대안적 성장정책을 가질 때 집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위로부터 만들어진 최대 민주연합을 강요하는 담론과 운동을 통해 그동안 표출될 수 없었던 사회적 약자의 소리나 여러 사회집단의 의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원적 토대 위에서 이를 결집하는 방식으로 다수를 형성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통은 공익, 정의, 도덕적이라는 말과 같이 좋은 말이다. 그러나 좋은 말은 캠페인 같은 방식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조건이 성숙되는 과정을 통해 결과적으로 실현되는 현상이다. 민주정치에서 소통은 투표에서 다수의 평결을 통해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소통하도록 강제되는 조건의 함수로 이해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잘하는 것이 소통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지, 소통에 대한 강조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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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교수에게 MB정부는 민주정부? (오마이뉴스, 09.07.15 09:41  주광재 (sbadco)) 
  
최장집 교수가 이런 견해를 내놓을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분의 학자적 식견이라면 그저 그러려니 해야 도리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MB정부가 보수정부라서 그렇지 민주정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는 부분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와 지난 정부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다른 것이다'는 주장이 특히 거슬린다.
 
이명박 정권은 국민의 민주적 선택에 의하여 수립된 정권이다. 수립과정이 민주적 절차를 통한 것이니 민주정부라 한다면 독일의 나치정권은 어떤가? 분명 선거를 통하여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합법적 정권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나치정권을 민주정권이라 칭할 수는 없다. 그들의 행태는 세계정치사에 큰 흔적을 남긴 나치즘일 뿐이다. 가장 비민주적인 운영방식과 독선으로 끔찍한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권력기관이 정권의 시녀로 전락하고 있으며, 대중의 의사표현이 심각히 제약되고 있다. 사상의 자유도, 결사의 자유도 침해되고 있다. 심지어 사법부의 독립성에도 심각한 하자가 드러난 바 있다. 특정 사건에 대하여 정권의 편에서 부당한 일을 한 법관이 대법관에 올랐다. 비판적 언론인들은 가혹한 수사를 당하고 있다. 정부를 비판했다고 네티즌이 옥고를 치르다 나왔다. 희대의 정치보복성 수사로 인하여 전직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그를 따르던 측근은 물론 가족과 지인들이 모두 고초를 당하며 그에게 끝없는 고통을 강요하였다. 자신이 목숨을 버리거나 비참한 굴욕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연일 증거와 확실한 사실관계의 확인도 없이 혐의를 언론에 브리핑하기도 하였다. 사법부의 독립에 대한 의구심, 대중의 의사표현에 대한 제약, 언론의 자유침해, 정치보복성 수사 등으로도 민주정부가 아니라는 증거가 부족한가?
 
또 그런 모든 것이 단지 보수정권이라는 증거일 뿐이라면 보수 세력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보수주의자라면 충분히 다른 의견에 대하여 관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법부의 독립성이나 언론의 자유, 사상과 결사의 자유, 정치보복 반대 등을 지극히 당연히 받아들여야 옳다. 만일 그러한 민주적 가치를 부정하는 세력이 보수를 표방한다면 그것은 보수가 아니라 반민주 세력이 맞다. 그래서 민주정부가 아니라 할 수는 없고, 보수정부라서 그렇다는 주장은 궤변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다. 진보적 학자라는 분의 글에서 이런 궤변을 대하는 것이 입맛을 씁쓸하게 만든다. MB정부는 단지 보수적인 정부가 아니라 반민주적인 정부가 맞다.
 
말의 뜻은 유감스럽게도 정확히 맞다. 아무리 큰 슬픔으로 애도를 하더라도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슬프기 때문에 갑자기 그가 했던 모든 일을 미화해선 안될 것이다. 과도하게 미화하려 한다면 그 자체로 고인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성도 있을 것이다. 참여정부에 대한 공과는 이미 많이 평가가 내려진 듯하다. 최장집 교수의 주장대로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서민대중의 어려움이 더욱 커지고 양극화가 심화된 것이 가장 큰 비판점이 될 듯하다. 한미 FTA 추진과정에서 절차의 문제나 소통의 결여는 제법 심각하게 진보진영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난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가혹한 측면이 있었다. 한나라당과 지금의 집권세력으로부터는 무능하다는 덧칠이 위력을 발했고, 진보진영은 그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비판하는 데 바빴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무능하고 한 일 없는 정권처럼 평가되지 않았던가? 결국 MB정권의 탄생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피할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과연 그러한 평가들이 객관적으로 옳고 당연한 것이었을까? 그렇게 형편없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면 현 정권과의 상대평가에서는 어떤가? 지금처럼 국민들이 자신의 할 말도 조심하고 위축된 분위기 속에서 전전긍긍해야 했던가?
 
애도를 한다고 해서 과도하게 미화해서는 곤란하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과도하게 저평가된 측면이 있었고, 그분의 서거를 통해 되돌아보고 수정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닐까? 그 일이 연로한 학자가 그렇게도 걱정하고 염려할 일인지 묻고 싶다. 잘못된 평가는 수정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애도의 분위기가 보수정부일 뿐 민주정부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하는 MB정부에게 불리한 분위기가 될까 염려하는 것일까? 처절하게 저평가되어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던 지난 정권에 대한 평가가 좀 다시 내려진들 뭐가 그리 염려할 일인지 모르겠다.
 
진보적 주장을 해오던 최장집 교수가 스스로 대단히 우스운 사람들로 정의해버린 보수세력을 도와주고 싶어서 이런 글을 썼을 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정권이 민주성의 문제가 아닌 보수성 때문에 이렇게 운영되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글의 맥락에서 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민주 대 반민주, 소통 대 불통 같은 양극화된 접근방식에 대한 의문도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그렇게 양극화된 구도를 가지고는 뭔가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논의진전이 어려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민주당과 친노세력 간의 결집움직임에 대한 견제구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상대적으로 지금 보수 세력의 대연합도 역시 논란이 시작되고 있는 시점에서 민주세력의 연합에 대한 의미심장한 견제구는 아닐까? 스스로 민주정부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는 MB정부에게 무엇이 유리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의구심이 더욱 커진다. 지난 참여정부를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양극화를 심화시켰다고 비판했던 그가 지금의 정부를 변호하고 싶은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문제는 탈권위적이던 지난 정권에 대하여 날리던 그 서슬 퍼렇던 비판이 지금의 정부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없다는 점이다. 지금의 정권이 비판할 거리가 그렇게 없이 잘하고 있어서 일까? 아니면 스스로 민주정부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하는 정권의 보복이 두려워서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수많은 의문부호는 그 분의 향후 행보를 지켜보자는 결론에서 멈추고 말았다. 시원한 대답은 어디서도 당장 듣기 어려울 듯싶다. 대다수의 국민도 민주 대 반민주, 보수 대연합, 민주 대연합 같은 양극화된 대결구도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상당히 심각한 퇴행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권의 운영방식은 심각히 퇴행하고 있는 데 대응하는 시민사회와 정치권은 그렇게 하지 말고 어쩌란 말인가? 그냥 각기 갈라진 목소리를 높이며 분열하고 있으면 누구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그가 언젠가는 이러한 의구심에 답해줄 것이다. 그저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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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이 문제’라는 거짓말 (레디앙, 2009년 07월 20일 (월) 10:28:01 민주희망)
[독자 투고] 노동-시민-야당 없는 민주주의가 문제…‘정당의 귀환’이 정답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핵심은 ‘야당’이다. 견제세력의 건재함이 필수다. 이명박 정부의 한국정치가 보여주는 특징은 ‘야당 없는 민주주의’다. 집권여당의 박근혜 전 대표 발언에 야당의 명암이 달라진다. 야당의 부재에서 이명박 정부에게 소통을 강조할 수 없다. 정치는 신이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다. 견제세력이 없는데 소통을 하라는 건 도덕적인 관점이다. 낭만일 뿐이다. 정치는 도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하는 것이 정치다.
 
이명박 정부는 지지자 혹은 대중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지지자 혹은 대중에 대한 정권의 책임성과 반응성 부재가 문제다. 소통 대 불통, 소통 담론은 정치적인 책임성과 반응성을 간과한다. 소통 담론은 정치적인 것을 도덕적인 것으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 사회담론을 소통과 불통으로 양극화한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 시민 없는 시민사회,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반응을 차단한다.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나타난 소통 담론은 엘리트 중심의 여론형성이 가지는 폐해다. 이러한 담론들은 사회 현실과 크게 괴리돼 사회 문제에 대한 진단을 할 수 없다.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는 차단되고 대중적인 담론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폐해도 만만찮다. 소통 대 불통으로 양극화된 담론은 사회경제적 담론을 둘러싼 정치대결이 아닌 선악이란 극단적 구도를 불러온다.
 
진보진영도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진보정치 1번지 울산이 현실이다. 집권 8년의 경험이 있는 울산 북구는 진보진영의 미천한 실력을 다 드러냈다. 구청장 8년 동안 한 것은 화장장 유치와 음식물자원화시설(쓰레기재활용시설) 건설이었다. 조승수 의원이 구청장 시절 화장장 유치를 주민투표로 실패하자 음식물자원화시설을 만들어 이상범 구청장에게 넘겼다. 당시 이상범 구청장은 음식물자원화시설을 강행했다. 음식물자원화시설은 공직자와 당이 야합한 결과물이다. 집권 8년간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역주민들과 갈등에서 택한 길은 현 정부 못지않다.
 
이전 한나라당 집권 시기보다 더 강력한 공권력을 동원했다. 당시 지역에서는 "저것들 시켜놓으니 진짜 무식하게 밀어 붙인다"는 반응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연상되지만 엄연히 진보정당 집권기 일이다. 믿기 싫겠지만 진보진영 지방행정 8년이었다. 진보 국회의원을 배출한 지역임에도 당선자와 현장 노동자들의 네트워크조차 없었다. 현장 노동자들이 진보 국회의원을 감시 혹은 소통할 수 없는 현실은 MB의 불통정치에 맞먹는다.
 
진보진영은 정파를 통해 현장노동자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대했다. 정파는 현장노동자들을 기계적으로 동원하고 이용한 이들이다. 진보진영의 노동운동과 정당운동은 공조직 중심이 아니다. 오로지 정파다. 정파가 조정해 공조직을 무너뜨려왔다. ‘세팅투표’와 ‘줄 세우기’ 정치에서 소통은 있을 수 없다. 현장 지도자들은 정파의 지침과 정치방침을 관철해왔다. 대리정치, 대리투쟁일 뿐. 하부영 전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은 노조 간부들이 자주성을 상실했다며 “정파의 ‘꼬봉’과 ‘똘마니’”라고 비판했다.
 
최근 지자체 정당공천제 폐지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정당을 통한 지방정치가 위기를 맞은 것은 정당의 사회적 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풀뿌리 정치는 정당의 뿌리 깊은 사회적 기반이 절실하다. 현 정치개혁 논의처럼 ‘영호남 일당독재구도 타파’와 ‘중대선거구제’에 초점을 맞추면 제도권 정당들과 아닌 정당으로 양극화된다. 영남에서 민주당, 호남에서 한나라당이 나눠먹는 제한된 이데올로기적 틀로 수용된다. 다원적인 세력형성을 차단하는 효과도 나타난다. 정당의 허약한 사회적 기반이 문제의 초점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책임성과 반응성이다. 지지자와 대중의 목소리에 얼마나 반응하는지는 정권의 사회적 기반을 보여주는 척도다. 정권과 대중의 매개체로 정당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집권여당은 어떤가. 책임과 반응이 없다. 정부의 거수기 혹은 계파 수장에 충성을 다할 뿐이다. 야당들도 다르지 않다. 노무현 정권시절 주요정책들을 집행, 추진하면서 지지자와 대중에 반응하지 않았다. 정권을 넘겨준 지 2년째임에도 기본적인 책임조차 지지 않았다.
 
문제는 정당이다. 책임성과 반응성을 기반으로 성찰과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정치시장에서 현 집권세력보다 더 좋은 대안들로 유권자들에게 선택받아야 한다. 정치적,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과거불문 ‘묻지마 대통합’도 소통도 아니다. 다시 ‘정당의 귀환’을 말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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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통합시다]“이제 상대편 보다 우리편에게 소통문제를 제기해보자” (경향, 2009-08-10 18:18:21)
ㆍ“소통의 엘리트주의·양극화 함정 지적엔 전적으로 동의”
ㆍ강준만 교수 특별기고 경향신문 소통특집은 ‘절반의 성공’
ㆍ<최장집 교수 특별기고에 대한 나의 의견>

 
나는 경향신문의 소통 특집을 한국 진보 언론의 획기적 업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이는 진보 언론의 가장 큰 문제가 비전과 대안보다는 비판과 저항에서 정체성을 찾는 관행이라는 나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 업적은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최장집 교수의 기고문과 관련돼 있다. 최 교수는 경향신문 지식인 설문 결과 ‘소통 잘하는 인물’ 3위로 꼽혔다. 보수 인사들로부터는 ‘소통할 만한 진보 인사’로 선정됐다. 나는 왜 그가 1위로 뽑히지 않았는지 의아스럽지만, 이 결과만으로도 그가 소통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걸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말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소통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보기엔 노무현 정권 시절이 훨씬 더 심했다. 이명박의 선거 공약은 애초부터 개혁·진보파와 소통 가능한 게 아니었다. 노 정권은 그런 문제에 더하여 다수 지지자들과의 소통도 외면했다. 최 교수는 당시 노 정권이 잘못 간다고 경고한 내부 비판자였다. 그때 친노 세력이 최 교수를 향해 퍼부은 비판은 ‘언어 폭력’의 수준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난 대선·총선의 비참한 결과는 친노세력의 이런 독선과 오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부 개혁·진보세력이 노 정권을 돕지 않았다며 원망하고 있다.
 
나는 이 문제가 반드시 거론될 것이라 믿었고, 이와 관련된 최 교수의 발언을 기대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최 교수와 경향신문 사이에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의 기고문 내용은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통 문제가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된 정치의 맥락에서 논의될 때, 그것이 정치발전에 어떤 긍정적 기여를 가져올지 의문이다”라는 최 교수의 생각에 동의한다. 내가 궁금하게 생각한 건 왜 최 교수가 그런 의문마저 소통의 문제와 연결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경향신문이 소통을 다루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으면 그걸 지적하면서 다른 방향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념의 차이를 소통으로 넘어설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노 정권 시절 최 교수와 친노 세력의 차이는 이념의 차이는 아니었다. 방법론의 차이였다. 물론 그 차이도 소통으로 넘어서기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다른 방법을 제시했을 때 그걸 대하는 태도를 문제삼을 수는 있다. 쉽게 설명해보자. 진보적이긴 하지만, 절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진보적 가치보다는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앞세우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들은 열성 추종자들에게만 둘러싸인 채 세상과 멀어지면서도 세상 탓만 한다. 어쩌면 이런 의식이나 행태는 이념보다 더 극복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로 이런 경우를 소통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인간소통학 개론’은 독선, 오만, 탐욕, 완고, 경박, 자폐성, 피해의식 등과 같은 개인·집단 심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통이 심리학만의 영역은 아니다. 소통의 정치경제학에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정치학 교과서들은 실제 정치 행위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한국 정치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지대추구(진보·보수를 막론하고 국가 부문의 자원과 영향력에 접근하여 수익을 얻고자 하는 행위)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줄서기·줄세우기’인데, 이런 건 거의 다루지 않고 서양 이론만 화려하게 나열돼 있다. 직·간접적으로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이 정권이 잘못된 길로 간다고 느껴도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위 공직, 영향력 행사, 인정 욕망 등과 같은 이해관계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해관계는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침투해 곧잘 신념으로 둔갑하곤 한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전반적으로 ‘내부고발’보다는 ‘조폭식 의리’를 더 멋있게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잘못가는 정권에 브레이크를 걸려는 시도를 하는 건 속된 말로 ‘남는 장사’가 아니다.
 
나는 그런 문제까지도 소통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개혁의 지점은 명확해진다. 시위에 의존해 판을 엎어보려는 단기 모험주의, “우리편 이겨라”를 외치면서 우리편의 승자독식을 꿈꾸는 한탕주의보다는 장기적으로 지대추구와 맞물린 전 사회 영역의 정치화·정략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게 우선이라는 깨달음이 올 것이다. 즉, 소통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게 아니라 “왜 소통이 안 되는가?” 하는 문제 의식으로 접근해 문제점을 발견하면 정치경제적 개혁 의제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걸 다룸으로써 사회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 최 교수는 이미 끝난 정권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걸까? 그렇다면 지난해 촛불시위 정국으로 돌아가보자. 주류파를 형성한 많은 개혁·진보적 지식인들이 감격이 지나쳐 허황된 촛불시위 예찬론을 펼 때에 최 교수는 냉정하게 그 한계를 지적하면서 차분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의 대안은 피가 끓는 그들의 공격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후 벌어진 사태는 최 교수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입증했다. 일부 과격파들의 화끈한 담론과 행동은 이명박 정권에 정권 전복의 가능성에 대한 과잉된 공포감을 심어 주었고, 그래서 이후 이명박 정권이 사실상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게 된 건 아닐까?
 
그러나 그들은 이마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이해심이 지나치다며 음모론을 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 교수의 발언 당시 일부 촛불시위 예찬론자들의 입에서 “최 교수가 이명박 정권에서 한 자리를 하려는 건 아닌가?”라는 따위의 말이 나오는 걸 듣고,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다. 이 사람들은 정신 나간 예외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게 사이버 정치담론의 평균적 수준이다. ‘지도자 추종주의’와 더불어 ‘정치의 종교화’ 현상이 매우 심각하다. 이명박 정권의 문제는 이명박 정권의 문제인 동시에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문제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게 이념의 문제인가, 소통의 문제인가?
 
이 물음을 파고 들면 우리는 사회적 소통 구조와 관행의 문제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다. ‘양극화 상업주의’ 논리와 ‘적대적 공존’의 원리에 주목해보자. 정치사회적 갈등 시 강경한 주장이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 매체의 장사에 도움이 되고, 갈등을 빚는 세력들 내에서 강경파들끼리 서로 돕는 관계가 형성된다. 의도는 순수한 것이라 해도 그런 원리에 의해 강경파의 발언이 필요 이상의 무게를 갖게 됨으로써 소통은 시궁창에 처박히고 만다. 내가 보기에 최 교수의 기고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도 바로 언론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지금 우리의 소통이 빠져있는 함정을 정확하게 지적한 이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최 교수께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소통의 문제가 이런 맥락에서 제시될 때”라고 소극적으로 말씀하실 게 아니라, 소통에 관한 소통의 문제를 주로 ‘우리편’을 향해서 적극 제기하자는 제안이다. ‘우리편’이 달라지면 ‘상대편’도 달라진다. ‘상대편’이 먼저 달라져야 ‘우리편’도 달라진다는 주장은 일리는 있지만, 누가 더 아쉬운 입장인가 하는 걸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간 이미 그런 역할을 잘 수행해온 최 교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면서, 경향신문이 나머지 절반의 성공도 쟁취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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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코리아, 소통을 논하라 (경향, 김종목기자, 2009-06-12-17:31:52)
▲대한민국소통법…강준만 | 개마고원 
 
‘중간파’를 자처하고 나선 강준만 전북대 교수(53)가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구호 ‘다이내믹 코리아’를 ‘커뮤니케이션 코리아’로 바꾸자며 ‘소통’을 들고 나왔다. 지금 정치·경제·사회 영역의 ‘대한민국 소통법’이 헌법 위의 법으로 군림하며 불통법으로 작동하는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해 강 교수는 여러 텍스트를 근거로 구조적·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제1장 ‘소통의 구조적 장애’에서는 <지방은 식민지다> 등에서 꾸준히 제기한 서울 중심의 ‘초강력 1극 구조’의 문제를 되짚고 있다. 극소수가 절대다수에게 퍼붓는 오락 위주의 소통 질서 즉 대중매체의 사회적 결과가 소통의 일방통행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정치·경제적 경로가 대중매체의 중앙집중과 그에 따른 쏠림·소용돌이 현상을 낳고 또 역으로 대중매체 경로가 정치·경제적 경로를 고착·강화시키는 악순환의 문제를 짚었다.
 
불통의 인적 문제에서 ‘꼴통’을 빼놓을 수 없다. 강 교수는 “꼴통의 행태는 전문적 용어로 표현하면 ‘전투적 근본주의’ ”라며 “꼴통의 법칙 즉 꼴통의 영도하에 분열은 촉진되고 예찬되고 있다”고 말한다. 연장선상에서 ‘사실 물신주의자’로서의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앞서며 당대의 수평적 소통을 그르친 김영삼 전 대통령에 관한 특유의 인물론도 양념처럼 들어 있다.
 
제2장 ‘정치와 소통’에서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라는 문제 의식을 담았다. 연고·반감·응징으로 결정되는 유권자들 투표 행태, 정치인을 ‘출세한’ 직업으로 여기는 서열주의와 사회 현실이 소통의 장애물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안달하는 이유도 소통 불능 사회에서 권력만이 유일한 소통의 무기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회 각계에서 존경받던 이들조차 금배지를 달기 위해 ‘난장판 국회’에 뛰어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개혁·진보세력의 소통 장애’를 분석한 장에서는 의식화가 고도로 이루어진 헌신파의 ‘아름다운 헌신’이 대의를 죽이는 역설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자신의 헌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대중과의 소통을 죽이고 있다. 소통 없는 마이웨이로 치달으면서 개혁·진보적 대의를 자기 만족·양심의 마스터베이션 제물로 전락시키고 만다.”
 
대안은 무엇인가. 강 교수는 ‘소통의 실천 전략’ 장에서 통섭·성찰적 사회학·기우뚱한 균형 등 인문사회과학적 개념을 제시하지만 구체적인 실천론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가’라는 보론에서 다룬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소통 불능 시대의 비극으로 진단한 강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이 서거 80일 전 <사람사는 세상>에 올린 ‘정치하지 마라’가 진정한 유언이라고 말한다. 곧 ‘정치하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역설적 메시지로 해석했다.
 
2001년 출간한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에서 말한 “정치가 썩었다고 침 뱉으면서 기존 정치판 문화에 저항하는 정치인(노무현)은 ‘지도자감’이 아니라고 배척하”는 게 ‘제1사기극’이었다면, 노 전 대통령이 언급한 “거짓말·정치자금·사생활검증·이전투구의 ‘지옥 같은 터널’ ”로 전락한 정치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이중적 자세는 ‘제2의 국민사기극’이다. 노조·총학·성직자·봉사 단체의 지도자 선거는 과연 깨끗한가. “깨끗해선 정치할 수 없다”는 상식을 알면서도 방관한 채 정치판 선거에 침을 뱉고 이러쿵 저러쿵하는 게 온당한가라는 물음이다.
 
이슈·대의에 관한 판단을 정치의 부차 요소로 치부하는 과도한 인물 중심주의와 정치지도자와의 자기동일시는 불통·분열의 주요 장벽인데, 강 교수는 “소통은 자신의 정치색깔을 자제하면서 포용의 자세를 취할 때에만 가능하다” “한나라당이 저주스러워도 한나라당을 지지한 유권자까지 저주할 수 없다는 대원칙만 확인한다면 답은 먼 곳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출판사는 책의 부제에 보론 제목을 달았다. 보도자료도 ‘보론’ 위주로 만들었다. ‘노무현 마케팅’인데, 보론은 강 교수가 책의 인쇄 직전 서거 소식을 접하고 추가한 20여페이지 분량 뿐이다. 다작·다산의 학자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또 낸’ 책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다독·다상량이 빚어내는 문제 의식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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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그의 죽음에 대한 독해 (레디앙, 2009년 06월 13일 (토) 02:04:19 손기영 기자)
[새책] 『대한민국 소통법』…"인물중심주의 넘어서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소통불능 시대의 비극으로 진단하고, 그 처방을 담은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의 『대한민국 소통법(개마고원, 295쪽, 12,000원)』이 출간됐다. 강 교수는 고인이 서거 전 홈페이지에 남긴 “정치, 하지마라”는 발언이야말로 그의 진짜 유언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정치하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그의 진정한 메시지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어 저자는 이번 사태의 핵심은 '제2의 국민사기극'이라고 밝힌다. 그는 '국민사기극'을 “정치가 제일 썩었다고 침을 뱉으면서도 기존 정치판의 문화에 저항하는 정치인은 지도자감이 아니라고 배척하는 이중적인 한국인의 정치관”이라고 지난 2001년 저서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에서 정의한 바 있다. 그러면 ‘국민사기극’을 우리 사회에서 종식시키기 위한 방법은 있을까. 저자는 '국민사기극'의 근본 원인을 ‘정치의 과부하’로 꼽는다. 이어 정치가 제공해줄 수 있는 '줄'의 위력과 그에 따른 이권이 너무도 막강하기 때문에, 정치의 힘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정치인을 중심으로 편 가르기가 일어나는 과도한 ‘인물중심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정당이 단지 과도한 인물중심주의를 반영하는 조직에 그치고 있는 현실에서는 정당민주주의도 당분간은 답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차이와 분열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모든 이들이 소통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 이슈들부터 출발해 그 범위를 넓혀 나가는 것이 우리의 살 길이라는 데 수긍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해서 정치의 개념이 지금과는 달라진다면, 그때 가서는 ‘우리 모두 정치하자’고 외쳐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본문 중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중앙정부에서 기초자치단체에 이르기까지 예산과 인사 투명성 확보 △권력을 시민사회 영역으로 이전 △정치인들의 자원봉사 활동 을 ‘자율적 의무’로 △인물중심 정치의 변화 △인물중심 지지모임의 변화 등 다섯 가지 처방을 내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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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0 23:34 2009/08/10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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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국가의 역할 - 신자유주의의 극복 (장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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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말에 이 책을 샀다가 2008년에 다 읽었다. 분명히 중요하고 관심이 가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읽을 시간이 없다고 토로한 바 있는데, 공기업 사유화에 대해 정리하면서 참고하고자 이 책을 읽게 되었고, 공기업 사유화를 다룬 부분 이외의 부분도 흥미롭게 읽었다. 
 

장하준 교수의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그의 주장을 가장 명징하게 정리하고 있는 책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본다. 이 책만큼 신자유주의의 허구를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지적하고 있는 책도 드물 것 같다. 물론 홍기빈이 말하다시피 지금의 현실과는 약간 괴리된 느낌이 없지 않아 있고, 그의 주장을 좌파의 입장으로 보기엔 어폐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시사받을 점은 무궁무진하다. 
 
아래에 서울신문과 프레시안, 그리고 새사연의 서평을 담아온다.
개인적으로 길기는 하지만, 프레시안의 홍기빈의 서평을 추천한다. 장하준 교수 책의 장점과 한계에 대해 잘 서술해놓았다. 시사인에 노무현 대통령이 추천하는 책과 관련한 기사 중 이 책을 언급한 것이 눈에 뜨여 담아온다.   

 

 

[Book Review] ‘신자유주의’ 허구 낱낱이 밝히다 (서울신문, 임창용 기자, 2006-11-25 12 면)

국가의 역할/장하준 지음 
  

지난 20여년간 신자유주의는 시대의 총아로 등장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역할을 줄이면 줄일수록 경제에는 이롭다면서 규제가 없는 시장의 미덕을 설파하고, 탈규제와 개방·민영화를 설교했다. 그리고 이 같은 주장은 지난 10여년간 부상한 세계화 담론과 결합하면서 한층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무서운 확장세와는 달리 실제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시된 국가들의 경우 소득 불평등이 심화된 것은 물론 경제전반의 불안정성이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분열이 빚어지게 되었다.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에 따르면 국가의 역할을 억압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 프로그램은 이처럼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국가의 역할’(이종태 황해선 옮김, 부키 펴냄)은 그동안 직설적이면서도 명쾌한 논리로 현실경제를 진단해 온 장하준이 그 특유의 논법으로 국가를 억압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현실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대안을 제시한 책이다.

  

책에 따르면 세계의 1인당 소득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인 1960∼1980년대 평균 3.1% 증가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이룬 1980∼2000년에는 소득 증가율이 2%에 그쳤다. 같은 기간 개발도상국의 1인당 소득증가율도 3%에서 1.5%로 떨어졌다. 그나마 중국과 인도의 가파른 성장이 없었더라면 그 수치는 더 낮아졌을 것이다.중국과 인도는 보기 드물게 신자유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반면 신자유주의 물결의 중심에 있었던 옛 공산주의 국가들이나 금융위기 이후의 인도네시아,2000년대 초반의 아르헨티나 등은 경제 불안정과 함께 소득 불평등, 정치·사회적 불안이라는 초라한 개혁의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 지은이가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경제의 효율화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대목이다. 지은이는 신자유주의가 이론적으로도 틀렸다고 잘라 말한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이 자연발생적이며,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 시장의 발생은 거의 항상 국가에 의해 신중하게 조정되어 왔다. 시장이 작동되게 하기 위해 국가는 소유권에 관한, 공정거래에 관한, 독과점 금지에 관한 법 등 무수한 법률과 규제를 통해 관리하고 규제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신성시하는 가격의 객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시장가격은 임금과 이자율 등에 의해 영향받고 있으며, 임금과 이자율은 상당 부분 정치적이기 때문에, 가격도 정치적이라는 것이다.뿐만 아니라 각종 정보에 대한 평등이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서 신자유주의는 시장조절 기능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은이는 이처럼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실증적, 이론적으로 논박하면서 그 대안을 도출한다.그것은 바로 마지막 갈등 관리자이자 비전을 제시하고, 혁신을 촉진하는 역할 담당자로서의 국가의 존재이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듯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에 맡겨야 하는가? 아니면 국가로 하여금 공론의 장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고 제도화함으로써 우리의 의지가 반영되도록 할 것인가?결국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이 두가지 선택 가운데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1만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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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경제학', 설 땅을 잃다 (프레시안, 홍기빈 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2006-12-06 오후 4:50:05)
[화제의 책]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과 '경제적 현실주의' 
 

  장하준 교수의 책 <국가의 역할>(이종태, 황혜선 역, 부키 출판사)이 출간되었다. 원저인 (London: Zed Books, 2003)는 이미 세계의 많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요한 교재로 채택되어 명성을 얻은 책이다. 다행히도 500쪽에 달하는 이 역저가 이종태, 황혜선 두 분의 노고 덕분에 근래에 보기 힘든 훌륭한 번역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도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리적, 실천적 파산과 그 폐해를 지적한 책들이 없지 않았으나, 장하준 교수의 저서는 그 중요성과 의의에서, 특히 난마와 같은 정치경제 구조변환의 혼란에 빠진 한국사회에 대해 갖는 함의에서 특기할 만하다.
  
  사이비과학의 위험에서 정치경제학 구해내기  
  과학철학의 중요한 작업 중 하나는 과학과 사이비과학(pseudo-science)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demarcation)이다. 사이비 과학의 특징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 모호한 개념들을 기초로 하여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도 논박할 수도 없는 명제를 도출한 뒤 이를 보편적인 법칙으로 승격시킨다'는 데 있다. 한때 유럽을 풍미했던 연금술이나 점성술 같은 것들이 그 예다. 이것들은 '5행성의 성질'이니 '여러 금속의 서열'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사용하여 예언과 주장을 내어놓은 뒤, 그것이 현실에서 어긋나게 되면 "이 경우는 특수한 경우로서…"라는 갖은 특수설명(ad hoc)으로 둘러대 논증도 논박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생과 사회의 나아갈 바라는 추상적인 법칙으로까지 그것들을 승격시킨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를 풍미하면서 전 지구의 정치경제 체제를 소위 '전지구적 시장 체제'로 바꾸어놓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리적 체계를 장 교수는 기본적으로 1970년대 이후 벌어진 신고전파와 오스트리아 정치경제학파의 '정략결혼'으로 파악한다. '경제적 최적화의 계산'이라는 기술적 한계를 넘지 못한 신고전파 경제학이 오스트리아 학파로부터 자유, 시장, 국가 등의 개념에 대한 일관된 자유주의적 논리를 제공받는 대신, 그동안 주류 경제학에서 따돌림당하던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이론의 '과학성'을 인정해주는 일종의 '빅딜'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결혼이 신랑 쪽이나 신부 쪽이나 모두 100살이 넘었다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신고전파 경제학의 기본축을 이루는 이론들은 모두 파레토, 왈라스, 클라크, 혹은 그 이전에 나온 19세기 경제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또 오스트리아 학파의 정치경제 사상이라는 것은 미제스나 하이에크 등이 이미 1930년대부터 끝없이 반복하며 설파했던 '19세기식 시장사회', 즉 "자유주의 정치경제 사상의 중심 가치는 신성불가침의 자연법"이라는 생각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20세기 100년 간의 역사는 시장도 국가도 사회도 자유도 후생도, 어느 것 하나 19세기 식으로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계대전, 파시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과 관련된 파란만장한 대사건들 속에서 계속 변모해 온 현대의 정치경제 체제를 과연 이 100년 묵은 이론 두 개를 합쳐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증손자, 아니 고손자를 기다리면서 학설사의 한 페이지로 그냥 조용히 늙어가야 할 이 할머니 할아버지 이론들이 과연 '회춘'하여 왕성한 생산력으로 새롭게 자손을 번창시킬 수 있을까. 혹시 현실과는 동떨어진 추상적 개념들로써 논박도 논증도 애매한 명제들을 마구 쏟아놓으면서 "한 나라, 아니 전 세계의 정치경제가 나아갈 바는 이런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거대담론으로 치닫는 '사이비과학'이 나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러한 사태가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기에 의혹이 더 짙어진다. 이미 20세기 전반에 카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19세기식 자유주의 정치경제 사상의 패러다임이 지닌 '과학'으로서의 가치가 파산상태에 달하여 이미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 된 현실을 폭로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 나아가 지식대중 전부가 그렇게 '이데올로기'로 변해버린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가운데 현실은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전 세계가 파시즘과 세계대전이라는 위기로 치닫는 기막힌 현실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런 사태에 부닥쳐 카아(E. H. Carr)와 같은 사람은 사회연구는 더 이상 '유토피아와 사이비 실증과학이 뒤섞인' 기존의 지배적 패러다임이라는 색안경을 낀 채 현실을 재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사회적 현실을 관찰하여 신중한 정책제안을 가능케 하는 '현실주의' 정신을 가지라고 제창한 적이 있다. 이 저서에서 장하준 교수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방법으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카아의 '현실주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장 교수는 자신의 방법을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정치경제학을 사이비과학의 위험으로부터 구제하여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과학으로 재정립하려는 노력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장 교수는 이런저런 현실의 폐해 사례를 극적으로 강조하거나 '사회적 관계와 가치의 파괴'와 같은 도덕적, 윤리적 명제에 호소하여 비판을 전개하고 있지 않다. 사상, 이론, 정책의 세 측면 모두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에 정면으로 맞서 씨름하면서 (1) 그 사상적 기초와 개념이 대단히 모호하거나 그릇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고 (2) 그것이 주장하는 숱한 이론들이 얼마나 실증적 기초가 박약하거나 현실적 사례에 의해 종종 논박되며 (3) 그 정책적 귀결이 비현실적이고 해롭기까지 함을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더욱이 이 저서 전체에 걸쳐서 장 교수는 한 순간도 글을 '날려서 쓰는' 법이 없다. 치밀하고 촘촘한 논리가 펼쳐지는 가운데 그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된 문헌과 데이터의 양과 규모도 실로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저서는 21세기 초에 새롭게 역동하고 있는 정치경제학의 발전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경제적 현실주의'의 선언으로 자리매김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안으로서의 산업정책   
  이 책 1부의 1장과 2장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기둥이 되는 두 개의 핵심 개념, 즉 '시장'과 '국가'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보통 자유, 효율성, 정보, 자발성 등에 의해 작동하는 동시에 그런 것들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시장'이며 불필요한 규제, 정치적 왜곡, 비효율, 무지, 자유의 억압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국가의 경제개입'이라고 규정해, 전자를 최대한으로 확장하고 후자를 최소한으로 축소하는 것이야말로 경제운영의 나아갈 바라는 단순명쾌한 주장을 그 사상적 기초로 삼는다.
  
  장 교수의 비판은 이런 식으로 단순하고 모호하게 정의된 '시장'과 '국가'의 개념이 실제 현실에서는 그 발생과 작동 및 운영에 있어서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결국 그러한 단순한 개념화에 기반을 둔 사상적 명제가 터무니없이 단순화된 현실의 희화화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대신 시장도 국가도 인간사회 속에서 존재하며 숨을 쉬는 수많은 제도 중 하나로서 현실적으로 자리매김돼야 한다. 그 후에야 비로소 두 제도에 대한 그릇된 환상이나 신화를 넘어서서 현실의 여러 제도들과 가장 잘 결합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러한 문제와 방안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정치경제학 방법론으로서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이 제안된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새로운 방법의 틀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주장과 정책적 제안 양자를 반박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2부에서는 먼저 대외경제의 측면, 즉 최근의 경제적 지구화의 담론 속에서 가장 예민하게 떠오르고 있는 세 가지 쟁점을 다루고 있다. 초국적기업, 지적소유권, 산업정책의 문제가 그것이다. 4장에서는 초국적기업이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초국적기업이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경제를 개방하는 것만이 개발도상국이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여지가 없는 선택이라는 명제를 실증적으로, 논리적으로 부수고 있다. 이를 통해 장 교수는 초국적기업의 요구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투자대상국이 얼마나 건전하고 수익성 높은 내부적 경제 틀을 갖추고 있는가가 오히려 더 많은 외국투자를 불러들이는 데 관건이 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5장에서는 특히 '지식기반 경제'에서 초국적 지적소유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장치가 필수적이라는 명제가 근본적으로 비판된다. 지적소유권 보장과 경제성장의 관계는 대단히 의심쩍은 것이며, 개도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일방적인 손해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된다.
  
  6장에서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어라 할 '산업정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지구적으로 확장된 세계시장의 역동성 속에서 하나의 국가가 자국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나 이룰 수 있는 산업정책이라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특히 일본, 프랑스 등 산업정책으로 성공한 나라들은 독특한 제도적, 사회적 환경이 그런 정책의 성공요건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경우이며, 따라서 산업정책을 보편적으로 시행할 수도 없고 시행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장 교수는 20세기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서는, 서구에서나 제3세계에서나 순수한 '시장경제'보다는 오히려 국가에 의한 산업정책이 더 보편적이었음을 들어 반박한다.
  
  이러한 6장의 논지는 곧 국내경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할 것인가를 다루는 3부의 논의로 이어진다. 2부에서 소위 '지구화로 인한 불가항력의 외적구조 변화'라는 담론을 비판하고 난 뒤 3부는 국내경제를 조직함에 있어서 바로 이 국가에 의한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산업정책 부활만이 오히려 이 지구화 시대의 세계경제에 가장 효과적으로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임을 역설한다.
  
  실로 논쟁이 많은 이 주제에 대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 쪽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은 '시장경제' 대 '산업정책'이라는 논쟁의 역사적 궤적을 살펴본 뒤, 20세기의 대규모 산업경제에서는 산업정책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시장의 비효율성'을 피할 수 있는 필연적인 선택이 될 수밖에 없음을 경제이론의 차원에서 입증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이 논쟁에서 실로 가장 첨예한 전투장이요 가장 많은 사상자, 피해자가 발생한 장인 '공기업'의 문제, 즉 '공기업은 반드시 수익성이 낮을 수밖에 없는가'를 다루고 있다.
  
  '더 많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지난 몇십년 간 대학에서, 매체에서, 정계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휘둘러 온 일사천리의 주장,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해 "시대착오에 빠져 있거나 경제법칙의 과학성을 무시하는 철없는 좌파"라고 하던 매도에 속절없이 말문이 막혔던 이라면 이 책의 출판을 반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경제적 현실주의자'라면 그러한 지난 몇십 년 간의 '시장개방'이 과연 지구적 규모에서나 일국적 규모에서나 고도성장과 보편적 풍요와 효율성이라는 낙원으로 우리를 인도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이 우리의 경제체질을 개선하고 경제성장을 이루게 해줄 것이라고 하던 IMF와 김대중 정부의 경제관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저투자, 저성장, 양극화, 투기 붐, 고실업, 가계경제 파산 등의 현실을 모르쇠하지 않는 경제적 현실주의자라면 장하준 교수가 목 놓아 역설하고 있는 "문제는 산업정책"이라는 목소리에 전적으로 공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장하준 교수의 노고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굳이 몇 가지 비판적 문제제기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자 한다. 첫째, 산업정책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을 '국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빠져 있어 국가가 여전히 어떤 집권세력이든 자신들의 뜻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일종의 '블랙박스'로 놓여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이는 프랑스의 정치학자 풀란차스가 지적한 바 있듯이 '제도주의' 정치경제학 일반에 나타나는 편향으로서, 국가를 다양한 사회세력들 간의 충돌과 이익대립과는 무관한, 아무런 내용도 갖지 않는 중립적인 제도로 본다는 문제점이다. 1960년대 일본의 국가든 1970년대 한국의 국가든, 그러한 사회세력들 간의 충돌이라는 복잡한 정치역학과 무관하게 '중립적이고, 순수하게 경제적 효율성만을 모토로 하여' 산업정책을 추진한 국가는 없었다. 따라서 21세기의 환경에 걸맞은 산업정책을 추진할 국가는 어떠한 내용과 성격을 가진 국가여야 하는가라는 논의가 빠져 있다면, '국가의 산업정책이 효율성을 담보할 것이다'라는 명제는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이 최고의 효율성을 담보할 것이다'라는 명제나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의 차원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둘째, 장하준 교수가 제시하는 산업정책의 정의와 그 사례들은 사실상 1980년대 이전의 상황과 현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산업정책의 정의는 "국가가 경제 전반에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한 결과를 특정 산업-그리고 그 요소로서의 기업-으로 하여금 달성토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 즉 '선별적 산업정책'과 유사한 것이다(265쪽). 하지만 이러한 산업정책은 199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을 필두로 하여 세계 곳곳에서 포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이 책에서 장 교수가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득세로 인한 이념공세가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포기가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을 천착하여 그 실정을 좀 더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21세기형 산업정책의 정의와 원칙을 제시하는 작업이 추가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문제는 별개로 볼 수 없다.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사실상 국가와 기업 양자 모두에게 있어서 '새로운 축적전략'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처럼 효과적인 산업정책을 통한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이라는 축적전략이 포기된 대신에 금융적 기법을 통한 다양한 방법의 재자본화(recaptialization)가 주된 축적방식으로 떠오른 것이 1990년대 이후 지구정치경제의 현실임은 누누이 지적된 바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곧 국가의 성격, 기업의 행태, 정책의 선호체계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공세에 맞서는 대안은 곧 이러한 변화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 성격의 국가, 대안적 성격의 경제주체를 형성하는 전략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 책에 제시된 수많은 혜안과 지혜를 좀 더 효과적인 전략으로 벼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의 관점이 아닌가 한다. 지금 간절히 필요한 21세기형 산업정책을 수행하는 국가라면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의 공세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는 광범위한 경제주체들이 폭넓게 참여하여 더 공격적인 경제정책을 펼 수 있는 성격의 국가일 수밖에 없다. 즉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국가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또 그렇게 해서 시행될 산업정책의 내용도 단지 '경제 전반에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예전의 산업정책과 같은 기술관료적 합리성의 좁은 틀을 벗어나야 한다. 작업장 민주주의의 실현, 노동과정의 인간화, 생태환경의 보전, 나라의 정신적·문화적 고양 등 한 나라의 살림살이인 경제를 운영하는 데서 국가가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끌어안으면서 좀 더 포괄적인 '정치경제 모델'을 건설하는 틀로 산업정책이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의 세계화를 앞세운 21세기 지구정치경제의 현실에 국가가 역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위한 조건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한 관점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도 장하준 교수의 저서는 중요한 출발점의 역할을 해줄 것 같다. 이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갖은 '교조'들을 영구불변의 자연법이나 되는 것처럼 외쳐대는 '사이비과학'은 딛고 설 땅을 크게 잃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이 저서의 위력을 십분 증가시켜 준 두 번역자의 훌륭한 번역문장이다. 시중의 번역서에 나오는 알쏭달쏭한 문장들과 씨름하다 지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이번에는 걱정을 붙들어 매시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이 책을 만들어준 저자, 번역자, 출판사 모두의 노고가 값진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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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극복할 '국가의 역할' [작성일:2007-01-23 | 작성자:이상동/새사연 상임연구원]
    
신고전학파는 현재 한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학계의 주류를 점하고 있다. 한계효용주의학파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학파는 경제 현상을 분석할 때 ‘시장’에서 시작해서 '시장'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경제학이라고 하면 수요공급 곡선부터 떠올리게 만들거나, 시장을 통해 두 곡선의 교차점에서 자율적으로(!) (균형)가격이 형성된다는 통념을 형성하는 데 실로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도 바로 이 학파다.
   
1970년대 들어 완전히 경제학계를 장악한 신고전학파는 1980년대가 되자 경제 정책마저도 장악해 들어갔다.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되어 이후 많은 개발도상국의 ‘시장 개방’을 이끌어 낸 신자유주의 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왔다. 이제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신고전학파의 논리를 넘어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드러내며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국가의 역할>. 이 책의 원 저자인 캠브리지 대학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는 이미 ‘쾌도난마 한국경제’, ‘사다리 걷어차기’, 그리고 ‘개혁의 덫’을 통해 끊임없이 한국경제에 대한 통찰력을 던져왔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국가의 역할’ 부상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유'를 위해 점점 더 깊이 '국가에 개입'해 오고 있다. 경제는 시장 그 자체이니 경제가 아닌 국가는 빠지라는 것처럼. 그러나 과연 경제활동은 시장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200여년의 근대 경제학사에서 국가의 역할은 언제나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어왔다. 최근 신자유주의가 국가를 거세시키기 위해- 실제로는 많은 부분 금융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이런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제 정책뿐만 아니라 정치, 법률 그리고 사회 제도에까지 개입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 성장을 위해 소득 불평등, 경제적 불안정, 그리고 사회적 불안과 같은 부작용은 감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논리가 전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신자유주의가 경제 성장조차 촉진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과연 저자가 이야기하는 비판의 근거와 대안은 무엇인가?
  
한국은 90년대 이후 세계화 담론과 IMF 구제 금융이 이식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신자유주의 수입국의 하나가 되었다. 금융이 개방되고 은행과 공기업이 민영화되었으며, 급기야 대통령의 입에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 갔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모든 경제 활동을 시장과 등치시키는 것, 그래서 소위 ‘시장 자율’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논리이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서부터 이 책의 논점은 시작한다.
  
저자는 ‘시장 자율’에 대비시킬 만한 ‘국가 개입’을 주장한다. 국가 개입 논의의 오랜 역사적,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고 ‘신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 전제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드러낸다. 반대 논리는 국가를 오직 이해 집단의 대리인들로 치부할 뿐이며, 국가 개입에 관한 논쟁에서 얻은 오랜 지적인 자산과 경험을 사장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 개입에 의해 성공적인 발전을 이룬 동아시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사례가 종종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는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에만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발전 과정의 구조 변동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받는다고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국가는 시장의 종속적 행위자가 아니라 시장과 동등한 또 하나의 '제도'라는 점이다.
  
국가의 개입이 비효율적?   
저자는 신자유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기를 그들이 신봉하는 '시장'에 대해 스스로 적확한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자신들의 윤리적 정치적 관점에 따라서 선호하는 곳에 시장과 국가를 가르는 경계선을 그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개입은 비효율적이라는 결론을 이미 신념화한 다음, 역으로 시장과 국가를 구분 짓고 최종적으로 시장의 정의를 내렸다고 하는 시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국가 개입의 비효율성에 대한 반론은 책의 곳곳에 펼쳐져 있다. 먼저 개입 자체가 점점 불가능해지는 '세계화' 상황에 대해 검토해 보자.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를 앞세워 국가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세력이 있다. 바로 초국적 기업이다. 초국적 기업은 개발도상국에 지적재산권을 엄밀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독자적인 산업정책을 펴지 말 것을 강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장을 개방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실제로 외국의 초국적 기업이 개도국의 경제 발전과 기술 역량 축적에 도움이 된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협상력을 발휘해 정책 선택권을 확보할 것을 개발도상국들에 권고한다. 초국적기업이 투자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사항은 해당국의 경제적 상황이지 규제나 개방화의 정도에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나아가 저자는 국가의 강력한 선별적 산업 정책을 주문하고 있다. 시장 중심적 정책은 보편적인 정책이고 선별적 산업 정책은 특수한 정책이라 여기는 통념이 있다. 특수 정책은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은 선별적 산업 정책이 비현실적이라 여기지만 이는 잘못된 견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완전한 보편적 정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제기구의 규제가 선별적 산업 정책의 실행을 극도로 어렵게 만든다는 견해는 과도하다며 여전히 방법을 찾을 여지는 많다고 결론짓는다. 저자는 국가 개입의 유력한 수단으로 산업 정책을 제시하며 그 성공적 사례를 펼쳐보이고 있다.
  
정부의 규제에 대한 오해도 풀어준다. 신자유주의의 대표주자격인 미국이 바로 ‘정부 규제의 나라’라는 실제 사례도 들어서. 1970년대까지 전 세계적으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은 당연했으며, 이때에 전례 없이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도 있었음도 사실이다. 저자는 규제가 국가마다 다르게 인식되고 있지만 규제가 없었다면 시장도 없었음을 논증한다.
  
특히 마지막 장에 소개된 ‘개발도상국에서 공기업의 효율성’은 특히 관심이 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공기업의 민영화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기업은 비효율적'이라는 주장은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공기업의 비효율성을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강력한 데이타는 아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저자는 또한 공기업 민영화 과정에는 대부분이 이데올로기적인 편견과 매각 과정에서의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은폐되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우리에게 '공기업 민영화'의 본뜻을 고찰할 기회를 주고 있다.
   
오히려 민영화는 공기업이 갖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정책적 목표를 사장시켜 버린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설명이다. 공기업은 계층과 계급 또는 지역의 분배를 위해 설립되기도 하고, 고용 확충과 같은 거시경제의 조절 장치로 활용되거나 민간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등 효율성이 크다고 강조한다.
  
“시장은 객관성, 효율성, 자발성과 같은 개념들을 대표하고 국가는 불필요한 규제, 정치적 폐해, 경직성과 같은 개념들을 대표하여 시장에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이상적인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라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을 저자는 이론적, 실천적 그리고 정책적으로 정면 비판한다. 현실 속에서 시장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복잡한 인간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제도 그 이상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저자는 선진국을 포함한 어떠한 사회에서도 국가를 제거한 채 완전한 시장을 갖고 발전을 한 예가 없다는 점을 실로 방대한 문헌과 데이터를 이용해 역사적인 사실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 출간된 지 약 3년 밖에 되지 않은 이 책이 이미 해외의 많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제학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저력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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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vs 정부, 우리 미래를 누구에게 맡길까 (조선, 이준 논설위원, 2006-11-24)
국가의 역할 | 장하준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 도서출판 부키 | 496쪽 | 1만6000원

 
“우리의 미래를 누가 결정하게 할 것인가. 신자유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에 맡기라고 한다. 반대론자들은 국가로 하여금 공론의 장을 통해 합의를 끌어내고 제도화함으로써 우리의 의지를 반영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의 미래를 누가 결정하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이 책을 왜 썼는지를 설명한다. 우리의 미래를 불확실성에 가득 찬 시장의 손에만 내맡길 수 없다는 믿음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필자는 그 점에서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을 향해 분노한다. 국가를 “약탈자나 정치적으로 강력한 집단이 그 당파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정치를 “집단적 의지에 빌붙어 시장이 내린 결과를 뒤엎는 합법적 수단”이라고 보는 신자유주의자들을 경멸한다.
 
그의 비판은 날이 서있다. 신자유주의는 적어도 이 책 속에선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백전백패’다. 무엇보다 사회경제적 구조변동과 개발도상국에서 국가의 역할이 왜 중요한지를 논한 대목은 설득력이 있다. 시장의 개별적 경제주체들은 체제(system) 전체를 보는 비전이 없거나 다른 경제주체의 행위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우왕좌왕한다. 그래선 구조조정이 불가능하다. 장 교수는 “경제 전체를 효율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선 어떤 한 경제주체가 중심적 위치에서 조정 기능을 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분산된 경제주체보다는 공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부가 그 역할을 맡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실패 위험이 있더라도 조직이 나아갈 비전을 제시하는 ‘기업가적 역할’을 정부가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제도주의’(institut ionalism)를 제시한다. 국민경제의 성패는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제도들에 달려있다. 시장은 매우 중요한 제도이기는 하지만 여러 제도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다. 지나치게 저평가된 ‘국가의 역할’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그의 문제 제기는 의미 있다. 그러나 정부와 시장의 역할 논쟁을 너무 ‘신 자유주의와 안티 신자유주의’의 이분법적 틀 속에서 보려고 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그러다 보니 시장이 갖는 역동성, 효율성, 자기조절과 자기복원 능력과 같은 장점들을 평가하는데 인색했다.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국가의 역할도 ‘신자유주의와 안티 신자유주의’의 중간 어디쯤 있다는 걸 그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치밀하고 촘촘하게 설계된 신자유주의 대안서 (시사IN [98호] 2009년 07월 25일 (토) 00:14:57 홍기빈 지구정치경제 칼럼니스트)
이 책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데올로기에 맞선 ‘경제적 현실주의’ 선언이다. 
 
<국가의 역할> 원저인 (London:Zed Books, 2003)는 이미 전 세계 많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요한 교재로 채택되어 교과서처럼 쓰이는 책이다. 이전에도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리적·실천적 파산과 그 폐해를 지적한 책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장하준 교수의 저서 출간은 특히 난마와 같은 정치경제적 구조 변환의 혼란에 빠진 한국 사회에 갖는 함의가 크다고 보여진다.  
 
장 교수는 이런저런 현실적 폐해를 극적으로 강조하거나 ‘사회적 관계와 가치의 파괴’ 같은 도덕적·윤리적 명제에 호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을 사상·이론·정책 세 측면에서 정면으로 맞받아친다. 다시 말해 장 교수는 이 책에서 첫째,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초와 개념이 대단히 모호하거나 그릇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으며, 둘째,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숱한 이론의 실증적 기초가 박약할 뿐 아니라 현실을 설명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폭로한다. 나아가 세 번째로는, 신자유주의의 정책적 귀결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해롭기까지 한 것인가를 조목조목 밝힌다.
 
이 책 전체에 걸쳐 장 교수는 한순간도 글을 ‘날려 쓰는’ 법이 없다. 치밀하고 촘촘한 논리가 펼쳐지는 가운데 그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하는 문헌, 데이터의 양과 규모는 실로 압도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21세기 초 새롭게 역동하는 정치경제학의 발전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데올로기에 맞선 ‘경제적 현실주의’ 선언으로 자리매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혁이 경제 체질 개선과 경제 성장을 이룩해줄 것이라던 IMF와 김대중 정부의 경제 관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저투자, 저성장, 양극화, 투기 붐, 고실업, 가계경제 파산 따위 현실을 모르쇠하지 않는 경제적 현실주의자라면, 장하준 교수가 목 놓아 역설하는, “문제는 산업 정책이다”라는 명제에 전적으로 공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장 교수의 노고에 대한 감사를 무릅쓰고 몇 가지 비판적 문제 제기를 해보자면 첫째, 이 중요한 역할을 맡을 ‘국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빠져 있어 국가가 여전히 일종의 ‘블랙 박스’로 놓여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곧 집권 세력이 국가를 여전히 자기 뜻대로 활용할 여지가 열려 있는 것이다. 둘째, 장 교수가 제시하는 산업 정책의 정의와 그 사례들은 사실상 1980년대 이전 상황과 현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별개로 볼 수 없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나타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사실상 국가와 기업 양자에게 ‘새로운 축적 전략’에 대한 합의가 나타났다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전처럼 효과적인 산업 정책을 통한 경제성장과 높은 고용 창출이라는 축적 전략을 포기하고, 대신 금융 기법을 통한 다양한 방법의 재자본화(recapita- lization)가 주된 축적 방식으로 떠오른 것이 1990년대 이후 지구 정치경제의 현실임은 누누이 지적된 바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곧 국가의 성격이나 기업의 행태와 정책 선호 체계에도 근본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책에 제시된 수많은 혜안과 지혜를 좀 더 효과적인 전략으로 벼리기 위해서는 21세기형 산업 구조에 근간한 ‘더 많은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방안으로 이후의 작업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갖은 ‘교조’들을 영구불변의 자연법이나 되는 것처럼 외쳐대는 ‘사이비 과학’은 설 땅을 크게 잃은 것으로 보인다. 더 자유롭고 진취적인 미래의 상상력을 해방시키기 위한 작업으로서 이 책은 상당 기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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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0 12:36 2009/08/10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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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위원장 “강경 일변도 노동운동 바뀌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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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이 서울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쌍용차 노사가 협상을 타결한 6일 오후에 이뤄진 것이란다. 임성규 위원장 말대로 분명 노동운동이 바뀌어야 하는 건 맞는데, 그 방향이 문제다. 과연 노동운동이 강경 일변도여서 문제였나. 민주노총이 무조건 강경투쟁만 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 노동운동의 잘못인가. 노동조합은 조합으로서 자기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당연한 말이다. 이 당연한 말이 어느 시점에서 누구에 의해 어떤 식으로 호명되는가에 따라 그 활용이 달라진다.
 
서울신문을 아무리 잘 봐주더라도 진보언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거기에서 민주노총 위원장 자격으로 인터뷰를 한다면 자신이 발언이 어떻게 소개될지에 대해 좀더 고민해야 한다. 물론 그는 여러 가지 얘기를 했을 테고, 특히 사측과 정부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할애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목으로 나왔다시피 언론에서 무슨 말을 부각시킬지는 뻔했던 것 아닌가. 
 
설사 77일간의 공장점거 과정에서 쌍용차 지부가 전략과 전술의 오류를 범했다 하더라도, 이것이 인터뷰의 핵심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그리고 진보정치 진영의 연대가 부족했으며, 역량 또한 부실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이를 교훈삼아 이러한 사태가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힐 수는 있겠다. 그런데 그 책임을 쌍용차 조합원들에게 돌리는 것이 타당한가. 민주노총 위원장이라면 쌍용차 노동자들을 고립으로 몰아넣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을 폭력으로 진압한 자본과 국가, 보수언론에 대해 준엄한 경고를 하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인터뷰에서 빠져 있다.
 
민주노총 위원장이 서울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강경 일변도의 노동운동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오, 민주노총이 정말 바뀔 모양이다" 하면서 민주노총,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일반 대중의 태도나 입장이 바뀔까. 아마 임성규 위원장도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하진 않았으리라. 아니 그보다 노동운동이 바뀌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것인가. 임성규 위원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결국은 쌍용차 사태의 책임을 노동운동에 돌리는 자본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인터뷰는 사측에 이번 쌍용차 투쟁이 무슨 교훈을 주었는지 물은 것에 대해, 노동자들도 회사가 있어야 자신들 존재도 인정받는다는 걸 분명히 깨달았다는 말로 마무리된다. 그 동안 자본이 되풀이해온 논리 아닌가.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서울신문에 민주노총 위원장이 나와서 할 말을 했으니 의미가 있다고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도대체 현재의 상황에서 왜 이런 식의 인터뷰를 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역시 중앙파는 어쩔 수 없는건가.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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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타결 이후] “강경 일변도 노동운동 바뀌어야” (서울신문, 김승훈기자, 2009-08-08  4면)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 인터뷰
 
→쌍용차 사태에서 보듯 노동계의 투쟁방식이 강경 일변도다. 어떻게 보나.
-정부나 자본을 상대한 투쟁방식도, 예를 들면 러시아·쿠바 혁명처럼 폭력을 동원해 정권 엎겠다는 사회적인 분위기 아니라면 자본주의 구조를 인정할 거냐 말 거냐 이것부터 정리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조합으로서 자기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정부든 자본이든 협상이 중요하다. 민주노총이 무조건 강경투쟁만하는 것으로 비춰졌는데 노동운동도 변신해야 한다.
 
→노조가 얻은 게 뭔가
-회사 쪽이 승리한 거다. 정리해고 및 희망퇴직자 2464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을 갖고 회생하려는 게 회사 측의 처음 계획이었다. 그 전에 노사 간에 구체적인 수치 얘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협상제의가 있었던 걸로 안다. 당시 노동조합은 사람 자르지 말고 개인이 조금 희생하더라도 나눠서 함께 가자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회사 목표 인원인 2464명보다 더 많은 인원을 줄일 수 있는 상황이 됐다. 노조는 손해를 본 거다. 노조가 당초 사 측의 안보다 후퇴한 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전략과 전술의 미스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민노총은 무얼 했나.
-기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교섭책임이 민노총에 있었다고 한다면 조금 달랐을 수도 있다. 쌍용차는 금속노조 산하다. 금속노조가 책임지고 정부 등 여러 곳과 중재를 했다. 한 보름 전쯤 쌍용차 노조지도부와 안을 만들었는데 쌍용차 내부 농성자들이 이걸 안 받아들였다. 지금 안은 그때보다 후퇴한 것이다. 민노총은 교섭권 없었다. 밖에서 정치적인 외교 등을 통해 지원한 수준인데, 이것도 잘 안 먹혔다.
 
→사측에도 교훈이 됐을 텐데.
-쌍용차 경영진은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일본은 한 기업이 잘못하면 기업가가 할복하기도 한다. 미국은 연봉 1달러 받을 테니 맡겨달라고 한다. 한국은 그런 게 없다. 진정한 노사관계 선진화도 필요하다. 이번에 노동자들도 회사가 있어야 자신들 존재도 인정받는다는 걸 분명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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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0 01:08 2009/08/10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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