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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시민운동을 개탄한다,>인권연대

 
작금의 시민운동을 개탄한다
[인권연대] 무엇을 위한 운동인가
  

작성날짜: 2005/02/24
인권연대기자

    
시민단체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많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 하면서 사실은 시민운동을 이용해 돈벌이나 하고 있다는 비아냥부터 시민운동은 정치적 진출을 위한 발판이다. 정권의 홍위병이다. 대안도 없이 비판만 하는 무책임한 집단이다. 선출되지도 않았고 시민도 없는 집단이 너무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별 이야기가 다 들린다.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식상한 법인데 듣기에 좋지 않은 이야기인 탓인가, 막상 이런저런 비판을 듣는 시민운동가들은 비판에 대해 상당히 무덤덤해 보인다. 내가 당당하면 그만이지, 내가 깨끗한데 뭐. 일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를 ‘과도하게’ 부각하면 좋은 뜻을 갖고 고생하는 다수에게 심각한 피해가 갈 수도 있잖아. 뭐 대충 이런 생각을 기본으로 깔고, 여기다가 조중동 등 수구언론의 불순한 책동이란 생각까지 보태지면 무덤덤한 태도는 이내 방어적으로 변하게 된다. 비판은 모략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에코생협 보도파문으로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최 열 환경재단 이사장이 지난달 12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환경단체 신년하례회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시민의신문 DB자료> 이정민 기자 jmlee@ngotimes.net


운동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비판에 대해 자주 내세우는 논리는 실용주의적이다. 명백히 범죄를 구성할 정도의 잘못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까지 엄밀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실용주의 노선의 몇가지 사례이다.  


사례 1: 지역의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지난해 보수적인 색채의 지역개발회로부터 약 2천만원의 장학금을 받았다.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지역개발회는 개인 및 장학회 등 법인들이 그 활동가를 위해 목적기탁금 형식으로 모은 돈을 전달했을 뿐이며 ‘어떤 특정한 의도’는 없다고 했고, 활동가가 속한 단체는 “지인 등 20여명이 개별적으로 모아 지원한 후원금을 가지고 우리 단체의 감시. 견제 기능을 문제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 활동가는 11년 동안 시민단체에서 일했으며, 지난해 8월 1년간 안식년을 받아 미국의 한 대학으로 NGO 관련 연구를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이 단체는 경제정의.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평화적 시민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민주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사례 2: 시민참여, 시민권리 찾기, 시민에 의한 권력 감시, 시민봉사, 재정자립을 주요 활동방향으로 설정하고 활동하는 지역의 대표적 시민단체에 최근 상공회의소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인사가 대표로 취임했다. 지역 현안을 해결하기에 적임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민단체와 상공회의소의 어색한 간극은 “지금은 보수나 진보에 연연하지 않고 함께 지역 현안을 해결할 때”라는 취임사 한마디로 얼버무려졌다.  


사례 3: 환경운동연합이 최근 원자력발전소 등 감시 대상 기업들에게 물건을 강매했고, 대표가 이사로 있는 자동차 회사에도 대량납품을 추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환경련은 “기업에만 판 것은 아니다”라며 억울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식의 사례는 끝이 없다. 거의 브로커 수준에서 피해자들의 ‘뽀지’나 뜯고 다니다가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된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시민단체의 잘못이 단순히 일부 인사의 일탈행위에만 그치지 않는다는데 있다.


말로는 대안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온갖 연줄이 단체를 운영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는 사례는 너무도 많다. 학연, 지연, 혈연, 정파 등의 패거리가 판을 치고, 패거리의 이해와 요구에 충실하지 않으면 당장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다. 적당히 밀어주고 당겨주는 구조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쉽지 않다. 패거리의 구조는 연대의 질서라고 불리기도 하고, 동지애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그 배타적이고 속물적인 속성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돈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한국적 풍토에서 회원의 회비만으로 단체를 운영하기 힘든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힘든 것과 불가능한 것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 시민단체가 이런저런 정부지원금에 눈독을 들이고, 의도가 뻔히 보이는 부당한 지원에 애써 무감각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정부지원금이나 각종 수익사업에 기대 10명이 일하는 것 보다 회비만으로 5명이 일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물론 고통스런 선택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주 내세우는 것이 바로 실용주의적 노선이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노선이 운동의 원칙을 훼손하고 있다면 당장에 폐기되어 마땅하다. 운동이 운동이기 위해서 가장 절실한 것은 원칙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운동에서 원칙이 중요하다고 하여도, 지금이 1987년이 아닌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많은 것이 변했다. 정권교체가 있었고, 역사상 가장 개혁적이라는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지도 2년이 지났다. 더 이상 운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는 세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과연 세상은 바뀌었나? 우리 운동하는 사람들이 그리던 꿈은 이제 이뤄졌는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소외’되고 있고, 아예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가난은 대물림되고 있으며, 다른 이유 없이 오로지 돈이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한 젊은이들, 돈이 없어서 가족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 돈이 없어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당장의 죽음을 무슨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 돈이 없어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소수의 부자들이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현실은 부의 양극화라는 알 듯 모를 듯한 근사한 말로 포장되고 있으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조금 더 소비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어린이, 청소년들도 끊임없이 학대당하고 있다. 자연, 공동체, 가족 등 우리가 말로는 소중하다고 인정하는 가치들이 돈과 무한소비 때문에 파괴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상이나 인간은 원래 그래, 현실 사회주의도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망해버렸잖아’ 하면서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세상이 그래도 희망을 찾아 부단히 움직이고, 큰 방향부터 다시 잡아야 한다고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것 같은 고독 속에서 투쟁에 투쟁을 거듭하는 것이 운동이 아닌가. 운동하는 사람들만이라도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원칙을 제시하고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오로지 가난한 민중에게 무엇이 더 유리한가, 지속가능한 세계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골몰하며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이념을 갖고 원칙을 부여잡고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교조적인 태도만 갖고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겠냐며 유연한 대응, 즉 실용주의적 노선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실용주의적 노선은 꼭 운동단체가 아니어도 정부, 기업, 언론, 학계 등에서 모두 한결같이 믿고 따르는 노선이 아닌가. 모두들 실용적으로 갈 때,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원칙론자들이 있어야 세상은 그만큼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운동마저 실용주의적이어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운동의 생명과도 같은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이든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더 넓은 사무실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하고, 더 많은 인력이나, 이를 통한 더 많은 영향력과 더 많은 일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운동하는 사람들만이라도 생명을 잃고서 얻는 더 큰 영향력 따위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 이 글은 [열린사회 2005년 3,4월호]에 게재된 내용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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