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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작가 설총식, 유인원의 '자리 만들기'

명퇴를 앞둔 고릴라처럼, 살려고 날뛰는 침팬지처럼
유원인(類猿人)의 ‘자리 만들기’…조소작가 설총식, 노동의 소외·생존경쟁 담아
 
조소작가 설총식이 만든 우화적 주제의 입체작업 다섯 점 <자리 만들기>는 ‘다섯 마리의 사람들’을 엮어놓은 입체 작품이다. 유인원(類人猿)에 빗댄 유원인(類猿人)의 생존경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원숭이를 닮은 사람들이 현대사회 생존경쟁의 장에서 연출하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직립보행이 가능한 유인원인 고릴라와 침팬지는 사람의 모습을 빗대어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한 동물인데, 이들의 골격에 사람의 모습을 담고 옷을 입힌 것이 <자리 만들기> 연작들이다.

한 때 많은 예술가들 사이에 억센 팔뚝의 노동자, 농민을 통해서 일하는 사람의 건강한 정서를 담으려는 도식이 횡행했다면, 근간에는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의 비애 섞인 모습들을 담아내는 것으로 또다른 전형성을 만들어 냈다. 이 때 이전과 다른 모습이 있었다면 그것은 일러스트레이션의 형상을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일러스트 기법이 도입된 점이다.

설총식의 작업들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의인화한 동물의 형상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다섯 점은 동일한 모티브로 ‘동물+사람 이미지’를 자신감 있게 선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위기에 놓인 직장인의 모습을 통해서 현대인의 비애를 담아내는 일, 그 가운데서도 넥타이에 서양식 정장을 입은 남성 직장인의 모습으로 현대인을 다루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그리 넓지 않을 법도 하다. 설총식이 이 식상함을 넘어서는 방식은 의인화한 우화적 요소, 입체에 그림 그리기 또는 설치구조물을 통한 일련의 이야기 구조 등이다.

설총식은 1968년에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1996년)와 같은 학교 대학원(2004)을 졸업했다. 2002년에 첫 번째 개인전 <설총식:나는 일한다, 고로 존재한다>(관훈갤러리)를 열었으며, 이번에 두 번째 개인전 <설총식:자리 만들기>를 열었다.

‘그림 그리는 소조각가(塑彫刻家)’라는 점은 설총식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의 입체조형 작업은 그냥 덩어리와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그림을 그려넣어 회화적 일루전을 입체 작품에 가미함으로써 비로소 마무리된다. 말하자면 ‘그림 소조각(painting sculpture)’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폴리코트 작업에 색을 입히는 작업은 브론즈의 느낌을 내기 위한 단순한 채색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설총식의 작업은 입체조형 작업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그림 그리는 작업에 의해 보다 강렬한 네러티브를 획득한다. 머리카락과 잔털, 면도자국, 피부의 잔주름과 옷깃의 그림자들까지 섬세하게 그려 넣는 소조각가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입체를 빚어내는 손길과 그 위에 색채와 형태를 불어넣는 붓질의 만남을 새삼 경이롭게 관찰하게 된다는 점. 이것이 설총식의 도드라지는 매력이다.

이러한 유원인 조형 작업들은 일련의 파이프 구조물 장치를 통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일련의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실업의 우울함을 담은 실직자의 모습 뒤로, 이직을 앞두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눈치를 보는 침팬지와 과감하게 다른 구조물로 건나가는 침팬지가 이어진다. 건너오는 침팬지를 향해 맹렬하게 짖어대며 방어기재를 작동하는 녀석이 있고, 그 옆에 명퇴를 앞둔 고릴라가 덩그러니 앉아 있다. 유인원들의 동물적인 본능에 의한 공격성과 방어기재들을 확인하면서 유원인의 삶 속에도 생존경쟁의 원천적인 모습들이 배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로 노동 개념을 묶어두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노동의 소외 현상을 안고 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의 노동은 불안과 위기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설총식의 구두 진술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포함한 현대인의 일반적인 삶의 전형을 가지고 소외된 노동의 면면을 얘기하고 있다. 설총식이라는 예술가 자신의 삶 속에도 자본주의 조직사회의 경쟁관계가 침윤되어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화적 에피소드를 모티브로 하는 <자리 만들기> 연작들이 총체적 세계 인식의 층위를 거대담론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에피소드와 총체성 사이에 드리운 커다란 간극을 넘어서려는 무모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가 노동의 소외와 고용불안의 증후군을 다루는 것은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에 드리운 현대인의 깊은 신음을 토해내는 겸손한 성찰의 과정이다. 예술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깊은 자기 투영의 산물인지/이어야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김준기 사비나미술관 학예연구실장 
     
2005-03-04 오후 1:33:09  입력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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