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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17
    우리의 유적존재에 관하여...[희망의 공간]
    우중산책
  2. 2009/08/16
    귀농에 대하여...(잡생각)(1)
    우중산책
  3. 2009/08/16
    일요일...멍때리기..^^;;
    우중산책
  4. 2009/08/15
    공간에 대한 공부....ㅎㅎ(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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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9/08/14
    도시화의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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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9/08/13
    유동하는 공포(2)..영은묻고 나 답하기..(6)
    우중산책
  7. 2009/08/12
    읽고 정리못한 책들..^^;;
    우중산책
  8. 2009/08/12
    유동하는 공포(1)..영은 묻고 내가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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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9/08/11
    아버지와 계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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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9/08/11
    나의 2009년 여름휴가 계획...
    우중산책

우리의 유적존재에 관하여...[희망의 공간]

  • 등록일
    2009/08/17 12:42
  • 수정일
    2009/08/17 12:42

아직도 희망의 공간을 가지고 헤매고 있다.

가급적 내일까지는 다 읽자라는 나름 굳은 결심을 해본다...크크

(야 ! 제발 질질끌면서 책읽지 말자...제발,,,,낼까정 꼬옥..꼭.....다 읽어 ....알았쥐..?..다짐다짐...크크)

 

어제 저녁 출근전에 잠깐 읽은 한구절이 내내 머리속에 남았다.

 

...'우리의 유적존재'에 관한 개념화...

노동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에 의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우리의 능력에 관해 말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임의적으로 제약된 상상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자신을 어떤 종으로서 이해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관련하여 우리의 특정한 능력과 힘(맑스가 설명하는 '잠재의식적 힘'을 포함하여)을 이해하는 어떤 방식을 전제 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에 대해 가지는 변증법적이고 신진대사적인 관계와 그 관계를 통하여 다시 인간 본성(특수한 성질과 의미를 가진)으로 되돌아오는 관계는 우리의 미래와 운명의 건축가로서 우리가 다성할 수 있는 것의 밑바탕에 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계와 신진대사적 관계를 가지는 감각적인 존재이다. 우리의 활동과 노동을 통해서 우리는 세계를 수정하고, 또한 그렇게 하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킨다. 다른 모든 종처럼 우리는 종 고유의 특별한 능력과 함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사회 조직에 대한 우리의 형태를 바꾸고 적응해나가는 능력

(예를 들어 노동의 분업, 계급구조와 제도의 창출 등)

언어를 통해 오랜 역사적 기억을 조성하는 능력,

미래 행위에 대한 지침으로서 우리에게 가능한 지식과 이해를 축적하는 능력,

경험으로부터의 학습(우리 자신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했했던 것 그리고 행하고 있는 것에 관해 반성하는 능력,

그리고 우리의 특별한 솜씨 덕분에 우리 자신의 신체적 구성에 의해 주어진 생리적 제약을 넘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종류의 부속품(도구, 기술, 조직 형태, 통신체계)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능력 등이다.

그 결과는 문화적, 기술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진도와 방향에 매우 민감하도록 우리의 유적 존재와 우리 종의 환경에 적응하고 또한 이를 변화시키는 속도와 규모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배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역동성에 따라 생산하고 행하는 것의 대부분(모두는 아니더라도)을 이룬다......

 

 

...................................

 

내가 인간이라는 유적존재로서 생물학적 종으로서

이런 능력을 가지고

무엇인가 생산하고 관계된 모든 것들을 변화시킬수 있는 능력을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수 있을까 ...?

 

물론 피상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지만

스스로는 개인적으로 아 !! 반성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런 유적존재 혹은 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생각들이 자칫

인간의 교만 혹은 자연지배력으로 분출될 수 있는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다시한번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나의 모습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잠재의식적인 능력과 힘을 가지고

어떤 식의 삶들을 살고 있는 것일까 ?

대다수 종으로써의 인간은 이러한 능력과 힘을 가지고

더욱더 인간을 인ㄱ나으로서 살지 못하도록 하는 시공간들을 창출하는 데

경쟁적으로 뛰어들며 체제들을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결국 가진것에 비하여 이루어 놓은 것이 빈약한 사회가

점차 우리들을 인간이라는 종으로써 살아가기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살짝...이 모든 인간의 종으로서의 능력과 힘들에서...

실은 이 모든 능력들을 망각하고 무능력하게 적응하는 자장 무서운 능력또한

우리에게는 있는 것처럼도 생각되어진다....^^;;;......

 

음...인간으로서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인지...모르겠다....라는 생각을 미친놈처럼  밤새 일하면서 했다.

손발은 돈벌기 위해

머리는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심에

그렇게 밤은 더웠고 지치고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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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에 대하여...(잡생각)

  • 등록일
    2009/08/16 18:23
  • 수정일
    2009/08/16 18:23

저번주에 흙살림에서 상근을 하시는 선배로부터

귀농학교에 대하여 제안이 왔다.

음...이번 귀농학교에 함께하면 학교 졸업후에 귀농정착자금인가.? 농가구입자금인가를 지원해 준다니

생각있으면 함께하자는 거다....ㅎㅎ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나서

이런 저런 자료도 보고 뭐...생각도 해 보았다.

 

귀농이라....

내가 살아오면서 특별히 대도시에 산다는 느낌이 있거나

내가 농촌과 유리되어 산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탓인지

귀농이라는 말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농가주택자금이니 하는 것들에 혹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웬지

내가 입을 옷은 아닌것처럼 낯선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나중에 귀농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활동가들이 조금 되는듯 싶다.

또 나랑 가장 친한 친구놈도 귀농하여 괴산에서 버섯농사를 짓고 있으니

귀농이라는 것이 낯설 탓이 없건만

아무래도 나의 밴댕이 같은 마음이

조금은 삐뚤어져 버린 탓도 있으리라 생각한다....ㅎㅎ

 

그러고 보면

대안교육을 한다고 시골로 들어간 후배들은

이번에 어딘가로부터 2억원의 자금을 지원받고 1억 5천만원을 조달하여

일종의 공동체마을(?)을 구상하며 실행해 볼 모양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을 하고 있고 아마도 곧 가시화할 모양새다.

산림조합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20여평의 건물을 짓는데 5천만원정도면 될거라는...

그 돈도 없으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손수 집을 지어서 사는 것도 좋을 듯 하다는 제안을 받았다는

주변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최근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사이에 많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듯도 싶다.

 

내심 나랑은 가는 길이 다르다는 생각에서

딱히 부지런 떨면서 함께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은 탓도 있다...ㅎㅎ

 

내가 귀농이라는 것에 대하여 조금 낯설어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은연중에 소위 활동가였던 사람들은 귀농이라는 말을 쓰면서

어떤 이미지들을 조금 이상하게(?) 잡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자급자족이니 반자본주의니 하면서

마친 농촌이 무슨 로망의 대상처럼...

농사가 대단한 운동적 방식 혹은 삶의 방식처럼 이야기한다는 거다.

이 나이 먹도록 농사를 지으면서..(물론 아버지 농사에 몸으로때우는 식의 농사였지만)

나에겐 그런 로망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농촌이 농촌만의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는 단위로 생각되어진 적도 없는 듯 싶다.

내가 농촌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 이유도

이미 농촌은 농촌만의 자급적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이미 도시의 주변부로 도시에 의탁하는 삶

즉, 도시의존성에 기반한지 한참이 지난 것처럼 느껴지는데

왜 새삼 귀농이 이처럼 로망의 대상이 되는 지 모르겠다.

 

소위 진보적 활동가로 자처했던 사람들의 귀농한 사례를 몇몇 군데에서 이야기를 듣고

또한 지금도 어렵지만 그런 귀농 공동체를 꾸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의

그 힘들지만 스스로는 보람되게 생각되어지는 경우들을 종종 본다.

하지만 난 여전히

의심스러운 입장이다.

 

잘 보면

그들이 애써 외면하곤 있지만

그들은 귀농을 하면서

오히려 도시의존성들이 더 강해진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거다

귀농해 살면서도 그들의 심정적 감정적 의존은 도시에 사는 누군가에게 향하고

그들이 자급자족을 부르짖는 많은 것들이

도시에 거주하는 누군가의 도움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귀농...?...

(여기서 내가 심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귀..다...어디로 돌아간다는 걸까 ?....?...)

한다기 보다는

먹고살기 위해 농사를 선택했다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심통스러운 마음이

내내 떠나지 않는다.....ㅎㅎ....(그래서 난 밴댕이다....크크)

 

나도 나중엔 농사지으면서 살고 싶다.

복ㅈ바한 생각들 보다는 몸을 쓰면서 사는 삶을 살고 싶고

이왕이면

내 몸뚱아리를 누군가에게 저당잡히기 보다느 ㄴ

내가 나의 몸에 대한 권리를 유지한 채 살아가고 싶은 거다.

하지만

난 귀농을 한다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그저  농사짓고

어떤 마을의 평범한 누군가가 되고 싶을 뿐....

 

그게 그건가...?

여튼...요즘

주변의 귀농바람에 다소 의심...다소 걱정....뭐 그렇다는 거다..

에구구...날이 더우니 쓰잘데기 없는 생각만 무럭무럭이다....^^;;

 

그래서

걍 몸으로 짓는 농사 생각에서

보다 농사 혹은 농촌이란 행위와 공간에 대하여 공부를 해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괴산에 있는 친구놈이

애써 귀농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는 것처럼

나름 어떤 생각들에 구체적인 이유를 찾아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다.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해서 등한시한

농사와 농촌....

어쩌면 그런 태도들에서

이상한 로망들이 나타날지도 모르고

그것이 나중에 나에게도 나타나지 말라는 버이 없지 않은가 ?

그러니

너무 익숙하다는 핑계로 쉽게 고민없이 움직이기보다는

좀더 면밀히 공부하고 고민해보아야 겠다...

 

귀농...

여전이 나에게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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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멍때리기..^^;;

  • 등록일
    2009/08/16 17:34
  • 수정일
    2009/08/16 17:34

오을은 일요일이다.

하루 종일 멍때리기...?....진짜로 간만에

멍하니 하루를 보내다.

 

실은 토요일 후유증이 오래간 거다.

 

토요일 아침에 퇴근해서

잠 한숨 못자고 고등부아이들 앰티가는 거 도와주러(?)..

잠안자고 공부방에 갔다가...대충 두 눈꺼풀만 좀 쉬게 해주고 11시부터 회의를 했다.

그렇게 회의를 나름 적당히 끝내고 혜린과 커피숍에서 이런저런 수다떨다가

생협일 좀 정리하다가 자려고 했는데

직장회식에 꼭 오라는 성화에 다시 직장회식자리에 참석했다.

그렇게 이리저리 시간보내다가 다시 밤이되고

밤엔 잠 못자고...그렇게 일요일 아침에 잠들었다가 따시 깨어나고는

하루종일 퍼져 있는 거다.

 

나름 오늘 읽을 책들도 꺼내놓고

어제 이야기한 것들을(..수다내용...ㅎㅎ) 정리해 보자 싶었는데

걍 하루종일 머리 아프고 답답하고 더워서 멍때리고 말았다....젠장....크크

 

어제 잠깐 서점에 들러서 보려던 책들을 구해보려고 했는데

결국 한권도 못구하고 터벅터벅...집에 있는 책들을 조금 뒤져보니

옛날에 읽었던 책들이 몇권 보인다.

그래서 이거라도 읽어야지 싶었다.

 

우선 지금 눈에 들어오는 책은

정기용의 건축관련책인 [사람,도시 건축]이다.

음...전문서적은 아니고 건축가가 바라보는 일종의 에세이집 비슷한

세상이야기다.

 

저번에 읽었을때 나름 재미났던 기억이 나서

머리아프지 않게 읽으려고 다시 꺼내 들었다.

 

그렇다가

아참...그러다가 사놓고 읽지 앟은책 또 한권 발견...?....ㅎㅎ

도리스 레싱의 [런던스케치]가 집에 있었다...크크

이것도 이번주에 읽을 수 있으려나 싶다.....

저번에 누군가의 블러그에서 도리스 레싱의 책 소개글을 읽고

요즘 도리스 레싱의 소설책들을 간간이 읽는  중이다.

그래봐야 [마사퀘스트]랑  [황금노트북]이지만....ㅎㅎ

뭐 여튼 읽어보려고 한다....음...

요즘 지나치게 책 읽는 재미에 빠져서 몸뚱아리를 고정시키는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긴 한다.

하지만..뭐 여름이니....^^;;

조금만 쉬려고 하는 것이다.....ㅎㅎ

 

여튼

책이라도 열심 읽어야쥐 싶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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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대한 공부....ㅎㅎ

  • 등록일
    2009/08/15 10:27
  • 수정일
    2009/08/15 10:27

내친 김에 보다 더 공부를 해보리라 생각하고 있다.

 

우선

르페브르의 공간론(...[공간의 생산]을 중심으로...)에 대해서 공부해보고

이-푸 투안(공간과 장소)과 에드워드 소자(공간과 비판사회이론)를 읽어 볼 생각이다,

조금 다른 경향이기는 하지만 

질 발렌타인의 [사회지리학]이라는 책도 공부해 볼 요량이기는 하다.

혹시 구할 수 있으면

[공간과 사회]라는 잡지 책(한구공간환경학회 발행)을 구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뭐 이 방법은 청주에서는 사실상 힘들것 같아서 미리 포기....ㅎㅎ

 

음...자꾸 책읽고 공부하다보니

점점더 알고 싶은 것들이 늘어나는 형국인데

보통 이런 상황이면 짜증이 날텐데 이상하게 [공간]에 대한 관심은

조금씩 더 흥미를 주는 모양새다.

 

이런 느낌은 과거 [맑스주의]책을 읽을때 와 사뭇 비슷한 느낌이랄까...?....ㅎㅎ

뭐...여튼 나름 진지해지고 진득해지는 것 같아서

나름 아 !! 나에게도 이런 면이...?...하면서

스스로 대견해 하는 중....ㅎㅎ

 

아참...지금은

짬짬이

[공간이론의 사상가들]이라는 개론서를 읽는 중이다.

음...뭐 항상 그렇지만 이런 류의 책은 언제나 나를 실망시킨다.

이게 뭐야...?...하는 식인데도... 꾹 참고 읽는 중이다.

문제는 이 책은 너무 간략한 소개로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원래 글들이 월간지에 실렸던 기사라서 그런지

너무 대충이고 너무 간략해서 충분히 알 수 가 없다,

다만 아 !! 이런 사상가들도 있었군 정도 ?....뭐 그렇게 생각하니 그런 정도의 정보는 주는 책이군...ㅎㅎ

뭐...여튼 돈이 아까운 책이다....공짜로 얻었다 해도 절대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보다는

관심가는 사상가 소개란 만 잠깐 씩 살펴보아야 하는 책인 듯...ㅎㅎ

그러고 보니 

이 책에 대하여 지나치게 혹평이군....^^;;

뭐 여튼 읽다보니 그렇다는 거다....푸하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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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화의 노동...

  • 등록일
    2009/08/14 14:40
  • 수정일
    2009/08/14 14:40

데이비드 하비의 [희망의 공간]을 두번이나 연속해서 읽고 있으면서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피곤한 몸 핑계대면서 실은 머리가 쉬고 싶은 거까 ?...싶다.

 

요 며칠

실은 일도 안하고 있다.

 

...우리가 도시의 미래를 숙고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과업의 속성'에 관한 우리의 의미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혼란시키기도 하는 광범위한 감정적, 상징적 의미와 항상 싸워야만 한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우리의 도시를 생산하는 것처럼, 우리는 집단적으로 우리 자신을 생산한다.

따라서, 우리의 도시가 어떠하기를 원하는가에 관한 프로젝트는 인간 가능성에 관한 프로젝트, 즉 우리는 어떤 사람이기를 원하는가, 또는 보다 요령있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가에 관한 프로젝트이다.

우리 가운데 어떠한 개인들도 이에 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해야 할 어떤 것을 가진다. 따라서 우리의 개인적 및 집합적 상상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도시화의 노동을 정의하는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에 관한 비판적 반성은 우리가 거주하는 제도적 및 상상적 세계의 '무력한 꼭두각시'라기 보다는 운명의 의식적 건축가로서 행동하기 위하여 숨겨진 유토피아주의에 대응할 뿐만 아니라 이를 부활시킴을 의미한다.

 

만약 '사화란 만들어지며 상상되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도시가 '다시 만들어지고 다시 상상되도록'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데이비드 하비...희망의 공간 (p219-220)

 

공간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특히, 건축적 관심이 폭주한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어쩌면 [유토피아]에 관련된 징후인듯싶다.

내가 꿈구고 상상하는 어떤 공간을 실현하고픈 욕망이 넘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그런 공간적 상상이 건축물처럼 단순한 공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사회화 과정으로서의 시공간적 과정에 집중하려고 스스로 노력중이긴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우리가 행하고 만들고 꿈꾸는 모든 것들은

단순한 결과무로 존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재구성되고 재발결ㄴ되면서

유동적으로 변화한다고 생각되어진다면

결국 남는 것은 과정으로서의 공간적 유희가 아닐가 하는 생각을

책읽는 내내 했었다.

 

가령 한옥이 몇 백년간다고는 하지만

실은 그 뼈대의 이야기 일뿐 실은 몇십년마다

살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변화를 겪는다.

 

한옥답사를 가 보아도

2-300년된 한옥이라고 해서 당시의 부재가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다만 그 건물을 지은 사람의 마음만이 남는달까 ?

 

아무리 구운 기와라도 5-60년 이면 지분의 기와와 올려진 흙을 갈아주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고

벽채의 흙들도 50년 정도마다 헐어내고 다시 치대어 쓴다.

결국 우리가 만들려는 공간에서의 공동체 혹은 공간적 유토피아 또한 결국

사람의 세대가 변하면 언제나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겠고

그렇게 변화한 공간에서

여전이 유의미하게 살아남는 것은 삶의 과정과 우리들 실행하고 재구성하려 했던

상상의  집단적 과정은 아닐까 ?

 

여러모로 복잡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스스로 과정으로써의 공간적 유토피아를 꿈꾼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지난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한다.

아마도 공부가 부족해서 그럴까 ?

 

여튼

두번째로 다 읽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정리해 보아야 겠다

이 책 읽다보면 묘한 매력이 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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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2)..영은묻고 나 답하기..

  • 등록일
    2009/08/13 14:51
  • 수정일
    2009/08/13 14:51

으으.... ...뭐야.....

영은 너무하는 거 아니야...이건....흑흑흑..

이건 뭐랄까 ....영은이 땜시

완존 내가 숙제하는 기분이랄까...?

이렇게가지 해주면 난 어떻게 하란 말인지.....^^;;

 

내가 믿고 있는 것이 겨우

가물가물한 기억력 몇 가닥인데

이처럼 마구마구 숙제를 던져주면...난...난....흑흑흑

으아아아앙......

 

옆에 혜린샘이나 종민샘 있으면 대신 답하라고

강요하고 싶어질 정도군....크크크

 

여튼

이렇게가지 영은이가 정리했는데

밍기적 거릴 수 도 없고....그렇다고 걍 가물가물한 기억을 믿고

부정확하게 답할 수 도 없고

진짜로 난감하군....갸갸갸갸....

 

여튼

나 진자로 기억이 잘 안나...하는 자기방어적 변명을 먼저 하고 싶어진다...ㅎㅎ

진짜로 머리가 딴나라로 놀러 갔다는 것 이해해주고 읽어주길 바란다....ㅎㅎ

 

나중에 네가 책 돌려주면

제대로 나두 정리해 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단다...ㅎㅎ...물론 나중에 시간이 되면

이라는 단서가 붙지만....히히힛

 

여튼

네가 묻고 있으니 외면할 순 없고

뭐...여튼 답은 해 볼 요량....ㅎㅎ

 

악과 공포

 

 

영은

악과 공포는 샴쌍둥이에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악이고 악이라고 하는것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래요. 근데,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모두가 악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죽음도 악인가요?

여기서 악은 설명 할 수 없는 것, 이해 할 수 없는 것, 칸트에 말로는 인간이 이해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닌 예지계에 속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지계에 있는 것들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존재를 알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여기서 궁금한건 앞에서 악이라는 것이 설명 할 수 도 이해 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뒤에서는 계속 악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어요. 읽으면서 종종 그래서 도데체 악이 뭔데? 하는 생각이 들고 악이란게 정의 되지 않으니까 뭔가 계속 한편에서 납득이 잘 안간달까.. 그래요.

 

=>

음 말그대로 악과 공포는 샴쌍둥이가 맞는 듯 하다.

다만 한몸이면서도 다른 존재랄까 ?

결국 우리들을 공포스럽게 하는 것...그렇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써

즉, 두려워하는 존재로써 우리들은 악을 상정한다는 거겠지.

결국 공포가 오면 우리는 그 공포를 우리에게 주는 어떤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데 그것이 곧 악이 아닐까 싶구나. 그렇니까 공포가 오면 악도 따라서 온달까 ?.....ㅎㅎ

내가 칸트는 잘몰라서 말하기 많이 망설여지지만 생가해 보면 우리 인간이 상정하는 악이라는 것은

어쩌면 구체적인 현실 혹은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관념적 상징처럼 보인단다.

즉, 우리를 공포스럽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악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이지.

따라서 성서에서 예언서들이 하는 역할 즉, 보여주고 현시하도록 해주는 것이 아닌 막연하게 던져주고 그 공포감을 가지고

신에게 귀속시키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공포를 만났을때 막연히 그 공포를 받아들이든 저항하든지 간에

그 공포를 주는 어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악이라고 상정하고 혹은 명명한다는 것처럼 보인단다.

따라서 이렇게 악이라는 것 자체에 이해불가능성을 상정하고 있기에 우리가 이해 혹은 납득할 만한

무엇으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것이 악이라는 개념이 아닐까 싶다.

 

 

영은

이성은 보편적이고 사라지지않은 것이에요. 이성이 어떤 것을 이해할때는 도구상자와 작업방식에 있어요. 도구상자와 작업방식이 발달 될 수록 이성이 점점 약화된데요. 악을 이해할때요. 왜 그런거에요?  [이성의 작업방식이 더 효율적이 될수록, 악에대한 잡업만큼은 더 부적절해지고 분에가 많기 된다.]라고 나와요. 악이 이해 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라서 그럴까요? 그럼 왜 악이 설명되거나 이해 될 수 없을까요? 죽음에서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잖아요.

 

=>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선은 악이라는 것이 이해불가능한 어떤 것들로 우리가 상정하는 그 출발에서 문제가 있는듯 싶구나

이성이라는 것을 통하여 인간들은 어떤 대상 혹은 실체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데

이런 이성적인 작업을 통해서도 납득하거나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우리는 악이라는 개념을 빌려서 사용한다고 치면

결국 이런 악을 상정하는 것 자체를 이성적 작업을 통하여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할 수록 이상한 딜레마에 빠지거나 더욱더 부적절한 어떤 것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지/

결국 이성적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것들을 악으로 상정한다는 것.....

이런 문제가 아닐까 ?

 

 

 

영은

과거에는 이해불가능성 띈 악의 관념을 표면화하지 않았어요. 악이란 죄를 짓게하는 것이였고 죄를 진 죄인은 벌을 받아야 했죠. 그래서 고통(벌)을 받는 사람에게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고백하고 회개하라고 강요했어요. 정신분석가들은 현재의 고민이나 문제는 어린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어요. 그렇기에 계속해서 앞에 처럼 인식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시절의 경험을 찾으려 하기도 하죠. 악에 대해서 죄를 찾는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알 지 못하죠. 그리고 악과 죄에 대한 관련이 있는 것 조차 의심없이 믿고 있구요. 오히려 빠져나갈 곳을 찾기위해 원죄같은 걸 만들어 놓기도 하죠.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욥기라는 것이에요. 욥기는 성서에 한부분으로 욥이라는 아주 신실하고 착하고 아무튼 벌을 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 나와요. 그런데 그 사람은 계속 벌을 받게 되는 거죠. 기독교는 착한 사람이 복받고 나쁜사람이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교리가 있잖아요. 욥기는 이걸 깨고 불분명하게 하죠. 재밌어요. 여기서 재미있는 해석은 전지전능한 하느님도 자신의 힘이 공포스럽기 위해서는 예측불가능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는거에요. 욥이 그것을 모르는 이유는 근대인이 아니라서 구요.

 

=>

과거에는 악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었던것 같다. 다만 그 받아들이는 것을 악과 죄라는 것을 통하여 실행하려던 것도 같다,

즉, 우리에게 설명되어지거나 이해될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그에 따르는 벌을 가하는 것으로

그 악을 제거했다고 생각하였다는 거다.

딱히 설명되어질 수 없는 악에 대하여 그렇게 원죄까지 들추려고 했었던 것은 결국 과거의 악을 제거한다는 것은 악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적당한 벌을 주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탓이겠지...

 

여기서 문제는 악에서 죄를 찾는 것...에 있는 듯 싶구나.

절대적으로 상정된 악이란 이해불가능성에 기반한다고 치면 결국 악은 죄와 다른 측면이 있는것이다.

우리가 죄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구체적인 ㅅ니체를 가진 무엇이라고 상정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런 것들은 결국 인ㄱ나이 지배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실체를 지녔다고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악을 제거하기 위한 죄의 설정은 그 죄를 벌할 수 있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죄라고 상정한다면 차라리 죄를 벌과의 상관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를 듯..

하지만 악은 우리가 벌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이해불가능성에 기반하는 것으로 보인단다.

따라서 악에서 죄를 찾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무엇인가를 찾지 못한다는 것인 아닌

악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악은 우리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를 띄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여기서 한가지...

용기는 일종의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든단다.

즉, 우리가 신의 섭리라는 권선징악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일들이 발생하였을때

빠지게 되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장치가 욥기인것 같다는 거다.

즉,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신은 어쩌면 자신의 변덕으로 치부하면서

오히려 그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방식으로 인간들에게 이해하려는 것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

욥기의 원칙이라는 것이지

이렇게 보면 이해불가능성에 기반한 공포를 심어주는 것은 [신]과 [악]은 동일한것 같다.

즉, 차라리 [악]은 이해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제거하여야 하는 대상으로서

보다 인간의 적극적인 의지들을 반영하는 반면에 [신]은 인간 자체를 수동적이고 그저 공포를 받아들이는 미미한 존재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는 거다.

결국 동전의 양명처럼 [신]과 [악]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다른 곳을 보는 것이겠지...ㅎㅎ

 

 

 

영은

근대 철학은 리스본의 재해에서 부터 시작됬다고 하네요. 근대철학은 불규칙적인 자연재해와 의도적이고 목적성 있는 도덕적인 악으로 나뉘어 져요. 자연재해도 죄와 관련있다고 생각했던 생각에서 독립한거죠. 변신론이라는 신의 결정은 모두 선한 동기가 있다는 신을 보호하는 거에요. 그것을 깨게 된것이죠. 그러면서 사람들은 이 자연재해의 이유를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대표적으로 루소. 그리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악을 제거 하자는 말이 나왔어요. 과학과 기술이 있으면 인간이 악을 제거 할 수 있는 범위는 넓어지고 또한 모든 악을 제거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여기서 인간이 제거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악은 자연적 악이에요? 이 때는 인간적 악이 크게 문제되던 시기가 아니니까, 자연적 악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겠죠?

 

=> 근대철학은 리스본의 재해에서 찾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드디어 자연이나 신이 아닌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든단다.

즉, 이제가지의 고대 철학들이 자연을 이해하거나 신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불가능한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면

이젠 그 한계에 다다른 철학이 드디어 리스본 재해를 통하여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 근대철학의 시작이라는 의미겠지.

결국 악의 제거라는 것을 단순하게 자연을 이해하거나 혹은 신의 섭리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거고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한가지 가능성이 인간에게서 찾자는 것이 근대철학의 방식은 아닐까 ?

결국인간을 바라보면서 근대철학 혹은 근대과학이 악을 제거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불가능성이라는 것을 통하여 상정된 악을 이제는 이해하게 됨으로서 악의 지위에서 내려와 과학의 위치로 바꾸어 준 것이겠지.

이제가지 알수 없어서 악으로 치부해 버렸던 것들이

과학을 통하여 그 원인을 이해하면서 드뎌 과학적으로 규정되면서

우리들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무엇으로 상정하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악을 제거한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따라서 이제 문제시 되는것은

우리 인간의 문제 즉 인간적 악의 문제라는 것으로 시선이 모아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결국 근대철학은 인간적 악을 발견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라고 볼수 도 있다는 것이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더욱더 알수 없어진 것인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겠지.

자연을 과학을 알아갈 수록 인간을 더욱더 모르게 되어버렸다는 것

그런 인간들에게 더 큰 공포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근대철학의 암울함이랄까 ?

 

 

 

영은

근데 이제 인간적 악이 문제가 되기 시작해요.아우슈비츠 사건이에요. 아우슈비츠 사건은 유태인 대학살을 이야기해요. 인간적 악이 자연적악처럼 무시무시해 지는 거죠. 아무튼. 아우슈비츠 사건은 변신론이 리스본 사건으로 무너지고 나타난 변신론을 대신하던 것도 아무것도 아님을 알려 주었어요. 그렇다면 변신론을 대신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앞에서 나온 것 처럼 인간이 악을 제거 할 수 있다는 믿음을까요? 신이 죄를 짓는 사람에게 벌을 준다는 선한 동기라는 변신론이 무너지면서 인간은 예측 할 수 없는 벌의 공포를 가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악을 과학의 힘으로 제거? 아니면 근대의 모든 법률이 가지고 있는 가정, 모든범죄에는 반드시 사악한 의도가 있다는 것일까요?

 

=>

철학의 시선이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대상이 인간으로 돌아오면서

문제는 그 시선의 주체이면서 객체가 되어버린 인간의 몰이해성이 더 큰 공포를 준다는 것이겠지.

가령 자연의 이해불가능성은 어쩌면 쉽게 잊어버릴 수 도 혹은 신의 섭리로 알수 없는 자연의 섭리로 외면할 수 도 있었던 문제들이

인간의 시선에 포착된 인간은 그런 외면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 겹치면서

우리에게 더 큰 공포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바로 인간의 문제인것 같다.

 

 

영은

아이히만의 얘기로 넘아갈까요? 아이히만는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사람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아이히만에게서 이야기기 해야 할 것은 관료제에요. 아이히만은 관료제에 충실했던 것 뿐이라는 거죠. 악. 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사람은 아주 평범하고 우리와 다를것 없는 사람이에요. 우리와 같은 다른 사람들 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인 거죠. 다만 아이히만은 특별한 상황이였던 것이죠. 그리고 그런 자신의 이익 추구로 부수적피해가 일어난 것이구요. 그리고 아이히만은 유대인에 대한 학살에 대한 의도가 없어었죠. 다만 조직의 윗사람의 명령에 따른것 뿐이고 따르지 않으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죠. 여기서 앞에서 얘기 했던 모든 범죄에는 반드시 사악한 의도가 있어야 한다 라는 가정을 위협하게 해요. 그러한 가정을 위협하는것은 관료제에 있어요. 관료제는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지 않아요. 인간의 감정은 수시로 바뀌니까요. 다만 복종을 요구할 뿐이죠.

관료제에 있는 악은 두가지 특징이 있어요. 악의 평범화와 합리성이 있어요. 관료제에 있는 사람들의 의도와 동기를 모르는 체 악이 될 수 있어요. 이것이 악의 평범화 아닐까요?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관료제 안에서 동기가 없는 악이 되는 것이죠. 근대 사회에서는 이미 악의 없이도 악을 행할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합리성은 관료제 안에서 위에서 오는 임무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합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관료제에서의 악은 평범화보다 합리성이 두드러 진대요.

 

=>

관료제라는 것이 어쩌면 근대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것처럼 보인단다.

그런 의미에서 관료제라는 조직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지...ㅎㅎ

어떻게 보면 아이히만은 가장 두드러진 근대를 대표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단다.

즉, 단순히 조직에 대한 충성과 충실한 가족의 구성원..그리고 철저한 개인주의   랄가 ?

 

신자유주의라는 것의 추종자였던 영국의 총리 대처라는 사람이 한말이 있단다.

 

"사회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만 있을뿐..."

 

결국 관료제로 대표되는 아이히만은 어저면 신자유주의의 전형적인 인물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한단다

(나의 생각일뿐...ㅎ)

 

즉, 모든 판단과 결정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그런 개인적인 판단과 결정에 충실하기만 하면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겠지.

명령과 사회적인 악 사이에서 결국 그는 조직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결정한 것일텐데

이런 것들이 결국 현재 우리들이 겪는 사회의 문제가 아닐가 싶고

또한 우리가 끔찍하게 여기고 있는 인ㄱ나적인 악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행태가 아닐까 싶다는 것이지.

악의 없이도 악을 행한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에서 이해할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해불가능성...???

각 개인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와의 관계 혹은 사회라는 체제속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파편화되고 있는 것을 

우리느 악의없이 악을 행한다고 보는 것은 아닌지 싶구나....ㅎㅎ   

 

영은

인간의 이성이 근대적으로 쓰이면서 인간은 긴 우회로를 달리고 있었어요. 가면 갈수록 문제가 해결 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원래로 돌아가게 되죠. 우회로. 우리는 지금도 자연적인 악, 재해를 막지 못하고 있고 위험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죠. 실은 인간적인 악이라는 자연적인 악만큼이나 예측이 어렵거나 불가능하고 무시무시한 재해를 만든 것인지도 몰라요.

인간이 만든 악은 자연적인 악만큼이나 예측불허해요. (왜?) 그리고 자연적인 악을 예측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적인 악을 예측하지 못해요. 이런 현대 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면서 외면하고 고개 돌리기도 하구요.

칸트의 정언명령이 나와요. (윤리선생님도 어려운거라면서 잘 설명해주시 않은게 기억나더라구요.아무튼,)"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이거죠.  사실 이부분이 잘 이해가 안가요. 보편적 입법원리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구요. 보편적 입법원리와 대립하는 이중 잣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런건가.. 생각하긴해도 전혀 맞는 것 같지도 않구요.

근대에 이성은 독점을 형성하고 배타성을 확보하는데 있어요.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거나 다른사람들 (우리와 다른)를 배제하는 것에도 쓰이고 그것을 문제 삼지도 않아요. 근대적 이성은 행복을 추구하고 그것을 보편적인 소유물이라고 해요. 하지만 근대적 이성은 이러한 보편성 보다 특권을 위해 봉사해 왔어요,

그리고 인간적 공포가 무시무시하게 확대됨에 따라 생긴것이 있어요. 바로 신뢰성의 상실이에요. 아이히만이 지극히 정상이였던 것 처럼, 우리 주위에 사람들이 언제 악이 될지 모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오류가 있어요. 분명 많은 사람들은 악을 싫어하고 거부하겠죠. 하지만   적당한 조건이라는 것이죠. 적당한 조건에서 우리는 악이 될 수 있는 거에요. 그렇기에 리스크를 생각한다면 모두를 의심해 보는 것이 가장 안전해겠죠. 아.. 인간관계의 아슬아슬함을 말해요.
 

==>

결국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유동하는] 세상을 이야기하고픈 것이겠지.....ㅎㅎ

근대 이성이라는 것이 철저한 각 개인성을 기반으로 한 고립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란다.

즉, 모든 것들 실은 굉장히 사회적인 문제까지도 

이 사회에서는 그저 각 개인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책임으로 돌려 놓으므로써

더이상 [악]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제거하려는 노력들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란다.

결국 과거의 [신]처럼 어쩌면 세상은 

[자본]이라는 것을 신의 위치로 삼고 수동적 인간...그저 악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이겠지

이는 근대철학의 문제이기도 한것 처럼 보인단다.

인간이 가진 시선이 인간을 주체 겸 객체로 만들고 다른 모든것들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순간

인간들은 헤어나올 수 없는 딜레마에 갇혀서 허우적 거리게 된것처럼도 보인다는 거지

 

최근

이런 개인성 혹은 개별화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쉽게 볼 수있는 것 같단다.

사회전체 혹은 공동체의 문제마저도 등한시됨녀서

철저하게 개인의 관심사 혹은 개인의 문제가 오히려 공공의 논의들에 자주 등장하고

나아가서 그 해결과 책임도한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는것

그리고 각 개인들은 그저 리얼리티 쇼 처럼 그저 방청객이면서

마치 참여자로 착각하게 만들어버리는 사회

더 나아가 자신들이 행하는 악의없는 악에 대하여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마는 자기사면의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었단다....ㅎㅎ

 

===>

두서 없이 말만 한것 같아 미안하구나....ㅎㅎ

처음에도 이야기 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ㅎㅎ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 재미있었다고 생각했었던 것은

이런 유동하는 사회 그리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고립된 개인의 사회에서

우리는 그저 가벼운 네트워크 정도의 관계들을 유지하면서

스스로 범죄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반성을 했었던 것 같다.

 

아이히만처럼 

우리는 어쩌면

공포를 상정하면서 그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그저 [신]처럼..자본주의의 신인 [자본]에 맹목적으로 온몸으로 빌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더 나아가 애초에 공포를 이해하려기 보다는 모든 것들을 악으로 간주하고

그 악을 단순히 미워하는 선에서 모든 문제들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하고 있었던 듯 싶기도 하구나....ㅎㅎ

 

영은이가 이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길 바라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을 읽고 좀더 개별화되는 사회에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함개 살아간다는 것에대한 공부들을 해보는 것은 어떨지 싶구나...ㅎ

뭐...나보다 바쁜 고딩이니 그러기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

네가 사회 혹은 공동체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어질땐

항상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단다.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공포와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 말이다....ㅎㅎ

 

여튼

약속대로 미션을 수행했으니

음....주기로 한것은 주지....푸하하하

 

곧 감행하기로 한 1박 2일 가출을 멋지게 성공하길 빈다....

여행에서 가출에서 보자....수고  

 

(아차차...생각해보니 칸트 이야기를 빼먹었군....캬캬캬

음 정언명령이니 하는 문제는 잘 모르겠고

아마도 도덕적 의무감인가..? 싶다.

도덕적 이성으로써 해야한다고 판단된 것은 해야한다는 것...이겠지.

감성 혹은 동정 혹은 감응 등이 아니라 도덕적 의무감으로서 

해야 할일들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은 듯 싶구나....ㅎㅎ

뭐 자세한 것은 나두 칸트를 좀 만나보고 이야기 해주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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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정리못한 책들..^^;;

  • 등록일
    2009/08/12 15:50
  • 수정일
    2009/08/12 15:50

책을 읽고 꼭 정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왠지 나의 기억을 못믿는 것과

또 책이라는 것이 단순히 책만이 아니라'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크크크....일이다보니

왠지 돈 값(?)을 하기 위해서라도

정리하고자 하는 바램이 있다.

 

읽고도 정리하지 않은 책들이 무쟈게 많지만 그래도 정리해 보면..(최근 읽은 책들중 생각나는 것들)

 

- 희망의 공간..데이비드 하비

- 공간으로서의 건축...브루노 제비

- 한옥에 살어리랏다...새로운 한옥을 위한 건축인 모임

- 사물들과 철학하기 ...로제-폴 드루아

- 사랑의 길....뤼스 이리가레

- 구테 나흐트....디트마르 비트리히

- 현대세계의 일상성....르페브르

- 어떻게 더불어 살것인가...롤랑 바르트

- 등등(지젝...고진...바르트...책들이 몇권 있다....마을만들기(?) 관련 책들도 몇권이 있는 듯...^^;;

            아 ! 그러고 보니 건축관련 책도 몇 권있고...만화책도 몇 권....

            왜케 많은 거야..?....^^;;)

 

그런데 사놓고도 읽지 않은 책도 있다...?

나 미쳤나봐...크크크

 

- 민주주의와 교육/철학의 개조.......존 듀이(다시 읽자 싶어서 샀는데....^^;;)

- 호모 루덴스....호이징하..(종민덕에 샀는데...안 읽음...크크)

- 불안의 개념/죽음에 이르는 병...키에르 케고르(가물가물해서 다시 읽으려 샀는데 역쉬...킄)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역쉬...읽었던 것들 다시 읽으려고 삼)

 

그러고 보니 옛날에 읽었던 것을 다시 산것들은 읽지 않고 소장용이 되고 있다.

이게 뭔짓이야...제길....크크

 

지금 읽는 책은

- 공산당 선언

- 지젝이 만난 레닌(...ㅎㅎ...힘들다..넘 두꺼워....젠장..)

- 희망의 공간..(다시 읽는 중...뭔가 작업을 위해서...ㅎㅎ

                           근데 작업은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다...이유는 ?...정리가 안되서...^^;;)

 

내친 김에 요즘 읽고 싶은 책은

맑스 원전 몇권...

건축관련 몇권....캬캬캬

 

뭐 이러고 있다....

조금더 노력하자...돈을 생각해서라도 꼭 읽고 정리하기...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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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1)..영은 묻고 내가 답??

  • 등록일
    2009/08/12 14:52
  • 수정일
    2009/08/12 14:52

음..

한 두달전인가에 읽은책인데

나름 재미나게 읽었던 터라

영은이에게 읽어보라고 권하면서 나름 미션을 달았었다.

읽긴 읽되 나에게 설명해 보라고...ㅎㅎ

 

언제나 변함없이 읽어내는 영은이가 결국 시간내에 읽고

설명 겸 답을 해왔다.

음...그래서 읽고도 정리하지 않았던 책을 뒤늦게 정리할 까 싶기도 하다....ㅎㅎ

실은 읽고도 정리하지 않은 책들이 많아서

뭐...다음에 시간되면 그때하지 하는 게으름으로 뭉게고 있었는데

영은 덕에 스스로 반성하기도 했다....ㅎㅎ

 

근데 기억이라는 것이 요상해서

아 ! 잼나게 읽었었지 ? 하는 생각은 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까마득하다....

그래서 영은이가 묻는 것에 제대로 답할 자신이 없고 막막하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이 나에게 없고 영은에게 있어서..

책 다시보면서 생각할 나름 빠져나갈 구명이 막혀 있다....갸갸갸갸

여튼

그래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부족하지만

생각나는대로 써볼까 싶다.

 

 

[즉음의 공포]

 

영은

죽음의 공포는 리얼리티 쇼로 시작됩니다. 리얼리티 쇼로 추방, 해방, 사면 등의 단어들을 설명하고 있어요. <빅브라더> 는 한번에 한명씩 '추방' 해야하는 리얼리티 쇼에요.

 

여기서 추방이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의미로 설명되어있어요.

추방을 피하고 살아남을수 있는 확실한 길은 없고 정당한 추방도 없어요.

다만 추방해야하기 때문이에 추방하는 사람이 생기는것 뿐이죠.

근데 정말로 '추방'이라는 것이 그렇게 결정되고 성립되는지는 확신가지 않아요.

추방이라고 불리는 모든 경우에 수에 해당되지는 않다는 생각이에요. 

 

해방으로 넘어가면 해방이란 <빅브라더>가 가지고 있는 진실에 있어요.

그 진실을 <빅브라더>를 시청하는 사람들과 공유되고 있고 <빅브라더>라는 것으로 정당화되고 있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느낌이나 의심, 예감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게 되죠.

그러면서 '해방'이라는 단어가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진실은 뭐라고 설명 가능할까요?

 

사면으로 가요. 사면도 '해방'하고 비슷한가 싶어요.

사면은 퇴향적이면서도 전향적이에요.

이 말은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죠.

그리고 전향적이라는 것의 그 사람들의 잘못들이 용서되면서 정당화 되기 때문이에요.

여기서의 용서도 어제 읽은 그 용서와도 관계있는것 같아요. 

이러한 리얼리티 쇼에서의 메세지는 혹은 진실은 주기적인 추방 과정에 얽힌 애환을 최대한 밑바닥까지

파헤쳐 보여주는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음...

[지그문트 바우만]이 설명하고 있는 추방, 해방, 사면 등등의 단어들은

내 생각에 [근대적 시공간]이라는 시간성 혹은 역사성안에서 설명되어지는 것 같단다.

즉, 네가 계속 의문스러워 하는 것 즉, 우리가 인문학 수업을 하면서 단어자체가 가지는

의미들을 깊게 생가해 보는 것...특히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단어들을 재음미해보는 것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단어 설명들을 이해하면

약간씩 동의하기 쉽지 않은 것...어긋나는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거다.

 

가령 네가 [추방]이라는 단어설명에 가지는 의문도 실은 

[추방]이 갖는 사전적 의미 혹은 네가 생각하는 역사적 단어의 의미들로 보면 약간의 의문

즉, 모든 수에 해당하는 지에 대한 의심이 들기는 할거라는 거다...ㅎㅎ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은 

시청자들이 열광해서 시청하는 [리얼리티 쇼]라는 것이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것 같다.

즉, 리얼리티쇼가 보여주는 우리들의 일상적 삶의 상징성이랄까 ?

 

우리의 실상적 삶들이 일종의 일얼리티 쇼라면

우리가 이런 리얼리티 쇼에서 이루어지는

추방, 사면, 해방 등등에 대한 반응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런 참여과정들로써 우리들의 근대적 삶들이 설명되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인단다.

 

즉, 우리가 인정하고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추방은 실제로 현실에서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

왜 ...?

그것은 사람들이 각각의 개인으로서 판단하고 무엇인가를 결정해야한 다는 것

그리고 그 결정된것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개인적 책임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가 근대라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쩌면 그런 개인적 판단, 결정,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는 것

따라서 부당하고 불편한 규칙일 망정 사람들은 순순히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동조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처럼 보인다는 거다

 

심지어 해방조차 

해방을 위한 자신들 즉, 개인들의 변화된 무엇인가를 스스로 의심, 판단, 결정 책임지기보다는

그것이 잘못되었을지 몰라도 

구체적이고 눈에보이게 제시되어지면 대중이라는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거다...ㅎㅎ

( 아 ! 물론 그 대중들이 무식하거나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동의하고 마는 것...

이 무서운 진실을 리얼리티 쇼아른 것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ㅎㅎ)

 

 

영은

 고대의 교훈담은 권선징악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어요.교훈담은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첫째는 승리자는 추방에서 모면된 사람이고 복을받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벌을 받아요.

<빅브라더>와 <위키스트 링크>같은 리얼리티 쇼와 아주 비슷한 맥락이에요.

이렇게 이런 고대의 교훈담은 유동적 근대사회에서 수용되고 있어요.

근대사회에서 근대의 교훈담이 아닌 고대의 교훈담이 수용되고 있는 이유는

공포에서 눈돌리는 방법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사실 근대 교훈담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요.

 

두번째는 착한일과 나쁜일, 복과 벌의 관계과 뚜렷하지 않아요.

이것은 추방에 특성에 있어요. '정당한 추방'이 없다는 것, 추방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에요.

그렇기에 추방으로 이루어지는 교훈담이 착한일과 나쁜일, 복과 벌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죠.

근대의 교훈담은  복불복이에요. 복불복으로 추방과 벌이 떨어져요. 이유도 설명도 없이요.

 

(근대의 교훈담은 죽음의 리허설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것은 뒤에 나오는 죽음의 평범화와 관련이 있을까요?)

 

[지그문트 바우먼]이 보기에 근대의 가장 큰 특징은 결국 유동한다는 것...즉, 액체의 성질처럼

고정적인 형태를 가지지 못하고 모든 것들이 유동적으로 변화한다는 거다

변화가 눈에 보이는 구체성을 가지고 우리 삶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거다.

즉, 우리에게 점점더 정해진 규칙, 규율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에 있어서

스스로 그 규칙들을 만들어가고 새롭게 변형해야 한다는 것이 란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철저하게 각 개인의 책임으로 혹은 개인들이 치루어야 하는 일들로

부여됨으로써 각 개인들은 엄청 당혹하거나 과거 지향적이 되거나

아니면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고대 교훈담을 수용하는 방식이고

근대의 교훈담이 복불복 처럼 되는 이유이고

또한 그런 교훈담에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는 것은 아닐까 ? 싶단다...ㅎㅎ

 

영은

죽음은 다른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있어요. 완전한 상실. 끝이에요.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공포가 되요.

원초적 공포.

모든 생명체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해요.

그거야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지만요. 러한 공포를 회피 할 수 있는 방법이 몇가지 있어요.

 

첫번째는 죽음을 종말이 아닌 종료로 생각하는 것이에요.

죽음이후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거죠. 그렇기에 현생의 삶을 더 잘 살아가야 하는 것이구요.

오히려 죽음을 매순간 기억하라는 '메멘토모리'라는 말이 생겼죠.

죽음의 의미를 거꾸로 뒤집는다고 그러네요.

엄청난 공포를 엄청난 삶의 의욕으로요.그런데 이것의 변형판이 있어요.

자신의 삶을 불면성을 위해 사는거에요. 지속적 효과에요.

자신의 삶의 업적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불멸하는 것이죠.

이것의 자신의 삶이 덧없고 허무한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줘요.

이 지속적인 효과는 두가지로 나누어져요.

 

첫번째는 개인적불멸성이 에요. 개인적불멸성은 개인성이 있어요. 특별해지고 유명해지죠.

여기서 자기만의 공유적 자아가 확보되요. 공유적자아란 다른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는 자아에요.

개인성이 강조되니까 공유적자아보다는 자기동일적자아가 더 강하지 않을까 하는데

왜 공유적 자아를 강조하는 거죠?

보통 공유적 자아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지니까 확실하지않고 모호하고

여럿 다른 성격의 자아들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수히 넓게 확산되어 있을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런데 개인적불멸성은 공유적 자아가 혼동되거나 혼란되어 있지 않고

'자기만의' 공유적 자아가 있다는 것일까요?

아무튼 개인적 불멸성은 역사속에서 기억될만할 업적을 남기는게 중요해요.

그만큼 삶을 열심이 힘들게 살아가야하는 거죠.

여기서 개인적불멸성은 명성은 불운 중 하나라고 얘기해요. 그렇다네요. 그리고

 

개인주의 혹은 개인성에서 왜 자기동일적 자아가 아닌 공유적 자아를 강조하는가 ...?..는 문제는

음...책을 읽으면서 난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군....ㅎㅎ

생각해 보면 개인주의에서 강조되는 것 그리고 리얼리티 쇼에 사람들이 광분하고 마치 함께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개인주의일수록 네트웍크 즉, 관계맺음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인것 같다.

즉, 보다 사회주의적인 삶에서는 관계자체가 일상적인 측면이 있어서 각 개인들이 관게맺는 것

즉, 공유된 자아에 대한 추구들이 적어지지만

반대로 개인주의에서는 공유된 자아가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도 보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개인의로서의 자아라는 것은 실은 모든것들이

결국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처럼도 보인단다.

즉, 개인만의 자아라는 것도 어차피 타자와 관게맺는 속에서 발견되고 체화되는 것이라는 거고

다만 문제는 그렇게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긴 자아라는 것이

자신의 내부에 시선을 돌리는 것이 자아동일적 자아일테고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공유적 자아가 되는게

아닌가 싶단다...여기서도 결국 명성 혹은 역사적 업적이라는 것도

실은 고립된 자아에서 생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공유된 자아에서만이

생길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생각된단다.

음...업적이라는 것은 겱구 남이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 역사적으로 다른 사람들이기억해주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을 자신의 불멸성으로 삼는 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가진 어떤 자아가 남들과  상호 관계맺어야 가능...즉 공유된 자아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

갑자기 네가 질문해서 짧게 나마 생각해 보았단다....ㅎㅎ

 

영은

두번째로 몰개인적불멸성이 있어요. 몰개인적불멸성은 자신의 죽음으로서  얻어야해요.

그리고 이러한 몰개인적불멸성은 국가에 의해 이용되었어요.

이러한 불멸성은 그사람들의 삶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요.

그들은 죽음으로서 평가되고 그들의 삶이 더욱 높게 평가되요.

 

이러한 불멸성은 사실 눈가리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짐, 끝에서 오는것인데

그저 자신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잊으려는 발버둥? 이 아닐까요?

죽은 후의 불멸성때문이 지금 사는 삶을 바친다는건..... .....

그만큼 불멸성에대한 욕망이 크다는 것일까요?

 

죽음의 공포를 회피하는

두번째 방법은 종말에 대한 고민을 축소하는 것이에요. 

이러한 방법의 죽음의 해체와 평범화로 이루어져요.

죽음의 해체는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죽음이 예방가능하다고 가정하면서 시작되요.

그러면서 신적인 거대한 죽음의 의미가 축소되죠. 그러면서 죽음의 평범화가 와요.

죽음의 평범화는 죽음을 일상적인 영역으로 들여오면서 죽음을 평범하게 만들어요.

죽음의 경험. 2인칭의 죽음이 있어요.

3인칭.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의 죽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상실의 의미를 주진않아요.

하지만 자신의 친한사람의 죽음은 영원한 상실을 알게하죠.

공유적자아. 그사람과 공유했던 자아. 내 마음속의 그 사람의 부분이였던 것의 영원한 상실.

무엇으로도 대체할수없는 상실을 알게 되겠죠.

그러면서 죽음을 경험하게 하죠.

 

그리고 '두번째 걸러낸 죽음'의 경험이 있어요.

이건 관계에서의 상실이에요. 유동적 근대에서 인간적관계가 계속 약화되죠.

계속 약화되는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가 계속 형성되고 또 관계가 계속 무너지죠.

이건 개인주의가 발달하면서 자신안으로 생각하는 것 때문이것도 같아요.

그런데 두번걸러낸 죽음이 정말 죽음의 평범화에 기여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2인칭의 죽음과 함께 세계의 상실을 알려주는 것 맞는데 죽음의 공포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상실의 공포이잖아요.

잘 들여다보면 죽음의 공포가 정말 평범화 되어 있을까요?

또 다른 공포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렇다고 피할수 없는 공포도 아니지만요.

 

그런데 '생명의 유한함은 인간관계의 깨지기 쉬움과 분별적 경향에서 여실이 나타난다.'라는

무슨 말인지 잘모르겠어요.

그런데 두번째 걸러낸 죽음은 추방과도 관련이 있어요.

인간관계의 상실이 살인. 이라는 것이에요.

그렇게 살인을 통해 인간관계의 상실에서 이익을 챙기는 사람과 희생자가 생겨요.

이익을 챙기는 사람은 인간관계의 상실이 하나의 해방으로 받아들이고 희생자는 추방으로 받아들이죠.

근데 여기서의 해방과 추방은 앞에서 얘기했던 해방과 추방과는 같은 맥락인가요?

사실 앞에서 추방과 해방등의 얘기가 나올때 이게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면서 의아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나와서 그런가 했는데 사실 앞에서와 것과는 좀 차이가 있는 것같아요.

여기서의 추방은 추방의 이유가 있잖아요. 개인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구요.

 

ㅎㅎ...

[지그문트 바우만]이 바라보는 것도 어쩌면 그런 관계의 상실일것 같단다.

중요한 것은 이런 죽음의 공포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져왔던 근원적 공포라면

결국 인류의 시작 즉, 태초부터 있어 왔었던 공포일텐데

왜 우리는 리얼리티 쇼를 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가 하는 것이 아닐까 ?

즉, 오랜 역사만큼이나 실은 죽음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는 많을 듯 한데

유독 바우먼은 리얼리티 쇼를 가지고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일까 ?

그것은 실은 이러한 [죽음의 공포]를 자세히 설명하는 데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공포들을 체화하고 극복하려는 우리들 각각의 개인들을 바라보는 어떤 시각이 있는 듯 하단다...ㅎㅎ

결론은 네가 본 것과 같단다.

 

영은

 근대는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한데요. 행복에서는 불편함에서의 자유가 있어요.

실은 처음봤을때는 불편함에서 자유를 찾는다는 것인줄알았어요.

아무튼.. 불편함에서 자유. 불편함을 추방하는 것이잖아요. 이것에 대해서는 궁금해요.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해소할 수 는 없고 다만 피하고나 미루는 일이라는 것이죠.

결국 죽음과의 전쟁에서도 패 한다는 것이구요.

 

결론은 그렇다는 거다

근대에 죽음에 대한 공포는 결국 패할 거라는 거다. 아무리 발버둥처도...?...ㅎㅎ

왜...?

근대에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행복한 결국 불편함에서의 자유라는 거고

그 불편함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향이라는 거다.

이것이 근대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현상 혹은 근대의 표상이라는 거다.

결국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들의 상태가

유동하는 사회에 기반하다보니

미쳐 준비될 수 없는 다양한 불편함들이 나타난다는 것이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살아가는 것에 대한 당혹, 불편함들이 결국 각각의 개인들에게

스스로 죽음을 회피하고 그저 리얼리티 쇼처럼

맹목적으로 동의하며 살아가는 삶으로써의 선택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

그가 우리에게 묻는 것이 아닐까 싶다....ㅎㅎ

여튼 그의 관심사는 유동하는 공포에서 [유동하는]이 상징하는 근대의 삶의 방식이 아닐까 싶다..ㅎ

 

여튼 여기가지는 나도 허겁지겁 두서없이 답해 보았다....ㅎㅎ

 

영은이가 조금 더 생각하고 정리하고 물어본다면

나의 밑천이 바닥나겠지만

나름 그래도 재미난 책일고 정리하는 것은 될 듯해서 좋긴 하구나...ㅎㅎ

네가 분발하는 만큼 나도 분발해 보도록 하쥐....크크

 

다음에 네가 책 돌려주면 조금더 살펴보고

진지하게 답글을 써 볼께

우선은 그저 얄팍한 답변(?...맞는지도 헷갈림...크크)으로 만족하고 기다려주길 바란다...ㅎㅎ

 

여튼 영은 홧팅이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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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계급..?

  • 등록일
    2009/08/11 13:18
  • 수정일
    2009/08/11 13:18

음...

어렸을때

그러니까 내가 초등 5학년일때 우리집은 정육점을 했다.

시골동네라서 정육점 겸 시골 구판장 겸 음식점이랄까 ?

 

당시 소작농이었던 우리집은 사는것이 녹녹치 않아서

언제나 이런저런 일들을 벌리시곤 하셨는데

어느날 아버지께서 큰 맘 먹고 정육점을 시작하신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아버지가 정육점을 하신다고 하더니 돼지 한마리를 사 오셔서 경운기에 싣고

청주 도축장으로 향하셨다.

왕복 5시간은 걸리는 길을 경운기로 탈탈탈 다녀 오시면

돼지고기랑 돼지부속이랑 잔뜩(?) 가져 오셨고

그것을 하루종일 칼로 부위별로 작업하시어 판매하셨다.

 

문제는

그렇게 청주도축장을 매주 갔다 오시는게 힘드셨던 모양이다,.

( 언제나 그렇지만 우리아버지는 잔머리(?)의 대가이시다.

  언제나 자랑스럽게 말씀하시지만 조금만 편할 수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하신다.

그것이 불법이든 아니든....ㅎㅎ)

 

그래서 그러셨는지 몇달만에 드뎌 우리 아버지가 집에서 직접 도축을 하셨다

아 물론 불법이다.
그래서 한 주는 도축장을 다녀오시고 한 주는 집에서 밀도살을 하시고...

뭐 시골동네라서 단속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집에서 밀도살을 하실때마다

가장 곤욕스러운 것은 초등5학년인 나였다.

 

우선 울고불고 난리인 돼지를 잠깐 기절시키고 소위 멱을 따면

그 상처에서 피가 엄청나게 나왔다.

세수대야를 가져다가 그 피를 받는 일은 언제나 나의 역할이었다.

(그 돼지피는 선지가 된다...ㅎㅎ)

 

문제는 내가 너무 겁이 났다는 거다.

일요일마다

벌벌벌 떨면서 그 피를 받는 다는 것은 어린 나이의 나에게

진짜로 죽기보다 무서운 ....그래서 몇 달을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곤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피를 받아내면 아버지가 칼로 부위별로 헤체를 하시고

그러고 나면 내장을 닦는 것은 나와 누나의 역할이었다.

오전 10시쯤 내장을 빨기(?) 시작하면 거의 오후 3-4시 쯤 끝나는 고된 일이었는데

언제나 그렇지만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눈물만 그렁그렁하면서도 끝까지 시키는 일은 했었던 것 같다...ㅎㅎ

 

그렇게 내장을 다 닦고나면 밤에는 어머니랑 순대를 만드는 일들을 했었다.

그때 쯤이면 누나는 이런저런 핑계로 방에 들어가 버리고

그래서 화내시는 부모님 눈치보다가 결국은 나만 잡혀서 일하곤 했었다.

뭐...순대만드는 일이야 어머니 도와서 돼지 내장을 잡고만 있는 단순한 일이어서 어렵진 않았지만

문제는 새벽부터 시작된 일들이 저녁때 쯤이면 거의 나를 녹초로 만들곤 하였다.

 

그렇게 지옥같은 일요일을 보내고 나서

월요일 학교가면 언제나

난 놀림감이 되곤 하였었던 것 같다.

뭐 다 그렇지만 백정의 자식이니 하면서 놀려대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 몸에서 돼지피 냄새가 진동한다고 놀려대는 아이들을 보면서

일요일에 하는 돼지 도축일보다도 더 끔찍한 마음이 들었었던 것도 같다.

 

언제나 그렇지만

난 소작농의 자식이라는 소리에 둔감하다.

뭐...원래 그러니까........ㅎㅎ

하지만 그 백정의 자식이라는 말은 언제나 나를 화나게 했었던 것 같고

그런 것들로 아버지를 숱하게 원망했었던 것 같다.

 

물론 돼지피를 받는 일도 싫었지만

학교에서 놀림당하는 것이 더 싫었었던 거다.

 

그래서

어느날 큰맘 먹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

우리 정육점 안하면 안되냐고....

 

그 날 아버지는 말없이 술을 무척 많이 드셨던 것 같다.

그렇게 술드시고 주무시는 사이에

난 어머니에게 잡혀서 무지하게 맞았다.....ㅋㅋ

부모 맘도 모르는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ㅎㅎ

 

뭐 그랬다는 거다.

그 이후로도 중 3때가정

우리집은 정육점을 했고

언제나 한주는 도축장에 한주는 집에서의 밀도살을 이어 갔었다.

 

생각해 보면

소작농이나 백정이나 뭐 별반 다르지 않은 궁색한 살림이었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백정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했을까 ..?...싶다.

 

어렸을때 부터

애 늙은이라는 소릴 들을 정도로

아버지 혹은 집안일에는 무덤덤하게 시키는 일들을 묵묵히 하던 나였었는데

그 날 딱한번 대들었던 기억은

언제나 생생하다.

후레자식이라....ㅎㅎ...그 날 뒷동산에 올라서 많이도 울었었는데....ㅎㅎ

 

우리 집은 여전히 가난하다.

믿지도 않으셨겠지만 장남이라는 나란 놈은

돈벌이보다도 다른 일들에 더 많은 신경을 쓰면서

딱히 부자로 살 생각도 안하고...그저 몸뚱아리로 먹고 산다.

그러다 보니 늙으신 부모가 여전히 소작농으로 먹고 사신다.

 

아 !! 물론 딱히 풍족하거나 부자로 살아 본 적이 없는 관계로

가난하다는 것이 불편하지도 않다....뭐 언제나 그랬으니까....ㅎㅎ

 

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스스로 [백정]이라는 소리에 민감했었던 것은

그것이 왠지 죽음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죽을때까지 시뻘건 피를 쏟아내는 돼지를 보면서

그 [백정]이라는 소리가 마치 내가 그 피를 뽑아내는 듯한 생각을 나에게 주었던 듯 싶다.

그런 피의 이미지때문에 끔찍히도 백정의 자식이라는 말이 싫어서

학교다니는 내내 그 말만 나오면 동네친구녀석들과 대판 싸우곤 했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 친구들이야 무슨 생각이 있었겠나 싶다.

다만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 한 것일 뿐일텐데....ㅎㅎ

 

[백정]의 자식이라.....

음.....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 일...

내가 혹은 우리 집이 언제나 처해있는 그저그런 경제적 상황일 뿐인 일이

어느 순간 나의 출신성분처럼 낙인찍힌다는 것이 싫었었을까 ?

아마도 실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질 못할 거라는 마음이 더 강했었던 것 같다.

난 절대로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이렇게 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그 시뻘건 피와 함께 나를 괴롭혔었던 것 같기도 하다.

유치하고 못난 던 것이겠지....ㅎㅎ

 

지금은

덤덤하다.

아버지가하시는 일이라는 것

어차피 먹고살기위해서 하시는 일이고

뭐 이젠 나도 다 커서 그런 일들에 둔감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ㅎㅎ

 

다만 그 시뻘건 피는....^^;;

난 영화에서 피가 너무 많이 나오는 영화들은 보질 못한다.

무섭기도 하고...싫기도 하고.....ㅎㅎ

뭐 그 정도의 후유증은 있는듯 하다.

가끔 돼지 피를 받는 어릴때 나를 꿈에서 보기도 하지만.....ㅎㅎ

 

비도 오는데

아버지는 잘 계시는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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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09년 여름휴가 계획...

  • 등록일
    2009/08/11 02:31
  • 수정일
    2009/08/11 02:31

음...조금은 더 고민을 하다가 잡으려던 여름휴가 계획이

갑자기 확...?...잡혀버렸다...

뭐 그렇다고 싫은 것은 아니고 음...조금 정리할 것들이 생겨버린거다....ㅎㅎ

 

원래는 경주쪽이 더 마음갔었는데

영은이가 가출한다는 나름 어마어마한 계획을 이야기 하기에

걍 나도 머뭇거리지 말고 서울로 정해 버렸다.....ㅎㅎ

 

언제나 그렇지만 좋은 것들은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영은이게게 빈집을 소개해주고픈 마음이 왕창 들어서.....ㅎㅎ

뭐 나야...빈집가도 넘넘 좋아라 할거라면 영은에게 나름

새로운 경험을 쌓도록 하는 것도 좋을 듯 싶어서....ㅎㅎ

 

여튼

그래서 빈집을 가기로 결심하고나서 갑자기 마음이 분주해진다.

무언가 저번 빈집식구들의 청주방문때

서로 인사하고 재미나게 알아가는 과정은 좋았는데

정작 하고싶고 알고 싶었던 것들을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었는데

이번 기회에 이야기하고픈 마음이 마구마구 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좀 편안하게 놀다오자...하는 마음보다

조금 빡시게 준비해서 이번에는 제대로 이야기해보고 오자 싶다.....ㅎㅎ

 

그런데

웃긴 것은

막상 빈집가려고 결정하니

갑자기 담근 술 정도를 파악하고

뭐 먹을꺼리 챙겨갈것있나 싶어지는게

나 완존 아줌마 스타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마지막 남은 칡술도 적당하고

저번에 다들 나름 맛나게 마신 앵두술도 그럭저럭 괘안을것 같고...

마구마구 자라고 있는 고추라도 싸 짊어지고 갈까 ?...(요즘 고추값이 금값이라는데...^^;;)

이러고 있는 거다.....나름 미치겠다는....크크크

 

여튼
바짝 긴장하자고 다짐하는 중...

제발 먹고 마시는 것에 신경쓰지말고

이야기할 꺼리 정리부터 해라라고 스스로 주문을 외워야 하는 상황...?.....ㅎㅎ

 

우선

내가 생각하는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은 정리해 볼 생각이다.

요즘 너무 빨리 변하는 것들에 정신차리지 못하는 것을

이번 빈집여행을 통해서 나름 정리해보자는 생각이다.

 

가급적 미리미리 정리하고

미리미리 공유하는 센스...아 !!...이 부러운 센스를 이번에는

확실히 내것으로 만들어 보려는....ㅎㅎ

 

여튼

아 ! 기대되는 여행.....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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