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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선희> (홍상수 감독, 2013) #
감독 : 홍상수
출연 : 정유미(선희), 이선균(문수), 김상중(최교수), 정재영(재학), 이민우(상우), 예지원(주현)
내 머리털 나고 혼자 야심한 밤(밤11시 상영)에 영화 관람을 하러 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홍상수라는 감독의 이름이, 그리고 배우들의 이름(정유미, 김상중, 정재영, 이선균, 이민우, 예지원)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에는 특별한 반전이 있는 내용이 없다. 그냥 너무나도 일상적인 이야기들과 모습으로 구성된 영화이다. 얼핏 보면 그냥 그저 약간 코믹한 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 홍상수 감독께서 그러셨단다. “이번엔 쉽게 쉽게 보시라.” 그런데 이게 쉽게 보면 쉬울 수도 있는 것이지만, 한꺼풀만 벗기면 그리 녹록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홍감독님께서 낚시밥을 던지셨구나 하는 느낌에 살짝 웃음이 나기도 했다(어렵게 생각하는 나를 홍감독님께서는 싫어하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영화 해석은 내 자유이니까!^^).
이 영화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강하게 떠올리게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 관계 속에서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찬찬히 사색해 볼 것을 바람이 전하듯 전해 준다.
이 영화는 한 여자(선희)와 세 남자(문수, 최교수, 재학)의 만남(재회)과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 남자는 예전에 한 여자와 관계가 있던 남자들이다. 한 여자는 학교 졸업 후에 다시 학교로 와서 이 남자들을 하나씩 만나고 나서 그대로 떠나버린다.
홍상수 감독의 예전의 영화 제목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영화에서도 선희는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관계의 전형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선희는 인간관계, 특히 남녀관계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관계 고리를 끊어 버린다. 예전에 세 남자와 선희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선희는 이 관계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현실(학교)을 떠나 잠수를 탄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통해 새롭게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려는 결심(유학)한 후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제 현실에서의 관계를 이해하고 정리해야 새로운 현실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희는 세 남자를 만나서 현실을 이해하고자 한다. 세 남자와의 각각의 만남 속에서 선희는 자신이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인의 위치에 있게 됨을 이해하게 된다. 세 남자는 선희에게 매달리고(문수), 선희의 말에 복종하게 되고(최교수, 교수 추천서를 선희의 뜻을 그대로 반영하여 다시 써 준다), 선희에게 오히려 위로를 받게 된다(재학). 그리고 선희는 이 주인의 위치를 과감히 버리고 쿨하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고리를 끊어 버린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끊임없는 악무한적 순환의 고리(불교에서는 윤회의 고리로 표현된다)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세 남자와 다시 관계를 가진다면 주인의 위치는 얼마 가지 않아 노예의 위치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희의 떠남은 결국 대등하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란 집착과 아집을 끊어버리는 쿨한 관계이다. 집착과 아집은 배타적 소유인 사적 소유관계(주인과 노예의 관계)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남자들 셋 모두 선희에 대한 동일한 파악은 바로 이러한 집착과 아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세 남자는 자신들이 선희와의 관계에서 노예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즉자적으로 직감하지만 대자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늘 주인의 자리를 그리워하지만, 그 주인의 자리는 이제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선희가 떠난 후에 주인의 위치라는 집착과 아집에 갇혀 현재의 자기 존재에 대해 기만하게 된다.
다른 한편 세 남자는 선희와 만나면서 선희에게 삶에 대한 충고를 한다. 이러한 충고는 여전히 자신의 주인의 자리에 있다는 자기 존재기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또한 권력관계로부터 나타나는 것(가진 자, 쥔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깊게 파고 들어가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결과적으로 지금의 삶을 깨뜨려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가 말하는 것, 즉 지금의 삶의 모습에 대한 제1원인을 캐보라는 것인데, 그 제1원인은 결국 신이고 네가 현재 이렇게 사는 것은 신에 의해 결정된 삶이라는 결정론의 이데올로기가 함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노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임을 뜻한다.
세 남자는 자신들의 이러한 존재 기만이 관성의 법칙에 의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이 깨닫지 못함은 결국 치킨(닭)으로 상징된다. 주현(예지원 분)의 재치가 돋보인다. 여성의 이름에만 Sophia(지혜)가 있고 남성의 이름에는 없는지가 이해된다. 역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페미니즘 이론의 본성(The Nature of Feminist Theory)
자신들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여성들은 많은 것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토록 다양한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회운동에 관해 일원론적인 용어들로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텔레비전에 나오고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매체가 페미니즘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나타낼 수 있는 여성운동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좀 찾기 어렵고, 지역의 특수한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지역 조직들 그리고 소규모 그룹들로 구성되어 있는 두 번째 운동들이 있는데, 이 운동은 여러 도시에 사는 여성들의 직접적인 욕구와 관련하여 연대하며(come together), 변화를 위한 작업에 직접적으로 에너지를 투입하는 운동이다.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내 논의의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이 그룹들이다. 이 그룹들은 여성 공동체를 건설해 나가는 성폭력 위기 센터, 여성 센터 등과 같은 실천적 행위와 관련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페미니스트들처럼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문제들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실천에 깊숙이 뿌리를 둔 운동을 조직하였다. 사실, 여성운동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정확히 우리 실천에 대한 고찰을 넘어선 혁명적 이론의 창조이다.
이러한 모든 그룹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주의 운동 대부분의 세계관과는 다르지만, 또한 동시에 놀랍게도 맑스의 세계관과 아주 유사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구체적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사회 이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개념들로부터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는 이러한 분석 양식은 페미니즘 힘의 근원이며 내가 페미니스트가 가장 정통성 있는 맑스주의자였음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루카치(Lukacs)의 주장처럼, 맑스주의 이론 내에서의 정통성은 오로지 방법(method)하고만 관계가 있다.
실제로, 페미니즘은 분석 양식이고, 삶과 정치에 접근하는 방법이며, (59쪽) 여성의 억압에 관한 일련의 정치적 결론들이라기보다는 여성 억압이 왜 생겨났는가라는 물음을 묻고 그 물음의 답을 찾는 길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현존을 규정하는 사회관계들을 변형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방법을 여성으로서의 그들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에 적용하고 있다. 페미니스트는 자신들의 고유한 일상적인 삶을 직접적으로 다루는데, 그 중 어떤 것은 이러한 운동이 급속하게 퍼져나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맑스주의 내에서 일반적으로 하나의 특정한 경향으로 인지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나는 페미니스트가 맑스의 방법을 재창조하였기 때문에, 여성운동이 나머지 좌파의 발전적인 이론과 전략을 위한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규모 그룹의 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한 실천활동은 경험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개인의 경험을 여성의 삶을 규정짓는 구조에 연결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으며, 페미니즘에 기초한 방법(재창조된 맑스의 방법-옮긴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이런 실천활동을 통해 여성들은 자신만의 경험과 함께 시작되는 지반(일상적인 삶-옮긴이)으로부터 자신의 분석 능력을 키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여성들은 사색하는 사람으로서뿐만 아니라, 맑스가 제시하였듯이, 자신의 느낌 전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분석하였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경험 그리고 여성 억압에 관한 모든 정치적인 것 사이의 연관관계를 이끌어내었다. 사실 여성들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그러한 일반적인 것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변형시켰던 방식으로 우리의 경험, 우리의 과거를 이해해 왔다.
페미니스트들이 발전시켜온 방법의 힘은 이 방법을 통해 여성들이 자신의 일상을 규정하는 사회 제도들의 분석과 그 일상을 연관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제국주의 양상을 포함한) 자본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백인 우월주의 제도들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이 제도들은 일상의 경험과 행동이라는 생생하고도 현실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는 이 제도들 사이의 구체적인 상호관계를 보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은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 이론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역할이 재차 강조되어 왔음을 의미하는데. 이 역할은 이론가들이 “원리들 그리고 대중이 자신의 실천 활동 속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체계화시키는” 것이다. 분석 양식으로서의 페미니즘은, 특히 의식화(consciousness-raising)가 그러한 방법의 토대로 이해될 때, (S.60) 지식인 또는 이론가의 개념을 재규정을 요구하며, 일상의 삶과 관련하여 이러한 사회적 역할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우리들 각각이 잠재적인 이론가, 지성인 그리고 활동가이기 때문에, 교육(Education)은 여성 운동에서나머지 좌파 운동에서와는 아주 다른 역할을 해 왔다. 이 같은 페미니스트의 교육은 내가 가르침(instruction) 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다시 말해 “올바른 정치 노선”을 가르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자신을 위해 행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반대되는 교육은 일상생활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교육은 일상생활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56쪽) # 3장.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혁명 전략의 전개 #
- 낸시 하트석(Nancy Hartsock) -
많은 저자들이 미국 좌파의 문제점들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들은 미국 좌파가 많은 사람들과 멀어졌고, 또한 통일된 조직을 세울 수 없었다는 것 또는 사회주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는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좌파는 시대착오적인 19세기 잔존물로 만들어진 이론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정치 혁신 또는 정치 문제의 확장을 경멸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너무나도 자주 좌파 그룹들은 노동계급이 그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생각 그리고 노동계급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자들이 신성한 텍스트들을 암기했던 자들일 것이며 세계를 조직할 수 있는 총괄적인 이론을 갖춘 자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비판들은 좌파 전체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많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재교육(reorientation)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작업의 한 국면만을, 즉 페미니즘 이론의 역할 그리고 나머지 좌파의 모델로서 여성 운동의 정치적 실천만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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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제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엘리슨(C. Ellison), 로즈(S. Rose) 그리고 스쿨만(M. Schoolman)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또한 이 아이디어들을 정식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퀘스트』(Quest) 직원에게도 감사드린다. 이 논문의 여러 부분들은 제1회 국내 사회주의 페미니즘 회의의 비평문(a critique fo the first national socialist feminist conference)으로서 『퀘스트』(Quest)(a feminist quarterly 2, no. 2 (1975))에 실렸다. 또한 많은 부분들이 1977년 봄 이타카 대학(Ithaca College)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강의 시리즈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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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쪽) 나는 여성 운동이 새롭고도 확실한 미국 사회주의 건설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여성 운동은 혁명적 전략을 수립하는 방식들 그리고 선진 자본주의의 본모습을 확실하게 밝히는 혁명적 이론들을 발전시켜 나가는 방식들을 위한 하나의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모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의 본성(the nature)이라는 특수한 관점으로 이론 일반을 검토하고 재정의(redefinition)하는 것이 필요하고, 계급의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기본적인 의문들을 재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페미니즘 이론을 우리가 건설해야 하는 다양한 조직과 연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론 그리고 페미니즘 이론(Theory and Feminist Theory)
이론은 어떤 혁명적인 운동에서도 기본적인 것이다. 우리의 이론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설명하며, 사회 삶을 유지시키는 힘들(forces)을 분석하고, 우리가 집중해야 할 문제들을 규정하며, 또한 우리가 발전시키는 전략들을 평가하는 규준으로(as a set of criteria)작동한다. 그러나 이론은 한층 더 폭넓은 역할을 한다. 이에 대해 안토니오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특수한 실천 국면에서 이론 자체를 실천 자체의 결정적 요소들과 동일시하고 일치시킴으로써 이론을 구성할 수 있는데, 이 이론은 모든 실천적 요소들을 좀 더 동질화시키고, 체계화시키며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어 가는 역사 과정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실천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현시켜 가는 역사 과정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 그 자체는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힘(a force for change)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동시에 그람시는 우리가 이론에 대한 이해를 다른 방향으로 확장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론화가 강단 지식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어떤 무언가가 아니라 이론이 항상 우리의 행위 속에 있으며 우리가 실재를 참되게 파악할 때까지 이론이 깊이 있게 진행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론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 속에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 그 자체는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의해 주어진 범주들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또한 우리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발전시켜 나갈 수도 있다. 우리가 둘 중에 첫 번째를 선택했을 때, 우리의 이론은 영원히 절대적인 것(implicit)으로 남을 수도 있다. 반면에, (58쪽) 두 번째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비판적이고 명확한 이론을 구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거의 최근 10여 년 동안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행위는 우리의 실천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이론을 정교화시키는 토대를 제공한다. 이론을 명확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페미니스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을 개선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못난 꽃]
박영근에게
-도 종 환 -
모과꽃 진 뒤 밤새 비가 내려
꽃은 희미한 분홍으로만 남아 있다
사랑하는 이를 돌려보내고 난 뒤 감당이 안되는
막막함을 안은 채 너는 홀연히 나를 찾아왔었다
민물생선을 끓여 앞에 놓고
노동으로도 살 수 없고 시로도 살 수 없는 세상의
신산함을 짚어가는 네 이야기 한쪽의
그늘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늘 현역으로 살아야 하는 고단함을 툭툭 뱉으며
너는 순간순간 늙어가고 있었다
허름한 식당 밖으로는 삼월인데도 함박눈이 쏟아져
몇 군데 술자리를 더 돌다가
너는 기어코 꾸역꾸역 울음을 쏟아놓았다
그 밤 오래 우는 네 어깨를 말없이 안아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범 혈육도 사랑도 이제 더는 지상에 남기지 않고
너 혼자 서쪽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빗속에서 들었다
살아서 네게 술 한잔 사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살아서 네 적빈의 주머니에 몰래 여비 봉투 하나
찔러넣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몸에 남아 있던 가난과 연민도 비우고
똥까지도 다 비우고
빗속에 혼자 돌아가고 있는
네 필생의 꽃잎을 생각했다
문학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목숨과 맙자꾸는 못난 꽃
너 떠나고 참으로 못난 꽃 하나 지상에 남으리라
못난 꽃,
내 방에 그대의 머리카락이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을 때
맑은 하늘에 머얼건 슬픔이 스멀스멀 배어왔다
눈물 한방울이라도 떨어뜨린다면
마른 울음이라도 꺼억꺽 토해낸다면
좋 으 련 만
오늘 인간인 내가 참으로 야속하다!
# 2012. 4. 29. 일요일 #
- 동국대 구장(총6게임; 07:00~19:00, 날씨 화창하고 많이 더웠음)
* 제1경기
* 제2경기(구심:본인 )
* 제3경기
* 제4경기(구심:본인 )
* 제5경기(루심: 본인)
* 제6경기
- 제2경기 주심 볼 때 볼카운트를 3번 잘못 세었다. 같이 루심을 보던 선배 심판께서 말씀해 주셨다. 운 좋게도 별 탈 없이 지나갔다.
- 제2경기 구심 볼 때, 히트 바이 피치 볼(hit by pitch ball, 일명 데드 볼)이 나왔는데, 주자가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맞았다. 그래서 타자주자를 다시 불러서 몸에 맞은 공을 볼로 처리하고 게임을 계속 진행시키려고 했을 때 공격 팀(좀 많은 점수 차로 이기고 있던 팀)에서 아주 강한 어필이 나왔다. 즉 데드볼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프로야구에서도 그냥 맞아도 1루로 나가는데 왜 1루로 내보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게임이 끝난 다음 규칙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어필한 공격 팀 감독님께 보여 드렸더니, 그때서야 수긍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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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쵸?^^ 올만에 뵈어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