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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감기 예방하는 법(퍼온글)

~"감기예방의 놀라운 정보...

껍질을 까지 않은 "양파"를 접시에 담아 방에.그리고 거실에 놓아 두시면 .
거짓말 처럼 감기에 걸리지 않읍니다...

그 증거는 1919년에 감기로 많은사람이 사망을 했을때..
돌림병 처럼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지역에서..
유독 한 농부의 집에서 만 가족이 한명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의사는 궁금하여서 방법을 물어 보았읍니다...

그랬드니 그 농부의 대답이...
껍질 까지 않은 양파 한개 를 접시에 담아 방에 두었다는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그 의사가 양파 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
그 양파에서 독감 바이러스 를 찾아낼수 있었다고 합니다...

양파를 방에 놓아두면 분명히 양파가 박테리아를 흡수해서 그 가족들의 건강을 지켜 줍니다..

그 말을 들은 한 중소기업 사장이
회사 사무실 여기 저기에다 껍질 까지않은 양파를 놓아 두었다는것입니다..

신기하게도 그해 겨울엔 직원들은 한명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환절기가 다가오는 지금부터 저를 아는 모든이들.....,.
돈도 들지 않고 쉽게 어느집에서나 있는 양파 처방전 을 한번 해보면 마니마니 좋을듯 합니다.

올겨울 건강하게 보내세요..

(한솔 밴드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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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도대체 누구냐, 넌!

한 6년 전에 쓰다가 만 글을 이제사 끝을 맺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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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 도대체 누구냐 넌?! #

 

1. 아리송한 진보의 정체.

2. 노동자는 진보적 존재인가 또는 아닌가?

3. 계급투쟁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4. 당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5. 진보는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의 끊임없는 과정

6. 진보와 혁명의 관계-전략, 전술의 측면에서

7. 진지전과 게릴라전의 통일로서의 진보.

 

1. 아리송한 진보의 정체.

예전에 진보라는 말은 ‘빨갱이’, ‘좌익’과 동의어였다. 그래서 진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도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진보라는 말은 진부하다고 할 만치 여기저기서 쓰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진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진보, 그것은 ‘유령’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인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주사파도 진보라고 하며, 심지어 노무현 정권도 진보라고 이름을 갖다 붙인다. 다른 한편 일반 대중들은 대통합민주신당이 새누리당보다 개혁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진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진보라는 말이 ‘중산층’, ‘서민’(우리는 이들을 보통 민중이라 부른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사용된다는 것이다. 중산층, 서민이라는 말은 ‘피지배 계급’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이제 ‘진보’의 정의를 내려 보자면 <중산층, 서민을 위하는 것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의심해 볼 수 있다. 첫째 이러한 정의가 사실 참된 것인지 자꾸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어떤 정권도 피지배 계급을 위하지 않는다는 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첫째 물음과 관련하여, 도대체 중산층, 서민은 과학적으로 어떤 계층을 가리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위의 정의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면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2. 노동자는 진보적 존재인가 또는 아닌가?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계급처럼 질적인 차이를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라 양적인 차이만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자면 양적인 소득 차이와 재산 소유의 양적 정도 차이만을 나타내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양적 차이는 실제로 그 경계가 아주 불분명하다. 명확하게 어떤 기준으로 상류층, 중산층, 서민층을 가를 수 있을까? 그 기준은 대단히 자의적이고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연 소득 2,000만 원 이하이면 서민층이고 2,010만 원이면 중산층인 것인가? 이러한 자의성과 임의성은 명확한 질적 차이를 드러내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 즉 계급 지배에 따른 착취와 억압의 관계를 은폐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산층, 서민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관계를 은폐시키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지닌 개념이 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곧바로 서민, 중산층이라고 느끼는 일반 대중들의 심리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엄연히 현실적으로는 계급지배가 일어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는 일반 대중들은 지배 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는 것이 너무나 비참하고 고달프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된다. 이러한 심리적 상태가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맞아 떨어지게 됨으로써 일반 대중들은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라 본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질서 속에서 지배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것이 또한 일반 대중들 대부분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생각하도록 만들며, 자신은 대부분 노동자이고 비슷한 처지이면서도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자기를 구분시키고자 한다. 노동자 대부분은 도시빈민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화이트칼라는 블루칼라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주관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관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서민, 중산층을 위하네 어쩌네 하면서 서민, 중산층을 들먹거리는 것을 진보라 칭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무늬만 진보인 ‘사이비 진보’이다. 진보는 질적인 차이를 지닌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을 통해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적인 차이를 지닌 계급지배를 나타내는 개념들은 노동-자본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본 개념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느냐 또는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르는, 즉 질적인 차이를 드러내 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즉 노동자를 위한다고 해서 모두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서민, 중산층은 계급의 측면에서 볼 때 피지배계급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의 대부분은 노동자이다. 서민, 중산층으로서 이 노동자들은 어떤 물적 토대를 가지며 살고 있는 존재인가? 그들 삶의 물적 토대는 무엇인가? 맑스는 생산하는 ‘인간’ 자신이 생산력이라고 했으며, 이 인간은 생산관계의 총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삶의 물적 토대는 노동자 자신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 그 임금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가는 존재이다. 이때 노동자는 두 가지의 측면으로 정의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다는 측면이다. 두 번째는 임금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간다는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의 측면에서 노동자는 <자본의 대상>이 된다. 두 번째의 측면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자는 대상과 주체의 측면 모두를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이 모순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모순이다. 이 모순은 자본가-노동자의 갈등과 투쟁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노동자 대중은 이러한 모순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자체로 진보적이지 않다. 그들의 생존의 물적 토대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자신의 생존을 모두 자신 혼자 떠맡게 된다.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무한한 적대 경쟁에서 물리쳐야 할 적이다. 노동자 대중은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생존하기 위해서 그들은 ‘힘’이 있는 쪽, 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있는 쪽으로 붙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노동자의 첫 번째 측면, 즉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게 팔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장자 에셔가 죽 한 그릇에 자신의 영혼을 파는 것”처럼 이렇게 노동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자본에 맡긴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어떤 사상, 신념, 개념, 언어 등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을 사용하게 될 때 자신의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은 자본주의의 비밀을 폭로하며, 자본주의를 해체시킬 수 있는 과학적 개념인 ‘노동자’를 사용하는 대신에 자본의 비밀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는 말인 ‘근로자’, ‘국민’, ‘서민’, ‘중산층’이라는 말을 쓰며, 그 말에 아주 익숙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노동자 대중이 자신의 삶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두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으로 제쳐놓고서 돈 버는 것 자체를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게끔 만든다.

노동자 대중이 자신의 삶을 자본의 영역과는 전적으로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생산관계 속에서 영위해 나가려는 기획을 가지고 실천활동을 해 나가는 순간에서부터 노동자 대중은 진보적인 존재가 된다. 이는 두 번째 측면이 첫 번째 측면을 지양해 나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진보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생산관계, 인간관계를 창출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맑스가 말한 대로 “각각의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대하는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끊임없는 운동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3. 계급투쟁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 자체가 어떤 이들에게는 뜬금없고 ‘별 미친...’이라는 말을 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급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측면, 즉 모순적인 측면들은 이런 물음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지도 않을까 싶다.

계급투쟁은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진보적이며 절대적으로 선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계급이 처해 있는 상황 또는 계급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모순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오늘날 노동자 계급 투쟁이 현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모순적인 존재이다. 먼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 팖으로써 자본의 대상이 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 임금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주체로 살아가고자 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측면을 ‘즉자적’ 계급이라 하고, 두 번째 측면을 ‘대자적’ 계급이라고 한다.

즉자적 계급으로서 노동자 계급은 자본의 적대적 경쟁 이데올로기에 따라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존재로서 항상 모든 걸 자기 혼자(또는 오로지 자기 가족)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개별적인 개인에 불과하다. 이 노동자는 사회적 개인이 아니다. 이 노동자는 언제나 자기와 자기의 가족 안위만이 문제이며, 그 안위를 위해서 죽기 살기로 경쟁에 뛰어든다. 동료가 짤리든, 그 동료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자본과 싸우든 그것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이런 것이 그의 생존을 위협할라치면 협력은 고사하고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하게 된다. 이 노동자는 오로지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전쟁의 살얼음판 위에서 목숨 부지에 연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계급투쟁의 형태는 기껏해야 경제주의, 조합주의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이 즉자적 계급투쟁으로는 결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이 상황에서 자본은 노동자 집단 이기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퍼트리면서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을 촉진시킨다. 그리하여 노동자의 저항을 쉽게 분쇄시킨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에 따른 자본의 기본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즉자적 계급투쟁은 진보적인 것이라 할 수 없다.

새로운 생산관계, 인간관계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대자적’ 계급투쟁이라 할 수 있겠다.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투쟁이 ‘대자적’ 계급투쟁이다. 자기 삶의 주체는 자본에 의해 개별화되고 원자화된, 그리하여 분열되어 있으며 타자를 끊임없이 수단화하려는 무한 적대적인 경쟁 속에 있는 즉자적 계급을 넘어서는 데 있다. 즉 이 분열을 줄여 나가기 위한 물질적 기반과 조건들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개별적이고 원자화된’ 존재에서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지닌 ‘보편적인’ 존재로 만들어 나가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존재의 생산과정은 맑스의 말마따나 동시적 과정으로서의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또는 자기 변혁의 일치” 과정이며, “혁명적 실천” 과정이다. 또한 생산력을 ‘질적’으로 변혁시키며 동시에 생산관계를 변혁시키는 과정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보’로서의 대자적 계급투쟁이다.

 

4. ‘당’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이러한 물음 또한 ‘미친...’이란 소리를 듣기 쉬운 물음일 수도, 어리석은 물음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당’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해 왔다. 하나는 러시아 혁명 당시의 볼셰비키 당으로서의 전위 정당이고, 다른 하나는 전위 정당과 대비되는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제도적 대중 정당이다. 그런데 이 둘 모두 역사적으로 ‘대표하는 자’가 ‘대표되는 자’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독재 또는 전제 정치로 귀결되었다.

먼저 전위 정당은 ‘이성의 화신’으로서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따라야 할 전범이며, 통치 권력을 잡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러한 전위 정당의 특색 때문에 동일한 목적을 가진 다른 모든 정당 또는 정치 세력들을 자신의 통치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자 한다. 예를 들어 프롤레타리아 자체가 여러 정당으로 분열되어 있을 경우,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농민과 연대하여 권력을 잡았을 경우 등을 생각해 보면, 통치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 일부가 통치 권력을 잡지 못한 다른 프롤레타리아를 통치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자 하며,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농민을 통치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자 하고, 남성이 여성을 통치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자 한다. 이렇게 될 경우 부르주아 정치와 하등 다를 게 없으며, 더 나아가서는 1차 파리 코뮌이나 스탈린 독재 체제처럼 공포 정치 또는 전제 정치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1차 코뮌의 실패는 코뮌의 통치가 공포정치로 변했다는 데 있다. 1차 코뮌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들의 연합에 의해 봉건적인 예속 관계와 지배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면서 봉건적 귀족 소유의 토지를 배분하는 데 있어서 배분의 기준도 정하지 않고 농민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토지를 배분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농민들과 부르주아들은 봉건 귀족의 토지를 무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로 하여금 혁명과 코뮌에 대하여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이 혁명과 코뮌을 통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였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배만 불렸고, 먹고 남은 것은 비싼 값에 팔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도시의 노동자들은 굶주리게 되었다. 이러한 굶주림은 고리대업을 성행시켰고, 부르주아들이 이득을 보도록 하였다.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섰고 그리하여 코뮌의 일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코뮌을 장악하고 있던 쟈코뱅 당은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이탈을 막기 위해 코뮌의 일로부터 멀어져가는 행위를 배신으로 규정하고 가차 없는 처벌을 내렸다. 이러한 일은 쟈코뱅 당이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점 더 공포정치로 빠져들게 하였다. 다른 한편 전쟁 수행 중이던 이때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물자가 엄청나게 필요하였다. 이러한 물자 징발과 관련해서 파리와 국경 근처에 있는 농민들은 애국심으로 물자 징발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전쟁의 위험을 크게 느끼지 못한 대부분 지방의 농민들은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전쟁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이렇게 물자가 제대로 징발되지 않자 코뮌은 6.000명의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물자 징발에 나섰다. 이것은 대부분의 농민들을 쟈코뱅 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쟈코뱅 당은 더더욱 공포정치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차 파리코뮌은 파리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무너지게 되었다. 오히려 이러한 와해는 많은 사람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쟈코뱅 당의 이러한 공포정치와 독재의 전철은 러시아의 볼셰비키와 그 뒤를 이은 스탈린 독재로 이어졌다.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는 “유럽 전체의 혁명이라는 단 하나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그 카드가 나오지 않자 그들은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이 가득 찬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들은 강력하고 무자비한 적들에 대항해서 군대도 없이 러시아를 방어해야만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물적인 조건과 정신적인 조건들이 부족하면 할수록 그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해 더욱더 노골적인 폭력에 의존하는 강제력, 즉 독재에 매달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국민대중 속에서 그들에 대한 반대파도 더욱 늘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은 점점 더 불가피하게” “독재로” “나가야만 했다.” (카를 카우츠키 지음, 『프롤레타리아 독재』, 한길사, 2006, 103쪽) 이러한 최종적인 결과가 스탈린의 공포정치에 의한 독재가 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제도적 대중 정당 역시 ‘부르주아 독재’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부르주아 독재란 부르주아 계급이 의회를 통해 지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계급’이나 ‘지배’ 속에 있는 개인을 ‘자유로운’ 모든 개인으로 환원함으로써 개인의 계급관계나 지배관계를 지워버리는 일이다.”(가리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한길사, 2005, 256쪽) 제도적 대중 정당은 부르주아 의회 제도권으로 들어간 정당인데, 이 제도권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보통선거”를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독재를, 오히려 보통선거에서 보고 있었다.”(같은 책, 255쪽) 보통선거의 특징은 모든 계급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모든 개인들을 모든 계급·생산관계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에 있다. 이러한 분리는 부르주아가 추구하는 주요한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현실 생산관계에서의 계급관계 또는 지배관계를 은폐·소거시킨다. 다른 한편 보통 선거는 비밀 투표로 이루어진다. 비밀투표는 투표에 참여한 사람 자신이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를 감춤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투표했다는 증거를 지워버린다. 그럼으로써 ‘대표하는 자’(선출되는 자)와 ‘대표되는 자’(선출하는 자) 사이에 단절이 생김으로써 대표하는 자는 대표되는 자의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선출된 자는 선출한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닌데도 선출한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선출한 사람은 또한 그렇게 믿는다. 따라서 제도적 대중 정당이 비밀투표로 이루어지는 보통선거에 의해 의회로 진출하여 국가의 통치 권력을 접수하려고 할 때, 그것이 자의적이든 또는 타의적이든 간에 부르주아 독재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당’이 진보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두 가지 형태의 ‘당’ 역시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향은 의도했든 또는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부르주아 독재로 귀결되었음을 위에서 보았다. 부르주아 독재의 이데올로기적 원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로지 타자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만 대하라!’ 여기에서 목적으로서 ‘타자’에 대립해 있는 ‘나’는 ‘수단’이 된다. 타자에 대해 나는 영원히 수단의 위치에 서 있을 뿐이다. 노동자인 나는 자본인 타자에 대해 자본의 자기 증식을 위한 영원한 수단의 위치에 있게 된다. 이것을 상품의 가치 형태에 놓게 되면 상품인 노동력으로서의 나는 항상 판매되어야 하는 상대적 가치 형태의 자리에만 있게 되고, 자본은 구매하는 등가 형태의 자리에만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가 구매하는 등가형태의 자리에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소비 물품을 구매할 때이다. 이때 소비자로서의 노동자는 자본가 대등한, 아니 오히려 자본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며, 그리하여 자신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소비자로서의 위치에 서려면 우선 전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 자신의 노동력이 판매되어야 한다는 사실, 즉 자본에 의해 구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소비자의 영역에 서게 될 때 자주 망각되는 것이다. 이것을 맑스는 『자본론』에서 ‘화폐의 물신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선출하는 자는 선거를 통해서만 선출되는 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이 자유는 선출되는 자 또는 선출된 자가 결정해 놓은 보통 선거라는 국가 장치를 전제할 때만 생겨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향은 이제 ‘오로지 타자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만 대하는 노동자 자신을 만들어 내는 영역이 아니라, 타자를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노동자 자신을 생산하는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영역은 현실적으로는 타자(자본)에 대해 오로지 수단으로서밖에 존재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자신(노동자)이 타자에 대해 목적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거나 정체성을 기만하게 만드는 영역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세계에서는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으며 그 타자에 대해 수단으로밖에 존재하고 있지만, 본래 자신은 누구로부터도 자유로운 개별적 개인이라는 이데아를 상기함으로써 이데아계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하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타자에게 수단이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인간 역시도 타자이므로 목적이 될 수밖에 없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잘 발현시키는 사회가 바로 코뮌 사회이다. 맑스는 코뮌 사회를 ‘각기 자유로운 개인이 연대’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코뮌 사회의 실현은 위에서 말한 영역의 끊임없는 확장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영역은 ‘공장 밖’의 영역이다.

‘공장 안’이 노동자의 삶의 목적을 수단으로 삼아 자본의 자기 증식이라는 목적을 위한 자본의 고유한 운동 영역이라면, ‘공장 밖’은 노동자의 자기 자신의 삶의 목적이 목적 그 자체가 되는 노동자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영역이다. 이 영역은 자본이 간섭하지 않고 통제하지 않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이 영역은 자본의 생산 과정의 전제로서 자본 생산 과정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장 안’은 개별적인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지배와 감시, 통제와 억압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이 자본의 힘이 이 개별적 노동자에 대해서 독립적이고 낯설며,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초역사적인 힘으로 느껴지게 되는 장소이다. 그에 반해 ‘공장 밖’은 자본의 지배와 감시, 통제와 감시를 벗어나서 유적인 인간으로서 노동자 자신의 삶을 자유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꾸려갈 수 있는 장소이다. 이 영역에서 노동자 계급은 온전히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자기 자신을 생산할 수 있다. 유적 존재의 실현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목적이다. 이 목적의 달성은 각기 자유의지로 타자를 위한 수단이 됨으로써 동시에 타자에 대해 목적으로서의 타자가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또한 이 유적 존재의 실현은 맑스가 말하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즉 각자의 욕구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 속에서는 그 누구도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5. 진보는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의 끊임없는 과정

진보는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최대 다수를 위하고 소수를 배제하는 사회이다. 즉 소수를 수단으로 삼고 최대 다수를 목적으로 대하는 사회이다. 그런데 이 최대 다수는 양적으로 볼 때 최소의 다수가 된다. 왜냐하면 최대 다수가 되는 기준이 바로 적대적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고, 이 경쟁은 TV프로그램인 1박2일처럼 한 번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루어지면서 지속적으로 ‘소수’를 배출하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소수’가 등장하면서 이 소수는 양적으로 ‘최대’가 된다. ‘소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조차 제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보는 ‘소수’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맑스는 노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이 생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노동은 자본을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노동을 수행하는 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는 여전히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한 개별적인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노동은 노동자 계급이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노동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자본)의 실체로서의 추상노동은 항상 노동자의 살아 있는 구체노동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 추상노동은 노동자의 임노동이다. 그리고 이 임노동을 뒷받침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은 여성의 가사노동이다.1 가사노동은 노동자 계급의 기존의 노동력 재생산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동력 생산의 기초이다. 새로운 노동력의 생산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산력’으로서의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가사노동은 대자적 노동자 계급 또는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을 생산해 내는 물질적 기초이다. 그리고 계급투쟁의 발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가사노동이 개별적인 여성의 몫으로 남게 될 때,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가사노동의 착취 구조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렇게 생산된 노동자의 노동력은 다시금 자본의 착취 구조 속으로 편입된다. 이러한 것은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의 등식으로 성립될 수 있으며,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이라는 일종의 먹이사슬 구조로 바뀌어 나타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은 그 자체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깨나가는 것이 바로 ‘여성 되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성 되기’는 ‘소수자 되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러면 여성은 소수자인가? 과연 소수자란 무엇인가? 양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여성은 소수자가 아니다. 세계의 절반이 여성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여성이 소수자라고 하는 것은 ‘소수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사실상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라는 말은 가타리가 썼던 말이다.

 

“모든 권력 구성체에 고유한 남근적 경매[부풀림]에서 이탈하는 남성은 가능한 다양한 양식들에 따라 여성 되기에 개입할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조건에서만 그는 더욱이 동물, 우주, 문자(lettre), 색채, 음악이 될 수 있습니다.” (F. Guatttari, 『분자혁명』, 윤수종 옮김, 푸른 숲, 2004, 226쪽.)

 

“본래적인 여성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성적 극이란 없으며, 영원한 여성성의 극도 없습니다. 남성-여성 대립은 계급이나 카스트 등의 대립에 앞서 사회적 질서를 근거짓는 데 기여합니다. 거꾸로, 이 규범들을 침해하는 것, 기존 질서와 단절하는 것은 모두 일정한 방식으로 동성애나 동물 되기, 여성 되기 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같은 책, 227쪽.)

 

“우리가 사람들을 범주-흑인 또는 백인, 남성 또는 여성-로 환원하려는 것은, 우리의 선입관, 즉 이원론적 환원과정을 통해 우리의 권력을 이들에게 행사하려는 욕구 때문입니다. 어떤 사랑도 일의적인 방식으로 서술할 수 없습니다. 프루스트(Proust)에게서 사랑은 결코 특정하게 동성애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분열자 및 편집자의 요소를, 식물 되기, 여성 되기, 음악 되기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책, 227쪽.)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성 되기’의 주체는 “모든 권력 구성체에 고유한 남근적 경매에서” (의식적으로)2 “이탈하”고자 하고, 기존의 “규범들을 침해하”고 “기존 질서와” (의식적으로) “단절하”고자 하며, “항상 분열자 및 편집자의 요소”를 (의식적으로) “포함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즉 현존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질서와 규범에 의식적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성 되기’는

 

“다른 형태의 되기[생성](예를 들면 슈만에게서처럼 아동 되기, 카프카에게서처럼 동물 되기, 노발리스에게서처럼 야채 되기, 베케트에게서처럼 광물 되기)의 준거” (같은 책, 225~226.)

 

이다. 즉 다른 ‘소수자 되기’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수자 역시도 자본주의 가부장제 질서와 규범에 (의식적으로) 저항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여성 되기’를 통해 본 가타리의 문제의식은 맑스주의의 문제의식과 동일하다. 즉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주체인 노동자 계급이 계급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소수자, 특히 여성 되기의 과정과 필수 불가결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에서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는 결국 인간관계의 문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화폐, 자본을 매개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개인들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하고 개별적인 개인으로서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자본과 대면할 수밖에 없고, 자본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 개인들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유적 보편성을 자본의 유사 보편성을 통해 가질 수밖에 없음으로써 자본에 의해 포섭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별적 개인으로서의 노동자들이, 즉 상대적 등가형태의 자리에만 있을 수 있는 노동자들이 화폐, 결국엔 자본에 의해 모여질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것이 루카치가 말한 ‘사물화된 의식’을 가지는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의 모습이다. 그런데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자본,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주체로서의 ‘소수자’의 모습이 아니라 자본에 포획되어 자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다수자’로서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저항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하여 노동자 계급이 계급 주체로서, 저항하는 주체로서의 ‘소수자’ 모습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모든 것을 자본으로 표현하도록 강제하는 가치의 동일성, 자본의 동일성을 깨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일단 자본의 동일성은 아래와 같이 상대적 가치형태에 있던 것을 등가형태로, 등가형태에 있던 것을 상대적 가치형태로 뒤바꾸는 것으로부터 해체된다.

 

노동자 계급 = p․화폐(자본) --> p․화폐(자본) = 노동자 계급 [도식2]

 

그런데 이러한 해체는 자본의 동일성의 비밀을 캐물어 들어가 해명하는 데서 출발한다. 가치, 자본의 동일성은 ‘차이’라는 관계를 통해 나타난다. 맑스는 『자본』상품 장의 ‘단순한 가치 형태’의 절에서 ‘x량의 상품A = y량의 상품B’라는 등식을 통해 이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 노동 일반으로서의 추상노동, 즉 자연적 노동시간이라는 공통요소(동일성)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이 맑스 생각 전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맑스는 『자본』을 통해서 자본 운동의 모순을 밝히고자 하였고, 고전 정치경제학의 노동가치론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만일 이것이 맑스 생각의 전체라고 본다면 맑스를 고전 정치경제학의 아류쯤으로 보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이러한 동일성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할 경우 자본의 동일성과 똑같은 동일성을 노동자 계급이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의 도래에 대한 희망의 싹을 보는 것은 바로 이 단순한 가치 형태 속에서이다. 이는 맑스가 공산주의 사회를 ‘필요한 만큼 배분 받는 사회’라고 했을 때, 사회 구성원 각자가 서로의 욕구(필요)의 차이를 인정하고 동의한다는 점을 바탕으로 함을 암시하고 있는 대목이다. 단순한 가치형태는 바로 서로 질적으로 다른 욕구(필요)를 인정하고 동의하기 때문에 교환이 이루어짐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상품 속에 들어 있는 노동량(자연적인 노동시간)이 동일하기(동일성) 때문에 교환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며, 교환의 전제가 바로 서로 다른 욕구(필요)의 인정과 동의라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3 ‘자본’의 동일성은 이 차이의 인정과 동의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만 유지할 수 있다. 헤겔은 이 동일성에 최후의 목적을 두고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서 자본의 동일성이 가지는 모순과 횡포를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맑스는 이러한 헤겔을, 즉 머리로 서 있는 헤겔을 뒤집었다. 동일성은 차이를 긍정하고 동의할 때 생성되는 것이다. 차이를 부정하면 동일성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차이와 동일성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자본의 동일성을 깨는 것은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인데, 이는 부정의 단계에만 머무르는 것이 된다. 이 동일성을 깨고서 이 동일성에 바탕한 관계 방식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지 않는 한 똑같은 관계 방식을 되풀이하게 된다. 즉 등가형태에 자리하는 얼굴마담만이 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이럴 때 차이는 차별로 변하게 된다. 상대적 가치형태에 오는 것들, 즉 개별적인 것들 그리고 자본과 관계를 가지지 못한 개별적인 것들은 자본의 보편성의 기준에 따라 양적인 차이만을 가진 차별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자본은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지 못한 양적인 확대 재생산 측면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부정의 단계에서 부정의 부정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곧 자본의 동일성의 해체를 넘어서서 차이의 인정과 동의의 관계를 새롭게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의 답은 차이의 생성의 변증법과 연관되어 있다. 차이의 생성의 변증법은 상대적 가치형태에 있는 개별을 등가형태의 보편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즉 개별과 보편의 관계의 변증법에 기인하는 것이다. 차이의 생성은 변증법(변화와 생성의 논리)을 배제하고서는 형성될 수 없다. 관계의 질적 변화, 발전의 변증법 없는, 또는 배제하는 차이는 어떤 차이도 가지지 못한다.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는 이 관계의 변증법에 따라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는 부정의 부정 변증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자본의 동일성만 깬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본의 동일성만을 깬다는 것은 부정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으로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의 필요조건일 따름이지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의 단계에 머무르는 노동자 계급의 중심성과 당파성은 해체되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의 중심성, 당파성은 바로 이러한 부정의 단계의 해체, 즉 부정의 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6. 진지전과 게릴라전의 통일로서의 진보.

부정의 부정의 과정은 노동자 계급이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구성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계급은 그 자체로 “진지”4이며, 또한 그렇게 돼야 한다.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보편으로서의 자본의 운동 과정의 모순에 따라 보편에 반대되는 개별로서의 주체의 참호를 구성한다.5 이러한 참호는 대체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노동조합은 자본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선봉부대이다. 그런데 이러한 참호는 각 개별 자본(기업) 별로 이루어지는 고립적 분산적인 것이기 때문에 총 자본의 측면에서 전 방위적인 포위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고립되고 분산된 참호인 노동조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궤멸하거나 아니면 자본에 투항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총자본에 대항하는 총노동의 진지가 없기 때문이다.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개별화되고 원자화되어 있다. 즉 노동자 계급은 단일화되어 있지 않다. 노동자 계급들은 그 자체로 이질적이며 다원화되어 있다. 따라서 분열되어 있다.6 이 분열을 줄여 나가기 위한 물질적 기반과 조건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대자적’ 계급, 즉 구체적인 계급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며, 이 과정이 바로 계급투쟁의 과정이며 총노동의 진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총노동의 진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계급투쟁의 과정으로서 자연, 사회의 총체적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고 이는 곧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의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순서의 도식들로 나타나게 된다.7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빈민....] = 노동자 계급 [도식1]

 

노동자 계급 =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빈민....]   [도식2]

 

 [노동자계급, 어린이, 청소년 학생, 노인계층....] =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빈민....]

또는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빈민....]  =  [노동자계급, 어린이, 청소년 학생, 노인계층....] [도식3]

 

[도식1]은 자본의 동일성, 보편성에 대한 부정의 형태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을 단순히 노동자 계급으로 대체한 것뿐이다. 이것은 화폐, 자본이 서 있던 등가형태의 자리를 노동자가 단순히 대신한다는 의미의 동일성, 보편성을 뜻하는 것이고, 그 동일성, 보편성은 화폐, 자본이 모든 상품(또는 상품 소유자)을 추상적이고 자신에게로 지양되어야 할, 다시 말해서 환원되어야 할 개별자로 만들고, 그 개별자들을 동일성을 지닌 보편자로서의 자신에게로 환원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얼굴의 전체주의의 모습을 가진 사회를 만들 뿐이다.

노동자 계급의 자기 생산은 양적인 자기 생산인 자본 자신의 생산과는 달리 질적으로 새로운 자기 생산이다. 질적으로 새로운 생산은 자본처럼 늘 등가형태의 자리, 즉 동일성과 보편성의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도식2]에서처럼 노동자 계급이 상대적 가치형태, 즉 차이와 개별성의 자리에 오고 동일성, 보편성의 자리에 여성을 비롯한 여러 소수자들이 온다. 여러 소수자 되기를 통해서 노동자 계급은 자기 자신을 새롭게 생산하고 표현할 수 있다. 계급투쟁은 이제 등가형태라는 보편성과 동일성의 자리에 끊임없이 소수자의 문제를 위치시킴으로써 노동자 계급 자신을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으로서의 기초를 만들어 낸다.

공산주의 사회는 각기의 자유로운 사회적인 개인들이 자유롭게 연대의 관계를 맺는 사회이다. 물론 [도식2]는 공산주의 사회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만일 [도식2]에 노동자가 상대적 가치형태의 자리에만 머문다면 이것은 『자본』에서 전개된 가치형태가 일반적 가치형태로 이행하는 것처럼 [도식1]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식2]에서의 노동자 계급은 『자본』의 전개된 가치형태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에 있는 개별 상품과 같은 순수한 개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식2]에서 좌변 항에 있는 노동자 계급은 이미 자신 안에 차이를 지닌 다양한 관계들을 포함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은 [도식1]에서처럼 이미 보편성을 지닌 우변 항을 거쳐 왔기 때문이다. 이제 [도식2]는 [도식3]으로 넘어간다.

그리하여 [도식3]의 좌측 등식의 좌변 항은 노동자 계급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계층이 올 수 있는데, 이는 『자본』에서의 일반적 가치형태의 좌변 항인 상대적 가치형태의 자리에 오는 상품들처럼 자기들끼리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우변 항에 있는 여성 계층(문제)과 다른 계층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그럼으로써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모든 계층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연대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소수자 되기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소수자 되기란 끊임없이 좌변 항과 우변 항의 위치를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바꾸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8 이것은 보편이 개별이 되며 개별이 보편이 되는 끊임없는 과정이며, 또한 다시 보편으로 돌아갔을 때 이 보편은 이전의 보편과는 내용상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보편이며, 개별 역시도 이전의 개별과는 내용상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다른 개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질적으로 새로운 인간의 생산과정이며, 생산력이 질적으로 바뀌는 과정이며, 그에 따라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며, 이 새로운 환경은 곧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 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자본의 재생산 구조를 깨뜨려서 질적으로 새로운 인간관계 구조를 만들어 내는 계급투쟁의 과정이며 노동자 계급의 진지를 확보하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지화는 계급해방, 인간해방으로서의 노동해방의 기본 핵심 전략이다.

계급투쟁의 진지는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소수자 되기를 통해 나타나는 각각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이다. 노동자 계급은 “수은방울”9처럼 자신의 관계 형성을 끊임없이 바꿔 나가면서 자본의 공격에 저항해야 하며 동시에 그 공격을 무화시켜야 한다. 노동자 계급이 노동자, 특히 임노동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고정시킨다면 그것은 ‘가만히 있을 테니 때리시오’와 같은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은 가타리가 말했던 것처럼 ‘되기(becoming)’, 즉 소수자 되기의 전략을 통해 자본에 저항할 수 있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특히 이 소수자 되기의 토대는 바로 여성 되기이다. 노동자 계급은 소수자 되기로서 여성 되기의 기동성과 유연성이라는 핵심전략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해방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성 되기는 진지 없이 치고 빠지는 단순한 게릴라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정규군대를 중심으로 하는 단순한 진지전도 아니다.101112 싸움의 헤게모니 장악을 통한 계급투쟁 진지를 구축, 확보함으로써 진지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끊임없이 옮길 수 있는, 다시 말하자면 개별(상대적 가치형태의 자리)과 보편(등가형태의 자리)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기동전을 펼치는 게릴라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여성 되기라는 게릴라전이야말로 노동해방의 핵심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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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기서 가사노동을 본래부터 여성의 담당이냐고 이의제기할 수 있다. 정당한 이의제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성’의 가사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성별 분업이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해체되어야 할 것은 바로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러한 성별 분업이다. 다른 한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치=상품=화폐=자본>. 이것의 최고의 법률적 형태는 국가이다. 그런데 이 국가는 가부장적이며 남성 지배적인 국가이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임노동의 물적 토대는 바로 여성의 가사노동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노동, 특히 가사노동은 남성의 화폐(임금)라는 사물의 형태로 소외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여기서 ‘의식적으로’라는 말은 맑스주의적으로 볼 때 ‘대자적’이라는 말과 유사한 말이다. 그러므로 이 ‘의식적’이라는 말에 괄호를 친 것은 ‘대자적’인 것뿐만 아니라 ‘즉자적’인 것 모두를 포괄하기 위해서이다. 앞으로 ‘의식적’이라는 말에 괄호를 칠 경우,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3. 그람시가 말하는 ‘동의’란 바로 ‘차이’에 의거한 동의라고 할 수 있다. 그람시가 시민사회에서 동의를 바탕으로 한 진지 구축을 이야기할 때, 그 동의는 시민사회 내에서 자본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자본의 ‘동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바로 이 자본의 동의와 질적으로 다르면서도 이 자본의 동의의 전제가 되는 동의이다. 이러한 동의는 바로 그람시의 사회주의관으로 연결된다고 본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4. K. Marx, Das Kapital, MEW 25, S. 99 텍스트로 돌아가기
  5. 이는 들뢰즈의 기계들의 관계 방식에서 이접적 종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접적 종합은 기계들이 주체로서 자신을 욕망이라는 매끄러운 표면에 ‘홈’을 파면서 등록, 기입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홈’은 바로 노동자 계급의 ‘참호’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홈’, ‘참호’는 자본에 의해 쉽게 함락되고 메꿔지는 것이다. 이때의 주체는 들뢰즈의 일시적, 분열적 주체일 따름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6. 이와 관련하여 리보위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자들이 이질적인 인간들로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그들 각각의 생산에 고유한 조건들이 지닌 차이점(자본 자체가 만들어 내는 분열뿐만 아니라)들을 감안한다면, 노동자들을 분열된 존재로, 즉 서로 경쟁하는 임노동자들로-자본에 대항하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적 근거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분석상 노동자 계급을 단일한 존재로 파악한다는 것은, 실제로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단일한 존재로 인식하거나, 또는 단일한 존재로 행동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또한 노동자 계급이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아니다).” 마이클 리보위츠, 『자본론을 넘어서』, 홍기빈 옮김, 백의, 1999, 255쪽.  텍스트로 돌아가기
  7. 아래에 나올 도식들은 맑스 『자본』의 상품 가치 형태에서 나오는 도식들을 응용한 도식들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8. 이는 들뢰즈의 ‘차이의 반복’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동일성보다는 차이의 존재론적 우월성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동일성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이는 들뢰즈가 반변증법론자이자 반헤겔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반레겔주의자로서의 맑스와 유사한 점은 바로 상품의 가치라는 동일성이 바로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 두 상품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맑스에게서 자기 동일성을 추구하려면 차이의 생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일성이란 차이를 내포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헤겔처럼 완전한 동일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들뢰즈가 비판하고 있듯이 개념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맑스 역시도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머리로 서 있는 헤겔의 변증법을 바로 뒤집고자 한 것이다. G.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서론 : 반복과 차이> 참조. 텍스트로 돌아가기
  9. “빨치산 부대들은 방어 시 가능한 한 공격목표 대상이 되지 않거나 그 대상권을 벗어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최대의 안전도와 공격력을 보유하기 위해 전개(展開)(군사용어로서 종으로 집중된 부대가 공격을 행하기 위해 종횡으로 공격대형을 전개함)되었다. 수은방울처럼 게릴라 부대들은 단일한 임무를 위해 신속하게 대부대로 결집될 수 있었으며 또 독일군이 반격을 취할 때에는 마찬가지로 재빠르게 십여 개의 분대들로 분해되어 흩어질 수도 있었다. 방어의 기본 이론이란 통상적인 전력 비교에 따라 적과의 접전을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동성과 유연성이 빨치산 대원들의 가장 강력한 전술적 특성이 되었다.” 브룩스 맥클루어, 「러시아의 지하군대」, 『현대 게릴라전 연구』, 오상카 외 지음, 편집부 편역, 세계, 1985, 64쪽 참조. 텍스트로 돌아가기
  10. 먼저 정규군대를 중심으로 하는 진지전에 관해서는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서 무정부주의자와 품의 군사조직이 스탈린 군대에 의해 강제적으로 해산되는 장면을 참고하면 되겠다. 이는 프랑코와 그를 원조해 주는 제국주의 정규군대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정규군대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는 일면적으로 타당하다. 각각의 게릴라 소부대가 서로간의 의사소통 관계(유기적 관계) 없이 각 소부대가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상대방의 정규군에게 각개격파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커다란 특성인 원자화, 개별화와 관련이 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 개인이나 소집단은 개별화, 원자화되어 있고 이 개별화, 원자화되어 있는 개인들이나 소집단들을 자본이 관계 맺게 하며, 만일 노동조합처럼 자본에 대항하는 경우 각개격파하여 궤멸시킨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탈 중앙집권적인 게릴라 전의 위험에 대하여 중앙집권적인 정규군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된 것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11. 그런데 과도하게 중앙집권적 정규군에 집중할 경우, 즉 게릴라를 정규군으로 만드는 데 집중할 경우 싸움은 백전백패를 당할 게 뻔하다. 왜냐하면 질적으로 동일한 형식(중앙집권제)으로는 양적인 것만이 승패의 요인이 되고 양적으로 불리한 정규군화된 게릴라들은 이미 지는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정규군에 대한 게릴라들의 싸움의 승패는 중앙집권화를 넘어서면서도 질적으로 새로운 관계 틀이 좌우한다고 보겠다. 탈 중앙집권적인 게릴라도 아니고, 중앙집권적인 정규군도 아니라면 무엇일까? 2차 세계대전 중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트남전>의 보기를 들어서 그 싹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12. 전력이 부족한 상태에 있는 측의 싸움 형태는 게릴라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게릴라전이 눈부신 전과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질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바로 이순신의 경우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순신은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한 장수라는 것이다. 이순신의 싸움은 게릴라전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이순신은 서남 해안의 물길 지형을 이용해서 치고 빠지는 전술을 택했다. 그리고 그 전술을 위한 무기도 개발했다. 이순신은 절대로 정규군들이 하는 식으로 일대일로 붙는 싸움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부하에게 도망가는 적을 절대로 쫓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이순신은 마지막 노량 해전 때 도망가는 적을 쫓아 관음포구로 향해 갔다. 왜 이순신은 그랬을까? 이순신은 더 이상 게릴라전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명나라 육군과 수군의 수모를 받으면서도 육지를 탈환해서 앞으로의 싸움을 진지전으로 끌어가고자 하였다. 싸움의 힘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새로이 생산할 수 있는 진지로서의 육지의 탈환! 이것이 이순신이 무리하게 도망가는 왜군을 뒤쫓던 이유였다. 진지 없는 게릴라전은 결국 패배하게 돼 있다. 해방 후 남쪽의 빨치산의 최후는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싸움의 힘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새로이 생산할 수 있는 진지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노동자 계급이 계급투쟁의 힘을 어디서 어떻게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새로이 생산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펌글> 박대통령의 위선적인 조문...

또 지워질까봐 카피.

 

뽐뿌 원문링크 m.ppomppu.co.kr/new/bbs_view.php?id=freeboard&no=3414250

오늘(29일) 오전에 YTN에서 안산 정부합동분양소에 박근혜 대통령이 조문했다는 뉴스를 봤다.

YTN앵커와 취재 기자가 일반인에게 문을 열기전에 먼저 찾아 조문했다고 했다.

화면에는 정부관계자와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서있는 화면이였는데

유독 일반인으로 보이는 어느 여자분이 뒤를 졸졸 쫓아 다니길래

저사람은 뭔데 쫓아 다니지 하고 이상하다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한참뒤 연합기사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경악했다....

포토라인에 세우기 위해 일반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일반인에게 문을 열기전에 데려와

사진을 찍은거다.

이런 대통령이 우리나라 대통령이다.


 

ytn 영상

http://media.daum.net/politics/pres...

 

연합뉴스 기사

http://www.ytn.co.kr/_ln/0101_20140...


 

 댓글(80)

  • 전설을만들다 13:27 답글달기

    미쳤군요.. 나라가..

  • 사랑이란...? 13:30 답글달기

    이글을 핫게로!

  • 농협이명박상금세탁 13:33 답글달기

    새치기 죄송합니다. ytn 영상하고 연합뉴스 기사가 순서가 바뀌었어요.

  • free... 13:27 답글달기

    와 이게뭐지..

  • 깬민 13:28 답글달기

    야!!!!!!!!!!!!!!!!!!!!!!!!!!!!!!!!!!!!!!

  • 뽑뿌. 13:28 답글달기

    징그럽네요.. 진짜..

  • 힘쎄고오래가는박대리 13:28 답글달기

    오지마 천한것..

  • 08제라드 13:28 답글달기

    저아줌만 시급얼마려나...

  • 구름찾기 13:28 답글달기

    가식적인.....연

  • 꿍창꿍창 13:28 답글달기

    으휴.. 정말 어떻게 돌아가는지 ㅠㅠ

  • thrall 13:28 답글달기


    그래도 오늘은 드레스코드를 맞추셔서 다행입니다^^

  • dnldzj1014 13:28 답글달기

    무슨 조선중앙티비 보는거 같네요 ... 저 할머니 유가족은 맞나요

  • 뽐뿌눈팅이 13:28 답글달기

    저 아주머니가 유가족인가요?

  • 부처핸섭 13:28 답글달기

    와 진짜.... 쩐다

  • 파즈여 13:28 답글달기

    미개한 국민이 해할까 무서워 저러나 봅니다.

  • 해치지않아요... 13:29 답글달기

    진짜 유족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리 약속됐겠지만... 보여주기가 ㅎㄷㄷ

  • 얼룩거북이 13:28 답글달기

    정말 아름다운 대한민국이군요.. 젠장..

  • 카리시마 13:28 답글달기

    헐..... 할말을 잃었네요.......

  • real- 13:30 답글달기

    와 핫게갑시다 ㅡㅡ

    안그래도 일반인 조문 10시부터랬는데 

    저기에 왠 일반인이지 그랬건만..

    역시나 ㅡㅡ.... 연합 ㄱㄱㄲ

  • 엑사베베 13:29 답글달기

    우와 진짜 미치나라 같네요...

  • 넌너무약해 13:29 답글달기

    저 아주머니 유족 아니면 일당 받고 저런거 하시는건가요?

  • Atelier 13:29 답글달기

    진짜 개미친년이다 저렇게까지 ㅈㄹ해야 하나

  • Justus_Newman 13:29 답글달기

    의전을 중시한다고 나불대더니 사기를 의전이라 포장하고 자빠졌군요 ㅉㅉㅉ

  • 관표 13:29 답글달기

    얼척없네요. 진짜 미친 ㄴ

  • Beyonce 13:30 답글달기

    대단하네요~

  • 계란을인질로잡고있다. 13:30 답글달기

    아..정말 그렇게 자세 낮추기 힘든가..그렇게 국민을 위해 자존심 내려놓기 힘들었나..?
    계란 맞고 돌 맞아도 더 낮추고 더 반성하면 이렇게 질타받지 않을텐데..
    어쩜 이리도 격식과 허례허식 투성이란 말인가...

  • 사랑이란...? 13:30 답글달기

    핫게로

  • 제이폼 13:30 답글달기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ㅎㄷㄷ
    온 몸에 소름이 끼치네요..
    저 아주머니는 누군지 낱낱이 밝혀야 할 것입니다.

  • 진격의뚱 13:31 답글달기

    에이 설마요,, 솔직히 짜고 했을수도 있겟지만.....
    고인 학생에 할머님이실거 같아요... 아 진짜 정부가 하도 개구라를 많이 치니 ㅡㅡ

  • 내일만나요 13:31 답글달기

    까도 까도 끝이 없네...

  • 나도야 13:31 답글달기

    이건.....뭐..

  • 해치지않아요... 13:31 답글달기

    유족으로 보이는 조문객???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놨네 ㅋㅋ

  • 힘쎄고오래가는박대리 13:33 답글달기

    ㅋㅋㅋ 유족이라고 말한적 없따~

  • 엉덩이에서나오는뜨거운바람 13:31 답글달기

    트루를 압박하는 팩트...

  • 환생™ 13:31 답글달기

    추천은 왜 한번밖에 안됩니까~! 포인트 다써도 좋으니 다수 추천 가능하게 해달라!

  • 고철 13:31 답글달기

    나라가 미쳐가는듯

  • 딸딸아빠 13:31 답글달기

    절대고수 경호원일지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Alison 13:31 답글달기

    에휴...............

  • 달빛조각사 13:31 답글달기

    보는것만으로도 짜증나는 ㄴ 이네

  • 카리시마 13:31 답글달기

    유족인가요... 아닌가요.... 아니라면, 정말 대박이군요....

  • 유라님 13:31 답글달기

    역겹다 진짜...

  • 망했어요언니 13:32 답글달기

    그림 잘나왔네요

  • 두산베어스짱V4 13:32 답글달기

    대단하다 진짜 할말이 없다...

  • Dorothy77 13:32 답글달기

    이건 천한정도를 넘어섰네

  • Fnanss 13:32 답글달기

    유족으로보이는 조문객 알고보니... 
    분향소 자원봉사원(청소나안내해주는) 
    ...아닐까 추측이..

  • median 13:32 답글달기

    닭이 겁은 많아서.. 정식 오픈하기 전에 아싸~ 하고 다녀온거죠.

  • 흐헤헤헤 13:32 답글달기

    쇼! 끝이 없구나 ㅉㅉ

  • 아이폰포씁니다 13:32 답글달기

    유족아니예요 저분?

  • 그래가는거야 13:33 답글달기

    쌍욕이 절로 나온다

  • 딸딸아빠 13:33 답글달기

    대통령 "어차피 인생도 한편의 연극이다" 하십니다.

  • 궁금혀 13:33 답글달기

    아 시바 니미 여기가 북한도 아니고 . 

    나 대한민국에 사는거 맞나. 우리 혹시 북에있는거 아니죠.

  • 대전지엥 13:33 답글달기

    아 너무 화난다 
    ㅅㅂ 저런게 대통령이라는게

  • 뭉올이진리 13:33 답글달기

    ㅈㄹ한다

  • 아--저는그냥할말을잃었습니다 13:33 답글달기

    언플을 너무 믿고계시네...

  • 까까 13:34 답글달기

    글은 왜 자꾸 지워지는건가요?

  • 합격! 13:34 답글달기

    ㅎㅎㅎ 웃기다 아마도 시민들이 무서웠을듯

  • 개같은내인생 13:34 답글달기

    밖씨는 원래 저렇게 하는 줄 알고 있을 겁니다

  • 송사장님 13:34 답글달기

    조석이 말합니다..좀 꺼져버렸으면 좋겠다..

  • 이십사흐시간 13:34 답글달기

    박빠 아줌마 데려다
    악수도 안되고 포옹도 안되고
    저게 최대한 접촉 이였군요

  • 쭈구리왕 13:35 답글달기

    ....욕 하기 싫은데...이런 ㅋ우리ㅏ무리ㅏ뷔ㅟ컽레머레ㅐ부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ㅠ

  • 카리시마 13:35 답글달기

    예전에 이란인가... 거기서 저런식으로 사진위조하고 하더만.... 진짜, 우리나라에서도 이런일이.... 내가 1970년대에 살고 있는게 아닌지 의문이 드네요..

  • 에세9000 13:35 답글달기

    왜 난 이해안될까? 저여자분이 들러리라는 증거는?

  • 현서맘~ 13:36 답글달기

    자꾸 왜 들키냐고

  • 봄은냐옹이다 13:36 답글달기

    마지막 사진 표정 압권 ...

  • 또다시 13:36 답글달기

  • 영원한500점 13:36 답글달기

    저분이 진짜 유족이라 해도
    저렇게 한 명 모셔다 놓고 장면 연출한건 진짜...어처구니가 없네요.

  • 흔들리는마음 13:37 답글달기

    한숨이 나오네요..정말..

  • 나비효과 13:37 답글달기

    선거운동할때 생각나네요. 
    똑같은 학생 세명정도가 여기서 사진찍고 저기서 사진찍고

  • 블랙로비 13:37 답글달기

    정말 대단하다라는 생각밖에는... 진심이라는 말을 알기는 하는지...

  • 으앙졸려 13:38 답글달기

    와.........................진짜..

  • 집중이필요할때 13:38 답글달기

    휘빠 무슨 화보집 찍냐? 국민과 함께 하겠다더니.. 왜 국민들이 없을때 조문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 비셈블루 13:38 답글달기

    이 얼마나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인가요.
    저런거 보고 믿으라고 연기하고 또 저런거 보고 믿고...

    국민을 완전 무슨 깡통캔으로 보는겁니다.

  • 카리시마 13:38 답글달기

    아.. 진짜 궁금하네.. 저분의 정체가... 저번에 팩트TV에서 파란색잠바도 궁금해지더만...

  • 맛있는떡볶이 13:38 답글달기

    대다나다

  • 재가대일전과 13:38 답글달기

    핫게로..

  • 고모리 13:39 답글달기

    고발뉴스와 JTBC에 제보합시다!!!!!

  • 바이어20 13:39 답글달기

    하려면 걸리지나 말지...들통난 걸 보는 국민의 입장에선 그냥 막막하네요.

  • 담비와구름이 00/00 답글달기

    진짜 대다나다

  • 분리수거 00/00 답글달기

    저 여자분이 유가족인지 아닌지는 모르죠.

    자신들 입맛에 맞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이용했을 수 도 있고, 일반인이 출입제한 시간에 저런 사진이 가능하다는건 문제가 있죠.

  • 빨간실님 00/00 답글달기

    얼마나...더... 우리에게 실망을 주실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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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맞이하며...

간장 오타맨...님의 [[시/최영미] 선운사에서]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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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겨울...

아직도 겨울이구나...

아직도 한겨울 외투에

목도리에 내복에...

그리고 감기에...

언제 봄이 올지...

글쎄...

봄이 오던 안 오던...

그냥 사는 게지...

희망도 절망도 없이...

 

왜 사는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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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혁명 전략의 전개 3.

개인의 변화 그리고 정치의 변화

 

“우리가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블록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은 두 번째 영역인 개인의 변화 그리고 정치적 변화의 통합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 활동을 통해 세계를 알아오고 (세계를 변화시키며 또한 세계에 의해 변화되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은 우리의 정치 활동의 토대가 될 수밖에 없다. 비록 가장 심오한 철학적 물음이 우리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보다 더 클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감각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 활동”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이 우리에게 부과한 특수한 문제들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의 현실 존재를 우리가 만들어 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그리고 일상의 삶과 사회 제도들을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우리는 사회적 과정으로서, 즉 인간 활동의 산물로서 우리 현실 존재를 이해해 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우리가 우리 사회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각은 우리의 힘을 느끼게 하고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하게 만든다.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페미니즘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 행위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재규정은 정치적 변화를 꾀할 수 있는 행위의 주요한 부분이다.

우리 자신이 사회적 현상들이며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로부터 그 현상의 의미들을 찾을 수 있다면, 오로지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삶의 다른 영역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61쪽)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존보다 자기에 대한 규정을 더 강화시키는지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힘을 축적시킬 수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 개인이 우리 사회적 관계의 총체일 때, “어떤 개인의 개성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어떤 개인의 개성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이러한 관계들의 총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가 아무 것도 없는 진공 속에서 우리의 삶을 생산하거나 재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의식의 변화나 규정의 변화는 우리가 서로 맺고 있는 사회적(집단적이고 개인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는) 관계들이 재구성되었을 때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페미니즘을 통하여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제도들에 반대한다. 개인들의 특별한 경험에 집중함으로써, 페미니즘은 사회적 관계 전체, 즉 전체로서의 사회구성체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페미니즘의 분석 양식은 가부장제, 자본주의, 백인우월주의, 사회 상호작용의 형태들, 언어 등 이 모든 것들이 역사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전체로서의 사회구성체 특징들이 개인적인 수준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우리의 삶을 변형시키는 역사적인 구조는 우리가 답해야 하고 변화의 직접적인 가능성들을 규정하는 물음들을 제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 활동이 사회 세계의 구조라는 점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구조는 개별적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쌓아온 성과들을 발판 삼아 민중이라는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회적 삶은 어떤 점에서건 바로 복잡한 요소들에 의존하는데, 즉 태아 때 욕구들뿐만 아니라 이미 성장했을 때의 욕구들에 의존하는데, 이러한 욕구들을 생산하고, 실현하며 만족시키는 것은 역사적 과정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새로운 자신으로 성장시켜 나가는 것은 우리가 대규모의 힘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 즉 완전히 성장한 개인들만이 역사와 투쟁의 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와 투쟁은 새로운 개인을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집단의 생성을 필요로 하는데, 이 집단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개인의 개념과 반대된다. 이러한 새로운 집단의 창조는

 

(62쪽) 이질적인 목적들을 가진 분산된 다수 의지들이 동등하고 공통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해서 하나의 목표로 결합되는 “문화적-사회적” 유대감 형성을 전제로 한다. 또한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 양자도 결합되는데, 일시적인 격정의 형태로(감정적인 방식으로) 결합될 수도 있고 지속적인 격정의 형태로(여기에서는 지성적인 기반이 잘 갖추어져 있고, 감정과 잘 동화될 수 있으며 그리고 잘 경험될 수 있어서 열정(passion)으로 되기도 한다) 결합될 수도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규정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을 변화시키려고 투쟁할 때만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사회 제도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일 뿐이다. 각각의 측면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누군가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 개인이 우리가 연관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관계라면 - 사회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실천은 자본주의에 의해 분열된 삶의 여러 측면들을 재통합시키는데, 바로 지성적 측면을 열정과 동화시키는 그러한 방식으로 재통합시킨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환경의 변화 그리고 인간 행동의 변화 또는 인간 자신의 변화는 일치될 수 있으며 이러한 일치는 합리적으로 혁명적인 실천활동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변화하는 세계 내에서의 우리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보다 규모가 큰 여러 과정의 일부이며 우리 삶의 모든 측면들이 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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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괜찮아..

난 정말로 대세인가봐

낙엽이 내 머리에 살포시 내려앉아

관음보살처럼 묻는다

요즘 어떻게 지내

안색이 별로

무슨 일 있어

 

나는 그냥 대답을 하지 않는다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저 흐린 하늘만 애써 쳐다본다

 

내 눈에 눈물이 흘러 내린다

비가 온몸을 토닥토닥 어루만진다

괜찮아 괜찮아

넌 괜찮아

 

난 요즘 대세인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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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희..

# <우리 선희> (홍상수 감독, 2013) #

감독 : 홍상수

출연 : 정유미(선희), 이선균(문수), 김상중(최교수), 정재영(재학), 이민우(상우), 예지원(주현)

 

내 머리털 나고 혼자 야심한 밤(밤11시 상영)에 영화 관람을 하러 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홍상수라는 감독의 이름이, 그리고 배우들의 이름(정유미, 김상중, 정재영, 이선균, 이민우, 예지원)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에는 특별한 반전이 있는 내용이 없다. 그냥 너무나도 일상적인 이야기들과 모습으로 구성된 영화이다. 얼핏 보면 그냥 그저 약간 코믹한 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 홍상수 감독께서 그러셨단다. “이번엔 쉽게 쉽게 보시라.” 그런데 이게 쉽게 보면 쉬울 수도 있는 것이지만, 한꺼풀만 벗기면 그리 녹록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홍감독님께서 낚시밥을 던지셨구나 하는 느낌에 살짝 웃음이 나기도 했다(어렵게 생각하는 나를 홍감독님께서는 싫어하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영화 해석은 내 자유이니까!^^).

이 영화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강하게 떠올리게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 관계 속에서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찬찬히 사색해 볼 것을 바람이 전하듯 전해 준다.

이 영화는 한 여자(선희)와 세 남자(문수, 최교수, 재학)의 만남(재회)과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 남자는 예전에 한 여자와 관계가 있던 남자들이다. 한 여자는 학교 졸업 후에 다시 학교로 와서 이 남자들을 하나씩 만나고 나서 그대로 떠나버린다.

홍상수 감독의 예전의 영화 제목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영화에서도 선희는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관계의 전형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선희는 인간관계, 특히 남녀관계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관계 고리를 끊어 버린다. 예전에 세 남자와 선희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선희는 이 관계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현실(학교)을 떠나 잠수를 탄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통해 새롭게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려는 결심(유학)한 후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제 현실에서의 관계를 이해하고 정리해야 새로운 현실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희는 세 남자를 만나서 현실을 이해하고자 한다. 세 남자와의 각각의 만남 속에서 선희는 자신이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인의 위치에 있게 됨을 이해하게 된다. 세 남자는 선희에게 매달리고(문수), 선희의 말에 복종하게 되고(최교수, 교수 추천서를 선희의 뜻을 그대로 반영하여 다시 써 준다), 선희에게 오히려 위로를 받게 된다(재학). 그리고 선희는 이 주인의 위치를 과감히 버리고 쿨하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고리를 끊어 버린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끊임없는 악무한적 순환의 고리(불교에서는 윤회의 고리로 표현된다)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세 남자와 다시 관계를 가진다면 주인의 위치는 얼마 가지 않아 노예의 위치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희의 떠남은 결국 대등하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란 집착과 아집을 끊어버리는 쿨한 관계이다. 집착과 아집은 배타적 소유인 사적 소유관계(주인과 노예의 관계)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남자들 셋 모두 선희에 대한 동일한 파악은 바로 이러한 집착과 아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세 남자는 자신들이 선희와의 관계에서 노예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즉자적으로 직감하지만 대자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늘 주인의 자리를 그리워하지만, 그 주인의 자리는 이제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선희가 떠난 후에 주인의 위치라는 집착과 아집에 갇혀 현재의 자기 존재에 대해 기만하게 된다.

다른 한편 세 남자는 선희와 만나면서 선희에게 삶에 대한 충고를 한다. 이러한 충고는 여전히 자신의 주인의 자리에 있다는 자기 존재기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또한 권력관계로부터 나타나는 것(가진 자, 쥔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깊게 파고 들어가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결과적으로 지금의 삶을 깨뜨려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가 말하는 것, 즉 지금의 삶의 모습에 대한 제1원인을 캐보라는 것인데, 그 제1원인은 결국 신이고 네가 현재 이렇게 사는 것은 신에 의해 결정된 삶이라는 결정론의 이데올로기가 함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노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임을 뜻한다.

세 남자는 자신들의 이러한 존재 기만이 관성의 법칙에 의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이 깨닫지 못함은 결국 치킨(닭)으로 상징된다. 주현(예지원 분)의 재치가 돋보인다. 여성의 이름에만 Sophia(지혜)가 있고 남성의 이름에는 없는지가 이해된다. 역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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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혁명 전략의 전개 2.

페미니즘 이론의 본성(The Nature of Feminist Theory)

 

자신들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여성들은 많은 것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토록 다양한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회운동에 관해 일원론적인 용어들로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텔레비전에 나오고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매체가 페미니즘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나타낼 수 있는 여성운동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좀 찾기 어렵고, 지역의 특수한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지역 조직들 그리고 소규모 그룹들로 구성되어 있는 두 번째 운동들이 있는데, 이 운동은 여러 도시에 사는 여성들의 직접적인 욕구와 관련하여 연대하며(come together), 변화를 위한 작업에 직접적으로 에너지를 투입하는 운동이다.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내 논의의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이 그룹들이다. 이 그룹들은 여성 공동체를 건설해 나가는 성폭력 위기 센터, 여성 센터 등과 같은 실천적 행위와 관련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페미니스트들처럼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문제들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실천에 깊숙이 뿌리를 둔 운동을 조직하였다. 사실, 여성운동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정확히 우리 실천에 대한 고찰을 넘어선 혁명적 이론의 창조이다.

이러한 모든 그룹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주의 운동 대부분의 세계관과는 다르지만, 또한 동시에 놀랍게도 맑스의 세계관과 아주 유사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구체적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사회 이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개념들로부터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는 이러한 분석 양식은 페미니즘 힘의 근원이며 내가 페미니스트가 가장 정통성 있는 맑스주의자였음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루카치(Lukacs)의 주장처럼, 맑스주의 이론 내에서의 정통성은 오로지 방법(method)하고만 관계가 있다.

실제로, 페미니즘은 분석 양식이고, 삶과 정치에 접근하는 방법이며, (59쪽) 여성의 억압에 관한 일련의 정치적 결론들이라기보다는 여성 억압이 왜 생겨났는가라는 물음을 묻고 그 물음의 답을 찾는 길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현존을 규정하는 사회관계들을 변형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방법을 여성으로서의 그들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에 적용하고 있다. 페미니스트는 자신들의 고유한 일상적인 삶을 직접적으로 다루는데, 그 중 어떤 것은 이러한 운동이 급속하게 퍼져나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맑스주의 내에서 일반적으로 하나의 특정한 경향으로 인지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나는 페미니스트가 맑스의 방법을 재창조하였기 때문에, 여성운동이 나머지 좌파의 발전적인 이론과 전략을 위한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규모 그룹의 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한 실천활동은 경험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개인의 경험을 여성의 삶을 규정짓는 구조에 연결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으며, 페미니즘에 기초한 방법(재창조된 맑스의 방법-옮긴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이런 실천활동을 통해 여성들은 자신만의 경험과 함께 시작되는 지반(일상적인 삶-옮긴이)으로부터 자신의 분석 능력을 키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여성들은 사색하는 사람으로서뿐만 아니라, 맑스가 제시하였듯이, 자신의 느낌 전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분석하였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경험 그리고 여성 억압에 관한 모든 정치적인 것 사이의 연관관계를 이끌어내었다. 사실 여성들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그러한 일반적인 것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변형시켰던 방식으로 우리의 경험, 우리의 과거를 이해해 왔다.

페미니스트들이 발전시켜온 방법의 힘은 이 방법을 통해 여성들이 자신의 일상을 규정하는 사회 제도들의 분석과 그 일상을 연관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제국주의 양상을 포함한) 자본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백인 우월주의 제도들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이 제도들은 일상의 경험과 행동이라는 생생하고도 현실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는 이 제도들 사이의 구체적인 상호관계를 보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은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 이론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역할이 재차 강조되어 왔음을 의미하는데. 이 역할은 이론가들이 “원리들 그리고 대중이 자신의 실천 활동 속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체계화시키는” 것이다. 분석 양식으로서의 페미니즘은, 특히 의식화(consciousness-raising)가 그러한 방법의 토대로 이해될 때, (S.60) 지식인 또는 이론가의 개념을 재규정을 요구하며, 일상의 삶과 관련하여 이러한 사회적 역할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우리들 각각이 잠재적인 이론가, 지성인 그리고 활동가이기 때문에, 교육(Education)은 여성 운동에서나머지 좌파 운동에서와는 아주 다른 역할을 해 왔다. 이 같은 페미니스트의 교육은 내가 가르침(instruction) 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다시 말해 “올바른 정치 노선”을 가르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자신을 위해 행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반대되는 교육은 일상생활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교육은 일상생활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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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혁명 전략의 전개 1.

(56) # 3장.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혁명 전략의 전개 #

- 낸시 하트석(Nancy Hartsock) -

 

많은 저자들이 미국 좌파의 문제점들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들은 미국 좌파가 많은 사람들과 멀어졌고, 또한 통일된 조직을 세울 수 없었다는 것 또는 사회주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는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좌파는 시대착오적인 19세기 잔존물로 만들어진 이론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정치 혁신 또는 정치 문제의 확장을 경멸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너무나도 자주 좌파 그룹들은 노동계급이 그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생각 그리고 노동계급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자들이 신성한 텍스트들을 암기했던 자들일 것이며 세계를 조직할 수 있는 총괄적인 이론을 갖춘 자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비판들은 좌파 전체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많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재교육(reorientation)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작업의 한 국면만을, 즉 페미니즘 이론의 역할 그리고 나머지 좌파의 모델로서 여성 운동의 정치적 실천만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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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제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엘리슨(C. Ellison), 로즈(S. Rose) 그리고 스쿨만(M. Schoolman)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또한 이 아이디어들을 정식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퀘스트』(Quest) 직원에게도 감사드린다. 이 논문의 여러 부분들은 제1회 국내 사회주의 페미니즘 회의의 비평문(a critique fo the first national socialist feminist conference)으로서 『퀘스트』(Quest)(a feminist quarterly 2, no. 2 (1975))에 실렸다. 또한 많은 부분들이 1977년 봄 이타카 대학(Ithaca College)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강의 시리즈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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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나는 여성 운동이 새롭고도 확실한 미국 사회주의 건설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여성 운동은 혁명적 전략을 수립하는 방식들 그리고 선진 자본주의의 본모습을 확실하게 밝히는 혁명적 이론들을 발전시켜 나가는 방식들을 위한 하나의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모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의 본성(the nature)이라는 특수한 관점으로 이론 일반을 검토하고 재정의(redefinition)하는 것이 필요하고, 계급의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기본적인 의문들을 재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페미니즘 이론을 우리가 건설해야 하는 다양한 조직과 연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론 그리고 페미니즘 이론(Theory and Feminist Theory)

 

이론은 어떤 혁명적인 운동에서도 기본적인 것이다. 우리의 이론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설명하며, 사회 삶을 유지시키는 힘들(forces)을 분석하고, 우리가 집중해야 할 문제들을 규정하며, 또한 우리가 발전시키는 전략들을 평가하는 규준으로(as a set of criteria)작동한다. 그러나 이론은 한층 더 폭넓은 역할을 한다. 이에 대해 안토니오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특수한 실천 국면에서 이론 자체를 실천 자체의 결정적 요소들과 동일시하고 일치시킴으로써 이론을 구성할 수 있는데, 이 이론은 모든 실천적 요소들을 좀 더 동질화시키고, 체계화시키며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어 가는 역사 과정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실천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현시켜 가는 역사 과정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 그 자체는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힘(a force for change)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동시에 그람시는 우리가 이론에 대한 이해를 다른 방향으로 확장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론화가 강단 지식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어떤 무언가가 아니라 이론이 항상 우리의 행위 속에 있으며 우리가 실재를 참되게 파악할 때까지 이론이 깊이 있게 진행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론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 속에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 그 자체는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의해 주어진 범주들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또한 우리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발전시켜 나갈 수도 있다. 우리가 둘 중에 첫 번째를 선택했을 때, 우리의 이론은 영원히 절대적인 것(implicit)으로 남을 수도 있다. 반면에, (58) 두 번째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비판적이고 명확한 이론을 구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거의 최근 10여 년 동안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행위는 우리의 실천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이론을 정교화시키는 토대를 제공한다. 이론을 명확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페미니스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을 개선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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