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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새로운 지식의 확산 (16세기 초 : 독일과 네덜란드)
▲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업 3가지-북유럽의 평가 ▼
- ①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
- ② “아름다운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하도록 하였던 해부학에 관한 지식”
- ③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품위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고전 시대의 건축 형식에 관한 지식”
- 이러한 지식의 충격은 그러나 건축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왜냐하면 건축은 회화와 달리 대단히 기능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건축물들이 ‘공공’ 건물이었다. ‘공공’이라는 말은 중세 가톨릭교회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건축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이념을 현실화하는 기능적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 그러므로 이탈리아로부터의 “이 새로운 유행”이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자 원했던 군주와 귀족들의 줄기찬 요구에서 비롯”되었지만, “건축가들은 이런 새로운 양식의 요구를 대단히 피상적으로만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원주(圓柱)나 프리즈를 여기저기에 갖다 붙이는 식으로,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풍부한 장식적인 모티프에 약간의 새로운 고전적인 형식을 가미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건축 이념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과시했다. 건물의 본체는 고딕식으로 전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341쪽)
▲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 1471-1528) ▼
- 그러나 화가들은 건축에서의 기능들에 매어 있을 수 없었다. 이미 반 에이크와 같은 15세기 북유럽 화가들의 현실화(자연을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묘사, 즉 자연의 모방)라는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그 현실화를 새로운 미술 원리로서 자기화하려는 충동과 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뒤러는 이탈리아로의 “여행 중에” “사물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고 알프스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수채화로 옮기기도 하고 만테냐(pp.256-9)의 그림을 연구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공방을 열기 위해서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북유럽의 미술가가 남유럽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기법적인 성과들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343쪽)
▲ 뒤러의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도판 220, p.344) ▼
- 이 목판화에서 나타난 “뒤러의 상상력과 대중들의 관심은 중세 말엽 독일에서 무르익어 결국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폭발한, 교회 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과 불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343쪽)
- 이 목판화는 “성 요한의 계시록을 묘사한 일련의 대형 목판화”인데, “최후 심판 날의 공포와 그에 앞선 여러 가지 징후와 불길한 조짐들의 무시무시한 광경”을 “힘 있고 강력하게 시각화”시키고 있다. (343쪽)
- “이 위대한 한순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뒤러는 종래의 전통적인 포즈를 모두 버렸다. 살려둘 수 없는 적과 싸우는 영웅을 종래와 같이 우아하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뒤러의 성 미가엘은 일정한 포즈를 취하며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다. 그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큰 창으로 용의 목을 찌르려고 온 힘을 다해 두 손을 사용하고 있고 그 힘찬 몸짓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 이 천상의 싸움터 아래에는 뒤러의 유명한 서명과 함께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이 전개되어 있다.” (345쪽)
▲ 뒤러의 <풀밭>(도판 221, p.345) ▼
- “자연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던 얀 반 에이크 이래, 지금까지 어떤 예술가가 했던 것보다도 더 끈기 있게, 그리고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뒤러의 목적이었음을 그의 습작이나 스케치를 통해 알 수 있다. …… 예를 들면 뒤러의 토끼 그림(p.24, 도판 9)이나 풀밭의 일부분을 그린 수채화(도판 221)와 같은 것이다.” (346쪽)
- “뒤러는 자연을 모사하는 완전한 기술을 얻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유화와 동판화와 목판화로 삽화를 그려야 했던 성경의 이야기를 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346쪽)
▲ 뒤러의 <예수 탄생>(도판 222, p.347) ▼
- 고딕 미술은 성경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성경 이야기를 <자연의 모방>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통해 묘사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 <예수 탄생>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둘이 아주 자연스럽게 동화․통일된 것이 뒤러의 <예수 탄생>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러한 결합은 <예수 탄생>에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고딕 미술의 전통은 성경 이야기의 인물들로 나타나는데, 이 “인물들은 정말 작고 거의 중요치 않게 보인다. 이 그림을 보면 낡은 헛간에 쉴 자리를 마련한 마리아가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며 요셉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좁은 물통에 붓느라고 분주하다. 배경에서 경배를 올리고 있는 목동 한 사람을 찾아보려면 대단히 세심하게 그림을 음미해야 하며 또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는 전통적인 천사의 모습을 하늘에서 찾아보려면 확대경이 있어야 할 판이다.” (346쪽)
- 그러나 이 성경 이야기의 인물들의 배경인 “단지 낡고 무너진 담장”과 “이미 허물어진 외양간의 울퉁불퉁한” “금이 간 회벽”, “맞물리지 않은 기왓장들, 부서진 틈바구니에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벽, 지붕 대신 씌운 너덜너덜한 벽,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새”들이 “바로” 이 그림의 “주제인 것”처럼 “꼼꼼히” 묘사하고 있다. (346쪽)
- 이렇게 볼 때, 인물들과 배경의 결합에서 주된 것은 배경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배경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새로운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동판화에서 뒤러는 예술이 자연의 모방을 추구하고 시작한 이래로 고딕 미술의 발전을 총합하고 완성시킨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마음을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부여한 고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346쪽)
▲ 뒤러의 <아담과 이브>(도판 223, p,348) ▼
- “고딕 미술이 거의 도외시되었으나 이제 관심의 전면으로 부상한 새로운 목적을 바로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인체의 표현이었다.” (347쪽)
- “여기에서 뒤러는 반 에이크의 아담과 이브(p.237, 동판156) 같이 꼼꼼하고 충실하게 묘사된 경우조차도 실제 자연에 대한 단순한 모방이 남유럽 미술 작품들을 돋보이게 하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요소들을 창출해 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347쪽)
- “라파엘로는 이러한 문제에 당면했을 때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아름다움의 ‘어떤 이념’에 비추어 답을 구했는데(p.320), 그 이념은 그가 고전적인 조각과 아름다운 모델들로 수년 간 연구하는 동안에 익힌 것들이었다.” 그러나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확실한 법칙을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그러한 법칙을” “인체의 비율에 관한 고전 시대의 저술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347쪽)
- 뒤러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서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림으로써 인간의 체격을 왜곡시켰다. 평생 동안 몰두했던 이러한 연구의 첫 번째 결과 가운데 아담과 이브를 그린 동판화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아담과 이브>이다. (349쪽)
-다른 한편 “뒤러가 울퉁불퉁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의 어두운 그늘을 배경으로 희고 섬세하게 모델링된 인체의 분명한 윤곽을 돋보이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남유럽의 미술의 이상(가장 아름다운 인간 신체의 표현)을 북유럽의 토양에 이식시킨 최초의 진지한 시도에 감탄하게 된다.” (349쪽)
▲ 뒤러에 대한 소결론 ▼
- 뒤러의 4개의 작품을 통해서 뒤러의 화가로서의 고민의 진행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 먼저 도판 220의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에서 전통과 현실을 결합시키고자 한 뒤러의 의도가 기계적인 결합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 뒤러는 이러한 기계적 결합을 넘어서서 유기적인 조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그 노력의 일환으로 도판 221 <풀밭>이 나타나게 된다. 이 <풀밭>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경 이야기(전통)를 보다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나타난 작품이 도판 222의 <예수 탄생>이다. 성경 이야기의 일부인 예수의 탄생을 그 당시의 일상생활 속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그런데 성경 이야기의 주된 부분은 이야기 내용의 주체(subject)인 인물들이다. 이러한 인물들을 생명력이 충만한 현실성을 가지면서도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따라야 할 가장 완벽하게 아름다운 존재(Type)인 성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도판 223의 <아담과 이브>이다.
▲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uünewald) ▼
- “위대함과 예술적인 기량에 있어서 뒤러에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독일 화가”인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이 “화가가 그렸다고 확신되는” “작품들은 통상 ‘그뤼네발트’라는 라벨이 붙게 되었다.” (350쪽)
- “그는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발견들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미술의 이념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한도 내에서만 그것들을 활용했다.” (353쪽)
- “그에게 있어서 미술은 (뒤러처럼) 아름다움의 숨겨진 법칙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목적, 즉 중세의 모든 종교 미술의 목적인 그림으로 설교를 해 주고 교회가 가르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젠하임 제단화의 중앙 패널(도판 224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p.351)은 이 절대적인 목적을 위해서 다른 모든 문제들을 희생시켰음을 보여 준다.” (353쪽)
- 그 예로 “인물상의 크기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십자가 밑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손과 예수의 손을 비교해보기만 해도 그 크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뤼네발트는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하여 온 근대 미술의 법칙들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중요성에 따라서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들로 의도적으로 되돌아간 것이 분명하다.” (353쪽)
-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구세주의 뻣뻣하고 참혹한 모습에는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생각하는 그런 아름다움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뤼네발트는 수난절의 설교자처럼 이 고통스러운 장면의 무서움을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353쪽)
-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근대 미술의 원칙들을 모두 버린 것은 아니다. 그가 필요하다면 이 원칙들을 적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도판 225(<그리스도의 부활>, p.352)이다.
- 이 그림에서 그뤼네발트는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색채들을 통해 “휘황찬란한 빛을 남기고 무덤에서 막 솟아나와 승천하는 것 같이” 보이는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354쪽)
- 다른 한편 “땅 위에 쓰러져 있는 군인들의” 모습 사이에서 원근법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무덤 앞에 있는 군인들과 뒤에 있는 군인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입체성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이 한낱 이야기 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사실임을 강조함으로써 신도들에게 믿음에 대한 각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종교의 목적을 잘 전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 1472-1553) ▼
- "뒤러 세대에 세 번째로 유명한 미술가“가 크라나흐이다. (354쪽)
- 크라나흐는 “해묵은 산림과 낭만적인 풍경을 가지고 있는 알프스 북쪽 산기슭에 매혹되어 있었다.” “1504년에 크라나흐는 이집트로 도피하는 성(聖) 가족을 그렸다(도판 226 <이집트로 피난 중의 휴식>, p.354)” (355쪽)
- “이 시적인 새로운 구상은 로흐너의 서정적인 미술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p.272, 도판 176).” (355쪽)
▲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 1480?-1538) ▼
- “알트도르퍼는 숲과 산을 누비고 다니며 풍우에 시달린 나무와 바위의 형태를 연구했다. 그가 남긴 많은 수채화와 동판화, 그리고 유화 몇 점(도판 227, <풍경>)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으며 인물이 하나도 없다.” (356쪽)
-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변화이다.” “중세에는 종교적인 테마이든 세속적인 테마이든 분명한 이야기 거리를 다루지 않는 그림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356쪽)
▲ 얀 호사르트(Jan Gossaert) 또는 마뷰즈(Mabuse : 1478?-1532) ▼
- “독일의 뒤러처럼 적어도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고 노력했던” 16세기 초엽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옛날 장식에 대한 집착과 새로운 것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껶어야만 했다.” (356쪽)
- “도판 228(<성모를 그리고 있는 성 루가>)은” 마뷰즈의 “작품으로서 그러한 갈등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한 예이다.” (356쪽) 이 그림에서는 성경 이야기의 인물들과 그 배경이 따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왜 하필이면 성 루가가 성모상을 그리는 데 겉보기는 화려하지만 외풍이 있을 듯한 텅빈 궁전의 중정에 자리를 잡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되기도 한다.” (356쪽)
- “그 결과 이 그림은 확실히 대단한 매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모델들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조화미(색채를 가지고 인물이나 배경의 구성․배치를 조화롭게 통일시킨 회화의 원리)는 결여되어 있다.” (356쪽)
- 다른 한편, 이 그림은 15세기, 16세기 초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새로운 기법이 기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을 그린 방식은 얀 반 에이크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고, 그 배경은 이탈리아 방식, 즉 “과학적인 원근법에 대한 능숙한 솜씨, 그리고 고전기의 건축에 대한 조예와 능숙한 명암 처리 방법”에 충실히 따르면서 그것을 “과시하려 한 것 같이 보인다.” (356쪽)
▲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 ?-1516) ▼
- “이 화가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356쪽)
- 그렇지만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미술가들” 중의 한 사람인데, 보스는 “독일의 그뤼네발트와 같이 남유럽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물결에 휩쓸리기를 거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미술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356쪽)
- “그뤼네발트와 마찬가지로 보스는 현실을 가장 신빙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 발전되어 온 회화의 전통과 새로운 수법들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그럴 듯하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보스는 지옥의 광경을 소름끼치게 묘사한 화가로 유명하다.” (356쪽)
- 도판 229-30(<천국과 지옥>)을 보면 알 수 있다.
- “중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괴롭히던 공포심을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형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미술가는 역사상 보스 한 사람뿐일 것이다. 이러한 업적은 아마도 새로운 시대정신이 미술가들에게 그들이 본 것을 재현하는 방법을 마련해 주었고 반면에 구시대의 이념이 의연히 살아남아 있었던 바로 그 순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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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위는 이해와 대립하는 것입니다. 당위는 이런 것이죠.린도스 사람 에우아고라스의 아들 클레오불로스의 말
1. 적도가 최선
2. 아버지를 공경할 것
3. 신체와 혼을 유지할 것
4. 즐겨 듣는 자가 되고 말을 많이 하는 자가 되지 말 것
5. 무지보다는 박식을
6. 불길한 말 듣기를 삼갈 것
7. 덕과는 친하고, 악과는 남이 되라
8. 불의를 미워하고 경건을 지킬 것
9. 시민들에게 최선의 것을 충고할 것
10. 쾌락을 이겨낼 것
반면 이해는 이런 것입니다.
플라톤(DK10A2)
저로서는 바로 그것, 즉 '자신을 아는 것'이 절제라고 얼추 말하지요, 또 나도 그러한 잠언을 델포이 신전에 헌정한 분과 같은 생각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와 "절제하라"는 것은 - 그 잠언이 의미하는 바나, 또 내가 주장하는 것처럼 - 사실 같은 말이긴 하지만, 아마도 어떤 이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저로서는 '무엇이든 지나치지 말라', '보증, 그 곁에 재앙'과 같은 후대의 잠언을 헌정한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너 자신을 알라'라는 잠언을 하나의 충고라고 생각할 뿐, 신전에 들어서는 자들을 위한 신의 인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그들 역시 아주 유익한 조언들을 신에게 바치려고 그러한 잠언들을 새겨 바쳤던 것이지요.
카르미데스 16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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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대해서는 아는게 별로 없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등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런 학문들이 지금의 학문처럼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을 이해해야하는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아테네에 가는데, 당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는 강의와 토론을 위한 공간만이 아니라 학자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2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플라톤 밑에서 학문을 정진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외국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때문에 아테네의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지만, <정치학> 집필과 강의를 통해 학문적 차원에서 정치에 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제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관심을 가지는 질문은 무엇을 탐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탐구하느냐입니다. 논리학은 탐구의 방법론입니다. 그의 논리적 분석은 실재(reality)를 개념적으로 재생산하는 사고에 대한 분석입니다. 논리적 분석은 궁극적으로 실재와 진리 인식을 목적으로 합니다.
자연학은 자연의 운동과 정지의 원리를 자기 속에 갖고 있는 실체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형이상학에서 규정합니다. 철학이 질료와 분리되는 실체를 다루는데 비해, 자연학은 질료와 분리될 수 없는 실체를 다룹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을 통해 자연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연의 본질인 운동 또는 변화의 고찰을 중심으로 그 조건과 관계와 원인에 대해 논하고, 그것과 더불어 무한과 장소, 시간을 다룹니다. 사물의 생성 및 소멸과 질료적 구조를 다루는 학문이 자연학, 즉 현재의 과학입니다. 인간도 자연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모든 것이 그것 때문에 존재하는 목적 telos라고 보았습니다. 자연은 본성 혹은 본질이라는 뜻도 있죠. 만사가 요행이고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원인일 뿐 자체적인 원인에 앞설 수 없다고 합니다. 자연은 방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질료로 여겨지기도 하고 형상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에게 있어 생성, 변화, 운동은 질료가 그 목적인 형상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해석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자연은 단순히 세계에 내재하는 운동의 원리일 뿐 아니라, 세계와 사물의 목적을 위한 활동 원리이기도 합니다.
형이상학에서는 자연 다음으로 오는 것들, 존재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의 형이상학은 존재의 우선적인 범주인 실체와 관계합니다. 실체란 무엇인가. 그에게는 개별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실체입니다. 그러나 그가 개별자가 진정한 실체이자 유일하게 진정한 실체라고 말할 때, 그는 보편자가 그 자체로서 분리된 실체라는 플라톤주의적 독트린을 거부하는 것이지, 사물 안에 있는 형상적 또는 종적 요소라는 의미에서의 보편자가 실재적(real)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맨 처음을 좋음과 목적으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는 놀랍게도 최고선과 정치학에 대해 말합니다. 윤리학인데 왜 정치학 얘기를 하느냐. 좋음에는 최상의 좋음이 있는데 그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정치를 못했으면서도 정치가 가장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 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 정치학이 규정한다고 합니다. 왜냐면 정치학은 실천적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이 입법을 하기 위해서는 정의에 대한 앎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치학의 목적이 인간적인 좋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최상의 좋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은 무엇인가, 윤리학은 직역하면 품성, 성격에 관한 논의들입니다. 이것은 <윤리학>에서는 정치학으로, <정치학>에서는 거꾸로 윤리학으로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과 정치학은 같은 것입니다. 왜냐면 정치는 개인이 모여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하려면 개인이 훌륭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윤리는 당위가 아니라 탁월함, aret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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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학파의 형성은 당시 그리스의 정치현실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시조인 에피쿠로스는 알렉산더 왕이 죽은 이후 권력투쟁이 벌어지면서 그리스는 피폐화되고 그리스를 지탱하던 중간층도 점차 빈민화됩니다. 따라서 그리스의 민주주의도 함께 흔들렸고, 정치학이나 윤리학도 쇠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주의가 대두합니다.이것은 중국의 명말청초의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명말청초는 격변기였습니다. 이민족인 청나라의 침략으로 명나라 말기의 정치 상황은 환관의 발호와 국가재정의 파탄, 격렬한 당쟁 등으로 혼란에 빠집니다.
이러한 비참한 정치현실과는 달리, 명대에는 상품경제의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역간의 교류도 활성화되고 사람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생활과 소비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달라진 물적 환경 앞에서 중국 봉건 통치의 기반을 떠받쳐오던 예교와 도덕 관념도 점차 변모합니다.
가치관의 변화는 명분을 상실한 유학의 교조적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들을 둘러싼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성의 해방과 개성의 발견에 눈을 뜹니다. 여기에 암담한 정치 현실에 대한 환멸은 지식인들에게 염세적 은둔 풍조를 부추깁니다. 그들은 백성을 교화하고 임금을 보필하는 재도지기로서의 문학을 전면거부하고, 소품의 새로운 양식을 통해 삶의 진실을 발견하고, 제도의 질곡과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정면으로 고발 풍자합니다.
마찬가지로, 에피쿠로스 역시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게 됩니다. 그는 아테네에 있는 정원을 사들여서 학교를 세우고 죽을 때까지 '정원' 공동체에서 활동합니다. '정원'의 구성원은 여자와 노예는 물론 창녀도 속해 있었기 때문에 에피쿠로스를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의 철학의 목적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고통을 야기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고자 했기 때문에 기존의 교육이나 공적인 일도 거부하고 개개인이 오로지 자신과 공동체만을 의지해서 살아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아타락시아는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외부의 자극은 적극적으로 차단되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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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돌아가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로 중용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찾아봐야하는데 집에 있지만 관두고, 플라톤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절제로 해석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릴께요. 절제란 사람마다 달라요. 매달 백만원 버는 사람과 매달 천만원 버는 사람에게 절제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능력에 맞게 소비하는 것이 절제겠죠. 아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님은 이 글을 직접 작성하셨는지, 아니면 어떤 글을 퍼오신건지, 퍼오셨다면 출처를 밝히셔야하고, 어떤 글을 읽고 그 글을 바탕으로 쓰셨다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철학사를 이해하는것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너무 급히 작성하신 것은 아닌지, 급하게 레포트를 제출해야한다면 큰 무리가 없지만 다른 사람도 보는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려놓으시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동의하지 않으셔도 좋고요, 자신이 공부해서 아는 만큼만 말하는 것이 진보를 위한 한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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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 대한 설명도 그래요. 플라톤의 국가를 안 읽어봤지만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플라톤은 능력만 있으면 여자에게도 정치의 기회가 주어져야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고 여성과 남성은 본질적으로는 동등하지만 현실에서 여성의 본질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알고있어요. 한번 찾아보세요. 실제 폴리스의 정치가 여자를 배제했다고 해서, 바로 그런 점이 안타까워서 플라톤은 국가에서 여자도 능력만 있으면 정치를 할 수 있어야한다고 했는데 저렇게 말씀하시면 혼동이 일어나죠. 그것은 공정하지 않아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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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학파가 금욕을 말한 것도 당시 그리스가 무역을 통해 얻은 상품과 노예들 때문에 극도의 사치와 방탕에 물들었고 그때문에 망했어요. 그래서 스토아학파가 이를테면 막대 구부리기처럼 금욕을 말했던 것이지 스토아 학파는 에피쿠로스 학파에 비해 매우 실천적이고 도덕적, 규범적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들이었어요. 물론 그들의 한계는 시대의 한계이고 그들에게도 명백한 한계가 있지만.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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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학파는 고대 유물론자들의 영향을 받아 자연의 필연적 인과율을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는데, 그들에게 쾌락이란 말씀드린대로 고통의 적극적인 회피에요.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자연 현상의 구체적인 원인들에 대해서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했어요. 특히 천문학에 있어서 동시대의 과학적 발견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어요.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영향을 받는데, 맑스가 이 두사람 가지고 박사논문 쓰죠. 맑스도 젊었을 때는 고대 철학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그래요. 어떻게 다르냐.데모크리토스는 원자의 크기는 무한히 다양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원자들의 모양이 무한히 다양하다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원자도 존재할 것이라고 했어요.
에피쿠로스는 원자의 수는 무한히 많지만, 원자의 모양은 매우 다양할 뿐 무한히 다양하지는 않다고 했어요.
그럼 이 사람들이 도구도 원시적인 상태에서 원자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까요.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이 영원히 움직인다고 말할 뿐, 운동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어요.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이 자신의 무게 때문에 아래로 떨어진다고 주장했어요. 여기서 원자가 똑바로 안떨어지고 비스듬하게 떨어지는게 있는데 이것이 원자론의 엄격한 결정론을 깬다고 생각한거에요. 필연에 저항하는 자유의지.
이 정도면 소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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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님이 정리하신 규범윤리학은 당위, 이성, 남성, 필연으로 정리됩니다. 그렇다면 규범에 대립하는 것들은 당위(sollen)에 대립하는 그냥 있음(sein), 감성, 여성, 우연 등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정말 대립항일까요. 잘 생각해봅시다.당위는 그래야한다는 것입니다. 현존재가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다운 것이냐, 인간성이란 무엇이냐, 인식이 필요합니다.
남성과 여성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더 밑에 있는 인간이라는 층위에서 동등합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만나길 원합니다. 이것도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사람과 여자만 있지 남자와 여자가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 그 여자, 사람, 여인, 교수, 여교수, 등등
이성과 감성은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성도 이해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불의를 보면 분노하는 것은 우리의 가슴에 또 다른 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고대 철학자들이 이성을 강조했을까요. 당시 민중이 신화적, 종교적 세계관에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무슨 죄목으로 극약을 먹고 죽었는지 생각해보시죠. 불경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똑같은 처벌을 받고 망명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는 필연과 우연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우연이란 있지 않고 단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사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입니다. 사물에는 질서가 있다는것이죠. 그러나 인간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신비로워 보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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