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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빛과 색채(16세기 초 :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 16세기 초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미술의 특징 ▼
- 이 시기 이곳의 미술의 특징은 원근법과 맞먹는 빛의 명암을 사용하고 그 빛의 명암을 색채 구성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 빛의 명암을 처음 사용한 화가는 곰브리치가 마사초의 후계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꼽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도판 170, p.261)이다. 피에로는 빛을 “인물들의 형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 내는 원근법과 대등한 중요성을” (260쪽) 지닌 것으로 사용하였다.
- 이 시기 이곳의 화가들은 아마도 남부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인 피에로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만, 그러한 피에로의 영향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들은 빛을 인물들의 구성과 배치의 조화와 통일성의 원리, 수단으로까지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것은 베네치아의 지형적․기후적 특성과 연관 있어 보인다. “사물의 예리한 윤곽을 희미하게 만들고 휘황찬란한 빛 속에 사물의 색채들을 뒤섞이게 하는 환초로 둘러싸인 해변의 분위기가 이 도시의 화가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의 화가들이 해 왔던 거보다 더 신중하고 민감하게 색채를 사용했는지 모른다.” (325쪽)
- 이탈리아 남부 “피렌체의 위대한 개혁자들은 색채보다는 소묘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그림이 색채 면에서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나 한 그림 속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형태들을 하나의 통일된 구성으로 결합시키는 데 색채를 주된 수단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던 화가는 매우 드물었다. 그들은 채색하기 전에 원근법이나 구도로써 그러한 통일된 구성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베네치아 화가들은 색채를 그림 위에 덧붙이는 부가적인 장식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326쪽)
▲ 야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 : 1486-1570) ▼
- 산 마르코(San Marco) 성당 도서관(도판 207)을 지은 피렌체의 건축가가 바로 산소비노이다. “그는 자신의 양식과 작품을 그 도시 특유의 분위기, 즉 환초로 둘러싸인 해변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화려한 베네치아의 밝은 빛에 어울리도록 완벽하게 적응시켰다.” (325쪽)
▲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 1431?-1516) ▼
- 도판 208(<성모와 성인들>)을 살펴보자. “그림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도 전에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채들이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326쪽)
- “벨리니는 그림의 질서를 깨트리지 않고 이 단순한 대칭적인 구도 속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성모와 성인들의 전통적인 모습을 그 신성함과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사실적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변화시키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는 페루지노(p.314, 도판 202)가 어느 정도 그랬던 것과는 달리 살아 있는 인물의 다양성과 개성을 희생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페루지노의 인물 못지않게 보다 더 조용하고 아름다운 세계, 즉 이 그림을 꽉 채우고 있는 충만한 따뜻함과 초자연적인 빛이 스며든 세계에 소속된 사람들 같이 보인다.” (329쪽)
▲ 조르조네(Giorgione : 1478?-1510) ▼
- “조반니가 보여준 모범”처럼 “색채와 빛을 행복하게 사용하여 화면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한” “영역에서 가장 혁명적인 업적을 이룩했던 사람이다. 이 미술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그의 진작(眞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겨우 다섯 점밖에 되지 않는다.” (329쪽)
- 도판 209(<폭풍우>)를 살펴보자. “이 그림은 분명히 화면 전체에 스며 있는 빛과 공기에 의해서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뇌우의 섬뜩한 빛이 그림 전체를 지배한다. 또한 이 그림이 그 시초일 듯싶은데, 그림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움직이고 있는 무대가 되는 풍경이 이제는 단순한 배경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풍경은 그 나름대로 그림의 진정한 주제가 되고 있다.” “사물과 인물을 나중에 공간 속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 땅, 나무, 빛, 공기, 구름 등의 자연과 인간을 그들의 도시나 다리들과 더불어 모두 하나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거의 원근법의 창안과 맞먹는 새로운 영역을 향한 하나의 발돋움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회화는 그 자체의 비밀스런 법칙과 방안을 갖는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329-331쪽)
▲ 티치아노(Tiziano : 1485?-1576) ▼
- 조르조네의 이 위대한 발견(자연과 인간을 모두 하나로 생각해서 그림의 소재가 되는 모든 것들이 제각각의 진정한 주제가 되도록 하는 회화 기법)의 모든 결실을 얻은 화가로서 “모든 베네치아 화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티치아노였다. (331쪽)
- 티치아노의 “물감을 다루는 솜씨는” “그(티치아노)로 하여금 전통적인 구도의 모든 규칙을 무시하게 했으며 파괴한 듯이 보이는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색채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331쪽)
- 도판 210(<성모와 성인들과 페사로 일가>)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조반이 벨리니의 그림 <성모와 성인들>(도판 208, p.327)보다 불과 약 15년 뒤에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조반니 벨리니의 그림에서처럼 성모 마리아를 그림의 중앙에 두고 시중 드는 두 성인을 대칭되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 성모를 그림의 중심에서 이동시켰으며 두 성인을 이 장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는데 이것은 거의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331쪽)
- 이것은 다가올 근대사회의 특성, 즉 개개인이 모두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된다는 근대사회의 이념인 자유(인물들의 자유로운 배치)와 평등(인물들 누구나 이 장면에 능동적으로 참여, “권위의 상징”인 “열쇠”가 “성모의 왕좌 아래의 계단에” 놓여 있음(331쪽)-이는 범신론의 특성이기도 함)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사람들은 “처음에” 이 “그림이 한 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 예기치 않는 구도는 전체적인 조화를 깨트림 없이 오히려 그림을 생기 있고 활기차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티치아노가 빛과 공기와 색채로써 이 장면을 통일시켰기에 가능하였다.” (332쪽)
- “단순한 깃발 하나를 가지고 성모의 모습과 대칭을 이루게 한” 것은 역사적․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부르주아가 정치적으로 교황청에 대적할 만큼 성장하였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332쪽)
- 도판 212, 213(<젊은 영국인>)을 살펴보자. “티치아노가 당대에 그처럼 큰 명성을 얻은 것은 초상화 때문이었다.” “이 그림에는 레오나르도의 <모나 리자>(도판 193, p.301)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세밀한 입체감의 묘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무명의 젊은 영국인은 모나 리자처럼 신비하게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이 꿈에 잠긴 듯한 눈동자는…… 영혼이 담긴 강렬한 표정으로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 같다(도판 213).” (333-334쪽)
-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은 도판 214(<교황 바오로 3세와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그의 동생 오타비오 파르네세>)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이 그림은” “티치아노가 황제 카를 5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를 떠나 독일로 그의 초상을 그리러 갔기 때문에”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되었다.” (335-337쪽)
▲ 코레조(Correggio)라 불리운 안토니오 알레그리(Antonio Allegri : 1489?-1534) ▼
- 코레조는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16세기 초기의 이탈리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과감한 혁신가로 평가”되었다. (337쪽)
- “아마도 그는 북부 이탈리아의 인근 도시들에서 레오나르도 제자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의 명암법을 배울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후대의 여러 유파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완전히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명암법에 관한 것이었다.” (337쪽)
- 도판 215(<거룩한 밤>)를 살펴보자. “왼쪽의 복잡한 장면에 대응하는 군상(群像)들이 오른쪽에는 없으므로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성모와 아기 예수에게 빛을 던져 강조함으로써 전체 그림은 균형을 이루게 된다. 코레조는 색과 빛을 사용하여 형태에 균형을 주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발견을 티치아노보다 더욱 잘 활용하였다.” (337쪽)
- “코레조 이후 세대의 수많은 화가들이 수세기 동안 그처럼 반복해서 모방한 이 화가의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가 교회의 천장과 둥근 지붕에 그림을 그리는 장식이다.” (337-339쪽)
- 이 장식의 대표적인 작품이 도판 217(<성모의 승천>)이다. 코레조는 “아래의 본당에 있는 신도들에게 천장이 열려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하늘의 영광을 곧장 바라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빛의 효과를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그의 능숙한 기술로 인해 그는 햇빛을 가득 받은 구름으로 천장을 채우고 그 구름들 사이로 천사들의 무리가 다리를 아래로 늘어트린 채 빙빙 떠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339쪽)
- 도판 216(<성모의 승천 : 파르바 대성당으 천장화를 위한 습작>)을 보면 “코레조가 단지 몇 번의 분필 자국만으로 그처럼 넘쳐흐르는 빛을 암시할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단순하 회화 수단을 구사했는지를 알게 된다.” (339쪽)
▲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 1449-94) ▼
- “콰트로첸트 말엽 피렌체의 지도적인 화가의 한 사람이었으며,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다.” (303쪽)
- 콰트로첸트 시기의 다른 화가들처럼 성경 이야기(전통)와 현실의 조화를 꾀한 화가이다. 고촐리에 비견된다 할 수 있다.
- “그는 성경 이야기를 마치 그의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를 중심으로 하는 피렌체의 부유한 시민들 사이에서 방금 일어난 사람인 것처럼 재미있게 표현할 줄 아는 작가였다.” (303쪽)
- “도판 195(<성모의 탄생>)는 성모 마리아의 탄생을 묘사한 그림으로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의 친척들이 찾아와서 그녀에게 축하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여기서 15세기 말의 한 화려한 저택의 내부와 상류사회 숙녀들의 의례적인 방문 장면을 보게 된다. 기를란다요는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방법과 눈을 즐겁게 해 주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303쪽)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ounarroti : 1475-1564) ▼
- “16세기(친퀘첸토) 이탈리아 미술을 그렇게 빛나게 한 두 번째 피렌체 미술가는 미켈란젤로였다.” (303쪽)
-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시체를 해부하고 모델을 보고 직접 소묘하며 인체의 비밀을 모두 알 때까지 인체 해부학에 관한 나름대로의 연구를 계속했다.” (304쪽)
- “그러나 인간을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매혹적인 수수께끼 중의 하나로 본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미켈란젤로는 이 하나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겠다는 일념으로 분투 노력하였다. 그의 집중력과 기억력은 대단히 탁월했으므로 얼마 안 가서 그리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자세나 동작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304쪽)
- 미켈란젤로가 “30살이 될 무렵” “피렌체 시는 영광스럽게도 그와 레오나르도에게 시의회의 대회의실 벽면에 피렌체 시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다.” (304-5쪽)
▲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
- 도판 197, 198(<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을 살펴보자. 이 천장화에서 “미켈란젤로가 후대에게 제시해 준 항상 새롭고 풍요로운 착상들, 그리고 모든 세부를 묘사하는 정확한 솜씨와 그 비전의 장대함을 인류에게 천재의 능력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307쪽)
- 이것을 헤르메티시즘이 가지고 있는 범신론적 성격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신분제 질서로 꽉 짜여진 중세로부터 다양한 개인의 생존과 자유를 보장하는 근대로의 열망을 잘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 곰브리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엄청난 작업조차도 늘 새로운 형상들을 창조하려는 그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이 그림들 사이의 경계에 또 다시 수많은 인물상들을 그려 넣었다.” “이들 놀라운 인물상들은 미켈란젤로가 어떤 자세이든지, 어떤 각도에서든지 인체를 능수능란하게 그리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 준다.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는 이 젊은 운동선수들은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몸을 틀어 돌리고 있으나 언제나 우아함을 잃지 않고 있다.” (308쪽)
▲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 중 리비아 무녀를 위한 습작> ▼
- 도판 199(<시스티나 천장화 중 리비아 무녀를 위한 습작>)를 보면, “우리는 미켈란젤로가 모든 세부를 얼마나 세심하게 연구하였으며 소묘를 통해 각 인물상들을 얼마나 주의깊게 준비했는지 잘 알고 있다.” (310쪽)
▲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
- 도판 200(<아담의 창조>)은 도판 198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중앙 부분에 있는 것이다.
- 이 그림을 보면 헤르메티시즘을 단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다. 아담과 The One의 손가락으로 연결되어 있음은 인간의 세계(지상계)와 신의 세계(천상계)가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 두 세계가 상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The One이 “인간답게 힘차고 아름다우며” “의연하고 힘차”게 나타난 것으로 알 수 있다. 물론 The One이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두 세계가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범신론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 ▼
- 도판 201(<죽어가는 노예>)은 도판 200(p.312, <아담의 창조>)와 대비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에서 힘찬 젊은이의 아름다운 육체 속으로 생명이 불어 넣어지는 순간을 묘사한 반면에 <죽어가는 노예>에서는 생명력이 막 꺼지려 하고 육체가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는 순간을 선택했다.” (310-2쪽)
- 그런데 이 두 그림은 삶과 죽음의 단순한 단절과 대비를 표현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 시기로 보면, 중세 봉건 체제의 쇠퇴와 해체, 그리고 새로운 근대의 부상이라는 단절과 그 단절을 통한 역사의 연속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이 역사적 시기와 맞물려서 미켈란젤로 자신의 미술가로서의 지위에 관한 단절과 연속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 <죽어가는 노예> : 중세 봉건제의 쇠퇴와 해체 ; 중세 기독교와 교황청의 시녀로서의 미술가로서 자신의 부정.
- <아담의 창조> : 새로운 근대의 부상 ; 중세 기독교와 교황청 그리고 신학으로부터 독립한 미술가로서의 새로운 삶.
- 이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를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는 존경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성질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대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퍽 의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미술가의 지위는 그가 젊은 시절에 의식하고 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실제로 그는 77세 때에 한 이탈리아 인이 ‘조각가 미켈란젤로 앞’이라고 편지를 썼다고 해서 그 편지를 받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조각가 미켈란젤로 앞이라고 편지를 보내지 말라고 그에게 전하시오. 왜냐하면 여기서 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로 통하고 있으니까…… 나는 공방을 경영하고 있는 화가나 조각인 적은 한 번도 없었소…… 내가 교황들에게 봉사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었소.”” (313쪽)
▲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 1446-1523) ▼
- 페루지노는 “소위 ‘움브리아 파’의 지도자”로서 “감미롭고 경건한 화풍의 제단화를” 그리던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315쪽) 그리고 라파엘로 산티의 스승이기도 했다.
- “그(페루지노)의 성공적인 작품들 중에는 그가 전체적인 화면의 균형을 깨트리지 않으면서도 공간의 깊이를 묘사하는 방법과 인물들이 거칠고 딱딱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를 구사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작품”이 있다. (315쪽)
- 그 작품이 도판 202(<성 베르나르두스에게 나타난 성모>)이다. 그런데 페루지노가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얻기 위해서 희생시킨 것이 있다. 즉 콰트로첸토의 거장들이 그처럼 정열적인 애착을 가지고 추구했던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어느 정도 포기했던 것이다.” (315쪽)
▲ 라파엘로 산티(Raffaello Santi : 1483-1520) ▼
- 도판 203(<대공(大公)의 성모>)을 살펴보자. 이 그림에서 “우리는 라파엘로가 페루지노의 인물 유형의 조용한 아름다움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의 어딘가 공허한 듯한 규칙성과 제자의 그림에서 보이는 충만한 생명력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입체감 있게 묘사되어 어둠 속으로 물러나는 성모의 얼굴, 자연스럽게 늘어트려진 옷자락 속에 싸인 육체의 볼륨,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확고하고 애정 어린 자세 등 모든 것이 완벽한 균형의 효과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약간만 변경해도 그것이 전체의 균형을 깨트리게 되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구도에는 긴장감이라든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 이 그림은 마치 이것 이외의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없으며 태초부터 그렇게 존재했었던 것 같이 보인다.” (316쪽)
▲ 라파엘로의 <요정 갈라테아> ▼
- 이 그림은 일단 신플라톤주의의 경향 중에서도 플라톤의 이데아의 대립 구조를 각 인물들의 구성 배치에 적용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의 대립 구조는 선의 이데아를 중심으로 각각의 이데아들이 대립 쌍을 이루며 원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의 요정 갈라테아는 선의 이데아에 비견된다. 그리고 화살을 갈라테아의 가슴에 겨냥하고 있는 세 명의 큐피드와 헤엄치고 있는 큐피드는 모두 4인데 각각이 대립 쌍을 이루고 있다. 사랑을 나누고 있는 바다의 신 두 쌍이 있고 조개껍질을 불고 있는 해신(바다의 신) 2이 있다. 큐피드들과 해신들은 서로 대립 쌍을 이루고 있는 이데아들에 비견될 수 있다.
- “우리는 이러한 방법을 플라이우올로의 걸작(p.263, 도판 171)에서 보았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그의 해결 방법은 오히려 딱딱하고 둔해 보인다.” (319쪽)
- “라파엘로는 이전 세대의 화가들이 이룩하려고 그처럼 노력했던 것, 즉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완벽하고 조화롭게 구성해 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319쪽)
- 다른 한편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당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린 인물들의 완전한 아름다움이다.” (319쪽)
- 이러한 아름다움이 대단히 가설적이며 이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라파엘로는 그의 스승 페루지노와 마찬가지로 콰트로첸토의 그처럼 많은 미술가들의 야망이었던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어느 정도 포기했던 것이다.” (319쪽)
- 인물 묘사에 대한 이러한 가설적이며 이상적인 방신의 대단히 뉴턴의 가설(예를 들면 힘, 중력 같은 것)과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를 연상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뉴턴은 <과학 연구에 가장 좋고 안전한 방법은 사물의 성질을 부지런히 조사하고 실험에 의해 결정한 다음, 그것을 설명할 이론(가설)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라파엘로도 고대 그리스․로마의 조각상이나 인물화를 많이 관찰했을 것이고, 그러한 관찰로부터 자신의 이상적인 완벽한 인물 모델을 생각해 만들어 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파엘로가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도판 206(<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을 살펴보자. “머리가 약간 부풀어오른 근시안인 교황의 초상에는 이상화된 것이 하나도 없다.” (320쪽)
15장. 조화의 달성(16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 16세기 거장(천재)들의 탄생의 역사적 배경 ▼
- 16세기, 즉 ‘친퀘첸토(500년대)’(이와 더불어 15세기를 ‘콰트로첸토(400년대)’라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부른다) “시기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파엘로(Raffaello), 티치아노(Tiziano), 코레조(Correggio)와 조르조네(Giorgione), 북유럽의 뒤러(Dürer)와 홀바인(Holbein) 등 수많은 거장들의 시대였다.” (287쪽)
- 이러한 거장들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조건은 다음과 같다. 먼저 중세 시대가 퇴락해 감에 따라서 신학의 시녀로 있던 여타의 다른 모든 과학(또는 학문)들이 신학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다른 한편 범신론의 영향으로 과학과 수학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미술에서도 이러한 과학과 수학의 발전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에는 미술가들이 원근법의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 수학으로 관심을 돌리고 인체 구조를 탐구하기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갖는 위대한 발견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발견들을 통해서 미술가들의 시야는 넓어졌다.” “그들은 자연의 신비를 탐색하지 않고서는, 또 우주에 감추어진 법칙을 밝히지 않고서는 명성과 영광을 얻을 수 없는 독립적인 거장들이었다.” (287쪽)
-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건축 분야에서 제일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브루넬레스키 시대(p.224) 이래로 건축가는 고전 시대의 지식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고대 건축의 ‘기둥 양식’에 적용했던 법칙들, 즉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식 기둥과 엔타블레이처의 올바른 비례와 치수를 연구해야 했으며 고대의 유적을 찾아가 측량해야 했다.” (288쪽)
- “이 당시 르네상스 건축가가 진정으로 열망했던 것은 건축의 쓰임새와 상관 없이 비례의 아름다움과 내용의 공간성 및 그 조화 자체가 만들어 내는 장대함만을 위해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건물의 실용적인 요구에 집착해서는 성취할 수 없는 완벽한 균형과 균제를 갈망했던 것이다.” (288-9쪽) 그런데 중세에서는 모든 것이 신학의 도구였고, 특히 과학은 일상생활에서의 실용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신학과 종교를 위한 ‘실용적’ 도구 차원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 1444-1514) ▼
- 브라만테는 “전통에 따라 성 베드로가 묻힌 자리에 세워졌던 고색창연한 성 베드로 바실리카를 헐어내고 1506년에 그 자리에 교회 건축의 오랜 전통과 신에게의 봉사라는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짓기로 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289쪽)
- 도판 187(<르네상스 전성기의 예배당 : 템피에토>)의 건축 양식을 보면 중세 고딕 양식에서 거의 탈피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뾰족한 첨탑 양식이 보이지 않고 원과 둥근 곡선 형태의 양식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 1435-88) ▼
- 베로키오는 피렌체의 화가이며 조각가이고,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이다.
- 도판 188-9(<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념상>)을 살펴보자. 이 기마상은 “그가 얼마나 꼼꼼하게 말의 해부학을 연구했으며 또 얼마나 명확하게 콜레오니의 얼굴과 목의 근육을 관찰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랄 만한 것은 투지만만하게 부대의 선봉장으로 달리는 것 같이 보이는 말 탄 사람의 자세이다.” (291쪽)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 1452-1519) ▼
- “그(레오나르도)는 그의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미술가의 임무는 더 철저하게, 그리고 더 열정적으로 더 정확하게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학자들의 책에서 얻는 지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293쪽)
- “레오나르도는 자기가 읽은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권위자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언제나 그것을 실험으로 해결하였다. 그는 자연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느꼈고 창의적 정신으로 이 모든 것에 도전했다. 30구 이상의 시체를 해부해서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기도 했으며(도판 190) 자궁 속에서 태아가 성장하는 신비를 조사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파도와 조류의 법칙을 연구했으며, 곤충들과 새들이 나는 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수년을 보내고 언젠가는 현실화되리라고 확신한 비행기구를 고안하기도 했다. 바위와 구름의 형태, 멀리 있는 물체의 색채에 미치는 대기의 영향, 초목이 성장하는 것을 지배하는 법칙들, 음(音)의 조화 등이 그의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그의 예술의 기초가 되었다.” (293-4쪽)
- “그의 글 가운데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레오나르도가 훗날 갈릴레오가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예견했음을 보여 준다.” (294쪽)
- “그는 그의 미술을 과학적인 토대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가 사랑하는 회화 예술을 비천한 기술로부터 존경 받는 신사다운 작업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294쪽)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
- 도판 191-2(<최후의 만찬>)를 살펴보자. “이 그림에는 동일한 테마를 다룬 이전의 그림들과 닮은 데가 하나도 없다. 이들 전통적인 그림들에서는 사도들이 식탁에 한 줄로 앉아 있고 유다만이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으며 예수는 조용히 성찬을 나누어 주고 있다. 이 새로운 그림은 이전의 전통적인 그림들과 아주 다르다. 이 그림에는 드라마가 있고 흥분이 있다.” (296쪽)
- “12사도들은 제스처와 움직임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는 세 사람씩 네 무리로 자연스럽게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 속에는 너무나 풍부한 질서가 있으며 또한 이 질서 속에는 너무나 다양한 변화가 내재해 있으므로 하나의 움직임과 그것을 받는 움직임 사이의 조화를 이룬 상호 작용을 살펴보려면 끝이 없다(이것은 어쩌면 상품들 사이의 관계와 아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플라이우올로의 <성 세바스티아누스>(p.263, 도판 171)를 설명할 때 논의했던 문제(즉 인물의 구성 배치 문제)를 돌이켜본다면 구성에 있어서의 레오나르도의 업적을 완전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298쪽)
- 로지에더 반 데르 웨이든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p.277, 도판 179)에서 나오는 인물상의 배치와 표정 변화를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이나 보티첼리와 같은 화가들이 각기 자기 나름대로 작품 속에서 회복시키려고 했던 그러한 무리 없는 균형과 조화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298쪽)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 리자> ▼
- “<최후의 만찬>보다 훨씬 더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들자면 그것은 리자(Lisa)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의 한 부인의 조상인 <모나 리자>(도판 193)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98쪽).
- <모나 리자>에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나타난 인물들의 다양한 변화와 표정이 리자라는 한 인물에 포괄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살아 있는 듯한 다양한 표정 변화가 <모나 리자>에서 한 인물의 변화무쌍한 표정 그대로 전이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감탄하게 하는 것은 리자라는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의 마음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299-399)
- “레오나르도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연의 위대한 관찰자인 레오나르도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사람들의 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300쪽)
- “그(레오나르도)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미술가들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 즉 정확한 소묘를 조화로운 구성에 결합하는 것만큼이나 미묘한 문제를 남겨 놓았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300쪽)
- “이탈리아의 ‘콰트로첸트(1400년대)’ 거장들”, 특히 반 에이크(자연의 모방 ; p.241, 도판 158), 만테냐(정확한 소묘법과 원근법 ; p.258, 도판 169)가 “재현한 자연은(자연이 신과 동급이기 때문에) 장대하고 인상적이면서도 그들의 인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오히려 조각상”이나 “어딘가 딱딱하고 거칠어서 나무로 만든 것 같이 보인다.” (300쪽) 다시 말하자면 인물을 세부적으로, 그리고 그대로 묘사하고 재현하고자 할수록 살아 있는 인물들이 아니라 돌처럼 굳어져 버린 인물들처럼 돼 버리는 난점을 이 거장들은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난점을 말끔하게 해결한 사람이 바로 레오나르도였다.
-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는 방식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 가령 윤곽을 그처럼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형태를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이 약간 희미하게 남겨 두면 이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인상을 피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창안으로, 이탈리아 어로 ‘스푸마토(sfumato)’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어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는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가리킨다.” (300쪽)
- 내가 보기에, 이 스푸마토라는 기법은 세부적인 것의 묘사에 있어서 빛의 밝음과 어두움, 그리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차이를 드러내는 원근법을 탁월하게 조화시킨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이 비치는 밝은 쪽과 가까운 쪽은 명확한 상이 드러나는 반면에, 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쪽과 먼 곳은 상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모호한 그 무엇으로 보인다. 이것을 선의 터치 측면에서 보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빛이 비치는 쪽은 가까운 거시에 있는 쪽과 마찬가지로 선을 명확하게 표시하여 그 형태의 경계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 반면에 그림자가 드려지는 쪽은 먼 거리에 있는 쪽과 마찬가지로 선을 불명확하게, 희미하게 처리함으로써 형태의 경계를 허물어서 서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 수 있게 된다.
- 이것은 헤르메티시즘을 가장 완벽하게 현실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헤르메티시즘에 따르면 천상계와 지상계는 ‘명확한’ 존재 사슬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형태’의 존재 사슬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천상계로 갈수록 지상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또한 천상계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신비의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비의 세계는 지상계로 오게 될 때 다양한 변화를 가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 이러한 것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제 <모나 리자>(도판 194)로 다시 돌아가 살펴보면 그 신비스러운 효과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스푸마토 기법을 아주 세심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얼굴을 그리거나 낙서를 해 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표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주로 두 가지 요소, 즉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 둔 부분들이 바로 입과 눈 부분이다. 모나 리자가 어떤 기분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은 늘 붙잡을 수가 없다. 물론 이러한 효과를 내게 하는 것은 이러한 모호함뿐만은 아니다. 그 뒤에는 더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 (301-2쪽)
- <모나 리자> 전체를 보면 모나 리자와 그 배경 사이에는 원근법적인 요소가 있다. 그런데 이 원근법적인 요소는 만테냐의 원근법하고는 차이가 있다. 왜냐 하면 이 원근법에는 빛의 요소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모나 리자의 표정이 빛의 요소와 원근법이 결합․통일되어 있듯이 그 배경도 빛이 있는 쪽은 선의 터치를 명확하게 한 반면에 빛이 없는 쪽은 선의 처리가 희미하게 되어 있다.
- 모나 리자 뒤에 있는 풍경을 보면, 그 왼쪽과 오른쪽 모두를 모나리자와 동일한 거리선상에 둔 것이 아니라 동일하지 않는 거리선상에 배치하였다. “왼쪽의 지평선은 오른쪽의 지평선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림의 왼쪽에 초점을 맞추면 오른쪽에 초점을 맞출 때보다 인물이 약간 더 커 보이거나 혹은 몸을 더 세우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또한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변하는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도 얼굴의 양면이 꼭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302-3쪽)
- 이상의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끈질기게 자연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레오나르도는 어느 선배 못지않게 근실했다. 다만 그는 더 이상 자연의 충실한 노예가 아니었다.” (303쪽) 다시 말하자면 레오나르도는 현실(지상계)에 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현실을 넘어서고자(즉 지상계와 천상계를 결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 “이제 위대한 과학자인 레오나르도는 태초의 형상 제작자들의 꿈과 두려움을 현실로 만들었다.” (303쪽) 이러한 레오나르도의 예술은 철저하게 자연에 대한 실험과 관찰,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도덕-->예술)이라는 칸트의 생각에 상당한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14장. 전통과 혁신Ⅱ(15세기 : 북유럽)
▲ 북유럽과 이탈리아 미술의 차이점 ▼
- 이탈리아 : 천상의 세계와 지상 세계의 조화와 통일성에 바탕
- 북유럽 : <단순성>(건축)과 <범신론 성격에 따른 구체적이고 세세한 묘사>(회화)에 바탕
- 이 둘은 모두 신플라톤주의 또는 헤르메티시즘의 두 측면을 각각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차이점이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분야는 건축이었다. …… 이탈리아 이외의” “나라에서는 15세기 내내 전 세기의 고딕 양식을 계속 발전시켜 갔다. 이러한 건물들의 형태는 뾰족한 아치나 공중부벽과 같은 고딕 건축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지만, “15세기에는 복잡한 트레이서리와 환상적인 장식에 대한 14세기의 취향이 더욱 강해졌다.” (269쪽)
▲ 15세기 북유럽 건축의 특징 ▼
- “도판 174(<루앙의 법원성의 안뜰>)의 루앙의 법원 건축물은 ‘플랑부아양(Flamboyant : 타오르는 불꽃 모양) 양식’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 고딕 양식의 최후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이런 건축물들에서 고딕 건축의 마지막 가능성까지 다 소진해 버렸으므로 그 반작용이 조만간 뒤이어 일어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탈리아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어도 북유럽의 건축가들이 보다 더 큰 단순미를 갖는 새로운 양식을 발전시켰으리라는 징후가 보이기도 한다.” (269쪽)
- 이러한 특징은 영국에서 이른바 “‘수직 양식(Perpendicular style)’으로 알려진 고딕 양식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269쪽) 도판 175(<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 예배당>)을 보자. “측랑이 없기 때문에 기둥과 가파른 아치도 없다.” “일반적인 구조가 대단히 소박하고 어찌 보면 이전의 대성당들보다 더 세속적인 인상을” 준다. (270쪽)
- 이러한 세속성은 회화에서의 구체적이고 세세한 묘사와 연결된다. 다른 한편 부채 모양의 궁륭(fan-vault)(천장 부분을 뜻함)은 천상계와 지상계의 결합이 자유로운 상상의 ‘규칙’에 따라 자유롭게 조화되고 있음을 볼 때 이탈리아 건축 양식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 15세기 중엽 독일 화가 슈테판 로흐너(Stefan Lochner : 1410?-51) ▼
- 로흐너는 “반 에이크의 혁신을 보다 더 전통적인 주제(종교적인 이야기)에 활용한 미술가”였으며 “어느 정도 북유럽의 프라 안젤리코라고 말할 수 있다.” (273쪽)
- 도판 176(<장미 그늘 아래의 성모>)을 살펴보자. 먼저 이 그림을 고딕 양식의 <윌튼 두폭화>(pp.216-7, 도판 143)와 비교해 보면, “두폭화의 인물들은 다소 평면적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는 데 반해, 이 그림의 인물들은 입체적이며 따라서 현실적이다.
- 로흐너는 얀 반 에이크의 신플라톤적인 경향을 받아들여서 이 그림의 인물 배치를 플라톤의 이데아 구조에 따라 하고 있다. The One과 두 천사가 삼각형의 구도로 배치되어 있고,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둘씩, 셋씩 쌍을 지어서 원 형태의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
- 그러나 이 인물들의 표정은 두폭화의 인물들의 표정처럼 거의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다. 이는 여전히 중세 고딕 양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북유럽의 다른 화가들 ▼
- “북유럽의 다른 화가들은 오히려 베노초 고촐리와 비견된다.” (273쪽)
- 도판 177(<사를마뉴 대제의 정복> 중 헌정 페이지>)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당시의 중세 도시의 광경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이다.” (274쪽) 이 그림의 특징은 정확성, 유쾌함과 유머, 익살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 이탈리아 미술과 북유럽 미술의 혼합1 - 장 푸케(Jean Fouquet : 1420?-80?) ▼
- 그는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 방문했다.” (274쪽)
- 도판 178(<성 스테파누스와 함께 있는 프랑스 샤를 7세의 재무대신 에티엔 슈발리에>)를 살펴보자. 이 그림의 인물 표정은 <장미 그늘 아래의 성모>나 <윌튼 두폭화>의 인물 표정처럼 거의 무표정하다. 그러나 장 푸케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했던 것처럼(p.261, 도판 170) 빛을 사용하고 있다.” (274쪽) 그리하여 명암을 통해 인물들을 “마치 조각처럼 다듬어진 것처럼” (274쪽) 묘사하였다. 그런데 “모피, 돌, 옷감, 대리석 등 사물의 질감과 표면에 그가 갖는 관심을 보면 그의 미술이 얀 반 에이크의 북유럽 전통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보여 준다.” (274쪽)
▲ 이탈리아 미술과 북유럽 미술의 혼합2 -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Rogier van der Weyden : 1400?-64) ▼
- “이 거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275쪽)
- 도판 179(<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살펴보자. “우리는 로지에르가 반 에이크와 같이 머리카락 하나하나, 바느질 솔기 하나하나 등 모든 세부를 충실하게 재현할 수 있었음을 본다.” (275쪽)
- 그런데 이 그림에서의 인물들의 배치를 보면, “폴라이우올로가 직면했던 문제들(p.273, 도판 171)을” “현명”하게 해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의 몸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이 제각각의 포즈와 표정을 다양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는 근대 부르주아 시대의 서막을 알렸던 중세 도시 사회의 인간관계가 ‘어떤 규칙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의 포즈와 표정들은 제각각이지만, 그 포즈와 표정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이탈리아 미술과 북유럽 미술의 혼합3 - 후고 반 데르 후스(Hugo van der Goes : 1482년 사망) ▼
- 그는 “15세기 후반에 가장 위대한 플랑드르의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276쪽)
- 도판 180(<성모의 임종>)을 살펴보자. “무엇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성모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 12사도들의 다양한 반응(조용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 격렬하게 슬퍼하는 사람과 경솔하게 하품을 하는 사람의 표정)을 묘사한 그 훌륭한 솜씨다.” (276쪽) 이는 로지에르와 같은 업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로지에르의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에서도 여전히 <여백 또는 빈 공간>을 찾아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우주(세계)는 꽉 차 있는, 즉 빈 공간이 없는 세계였고, 따라서 빈 공간(여백)을 남겨 두는 것은 현실(세계)이 정확한 사실 묘사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독일의 목각사 바이트 슈토스(Veit Stoss : 1533년에 사망) ▼
- “조각가들과 목각사들에게는 고딕 양식을 새로운 형식 속에 잔존케 한 로시에르의 업적이 특히 중요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279쪽)
- 도판 182(<성모 마리아 교회당 제단>)를 살펴보자. 이 목각 제단의 각 장면은 “별 어려움 없이” 그 “의미를” “읽을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알아볼 수 있도록 목판에 새겨진 각 인물들의 표정(도판 183(<사도의 머리 부분>)을 참조)과 배경의 특징들이 세심하고 현실감 있도록 처리되어 있다.
▲ 중세 미술과의 단절 과정1 - 목판화와 인쇄술의 발전 ▼
- “15세기 중엽 독일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미술 기법이 발명되었”는데, 이 기법이 바로 목판 인쇄이다. “이로써 그림을 인쇄하는 것이 책을 인쇄하는 것보다 수십 년 앞서게 되었다.” (281쪽)
- 그런데 목판화는 그 특성상 “그림을 인쇄하는 데는 조잡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조잡함 그 자체가 사실 효과적일 때도 있었다. 즉” “윤곽이 단순하고 수법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282쪽)
- “그러나 그들은 세부를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과 관찰력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목판화가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 대신 동판을 사용했다.” (282쪽)
▲ 중세 미술과의 단절 과정2 -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 : 1453?-91) ▼
- 숀가우어는 “15세기의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동판화가이다.” (283쪽 참조)
- 도판 185(<거룩한 밤>)를 살펴보자. “네덜란드의 대가들과 마찬가지로 숀가우어는 그 장면에 있는 모든 작은 일상적인 세부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283쪽)
- 또한 이 그림에서도 빈 공간 또는 여백이 보이지 않는다. 숀가우어는 이러한 빈 공간 여백을 남기지 않기 위해 “폐가를 그림의 무대로 선택” (284쪽)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폐가의 무너진 돌담을 통해 기독교를 주제로 한 이 그림을 입체적이며 보다 현실감 있게 볼 수 있다.
- 그러나 “이 두 대각선은 성모의 머리에서 교차하는데 그 부분이야말로 이 판화의 진정한 중심”이 되는데, 이러한 중심은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이며 평면적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중세 전통의 미술 관념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 중세 미술과의 단절 과정3 - 동판화와 인쇄술의 발전 ▼
- 동판화를 통한 “그림의 인쇄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승리를 보장해” 주었으며, “북유럽의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여러 가지 원동력 중의 하나”가 되었다. (285쪽)
13장. 전통과 혁신Ⅰ(15세기 후반 : 이탈리아)
▲ 15세기 여러 ‘회화 유파’ 발생의 역사적 목적 ▼
- 중세시대에는 게르만 족의 유럽 통일을 통해 단일한 거대 제국이 탄생했다. 이러한 단일한 거대 제국을 통일시키는 지배적인 이념이 바로 중세 가톨릭(또는 중세 기독교)이었다. 이러한 지배 이념은 미술, 건축, 조각 등의 예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미술, 건축, 조각 등의 예술은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활동한 것이 아니라 과학을 비롯한 여타의 학문처럼 종교적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곰브리치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미술”은 “성경의 이야기를 감동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에만 사용”되었다. (247쪽)
- 다른 한편, 거대 단일 제국 하에서는 각 지역 또는 각 민족(nation : 이때에는 아직까지 민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하지 않았다. 이 개념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생겨나게 되었다)의 특이성이 강조될 수 없었다. 이 특이성이 강조될 경우 거대 단일 제국은 분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일성> 또는 <단일성>, <동일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동일성, 단일성이 미술에 있어서 <고딕 국제 양식>(p.215 참조)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 그러나 중세 말기에 오게 되면 절대 왕정의 왕권 강화(국왕의 권력 강화)되었고, 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부르주아가 성장하였으며, 이러한 성장으로 인해 도시 공국(도시 국가)이 출현하게 되었다.
- 이러한 출현은 곧 고딕 국제 양식을 서서히 쇠퇴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도시 공국을 중심으로 지역적, 민족적 특색이 강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미술가들로 하여금 길드(gild)를 조직하게끔 만들었고, 이러한 길드는 곧 하나의 ‘회화 유파’(248쪽 참조)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15세기의 그림은 그림 자체만 보아도 그것이 피렌체의 것인지 또는 시에나인지, 디종 또는 브뤼주, 퀼른 또는 비엔나의 것인지를 식별할 수”있게 되었다. (248쪽)
▲ 피렌체의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 1404-1472) ▼
-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 마사초를 이은 다음 세대의 건축가이다.
- 15세기 이탈리아와 북유럽 미술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 이탈리아 - 천상계와 지상계의 상호통일성
* 북유럽 - 건축에서는 <단순성>, 회화에서는 <구체적인 세부적 묘사>
이 둘은 모두 신플라톤주의 또는 헤르메티시즘의 두 측면을 각각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 알베르티는 바로 이탈리아 미술을 계승하고 있다.
- 도판 162(<르네상스 교회 : 만토바의 성 안드레아 대성당>)를 살펴보자. 알베르티는 직선과 원의 형태가 거의 분리되어 있는 고딕 양식을 지붕에서 직선과 원의 형태의 조화와 통일을 추구해 돔(dome) 형식을 추구했던 브루넬레스키를 이어받아 지붕의 돔 구조를 이어 받고 있다.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피렌체 대성당의 돔>(도판 146)과 비교해 보자.
- 도판 163(<피렌체의 루첼라이 대저택>을 살펴보자. 이 저택은 부유한 상인 소유의 집이다. 그 이전까지의 건물들의 소유는 모두 공동체의 소유였다. 즉 모두 공공건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가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의 중요시되고, 그에 따라 사적 소유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사적 소유의 한 형태가 이 대저택이다.
- 이 저택 역시도 벽기둥 사이를 부드러운 곡선 형태의 아치로 배치하고 있는데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는 또한 돔 구조와 아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대저택의 창문들(p.189, 도판 125)을 비교해 보기만 해도 예기치 않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티는 소위 ‘야만적인’ 첨형 아치를 부드럽게 만들고 또 고전적인 기둥 양식의 요소들을 재래의 인습적인 형식 안에 채택함으로써 단지 고딕 식 설계 방식을 고전적 형식으로 ‘번안했을’ 뿐이었다.” (250쪽)
-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고딕 전통과 근대적인 양식 사이의 절충은 15세기 중엽의 많은 거장들의 특징이었다.” (250쪽)
▲ 피렌체의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 1378-1455) ▼
- “새로운 업적과 재래의 전통을 조화시키는 데에 성공한 피렌체의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는
도나텔로와 같은 세대의 조각가인 로벤초 기베르티를 들 수 있다.” (250쪽)
- 도판 164(<세례 받는 그리스도>)를 살펴보자. 먼저 이 부조는 도타텔로가 만든 부조 <헤롯 왕의 잔치>(p.232, 도판 152)에서처럼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이 장면의 구성이 12세기 리에주의 유명한 놋쇠 주물공의 배치 방식과 많이 다르지 않다.(p.179, 도판 118)” (251쪽) 그런 점에서 중세의 전통적인 것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먼저, 구원의 천사들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점이다. 도판 118(<놋쇠 세례반>)에서 천사는 요단강에서 예수를 기다리다가 세례를 해주는 두 사람 위에, 즉 천상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이 부조에서는 세례를 하는 세례 요한과 수평의 위치(세례 요한의 반대편)에 있다.
- 또한 기베르티도 도나텔로처럼 이 부조에서 “각 인물상에 특징을 주어 그들이 행한 역할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251쪽)
- 이처럼 “기베르티”는 “당대의 새로운 발견들을 이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고딕 미술의 이념에 충실”했다. (252쪽)
▲ 피렌체 부근 피에솔레(Fiesole)의 위대한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 1387-1455) ▼
- 기베르티처럼 “안젤리코도 주로 종교 미술의 전통적인 이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마사초의 새로운 방법을 응용했다.” (252쪽)
- 도판 165(<수태고지>)를 살펴보자. 이 그림은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천장의 모습을 둥근 곡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인물들은 “거의 운동감이 없으며 실재의 단단한 인체를 암시해 주는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252쪽)
▲ 피렌체 화가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 1397-1475) ▼
- 도판 166(<산로마노의 대승>)을 살펴보자. 일단 이 그림은 원근법을 사용한 입체감을 통해 현실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말들이나 인물들은 조각된 회전목마나 인형들처럼 보인다. 이런 점은 이 그림을 매우 중세풍으로 보이게 한다.
- 그러나 이러한 중세풍을 해소시키는 것은 바로 그가 심취해 있는 원근법(도판 167 참조)이다. 이러한 원근법은 우첼로의 그림이 대단히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인물상들의 배치나, “심지어 땅에 흩어져 있는 부러진 창들까지도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254쪽)
- 이러한 우첼로의 원근법은 “관찰을 통해 얻은 세부들을 점차 더해주고, 또한 가장 사소한 음영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세세한 면을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국제 양식의 형식들을 변화”시킨 북유럽의 얀 반 에이크와는 “정반대의 접근 방법”으로 입체적인 현실묘사를 하고자 했던 방법이다. (255쪽)
▲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 : 1421경-97) ▼
- 고촐리는 그의 스승인 프라 안젤리코와는 화풍이 대단히 다르다.
- 도판 168(<베들레헴을 향해 가는 동방박사들>)을 살펴보자. 고촐리는 그의 스승 안젤리코와는 다르게 성경의 일화를 성스럽고 단순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화려하고 매혹과 환락의 동화처럼 그리고자 함으로써 당시의 생생하고 유쾌한 생활상을 묘사하고자 하였다. 이 그림 또한 원근법에 충실하다.
▲ 북부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 1431-1506) ▼
- “그(만테냐)가 현실성이라고 부른 기준은 조토의 시대보다 훨씬 더 정확한 것이 되어 있었다. 조토의 경우 중요했던 것은 이야기의 내면적 의미, 즉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즉 성경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어떻게 하면 성스럽고 아름답게 그려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반면 만테냐는 외부적인 형태에도 관심을 가졌다.” 즉 어떤 “광경이 실제로 벌어졌을 장면을 그대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256쪽)
- 도판 169(<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성 야고보>)를 살펴보자. 이 그림은 만테냐의 현실성을 충분히 반영한 그림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성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하여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 도판 169의 그림은 도판 168의 고촐리의 그림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고촐리의 인물들은 화려하지만 표정들이 거의 동일하고 생동감이 없는 반면에, 만테냐의 인물들은 매우 “조각적이고 인상적이다.” 또한 원근법을 통해서 만테냐는 그의 인물들을 “단단하고 형체가 있는 존재들처럼 서 있고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하였다. (259쪽)
▲ 남부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cesca : 1416?-92) ▼
- 피에로는 만테냐의 비슷한 점을, 고촐리와는 전혀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만테냐와 고촐리처럼 원근법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 도판 170(<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을 보자. 이 그림에서 피에로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곧 <빛의 처리>이다. 피에로는 이 빛을 통하여 <현실성>을 훨씬 더 잘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에서 빛은 인물들의 형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 내는 원근법과 대등한 중요성을 지닌다.” (260쪽) 이러한 점에서 곰브리치는 “마사초의 후계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피에로를 꼽는”다. (260쪽)
▲ 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만들어 낸 새로운 문제점 ▼
- 중세 시대는 대단히 수직적이고 위계적이며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던 2차원적인 평면적 시대였다. 왜냐하면 신의 세계(이데아 계)가 기하학적으로 2차원적인 단순한 삼각형의 구조를 가진 세계였고, 인간 세계의 현실계도 이러한 신의 세계를 본 떠 만든 세계이고 그 세계를 지향하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의 현실은 평면적이고 인물상들 역시 평면적인 삼각형 구도로 배치하면 되었다. 또한 정확하고 세세한 소묘 역시 알 필요가 없었는데, 이 또한 신의 세계가 가장 단순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 그러나 “현실 세계를 거울과 같이 반영하는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관념이 채택되자마자 인물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 이전처럼 용이하지 않았다.” (260쪽) 왜냐하면 중세 신분제 사회가 서서히 붕괴되면서 상인, 과학자 등이 ‘부각’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해진 신분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 “이러한 문제는 거대한 제단화나 그와 비슷한 작업에 직면했을 때 특히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이런 그림들은 멀리 떨어져서 보여지며 또 교회 건축의 전체적인 구조와 어울려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술가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분명하고 인상적인 윤곽으로 신자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260쪽) 한마디로 말하면 중세의 시대적 이념과 붕괴되어 가는 중세의 시대상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였다.
▲ 15세기 후반 피렌체 미술가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Antonio Pollaiuolo : 1432?-98) ▼
- 폴라이우올로는 “이 새로운 문제, 즉 소묘에 있어서도 정확하며 구성에 있어서도 조화로운 그림을 그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262쪽) 그는 “정확한 규칙을 써서 이러한 문제를” “최초”로 “해결하려 했던” 사람이다.
- 이러한 그의 시도는 도판 171(<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에 잘 나타나 있다. 폴라이우올로는 이러한 규칙을 플라톤의 이데아 계의 구조로 나타낸 것 같다.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원뿔 형태의 꼭짓점에 위체해 있다. (평면적인 형태로 봤을 때 이는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의 위치에 해당한다). 그리고 성 세바스티아누스에게 활을 쏘는 사람들은 원뿔의 원을 형성하는 위치에 있는데 각기 대립적인 쌍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이는 플라톤의 이데아들의 특성과 구조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할 수 있다).
- 그리고 원근법을 사용하여 인물들의 입체감을 보여 주고 있다.
- 그러나 이 그림은 뭔가 조화롭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즉 “폴라이우올로는 그가 성취하려고 시도했던 것을 거의 성공시키지 못하고 있다.” (262쪽) 왜냐하면 이러한 규칙(플라톤의 이데아 구조)은 중세적인 것인데, 이 중세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서 이 그림의 배경에 있는 “토스카냐의 풍경” (262쪽)과 제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배경에 있는 토스카냐의 풍경을 원근법으로 이용하여 훌륭히 묘사하고 있지만, 그 주제와 배경은 사실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순교가 집행되고 있는 전경의 언덕과 배경의 풍경을 연결시키는 것은 하나도 없다” (262쪽)
▲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 1446-1510) ▼
- 보티첼리 역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한 15세기 후반의 피렌체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262쪽)
-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 도판 172(<비너스의 탄생>)이다. 이 그림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근거한 것인데, 이 신화의 주요 원리는 <다(多)의 공존>이다. 신들 사이의 위계질서 없이도 잘 공존하는 방식을 중세 신분제가 붕괴해 가고 있는 시점에서 앞으로 따라야 할 그 당시 사람들의 공존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런 공존 방식은 미술에서 인물상의 배치의 기준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 그러나 보티첼리의 인물 묘사는 “덜 딴딴해 보이”고 그럼으로써 “폴라이우올로나 마사초의 인물처럼” 해부학적 지식에 따라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264쪽)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우아한 운동감이나 선율적인 선들은 기베르티나 프라 안젤리코의 고딕 전통, 또는 앞에서 우리가 부드러운 육체의 곡선과 섬세한 옷주름의 흐름을 언급한 바 있는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p.213, 도판 141)나 프랑스 금세공사의 작품(p.210, 도판 139)과 같은 14세기의 미술을 상기시켜 준다.”(264쪽) 다시 말하자면 인물 묘사의 측면에서는 중세의 전통을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서양 미술사 스터디한 내용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함 보셔요^^.
근데 길어서 보시기 불편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앞으로도 스터디 끝날 때까지 계속 정리해서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양미술사』(E. H. 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이종숭 옮김, 예경, 2009)
12장. 현실성의 정복(15세기 초)
▲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 또는 헤르메티시즘 ▼
- 그리스 고전의 합리적인 면모를 재조명하는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그리스 시대에 유행했던 자연세계에 대한 마술적이고 신비적인 사상이 다시 등장하였다. 이 사상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1460년 마케도니아에서 피렌체로 여러 그리스 문헌이 보내져서 코시코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가 그것을 소장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헤르메스 전집」(Corpus Hermeticum)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로 하여금 이것을 번역하게 했다. 피치노와 당시 사람들은 이 책의 저자로 알려진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us)가 모세와 동 시대 사람인 이집트 신부로서 실제 인물이고, 기독교의 예언자이며, 플라톤과 플라톤주의도 이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 역사적 실수는 르네상스 시대에 엄청난 결과를 야기했다.” (『과학사신론』(김영식,임형순 공저, 다산출판사, 2008), 71쪽)
- 헤르메스주의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매우 유행했던 신플라톤주의의 한 지류로서 중세의 마술적, 연금술적 사조와 연관되어 우주에 존재하는 신비적인 힘을 인정하고 인간이 자연에 영향을 미친다는 자연에 대한 근대적 세계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 헤르메스주의는 우주와 인간이 연관되어 있다는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는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영향으로 ‘존재의 큰 사슬’과 ‘대우주-소우주 유비관계’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존재의 큰 사슬’ 이론은 이 사슬의 한 쪽 끝에 신과 천사들이 있고, 다른 한 쪽 끝에 인간과 지상세계가 있으며, 이 둘이 거대한 사슬로 묶여 있다는 이론이다. 당시 사람들은 천상계와 지상계 사이의 여러 상관관계들을 설명함으로써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추구했고 점성술은 그 관계들을 기초로 발전하게 되었다.
- 헤르메스주의는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인간을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우주는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신성한 신의 영역이었다. 반면에 헤르메스주의에서 우주는 신비적 힘들의 네트워크(network)로 연결되었고, 네트워크 한 부분인 인간과 대우주가 서로 영향을 미쳤다. 즉 헤르메스주의에서 우주는 인간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과거에 인간이 자연을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무능력자였다면,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은 무능력에서 벗어나 자연을 통제하고 변형시켜 자연에 영향을 미치는 적극적인 존재로 발전한 것이다.
-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에 널리 퍼진 헤르메스주의는 동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뿐만 아니라 이후 세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레오나르도는 신비주의 사상에 입각한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고, 16~17세기에 베이컨과 뉴턴은 신비주의 사상과 연금술에 심취했었다. 기존에 수용된 신비주의가 자연의 초월성과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관념이었다면, 헤르메스주의는 구사상 체계를 타파하는 새로운 지적 에너지로서 자연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연구하는 근대과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 플라톤의 만물계(현상계)의 복잡한 현상들이 이데아 세계의 아주 단순한 구조로부터 비롯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신비화의 이면에는 복잡하게만 보이는 우주 현상을 단순한 우주 구조의 원리, 법칙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과학적인 노력들이 숨어 있었다. 앞으로 우리는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등의 과학자들을 통해 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헤르메스주의(또는 신플라톤주의)의 상호 영향과 관련된 신비함은 플라톤의 <관여 또는 분유>개념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관여 또는 분유 개념은 논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당히 비유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 이 장에서의 현실성(또는 사실성)의 의미 ▼
- 이 현실성은 단순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단순한 현실이 아니다. 헤르메티시즘에 따르는 현실이다. 즉 중세 때처럼 신의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지상세계로서의 현실계가 아니라 신의 세계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면서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현실이다.
▲ 르네상스가 서양 미술사에서 가지는 의미 ▼
-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한다.
- 고트 족과 반달 족 같은 게르만 종족이 침입하여 로마가 멸망한 지 700년이 지나서야 고딕 양식이라고 부르는 미술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때 고딕이라는 말은 이탈리아 인들에 의해 <야만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 이 당시의 이탈리아인들은 야만적인 고딕 양식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시도를 시작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단테와 조토의 출생지이며 부유한 상업도시인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
- 피렌체에서 15세기 초에 일단의 미술가들이 계획적으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미술 개념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하였다.
▲ 젊은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lippo Brunelleschi:1377-1466) ▼
- 피렌체 대성당의 돔(dome) 구조의 완성(도판146, <피렌체 대성당의 돔>, 225쪽 참조)
- 중세 시대에는 픞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 따라서 지상계와 천상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운동의 형태로 볼 때, 천상계의 구조는 원 운동 구조(그리하여 천상계에서 원 운동은 자연 운동이고 직선 운동은 강제적 운동이 된다)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반대로 지상계의 구조는 수직 자유낙하 운동으로서의 직선 운동 구조(그리하여 지상계에서 직선운동은 자연 운동이고, 원 운동은 강제적 운동이 된다)로 이루어져 있다.
- 그러므로 중세 고딕 양식의 건축들은 거의 모두가 직선 형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 형태나 곡선 형태의 구조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 그러나 지상계와 천상계의 상호 결합과 영향이라는 점에서 볼 때, 브루넬레스키는 직선과 원형태가 결합된 곡선 형태의 돔 구조를 지붕(지상계와 천상계가 만나는 지점)에 적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후에 아마도 17C 운동 역학의 포물선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브루넬레스키와 마사초(Masaccio : 1401-28)의 원근법 ▼
- 원근법은 현실 세계, 즉 3차원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방법인데, 이는 수학적(이 당시까지만 해도 수학은 천상계의 구조를 파악하는 학문으로서 주로 수적 비율과 연관된 기하학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방식에 의거한 것이다.
- 이 원근법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적용한 것(즉 신플라톤주의 또는 헤르메티시즘을 적용한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삼각형 구조이다.
(이데아1) (이데아2)
** 이데아1과 이데아2는 대립쌍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삼각형 구조는 2차원적인, 즉 평면적인 아주 단순한 구조이다. 이 삼각형 구조는 현실계에 <관여 또는 분유>를 통해 다양한 입체적 형태로 나타난다(플라톤은 우주의 물질 형상은 바로 정다면체의 기하학적 도형이라고 주장했다. 우선 불은 정4면체로 이루어져 있다. …… 공기는 정8면체로 이루어져 있다. …… 물은 정20면체로 이루어져 있다. 흙은 정6면체로 이루어져 …… 매우 안정적이다. …… 기하학에는 이 네 가지 정다면체 이외에 또 하나의 정다면체가 주가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에는 또 하나의 원소가 있어야 한다. 즉 제5원소는 정12면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둥글게 생긴 형태로서 하늘을 구성하고 있다).
- 그런데 이 3차원의 현실 세계는 2차원의 이데아 계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있다.
- 도판 149(마사초 작, <성 삼위일체, 성모, 성 요한과 헌납자들>)를 살펴보자. 예수,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 요한의 위치와 헌납자들인 상인들의 위치는 분리되어 있고, 상인들이 서 있는 위치는 지상계(현실계)이고, 그 뒤는 천상계(이데아계)이다. 그러나 천상계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손으로 만지면 만져질 것 같은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 도판 149를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에 비견되는 신(The One)과 예수, 그리고 그 밑에, 대립쌍에 비견되는 성모 마리아(여성)와 성 요한(남성), 그리고 더 밑에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의 관여 또는 분유 형태로서의 상인 부부가 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삼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2차원적으로도, 그리고 원근법에 따라 3차원적으로도 삼각형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 이렇게 볼 때 원근법은 기하학적 도형상 삼각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각형의 2점의 지상계로부터 삼각형의 나머지 1점의 천상계에 이르는 모습이 바로 이 장에서 말하는 현실이고, 그 현실은 원근법으로 처리되어 있다.
- 성모가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을 손으로 가리키는 단순한 제스처는 현실계(지상계)와 이데아계(천상계) 사이의 상호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하고 할 수 있다. 현실계는 운동 변화하는 세계인데, 이 운동 변화는 대단히 현란하고 복잡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계늬 운동 변화가 이데아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이데아계가 현실계처럼 현란하고 복잡한 운동 변화를 겪는 세계는 아니다. 그러한 운동 변화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상호 영향성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데아는 가장 단순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 도나텔로(Donatello : 1386?-1466) - 브루넬레스키 일파 중 가장 위대한 조각가 ▼
- 도판 151, 150(도나텔로 작, <성게오르기우스>)을 살펴보자. 여기에도 범신론적인 헤르메티시즘(헤르메스주의)의 영향이 잘 나타나 있다. 중세에서의 지상계와 천상계의 분리를 통해서 볼 때, 상인들은 거의 무표정한 고요한 아름다움(도판127 참조)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천상계의 성인들은 지상계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희로애락 등의 감정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 게오르기우스>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결의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이 천상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자신감과 힘찬 기상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 도판 152(도나텔로 작, <헤롯왕의 잔치>)를 살펴보자. 도나텔로는 여기에서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헤롯왕이 있는 연회장과 악사가 있는 회랑, 그리고 음식을 만들어 내는 주방(?)의 위치를 원근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세 개의 방을 플라톤의 사회의 세 계급을 분리한 것에 비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개의 방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근법으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 왕실의 연회실은 플라톤의 이데아 계에 비유될 수 있는데, 이데아 계는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날 수도 없거니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연회실 안에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표정한 표현들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공포와 갑작스러운 혼돈의 표정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교황청과 중세 가톨릭의 권위 상실로 인한 그 당시의 사회상을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점은 살로메의 어머니와 연회석 사이에 <큰 공백>이 있다는 점이다. <큰 공백>은 곧 <빈 공간>을 의미한다. 중세 시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의 여향으로 이 세계 전체, 즉 우주 전체는 빈 공간이 없이 꽉 차 있다. 왜 이런 생각을 했느냐 하면, 빈 공간은 운동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운동 변화는 곧 신분제 질서 체제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5C 전까지의 모든 예술 작품에는 빈 공간(여백)을 남겨 두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은 헤르메티시즘의 영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운동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지상계와 천상계 사이의 빈 공간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빈 공간은 나중에 뉴턴의 만류인력 법칙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 알프스 북쪽의 조각가 클라우스 슬뤼테르(Claus Sluter) ▼
- 당시의 부유하고 번창하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 디종(Dijon)에서 1380년 경부터 1405년까지 일한 사람이다.
- 도판 154를 살펴보자.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예수의 수난을 예언했던 예언자인 다니엘과 이사야라는 인물이다. 이 인물들은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도판 151, 152)에서의 성 게오르기우스처럼 인상적인 표정을 가지고 있다.
▲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 1390?-1441) - 북유럽에서 사실성(현실성)의 정복을 최종적으로 완수한 사람 ▼
- 얀 반 에이크 역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브루넬레스키와 마사초와는 달리 사실적이고 세속적인 표현에 좀 더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신플라톤주의의 범신론적 성격, 더 나아가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신론적 성격과 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은 개개의 만물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 범신론인데, 개개의 사물에 대한 사실적이고 세세한 묘사는 신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도판 155를 살펴보자. 일단 전체적으로 볼 때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이데아들의 존재 구조가 선의 이데아를 중심으로 대립 쌍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쌍으로 대비되어 이루어져 있다. 위의 그림은 말할 것도 없고 아래 그림도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범신론이 가지는 해방 성격에 따라, 아래 그림을 보면 영주 귀족들과 기사, 농노들과 같은 평민들이 수평으로 배열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또한 이러한 범신론의 성격에 따라 The One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의 표정이 세속 인간의 다양한 표정처럼 다양하다. 도판 141(p.219, 100년 전 시모네 마르티니가 그린 제단화)와 비교해 보라.
- 도판 156도 마찬가지이다.
- 도판 157을 보게 되면 생생하고 구체적이면서 세부적인 묘사가 눈에 띄는데 이것도 다 범신론적인 성격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범신론에 의해 자연과학이 크게 발전하는 것과 깊은 연곤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원근법도 사용하고 있다.
- 도판 158(<아르놀피리의 약혼>) 이 그림 역시도 얀 반 에이크가 아르놀피리와 그의 신부 잔느 드 쉬라리의 약혼을 기록화처럼 사실성에 기초해 그린 그림이다. 두 인물의 세세한 묘사뿐만 아니라, 특히 강아지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도판 160 참조). 또한 거울에 반사된 모습 역시도 아주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거울 속에 얀 반 에이크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이 거울 속의 그림은 원근법에 의해 처리돼 있다(도판 158 참조).
▲ 스위스 화가 콘라드 비츠(Conrad Witz : 1400?-1446?) ▼
- 도판 161(<제자들로 하여금 고기를 잡게 하신 기적>)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대단히 친숙해 보이는 느낌을 지닌다. 그 이유는 실제 제네바 호수와 살레브 산을 배경으로 그렸으며 실제 어부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성경에서 이 호수는 티베리아 해로 나온다). 중세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면 곰브리치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티베리아 해를 상투적인 몇 개의 물결 선으로 처리했을 것이며, 예수의 모습을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의 모습은 친근하면서도 굳건한 모습(이는 마사초의 도판 149(<성 삼위일체, 성모, 성 요한과 헌납자들>의 인물상을 연상시킨다)으로 나타나 있다.
이번 여름 방학 때는 근대서양 미술사에 관해서
스터디를 하려고 합니다.
서양 미술사를 인문학적, 특히 철학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뭐, 제가 이에 관해서 잘 아는 건 아닙니다^^.
저도 잘 모르지만 같이 토론하면서 공부를 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미술관 전시회도 같이 가 볼 생각입니다.
가서 그림 감상도 하고요^^.
텍스트(교재) : 곰브리치(저자)의 [서양미술사](예경, 1997)
12장부터~
예비 모임 : 7월 15일(목) 오후 5시 건국대학교 학생회관 1층 학생식당
주중에 스터디를 할지, 주말에 스터디를 하게 될지는 예비모임 때
같이 논의해서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공부해 볼 사람은 밑에 댓글 달아주시고, 이메일 주소 남겨 주셔요.^^
사실 이 노래는 연부를 비롯해 억압과 착취에 대항해 투쟁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노래라고 생각한다.
짜증나는 일상의 더위를 나려 보내 줄 수 있는 노래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 노래는 영화 <감사용>에서 나온다.^^
도넛츠(Donots)라는 그룹이 2002년에 동영상을 제작하면서 리메이크한 곡이기도 하다.
Twisted Sister - We're Not Gonna Take It
Oh we're not gonna take it
No, we ain't gonna take it
Oh we're not gonna take it anymore
우린 참지 않을 거야절대 받아 들일 수 없어더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어
We've got the right to choose and
There ain't no way we'll lose it
This is our life, this is our song
우린 선택할 권리가 있고그 권리를 앗아갈 순 없지이건 우리의 인생, 우리의 노래야
We'll fight the powers that be just
Don't pick our destiny 'cause
You don't know us, you don't belong
우린 침묵하는 권력과 싸울거야
우리 운명을 정하려 하지마넌 우릴 몰라, 네가 있을 곳이 아냐
Oh we're not gonna take it
No, we ain't gonna take it
Oh we're not gonna take it anymore
우린 참지 않을 거야절대 받아 들일 수 없어더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어
Oh you're so condescending
Your gall is never ending
We don't want nothin', not a thing from you
넌 겸손한 척 하지만
그 뻔뻔함은 결코 끝이 없어우린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너에게 원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Your life is trite and jaded
Boring and confiscated
If that's your best, your best won't do
닳고 낡아 빠진 네 삶따분하고 차압당한 네 인생너의 최선이 고작 그 정도라면아무리 애써도 헤어나질 못할거야
Oh.....................
Oh.....................
We're right/yeah
We're free/yeah
We'll fight/yeah
You'll see/yeah
우리는 정당해, 우리는 자유로워우리는 싸울거야, 두고 보라구
Oh we're not gonna take it
No,we ain't gonna take it
Oh we're not gonna take it anymore
우린 참지 않을 거야절대 받아 들일 수 없어더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어
Oh we're not gonna take it
No,we ain't gonna take it
Oh, we're not gonna take it
No, we ain't gonna take it
Oh we're not gonna take it anymore
우린 참지 않을 거야절대 받아 들일 수 없어더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어
No way!
절대 안돼
Oh.....................
Oh.....................
We're right/yeah
We're free/yeah
We'll fight/yeah
You'll see/yeah
우리는 정당해, 우리는 자유로워우리는 싸울거야, 두고 보라구
We're not gonna take it
No, we ain't gonna take it
We're not gonna take it anymore
우린 참지 않을 거야절대 받아 들일 수 없어더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어
We're not gonna take it, no!
No, we ain't gonna take it
We're not gonna take it anymore
우린 참지 않을 거야절대 받아 들일 수 없어더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어
Just you try and make us
한번 해봐 그렇게 만들어봐
we're not gonna take it
Come on!
No, we ain't gonna take it
You're all worthless and weak!
we're not gonna take it anymore
Now drop and give me twenty!
We're not gonna take it
Oh crunch pin!
No, We ain't gonna take it
Oh you and your uniform!
We're not gonna take it anymore
우린 참지 않을 거야
덤벼!절대 받아 들일 수 없어
넌 약해빠진 쓰레기야!
더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어
나에게 고통을 가하겠지만 택도 없는 소리!
틀에 박힌!
절대 받아 들일 수 없어
너와 너의 제복!더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어
선거가 끝났다.
선거 기간 동안 시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유세차량 방송이 엄청 시끄러워서였다.
별로 관심 없던 선거여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나는 이번에도 투표에 참가하지 않았다.
선거에 참여하지 않아서 사표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표를 만들었다는 그런 멍청한 말은 이제 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들이 투표를 한다고 해봤자 전국적으로 기껏해야 1만표 정도였을 것이다.
1만표 얻어서 당선될 것도 아닌데...
그리고 비판적 지지해서 한명숙이라도 당선됐다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인지...
그렇게 표 확인해서 어쩔 것인가...
진보 진영이 1만표 정도 더 얻었다는 거 확인해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는가?!
전국적으로 3.4%에서 3.5%로 올라갔다고 자족하고 말 것인가?!
한명숙 등 민주당이 당선돼서 비판적 지지자들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민주당이 당신들의 정체성이라는 환상에 젖어봤자,
민주당이 당신들의 정체성이 될 리도 만무하거니와
자신의 모든 정치적 생존을 민주당에 모두 맡기는 멍청한 짓을 한다고 생각해 보지 않으셨는지...
그러니까 표 갈라먹었다고 민주당한테 욕을 얻어 먹는 상황을 자초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근본적으로 하나 물어보고 싶다.
도대체 왜 선거에 참여하는 것인가?!
우리는 먼저 이것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선거 때가 오니까 선거에 참여한다는 관성에 의한 것인가?!
당선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선거에 참여하는 것인가?!
진보진영인 우리가 있음을 알려리려고?!
그건 평소에 하여야 하는 일 아닌가?!
왜 하필 선거 때만 되면 알리지 못해서 그러는가?!
몇 표인지 확인해 보려고?!
이건 아니잖아~~~...
그렇지 않은가?!
이명박 뽑았다고, 한나라당 뽑았다고
대중들 욕할 필요도 없고,
사실 그럴 욕할 자격도 없는 게 사실이다.
이번에는 한나라당 뽑지 않고 민주당 뽑았다고
대중들 칭찬할 건가, 대중의 의식이 높아졌다고?
어떤 선거이던지 선거에 참여하려면
뭔가 보여줄 만한 능력이나 실제 행하고 있는 대안들을 제시해야 한다.
대중들은 '소박한' 유물론자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경험론자들이라 뭔가 보여 주어야 한다.
진보 진영 스스로가 뭔가 대안을 실험하고 있으며 그 성과를 조금씩
쌓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대중들은 부르주아 정치 공간에서 진보 진영이 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진보 진영이 늘 부르주아 정치 공간 안에서 부르주아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항상 부르주아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놈한테 직접 요구하는 것이 빠른가,
아니면 제3자(그렇다고 이 3자가 부르주아 하고 아주 친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고,
미운털이 박혀도 단단히 박혀 있는 3자다)를 통해 요구하는 것이 빠른가?!
대중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직접적인 요구를 하는 쪽이 빠르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성향이 극적으로 나타난 현상이 재작년에 나타난 촛불 시위 현상이고,
이번 선거에 민주당에게 표를 준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 선거가 끝났다.
민주당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고, 그 속에서 어떤 떡고물을 찾을 것이냐 하는 것에,
그리고 심상정이나 노회찬의 정치노선이 어떻다라는 것에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자.
이미 예견했던 일이 나타난 것이고, 이미 선거 과정과 그 결과를 통해서 그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죽은 자식 뭐 만지기'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스스로 우리가 내걸었던 구호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한 구호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개별적인 노동자들이 자본이 주는 개별적인 임금을 통해 개별적으로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토대가 될 수 있는 모든 물질적 조건들을 공동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런 인프라의 구축을 자본에게 청원해 봤자 자본은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자본의 투쟁(이 투쟁은 수동적인 청원의 의미가 아니라 빼앗긴 우리의 것을
우리가 되찾아오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투쟁이다)을 벌여서 그 물적 토대를 다져야 한다.
그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 최선봉의 투쟁이 바로 노동자 계급의 임금, 단체 협상 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은 개별 노동자들의 임금을 몇 %인상한다거나,
이와 밀접하게 관련하여 개별적인 노동조합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즉 개별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 스스로 대안을 마련하고 실험하면서 현실화시켜 나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할 수 있으며 이는 곧 대중의 신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중의 신뢰를 받게 되면,
이제 대중은 이 실천활동에 죽극적이고도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바꿔 나갈 때 우리의 정치적 힘이 생성, 증대되며
그럴 때 선거가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다.
이제 6월에 민노총 총파업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이다.
이 총파업을 우리의 공동 삶을 현실화시키는 디딤돌로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요구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인 민노총에게 정당하고도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무늬만 총파업을 하지 말고,
우리 공동 삶을 위한 하나의 디딤돌로 총파업을 실시하자고 말이다.
우리에겐 우리 공동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진보 블로그들이 모여
토론하고 그 토론의 결과를 민노총에게 전달하고,
민노총을 견인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진보넷이 이러한 토론회를 마련해 봤으면 어떨까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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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박식하신 곰탱님. 그 지식을 5분만에 저의 머리로 옮겨 주실 방법 없을까요? ㅋㅋㅋ 잘 들어가셨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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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부에 비하면 새발의 피죠^^. 글고 저 박식하지 않아요^^. 잘 들어갔어요^^. 술도 안 마셨는데^^.. 언제 학교 앞으로 함 오셔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