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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랑 친하게 지내렴...
그래야 가을에 같이 야구하지^^.
이길라면 별 세 개 달린 사자랑,
에스켄지 로스켄지 짝퉁 드래곤, 미련 곰팅이를 이겨야 한단다.
나머지는 적당히 하고...
주타방을 쌍둥이로 잡으면 안 된다, 알겠지, 갈매기들아?!
수업이 오전 오후 다 있다...
이거 오늘 수업해야 하나...?
수업 째고 노동절 집회에 가고 싶다.
어제는 전야제였다고 하는데,
거기도 못 가보고...
아~~~씨이... 수업 5시에 끝난다!!
미치겄다...
요 5~6년간 노동절에 계속 수업 걸리고 있다...
얘들아,
오늘 수업 안 하면 안 되겠니?
샘두 수업 안 하구 싶은 날이 있거덩...
마음은 굴뚝 같으나, 수업 들어가야지...
가서 커피 한잔 하면서 맘을 가라앉히고...
쿠울하게...^^
오늘 <비판적 사고와 토론>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주제는 메트릭스에 관한 것이었고, 그에 따른 토론 주제는
현실 세계가 가상세계라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하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만의 토론 결론은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며,
우리가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빨간약과 파란 약 중에 파란 약을 선택한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자기 자유의지대로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한 번도 자기의 자유의지대로 살아보지 못했다. 온통 강자의 의지대로 살아왔다.
이것은 동물세계의 약육강식의 원리대로 사는 것은 아닐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약육강식의 원리를 거스르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부분은 홍실이 님의 이야기를 따온 것이다!^^)
어쨌거나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개겨 보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여러분들은 온통 취직에 목매어서 산다. 그것 때문에 너무도 바쁘게 살고 있으며 많은 사교육비를
들이며 살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정규직에 취직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수 있다.
일자리 10개 가운대 2개만 정규직이고, 8개만 비정규직이라면, 여러분들은 절친한 친구와
적대적 경쟁을 해야 하고 실제로 그 친구와는 멀어지게 된다.
여러분들이 대학에서 개기면 8개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럼 어떻게 개길 것인가?
어차피 공부해도 취직 못하는 게 다반사라면 공부 못하겠다고 선언하고
열심히 놀아라! 단 혼자는 놀지 말아라!
학교 축제를 왜 3일만 하나, 5월 한 달을 축제하자고 해 봐라.
그리고 동맹 휴업을 일주일만 하면 세상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졸업 학점 140학점을 70학점으로 줄여달라고 해 봐라.
그러고서 한달만 동맹 휴업하면서 재미있게 놀아봐라.
그럼 70학점 할 수 있다.
비정규직 없애고 정규직으로 만들어 달라고 해라, 모두 다!
안 그러면 졸업 안 한다고 하고서 동맹 휴업 1년 하면서 재미나게 축제하면서 놀아라!
그럼 비정규직 정규직으로 바뀐다.
세상이 바뀐다!
80년대 학생들은 세상 바꾸려고 짱돌과 화염병을 손에 들었지만,
여러분들은 신나게 놀면서 세상을 바꿔 봐라.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놀아라, 단 재미나게, 신나게!
노는 것도 공부다!>
이랬다.
너무 뻥구라를 펼쳤나...
하여간 대학생들이 공부 안 하고 놀면 세상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뻥구라 치면서 가져 보게 되었다.
학생이 선생의 스승이라는 말 실감한 수업이었다!
아래의 글은 논문 중의 일부(첫머리)입니다.
혹시 관심 있어서 읽어보고 싶으신 분이 계시면
이메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쓴 논문은 아니지만 열심히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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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되기와 계급투쟁 #
1. 오늘날 맑스주의에서 왜 ‘여성 되기’가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인가.
오늘날 맑스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곤혹스럽게 다가온다. 특히나 역사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노동자계급 중심성은 한마디로 뜨거운 감자처럼 보인다. 이런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은 크게 두 가지의 문제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이 계급운동의 보편성에 대한 다른 모든 반자본 운동과의 연관성 문제이다. 이 문제들은 사실상 맑스주의 사적 유물론의 존폐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을 살펴보자.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노동자계급(운동)은 정말 보편적인가? 자본-임노동과의 관계에 있는 임노동자는 보편적 존재가 아니라 개별적 존재이다. 임노동자는 개별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가지고 시장에서 자본과 상품관계를 맺는다. 그렇기 때문에 상품관계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에 서 있는 임노동자는 개별적 존재이지 보편적 존재가 아니다.(주1-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맑스주의에서 노동자 계급의 보편성을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성’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의 생산수단 유무의 구조에 의해 사회공학적으로 단순하게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의 보편성을 통해서만 자신의 보편성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알튀세는 이러한 보편성을 지닌 주체를 ‘호명된 주체’로 불렀다. 이 보편성은 대단히 불완전하며 일면적이고, 알튀세에 따르면 허구적이다. 왜냐하면 알튀세에게 보편적 존재로서의 계급은 없기 때문이다. 추상적(분석적) 수준에서 보편적 존재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가능할 수 있지만(그것도 불완전한 추상으로서 말이다), 현실적 수준에서 이 추상적 수중에 상응하는 보편적 존재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또는 노동조합 이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으로 먹혀들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에 관해서 마이클 리보위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노동자들이 이질적인 인간들로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그들 각각의 생산에 고유한 조건들이 지닌 차이점(자본 자체가 만들어 내는 분열뿐만 아니라)들을 감안한다면, 노동자들을 분열된 존재로, 즉 서로 경쟁하는 임노동자들로 - 자본에 대항하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적 근거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분석상 노동자 계급을 단일한 존재로 파악한다는 것은, 실제로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단일한 존재로 인식하거나, 또는 단일한 존재로 행동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또한 노동자 계급이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아니다).” 마이클 리보위츠, 『자본론을 넘어서』, 홍기빈 옮김, 백의, 1999, 255쪽. 이 문제는 다음에 자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그런데도 맑스주의에서는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을 이야기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맑스는 노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이 생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노동은 자본을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노동을 수행하는 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는 여전히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한 개별적인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노동은 노동자 계급이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노동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자본)의 실체로서의 추상노동은 항상 노동자의 살아 있는 구체노동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 추상노동은 노동자의 임노동이다. 그리고 이 임노동을 뒷받침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은 여성의 가사노동이다.(주2-여기서 가사노동을 본래부터 여성의 담당이냐고 이의제기할 수 있다. 정당한 이의제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성’의 가사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성별 분업이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해체되어야 할 것은 바로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러한 성별 분업이다. 다른 한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치=상품=화폐=자본>. 이것의 최고의 법률적 형태는 국가이다. 그런데 이 국가는 가부장적이며 남성 지배적인 국가이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임노동의 물적 토대는 바로 여성의 가사노동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노동, 특히 가사노동은 남성의 화폐(임금)라는 사물의 형태로 소외된다.) 가사노동은 노동자 계급의 기존의 노동력 재생산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동력 생산의 기초이다. 새로운 노동력의 생산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산력”으로서의 새로운 “인간”(주3- 맑스가 말하는 생산력은 인간 자신이다. K. Marx, Grundrisse, MEW 42, S. 599)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가사노동은 대자적 노동자 계급 또는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을 생산해 내는 물질적 기초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의 계급투쟁의 발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가사노동이 개별적인 여성의 몫으로 남게 될 때,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가사노동의 착취 구조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렇게 생산된 노동자의 노동력은 다시금 자본의 착취 구조 속으로 편입된다. 이러한 것은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의 등식으로 성립될 수 있으며,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이라는 일종의 먹이사슬 구조로 바뀌어 나타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은 그 자체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깨나가는 것이 바로 여성-되기라고 할 수 있다. 여성-되기의 출발점으로서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필요하다.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가사노동을 새롭게 재조직하여 여성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 자신이 개별화, 원자화된 존재로부터 보편적 존재로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끊임없이 형성시켜 나가면서 새로운 노동관계, 생산관계를 만듦으로써 성별 분업 체계를 깨는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여성들의 자유로운 발전이 바로 생산력 발전의 토대이고, 이 생산력 발전이 ‘여성 되기’이다.
기왕 하는 김에 하나 더요.
심수봉 언니의 <그때 그사람>인데요.
78년 대학가요제 때 직접 피아노 치면서 부르던 모습입니다.
자작곡이라네요^^.
본명은 심민경이라네요.^^
오늘 새벽에 자다가 가위 눌렸다가 깼다.
꿈 때문이었는데...
내가 꿈 속에서 두 번 죽는 꿈이었다.
꿈은 잘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살인을 했는지, 아니면 살인을 방조했는지 몰라도,
그것 때문에 한 번 죽은 거 같다.
근데 어찌 어찌 해서 살아나긴 했다.
근데 조건부인 것 같기도 하고(어떤 조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다가 다시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고 노린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내가 풍선을 사다가 풍선을 불었다, 크게...
(왜 풍선 부는 게 나온지는 잘 모름...^^)
그리고 그 풍선을 안고 잠을 자려고 하는데...
이불 속에 풍선이 하나가 더 있었다.
그런데 이 풍선들이 나를 덮치면서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하면서
나를 짓누르며 질식사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아~~~~ 하면서(소리를 크게 지르지는 않았다)
약간의 몸부림을 치다가 깨어났다.
아~씨~, 기분이 거시기했다.
근데 내가 두 번 죽는 꿈은 좋은 꿈이냐, 나쁜 꿈이냐...
요즘 뭐 쫓기거나 하는 일은 없는데 말이쥐...
개꿈이라고 치자...
산오리님의 [자전거 출근...] 에 관련된 글.
왜 트랙백을 걸었는가 하면 제가 산오리 님께 4월부터는 꼬옥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출퇴근하겠다고 약속하였고,
산오리 님께서 자전거 열심히 타고 그 느낌 좀 적어달라기도 하셔서 말이죠^^...
자전거 출퇴근이라고 해 봐야 산오리 님처럼 꽤 타고 다니는 거리도 아니고,
기껏해야 5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그렇다고 주말, 휴일에 자전거 타고 어디 소풍처럼 갔다오는 것도 아니고^^...
글치만 나름대로 재미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게 있다.
이제 쪼오끔 자전거가 몸에 익는다.
학교까지 오는 거리에는 두 개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
그런데 집에서 학교 갈 때와 학교에서 집에 갈 때의 느낌이 좀 다르다.
근데 자전거 탈 때 귀차니즘이 있어서 기아 변속은 안 한다.^^
먼저 집에서 학교 갈 때...
여기서 내리막은 경사가 완만한데, 길이가 한 100m, 500m쯤 된다.
그리고 오르막은 경사가 내리막보다 좀더 가파른데, 20m, 30m쯤 된다.
집에서 학교 가는 길목의 처음 오르막은 30m쯤 되는데,
여기는 가배얍게 올라간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 오르막이다.
요 오르막은 첫째 오르막보다 좀더 가파르다.
그래서 요 오르막은 한 20m 전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서
그 힘으로 올라가야 한다.
안 그러면 중간 정도까지밖에 올라가지 못한다.
근데 전속력으로 달리려면 앞에 사람이 없어야 한다.
(요걸로 오늘의 운세를 점치기도 한다. 사람 없으면 굿, 있으면 낱 배드^^...)
낱 배드일 때 처음엔 앞에 가는 사람이 아주 야속하게 보였더랬다.
내가 오늘 좀 달려애겠는데 앞 길을 막아서 말이다...ㅋ...
그러다가 위의 바로 요 문구를 쓰는 자동차 광고 때문에
앞에 가는 사람이 야속해 보이지 않게 되었다^^...ㅋ...
요 두 오르막을 오르면 학교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면 500m짜리 완만한 내리막이 된다.
여기선 거의 브레이크를 잡지 않는다.
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에 부딪히는 것이 상쾌한 속도감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집에 갈 때...
대부분 밤이다.
근데 집에서 학교 갈 때보다 좀더 힘들다.
500m오르막이 서서히 힘을 뺀다.
한 80%는 뺀다.
그리고 내리막 2개를 내려간다.
근데 컴컴해서, 그리고 가파라서 브레이크를 꽉 잡는다.
마지막 오르막을 오를 땐 온 힘을 짜낸다.
근데 집에 올 때는 뒤에 브레이크 등을 달고 온다.
뭔가 뿌듯한 느낌이 든다. ㅋㅋㅋ...
브레이크 등은 작년 늦가을에 일산 갔다오면서 지하철 역에서
2000원 주고 산 거였는데,
달 일이 없다가 이번에 달고 다닌다.^^
자전거 타는 게 오고 가며 나름대로의 느낌이 있어 탈 만하다^^.
자전거를 타면서 지금 바라고 있는 것은 집에서 학교 갈 때의
두 번째 오르막을 가배얍게 올라가는 거다. ㅋㅋ...
가배얍게 올라가면 산오리 님처럼 먼 길도 다녀볼 생각이다.
이상 끄으읕~~~!!
행인님의 [20대에게 짱돌 던지지 마라] 에 관련된 글.
이 글이 전적으로 행인의 위 글에 부합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보고 느끼고 한 것들을 중심으로 궁시렁거려 보고자 한다.
이 글은 20대 전체가 아니라 20대 중에서 대학생들에 국한된다.
대학생이 아닌 20대분들께 미안하다는 말씀을 올린다.
요즘 수업을 하면서, 그리고 학생들의 토론하는 걸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그들에겐 취직 이외에는 어떠한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그들은 적대적 무한 경쟁을 이미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겐 타인이 보이지 않는다.
소수자, 약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당연히 그들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착하지 않다고 말한다.
배제되는 건 비윤리적인 것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머리는 윤리적이어야 하는데, 가슴은 그걸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에겐 사회적 문제라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주저없이 거의 대부분이 이구동성으로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
그럼 얘기는 끝난다.
그것이 아니라고 차분히 이야기를 해도 별로 씨알이 먹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가 어떤 사회이며, 여러분들이 왜 취업하기 힘든지,
왜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점점 더 가난해지는지를 이야기해도 그때뿐인 것처럼 보인다.
다음 번에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이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는
데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
이건 선생으로서의 교육 방법과 기술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런데도 그걸 넘어서 더 무엇인가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도대체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시험에 나올까봐 공책에 받아 적기는 한다(그나마도 다행이다).
그러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왜 이들은 한발짝도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는 걸까?
내가 보기엔 이건 단순한 의사소통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사소통의 영역을 넘어서서,
어떤 의사소통인가, 그리고 의사소통의 의지가 있는가의 문제이지 싶다.
그들은 의사소통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교육 받아왔고, 그런 생활 환경에서 자랐으며,
그것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을 볼 기회를 박탈 당해 왔다, 어려서부터...
설령 그런 세상을 보기를 갈망했을지라도,
그런 세상은 현실 속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그래서 서서히 지쳐갔을지도 모른다.
다른 세상에 대한 의사소통은 이들(대부분의 대학생들)에겐
의사소통할 관심사도, 주제가 못 된다.
그들은 선생이 구라치는 걸 무의식적이지만 몸으로 체득한다.
다른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선생조차도 그 세상이 어디에 있는지,
그 세상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나 내나 다 똑같은 걸... 쳇!
그들에겐 비빌 언덕이 없다.
아니 우리에겐 비빌 언덕이 없다.
그들은 이걸 너무나도 잘 안다.
그들에겐 탈출할 수 있는 해방구가 없다.
해방구 없는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유토피아일 뿐이다.
이들은 말한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은 이론적으로는 맞는데,
현실적으로는 안 맞는다고...
(하긴 이런 말도 옛날 얘기가 되어 버렸다.)
이것이 그들이 보수화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지 아닐까 싶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건 비빌 언덕, 해방구이다.
그 해방구를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가가 관건인 셈이다.
그 단초라도 보여줘야 나의 구라가 개구라가 아닌 구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행인과 나의 고민 지점이 여기가 아닐까...
아니 진보넷 블로거 모두의 고민 지점이 아닐까...
덧니> 그래도 행인 말처럼 그들과 소주 한잔 하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봐야겠다.
지금은 개구라가 될지언정...
5월 2일에 야자를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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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뭥미?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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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냥 가을에 둘이서 야구를 했으면 어떨까 해서^^... 물론 가을에 같이 야구할 땐 갈매기가 이겨야겠지만^^... ㅋㅋ...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