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이사를 했습니다. 내심 9월에나 발령이 나길 바랐지만. 그래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타고 산티아고 길도 걷고. 전세금 빼서 재미나게 한 6개월 걷기만 하자 마음먹었지만. 사람 일, 참 맘대로 되질 않더군요. 연수 때부터 왠지 아슬아슬하다 싶었는데. 결국 막차를 타고 말았던 듯. 그래도 혹여 동해안 쪽으로 나지 않았을까, 란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도 한 순간 꿈. 춘천하곤 정말 먼. 기차타고 지나만 갔을 뿐 둘 다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 태백.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사 준비하느라 왔다 갔다 한 이 주일 동안 이틀인가 해가 나온. 처음느낌이라곤 눅눅함과 잔뜩 찌푸림이지만. 또 몸도 마음도, 미리 갖추어 차리는 준비도 없이 왔지만. 푸근한 인심과 환한 얼굴들이, 곧 정붙이고 잘살만한 곳이겠구나 싶고. 춘천만큼이나 차타기가 쉽진 않지만 여기저기 볼 것도 많고 가볼 곳도 많으니. 함 재미나게 살아봐야지요.
 
차비없이 : 미리 갖추어 차리는 준비도 없이
 
방 빼기 무섭게 방 구하고. 방 구하자마자 도배며 장판하고. 도배, 장판하고 나서 서둘러 이삿짐 꾸려 옮겨왔지만. 비싼 월세도 아니면서 전세도 아닌. 좀 작다 싶긴 하지만 베란다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좋은. 어차피 버스는 포기하고 택시타고 다녀야 하니 학교랑 먼 거는 상관없고. 바로 앞에 산책길이며 체육관에 도서관도 있으니. 차비없이 한 이사치곤 꽤 잘한 듯싶습니다. 다만 너무 빨리 난 발령 때문에 놀질 못했고. 의정부랑 서울이랑 더 멀어졌고. 나이가 먹어가면서 낯선 곳으로 가는 게 선뜻 내키질 않아. 또 물갈이를 하지나 않을런지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왕 왔으니, 또 정붙이고 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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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30 20:27 2012/03/30 20:27

사용자 삽입 이미지심심한 7번 국도, 해 넘어 도착한 곳 인구항(2010년 9월 18일)

 

꼭 한 달만이다. 날씨가 좋아 걷기로 했지만 곧 추석이고. 길게는 9일 가까이나 되는 연휴인지라 길이 많이 막힐 것 같아 연휴 시작에 갈까, 연휴 끝에 갈까 고민도 됐고. 이제 막 마르기 시작한 고추도 하루, 이틀은 더 바싹 말려야 안심이 될 것 같아 어쩔까 걱정도 됐지만. 또 며칠 전부터 속도 좋지 않고 조금만 무리해도 피곤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잠만 쏟아지고 있지만. 이런 저런 일을 생각하다보면 언제 또 가려나 싶어, 이렇게라도 걸어야 운동이 되려나 싶어. 일단 가자, 새벽차를 탄다.

 

오색령을 넘어갈 때까진 썩 기분이 좋질 않았다. 또 이 이유 없이 싸우다 그리됐는데,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꽤나 재밌었을 듯싶다. 보기엔 웃기지도 않는 걸로 둘이 싸우는 가 싶더니, 잠깐 섰다 가던 원통터미널에선 급기야 울기까지 하고. 그러다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가는데 뭐가 좋은지 웃고 떠드니. 지겹기만 하진 않았을테다.   

 

새벽에 나선 탓에 세 시간이 넘게 차를 타고 왔는데도 양양에 도착하니 10시도 못됐다. 하루 종일 걸어 남애항이나 인구항까지 가고자 계획을 세웠는데. 둘러가고, 돌아보고 가도 대충 20km정도니 무리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느긋한 마음에 찬찬히 길을 나선다. 어딜 가도 읍내는 구경하지 않는 법인데. 터미널 주변이긴 해도 이곳저곳 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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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남짓이나 걸었을까. 전날 미리 사 놓은 김밥에 과일까지 바리바리 싸 가져와 버스 안에서 주섬주섬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다. 국도를 벗어나 오랜만에 한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호젓함을 느끼려면 아무래도 뭘 먹지 않으면 안 되겠다. 헌데 이 아침부터 밥하는 데가 있을까. 한참 휴가철이라면 걱정 없겠지만. 어딜 가나 때를 놓치면 밥 한 끼 먹기도, 하룻밤 묵어가기도 쉽지 않으니. 그래도 선사유적지 근처에 가니 아침밥을 하는 곳이 있어 청국장에 밥 한 그릇씩 뚝딱. 든든히 배를 채운다.

 

먹었으니 이제 힘을 내 길을 걸어야겠는데. 동해안 일주여행 하면 으레 떠오르는 길. 7번 국도. 하지만 그 7번 국도는 옛 명성에 통 걸맞지 않다. 해안선을 따라 구불구불, 느리게 내려가던 그 2차선 길은 다리미질 한 것 마냥 일직선, 게다가 바다는 저 멀찍이 떨어져 있어. 걷기엔 참 재미없고 심심하기만 한데. 당분간은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힘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어쩌겠나. 잔뜩 구름낀 흐린 날씨지만 벌써 노랗게 패인 벼들과 울긋불긋 코스모스들이 있어, 그 보는 재미에 겨우겨우 나간다. 또 수산항과 동호리에선 등나무 아래, 쉼터 의자에서 오랫동안 이 얘기, 저 얘기 이야기꽃을 피우며 쉬엄쉬엄 가니.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해가 나왔다, 들어갔다. 한 여름 불볕더위 못지않은 햇볕을 피해 쉬었다가, 선선한 가을바람에 또 걸었다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메밀전병에 막국수 한 그릇씩 후루룩 말아먹고는 다시 7번 국도 위에 서는데. 좀 전에 걷던 지방도하고는 달리 널찍한 갓길이 있어 둘이 나란히 걸을 수도 있지만. 바람과도 같이 질주하는 차들 때문에 손잡고 걷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뒤꿈치를 보며 걷다. 하조대에 이르러서는 안 되겠다, 바다에 발 담그고 한참을 놀다. 절벽위에 선 하얀 등대 보러 삼십분 넘게 되돌아가는 길을 걷기도 하고. 이리저리 심심함을 달래보니 아까보단 낫다.

 

그래도. 기사문항을 지나고부터 다시 만난 이 널찍한 도로. 게다가 흐린 날씨 탓에 다섯 시도 안 됐는데 어둑어둑. 두 번을 갈아 타야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어찌됐든 인구항까진 가야 하기에. 열심히 걷기만 해야 해서. 참 재미없는 걷기다. 하지만 어째, 죽을 힘 다해 부지런히 걸을 수밖에.

 

결국 지나는 포구마다 그저 눈길 한 번씩만 돌리고. 조금만 돌아가면 이 심심한 길을 벗어날 수 있겠건만. 자동차 불빛이 하나, 둘 켜지는 걸 보며 급한 마음에 거의 뛰다시피. 다행히 조기 눈에 보이는 곳이 인구라고는 하지만. 겨우 숨 한번 돌려 쉬고 또 걸어. 겨우겨우, 강릉 가는 시외버스 표를 끊고 나니 금세 어둠이 짙게 깔리는데. 피곤함에, 배고품에, 맥이 탁 풀린다. 

 

* 다섯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양양 읍내에서 인구까지 약 23km.

 

* 가고, 오고  

춘천에서 양양은 한계령을 넘어가는, 홍천, 인제, 원통 등을 거쳐 가느라 시간이 다소 걸리는 시외버스를 타거나 미시령 터널을 지나가는, 중간에 들르는 곳이 없어 조금 빠르긴 하지만 속초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 방법이 있다. 인구에서는 도로 양양으로 나오는 것보다는 강릉으로 가서 무정차 춘천행 시외버스를 타는 게 좋다. 양양에서보다 늦게까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주 있기 때문이다.

 

* 잠잘 곳

역시 널린 게 먹을 곳, 잠잘 곳이다. 너무 많아 탈이라면 과한 표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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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7 12:10 2012/03/27 12:10
사용자 삽입 이미지외국영화를 보다보면 가끔 원제목과는 전혀 다른 제목 때문에 헛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테리 길리암 감독이 1985년에 내놓은 ‘Brazil’이라는 컬트무비는 ‘여인의 음모’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는데요. 영화를 보는 내내 대체 저 여인이 뭔 음모를 꾸민다는 거지, 괜한 상상을 하게 만들다 끝내. 영화 속 주인공처럼 환상에서 깨어날 때쯤 영화도 끝난다는. 꽤나 어처구니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 물론 반대의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영어식 제목을 무조건 한글로 해야 했던 웃긴 시대에 나온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으로 나왔던 이 영화는 ‘내일을 향해 쏴라’라는 아주 멋진 제목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까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의 수수께끼>와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 이어 <식인과 제왕>까지, 문화인류학 3부작을 잇달아 발표했던 마빈 해리스가 1981년도에 쓴 이 책. 첫 장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내내 대체 제목을 왜 이따위로 한 거야, 란 말이 나왔지요. 아무리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을 뽑는다고는 해도, <아무것도 되는 게 없어>가 모랍디까. 책 내용과 동떨어진 거는 물론이거니와 문화인류학과는 촌수를 따지기도 힘든 제목. 솔직히 마빈 해리스란 이름만 없었다면 그냥 눈길 한 번 주는 걸로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저거 계속 보고 있자면 찝찝한 마음이 자꾸 생기니 말이지요. 달력이라도 한 장 죽 찢어 표지를 덮어 버린 다음, 꼼꼼히 읽어보면. 해리스가 이전에 썼던 책에서도 밝혔듯이 사회학이나 경제학만큼이나 시대를 읽어 내는 눈이 생기는 데 문화인류학 역시 큰 도움이 되겠다, 라는 것. 또 그것이 마빈 해리스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이면서도 매우 적절한 분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제목 따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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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1 17:36 2012/03/21 17: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