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계곡에서 화양동계곡까지, 아직 괴산(2006년 9월 23일)
 
속리산엘 다녀오고 나니 추석이 가까워서인지 여기저기서 벌초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다른 때와 달리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 유난히 막혔는데 그 때문이었나 보다. 여하간, 어째 벌초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다들 남정네들인데 하나같이 자기네 조상들 벌초 다녀왔다는 이야기들뿐이다. ‘혹시 처갓집 벌초는 다녀들 오셨나요?’ 한마디하고 싶은데 그냥 꾹 참는다.
 
아무튼 남정네들이 그렇게 자기네 조상들 무덤 찾아다녔던 그 좋은 날씨 속에서 정말 걷기 좋은 길을 걸었다. 지도에도 없는 시골길을 걷기도 했고, 걷는 내내 맑은 가을하늘과 가을바람, 맑은 계곡이 함께 했다. 많은 이들이 남도지역을 최고의 여행지로 꼽지만 우리 생각엔 충청도가 훨씬 나은 듯하다. 무주를 지나면서 만났던 민주지산을 품고 있는 황간, 드넓은 포도밭의 영동, 속리산 자락을 따라 걸었던 보은, 그리고 여기 아기자기한 골짜기를 연이어 펼쳐 보이고 있는 괴산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아름다운 길들이다.
 
 
 
어제 저녁 늦은 시간이었지만 서울을 떠나 괴산까지 온 덕에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고, 덕분에 하루짜리 여행이었으면서도 20km가 넘게 걸었다. 이제는 한 시간에 4km 걷는 속도는 완전히 몸에 배었고, 두 시간은 걸어야 ‘힘들다’ 생각이 들 정도로 체력이 생겼으니 이는 생각지 못한 성과다.
 
여행 때면 늘 그렇듯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반이 넘게 버스를 타고 사담에 도착하니 9시가 코앞이다. 괴산 읍내에서 아침을 해결하지 못해 혹시나 하고 빵 한쪽씩, 과자 부스러기 몇 개를 준비했는데, 역시나. 민박 간판은 여기저기 보이나 음식점은 몇 보이지 않고, 보이는 음식점들은 이른 시간인지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하는 수 없다. 준비해간 빵 한 입 베어 물고 길을 나선다.
 
헌데 이런. 이렇게 높은 하늘과 맑은 계곡을 봤던 게 언제지? 게다가 시원한 가을바람까지 옷깃을 파고드는데 뱃속에서 나는 ‘꾸르륵’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 좋다’라는 표현 외에 또 어떤 말이 있을까? 아직 길가에 코스모스는 보이지 않아도 가을을 느끼기에는 한없이 좋은 날씨와 한없이 좋은 길이다.
 
 
 
 
 
 
 
 
 
 
 
 
 
 
 
  
 
 
 
 
사담리를 출발해 그렇게 가을을 한껏 즐기며 두 시간을 넘게 걸으니 아무리 좋아도 잠시 쉬어가야 하나보다. 몸에서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는 걸 보니.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고, 등 뒤로는 땀도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맺힌다. 배도 채우고 다리도 주무르며 쉬어가야겠는데 다행이 마을 입구에 정자 하나가 마중 나와 있다. 에라, 모르겠다. 땀이 배지는 않았어도 신발에 양말까지 벗어 던져 놓고는 아침에 한 입 먹고 남은 빵이며 과자까지 꺼내들고 안방에 누운 것 마냥 대(大)자로 눕는다.
 
 
괴산군 관광안내도에 따르면 멧돼지와 토종돼지로 유명하다던데, 이름도 거기서 따온 듯 보이는 멧돼지휴게소를 조금 지나면서부터는 지도에도 잘 나타나 있지 않는 샛길로 빠진다. 후평숲이 있다고 나와 있기는 해도, 그리고 왕복 2차선의 잘 닦여진 도로라고 해도,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나는 마을이 무슨 마을이지, 대체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수려한 풍경에, 오가는 차도 없고, 때로는 차선도 없는 시골길을 걸으니 기분 하나는 계속 죽여준다. 카메라를 꺼내들고 풍경을 담아내느라 속도가 더디기는 하지만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그렇게 지도에도 없는 길을 따라 두 시간을 넘게 걸어 화양동계곡 입구에 당도하니 2시가 가깝다. 배고픈 거야 출발할 때부터였으니 뭐 그렇다 쳐도 벌써 시간이 이리됐을까? 계획했던 시간보다 2시간이나 지체됐다. 아무래도 방금 지나온 이름 모를 길을 걸어서일 테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던 시골풍경에, 시골길을 걸어와 아쉬움은 없다. 다만 당초 목표로 했던 송면까지 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멀리 속리산국립공원 매표소가 보이는 게 화양동계곡을 지나려면 아무래도 입장료까지 내야 할듯하다. 물론 계곡을 저만치 돌아가는 길을 걷는다면 돈은 아낄 수 있겠지만. 계곡 입구 다리 옆에 붙어 있는 안내도를 보면서 대충 거리를 가늠해보니 송면까지만 해도 5km는 넘는 듯하다. 그럼 두 시간은 잡아야하는데. 바로 점심을 먹고 출발한다 해도 네 시가 넘어서야 도착할 듯.
 
계곡 입구에서 한참을 어찌할까 생각해보지만 아무래도 무리라는 판단이다. 게다가 청주까지 나가는 시외버스 시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자꾸 거슬린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자꾸만 드는지 발길은 계곡 쪽으로만 향하는데. 해서 계곡이 내려 보이는 식당 앞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늦은 점심에 시원한 동동주 한잔 걸치니, 음,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 열네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괴산 사담리 계곡에서 화양동계곡까지 약 20km. 걸은 시간 5시간.
 
* 가고, 오고
괴산까지는 전날 동서울터미널에서 저녁 8시 10분에 출발하는 시외버스를 타고 이동했으며, 괴산에서 사담까지는 다행히도 아침 7시 10분에 출발하는 시내버스를 탈 수 있어 쉽게 갈 수 있었다. 화양동계곡에서는 일단 청주로 나간 후에 강남, 남부, 동서울 혹은 광명 등지로 가는 시외버스,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편할 듯하다.
 
* 잠잘 곳
사담계곡과 화양동계곡에는 민박과 음식점이 다수 있으니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다만 우리가 걸었던 길에는 화양동계곡까지 음식점은커녕 변변한 구멍가게 하나 보기 힘드니 멧돼지휴게소에서 미리미리 먹을 것을 챙겨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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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5 13:50 2009/10/05 13:50
첫째 날, 서원계곡에서 505번 지방도로를 따라 속리산 법주사로(2006년 9월 2일)

불과 일주일 사이인데 한결 가을 날씨다. 지난주만 해도 목덜미로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아스팔트 위에 열기가 후끈후끈했는데 시원한 가을바람 한 줄기에 금새 땀이 마르는 걸 보니. 여름 내 많이 걷는다고 걸었는데도 그리 많이 걷지 못했고, 이제 걷기에 더없이 좋은 날들이니 부지런히, 많이 걸어야겠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는데도 장내에 도착하니 어느새 버스에 오른지 세 시간이 훌쩍 넘었다. 중간중간 쓸 때 없이 시간을 많이 낭비한 탓이다. 충주에서 20분, 보은에서 15분을 하릴없이 쉬었다 가는데, 처음부터 그러하다 이야기도 없었고, 쉬면서도 아무 이야기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고 속았다는 느낌이다.
 
<속리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법주사를 찾아 에둘러 가는 길>
 
선병국가옥이니 선명무가옥은 이미 한 번씩 둘러보았기에 때늦은 점심으로 자장면 한 그릇씩을 비우고는 바로 출발인데, 황해동 쉼터까지는 걸었던 길이라 그런지 걸음이 빠르다. 그래도 쉼터에서는 잠시 쉬어가며 새로 장만한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꺼내들고 계곡 풍경이며,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본다.
 
법주사 입구에 있는 정이품송의 부인이라며 ‘정부인송’이라고도 불리는 서원리 소나무는 속리산 남쪽의 삼가저수지에서부터 내려오는 삼가천을 옆에 두고 나란히 이어지는 505번 지방도로 가에 있는데, 계곡 이곳저곳에서 고기를 굽는 둥 물놀이를 하는 둥 해서 썩 쉴만한 장소는 안 된다. 사람도 고기 냄새에 고개가 절로 돌아가는데 소나무라고 별 수 있을까? 아무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말이다.
 
‘정부인송’을 지나니 곧 오르막이고 지도상으로는 삼가저수지 쪽으로 이어지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데, 저수지 쪽 길은 댐 공사관계로 폐쇄돼 있고 대신 지도에도 없는 잘 닦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별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오르막길로 접어들었는데 웬걸 오르막도 오르막인데 저 멀리 터널이 보이는 게 아닌가. 낭패다.
 
                                                                                     <갈목재에 이르는 길에서 본 삼가저수지>
다행이 터널은 방금 지나온 길처럼 최근에 지어져서인지 잘 닦여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도 환하고, 갓길도 찻길과는 다른 높이로 넓게 확보돼 있어 걱정이 없다. 다른 터널들도 이만큼만 환하고 갓길이 넓었으면. 도로뿐만 아니라 터널, 다리 모두가 차에게는 좋은 길이겠지만 걷는 이들에게는 좋지 않은 길이다. 그래도 질주하는 차들의 굉음에 발걸음은 빨라진다.
 
터널을 지나고도 한참을 더 올라가서야 이 고개가 갈목(葛目)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꼬부랑꼬부랑 발아래 저만치 저수지가 보이는데 390m라고 하니 믿기지는 않지만 지금부터 내리막길이겠거니 생각에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다.
 
 
 
 
 
 
 
 
 
 
터널에서 갈목재, 다시 법주사로 이어지는 길은 올 해 들어 처음으로 맛보게 되는 가을 날씨, 가을풍경이다. 맑은 날씨, 높은 하늘, 낮은 뭉게구름, 적당한 바람, 이처럼 걷기 좋을 때가 또 있을까 싶다. 해서 걸음은 자꾸만 늦어지고 결국 법주사 근처에 당도하니 벌써 빨간 노을이 하늘에 가득이다.
                                                                                        
둘째 날, 산길을 넘어 괴산군 사담계곡까지(2006년 9월 3일)
 
술이 과했다. 적당한 음주는 그 날의 노독을 풀어주는데 아주 그만이지만, 어제는 과한 술에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를 정도다. 덕분에 8시가 넘어서야 겨우 겨우 일어났다. 헌데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속이 편치 않아 대충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는 길을 나서는데, 민박집 아주머니가 카메라를 달라더니 여기도 서보라고 저기도 서보라고 하며 연신 셔터를 눌러대신다. 시간은 없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파 기분은 과히 좋지 않지만 뷰파인더로 이리저리 우리 모습을 보고 있을 아주머니를 생각해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어째 영 아니다.
 
“이게 다 지나고 나믄 추억잉께 이짝 우리 집 문 앞에도 서 보소”
 
결국 민박집을 배경으로 두어 컷이 넘는 사진을 찍히고 나서야 길을 나설 수 있다. 하지만 아스팔트 길 대신 흙 길을 걷겠다며 접어든 산길을 때문에 이건 걷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조금 걷다 조금 쉬고, 또 조금 걷다 또 조금 쉬고, 아예 길바닥에 눕기도 하니 아무래도 이러다 일정에 차질이 생길지 싶다.
 
아스팔트로 덮이지만 않았다면 더 좋았을 산길을 따라 콧노래를 부르며 한참을 내려오니 국도다. 게다가 오가는 차도 많은데다 속리산 인근이어서 인지 관광버스가 유난히 많이 지난다. 덕분에 길을 걷는 게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길옆으로 줄곧 계곡물이 흐르고 가을바람은 목덜미를 시원하게 하니 기분 하나는 좋다.
 
백현리라는 마을에서는 상회라는 간판을 달기는 했어도 겉보기에도 그렇고 실제도로 그냥 평범한 농가에서 냉장고 하나 갖다놓고 이것저것 음료수만 파는 그런 곳에서 목을 축일 음료수도 사서 마시기도 하고, 경상북도 상주로 넘어와서는 손두부마을에서 두부정식에 점심을 먹기도 하며 부지런히 걷는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아침 내내 괴롭혔던 술독도 많이 빠져 기운이 난다. 또 충북 괴산으로 넘어와 만나게 되는 사담리 유원지에서는 계곡 물이 발을 담그며 어린아이들처럼 물장난에 한참을 재미나게 놀기도 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당초 괴산 청천까지 걸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아침 시간을 허비해서인지 더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무리해서 청천까지 걷는다면 해가 지기 전에는 당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서울로 올라가는 차편이 걱정이다. 해서 사담유원지 앞을 지나는 군내버스를 일단 세우고 본다. 다행이 청천으로 나가는 버스다. 차창으로 시원한 가을바람이 옷 속으로 스며든다.
 
<시원한 가을하늘이 돌아오는 길을 가볍게 한다>
 
 
* 열세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서원계곡에서 법주사까지 약 11km. 걸은 시간 3시간 30분.
- 둘째 날 : 법주사에서 산길을 넘어 37번 국도를 따라 괴산 사담리 계곡까지 약 18km. 걸은 시간 7시간 30분.
 
* 가고, 오고
다행이 보은군 장내리까지는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청주, 보은 경유 시외버스가 있어 버스를 갈아타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주에서 20분, 보은에서 15분씩 정차를 하는 바람에 아침 10시 20분에 출발한 버스가 장내에 도착하니 오후 2시가 다되어서였다. 올라오는 길은 괴산 사담계곡에서 청천, 청천에서 다시 괴산으로 버스를 갈아타야만 동서울터미널로 오는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청천에서 괴산으로 나오는 버스는 1시간 간격으로 다니나 사담계곡에서 청천으로 가는 버스는 자주 다니지 않으니 미리 버스시간을 알아두어야 한다.
 
* 잠잘 곳
법주사 인근에는 호텔에서부터, 유스호스텔, 여관, 모텔, 민박 등이 많아 성수기가 아니라면 잠자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법주사에서 괴산 사담계곡까지는 드문드문 식당과 민박(펜션)이 있으나 사전에 머물 곳을 잘 알아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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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5 22:17 2009/09/15 22:17
옥천군 청산면에서 속리산 아래 서원계곡까지(2006년 8월 27일)
                                                                              
                                                                                <동학 집회가 열렸던 장내에는 장승만이 서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첫차를 탔는데도 청산에 도착하니 7시가 넘어도 훌쩍 넘었다. 아직은 구름 속으로 해가 숨어 있어 아직은 괜찮지만 언제부터 목 뒤로 따가운 햇빛이 내리쬘지 몰라 서둘러 길을 나선다. 하지만 청산 면소재지를 벗어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505번 지방도로의 풍경이 자꾸만 발걸음을 늦추게 한다.
 
오른편으로 보성천이 있기는 한데 강물은 흐름을 멈춘 듯 하고, 바람은 한 점 없는 데다 사람은커녕 지나는 차 하나 없다.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것이 마치 꿈속을 걷는 듯 나른하기만 하다. 큰 목소리로 노래도 부르며 힘을 내보지만 여전히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어제는 밖에 일이 있다며 사무실에서 땡땡이를 치고는 해지기 전 옥천에 당도했다. 꽉 짜여진 일상에서 탈출하기가 맘만 먹으면 이렇게도 쉬운 것을, 이리재고 저리재고 앞뒤 생각하니 어디 쉽게 놀러 갈 수나 있을까. 혹, ‘누가 요즘 같은 때에 간도 크게 사무실을 땡땡이 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 번 해보시라. 맘먹을 땐 오만가지 생각이 들겠지만 일단 저지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열차를 타기 전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소나기가 한 두 차례 온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는데, 어째 옥천역에 내리자마자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가 좀체 그칠 줄을 모르더니 5시가 넘어서야 겨우 가늘어진다. 그 바람에 정지용 생가며, 문학관 구경을 놓치고 말았다. 게다가 비가 온 탓인지 날마저 금세 어둑어둑해져 옥천으로 다시 나가지 못하고 인근에서 하루 머물 곳을 정했다.
 
10여 년 전 홍수로 유실돼 이제는 그 자취를 볼 수 없는 한호팔경이 있었던 대성리라는 마을에서 한 숨 쉬고 나니 한결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하루 종일 있어봐야 동네 사람 이외에는 누구 하나 올까말까한 동네 구멍가게에서 목도 축이고, 평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눈다.
 
마로면 관기리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이제는 목덜미가 따끈따끈하고, 귀 볼 아래로 땀도 주르르 흐리니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땀을 닦으며 쉬어가야겠다. 다행이 맛 좋은 시골 밥상을 차려주는 식당이 있어 뱃속을 든든히 채우고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 시골 학교 운동장 한구석에 자리를 펴고 눕는다.
 
까까머리 소년들의 공차기에 쪽잠이 방해받기는 해도 정겨운 시골 풍경 때문인지 그리 시끄럽지만은 않다. 나무아래 시원한 가을바람 속에서 그렇게 아직은 한여름의 따가움을 지니고 있는 햇살이 사그라질 때까지 그렇게 쉬다 3시가 넘어서야 다시 길을 나선다.
 
속리산국립공원으로 이어지는 25번 국도는 길 양옆으로 은행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서있고 너른 논이 산 아래까지 펼쳐져 있어 마음이 한결 풍성해진다. 하지만 여느 국도와 다를 바 없이 통행하는 차도 많고, 멀리 보이는 공사 현장에서 쏟아내는 덤프트럭들이 쉴 새 없이 질주하느라 조심해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탄부 임한 솔밭 공원에서는 250년 이상 된 노송 사이에서 잠시 쉬기도 하고, 장내에서는 선병국 가옥에, 동학 장내 집회 장소에서 이것저것 눈요기를 하며 쉬기도 하고, 마른하늘에 때 아닌 소나기를 맞기도 하니 재밌기만 하다.
 
 
<서원계곡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선병국 가옥>
 
장내에서부터 ‘여기가 서원계곡이다’고 불리는 서원계곡은 여름철 계곡 물놀이 장소로 이름이 알려졌다기보다는 이런저런 고시들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 곳으로 더 소문이 난 듯하다. 장내 입구에서 한 동안 우리의 발걸음을 잡았던 99칸 선병국 가옥이 그랬고, 서원리의 커다란 건물들이 모두 고시원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이 그랬다. 그리고 보니 장내에서부터 유난히 선남선녀들이 눈에 띄었는데 아마 그 고시생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혹시나 해서 서울에서 서원계곡 내 민박집 여러 곳의 전화번호를 적어왔지만 마땅히 잘 만한 곳이 없어 보이는 게 이만저만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당초 일정은 숙박할 곳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법주사까지 걷는 것으로 잡았는데, 선병국 가옥과 동학 집회 장소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어쨌든 근방에서 하루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될 텐데 말이다. 해서 잘 만한 곳 여기저기에 서둘러 전화를 돌려본다. 하지만 이를 어째. 쉽사리 통화가 되는 곳들은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한참을 더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하고, 어렵사리 통화가 된 곳들에서는 터무니없는 방에, 터무니없는 방 값을 불러 기분만 상한다. 아무리 한철 장사라고 해도 좀 너무 한다 싶다.
 
서울로 갈 요량으로 고시촌 서원리로 다시 되돌아가는 가는데, 이름 모를 동네 어귀에서 버스편을 알아보니 이미 읍내로 나가는 버스가 이미 끊겨버렸다고 한다. 어찌할까 생각해봐야 답은 없고, 일단 국도와 이어지는 장내까지 내려가기로 한다. 다행히 고시촌 못 미쳐서 맘씨 좋은 고시생을 만나 보은 읍내까지 편히 나올 수 있었다. 3시간 30분이나 걸린다는 걸 차가 출발한 후에야 알게 된 남부터미널행 시외버스에 오르니 창밖으로 어둠이 짙다.
 
* 열두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옥천군 청산면에서 보은군 외속리면 서원계곡까지 약 23km. 걸은 시간은 약 6시간.
 
* 가고, 오고
옥천까지는 영등포역에서 14시 33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로 이동했으며, 청산면까지는 군내버스를 이용했다. 영등포에서 옥천까지 기차요금이 8,200원인데 옥천읍에서 청산면까지 버스요금이 3,250원이니 웬만하면 열차나 고속버스가 다니는 곳에서 시작과 끝을 맺는 게 좋다. 서원계곡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맘씨 좋은 고시생을 만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하루 더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서원계곡에서 보은읍내로 나가는 버스는 몇 차례 운행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지만 대략 저녁 6시 이전에 마지막 차가 지나는 것을 보았으니 하루 더 머물 요량이 아니라면 막차시간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 보은에서 청주를 거쳐 서울로 올라오는 시외버스는 시간도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저녁 7시 30분이 마지막이다. 시간을 절약하려면 일찍 터미널에 도착해 대전이나 청주를 거쳐 고속버스 또는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낫다.
 
* 잠잘 곳
이번 여행은 1박 2일 일정이었지만 걷기는 둘째 날 하루만 했다. 첫째 날 우리가 머문 곳은 정지용 생가 인근의 춘추민속관이라는 곳이다. 가까운 옥천 읍내에는 여관과 모텔 등 숙박할 만한 곳이 여러 있으나 한옥체험을 할 수 있다 해서 그곳에서 머물렀다. 속리산 아래 서원계곡에는 황토방갈로를 운영하는 곳 한 군데를 제외하고는 숙박할 만한 곳이 없으니 보은읍이나 법주사 쪽으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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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2 13:20 2009/08/22 13:20
첫째 날,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영동군 황간면에서 용산면까지(2006년 7월 29일)
 
일기예보로는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이제 한여름 무더위가 시작된다고 하던데, 수원에서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평택에 들어서자 제법 굵어지고 있다. 비옷이고 우산이고 어느 하나 준비하지 않았는데, 걱정이 앞선다. 다행이 대전을 지나면서부터는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있기는 한데, 비구름이 여전히 하늘을 덮고 있어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황간에 도착하니 산허리에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고 굵지는 않지만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서둘러 역사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 멀리 민주지산에 걸린 비구름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어째 오늘은 해 구경하기 힘들 듯 하다. 그래도 빗줄기가 더 굵어지지 않는 게 고마울 뿐이다. 뜨거운 햇빛을 가리기 위해 준비해 온 모자로 대충 빗줄기는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월류봉을 지나 긴 오르막길(위)을 지나고 나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하늘이 맑아지는데 아예 덥다(아래)>
 
읍내를 벗어나자마자 오른편 저쪽에서부터 왼편 월류봉 아래로 제법 거센 흙탕물이 흐른다. 몇 주간 쉴 틈도 없이 내린 장맛비 때문 일게다. 들리는 소식에는 이곳에도 많은 비가 내렸고 곳곳에 산사태에 도로가 끊겼다고는 하는데, 우리가 걷는 이 길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비 때문인지, 원래 보수를 하려고 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곳, 딱 한 곳을 지나쳤다.
 
월류봉을 지나니 곧 오르막길이다. 제법 긴 오르막길인데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쉬지 않고 내리는 비로 옷마저 축축해 무척 힘이 부친다. 게다가 지나는 차들은 길을 걷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듯 물살을 일으키며 질주하고 있어 조금 걷다 갓길 저만치로 피하고, 조금 걷다 또 갓길로 저만치 피하고 하는 바람에 발걸음이 더디기만 한다.
 
고갯길을 넘고 나니 어느새 비가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간간이 따가운 햇살이 머리를 비추는데 이건, 좀 전까지는 비 때문에 걸음이 늦어졌다면 이제는 햇빛 때문에 걸음이 늦어지는 꼴이다. 아무래도 잠시 쉬어가야겠다. 용암리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 잠시 배낭을 벗어 던지고는 어깨며, 발목을 번갈아 가며 주물러준다.
 
황간을 출발한지 두 시간이 조금 넘어 용암 삼거리에서 514번 지방도로로 바꿔 탄다. 오늘은 옥천군 청산면까지 가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는데 아무래도 이 속도라면 다 못 갈 듯 싶다. 큰일이다. 황간면에서 청산면까지는 하루 밤 쉬어 갈만한 곳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니. 그런데도 이상스레 몸이 무거울 뿐만 아니라 발걸음마저 더디기만 한다.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쉬어가면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결국 용산면소재지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한다. 혹 근처에 민박집이 있을까 해서 이리저리 전화도 돌려보지만 마땅히 쉴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대신 저녁이나 해결할까, 중국집에 들어선다. 하지만 허기진 뱃속과는 달리 잠자리 걱정 때문인지 자장면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른다. 어쩔 수 없다. 영동이나 옥천으로 나가는 수밖에. 이리저리 재고자시고 없이 가장 먼저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니 영동으로 나가는 차다.
 
둘째 날, 옥천군으로 넘어와 청산면까지(2006년 7월 30일)
 
용산행 첫 차가 5시 50인데 아침에 눈을 뜨니 5시 20분이다. 세면은커녕 서둘러 옷만 갈아입고는 버스정류장으로 허겁지겁 달려간다. 이른 아침인데다 일요일 이어서인지 오가는 차도 없고 버스를 타는 사람도 우리 둘 이외에 딱 두 명이 더 있었을 뿐이다. 어제는 30분이 조금 넘게 걸린 길을 오늘은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용산에 당도하니 사방이 자욱한 안개다. 물가 쪽에는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고 산허리 쪽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날씨가 우리의 여행을 도와주지 않는 듯하다. 발걸음이 계속 무겁다. 게다가 용산을 벗어나자마자 시작되는 길이 국도라 오가는 차량도 많아 불편하기 짝이 없다.
 
법화리에서 한 번 쉬고 나니 고갯길이고, 고갯길 정상에 오르니 옥천군이다. 멀리 ‘인삼의 고향 옥천’이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보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열 번째 여행 내내 길 양옆으로 짙은 포도향을 내던 포도송이들 대신 이번엔 끝없는 인삼밭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내리막길에, 빨갛게 핀 인삼 꽃구경에, 오랜만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당초 10시 이후에는 걷지 않기로 했지만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벌써부터 땅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보통이 아니다. 간간이 구름들이 햇빛을 가려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머리 위로 내리쬐는 따가운 햇살에,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등 뒤로 땀이 ‘주르륵’ 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출발하기 전 준비했던 물마저 바닥이다. 또 마을은 보이지도 않는다. 조금 걷고 그늘에서 쉬고, 또 조금 걷고 그늘에서 쉬고 하니 시간만은 잘도 가는데 진도는 나가지 않는다. 조금 더 지나면 정말 땡볕 속에서 걸어야 할 텐데.
 
예정대로라면 어제 밤 하루 쉬어가야 했을 청산면에 도착하니 9시다. 일단 아침은 먹어야겠는데 더 걸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벌써부터 한여름 찜통인데다 온 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라 그렇다. 아무래도 더 이상은 걷는 게 무리다. 다행히 버스 시간이 잘 맞아 떨어져 시간 낭비 없이 청산에서 영동으로, 영동에서 서울로, 또 무더위를 피해 쉬이 올라올 수 있다.
 
* 열한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영동군 황간면에서 용산면까지 약 12km. 걸은 시간 3시간.
- 둘째 날 : 영동군 용산면에서 옥천군 청산면까지 약 11km. 걸은 시간 어제와 마찬가지로 약 3시간.
 
* 가고, 오고
영등포에서 황간까지는 12시 29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했다. 옥천군 청산면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보은이나 영동 쪽으로 나와야 하는데, 우리는 영동으로 나왔다. 다행이 버스 시간이 잘 맞아서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으나 아무래도 사전 버스 시간 확인은 필수인 것 같다.
 
* 잠잘 곳
황간에서 당초 머물려고 했던 옥천군 청산면까지는 거의 숙박할 만한 곳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첫날 도착했던 용산면에는 허름한 여관이 하나 있을 뿐이다. 대신 음식점은 곳곳에 꽤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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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1 16:02 2009/08/11 16:02

첫째 날, 무주군 설천면에서 민주지산 아래 조동리 산촌마을까지(2006년 7월 1일)

 

중독이다. 장마전선이 북상하고 주말에는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사나흘 전부터 있었고, 오늘 아침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고서도 기차에 앉아 있는 걸 보니. 이젠 연휴나 휴가만이 아니라 주말만 다가오면 부쩍 마음이 동하고, 몸이 근질근질하니.

 

천안역을 지나면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대전역을 지나니 제법 굵어진다. 당연 비옷과 우산을 준비했고, 비가 오더라도 ‘오늘은 무조건 걷자’며 나섰지만 그래도 걱정이다. 영동역에 내리니 이건 굵은 정도가 아니라 장대비고, 우산을 펼쳐들었지만 금세 옷이 다 젖는다. 늦은 점심도 해결할 겸 역 앞 분식집에 들어가니 무주로 가는 버스 시간이 바로 코앞이다. 허겁지겁 깁밥 몇 줄 집어 들고는 버스에 오른다.

 

무주에서 한 번 더 버스를 갈아타고 설천에 도착하니 다행히 빗줄기가 조금은 가늘어졌다. 비옷을 걸치고 길을 나서니 걱정보다는 되려 ‘시원하다’.

 

설천을 출발한지 30여분 만에 충청북도로 들어선다. 일곱 번째 여행에서 전라북도로 넘어와 다시 여덟 번째 여행부터는 경상남도의 길을 걸었는데 이제 열 번째 여행에서 충청북도에 발을 디딘 것이다. 다시 쏟아지는 빗줄기에 옷이며 신발까지 다 젖었지만 서로 안아주며 다독인다.

 

맑은 날이었다면 민주지산을 바라보고 걸었을 텐데 지금은 세찬 빗줄기 너머 산허리 구름만 보일 뿐이다. 그래도 지나는 차하나 없어 길을 전세 낸 마냥 걸으며 목청 높여 노래도 불러본다.

 

민주지산 아래 산촌마을로 유명한 조동리에 도착하니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시간이 넘게 빗속을 걸은 덕에 속옷까지는 아니지만 신발이며, 바지 등이 축축이 젖어 서둘러 민박집을 정한다. 주인 아주머니가 손수 해주신 맛난 저녁을 먹고 나니 어둑어둑하다. 들어설 때는 꽤나 넓은 방인 거 같았는데 두 짝의 젖은 신발 속에 신문지를 한 줌씩 말아 넣고, 두 짝의 위, 아래 젖은 옷가지들을 방바닥에 죽 펼쳐 늘어놓으니, 겨우 둘이 나란히 누울 수 있는 자리만 남는다. 내일은 비가 그쳐야하는데.

 

<저 오솔길 아래가 하룻밤 묵어갔던 조동리 산촌마을이다>

 

둘째 날, 해발 800m 도마령을 넘어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과 호두나무를 따라 황간까지(2006년 7월 2일)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신발도 뽀송뽀송 말랐고, 비도 그친 데다 길은 오르막이지만 맑은 주위 풍경에 몸과 마음 모두 가뿐했으니. 헌데 오르막길을 30여분 올랐을까?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더니 이내 장대비가 내린다. 버스정류장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마치 우리를 유혹이라도 하듯 몇 시간에 한 대씩 온다는 시내버스가 저 아래서 올라온다. 어쩔까.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까. 어제 일기예보는 오전까지만 오고 그친다고 하던데.

 

우리 앞에 서 있었던 버스가 저만치 고갯길을 내려 보이지 않지만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 다시 길을 나선다. 비가 그치지는 않았지만 버스도 떠난 마당에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해발 800m에 자리 잡고 있는 도마령을 향해 한참을 오르니 비구름 속으로 들어와서인지 비는 그치고 안개가 잔뜩 긴 것 마냥 바로 코 앞 길마저 분간하기 힘들다. 날이 좋았다면 멀리 어제 지나온 길들과 포도밭이 발아래 펼쳐질 텐데, 것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아쉽다.

 

도마령을 넘어 산 아래로 조금씩 내려오니 구름 아래라 그런지 또 비가 내린다. 어설프게 구름 중간에 있느니 아예 구름 속으로 들어가던가 저만치 구름 아래에 있던가 해야 할 듯하다. 해서 발걸음을 빨리 해 산 아래로 내려간다. 얄궂은 이름의 고자리를 지나 고자천을 따라.

 

 

<도마령을 힘겹게 넘으니 하루종일 걸어야 겨우 차 한, 두대 지나가는 호젓한 길을 만나게 된다>

 

논이 조금씩 있는 걸 보니 산 아래로 많이 내려온 듯하다. 헌데 어째 지나는 마을마다 가게 하나 보이지를 않고 쉬어 갈만한 곳도 보이지 않는다. 버스 정류장도 어제 넘어온 길보다 더 뜨문뜨문 있고 지나는 차도 없다시피 하다. 게다가 4시간이 넘게 걸었는데도 아직 골짜기에 있는 듯한 느낌이고 산을 돌아서면 너른 들이 보이겠거니 하며 많은 산을 돌아섰는데도 또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아직 다 여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실컷 포도와 호도도 구경하고, 깊은 산세를 느낄 수 있기에 힘든지 모른다.

 

1시가 넘어서야 상촌면 면소재지에 도착했다. 그 사이 비는 그쳤고 구름 사이로 간간이 따가운 햇볕이 비치는 가운데 5시간이 넘게 걸으면서 발을 뻗으며 쉬지 못한지라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뜨거워서 시원한 올갱이국밥과 차가워서 시원한 냉콩국수로 배를 채우고는 파출소 옆 쉼터에서 한참을 쉬고 나니 살 것 같다.

 

구름 사이로 자꾸만 얼굴을 내미는 해를 피해 그렇게 3시까지 쉬다 다시 길을 나선다. 하지만 도마령 넘어 딱 한 번 밖에 보지 못하고 있는 이정표 때문에 길을 걷는 게 여간 지루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얼마나 가야 황간인지, 얼마나 걸어왔는지 알 수 없는 데다 가지고 있는 지도마저 그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까짓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야 이정표 없어도 몇 킬로미터는 금방 이겠지만 걷는 이들에게는 한나절이고, 배려가 아쉬울 뿐이다.

 

황간을 바로 코앞에 두고 다시 소나기를 만났는데, 어제오늘 함께 한 비옷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거의 뛰다시피 해서 터미널에 겨우 도착하니 길 위에 퍼붓듯이 쏟아지는 비가 오히려 시원하다.

 

* 열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무주군 설천면 사무소에서 민주지산 바로 아래 충청북도 영동군 조동리 산촌마을까지 약 10km. 걸은 시간 2시간 30분.

- 둘째 날 : 조동리에서 끝없는 포도밭과 호두나무를 따라 황간까지 49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 32km. 걸은 시간 8시간 40분.

 

* 가고, 오고

영등포에서 무주군 설천면까지는 기차와 두 차례의 버스 갈아타기 끝에 도착할 수 있다. 영동역까지는 열차편이 금방금방 있어 쉬이 갈 수 있으나 영동에서 무주, 무주에서 설천으로의 이동은 버스시간이 거의 한 시간 간격이어서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 미리미리 준비를 잘 해두어야 한다. 황간에서는 구미발 강남터미널행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오후 1시 30분과 저녁 8시 달랑 하루 두 차례밖에 없는 기차보다 편하다.

 

* 잠잘 곳

도마령을 넘기 전에는 조동리 산촌마을과 민주지산 휴양림 인근에 민박을 쉬이 구할 수 있으나 음식점은 민박집에 부탁을 해야 한다. 조동리에서 도마령을 넘어 황간까지는 상촌면과 매곡면 면소재지를 제외하고는 음식점은커녕 슈퍼하나 찾아볼 수 없다. 하니 조동리에서 출발한다면 그곳에서 간식과 물 등을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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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30 21:45 2009/07/30 2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