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 재를 두 개나 넘으며, 동강이와 함께 하는 길(2006년 11월 8일)
이른 아침, 길을 나서려는데 오늘 하루는 아마도 쫄딱 굶을 거라며 도시락을 내민다. 어제 밤 편안히 쉬어 갈 수 있었던 것도 이제까지의 여행 중에서 처음 접했던 고마운 일이었는데, 도시락까지 챙겨주다니. 게다가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집 앞에 서 있는 모습이라. 정말 마음 한 곳에 따뜻함이 머물게 하는 사람이다.
어제 길을 잃었던 곳에 이르니 할아버지께서 집 밖에까지 나오셔서 다시 길을 일러주신다. 우리는 밭 위쪽 끝까지 올라가서 길을 찾았는데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다 쓰러져 가는 폐가 뒤쪽으로 길이 나 있다고 하신다. 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한참이나 더 올랐으니 길을 찾을 수가 있나.
일러주신 대로 폐가 뒤쪽으로 올라서니 아니나 다를까 낙엽이 쌓여 있어 언뜻 보면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법 사람들이 많이 다닌 듯, 길이 나 있다. 또 등산로임을 알려주는 알록달록한 리본들까지 보인다. 또 때맞춰 저 아래서 할아버지께서 길은 찾았는지, 고개를 넘으면 마을이 보인다며 큰 목소리로 알려주시니 이래저래 걱정이 가신다.
<겨우 산길을 너머 절벽 건너편으로 오니 이런....>
한 시간 가까이 등산 아닌 등산을 한 후 진탄나루에 도착해보니 어제 절벽에 막혀 되돌아갔던 곳이. 세상에, 바로 코앞이다. 이런. 그래도 어제오늘 마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또 맛난 도시락을 먹으며 동강을 바라볼 수 있어, 오히려 기분은 좋기만 하다.
발 가득 옻나무진을 묻히고 산을 넘은 개 한 마리로 길이 생겼다는 칠족령(柒足領)을 넘기 위해 문희마을에서 잠시 길을 확인하고 나니 12시다. 재 넘어 제장마을까지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는 말에 여유를 부리며 마을 구경을 해볼까도 하지만 여행 첫날부터 일정이 계속 어긋나고 있어 그리 하진 못한다.
칠목령이라고도 불리는, 칠족령을 넘어가는 길은 백운산 등산로와 함께 많은 이들이 걸었던 길이어서 비교적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또 동강의 가을을 제대로 맛볼 수 있을 만큼 푹신한 낙엽길에, 굽이돌며 멀리서 푸른빛을 내는 강줄기가 있어 힘들지가 않다. 다만 전망대를 지나면서 시작되는 하산 길은 곳곳에 ‘낙석주의’, ‘추락주의’ 표지판이 서 있는 대로 곳곳에서 절벽과 만나고 있어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 사람들이라면 한 시간, 외지인이라도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고 하던데. 산을 내려와 제장마을에 도착하고 나니 두시가 훌쩍 넘었다. 아마도 칠족령까지가 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려오는 길에 마주친 절벽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기 했어도 한 시간, 한 시간 반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은데.
힘겹게 재를 두 개나 넘었기에, 문산나루와 진탄나루에 이어 세 번째 나루이자 가장 예스러운 정취를 품고 있는 나루터이기에, 마땅히 쉬어가야 하나 이제는 나루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다리 위에서 잠시 강이며, 마을 구경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지도상으로는 제장마을에서부터 정선까지는 강을 따라서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길이 이어져 있다고 되어 있는데 소동에서부터 납운교까지는 강을 따라 가는 길은 없고 고성산성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야 한다. 덕분에 우리도 소동까지 갔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길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길을 돌아서야 했다.
납운교부터 우리가 동강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한 가수리까지는 왼편으로 강이 줄곧 따라오는 길이다. 간혹 긴 오르막이 나타나기도 하고, 아스팔트길과 흙 길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기도 하고, 또 올 여름 수해 때문에 자주 출몰하는 대형 트럭들이 나타나 길을 걷기가 수월치는 않지만 용바위니, 삼형제바위니 등 눈요깃감이 있어 지루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어째, 가탄마을을 지나면서부터는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더니 바람도 거세지고 먹구름까지 몰려든다. 아침에 잠시 먹구름이 하늘을 덮었으나 칠족령을 넘고 나니 파란 하늘이 열려 비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걱정이다. 지도를 들여다보니 가수리까지는 아직 한참이고, 마을이라고는 제장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번평마을 하나를 지났으니 앞으로 마을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어제그제 만났듯이 여름 한철만 민박을 하는 곳이 많아, 또 마땅히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전혀 없어 가수리에 당도한다 해도 잠잘 곳이 있을런지, 배를 채워줄 곳이 있을런지, 이래저래 걱정이다.
멀리 가로등 불빛이 보이는 게 가수리인 듯싶다. 가탄마을을 지난지도 벌써 1시간이 지났고, 어둠과 먹구름과 바람 때문에 쉬지도 않았고, 평상시보다도 빠른 속도로 걸었으니, 꽤 먼 거리를 지나온 듯하다. 파김치 몸을 이끌고 가수리에 들어서니 다행히 끼니도 때우고 잠도 청할 곳이 몇 있다.




한적하기만 한 시골길을 세 시간 가량 걸으니 어라연으로 이어지는, 동강의 끝 지점이라고들 이야기하는 거운리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이름과는 달리 마을이 참 썰렁하다. 아마도 철지난 탓이리라. 아무튼 여기서부터 강을 따라 걷기로 했으니 어라연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겠는데, 강을 건네줄 분의 바뀐 전화번호를 알 수 없어 시작부터 난관이다. 간단히 요기라도 해야 할 시간이고, 혹 어라연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해서 슈퍼에 들어서는데, 다들 절운재를 넘어 문산으로 가야한다고 한다.
강 건너 문산마을을 이어주는 문산교 아래서부터는 지번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길을 따라 가야 한다. 벌써 세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기에 서둘러, 차 한 대 지나기 채 어려운, 흙 길과 아스팔트길이 번갈아 이어지는 옛길에 접어든다. 고갯길을 넘어 두 번째 인가와 만날 때까지는 오랜만에 걷는 흙 길에, 하루 종일 있어도 사람 하나 만날 수 있을까, 할 만한 길을 걷는 맛에 별 걱정이 없다. 그리고 길이 끊긴 걸 모르고 무심코 접어든 강변 자갈밭을 한참을 걸을 때만 해도 강 구경에 아무생각이 없다. 그러다. 











송계계곡을 다 빠져나오니 길은 어느새 충주호를 끼고 돈다. 길 양옆으로는 코스모스가 한 창 제 멋을 뽐내고 있고 가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색이다. 게다가 지금은 옛 정취를 찾아볼 수 없으나 가을 가뭄 덕분에 물 아래 가라앉아 있던 옛 길과 다리를 보게 되는 뜻밖의 수확을 월악나루터에서 거둘 수 있었으니 걷는 즐거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 꼬부랑 고개를 고개를 넘어 간다’
헌데 마을 입구에서 만난 고갯길부터 예사롭지 않다 싶었는데 마을을 지나 단양으로 향하는 이 길의 오르막은 상학현에 이르러 급기야 전혀 맛보지 못한 급경사를 보여준다. 지리산을, 덕유산을 넘었고, 엊그제는 새재에서 마폐봉까지 넘었던 발걸음이, 더디다 못해 나아가지 못한다. 조금 쉬다 또 걷고 조금 쉬다 또 걷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세 시간이 넘도록 18구곡의 풍경에 빠져있다 정신을 차리니 이번엔 하, 중, 상관평을 거쳐 경상도 땅으로 이어지는 긴 오르막의 517번 지방도로가 우리를 기다린다. 예전에는 이곳까지 길이 나지 않아 물길을 건너 청천 읍내에 장을 보러 다니셨다는, 관평슈퍼 앞에서 만난 할머니와 두런두런 지나온 길을 이야기하며 잠시 숨을 고르는데 해가 산머리에 걸린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텐데, 할머니께서 ‘용추계곡까지는 갈 수 있겄네. 저기 저 보이는 산만 넘으면 되니께’ 하신다. 안심이다.

마폐봉 오르는 길은 생각만큼이나 그다지 어려운 길은 아닌 듯하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1시간 조금 넘게 오르며 간간이 미끄러운 곳을 만나기는 했어도 쉬이 올라왔으니 말이다. 정상에 서니 내려가는 길 멀리 월악산 영봉이 보이고, 올라온 길 멀리 꾸불꾸불 새재길이 보인다. 잠시 숨도 고르면서 좋은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도 찍고 싶지만 허기진 배만 채우고는 서둘러 길을 나선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온 것과 달리 거리도 길고 그만큼 시간도 많이 걸린다고 들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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