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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치사

대구에서 막노동을 하던 일용직 노동자 김모씨(39세)의 4살 난 아들이 굶어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김씨와 정신지체 3급 장애인인 어머니 김모씨(38) 부부는 3자녀 중 둘째인 4살짜리 아들이 지난 16일(추정) 사망하자 신고하지 않고 방 장롱에 아들의 시체를 숨겼다.

 

이 사실은 김치와 쌀을 전해주기 위해 이들 부부를 찾은 불로성당 사회복지부장 구모씨(53)가 최초로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구씨는 "김치와 쌀을 전해준 뒤 평소 건강이 좋지 않던 김군의 안부를 물었더니 김군의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장롱문을 열어보였다"며 "뼈대만 앙상한 김군이 숨진 채 장롱에 있어 신고했다"고 말했다.

 

경북대 의대에서 김모군의 사체를 부검한 결과, 오랜 기간 굶어 몸무게가 같은 또래 정상아동 몸무게의 3분의 1에 불과한 5kg 상태로 아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김군의 사인이 '기아사'로 잠정 추정됨에 따라 아이 사체를 장롱 속에 이틀간 방치한 김군의 부모에 대한 정신감정을 실시하고, 부모 양쪽 가운데 한명이라도 정상인으로 판명날 경우 검찰과 협의를 거쳐 '유기치사' 혐의로 형사 입건한다는 방침으로 알려지고 있다.



갑자기 한파가 몰아닥친 20일 전해진 어린아이의 아사 소식은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김군의 죽음 자체도 그렇지만,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배경은 한국 사회의 사회적 안전판의 부재와 지독한 이기주의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가슴 아픈 사연이다.

 

특히 아이의 어머니 김씨는 정신지체 3급 장애인이며, 숨진 김군도 미숙아 태어나 밥도 떠먹여 주지 않으면 식사를 못할 정도의 건강 상태인 장애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장애인 등록을 하지 못해 아무런 복지혜택을 받지 못했다. 장애인 등록을 하기 위해서는 병원 진단이 필요하지만 어느 누구도 장애인 등록 절차와 방법에 대해 도와주지 않았고, 진단비용도 댈 수 없었다. 이들에겐 장애인 등록을 위한 서류를 갖추는 일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장애인 출현율을 보통 인구의 10%수준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4백80만명의 장애인이 있다는 얘기지만 장애인 등록인구는 1백56만명에 불과하다.)

 

또 '피해자'라 볼 수 있는 김군의 부모는 '유기치사' 혐의로 형사 입건될 가능성도 있다. 

 

형법상 유기죄는 노유, 질병 등으로 부조(扶助,도움)가 필요한 사람을 보호할 법률상 또는 계약상 의무가 있는 사람이 부조받을 사람을 버려두고 간 경우 성립한다.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 피살된 김선일 씨 사망과 관련해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의 유기 치사죄 성립 여부가 논란이 되기도 했고, 최근 만취한 승객을 자동차 전용도로에 내려놓고 가 차에 치여 숨지게한 택시 기사에게도 유기치사죄가 적용, 실형이 선고됐다. (2004년 11월 21일 서울 고등법원 형사 3부)

 

경찰은 입건에 앞서 김군의 부모들에 대한 정신 감정을 실시한다고 했다. 정상 상태가 어떤 상태일까? 자식이 굶어죽은 부모의 정신 상태가 어떠하면 정상일까?

 

예전에 침팬지의 삶을 다룬 다큐멘타리 보았는데, 잊혀지지 않은 장면이 있다. 침팬지들은 새끼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품 안에 안고 키우는데 무리 중 가장 약한 암컷의 새끼를 우두머리를 비롯한 수컷들이 죽였다. 그러자 그 암컷은 죽은 자식을 계속 품안에 안고 다녔다. 그 녀석은 나중엔 죽은 새끼의 시체를 질질 끌고 다녔다. 절대 죽은 새끼의 손을 놓지 못하고, 안고, 끌고, 업고 다니는 그 암컷은 자기 자식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에미의 모습이었다.

 

장롱에 죽은 자식의 시체를 묻어둔 부모의 마음을 누가 감정할 수 있을까? 정상 혹은 비정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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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도

얼마전 체 게바라의 젊은 의대생 시절을 다룬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봤다.

 

세기의 혁명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이 영화를 소위 혁명과는 한 발짝 떨어진 로드 무비다. 영화 전편에 펼쳐지는 남아메리카 풍경은 솔직히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힘든 삶과 이를 통해 '혁명'을 결심하게된 게바라의 변화를 압도한 측면이 있다. 게바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설명이 없었다면 그가 인도주의적 의사가 됐다고 믿을 법한... 여러 비판이 가능하겠지만, 난 이 영화를 올해 인상깊게 본 영화 중 하나로 꼽고 싶다.   
 
이 영화에서 내게 더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함께 여행을 다닌 알프레도다.



여행 도중 여객선에서 만난 여성의 몸을 사기 위해 카지노에서 사기 도박으로 돈을 따고, 하룻밤 공짜로 자기 위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술과 여성과 춤을 좋아하는. 다소 철없는 남성이 그다.   

 

게바라와 함께 남미 여행을 마칠 즈음 서른 살인 그는 좋은 병원에 취직해 평범한 삶을 계획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던 그는 게바라가 쿠바 혁명에 뛰어들어 도움을 요청했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게바라와 함께 한다. 

 

게바라는 의사라는 안정적 지위를 버리고 험난한 혁명가의 삶을 택한 이유에 대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반면 알프레도가 혁명에 동참한 좀더 직접적 계기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친구 때문이었다. 

 

변함없이 한길을 가는 이들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만들지만

때론 끊임없이 흔들리는 이들의 어떤 선택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근데,

내 주변엔 게바라 같은 친구들이 있는 건 확실한데,
과연 그들이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을 때
나도 알프레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건 좀 의문이다.

 

아, 아직도 혁명을 꿈꾸냐고?

그것도 별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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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의(祭儀)

습작이란 표현이 좀 부담스럽긴 한데...

 

내가 최소한 '작가 지망생'이란 걸 의미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요즘 예술적 글쓰기와 기록적 글쓰기 사이의 차이를 더욱 절감한다.

 

올해 봄 열병을 앓듯 무언가를 끄적였는데

 

젊은 한 때 감상들이 결코 작품이 될 수 없다는 걸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결론은

 

우선 '기자질부터 제대로 하자'로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느끼는 내 감정들이 아깝고 아쉬울 때가 있다.

 

다시는 못 가져볼 것 같아 말이다.

 

여기엔 그런 기록을 남기려 한다.

 

첫 번째 올리는 글이 내 엽기성을 드러내는 것 같아 거시기 하네;;;

 

제의

 

자, 이제 우리 의식을 시작하자.

너와 나만의 마지막 제의.

실수할까 걱정하지 마.

넌 그저 내게 가만히 몸을 맡기면 돼.



널 위해 손에 석회 가루를 살짝 바르고

투명한 수술용 장갑을 끼웠어.

난, 실수하면 안 되잖아.

 

오래 기다렸지?

이제 은빛 메스로

네 살집을 꽃잎처럼 떠

떠돌이 개들에게 던져줄거야.

 

진동하는 피냄새에 모여든

동네 개들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침을 뚝뚝 바닥에 흘리며

흥분해 날뛰겠지.

 

조상들이 죽어 독수리로 부활한다고

망자(亡者)의 시체를 그들에게 던져주는

몽골의 조장(鳥葬)을 알지?

 

조장을 치르듯

네 내장은 까마귀에게 줄거야.

 

광활한 대지를 가로지르는 독수리와 달리

도시 뒷골목에 둥지를 튼 까마귀는

행여 네 영혼을 쓰레기와 함께

내장 어느 한 귀퉁이에 담았을지라도

저주받은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할거야.

 

네 뼈는 하얗게 빻아

수채 구멍에 조금씩 흘려 보낼 거야.

하숫물로 등이 젖은 시커먼 시궁쥐가

살빛 코를 벌름거리며 모여들겠지.

 

네 살을 뜯은 개와

네 내장을 훔쳐간 까마귀와

네 뼈를 갉은 시궁쥐.

 

존재 자체가 혐오인

이들의 기쁨만으로는

내 죄가 사해지진 않을까?  

 

마지막으로

죽어서도 

내 맘을 헤집고 다니는

네 영혼을 위해

작은 관을 짤 거야.

내 가슴 한켠에 네 무덤을 만들기 위해.

 

내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있길 바래.

 

이것으로 타인에 대한 내 증오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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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란 없다

가까워지고, 젖어들고, 스며들고, 익숙해지는 데는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멀어지는 것은 돌아서는 순간이면 족하다.

 

한 번의 어긋남
그것이 객기이든, 아니면 불협화음이든
다시 매끈하게 이어 붙이기란 정말 힘든가 보다.

 

그리고
눈 가리고 아웅
같은 것 하기엔
너무 늙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정말 간사하다.
오해란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사고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오해란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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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증후군

해마다 연말이 가까워져 오면 약간의 우울증을 겪었다.

 

또 한해가 가는구나...하는 회한과 더불어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올해는 비교적 편안하다.

당분간은 나이가 내게 큰 차이를 가져다주는 숫자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인가.

 

그러다 보니

여전히 혼자인 내 위치가 참 편안하다.

 

야호!!

 

아래는 작년 연말에 썼던 글.

 

올해가 지나고 내년을 맞이하면서야 서서히 이런 경지로 다가가고 있는

 

날 느낀다.

 

친밀감에 대한 희구, 제도로서의 결혼, 관계에 대한 부족한 상상력, 생물학적 존재로서 가지는 성적 욕망,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과 간섭의 위태로운 경계...이런 복잡한 계산 속에서 빠져, 어느덧 실제 원하는 것은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해 버렸다. 스스로가 안쓰럽다.

 

가부장제가 어떤 관계를 통해(배타적인 이성애 결혼, 낭만적 사랑)여성을 구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관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굴러가게 하는 관계의 각본을 통해서이기도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허용 가능한 관계를 제한적으로 막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친밀한 만남의 가능성과 종류. 그것은 얼마나 제한적인가? 친구, 아니면 애인, 아니면 부인과 남편, 그것도 아니면? 정부?!

 

어떤 새로운 사람이 내 삶의 반경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그 상대방 자체를 느끼고 알아가는 여정으로 쉽게 몰입하지 못한다. 대신,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관계의 종류들 중에서 그와 내가 어떤 종류의 관계가 될 것인지를 결정하느라 한동안 강박에 시달려야 한다. 친구로 남을 것인가, 연애를 시작할 것인가, 결혼까지 해야하는 것인가...

 

그 결정을 끝마치면 '종류'에 따른 관계의 수위와 내용을 적용시키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그 관계는 안정되고 익숙한 트랙 속으로 들어와 정해진 경로를 돌기 시작한다.

 

이 정해진 트랙 위에서 잠시 무장해체되고 싶었다. 관계에 이름짓기 하는 걸 잠시 멈추고 그저 상대를 풍부하고 섬세하게 알아가는 과정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상대와 시작할 것인지 말것인지를 고민하느라 연애시절의 반을 써버리고, 그 상대와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하느라 그 나머지 반을 써버리는 연애와 결혼의 각본을 벗어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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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왜 천재, 또는 유사 천재, 더 나아가서 스스로가 천재라고 믿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까...
 
그들에게 범인은 잠시 취하고 버릴 가치만 인정되는 게 아닐까...
 
그들의 큰 지적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만족시키기엔
한 개인은 그저 너무 지루하고, 결국엔 귀찮은 존재일 뿐.
 
어쨌든 분명한 건

난 천재들을 인정하되
결코 그들을 동경하고 싶진 않은 범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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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한때 독재정권에 불만을 품던,
그러나 결코 대놓고 대들지 못하던
대한민국 청춘남녀들의 심금을 울리던 영화가 있었다.

 

또 90년대 후반.
아이엠에프로 사회진출에서부터 좌절을 경험해야 했던,
그래서 가난한 젊은 남성들이
어린 연인들 앞에서 허풍치며 부르던 절절한 구애가도 있었다.

 

그 이름하여
'맨발의 청춘'

 

전혀 다른 맥락일지 몰라도
이 노래의 제목도 '맨발'이다.

 

맨발은 늘 서럽다.

 

그 서러움은 때론 상대에게 가장 큰 절절함으로 다가가기도 한다.

 

눈 쌓인 설원을 맨발로 가로지를 수도 있다는 절절함...

언 맨발을 기꺼이 가슴에 안고 녹여줄 상대를 만난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예의 어긋남을 즐기는 신의 못된 심사 때문인지
아니면 상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두운 눈 때문인지 몰라도

세상은 사람들이 만들어온 외로움으로 가득 차있다.

 

결국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스스로 무너뜨렸던 사랑을 복원하는 것이다.





'Bare foot'은 <연어알> (Salmonberries, 1991)이란 영화 주제곡이다.

 

1991년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 영화를 가득 메우고 있는 건 하얀 눈밭이다

눈이 가져다 주는 그 차갑고 황량한 느낌은

'맨발로 걸어가겠다'는 감정을 더 절실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주제곡을 부른 가수 K.D. Lang 은

데뷔 때부터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다. 

 

Bare foot

 

When the sun goes down here
And darkness falls
The blanket of winter
Leaves no light at all

 

You search for shelter
To calm the storm
Shaking with an instinct
Just to stay warm

 

But I'd walk through the snow barefoot
If you'd open up your door
I'd walk through the snow barefoot

 

You hear the howling
Of dogs and wind
Stirring up the secrets
That are frozen within

 

The ice will haunt you
It lays so deep
Locking up inside you
The dreams that you keep

 

But I'd walk through the snow barefoot
If you'd open up your door
I'd walk through the snow barefoot

 

I'd walk through the snow barefoot
If you'd open up your door
I'd walk through the snow barefoot

 

This wind ...
through my soul ...
blows cold

 

I'd walk through the snow barefoot
If you'd open up your door
I'd walk through the snow barefo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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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진짜 독하게 살거다

"전태일이 자기가 너무 가난해서, 너무 비참하게 살아 운동을 한 게 아니라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가 고통스럽게 살기 때문에 임금을 더 달라고 싸운 게 아니다. 타인에 대한 애정 때문에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그것 때문에 죽었다. 개인의 문제였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재단사가 됐다.

 

전태일은 10살 때부터 미싱을 배워 미싱사였다. 청계천에서는 사실 A급 미싱사가  재단사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 그래서 미싱사로 돈을 더 벌 수 있었는데 재단사가 됐다. 이것도 본인한테는 굉장한 의미가 있다. 재단사가 돼서 시다들한테 잘해주고 싶어했다. 근데 막상 재단사가 돼도 아무 소용 없으니까 노동법 들고 신문사에 쫓아가고 해본 것이다. 사회의 진보의 근본적인 동력은 자기 자신의 고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선도한 사람들은 이웃의 고통 때문에 나섰다.

 

역사를 해석하는데 물질주의적으로만 해석하지 말고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존중심을 갖고 해석했으면 한다.


전태일이 못살아서가 아니고 진짜 훌륭해서 한 것이라고."

(11월 23일. 소설가 안재성씨 인터뷰 중)



최근 내 화두는 '이타적 인간'이다.

 

안재성씨와 안건모씨(<작은책> 편집장)의 인터뷰에서 느꼈고,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체 게바라를 보면서도 느꼈다.

 

또 최근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로 감옥에 가게된 염창근씨를 보면서도 

대의명분에 기반한 '이타적 선택'이 가질 수 있는 힘을 감지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들은

나와, 혹은 대다수의 인간 군생들과 다른 종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루에 수백번 '이기심'과 '이타심' 사이에서 

흔들리는 날 보면

그들은 아주 '독한' 별종임에 틀림없다.

 

나도 진짜 '독하게' 살고 싶다


 

 

(김정환 시인의 <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 전태일에 대한 명상>에 실린 임옥상 화백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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