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9/22
    망각...
    onscar
  2. 2005/08/29
    "사람이 나빠서지 터가 나빠서가 아니다"
    onscar
  3. 2005/08/09
    '유랑작가' 공선옥(2)
    onscar
  4. 2005/07/30
    휴가
    onscar
  5. 2005/07/27
    생일(2)
    onscar
  6. 2005/06/21
    인간 친절 재단
    onscar
  7. 2005/06/14
    연애의 '목적'
    onscar
  8. 2005/05/26
    황우석과 가스냉장고(3)
    onscar
  9. 2005/05/06
    장사꾼 시대의 기자
    onscar
  10. 2005/05/02
    4.30 재보선과 조간신문
    onscar

망각...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그리고 까맣게 잊었다.

 

오늘 우연히 컴퓨터에 저장된 이메일을 들춰보다

 

몇해 전 가을...누군가를 위로하려고 썼던 메일을 발견했다.

 

당시 이 메일을 받았던

짝사랑으로 가슴앓이하던 P씨는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져

내년쯤 결혼할 예정이라고 한다.

 

정말 시간이 '약'이다.

 

얼마전 우연히 그가 사랑에 빠졌다는
얘길 전해듣고

정말 이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가슴 한켠이 묵직하게 아려오더군요.



그 감정의 실체가
나로선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가 닿은
누군가에 대한 질투인지
끝까지 뒤돌아봐주지 않은 그에 대한 원망인지
그토록 얄팍한, 하잘 것 없는 감정에 집착한
스스로에 대한 회한인지
알 길은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알게된 것은

언제 또 이놈이 내 가슴 한켠에 숨어 있다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지 모르겠지만

더이상 나를 지배하지 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맘속에서 떠도는
그의 유령을 붙잡아
관 속에 고이 안치해
영원히, 영원히 묻고자 합니다.

내 맘속에 작은 그의 무덤을 만들고자 합니다.

부디 그가 편안히, 편안히 안식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간 나와 편히 화해할 수 있기를...

 

P씨도 이젠 떠나 보내세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람이 나빠서지 터가 나빠서가 아니다"

권세가 중하면 지키기 어렵고

지위가 높으면 세도는 다하기 마련이니

교만한 자리에 오름은 가득 찼다는 뜻이요

나이가 많음은 목숨이 끝나간다는 것.

권세와 지위, 녹봉과 권위, 이 넷은 도둑과 같아

밤낮으로 서로 공격해온다.

설사 좋은 집에 산다고 해도

누가 자신의 몸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작은 일을 가지고 큰 도리를 밝히나니

집의 이야기를 빌어 나라의 일을 깨우칠 수 있도다.

주나라와 진나라는 효관과 함곡관을 터로 삼고

그 터는 같았으나

주나라는 팔백 년 간 흥하고

진나라는 이궁만 바라보고 죽었노라.

집이나 국가에 대해서 말하노니

사람이 나빠서지 터가 나빠서가 아니로다.

 

--- 백거이 '흉가' 중에서.

(출처 : <비파행> (오세주 옮김, 다산초당)

 

백거이는 두보, 이백, 한유와 더불어 '이두한백'이라 불리며 한시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시인이다.

 

리얼리스트이자, 저항시인이었고, 참여시인이었으며, 민중시인인 백거이는 그러나 한국 독자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백거이는 시를 다 지은 뒤 이웃 노파에게 들려주어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고쳐 쓸 정도로 철저히 쉬운 용어로 시를 지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백, 두보, 한유의 시에 대한 주석서가 수백권에 이르지만 백거이의 시에 대한 주석서가 한권도 없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소재로한 <장한가>는 '낙양의 종이값을 올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마오쩌둥, 장쩌민도 120행이나 되는 이 시를 애송했다고 한다.

 

한시(아니 한자 ㅡ..ㅡ) 자체가 낯설어 그 맛을 제대로 즐길 순 없었지만

번역된 것만으로도 백거이 시의 '저항정신'과 '민중성'을 엿볼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의 권력에 대한 충언이

1200년이나 지난 지금도 일정 부분 유효하다는 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유랑작가' 공선옥

 

공선옥은 잔인한 작가다. 독자의 기대 따윈 염두에 두지 않는다. 아니, 여지없이 부순다. 어쩌면 공선옥은 나 같은 독자에게 스스로가 자식을 미국에 조기유학 보내놓고 “대 아랍전 이후 중미전쟁에 전부 용병이 될 남반부 아이들”을 걱정하는 지식인 ‘정’과 같은 존재는 아닌지 질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얄팍한 기대는 내 무관심에 면죄부를 주지 위한 것임을 공선옥은 은근슬쩍 눈 감아 주고 않은 게다. 그보다 가난한 ‘유랑작가’인 그는 그럴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게다.    


공선옥의 잔인함, 아니 가난한 이들의 삶의 비극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함께 살던 할머니마저 위암으로 숨져 오갈데 없는 산골 소녀 영주의 이야기를 담은 <남쪽 바다, 푸른 바다>에서 가장 아프게 드러난다. 열한 살 난 영주는 어렵사리 연홍도에 사는 고모를 찾게 됐다. 그래서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지만 야무진 고모 김귀옥과 남편 김 선장, 이들 부부의 딸 주희와 함께 행복하게 살게 되는 듯 했다. 



  “일이 그렇게 되어 부렀습니다요 이. 김 선장이 말입니다. 전 해상에 태풍 루사 경계경보가 내린 밤에 말입니다, 도선 운항 시간이 끝난 밤 열두시, 신양서 데리러 오라는 연홍도 주민의 전화를 받고 연홍도에서 신양으로 건너오다가 말입니다.....”

“사곱니까?”

“배가 뒤집혀부렀습니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온다.

“가족들은요?”

“암만 기달려도 연홍도 아이들이 안 보이지요 이 얼마 전에 섬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간지는 모르고요 이, 그 자모님이 장애인인데, 거그다가 조카까지 책임을 져 놓아가지고....”

 


영주는 섬에 없다. 남쪽 바다 푸른 나라에 영주는 없다. 아침 햇살 속에서 꼭 다시 오라고 소리치던 아이들의 함성도 없다. 그렇다면 영주는 어디로 갔는가. 김귀옥은 두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갔는가. 그때야, 영주가 소리치던 것이 생각났다.

 

“아저씨, 나는 남쪽 바다 푸른 나라에서 행복하게 잘살 거래요.”

 


그렇다면 영주는 제 고모를 따라 그 나라, 그 푸른 나라로 갔는가. 돌아서는데 문득, 바다가 검다.

 

또 공선옥은 에둘러 표현하는데 서툴다. 이미 ‘가난’은 직접 표현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만큼 많은 독자들에게 타자화된 경험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은유적으로 표현할 만한 여유가 그에겐 없을지 모른다. 생존의 문제이지 않은가.

 

아버지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요. 그래서 간이 탈나버린 거예요. 어머니요? 아버지 땜에 농약 마셔버렸어요. 제초제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희망이 없었던 거예요. 삶에 대한 희망이요. 저요? 안 죽으려면 서울로 가야죠. 아저씨, 그거 알아요? 여긴요. 죽음의 땅이에요. 왜냐면, 나라에서 돌봐주지 않잖아요. 킬링필드라고 아시죠. 바로 그거라구요. 죽지 못해 사니까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여긴 맨날 그런 사람들만 산다구요.

 


가난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하고 난폭하게 만들기도 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했다. 가난은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렸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가정을 지켜낼 수 있는 마지막 무기는 사랑 뿐이었다. 그 사랑이 경수 부부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부자들의 사랑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사랑이 한에게는 그래서 더 눈물나는 사랑이다. 돈도 받쳐주지 못하는 것을 사랑이 받쳐주지 않는가. 가난한 사랑이.

 


돈 때문이든, 외로움 때문이든, 사람들이 함께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돈이 없어서, 사람들은 외롭다. 돈 있는데도 외로워하는 사람들을 인숙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수몰이 되면서 여기 살았던 사람들의 삶도 수장이 되는 거라구.”

물부족 사태라거나, 댐건설의 필요 불필요를 따지기에 앞서, 김은 건설과 개발의 미명하에 파괴되어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얘기했다. 생태계 파괴에 대한 걱정에 앞서 거기 오래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도대체 돈으로 맞바꿀 수 없는 정신에 대해서. 그러나 돈 앞에서, 발전이라는 이름 앞에서 그런 정신, 삶을 에워싸고 있던 오래된 정신 같은 것은 그저 허섭스레기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공선옥은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은 죄인처럼 살아간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생활의 안전은 물론이거니와 인격도 인권도 보장되지 않는 게 현실이지 않냐"며 안타까움을 표한다. 가난한  '유랑 작가' 공선옥의 존재는 그래서 더 소중하다. 가난이란 죄가 더 커져갈 수록....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을 결코 원치 않을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휴가

다음주 월요일부터 휴가다.

 

불행히도 올해는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

 

좀 막막하기도 한데...

 

일단 푸욱...쉬어야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생일

7월 들어 글을 하나도 올려놓지 못 했다.

 

지난 한달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편집국장이 바뀌고

 

노조도 생겼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끼리 때로는 다투고 다시 화해하고

 

그렇게 한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근데 문득 주민등록상 생일인 오늘 여러 통의 축하 메일과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OO님의 서른 X 번째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시간이 참 빠르구나...

 

내 나이에 아직 익숙치도 않는데

 

벌써 7월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간 친절 재단

"이상주의자는 내가 아니라 감옥제도를 옹호하거나 감옥을 더 짓고 처벌을 더 강화하자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부정적 이상주의자'인 것은 현실에서 끊임없이 그릇된 것으로 드러나는 징벌에 대한 이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상은 한 마디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우리를 해치는 사람을 해치는 일은 해침의 악순환을 영속화할 뿐이다."



이 말은 '인간친절재단'의 보 로조프가 한 말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친절재단'과 보 로조프란 인물에 대해 더 알고 싶었지만 자료를 찾기가 영 쉽지가 않다. 

 

내가 이 문구를 접하게 된 것은 <지구를 입양하다-세상을 바꾸는 대안 아이디어>라는 책에서다. 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아주 작은 욕망이라고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재미있는 아이디어들이 많다. '지역화폐' 등 이미 한국에서 현실화된 아이디어들도 있고 1977년 10월27일에 건국한 자유독립공화국 프레스토니아 같은 진짜 못말리는 사람들의 얘기도 있다.

 

프레스토니아 공화국을 비롯해 몇 가지 눈에 띠는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 자유독립공화국 프레스토니아 :

 

1977년 런던 W11 노팅데일 프레스톤가 주민들이 큰 공장으로 가는 길을 낸다며 이사하라는 강제 이주 위협을 받고 주민 투표를 통해 만든 인구 1백20명인 공화국. 이들은 문장紋章까지 갖춘 가입신청서를 유엔에 보내면서 평화유지군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국민 중 원하는 사람은 장관이 됐으며 수상은 없었다. 교육부 장관은 두살배기 프란시스코 보기나-브램리였고, 외무부 장관은 난쟁이 배우인 데이비드 래포트-브램리였다. 문장에 새겨진 이 나라 모토는 '노스 수무스 우나 파밀리아'(우리는 한가족)이었고, 모두가 브램리라는 성을 같이 쓰기로 했다. (만일 런던의회가 이들을 쫓아내기로 결정한다면 1백20명을 한 가족으로 묶어 새집으로 옮겨야만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프레스토니아는 국제우편연합에 가입신청을 했으며, 자체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많은 관광객들이 프레스토니아를 찾아 20여분 동안 동네를 돌아본 뒤 여권에 프레스토니아 도장을 찍은 다음 다소 실망한 표정으로 떠나곤 했다고 한다.

 

1998년에는 마을 정원에 있는 천막에서 스물한번째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고 한다.

 

 

- 판사가 피해자에게 강도의 집에서 물건을 가져가도록 허락하다 :

 

1990년 시애틀의 조 브라운 판사의 판결. 그는 몇몇 강도범에게 이전 피해자들을 위해 자기 집을 개방하라고 명령했다. 피해자가 대리인과 함께 가서 자기들이 잃어버린 물건의 가치에 해당하며, 판사가 정한 선까지라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가져갈 수 있겠했다. "범인은 집에 돌아가서 자기 물건이 제대로 있을지를 걱정하는 선량한 시민들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게 이같은 판결을 내린 이유.

 

- 골프차(골프카트)만을 도심지 허가차량으로 :

 

일반 승용차는 도심에서 금지한다. 골프차는 전기로 가기 때문에 매연이 없다. 최대 시속이 20마일이라서 도심에서 쓰기에는 충분하다. 목적지까지 더 빨리 가고 싶은 사람은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골프차는 아주 작기 때문에 주차도 별 문제가 없다.  

 

- 임신 및 출산 도중에 노래 부르기 ;

(<폭력없는 출산>의 저자 프레데릭 르보이어의 주장)

 

산모는 배를 이용해 깊이 천천히 숨을 쉰다. 숨을 내 쉴 때 노래를 부르면서 힘을 주어 자궁을 수축시킨다. 르보이어는 산모가 노래를 불러줄 경우 자궁속 아기가 출산 과정에서 덜 움직이며 편안해 한다고 주장한다.

 

- 추억상자 만들기 : 기념품으로 작은 개인 박물관 만들기.

 

- 맹인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음식점 불을 다 꺼버리다 :

 

취리히의 '블린데쿠(눈먼 소)' 음식점. 이 음식점은 맹인 종업원들이 서빙을 하는 곳이다. 손님들은 가방과 외투는 라커에 두고, 핸드폰과 야광시계도 따로 보관해야 하며, 자리로 가기 위해 웨이터나 웨이트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가야 한다. 식당 내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하다.  이 음식점은 유명한 블라인드 데이트의 장소가 됐다고 한다. 커플들은 당장 눈에 띄는 시각적인 부분에 마음을 빼앗기를 일 없이 둘이 얼마나 잘 지낼 수 있을지를 가늠할 수 있는 곳이라고. 때문에 여기서 식사를 하려면 4개월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왠지 딴 나라 사람들만의 얘기 같다고 느끼시는 분은 한국일보 서화숙 대기자가 쓴 <행복한 실천>이란 책을 읽기를 권한다. 우리 사회에서 대안운동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의 행복한 이야기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연애의 '목적'

연애의 목적은 '연애' 그 자체다.

 

연애가 아닌 다른 것을 목적으로 할때 그 연애는 굴절을 경험하게 된다.

 

상대방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탐하며

 

그렇게 한 마리 동물로 본능에 충실할 수 있는 순간,

 

그 매 순간 순간 원초적 긴장감의 아찔함을 즐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연애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러나 '진공' 상태에서 살아갈 수 없듯이

 

진공 상태의 연애,

 

연애의 목적에만 오롯이 충실한 연애는 현실에선 어렵다.

 

뼈 속 깊숙이 박힌 연애의 각본은 우리의 동물적 감각을 무디게 하며

 

더 나아가 상상력을 제한한다.

 

연애를 넘어서 다른 단계로 가고자 하는 욕망,

 

더 튼튼한 관계의 끈을 마련하고자하는 욕망은 연애의 목적을 교란시킨다.

 

또 자본주의적 이성애 제도에 의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서로 다른 종으로 훈육된 이들은

 

필경 다른 각본에 기반해 서로 다른 결말을 꿈꾸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연애를 동시적 욕망과 합의에 기반해 다른 차원의 관계로 변경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같은 이유로 연애는 자주 불행이란 감정의 씨앗이 된다.

 

아무 걱정없이, 아무 거리낌없이, 아무 기약없이 서로를 탐하는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여기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황우석과 가스냉장고

지난주부터  환자의 체세포를 복제해 배아줄기세포를 배양하는데 성공, 난치병 치료에 신기원을 기록했다는 황우석 서울대 수의대 교수 얘기로 떠들썩하다.

 

그의 연구가 난자 공여 과정, 연구 과정에서 버려진 난자와 배아 문제 또 세포 복제 기술 자체를 둘러싼 윤리적 논란 등 윤리적 문제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어느 누구도 그의 연구에 '딴지'를 걸기 힘든 분위기다.

 

유난히 일등과 최초를 좋아하는 우리 사회에서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 그리고 종교적 이유로 줄기세포 연구를 제한하고 있는 미국에서 이른바 '황우석 논쟁'이 일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의 연구를 흠집내려 했다간 당장 '매국노'로 몰릴 판이다.   

 

또 척수손상으로 팔.다리가 마비된 환자(예를 들면 가수 강원래씨) 등 그의 연구가 실용화될 경우 구체적 수혜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난치병 환자를 위한 것이라는 황 교수의 연구는 칭송받아 마땅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연구에 대한 절대적 지지는 과학기술이 효용성, 가치에 따라 발전한다는 다소 순진한 믿음에 기반한 게 아닌가 싶다.



어제 술자리에서 황우석 교수와 관련된 얘기를 하다 동료 기자에게 들은 얘기다.

 

그 친구 역시 황 교수 연구를 둘러싼 최근 분위기에 대해 마뜩잖아하는 사람이다.

 

그가 불안해 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다소 막연하고 모호해 보이는 종교적, 철학적 차원의 '윤리' 문제가 아니다. 그는 한번 개발될 경우 그것이 미치는 파급력은 너무나 크지만, 역효과가 발생할지라도 되돌리기 힘든 과학기술의 '불가역성'에 주목하고 있다. 과연 우리가 세포복제 연구에 대해 최소한의 합의라도 가지고 있는가? 과거에 기반한 '종교 윤리'를 대체할 새로운 윤리가 존재하는가? 이 친구의 고민이다.

 

그는 그러면서 효용성이 아닌 자본이 기술 개발을 결정했던 사례로 가스냉장고를 들었다.

 

가스냉장고는 가스의 연소로 냉각장치를 작동시키는 흡수식 냉장고로 1922년 스웨덴의 한 공업학교 학생인 맨타와 플란텐이 발명한 것이다. 가스냉장고의 특징은 소음이 없고, 기계적 마모에 따른 고장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전기냉장고는 냉매를 고온, 고압으로 압축하는 '압축기'를 가동시키면서 '윙윙' 거리는 큰 소음이 나고 전기료도 비싼데다 덩치도 더 컸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스냉장고는 사라져버렸다. '자본의 힘'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냉장고가 일반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한 1920년대 전기냉장고를 생산하는 회사는 제너럴일렉트릭, 제네럴모터스, 웨스팅하우스 등 대기업이었다. 특히 발전소에서부터 전등을 만드는 것까지 전기산업을 주도하고 있던 제너럴일렉트릭 입장에선 냉장고 시장이 사업 확장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반면 가스냉장고를 제조하던 기업은 중소기업들이었다. 가스냉장고와의 경쟁에서 전기냉장고를 생산하는 대기업들은 우리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각종 횡포를 저질렀다.


결국 미국 가정의 45%가 전기냉장고를 소유할 정도로 냉장고가 보편화된 1940년대 무렵에 가스냉장고는 사라지게 됐다. (좀더 자세한 얘기를 알고 싶은 분들은 사이언스타임즈(http://www.sciencetimes.co.kr). "냉장고 '윙윙'거리는 소리에 얽힌 비밀- 강양구의 과학기술 뒤집어보기" 롤 보시기를..)

 

최근 만난 강주성 건강세상 네트워크 대표는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백혈병에 걸리면 다 죽었다. 그러나 한병에 3백만원 하는 글리벡이 시판된 후 약을 사먹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백혈병 환자는 치료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좀더 기술이 발전하면 수혜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과연 이게 기술의 문제일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장사꾼 시대의 기자

"과점 언론들 즉 조중동 논조가 왜 그렇게 보수적이냐. 사주들이 정말 친자본적이고 수구적인 사람이라서 그럴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기자 개개인이 부르주아가 됐다. 그전까지는 기자들 월급이 한국 사회 평균이거나 더 아래였다. 그래서 아래에서 한국 사회를 볼 수 있었다.
  

<조선일보> 등은 월급쟁이가 받는 최고 수준의 월급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이미 '결단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적 상층부에 기자들이 들어간 것이다. 편집권 독립을 얘기하는데, 기자들이 편집장을 뽑는다고 좀 다른 논조를 주장하는 편집장이 뽑힐까? 데스크 눈치 보지 말고 마음대로 기사를 쓰라고 하면 기자들의 논조가 바뀔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기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상층 부르주아에 포섭됐기 때문에 자기가 속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이 내용은 지난해 고종석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인터뷰 했을 때 고 위원이 한 말이다.

 

진보언론, 언론개혁을 얘기하는 다른 어떤 말보다 내게 무겁고 아프게 다가왔다.

 

(물론 내 월급은 내 또래의 정규직 대졸 월급쟁이가 받을 수 있는 최저 수준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행여나 기자들이 경제적 상층부에 편입해 필봉이 무뎌질 것으로 우려하는 회사의 혜안에도 불구하고 난 종종 내 월급에 불만이 많다.) 

 

먹물쟁이들이 우대받는 사회, 군인들이 우대받는 사회를 지나 장사꾼이 우대받는 사회에서 '기자'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권력을 감시하고 있다,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비추고 있다 등 기자의 자존심 만으로 버틸만한 기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 장사꾼의 시대에...

 

아니 인문학적 지식이란게 시대에 뒤떨어진 뒷방 늙은이들의 유희거리 정도로 전락한 이 장사꾼의 시대에 양심적 기자라는 존재가 언제까지 효용 가치가 있을까?

 

주변에 알고 지내던 후배 기자의 전직 소식에 "전망 없으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른 길 알아보는 게 현명하다"는 선배 기자의 평가가 서글프다. 난데없이 추워진 봄날, 소주 한잔이 간절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4.30 재보선과 조간신문

'6:0'

지난 주말 치러진 4.30 재보선 결과는 여.야 모두에 충격적이었다.

 

'설마' 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새삼 정치는 정말 그 향방을 한치도 예측하기 힘든 '생물'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이같은 선거 결과는 당연 5월2일 조간신문 1면 톱을 장식했다. 또 각 신문 사설에서도 이번 선거의 의미를 분석했다. 조간신문들은 이번 재보선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집권 여당에 대한 심판이라는 인식은 공유했지만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열린우리당이 어떻게 거듭나야 하는가에 대한 '훈수' 내용은 각기 달랐다.

 

경향신문, 한겨레, 서울신문 등은 이번 재선거 결과가 과반의석을 갖고도 제대로된 개혁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았고, 동아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세계일보, 국민일보 등은 오히려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의 '개혁노선'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개혁 실종'을 선거 참패의 원인으로 분석한 신문들은 열린우리당이 본연의 노선에 충실할 것을 주문했고, 정반대의 분석을 한 신문들은 열린우리당이 실용주의 노선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 정치적 견해에 비춰보건데, 이날 사설 중 가장 훌륭한 것은 경향신문이었다.  

 

특히 "선거가 패배자와 승리자에게 각각 다른 의미의 교훈을 주고, 자기 교정의 계기가 된다면 선거는 제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정치는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치는 희망이어야 한다"는 마지막 구절은 압권이다.

 

<왜 집권당은 패배했는가>


그제는 열린우리당과 노무현정부에게 슬픈 날이었다. 열린우리당은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단 한석도 얻지 못했다. 그들은 집권 이래 나름대로 노력했는데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답답하고 서운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선거 결과는 과반의석을 갖고도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지도 못하고, 개혁도 하지 못한 무능한 집권세력에 대한 정당하고도 냉정한 평가이다. 시민들은 열린우리당이 실력 이상으로 많은 의석을 갖고 있다고 믿었던 게 틀림없다. 사실, 열린우리당은 과반의석을 부담스러워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 힘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 어쩔 줄 몰라했고, 우왕좌왕했다. 야당과는 소모적인 싸움을 하며 귀중한 첫 1년을 다 허비했다.


이런 집권당이 계속 의석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너무나 비정치적이며, 너무나 비상식적인 일이다. 열린우리당이 이번 선거에서 만에 하나 승리를 기대했다면 그것은 욕심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열린우리당이 1년 내내 표 깎아 먹을 일만 하다 재선거가 다급하다고 벌인 행태만 보아도 패배는 너무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새 정치’ ‘다른 정치’를 자신의 존재이유로 자처했던 정당이다. 그런데 가장 낡고 더러운 선거수법을 다 동원했다. 그 정당은 선거승리에 정신을 빼앗겨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겠지만, 시민들은 다 알고 있었다. 다른 정당 인물을 빼내오는 철새정치, 후보와 당정체성의 불일치, 유권자 매수 시비에서 그 정당은 선두에 있었다. 이런 자기 부정이 없다. 그들이 부풀려 놓은 기대와 실제 행동 사이의 괴리가 시민을 더 큰 절망 속에 빠뜨렸음을 아는지 모르겠다. 열린우리당은 왜 이겨야 하는지,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 성찰하지 않았다. ‘선거니까 이겨야 한다’고 했다면, 굳이 열린우리당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이번 선거를 통해 열린우리당의 대안으로 선택받았는가. 한나라당은 감히 그렇다고 내놓고 말하지는 못한다. 이 선거 결과의 의미를 천하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무슨 비전을 제시해서, 그 무슨 국가개혁 프로그램을 내놓아서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집권당의 잘못으로부터 얻은 반사이익일 뿐이다. 이번 선거가 열린우리당의 실패일지언정 한나라당의 성공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더 빨리 달리라는 국민 여러분의 매서운 채찍”이라는 말이 빈말이 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한나라당이 자만에 빠져 자기개혁에 나태해진다면, 이번 승리는 큰 패배를 향한 음울한 전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그렇지 않아도 재·보선이라는 작은 선거에서는 이기고, 대통령 선거라는 큰 선거에서는 연속해서 졌다. 큰 선거는 지역주의, 반사이익, 선거전략만으로는 안된다. 시대 흐름을 읽을 줄 알고 자기의 전망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이번 승리가 다음 승리의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한나라당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선거가 패배자와 승리자에게 각각 다른 의미의 교훈을 주고, 자기 교정의 계기가 된다면 선거는 제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정치는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치는 희망이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